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육 년의 세월은..

달력에서 오늘이 2016년 1월 25일임을 보면서 다시 생각에 잠긴다. 36 주년 결혼 기념일.. 어제 아이들과 Marlow’s Tavern에서 나의 ‘늦은 생일’ brunch를 먹으며 이 ‘긴 세월 36년‘이 또 언급되었다. ‘무척 오래 같이 살았다’라는 딸들의 이야기.. 별로 생각 없이 36년을 거론하곤 했지만 듣고 보니 과연 ‘우아.. 같이 참 오래 살았다…‘ 라는 탄성이 낮게 나온다. 총각 때의 자유연애 시절이 끝나는 시점인 결혼은 사실 조금은 자유가 없어지는 시점이기도 해서 결혼 전에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막상 결혼 후에는 그런 생각이 스스럼없이 사라졌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이여.. 1980년 1월 말 제주도 서귀포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이여.. 1980년 1월 말  honeymoon 제주도 서귀포에서

 

36년이란 숫자의 세월은 공교롭게도 일제시대 36년 이란 말이 연상이 된다. 그 옛날 일제시대 36년 어쩌구.. 했을 때 참 오랫동안 ‘쪽바리 치하’에서 고생했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바로 그런 긴 세월의 36년이었다.

얼마 전에 25주년 결혼 은혼식 Silver Anniversary 축하를 친지들과 조촐히 했던 기억인데.. 그것이 벌써 11년 전이 되었고, 이제는 숫제 50주년 금혼식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결혼 당시 흔히 듣는 주례님의 말씀 중에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하는 말로 오래 오래 같이 살라는 뜻의 주례사가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미사여구 美辭麗句 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시간과 세월에 밀리듯이 이렇게 36년을 맞게 되니, 가급적 50주년도 기념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생긴다.

지금의 세상이 하도 요상하게 돌아가다 보니.. 예전에는 당연시 되던 ‘백년 해로’하던 미풍양속이 흡사 ‘희귀동물’ 취급으로 축하를 요란하게 받게 되고, 심지어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부부가 남달리 돋보일 정도로 한마디로 ‘해괴’한 추세를 느끼며.. 이런 ‘반역사적’인 것들이 과연 어디까지 ‘퇴보’할 것인가 한숨만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부부.. 36년을 맞으며 ‘자연법 인간역사‘에 일조를 했다고 자부하고 싶다. 

36년 전의 세상은.. 그 동안 강산이 3번 이상 변했다고 하면 짐작이 갈까? 잊고 살던 결혼 당시의 세상모습들이 떠오르고, 우리가 변한 모습에 또 한번 놀라고.. 이런 모든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크게 놀랄 것 하나도 없다. Soviet를 위시한 살기등등했던 세계 공산당들이 물러간 자리에 목을 자르는 살인강도들이 종교의 이름을 팔며 설쳐대는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변했다. 자연법에 따라 우리의 자식들이 세상의 빛을 보며 커가고 그에 맞갖게 부모님 세대들이 황혼의 빛으로 사라지셨다. 그 자리로 우리가 서서히 사라지는 중.. 이것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지극히 자연적이고 순리적인 것이다. 아하~~ 이제서야 이런 변화들이 왜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이유가 어설프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이렇게 큰 사고 없이 36년간 가정을 유지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We are all alone.. Rita Coolidge의 이 oldie는 결혼 전후로 꽤나 듣고 따라 불렀던 추억의 곡이다. 이 곡은 총각시절에는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낄 때, 결혼 후에도 둘이서 외로움을 느낄 때 듣곤 했다.

 

 

We’re All Alone – Rita Coolidge

 

첫 눈발, 또 하나의 생일

내가 본 마지막 아틀란타의 설경, 2015년 2월 24일 이었다. 약간의 눈발과 dusting 정도..

내가 본 마지막 아틀란타의 설경, 2015년 2월 24일 이었다. 약간의 눈발과 dusting 정도..

 

¶  오늘은 올 겨울의 첫 하얀 것(일명 ‘눈 雪’, white stuff, a.k.a snow) 을 기다리는 예기치 않은 holiday이 되었다. 2년 전의 악몽 같던, gas가 거의 바닥이 난 차 속에 갇혀서 19시간을 꽁꽁 얼어붙은 I-285 freeway 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던 것.. 그런 것 때문에 이번의 ‘비, 진눈깨비, 눈’의 일기예보는 분명히 모두들 over-reacting을 할 각오를 할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예정대로라면 신부님을 모시고 H자매님 봉성체 동행을 하는 날이었지만, 이런 날씨 처음 맞는 신부님은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불안감은 떨칠 수가 없어서 일 주일을 연기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free holiday를 준 셈이 된 것이다.

2년 전의 악몽도 사실은 오늘과 비슷한 routine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과는 disastrous한 것으로 남았다. 당시에는 일기예보보다 훨씬 빠르게 점심시간 즈음부터 freezing rain-to-snow가 내리고 panic한 모든 차들이 한꺼번에 freeway로 몰리면서 그 유명한 2014 Atlanta Snow Jam, Snowmageddon이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오늘 것은 다행히 traffic hour가 끝나는 밤이 되어야 비가 눈발로 바뀐다고 하지만 문제는 모든 ‘직장’들이 정오 즈음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 그들이 또 모조리 freeway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를 떨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시간에는 비가 내릴 것으로 2년 전 같은 일은 안 날 것이지만.. 한번 놀란 기억이 머리에서 좀처럼 지위지지 않으니 어쩔 것인가?

이번의 weather system은 1990년대 초의 the storm of the century와 비슷한 pattern으로 deep South에서 습기를 몰고 northeast로 가면서 snow blizzard로 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년과 같이 Washington DCNew York쪽은 아마도 엄청난 기후 news가 될 듯하다. 이런 것들.. 그야말로 Mother Nature 그러니까 act of God이니 어찌할 것인가 도리가 없이 그저 자연에 겸손한 마음으로 승복을 하며 자연의 힘을 다시 한번 감상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도 positive한 것이 있다면.. 따뜻한 집안에서 hunkering-down하며 냄새 구수한 strong coffee를 즐길 수 있다는 정도일까.

Morning After, big chill Siberian postscript:

아침에 일어나보니.. 예보는 100% correct, 덩치가 큰 놈은 모두 예년대로 Washington DC 쪽으로 가서 그쪽은 완전히 눈 속에 파묻혔지만,  이곳은 조금 진짜 겨울 맛을 보여준 정도다. 하지만 약간 dusting정도의 white stuff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시베리아 같은 무서운 얼어붙는 바람.. 이런 날 밖에 나가는 것은 bad idea. 모르긴 몰라도 언덕 같은 곳은 skating하기 좋은 상태일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Local tv news의 ‘closing central’에는 church closing이 줄줄이 나온다. 아마도 우리의 Holy Family CC도 그 중에 하나여서.. hunker down, hunker down.. enjoy my ‘strong’ cup of coffee all morning!

 

Frozen snowy siberian morning emerges..

Frozen snowy siberian morning emerges..

 

¶  또 하나의 생일을 맞았다. 이번에는 이 몸이 이 세상의 빛을 본 날이 된다.  까마득한 옛날, 1948년 1월 21일, 어머니는 나를 서울에서 낳으셨다. 근래에 들어서 이날을 맞으며 나는 나 자신을 세상에 보내주신 부모님, 선조님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한다. 분명히 이것은 ‘고령’의 나이 탓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쪽으로는 나의 생일이 흡사 ‘어버이 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날이 나의 것, 내가 주인공으로 ‘착각’하며 오랜 세월을 산 것이 크게 자랑스럽지 않은 것이다. Pope Francis 말씀대로.. 내가 과연 나의 것인가, 내 것이 과연 있는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는가.. 올해는 유난히도 그런 것들이 나의 화두가 되었다.

올해는, 68이란 숫자에 무슨 magical 한 것 하나도 없는데, 한 번도 아니고 3번이나 ‘생일을 먹게’ 되었다. 이것이 무슨 ‘추태’인가.. 70을 향하는 ‘고령’에 겸손치 못하게.. 주책없이.. 하지만 이것도 순리에 속하는지 내가 control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지나간 화요일, 레지오 주회합 날에 생일축하 회식이었는데,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은 전통에 따라서 생일을 맞는 단원이 회식 비용을 전담한다. 처음에는 조금 ‘해괴’한 풍습이라고 생각도 했지만 지내보니까 이것도 makes perfect sense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은 오랜만에 9명 전 단원이 모여 식사를 했고,  김 실비아 자매의 제의와 전담으로 ‘하얀 풍차 coffee & bakery’에서 2차까지 치러서 아주 오붓한 자리가 되었다. 이날 정오미사에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생미사를 봉헌했는데, 신부님이 ‘연미사’로 오인, 내 이름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으로 발표가 되는 happening이 있었지만, 모두들 내가 오래 살 것이라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웃기도 했다. 이 레지오 생일 회식은 특별한 것은 없다지만 나에게는 조금 이색적인 것으로, 나를 제외한 전원이 모두 ‘예쁘신 자매님’들이라는 사실.. 남들이 보면 너무나 부러워하지는 않을까.. 외톨이 남성단원이기에 받는 유쾌한 느낌은 아닐까?

두 번째는 어제 1월 21일 (1.21 사태, 1968년) 바로 68년 째 되는 바로 그날, 예의 ‘우리 전통 group1‘이 모인 것. 1월 21일은 우연치 않게도 최형 wife (진희 엄마)의 생일이기도 해서 근래에는 ‘같이 치르는 생일’로 변했다. 어제 모인 이 group은 한마디로 ‘인생 모범생’ 가정으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서로가 서로의 ‘나이 듦’을 보아주는 watch group의 역할도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그 대신 모임자체는 아주 심도가 있고 stress 를 풀어주는 좋은 자리를 마련한다. 모두들 몸과 마음이 건강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차가운 비 내리는 늦은 저녁시간을 보냈다.

세 번째의 생일모임은.. 우리 식구들만 모이는 private한 것, 모두 바쁜 관계로 일요일 잠깐 모여서 전에 갔었던 Marlow’s Tavern에 가서 gourmet hamburger를 먹기로 했는데.. 과연 이 약속이 지켜질지는 100%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다. 이미 두 번씩이나 생일을 치렀기 때문이다.

 

2 Birthday Treats by Judy Collins 2

 

Amazing Grace – Judy Collins – 1971

 

Both Sides Now – Judy Collins – 1967  

  1. 일명 진희네 group: 최형, 윤형, 전 사장
  2. 20대 초에 좋아했던 flower girl Judy Collins,  그녀의 Both Sides Now는 인생과 사랑을 안과 밖, 위와 아래에서 바라보는 멋진 시였고, 후에 발표된 Amazing Grace는 가히 popular gospel song의 압권이었다. 특히 Amazing Grace의 가사를 천천히 음미하며 들으면 천상의 음악으로까지 들린다.

冊,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김정훈 부제 유고집, 1978
김정훈 부제 유고집, 1978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서정적인 시를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사실 어떤 ‘유고집 遺稿集’ 책의 제목이다. 언뜻 들으면 “산에 가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하느님을 생각하는 나” 정도로 연상이 되기도 하지만 과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주일 전에 아틀란타 도라빌 소재 한인 천주교회, 순교자 성당의 ‘성물방 책 코너 book corner’엘 들렸다가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것이다. 전혀 계획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연이 정말 우연일 chance는 과연 얼마나 될까?

평소에 보통 나는 성물방엘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예외적으로 10시 반 미사에 맞추어 성당 주차장 교통정리 봉사를 하게 되어서 아침 8시 30분 미사에 참례했어야 했고 12시 45분에 예정된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문에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성물방에 있는 book corner에 들린 것이고 그곳에서 이 책을 잠깐 보고 대출을 받게 받게 되었다.

Scan10020-1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 유고집 저자의 이름, 김정훈, 김정훈 베드로 부제 副祭.. 나의 거의 60년 된 깊숙한 곳 뇌세포에서 이 오래된 이름을 찾아 내었다.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동창이었다. 이 책을 대출 받으며 곧바로 나는 옆에 서있던 연숙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이 책의 제목을 알아본 것이다. 1990년 쯤 아틀란타에 이사 와서 처음 살던 Norcross의 직장 바로 근처에 있던 Four Seasons Apartment.. 우리 살던 아파트 건물 아래 쪽에 한국 상사직원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두 딸이 곧바로 우리 애들과 학교를 같이 가게 되었고 알고 보니 그 집 엄마가 나의 중앙고 동창 박우윤의 여동생이었다. 그 집에 책이 많이 있어서 연숙이 가끔 빌려보곤 했는데.. 그 당시 연숙이 그 책을 보고 ‘나와 비슷한 나이로 일찍 타계한 아까운 젊은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까물거리는 기억..  그 당시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김정훈’이란 나와 동갑인 신부의 이름이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책은 곧바로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연숙은 그 책을 읽었을 것이다.

고 김정훈 부제
고 김정훈 부제

이런 인연으로 이번에 다시 나의 ‘손에 들어온’ 이 책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재동 동창생 김정훈을 다시 발견하게 될 기회라는 ‘사명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되었다. 김정훈, 김정훈 부제.. 1960년 재동국민학교 졸업, 1966년 경기중고교 졸업..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인스부르크 대학교 유학, 부제 서품, 1977년 6월 2일 예기치 않았던 등산길에서 조난 사.. 김수환 추기경까지 참석예정이었던 사제 서품을 바로 코앞에 두고 선종.. 흡사 작은 ‘개인 서사시’ 같은 느낌.. 흠~ 30세에 선종..이란 말이 나의 코를 찡~~하게 만든다. 어찌 채 날개도 못 펴고 그렇게 갔단 말인가?

내가 아는 김정훈은 사실 단편적인 평범한 오래 된 동창의 기억 정도다. 나와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이라는 정도지만 이 ‘친구’는 조금 더 기억이 나는 것이.. 6학년 때 ‘아마도’ 전학을 왔던 것 같다. 학년이 시작되고 중간에 들어온 case였던가? 당시 우리 반은 6학년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애들이 몰려있었는데.. 당시 담임 박양신 선생님 왈: ‘김정훈은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말로 소개를 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이 애는 기기 막히게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말이 별로 없었고.. 그러니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다고 할까? 그것이 전부였다. 말썽을 피우지 않으니 크게 기억할 사건이 없는 것이다. 우리 반에는 당시 ‘경기중 지망’ 수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집안들이 떠들썩하던 치맛바람이 아니면 아이들이 그다지 겸손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 김정훈은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경기중학교에 간 것이다. 그런 사실만 나중에 알았고 곧 잊었는데.. 중학교 당시 나는 이 친구를 서울 낙원동 파고다 공원 (일명 탑골공원) 수영장 앞에서 ‘멀리서’ 보았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들어가던 모양.. 그 이후로 나는 김정훈을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다시 이렇게 불현듯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죽은 모습’으로…

재동학교 앨범사진
재동 앨범사진

연숙이 처음 이 책을 대하면서 아주 인상적이었던지 나에게 몇 번 언급을 하긴 했지만, 저자 김정훈이 나의 재동학교 동창인 김정훈이라는 100% 확신도 없었고 신부지망생이었다는 말도 나에게는 가슴 가까이 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만큼 성소 聖召 란 말의 느낌도 나는 피하고 싶었던 ‘마음과 가슴이 황폐하던’ 기나긴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주 아주 달랐다. 두말없이 그 책을 ‘2주 대출’을 받아왔고 관심 있게 이리저리 요모조모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김정훈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의 버릇인 ‘난독’으로 거의 한번은 읽은 듯하고 이제는 조금은 체계적으로 읽어볼 까.. 현재의 느낌은 김정훈의 30세가 되어가던 그 당시 그의 생각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너무나 애와 같은 생각으로 살던  나 자신을 보았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 하나다. 아무래도 하느님을 이미 찾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세를 나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참 너무나 차이가 나는 30세까지의 우리 둘의 인생이었다.

mid january, tipping over..

¶  2016년 ‘정월 正月’ 1월, 깔딱 고개를 숨 겹게 넘어간다. 그런대로, 제대로 1월다운 ‘싸늘한’ 기온을 되 찾은 이 시점에서 무언가 머릿속은,  ‘무언가 할 것들이 꽤 있는데..’ 라는 편하지 않은 생각으로 꽉 차온다. 그것들은 거의 90% 이상들이 계속 반복되는 daily, weekly routines들일 것이다. 어떨 때는 그런 것들이 그렇게 무게로 느껴지지 않은데 왜 가끔은 짓누르는 쇳덩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과학적인 biorhythm인가, 안 보이는 하느님의 섭리인가?

Kant (Immanuel) 의 시계 같은 산책 습관을 연상시키는 정확한 clockwork같은 나의 daily routine들,  가끔 ‘완전히 박살’을 내고 싶은 충동이 없다면 내가 지나치게 과신을 한 것이지만,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 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를 생각하면 그런 작은 문제들은 눈 녹듯 사라진다.

그래도 그런 충동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곧바로 별이 가득한 막막하고 까만 하늘을 보며 Cosmology, Big Bang, Quantum Enigma로 위로를 받는다.

 

¶  6년 전 쯤, 야심에 찬 계획으로 나도 “고래등같이 큰 집”에나 있는 (computer) server room에 필적하는 server closet을 시도하였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하였다. 그 때부터 우리 집의 connectivity, computing, file sharing, streaming 같은 것들을 해결하는 server 들이 car garage 의 구석에 붙어있는 이 조그마한 server closet에 모두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것을 위해서 대대적으로 cat5e cabling이  attic부터 garage까지 설치가 되었는데 사실 이 cabling, wiring 이 제일 힘든 job이었다.  Attic부터 벽을 뚫고 garage까지 wiring하는 것, 사실 pro들이나 하는 것이어서 나는 그저 ‘가진 것은 시간 뿐’이라는 motto로 결국 끝을 냈다.

 

Server Closet

Server Closet

Network/Phone Switches at Attic

Network/Phone Switches at Attic

 

당시만 해도 Wi-Fi(Wireless LAN, WLAN)의 수준이 아이들 장난 정도로 느렸고 coverage가 좁았다. 한마디로 reliable한 것이 아니었기에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wired network 그것도 Gagabit speed의 유혹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의 자랑: server closet’은 성실하게, 부지런히, 안보이는 곳에서 우리 집의 모든 family information hub의 역할을 다 해 주었다. 하지만 이것을 유지 maintain 하는 것, 공짜가 아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습도 높은 더운 여름에 air-condition이 안 된 garage의 높은 공기온도.. 그런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온도 조절에 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 동안 가족의 ‘요구 사항’이 변해서.. 아이들이 다 나간 집에서 우리 부부에게 이런 business-class network system은 한마디로.. 웃기는 overkill. 이제는 Small is better, Less is more라는 생각 투성이여서.. 올해 들어서 이런 것들은 명퇴를 당해야 했고, 결국 며칠 전부터 철거가 시작되었다. 완전히 없앨 자신이 없어서 일부분만 나의 office바로 옆 옷장 closet에 옮겨다 놓았다. 나는 주로 virtual machine(on Proxmox KVM or Oracles’ Virturalbox)을 main desktop pc 로 쓰고 있어서 server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올해 안으로 이것도 없앨 ‘각오’를 다지고 있다. 세월은 흐르고 변하고.. 그것이 순리일 것이다.

 

¶  지나간 일요일에는 원래 레지오 Curia 월례회의가 있어서 도라빌 순교자 성당엘 가야 했지만, 그것 말고도 그곳에 갈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본당 봉사의 일환으로 레지오 단원들에게 주차장 교통정리의 임무를 부여 받았던 것이다. 전에 다른 레지오 남성단원 K 빠치피코 형제가 ‘삐까번쩍’ 하는 교통안내원용 reflective vest uniform를 입고 ‘멋지게’ 교통정리를 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온 것이었다.

문제는 언뜻 보기에 이런 것 ‘남자의 임무’ 처럼 느껴졌는데.. 그것이 아니고 대부분 자매단원인 레지오에게 ‘무차별’로 주어졌다는 것. 10시 반 미사에서 가끔 교통정리를 하던 ‘청년, 분명히 형제들’ 들은 보았지만.. 자매님들은 본 기억이 없었다. 분명히 본당에서 꾸리아로 ‘지시’가 내려 갔을 것이라 ‘무조건’ 순명을 하는 자세로 우리부부는 갑자기 바람불고 추워진 아침에 처음 해 보는 교통정리를 하긴 했다.

이 임무가 주워졌을 때 나는 기왕이면 미사에 잘 안 나오는 남성 교우를 불러내어 도움을 청하면 일석이조 一石二鳥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S 아오스딩 형제에게 별로 기대도 안 하고 부탁을 했더니.. 이게 웬 일인가.. 순순히 승낙! 좌우지간 이 친구, 가끔 예측불허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그 추운 날 같이 주차장에서 교통정리 봉사를 끝냈다. 이런 기회에 ‘냉담’ 교우를 ‘밖으로 나오게, 미사를 보게’ 하는 것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는 아주 ‘점수 높은’ 활동에 속하기에 그날.. 참 기분 좋은 주일을 보낸 셈이 되었다.

 

¶  지난 해 한 여름에 만난 이후, 해가 가기 전에 만나서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해를 넘겼던 아틀란타 한국학교 ‘교사 동창’ 이동수 목사 부부, 결국은 며칠 전에야 부부가 둘루스 Duluth H-Mart 근처에 있는 일식집 해오름 에서 만나서 반년이나 지나간 동안의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었다. 서로가 바쁘게 해를 넘겼지만 이 목사 댁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와는 비교가 될지 않을 정도로 굿은 일도 많았고 바빴음을 알고 놀랐다. 자세한 것을 당시에 알았더라면 다른 것은 못해도 기도는 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 옛날 우리 집 큰딸 새로니가 사경을 헤 멜 때 이목사가 제일 먼저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절실한 기도를 했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당시에 나는 기도의 뜻과 힘을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아주 다르지 않은가? 한 때 어려운 건강상 고비를 넘겼지만 이제는 오래된 (개척)교회를 끈기 있게 이끌며 가정도 건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목사 부부.. 이제는 우리가 기도를 해 줄 차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불원간 목사님의 교회를 방문할 것을 희망하며 헤어졌다.

 

¶  레지오 주 회합이 있던 지난 화요일, 색다른 점심 회식이 성당근처에 있는 한식당 운암정 에서 있었다. 현재, 환자교우 H 자매를 교대로 돌보고 있는 helper group이 KaTalk space를 벗어나 face-to-face 로 모여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나도 분명히 그 중의 한 member였기에 참석했지만 역시 이곳도 모두 자매님들이어서 조금은 더 신경을 쓰지만 subject가 조금 심각한 것이어서 그런 것도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다. text로 의견과 보고를 나누었던 것에 비하면 다른 의견을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레지오가 도와줄 수 있는 한계를 알게 되기도 했다.

모임 자체는 화기애애했지만 모였던 장소는 조금 불쾌한 곳이었다. 그 운암정 이라는 곳, ‘비싸고 불친절한’ (한국인에게만 그렇다는 이야기까지..) 그곳의 분위기가 걸맞지 않게 ‘고성방가’ 스타일로 무슨 가라오께 방 같은 시끄러운 분위기여서 도대체 조용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못 되었다. 다시 그곳을 찾을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계기가 되었다.

 

¶  Ruby Tuesday regular 봉성체 환자 K 베로니카 자매님이 이번을 마지막으로 ‘안 와도 된다‘ 라고 ‘봉성체 service’ 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선언하셨다. 가벼운 stroke으로 갑자기 거동이 불편해지신 이 ‘어머니 자매님’, 한동안 우울하게 집에 발이 묶여 지내시고 성체를 집에서 모셔왔는데 이번에 방문을 해보니 스스로 walker의 도움이 없이 걸어 나오셔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편한 거동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씀이.. 이렇게 편하게 성체를 모시면 다시는 성당엘 못 가게 될 것 같다는 우려로 용단을 내리셨다는 말씀의 요지였다. 백 번 옳은 말씀이 아니던가? 오랜만에 환자가 크게 좋아진 상태로 봉성체 service를 끝내는 case가 되어서 우리는 너무나 홀가분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시 겨울로, final closure ..

¶  Brrrr…. 와~ 어쩌면 하루아침에 늦여름에서 한겨울로 날씨가 돌변을 하나? 섭씨 영하 훨씬 밑으로 뚝 떨어진 기온에 바람까지 겹쳐서 wind chill (체감온도)은 아마도 섭씨 영하 10도 정도같이 느껴진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전후로 한여름에 연일 쏟아지는 장마 같은 비와 홍수까지 예보가 되었던 정말 ‘보기 싫은, 추억에 남지 않을’ 그런 주일들이 지나가고 결국은 mother nature의 제 모습이 찾아왔다. 한창 때를 모르고 피어나던 동백꽃들, 된 서리를 맞은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하지만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한다’ 입을 모은다. 올 겨울의 장기 일기예보에 의하면 ‘엘 니뇨’ 의 영향으로 이곳 Southeastern United States 는 평균보다 낮은 온도와 잦은 비를 예보하지만,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눈 snow’ 같은 것은 아마도 크게 걱정, 기대를 안 해도 될 듯하다.

 

¶  Final closure..  어제는 3 주 이상이나 지연이 되었던 이 필립보 형제님의 장례미사가 있었다. 3주 전쯤 ‘독거사’라는 제목의 나의 blog에서 이 연세대 대 선배님의 급작스런 선종을 애도했지만, 당시에는 가족, 연고자들의 사정으로 이제서야 정식으로 장례미사가 치러진 것이다. 3주나 연기가 된 장례미사이기에 혹시 조객들이 적을까 염려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생각보다 많은 조객들이 큰 대성전을 거의 채웠으니까.. 이것을 보아서 이 선배 형제님 인간관계는 좋았던 느낌도 들었다. 또한 80년의 인생을 살아오며 어찌 인생이 순탄만 할 수가 있을까마는, 각가지 사연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일진데 이런 ‘늦은 장례미사’가 크게 문제가 될까? 하지만, 부인과 아들 딸의 혈육들이 다른 곳에서 다른 인생길을 걸어왔기에 이렇게 갑작스레 독거사 獨居死 로 보내는 것이 보는 주변 사람들을 을씨년스럽게만 느껴지게 한다.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는 다 큰 자녀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장례미사에 참례는 했지만 그래도 영어로 한마디만이라도 할 수는 없었을까? 아쉽기만 하다. 자업자득 自業自得 이란 말이 생각 나기도 하지만 어찌 쉽게 속단을 할 수가 있을까.. 그저 훗날에 저 세상에서 혈육들과 이승에서 못다한 관계를 회복하게 되시기만 어렴풋이 희망할 정도다. 이날의 장례미사를 보면서 나는 유난히도 ‘상상의 나래’를 펴서 내가 이 장례미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연극을 펴기도 했다. 아주 먼 훗날이 아닐 수도 있는 그날은 과연 어떤 것인가..

 

1983년 1월 5일

내일 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33번째 생일이다. 그 옛날, 한때 뻑적지근했던 아이들의 생일이 이제는 어쩌면 그렇게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는가..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거의 신비에 가깝다. 세월의 횡포인가 마술인가, 나이를 먹는 것이 그렇게도 좋았는지 싱글벙글 생일 잔치를 받던 아이들, 20대에 이르러 한결같이 시들해진 표정들로 변했고 30대에 이르러 이제는 숫제 거의 관심도 없다.

출산 5일 전, 신정 미사 후에 박재승 부부, 김원백 부부와.. 콜럼버스 한인성당에서.. 1983년 1월 1일

출산 5일 전, 신정 미사 후에 박재승 부부, 김원백 부부와.. 콜럼버스 한인성당에서.. 1983년 1월 1일: 2명 가족으로 마지막 모습

 

우리세대는 가난하고 찌들은 전통인지 생일날에는 그저 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을 먹던 것이 전부였고 더 나아가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께도 감사를 드리던 겸손한 전통이었는데, 그런 소박한 것들이 지금은 아주 신선하고 그립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들이 이제는 세계 보편적인지 서구적인지는 잘 몰라도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앵무새처럼Happy Birthday to You..’ 를 따라 부르며 자기가 100% 주인공인 된 조금은 ‘오만한’ 생일을 맞는다. 이것이 요새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생일은 100% 자기의 날인 것이다.

Well after delivery, Riverside Hospital Columbus, Ohio Jan 1983
Well after delivery, Riverside Hospital Columbus, Ohio Jan 1983

벌써 4년이나 된 나의 blog에서 당시를 피상적으로, 감상적으로 회상을 해 보았지만, 오늘은 ‘4년 동안 더 배운’ 것으로 1983년 1월 5일.. 을 회상해 본다. 그 날은.. 우리가 만든 첫 생일이었다. 지금은 반드시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begotten, not made..], 신비롭기만 한 새 생명, 그것도 ‘우리가 만든’ 생명이 세상의 빛을 본 그날이었다. 이런 표현은 사실 신앙의 눈이 뜬 지금에서야 차원이 높게 표현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도 과연 그랬을까? 우리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던 한 생명의 실존적 의미를 그 당시에 거의 실감을 못하며.. 그저 ‘한 인생의 자취’를 역사에 남기는 의무 정도로 생각하며 자질구레한 출산, 유아 쪽에 모든 신경과 노력이 쏟아지기 시작하던 겨울답지 않게 가랑비가 내리던 Columbus, Ohio의 1983년 1월 5일.. 이제는 조금은 더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태어날 당시 새로니는 참 많은 주위의 축복을 받았기에 그 애는 ‘잘 클 것’이라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대로 ‘자식은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뼈저리기 절감을 할 정도로 놀라는 순간들도 많았다. 한 마디로.. 저 애가 과연 우리의 자식인가.. 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는 세월을 거치며 지금은 체념하는 심정이 되었고.. 아하.. 이것이 순리적인 인생의 법칙이로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것과 더불어, 나의 자식들은 ‘내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라는 말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었다. 고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우리가 ‘만든다는’ 것이 한마디로 어불성설 語不成說 인 것이다.

‘남아도는 풍부한 cash’가 없던 우리 집, 편안한 도움을 줄 수 없어서 거의 모든 것들을 자력으로 공부하고, 난관을 헤쳐나간 우리 큰 딸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런 사실이 우리들이 생각한 ‘간접적인 효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큰 걱정하지 않고 이 ‘애’를 두고 ‘보이는 세상’을 떠나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색다른 선물인가?

1월 3일 모두에게 편한 날을 잡아서 다시 한번 ‘미역국’을 나누며 33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나누며 또 한번 가족의 생일을 축하한다. 이제는 ‘완전한 노처녀’가 되었다고 우리는 푸념하지만 주위 ‘선배’들의 말처럼 요새는 옛날 같은 노처녀는 아니라고 하니.. 조금은 덜 신경이 쓰일 정도다. 요새 ‘아이’들.. 그야말로 self-sufficient generation, 부족한 것이 없으니 ‘남편의 도움’이 크게 절실하지 않은 모양이다. ‘할 것 다하고’ 생각하겠다는 태도에 우리도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서 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남은 인생은 그렇게 짧지도 않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다는 사실만 하루속히 깨닫는 순간이 오기만 바라고 있다.

 

Hold on Tight to Your Dreams – ELO – 1980년대 초 oldie

common sense by npr

NPR, National Public Radio.. 오래 전, 지루하고 지겨운 Atlanta Metro I-285  통근 길의 벗이었다. 이 방송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 배운 것도 참 많았다. 특히 ‘통근시간’에 맞추어 방송을 하는  Morning & Evening News, ‘All Things Considered‘ 같은 program은 가히 일품이었다. 특히 그들이 자랑하는 independent & progressive value에 대해서 많이 배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끔씩 신경을 건들이던 ‘going too far’ 했던 것들1이 나를 그들로 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통근할 필요가 없어진 이후 나는 거의 그들을 잊고 살았다. 그 사이에 Internet이 traditional over-the-air mass media를  누르면서  FM radio를 따로 들을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Internet에 등장하게 되어서 다시 그것들을 듣거나 볼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옛날 그들의 golden-age는 최소한 나에게는 지난 듯 싶다.

오늘 우연히 들린 그들의 website에 나의 눈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건강에 관한 기사였는데, ‘유행을 타는 건강지식’에 대한 가벼운 경고를 포함하고 있는 주로 common sense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나도 많이 공감이 가기도 했다. 기사의 골자는 ‘치료보다는 예방’이라는 이제는 상식화 된 것인데, 예전에 이런 것들에 거의 관심이 없었던 나도 결국은 Medicare age로 들어가게 되면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골자는.. “언제 죽더라도.. 죽는 날까지 필요이상의 고통이 없이 살자” 라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건강하게 죽자’ 라는 이상한 표현이다.

예방의학의 발전이 치료의학의 발전에 비해서 훨씬 앞서고 있다는 저자의 말, 그도 physician이고 보니 공감이 간다. 치료하는 의사들, 특히 primary doctor들이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 아직도 심하게 말하면 ‘추측하는 game’이라는 것, 조금은 소름이 끼친다. 확률적으로 진단, 치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수없는 case에는 병을 키우고, 사망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러면 예방의학 차원에서, 어떻게 살면 건강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내가 보아도 상식, common sense가 아닐까 생각한다.

1. Get enough sleep.

2. Move your body throughout the day.

3. Eat well — a healthy assortment of foods. Mostly plants, and not too much. (An ideapopularized by author Michael Pollan.)

4. Interact socially. Isolation is not good for the body, soul or mind.

5. Take some time to reflect on what you are grateful for.

 

1. 숙면: 밤에 잠을 잘 잔다

2. 운동: 부지런히 움직이는 하루를 보낸다.

3. 음식: 적당한 양의 음식, 야채,과일을 잘 먹는다.

4. 사회적인 활동으로: 고립 됨을 피한다.

5. 자기 반성, 감사: 항상 뒤돌아 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 정도면 아하~~ 나도 알던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과연 모두들 이런 것을 지키며 살까? 아닐 것이다. 이중에서 1,2,3 은 모두 소위 말하는 육체적인 건강에 관한 것이다. 과학적인 통계도 가능한 것들이고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중에 1, 2 는 그런대로 잘 하고 있다. YMCA에서 일주일 두 번 정도는 heavy workout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움직이는 것’도 큰 문제가 없다. 매일 빠짐없이 (car) drive를 비롯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3번의 음식: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적당한 양’이 관건인데 나는 소식 小食을 좋아하기에 이것도 pass다.  근래에 들어서서 연숙의 ‘권장’으로 매끼 빠지지 않고 야채와 과일을 먹게 되고 이제는 습관이 들어서 그것들이 식탁에서 빠지면 이상하게 되었다. 그러면 physical한 것이 아닌 4번과 5번 (사회적, 자기반성)은 어떤 것일까?

짐작으로도 4번과 5번은 그야말로 make perfect sense라고 할까. 특히 4번의 ‘사회적인 인간 교류’는 공감을 수없이 하고도 모자란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을 가급적으로 face-to-face 만나는 것이다. 심리 과학적으로 이것이 body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까지는 몰라도 경험적으로 이것에 이견을 가질 수가 있을까? 5번의 자기반성, 성찰, 감사 등은 어떤가? 어느 정도까지 이런 것들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궁극적인 것은 모른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자연과학’적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나 신앙처럼 그저 옳다고 믿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물론 모두 경험통계에 의한 것들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말하는 Blue Zones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Blue Zones란 ‘지역’은 세계에 5군데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Okinawa, Japan

2. Ikaria, Greece

3. Sardinia, Italy

4. Nicoya, Costa Rica

5. Loma Linda, California  U.S.A.

이 다섯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장수촌’을 말하는 것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람사람들이 많은 곳들이다. 위에 말한 ‘건강습관’을 골고루 실천하는 이 지역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습관이 배어있다고 한다. 적당한 양의 인근에서 재배한 채식을 중심으로 먹고, 적당히 걷고, 특히 다양한 세대에 걸친 인간적 교류가 눈에 뜨인다. 이들은 술도 적당히 마시고 고기도 적당한 양을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생활방식이 절대로 아닌 ‘상식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이들은 거의 ‘정제된 설탕’을 피하고, 가공식품도 거의 피하며 산다는 정도다. 이런 것들.. 참 많이 들어 보았고, 이제는 상식화 된 건강지식들이다. 문제는.. 어떻게 보면 쉬운 이런 상식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결국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해서’ 문제인 것이다. 건강뉴스에 ‘미쳐서’ 무슨 새로운 발견에 빠져 이런 상식적인 것을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며 생각한다. 올해 나의 New Year’s Resolution에 이런 ‘상식적’인 것을 꼭 실천하리라 하는 것을 포함시키는 것.. 비록 대부분 나는 비슷한 life style을 가지고 현재 산다고 해도 더욱 잘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다. 특히 쉽게 먹을 수 있는 processed food (가공식품)들, 아차~ 하면 손이 가는 것들이다. 가끔 기분전환 한답시고 ‘맛있게 먹는’ Hamburger 류들.. (어떤 것들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이런 것들을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가려먹으리라 생각도 해 본다. 그렇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1. mostly homosexual issues

small Reflection 2015

¶ 다사다난 多事多難 했던 2015년 을미년 乙未年 이 서서히 저문다. 일년 내내, 생각하면서 살아간다고 자부하곤 하지만 제일 생각을 많이, 깊이, 천천히 해야 할 듯한 년 말이 되면 무언가에 떠밀리고, 쫓기는 듯, 번번이 후회를 남기며 ‘하나도’ 생각을 못한 듯한 회한 悔恨을 남기고 새해를 맞곤 했다만, 올해는 그 달갑지 않은 전통을 깨어볼까.

2015년은 내가 살아온 나이가 ‘만 滿’ 으로 67세인 해로써 70대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나이였다. 그러니까, 70 이란 숫자가 60보다 훨씬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던 그런 해였다. 60이란 숫자를 꼭 잡고 싶은 허황된 욕심이 없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지만, 솔직히 그런 ‘아이 같은, 순진한’ 꿈을 꾸기에는 너무도 성숙한 나이가 되었다.  한마디로 나의 심정은  ‘초연.. 超然’ 한 것이다.

나는 과연 몇 살까지 살까? ‘늘어나는 평균수명’을 가지고 참 많이들 말장난을 하는 것 같지만 솔직히 나는 그것에 큰 관심이 없다. 분명 나 자신도 그런 ‘통계’의 일부일 것은 사실이지만, 나 자신이 그런 ‘통계’ 자체는 아닌 것이고 또한 언제 죽느냐 보다는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보험 ‘장사’를 하는 곳에서는 이런 통계가 절대적인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통계를 의식하며 살기는 싫다.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며 내가 역사적인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긴 이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 나는 그런 것을 원한다.

 

¶ 2015년의 ‘나의 사람’은 누구였던가? 비교적 자주 journaling을 하는 나는, 한 달처럼 느껴지는 1년 정도의 길지 않은 세월에서 내가 살아온 흔적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잡다한 흔적’들 속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사람들을 찾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해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초자연’적으로 나와 가족을 정북방향 true north을 잊지 않게 하시고 이끌어 주신 ‘성모님’, 비록 인간이셨지만 나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도와주셔서 지나가는 한 해를 나의 오랜 인생에서 ‘최고의 해’로 만들어 주셔서 ‘2015년 나의 사람’이 되셨다. 믿음의 결실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어려울 수도 있었던 지난 10년 간을 통해서 서서히, 확실하게, 조금씩 보여주셨다. 이제는 나의 어머니와 더불어 한시도 빠질 수 없는 나의 제2의 어머니가 되셨다.

뼈 저리는 그리움의 아픔이..

연말이라 또 그런 것일까? 아니다.. 나는 이런 참을 수 없는 가슴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뼈 저린 아픔과 그에 수반되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을 때가 적지 않다. 물론 눈물을 쏟아내면 이상하게 시원함이 따른다. 하지만 아련한 아픔은 잔잔하게 남는다. 엄마와 가족들을 그리는 원초적, 생물적인 본능일까.. 아니다 그보다는 후회와 안타까움으로부터 나오는 참회의 눈물임이 분명하다. 곁들여.. 나의 아련한 옛날 옛적, 이제는 분명히 70년에 가까워지는 길어지기만 한 나의 인생역마차, 역정, 누나와의 운명적인 이별의 인생.. 이런 것들이 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듯 하고, 나는 ‘불행한 인간’이라는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에 젖는다.

비록 근래에 나는 다시 찾은 신앙의 도움으로 가정과 나의 주위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제 정신으로 돌아오고, 하느님의 세계관에 의한 인간과 인생의 근본적인 위치를 알았다고는 하지만, 나의 옛적부터 쌓인 그리움의 기억들은 ‘조금도’ 지울 수가 없다. 아니 지워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이 나인 것을 어찌하랴? 하지만 나는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그리움의 노예가 되기는 싫다. 새로 만난, 찾은 세계관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그리움, 그 속에서 포근한 安住感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포근한 엄마의 자상한 ‘경우야~ 걱정 마’ 하는 말씀이 듣고 싶다.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나에게 현재 없다. 엄마의 그런 따뜻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위로의 말씀을 나는 이제는 들을 수가 없다. 내가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나의 다른 어머니 성모님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면서 그런 ‘무조건적 사랑’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은 한다. 우리 쓸쓸한 가족 3명이 살던 시절을 그린다. 나를 그렇게 보금자리 같은 곳으로 느끼며 자라게 해 주셨던 나의 어머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나는 따뜻한 곳에서 이렇게 달콤하고 포근한 추억들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것을 나는 비록 감상적이긴 하지만 나의 보물로 간직하며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느낌을 남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지만 그것이 쉬울까? 요새 우리부부가 돌아다니며 노력하고 있는 봉사활동이 그런 것에 속할까? 얼마나 우리는 그런 포근한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일까? 어둡게 살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기분을 알 듯하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그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남은 삶을 사는 것이 제일 보람된 방법일까? 묵주기도 속에 그것의 해답이 있을까? 새해를 맞이하며 계속 기도를 해 보자.

The 1st Day of Christmas

12days of

¶ 엘니뇨의 영향으로 미국 동부는 이상난동 異常暖冬에다 장마성 폭우로 사실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하~얀, 고향 같은 풍경의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기후적, 감상적인 것을 빼고는 사실 예년이나 다를 기분은 하나도 없고 Christmas Season (12월 25일부터 다음해 1월 둘째 일요일까지, 이번은 1월 10일, liturgical calendar) 의 첫날, 12 Days of Christmas 중의 첫날,  First Day of Christmas 를 지낸다.

올해는 우리 집 오랜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성탄미사에 참례를 하게 되었다. 오랜 동안 우리는 미국 성당에서 성탄 전야 미사에 온 가족이 참례하고 정작 성탄절에는 완전히 집에서 늘어지게 쉬곤 했었다. 이것이 근래에 들어서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고쳐야겠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던 참이었었다.

 

푸근~한 느낌의 성탄미사가 끝나고... 도라빌 순교자 성당 2015년 12월 25일

푸근~한 느낌의 성탄미사가 끝나고… 도라빌 순교자 성당 2015년 12월 25일

 

2015-12-25 13.24.41푸~근~ 하고, 잔~잔~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성탄절미사를 집전하시는 이재욱(요한) 주임신부님, 흡사 ‘젊은’ 산타클로스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 ‘고차원적인 사랑‘ 의 느낌을 강론과 몸으로 보여주신다. 오늘 이곳 도라빌 순교자 성당, 한국본당에 오게 된 계기도 우연이 아닐 듯.. 순교자 성당에서 아주 멀지 않은 apartment로 얼마 전에 이사온 작은 딸 나라니가 올해 family Christmas meal을 준비한다고 한 것.. 거기서 가족들이 모이게 된 것들.. 모두 우연이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나라니가 준비한 fusion Christmas luncheon 으로 성탄 오후시간을 즐겼고, 오랜만에 우리 집에 없는 big screen TV로 우리 가족들의 오래 된 classic movie였던 Bing Crosby, Ingrid Bergman 주연, 가슴을 훈훈하게 적시는 ‘The Bells of St. Mary‘를 보며 각자가 느끼는 추억이 어린 논평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warm heart, loving heart 의 기적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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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탄절에 집에서 나왔던 덕분에 쓸쓸하게 성탄절 낮을 보낼 듯 했던 우리의 젊은 봉성체 환자 H 보나 자매님 댁도 찾아볼 수도 있었다. 이런 날, 몸과 마음이 쓸쓸한 영혼을 찾는 것은 우리들의 heart에도 엄청난 도움을 준다. 변함없는 모습과 감사하는 태도로 우리를 맞는 자매님, 비록  holiday decoration이 하나도 없는 조용한 집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가족들은 모두 가까운 곳에서 보살피고 있어서 그러한 쓸쓸함을 이기는데 도움을 준다. 사랑이 주제라는 성탄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는 거의 완전한 예들을 오늘 이렇게 경험한다.

오늘의 이런 ‘성탄절 봉성체’와 더불어 어제의 조금 다른 경험들이 나를 조금 움츠리게 한다. 지난 화요일 우리와 같이 고해성사를 했던 S 형제, 어제의 통화에서 다시금 우울한 holiday를 가족과 맞이하고 있음을 알고 나의 가슴은 주저앉는다. 오래 전의 나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는 듯해서 더욱 우울해진다. 이럴 때 어떠한 말도 필요가 없음도 알기에 더욱 답답한 것이다. 어제 쏟아지는 빗속을 drive해서 올해 5월초 선종하신 배 베로니카 자매님 댁을 찾아가서 홀로 남은 두 아드님에게 작은 인사를 전하고 왔는데, 그 집도 역시 쏟아지는 빗속에서 성탄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어둡게만 보였다. 쓸쓸한 모습으로 우리를 문 앞에서 맞은 그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쓸쓸하고 어두웠다. 밝은 빛이 탄생한다는 이런 날들에 이렇게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어찌 잊고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어떻게 이들에게 빛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Ha.. single cup, finally!
Ha.. single cup, finally!

¶ 요사이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면 예외 없이 추위에 떨며 coffee를 ‘내려서’ 마시는 즐거움을 맞이하지만 문제는 그 ‘추위에 떠는’ 시간이 짧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것을 해결해 주는 perfect present를 ‘아이들’로부터 받았다. Single cup coffeemaker 이것이 바로 해답이었다. 현재 우리 집 drip coffeemaker는 10 cups 이상을 만들어야 제 맛이 나는 monster급이고, pour-over coffee maker는 ‘내리는데’ 시간이 걸린다. 비록 ‘고급’은 아니더라도 이제는 power switch만 올리면 자동으로 personal single cup coffee가 만들어지니.. 추운 새벽의 괴로운 dark morning routine이 다가오는 1월 달의 ‘강추위’를 조금은 덜 괴로울 듯하고, 차가울 수 있는 가슴을 훈훈하게 느끼게 한다. Thank you, Kids!

 

The Twelve Days of Christmas – John Denver & the Muppets

Stormy Christmas, misc..

¶  Unseasonal Christmas, 밤새도록 천둥과 번개, 폭우가 오락가락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성탄 eve 전날이 아닌가? Stormy holiday, 분명히 심상치 않은 성탄의 기분을 주지만, 문제는 이 stormy 란 것이 겨울이 아닌 여름, 그러니까 ‘열대성 tropical‘이란 사실이다. 이것도 몇 년 만인가? 기억에 3~4년 정도 전 이 맘 때였나? 맞다.. 2012년이었다. 그 때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풍우 속에서 ‘처량하게’ 가족 모두가 극장엘 가서 Spielberg의 Lincoln영화를 보았다. 왜 그랬을까? 절대로 포근한 추억이 아닌 것이다. 최소한 나의 style은 아니었다.

가족을 위해서 나갔다는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것을 보면 싫은 추억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unseasonal holiday은 싫은 것 중에 하나다. 하지만 꼭 그럴까? Christmas란 것이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 몇 초 정도라도 생각을 하며 보낼까? ‘집단’ 군중심리에 밀려서, 무슨 zombies같이 ‘shop, shop, shop, 줄을 서서’ shopping이나 하는 지독히 세속화 된 크리스마스.. 기다림(advent)이 내일로 끝난다는 단 하나의 희망, 그것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 되었나?

 

¶  며칠 전 일요일 저녁에 ‘세대 차를 뛰어넘는’ ‘100% 비공식’ 순교자 성당 구역 ‘친구’들의 간단한 저녁식사와 간담회가 있었다. 나의 레지오 협조단원이기도 한 ‘다多 차원적’인 host 형제님, 무섭게 바쁜 생활에서 틈을 내어서 이렇게 ‘마음이 맞는’ 형제, 자매들을 초대한 것 감사를 안 할 수가 없다. 비록 같은 구역에서 만난 사이지만 이야기들은 구역 politic을 초월한 것들, 개인적인 것들, 신앙적인 것들로 아주 화기애애하고 유익한 것들이어서 집을 나올 때 마음이 아주 가벼웠다.

어떠한 구역모임이 “이상적인, 본당이 바라는 모습”일까.. 이런 것도 허심탄회 虛心坦懷 하게 다루어졌고, 무언가 meaningful correction의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는데 의견이 모아졌지만, 필요 이상의 ‘논쟁 성’ 대화는 아니었다. 이런 민감할 수도 있는 사안은 ‘순리’란 것에 맡기는 것도 좋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새해부터는 우리 구역도 조금은 “inclusive, faithful, ecclesiastical 한” 그런 쪽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이고, ‘잘 될 것’이라는 가느다란 희망도 가져본다.

 

¶  Busy busy Tuesday: 우아.. 이렇게 어깨에 천근만근 무게를 느끼며 보냈던 화요일이 있었을까? 레지오 회합으로 시작되는 화요일은 주로 봉성체로 끝을 내고 거의 저녁때 귀가하는 일정인데 이번 화요일은 그것을 넘는 일정들이 꽉~~ 차 있어서 그 전날에는 심지어 심한 stress까지 느낄 정도여서 왜 이렇게 schedule을 잡았나 하는 후회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 좋은 것들’이란 100% 확신이 있기에 주로 ‘don’t think twice, don’t look back, just say yes‘란 말만 되뇐다.

평소의 일정에 오늘은 ‘성탄 판공성사, 신부님 면담‘, 냉담교우 형제와 점심식사 에다가 저녁에는 친지들과의 Christmas dinner party까지 겹쳤다. 조금은 아찔한 일정이었지만 끝났을 때의 ‘날라갈 듯한 기분’을 미리 그리며 나를 달래기도 했다.  판공성사는 고백소에서 줄을 서서 해도 되겠지만 언제나 그것은 무언가 미흡한 뒷맛을 주기에 올해는 따로 면담 식으로 하고, 냉담하고 있는 ‘아오스딩, Augustine‘ 형제까지 불러 점심을 하고 같이 성사도 보게 되었다. 몇 년 만에 이런 기회를 갖게 된 이 형제와 조금은 깊은 대화를 하려 했지만 의외의 불청객이 있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 형제님, 기나긴 냉담을 하고 있지만 항상 나의 기도 속에 있기에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굳게 믿는다. 고해성사의 ‘백미 白眉’는 역시 Matthew Kelly 1의 말처럼  ‘지난 세월의 때와 먼지’가 씻겨나가는 홀가분한 뒷맛이 아닐까?

저녁에는 올해 새로 이사를 한 C 사장, 나이는 한참 밑이지만 우리 ‘동년배’ 그룹에서 당당히 끼어서 오랜 교분을 유지했던 Ohio State 동창 후배, Riverside Drive에 있는 멋진  upscale 집을 찾아가서 늦은 저녁 시간을 즐겼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고 자칭하는 이 그룹은 뒤늦은 나이에 모든 것들이 잘나가게 되는 case여서 나에게는 조금 미묘한 감정이 교차됨을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랜 ‘친지’들이 아닌가?

 

¶  ‘갑자기’ 커진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쁘레시디움, 비록 새 단원들이 모두 자매님들이지만 이들 덕분에 평균연령이 훨씬 떨어진 것은 감사할만한 것이었다. 무슨 ‘긴급 수혈’을 받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밝아졌다고나 할까? 들락날락하며 전체 분위기를 흐려놓았던 눈에 성가셨던 일도 올해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가급적 원칙대로’ 하는 우리 레지오의 전통을 모르긴 몰라도 두고두고 감사한,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체득하는 삶을 살게 하리라 나는 믿는다. 지난 9월부터 서서히 ‘수혈’을 받아오면서 현재는 출석률 100%가 새로운 정상이 되었다. 전원 출석하면 박수를 쳐야만 했던 사실, 들락날락하던 것이 정상이던 것이 이제는 출석률 100%가 정상이 된 것이다. 레지오 교본의 말씀들이 정말 100% 모두 맞는다.. 이것은 누구의 도우심인가?

 

¶  아주 아주 오랜 만에 전호배 요셉형제KaTalk으로 통화를 했다. 나와 동갑 돼지띠 전 요셉 형제님, 작년 11월 쯤에 ‘갑자기’ 귀국을 했었다. 이곳에서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랬으리라는 짐작만 할 정도지만, 그래도 그가 황량 히 떠나버린 작년 12월은 찬바람만 부는 듯한 외로운 느낌을 주었다. 우리와 가까워진 지 일년도 채 안되었을 때 홀연히 떠난 것이다. 늦은 인생의 느낌을 말없이 공감할 수 있는 영혼을 만났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조금 나에게 사치였는지.. 귀국한지 일년이 되는 지금에야 ‘무엇이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확실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편안히 안주해야 할 나이에 큰 변화는 사실 어렵거나 괴로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상상도 못할 심리적, 혹은 육체적인 challenge가 왜 없겠는가? 그림이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사는 모습이 느껴진다. 인근 성당(노원성당?)의 레지오에도 가입을 해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고, ‘조그만’ 직장도 잡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자매님은 양로원 같은 곳에서 일을 하신다고.. 정치적으로는 나와 잘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곧은 지조와 믿음으로 만사를 해결하는 돼지띠 형제님, 모든 가족이 성탄, 새해를 잘 맞으시기 빕니다.

 

super-cute Christmas tree
super-cute Christmas tree

¶  ‘역사상’ 제일 ‘늦게’ 우리 집 mini 성탄 tree가 장식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탄 2일 전이다. 아이들이 이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 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나가는 두 곳의 성당이 3일 전에 장식을 했으니까 우리는 ‘당당히’ 하루가 더 늦은 ‘쾌거’였다. 진정한 대림의 정신으로 잘 견디어낸 결과였고 ‘원칙’대로 1월 10일 이후에 치울 것이다. 어제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작년의 movie collection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보고 싶었던 것이 The Christmas Box란 1995년 family classic. 여기 출연을 하는 Maureen O’Hara가 올해 타계를 했기에 더 이것을 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지루하지만 차근차근하고 자상하게 보여준다. Family의 의미를 그렇게나 강조했던 1995년은 지금 생각하며 ‘고전적’인 시대였을지도 모른다. Transgender, LGBT, SS “Marriage’new normal이 되어가는 참 해괴한 세상이 도래한 이 시점에서 무엇을 더 언급하랴? 그래서 Advent의 희망이 더 무게를 더하는 (최소한 나에게는) 그런 2015년 성탄이 내일로 다가왔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래도 Christmas vigil Mass에 모두 간다는 사실이 거의 기적같이 느껴진다. 우리 아이들이 한마디로 C&E2 Christian3이 된 사실, 역사적인 irony에 속한다. 이것이 나의 personal Advent에 속하는 것이다.

 

2015-12-24 08.13.44

Lights along the stairway to heaven

 

  1. Australia-born American Catholic Author, Commentator, businessman, Author of ‘The Four Signs of A Dynamic Catholic
  2. Christmas & Easter
  3. 일년에 딱 두번 미사참례 신자

깡패 유감 有感

bully-1깡패.. 흠.. 참 더럽고 싫은 말 중에 하나다. 귀여운 깡패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99.99999% ‘증오의 대상’ 중에 하나다. 이 말이 주는 ‘더러운’ 느낌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고 요새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참 잘 만들어진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어원은 무엇일까? 깡+패.. 그러니까 ‘깡, 오기’를 부리는 ‘패, 거리’ 정도 아니었을까? 소리지르고 깡만 부리면 통한다고 생각하는 불쌍한 쓰레기들인가.. 상관없다. 싫고 증오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나의 blog에서 ‘회고록 류’ 그러니까 memoir 는 가장 쓰기 힘든 것이지만, 그만큼 쓰는 보람은 그에 비례해서 제일 크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회고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에 따라서 일어나는 감정은 참 다르다. 그러니까 즐거운 추억이나 개인 역사를 더 잊기 전에 더 쓰고 남기고 싶었고, 나의 blog에서도 대부분 아련한, 즐거운, 포근한 그런 추억들을 주로 쓰곤 했다.

반대로 기억하기 괴로운 것들은 어쩔 것인가? 당연히 요리조리 피하며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그 중에서 ‘깡패의 추억’은 가히 괴로운 것 중에 괴로운 것, 잊고 싶은 것이다. 어떤 ‘개인적 사건들’은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잊고 싶었던 것들인데 분명히 나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버젓이 살아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의 나이가 70에 육박하면서, 조만간 早晩間 에 나는 이것을 정리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은 항상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사실 불편한 것이어서 성당에서 고해성사 告解聖事하는 기분으로 깡패의 추억들을 다 ‘정리 해고’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것, 숨어있는 ‘이글거리는’ 증오심도 나의 dark side의 일부가 되었다면 나는 이것을 가끔 하는 고해성사에 포함시켰어야 되었을 것이지만 그만한 값어치 조차도 나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싫었다.

깡패, 깡패들.. 내가 말하는 깡패는 100% 소위 말하는 ‘조무래기, 피래미 급’으로 이들의 특징은 철저히 ‘약육강식’의 쓰레기 철학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의 불만과 욕구를 철저히 채우려는 한마디로 ‘불쌍한 쓰레기’급 인간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연령층인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말하는 인간들은 모두 미성년이거나 지독히 젊었던 깡패들이어서 이것은 지금은 조금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떠한 환경이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그 ‘쓰레기’들이 과연 자기들이 하는 짓이 옳은 것인가..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 보고 한 것이었을까.. 집단심리에 의한 불우하거나 불행한 자기 환경의 산물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자라던 6.25 이후의 역사적인 환경은 사실 어쩔 수 없는 깡패들을 무수히 배출하여야만 했던 암울하고 가난하고, 법 이전에 주먹이 훨씬 효과적이었던 그런 시절이긴 했다. 게다가 급수가 아주 높았던 ‘정치깡패’들이 판을 치던 그런 시절도 겪었다. 한마디로 ‘법치국가’란 것은 말 뿐이던 ‘폭력의 사회’ 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던 6.25 전쟁 후의 대한민국 실정.. 나는 그런 ‘남자들의 험악한’ 환경에서 알맞게 적응을 못했던 것이었을까? 특히 가부장제가 굳건하였던 그 시절 아버지 없었던 집의 내성적인 남자아이가 사회적으로 겪었던 것은 남들보다 더 심각한 경험들이었다.

이번에 더 미루지 못하고 ‘깡패의 추억’을 논하게 된 마지막 계기는, 얼마 전 같은 성당구역의 교우형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그 형제님 왈 曰.. 자기가 “깡패였다”고 서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도 주저함이나 부끄러움이 그 태도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이 탓인지 예전에 보던 그런 ‘나쁜 깡패’의 인상을 풍기지도 않았다. 모두들 오래 전의 아련한 추억 정도로 무협영화를 보는 정도로 들은 듯 하였지만 나는 복잡한 생각 뿐이었고, 이렇게 ‘정리해고’를 더 미룰 수는 없다.. 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옛날 옛적의 ‘나쁜 놈들’ 이들을 용서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증오할 것인가?

내가 반세기도 넘는 옛날 옛적 70년대 초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낀 것도 깡패에 관한 것이었다. 이 나라 이 땅에는 주변에 추악한 깡패들이 안 보였던 것이다!  최소한 나의 눈앞에 그 놈의 ‘쌍판’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하! 내가 살 곳은 바로 이곳이로구나.. 쾌재를 불렀고 그 이후에도 나의 주변에는 깡패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인가? 왜 이렇게 같은 지구 위에서 사는 곳이 다른가?  경제적인 요인이 제일 먼저 떠 오르고 다음은 사회, 문화적인 것 등이 있지만 결과는 모두 ‘종합판’일 것이다. 복합적인 것들..

미국에도 bully 정도의 ‘순한 깡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경험했던 ‘한국판 bully’와는 game이 안될 정도다. 욕을 하는 정도가 하늘과 땅의 차이고, 폭력의 정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불운과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며 남을 괴롭혔던 대한민국 조무라기 깡패들, 한마디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내가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정말 무서웠던 사실은 ‘맞아서 아프고 수치심을 느끼고’ 하는 것 보다는 ‘꿈에라도 기관총으로 이들을 모조리..’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상상이지만.. 이것이 상상에서 벗어나는 것도 상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괴로운 추억들도 나이가 들면서 다 수그러지고 조금씩은 ‘자비’의 심정으로 그 쓰레기들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반전 scenario’도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역시 ‘나는 절대로 그런 쓰레기가 될 수가 없다’.. 였다. 그 쓰레기들.. 환갑을 넘기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기들의 과거를 어떻게 회상을 하며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해 줄까.. 재미있는 상상도 꼬리를 문다. ‘할아버지가 옛날에 깡패였고, 누구누구를 매일 패 주었다’ 고 자랑을 할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괴롭힘을 당한 애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심정이 들었다면 괜찮은 노후를 맞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꿈 속에 ‘기관총으로 모조리..’ 라는 표현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번 놀란다. 미국은 근래에 들어서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이 실제로 ‘기관총 급의 무기’로  깡패들은 물론 옆에 있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mass shooting이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나는 100% 그 ‘정신병자, 피해자’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mindset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 모두 극단적인 case이지만.. 원인을 따져보면 ‘쓰레기급 깡패’에게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정말로 나의 마음 속 깊이 수십 년간 눌려있었던 나쁜 추억, 잠재의식, 분노..등을 ‘정리해고’할 때가 왔다. 나를 괴롭혔던 ‘쓰레기’들.. 용서하고 싶고 그들도 진정한 회개를 하며 노후를 맞이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용서하려는, 하는 나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혼자의 힘으로 안 되면 ‘높은 곳’의 도움을 청하고 싶다.

 


Sam the Sham & Pharaohs – Wooly Bully – 1965 

 

El Niño winter, Advent spirit, 또 찾은 사람..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  El Niño Christmas Holidays   한 마디로 ‘따뜻한 성탄절’을 말한다. 지나간 몇 년간 이곳 지역은 아주 추운 겨울을 경험했지만, 그런 weather system이  Northeast지방(I-95 corridors, New York, Boston)에서는 물러가는 모양으로 National news 에서는 온통 ‘따뜻한 겨울’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5년간은 이 지역에서는 희귀한 white Christmas도 보았고 고드름과 폭설 같은 ‘북방’에서만 볼 수 있던 것도 보았던 세월이어서 사실 holiday의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는 있었다. Northeast 지방에서 그런 기후 pattern이 서서히 물러가는 모양으로, 이것이 ‘엘 니뇨‘ 현상이고 하는지 (따뜻한 태평양 수온), 앞으로 몇 년간은 그쪽 지방은 다시 비교적 조용하고 ‘따뜻한’ 성탄절이 되는가 보다. 우리가 사는 Southeast지방은 3개월 장기예보가 ‘wetter, cooler’ 라고 나와서 겨울이 가기 전에 눈(雪)같은 것을 기대해 볼만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즈음한 날씨는 ‘wet, very warm’이라고 예보가 되어서.. 미리 심리적으로 ‘white Christmas는 물 건너 갔다’ 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  Advent spirits, 2015   나의 전통적인 12월은 한마디로 Charles Dickens 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에 나오는  Christmas Past 라고 할 것이다. 평소에도 “현재보다는 과거”를 더 많이 생각하면 사는 나에게 12월이 되면 어떨 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감상적 늪에 빠지기도 한다. 설상가상 雪上加霜으로 나이가 ‘고령 高齡’으로 접어들면서는 나이를 더 먹게 되는 년 말이 되면 더욱 축~ 쳐지고, 우울해지기도 하는 괴로운 시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비정상’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분명히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아서, 나의 감정이나 느낌을 남에게 보이기도 싫었다. 한마디로.. 결국 12월은 심지어 즐겁지 않았던 season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서서히, 천천히’ 나는 이런 ‘bad trap’ 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서 올해는 현재까지 중에 ‘최고’의 spirit을 찾게 되었다. 그러니까.. Christmas present를 찾게 된 것이다. 거의 “기적”과 같은 이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참 인생이란 오묘하기만 하다.  

예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 중에는: (1) Holiday decoration은 빨라도 12월 20일 이후에 하고, (2) Christmas carols, movies 같은 것도 그 이후에 즐기고.., (3) 가급적 holiday shopping같은 것을 피하고 정 필요하면 딱 하루 날을 잡아서 하고, (4) 진정한 성탄 holiday는 12월 25일에 시작이 되어, 다음 해 1월 5일 (12 Days of Christmas) 이후까지 지속된다. 작년에 이런 것들을 부분적으로 단행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뒤 느낌이 좋았다. 올해는 ‘모두’ 실천을 해 볼 계획으로 오늘까지 Christmas tree 장식 같은 것을 hold해 오고, carol이나 movie같은 것도 안 듣고, 안 보고 있다. 어떨까? 이것은 사실 ‘교회’에서 오랫동안 권장해 오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제야 그 참 의도를 알 듯한 것이다.

과거에 성탄 전날까지 요란법석 시끌벅적 하다가 성탄 아침에 무섭게 선물을 나누어 뜯어 ‘버리고’, 거의 거짓말 같이 ‘모든 것’이 끝나던 정말 괴상한 풍습..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보냈을까.. 성탄 씨즌이 성탄절부터 시작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외면하며 살았는지.  좌우지간 이러한 것이 그런대로 진정한 ‘대림절의 정신’일 듯하다.

 

¶  염경자 누나   바로 얼마 전에, 나의 2011년  blog post: ‘가회동의 추억‘에 누가 찾아와 댓 글 comment를 올려 놓았다. 알고 보니 그 ‘사연’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고 꽤 놀라기도 했다. California (LA area)에 사시는 나와 같은 재동국민학교 졸업, 6년 정도 후배, 송요한 씨가 그 주인공인데, 오래 전 가회동에 같이 살았기에 나의 글을 찾았고 본 듯하다. 게다가 레지오 단장을 역임한 같은 천주교 교우.. 그러니까 송요한 형제님, 얼마나 반가운 사실인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가회동 내가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을 곳에 사셨던 듯하지만 내가 더욱 놀란 것은 내가 살던 ‘주인’ 집의 ‘미인중의 미인‘, 막내 따님 염경자 누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참, 인연도 묘한 것이.. 송형제의 wife와 염경자 누나가 같은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이라고 하며 그것도 같은 지역에 사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연관이 될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희미하게 알고만 있던 ‘주인집’ 소식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흠뻑 젖었던 그 당시의 한 가족들을 찾은 것이다. 이것으로 tiny blog의 ‘무서운 위력’을 다시 실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추억과 기억이 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의 사람’들을 다시 찾는 것은 오래 산 보람이라고 할 것이다.

‘독거 사 獨居死’ 연세대..

순교자 성당 성모님, 형제님을 인도하소서..
순교자 성당 성모님, 형제님을 인도하소서..

며칠이나 되었나.. 거의 일주일 전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정오 미사에 봉성체 준비 차 참례를 했을 때, 집전하신 한민 토마스 신부님, ‘어떤 연로하신 형제님이 돌아가셨다’는 짧은 comment를 하셨다.

처음에는 그저 또 하나의 ‘어르신의 타계, 선종’ 정도로 알았지만 그 다음날 Buford에 있는 서 베드로 형제 댁으로 그의 어머님을 위한 가족연도에 갔을 때 조금 더 확실한 실상을 알게 되었다. 거기 온 분들 모두 이 소식을 알고 있어서 들어보니.. 타계하신 형제님은 나도 알 정도의 낯익은 ‘키가 크신 분, 이 필립보 형제님’ 이었다.

미사 중에 ‘거양성체’를 할 때면 ‘항상’ 무언가 들리는 소리로 중얼거리셔서 사람들이 모를 수가 없을 터였고, 분심이 들 때도 있었다. 별로 오래 전이 아니었을 때 그분과 짧은 지나가는 대화를 한 기억도 있다. 나는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 형제님에 대한 ‘소문’이 적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힘든 ‘digestive gas’ 조절 문제도 그 중에 하나였고, 괴짜라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또한 성지순례로 다니시고, 레지오 단원도 하셨다는 것, 성실한 신자생활을 하셨다는 것도 어렴풋이 기억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번에 충격적인 사실은 혼자 사시는 senior apartment에서 아무도 모르게 운명을 하셨다는 사실이었다. 몇 달 전에 New York Times기사에 ‘경제대국’ 대한민국에 식구들로부터 ‘버려진 독거노인’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보도된 것을 읽고 놀랐지만, 그런 일이 성당 근처의 우리의 코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독거 사’가 아닌가?

문제는 역시 그 형제님의 ‘가족문제’에 있었는데, 이미 오래 전부터 ‘가족’이 없이 사신 것 같았다. 자세한 사연을 현재 알 수가 없지만, 대강 짐작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원만한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시고 사신 인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추측.. 또한 오래 전에 San Francisco에 사실 때에는 그쪽 성당의 회장도 하셨다고 듣기도 했지만, 진짜 놀란 것은 이것이다. 그 형제님이 연세대 ‘대선배’라는 사실, 고등학교는 서울고 출신인 고등교육을 받으신 형제님 이었다는 사실이 다른 충격으로 다가온다.

솔직히 그런 ‘인텔리 인상’을 강하게 풍기지 않았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벌’좋아하는 서울고 출신 C형, 그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고, 사실은 몇 달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는 필립보 형제님, 연세대 시절 대학 농구 팀의 선수였다는 얘기도 있었고, 당시 유명했던 신동파 선수 와 함께 뛰었다는 등등.. 어느 것이 사실인지, 과장인지, 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틀 전에 있었던 식구가 참석을 못한 성당연도에는 예상보다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역시 서울고 동창들과는 잘 어울리셨는지.. 그쪽 ‘학벌 좋아하는 그룹’ 이 걸맞지 않는 성당연도를 함께 했지만 내가 아는 한 연세대 동창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레지오의 이요셉 연세대 선배님께 물어보니.. 2년 정도 선배이시지만 동창회에서는 전혀 모르는 ‘동문’이라고 했다. 아마도 고등학교 동창들과는 조금 어울렸던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던 모양이었다.

열심한 신자였고 레지오까지 하신 경력으로 성당 연령회에서 모든 것을 도맡아서 연도와 장례미사를 준비하는 수고를 하는데, 장례미사는 가족들과의 연락문제로 내년 1월 5일에 있다고.. 하기야.. 그렇게 가족들과 연락 없이 사셨으니.. 장성하고 성공적인 자녀들이 있다고 하지만.. 아마도 그들이 연말 휴일이 겹쳐서 장례미사에 오는 일정에 문제가 있었지 않을까? 제 때에 장례식을 못하게 된 것이 누구 탓이겠는가 생각해 보지만 머리만 아파질 뿐이다.

이번 일로 본당 주임신부님, 일요일 미사가 끝나고, 주위에 사는 ‘독거 노인’들을 더 잘 보살피자고 부탁을 하셨다. 근래에 들어서 봉성체 관계로 독거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어르신들을 집으로 찾게 되었지만 대부분 가족들이 ‘대기하고, 보살피는’ 모습을 보았기에 이렇게 ‘완전히 혼자’ 계시는 분들이 당면한 문제를 실감하지 못했다. 나의 세대는 우리들 부모세대를 보았고 기억을 하기에, 삼대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따뜻하게 어르신들을 보내드리는 그림을 상상하기도 하지만, 이런 것은 지금에는 누가 보아도 완전히 꿈이고 그림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저 가족들에게 “필요이상의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것이 제일 최상의 꿈이 되었다.

새벽 4시의 스치는..

pourover-coffee
pourovering labor..

잠에서 깨끗이 깨고 보니 아직도 깜깜한 느낌, 멀찌감치 보이는 초록색의 LED clock radio를 눈을 찡그리며 ‘째려’ 보니 정확히 4:00가 희미하게 눈엘 들어온다. 그러니까 새벽 4시인 것이다. 순간적으로 뒤척이며 ‘더 자자..’ 하고 돌아누웠지만 다시 돌아누워 앉아 버렸다. 연숙은 새벽잠에 깊이 빠진 듯.. 움찔하지도 않는다. 이것도 조그만 tiny chain of decision time.. 그러다 깜깜하고 넓게 느껴지는 bedroom을 가로질러서 복도로 나왔다. 완전한 암흑의 싸늘한 공기가 나를 덮친다.

그제 서 베드로 형제 어머님 가족연도에 갔을 때, 그곳에 온 자매님, 별로 ‘연로’한 나이가 아니건만 ‘나이가 드니까 새벽에 일찍 깬다’는 comment가 생각이 난다. 밤에 쉽게 잠에서 깨는 경험은 많이 했어도 완전히 깨어나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나에게도 서서히 그런 ‘연로 현상’이 덮치는 것인가.. 조금은 우울해진다. 생물학적인 나이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인가?

absolute color & smell ..
absolute color & smell

그래도 ‘절대 새벽’의 느낌은 신선하고 새로운 세상을 느끼게 하는 가장 싼 경험이다. 물론 매일 이것을 느끼면 금새 시들해지겠지만, 가끔 이렇게 겪는 ‘연로 새벽’은 새롭고 젊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 우~~ coffee, coffee.. ‘기가 막히는’ 향기의 freshly grounded coffee라도 곁들이면 이 새벽의 두어 시간 정도는 완전히 나의 세상이 된다. ‘적당한’ coffee drinking이 ‘급사’를 방지한다는 ‘의학보고’를 상기하며,  각종 상상력이 활보를 하고 비상 飛上을 하는 완전한 나의 세계, my domain.. 그래서 또 다른 하루가 아닌 특별한 하루를 시작하게 해 준 ‘연로성 불면증’에 감사하며 하루를 맞는다.

impromptu helper team, 12.12 redux

¶   어제는 ‘아픈 나의 몸’ 때문에 한 주일을 걸렀던 ‘금요일 봉성체 동행’ 봉사자로 연숙과 순교자 성당엘 갔다. 젊은 엄마 환자, 허 자매님의 봉성체가 이제는 고정적으로 금요일로 정해지면서 우리에게 금요일 정오 평일미사를 순교자 성당에서 참례하게 된 것은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곳에서, ‘한국식 가톨릭 문화’ 에 가까워짐은 느낀다.

몇 주전부터 시작된 ‘교우 환자 허 자매님 돌보기’는, 주말을 빼고 거의 매일 (4일) 돕기 위한 작은 helper team이 순교자 성당 소속 레지오 단장들을 중심으로 ‘급조’가 되어서 현재까지 큰 차질 없이 진행 되어오고 있는데, 이것은 본당주임 이재욱 신부님께서 허 자매님을 집으로 방문하신 후에 즉각, 직접 레지오에 봉사 활동을 부탁하신 결과였다. 이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직접 목격한 나는 이신부님의 ‘사목 스타일’을 한눈으로 볼 수가 있었는데, 진정한 가톨릭 목자의 온유함과 측은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허 자매님, 비록 식구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문제는 낮 시간에 집이 비어있는 때가 많아서 식사나 거동에 큰 불편을 겪고 있었고 심리적으로도 외로움을 느끼고 있어서 이렇게 봉사자들이 필요한 것으로 현재까지 봉사자 ‘자매’님들 열심히 성심껏 활동을 하고 있고 봉사 후에는 Kakao  ‘group’ Talk으로 간단한 보고를 곁들인 소감을 나눈다.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모두들 봉사를 한 것에 비해서 무언가 얻고 느낀 것이 더 크다고 입을 모은다. 어떨까.. 이럴 때 ‘기동성과 조직력, 동원력’을 골고루 갖춘 레지오의 조직과 특성이 가장 빛날 때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서 외로울 수 있는 연말연시에 따뜻하고 훈훈한 느낌을 주고 있다.

 

¶   십이십이, 1979년 12월 12일, 36년 전..  바보처럼 손가락으로 햇수를 한참 세고 나니 바로 36년 전이라는 해답이 나온다. 이제는 사실 30년 정도는 긴~ 세월의 축에 끼지도 않을 정도로 ‘진짜 긴 세월’에 익숙해 졌다. 아.. 이것이 바로 ‘나이 듬’에서 나오는 공짜로 받는 지혜요 고집인가보다.

사실 35년 전이라고 생각되는 작년 12월 12일 나의 blog post가 빠져 버린 것을 기억한다. 이날을 유난히도 추억의 명단에 넣고 싶은 나의 희망이 작년에는 무언가 바쁘게 느껴졌던 당시의 상황은 그런대로 기억을 하지만 글로 남기지 않았던 것이 일년 내내 후회가 되기도 해서, 이번에는 작심을 하고 몇 자라도 남기려 하고 있다.

이날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는 몇 년 전 나의 blog post에서 밝혔듯이 현재 우리 가족이 있게 해준 결혼이 결정될 무렵이었기 때문이었다.

1979년, 부모를 잃은 장녀, 박근혜
1979년, 부모를 잃은 장녀, 박근혜

사진같이 선명했던 꿈같은 당시의 느낌과 광경들이 실로 세월의 횡포에 서서히 물러나가는 듯.. 희미해짐을 실감하고 나는 슬픈 심정을 누를 수는 없지만 이것이 순리요 자연의 법칙 임도 알기에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총각이던 그 시절 나의 mindset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자유스러운 것일까, 불안한 것이었을까?

평생 ‘대통령’으로 머리 속에 남아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라진 그 당시, 솔직히 일생일대의 대사였던 ‘결혼’, 나의 미래인생을 설계하던 그 당시에 ‘대통령 유고’, ‘전두환 등장’ 등은 나에게 아무래도 첫 관심사는 아니었다. 서른 살이 넘었어도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 정도로 유치했나? 나라의 미래보다는 나의 미래에 더 관심을 쏟던 그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정치적인 이유’로 12월 12일은 후세에 역사로 남았지만 나는 당시에 거의 전혀 무슨 일이 그날 일어났는지 관심 밖이었다. 전두환이란 이름도 생소했지만 외신에 의해서 그가 현재 정치적으로도 제 1 강자로 부각하고 있다고는 들었다. 하기야 서울을 장악한 수경사란 것이 그의 것이었으니 이해하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그날, 나와 결혼을 약속한 연숙은 그녀의 이화여대 지도교수(박사과정) 김숙희교수를 김포공항으로 보러 갔었다. 김교수는 현재는 유명인이 된 도올 김용옥의 누님이었고 독신으로 이대 총장을 바라볼 정도로 실력자이기도 했는데 그 당시 그녀는 미국의 어떤 대학으로 ‘출장’을 출국을 하던 참이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끌려 ‘인사를 하러’ 나가게 된 것이었다. 마음이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혼식 전에 다시 못 볼 것이라 인사를 하여야만 하게 된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날, 기억이.. 참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김포공항 가는 길.. 우리는 한참을 걷게 되었는데 그날 내가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 우리에게 ‘추억의 12.12’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잡았으니 사실 그것은 고역이었을 테지만 젊음은 좋은 것이었나 보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옴을 느낀 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우리는 ‘큰 사고’없이 김포공항으로부터 한강교를 넘어서 집에 왔지만 그 이후부터 한강의 모든 다리들이 차단이 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시해 조사본부장 전두환의 휘하 계엄군 부대들이 한남동 육본 총장공관으로 출동,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이것이 전두환 혁명의 최초의 시발점이 되어서, 전두환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이후는 모두 역사가 되었다.

아~~ 세월이여.. 1979년 12월 즈음의 나의 주변과 세상은 과연 어떤 것들이었을까? 어떤 냄새를 가지고 있었던 세상이었을까? 간신히 나의 인생 반려자의 얼굴과 체취를 익히기 시작하던 꿈같은 시절.. 민족중흥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전두환의 등장, 지미 카터가 이란 인질사태로 악전고투를 하던 시절, 미국 소련의 냉전, ideology 에 의한 세계질서, 공산당이 제일 무섭던 시절.. 참~~ 세상 많이도 변했구나. 그 동안 우리의 새 생명들이 어느덧 30살을 넘게 되고, 우리들은 ‘완전한 고아’가 된 기나긴 세월이었다.  멋지고 희망이 있던 시절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외로움에 시달리던 시절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외로움과 불안감은 거의 사라졌다. 세월이 준 선물인지도 모른다.

 

한강교가 '끊어진' 12월 12일 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

한강교가 ‘끊어진’ 12월 12일 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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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계엄군이 정승화 총장 공관에서 충돌하던 12월 12일, 1979년

 

나를 순간적으로 그 당시로 돌아가게 해 주는 classic oldies

 

 

Somewhere in the Night – Barry Manilow 

 

 

Love is the Answer – England Dan & John Ford Coley

 

 

Goodbye Girl – David Gates

 

힘든 삶, Trump, Windows 10, 최인호

¶  Come to me… and I will give you rest (Matthew 11:28): 오늘의 성서 말씀, 그러니까 Today’s Readings 중 복음말씀, 마태오 복음 11장 28절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머지 부분은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귀에 많이 익은 구절이라 사실 새삼스러운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스치는 느낌은: “산 중 폭풍우 속에서 보이는 먼 곳 가물거리는 불빛이 흘러나오는 오두막집, 그곳으로 비틀거리고, 쓰러지며 들어가 푹신푹신한 이부자리에 쓰러지듯 누웠을 때”.. 오랜 세월을 살면서, 참 어떨 때는 삶,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힘든가.. 묻고 물을 때, 게다가 편히 기댈 곳이 없을 때..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에서 그 구세주란 것을 믿을 수 있었고, 그에게 기댈 수만 있었다면..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며 나의 모든 것을 기댄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조금 가능할 것 같지만. 하느님은 사랑의 자체이고 성삼위 성자께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고자 한다는 비교적 간단한 교리, 진리를 전에 가슴으로 믿을 수만 있었다면.. 그랬었다면 나의 인생은 조금은 더 밝은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  retarded Trump, Americans:  요사이 미국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실로 가관중의 가관이다. 오~랜 세월을 이 common sense의 나라에 살면서 이런 해괴한 ‘정치적’ 현상들은 못 본 듯 싶은데.. 어떻게 이런 ‘속물중의 속물, 정박아, 양아치’ Trump란 ‘쓰레기’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섰을까? 졸부중의 졸부, 부동산 투기의 귀재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 빼고는 그야말로 ‘양아치, 정박아’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의 ‘원시적’ 생각은 그야말로 ‘쓰레기’ 수준이다. 하지만 내가 요사이 이 인간을 쫓아 다니는 news media를 피하는 이유는 이런 쓰레기를 쫓아다니며 바보, 천치 같은 얼굴로 환호하는 지지자들, 이들은 그야말로 미국인 유권자의 최저 중에 최저에 속하는 집단들이다. 대부분 white trash급에 속하는 불쌍한 인간군상들이다. 잘못하면 내년 봄까지 이 쓰레기들에 대한 것들을 듣고, 보고 할 생각을 하면 아찔해진다. 시간이 약이고 세월이 모든 것들을 correct 할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어쩌다 미국이 이 지경까지 추락하고 있는지.. 최악의 악몽중의 악몽은 이 쓰레기가 대통령이 되어서 ‘고함을 지르며, 악을 쓰며’ nuclear button을 누르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성모님의 전구’가 진짜로 필요한 때가 온 것인가? 어머니, 제발 이 쓰레기가 나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onegaishimas!

 

¶  Windows 10‘s comingsuddenly지난 달부터 나는 corporate life 이후의 나의 좌우명 ‘Never Apple, Never Microsoft‘란 철학으로부터 조금씩 외도를 시도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들은 two evils에 속했고 누가 lesser evil인가 하는 것은 시간에 따라서 뒤 바뀌기도 했다. 현재 나에게 lesser evil은 바로 Microsoft인 셈이다. 이들이 evil까지 된 것은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들이 있었고 Apple의 경우에는 egomaniac Steve Jobs가 바로 그 이유고, Microsoft의 경우에는 당시 그렇게 엄청난 $$$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1 cent라도 더 짜내려고 발상한 Activation이란 것이었다. 그런 nonsensical ‘사건’들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뒤를 보지 않고 그들에게서 완전히 떠났다. Open Source 쪽이 나를 구해준 것이다. 하지만, Duopoly인 이 세상에서 그들을 100%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나의 결심은 “절대로 나의 $$$이 그들에게 가는 것만은 피하겠다는 것”으로 고착이 되어서 현재까지 흘러왔다.

다행히 세상이 desktop에서 mobile쪽으로 변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desktop OS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생활의 일부이기에 조금씩 신경을 쓰다가 얼마 전에 우리에게 적합한 해결 방법을 찾게 되었다. Refurbished hp business pc, 그것도 OEM Windows 7이 들어있는 것, $70로 ‘실험용’으로 구입을 해서 샅샅이 test를 해 보니.. 이것이 ‘대박’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최신판 Windows 10으로 가는 ‘가장 싼’ 길이 바로 이것이었다. 최소한 나의 $$이 Windows 10으로 직접 쓰여진 것이 아니므로, 나의 자존심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내가 만들어 쓰던 PC들과 다른 것은 물론 내가 마음대로 바꾸거나 고치는 것에 제한이 많지만 대신 이 ‘box’들은 정말 tank처럼 단단히 만들어짐을 알기에 큰 걱정이 필요 없었다. 나의 예상이 이 2 hp ‘box’들.. Windows 10으로 앞으로 수년간은 걱정 없이 우리들의 mainstream desktop 구실을 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쓰던 Windows Vista에서 Windows 10의 변화는 참 신선한 것이어서 현재까지 나의 평가는 아주 호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나의 main desktop은 물론 Open Source, 그러니까 Linux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side-by-side로 이 Windows 10로 ‘주류 세상’의 맛도 볼 것이다.

 

¶  최인호의 신년 스페셜, 다큐로망: 장보고  이것이 나온 지 거의 15년이 되어가나.. 고국의 KBS 걸작  program이었던 ‘역사 스페셜‘ series,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 Thanksgiving Holiday이후 일 주일 동안 앓아 누워지내며 ‘우연히’ home server에 있는 이것 중에서 예전에 안 보았던 ‘최인호 스페셜’을 보게 된 것이다. 왜 그 당시에 이것을 안 보았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당시에 내가 최인호에 대한 선입견이 안 좋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한 생각도 든다. 우리세대, 우리시대를 풍미하며 인기를 구가하던 그..얼마 전에 암으로 타계를 했다고 했을 때도 나는 그렇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나이란 것, 연세대 동문이라는 사실을 빼고는 나와 공통점이 거의 없는 그였다. 나보다 2살 정도 위였지만 연세대는 나보다 조금 늦게 입학한 것을 보면 아마도 재수를 하였던 모양이다. 연숙은 그의 책을 잘도 보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1970대의 그를 기억하기에 그 시대의 유행을 잘도 타던 그가 나의 radar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다.

가톨릭으로 언제 개종을 했는지는 몰라도.. 주위에서 그가 아주 경건한 신앙인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조금 반갑기도 했지만 그런 것도 잠깐.. 어떻게 그렇게 건장한 나이에 암으로 타계를 해야만 했는지.. 아쉽고 아까운 기분, 우리 세대의 celebrity였던 그가 그렇게 ‘일찍’ 가는 것을 보며 우리들의 mortality도 생각 안 할 수 없었다.

이 ‘신년 스페셜, 다큐로망 장보고‘라는 5부작 video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의 모습과 인상을 자세히 ‘가까이’ 보게 되었다. 우리 세대라는 느낌이 우선 ‘확~’ 들어왔고, 다음은 ‘우와~ 멋진 사람이다’ 라는 탄성이 나왔다. 물론 celebrity의 후광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과는 다른 ‘지식인, 신앙인’의 냄새가 확~ 느껴지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비록 ‘역사 스페셜’의 일부였지만 사실은 역사적인 접근보다는 ‘문학적인 접근’에 더 가까워서 그렇게 느낌이 신선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가 ‘추적 취재’를 하며 보여주는 일본과 중국에서의 행적들은 내가 정말로 부러워하는 모습들이었다. 예를 들면 일본 취재를 하면서 산중의 고요한 온천 여관의 방에 앉아서 ‘향기 짙은 coffee’를 마시는 모습이 나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하.. ‘인기’ 문학인들은 저런 멋에 사는구나. 처음으로 나도 ‘저런 멋진 문학인’이 되었다면 어떨까.. 하는 해괴한 상상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저래..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장보고와 9세기 무렵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를 실감나게 공부했지만 그것 보다는 최인호란 ‘멋진 사람’을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하는 아쉬움이 나의 머리를 더 휩싸곤 했다. 지금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정열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전하기도 할 것이고, 숨어있는 역사를 문학적인 신선한 접근으로 우리들에게 전해 주지 않았을까? 아쉽다.. 아쉽기만 하다. 앞으로 (가능한 그날까지) 나는 이 작가의 글을 ‘체계적’으로 읽으며 우리가 살아온 세대를 ‘최인호가 본 눈’으로 기억하고 찾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2003년 신년 KBS Special: 최인호의 다큐로망: 해신 장보고

2003년 신년 KBS Special: 최인호의 다큐로망: 해신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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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L! The news is not all gloom and doom..

lol-francis이 cute한 사진을 보고 안 웃을 수 있을까? 자유롭고 ‘유치’한 어린아이의 큰 웃음과 파안대소 교황님 프란체스코의 만남.. CNN의 제목은 ‘우울한 암울한 뉴스’에 치어 죽을만한 이 시기에 이런 웃음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일까? 희망은 있다.. 대림절의 뜻과 부합하는 희망이 솟구친다.

¶ 오늘은 기가 막히게도 청명하고 높은 하늘아래 10여일 만에 처음으로 regular normal routine을 따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생소하게까지 느껴지는 Holy Family 성당, 하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 우리를 기다리고 반겨주었다. 정말 ‘고향’같은 느낌까지 받았고 그렇게 하루의 평화는 주어졌다. 역시 그 동안 못 보았던 다른 프란체스코, ‘고려대 출신’ 김 프란체스코 형제, 역시 충실히 서울에서 방문오신 장모님을 모시고 미사 참례를 하고 우리와 만나게 되었다. 예상대로 형제님의 wife자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직도 여독과 시차가 있으리라 benefit of doubt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미사란 것이 생소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다른 생각도 든다.

별로 말이 없으신 장모님에게 거리감을 줄이려 대화를 하려고 성당 hospitality room으로 coffee 를 마시러 갔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따라 funeral이 있어서 쓸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우리가 잘 가던 Roswell road at Canton road에 있는 McDonald로 가 breakfast #2 로 짧지 않은 즐거운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모인 것은 아마도 처음이었겠지만 그래도 무슨 오랜 친지를 만난 듯 거리감 없이 대화를 하는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Regular routine 중에는 YMCA workout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며칠 뒤에나 시작이 될 듯하다. 그래서.. 명언.. ‘이 모든 것 다 지나가리라..’ 세월은 흐른다.

Two Candles, ‘Legio’ Re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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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대림 초

대림2주일로 들어서는 아침이 밝아온다. 나의 올해, 2015년  대림주간은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별로 묵상도 못하고’ 지낸 첫 대림주가 될듯하다. 아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그럴 것이고, 그 다른 것이란 ‘육체적 고통’이다. 사순절이라면 고통을 느끼고 묵상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겠지만, 희망과 기다림이 주제인 대림절에서 말초적인 고통 감은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Thanksgiving Holiday를 비교적 무절제하게 ‘외도’했기에 당한 self-inflicted damage라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3개의 초가 남아있다. 희망은 있고 다시 겸손, 절제하는 생활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각종 ‘해괴한’ 것들이 news media에 흘러 넘치는 이 세상.. 어떨까? 암만 생각해도 유일한 희망과 해답은 ‘절대적 선(善)’이신 하느님, 구세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맞다.. 모든 근초적인 악의 원인은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고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라고 보면 해답은 비교적 간단한 것이 아닐까?

 

¶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 2015

참.. 세월도 빠르지.. 작년 ‘연총: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의 기억이 어제같이 생생한데 어떻게 벌써 올해 또 이렇게 같은 곳에 모두 모였던가? 작년 것이 생생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생생하게 몸으로 우러나오는 것을 말한다. 작년에는 우리들과 나이가 비슷한 ‘평화의 모후’와 같이 합작해서 karaoke style로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 를 신나게 불렀었다. 그때에 연세대 선배님과 가까이 알게 되는 친목회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친목회의 목적은 지난 일년 동안 잘 모르고 지내던 단원들과 친교를 이루는 것으로 ‘레지오 교본’에 명시가 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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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갑자기’ 늘어난 단원 수에 힘을 입어서 대담하게 새로운 것을 시도하였다. 연숙에 오래 전에 관여 되었던 ‘탈춤’을 ‘흉내’ 내 보기로 한 것이다. 예전부터 나는 그녀로부터 이 탈춤에 대한 추억의 얘기를 많이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글쎄..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힘들 것이다’라는 우려를 하고 연습을 하면서 신도 별로 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예술’은 딱 질색이라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순명’을 제일 덕목으로 삼고 있는 ‘성모님의 군단’의 ‘장교’로서 단체행동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고.. 빠지지 않고 연습을 했지만 결국은 마지막 단계에서 허리통증과 부차적인 고통으로 ‘공연’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의 ‘연총’ 은 작년 때와 거의 완전히 같은 format으로 진행이 되었지만 그래도 눈에 띄게 ‘발전’한 것이 있었다. 교본의 정신을 따라서 ‘사치스럽고, 게걸스러운 음식’들이 자제되었고, 각종 ‘경품’ 같은 것도 사라졌다. 그러니까 performing group에 거의 모든 focus가 맞추어져서.. 어떨까.. 이것이 이상적인 연총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나는 비록 탈춤공연에 참가는 못 했어도 오늘 하루 온전히 이 연례행사에 참가를 해서 오랜만에 ‘방관자’의 여유로 장기자랑(공연)과 행사의 진행을 만끽하였기에 예년과 다른 색다른 각도로 보고, 생각하는 뜻 깊은 기억을 만들었다.

totally grounded Advent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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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향한 4주의 ‘희망의 촛불’..

¶ 은근히 그 동안 기다려 오던 2015년의 대림절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나는 꼼짝없이 집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까.. totally grounded가 된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 이런 중요한 season에 이런 적은 한번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는데.. 속으로 생각하기에 그야말로 what a lousy timing!  인가 되뇌기만 하고 현재도 계속하고 있다. 왜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살아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가?

조금은 비 전통적인 Thanksgiving holiday를 보냈던 올해, 가족보다는 친지와 어울린 것에 대한 ‘보복’인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Thanksgiving 이 무엇인가.. 가족들과 감사를 드리는 조용한 때인가 친지들과 어울려 부어라 마셔라 고성방가를 하는 시절인가? 완전히 무언가 잘 못된 것이었다. 그것이 시발이었는지.. 그 다음날 나는 ‘허리를 다쳐서’ 드러눕는 불쌍한 신세가 된 것이 그저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등, 허리 문제는 보통 사람들도 가끔 당하는 조그만 사고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나의 ‘젊지 않은’ 나이와 그것과 겹쳐서 발생하는 다른 ‘이상한’ 고통들이 amplified가 되어서 무섭게 괴롭히는 시간의 시작된 것.. Bible 속 Job 의 고통이 생각날 정도로 이 시간들 괴롭기만 하다.  오랜 동안 ‘몸에 익었던’ 친근한 daily routines들이 100% 정지가 되고, 중요한 Advent Sunday Mass는 물론 레지오 주회합 결석까지.. 서기로서의 간부기능도 빼먹게 되었고, 이제는 금요일 봉성체 동행도 포기할 지경이 되었다. 아니.. 이번 일요일의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에 참석하는 것도 확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작년 2014년 봄에 지독한 몸살독감으로 며칠을 누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에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레지오 주회합도 못 갔었던 나에게는 ‘대형 사고’였던 때였다. 그때에 느낀 것이 참으로 많았었다. 별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모르고 살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 것이다. 몸이 아픈 누구를 보거나 들으면 그저 ‘상상’만 할 정도였고 그 고통에 동참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의 표정과 말에 더 신경을 써서 위로할 정도였다. 그것이 그때에 확실한 교훈을 받았고 그 이후에는 많은 노력과 발전이 있었다.

이번의 경우에는 집 밖으로 ‘자유자재’로 나갈 수 없는 교우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거동이 불편’한 형제자매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불편할까? 얼마나 나가고 싶을까? 얼마나 사람들과 만나고 싶을까? 그런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이런 고통을 받는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timing이 전혀 우연만은 아닌 듯 해서 조금 더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자유롭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사실만은 나를 지독히 우울하게 한다.

그립다.. 공산당?
그립다.. 공산당?

¶  “공산당이 그립다..”  허~~ 이게 웬 망언인가? 근래에 들어서 이렇게 가끔씩 ‘공산당 향수’란 것이 머리에서 왔다 갔다 함을 느끼고 나도 깜짝 놀란다. 이것은 사실 사연을 알고 보면 해괴할 것까지 없다. 근래에 뉴스를 보면 ‘악 중의 최고 악’도 세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며 현재의 ‘최악’까지 온 듯하다. 현재의 최악은 물론 ‘모슬렘을 자처하는 미친 로보트’ 들이다. 솔직히 이들 존재는 내가 보기에 이미 ‘인간이기를 거부한, 악의 씨로 프로그램이 된 로보트 집단’으로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 ‘물건’들은 사실 그러니까 생각 깊이 할 필요도 없이 destroy되어야 하는 ‘물건’들인 것이다.

이 불쌍한 xx들은  이 세상이 싫어서 죽으려면 자기네들만 죽지 힘들게 남들과 함께 죽으려는 것인지.. 이런 물건들이 어떻게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는지.. 종교를 탓하지 말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인간을 탓해야 할 것인지..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그래도 ‘인간 집단’과 싸우던 공산당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그 공산당 집단도 극단적인 case에는 거의 로보트에 가까운 것들이었지만 최소한 자기와 가족들의 목숨은 아끼던 인간들이었기에 지금의 사태에 비하면 그들과 싸우던 그 시절이 조금은 그리운 것이다.

이런 ‘악에 대한 향수’ 중에는 어린 시절의 공포의 대상, ‘소련, 중공, 북괴, 일본 공산당’ 등이 떠오르는데.. 당시에는 정말 무서운 대상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최소한의 ‘전쟁법’은 지키던 집단들이었다. 그런데 요새 일어나 기가 막힌 사태들의 주범들은 도대체 우주의 어디에서 도래한 종자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