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Snow day No. 3, 100th blog etc..

frozen Atlanta
frozen Atlanta

아무리 생각해도 snow day가 3일째 계속된 적은 이번 말고 기억에 없다. 1989년 이곳에 이사온 이후에는 없었다. 1993년 3월 달의 storm of the century때도 3일 이상 계속되지는 않았다. 이번은 내일까지 모든 학교들과 대부분 직장이 쉰다고 한다. 그러니 4일 연속의 snow day인 셈이다. 이번에는 눈이 온 이후로 강추위가 계속되어서 길들이 모두 스케이트장으로 변한 탓이다. 제설트럭이 10대밖에 없으니.. 얼음이 저절로 녹기를 기다리는 형편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것을 가지고 정치화 하거나 불평을 하는 이곳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 더 재미있지 않은가? 나도 사실 큰 문제가 없고, 오히려 뜻밖에 완전한 relax를 하게 되어서 고마울 지경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쌀만 있으면 몇 주라도 끄떡없이 나가지 않고 살 수 있으니 더 그렇다. 이곳 사람들은 조금 다를 것이다. 빵과 우유, 야채가 꼭 있어야 하니..

오늘의 blog이 100번째를 넘었다. 2009년부터 조금씩 쓰던 것이 지난해 7월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쓰게 되고 이제 100번째가 넘은 것이다. 남들에게는 큰 숫자가 아닐지 몰라도 나로서는 milestone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영어로 쓰는 것보다 쉽겠지..한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영어로 쓰는 것 만큼 힘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영어로 생각하는 습관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런데다 멋진 한글 수식어들을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아마도 내가 한글로 된 책을 별로 안 보고, 2000년이 넘으면서 한글로 된 website도 거의 피한 결과일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아이들 수준의 단어 밖에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한글표현도 잘 못하고.. 이제는 영어보다는 한글에 더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한인성당의 레지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한국 문화’를 더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Cobb Central Library엘 가게 되었다. 친지가 경영하는 Atlanta downtown에 있는 Kristie란 jewelry store에 computer문제가 생겨서 보아주고 오다가 잠깐 들린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집안의 마루를 새로 놓는 일을 시작하면서, 그 때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가던 것이 중단되어서 이제까지 온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이 제법 있어서 새로 나온 책이 있나 보았는데.. 거의 없었다. 이곳도 $$$이 경제사정으로 모자란 모양인가? 그래도 몇 권을 빌려왔다.

한번 빌려 보았던 독일작가 제발트(W.G. Sebald) 저 “이민자 들(Die Ausgewanderten)”, 마쓰히사 아쓰시 저 “천국의 책방“, 그리고 이청준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이다. 이 중에 “이민자 들”은 한번 본 것인데 다시 읽고 싶었다. 왜 그럴까? 독일인으로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다른 이민자들을 보면서 쓴 것인데..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한마디로”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소설”인데 아주 그 format이 특이하다. 주제는 이민자들이 겪는 ‘고향상실의 고통’이다. 나는 그들이 겪는 고향상실이 어떤 것이지 잘 알고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이던 이런 것은 사실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Atlanta snow to ice day..

이곳 아틀란타 수도권 지역의 폭설은 완전히 끝나고 지금은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일째 모든 기관,학교가 문을 닫고, business도 거의 문을 닫은 듯 하다. 무슨 민방위 연습을 하는 듯 모든 곳이 정적에 잠겼다. 문제는 눈이 온 이후 영하의 기온이 계속되어서 완전히 두꺼운 얼음이 되어 빨리 녹지를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예년과 아주 다른 점이다. 이것도 혹시 global warming의 한 징조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극단의 기후(extreme weather)’가 온난화의 한 예라고 한 것을 어데선가 들은 듯하기 때문이다.지난 여름이 기록적인 오랜 더위여서 조금은 이러한 춥고 눈 많이 오는 겨울을 예측하긴 했다.

오늘은 우리로서는 한인성당에 레지오 정기 회합이 있던 날인데 성당 자체가 문을 닫아서 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우선 우리 집 subdivision도 빠져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설사 레지오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 무리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면..하고 상상도 해 본다.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 뿐이다. 인생에는 가끔 이런 ‘깜짝 즐거움’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들에게 이런 것들은 절대적으로 ‘뜻밖의 즐거움’이리라.

완전히 빙판으로 변한 I-285 near spaghetti junction

완전히 빙판으로 변한 I-285 near spaghetti junction

운전을 포기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차들 near Pleasantdale Rd@I-85N

운전을 포기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차들 near Pleasantdale Rd@I-85N

Night before Atlanta snow day 2011

Night before Atlanta snow day 2011

fairly rare sight & treat for this dog in Atlanta

fairly rare sight & treat for this dog in Atlanta

Atlanta snow day fun 2011

Atlanta snow day fun 2011

What's this white stuff under my belly?

What’s this white stuff under my belly?

Never knew you can walk a cat like this

Never knew you can walk a cat like this

 

A longest day, then snow day 2011..

어제는 모처럼 아주 바쁘게 느껴지는 일요일을 보냈다. 평소 때의 일요일은 조금 relax하는 기분으로 보내곤 하는데, 어제 일요일은 조금 달랐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out-of-closet의 한 예라고나 할까.. 처음 가보는 집도 두 군데, 처음 만났던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주 유쾌하고 진땀 나는 경험이 되었다. 단 요새 예외 없이 대부분이 즐기는 karaoke를 제외하고.. 나는 이것에 익숙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이런 것들과 아울러 이곳의 날씨가 어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치도 어김없이 일기예보가 들어 맞았다. 9시경부터 snow shower/storm(눈보라?)이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 들이 닥친 것이다. 이 눈보라 때문에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완전히 눈에 쌓인 고속도로 운전을 해야 하는 모험을 하게 되었다. 시카고, 오하이오, 위스컨신에서 살 때는 이 정도는 큰 문제가 못 되었지만 이곳에선 절대로 장난이 아니다. 제설 대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다가 지형적으로도 언덕이 많은 탓이다 (아틀란타 메트로는 piedmont, 그러니까 구릉지역에 속함).

어제 낮에는 레지오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설재규씨 댁으로 가서 그 집의 home network (주로 adsl modem/wifi router 같은 것들)을 손 보아 주었다. 나는 옛날 생각만 해서 설재규씨가 이런 것들 잘 했으려니 했지만 본인의 말로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런 류의 일들은 언제나 깜짝 놀라게 하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Earthlink/Netopia combo.. 요새 아직도 이런 구닥다리 broadband supplier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도 Netopia adsl modem/router가 특이하다. 아주 요상한 setup mode가 있는데.. 이것은 정말 쓰는 사람이 아무리 ‘바보’라도 문제가 없게 만들어 놓았다. 흡사 요새의 Apple computer와도 같다고 할까. 문제는 동시에 두 대 이상의 pc에서 Internet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정말 20세기적 발상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dumb mode를 full “bridge mode”로 바꾸면 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끝나고 몇 주 전에 이미 예정된 아틀란타 한인성당 전산팀의 신년 회의/식사 참석차 Dacula, Georgia에 있는 홍보분과위원장 댁으로 연숙과 합류를 해서 설재규씨와 갔다. 그곳은 I-85 Exit 120 근처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최근 이곳은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정착을 하는 곳이다. 밤 9시 이후로 예정된 대설 주의보를 염두에 두면서 전산팀 모임이 진행 되었다. 이날의 hostess인 서 안젤라 자매(본당 사목위원)의 power를 보여 주는 듯, 본당의 세 분 신부님께서 모두 오셨다. 그러니 분위기는 자연히 아주 활발하고 무게가 있었다.

이 댁의 지하에는 완전히 꾸며진 Video/Audio/Karaoke시설이 있었고, 한 쪽에는 아주 잘 꾸며진 ‘기도방’도 있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와 식사가 끝나면서 Karaoke방으로 모두들 모이게 되었는데(사실은 우리 신부님들이 이런 것들을 좋아 하신다고 함).. 나와 설재규씨는 눈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미리 일찍 가자고 합의를 한 상태여서.. 9시 넘어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 위에 언급한 snow adventure/nightmare 가 시작된 것이다.

20여 년이 넘게 나는 눈이 깊이 쌓인 고속도로를 운전한 경험이 없었다. 어제의 눈발은 흡사 거의 폭우와 같이 쏟아졌는데. 도로는 완전히 눈으로 덥히고, 앞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중간쯤에 와서는 차기 조금씩 미끄러짐을 느끼게 되었다.다행히 일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일기예보를 미리 들 보아서 그런지.. traffic은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집채만한 대형 트럭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더 눈보라가 심해지고, 드디어 나는 속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만큼 다급해 진 것이다. 잘못 하다가는 차를 세울 지경이 된 것이다. 이미 도로변에는 세워진 차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ramp에서는 이미 충돌사고로 엉킨 차들을 피해가야 했다. 집 근처의 완만한 언덕들을 천신만고 끝에 기어서 거북이처럼 집으로 goal-in을 하였다. 이때는 정말 ‘만세’를 불렀다. 최악의 상태가 오면 차를 버리고 둘이서 집까지 걸어 올 각오를 했을 정도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 보니 아직도 karaoke를 하며 놀고 있어서, 빨리들 출발 하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으로 돌아 갈 때 몇 명은 아주 고생을 하였다고.. 새벽 3시경에 도착한 형제님도 있었다. 신부님들도 역시 눈 때문에 거북이처럼 운전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이번 모임은 사실 취소하거나 연기를 했어야 했다. 정말 무모한 모험을 한 결과가 된 것이다. 만약에 더 큰 사고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지만 다행히 이번의 모임은 추억에 오래 남을만한 것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밖을 보니 완전히 모든 곳이 깊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성탄절의 눈과 더불어 이번 겨울의 제2탄인 것이다. 조금 용기를 내어서 우리 집 “깡패” Tobey(개)를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다리가 짧은 Tobey가 가슴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느라 고생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오늘 월요일은 snow day, holiday가 되었다. 대부분 따뜻한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뜻밖의 ‘휴가’를 즐길 것이다. 이것이 snow day의 즐거움일까. 겨울에만 있는 뜻밖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챔피온, 위스컨신 성모님 발현, 그 후..

성모님 발현 당시를 재연한 모습
성모님 발현 당시를 재연한 모습

지난해 (2010년) 12월 초순 경에 New York Times를 통해서 19세기 (1859년)위스컨신의 성모님 발현이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다는 비교적 짧은 기사를 읽었다. 바로 전에 시작된 2010년 대림절과 더불어 정말 가슴을 따뜻하게 느끼게 해 준 반가운 소식이었다.

성모님의 발현소식은 언제나 추문이 함께 따른다. 그래서 교회(바티칸)는 언제나 극도의 신중성으로 이런 소식을 처리하는 것을 안다. 나는 그래서 천주교를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거짓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유혹을 하는가? 조금 더 교회로 부터의 자유를 원하며 떨어져 나간 개신교 형제들.. 그 자유에는 아주 무서운 유혹이 더 넘실거린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번에 공식 인정을 받은 것도 그렇다. 첫 발현이 1859년이었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루르드 발현 다음해이다. 그 당시만해도 미국 위스컨신은 아주 ‘오지, 황무지’에 불과한 미개척지 정도였을 것이고, 그런 성모님의 발현소식은 유럽에서는 뉴스 감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르드 같은 ‘인파’가 그 황무지 위스컨신 얼어붙은 곳에 몰릴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성모님 발현은 요새 다른 곳의 ‘거짓’ 발현과 달리 자연히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진실성을 밝힐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번에 나는 미국이 주요 ‘세속적’ 신문이 아닌 가톨릭 뉴스(Catholic News Agency)의 기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줄거리는 대강 같으나, 우리 가톨릭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조금 새롭다. 그 기사를 나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를 해 보았다.

 

위스컨신 주의 그린베이(Green Bay, Wisconsin) 데이빗 리큰 주교(Bishop David L. Ricken)의 인정으로 이곳, 챔피온마을(town of Champion)의 한 교회가 미국에서 첫 성모님 발현지가 되었다.

2010년 12월 8일 –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 대 축일- 에 주교님은 ‘도덕적 확실성’으로, 동정녀 마리아가 정말 1859년 10월, 3번에 걸쳐서 젊은 벨기에 여성 이민자, 어델 브라이스(Adele Brise)에게 발현하셨다고 선포를 하였다.

1861년 발현 이후부터 그곳에는 ‘좋으신 협조자 성모님'(Our Lady of Good Help) 이라는 이름의 성모님을 위한 교회가 있었다. 2년간에 걸친 조사 끝에 리큰 주교님은 이곳은 ‘믿을만한 가치’가 있고, 교구의 공식적인 성지로 선포한다고 하였다.

3번에 걸친 발현 당시, 그 ‘여인’은 밝고, 하얀 옷을 입으셨는데, 세 번째 발현 때에, 그 ‘여인’은 자기가 죄인들의 개종을 위해 기도를 하는 ‘천상의 모후'(the Queen of Heaven)라고 밝히셨다.

“너도 개종을 하기 바란다”, 라고 그 28살이 된 어델 브라이스 여인에게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그 브라이스 여인은 미연방의 주가 된지 11년 밖에 안된 이곳 위스컨신에 가족들과 함께 이민 오기 전, 수녀가 되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동정 마리아는 그녀에게 ‘선교와 교리 가르침’의 사명을 주셨다. “이 황무지에 있는 어린이들을 모아 구원을 위해서 가르쳐라, 내가 너를 도와 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마라” 고 말씀을 하셨다.

어델 브라이스는 이어서 재속프란치스코(Third Order of Penance) 수도회원이 되어서, 미국의 미개척지를 돌아다니며 어린이, 어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하늘의 사명을 완수하려 노력을 하였다. 그 당시, 위스컨신에는 사제가 거의 없어서 교회를 다니려면 멀고 힘든 여행을 해야 했다.

세워진 성당근처에 프란치스코 회 여성들은 학교도 세웠다. 1871년경에 큰 불이 이곳에 났는데, 이곳의 거의 모든 곳이 불에 타버렸으나 학교, 성당, 그리고 수녀원 등 성모님께 봉헌 된 곳은 기적적으로 타지를 않았다.

그녀가 죽기 6년 전인 1890년, 그녀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었던 로빈슨빌(Robinsonville)이 그녀의 원래 고향이었던 유럽 벨기에의 마을이름 챔피온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동정 마리아에게 수녀가 되겠다고 약속한 것을 기념한 것이었다.

리큰 주교님은 기자에게 “어델 브라이스 수녀의 일생이야 말로 동정녀 발현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 자기 자신이나 성모님 발현 자체에 세상의 주목을 받게 하기 보다는 자신의 여생을 조용히, 겸손하게 성모님에게 바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말한다. “그녀는 근처지역을 모두 걸어서 돌아다니며 집을 방문하며 프란치스코 회의 단순하고 겸손한 정신으로 며칠 동안 아이들에게 교리공부를 시키거나 그들의 부모들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녀야 말로 사도정신으로 가득 찬 일생을 살았다. 성모발현 이후만이 아니고 그녀의 일생이 그러하였다. 또한 마리아의 간단 명료한 메시지야 말로 이 발현의 진실성을 말해준다. 마리아가 어델 수녀에게 준 지시는 간단하지만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무게 있는 것이었다.”

리큰 주교는 이어서 수없이 많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기적에 속하는 것들도 포함이 되어있다고 한다.

이번 주교의 공식 발현 인정은 새로운 사실이지만, 이곳은 150년 동안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이 이미 묵시적으로 알고 있던 이 교구의 성지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셈이다.

리큰 주교는 수없이 많은 믿기 힘든 기적적 치유와 개종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1859년 10월 9일 성모님 발현 이후 아직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생을 바꾸는 듯한 그런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 유명한 프랑스 루르드 성모발현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챔피온의 성지에도 순례객들이 치유를 받고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버린 지팡이들이 쌓여있다고 한다.

이곳 성지 성당의 존 더플러(Fr. John Doefler) 주임신부님은 이곳에 발현하신 동정 마리아와 루르드 발현 성모님과는 아주 의미심장한 관계가 있다고 하고, 루르드의 벨라뎃따 수베루에게 나타나신 뒤 일년 후에 이곳으로 에이들 브라이스에게 나타나실 때, 성모님께서 이러한 연관성을 암시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주임 신부님은 이어 “루르드에 발현하신 마리아는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되심’으로 밝히셨고, 이곳에서는 자신을 ‘천상의 모후’라고 밝히셨다. 이 두 사실은 사실상 마리아의 신비를 전부 간직한다. 즉, 마리아의 생애의 시작으로부터 하늘로 들어올리심과 천상모후의 관을 쓰신 사실이다.”라고 설명한다.

발현지 성지 성당 Champion, WI

발현지 성지 성당 Champion, WI

 

busy January..2011

2011년, 신묘년, 토끼해 새해도 벌써 5일이 지나간다. 1월은 우리 집에선 조금 바쁘게 느껴지는 달이다. 큰딸 새로니와 나의 생일이 있고,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도 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1월 5일,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오늘 Columbus, Ohio의 Riverside Hospital에서 태어났다. 보통 Ohio의 1월은 사실상 거의 옛날 (내가 살던 때) 서울의 겨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달랐다. 아주 따뜻했고 눈이 아닌 비까지 내렸다. 머나먼 타향에서 첫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을씨년스럽고, 쓸쓸하게 느껴지는데 날씨까지 추웠으면 우리들의 마음까지 더 쓸쓸하게 했을 것이다. 갓난 새로니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던 날, 가깝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김원백씨, 그의 wife, 도성이 엄마가 우리 집 (Ohio State University, Buckeye Village)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기다려 주어서 얼마나 포근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정이라고 하던가.

1월 21일은 나의 생일이다. 1.21 (일-이-일)하면 나의 생일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1968년 나의 20세 생일날 에 터진 김 신조 일당의 북괴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어쩌다 나의 생일날에 쳐들어 왔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우스운 생각이지만 나의 생일과 연관되어서 바로 어제의 사건같이 느껴진다. 지금은 이렇게 여유 있게 회상을 하지만 사실 그 당시는 아주 심각했다. 이것은 요새의 연평도 포격 사건보다 심리적으로 더 충격적이었다. 특히 공비들 중 김 신조가 유일하게 생포 되었는데 사전의 각본도 없이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짙은 북한 사투리로 말을 하는 바람에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몇 년 뒤에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이 “나도 모르게 극단분자들이 저지른 망동”이었다고 말 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이는 자기 이외는 모두 바보들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말을 누가 믿는가?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야, 김일성이 개새끼야, 북괴왕조에서 누가 너의 승인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곧 뒤이어, 1월 25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 된다. 그것은 1980년이다. 그러니까 올해는 31주년이 되나.. 허~~ 참 세월이여.. 우리는 그 당시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도 서울 명동에 있던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배경에 크게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다. 그 당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것도 무슨 뜻이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정말 아주 매서운 전형적인 ‘서울의 겨울’ 날씨였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보니 결혼식은 ‘아름다운 계절’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황량하고, 춥게 느껴지는 겨울의 결혼식은 크게 매력적이 아니니까. 물론 우리부부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그것이 사실 결혼을 바로 앞둔 사람들의 심정이리라. 31년을 큰 탈없이 같이 살았다는 것을 요새는 조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앞 날도 기대를 해 본다.

나의 본관인 평창이씨 익평공파의 족보를 통해서 최근에 알게 된 나의 “친 삼촌”, 이준모 아저씨.. “듣도, 보도” 못했던 거의 전설적인 인물, 이준모 아저씨의 생일이 분명히 족보에 1월 10일로 나와있다. 그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서 이것은 분명히 음력일 것이라서 언제 ‘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의 1월은 예년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를까도 생각을 해 본다. 제일 큰 차이는 역시 새로 시작된 나의 레지오 활동에 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1월이 가기 전에 나는 정식단원 선서를 할 것이다. 활동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을 기대해 본다. 본당의 IT support team (전산팀이라 부른다)에 가입이 되어서 이제부터는 실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외부로 나타나는 제일 큰 차이가 아닐까? 올해는 사실상 잠정적으로 일년간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데, 이것은 레지오 활동을 생각하면서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시간을 정말 효율적이고, 보람차게, 조금은 높은 뜻에 맞게 쓰려는 노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adieu 2010.. see you in history

Year 2010, 이천십 년, 이공일공 년… 밀레니엄, Y2K, 21세기 어쩌구 저쩌구..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그것도 10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십진법의 ‘공’자에 집착하는 것일까? 하기야 다른 진법을 썼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기도 ‘공’자는 꼭 쓸 테니까.. 내년은 무슨 해인가? 족보의 부록에 이것들이 자세히 나와있다. 2011년은 분명히 신묘(辛卯)년으로 나와있다. <묘>는 토끼다. 그러니까 토끼의 해가 되는 것인가? 이것도 잊고 산지가 꽤 된다. 특별하게 알고 살 필요가 없는 이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 “고리타분”한 것들을 다시 알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아마도 올해 내가 나의 평창이씨 족보를 찾으려고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올해는 호랑이 해였고, 내년(내일)은 토끼 해.. 이 두 짐승이 주는 극적으로 다른 느낌으로 보아서 내년에는 세상이 조금 부드러운 쪽으로 변화되는 것도 기대를 해 본다.

 

레지오가 만나게 해 준 세 사람

2010년의 황혼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올해 나에게 제일 크고,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그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레지오에 예비단원으로 입단을 한 사실이다. 물론 나는2007년 초부터 아내 연숙의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둘이서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나의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시간적, 육체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묘하게 나를 조금씩 바꾸어 주고 있었다.

올해 10월경부터 아주 조그만 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레지오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나의 10월 19일 레지오 예비단원으로의 입단이었다. 그때 받은 레지오 단원 수첩으로 기록이 된 나의 ‘활동’을 다시 본다. 비록 예비단원이라 ‘공식적 실적’에는 못 오른다고는 하나 나에게 그런 것은 별 차이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비록 그 이후 묵주기도의 횟수가 조금씩 많아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금씩 나의 lifestyle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마디로 신선하고, 무언가 생의 목적이 다시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선 새로 적응해야 할 일이, 사람들(형제,자매님들이라고 부른다)을 새로 만나게 되는 일이었다. 지난 10년간 나는 ‘새로 만난 인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을 그저 편안하게 느끼면서 살았다. 심지어는 새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기도 했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피해망상증까지는 안 갔어도 그 근처까지 간 것이 아닌가 나도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배경에서 이렇게 새로 만난 사람들.. 내가 변했나.. 모두 그렇게 정답고, 친근하고, 친절하고, 죽마고우를 보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 물론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 내가 변한 것일 것이다.

그 중에서 내가 속한 곳의 자매님들(내가 유일한 남자단원 임), 대부분 나의 신앙, 인생 선배님들.. 나의 누나를 보는 듯해서 너무나 마음이 편하다. 성모신심으로 완전 무장된 그 자매님들..내가 배울 것 투성이다. 죽은 영혼들을 더 편히 보내드리는 레지오 연도에도 몇 차례 참가를 해서 그 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던 ‘죽음의 절차’를 다시 배우게도 되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3개월이 되어서 정식단원 선서의 절차를 앞두고 있지만, 나는 큰 문제없이 정식 단원이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그런 시점에서 나는 레지오가 그 동안 다시 만나게 해 준 세 사람을 생각한다.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우리 예수님을 낳아주신 성모 마리아님이다. 거의 신화적, 역사적, 성서적, 심지어는 추상적으로만 느껴왔던 마리아님을 이제 나의 어머니로 다시 맞아들이고,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레지오 교본을 혼자서 열심히 ‘독학’을 한 덕분에 나는 모르고 있던 ‘보화’와도 같은 심오한 성모신심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같은 성인의 저서 (직접, 간접으로)도 읽게 되었고.. 얼마나 내가 성모님을 슬프게 해 드렸는지도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 어떠한 “무지한 가톨릭 신자, 개신교신자, 개신교 신자와 같이 행동하는 가톨릭신자”를 만나더라도 이제는 자신이 있다.

바른쪽 설재규씨 부부, Thanksgiving dinner Atlanta, 1989
바른쪽 설재규씨 부부, Thanksgiving dinner Atlanta, 1989

두 번째 사람은 본당교우이자 오래 전부터 알던 설재규, 아오스딩 (Augustine) 형제다. 설재규씨는 비록 나보다 나이가 한참 밑이었지만, 내가 이곳 아틀란타에 1989년 직장을 따라 이사를 오게 되면서 거의 처음 만나게 된 정말 오래된 형제님이다. 내가 다니던 직장, AmeriCom Corporation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software engineer였고, 그는 test engineer였는데,. 비록 같은 부서는 아니었어도 곧바로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깝게 지냈고, 더욱이 그도 우리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설재규씨의 부인은 우리부부와 같이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직장도 그렇고 성당, 한국학교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아주 오래가지를 못했다. 거의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설재규씨와는 무슨 인연이 있는지 그 후의 다른 직장이었던 Scientific Atlanta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물론 다른 부서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남다른 chemistry가 없었나 보다. 별로 더 가까워지질 못했다. 게다가 그 후 우리는 거의 완전히 한인 community와 멀어지게 되었고 서로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레지오 입단을 계기로 아틀란타 본당의 전산팀에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글쎄..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참, 이것도 인연이라면 어떨까? 서로가 젊은 패기는 다 수그러졌고, 조금은 완숙된 심경으로 만나면 이것도 무슨 큰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 번째 사람은 역시 본당의 교우,형제님이었던 김찬웅, 베드로씨다. 역시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오면서 거의 곧바로 만났다. 중앙고 후배 이성풍(aka 윤주 아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분은 그 당시 아마도 삼성 지사에서 근무를 했었던가 했다. 그래서 가끔 윤주네 식구와 더불어 모이곤 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서로 잘 맞았고, 술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는 분위기가 우리와도 (비록 내가 나이가 제일 위였지만) 잘 어울린 것이다.

그러다가 역시 우리가 성당과 멀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중간다리 역할을 하던 윤주네가 완전 귀국을 하게 되면서 사실상 연락조차 끊긴 채 산 것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아내 연숙과 김찬웅씨 부인 안젤라씨가 한인천주교회 레지오에서 만나 베드로씨네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다. 알고 본즉 베드로씨도 나와 같이 레지오 협조단원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제는 서로 부부가 만나서 점심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희망에 베드로씨도 언젠가는 안젤라씨와 같이 레지오를 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이고 지금은 ‘해후의 즐거움’이 더 크다.

 

toward 100th, dismal frozen days, Persian friends

나의 serony.com published blog count가 이번으로 94번째가 된다. 그러니까 100번째가 아주 멀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에 올해가 가기 전에 100회라는 milestone을, 조금은 우습지만,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쓰고 싶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은 최소한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하게 느껴진다. 그것들을 어떻게 ‘한글’로 표현을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던 ‘한글 형용사‘들이 다 어디로 도망을 갔단 말인가? 참 슬프다. 한글도 잘 못하고, 영어도 잘 못하고.. 이것이 진정 30년 넘게 만들어진 나의 bilingual culture 라면 참 나도 나에게 실망을 금할 수가 없다.

약 1년 반전에 시작한 이 ‘초라한’ 나의 public diary는 사실 나의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이미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는 ‘놀라움’에서 시작이 되었다. 사실은 더 급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이러한 digital records의 수명은 원칙적으로 거의 무한에 가깝다. 일부러 없애지 않는 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누가 보건 간에 (희망에는, 나를 태고 적부터 이미 알았던 사람들) 나의 진실된 생각을 알리고,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시작의 모든 것이었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아직도 계속이 되어서 자그마한 100회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200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500, 혹은 1000.. 그저 겸손한 희망일 뿐이다.

올해의 연말 휴일은 한마디로 ‘죽을 쑨’ 격이 되고 말았다.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다. 하나도 앞뒤가 맞지를 않았다. 제일 중요한 천주교회 미사란 미사는 모조리 빠진 결과가 되었고, 반갑지 않은 ‘세속적’인 모임에서 쓸데없이 ‘세속적’인 마음의 상처만 입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이보다 더 망친 휴일이 이제까지 있었을까.. 암만 생각해도 이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위로한 것이 있다면 강추위를 동반한 하얀 눈뿐일 것이다. 문제는 이미 다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잘 못한 것은 인정을 하고 앞으로 반복을 하지 않는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 나이에 이렇게 ‘잘못’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것이다.

 

아주 우연히도 “‘이란’에서 한국의 TV 사극드라마대장금‘이 인기”였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문제는 그때가 또 이미 몇 년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옛날과 그 옛날’의 것을 본 것이다.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내가 요새 사는 것이 이런 식이다. 무언가 새로 알았다고 한 것은 대부분 최소한 몇 년 전의 것이었다. 이것도 archived googling 때문일까? 이제 이런 digital contents들은 여간 해서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한마디로 Internet에 무언가 ‘남기면’, 거의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생각해 봐야 할 현상이다.

왜 이란과 대장금을 연관하게 되었을까.. 오래 전 1970년대에 West Virginia에서 학교(West Virginia Tech)를 다닐 때 나는 유난히도 많은 Persian(Iranian student를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들을 알게 되었고 어울렸었다. 물론 그때는 Shah (of Iran)가 이란을 통치할 당시였다.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의 바로 전이었다. 그래서 그 Persian들은 연일 학교근처 도시(Charleston, West Virginia)로 몰려가서 데모를 하곤 했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가까운 친구들은 공부벌레들이 많았다.

대장금과 관련된 기사에서 그들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대부분 나의 경험과 일치한다. 종족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중간이라 그런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들 handsome, attractive한 모습이고, 아주 다정다감하였다. Shah의 친미정책으로 그 들도 미국,유럽문화에 상당히 빠진 상태였다. 아마도 그것이 호메이니의 이란혁명으로 완전히 제지를 당한 듯 하다. 짧은 시간 (1년 반정도) 였지만 그들과의 우정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졸업 후 다 연락이 끊어지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사진을 꺼내 보면서 그들을 생각한다. 비록 정치적으로 이란이 곤경을 겪고 있지만 국민성은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사극 대장금을 보았다니 참 믿어지지 않는 즐거운 소식이 아닐까?

 

2nd day of Christmas, windy white..

12월 26일 아침, 크리스마스 두 번째 날이다. 이번의 성탄은 의외와 예외가 계속되는 그런 휴일이 되고 있다. 우선 성탄절 당일에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이 우리 집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가 되었고, 그것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 가족만의 푸근한 그런 날이었는데.. 하지만 이런 것으로 남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 내가, 우리가 결정하고 행한 일이 아닌가? 올해의 성탄과 같은 추억이 반복되지 않기만 바랄 정도로 나는 기분이 아주 쳐진 상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일기예보대로 정확한 시간에 눈도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었는데도 그것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못 만든다. 나의 마음을 적당히 자제를 못한 순간의 ‘실수’가 나의 가족을 아주 슬프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나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왜 그것도 성탄 아침에 자제를 못 했을까? 큰딸 새로니에 대한 나의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그저 이유가 없었다. 아니 화를 낼 정도의 심각한 이유는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절제와 자제를 못했을까?

성탄절에 남의 집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노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침부터 눈이 예보된 상태에서 간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대로 가지를 않았다. 두 가지 마음.. 고래등 같은 ‘사치스러운’ 집에서 white Christmas movie를 연상시키는 광경을 감상하는 것,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type은 절대로 아니었다. 암만 호화스러운 음식이 있어도 오가는 얘기가 그것을 못 따라 가거나, 심지어는 (아니, 거의 매번) 남의 심사를 완전히 뒤틀어 놓을 그런 utterly stupid comment를 들으면서,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을까 하는 극단적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이가 먹을 수록 주로 겉멋에 집착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난감하다. 새해에는 이런 자리를 가급적 피하며 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다.

 

Our cul-de-sac under snow

Our cul-de-sac under Christmas day snow

 

White Christmas, 2010

White Christmas, 2010

 

finally, white Christmas here.. Wisconsin 성모발현 공식인정

Snowing Atlanta on Christmas day
Snowing Atlanta on Christmas day

일기예보가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았다. 오늘 크리스마스에 아틀란타지역에 눈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오 무렵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기온이 떨어지더니 진눈깨비로 변하고 급기야 함박눈으로 변한 것이다. 기온이 그렇게 낮지를 않아서 차도에 내린 눈은 물로 변하고 아직 얼지는 않았다. 오늘 낮부터 친지의 집에 모여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글자 그대로 white Christmas를 맞은 것이다. 나의 기억에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본다. 문제는 내일이다. 내일의 기온이 만만치 않게 낮을 예정이어서 이 눈이 녹지를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이곳은 차들이 꼼짝 을 못할 것이다. 다행히 일요일이라 큰 문제는 없겠지만 성당에 갈 일이 문제다. 어제 오늘 모두 성탄미사를 빠지는 바람에 내일도 못 가게 되면 조금 문제다.

어제의 New York Times의 주요기사 중에 Wisconsin 성모발현이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있었다. 머리 속으로 아마도 이것은 미국 ‘본토’에서는 처음 있는 경사가 아닌가 생각이 스쳐갔다.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세워진 위스컨신주의 성당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세워진 위스컨신주의 성당

그 동안 미국의 여러 군데에서 성모 발현 소식은 있어왔다. 심지어는 내가 사는 이곳의 근처에 있는 Conyers라는 곳에서도 지난 십 년 동안 성모님이 발현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려간 것을 기억을 한다. 문제는 그런 곳들이 하나도 교황청은 물론이고 현지 교구에서조차 정식으로 조사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성모 발현이 인정을 받기는 그 정도로 ‘하늘의 별’따기 정도인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한국의 나주, 오하이오의 어느 town, 그리고 이 근처 Conyers등등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인간들의 장난’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Wisconsin의 성모발현이 공식인정을 받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기사를 읽어보니 이 발현은 무려 160년이나 지난 오래된 발현이었다. 더 정확히, 1859년에 발현한 것을 지금 인정을 한 것이다. 그 해는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France)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다음해가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된 것이 이제 인정을 받게 되었을까?

 

Atlanta’s White Christmas?

미국 west coast를 연일 강타하던 저기압서서히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더니, 드디어 1993년 이후 처음으로 white Christmas의 가능성이 점점 확실히 지고 있다. 이것 자체만도 이곳에서는 큰 뉴스에 속한다. 그 가능성이 통계적으로 정말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적인 휴일인 성탄절이라서 교통문제는 큰 문제가 되지를 않을 것이다. 대개가 집안에서 눈을 즐기니까 사실 더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차로 drive를 한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눈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 도시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보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이제까지의 ‘대책’이었다. 그 만큼 통계적으로 눈의 확률이 낮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사실 그날 저녁에 가깝게 지내는 친지, 진희네 집, 의 저녁 초대를 받아놓고 있는 상태라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 중이다 일기예보가 맞는다면 아마도 집으로 돌아올 때쯤 drive하는데 문제가 있을 듯 하다. 그 집이 워낙 고래등같이 크니까, 비상시에는 거기서 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탄절을 집밖에서 자는 것이 아주 꺼려진다. 또한 다음날은 일요일, 성당 미사를 가야 하지 않을까?

 

Secret Santa’s, 고백성사, 올해의 마지막 일..

이것이 웬 떡이냐? 이것이야 말로 Santa’s Surprise가 아닐까? 얼마 전에 아래층 마루(IKEA Tundra)를 하면서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hallway의 조그만 closet의 바닥도 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몇 년(아마도 십여 년?)동안 쌓여 있던 각종 잡동사니가 있었다.

Secret Santa's Surprise
Secret Santa’s Surprise

주로 Halloween decoration stuff같은 것과 겨울용의 heavy jacket같은 것들이어서 평소에는 별로 열어 보지를 않던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 완전히 그곳의 모든 것들을 다 들어낸 셈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던 뚜껑도 뜯지 않은 CHIVAS REGAL Scotch Whiskey 한 병이 나온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이런 술을 사본 적이 없었고, 유일하게 집에서 마시던 맥주도 이제는 거의 사지를 않는다. $$도 그렇지만 이런 것들의 ‘단점’하나가 조금씩 이런 것에 의존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그냥 싫었다. 담배와 마찬 가지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아주 쉽게 습관성이 되어가는 것이 싫은 것이다. 담배를 끊을 때의 trick을 다시 써서, 술은 남의 집에 놀러 가서 ‘얻어’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대부분 얻어먹는 다는 사실이 ‘치사’하게 느껴져서 피하게 되곤 하고, 설사 피할 수 없게 되더라도 절대로 과도하게 마시게 되지를 않는다. 그런 배경이지만 가끔 정말 외롭게 느껴지거나 할 때, 술 생각이 나곤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결심은 확고해서 ‘절대로’ 술을 사지를 않았는데.. 그런 나를 가상히 여기셨는지.. 이렇게 뜻하지 않게 술병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Santa할아버지가 주신 것은 아니고, 사실은.. 아마도 작년에 ‘선물’로 받은 것을 그냥 그곳에 넣어두고 완전히 잊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pleasant surprise가 아닐까? 덕분에 올해 겨울 저녁은 조금 훈훈한 느낌을 받으리라 희망을 해 본다.

어제 오후에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거의 20년 만에 아틀란타 순교자 천주교회에서 ‘한국어 고백성사’ 를 하였다. 결론부터 말을 하면, 이것이다. 이것을 잘하고 못하고는 거의 ‘언어’에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준비를 잘 했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영어로 하게 되어도 조금은 ‘미묘한 표현의 제한’을 느낄지는 몰라도 시간을 두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준비를 잘하는 것이 그저 느끼는 대로 말할 수 있는 한국어 고백성사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쉽다는 것이다. 어제의 경우가 그랬다. 모처럼 ‘자유스러운 모국어’로 하는 것이니까 그저 큰 문제가 없을 줄 잘못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과같이 준비를 철저히 하지를 못했다. 신부님께서 그것을 모르실까.. 아닐 것이다. 조금 신부님께도 미안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사제경험이 적은 ‘막내’신부님, 김영훈 스테파노 신부님에게 성사를 보게 되어서 조금은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것을 피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거의 무조건 나는 고백성사를 해야만 하는 심정이었다. 그저 시작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제부터 나는 ‘정상적,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잘 준비하고 잘 할 것이다. 이것도 레지오에 들어가면서 다시 생각한 ‘부산물’중의 하나라고 할까.. 참 성모님의 묵주기도는 오묘하다고 할까.. 정말 모른다.

The last 10% of work takes 90% of time. 이 경험적인 명언이 정확히 도 잘 들어맞는다. 물론 이것은 경험적으로 어떠한 과제를 과소평가 했을 때 꼭 들어맞는다. 년 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아래층 나무 마루 놓기, laminate flooring이 그것 중의 하나다. 비교적 작은 면적의 화장실의 마루가 그것이다. toilet 아래로 마루를 놓는 것이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던 것이다. Toilet을 분해, 그것도 완전히 들어내고, drain hole주변으로 동그랗게 cutting하는 것이 당연히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을 왜 예측을 못 했을까? 전에 toilet를 바꾸는 것을 해 본적이 있었지만 거의 10년이 되어가서 자세한 것을 다 잊어버린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drain hole에 wax ring도 필요하고, water line plumbing도 다시 해야 했다. 한마디로 조금은 ‘뼈빠지는’ 일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것을 하고 나니 정말 보람을 느낀다. $$$도 엄청 save했겠지만 이 나이에도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나를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win-win이 아닐까?

 

Aging blues, 고백성사, 평창이씨 족보 연구

12월, 아니 2010년도 열흘 정도 남았나? 나의 마음도 무언가에 쫓기듯이 종종 발걸음이 빨라진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쫓기는 심정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나의 쫓기는 심정을 분석하려 해도 확실한, 그럴듯한 대답이 없다.올해는 조금 느긋하게 년 말을 보내려고 했지만 여지없이 나는 또 이렇게 2011년을 향해 내몰리는 듯한 심정이 되고 만다. 급기야는 어제 밤에 또 무언가에 쫓기는 꿈까지 꾸고 말았다.캐나다의 친구 정교성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수십 년간 꼬박 보내던 그, 최근 몇 년은 소식이 없었다가 올해 다시 그의 카드를 받은 것이다. 언제나, CANANA의 symbol이 꼭 들어간 그런 카드를 보내온다. 언제 한번 그와 그의 새 wife를 만나보게 되려나?

나는 오랫동안 성탄 카드를 친지들에게 보내지 못하고 살았다. 그것이 그렇게 힘이 들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역시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가 소식을 끊어버리고 산 것이다. 그 결과 하나하나 친지들이 주변에서 사라짐을 알았다. 오랜 동안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친하던 친지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짐을 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또한 그렇게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과 다시 연결이 되기는 생각보다 쉽지를 않다. 하지만 노력을 다시 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성탄카드를 조금씩 보내기 시작했다. 올해도 조금은 늦었지만 이제부터 보내기 시작을 할 것이다.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한국어 고백성사’를 할 예정이다. 레지오에 입단을 하면서 생각한 것 중에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심각하게 다시 시도할 것도 들어있었다. 최소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피할 생각이 없다. 천주교 교리에 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니까 하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근래에는 거의 미국본당에서 미국인 신부님들께 영어로 고백성사를 드렸었다. 비록 형식적인 기분이 많이 들었지만 하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것 조차도 사실 3년 전부터 못하고 있지만.. 영어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백성사’ 그 자체가 문제였다. 나의 ‘치부’를 들어내야 하는 작업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신자들 중에도 잘못한 것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어떤 때는 나도 이 말에 수긍이 가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인 것을 또한 나는 안다. 비록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나의 마음에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도 그렇게 이해가 되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나같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그렇게 쌓인 것을 하려고 무척 고생을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것을 조금 체계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었다. 2천년 전통의 가톨릭교에 이미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성인,성녀들이 이미 다 겪었을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 ‘양심성찰’이라는 아주 체계적인 이론까지 있었는데, 그것이 고백성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죄’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 나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고백성사 그 분위기의 ‘어색함’에도 있다. 특히 고백성사를 하기 전에 느끼는 것.. 하지만 또한 안다. 고백성사 후의 그 날라갈 것 같은 그 기쁨..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한국 과천에 사시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 종친님(사실은 아주 젊은 entrepreneur) 이종환 님이 족보의 무려 1700여 쪽을 확인하면서 나의 아버님의 성함이 보이는 몇 쪽을 scan을 해서 보내 주셨다. 그 동안 추측으로만 알던 것을 다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계조부님들의 거주가 경기도 평택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 인가.. 해답보다는 의문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 중에 제일 궁금한 것은, 아버님의 사촌들이 거의 6명이나 되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 하는 것일까? 물론 나의 이름도 거기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증조부이신 이종득 할아버지의 후손이 28세손에서 최소한 족보에서는 ‘전멸’인 것이다. 그분들의 ‘남자’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면, 나머지는 역시 동족의 비극 육이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모두 북한에서 사셨을까? 최소한 나의 직계 할아버지 ‘이경호’ 님은 서울에서 사셨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그리고 나의 삼촌 ‘이준모’.. 호적에도 없는 그 삼촌은 사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 들은 적이 있었다. 육이오 전쟁 때, ‘월북’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의 호적에서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무슨 해괴한 역사일까?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당하시고, 그 동생은 빨갱이였단 말인가? 정말 그 짧은 공산당 혁명 역사가 이렇게 한 가정을 파괴할 수 가 있을까? 할말을 잊는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 성함이 보이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족보
아버지 성함이 보이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족보

오늘 나의 핏줄을 찾는 내 자신의 노력에 커다란 전환점이 왔다. 내 눈으로 나의 아버지의 성함(이정모, 李正模)을 평창이씨 익평공파 족보에서 처음 확인한 것이다. 물론 100%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99.9% 정도는 확실해서 실제로 나는 아버지를 찾은 셈이다.결정적인 단서는 생년월일에 있었다. 어머님으로부터 들었던 희미한 기억에 아버님 태어나신 해가 1910년대 초반이라고 했는데, 족보에 신해년(그러니까 나와 같은 돼지띠!) 3월 11일 생으로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아버지의 성함과 나란히 이준모 라는 성함이 기재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분이 ‘전설적’인 나의 삼촌 이준모..일 것이다. 이 준모 삼촌은 나이가 1914년 생이니까 아버지보다 3살이 아래였다. 이것은 정말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이다.

이번의 이 scoop은 한국 과천시에 사시는, 인터넷으로 알게 된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이신 이종환 종친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에 운이 좋았던 것은 이 종친님이 익평공파 족보를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바쁜 직장생활에서 틈을 내어서 족보의 몇 쪽을 copy해서 보내주신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보면서 조금 놀란 사실 중에 하나는 아버님의 남자 사촌들이 5분이나 계신데 (그 당시에는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하나도 개재되지를 않았다) 그 후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후손이 없었다기 보다는 기재가 되지를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우선 나의 이름도 아버님 밑에 기재되지를 않았으니까. 왜 그랬을까? 아마도 동족의 비극, 육이오 전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아버님은 내가 2살, 육이오 이후 납북이 되셔서 호적이 올려놓을 시간을 놓치셨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나의 가까운 친척을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을 느낀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나는 나의 아버님의 후손을 족보에서 없애는 불효는 절대로 반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Carols, Cards & Christmas past..

지금 이맘때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절정을 이룬다. 듣기에도 제일 편안하고 추억까지 곁들이면 더욱 따뜻하게도 느껴진다. 캐롤의 추억에 대해서는 역시 고국에서 맞았던 중 고교 시절의 순진했던 크리스마스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당시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를 않았고 집에서도 전혀 신앙적인 환경을 주지 못해서, 그저 성탄절은 유럽이나 미국 것이라는 인상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국민학교 시절에는 성탄절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있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리는 것, 바로 그것이 그렇게 좋았다. 그 당시 고국의 품질 좋은 인쇄산업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므로 주로 주한 미8군에서 흘러나온, 이미 사용된 카드를 잘라서 다시 우리의 카드로 만들곤 했다. 그런 것을 아예 가게에서 팔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걸 ‘재생’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에 이것도 일본사람들이 먼저 시작을 해서 그곳에서 ‘재생’이라는 이름을 썼을 것이다. 우리 같은 국민학생들은 그 ‘진짜 재생’ 카드의 그림을 보고 비슷하게 그리곤 했는데, 성탄 무렵이 되면 누나와 누나친구들 까지 한 방에 모여서 같이 그리곤 했다. 그 이후로는 내내 그때의 기억이 너무도 아름답게 남아서 지금 까지도 그때의 추억을 즐기곤 한다.

그 당시에는 캐롤은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것을 들으려면 ‘전축’이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 경제사정이 그것은 대부분에게 무리였다. 군사혁명(1961년) 후에 조금씩 전축이 보급되면서 레코드 ‘판’ (거의 다 LP)이 대량으로 복사되어서 팔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본격적으로 외국의 캐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처음 산 것이 Pat Boone의 Christmas album이었고 그것이 아주 뚜렷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YouTube를 보니 그때의 앨범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몇 곡만은 다른 앨범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가 1964년 (중앙고 2년 때) 경이었는데, 성탄 전야에 보통 밤 12시부터 4시까지 있었던 통행금지가 해제 되었고.. 고요한 밤이 완전히 ‘시끄러운 밤’ 으로 변해버렸는데, 재미있던 사실은 이런 비슷한 현상이 일본 도쿄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한다. 그들은 사실 우리 같은 통금해제 같은 해방감도 없었을 것인데..그날 후 언론에서도 모두 반성을 하는 논설을 폈다. 성탄의 본고장에서는 그날이 제일 조용한 날이라는데.. 어찌 이곳은 이렇게 시끄러우냐 하는 논조였다. 물론 이런 추억은 종교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성탄에 관한 것이다.

대학시절에는 외국의 캐롤이 많이 정착이 되기 시작했고, 우리 또래의 젊은 가수들이 편곡을 해서 토착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제일 추억에 남는 것이 송창식, 윤형주 Vocal Duo Twin Folio가 불렀던 Silver Bells라는 곡, 이것이 그들의 목소리에 가장 잘 맞았던 곡이었다. 그 후에 미국에 와서는 본고장, 본토박이 캐롤을 듣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찬송가’ 스타일의 classic carol들을 듣게 되었다. 그 이후 매년 이맘때면 거의 같은 것들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었다. 1979년 성탄을 고국에서 결혼을 앞두고 맞게 되었는데 그때에 거의 우연히 세종로 네거리, 교육회관 옆의 어떤 서점에서 Paul Mauriat (폴 모리 악단)의 1967년 크리스마스 앨범 카세트 tape을 사게 되었다. 어찌나 편곡과 연주를 감미롭게 잘 했던지.. 그 중에서도 White Christmas와 Trois anges sont venus ce soir.는 “편곡,연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이 앨범은 그 이후로 우리 집의 classic Christmas favorite 로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1990년대 중반 쯤이었을까.. 출퇴근을 하면서 나는 주로 PBS 를 듣는데, 거기에서 The Roche라는 여성그룹의 carol CD가 소개 되었다. 세 자매인 듯 한데.. 모든 classic carol들을 정말 신선하게 arrange를 하고 티없이 깨끗한 화음으로 불렀다. 어렸던 우리 아이들도 듣기에 좋았던 모양으로 이것도 역시 family favorite가 되었다.

 

 

The Roches – Star of Wonder

 

 

Give me a BIG break!

“Late” Christmas Tree’s Up!  어제 2010년 우리 집의 Christmas tree가 첫 불을 켰다. 우리 집의 성탄절 장식은 꽤 오래 전부터 작은 딸 나라니가 도맡아서 거의 전담을 하고 있다. 이제는 그것이 정상인 듯한 느낌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물론 우리부부가 거의 했지만 해가 갈수록 아이들이 커 갈수록 우리는 뒤로 밀리게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한가지 증거에 이것도 포함이 될 듯.. 큰 딸애는 성탄이 되면 선물장만에 더 신경을 쓰고 작은 딸애는 이렇게 장식에 힘을 쏟는다. 가족 전체로 보면 조금 균형이 맞는다고 할까.

Family Christmas Tree, 2010
Family Christmas Tree, 2010

약 4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지붕처마에다 icicle (고드름) light를 하곤 했다. 처음에는 하도 그 모습이 멋있어서 멋도 모르고 반 나절 동안 그것을 다느라고 힘을 썼었다. 사실 반나절 노동에 비해서 그 결과는 spectacular한 것이다. 그때는 또 이것이 유행을 하던 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 후로는 못하고 있는데, 제일 큰 이유는 높은 2층 높이로 사다리를 타야 하는 것에 있었다. 2006년에 한번 떨어진 이후로는 조금 조심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하나도 문제가 없는데 옆에서 보는 가족들을 내가 보는 것이 불쌍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 우려는 근거가 있었다. 근처에 사는 어떤 한국남자분이 식구가 없을 때 사다리에서 일을 하다가 떨어져서 사망을 한 일이 있었고, 그 이후 우리 식구들은 극도로 내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일을 하는 것을 극구 말렸던 것이다. 100% 나도 이해를 한다. 절대로 무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하나도 문제가 없는데..

IKEA Tundra’s Marching On.. 우리 집 아래층이 90% 이상 IKEA Tundra laminate floor로 바뀌고 있다. 시작을 한지 거의 반년이 지나가고 있다. flooring work 시간적으로 아마도 기록적일 것이다.

Nice looking Tundra over Family Room
Nice looking Tundra over Family Room

여름에는 너무나 더워서, 그 미묘한 technique을 체험하느라, 피곤해서.. 등등의 이유로 거의 의도적으로 느리게 일을 했었다. 한 동안은 너무나 ‘지겨워서’ 한달 이상을 쉬기도 했고, subfloor의 ‘구조적인 결함’을 고치느라 몇 주일을 보내기도 했다. 나만이 가진 장점중의 하나는 ‘마감 날자’가 불 분명하다는 것이다. 빠른 시간에 끝을 내면 물론 좋겠지만 그것 보다는 ‘즐기며’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professional자격은 거의 없는 것이다. 나는 100% amateur인 것이다.

아래층의 구석구석이 조금씩 wood floor로 바뀌는 과정을 보는 것도 올해 들어서 우리 식구들의 즐거움이 되었다. 이제 남은 곳은 조그만 closet, half-bath, laundry area 정도인데 그 중에 제일 큰 것이 half of kitchen인데, 골치가 아픈 것이 그 무거운 냉장고를 임시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아~~ 이럴 때, 건장한 아들녀석 ‘한 마리’라도 있었으면.. 한숨이 나온다. 아래층이 다 끝나면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위층으로 계속이 될 것인가.. 계속이 되면 지금의 IKEA Tundra로 할 것인가.. 조금 다른 것으로 할 것인가, 색깔을 조금 진한 것으로 바꿀 것인가, 더 고급으로 올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결과적으로 처음에는 나의 기술이 없어서, 불평도 많이 했지만 제품에는 ‘절대로’ 문제가 없었다. 아니, 아주 아주 남에게도 권할 만한 좋은 제품이었다. Thanks IKEA, for the excellent value!

TIME’s “Person of the Year” goes to FB’s Mark Z..  Give me a BIG break!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아마도 이 타임 지의 기자들이 FB(FaceBook)의 열렬한 user들인 모양이다. 암만 그의 stock price가 그렇고 높아도, 26세의 ‘아이’ 에게 Person Of the Year, 는 ‘정직하게, 근면하게’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조금은 우습게 보는 결정인 것이다. 기술적으로 보아도 scalable web application하나를 만든, 그것도 자신이 아닌, 그런 인간이 $$$$$$를, 그것도 stock price로, 어느 학교 군에 donate를 하고, 뒤로는 자기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 하고.. 참, 이것이 요새를 사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인가? 이런 것들을 해서 $$$$를 긁어 모아서 ‘하루아침에’ TIME지에 올해의 인물로 뽑힌다면, 학교는 이제 갈 필요가 없을 듯하다. 정말 정말, 재미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ANY CHARACTER HERE

Retiring HP LaserJet 6L

Venerable HP LaserJet 6L
Venerable HP LaserJet 6L

며칠 전에 우리 집의 역사 깊은 printer 하나가 퇴역을 하게 되었다. 1997년 6월에 무려 $400을 주고 산 HP LaserJet 6L.. 처음 나올 당시에 가정용으로 쓰기에는 조금 과분하던 아주 단단한 레이저 프린터였다. 이런 제품들은 문제가 생기면 제일먼저 paper handling mechanism에 문제가 생긴다. 제일 많이 움직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그런 문제가 한번 있어서 내가 한번 고친 적이 있었다. 워낙 ‘비싼’ 것이라서 부품을 내가 사서 고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거의 9년이 되어간다. 그 동안 그런대로 문제가 없더니 며칠 전에 드디어 paper feed가 되지를 않았다. 이번에도 전과 같이 부품을 사서 고쳐도 안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computer hardware의 값이 말도 안되게 떨어졌다. 이제는 새것을 사는 것이 훨씬 경제적인 것이다. 성능이 훨씬 좋고, 심지어는 wireless network까지 support되는 model이 $100정도인 것을 보고 참.. 좋은 시절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새로 order한 printer model은 HP LaserJet Pro P1102w 인데 shipping 까지 포함해서 $100 정도다. 이제부터는 printer를 home network에 직접 연결을 해서 쓰게 되므로 따로 printer server PC를 쓸 필요가 없어서 정말 편리하게 되었다.

 

雜想: 눈발이 흩날리는 일요일 오후에..

눈발이 흩날리는 일요일 오후에..  어느덧 2010년 대림 3주로 접어들었다. 그러니까 대림 초 3개가 켜지는 일요일이 된 것이다. 지난주에는 주일 미사를 빠지고 말았다. 그 전날 아틀란타 한인성당에서 있었던 레지오 마리애 연차 총 친목회에 거의 하루 종일 참석을 한 것이 조금 피곤했다는 것이 핑계가 되었다.

대림 2010 3주일
대림 2010 3주일

물론 핑계에 불과하고, 아침에 조금 피곤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명심을 하고 미국본당의 미사엘 갔고 Panera Bread (Cafe)에 들려서 평상적으로 small breakfast (bagels & coffee)를 즐겼다. 그런데 회색 빛 하늘에서 하얀 것들이 조금씩 내려옴이 보였다. 분명히 눈발이었다. 싸늘한 바람과 함께.. 아.. 기억에 남을 12월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경험적으로 십중팔구는 싸늘한 비가 올 시기에 어렸을 때 보던12월의 눈은 참 아름다운 느낌으로 과거와 함께 내려오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온다.

여기까지가 즐거운 것이고.. 다음은 다르다. 12월 자체가 완전히 무엇에 밀려가는 무거운 느낌인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제일 극치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다. 그날로 그렇게 떠들고 북적대던 것들이 거짓말같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그것은 거의 고통이다. 물론 이것은 ‘세속적’인 풍경이지만, 믿는다는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오죽하면 유타주(State of Utah)의 한 주교는 ‘공문’으로 “12월 24일 이전에 크리스마스 기분을 즐기지 말라” 고 말까지 했을까? 나도 사실 이 말에 동감이다. 그것이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일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완독(完讀)  어제로 레지오 교본을 한번 다 읽은 셈이 되었다. 비교적 얇은 종이로 된 책이라서 보기보다 분량이 많았다. 거의 500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올해 10월 19일에 아틀란타 본당 꾸리아 소속의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 예비 행동단원(공식 선서까지 3개월간의 대기단원)이 되면서 받은 책이 바로 이 공식 레지오 교본이었다. 이 책을 받으면서 단원들이나 단장으로부터 아무런 말을 들은 것은 없었다.

레지오 교본
레지오 교본

그저 공식교본이니까 읽어야 한다는 ‘묵언’ 정도만 나 나름대로 느꼈을 뿐이었다. 하기야 정기회합 중에 항상 조금씩 읽고, 돌아가면서 공부를 해 와서 발표하는 것은 보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렇게 하다가는 시간이 너무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입단 1주일 뒤부터 미친 듯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냥 읽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지루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든 것이다. 그래서 조금 변화를 준 것이 keyboarding 으로 하는 ‘필사’였다. 한글타자를 치면서 읽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읽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이것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에 비해서 keyboarding을 하면 오타에 대한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까 더 정성을 드리게 되는데, 여기에 글이 의미를 파악하려면 더 ‘머리’를 써야 한다. 조금은 “고행”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거기다 다 읽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완전한 나만의 text copy가 남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copyright가 된 것이라 공개는 못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읽은 것은 ‘정독’은 절대로 될 수가 없다. 그저 ‘속독’ 정도가 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읽음으로써 정말 내가 그 동안 가톨릭 신자로써 무심하거나 무식한 것들이 참 많았다는 것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이 교본의 ‘역사’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레지오의 90년에 가까운 역사를 고려한다면 이 책이 오랜 동안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심오한 신학적 고찰과 거의 cookbook에 가까운 실제적 방법론이 기가 막히고 교묘하게 접목을 이루고 있는 이 책은 나에게 거의 제2의 성경에 가깝게 느껴진다. 1월 중순에 있을 정식단원 선서 전까지는 ‘완전 정독’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른 책들도 이것과 같이 잘 쓰여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Amazingly Stupid Chinese (Government)…  솔직히 말해서, 나는 ‘듕귁’ 이라는 말조차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듕귁정부라는 말은 더 좋아할 수가 없다. 더구나 빨갱이 듕귁과 듕귁정부는 지독히도 싫어했다. 각종 이유로 자기네 인민들을 수백만 명이나 굶겨 죽이고 문화혁명이라고 해서 모택동을 신격화하고.. 정말로 그들의 해괴한 행적은 끝도 없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드디어는 “인민의 적인 자본주의” 를 교묘하게 이용을 해서 흡혈귀와 같이 $$$를 거지같이 모으더니 아주 선진국같이 행세를 하려 든다. 머릿속은 19세기에 머물고 있으면서 21세기의 국제사회를 대하려 드니 문제가 없을 수가 없겠다. 그 “해괴한 행적 올림픽” 중에서 금메달은 “바티칸과 상관없이 가톨릭 신부,주교를 임명하는 것”이고 은메달은 노벨 평화상에 대해서 “몇몇 광대들에 의해서 듕귁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듕귁 외무성의 성명이다. 이들은 $$$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 모양이다. 빨갱이 시절에는 무시무시하게 많은 인구 덕분에 핵전쟁도 무섭지 않다고 떠들더니 이제는 무시무시하게 많은 $$$ 덕분에 국제적인 관행을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다는, 역시 “빨간 짱꼴라” 적 발상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Elizabeth Edwards…  요새는 참 용감한 여성들이 많다. 과거에 비해서 더 많아진 듯 하다. 어떨 때는 남자들 보다 더 용감한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여성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나와 나이도 비슷해서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공적인 인물이 그것도 암과 싸우다 죽으면 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모든 사람이 다 미리 알 수 없는 수명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모두들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산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내일 이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실감나게 든다. 물론 평균수명이라는 것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통계이고, 나는 그 통계와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나는 제일 가까운 사람,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느끼기 시작을 했고, 지금은 그런대로 유한하고, 비교적 짧은 인간수명을 느끼면서 하루하루 사는 셈이다.물론 이 ‘용감한’ 여성은 암이라는 병에 의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삶이 끝이 났지만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용감함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Early Siberian Blast

드디어 온다. 하지만 한 달이나 일찍 온다. 진짜 추위가 Siberian Express.. 라고나 할까. 한반도에서는 Siberian Express라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Canadian Express가 더 맞는 말이다. 기온이 하루 사이에 무려 화씨 20도 이상 떨어지고 있다. 모래 새벽의 기온은 화씨로 15도까지 내려갈 예정.. 화씨로 15도면 섭씨로 얼마나 될까? 아마 영하 10도 정도가 될까? 좌우지간 이곳의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추위인데, 여기 바람까지 합세하면 wind chill(체감온도?)은 훨씬 더 심할 것이다. 12월의 이곳은 주로 싸늘한 비가 많이 오곤 하는데 12월 초에 이런 것은 나의 기억에도 거의 없는 것이다. 작년에 이런 강추위는 평년대로 1월에 시작이 되었다. 여름이 지독히 더워서 이것은 역시 예상이 되긴 했다. 연평균은 아직도 거의 일정하니까. 이곳이 이 정도면 북쪽지방인 mid west지방은 훨씬 더 추우니까.. 상상이 간다. 이런 것들 때문에 조금은 더 12월에 있는 ‘휴일’의 기분이 나긴 하지만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조금 괴로울 것이다.

어제는 나에게 조금 이색적이 날이었다. 모처럼 한국사람이 제법 많이 모이는 모임에 참석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참가한 곳은 아틀란타 “한국순교자천주교회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제13차 연차 총 친목회”란 길고 긴 이름의 모임이었다. 이런 모임의 이름들은 사실 그렇게 생소한 것이 아닌 것이 연숙이 가끔 전에 언급을 했던 이름들이었기 때문인데 내가 그곳에 가게 될 줄은 정말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이것은 조금 신비스럽다고나 해야 할지 나도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다. 지난 10월 말 부터 나가기 시작한 레지오 회합도 이제 거의 2달이 되어오고 조금 성모님 군단 일원으로 조금씩 나의 모든 것들이 조정이 되고 있음을 느끼고, 그런 배경에서 참가한 이 연례행사는 나에게 너무나 은총과 기쁨의 시간을 주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많은 ‘전우’들을 보게 된 것도 그렇고 막강한 인원으로 같이 바치는 묵주기도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나는 사실 처음 그런 것들을 보는 것이다. 비록 동료단원들의 친목이 주 목적이겠지만 공식적인 기도, 신부님 참여 등등이 오묘하게 섞이어서 균형을 잘 맞추었다. 이런 모임이 다른 곳에 어디에 또 있을까? 물론 모두가 ‘행사의 프로’가 아니라서 모임의 진행이 100% 매끄럽지는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다. 특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중에 Audio system의 중요성을 이번에 느꼈는데.. 이것에 문제가 있으면 모임의 진행이 얼마나 힘든가를 절감했다. 이런 모임을 준비할 때는 이것부터 미리 점검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단원들이 열심히 참가를 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까?

 

Catholic Sunday

Advent 2010 (2010년 대림절)…  오늘은 천주교 달력으로 새해가 되고 예수님 탄생인 12월 25일 성탄절까지의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개신교회에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이름이 따로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에 들어본 적이 없다.예수님 활동 당시 12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이 Roman Catholic, 천주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 전통들은 알면 알수록 , 더 알고 싶은 것 투성이다. 이날부터 제대 옆에는 대림을 상징하는 4개의 촛불이 세워지고 한 주일마다 초가 하나씩 켜진다. 이것도 천주교의 특징인 ‘상징’적인 의식일 것이다.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우리는 주일미사를 집 근처에 있는 미국인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본다. 이곳도 거의 10년 넘게 다녀서 정이 들었다. 아침 8시 반의 미사에 가면 거의 앉는 자리가 정해질 정도로 익숙한 신자들이 많다. 혹시나 낯익은 얼굴이 안 보이면 신경이 쓰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제는 사실 주임신부님 보다는 부제님 중에 있다. Deacon John이라고 불리는 부제님, full name은 Deacon John Duffield인데 건장한 체구에 단정한 흰머리, 항상 진실된 웃음을 띈, 순진하게도 보이는 얼굴, 그 보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그 ‘경건’한 태도이다. 주임신부님보다 더 경건하게 미사를 돕는다. 이분이 부제가 된 것도 5년 정도 되어간다. 나이도 나와 같고 직업은 사실 nuclear engineer, U.S. navy officer로 nuclear submarine (핵 잠수함)이 전공이다. 그가 이렇게 공학도라는 사실이 나를 참 기쁘게 한다. 가끔 하는 설교도 어찌나 그렇게 틀에 박히지 않았는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것들..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속으로 나도 여생을 그분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내일은 이 미국본당에서 penance service(판공성사)가 있는 날이다. 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한번 하고 부활절 전에 또 있다. 쉽게 말해서 천주교 특유의 ‘고백(고해)성사’인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만큼 이 성사를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것을 하려면 정말 심각하게 자기를 되돌아 보는 ‘양심성찰’을 해야 하니까. 자기의 죄를 찾아 내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2년간 이 성사를 못 보고 있고, 이것이 항상 나를 찜찜하게 한다. 사실 이것을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로 하는 고백성사는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니까..

 

I Understand, by G-Clefs…  며칠 전부터 정말 이상하게도 oldies중의 I Understand란 곡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발전이 아닐까.. 년 말이 되어가고, 그러면 분명히 Auld Lang Sine이 불릴 것이다. 그 곡이 background 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G-Clefs가 불렀던 60년대 초의 hit,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이 곡을 부른 group G-Clefs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 이번에 알고 보니 이들은 내가 잘 못 추측한 대로 영국계통의 그룹이 전혀 아니고, 미국의 ‘흑인’그룹이었다. 사실, 적지 않게 놀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이 곡은 미국에서 1961년에 나온 것이지만 우리 때는 거의 1964년경에 많이 알려진 곡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고2 때였다. 년 말에 많이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2때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역시 1964년이 저물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학급회의, 그러니까 home room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에 모두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을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고2때 특유의 감상에 젖은 그런 분위기.. 고3이 되기 전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듯한 심정으로 이별을 서러워하는 기분에 모두들 휩싸인 것이다. 바로 그때다.. 제일 키가 컷 던 김용만이 G-ClefsI Understand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순진했던 가슴들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고교2학년은 정말 모두들 문학소년,소녀들이었다. 지독히도 순진하고, 이상적이었던 그 일년.. 그때에 생각하고 꿈을 꾸었던 장차 다가올 인생들.. 과연 어떠한 인생들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기쁨, 행복, 괴로움, 후회를 만들며 살았을까? 갑자기 지독한 감상에 젖는다.

 

I Understand by G-Clefs, 1961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Your love for me, why not be mine?

It’s over now but it was gr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miss you so, please believe me when I tell you

I just can’t stand to see you go

You know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SPOKEN: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Let bygones be bygones. But always

remember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We’ll sip a cup of wi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

I underst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