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 Wednesday 2023, Lent Begins…

매일 참례하는 우리 동네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아침미사가 오늘은 ‘재의 수요일 미사’가 되었다. 물론 전례가 특별하고, 다른 것은 물론이고 처음 보는 교우들도 꽤 많았다. 우리가 이곳의 주일미사에 오지 않아서 이들 대부분이 아마도 ‘주일미사 교우’들일 듯하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40일 간의 Lent 사순절, 교우 신자들의 이마에 그어진 재의 십자가,  Remember that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Miguel 주임신부님, 이 두 가지 말씀을 곁들이며 이마에 재의 십자가를 그었다.  이어진 강론도 이 두 말씀에 관한 것,  인간 존재의 무상함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 antidote는 다름이 아닌 ‘복음 Gospel’이라는 간단한 진리… 아~ 이것을 잊고 살았던 것, 오늘은 진정한 사순절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Lent, 사순절 시작, 오늘과 40일간 매주 금요일은 ‘절제, 금육’이라는 교회의 지침을 나는 왜 이렇게 가볍게 알고 있었던 것인가?  절제 abstinence 는 음식을 절제, 단식하는 것이지만 우리 같은 ‘고령’은 제외되지만 [사실은 60세 미만]  금육재 禁肉齋는 예외 없이 지켜야 한다. 그래, 오늘과 금요일은 절대로, ‘한때 의식을 가졌던 생명의 살’을 취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절대로..  오늘은 비록 나이조항으로 면제는 되지만 가급적 단식을 지향한 하루가 되도록, 가급적, 될 수 있는 한…

 

오늘 뉴스를 보니 President Joe Biden의 이마에 검은 십자가 모양이 보였다. 사진 설명에 의하면 Ukraine을 깜짝 방문한 후 Poland의 hotel에서 개인미사를 하며 재의 예식을 받았다고 나온다. 역시 그는 ‘전통적 가톨릭 신자’임을 알 수가 있다. 비록 교리에 벗어난 ‘정치적’ 신념으로 논란은 있지만 역시 그는 교회를 다니는 진정한 신자인 것이다. 그것과 ‘교회 앞에서 징그러운 pose로 사진을 찍는 연극을 하는’ 정말 구제불능의 DONALD 개XX를 모습이 극적으로 비교가 되니…  정말 이것은 하늘과 땅, 아니 지옥의 차이가 아닐지..  오늘 보게 된 Boston based CatholicTV.com의 This is the Day program에 나온 regular personality들의 이마에  Biden보다 더 선명하게  ‘재의 십자가’가 보인다.

매년 재의 수요일 미사 예식에서 쓰이는 ‘재’는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두들 안다. 작년 Palm Sunday에서 쓰이던 palm leaves를 신자들로부터 회수를 받아서 그것을 태워 만드는 것인데 오늘 이 Catholic TV program 에서 그 과정을 보여주었다.  거의 순식간에 재로 변한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 종려나무가지들’, 이런 상징적인 것에 예수 수난의 신학적 의미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지…

이렇게 해서 드디어 오늘부터 40일간 ‘사막의 여정’이 시작되는가? 그 첫날인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는 Lenten regulation 중에는 No Meat 조항밖에 없지만 그래도 Fast 조항은 어떨 것인가? 비록 ‘고기’는 안 먹었어도 절제, 단식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나이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공교롭게도 오늘따라 더 배가 고픈 듯이 느껴졌으니… 심지어 다른 때보다 더 맛있게 식사를 한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Viewing, Pope Emeritus Benedict XVI

Pope Emeritus Benedict XVI,  2022년이 저무는 날에 향년 95세로 선종하신 ‘은퇴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의 바티칸 장례식을 앞두고 viewing, 조문객들의 행렬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길어지고 있음을 본다. 처음 선종뉴스 이후에는 ‘교황직을 자의 自意로 사임한, ‘도중하차’ 한 예외적 교황’이란 제목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그의 생전 교황직에 대한 호의적인 견해들이 지배적인 것을 본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교황님은 첫째도 둘째도 ‘깊은 사상적, 철학적 신학자중의 신학자’임을 알고 있다. 그분의 사목사상의 하나가 담긴 책 The Dictatorship of Relativism은 사서 읽기도 했다.
물론 도중하차했을 그 당시에는 강인한 체력과 에너지가 필요한 교황직 (특히 선교여행)에 역부족이었던 ‘연약한’ 모습들도 보며 걱정과 실망도 했다. 특히 왕성하고 무한한 에너지로 세계를 순방하던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와 비교가 되던 때여서 더욱 대조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아가 교황님은 현재 너무나 세속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보수 중의 보수’, ‘고집불통’으로 낙인이 찍히고 있는 것을 보며… 혼란스럽다.
이분은 제2 바티칸 공의회의 ‘혁신적, 진보적’ 신학적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그는 그 당시 그는 절대적으로 보수가 아니라 진보 중의 진보였는데, 이것은 사실 그가 변한 것이 아니고 세상이 이렇게 한계 없이 탈신앙, 극단세속화 된 것은 아닌가? 참, 이것이 어떤 형태의 진화인가? 아니면?

새로니의 hubby, Richard가 나와 비슷한 직종, 그도 computer engineering에 속해서, 그가 쓰다가 retire시키고 있는 각종 gadgets, computer equipments가 상태에 따라서 나에게 오는 기회가 생긴다. 며칠 전에 ‘물려받는’ 것은 보기에도 육중한 것들 Samsung Dual PC monitors 와 그것을 support하는 monitor arms (mounts)인데 이것을 누가 어떻게 쓸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연숙이 쓰기에 너무나 ‘육중하면’, 나의 lab desk에 올 가능성도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나도 dual monitor를 쓰며, 한쪽에서는 100% movie/video를 보게 되어 시간 낭비가 많아서 다시 single monitor로 돌아오기도 했는데… 역시 주식 stock trade같은 것이 아니면 사실 이것은 ‘한눈 팔기에’ 완전한 setup일 듯하다. 하지만 일단 나에게 왔으니 어떻게 쓰는 것이 제일 효과적인지 머리를 굴려야 할 듯…

연숙의 이빨이 계속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다. 나처럼 ‘오랜 세월, 무식하게 참는’ 습관이 전혀 되지 않은 연숙이 같은 사람들의 고통을 짐작은 한다. 그래서 이제는 이해를 할 수 있다. 우리도 바쁘고 치과들도 모두 바빠서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보험plan이 바뀌어서 그렇게 크게 돈 걱정은 전처럼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마음이 놓인다. 또한 이 지역의 치과의 숫자는 실로 엄청나고 그것도 한인 치과의사들도 거의 100군데가 넘으니, 이것은 사실 반가운 사실이다. 이곳에 처음 이사 왔을 때 한두 군데가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아졌을까… 생각하니 물론 한인 숫자가 그만큼 많아졌고, 이빨 아픈 것을 참는 사람들이 과연 나 외에 누가 있겠는가? 
몇 십 년 동안 우리 식구들의  주치의도 우리처럼 나이가 들어 retire를 준비하기에 이번에는 ‘새 치과’를 찾아야 할 때가 된 듯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새로니의 ‘원군 요청’에 두말 안하고 애보기를 하러 가는 것을 보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누구에게 질 수가 있으랴~ 나는 아직도 멀었다, 멀었어…
오늘은 새로니가 드디어 federal government [Department of Energy]  job 을 시작하는 첫날이 되었고 내일부터는 그 조그맣고 똘망똘망한 유나가 daycare 에 가게 된단다. 조금 믿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새로니가 참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지고도 하고, 상대적으로 나라니가 조금 힘들게 보이니… 이렇게 비교가 되는 듯한 삶을 보게 되는 것이 나는 제일 무서운데… 하지만 이것은 기우 중의 기우일 것이다.

새해의 결심 중에 ‘육성 전화 voice call 무조건 받기’가 있었고 이 덕분에 오늘 처음으로 윤형의 전화를 1초도 되지 않아서 받게 되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니까, 우선 성공한 것이 아닐까? 다음에는 받는 것과 같이 거는 것에도 용기를 실어보고 싶은데, 제일 먼저 내일 교성이에게 걸어보면 어떨지… 제발 성공적인 습관이 되기를 빌어본다.

새로 시작한 ‘수난의 기도들’을 시기하는가, 연속적인 유혹이 아침부터 나를 시험하는가… 역시 사탄의 장난인가… 이런 ‘거의 미친듯한 이 기도’가 나에게 가당하고 유익한 것인가 하는 유혹이 어제의 깜깜한 시간들의 도움으로 나에게 속삭인다. 분명히 나도 현재 ‘수난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고 믿지만, 이 이탈리아 ‘주님의 종’ 여인의 ‘광적인 수난’과 비교가 될 수 있으랴~~ 아, 이것이 현재 나와 무슨 큰 관계가 있단 말이냐~~ 싫고 지겹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Adieu Year 2022, I Love You All…

하루가 거의 지난 이때에 처음 ‘붓을 잡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침부터 Ozzie와 유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Ozzie는 나의 침대 바로 옆에서 너무나 조용히 잤고, 유나도 못지 않게 지난 밤 깊은 잠에 들었다. 우리도 덕택에 제때에 일어나게 된 것이지만 연숙이는 아마도 긴장을 했고 제대로 깊은 잠을 못 잔 듯하고… 아침의 모든 routine들도 유나 때문에 완전히 바뀐 것이어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역시 귀여운 모습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유나는 즐거움 자체였다. 이런 것으로 손주들을 모두 그렇게 고생 고생하며 보아주는 모양이다.

2022년 마지막 날Ozzie와 ‘연장 延長된 산책 즉, Sope Creek까지’ 을 할 수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 했지만 다행히 쏟아지는 비가 아니어서 오히려 시원하게 걸을 수 있었다. 지치지도 않고 그렇게 시간을 쓰며 곳곳에서 냄새란 냄새는 모두 맡으며 걷는 Ozzie의 모습이 그렇게 대단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Emeritus Pope Benedict XVI 16 이 선종한 것을 알았다. 물론 예상은 했지만 역시 다시 생각에 잠긴다. 이 교황님은 내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고 애를 쓰던 시기의 교황님이었고 한창 회심에 불이 붙었던 시기에 갑자기 은퇴를 한 것이 어제의 일처럼 기억에 남는 것이다. 은퇴를 한 사실이 실망적이긴 했지만 나중에 천천히 이 교황님은 내가 좋아하는 type 그러니까 심각한 신학자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이 교황님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깊은 신학을 얻으려 노력을 한 기억이 남는다. 교황님의 신학사상 중 하나로부터 연유된 책, The Dictatorship of Relativism 도 ‘나라니가 성탄선물로 주었던  Barnes & Noble gift card  덕분에 사서 읽기도 했다. 나중에 알면  알 수록 이분은 역시 ‘명석한 신학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교황직을 완수하기에는 역시 ‘필수적 에너지’가 부족한 분이었고 그렇게 오늘 조금은 ‘사라지는 교황’의 모습으로 선종을 하게 된 것이 아닐지… 조금은 슬프기도 하다.

오늘이 2022년의 마지막 날이지만 예년과는 다른 날이 될 것이다. 3-2-1 Happy New Year! 를 올해는 안 하기로 내가 일방적으로 정했다. 연숙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이 조금 미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 피곤한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은 New York Time Square 광경 앞에서, 계속 눈을 비비며 그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올해는 역시 ‘아니다’ 였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샴페인을 미리 맛을 보며 오랜만에 취기를 즐기긴 했다. 아~ 취기가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인가? 갑자기 기쁘고 세상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내친 김에 갑자기 카톡에 보이는 모든 이름을 향해서 새해 인사를 모조리 쏘았다. 어쩌면 그런 들뜬 기분이 들던지… 그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가끔은 이렇게 취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CANCEL & CANCELED, Family Gathering Together

결국 올 성탄, 연말 가족모임은 100% cancel되었다. 나라니가 아무래도 아직도 몸이 아픈 것이다. 그래서 재료만 준비하고 있었던 각종 음식들을 만들어서 두 집에 배달하고 선물도 교환하기도 했다. 작년에도 이렇게 했던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올해도 이렇게… 올해는 사실 나의 작은 감기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어서 미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새로니네 먼 곳으로 이사 안 가는 것과 나라니의 둘째 아기 가진 것 등으로 축배를 들어도 좋았을 텐데… 그래도 한번 얼굴을 보러 그곳으로 가니까… 아~ 올해는 이렇게 넘어가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성탄모임요리’를 만들어서 선물상자들을 들고 ‘거의 작년처럼’ 두 딸의 집에 가서 전해주고 들어왔다. 나는 거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기에 I-285 drive를 하는 것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이런 것들은 진짜 가족모임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신명 나는, 즐거운, 보람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 참 올해는 이상한 해로 끝이 나는 모양이다. 특히 전혀 happy하지 않은 모습의 나라니 인상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대조적으로 기운이 넘치게 보이는 새로니의 모습이 이런 기분을 조금 보상해 주긴 했다. 내일 새로니가 유나를 맡기러 올 것이어서 아예 오늘 간 김에 Ozzie를 미리 데리고 왔다. 그 녀석이 있어야 동네 산책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정상적 삶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는 희망도 없지는 않았다.

 

몸도 근질거리고, 어제 이형 네 그룹과 만나서 느낀 것도 있기에 오늘은 혼자서라도 YMCA gym엘 갈까 했지만,  별로 good idea가 아니라고 ‘강제성 권고’를 하는 연숙, 속으로 ‘네~ 네~’를 되뇌는 나, 그래 좋은 것이 좋은 것,물 흐르는 대로 순리대로 싸우지 말고 살자.

어제 이형네 retail store에서 나와 다른 삶들의 모습을 보고 느꼈기에 나도 조금 자극을 받은 것인지…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렇게들 사느냐 하는 놀람과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생동감, 살아있는 삶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하는 극과 극의 양면성을 본다. 내가 너무 ‘게으르고 안전한 철부지 삶’을 아직까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편한 곳에 앉아서 각종 영성, 철학, 과학 책들을 읽고 사는 나의 현재의 삶, 솔직히 다른 사람들에게 큰 자랑거리가 안 됨을 사람들을 만나서 깨닫기도 한다. 나는 나의 현재 삶의 성격에 이렇게 자랑하지도 못하는 듯한, 한마디로 자신감이 없는 것일까?

그들의 삶, 나와 너무나 다르고 듣고 보기에 신선하기까지 하지만 나는 그런 삶에 그렇게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인데…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사는 듯하게 보이는 것인지..

한마디로 내가 보기에 그들은 가급적 세상적, 세속적인 즐거움을 만끽하며 사는 듯 보인다. 즐거움 이외의 다른 세계를 모르고 사는 듯한 것이다. 어떻게 그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조금 타협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조금 더 ‘삶이 있는 현장 드라마’를 보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떨까?

어제 이형 가게에 간 것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어떤 ‘찬물’을 뒤집어 쓰는 효과를 주기도 했고, 우울한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런 외출이었기에 앞으로 이런 기회를 더 갖고 싶기도 하다.

 

과달루페, 과달루페~~ 이제 새해가 이틀 앞으로 … 머리 속은 역시 1월 말 예정의 과달루페 성지순례로 가득 차 있다. 성지에 대한 것 보다는 ‘여행 그 자체’, 집을 떠나는, 그것도 ‘멕시코’로 가는 것에 더 나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이번 여행은 나에게는 깊은 심리적 충격을 주리라 기대, 희망을 한다. 그러면 이번 성지순례는 100%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로 ‘수난의 시간들’ 묵상기도가 24시간 (24일 동안)이 지난 뒤에 있는 ‘부록’으로 넘어갔다.  ‘수난의 처참한 고통의 시간’에서 조금 숨을 돌리고 이 ‘하느님의 종’, 피카레타에 대한 공부를 조금 넓혀 보고 있다. 우선 그에 관련된 책들에 대한 조사, Amazon에서 보는 ‘서평’ 등으로 조금씩 ‘느낌’을 조절한다. 제일 관심사가  ‘이단성’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사실 전혀 문제가 없다. 이 기도서 책의 감수자 격인 ‘성인’이 그녀의 고해신부였기 때문이다. 99% 의 Amazon 독자들도 나와 마찬가지의 의견인 듯 싶다. 소수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작은 거부감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100% fiction으로 치부하기도.. 하기야 영적, 믿음에 관한 것이니 그것도 이해는 간다.

Those Who Saw Her – Guadalupe

Those Who Saw Her, Catherine M. Odell… 2012년 한창 불타오르기 시작하던 신앙의 르네상스를 맞을 당시에 샀던 책…  그 중에서 현재 내가 필요한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이 책은 가톨릭 교회의 공인을 받은 유명한 발현 스토리를 다루고 있지만  현재 관심사는 물론 Guadalupe 성모님 발현에 대한 것이다. 내년 달력에서 그것도 1월 말을 유심히 보며 예정된 Guadalupe 성지순례의 모습을 예상하며 상상을 한다. 과연 우리가 그곳, 인디언 모습으로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원주민 성 Juan Diego 앞에 나타나신 현장 Tepeyac 언덕엘 가볼 것인가? 예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각종 성모발현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읽고 보았지만 지금부터는 사실 Guadalupe에 관한 것만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어떻게 이번 성지 순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 지금부터 서서히 흥분이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이 신비중의 신비,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에 대해서 공부하고 묵상을 하며 그때를 기다릴 것이다.

 


The Apparitions at Guadalupe, Mexico, 1531

 

Excerpt from Chapter 4,  ‘Those Who Saw Her

 

For fifty-seven years, Juan Diego had lived near the shore of Lake Texcoco in a village hugging Tlateloco, the Aztec capital. As he walked toward that city on a chilly morning in 1531, his thoughts returned to the years of Aztec pagan rites and despicable human sacrifice. Later, the Spanish conquistadors had overwhelmed the Aztec chieftains, who had ruthlessly ruled the Indian tribes. For Juan and fifteen million Indians, a new time and spirit then began in his homeland.

In Juan’s own mind, only the last six of his years had been truly joyful. In 1525, he and his wife, Maria Lucia, had been baptized as Christians Juan, a farm worker and mat maker, had given up his Aztec name – Cuauhtlatoatzin, a word that meant “eagle that talks.” On most days, well before dawn, Juan was somewhere on this road, headed to or from Mass. His village was called Tolpetlac, near Cuauhtitlan. This day, December 9, 1531, was a Saturday, a day on which a special Mass was said in honor of the Virgin Mary.

For some time, his early morning walks had been solitary as he crossed the hill of Tepeyac and the Tepeyac causeway to Tlatelolco, the future Mexico City. Juan’s wife had died. There was only his uncle, Juan Bernardino. Juan Diego thought of his dead Maria Lucia many times as he made his way. There had been no children, and she had been precious to him.

As Juan approached the crest of Tepeyac Hill, he saw a cloud encircled with a rainbow of colors. Then he heard strange music coming from the hill as well. Could it be from some sort of rare bird? He wondered and stared up at the hill with the sun now rising behind it. A woman’s voice was calling above the music. He was fascinated but confused.

“Juanito Juan Dieguito…” the voice came, urging him. Since it seemed to be coming from behind the top of the hill, he ascended to the crest to look. A young woman, strikingly beautiful, stood there, beckoning him. She radiated such light and joy that Juan Diego could think of nothing more to do than drop to his knees and smile at her.

Everything around her seemed to catch the sweet fire she glowed with. The leaves of the plants surrounding her on the hill were aglow; the branches of the trees and bushes shone like polished gold. Around the whole hill, a rainbow of multicolored light seemed to have descended.

“Juanito [Little John], my sweet child, where are you going?” the woman asked him in Nahuatl, his own tongue.

“My Lady and my child,” he replied, in an Indian idiom of endearment, “I am on my way to the church at Tlatelolco to hear Mass.”

Then, with no further introduction, the shining young woman spoke very seriously and yet lovingly to Juan Diego. He listened with intensity born of instant devotion. The woman was so beautiful, so gracious. He could not ignore any request from her:

You must know and be very certain in your heart, my son, that I am truly the perpetual and perfect Virgin Mary, holy Mother of the True God through whom everything lives, the Creator and Master of Heaven and Earth.

I wish and intensely desire that in this place my sanctuary be erected so that in it I may show and make known and give all my love, my compassion, my help, and my protection to the people. I am your merciful Mother, the Mother of all of you who live united in this land, and of all mankind, of all those who love me, of those who cry to me, of those who seek me, of those who have confidence in me. Here I will hear their weeping, and sorrow, and will remedy and alleviate their suffering, necessities, and misfortunes.

And so that my intentions may be made known, you must go to the house of the bishop of Mexico and tell him that I sent you and that it is my desire to have a sanctuary built here.

St. Padre Pio, Indian Summer over, KEURIG anytime

오늘이 바로 이탈리아의 오상 五傷의 성 비오 성인 신부님 축일, 하~ 이 ‘귀신 잡는’ 신부님의 날이었구나!  악의 ‘현존재’를 현 시공간에서 몸소 체험하신 분, 나는 유난히 이분을 오늘 꼭 움켜 잡으려고 애를 쓴다. 나의 어수선한 세속 관심으로 또 다른 함정으로 빠져들어갈까 봐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다. 이 신부님이 경험하신 각종 문제들은 분명한 악령들 때문이었고, 나의 각종 문제도 비슷할 것이라는 확신도 변함이 없다.

일기예보를 한동안 안보며 사는 것, 가끔 당황할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었다. 아침미사에 가려고 차를 탈 때, 짧은 shirts를 입고 나오는 나를 보고 연숙이 깜짝 놀라는 것에 내가 더 놀랐다. 밤새 하늘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거의 10도가 떨어진 기온과 반으로 떨어진 습도까지, 완전히 70도의 날씨가 된 것. 아~ 이제는 90도란 말은 당분간 없겠구나~ 일단 Indian Summer는 끝이 난 것이다. 그러면, 진짜 가을의 시작인가~~

 

KEURIG pod coffee  brewing의 편리함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 동안 꽤 자주 이것으로 ‘수시로’ 커피를 즐기게 되었다. 이것을 더 활용하려면 각종 다른 brand의 coffee를 box package로 사두면 되는데 오늘 Kroger에 간 김에 2가지 새로운 것을 찾아서 그 중에 한가지의 맛을 보았다. Paul Newman Organics인데 아주 새로운 맛이기도 했지만 sales profit을 모두 charity에 donation을 한다는 ‘놀라운’ 문구를 보게 되었다. 이런 제품들은 당연히, 무조건 사 주어야 할 듯하다.

오늘은 모든 조건이 맞아 떨어진 날, 그러니까 YMCA gym을 일주일에 3번을 간, 그런 날이 되었다. 매주 이렇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나이에 조금 무리라는 것에 의견이 맞아, 한 달에 한 주정도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역시 피로 했는가, 운동 후에 늦은 달콤한 낮잠을 자게 되었다.
오늘은 집에서 본격적인 육체적인 일을 할 수 없는 날이었지만 그래도 서운한 심정으로 HYUNDAI Sonata의 waxing은 할 수 있었다. 조그만 paint의 흠, scratch이외에는 거의 body는 waxing으로 새 차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The Most Holy Trinity, Tomorrow is Another Day…

 

지난 주일은 성령강림 대축일,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인데, 한마디로 오늘도 주제는 성령에 관한 것이 아닐까?  성경에 근거한 이 삼위일체 교리는 어떻게 보면 비교적 간단하지만 깊이 이해하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저 성부, 성자, 성령 각위 person을 인정하고 그들 서로의 관계를 성경으로 유추하는 정도가 우리 평신도의 한계일 것이다. 근래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이런 교리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깨닫게 되었다. 성경의 한 글자, 한 문단에 담기고 배어있는 사실 진실들이 놀랍게도 내가 아직도 모르고 있던 것들 투성이…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는 그런대로 의도적인 노력으로 성경에 자세하게 묘사된 성령강림의 모습을 떠올리며, 성령의 움직임을 느끼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미사 후 정기모임, C베로니카 자매까지 모인 ‘하연풍차’의 coffee 모임도 반갑게 시작이 되었는데… 오늘은 뜻밖으로 guest가 한 명 합석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bad idea였고, 이것이 오늘을 bad day로 만드는 시작도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pvc pipe work의 결과가 실망적이었으니…  물이 새는 것을 우려한 것이 현실이 되었고 하필이면 나에게 없는 part에서 새고 있으니… 나쁜 일들은 대부분 연속으로 일어난다는 통계가 있다고 하더니, 어쩌면 오늘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인가?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연이 아닌 듯싶다. 어떻게 이런 날이 있는 것일까?  오늘은 한시라도 빨리 지나가는 것이 내가 기대하는 최상의 약이다.

결과적으로, 평범하지만 편안한 일요일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오늘은 괴로운 날로 남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 내가 어찌할 수가 있겠는가? 세상사가 이런 것이지만, 문제는 내가 이런 ‘의외의 일’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다가 결국은 심한 분노로 고생을 한다는 사실이다. 분노까지는 아니어도 분명히 나는 상당히 실망하고 화가 낙 것은 분명하다.  문득 the tomorrow is another day 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The Art of Loving by Eric Fromm

Erich Fromm의 고전 classic 인 ‘사랑의 기술 技術’, 종이 색깔이 그 동안 더 바래진 오래된 ‘볼품없이 초라한 paperback’ 을 부리나케 꺼내 펴놓았다. 몇 페이지를 펴보니 역시 책의 spine의 접착제가 완전히 말라서 그런지 그 부분이 완전히 떨어지고.. 할 수 없이 spray glue를 뿌려서 간신히 고정을 시켜 놓았다. 조금 불쌍하게 보이는 모습의 이 오래된 책이 더 사랑스럽고 정이 간다.
아침에 왜 이 책을 부지런히 찾았는가? ‘사랑’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요사이 요즈음 나를 문자 그대로 ‘괴롭히는’ 말이 바로 이 ‘사랑’이란 단어였다.  순교자 성당의 ‘요한복음 산책’ 영성독서 강의, 갑자기 악마처럼 나를 괴롭히는 나쁜 생각들 등등의 등 뒤에는 ‘사랑이 결여된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상상일까?
이 책을 봐도, 저 책을 봐도, 이곳, 저곳을 가도 나에게는 ‘사랑’과 사랑의 결여, 를 본다. 그것도 나 자신의… 왜 이렇게 이 흔하디 흔한 말을 나는 다시 깜짝 놀라는 듯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일까?
심리학적인 사랑, 영성적인 사랑, 종교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 상관이 없다. 사랑은 사랑이다. 특히 인간적, 인간 대 인간의 사랑, 나의 주변과 나의 사랑…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과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내가 쉽게 생각했던, 나는 물론 ‘나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제는 의심이 든다.
나는 안다. 나는 감정적인 사랑만을 사랑으로 보며 살았을 것 같다. 의지적으로 사랑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에 거의 없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할 자신은 있다. 의지적 사랑? 생소한 개념이다. 아니 없다, 나에겐…
의지적인 사랑, 공부하며 연구하는 사랑의 방법,  그것을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이란 책에서 본 기억으로 그 책을 찾은 것이다. 이것으로 현재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그룹,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 책의 서문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의 기술 技術에 대한 편리한 지침 指針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반대로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 成熟度와는 관계 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 感傷 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서낼리티 personality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한다.  <발췌: 사랑의 기술>

사랑과 관련된 source 중에 한동안 잊고 살았던 책들이 있다. 바로 예수회 Father Spitzer의 Quartet Series, 그 중에도 God So Loved the World 는 주제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거의 논문급인 그 책은 이런 때에 거의 오아시스와 같은 희망을 준다. 이런 때에 이것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오늘도 남아도는 ‘꽤 많은’ pc box들과 씨름을 했다. 물론 Ubuntu Desktop OS 를 installation을 하는 것으로… 이것을 하면서 왜 내가 이것을 지금 꼭 해야 하는 것인가 묻는 나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우선 ‘재미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실용성보다는 engineer적 호기심, 재미,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이유로 몇 시간 머리씨름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용성도 은근히 희망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요새 나의 심심풀이 시간선용의 제1 후보인 Raspberry PI가 Linux based라는 간단한 사실이다.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Linux community에 가까이 가는 것, 나쁜 idea가 아니다.  두 대의 PC box 에 Ubuntu 20.4 LTS 를 설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agony & ecstasy 의 연속이라고 할 듯… 그런 과정들이 내 engineer로서의 인생이었다. 고통과 희열의 반전, 연속…

 

Ignatius Way, Raspberry PI cookbook

아~ 또 냉랭, 싸늘, 움칠… 춥다, 추워… 조용하게 추운 바깥의 모습이 더욱 싫어진다. 이럴 바에는 아예 이상기온으로 좀 봄 같은 날씨도 나쁘지 않은데… 이제는 추운 것이 점점 귀찮아지고 싫어지는 것은 분명히 나이 때문일 것이다. 자연적 이치라고…
무언가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왜 그럴까? 어제 순간적인 자화상의 느낌으로부터 시작된 그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이 나를 시험하는 것일까? 나에게도 성령과 악령이 교대로 오는 것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요새 나는 분명히 악령 Screwtape의 노리개  감으로 고통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순교자 성당의 요한복음 공부, 예상외로 좋았다. 꽤 많은 깨달음도 있었다. 송봉모 신부의 전6권 ‘요한복음산책’, 교재의 주제와 정신을 충실히 해설하시는 신부님의 강의가 우선 좋았지만 오늘의 주제가 현재 내가 겪는 혼란스러운 생각에서 헤쳐 나오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성령의 움직임을 나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긴다. 배우려고 하지 말고 느끼고 묵상하고 관상을 하는 예수회, 아니 이냐시오 성인의 방식을 더 알고 싶다. 아니 현재 이 복음공부는 이냐시오 영성에 바탕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timing이 어디 있을까? 최근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James Martin신부의 책들, 대부분 이냐시오 관상, 영성에 관한 것들인데 우연일까? 이 요한복음 공부 전에 나는 이미 그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시작을 이미 했던 것인데… 역시 프로인 신부님의 지도로 본격적으로 이것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이번이 기회다, 절호의 기회… 이것을 놓치면 나는 없다, 없어… 미래가 없다… 절대로 잡아야 한다.

오늘도 새로 산 refurbished PC에 Windows 10 Pro  installation 을 계속한다. Provisioning 이라고 할까? 일단 연숙에게 주기로 했으니 그녀의 필요에 맞게 personalize를 해야 한다. 이런 작업도 앞으로 별로 없지 않을까? 오늘도 hardware test를 해 보니, 특히 video는 확실히 speed에서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본다.  그것으로 일단 되지 않았을까? Benchmark는 역시 YouTube video일 것이니까… 그것이 pass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책 한 권과 2개의 32GB microSD card (rather chips?)..  책은 Simon Monk, O’REILLY  Raspberry PI Cookbook인데 거의 600 pages에 가까운 두툼한 책이다. Raspberry PI [tiny single board computer]에 대한 책은 이미 오래 전에 산 것이 두 권이나 있으나 문제는 너무나 오래 된 것이다. 2020년 대에 나온 이 책은 아주 fresh 한 느낌이고, Amazon의 review가 아주 좋았다. 나의 희망은 사실 이런 review들 보다는 그 동안 뜸했던 나의 흥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결과는 어떨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희망적이다. 이 책의 인도를 받아 작년에 $$를 투자한 것들, 주로 electronic parts들,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은 것이고, 머리를 조금 더 쓰게 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다.

 

Shadowlands, Miracle of Medjugorje

어제 밤에 ‘연속상영’으로 보게 된 Narnia의 저자,  C.S. Lewis의 1993년 자전적 drama film1, Shadowlands 로 나는 인간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순수하고 지성적, 고전적 사랑의 위력! 영화의 주인공 Jack Lewis는 비록 견디기 어려운 간병과 사별의 고통을 겪었지만 그것이 보여준 진정한 사랑, 그것도 세속적으로 비쳐진 인간상과 영성적, 내면적인 모습이 100% 일치했던 C. S. “Jack” Lewis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교훈이고 모습이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그런 것을 배우고, 실천하고 남기고 싶다. 신앙적으로 언행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인간상, 요즈음에 흔치 않은 것이다.

Joy[Debra Winger]의 불치병이 밝혀진 후 결혼식을 결심하는 Jack[Anthony Hopkins]

아내의 임종을 함께…

 

 

오늘 아침부터는 역시 전에 보았던 또 다른 인간상, ‘메주고리예의 Artie Boyle 기적’,  A Time for Miracles을 다시 보고 있다. 이 ‘영화’는 2000년대 초 성모발현지 메주고리예 에서 일어난 실화의 documentary film이다.  주인공인 Artie[Arthur], 전통적 ‘준 냉담적’인 가톨릭 집안의 가장으로 폐종양으로 위기를 맞는다.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친구의 권유로 3명이 메주고리예를 찾고, 십자가 정상에서 기적적, 순간적인 치유를 받는 것, 현재까지 아무런 후유증이나 재발이 없는 전형적인 기적체험을 한 것이다. 나에게는 희망의 자극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전적 시기를 가고 있기에 이 이야기는 아주 timing이 좋다. 기적, 그것도 초자연적인 기적의 이야기와 증언이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된다. 이것도 공동체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의 하나라고 본다. 나는 현재 그렇게 ‘심각한 도전’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Medjugorje 에서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가 Artie

The Cross Mountain

위의 두 가지 ‘시각적 활동’의 도움으로 놀랍게도 안정감을 되 찾으며,  내친 김에 순교자 성당 ‘본당 봉사자를 위한 영적독서회’를 염두에 두며 ‘신비스런’ 요한복음을 읽게 되었다. 몇 년 전에 Holy Family 성당에서 거주사제였던 ‘젊지만 중후한’ 멋진 아틀란타 대교구 소속 법관 신부님 Fr. Dan Ketter가 열심히 권해주었던 주해 신약성경까지 동원해서 드디어 요한복음을 정성스레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몇 가지 ‘간단한’ 선택으로 최소한 오늘 하루는 평화의 기쁨을 맛보다니… 정말 간단한 선택이었는데…  부수입으로 어제부터 아팠던 허리의 통증까지 조금은 나아가는 듯 느껴지고…

 

며칠 째 계속 먹었던 ‘쌀밥, vegetable stir-fry 아침’, 조금 지겹다는 불평이 들리는 듯. 오늘은 일상적인 ‘양식’ 아침메뉴로 돌아왔다. 역시 아무리 맛이 있어도 계속 먹으면 별 수가 없는가…  별볼일 없게 보이던 이 ‘양식’ 이 이렇게 새로운 맛인지는…

 

 

1월 중순 쯤이 되면 kitchen TV에는 반드시 이런 멋진 모습의 ambient music 이 Youtube screen에 뜬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눈 내리는 설경이 창 밖으로 보이는 coffee shop, 이런 것들이 있어서 고민이 있는 하루도 그렇게 괴롭지만은 아닌 걸 거다, 그래… 몸 대신 마음이라도 이런 곳에 갔다고 상상하는 것도 한겨울의 별미다. 비록 작은 화면이라도 상관없다. 머리 속의 화면만 충분히 크다면

어제 아침부터 등쪽 허리부분이 아파오던 것이 점점 아파지기 시작해서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는 것조차 힘이 든다. 이것 또 며칠을 갈 것인가 은근히 걱정이 된다. 어깻죽지 부분이 아니고 허리아랫부분인 것은 나에게는 아주 드문 것인데, 허리를 구부리는 것이 때에 따라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프니… 이것이 연숙이 주로 아픈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의 특징은 산보를 해도 별 효과가 없는 것이고, 유일한 처방은 허리를 안 구부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비교적 빨리 허리가 아픈 것이 조금 나아지고 있지만 이번에는 연숙에게 감기가 찾아오는 듯싶다. 혹시… 하지만 설마… 그래 오늘 저녁과 내일까지 조금 편하게 쉬면 이런 ‘노인성 불편함’일지도 모르는 것들 현명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내일까지 천천히 쉬고 나면 나의 생일이니… 그날 미역국을 제대로 즐기려면 내일까지 연숙이 나아야 할 터인데… 웃긴다, 미역국 때문에 빨리 완쾌가 되라고… 나도 지독한 인간인가?

 

  1. Youtube에서 볼 수 있음.

Gaudete Monday

어제로부터 넘어온 잔광 殘光…  어제, 대림3주일의 시작에 새삼 느꼈던 여러 가지 밝고 새롭고 새삼스럽고 들뜨고 반갑고 기쁘기까지 했던 일들이 나를 이렇게 건강하게 느끼게 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사람이란 생물은 이렇게 쉽게 건강의 느낌이 쉽게 변하는 것인가? 비록 느낌이라도 좋다. 그것이 현재 나의 상태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Have You Found Joy? — Bishop Barron’s Sunday Sermon 

어제 깜빡 하고 지나친 Bishop BarronGaudete Sunday Sermon Youtube video를 본다. 벌써 100,000 views 를 향하고[결국 137,000 views] 있는 대림3주일강론, 변화무쌍하게 재빠르게 변하는 연약한 인간들에게 안 변하는 것, 그것을 거의 하루 종일 잊고 어쩌면 나의 현재 일상 경험을 그대로 분석, 묵상을 하는 착각에 빠진다. 하루 하루의 심리적 감정적 up & down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런 순간적, 시간적 변화무쌍한 지나가는 생각들에 집착, 고민, 절망을 피하며 살 것인가? 역시 기도, 기도 란 쉽지 않은 주문이 그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없는 일상의 쪼잔한 고민들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 이 강론은 내가 계속 듣고 실천해야 할 것 같다. 기도, 기도, 기도, 진심의 간절한 기도…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고, 두고… 이것은 현재 내가 지나가고 있는 생활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치료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일 듯하다. 중심, 중심에서 멀어진 나의 모습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 나의 병이다.

어제의 ‘대림3주일 기쁨의 주일 Gaudete Sunday’의 힘으로 이번 주를 기쁘게 살고 싶다. 기쁘게, 고민이 있거나 괴로워도 기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순간 순간을 기쁨이 넘치는 느낌을 갖고 싶은 것이다. 슬픔 보다는 기쁨을 친구로 삼고 싶다. 들뜨고 싶다. 사람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나를 친절하게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약간 취하고 싶다. 멋진 추억거리를 잊기 전에 기억하고 싶다. 멋진 대림, 성탄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안팎에서 마시고 싶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

오늘도 지나가는 해를 정리하며 더 남기고 싶은 나의 저무는 생의 기록을 찾아내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이런 작업에 익숙해져서 전보다 훨씬 쉬워졌기에 12월을 보내는 적당한 소일거리가 되어간다. 감사할 일이다. 거의 아무도 안 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공적’인 기록의 고마움을 어느 누가 알겠는가?

 

뜻밖의 5일간 자가격리에서 벗어난 이후, 정확히 2주 만에 둘이서 다시 하게 된 동네 산책, ‘오늘도~ 걷는다마는~’. 제일 짧은 코스를 택했다. 바람이 없고 싸늘한 느낌이 좋았다. 2주 전보다 훨씬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많아지고 요란해졌다. 열흘 남짓한 성탄, 올해도 급속하게 저물어간다. 어떻게 성탄, 새해를 맞을 것인가? 다음 주에는 우리의 ‘날개’를 향한 거의 마지막 목표를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다. 이렇게, 올해는 참 상징적인 일을 많이 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불현듯 이영석 신부님에게 안부 소식을 전했다가 어머님이 쓰러지셔서 응급실에서 답을 주신다. 얼마나 자상한 목자인가? 그 상황에서 그렇게 나에게까지 시간을 할애한 자상함, 나는 그것이 그저 감사한 것이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닌 듯, 꿰매면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한창 목회, 연구, 강의를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어머님에게 거의 모든 시간을 쏟는 모습에 감동을 안 받을 수가 있는가?

Martin on Merton

2021년 summer reading 목록 중에서 제일 빨리 독서/필사가 끝난 책이 예수회 America magazine 편집장 James Martin신부의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원제: My Life with the Saints, 2006)’ 이다. 이 책이 최근에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듯 싶다. 몇 개월 전에 Martin fever로 이름한 나의 초 超관심 기간 중에 이 신부의 책 4권을 거의 한꺼번에 산 적이 있었다. 그것들을 천천히 이것 저것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그의 문체와 지적 철학에 조금 적응하려는 의도였다. 이 예수회 신부는 news media상에서 가끔 ‘지나친 진보적 신부’라는 비판을 받는 것 외에는 별로 큰 관심을 끈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속단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결국은 Bishop Robert Barron에 못지않은, 아니 버금가는 미국 가톨릭 [거의] 차세대 최고 지성의 거목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연숙과도 나누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그분의 책 몇 권을 이미 읽었던 과, 이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교리반 시절 선물로 받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한국어 번역본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이었다.

이제까지 성인전 종류의 책은 나에게 별로 손이 가지 않은 것들이었다. 기억 속에서도 그런 책들은 우선 오래된 낡은 책들, 하나같이 고통을 지나치게 묘사한 것들, 감히 다다르지도 못할 인간의 능력을 넘은 초인간들, 난해한 고유명사 투성이의 조잡한 번역… 등등으로 나는 가급적 그런 책들을 피하며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도 별로 선뜻 손이 안 가는 책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제는 친근한 모습의’ Martin 신부가 쓴 책이라는 것에서 느낌이 아주 달랐다. 조금은 ‘초현대적, 초이성적, 심지어 과학적’인 접근을 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전통적인 고리타분 하고 녹 냄새가 풍기는 그런 성인전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바로 나를 위해서 쓴 책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이 책의 원제는 ‘성인과 함께한 나의 삶, My Life with the Saints‘ , 하지만 성찬성[역자] 번역본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왜 멘토란 말을 넣었을까?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성인’이란 말은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성인은 물론 그 외에도 성인 같은 삶을 산 사람들[토마스 머튼, 도로시 데이 같은]도 포함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그 ‘성인과 비슷함’을 멘토 mentor 란 단어로 표현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16명의 성인, ‘예비, 준’성인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의 특징,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모두 Martin신부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으뜸으로 다루어진 ‘성인’이 바로 토마스 머튼 트라피스트 수사신부님인데, 솔직히 나는 그런 사실에 아직도 동감을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화장실에서’ 몇 년간 읽었던 그의 대표작 Seven Storey Mountain 이란 자서전이 왜 그렇게 수많은 예비신부들의 ‘고전적’ 필독서가 되었는지 쉽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이유는 이 책은 솔직한 고백록일지는 모르지만 요점을 제외한 ‘군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웬 고유명사들이 그리도 많은지, 본인에게는 익숙한 표현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한 것들인데 알고 보면 그런 것들이 모두 불필요한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머튼은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실망까지… 그래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99% 틀렸을 것이라는 것 [사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Bishop Barron과 Father Martin 모두가 그 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마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토마스 머튼과 그 칠층산을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마틴 신부의 글은 다른 각도로 그 책을 재조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다시 그 책을 읽을 때는 조금 더 겸손한 자세로 읽게 될 지도 모른다.

 


참된 자아

 

나에게 있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화와 구원의 문제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와 같다.

 – 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대학에서 미시 美詩 American Poetry 강의를 들을 때, 월트 휘트먼을 처음 소개받았다. 우리 젊은 교수는 휘트먼 예찬자이자 연구가였다. 그녀는 시인의 전기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 어느 날 그녀는 만일 우리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거든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하라고 말했다.

 

내가 나 자신과 모순되는가?

그래, 참 좋다. 나는 나 자신과 모순된다.

(나는 크고, 내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앉아 있나니.)

 

휘트먼은 이 시구로 또 다른 시인이자 신비가요, 수도승이요, 예술인이요, 평화 운동가요, 사제요, 영성 대가요, 교회 일치 주창자요, 선사 禪師 요, 성인인 토마스 머튼을 어렵지 않게 변호할 수 있었다.

머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모순이다. 자신의 주변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봉쇄 수도회 수도승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데, 그가 바로 트라피스트 수도승 머튼 루이스 OCSO the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 (엄률 시토 수도회) 신부다. 떠돌이요 타고난 여행가이면서 정주 서원을 하고 미국 켄터키 주 외딴 산중에 터를 잡은 겟세마니 성모 대수도원에 정착하기로 작정한 사람. 자진하여 순명 서원을 하고도 수도 생활 상당 기간을 자기 수도회의 장상들과 부딪히며 보낸 사람. 자신의 소명에 반하지만 [필사주: 反인가, 반대로 魅惑인가? 정말 성의 없는 번역]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사람. 동양 종교들에 매혹당한 신심 깊은 가톨릭 회심자. 명예직과 훈장을 싫어하는 (아니면 싫어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려 노력하는) 저명한 문필가. 하루는 결코 한 줄도 더 쓰지 않겠다는 결단을 글로 쓰는가 하면, 며칠 후에는 출간된 자신의 또 다른 저서를 보고 느낀 기쁨을 글로 쓸 수 있는 사람. (그는 주목할 만한 한 일기의 도입부에서, 새로 나온 자신의 책 표지를 싸고 있는 올이 굵은 삼베가 당시 맨해튼의 현대식 나이트클럽에 사용된 천과 똑같았다는 점에 은근히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역설들, 이런 휘트먼풍의 다중성은 머튼을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변화무쌍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이르는 여정을 소상하게 기록한 1948년도에 출간한 회고록 <칠층산>은 사리를 아는 머튼조차도 예견하지 못한 출판계의 기현상이 되었다. 이 책은 수백만의 독자에게 관상 기도를 소개했고, 전후 미국 수도 생활의 쇄신을 예고했다. 평화에 관한 그의 글들은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의 전조가 되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자극은 지쳐 있던 한 미국인이 그리스도 신앙을 재정립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책은 나를 재정리하는 데도 보탬이 되었다.

<칠층산>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려면, 내가 머튼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얼마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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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일곱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 대학 와튼 스쿨에서 수강했다. 내가 경영학을 공부하기로 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거니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는 이해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미술처럼 신나게 공부한 과목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직업으로는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보았다. 일례로 나는 프랑스어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다.

Vatican Angelus

St. Peter’s Square에서 교황님의 삼종기도를 기다리며 운집한 die-hard 순례자들.

예전같이 평상적인 모습으로 기다리는 순례자, face mask가 하나도 안 보인다.

 

Vatican Angelus, 바티칸 삼종기도:   지나간 주에 일어난 딸애의 출산 같은 큰 일들을 때문인지, 모처럼 주일미사를 빠지기로 결정한 ‘우리들의 삼일절’ 일요일 오후에 Vatican Youtube 를 보니까 오랜만에 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삼종기도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교황님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 이라며 기도를 하자는 text message를 본 직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기에 사실 여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의 바티칸 삼종기도에 교황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과연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과연 삼종기도 시간에 맞추어 교황님이 창문으로 나타나셨고,  close-up 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조금 피곤한 것 이외에는 전혀 병색이 없었다. 또한 성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순례객은 숫자는 비록 적었어도 얼굴 마스크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태리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율이 아주 높다고 들었는데, 그 지역이 다른 쪽인 모양이다. 하지만 로마나 바티칸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우려는 떨칠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창문으로 등장하신 교황님, 코로나 바이러스는 헛소문..

역쉬… fake rumor 전혀 병색이 없는 교황님, 평소처럼 삼종기도, 메시지를 바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까.. 과장해서 말하면 심한 flu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1) 이 바이러스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점, (2) 감염률이 높은 듯한 점, (3) 경제,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인 파급적인 불안감, (4) 결국은 사회적인 약자에게 미칠 지나친 피해… 등등을 생각하면 조금은 미리 피곤해진다. 왜 하필이면 성스럽기만 한 사순절에 이런 ‘중국발 대형사고’가 났을까? 

Mass, romantic..

몇 년 전부터인가.. 내가 YouTubeVatican programming을 보기 시작한 것이.. 최소한 2~3년 정도는 되었지 않았나? 처음에는 중요한 행사, 그러니까 시복, 시성식 같은 것 아니면 가톨릭 전례력으로 아주 중요한 날들, 크리스마스, 부활절 같은 것을 high definition video로 볼 수 있었던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해외여행을 밥 먹듯이 ‘자랑 삼아(주로 Facebook-type people)’ 하는 부류들은 분명히 그런 때마다 Vatican city로 날라가서 현장의 분위기를 만끽할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런 ‘$재력$’이 없기에 YouTubeVatican streaming video를 감지덕지 感之德之 하며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Italy 동북부의 소도시, Carpi 본당 앞 piazza 에서 거행된 교황집전 미사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고 생소하기도 했던 교황님 집전의 Latin Mass들이 이제는 거짓말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하나도’ 짐작조차 못했지만 지금은 그냥 몇 년을 ‘계속’ 본 탓인지는 몰라도 짐작으로 ‘거의 다’ 이해를 하게 되기도 했다. 반세기 전에 그 잘 나가고, 알량한 WordPower라는 책으로 영어단어들의 역사와 어원을 따지며 공부했던 그 말들, ‘배움의 위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 배워두어서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현대 영어는 물론 Latin어에서 나온 다른(나라) 말들, 짐작으로 거의 때려 맞추게 되었으니 말이다.

‘거의 매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교황 Francesco

 

대부분의 Vatican video programming들 중에서 가끔 ‘생소’한 것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오늘의 주제인 romantic mass가 그 중에 하나다. 교황님, 가끔 (아니면 자주?) Italy 국내의 성당들을 방문하곤 하시는데 그 중에 조그만 본당들도 있다. 2017년, 4월 2일에 방문한 곳 Carpi 라는 도시의 본당이다. 이 ‘사목적 방문’의 이유는 지진에 의한 고통을 위로하시러 가신 듯하다. 지진으로 무너진 본당의 건물이 다시 세워진 것에 맞추신 듯 한데 확실한 것은 모른다.

 

 

그 때 찍은 ‘공식’ video, 누가 찍었는지 ‘참으로 멋진 coverage’라고 감탄을 했다. 처음에는 무심코 생소한 것을 본 듯이 보았지만 두 번째 보게 되었을 때는 더 자세히 그곳의 풍경,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조그만 도시라서 그런지 그곳의 사람들, 신자들 보통 생각하는 ‘멋진 이탈리아 fashion‘ 같은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평범한 소도시의 simple 가톨릭 신자들.. 어쩌면 그렇게 소박, 경건하고도 생동감 있는 미사를 드리던지.. 위로와 사랑으로 가득 찬 모습의 교황님을 중심으로 그 많은 사람들 혼연일체가 된 모습들.. 인상적이었다.

 

 

더 나아가 이 미사의 video를 계속 반복해서 보게 된 이유는 조금 우스운 것인데.. 성가대의 어떤 젊은 여성 lead singer의 모습 때문이었다. ‘서양여자’의 나이는 조금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이 여성은 쉬운 case로서,  아마도 upper teen 아니면 early 20s  나 되는지.. 나이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요즈음 정말 오랜만에 성형왕국 대한민국의 수 많은 똑같은 복제품 같은 여성들에 비해서, ‘칼을 대지’ 않은 ‘처녀성 얼굴’이었고, K-pop 가수들처럼 100% artificial 한 화장기가 전혀 없었던 바로 그 얼굴..  거기다가.. 그 청순하고 단순한, black gospel song 냄새가 전혀 안 나는 전통 가톨릭적 음성의 정수 精粹 를 보여주었다. Romantic한 감정까지 느끼며, 이런 저런 생각의 끝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손녀 같은 나이의 이 여성에 맞는 나이였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런 ‘찬사’가 그대로였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나이 듦의 비밀일 것이다.

 

 

심지어 ‘야릇한, romantic’한 감정을 갖고 교황님 미사를 ‘경청’하면서 이 programming을 찾고, 보고, 느끼게 되는 것, 전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긴다. 요새는 모두 그런 식이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지 않을까… 필연적인 것은 아닐까? 그러면 그 필연의 first mover는 과연 누구일까? 이래서 인생의 황혼기도 그렇게 지루하고 심심한 것이 아님을 실감하고, 또한 그저 감사, 감사한다.

 

 

Guadalupe Virgin’s in Marietta

Vivid Virgin's imprint

Vivid Virgin’s imprint

 

Guadalupe, 과달루페 성모님, Mexico City에 있는 그 성모님 (영상)이 내가 사는 마리에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 성모님의 ‘상본’은 나의 main desk옆 벽에도 걸려있어서 커다랗게 잘 보인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지난 7월 초 내가 속한 레지오는 과달루페로 ‘피정’순례를 간 바 있지만 우리는 가지를 못했기에 (lousy timing)  이번의 과달루페 성모님 소식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 웃기는 것은 이번에 우리가 ‘발견’한 성모님은 사실 지난 해 2015년 12월 12일에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 우리는 무척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주위에 물어보니 거의 모두 그 소식을 알고 있는 듯 했다.

Transfiguration Catholic Church
Transfiguration Catholic Church

이번의 Guadalupe story는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 최근 우리와 자주 보게 되는 Holy Family CC near-regular Chris 자매님, 아침 daily mass가 끝나고 coffee break시간에 우연히 우리에게 ‘마리에타 성모님’ 이 찍힌 사진을 보여주었다. 마리에타의 ‘어떤’ 성당 Transfiguration CC(Catholic Church) (The Catholic Church of Transfiguration) 의 ‘창’에 성모님 모습이 보였고 그것은 과달루페 성모님과 비슷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모습은 video로 찍혔는데 정말 가까이 찍은 것을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은 ‘성모님’의 자태에 분명했다. 언제 이 ‘창문의 성모님’이 나타나셨냐고 물으니 ‘꽤 지나간 일’ 이라고, 아마도 지난 5월 쯤이 아닌가.. 하였다. 집에 와서 부지런히 googling을 해 보며 우리는 놀라기만 했다. 나타난 때가 지난 해 12월 12일.. 그것은 바로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이 발현하신 바로 그날이었다. 주임신부님이 Facebook에 ‘공표’를 하고 ‘세상’에 이미 알려진 지가 거의 9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는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창문에 image가 새겨졌다.
바로 이 창문에 image가 새겨졌다.

그러면.. 왜 그 성당에 과달루페 성모님이? 그 성당은 ‘아마도’ Hispanic community가 상당히 있었을 듯 하고 주임신부도 Columbia출신이기에.. 요새 ‘빠가 중의 빠가, 양아치 중의 양아치, Trump의 주둥이 으름장’ 때문에 고생하는’ 그들을 위로하시려 나타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It’s not too late, it’s now or never를 되뇌며 우리 (3명)은 이틀 뒤, 오늘 아침 미사 후 McDonald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곧바로 그곳을 찾아갔다.  그 성당이 있는 동네는 사실 typical Hispanic의 인상과는 거리가 있는 깨끗한 전형적인 Northeast Cobb County, middle-class neighborhood, 성당도 우리 Holy Family CC 보다 더 깨끗하고 웅장하였다. 그 문제의 창문은 parish center로 쓰이는 커다란 강당 같은 곳에 있었고 밖에서는 어렴풋이 ‘흑백의 그림자’같은 것만 보였는데, 들어가보니.. 와~~~ ‘총천연색’이 분명한 ‘아직도’ 뚜렷이 과달루페 성모님의 자태가 남아있었다. 나는 살아 생전이 이런 supernatural한 원인으로 남아있는 것을 처음 육안으로 목격하는 셈이 된다. 

이번에 나는 매일 묵주기도로 가까운 성모님이 생각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메주고리예처럼 살아있는 모습의 발현이 아니더라도 이런 간접적인 ‘계시’라도 그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면 깊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깊은 감명’을 숨길 수 없는 뜻있는 하루가 되었다.

 

2016-09-23-11-48-04

성모님 모습이 새겨진 곳이 가운데 창문이다. 이곳은 multi-purpose parish center 중 제일 큰 ‘강당’ 인 듯하다.

 

 

 

Tobey scare, 33일 봉헌 retreat

¶  Tobey Scare: 12살 배기 male mixed Dachshund, Tobey, 이틀 전부터 거의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자는 시간 빼고 거의 모든 시간 나를 졸졸 따라오는 나의 그림자였지만 그날 아침부터 나를 따라오지를 않았다. 아니..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거의 죽은 듯이 엎디어 있고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일순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12살의 나이면.. 언제나 가능성이 있는 나이라고 서서히 우려를 하고 있던 차였다. 제 발로 계단을 못 내려가는 것이 뻔하기에 내가 앉고 나가서 bathroom처리를 했다. 집안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변했다. 조용해진 것은 물론이고.. 거의 초상집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처음으로 우리 Tobey와 이별할 수도 있다는 현실감도 들 정도..

주위에서 정든 pet dog을 보내며 보여준 각가지 반응들에 우리는 남의 일처럼 comment를 하곤 했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Veterinarian을 찾으면 이상적이겠지만.. 그것도 꺼려지는 것, 이것 저것 test test.. 로 개를 잡을 것이고, $$$도 만만치 않을 것이지만 그것 보다는 증세가 최소한 internal한 것이 아니기에 며칠을 두고 보자고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 최소한 먹는 것과 ‘싸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오늘 소식을 듣고 새로니가 부리나케 ‘병문안’을 왔고 이곳 저곳 연락을 해서 알아보니, 역시 ‘심한 신경통, 관절염‘ 계통의 증상인 듯 했다. 그렇게 잘 걷고 활발하던 애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 부리나케 신경통증을 완화하는 약을 order하고 더 지켜 보기로 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듯 하긴 하다. 새로니의 이야기가 만약 관절염계통이면 치료가 불가능하고, 통증만 control할 정도라고..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활발하던 애가.. 하지만 12살이 되는 나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항상 이별할 준비를 하는 것은 생각하기도 괴롭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인가?

 

¶  2016년 ’33일 ‘대장정’ 의 첫날을 맞이했다. 이번이 3번째의 33일 봉헌이 되기에 조금은 경험이 있다고 할까.. 처음 두 번의 것보다 조금은 느긋한 심정으로 첫 날을 맞이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며칠 전부터 뒤적거리던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책의 첫 장을 열고 첫 12일의 목표: ‘세속 정신을 끊음‘ 의 제1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당신 제자로 부르심‘ 을 읽고 묵상을 시도한다. 12일 동안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라’ 는 과제.. 이것이 과연 그렇게 쉬울지..

사실 이 33일 과정은 이 책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guide를 받으며 독서, 묵상, 기도를 할 수 있다. 이 ‘책’을 그대로 따라가면 큰 문제없이 33일 기간을 마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실제로 독서 후에 깊은 묵상과 제시된 기도를 다 마쳐야 하는 것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33일의 기간 동안 지켜야 할 것들이 이 책에 일목요연하게 제시가 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급적’ 지켜야 하는 부담도 있다.

한창 더운 복더위의 여름에 이것은 무엇인가.. 시원한 beach나 산 속의 summer vacation도 아니고.. 에어컨 소음이 요란한 자기 집 방구석에 앉아서 이렇게 33일 보낸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큰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의미가 있는 멋진 summer ‘spiritual’ retreat, vacation 일 수 있는 것이다.

33일 매일의 실천 사항 이란 list를 보면: 거의 모두 ‘상식적’인 것들이다. 이 기간 동안 ‘대죄’를 짓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1시간 이상 조용한 시간을 할애하라는 것, TV같은 ‘잡 雜 것’들 을 피하라는 것, 아니 요새 나온 실천사항에는 분명히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피하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듯 하다. 아마도 제일 힘든 것이 ‘조용한 1시간 이상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정말 힘들게 된 요새세상, 참 많은 사람들 ‘로봇트’ 같은 정해진 일상을 보낸다는 사실에 경악을 한다.

이 중에는 가능하면 매일미사 참례하라는 것이 있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것에서 ‘걸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 요새 세상에 매일 미사를 한다는 것,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 인기 있는 활동이 아닐진대.. 하지만 나는 문제가 없다. 2012년 부활시기에 이 ‘인기 없는 활동’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굳건한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참 오묘한 것은, 2012년 부활시기에 연숙이 33일 봉헌을 시도하면서 ‘시험 삼아’ 평일미사를 같이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작은 기적들’의 시작이 되었으니 말이다.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은 이래서 우리에게는 거의 ‘신화적 역사’가 되었다.

 

T-minus 48 hours..

7월 11일, 2016년 아침.. T-Minus 48 hours.. 이틀이 남았다 2016년 ‘성모승천 대축일’ ‘봉헌을 위한 33일 준비’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 7월 13일로 다가왔다.  2012년 8월 첫 봉헌, 2014년 3월 갱신 이라는 이력을 가진 내가 왜 다시 이 쉽지만은 않은 신심에 도전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2012, 2014, 다음은 수열 상으로 2016이라는 것은 조금 우습지만, 그런 것도 좋은 이유 중에 하나로 넣기로 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 깊고 심각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생활을 하는 덕에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가르침으로부터 크게 멀어진 적은 없는 듯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혹시 타성에 젖어가는 것은 아닐지, 항상 의식한다. 편한 기분이 들어가면 그것은 분명히 타성에 젖는 것이다.배우고 알고 경험이 쌓이면서 편해진 것이면 큰 문제가 없지만, 무디어지고 느낌이 없어지고, 짜증도 나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커다란 reboot, reset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2014년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7월에 나는 reset과 reboot을 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었다. 비록 비싼 vacation trip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인생 최고의 ‘free’ vacation으로 남았다. 하지만 2014년 여름의 big reboot은 spiritual, devotional한 것이 전혀 아니고, 완전히 나만의 mental exercise에 불과한 것이었다. 길고도 죽을 때까지 남는 그런 ‘비싼’ 경험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background를 가지고 나는 이번 여름 Marian Assumption Day1 에 맞춘 봉헌을 하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2013년에 시도했던 33일의 노력이 도중하차로 끝난 것을 명심하면서 이번에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 다음은 역시 ‘또 다른 경험’을 하는 것.. 어떤 것이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 상관이 없다. 다른 느낌과 체험, 경험.. 그것이면 족하다.

이 정도의 준비각오면 (이렇게 요란하게 글로 남기는 것도 포함)  아마도 아마도 이번에는 도중하차를 할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면 8월 15일 후에 내가 ‘얻는 것’은 어떤 것에 중점을 두면 좋을까? 분명히 더 낫고 더 올바른 성모마리아 신심(이것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첩경이다) 에 다가가는 것이다. ‘오해 받지 않는 철저하고 용감한’ 성모신심을 얻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과제다.

어제 Catholic News Agency website에 조금은 섬뜩한 기분의 기사가 실렸다. Fatima 의 visionary Lucia 루치아 수녀님의 예언이었다. 파티마 목격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수녀님 2005년 선종 전에 증언이 그것이다. 인류 최후의 심판, 결전은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결혼과 가정’2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 그것을 ‘예언’하시고 선종하셨다고 보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수녀님의 예언인지 혹시 성모님의 예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떨까.. 나도 비슷한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기에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Humanity의 근간 중의 근간인 ‘정상적인 가정’의 파괴와 붕괴는 사실 핵전쟁이나 다름없는 인류파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매한 지식인‘들은 그렇게 stupid한 것일까? 10은 알고 11는 모르는 것.. 이런 뉴스에 접하며 나는 이번 33일에 이런 Current social problem을 같이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뉴스와 일맥상통하는 글이 바로 33일 봉헌 Guide에 잘 나와있다. 아래 그것을 전문 발췌를 했는데, 원제는 20세기에 관한 것이지만 21세기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다.

 

20세기에 들어 성모님은 파티마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발현하셔서 당신의 티없는 성심께 대한 봉헌을 간곡히 호소하고 계신다. 20세기의 초엽인 1917년 파티마에 발현하셨을 때에는 원죄에 물들지 않은 당신의 티없는 성심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티없는 성심께 대한 신심과 봉헌을 호소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나의 티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기를 원하신다” (파티마, 19717. 6. 13).

“내 티없는 성심은 너의 피시처가 될 것이며, 너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파티마, 19717. 6.13).

이에 따라 1942년 10월 31일 비오 12세 교황은 전 세계를 마리아의 티없는 성심께 봉헌하고, 1946년에는 파티마의 성모님을 세계의 여왕으로 대관하고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 축일’을 제정하였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청년시절에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서 큰 감화를 받고 자신을 온전히 성모님께 봉헌하였으며 이 책에서 ‘온전히 당신의 것 (Totus Tuus)‘라는 문장을 뽑아 교황 즉위 시에 모토로 삼기까지 했다. 1984년 3월 25일에는, 1917년 파티마에서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전 세계의 주교들과 뜻을 합하여 소련은 물론 전 세계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는데 그 이후 마침내 소련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 교황님들의 모범에 따라 이 봉헌을 실천하는 이들은 이 길이 틀릴 수 없는 가장 완전한 길임을 체험하는 동시에 이 봉헌으로써 이루어지는 놀라운 결과 즉 “티없는 내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 (파티마 1917. 7.13)이라는 성모님의 약속의 실현을 자신들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봉헌은 하느님께 봉헌되기 위한 가장 완전한 방법인 동시에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대한 가장 완전한 신심행위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받으셔서 당신 아드님과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그러나 그분께 종속되어 “은총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의 자격으로” (교회헌장 61항)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생활에 모성적으로 관여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봉헌을 당신의 봉헌과 일치시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가능케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 것이며 성모님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이시다” 라고. 따라서 성모님을 통하여,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바치면 바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봉헌의 주된 목적이며 의의이다.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 중에서

 

  1. 매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2. Homosexuality, Same-sex ‘marriage’, transgender, rampant divorce etc etc

33일 봉헌 갱신 更新..

더위를 먹은 머리가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로 조금 식어간 후에 문득 7월 13일이 코 앞에 다가온 것을 느낀다. 레지오 주회합 때마다 회의록을 읽는 서기 書記(2012년부터)인 관계로 레지오의 공식활동의 목록을 앵무새처럼 읽는 것, 듣는 이에게는 크게 새로운 것이 없을지라도 나 자신은 은근히 세뇌 洗腦 가 되는 효과가 있다. 7월 13일.. 아하.. 올해 여름 중에 봉헌되는(정확히 8월 15일 Marian Assumption Day, 고국의 광복절)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간단한 말로 ’33일 봉헌’ 준비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 바로 7월 13일이었다.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몇 달 동안 이 공식예고를 듣고 보며 잠깐씩 생각하곤 했다. 내가 전에 이것을 언제 했지.. 근래에 체험한 행사와 경험들이 하도 많아서 ‘레지오 수첩’을 안 펴보고는 확실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기억이 조금 희미해진 것을 느끼고, 너무 오래 잊고 살았구나 하는 자괴감 自愧感 도 들었다. 우선 성모님께.. 다음은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 Saint Louis of Montfort 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분명히 나는 몇 년 전에 봉헌을 했지만, 그 다음에 다시 갱신 renew 을 한 것이 100%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실망이다.. 이런 것에 대한 기억력이 떨어지면 어찌할 것인가?

Personal blog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 stupid한 것도 많지만 나중에 유익한 개인역사를 남기는 것은 이럴 때 도움이 되고, 이곳을 찾아보니 역시 2012년 7월 11일 자 blog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2012년 8월 15일 즈음에 나는 ‘첫 33일 봉헌’을 한 것이다. 이 blog에 봉헌 준비 당시 나의 심정이 잘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33일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그것은 어디 있는 것일까? 그것도 찾았다. 나의 OneNote1 Journal에 33일의 일기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첫 번째 봉헌, 나는 그만큼 심각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력을 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그 후에 갱신 renew를 한 것일까? 머릿속의 잡티를 청소하고 기억을 해 보니 2013년 부활시기에 갱신 시도를 했지만 도중 하차..  다음 해 2014년 부활시기에 연숙과 같이 갱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정도로 갱신은 첫 봉헌과 비교해서 깊이나 느낌의 정도가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갱신할 당시 나의 33일 준비는 첫 번에 비해서 훨씬 허술했던 것은 아닐까? 그때의 묵상기록도 OneNote Journal에 남아있지만 첫 번에 비해서 그렇게 허술한 것은 아니었다. 갱신 때는 첫 봉헌에 비해서 오히려 하루도 빠짐없이 꼼꼼히 묵상기록을 남겨 놓았다.

2016년 연중시기 중의 제일 ‘한가한’ 시기인 8월 봉헌 시기가 다가오면서.. 이번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한마디로 나의 성모신심 Marian devotion 의 나사가 조금 씩 풀어지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일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행여라도 풀어지지 않기 위한 안간힘일지도 모른다. 지난 두 번의 봉헌에 빠졌거나 못했던 것을 이번에 더 노력을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번에 더 할 것이 있다면 성 루도비코 마리아와 그의 불후의 명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더 자세히 읽어 보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다. 8월 16일로 예정이 되어있는 봉헌, 갱신식에 과연 내가 서있을 것인가.. 아니면..

 

  1. Microsoft Office note app

The Catholic Thing, WHO IS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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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개월 동안 나의 e-mailbox에 아침마다 배달이 되는 newsletter 중에 The Catholic Thing 이란 것이 있다. 우연히 찾은 이곳 website는 시각적, 내용적 balance가  잘 맞아서 나의 favorite site 중에 하나가 되었고  곧 이어서 daily newsletter를 받아보기 시작하였다.  ‘지속적으로 매일 받아 읽는 글’의 영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것은 습관적으로 읽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날의 생각에 첫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008년 6월에 시작된 이 site는, 주로 대학 교수급, 지식층, 다양한 저자들이 교대로 글을 써서 ‘매일’ 이곳에 발표를 한다. 그러니까, 내용은 우선 pro 레벨, fresh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일반인에게 크게 무리 없이 읽힐 정도로 아주 자상하게, 조심스럽게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일반인’ 도 큰 무리 없이 읽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용들도 박사학위 논문 같은 것, 아주 현실과 동 떨어진 것, 자기자랑을 하려는 것 같은 것보다는  대중적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현재’에 필요한 ‘모든’ Issue를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것이란 예를 들면: “politics, economics, culture & warfare,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children and careers, and many other contemporary questions” 라고 처음에 밝히고 있다. 영어를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가톨릭 신앙인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대답을 줄 수 있는 곳이다.

 

WHO IS GOD? 오늘 아침에 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거창하게: WHO IS GOD? 평범한 질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것을 하루 동안 기억하며 살면 그래도 조금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지식적인 출발로 하느님은, 기하학의 공리 같은 출발로 정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핵심교리에 선언된 것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that there is one true and living God, creator and lord of heaven and earth, almighty, eternal, immeasurable, incomprehensible, infinite in will, understanding and every perfection.”

 

Self-Existence: 육감적으로 전혀 느낄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이 표현에 전부 들어가 있다. 아니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다.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한 ‘분’이 아니다. 모세에게 하느님은: “I am who I am” 이라고 선언을 하신 것이 그와 비슷한 뜻이 아닐까?

The First Cause: 시공간의 연속은 인과관계의 무한한 연속이다.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결과를 낳고.. 그 중에 바로 ‘the first cause, 첫 원인’이 바로 하느님이란 ‘분’이다. 모든 결과는 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접근으로, 모든 존재의 그 모든 것(생명체나 물체)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 이것을 조금 더 생각하면: 사람은 이 물체들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특별한 은총을 받은 존재인가, 아니면..물리적인 위치로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무한한 시공간 속,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 ‘지구’ 위에서 복닥거리는 인간의 존재는 성경의 표현대로 특별한 존재일 수가 있을까? 창조의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성경을 믿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도 믿는다면..하느님의 존재와 그가 ‘특별히’ 보내셨다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철학적인 접근으로는 보통 사람 특히 육감을 사랑하는 요새 세속적인 존재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으니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물리적’인 육감을 믿기에 물리적인 접근으로도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런 접근은 상상 이외로 빠르게 시도되고 현재도 시도되고 있다. 그런 설명은 나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이렇게 ‘물리적, 철학적’인 접근을 왔다 갔다 하면 확실히 무언가 보인다.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했던 것들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Made it! Atlanta EC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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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나를 따라오며 유혹하던 Screwtape1을 당당히 물리치고 ‘하루 종일’을 Atlant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보냈다. 그곳은, 이제는 완전히 classic이 된, 연례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EC) 가 열린 곳이다.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2011년부터 줄곧 ‘도장’을 찍었던 ‘초여름의 향연’, 아틀란타 성체대회, 작년에 나의 ‘게으름’으로 우리 둘 모두 참가를 못했었다. 못 갔던 이유는 있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것은 그럴듯한 유혹에 굴복 당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 나 자신은 속일 수가 없다. 그것이 화근인가. 올해에도 그런 ‘약점’을 이용한 각가지 유혹들.. 요란하고, 간교하고, 그럴 듯한 핑계거리가 줄줄이 나를 괴롭혔고, 거의 그것은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senior devil은 나의 어머니에게 굴복한 셈이 되었고, 그것이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뿌듯하게, 기쁘게 할 수가 없다.

작년에 나를 유혹했던 screwtape의 point는 “유명하고 멋지고, 잘나가는 speaker가 없는 것.. 무엇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하냐?” 정도가 될 듯하다. 너무나 나의 기대가 커서 생긴 유혹이었다. 그러니까 재탕을 방지하려면 그 expectation을 ‘하향 조정’하면 된다.  더 간단한 것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 무기로 올해의 유혹에 대비했지만, 역시 senior devil Screwtape은 경험이 많은 악마인가.. 다른 쪽을 공격을 한다. 성체대회가 열리는 날 이후에 나의 신경을 많이 쓰게 하는 schedule들이 몇 달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나를 괴롭힌 것이다. 한마디로 가벼운 마음으로 성체대회에 참가할 기분이 안 나는 것이다.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대회 전날 밤까지 나를 유혹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조금 ‘조직적’으로 대비를 했는지, 굳세게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고 하루 종일을 일 만 여명의 신앙 동료 catholic들과 보낼 수 있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올해는 이제까지 우리의 format을 조금 바꾸어서 순교자 성당bus를 안 타고 우리 차로, 대신 아침 더 일찍 출발을 해서 비교적 쉽게 parking도 할 수 있었다. 필요할 때 우리의 돌아오는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편하지만 bus를 타고 오고 가며 순교자 성당 교우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예상보다 적은 사람들이 bus를 탔다고 했고 김밥 점심을 같이 먹을 때 보니, 자기 차를 타고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비교적 일찍 도착했기에 우리는 ‘처음으로’ 대교구 소속 각 교회 공동체의 banner procession하는 것을 보았고 우리 순교자 성당 팀 banner group에는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과 같이 우리 부부도 낄 수도 있었다. 이것이 올해에 우리에게 신선한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Yakuza' Father Donald Calloway
‘Yakuza’ Father Donald Calloway

올해 성체대회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2016은 어떤 쪽으로 기억에 남을까.. 소위 말하는 superstar급 speaker는 없었지만 (2년 전처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신부님의 ‘인생역정’은 가히 올해 성체대회의 백미 白眉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 surfer, rockstar같은 인상을 주는 젊은 신부님, Father Donald Calloway, MIC 란 분이다. Donald란 말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하필이면 Donald일까..

알고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신부님의 ‘개인 신앙 여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 처음 알게 된 분이다. 아직도 신부가 되기 전의 ‘말 습관’들이 뚜렷이 남아있었기에 그의 ‘간증’은 더욱 더 믿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완전히 ‘패륜, 반항’ 적으로 자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근본적으로’ 아주 smart한 영혼이었음을 안다. 인상적인 것이.. 잠깐 일본에서 ‘전통적인 일본 조폭’ 야쿠자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 물론 ‘백인 야쿠자’이었지만.. 각종 비행으로 ‘시설을 들락날락’ 했던 그에게 큰 변화는 부모가 ‘갑자기’ (그의 말에 의하면 하루 아침에) ‘매일 미사 가톨릭 신자’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가 그런 사실을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 중에는 ‘성모님’의 역할이 중심적인 것인데 그에게는 거의 기적과 같은 ‘만남’이었다고.. 그는 그렇게 포근한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기적 같은 변화를 체험하게 되고 결국은 신학공부로 시작을 해서 사제로까지 변한다. 이것으로 그는 ‘머리가 좋은 불량소년’이었음을 알게 된다. 공부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끝에는 그 유명한 Mariology의 세계 권위인 University of Dayton에서 ‘성모신심학’ 학위까지 받고 그의 체험, 경험을 토대로 ‘묵주기도의 기적’에 관한 책을 간행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모신심의 대부 代父 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물론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과 힘이 뒤에서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역할은 역시 그의 어머니의 기도였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성 모니카 (St. Monica,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아오스딩의 어머니)에 비유를 한다. 뒤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하신 것이다. 한때 마약과 rock music에 심취, 찌들어 자살이 다음이라고 장담한 그가 어떻게  Marian Fathers of Immaculate Conception (MIC) 신부님이 되었을까.. 이런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닐까? 그는 과연 제 2의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를 꿈꾸고 있을까? 자신의 ‘기적 같은’ 개인 체험이 그런 꿈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speaker 들도 나름대로 독특한 style과 주제로 힘을 썼지만 Fr. Calloway의 ‘체험에 저린 웃음’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분의 차례를 제일 마지막에 넣었을까? 비교적 지루하고 졸린 오후 였으니까.. 그 분의 책과 성지순례 안내서는 날개 돋치듯 없어졌고 나는 집에 와서 그 신부님을 더 알아보려는 googling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도 인상에 남는 사람은 power country singer Collin Raye와 함께 출연한 Andrea Thomas라는 젊은 여성, 가창력이 정말로 뛰어났고, 흡사 오랜 전의 Celine Dion같은 느낌을 주었다. Collin Raye의 독특한 power country는 물론 좋긴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크게 호감은 안 간다. 그의 style은 country와 Italian Tenor를 합친 것 같은 그런 것인데, 성체대회의 분위기에는 어떨까?

우리는 ‘전통적’으로 closing ‘vigil’ mass를 하고 오기에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많은 UN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양각색의 교우들과 ‘장엄 미사’를 하는 것 독특한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집전 대주교님의 우렁찬 목소리도 좋고, 각종 언어로 행하는 ‘지향기도’도 색다르다. 하지만 몇 번이고 경험하는 것.. ‘한국어 기도’다. 기도하는 ‘자매님’들.. 기도 끝에 ‘we pray to the lord.’ 를 싹둑 빼버리고 하단을 하니.. 그 말이 나와야 끝난 줄 알고, ‘Lord, hear our prayer‘ 를 하려고 준비했던 모두들 그저 어리둥절.. 당황을 하니..  이것이 누구의 실수인가, 잘못인가.. 왜 꼭 한국 자매님들만 그런 것인가? 한 때는 어떤 수녀님까지 그런 실수를 해서.. 뒤에서 coach하는 staff들, 한국 자매님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Convention center의 엄청난 내부 시설과 크기에 버금가는 수많은 사람들, UN 총회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참 이곳에 각종 인종, 나라에서 온 사람들 많기도 하다. 하지만 뚜렷한 것은 역시 Hispanic의 막강한 power다. 물론 수 數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모두 family 단위로 참가를 해서 더욱 인상적이다. 그에 못지 않게 Vietnamese power는 더욱 놀랍기만 하다. 한국 community에 비해 이민역사가 그렇게 길지도 않건만 특히 가톨릭 power는 인상적으로 크게 성장을 해서 벌써 커다란 성당이 2개일 뿐 아니라 성소자들도 속출, 신부, 사제, 수도자, 수녀들이 거의 없는 우리들에 비해 그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많다. 대교구가 그것을 모를까.. 그들을 위한 따로 program을 마련하고 그들만이 옆에 있는 건물에서 따로 모인다. 물론 closing mass에는 함께 하지만. 왜 월남과 우리는 그렇게 차이가 난 것일까?

이 closing mass에서는 다음 해 성체대회의 주제가 발표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video를 통해서 보여졌는데, 내년 주제 성경구절은 조금은 생소한 것: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구약, 여호수아기 24장 15절에서 나온 것이다. 2005년 ‘가톨릭 공용 성경’ 에 의하면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인데 문맥을 보면: “전에 살던 이집트의 신을 버리고,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눈에 거슬리면 오늘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을 하라” 라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말이다. 한 분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뜻 같다. 이렇게 2016년 성체대회가 막을 내리고 우리는 traffic 이 비교적 한산한 I-285 North를 질주, ‘유혹을 물리친’ 멋진 결과를 만끽하며 긴 하루의 피로를 푼다.

 

  1. the senior devil in the Screwtape Letter by C. S. Lew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