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역사

Wintry Mix, 드디어 winter weather advisory 가 이곳 저곳에 보인다. 2개 중, 하나는 freezing rain이고 나머지는 strong wind… 이 정도면 거의 준準 비상 급이 아닌가? 첫 눈이 오는 것은 내심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것이지만 피해가 생기게 되면 문제다. 하지만 느낌에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오늘 저녁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고 내일 아침에는 북서풍 강풍을 동반한 비, 서서히 눈으로… 얼기 시작하면… 와~ 운전하는 것 문제다. 결국 우리 둘은 내일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미사 차 20+ 마일 freeway 외출하는 것을 자제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그래 안전한 것이 우선이다. Online mass에 이제는 익숙해졌으니까…

밤새 유나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렸지만 그래도 긴 울음이 아니라서 우리가 자는 것은 거의 문제가 없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최악의 경우 밤을 꼬박 샐 것도 상상을 했는데… 이 정도면 양반이다.  이렇게 해서 유나도 자기 집이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자는 경험을 만든 것, 우리는 물론이지만 새로니에게도 조금은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오늘 1월 15일은 친구 양건주의 74세 생일… 언제부터 이날을 기억하며 사는 것인지… 이제는 완전히 기억을 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보다 며칠 위 형 뻘이지만 지금은 도저히 생사여부조차 알 수가 없으니… 왜 인희씨는 한마디 소식이라도 전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큰 문제만 없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건주야~ 네가 오래오래 도사처럼 우리에게 삶과 건강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니?

 

Sope Creek Crossing

Ozzie와 둘이서 거의 2시간가까이 걸었다. 오늘은 Sope Creek Apt trail East 쪽을 정말 오랜만에 들러보았다. 하지만 오늘의 산책 뉴스는 뜻밖으로  historical landmark를 발견한 사실이다. Sope Creek 상류를 처음 발견했을 때 그 위치와 연관되는 것, 바로 옆 Roswll Road에 세워져 있었던 다른 landmark 를 오래 전에 본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것을 읽어본 기억에 Civil War 당시Lincoln의  Union Army [북군]가 바로 이 근처, 이곳을 거쳐서 Atlanta로 진격을 했다는 것.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서있었던 Sope Creek 개울가에 돌다리가 있었고 그곳을 거쳐서 Union Army가 Atlanta 최후의 Chattahoochee River 방어선을 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곳, Sope Creek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Sope Creek Crossing의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이상 앞으로 이곳에 산책을 올 때마다 Kennesaw Mountain 격전 후 1864년 7월 초 이곳을 넘나들던 Union Army의 ghosts 말발굽, 군화 소리를 상상하는 것도 뜻이 있는 것 아닐까? 오늘 보게 된 Sope Creek Crossing historical landmark plaque는 이렇게 증언을 하고 있다.

On July 8, 1864 General Sherman sent a contingent of troops to cross the Chattahoochee only a few miles from this site. That crossing was successful in penetrating the Confederate defenses, the final stronghold in front of the fortifications around Atlanta. From the 9th to the 13th of July an estimated 30,000 Union soldiers under the command of McPherson, Howard, and Logan passed over Sope Creek on their way to the eastern flank of Sherman’s advance. Many of these soldiers traveled down Old Roswell Road and crossed Sope Creek at a classic plank and stone-covered bridge located where this overlook now stands. As Sherman’s troops moved through Sope Creek Crossing, Atlanta waited restlessly under the shadow of an impending attack. War’s dark clouds were gathering for the storm that would destroy the South’s grandest city.

1864년 Atlanta Campaign 직전 외곽지대에 도착한 Gen. Sherman

지금은 예전의 가교는 없어졌지만 이런 landmark와 전망대가 그 당시를 기억하게 한다. 우리 동네를 휘휘 감으며 졸졸거리는 Sope Creek을 따라 내려가면 커다란 강줄기 Chattahoochee River가 나온다. 그러니까 아틀란타 최후의 격전지였던 Kennesaw Mountain과 ‘패전 도시’ Atlanta사이에 있는 이곳 ‘우리동네’  Marietta는 향후 미국역사를 판가름하는 그 길에 있었던 것이다. 가끔 상상을 빼놓지 않는다. 만약 이 전투에서 Lincoln이 졌다면… 아니 최소한 휴전으로 끝났다면 미국이란 나라는, 아니 전 세계의 역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쉽게 말하면 소위 말하는 ‘미국식 자유자본민주주의’의 모습은 기대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상상에 따라서 ‘아찔’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밤이 깊어오면서 예보대로 차가운 빗발이 뿌리기 시작, 비와 눈이 강풍과 함께 내일 올 것을 머리로 그린다. 비가 눈으로 바뀌면 우리는 Ozzie를 데리고 산책을 시도하고 Sope Creek쪽으로 가서 그곳의 겨울풍경을 만끽하고 싶다. 그것이 과연 실현이 될 것인가? 나의 흐릿했던 상상력, 올해는 눈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가급적 내 생일 전에 ‘대한 추위와 함박눈’의 선물을 기대하는 것, 너무나 유치한 바램일까?

 

아차! 미안, 자괴自愧, 실망… 오늘이 사일구 4.19  61주년 기념일이었구나! 미안합니다, 선배님들, 형님, 누님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일구를 어제 잠깐 생각은 했지만 바로 오늘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것 뿐이었다. 죄스러움, 나이와 세월의 횡포, 등등만 핑계거리만 생각하고 있으니… 1960년의 이날을 어찌 이렇게 잊었단 말인가?  요새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인가? 그 당시에 잘 모르고 경험했던 어린아이의 추억이 지금은 조금 역사적 조망을 할 나이가 되었으니… 한마디로 ‘순수함의 결정체’ 였던 민중, 아니 학생들의 염원이었다. 다른 생각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빨갱이가 싫긴 했지만 그렇다고 빨갱이로 모함을 받는 것도 마다한 정말 깨끗한 분노의 발로였다. 부정, 부정 그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형님, 누님들, 그들의 순수한 희생, 그날은 바로 바로 그런 날이었다.

 

지난 밤 3시가 지나서 깼지만 다시 자려고 노력을 하며 6시 반까지 굳세게 자리를 지켰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그 중에서도 성모님의 추억을 떠올렸다. 특히 2014년 경의 성모님, 나를 진흙탕 도랑에서 손을 잡고 이끌어 올려주시던 모습, 북망산을 닮은 먼~ 곳의 서너 개의 봉우리를 바라보며 나를 계속 잡고 이끌어 주셨다. 마지막 봉우리는 아마도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런 것이라고 짐작한다. 성모님, 저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이제는 더 필요합니다. 절대로, 절대로…

2010년대 초 성모님의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한다. ‘용서’를 선언했던 올해 성금요일, 나는 무엇을 했던가? 아직도 앙금이 깊이 남아 있는 자신을 보며 다시 생각하니 나는 ‘용서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였다. ‘용서를 했다’ 가 아닌 것이다. 그 전까지는 ‘용서를 절대로 안 하겠다’였고 지금은 ‘용서를 하도록 노력하겠다’ 인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작은 기적’인 것이다. 그래, 서서히 잊으며 다시 예전에 없었던 때로 돌아가는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 너무 쪼잔한 신경에 목을 매지 말자.

 

Ozzie와 지내는 첫 아침이다. 계획에는 이 녀석을 데리고 이른 아침에 산택을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잘 하면 하루에 두 번 산책을 할 수 있는 기회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일주일 편하게 사고 없이 서로 사랑하며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니 부부는 어제 Pensacola [Florida] beach hotel에서 Gulf [of Mexico] 의 저녁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내왔다. 갑자기, 숙연해 진다. 어~~ 우리가 이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거의 참을 수 없는 향수, 그것을 느낀다. 가보고 싶기도 하고… 오랜 만에 둘이서 편하게 푹 쉬다 오면 좋겠다.

7시 반에 Ozzie와 기다리던 이른 아침 산책을 하였다. 이 녀석 요사이 새로니가 늦게 일어나기에 아마도 처음 이런 산책을 할 듯하다. 너무나 기운이 넘치고 유유작작 온 동네를 섭렵하는 모습 나도 맑은 공기를 실컷 들어 마시며 즐긴 셈이다. 푸푸를 무려 세 번씩이나 하는 것, 이제는 나도 기대를 하기에 큰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토요일까지 걷는 것이 나의 목표다. 나의 허리운동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날씨까지 협조적이니 얼마나 좋은가?

 

HISTORIC FIRST FLIGHT ON MARS!  화성의 표면에서 처음으로 뜬 헬리콥터 drone Ingenuity… 정말 재미있는 소식이 아닌가? 대기권이 거의 공허한 그곳에서 어떻게 ‘뜬’단 말인가? 무엇을 밀어 제칠 것이 있단 말인가? 무언가 있으니까 떴겠지만. 공기가 너무 희박한 것을 해결하려면 결국 이 drone의 무게를 가급적 가볍게 해야 하는데, 이것들을 가지고 ‘노는’ engineer들이 정말 부러워 진다. 분명히 여자, minority들이 섞어 있거나 그들이 주역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고 변했다.

 

오늘로 일단 우리 집의 ‘대 공사’는 끝나게 되었다. 마지막이 gutter인데 오늘 예정된 시간에 Duckworth Gutters guys 들이seamless gutter extractor 차를 몰고 와서 2시간도 안 걸려서 말끔히 6″ seamless aluminum gutter를 설치해 좋고 갔다. 2 black guys까지 포함된 날렵한 teamwork도 그랬고 black/white가 어울린 team이 오늘의 George Floyd 공판의 뉴스와 함께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생각보다 큼직하고 탄탄하게 보이는 gutter는 우리 집 전체를 돋보이게도 했지만 이제부터는 소낙비가 오더라도 안심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이로써 total  $30,000 의 결산으로 tree, roofing, siding, gutter가 모두 끝나게 되었다. 분명히 집값도 영향을 받게 되리라….

 

KBS 역사 스페셜… History Special… 이름도 독특하다. 무엇이 스페셜 하다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역사에 접근하는 방식, 보여주는 방식이 독특하다는 뜻은 아닐까? 물론 여기서 역사 스페셜 이란 거의 20여 년 전에 대한민국 국영방송 KBS 에서 제작, 방영한 인기 다큐멘터리다. 이 프로그램을 나는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Pandemic 사태 중에 다시 많이 보게 되었다. 물론 여유 시간이 거의 무제한으로 나에게 다가온 시기였기에 이것도 그것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나를 가끔 찾아오던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하는 특별한 역할을 하기도 했기에 지금은 아주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50대가 되기까지 세계적인  ‘정치적, 사회적’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때까지 나이를 살아가는데 필요성이 없어서 그랬을까? 한마디로 나에게 역사란 물리적인 시간이 모두 지나간 때의 ‘실재 實在 사실 事實’, 그림, 글, 사진들에 남은 퇴색된 옛날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50대가 넘어가면서 늦게나마 나에게는 역사의식이란 것이 움트기 시작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나만이 경험한 우연적인 일인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30대 이전에 보편적 역사의식이 생기는 것은 드문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나는 아마도 조금 늦게 이런 의식이 생긴 것이 아닐까.

 KBS 역사 스페셜, Wikipedia에서 자세한 내용을 거의 우연히 찾게 되었다. 알고 보면 내가 가지고 본 것들은 제1차 스페셜 [1998~2003]의 완전한 전부였다. 그 이후 나도 기억하는 ‘고두심’ 진행의 2차 HD 역사 스페셜[2005~2006]이 2006년부터 일년 정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3차 스페셜[2009~2012] program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것도 거의 1차의 반 정도가 되는 100회가 넘는 긴 series였던 것을 오늘 알고 깜짝 놀랐다. 물론 진행자는 ‘한상권’이라는 아나운서라고 하는데 물론 나는 전혀 안식이 없는 사람이다. 제1차 시리즈에 매료된 나는 역시 ‘전원일기’ 유인촌의 진행에 모든 가치 기준을 두고 있다. 그가 ‘사실상 표준’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1차 시리즈 전체 150회가 넘는 갓, 이미 오래 전 우연히 download를 해서 언제라도 볼 수가 있었는데, 문제는, 그 후 시리즈의 것들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 Wikipedia link를 따라가 보니 그곳은 원래 제작자인 KBS site였고 물론 그곳에서 공식적으로 그것을 ‘공짜’로 보여 줄 리는 만무… 작은 희망인 ‘open’ YouTube를 가보니 그곳에서는 몇 편인지는 모르지만 볼 수 있는 희망이 조금 보인다. 일단 ‘낚시 줄에 걸리는 것’ 부터 download를 시작했는데…. 과연 몇 편이나 건질 수 있을지…

새로 찾고 download한 ‘續’ KBS 역사스페셜 후편들…  2006년에 방영된 2차 시리즈, ‘전원일기’ 고두심 진행의 것 중에 ‘수도 한성의 건설이야기’를 본다. 2006년 즈음의 강북 江北 서울이 고스란히 나온다. 어찌 가슴이 저며오지 않으랴…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제 거의 question mark가 되었고, 이제는 그런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오래 전에는, 100% 고향에 가서 죽으리라 했던 것이 이제는 이렇게 나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어떨까? 나의 원래의 소원이 비현실적이었는가?

 

지울 수 없는 잊혀진 대의명분, Stone Mountain, Georgia

 

미국 조지아 주,  수도 아틀란타, ‘바람과 함께 사라진’  lost cause의 역사, 공립고등교육수준  미국에서 ‘거의’ 최하위,  racist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득실득실, 남북전쟁 전후 노예제도 천국, 깊은 산속에 숨어사는 해괴한 백인들…  알아들을 수 없는 지독한 사투리 southern accent, 이런 모든 조지아 주의 ‘사실이건 아니건’ 불명예는 정확히 30여 년 전에 ‘북쪽’에서 이곳으로 직장을 찾아 온 가족이 내려오면서 어렴풋이 들었던 숨길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들이었다.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조지아와 모든 것이 정 반대의 극에 있는 ‘추운 동네’ Madison, Wisconsin을 떠나 새로 찾은 직장이 바로 Atlanta, Georgia에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대단한 결정을 하게 된 것이지만,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들, 남쪽 특히 조지아 주로 가는 것에 대해 불쌍한 듯, 이맛살 찌푸림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치 사회적, 문화적으로 뒤 쳐진 곳’으로 가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사를 올 당시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것 중에는 ‘무식 無識이 자랑인, 무지랭이 중의 극치 極致’, 감추고 싶은 미국 역사의 수치 羞恥’인  KKK (Ku Klux Klan) 가 ‘패전 敗戰, 조지아 주’와 직접 관련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남북전쟁 패전 직후 테네시 Pulaski, TN 주의 ‘한 동네에서’  갑자기 할 일들이 없어진 ‘패전 남부 confederate 퇴역군인, 동네깡패’들로 로 출발했던 이 hate group은,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급변하는 세상의 불안한 심리[흑인해방, 동유럽 이민, 가톨릭]를 적절하게 이용해서 급성장 수백만 명의 member를 확보하기도 했는데 이 무렵에는 이미 ‘장난적인 hate group’에서 벗어나 당당한 정치적 그룹이 되었고 수 많은 정치인들도 가입을 한 상태가 되었다. 이 재건된 KKK의 시발점이 바로 아틀란타 교외의 Stone Mountain[현재는 州 공원]이란 곳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Stone Mountain [Park]은 사실 이곳으로 이사오자 마자 중앙고 후배 윤주네 집의 안내로 주말에 가끔 놀러 가던 곳이었다.  가족들 picnic장소로 적당하고 거리가 우리 살던 곳에서 20분도 안 걸리는 곳의 위치, ‘세계에서 제일 큰 돌 바위 산’으로 비교적 쉽게 정상으로 hiking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제일 큰 ‘행사’는 Laser Show였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남부의 영웅 3명[R. Lee, Jackson, J. Davis]’ 조각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laser image는 어둠이 깔리는 잔디에 누워서 보는 것은 정말 대단한 show였다.

 

3 heroes alive with Laser

 

비록 ‘적진 敵陣’으로 이사온 기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보이는 피해를 본 기억은 전혀 없다. 1990년대 이후의 아틀란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도시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온 지 몇 년 후에는 올림픽까지 치렀다. 내가 일하던 직장은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 타 주에서 직장을 찾아 내려온 사람들이고, 최소한 수도권 안에서는 어렵지 않게 많은 이민자들이 정착해 있었다. 그 옛날 유색인 전용 화장실은 전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이사온 지 30년이 지난 현재, 서울-아틀란타 비행기가 매일 뜨고 내리게 되어서 이제는 서울의 공기가 지척에서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아직도 조지아는 평균적으로 뒤 떨어진 곳이지만 부분적, 지역적으로는 진보, 발전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비록 평균적인 중고등 교육수준은 최하위에서 맴돌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Georgia Tech이나 Emory University같은 곳은  대표적 예외에 속하는  case다.  온화한 날씨, 경제적인 부동산, 활발한 경제 등으로 이제는 너무나 많은 외부, 타 주 인들의 유입이 문제가 될 정도가 되었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KKK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세계사를 통해서 이런 ‘반동, 증오’ 그룹은 언제나 있었고 그것에는 분명히 원인과 결과가 교훈으로 남는다. 미개한 것이나 덜 개화된 것이 전부가 아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그 중에서 제일 큰 원인을 제공한다. 미국의 KKK의 교훈을 보아도 분명하다.  노예들 덕분에 편안했던 시절이 끝나게 됨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듯하고, 설상가상 ‘종교가 불확실한, 못사는’ 유럽으로부터의 대량이민, 종교적으로 증오대상이었던 ‘가톨릭’의 출현, ‘보기 싫은’ 유대인들 등등,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증오했던 ‘백인우월주의’,  어느 정도 민중의 호응이 없었을 리가 만무하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하면 모든 것은 끝이다.

이런 모든 것들의 실험장이 바로 미국의 19~20세기 역사가 아닐까?  이것은 전형적인 challenge-and-response의 반복 실험이다. 미국은 결론적으로 이제까지 이런 치명적인 도전을  거듭해서 물리치고 있는 형편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현재 우리의 코앞에 있는 challenge 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위의 교훈들에 비추어 보아서 현재 우리의 ‘우려, 공포,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거나 잘못 판단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이끄는 ‘주체 세력, 정치인’들은 과연 누구인가? 희망과 긍정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들추어내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세력, 인간들은 누구인가? 우리와 같은 소수민족을 더욱 불편함과 불안함을 더해 주는 정치인은 누구인가? 그와 반대로 ‘지나친 방종적 자유, 비도덕적에 대한 무감증’을 부추기는, 한 마디로 ‘내가 법이고 도덕’이라고 떠벌리는 한심한 부류들은 누구인가? 이런 것들, 결코 쉬운 도전이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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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서 내가 살아왔던 20세기 중엽을 전후로의 ‘세계, 미국사’를 사회적 관점에서 공부하는 데 안성맞춤인 당시의 미국 주간지 LIFE magazine에서 바로 KKK on the Stone Mountain, 기사를 읽게 되었다. 화보중심의 주간지라서 이곳에 실린 사진들은 과히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사진기자가 어떻게 ‘변장’을 하고 이들의 ‘행사’에 잠입하여 당당하게 사진을 찍었는지, 과연 LIFE journalism의 우수성이 대단했다.

여기에 보이는 ‘신 단원 선서식’에서 많은 ‘인간’들이 관공서, 경찰 들의 member라는 것으로 당시의 ‘개화된 아틀란타’ 교육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채로운 것은,  이 사진의 설명들에서, 객관성을 자랑하는  LIFE 편집자들의 ‘이 그룹에 대한 혐오감’ 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 anti-Negro, anti-Catholic, anti-Semitic, anti-foreign, anti-union, anti-democratic”, “The ghastly spectacle of hooded human beings”, “Childish ritual”, “march in lock step, like old Georgia chain gang prisoners”, “the mumbo jumbo of initiating”…  이 중에서도 Georgia chain gang prisoners라는 말로 보아서 이들 [북쪽 사람들]이 얼마나 [바람과 함께 사라진] 조지아 주를 경멸, 조롱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On the evening of May 9 [1946] at 8 p.m. a mob of fully grown men solemnly paraded up to a wide plateau on Stone Mountain, outside Atlanta, G., and got down on their knees on the ground before 100 white-sheeted and hooded Atlantans. In the eerie light of a half-moon and a fiery 200-by-300 foot cross they stumbled in lock step up to a great stone altar and knelt there in the dirt while the “Grand Dragon” went through the mumbo jumbo of initiating them into the Ku Klux Klan. Then one new member was selected from the mob and ceremoniously “knighted” into the organization in behalf of all the rest of his fellow bigots. During the two-hour pageant the more privileged members of the Klan padded about with an electrically lighted cross. Said a local Baptist minister of the exhibition, “The ghastly spectacle of hooded human beings trekking…to Stone Mountain to burn a cross…is a sad commentary on the words of the Son of God: ‘And I, if I be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men unto Me.'”.

This was the first big public initiation into the Klan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It was put on at a carefully calculated time. The anti-Negro, anti-Catholic, anti-Semitic, anti-foreign, anti-union, anti-democratic Ku Klux Klan was coming out of wartime hiding just at the time when the C.I.O. and the A.F. of L. were starting simultaneous campaigns to organize the South and just at the time when Southern politicians were starting their campaign for state and national offices. Georgia’s former “white supremacy” Governor Gene Talmadge is trying a comeback this year and has said that he will “welcome” the support of the Klan. But it is doubtful that the Klan can become as frighteningly strong as it was in 1919. One indication of the Klan’s impotence was its lack of effect on Negroes, who were once frightened and cowed by the white-robed members. More than 24,000 Negroes have already registered for next July’s primaries in the Atlanta vicinity alone, where the Stone Mountain ritual was held.

 

THE KLANS “GRAND DRAGON,” SAMUEL GREEN, AN ATLANTA DOCTOR, IS SURROUNDED BY HIS ASSISTANTS

THE “NEW MEMBERS” march in lock step, like old Georgia chain gang prisoners, up to the Klan’s big altar. The Klan exultingly announced they had initiated 600 new members in one night. But observers’ best guesses were from 150 to 200.

A BURNING CROSS DURING MAY 9 INITIATION, STONE MOUNTAIN CEREMONY WAS PUT OFF MANY TIMES, KLANSMEN SAID, BECAUSE OF WARTIME SHEET SHORTAGE.

BEFORE THE GRAND DRAGON initiates kneel, repeating the ritual. The crowd included some Atlanta policemen. The five Atlanta “klaverns”(branches) are strong because many members of the police force are also members of the Klan.

 

 

 

요즈음 ‘심심하면’ 들추어 보는 미국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화보 주간지 LIFE magazine, 그 중에서 내가 태어날 즈음의 것을 보다가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2년 뒤에 일어난 6.25 동란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한국에 관한 기사가 실렸지만 그 이전에는 사실 이 반란사건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전에 이런 기사를 보게 되면 그저 ‘분단 역사’의 비극의 하나로 생각하기도 했겠지만 현재의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면 아주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이 기사가 실렸을 때까지의 LIFE 지를 살펴보면 미국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반공 중의 반공’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이 거의 갑자기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속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의 확장, 특히 철의 장막에 대한 경계심을 날로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인들, 특히 ‘진보적 성향’의 LIFE 지 조차도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리기 시작하고 나치 독일의 뒤를 이어 나타난 소련의 공포 (특히 스탈린)를 미리 파악하지 못한 미국 행정부의 정책 실패를 비난하고 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의 공산정권에게 거의 패배하던 마당에 이번에는 한반도에서 이런 사건이 난 것을 LIFE 지는 중요하게 화보로 다룬 것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 2년 뒤에 일어날 CIVIL WAR, 한국전쟁도 예견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의 2차 대전을 전후로 한 루즈벨트 정권이나 모두 공산주의의 실체를 일시적이나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 본다면 쉽게 말해서 기회가 있을 때 이들의 ‘악의 뿌리’를 제때에 청소를 했었더라면 현재 한반도의 사정은 많이 달라졌을지 않았을까?

 

 

REVOLT IN KOREA

 

AT YOSU IN THE U.S. ZONE, WHERE KOREA’S REBELLION BEGAN
ON OCT 19, LOYAL TROOPS FLUSH OUT COMMUNISTS FOR TRIAL
AFTER RETAKING THE CITY

YOSU’S RECAPTURE was achieved on Oct. 27 by loyal troops. Only their
white helmet bands differentiated them from the rebels, who also used
new American equipment.

TWO OF SUNCHON’S BEREAVED WOMEN MOURN A LOYAL KOREAN WHO FELL BEFORE A REBELE SLAUGHTER SQUAD AS THE REBELLION BEGAN. AN AMERICAN ADVISER, LIEUT. RALPH BLISS LOOKS ON SILENTLY WHERE NO ADVICE WILL HELP

 

 

A NEW COMMUNIST UPRISING TURNS MEN INTO BUTCHERS

Sooner or later the cold war in Korea was sure to turn hot, and so it did in late October on a signal from Soviets. The reason were well known: Korea had been split between U.S. and Soviet control at Yalta, and the Soviets obstructed all later efforts to unite it, preferring to establish a Communist “people’s republic” in North Korea and equip it for civil war which would make all Korea Red. The urgency increased in August when the U.S. gave South Korea a government under President Syngman Rhee. When the Red rebellion came, it splattered blood across the new southern nation. It began on the cool night Oct. 19 while the Moscow radio trumped the news that Soviet troops were leaving Korea. Simultaneously a Red cell of 40 soldiers in a regiment of the American-trained Korean national army at the southern port of Yosu killed the regimental officers, gathered the entire regiment in revolt, murdered the local police and quickly captured both Yosu and the city of Sunchon 25 miles to the north. There the rebels, still in American Army uniforms, and followers raised the flag of the North Korean People’s Republic, and for a few bloody days ruled a small chunk of Rhee’s south. Before they melted into the hills, at least temporarily repulsed by loyal troops, LIFE’s Carl Mydans was on the scene with a camera to record the brutal consequences.

 

HOW DEATH CAME TWICE TO “PEACEFUL HEAVEN”

At Sunchon, which means “Peaceful Heaven,” the rebellion’s Red leaders opened the city jail and let political prisoners lead them through the city from house to house pointing out enemies for revenge. With this help the rebels had slaughtered about 500 civilians and 100 police before the Korean national army retook Sunchon (pop. 60,000) on Oct. 23. Then it was the government’s turn, and LIFE’s Carl Mydans watched with horror as the process of retribution began again. He cabled:

“Now the national army, aided by a few police who had fled to the hills and come back, repaid brutality with brutality. We watched from the sidelines of a huge playground with the women and children of Sunchon while all of their men and boys were screened for loyalty. Four young men stripped to their shorts were on their knees begging. One had his hands up in a symbol of prayer. Suddenly these suppliant hands were crushed into his mouth and nose as a rifle smashed out his teeth.

“Behind them stood two men with clubs. They beat the kneeling group over heads and backs until the beaters, grinning, had to pause for breath. A policeman wearing black glasses and Japanese helmet danced madly before the victims. Uttering staccato barks, he alternately spun his carbine butt forward and smashed a kneeling man in the face, then twirled the gun muzzle downward and feigned shooting. Finally, without missing a stroke, he charged like a goat, helmet lowered, and smashed the steel hat into the begging victim’s head.

“We drove through the city – empty except for bodies – and here we saw the reason for brutal retaliation. Bodies lay just as they had been slain by the rebels – in heaps with hands tied behind backs. In the police compound there were two heaps: 85 corpses, some of them civilian, some police. We found others near the river, tumbled grotesquely down an embankment and on the edges of paddy fields. Some were burned in charred masses on the streets, or lay alone where they had fallen beside looted shops and homes.

“During the first terrible days of Sunchon’s blood bath, no relative dated claim a body for fear that doing so would identify the living with the dead and thus bring quick retaliation from either the Communists or the government. Later, when it was safe, women streamed away from the big playground to poke among the heaps of bloated dead – a scene not easy to watch. When they found theirs, they were stoical at first. Then tears came and they were hysterical.”

 

DEAD REBELS, their bodies dotted with bullet holes, lie beside a school ground at Sunchon. Other rebels in army uniform (below) are hauled away tightly trussed in army trucks, after their capture by loyal army forces, for trial by a Korean military tribunal.

 

A CIVILIAN REBEL holds his bloody head after “questioning” by loyal
soldiers who took Sunchon back from the revolting troops. He may
get death sentence. Many Koreans, who traditionally jump at a chance
to attack their police and officials, joined the rebels believing
Red propaganda that all Korea had fallen to the Communists.

Margaret Burke-White

 

언제였을까? 아마도 1950년대 후반이 아니었을까?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는  이 (사진) 모습의 여자, Margaret Burke-White를  처음 보았던 것이…  어디에서 보았는가… 그것은 잊혀진 듯 하지만, 거의 분명히 당시의 미국의 대표적인 화보뉴스 주간지,  LIFE magazine이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iconic한,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그런 역사적인 사진. 요새 들어서 다시 우연히 Atlantic (magazine, online)에서 찾았고, 다시 ‘실컷’ 보며 짠~한 추억을 되새긴다. 바로 ‘그 미국여자’ 였다. 그 당시에는 ‘서양 여자’를 보면 우선 ‘미국여자’라고 불렀기에 국적 같은 것은 상관이 없었다.

이 사진 – 우람하고, 정열적이고 멋진 – 의 이 ‘미국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어린 마음이었지만 아주 충격적이고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B-17 bomber (전폭기) 앞에서 방한복으로 중무장,  ‘거대한’ 사진기를 사뿐 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와~ 한마디로 ‘어떻게 여자가…’ 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50/60년대의 대한민국 사회적인 분위기와 여필종부, 부부유별 등과 같은 유교적 전통적 여파의 끝자락을 보며 자랐기에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매일 ‘남자에게’ 얻어맞고 사는 아줌마들이 동네마다 적지 않게 살았던 그 시절,  용감하게 보이는 여자들을 보면 나는 정말 감탄도 하고 부럽기조차 했었다. 우리 어머님도 그 중에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아득한 기억 속의 ‘멋진 여자’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지만 생각보다 유명한 ‘앞서가는 여자’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요새말로 남녀차별의 glass ceiling을 ‘부숴버리는’ 그런 feminism 의 신봉자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물론 ‘모든 남녀차별의 벽을 깨는’ 첫 번째의 기록을 깨었던 인물이었다. 웬만한 남자들도 못 가는 곳들로 가서 역사적인 사진들을 남긴 것..  한마디로 photojournalism의 선구자…  공적인 직업적 성격은 아주 남성적이었지만, 사적인 다른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고 온순한, 대조적인 모습의 ‘미국 여자’, 나는 아직도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있다. 멋진 미국여자.. 여자.. 여자..

 

지난 5월 달에 들어서 부쩍 역사적 5월의 사건들 (5.16, 5.18 같은)에 추억을 더듬어 관심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쏟았다. 내가 만일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난다면..  나를 낳아준 조국 역사의 일부분, 그것도 아주 의미가 큰 것을 모른다면 조금 억울할 것 같았다. 게다가 요사이 나의 주변에는 ‘조국의 빨갱이화’를 염려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앞에서는 나는 거의 ‘완전한 외계인’이 된다. 어떻게 그렇게 모르고, 관심 없이 살았을까?

그 잃어버린 198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가 ‘이념 논쟁’과 마주 어울려서 정체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게 된 것이다. Internet의 덕분으로 Fake news까지 등장하고, Youtube란 것은 자칫하면 우리들 거의 몇 시간 만에 brainwash를 시켜 버린다.

오늘 나의 생각은 ‘천주교와 빨갱이’란 거북한 화제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 읽은 1990년 5월호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의 ‘4.3 항쟁, 인간해방의 토대’란 ‘특별기고’를 읽은 후, 나는 나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간단히 말해서, 1990년의 천주교 잡지의 글이 이 정도라면, 지금은 과연 어느 정도일 것인가?

이 특별기고의 저자 ‘김명식 시인’이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Googling하려는 유혹을 참았다. 더 자세히 알아보면 나는 이 저자에 대한 ‘증오의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실은 ‘생활성서’는 분명히 (천주교)교회인가를 받은 출판물인데, 어떻게 이렇게 편파적, 아니 ‘빨갱이’의 mouthpiece역할을 했던 것일까?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광주사태에 대한 생활성서의 기사들’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함을 느꼈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었다. 만약 광주’항쟁’이 이 ‘시인’의 4.3 ‘항쟁’과 같은 맥락이라면 나는 색안경이 아니고 ‘증오의 눈’으로 그들을 볼 것이다.

이 글을 전재하는 것,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지만 이런 것 감수하기로 결심을 했기에 강행을 하였다. 문제는 ‘천주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어떻게 허용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사필귀정 事必歸正’의 맥락에서 ‘혁신정당 남로당과 함께 민족해방의 대열에 합류’ 한 4.3 항쟁이라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 ‘시인’이란 분, 과연 어떤 인간인가? 어떻게 천주교를 말살했고, 하려던 빨갱이들이 이렇게 천주교의 이름을 팔아가며, 합류할 수 있었는지.. 역사를 배워라, 역사를.. 이 ‘事必歸正’의 인간들아…  당신은 당신이 숭배해온 주사파, 김씨 세습왕조의 최후 발악적 말로와, 그 밑에서 인류역사 유래 없는 카프카도 웃지도 못할 어이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동족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전재 全載: 생활성서 1990년 5월호에서

 

제주 4.3 항쟁 42주년 특별기고 (2)

 

4.3 항쟁, 인간해방의 토대

 

김명식 시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연구원 원장1

 

 

이승만 정권을 앞세우려고

2차대전 이후 미국은 국제관계에 있어서 패권 팽창주의의 야심을 노골화 해 나갔다. 그들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대소련정책에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으며 소련과의 협상을 계속하면서도 모스크바 3국(미, 영, 소) 외상 협의 사항조차 지키지 않았다. 3상 협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 사령관은 2주 이내에 회담을 개최하고,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미, 영, 소, 중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을 고려하여 신탁통치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1945. 12. 17)

그리스, 터키, 중국 등지에서의 사회주의 확대경향과 소련의 세력확대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다음의 여러 이론과 주장을 통하여 국제적 입지를 구축하려 했고 한반도 문제도 같은 방식을 사용하였다.

  • 케난의 주전론; 소련과의 협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미국은 이제 소련과의 상호적대적이고 상호불신하는 관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1946년 초)
  • 처칠의 철의 장막론; 소련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어권 국민이 단결하자 (1946.3)
  • 이승만의 분단고착 발언; 우리는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1946.6)
  • 트루만 톡트린: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주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스, 터키에 4억 달러 원조요청(1947.3)
  • 마샬 플랜; 자유주의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경제원조(1947.6)

 

미국은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안을 유엔 총회에 전격적으로 통과 시켰다(1947.11.14). 결국 UNTCOK 제1차 회의 (서울 1948.1.12)->소련측 반대->유엔 소총회 결론(1948.2.26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선거 실시)->UNTCOK 결의(한국의 일부지역에서 선거실시를 감시하며 동 선거는 늦어도 1948년 5월 10일 이전에 시시되어야 한다)라는 형식적 과정을 밟고 대리점령통치기구 구축음모를 착실히 굳혀나갔다.

미국은 당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지지하는 한민당과 북한 피난민 대표로 이루어진 조선민족당을 내세워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자기들의 전략이 실현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한반도 전역을 전초기지화하기 위해서 전략상 제주도에 반공기지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주도를 완벽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삼무도(三無島)는 처형도로 바뀌어

명분상으로는 선거전략을, 작전상으로는 초토화작전을, 토벌대에는 용병인 반공우익집단, 친일경찰, 친미경비대 등을 이용하려는 미국의 음모는 1948년 벽두부터 시작되었다. 5.10 선거운동은 리, 동 단위의 18~55세 청장년으로 구성된 향보단을 이용하였고 그 필요경비는 해당 지방민의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빨갱이를 잡는다는 구실로 계엄령 선포, 통행제 실시, 해상교통차단, 무차별 총살, 마을 가옥 소각, 주민 소개, 주민 격리작전(해안으로부터 4 km 내에 있는 중산간부락과 산간부락을 격리, 후에 9 km로 바뀜) 등으로 이루어진 초토화 작전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초토화작전 앞에서 제주도민은 혼연일체가 되어 미국의 지배전략에 전면 거부, 항거의 기치를 들고 단선단정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는 유엔 조선위원단 입국거부로 시작하여 2.7 구국투쟁, 자위무장투쟁, 전선합류투쟁으로 이어졌다.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고양되어가는 제주도민의 항전 기세에 대하여 미군은 제주지방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1천 7백여 명의 경찰토벌대를 증원했다 (1948.4.5) 그리고 1948년 5월 6일 점령군 전세력을 망라한 긴급대책회의 – 군정장관 딘 (Dean)도 참가 – 를 열고 구체적인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모의했다. 제주도 인민의거자 김달삼과 제9연대장 김익력 간의 협상을 유도하는 선무공작, 첩보활동, 합동토벌작전, 제11연대 창설, 수도청 형사대파견(1948.5.18) 등을 이유로 5.10 선거를 전후해서 기존병력의 50 퍼센트 이상이 증원되었다. 그들은 확보된 지상, 해상, 공군 화력으로 집단 대량학살, 집단 방화, 주민 추방, 전략촌 건성 (3광 3진 작전)을 자행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1948년 4월부터 1949년 4월 사이에 제주도의 4백여 부락 중에서 295부락의 1만여 호를 불태웠고 무려 5~8만의 무고한 제주도 양민을 살해했다. 산 좋고 인심 좋은 제주도는, 이국인의 총탄에 쓰러진 시체더미로 인해 거지 없고, 도둑 없고, 대문 없는 삼무도(三無島)에서 ‘처형도’로 바뀌어 버렸다. 미국은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기 위해서 제주도를 초토화했던 방식 그대로 이승만 정권을 앞세우고 초토화작전을 확대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한 목숨 떳떳하게 살고자 한라산으로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한 미국은 사실상 전후 조정문제를 금한 유엔 헌장 제 107호 및 내정간섭을 금한 동 헌장 2조 7항을 위배한 것이었다. 결국 대리점령통치기구를 세우려는 미국의 음모 앞에서 제주도민들은 하나 둘 한라산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제주도민의 유일한 꿈이었던 민족의 통일과 자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의한 민족의 분열과 38선 이남에서의 대리점령통치기구(이승만 정권) 설치음모를 분쇄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주도민의 저항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워온 정신 그대로였다.

민족해방지도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미국의 체포명령에 쫓기는 민주인사들은 지하로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고, 용병이 되라는 미국의 책략에 결코 부응할 수 없었던 제주도민들은 한 목숨 떳떳하게 살기 위하여 한라산으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압적인 미국의 선거전략에 맞서서 제주도민들은 단선, 단정저지투쟁에 몸과 마음을 다 쏟아 넣게 되었다. 그들은 실력저지만이 민족통일과 자주정부수립이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경찰의 탄압에 무력항쟁으로, 그 외 지서공격, 용병경찰처단 등으로 맞섰다. 동시에 제주도민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유엔 조선위원단은 물러가라” “망국 단선 단정결사 반대” “미소양군은 즉시 철수하라” “토벌대를 즉시 해체하라” “반미구국통일전선에 총 집결하라”. 민중의 생존권과 자유활동을 쟁취하기 위하여…

1948년 2월부터 3월까지 한라산으로 들어간 제주도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민족통일과 자주정부수립을 위해서 자위적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이 자위적 무장조직은 초기에는 한라산으로 들어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대정지역, 중문지역, 애월-한림지역, 제주, 조천지역, 남원지역, 성산-표선지역으로 뭉쳐 이루어졌다. 이렇게 구성된 자위무장대의 활동사항을 보면 그 성격이 뚜렷해진다.

“조선인민이라면 조국과 인민을 압박하는 외적을 몰아내는 폭넓은 투쟁에 서야 함이 명백하지 않은가?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미국과 그 앞잡이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들과 함께 조국과 인민이 이끄는 길로 결연히 떨쳐 일어서 행진합시다”(1948.4.3 인민무장대).

5.10 선거전략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자행된 ‘미국식 빨갱이 토벌전(W. L. 로버트)’에 맞서 경비대(문상길 중위와 함께 백 여명, 1948.4.27), 혁신정당 (남로당 1948.6.3), 사회단체 (단선단정 반대투쟁 총파업 위원회, 1948.5.5.) 및 학생, 지식인, 종교인들은 제주도민 무장대와 함께 민족해방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선거전략의 실패는 잔악한 초토화작전으로

결국 이렇게 합류한 제주도 민주세력에 의해 미국의 선거전략, 즉 대리점령 통치기구 설치음모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제주도 감과 을 두 선거구에는 투표에 참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5.10 선거 반대투쟁은 미국의 극동전략을 분쇄한 민족해방투쟁의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되었다.

선거전략에 실패한 미국은 앞잡이들을 내세워 제주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한라산 일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다음 항공기로 소이탄을 퍼부으면 제주도 빨갱이들을 몰살할 수 있다”. 이것은 11연대장 박진경의 말이었다(1948.6.17). 미국은 제주도를 시발로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고 6.25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 지배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 항쟁은 계속되리라

미국의 초토화작전에 묵묵히 맞서 싸우다 죽어간 5~8만의 목숨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당시 제주도민들은 무엇을 바랐고 어떻게 활동했는가? 최근 모슬포 송악산에 미 공군기지 건설계획에 대해 제주도민 전체는 왜 반대하고 일어섰는가? 4.3항쟁은 이상과 같은 소박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4.3 항쟁의 주체는 분명 제주도민 전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민족의 하나됨과 통일된 정부수립을 갈구했고 민족의 통일과 통일된 자주정부수립을 방해하는 미점령정책에 반대하여 싸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4.3 항쟁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고 궐기한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수만의 제주도민이 바로 이 싸움에서 전사한 것이다. 물론 이 싸움에는 제주도민의 생존권 투쟁도 포함된다.

4.3 항쟁은 역사적으로 볼 때 침략세력, 즉 여몽연합군 -> 조일 연합군 -> 한미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운 민중해방투쟁사와 그 궤(軌)를 같이 한다. 그러기에 4.3 항쟁은 각 시대, 각 지역에서 해방을 위해 싸워왔던 민중해방투쟁의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도식적인 민족주의, 인종주의, 종파주의, 이념주의를 훨씬 넘어선 인간해방이라는 지상과제를 안고 4.3 항쟁은 민족적 힘과 민중적 힘의 합류에 의하여 결행되었던 것이다.

이 합류된 힘은 바로 작은 규모였지만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오늘도 이 작은 힘들이 모여 역사를 정 방향으로 인도하고 사회를 민주화로 이끌며 인간다운 세상, 평화스런 사회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4.3 항쟁은 모름지기 인간해방의 토대이다. 누구든지, 어느 것이든지 역사의 올바른 흐름을 거스르는 한 이 4.3 항쟁은 계속될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무엇 때문에 미제 살인귀들의 총마개가 되려는가? 오늘 네놈들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밝아오는 조국의 아침햇살을 쇠사슬로 묶어 둘 수는 없다”(문상길 중위의 최후진술).

 


  1. 아주 제3세계만 골고루 섞어 놓으셨군요… 소련은 빼고, 미제를 혐오하는 이유를 짐작하겠습니다.

올해 5월은 조금 특이하다. 왜 ‘갑자기’ 1980년의 5월이 자꾸만 생각이 났을까? 이제까지 나에게 추억의 5월은 주로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린 시절, 철없던 젊은 시절들의 그것이었다. 그때의 5월들은 언제나 나에게 아련하고 짜릿한 기쁨을 주는 그런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5월은 5월 18일의 그 ‘비극적 사건’ 으로 거의 고정이 되었다. 5.18 광주사태, 나의 기억에 남았던 단어, 광주사태였다. 나의 나이를 감안해서도 더 이상 외면,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조금 더 알아보자.. 내가 외면하고 살았던 그것을 하나 하나씩 다시 뒤져보자.. 나의 눈에 1989년 5월호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가 눈에 들어왔다. 정치적인 시각이 아닌 신앙적, 교리적인 눈으로 본 광주는 과연 어떤 것인가? 최소한 그들은 양심적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전재’하기로 하며, 내가 잊은 역사를 다시 들쳐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기사가 당시 연세대 부총장 김찬국 교수의 ‘광주의거의 성서적 조명’, 여기에 전재를 한다.

 

 


 

5월이 오면, 우리의 분노와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의 길을 따라 삶의 새로운 포용력을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김찬국

 

 

민족적 수치이자 비극인 광주학살

 

9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 전국확대조치에 항거한 광주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피비린내 나는 광주시민 학살사건이 일어난 민족적 수치이자 비극인 당시를 기억할 때 우리 모두 무어라고 해야 할지 할 말을 잃고 만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으로 무죄한 학생과 시민들이 비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실로 천인공노할 민족적 대참사였지만 한편 한국인의 민중항쟁역사에 뿌려진 거룩한 의거의 희생이었던 것이다.

이 광주의거로 인한 민족전체의 분노와 탄식의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었지만 군사독재정치를 자행하던 집권자들은 폭동진압이란 명목으로 학살사건을 정당화했고, 시민들의 무죄한 희생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명예회복을 해주지 않고 지내온 지 9년이 된 것이다. 더욱이나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사건진상을 밝히는 국회청문회가 열렸었지만 비무장의 학생과 시민에게 발포하여 끔찍스런 사상자를 내게 한 군 작전 책임을 가리는 데 있어서 책임을 회피하고 은폐하고 있는 부끄러운 오늘의 역사의 현장에서 국민들은 또다시 분노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 5월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갈망한다면

왜 우리는 죽는가?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쓰러지는 자들의

죽음에 무슨 남는 게 있는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일어섰다가

권력자에게 살해당하고 만 자들,

이들 이름 없는 자들이 흘린 피에

누가 있어 과연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 빛고을출판사가 펴낸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1988)에 실린 ‘오월의 묵상’에서 인용

 

이런 기도는 한국인의 탄원시이다. 5월이 오면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란 탄원시로 한 맺힌 분노를 삭이면서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새 희망과 새 힘을 키우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 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타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구약성서의 시편에는 탄식시 또는 탄원시들이 많이 있다. 민족적 수난과 역경에서 하느님께 한을 풀면서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신앙의 시편들이다.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의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 시편 13편

 

원수로 인해서 박해와 피해를 입고 있는 탄식자의 한풀이 시다. 이 시인은 ‘언제까지’ 란 표현을 네 번이나 쓰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의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이런 탄원시들은 개인작품이지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민족의 탄원을 대변하면서 신앙의 힘을 키워나가는 기도문이 되고 있다.

오월 그날이 오면 우리 광주시민 뿐만 아니라 온 국민들이 다 이런 시로써 한을 풀면서 새로운 다짐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도 시적인 표현으로 자기들 당대 국민의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변하였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심판예언자였다. 권력형 구조악으로 피해를 입은 약자들의 인권을 대변할 때 분노를 터뜨리며 욕하는 저주의 말로 시작하였다.

 

“저주 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덮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 가는구나

– 아모 5,7-11

 

아모스는 하느님의 심판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정의를 강조하였다. (아모 5,18-20).

 

폭군으로서 11년간 남쪽 유다를 통치한 여호야킴(609-598) 왕 때 하바꾹 이란 예언자가 등장하여

 

“야훼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 하바 1,2-4

 

이런 탄원의 말로 당시 시대상을 대변하면서 “화를 입으리라”라는 저주의 심판선언을 하고 있다. (2,12-20).

 

 

최고 책임자까지도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 왕정역사에서 제일가는 폭군으로 유다 왕 므나쎄(687-642)가 있었다. 12살 때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45년간 다스렸는데 우상을 만들어 야훼 하느님께 불충성한 신앙적 배신과 폭력정치를 저질렀는데 후세 역사가인 신명기적 편집자는 므나
쎄 왕을 고발하고 “그가 저지른 죄는 유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2 열왕 21,17)고 적어 놓았다.

 

“그는 우상을 만들어 유다를 죄에 빠뜨렸다…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 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 2 열왕 21,11-16

 

이 말을 예언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쓴 글이지만 후대 역사비평가인 신명기적 편집자의 정확한 역사서술과 평가가 담겨져 있음을 본다. 므나쎄 왕의 폭력정치시대에는 백성들이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에 반체제인사로서 저항한 예언자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 왕도 실은 자기가 왕이 될 때에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왕이 된 다음에 피의 숙청을 하고 궁전과 성전을 짓는 데에 강제로 국민노동력을 동원하고 세금을 강제로 징수한 죄와 또 이방종교의 신을 예루살렘에 허용한 죄 때문에 후세사가에 의해서 고발이 되었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이 되어 (기원전 922) 남 유다의 왕으로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922-915)이 왕위에 올랐다. 르호보암은 원로정치인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젊은 후견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왕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렇지만 나는 그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리라. 선왕께서는 너희를 가죽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채찍으로 다스리리라”(1 열왕 12,12-15)라고 했다는 것이다.

후세사가는 르호보암 왕이 끝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12,15)고 지적하고 있다. 선조들보다도 더 큰 죄를 범하여 ‘야훼께 미움을 샀다’ (1열왕 14,22)고 평가되어 있다.

구약 역사에서 왕정정치가 시작되고 남북분열이 된 다음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군사 쿠데타가 수없이 일어나 선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 일이 일곱 차례나 있었다. 이런 혼돈이 200년이나 계속되다가 북 이스라엘은 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신명기사가는 왕들의 업적을 평가할 때마다 북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인 여로보암 왕(922-901)이 저지른 종교죄 (우상신을 섬긴 죄)의 전철을 밟아 죄를 지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폭력정치죄나 우상종교를 허용한 죄는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어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과 자료로 알려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 유다의 여호야킴 왕 (기원전 609-598)과 예언자 예레미야와의 관계가 예레미야 서에 가끔 나온다. 즉 폭군과 대결한 예언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는 성전설교에서 당시 사회상을 고발하였다.

 

“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있다…. 이 땅 위에 나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리라, 아무도 나의 타오르는 분노를 끄지 못하리라” (예레 7,.5-20).

 

하느님은 분노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야킴 왕의 폭력적 탄압정치와 우상숭배를 심판하신다는 점을 예언자 예레미야 가 대변하고 있다.

 

“그날이 오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야훼의 손에 죽은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굴러 다니리라…. 백성의 목자, 민중의 우두머리들아, 너희가 도망쳐도 난을 피하지 못하리라…”

– 예레 25,33-38

 

혹독한 심판의 예언이다.

 

폭군인 여호야킴 이 새로운 강대국인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굴복했었다가 3년 후에 바빌론에게 반기를 들자 다시 침략을 받아 유다 전국이 침략군에게 짓밟히고 말았다.(기원전 598).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

 

“이런 일이 유다에서 일어난 것은 므나쎄가 온갖 못할 짓을 하는 것을 보시고 야훼께서 유다 백성을 내쫓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다가 그는 무죄한 피마저 흘려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으므로 야훼께서는 용서하실 마음이 없으셨던 것이다”

– 2 열왕 24,3-4

 

우리가 이런 성서적인 조명으로 광주 민중항쟁을 보면 참으로 하느님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려 도시를 피바다로 만든 폭력적 진압을 한 군관계 책임자 뿐만 아니라 이에 관련한 최고 책임자까지도 국민과 역사 앞에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며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보시는 것이다. 그 해 5월 광주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대열에 나섰다가 총칼로 인한 폭력으로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정당한 인권이 회복되어 역사에서 그들의 희생 정신이 바르게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광주시민의 희생은 민주화운동의 길잡이

 

“광주에 5월이 찾아오면 들려오는 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

새 생명의 눈부신 빛 줄기가 이제 세상 구석구석을 비춥니다.

우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동이 트는 첫 창조를 봅니다. 아멘”

– ‘5월의 묵상’ 중에서

 

 

인간의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비극자체는 비참한 종말이지만 비극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약동과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이 살아남은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온 겨레에게 지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이 예수께서 기득권을 가진 종교인들이 힘을 가진 로마 총독 빌라도를 업고 무죄한 예수를 잡아갔을 때 도피하거나 모른다고 했었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멀리 피해 있었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신 다음에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여 예수의 교훈과 복음을 널리 펼치는 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순교까지 하면서 예수의 삶과 그의 교훈을 따라 실천하는 데에 자신들의 삶을 투신했던 것이다.

김준태 시인은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란 시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가는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 희생이며 그의 부활사건은 그의 삶만 아니라 그 자신인 진리의 부활과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5월이 다시 오면 우리는 광주의 희생과 새로운 약동을 불러 일으키고 그 수난과 희생을 새롭게 의미화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부활과 정의사회의 건설을 위한 기회로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시편 작가들도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신앙에 의한 삶의 길을 보여 주고 있다.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말아라.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야훼만 믿고 살아라.”

– 시편 37,1-2

 

“야훼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성하는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악하게 사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며 악인들은 그 자손이 끊기리라.”

– 시편 37,27-28

 

 

탄원시들은 억울한 일들을 고발하면서 하느님께 분노를 터드리고 구원을 호소하고 마지막에는 하느님께 감사찬송을 드리는 내용으로 끝나고 있다. 시편 13편을 보면 원망하는 소리로 원수를 고발하다가 (1-2절), 다음에는 구원을 호소한다.

 

“야훼 나의 하느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

– 시편 13,3-6

 

이런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음을 확신하고 끝에 가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감사찬송을 하게 된다. 미움과 원망에서부터 시작했다가 정의의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믿고 신뢰할 때 그 원망이 희생으로 바뀌어져서 찬양으로 끝나는 그런 전환을 보게 된다.

5월이 오면, 우리의 분노와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의 길을 따라 삶의 새로운 포용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광주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정당한 인권이 회복되어 역사에 길이 남아 그들의 희생정신이 바르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찬양 시편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가 또 있다. 시편 33편을 요약해본다.

 

“의인들아 야훼께 감사하며 기뻐 뛰어라.

………….

옳은 사람들의 찬양이라야 기뻐 받으신다.

………….

야훼의 말씀은 언제나 옳은 말씀.

그 하시는 일 모두 다 진실이다.

………….

왕들아 너희가 대군을 거느렸다고 이길 성 싶으냐?

힘 좀 있다 해서 궁지에서 살아날 성싶으냐?

군마만 믿다가는 살아나기 어렵고 대군을 거느렸다 해서 사지에서 벗어나지는 못 하리라.

야훼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 사랑을 바라는 자들을 자켜보시며…………

우리가 이렇게 당신만을 기다리오니 야훼여, 한결같은 당신 사랑 베푸소서.”

 

여기에서 의인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힘을 키워나가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의인들이 자기교만에 빠져서 하느님의 역사의 심판과 구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남을 정죄만 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게 하는 신앙을 키워주려 하고 있다. 하느님의 오심을 이 5월의 광주와 함께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기초로 하느님의 승리를 의심치 않고 믿고 기다리는 확신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인 위기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유다 나라의 최후를 앞에 두고서도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여주었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비록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재앙을 내린다 마는 그만큼 약속한 행복도 모두 베풀 것이다…….. 이 땅에서 다시 밭을 사고 팔게 되리라……….. 이렇게 나는 이 백성의 운명을 회복시켜주리라. 이는 내 말이다. 어김이 없다.”

– 예레 32,42-44

 

 

멸망 후의 회복을 예언한 것이고 약속한 것이다. 예언자의 이런 꿈이 그냥 꿈으로서가 아니라 실현될 약속으로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해방과 재출발을 전망한 것이다.

1989년 5월이 다시 온다. 광주의 5월은 우리 온 국민이 겸허한 마음으로 희생의 피를 기억해야 한다. 군부 독재가 몰고 온 광주시민의 희생은 우리의 의로운 민주화로의 길을 바르게 보여주는 역사의식의 기초가 되고 민주화 운동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광주의거를 이렇게 성서적으로 조명해볼 때 하느님께서 정의와 자비로써 희생당한 광주시민의 명예의 회복만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의 자유와 정의의 회복을 보여주시리라고 믿는다.

 

김찬국 씨는 연희대 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부총장으로 있다.

5.16 군사혁명, 1961년 5월

 

박정희와 광주, 5월 16일과 5월 18일.. 이번 주 desktop 달력에서 유난히 나의 눈에 들어오는 이 숫자들을 보며 과연 나에게 이 숫자들은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면, 현시점에서 5.16이란 것, 역사 교과서적인 의미가 거의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나의 개인 역사에서 5.16 ‘군사혁명’ 은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비해서 5.18이란 숫자는 미안하게도 ‘아직까지’  footnote정도로만 느껴지고 있다.

1960년 4.19 학생혁명에 뒤이어, 1961년 당시 중학교 2학년 생의 눈과 생각으로 보고 겪었던 5.16 군사혁명의 사건은 그런대로 생생히, 뇌리에 정확히 남아 있지만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 평가는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까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학생시절과 비교적 유치한 청년시절에는 독재적, 군사적인 것들을 싫어했지만 그 이후 나이가 들면서 ‘무조건 싫어하는 것’을 서서히 싫어하게 되었다.

현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5.16은 달력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5.18은 ‘거창한 이름으로’ 보인다는 격세지감 隔世之感 뿐이다. 역사란 것이 ‘승자’의 기록이라면 분명히 5.16은 승자로부터 완전히 탈락하고,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국사교과서를 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런 나의 판단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닐까?

나는 솔직히 5.18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나의 젊었던 신혼 시절 30대 초에 일어난 5.18 ‘광주사태’가 ‘민주항쟁’이란 말로 바뀐 것 조차 생소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잊고 살았던 것, 솔직히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1980년 5월 18일 이전에 고국을 완전히 떠난 상태로 이 ‘비극적 사태’를 TV 뉴스로 접했던 것이 전부, 그것이 또한 내 변명의  전부다. 그 이후 오랜 세월 동안은 대한민국 정권이 바뀔 때마다 5.18이란 말이 간혹 뉴스로 등장하는 것 정도를 들었을 뿐,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1979년 10월 ‘대통령 유고 有故’ 이후 잠깐 맞았던 1980년 초 ‘서울의 봄’,  나는 그 해 1월에 서울에서 연숙과 결혼을 하고 곧 바로 먼저 미국으로 돌아와서 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에서 post graduate course 를 계속하고 있던 중,  ‘광주사태’ 뉴스를 듣게 되었다. 이곳 뉴스는 여과, 통제 없이 그대로 보도가 되어서 광주 시민이 죽는 ‘처참한 광경’을 모두 TV에서 보게 되었고 주위의 미국학생들도 ‘광주 광주’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잔혹성’을  비난하는 comment를 하는 것도 들었다.

같은 과에서 친하게 지내던 육사출신 소령 유근호 형은 당시 다른 학생들로부터 군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사실 그 형도 그 처참한 광경에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역 소령의 입장으로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던 것, 나는 충분히 이해했고 심지어 가볍게 변호까지 하기도 했다. 사태의 ‘진상 眞像’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편을 들 수는 없었지만 군사정권이 계속되는 것은 정말 싫었다.

억울하게 죽거나 다친 ‘학생, 시민들’의 목소리는 사실 그 동안 들을 기회가 없었고, 정권이 바뀌어 ‘공정한 신상 파악’을 하기 전까지는 그 ‘사건’은 그저 잊고 싶은 악몽이었다. 역사적 지역감정에 군사정권의 계속 존속은 사실 광주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 희망적이 아니었고 세월이 흐르며 점차 잊고 살게 되었다.

문민정부의 등장, 특히 김대중, 노무현 등 급진 진보적 정권이 사건진상을 밝히며 역사를 바로 잡는 과정에서 민족여론의 화합 점 和合点 을 완전히 놓쳤고, 세월의 흐름으로 한때 군사정권을 혐오하던 세대들이 보수성향으로 진화를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역적으로 갈린 데다가 세대적으로 완전히 분열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어느 나라나 그런 성향은 있기 때문이고,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을 인정하면 된다.

오랫동안 나는 광주사태에 김일성 살인 집단이 개입되었다는 ‘뜬 소문’ 을 못 들은 척하며 살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나의 ‘안이하지만 이성적’ 인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듯한 ‘과격파’들, 끊임없이 할 일없는 장,노년층을 가르친다. 세대별로 완전히 갈라진 듯한 국론, 의견, 사상.. 도대체 ‘온건, 중간’이 없다.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빨갱이, 주사파, 김일성 이 모든 것, 진절머리가 나도록 증오하지만 그것이 문제의 전부가 아닐진대.. 어찌 그렇게들 열을 올리는가?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눈과 생각은 어디로 갔는가? 이래서 5.16과 5.18 사이에서 나는 아직도 고민을 한다.

Piece of Paper, Peace in our time!

 

얼마 전에 문재인과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만나서 ‘정상 회담’을 한 기사를 Wikipedia의 ‘In the news’ 에서 잠깐 보았다. 요새는 main news outlets을 모두 닫고 살기에 이곳이 나에게는 유일한 news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News란 것이 정말 장난이 아닌 것이 오래 전의 ‘검증, 확인’ 된 것보다는 엉터리 기사들이 판을 치고 있고, 그것 일일이 내가 확인할 길도 없고 시간도 없다. 결론적으로 최선의 방법 증에는 ‘모두 안 보고 사는 것’ 도 있고 그렇게 살다 보니, 나의 정신건강에도 그렇게 도움이 됨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우연히’ 나에게 들어온 뉴스는 나름대로 판단하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이 ‘문재인, 김정은’의 회담소식을 보고 생각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이 blog의 title인 Chamberlain 이란 이름이다.  여기서 Chamberlain 은 2차대전 발발 당시 (1937~1940) 영국의 수상 Prime Minister Neville Chamberlain을 말한다. 이 영국수상의 이름과 얘기는 1960년대 내가 중학교 때 나의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으로부터 들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순진하게’,  냉전 적국이었던 소련과 공산주의를 대하는 정책을 이 영국수상의 ‘독일 히틀러 회유정책’에 비유하며 비꼬는 얘기였다. 1930년대가 저물어가며 1차 대전의 폐허에서 다시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를 ‘달래가며’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이 영국수상이었다.

문제는 이 운 없는 영국수상이 히틀러의 음모에 완전히 농락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뉴스를 보면 거의 drama 같은 얘기를 상상할 수 있다. 전쟁준비를 완전히 끝낸 히틀러, 이 ‘평화를 원하는 영국수상’에게 ‘종이조각’을 건네 주고 돌려 보냈다. ‘전쟁할 마음이 없음’ 이라는 요지의 의미 없는 ‘각서’ 정도가 될까.. 이 순진한 수상께서 그 종이를 들고 영국에 도착한 공항에서 ‘평화주의자’들에 둘러싸여  그 종이조각을 흔들며 개선 하는 사진, 역사중의 역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도 안 되어 히틀러는 유럽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 넣었고 이 운 없는 수상을 이어 Churchill 수상이 ‘힘과 용기’로 전쟁을 치르고 결과적으로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로 역사는 간단하게, ChamberlainChurchill 의 아주 다른 정책을 평하지만 사실 자세히 알고 보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도 알게 된다.

문재인과 김정은의 ‘협상’, 이것도 협상일까? 히틀러보다 더 거짓으로 범죄국가를 경영하던 역사상 유례없는 ‘반 인류 범죄자’와 협상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거기서 ‘합의’가 된 결과의 ‘종이조각’은 어떠한 무게가 있는 것일까? 1940년과 2018년은 확연한 차이가 있겠지만 역사의 관성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문재인 가톨릭 형제여, N. Chamberlain보다는 W. Churchill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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