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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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늦게 Corona booster shot 예약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고 있었다. Pandemic이후 오랜 동안 근처에도 못 가보았던 YMCA,  그 바로 앞에 있는 이곳 Publix Supermarket에서 이것을 맞게 되었다. 3주를 기다릴 줄 알았다가 새로니의 예약 덕분에 일찍 맞게 되었지만 사실은 주변의 아는 사람들 거의 다 맞은 것을 알면 이것은 너무나 늦은 것이 아닌가?  최근에 거의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코로나 바이러스, 다시 감염률이 오르고 있다는 소식,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정말 골치 아픈 세상을 살고 있다.

결국은 우리도 이렇게 해서 COVID booster shot 접종을 받았다. 이것으로 ‘당분간’ COVID 로 죽는 chance는 아주 낮아진다고 한다. 이것을 맞는 것,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것,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인데 왜들 그렇게 앙앙거리는 것인가? 이번 Pandemic을 겪으며 새삼 깨달은 것, 이 세상에 정말 바보, 병신, 아니 거의 criminal급 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불쾌한 사실, 어쩌면 그렇게 무식하고 남을 배려 못하는 병신, 무지랭이들이 득실거리는 걸까… 솔직히 미안한 소리지만 그런 부류 인간들, 이 병에 감염되어서 죽지는 말고,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1+1=3 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은 인간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오늘 접종은 의외로 밤시간에 차를 drive해서 가는 기회가 되었다. 집에 들어오면서 접종의 느낌 대신에 밤시간에 drive해서 나갔다 온 느낌을 나누었다. 정말 오랜만인 것이다. 밤시간의 밖은 우리에게 조금은 불편한 모습들, 확실히 이것으로 우리는 활동적인 세대에서 이미 멀어지고 있음을 절감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착잡한 심정이다. 옛날 옛적, 오밤중에 장시간 drive하며 돌아다니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딴 나라 세상 같기도 하고… 조금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요즈음 나를 매료시키는 Thomas Berry의 거시우주적 자연관이나 어제 읽었던 Avery Dulles [추기경]의 ‘자연’ 체험담 등이 나의 보는 눈을 더욱 활짝 열어주는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특히 Dulles 신부의 이야기는 너무나 흥미롭다. Dulles 집안은 미국에서 유명한 명문가문이다. 나도 어렸을 적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인 John Foster Dulles를 기억할 정도니까.. 그의 아들이 바로 Avery Dulles라는 것인데 집안의 후광과는 상관없이 이 추기경님은 미국 제일가는 가톨릭 신학의 거두인 것이다. 이분이 대학시절까지 무신론자에 가까운 agnostic였는데 한 순간에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내가 요사이 유달리 깊은 가을의 모습에 감동하는 것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이 추기경도 어느 날 나무의 모습을 보다가 깊은 영감을 느끼고 곧바로 가톨릭에 입교를 했다고 한다. 비슷한  case로는 유명한 당대의 석학 Narnia Trilogy로 알려진 C.S. Lewis 의 천주교 개종 일화도 있다.

 

I walk therefore I am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오늘 도 Ozzie와 둘이서 정처 없이 2시간을 걸었다. 그야말로 spectacular, gorgeous day, 깊어가는 가을의 모습, 이곳에 산 이후 제일 멋진 가을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아니면 내가 자연을 보는 눈의 차원이 올라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눈으로 들어오는 물리적(광학적) 그림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뇌 능력이 발달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 이상의 형이상학, 초월적인 현상도 배제할 수 없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오늘 드디어James Martin신부의 걸작,  ‘성자처럼 즐겨라!’ 의 ‘필독서’ [필사, 독서의 약어]가 일단 완료되었다. 재독을 하며 교정을 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책의 요점은 대강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즐겁고 명랑한 신자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는  마틴 신부의 경험적 논문 급의 정말 탁월한 솜씨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나와 어떻게 연관을 지을까 하는 과제는 남는다. 읽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긴 했다. 우선 나와는 거리가 먼 어려운 요구라는 것, 나는 어쩌면 너무 심각한 자세로 살고 있다는 것, 그런 나와 함께하는 나의 주변 가족, 지인들… 미안하기도 하다.

 

¶  8월 15일, [대한민국]광복절,  [가톨릭] 성모승천 대축일…  하지만 근래에는 나에게 광복절보다 더 중요한 날이 되었다. 이날은 성모 마리아가 지상의 삶이 끝난 후 육신이 하늘[천국]로 부르심을 받은 날로써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의무 대 축일이다. 올해는 [pandemic] 사정상 대성전 참례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워 online 대축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수동적인 참례라도 큰 걱정 [건강, 경제 등]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고맙게 생각해야 할 듯하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  교황의 무류성 [papal infallibility]을 배경으로 교회 교의 敎義의 하나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교회가 이렇게 선포한 것으로 우리들은 안심하고 교회 안에서 성모님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1 매일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묵주기도, 그 중에서 오늘을 맞아 영광의 신비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 올리심을 묵상합시다’ 의 의미를 더욱 일깨운다.

We proclaim and define it to be a dogma revealed by God that the immaculate Mother of God, Mary ever virgin, when the course of her earthly life was finished, was taken up body and soul into the glory of heaven.

오늘 live streaming으로 참례한 순교자 성당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참 좋았다. 큰 기대를 안 하면 이렇던가? 우선 이 방문신부님, 콧수염이 안 보이니 훨씬 보기가 좋았다. 미사 강론을 들으며 나는 눈물까지 흘렸다. 성모님의 고난 중의 희망, 코로사 사태를 가는 우리들에게 정말 본받을 귀감 중의 귀감이라는 것, 가슴 속 깊이 그 성모님의 용기가 나를 일깨운다.

 

¶  어젯밤에는 밖에서 무언가 내리는 듯한 느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과연 나가보니 약간의 이슬비가 내린 것이 보인다. 소낙비를 바랐건만 어째 이렇게 가랑비를… 아주 조금… 그래도 땅이 축축한 것은 정말 반갑다. 하늘도 모처럼 구름이 잔뜩 끼어서 비록 기온은 높더라도 시원한 느낌이다. 하루 종일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알고 보니 오늘 기온은 요사이의 그것에 비해서 무려 10도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오늘이 말복 末伏인 것을 감안해서 분명히 최악의 더위는 서서히 우리를 떠날 것이다.

 

¶  S 아오스딩 형제, 참 줄기차고 변함없는 사람, 아침에 카톡 메시지를 보니, 운동하러 Stone Mountain Park에 가니 오늘 무슨 시위가 있다고 문이 닫혔다고 쓰여있었다. 참, 요즈음 들어서 이 친구가 부러울 때가 있다. 자기 하고 싶은 것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하며 사는 친구…  그래서 요새와 같은 pandemic 하에서는 이 친구가 사는 방식이 나보다 더 심리적으로 건강한 것이 아닐까, 부러운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삶의 방식을 터득했을까, 이제 어떤 부분은 내가 배우고 싶을 정도다.

 

¶  뜻밖에 집 뒤쪽에 사시는 고국동포 B 선생님 부부가  우리 집 앞문까지 와서 커다란 수박을 주고 가셨다. 물론 처음에는 귀찮아서 door bell 을 무시했는데 또 역~쉬 연숙의 기지와 용기로 큰 실례를 피할 수 있었다.  귀찮은 sales person일 것으로 생각을 했기에 그런 것이지만 가끔 이런 예외도 있긴 하다. 참, 앞 뒷집으로 산지 거의 30+ 년이 가까워 오는 이 인연, 하지만 참 멀게 살아온 야릇한 인연인가? 언제나 나는 이분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훨씬 가깝게 인생말년을 보낼 수도 있었다는 후회가 남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하며 생각하지만 당장 눈 앞에 안 보이고 잊게 되는 정말 이상한 관계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술도 같이 하고 식사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 기다린다.

 

  1. 개신교 형제들, 무조건 반발하기 전에 심각한 공부를 조금 더 하고 대화를 하면 어떨지…

성령 강림

 

5월의 마지막 날인 동시에 마지막 주일인 5월 31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그리스도 교회가 탄생한 날로 기념하는 성령강림 대축일 Pentecost Sunday 이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이 사도들에게 불꽃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잇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2:1-4]

 

이날을 왜 그리스도교회가 탄생한 날로 정했는가를 보면, 이 성령의 힘으로 사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이들이 담대히 전세계에 퍼뜨리기 시작한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이었고 그것이 교회공동체, 가톨릭 교회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날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미사가 정지되었던 이후, 처음으로 아틀란타 한국순교자 성당이 공식적으로 공개 미사를 드리는 주일이기도 해서 관심을 가지고 online미사에 참례하였다.

미국 성당들도 하나 둘씩 미사를 재개했지만, 이곳 저곳 모두 미사참례 조건이 비교적 자세하고 까다로웠다.  100명으로 제한, 마스크 착용 등은 기본이지만 미사 이외의 모든 활동은 전면 금지였다. 게다가 권고사항으로 65세 이상은 당분간 자제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현명한 선택 분별을 해야 하는 것으로, 솔직히 귀찮고 골치까지 아픈 것이 아닌가? 결국 우리는 당분간 지켜보기로 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날 미사광경을 보니, 미사 참석인원이 30명 정도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비교적 나이가 있는 교우들로 보였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비교적 젊은 교우들로 100명 가까이 올 줄 알았는데 이것은 조금은 뜻밖이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평소에 열심히 참석하던 열성교우들이 역시 이날도 자리를 채운 것이다. 신부님도 이것이 조금은 뜻밖인 듯한 인상을 보였는데, 30여명 정도면 일단 ‘수칙준수’에 대한 안심은 되겠지만, 적은 숫자에 실망도 하셨을 듯… 하지만 이것은 첫날이니까 다음 주에는 분명히 훨씬 더 많은 교우들이 ‘몰려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공식미사 재개 첫날

 

이날의 강론의 주제 역시 성령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로서는 이 강론을 들으며 묵상할 자료들이 참으로 많았다. 개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신학적인 것까지…

평화란 무엇인가? 나에게 평화와 이기적인 평화. 모두가 갖는 평화를 위해서는 싸워라. 그렇게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탓. 이 용기는 성령의 선물이고 가장 중요한 성령의 은사다. 이 용기의 은사가 결여되면 다른 은사들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강론, 이영석 세례자 요한 주임신부님

 

나와 우리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이 강론으로 얼마나 ‘용기의 은사’가 중요한 지를 느낀다. 개인적으로 나도 체험을 했지만, 사실 선택의 용기와 실천의 용기가 없었던 삶은 사실 죽은 삶에 가까운 것이다. 선택과 결단을 미루며 산 것도 용기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용기란 놈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질 않는다. 역시 높은 곳,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St. Peter’s Square에서 교황님의 삼종기도를 기다리며 운집한 die-hard 순례자들.

예전같이 평상적인 모습으로 기다리는 순례자, face mask가 하나도 안 보인다.

 

Vatican Angelus, 바티칸 삼종기도:   지나간 주에 일어난 딸애의 출산 같은 큰 일들을 때문인지, 모처럼 주일미사를 빠지기로 결정한 ‘우리들의 삼일절’ 일요일 오후에 Vatican Youtube 를 보니까 오랜만에 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삼종기도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교황님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 이라며 기도를 하자는 text message를 본 직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기에 사실 여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의 바티칸 삼종기도에 교황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과연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과연 삼종기도 시간에 맞추어 교황님이 창문으로 나타나셨고,  close-up 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조금 피곤한 것 이외에는 전혀 병색이 없었다. 또한 성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순례객은 숫자는 비록 적었어도 얼굴 마스크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태리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율이 아주 높다고 들었는데, 그 지역이 다른 쪽인 모양이다. 하지만 로마나 바티칸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우려는 떨칠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창문으로 등장하신 교황님, 코로나 바이러스는 헛소문..

역쉬… fake rumor 전혀 병색이 없는 교황님, 평소처럼 삼종기도, 메시지를 바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까.. 과장해서 말하면 심한 flu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1) 이 바이러스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점, (2) 감염률이 높은 듯한 점, (3) 경제,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인 파급적인 불안감, (4) 결국은 사회적인 약자에게 미칠 지나친 피해… 등등을 생각하면 조금은 미리 피곤해진다. 왜 하필이면 성스럽기만 한 사순절에 이런 ‘중국발 대형사고’가 났을까? 

 

2020년의 사순절 Lent가 시작되었다.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아침 9시 미사엘 가서 이마에 재 灰로 긋는 십자가를 엄숙하고 고맙게 받았다. 문득 ‘아, 또 새로운 사순절이…’ 하는 자괴감 비슷함을 잠깐 느꼈지만, 올해의 사순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생각을 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갑자기 다가온 ‘손자’의 출산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걱정보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온통 머리 속을 맴돈다.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고?  증손주를 볼 가능성은 제로이므로 이것이 우리가 거쳐야 할 중대사의 거의 마지막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쁨, 후회, 걱정, 안도감들이 완전히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각종 개인적인 관문들, 국민학교입학,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 졸업, 대학교 입학 졸업, 유학출가, 결혼, 출산, 취직, 은퇴, 고아가 되는 슬픔, 자녀 출가, 출산… 70여 년에 걸쳐서 계속되는 이런 일들은 모두가 겪겠지만, 그래도 ‘해 냈다’ 라는 안도감이 앞선다. 전에는 이런 ‘과업’들이 우리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때 늦게나마 이런 모든 것이 ‘안 보이는 은총’의 덕이었음을 알고 가는 것이 제일 다행스럽다.

나를 근원적으로 일깨우고 변화시켰던 2014년 사순절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워낙 거대했던 깨우침이라서 죽기 전까지는 다시 그런 경험을 못하리라고 거의 확신하지만, 그래도 사순절은 나에게는 신비로운 의미를 주는 40일이다. 또한 올해의 사순절은 이런 큰 가족적 진화과정을 겪으며 ‘사람을 사랑으로 구하시려는 사명’의 예수님의 의미를 다시금 차분히,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 사순절의 결론은 역시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잊지 않고, 사순 40일을 보낼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싶다.

 

Scott & Kimberly Hahn 의 잘 알려진 이야기,  ‘개신교 골수분자’였던 이들 부부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던 과정을 자세히 쓴 책의 제목이 바로 Rome Sweet Home이다. 이름부터 이채롭다. 그들에게는 ‘이단 종교의 아성’으로 증오의 상징이었던 로마 교황(청) Vatican 이 결국은 그들에게는 ‘오랜 방황 후에 돌아온 나의 고향’이 된 것이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지난 20년간 아주 조금씩 ‘귀동냥’ 정도로 들었던 것이 전부였다. 주류 크리스천들이 개종하는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큰 이야깃거리는 아니지만 이 부부의 개종은 아주 의미심장, 지각변동적, 특별한 것이기에 ‘사회적, 세속적 뉴스’까지 된 것이 아닐까?

내가 그 동안 이 사실에 대해서 듣고 안 것들은 아주 피상적이고 ‘소문의 수준’ 정도였는데 이 책을 일주일 만에 두 번을  cover-to-cover 로 읽고 나서, 나는 놀랍기도 하고, ‘그러면 그렇지..’하는 안도감, 이제라도 이런 ‘천재 신학자’를 가톨릭으로 보내준 사실이 아주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일 인상적인 표현은 이것이다. 이 사람의 ‘역할, 위치’는  한마디로 Luther in reverse,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종교개혁 reformation의 반대 과정을 거친, ‘개신교에서 기독교의 원형인 가톨릭’으로 거슬러 올라간  장본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본향을 찾았다!’ 하고 외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아니, 모든 독자들이) 제일 관심을 갖고 찾았던 부분은 물론… 어떻게 왜 무슨 이유로 ‘본향’을 찾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부부의 깊은 학자적, 성경신학적인 배경을 알면 절대로 ‘간단한 결정’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이 책으로 느낀 점 중에 제일 나를 부끄럽게 했던 것이 있다면, 역시 Holy Bible, Scripture에 관한 것이다. 역시 가톨릭은 ‘소문’ 그대로 성경에 대한 열정만은 개신교에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가톨릭 신자들도 인정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부러움’이 결국은 개신교의 근본적인, 기본적인, 역사적인 문제중의 문제가 됨을 알면 놀라게 된다. 그러니까, 개신교의 근본 공리적 명제는 Sola Scriptura (성경 유일)와 Sola Fide (믿음으로만).. 이 아닌가? 이것에 ‘근본적, 신학적’ 문제가 있으면 어찌 되는 것인가?

Scott Hahn 은 젊은 시절부터 ‘광신적 성경, 믿음 유일주의자’였고 ‘광신적 가톨릭 혐오자’라고 자부를 하던 ‘유망한 젊은 신학도’였다. 그가 성경으로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의 ‘생애의 고민’은 시작된 것. 처음 그가 경험했던 고민은 ‘어디에 성경만이 모든 것’이라는 근거가 있는가를 ‘탐정적 열정’으로 찾은 것으로 비롯된다. 신학교 젊은 교수시절 한 ‘명석한 학생’의 순진하지만 심각한 질문, ‘성경의 어느 곳에 성경만이 전부’라는 구절이 있습니까?’ Martin Luther이후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던가?  이 사실은 그를 너무나 놀라게 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거기서 끝 나지 않았다. 더 나아가서 성경에는 Sola Fide, Faith Only라는 것 이외에 교회초기의 교부들과 전통들도 같이 강조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타협을 하느냐?  허~~  문제는 성경만이 절대로 옳은 것이라면 이 두 문제는 ‘모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이런 ‘사태’에 직면한 Scott Hahn, 그의 모든 지적 능력을 통해서 그는 결국 전통적인 가톨릭 문헌, 교리를 철저히 파헤치기 시작하고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가톨릭의 교리, 전통, 성경 모두 그들이 공부한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놀라움이었다.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것은 ‘역시’ 성모신심, 교리였지만 이것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한 묵주기도를 통해서 비교적 쉽게 극복이 되었다.

그의 영적 동반자 부인인 Kimberly는 5년 뒤에 그를 따라 개종을 했는데 그 과정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이혼’까지 각오를 한 Scott의 용기는 실로 극적인 것이었고 결국은 그들은 평화 속에서 다시 합류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교황청에서도 인정하는 ‘세계 정상급 신학자’의 대열에 서게 되었고 유명한 가톨릭 대학 Franciscan University의 유명한 교수로서 열정적인 교육, 전교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수 많은 강론 여행을 하며 ‘그릇된’ 개신교 기본교리를 알리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이 명석한 부부 가톨릭 신자를 어떠한 눈을 볼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그래도 ‘신학은 신학으로’ 대하고, 풀어야 하지 않을까?

 

11월로 접어들며, 1일의 ‘모든 성인의 날 All Saints Day‘를 시작으로 2일에는 ‘위령의 날 All Souls Day‘ 를 맞는다. 이 두 날은 모두 ‘가톨릭 천주교 전례력’의 기념일이지만, 11월이라는 ‘깊어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사실 제한된 시간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한번은 ‘죽음, 특히 자기의 죽음’에 대한 성찰, 묵상을 하고 싶은 때가 아닐까…

작년 이맘때 ‘그리운 친구, 양건주’가 고맙게 보내준, 당시로서는 신간에 속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수필집 <기다리는 행복>을 이제야 다 읽게 되었다. 비록 여백이 넉넉히 있는 각각의 페이지에도 불구하고 전체는 무려 4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으로 ‘필사’는 물론 깊이 소화하는데 무려 일년이 걸린 것이다.

내용 중에 ‘순례자의 영성’ 章에서는 위령의 달, 위령의 날을 묵상하는 시와 글이 실려있다. 역시 수도자답게, 죽음은 끝이 아니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임을, 우리들 모두 인생의 순례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래도 그래도 역시 작은 인간이기에 ‘죽음이 있는 곳’은 안 가보았기에 두려움은 인정을 한다. 얼마나 솔직한 표현인가.

이해인 수녀님의 ‘명성’은 사실 오래 전 연숙을 통해서 익히 듣고 짧은 수필을 읽어 보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아주 heavy weight를 들어올리는 기분으로 책 전체를 읽게 되었고, 근래에 조금씩 ‘시詩의 눈 眼’이 열리는 덕인지 수녀님의 주옥 같은 시에서 영성적 차원의 시상 時相을 얻기도 한다.

수녀님의 이력 중에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있다면 나이가 나의 누나와 동갑인 닭띠인 것과, 서울 가회동 성당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있었다. 상상으로 아마도 나와 같은 시절(1950년대) 같은 동네 (가회동)를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참 놀랍고 즐겁기까지 하다. 혹시 재동국민학교 출신이 아닐까 하는 ‘희망’도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수녀님은 조금 떨어진 ‘창경국민학교’ 를 다녔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가회동성당 주일학교 소풍 1955년, 아마도 수녀님은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아닐까..

안타까운 사실은 역시 수녀님의 건강상태, 몇 년 전 ‘타계’ 라는 오보를 접하고 놀랐던 사실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이 ‘누님’의 안녕을 잊을 수가 없다. 고통은 다른 쪽으로 은총이라는 ‘싫은 진리’도 있기 하지만 아마도 수녀님은 그런 진리를 모두에게 보여주시는 듯 보통 나약한 사람들보다도 더 건강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니,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가 role model로 삼을 수 있는 case가 아닐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시와 글의 일부분이라도 머리에 떠오르면 반드시 화살기도를 바치리라.. 항상 생각한다.

 

 

순례자의 영성

 

저무는 11월에

한 장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게 하소서

(……………….)

한 점 흰구름 하늘에 실려 가듯

그렇게 조용히

당신을 향해 흘러가게 하소서

 

죽은 이를 땅에 묻고 와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계절

차가운 두 손으로

촛불을 켜게 하소서

 

해 저문 가을 들녘에

말없이 누워있는 볏단처럼

죽어서야 다시 사는

영원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소서

 

– 이해인, <순례자의 기도> 중에서

 

 

세상 떠난 이들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위령의 달, 위령의 날을 나는 좋아합니다.

우리 수녀님들이나 친지들이 긴 잠을 자고 있는 무덤가에 서면 마음이 절로 차분하고 온유해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떠난 분들에 대한 그리움에 잠시 슬퍼지다가도 그들이 보내오는 무언의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들곤 합니다. 지난해와 올해만 해도 여러 명의 수녀님이 세상을 떠났는데 어떤 분은 매장하고, 어떤 분은 화장해서 수녀원 묘지에 모셔옵니다. 비록 육신은 떠났으나 그들이 너무도 생생히 꿈에 보이거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기도 속에 떠오를 때면, 허무를 넘어선 사랑의 현존으로 행복을 맛보기도 합니다. 오래 전 수도공동체의 수련장이었던 노수녀님을 동료수녀와 같이 병간호하러 가서 환자 수녀님과 성가도 부르고 배도 깎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다음 날 새벽 수녀님은 갑자기 살짝 주무시듯이 고요하게 선종하셨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함께 지켜보던 동료 수녀는 떠나는 수녀님을 향해 “아주 가시는 건가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그 인사말이 어찌나 간절하고 인상적이던지! 잠시 출장을 가거나 지상 소임을 마치고 저쪽 세상으로 이사 가는 이에게 건네는 이별 인사로 여겨져서 슬픔 중에도 빙긋 웃음이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먼저 떠나가서 친숙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은 가보지 않은 세상이기에 두렵고 낯설기도 한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11월, 우리는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가벼움과 자유로움으로 순례자의 영성을 살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아직은 오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잠시라도 묵상하는 것은 오늘의 삶을 더 충실하게 가꾸는 촉매제가 되어줍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매일 외우는 끝기도의 마무리 구절을 묵상해봅니다. 삶의 여정에서 자존심 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을 적마다 언젠가는 들어갈 ‘상상 속의 관’ 속에 잠깐 미리 들어가보는 것, 용서와 화해가 어려울 적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겸손히 내려놓는 순례자의 영성을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을 극복하는 작은 죽음을 잘 연습하다 보면 어느 날 주님이 부르실 때, “네!” 하고 떠나는 큰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  어제 저녁에 backyard에 잠깐 나갔을 때, 아주 오랜만에, 피부에 와 닿는 다른 느낌의 공기를 보았다. 무언가 다른 것, 아하… 바로 ‘가을’이 ‘아주’ 멀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특별히 대지가 타는 듯이 ‘마르게’ 더웠던 올해의 여름은 인상적이었지만 추분을 며칠 앞둔 때라서 잊혀진 가을의 모습이 그리운 것이다.

달력상의 가을은 추분에서 시작되고 며칠 남지 않았다. 그때로 낮은 하루하루 짧아지기 시작하며 나와 같은 나이의 인간, 피조물들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깊은 가을’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모든 것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 올해는 어떠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인가 미리부터 궁금하다.

 

¶  진실되고 심각한 의미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절대’ 를 믿는다 함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쉽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일초, 하루, 매년 살아가는 것이 ‘믿으며 사는 것’인가? 어렵게 보이지만, 의외로 쉬운 답을 찾으면,  ‘나의 인생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의 전환을 하는 것이다. Word On FireBishop  Robert Barron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One of the most fundamental statements of faith is this: your life is not about you. Youre not in control. This is not your project. Rather, you are part of Gods great design. To believe this in your bones and act accordingly is to have faith. When we operate out of this transformed vision, amazing things can happen, for we have surrendered to “a power already at work in us that can do infinitely more than we can ask or imagine.” Even a tiny bit of faith makes an extraordinary difference.

– Bishop Robert Barron (a daily gospel reflection)

 

하루하루, 매달, 매년이 그저 지루하게 느껴지고 사는 것 같지 않을 때 이렇게 조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는가…

Blessed Virgin Mary

 

성모승천대축일,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매년 8월 15일, 우리의 광복절) 을 즈음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거의 9년 전쯤에 처음 읽다가 만  독일의 신학자 Wolfgang Beinert 볼프강 바이너르트의 <마리아 – 오늘을 위한 마리아론 입문> 이란 책,  당시 생전 처음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면서 고조된 성모신심에 힘입어 – 일단 묵주기도를 통해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이지만 – 그 이후로도 가끔  생각하며, 개인 신심적으로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지극히 가톨릭적’인  ‘5대 마리아 교의‘를 다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포근한 인류의 어머니’, 무엇이나 다 들어주실 듯한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려고 무척 애를 썼고 이제는 아주 편하게 나를 ‘개인적으로 대해 주시는’ 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항상 비껴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왜들 그러한 포근한 어머니를 배척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심지어 그런 ‘증오심’을 자랑으로 여기는 인간들을 보면 심한 혼동에 빠진다. 어떻게 그러한 인간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것인지…

역시 이것도 요사이 미국 가톨릭교회의 떠오르는 희망인 LA 교구의 Bishop Robert Barron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사랑에 의한 이성’을 통한 신심, 바로 그것이다. 학문적인 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아무리 뜨거운 신심이라도 수명과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학문적인 체계, 논리적인 뒷받침,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6장에는 ‘마리아론의 기본원리’ 가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것이야 말로 학문적인 approach인 것이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서로 논쟁을 해도 할 것이다.

 

 

마리아論의 기본원리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 교의신학의 가장 중요한 정식은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로 머물렀다.

2.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3.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

4. 마리아는 죄 없는 삶을 영위하였다.

5. 마리아는 사망 후 ‘승천하였다.’

 

신학자들은 특수한 원천기반과 이에 상응하는 인식기준에 입각하여 계발된 모든 마리아 교리에서, 배아 胚芽에 담겨 있는 것 같은 기본원리를 발견해내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원리가 있다면 이로부터 마리아론 전체의 단일성과 응집력은 가시적이 될 것이며, 마리아 신심은 번잡스러움과 과잉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되고 통제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에 관한 명제는 어느 것이든 그 기본원리에서부터 출발할 때 비로소 정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의 정당성 여부는 이 기본원리에 입각하여 실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명제는 하나의 일반적인 교의적 기능을 지니며, 신앙교리 전체구조의 범위 내에서 마리아론 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어떠한가를 제시할 것이다. 또한 이 기본원리는 순전히 조직적인 근거에서만 중요할 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도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견해에 의하면 ‘신앙진리의 위계질서 位階秩序’가 있다. 이 점은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에서 단정되고 있다. 1 신앙의 진리는 모두 진리이지만 이것이 모두 동격은 아니다. 어떤 진리가 – 진리의 함축성은 손상되지 않은 채 – 가장 핵심적인 신앙의 진리이며 인생의 진리인지, 아니면 보다 주변적인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기본원리는 마리아 신심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불가결한 신심인지, 아니면 이 신심이 특별히 정당하고 모범적이긴 하지만 열심한 교회 구성원의 특수영성일 뿐 모든 신자들에게 반드시 의무를 부과하지는 않는 신심인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해답을 줄 것이다.

성 알로이시오 Aloysius (1568-1591), 사도 유다 타데오 Judas Taddaus, 빠두아의 성 안토니오 Antoius (1195-1231)와 같은 성인에 대한 공경이 극히 칭송할만하고 장려할 만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성인을 공경하는 것만으로 어느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드러내는 척도를 삼을 수는 없다. 즉 이러한 성인공경이 신앙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어머니 마리아 공경 역시 이 범주에 해당되는지 어떤지 문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본원리는 얼핏 보아서는 발견하기 쉬운 것 같다. 마리아에 관해서 언명하고 탐색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구세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이 사실을 도외시한다면 남는 것은 마리아가 아무리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 알로이시오와 사도 유다나, 빠두아의 성 안토니오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찬양 받을 만 하듯이, 마리아와 유대를 맺는 것 또한 찬양 받을 만 하다. 그러나 이렇게만 본다면 마리아론 이란 결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로이시오론 이나 안토니오론 을 정립하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론을 정립하려는 이 작업은 언어상의 난점을 도외시하더라도 착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 인물은 교회 안의 다른 모든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과는 달리 독자적인 양식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바로 이 점이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명제만을 마리아론 전체의 기본원리로 선언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보다는 바로 이 모성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규명해야 한다. 이 모성이 다른 모성과 어느 점에서 구별되는가? 이 모성이 어느 점에서 마리아의 다른 기본특성의 근거가 되는가? 여기서 의견들이 분분해진다. 하느님의 모성에 대해 상이한 일련의 형식규정들이 있다. 이것을 모두 나열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 같아 여기서는 다만 몇 가지 분석적인 고찰만을 시도하고자 한다.2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기본진술은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이룩하신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바로 하느님이 인간의 절대적 완성을 원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절대완성이란 삼위일체인 하느님과의 복된 일치에서 이루어진다. 이 목표는 우리가 구세사 救世史라고 일컫는 과정 속에서 구현된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의미있는 중요한 일이란 구세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어느 한 사건이 구원을 구현하는 데 기여하는 만큼 그 사건은 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은 구세사가 동일한 밀도로써 계속 진행하지 않음을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구세사 안에는 절정이 있는가 하면, 심연이 있다.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는가 하면 조용하게 사건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점은 세계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볼 때 세계의 역사란 다른 것이 아니라, 구세사의 한 구성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이 진행되는 이 테두리 안에 하나의 중심사건이 있는가?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구원사업이 시간의 충만, 즉 모든 구세사건의 정점이요 핵심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하는 가운데 시간은 절대 중심에 이른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은 이 구세사의 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 사건에 의해서 그 수준과 가치가 측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세사의 사건에 대한 이치에 맞는 척도를 얻어내기 위해서 그리스도 사건의 본질적 면모를 찾아내어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의 형식적 면모를 단정할 수 있다.

 

1.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의 ‘간선’이다. 육화, 즉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된 것은 창조에 내재하는 강박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결의 恩寵決意에 서 나온 것이다. 육화, 강생이 인간의 죄 때문에 발생했는지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아니면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발생했을는지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오늘날 믿고 있듯이)는 여기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가설이든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의 절대의지에 의한 것이며, 인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던 이유도 있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사건은 연대사건이다. 육화의 개념은 육화의 사건 전체에서 가려 뽑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우리의 형제가 되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비슷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2, 11-17 참조). 그러나 여기에 죄는 포함되지 않는다. 죄는 인간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도착 倒錯되어 비정상적이 된 인간본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존재란 항상 공동체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이중의 귀결을 낳는다.

(1) 인간이면 누구든지 그에게 주어져 있는 한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다. 누구나 특정한 가정에 태어나고, 특정한 집단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한다. 누구나 정치-문화적인 총체적 상황에서 생활하게 마련이다. 이 상황에 속한 구체적 집단은 각 개인의 활동보다 앞서 있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 이러한 정치 문화적 총체 상황을 체험하게 된다. 창조가 이미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구현을 드러냈기 때문에 사람이면 누구나 그에게 주어져 있는 특정한 구세사적 상황에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 구세사적 상황은 구체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체험된다.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양식으로 인간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

(2)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만일 그 사람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달라질 것이다. 그가 그 공동체에 해독을 끼치는 사람일 경우라면 그가 없어지고 난 그 공동체는 아마 개선될 것이다. 또 유능한 한 사람의 활동이 없어진다면 그만큼 그 공동체는 가난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공동체를 지연시키고 공동체에 부담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런 활동을 통해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가장 보잘것없는 지체일망정 인간은 누구나 그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이 모든 것이 구원공동체에도 해당된다.

강생이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으로서 존재하는 구원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계약에 포함된 인간이 그리스도를 순수한 하느님의 은총 자체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계약이 파기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린 피로써 새 계약[신약]이 묵은 계약[구약]에서 탄생하였다. 이 새 계약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새로운 구원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육화는 ‘첫 의인이었던 아벨로부터 유래하는 교회’3로서 애당초부터 그를 향하여 정착되어 있었으며 머리인 그에 의하여 생활하는 교회인 ‘신약의 교회’에 들어섬으로써 성취된다.4

 

3. 그리스도 사건은 ‘구세사적인 효력’을 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은총의 충만이 우리 구원을 위해 세계에 현존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골로 1, 19이하). 그러므로 이 은총은 강생에 입각해서 인간적으로 세계에 분배된다. 또한 이 은총은 인간적 활동에 입각하여 세계에 선사된다. 우선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에 입각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지향하거나 또는 그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자신을 봉사에 내맡기는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이 은총은 세계에 선사된다. 선교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 (에페 1,23)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사건의 형식적 규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 사건은 교회 안에서 완전히 효력을 발휘한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와의 연대성과 구세사적 효력은 교회 실존의 근거이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기 위한 전제이다. 여기서 이러한 구조 자체가 하느님이 역사하신 사실적 길[道程]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인식을 신학적으로 아주 간략하게 정식화하여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론은 교회론 안에서 성취된다. 그리스도론은 구세사적으로 볼 때 교회론의 전제이며 교회론은 그리스도론의 계속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구세사의 정점이요 중심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통찰에 이르게 되면서 우리는 구세사적 사건을 평가하기 위해 모색했던 척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척도는 한 인물이나 사건이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 속에 존속한다.

 

그러면 이 고찰이 우리의 마리아론적 기본원리를 위해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마리아론의 기본원리는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단정한다. 그리스도론이나 교회론에서 분리된 진정한 마리아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그리스도께로 더 치중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교회에 더 치중시켜야 하는지에 관해 지금까지 전개해 온 토론은 긍정적이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오로지 종합명제가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구원을 이룩하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만 구원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난 독자적인 마리아론이 있다면, 이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과 교회론 사이에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에 각각 위치해야만 한다.

이제 주의 어머니의 인물 자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리아는 결국 자유로운 하느님의 은총행위를 통해서 주의 어머니가 되는 품위에로 불림받은 것이다. 그녀의 모성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조물계에서 통용되는 인과율의 결과가 아니다. 이 단계에서 동정녀 출산의 신비에 대해 신학적으로 본질적인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말씀이 육화하는데 ‘예’를 발함으로써 마리아는 하느님의 사실적 구원계획을 수락한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인간적으로 온전히 수락되고 수용된다. 하느님의 인류와의 연대성은 이런 의미에서 사실상 마리아를 통하여 작용한다. 마리아는 사람의 아들 [인자 = 그리스도]에게 그를 인류와 연결시키는 육신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와 사람의 아들을 인격적으로 연결 지어주는 지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와 관련된 개념의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통하여 교회 안에 탄생하였으나 동시에 교회의 머리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마리아로부터 그의 육신을 취하는 가운데 마리아  안에서 신약의 교회를 세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마리아는 자신의 모성을 통하여 구세사적 작용능력도 아울러 받게 된다. 마리아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하느님과의 연대감으로 인해 세계를 위한 구원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론이 교회론에서 성취되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한 인물의 구세사적 가치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 속에서 측정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교회 안의 그리스도와도 가장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밀접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교회를 가장 완전하게 구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가 마리아에게 해당된다면 후자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가 마리아에게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순수하게 표현된다.5

이렇게 정식화함으로써 우리는 마리아의 모성의 규정을 넘어서 마리아론의 기본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마리아론의 기본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할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예형 또는 원형이다.”

이 원리로부터 다른 모든 마리아론적 신앙진술이 유도되어 나와야 할 것이다. 마리아에 관한 다른 모든 신앙진술은 이 원리와 부합되어야 한다.

 

<마리아오늘을 위한 마리아론 입문> 중에서

볼프강 바이터르트

심상태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Unitatis Redintegratio 11항: “가톨릭 교회의 여러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기초와의 관계는 서로 다른 것이므로 여러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그 진리들 사이에 질서와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전체적으로 A. Mueller, Marias Stellung und Mitwirkungim Christusereignis 참조.
  3. 교부시대 이래 활발하였던 ‘아벨로부터의 교회 표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재차 포착하였다.
  4. 이 표상은 성바오로의 ‘그리스도의 몸 신학’과 ‘그리스도의 몸 신비학’에 그 성서적 기초를 두고 있다. 에페 4,15 참조.
  5.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교서 Marialis cultus 16-22, 32, 57항

오랜 만에 ‘초록색 책’을 나의 눈과 손에 가까운 곳에 두었다. 빌려온 지 꽤 시간이 지난 책, 이거 혹시 너무나 오래된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되었다. ‘대출기간 초과 과태료’가 붙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이든 어르신’을 상식적으로 ‘봐 주는’ 우리 고마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도서실 관리자 자매 형제님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래 더 가지고 보자’, 걱정을 접는다.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초록색의 표지는 고 김정훈 부제의 그림에서 온 것이라 더 친근감이 간다.  1978년 유학 중 오스트리아의 어떤 산에서 실족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던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기’반’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몇 년 전에 빌려와서 ‘독후감’ [첫 편]을 남긴 적도 있었고 이후 계속 읽으며 후편을 쓰려고 했지만 ‘세월의 마술’로 성사가 되지 못했다. 대신 이런 식으로 눈에 띌 때마다 가끔 읽기를 계속한 지 몇 년이나 되었나?

오늘 우연히 펼친 1975년 마지막 부분의 일기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한마디로 정훈이의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까… 이 일기를 통해서 얼마나 정훈이가 한국천주교회의 기대와 희망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게 되었다. 본인이 그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이렇게 부담으로 느껴졌던 것.. 나는 ‘행복한 고민’이라고 했지만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항상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기에 칭찬도 그렇게 기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훈이가 사고로 그렇게 일찍 타계를 안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거목’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 실린  김수환 추기경의 ‘추도사’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한국교회의 촉망과 기대를 받았었는지 이해가 간다. 애석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하느님은 그를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분명히 무슨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12월 2일 (1975년)

 

나는 별제(別製)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그냥 가만히 놔둔 그런 완전히 보통 사람이고 싶다. 모든 이들의 감시 속에서 – 자신은 엉망으로 감당 못 하면서 – 별나게 고고해야 하고, 상냥한 행동거지, 우아한 품위를 지닌…

모든 이들이 저 아래에서 쳐다보면서 저희들끼리 냉소하며 비웃음과 욕설로 나를 샅샅이 훑어내어 분해하려 한다.

아! 나는 그런 별제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무조건,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엄청난 철학의 이론 – 신학의 체계 – 학문의 상아탑, 한국 교회의 기둥, 서울 교구의 인재,

“장래를 걸고 우리 모두에게 줄 복음을 연구하러 유학갔대. 훌륭히 되어 돌아와서 우리에게 굉장한 걸 줄 거야.”

아! 당장 앞에 다가온 세미나, 그게 도대체 뭐냐?

나는 미사 드리는 사람보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하느님을 모르겠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한 톨 밀알을 조심스레 뿌리고, 조그만 의미를 그냥 혼자서 체득하고 싶은 거다. 가만히 혼자서 하느님을 기리고 싶다는 거다. 아! 나는 조용히 모르면 모른다고, 좋은 건 좋다고,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고 하고 싶은데… 왜 모르는 것도 아는 것같이 해야 하고, 좋은 것도 내색을 해서는 안 되고, 재미있을 때도 웃으면 안 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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