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중앙중

2년 전 아래층으로 ‘이사’를 내려온 나의 office에 있는 bookshelf 에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책들을 섞는 중에 눈에 띈 책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읽다 말다 하다가 놓은 책, 동아일보사 간행, <인촌 김성수’> 란 책이었다.  김성수, 동아일보사 모두 나와는 자연스레 친근한 이름들이다.

1960년대 나의 모교였던 서울 중앙학교(중-고등)를 ‘인수, 경영’했던 ‘만석군 부호의 아들’이었던 인촌 김성수, 귀공자 답지 않게  Bill Gates같이 ‘돈을 현명하게 쓸 줄’  알았고, 당시로서는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말년에 정치계에서는 ‘이승만의 독재’를 정말 싫어했고, 아마도 그로 인해 화병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 계동 1번지에 중앙학교가 위치한 사연을 읽게 되었다.  1960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코흘리개 우리들에게 학교는 ‘민족학교의 역사’를 정식으로 가르쳤었다. 무언가 민족적 사립학교의 전통을 남기려는 것을 우리들도 숙연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남는다.

 

 

책,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중에서

 

중앙학교 교장 재직 당시의 인촌 김성수

 

새 요람,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조선의 새 인맥(人脈)

새로운 교사가 들어설 땅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인촌 仁村 은 1917년 6월, 계동 1번지인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자리를 터로 정하고 4천 3백 평을 사들였다. 당시 이곳은 북악산 줄기를 뒤로 한 계곡으로 울창한 송림만 들어찬 산골짜기였다.  민가도 없었고, 다만 학교 터 뒤편 숲 속에 당시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훈련소) 교장이었던 노백린(盧伯麟; 후에 上海 臨政 軍務總長 역임)  참령(參領)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촌이 이 땅을 사들이려 하자  고하 古下 (송진우) 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숯막 짓고 참숯 구워 팔려나?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어 어떡하겠다는 거여?”

“어째 그렇게 자넨 발등만 보고 사는가?. 자, 보라고! 앞으로는 서울 장안이 한 눈에 굽어 보이고 뒤에는 북악의 줄기가 아닌가! 그 정기를 받아 청년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배움의 터로서는 이만한 명당이 없네. 얼마나 시원한가, 젊은이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만 허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이 보게, 큰 길에서 너무나 들어온 골짜기야, 학생들 통학도 생각해야지?”

“지금은 좀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십 년만 지나보게. 서울은 지금 새 시대를 맞이하여 커지고 있어. 모르기는 해도 십 년 뒤면 학교 주변이 주택들로 차게 될걸?”

멀리 앞을 내다보는 인촌의 안목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연 십 년이 채 안되어 개발이 되고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고하는 인촌의 선견지명에 혀를 찼다고 한다. 땅을 사들이자 즉시 새 교사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인촌은 공사장에 나가 감독 뿐만 아니라 일꾼들과 함께 흙을 고르며 땀을 흘렸다. 교장이 솔선수범하니 고하를 비롯한 교사들까지 수업이 끝나면 함께 땀을 흘렸다. 스승들이 일을 하자 학생들도 부지런히 삽질을 하고 돌을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 보람이 있어 나무만 울창하던 산골짜기에 건평 2백여 평의 붉은 2층 건물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장안(長安)의 이목이 쏠리고 김성수라는 이름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붉은 벽돌 2층의 이런 신식 건물은 그때까지만 해도 장안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신식 교사인 데다가 그것을 짓고 있는 인물이 같은 동포인 김성수라는데 화제가 됐던 것이다.

뒷날 동아일보 사옥을 신축할 때나 보성전문 교사를 신축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촌은 틈만 나면 공사장에 나가 일꾼과 함께 살았다. 자재에서부터 설계, 혹은 대목(大木)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건축을 공부해서가 아니고 공사장에 가서 몇 번만 보면 다 터득하여 현장 감리(監理)들이나 목수들의 탄복했다고 한다.

어쨌든 장안의 화제였던 계동의 중앙학교 신교사는 5개월만에 그 웅자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준공을 끝내고 12월 1일에  화동(花洞) 구교사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동 1번지에 세워진 중앙학교 새 교사 낙성식, 1917년

 

폐교 직전의 중앙학교를 인촌이 인수하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의 조선인 사회 뿐이 아니었다. 총독부 관리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돈 있으면 금광이나 하라며 백산학교(白山學校) 설립계획을 까뭉개고 돌려보낸 학무국장 <세끼야> (關屋)는 조선인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터라 무명청년 김성수가 말썽 많고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던 중앙학교를 인수했지만 결과는 뻔한 것으로 추측했다.  시골 부자 아들이라니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로 얼마 안 가서 재산 다 날리고 주저 앉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전연 예상 밖이었다. 붉은 2층 벽돌의 신식 교사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80여명 정도였던 학생이 이제는 3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교사들 역시 대학을 나온 조선인들이 거의 전부 일 만큼 탄탄하게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11월 하순, 어느 날 <세끼야>는 비서가 전해준 초청장을 받아 들고 얼굴이 이지러졌다.

“뭐라구? 중앙학교 신교사 낙성식? 그 낙성식에 오라구? 으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무시했던 무명청년은 새 교사를 당당하게 지어 놓고 그 잔치마당에 자신을 초청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촌을 김군(金君)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학교설립을 신청했을 때는 부모의 승낙을 얻었느냐며 어린애 취급을 하고 얕보던 <세끼야>도 낙성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원파공과 지산공을 상석에 모시고 낙성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조선인의 힘으로 만들어진 학교였기 때문에 장안의 시민들도 구름처럼 모였다. 학무국장 <세끼야>는 금줄이 번쩍이는 제복에 긴 칼을 늘어뜨리고 식장에 나타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긴센세이> (김선생)라 존대하며 몇 번이나 장한 일을 했다고 치켜 세우고, 조선인의 힘으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게 된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는 천황폐하의 홍은(鴻恩) 때문이라며 판에 박은 공치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총독부 관리들이 인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조선의 젊은 민족지도자로 지목하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촌은 어진 성품과 큰 도량을 지녔기 때문이었는지 젊어서부터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떠날 줄을 몰랐다.

인덕(인덕)을 타고남도 하늘의 도움이다. 인촌은 늘 인덕이 있었다. 당시 그의 주위에도 제제다사(濟濟多士), 많은 인재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중앙학교와 인연이 깊었던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대가 이외에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송진우, 최두선, 현상윤, 이강현 등과 국내에서 명성이 높던 변영태, 유경상, 유태노, 조철호, 고희동, 나원정, 박해돈 등 신진기예들이 차례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 총독부로 볼 때 인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학교의 인맥과 존재는 조선 사회에서 무시 못할 민족 지도자 그룹으로 비치게 되었다.

 

 

무명 교복과 교지(敎旨)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 의 3대 교훈은 인촌 스스로 정한 것이며 인촌 스스로 정성스럽게 써서 남긴 진적(眞迹)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세 가지 중앙의 정신: 웅원, 용견, 성신

 

이 중앙학교의 교지는 인촌의 교육이념을 집약하는 동시에 그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1자의 수정도 없이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인촌의 교육관은 백년대계의 큰 안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앙학교를 인수한 후 인촌은 특히 학생들의 옷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하찮은 걸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시오? 다른 학교와 학숙의 학생들처럼 그냥 입히면 되는 거지?”

보다 못한 안재홍이 그렇게 말하자 인촌은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니오, 학교 모자와 학교 옷은 바로 그 학교의 얼굴이며 상징입니다. 관립 일반학교마냥 일제(日製) 광목으로 된 옷을 입히고 그들의 씌운 모자를 그대로 씌울 수는 없는 일이요. 조선학생은 조선학생 티가 나야지요.”

고심하던 인촌은 검은 천을 댄 교모(校帽)에 무명으로 지은 교복을 입히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질 좋고 맵시 나는 일제 광목을 두고 왜 하필이면 손으로 짠 그 투박한 무명베로 교복을 하느냐며 못 마땅해 했다. 광목(廣木)은 개화 이후 일본 상인들이 들고 들어와 가장 재미를 본 생필품이었고 널리 판을 치고 있었다.

“값 싸고 질긴 우리 전래의 무명베가 있는데 왜 비싼 일제 광목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우리 것을 쓰지 않으면 누가 쓴단 말이오?”

인촌은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찍부터 ‘산업장려’나 ‘국산품 애용’을 구국운동의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찮은 교복에까지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자기학교 학생들 한테 만이라도 그러한 민족의 얼을 심어주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참성단(塹星壇) 수학여행

 

당시 인촌 밑에서 중앙학교를 거쳐 나온 인사들의 회고만 보더라도 인촌이 평소 얼마만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민족사상을 불어 넣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유홍 柳鸿  회고

나는 1916년 그러니까 인촌 선생께서 학교를 인수하신 그 다음 해에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첫 소풍을 강화도로 갔었는데 그때의 일은 오래도록 나에게 어떤 충격처럼 남아 있었다. 전교생이 함께 갔었던 것 같다.

유근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중에는 물론 인촌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 단군 성터에서 단군설화를 얘기하면서 목이 메었으며, 인촌 선생님께서도 소리 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학생들도 그제서야 나룻배까지 빌어 타고 강화도에 소풍을 온 까닭을 깨닫고는 모두 함께 울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 바로 옆에서 단정한 자세로 눈물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리시던 인촌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도성 愼道晟 회고

중학교 입학 당시(1930년) 나는 제일고보(第一高普)와 중앙학교 두 군데 시험을 쳤는데 두 군데 다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상식은 당연히 제일고보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학교를 가느냐의 선택에 있어 어리고 철이 없으므로 선친께 의논을 드렸더니 중앙학교를 택하라 하셨다. 경남 거창에서는 우리 집이 대지주에 속했으므로 인촌의 경방, 동아일보 설립할 때 주식투자 권유를 받아 우리 선친과 인촌은 교분이 있었다. 투자는 안 하신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인촌을 퍽 존경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중앙학교를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를 들어가 보니까 역시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었고, 김성수 선생께서 교장을 하시며 수업에 들어 오시기도 했다. 그것도 좋았지만 조철호, 박용희 선생 등으로부터 훈련을 단단히 받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권덕규(역사), 문일평(한국사; 동양사), 이윤제(한글) 선생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일제하에서 배우기 힘든 보통의 교양교육을 다 배웠다. 학교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인촌 선생은 수신시간에 교재를 뒤로 제쳐놓고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은근히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곤 했다. 예를 들면 영국에 가서 하숙을 하는데 한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불을 안 끄고 나왔더니 주인이 잔소리를 하더라. 전력을 낭비하지 않고 물자를 절약하며 잘 살면서도 검약하더라. 우리는 전등불도 안 끄고 잠을 자고 그러는데 그래서는 안 되다고 충고를 하시기도 했다. 한번은 외국을 가시는데 여권에 적어야 하는 국적이 남의 나라 이름으로 되어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실감했었다. 배 안에서 식사를 할 때 식탁에 승객들의 국기를 꽂는데 그 국기 가운데 태극기가 없었다는 울분을 얘기하셨다.

 

3.1운동의 실제적 모의 장소: 중앙학교 숙직실

 

그리고 3.1운동 때의 말씀도 하셨는데 중앙학교에서 모의하던 얘기를 하셨다. “3.1운동이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줄만 알고 있지? 사실은 중앙학교에서 시작된 거야. 계획도 세우고 유인물도 만들고 그랬는데 바로 그거 한 집이 바로 저 집이야!” 하고 우리학교 숙직실을 가리켜 주셨다. 중앙학교가 민족주의 본거지임을 일깨워 주셨고 우리는 자부심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그 후에도 남아서 일제 말기에 학생의 몸으로 항일투쟁은 못 했지만 은근히 ‘일제에 협력해서는 안 된다’ ,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그런데 끌려가서는 절대 안 된다’ 는 것은 확고했다. 해방될 때가지 일제가 강요하던 국민복은 한번도 입지 않았고 ‘전투모’와 ‘각반’도 한 번도 매보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촌 선생의 교육 영향이었다.

 

 

김승태 金昇泰 회고

그때 중앙학교는 마치 기사(기사)를 양성하는 도장(도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또한 그 학교는 3.1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6.10만세 사건의 중추적 역할도 담당했다. 이것이 모두가 선생께서 웅원(雄遠)한 포부와 용견(勇堅)한 의지, 성실(誠實)한 행동을 가르치신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학교는 도장과 같았고, 배우는 우리는 기사와 같은 흥분 속에서 지냈다. 예를 들면 동지섣달 눈이 쌓였어도 팬츠 하나만 입고 운동장을 달리게 했다. 그것은 독립정신을 갖게 하기 위한 단면이었으며, 정신과 육체의 극기(극기) 훈련이기도 했다.

 

 

채문식 蔡汶植 회고

나의 인생은 중앙학교 5년 동안 교육을 받을 때 인촌의 정신, 인촌의 손길에 의해서 키워졌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문경(聞慶)의 산골에서 태어나 중앙고보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1930년대 말 일제는 국어상용 이라 하여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쓰게 했다. 중앙학교에서 가까운 어떤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한국인 교사가 학생 하나를 정학 시켰다. 그래서 부모가 찾아 왔는데 그 아버지는 일본 말을 모르는 시골 노인이었다. 한국인 담임선생은 우리말을 쓰지 않기 위해 통역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처벌을 받게 된 것은 점심으로 빵을 하나씩 나눠 주었는데 ‘아, 빵이다!’ 하고 외쳤는데 그 말이 한국말이라 해서 정학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중앙고보만은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쓰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게 중앙학교 선생은 1년은 학교에 계시고 1년은 감옥에 가 계시는 게 보통이었다. 중앙학교에 입학하면서 매를 많이 맞았다. 입학 첫 날부터 영어시간에는 회초리 하나씩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오라는데 집에 갈 때는 그게 다 꺾여질 지경이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선생님은 우리 말로 ‘채문식!’ 하고 부른다. 그때 국민학교에서는 일본어만 배웠으므로 부지불식간에 ‘하이!’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무조건 앞으로 나오라 해서는 회초리로 때렸는데 왜 맞는지 몰랐다. 선생님이 매를 들고 또 ‘채문식!’ 하면 ‘하이!’ 하게 되고 ‘하이!’ 하면 도 맞는 것이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자기가 가져간 회초리가 다 부러질 때 쯤 되면 뭔가 가슴에 뿌듯한 게 있어서 ‘예’ 하고 우리말로 대답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촌 선생이 아니면 못할 것이었다. 인촌을 보고 더러 총을 들고 독립운동도 안 했고, 외국에 가서 항일운동도 안 하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대의 한국 땅에서 인촌이 아니고 누가 그같이 민족의식이 맥박 치는 그런 학교를 경영했던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선생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었고 그 같은 한국 사람을 기르려고 무척도 애를 썼다. 그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1학년에서 5학년이 될 때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쯤은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위대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

 

 

퇴교생(退校生)이 모이는 곳

 

 인촌은 제자들에게 민족혼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일인교사(일인교사)의 배척운동이나 저항운동을 하기 위해 스트라익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한 학생들에게 항상 중앙학교는 문을 열고 너그럽게 받아 들였던 것이다. 당시 인촌이 중앙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보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일인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인촌은 이때 처벌 받은 학생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서항석 徐恒錫 회고

나는 1918년에 중앙학교를 졸업했는데 따지고 보면 1년도 못 다니고 졸업한 셈이다. 나는 보성학교를 다니다가 퇴학을 당하여 중앙학교로 편입학하게 됐던 것이다. 인촌 선생의 항일적이며 애국적인 용단을 잊을 수가 없다. 보성학교 2학년에서 문제가 생겼다. 초조시간이 되어 모두 웃옷을 벗고 나가게 되었다. 물론 교실에는 당번이 지키게 돼 있었다. 그런데 벗어 두었던 옷 속에서 시계가 없어졌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여러 방법으로 시계를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마침 보성학교에는 <고마쯔자끼>라고 하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 일본선생이 종로 경찰서에 연락을 했다. 그래서 형사가 와가지고는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했다. 우리는 4학년으로 최고 학년이었는데 이 같은 사태에 크게 분개했다. 학교에서 도난사고가 생겼다면 선생들이 자기네 잘못을 느끼고 쉬쉬하며 잡을 일이지 그것을 경찰을 불러 몸수색을 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여 일어섰던 것이다. 2, 3, 4학년의 전 학생이 들고 일어났다. 교장은 최린 선생이었는데 전교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 졌다. 더 이상 사태가 키질 것 같아 2, 3 학년들을 누르고 우리 4학년 학생 8명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교장선생께 자퇴서를 냈다. 교장선생은 제발 이러지 말라달라고 하셨지만 우리의 기세는 당당했다. 학교측에서는 퇴학을 명함 이라 내붙이게 되었다. 최린 선생은 안 되겠던지 인촌 선생에게 전화를 거셨다.

“요새 우리학교 사건 생긴거 하시지요? 정말 진퇴유곡입니다. 총독부에서 퇴학을 시키라 하니 그럴 수 밖에 없어 퇴학을 시켰소만 정말 우수한 애들인데 버리자니 가슴이 아프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 애들의 장래를 막아 놓을 수는 없지 않소?”

“좋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싹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퇴교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보내 주십시오. 소생이 맡아 가르치겠습니다.”

그래서 중앙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후에 생각하니 인촌 선생의 애국자로서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의 학무국장 세끼야 는 화가 나서 인촌을 소환했다.

“김선생, 이번 일은 좀 경솔했던 거 아니오?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소. 불온 학생 여덟 명은 받아 들이지 말구 당장 내쫓으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만 가령 일본인 학교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경찰이 학교 구내에 들어가사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스승을 배척했다면 당연히 교칙에 따라 퇴학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그것으로 벌은 충분히 받은 거 아닙니까? 배우는 학생에게 퇴학 이상의 중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벌을 받은 학생이 다른 학교에 가는 것까지 총독부가 나서서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교육적 견지에서 하는 처벌이 아니라 어떤 민족적 견지에서 하는 보복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인촌의 말을 들은 세끼야 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자기 앞에 와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 할 소리를 하는 조선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총독부 관리라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사리를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김선생의 체면을 봐서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이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우리 학무국 과 상의해서 처리하시오.”

그것은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총독 정치하에 있어서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 사학(私學)의 문을 닫게 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인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민족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뻔해 보이지만 트집을 잡으려 해도 구실을 주지 않는 인촌이야 말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다. 친일인사(親日人士)로 만들려고 유혹도 해 보고 구실을 붙여 위협도 해 보았지만 언제나 그는 정정당당했다. 그러한 편입학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게 아니고 또 있었다.

 

 

정문기 鄭文基 회고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성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신학교는 미국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가 세운 기독교계 학교였다. 4학년에 진급하자 학교에서 스트라익이 일어났다. 나는 주동 학생으로 몰려 퇴학을 당했고 중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전부터 사실은 인촌선생 밑에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신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쫓겨난 학생은 1, 2, 3, 4 학년 합쳐서 수십 명에 이르렀다. 중앙학교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 주었던 것이다. 이젠 끝장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촌 선생이 용단을 내려 받아 주시니 우리들의 사기는 충천할 뿐이었다. 당시 경신학교 교장은 미국인 선교사였는데 화가 났던지 전화로 인촌 선생께 따졌다고 한다.

“이거 보시오, 김성수 선생! 선생께서 그렇게 분별 없으신 교장이신 줄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같은 교육자끼리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처벌한 학생들입니다. 잘못해서 처벌한 학생들이라 그겁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을 중앙학교에서 그냥 받아주면 우린 뭐가 되지요? 학생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처벌된 학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오라고 한 일 없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찾아와서 저희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물론 잘못 해서 벌을 받은 것이니 반성을 하고 다시 돌아가 공부하라고 엄하게 꾸짖었소만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 중에서 1, 2, 3학년 학생들은 나의 설득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4학년들은 누구도 못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4학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볼 테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인촌 선생은 결국 4학년 학생만 중앙학교에 남게 하고 그 이하 하급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셨다. 나는 공부는 좀 소홀히 한 편이지만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를 좋아했다. 동급생 중 일석(일석: 이희승)은 모범적인 노력가였고 보성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중앙학교로 온 서항석은 머리가 우수하고 작문을 잘 했다. 둘이서 늘 1, 2등을 다투었다. 인촌 선생은 은근히 경쟁심을 고취했는데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셨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든다시며 늘 체력단련을 권하셨다. 일본인과 겨루려면 머리도 우수해야지만 몸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건강을 겸했다고 늘 사랑해 주셨다. 한번은 계동 신교사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걸 들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도 경쟁이니 두각을 내려는 것은 인지본능이며 두각을 쉽게 내는 방법을 알켜 줄까? 남들이 모두 몰리는 유행학과를 전공허지 말아야 돼. 진리탐구를 하는 학문은 어떤 학문이든 똑 같은 벱이여. 지금의 유행 학과가 후엔 무실해지고 지금 유행하지 않는 학과가 인기를 얻을 지 모르는 일이거든? 학문에는 우열이 없느니께 남이 않는 것을 해보라 이말이여”

나는 그 말씀을 명심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 <송산고>(松山高)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동경제대 수산과에 시험을 치뤄 합격을 했다. 그때 수산과를 택한 것은 인촌 선생의 영향이었다. 그때는 문과를 해야 대학생인 줄 알았지 수산학을 한다는 것은 좀 엉뚱한 것이었다.

 

 

韓紙 한지에 싸 준 인절미

중앙학교 교장 당시의 인촌이 우리 민족정신과 기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증명해 준다. 일제는 한반도 강점 후 구정(舊正)인 <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저희들의 명절인 신정(新正)설을 쇠게 했다. 이른바 <양력설> <일본설>을 쇠게 한 것이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총독부에서는 신년 하례식을 하고 천황의 하사품이라 하여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인 국화꽃 무늬가 든 이른바 ‘모찌’ (흰 찹쌀떡)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아직 소년들이라 그 떡 받아 먹는 것을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중앙학교만은 그와 같은 ‘모찌’를 주지 않고 해마다 신년 초하루가 되면 콩가루 고물 묻힌 인절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촌 댁에서 직접 떡을 하여 그것을 한지(한지)에 싸서 나눠주는 것이었다. 조선학생이 정월 초하룻날부터 나라 잃은 것만도 서러운 데 일본 떡을, 더구나 일본 왕실의 문장이 찍힌 ‘모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철 없는 학생들은 집에서 먹어보지 않은 그 일본 떡이 먹고 싶어 불평하는 측이 있었지만 인촌은 씁쓸하게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명절이면 집에서 먹는 그 흔한 인절미, 잔치 때면 흔하게 먹는 인절미라고 그러는 지는 모르겄다만 너희들도 학교를 나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우리 한지에 인절미를 싸서 주는지 그 뜻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어제 우리 집 Saybrook court driveway로 들어오는 cul-de-sac  에서 집 쪽을 바라보니 눈에 익은 듯한 광경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아~ 올해 우리 집, ‘마지막 잎새 들’이 로구나..  하며 ‘마지막 잎새’란 생각이 들고,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슬픔을 느꼈다. 결국은 다~ 떠나는구나.. 보통 12월 초 이맘때가 되면 이렇게 ‘마지막 추수’ 가 수북이 쌓임을 이제 경험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보다 훨씬 젊은 앞집의 Josh는 아마도 올 가을에 걸쳐서 수십 번은 power blower로 낙엽들을 치우고 있는데.. 도대체 그 wasted time & energy aching muscle등등은 둘째치고 그는 ‘낙엽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그렇게 없다는 사실에 솔직히 ‘비웃음’이 나온다.

세월은 흐르고 올해도 한 달도 채 남지 않고, 깊은 겨울로 들어가며 새해 2018년을 맞는다. 칠십 70이란 숫자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의 처지는 감정을 달랜다… 그래도, 그래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 70년의 세월은 나에게 과분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여한이 없다’ 라고 위로를 받는다.

 

pen name O Henry

마지막 잎새,  명작 단편의 제목이었다. 필명 O Henry라는 미국 단편 작가가 20세기 초에 발표한 그야말로 ‘짧은’ 단편 그것이 바로 The Last leaf 였다. 낙엽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떨어지는 ‘놈’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마지막 잎.. 그러면 세상은 갈색에서 하얀 색으로 변하고 겨울잠을 자야 하는 때, 이 소설의 주인공 여성, 폐렴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하나 하나 떨어지는 낙엽을 자기의 운명과 연관이 있음을 느낀다. 결국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자기도 ‘따라 떨어진다’ 믿는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잎새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안 떨어졌다. 대신 그 마지막 잎새를 ‘살려준’ 아름다운 마음씨의 친구 화가 할아버지가 대신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얼마나 아름답고 운명적인 단편이었던가..

 

 

왜 이 단편이 나의 기억에 그렇게도 남았는가. 1960년 57년 전 서울 중앙중학교 1학년 때 국어 담당 ‘소재영‘ 선생님 때문이었다. 소재영 소재영 선생님… 그 어린 나이의 눈에도 이 선생님의 ‘학자적 겸손, 능력, 품위’가 그렇게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나에게는 멋진 선생님이셨다. 교실에 들어오실 때는 책을 한 꾸러미를 들고 오셨는데, 그 두꺼운 국어사전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참고자료들을 가지고 국어시간에 가르치신 것이다. 그 때가 고작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입시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때) 그 선생님은 완전히 우리에게 국어라는 학문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 중에 바로 이 ‘마지막 잎새‘에 관한 공부도 들어있었고 그것이 반세기 뒤에도 뚜렷이 남아 있게 되었다.

 

The Gift of the Magi

크리스마스 ‘사랑의 마음’을 적절히 묘사한 O Henry의 다른 단편 The Gift of the Magi, (한글제목은 생각이 안 난다) 도 기억에 남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젊은 ‘신혼’부부 Jim과 Della의 크리스마스 선물교환 이야기.. 서로를 위해서 Della는 머리를 팔아서 Jim의 watch chain을 샀고, Jim은 watch를 팔아서 머리 빗을 샀다는 슬프지만 너무나 사랑스런 이야기였다. 이것이 바로 the Magi(동방박사)의 아기예수에게 드리는 선물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O Henry라는 이름을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지만 인생의 항해를 하며 모든 것을 잊고 살다가 우리 집 앞에 쌓인 마지막 잎새들을 보며 회상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이 작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 길이 없었지만 알고 보니 사실은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는 조금 실망을 했다. 많은 유명한 단편은 남겼지만, 그의 비교적 짧았던 생(47세)은 각종 색깔의 행적을 남겼다. 그 중에는 우리가 살았던 Columbus, Ohio의 감옥에 죄수로 수감되었던 것도 있다. 물론 폭력적인 범죄는 아니었고 비교적 가벼운 ‘사기 횡령죄’로 복역을 한 것이다.  말년에 마음과 행동을 가다듬고 쓰기 시작한 단편들, 바로 그것이 그에게 커다란 이름을 남겨주게 되었다. 한마디로 ‘역량, 잠재성’이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알콜 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타계한 것을 보면 말년이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O Henry라는 이름을 사랑한다. 나도 그 중에 하나고, 그것은 중학교 1학년 국어, 소재영 선생님의 고귀한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The Last LeafThe Cascades – 1963

 

만화, 민족의 비극 표지, 1961

‘민족의 비극’, 1962년 1월..  내가 55년 전에 ‘탈고 脫稿’한 50여 페이지의 ‘먹물로 그린’ 만화 漫畵 의 제목이다. 그러니까 서울 중앙중학교 2학년 시절 1961년에 그렸던 ‘자작 自作 만화’ 인 셈인데 이것이 거의 기적적으로 그것도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이것은 나에게는 ‘가보 家寶’에 상당하는, 돈을 주고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개인 역사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지금 이 만화 책의 ‘외형적, 물리적’ 상태는 그렇게 양호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신경을 안 쓰고 조금 험하게 다루면 망가질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자주 만지지도 않고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에 더 이상 이런 상태로 모셔둘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려서 fully digitized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당시에 그렇게 ‘희귀’했던 stapler, 현재 몇 불 弗이면  살 수 있는 그것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나는 역시 전통적인 공구였던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동네가게에서 가는 철사를 사다가 이 책을 엮었다. 그것이 현재 그대로 남아있는데.. 문제는 이 homemade staple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1961년 경 서울 가회동 잡화상(철물도 취급하는)에서 산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true antique value가 있는 것, 돈을 주고 어디에서도 살 수 가 없는 것이니.. 쉽게 바꾸거나 손을 대는 것이 망설여진다.

우선 몇 page를 scanner에 책갈피를 강제로 펴서 scan을 해 보았다. 역시 보기가 안 좋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이렇게 55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았다는데 만족감을 느낀다. 당시 이 만화를 ‘애독’ 해 주었던 몇몇 원서동 苑西洞 죽마고우 竹馬故友 (안명성, 유지호, 김동만 등등) 이 자신들이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되었던 역사를 재발견하게 되면 감개가 무량할 것이라 믿는다.

이 만화의 그림 technique을 보면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그것들은 거의 99%가 당시 만화계의 영웅 ‘산호‘ (선생님)의 bestseller 우리의 영웅 ‘만화 라이파이‘를 비롯한 다른 ‘전쟁, 역사 물’에서 온 것이다. 24시간을 그런 그림을 보며 살았던 당시에 그것을 흉내 내어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랑스런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것을 거의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까지 그렸으니.. ‘공부, 공부, 입시’ 지옥이었던 당시, 우리 집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이고 결국은 이 만화가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내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그렸던 만화가 이 만화 바로 전에 완성이 되었는데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없어졌고 나중에 알고 보니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알았다. 어머님의 지나친 간섭이었지만…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서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굶어 죽는 만화가’가 될 것으로 염려가 되셨다는 것을 어린 나이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없어진 그 만화, 나에게는 아련한 아쉬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 없어진 만화작품의 그림 기법, story 같은 것이 나의 머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저 어린 나이에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날랐던  그 만화시절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고 싶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만화책을 완전히 ‘해체’해서 full scanning을 한 후에 pdf book format 으로 바꾸는 것이고 그것이 완성 되면 나의 serony.com blog에 ‘영구히’ 남길 것이다.

 

 

아침에 달력을 보니 4월 19일.. 화요일, 물론 4.19라는 숫자는 56년이나 지났어도 어제처럼 느껴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만큼 비록 세월의 깊이에 맞게 뇌의 깊숙한 곳에 잠겨있어도 아주 ‘큰’ 세포에 간직된 것이라 그럴 것이다. 그리고 화요일.. 이었다. 1960년의 4월 19일도.. 99% 화요일이었다는 기억. 5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을 함은, 그 세월이 그렇게 역사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세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일제 36년, 유럽의 100년 전쟁.. 등에서 느꼈던 그 햇수는 너무도 길었던 것이지만 내가 이런 56년을 어제처럼 기억하게 살면서 느낀 것은 너무나도 짧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것이다.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당시의 데모 열기 함성과 카빈 소총 소리, 어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수 많은 군중들.. 그렇게 찬란한 4월의 계절은 소음과 정적이 교차하는 순간들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새카만 교복의 물결, 심지어 대학생 형님들까지도..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뛰고, 트럭을 타고, 소방차를 타고 서울의 중심가를 돌고 도망가고 숨고 쓰러지던 그 때.. 모습들.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공격을 받던 날 우리 중학교 1년생의 혼란한 심정.. 누가 누구를 쫓아가고 쫓겨가던가.. 누가 우리의 역적이던가? 우리들은 그저 놀란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들려오던 요란한 카빈 소총 소리들.. 종로 경찰서 지붕에 설치된 만화에서만 보던 ‘기관총’들.. 곧 이어 아스팔트 길에 우람한 바퀴자국을 내며 웅장하게 들어오던 탱크의 무리들.. 4월 달.. 4월 달 ,1960년의 찬란한 꽃이 만발하던 4월 달이었다.

쓰러진 형님, 누나들.. 그렇게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던 그들.. 지금은 다 어디에 가셨는가? 그들은 과연 그들이 싸우던 목적을 이루며 살았던가? 혹시 그들도 나중에는 ‘역적’들과 같은 무리를 닮아가지는 않았던가?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이승만, 이기붕, 이강석, 프란체스카, 장면, 윤보선, 허정, 그리고 장도영, 박정희..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의 열차에 남았던 역사 속의 그들.. 모두 어디에 있는가? 젊으셨던 우리 어머니, 그래도 이승만의 잘못을 지적하시던 지성을 가지고 침묵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우리는 아직도 그 말의 뜻을 새기고 감사하며 산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그것에서 배우고 최소한 되풀이 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기에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2016년 4월 19일, 싸늘한 아침에 머리를 맴도는 넋두리, 이렇게 정리를 하지만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정상이다.

고금소총(古今笑叢).. 벌레 먹은 장미..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생각하고 조심스레 써본 조금은 ‘숨기고 싶은’ 이름들이다. 고금소총은 아마도 태고 적부터(아마도 고려시대?) 있었을 ‘고전’ 책 이름일 것이고, ‘벌레 먹은 장미’ 는 1950년대에 나왔음직한 책의 제목이었다. 옛날 옛적을 추억하며 이 책 두 권을 언급하지 않으면 사실, 너무나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두 권의 책은 ‘절대로’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책들이 어디 한 두 권이겠는가? 한마디로 그 당시 도덕적, 사회적 기준에서 들어내 놓을 수 없는 책들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상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기의 이 책들은 사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풍기문란’ 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내가 이 책들을 읽고 본 것이 중학교(서울 중앙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1962년 경인가.. 여학생들은 모르겠지만 남학생들은 그 나이 정도에서 이런 ‘금기 도서’ 목록을 조금씩은 거쳐 나갔을 것인데, 조금 조숙한 아이들은 그 훨씬 이전에 읽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나이에서야 읽게 되었다. 물론 친한 친구들의 ‘권유’로 알게 되고 읽게 되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그 읽던 때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런 것들은 사실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했다.

아주 옛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1960년 대 만 해도 고등학교까지는 철저한 ‘남녀유별’의 사회적 규율이 엄존했다. 남녀공학은 ‘거의’ 없었고, 만약 공개적인 연애를 하다 ‘걸리면’ 정학처분 같은 벌을 받곤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발동하는 남성 호르몬의 영향은 자연스레 ‘지하’로 들어가며, 음성적, 비공개적, 밀담 같은 것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조금만 노출된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는 물론 ‘학생입장불가’ 라는 말이 붙어서 그저 영화광고 벽보 앞에서 침만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환경 하에서 비밀리에 돌려가며 읽는 책 중에 아마도 위의 두 책이 제일 유명했을 것 같다. 나의 또래 사람들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예외 없이 모두 보았다고 했으니까.. 또한 같은 또래의 여성들에게 은근히 물어보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예상하기 쉬운 반응을 보곤 했다. 이렇게 여자와 남자가 다른가.. 놀라기만 했다.

고금소총은 글자 그대로 ‘옛날과 오늘날의 웃음거리 이야기를 모은 책’ 인데, 100%가 ‘성(性)’ 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요새도 인터넷에 가면 특히 dirty old men들이 즐기는 소일거리이지만 그 옛날에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노골적인 묘사를 피하며 교묘하게 그것도 ‘한자’가 많이 섞인 글을 읽으면 아닌 게 아니라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어휘들, ‘양물, 옥문‘ 같은 말들.. 처음에 읽을 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는 놀라다가 웃게 되었다. 또한 옛 사람들의 과장법도 상당해서 그 당시 남녀는 모조리 ‘성 중독자, 도착증 환자’로 묘사가 되어 있었다. 모든 이야기들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그렇게 성이 억압을 받던 시대에도 그렇게 모두 ‘숨어서’ 이런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통을 잇거나, 아마도 일제시대에 흘러 들어온 일본의 개방적인 성 문화의 영향까지 겹치고, 6.25 전쟁의 상처가 아물던 1950년대에 그런 ‘삶의 돌파구’가 없을 리가 없었다. 비록 책방에서 들어내 놓고 팔 수는 없었어도, 길거리의 카바이드 등불 아래 ‘포장마차’ 책방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은 잘 팔렸을 것이고, 이제는 일본 이외에 미국문화가 전쟁 후에 쏟아져 들어오며 한창 잘 나가던 미국 판 잡지들 (대부분 PLAYBOY같은) 까지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그 시절 굶주린 남성들을 유혹하곤 했고, 학생들도 거기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 중에 나에게 ‘흘러 들어온’ 책이 바로 그 유명한 ‘현대고전’, ‘벌레먹은 장미’였다. 중학교 3학년 내가 가회동에 살 때, 골목 친구가 시간제한을 두고 빌려주었던 책이었다. 불과 몇 시간 밖에 없어서 빠른 속도로 읽고 돌려준 책이었다. 그런 책의 내용이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 거의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알고 나도 놀란다. 그 정도로 ‘강하게’ 뇌리의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고금소총과 달리 완전히 이야기의 배경이 현대, 그것도 6.25 이후의 사회적 풍경을 담아서 그야말로 100% 실감이 갔던 이야기들.. 당시로써는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요 묘사였다.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그 유명한 ‘방인근‘ (일제 당시 소설가) 선생이었지만 소위 문학의 대가가 그런 책을 썼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도 돈이 필요한 선생께서 이름을 빌려 주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종류의 책들을 접할 기회가 적지 않게 있었고, 그런 것을 내가 피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위선에 불과할 것이다. 이전에는 그런 것들을 ‘자라면서 꼭 거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자위하며 ‘괜찮다’ 로 일관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후회가 되는 것이다. 꼭 그렇게 ‘음성적’으로 성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지하, 음성적’인 습관이 깊어지면 아마도 소위 말하는 중독증으로 빠질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도움’으로 요새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것들을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1 한마디로 이제는 ‘장난’이 아닌 것이다. 동네 골목에서 숨어서 몇 시간 동안에 보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편하게 집에 ‘숨어서’ 24시간이고 보고, 듣고, 보내고, 받고.. 이것이 바로 우리 신부님2이 말하는 ‘어두운 밤’의 시작일 것이다.

  1. 최근 영국에서 이런 것을 대처하는 법안이 나옴.
  2.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하태수 미카엘 주임신부님.
Jules Verne의 15소년 표류기

1880년대 Jules Verne의 ’15소년..’의 책 표지

“15소년 표류기”..  까마득히 옛날 옛적, 중학교 1학년 (서울 중앙중학교) 때 읽었던 세계명작중의 하나, 정말 재미있던 모험, 소설책의 제목이다.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머리에 거의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면 이것은 참 대단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는 인터넷에서 이것을 찾아보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아직도 널리 사랑을 받으며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만화책과 골목 밖에는 별로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재미있는 것과 곳이 없었던 그런 찌들었던 시대가 아닌,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으로 밤을 새는 요새 아이들에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다. 내가 읽었던 때 이후, 50년 뒤에도 아직도 그 나이또래들의 ‘고전적인’ 탐험 심과 호기심은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일까?

이 책은 나의 중학입시 준비를 도와주었던 (재동학교 6학년, 1959년) 가정교사였던 경기고 (김)용기형이 나에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주었던 것인데, 하도 재미있어서 하루 이틀 새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나고, 용기형 자신도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거의 무슨 의식처럼 읽는 ‘명작’ 전집이 있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학원사에서 발행된 거의 100권이 넘는 것이었고, 그것도 한국 명작과 세계명작으로 따로 있었다. 중학교를 마치기 전까지 그것을 다 읽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나는 별로 그런 것들에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유는 ‘만화’가 훨씬 더 재미있고 배울 것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의 15소년 표류기는 그 ‘표준’ 명작전집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한창, 모험심, 공상적 상상이 극에 달하던 그 시절에 이 책은 사실 그렇게 ‘과학적, 공상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은 1세기 전 사람들이 겪었던 거대한 바다, 미개척 된 대륙, 특히 섬들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바다를 뗏목으로 항해하는 꿈을 많이 꾸기도 했다.

특히, 실제로 구체적으로 서해안, 인천에서 출발해서 제주도 쪽으로 가는 뗏목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물론 중학생에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자살행위였겠지만, 그런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하는 것 만도 너무나 행복하였다.

이번에 이 책을 어렴풋이 회상하면서 과연 그것이 어떤 책이었는지 궁금해져서 조사를 해보니,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나 많았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책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어서 누가 언제 쓴 책인지도 몰랐다. 이러한 사실을 찾는데 책의 제목부터 문제였다.

도대체 ’15소년 표류기’라는 영어 제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Fifteen Boys로 아무리 찾아도 없었고, 표류기 같은 castaway, adrift 로 찾아도 헛수고였는데, 혹시..하고 한글로 ’15소년’을 찾았더니 bingo! 재수가 좋았던 것이 이 책이 ‘요새에도’ 읽히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옛날에 읽었던 나 같은 나이의 ‘꼰대’들이 그런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놓았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인데, 요새는 아마도 ‘극성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생각해서 ‘권장하는 아동도서’로서 이런 ‘독후감’ 같은 것을 쓰는 모양이었다.

Jules Verne classic, Two Years Holiday

2003년 영어판, 15소년 표류기

이런 모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에서 제일 ‘웃기는’ 것이, 책의 제목이었다. 원래의 제목은 Deux ans de vacances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나온 책이었던 것이고, 영어로는 Two Years’ Vacation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저자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바로 그 유명한 Jules Verne!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Jules Verne 하면, 우선 ‘해저 2만리(Two Thousand Leagues under the Sea)’,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 ‘기가 막힌’ 책들의 저자가 아닌가? 나는 그 당시에 전혀 모르고 읽었던 것이다.

원제가 ‘2년간의 휴가‘인데 어떻게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15소년.. 어쩌구 로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이것은 쉽게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일찍이 개화를 한 일본 아해들이 이미 열광적으로 일본어로 출판을 했었고 그 책의 제목이 바로 十五少年漂流記, 가난했던 우리 출판사 아저씨들은 ‘그대로’ 찍어낸 것이다.

일본 쪽으로 자료를 찾으면 1951년에 나온 것이 있는데 내가 읽었던 것은 분명히 이 것을 ‘100% 그대로’ 한글로 직역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출판계는 분명히 그랬다. 거의, 아니 100% 일본 것들을 ‘베낀’ 것들 뿐이었다. 문제는 일본 판의 번역이 충실했으면 그런대로 괜찮을 법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읽었던 ‘세계명작’ 들은 완전히 ‘오역’으로 즐겼던 셈이다.

이 책의 대강 줄거리는 생생히 기억을 하지만, 자세한 지명이나 사람이름들은 거의 잊어버렸다. 분명히 생각나는 이름 중에는, 거의 주인공이나 다름이 없는 프랑스 소년 ‘브리안, Briant‘ , 나중에 등장한 ‘Friday 아줌마’ 등이 있다. 대부분이 영국소년들이고, 이들과 ‘정치적’인 갈등까지 겪지만 어른들과 다르게 그들은 빛나는 화해와 협력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참 듣기 좋은 Utopia적인 얘기다.

이런 것들은 요새 생각을 해본 것이고,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제치고, 무인도의 동굴 속에서 2년간 살면서 겪는 각가지 탐험, 위험, 모험 등에 ‘열광’을 했었다. 특히 실감나게 잘도 그린 무인도의 지도는 흡사 ‘보물섬’ 을 연상시키는 것이라서 그 당시 나이에서는 완전히 우리를 압도하곤 했다. 1880년대에 나온 책이라 당시의 바다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이 책을 기억하면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기분이다. 요새의 모든 관심사는 그저 ‘우주’가 아닌가.. 바다에 대한 경외심은 이제 많이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을까.

요새 새로 생긴 ‘소일거리, time-killer’ 중에는 옛날 내가 소싯적일 때의 신문을 보는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과거에는 ‘너무나 비싸서, 거의’ 불가능 했던 것들이 마음만 먹으면 거의 무료, 아니면 값싸게 다가온다. 이것도 조금 오래 산 보람중의 하나다. 소싯적이란 때도 그리 짧은 것이 아니어서, 요새는 특별히 반세기라는 이정표에 그 시기를 맞추어서, 그 당시를 회상해 본다.

반세기, 역사시간에 그것은 아득하게 긴 시간으로 들렸지만, 이제 보니, 아직도 기억이 또렷한 것들도 많아서 그 정도로 긴 것 같지 않다. 50년 전이라면, 1962년 6월이 되고 그 당시 나는 서울 중앙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그 나이에 당시의 ‘한자 투성이’ 신문을 쉽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읽는다 하더라도 거의 모두 ‘관심 밖’의 일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며 그 ‘사건’들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은 뜻 깊고, 보람된 일이라고 느껴진다.

50년 전의 이맘때의 ‘시사’를 그런대로 기억한다. 5.16 혁명이 비교적 안정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신선한 기분으로 ‘재건‘이란 말을 염두에 두며 뛰었다. 정치적인 안정은 그런대로 경제 문제로 에너지가 집중이 되면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 라는 구호로 이어진다. 그래서 기억에 그 해 4월 쯤에 경복궁 안에서 ‘산업박람회‘라는 것이 열렸고 나도 그곳에 가 보았다. 그때 나에게 인상적인 ‘상품’은 일본회사의 ‘칼피스’ 같은 자동 주스기 였는데, 물론 값이 아주 비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뉴스’에 속했다. 진짜 문제는 새로 부각된 ‘한미행정협정’이란 골치 아픈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이것에 대해서 나의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으로부터 이것에 대해 ‘쉽게 설명되어’ 듣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의 범죄를 어느 정도 우리 정부가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것인가는 어렸던 나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번번히 미군들이 우리동포들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하는 신문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에 아직도 손이 부르르 떨게 되는 사건은, 미군들이 집단으로 위안부(직업여성들)의 머리를 삭발시키고 도로포장용 tar (까만 ‘타마구’)를 머리에 붓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던 끔찍한 일이었다. 그것이 신문에 사진으로 까지 나왔으니.. 국민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이런 사건이 왜 그렇게 처리하기 어려운가는 간단히 말해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들은 치외법권적인 절대적 특혜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형사문제가 생기면 전적으로 미국의 법에 의해서 처리가 되었고, 그것은 우리들의 ‘울분’을 조금도 씻어주질 못했다. 여기에 역시, 또, 우리의 자랑스런 혈기 왕성한 ‘고대생’ 형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고려대학 전체의 영웅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민족적 민주주의 교육의 요람‘ 이었다. 물론 그런 항의데모는 곧 바로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거의 언제나 그들이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정말 한미당국의 ‘고도의 정치 기술’을 요하는 민감한 사건들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위치는 거의 대한민국의 보호자 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짐을 싸서 가버리면 바로 그 다음날 김일성의 탱크가 의정부 가도로 행진을 할 것은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국가자체의 생존문제가 걸린 것이다.

그날 일어난 고대생 평화적 시위는 이 골치 아픈 문제의 해결을 향한 길고도 긴 여정의 첫 발을 띄게 하는 역사적인 것이었다. “반미는 곧 용공” 이라는 슬픈 등식이 횡행하던 때, 그런 반미시위는 고도의 용기와 기술이 필요한 것이었고, 국민 감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정부 측인 군사정부도 사실을 마찬가지였다. 그 혈기왕성한 군인들이라고 우리 동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과 다르게 느낄 리가 있을까? 그날 곧바로 박정희(최고회의 의장)의 성명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전적으로 학생들과 동감‘이라는 요지는 사실 파격적인 발언이었고, 이 시위가 그런대로 control된 상태로 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특히 김일성이 ‘절대로 좋아하는’ 사건들이었고, 그 당시 그들의 방송을 들어보면,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빨리 “미제도당”의 군대를 철수시킬 때가 되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그 당시 고대생들의 성명을 보면 그들은 ‘절대로 반미, 반정부 적이 아니라’ 고 누누이 강조를 했다. 그것은 또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 동포가 미군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인권이 침해 당하지 않게 하라는 요구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위는 평화적이었다. 고대생들의 결의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하여 공동의 적과 싸워 피로써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상호관계가 미국으로 보아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며 한국으로서는 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접종하는 불상사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손상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일부 몰지각한 미군인들 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만행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의 격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미 양국이 주권국가로서 서로 존중하여 양국의 권리와 의무를 명백히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서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로서 성명한다.
6.25 이후 미국군대 주변에서 빈번히 일어난 한국인 ‘린치’ 사건과 이를 둘러싸고 자주 논의된 행정협정체결 문제가 아직까지도 뚜렷한 이유 없이 지연되어 왔음은 심히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미국인의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인권의 침해와 인간존엄을 유린하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장 합리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타국에서와 같이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요청한다.

 

고대생들의 대 정부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봉이며 ‘심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어났던 ‘린치’ 사건은 미 국민 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정부의 무능한 소치다. 정부는 성의를 다하여 주권국민임을 해외에 선언하라.

 

고대생 한미행정협정촉구 시위, 1962년 6월 6일

1962년 6월 6일, 군사정부 계엄령하에서 일어난 고대생들의
한미행정협정 촉구 데모, 평화적인 시위였다

 지금 이 사건을 되돌아 보면서 느낀다. 그 당시의 객관적인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통계를 감안하지 않고서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우리를 앞서 갔던 일본의 경우를 보면 간단하다. 국가 안보 다음에 ‘통하는 것’이 경제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그 당시 대한민국은 소위 말하는 ‘후진국’이었다. 일단 전쟁은 끝냈지만,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실정이었던 것이고 국가 안보와 직결이 되었던 미국의 원조와 미군의 존재는 거의 ‘성역‘에 속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어찌 그것을 몰랐으랴.. 대학생의 절규를 그들도 못지않게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불행의 ‘원죄’를 만든 민족반역자, 1급 전범 김일성 개XX 를 견제하며, 경제개발을 해야 했던 군사정부, 박정희 정권이었다. 단 한가지.. 경제적인 안정과 성장 그것만이 고대생들이 절규했던 동등한 지위에서의 한미행정협정을 가능케 하리라는 것이 당시 정권의 믿음이었다. 비록 군사정권 하에서 ‘시위금지’ 라는 법을 어겼지만, 고대생들은 결과적으로 군사정권이 더욱 경제개발에 총력을 하게하는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John-Glenn-1962

1962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의 1면 기사, 존 글렌의 미국 첫 지구궤도비행 성공뉴스

 

The Right Stuff.. 책과 영화의 제목.. 미국의 우주개발 초창기 때에 관한 얘기들, 특히 첫 프로그램이었던 머큐리의 7인 우주비행사 (우주비행사를 미국에서는 astronaut, 당시의 소련에서는 cosmonaut라고 했다) 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바로 50년 전, 그러니까 반세기 전, 오늘이 이 프로그램의 절정에 해당하는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2월 20일은 소련에게 완전히 선두를 빼앗겼던 미국의 첫 완전 지구궤도 비행이 성공한 날이다. 그 우주인이 아직도 90세로 건재한 한국전에도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해병대 중령출신인 존 글렌, John Glenn, 그는 1969년에 달에 사상 최초로 착륙한 Neil Armstrong과 같이 Ohio주 사람으로, 나중에는 오랫동안 연방 상원의원으로 정치를 했고, 한때는 미국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기도 했다.

The Right Stuff의 영화를 보면 짐작이 가듯이 그는 7인의 astronaut중에서도 유별나게 ‘도덕적, 신앙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곧디 곧은 성품으로 전 인생을 보낸 셈이고 90세인 지금의 나이에도 전혀 나이에 의한 장애를 느끼지 않는 듯한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보인다. 나는 이 미국의 첫 지구 궤도비행 성공 소식을 서울에서 중앙중학교 3학년이 시작되기 전 2월에 신문과 라디오 방송으로 들었다.

미국, 소련의 심각한 냉전의 공포 속에서 두 초강국은 우주경쟁을 전쟁의 연장으로 보았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이것은 미국의 절대 열세였다. 1957년의 Sputnik 소련 인공위성을 필두로 Yuri Gargarin의 사상 첫 소련 우주인 탄생 등등 계속 소련의 연전 연승이었다. 그럴 때, 미국은 로켓을 쏘아 올릴 때마다, 거대한 화염에 싸여 곧 추락을 하곤 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젊고도 젊었던 40대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고, NASA가 본격적으로 가동을 하면서, 이렇게 John Glenn의 성공적인 첫 궤도비행이 탄생한 것이다.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것은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끼친 심리적인 효과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으로 보인다. 조금 자신감이 생긴 것이고, 케네디 대통령의 “1970년 전까지 인간의 달 착륙과 귀환” 공약까지 나오게 되고, 결국은 이것을 출발점 으로 1969년 여름에 달에 착륙을 함으로써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space program은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나는 곧이어 중앙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같은 반에 있던 윤태석이 수시로 가져다가 교실 뒤의 벽에 붙여놓은 우주 프로그램의 총천연색 화보 (아마도 미국 공보관을 통해서 나온 것)를 보면서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 당시의 신문을 다시 보게 되면서, 그때의 우리들을 생각한다. 그전 해(1961년)에 5.16군사혁명으로 박정희 의장시절이었다. 그러니까 민정으로 이양이 되기 전, 군사혁명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치되던 시절이었다. 경제는 말도 아니었고, 미국 원조 수준은 떨어지고, 휴전선 너머에는 살이 더 찐 김일성 개XX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철전지 원수 일본은 우리 동족간의 전쟁 덕분으로 날로 부강해지고, 급기야 올림픽을 눈앞에 두었고, 우리는 구차스럽지만, 일본에게 돈을 꾸어달라는 외교를 해야만 했던 그런 시절.. 하지만 박정희는 ‘한가지를 향해서’ 뒤도 안 보고 달리기 시작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평화의 십자군’ 으로 보이던 미국에서 이런 신나는 소식이 온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박수 갈채를 보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무언가 앞으로 ‘잘 풀릴’ 것이라는 그런 희망들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다.

 

 Bert Kaempfert – “Wonderland By Night”
‘밤하늘의 트럼펫’, 그 당시의 hit instrumental melody  

 

 

연고전 Classic

연고전 Classic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둘려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을 안고 푸르고 맑은 정기 하늘까지 뻗치는
연세 숲에 우뚝 솟은 학문의 전당. 아~ 우리들 불멸의
우리들 영원한 진리의 궁전이다 자유의 봉화대다.
다함 없는 진리의 샘 여기서 솟고 불멸의 자유의 불
여기서 탄다.

우리들은 자랑에 찬 연세 아들딸. 슬기 덕성
억센 몸과 의지로 열성 진실 몸과 맘을 기울여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 승리와 영광으로
길이 다한다. 찬란한 우리 이상 밝은 누~릴 이룬다.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너무 너무 오랜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앨범을 보며 교가 연세의 노래를 듣는다. 얼마나 오랜 만인지는 정확히 그 햇수를 모른다. 다만 1971년 2월 졸업 후에 처음으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물론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은 보았을 것이지만 느낌 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10여 년 동안 가끔이라도 즐겨 본 졸업 앨범은 거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의 것이었고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앨범에는 손이 가지를 않았다.

어떻게 나는 이렇게 대학시절의 추억과 그 이전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게도 다를까?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그 나이의 추억은 그 이전의 추억과 근본적으로 깊이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심하게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지만 순진한 추억과 더 성숙하지만 조금은 덜 순진했던 시절의 추억, 그런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더 복잡해진 대학시절의 추억을 글로 간단히 표현하기도 그 이전에 비해서 더 힘들었고,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준비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전의 졸업앨범에 비해서 대학의 것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는 제일 큰 이유는 대부분 ‘생소한’ 모습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앨범의 주인공들은 같은 학과가 아니면 사실상 전혀 모르는 ‘동문’ 인 것이다. 같은 학과라도 재학생과 복학생(민바리 vs. 군바리 라고 불렀다) 으로 갈라지고 거기다 나이차이까지 있다. 물론 여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래서 대학 앨범을 자주 안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특히 학교 내에서 활동을 안 하거나 하면 다른 과의 동문들은 이름도 모르고 졸업하게 된다. 입학 동기들의 얼굴은 교양학부의 과정에서 조금 익히고 나머지들은 채플 시간(연세대는 개신교 재단의 학교), 그리고 과외활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후회스럽지만 나는 연세대학 시절,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을 하나도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학생회나 과외 서클(그때는 동아리라는 말조차 없었다) 같은 것들이다. 한때 전통 있는 교내 사진(동호회) 서클인 연영회 의 가입 모임에 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전혀 나가지 못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일초도 주저 없이’ 그런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부분 대학시절의 ‘멋과 보람’을 학교 밖에서 찾으려 했고, 또한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결혼 후에 ‘아내’ 연숙이 학교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교내 활동의 멋과 보람 같은 것도 충분히 실감 하게 되기도 했지만, 재학 당시 나는 그런 교내 활동은 그저 고리타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 졸업앨범을 다시 보면서 그 오랜 세월 잊었거나 몰랐던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정말 우연히 이 재동국민학교 동창을 이번 앨범에서 보게 되었다. 일부러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신문영은 나의 지나간 재동국민학교의 추억 blog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던 바 있었고, 그 후에 또 우연히 googling으로 다시 이 친구이름이 연세춘추(연세대 교내신문)와 연관됨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재학 당시 연세춘추 교내 신문에 관련된 과외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문과대학생들이 하는데 어떻게 상과대학 생인 그가 그곳에 관련에 되었을까? 연대 입학 후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사실 이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외모가 완전히 ‘현대식’이었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고수한 것이다. 아마도 최현배 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남과 조금 다르고, 앞서가는 연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이 좋았다. 연세대 다닐 당시 (아마도 도서관이 아니면, 학생회관에서) 잠깐 신문영의 얼굴과 완전히 닮은 사람을 보았었는데, 이제야 100% 그의 존재가 이 졸업앨범을 통해서 확인이 된 것이다. 상경대학의 상학과를 다녔고, 연세춘추에 관련된 사진에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1971년 졸업이었으니까 이 친구도 일년 재수를 했거나 휴학 같은 것을 했던 모양이다. 이제 유일한 의문은, 어떤 중,고등학교를 다녔나 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꽤 많은 중앙고 동창도 이곳에서 처음이나,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분 재수 입학을 해서 보통보다 1년이 늦게 졸업을 하게 되는 듯 싶었다. 나처럼 1년을 휴학을 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재수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 중에 경영학과의 이수열과 박종섭이 있다. 이수열은 나의 중앙고 3학년에 대한 blog에 이미 회고한 바가 있다. 졸업식 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어서 사진도 남아있다. 이수열은 중앙고 3학년 때, 이과(理科)로 분반이 되어서 대입준비를 했는데, 어떻게 상경대로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박종섭은 중앙고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그러니까 역시 이과였는데, 어떻게 이 친구도 상경계열로 가게 되었는지? 특히 박종섭은 국민학교 때부터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학교, 중앙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그것도 졸업동기.. 이 정도면 참 우연치고는 대단하지 않을까? 그것에 비해서 우리는 한번도 친구가 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참 대단한 인연이다. 박종섭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크게 성공한 동창, 동문이 되었다. 나중에 현대 반도체(Hynix) 의 사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는지.. 확실치 않다. 그 이외에도 상학과 권세용, 정외과 구만환, 지질학과 윤병훈 등이 졸업앨범에서 반갑게 보이는데, 이들 역시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다. 기계과의 김영철.. 중앙고 3학년 ‘반창’인데, 사실 연세대 재학 시 그를 본 기억이 거의 나지를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친구도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대성공’을 한 친구로, 동국제강의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중앙고 1년 후배들, 내가 1년을 휴학을 한 바람에 ‘동급생’이 된 친구들이다. 전기과 박창희, 김태일, 기계과 양규식 등… 박창희는 나의 죽마고우로써 후배라는 생각보다는 ‘불알친구’ 라는 생각뿐이다. 김태일, 재학 시 같은 클럽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양규식, 재동국민학교도 1년 후배인 활발한 친구, 역시 재학 시 학생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학훈단(ROTC, 일명 바보티씨)을 거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오래 전 시카고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1976년 쯤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들으니 LA로 이사를 갔고, 지금도 거기서 ‘매일’ 동창들과 골프를 즐긴다고..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상경대 상학과 김상우..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금새 알아 보았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는 중앙중학교를 나와 같이 다닌 김시영 이었다.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안 바뀌었다. 중앙중학교 3학년 때 나의 다른 친구 이경증과 단짝이던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친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졸업앨범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연세대 시절 사실 그를 캠퍼스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시영이 김상우로 이름이 바뀌었던 친구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

건축과의 장학근씨.. 64학번이라고 하니까 나의 2년 정도 연배인 셈이다.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곳 아틀란타에 왔을 때, 이곳 연세대 동문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부인 장(피)영자 동문도 66학번 연세대 기정대 출신으로 나와 사실 입학 동기인 셈이었다. 학번이 거의 비슷한 연대 선배가 이곳에 같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조금 가까이 지내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선배의 얼굴을 이번에 졸업앨범 건축과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장 선배는 이곳의 ‘유지’ 격에 속해서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한인사회의 이곳 저곳에 많이 관여가 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식, 장례식 같은 데서 꼭 이 장 선배를 만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오래 전, 이곳의 다른 ‘유지’ 격이었던 김예순씨 (치과의사)의 장례식에서는 ‘울면서’ 조사를 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연세대 동문 (박만용씨)의 장례식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전공(건축과)도 충실히 살려서 이곳 주택에 관련된 연방정부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기계과 민옥기..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나의 졸업앨범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Ohio State 다닐 때 그를 잠깐 보았다. 역시 같은 기계과에 있었다. 학교 기숙사 버스에서 가끔 보기도 하고 같은 공대라서 얼굴이 익었고, 연세대 피크닉에서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동문이라서 웬만하면 조금 친해질 수도 있으련만.. 전혀 mutual chemistry가 없었을까.. 느낌이 그랬다.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표정’ 일 수도 있고, 좋게 말하면, 그저 사람을 피하는 듯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와 연세대 졸업동기라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같은 기계과 출신 나의 친구 김호룡에게 물으니 ‘검정고시 파‘ 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연세대 재학 당시에도 그렇게 ‘행동’을 했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김호룡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뒤 늦게 그 소식을 확인하려고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본적이 있었다. 둘 다 연세대 기계과 교수단에 있어서 그리 한 것인데, 나를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의 그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들어맞았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앨범, 1971년

 

Mary Hopkin – Those Were The Days – 1968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British Oldie, Beatles 의 Paul McCartney가 제작한 이곡은 역시 비틀즈의 Apple Record label 판매로  Mary Hopkin 의 debut곡이 되었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까지 올랐다. 그 당시를 생각케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Mary Hopkin – Goodbye – 1969

다음 해, 역시 비틀즈의 Paul McCartney 곡으로 Mary Hopkin의 두 번째 hit song이 되었다. 그 후에 다른 hit song 도 있었으나 우리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생인 그녀는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세계적 fashion model이었던 영국의 TwiggyBeatles에게 소개 했다고 한다.

 

 

윤태석,  중앙고 57회 앨범에서 1966

윤태석, 중앙고 57회 앨범에서 1966

윤태석, 박종원, 그리고 비행기.. 이들은 오래 전 한때 나의 친구들이었다. 처음 만난 친구가 윤태석.. 중앙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1962년이었다. 교실에서 윤태석은 나의 바로 뒤에 그의 짝꿍 정만준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때 윤태석은 이미 우주과학과 비행기 광이었다. 그 나이에 그런 것들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것들을 알고, 좋아하는 정도가 완전히 프로 급이었다.

 윤태석과 박종원은 그 당시 이미 서로 친한 친구로써 모형 비행기를 같이 날리고 있었지만 내가 윤태석을 통해서 박종원과 만나게 된 것은 대학 1학년에 된 후였다. 윤태석은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비행기와 더불어 우주과학에도 심취해 있었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부지런히 총천연색으로 인쇄된 미국 우주개발에 대한 화보들을 교실의 뒤에다 붙여놓곤 했다. 그 당시 반 친구들, 좋건 싫건 간에 그런 사진들을 보면서 소련과 미국의 우주경쟁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요새 같으면 물론 칼라 텔레비전 현장 중계로 보겠지만 그 당시는 사실 흑백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Soviet Union)은 1957년 10월 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프트닉(Sputnik)에 이어서 역시 사상 최초로 cosmonaut 유리 가가린 (Yuri Gagarin)의 지구궤도 완전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미국이 또 한발 늦은 것이다. 한 달 후에 미국도 알란 쉐퍼드, astronaut Alan Shepard의 우주비행에 성공을 했지만 그것은 완전 지구궤도비행이 아니고 비교적 짧았던 15분 정도의 우주비행이었다. 그러다가 1962년 2월 드디어 미국도 존 글렌, astronaut John Glenn Jr.를 space capsule 우정7호Friendship 7에 태우고 거의 5시간 동안 지구를 3번 선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때가 바로 미국의 첫 번째 NASA space program인 머큐리 프로젝트Mercury Project가 진행되던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던 때였다.

John Glenn Jr. on Friendship-7, 1962

John Glenn Jr. on Friendship-7, 1962

이 당시에 윤태석을 알게 되어서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을 생생한 화보로 목격을 할 수 있었고, 또한 모형비행기에 대해서도 그에게 많은 것을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 모형비행기라면 조잡한 수준으로 대나무와 습자지 같은 종이, 고무줄로 프로펠러를 돌리거나, 글라이더로 날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가끔 만들어 보고 날리기도 했지만 무언가 잘 되질 않았다. 재료가 형편이 없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가끔 학생을 중심으로 모형비행기대회가 열리곤 했지만 나는 꿈도 못 꾸었는데 윤태석은 박종원이란 자기 친구와 같이 참가하곤 했다고 들었다.

 그때 윤태석이 학교로 가지고 와서 보여준 잡지는 미국의 Model Airplane News 였고, 그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만들던 모형비행기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습자지, 창호지로 만들던 것은 전혀 없었고, ‘진짜’ 비행기와 똑같은 것들, 게다가 고무줄 동력이 아니고 조그마한 엔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짜 비행기를 그대로 축소한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흥분한 것은 잠깐이고,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미국에서는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미국 환상’만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윤태석과 헤어지게 되었다. 중앙고교 3년 동안 한번도 같은 반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에 대해서도 거의 잊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비행기 대신에 망원경과 전파과학에 심취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가면서 윤태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연세대 전기과엘 갔고, 태석이는 고대 물리학과에 갔는데, 어떻게 연락이 되어서 만나게 되었는지 그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런 어느 날 태석이가 박종원과 함께 우리 집엘 놀러 와서, 말로만 들었던 박종원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도 나와 함께 중앙 중 고교 6년을 다녔지만, 한번도 같은 반을 해 본적이 없어서 사실상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큰 상관이 없이 우리들은 같은 취미를 가진 동창생으로 다시 만나서 비행기 이야기로 얘기꽃을 피웠다.

gas engine powered model airplane, Angst, 1966

나의 ” engine, Enya 019″ line-controlled 모형비행기, Angst, 1966

 알고 보니 태석이보다 박종원이 이쪽 계통은 더 프로였다. 청파동에 있던 그의 집에 가보니 진짜 미국 잡지에서 보던 엔진이 달린 비행기들이 있었다. 엔진도 꽤 많이 가지고, 숫제 조그만 machine shop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은 2층 양옥으로 상당한 고급주택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립학교 재단의 이사장이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그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진짜’ 모형비행기 만드는 데 시간을 쏟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쓰인 시간 때문에 대학의 강의를 듣는데 상당히 stress를 주어서 성적을 유지하느라 상당히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1966년 봄이었다. 그 봄을 나는 온통 엔진 비행기 만드는 것, 날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것들에 필요한 재료들은 거의 전부가 미8군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라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그런 것을 취급하는 유일한 곳은 ‘스카라 극장’앞, 퇴계로 근처에 있었던 ‘합동과학교재사‘ 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도 사실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날린 장소가 더 중요했다. 어느 곳이고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서울에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학교 운동장은 예외였지만 대부분 출입이 제한 되어있어서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 곳이 교외선을 타고 가는 화전비행장이었다. 말이 비행장이지 제일 작은 신문사에서 쓰는 경비행기들이 활주하는 커다란 풀밭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한가한 곳이고 넓은 평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교통편이 불편했는데, 그 복잡한 교외선 열차에 비행기를 들고 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모형비행기 대회, 1966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모형비행기 대회, line-control 비행기가 나르고 있다.1966

한번은, 졸업 후에 처음으로 중앙고교 뒷산까지 비행기를 들고 가서 날렸는데, 나의 실수로 비행기가 완전히 박살이 나기도 했다. 그때 비행기 조종은 거의 U-reely 이라는 것을 비행기 날개에 연결해서 빙빙 돌게 만들고 그것으로 뒷날개의 elevator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별로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사실 진짜 프로들은 radio control로 조종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radio control의 값이 너무나 비싸서 머리만 굴리다가 못하고 말았다. 무선 조종 비행기의 시범을 한번 보았는데,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공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열린 ‘한국 모형비행기 대회’ 란 것이 박종원과 참가를 했다가 본 것이다. 학생도 많았지만, 직장인, 미군들이 대거 참가를 한 아마도 제일 큰 대회였을 것이다. 기어코 무선조종을 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기재를 구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조금씩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서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만났던 윤태석과 박종원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경에 마지막으로 윤태석을 그의 짝꿍이었던 정만준과 같이 한번 만났고, 그것이 그들과의 마지막이었다. 세월의 수레바퀴가 구른 한참 뒤에 윤태석과 중앙고 동창회의 인터넷을 통해서 연락이 되었는데, 그는 경인에너지에서 오래 근무를 했고, 학교 선생님인 부인과 결혼을 했다고.. 현재는 비행기 대신에 망원경에 더 관심을 쏟는 모양이었다. 한때 개인 천문대를 만들 계획을 다 세웠다고 들었다.

미국에서는 모형비행기는 상당히 프로 급의 취미에 속하고 역사도 amateur radio(HAM)과 더불어 상당히 오래 되었다. 고국도 경제여건에 따라 이런 취미는 미국이나 일본 수준까지 온 듯하다. 나의 조카(임준형)도 한때(대학시절) 이것에 심취를 한 모양이고, 그것이 거의 15년 전인데 그때 벌써 무선조종을 손쉽게 하는 것을 보고 그 수준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이 ‘고급취미’ 때문에 학교공부를 소홀히 해서 두고두고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멋진 추억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윤태석, 박종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January 2022
S M T W T F S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29
3031  
Categories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