스티브, 2구역

Steve Jobs의 죽음으로 온통 media들이 떠들썩하다. 절대적으로 예상했던 현상이다. 나와 같은 computer engineer의 배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장을 거의 혼자서 개척한 그는 다른 종류의 visionary 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보다 조금은 잘 사는’ 대중, 특히 journalist, artist, technology-challenged 들을 휘어잡았고, 그들은 완전히 그에게 팔렸다. 절대적인 100%의 자기만의 제품, 시장의 control을 고집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닫힌’ 제품, 완전히 소비자를 control할 수 있는 제품, 그 결과로 완전히 ‘이득’을 control할 수 있는 제품.. 조금만 흉내를 내도 소송 협박을 일삼는.. 나의 Open System철학과 지구 반대 쪽에 위치한 지독히 이기적인 철학의 화신.. 하지만 같은 computer engineer, 그것도 70년대의 microprocessor revolution의 시작을 같이 경험한 ‘한 인간’ 으로서, 60세도 못 채우고 타계한 그를 마음 속 깊이 애도하고 싶다. RIP:  Rest In Peace, Steve Jobs

 

가까이서 본 본당신부님, 하태수 예수회 신부님: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마리에타 2구역 미사가 있었다. 꽤 오래 되어서 지난 번에는 어디서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처음으로, 새로 부임하신 본당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예수회 신부님을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가까이 뵐 기회가 되었다. 그것도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한마디로, 멀리서 엄숙한 분위기에서 본 것과 꽤 다른 느낌을 받음을 느낀다. 그러니까 첫 인상은 별로인데 점점 알게 되면서 좋아지는,그런 타입이라고나 할까. 권위적인 냄새가 별로 없고, 술도 적당히, 말씀도 적당히, 무리가 별로 없다.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까? 남의 말을 잘 들으시고, 그에 대해 맞는 말씀을 하시고.. 그것으로 나는 우선 만족이다. 모였던 다른 형제,자매들도 나와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구역 자매, 형제들 반갑다. 특히 ‘젊고 예쁜’ 자매님들, 보기만 해도 즐겁다. 그렇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우리 구역모임 때, 꽤 자주 듣게 되는 ‘과학적’ 호교론(apologetics) 같은, 해괴한 얘기가 듣기 싫어서 빠지곤 했다. 내 머리로는 왜 그런 ‘상황에 맞지 않는’ 얘기’를 그곳에서 장시간 들어야 하는지를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안 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의 신앙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빠지고 보니 역시 다른 이웃들과의 친교를 하는데 어려움도 없지 않았는데 이것은 가까운 곳에서 ‘전교’를 해야 하는 레지오의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이것은 나와 연숙이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Catholic Sunday

오늘 아침은 3주 만에 미국본당 Holy Family CC(Catholic Church) 에서 8시반 주일미사를 보았다. 그러니까 2주 계속 주일미사를 거른 셈이다. 레지오 화요일 주중 미사는 절대로 거르지 않아서 조금은 변명 감 있긴 해도 역시 주중의 ‘약식’ 미사와 주일의 ‘정식’ 미사는 느낌이 많이 다른 것이라서 역시 ‘손해’를 본 것은 우리들이다. 10월 초에 걸맞은 계절의 맛을 마음껏 내듯 아침 바깥 기온이 45도(섭씨 7도) 로 떨어져서 이건 완전히 춘추복의 날씨로 오랜만에 “넥타이만 없는 정장”으로 갈아 입었다.

Holy Family Fall Festival 2011
Holy Family Fall Festival 2011

2주 동안 못 본 낯익은 얼굴들, 비록 이름도 모르고, 본당 밖에서 따로 만난 적이 없어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이 안 보이면 조금은 신경이 쓰이기도 하니까. 오늘의 주보를 보니, 역시 10월의 상징인 (Halloween) pumpkin의 색깔로 가득하고 돌아오는 토요일 예정인 본당주최 Fall Festival 내용으로 그득하다 . 오늘은 주임신부님, Fr. Darragh (대라, common Irish name), 오늘 복음 말씀(마태오: 21:33-43)에서, “stewardship”을 주제로 삼아, 미사 이외의 본당활동에 더 적극 참여하라고 강조하시고, 숫제 volunteer form까지 모든 좌석이 비치해 놓으셨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talent를 썩히지 말라고.. 그런 각자의 ‘재능’을 좋은데 쓰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도로 가져간다고 거듭 강조하신다. 이런 말씀 많이 들었고, 나는 안다.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면 이 정든 ‘동네’ 본당에 내가 봉사를 할 것은 적지 않다. 하지만 현재 하나도 하는 것이 없고, 이것은 항상 갈등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오랜 동안의 영어문화권 직장을 떠난 후에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다. 역시 우리 같은 사람은 잔뼈가 굵은 곳의 언어문화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본능일까? 이곳에 살면서 계속 겪던 문화적 혼동과 갈등이 결국 나중에는 이런 곳에서도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조금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일까.. 참 어려운 것이다.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본당소속, 레지오에 입단한 이후, 조금씩 모국 문화권에 더 익숙해 지면서 이런 문화적, 언어적 갈등을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 나의 나머지 인생을 보내야 할까.. 너무나 멀어진 고국문화를 다시 배우며 살까, 아니면 더 영어권으로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그들과 어울릴까.. 정답은 없다. 절대로 선택문제인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나에게 보람을 느끼게 할까 에 달려있다. 

 

올 들어 처음으로 central heating system을 시험하는 날이 왔다. 아래층의 kitchen area에 앉아 있으려니 추울 정도라서 thermostat를 보니 67도.. heater로 스위치를 켰는데.. 잠잠.. 분명히 68도로 맞추었으니까 더운 바람이 잔잔하게 나와야 하는데, 아주 조용한 것이다. 직감적으로 아하! 아래층 furnace의 thermocouple을 새것으로 갈 때가 되었구나. 그러니까 thermocouple이 수명이 다 되면 pilot lamp가 꺼지고, fire(점화)가 안 되는 것이다. 요새의 furnace는 물론 거의 다 automatic firing mechanism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 것은 거의 20년 전의 것이라 이런 불편이 있다. 문제는 이 thermocouple이 생각보다 자주 교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새것으로 바꾸려면… 조금은 ‘기계적’인 머리도 필요하고, 그 우중충한 ‘지하’ 공간으로 기어 들어가다시피 해야 하는 그런 ‘남자의 일’인 것이다. 그래서 여자만 사는 집이라면 99% handyman을 $$을 주고 불러야 할 듯 한데 나의 우려는, 내가 먼저 죽으면 연숙이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고치며’ 살까.. 조금은 우습지만, 사실은 실제적인 문제다. 이런 것은 기계적인 것에 한하지 않고 우리 집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는 computer network같은 것들.. 거의 자동적으로 돌아가지만, 문제가 생기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며칠 전, 빛의 속도보다 빠른 물체를 실험으로 관측1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말 오랜만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추억과 함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억이란 물론 내가 처음 이 ‘기가 막히게 멋진 과학 이야기’ 들을 때의 기억이다. 우리 또래들은 이런 것들을 거의 대부분 책을 통해서, 그것도 ‘만화’를 통해서 접하고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교과서가 거의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었다. 백과사전은 나오지도 않았고, 나왔을 때는 너무 비싸서 ‘월부’로 사기도 힘든 때였다. 라디오에서 이런 것을 가르쳐 줄 리는 만무하고, TV는 없었을 때였다. 나도 역시 만화에서, 그것도 ‘공상과학’ 만화에서 처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라고 해서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과장되게 표현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 만화에서 상대성원리의 결과로 보여 준 것이 이런 것이었다. 두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빛의 속도로 나르는 로켓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 몇 년 뒤에 그는 지구로 돌아왔는데, 그 때는 이미 지구시간은 수만 년이 지난 후여서 그의 가족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가 완전히 바뀐 뒤였다. 이것은 광속도에 접근하는 로켓(과 그 안의 사람)에서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에 근거를 한 것으로,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공상이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중학교 2학년 가회동에 살 당시, 같은 집에서 자취를 하던 경기고교 생 양병환 형으로부터 이런 류의 이야기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의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역시 조금은 소름 끼치는 이야기도 있었다. 도저히 이해는 안 갔지만 이론적으로는 역시 큰 문제가 없었다. 이 이야기의 함정은,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본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의 과거를 본다는데 있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지구에서 10광년 떨어진 별에서 거대한 망원경으로 지구를 보면 10년 전의 지구가 보일 것이고, 10년 전의 우리들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대학 1학년 때, 드디어 흥분의 순간이 왔다. 대학 물리시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그대로 다룬 것인데, 조금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이론은 전혀 ‘어렵지’ 않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이론에서 쓴 수학들이 정말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너무나 ‘간단’ 했던 것이다. 그곳에 상대성원리의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우주의 법칙은 절대로 ‘복잡’하면 안 된다는 아인슈타인의 지론이 그것이다. ‘하느님의 법칙’ 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에너지의 공식을 보라. E=mc2 이렇게 간단한 공식이 어디 있는가? 이런 이론들을 과학적 증명이 거의 없이 ‘발명’한 그는 한마디로 천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 100년 동안 그의 이론은 거의 실험으로 하나하나 ‘직접,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Gutenberg.org의 도움으로 아인슈타인의 원래 저서 ‘상대성 원리’를 download해서 보았다. 역시 비교적 내용이 길지 않은 책이었다. 위대한 저서는 이런 식으로 의외로 간단해 보이는가? 비록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을 한 것이지만 아인슈타인의 ‘냄새’가 여기저기서 나는 위대한 책이다. 시간이 나면 한번 녹슨 머리를 굴려가며 다시 한번 읽어 보리라. 어렸을 때와 다른 것은 이제는 ‘하느님의 작품인 거대한 우주’ 라는 framework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그 때와 같이 방황하지는 않으리라.

 

  1. 아마도 이것은 quantum entanglement 실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2011년 9월이여, 사요나라

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집에서 실컷 읽어서 큰 후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무의식 중에 생각을 해오던 1950년, 구일오 인천상륙, 구이팔 서울 수복 기념일들도 다 지나갔다.
만약 그 때의 역사를 계속 따라간다면 조금 있으면 UN군이 한 맺힌 삼팔선을 지나 노도와 같이 북진을 하게 될 것이다. 올해는 어쩐지 그 때의 <1급 전범, 민족반역자, 김일성 개XX>를 ‘죽이거나, 사로 잡거나, 만주로 쫓아내려는 국군과 유엔군을 계속 따라가며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미 해병대의 장진(Chosin Resevior) 저수지 사투와 흥남 철수, 일월 사일 서울 철수(일사후퇴) 등이 포함될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서 중앙고 동창 이성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비대칭적 추억‘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비대칭적 추억이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 같은 추억을 서로 아주 다른 정도로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첫 경험한 것이, 10여 년 전,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 이윤기와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나의 이윤기에 대한 추억과 그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그 전에는 별로 못 했기 때문에 사실 무척 당황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부작용’ 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 뚜렷하게 기억을 한 것이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지만 이것은 ‘나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을 ‘대칭적인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번에 이성복을 통해서 조금은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case는 한번 알던 사람이 나를 완전히 잊은 경우다. 1974년 경에 시카고에서 잠깐 만났던 연세대(철학과) 동문 신경시 씨 부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나중에 연락을 해 보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진까지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조금 심한 case라서 나는 물론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기억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잠깐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서 그랬을까.. 이것은 사실 조그만 비극이다.

 

빛의 속도, 조탁 이성복

Albert Einstein
Albert Einstein

빛의 속도에 대한 논란: 이 우주에서 제일 빠른 속도는 ‘이론적’으로 정해져 있다. 바로 빛의 속도인 것이고 변치 않는 상수(常數) c 로 표시된다. 이것은 고등학교 물리시간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을 통해서 배운다. 이것을 배울 때, 대부분은 담담히 받아 들인다. 어찌 의문을 제기할 수가? 상대는 ‘상대성 원리의 천재, 아인슈타인’ 인데.. 말 잘못 했다가는 물리 선생으로부터 면박이나 당할 것이다. 이 우주에서, 어떤 물체가 아무리 빨라도 빛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하고 그의 상대성 이론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100여 년 동안 그의 이론은 실제와 거의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거의’라는 단서인데, 100% 증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빛의 속도도 마찬 가지다. 만의 일이라도 어떤 것이 빛 보다 빠르다고 판정이 되면: 그것은 판정이 잘 못 되었거나, 상대성 이론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6개월 이상 실험 끝에 어떤 ‘입자,neutrino‘가 빛 보다 60 ns(nano-second, 1/1000,000,000초) 빠른 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은 ‘우선’ 이 실험에 결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실험자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문제는 60ns이면 실험 오차치고는 상당한 오차인 것이고, 그들의 실험이 그렇게 허술했나 하는 것이다. 100여 년 동안 우리의 ‘삶의 철학’ 까지 바꾸어 놓았던 ‘상대성 이론’ 도 조금씩 무너지나.. 그 다음은 어떤 것이 나오려나.. 100년 마다 이렇게 큰 이론의 변화가 나오면 1000,000년 뒤에는 어떨까? 이래서 인간이다. 인간은 역시 신이 아닌 것이다.

 

이성복을 찾았다! 일년도 넘는 비교적 오래된 나의 blog <누가 이성복을 보았는가?> 라는 나의 외침에 대한 답이 온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Google’s indexing power의 위력을 실감한다. 비약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보는 우주 전체를 포함한 하느님의 성역 전부를 indexing할 날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어느 것이 이길까? 하느님, 아니면 Google’s Datacenter? 좌우지간.. 나의 ‘도박’은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성복의 comment에 의하면, 성복이의 아우가 이 blog을 보게 되어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성복이가 만든 navor blog 을 보게 되었다. 나의 예상을 뒤엎고, 완전히 ‘국어학 박사’ 급의 글들로 가득.. 거기다 저서가 다섯 권씩이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제목을 보니: <한국어: 맛이 나는 쉬운 문장>, <논리적인 글의 요건>, <논문 맵시 내기>, <마침한 말 바른 표기>, <틀리기 쉬운 맞춤법> 등등.. 

이 녀석, 분명히 고대 농대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한)국어학 박사가 되었단 말인가?이 녀석, 요새 흔치 않은 호까지 있다. “조탁(彫琢) 이성복”, 와~~ 근사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조탁’이란 호는 어떤 뜻인가? 새길 조에, 쫄 탁? 암만 생각해도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성복’을 ‘만나게’ 되었는데.. 현재 나의 의문, 어떻게 농대출신이 국어학박사, 저자가 되었나? 곧 의문은 풀릴 것이지만,그래도 궁금하다. 5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왜 동창회 연락처에 이 친구가 빠져 있었을까? 이런 의문도 곧 풀릴 것이다.

 

Greedy Generation

지금 한창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지독한’ 불경기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세대,특히 25세부터 34세 사이의 세대의 높은 실업률이 우리 세대에 미치는 ‘예상치 않은’ 파급효과가 그 중의 하나다.

예전, 그러니까 최소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이의 세대면 거의 공식적인 retiring formula가 이미 있었다. 이 나이가 되면 겪은 두 가지 즐거움: 자녀들이 거의 직장을 가지고 집을 떠나게 되고, 집을 살 때 얻었던 loan을 다 갚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사실 크게 돈을 쓸 일이 없어지게 되는 즐거움이다. 그렇게 되면 젊었을 때 꼬박꼬박 돈을 부어놓았던 은퇴자금을 서서히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우선, 자녀들이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게 되어서,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거나, 아예 나가서 살 엄두를 못 내게 된 것이다. 이들이 주는 경제적 부담은 미지수지만, 아무래도 부모에게 부담을 줄 것이다. 그리고, 부동산 거품이 최고조에 달 했을 때 (8년 전), 많은 사람들이 겁도 없이 집을 저당으로 해서 은행에서 마구 돈을 빌려다 쓰곤 했다. 아예, 빚을 얻어서 투자를 하기도 했다. 부동산 거품이 완전히 빠지고, 그들이 집은 아직도 저당금 빚이 남아 있게 되었으니..

그들은 (우리세대) 이제 완전히 샌드위치처럼, 아래로는 자식들이, 위로는 집 저당금(mortgage)이.. 누르게 되었다. 예전처럼, 멋지게 은퇴를 해서, 골프를 치고, 크루즈 여행을 가고.. 하는 꿈들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것이 현재 baby boomer세대의 슬픈 현실이다.

과연,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이런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없었을까? 이런 것들은 근래, 그러니까 1990년대 초에 일본에서 이미 겪은 것이고,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1990년 초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부동산 거품과 그에 따른 경기침체..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왜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경제학자들이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과소평가 했던 것일까? 나는 경제학을 잘 모르니까 할 말은 없지만,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우선, ‘부-동-산’.. 에 관한 것은 다 싫다! 이것에 관련된 인간들도 하나도 멋진 인간들이 아니다. 대부분, ‘공짜’ 를 좋아하는 싫은 인간 군상들이다. 이렇게 손쉽게 먹으려는 심리의 표현이 바로 ‘거품’이 된다. 이것을 기생충처럼 파고들며 같이 쉽게 먹으려는 인간들, 은행, 융자 인간들.. 이들 부-동-산 인간들과, 은-행-융-자 인간들이 최악의 역할을 잘도 해냈다. 쉽게, 쉽게 벌려는 많은 불쌍한 인간들이 이 두 부류에 완전히 놀아나고, ‘공짜’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이 잘도 보호를 해 주었다. 이것이 현재 경제파탄의 실체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돈을 만들어서 한참 동안 흥청망청 쓴 것의 결과가 현재인 것이다. 이것이 경제구조의 결함일까, 인간의 근본적인 결함일까. 아니 둘 다일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약삭바른 부류들이 너무 심하게 탐욕을 부린 결과인 것이다. 그 정도로 원인은 사실 간단했다. 지독한 탐욕.. 어찌 인간들이 그렇게나 욕심들이 많은 것일까? ‘정도껏’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어떻게 불과 2~3식구가 10명이 살아도 방이 남는 고래등 같은 백만 불짜리 집에서 살 용기가 나는 것일까? 뉴욕 Wall Street에서 잘나가는 곳에서 investment banker로 아들, 딸이 스카웃 되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나는 정말 정말 하나도 부럽지 않다. 그런 곳에서 과연 그들은 무엇을 배울까?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20년 전에 이미 일어난 ‘거품경기’에 대한 교훈을 어쩌면 그렇게 잊고 살았을 까 하는 것이다.

 

구월 하순, GXP-285, GPS, 연고전

9월 21일, 구월의 하순으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지난 2 주 동안 가을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첫’ 싸늘함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다만 매일 기대했던 비가 내릴 듯 말듯 하며 내리지를 않아서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인다. 지독히도 가물고 더웠던 여름 동안 앞 쪽의 잔디는 색이 바래고, 숨을 죽이고 죽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파랗게 살아날 것이다. 올해 이곳의 날씨는 다행히 ‘뉴스’가 없이 지나갔다. 다른 곳에 비하면 그런대로 준수하다고나 할까. 과연 이번 겨울 날씨는 어떨지 자못 기대가 된다. 작년에는 정말 춥고,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Grandstream GXP-285 SIP Phone
Grandstream GXP-285 SIP Phone

오늘 며칠 전에 Amazon.com에 order했던 Grandstream GXP-285 (SIP) VOIP phone이 도착했다. 미리 review도 보았고, USERS MANUAL도 이미 download해서 보았기 때문에 생소할 리가 없다. 사실 몇 년 전에 이미 GRANDSTREAM의 VOIP phone adapter를 써본 적이 있어서 눈에 익은 제품이긴 하다. 하지만 진짜 phone은 이번이 처음이다. 몇 달 전에 ebay에서 LINKSYS (Cisco)의 SPA-841 2-line VOIP phone, 쓰던 것을 산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SIP VOIP phone은 그것이 처음이었던 셈이다. 그 동안 이 전화기를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에 Google Voice로 한국에 전화를 했을 때, 너무나 음질이 좋았다. 그러니까 Internet phone의 수준이 완전히 PSTN (analog) phone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VOIP 의 대부분이 softphone (on PC)을 쓰는 사람들이 많고, SKYPE 같은 조금 non-standard technology를 쓰기 때문에 전통적인 Bell phone같은 ‘쓰기 쉬운’ 맛이 덜 하다는데 있다. 하지만 이제 VOIP (특히 SIP compatible) phone도보기와 느낌이 거의 똑 같이 analog phone과 비슷해서, ‘전통적인 전화기’의 남은 수명도 그렇게 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나의 home-office에는 이미 Asterisk-based IP-PBX (PBX-IN-A-FLASH: PIAF)가 있어서 (running on Proxmox Virtual Server), 미국과 캐나다는 Google Voice로 무료로 통화를 할 수 있고, 국제전화도 정말 싸게 사용할 수 있다. 이번에 산 전화기는 비록 값이 저렴한 것이지만 (under $50) Home-Office에는 적당해서, 연숙의 office에서 쓰게 할 예정인데, 가끔 ‘음질이 형편없는’ cell-phone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안정되고 깨끗한’ 음성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좋을 듯 하다.

GPS' dead battery
GPS’ dead battery

몇 년 전에 크리스마스 때 연숙에게 선물로 준 GPS가 별로 쓰지도 않았는데 charge가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power cord (usb or adapter)를 써야만 이것을 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GPS를 별로 쓸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가끔 쓰려고 하면 이런 것이 짜증이 나는 것이다. 고급 차를 타는 사람들은 요새 아예 GPS가 dashboard console에 있어서 쓰기가 참 편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살 필요까지는 못 느끼고.. 이럴 때는 역시 ‘공돌이 정신 (hacker mentality)’이 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열어보게’ 되었다. charge가 안 되니까 이것은 rechargeable battery가 ‘죽은’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죽었는지, 역시 이 battery도 Made in China였다. ‘조잡한’ 것을 썼을 것이다. 이것은 portable device에서 많이 쓰는 3..7V의 Polymer type인데, 암만 Internet을 뒤져 보아도 이것과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비슷한 것을 찾아도, 값이 ‘장난’이 아니게 비쌌다. 그렇게까지 해서 고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GPS를 버리기도 그렇고.. 그러다가 얼마 전에 거의 못쓰게 된 Canon digital camera의 Battery가 생각이 나서 보니 거의 power spec이 비슷했다. 3.7V 1200mAh! 모르긴 몰라도 이것을 쓸 수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battery terminal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Soldering 을 해야 하는데, 워낙 terminal이 작아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계속 궁리를 하면 무슨 idea가 생길지도 모른다.

오늘, 요새 거의 자취를 감춘 ‘엽서’ 한 장이 배달되었다. 보낸 사람은 Law Office of Se Ho Moon, PC (Suwanee, GA)라고 인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스와니 (아틀란타 동북단의 suburb)에 있는 ‘문세호 변호사‘ 가 보낸 것이다. 요새 변호사 개업을 했나.. 하며 읽어보니 “친애하는 연세대학교 동문 여러분,”으로 시작이 된다. 아하! 연세대 동문회에서 보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아, 이맘때면 연례 연고전이 있던 때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9월 25일에는 골프대회, 10월 2일에는 구기대회. 나는 골프를 치지 않으니까 그날은 관심이 없지만, 구기대회에는 조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연고전 참가를 한 것이 1997년 쯤이었다. 그러니까, 15년 전이 되었다. 그 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말 연대 송년회까지 참석을 했는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완전히 잊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이사온 후 나는 사실 동창회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 당시에는 가까이 알고 지내던 연대 이원선 동문이 그 해 동문회 회장이 된 바람에 조금은 손 쉽게 참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처음 나갈 때 모르는 동문을 만나는 것이 물론 반갑기는 하지만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것도 사실이라서 그렇게 참가를 안 한 것도 이유가 된다. 이원선 동문은 68학번 연대 기계공학과 출신인데, 내 친구였던 (타계) 같은 연대 기계과 김호룡을 알고 있었고, 우리와 같이 아틀란타 천주교회에도 같이 나갔던 동문이었다. 아쉽게 그 이후 서로 소식이 거의 끊어지게 되고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거의 잊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요새는 내가 레지오에 입단하면서 성당에 갈 수가 있어서, 가끔 이원선씨의 부인을 뵙곤 하였지만 끝내 이원선씨는 볼 수가 없었다. 올해 이 연고전 엽서를 받고 조금은 생각을 하게 된다. 거의 숨어서 살다가 조금씩 밖으로 나간 김에 올해는 한번 연고전 ‘소프트 볼’ 대회에 참가하거나 구경을 가 볼까 하는 생각이다. 그곳에서 운동과 놀기를 좋아하는 이원선 동문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인천, 61년 전

9월 15일,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비상식적’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계산이 깔린 도박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는 것은 그 뒤에 같은 운들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난다. 그 이후 맥아더의 운은 사라지고, ‘악운’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가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적군에 대한 정보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일 큰 도박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억지로’ 무시했다는 실수였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것을 말해주었지만,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정보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정보들의 신빙성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정보수집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지 않았을까?

Book, Operation Broken Reed
Book, Operation Broken Reed

며칠 전에 Reading-by-Tying으로 읽고 있었던 한국전쟁(육이오 동란)에 관한 책, Operation Broken Reed (꺾인 갈대 작전)을 간신히 다 읽게 되었다. 이 책도 산지 몇 년째 된 것인데 올 여름, “육체적인 노동 대신 여름독서를”, 이란 목표로 골랐던 도서목록중의 하나였다. 이 책을 읽은 때가 육이오(6.25: 동란 발발)와 구이팔(9.28: 서울 수복) 을 사이에 둔 계절이어서 더 61년 전을 상상하게 되며 읽으니 실감이 더 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자세히 나의 blog에서 소개할 예정인데,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이 ‘진실, 사실’ 이라면 이 ‘믿기 힘든’ 작전은 육이오 동란 중, 가장 비밀에 쌓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거의 ‘허구’라고 단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믿는 쪽에 가깝다. 나도 읽고 나서 생각이, 이것은 사실 일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작전은 육이오 동란이 휴전회담과 격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던 1952년 1월 초에 38선 북쪽, ‘적진’ 속에서 일어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주일에 걸친 미군, 자유중국 군의 합동작전이었고, 비록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실로 충격적이고 슬픈 것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휴전회담은 가속화 되었고, 확전, 3차 세계대전(심지어, 핵전쟁)은 방지가 되었다.

 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구이팔을 가능케 한 구일오 인천상륙작전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New York Times best seller였던 David Halberstram의 책, The Coldest Winter, The America and The Korean War라는 책 덕분이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육이오 동란을 미국과, 한국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각도로 다룬 것이어서 이제까지의 군사적인 각도로만 다룬 책과 다른 맛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역시 저자의 정치적 색깔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어서 흠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역사철학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에 대한 저자의 거의 ‘혐오’ 적인 인상이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자료에 의한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조금은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중립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맥아더를 옆에서 본 것도 아니고, 이 저자와 같이 충분히 사료를 공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영웅도 보여주기 싫은 면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진리’는 안다.

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이 책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맥아더의 천재적인 ‘용기와, 지혜’를 인정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거의 부산 교두보 (Pusan Perimeter)에서 바다로 밀려날 뻔 했던 시기에 이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고 보면 그 절묘한 timing의 진가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전이 조금만 더 늦게 있었다면 김일성 개XX의 호언장담대로 부산은 괴뢰군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은 이미 지상전에서 유엔군의 압도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엔군의 해군, 공군을 포함한 기술적인 면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활용하는 방법은 해상으로 적진 깊숙이 대거 병력을 빨리 상륙시키는 방법임은 사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그의 과거 전투경험으로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적군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우회 작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적진 뒤의 상륙작전의 구상은 서울함락 직후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남진하기 시작하던 7월 초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

 맨 처음 이 작전은 Operation Blueheart 라고 이름이 되었고, 예정 날짜는 7월 22일이었지만 지상전에서 너무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이 예정은 무기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 맥아더는 그 동안 별로 작전이 없었던 해병대에 이 작전을 맡아주도록 주선을 하며, 본격적으로 목표를 인천으로 굳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목표가 인천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사실 표면적으로 인천은 작전하기에 ‘최악’의 자연적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한 곳이었다. 이 조수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해병대가 기나긴 개펄에서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상륙하기에 알맞은 ‘해변’ 이 없고 모두 방파제 같은 시설물로 그득하고, 수뢰와 같은 방어시설이 있으면 더욱 힘들 것이다. 항구에 거의 붙어있는 월미도는 공산군 수비대에게 부두를 방비하는데 좋은 시설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물론 해병대를 전함으로 운반해 줄 해군 측에서 강조가 되었다. 해군 함정들이 인천 해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날짜는 밀물의 주기에 따라 거의 제한이 되었는데, 빠른 날이 밀물의 깊이가 31 feet인 9월 15일 이고 그 다음이 10월 11일이었다. 9월 15일의 아침 밀물의 시간은 오전 6시 59분, 저녁 밀물은 오후 7시 19분이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상륙시기를 아침밀물에 맞추는 작전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결정은 그에게는 사실 간단했지만 해군에게는 상당히 힘들고 복잡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거의 한결같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맥아더가 충분히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도박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전략적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거의 모두 인정을 했지만 문제는 상륙 지점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한 조건만 갖춘 인천인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군산이 훨씬 (해군에게, 해병대가 상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닌가? 그런 것들은 사실 맥아더가 설득하는데 거꾸로 이용이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 적들도 그곳을 충분히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천의 가치는 사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면 낙동강 쪽에 몰려있는 공산군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아더의 뚜렷한 구상은 예상보다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인천 D-day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졌고, 공격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맥아더의 짐작대로, 김일성은 인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모택동은 달랐다. 맥아더를 알았고, 일본에 깔려있던 공산스파이들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후방 깊숙한 곳으로 대거 병력이 쳐들어 올 가능성에 대해서 중공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지만, 역시 맥아더에게 운이 좋았는지 그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빠른 승리를 장담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공의 지시에 의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를 보면 이런 미친 정도로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간다. 그는 사실 거의 ‘깡패 개XX’ 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상륙작전은 예상대로 공산군의 저항이 미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13,000명의 해병대가 투입이 되어서 첫날의 전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을 향한 진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것은 9월 28일까지 계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30마일 정도 진격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9월 15일 이후 놀란 김일성이 대거 병력, 2만 이상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사실 서울을 그렇게 빨리 점령할 이유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저항이 치열한 서울을 우회해서 빨리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하는 공산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후에 ‘맥아더 개인의 영광’을 위한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서울 탈환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울 탈환에 소모된 귀중한 시간에, 후퇴하는 공산군이 북으로 탈출할 여유를 준 셈이고, 그것은 두고두고 전쟁을 길게 끈 원인도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6.25 남침의 3개월이 되던 9월 25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에는 서울 근교까지 진격을 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가전이 거의 3일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가 거의 혼자 밀어부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 셈이고, 이로 인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포위했던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하게 되고,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 성공 이후로 ‘기세가 등등’ 해진 그의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 된다.

 시기적으로 6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당시 2살 정도여서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이 당시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아버지가 끌려 가신 이후였고, 원서동의 어떤 무당집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그 동네는 비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다 보셨다고 들었다. 그러면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런 장면을 다 보고 들었을 것 같다. 다만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다. 생각을 한다. 과연 민족 반역자, 역적, 김일성 개XX는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나? 이 미친놈을 어떻게 역사는 능지처참을 할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

 

낙엽을 기다리며..

 

Autumn Leaves – Edith Piaf

Autumn Leaves:  의외로 갑자기 가을의 맛이 눈앞에 다가왔다. 준비도 못한 채 맞게 된 것이지만, 절대로 가을은 반갑다. 황금색으로 바뀌는 나뭇잎을 보는 것도 즐겁고, 차가운 비를 바라보며 움츠려 드는 몸을 따뜻하게 녹이는 진한 커피향도 그렇고, 이것이 앞으로 몇 개월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은근히 기대했던 비는 끈질기게도 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확률적인 수치로 나오는 일기예보는 해석을 잘 해야 한다. 그 확률이 맞는 확률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역시 개개인 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 일기예보는 거의 일부러 안 보는 편이다. 기대도 하기 싫고, 미리 알아 보았자 그렇게 이득이 될 것도 없고, 만의 일이라도 비상 적인 일기가 오게 되면 그것은 주위를 통해서 자연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니까 사실 마음이 편하다. 시간적으로 변하는 날씨에 연연하던 때를 생각하면 왜 그렇게 내가 한가했나 하는 후회도 든다.
내가 사는 이곳의 9월은 사과의 계절이다. 그래서 애들이 어렸을 때는 가족적인 연례행사로 과수원을 찾고 했다. 아이들이 다 떠나면서 그런 행사도 시들해지고 작년부터는 가지 않게 되었다. 이곳에 이사올 당시, 그러니까 거의 20년 전만 해도 그렇게 과수원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인구가 늘면서, 특히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조금은 눈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다. 특히 단체로 버스까지 타고 오는 것을 보면서 완전히 그곳의 맛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옛날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이 아닐까.. 모든 것은 모두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까.

 일본 TV 드라마:  2007년부터 보기 시작했던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특히 그 중에서도 연속극 드라마들 이제는 이미 방영된 것은 다 보아서 새로 나오는 것을 기다리게까지 되었다. 사실상 그것들을 보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프로그램들을 하나도 안보게 되었다. 연숙은 이것을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조금은 실망까지 하는 눈치다. 어찌 그것을 이해를 못할까? 같은 드라마를 보아야 그런대로 얘기할 것도 생기고 하니까.. 이곳에서 가끔 모이는 친지들과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어떤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가지도 신나게 얘기를 나누는데, 나는 완전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일본 프로그램을 보기 전에도 사실 나는 한국에서 나오는 것을 아주 가끔 보는 편이어서,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들은 내가 보아도 조금은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일본의 드라마를 보는 나는 분명히 목적이 있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값싸게’ 공부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인터넷의 덕분으로 가능해 졌고, 최소한 듣는 일본어는 많이 익숙해 졌다. 비록 드라마지만 그들의 문화, 생각, 풍습, 역사 등등을 간접적으로 많이 배우게 되었다. 너무나 그들을 모르고, 무시하며 산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올해 초의 지진, 해일, 원전사고 등 재해 때, 그들을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눈으로 그들을 보게 되기도 했다. ‘증오’의 역사로 점철이 되었고, 철저한 반일교육으로 자란 나로써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새로 보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행히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정치적인 완숙함, 한류의 파급 등으로 그들도 이제는 거의 친구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어서, 참 세상을 오래 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이미 내가 골라놓은 ‘최고의 일본 드라마’ 목록은 계속 불어난다

 평창이씨 시조: 얼마 전에 강원도 평창이 동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고 들어서, 평창이란 이름이 앞으로 귀에 아주 익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평창 이씨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평창이 본관인 성씨가 다른 것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평창 이씨만은 분명하게 그곳이 고향이다. 하지만 평창이씨를 공부해 보면서 평창에 근거를 한 평창이씨는 한가지 파, ‘정숙공파’ 밖에 없고 나머지는 거의 전국에 흩어져 있다. 내가 속한 ‘익평공파’만 해도 그렇다. 나의 바로 위 조상님들의 세거지는 평창이 아니고 평택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평창에 살고 계신 정숙공파 종씨들은 평창이 더욱 알려지게 되면서 조금 더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지 않을까..

현재 평창이씨는 시조 할아버지 문제로 두 개의 파벌로 갈린 상태가 되었다. 서울 흥인동에 위치한 평창이씨 대종회는 시조 휘 ‘광’ 자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는데 반해서, 정숙공파는 독자적으로 그 보다 훨씬 위의 조상인 ‘윤장’ 할아버지를 시조로 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2개의 ‘다른’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대종회에서는 광 할아버지 이전의 역사는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니까, 최소한 대종회 족보는 전체가 맞는 것이고, 정숙공파 족보는 대종회 족보에 없는 것이 더 들어가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숙공파의 족보는 시조인 윤장이 경주이씨에서 갈려 나온 것까지 밝히고 있어서, 이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그리고 그렇게 오래 전의 사실을 어떻게 몇 가지 남은 사료로써 단정을 지을 수 있을까? 대종회는 ‘정사’를 고수하는 입장이어서 원래 족보가 출발된 시점에서 어떠한 다른 것도 넣을 수 없다는 보수적인 입장이고 보면 그것도 이해가 간다. 어떤 분들 말대로 사실 그것이 대종회가 갈라질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2011 첫 가을비 우산 속

어제는 루이지애나 로 부터 북상한 tropical storm ‘Lee’가 많은 비를 몰고 결국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알맞은 비 였으나, 덤으로 토네이도까지 주면서 지나갔다. 비는 예상보다는 적게 왔지만, 몇 주의 가뭄에 비하면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근처에 아주 작은 규모의 토네이도가 집 몇 채에 나무를 쓰러뜨렸지만, 이것은 다른 곳의 ‘대형 사고’에 비하면 아주 경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왔다. 올 것이 온 것이다. 기온이 급강하 하며 아주 음산한 비까지 뿌리는 하루였다. 이것이 바로 가을비의 전형이 아닐까? 몇 달 만에 다 잊어버렸던 ‘써늘함’을 처음으로 느낀 날이었다. 긴 팔, 긴 바지 옷들을 갑자기 찾아서 허둥대던 싸늘한 아침, 이제부터는 조금 ‘가을비 우산 속‘을 기대해도 좋은 계절이 된 것인지.. 기대가 된다.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 조금은 불쌍하다. 재수가 지독히도 없었나. 기대가 너무나도 컸었을 까? 제2의 지미 카터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poor Obama on Labor Day, 2011
poor Obama on Labor Day, 2011

8년간의 ‘머저리’ 부시(stupid Bush) 밑에서 거덜이 난 미국의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후의 거의 이상적인 대통령 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희망과 현실이 어쩌면 이렇게 처참할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결국은 오바마는 지금 미국이 필요로 하는 인물의 자격에 미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가 제일 큰 ‘실수’를 한 것이 거의 광신적으로 그의 정책이 실패하기를 원했던 반대당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착하고, 타협적’으로 그들을 대한 것은 지금 보면 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들과 똑 같은 수법으로 ‘무자비하게’ 그 광신도들을 눌렀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실수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고, 시간적으로도 늦었다. 이제, 깡패 같은 공화당이 재집권을 하게 되면 그와 대다수 국민들이 원했던 ‘상식적인 정책’은 물 건너 갈 것이 너무나 뻔하다. 참, 암담한 미래가 보인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하루 하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일까?

돌아오는 일요일은 9월 11일이다. 뉴스에서 그것을 10년 동안 끊임없이 하지만 조금씩 낮아지는 정도로 취급을 했지만 역시 10이라는 숫자에는 약한 모양이다. 10주년이 된 나인-원-원.. 어찌 구급,비상 전화번호, 911과 같은 날이었을까? 이제는 10년 정도는 절대로 긴 세월이 아니다. 어제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10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함도 느낀다. 나도 변했고, 늙었고, 주위도 꽤 변해 있다. 특히 정치, 사회적으로 미국이 겪었고, 변한 것을 보면 조금은 소름조차 끼칠 정도다. 그것은 미국만이 아닐 것이다. 직접, 간접적으로 미친 여파는 후세에 역사가들이 말을 해 줄 것이지만, 아마추어 역사학도가 되어서 생각을 해도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극단주의자들의 일시적 승리’,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는 웬만한 ‘끔찍한’ 것에도 그리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극단주의는 사회, 문화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 것들이 언제까지 가게 될까? ‘양순하고, 착한’ 다수들은 도대체 어디로들 숨었을까?

 

Come September

중학교 (서울 중앙중학교) 때 나온 미국영화, Come September의 주제곡을 수십 년 만에 들었다. 거의 분명히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의 영화니까 분명히 ‘학생입장불가’로 볼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고, 영화자체도 그 나이에 보기에는 너무나 ‘지겨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주연배우는 Rock Hudson(록 허드슨)과 이태리의 Gina Lollobrigida(지나 롤로브리지다) 등의 그 당시 최고 정상급 국제 스타들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의 주제곡 때문이다. 영화 내용은 모르지만 그 주제곡은 그야말로 ‘경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말 경쾌한 것이었다. 그것이 왜 9월과 연관이 있는지, 그러니까 그 영화의 제목이 왜 ‘9월이 오면‘ 이었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9월이 오면 생각나는 ‘음악’ 중의 하나라는 , 그것이 더 중요하니까.

 

 

Come September: 9월이 오면, 1961

어제, 9월 1일은 3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나의 인생 반려자로 살아온 아내 연숙의 생일이었다. 원래 내가 우리 둘의 아침식사를 준비한 것이 이제 몇 년째가 되어서, 이것으로 생일의 “깜짝 서비스” 를 할 수도 없고, $$$도 그렇고, 너무나 흔한 ‘생일 축하 메시지’ 를 만들기도 낯 가렵고.. 그래서 요새는 생일이 맞거나 축하해주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은 부담이 되어간다. 그저 한마디로 XX 년 전에 ‘인간으로 세상에 나온 신비’ 를 서로가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게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며, 먹으며, 선물포장을 뜯어야만 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올해는 작은 딸 나라니 가 ‘먹는 생일’을 마련해 주었다. Cumberland Mall에 있는 커다란 Italian restaurant, Maggiano’s (Little Italy) 에서 오랜만에 ‘밀가루 음식’ 과 bottle of wine으로 포식을 시켜주었다. 이태리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음식의 크기 (flat dish가 아니고 bowl)에 먹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우리는 원래 저녁식사를 거의 안 하고 살아서 아마도 위장이 꽤 놀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음식값에 carry-out 메뉴가 덤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까지 하면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봉’에 시달리는 작은 딸의 저금 통장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이래서, 우리도 이제 오래~~ 살았구나.. 실감을 했다.

 

Try to RememberThe Lettermen

9월과 12월 사이의 감정을 보여주는 멋진 시

오래된 추억의 9월은 어떤 것들일까? 그 중에서 추석이 으뜸일까? 타향살이에서 제일 그리운 것이 ‘추석의 느낌’ 이다. 이것은 타향에서는 ‘절대적으로 느끼기 불가능’ 한 것 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추억이던가. 실제로 그 추억이 현실적인 추석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것들이 ‘느리기만 하던’ 시절.. 시간도 느리고, 버스도 느리고, 비행기, 기차도 느리고, 전화도 느리던 그 시절.. 그런 명절은 정말 천천히 즐기는 느린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설날과 달리 날씨가 알맞게 따뜻해서 얼마든지 밖에서 ‘딱총과 칼’로 무장을 해서 전쟁놀이로 뛰어 놀고, 뛰어 들어와서 송편, 고기 등 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골목으로 뛰어나가던 그런 추석.. 그날 밤에 재수가 좋으면 어둡기만 하던 동네를 완전히 대낮으로 바꾸어 놓았던 보름달 아래서 골목 이웃들이 몰려나와 수다를 떨던 아저씨, 아줌마들.. 세월을 따라 모든 것들이 빨리 움직이면서 그런 순진함 즐거움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대학 다닐 때, 갈비씨(skinny people, 이런 말을 요새도 쓰나?) 인 신세로 주눅이 들었던 시절, 9월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모든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짧은 팔에서 조금은 가려주는 긴 팔의 옷으로 천천히 바뀌던 첫 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심각했다. 아마도 뚱뚱한 것이 마른 것보다 ‘가치가 떨어진’ 요새 사람들은 절대로 상상을 못할 듯 하다. 분명히 그 당시는 ‘살이 찐 것’이 마른 것 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아마도 마른 사람의 대부분이 가난했던 사람들이라 그랬나?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건가? 가난하게 보이게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족이 생기고, 대부분 가장이 겪게 되는 세파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9월과 가을을 거의 잊고 살게 되었고, 그에 따르는 추억도 메말라 가게 되었다.그러다가 50대에 접어 들면서 우연히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詩)에 눈을 뜨게 되었다. 거의 완전히 메말랐던 감정들이 이 신기한 것을 통해서 조금씩 스며 나옴을 느끼게 되어서, 나이와 감정, 감상이 꼭 반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9월은 그런 찐한 감정의 보물창고인 가을과 겨울의 입구와 같은 때인 것을 매년 조금씩 실감해 가게 되었다. 올해는 과연 어떻게 그런 감정의 보고(寶庫)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을 그림자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빠진 감잎에 근심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서는 여윈 추억들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김재진

 

 

9월의 노래

누가 처음 발표를 했는지는 몰라도 9월의 classic은 바로 곡이 아닐까? 패티킴의 version이 바로 그것인데 아깝게도 그것은 이마 유튜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에 버금가는 ‘연숙’을 닮았던 “혜은이”의 것이 건재하니까..라고 했지만 다시 찾게 되었다. 멋진 패티김의 pose와 함께… 감사합니다~~

 

팔월이여, 안녕..

Labor Day 그렇게 더웠던, 하지만 그런대로 잘 적응하며 더위가 친구처럼 완전히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9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9월 첫 월요일은 전통적으로 동네의 수영장들이 문을 닫는, ‘비공식적’ 여름의 마지막 날, Labor Day(미국 노동절)이다. 요새같이 실업률이 높아서야, 노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세월이 되었다. 대부분의 육체적 노동을 하던 멕시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그 다음의 ‘소수 인종’들이 조금은 경쟁이 완화되었지만 이번에는 일자리가 없는 것이다. 불필요한 전쟁을 몇 번씩 치르며 돈을 그렇게 찍어냈으니, 아무리 천하장사 미국 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몇 년 동안은 완전히 남의 돈으로 집과 빚을 얻어서 흥청망청 썼으니.. 과연 그 ‘없는 돈’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이건 경제학의 ‘경’자도 모르는 중학생이 더 잘 알 것이다.

불경기는 분명히 걱정할 만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중산층의 폭’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돈을 가진 인간과 ‘절대로 가난한’ 인간들의 폭만 그 동안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3세계의 문제들인데.. 이것이 현재의 상태로 나가면 미국의 문제가 될 전망이다. 깡패집단에 ‘납치가 된’ 공화당은 절대로 ‘대기업과 부자들을 보호’ 해야 하는 입장이고, ‘불쌍한’ 민주당은 절대적으로 없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미국 정치는 완전한 ‘야쿠자 난투’ 형국이 되어가고 있는데.. ‘정치를 초월한, 윈스턴 처칠’ 정도의 지도자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지난 반세기 동안 잘 나가던 ‘무적의 미국’은 동생나라 일본을 따라서 ‘천천히’ 쇠퇴의 첫 단계로 들어가지 않을까..(아니,이미 들어섰을 것일지도) 나중에 쾌재는 아무래도 ‘짱 꼴라’ 들이 부를 것 같아 정말로 우울해 진다.

 

 

Brian Hyland – Sealed with a kiss
아련한 추억의 찬란했던 여름을 보내고 다가오는 계절을

아침의 신비:  비록 당분간도 덥겠지만 하루하루가 달라질 것이다. 벌써 아침 7시 쯤에도 어둠이 가득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해가 짧아진 것이다. 10월의 Daylight Saving Time(DST: aka, summer time)해제 쯤까지는 해 뜨는 시간이 무서운 속도로 늦어질 것이다. 이것이 가을의 맛이다. 어두운 아침..에 일어나는 맛.. 나는 ‘절대적’으로 morning person이라서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을 못 느끼면 살 맛도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연숙은 나와 절대로 궁합이 맞지를 않는다. 그녀는 절대적인 night person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꾸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듯 하지만 아마도 힘들 듯 하다.

나도 한 때, 대부분은 학교 다닐 때, 정말 밤늦게 자는 올빼미 스타일이었고, 한때는 정말 그것을 즐겼다. 그러던 것이 서서히 아침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른 아침 공기와 분위기를 느끼고 즐기게 되었다. 특히 이것은 직장생활에서 받은 영향도 있는데, 이른 아침 아련히 진동하는 잠을 깨는 커피향기만 기억을 해도 아침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직장분위기가 다 끝난 지금에도 그것이 완전히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침에 하는 1시간의 ‘일’은 다른 때에 하는 것과는 ‘양과 질’로 절대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가을, 겨울과 같이 밝지 않은 아침의 시간은 정말 보석과도 같이 값지고, 심지어 ‘신비스러운’ 시간인 것이다. 그런 어둡고 긴 아침의 계절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 이것 하나만으로도 가을이 기다려지지 않겠는가?

 

느긋함과 늙음,  젊었던 시절 항상 그렇게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을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회상을 하며, 생각하며, 천천히 관용적으로, 이해를 하는.. 그런 ‘신사중의 신사 같은 나이 듦’ 등을 그리곤 했다.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그런대로 싫지만 이해하게 되는 그런 너그러움.. 이 나이가 들었다는 ‘보람’이 아닐까..하는 조금은 희망적인 희망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느긋함 보다는 점점 굳어져가는 ‘나만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느끼고 적지 않게 실망을 하곤 한다.

왜 그럴까? 오히려 젊었을 때에 더 ‘관용과 용서’가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만의 ‘사상과 주관’이 나이에 비례해서 뚜렷해져서 그런지 모른다. 그러니까, 더 타협을 하기가 힘든 것이다. 나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서 그럴지도.. 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가? 이런 것에서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하는가? 개개인 마다 다를 것이고, 정답도 없을 것이다. 이래서 인생은 재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가장 추악한 정치인, 딕 체이니
미국에서 가장 추악한 정치인, 딕 체이니

CheneyPowell, 정말로 극과 극의 인상을 주는 이름들이다. 그러니까 전자는 Dick Cheney, 부시, 미국을 말아먹은 인간의 꼬붕 격 이었고, Colin Powell은 같은 꼬붕 자리에 있었지만 정 반대로 그 나름대로 의 피해를 가급적 줄이려고 노력을 하려고 한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부시를 전쟁으로 몰아넣게 한 장본인들 중의 오야붕 격이 바로 Cheney인데, 이 인물은 알면 알수록 ‘무섭게’ 느껴지는 ‘전쟁 광’ 에 가깝다. 마키아벨리를 뺨치는 ‘수단과 방법에 문제 없는’ 그런 전근대적 과격주의 신봉자이기도 하다. 공공연히 고문 사용을 지지하는 만용도 가졌고,심지어 ‘전범’으로 국제재판소에 기소되는 것을 우려할 정도다.

부시의 ‘비극’은 바로 그 같은 인물을 직속 ‘상관’으로 기용을 했다는 실수였다. 같은 체제 내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직책을 걸고 제동을 걸려던 사람이 Colin Powell이다. 그 두 사람이 지금 완전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제 2의 대결을 할 모양이다. ‘철면피 같은 더러운 늙은 여우’ 같은 Cheney, 그런대로 명분과 이름을 살리려고 자서전을 발행할 모양인데, 완전히 자기만의 역사를 다시 쓴 모양인데,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지금 미국은 이런 ‘과격파’가 아니면 행세를 못할 지경에 이르고 있고, 이것은 정말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천천히 바뀌는 천주교 영어미사

Holy Family's Fr. Stewart's guide to 'changing Mass'
Holy Family CC Fr. Stewart’s guide to ‘changing Mass’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맞는다. 다른 쪽에서는 허리케인 아이린 으로 떠들썩 하지만 이곳은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에 가을기분의 따가운 햇볕이 작열을 하는 한가한 느낌의 일요일.. 우리 집의 ‘숙명의 적’ pet duo 토우비(Tobey, dog)와 이지(Izzie, 고양이) 를 보아도 한가한 느낌을 받는 것이, 둘 다 완전히, 절대적으로 ‘평화롭게’ 낮잠에 떨어진 모습이 정말로 한가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한가한 순간들도 ‘좋아하는 시간’에 속한다.

오늘 일요일의 미국본당 미사에서는 올해의 대림절 (교회력 신년의 시작, 올해는 11월 27일)부터 부분적으로 바뀌게 되는 영어 미사의식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사의식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미사의식에서 하는 문구(text) 들이 바뀌는 것이다. 현재 영어 미사는 1975년부터 사용된 것이라고 하니까, 상당한 기간 신자들이 쓰던 것이라 이것이 조금이라도 바뀌게 되면 아무래도 처음에는 불편할 것이다. 문제는 “왜” 바꾸어야 하는가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바티칸 교황청에서 지시를 한 것이 아니고, 그 동안 쓰던 영어미사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문구를 원래 ‘라틴어 미사의 정신’에 더 가깝게 번역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영어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고, 그것을 늦었지만 바꾼 것이다. 나의 의문은 그러면 다른 언어, 예를 들면 한국어 미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이 영어로부터 번역을 한 것이었다면 그쪽도 바꾸어야 할 것인데,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도 한국말 미사는 이미 바뀌었다고 들은 것 같다. 현재 이곳의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이미 바뀐 것을 쓰고 있을 듯한데, 현재 우리가 주일미사를 그곳으로 가지를 않아서 100% 확실치는 않다.

라틴어 미사는 1970년에(그 훨씬 전에 있었던 바티칸 2차 공의회(the Second Vatican Council, 1963)의 정신에 의해서) 바뀐 이후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놀라운 사실은, 1970년 이전에는 세계적으로 모두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어떻게 그 어려운 라틴어로 미사를 보았는지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그때는 라틴어를 쓴 것이다. 영어와 라틴어는 그 근원이나 비슷하지만 한국과 같이 ‘전혀 다른 계통의 언어권’ 에서는 어떠했을까? 하지만 역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현지 언어’가 원래 라틴어의 ‘정신’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참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재미있게’ 하려는 미국 천주교인들, 이것도 ‘응석을 부리면서’ 9월부터 조금씩 ‘연습’을 하면서 목표인 대림절까지 갈 모양이다. 9월 초부터 일주일에 ‘한가지 씩’ 을 ‘연습’해 보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크게 바뀐 것도 아니던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참 본 받을 만하다.

 

 

Changes in the People’s Parts    
PART OF MASS OLD TEXT NEW TEXT
Greeting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Penitential Act,Form A (Confiteor)   I confess to almighty God,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sinned through my own fault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and I ask blessed Mary, ever 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I confess to almighty God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greatly sinned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through my fault,
through my fault,
through my most grievous fault; therefore I ask blessed Mary ever-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Penitential Act,Form B Priest: Lord, we have sinned against you: Lord, have mercy.
People: Lord, have mercy.
Priest: Lord, show us your mercy and love. People: And grant us your salvation.
Priest: Have mercy on us, O Lord.
People: For we have sinned against you.
Priest: Show us, O Lord, your mercy.
People: And grant us your salvation.
Gloria  Glory to God in the highest,and peace to his people on earth.  
Lord God, heavenly King, almighty God and Father, we worship you, we give you thanks, we praise you for your glory.    
Lord Jesus Christ, only Son of the Father, Lord God,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you are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receive our prayer.  
For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Jesus Christ,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God the Father. Amen.
Glory to God in the highest,and on earth peace to people of good will.  
We praise you, we bless you, we adore you, we glorify you, we give you thanks for your great glory, Lord God, heavenly King, O God, almighty Father.  
Lord Jesus Christ, Only Begotten Son, Lord God, Lamb of God, Son of the Father,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receive our prayer;  
you are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ave mercy on us.    
For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Jesus Christ,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God the Father. Amen.
At the Gospel Deacon (or Priest): A reading from the holy Gospel according to N.People: Glory to you, Lord. Deacon (or Priest): A reading from the holy Gospel according to N.People: Glory to you, O Lord.
Nicene Creed  We believe in one God,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ne in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was born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ied, and was buri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in fulfillment of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ith the Father and the Son he is worshiped and glorified.
He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I believe in one God,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I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bor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consubstantial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and by the Holy Spirit was incarnate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and rose again on the third day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adored and glorified,
who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I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I confess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and I look forward to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I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Mary.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to the dea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re he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Invitation to Prayer  May the Lord accept the sacrifice at your hands
for the praise and glory of his name, for our good,
and the good of all his Church.
May the Lord accept the sacrificeat your hands
for the praise and glory of his name,
for our good and the good of all his holy Church.
Preface Dialogue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Lift up your hearts.
People: We lift them up to the Lord.
Priest: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People: It is right to give him thanks and praise.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Priest: Lift up your hearts.
People: We lift them up to the Lord.
Priest: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People: It is right and just.
Sanctus  Holy, holy, holy Lord, God of power and might.
Heaven and earth are full of your glory.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Holy, Holy, Holy Lord God of hosts.
Heaven and earth are full of your glory.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Mystery of Faith(formerly the Memorial Acclamation)  Priest: Let us proclaimthe mystery of faith:  
People: A – Christ has died, Christ is risen, Christ will come again.    
or B – Dying you destroyed our death, rising you restored our life. Lord Jesus, come in glory.    
or C – When w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we proclaim your death, Lord Jesus, until you come in glory.    
or D – Lord, by your cross and resurrection, you have set us free. You are the Savior of the World.
Priest: The mystery of faith.   
People: A – We proclaim your death, O Lord, and profess your Resurrection until you come again.  
or B – When w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we proclaim your death, O Lord, until you come again.  
or C – Save us, Savior of the world, for by your Cross and Resurrection, you have set us free.
Sign of Peace Priest: The peace of the Lordbe with you always.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peace of the Lordbe with you always.
People: And with your spirit.
Invitation to Communion  Priest: This is the Lamb of God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ppy are those who are called to his supper.
All: Lord, I am not worthy to receive you,   but only say the word and shall be healed.
Priest: Behold the Lamb of God,behold him 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Blessed are those called to the supper of the Lamb.
All: Lord, I am not worthy that you should enter under my roof, but only say the word and my soul shall be healed.
Concluding Rites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Hurricane Irene

major hurricane Irene near Florida coast
monster hurricane Irene near Florida coast

허리케인 아이린, 일주일도 넘게 비 구경을 못하던 차에 monster hurricane Irene이 미 동부 해안을 따라 올라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이쪽으로 와서 많은 비를 뿌리려나 희망적인 기대를 해 보았지만 예년과 비슷하게 이곳의 근처는 완전히 비켜 지나갈 것으로 예보가 되었다. 하기야 이것이 정말로 지나가게 되면 비만 뿌리겠는가.. 강풍으로 피해도 엄청날 수도 있다. 그것보다는 그저 ‘더운 쪽’이 더 나을 것이다.

문제는 이 허리케인이 Interstate Highway I-95를 따라서 워싱턴, 뉴욕 쪽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이 I-95 고속도로는 완전히 미국 동부의 대도시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지나가니까, 막대한 피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만약, 2005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 가 루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즈(New Orleans, Louisiana) 를 덮치듯이 뉴욕 시를 덮치게 되면 정말 예측불허의 피해가 날 수도 있다. 일요일 쯤이면 그 결과를 알게 될 것인데.. 과연 어찌될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하지만, 사실은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비약적인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지독한 불경기에 이런 자연재해로 피해까지 보게 되면, 미국경제 (따라서 세계경제)는 당분간 같은 상태의 불경기로 이어질 듯하고, 이것은 내년의 대선으로 이어져서 ‘희망의 등대’였던 오바마 도 재선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지고, 전대미문의 ‘깡패집단’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는 공화당은 승리의 쾌재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짱 꼴라” 집단이 ‘We’re Number One!” 이라고 선언을 할 날이 곧 오게 되지 않을까? 정말 살 맛이 없는 날들이 오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최악이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iJobs’ going, 디지털 세대는 흐른다

Two Steves with Apple-I prototype, 1975
Two Steves with Apple-I prototype, 1975

뉴스를 잠깐 보니.. Steve Jobs가 물러난다고.. 일선에선 물러나지만 ‘회장’자리를 지킨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당분간 필요한 그 회사의 사업상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 회사의 주식을 가진 인간들이 그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그는 나와 같은 computer engineer로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직업에 대한 정열,애착 같은 것을 많이 공감하는 편이다.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외골수 적인 인생을 어찌 이해를 못하겠는가? 그것이 $$$ 으로 이어지면 더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실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만드는 그 자체’ 에 만족을 하면 되니까. 나는 그와 거기까지만 공감을 하며, 그 나머지 그의 제품에 대한 ‘접근방식’은100% 불만이고, 그와 정반대인 편에 있다.

지금까지 그가 한 방식, 결과를 보면 그는 완전히 ‘자기도취’에서 만족하고 살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한 회사에 막대한 $$$를 벌게 해주고, 그에 따라 주주들도 같이 덕을 본 것 뿐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케 한 것은 그의 제품에 ‘팔린’ 대부분 ‘기술적으로 문제가 많은 돈 많은 인간들’에게 있다. 여기서 기술적으로 덜 떨어진 인간들은 주로 ‘언론인, 연예인, 예술가’ 들이 많고 그들은 완전히 ‘신앙적’으로 믿으며 제품 선전을 해 주었다. 완전히 삼박자가 맞아 떨어진 ‘완벽한 무용’ 이었다.

나는 ‘골동품’ 애플 시절부터 그것들을 싫어했다. 완전 아마츄어 급의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의 연구한 결과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완전히 ‘예술품’ 급의 판매 가격으로 매킨토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 회사가 한때 거의 도산지경에 까지 가지 않았던가? IBM-PC의 성공, 보급으로 5%정도의 보급율로 회사를 살리려니 제품의 가격은 절대로 항상 premium급이었다. 하기야 언론인, 예술가중에는 $$$이 많았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PC clone이 나오면서 ‘살려고’ 한 짓은 절대로 Apple clone을 막아야 한다는 ‘철칙’이었다. 그때부터 100% ‘닫힌 시스템’이 고수되었다. 이것은 사업상으로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사실은 Steve Jobs의 기본 철학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만든 제품은 절대로 열어볼 수 없게 만든다‘ 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완전히 애플(매킨토시)로 부터 등을 돌렸다. Unix를 완전히 자기 것처럼 ‘변종’을 시켜서 쓰면서 ‘절대로’ 그것을 ‘열어’놓지 않았다. 이것도 Steve Jobs의 철학이었을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 가끔 매킨토시를 ‘써야만 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건 ‘컴퓨터 엔지니어’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아하! 바로 이것이 ‘stupid people’을 위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stupid한 사람들이 절대로 많은 세상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그들의 business에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다른 쪽인 Windows쪽은 최소한 open된 것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이곳도 나중에는 많이 ‘이기적’으로 변했지만 매킨토시에는 비교도 못하게 ‘열린’ 것이다. 최소한 hardware를 내 마음대로 고르고 만들 수가 있으니까..

문제는, 이런 ‘닫히고, 고가를 자랑하는’ 시스템의 방식이 그들이 처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smart phone (iPhone)으로 연결되어 stupid mass가 완전히 그것에 ‘빠졌다는’ 현실이다. 그것은 거의 monopoly나 다름이 없고, brainwash에 가깝다. 분명히 바보 같은 ‘언론인, 예술인’들이 앞장을 섰을 것이고, 거의 ‘공짜 선전’을 해 주었을 것이다. 그의 salesmanship은 절대로 인정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방식은 절대로 많은 open system people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거의 반대편에 있는 Open System쪽은 어떠한가.. 이래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모든 것을 나누어서 공익을 취하자는 거의 ‘사회주의적’인 방식이 기술 쪽에 들어왔을 때, 그것의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나 같은 ‘돈 없는’ 사람을 ‘살려준’ 것은 Linux를 선두로 대부분의 Open System 운동이었다.그와 정반대의 쪽이 있던 것이 바로 Steve Jobs 같은 selfish, egomaniac한 인간 부류들이고, 그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머리를 잃어버린’ Microsoft쪽이다.

 

 

dream dream

 
Dream Dream – Everly Brothers – 1960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좋은 꿈’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좋은 꿈’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이상한’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

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날라서 사뿐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진했던’ 그런 ‘초원과 하늘’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찐~’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라이파이, ‘철인 28호‘, 왕현의 ‘저 별을 쏘라‘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잠자리 채’ 로 ‘잠자리 비행기’를 잡던 꿈이었다. 그러니까 ‘방충망’으로 ‘헬리콥터’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잠자리 비행기’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잡았다’.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좋은 꿈’ 중에 하나였다.

 청춘의 절정기에는 ‘성장, 남성 male’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이성을 그리는 환상’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건강’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변태’가 아닐까 하는’틀린’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

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최고’의 꿈은 역시 ‘지적이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가위 눌림‘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히다카 켄조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고민’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천천히, 완전히’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The Exorcist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악몽’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대머리’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서서히’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된 정도로 역사와 ‘실감’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공부, 성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성적’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PBS TV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The Paper Chase..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CBS TV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고전’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Riverview Apartment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PBS TV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진짜’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Hart)이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간신히’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고통’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Prof. Kingsfield)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Hart)을 심리적으로 거의 ‘죽이는’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아직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완전히’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안도감과 기쁨’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그런 ‘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

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역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

 

WYD 2011, 레지오의 전산화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2011년 마드리드,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 가 ‘무사히’ 막을 내렸다. 전야 미사 중의 날씨가 나빠져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오늘 CatholicTV.com을 보니 드디어 어제 일요일의 “폐막 미사”의 비디오가 올라와 있었다. 이 행사를 며칠 유심히 보면서 나는 거의 내가 ‘가톨릭 청년’ 이 된 기분이 되어서 참 기분이 좋았다. 폐막미사의 광경은 참 ‘장엄’하면서도 100만의 젊음의 활기가 완전히 ‘공항’을 휩싸는 그런 것이었는데..이것은 실제로 그 현장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전부를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난 6월 이곳 아틀란타에서 열린 연례 대교구 주최의 ‘성체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런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수만 명의 형제,자매 신자들과 같이 함께 모여서 미사를 본다는 사실은 글로 그 느낌을 다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한 비행장 전체가 ‘완전히’ humanity로 채워진 모습은 비록 작은 화면으로 보더라도 실감이 되었다. 그 광활한 평지를 완전히 메웠던 백만 명의 ‘멋진’ 젊은이들.. 잘못 보면 무슨 rock concert에 온 젊은이들 같이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히 그들은 다르다. 1960년대 말, 미국 Woodstock Rock Concert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 광경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완전히 drug, sex & rock music이 주제가 되었던 그 시절, 그 세대.. 사실은 나도 그것들을 보면서,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 열광’을 하던 오래 전의 추억이 있다. 하지만 ‘다른 모습의 완전한 자유를 보여주는’ 이런 전혀 다른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이래서 항상 ‘희망’이란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멋진’ 젊은이들이 얻었던 며칠간의 체험은 그들, 그들 주변, 그가 속한 사회, 나라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의심하지 않는다. 작은 호기심 하나는, 어떻게 100만 여명에게 성체를 분배할까..하는 별로 의미 없는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전산화: 이것도 잘못 들으면 oxymoronic한 구절이 아닐까. 절대적인 성모마리아께 대한 순명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 거룩한 평신도 단체는 언제까지 ‘낭비적인 시간’을 허용할 것인가? 로마군단의 효율적인 체제를 본 받으려면 현재에 가능한 온갖 ‘도구’를 다 써야 할 것이 아닐까? 여기서 ‘도구’란 물론 digital tool을 말한다. 물론 computer가 그것이다. 예전에는 computer하면 막연히 desktop system을 뜻했지만 지금은 아주 다양해졌다. 여기에는 물론 Internet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모든 것들이 ‘연결’이 되었고, 무서운 기세로 연결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 이제 이 ‘도구’는 누가 어떻게 먼저 자기 목적에 맞게 쓰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얼마 전에 나의 예상을 뒤엎고, 연숙이 본당소속 꾸리아의 부회장에 피선이 되고 말았다. 전부터 나는 레지오 평의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극구 말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해야 하는 ‘봉사적’인 직책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덜 바쁜 시간이 필요함을 잘 알기에 나는 반대를 한 것이다. 또한 직책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중요함을 나날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떤 직책의 ‘일’이란 것이 사실은 ‘타협, 양보, 조절’의 기술이 나머지 것들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헌신적으로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극구 말렸지만, 본인의 의사는 별로 반영이 되지 않게 피선이 되었으니.. 이제는 현실로 받아야 할 듯하다. 한마디로 나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비록 평 단원이지만 부부로써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래서 첫 번째로 연숙이 가지고 온 ‘일’ 중의 하나가, “레지오 멤버들의 관리” 에 제일 중요한 레지오 <행동단원 복무기록부> 를 정리하는 일이 되었다. 아주 두터운 3-ring binder에 꾸리아소속의 거의 모든 단원의 신상기록이 있는데, 물론 이것을 ‘전산화’ 하려는 것이고, 그것을 첫 과정이 data entry가 아닌가? 가장 쉬운 Excel-format으로 시작을 하는데, 역시 문제는 한글, 영어가 섞어야 하는 조금은 복잡한 데이터 들에 있고, 불완전한 record, 고유한 개개인의 아이디(id)등인데 이것은 아마도 본당의 교적부의 database를 참고로 하면 좋을 듯하다.

이것이 시작이지만, 그 이외에 예상할 수 있는 ‘과제’는 적지 않다. 제일 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모든 서류양식을 writable-pdf 화 하여 computer screen에서 직접 입력을 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역사 깊은 레지오에서 이미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온통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심지어 Ireland(아일랜드)의 레지오 세계 총본부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format file을 download-print해서 손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이’는 아직도 계속 써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 digital gadget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고국의 레지오도 마찬가지로 이곳은 거의 아래아 한글(hwp format)로 된 것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이 현재의 레지오 단원 평균 연령층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활발한 레지오 연령대는 어느 곳에서나 시간이 조금은 여유가 있는 세대일 것이다. 그들은 거의 장년층일 것이고 아무래도 그들은 젊은 세대보다는 technology에는 덜 익숙하지 않을까? 꾸리아 레벨에서 산하 쁘레시디움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정보적인 도움’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기계적인 일들은 모두 computer에 맡기고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인,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cloud-model로 가는 마당에, 이것을 database application으로 바꾸고, 그것을 webify(web application으로 바꿈) 해서 모든 ‘단원, 임원’ 들이 “위치에 상관없이” 볼 수 있고, 쓸 수있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Catholic Sunday, etc..

WYD: Wor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일요일 아침, 근처에 있는 ‘미국 본당(Holy Family CC)’ 주일미사를 가기 전에 잠깐 뉴스를 봤더니, WYD(World Youth Day: 세계청년대회, 스페인 마드리드)의 토요일 밤 vigil mass중에 찌는 듯이 더운 날씨가 돌변을 해서 천둥과 벼락, 폭우가 쏟아 졌다고.. 며칠 전에 미국 Indianapolis, Indiana에서 열린 커다란 야외 집회 중에 갑자기 몰아친 돌풍으로, 높이 세운 구조물(scaffoldings)이 쓰러져서 다수의 사망자 까지 나왔던 일이 생각이 났다. 미사 후에 집에 돌아와 자세히 읽어보니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이야 말로 Thank God..이라고 해야 할까.

이 뉴스는 사실 ‘세속적’인 뉴스 채널을 통해서 보았다. 이런 곳에서는 어떻게 이번 행사를 보며, 느낄까 궁금하기도 해서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교황이 가는 곳은 이들 세속적인 뉴스 매체가 꼭 관심을 갖고 따라다닌다’ 라는 사실이다. 역시 바티칸은 ‘정치적’인 위치도 잃지 않고 있다. 그만큼 교황의 ‘말씀’은 아직도 ‘세계적’으로 영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알게 된 것은 ‘보수적인 추측’ 으로 예상했던 참가한 젊은이들의 숫자가 50만 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거의 100만 명이라는 사실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대단한 숫자가 아닐까? 정말 정말 대단하다. 이들은 역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영향을 듬뿍 받은 젊은 세대인 것이고, 다시 한번 그분의 ‘선견지명’에 놀랄 뿐이다. 이 백만 여명의 젊은 ‘세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 주변을 바꾸어 놓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세상에는 ‘희망’이 있어 보인다. 다음의 이 대회는 2년 후인 2013년 Rio de Janeiro, Brazil에서 열린다고 발표가 되었다. 3년 후인 2014년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그 해에 그 곳에서는 4년 마다 열리는 세계인의 대 축제, World Cup Soccer가 열려서 부득이 일년을 앞 당긴 모양이다. 다시 ‘흑자, 호경기 재정’으로 돌아선 브라질은 이래 저래 좋은 소식만 가득하게 되었다… 부럽다.. 그들이..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Maximilian Kolbe),  오늘 주일 미사는 대학의 catholic center(보통은 Newman Center:대학 내 가톨릭 공소, 라고 함)의 신부님께서 방문자의 자격으로 집전을 하셨다. 갑자기 ‘젊은’ 공기가 성전을 가득 찬 기분이었다. 우선 말씀의 ‘속도’가 엄청나게 젊었다.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다음 젊은 목소리, 그것도 에너지가 충만하고, 한 단어 단어가 뚜렷이 구별되는 확실한 영어.. 이것도 새로웠다. 아마도 모두들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이맘때면 ‘휴가 차’ 그의 고향인 Dublin, Ireland에 가신다. 가셔서 ‘공개적’인 안부 엽서까지 주보에 실렸다.

오늘 방문 신부님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의 축일이 지난 8월 14일이었음을 상기하고, 그 성인의 ‘유적지’를 찾아 본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유적지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2차 대전 당시 그’죽음 공장’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나치 집단수용소. 어찌 이 이름을 잊으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멋도 모르고’ 그 당시 나왔던 기록 영화 ‘(히틀러의) 나의 투쟁‘ 을 보고 처음 그곳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영화가 ‘학생입장 대환영’ 이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역사, 교훈적일지는 몰라도 준비가 덜 된 ‘아이들’에게 그런 ‘시각적으로 끔찍한’ 것은 너무나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이 나이에서 그것을 다시 보라고 해도 망설여질 정도인데.. 어떻게 어린 중학생들에게 그것을 보게 했을까? 공상영화였다고 해도 충격적인데 그것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얼마 전에 벌어진 전쟁 범죄’였다는 사실.. 그 당시에도 믿어지질 않았다. 그 희생자 중에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도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기차로 도착을 하면서, 그 옆 철길에는 아직도 집단 학살될 유대인 가족들이 도착하는 ‘짐짝 기차’가 그대로 ‘전시’ 되어 있음을 보고 생각하셨단다.. 화장실, 좌석, 아무것도 없는 화물열차로 도착하던 그 불쌍한 가족집단들.. 어린이들의 울음소리..그것도 역시 another Kafka moment 였을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비틀어지면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들이 일어났을까? 천 년 전의 ‘우매, 잔인한’ 몽골전쟁이 아닌 바로 70년 전의 ‘생생한,역사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전쟁 중에..

맥시밀리안 성인의 이야기는 얼마 전 우연히 역시 연숙의 책 중에서 잠깐 본 것이었다. Boniface Hanley 저, Ten Christians이라는 책이었다. 이 10명의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고, 결국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준 그런 분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도 있고, 그 반대로 전혀 알려지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 인생의 선생님’으로 사신 분들인 것이다. 그 중에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은 ‘현대적 순교’를 하심으로써 기독교 사랑의 극치를 가르치신 case다.

프란치스코회의 신부였던 그는 수용소에서 짐승 같이 날뛰던 SS들 (비밀경찰)에 의해서 약물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죄는 탈출한 동료들 대신 보복적으로 뽑혀서 죽게 될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살리고 대신 그 자리를 맡아서 ‘굶어 죽는 형벌’을 자청한 것이다. 대부분 일 주일 후에 굶어 죽었지만 그는 3주를 더 버티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나치SS는 약물로 그를 죽인 것이다. 그 때문에 살아나게 된 운 좋은 ‘죄수’는 그의 남은 여생을 끝까지 살게 되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끝까지 비판하며 천국으로 가신 이 성인은 정말 지금에도 거룩한 인생의 선생님이시다.

 

아틀란타 한국성당, 완전히 분가, 그 동안 아틀란타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숙원이었던 ‘또 하나의 다른 성전’의 꿈이 이제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노력 끝에 이번에 임기를 마치고 떠나신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의 ‘단행’으로 결말을 본 것이다.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도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늘어나는 천주교 신자, 예비자들을 적절히 수용할 기회를 놓쳤다는 평도 있었다. 기존의 한인타운의 한 중심에서 그 역할을 100% 수행했던 구 성전이 이제는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졌던 차에 조금은 활짝 넓은 공간에 새로운 성전이 마련 된 것이다.

새 성전은 사실 제2의 한인타운이 되어가는 동북부 교외지역(Duluth, Suwanee)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쪽으로 새로 유입하는 ‘은퇴세대’ (주로 뉴욕지역으로부터) 를 중심으로 ‘졸부 급’의 신흥 ‘벼락부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경제적, 연령적으로 보아도 아주 안정된 여건을 갖추고 있다. 물론 그런 여건이 ‘신심적’으로 활발할 지는 확실치 않지만..

덕분에 기존 성전은 조금 여건이 나아질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신자수가 그 만큼 (약 200~300명?)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service나 사목 활동에도 조금 기를 펴고 여유가 생길 것이다. 한가지 문제점은 여러 가지 신심단체들이 거의 ‘강제적’으로 분할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를 가지고 해결을 할 문제이다. 내가 속한 레지오 도 2명 정도가 (그것도, 단장, 부단장) 그쪽 지역에 속해 있어서 조금은 염려가 되기도 한다.물론 주일 미사는 새 성전으로 가고 신심단체는 바꾸지 않아도 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세계청년대회, WYD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YD: World Youth Day .. 이것이 한국어로 “세계 청년 대회” 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1984년에 시작된 이 세계적인 가톨릭 행사를 이제야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보고 듣게’ 된 것이 나로써는 조금 늦은 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관심이 가고 알게 된 것도 다행이라고 위안을 한다.

올해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다린’ 것은 사실 여러 가지의 원인이 함께 도움이 되었다. 이 행사가 시작된 것은 다름이 아닌 내가 제일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이시다. 그는 어떻게 이런 행사를 생각을 하고 실행을 했을까? 희망은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절박한 진리’ 때문이었을까? 믿음 하나로 공산주의를 꺾고, 인류의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대였던 그.. 진정한 범 세계적인 세계인, 지도자.. 그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오래 갈 것은 바로 젊은이의 등대인 이 행사가 아니었을까? 희망은 역시,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지독한 피상적인 물질주의와 인기, 인본주의에 찌들은 요새의 유행문화를 어찌 그들, 젊은이들이 피해갈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nano-second, 찰나의 기쁨을 추구하려는 그들에게 어떻게 누가 무엇이 장차 그들 앞에 다가올 현실일까를 가르쳐 줄 것인가? 허무.. 허무 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행사의 전개되는 것을 보니 조금은 요새 보기 드문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오십만 명 이상이 온다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 그들이 어떤 것을 느끼고 보고 갈 것은 크게 추측을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할 것이다.그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이바지’ 할 지는 크게 의심할 필요도 없다. 잠깐 잠깐, 상상과 꿈의 나래를 피어본다. 내가 20대 초반의 옛날로 돌아가서, ‘반종교적’ 이던 나의 그때와는 달리, 가톨릭 신자로써 이곳에 참가를 한 그런 꿈이다. 수십만  명의 ‘동료’, ‘친구’, 젊은이들을 보며 그들과 그곳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존경하는 교황을 직접 듣고 본다는 꿈.. 그때 느낀 것들을 두고 두고 생각하며 나의 젊은 인생을 시작한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론 어려운 위기도 많이 겪었겠지만.. 분명히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는 필요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조금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최소한 ‘인생의 (최후의) 목적’ 만은 알고 살았을 것이다. 나아가서 내가 추구했던 이상, 전문적인 일들, 가족들과의 관계도 조금은 덜 후회를 남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꿈에서 깨면 을씨년스러운 현실로 돌아온다. 나를 성당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십 년이 넘도록 기도하며 도와 주었던 우리 식구들, 연숙과 두 딸들.. 그런 10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두 딸들이 떠났다. 이번에는 나와 연숙이 그들을 기다리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왜 우리 두 딸들은 그렇게 ‘야멸차게’ 성당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런 나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 WYD같은 세계적인 행사를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다. 왜 우리 두 딸들이 그 속에 있지 못한 것일까? 왜 그렇게 쉽게 세속문화,찰나 문화에 빠져야만 할까? 기다려 본다. 나 같이 남을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case도 있지 않은가?

 이번 미국에서 가는 청년의 수는 무려 2만 여명으로 사상 최대이고 한국에서도 천 여명 이상이 참가한다. 내가 사는 이곳 아틀란타 대교구에서도 백여 명 이상이 참가를 한다고 이곳 가톨릭 신문에서 보았고 그 중에는 우리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여대생도 있었는데, 예쁜 얼굴의 Georgia State University 학생이라고 했다. 성당을 떠난 우리 두 딸만 보다가 이런 ‘다른’ 젊은이들을 보는 것이 요새는 나의 ‘낙’이 되었다. 거의 흡사 무슨 ‘젊은 성인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인 것이다. 지난 6월 달, 이곳 아틀란타 한국본당의 레지오 피정에서 그런 젊은 성인’들을 나는 room-mate로 직접 가까이 보기도 했다. 그들의 부모들은 우리와 다르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시켰던 것일까? 그들 부모들이 그 들에게 어떤 role-model로 비쳤기에 그렇게 ‘모범적’이었을까?

한국 주교회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세계청년대회, WYD: World Youth Day‘는 다음과 같이 요약이 된다.

세계 각지에 있는 가톨릭 젊은이들이 2년 또는 3년에 한번 개최 교구(도시)에 모여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함께 축제를 지내는 모임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살게 하고자 개최한 젊은이들의 축제이다. 1984년과 1985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으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초대하였다. 그 뒤 1985년 12월 20일, WYD 협회를 구성, 1986년에 처음으로 공식 WYD가 열리게 되었고 1987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 번째 WYD가 개최되었는데 이로써 2년 또는 3년 만에 개최하는 정기적인 국제 대회가 되었다.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에서 모여 온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의 가치인 보편성과 다양성을 확인하며 함께 어우러진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신앙과 경험을 나누고, 자기들의 고국에 그리스도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전파할 수 있는 활기를 얻는다.
또한 서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갖는다. WYD는 세계 도처에 평화와 상호 이해의 정신을 표현하는 대회이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나라와 지역의 깃발을 흔들 때, 깊은 공감을 맛보며 이 체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Bozos from Marietta Power

It was so amazing, hilarious, then frustrating and finally angry. Yesterday, while driving home with Yonsook from Tuesday regular Legio meeting at the church, Janet called the power went out at home around 2 pm. Probably another Rosewell road widening construction disrupted neighborhood power, we guessed it would last a hour again. My concern was more with home-servers than usual inconvenience. Thanks to the a bit cooler weather, a/c was not the primary concern this time.

Arriving at near our garage drive way, though, we found a few Marietta Power crew were working at the ‘box’ (transformer). That’s was the reason! They apparently did bother to give us any advance notice, which is probably ok if they figured, or estimated the outage would be reasonably short. One of the crew even let us know it would be around 20~25 minute thing. I thanked them for letting us know even now.

Now, hot afternoon made us very uncomfortable inside the house, but their 20 minute thingy becomes almost 4 hours now.. hmmm.. What’s going on? Looking outside.. well.. it’s quiet.. they’re gone! The day’s work apparently was done. Checking my next neighbor’s a/c units.. they’re humming very nicely! What’s happened? Only my house was without power still yet! Now, I am almost certain those bozos were so eager to call it day, headed home for dinner without turning power switch back on only for our house! This was almost like another small Kafka moment for the day (among others). Called ‘amazing’ Marietta Power, only recorded message welcome their ‘frustrated’ customer after hour. Luckily Janet managed to connect to a ‘real human’, got assured ’emergency crew’ is on the way in 45 minutes. A monster truck rolled in, the crew initially couldn’t believe the story we told them.. why not? It was so unbelievable, even hilarious! They did not turn the power switch back before closing the transformer box. Thanks, for nothing, Marietta Power!

 

60대에 읽는 카프카

부조리 박사, Franz Kafka, 카프카
부조리 박사, Franz Kafka, 카프카

60대에 읽는 카프카.. 이것이야 말로 조금 웃긴다. 카프카.. Franz Kafka의 이름은 많이도 들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모른다. 그저 감수성이 많던 시절, 그러니까 10~20대 정도에서나 관심이 있을 그런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삶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이제 조금 느리게 가는 시기에 우연히 그를 드디어 접하게 되었다.이번 여름의 독서목록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 카프카의 ‘심판‘[The Trial]이란 책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이것도 그러니까 모르고 죽으면 조금 아까운 것 중에 하나라고나 할까. 한가지 아쉬운 것은 내가 카프카의 글을 아주 젊었을 때 읽었었더라면 그때의 느낀 것과 비교를 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실존주의자였던 그가 근대 서구 문학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까.. 그것이 나는 알고 싶었다. 왜 그는 그렇게 “인간 삶의 부조리(absurdity)” 라는 것을 그리고자 했을까? 그는 왜 삶 자체를 ‘부조리, 무의미’로 보았을까? 그 젊었던 나이에 그가 얼마나 인생을 살아 보았다고 그런 것들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 현재 이 책의 삼분의 일 정도 읽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왜 그렇게 그가 그렇게나 유명했는지 모르겠다. 1990년대 영화 Congo 에서 나온 대사, pure Kafka 란 말이 아직도 나의 귀를 울리는데, 그때의 의미도 역시 ‘상황의 부조리,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등이었다. 그 정도로 그의 ‘부조리’는 유명했을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나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