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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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e v. Wade… 1973~2022? 정말인가? 각종 소식통들이 이 놀라운 소식을 이제는 확실한 사실로 보도를 하고 있으니.. 나의 신앙적 믿음이나 교회의 가르침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확실히 이 ‘자유낙태법’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 자유가 아닌 것, 생명은 하느님의 것, 등등을 이해하고 믿고 살았으니 사실 이 소식은 ‘만세!’ 를 외칠 만한 ‘거의 믿을 수 없는’ 희소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상외로 담담, 덤덤, 아니 냉담 수준이 되었으니.. 모든 것은 근래의 해괴한 정치적 사태, 특히 ‘Donald 개XX’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그 개XX가 이것으로 정치적 점수를 조금이라도 얻게 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냉정하게 나의 입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것은 그 개XX와 별개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입장, 사회정의를 포함한 범 인권존중 등은 고수 하지만 원천적인 인간생명의 의미와  ‘올바른 성도덕관’은 고수하는 입장을 지키면 될 것이다. 참 급변하는 세상이 우리를 혼란 시키고 있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성모님이시여, 부여된 생명의 존엄을 지켜주소서…

 

맑은 머리로 산뜻하게 일어난 편안한 아침, Almost stress-free day No.2!  아무리 날씨가 code orange라고 하지만 나의 머리 속은 상쾌한 것으로 가득 찬 느낌, 어제부터 시작된 이런 조금 이상한 날, 언제까지 가려나~ 하지만 상관없다, 현재가 제일 중요한 것이니까. 책, ‘물이 본 세상‘에서 힌트를 받으며, 조용히 감사하며 기도하는 자세로 하루를 보내고 싶은데…

‘Donald 개XX’ 냄새에 과잉반응을 하는 나의 모습, 이상한가? 아니다, 내가 정상임은 확실하니까.. 그 냄새를 풍기는 각종 정치군상들, 이곳 local은 내주 화요일이 지나야 결말이 나니, 나는 그것이 신경이 쓰이고 stress의 잠재적 원인으로 당분간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저 hope will triumph 를 잊지 말자. 그 중에서도 Pa의 senate race가 나의 촉각을 곤두세운다. 개XX의 냄새를 흠뻑 받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또 다른 개XX [Turkish fake doctor, Oz] 의 운명이 아직도 결말이 나지를 않았다니, 안타깝기만 한다.

Georgia EC, 아틀란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 BACK! 세상이 변한 것을 2년 만에 다시 실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좋던 나쁘던 꿈같은 2년의 세월의 끝에 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거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아틀란타 대교구의 용감한 대 결단의 결과가 아닐까? 2년 전에 새로 부임하신 대주교님의 첫 거대한 교구 행사라서 그분의 역량이 어떻게 드러날지 궁금하다. 그 전까지 이 행사를 거구의 위엄으로 주도하던 ‘흑인’ Archbishop Wilton Gregory, 당시의 대주교님, 우리의 희망과 예상대로 추기경이 되고 미국 천주교 심장부인 워싱턴 DC 대교구로 가신 것도 Pandemic 직전이었다. 이 Wilton 미국 첫 흑인 추기경, 나와 동갑으로 친근감도 가지만 혹시 바티칸과 계속 좋은 ‘최고 인연’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닐지… 상상도 해본다. 올해 성체대회, 현재로서는 물론 참가하려고 하는데, 우리와 같이 갈수 있는 사람들에 관심이 간다. 혹시 안나, 아가다 모녀자매, 그리고 장베로니카 자매와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을 듯한데…  과연 뜻대로 될지…
오늘은 Holy Family 성당 미사도 갔기에 정말 유쾌한 나머지 하루를 예상했었지만 너무나 stress에서 벗어난 것을 즐기려다가 거의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거의 휴일처럼 보낸 셈인데… 조금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불만은 없다. 이렇게 쉬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그만 일이라면, garage의 창문을 다시 열고 box fan을 임시로 설치한 것, 그래서 오늘 이상기온, code Orange 90도가 넘는 날을 시작으로 본격적 여름에 대비를 한 셈이다. 아~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일단 찾아 왔으니…

 

 

새로니가 보낸 family video를 보고 한참 웃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웃었다. Ozzie와 유나 Duo ‘Odd Band’ 의 ‘이중창’, 유나의 선창에 이어 Ozzie의 ‘화답송’이 네 번이나  계속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hilarious의 극치라고나 할까… 이것은 역사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의 YouTube channel에 post를 해 볼까 하는 생각, 아니 할 것이다. 나의 channel은 현재 완전히 잠잠한 것이기에 이것도 shakeup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또한 이것이 ‘안전한 곳’ 에 save가 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어제 First of May 연례 posting을 하면서, 확실하게 Marian Month,  ‘성모성월 5월’의 시작을 실감한다. 그렇다, 5월인 것이다. 가정, 그것도 어머니의 달, 적당히 더운 듯한 나날들, 이때의 단비의 맛과 멋, 각종 꽃들이 하루하루 파랗게 일어나는 듯… 아~ 멋진 5월의 시작이 아닌가?  하지만 지나간 4월은, 김순애 ‘4월의 노래’ 조차 제대로 회상하지 못하고 지나갔고, 각종 크고 작은 근심걱정의 시간들… 그래, 잊자 잊고 앞을 보자.
교황님 Pope Francis,  전세계 신자들에게 희망사항, 아니 요청사항이 있었다. 5월 중에 Ukraine의 평화를 위한 ‘매일 묵주기도’ 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런대로 이미 매일 저녁기도에서 그것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성을 드리며 바치고, 화살기도를 추가하면… 아~ 성모님, 점점 멀리 느껴지는 당신의 모습.. 제발 가까이 오셔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저희들을 보호, 전구해 주소서, 성모성월에는 더욱 더 당신을 가까이 느끼고 싶습니다.

 

모처럼 ‘멋진, 마음에 드는‘ 월요일 아침을 보냈다. 아마도 최상, 최선의 월요일 아침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 최상의 수준에서 한 가지가 결여된 것도 사실이다. 아~ 한 착한 영혼을 가진 따뜻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우리와 함께 어울렸으면… 하는 꿈같은 소리다. Holy Family 동네본당, Pandemic에서 잠을 깨면서 아주 전보다 더 활발하고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이 인상적, 평일 매일 아침미사 그것도 월요일 아침 상당한 교우들이 매일 기도그룹에 이어 에너지 넘치는 미사까지 이어지는 것을 오늘 목격한다.  성전제단 뒤편이 모두 유리창으로, 5월 초의 신록이 신자들의 눈을 현란하게 하는 것, 어찌 짧은 단어들로 표현을 할 수 있으랴, ‘감사합니다~’.
월요일 아침[식사]를 McDonald에서 하는 것, 가끔은 정말 효과적인 생각이다. 하루가 평소와 다르게 시작되는 효과는 실로 큰 것이다. 맛도 주변의 모습도 느낌도 모두..  Georgia Primaries에 제발 Asian 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라는 엽서, 5월 24일까지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 하는지 결정을 하는 것, 이번에는 조금 쉬운 작업이 되었다. 우선 생명을 걸고서라도 뽑지 말아야 할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DONALD개XX가 흉측한 모습으로 침을 튀기며 ‘지지’한다는 ‘한심한 다른 개XX’를 말한다. 결과도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것은 우리 2표의 능력권외의 일이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다른 도움,  ‘기도’의 힘을 빌리면 된다.

 

2022년 부활절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실토를 한다면: 토요일 밤 부활성야 와 일요일 부활주일 미사 둘 다 참례할 수 없게 된 것, 실망스런 결과임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갑자기, 생각지도 않게 우리에게 온 것일까? 전, 아니 오래 전에는 성 목요일 미사 직후에 어두운 성전에 조용히 앉아서 수난감실 성체조배를 기다리고, 자정이 넘을 때까지 성체 앞에 머물렀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런 것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되고… 솔직히 그때가 그리운 것이다. 자꾸 우리는 뒤로 밀려나는 걱정 아닌 근심을 또 걱정하고…
오늘 이렇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역시 COVID 2nd booster shot이라고 볼 수 있지만, 솔직히 그것이 변명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꾀병까지는 아니었어도 무언가 귀찮고 꾀가 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booster shot의 후유증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렇게 몸이 쳐지고 불편하고 잠도 오는 듯하고, 전에는 경험을 못한 것이어서 아리송했던 것, 그것은 분명하다. 이번에는 나의 알량한 신심을 과시라도 할 양으로 일요일 아침에는 ‘혼자서라도’ Holy Family 동네성당 아침 7시 부활미사엘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게…  그래, Vatican의 미사를 보며 보충을 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오늘 아침은 거의 완전한 컨디션으로 부활절 아침에 편하게 느긋하게 못했던 부활 인사 카톡 메시지를 모두 ‘돌렸다’. 그러고 나니 조금 마음이 안정되는 듯… 살아있다는 기쁨이 넘치고 부활절의 느낌도 들었다. 처음에는 오늘 하루 ‘죽상’을 하며 보낼 것으로 염려를 했지만 이렇게 쉽게 회복된 것이 놀랍고 기쁘기만 하다. 부활주일을 ‘건진’ 것이다.
오늘은 나의 카톡 친구들 모두들과 소식을 나누었던 것이 나를 재빠르게 ‘회복’시켜주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특히 나는 이제 외롭게 혼자서, 아니 우리 둘이서만 얼굴을 마주보고 살기가 싫다는 것. 뒷마당에 나가서 화초들만 있으면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듯 조금은 오만한 삶의 자세는 과연 보기가 좋은 것일까? 이제부터는 남들처럼 나도 ‘홀로서기’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 아직도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럴 때가 재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옴을 느낀다. 이것도 나에게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는 것인가? 지난 10여 년, 둘이 짝으로 활동, 외출을 했던 것은 이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야 하는 것인가, 조금은 아쉽고 심지어 서글프기까지 하니… 아~ 성모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Pandemic이후 한번도 만날 수가 없었던, 이 목사에게 간단하게 부활인사를 보냈더니 예상치 않게 음성 통화로 연결이 되었는데, 이유는 ‘사모님’이 오늘 아침에 긴급 수술 차 입원을 했다는 놀라운 소식. 하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나중에 수술이 잘 끝나서 입원실로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기도를 부탁하는 다급한 목소리여서 놀랐지만 이제는 ‘장폐색’의 정체를 알게 되어서 안심을 할 수가… 이 목사는 지금 현재 서울에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곳 교회의 부활절 예배는 어찌된 것인가, 모를 일이다. 이어진 소식은 ‘수술이 잘 끝나서 입원실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마취가 풀리면 회복실로 가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고비는 넘겼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도 부활절과 무슨 관계는 없는 것일까?

 

Palm Sunday, 성지수난주일, 성주간이 드디어 오늘부터 시작되는가.  역시 머리 속은 … 아~ 나는 사순절을 제대로 충실히 보내지 못했다~ 는 자괴감과 후회로 시작이 된다. 매년 그랬을 것이지만 올해는 조금 더 그런 것이, 판공성사를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 동안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본당 신부님들이 최근 신임 신부님 이후로 갑자기 멀어진 듯한 섭섭함도 나를 조금 우울하게 한다. 그래, 여기서 stop! 지나간 때보다는 오늘부터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되는 거야.
아침 8시반 Palm Sunday의 미사는 물론 교중미사보다는 에너지가 떨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성지가지를 모두 들고 제대로 미사를 한 것, 이렇게 2022년의 성주간이 시작되는 거다.  신부님 강론도 나에게는 특별히 다가왔는데, 역시 요즈음 고통으로 다가오고 느껴지는 ‘작은 걱정, 공포, 근심, 우울’ 을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그 고통을 같이 하신다는 것, 대부분 상투적으로 들리기도 했던 그것이 오늘은 가슴 깊이 다가온 것이다. 이것이 2022년 성주간의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

지난 주일에 이이서 오늘도 우리들 소그룹 자매님 4명과 나, 5명의 하얀풍차 환담모임이 계속되었다. 장베로니카 자매가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 지난 주였는데, 오늘도 용케 합류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차갑게 느껴질 때가 많았고, 심지어 거부감까지 느낄 정도였던 이 자매, 가까이서 이야기를 해 보니 혼란스럽다. 어쩌면 그렇게 다른 모습, 다정함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한마디로 내가 너무 빨리 단죄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것, 즐겁고 유쾌한 놀람이었지만 그것에 못지않은 것이 있었다. 지난 주부터 아가다 자매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듯한, 아니 거의 라자로처럼 죽음에서 일어난 듯한 행동거지… 나는 아직도 놀라고 있다. 치매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지난 번이 이어 오늘도 완전히 정상적, 다정한 모습의 아가다 자매님의 모습… 혼란스럽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혹시 우리 둘이서 기도를 한 것도 한몫? 정말 세상은 이래서 살 맛이 나는가?

오늘 저녁 늦게 Corona booster shot 예약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고 있었다. Pandemic이후 오랜 동안 근처에도 못 가보았던 YMCA,  그 바로 앞에 있는 이곳 Publix Supermarket에서 이것을 맞게 되었다. 3주를 기다릴 줄 알았다가 새로니의 예약 덕분에 일찍 맞게 되었지만 사실은 주변의 아는 사람들 거의 다 맞은 것을 알면 이것은 너무나 늦은 것이 아닌가?  최근에 거의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코로나 바이러스, 다시 감염률이 오르고 있다는 소식,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정말 골치 아픈 세상을 살고 있다.

결국은 우리도 이렇게 해서 COVID booster shot 접종을 받았다. 이것으로 ‘당분간’ COVID 로 죽는 chance는 아주 낮아진다고 한다. 이것을 맞는 것,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것,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인데 왜들 그렇게 앙앙거리는 것인가? 이번 Pandemic을 겪으며 새삼 깨달은 것, 이 세상에 정말 바보, 병신, 아니 거의 criminal급 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불쾌한 사실, 어쩌면 그렇게 무식하고 남을 배려 못하는 병신, 무지랭이들이 득실거리는 걸까… 솔직히 미안한 소리지만 그런 부류 인간들, 이 병에 감염되어서 죽지는 말고,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1+1=3 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은 인간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오늘 접종은 의외로 밤시간에 차를 drive해서 가는 기회가 되었다. 집에 들어오면서 접종의 느낌 대신에 밤시간에 drive해서 나갔다 온 느낌을 나누었다. 정말 오랜만인 것이다. 밤시간의 밖은 우리에게 조금은 불편한 모습들, 확실히 이것으로 우리는 활동적인 세대에서 이미 멀어지고 있음을 절감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착잡한 심정이다. 옛날 옛적, 오밤중에 장시간 drive하며 돌아다니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딴 나라 세상 같기도 하고… 조금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요즈음 나를 매료시키는 Thomas Berry의 거시우주적 자연관이나 어제 읽었던 Avery Dulles [추기경]의 ‘자연’ 체험담 등이 나의 보는 눈을 더욱 활짝 열어주는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특히 Dulles 신부의 이야기는 너무나 흥미롭다. Dulles 집안은 미국에서 유명한 명문가문이다. 나도 어렸을 적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인 John Foster Dulles를 기억할 정도니까.. 그의 아들이 바로 Avery Dulles라는 것인데 집안의 후광과는 상관없이 이 추기경님은 미국 제일가는 가톨릭 신학의 거두인 것이다. 이분이 대학시절까지 무신론자에 가까운 agnostic였는데 한 순간에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내가 요사이 유달리 깊은 가을의 모습에 감동하는 것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이 추기경도 어느 날 나무의 모습을 보다가 깊은 영감을 느끼고 곧바로 가톨릭에 입교를 했다고 한다. 비슷한  case로는 유명한 당대의 석학 Narnia Trilogy로 알려진 C.S. Lewis 의 천주교 개종 일화도 있다.

 

I walk therefore I am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오늘 도 Ozzie와 둘이서 정처 없이 2시간을 걸었다. 그야말로 spectacular, gorgeous day, 깊어가는 가을의 모습, 이곳에 산 이후 제일 멋진 가을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아니면 내가 자연을 보는 눈의 차원이 올라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눈으로 들어오는 물리적(광학적) 그림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뇌 능력이 발달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 이상의 형이상학, 초월적인 현상도 배제할 수 없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오늘 드디어James Martin신부의 걸작,  ‘성자처럼 즐겨라!’ 의 ‘필독서’ [필사, 독서의 약어]가 일단 완료되었다. 재독을 하며 교정을 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책의 요점은 대강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즐겁고 명랑한 신자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는  마틴 신부의 경험적 논문 급의 정말 탁월한 솜씨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나와 어떻게 연관을 지을까 하는 과제는 남는다. 읽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긴 했다. 우선 나와는 거리가 먼 어려운 요구라는 것, 나는 어쩌면 너무 심각한 자세로 살고 있다는 것, 그런 나와 함께하는 나의 주변 가족, 지인들… 미안하기도 하다.

 

¶  8월 15일, [대한민국]광복절,  [가톨릭] 성모승천 대축일…  하지만 근래에는 나에게 광복절보다 더 중요한 날이 되었다. 이날은 성모 마리아가 지상의 삶이 끝난 후 육신이 하늘[천국]로 부르심을 받은 날로써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의무 대 축일이다. 올해는 [pandemic] 사정상 대성전 참례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워 online 대축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수동적인 참례라도 큰 걱정 [건강, 경제 등]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고맙게 생각해야 할 듯하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  교황의 무류성 [papal infallibility]을 배경으로 교회 교의 敎義의 하나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교회가 이렇게 선포한 것으로 우리들은 안심하고 교회 안에서 성모님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1 매일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묵주기도, 그 중에서 오늘을 맞아 영광의 신비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 올리심을 묵상합시다’ 의 의미를 더욱 일깨운다.

We proclaim and define it to be a dogma revealed by God that the immaculate Mother of God, Mary ever virgin, when the course of her earthly life was finished, was taken up body and soul into the glory of heaven.

오늘 live streaming으로 참례한 순교자 성당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참 좋았다. 큰 기대를 안 하면 이렇던가? 우선 이 방문신부님, 콧수염이 안 보이니 훨씬 보기가 좋았다. 미사 강론을 들으며 나는 눈물까지 흘렸다. 성모님의 고난 중의 희망, 코로사 사태를 가는 우리들에게 정말 본받을 귀감 중의 귀감이라는 것, 가슴 속 깊이 그 성모님의 용기가 나를 일깨운다.

 

¶  어젯밤에는 밖에서 무언가 내리는 듯한 느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과연 나가보니 약간의 이슬비가 내린 것이 보인다. 소낙비를 바랐건만 어째 이렇게 가랑비를… 아주 조금… 그래도 땅이 축축한 것은 정말 반갑다. 하늘도 모처럼 구름이 잔뜩 끼어서 비록 기온은 높더라도 시원한 느낌이다. 하루 종일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알고 보니 오늘 기온은 요사이의 그것에 비해서 무려 10도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오늘이 말복 末伏인 것을 감안해서 분명히 최악의 더위는 서서히 우리를 떠날 것이다.

 

¶  S 아오스딩 형제, 참 줄기차고 변함없는 사람, 아침에 카톡 메시지를 보니, 운동하러 Stone Mountain Park에 가니 오늘 무슨 시위가 있다고 문이 닫혔다고 쓰여있었다. 참, 요즈음 들어서 이 친구가 부러울 때가 있다. 자기 하고 싶은 것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하며 사는 친구…  그래서 요새와 같은 pandemic 하에서는 이 친구가 사는 방식이 나보다 더 심리적으로 건강한 것이 아닐까, 부러운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삶의 방식을 터득했을까, 이제 어떤 부분은 내가 배우고 싶을 정도다.

 

¶  뜻밖에 집 뒤쪽에 사시는 고국동포 B 선생님 부부가  우리 집 앞문까지 와서 커다란 수박을 주고 가셨다. 물론 처음에는 귀찮아서 door bell 을 무시했는데 또 역~쉬 연숙의 기지와 용기로 큰 실례를 피할 수 있었다.  귀찮은 sales person일 것으로 생각을 했기에 그런 것이지만 가끔 이런 예외도 있긴 하다. 참, 앞 뒷집으로 산지 거의 30+ 년이 가까워 오는 이 인연, 하지만 참 멀게 살아온 야릇한 인연인가? 언제나 나는 이분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훨씬 가깝게 인생말년을 보낼 수도 있었다는 후회가 남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하며 생각하지만 당장 눈 앞에 안 보이고 잊게 되는 정말 이상한 관계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술도 같이 하고 식사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 기다린다.

 

  1. 개신교 형제들, 무조건 반발하기 전에 심각한 공부를 조금 더 하고 대화를 하면 어떨지…

성령 강림

 

5월의 마지막 날인 동시에 마지막 주일인 5월 31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그리스도 교회가 탄생한 날로 기념하는 성령강림 대축일 Pentecost Sunday 이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이 사도들에게 불꽃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잇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2:1-4]

 

이날을 왜 그리스도교회가 탄생한 날로 정했는가를 보면, 이 성령의 힘으로 사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이들이 담대히 전세계에 퍼뜨리기 시작한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이었고 그것이 교회공동체, 가톨릭 교회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날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미사가 정지되었던 이후, 처음으로 아틀란타 한국순교자 성당이 공식적으로 공개 미사를 드리는 주일이기도 해서 관심을 가지고 online미사에 참례하였다.

미국 성당들도 하나 둘씩 미사를 재개했지만, 이곳 저곳 모두 미사참례 조건이 비교적 자세하고 까다로웠다.  100명으로 제한, 마스크 착용 등은 기본이지만 미사 이외의 모든 활동은 전면 금지였다. 게다가 권고사항으로 65세 이상은 당분간 자제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현명한 선택 분별을 해야 하는 것으로, 솔직히 귀찮고 골치까지 아픈 것이 아닌가? 결국 우리는 당분간 지켜보기로 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날 미사광경을 보니, 미사 참석인원이 30명 정도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비교적 나이가 있는 교우들로 보였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비교적 젊은 교우들로 100명 가까이 올 줄 알았는데 이것은 조금은 뜻밖이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평소에 열심히 참석하던 열성교우들이 역시 이날도 자리를 채운 것이다. 신부님도 이것이 조금은 뜻밖인 듯한 인상을 보였는데, 30여명 정도면 일단 ‘수칙준수’에 대한 안심은 되겠지만, 적은 숫자에 실망도 하셨을 듯… 하지만 이것은 첫날이니까 다음 주에는 분명히 훨씬 더 많은 교우들이 ‘몰려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공식미사 재개 첫날

 

이날의 강론의 주제 역시 성령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로서는 이 강론을 들으며 묵상할 자료들이 참으로 많았다. 개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신학적인 것까지…

평화란 무엇인가? 나에게 평화와 이기적인 평화. 모두가 갖는 평화를 위해서는 싸워라. 그렇게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탓. 이 용기는 성령의 선물이고 가장 중요한 성령의 은사다. 이 용기의 은사가 결여되면 다른 은사들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강론, 이영석 세례자 요한 주임신부님

 

나와 우리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이 강론으로 얼마나 ‘용기의 은사’가 중요한 지를 느낀다. 개인적으로 나도 체험을 했지만, 사실 선택의 용기와 실천의 용기가 없었던 삶은 사실 죽은 삶에 가까운 것이다. 선택과 결단을 미루며 산 것도 용기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용기란 놈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질 않는다. 역시 높은 곳,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St. Peter’s Square에서 교황님의 삼종기도를 기다리며 운집한 die-hard 순례자들.

예전같이 평상적인 모습으로 기다리는 순례자, face mask가 하나도 안 보인다.

 

Vatican Angelus, 바티칸 삼종기도:   지나간 주에 일어난 딸애의 출산 같은 큰 일들을 때문인지, 모처럼 주일미사를 빠지기로 결정한 ‘우리들의 삼일절’ 일요일 오후에 Vatican Youtube 를 보니까 오랜만에 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삼종기도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교황님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 이라며 기도를 하자는 text message를 본 직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기에 사실 여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의 바티칸 삼종기도에 교황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과연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과연 삼종기도 시간에 맞추어 교황님이 창문으로 나타나셨고,  close-up 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조금 피곤한 것 이외에는 전혀 병색이 없었다. 또한 성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순례객은 숫자는 비록 적었어도 얼굴 마스크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태리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율이 아주 높다고 들었는데, 그 지역이 다른 쪽인 모양이다. 하지만 로마나 바티칸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우려는 떨칠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창문으로 등장하신 교황님, 코로나 바이러스는 헛소문..

역쉬… fake rumor 전혀 병색이 없는 교황님, 평소처럼 삼종기도, 메시지를 바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까.. 과장해서 말하면 심한 flu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1) 이 바이러스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점, (2) 감염률이 높은 듯한 점, (3) 경제,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인 파급적인 불안감, (4) 결국은 사회적인 약자에게 미칠 지나친 피해… 등등을 생각하면 조금은 미리 피곤해진다. 왜 하필이면 성스럽기만 한 사순절에 이런 ‘중국발 대형사고’가 났을까? 

 

2020년의 사순절 Lent가 시작되었다.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아침 9시 미사엘 가서 이마에 재 灰로 긋는 십자가를 엄숙하고 고맙게 받았다. 문득 ‘아, 또 새로운 사순절이…’ 하는 자괴감 비슷함을 잠깐 느꼈지만, 올해의 사순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생각을 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갑자기 다가온 ‘손자’의 출산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걱정보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온통 머리 속을 맴돈다.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고?  증손주를 볼 가능성은 제로이므로 이것이 우리가 거쳐야 할 중대사의 거의 마지막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쁨, 후회, 걱정, 안도감들이 완전히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각종 개인적인 관문들, 국민학교입학,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 졸업, 대학교 입학 졸업, 유학출가, 결혼, 출산, 취직, 은퇴, 고아가 되는 슬픔, 자녀 출가, 출산… 70여 년에 걸쳐서 계속되는 이런 일들은 모두가 겪겠지만, 그래도 ‘해 냈다’ 라는 안도감이 앞선다. 전에는 이런 ‘과업’들이 우리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때 늦게나마 이런 모든 것이 ‘안 보이는 은총’의 덕이었음을 알고 가는 것이 제일 다행스럽다.

나를 근원적으로 일깨우고 변화시켰던 2014년 사순절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워낙 거대했던 깨우침이라서 죽기 전까지는 다시 그런 경험을 못하리라고 거의 확신하지만, 그래도 사순절은 나에게는 신비로운 의미를 주는 40일이다. 또한 올해의 사순절은 이런 큰 가족적 진화과정을 겪으며 ‘사람을 사랑으로 구하시려는 사명’의 예수님의 의미를 다시금 차분히,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 사순절의 결론은 역시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잊지 않고, 사순 40일을 보낼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싶다.

 

Scott & Kimberly Hahn 의 잘 알려진 이야기,  ‘개신교 골수분자’였던 이들 부부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던 과정을 자세히 쓴 책의 제목이 바로 Rome Sweet Home이다. 이름부터 이채롭다. 그들에게는 ‘이단 종교의 아성’으로 증오의 상징이었던 로마 교황(청) Vatican 이 결국은 그들에게는 ‘오랜 방황 후에 돌아온 나의 고향’이 된 것이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지난 20년간 아주 조금씩 ‘귀동냥’ 정도로 들었던 것이 전부였다. 주류 크리스천들이 개종하는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큰 이야깃거리는 아니지만 이 부부의 개종은 아주 의미심장, 지각변동적, 특별한 것이기에 ‘사회적, 세속적 뉴스’까지 된 것이 아닐까?

내가 그 동안 이 사실에 대해서 듣고 안 것들은 아주 피상적이고 ‘소문의 수준’ 정도였는데 이 책을 일주일 만에 두 번을  cover-to-cover 로 읽고 나서, 나는 놀랍기도 하고, ‘그러면 그렇지..’하는 안도감, 이제라도 이런 ‘천재 신학자’를 가톨릭으로 보내준 사실이 아주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일 인상적인 표현은 이것이다. 이 사람의 ‘역할, 위치’는  한마디로 Luther in reverse,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종교개혁 reformation의 반대 과정을 거친, ‘개신교에서 기독교의 원형인 가톨릭’으로 거슬러 올라간  장본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본향을 찾았다!’ 하고 외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아니, 모든 독자들이) 제일 관심을 갖고 찾았던 부분은 물론… 어떻게 왜 무슨 이유로 ‘본향’을 찾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부부의 깊은 학자적, 성경신학적인 배경을 알면 절대로 ‘간단한 결정’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이 책으로 느낀 점 중에 제일 나를 부끄럽게 했던 것이 있다면, 역시 Holy Bible, Scripture에 관한 것이다. 역시 가톨릭은 ‘소문’ 그대로 성경에 대한 열정만은 개신교에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가톨릭 신자들도 인정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부러움’이 결국은 개신교의 근본적인, 기본적인, 역사적인 문제중의 문제가 됨을 알면 놀라게 된다. 그러니까, 개신교의 근본 공리적 명제는 Sola Scriptura (성경 유일)와 Sola Fide (믿음으로만).. 이 아닌가? 이것에 ‘근본적, 신학적’ 문제가 있으면 어찌 되는 것인가?

Scott Hahn 은 젊은 시절부터 ‘광신적 성경, 믿음 유일주의자’였고 ‘광신적 가톨릭 혐오자’라고 자부를 하던 ‘유망한 젊은 신학도’였다. 그가 성경으로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의 ‘생애의 고민’은 시작된 것. 처음 그가 경험했던 고민은 ‘어디에 성경만이 모든 것’이라는 근거가 있는가를 ‘탐정적 열정’으로 찾은 것으로 비롯된다. 신학교 젊은 교수시절 한 ‘명석한 학생’의 순진하지만 심각한 질문, ‘성경의 어느 곳에 성경만이 전부’라는 구절이 있습니까?’ Martin Luther이후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던가?  이 사실은 그를 너무나 놀라게 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거기서 끝 나지 않았다. 더 나아가서 성경에는 Sola Fide, Faith Only라는 것 이외에 교회초기의 교부들과 전통들도 같이 강조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타협을 하느냐?  허~~  문제는 성경만이 절대로 옳은 것이라면 이 두 문제는 ‘모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이런 ‘사태’에 직면한 Scott Hahn, 그의 모든 지적 능력을 통해서 그는 결국 전통적인 가톨릭 문헌, 교리를 철저히 파헤치기 시작하고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가톨릭의 교리, 전통, 성경 모두 그들이 공부한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놀라움이었다.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것은 ‘역시’ 성모신심, 교리였지만 이것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한 묵주기도를 통해서 비교적 쉽게 극복이 되었다.

그의 영적 동반자 부인인 Kimberly는 5년 뒤에 그를 따라 개종을 했는데 그 과정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이혼’까지 각오를 한 Scott의 용기는 실로 극적인 것이었고 결국은 그들은 평화 속에서 다시 합류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교황청에서도 인정하는 ‘세계 정상급 신학자’의 대열에 서게 되었고 유명한 가톨릭 대학 Franciscan University의 유명한 교수로서 열정적인 교육, 전교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수 많은 강론 여행을 하며 ‘그릇된’ 개신교 기본교리를 알리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이 명석한 부부 가톨릭 신자를 어떠한 눈을 볼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그래도 ‘신학은 신학으로’ 대하고, 풀어야 하지 않을까?

 

11월로 접어들며, 1일의 ‘모든 성인의 날 All Saints Day‘를 시작으로 2일에는 ‘위령의 날 All Souls Day‘ 를 맞는다. 이 두 날은 모두 ‘가톨릭 천주교 전례력’의 기념일이지만, 11월이라는 ‘깊어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사실 제한된 시간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한번은 ‘죽음, 특히 자기의 죽음’에 대한 성찰, 묵상을 하고 싶은 때가 아닐까…

작년 이맘때 ‘그리운 친구, 양건주’가 고맙게 보내준, 당시로서는 신간에 속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수필집 <기다리는 행복>을 이제야 다 읽게 되었다. 비록 여백이 넉넉히 있는 각각의 페이지에도 불구하고 전체는 무려 4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으로 ‘필사’는 물론 깊이 소화하는데 무려 일년이 걸린 것이다.

내용 중에 ‘순례자의 영성’ 章에서는 위령의 달, 위령의 날을 묵상하는 시와 글이 실려있다. 역시 수도자답게, 죽음은 끝이 아니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임을, 우리들 모두 인생의 순례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래도 그래도 역시 작은 인간이기에 ‘죽음이 있는 곳’은 안 가보았기에 두려움은 인정을 한다. 얼마나 솔직한 표현인가.

이해인 수녀님의 ‘명성’은 사실 오래 전 연숙을 통해서 익히 듣고 짧은 수필을 읽어 보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아주 heavy weight를 들어올리는 기분으로 책 전체를 읽게 되었고, 근래에 조금씩 ‘시詩의 눈 眼’이 열리는 덕인지 수녀님의 주옥 같은 시에서 영성적 차원의 시상 時相을 얻기도 한다.

수녀님의 이력 중에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있다면 나이가 나의 누나와 동갑인 닭띠인 것과, 서울 가회동 성당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있었다. 상상으로 아마도 나와 같은 시절(1950년대) 같은 동네 (가회동)를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참 놀랍고 즐겁기까지 하다. 혹시 재동국민학교 출신이 아닐까 하는 ‘희망’도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수녀님은 조금 떨어진 ‘창경국민학교’ 를 다녔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가회동성당 주일학교 소풍 1955년, 아마도 수녀님은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아닐까..

안타까운 사실은 역시 수녀님의 건강상태, 몇 년 전 ‘타계’ 라는 오보를 접하고 놀랐던 사실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이 ‘누님’의 안녕을 잊을 수가 없다. 고통은 다른 쪽으로 은총이라는 ‘싫은 진리’도 있기 하지만 아마도 수녀님은 그런 진리를 모두에게 보여주시는 듯 보통 나약한 사람들보다도 더 건강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니,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가 role model로 삼을 수 있는 case가 아닐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시와 글의 일부분이라도 머리에 떠오르면 반드시 화살기도를 바치리라.. 항상 생각한다.

 

 

순례자의 영성

 

저무는 11월에

한 장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게 하소서

(……………….)

한 점 흰구름 하늘에 실려 가듯

그렇게 조용히

당신을 향해 흘러가게 하소서

 

죽은 이를 땅에 묻고 와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계절

차가운 두 손으로

촛불을 켜게 하소서

 

해 저문 가을 들녘에

말없이 누워있는 볏단처럼

죽어서야 다시 사는

영원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소서

 

– 이해인, <순례자의 기도> 중에서

 

 

세상 떠난 이들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위령의 달, 위령의 날을 나는 좋아합니다.

우리 수녀님들이나 친지들이 긴 잠을 자고 있는 무덤가에 서면 마음이 절로 차분하고 온유해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떠난 분들에 대한 그리움에 잠시 슬퍼지다가도 그들이 보내오는 무언의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들곤 합니다. 지난해와 올해만 해도 여러 명의 수녀님이 세상을 떠났는데 어떤 분은 매장하고, 어떤 분은 화장해서 수녀원 묘지에 모셔옵니다. 비록 육신은 떠났으나 그들이 너무도 생생히 꿈에 보이거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기도 속에 떠오를 때면, 허무를 넘어선 사랑의 현존으로 행복을 맛보기도 합니다. 오래 전 수도공동체의 수련장이었던 노수녀님을 동료수녀와 같이 병간호하러 가서 환자 수녀님과 성가도 부르고 배도 깎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다음 날 새벽 수녀님은 갑자기 살짝 주무시듯이 고요하게 선종하셨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함께 지켜보던 동료 수녀는 떠나는 수녀님을 향해 “아주 가시는 건가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그 인사말이 어찌나 간절하고 인상적이던지! 잠시 출장을 가거나 지상 소임을 마치고 저쪽 세상으로 이사 가는 이에게 건네는 이별 인사로 여겨져서 슬픔 중에도 빙긋 웃음이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먼저 떠나가서 친숙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은 가보지 않은 세상이기에 두렵고 낯설기도 한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11월, 우리는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가벼움과 자유로움으로 순례자의 영성을 살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아직은 오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잠시라도 묵상하는 것은 오늘의 삶을 더 충실하게 가꾸는 촉매제가 되어줍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매일 외우는 끝기도의 마무리 구절을 묵상해봅니다. 삶의 여정에서 자존심 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을 적마다 언젠가는 들어갈 ‘상상 속의 관’ 속에 잠깐 미리 들어가보는 것, 용서와 화해가 어려울 적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겸손히 내려놓는 순례자의 영성을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을 극복하는 작은 죽음을 잘 연습하다 보면 어느 날 주님이 부르실 때, “네!” 하고 떠나는 큰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  어제 저녁에 backyard에 잠깐 나갔을 때, 아주 오랜만에, 피부에 와 닿는 다른 느낌의 공기를 보았다. 무언가 다른 것, 아하… 바로 ‘가을’이 ‘아주’ 멀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특별히 대지가 타는 듯이 ‘마르게’ 더웠던 올해의 여름은 인상적이었지만 추분을 며칠 앞둔 때라서 잊혀진 가을의 모습이 그리운 것이다.

달력상의 가을은 추분에서 시작되고 며칠 남지 않았다. 그때로 낮은 하루하루 짧아지기 시작하며 나와 같은 나이의 인간, 피조물들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깊은 가을’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모든 것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 올해는 어떠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인가 미리부터 궁금하다.

 

¶  진실되고 심각한 의미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절대’ 를 믿는다 함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쉽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일초, 하루, 매년 살아가는 것이 ‘믿으며 사는 것’인가? 어렵게 보이지만, 의외로 쉬운 답을 찾으면,  ‘나의 인생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의 전환을 하는 것이다. Word On FireBishop  Robert Barron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One of the most fundamental statements of faith is this: your life is not about you. Youre not in control. This is not your project. Rather, you are part of Gods great design. To believe this in your bones and act accordingly is to have faith. When we operate out of this transformed vision, amazing things can happen, for we have surrendered to “a power already at work in us that can do infinitely more than we can ask or imagine.” Even a tiny bit of faith makes an extraordinary difference.

– Bishop Robert Barron (a daily gospel reflection)

 

하루하루, 매달, 매년이 그저 지루하게 느껴지고 사는 것 같지 않을 때 이렇게 조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는가…

Blessed Virgin Mary

 

성모승천대축일,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매년 8월 15일, 우리의 광복절) 을 즈음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거의 9년 전쯤에 처음 읽다가 만  독일의 신학자 Wolfgang Beinert 볼프강 바이너르트의 <마리아 – 오늘을 위한 마리아론 입문> 이란 책,  당시 생전 처음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면서 고조된 성모신심에 힘입어 – 일단 묵주기도를 통해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이지만 – 그 이후로도 가끔  생각하며, 개인 신심적으로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지극히 가톨릭적’인  ‘5대 마리아 교의‘를 다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포근한 인류의 어머니’, 무엇이나 다 들어주실 듯한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려고 무척 애를 썼고 이제는 아주 편하게 나를 ‘개인적으로 대해 주시는’ 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항상 비껴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왜들 그러한 포근한 어머니를 배척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심지어 그런 ‘증오심’을 자랑으로 여기는 인간들을 보면 심한 혼동에 빠진다. 어떻게 그러한 인간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것인지…

역시 이것도 요사이 미국 가톨릭교회의 떠오르는 희망인 LA 교구의 Bishop Robert Barron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사랑에 의한 이성’을 통한 신심, 바로 그것이다. 학문적인 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아무리 뜨거운 신심이라도 수명과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학문적인 체계, 논리적인 뒷받침,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6장에는 ‘마리아론의 기본원리’ 가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것이야 말로 학문적인 approach인 것이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서로 논쟁을 해도 할 것이다.

 

 

마리아論의 기본원리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 교의신학의 가장 중요한 정식은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로 머물렀다.

2.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3.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

4. 마리아는 죄 없는 삶을 영위하였다.

5. 마리아는 사망 후 ‘승천하였다.’

 

신학자들은 특수한 원천기반과 이에 상응하는 인식기준에 입각하여 계발된 모든 마리아 교리에서, 배아 胚芽에 담겨 있는 것 같은 기본원리를 발견해내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원리가 있다면 이로부터 마리아론 전체의 단일성과 응집력은 가시적이 될 것이며, 마리아 신심은 번잡스러움과 과잉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되고 통제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에 관한 명제는 어느 것이든 그 기본원리에서부터 출발할 때 비로소 정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의 정당성 여부는 이 기본원리에 입각하여 실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명제는 하나의 일반적인 교의적 기능을 지니며, 신앙교리 전체구조의 범위 내에서 마리아론 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어떠한가를 제시할 것이다. 또한 이 기본원리는 순전히 조직적인 근거에서만 중요할 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도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견해에 의하면 ‘신앙진리의 위계질서 位階秩序’가 있다. 이 점은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에서 단정되고 있다. 1 신앙의 진리는 모두 진리이지만 이것이 모두 동격은 아니다. 어떤 진리가 – 진리의 함축성은 손상되지 않은 채 – 가장 핵심적인 신앙의 진리이며 인생의 진리인지, 아니면 보다 주변적인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기본원리는 마리아 신심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불가결한 신심인지, 아니면 이 신심이 특별히 정당하고 모범적이긴 하지만 열심한 교회 구성원의 특수영성일 뿐 모든 신자들에게 반드시 의무를 부과하지는 않는 신심인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해답을 줄 것이다.

성 알로이시오 Aloysius (1568-1591), 사도 유다 타데오 Judas Taddaus, 빠두아의 성 안토니오 Antoius (1195-1231)와 같은 성인에 대한 공경이 극히 칭송할만하고 장려할 만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성인을 공경하는 것만으로 어느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드러내는 척도를 삼을 수는 없다. 즉 이러한 성인공경이 신앙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어머니 마리아 공경 역시 이 범주에 해당되는지 어떤지 문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본원리는 얼핏 보아서는 발견하기 쉬운 것 같다. 마리아에 관해서 언명하고 탐색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구세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이 사실을 도외시한다면 남는 것은 마리아가 아무리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 알로이시오와 사도 유다나, 빠두아의 성 안토니오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찬양 받을 만 하듯이, 마리아와 유대를 맺는 것 또한 찬양 받을 만 하다. 그러나 이렇게만 본다면 마리아론 이란 결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로이시오론 이나 안토니오론 을 정립하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론을 정립하려는 이 작업은 언어상의 난점을 도외시하더라도 착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 인물은 교회 안의 다른 모든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과는 달리 독자적인 양식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바로 이 점이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명제만을 마리아론 전체의 기본원리로 선언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보다는 바로 이 모성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규명해야 한다. 이 모성이 다른 모성과 어느 점에서 구별되는가? 이 모성이 어느 점에서 마리아의 다른 기본특성의 근거가 되는가? 여기서 의견들이 분분해진다. 하느님의 모성에 대해 상이한 일련의 형식규정들이 있다. 이것을 모두 나열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 같아 여기서는 다만 몇 가지 분석적인 고찰만을 시도하고자 한다.2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기본진술은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이룩하신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바로 하느님이 인간의 절대적 완성을 원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절대완성이란 삼위일체인 하느님과의 복된 일치에서 이루어진다. 이 목표는 우리가 구세사 救世史라고 일컫는 과정 속에서 구현된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의미있는 중요한 일이란 구세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어느 한 사건이 구원을 구현하는 데 기여하는 만큼 그 사건은 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은 구세사가 동일한 밀도로써 계속 진행하지 않음을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구세사 안에는 절정이 있는가 하면, 심연이 있다.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는가 하면 조용하게 사건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점은 세계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볼 때 세계의 역사란 다른 것이 아니라, 구세사의 한 구성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이 진행되는 이 테두리 안에 하나의 중심사건이 있는가?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구원사업이 시간의 충만, 즉 모든 구세사건의 정점이요 핵심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하는 가운데 시간은 절대 중심에 이른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은 이 구세사의 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 사건에 의해서 그 수준과 가치가 측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세사의 사건에 대한 이치에 맞는 척도를 얻어내기 위해서 그리스도 사건의 본질적 면모를 찾아내어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의 형식적 면모를 단정할 수 있다.

 

1.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의 ‘간선’이다. 육화, 즉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된 것은 창조에 내재하는 강박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결의 恩寵決意에 서 나온 것이다. 육화, 강생이 인간의 죄 때문에 발생했는지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아니면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발생했을는지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오늘날 믿고 있듯이)는 여기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가설이든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의 절대의지에 의한 것이며, 인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던 이유도 있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사건은 연대사건이다. 육화의 개념은 육화의 사건 전체에서 가려 뽑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우리의 형제가 되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비슷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2, 11-17 참조). 그러나 여기에 죄는 포함되지 않는다. 죄는 인간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도착 倒錯되어 비정상적이 된 인간본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존재란 항상 공동체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이중의 귀결을 낳는다.

(1) 인간이면 누구든지 그에게 주어져 있는 한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다. 누구나 특정한 가정에 태어나고, 특정한 집단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한다. 누구나 정치-문화적인 총체적 상황에서 생활하게 마련이다. 이 상황에 속한 구체적 집단은 각 개인의 활동보다 앞서 있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 이러한 정치 문화적 총체 상황을 체험하게 된다. 창조가 이미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구현을 드러냈기 때문에 사람이면 누구나 그에게 주어져 있는 특정한 구세사적 상황에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 구세사적 상황은 구체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체험된다.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양식으로 인간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

(2)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만일 그 사람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달라질 것이다. 그가 그 공동체에 해독을 끼치는 사람일 경우라면 그가 없어지고 난 그 공동체는 아마 개선될 것이다. 또 유능한 한 사람의 활동이 없어진다면 그만큼 그 공동체는 가난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공동체를 지연시키고 공동체에 부담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런 활동을 통해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가장 보잘것없는 지체일망정 인간은 누구나 그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이 모든 것이 구원공동체에도 해당된다.

강생이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으로서 존재하는 구원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계약에 포함된 인간이 그리스도를 순수한 하느님의 은총 자체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계약이 파기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린 피로써 새 계약[신약]이 묵은 계약[구약]에서 탄생하였다. 이 새 계약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새로운 구원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육화는 ‘첫 의인이었던 아벨로부터 유래하는 교회’3로서 애당초부터 그를 향하여 정착되어 있었으며 머리인 그에 의하여 생활하는 교회인 ‘신약의 교회’에 들어섬으로써 성취된다.4

 

3. 그리스도 사건은 ‘구세사적인 효력’을 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은총의 충만이 우리 구원을 위해 세계에 현존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골로 1, 19이하). 그러므로 이 은총은 강생에 입각해서 인간적으로 세계에 분배된다. 또한 이 은총은 인간적 활동에 입각하여 세계에 선사된다. 우선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에 입각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지향하거나 또는 그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자신을 봉사에 내맡기는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이 은총은 세계에 선사된다. 선교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 (에페 1,23)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사건의 형식적 규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 사건은 교회 안에서 완전히 효력을 발휘한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와의 연대성과 구세사적 효력은 교회 실존의 근거이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기 위한 전제이다. 여기서 이러한 구조 자체가 하느님이 역사하신 사실적 길[道程]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인식을 신학적으로 아주 간략하게 정식화하여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론은 교회론 안에서 성취된다. 그리스도론은 구세사적으로 볼 때 교회론의 전제이며 교회론은 그리스도론의 계속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구세사의 정점이요 중심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통찰에 이르게 되면서 우리는 구세사적 사건을 평가하기 위해 모색했던 척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척도는 한 인물이나 사건이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 속에 존속한다.

 

그러면 이 고찰이 우리의 마리아론적 기본원리를 위해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마리아론의 기본원리는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단정한다. 그리스도론이나 교회론에서 분리된 진정한 마리아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그리스도께로 더 치중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교회에 더 치중시켜야 하는지에 관해 지금까지 전개해 온 토론은 긍정적이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오로지 종합명제가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구원을 이룩하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만 구원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난 독자적인 마리아론이 있다면, 이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과 교회론 사이에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에 각각 위치해야만 한다.

이제 주의 어머니의 인물 자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리아는 결국 자유로운 하느님의 은총행위를 통해서 주의 어머니가 되는 품위에로 불림받은 것이다. 그녀의 모성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조물계에서 통용되는 인과율의 결과가 아니다. 이 단계에서 동정녀 출산의 신비에 대해 신학적으로 본질적인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말씀이 육화하는데 ‘예’를 발함으로써 마리아는 하느님의 사실적 구원계획을 수락한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인간적으로 온전히 수락되고 수용된다. 하느님의 인류와의 연대성은 이런 의미에서 사실상 마리아를 통하여 작용한다. 마리아는 사람의 아들 [인자 = 그리스도]에게 그를 인류와 연결시키는 육신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와 사람의 아들을 인격적으로 연결 지어주는 지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와 관련된 개념의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통하여 교회 안에 탄생하였으나 동시에 교회의 머리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마리아로부터 그의 육신을 취하는 가운데 마리아  안에서 신약의 교회를 세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마리아는 자신의 모성을 통하여 구세사적 작용능력도 아울러 받게 된다. 마리아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하느님과의 연대감으로 인해 세계를 위한 구원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론이 교회론에서 성취되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한 인물의 구세사적 가치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 속에서 측정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교회 안의 그리스도와도 가장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밀접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교회를 가장 완전하게 구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가 마리아에게 해당된다면 후자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가 마리아에게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순수하게 표현된다.5

이렇게 정식화함으로써 우리는 마리아의 모성의 규정을 넘어서 마리아론의 기본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마리아론의 기본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할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예형 또는 원형이다.”

이 원리로부터 다른 모든 마리아론적 신앙진술이 유도되어 나와야 할 것이다. 마리아에 관한 다른 모든 신앙진술은 이 원리와 부합되어야 한다.

 

<마리아오늘을 위한 마리아론 입문> 중에서

볼프강 바이터르트

심상태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Unitatis Redintegratio 11항: “가톨릭 교회의 여러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기초와의 관계는 서로 다른 것이므로 여러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그 진리들 사이에 질서와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전체적으로 A. Mueller, Marias Stellung und Mitwirkungim Christusereignis 참조.
  3. 교부시대 이래 활발하였던 ‘아벨로부터의 교회 표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재차 포착하였다.
  4. 이 표상은 성바오로의 ‘그리스도의 몸 신학’과 ‘그리스도의 몸 신비학’에 그 성서적 기초를 두고 있다. 에페 4,15 참조.
  5.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교서 Marialis cultus 16-22, 32, 57항

오랜 만에 ‘초록색 책’을 나의 눈과 손에 가까운 곳에 두었다. 빌려온 지 꽤 시간이 지난 책, 이거 혹시 너무나 오래된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되었다. ‘대출기간 초과 과태료’가 붙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이든 어르신’을 상식적으로 ‘봐 주는’ 우리 고마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도서실 관리자 자매 형제님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래 더 가지고 보자’, 걱정을 접는다.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초록색의 표지는 고 김정훈 부제의 그림에서 온 것이라 더 친근감이 간다.  1978년 유학 중 오스트리아의 어떤 산에서 실족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던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기’반’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몇 년 전에 빌려와서 ‘독후감’ [첫 편]을 남긴 적도 있었고 이후 계속 읽으며 후편을 쓰려고 했지만 ‘세월의 마술’로 성사가 되지 못했다. 대신 이런 식으로 눈에 띌 때마다 가끔 읽기를 계속한 지 몇 년이나 되었나?

오늘 우연히 펼친 1975년 마지막 부분의 일기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한마디로 정훈이의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까… 이 일기를 통해서 얼마나 정훈이가 한국천주교회의 기대와 희망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게 되었다. 본인이 그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이렇게 부담으로 느껴졌던 것.. 나는 ‘행복한 고민’이라고 했지만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항상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기에 칭찬도 그렇게 기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훈이가 사고로 그렇게 일찍 타계를 안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거목’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 실린  김수환 추기경의 ‘추도사’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한국교회의 촉망과 기대를 받았었는지 이해가 간다. 애석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하느님은 그를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분명히 무슨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12월 2일 (1975년)

 

나는 별제(別製)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그냥 가만히 놔둔 그런 완전히 보통 사람이고 싶다. 모든 이들의 감시 속에서 – 자신은 엉망으로 감당 못 하면서 – 별나게 고고해야 하고, 상냥한 행동거지, 우아한 품위를 지닌…

모든 이들이 저 아래에서 쳐다보면서 저희들끼리 냉소하며 비웃음과 욕설로 나를 샅샅이 훑어내어 분해하려 한다.

아! 나는 그런 별제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무조건,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엄청난 철학의 이론 – 신학의 체계 – 학문의 상아탑, 한국 교회의 기둥, 서울 교구의 인재,

“장래를 걸고 우리 모두에게 줄 복음을 연구하러 유학갔대. 훌륭히 되어 돌아와서 우리에게 굉장한 걸 줄 거야.”

아! 당장 앞에 다가온 세미나, 그게 도대체 뭐냐?

나는 미사 드리는 사람보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하느님을 모르겠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한 톨 밀알을 조심스레 뿌리고, 조그만 의미를 그냥 혼자서 체득하고 싶은 거다. 가만히 혼자서 하느님을 기리고 싶다는 거다. 아! 나는 조용히 모르면 모른다고, 좋은 건 좋다고,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고 하고 싶은데… 왜 모르는 것도 아는 것같이 해야 하고, 좋은 것도 내색을 해서는 안 되고, 재미있을 때도 웃으면 안 된다는 건가?

예수회 창시자 성 이냐시오

예수회, S.J.  성 로욜라의 이냐시오,  S.J…. Society of Jesus. 우리에게 비교적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 ‘가톨릭’ 단체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우문현답 愚問賢答 을 연상하게 하는 질문이지만 실제로 어떤 때는 나도 확실하지 않다. ‘예수회’니까 물론 절대적, 궁극적인 목표는 ‘역사적, 현존’ 예수님일 것이지만 과연 그것을 지향하는 신학적인 철학, 방법은 무엇인가? Wikipedia같은 곳을 보면 ‘공식적인 사실’들이 수 없이 많이 열거되어 있고, 모두 사실적, 객관적, 역사적인 것들이라 왈가왈부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우리가’ 머리로, 가슴으로, 피부로’ 받는 그 느낌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객체’들에 의해서 좌우 될 것이다. 그 객체는 어떤 것이며 누구인가?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예수회 사제, 신부, 수도자, 학교’ 같은 것이 아닌가?  내가 학교 같은 단체는 접할 기회는 없지만 사제들은 바로 앞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나에게는 예수회의 전부인 것이다.

나의 두 본당 중 영어권 본당의 사제는 오래 전에 결혼을 한 ‘동방교회’ 출신으로 로마교회로 온 신부로 그야말로 ‘교구신부’다. 예수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모국어 ‘도라빌’ 본당의 사제는 언제부터인가 교구사제에서 예수회 사제로 바뀌어서 이제는 예수회란 말이 빠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가까운 곳에서 ‘예수회’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우리들, 평신도들에게 이런 것이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멀리서 보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차이를 느낀다. 예수회 사제, 특히 본당신부는 전통적으로 ‘교구 사목’이 그들의 특기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차이가 없이 느껴지니까 별 문제는 없다. 오히려 영성적인 측면으로 보면 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냐시오의 영성을 사목에 주안점으로 삼으면 평신도들은 독특한 혜택을 받지 않을까.  그래서 교구 사목상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나는 절대적으로 신학전문가가 아니기에 섣불리 단언은 못하지만 내가 접하는 ‘미디어’ (fake가 아닌 전통적 미디어)를 통한 예수회, 그것도 특히 미국(북미주) 예수회는 더욱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야당과 여당’을 이루는 정치구도와 흡사한가. 한마디로 예수회는 미국의 liberal, democratic, progressive한 것이라면 거의 틀림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닐 듯하다. 모국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의 가톨릭 매체들을 살펴보면 이 ‘양극화’가 뚜렷하다. 특히 ‘또라이’ 트럼프가 들어오며 이 현상은 숨길 수가 없는 듯하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회 프란치스코교황’의 ‘자비’ 선포로 인한 ‘전통 교리의 후퇴’를 우려하는 ‘극단적인 비난’인데,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모두가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교리, 교의 해도 세상과 세속의 ‘진화’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아마도 예수회의 주장일 듯하다.

쉽게 말해서 ‘자비와 정의, 원칙’의 대결인 셈인데, 이들 신앙인들에게는 ‘중도’라는 ‘타협’은 없는 것인가?  제일 심각한 것이 Homosexual 들을 ‘자비’로 받아들이자는 문제다.  또한 Abortion(낙태)에 대한 자세도 그 중에 하나다. 이것도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대한민국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회 신부들은 여론적으로 보아도 ‘진보적’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빨갱이’라는 평을 쉽게 받는다. ‘정구사’라는 독특한 약어의 느낌도 다를 것 없이 ‘빨갱이’라고 매도된다. 이것도 타협점이 없는 것일까? 한마디로 주위를 살펴보면 ‘또라이 트럼프’처럼 서로 잇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기만 했지 절대로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나의 생각은 어떤가? 아무래도 나이 탓, 나의 가족적 역사로 보아서 예수회 같이 무조건 자비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유 있고, 정의가 밑받침이 되는 자비와 사랑..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닐까?

지난 달 말에  ‘프카’ 자매님1 과 카톡 대화를 하던 중에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 내  ‘영적독서클럽’에 대한 소식을 물었는데 반응이 아주 ‘부정적’인 것이었다. 최근에 느낌도 그랬지만 역시 이 자매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으로 아예 ‘탈회 脫會’를 하였고 성당을 떠난 별도의 클럽을 만들어서 ‘영적독서’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개인적인 사정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동안 성당내의 영적독서클럽은 아무래도 무언가 ‘구심점’  결여로  ‘흥미’를 유발하는 클럽의 운영상황이 아닌 듯 싶었다.  흔히 말하는 leadership의 부재 不在, 바로 그것은 아니었을까?

근래에 읽었던 책을 소개하면서 나보고도 읽어보지 않겠냐고 해서 ‘물론 ok’라고 해서 그 다음 주에 그 ‘프카’ 자매님2  손수 책을 갖다 주셨다. 이 동갑내기 자매님, 참 볼수록 정이 많은 분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아주 특별한 순간‘ 이었는데, 영성적 번역서로 많은 친근감을 주는 ‘류해욱 요셉’ 신부님이 엮은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류신부님의 글이 아니고 ‘안토니오 사지’ 라는 ‘유명한’ 인도출신 신부님이 한국에서 지도한 ‘치유피정’의 강의부분을 아주 매끈하고 유려한 한글로 정리한 것이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2013년에 첫 출판 후 2017년까지 18 쇄의 중판을 거듭한 것을 보면 아마도 ‘베스트셀러’ 급의 ‘좋은 책’이 아닐까 추측도 해 본다.

모두 25회의 강의로 이루어진 이 책을 접하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25번의 피정 강의를 한꺼번에 읽는 대신 하루에 하나의 강의를 편안하게 소화를 하면 어떨까? 더 나아가서 2019년 사순절이 시작되는 3월 6일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까지 모두 (쓰고) 읽으며 올해의 사순절을 더 특별하게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 5일까지 25회의 강의를 ‘들으려면’ 2월 9일부터 시작을 하면 될 것이고, 그것을 이곳 개인blog에 시한적으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류해욱 요셉 신부님은 물론 오래 전 (거의 20년 전?)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임신부로 계셨던 분이라서 익숙하지만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당시에 성당엘 안 나갔기에 개인적인 느낌은 거의 없다. 애기로만 듣던 분이었지만 몇 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 직접 강론을 들었다. 그 후 이분이 저서나 번역서를 읽기도 했는데 그 읽은 경험들이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다. 한때 stroke로 쓰러지셨다고 해서 모두 걱정을 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때 직접 보았을 때는 거의 완치가 된 듯 보였다.

이 책의 원저자격인 안토니오 사지 라는 분은 전혀 생소한 이름이지만 강의 내용을 읽고, 약력을 자세히 보니 류신부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충만한’ 분인 듯싶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런 피정을 지도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피정강의를 ‘강의록’ 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성경만 가지고 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책에 소개된 website를 가보니 그곳에 궁금했던 ‘모습’들이 나와 있었고 책보다 더 자세한 안토니오 신부님의 배경도 실려 있어서 이곳에 발췌 전재를 해 본다.

 

강단에 선 안토니오 사지 신부님

안토니오 신부와, 옮긴이 류해욱 요셉 신부님

 

 

Fr. Anthony Vadakkemury, V.C.

안토니오 신부는 1977년 5월1일 2남2녀 중 맏이로 인도에서 출생했다. 양친은 현재 인도의 케랄라에 살며,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부터 그의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신학교 과정을 인도와 동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수료했으며, 2006년 12월 29일 인도 케랄라에서 빈첸시오회 수도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2007년 1월 6일 첫 미사를 거행하였다.

인도의 방갈로에서 신학교 철학 과정을 마친 뒤, 1년간의 사목 수련을 위해 그는 2002년 케냐의 나이로비로 보내졌다. 이후에 그는 신학 과정을 마치기 위해 아프리카의 가장 유명한 대학 중 하나인 ”탄가자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77개의 서로 다른 국적의 학생들과 지내며, 서로다른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2006년 5월 14일 그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부제품을 받았고, 이후 케냐의 사목 수련시기 동안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 동료 사제들과 함께 중등부 학생들을 위한 3일간의 피정을 (예수선교피정) 지도하였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나이로비의 서로 다른 본당들에서 본당신부를 도와 강론을 하였으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본당들에서 청소년 그룹을 지도하였다. 특히 그는 청소년들이 영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에 유의하였다. 또한 부제 생활 중에 수감자들을 위한 피정, 선교 등을 비롯한 많은 피정 프로그램을 지도하였다. 나이로비의 5년간 체류하면서 안토니오 신부는 동 아프리카의 빈첸시오 피정센터 중 하나인 빈첸시오 기도의 집에서도 봉사하였다.

안토니오 신부가 사제 서품 받은 직후, 그의 관구장으로부터 타자니아의 유빈자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그는 두 달 간의 성공적인 사목 임기를 마치고 우간다의 엔테베로 가서 두 가지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엔테베의 빈첸시오 피정의 집에서 1일 피정을 지도하며 재정을 관리하였는데, 故 요셉 빌 신부가 그가 속한 분원의 장상이었다. 또 하나의 임무는 우간다의 마사카에서 새로운 피정센터를 건립하는 것있었다. 그리하여 엔테베에서 180km 떨어진 마사카를 매일같이 오가며 사제들을 위한 피정센터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건물은 2008년 2월 23일 故 요셉 빌 신부의 80세 생일에 완공식을 거행하였다.

안토니오 신부는 故 요셉 빌 신부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하며 임종을 지키신 분으로, 그의 관구장은 故 요셉 빌 신부의 침묵 치유 피정 사업을 이어받을 후임자로 안토니오 신부를 임명하였다.

  1. ‘프란체스카’ 란 세례명을 우리들이 줄여 부르는 말
  2.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내던 친지의 누님이 되시며,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매주 레지오 화요일에 보기도 하는 동갑내기 전 음악대학 교수님.  2년 전에는 기타동호회에서 몇 개월 동안 보기도 했던.

지나간 주, 주일날 대림특강이란 것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있었다. 대림절 the Advent 이면 거의 예외 없이 있는 이 ‘특강’ 에서는 , 몇 년 전까지 이곳의 보좌신부님으로 수고하시고 귀국한  ‘애 같이 해맑은‘ 한민 토마스 신부님이 강론을 하셨는데 역시 ‘예의’ 강론 내용과 스타일은 전혀 전과 변함이 없었다. 일상에서, 특히 가족관계에서 몸소 겪었던 것들에서 어쩌면 그렇게 주옥 같은 영성 소재들을 찾고, 실감나게 전하는지, 이것은 이 신부님만의 ‘특기’인 듯 싶었다.

재미도 있지만 깊이 있는 강론 끝에 ‘예수회 후원회’ 간담회가 있었는데 어쩌다가 우리도 참석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책 한 권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 제목이 너무도 평범한 느낌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였다. 특강을 마치며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는데 물론 ‘저자’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 ‘김우중’ 수사,  이것 또한 너무나 세속적 이름이 아닌가… 큰 관심을 가지기에 역부족인 듯 했지만 저자에 관한 ‘개인적인 사연’을 간단히 들었기에 관심을 갖고 그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대한민국 대학원 출신, 자동차회사 연구원 생활 이후에 길고도 험난한 사제의 길을 택한 수사님이라면 예사롭지 않은 경험의 소유자임은 분명하다.

책, book 이라기 보다는 ‘소책자’, booklet에 가까운 ‘사진과 글’이 적당히 얽힌, 편한 소파 에 누워 읽기에 안성맞춤인 책.. 이 ‘젊은 수사’가 과연 얼마나 오래 살았기에 이런 ‘경험적 영성’을 말할 수 있는지 부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거의 모두 나에게는 친근한 느낌으로 글과 사진들이 다가옴은, 나와 ‘파장, 화학’이 맞는다 고나 할까..  결국, 대림절과 대림 특강과 잘 어울리는 선물이 되었다.

예수회 한민 토마스 신부님,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우리 성당의 주임신부님으로 오시길 기도합니다.

 

이 소책자의 많은 글 중에서 다음의 사진과 글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김우중

 

 

빛과 어둠

 

빛이 강하면 어둠 또한 강합니다.

한 여름의 강한 태양빛은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지난 시간 유난히도 짙은 어둠 속에 사셨다면,

그만큼 강한 빛을 받으며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몰랐던 것은

빛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빛을 향해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고통과 괴로움에 묶여있던 시선이 빛을 향하는 순간,

하느님의 은총이 매우 강렬한 빛처럼

늘 나에게 쏟아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새로운 태양은 늘 떠오릅니다.

이제는 빛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

 

빛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더욱 강한 빛 안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글과 사진을 읽고 보며 생각에 잠긴다.

시각이 정상인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 ‘빛’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당연한 것일까? 빛을 물리적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초월한 것’으로 보면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 빛이 있음과 없음은 시각이 있으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영혼이 느끼는 빛이 없는 것은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 그야말로 ‘지옥’이 바로 그 빛이 없는 곳이 아닐까?

따라서 빛과 ‘절대적 존재, 하느님’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 인간이 그렇게 자랑하는 ‘물질적 과학주의 materialistic scientism‘에 의하면 빛과 ‘에너지’는 같은 종류이다. 한마디로 에너지가 있으면 ‘존재’이고 에너지가 없으면 ‘허공’ 그 자체인 것이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한때 ‘고립감, 허탈함, 고독,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던 시절에 나는 분명히 ‘빛’을 싫어한 경험을 했다. 보이는 것이 다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옥’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느끼는 것 역시 ‘빛의 존재’ 였다. 나는 분명히 주위를 밝히고 싶었다. 그것이 ‘악으로부터의 탈출’ 의 시작이었다. 밝음, 빛, 그것이 전부였다. 그 빛은 누가 시초에 생기고, 만든 것인가…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빛을 향해 돌아서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일요일에 제출, 발표할 레지오 연례 사업보고서를 작성하며 도움이 될만한 자료가 있는지 googling을 하던 중에 ‘보물’을 찾았다. 얼마 전 자비의 모후 Pr. 단장이 되면서 훈화를 준비하며 도움을 받고 있는 ‘레지오 훈화집’의 저자 ‘레지오 박사’ 최경용 신부님의 글을 발견한 것이다. 비록 2003년도에 발표된 것이지만 현재 나에게는 거의 모두 유효한 기사, 글이었다.

이 최신부가 쓴 ‘레지오 영성’이란 책도 언젠가 잠깐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책을 보고 이분이 로마에서 레지오 마리애 영성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레지오 마리애 박사 신부님인 것이다.

2003년이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처음 창설된 50주년을 즈음하여 당시의 대한민국 레지오의 현황을 예리하게 분석한 것으로 지나친 신학적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설명한 것이 매우 인상적인데 이것을 읽으며 거의 모든 분석이 현재 내가 있는 ‘아틀란타 레지오’에 모두 적용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형식적이고 소극적인 활동 때문에 사업보고서의 특기사항이 거의 비어있다.”

올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이 점을 보면 동감이 간다. 별로 ‘특기할 만한’ 활동이 없는 것이다.

 

 **  “간부직이 부담스러워 서로 맡지 않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솔직히 간부는 고사하고 평단원들조차 입단 시키기 어려운 실정, 이것은 레지오 전체의 이미지나 단원들이 보여주는 ‘자질’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  “레지오 마리애가 지도신부의 관심과 사랑 없이 그냥 두어도 잘 되는 단체는 결코 아니다.”

특정 지도 신부님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제도적 문제가 아닐까? 너무나 바쁜 사제들에게 레지오에 우선권을 두라고 강요할 사람이 없다. 다만 꾸리아 차원에서 지도사제의 관심을 유도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  “소 공동체와 레지오의 마찰”

대표적인 소 공동체는 ‘구역 모임’이 있는데 이들과 활동이 중복되는 것이 있을까?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특성을 활용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  “레지오 마리애는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간부와 단원들의 질적 향상을 위해 공부와 교육에도 정성을 쏟는다.”

주회합에서 하는 영적독서, 훈화, 교본공부가 거의 전부인 현재의 우리들의 실정으로는 간부, 단원을 고사하고 신단원이 레지오의 정신을 배울 기회는 거의 없다. 현재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꾸리아 차원에서 ‘시간과 돈’을 지속적, 제도적으로 투자하는 수 밖에 없다.

 

**  “규칙과 규율이 무시되면 군인정신이 해이해져 힘을 쓰지 못하는 군대가 되고 만다.”

이런 ‘군대의 특성’이 무시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나는 일년 전부터 내 눈으로 보았고 그 여파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법에는 항상 예외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법이 어겨지면 그 처리 결과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곳은 현재 영적지도자, 꾸리아 밖에 없다.

 

**  “단원들이 신심과 활동보다 친교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면 레지오 마리애는 무너지고 침체될 수밖에 없다.”

신 단원 교육에서 제일 강조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레지오의 조직과 정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는 수없이 이런 사례를 목격했고 결과는 거의 예외 없이 이런 ‘무너지고, 침체될’ 그런 것이었다. 현재도 나는 ‘주 회합 후 외식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을 매주 본다.

 

** “레지오 행동단원이 받는 혜택과 은총”

1. 개인 성화로 자신이 구원을 받고,

2. 주간 활동을 통하여 보람 있는 생애를 보내며,

3. 활동 대상자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주며,

4. 기도, 공부, 활동을 통하여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대인관계의 폭도 넓어 지고,

5. 군인정신과 프로 정신으로 역경을 극복할 수 있으며,

6. 따라서 기쁨과 감사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되고,

7. 성모, 성령신심을 통해 열매를 맺는 생활이 되고,

8. 활동을 통해서 신체적인 건강을 유지하게 되고,

9. 수많은 레지오 장례와 위령미사의 혜택과 은총을 받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위의 거의 모든 것들은 내가 받았던 것들이고 또한 창설자(프랭크 더프)가 몸소 실천한 삶이다.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을 맞이하여

최경용 (부산교구 신선본당 주임신부)

 

 

1. 시작하는 글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는 1953년 5월 31일에 아일랜드로부터 도입되어 올해(2003년) 50주년을 맞았다. 레지오 마리애는 외국에서 도입한 한국의 첫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서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레지오 마리애가 쌓은 공로와 업적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레지오 마리애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말이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장래가 심히 우려된다. 왜냐하면 레지오 마리애의 알맹이인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의 정신은 쇠퇴하고, 껍데기인 친목과 친교에 치중하는 현상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레지오 마리애 정신이 얼마나 해이해졌으면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을 맞아 레지오 마리애 정신 회복에 지향을 두고 묵주기도 5억 단 봉헌운동을 펼쳤겠는가? 간부들과 단원들이 얼마나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었으면 한국 레지오 마리애 협의회가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 회복’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까지 개최했겠는가?

지금은 레지오 마리애의 변화와 쇄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곧 창설자의 정신이다. 따라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창설자 프랭크 더프의 정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창설자의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오늘날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문제점들을 짚어보면서 창설자의 정신에 비추어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오늘날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오늘날 우리나라 레지오 마리애가 당면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크게 열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선교활동과 봉사활동 기피, 단장을 비롯한 간부들의 사명감 결여, 영적 지도자와 영적 지도 문제, 소공동체와 레지오의 마찰, 교육 문제, 규칙과 규율 문제, 지나친 친목, 물질 구제 문제와 자금 사용 문제, 노인·청소년·신학교 쁘레시디움 문제, 단원 모집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각각 살펴보고 해결방안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선교활동과 봉사활동 기피

한국 가톨릭 교회 공동체의 선교 실적이 낮아지고 있다. 이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주간 활동 의무를 다하지 않는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활동은 레지오 마리애의 본질이다. 레지오 마리애 주회합의 핵심은 활동보고와 활동배당이다. 주회합에서 묵주기도를 포함한 기도 시간보다 활동보고와 활동배당에 소요되는 시간이 더 길어야 한다. 

주회합의 3대 요소인 기도, 활동, 공부를 감안하여 주회합의 소요시간 기준을 한 시간 반으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마치 쫓기듯이 주회합을 한 시간 이내에 해치우고, 곧바로 평일 미사에 참례하는 쁘레시디움이 많이 있는 것 같다. 활동보고 내용과 활동배당이 빈약하다 보니 주회합을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내는 것이다. 

형식적이고 소극적인 활동 때문에 연중 사업 보고서의 특기사항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 특기사항란이 아예 공백인 쁘레시디움도 있다. 1년 동안 특기할 만한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교본은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단원들이 모든 시간을 복무시간으로 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의 정신으로 복음화에 앞장서는 선교단체이므로 선교와 복음화 활동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본당마다 쉬는 교우와 거주 미상자가 수두룩하여 큰 문제가 되지만, 사실 이러한 문제는 레지오 마리애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협의회는 이를 위한 사업을 점차적으로 연중 사업 계획에 넣어 본당과 교구 사목에 획기적인 업적을 세울 것을 제안한다.

 

2) 단장을 비롯한 간부들의 사명감 결여 

간부직이 부담스러워 서로 맡지 않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저 평단원으로서 부담 없이 레지오 마리애 단원 생활을 하겠다는 것이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장교가 되기는 싫고 사병으로만 머물겠다는 말과 똑같다. 그래서 걸핏하면 레지오 마리애를 잘 모르는 신참 단원이 간부직을 떠맡게 되는 안타까운 사례가 여기저기서 생기고 있다. 모름지기 간부직은 성모님께서 직접 맡겼다고 여겨야 하는데도 그걸 모른다. 이를 순명 으로 받아들였을 때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부들이 잘못하면 쁘레시디움 전체가 잘못된다. 특히 레지오 마리애의 운명은 단장에게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장이 주회합에 자주 결석하거나 활동 계획서를 꼼꼼히 챙기지 않아 활동배당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든지, 단장 자신이 활동을 소홀히 하고 언행도 일치하지 않으면서 단원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든지,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사랑과 열성 없이 타성에 젖어있다면, 그 쁘레시디움은 얼마 안 가 존폐 위기를 맞게 된다. 단원들이 하나 둘씩 퇴단하기 때문이다. 단장의 결정적인 결함은 단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므로 그럴 경우 단장을 교체하여 물갈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단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땅에 묻지 말고 십분 활용해야 한다. 

 

3) 영적 지도자와 영적 지도 문제

레지오 마리애는 초창기부터 주회합에 사제를 영적 지도자로 모셨다. 레지오 마리애는 본당 사목의 협력기구이므로 대체로 영적 지도자들은 레지오 마리애를 사목적으로 적극 활용한다.

레지오 마리애의 제도와 규율에 따르면 영적 지도자도 쁘레시디움과 평의회의 당연직 간부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목자들은 자신이 간부임을 잘 모르고 있다. 이것이 문제이다. 영적 지도자가 레지오 마리애의 간부라면 당연히 상급 평의회의 지시에 순명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사목자가 상급 평의회의 지시에 따라주면 좋지만 그 지시에 순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 오히려 영적 지도자가 레지오의 지단과 평의회를 설립하고 해체할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상급 평의회의 지시보다는, 주임신부가 직접적으로 지시한 사항이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이다. 따라서 주임신부가 레지오의 간부가 되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영적 지도자는 주회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여 묵주기도, 영적 독서, 까떼나, 선서 후 강복, 훈화, 회합의 마침 강복을 주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레지오 마리애가 지도신부의 관심과 사랑 없이 그냥 두어도 잘 되는 단체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주임신부는 보좌신부, 수녀 등 대리자에게 영적 지도를 일임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참석한다. 쁘레시디움이 많은 레지오 마리애를 원활하게 관리하고 운영하려면 사목자가 꾸리아 간부 연석 월례회, 쁘레시디움 단장 연석 월례회를 개최하여 레지오의 현황과 실태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4) 소공동체와 레지오의 마찰

레지오 마리애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활기를 잃고 침체되기 시작한 와중에 소공동체 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그 전부터 교회의 기반 조직인 구역, 반모임이 있었지만 소공동체 운동을 통해 조직이 더욱 강화되었다. 소공동체 교재를 통해 성서에 맛들이게 되고 구성원 간의 친목과 유대를 돈독히 하고 본당 공동체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도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소공동체 운동은 모든 교구에서 실시하고 있으며, 소공동체가 없는 본당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전국 어느 본당이든 레지오 마리애가 존재한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소공동체를 선호하는 본당 사목자들이 레지오 마리애가 소공동체 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쁘레시디움과 평의회를 해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는 상호보완이 가능하다. 교회의 사명은 신자들의 성화와 선교활동이요,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도 개인 성화와 선교활동이다. 그러므로 레지오 마리애를 해체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 수행을 막는 것이며,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사목자는 본당의 소공동체 모임에 적극 참여하지 않거나 창설자의 정신에서 빗나가는 레지오 마리애를 바로잡아주고 본래의 정신을 되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협조를 통한 상생의 관계로 정립되어야 한다.

 

5) 교육 문제

레지오 마리애는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간부와 단원들의 질적 향상을 위해 공부와 교육에도 정성을 쏟는다. 주회합에서는 영적독서, 훈화, 교본공부가 레지오 마리애의 일상적 교육에 해당된다. 교본공부를 위한 「교본 해설집」도 필요하고, 특히 「훈화집」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다. 아무쪼록 한국 레지오 마리애 협의회의 노력으로 하루빨리 새 훈화집이 발간되어 영적 지도자와 단장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어야 할 것이다. 

주회합에서 하는 훈화와 짧은 교본공부만으로는 단원들의 질적 향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레지오의 양적 팽창에 질적 수준이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나라 실정에는 반드시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특히,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단원들이 단장이나 간부직을 맡게 되는 실정에서 간부 양성교육은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1990년에 접어들어 세나뚜스나 레지아 주관으로 ‘레지오 마리애 학교’를 개설하였으며, 교육기간은 대개 매주 2시간씩 8-13주간이다(교구에 따라 명칭이나 기간이 다양함).

앞으로 세나뚜스 협의회에서 전국적인 레지오 마리애 교육 협의회를 결성하여 강사진을 폭넓게 활용한다면 레지오 교육에 획기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6) 규칙과 규율 문제

레지오 마리애는 규칙과 규율로써 군기를 확립하고 일사불란하게 운영된다. 규칙과 규율이 무시되면 군인정신이 해이해져 힘을 쓰지 못하는 군대가 되고 만다. 레지오 마리애는 규칙과 규율의 힘으로 지탱하기 때문에 모든 단원은 선서를 할 때 “레지오 규율에 온전히 복종하겠나이다.”라고 서약한다. 레지오 마리애의 규율과 규칙은 교본에 수록되어 있으며, 각 지역마다 달라서도 안 되고 임의로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교본에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규칙과 규율이 많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창설자의 의도와 관례를 감안하여 국가 평의회인 세나뚜스에서 결정을 하면 된다. 

규칙과 규율도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의 정신을 새롭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규율과 규칙에 집착하거나 문자에 얽매이기보다 탄력성, 융통성, 신축성을 갖고 끊임없이 변화하여 시대의 요청과 징표에 적응해야 한다. 마치 인터넷 시대에 인쇄매체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레지오의 규정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이고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중요시하셨지만 결코 율법주의자는 아니셨다. 그것이 바로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7) 지나친 친목

레지오 마리애는 단원들이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친목을 통한 단원들 간의 결속과 일치를 중요시한다. 창설자도 주회합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잠깐 다과를 나누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단원들 간의 친목 도모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레지오 마리애는 단원들이 ‘끼리끼리’ 사귀지 않고 ‘고루고루’ 사귀기를 바란다. 그것이 창설자의 정신이다. 그런데 오늘날 끼리끼리의 사귐이 지나친 것 같다. 단원들에게 바라는 레지오의 이상은 신심과 활동, 친교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단원들이 신심과 활동보다 친교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면 레지오 마리애는 무너지고 침체될 수밖에 없다. ‘회합은 짧게, 친교는 길게’라는 구호가 생길 정도로 단원들이 회합과 활동을 소홀히 하고 친교를 더 중요시한다. 저녁에 주회(週會)를 마치고 술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으로 형제들 간에 2차 주회(酒會)라는 말이 성행한 지 벌써 오래되었다. 자매들 간에도 비밀헌금 외에 친목을 위한 헌금을 별도로 갹출한다. 그리하여 레지오가 계모임처럼 끼리끼리 즐겁게 노는 친목단체로 전락하고 있다.

단원들 간의 지나치게 끈끈한 정이 오히려 레지오 마리애 정신을 좀먹고 공적인 일에 차질을 빚게 한다. 지나친 친목은 단원들이 공(公)과 사(私)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고 순명정신을 약화시킨다. 레지오 마리애는 결코 친교 위주의 오합지졸 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8) 물질 구제 문제와 자금 사용 문제

레지오 마리애의 물질적 구제 금지 규정은 1921년 레지오 마리애 창설 주회합에서 결의된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 자선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부딪히는 것을 피하려는 취지였다. 프랭크 더프는 레지오 마리애가 비록 빈첸시오회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영신적 자선활동 단체임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물질적인 자선보다도 영신적인 자선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물론 레지오 마리애는 물질적 구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결코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레지오 마리애의 이름으로 비밀헌금을 사용하면서까지 직접적으로 물질 구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인 활동만 한다는 규정 때문에 단원들이 당장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때를 놓쳐버린다면,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율법이므로 고쳐야 한다.

레지오 마리애는 모든 이에게 영신적인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므로 물질적인 영리를 추구하지 못하며, 단원들이 레지오 안에서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 없다. 단원들끼리 계모임을 하거나 금전관계를 맺거나 다단계 판매 등의 상행위를 하는 것은 레지오의 순수성을 저해하므로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레지오 마리애에 필요한 모든 경비와 자금은 오로지 단원들의 의무적인 비밀헌금에만 의존하며, 레지오 마리애의 기금은 성모님의 군자금이므로 레지오의 조직과 관리 운영, 사업에만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영적 지도자인 사목자는 레지오 마리애의 재정 문제만큼은 원래의 규정과 정신을 보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기를 바란다. 

 

9) 노인·청소년·신학교 쁘레시디움 문제

행동단원이란 사도직 활동을 행동으로 옮기는 단원을 말한다. 노인으로 구성된 쁘레시디움은 사도직 활동을 하지 못하고 기도만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 부대가 아니고 기도 부대, 보급 부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활동할 수 없는 노인 행동단원은 협조단원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목자와 협의하여 레지오 장례를 치르면 될 것이다. 그러나 레지오 장례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협의회에서 통일된 규정과 기준을 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는 청소년에게도 매력이 있는 단체가 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미래 교회의 기둥이다. 그들의 단원생활은 공동체 의식 함양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귀중한 훈련의 기회가 될 것이다. 성인 쁘레시디움과 평의회는 청소년 쁘레시디움 운영과 육성을 조직 체계의 일부로 여겨야 하며 재정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소년 레지오 마리애는 사제와 수도 성소의 못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본에서 창설자가 강조하듯이, 신학교에도 쁘레시디움이 있어야 한다. 한국 세나뚜스 협의회나 신학교가 있는 교구 평의회는 신학교 안에 쁘레시디움을 설립하도록 교섭하고 추진해야 한다. 과거에는 쁘레시디움이 있는 신학교도 있었다. 소년 쁘레시디움 출신 신학생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신학교 안에 레지오 마리애 지단이 있다면 훌륭한 영적 지도자의 양성소가 될 것이며, 교본공부 등의 학습활동을 통하여 레지오 마리애를 더 잘 알게 되고 기도와 봉사활동으로 성덕을 쌓고 영육의 건강도 유지하게 될 것이다. 

 

10) 단원 모집 문제

해가 갈수록 레지오 마리애 행동단원과 협조단원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신자들도 입단을 꺼려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기존 단원들이 기쁨과 긍지를 가지지 못하고 마지못해 단원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단원이 됨으로써 좋은 점이 많고 은혜롭다면 레지오 마리애를 자신 있게 홍보할 수 있고 단원들을 더 많이 모집할 수 있을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행동단원이 되면 과연 어떤 혜택과 은총을 받는지 알아보자. 

레지오 마리애 단원은 개인 성화를 통하여 먼저 자신이 구원받고, 주간활동을 통하여 타인도 구원받게 함으로써 보람 있는 생애를 보내며 활동 대상자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주게 된다. 선교활동으로 한 명이라도 영세시키면 활동 대상자에게는 영신 생명의 은인이 된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면 기도, 공부, 활동을 통하여 굳건하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며 대인관계의 폭도 넓어진다. 

그리고 투철한 군인 정신과 프로 정신으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역경도 극복할 수 있으며, 기쁨과 감사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성모 신심이 깊어지고 성모님의 덕성을 본받게 된다. 또한 성령 신심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도록 인도된다. 단원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면 할수록 신체적인 건강도 유지하게 된다. 레지오 마리애 생활을 통하여 선종하는 은혜를 입게 되고 레지오 장례와 수없이 많은 위령미사의 혜택을 받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며 은총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창설자가 몸소 실천한 삶이다. 

 

3. 맺는 글

지금까지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의 정신에 어긋나는 점을 짚어보며 해결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았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 대한 창설자의 소망은 첫째로, 단원들 자신이 먼저 성화하여 구원받는 삶을 사는 것이고 둘째로, 단원들이 성모님의 정신과 덕성을 본받아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는 삶을 살도록 이끎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이 목적과 소망을 달성하려면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주회합을 통하여 기도와 공부로써 정신을 무장하고 활동을 배당받아 적극적으로 주간활동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창설자는 행동과 실천이 수반된 개인 성화와 성모 신심을 강조하였다. 그는 레지오 회합의 핵심인 사도직 활동을 중심으로 기도하고 공부하며 친교를 나누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동단원(Active Member)이란 명칭을 활동단원으로 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활동의 폭을 넓혀나가야 한다. 그런데 활동의 폭을 넓히기는커녕 오히려 단원들이 활동을 하지 않으려 하고, 먹고 즐기는 친교에 치중함으로써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창설자의 정신은 그리스도 왕국을 확장하는 데 충성을 바치는 투철한 군인 정신이며, 또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는 성모님의 정신이다. 창설자의 정신은 참된 성모 신심의 정신이고 봉헌의 정신이다. 참된 성모 신심은 봉헌과 사도직 활동을 요구한다. 남미의 레지오 마리애 선교사 알피 램은 ‘레지오에 산다.’는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 말은 레지오 마리애의 규율도 지키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대로 산다는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대로 산다는 것은 창설자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다. 단원들이 창설자의 정신대로 산다면 레지오 마리애는 다시 활성화되어 꾸준히 발전할 것이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을 맞아 레지오 마리애 간부들과 단원들 모두가 자성하고 심기일전한다면 전성기를 다시 누릴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 75주년, 100주년도 기쁘게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목자료 – 창설자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2003년 10월호 (제 297호)

 

“이번에 글을 쓰면서 나는 이런 것을 생각해 봤읍니다. 즉 하나의 글은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인격과 비슷하다는 것 말입니다. 나는 글의 내용을 글의 생명으로 보았고, 그 내용을 이루고 있는 사건들을 글의 몸에 비교해 보았읍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문장화하는 표현을 한 인간의 옷에 비유했었고, 또 그 표현의 테크닉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삶의 멋이라고 말할 수 없을까를 생각해 봤읍니다. 남에게 호감을 주고 또 존경 받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격과 좋은 몸매와 단정한 옷차림과 명랑하되 고상한 삶의 멋을 적절하게 가져야만 하듯이, 글이란 것도 그래야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고마태오 신부, ‘영원의 방랑객’ 312쪽

 

어젯밤 거의 우연히 나의 손에 ‘잡힌’ 책, ‘존경하는’ 고 마태오 신부님의 장편 서사시적 실화소설 ‘영원의 방랑객’ 을 ‘난독’하며 나의 눈에 들어온 ‘글에 대한’ 글이다.

 

“트렁블레 신부가 술잔을 들자 나도 술잔을 들어 축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날 밤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나는 감격해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학교라고는 왜정 시대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내가 프랑스어로 글을 쓰고, 그것이 곧 책으로 출판된다니 도무지 꿈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실감하고 있을 때 내 마음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고마태오 신부, ‘영원의 방랑객’, 313쪽

 

국민학교 출신, 문학적 수업은 물론 국어교육조차 제대로 못 받았던 이 ‘전설적’인 고 (종옥)마태오 신부님이 한국어도 아닌 프랑스어로 책을 쓰시고 출판1하기 전에 밝힌 ‘글이란 무엇인가?’, 한 문단으로 집약된 신부님의 ‘글의 정수 精粹’ 론 論이다.

‘진짜 글’은 ‘한 인간의 인격’이다. 내용은 생명이고, 내용 중의 사건들은 몸, 문장화 된 표현은 옷, 표현의 기교는 삶의 멋..  이것이 신부님이 생각한 글의 모습이다. 간단히 말해서 글이 글다운 멋을 지니려면 그 저자도 함께 멋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것이 아닐까? ‘못된 인간’이 쓴 글은 어쩔 수 없이 ‘못된 글’이라는 비교적 자명한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는데, 이 고 마태오 신부님의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자세는 그가 쓴 글에도 100% 그대로 남아있어서 가끔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이것을 읽고 생각하며, ‘나의 글’을 되돌아 보게 된다. 지나간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적, 공적인 나의 글 (개인 일기 diary 와 블로그 public blog)을 가끔 읽게 되는데, 어떨 때는 ‘내가 어떻게 이런 글을 썼을까?’ 하고 부끄러운 감탄을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좀 더 솔직히, 자세히..’ 라는 아쉬움도 많다. 특히 ‘자기 도취, 자기 연민’이 대부분인데, 한마디로 ‘삶의 사연들, 그것도 감동적인..’ 이 절대로 결여되어 있다. 이래서 글의 본질에 내용을 이루는 ‘사건’들을 잘 창조하고 이끌어 나가는 저자의 삶이 절대로 중요함을 느끼고, 위의 고 마태오 신부님은 그런 면에서 거의 신화에 가까운 ‘감동적 삶의 연속’을 경험하셨기에 ‘글의 정수’의 표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 아닐까?

열대성 기후가 아직도 섞여있는 2018년 초가을, 날씨 탓도 있지만 이렇게 나의 머리가 정리되지 못한 혼탁한 상태에서 우연히 다시 손에 ‘걸린’ 이 책 속의 ‘인간애의 표본’ 고 마태오 신부님.. 아직도 살아 계셨으면 당장 비행기라도 타고 가서 뵙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간단하지만 어려운 말을 그대로 일생을 통해 실천하신 고 마태오 신부님, 영원히 사랑합니다. ‘글로 표현이 되지 못한 생각은 진정한 생각이 아니다’ 라는 명언을 생각하며, 나도 좀 더 솔직하고 꾸밈없고 용기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며, 습기가 사라진 진정한 가을하늘을 기다려본다.

  1. 프랑스어 제목: ‘모든 길을 신에게로’, 후에 출판된 한국어판 제목: ‘예수 없는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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