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중앙고

‘Jordan Peterson, God, and Christianity’,  이 책을 산지도 일년이 지나갔는데 이제야 겨우 몇 페이지를 읽었을 뿐이다. 관심이나, 흥미가 적어서 그런 것보다는 다른 책들 쪽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역시 현재 인기가 많은 ‘인기인’ 개인의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관에 관한 것이라서 우선은 Jordan Peterson 이란 사람을 더 알아야 하는 걸림돌이 있다. 하지만 현재 YouTube를 통해서 지성인 중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완전히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고 공언을 하였기에 더 이상 이 책을 읽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가장 커다란 무기는 역시 그의 ‘첨예한 지성’이고 이 책은 그의 기본적인 성경 해석을 분석한 것이기에 더욱 관심이 간다. 이제 읽기를 시작했지만 현재의 느낌으로는 빠른 시일 내에 완독을 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오늘은 짬이 나는 대로 Coursera course를 청강하는 기회를 얻었다. 바로 시작한 것, Atlanta Emory University 신학대학에서 제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성서적 기원’이 주제다.  이것에 관심이 간 제일 큰 이유는 구약,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prehistory 선사시기의 학문적 역사적 사실과 구약의 차이, 관계가 궁금했던 것인데, 이것도 역시 과학과 신앙의 대비, 차이, 대결이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신기한 광경이 펼쳐진 침실, 해가 중천에라도 뜬 듯한 대낮 같은 밝음, 어찌된 일인가? 시계를 보니 8시가 훨씬 넘었다. 몸이 개운한 듯 느껴진다. 아~ 그렇구나, 평상시보다 거의 한 시간 이상 늦게 일어난 것이다. 평상처럼 깜깜한 속을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나의 모습이 없어서 편하기도 하고..

너무나 초현실 같이 꾸었던 꿈들도 너무나 선명한데, 이번에는 거의 확실하게 뇌세포에 남아 있다. 우연인가, 이것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100% 분명한 것은 ‘박종섭’이란 동창의 얼굴과 이름 뿐이지만,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는 아마도 하루 종일 생각거리가 되지 않을까?

몸이 개운하고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히 어제 운동한 것과 그 후에 Tylenol 2알의 결과일 것 같다. 과도로 쌓여가는 피로가 어제 절정에 달했고, 오늘 아침의 oversleep으로 풀어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은 아침 미사를 못하게 되었다. 연숙이 새로니 집에 갈 약속이 되어 있기에 그렇지만,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심리적 도움’을 받아 오늘 나도 편하게 피로를 풀게 되었고, 선명한 꿈까지 꿀 수도 있었으니까, 큰 불만은 없다.

그런데… 왜 박종섭인가? 허~ 이것이 문제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고등학교, 그리고 연세대학교까지 같이 다닌 동창은 사실 드문 케이스일 것이지만 그와 친해본 적은 한번도 없으니.. 키가 큰 그룹에 속했던 그와 말도 해본 적도 없다. 나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도 역시 내성적이고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기억할만한 것이 거의 없는데, 언젠가 그가 미국에 있는 한국의 Hynix란 반도체회사의 사장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전부인데, 그의 변신이 아마도 나에게는 커다란 놀라움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물론 샘이 날 정도로 부럽고, 다른 쪽으로는 자랑스러운 그런 묘한 심정이었다. 그는 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 나와 같은 반, 그러니까 ‘이공계’반이었는데 어떻게 연세대에서는 인문계 (아마도 상경계) 쪽으로 공부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정도면 크게 성공한 동문인데 동창회 쪽으로 그의 이름은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는 것도 조금 의아한 사실.

이런 배경으로 그의 모습은 뇌리의 어느 곳에 있었을 터이지만, 왜 그가 오늘 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일까? 정말 우연 중의 우연일까?

 

오늘은 연숙의 스케줄 때문에 부득이 미사를 쉬게 되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도 유연성이 있어야 장기적으로 유리하니까 할 수가 없다. 대신 몇 년 동안 하지 못했던 pressure washer로 집 정문 쪽을 deep cleaning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Hedge trimming 까지 할 수 있었던 것, 오늘의 건조하고 시원한 날씨 덕분이었다.

연숙이 Ozzie를 새로니 집에서 데리고 왔다. 새로니 식구가 내일 여행을 간다고 오늘부터 Ozzie를 봐달라고 한 것, 오늘부터 내주 수요일까지,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녀석과 매일 산책하는 것도 몸에도 좋으니까…

 

 

Echinopsis Summer!  또 3 송이가 피었다. 올 들어서 도대체 이것이 몇 번째인가? 이제는 별로 놀랄만한 일도 아닌 것인가? 아니다, 불과 하루 몇 시간 동안  피는 이것, 해가 뜨기 전에 나가서 이미 피어난 모습과, 주변의 초록색 절정을 무섭게 지나가는 올 여름 찰나의 역사로 남긴다.

 

입추도 어제로 지났고, 다음 주 월요일은 결국 말복이다. 이제 여름은 그렇게 무섭지 않게 보인다. 아무리 더워 봤자… 라는 배짱인가? 분명히 mercury 숫자로 보면 더운 것이지만 전처럼 더운 느낌이 다르다는 것, 우리의 몸, 특히 피부가 신기하게 적응을 한 것이리라…  앞으로 몇 주는 쏜살같이 지날 것이니까… 그러면 9월이… amber after amber… 허~~ 그렇게 되는가?

Google Voice에서 경고[권고]성 email이 날아들었다. GV No 2가 일주일 후에 expire가 된다고… 그때까지 쓰지 않으면… 곧바로 번호에 전화를 걸어서 voice mail을 남겼다. 이렇게 된 것은… 요사이 산책을 하면서 이곳에 ‘도장’을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7월 초, Spring Creeks 산책 중, 개XX 사건으로 완전히 이것을 잊었던 것인가… 하~ 그런지도.. 앞으로는 이것에도 신경을 써야겠다. 산책을 하며 자주 voice mail을 남기면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인데..

조용하고 평범한 월요일을 예상했지만 약간의 추가로 신경을 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성당 가는 길, 도착하는 길에 어떤 차가 쫓아오더니 주차장까지 따라 들어와서 우리 차 brake light 두 개[왼쪽과 가운데] 가 안 들어온다고… 물론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을 것인데 나는 불현듯  조금 지나친 간섭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결국은 그의 ‘좋은 이웃’의 모습에 충분히 나의 답례가 부족하게 보였을 것이 염려가 되었다. 누가 그런 수고를 해 주겠는가? 하지만 후에 작은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닌 것이 나중에 brake light bulb를 O’Reilly에서 사다가 교체를 하려고 보니… 글쎄 원래의 것이 멀쩡한 것이 아니던가? 도대체 어찌된 노릇인지.. 분명히 연숙이도 확인을 했다고 하니.. 누가 틀린 것인가? 순간적으로 조금 화가 나긴 했지만..  결국 brake light가 수명이 다 되어가는 것으로 ‘공식판정’을 내리고 말았다. 또 다른 사실은, 소위 말하는 3rd brake light교체하는 작업.. 특히 SONATA의 경우 거의 mechanic이 필요한 작업으로까지 보인다. 이것 3rd brake light를 design한 HYUNDAI engineer 인간들의 비상식적인 머리가 의심스럽다. 아니 light bulb 교체하는데 그렇게 고통스럽게, 어렵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R 형 부부와 모레 목요일 점심을 같이 하기로 약속이 간신히 잡혔다. 덕분에 며칠 전 안나 자매가 언급했던 예전의 초원뷔페 자리의 ‘새벽집’이란 묘한 이름의 식당을 가보게 되었다. ‘꼰대’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서, 분위기가 대강 짐작은 간다.  그 자매부부가 그곳에 갔을 때, 그곳에서 경로잔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해서 한참 웃었다. 왜 그곳에 그렇게 ‘꼰대’들이 많이 오는 것일까? 늙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메뉴 때문일까? R형 부부와 만난 것이, 5월 초에 만나고… 그러니까.. 거의 3개월이 흐른 것이다. 지난번 만난 후에는 자주 만나자고 기염을 통했지만 이렇게 되고 말았는데.. 이유는 무엇일까? 친분이나 우정이란 것, 인위적으로 희망대로만 되는 것이 이 나이에서는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사람’들과의 사귐에는 노력을 하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듯 한데… 동갑, 동향이란 것만으로는 극복할 것이 적지 않다. 특히 개인적이 아닌 부부가 관계가 되면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분명하고.. 둘이서만 만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이 이제는 전처럼 쉽지가 않으니..

뉴스를 의도적으로 안 본지가 20여 일이 되었는데, 사실 그 동안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too big news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제 오늘 연숙이 언급하는 서울의 집중호우 소식은 조금 관심이 갔다. 시가지의 차들이 물에 잠기는 정도가 된 것은 예외적인 것 아닌가? 인명피해는 경미하지만 심리적으로 느끼는 공포감은 상당할 것 같다. 1964년 중앙고 2학년 여름, 용산구 남영동에 살 때 나는 직접 피부로 눈으로 느끼고 목격을 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밤새 쏟아지는 폭우, 그것이 집중호우일 것인데, 다행히 우리는 2층 집의 2층에 살고 있어서 길이 물에 잠기는 것을 내려다 보는 입장이었지만, 한마디로 자연의 무서움은 50 여 년이 지난 아직도 남아있다.  도로에 물이 넘치며 침수가 되고, 지하실을 완전히 물에 잠길 정도, 그 당시에는 한강이 범람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그것의 최악의 사태는 서울시가[특히 용산 쪽]  물에 잠기는 형국이었다. 다행히 그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었다. 나는 특히 수영을 못하고 물에 대한 trauma가 많아서 그런지 물을 아주 싫어하는 편이라서 서정적인 느낌의 아름다운 비는 정말 사랑하지만 집중호우 같은 것은 정 반대로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것 같다. 이곳에도 오늘은 어제보다 더 확실하게 더 많은 비가 오후에 내렸다. 이 정도의 비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빗님이고, 갑자기 서울을 비롯한 세계도처에서 혹서, 폭우, 산불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며 생각하니 정말 미안해진다.

중앙57회 동기 카톡방, 처음에는 옛날 옛적의 중앙중고 캠퍼스의 추억에 젖어, 당시 졸업앨범의 애 띤 얼굴들을 연상하며 그들의 글을 보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니 이곳의 regular들이 한정된 숫자의 몇몇 동문들이었고 화제도 주로 정치 쪽이 압도적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상할 것도, 나쁠 것도 없지만, 솔직히 내가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는 듯, 또다시 외톨이가 되어가는 서운함이 없지 않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최근에 이곳을 통해서 알게 된 이재영 동문이 그곳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일까. 나와 거의 비슷한 것, ‘Donald 개XX MAGA’ 빠가 집단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일까. 아직도 그 개XX의 narcissistic 거짓말을 믿는 한심한 동문들이 이곳에 있음이 나는 더욱 놀랍기만 하고, 가끔 나도 한마디 이재영을 지원사격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창들이 나의 의견은 고사하고 나의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973년 6월 초 김포공항… 오른쪽 끝에 건장하고 훤칠한 모습의 김원규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우진규, 김호룡, 정교성, 이종원, 박창희, 신창근, 이진섭, 이경증… 원규는 하늘로 며칠 전에 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디에..

며칠 전 사망, 타계한 김원규..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추억들이 조금씩 되살아 나오고 결국은 공항에서 단체로 찍은 사진까지 발견하였다. 그것으로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 호룡이, 교성이, 우진규 등과 같이 어울린 기억, 또한 그의 친구였던 박승호의 결혼식도 갔던 것, 그의 소개로 미국에서 박승호의 도움을 받았던 것 등등..  하지만 원규와는 중앙중고 6년을 통해 한번도 같은 반을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활달했던 그의 성격으로 잘 알려졌지만 나와 개인적으로는 한번도 안 적은 없었다. 당시 서울시 교육감의 이름과 같아서 아이들이 그를 교육감이라고 불렀던 것도 기억을 한다. 그러니까 졸업 이후에 호룡이, 교성이 그룹을 알게 되면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교성도 마찬가지지만…  근래에 양건주와 만난다는 소식을 접해서 연락처까지 알아서 카톡으로 재상봉을 했는데, 녀석은 용케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우리 어머님을 만났던 것까지 회고를 해서 내가 너무나 감사하고 기뻤다. 하지만 폐암말기로 투병하고 있음을 알았고 비록 그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매일 저녁기도에 그의 완치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정성이 모자랐던 듯하다.  내가 신세를 졌던 박승호가 환갑도 되기 전에 타계했다는 것도 나에게 알려주었는데, 그마저 가버리다니…  이번에는 정말 조금 외로워진다. 하나, 둘, 셋… 모두 떠나는 것을 보니… 예전과 다르게 유별나게 외로워진다.

원규에 대한 기억이 더 살아난 것 중에… 결혼식에서의 기억이다. 호룡이, 교성이 그룹과 어울리며 원규도 같이 만나게 되었는데 한번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중앙동차 박승호의 결혼식엘 가게 되었다. 그 결혼식의 사회를 김원규가 보았는데, 그 사회 솜씨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나는 것, 결혼식이 끝나며 신부신랑 퇴장 시에 사회를 보던 원규, 무슨 군대식 호령인지… 앞으로 갓! 하며 고함을 친 것이 아직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는다. 후에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그와 친한 박승호를 소개받아서 LA에 도착해서 큰 도움까지 받았다. 며칠 동안 여행도 하며 신세를 진 것이다. 얼마 전 원규에게 박승호가 환갑 전에 타계했다고 알려주어서 상당히 놀랐었다. 또 다른 기억은 1975년경 잠시 귀국을 했을 때 이번에는 원규가 결혼을 하게 되어서 그의 결혼식엘 갔었던 것이 기억에 또 남는구나…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원규를 본 때가 되었으니… 이후로는 교성이, 호룡이, 그리고 최근에는 양건주를 통해서 원규 소식을 간접적으로 듣고 있었고, 얼마 전에는 원규와 카톡으로 개인적인 연락이 되어서 매일 그를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결국은 하느님이 그를 더 빨리 원하셨는지.. 우리를 떠났구나… 원규야~ 비록 하느님을 우리와는 다른 식으로 믿지만 저 세상에서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니 부디 우리들을 기다려 다오.

 

Holy Family 동네 미국성당 9시 아침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한여름을 가는 대성전 후면 거대한 유리창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진하디 진한 초록색의 현란한 색상을 담고 싶었는데, 결과는 역시 ‘십자고상’이외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은 질책이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시각적 유혹은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중복을 넘기며 본격적으로 휴가들을 떠났는지 미사에 사람의 숫자가 현저히 줄었지만 아마도 이런 조용한 여름도 얼마 남지 않았을까?

여름다운 여름… 이라고 부르고 싶은 올 여름, classic summer.. 그래 이런 여름이 30+ 년 전 이사올 당시에 느꼈던 그런 것 아닐지.. 여름은 사실 여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최근에는 사실 조금 여름답지 않게 너무나 시원했던 몇 년을 보낸 듯하다. 일어나서 밖의 기온을 느껴보니 역쉬~ 76~77도, 와~ 정말 중복 복더위 여름이로구나… 지난 밤에 기온이 별로 떨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래… 여름다운 여름을 가급적 납량하는 기분으로 즐기자…

내가 세상 [정치] 뉴스를 피하며 사는 것이 벌써 12일째라고?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었다. 아침의 NYT newsletter email에서 한 줄의 소식만 재빨리 보는 것이 전부니까… 그것도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아직은 그런대로 보고 있다. 최소한 그곳에는 사실적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없으니까… 어제 저녁 순교자 성당의 한 친목단체에서 받은 카톡 메시지, 웃기지도 않는 아이들 장난이 분명한fake message를 바보처럼 그대로 마구잡이로 보낸 것을 보니 정말 한숨이 나온다. “영국 엘리자벳 여왕이 한국에서 은퇴여생을 보낸다..”고? 이런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결국은 근래 각국의 정치판도에도 이런 바보천치들이 많이 투표자로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정말 한숨이 나온다.

오늘의 YMCA workout, summer camp가 끝나는 듯, 아이들의 talent show가 indoor track에서 한창이었다. 때문에 걷는 것은 복도에서 조금 흉내만 낸 정도가 되었다. 덕분에 muscle workout의 시간이 더 생겼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각종 근육에 생기가 느껴지지만 아직도 보기에는 별로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며칠 째 계속되는 ‘폭염’ 더위, 하지만 우리의 몸은 거의 완전히 적응이 된 상태가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가급적 몸을 쓰는 바깥일은 중단되었다는 사실뿐이다. 대신  조용히 책상에 앉아서 ‘납량물’ 역할을 하는 것들을 즐기는 편안함이 있으니 이것도 이런 때에 살맛이 나게 하는 것 아닐까?  납량물 역할을 하는 것 중에 ‘역사물’이 효자 노릇을 단단히 했고 지금은 자연과학 쪽을 기웃거린다. 오늘은 그것의 하나로 Brian Greene의 WSU lecture: Special Relativity 에 관한 것인데, 몇 년 전에는 완전히 수학에 의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것은 수학이 완전히 빠진 것이어서 조금 더 ‘느낌’에 의지한다고 할까…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수학이 빠진 것이 더 이해하는 것이 수월하다. 거의 현상론, 철학의 경지라고나 할까… 이것도 멋진 납량물 역할을 하니… ‘전설의 고향’에서 ‘상대성 원리’의 급격한 진화는 너무나 재미가 있다.

우리부부의 저녁기도, 환자명단 1번에 있는 중앙동창 김원규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이 [교성이, 중앙57회 카톡방] 날아들었다. 그렇게 활발하고 친절하게 나의 카톡에 답신을 하던 원규, 김원규…  항암치료를 잘 받으며 아주 밝게 투병을 하는 그의 자세가 참으로 나도 배우고 싶었다. 그의 자세한 성격은 거의 다 잊고 살았지만 예전의 그와의 짧았던 인연도 아련히 떠오른다. 하지만 기도 중에 그렇게 완치를 기원했는데..  너무나 암담하고 슬프기만 하다. 특히 우리 동년배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타계, 선종하는 것이 상상외로 나를 외롭게 만든다. 원규는 크리스천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서 영생의 세상으로 갈 것을 그려본다. 어차피 우리들 그곳에서 다 재회할 것 아닌가? 가족들, 개인적으로 잘 모르지만 그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하기를… 빌어본다. 편히 쉬게, 친구야~~

 

동네 산책을 하며 보니 봄기운과 부활절의 느낌을 주는 것들이 들어온다. 아이들이 꽤 많은 집, 항상 집 장식에 신경을 쓰는 집, ‘DONALD 개XX’를 혐오하는 나의 마음에 드는 집 앞의 나무 가지에 색깔도 영롱한 Easter egg들이 걸려 있고, 우리 집 앞의 진달래의 색깔도 못지 않게 Technicolor 급이었다. 자연과 계절, 그리고 인간문화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모습, 앞으로 어느 정도 이 세상에서 보게 될 수 있을까? 나중에 만약 천국엘 가게 된다면 이런 정도는 ‘새발의 피’ 가 아닐지…

아~ 오늘아침도 왜 이렇게 춥단 말인가? 이제는 지겨워지려고 한다. 조금만 조금만 10도만 높았으면~ 이제는 싫구나, 매일 똑같은 날씨들이, 조금만 변화가 있으면 누가 때리나? 일이 주일 정도 기다리면 훨씬 나아질 것이지만…  이런 날씨에 짓눌려 오늘도 늦게 일어난 것, 조금 후회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제 연숙이는 아예 작정을 해서 그런지 밤 8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거의 하루 종일 두 베로니카가 수다를 떨다가 들어온 것이다. 나는 대 환영이다.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좋은 것인데…  반대로 현재 나의 신세가 조금 불쌍한가? 한 사람과도 연락을 하며 살고 있지 못한 나의 모습, 어떻게 또 이렇게 내가 변하고 있는 것일까? 조금 두려워지기도… 옛날 옛적의 나로 돌아가기는 절대 싫은데, 다시 움직이는 것도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지니… 왜 이럴까?

지난 밤 재영이의 카톡 메시지를 보며, 다른 의문점들이 조금 풀린다. 그가 경험했던 한국형 트럼프 type 음모론자들에 대한 것이다. 이 친구 한마디로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제대로 생각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것이다. 우선 안심이다. 우선 각종 정치음모설들을 피하는 자세가 마음에 든다. 물론 나의 ‘DONALD 개XX’에 대한 생각과도 비슷한 듯하고~ 다른 것들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반공 쪽으로 가면 나의 기준에서 보면 조금은 극우 쪽이 아닐까? 아니면 내가 그의 의견에 대한 정확한 생각이 모자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 친구와 얘기를 나누면 조금 더 나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해 보지만… 글쎄…

 

어제는 나의 몸이 실내기온에 적응을 잘 못했던 듯하다. 아니, 나의 잘못일까? 추위를 느끼면 옷을 더 입으면 되는데, 어떻게 고집을 부리며 버티었을까? 그 정도로 나는 어제 하루 종일 추웠다. 실내가 그렇게 싸늘하게 느껴졌던 것도 조금 이상할 정도였다. 아마도 나의 몸 컨디션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아예 ‘완전무장’을 하고 내려와, 따뜻함을 만끽하고 있다. 이것이 초봄의 ‘안 보이는’ 추위의 모습이던가? 게다가 오늘은  ‘강풍, 화재주의보’까지 있어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비록 강풍이 예상되는 날이지만 대신 하늘은 정말 ‘영광스럽게 찬란한’ 그런 날 이런 날씨에는 밖에서 일을 한 후  땀이 나더라도 몇 초도 안 되어서 말라버린다. 별로 밖에서 일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찬란한 하늘에 이끌려 무엇에 홀린 듯이 나가보니.. 아하~ 어제 발견했던 garage앞 쪽의 low fence 에서 떨어져나간 cross beam 생각에, 우선 그것을 고치고 나니 또 미완성 작업, back porch 의 gutter cleanup job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작업은 날씨의 도움으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강풍이 부는 날 걷는 것을 조금 망설였지만 역시 새파란 하늘의 유혹에 이끌려 산책까지 한 오늘은 그야말로 ‘바람이 가득 찬 하늘’의 날이 되었다.

 

벌써 토요일…  어제 밤에 이재영과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를 보았다. 이 친구의 문체는 나와 그렇게 ‘화학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같은 내용으로 썼더라도 그의 것과 비슷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조금은 분석적, 회의적, 관망적인 자세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앙생활의 화두는 역시 조심스러운 것이라서 나의 생각은 잘 전달되지 않은 듯한 반응이라 조금은 실망했지만 이런 시도는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도 생소한 것이라서 시간이 걸린다. 이런 기회를 Bishop Barron의 멋진 ‘지식에 근거를 둔 이성’ 에다가 최근[1950년 이후, 물리학] 의 과학적 발견의 도움을 받으면 이런 도전도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지도…

중앙고 57회 카톡 카페, 그리 많지 않은 regular들의 ‘힘찬, 시끄러운 토론’은 사실 익숙한 모습이긴 하지만 ‘설전의 내용’의 대부분은 내가 자신 있게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짐작은 하지만..   현재까지는 99% 정치적인 것들이고 화제도 거의 한가지, ‘문재인’이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가는 인물에 관한 것이다.  사상, 이념적인 것을 빼고는 그렇게 심각한 issue는 없는 듯 한데, 아마도 우리 그룹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이념적 갈등’이기에 다른 것들은 큰 문제가 안 되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지정학, 역사적인 배경으로 힘든 도전이지만, 만약 이념이란 것이 등식에서 빠진다면 어쩔 것인가? 그곳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사실 쉽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비를 잃게 한 동족상잔의 후유증을 겪은 사람으로서 한마디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상, 이념적 갈등은 사실 나도 이곳에 살면서 피부로 느꼈기에 실감한 것이, 가까이 거의 친구로 지내오던 우리보다 10년은 젊은 ‘전 사장’, 근래의 고국정치에 대한 의견이 우리들과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것을 알고 우리들 모두 너무나 놀랐던 기억.. 10년 정도 젊으면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들은 그에게 ‘지나간 퇴보한 고루한 꼰대’의 수준으로 보인 듯하다. 쉽게 말하면 우리 세대들이 ‘모두 사라져야’ 대한민국이 새로운 나라로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의 세대들이 그들을 포함한 우리 자식세대들이 아닌가? 아마도 문재인이란 인물은 이런 거대한 세대적 변화의 산물이 아닌지?

나는 어떤가? 대한민국 최근 정치역사의 지식이 모두 결여된 나로서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몇 가지 기본은 있다. 우선 우리 가족을 포함한 동족을 파멸로 몰아간 공산당, 김일성, 빨갱이, 그 세습 후손들, 그 이후의 정권들은 모두 역사의 심판대에 서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나의 신앙적 믿음이 되었다. 이것이 시작인 것이다. 그 이외의 갖가지 문제들, 나의 머리로는 분석, 해결할 자신이 없지만, 마지막으로 최소한 Catholic Social Justice의 잣대에 의지를 한다. 이것은 충분히 보편적인 가치, 세계관에 의거한 것이다. 이 잣대에서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문재인이란 인물, 이 잣대의 기준으로 보면 과연  어떤 문제가 있는가?

 

Donald 개XX가 Atlanta에 왔다고? 피하고 피해봤자 이XX의 뉴스는 왜 이렇게 우리를 따라오는가? 하기야 이XX는 뉴스에 나와야 가느다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이해는 간다만..  불쌍하다 못해서 ‘하느님 좀 봐주세요’라는 한숨밖에 안 나온다. 이 쓰레기를 이용해서 득표를 하겠다는 더욱 기막힌 쓰레기급 정치인이 이곳에 산다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다. 하기야 쓰레기는 쓰레기 속에서 살아야 하니 이해는 간다만. 이 쓰레기를 재선시키려 ‘Biden Crime Family’를 언급한1 현 ‘거의 미친 보수’ black supreme justice Thomas의 ‘뚱보 백인 마누라’의 text message의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기적인 happening중의 하나다. 진짜 crime family는 바로 Donald 개XX 가족들인데… 이런 마누라와 함께 사는 대법관2 이 내리는 ‘궁극적 판단’을  앞으로 우리는 절대로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1. 믿을만한 증거 한 올도 없는 소위 말하는  ‘부정선거 misinformation’의 시작은  바로 이런 ‘고위층 인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2. 이 대법관은 1990년대에 벌써 당시의 #metoo 급 뉴스에서 성추행사건으로 문제가 되었던 인간이었다. 당시 이 인준 청문회를 목격했던 나는 당시에 성추행을 고발하던 흑인여성판사 대신 이 인간을 믿었는데, 이제 보니 우리 모두 감쪽같이 속았던 듯싶다.

며칠 째,  익숙한 중앙중고 동창 차정호를 통해서 새로 알게 된 동창, 3학년 7반 이재영 교우와 ‘새롭지만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어딘지 나와 비슷할 거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 영혼 –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 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은 정말 신비스런 탐험이요, 거의 철학적인 도전이다. 물론 희망적인 기대를 깎을 수는 없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성숙함도 그 동안 배웠다. 이런 기회를 나의 과거, 현재, 심지어는 미래를 포함한 삶에 어떻게 적절하게 사랑의 분위기로 접목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류의 나의 사고방식, 분명히 ‘또 너무 심각해지네… ‘ 하는 핀잔을 연숙에게 받을 것이다.

요새 가급적 자세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Ukraine에 관한 뉴스와 작은 정보들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반응은 ‘세상이 완전히 퇴보, 후퇴, 세계 제2차 대전 직후의 냉전시대로 돌아간’ 착각에 빠지는 것. 그 다음은 ‘이런 후레자식, 제2의 트럼프 개XX, 악질, 괴물 Putin’ 이란 욕지거리들.. 그 다음은 아직도 적화통일의 꿈을 꾸고 있다는 ‘대한민국에 사는 빨갱이, 동조자’들에 대한 저주스러움..까지. 흡사 학생들이 좌우익으로 갈라져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던 1940년대 후반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해괴함. 옛날의 빨갱이들이 그 동안 무덤 속에서 졸고 있다가 ‘악마의 군대’로 돌변한 놀라움… 아직도 휴전선 위쪽에서 장난감 같은 핵무기를 실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경제대국 10위의 그곳에는 아직도 빨갱이들이 득실거린단 말인가? 

오늘 놀러 온 9개월짜리 손녀 유나 바다, 며칠 만에 더 자랐는지 오늘은 재롱까지 부린다. 내가 ‘이리 온!’ 하며 두 팔을 내밀면 전에는 눈만 껌뻑 거리더니 이제는 점점 반응을 보이며 두 팔을 내밀며 내게 안긴다. 아~ 이것이 핏줄이구나~ 이렇게 가까이 체온을 느끼면서 가족의 일원이 되어가는 것, 때늦은 우리  삶의 중요한 과정을 경험한다.  유나의 하얀 얼굴에 나타나는 각종 피부 앨러지 반응으로 새로니가 동부서주하며 각종 테스트를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새로니도 엄마로써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 그래 이렇게 인간역사는 진화하는구나.

 

Folgers’ Single, 3가지의 성분, instant coffee, sugar 그리고 coffee cream 중에서 cream 쪽이 어제부터 떨어진 것을 본다. 이것으로 요새는 아침을 시작하는데 조금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 옆쪽을 보니 아하! 이것이 있었지~ Folgers‘ COFFEE SINGLES! 이것의 특징은 독특한 Folgers의 ‘향기’다. 혀끝이 아니고 코로 들어오는 맛이 기막힌 것이다. 그래, 예외적으로 오늘 아침은 이것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역시 코가 뚫리며 머리 속의 뇌세포들의 아우성을 듣는 듯하구나.~~ 고마워, 고마워… 제발 그 세포들이 ‘좋은 생각’로 가득 차게 되기를~~

60도가 넘고 잔잔한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어두운 새벽, 정말 느낌이 좋다. 우선 춥지를 않으니 어깨를 당당히 펴고 어둠 속을 걸어 내려 올 수가 있는 것,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구나. 게다가 천둥번개보다는 잔잔한 빗소리의 매력이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데 기쁨을 준다는 사실도 우선 상쾌하게 느껴진다. 기분이 상기되는 듯한 착각까지 들고… 하루 종일 이런 날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Ghost Friends.. 간밤에 도착한 이재영의 카톡메시지를 본다. 현재는 정치계에 얽힌 생각의 표현들이지만, 나로서는 흥미진진한 것이다. 이 친구, 비록 60여 년 전의 동창이었지만 거의 완전히 새로 만나 사귀는 느낌에 빠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이런 경험은 나의 이전 세대에서는 상상이 안 가는 ‘기술혁명’의 결과일 것이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힘을 가진 digitized history는 아마도 우리에게도 과거를 잊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문제는 살아있는 과거의 사실, 경험들을 지금 여기에 있는 살아있는 역사와 어떻게 ‘절충’을 하느냐 하는, 실로 ‘인간 진화의 산물’ 을 어떻게 ‘좋은 쪽으로’ 만들고 남기느냐 하는 것,  그런 경험들을 요새도 나는 이렇게 하고 있다.
이재영이란 ‘새로 알게 된’ 영혼, 이것은 완전히 미지세계의 탐험에 가깝다. 내가 주목한 것 중에는 한 영혼의 실재관, 세계관, 신앙관, 상태다. 간단히 말해 이 교우는 현재 냉담중인 크리스천이다. 무조건 믿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듯한,  나의 10여 년 전 모습을 보는데, 어떻게 ‘이성적으로 믿는’ 접근방법을 알려 줄 수 있을지? 다행히 반려자가 개신교의 권사수준이면 일단은 조건이 좋은 것이 아닐까? 일단은 크리스천이 아닌가? 다른 것보다는 비슷한 것이 더 많은, 그런 세계관을 가졌을 것 아닌가? 현재 ‘건물 교회’에 안 가는 것 보다는 그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더 관심이 간다. 나와 비슷한,  쉽지만은 않은 신앙여정을 경험하거나 걷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나의 역할이 있을지도…
암투병중인, 역시 다른 중앙고 동창 김원규가 나의 카톡 인사에 답을 보내왔다. 의외로 항암치료의 효과가 좋다고~ 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친구를 위한 우리 가족기도의 역사는 짧지만 희망적인 것이 기도를 받는 사람의 자세가 완전히 가슴을 열고 있는 듯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을 받더라도 본인이 거부하는 것은 전혀 속수무책임을 알기 때문에, 우선 이 친구는 치유의 가망성을 굳게 믿는다. 또한 성모님의 특별한 전구 傳求를 청하고 싶다.

오늘은 원래 Holy Family 성당 아침미사엘 갈 예정이었는데, 어두운 비가 오는 모습에 이끌려 ‘무리하지 말자’ 쪽으로 합의가 되어서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지만 편안하고 여유 있는 아침시간을 지내게 되었다. 또한 잊지 않고 오랜만에 평화방송 ‘스크린’ 미사에도 참례를 해서 아주 평화스런 수요일 아침을 지내게 되었다.

생각보다 일찍 비가 그친 후 오랜만에 둘이서 걸었다. 날씨가 이렇게 포근한 것, 무언가 해방된 느낌까지 든다. 편하다, 편하다. 제일 짧은 코스를 조금 빠른 속도로 걸었다. 오늘 같은 날씨, 일기가 바로 100% 걷기에 완전무결한 날인 것이… 그야말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아~ 일년 내내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연숙에게는 조금 빠른 산책, 걷기는 기분문제를 넘어서 생사, 건강에 직결이 되기에 이런 걷는 습관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YMCA를 가게 되면 조금 더 꾸준히 걸을 기회가 있을 터이니까 기대를 해 본다.

70도가 넘는 바깥 공기의 도움인가, 이맘때쯤 보이기 시작하는 각종 꽃나무들이 하나 둘씩 눈에 보이는데, 올해는 왜 그렇게 dogwood가 나의 관심을 받고 있을까? 처음 이곳에 이사를 왔을 때 유난히 진짜 봄을 알리는 것이 바로 이 꽃나무였고, 예수님 십자가와 연관된 오랜 전설도 있고, 사순절, 부활절등과 연계가 되어서 그런지 이 dogwood를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축~ 늘어진 소나무 가지의 모습에서 벌써 ‘송학가루’ 앨러지를 예측하는 연숙, 과연 올해의 소나무가루 앨러지는 어느 정도 극성을 부릴지…

동네 꽃나무들, 조금씩 기지개를 피고 있는 모습을 본다. 지금 땅 속에서는 각종 봄기운의 도움으로 활발한 움직임이 있을 듯하니… 이것이 바로 자연의 신비가 아닐까?

우리 집 정면에 수십 년 도사리며 봄기운을 알려주는 dogwoods, 늙은 모습이 애처롭기는 하지만 같이 세상을 살아준 것이 고맙기만 하구나…

그 dogwoods 바로 아래 드디어 색깔도 영롱한 tulips들이 영롱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봄이 오는가…

30여 년 동안 많은 변모를 거듭했던 우리 집의 뒤뜰, 연숙이 설레는 마음으로 올해의 농사의 꿈 속을 헤매고 있으니… 과연 그 수확의 결과는 올해 어떨 것인지…

 

모처럼 찾아온 을씨년스러운 3월 날씨의 덕분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심지어 알 수 없는 조그만 ‘희망의 속삭임’도 느껴지는, 한가한 사순절 금요일 무엇인가 쓰고 읽고 하고 싶은데 선택의 여지가 무한정으로 많은 것이 유일한 문제다. ‘생각 없이’ 손이 간 곳이 Erich FrommThe Art of Loving, ‘사랑의 기술’,  이것은 이미 책의 절반 정도까지 나아가는 성과가 있는 것이다. 복음공부의 성서적, 영성적 사랑으로 출발해서, 신비가 차원의 우주적 사랑, 공동체에서 경험하는 사랑에의 도전 등등 나는 요즈음 이 사랑이란 단어의 홍수에서 허우적거린다. 이때 ‘사랑을 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하는 책에 호기심이 안 갈수가 있는가? 비록 typing 중심의 독서지만 대강 저자의 저술 내용과 의도는 조금씩 느껴지고 있다. 교정을 겸한 재 독서에서 더욱 확실한 ‘사랑의 방법’을 깨우치게 되지 않을까… 

두 번째로 손이 간 곳은 연숙의 장서인 소책자 ‘성 이냐시오 로욜라 자서전‘이다. 이것은 한글판이라 속독도 가능한 것이다. 이곳 저곳에서 조금씩 얻어 들었던 이 성인의 ‘개인적 정사 正史’라고 할 수 있기에 완독을 하는 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을 듯하다. 비록 예수회 James Martin신부의 각종 예수회에 관한 책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방대한 분량이라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소책자를 먼저 읽는 것도 나중의 도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갑자기 출현한 중앙동창 차정호의 도움으로 오늘 내가 결국 중앙고 57회[1966년 졸업] 단체 카톡방에 등록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110여 명의 동기동창이 있는 그곳… 나에게는 거의 미지의 개척지 같은 느낌을 준다. 누가 그곳에 있는 것일까? 우선 차정호는 있을 것이지만… 오늘 글이 올라온 것을 보니 ‘주응권’이란 이름이 보인다. 물론 잘 아는 이름이고 얼굴도 뚜렷이 생각이 난다.  고2때 그러니까… 1964년 경 [용산구] 남영동에 같이 살았었지. 그제 차정호가 언급한 이재영이라는 동창의 글에 나의 이름을 언급한 것도 보인다. 가만있자.. 이재영이 누구인가? 금세 알 수가 없으니… 내가 잊은 것일까? 가슴이 철렁한 것은 왜, 두뇌세포? 아직도 나는 함께 인생의 황혼기를 함께 가는,  늙어가는 동창들이 ‘두렵거나, 무섭거나, 생소하거나, 부럽거나..’ 정말 알 수 없는 나의 감정… 이것을 어떻게 조율을 하며 이들을 대할 것인지 나도 모른다. 동창회 참석하는 것을 가끔 꿈으로 경험하는 것이 이런 심정을 말해 준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모두들 인생의 석양을 지나가고 있는 마당에 무슨 체면이 필요할까? 나를 잘 모르는 동창들에게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말자. 그것이 진실이고 사실이 아닌가?

이후에 조금은 망설이다가.. 중앙앨범에서 이재영이란 이름을 찾기 시작해서 결국은 찾았다. 이름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역시 앨범의 얼굴을 보니 물론 기억이 가물거리며 난다. 나와 친하거나 얽힌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 뿐이다. 3학년 7반, 김호룡이 반이었구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중앙 단톡방엘 들어가 아는 몇 명을 카톡친구로 일단 넣었고 그 중에 윤태석에게는 소식까지 보냈다. 그 친구, 역시 부지런하게 금세 답을 보내주었다. 바로 어제까지 연락을 하며 살던 착각에 빠질 정도…  이재영에게도 글을 보냈고, 나머지 목창수는 아직 연락이 닿지를 않는구나.. 그 친구에게는 꼭 나라니 소식을 알려주고 싶은데… 정말 오랜만에 중앙교우회에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망설인다… 망설여… 아직도 나는 수줍어하는 이경우인 것인가?

나중에 이재영 교우로부터 나중에 소식이 왔다. 이 친구, 미국에서 공부를 했던 듯 싶고 나의 블로그도 조금 읽은 듯하니… 놀랍기만 하다. 나와 직접 알고 지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이 친구 말대로 그것이 큰 문제가 될까? 같은 곳에서 3년의 세월을 보낸 것도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지난 일요일 새벽 한 시간을 빼앗기 이후, 나는 계속 오늘까지 그  없어진 한 시간을 피해자가 된 기분이다. 아직도 7시에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고, 아니 더 자고 싶고, 더 꿈꾸고 싶은 것이다. 이른 새벽을 그렇게 좋아해서 일어나는 시간만 학수고대하며 살았던 내가 올해는 왜 이렇게 바보같이 변하고 있을까? 아~ 또, 나이, 늙음, 진화, 퇴화…?

3월도 중순을 깜짝 넘어가고 춘분을 향해서, 그래 Spring Equinox라고 했던가.. 3월의 ‘바람 부는 날’도 일단 겪었고, 이제는 무엇을 향해서 가는가? 물론 남은 사순절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3주일 이후에는 성주간의 시작, 성삼일, 아~~ 부활 부활 부활절이다! 4월의 찬란한 꽃들의 향연, 깜짝 추위… 작년 이즈음.. 그래 우리 집의 커다란 숙제들 몇 가지가 풀리던 때였다. 지붕과 siding이 새것으로 바뀌고 최소한 밖에서 보는 집의 모습도 훨씬 젊어지던 때였지..  우리 집 30년간 우리 작은 가족을 안전하게 편안하게 행복하게 감싸주었다. 비록 이 집을 선택한 것은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렇게 우리의 삶을 장구한 세월 지탱시켜준 것은 분명히 무슨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구나… 우연만이 아닌.. 뜻이 있는…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만은 문제가 없던 내가 이번에는 고전을 하고 있다. 한 시간이 바뀐 것, 첫날부터 문제가 있었는데 3일간 계속? 이건 조금 재미있기도 하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깜깜한 때에서 일어나기가 싫어진 것, 바로 그것뿐인데…
오늘, 오늘, today.. 흐리고 오후에는 비의 가능성이 많은 날, 기온은 50도 대 비교적 편한 하늘의 모습이다. 오늘은: 아침에 동네성당 아침미사에 갈 예정이고, 새로니가 유나와 Ozzie를 맡기고 ‘둘만의 날’을 내일까지 보낼 예정이라서.. 조금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날이 되었다. 그래, 할 수 있을 때 하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을 때…

내가 걱정하는 나의 문제점 중에는, 비이성적이 되는 경향, 바로 그것이다. Unreasonable Fear… 이미 2016년부터 서서히 시작된 이것은 물론 Trump ‘a.k.a 개XX’가 주 원인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비슷하게 Putin ‘a.k.a. 개XX’ 로 이어진다. 이때의 나의 직감적 반응이 나를 겁나게 하는 것이다. 우선 ‘바보!’ 정도가 아닌 ‘이 개XX야!’ 로 시작되는 나의 모습, 예수님의 얼굴이 곧바로 떠오르지만 이것만은 별 방책이 없다.  어쩌면 2016년부터 6년에 걸쳐서 두 명의 ‘죽음의 사자 使者’가 거의 예고도 없이 출현을 했단 말인가? 첫째 놈은 미국 200여 년의 ‘보편적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인간이고, 다른 놈은 ‘지구를 한방에 날리려는 듯 보이는’ 그런 인간… 어떻게 거의 반세기 간의 ‘계몽적, 민주적, 진보적, 진화적’ 인류가 이렇게 ‘난데없는 독재자들에 의한 퇴보를 하고 있단 말인가? 테이야르 Teilhard de Chardin 신부님의 ‘보편적 진화론’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사순절의 분위기가 가득~한 우리 정든 동네성당, face mask가 완전히 사라진 곳에 정든 얼굴들이 이곳 저곳에 보인다. 목표 주일 2회 아침미사참례는, 드문드문 예외는 생기지만 끈기 있는 노력의 성과는 서서히 보일 것이다. 오늘은 주임신부 Fr. Miguel 집전이어서 예의 강론은 여전히 같은 tone과 내용을 보고 듣는다. 변함없는 그의 사목 style은 지루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변치 않는 우리 신앙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런 곳이 우리에게 필요한 곳이다.  오늘도 그곳으로 drive하면서 생각하며 말을 한다.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동포 본당 순교자 성당에 drive해서 갈 수 있을까… 그런 여건이 안 된다면 분명히 다음 선택이 동네 본당이 우리의 유일한 본당이 될 것인데… 지금은 조금 상상하기 쉽지는 않지만 이제는 세월의 진실을 알기에 조금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래, 언젠가 우리도 drive를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깊이 생각하기는 싫지만…

오늘 그곳의 주보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보며 놀란 사실은… 지난 해부터 헌금의 액수가 상상외로 많다는 것, 우리는 Pandemic으로 교회가 재정난을 겪을 것으로 추측은 했지만 결과는 정 반대… 오래 전의 평상시에 비해서 적자는 물론 사라지고 이제는 상당한 흑자 재정! 허~ 이것은 놀랍고 반갑고, 우리 동네 성당에 자신감과 희망이 갖게 된다.  교우 신자들의 숫자가 분명히 많아졌다는 것, 특히 Hispanic 신자들이 더 많이 늘어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유나, Ozzie가 내일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 왔다. 새로니부부는 오랜만에 애기 없는 하룻밤 휴가를 갖게 된 것이다. Buckhead에 있는 upscale restaurant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하고, 근처의 Hilton Hotel에서 밤을 지내는 계획이다. 얼마나 힘든가, 갓난 아기를 기르는 것, 생활의 단조로움이 큰 문제가 아닌가? 그래도 돌봐주는 사람이 가까이 사는 것이 그 애들에게는 다행일 것이다. 같은 town에서 살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이런 시간을 쉽게 가질 수 있을까?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온 Ozzie와 오늘은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어제 점심식사를 같이 했던 자매님들 얘기에 산책은 한 시간 이하로 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를 했던 것을 기억하며 한 시간 정도 걸었다. 하기야 너무 오래 걸으면 운동이 되는 것보다 무릎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그래 앞으로는 최대한 1시간 정도로 … 하지만 가장 적당한 거리는 45분 정도의 산책이 아닐지..

 

정말 뜻밖으로 중앙동창 ‘차정호’가 email을 보내왔다. 요새 이런 류의 소식을 받은 적이 없어서 내용에 상관없이 반갑고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중앙동창회 소식이 끊어진 지 거의 10여 년이 넘어가고, 유일한 연락처 역할을 했던 건주가 중풍으로 쓰러진 후 솔직히 나는  중앙동창회 소식은 포기한 셈이었다. 그래도 정교성, 김원규 등의 소식은 지속적으로 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주 다른 쪽으로 차정호의 소식을 받은 것이다. 소식의 요지는 요새의 흐름에 따라 단체 카톡방으로 동창들이 소식을 전한다는 것, 나에게도 들어오라고…  100여 명이 현재 가입을 했다고… 어떤 동창들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은근히 나의 관심은 나 이경우란 이름을 대부분 기억을 못 할 것이라는 사실에 머문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2년 전 아래층으로 ‘이사’를 내려온 나의 office에 있는 bookshelf 에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책들을 섞는 중에 눈에 띈 책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읽다 말다 하다가 놓은 책, 동아일보사 간행, <인촌 김성수’> 란 책이었다.  김성수, 동아일보사 모두 나와는 자연스레 친근한 이름들이다.

1960년대 나의 모교였던 서울 중앙학교(중-고등)를 ‘인수, 경영’했던 ‘만석군 부호의 아들’이었던 인촌 김성수, 귀공자 답지 않게  Bill Gates같이 ‘돈을 현명하게 쓸 줄’  알았고, 당시로서는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말년에 정치계에서는 ‘이승만의 독재’를 정말 싫어했고, 아마도 그로 인해 화병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 계동 1번지에 중앙학교가 위치한 사연을 읽게 되었다.  1960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코흘리개 우리들에게 학교는 ‘민족학교의 역사’를 정식으로 가르쳤었다. 무언가 민족적 사립학교의 전통을 남기려는 것을 우리들도 숙연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남는다.

 

 

책,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중에서

 

중앙학교 교장 재직 당시의 인촌 김성수

 

새 요람,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조선의 새 인맥(人脈)

새로운 교사가 들어설 땅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인촌 仁村 은 1917년 6월, 계동 1번지인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자리를 터로 정하고 4천 3백 평을 사들였다. 당시 이곳은 북악산 줄기를 뒤로 한 계곡으로 울창한 송림만 들어찬 산골짜기였다.  민가도 없었고, 다만 학교 터 뒤편 숲 속에 당시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훈련소) 교장이었던 노백린(盧伯麟; 후에 上海 臨政 軍務總長 역임)  참령(參領)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촌이 이 땅을 사들이려 하자  고하 古下 (송진우) 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숯막 짓고 참숯 구워 팔려나?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어 어떡하겠다는 거여?”

“어째 그렇게 자넨 발등만 보고 사는가?. 자, 보라고! 앞으로는 서울 장안이 한 눈에 굽어 보이고 뒤에는 북악의 줄기가 아닌가! 그 정기를 받아 청년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배움의 터로서는 이만한 명당이 없네. 얼마나 시원한가, 젊은이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만 허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이 보게, 큰 길에서 너무나 들어온 골짜기야, 학생들 통학도 생각해야지?”

“지금은 좀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십 년만 지나보게. 서울은 지금 새 시대를 맞이하여 커지고 있어. 모르기는 해도 십 년 뒤면 학교 주변이 주택들로 차게 될걸?”

멀리 앞을 내다보는 인촌의 안목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연 십 년이 채 안되어 개발이 되고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고하는 인촌의 선견지명에 혀를 찼다고 한다. 땅을 사들이자 즉시 새 교사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인촌은 공사장에 나가 감독 뿐만 아니라 일꾼들과 함께 흙을 고르며 땀을 흘렸다. 교장이 솔선수범하니 고하를 비롯한 교사들까지 수업이 끝나면 함께 땀을 흘렸다. 스승들이 일을 하자 학생들도 부지런히 삽질을 하고 돌을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 보람이 있어 나무만 울창하던 산골짜기에 건평 2백여 평의 붉은 2층 건물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장안(長安)의 이목이 쏠리고 김성수라는 이름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붉은 벽돌 2층의 이런 신식 건물은 그때까지만 해도 장안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신식 교사인 데다가 그것을 짓고 있는 인물이 같은 동포인 김성수라는데 화제가 됐던 것이다.

뒷날 동아일보 사옥을 신축할 때나 보성전문 교사를 신축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촌은 틈만 나면 공사장에 나가 일꾼과 함께 살았다. 자재에서부터 설계, 혹은 대목(大木)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건축을 공부해서가 아니고 공사장에 가서 몇 번만 보면 다 터득하여 현장 감리(監理)들이나 목수들의 탄복했다고 한다.

어쨌든 장안의 화제였던 계동의 중앙학교 신교사는 5개월만에 그 웅자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준공을 끝내고 12월 1일에  화동(花洞) 구교사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동 1번지에 세워진 중앙학교 새 교사 낙성식, 1917년

 

폐교 직전의 중앙학교를 인촌이 인수하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의 조선인 사회 뿐이 아니었다. 총독부 관리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돈 있으면 금광이나 하라며 백산학교(白山學校) 설립계획을 까뭉개고 돌려보낸 학무국장 <세끼야> (關屋)는 조선인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터라 무명청년 김성수가 말썽 많고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던 중앙학교를 인수했지만 결과는 뻔한 것으로 추측했다.  시골 부자 아들이라니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로 얼마 안 가서 재산 다 날리고 주저 앉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전연 예상 밖이었다. 붉은 2층 벽돌의 신식 교사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80여명 정도였던 학생이 이제는 3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교사들 역시 대학을 나온 조선인들이 거의 전부 일 만큼 탄탄하게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11월 하순, 어느 날 <세끼야>는 비서가 전해준 초청장을 받아 들고 얼굴이 이지러졌다.

“뭐라구? 중앙학교 신교사 낙성식? 그 낙성식에 오라구? 으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무시했던 무명청년은 새 교사를 당당하게 지어 놓고 그 잔치마당에 자신을 초청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촌을 김군(金君)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학교설립을 신청했을 때는 부모의 승낙을 얻었느냐며 어린애 취급을 하고 얕보던 <세끼야>도 낙성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원파공과 지산공을 상석에 모시고 낙성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조선인의 힘으로 만들어진 학교였기 때문에 장안의 시민들도 구름처럼 모였다. 학무국장 <세끼야>는 금줄이 번쩍이는 제복에 긴 칼을 늘어뜨리고 식장에 나타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긴센세이> (김선생)라 존대하며 몇 번이나 장한 일을 했다고 치켜 세우고, 조선인의 힘으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게 된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는 천황폐하의 홍은(鴻恩) 때문이라며 판에 박은 공치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총독부 관리들이 인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조선의 젊은 민족지도자로 지목하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촌은 어진 성품과 큰 도량을 지녔기 때문이었는지 젊어서부터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떠날 줄을 몰랐다.

인덕(인덕)을 타고남도 하늘의 도움이다. 인촌은 늘 인덕이 있었다. 당시 그의 주위에도 제제다사(濟濟多士), 많은 인재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중앙학교와 인연이 깊었던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대가 이외에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송진우, 최두선, 현상윤, 이강현 등과 국내에서 명성이 높던 변영태, 유경상, 유태노, 조철호, 고희동, 나원정, 박해돈 등 신진기예들이 차례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 총독부로 볼 때 인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학교의 인맥과 존재는 조선 사회에서 무시 못할 민족 지도자 그룹으로 비치게 되었다.

 

 

무명 교복과 교지(敎旨)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 의 3대 교훈은 인촌 스스로 정한 것이며 인촌 스스로 정성스럽게 써서 남긴 진적(眞迹)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세 가지 중앙의 정신: 웅원, 용견, 성신

 

이 중앙학교의 교지는 인촌의 교육이념을 집약하는 동시에 그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1자의 수정도 없이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인촌의 교육관은 백년대계의 큰 안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앙학교를 인수한 후 인촌은 특히 학생들의 옷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하찮은 걸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시오? 다른 학교와 학숙의 학생들처럼 그냥 입히면 되는 거지?”

보다 못한 안재홍이 그렇게 말하자 인촌은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니오, 학교 모자와 학교 옷은 바로 그 학교의 얼굴이며 상징입니다. 관립 일반학교마냥 일제(日製) 광목으로 된 옷을 입히고 그들의 씌운 모자를 그대로 씌울 수는 없는 일이요. 조선학생은 조선학생 티가 나야지요.”

고심하던 인촌은 검은 천을 댄 교모(校帽)에 무명으로 지은 교복을 입히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질 좋고 맵시 나는 일제 광목을 두고 왜 하필이면 손으로 짠 그 투박한 무명베로 교복을 하느냐며 못 마땅해 했다. 광목(廣木)은 개화 이후 일본 상인들이 들고 들어와 가장 재미를 본 생필품이었고 널리 판을 치고 있었다.

“값 싸고 질긴 우리 전래의 무명베가 있는데 왜 비싼 일제 광목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우리 것을 쓰지 않으면 누가 쓴단 말이오?”

인촌은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찍부터 ‘산업장려’나 ‘국산품 애용’을 구국운동의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찮은 교복에까지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자기학교 학생들 한테 만이라도 그러한 민족의 얼을 심어주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참성단(塹星壇) 수학여행

 

당시 인촌 밑에서 중앙학교를 거쳐 나온 인사들의 회고만 보더라도 인촌이 평소 얼마만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민족사상을 불어 넣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유홍 柳鸿  회고

나는 1916년 그러니까 인촌 선생께서 학교를 인수하신 그 다음 해에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첫 소풍을 강화도로 갔었는데 그때의 일은 오래도록 나에게 어떤 충격처럼 남아 있었다. 전교생이 함께 갔었던 것 같다.

유근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중에는 물론 인촌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 단군 성터에서 단군설화를 얘기하면서 목이 메었으며, 인촌 선생님께서도 소리 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학생들도 그제서야 나룻배까지 빌어 타고 강화도에 소풍을 온 까닭을 깨닫고는 모두 함께 울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 바로 옆에서 단정한 자세로 눈물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리시던 인촌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도성 愼道晟 회고

중학교 입학 당시(1930년) 나는 제일고보(第一高普)와 중앙학교 두 군데 시험을 쳤는데 두 군데 다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상식은 당연히 제일고보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학교를 가느냐의 선택에 있어 어리고 철이 없으므로 선친께 의논을 드렸더니 중앙학교를 택하라 하셨다. 경남 거창에서는 우리 집이 대지주에 속했으므로 인촌의 경방, 동아일보 설립할 때 주식투자 권유를 받아 우리 선친과 인촌은 교분이 있었다. 투자는 안 하신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인촌을 퍽 존경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중앙학교를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를 들어가 보니까 역시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었고, 김성수 선생께서 교장을 하시며 수업에 들어 오시기도 했다. 그것도 좋았지만 조철호, 박용희 선생 등으로부터 훈련을 단단히 받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권덕규(역사), 문일평(한국사; 동양사), 이윤제(한글) 선생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일제하에서 배우기 힘든 보통의 교양교육을 다 배웠다. 학교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인촌 선생은 수신시간에 교재를 뒤로 제쳐놓고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은근히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곤 했다. 예를 들면 영국에 가서 하숙을 하는데 한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불을 안 끄고 나왔더니 주인이 잔소리를 하더라. 전력을 낭비하지 않고 물자를 절약하며 잘 살면서도 검약하더라. 우리는 전등불도 안 끄고 잠을 자고 그러는데 그래서는 안 되다고 충고를 하시기도 했다. 한번은 외국을 가시는데 여권에 적어야 하는 국적이 남의 나라 이름으로 되어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실감했었다. 배 안에서 식사를 할 때 식탁에 승객들의 국기를 꽂는데 그 국기 가운데 태극기가 없었다는 울분을 얘기하셨다.

 

3.1운동의 실제적 모의 장소: 중앙학교 숙직실

 

그리고 3.1운동 때의 말씀도 하셨는데 중앙학교에서 모의하던 얘기를 하셨다. “3.1운동이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줄만 알고 있지? 사실은 중앙학교에서 시작된 거야. 계획도 세우고 유인물도 만들고 그랬는데 바로 그거 한 집이 바로 저 집이야!” 하고 우리학교 숙직실을 가리켜 주셨다. 중앙학교가 민족주의 본거지임을 일깨워 주셨고 우리는 자부심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그 후에도 남아서 일제 말기에 학생의 몸으로 항일투쟁은 못 했지만 은근히 ‘일제에 협력해서는 안 된다’ ,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그런데 끌려가서는 절대 안 된다’ 는 것은 확고했다. 해방될 때가지 일제가 강요하던 국민복은 한번도 입지 않았고 ‘전투모’와 ‘각반’도 한 번도 매보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촌 선생의 교육 영향이었다.

 

 

김승태 金昇泰 회고

그때 중앙학교는 마치 기사(기사)를 양성하는 도장(도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또한 그 학교는 3.1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6.10만세 사건의 중추적 역할도 담당했다. 이것이 모두가 선생께서 웅원(雄遠)한 포부와 용견(勇堅)한 의지, 성실(誠實)한 행동을 가르치신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학교는 도장과 같았고, 배우는 우리는 기사와 같은 흥분 속에서 지냈다. 예를 들면 동지섣달 눈이 쌓였어도 팬츠 하나만 입고 운동장을 달리게 했다. 그것은 독립정신을 갖게 하기 위한 단면이었으며, 정신과 육체의 극기(극기) 훈련이기도 했다.

 

 

채문식 蔡汶植 회고

나의 인생은 중앙학교 5년 동안 교육을 받을 때 인촌의 정신, 인촌의 손길에 의해서 키워졌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문경(聞慶)의 산골에서 태어나 중앙고보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1930년대 말 일제는 국어상용 이라 하여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쓰게 했다. 중앙학교에서 가까운 어떤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한국인 교사가 학생 하나를 정학 시켰다. 그래서 부모가 찾아 왔는데 그 아버지는 일본 말을 모르는 시골 노인이었다. 한국인 담임선생은 우리말을 쓰지 않기 위해 통역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처벌을 받게 된 것은 점심으로 빵을 하나씩 나눠 주었는데 ‘아, 빵이다!’ 하고 외쳤는데 그 말이 한국말이라 해서 정학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중앙고보만은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쓰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게 중앙학교 선생은 1년은 학교에 계시고 1년은 감옥에 가 계시는 게 보통이었다. 중앙학교에 입학하면서 매를 많이 맞았다. 입학 첫 날부터 영어시간에는 회초리 하나씩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오라는데 집에 갈 때는 그게 다 꺾여질 지경이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선생님은 우리 말로 ‘채문식!’ 하고 부른다. 그때 국민학교에서는 일본어만 배웠으므로 부지불식간에 ‘하이!’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무조건 앞으로 나오라 해서는 회초리로 때렸는데 왜 맞는지 몰랐다. 선생님이 매를 들고 또 ‘채문식!’ 하면 ‘하이!’ 하게 되고 ‘하이!’ 하면 도 맞는 것이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자기가 가져간 회초리가 다 부러질 때 쯤 되면 뭔가 가슴에 뿌듯한 게 있어서 ‘예’ 하고 우리말로 대답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촌 선생이 아니면 못할 것이었다. 인촌을 보고 더러 총을 들고 독립운동도 안 했고, 외국에 가서 항일운동도 안 하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대의 한국 땅에서 인촌이 아니고 누가 그같이 민족의식이 맥박 치는 그런 학교를 경영했던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선생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었고 그 같은 한국 사람을 기르려고 무척도 애를 썼다. 그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1학년에서 5학년이 될 때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쯤은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위대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

 

 

퇴교생(退校生)이 모이는 곳

 

 인촌은 제자들에게 민족혼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일인교사(일인교사)의 배척운동이나 저항운동을 하기 위해 스트라익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한 학생들에게 항상 중앙학교는 문을 열고 너그럽게 받아 들였던 것이다. 당시 인촌이 중앙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보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일인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인촌은 이때 처벌 받은 학생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서항석 徐恒錫 회고

나는 1918년에 중앙학교를 졸업했는데 따지고 보면 1년도 못 다니고 졸업한 셈이다. 나는 보성학교를 다니다가 퇴학을 당하여 중앙학교로 편입학하게 됐던 것이다. 인촌 선생의 항일적이며 애국적인 용단을 잊을 수가 없다. 보성학교 2학년에서 문제가 생겼다. 초조시간이 되어 모두 웃옷을 벗고 나가게 되었다. 물론 교실에는 당번이 지키게 돼 있었다. 그런데 벗어 두었던 옷 속에서 시계가 없어졌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여러 방법으로 시계를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마침 보성학교에는 <고마쯔자끼>라고 하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 일본선생이 종로 경찰서에 연락을 했다. 그래서 형사가 와가지고는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했다. 우리는 4학년으로 최고 학년이었는데 이 같은 사태에 크게 분개했다. 학교에서 도난사고가 생겼다면 선생들이 자기네 잘못을 느끼고 쉬쉬하며 잡을 일이지 그것을 경찰을 불러 몸수색을 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여 일어섰던 것이다. 2, 3, 4학년의 전 학생이 들고 일어났다. 교장은 최린 선생이었는데 전교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 졌다. 더 이상 사태가 키질 것 같아 2, 3 학년들을 누르고 우리 4학년 학생 8명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교장선생께 자퇴서를 냈다. 교장선생은 제발 이러지 말라달라고 하셨지만 우리의 기세는 당당했다. 학교측에서는 퇴학을 명함 이라 내붙이게 되었다. 최린 선생은 안 되겠던지 인촌 선생에게 전화를 거셨다.

“요새 우리학교 사건 생긴거 하시지요? 정말 진퇴유곡입니다. 총독부에서 퇴학을 시키라 하니 그럴 수 밖에 없어 퇴학을 시켰소만 정말 우수한 애들인데 버리자니 가슴이 아프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 애들의 장래를 막아 놓을 수는 없지 않소?”

“좋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싹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퇴교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보내 주십시오. 소생이 맡아 가르치겠습니다.”

그래서 중앙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후에 생각하니 인촌 선생의 애국자로서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의 학무국장 세끼야 는 화가 나서 인촌을 소환했다.

“김선생, 이번 일은 좀 경솔했던 거 아니오?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소. 불온 학생 여덟 명은 받아 들이지 말구 당장 내쫓으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만 가령 일본인 학교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경찰이 학교 구내에 들어가사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스승을 배척했다면 당연히 교칙에 따라 퇴학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그것으로 벌은 충분히 받은 거 아닙니까? 배우는 학생에게 퇴학 이상의 중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벌을 받은 학생이 다른 학교에 가는 것까지 총독부가 나서서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교육적 견지에서 하는 처벌이 아니라 어떤 민족적 견지에서 하는 보복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인촌의 말을 들은 세끼야 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자기 앞에 와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 할 소리를 하는 조선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총독부 관리라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사리를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김선생의 체면을 봐서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이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우리 학무국 과 상의해서 처리하시오.”

그것은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총독 정치하에 있어서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 사학(私學)의 문을 닫게 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인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민족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뻔해 보이지만 트집을 잡으려 해도 구실을 주지 않는 인촌이야 말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다. 친일인사(親日人士)로 만들려고 유혹도 해 보고 구실을 붙여 위협도 해 보았지만 언제나 그는 정정당당했다. 그러한 편입학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게 아니고 또 있었다.

 

 

정문기 鄭文基 회고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성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신학교는 미국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가 세운 기독교계 학교였다. 4학년에 진급하자 학교에서 스트라익이 일어났다. 나는 주동 학생으로 몰려 퇴학을 당했고 중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전부터 사실은 인촌선생 밑에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신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쫓겨난 학생은 1, 2, 3, 4 학년 합쳐서 수십 명에 이르렀다. 중앙학교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 주었던 것이다. 이젠 끝장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촌 선생이 용단을 내려 받아 주시니 우리들의 사기는 충천할 뿐이었다. 당시 경신학교 교장은 미국인 선교사였는데 화가 났던지 전화로 인촌 선생께 따졌다고 한다.

“이거 보시오, 김성수 선생! 선생께서 그렇게 분별 없으신 교장이신 줄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같은 교육자끼리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처벌한 학생들입니다. 잘못해서 처벌한 학생들이라 그겁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을 중앙학교에서 그냥 받아주면 우린 뭐가 되지요? 학생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처벌된 학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오라고 한 일 없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찾아와서 저희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물론 잘못 해서 벌을 받은 것이니 반성을 하고 다시 돌아가 공부하라고 엄하게 꾸짖었소만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 중에서 1, 2, 3학년 학생들은 나의 설득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4학년들은 누구도 못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4학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볼 테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인촌 선생은 결국 4학년 학생만 중앙학교에 남게 하고 그 이하 하급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셨다. 나는 공부는 좀 소홀히 한 편이지만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를 좋아했다. 동급생 중 일석(일석: 이희승)은 모범적인 노력가였고 보성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중앙학교로 온 서항석은 머리가 우수하고 작문을 잘 했다. 둘이서 늘 1, 2등을 다투었다. 인촌 선생은 은근히 경쟁심을 고취했는데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셨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든다시며 늘 체력단련을 권하셨다. 일본인과 겨루려면 머리도 우수해야지만 몸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건강을 겸했다고 늘 사랑해 주셨다. 한번은 계동 신교사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걸 들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도 경쟁이니 두각을 내려는 것은 인지본능이며 두각을 쉽게 내는 방법을 알켜 줄까? 남들이 모두 몰리는 유행학과를 전공허지 말아야 돼. 진리탐구를 하는 학문은 어떤 학문이든 똑 같은 벱이여. 지금의 유행 학과가 후엔 무실해지고 지금 유행하지 않는 학과가 인기를 얻을 지 모르는 일이거든? 학문에는 우열이 없느니께 남이 않는 것을 해보라 이말이여”

나는 그 말씀을 명심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 <송산고>(松山高)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동경제대 수산과에 시험을 치뤄 합격을 했다. 그때 수산과를 택한 것은 인촌 선생의 영향이었다. 그때는 문과를 해야 대학생인 줄 알았지 수산학을 한다는 것은 좀 엉뚱한 것이었다.

 

 

韓紙 한지에 싸 준 인절미

중앙학교 교장 당시의 인촌이 우리 민족정신과 기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증명해 준다. 일제는 한반도 강점 후 구정(舊正)인 <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저희들의 명절인 신정(新正)설을 쇠게 했다. 이른바 <양력설> <일본설>을 쇠게 한 것이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총독부에서는 신년 하례식을 하고 천황의 하사품이라 하여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인 국화꽃 무늬가 든 이른바 ‘모찌’ (흰 찹쌀떡)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아직 소년들이라 그 떡 받아 먹는 것을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중앙학교만은 그와 같은 ‘모찌’를 주지 않고 해마다 신년 초하루가 되면 콩가루 고물 묻힌 인절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촌 댁에서 직접 떡을 하여 그것을 한지(한지)에 싸서 나눠주는 것이었다. 조선학생이 정월 초하룻날부터 나라 잃은 것만도 서러운 데 일본 떡을, 더구나 일본 왕실의 문장이 찍힌 ‘모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철 없는 학생들은 집에서 먹어보지 않은 그 일본 떡이 먹고 싶어 불평하는 측이 있었지만 인촌은 씁쓸하게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명절이면 집에서 먹는 그 흔한 인절미, 잔치 때면 흔하게 먹는 인절미라고 그러는 지는 모르겄다만 너희들도 학교를 나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우리 한지에 인절미를 싸서 주는지 그 뜻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오늘 YouTube에서 뜻밖의 email message 받았다.  7년 전쯤에 내가 만들어 ‘올려놓은, upload’ music video 성재희씨가 1965년에 취입한 노래 ‘보슬비 오는 거리‘ 가 1 million hits (백만 번 보았다는 뜻)를 했다는 사실과 함께 ‘축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의아했는데, 꽤 오래 전의 일이라 그런 것이다. 한창 youtube 에서 지나간 추억의 노래들을 듣던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에 나도 한번 무언가 남겨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요새는 웬만한 video들,  viral 하다고 불리는 것들 며칠 사이에 백만 번 hit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되었기에 7년 만에 백만 번이라고 하면 우습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놀랍기만 한데 왜 그럴까? 백만이란 숫자에 무슨 magic 이라도 있나 아니면 그저 꽤 많은 중년, 노년의 대한민국 출신의 사람들이 당시를 추억하며 보았다는 사실이 의아한 것인지.. 솔직히 덤덤한 심정이다. 하지만 ‘추억의 마술’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 ‘보슬비 오는 거리’를 내가 개인적으로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낄 정도로 좋아하는 지 생각을 해 보면 크게 특기할만한 것이 없다. 그저 그 당시, 1965년 말 서울 남영동에서 살던 때의 순진했던 기억들과 함께 중앙고 3학년으로 막바지 대학 입시공부에 열중하면 들었던 그 추억이 전부다. 그것이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며, 은은한 저음과 매력적인 자태로 보슬비의 추억을 달랬던 성재희씨의 모습이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나도 모른다.

¶  Running ‘C’ wire Smart Home, Smartphone (now one word), Smart TV, 그리고 Smart ‘Stat (thermostat) ..

덧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를 스쳐 지나는 이런 단어들,   이것들 중에서 나와 역사적으로 제일 오래된 것이 smart home일 것이고,  다음이 Smartphone, 그리고 지금 나의 코앞에 다가온 것이 바로 Smart Thermostat 이다. 얼마 전에 두 ‘아이’들이 우리에게 준 2대의  ‘dumb’ 40+” TV는 Roku, ChromeCast gadget 덕분에 곧바로 Internet streaming를 하는 smart tv의 기능을 갖추게 되어서 그런대로 우리 집도 ‘현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큰딸 boyfriend Richard가 최신형으로 upgrade 한다고 2개의 smart thermostat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이 EcoBee 라는 ‘웃기지 않게’ 비싼 사치품 thermostat였다. 집안의 heating & cooling system(HVAC) 을 control 하는 것이 thermostat인데 이것의 내부 구조는 간단한 electrical switch에 불과해서 예전까지 이것은 비쌀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복잡한, 그러니까 smart하게 보이는 기능을 잔뜩 넣어서 멋진 fashion을 만들어 고가로 파는 것, 나에게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추세다. 수백 년 전통의 coffee를 Starbucks로 비싸게 파는 것이나 맹물을 bottle에 넣어서 파는 것과 다를 것 하나도 없다. 하지만 비싼 것은 비싼 이유가 있을 것이다.

2 ‘given’ Ecobee smart thermostats

 

현재 우리 집에 있는 것은 기본적인 programmable thermostat로서 하루에 네 번 정도 시간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는 model로서 사실 그렇게 불편한 것은 없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집에서는 더 복잡한 timing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retire한 상태에서는 복잡한 것이 더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이것을 program 하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 않다. 대부분 어두운 복도에 설치된 이것을 서있는 상태에서 그 작은 글씨를 보며 program하는 것 거의 torture에 가깝다. 그래서 한번 program해 놓으면 거의 바꾸지도 않고 그러기도 싫은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은  Smartphone이나 PC의 보기 좋은 screen을 편한 곳에 누워서 program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족하다.

이것을 나에게 주면서 Richard는 현재 우리 집 thermostat에  ‘C’ wire가 연결되어 있냐고 물어서..  속으로 이것이 무슨 말인가 궁금했지만 우선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 extra wire, 24V transformer의 ‘common’ (power return) 임을 알게 되었다.

왜 이 ‘놈’이 필요한가 보니, smart ‘stat(thermostat)는 Smartphone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small computer라서 power, 본격적인 전원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다.  작은 computer라고 했지만 기능적으로 보면 웬만한 예전의 desktop PC의 그것이고, 특히 WiFi 가 필요한 것이라 생각보다 energy를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과 다르게, 오래 전에 쓰던 mechanical ‘stat는 전혀 power가 필요 없었고 요새 많이 쓰고 있는 programmable ‘stat는 거의 모두 battery를 쓰기에 따로 power supply wire가 필요 없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4 wires가 필요한데 (1) 24V hot side, (2) fan on, (3) heat request, (4) cool request 가 그것들이다. 예를 들면 heat가 필요하면 (1)과 (3)을 연결하면 된다.  그러니까 24V hot side가 return되는 ‘common’ 이 사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새로 나오는 smart ‘stat들을 ‘팔아 먹으려면’ 이 extra wire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해결책은 이 wire를 furnace control board로부터  thermostat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야 한다. 이 작업을 과연 몇 명이나 ‘감히’ 할 수 있을까.. 물론 handy한 공돌이를 제외하고. 

다행히도 우리 집의 in-wall wiring은 home pc networking 시절부터 10base2, 그 후의 CAT5 cabling 까지 모두 내가 설치했기에 사실 이번의 ‘C’ wiring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쉬운 job이다. 다행히 남아도는 CAT5 cable이 많아서 그것으로 위층은 해결이 되었다. 아래층 것이 끝나면 드디어 EcoBee 를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요새 아이들 자랑스럽게 말하는 ‘Smartphone으로 언제 어디서나 집의 온도를 맞출 수 있다’ 라는 것, 나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토요일을 수도원에서:  싸늘하지만 기가 막히게 화창한 ‘영광스러운’ 가을 하늘아래 일년 만에 다시 한 시간 정도의 drive로 Conyers, GA 의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실 부끄럽지만 ‘자발적’으로 간 적은 없고 무슨 계기가 있으면 가는 그런 곳이다. 위치나 분위기를 보아서 이곳에 갔다 오면 다음에는 반드시 ‘자발적’으로 가보자, 문득 ‘평화로운 곳’ 생각이 들면 그곳을 차를 몰자.. 등등의 상상을 해 보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계기’가 생기만 거의 두 번 생각을 안 하고 OK를 하곤 했다. 올해도 그런 식으로 연숙을 포함한 교사들이 인솔하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의 예비신자 교리반 일행을 따라서 가게 되었다.

 

a spectacular view of the pond at the monastery..

 

5~6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렇게 생소하던 곳이 이제는 연륜이 쌓여가는지 아주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든다. 제일 기억에 남던 때가 레지오 피정을 이곳에서 했을 때가 아닐까? 밤늦게 어두운 대성전에 홀로 앉아서 묵상하던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주 강렬한 것이었다. 사람은 역시 ‘주위 환경’에 철저히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오감의 피조물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을 이런 곳에서 느끼고 받을 수 있음을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교리반 학생들은 이런 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울까.. 이날도 방문후의 소감들을 나누는 시간에서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너무나 생소한 것을 보았다는 나눔, 이해가 간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생소함과 더불어 ‘신비적 경건함’도 느꼈다는 나눔은 아주 고무적인 것이 아닌가?  이들의 앞으로의 신앙여정은 어떨까..  과연 얼마나 궁극적으로 ‘절대존재’를 알게 될까… 큰 유혹 없이 세례의 은총을 받게 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이날 오랜 만에 gift shop에서 책을 한 권 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C. S. LewisThe Joyful Christian이란 책을 산 적이 있었고 그때 이곳은 Amazon.com 같은 discount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list price대로 파는 것이다. 이것으로 수도원을 유지해야 함을 누가 모를까? 이날도 그것을 알고 샀는데, 메주고리예 발현에 관한 Janice T. ConnellThe Vision of the Children 이란 책으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주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비교적 읽기 쉬운 책으로 오자마자 거의 1/3을 읽었는데 ‘뜻밖의 보물’이란 느낌이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  2권의 ‘반갑고 고마운’ 책들:  문밖에서 bell 소리가 들린다. 누가 온 것, 귀찮은 sales, 아니면 delivery? 조용히 밖을 보니 벌써 누가 무엇을 문 앞에 놔두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하~ FedEx van이 보이니 무엇이 배달된 것이었다. 익숙한 package이지만 나는 요새 아무것도 산 것이 없는데… 하고 shipping label을 읽으니.. 아니~ 대한민국에서 온 것, 누가?  아하~ ‘도사’ 양건주가 책을 보낸 것이었다.

 

FedEx package from Korea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되어서 너무나 반가웠는데, 이상하게 ‘주소’를 물어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책을 보내려고 그랬던 것이다. 다시 눈가가 찡~ 해 짐을 느꼈다. 친구야, 친구야… 고맙다, 친구야.. 어쩌면 너는 그렇게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은가? 나는 아무래도 못 따라가는데.. 이 친구에게 받았던 ‘책 선물’이 꽤 되는데.. 책 값도 그렇지만 이렇게 실제로 행동으로 귀찮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고물 우정’에 어떻게 응답을 한 것인가?  이해인 수녀님의 ‘기다리는 행복’ 이란 수필집과, 얼마 전에 출판된 ‘따끈따끈한’ 책 ‘글배우’라는 독특한 이름의 저자가 쓴 ‘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 라는 제목을 가진 책, 모두 2권이었다. 책 값만큼 우송료가 대단했는데.. 그것도 FedEx로 속달이 된 것이다.

이해인 수녀님은 사실 종파를 떠나서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분이지만 연숙이 특히 좋아하는 수녀님이다. 그 책은 연숙이 먼저 보기로 하고 나는 현재 ‘글배우’라는 저자가 쓴 ‘오늘처럼…’ 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잠깐 훑어 보니 대부분이 ‘상식적 수준의 조언’들이지만 어떤 것들은 나의 생각이 맞는다는 재확인을 하게 하는 것들도 보였다. 책의 부제가 ‘무너진 자존감을 일으켜줄 글배우의 마음 수업’으로 되어있으니 아마도 대부분 ‘무너진 자존감’에 대한 조언들일 것이다. 나의 자존감은 분명히 예전 보다는 많이 오른 상태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벗’이 지구상 어디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나를 ‘하늘로 뜨게’ 만든다. 건주야.. 고맙다, 고마워. 행복하게 살아다오.

 

주로 1980년대 책들, 그것도 거의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책들만 꽂혀있는 bookshelf 가 우리 집에 하나 있다. 거의 ‘고서’에 가깝게 된 이 책들은 분명히 우리 주위의 어딘가에 항상 있었겠지만 나의 관심과 눈을 끈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이 책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살 만한 책들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몇 백 권인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을 받았을까? 추억을 더듬어 보니 1990년 전후로 우리가 아틀란타에서 처음 살았던 Norcross 에 있는 Four Seasons 아파트 이웃에서 살았던 ‘선경 지상사원’의 wife가 영구귀국을 하면서 우리에게 준 것이었다. 그 집 아이들 (경윤이와 동생)과 우리 집 아이들이 어울리고, 그 집 wife는 알고 보니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후배였고, 나의 서울 중앙고 57회 동창 박우윤의 친 동생 임도 알게 되기도 했다.

한글로 쓰인 책을 거의 잊고 살았던 시절에 이렇게 무더기로 얻은 책들, 나는 거의 못 읽고 살았지만 요새 들어서 하나 둘 씩 눈에 뜨이고 어떤 책은 나의 ‘필사’ 원본이 되기도 했다. 완전히 잊고 살았던 1980년대 이후의 조국과 그 냄새가 훈훈히 풍기는 고국문화의 정수인 책들, 이제 남은 시간에 하나 둘 씩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오늘 우연히 발견한 책, 천경자 화백의 수필집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선명하고 강렬한 색깔의 그림들과 글들, 이제는 이런 ‘여자’의 글들 나도 익숙해 졌다. 그 중에서도 ‘5월’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나에게도 5월에 얽힌 romance 가 있었지..’ 하는 아련한 추억을 찾기도 했다.

 


 

5월 – 천경자

 

라일락이 향기를 잃어 버린 밤이다. 장미가 부풀었던 가슴을 헤치고 이제 요염한 자세를 일으키는지 화사한 날개로 숨소리를 덮는 듯 짓눌러 오는 밤, 내 심장의 고동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날개를 터는 십자매(十姉妹)의 동작과 더불어 호수의 파동처럼 주름을 잡는다.

고요하고 화려한 환상도 무너지고 시든 라일락의 영혼마저 증발하는 것 같은 쓸쓸한 5월의 밤이다.

이렇듯 식물성(植物性)의 생명들이 시들어 가고 또 새로운 생명을 노래도 하고…

5월의 생리(生理)는 슬픔과 환희를 한꺼번에 쏟아 놓는다. 이 밤도 가고픈 옛날의 논두렁 길에선 개구리들이 녹색의 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인데 덧없는 인생이 취한 내 가슴엔 이슬 같은 것이 괴고 있다.

5월은 인생에서 어떤 피하지 못할 인과(因果)를 지어 주는 것 같다. 지열(地熱)에 익은 포플라가 상기한 풋냄새를 피우고 태양의 직사(直射)를 받아 떨어뜨린 선명한 그림자에 바람이 깃들면 5월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알지 못할 5월의 회화(會話)에 귀를 기울이고 풀지 못할 인과에 마음을 태워야 한다.

나는 5월이 오면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야 했고, 내일을 위해서 화필(畵筆)을 들어야 했다.

5월을 불러 누구나 다 아름답다고 한다. 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견주는 것도 5월이요, 신록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도 5월이고 보면 5월의 자연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들은 여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리고 눈물도 얼마나 괴이게 했는지 모른다.

옛날 젊은 시절 어느 5월에 나는 여인네들끼리 가족적으로 들놀이를 가는데 권함을 받아 바람을 쐬러 따라간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소풍을 갔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시련 같은 것을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인연의 줄기가 나의 운명 앞으로 뻗어왔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네들 가운데는 인텔리 오뎅집 마담 형제 일행과 인생면에서 나와 비슷한 환경의 직업 여성인 Y양도 나처럼 ‘옵서버’ 격으로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나무 위로 무척이나 왕개미 떼가 올라가는 송림(松林)의 구릉(丘陵)이 목적지었던가 그들과 나는 거기에 올라가서 잡초가 무성한 어느 무덤 위에 앉았었다.

화제는 어느덧 막연한 사랑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엔 두 여인이 서로 제각기 자기가 사모한다는 것보다 상대의 이성(異性)이 자기를 사모하여 늘 전화가 걸려온다는 등 아베크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표정은 해당화처럼 활짝 피어 있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던 상대방 주인공은 아마도 동일한 남성인 것 같았고 Y양의 것이 농도가 더 짙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 구릉을 내려와 논두렁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를 수십 마리 잡아서 손수건에 싸 들었다.

그 후 그 개구리들은 나의 화재로서 희생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인네들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고, 그때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얘기의 주인공은 나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개구리에 대해서 나의 슬픔을 호소(呼訴)하고 싶지는 아니했지만 개구리들의 녹색의 울음 소리가 나의 심경을 한결 더 구슬프게 울려 주었다. 나는 어쩐지 5월이 오면 개구리의 울음 소리와 함께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나는 이 밤에 시든 라일락의 향기를 슬퍼만 할 수는 없다.

내일 아침이면 화사하게 피어났을 장미의 붉은 정열과 견주기 위해서 이 밤이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호룡이와 함께, 서울 명동성당 옆 뜰에서, 1973년 초 봄에..

 

호랭아, 호랭아!  간밤에 호룡이(친구들이 호랭이라고 불렀던, 김호룡 金鎬龍 )를 꿈에서 보았다. 정말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그 녀석의 자태, 얼굴은 자세히 못 보았지만 아마도 우리의 ‘젊었을 때’의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 일찍 세상을 떠난 그 녀석의 ‘늙은’ 얼굴을 내가 기억할 리가 없으니까.. 왜 나타났을까? 50대 초에 떠난 그 녀석, 어찌도 나를 두고 그렇게 빨리도 갔단 말인가? 불현듯, 갑자기, 너무나도 그 녀석을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초조함이 나를 엄습한다. 믿음이 있었던 녀석이니까.. 언젠가는 어느 곳에서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싶지만, 나의 믿음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꿈에서 깨어나며 아하.. 녀석은 이 세상에 없지.. 하는 자괴감보다는 안도감이 더 들었다. 꿈 속에서 이미 녀석이 인간적으로 나를 떠났기 때문에 엄청 슬퍼하고 있었다가 잠을 깨었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그 녀석은 친구로써 나를 떠났던 것 같던데, 그 자세한 배경 상황이 깨끗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왜 꿈 속에서 나를 슬프게 했을까?

녀석을 마지막으로 바로 옆에서 보았던 때가 1992년 여름이었다. 미국에 교환교수로 왔고 Florida로 가족들과 함께 차로 여행을 하다가 이곳 Atlanta를 들렀던 그때였다. 40대 중반의 우리들, 식구를 거느린 한 가장으로 다시 만났던 그때, 인생의 성숙함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던 그때, 우리는 어렸을 때의 꿈과 이상, 환상을 어느 정도로 ‘가감 加減’을 하며 살아왔었을까? 너는 끈질기고 치열한 노력으로 원했던 모교에서  ‘연세대 교수직’을 성취했지 않니? 꿈의 사나이, 목표의 사나이, 그런 네가 나는 항상 부러웠고 질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우리들의 황금시절, 중앙고, 연세대 시절.. 전자기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진짜 송신기’를 만들었다는 너를 나는 참 부러워했고, 또 너는 혼자서 ‘진짜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지? 그래서 기계공학과에 간 것은 알지만 참 그 꿈은 진짜 꿈이었음을 알고 실망했던 것 나는 잘 안다. 중앙고 시절, 당시의 희망의 상징이고 목표였던 ‘미국과 세계’를 향하여 ‘멋진 영어 구사’를 목표로 영어회화 클럽을 만들고 주도했던 네가 아니었던가? 항상 숨어 지내던 나를 밖으로 끌어낸 것, 너의 영향이 아주 컸었음을 숨길 수가 없구나.

생각이 나이에 비해서 무언가 성숙, 조숙했던 너, 당시에 아마도 신앙적인 경험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 그것이 사실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주위의 친구들은 전혀 알 수가 없었지. 가족들의 영향, 아니면 우리가 모르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 아니면 네가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 그 ‘자매님’ 때문이었나.. 당시에 나는 그런 기분과 배경을 알 수도 없었고 그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경험이었음 만 어렴풋이 짐작할 정도였지.

돌이켜 보던데, 너는 나에 비하면 ‘어른’들의 수준에 가까운 사고방식과 생활의 절제 훈련을 갖고 있었던 듯 하다. ‘좋은 목표’를 향한 치열한 접근, 노력, 투쟁… 아마도 ‘좋은 것’에 대한 너의 인생관은 이미 ‘초자연적’인 것이었음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구나. 나는 그것이 수 십 년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짐작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꿈의 영향인가..) 너의 생각이 나는 것, 전혀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다시는 너를 볼 수가 없다는 사실 이제는 모든 것을 ‘초자연적, 신비적’을 기대하는 나, 다시 어디선가 너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다.

 

책, 二十世紀 哲學 역자, 강성위.. 1978년 대한민국 왜관 분도출판사에서 발행된 철학 번역서. 강성위 는 번역한 사람의 이름이다. 지난 주일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에도 참석할 겸해서 그곳에서 주일미사엘 갔는데, 근래에 자주했던 것처럼 ‘성물방, 도서실’ 엘 들렸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의 제목이었다.

갑자기 철학에 눈이 뜬 것이라기 보다는 번역자의 이름이 나의 눈을 끌었고 곧바로 2주 대출을 하게 되었다. 강성위.. 강성위.. 1963~4년, 무려 반세기가 지난 때의 기억 속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서울 중앙고등학교 독일어 선생님의 이름.. 바로 그 강성위 선생님이 분명했다.

지난 해에도 이 ‘조그마한’ 도서실에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그리고 나]을 발견한 바가 있었는데 그런 추억이 담긴 발견의 두 번째가 된 것이다.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식의 ‘역사 속 발견의 즐거움’을 종종 대하게 된다. 세월의 즐거움 중에 하나일 것이고 ,길지 않은 삶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거의 40년이 가까운 이 책은 비록 ‘소책자’의 느낌을 주지만 내용은 정 반대로 ‘거대한 주제를 압축적으로 다룬’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를 풍미하며 우리를 직접 간접으로 지배해 온 사상, 물론 서양적인 관점에서 본 것들을 정리한 것, 지금 읽으니 우리들도 피할 수 없던 이런 ‘사상 들’ 속에서 평생을 살았구나.. 하는 감회도 든다. 때로는 ‘사상이 밥 먹여 주냐?’ 는 때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의견일 것이다.

강선생님 졸업앨범 사진

강성위 독일어 선생님.. 비록 2년 여의 짧은 기억이지만 추억은 아주 너무나 또렷하게 남는다. 1963-64년..  박정희가 5.16 혁명 2년 후 군복을 벗고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요란하게 선전되던 때 [주로 중화학 산업개발], 강선생님, 중앙고 1학년의 독일어 선생으로 만나게 되었다.

독일어.. 는 분명히 입시중심의 교육과정에서 별로 빛이 없었던 ‘제2외국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1960년 당시만 해도 2차대전의 강국 독일문화의 후광은 그런대로 남아있어서 대학과정에서 독일어는 거의 필수적 선택이었고 대학원엘 들어가려면 독일어 시험을 치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는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했고 그렇게 ‘되길어 [당시 우리들은 풍자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강성위’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고등학교와 독일어,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는 것은 신선하고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자랑할 만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독일어 자체는 악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독일어의 재미를 못 느끼며, 게다가 핵심을 못 배운 것이다. 그저 기억 속에는 정관사 der des 같은 것이 전부다. 이런 탓으로 나는 대학시절에도 이 ‘어려운 말’과 고전을 하게 되었고 대학원 입학에 이 독일어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예 대학원은 꿈도 못 꾸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름대로 나는 노력을 했다고 기억을 하는데 결과적으로 ‘완전 실패’였다. 나는 독일어를 잘 못 배운 것이다. 다른 애들은 어땠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열심히 해도 잘 못 배운 것’은 어쩌면 선생님 탓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이 ‘강성위 되길어’ 선생님의 독일어 강의는 절대로 흥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입식으로 그저 외우는 것 외에는 기억이 전혀 없다.

이 강선생님에 대한 다른 추억은 독일어가 아니고 ‘장난치고 이상하게 때리는’ 당시로써는 ‘전통적 선생님’이 아니었던 것. 독일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수시로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했는데 그 방식이 독특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고 꼬집는 것’ 이었다. 이런 식으로 고교 1, 2년을 보내고 이과를 선택한 나는 독일어와는 상관이 없게 되었고 이 강선생님도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졸업 후에 완전히 잊고 살다가 친구 정교성에게 강성위 선생님의 이야기를 잠깐 들었던 기억,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것, 독일에 유학을 갔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은근히 속으로 놀라긴 했지만[아니.. 그 꼬집던 선생님이 독일유학?]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선생님의 이름이 들어간 책을 보게 되었고 1978년까지의 ‘약력’을 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과연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대학에서 가르치는 약력이 그 책에 적혀있었다. 정교성의 말이 맞은 것이다. 언제 독일유학을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6년 직후가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googling을 하면 더 자세한 약력과 근황을 알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에서 stop을 하기로 하였다.

중앙고교 천주교반 앨범사진, 1965

 

중앙고교 졸업앨범을 보고 다시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바로 그 모습을 나는 머리에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진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 바로 ‘천주교 반’ group 사진에 ‘지도 교사 격’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아하! 강선생님.. 천주교 신자였구나!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친구 정교성의 모습도 보이고..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 동창들[이태식, 김창호 등등] 의 얼굴도 보인다. 근래 나의 인생의 나침판이 된 천주교를 믿는 영혼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는 ‘꼬집는 강성위 선생님’보다는 더 친근한 천주교 교우인 ‘강성위 박사, 형제님’ 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영세 명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지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언젠가는 알 수가 있을 것이고 어떤 본당에 나가시는지도 알게 될 테니까..

 

4월의 마지막 주에 접어들고, 작년 4월 ‘배 베로니카’ 자매님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며 겪었던 바쁜 4월에 비해서, 올해 ‘우리의 4월’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다고 서로의 의견을 모은다. 또한, 올 3월 말 보나 자매님과 영원한 작별을 한 후, 슬프고 바쁘고 정신이 없었던 느낌의 3월에 비해서 갑자기 무슨 휴가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아주 한가한 그런 4월이 거의 가고 있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의 전원 목가적인 박목월 시인의, 낮고 파아란 하늘과 수줍은 꽃들이 핀 파~란 청라 언덕과 이름 없는 항구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지만 실제로 그런 아련~한 꿈같은 모습은 나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4월의 노래’를 회상하며 이제는 타계하신 가톨릭 음악가, 나의 중앙고 1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 김순애 교수 작곡의 4월의 노래가 그렇게 맴돌았을 것이다.

올해의 point는 가사 중에 나오는 ‘이름 없는 항구’.. 어찌 그렇게 그 구절이 나를 헤매게 하는가? 암만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아마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분명히 계획 없이 훌쩍 떠난 나그네의 넋두리였을 것이다. 나도 그런 ‘부러운’ 나그네가 되고 싶다면.. 그렇다. 이제 그런 나이도 아니고, 그런 처지도 아니다. 꿈을 깨고 잠을 깨자.. 다시 ‘나를 필요로 하는 항구’로 배를 저어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4월을 보낸다.

 
박목월 작사, 김순애 작곡 4월의 노래

 

며칠 전에 예기치 않게 (of course!) 나의 모교 중앙고 57회 동창생 차정호와 연락이 되었다. 나의 blog motto 중에 ‘build it, they’ll come’ 이 바로 이런 case인데, 정말 가끔 예상치 않게 이런 기회가 온다. 나의 blog에서 중앙고 회고담에서 짧지 않게 언급이 되었고, 또 한번은 ‘차정호 사진전’ 이란 어떤 인터넷 상의 기사를 보고 그의 ‘사진 활동’ 을 언급을 했었지만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어쩌다 ‘기적적으로’ 연락이 되면 물론 뛸 듯이 반갑다. 하지만 그 다음은 항상 미지수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근래 ‘사회심리’적 연구 대상이라도 될 듯이 흥미롭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남북한 이산가족의 반세기 만의 재상봉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아마도 예상치 못한 심리적인 현상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고 세상이 무지개로만 보이던 시절 같은 시공간을 나누었던 동창 ‘친구’들, 그때의 자연스럽게 형성된 우정은 사실 너무나 순수해서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순수하지만은 않은’ 세상살이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남는다. 문제는 각자가 그 순수하던 시절에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있는데 이것은 각자가 살아온 긴 인생여정에 따라 모두 다를 것 같다. 반세기 만에 다시 알게 된 오랜 친구들 중에는 나를 너무나 슬프게 한 ‘지독한 변신’ (아니면 나의 비현실적인 기대감) 도 있어서 이제는 이런 때 나를 ‘보호’할 준비를 단단히 하게 되었다. 여기서 ‘준비’란 간단히 말해서 ‘아주 낮은 기대치’를 말한다.

이번에 연락이 된 차정호, 중앙중 1학년 때와 중앙고 3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전혀 낯설지 않은 동창이다. 나와는 다르게 장난꾸러기, 외향적인 친구.. 나는 그런 성격이 항상 부럽기도 했다. 특히 중앙고 3학년 때 백정기 국어선생님께 ‘농담’을 잘못해서 심하게 얻어맞은 ‘사건’은 아직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되는데.. 이 친구도 나의 그 회고담을 보고 ‘너무나 아팠다고’ 해서 미안해지기도 했다. 나도 누구에게 얻어 맞은 기억을 하면 슬퍼지기도 하는데..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그런 것들을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 볼 정도로 흘렀지 않은가?

 중앙57회-1아직도 활발한 느낌이 드는 그의 ‘글’을 읽고 그 옛날의 그 활달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그의 모습들을 떠 올린다. 어제는 가까이 지내는 동기동창들과 ‘허름한 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담아서 보내 주었다. 그의 ‘자상함’에 찐~한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소주잔’의 모습들은 사실 나는 이제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들이라서.. 너무나 그리운 모습들인 것이다. 몇 년 동안 뜸~ 했던 중앙고 동기동창들 소식.. 이제 다시 찾은 차정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조그만 희망을 보게 된다.

이 친구가 어울리는 동창들은 사실 나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이름들이 그렇지만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한’ 정도의 동창들도 있다. 전영훈, 윤홍섭, 주창모는 ‘100%’ 알겠는데.. 나머지는 정말 미안하게도 기억이 희미하기만 하다. 거꾸로 이 동기동창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기억하기는 정말 힘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월의 횡포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한 때 같은 곳에서 3년 아니면 6년을 본 동창들이 아닌가..

 

jinro-soju보드카 야.. 물러가라, ‘강남스타일’ 진로소주가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진로소주의 본격적인 미국 주류시장 공략에 대한 이야기가, 미국 주요 뉴스 매체[major news outlet]가 보기에 ‘하찮은’ 것들 즐겨 찾는 NPR[National Public Radio]에 보도가 되었는데 그냥 지나치려다가 ‘파아란’ 쏘주 병 사진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보고야 말았다. 그 ‘파아란, 두꺼비 표’ 진로 쏘주 병 색깔을 보니 어쩔 수 없는 향수 심이 돋아나는 것이었다.

이 보도를 보면 내가 그 동안 몰랐던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 진로 소주는 술 종류 SPIRITS (증류주?) 중에서는 판매량이 ‘세계에서 1위’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쟁 주’는 Smirnoff, Jack Daniel’s, Bacardi등이 있는데 그들의 판매량 보다 거의 갑절이라는 것은 사실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판매량이 적은데 전체의 5%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시장이 거의 압도적으로 제일 크고, 다음이 일본, 중국 정도 인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나는 한국사람들의 술 문화를 비록 오래 전이었지만 ‘알맞게’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술고래’ 전통이 계속 그렇게 유지되지는 않을 듯.. 그래서 이제는 제일 큰 미국시장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술을 파는 것은 사실 술 맛도 중요하지만 ‘멋진 광고’도 중요할 것이고, 그래서 제일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강남스타일을 광고로 골랐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은 그 ‘강남 어쩌구’ 하는 것, 한마디로 ‘병신 지x’로만 보이지만 그것에 넘어가는 작은 머리들이 생각보다 많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광고인 것이다. 그저 ‘넘어가면’ 그 역할을 끝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한국 팝 문화’를 이용하고, 곁들이는 방식인데, 글쎄요.. 그것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쉬울까?

한 전문가는 지금까지의 넘버 원이었던 러시아 보드카를 예로 들었는데, 그것이 처음 들어왔을 때가 1950년대였고, 현재에 이르러서 그것이 top이 되었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가?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그것이 ‘술 문화’가 변하는 ‘속도’인 것이다. 그런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시아의 요상한 맛을 가진 소주를 ‘강남 스타일’ 등으로 팔겠다는 것도 생각보다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소주에는 보드카에 없는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소주의 알코홀 ‘도수’가 20%라는 것인데, 이것은 정식 주류 면허에 못 미치는 맥주, 와인 정도의 면허만으로 팔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낮은 알코홀 도수이기에 보드카로 만드는 칵테일 대신에 색깔이 같은 소주를 대신 쓸 수가 있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소주를 bar에서 많이 쓴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한국문화의 관계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장사 속’으로 생각해서 훨씬 경제적이라는 뜻이다.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아마도 진로소주는 내년에도 ‘전세계 판매량 제1위’를 계속 유지할 확률이 크다고 한다.

이러한 보도를 읽으며 생각을 해 본다. 나 자신의 ‘술 문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옛날 대학시절 무렵, 팔팔할 적에는 술에 너무나 약해서 제대로 ‘술 맛과 멋’을 몰랐다. 쉽게 퍼 마셔도 별로 탈이 없었을 나이에 제대로 못 마신 것이다. 취하면 기분이 날라갈 듯했지만 대신 ‘술 탈’로 고역을 겪어야 했다. 유혹에 약해서 술을 제대로 거절할 수 도 없었다. 그런 문화에서 계속 살았으면 나는 나의 절친한 친구 김호룡1 처럼 50세도 못 채우고 황천으로 갔을 확률이 90% 이상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술 문화가 ‘전혀 다른’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나는 그런 함정은 피할 수 있었고, 대신 ‘서서히, 알맞은’ 속도로 주량을 늘려 나가서 이제는 맥주 5병을 마셔도 괜찮고, 기분도 좋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의 ‘체질’이 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주막집 문화’를 느끼며 마시는 ‘재미’는 물론 거의 없고, 대신 집에서 하는 모임 같은 곳에서나 그런 재미를 ‘상상’하긴 한다. 그 옛날 서울 포장마차에서 마셨던 ‘진짜 진로 소주‘는 없어지고, 이곳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와인’ 정도로 ‘약 하게’ 변해서 도저히 그 옛날의 ‘목 젖이 아파오는‘ 그런 짜릿한 맛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0% 소주가 그런 것들이다. 술에 얽힌 이야기들은 적지 않지만 대부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잊은 것도 많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들도 ‘치매 예방’ 차원에서 하나 둘 씩 기억을 해내어 개인 역사에 남겨 놓는 것도 나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1. 중앙 중학, 고교, 연세대 동창, 연세대 기계공학과 교수역임

¶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계절의 시계는 예측할 수도 없이 별로 쓸모가 없어지고 하루 하루의 날씨가 그날에 맞는 기후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게 되었다. 3월 중순에 섭씨 30도의 날씨가 일주일 계속되고, 4월 말에 거의 빙점의 날씨, 찌는 듯이 덥던 5월이 이제는 가을처럼 시원한 6월로 접어 들었으니.. 기상전문가들은 할 말이 있을까? 하지만 특별한 energy를 쓰지 않는 날씨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요새 며칠 같이..

 

¶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결혼식에 둘이서 갔었다. 한인 순교자 성당 마리에타 1구역의 문요한 형제님, 지난번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단장을 역임하셨고, line dance mania group을 이끌고 있는 나이에 비해 정열적인 분.. 그분의 ‘장성한’ 아들이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한 것이다.

우리 집 두 딸이 ‘요새의 이상한 문화’에 젖어서 결혼하는 것이 cool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사실 결혼에 대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마당에 이런 결혼식은 우리에게 참 신선하고, 참석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진다. 그곳에서 30여 년 전 우리의 결혼과 그때 만남의 의미를 생각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 가족, 가정, ‘정상적인 결혼’ 등의 정의와 의미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요새, 그런 ‘정상적인 결혼’을 보는 것도 큰 ‘은총’이 아닐까? 

결혼식에 간 ‘부수입’으로 정말 오랜만에(1992년 이후 처음으로) 역사 깊은 본당 성가대의 솜씨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사실 새 성전이 지어진 후 처음으로 성전 앞쪽에 있는 성가대를 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성전 뒤쪽에 있었다) 그 동안 우리세대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고 더 젊은 세대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약간은 아직도 우리들 세대인 듯 보였고, 특히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형제, 자매인 우요셉, 마리아 부부의 반가운 모습도보였다.

우리가 있을 때의 성가대와 다른 것은 중에는, 거의 ‘프로’에 가까운 audio system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도 있었다. 우리가 주일 미사를 한국본당으로 ‘옮기게’되면 성가대에 ‘돌아와도 좋다’는 묵약은 있고, 이런 활동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 솔깃하긴 한데, 역시 오래 습관이 된 주일미사 의 고향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힘들다.

 

¶  오늘은 6월 3일, 일요일이다. 천주교 전례력으로는 삼위일체 대 축일로서 신학적으로도 신비로 여겨지는 Holy Trinity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삼위일체 하면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 참고서로 ‘삼위일체 영어(문법, 해석, 작문)’ 라는 것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신학에서는, 성부,성자, 성령(예전에는 성신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도 깊은 의미는 오리무중이다. 절대, 전능, 영원, 무한..의 절대자가 3위를 가졌다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온다. 성경을 믿으면 사실 그것도 믿어야 하니까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요새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이다. 하느님인 성부, 예수님인 성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령, 그래서 Holy Spirit인가.. 신부님들의 강론을 잘 들어보면 성령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성령께 기도를 하란 말인가? 우리 순교자 본당 주임 하태수 신부님은, 기도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신다. 그것도 알듯 모를 듯한 얘기지만, 전 보다는 훨씬 받아들임에 크게 문제가 없는 나를 발견한다. 성령만을 크게 강조하는 성령 세미나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것의 중요함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  6월 3일.. 육 삼.. 하며 생각난 것6.3 사태란 것이 있었다. 4.19 같이 날짜에서 나온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난 날을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6.3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확실히 어떤 해였는지 확실치 않았다. 1964년 아니면 1965년으로 기억은 했었다. 그날은 1960년 4.19 학생혁명 이후 가장 심각한 학생데모가 난 날이었다. 그것도 5.16 군사혁명 이후, 박정희의 ‘민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비상사태’였다.

그 데모가 난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해를 1965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65년 내가 중앙고 3학년 여름방학 전에 학생데모로 인한 비상사태로 휴교를 했던 기억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억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이번에는 확실히 ‘정답’을 찾으려고 그 당시의 일간지로 확인을 하게 되었다. 정답은 1965년이 아닌 1964년 6월 3일이었다. 1965년에 휴교를 한 것은 1964년 때와 다른 한일조약(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의 여파였던 것이다.

6.3 데모 주동자 김중태약간은 희미해진 1964년의 기억을 거스르며, 그 당시 신문을 보면서 (대) 학생데모로 이어지는 과정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번도 역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것이고, 그것도 4.19와는 다르게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중심에 있었다. 군사정권에서 박정희 민간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쌓여가는 국민의 불만들을 대학생들이 다시 행동으로 보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고교 2학년이어서 사실 그 심각성이나, 의미를 잘 실감을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그것도 일본 자본에 크게 의지하려는 것, 그것에 따른 한일회담 등이 굴욕적으로 보인 것, 일을 빨리 진행하려 중앙정보부를 섣불리 학원으로 투입하는 등, 사실 정책적인 실수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박정권의 의도는 의외로 간단했을 것이다. ‘경제 자립’ 이었던 것이다. 그 괴로운 과도기를 혈기왕성했던 ‘서울 문리대’ 생들이 고분고분 참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부르짖던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 였고, 그것이 죽었다고 성토를 했다. 고려대학이 주축이 되어서 시작 되었던 4.19때와 달리 1964년에는 서울 문리대가 완전히 중심에 있었다 . 그래서 서울 문리대의 ‘용공성’ 물의까지 생겼을 것이다.

문리대 데모 주동자중의 하나인 ‘김중태‘ 는 사실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당시에 김중태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가열된 서울 문리대 주동의 데모가 6.3일에 서울 지역 대부분 대학으로 퍼지면 절정에 달하고, 그날 오후에 급기야, ‘비상계엄령’ 선포로 이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던 대학생들의 데모는 계엄령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비상계엄으로 치닫게 한 또 하나의 이유 중에는 대학생들의 구호가 심상치 않게 격해지고, ‘박정권 하야’ 까지 간 사실도 있었다. 민간정부 6개월 만에 당한 ‘정권위기’를 맞아, 박정희 정권은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권은 이런 격한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일본의 도움을’ 받아가며, 굴욕 외교의 모욕을 참아가며 밀어 부쳤다. 그리고 이후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되었다.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당시의 신문보도,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1964년

 

4.19이후 최대의 대학생 데모, 1964년 5월 말

서울 문리대 생들의 치열한 데모, 6.3 사태 1964년

 

6.3 사태 서울지역 비상계엄 선포

박정권은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16 이후 처음 맞는 비상계엄령, 1964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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