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Cat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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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 Fromm의 고전 classic 인 ‘사랑의 기술 技術’, 종이 색깔이 그 동안 더 바래진 오래된 ‘볼품없이 초라한 paperback’ 을 부리나케 꺼내 펴놓았다. 몇 페이지를 펴보니 역시 책의 spine의 접착제가 완전히 말라서 그런지 그 부분이 완전히 떨어지고.. 할 수 없이 spray glue를 뿌려서 간신히 고정을 시켜 놓았다. 조금 불쌍하게 보이는 모습의 이 오래된 책이 더 사랑스럽고 정이 간다.
아침에 왜 이 책을 부지런히 찾았는가? ‘사랑’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요사이 요즈음 나를 문자 그대로 ‘괴롭히는’ 말이 바로 이 ‘사랑’이란 단어였다.  순교자 성당의 ‘요한복음 산책’ 영성독서 강의, 갑자기 악마처럼 나를 괴롭히는 나쁜 생각들 등등의 등 뒤에는 ‘사랑이 결여된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상상일까?
이 책을 봐도, 저 책을 봐도, 이곳, 저곳을 가도 나에게는 ‘사랑’과 사랑의 결여, 를 본다. 그것도 나 자신의… 왜 이렇게 이 흔하디 흔한 말을 나는 다시 깜짝 놀라는 듯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일까?
심리학적인 사랑, 영성적인 사랑, 종교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 상관이 없다. 사랑은 사랑이다. 특히 인간적, 인간 대 인간의 사랑, 나의 주변과 나의 사랑…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과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내가 쉽게 생각했던, 나는 물론 ‘나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제는 의심이 든다.
나는 안다. 나는 감정적인 사랑만을 사랑으로 보며 살았을 것 같다. 의지적으로 사랑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에 거의 없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할 자신은 있다. 의지적 사랑? 생소한 개념이다. 아니 없다, 나에겐…
의지적인 사랑, 공부하며 연구하는 사랑의 방법,  그것을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이란 책에서 본 기억으로 그 책을 찾은 것이다. 이것으로 현재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그룹,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 책의 서문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의 기술 技術에 대한 편리한 지침 指針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반대로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 成熟度와는 관계 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 感傷 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서낼리티 personality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한다.  <발췌: 사랑의 기술>

사랑과 관련된 source 중에 한동안 잊고 살았던 책들이 있다. 바로 예수회 Father Spitzer의 Quartet Series, 그 중에도 God So Loved the World 는 주제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거의 논문급인 그 책은 이런 때에 거의 오아시스와 같은 희망을 준다. 이런 때에 이것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오늘도 남아도는 ‘꽤 많은’ pc box들과 씨름을 했다. 물론 Ubuntu Desktop OS 를 installation을 하는 것으로… 이것을 하면서 왜 내가 이것을 지금 꼭 해야 하는 것인가 묻는 나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우선 ‘재미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실용성보다는 engineer적 호기심, 재미,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이유로 몇 시간 머리씨름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용성도 은근히 희망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요새 나의 심심풀이 시간선용의 제1 후보인 Raspberry PI가 Linux based라는 간단한 사실이다.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Linux community에 가까이 가는 것, 나쁜 idea가 아니다.  두 대의 PC box 에 Ubuntu 20.4 LTS 를 설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agony & ecstasy 의 연속이라고 할 듯… 그런 과정들이 내 engineer로서의 인생이었다. 고통과 희열의 반전, 연속…

 

아~ 또 냉랭, 싸늘, 움칠… 춥다, 추워… 조용하게 추운 바깥의 모습이 더욱 싫어진다. 이럴 바에는 아예 이상기온으로 좀 봄 같은 날씨도 나쁘지 않은데… 이제는 추운 것이 점점 귀찮아지고 싫어지는 것은 분명히 나이 때문일 것이다. 자연적 이치라고…
무언가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왜 그럴까? 어제 순간적인 자화상의 느낌으로부터 시작된 그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이 나를 시험하는 것일까? 나에게도 성령과 악령이 교대로 오는 것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요새 나는 분명히 악령 Screwtape의 노리개  감으로 고통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순교자 성당의 요한복음 공부, 예상외로 좋았다. 꽤 많은 깨달음도 있었다. 송봉모 신부의 전6권 ‘요한복음산책’, 교재의 주제와 정신을 충실히 해설하시는 신부님의 강의가 우선 좋았지만 오늘의 주제가 현재 내가 겪는 혼란스러운 생각에서 헤쳐 나오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성령의 움직임을 나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긴다. 배우려고 하지 말고 느끼고 묵상하고 관상을 하는 예수회, 아니 이냐시오 성인의 방식을 더 알고 싶다. 아니 현재 이 복음공부는 이냐시오 영성에 바탕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timing이 어디 있을까? 최근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James Martin신부의 책들, 대부분 이냐시오 관상, 영성에 관한 것들인데 우연일까? 이 요한복음 공부 전에 나는 이미 그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시작을 이미 했던 것인데… 역시 프로인 신부님의 지도로 본격적으로 이것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이번이 기회다, 절호의 기회… 이것을 놓치면 나는 없다, 없어… 미래가 없다… 절대로 잡아야 한다.

오늘도 새로 산 refurbished PC에 Windows 10 Pro  installation 을 계속한다. Provisioning 이라고 할까? 일단 연숙에게 주기로 했으니 그녀의 필요에 맞게 personalize를 해야 한다. 이런 작업도 앞으로 별로 없지 않을까? 오늘도 hardware test를 해 보니, 특히 video는 확실히 speed에서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본다.  그것으로 일단 되지 않았을까? Benchmark는 역시 YouTube video일 것이니까… 그것이 pass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책 한 권과 2개의 32GB microSD card (rather chips?)..  책은 Simon Monk, O’REILLY  Raspberry PI Cookbook인데 거의 600 pages에 가까운 두툼한 책이다. Raspberry PI [tiny single board computer]에 대한 책은 이미 오래 전에 산 것이 두 권이나 있으나 문제는 너무나 오래 된 것이다. 2020년 대에 나온 이 책은 아주 fresh 한 느낌이고, Amazon의 review가 아주 좋았다. 나의 희망은 사실 이런 review들 보다는 그 동안 뜸했던 나의 흥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결과는 어떨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희망적이다. 이 책의 인도를 받아 작년에 $$를 투자한 것들, 주로 electronic parts들,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은 것이고, 머리를 조금 더 쓰게 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다.

 

어제 밤에 ‘연속상영’으로 보게 된 Narnia의 저자,  C.S. Lewis의 1993년 자전적 drama film1, Shadowlands 로 나는 인간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순수하고 지성적, 고전적 사랑의 위력! 영화의 주인공 Jack Lewis는 비록 견디기 어려운 간병과 사별의 고통을 겪었지만 그것이 보여준 진정한 사랑, 그것도 세속적으로 비쳐진 인간상과 영성적, 내면적인 모습이 100% 일치했던 C. S. “Jack” Lewis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교훈이고 모습이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그런 것을 배우고, 실천하고 남기고 싶다. 신앙적으로 언행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인간상, 요즈음에 흔치 않은 것이다.

Joy[Debra Winger]의 불치병이 밝혀진 후 결혼식을 결심하는 Jack[Anthony Hopkins]

아내의 임종을 함께…

 

 

오늘 아침부터는 역시 전에 보았던 또 다른 인간상, ‘메주고리예의 Artie Boyle 기적’,  A Time for Miracles을 다시 보고 있다. 이 ‘영화’는 2000년대 초 성모발현지 메주고리예 에서 일어난 실화의 documentary film이다.  주인공인 Artie[Arthur], 전통적 ‘준 냉담적’인 가톨릭 집안의 가장으로 폐종양으로 위기를 맞는다.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친구의 권유로 3명이 메주고리예를 찾고, 십자가 정상에서 기적적, 순간적인 치유를 받는 것, 현재까지 아무런 후유증이나 재발이 없는 전형적인 기적체험을 한 것이다. 나에게는 희망의 자극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전적 시기를 가고 있기에 이 이야기는 아주 timing이 좋다. 기적, 그것도 초자연적인 기적의 이야기와 증언이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된다. 이것도 공동체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의 하나라고 본다. 나는 현재 그렇게 ‘심각한 도전’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Medjugorje 에서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가 Artie

The Cross Mountain

위의 두 가지 ‘시각적 활동’의 도움으로 놀랍게도 안정감을 되 찾으며,  내친 김에 순교자 성당 ‘본당 봉사자를 위한 영적독서회’를 염두에 두며 ‘신비스런’ 요한복음을 읽게 되었다. 몇 년 전에 Holy Family 성당에서 거주사제였던 ‘젊지만 중후한’ 멋진 아틀란타 대교구 소속 법관 신부님 Fr. Dan Ketter가 열심히 권해주었던 주해 신약성경까지 동원해서 드디어 요한복음을 정성스레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몇 가지 ‘간단한’ 선택으로 최소한 오늘 하루는 평화의 기쁨을 맛보다니… 정말 간단한 선택이었는데…  부수입으로 어제부터 아팠던 허리의 통증까지 조금은 나아가는 듯 느껴지고…

 

며칠 째 계속 먹었던 ‘쌀밥, vegetable stir-fry 아침’, 조금 지겹다는 불평이 들리는 듯. 오늘은 일상적인 ‘양식’ 아침메뉴로 돌아왔다. 역시 아무리 맛이 있어도 계속 먹으면 별 수가 없는가…  별볼일 없게 보이던 이 ‘양식’ 이 이렇게 새로운 맛인지는…

 

 

1월 중순 쯤이 되면 kitchen TV에는 반드시 이런 멋진 모습의 ambient music 이 Youtube screen에 뜬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눈 내리는 설경이 창 밖으로 보이는 coffee shop, 이런 것들이 있어서 고민이 있는 하루도 그렇게 괴롭지만은 아닌 걸 거다, 그래… 몸 대신 마음이라도 이런 곳에 갔다고 상상하는 것도 한겨울의 별미다. 비록 작은 화면이라도 상관없다. 머리 속의 화면만 충분히 크다면

어제 아침부터 등쪽 허리부분이 아파오던 것이 점점 아파지기 시작해서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는 것조차 힘이 든다. 이것 또 며칠을 갈 것인가 은근히 걱정이 된다. 어깻죽지 부분이 아니고 허리아랫부분인 것은 나에게는 아주 드문 것인데, 허리를 구부리는 것이 때에 따라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프니… 이것이 연숙이 주로 아픈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의 특징은 산보를 해도 별 효과가 없는 것이고, 유일한 처방은 허리를 안 구부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비교적 빨리 허리가 아픈 것이 조금 나아지고 있지만 이번에는 연숙에게 감기가 찾아오는 듯싶다. 혹시… 하지만 설마… 그래 오늘 저녁과 내일까지 조금 편하게 쉬면 이런 ‘노인성 불편함’일지도 모르는 것들 현명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내일까지 천천히 쉬고 나면 나의 생일이니… 그날 미역국을 제대로 즐기려면 내일까지 연숙이 나아야 할 터인데… 웃긴다, 미역국 때문에 빨리 완쾌가 되라고… 나도 지독한 인간인가?

 

  1. Youtube에서 볼 수 있음.

어제로부터 넘어온 잔광 殘光…  어제, 대림3주일의 시작에 새삼 느꼈던 여러 가지 밝고 새롭고 새삼스럽고 들뜨고 반갑고 기쁘기까지 했던 일들이 나를 이렇게 건강하게 느끼게 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사람이란 생물은 이렇게 쉽게 건강의 느낌이 쉽게 변하는 것인가? 비록 느낌이라도 좋다. 그것이 현재 나의 상태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Have You Found Joy? — Bishop Barron’s Sunday Sermon 

어제 깜빡 하고 지나친 Bishop BarronGaudete Sunday Sermon Youtube video를 본다. 벌써 100,000 views 를 향하고[결국 137,000 views] 있는 대림3주일강론, 변화무쌍하게 재빠르게 변하는 연약한 인간들에게 안 변하는 것, 그것을 거의 하루 종일 잊고 어쩌면 나의 현재 일상 경험을 그대로 분석, 묵상을 하는 착각에 빠진다. 하루 하루의 심리적 감정적 up & down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런 순간적, 시간적 변화무쌍한 지나가는 생각들에 집착, 고민, 절망을 피하며 살 것인가? 역시 기도, 기도 란 쉽지 않은 주문이 그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없는 일상의 쪼잔한 고민들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 이 강론은 내가 계속 듣고 실천해야 할 것 같다. 기도, 기도, 기도, 진심의 간절한 기도…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고, 두고… 이것은 현재 내가 지나가고 있는 생활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치료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일 듯하다. 중심, 중심에서 멀어진 나의 모습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 나의 병이다.

어제의 ‘대림3주일 기쁨의 주일 Gaudete Sunday’의 힘으로 이번 주를 기쁘게 살고 싶다. 기쁘게, 고민이 있거나 괴로워도 기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순간 순간을 기쁨이 넘치는 느낌을 갖고 싶은 것이다. 슬픔 보다는 기쁨을 친구로 삼고 싶다. 들뜨고 싶다. 사람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나를 친절하게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약간 취하고 싶다. 멋진 추억거리를 잊기 전에 기억하고 싶다. 멋진 대림, 성탄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안팎에서 마시고 싶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

오늘도 지나가는 해를 정리하며 더 남기고 싶은 나의 저무는 생의 기록을 찾아내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이런 작업에 익숙해져서 전보다 훨씬 쉬워졌기에 12월을 보내는 적당한 소일거리가 되어간다. 감사할 일이다. 거의 아무도 안 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공적’인 기록의 고마움을 어느 누가 알겠는가?

 

뜻밖의 5일간 자가격리에서 벗어난 이후, 정확히 2주 만에 둘이서 다시 하게 된 동네 산책, ‘오늘도~ 걷는다마는~’. 제일 짧은 코스를 택했다. 바람이 없고 싸늘한 느낌이 좋았다. 2주 전보다 훨씬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많아지고 요란해졌다. 열흘 남짓한 성탄, 올해도 급속하게 저물어간다. 어떻게 성탄, 새해를 맞을 것인가? 다음 주에는 우리의 ‘날개’를 향한 거의 마지막 목표를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다. 이렇게, 올해는 참 상징적인 일을 많이 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불현듯 이영석 신부님에게 안부 소식을 전했다가 어머님이 쓰러지셔서 응급실에서 답을 주신다. 얼마나 자상한 목자인가? 그 상황에서 그렇게 나에게까지 시간을 할애한 자상함, 나는 그것이 그저 감사한 것이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닌 듯, 꿰매면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한창 목회, 연구, 강의를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어머님에게 거의 모든 시간을 쏟는 모습에 감동을 안 받을 수가 있는가?

2021년 summer reading 목록 중에서 제일 빨리 독서/필사가 끝난 책이 예수회 America magazine 편집장 James Martin신부의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원제: My Life with the Saints, 2006)’ 이다. 이 책이 최근에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듯 싶다. 몇 개월 전에 Martin fever로 이름한 나의 초 超관심 기간 중에 이 신부의 책 4권을 거의 한꺼번에 산 적이 있었다. 그것들을 천천히 이것 저것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그의 문체와 지적 철학에 조금 적응하려는 의도였다. 이 예수회 신부는 news media상에서 가끔 ‘지나친 진보적 신부’라는 비판을 받는 것 외에는 별로 큰 관심을 끈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속단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결국은 Bishop Robert Barron에 못지않은, 아니 버금가는 미국 가톨릭 [거의] 차세대 최고 지성의 거목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연숙과도 나누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그분의 책 몇 권을 이미 읽었던 과, 이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교리반 시절 선물로 받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한국어 번역본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이었다.

이제까지 성인전 종류의 책은 나에게 별로 손이 가지 않은 것들이었다. 기억 속에서도 그런 책들은 우선 오래된 낡은 책들, 하나같이 고통을 지나치게 묘사한 것들, 감히 다다르지도 못할 인간의 능력을 넘은 초인간들, 난해한 고유명사 투성이의 조잡한 번역… 등등으로 나는 가급적 그런 책들을 피하며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도 별로 선뜻 손이 안 가는 책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제는 친근한 모습의’ Martin 신부가 쓴 책이라는 것에서 느낌이 아주 달랐다. 조금은 ‘초현대적, 초이성적, 심지어 과학적’인 접근을 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전통적인 고리타분 하고 녹 냄새가 풍기는 그런 성인전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바로 나를 위해서 쓴 책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이 책의 원제는 ‘성인과 함께한 나의 삶, My Life with the Saints‘ , 하지만 성찬성[역자] 번역본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왜 멘토란 말을 넣었을까?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성인’이란 말은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성인은 물론 그 외에도 성인 같은 삶을 산 사람들[토마스 머튼, 도로시 데이 같은]도 포함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그 ‘성인과 비슷함’을 멘토 mentor 란 단어로 표현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16명의 성인, ‘예비, 준’성인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의 특징,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모두 Martin신부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으뜸으로 다루어진 ‘성인’이 바로 토마스 머튼 트라피스트 수사신부님인데, 솔직히 나는 그런 사실에 아직도 동감을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화장실에서’ 몇 년간 읽었던 그의 대표작 Seven Storey Mountain 이란 자서전이 왜 그렇게 수많은 예비신부들의 ‘고전적’ 필독서가 되었는지 쉽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이유는 이 책은 솔직한 고백록일지는 모르지만 요점을 제외한 ‘군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웬 고유명사들이 그리도 많은지, 본인에게는 익숙한 표현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한 것들인데 알고 보면 그런 것들이 모두 불필요한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머튼은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실망까지… 그래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99% 틀렸을 것이라는 것 [사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Bishop Barron과 Father Martin 모두가 그 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마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토마스 머튼과 그 칠층산을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마틴 신부의 글은 다른 각도로 그 책을 재조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다시 그 책을 읽을 때는 조금 더 겸손한 자세로 읽게 될 지도 모른다.

 


참된 자아

 

나에게 있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화와 구원의 문제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와 같다.

 – 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대학에서 미시 美詩 American Poetry 강의를 들을 때, 월트 휘트먼을 처음 소개받았다. 우리 젊은 교수는 휘트먼 예찬자이자 연구가였다. 그녀는 시인의 전기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 어느 날 그녀는 만일 우리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거든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하라고 말했다.

 

내가 나 자신과 모순되는가?

그래, 참 좋다. 나는 나 자신과 모순된다.

(나는 크고, 내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앉아 있나니.)

 

휘트먼은 이 시구로 또 다른 시인이자 신비가요, 수도승이요, 예술인이요, 평화 운동가요, 사제요, 영성 대가요, 교회 일치 주창자요, 선사 禪師 요, 성인인 토마스 머튼을 어렵지 않게 변호할 수 있었다.

머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모순이다. 자신의 주변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봉쇄 수도회 수도승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데, 그가 바로 트라피스트 수도승 머튼 루이스 OCSO the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 (엄률 시토 수도회) 신부다. 떠돌이요 타고난 여행가이면서 정주 서원을 하고 미국 켄터키 주 외딴 산중에 터를 잡은 겟세마니 성모 대수도원에 정착하기로 작정한 사람. 자진하여 순명 서원을 하고도 수도 생활 상당 기간을 자기 수도회의 장상들과 부딪히며 보낸 사람. 자신의 소명에 반하지만 [필사주: 反인가, 반대로 魅惑인가? 정말 성의 없는 번역]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사람. 동양 종교들에 매혹당한 신심 깊은 가톨릭 회심자. 명예직과 훈장을 싫어하는 (아니면 싫어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려 노력하는) 저명한 문필가. 하루는 결코 한 줄도 더 쓰지 않겠다는 결단을 글로 쓰는가 하면, 며칠 후에는 출간된 자신의 또 다른 저서를 보고 느낀 기쁨을 글로 쓸 수 있는 사람. (그는 주목할 만한 한 일기의 도입부에서, 새로 나온 자신의 책 표지를 싸고 있는 올이 굵은 삼베가 당시 맨해튼의 현대식 나이트클럽에 사용된 천과 똑같았다는 점에 은근히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역설들, 이런 휘트먼풍의 다중성은 머튼을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변화무쌍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이르는 여정을 소상하게 기록한 1948년도에 출간한 회고록 <칠층산>은 사리를 아는 머튼조차도 예견하지 못한 출판계의 기현상이 되었다. 이 책은 수백만의 독자에게 관상 기도를 소개했고, 전후 미국 수도 생활의 쇄신을 예고했다. 평화에 관한 그의 글들은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의 전조가 되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자극은 지쳐 있던 한 미국인이 그리스도 신앙을 재정립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책은 나를 재정리하는 데도 보탬이 되었다.

<칠층산>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려면, 내가 머튼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얼마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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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일곱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 대학 와튼 스쿨에서 수강했다. 내가 경영학을 공부하기로 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거니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는 이해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미술처럼 신나게 공부한 과목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직업으로는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보았다. 일례로 나는 프랑스어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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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Peter’s Square에서 교황님의 삼종기도를 기다리며 운집한 die-hard 순례자들.

예전같이 평상적인 모습으로 기다리는 순례자, face mask가 하나도 안 보인다.

 

Vatican Angelus, 바티칸 삼종기도:   지나간 주에 일어난 딸애의 출산 같은 큰 일들을 때문인지, 모처럼 주일미사를 빠지기로 결정한 ‘우리들의 삼일절’ 일요일 오후에 Vatican Youtube 를 보니까 오랜만에 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삼종기도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교황님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 이라며 기도를 하자는 text message를 본 직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기에 사실 여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의 바티칸 삼종기도에 교황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과연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과연 삼종기도 시간에 맞추어 교황님이 창문으로 나타나셨고,  close-up 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조금 피곤한 것 이외에는 전혀 병색이 없었다. 또한 성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순례객은 숫자는 비록 적었어도 얼굴 마스크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태리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율이 아주 높다고 들었는데, 그 지역이 다른 쪽인 모양이다. 하지만 로마나 바티칸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우려는 떨칠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창문으로 등장하신 교황님, 코로나 바이러스는 헛소문..

역쉬… fake rumor 전혀 병색이 없는 교황님, 평소처럼 삼종기도, 메시지를 바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까.. 과장해서 말하면 심한 flu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1) 이 바이러스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점, (2) 감염률이 높은 듯한 점, (3) 경제,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인 파급적인 불안감, (4) 결국은 사회적인 약자에게 미칠 지나친 피해… 등등을 생각하면 조금은 미리 피곤해진다. 왜 하필이면 성스럽기만 한 사순절에 이런 ‘중국발 대형사고’가 났을까? 

몇 년 전부터인가.. 내가 YouTubeVatican programming을 보기 시작한 것이.. 최소한 2~3년 정도는 되었지 않았나? 처음에는 중요한 행사, 그러니까 시복, 시성식 같은 것 아니면 가톨릭 전례력으로 아주 중요한 날들, 크리스마스, 부활절 같은 것을 high definition video로 볼 수 있었던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해외여행을 밥 먹듯이 ‘자랑 삼아(주로 Facebook-type people)’ 하는 부류들은 분명히 그런 때마다 Vatican city로 날라가서 현장의 분위기를 만끽할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런 ‘$재력$’이 없기에 YouTubeVatican streaming video를 감지덕지 感之德之 하며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Italy 동북부의 소도시, Carpi 본당 앞 piazza 에서 거행된 교황집전 미사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고 생소하기도 했던 교황님 집전의 Latin Mass들이 이제는 거짓말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하나도’ 짐작조차 못했지만 지금은 그냥 몇 년을 ‘계속’ 본 탓인지는 몰라도 짐작으로 ‘거의 다’ 이해를 하게 되기도 했다. 반세기 전에 그 잘 나가고, 알량한 WordPower라는 책으로 영어단어들의 역사와 어원을 따지며 공부했던 그 말들, ‘배움의 위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 배워두어서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현대 영어는 물론 Latin어에서 나온 다른(나라) 말들, 짐작으로 거의 때려 맞추게 되었으니 말이다.

‘거의 매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교황 Francesco

 

대부분의 Vatican video programming들 중에서 가끔 ‘생소’한 것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오늘의 주제인 romantic mass가 그 중에 하나다. 교황님, 가끔 (아니면 자주?) Italy 국내의 성당들을 방문하곤 하시는데 그 중에 조그만 본당들도 있다. 2017년, 4월 2일에 방문한 곳 Carpi 라는 도시의 본당이다. 이 ‘사목적 방문’의 이유는 지진에 의한 고통을 위로하시러 가신 듯하다. 지진으로 무너진 본당의 건물이 다시 세워진 것에 맞추신 듯 한데 확실한 것은 모른다.

 

 

그 때 찍은 ‘공식’ video, 누가 찍었는지 ‘참으로 멋진 coverage’라고 감탄을 했다. 처음에는 무심코 생소한 것을 본 듯이 보았지만 두 번째 보게 되었을 때는 더 자세히 그곳의 풍경,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조그만 도시라서 그런지 그곳의 사람들, 신자들 보통 생각하는 ‘멋진 이탈리아 fashion‘ 같은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평범한 소도시의 simple 가톨릭 신자들.. 어쩌면 그렇게 소박, 경건하고도 생동감 있는 미사를 드리던지.. 위로와 사랑으로 가득 찬 모습의 교황님을 중심으로 그 많은 사람들 혼연일체가 된 모습들.. 인상적이었다.

 

 

더 나아가 이 미사의 video를 계속 반복해서 보게 된 이유는 조금 우스운 것인데.. 성가대의 어떤 젊은 여성 lead singer의 모습 때문이었다. ‘서양여자’의 나이는 조금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이 여성은 쉬운 case로서,  아마도 upper teen 아니면 early 20s  나 되는지.. 나이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요즈음 정말 오랜만에 성형왕국 대한민국의 수 많은 똑같은 복제품 같은 여성들에 비해서, ‘칼을 대지’ 않은 ‘처녀성 얼굴’이었고, K-pop 가수들처럼 100% artificial 한 화장기가 전혀 없었던 바로 그 얼굴..  거기다가.. 그 청순하고 단순한, black gospel song 냄새가 전혀 안 나는 전통 가톨릭적 음성의 정수 精粹 를 보여주었다. Romantic한 감정까지 느끼며, 이런 저런 생각의 끝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손녀 같은 나이의 이 여성에 맞는 나이였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런 ‘찬사’가 그대로였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나이 듦의 비밀일 것이다.

 

 

심지어 ‘야릇한, romantic’한 감정을 갖고 교황님 미사를 ‘경청’하면서 이 programming을 찾고, 보고, 느끼게 되는 것, 전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긴다. 요새는 모두 그런 식이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지 않을까… 필연적인 것은 아닐까? 그러면 그 필연의 first mover는 과연 누구일까? 이래서 인생의 황혼기도 그렇게 지루하고 심심한 것이 아님을 실감하고, 또한 그저 감사, 감사한다.

 

 

Vivid Virgin's imprint

Vivid Virgin’s imprint

 

Guadalupe, 과달루페 성모님, Mexico City에 있는 그 성모님 (영상)이 내가 사는 마리에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 성모님의 ‘상본’은 나의 main desk옆 벽에도 걸려있어서 커다랗게 잘 보인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지난 7월 초 내가 속한 레지오는 과달루페로 ‘피정’순례를 간 바 있지만 우리는 가지를 못했기에 (lousy timing)  이번의 과달루페 성모님 소식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 웃기는 것은 이번에 우리가 ‘발견’한 성모님은 사실 지난 해 2015년 12월 12일에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 우리는 무척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주위에 물어보니 거의 모두 그 소식을 알고 있는 듯 했다.

Transfiguration Catholic Church

Transfiguration Catholic Church

이번의 Guadalupe story는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 최근 우리와 자주 보게 되는 Holy Family CC near-regular Chris 자매님, 아침 daily mass가 끝나고 coffee break시간에 우연히 우리에게 ‘마리에타 성모님’ 이 찍힌 사진을 보여주었다. 마리에타의 ‘어떤’ 성당 Transfiguration CC(Catholic Church) (The Catholic Church of Transfiguration) 의 ‘창’에 성모님 모습이 보였고 그것은 과달루페 성모님과 비슷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모습은 video로 찍혔는데 정말 가까이 찍은 것을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은 ‘성모님’의 자태에 분명했다. 언제 이 ‘창문의 성모님’이 나타나셨냐고 물으니 ‘꽤 지나간 일’ 이라고, 아마도 지난 5월 쯤이 아닌가.. 하였다. 집에 와서 부지런히 googling을 해 보며 우리는 놀라기만 했다. 나타난 때가 지난 해 12월 12일.. 그것은 바로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이 발현하신 바로 그날이었다. 주임신부님이 Facebook에 ‘공표’를 하고 ‘세상’에 이미 알려진 지가 거의 9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는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창문에 image가 새겨졌다.

바로 이 창문에 image가 새겨졌다.

그러면.. 왜 그 성당에 과달루페 성모님이? 그 성당은 ‘아마도’ Hispanic community가 상당히 있었을 듯 하고 주임신부도 Columbia출신이기에.. 요새 ‘빠가 중의 빠가, 양아치 중의 양아치, Trump의 주둥이 으름장’ 때문에 고생하는’ 그들을 위로하시려 나타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It’s not too late, it’s now or never를 되뇌며 우리 (3명)은 이틀 뒤, 오늘 아침 미사 후 McDonald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곧바로 그곳을 찾아갔다.  그 성당이 있는 동네는 사실 typical Hispanic의 인상과는 거리가 있는 깨끗한 전형적인 Northeast Cobb County, middle-class neighborhood, 성당도 우리 Holy Family CC 보다 더 깨끗하고 웅장하였다. 그 문제의 창문은 parish center로 쓰이는 커다란 강당 같은 곳에 있었고 밖에서는 어렴풋이 ‘흑백의 그림자’같은 것만 보였는데, 들어가보니.. 와~~~ ‘총천연색’이 분명한 ‘아직도’ 뚜렷이 과달루페 성모님의 자태가 남아있었다. 나는 살아 생전이 이런 supernatural한 원인으로 남아있는 것을 처음 육안으로 목격하는 셈이 된다. 

이번에 나는 매일 묵주기도로 가까운 성모님이 생각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메주고리예처럼 살아있는 모습의 발현이 아니더라도 이런 간접적인 ‘계시’라도 그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면 깊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깊은 감명’을 숨길 수 없는 뜻있는 하루가 되었다.

 

2016-09-23-11-48-04

성모님 모습이 새겨진 곳이 가운데 창문이다. 이곳은 multi-purpose parish center 중 제일 큰 ‘강당’ 인 듯하다.

 

 

 

¶  Tobey Scare: 12살 배기 male mixed Dachshund, Tobey, 이틀 전부터 거의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자는 시간 빼고 거의 모든 시간 나를 졸졸 따라오는 나의 그림자였지만 그날 아침부터 나를 따라오지를 않았다. 아니..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거의 죽은 듯이 엎디어 있고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일순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12살의 나이면.. 언제나 가능성이 있는 나이라고 서서히 우려를 하고 있던 차였다. 제 발로 계단을 못 내려가는 것이 뻔하기에 내가 앉고 나가서 bathroom처리를 했다. 집안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변했다. 조용해진 것은 물론이고.. 거의 초상집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처음으로 우리 Tobey와 이별할 수도 있다는 현실감도 들 정도..

주위에서 정든 pet dog을 보내며 보여준 각가지 반응들에 우리는 남의 일처럼 comment를 하곤 했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Veterinarian을 찾으면 이상적이겠지만.. 그것도 꺼려지는 것, 이것 저것 test test.. 로 개를 잡을 것이고, $$$도 만만치 않을 것이지만 그것 보다는 증세가 최소한 internal한 것이 아니기에 며칠을 두고 보자고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 최소한 먹는 것과 ‘싸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오늘 소식을 듣고 새로니가 부리나케 ‘병문안’을 왔고 이곳 저곳 연락을 해서 알아보니, 역시 ‘심한 신경통, 관절염‘ 계통의 증상인 듯 했다. 그렇게 잘 걷고 활발하던 애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 부리나케 신경통증을 완화하는 약을 order하고 더 지켜 보기로 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듯 하긴 하다. 새로니의 이야기가 만약 관절염계통이면 치료가 불가능하고, 통증만 control할 정도라고..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활발하던 애가.. 하지만 12살이 되는 나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항상 이별할 준비를 하는 것은 생각하기도 괴롭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인가?

 

¶  2016년 ’33일 ‘대장정’ 의 첫날을 맞이했다. 이번이 3번째의 33일 봉헌이 되기에 조금은 경험이 있다고 할까.. 처음 두 번의 것보다 조금은 느긋한 심정으로 첫 날을 맞이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며칠 전부터 뒤적거리던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책의 첫 장을 열고 첫 12일의 목표: ‘세속 정신을 끊음‘ 의 제1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당신 제자로 부르심‘ 을 읽고 묵상을 시도한다. 12일 동안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라’ 는 과제.. 이것이 과연 그렇게 쉬울지..

사실 이 33일 과정은 이 책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guide를 받으며 독서, 묵상, 기도를 할 수 있다. 이 ‘책’을 그대로 따라가면 큰 문제없이 33일 기간을 마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실제로 독서 후에 깊은 묵상과 제시된 기도를 다 마쳐야 하는 것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33일의 기간 동안 지켜야 할 것들이 이 책에 일목요연하게 제시가 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급적’ 지켜야 하는 부담도 있다.

한창 더운 복더위의 여름에 이것은 무엇인가.. 시원한 beach나 산 속의 summer vacation도 아니고.. 에어컨 소음이 요란한 자기 집 방구석에 앉아서 이렇게 33일 보낸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큰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의미가 있는 멋진 summer ‘spiritual’ retreat, vacation 일 수 있는 것이다.

33일 매일의 실천 사항 이란 list를 보면: 거의 모두 ‘상식적’인 것들이다. 이 기간 동안 ‘대죄’를 짓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1시간 이상 조용한 시간을 할애하라는 것, TV같은 ‘잡 雜 것’들 을 피하라는 것, 아니 요새 나온 실천사항에는 분명히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피하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듯 하다. 아마도 제일 힘든 것이 ‘조용한 1시간 이상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정말 힘들게 된 요새세상, 참 많은 사람들 ‘로봇트’ 같은 정해진 일상을 보낸다는 사실에 경악을 한다.

이 중에는 가능하면 매일미사 참례하라는 것이 있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것에서 ‘걸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 요새 세상에 매일 미사를 한다는 것,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 인기 있는 활동이 아닐진대.. 하지만 나는 문제가 없다. 2012년 부활시기에 이 ‘인기 없는 활동’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굳건한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참 오묘한 것은, 2012년 부활시기에 연숙이 33일 봉헌을 시도하면서 ‘시험 삼아’ 평일미사를 같이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작은 기적들’의 시작이 되었으니 말이다.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은 이래서 우리에게는 거의 ‘신화적 역사’가 되었다.

 

7월 11일, 2016년 아침.. T-Minus 48 hours.. 이틀이 남았다 2016년 ‘성모승천 대축일’ ‘봉헌을 위한 33일 준비’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 7월 13일로 다가왔다.  2012년 8월 첫 봉헌, 2014년 3월 갱신 이라는 이력을 가진 내가 왜 다시 이 쉽지만은 않은 신심에 도전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2012, 2014, 다음은 수열 상으로 2016이라는 것은 조금 우습지만, 그런 것도 좋은 이유 중에 하나로 넣기로 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 깊고 심각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생활을 하는 덕에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가르침으로부터 크게 멀어진 적은 없는 듯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혹시 타성에 젖어가는 것은 아닐지, 항상 의식한다. 편한 기분이 들어가면 그것은 분명히 타성에 젖는 것이다.배우고 알고 경험이 쌓이면서 편해진 것이면 큰 문제가 없지만, 무디어지고 느낌이 없어지고, 짜증도 나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커다란 reboot, reset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2014년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7월에 나는 reset과 reboot을 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었다. 비록 비싼 vacation trip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인생 최고의 ‘free’ vacation으로 남았다. 하지만 2014년 여름의 big reboot은 spiritual, devotional한 것이 전혀 아니고, 완전히 나만의 mental exercise에 불과한 것이었다. 길고도 죽을 때까지 남는 그런 ‘비싼’ 경험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background를 가지고 나는 이번 여름 Marian Assumption Day1 에 맞춘 봉헌을 하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2013년에 시도했던 33일의 노력이 도중하차로 끝난 것을 명심하면서 이번에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 다음은 역시 ‘또 다른 경험’을 하는 것.. 어떤 것이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 상관이 없다. 다른 느낌과 체험, 경험.. 그것이면 족하다.

이 정도의 준비각오면 (이렇게 요란하게 글로 남기는 것도 포함)  아마도 아마도 이번에는 도중하차를 할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면 8월 15일 후에 내가 ‘얻는 것’은 어떤 것에 중점을 두면 좋을까? 분명히 더 낫고 더 올바른 성모마리아 신심(이것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첩경이다) 에 다가가는 것이다. ‘오해 받지 않는 철저하고 용감한’ 성모신심을 얻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과제다.

어제 Catholic News Agency website에 조금은 섬뜩한 기분의 기사가 실렸다. Fatima 의 visionary Lucia 루치아 수녀님의 예언이었다. 파티마 목격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수녀님 2005년 선종 전에 증언이 그것이다. 인류 최후의 심판, 결전은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결혼과 가정’2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 그것을 ‘예언’하시고 선종하셨다고 보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수녀님의 예언인지 혹시 성모님의 예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떨까.. 나도 비슷한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기에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Humanity의 근간 중의 근간인 ‘정상적인 가정’의 파괴와 붕괴는 사실 핵전쟁이나 다름없는 인류파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매한 지식인‘들은 그렇게 stupid한 것일까? 10은 알고 11는 모르는 것.. 이런 뉴스에 접하며 나는 이번 33일에 이런 Current social problem을 같이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뉴스와 일맥상통하는 글이 바로 33일 봉헌 Guide에 잘 나와있다. 아래 그것을 전문 발췌를 했는데, 원제는 20세기에 관한 것이지만 21세기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다.

 

20세기에 들어 성모님은 파티마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발현하셔서 당신의 티없는 성심께 대한 봉헌을 간곡히 호소하고 계신다. 20세기의 초엽인 1917년 파티마에 발현하셨을 때에는 원죄에 물들지 않은 당신의 티없는 성심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티없는 성심께 대한 신심과 봉헌을 호소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나의 티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기를 원하신다” (파티마, 19717. 6. 13).

“내 티없는 성심은 너의 피시처가 될 것이며, 너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파티마, 19717. 6.13).

이에 따라 1942년 10월 31일 비오 12세 교황은 전 세계를 마리아의 티없는 성심께 봉헌하고, 1946년에는 파티마의 성모님을 세계의 여왕으로 대관하고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 축일’을 제정하였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청년시절에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서 큰 감화를 받고 자신을 온전히 성모님께 봉헌하였으며 이 책에서 ‘온전히 당신의 것 (Totus Tuus)‘라는 문장을 뽑아 교황 즉위 시에 모토로 삼기까지 했다. 1984년 3월 25일에는, 1917년 파티마에서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전 세계의 주교들과 뜻을 합하여 소련은 물론 전 세계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는데 그 이후 마침내 소련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 교황님들의 모범에 따라 이 봉헌을 실천하는 이들은 이 길이 틀릴 수 없는 가장 완전한 길임을 체험하는 동시에 이 봉헌으로써 이루어지는 놀라운 결과 즉 “티없는 내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 (파티마 1917. 7.13)이라는 성모님의 약속의 실현을 자신들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봉헌은 하느님께 봉헌되기 위한 가장 완전한 방법인 동시에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대한 가장 완전한 신심행위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받으셔서 당신 아드님과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그러나 그분께 종속되어 “은총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의 자격으로” (교회헌장 61항)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생활에 모성적으로 관여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봉헌을 당신의 봉헌과 일치시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가능케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 것이며 성모님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이시다” 라고. 따라서 성모님을 통하여,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바치면 바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봉헌의 주된 목적이며 의의이다.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 중에서

 

  1. 매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2. Homosexuality, Same-sex ‘marriage’, transgender, rampant divorce etc etc

더위를 먹은 머리가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로 조금 식어간 후에 문득 7월 13일이 코 앞에 다가온 것을 느낀다. 레지오 주회합 때마다 회의록을 읽는 서기 書記(2012년부터)인 관계로 레지오의 공식활동의 목록을 앵무새처럼 읽는 것, 듣는 이에게는 크게 새로운 것이 없을지라도 나 자신은 은근히 세뇌 洗腦 가 되는 효과가 있다. 7월 13일.. 아하.. 올해 여름 중에 봉헌되는(정확히 8월 15일 Marian Assumption Day, 고국의 광복절)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간단한 말로 ’33일 봉헌’ 준비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 바로 7월 13일이었다.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몇 달 동안 이 공식예고를 듣고 보며 잠깐씩 생각하곤 했다. 내가 전에 이것을 언제 했지.. 근래에 체험한 행사와 경험들이 하도 많아서 ‘레지오 수첩’을 안 펴보고는 확실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기억이 조금 희미해진 것을 느끼고, 너무 오래 잊고 살았구나 하는 자괴감 自愧感 도 들었다. 우선 성모님께.. 다음은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 Saint Louis of Montfort 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분명히 나는 몇 년 전에 봉헌을 했지만, 그 다음에 다시 갱신 renew 을 한 것이 100%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실망이다.. 이런 것에 대한 기억력이 떨어지면 어찌할 것인가?

Personal blog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 stupid한 것도 많지만 나중에 유익한 개인역사를 남기는 것은 이럴 때 도움이 되고, 이곳을 찾아보니 역시 2012년 7월 11일 자 blog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2012년 8월 15일 즈음에 나는 ‘첫 33일 봉헌’을 한 것이다. 이 blog에 봉헌 준비 당시 나의 심정이 잘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33일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그것은 어디 있는 것일까? 그것도 찾았다. 나의 OneNote1 Journal에 33일의 일기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첫 번째 봉헌, 나는 그만큼 심각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력을 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그 후에 갱신 renew를 한 것일까? 머릿속의 잡티를 청소하고 기억을 해 보니 2013년 부활시기에 갱신 시도를 했지만 도중 하차..  다음 해 2014년 부활시기에 연숙과 같이 갱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정도로 갱신은 첫 봉헌과 비교해서 깊이나 느낌의 정도가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갱신할 당시 나의 33일 준비는 첫 번에 비해서 훨씬 허술했던 것은 아닐까? 그때의 묵상기록도 OneNote Journal에 남아있지만 첫 번에 비해서 그렇게 허술한 것은 아니었다. 갱신 때는 첫 봉헌에 비해서 오히려 하루도 빠짐없이 꼼꼼히 묵상기록을 남겨 놓았다.

2016년 연중시기 중의 제일 ‘한가한’ 시기인 8월 봉헌 시기가 다가오면서.. 이번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한마디로 나의 성모신심 Marian devotion 의 나사가 조금 씩 풀어지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일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행여라도 풀어지지 않기 위한 안간힘일지도 모른다. 지난 두 번의 봉헌에 빠졌거나 못했던 것을 이번에 더 노력을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번에 더 할 것이 있다면 성 루도비코 마리아와 그의 불후의 명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더 자세히 읽어 보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다. 8월 16일로 예정이 되어있는 봉헌, 갱신식에 과연 내가 서있을 것인가.. 아니면..

 

  1. Microsoft Office note app

catholic-thing-1

 

최근 몇 개월 동안 나의 e-mailbox에 아침마다 배달이 되는 newsletter 중에 The Catholic Thing 이란 것이 있다. 우연히 찾은 이곳 website는 시각적, 내용적 balance가  잘 맞아서 나의 favorite site 중에 하나가 되었고  곧 이어서 daily newsletter를 받아보기 시작하였다.  ‘지속적으로 매일 받아 읽는 글’의 영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것은 습관적으로 읽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날의 생각에 첫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008년 6월에 시작된 이 site는, 주로 대학 교수급, 지식층, 다양한 저자들이 교대로 글을 써서 ‘매일’ 이곳에 발표를 한다. 그러니까, 내용은 우선 pro 레벨, fresh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일반인에게 크게 무리 없이 읽힐 정도로 아주 자상하게, 조심스럽게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일반인’ 도 큰 무리 없이 읽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용들도 박사학위 논문 같은 것, 아주 현실과 동 떨어진 것, 자기자랑을 하려는 것 같은 것보다는  대중적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현재’에 필요한 ‘모든’ Issue를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것이란 예를 들면: “politics, economics, culture & warfare,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children and careers, and many other contemporary questions” 라고 처음에 밝히고 있다. 영어를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가톨릭 신앙인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대답을 줄 수 있는 곳이다.

 

WHO IS GOD? 오늘 아침에 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거창하게: WHO IS GOD? 평범한 질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것을 하루 동안 기억하며 살면 그래도 조금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지식적인 출발로 하느님은, 기하학의 공리 같은 출발로 정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핵심교리에 선언된 것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that there is one true and living God, creator and lord of heaven and earth, almighty, eternal, immeasurable, incomprehensible, infinite in will, understanding and every perfection.”

 

Self-Existence: 육감적으로 전혀 느낄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이 표현에 전부 들어가 있다. 아니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다.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한 ‘분’이 아니다. 모세에게 하느님은: “I am who I am” 이라고 선언을 하신 것이 그와 비슷한 뜻이 아닐까?

The First Cause: 시공간의 연속은 인과관계의 무한한 연속이다.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결과를 낳고.. 그 중에 바로 ‘the first cause, 첫 원인’이 바로 하느님이란 ‘분’이다. 모든 결과는 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접근으로, 모든 존재의 그 모든 것(생명체나 물체)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 이것을 조금 더 생각하면: 사람은 이 물체들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특별한 은총을 받은 존재인가, 아니면..물리적인 위치로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무한한 시공간 속,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 ‘지구’ 위에서 복닥거리는 인간의 존재는 성경의 표현대로 특별한 존재일 수가 있을까? 창조의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성경을 믿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도 믿는다면..하느님의 존재와 그가 ‘특별히’ 보내셨다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철학적인 접근으로는 보통 사람 특히 육감을 사랑하는 요새 세속적인 존재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으니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물리적’인 육감을 믿기에 물리적인 접근으로도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런 접근은 상상 이외로 빠르게 시도되고 현재도 시도되고 있다. 그런 설명은 나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이렇게 ‘물리적, 철학적’인 접근을 왔다 갔다 하면 확실히 무언가 보인다.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했던 것들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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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나를 따라오며 유혹하던 Screwtape1을 당당히 물리치고 ‘하루 종일’을 Atlant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보냈다. 그곳은, 이제는 완전히 classic이 된, 연례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EC) 가 열린 곳이다.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2011년부터 줄곧 ‘도장’을 찍었던 ‘초여름의 향연’, 아틀란타 성체대회, 작년에 나의 ‘게으름’으로 우리 둘 모두 참가를 못했었다. 못 갔던 이유는 있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것은 그럴듯한 유혹에 굴복 당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 나 자신은 속일 수가 없다. 그것이 화근인가. 올해에도 그런 ‘약점’을 이용한 각가지 유혹들.. 요란하고, 간교하고, 그럴 듯한 핑계거리가 줄줄이 나를 괴롭혔고, 거의 그것은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senior devil은 나의 어머니에게 굴복한 셈이 되었고, 그것이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뿌듯하게, 기쁘게 할 수가 없다.

작년에 나를 유혹했던 screwtape의 point는 “유명하고 멋지고, 잘나가는 speaker가 없는 것.. 무엇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하냐?” 정도가 될 듯하다. 너무나 나의 기대가 커서 생긴 유혹이었다. 그러니까 재탕을 방지하려면 그 expectation을 ‘하향 조정’하면 된다.  더 간단한 것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 무기로 올해의 유혹에 대비했지만, 역시 senior devil Screwtape은 경험이 많은 악마인가.. 다른 쪽을 공격을 한다. 성체대회가 열리는 날 이후에 나의 신경을 많이 쓰게 하는 schedule들이 몇 달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나를 괴롭힌 것이다. 한마디로 가벼운 마음으로 성체대회에 참가할 기분이 안 나는 것이다.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대회 전날 밤까지 나를 유혹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조금 ‘조직적’으로 대비를 했는지, 굳세게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고 하루 종일을 일 만 여명의 신앙 동료 catholic들과 보낼 수 있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올해는 이제까지 우리의 format을 조금 바꾸어서 순교자 성당bus를 안 타고 우리 차로, 대신 아침 더 일찍 출발을 해서 비교적 쉽게 parking도 할 수 있었다. 필요할 때 우리의 돌아오는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편하지만 bus를 타고 오고 가며 순교자 성당 교우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예상보다 적은 사람들이 bus를 탔다고 했고 김밥 점심을 같이 먹을 때 보니, 자기 차를 타고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비교적 일찍 도착했기에 우리는 ‘처음으로’ 대교구 소속 각 교회 공동체의 banner procession하는 것을 보았고 우리 순교자 성당 팀 banner group에는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과 같이 우리 부부도 낄 수도 있었다. 이것이 올해에 우리에게 신선한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Yakuza' Father Donald Calloway

‘Yakuza’ Father Donald Calloway

올해 성체대회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2016은 어떤 쪽으로 기억에 남을까.. 소위 말하는 superstar급 speaker는 없었지만 (2년 전처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신부님의 ‘인생역정’은 가히 올해 성체대회의 백미 白眉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 surfer, rockstar같은 인상을 주는 젊은 신부님, Father Donald Calloway, MIC 란 분이다. Donald란 말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하필이면 Donald일까..

알고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신부님의 ‘개인 신앙 여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 처음 알게 된 분이다. 아직도 신부가 되기 전의 ‘말 습관’들이 뚜렷이 남아있었기에 그의 ‘간증’은 더욱 더 믿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완전히 ‘패륜, 반항’ 적으로 자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근본적으로’ 아주 smart한 영혼이었음을 안다. 인상적인 것이.. 잠깐 일본에서 ‘전통적인 일본 조폭’ 야쿠자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 물론 ‘백인 야쿠자’이었지만.. 각종 비행으로 ‘시설을 들락날락’ 했던 그에게 큰 변화는 부모가 ‘갑자기’ (그의 말에 의하면 하루 아침에) ‘매일 미사 가톨릭 신자’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가 그런 사실을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 중에는 ‘성모님’의 역할이 중심적인 것인데 그에게는 거의 기적과 같은 ‘만남’이었다고.. 그는 그렇게 포근한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기적 같은 변화를 체험하게 되고 결국은 신학공부로 시작을 해서 사제로까지 변한다. 이것으로 그는 ‘머리가 좋은 불량소년’이었음을 알게 된다. 공부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끝에는 그 유명한 Mariology의 세계 권위인 University of Dayton에서 ‘성모신심학’ 학위까지 받고 그의 체험, 경험을 토대로 ‘묵주기도의 기적’에 관한 책을 간행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모신심의 대부 代父 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물론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과 힘이 뒤에서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역할은 역시 그의 어머니의 기도였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성 모니카 (St. Monica,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아오스딩의 어머니)에 비유를 한다. 뒤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하신 것이다. 한때 마약과 rock music에 심취, 찌들어 자살이 다음이라고 장담한 그가 어떻게  Marian Fathers of Immaculate Conception (MIC) 신부님이 되었을까.. 이런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닐까? 그는 과연 제 2의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를 꿈꾸고 있을까? 자신의 ‘기적 같은’ 개인 체험이 그런 꿈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speaker 들도 나름대로 독특한 style과 주제로 힘을 썼지만 Fr. Calloway의 ‘체험에 저린 웃음’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분의 차례를 제일 마지막에 넣었을까? 비교적 지루하고 졸린 오후 였으니까.. 그 분의 책과 성지순례 안내서는 날개 돋치듯 없어졌고 나는 집에 와서 그 신부님을 더 알아보려는 googling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도 인상에 남는 사람은 power country singer Collin Raye와 함께 출연한 Andrea Thomas라는 젊은 여성, 가창력이 정말로 뛰어났고, 흡사 오랜 전의 Celine Dion같은 느낌을 주었다. Collin Raye의 독특한 power country는 물론 좋긴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크게 호감은 안 간다. 그의 style은 country와 Italian Tenor를 합친 것 같은 그런 것인데, 성체대회의 분위기에는 어떨까?

우리는 ‘전통적’으로 closing ‘vigil’ mass를 하고 오기에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많은 UN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양각색의 교우들과 ‘장엄 미사’를 하는 것 독특한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집전 대주교님의 우렁찬 목소리도 좋고, 각종 언어로 행하는 ‘지향기도’도 색다르다. 하지만 몇 번이고 경험하는 것.. ‘한국어 기도’다. 기도하는 ‘자매님’들.. 기도 끝에 ‘we pray to the lord.’ 를 싹둑 빼버리고 하단을 하니.. 그 말이 나와야 끝난 줄 알고, ‘Lord, hear our prayer‘ 를 하려고 준비했던 모두들 그저 어리둥절.. 당황을 하니..  이것이 누구의 실수인가, 잘못인가.. 왜 꼭 한국 자매님들만 그런 것인가? 한 때는 어떤 수녀님까지 그런 실수를 해서.. 뒤에서 coach하는 staff들, 한국 자매님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Convention center의 엄청난 내부 시설과 크기에 버금가는 수많은 사람들, UN 총회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참 이곳에 각종 인종, 나라에서 온 사람들 많기도 하다. 하지만 뚜렷한 것은 역시 Hispanic의 막강한 power다. 물론 수 數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모두 family 단위로 참가를 해서 더욱 인상적이다. 그에 못지 않게 Vietnamese power는 더욱 놀랍기만 하다. 한국 community에 비해 이민역사가 그렇게 길지도 않건만 특히 가톨릭 power는 인상적으로 크게 성장을 해서 벌써 커다란 성당이 2개일 뿐 아니라 성소자들도 속출, 신부, 사제, 수도자, 수녀들이 거의 없는 우리들에 비해 그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많다. 대교구가 그것을 모를까.. 그들을 위한 따로 program을 마련하고 그들만이 옆에 있는 건물에서 따로 모인다. 물론 closing mass에는 함께 하지만. 왜 월남과 우리는 그렇게 차이가 난 것일까?

이 closing mass에서는 다음 해 성체대회의 주제가 발표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video를 통해서 보여졌는데, 내년 주제 성경구절은 조금은 생소한 것: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구약, 여호수아기 24장 15절에서 나온 것이다. 2005년 ‘가톨릭 공용 성경’ 에 의하면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인데 문맥을 보면: “전에 살던 이집트의 신을 버리고,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눈에 거슬리면 오늘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을 하라” 라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말이다. 한 분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뜻 같다. 이렇게 2016년 성체대회가 막을 내리고 우리는 traffic 이 비교적 한산한 I-285 North를 질주, ‘유혹을 물리친’ 멋진 결과를 만끽하며 긴 하루의 피로를 푼다.

 

  1. the senior devil in the Screwtape Letter by C. S. Lewis

¶  Kitten family gone: Backyard shed에서 태어난 4마리 kitten과 엄마 가 갑자기 오늘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고, 하루 종일 밥과 물을 살펴보아도 없어지질 않고.. 나의 느낌이 이 5가족이 사라진 듯 하다. 우리 집에서 낳은 4마리 아기 고양이들과 엄마가 모두 귀신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 동안 밥을 엄청 먹기에 거의 바닥이 난 고양이 밥을 사러 내일 Costco에 가기로 계획까지 세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우리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갔단 말인가?

너무나 화창하고 가을같이 서늘한 일요일, 비가 그친 후 다시 backyard에 나가서 deck, grape trellis 등 일을 하였지만 계속 이 5 고양이 가족이 돌아오나 shed쪽에 신경을 썼지만.. 그렇게 뒹굴며 놀았던 shed 옆 마당은 고요하기만 하다. 너무나 기분이 이상한 나 자신에 내가 놀란다. 몇 주 동안 그 애들 밥을 부지런히 주며 보살폈던 하루하루가 선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왜 갔을까? 왜? 이것이 출산 후의 고양이 일가의 습성일까? 일단 kitten들이 건강하게 크면 이렇게 낳은 곳을 떠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추측에는 어제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들려서 backyard에서 짖어대며 떠들어 댄 것이 화근이었을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mom이 용단을 내려서 떠난 것일까? 너무나 서운한 마음, 괴롭기까지 하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그래도 정성스레 먹이와 shelter를 제공한 우리에게 ‘감사’하며 떠났을 것이라는 ‘억지 희망’을 갖는다. 언제라도, 먹이가 떨어지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  New pastor shock: 오늘 모처럼 동네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주일 미사를 보러 갔다. 우리의 지정석이 있고 그 주위의 교우들 이제는 거의 고정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아는 얼굴이 안 보이면 그래도 관심을 가져줄 정도가 되어, 그야말로 정든 ‘미국 본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하는 곳이다. 3주 전에 Irish pastor Father Darragh Griffith 가 본당을 떠난다고 발표를 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하지만 10년이 넘게 주임신부로 계셨으니 (50세가 넘은 젊은 신부) 사실 크게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10년 이상 있었으니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것이 문제다. 6월 초에 떠나게 되고 Norcross (Peachtree Corners) 에 있는 본당으로 가신다고 했다.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서 사실 조금은 덜 섭섭하기도 했고, 새로 오시는 주임신부는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늘 주보를 보니 드디어 새로 오는 주임신부가 소개되어 있었다. 사진과 간단한 약력을 암만 보고 읽어도 시원스럽지 않은 점들이 있었다. ‘전통적인 신부님의 약력’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Atlanta Metro에서 가장 conservative한 ‘동네’인 이곳 East Cobb에 Cuba 출신인 Father Miguel.. 정말 이제 Irish power는 사라지고 있는가? 가장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얼굴이나 Hispanic 등이 아니고 Greek Orthodox Melkite background란 것이다. 기억에 Melkite 쪽은 celibacy (독신) 제도가 없는.. 그러니까 성공회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이 있는 신부라고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집에 와서 부리나케 googling을 해 보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 새 주임신부님.. 정말 colorful한 인생, 신앙 여정의 소유자였다. Cuba 에서 온 망명인사의 가정에서 자라고, 개신교 (침례교) 출신에다가, 다음에는 Episcopal Church (성공회)의 신부가 되더니, 이제는 Melkite로 변신, 결국은 Roman Catholic으로 오긴 했지만 Melkite의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 둘은 이 ‘난감한 소식’에 아연실색.. 어쩔 것인가? Wife가 있고 가정이 있는 천주교신부.. 라니.. 암만 생각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신부님이 아닌 것이다. 대주교가 미쳤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우려하는 것들이 다 이유 있게 설명이 될 것이라는 희망은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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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7일, 폴란드 Poland 에서 2년 전에 발생한 성체기적 Eucharistic Miracle 이 공식적인 교회(현지 교구, bishop Zbigniew Kiernikowski 주교) 의 승인을 받았다는 뉴스가 catholic blogger, Philip Koloski 의 보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이 소식을 접한 것은 National Catholic Register newsletter 를 통해서였고, 따라서 그것의 source인 website를 통해서 뉴스의 전부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성체기적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이 비교적 간단히 보도되었다.

2년 전, Poland의 Legnica 교구 본당에서의 일이다. 성체 분배과정에서 축성된 성체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졌고, 곧바로 다시 집어 올려서 물이 들어있는 그릇에 다시 담겨졌다. 곧바로 성체에서 빨간 흔적들이 나타났다. 법의학 전문가들이 이 성체를 과학적으로 분석을 하니: 그 성체 부스러기 fragments 들은 사람 심장 근육의 조직과 비슷한 것 cross striated muscle로 판명이 되었다. 이 분석은 또한 이 조직, 조각은 사람, 인간의 것이고, 아주 고통을 느낀 그런 것이었다.

 Philip Koloski의 성체기적에 대한 논평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의 ‘기적’이 예전의 것과 다른 것은 예전 것들 (예를 들면 Miracle of Lanciano)은 성체가 축성이 되는 과정에서 피로 변하거나, 축성을 하는 신부사제의 믿음이 부족할 때 변하는 것 들이었다. 이번의 case는 성체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생긴 것이니.. 이것은 ‘취급 부주의’에 의한 것이다. 이번의 기적은 우리가 성체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말로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그에 맞게 조심해서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교훈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성체가 예수님의 ‘고통 받았던 몸’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에 의한 예수님의 message는 아니었을까?

나는 이 news를 접하며 또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교리적’으로 분명히 성체는 성체,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안다. 최소한 머리로는 배웠고 인정하고 믿고 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고해성사와 더불어 이 가톨릭 전통 교리는 나를 항상 더 고민하게 하고 더 생각하게 한다. 영성체를 할 때마다 겪는 고민과 갈등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집중적인 묵상을 하며 준비한 영성체에는 어렴풋이 강한 느낌이 온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은총인가? 일단 믿는다고 ‘선택’을 한 이상 믿고 싶고, 일단 믿음의 문지방을 넘으니 이런 ‘성체기적’을 믿고 싶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근래에 나에게는 작은 기적이다.

¶ 장례미사 2월 12일, 금요일에 정말 난데없는 날 벼락 같은 장례미사를 참례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날 벼락일 듯 하다. 레지오에서 낯 익은 얼굴, A 자매님의 조카,  40세가 갓 넘은 ‘건강하게 보이는’ 젊은 형제가 급사를 한 것이다. 밤에 자다가 심장마비.. 와.. 이것이 날벼락이 아닌가? 놀란 것은 그 나이에.. 어떻게.. 알고 보니 평소에 심장에 지병이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나이에 유언도 없이 간다는 사실은.. 무섭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청년이 혼자 객지에 사는 것, 멋지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류의 dark side도 있을 것이다.

자랑스럽던 아들을 그렇게 보낸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이 부모님은 2년 전에 우리가 교리반 교사로 있을 때, 통신반 교리로 세례를 받은 분들이었다. 그의 아드님, LA 지역에 있는 큰 은행 지점의 부사장, 40세에.. 그러면 크게 성공한 아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텐데.. 얼마나 자랑스러웠을 텐데.. 모든 조문객들 그런 생각 속에 잠겨있었을 것이고 우리도 마찬가지.. 만약 우리 두 딸이 ‘잘 나가는 직위, 직업’으로 $$을 억수로 벌면서 객지에서 ‘건강을 챙기지 못하고’ 살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에 느껴지는 것이다. 무엇이 과연 잘 사는 인생일까? 40세면 별로 인생의 의미를 느낄 나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먼저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것을 일깨워 주어야 할 것인데.. 그러니까, true-north principle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라가는, 그것이 쉽지 않구나.

 

¶ 선발식 Cobb Galleria Centre, 2016년 아틀란타 대교구 주관 예비자 선발식이란 것이 열렸다. 2년 전에는 다른 곳에서 한 이 행사에 나는 ‘교리반 교사 도우미‘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작년부터 집에서 훨씬 가까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의 예비자 수가 너무나 단출해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꾸준히 신앙을 지킨다면 크게 상관이 없을 듯하다. 미사 중에 파견식을 하고 연숙은 그들과 먼저 성당을 떠나고 나는 꾸리아 월례회의에 단장 없이 참석을 하고 집에 먼저 왔다. 그리고 예비자 선발식이 끝날 무렵에 Cobb Galleria Centre로 가서 연숙을 데리고 왔다. 웃기는 것은.. 그곳을 찾느라 촌놈 행세를 했다는 사실.. 미리 지도를 공부한 것이 우습게 되었다. 한 번도 그곳엘 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나의 실수.. 또 잊었다.. GPS가 있건 없건 이놈의 동네는 절대로 처음 찾아가는 곳은 장담하지 말라는.. 경험에 의한 교훈을..

 

Sacred Heart of Jesus by Pompeo Batoni, 1767

Sacred Heart of Jesus by Pompeo Batoni, 1767

The Most Sacred Heart of Jesus.. 예수(의) 성심. 오늘은 The Pentecost (성령강림 대축일)로부터 19일째인 예수성심 대축일이었다. 미국 우리지역 province 은 의무 축일이 아니기에 아주 특별한 미사는 아니었고 평소 ‘매일 미사’보다 ‘조금’ 격상된 정도라고 할까.. 

요새 부활시기를 완전히 뒤로한 한가한 느낌의 6월 초여름의 ‘연중’ 시기에는 부활절을 치르느라 피곤하다는’ 본당 주임, 사제들은 꼭 자리를 비워야 ‘멋이 있는지’ 대부분 방문신부님들이 자주 찾아 오신다. 속으로 나는 ‘꼭 그렇게들 쉬어야 하나..’ 하는 짜증이 난다. 무엇을 그렇게 바쁘고 피곤하다는 것인지 나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가 안 간다. 근래에는 땀을 흘리며 뛰는 신부들을 별로 본 기억이 나질 않아서.. 요새 신부들은 어떤 생각으로 사목을 하시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우리 Holy Family 성당의 경우, 보좌신부님, 박사학위를 받고 완전히 떠나신 Africa출신 상당히 지적인 신부님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영어 발음에 짜증이 조금은 났지만 주임신부의 ‘애 같은’ 강론수준과 하늘과 땅의 차이라 은근히 좋아하기 시작했더니만.. 그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런 판국에 Irish 출신 주임신부라는 목자는 어떻게 편히 쉬실 수 있는가? 드디어 며칠 전부터는 본당의 브라질 공동체 신부님이 임시로 매일 미사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건 완전히 disaster에 가깝다. 그의 영어 발음은 99.9% 알아 먹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찌 Portuguese와 English가 그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완전히 ‘꼬이는’ 발음은 Jesus란 말 정도나 들릴 정도다. 하지만 공평한 것은.. 이 신부님 너무나 ‘진솔하고 착한 미소 띤 얼굴’ .. 이것으로 완전히 balanced-out이 되고 있다. Universal한 미사 자체야 Latin말로 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못 알아 먹어도 90% 이상은 다 추측이 가능하니까..

 성심.. 예수성심.. 성모성심.. 참 오래 전부터 들었던 단어였다. 성심 聖心 .. 하지만 확실한 뜻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성스러운 마음’ 정도는 한자로 짐작이 가능할 정도였다. 어렸을 때, ‘성심’이 붙은 학교들이 있었고, 대부분 ‘멋지고 부자’들이 가는 학교라는 인상도 남았다. 서울의 성심여학교가 그랬다. 교복도 그렇게 멋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큰 딸 박근혜 (현 대한민국 대통령.. 허.. 세월의 장난이..) ‘양’ 이 아마도 그 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그것 뿐인가.. 성심병원, 성심 여대까지 있으니까.. 이것은 이곳 미국도 예외는 아닐 듯 싶다. 문제는 이 ‘성심’이란 말이 보통명사인가 고유명사인가 하는 것이다.

조금만 research하면 ‘정답’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예수성심은 글자 그대로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심장’ (마음이라기 보다는), 그 육신적인 심장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불이 타는 듯이 타오르는 모습이 바로 예수성심인 것이다. ‘성스러운 마음’ 아닌 예수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 오랜 세월, 나의 ‘무지’가 부끄럽다. 그러니까 예수성심은 이 ‘심장’에 대한 인간들의 신심 devotion 인 셈이다. 이것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것은 역시 ‘인간’ 역사 중의 하나다.

1673년부터 1675년까지 프랑스 수녀 St. Margaret Mary Alacoque (성녀 알라콕)에게 나타나신 일련의 예수발현으로 비롯되었다. 이 발현 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신심이었다. 계시 revelation 중의 계시가 이런 것이 아닐까? 역사적인 배경과 근대에 들어와서 성심의 발전 양상을 예수회의 ‘예수성심의 역사’ 라는 DVD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레지오 단원 자매에게서 빌린 DVD를 감히 ripping해서 이곳에 올려 놓았다. copyright는 분명히 문제가 되겠지만.. please.

 

예수성심의 역사

Pope Francis, 사라예보 방문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자회견

Pope Francis, 사라예보 방문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자회견

요새 ‘우리’ 교황님, 참 뉴스에서 많이 뵙는다. 99.9% 거의 모두 positive한 것이라 안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런 기사들을 대한다. ‘어쩌다가’ 이런 멋진 교황님이 탄생을 하셨는가.. 그러니까 ‘전’ 명예 교황님 Benedict XVI 이 깊은 생각과 교회의 당면한 숙제들을 생각하고 ‘조기 퇴진’을 하신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현 시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목자를 탄생시키셨다. 모든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다행스러운 교회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교황님 사라예보 Sarajevo, Bosnia & Herzegovina 를 방문하시고 바티칸 로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의 사라예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공식’ 성모 발현지 메주고리예 Medjugorje 에 대한 짧은 언급이 나의 (아마도 많은 사람들) 눈길을 끌었다. 그 ‘짧은 언급’은 다음과 같이 보도 되었다.

It’s almost decision time…  6/6/2015  on PAPAL FLIGHT

사라예보의 짧은 방문을 끝내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보즈니아 (사라예보와 메주고리예가 위치한 나라) 출신 기자의 메주고리예 성모발현에 대한 바티칸의 공식적인 입장 해명의 질문에 대해서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셨다.

“메주고리예에 대한 결정의 시기가 거의 다가왔습니다. 결정이 되면 발표가 될 것입니다.”

교황은 이에 관련되어서 전임 교황 베네틱트 16세가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 ‘설’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위한 위원회를 발족 시켰음을 상기시켰다. 이 위원회는 메주고리예 ‘현상’을 교리적, 교회법등에 비추어 연구, 조사를 끝내고 교황님께 보고를 드렸다고 덧붙였다.

 이 결정은 곧 이루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모든 일선의 주교들에게 guideline이 시달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모든 교회는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발현의 진실성을 당연시 하는 모임, 회의, 집회 등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기사가 나오고 나서 3일 후에 이에 관련된 기사가 다시 보도 되었다. 이것은 그러니까.. ‘damage control’ 정도가 될는지…

 

Day after Medjugorje comment, Pope downplays predictable visions:

 아마도.. 교황님의 6월 6일 기자회견에서 메주고리예의 공식입장 결정이 다가왔다는 말이 주는 뉴앙스가 너무나 positive했던 것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6월 9일 바티칸의 성 마르타 guesthouse에서의 매일미사에서 교황님은 ‘조금 초현실적인 믿음’에 의존하려는 신자는 현대판 gnostics(무관심론자)라며 결국 믿음의 종착역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고 조심을 시켰다. 성모님께서 ‘이런 것, 저런 것’을 하라고 말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의 본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 뉴스에 접하며 생각을 해본다. 우선 이런 교황님의 스타일은 이제 익숙한 편이다. 우선 issue를 거론하고, 반응에 의해서 필요하면 곧 수정하는 style..  이런 방식은 분명히 issue를 forward시킨다. 무언가 결과가 제 시간에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일을 처리해 나가는 교황님의 agenda는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메주고리예의 성모님 발현은 교회사, 세계역사를 통 털어서 전무후무 前無後無 한 것이다. 30년 이상 거의 매일 같은 지역에서 발현한다는 것.. 이것에 대한 과학적, 이성적인 반론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30년 이상의 사기극’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사기극’을 벌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쉽다. 메주고리예가 나에게 준 자극과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높고, 심각한 것이라 나는 여기에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30년 이상 인간에게 거의 매일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어머니,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의미는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짜 인류의 어머니라는 것, 너무나 자상하고 사랑하시는 어머니가 ‘나쁜 길’로 가려는 자식들을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 조금만 생각해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Pope Francis coming to America?

Pope Francis coming to America?

우연히 미국 예수회 America magazine website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를 30초간 볼 기회가 있다면..’ 이라는 주제의 Youtube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이런 street interview를 한 것인가 의아 했지만 곧 의문이 풀렸다. 올해 9월 미국을 방문하는 교황에 대한 것이었다.

 

America Media asks:
“If you had 30 seconds with Pope Francis, what would you say?”

May 13 2015 – 10:19am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의 위치와 의미는 잘 알려진 것이지만, 교황도 ‘겸손한’ 인간이기에 각 재위 교황마다 한결같이 다른 굴곡1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교황들은 주로 John Paul II (요한 바오로 2세) 로 부터 시작이 되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오랜 냉담 시절에는 교황의 위치를 하찮게 보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 이후 그런 나의 ‘바보 같은’ 경솔함을 정말 후회하고 있다.

2년 전인가.. 당시 교황 Pope Benedict XI (베네딕트 16세) 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며 퇴임하고 급작스레 선출 된 분이 현 교황 Francis (프란치스코)인데 최초로 남미출신(Argentina)인데다가 교황청과는 outsider 에 속해서 어떻게 재위를 할지 미지수였다. 전임 교황들,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분의 뒤를 이으며 그분들이 닦아 놓은 업적을 유지, 계승, 향상 시키려면 그분의 어깨는 정말 무거웠으리라. 그 후의 경과, 결과는 어떤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를 능가하는 인기와 명성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전임 같은 ‘두뇌’ 보다는 ‘인정, 솔직’함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의심 많은 초현대의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비 신자들을 매료한다. 그러한 인기를 잘 활용해서 드디어 세계 정치에도 서서히 관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누가 뭐래도 변화 무쌍한 인류 가치관에 그는 변함없는 진리, 그리스도 가치관을 너무나 부드럽게 포용시킨다.

용감하게 유럽을 no longer fertile and vibrant, weary and becoming irrelevant 라고 가차없이 질타하고, 의혹 많기로 유명한 바티칸의 ‘재정비밀’을 투명하게 만드는 노력을 하는가 하면, 가톨릭 교리를 ‘요지부동’의 인상 보다는 ‘자비’를 강조하는 묘기도 보인다. 예수님의 기본 철학, ‘부자보다는 가난함을 사랑하는’ 실천적으로 가르치기도 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 소위 말하는 populism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부자 사제’는 척결하고 본인은 ‘소형차, 시민 아파트’를 택했다. 이런 배경으로 그의 agenda를 밀어 부치는 교황, 어떨까.. 퇴임 시에는 아마도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기를 능가하지 않을까?

이런 배경으로, 작년에 아틀란타 대주교에도 불똥이 튀겨, ‘공짜로 받은’ 주교관 mansion을 반납해야 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일반 신도들이 대담하게 교황의 모범을 무기로 항의를 했던 것이다. 어떨까.. 이런 와중에 한국출신 교포사목 동남부 사제단인가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김대건 성당도 포함) 하는 곳에서는 작년에 멕시코의 칸쿤 Cancun 에서 사제단 회의를 하였다. 그것도 자랑스럽게 말씀하던 신부님.. 속으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하필 세속사회의 상징인 멕시코 관광도시 칸쿤에서 비싸게 모여야 했을까? 누군가 설명을 해 주면 어떨까? 그들의 최고 통수권자 교황님의 행적을 그들은 전혀 몰랐던가, 무시했던가?

이 교황을 보려면 제일 직접적인 방법인 바티칸을 가야하고 그곳에서도 사실 가까이 보는 것은 운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중에 이번 9월에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혹시.. 우리도 그곳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실험’을 하게 되었다. 크게 무리는 아닐 듯..  World Meeting of Families convention을 계기로 Philadelphia 대회에 참석하고, Washington DC, White House, Congress, New York을 방문 하다고 하니 교황을 비교적 가까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내가 교황과 30초간 함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이런 질문이 이제 100% 공상이 아닌 것이다.

  1. 현대 한국어에서 이런 말을 아직도 쓰는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5년 성모의 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5년 성모의 밤

 

Scan10139-15월의 절반이 지나가며, 나를 낳아준 조국,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조’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게 하는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 5.16 도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 나는 다시 예수님의 어머니 Jesus’ Mother, ‘하느님의 어머니 Mother of God‘,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Immaculate Mary를 생각하는 날들을 맞는다. 5월 달 전체가 사실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달이고 그 중에서도 성모의 밤은 그 절정에 해당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나의 ‘한국어’ 본당 도라빌 소재 순교자 성당에서 2015년 성모의 밤이 ‘신선하고, 뜻 깊게’ 열렸고, 우리도 참가를 하여 ‘humanity’s 어머니 마리아’를 기렸다.

이 행사에 내가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레지오 입단 다음 해인 2012년 부터 였으니까.. 4년 째 가 되어가나..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서 약간의 거부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나는 이 행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가톨릭에서의 위치를 알려면 가톨릭 ‘마리아 4대 교의’를 상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무거운’ 것이 이날에 그렇게 중요할까.. ‘어머니의 자애’.. 하나만 생각하며 모든 생각이 필요가 없지 않을까?

올해 ‘성모의 밤’ 행사 자체도 예년과 ‘아주’ 다르게 ‘정중함’이 풍기는 완전한 절차 임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제까지 내가 겪었던 것들은 모두 레지오 마리애 주최의 ‘약식’ 행사였었다. 하지만, 올해는 새로 부임한 ‘신입 보좌신부’ (정말 ‘어리게 보이는’) 와 전례부가 합작을 해서 ‘정식’으로 승격을 시켰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도 되었다. 왜 갑자기 ‘약식 전통’을 바꾸었을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주임신부의 이임과 상관이 있었을지 않았을까..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임 신부님의 ‘마리아 신심’은 우리들의 기대에 ‘항상’ 못 미치기에 새로 부임한 ‘이 요한’ 주임신부의 그것은 어떨까 궁금하기만 하다.

 

 

언제나 웃으시는 마리아

 

제 사랑이 풍요로워 지도록

당신의 웃음을 곁들여 주십시오.

 

당신의 웃음을 닮아

저도 맑은 웃음을 웃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저를 도와주시어

당신처럼 웃음 띤 얼굴로

기쁘게 주님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걱정과 고뇌를 잊고

이웃과 기쁨을 함께 나누게 해주십시오.

 

밝게 웃는 얼굴로 이웃에게 다가가

친절과 위로를 나눠주게 해주십시오.

 

제 웃음에 비웃음이 섞이지 않고

언제나 성실하고도 참된 호의로

가득 채워 주시고

괴로울 때에도

웃음 짓은 것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을

마음 깊이 보존하게 해주시고

이 기쁨이 언제나 웃음으로 피어나게 해주십시오.

 

생각과 감정이 다를 지라도

언제나 웃음 띤 얼굴로 대하게 해주십시오.

 

호의를 가득 담은 얼굴로

이웃을 하느님께 이끄는데

저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게 해주십시오.

 

< J. 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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