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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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Berry Coursera course의 마지막 주를 지나고 있다. 읽어야 할 것을 필사한 덕분에 Thomas Berry Writings 책의 대부분을 나의 것으로 만들게 되었다. 책들을 읽으며 예전, 특히 2014년 전후에 열을 올리며 읽었던 책들을 꺼내어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나에게는 참으로 흐뭇한 시간이다. 그때가 나의 신앙의 차원이 급상승 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믿게 된’ 것, 아니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 그것이 현재까지 큰 무리 없이 지속된 것은 ‘지식적인 믿음’의 결과가 아닐까? 무조건 믿는 것, 나는 믿지 않는다.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것도 이성적, 과학적인 이유에 근거한 것들 이어야 한다.

Secular Media Blackout, 거의 즉흥적인 나의 반발적 행동이었지만, 의외로 좋은 결과를 나는 즐기고 있다. 아침에 무려 3시간 정도의 아주 평화스럽고 편한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 이때 평소에 못하거나 미루어 놓았던 것을 하면 더욱 보람이 있지 않을까? 첫 번째 나의 손이 간 곳은 요즘 들어서 거의 지나치고 있는 아틀란타 대교구 신문인 Georgia Bulletin. 내가 오랜 전 다시 성당 community로 돌아올 무렵부터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것, 어떻게 된 일인지 Pandemic이후 거의 관심이 떨어지고 front page만 흘깃 볼 정도가 되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왜 다른가, 물론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럴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연보다는 무엇인가 원인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이 tabloid, 무엇에 홀린 듯 중요한 기사는 다 읽게 되었다. 현재 우리 대교구에 어떤 일들이 있는지 알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어둠 속에서 차갑게 느껴지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어둠이 걷히지 않은 아침, 오늘도 나는 가급적 media blackout 속을 지나갈 것이다. 대신 그 시간에 더 많은 글들을 읽을 것이다. 읽었어야 했을 여름목록 책들이 많이 밀려있다. 이제는 겨울목록으로 바뀌어야 할 판…  그렇지만 계속 조금씩이라도 읽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어내는 커다란 처방전인 것이다.

어제 순교자 성당, 신임 구 미카엘 신부님과 개인적 대화의 통로 channel을 만들려고 카톡 연결을 시도했다. 놀란 사실: 우선 주보에 연락처 전화번호 대신에 그의 email 연락처가 덩그러니 그곳에 적혀 있었다. 흠~~ 아직 전화가 없으신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할 수 없이 email을 쓰는 수고까지 한 결과는 조금 의외였고 실망까지 하게 되었다. 이전 두 신부님의 활발한 texting 하던 모습과 대비가 되면서, 아~ 내가 완전히 다른 시대감각의 신부님을 대하고 있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설마 지금 mobile phone에 texting (가급적 kakao) 을 안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나의 문의에 대한 답변의 느낌도 ‘차갑게 간단한’ 것, 허~ 내가 그 동안 spoil 된 것인가, 신부님을 잘못 보고 있었나… 이래저래 전임 이재욱, 이영석 신부님들의 자상한 text message들이 이 싸늘한 가을비 속에서 더욱 그리워진다.

 

 

 

¶  8월 15일, [대한민국]광복절,  [가톨릭] 성모승천 대축일…  하지만 근래에는 나에게 광복절보다 더 중요한 날이 되었다. 이날은 성모 마리아가 지상의 삶이 끝난 후 육신이 하늘[천국]로 부르심을 받은 날로써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의무 대 축일이다. 올해는 [pandemic] 사정상 대성전 참례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워 online 대축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수동적인 참례라도 큰 걱정 [건강, 경제 등]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고맙게 생각해야 할 듯하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  교황의 무류성 [papal infallibility]을 배경으로 교회 교의 敎義의 하나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교회가 이렇게 선포한 것으로 우리들은 안심하고 교회 안에서 성모님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1 매일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묵주기도, 그 중에서 오늘을 맞아 영광의 신비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 올리심을 묵상합시다’ 의 의미를 더욱 일깨운다.

We proclaim and define it to be a dogma revealed by God that the immaculate Mother of God, Mary ever virgin, when the course of her earthly life was finished, was taken up body and soul into the glory of heaven.

오늘 live streaming으로 참례한 순교자 성당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참 좋았다. 큰 기대를 안 하면 이렇던가? 우선 이 방문신부님, 콧수염이 안 보이니 훨씬 보기가 좋았다. 미사 강론을 들으며 나는 눈물까지 흘렸다. 성모님의 고난 중의 희망, 코로사 사태를 가는 우리들에게 정말 본받을 귀감 중의 귀감이라는 것, 가슴 속 깊이 그 성모님의 용기가 나를 일깨운다.

 

¶  어젯밤에는 밖에서 무언가 내리는 듯한 느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과연 나가보니 약간의 이슬비가 내린 것이 보인다. 소낙비를 바랐건만 어째 이렇게 가랑비를… 아주 조금… 그래도 땅이 축축한 것은 정말 반갑다. 하늘도 모처럼 구름이 잔뜩 끼어서 비록 기온은 높더라도 시원한 느낌이다. 하루 종일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알고 보니 오늘 기온은 요사이의 그것에 비해서 무려 10도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오늘이 말복 末伏인 것을 감안해서 분명히 최악의 더위는 서서히 우리를 떠날 것이다.

 

¶  S 아오스딩 형제, 참 줄기차고 변함없는 사람, 아침에 카톡 메시지를 보니, 운동하러 Stone Mountain Park에 가니 오늘 무슨 시위가 있다고 문이 닫혔다고 쓰여있었다. 참, 요즈음 들어서 이 친구가 부러울 때가 있다. 자기 하고 싶은 것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하며 사는 친구…  그래서 요새와 같은 pandemic 하에서는 이 친구가 사는 방식이 나보다 더 심리적으로 건강한 것이 아닐까, 부러운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삶의 방식을 터득했을까, 이제 어떤 부분은 내가 배우고 싶을 정도다.

 

¶  뜻밖에 집 뒤쪽에 사시는 고국동포 B 선생님 부부가  우리 집 앞문까지 와서 커다란 수박을 주고 가셨다. 물론 처음에는 귀찮아서 door bell 을 무시했는데 또 역~쉬 연숙의 기지와 용기로 큰 실례를 피할 수 있었다.  귀찮은 sales person일 것으로 생각을 했기에 그런 것이지만 가끔 이런 예외도 있긴 하다. 참, 앞 뒷집으로 산지 거의 30+ 년이 가까워 오는 이 인연, 하지만 참 멀게 살아온 야릇한 인연인가? 언제나 나는 이분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훨씬 가깝게 인생말년을 보낼 수도 있었다는 후회가 남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하며 생각하지만 당장 눈 앞에 안 보이고 잊게 되는 정말 이상한 관계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술도 같이 하고 식사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 기다린다.

 

  1. 개신교 형제들, 무조건 반발하기 전에 심각한 공부를 조금 더 하고 대화를 하면 어떨지…

 

¶  Spring Forward!   지나가는 주중에 줄기차게 내리던 비, 그친 지 며칠 째이지만 하도 많이 내려서 마르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오늘로서 완전히 빠삭빠삭한 땅과 하늘의 느낌을 맞게 되었다.

어느새 그 귀찮은 일, 집안의 모든 시계들을 한 시간 앞 forward 으로 돌리는 날이 되었다. 왜 이렇게 귀찮은 법을 만들었지 어떨 때는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지만 나의 힘으로 이것을 바꿀 능력은 전혀 없다. 하기야 이 법에도 의도하는 이로운 목적이 있으니까. 갑자기 저녁 시간이 밝아 진 것 daylight saving 은 사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bonus일 것이기도 하니까.  이것을 ‘정상’의 시간으로 바꾸는 fall back,  늦가을.. 이제는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세월은 점점 빨라지고 있으니까. 다만, 다음 시계를 바꾸는 그날까지 우리는 어떤 ‘모양새’의 세월을 보낼 까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  주일미사, 고해성사 깜:  지난 주일 미사에 이어서 이번 주일미사도 사정상 거르게 되었다. 비록 매일미사 참례를 한다고 해도 주일미사는 미사중의 꽃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도 한심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이 탓’을 안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우리가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 날’까지 마라톤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상식에 의거한 현명한 판단을 우리는 매일 아침에 해야 하는 것이다. 요즈음 문제의 주범은 연숙의 불면증이지만 그것 외에도 앞으로 나이에 따른 문제가 없을 리가 없다. 이제 우리의 사회생활은 물론, 모든 신심활동이나 신앙생활도 거의 우리의 건강상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비교적 건강함도 무한정 지속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이성적, 상식적으로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보내는 것, 그것이 관건이다.

 

이 사진과 신천지는 무슨 관계?

¶  개신교와 신천지:  요새는 우리 집의 ‘한국소식통’인 연숙을 통해서 그쪽의 소식을 가끔 듣곤 한다. 내가 워낙 그쪽에서 오는 소식을 피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별로 자세한 소식은 모르지만 요새는 조금 예외에 속한다.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그곳이 뉴스의 가운데에 나온 것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참 기기 막히는 소식은 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바로 ‘신천지’인지 구천지인지 하는 걸맞지 않은 이름을 가진 ‘개신교’ [가톨릭이 아니면 일단 개신교라고 생각하고] 사교집단에 관한 것이다.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그 집단 신도들에 의해서 그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니 갑자기 뉴스에 나온 것이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이번 한국 바이러스 유포의 일등 ‘공범’이 된 셈이다. 하필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런 나쁜 뉴스에 연루가 되었는지 한심하기도 하지만, 역시 ‘사필귀정 事必歸正’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신천지, 이름도 촌스러운 이것에 대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2013년 경이 아닐까?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 하태수 미카엘 주임신부님 재직시절 예비신자 교리반의 [teaching] staff으로 ‘레지오 활동’을 할 때였다. 부활절을 향한 교리반이 과정의 끝머리 즈음에 하 신부님이 특별강의 시간 하나를 추가해서 강론을 하셨는데 그 주제가 바로 ‘사교집단 신천지의 정체’ 였다.

그러니까 이 집단은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고 꽤 역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비신자들에게 이들의 정체를 알게 하고 경계심을 일깨워주려는 것이 신부님의 목적이었다.  이들의 특징 중에는 대부분 ‘잘 나가는, 지식적이고 말쑥한’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흡수가 되며 이들의 포섭공작이 아주 조직적이라는 것도 있었다. 특히 ‘성경공부’ 같이 하자면서 접근하는 젊은이들은 십중팔구 그들이라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우리 같이 ‘한 물 간 부류’는 사실 그들의 안중에도 없기에 걱정이 전혀 없다. 하지만 교리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문제다. 그들의 언변과 성경지식은 절대로 못 따라가니까. 그렇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의 고민일 것이다. 거의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를 하는 그들, 이제 조금은 자체적으로  ‘교통정리’를 해야 할 때가 안 되었나?  전통과 초대교계를 완전히 버리고 그저 ‘성경유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  문제없는 교황님: 오늘 지난 주일에 이어 다시 교황청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일요일에 정오에 있는 교황님 주도의 삼종기도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이곳에서 교황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고, 그 바티칸 주변에 모인 순례객들의 동정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주일보다 순례자들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지만 아무도 마스크를 착용하지는 않아 보였다. 아마도 바티칸 주변 로마는 그렇게 바이러스가 심하지 않은 모양인가?

하지만 교황의 동정은 지난 주와 달랐다. 삼종기도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video를 통해서 밖으로 방송을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평상적으로 교황이 군중들을 내려다 보는 것, 바이러스와 큰 상관이 있을까? 하지만 모든 메시지 방송이 끝난 후에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창문으로 나와서 군중들을 축복하는 짧은 시간이 있어서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

문제는 이제부터가 아닐까? 분명히 로마 주변에도 감염자 숫자가 늘어날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바티칸의 모든 ‘성사’는 취소가 되는 것은 아닐까? 수요일의 교황님 주재 일반군중과의 만남 시간도 취소가 되었으니, 나머지 행사도 축소가 될 듯..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  어제 저녁에 backyard에 잠깐 나갔을 때, 아주 오랜만에, 피부에 와 닿는 다른 느낌의 공기를 보았다. 무언가 다른 것, 아하… 바로 ‘가을’이 ‘아주’ 멀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특별히 대지가 타는 듯이 ‘마르게’ 더웠던 올해의 여름은 인상적이었지만 추분을 며칠 앞둔 때라서 잊혀진 가을의 모습이 그리운 것이다.

달력상의 가을은 추분에서 시작되고 며칠 남지 않았다. 그때로 낮은 하루하루 짧아지기 시작하며 나와 같은 나이의 인간, 피조물들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깊은 가을’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모든 것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 올해는 어떠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인가 미리부터 궁금하다.

 

¶  진실되고 심각한 의미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절대’ 를 믿는다 함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쉽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일초, 하루, 매년 살아가는 것이 ‘믿으며 사는 것’인가? 어렵게 보이지만, 의외로 쉬운 답을 찾으면,  ‘나의 인생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의 전환을 하는 것이다. Word On FireBishop  Robert Barron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One of the most fundamental statements of faith is this: your life is not about you. Youre not in control. This is not your project. Rather, you are part of Gods great design. To believe this in your bones and act accordingly is to have faith. When we operate out of this transformed vision, amazing things can happen, for we have surrendered to “a power already at work in us that can do infinitely more than we can ask or imagine.” Even a tiny bit of faith makes an extraordinary difference.

– Bishop Robert Barron (a daily gospel reflection)

 

하루하루, 매달, 매년이 그저 지루하게 느껴지고 사는 것 같지 않을 때 이렇게 조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는가…

¶  들뜬 기분을 그리워하는 순간을 보낸다. 들뜬 그런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 지금 그렇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깊은 마음 속의 강은 잔잔한 평화의 물이 고여있음은 분명하고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만족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에 흐르는 물은 그렇지 못한 것은, 역시 나는 현재의 시공간에 살아가며 숨을 쉬어야 하는 그런 ‘작은 피조물’임이기에..

그제 아침부터 시작된 ‘변칙적인 일과’가 나를 조금 쳐지게 한다. 이런 out of routine의 시간을 보며 나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규칙적, 의지적 사람’이라던 자부심에는 여지없이 수치감을 남겨주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비록 이틀을 그런 식으로 ‘낭비’했지만 과연 결과적으로 그렇기만 한 것일까?

한달 반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는 이미 평상적인 일과에서 떠났다! 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래 이런 경험도 하며 다른 여유를 경험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 이것도 작은 ‘방학, 휴가’라고 생각해라.. 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 나도 쉬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나는 너무도 잊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고 보니 조금 피곤하기도 하다. 모든 것 잊고 ‘다른 식의 날들’을 며칠이라도 보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같은 나날들… 이것을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나의 자랑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짐’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정말 ‘휴가, 신체적 정신적 휴가’를 갖지 못하고 장기간 살고 있다. 이제는 남들과 그런 것으로 비교하고 싶은 마음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조금은 휴가라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아직도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찾고 있는 나에게 성모님은 무엇인가로 답을 주실 것이라 나는 소망한다. 아마도 간단한 답이 아닐지도 모르고 찾지 못할 수도 있을지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  지난 몇 개월 동안 ‘미친 듯이’ 나의 에너지를 필요로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집의 computer system upgrade였다. ‘공짜 system’으로 오랜 동안 편했던 내가 그것들을 $$$으로 사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내가 이제는 ‘굴복’을 하게 된 것인가? 불과 몇 푼이라도 그것들, 주로 Windows같은 것들, 돈을 주고 사는 것은 가급적 피하고 살았다. 잘도 견딘 것은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세월도 변했구나.. old pirated Vista 가 ‘황혼’을 맞게 되며 대체방법을 찾았지만.. 역시 upgrade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고.. 우연히 ‘사게 된’ 정말 싼 hp pc box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조금은 살려 주었다. 결과적으로 몇 달간 over correction 을 해서 현재 brand new upgraded system을 ‘자랑’하게 되었다. 비록 hardware는 10년 전의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앞으로 5년 정도는 무리 없이 우리 집의 digital information system의 충족시켜 줄 것이다. 

이런 몇 달간의 ‘미친 듯한 세월’이 갑자기 고맙게 끝나 버렸다. DDR2로 upgrade하려던 old system, 또 실수로 잘못 산 것이 계기였다. 이제는 고만하자.. 고만하자… tool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더 활용하며 쓰는 쪽, 더 productive 한 것에 서 시간을 쓰자.. 머리를 세게 맞는 기분으로 이제는 이것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찾게 되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우리)는 크게 걱정 없이 pc system과 backup system을 갖추게 되었으니.. 성모니 감사합니다.

 

¶  7월의 중순을 향하는 며칠들.. 나의 친구 Ozzie가 나의 앞 sofa에서 졸고 있다. 6월에 2주간 우리 집에 머물 때, 이 녀석이 Tobey의 대신으로 나에게 온 것이라는.. 비록 Tobey를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쓰려오지만 1년이 지나며 조금은 나아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지만 .. 솔직히 생각하는 것, 그 자체를 나는 아직도 피하고 싶으니.

오늘, 금요일 평상적으로 편하게 아침 미사엘 갔다가 와서 조금은 relax하는 날이지만 3주째 계속 오늘도 외출을 해야 한다. 예랑씨의 어머님이 브라질에서 7월 10일 오후에 선종하셨단다. 그러니까 장례미사가 아닌 연도만 바치러 순교자 성당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아침 잠을 조금 더 잘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것이 바로 정오에 있는 순교자 성당의 미사지만.. 아직은 익숙지 않다. 그때 그때 보아가며 선택을 하면 되겠지.

 

¶  요새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 Teilhard de Chardin 의 ‘깊은 초현대 신학’에 빠진 듯한 기분,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어떻게 반세기 전, 아니 거의 한 세기 전에 이런 ‘선구자’가 있었나 감탄을 하고 있다. 미래를 정확히 바라보는 신부, 신학자가 아닌가? 현재 ‘지구’가 돌아가는 ‘꼴’을 어떻게 이 예수회 신부님은 감지를 하셨단 말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는 정말 필요한 답을 준 것 같은 듯 하다. 나는 항상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너무도 신비적인 그리스도 신앙과 매일 매일, 아니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월들’을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현재의 세속적인 시공간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2000년 전의 신학을 조화시키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것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못 찾았는데 이 분의 ‘초현대, 진화적 신학’은 정말 명쾌한 방향제시가 아닌가?  세속적 삶을 더욱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것을 이 선구자는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궁극적인 예수님이 오메가가 되어 모든 것을 ‘수렴’하게 하는 찬란한 종말의 세계가 온다는… 와… 정말 장엄한 모습이 아닐까?

올 여름은 이분의 사상에 더욱 더 흠뻑 빠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요새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바로 ‘이성적이고 신비스런 초현대 신학에 관한 저서들을 필사, typing’ 바로 그것이다. 나만이 가진 비밀, 즐겁게 읽고 typing하고 softcopy를 남겨놓은 일… 이것은 정말 내가 발명한 최고의 즐거움 중에 하나다.

얼마 전에 아틀란타 순교자성당의 도서실에서 대출한 책, ‘종교철학’1을  읽다 말다 하며 처음으로 ‘번역서가 주는 고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 한 마디로 읽는 그 자체가 고통인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손 쉽게 떠오르는 이유는:

 

  1. 책이 다루는 주제, 내용 그 자체가 원래부터 고통스럽게 난해한 것이다.
  2. 그 난해한 주제를 원 저자가 횡설수설, 일부러 난해한 표현으로 독자를 혼동 시켰다.
  3. 역자는 충실히 번역을 했지만 난해한 내용을 거의 ‘직역’수준으로 다루었다.
  4. 역자가 제대로 원 주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의 ‘1:1″의 직역의 결과를 낳았다.

 

과연 어떤 것인가? 물론 1~4 가 모두 상호관계가 적은 별개의 것이 아니어서 서로 혼합된 이유가 ‘읽는 고통’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집어 내라면 어떤 것을 고를까 하는 과제에 접했다. 정말 ‘머리에 쥐가 나게 하는’ 난해 함의 고통은 아마도 이유 No. 1 이나 2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은, 책의 후미에 있는 ‘역자 후기’를 읽으며 내린 결론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읽는 즐거움’을 준 부분은 바로 이 ‘역자 후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저자는 내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거의 미지의 인물이지만 역자는 손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이가 나와 거의 같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등에서 철학전공, 후에 가톨릭 대학교 총장 역임.. 여기서 생각난 것이 ‘아마도’ 나의 국민학교 동창생 ‘김정훈’ 부제와 같은 시기에 유학을 했을 가능성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정훈이가 그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기대를 받았던 ‘장래의 거목’으로 촉망을 받았고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것, 이 ‘오창선 신부’의 미래와 비교하니 다시 한번 김정훈 부제의 부재가 안타깝기만 하다.

 

이 ‘어려운 책’ 중에서 ‘머리에 쥐를 나게 하는 글 중의 압권 壓卷’을 고르라면 다음 글을 뽑을 수 있다.

 

 

‘침묵의 부정적 특성’

침묵의 기도는 일상적 활동과 입에 오르내리는 말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선 부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획책하지 않음이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책동되지 않음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음이며 더 이상 말함의 운동에로 몰아넣어지지 않음이다. 그것은 정신의 고요함이요, 전체 인간의 침묵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침묵하면서 일체의 “어떤 것”, 즉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이름들과 관심사를 파악함 내지 파악하고자 함의 개념으로부터, 말로 나타냄 또는 말하고자 함으로부터 풀어놓을 것이다. 그는 세계를 소유함과 세계에 의해 점령당해 있음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는 욕구들과 그 호기심들이 진정되도록 할 것이다. 그는 아주 평온하고 태연자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무 無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위의 글은 내가 추측하기에 거의 100% 직역일 듯하다. 어떨까.. 역자가 조금이라도 풀어서 설명을 할 수 없었을까? 조금 쉬운 말, 부드러운 말로… 더 많은 독자들이 ‘쉽고 빠르게’ 이해를 돕게 노력을 했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만 하다.

 

 

‘역자후기’ 중에서

다른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에 따른 어려움이란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되는 작품과 관련하여 옮긴이는 이러한 사실을 개인적으로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깊은 생각이 독자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전달될 수 있기를 옮긴이는 기대해 본다.

소개되는 작품의 주제는 종교철학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종교는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가? 점차 과학화되고 합리화되어 가는 현대세계 안에서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성의 광장” 앞에서 종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역자후기의 서문은 역시 ‘번역의 어려움’으로 시작하고 있다. 왜 그럴까? 원저가 워낙 어려운 것이라? 아니면 적당한 우리 말 용어가 없어서?  쉬운 말로 설명을 하기가 힘들어서?  구체적인 이유는 생략되었지만 나는 솔직히 무엇인지 짐작은 한다. 하기야 쉽지 않은 분야, 신학과 철학이 함께 엮인 것이니.. 쉽지 않은 것은 100%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특히 ‘공돌이’로 굳어진 머리로 이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 함은 거의 허무한 명제일 듯 하다. 하지만 노력은 한다. 조금씩 조금씩… 그날까지..

  1. 종교철학, 베른하르트 벨터 적, 오창선 옮김, 1998년 분도출판사

Hope… 희망 希望..  인생의 황혼기, 후반기 중의 한 시점을 살아가면서 이 희망이란 말은 사실 크게 .  생각보다 더 많은 뜻을 함축한 이 희망이란 말, 요즈음 들어서 조금 더 깊고 다르게 생각 하게 되었다. 희망이란 말,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은 이번에 ‘우연히’ 읽게 된 Pope Francis (교황 프란치스코) 의 short essay: Never Lose Hope 에서였다.

우리는 ‘희망이 필요하다!’. 허.. 누가 모르나. 희망이 적거나 없으니까 문제가 아닌가? “하느님, 예수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니까 우리는 희망이 있다”.. 는 말, 솔직히 그렇게 실감을 할 수가 없을 때가 너무나 많은 우리의 삶이 아닌가?  그런 먼 미래의 희망들이 절망이나 실망 속에 빠진 우리들에게 그렇게 큰 도움이 될까?

문제의 관건은 역시 ‘믿음’이다. 그것도 무조건 적인 믿음, 바로 그것이 아닐까? 영원한 생명, 절대로 다시는 죽지 않으리라는 엄청난 약속의 희망으로부터 우리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절망의 순간들 속에 우리는 희망이 있는 영원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믿음의 진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간단히 보이는 진리가 그렇게도 ‘다루기 handle’ 가 힘든 것일까?

 


 

NEVER LOSE HOPE

POPE FRANCIS

 

Hope never disappoints. Optimism disappoints, but hope does not! We have such need, in these times which appear dark. We need hope! We feel disoriented and even rather discouraged, because we are powerless, and it seems this darkness will never end.

We must not let hope abandon us, because God, with his love, walks with us. “I hope, because God is beside me”; we can all say this. Each one of us can say: “I hope, I have hope, because God walks with me.” He walks and he holds my hand. God does not leave us to ourselves. The Lord Jesus has conquered evil and has opened the path of life for us…

Let us listen to the words of Sacred Scripture, beginning with the prophet Isaiah… the great messenger of hope.

In the second part of his book, Isaiah addresses the people with his message of comfort: “Comfort, comfort my people, says your God. Speak tenderly to Jerusalem, and cry to her that her warfare is ended, that her iniquity is pardoned… A voice cries: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Every valley shall be lifted up, and every mountain and hill be made low;  the uneven ground shall become level, and the rough places a plain.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for the mouth of the Lord has spoken'” (Isaiah 40:1-2, 3-5)…

The Exile was a fraught moment in the history of Israel, when the people had lost everything. The people had lost their homeland, freedom, dignity, and even trust in God. They felt abandoned and hopeless. Instead, however, there is the prophet’s appeal which reopens the heart to faith. The desert is a place in which it is difficult to live, but precisely there, one can now walk in order to return not only to the homeland, but return to God, and return to hoping and smiling. When we are in darkness, in difficulty, we do not smile, and it is precisely hope which teaches us to smile in order to find the path that leads to God.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happens to people who distance themselves from God is that they are people who do not smile. Perhaps they can break into a loud laugh, on after another, a joke, a chuckle… but their smile is missing! Only hope brings a smile; it is the hopeful smile in the expectation of finding God.

Life is often a desert, it is difficult to walk in life, but if we trust in God, it can become beautiful and wide as a highway. Just never lose hope, just continue to believe, always, in spite of everything…. Each one knows what desert he or she is walking in – it will become a garden in bloom. Hope doe snot disappoint!

The prophet Isaiah once again helps us to open ourselves to the hope of welcoming the Good News of the coming of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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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iah chapter 52 begins with the invitation addressed to Jerusalem to awake, shake off the dust and chains, and put on the most beautiful clothes, because the Lord has come to free his people (verses 1-3). And he adds: “[M]y people shall know my name; therefore in that day they shall know that it is I who speak; here am I” (verse 6). It is to this “here am I” said by the Lord, which sums up his firm will for salvation and closeness to us, that Jerusalem responds with a song of joy, according to the prophet’s invitation…

These are the words of faith in a Lord whose power bends down to humanity, stoops down, to offer mercy and to free man and woman from all that disfigures in them the beautiful image of God, for when we are in sin, God’s image is disfigured. The fulfillment of so much love will be the very Kingdom instituted by Jesus, that Kingdom of forgiveness and peace which we celebrate at Christmas, and which is definitively achieved at Easter…

These are, brothers and sisters, the reasons for our hope. When everything seems finished, when, faced with many negative realities, and faith becomes demanding, and there comes the temptation which says that nothing makes sense anymore, behold instead the beautiful news… God is coming to fulfill something new, to establish a kingdom of peace… Evil will not triumph forever; there is an end to suffering. Despair is defeated because God is among us.

And we too are urged to awake a little, like Jerusalem, according to the invitation of the prophet; we are called to become men and women of hope, cooperating in the coming of this Kingdom made of light and destined for all, men and women of hope…. God destroys such walls with forgiveness! And for this reason we must pray, that each day God may give us hope and give it to everyone; that hope which arises when we see God in the crib in Bethlehem. The message of the Good News entrusted to us is ur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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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also Isaiah who foretold the birth of the Messiah in several passages: “Behold, a young woma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Isaiah 7:14); and also: “there shall come forth a shoot from the stump of Jesse, and a branch shall grow out of his roots” (Isaiah 11:1). In these passages, and meaning of Christmas shines through: God fulfills the promise by becoming man; not abandoning his people, he draws near to the point of stripping himself of his divinity. In this way God shows his fidelity and inaugurates a new Kingdom which gives a new hope to mankind. And what is this hope? Eternal life.

When we speak of hope, often it refers to what is not in man’s power to realize, which is invisible. In fact, what we hope for goes beyond our strength and our perception. But the Birth of Christ, inaugurating redemption, speaks to us of a different hope, a dependable, visible, and understandable hope, because it is founded in God. He comes into the world and gives us the strength to walk with him: God walks with us in Jesus, and walking with him toward the fullness of life gives us the strength to dwell in the present in a new way, albeit arduous. Thus for a Christian, to hope means the certainty of being on a journey with Christ toward the Father who awaits us. Hope is never still; hope is always journeying, and it makes us journey. This hope, which the Child of Bethlehem gives us, offers a destination, a sure, ongoing goal, salvation of mankind, blessedness to those who trust in a merciful God. Saint Paul summarizes all this with the expression: “in this hope we were saved” (Romans 8:24). In other words, walking in this world, with hope, we are saved. Here we can ask ourselves the question, each one of us: Am I walking with hope, or is my interior life static, closed? Is my heart a locked drawer or a drawer o open to the hope which enables me to walk – not alone – with Jesus?….

Those who trust in their own certainties, especially material, do not await God’s salvation. Let us keep this in mind: our own assurance will not save us; the only certainty that will saves us is that of hope in God. It will save us because it is strong and enables us to journey in life with joy with the will to do good, with the will to attain eternal happiness.

Christian hope is expressed in praise and gratitude to God, who has initiated his Kingdom of love, justice, and peace… It will truly be a celebration if we welcome Jesus, the seed of hope that God sets down in the furrows of our individual and community history. Every “yes” to Jesus who comes, is a bud of hope. Let us trust in this bud of hope, in this “yes”: “Yes, Jesus, you can save me, you can save me.”

 

예수회 창시자 성 이냐시오

예수회, S.J.  성 로욜라의 이냐시오,  S.J…. Society of Jesus. 우리에게 비교적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 ‘가톨릭’ 단체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우문현답 愚問賢答 을 연상하게 하는 질문이지만 실제로 어떤 때는 나도 확실하지 않다. ‘예수회’니까 물론 절대적, 궁극적인 목표는 ‘역사적, 현존’ 예수님일 것이지만 과연 그것을 지향하는 신학적인 철학, 방법은 무엇인가? Wikipedia같은 곳을 보면 ‘공식적인 사실’들이 수 없이 많이 열거되어 있고, 모두 사실적, 객관적, 역사적인 것들이라 왈가왈부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우리가’ 머리로, 가슴으로, 피부로’ 받는 그 느낌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객체’들에 의해서 좌우 될 것이다. 그 객체는 어떤 것이며 누구인가?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예수회 사제, 신부, 수도자, 학교’ 같은 것이 아닌가?  내가 학교 같은 단체는 접할 기회는 없지만 사제들은 바로 앞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나에게는 예수회의 전부인 것이다.

나의 두 본당 중 영어권 본당의 사제는 오래 전에 결혼을 한 ‘동방교회’ 출신으로 로마교회로 온 신부로 그야말로 ‘교구신부’다. 예수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모국어 ‘도라빌’ 본당의 사제는 언제부터인가 교구사제에서 예수회 사제로 바뀌어서 이제는 예수회란 말이 빠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가까운 곳에서 ‘예수회’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우리들, 평신도들에게 이런 것이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멀리서 보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차이를 느낀다. 예수회 사제, 특히 본당신부는 전통적으로 ‘교구 사목’이 그들의 특기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차이가 없이 느껴지니까 별 문제는 없다. 오히려 영성적인 측면으로 보면 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냐시오의 영성을 사목에 주안점으로 삼으면 평신도들은 독특한 혜택을 받지 않을까.  그래서 교구 사목상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나는 절대적으로 신학전문가가 아니기에 섣불리 단언은 못하지만 내가 접하는 ‘미디어’ (fake가 아닌 전통적 미디어)를 통한 예수회, 그것도 특히 미국(북미주) 예수회는 더욱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야당과 여당’을 이루는 정치구도와 흡사한가. 한마디로 예수회는 미국의 liberal, democratic, progressive한 것이라면 거의 틀림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닐 듯하다. 모국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의 가톨릭 매체들을 살펴보면 이 ‘양극화’가 뚜렷하다. 특히 ‘또라이’ 트럼프가 들어오며 이 현상은 숨길 수가 없는 듯하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회 프란치스코교황’의 ‘자비’ 선포로 인한 ‘전통 교리의 후퇴’를 우려하는 ‘극단적인 비난’인데,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모두가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교리, 교의 해도 세상과 세속의 ‘진화’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아마도 예수회의 주장일 듯하다.

쉽게 말해서 ‘자비와 정의, 원칙’의 대결인 셈인데, 이들 신앙인들에게는 ‘중도’라는 ‘타협’은 없는 것인가?  제일 심각한 것이 Homosexual 들을 ‘자비’로 받아들이자는 문제다.  또한 Abortion(낙태)에 대한 자세도 그 중에 하나다. 이것도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대한민국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회 신부들은 여론적으로 보아도 ‘진보적’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빨갱이’라는 평을 쉽게 받는다. ‘정구사’라는 독특한 약어의 느낌도 다를 것 없이 ‘빨갱이’라고 매도된다. 이것도 타협점이 없는 것일까? 한마디로 주위를 살펴보면 ‘또라이 트럼프’처럼 서로 잇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기만 했지 절대로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나의 생각은 어떤가? 아무래도 나이 탓, 나의 가족적 역사로 보아서 예수회 같이 무조건 자비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유 있고, 정의가 밑받침이 되는 자비와 사랑..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닐까?

 

Max Planck, father of Quantum Physics

 

요새 나는 온통 이 흔해빠진 단어, ‘consciousness,  의식 意識’의 홍수에서 헤매며 사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곳, 저곳, 그곳.. 나의 눈이 가는 곳마다 이 consciousness란 말이 보이는 것일까? 하기야 이것은 우문현답 愚問賢答 식으로 말하면 ‘나의 눈이 가는 곳마다 (대부분 책들) 그것이 보이니까, 아니 내가 그런 것을 내가 의식적으로 읽거나, 보거나 생각하고 있으니까’  정도가 아닐까?

무슨 큰 진리나 발견한 듯한 쾌감이 따라오는 이 최근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나는 ‘절망 뒤에는 반드시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그런 ‘작은 은총’을 느낀다. 죽으란 법은 없는가.. 요사이 나의 ‘독서 관심’을 이쪽으로 이끌어주는 것, 나의 의식적 의지만은 아님을 어찌 내가 모르랴..

과학과 종교, 인간과 하느님, 보이는 현실과 초자연 세계를 연결해 주는 고리, 그것이 바로 consciousness라는 놀랍지만 생소한 idea가 이제는 ‘말이 된다’라는 경지까지 온 것, 그것이 나는 아직도 놀랍기만 하다.

20세기 초의 Quantum theory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string theory, multiverse등이나 NDE (Near-Death Experiences)를 통해서 지나간 반세기 동안 그 동안 taboo처럼 취급되던 것들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드디어 big convergence (science & religion) 가 시작된 것인지는 몰라도 가히 흥미로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끈질긴 materialistic mindset을 가지고 자란 나에게 종교적 신비적인 경험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영역이었지만 근래에 들어서 ‘가슴을 열고’ 본 ‘새로운 현실’은 아주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온 우주가 의식적, 의식으로 가득 찬, 사랑의 시공간이라는 놀라움. 우리의 두뇌에 갇혀있는 포로로 알던 ‘의식’은 그 자체가 자체라는 사실 등등은 아무리 ‘영혼의 밤’ 속에서도 밝은 빛으로 나를 살려준다.

이런 모든 것들은 가히 ‘복음적’이 아닐 수 없다. 태어나면 죽어서 잊혀져야 하는 존재가 실제로는 ‘영원한 존재’라는 조심스러운 나의 희망적 염원이 서서히 실감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의 복음 중 제일 큰 복음이 아닐까?

예기치 않은 작은 일 하나로 어제 오후의 기분은 평상적인 평화로운 화요일의 그것과 다른 것이었다. 오랜 만에 마음의 평정이 공략을 받는 듯한 위기감까지 느낀 고요한 화요일 오후, 오랜 만에 openculture website를 들렸다. 이곳이 언제부터 나의 favorite site list에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최소한 3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곳은 주로 ‘인류 문화적 유산’에 큰 가치를 두고 그 가치를 유지 발전 보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 일환으로 무료나 저렴한 비용으로 online course를 제공하는 information을 싣곤 한다. 이곳의 소개로 내가 ‘들었던’ course도 이제는 몇 개가 된다.

오늘 쳐지는 기분 속에 나의 눈에 들어온 글자가 바로 Kierkegaard란 이름이었다. 한글로는 ‘키에르케고르’ 로 번역되는 이 19세기 덴마크의 국보급 철학자에 관한 course가 그곳에 소개되고 있었다. 게다가 course가 어제인 6월 4일에 시작이 되니, 알맞은 timing이 아닌가?

8주간 계속되는 이 course는 19세기 덴마크 실존주의 신학,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성장 배경과 그의 주 관심인 그리스도교적 실존철학, 주관론, 소크라테스의 Irony개념, 그리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느끼는 ‘절망감’ 같은 것들을 공부한다.

 

문제는 왜 내가 이 course에 관심이 가는가 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보아온 이름 ‘키에르케고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왜 많은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 사람에 관심을 두는가.. 알고 싶다. 피상적으로 이 철학자의 profile을 보면, 우선 그의 철학은 완전히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특히 ‘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Unto Death‘이라는 후기작의 제목은 바로 ‘요한복음 11장 4절1‘ 에서 나온 것을 알고 나서 나는 이번 여름 8주를 coursera 제공, ‘open & free2‘ course를 통해서 이 덴마크 신학철학자에 대해 알아 보기로 결심했다.  

이런 과정에서 기억 속을 헤치고 나온 것이 하나 있다. 1984년 신동아 잡지의 별책 부록,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이란 것, 분명히 ‘키에르케고르’는 그 곳에 소개 되고 있었다. 특히 위에 소개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관한 저자의 소개가 그곳에 있었다. 그것을 이곳에 전재를 하여 기억력을 살린다.

이러다 보니.. 온종일 쳐지고 우울한 머리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끼며,  한결 살맛이 난다. 이래서, 우울할 때 그대로 쳐지고 있으면 하나도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나의 경험철학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덴마크 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죽음에 이르는 病 (1849)

 

표재명 表在明 (고려대 문과대학교수 서양철학)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3

 

 

<1>

‘쇠얀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 5월 5일 북 유럽의 작은 나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유하고 경건한 모직상의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증력을 훈련 받았고 깊은 시름을 물려 받았다.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고 부친의 뜻에 따라 신학 국가시험에 합격, 왕립전도학교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한편, ‘소크라테스’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쓴 ‘아이러니의 개념’으로 철학 학위를 받았다. 한때 베를린대학에 가서 ‘헤겔’의 뒤를 이은 만년의 ‘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1838~39년에 그는 부친의 소년시절에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되어 ‘큰 지진’을 체험하고 죄의식에 눈을 떴다. 이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 ‘레기네 올센’과의 결혼도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1846년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악덕 풍자신문 ‘코르사르'(해적)와 충돌하면서 그는 사회와 대중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종교적 저작가로서의 사명에 살 것을 결심했다. 1854년부터는 팜플렛으로 된 ‘순간’으로 덴마크국교회와의 싸움에 나서 순교자의 길을 택했는데, 1855년 가을에 길에서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1월 11일 42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현대실존사상의 선구적 사상가 철학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종교적 저작가’ 또는 ‘그리스도교적 저작가’로 자처했다. 그의 저작활동의 목적은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것을 기술하는 것이며, 낱낱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곳에서 그 자신의 책임으로 이 문제와 씨름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단독자 單獨者’의 범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단독자의 범주는 그의 모든 저작활동이 그것을 축으로 전개된 그의 모든 저작활동이 그것을 축으로 전개된 근본 이념이며, 그리스도교의 결정적 범주였다. 그에게 있어 단독자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무한한 관심을 가지는 믿음으로 홀로 서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이토록 힘을 써야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물음의 뜻은 ‘그리스도교 세계는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그리스도교 세계는 저도 모르게 그리스도교를 말살시켜 버렸다’는 그의 놀라운 단언에서 밝혀진다.

그가 볼 때 당시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적 합리주의사상이라든가 낭만주의 사상, 특히 그리스도교와 국가를 합리화하고 종교와 국가를 융합시킨 헤겔철학의 영향 아래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라 한갓된 교리와 사상으로 변질된 겉치레만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약성서’의 그리스도교, 사도 使徒 들의 그리스도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행복을 좇아 ‘미적인 것’의 범주에서 사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요 기만이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들이는 일’을 위한 그의 저작활동의 의의와 저작가로서의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정치-사회적 인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자기의 사명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1848년에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냈고 파리혁명을 기폭제로 유럽 전역에서는 혁명의 폭풍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덴마크에도 혁명의 여파가 밀려와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로 바뀌면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널리 보장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시대의 유행이 된 사회주의의 이념이나 국민 사회운동이 시대의 구원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 같은 것은 낱낱의 단독자를 대중이라든가 그 밖의 유개념의 추상물 속에 묻어버리는 대중화, 평균화의 위험을 촉구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민중을 집단의 힘 에로 결속시키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붕괴의 시대의 유일한 고정점으로서 하느님 앞의 단독자로 해체시키는 일이었다. 곧 이 시대의 구원은 각 사람이 ‘자기의 원시성 原始性’에 눈뜨고 ‘1800년을 그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뛰어 넘어’ 예수와 함께 하는 삶, 곧 신약성서의 그리스도교로 돌아가는 데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각 사람에게 ‘감히 자기 자신이 될 것’ 곧 ‘감히 하느님 앞에서 오직 홀로서는 단독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거대한 노력과 이 엄청난 책임을 지고 오직 홀로 서는 특정한 단독자’가 스스로 되려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도 그러기를 원했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교적인 영웅주의’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영웅주의를 위해 ‘교화와 각성을 위한 그리스도교적이고 심리학적 論述’로서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을 썼던 것이다.

 

<2>

<죽음에 이르는 병>의 본문은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다’ 라고 하는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인간은 ‘정신’으로, 그리고 이 정신을 ‘자기’로 파악한 데 ‘키에르케고르’의 독특한 인간이해가 있다.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주관과 객관, 사고와 존재, 이성과 감성, 논리와 자연을 의식적으로 종합하는 ‘절대정신’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는 이 같은 절대정신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유한한 인간의 실존재하는 정신은 영원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로는 그렇지 못한 자기이며, 영원자가 되는 일을 과제로 안고 있는 자였다. 본래 그렇게 되어야 할 자기가 되려는 자기생성의 무한한 노력 중에 있는 것이 인간 실존의 진실이요, 인간으로서 실존재하는 정신이란 이러한 과제를 자신의 과제로 자각하는 자기, 이 과제를 지금을 사는 이 단독의 자기의 삶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자기였다. 자기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존이 되어 있지 못한 상태,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실의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곧 절망인 것이다.

이러한 절망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곧 구제를 위한 첫째 계기가 된다는 변증법적인 성질의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죽음은 일체의 것의 마지막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죽음조차도 일체의 것의 마지막이 아니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 인간은 삶을 희망한다. 그러나 죽기를 바랄 만큼 위험이 클 때, 그리고 죽음조차도 희망이 될 수 없을 때 이것이 절망이다.

절망의 진행과정은 절망의 현상학이 된다. 절망의 강도는 인간의 자기의식의 도 度 에 따라서 높아진다. 곧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절망’ (영원한 자기를 가지는 일에 대한 무지)에서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절망'(어떤 영원한 것을 가진 자기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에로 높아진다. 이것은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에 있어서 정신성의 미적 실존의 단계에 해당되는 ‘재미’를 찾아 헤매는 직접적인 대상의식의 절망에서 윤리적-종교적 실존의 단계까지 이르는 자기의식의 절망이 된다.

윤리적 실존에 눈을 뜬 인간의 절망은 ‘절망하여 자기자신 이려고 하지 않는’ 약한 여성적 절망이 되든지 ‘절망하여 자기자신 이려고 하는’ 반항적인 남성적 절망이 된다. 이 반항적 절망은 자기의식의 강도에 따라 악마적인 반항, 절망적 광포에까지 이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 현대의 윤리적 상황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 적인 윤리적 교정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적 윤리는 시대의 구원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알면서 선을 행하지 않고 부정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반항하는 인간의지가 죄를 자각하고 그 마음을 돌이킬 때 구제의 길이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계시와 원죄의 가르침의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제2부에서 절망은 ‘하느님 앞에서의 절망’ 곧 죄로 규정되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서는 일, 곧 믿음에 의한 절망의 근절을 말하고 있다.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은 그 다음해에 나온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훈련>과 함께 ‘파스칼’의 <팡세>에 비겨지는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명저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구명된 그의 인간이해는 그 후의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현대의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 변증법적 신학은 물론 교육학 심리학 문학예술사상의 형성과 전개에 크게 이바지했다.             

 

주요저서

  • Either-Or <이것이냐, 저것이냐>, 1843.
  • Fear and Trembling <공포와 전율>, 1843.
  • Repetition <반복>, 1843.
  • Philosophical Fragments <철학적 단편>, 1844.
  • The Concept of Dread <불안의 개념>, 1844.
  • Stages on Life’s Way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 1845.
  •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철학적 단편에 대한 後書>, 1846.
  • The Present Age <현대비판>, 1846.
  • Work of Love <사랑의 역사 役事>, 1847.
  • Christian Discourse <그리스도교 講話>, 1848.
  • Training in Christianity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훈련>, 1850.
  • Attack upon Christendom <순간>, 1855.
  • The Point of View for my Work as an Author <관점>, 1848.
  1.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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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동아 1984년 1월호 별책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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