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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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garet Burke-White

 

언제였을까? 아마도 1950년대 후반이 아니었을까?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는  이 (사진) 모습의 여자, Margaret Burke-White를  처음 보았던 것이…  어디에서 보았는가… 그것은 잊혀진 듯 하지만, 거의 분명히 당시의 미국의 대표적인 화보뉴스 주간지,  LIFE magazine이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iconic한,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그런 역사적인 사진. 요새 들어서 다시 우연히 Atlantic (magazine, online)에서 찾았고, 다시 ‘실컷’ 보며 짠~한 추억을 되새긴다. 바로 ‘그 미국여자’ 였다. 그 당시에는 ‘서양 여자’를 보면 우선 ‘미국여자’라고 불렀기에 국적 같은 것은 상관이 없었다.

이 사진 – 우람하고, 정열적이고 멋진 – 의 이 ‘미국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어린 마음이었지만 아주 충격적이고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B-17 bomber (전폭기) 앞에서 방한복으로 중무장,  ‘거대한’ 사진기를 사뿐 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와~ 한마디로 ‘어떻게 여자가…’ 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50/60년대의 대한민국 사회적인 분위기와 여필종부, 부부유별 등과 같은 유교적 전통적 여파의 끝자락을 보며 자랐기에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매일 ‘남자에게’ 얻어맞고 사는 아줌마들이 동네마다 적지 않게 살았던 그 시절,  용감하게 보이는 여자들을 보면 나는 정말 감탄도 하고 부럽기조차 했었다. 우리 어머님도 그 중에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아득한 기억 속의 ‘멋진 여자’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지만 생각보다 유명한 ‘앞서가는 여자’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요새말로 남녀차별의 glass ceiling을 ‘부숴버리는’ 그런 feminism 의 신봉자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물론 ‘모든 남녀차별의 벽을 깨는’ 첫 번째의 기록을 깨었던 인물이었다. 웬만한 남자들도 못 가는 곳들로 가서 역사적인 사진들을 남긴 것..  한마디로 photojournalism의 선구자…  공적인 직업적 성격은 아주 남성적이었지만, 사적인 다른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고 온순한, 대조적인 모습의 ‘미국 여자’, 나는 아직도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있다. 멋진 미국여자.. 여자.. 여자..

 

만화, 민족의 비극 표지, 1961

‘민족의 비극’, 1962년 1월..  내가 55년 전에 ‘탈고 脫稿’한 50여 페이지의 ‘먹물로 그린’ 만화 漫畵 의 제목이다. 그러니까 서울 중앙중학교 2학년 시절 1961년에 그렸던 ‘자작 自作 만화’ 인 셈인데 이것이 거의 기적적으로 그것도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이것은 나에게는 ‘가보 家寶’에 상당하는, 돈을 주고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개인 역사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지금 이 만화 책의 ‘외형적, 물리적’ 상태는 그렇게 양호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신경을 안 쓰고 조금 험하게 다루면 망가질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자주 만지지도 않고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에 더 이상 이런 상태로 모셔둘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려서 fully digitized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당시에 그렇게 ‘희귀’했던 stapler, 현재 몇 불 弗이면  살 수 있는 그것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나는 역시 전통적인 공구였던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동네가게에서 가는 철사를 사다가 이 책을 엮었다. 그것이 현재 그대로 남아있는데.. 문제는 이 homemade staple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1961년 경 서울 가회동 잡화상(철물도 취급하는)에서 산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true antique value가 있는 것, 돈을 주고 어디에서도 살 수 가 없는 것이니.. 쉽게 바꾸거나 손을 대는 것이 망설여진다.

우선 몇 page를 scanner에 책갈피를 강제로 펴서 scan을 해 보았다. 역시 보기가 안 좋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이렇게 55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았다는데 만족감을 느낀다. 당시 이 만화를 ‘애독’ 해 주었던 몇몇 원서동 苑西洞 죽마고우 竹馬故友 (안명성, 유지호, 김동만 등등) 이 자신들이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되었던 역사를 재발견하게 되면 감개가 무량할 것이라 믿는다.

이 만화의 그림 technique을 보면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그것들은 거의 99%가 당시 만화계의 영웅 ‘산호‘ (선생님)의 bestseller 우리의 영웅 ‘만화 라이파이‘를 비롯한 다른 ‘전쟁, 역사 물’에서 온 것이다. 24시간을 그런 그림을 보며 살았던 당시에 그것을 흉내 내어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랑스런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것을 거의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까지 그렸으니.. ‘공부, 공부, 입시’ 지옥이었던 당시, 우리 집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이고 결국은 이 만화가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내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그렸던 만화가 이 만화 바로 전에 완성이 되었는데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없어졌고 나중에 알고 보니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알았다. 어머님의 지나친 간섭이었지만…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서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굶어 죽는 만화가’가 될 것으로 염려가 되셨다는 것을 어린 나이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없어진 그 만화, 나에게는 아련한 아쉬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 없어진 만화작품의 그림 기법, story 같은 것이 나의 머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저 어린 나이에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날랐던  그 만화시절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고 싶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만화책을 완전히 ‘해체’해서 full scanning을 한 후에 pdf book format 으로 바꾸는 것이고 그것이 완성 되면 나의 serony.com blog에 ‘영구히’ 남길 것이다.

 

 

나만의 올해 summer retreat 하계피정의 3분의 1일 지나가고 있다. 말이 좋아서 하계피정이지.. 하얀 모래사장, 시원한 바람과 바닷물이 보이는 어느 East Coasta summer place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보내는 하계피정은  별로 시원하지 않은 나의 this old house 지붕 아래에서..  그것이 벌써 3분의 1일,  11일째 날을 맞는다.

1장: 세속 정신을 끊음, 제11일: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33일 봉헌준비기간 중 11일 째, 첫째 편인 ‘세속정신을 끊음‘  12일 중에서 11일 째, 그 동안 세속 정신에 대한 인식과 결단에 대한 ‘공부, 묵상’ 한 셈이다. 과연 얼마나 ‘피정 retreat’ 을 한 것일까?

Daily routine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루 중 머리가 그런대로 깨끗한 시간 아침 6시~6시 30분경에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며 그날의 ‘과제, 주제’를 생각하며 묵상하는 것, 처음에는 거북한 느낌도 들고 ‘잡 것들 distraction, 주로 Internet’ 같은 것과 씨름을 하기도 했지만 며칠 만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좋은 습관’을 만드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자부하기에 이것도 그 중에 하나가 되었다. 비결은 간단한:  ‘just do it‘와 몇 가지 화살기도가 전부지만..

내일까지 과제는 ‘세속정신과의 싸움‘ 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 오늘 것은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이다. 이것은 다른 것과 다르게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것이 절대 아니라서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왜 그렇게 익숙한 말이 되었나? 그렇다..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오늘 주제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데, 공감이 가는 글이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지극히 태연자약해 보이지만 삶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갖은 수단을 다해 갖가지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다하고 무엇보다도 돈과 재물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그러한 것들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안정과 평화를 구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청하며 그리하여 평화와 기쁨 중에 살아간다. 하느님 안에 참 된 안전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삶이란 과연..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의 자취‘ 가 아니었을까? 그 불안은 사실 육감적인 피부로 느끼던 불안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가장 밑 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원초적인 불안’이다. 대부분 너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없앨 수도 없는 것.. “나이에 따른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내가 사는 의미” 바로 “내가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가?” 삶의 목적과 의미다. 이것을 잊고 살려고 하던 노력들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물질적 육감적 보호‘에 치중하다 보면 반드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이런 불안에 궁극적인 해답이 안 된다.

이것에 대한 삶의 예는 얼마든지 있고, 비교적 가까운 주변에도 있다. 삶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아무것도 못하며 가족을 괴롭히는‘ 그런 형제님.. 너무나 그런 생각에 빠져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거의 depression에 가깝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은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나의 소리만 듣겠다’라는 심하게 꼬인 이기심의 소산이라고 나는 본다. 어떻게 그런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초자연적인 것.. 나만의 육감에만 의존하던 과거의 경험으로 해답은 바로 이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Good Ole Days 의 시원한 여름에 대한 추억은 역시 어린 시절 poster로만 보았던 Troy Donahue, Sandra Dee 주연의 영화 A Summer Place 보다 더 멋진 것은 없었다. 학생입장불가 급의 poster도 화려했지만 몇 년 뒤에 취입된 Percy Faith 악단의 영화주제곡이 또한 ‘불후의 명곡’으로 남았고 아직도 그 당시 평화스러웠던 여름을 연상하게끔 한다.

 

 

Theme – A Summer Place – Percy Faith – 1960

 

서울 특별시 종로구 鍾路區 원서동 苑西洞 비원 秘苑의 서쪽 담장을 따라 맑은 시냇물 (당시에는 개천 이라고 불린)을 따라 아늑하게 남북으로 펼쳐진 그 옛날 1950년대의 종로구 원서동,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의 기억 제일 깊숙한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 특히 1954년 경 그 동네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억하며 그릴지도 모른다.

육이오 6.25란 글자가 보이면 원서동에 연관된 추억들이 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나를 깨우는가. 이런 이유로 나의 blog 특히 memoir 에는 이곳의 추억이 이곳 저곳 산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나의 추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것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6.25 동란, 66주년 아침에, 남기려는 것들, 6.25 동란 기록영화의 추억,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하고 기억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원서동 극장, 한성택, 조흔파’ 정도가 keywords가 될 듯한 오늘의 추억은 정말로 아련한 추억들이다. 뒤 늦게 연대를 찾아보니 분명히 1954년 에서 1955년 사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6.25 동란이 일단 끝난 휴전 바로 다음해 쯤이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 전쟁 이후 휴전이 될 무렵까지 우리는 원서동의 아래쪽, 휘문중고교 바로 옆, 동섭이네 집이라고 불리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의 주인이 휴전 이후에 피난에서 돌아왔기에 우리 3식구 (아버지는 전쟁 초에 납북)는 가까운 곳, 아주 작은 ‘무당집’ 단칸 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때의 기억들은 나의 오래 전 blog1에서 이미 회상을 하였다. 그 이후, 우리 세식구는 1954년 초에 이곳, 승철이네 집의 건넌방으로 이사를 왔고 본격적인 ‘재동국민학교 1~2학년’ 시절의 ‘평생 기억’을 만든다.

 

승철이네 집.. 최승철.. 어찌 잊으랴.. 나보다 2살 밑이었지만 그 나이에 나의 제일 친한 ‘한 집’ 친구가 되었다. 안 방 주인집은 양 부모가 있는 ‘정상적’인 주인이었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그 집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집이라고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비록 큰 집은 아니었어도 승철이네 집에서 보낸 2년 정도는 한마디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집의 위치도 원서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북쪽과 서쪽은 비원의 담으로 완전히 가로막힌 아늑한 곳, 여름에는 비원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잠을 설칠 정도였고, 겨울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청계천으로 흐르는) 에서 썰매를 타는 그곳은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승철이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나이도 비슷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큰 딸 시자누나는 나의 누나와 동갑이었는데,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는지 성이 ‘주’씨여서 원래는 주시자 누나로 통했는데 나중에는 성을 최씨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두 남동생인 승철이와 승관이는 현재 아버지와의 자식인 것이다. 당시에 그런 것이 그렇게 관심은 없었지만 기억에 뚜렷이 남은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 그것도 두 누나들까지 포함 된.. 그런 승철이네 집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승철이 아버지는 경찰출신으로 (해방 전에도 그랬는지는 몰라도) 훤칠한 키의 호남형, 하지만 사나운 사나이 기절도 있었다. 일정한 직장이 없으셔서 거의 집에 계신 것이 특이한 점이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하셔서 놀지는 않으셨다. 항상 무언가 하신 것 같았다. 기계 쪽에 관심과 특기가 있으셨는지, 엔진 같은 것을 집에다가 갖다가 놓으시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얼음을 만드는 냉동기였다. 그것을 가지고 후에는 경기도 연천 인가 하는 곳으로 가셔서 가게를 차리셨다. 물론 아이들은 집에다 두고 부부만 가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온 후의 일이었지만.

구파발의 추억: 가끔 승철이 아빠는 우리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인 경기도 구파발로 놀러 가시기도 했다. 여름 겨울 모두 갔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즐겁고 신기한 추억이 되었다. 구파발.. 어찌 잊으랴.. 그것이 그러니까 1954, 5년 경이었을 것이다. 서울역 염천교 옆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한없이’ 달려서 간 곳.. 구파발, 구파발.. 그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시골’이었다. 시골, 시골,.. 처음으로 ‘쌀나무, 벼’를 보았고, 논을 보았고 ‘진짜 초가집’ 안에 들어가서 자 보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그곳은 아름답기 전에 너무도 가난한 곳이었음을.. 서울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름다운 곳, 진짜 시냇물에서 수영, 미역을 감고, 미꾸라지를 잡고, 차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깜깜한 밤에 술래잡기를 하고, 한없이 많았던 메뚜기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리가 가서 자던 초가집이 승철이 아빠와 어떤 친척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에 ‘희덕이’라는 우리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것이 전부다. 겨울에 놀러 갔을 때는 얼어 붙은 논에서 ‘한 없이 하루 종일’ 썰매를 타는 황홀에 빠지기도 했다. 승철이 아버지, 감사 드립니다. 셋방에 사는 아이까지 데리고 가신 것..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 황홀경의 추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억에 뚜렷한 것 중에, 그곳 (구파발)에서 나올 때 어떤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이 승철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것, 그러니까 그 집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던 것, 그 아내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승철이 아빠에게 매달리던 것,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된 후 그 집을 떠나는데 또다시 그 집 아내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를 쫓아오던 모습.. 어린 나이에도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의 장면이었다. 그것을 만류하고 해결해 주었던 승철이 아빠.. 존경을 받을 만 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쪽도 있다. 다른 기억에, 한 때 어떤 ‘장판지 외판원’을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 한번 장판을 파는 젊은 청년이 왔었는데, 무언가 잘 못 되어서 승철이 아빠가 그 청년을 거의 구타하다시피 해서 쫓아 낸 것이다. 나는 너무나 혼동스러웠던 것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어린 나이에 그것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의 상에 흠이 간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없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까지도 한 것이다. 

 

작가 조흔파:  집에서 북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조금 더 좋은 집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바로 ‘작가 조흔파’ 선생의 집이 있었다. 당시에 솔직히 조흔파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그 집의 둘째 아들 ‘조영환’과 같이 놀았기에 그 집엘 놀러 가며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소설가라는 것, 학생잡지를 보면 그의 이름이 눈에 뜨일 정도였지만 그런 것을 읽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그 집의 큰 아들이 이름, 그러니까 조영환의 형의 이름이 조영수였다. 나중에 휘문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기억이 난다. 조영환은 장난이 조금 심한 애였고 우리들을 조금 괴롭힌 기억도 나는데.. 의문은.. 분명히 나와 같이 재동국민학교에 다녔을 텐데.. 졸업 앨범에 그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졸업하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을 것이다.

그 집에 몇 번 놀러 갔을 때 느낌은..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다른 집이다.. 그러니까.. ‘작가, 문필가 소설가’의 집이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아빠 조흔파 씨는 집에 없어서 못 보았다. 그리고 그 엄마도 못 보았는데.. 그 집 툇마루에서 이상한 것을 본 기억, 바로 수영복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 수영복을 보았다. 그리고 들었던 소문이 있었다. 그 집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고, 후처였다는 사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게다가 그 후처는 당시에 숙명여대 학생이었고 조영환이 엄마는 ‘쫓겨 났다’는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하~ 그 새 엄마는 조흔파씨가 아마도 숙명여대에서 가르친 학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아마도 맞지 않았을까? 그 이후 ‘사라진’ 조영환이네 기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TV가 나오면서 가끔 조흔파씨가 출연하는 game show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또한 알게 된 것은 조흔파씨의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이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김관형, 종맹이 형들:  집 바로 앞, 골목길 건너에 붙어있는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김) 관형이 형 살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은 기억이 안 남) 또 한 집은 ‘원서동 극장’ 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집, 종맹이 형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관형이형, 종맹이 형으로 기억이 나는 두 집이다. 관형이 형, 어린 눈에도 그 형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형이었다. 말도 부드럽고 우리들, 나와 같은 동생뻘 아이들을 잘 돌보아 준 형.. 가끔, 옆집인 종맹이 형네 집에서는 극장처럼 영화를 상영하였다. 아마도 종맹이 형의 아버지가 기록영화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심심하면 여름 밤에 우리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 몇 집을 불러다가 대청 마루에서 영사기를 돌렸다. 극장가는 것 당시에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활동사진’을 집에서 본다는 것은 참 희귀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화’라는 것이 모조리 6.25 전쟁 기록영화였다는 사실..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네 아낙네들인데 그들이 그것에 열광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은 아주 달랐다. 만화를 보아도 전쟁, 군인들에 관한 것만 보는데.. 실제 전쟁 기록 영화를 집에서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완전히 꿈같은 일이었다. 심심치 않게 많이 보았던 6.25 기록영화들.. 군대 사열식하는 것부터 실제 대포를 쏘는 것, 군인들이 쓰러지는 것.. 그것은 당시 여름 밤을 다시 회상할 수 있는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종맹이 형은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관형이 형은 나중에 중학교까지 가서도 멀리서 가끔 본 기억이 난다. 나를 특별히 잘 돌보아 주었다는 나만의 상상인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되었다.

 

한성택 형.. 집 옆에 흐르는 개천 건너 쪽에 있는 나즈막 한 집들에 ‘한씨 일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나의 다른 기억을 만들어준 성택이 형이 있었다. 그 나이가 얼마 정도 였을까? 아마도 중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집에는 사촌으로 알려진 한성우도 있었는데 그는 나와 동갑으로 재동국민학교도 같이 다니고 졸업도 같은 때 하였다. 성택이 형, 전형적인 ‘형 type’ 이라면 어떨까.. 동생뻘 아이들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조종’을 하는 type, 나와 승철이는 그를 ‘하느님’처럼 따르기도 했지만 내가 훨씬 더 ‘보살핌’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다.. 그 나이에 어떻게 야쿠자도 아니고, 그런 ‘돈 관계’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의 사고방식은 간단했다. 그 형에게 더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내가 받는 용돈을 그에게 바치곤 한 것이다.

덕분에 동네에서 나는 주먹 같은 아이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도 ‘돈의 위력’을 실감하게도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형만 보면 고맙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그 성택이 형의 심정은 어땠을까? 돈을 받으니 좋았을 것이고, 졸졸 따라다니며 ‘숭배’를 하는 꼬마가 있었으니 좋았을지 모른다. 한번은 한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그 형을 따라서 ‘한없이 걸어서’ 썰매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위치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도 삼선교 부근이 아니었나.. 돈화문, 창경원 앞 전차 길을 따라 걸어 간 곳, 눈부신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던 그 추억.. 결국 간 곳에서는 썰매를 살 수가 없었다. 

6.25의 기억을 다시 생각하면 100% 생각나는 원서동 어린 시절, 그 중에서도 1954년 무렵의 승철이네 집 주변의 추억들은 나의 6.25에 대한 심각한 역사를 조금은 부드럽게, 포근하게 만든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 인물들.. 지금 다 어떻게 살고들 계신지..

 

  1. 육이오, 원서동, 동섭이네집, 영구차 귀신

2주일 대출기한이 수개월을 지나가면서 이 책을 우선 반납하여야 한다는 stress를 느끼며 이제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저곳을 훑어보고, 비교적 가볍게 접한 이 책에서 나의 재동 齋洞 동창, 김정훈 부제에 대해서 알게 되고 느낀 것을 정리한다.

신학생 김정훈

신학생 김정훈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사실은 정훈이가 어떻게 그렇게 일찍 타계 他界 를 했던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의 집안, 가족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신앙, 성소를 가지게 되었는지..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20대를 훨씬 넘은 시절부터 쓰여진 일기 형식이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이 정성스럽게 담겨진 ‘문학적 냄새’가 나는 글로써,  꼼꼼히 ‘정독’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강 책을 훑으며 느꼈던 감정은 의외로 반갑지 않는 나의 반응이었다. “좋은 집안, 머리가 좋은 덕으로 선택된 선망의 대상으로 어려움과 고민 같은 것 별로 없이 유럽 유학 중, 좋아하는 등산을 하다가 조난사고로 운명”.. 비록 너무나 이른 인생의 비극적인 마감이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이력서적인 눈에 쉽게 뜨이는 사실들 만으로는 정훈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김수환 추기경의 서문’이 실릴 정도로 큰 화제나 영원히 남을 만한 책으로의 가치가 될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물론 이 책을 계속 읽으며 이것은 나의 ‘너무나 성급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 김정훈 유고집의 제목인데.. 과연 이것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 궁금증은 19 쪽을 보면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이 대목은 김정훈의 신학교 영적 지도 신부인 Stefan Hofer신부의 추모의 글에 있는데 그 신부님은 김정훈이 조난을 당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에 세르레스(Serles)에 등반하였던 적도 있었다. (중략) 베텔풀프(Bettel Wurf) 정상 정복자가 된 우리는 그 곳의 방명록에 우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베드로(김정훈)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 말로 무엇인가 썼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묻자 그는 독일어로 그 밑에 주를 달았다.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김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단순한 산에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깊은 종교적 느낌 속에서 산을 찾고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회고’를 보며 생각한다. 정훈이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등반을 했지만 단순히 산이 좋아서, 산이 그곳이 보이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통한 등반을 더 사랑하였던 듯 싶다. 나도 대학시절 참 산을 많이 찾아 다녔지만.. 어떨까, 종교적인 체험을 하였던 기억이 거의 없음에 정훈이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생체험은 더욱 돋보인다.

 

¶ 정훈이의 가족관계는 어떤가? 이것은 사실 기본적인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재동 동창생이지만 ‘공부를 잘 해서 경기중학교에 갔다’는 사실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재동학교 졸업 후 중학교 시절, 파고다공원 수영장에서 그가 아이(아마도 동생)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남자 동생은 있었을 듯 하다. 이 책에 가족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간단히 이곳 저곳에 나오기에 한 눈에, 명확하게 알기는 힘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묘사한 가정은 204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직동 김판사네 가정도 한국에서는 신앙으로 가꾸어진 훌륭한 이상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사리를 스스로 옳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인생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그런데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손보기가 어려워져 버린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중략) 곧 아버님 돌아가신 지 10년째가 된다. 벌써 그렇게. 강산이 정말로 크게 변했다. 아버지의 그 보화를 캐내어 나눠 줘야 할 큰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 이 순간 확연해진다. (1975년 3월 10일)

이 글은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친구 클레멘스의 가정을 부러워하는 글 뒤에 나온 것이다. 그 친구의 가정이 부러운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고 건강한 아이들, 높은 교육을 받은 것, 3남 2녀라는 것.. 이런 것과 더불어 잘 화합된 부모의 교육, 그것도 참된 신앙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 아마도 김정훈의 가정도 이에 뒤지지 않았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10년 전에 돌아가신 ‘김판사’ 아버님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에 가정은 ‘난맥상’이 드러났다는 판단이다. 그러니까.. 1965년 경에 아버님이 타계를 하셨으니까, 정훈이 경기고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혹시 그런 충격이 정훈이에게 깊은 성소의 뜻을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신앙심이 깊고, 가정을 사랑하는 아버님을 가진 정훈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로써는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천주교 가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천주교인이었을 정훈이네 가정, 혹시 대대로 내려온 ‘박해 받았던 가문’은 아니었을까? ‘비중에 컸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이곳 저곳에 나온다.

나가이 다카시의 ‘만리무영’에서 여러 대목을 읽었는데 느끼는 점이 많다. 우선 그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원만하고, 노력을 기막히게 많이 한 신앙인인 것을 알게 해 준다. 내게 특히 좋게 여겨지는 것은 그 글의 분위기와 저자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신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러하고, 어투며 그 상황까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까. 공감 가는 점이 정말 많다. 자식에 대한 배려, 아내 생각 등도 아버지 경우와 같다. 동시에 그 사람의 아들들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이나 나에게 대해 갖는 기대와 주시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불쌍하신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자녀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에 젖으셨을까? 얼마나 우심 憂心 이 크셨을까? (1972년 6월 11일)

위의 일기에서, 아버지가 권해준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저자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좋은 점’들을 열거한다. 여기서 보아도 그 아버지는 정말로 존경 받을 만한 가장이었음이 짐작이 된다. 일찍 운명을 하신 아버지, 아마도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 듯하다. 장남일 것 같은 정훈이, 이때부터 아마도 가장으로써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 20대를 꽉 차게 살아오던 정훈이의 모습, 언행, 성품 등은 어땠을까? 이것은 친구들이 본 것이 아마도 제일 정확한 것이 아닐까? 일찍 타계한 친구를 보내며 친구 대표 ‘기헌’의 ‘조사’에 잘 묘사되어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바랐던 대로, 평소에 너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기대했던 대로, 너의 훌륭한 재능과 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더욱 닦아지고 완성되어 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서른 해를 넘기고 가다니.. (중략)

너는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어. 너의 신심 생활의 진보는 언제나 앞서 있었고, 너의 정신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예리하게 우리를 압도했었지.

책 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너는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러면서도 네 마음은 언제나 뜨거운 인정이 넘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낀 너였는지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잘 해 주었어. 특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던 너였지. 너의 특징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던 너.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나누고 싶어 너는 애썼지.  (중략) 그러기에 친구이면서도 우리는 너를 존경하였고, 우리를 대신해서 큰 일을 해 주리라 믿었다. (중략) 착하고 아름답게 산 너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백 배의 보상을 틀림없이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너와 영결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1977년 6월 7일, 정훈이를 보내며.. 친구대표 기헌이가)

비록 고인을 기리는 조사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정훈이의 이목구비, 면모, 표정, 성격 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다 보인다. 나로써는 이것이 ‘성인’ 정훈이를 상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기대를 받았던 ‘장래가 촉망되던 큰 재목’ 이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 가톨릭 신부와 여성, 신부 지망생 그러니까 신학생이었던 김정훈은 어떤 여성관, 여성 경험을 가졌을까..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멋진 남자’에게 여성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나와 동갑(돼지띠) 이기에 1970년대 중반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가는 것이다. 다만 나의 background와 그 이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나와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한다.

우선 절대자 하느님, 예수님을 자연스레 알고 믿는 그, 완벽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유복한 가정.. 등을 생각하면 정말 ‘자격을 갖춘 멋진 여성’이 그의 주변이 있었을 듯 하다. 다만 이 유고집에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J 라는 여성만이 눈에 뜨인다. 과연 J란 여성은 누구일까? 거의 한 chapter “J와 인생” 이 J 라는 여성에 관한 일기인 것을 보면 ‘신부와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에서 가장 심각한 인물이었음 에는 틀림이 없다.

J에 대한 나이, 출신배경, 알게 된 경위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집 식구들에게는 알려진 사람, 공개된 데이트였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부를 지망하는 신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들일까? 결혼을 전제로 할 수가 없는 100% 순수한 지적인 만남이었을까? 계속되는 깊어지는 만남에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자신의 결심도 보인다.

J와의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 하고, 내렸으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

1. 실험적인 사귐은 있을 수 없다.

2.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하게 됨.

3. 그녀를 위해서도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나의 결론은 지어졌는데, 실행은 빠를수록 좋다.

4. 언젠가 끝에 가선 내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내 햄, 내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니 주님, 빛과 길을 주소서. 이럴 때 주님을 찾는다고 나무라지 마소서.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조직적’으로 차근차근하게 문제의 본질과 방향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문제의 심각함과, 어려움을 알고 그는 결국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며 돌아본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절대로 혼자였다. 절대자가 절대로 나에게는 없었다. 혼자였던 나는 모든 것을 ‘나침반’이 없이 헤매며 허우적거린 세월들이었다. 나와 정훈이의 20대 중반은 이렇게 하늘과 땅만큼 멀리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은총을 일찍 받았던’ 영혼이었다.

곧바로 그는 J에게 쓴 ‘헤어짐의 편지’를 쓴다. ;7월 23일자 일기에 편지가 실려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편지는 일기인가 아니면 실제로 J에게 보내진 편지인가 하는 것이다. 이별의 편지, 참 balance와 courtesy, essence가 모두 있는 편지가 아닐까?

J씨 귀하,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있어야 할 순간이고 또 그 때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이며 글 같은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글로 써야 제 뜻을 그래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기존의 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기가 뜻을 정하고 온 가능성을 모으고 있는 터에 이와 상치되는 사상 (事象)을 지닌다는 것은 일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가 확실한데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저로써 더 이상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J씨를 크게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쓰라림만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이것을 알면서도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린 거지요.

지금 이 글월을 쓰면서 저는 이 글의 의미가 엄청난 데 스스로 놀랍니다. 이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결단일 뿐 아니라 저로서는 제 삶의 의미를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이 일방적이고, 제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고 또 회피가 아니냐고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일이 그런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냐고 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또 그런 만큼 얼마나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를  J씨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몇 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만나고, 또 한 번 내린 결정은 단호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씨는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 심정도 몹시 단호함으로 차 있습니다. 아니, 단호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소도 아시고 또 9월에 학관에도 나가겠지만 제게 소식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 말했다고 한 것처럼 저도 J씨가 그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그 동안 얘기했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 김정훈

이 책은 그 동안의 우정에 대한 저의 기념의 선물입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별편지를 보면, 그의 확고한 결심을 J에게 전하며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이 정도만 아주 단호한 결심이 아니었을까? 이런 것으로 보아서 J라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정훈이를 만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아주 나이에 비해서 성숙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9월에 학관에도 나간’다는 구절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도 같은 ‘학관’에 다녔던 것은 아닐까? 학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대강 그 당시에는 ‘학원’이라는 말을 썼는데.. 학관은 종류가 다른 것이었을까? 마지막 구절에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이것으로 J라는 여성도 무슨 뚜렷한 목표를 향한 ‘지식층’ 여성이었을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 ‘편지 일기’ 이후에도 그는 사실 J를 잊은 것이 아닌 것 같다. 계속 J를 만나며 그녀에 대한 글이 나오니까.. 아마도 서로가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한’, ‘진정한 친구’로써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8월 21일의 일기는 J에 대한 끈질긴 미련과 자신의 필연적인 결심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J를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 금요일과 월요일에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면서도 보고 싶다.

그냥 당겨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왠가? 누가 무엇이라 한다 해도 이런 마음은 참 순수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현상이다.

간단한 기록으로 끝나려 했는데 또 길어진다. 내심에 잠겨 있는 것이 들고 일어나는 까닭이다. 파헤쳐 본다는 것도 힘에 겨웁다.  문제는 결단만이 해결의 관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결단을 내렸으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도 포기하고, J와 같은 사람과의 사귐도 금기(禁忌)인 신부가 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부행(神父行)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일 터인데 과연 그런가? 어째서 내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사제에다 걸었는가? 사제가 무엇인가? 그 본질을 분명히 보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비교적 분명하게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신부에 대한 정의, 그 신원(身元)은? 고전적 정의로서는 내게 그 의미가 약하다.

위의 일기로 나는 그가 아직 신부가 되려는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을 안다. 하지만 계속 내면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적으로 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이성, 그것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찌 간단히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김정훈의 ‘결단의 힘’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인 여성에 대한 사랑, 관심, 끌림 등과 신부가 되려는 성소의식이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몇 개월로 1973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김정훈, 드디어 무서운 결단을 내리며 편지를 쓴다. 신부가 된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J씨 귀하.

이 시각을 위해 사귐을 해 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는 초조하리만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뜻밖의 이 글월을 받고 놀라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을 지고(至高)로 모시고 있고, 그 동안 J씨나 저나 거짓 한 점 없이 서로 성실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벌써 짐작을 하실지 모르나 정말 그렇습니다. 결단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저는 신부행(神父行)을 결단했습니다. 설령 각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저의 그 선택에는 후회나 변함이 없습니다. J씨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J씨가 말한 뜻대로 그 동안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피치 못할 불성실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제가 J씨를 아끼는 그만큼 이 문제는 절실합니다. 이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어떤 식으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항상 의식한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껏 회피하려 했으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단호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가 쉬웠고, J씨는 어렵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 사귐이 그렇게 순수했던 것처럼 이 시작도 서로에게 순수해야 하고, 전적인 동의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J씨는 J씨의 길을 힘차고 명랑하게 가십시오. 저도 제 길을 용기 있게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상이 제가 쓰고 싶은 전부입니다. 사실 J씨는 이 글의 진의(眞意)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집 전화번호도 알고 또 찾을 수도 있지만 저를 찾지 마십시오. 이별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저도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

1973년 12월 26일 김정훈

정중하고 진심이 우러나오는 글이지만, ‘영원히’ 남녀로써 헤어져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미련을 0%도 남기지 않고 그는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라는 작별인사로 끝을 내는 그.. 얼마나 괴로웠을 결단이었을까? 그 나이에 나라면 ‘절대로 절대로’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1974년 봄 무렵 유럽 유학을 떠나는 그는 아마도 그 때서야 J씨를 조금은 더 쉽게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남녀관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Part 2로 계속 됨)

 

Morning routine gone: 4월보다 더 싸늘한 5월의 어떤 날들을 기억한다. 오늘 2016년 5월 5일이 바로 그런 ‘싸늘한 날’ 이 되었다. 그런 싸늘한 아침에 ‘비상용’ 이불을 더 덮어서 잠은 포근했지만 온 몸은 완전히 권투시합 15 round에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떤다. 아프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특히 손, 팔, 허리, 이빨 등등이 더 아픈 듯 느껴졌다. 어제 갑자기 ‘남용’한1 나의 근육들이 치열하게 데모를 하는 것인가? 곧바로.. 아하~ 나의 몸이 나에게 ‘오늘 아침 morning routine은 없는 것으로’ 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아~ 미안합니다..

오늘 아침의 ‘regular routine’은 9 AM daily mass와 breakfast@SonataCafe, 이후 곧바로 YMCA workout 바로 그것들인데 이 세가지가 순식간에 없어진 것이다. 이런 routine들, 특히 ‘영육간’에 중요한 routine들, 전부터 둘이서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다. 얼마 더 남은 인생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절대로 sprinter가 아니고 marathoner라는 생각으로 살자는 것이다.  serious Moderation, compromise..하는 기분이 아니면 절대로 한 달도 못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그런 덕분에 ‘좋은 routine’들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최소한 5년 이상 꾸준히 지켜지는 routine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서 지금은 생활, 몸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daily mass를 빠진 것은 아무래도 미안합니다… 라는 말이 귀속에서 맴돈다. ‘성체,성혈’을 놓친다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서 생사 生死같은 큰 차이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인자하신 우리 천상의 어머니께서.. 그래 무리하지 마라.. 오래 오래 뛰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하고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실 것 같다.  OK, 간바로, 성모님!

 

¶ 어린이 날: 5월 5일하니까, 직감적으로 친근한 5/5의 연속.. 아하.. 어린 시절에 제일 좋았던 일년의 하루, 우리들의 날 어린이날이구나! 하지만 지금도 대한민국에 5월 5일이 어린이 날인지는 잘 모른다. 이것도,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의 유행으로, ‘일본강점기의 잔재’라고 하루아침에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조선 어린이를 사랑했다던’ 방정환 선생님, 이 날을 제정하면서 왜 왜 하필 보기 싫은 일본의 어린이 날인 5월 5일을 그대로 답습을 했을까? 다른 의문점은 해방 이후에 일본이라는 생각만 해도 잠을 못 잘 정도로 반일 증오의 표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이 날을 그대로 놔 두었을까?

상관없다. 우리들 이 어린이날 덕분에 멀쩡하게 한창 화창했던 봄날에 학교공부 완전히 쉬고 하루 종일 선생님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놀았으니까.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물에 빠지면 우리들부터 먼저 구해준다는 등등 참 기분 좋았던 하루를 보냈다. 당시에 불렀던 ‘어린이날의 노래’,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고 가사도 100% 완전히 외운다.

시대적으로 찌들고, 세계에서 모든 ‘좋은 통계’ 에서 거의 바닥에 머물던 조국이었지만, 우리들 눈에 그런 것 크게 상관이 없이 그날 하루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골목에서 만세를 부르며 달리고 숨고 웃고 떠들어댔다. 그렇다.. 바로 그 때의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었다. 다른 것 없었다. 그 동안 강산이 다섯 번 이상이나 변했어도 그 당시의 추억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Battle of Puebla

Battle of Puebla, 1862년 5월 5일

Cinco de Mayo: 싱코-드-마요, 이곳에 오래 살면서 주변국들에 대한 것들 듣고 배우고 알게 된 지도 꽤 세월이 지났다. 특히 남쪽에 사는 멕시코는 사실 북쪽의 캐나다 보다 더 정이 가고 친근한 느낌으로 관심도 많이 가는 편이다. 우선 역사가 그렇고 종교가 그렇다. Guadalupe 성모님은 물론이고 다수가 가톨릭인 순진한 사람들, 비록 잔인하고 부패한 인간들도 ‘닥상’으로 널린 나라지만 그래도 정이 간다.

오늘은 5월 5일, 바로 멕시코 독립기념일(9월 16일) 다음으로 중요한 명절인 Cinco de Mayo,  글자 그대로 ‘5월5일’이다. 혹시 여기도, 어린이날? 물론 아니고.. 이날은 역사적인 날로 1862년 5월 5일,  멕시코 군대가 프랑스 ‘침략군’을 ‘프에블라 전투, the Battle of Puebla‘ 에서 최악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역전승을 한 ‘전승기념일 戰勝紀念日’이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이 ‘막강, 기계화 된’ 일본군대를 섬멸한 정도가 될까?

이 전투에서 만약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면 미국 역사도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의미가 있었던 전투여서 아주 흥미롭다. 간단히 말하면, 침공을 했던 프랑스군 (나폴레옹 3세의 군대)이 멕시코를 제압했었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 중에는 미국의 ‘남부 정권 Confederates’를 돕는 일이었고, 그 남북전쟁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날 승리의 의미는 미래적, 국제적인 것이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멕시코는 더욱 확고해졌고, 링컨이 승리한 미국은 초강대국가 superpower로 운명적인 발걸음을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역사는 재미있고도 심각하다.

 

  1. popup project, 보기흉한 outdoor deck을 고치는 일, 보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4월의 마지막 주에 접어들고, 작년 4월 ‘배 베로니카’ 자매님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며 겪었던 바쁜 4월에 비해서, 올해 ‘우리의 4월’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다고 서로의 의견을 모은다. 또한, 올 3월 말 보나 자매님과 영원한 작별을 한 후, 슬프고 바쁘고 정신이 없었던 느낌의 3월에 비해서 갑자기 무슨 휴가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아주 한가한 그런 4월이 거의 가고 있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의 전원 목가적인 박목월 시인의, 낮고 파아란 하늘과 수줍은 꽃들이 핀 파~란 청라 언덕과 이름 없는 항구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지만 실제로 그런 아련~한 꿈같은 모습은 나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4월의 노래’를 회상하며 이제는 타계하신 가톨릭 음악가, 나의 중앙고 1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 김순애 교수 작곡의 4월의 노래가 그렇게 맴돌았을 것이다.

올해의 point는 가사 중에 나오는 ‘이름 없는 항구’.. 어찌 그렇게 그 구절이 나를 헤매게 하는가? 암만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아마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분명히 계획 없이 훌쩍 떠난 나그네의 넋두리였을 것이다. 나도 그런 ‘부러운’ 나그네가 되고 싶다면.. 그렇다. 이제 그런 나이도 아니고, 그런 처지도 아니다. 꿈을 깨고 잠을 깨자.. 다시 ‘나를 필요로 하는 항구’로 배를 저어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4월을 보낸다.

 
박목월 작사, 김순애 작곡 4월의 노래

 

4.19 에 대한 것, 물론 나의 기억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당한 부분은 news media에 의한 것들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당시 서울의 일간지가 제일 그렇고 나머지 것 중에는 미국의 LIFE magazine도 한 몫 낀다. 특히 당시의 ‘최첨단’ 사진기자, 기술을 자랑하던 잡지라서 그 역사적 가치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 화보 이외에도 사설, 논설 등도 수준급이었는데, 다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금은 left-leaning (좌향적)  한 쪽이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든다. 4.19 학생 혁명이 난 후 처음으로 기사와 화보를 다룬 것이 5월 9일자였고 거기에는 아주 비중 있는 ‘논설, editorial’이 실렸다. 제목이 바로 The Student Phenomenon, 학생현상(?).. 그 전문을 여기에 발췌하였다.

논설의 주제는 바로 ‘학생’들이다. 한국의 학생을 중심으로 세계도처의 학생들,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하였다. 이 논설을 쓰게 된 동기는 ‘분명히’ 한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곧바로 터키에서 4.19 와 비슷한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의 친구’ 멘데레스 수상이 실각을 하였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난처한 사태가 아닐 수가 없었다. 두 나라가 거의 같은 미국의 ‘맹방’, 제1의 적인 소련의 공산당과 총칼로 맞선 나라가 아닌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보니 나라 안에 조금 잡음이 있어도 외교적으로 무마할 정도였다. 4.19 혁명 당시도 미국은 한국 학생의 ‘유혈사태 희생자’정도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에 일이라도 이 사태를 이용해서 김일성 개xx가  제2의 6.25 라도 꿈을 꾼다면 그것이 진짜 미국의 악몽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맹방의 지도자, 사실 또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터키 또한 비슷한 상황이고 보니 한쪽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 다른 쪽은 나토 NATO로 묶여 있는 상황의 미국, 참 입장이 어려웠을 듯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자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태는 흘러갔고 미국의 입장 또한 큰 문제없이 해결 된 셈이다.

LIFE magazine의 논설은 다음 사실을 주목하였다.

이 두 나라의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지독하게 심각한 미국 소련간의 냉전상태 라는 사실. 이 편이 아니면 저 편, 중간이 없었던 그런 심각한 냉전 상태에서 ‘약소국’들은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 남용이 허용되었고, 그들이 독재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을 견디지 못한 첫 그룹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미국의 경우,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운동권’ 형성이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의 혁명이 ‘완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문제는 아마도 ‘노예제도의 전통’을 고수하는 주들과 연방정부간의 마찰, 충돌이다.

이어서 논설은 유럽의 사례를 들며, 1848년 Hungary 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예로 든다. 근래의 예로써 1956년 역시 Hungary의 소련침공을 유발시킨 ‘자유운동’을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운동들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지만, 극단적인 예외는 세계 제1차 대전을 유발시킨 ‘사라예보사건’ 이었다.

논설은 다시 LIFE magazine의 progressive value를 다음과 같은 ‘미국 흑인차별’의 사건들에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South (남북전쟁의 남쪽 측)에서 흑인 학생들이 제도적인 흑백차별에 항의해서 식당 같은 곳에서 백인들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데모’를 벌리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남측의 웃기는 전통’에 대항하는 이런 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신세대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덕이 아닐까.

동정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논설은, 학생들이 정부의 극단적인 탄압적인 정책에 반발을 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정치깡패, 정치경찰들이 얼마나 웃길 정도로 비행을 저질렀던가? 그저 휴전선 넘어 김일성 개xx가 ‘무서워서’ 침묵만 지키던 일반 국민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그런 목불인견 적인 꼴들을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런 백주대로 강도 같은 정책을 싫어한 것은 한국 대학생만이 아니었음을 주지하는 논설은 당시의 국무장관 ‘허터 Herter‘와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맹방이고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탄압적인 정책이 안보를 위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국무장관 허터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대한 것도 거의 같은 ‘미소 냉전’의 산물이었다. 공산당을 잡으려는 부패정권에 대항한 학생들의 데모와 항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미국의 기본 자세는 이곳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미의 좌익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쿠바 카스트로 를 왜 미국에 반대하는가 항의를 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스트로 Fidel Castro 가 ‘공약’을 어기고 ‘자유를 억압’ 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것의 밑에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논설은 한국과 터키의 학생들을 지지하는 결론을 내린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불만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의 credo가  Don’t tread on me! (밟지 마!)라는 사실임을 주지해야 한다.

논설을 4.19혁명이 난지 66년이 지난 뒤에 읽으니 격세지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적으로 가치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느낌이니까. 기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논설이 조금 과소평가한 낙관적인 분석은: ‘미국 학생들은 절대적 자유가 보장된 덕분에 조용할 것이다’ 라는 것.. 이 논설이 쓰여진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서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반정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겪게 되니까.. 월남전의 정당성에 대한 불만에 의한 것, 이것은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가 ‘보장, 허용’ 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irony가 아닐 수가 없다.

 

LIFE cover

LIFE cover

There is a fascinating pattern emerging in Latin America, Korea and now Turkey. What is taking place in these widely separated lands is an outburst of resentment by university students against governments which – partly as a result of the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 have become tyrannical. And what the students are proving – which free men must of course welcome – is that young, spirited and determined people can still make tyrants tremble, and even totter.

Political revolt by university students is a well-known story abroad, thought not common to our own land. This may be a reflection on the seriousness and maturity o f U.S. students but, whatever the cause, other students around the world are politically minded by traditional and are accepted as a dynamic political force.

Perhaps the contrast exists because our own revolution was so complete – in establishing the basic freedoms of conscience, press and speech for once and all – that there has been no need to question what it has settled. The greatest challenge was met in our War Between the States which settled forever that no man may be another’s master.

In Europe, where things have been different, it was a young poet, Sándor Petöfi, who in 1848 set off the revolution in Hungary against the tyranny of the Habsburgs, only to be crushed later by the Russian czar. And it was the students of Budapest again in 1956, acting in the name of Petöfi, who overthrew – if only briefly – the czar’s successors. Serious, impassioned Italian students were the backbone of Garibaldi’s Risorgimento. In France, it was students who in 1897 rioted in defense of Captain Dreyfuss. Students were the nihilists, the anarchists, the Marxists of Russia. What all these movements had in common was idealism backed up by willingness to fight. Sometimes this violence was bent to good ends and sometimes ill. It was, we must remember, a Bosnian student named Princip who at Sarajevo lit the fuse which doomed more than eight million men.

Most of these revolts of the young have been beneficial. We are seeing something of that sort now in our own country. By their sit-ins Negro students in the South are demonstrating the silliness of a system which denies the right of humans to eat alongside one another. They are getting an impressive amount of support from which students outside the South. They are getting some, too, from which students in the South, who find they cannot rationalize or defend these paradoxes. The spread of education in the South has produced a force to make men think.

The students who have overthrown the government of Syngman Rhee in Korea have obviously been stirred to the depths by oppressive practices. Rhee’s motives were understandable in a land which has been horribly devastated by Communist incursions and must still live beneath the gun of possible new attacks. This is true in Turkey, which lies immediately beneath the guns of the vast Soviet Union and is subjected to continuous and insidious subversion. Yet, when all is said and one, the fear of losing freedom can never be made an excuse for suppressing freedom – certainly not as a permanent policy.

The demonstrating students who are insisting on freedom have an ally in Secretary of State Herter. In his denunciations of the killings of South Africa and Korea, he has made clear that he will not allow the common interests of defense to put the U.S. in the position of endorsing practices which offend our basic principles. The students have another wise friend in President Eisenhower. On his Latin American visit Chilean students asked him trenchant questions about our alleged hostility to Fidel Castro. The President’s written answer to them left little more to be said: Castro has betrayed “the ideals of freedom of expression,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and the right freely to choose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course, that is also what Rhee did, and what Menderes is doing in Turkey. Students are letting them know that the time is later than they thought – and are right to do so. And we are right to endorse their legitimate grievances and their right to have them redressed. That is what the world would expect – and is entitled to expect – of a nation born in revolution and whose credo was, “Don’t tread on me!”.

 

아래의 사진을 보라.. LIFE에 실린 내 또래 아이들의 모습들.. 국민학생, 중학생이 섞인 이 데모는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송요찬 장군휘하의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내 중심을 장악했을 때 ‘군인 아저씨 우리를 쏘지 마세요’ 라고 다시 학생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외쳤다.

당시 계엄군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며 자기 국민을 ‘보호’하였다. 1년 뒤 5.16으로 ‘그 고마운 군인아저씨’ 들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진을 유심히 보며.. 서울 시청을 뒤로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는 아이들.. 바로 나를 보는 듯 했다. 꾀죄죄한 구제품 옷, 신발, 교복을 ‘걸치고’ 골목 뒤에서 놀다가 나온 모습들.. 바로 나의 모습, 이 사진의 ‘아이’들 다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되었을 것인데 그 날 ‘형님 학생’들에게 이끌려 나온 사연이나 기억하고 있을는지..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아침에 달력을 보니 4월 19일.. 화요일, 물론 4.19라는 숫자는 56년이나 지났어도 어제처럼 느껴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만큼 비록 세월의 깊이에 맞게 뇌의 깊숙한 곳에 잠겨있어도 아주 ‘큰’ 세포에 간직된 것이라 그럴 것이다. 그리고 화요일.. 이었다. 1960년의 4월 19일도.. 99% 화요일이었다는 기억. 5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을 함은, 그 세월이 그렇게 역사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세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일제 36년, 유럽의 100년 전쟁.. 등에서 느꼈던 그 햇수는 너무도 길었던 것이지만 내가 이런 56년을 어제처럼 기억하게 살면서 느낀 것은 너무나도 짧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것이다.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당시의 데모 열기 함성과 카빈 소총 소리, 어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수 많은 군중들.. 그렇게 찬란한 4월의 계절은 소음과 정적이 교차하는 순간들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새카만 교복의 물결, 심지어 대학생 형님들까지도..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뛰고, 트럭을 타고, 소방차를 타고 서울의 중심가를 돌고 도망가고 숨고 쓰러지던 그 때.. 모습들.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공격을 받던 날 우리 중학교 1년생의 혼란한 심정.. 누가 누구를 쫓아가고 쫓겨가던가.. 누가 우리의 역적이던가? 우리들은 그저 놀란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들려오던 요란한 카빈 소총 소리들.. 종로 경찰서 지붕에 설치된 만화에서만 보던 ‘기관총’들.. 곧 이어 아스팔트 길에 우람한 바퀴자국을 내며 웅장하게 들어오던 탱크의 무리들.. 4월 달.. 4월 달 ,1960년의 찬란한 꽃이 만발하던 4월 달이었다.

쓰러진 형님, 누나들.. 그렇게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던 그들.. 지금은 다 어디에 가셨는가? 그들은 과연 그들이 싸우던 목적을 이루며 살았던가? 혹시 그들도 나중에는 ‘역적’들과 같은 무리를 닮아가지는 않았던가?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이승만, 이기붕, 이강석, 프란체스카, 장면, 윤보선, 허정, 그리고 장도영, 박정희..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의 열차에 남았던 역사 속의 그들.. 모두 어디에 있는가? 젊으셨던 우리 어머니, 그래도 이승만의 잘못을 지적하시던 지성을 가지고 침묵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우리는 아직도 그 말의 뜻을 새기고 감사하며 산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그것에서 배우고 최소한 되풀이 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기에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2016년 4월 19일, 싸늘한 아침에 머리를 맴도는 넋두리, 이렇게 정리를 하지만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정상이다.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얼마 전 역시 우연히.. stumbled upon.. ‘재수 좋게’ 이 영화를 정확히 거의 50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 신필름 제작의 전쟁영화로 당시에 장안의 화제를 상당히 끌었고, 흥행도 대 성공이었던 것도 기억을 한다. cast도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등장을 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전투기, 거의 모두 F-86 Sabre jetfighter 가 대거 등장을 했고 지금 다시 보아도 ‘우습지 않게 보이는’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촬영 기술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혹시 이것도 ‘한국 영상원’ 어쩌구 하는 곳에서 ‘올려 놓은’ 것인가 했지만 정말 다행히도 ‘표준 youtube video protocol’ video여서 부지런히 ‘download’ 를 해 두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good news였는데 bad news는..  막상 보게 되니.. video quality가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VHS video tape보다도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첫 부분에 그 이유에 대한 ‘양해’ 메시지가 나온다. 이것도 역시 빨갱이 탓이었던가.. 신상옥씨가 강제 납북되면서 자신 소장의 original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의문은.. 신씨가 납북되면서 왜 그가 만든 영화들을 가지고 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북을 간 것인가? 좌우지간 여기에 보이는 영화의 video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video camera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보니 더욱 이 video가 값지게 느껴졌다. 아차..하면 이것도 못 보고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끔 이 영화가 생각나곤 하고.. 그 당시 보았던 영화의 장면, 줄거리 등을 머리를 짜내며 생각하기도 했다. 몇 장면과 대사는 아직도 기억을 한다. 또한 당시 인기 4중창단 불루벨즈 가 불렀던 주제곡은 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고 또 영화와 별도로 인기곡으로 남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이 되었고 상당한 인기였지만 당시 중앙 고교 2학년 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나이에는 ‘외국영화, 미국영화’가 아니면 모두 ‘촌스럽게’ 느껴지고, 사실이 그랬다. 그 정도로 국산영화의 질은 한마디로 저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빨간 마후라‘ (당시 마후라 란 말은 가벼운 느낌의 목도리란 뜻으로 거의 표준어처럼 쓰였는데 알고 보니 muffler의 순 일본식 발음이었다) 는 조금 달랐다. 우선 당시 우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박택규 화학 선생님이 이것을 보고 와서 아주 인상적으로 ‘선전’을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가 됐다.

그 박택규 선생님은 화학을 ‘대학 교수’ 스타일로 ‘강의’하시던 독특한 선생님으로 역시 수년 후에 대학교로 ‘영전’이 되시어 가시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할 정도로 화학 과목 이외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시고 자신이 본 영화 같은 것도 감상을 나누곤 했다. 당시 입시위주의 분위기에서 그런 선생님은 참 드문 case였다. 그 선생님이 알려 준 이 영화 장면들 중에서 ‘최무룡’ 이 수송기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출 되는 것.. 그것은 아직도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것 중에는 한마디로 모조리 멋진 사나이들.. jetfighter pilot들의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런 사실은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 가지인 모양으로 1980년대 미국 영화 Top Gun을 보아도 거의 비슷한 것이다. 여자들이 그 조종사들을 그렇게 멋지게 본다는 사실이 미국 영화보다 우리가 훨씬 앞서 이 빨간 마후라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신영균, 최은희, 최무룡.. 이 세 최고 배우가 주름잡는 이 영화는 6.25 전쟁 당시 강릉 공군기지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나도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강릉 공군기지는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었고 그곳에서 ‘뜨는’ 공군 조종사들을 내가 9살 쯤인가 원서동 살 당시에 가까이 보기도 했다. 물론 그 조종사도 ‘여자’와의 관계로 더욱 우리에게 알려진 case라서 내가 갖는 이들의 playboy인상은 이 영화에서 재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00% 확실한 기억 속의 장면 중에는 최은희가 고급 술집에서 hostess로 아주 취한 상태로 ‘쉬~ 하러 간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고2의 나이에 이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erotic하게 들렸다. 또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그룹의 조종사들과 여자들이 모조리 good night ladies’ kiss를 같이 하다가 비행단 최고 상관인 ‘박암’이 자동차 headlight를 키며 노려 보자, 신영균이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노무 새끼..’ 하며 다가가는 장면.. 50년이 되었지만 생생한 기억들이다.

당시 F-86 조종사들은 아마도 군인들 중에서 최고 ‘엘리트’ 급에 속했을 듯 하다. 왜냐하면 영어에 능통을 해야 미군들에 의해서 훈련을 받는데다가 비행기를 이해할 정도면 rocket scientist는 아니더라도 대학졸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군인들 중에서는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영균, 최무룡 급의 미남들을 아니었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하늘을 나르며 조국의 지킨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멋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 같다. 최소한 그 당시 이 영화를 본 나의 나이 또래는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본 느낌은.. 다 좋은데.. 끝 부분이 전체적인 ‘멋진 인상’을 구겨놓았다는 아쉬움이랄까.. 멋진 외국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촌스러운’ 국산영화의 느낌으로 끝을 낸 것이다. 그 장면은 ‘한국적 정서’를 나타내려고 한 듯이 ‘죽은 신영균의 어머니, 한은진’ 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불현듯 나타난 것인데.. 글쎄, 각본 때문에겠지만 이 장면으로 완전히 ‘멋진 꿈에서’ 깨어난 듯 느껴진다.

 

 영화 빨간 마후라,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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