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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1969 1969 1969 ….

나는 지금 한창 ’20세기’, 1969년 경으로 돌아가 그때의 개인역사, 내 주변의 세계를 머리를 쥐어 짜며 기억하려고 각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나의 본격적 시대별 회고록 series blog: memoir 가 3년 전쯤 1968년경을 마지막으로 멈추었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도에서 나이 20세가 되던 1968년경까지는 글로 남긴 셈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그 이후에서 현재까지 것들, 세월로 보면 엄청 길었던 시절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다.

얼마 전부터 더 이상 1968년에서 멈추어 있을 수 없다는 우려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그 당시가 명료하게 기억이 나던 것들이 이제는 급속도로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위기의식을 갑자기 느낀다… 내일 아침을 내가 못 본다면.. ‘나, 平昌李氏,  이경우 李炅宇‘라는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만 아실 수 있는 영역에만 속하게 된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1969년은 내가 연세대 3학년 시절인데, 오랫동안 머리 속에 그 당시의 기억을 조금씩 정리하고는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정리가 되고 정확한가 한 것이다. 당시의 개인 일기는 물론 남아 있을 리가 없고(사실 일기가 있었지만), 사진 몇 장 정도로 상상력을 동원하면 대부분 ‘희미한’ 회상이 가능하다. 게다가 당시의 신문들, 특히 국제적인 역사는 미국의 대표적 화보잡지 LIFE magazine 에 의지하면 된다. 하지만 이 작업은 거의 나 자신과의 싸움에 가깝다. 이것도 기적과 같은 높은 곳의 도움이 필요한데.. 어떨까?

Neil Armstrong 의 잡음이 섞인 달착륙 당시의 육성, 소백산 연화봉 정상의 운해, 3선 개헌 반대 데모 때 최루탄이 나르던 연세대 굴다리, 기타귀재 鬼才 보성고 심재흥과 YMCA sing-along-Y 전석환, 미국 Woodstock  (rock) festival,  Pop, Folk & Rock music에 심취하던 시절 등등 거의 생생하게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비록 이 작업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보내는 시간 그 자체는 즐거움 바로 그것이다. 한마디로 ‘기쁜 우리 젊은 날’ 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이니까.. 이것도 ‘세월의 선물: 늙음만이 주는 특혜’ 중에 하나일 것이다.

 

Galveston – Glen Campbell – 1969

 

Sweet Caroline – Neil Diamond – 1969

 

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들이 남하를 시작, 수원 근교를 지나가고 있다 – 1950년 7월 11자 Life magazine

 

육이오, 융요..유기오.. 6.25.. 1950년,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이것도 이제는 쉽지 않구나. 반세기도 모자라서 67년 전이란 말인가? 나에게 이 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집, 가족의 형체를 철저히 망가뜨린 동족상잔의 시작인 날은 분명하고,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머리 속의 깊은 속에서는 분명히… “김일성 이 X새끼야, 내가 지옥까지 너를 찾아내서 다시 한번 더 확실히 죽여 버릴 거다!!!!”라는 절규가 울리고 있다. 100% 동감하는 나의 심정이다.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저주의 정도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빨갱이들과 민족화해라고.. 허.. 정말 죽여주는 말이다.

 

아.. 압록강으로 올라가던 MacArthur가 이 개새끼를 잡았더라면, 역사는..

6.25 사변이 정전armistice 으로 끝났던 어렸을 적에는 물론 ‘반공, 멸공,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우리 할아버지’를 따라서 무조건, 무의식적으로 반공, 역적 개새끼 김일성을 외쳤지만 같은 구호를 외치며 경제개발을 시작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독재’ 덕분에 한때는 반공보다는 반독재의 고함소리에 솔깃했고,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젊은 피가 인생, 삶의 피로 바뀌기 시작한 그 이후의 오랜 인생여정, 내가 살던 지리적 여건으로 ‘탈 脫 사상 思想’ 의 변화의 시기들도 있었다. ‘잊자, 조국’, 대한민국 무관심의 세월이었나? 그 후에는 조국도 변하고 나의 나이도 진전을 해서 세상이 변했던가.. 하지만, 시간의 irony는.. 결국은 ‘박정희 향수’에 젖은 기분도 느낀 것이다.

 

이런 ‘복잡한’ 나의 조국관 祖國觀 을 정리해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아마도 많은 노력일 필요할 듯 하다. ‘국가’란 것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인가, 하는 단계까지 내려간다. 이런 ‘정치적 인간, 인생’의 차원은 어느 정도 ‘높은’ 것인가?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어떤 세상이 보이는 것인가?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나의 고뇌는 이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해괴하기까지 느껴지는 대한민국의 정국, 멀쩡하던 여자 대통령이 갑자기 수의를 입고 나타나고, 그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멀쩡한 군중들’.. 이것이 어떤 나라인가? 아마도 현재 조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민주주의의 이상형이 바로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며 박수를 치는’ 그런 것인가? 세상에 유례가 없는 선진형 민주주의라고? 유례가 없기는 하지만 과연 이것이 advanced, vibrant democracy인지는.. 글쎄올시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이런 분석이 모두 내가 피부로 느끼는 ‘추측’이라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으로 바라보았던 그쪽의 정확한 사정을 나는 알지 못하기에 이런 논평 자체가 ‘실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나 ‘빨갱이’란 말이 연계가 되면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6.25 를 연상할 수 밖에 없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된 소위 말하는 ‘progressive 한 정권’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

 

6.25를 맞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속에는 이런 것도 있다. 이것도 물론 나의 제한된 지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extreme, mass narcissism에 빠진  ‘집단적 자기 도취’에 빠진,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나의 ‘코끼리 만지는 장님’ 식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1980년대의 일본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원화 평가절상 후 세계를 돈으로 석권하며 자기도취에 빠진, 이제는 지구상 다른  어느 곳에서도 더 배울 것이 없어진 것을 애석해 하던 그들. 그 이후 30년 어떻게 그들은 변했던가? 이제는 당시의 ‘일류 日流’가 ‘한류’로 바뀐 것 뿐.. 그것에 환호하며 ‘자기들이 뽑아놓은’ 현 대통령을 감방으로 보내는 것에 ‘아이들까지 환호’하는 그런 나라.. 가.. 나는 정말 싫다.

 

통일, 그러면 통일은?  나를 포함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김일성 X새끼가 소련제 tank로 ‘쉽게’ 통일을 하려던 바로 그것, 어떨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듯 보인다. 아주 고차원적인 초월적인 도움, 아주 먼 옛날로 갈 필요가 없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민주화’되고 독일이 통일되었던, 그것도 1980년대 이후를 공부해 보면 무언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초자연적인 도움1 이 필요한 바로 그런 것이다.

 

  1. Fatima의 성모님이 예견하고, Saint John Paul Second, Ronald Regan, Gorvachev 등이 주도 했던 소련 붕괴

¶ Morning routine gone: 4월보다 더 싸늘한 5월의 어떤 날들을 기억한다. 오늘 2016년 5월 5일이 바로 그런 ‘싸늘한 날’ 이 되었다. 그런 싸늘한 아침에 ‘비상용’ 이불을 더 덮어서 잠은 포근했지만 온 몸은 완전히 권투시합 15 round에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떤다. 아프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특히 손, 팔, 허리, 이빨 등등이 더 아픈 듯 느껴졌다. 어제 갑자기 ‘남용’한1 나의 근육들이 치열하게 데모를 하는 것인가? 곧바로.. 아하~ 나의 몸이 나에게 ‘오늘 아침 morning routine은 없는 것으로’ 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아~ 미안합니다..

오늘 아침의 ‘regular routine’은 9 AM daily mass와 breakfast@SonataCafe, 이후 곧바로 YMCA workout 바로 그것들인데 이 세가지가 순식간에 없어진 것이다. 이런 routine들, 특히 ‘영육간’에 중요한 routine들, 전부터 둘이서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다. 얼마 더 남은 인생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절대로 sprinter가 아니고 marathoner라는 생각으로 살자는 것이다.  serious Moderation, compromise..하는 기분이 아니면 절대로 한 달도 못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그런 덕분에 ‘좋은 routine’들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최소한 5년 이상 꾸준히 지켜지는 routine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서 지금은 생활, 몸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daily mass를 빠진 것은 아무래도 미안합니다… 라는 말이 귀속에서 맴돈다. ‘성체,성혈’을 놓친다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서 생사 生死같은 큰 차이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인자하신 우리 천상의 어머니께서.. 그래 무리하지 마라.. 오래 오래 뛰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하고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실 것 같다.  OK, 간바로, 성모님!

 

 

¶ 어린이 날: 5월 5일하니까, 직감적으로 친근한 5/5의 연속.. 아하.. 어린 시절에 제일 좋았던 일년의 하루, 우리들의 날 어린이날이구나! 하지만 지금도 대한민국에 5월 5일이 어린이 날인지는 잘 모른다. 이것도,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의 유행으로, ‘일본강점기의 잔재’라고 하루아침에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조선 어린이를 사랑했다던’ 방정환 선생님, 이 날을 제정하면서 왜 왜 하필 보기 싫은 일본의 어린이 날인 5월 5일을 그대로 답습을 했을까? 다른 의문점은 해방 이후에 일본이라는 생각만 해도 잠을 못 잘 정도로 반일 증오의 표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이 날을 그대로 놔 두었을까?

상관없다. 우리들 이 어린이날 덕분에 멀쩡하게 한창 화창했던 봄날에 학교공부 완전히 쉬고 하루 종일 선생님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놀았으니까.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물에 빠지면 우리들부터 먼저 구해준다는 등등 참 기분 좋았던 하루를 보냈다. 당시에 불렀던 ‘어린이날의 노래’,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고 가사도 100% 완전히 외운다.

시대적으로 찌들고, 세계에서 모든 ‘좋은 통계’ 에서 거의 바닥에 머물던 조국이었지만, 우리들 눈에 그런 것 크게 상관이 없이 그날 하루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골목에서 만세를 부르며 달리고 숨고 웃고 떠들어댔다. 그렇다.. 바로 그 때의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었다. 다른 것 없었다. 그 동안 강산이 다섯 번 이상이나 변했어도 그 당시의 추억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Battle of Puebla

Battle of Puebla, 1862년 5월 5일

¶ Cinco de Mayo: 싱코-드-마요, 이곳에 오래 살면서 주변국들에 대한 것들 듣고 배우고 알게 된 지도 꽤 세월이 지났다. 특히 남쪽에 사는 멕시코는 사실 북쪽의 캐나다 보다 더 정이 가고 친근한 느낌으로 관심도 많이 가는 편이다. 우선 역사가 그렇고 종교가 그렇다. Guadalupe 성모님은 물론이고 다수가 가톨릭인 순진한 사람들, 비록 잔인하고 부패한 인간들도 ‘닥상’으로 널린 나라지만 그래도 정이 간다.

오늘은 5월 5일, 바로 멕시코 독립기념일(9월 16일) 다음으로 중요한 명절인 Cinco de Mayo,  글자 그대로 ‘5월5일’이다. 혹시 여기도, 어린이날? 물론 아니고.. 이날은 역사적인 날로 1862년 5월 5일,  멕시코 군대가 프랑스 ‘침략군’을 ‘프에블라 전투, the Battle of Puebla‘ 에서 최악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역전승을 한 ‘전승기념일 戰勝紀念日’이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이 ‘막강, 기계화 된’ 일본군대를 섬멸한 정도가 될까?

이 전투에서 만약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면 미국 역사도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의미가 있었던 전투여서 아주 흥미롭다. 간단히 말하면, 침공을 했던 프랑스군 (나폴레옹 3세의 군대)이 멕시코를 제압했었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 중에는 미국의 ‘남부 정권 Confederates’를 돕는 일이었고, 그 남북전쟁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날 승리의 의미는 미래적, 국제적인 것이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멕시코는 더욱 확고해졌고, 링컨이 승리한 미국은 초강대국가 superpower로 운명적인 발걸음을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역사는 재미있고도 심각하다.

 

  1. popup project, 보기흉한 outdoor deck을 고치는 일, 보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4.19 에 대한 것, 물론 나의 기억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당한 부분은 news media에 의한 것들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당시 서울의 일간지가 제일 그렇고 나머지 것 중에는 미국의 LIFE magazine도 한 몫 낀다. 특히 당시의 ‘최첨단’ 사진기자, 기술을 자랑하던 잡지라서 그 역사적 가치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 화보 이외에도 사설, 논설 등도 수준급이었는데, 다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금은 left-leaning (좌향적)  한 쪽이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든다. 4.19 학생 혁명이 난 후 처음으로 기사와 화보를 다룬 것이 5월 9일자였고 거기에는 아주 비중 있는 ‘논설, editorial’이 실렸다. 제목이 바로 The Student Phenomenon, 학생현상(?).. 그 전문을 여기에 발췌하였다.

 

논설의 주제는 바로 ‘학생’들이다. 한국의 학생을 중심으로 세계도처의 학생들,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하였다. 이 논설을 쓰게 된 동기는 ‘분명히’ 한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곧바로 터키에서 4.19 와 비슷한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의 친구’ 멘데레스 수상이 실각을 하였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난처한 사태가 아닐 수가 없었다. 두 나라가 거의 같은 미국의 ‘맹방’, 제1의 적인 소련의 공산당과 총칼로 맞선 나라가 아닌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보니 나라 안에 조금 잡음이 있어도 외교적으로 무마할 정도였다. 4.19 혁명 당시도 미국은 한국 학생의 ‘유혈사태 희생자’정도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에 일이라도 이 사태를 이용해서 김일성 개xx가  제2의 6.25 라도 꿈을 꾼다면 그것이 진짜 미국의 악몽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맹방의 지도자, 사실 또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터키 또한 비슷한 상황이고 보니 한쪽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 다른 쪽은 나토 NATO로 묶여 있는 상황의 미국, 참 입장이 어려웠을 듯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자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태는 흘러갔고 미국의 입장 또한 큰 문제없이 해결 된 셈이다.

 

LIFE magazine의 논설은 다음 사실을 주목하였다.

이 두 나라의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지독하게 심각한 미국 소련간의 냉전상태 라는 사실. 이 편이 아니면 저 편, 중간이 없었던 그런 심각한 냉전 상태에서 ‘약소국’들은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 남용이 허용되었고, 그들이 독재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을 견디지 못한 첫 그룹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미국의 경우,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운동권’ 형성이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의 혁명이 ‘완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문제는 아마도 ‘노예제도의 전통’을 고수하는 주들과 연방정부간의 마찰, 충돌이다.

 

이어서 논설은 유럽의 사례를 들며, 1848년 Hungary 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예로 든다. 근래의 예로써 1956년 역시 Hungary의 소련침공을 유발시킨 ‘자유운동’을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운동들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지만, 극단적인 예외는 세계 제1차 대전을 유발시킨 ‘사라예보사건’ 이었다.

 

논설은 다시 LIFE magazine의 progressive value를 다음과 같은 ‘미국 흑인차별’의 사건들에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South (남북전쟁의 남쪽 측)에서 흑인 학생들이 제도적인 흑백차별에 항의해서 식당 같은 곳에서 백인들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데모’를 벌리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남측의 웃기는 전통’에 대항하는 이런 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신세대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덕이 아닐까.

 

동정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논설은, 학생들이 정부의 극단적인 탄압적인 정책에 반발을 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정치깡패, 정치경찰들이 얼마나 웃길 정도로 비행을 저질렀던가? 그저 휴전선 넘어 김일성 개xx가 ‘무서워서’ 침묵만 지키던 일반 국민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그런 목불인견 적인 꼴들을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런 백주대로 강도 같은 정책을 싫어한 것은 한국 대학생만이 아니었음을 주지하는 논설은 당시의 국무장관 ‘허터 Herter‘와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맹방이고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탄압적인 정책이 안보를 위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국무장관 허터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대한 것도 거의 같은 ‘미소 냉전’의 산물이었다. 공산당을 잡으려는 부패정권에 대항한 학생들의 데모와 항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미국의 기본 자세는 이곳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미의 좌익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쿠바 카스트로 를 왜 미국에 반대하는가 항의를 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스트로 Fidel Castro 가 ‘공약’을 어기고 ‘자유를 억압’ 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것의 밑에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논설은 한국과 터키의 학생들을 지지하는 결론을 내린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불만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의 credo가  Don’t tread on me! (밟지 마!)라는 사실임을 주지해야 한다.

 

 

논설을 4.19혁명이 난지 66년이 지난 뒤에 읽으니 격세지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적으로 가치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느낌이니까. 기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논설이 조금 과소평가한 낙관적인 분석은: ‘미국 학생들은 절대적 자유가 보장된 덕분에 조용할 것이다’ 라는 것.. 이 논설이 쓰여진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서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반정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겪게 되니까.. 월남전의 정당성에 대한 불만에 의한 것, 이것은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가 ‘보장, 허용’ 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irony가 아닐 수가 없다.

 

LIFE cover

LIFE cover

There is a fascinating pattern emerging in Latin America, Korea and now Turkey. What is taking place in these widely separated lands is an outburst of resentment by university students against governments which – partly as a result of the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 have become tyrannical. And what the students are proving – which free men must of course welcome – is that young, spirited and determined people can still make tyrants tremble, and even totter.

Political revolt by university students is a well-known story abroad, thought not common to our own land. This may be a reflection on the seriousness and maturity o f U.S. students but, whatever the cause, other students around the world are politically minded by traditional and are accepted as a dynamic political force.

Perhaps the contrast exists because our own revolution was so complete – in establishing the basic freedoms of conscience, press and speech for once and all – that there has been no need to question what it has settled. The greatest challenge was met in our War Between the States which settled forever that no man may be another’s master.

In Europe, where things have been different, it was a young poet, Sándor Petöfi, who in 1848 set off the revolution in Hungary against the tyranny of the Habsburgs, only to be crushed later by the Russian czar. And it was the students of Budapest again in 1956, acting in the name of Petöfi, who overthrew – if only briefly – the czar’s successors. Serious, impassioned Italian students were the backbone of Garibaldi’s Risorgimento. In France, it was students who in 1897 rioted in defense of Captain Dreyfuss. Students were the nihilists, the anarchists, the Marxists of Russia. What all these movements had in common was idealism backed up by willingness to fight. Sometimes this violence was bent to good ends and sometimes ill. It was, we must remember, a Bosnian student named Princip who at Sarajevo lit the fuse which doomed more than eight million men.

Most of these revolts of the young have been beneficial. We are seeing something of that sort now in our own country. By their sit-ins Negro students in the South are demonstrating the silliness of a system which denies the right of humans to eat alongside one another. They are getting an impressive amount of support from which students outside the South. They are getting some, too, from which students in the South, who find they cannot rationalize or defend these paradoxes. The spread of education in the South has produced a force to make men think.

The students who have overthrown the government of Syngman Rhee in Korea have obviously been stirred to the depths by oppressive practices. Rhee’s motives were understandable in a land which has been horribly devastated by Communist incursions and must still live beneath the gun of possible new attacks. This is true in Turkey, which lies immediately beneath the guns of the vast Soviet Union and is subjected to continuous and insidious subversion. Yet, when all is said and one, the fear of losing freedom can never be made an excuse for suppressing freedom – certainly not as a permanent policy.

The demonstrating students who are insisting on freedom have an ally in Secretary of State Herter. In his denunciations of the killings of South Africa and Korea, he has made clear that he will not allow the common interests of defense to put the U.S. in the position of endorsing practices which offend our basic principles. The students have another wise friend in President Eisenhower. On his Latin American visit Chilean students asked him trenchant questions about our alleged hostility to Fidel Castro. The President’s written answer to them left little more to be said: Castro has betrayed “the ideals of freedom of expression,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and the right freely to choose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course, that is also what Rhee did, and what Menderes is doing in Turkey. Students are letting them know that the time is later than they thought – and are right to do so. And we are right to endorse their legitimate grievances and their right to have them redressed. That is what the world would expect – and is entitled to expect – of a nation born in revolution and whose credo was, “Don’t tread on me!”.

 


 

아래의 사진을 보라.. LIFE에 실린 내 또래 아이들의 모습들.. 국민학생, 중학생이 섞인 이 데모는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송요찬 장군휘하의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내 중심을 장악했을 때 ‘군인 아저씨 우리를 쏘지 마세요’ 라고 다시 학생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외쳤다.

당시 계엄군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며 자기 국민을 ‘보호’하였다. 1년 뒤 5.16으로 ‘그 고마운 군인아저씨’ 들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진을 유심히 보며.. 서울 시청을 뒤로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는 아이들.. 바로 나를 보는 듯 했다. 꾀죄죄한 구제품 옷, 신발, 교복을 ‘걸치고’ 골목 뒤에서 놀다가 나온 모습들.. 바로 나의 모습, 이 사진의 ‘아이’들 다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되었을 것인데 그 날 ‘형님 학생’들에게 이끌려 나온 사연이나 기억하고 있을는지..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아침에 달력을 보니 4월 19일.. 화요일, 물론 4.19라는 숫자는 56년이나 지났어도 어제처럼 느껴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만큼 비록 세월의 깊이에 맞게 뇌의 깊숙한 곳에 잠겨있어도 아주 ‘큰’ 세포에 간직된 것이라 그럴 것이다. 그리고 화요일.. 이었다. 1960년의 4월 19일도.. 99% 화요일이었다는 기억. 5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을 함은, 그 세월이 그렇게 역사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세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일제 36년, 유럽의 100년 전쟁.. 등에서 느꼈던 그 햇수는 너무도 길었던 것이지만 내가 이런 56년을 어제처럼 기억하게 살면서 느낀 것은 너무나도 짧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것이다.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당시의 데모 열기 함성과 카빈 소총 소리, 어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수 많은 군중들.. 그렇게 찬란한 4월의 계절은 소음과 정적이 교차하는 순간들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새카만 교복의 물결, 심지어 대학생 형님들까지도..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뛰고, 트럭을 타고, 소방차를 타고 서울의 중심가를 돌고 도망가고 숨고 쓰러지던 그 때.. 모습들.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공격을 받던 날 우리 중학교 1년생의 혼란한 심정.. 누가 누구를 쫓아가고 쫓겨가던가.. 누가 우리의 역적이던가? 우리들은 그저 놀란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들려오던 요란한 카빈 소총 소리들.. 종로 경찰서 지붕에 설치된 만화에서만 보던 ‘기관총’들.. 곧 이어 아스팔트 길에 우람한 바퀴자국을 내며 웅장하게 들어오던 탱크의 무리들.. 4월 달.. 4월 달 ,1960년의 찬란한 꽃이 만발하던 4월 달이었다.

쓰러진 형님, 누나들.. 그렇게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던 그들.. 지금은 다 어디에 가셨는가? 그들은 과연 그들이 싸우던 목적을 이루며 살았던가? 혹시 그들도 나중에는 ‘역적’들과 같은 무리를 닮아가지는 않았던가?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이승만, 이기붕, 이강석, 프란체스카, 장면, 윤보선, 허정, 그리고 장도영, 박정희..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의 열차에 남았던 역사 속의 그들.. 모두 어디에 있는가? 젊으셨던 우리 어머니, 그래도 이승만의 잘못을 지적하시던 지성을 가지고 침묵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우리는 아직도 그 말의 뜻을 새기고 감사하며 산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그것에서 배우고 최소한 되풀이 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기에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2016년 4월 19일, 싸늘한 아침에 머리를 맴도는 넋두리, 이렇게 정리를 하지만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정상이다.

 

 
‘OHIO’, Crosby Stills Nash & Young 1970

 

KENT STATE.. 1970년 5월 4일, Kent State (University)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기억한다. 이 학교는 오하이오 주 동북지역에 있는 비교적 작은, 알려지지 않던 학교였지만 1970년 5월 4일에 일어난 이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거의 며칠 만에’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그날 이후 역사적인 파장과 의미도 상당하였다. 그날이 바로 1970년 5월 4일 이었다.

1970년 5월.. 기억을 더듬는다. 나의 기억력이 제일 활발하던 22세 시절 그 시절은 어떤 시절이었을까.. 나의 연세대 졸업반 시절, 바로 몇 주전에는 그 유명한 APOLLO 13의 극적인 귀환 뉴스가 있었다. 또한 ‘불도저, 건설 붐’의 서울의 실패작 ‘와우 아파트’ 가 ‘와우~~’ 하며 붕괴를 했었고, 나는 당시 연세대 전기과의 제주도 졸업여행을 ‘반납’하고 창희 용현이와 지리산 장기등반의 희열을 맛 보던 그런 때이기도 했다.

 

졸업 후의 걱정은 비록 서서히 나의 머리를 누르긴 했지만.. 22세의 나이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모든 관심은 가능성이 100% 같이 보이는 ‘멋진 인생’에 있었고, 나를 둘러싼 사정들: 정치, 경제, 사회..등등 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먼 걱정’은 당장이라도 탱크로 밀고 내려올 듯한 휴전선 너머의 빨갱이들과, 다른 빨갱이 월남의 베트콩에 ‘밀려서 고전하는’ 우리의 ‘보호자’ 미국의 어려운 사정이었다.

당시 우리와 같은 대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빨갱이를 증오하는 기본자세는 갖추고 있었고, 그 전해에 있었던 박정희 3선 개헌도 데모를 통한 반대를 하긴 했지만 ‘박정희의 명분’은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에 나온 대학생 ‘군사훈련: 교련’도 반대 데모를 했지만 이미 국민정서는 ‘무조건 안정’으로 흐르고 있었다. 낭만적인 대학 캠퍼스 내에서 장난감 총으로 받던 ‘어린애 장난’ 같던 교련을 우리는 별 수 없이 받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런 식의 ‘교련’이 빨갱이를 막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지는 우리들도 웃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이 고전하던 월남은 한마디로 완전 교착상태였고 미국의 여론도 서서히 ‘철군’ 쪽으로, ‘협상’ 쪽으로 흐르던 때였다. 미국은 비록 기술적, 화력 등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월맹(북 월남)과 베트콩(게릴라)는 ‘민족적 이념’으로 똘똘 뭉친 만만치 않은 적으로 사실은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승산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 특히 캄보디아가 바로 옆에서 피신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닉슨은 그 때 캄보디아 ‘침투’를 선언하게 되었다. 일방적인 선전포고였다.

전쟁이 끝나가나 희망을 했던 미국 여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특히 군대로 나갈 확률이 더 커진 미국 대학생들이 열을 올리며 데모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전에도 간간히 반전 운동이 있었지만 이번은 달랐고, 특히 KENT STATE 캠퍼스에서 일어난 ‘비극’이 그 도화선이 된 것이다.

 

우리들도 대학교 주변에서 데모를 한 경험, 특히 3선 개헌 반대 (1969), 교련반대 데모 등을 한 경험이 있었지만 데모저지를 하는 군경찰 들은 4.19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총기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그저 최루탄과 투석..그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10월 유신 이후에는 조금 달라졌겠지만.. 그런데 인권, 인명을 최 우선시 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보루인 미국, 그것도 대학교 안에서 군인들이 총을 ‘난사’ 해서 사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도 사실 놀랄 일이었다.

비록 4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가 나온 비교적 작은 비극이었지만 그 뉴스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들이 총을 쏜 거리는 거의 100m를 넘어서 사실 ‘대치’ 상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엄밀히 말해서 ‘실탄’으로 발포할 이유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날의 상황을 wikipedia에서 보면 이것은 거의 ‘순간적인 사고’로 보인다. 대치 상태에서 서로의 의도를 오해한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2차적인 문제였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여론과 정치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반전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미국의 ‘모든 학교’가 데모에 가담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전은 점점 증오의 대상이 되어갔고 징집자들은 하나 둘씩 도피하고.. 하지만 이 여파로 ‘데모 진압’의 기술이 연구가 되고 실탄 사용이 억제되는 등..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iconic, Pulitzer-prize winning picture

iconic, Pulitzer-prize winning picture

당시의 현장 사진 중에 하나는 ‘역사 박물관 용’이 될 정도로 유명한 것이 있었다. 입에 M1 소총을 맞고 ‘즉사’한 학생 Jeffrey Miller, 그 옆에서 고함을 지르는 14살의 ‘가출 소녀’ Mary Ann Vecchio의 사진.. 그것은 나중에 Pulitzer상을 받았다. 한 마디로, wikipedia에 따르면 “most enduring image of the events, and one of the most enduring images of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이 된 것이다. 사진화보 주간지 LIFE는 완전히 cover story로 그것을 다루었고 ‘재수 없이’ 사망한 학생들, 특히 ‘반전’과는 무관한 ROTC 학생, William Schroeder는 데모와 상관없이 강의실로 걸어가다가 ‘횡사’를 한 case를 다루었다.

 

이 사건 이후 반전운동, 문화가 확산되고 ‘주옥 같은’ 반전 음악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hit song도 있었는데 바로 Crosby, Stills, Nash & Young이 부른 ‘OHIO‘ 란 노래였다. 당시에 꽤 hit를 한 것이고 이런 영향의 도움으로 여론은 점점 반전으로 기울게 되었다. 당시 우리 입장에서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왜 ‘빨갱이’한테 그렇게 고전을 하고 있는가.. 왜 국민전체가 더 단결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월남에서 ‘후퇴를 하거나 만에 일 지기라고’ 하는 날에는 김일성 빨갱이들도 ‘한번 더 해보자’ 하는 엉뚱한 꿈을 꿀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도 박정희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향 후 월남에서 ‘패 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다행히 그 여파가 한반도로 옮겨오지는 않았다. 이미 빨갱이들의 ‘전쟁 능력’에 한계가 들어나기 시작했고 반대로 박정희의 원대한 국력개발의 꿈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에 이때 벌써 ‘대세’는 정해지지 않았을까.. 이데올로기와 냉전의 그늘에서 한 세대를 보낸 나로써는 사실 월남전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현재로써는 ‘가끔 감상에 젖고 싶은’ 추억의 일부일 따름이다.


 

kent-21970년5월 15일자 LIFE magazine cover

 

kent-7Kent State campus, 최루탄으로 해산을 시도하는 Ohio National Guard

 

kent-3권총과 M1 소총을 ‘일제히’ 발사하는 주 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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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t-6사망한 Jeffrey Miller 옆에서 비명을 지르는 ’14세 소녀’

오늘 2월 8일자 The New York Times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바로 오래 전 우리들의 영웅 ‘안중근 의사’ 의 커다란 사진이었다.

중국 하르빈, 안중근 의사 전시관

중국 하르빈, 안중근 의사 전시관

어떻게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한 얼굴에 이곳에 실렸을까? 안중근 의사의 기일이라도 되었나.. 하고 보니 그것이 아니고 기사의 실제 주제는 중국과 일본의 불편한, 아니면 추한, 험악한 관계발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안 의사의 흉상과 사진 등은 전시장의 모습이었고 물론 중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 정치적인 각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 기사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이 전시장은 1909년 당시 안 의사가 일본의 원로(아니면 원흉)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하던 바로 그곳 철도 플랫 홈 에 있던 철도역사(驛舍)여서 전시의 의미가 더욱 증폭이 됨을 느낀다. 100여 년 전의 그곳의 지정학적인 역사로부터 지금의 사정은 어떻게 변했나.. 참 100여 년은 길게도 느껴진다. 그렇게 역사적인 강산이 변했나..

이 기사에 의하면 작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짱 깨 정부에 안중근 의사를 기려주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전시회는 대한민국 정부의 바램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쾌히’ 받아들인 것은 중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의 표시일 것이다. 여기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다른 민족의 원흉 ‘북괴’ 김씨 왕조의 언급은 없다. 그들의 느낌은 이제 별로 무게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중국, 일본, 빨갱이 북괴… 이 골치 아픈 족속들을 의식하며, 특히 짱 깨 와 쪽발이의 사이에서 박정희의 큰 딸 박근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 1960~70년대에 일본 경제 발전을 모델로 하고 그들의 도움을 철저히 이용해서 한국형 경제발전을 이루어내었던 그녀의 아버지를 잘 아는 그녀는 어떻게 과거를 그녀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과거 전혀 모르고, 아니 피하고 살았던 일본을 최근에 나는 조금씩 ‘문화’를 통해서 접하고 역시 그들도 우리가 배우고 들었던 대로의 monster는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들이었음을 알게는 되었지만 전체적인 집단으로써의 그들은 역시 과거의 monster를 떠올리게 되니..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고치기 어렵고 숨기기 어려운 일단 벌어진 ‘역사’의 문제라서 더욱 골치가 아플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나는 짱 깨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나는 체질적으로 그들이 싫었고 (주로 모택동의 빨갱이 집단에 대한 것)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들의 양심 없는 거짓과 기만, 경험적으로 느껴지는 중국여자들의 해괴한 행동들 등등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피하고 싫어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것들은 나의 일방적인 편견이지도 모르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떻게 이런 편견을 없앨 것인가.. 역시 ‘인간적’으로 그들을 접근해야 할 듯 하다. 일본의 경우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기에 여기에도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 Catechist, catechesis, catechistic, catechistical, catechistically, catechize, catechumen, catechetic, catechetical hew..

     가톨릭 교회의 매력 중에는 아주 풍부한 alphabet soup 같은 각종 용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이 alphabet soup은 라틴어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라틴어를 조금 이해하거나 좋아하면 이것도 매력 중에 하나다. 다만 조금 다른 종교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문제일 수는 있다. 이 라틴어는 영어권에서 보면 동양권에서 한자를 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 용어나 단어들은 조금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긴 역사를 자랑하는 그득한 내용이 담긴 단어들이라 그 옛날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할 때, WORD POWER를 공부하던 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어의 어원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들이 그 책에 그득했고 그것으로 단어를 배운 것이 ‘영원히’ 나의 머리에 남았고, 모르는 영어 단어를 보면 곧 바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주교 ‘영어’를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모조리 라틴어였다. 그것들이 이곳의 성당에서 영어처럼 쓰이는 것이다. 오늘은 Catechetical Sunday였다. 이 단어도 처음에 정말 괴상하게 느껴졌다. 발음도 그렇지만, 그것과 비슷한, 파생어는 수 없이 많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의미 ‘영세예비자 교리공부’ 에 대한 단어들이란 것만 알면 끝난다. 교리공부라고 했지만 이것은 ‘교실에서 말로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매년 이 ‘교리반 주일’이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이 지났는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우리가 한국본당에서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본당은 거의 ‘봉사자’들이 교리반을 나누어 가르치는데 한국본당은 올해부터는 수녀님이 가르치신다. 그러니까 올해의 영세예비자들은 ‘행운아’들인 것이다. 열명 안팎의 알맞은 인원이라서 토론하기도 좋고, 모두들 진지한 태도와 열의를 보인다. 이들이 내년 부활절에는 ‘모두’ 영세식을 통해 하느님의 새 자녀들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려 본다.

     

  • 아.. 인천..1950

    오늘은 9월 15일 일요일, 하지만 1950년 9월 15일 금요일은 그 유명한 육이오 동란 (일명 한국전쟁)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던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Gen. Douglas MacArthur] 장군의 걸작품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때는 63년 전.. 내가 2살 8개월 되던 때였다. 그 당시 우리식구는 아버지가 납북이 되시고 어머니가 누나와 나, 남매를 데리고 비원 옆 원서동에서 숨을 죽이고 사셨다. 물론 나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2년 정도 뒤부터는 그 원서동의 분위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인천..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박경원씨의 구수하고도 경쾌한 노래를 들으면 인천의 냄새가 그대로 나는 듯하다. 서울 재동학교 5학년 때, 그러니까 1958년에는 5학년 전체가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 인천 부두와 월미도가 내려다 보이는 만국공원, 그곳에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의 동상 아래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1950년대의 인천은 참으로 멀었다. ‘증기, 화통’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갔을까.. 그래서 그랬을까? 인천을 번개와 같이 점령한 유엔군(사실은 미군과 국군)은 예상을 뒤엎고 서울을 탈환하는데 무려 2주가 결렸다. 그렇게 멀었을까? 빨갱이들이 6.25 발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지나치게 서울에서 꾸물대다가 ‘부산 해방’을 놓쳤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것과 맞먹는 유엔군의 실수는 그렇게 느린 서울 탈환이 아니었을까? 서울탈환, 그러니까 구이팔, 9.28 수복이 되던 때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독 안의 쥐가 된 빨갱이들은 여유 있게 ‘양민학살과 38선 이북으로 도주’를 했을 것이다. 순전히 결과론이지만 맥아더 장군의 ‘오만과 아집’이 조금 덜 했더라면, 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었더라면, 중공군의 개입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했을 것이고 흥남철수1.4 후퇴 같은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 후에도 미국이 조금 더 ‘모험’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만주를 폭격하거나 원자탄으로 위협을 하는 맥아더의 구상이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때 통일이 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고 한민족 만고의 1급 역적, 원흉 김일성 일당을 처단 못한 그것이 이후 한반도, 한민족 비극의 씨앗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악의 씨는 그대로 남아 민족반역자 3대, 그 중에 마지막 인간은 새끼돼지 같은 젖먹이, 현대 역사 박물관 전시물 제1호가 될 만한 ‘북조선 김씨 왕조‘를 유지하며 장난감 핵무기로 장난을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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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으로 상륙하는 미국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오늘아침에 일어나서 모처럼 network TV morning show를 잠깐 보다가 오늘이 9월11일, nine-eleven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2001년, 나인 일레븐 에서 12년이 흐른 바로 ‘그’ 나인 일레븐..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어떻게 올해 나는 ‘철저히’ 이것을 잊고 있었을까? 내가 나 자신에 놀란 것이다. 저녁 TV 뉴스를 보니 이곳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인가..별로 ‘감동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Syria 문제로 또 다른 전쟁행위의 가능성을 알기에 그런가? 솔직히 12년 전부터 시작된 ‘빠가, 조지 부시의 미친 보복 전쟁들’ 이 지겹게 느껴지는 마당에 또 ‘쳐들어’ 가겠다니.. 이번에는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의 차례인가? 왜 세상이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청명한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Twin Tower의 까만 연기를 보며 ‘인간이 아님을 자랑으로 아는’ 광신교 이슬람의 극단성과 ‘너무나 명백한 악의 존재’를 느꼈다. 그 ‘미친 놈’들이 아마도 antichrist정도의 purest evil이 아닐까.. 극단주의와 상대주의가 맞물리고 꼬이던 21세기의 벽두에..

 

빠가 부시는 측근의 ‘늙은 전쟁광과 그의 부관’들에1 의해 놀아났지만, 솔직히 말해서 빠가 부시 자신은 머리 속이 비교적 ‘간단한’ 인물이어서 예측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현재의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란 인물은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고, 그의 ‘뒤에 숨은 안건’은 예측하기가 힘든 정말 겁나는 인물이다. 혼돈과 파괴의 2000년대의 과정에서 이 인물의 급부상을 보며 나인 일레븐 같은 대 참사가 주는 극단적인 여파를 생각한다. 한편의 극단에서 빠가 부시에게 던덜머리가 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빠가 부시만 아니면 OK‘라는 지친 심정으로2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란 미지의 인물을 택했지만, 이것은 커다란 ‘도박’이었음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빠가 조지 부시와 그를 사주하던 ‘전범’들이 나갔고 그 자리에는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이 들어와 4년 이상 그들의 정체를 조금씩 들어내고 있지만, 그들이 역사적으로 미국이란 나라에 남기고 갈 ‘무서운 유산’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쉽게 예측이 가능한 것 중에는 ‘극단적 도덕상대주의 독재체제‘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는 사실이다. 바락 후세인 오바마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밀어 부쳤는지, 아니면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는지는 시간이 흐른 후에 역사가들이 밝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시도하고 행했던 여러 정책들 중3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것과 선거를 위한 ‘술책’으로 그는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100% 새빨간 거짓말임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락 후세인 오바마 정체 중에 들어난 몇 가지일 뿐이다. 3년 뒤에 그는 없어질 것이지만, 그가 남기고 갈 ‘썩은 유산’은 두고 두고 씻어내어도 없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1.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인 Dick CheneyDonald Rumsfeld, Paul Wolfowitz 같은 neo-conservatives
  2. 이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구 정치인들에게 지친 국민들이 노무현같은 ‘알 수 없는’ 인물을 ‘감정적’으로 대통령으로 뽑은 기가 막힌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3. 지나친 다원주의, 자연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책들, 모든 것은 공평하다라는 허구 신봉’ 등

 

섬유공장 기계를 부수는 Luddites

섬유공장 기계를 부수는 Luddites, photo credit: wikimedia

Luddites.. textile workers in early 19th century England. 그들은 누구였나? 한글로는 또 어떻게 쓰는가 Naver 사전은 이것을 러다이트 로 표기하고 있다. 이들은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Luddite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산업혁명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산업화, 기계화 되기 전 방직공장(섬유공장)의 artisan(장인)들이었는데, 과장된 표현으로 ‘하루아침’에 기계에 밀려서 직업과 직장을 잃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산업혁명의 ‘예기치 않았던’ 첫 희생자들이라고나 할까? 장인들.. 지극히 인간적인 손끝의 힘으로 그들은 섬유제품을 ‘뽑아내고’ 있었던 자랑스러운 집단이었지만, 효율성이 50배에서 무려 1000배까지 늘어나고 제품의 질에도 큰 손색이 없었기에 ‘공장장, 자본주’들은 그들을 가차없이 몰아냈고 결과로 그들을 길바닥으로 몰아낸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200년 전에 시작 되었던 일이다.

 그때 길바닥으로 나 앉게 된 그들 중에 택한 방법은 극단적인 것으로, ‘무력행사’로 일관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밤 몰래 주로 섬유공장을 쳐들어가서 기계를 부수곤 나아가 공장을 부수기도 했다. 나중에는 섬유공장만이 아니고 기계화된 농기계 공장이 표적이 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노동자 운동권’을 형성해서 정치성까지 보이기도 했지만 영국은 정부차원에서 그들을 법으로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그들은 ‘전설 속의 로빈 후드’를 연상하게 하는 ‘영웅’으로 남았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그들은 역사에서 ‘혁신을 거부한 보수, 패배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이때 이후 luddite ‘족’은 ‘기술적인 진보, 변화 등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부류를 뜻하게 되었다.

 이런 통상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 더 자세히 알고 보면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위에 나온 이야기는 ‘설화’에 가깝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믿고 싶은 그런 식의 이야기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의 자세한 역사는 Smithsonian 지에 자세히 실렸는데Luddite들이 기계를 부수고 공장을 부순 것은 기계에 대한 원망이 아니고 그 당시 그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프랑스에서 출발한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의 경제상태는 나빴고 특히 노동자 계급은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는데, 그들은 참다 못해서 노동임금의 인상과 더 많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항의 데모를 했는데 정부는 그것을 과도하게 진압을 했고, 분격한 그들은 자기들의 일자리였던, 부의 상징이었던 공장과 기계를 부순 것이다. 이런 군중심리는 전염성이 강해서 다른 곳으로 퍼지게 되고 정부는 ‘기계를 파괴하면 사형’이란 극단 법안을 만들게까지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항의한 것은 기계나 기술혁명이 아니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노동자 멸시, 차별’이었을 것이고, 기술자체를 그들이 혐오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Luddite에 대한 역사나 ‘전설’의 여부를 떠나서, 이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나 교훈이 있을까? 노동자의 처우문제를 떠나서, 숨차게 변하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digital information technology 분야를 무시하거나 등한시하며 살 수 있을까? 특히 인간을 ‘근육 노동’에서 해방시켰던 것이 19세기 초 산업혁명이었다면, 우리를 ‘두뇌 노동’에서 해방시키려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거의 매일 무의식 중에’ 쓰고 있는 PC, Internet, mobile device같은 digital information technology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듯 느껴지는’ technology는 과연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 기계혁명이었던 산업혁명의 역사와 현재의 ‘디지털 혁명’과 유사한 것일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회는 어떤 영향을 주고 주게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 를 미리 알아서 예방을 하면 좋지 않을까?

 

최신, 최근 luddite 중에는 ‘컴맹’ 다음으로 ‘인터넷의 레이다’에 보이지 않는 부류가 있다. 처음 인터넷이 보편화1 되기 시작 시작 되면서 사람들은 desktop pc 컴퓨터를 써야만 인터넷을 쓸 수가 있었다. 그러니 pc같은 컴퓨터를 못 쓰던 사람들이 이런 인터넷 ‘혜택’에서 소외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pc 컴퓨터의 ‘전체 기능’은 다 필요하지는 않지만 인터넷만 쓰려는 부류들이 생겼다. 그것이 지금은 mobile device, 특히 mobile phone을 쓰게 되면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고 있어서 이제는 전통적인 ‘컴퓨터’의 의미는 희미해 지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인터넷-privacy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의 24시간 손에 잡히는 ‘핸드폰’이 무의식 중에 ‘세계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음은 아차 하면 자기의 모든 것이 들어나는 가능성이 항상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 사회 안보를 의식한 듯 정부차원으로 거의 모든 ‘인터넷 활동’이 감시2되게 되어서 이제는 인터넷에서 숨어살기가 거의 불가능해 졌다. 이것이 21세기 초의 ‘불편한’ 새로운 현실, new normal이 되었다.

 

이런 ‘다른 얼굴의 디지털혁명’을 러다이트luddite의 역사적 교훈에 비추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우선 분명한 것은 이것을 예전의 luddite들 처럼 무조건 피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알고 지내는 수녀님을 나의 blog에서 ‘찰나’의 정도로 언급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을 아시고 ‘간곡하게’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셔서 한동안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google-bot에 의해서 빠르게도 그 수녀님의 이름이 indexing이 되었던 모양이고 그것을 본 다른 ‘수녀님’이 귀 띰을 했던지.. 이 ‘사건’은 서로에게 불편한 화제였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개인의 privacy’와 나의 ‘표현의 자유’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케이스인 것이다. 물론 나는 수녀님의 부탁을 존중하고 ‘이름’을 지웠지만, 두고두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privacy가 그렇게 중요하면 당장 전화나 email에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것이 아닐까? 모든 전화 통화기록과 email, 특히 gmail이 ‘공공연하게’ monitoring이 된다는 사실을 아실까?

 

이런 것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중간 정도’에 있다는 진리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아라..는 말처럼.. 이것이 명쾌한 “명절 같은 해답”인 것이다. 그렇게 ‘무조건’ 피하지도 말고, 멋지게 보이겠다고 ‘잘 알지도 못하며’ 앞서가며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follow the crowd” 란 교훈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1. 주로 WWW:world wide web, email로 시작 된
  2. 이제는 거의 모든 통신수단이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어서 전화(landline, cellular), email, websites등이 대상이 되었다.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얼마 전에 근래 자주 찾아가는 인터넷 ‘한국영상자료원‘에 새로 ‘올라’ 온 옛 영화1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것이야말로 옛 것 중의 옛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진규, 문정숙, 최은희,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등이 주름을 잡았던 신상옥 전성시절 60년대 중반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 바로 1941년 영화,반도의 봄, 半島の春2 이였고, 여기의 반도는 지리적 반도, peninsula가 아니고 일본이 조선을 칭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완전히’ 일제시대 (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나온 것..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일본영화가 아니던가. 물론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니까 일본영화는 절대로 아니다. 영화의 기법, 영상, 배우 등을 보면 사실 내가 보았던 50년대 초의 영화3와 별 차이가 없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커다란 감정의 물결로 다가왔다. 나는 일제시대를 겪지 못했지만 나의 부모님 세대는 그 속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고, 결혼을 했었기에 그 시대의 영향을 우리도 간접적으로 ‘고스란히’ 받았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그 ‘숨기고 싶은’ 영향의 원류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당시 사회상은 교과서에조차 묘사가 된 것이 없고4, 영화는 커녕 가족 몇 명을 제외한 흑백사진 조차 본 적이 없었기에5 사실 나에게 그 당시는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어떠한 ‘말’을 쓰며 살았는지, 그러니까 우리 말과 일본어 등이 어떻게 섞여서 쓰였는지 나는 궁금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조금 이해가 갔다. 일본어를 쓰는 대목에서는 한글 자막이 없었고, 우리말이 나오면 일본어 자막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역시 그 당시의 공식언어가 일본어 였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실감을 하게 된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런 것을 물어보면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런 혼합 언어 정책이 그런대로 큰 무리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자세히 보면 어떤 부분에서 일본어를 쓰고 어떤 부분에서 우리말을 썼는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영화의 캐스트나 스탭 진들의 이름을 보면 대부분이 우리 이름이고 간혹 일본 이름이 보이는데, 그것은 1941년 때만 해도 창씨개명6 이 널리 퍼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궁금하다.

 

3.1운동, 유관순 같은 애국지사에게 행한, 잔학했었다는 일제시대에 대한 ‘일방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어렸을 적에는 빨갱이 이상으로 ‘죽음을 불사한 학대’를 ‘매일’ 받았던 것으로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 역시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일교육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고스란히 경험을 한 어머님께 물어보면, 아주 다른 반응을 보곤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각도로 이 영화를 보면 우리의 반일교육이 완전히 일방적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춘향전 영화 같은 ‘민족적’인 영화를 찍는 조선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1941년이면 일본제국이 한창 진주만을 습격, 미국에 도전을 하던 살기등등하던 시절인데, 춘향전과 연애를 하는 ‘조센징’ 영화를 찍게 허가를 하였을까..

이 영화에서 일제시대의 다방과 서울의 풍경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했을 까 조금은 궁금증도 풀리는 듯 했다. 그러니까 백문이 불여일견, 이렇게 보니까 이해가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를 보면 ‘목포의 눈물‘ 이 아코디언 연주로 구성지게 흘러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한 서린’ 노래도 자유롭게 부르고 듣고 했던 시절이 아니던가?

 

1930~40년대의 미국영화와 이 영화를 비교해도 사실 기법이나 연기 등이 큰 차이가 없이 보였다. 아마도 그 당시 일본의 영화 수준이 이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도 한다. 비록 해방 후, 6.25 동란으로 우리 영화가 타격을 받았을 지라고 그때의 수준이 있었기에 곧 바로 60년대의 영화 전성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마지막 장면이 ‘성공을 위해서’ 동경유학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방 후 영화에서는 ‘성공을 위해서’ 미국유학을 떠나는 것을 바뀐 것.. 참 시대와 역사의 요술이 아닐까?

 


 spring-peninsular-2서울역, 서울은 케이죠, 경성으로 불리지만 그래도 한글로 쓰였다

 

spring-peninsular-6이 귀여운 여자가 50년대 영화에 많이 출연한 친근한 ‘할머니 배우’ 복혜숙씨였다.

 

spring-peninsular-11이것을 보면 일제시대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 그때도 이런 멋쟁이가 있었구나..

 

spring-peninsular-4너무나 익숙한 50~60년대의 가정집 마당을 연상케 한다

 

spring-peninsular-5학생이 살던 방, 이것도 너무나 친숙한 광경이다

 

spring-peninsular-8영화 속의 영화, 춘향전.. 태극이 선명하고 춘향이도 예쁘다.

 

spring-peninsular-7경양식점, 이런 류의 ‘양식’은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spring-peninsular-10아저씨와 어르신, 대청마루에 앉은 모습도 전혀 낯설지 않다.

 

spring-peninsular-3당시 소설에 많이 나오는 동경유학생들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1. 새로 올라온 것 중에 ‘미몽’ 이라는 1930년대의 영화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무성영화 수준이었다.
  2. 이것은 공식적인 영화제목이고 개봉된 이름은 ‘아름다운 청춘’ 이었다고 한다.
  3. 예를 들면 1954년 영화 ‘운명의 손‘이나 ‘과부의 눈물‘과 같은…
  4. 이것은 공산주의와 비슷하게, 완전히 정책적이고 의도적이었다.
  5. 우리 가족은 6.25를 겪으며 거의 모든 역사적 유물들이 분실되었다.
  6.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이름을 일본 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던 것.

오랜만에 일찍 아침잠에서 깨고 보니 아직도 깜깜하고, 시계를 어렴풋이 보니 6시도 되지를 않았다. 아침잠을 이렇게 설치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음을 알기에 ‘무조건’ 6시까지 뒤척이며 기다렸다. Flash flood watch까지 예보된 축축한 늦겨울.. 귀를 기울여도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붕의 gutter에서 새는 빗소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이런 새벽이면 유난히 잘 들리고, 심지어 문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기대했지만 그래도 조용하다.

모처럼 깜깜한 가운데 침실에서 나가니, 역시 우리 집 귀염둥이 고양이 Izzie가 배고프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나는 거의 로봇처럼 내려가 밥을 주고, 오랜만에 ‘진한’ 커피를 갈아 내리고 아직도 켜지지 않은(programmed-timer에 의해서 아침 6시 45분에 켜지는) living room light를 ‘강제로’ 키고, 이번 달의 ‘주제곡’ Telemann symphony CD를 들으며 aroma가 ‘죽여주는’ Christmas blend Starbucks coffee로 이른 아침의 목을 축인다. 시간은 비록 일찍이었지만 이것은 내가 매일 아침마다 거치는 routine이다.

교황 베네딕트 16세

교황 베네딕트 16세

그런대로 해 없는 ‘여명’의 시간이 되면서 desktop PC로 streaming TV channel을 켜 보니.. 갑자기 머리가 띵~ 해지는 news가 흘러나온다. 그것을 듣고 보면서.. 내가 아직도 잠에서 덜 깨었나 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news를 보고 있었다. Pope is resigning at end of the month.. 교황, 2월 28일에 사임..무슨 comedy인가.. 며칠 전까지 Angelus (삼종기도)에서 비록 느리지만 ‘건강한’ 얼굴을 본 것 같았는데.. ‘거의’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해서 더 놀란다. 마지막으로 ‘자진해서 사임’한 case는 15세기.. 우아.. 정말 너무하다.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Blessed Pope John Paul II)는 혼신과 혼미의 몸과 정신으로도 끝까지 버티셨는데, 거의 ‘멀쩡하게’ 보이시는 베네딕트 16세(Pope Benedict XVI)는 왜 그런 ‘폭풍’과 같은 결정을 하셨을까? 공식적인 이유가 ‘건강상’의 문제고, 분명히 그것이 이유일 것이라도 나는 믿는다.

요새 85세면 그 옛날의 85세는 아닐 것 같고, 교황의 오랜 경험과 명석한 두뇌는 젊은이 못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 주위의 사람들도 거의 몰랐고, 그래서 더 놀랐다고 보도가 되고.. 논평하는 ‘바티칸 전문가’ 들도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전 교황이 그렇게 오래 병마와 싸우면서도 교황 직은 고수하셨기에, 그런 과정을 또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교황이 그런 괴로운 결정을 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전 교황이 겪었던 ‘괴로운’ 과정이 지금 천주교회의 여러 가지 사정과 입장에 맞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교회의 문제들을 보고, 오랜 동안 견딜 수 있는 젊은 교황의 출현을 기대했는지도.. 그분의 예외적인 신학적인 지식과 영성을 알기에 그런 어려운 결정을 믿는 것이 올바르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도 왜 지금인가.. 내일 모래가 사순절(Lent)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인데.. 우리에게 왜 이런 ‘분심’을 주게 한 것인가? Timing으로 보면 아마도 부활절 전까지 새 교황이 선출 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또 적응을 해야 한다. 무언가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것은 교회, 이 세상, 아니 나와 우리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새 교황, 그것도 ‘젊은’ 교황이 선출되면 그는 교회를 어떤 쪽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어두운 아침’을 맞는다.

 


Postscript

몇 시간 후에 교황 베네딕트 16세께서 직접 은퇴, 사임 발표하는 video가 Vatican TV에 실렸다. 역시 ‘건강’하신 모습이다. 이제 조금씩 교황님의 뜻을 알 것 같다. 야심적인 개인 의견을 접고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는 교회를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직접 은퇴를 발표하는 교황 베네딕트 16세

 

The Longest Day, 1945

 

6월 6일, 달력이 빨갛다. 바보 같은 본당(that is,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달력이 ‘고국에서 주문을 받아와서’, 친애하는 고국의 국경일이 모두 빨갛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올해 (최소한) 한해는 고국의 국경일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고국에 달력을 주문해서 얼마나 돈을 절약했는지는 몰라도, 참 해도 너무했다. 그곳의 국경일들을 빨갛게 ‘강조’ 했으면, ‘고객이 거의 일년 열두 달 사는’ 현지의 국경일, 기념일도 그랬으면 누가 때리냐? 6월 6일 현충일에 동작동 국군묘지라도 참배해야 한단 말인가? 6월 6일을 왜 이승만 대통령께서 현충일로 정했는지 유래는 확실치 않아도, 이곳에서 6월 6일은 1944년 6월 6일을 기념하는 날이고, 그날은 2차 대전시 3백만의 연합군이 프랑스의Normandy 해안으로 육,해,공의 ‘사상 최대의 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바로 D-Day인 것이다. 그 날이 없었으면 간접적으로라도 우리의 광복절도 연기가 될 수도 있었던 그렇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인 것이다. 그것도 본당 달력에 ‘정확히’ 빠져있었다.

2004년에 이미 반세기, 50주년이 지났고 이제는 사실 60주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특별히 이날을 생각하는 것은 역시 개인적인 추억과 그것과 관련된 영화, The Longest Day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1948년 생인 내가 그날을 어찌 기억하랴마는, 사실처럼 그려낸 영화의 역할이 내가 직접 그때를 겪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는 데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 The Longest Day는 컴퓨터로 특수효과를 ‘조작’ 한 만화 같은 요새 영화들이 아니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만든 1962년 미국 ‘흑백’ 영화 ‘The Longest Day‘ 인 것이다. 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영화를 나는 1963년도 중앙고 1학년 때, 남산 밑, 퇴계로에 있던 ‘개봉관’ 대한극장에서, 학교에서 단체로 가서 보았다.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궁금해서, 그 당시의 일간지를 찾아보았지만, 그 영화의 광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1962년의 영화이기 때문에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려면 빨라도 1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고, 고1때 본 기억이 분명해서, 1963년일 것인데.. 왜 그 영화의 광고는 신문에 없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The Longest Day, the theme song – Paul Anka – 1962

 


그 당시에 이 영화의 ‘역사적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저 ‘우리의 멋진 친구인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이 ‘나쁜 놈들,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기분 좋은 스토리라는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우리들은’그 영화를 참 재미없게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영화는 재미있게 만들어진 얘기 같은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직하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영화처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있는 climax같은 것도 그 영화에는 없었고,특히 끝나는 장면은 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완이라도 해 주듯이, 엄청나게 많은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동원되었고, Paul Anka의 영화 주제곡은 영화의 심각성을 잘 나타낼 수 있어서, 조금은 덜 지루할 수 있었다. 이 주제곡은 다른 영화 ‘콰이강의 다리’ 와 같은 정도로 우리들이 두고두고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기에 좋았다. 특히 기억에, 우리 반에 ‘조광순‘이라는 친구, 원래 노래를 잘 부르는데, 이 영화를 보고 학교로 돌아와서부터 복도건 교실이건 가리지 않고 따라 부르곤 했다. 다른 기억으로는, 우리 학교에서 단체로 대한극장에 들어갔을 때, 이미 전회의 상영이 끝나고 있었는데 보니까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또래의 여학생들이었다. 과연 그 ‘여학생’들이 이 영화를 ‘졸지 않고’ 보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또한, 다른 생각에 이 영화는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크기 돈을 못 벌었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아마도 신문광고를 찾기가 힘들었던 이유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면,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이 있다. 그것 중에는:

 

  1. The Longest Day는 1959년 저자 Cornelius Ryan이 저술한 1944년 6월 6일 ‘하루 동안’ 일어난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작전에 관한 역사책의 제목이다. 그러니까 non-fiction, fiction도 아닌 historybook인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과 아주 가까운 실화들인데, 이것이 영화화 되면서 판권이 당시의 금액 $175,000 (십칠만 오천 불)에 달했다.

     

  2. 영화에 사용된 언어들은 모두 각국의 언어를 쓰고 있고, 모두 영어로 자막을 넣었다. 하지만 배우들이 모두 영어를 쓰는 다른 것도 동시에 찍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두 가지 version이 존재하는 셈이다.

     

  3. 당시의 인기 인중에 주제곡을 부른 Paul Ankacameo appearance(깜짝, 인기 출연?)를 했는데, 예상 외로 그는 멋지게 army ranger역할을 해 냈다.

     

    Paul Anka & Robert Wager in the Longest Day

    Paul Anka & Robert Wager

  4. 실제 인물인 Benjamin Vanderboort (중령, 82nd Airborne, 공정단)로 연기를 한 당대의 인기배우 John Wayne, 원래 이 역할은 Charlton Heston이 원하던 역이었지만 John Wayne에게 넘겨진 것이다. 대부분의 주역 배우들이 25,000불의 연기료를 받았지만 John Wayne만은 그것의 열 배인 250,000불을 요구하고 받았다고 한다.
    John Wayne as Lt. Col. Vanderboort

    밴더브루트 중령 역의 존 웨인, 공수부대장

     

  5.  82nd 낙하산 공정대가 투하되었던 프랑스의 마을 (Sainte-Mere-Eglise)의 교회당 꼭대기로 ‘잘 못’ 투하되었던 사병(Red Button의 역할)을 기념하는 실제 인형이 아직도 그곳에 걸려있다고 한다.

     

  6.  연합군 최고사령관 (Allied Supreme Commander) 였던 General Eisenhower의 역할은 처음에 실제 인물인 미국 전 대통령의 역임했던 President Eisenhower를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D-Day로부터 거의 20년이나 지나서 비교적 젊었던 그 당시의 역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연기 경력이 전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하게 생겼던 decorator Henry Grace를 기용했다. 그의 연기를 영화에서 보면 꽤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경력 제로의 아이젠하워 역의 Henry Grace

    연기경력 제로의 아이젠하워 역의 Henry Grace

     

  7. 공포영화, 드라큘라(Count Dracula)로 잘 알려진 경력 영국배우였던 Christopher Lee는 영국군으로 등장을 하려 연기심사를 받았지만, ‘군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낙방을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2차대전시 영국 공군 정보장교로 복무를 했다고 한다.

     

  8.  영국 사병 Private Flanagan으로 등장을 하는 Sean Connery(숀 코네리), 특별한 연기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가 그에게는 007 James Bond로 가는 마지막 출연이 되었고, 그 이후 그는 100% James Bond가 되어 버렸다.
    영국측 군인 Sean Connery 숀 코네리

    영국측 군인 Sean Connery 숀 코네리

     

  9. Normandy의 상륙 해변 중의 하나인 Omaha Beach 상륙을 촬영할 때, 미군들 역할을 하던 extra(엑스트라)들이 시퍼런 물에 질려서 물 속으로 뛰어들지를 않았고, 이에 질려버린 Robert Mitchum (로버트 밋첨, Army General Norman Cota역)이 먼저 뛰어들고, 엑스트라들이 서서히 뛰어들었다고 한다.

     

  10. 총 제작비, $10,000,000(천만 불)은 1993년 이전(Steven SpielbergShindler’s List가 나올 때까지)의 흑백 영화로써는 제일 비싼 제작비였다. 그 동안의 inflation을 감안한다면 천만 불은 그 당시로써는 큰 돈이었다.

     

  11. 낙하산 특공대, paratrooper들이 낙하하던 때 숲과 습지에서 요란히 들리던 개구리 소리는 사실 프랑스에는 없는 개구리의 소리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녹음이 된 ‘미국 개구리’ 소리였던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쪼잔한 것 들이지만 나중에 이렇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12. 미국 해군당국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전함과 상륙정 등으로 지원을 해 주었지만, 그 당시 ‘빌려준’ 함정들은 이미 1960년 이후의 것으로 1944년 당시의 함정들에 비하면 훨씬 현대적인 함정들이고, 자세히 관찰을 하면 쉽게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계절의 시계는 예측할 수도 없이 별로 쓸모가 없어지고 하루 하루의 날씨가 그날에 맞는 기후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게 되었다. 3월 중순에 섭씨 30도의 날씨가 일주일 계속되고, 4월 말에 거의 빙점의 날씨, 찌는 듯이 덥던 5월이 이제는 가을처럼 시원한 6월로 접어 들었으니.. 기상전문가들은 할 말이 있을까? 하지만 특별한 energy를 쓰지 않는 날씨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요새 며칠 같이..

     

  •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결혼식에 둘이서 갔었다. 한인 순교자 성당 마리에타 1구역의 문요한 형제님, 지난번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단장을 역임하셨고, line dance mania group을 이끌고 있는 나이에 비해 정열적인 분.. 그분의 ‘장성한’ 아들이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한 것이다. 우리 집 두 딸이 ‘요새의 이상한 문화’에 젖어서 결혼하는 것이 cool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사실 결혼에 대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마당에 이런 결혼식은 우리에게 참 신선하고, 참석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진다. 그곳에서 30여 년 전 우리의 결혼과 그때 만남의 의미를 생각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 가족, 가정, ‘정상적인 결혼’ 등의 정의와 의미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요새, 그런 ‘정상적인 결혼’을 보는 것도 큰 ‘은총’이 아닐까? 

    결혼식에 간 ‘부수입’으로 정말 오랜만에(1992년 이후 처음으로) 역사 깊은 본당 성가대의 솜씨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사실 새 성전이 지어진 후 처음으로 성전 앞쪽에 있는 성가대를 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성전 뒤쪽에 있었다) 그 동안 우리세대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고 더 젊은 세대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약간은 아직도 우리들 세대인 듯 보였고, 특히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형제, 자매인 우요셉, 마리아 부부의 반가운 모습도보였다. 우리가 있을 때의 성가대와 다른 것은 중에는, 거의 ‘프로’에 가까운 audio system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도 있었다. 우리가 주일 미사를 한국본당으로 ‘옮기게’되면 성가대에 ‘돌아와도 좋다’는 묵약은 있고, 이런 활동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 솔깃하긴 한데, 역시 오래 습관이 된 주일미사 의 고향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힘들다.

      

  • 오늘은 6월 3일, 일요일이다. 천주교 전례력으로는 삼위일체 대 축일로서 신학적으로도 신비로 여겨지는 Holy Trinity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삼위일체 하면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 참고서로 ‘삼위일체 영어(문법, 해석, 작문)’ 라는 것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신학에서는, 성부,성자, 성령(예전에는 성신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도 깊은 의미는 오리무중이다. 절대, 전능, 영원, 무한..의 절대자가 3위를 가졌다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온다. 성경을 믿으면 사실 그것도 믿어야 하니까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요새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이다. 하느님인 성부, 예수님인 성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령, 그래서 Holy Spirit인가.. 신부님들의 강론을 잘 들어보면 성령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성령께 기도를 하란 말인가? 우리 순교자 본당 주임 하태수 신부님은, 기도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신다. 그것도 알듯 모를 듯한 얘기지만, 전 보다는 훨씬 받아들임에 크게 문제가 없는 나를 발견한다. 성령만을 크게 강조하는 성령 세미나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것의 중요함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  6월 3일.. 육 삼.. 하며 생각난 것이 6.3 사태란 것이 있었다. 4.19 같이 날짜에서 나온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난 날을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6.3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확실히 어떤 해였는지 확실치 않았다. 1964년 아니면 1965년으로 기억은 했었다. 그날은 1960년 4.19 학생혁명 이후 가장 심각한 학생데모가 난 날이었다. 그것도 5.16 군사혁명 이후, 박정희의 ‘민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비상사태’였다. 그 데모가 난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해를 1965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65년 내가 중앙고 3학년 여름방학 전에 학생데모로 인한 비상사태로 휴교를 했던 기억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억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이번에는 확실히 ‘정답’을 찾으려고 그 당시의 일간지로 확인을 하게 되었다. 정답은 1965년이 아닌 1964년 6월 3일이었다. 1965년에 휴교를 한 것은 1964년 때와 다른 한일조약(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의 여파였던 것이다.

     

    6.3 데모 주동자 김중태

    6.3 데모 주동자 김중태

    약간은 희미해진 1964년의 기억을 거스르며, 그 당시 신문을 보면서 (대) 학생데모로 이어지는 과정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번도 역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것이고, 그것도 4.19와는 다르게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중심에 있었다. 군사정권에서 박정희 민간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쌓여가는 국민의 불만들을 대학생들이 다시 행동으로 보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고교 2학년이어서 사실 그 심각성이나, 의미를 잘 실감을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그것도 일본 자본에 크게 의지하려는 것, 그것에 따른 한일회담 등이 굴욕적으로 보인 것, 일을 빨리 진행하려 중앙정보부를 섣불리 학원으로 투입하는 등, 사실 정책적인 실수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박정권의 의도는 의외로 간단했을 것이다. ‘경제 자립’ 이었던 것이다. 그 괴로운 과도기를 혈기왕성했던 ‘서울 문리대’ 생들이 고분고분 참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부르짖던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 였고, 그것이 죽었다고 성토를 했다. 고려대학이 주축이 되어서 시작 되었던 4.19때와 달리 1964년에는 서울 문리대가 완전히 중심에 있었다 . 그래서 서울 문리대의 ‘용공성’ 물의까지 생겼을 것이다. 문리대 데모 주동자중의 하나인 ‘김중태‘ 는 사실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당시에 김중태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가열된 서울 문리대 주동의 데모가 6.3일에 서울 지역 대부분 대학으로 퍼지면 절정에 달하고, 그날 오후에 급기야, ‘비상계엄령’ 선포로 이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던 대학생들의 데모는 계엄령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비상계엄으로 치닫게 한 또 하나의 이유 중에는 대학생들의 구호가 심상치 않게 격해지고, ‘박정권 하야’ 까지 간 사실도 있었다. 민간정부 6개월 만에 당한 ‘정권위기’를 맞아, 박정희 정권은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권은 이런 격한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일본의 도움을’ 받아가며, 굴욕 외교의 모욕을 참아가며 밀어 부쳤다. 그리고 이후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되었다.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당시의 신문보도,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1964년

 

4.19이후 최대의 대학생 데모, 1964년 5월 말

서울 문리대 생들의 치열한 데모, 6.3 사태 1964년

 

6.3 사태 서울지역 비상계엄 선포

박정권은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16 이후 처음 맞는 비상계엄령, 1964년 6월 3일

 

 

오늘은 3월 1일, 그러니까 삼일절이다. 왜 이렇게 생소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흡사 무슨 먼~나라의, 먼~옛적의 일로 완전히 남의 것처럼 느껴지고, 곧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잠긴다. 무언가 복잡한 심정이 됨을 또한 느낀다. 아직도 달력이 빨갛게 물들어 있음이, 분명히 고국의 ‘국경일’임이 틀림이 없다. 나의 코앞에 걸려있는 달력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한국성당 것인데, 이곳 현지인 미국의 국경일에도 없는 빨간 날짜가 대한민국의 국경일들에는 요란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 이곳에 사는 대한민국출신 사람들의 국가의식이다. 이것에도 저곳에도 확실하게 소속감은 못 느끼는.. 그런 어정쩡한 자세.. 이런 자세에서 그들은 과연 삼일절은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올해는 삼일절 93주년이 된다. 1919년 기미년 삼월 일일, 이 1919년 기미년은 나에게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 나의 어머님이 바로 이해에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거의 1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 그러니까 살아계셨으면 올해 93세가 되실 것인가. 상고사만큼 오래 된 것도 아니지만, 나로써는 실감나게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오래 전의 역사다. 멀쩡한 독립국가를 꿀꺽해 버린 ‘왜(倭)놈’들과 얽힌 악연의 시절 때의 사건이었다. 93년이 지난 지금, 약한 사람들의 기억력은 희미해지고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소리를 실감하며 산다. 우리 민족에게 증오와 질시, 질투 대상의 화신이었던 일본은 그런 역할을 조금씩 옆 나라 ‘짱깨’ 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과연 삼일절에는 무엇을 생각하며 보내야 하나?

내가 고국에서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삼일절 하루 종일을 거의 경쟁적으로 ‘왜놈 증오’하는 행사로 보냈다. 특히 국민학교 때인,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그것은 거의 광적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반일감정은 보기에 아주 원색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필요하면 ‘친일파’를 과감하게 중용을 할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 이후 그런 것은 눈에 띄게 완화가 되었다. 그 이유는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이후의 정권에선 이런 삼일절 같은 ‘과거사’를 어떻게 대했을 까, 나는 거의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국경일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을 보니 조금 의아한 심정이다. 한글날이 없어져서 삼일절도 없어질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일까?

나는 지난 5년간의 ‘피상적인 일본공부’의 결과(대부분 텔레비전 프로그램), 과거 오해했거나 모르고 지냈던 것들을 지금은 많이 새로 알게 되었다. 특히 각종 전쟁으로 인한 그들 민간인들이 겪었던 고통이 사실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음도 그 중의 하나다. 오랜 기간의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완전히 자만심에 빠진 그들은 근래에 들어서 조금씩 주변의 나라, 특히 한때 그들의 ‘만만한’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보다 훨씬 전에 버블경제의 충격을 겪었고, 그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작년 3월의 천재지변으로 다시 한번 충격을 겪으면서 조금은 겸손해졌다고나 할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앞으로 한반도와 일본은 어떠한 관계로 이어가게 될 것인가, 혹시 기고만장한 짱깨를 공동의 적으로 의식하게 될 불편한 친구관계가 되지는 않을까?

 

 

멘데레스 수상 환영

멘데레스 수상을 기다리며, 1958년 4월 25일

멘데레스 수상.. 엄청 지난 세월에도 그 이름만은 기억을 한다. 멘데레스, 정확히 말하면 1958년 당시 터키 수상 멘데레스, 그가 아시아 순방길에 서울에 들린 것이다. 그 당시에 외국의 수상급이 한국에 온다는 것은 사실 큰 뉴스거리였다. 그만큼 외국에서 올 만한 거물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전쟁을 겪은 거의 폐허로 변한 찌들게 가난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어서 온단 말인가? 설령 누가 꼭 방문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어도 곤란한 것이, 그렇게 높으신 분이 묶을 변변한 숙소, 그러니까 호텔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유일한 호텔은 시청 근처에 있던 반도호텔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추억에, 나는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이 갓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 (이원의 선생님) 께서 외국에서 ‘대통령’이 오신다고 하시며 그 나라의 국기를 다같이 그리자고 하셨다. 나라의 이름은 ‘털기‘ 라고 했다. 이것이 조금 웃기는 추억이었다. 도대체 ‘털기’가 무엇인가.. 우리는 한바탕 웃고 그저 ‘먼지 털기‘ 로 연상을 해 버렸다. 국기는 초생 달이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유일한 뉴스의 원천은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듣는 것인데, 신문은 한자가 너무나 많아서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우리들도 그 나이에 그런 ‘정치뉴스’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털기라는 나라는 정확하게 ‘터키’였고, 신문에서는 한자로 ‘토이기(土耳基)‘라고 쓰기도 한, 육이오 동란 때 유엔군 16개국의 일원으로 전투사단을 보내어 이미 우리땅에서 피를 흘렸던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세계정세로 미국, 소련의 냉전 하에서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으로 ‘완전히’ 갈린 상태에서 터키는 우리나라와 같은 쪽에서 빨갱이와 대적한 입장이고 보니,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 수상 멘데레스는 자연스레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이 소련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기 위한 전략으로 아시아에서는 서쪽 끝으로는 나토, 터키 를 출발로 해서 월남, 자유중국(대만), 한국(과 일본)를 동쪽 끝으로 거대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 외국의 ‘우두머리’가 온다는 것과, 그 분을 환영하러 우리들이 거리로 나간다는 사실은 사실 신나는 소식이었다. 우선 거리로 나가려면 학교 공부를 빼먹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신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가서 거물급들이 탄 차들을 보는 것도 신났다. 하지만 일단 거리로 나가서 환영을 하려면 그들의 차들이 지나가는 몇 시간 전에 나가서 기다려야 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또한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도 차들이 지나가는 시간은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으니, 참 허무하기도 했다. 그 몇 초를 위해서 몇 시간을 목이 빠지기 기다렸으니.. 그 다음날 가도에서 멘데레스 수상을 기다리던 우리들의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심지어는 내가 사진에 나왔다고까지 했다. 그것이 조금은 우리 집의 ‘역사’가 되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을 본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비슷한 것이 실렸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 54년이 흐른 것이다. 그것을 지금 그 당시의 신문을 다시 보게 되면서 확인을 할 수 있었다. 분명히 우리들이 사진이 나왔고, 그것은 1958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나는 경향신문으로 알았다) 였다.

문제는 그 사진을 암만 보아도 나의 존재를 확인 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신문의 사진은 원래 바로 찍은 것을 보아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해상도가 ‘저질’에 속하는데 그렇게 오래 전의 것은 더 나쁠 것이니 말이다. 또한 그 때의 경향신문을 지금은 볼 수가 없는데, 아마도 그곳에 내가 있는 사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때의 생생한 기록과 사진을 찾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인 것이고, 이 사진을 보면서 그 당시 우리들의 ‘꾀 죄죄’한 모습들이 너무나 반가운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 당시의 그 두 거물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모두 몇 년 후에 정권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19 학생 혁명으로 물러났고, 멘데레스 수상은 같은 해, 군사 쿠데타로 실각, 체포, 나중에는 사형까지 당했다. 참 역사는 이런 것인가.

 

2012년 2월, 이제 ‘완전히’ 과거가 된 2011년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때가 되었다. 대부분 년 말이 다가오면 지난 해를 기억하고 정리를 하지만 한 해가 완전히 지난 때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것을 나의 제일 활동적인 나이에 했으면 얼마나 더 효과적이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하는 것도 다행이라고 자위를 한다. 지난 2011년 나에게 제일 중요한 정치 사회적, 개인적 뉴스, 사건, 일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틀란타 지역 폭설과 강추위

2011년 1월 8일의 폭설과 강추위로 1주일간 대도시기능 거의 마비된 ‘사건’, 이것은 심리적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일본 도오쿠(동북) 대지진, 해일과 원전 사고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재산피해와 뒤따른 원전의 방사능 유출 사고, 비록 바다건너 먼 곳이었지만 우리가 일본에 대한 복잡하고, 특별한 관계로 더욱 생각하게 되는 비극적인 재해였다.

 

 

아랍, 중동의 격동과 봄

이집트와 리비아의 오랜 독재자들 군중에 의해서 피살되거나 실각, 주변의 국가로 퍼짐. 서구식 민주주의가 드디어 범 세계적으로 퍼지는 시작일까, 아니면 다른 종류의 종교독재주의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나의 신앙적 영웅, 전 교황님 성인 품으로 한걸음 더 다가섰다. 종교를 초월한 인류의 모범인 이 교황님은,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분이시다.

Extreme Spring Weather disasters

조플린과 알라바마 지역이 거의 파괴되는 무서운 천재지변, 몇 초간에 운명이 바뀌는 비극적인 순간들을 거의 체감적으로 느낀다.

DIY, self-installation of home water heater

누구의 말대로 내가 바보일까, 내자신의 기계실력을 과시하려던 만용일까, 고생은 했지만 큰 보람을 느끼던 나만의 Independence Day 였다.

아틀란타 성체대회 참가

10년이 넘게 뉴스에서만 보던 성체대회에 내가 드디어 가서 보고 듣고 은총을 받고 왔다. 내년을 기대해 본다.

연례 레지오 봉쇄피정 참가

레지오 중심으로 인생 항로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참가한 피정, 나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All work PCs now on home Proxmox VE(PVE) network

Near perfect home network system이 완전한 KVM-based virtual machine으로 탈바꿈을 해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보는 home system이 되었다.

Summer ‘critical’ reading

근래에 들어 ‘치열한’ 독서의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여름을 보냈다. 참, 많이 읽었던 여름, 두고두고 기억이 날 것이다.

연숙 레지오 꾸리아 임원 피선

인간의 머리로 피하고 싶던 ‘고된 일’이 결국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운명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서 연숙을 돕기로 약속을 했다.

레지오 중심의 생활, 철학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생활의 중심에 ‘레지오’의 정신을 놓기로 성모님과 약속을 했다.

한국 본당 전산팀 실질적 탈퇴

레지오가 나의 탤런트를 전산팀에 쓰도록 인도를 하고, 나도 노력을 했지만, 무리한 인간적인 마찰은 피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다.

고교 동창 이성복 발견과 실망

시간과 세월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나의 ‘순진한’ 생각과 꿈에서 깨어나는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새로니, Vanderbilt 2nd degree

대학을 3년에 졸업한 기세로 다시 단기간에 Vanderbilt 학위를 받은 새로니, 이번에는 조금 안정된 career path에 진입하기를 희망한다.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 참가

레지오 중심의 생활의 연장선에 있던 큰 행사, 결과보다는 참가가 중요한 행사, 잘 참가하고, 치렀다.

믿지 못하게 웃기는 Republican Primary

언제부터인가 ‘지독히도’ 혐오하게 된 이 정치 군상들, 대부분 과격파들은 성경의 바리사이파 보다 더 추악한 것들, 미국을 좀먹고 있는 그들의 추태를 언제까지 보아야 하나?

연숙의 폴라와의  聖戰, 부분적 승리

중동의 봄에 힘 입은, 일본기업과의 부조리에 맞서는 용감한 성전,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옆에서 보기에도 멋진 싸움이었다.

레지오 단원 선서

나의 후반인생의 큰 획을 긋는 쾌거, 나는 확신한다.

김, 정박아, 정일 지옥 행

민족반역자, 전범 김일성 일가의 두 놈이 이미 지옥으로 떨어지고, 나머지 놈마저 가려고 준비 중이다.

 

이중에서 5가지를 골라 뽑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를 않았지만, 고심 끝에 다음의 다섯 가지를 나의 2011년 5대 사건,뉴스로 정했다.

 

  1. 레지오 단원 선서
  2. 일본 도오쿠(동북) 지진, 해일 참사
  3. 중동의 봄: 이집트, 카다피 사망
  4. 새로니 Vanderbilt Peabody College 졸업
  5. 김정일 지옥 행

 

 

오늘은 12월 7일, December Seven, 1941년, 그러니까 70년 전의 일본제국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습 기념일이다. 10년 전의 9-11, Nine Eleven 보다 더 충격적인 기억을 남기게 한 날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날을 The Day of Infamy라고 부르게 되어서 아직까지 쓰이고 있는데, 결국 70년이란 세월은 사실 길게도 느껴진다. 그래서 그날 생존자(군인들) 단체들로 올해 말로 정식 해체를 한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에 그날의 충격도 둔해진 것도 사실이고, 그보다는 그 생존자 자체가 이제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슬픈 사실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육이오의 생존자, 월남전의 생존자.. 등등 차례를 기다릴 것이다. ‘위대한 세대‘라고 불리던 2차 대전 세대는 진정 다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참 세월이란 것.. 정직하지 않은가? 우리의 세대는 아마도 월남전 세대로 합류할 듯 해서 그 세대가 사라질 무렵이면 또다시 이런 뉴스거리가 될까 미리 궁금해진다.

 

9월 15일,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비상식적’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계산이 깔린 도박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는 것은 그 뒤에 같은 운들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난다. 그 이후 맥아더의 운은 사라지고, ‘악운’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가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적군에 대한 정보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일 큰 도박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억지로’ 무시했다는 실수였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것을 말해주었지만,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정보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정보들의 신빙성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정보수집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지 않았을까?

 

Book, Operation Broken Reed

Book, Operation Broken Reed

며칠 전에 Reading-by-Tying으로 읽고 있었던 한국전쟁(육이오 동란)에 관한 책, Operation Broken Reed (꺾인 갈대 작전)을 간신히 다 읽게 되었다. 이 책도 산지 몇 년째 된 것인데 올 여름, “육체적인 노동 대신 여름독서를”, 이란 목표로 골랐던 도서목록중의 하나였다. 이 책을 읽은 때가 육이오(6.25: 동란 발발)와 구이팔(9.28: 서울 수복) 을 사이에 둔 계절이어서 더 61년 전을 상상하게 되며 읽으니 실감이 더 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자세히 나의 blog에서 소개할 예정인데,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이 ‘진실, 사실’ 이라면 이 ‘믿기 힘든’ 작전은 육이오 동란 중, 가장 비밀에 쌓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거의 ‘허구’라고 단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믿는 쪽에 가깝다. 나도 읽고 나서 생각이, 이것은 사실 일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작전은 육이오 동란이 휴전회담과 격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던 1952년 1월 초에 38선 북쪽, ‘적진’ 속에서 일어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주일에 걸친 미군, 자유중국 군의 합동작전이었고, 비록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실로 충격적이고 슬픈 것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휴전회담은 가속화 되었고, 확전, 3차 세계대전(심지어, 핵전쟁)은 방지가 되었다.

 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구이팔을 가능케 한 구일오 인천상륙작전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New York Times best seller였던 David Halberstram의 책, The Coldest Winter, The America and The Korean War라는 책 덕분이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육이오 동란을 미국과, 한국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각도로 다룬 것이어서 이제까지의 군사적인 각도로만 다룬 책과 다른 맛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역시 저자의 정치적 색깔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어서 흠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역사철학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에 대한 저자의 거의 ‘혐오’ 적인 인상이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자료에 의한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조금은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중립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맥아더를 옆에서 본 것도 아니고, 이 저자와 같이 충분히 사료를 공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영웅도 보여주기 싫은 면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진리’는 안다.

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이 책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맥아더의 천재적인 ‘용기와, 지혜’를 인정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거의 부산 교두보 (Pusan Perimeter)에서 바다로 밀려날 뻔 했던 시기에 이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고 보면 그 절묘한 timing의 진가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전이 조금만 더 늦게 있었다면 김일성 개XX의 호언장담대로 부산은 괴뢰군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은 이미 지상전에서 유엔군의 압도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엔군의 해군, 공군을 포함한 기술적인 면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활용하는 방법은 해상으로 적진 깊숙이 대거 병력을 빨리 상륙시키는 방법임은 사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그의 과거 전투경험으로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적군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우회 작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적진 뒤의 상륙작전의 구상은 서울함락 직후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남진하기 시작하던 7월 초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

 맨 처음 이 작전은 Operation Blueheart 라고 이름이 되었고, 예정 날짜는 7월 22일이었지만 지상전에서 너무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이 예정은 무기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 맥아더는 그 동안 별로 작전이 없었던 해병대에 이 작전을 맡아주도록 주선을 하며, 본격적으로 목표를 인천으로 굳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목표가 인천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사실 표면적으로 인천은 작전하기에 ‘최악’의 자연적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한 곳이었다. 이 조수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해병대가 기나긴 개펄에서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상륙하기에 알맞은 ‘해변’ 이 없고 모두 방파제 같은 시설물로 그득하고, 수뢰와 같은 방어시설이 있으면 더욱 힘들 것이다. 항구에 거의 붙어있는 월미도는 공산군 수비대에게 부두를 방비하는데 좋은 시설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물론 해병대를 전함으로 운반해 줄 해군 측에서 강조가 되었다. 해군 함정들이 인천 해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날짜는 밀물의 주기에 따라 거의 제한이 되었는데, 빠른 날이 밀물의 깊이가 31 feet인 9월 15일 이고 그 다음이 10월 11일이었다. 9월 15일의 아침 밀물의 시간은 오전 6시 59분, 저녁 밀물은 오후 7시 19분이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상륙시기를 아침밀물에 맞추는 작전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결정은 그에게는 사실 간단했지만 해군에게는 상당히 힘들고 복잡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거의 한결같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맥아더가 충분히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도박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전략적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거의 모두 인정을 했지만 문제는 상륙 지점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한 조건만 갖춘 인천인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군산이 훨씬 (해군에게, 해병대가 상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닌가? 그런 것들은 사실 맥아더가 설득하는데 거꾸로 이용이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 적들도 그곳을 충분히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천의 가치는 사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면 낙동강 쪽에 몰려있는 공산군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아더의 뚜렷한 구상은 예상보다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인천 D-day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졌고, 공격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맥아더의 짐작대로, 김일성은 인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모택동은 달랐다. 맥아더를 알았고, 일본에 깔려있던 공산스파이들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후방 깊숙한 곳으로 대거 병력이 쳐들어 올 가능성에 대해서 중공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지만, 역시 맥아더에게 운이 좋았는지 그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빠른 승리를 장담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공의 지시에 의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를 보면 이런 미친 정도로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간다. 그는 사실 거의 ‘깡패 개XX’ 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상륙작전은 예상대로 공산군의 저항이 미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13,000명의 해병대가 투입이 되어서 첫날의 전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을 향한 진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것은 9월 28일까지 계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30마일 정도 진격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9월 15일 이후 놀란 김일성이 대거 병력, 2만 이상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사실 서울을 그렇게 빨리 점령할 이유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저항이 치열한 서울을 우회해서 빨리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하는 공산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후에 ‘맥아더 개인의 영광’을 위한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서울 탈환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울 탈환에 소모된 귀중한 시간에, 후퇴하는 공산군이 북으로 탈출할 여유를 준 셈이고, 그것은 두고두고 전쟁을 길게 끈 원인도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6.25 남침의 3개월이 되던 9월 25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에는 서울 근교까지 진격을 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가전이 거의 3일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가 거의 혼자 밀어부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 셈이고, 이로 인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포위했던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하게 되고,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 성공 이후로 ‘기세가 등등’ 해진 그의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 된다.

 시기적으로 6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당시 2살 정도여서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이 당시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아버지가 끌려 가신 이후였고, 원서동의 어떤 무당집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그 동네는 비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다 보셨다고 들었다. 그러면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런 장면을 다 보고 들었을 것 같다. 다만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다. 생각을 한다. 과연 민족 반역자, 역적, 김일성 개XX는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나? 이 미친놈을 어떻게 역사는 능지처참을 할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

 

 

 

지난번에 우연히 빌려온 Esperanto 에 대한 책을 보고, 어릴 적에 본 아버지의 책들과 문서들을 떠올렸다. 사실 에스페란토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지만, 그 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때 납북되시기 전까지 이것에 깊이 관련되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오래 잊고 살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무언가 큰 가족 역사를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에스페란토 그 자체보다 그것에 얽인 아버지의 활동에 더 관심이 간 것이다. 어렸을 때 본 몇 장 되지 않은 아버지 사진 중에 에스페란토 기념사진이 있었다. 무슨 건물 앞 중앙 현관 계단에 모두들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는데, 거기에 에스페란토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제일 앞줄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무슨 에스페란토 연수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1980년대 에스페란토 교본에 실린 한국 에스페란토 인들

1980년대 에스페란토 교본에 실린 한국 에스페란토 인들

그래서 세월의 curse가 아닌 그로 인한 technology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역시, googling 으로 한국 에스페란토 역사의 ‘여명기’에 관해서 ‘과거’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나의 ‘희망적 짐작’은 어김없이 맞았을 뿐만 아니라 상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나의 아버지(의 흔적)를 거기서 찾은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육성’ 까지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나와 같은, 아니 훨씬 더 했을 감동을 나누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너무나 늦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에스페란토의 관계를 나는 느끼며 살았는데, 관련 사진과, 책, 서류들 때문이었지만 어머니도 가끔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언급을 하신 것을 기억한다. 위에 말한 아버지의 책들과 ‘회보’ 같은 것들은 분명히 ‘영어’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 고등학교 세계(역)사 시간에서 드디어 에스페란토 란 말을 듣게 되었다. 비록 간단히 언급을 했지만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의사, 자멘호프 란 사람이 ‘세계평화‘를 염두에 두고 고안한 사상 처음으로 ‘인공 언어’ 인 ‘에스페란토’ 어를 만들었다는 간단한 구절이었다.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 말고는 더 자세한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그런 것을 더 알려면 국내 유일의 국립중앙도서관에나 가야만 알 수가 있었고, 백과사전은 너무나 비싼 ‘귀중, 사치품’에 속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대로 오래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무한정의 정보망”, 인터넷은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역사를 조금은 더 정확하게 잡아 놓았다. 첫 번째로 우리 (아버지 쪽) 집의 뿌리가 평창이씨, 익평공파, 아버지는 27세 손이고, 전설적으로만 남아 있던 작은 삼촌의 존재, 그들의 정확한 나이까지 알게 되었다. 현재는 이것으로 나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나의 자식들이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아버지의 ‘업적’까지 덧붙이게 되었으니, 나의 기쁨은 글만으로 표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연대적으로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은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라는 글이다. 이 글은 인하대학교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의 학교 웹사이트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Google의 indexing을 통하지 않고는 찾기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semi-private’한 인상을 준다. 이 저자의 전공이 molecular biology인 것 같아서 조금 의아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니 에스페란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문학적인 각도에서 본 에스페란토 어의 유용함을 ‘과시’하듯 한국문학작품의 번역(에스페란토 어로)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다.

인하대학 조성호 교수의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인하대학 조성호 교수의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이 글 에서 아버지의 성함이 두 번 언급된다. 첫 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홍형의 는 「삼천리」사 편집국에 근무하다 사퇴하고 1937년에 「Korea Esperantisto」지를 창간하였다. 비록 일제에 의해 곧 폐간되어 창간호 밖에는 발행되지 못하였으나 이 잡지는 표지 포함 24쪽 전문이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어 우리 운동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창간호에는 월북작가인 이태준(李泰俊)의 장편(掌篇) 소설 「천사(天使)의 분노(憤怒)」(1932)가 이정모(李正模)의 번역(「La Indigno de l’Anĝelo」)에 의해 실려 있다

 

그러니까, 1937년에 창간호로 폐간이 된 언급된 잡지에 아버지(이정모)가, 1932년에 발표된 이태준의 꽁뜨, <천사의 분노>를 번역해서 실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나는 아버지가 이시기에 이미 에스페란토 어를 거의 통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1937년이면 아버지의 연세가 26세에 불과한데..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대학(보성전문: 고려대학의 전신)시절에 이미 에스페란토에 심취 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평소 직업은 영어 선생님(선린, 경기고)이었으니까, 어학 쪽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지만 어떻게 에스페란토에 접하게 되었는지는 현재까지 알 길이 막막하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99년경에 그 동안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을 총 망라한 anthology, <Korea Antologio>가 출간이 되었는데 이 글의 저자도 이 작업에 관여가 된 모양이다. 그 책에도 역시 아버지, 이정모의 번역작품이 실린 모양인데 그것이 위에 언급된 <천사의 분노>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스페란토 협회를 중심으로 이종영, 이낙기, 정원조 등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도 Antologio 발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으며, 수년 전 드디어 구체적으로 그 뜻을 모으게 되었다. 필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 1970년대 말부터 틈틈이 단편소설의 번역 작업을 해 오던 터이라 김우선과 함께 그 편집의 역할을 수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안송산, 허성, 방명현, 권혜영 등과 함께 편집진을 구성하여 기 발표된 작품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약 2년만인 1999년 말에 드디어 「Korea Antologio de Noveloj」 (이하 「Korea Antologio」라 함)가 발간되었다.
Korea Antologio」에는 339쪽에 걸쳐 모두 2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김억의 번역 소설 중 3편, 안우생 번역의 1편, 이정모 번역의 1편, 이재현 번역의 5편, 기타 「La Espero」에 수록된 11편, 「La Lanterno Azia」 수록의 3편과 필자가 번역하여 발표하지 않았던 황석영 원작(1973)의 「삼포(三浦)가는 길(La Vojo al Sampo)」 등 25편의 소설 번역 작품과 부록으로 「La Pioniroj en Vilaĝo」가 포함되었다. 편집 과정 중 가능한 한 원래의 번역 문체를 살리기 위하여 문법적인 오류를 제외하고는 수정을 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인터넷에서 찾아 낸 것이 <제3장 혼란 속의 재건과 성장(1945~75)> 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역사의 일부분이다. 누가 저자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에스페란토의 ‘정사(正史)’ 정도 수준의 글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글의 바로 제일 첫 부분에 아버지의 이름과 ‘육성’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패하고,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자 새로운 나라를 수립하기 위한 건국준비가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동시에 에스페란토운동에 대한 탄압도 사라졌다. 이 때 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출신의 젊은 지성인을 총망라한 [건국추진대 본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우선 [평화의 사도] 연합군(미국, 소련)의 서울 진주를 환영하기 위하여 영어와 러시아로 된 환영휘장을 붙이기로 하였다. 이 때 이정모(李正模)가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창조된 국제공통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고 제의하여 젊은 지성인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들은 즉석에서 주머니를 털어 1천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1945년 8월 하순, 서울 종로에 있는 영보빌딩 정면에 에스페란토로 서울에서 가장 큰 연합군 환영휘장을 붙이고, 가두방송용 확성기를 통하여 에스페란토에 관한 선전을 하였다.

 

이 글을 찾고 읽었을 때 나는 피가 멈추는 듯한 충격과 감격을 느꼈다. 전설적으로만 느껴지던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로 나는 간접적으로 추측의 나래를 한껏 펴보는 기쁨을 즐겼다. 해방되는 해면 아버지는 첫 딸을 5월쯤에 보았을 젊은 아빠였을 것이다. 그 당시 아버지는 선린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이런<건국추진대> 라는 ‘운동권’에 관계가 되었을까? 전혀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는 없던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로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는 에스페란토의 정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분명히 ‘인류평등’, ‘인류평화’를 신봉하던 거의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 본다.

 해방 후에 재건된 에스페란토 학회의 창설과정과 후학 연수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때가 아버지의 에스페란토 운동의 절정기가 아니었을까. 이때는 사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서울 중심의 전국적 조직은 흩어진 동지의 규합에 시간이 필요하고, 또 서울에서 사회적, 정치적 혼미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에스페란토운동의 부활이 늦어졌다. 그러나 개혁적인 에스페란티스토와 에스페란토 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모여 “약소민족어의 해방 및 에스페란토운동의 재건”을 축하하는 [에스페란토 정치선언]을 채택하고, 이것을 잡지 「혁명」(발행인 김 근)에 게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1945년 12월 15일 자멘호프 탄신을 계기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Korea Esperanto-Instituto)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홍명희(洪明憙)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고,2) 홍형의(洪亨義)를 서기장에 임명하였다. 동시에 조선에스페란토학회의 사업계획을 채택하였는데 1) 재정 확립, 2) 기관지 발행, 3) 사전 편찬, 4) 학습 교재 발행 등을 하기로 하였다. KEI창립을 위하여 김억(金億), 백남규(白南圭), 석주명(石宙明), 유기동(柳基東), 이균(李鈞), 이종률(李鍾律), 김교영(金敎瑛), 신봉조(辛鳳祚), 이정모(李正模), 장석태(張錫台), 나원화(羅元和), 송창용(宋昶用), 서병택(徐丙澤), 홍형의(洪亨義) 등 서울에 있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발기하고, 그 외 창립총회에는 홍명희(洪命憙), 이기린(李基麟), 유림(柳林), 곽경(郭敬), 김계림(金桂林), 김명진(金明鎭), 이동각(李東珏), 李正馥(이정복), 박명줄(朴明茁), 이동석(李東錫), 문홍주(文弘周), 한일(韓一), 윤봉헌(尹鳳憲), 홍숙희(洪淑熹), 이기인(李基寅), 이극로(李克魯) 및 당시 아직도 중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한 안우생(安偶生), 이재현(李在賢) 등이 참가 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대회가 끝나자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 주최 첫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1946년 2월 16일 서울대 대강당에서 [대학생 에스페란토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100여 명의 수강자에게 석주명, 홍형의, 안우생의 강연에 이어, 석주명, 홍형의 지도로 에스페란토 강습을 하였다. <중략>
1946년 8월 제2회 공개강연회 및 강습회가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개최되었고, 이 때 이극로(李克魯)가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고,3) 서울 을지로2가에 있는 청목빌딩에 KEI 사무실을 두게 되었다. <중략>
    1949년 5월 서울 국학대학 강당에서 약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 및 KEI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KEI 제4대 회장으로 유기동(柳基東, Saliko, 사업가), 부회장으로 백남규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8월에 KEI 제5회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약 30명이 참가하고 서병택, 석주명, 이정모가 지도하였다.

 

위의 글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에 에스페란토 운동의 중심부에서 학회 발기인, 후배 양성에 전력을 쓴 것이 역력히 들어난다. 특히 아버지의 이름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대부 격인 ‘김억, 석주명,’등과 나란히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이로나 정열, 열의, 경력 등으로 보아 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특히 계속된 에스페란토 강습회에서 강의를 한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직업인 ‘학교 선생님’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상주의적인 에스페란토 운동은 사실 사상적으로 조금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완전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니까, 사실 빨갱이건, 아니건 모두가 참여할 여지가 있었고, 해방 후의 사상대립에서 이것은 정말로 아슬아슬한 운동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구의 남북합작과 같은 정도의 남쪽에서 보면 불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거꾸로 빨갱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악질반동들이 섞여있는 이런 단체를 곱게 보았을까? 그러니까 양쪽에서 모두 ‘노리는’ 그런 ‘동네 북’과 같은 ‘중립’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에스페란토의 중추적이었던 몇 사람이 납북과, 처형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차츰 정리, 활성화되어 가던 한국 에스페란토운동도 갑작스런 6.25사변으로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KEI는 1949년 5월 서울에서의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마치고 제4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1950년 6월 28일 서울 과학박물관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6.25동란으로 서울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따라서 제4차 대회는 개최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석주명은 살해되고, 김억과 KEI 회장 유기동 등 핵심인물들이 동란 중에 납북되었다.  국내에 머물 수 있었던 안우생, 이균, 김교영, 이계순(여자) 등 인사들도 전란으로 뿔뿔이 분산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스페란토학회(KEI)의 기능이 계속 될 수 없었다.

 

위의 글에서 왜 아버지의 납북에 관한 언급이 없었을까? 육이오 동란 이후, 국내 에스페란토 관련 인물들이 아버지의 납북사실을 이렇게 전혀 몰랐을까? 나중에 역사를 정리하면서 분명히 ‘이정모’의 실종 사실을 발견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에스페란토 정사(正史)’에서 아버지 이름이 슬그머니 사라졌을까? 나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가족의 역사는 이곳에서도 ‘찾기 어려운’ 그런 사실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하고, 내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아버지의 희미한 자취를 찾으면서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인공적인 국제 공용어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다. 언어를 천재적인 용기로 혼자서 150년 전에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안타깝게도 이 언어는 창시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역시 새로 등장한 영어의 위력 때문이 아닐까? 비록 배우기가 자연언어보다 쉽다고는 하지만 역시 이것을 배우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도 전형적인 chicken-and-egg or Catch-22 problem일 것이다. 어느 정도 쓰이고 있어야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질 터인데 그 단계에 도달하지를 못한 것이다. 15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절대 질량 (critical mass)’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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