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inus 48 hours..

7월 11일, 2016년 아침.. T-Minus 48 hours.. 이틀이 남았다 2016년 ‘성모승천 대축일’ ‘봉헌을 위한 33일 준비’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 7월 13일로 다가왔다.  2012년 8월 첫 봉헌, 2014년 3월 갱신 이라는 이력을 가진 내가 왜 다시 이 쉽지만은 않은 신심에 도전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2012, 2014, 다음은 수열 상으로 2016이라는 것은 조금 우습지만, 그런 것도 좋은 이유 중에 하나로 넣기로 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 깊고 심각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생활을 하는 덕에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가르침으로부터 크게 멀어진 적은 없는 듯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혹시 타성에 젖어가는 것은 아닐지, 항상 의식한다. 편한 기분이 들어가면 그것은 분명히 타성에 젖는 것이다.배우고 알고 경험이 쌓이면서 편해진 것이면 큰 문제가 없지만, 무디어지고 느낌이 없어지고, 짜증도 나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커다란 reboot, reset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2014년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7월에 나는 reset과 reboot을 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었다. 비록 비싼 vacation trip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인생 최고의 ‘free’ vacation으로 남았다. 하지만 2014년 여름의 big reboot은 spiritual, devotional한 것이 전혀 아니고, 완전히 나만의 mental exercise에 불과한 것이었다. 길고도 죽을 때까지 남는 그런 ‘비싼’ 경험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background를 가지고 나는 이번 여름 Marian Assumption Day1 에 맞춘 봉헌을 하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2013년에 시도했던 33일의 노력이 도중하차로 끝난 것을 명심하면서 이번에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 다음은 역시 ‘또 다른 경험’을 하는 것.. 어떤 것이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 상관이 없다. 다른 느낌과 체험, 경험.. 그것이면 족하다.

이 정도의 준비각오면 (이렇게 요란하게 글로 남기는 것도 포함)  아마도 아마도 이번에는 도중하차를 할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면 8월 15일 후에 내가 ‘얻는 것’은 어떤 것에 중점을 두면 좋을까? 분명히 더 낫고 더 올바른 성모마리아 신심(이것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첩경이다) 에 다가가는 것이다. ‘오해 받지 않는 철저하고 용감한’ 성모신심을 얻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과제다.

어제 Catholic News Agency website에 조금은 섬뜩한 기분의 기사가 실렸다. Fatima 의 visionary Lucia 루치아 수녀님의 예언이었다. 파티마 목격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수녀님 2005년 선종 전에 증언이 그것이다. 인류 최후의 심판, 결전은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결혼과 가정’2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 그것을 ‘예언’하시고 선종하셨다고 보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수녀님의 예언인지 혹시 성모님의 예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떨까.. 나도 비슷한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기에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Humanity의 근간 중의 근간인 ‘정상적인 가정’의 파괴와 붕괴는 사실 핵전쟁이나 다름없는 인류파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매한 지식인‘들은 그렇게 stupid한 것일까? 10은 알고 11는 모르는 것.. 이런 뉴스에 접하며 나는 이번 33일에 이런 Current social problem을 같이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뉴스와 일맥상통하는 글이 바로 33일 봉헌 Guide에 잘 나와있다. 아래 그것을 전문 발췌를 했는데, 원제는 20세기에 관한 것이지만 21세기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다.

 

20세기에 들어 성모님은 파티마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발현하셔서 당신의 티없는 성심께 대한 봉헌을 간곡히 호소하고 계신다. 20세기의 초엽인 1917년 파티마에 발현하셨을 때에는 원죄에 물들지 않은 당신의 티없는 성심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티없는 성심께 대한 신심과 봉헌을 호소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나의 티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기를 원하신다” (파티마, 19717. 6. 13).

“내 티없는 성심은 너의 피시처가 될 것이며, 너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파티마, 19717. 6.13).

이에 따라 1942년 10월 31일 비오 12세 교황은 전 세계를 마리아의 티없는 성심께 봉헌하고, 1946년에는 파티마의 성모님을 세계의 여왕으로 대관하고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 축일’을 제정하였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청년시절에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서 큰 감화를 받고 자신을 온전히 성모님께 봉헌하였으며 이 책에서 ‘온전히 당신의 것 (Totus Tuus)‘라는 문장을 뽑아 교황 즉위 시에 모토로 삼기까지 했다. 1984년 3월 25일에는, 1917년 파티마에서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전 세계의 주교들과 뜻을 합하여 소련은 물론 전 세계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는데 그 이후 마침내 소련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 교황님들의 모범에 따라 이 봉헌을 실천하는 이들은 이 길이 틀릴 수 없는 가장 완전한 길임을 체험하는 동시에 이 봉헌으로써 이루어지는 놀라운 결과 즉 “티없는 내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 (파티마 1917. 7.13)이라는 성모님의 약속의 실현을 자신들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봉헌은 하느님께 봉헌되기 위한 가장 완전한 방법인 동시에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대한 가장 완전한 신심행위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받으셔서 당신 아드님과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그러나 그분께 종속되어 “은총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의 자격으로” (교회헌장 61항)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생활에 모성적으로 관여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봉헌을 당신의 봉헌과 일치시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가능케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 것이며 성모님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이시다” 라고. 따라서 성모님을 통하여,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바치면 바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봉헌의 주된 목적이며 의의이다.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 중에서

 

  1. 매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2. Homosexuality, Same-sex ‘marriage’, transgender, rampant divorce etc etc

33일 봉헌 갱신 更新..

더위를 먹은 머리가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로 조금 식어간 후에 문득 7월 13일이 코 앞에 다가온 것을 느낀다. 레지오 주회합 때마다 회의록을 읽는 서기 書記(2012년부터)인 관계로 레지오의 공식활동의 목록을 앵무새처럼 읽는 것, 듣는 이에게는 크게 새로운 것이 없을지라도 나 자신은 은근히 세뇌 洗腦 가 되는 효과가 있다. 7월 13일.. 아하.. 올해 여름 중에 봉헌되는(정확히 8월 15일 Marian Assumption Day, 고국의 광복절)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간단한 말로 ’33일 봉헌’ 준비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 바로 7월 13일이었다.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몇 달 동안 이 공식예고를 듣고 보며 잠깐씩 생각하곤 했다. 내가 전에 이것을 언제 했지.. 근래에 체험한 행사와 경험들이 하도 많아서 ‘레지오 수첩’을 안 펴보고는 확실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기억이 조금 희미해진 것을 느끼고, 너무 오래 잊고 살았구나 하는 자괴감 自愧感 도 들었다. 우선 성모님께.. 다음은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 Saint Louis of Montfort 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분명히 나는 몇 년 전에 봉헌을 했지만, 그 다음에 다시 갱신 renew 을 한 것이 100%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실망이다.. 이런 것에 대한 기억력이 떨어지면 어찌할 것인가?

Personal blog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 stupid한 것도 많지만 나중에 유익한 개인역사를 남기는 것은 이럴 때 도움이 되고, 이곳을 찾아보니 역시 2012년 7월 11일 자 blog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2012년 8월 15일 즈음에 나는 ‘첫 33일 봉헌’을 한 것이다. 이 blog에 봉헌 준비 당시 나의 심정이 잘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33일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그것은 어디 있는 것일까? 그것도 찾았다. 나의 OneNote1 Journal에 33일의 일기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첫 번째 봉헌, 나는 그만큼 심각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력을 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그 후에 갱신 renew를 한 것일까? 머릿속의 잡티를 청소하고 기억을 해 보니 2013년 부활시기에 갱신 시도를 했지만 도중 하차..  다음 해 2014년 부활시기에 연숙과 같이 갱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정도로 갱신은 첫 봉헌과 비교해서 깊이나 느낌의 정도가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갱신할 당시 나의 33일 준비는 첫 번에 비해서 훨씬 허술했던 것은 아닐까? 그때의 묵상기록도 OneNote Journal에 남아있지만 첫 번에 비해서 그렇게 허술한 것은 아니었다. 갱신 때는 첫 봉헌에 비해서 오히려 하루도 빠짐없이 꼼꼼히 묵상기록을 남겨 놓았다.

2016년 연중시기 중의 제일 ‘한가한’ 시기인 8월 봉헌 시기가 다가오면서.. 이번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한마디로 나의 성모신심 Marian devotion 의 나사가 조금 씩 풀어지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일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행여라도 풀어지지 않기 위한 안간힘일지도 모른다. 지난 두 번의 봉헌에 빠졌거나 못했던 것을 이번에 더 노력을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번에 더 할 것이 있다면 성 루도비코 마리아와 그의 불후의 명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더 자세히 읽어 보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다. 8월 16일로 예정이 되어있는 봉헌, 갱신식에 과연 내가 서있을 것인가.. 아니면..

 

  1. Microsoft Office note app

The Catholic Thing, WHO IS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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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개월 동안 나의 e-mailbox에 아침마다 배달이 되는 newsletter 중에 The Catholic Thing 이란 것이 있다. 우연히 찾은 이곳 website는 시각적, 내용적 balance가  잘 맞아서 나의 favorite site 중에 하나가 되었고  곧 이어서 daily newsletter를 받아보기 시작하였다.  ‘지속적으로 매일 받아 읽는 글’의 영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것은 습관적으로 읽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날의 생각에 첫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008년 6월에 시작된 이 site는, 주로 대학 교수급, 지식층, 다양한 저자들이 교대로 글을 써서 ‘매일’ 이곳에 발표를 한다. 그러니까, 내용은 우선 pro 레벨, fresh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일반인에게 크게 무리 없이 읽힐 정도로 아주 자상하게, 조심스럽게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일반인’ 도 큰 무리 없이 읽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용들도 박사학위 논문 같은 것, 아주 현실과 동 떨어진 것, 자기자랑을 하려는 것 같은 것보다는  대중적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현재’에 필요한 ‘모든’ Issue를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것이란 예를 들면: “politics, economics, culture & warfare,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children and careers, and many other contemporary questions” 라고 처음에 밝히고 있다. 영어를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가톨릭 신앙인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대답을 줄 수 있는 곳이다.

 

WHO IS GOD? 오늘 아침에 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거창하게: WHO IS GOD? 평범한 질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것을 하루 동안 기억하며 살면 그래도 조금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지식적인 출발로 하느님은, 기하학의 공리 같은 출발로 정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핵심교리에 선언된 것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that there is one true and living God, creator and lord of heaven and earth, almighty, eternal, immeasurable, incomprehensible, infinite in will, understanding and every perfection.”

 

Self-Existence: 육감적으로 전혀 느낄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이 표현에 전부 들어가 있다. 아니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다.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한 ‘분’이 아니다. 모세에게 하느님은: “I am who I am” 이라고 선언을 하신 것이 그와 비슷한 뜻이 아닐까?

The First Cause: 시공간의 연속은 인과관계의 무한한 연속이다.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결과를 낳고.. 그 중에 바로 ‘the first cause, 첫 원인’이 바로 하느님이란 ‘분’이다. 모든 결과는 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접근으로, 모든 존재의 그 모든 것(생명체나 물체)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 이것을 조금 더 생각하면: 사람은 이 물체들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특별한 은총을 받은 존재인가, 아니면..물리적인 위치로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무한한 시공간 속,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 ‘지구’ 위에서 복닥거리는 인간의 존재는 성경의 표현대로 특별한 존재일 수가 있을까? 창조의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성경을 믿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도 믿는다면..하느님의 존재와 그가 ‘특별히’ 보내셨다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철학적인 접근으로는 보통 사람 특히 육감을 사랑하는 요새 세속적인 존재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으니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물리적’인 육감을 믿기에 물리적인 접근으로도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런 접근은 상상 이외로 빠르게 시도되고 현재도 시도되고 있다. 그런 설명은 나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이렇게 ‘물리적, 철학적’인 접근을 왔다 갔다 하면 확실히 무언가 보인다.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했던 것들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Made it! Atlanta EC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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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나를 따라오며 유혹하던 Screwtape1을 당당히 물리치고 ‘하루 종일’을 Atlant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보냈다. 그곳은, 이제는 완전히 classic이 된, 연례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EC) 가 열린 곳이다.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2011년부터 줄곧 ‘도장’을 찍었던 ‘초여름의 향연’, 아틀란타 성체대회, 작년에 나의 ‘게으름’으로 우리 둘 모두 참가를 못했었다. 못 갔던 이유는 있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것은 그럴듯한 유혹에 굴복 당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 나 자신은 속일 수가 없다. 그것이 화근인가. 올해에도 그런 ‘약점’을 이용한 각가지 유혹들.. 요란하고, 간교하고, 그럴 듯한 핑계거리가 줄줄이 나를 괴롭혔고, 거의 그것은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senior devil은 나의 어머니에게 굴복한 셈이 되었고, 그것이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뿌듯하게, 기쁘게 할 수가 없다.

작년에 나를 유혹했던 screwtape의 point는 “유명하고 멋지고, 잘나가는 speaker가 없는 것.. 무엇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하냐?” 정도가 될 듯하다. 너무나 나의 기대가 커서 생긴 유혹이었다. 그러니까 재탕을 방지하려면 그 expectation을 ‘하향 조정’하면 된다.  더 간단한 것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 무기로 올해의 유혹에 대비했지만, 역시 senior devil Screwtape은 경험이 많은 악마인가.. 다른 쪽을 공격을 한다. 성체대회가 열리는 날 이후에 나의 신경을 많이 쓰게 하는 schedule들이 몇 달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나를 괴롭힌 것이다. 한마디로 가벼운 마음으로 성체대회에 참가할 기분이 안 나는 것이다.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대회 전날 밤까지 나를 유혹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조금 ‘조직적’으로 대비를 했는지, 굳세게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고 하루 종일을 일 만 여명의 신앙 동료 catholic들과 보낼 수 있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올해는 이제까지 우리의 format을 조금 바꾸어서 순교자 성당bus를 안 타고 우리 차로, 대신 아침 더 일찍 출발을 해서 비교적 쉽게 parking도 할 수 있었다. 필요할 때 우리의 돌아오는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편하지만 bus를 타고 오고 가며 순교자 성당 교우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예상보다 적은 사람들이 bus를 탔다고 했고 김밥 점심을 같이 먹을 때 보니, 자기 차를 타고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비교적 일찍 도착했기에 우리는 ‘처음으로’ 대교구 소속 각 교회 공동체의 banner procession하는 것을 보았고 우리 순교자 성당 팀 banner group에는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과 같이 우리 부부도 낄 수도 있었다. 이것이 올해에 우리에게 신선한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Yakuza' Father Donald Calloway
‘Yakuza’ Father Donald Calloway

올해 성체대회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2016은 어떤 쪽으로 기억에 남을까.. 소위 말하는 superstar급 speaker는 없었지만 (2년 전처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신부님의 ‘인생역정’은 가히 올해 성체대회의 백미 白眉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 surfer, rockstar같은 인상을 주는 젊은 신부님, Father Donald Calloway, MIC 란 분이다. Donald란 말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하필이면 Donald일까..

알고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신부님의 ‘개인 신앙 여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 처음 알게 된 분이다. 아직도 신부가 되기 전의 ‘말 습관’들이 뚜렷이 남아있었기에 그의 ‘간증’은 더욱 더 믿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완전히 ‘패륜, 반항’ 적으로 자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근본적으로’ 아주 smart한 영혼이었음을 안다. 인상적인 것이.. 잠깐 일본에서 ‘전통적인 일본 조폭’ 야쿠자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 물론 ‘백인 야쿠자’이었지만.. 각종 비행으로 ‘시설을 들락날락’ 했던 그에게 큰 변화는 부모가 ‘갑자기’ (그의 말에 의하면 하루 아침에) ‘매일 미사 가톨릭 신자’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가 그런 사실을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 중에는 ‘성모님’의 역할이 중심적인 것인데 그에게는 거의 기적과 같은 ‘만남’이었다고.. 그는 그렇게 포근한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기적 같은 변화를 체험하게 되고 결국은 신학공부로 시작을 해서 사제로까지 변한다. 이것으로 그는 ‘머리가 좋은 불량소년’이었음을 알게 된다. 공부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끝에는 그 유명한 Mariology의 세계 권위인 University of Dayton에서 ‘성모신심학’ 학위까지 받고 그의 체험, 경험을 토대로 ‘묵주기도의 기적’에 관한 책을 간행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모신심의 대부 代父 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물론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과 힘이 뒤에서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역할은 역시 그의 어머니의 기도였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성 모니카 (St. Monica,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아오스딩의 어머니)에 비유를 한다. 뒤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하신 것이다. 한때 마약과 rock music에 심취, 찌들어 자살이 다음이라고 장담한 그가 어떻게  Marian Fathers of Immaculate Conception (MIC) 신부님이 되었을까.. 이런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닐까? 그는 과연 제 2의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를 꿈꾸고 있을까? 자신의 ‘기적 같은’ 개인 체험이 그런 꿈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speaker 들도 나름대로 독특한 style과 주제로 힘을 썼지만 Fr. Calloway의 ‘체험에 저린 웃음’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분의 차례를 제일 마지막에 넣었을까? 비교적 지루하고 졸린 오후 였으니까.. 그 분의 책과 성지순례 안내서는 날개 돋치듯 없어졌고 나는 집에 와서 그 신부님을 더 알아보려는 googling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도 인상에 남는 사람은 power country singer Collin Raye와 함께 출연한 Andrea Thomas라는 젊은 여성, 가창력이 정말로 뛰어났고, 흡사 오랜 전의 Celine Dion같은 느낌을 주었다. Collin Raye의 독특한 power country는 물론 좋긴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크게 호감은 안 간다. 그의 style은 country와 Italian Tenor를 합친 것 같은 그런 것인데, 성체대회의 분위기에는 어떨까?

우리는 ‘전통적’으로 closing ‘vigil’ mass를 하고 오기에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많은 UN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양각색의 교우들과 ‘장엄 미사’를 하는 것 독특한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집전 대주교님의 우렁찬 목소리도 좋고, 각종 언어로 행하는 ‘지향기도’도 색다르다. 하지만 몇 번이고 경험하는 것.. ‘한국어 기도’다. 기도하는 ‘자매님’들.. 기도 끝에 ‘we pray to the lord.’ 를 싹둑 빼버리고 하단을 하니.. 그 말이 나와야 끝난 줄 알고, ‘Lord, hear our prayer‘ 를 하려고 준비했던 모두들 그저 어리둥절.. 당황을 하니..  이것이 누구의 실수인가, 잘못인가.. 왜 꼭 한국 자매님들만 그런 것인가? 한 때는 어떤 수녀님까지 그런 실수를 해서.. 뒤에서 coach하는 staff들, 한국 자매님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Convention center의 엄청난 내부 시설과 크기에 버금가는 수많은 사람들, UN 총회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참 이곳에 각종 인종, 나라에서 온 사람들 많기도 하다. 하지만 뚜렷한 것은 역시 Hispanic의 막강한 power다. 물론 수 數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모두 family 단위로 참가를 해서 더욱 인상적이다. 그에 못지 않게 Vietnamese power는 더욱 놀랍기만 하다. 한국 community에 비해 이민역사가 그렇게 길지도 않건만 특히 가톨릭 power는 인상적으로 크게 성장을 해서 벌써 커다란 성당이 2개일 뿐 아니라 성소자들도 속출, 신부, 사제, 수도자, 수녀들이 거의 없는 우리들에 비해 그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많다. 대교구가 그것을 모를까.. 그들을 위한 따로 program을 마련하고 그들만이 옆에 있는 건물에서 따로 모인다. 물론 closing mass에는 함께 하지만. 왜 월남과 우리는 그렇게 차이가 난 것일까?

이 closing mass에서는 다음 해 성체대회의 주제가 발표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video를 통해서 보여졌는데, 내년 주제 성경구절은 조금은 생소한 것: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구약, 여호수아기 24장 15절에서 나온 것이다. 2005년 ‘가톨릭 공용 성경’ 에 의하면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인데 문맥을 보면: “전에 살던 이집트의 신을 버리고,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눈에 거슬리면 오늘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을 하라” 라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말이다. 한 분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뜻 같다. 이렇게 2016년 성체대회가 막을 내리고 우리는 traffic 이 비교적 한산한 I-285 North를 질주, ‘유혹을 물리친’ 멋진 결과를 만끽하며 긴 하루의 피로를 푼다.

 

  1. the senior devil in the Screwtape Letter by C. S. Lewis

Kittens gone, Pastor shock

¶  Kitten family gone: Backyard shed에서 태어난 4마리 kitten과 엄마 가 갑자기 오늘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고, 하루 종일 밥과 물을 살펴보아도 없어지질 않고.. 나의 느낌이 이 5가족이 사라진 듯 하다. 우리 집에서 낳은 4마리 아기 고양이들과 엄마가 모두 귀신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 동안 밥을 엄청 먹기에 거의 바닥이 난 고양이 밥을 사러 내일 Costco에 가기로 계획까지 세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우리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갔단 말인가?

너무나 화창하고 가을같이 서늘한 일요일, 비가 그친 후 다시 backyard에 나가서 deck, grape trellis 등 일을 하였지만 계속 이 5 고양이 가족이 돌아오나 shed쪽에 신경을 썼지만.. 그렇게 뒹굴며 놀았던 shed 옆 마당은 고요하기만 하다. 너무나 기분이 이상한 나 자신에 내가 놀란다. 몇 주 동안 그 애들 밥을 부지런히 주며 보살폈던 하루하루가 선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왜 갔을까? 왜? 이것이 출산 후의 고양이 일가의 습성일까? 일단 kitten들이 건강하게 크면 이렇게 낳은 곳을 떠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추측에는 어제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들려서 backyard에서 짖어대며 떠들어 댄 것이 화근이었을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mom이 용단을 내려서 떠난 것일까? 너무나 서운한 마음, 괴롭기까지 하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그래도 정성스레 먹이와 shelter를 제공한 우리에게 ‘감사’하며 떠났을 것이라는 ‘억지 희망’을 갖는다. 언제라도, 먹이가 떨어지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  New pastor shock: 오늘 모처럼 동네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주일 미사를 보러 갔다. 우리의 지정석이 있고 그 주위의 교우들 이제는 거의 고정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아는 얼굴이 안 보이면 그래도 관심을 가져줄 정도가 되어, 그야말로 정든 ‘미국 본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하는 곳이다. 3주 전에 Irish pastor Father Darragh Griffith 가 본당을 떠난다고 발표를 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하지만 10년이 넘게 주임신부로 계셨으니 (50세가 넘은 젊은 신부) 사실 크게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10년 이상 있었으니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것이 문제다. 6월 초에 떠나게 되고 Norcross (Peachtree Corners) 에 있는 본당으로 가신다고 했다.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서 사실 조금은 덜 섭섭하기도 했고, 새로 오시는 주임신부는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늘 주보를 보니 드디어 새로 오는 주임신부가 소개되어 있었다. 사진과 간단한 약력을 암만 보고 읽어도 시원스럽지 않은 점들이 있었다. ‘전통적인 신부님의 약력’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Atlanta Metro에서 가장 conservative한 ‘동네’인 이곳 East Cobb에 Cuba 출신인 Father Miguel.. 정말 이제 Irish power는 사라지고 있는가? 가장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얼굴이나 Hispanic 등이 아니고 Greek Orthodox Melkite background란 것이다. 기억에 Melkite 쪽은 celibacy (독신) 제도가 없는.. 그러니까 성공회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이 있는 신부라고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집에 와서 부리나케 googling을 해 보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 새 주임신부님.. 정말 colorful한 인생, 신앙 여정의 소유자였다. Cuba 에서 온 망명인사의 가정에서 자라고, 개신교 (침례교) 출신에다가, 다음에는 Episcopal Church (성공회)의 신부가 되더니, 이제는 Melkite로 변신, 결국은 Roman Catholic으로 오긴 했지만 Melkite의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 둘은 이 ‘난감한 소식’에 아연실색.. 어쩔 것인가? Wife가 있고 가정이 있는 천주교신부.. 라니.. 암만 생각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신부님이 아닌 것이다. 대주교가 미쳤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우려하는 것들이 다 이유 있게 설명이 될 것이라는 희망은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성체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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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7일, 폴란드 Poland 에서 2년 전에 발생한 성체기적 Eucharistic Miracle 이 공식적인 교회(현지 교구, bishop Zbigniew Kiernikowski 주교) 의 승인을 받았다는 뉴스가 catholic blogger, Philip Koloski 의 보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이 소식을 접한 것은 National Catholic Register newsletter 를 통해서였고, 따라서 그것의 source인 website를 통해서 뉴스의 전부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성체기적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이 비교적 간단히 보도되었다.

2년 전, Poland의 Legnica 교구 본당에서의 일이다. 성체 분배과정에서 축성된 성체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졌고, 곧바로 다시 집어 올려서 물이 들어있는 그릇에 다시 담겨졌다. 곧바로 성체에서 빨간 흔적들이 나타났다. 법의학 전문가들이 이 성체를 과학적으로 분석을 하니: 그 성체 부스러기 fragments 들은 사람 심장 근육의 조직과 비슷한 것 cross striated muscle로 판명이 되었다. 이 분석은 또한 이 조직, 조각은 사람, 인간의 것이고, 아주 고통을 느낀 그런 것이었다.

 Philip Koloski의 성체기적에 대한 논평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의 ‘기적’이 예전의 것과 다른 것은 예전 것들 (예를 들면 Miracle of Lanciano)은 성체가 축성이 되는 과정에서 피로 변하거나, 축성을 하는 신부사제의 믿음이 부족할 때 변하는 것 들이었다. 이번의 case는 성체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생긴 것이니.. 이것은 ‘취급 부주의’에 의한 것이다. 이번의 기적은 우리가 성체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말로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그에 맞게 조심해서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교훈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성체가 예수님의 ‘고통 받았던 몸’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에 의한 예수님의 message는 아니었을까?

나는 이 news를 접하며 또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교리적’으로 분명히 성체는 성체,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안다. 최소한 머리로는 배웠고 인정하고 믿고 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고해성사와 더불어 이 가톨릭 전통 교리는 나를 항상 더 고민하게 하고 더 생각하게 한다. 영성체를 할 때마다 겪는 고민과 갈등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집중적인 묵상을 하며 준비한 영성체에는 어렴풋이 강한 느낌이 온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은총인가? 일단 믿는다고 ‘선택’을 한 이상 믿고 싶고, 일단 믿음의 문지방을 넘으니 이런 ‘성체기적’을 믿고 싶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근래에 나에게는 작은 기적이다.

장례식과 선발식

¶ 장례미사 2월 12일, 금요일에 정말 난데없는 날 벼락 같은 장례미사를 참례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날 벼락일 듯 하다. 레지오에서 낯 익은 얼굴, A 자매님의 조카,  40세가 갓 넘은 ‘건강하게 보이는’ 젊은 형제가 급사를 한 것이다. 밤에 자다가 심장마비.. 와.. 이것이 날벼락이 아닌가? 놀란 것은 그 나이에.. 어떻게.. 알고 보니 평소에 심장에 지병이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나이에 유언도 없이 간다는 사실은.. 무섭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청년이 혼자 객지에 사는 것, 멋지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류의 dark side도 있을 것이다.

자랑스럽던 아들을 그렇게 보낸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이 부모님은 2년 전에 우리가 교리반 교사로 있을 때, 통신반 교리로 세례를 받은 분들이었다. 그의 아드님, LA 지역에 있는 큰 은행 지점의 부사장, 40세에.. 그러면 크게 성공한 아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텐데.. 얼마나 자랑스러웠을 텐데.. 모든 조문객들 그런 생각 속에 잠겨있었을 것이고 우리도 마찬가지.. 만약 우리 두 딸이 ‘잘 나가는 직위, 직업’으로 $$을 억수로 벌면서 객지에서 ‘건강을 챙기지 못하고’ 살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에 느껴지는 것이다. 무엇이 과연 잘 사는 인생일까? 40세면 별로 인생의 의미를 느낄 나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먼저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것을 일깨워 주어야 할 것인데.. 그러니까, true-north principle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라가는, 그것이 쉽지 않구나.

 

¶ 선발식 Cobb Galleria Centre, 2016년 아틀란타 대교구 주관 예비자 선발식이란 것이 열렸다. 2년 전에는 다른 곳에서 한 이 행사에 나는 ‘교리반 교사 도우미‘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작년부터 집에서 훨씬 가까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의 예비자 수가 너무나 단출해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꾸준히 신앙을 지킨다면 크게 상관이 없을 듯하다. 미사 중에 파견식을 하고 연숙은 그들과 먼저 성당을 떠나고 나는 꾸리아 월례회의에 단장 없이 참석을 하고 집에 먼저 왔다. 그리고 예비자 선발식이 끝날 무렵에 Cobb Galleria Centre로 가서 연숙을 데리고 왔다. 웃기는 것은.. 그곳을 찾느라 촌놈 행세를 했다는 사실.. 미리 지도를 공부한 것이 우습게 되었다. 한 번도 그곳엘 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나의 실수.. 또 잊었다.. GPS가 있건 없건 이놈의 동네는 절대로 처음 찾아가는 곳은 장담하지 말라는.. 경험에 의한 교훈을..

 

Sacred Heart 聖心

Sacred Heart of Jesus by Pompeo Batoni, 1767
Sacred Heart of Jesus by Pompeo Batoni, 1767

The Most Sacred Heart of Jesus.. 예수(의) 성심. 오늘은 The Pentecost (성령강림 대축일)로부터 19일째인 예수성심 대축일이었다. 미국 우리지역 province 은 의무 축일이 아니기에 아주 특별한 미사는 아니었고 평소 ‘매일 미사’보다 ‘조금’ 격상된 정도라고 할까.. 

요새 부활시기를 완전히 뒤로한 한가한 느낌의 6월 초여름의 ‘연중’ 시기에는 부활절을 치르느라 피곤하다는’ 본당 주임, 사제들은 꼭 자리를 비워야 ‘멋이 있는지’ 대부분 방문신부님들이 자주 찾아 오신다. 속으로 나는 ‘꼭 그렇게들 쉬어야 하나..’ 하는 짜증이 난다. 무엇을 그렇게 바쁘고 피곤하다는 것인지 나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가 안 간다. 근래에는 땀을 흘리며 뛰는 신부들을 별로 본 기억이 나질 않아서.. 요새 신부들은 어떤 생각으로 사목을 하시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우리 Holy Family 성당의 경우, 보좌신부님, 박사학위를 받고 완전히 떠나신 Africa출신 상당히 지적인 신부님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영어 발음에 짜증이 조금은 났지만 주임신부의 ‘애 같은’ 강론수준과 하늘과 땅의 차이라 은근히 좋아하기 시작했더니만.. 그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런 판국에 Irish 출신 주임신부라는 목자는 어떻게 편히 쉬실 수 있는가? 드디어 며칠 전부터는 본당의 브라질 공동체 신부님이 임시로 매일 미사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건 완전히 disaster에 가깝다. 그의 영어 발음은 99.9% 알아 먹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찌 Portuguese와 English가 그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완전히 ‘꼬이는’ 발음은 Jesus란 말 정도나 들릴 정도다. 하지만 공평한 것은.. 이 신부님 너무나 ‘진솔하고 착한 미소 띤 얼굴’ .. 이것으로 완전히 balanced-out이 되고 있다. Universal한 미사 자체야 Latin말로 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못 알아 먹어도 90% 이상은 다 추측이 가능하니까..

 성심.. 예수성심.. 성모성심.. 참 오래 전부터 들었던 단어였다. 성심 聖心 .. 하지만 확실한 뜻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성스러운 마음’ 정도는 한자로 짐작이 가능할 정도였다. 어렸을 때, ‘성심’이 붙은 학교들이 있었고, 대부분 ‘멋지고 부자’들이 가는 학교라는 인상도 남았다. 서울의 성심여학교가 그랬다. 교복도 그렇게 멋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큰 딸 박근혜 (현 대한민국 대통령.. 허.. 세월의 장난이..) ‘양’ 이 아마도 그 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그것 뿐인가.. 성심병원, 성심 여대까지 있으니까.. 이것은 이곳 미국도 예외는 아닐 듯 싶다. 문제는 이 ‘성심’이란 말이 보통명사인가 고유명사인가 하는 것이다.

조금만 research하면 ‘정답’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예수성심은 글자 그대로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심장’ (마음이라기 보다는), 그 육신적인 심장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불이 타는 듯이 타오르는 모습이 바로 예수성심인 것이다. ‘성스러운 마음’ 아닌 예수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 오랜 세월, 나의 ‘무지’가 부끄럽다. 그러니까 예수성심은 이 ‘심장’에 대한 인간들의 신심 devotion 인 셈이다. 이것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것은 역시 ‘인간’ 역사 중의 하나다.

1673년부터 1675년까지 프랑스 수녀 St. Margaret Mary Alacoque (성녀 알라콕)에게 나타나신 일련의 예수발현으로 비롯되었다. 이 발현 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신심이었다. 계시 revelation 중의 계시가 이런 것이 아닐까? 역사적인 배경과 근대에 들어와서 성심의 발전 양상을 예수회의 ‘예수성심의 역사’ 라는 DVD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레지오 단원 자매에게서 빌린 DVD를 감히 ripping해서 이곳에 올려 놓았다. copyright는 분명히 문제가 되겠지만.. please.

 

예수성심의 역사

Francis on Medjugorje

Pope Francis, 사라예보 방문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자회견
Pope Francis, 사라예보 방문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자회견

요새 ‘우리’ 교황님, 참 뉴스에서 많이 뵙는다. 99.9% 거의 모두 positive한 것이라 안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런 기사들을 대한다. ‘어쩌다가’ 이런 멋진 교황님이 탄생을 하셨는가.. 그러니까 ‘전’ 명예 교황님 Benedict XVI 이 깊은 생각과 교회의 당면한 숙제들을 생각하고 ‘조기 퇴진’을 하신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현 시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목자를 탄생시키셨다. 모든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다행스러운 교회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교황님 사라예보 Sarajevo, Bosnia & Herzegovina 를 방문하시고 바티칸 로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의 사라예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공식’ 성모 발현지 메주고리예 Medjugorje 에 대한 짧은 언급이 나의 (아마도 많은 사람들) 눈길을 끌었다. 그 ‘짧은 언급’은 다음과 같이 보도 되었다.

It’s almost decision time…  6/6/2015  on PAPAL FLIGHT

사라예보의 짧은 방문을 끝내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보즈니아 (사라예보와 메주고리예가 위치한 나라) 출신 기자의 메주고리예 성모발현에 대한 바티칸의 공식적인 입장 해명의 질문에 대해서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셨다.

“메주고리예에 대한 결정의 시기가 거의 다가왔습니다. 결정이 되면 발표가 될 것입니다.”

교황은 이에 관련되어서 전임 교황 베네틱트 16세가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 ‘설’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위한 위원회를 발족 시켰음을 상기시켰다. 이 위원회는 메주고리예 ‘현상’을 교리적, 교회법등에 비추어 연구, 조사를 끝내고 교황님께 보고를 드렸다고 덧붙였다.

 이 결정은 곧 이루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모든 일선의 주교들에게 guideline이 시달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모든 교회는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발현의 진실성을 당연시 하는 모임, 회의, 집회 등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기사가 나오고 나서 3일 후에 이에 관련된 기사가 다시 보도 되었다. 이것은 그러니까.. ‘damage control’ 정도가 될는지…

 

Day after Medjugorje comment, Pope downplays predictable visions:

 아마도.. 교황님의 6월 6일 기자회견에서 메주고리예의 공식입장 결정이 다가왔다는 말이 주는 뉴앙스가 너무나 positive했던 것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6월 9일 바티칸의 성 마르타 guesthouse에서의 매일미사에서 교황님은 ‘조금 초현실적인 믿음’에 의존하려는 신자는 현대판 gnostics(무관심론자)라며 결국 믿음의 종착역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고 조심을 시켰다. 성모님께서 ‘이런 것, 저런 것’을 하라고 말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의 본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 뉴스에 접하며 생각을 해본다. 우선 이런 교황님의 스타일은 이제 익숙한 편이다. 우선 issue를 거론하고, 반응에 의해서 필요하면 곧 수정하는 style..  이런 방식은 분명히 issue를 forward시킨다. 무언가 결과가 제 시간에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일을 처리해 나가는 교황님의 agenda는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메주고리예의 성모님 발현은 교회사, 세계역사를 통 털어서 전무후무 前無後無 한 것이다. 30년 이상 거의 매일 같은 지역에서 발현한다는 것.. 이것에 대한 과학적, 이성적인 반론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30년 이상의 사기극’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사기극’을 벌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쉽다. 메주고리예가 나에게 준 자극과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높고, 심각한 것이라 나는 여기에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30년 이상 인간에게 거의 매일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어머니,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의미는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짜 인류의 어머니라는 것, 너무나 자상하고 사랑하시는 어머니가 ‘나쁜 길’로 가려는 자식들을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 조금만 생각해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30 seconds with Pope Francis

Pope Francis coming to America?

Pope Francis coming to America?

우연히 미국 예수회 America magazine website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를 30초간 볼 기회가 있다면..’ 이라는 주제의 Youtube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이런 street interview를 한 것인가 의아 했지만 곧 의문이 풀렸다. 올해 9월 미국을 방문하는 교황에 대한 것이었다.

 

America Media asks:
“If you had 30 seconds with Pope Francis, what would you say?”

May 13 2015 – 10:19am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의 위치와 의미는 잘 알려진 것이지만, 교황도 ‘겸손한’ 인간이기에 각 재위 교황마다 한결같이 다른 굴곡1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교황들은 주로 John Paul II (요한 바오로 2세) 로 부터 시작이 되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오랜 냉담 시절에는 교황의 위치를 하찮게 보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 이후 그런 나의 ‘바보 같은’ 경솔함을 정말 후회하고 있다.

2년 전인가.. 당시 교황 Pope Benedict XI (베네딕트 16세) 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며 퇴임하고 급작스레 선출 된 분이 현 교황 Francis (프란치스코)인데 최초로 남미출신(Argentina)인데다가 교황청과는 outsider 에 속해서 어떻게 재위를 할지 미지수였다. 전임 교황들,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분의 뒤를 이으며 그분들이 닦아 놓은 업적을 유지, 계승, 향상 시키려면 그분의 어깨는 정말 무거웠으리라. 그 후의 경과, 결과는 어떤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를 능가하는 인기와 명성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전임 같은 ‘두뇌’ 보다는 ‘인정, 솔직’함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의심 많은 초현대의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비 신자들을 매료한다. 그러한 인기를 잘 활용해서 드디어 세계 정치에도 서서히 관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누가 뭐래도 변화 무쌍한 인류 가치관에 그는 변함없는 진리, 그리스도 가치관을 너무나 부드럽게 포용시킨다.

용감하게 유럽을 no longer fertile and vibrant, weary and becoming irrelevant 라고 가차없이 질타하고, 의혹 많기로 유명한 바티칸의 ‘재정비밀’을 투명하게 만드는 노력을 하는가 하면, 가톨릭 교리를 ‘요지부동’의 인상 보다는 ‘자비’를 강조하는 묘기도 보인다. 예수님의 기본 철학, ‘부자보다는 가난함을 사랑하는’ 실천적으로 가르치기도 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 소위 말하는 populism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부자 사제’는 척결하고 본인은 ‘소형차, 시민 아파트’를 택했다. 이런 배경으로 그의 agenda를 밀어 부치는 교황, 어떨까.. 퇴임 시에는 아마도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기를 능가하지 않을까?

이런 배경으로, 작년에 아틀란타 대주교에도 불똥이 튀겨, ‘공짜로 받은’ 주교관 mansion을 반납해야 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일반 신도들이 대담하게 교황의 모범을 무기로 항의를 했던 것이다. 어떨까.. 이런 와중에 한국출신 교포사목 동남부 사제단인가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김대건 성당도 포함) 하는 곳에서는 작년에 멕시코의 칸쿤 Cancun 에서 사제단 회의를 하였다. 그것도 자랑스럽게 말씀하던 신부님.. 속으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하필 세속사회의 상징인 멕시코 관광도시 칸쿤에서 비싸게 모여야 했을까? 누군가 설명을 해 주면 어떨까? 그들의 최고 통수권자 교황님의 행적을 그들은 전혀 몰랐던가, 무시했던가?

이 교황을 보려면 제일 직접적인 방법인 바티칸을 가야하고 그곳에서도 사실 가까이 보는 것은 운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중에 이번 9월에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혹시.. 우리도 그곳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실험’을 하게 되었다. 크게 무리는 아닐 듯..  World Meeting of Families convention을 계기로 Philadelphia 대회에 참석하고, Washington DC, White House, Congress, New York을 방문 하다고 하니 교황을 비교적 가까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내가 교황과 30초간 함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이런 질문이 이제 100% 공상이 아닌 것이다.

  1. 현대 한국어에서 이런 말을 아직도 쓰는지..

아틀란타 성모의 밤 2015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5년 성모의 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5년 성모의 밤

 

Scan10139-15월의 절반이 지나가며, 나를 낳아준 조국,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조’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게 하는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 5.16 도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 나는 다시 예수님의 어머니 Jesus’ Mother, ‘하느님의 어머니 Mother of God‘,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Immaculate Mary를 생각하는 날들을 맞는다. 5월 달 전체가 사실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달이고 그 중에서도 성모의 밤은 그 절정에 해당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나의 ‘한국어’ 본당 도라빌 소재 순교자 성당에서 2015년 성모의 밤이 ‘신선하고, 뜻 깊게’ 열렸고, 우리도 참가를 하여 ‘humanity’s 어머니 마리아’를 기렸다.

이 행사에 내가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레지오 입단 다음 해인 2012년 부터 였으니까.. 4년 째 가 되어가나..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서 약간의 거부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나는 이 행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가톨릭에서의 위치를 알려면 가톨릭 ‘마리아 4대 교의’를 상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무거운’ 것이 이날에 그렇게 중요할까.. ‘어머니의 자애’.. 하나만 생각하며 모든 생각이 필요가 없지 않을까?

올해 ‘성모의 밤’ 행사 자체도 예년과 ‘아주’ 다르게 ‘정중함’이 풍기는 완전한 절차 임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제까지 내가 겪었던 것들은 모두 레지오 마리애 주최의 ‘약식’ 행사였었다. 하지만, 올해는 새로 부임한 ‘신입 보좌신부’ (정말 ‘어리게 보이는’) 와 전례부가 합작을 해서 ‘정식’으로 승격을 시켰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도 되었다. 왜 갑자기 ‘약식 전통’을 바꾸었을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주임신부의 이임과 상관이 있었을지 않았을까..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임 신부님의 ‘마리아 신심’은 우리들의 기대에 ‘항상’ 못 미치기에 새로 부임한 ‘이 요한’ 주임신부의 그것은 어떨까 궁금하기만 하다.

 

 

언제나 웃으시는 마리아

 

제 사랑이 풍요로워 지도록

당신의 웃음을 곁들여 주십시오.

 

당신의 웃음을 닮아

저도 맑은 웃음을 웃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저를 도와주시어

당신처럼 웃음 띤 얼굴로

기쁘게 주님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걱정과 고뇌를 잊고

이웃과 기쁨을 함께 나누게 해주십시오.

 

밝게 웃는 얼굴로 이웃에게 다가가

친절과 위로를 나눠주게 해주십시오.

 

제 웃음에 비웃음이 섞이지 않고

언제나 성실하고도 참된 호의로

가득 채워 주시고

괴로울 때에도

웃음 짓은 것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을

마음 깊이 보존하게 해주시고

이 기쁨이 언제나 웃음으로 피어나게 해주십시오.

 

생각과 감정이 다를 지라도

언제나 웃음 띤 얼굴로 대하게 해주십시오.

 

호의를 가득 담은 얼굴로

이웃을 하느님께 이끄는데

저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게 해주십시오.

 

< J. 갈로 >

아틀란타 성체대회: a p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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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 the end of the age.” (Matthew 28:20)

 

“(보라, 세상이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20) 위와 같은 올해의 thematic verse를 배경으로, 아틀란타 대교구 주관 2015년 미국 동남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 가 6월 초(6월 5일, 6일)로 다가왔다. 나에게 일년이란 세월이 67마일의 속도로 느껴짐은 작년 성체대회의 기억을 더듬으면 알 수 있다. ‘엊그제’ 같은 느낌이니까..

올해 성체대회의 theme은 ‘I will be with you always‘.. 마태오 Matthew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until the end of age.. ‘세상이 끝날 때가지’ 가 생략된 비교적 귀에 익은 표현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나에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예수님이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의지’.. 이 말씀이야 말로 ‘복음 중의 복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로 어느덧 20주년을 맞게 되어서 누가 보아도 이제 이 연례 대회는 완전히 자리를 굳건히 잡은 듯 하다. 아틀란타가 1996년 올림픽을 주최하며 호경기와 급성장을 예상하던 때, 당시의 선견지명을 가진 Francis Donohue 대주교님의 용단으로 조촐하게 시작 되었지만, 급팽창하는 대교구를 함께 모이게 하고 ‘성소 난’에 봉착한 교회에 돌파구를 제시하는 뚜렷한 목적을 유지하며 건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때 재정난 (eg. subprime mortgage crisis, housing bubble)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대교구 여론의 도움이었던가, 난관을 극복하고 예전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으로 건강한 장래를 내다 보게 되었다.

우리가 이곳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지만, 이것도 우리에게는 ‘금자탑’에 속한다. 예상 밖으로 우리에게 이 행사는 큰 은총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의 3만 명이 ‘운집’하는 이곳엘 가면 ‘천주교’가 절대로 ‘소수 종교, 방어적 종교’라는 의심을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다. 성체 신심이라는 말조차 생소하게 들리던 나에게 이런 대회는 ‘모조리 배울 것 투성이’ 인 기회라서 ‘절대로 참가하자’라는 결심을 하였기에 ‘죽을 정도로 아프지’ 않은 한 이 날을 달력에서 비워 두고 산다.

작년까지는 ‘두말 없이’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묻어서’ 참가하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예외’로 바꾸어서.. 단체 행동에서 벗어나 우리들 만의 ‘개인 참가’ 하기로 하였다. 교통편 때문에 가급적 성당 car-pooling이나 bus를 타면 좋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아침에 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올 때가 문제임을 작년에 bus가 ‘예고도 없이’ 끊어진 바람에 당황한 기억으로 Never Again! 을 되 뇌이며 ‘우리 차’로 자유롭게 가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 교우들이 성체대회의 절정인 closing vigil mass를 기다리지 않고 ‘점심을 먹은 후’ 일찌감치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올해부터는 우리에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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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congress program을 언뜻 들여다 보니.. 작년과 같은 Hollywood celebrity 급 keynote speaker는 보이질 않는다. 생각하면 이것이 ‘정상’일 듯 하다. 성체대회가 무슨 show나 entertainment는 아니니까.. 하지만.. Not so fast! 다른 의미의 celebrity급 speaker의 모습과 이름이 보였다. 바로.. Father Robert ‘Bob’ Barron!  우아~~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Hollywood star급 보다 brainy하고, 현재 미국 가톨릭 계의  ‘급상승’하는 56세 신부님, 바로 Father Barron이 오는 것이다.

월남 신자들은 규모가 커서 자기들 만의 모임이 있지만 우리들은 어차피 English Track에 속한다. 그러니까.. 언어에 상관없이 ‘영어권’의 인물들에 익숙해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한국어 신자들이 이 keynote speaker들을 알고 있을까? 결국은 부지런히 ‘예습’을 하는 수 밖에 없다. 다른 speaker 중에는 Teresa Tomeo, Kerri Caviesel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Father Barron처럼 익숙한 이름은 아닐 듯 하다. 그래서 올해는 집중적으로 Father Robert Barron에게 관심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Robert ‘Bob’ Barron, 1959 년 시카고 출생 (56세), 시카고 대교구 신부님, Mundelein 신학교 총장, author, scholar and Catholic evangelist.. 나이에 비해서 화려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가톨릭 신학대가 Thomas Aquinas 토마스 아퀴나스 에 매료되었고 결국 1986년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Washington DC)에서 Master 학위를 받았고, 1992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Institut Catholique de Paris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외국어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암으로 서거한 시카고 프란시스 조지 추기경은 그를 one of the Church’s best messengers라고 했듯이 그는  초현대 디지탈 미디어를 이용한 많은 저서, video, website, blog, newsletter, podcasts등을 발행하고 있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인기 있는 강연, 강의를 하고 세속적인 media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가톨릭 교리, 핵심을 전파하고 있다. 그 중에서 2011년에 출시된 10 편 documentary series:  The Catholicism Project 는 미국을 위시한 16 개국 대중적 TV를 통해서 방영이 되었다. 그의 TV program은 1950년대의 Fulton Sheen 대주교 이후에 처음으로 ‘상업적 TV’에서 방영이 된 case가 된다고 한다.

이런 그의 resume를 떠나서, 나는 이 ‘젊고 handsome’하고 머리 좋은 신부님을 언제쯤 알았던가? 아마도 위에 언급된 TV program, Catholicism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program을 본 적이 없다.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DVD를 사기에는 비싼 것들이기도 했고, 그 것이 나올 당시만 해도 나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Keynote Speaker: Father Robert Barron

Keynote Speaker: Father Robert Barron

그러다가 그의 website: Word On Fire 를 정기적으로 subscribe하면서 그를 거의 정기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크리스마스나 사순절 쯤이면 그의 newsletter를 받아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그의 style은 조금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Postscript: May 30, 2015

Never Mind!  오늘 성체대회 website를 우연히 보니.. 이것이 웬일인가? Keynote Speakers 명단에서 Father Robert Barron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완전한 disaster.. 하도 실망을 해서 이곳엘 갈까 말까 생각을 할 정도다. 하기는.. 올해의 여러 가지 느낌이.. 20년 주년 기념적인 이 성체대회에 김이 빠진 듯 한 그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실망.. 실망..

봉성체 奉聖體, 1년 후

봉성체 봉사자를 구하는 Holy Family 성당의 brochure
봉성체 봉사자를 구하는 마리에타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의 brochure

봉성체 奉聖體, home Eucharistic communion service, ministry 성체를 집으로 모시고 가서 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봉성체 라고 하는데 이것은 Extraordinary Minister of the Holy Communion 라는 평신도 중에서 특별히 선발되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류상으로도 본당, 교구, 대교구에 등록을 하여야 하고 대강 3년 정도 유효하다고 한다. 이만큼 사제가 아닌 평신도가 성체를 성당 밖으로 모시고 나가서 영성체 봉사service를 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신중하다고 할까.

4년 전쯤, 말기 암으로 투병을 하던 우리 레지오 단원 은 요안나 자매님이 거동이 불편해져 집에만 있게 되었을 때, 그 자매님에게 성체를 모시게 해 주고 싶다는 일념 으로 연숙이 ‘두말없이’ 봉성체 교육을 받고 교구청에 등록을 했는데.. 좀 늦었던가.. 안타깝게도 한번도 봉성체를 해 주지 못하고 그 자매님은 운명을 하게 되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이후로는 ‘가능하면’ 늑장을 부리지 않고 성체를 원하는 거동이 불편한 신자들을 찾게 되었고 필요한 곳은 찾아가게 되었다.

5년 전쯤만 해도 나는 ‘성체의 심각한 의미’를 잘 몰랐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성체와 성혈은 100%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교리상식은 물론 ‘머리’에서는 알지만.. 그래서..어쨌다는 말인가 라는 선에서 멈추곤 하였다. 미사에서 성체, 성혈을 받을(모실) 때에도 ‘의미 있는 묵상’이 별로 쉽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내가 별로 깊이 생각과 묵상을 안 해서 그런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된 성체,성혈의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조금 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점들이 연결되는 순간부터’ 나는 거의 무조건 성체의 신비를 믿게 되었다. 의외로 간단한 과정이었을까?

그런 배경으로 봉성체 봉사자인 연숙을 따라다니며 ‘봉성체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레지오 활동의 일환으로 봉성체 봉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집이나 병원에서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일년이 넘은,  작년 2월경 부터 우리는 정기적인 ‘화요일 봉성체’ routine을 시작하게 되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화요일에 정기적인 봉성체 활동을 하고 가끔 비정기적인, 예외적인 봉사를 한다.

이 봉성체 활동을 하며 느끼는 것은 한마디로 가톨릭 신앙에서 얼마나 성체신심이 중요한 가 하는 때늦은 놀라움이다. 1982년 영세를 받고 나서 수십 년이 흐른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이것을 정말 늦게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미사를 못 보며 느끼는 이들 봉성체 대상 교우들의 성체에 대한 갈증, 갈망을 느끼고 보며 나는 너무나 많은 은총을 받는 듯 하다. 이 우리의 봉사는 사실 우리가 봉사를 받는 다는 쪽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고령의 봉성체 대상 자매님, 기억력과 씨름을 하시지만 우리들이 가면 ‘일제 시대(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남편 형제님을 만나게 된 경위를 일본말을 섞어가며 설명하시던 모습을 보며, 이 분들에게 성체 이외에 ‘인간적 대화’가 필요함도 절실히 느낀다. 성체의 ‘기적’까지는 기대 못하더라도 이런 활동이 외로울 수도 있는 그분들에게 다른 기적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자동차와 다리가 성한 한’ 이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Guadalupe, Tobey, Bernadette ..

Juan Diego의 망토에 새겨진 과달루페 성모님 상
Juan Diego의 망토에 새겨진 과달루페 성모님 상

¶  Our Lady of Guadalupe:  과달루페의 성모님! 처음 이 성모님 발현에 대한 것을 듣게 된 것은  ‘아마도’ 무척 오래 전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당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저 ‘마음 약한 영혼들’이 애타게 찾는 천상의 예수님의 어머니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89년 쯤 위스컨신 매디슨에 살 적에 한국에서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위스컨신 주립대로 ‘연수 차’ 오셨던 김희선 신부님 (본명을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께서 멕시코에 다녀 오시면서 과달루페 성모님 상 사진을 선물로 사가지고 오셔서 우리집도 한 장을 받았고 기회가 있으면 벽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그 당시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신부님으로부터 분명히 들었을 터이지만 역시 ‘관심 밖’이어서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것이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의 전부였다.

25년을 fast forward한 현재는 어떠한가? 오늘이 바로 천주교 전례력으로 ‘과달루페 성모님 축일 feast’로 나는 처음으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뜻 깊게 축일 미사를 맞았다. 그렇게 바뀐 나 자신이 나도 놀랍기만 하다. 세월의 장난일까.. 아니면? 이제는 이 특별한 발현의 배경, 역사, 뜻, 그리고 인류 구원사, 세계사에서의 의미까지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발현 사건’은 알면 알게 될수록 신비롭고 특히 ‘과학과 신앙’의 각도로 깊이 연구한 결과는 가히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 ‘발현’을 ‘믿는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지금 나 자신은 100% 이 발현 ‘역사’를 믿는다.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시대 이후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이 ‘계속’ 인간들에게 발현하시는 첫 번째 이유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같이 자신이 없는 신앙인들을 ‘응원’하시는 그것이 첫 번째 발현 이유가 아닐까?

1531 12 9 지금의 Mexico City 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과달루페 성모님이라고 하는데 이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성모님 자신이 발현 당시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특별한 뜻은 없는 것 같다. 16세기 초 멕시코 지역은, 물론 Aztec 아즈텍 원주민들이 살던 땅이었지만 Spain 에게 ‘정복, 개척’되기 시작했던 때였고, 따라서 가톨릭 신앙이 전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그 당시 Aztec ‘나라’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원시,태양숭배 종교로 통치되던 때였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인적 희생물’로 바쳐지던 공포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당시 이들의 태양숭배 인간제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오래 전 Indiana Jones (Temple of Doomed) 영화에 나온 그런 장면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손으로 꺼내는 끔찍한 장면.. 그런 ‘공포 정치’속에서 살던 원주민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이 ‘사랑과 자비’를 기치로 가톨릭 신앙을 전하던 때에 ‘과달루페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이다. 발현은 그래서 어떤 원주민 ‘아저씨’ Juan Diego (후안 디에고?) 에게 나타나셨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지고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 하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아저씨’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지역이 피지 않는 장미를 ‘증거’로 Juan Diego에게 주시고 그것을 의심 많은 주교에게 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가 그 장미를 tilma(망토) 에 담아 왔고 그것을 주교에게 보여주려 펼치자.. 장미를 쏟아지고.. 그 tilma에는 ‘찬란한’ 성모님의 상이 ‘각인’이 되어 있었다. 선인장으로 만든 그 tilma에 그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더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주교님은 그대로 땅으로 쓰러지면 경배를 하고.. 성모님의 요청인 ‘성모님 성당’을 그곳에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과달루페의 역사’가 되었다. 이후 그 ‘성모님 상’에 많은 피해와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기적적’으로 극복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발현 자체도 기적이고 그 ‘상본’이 하나도 변질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도 기적이고.. 발현 이후 수많은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것도 기적이고… 기적의 집합체인 것이 바로 과달루페 발현이다. 신학적으로도 신세계인 America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성모님 사랑의 배려로 충분히 설명이 되기도 한다.

이런 ‘흔한’ 배경 이야기 보다 나는 그 유명한 성모님 상본이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더 관심이 많이 간다. 과학적 분석만으로는 기적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과 ‘수학적’ 과학의 차이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특히 무신론적인 일본인 과학자가 digital image analysis를 통해서 분석한 성모님의 눈동자 속에 반사된 Juan Diego(목격자)와 주교의 모습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울 뿐이다. 나에게 정말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성모님 발현의 목적은 분명하고 뚜렷하다는 것.. 특히 초 현대를 살아가는 요새의 인간들에게… 절대로 희망은 있다!

 

¶  Tobey, 10!  12월 9일.. 은 우리 집 수컷 강아지Tobey 생일이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특별한 생일인 10 생일을 맞았다. 이런 중요한 날을 완전히 잊고 넘어갈 했는데 Tobey 오랜 역사를 같이 해온 East Cobb Animal Medical Center에서축하 카드 email 와서 알게 되었고 아하.. 올해가 10 생일이구나..하는 탄식이 나왔다. 10살이면 이제 인간나이로 나와 맞먹는 것이기에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Tobey와 100% 닮은 크리스마스 카드
Tobey와 100% 닮은 크리스마스 카드

우리 집에는 Tobey 대한 크고 작은일화들이 많아서 그것을 기억하려면 한이 없을 정도다. 괴로운 것은 잊으려 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snap 사진을 통해 즐기려 한다. 근래에 들어 많은 사람들이 pet 데리고 사는 것을 감안하면 특히 식구가 적은 우리 같은 곳에서 이런 pet 존재는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어떨 때는 진짜 사람 식구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해서 이런 pet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한심한 듯한눈총을 받는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속으로당신도 한번 길러 보고 말해!’ 라고 하고 싶을 때도 있다.

 

현재까지 Tobey 건강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10살이라는 느낌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본격적인 노년으로 접어 것인데, 주변에서 듣고 보고 것으로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을 생각하며 우울해지기도 한다. 진희네 집의 , ‘공주 하루아침에 눈이 멀었고, 다른 쪽에서는 개가 제대로 걷지를 못한다. 사람은 아프면 말이라도 하지만 애들은 어떨까? 사회적, 문화적으로 이제 개나 고양이 들은 거의사람 같은 식구대접을 받게 되어가고 우리도 차이가 없다. Tobey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사람 못지않게 정말 슬플 같다. 살을 맞이한 Tobey.. 우리와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아다오!

 

Bernadette & Nathan
Bernadette & Nathan

Bernadette.. 버나뎃, 벨라뎃따,  흔히들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님 발현의 목격자 소녀의 이름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의 Bernadette는 캐나다에 사는 나의 중앙고 동창 정교성 딸의 이름이다. 인 친구는 매년 꼬박꼬박 크리스마스 카드를 12월 초만 되면 보내준다. 요새 우표를 붙여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련만  이 친구는 고집불통으로 ‘인터넷’을 외면하고 이렇게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해 왔다. 오랜 전에는 나도 우편 카드로 답을 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작은 친 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언제나 성숙한 친구, 전통적인 천주교인’ 정교성.. Wife를 병으로 잃은 후  재혼한지도 꽤 오래 전인데 이제는 딸 (큰 딸인지 작은 딸인지 확실치 않지만) Bernadette이 결혼을 한다고 결혼 안내장을 동봉해 주었다. 청첩장이 아니고 청첩장을 예고하는 card였는데.. 신부와 신랑감에 대한 아주 자세한 설명이 그곳에 있었다.

신랑감은 테네시주 내쉬빌 출생의 미국인, 그리고 evolutionary biology (진화생물학) 박사학위 소지자 로서 캐나다 시민인 Bernadette을 Toronto의 Royal Ontario Museum에서 post-doctoral research하면서 만났다고 한다. 교성이는 딸이 두 명이 있는데 Bernadette이 장녀인지 차녀인지.. 확실치 않다. 오래 전에 보내준 가족사진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 집도 두 딸이고 해서 ‘동지’같이 느꼈는데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을 보니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두 딸은 요새의 풍조대로 결혼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더욱 부러운 것이다.

신랑이 우리가 사는 인접한 테네시 주 출신이라서 혹시 결혼식을 그곳에서 하게 된다면 이 친구가 미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십 년 만에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우리 둘은 서로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을 것 같은데.. 교성이는 옛날 부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별로 변하지 않았을 것에 비하면 나는 ‘완전히 변한’ 모습이라서 더욱 그렇다. 하기야 내년에는 더 늦기 전에 캐나다 쪽으로 여행을 할 계획도 있어서 딸의 결혼과 상관없이 한번 보게 될지도 모른다.

친구야.. 정말 축하한다. 정든 딸을 보내는 아비의 심정 나는 현재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어찌 섭섭하지 않겠니?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순리가 아니겠니.. 덤덤하게 행복을 빌어주며 보내렴.. 인자하신 성모님과 주님의 가호가 딸 부부에게 함께하기를 빌어본다.

Advent 2014

Scan10112-12014년 대림절이 시작된 첫 주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슬그머니’란 표현이 어찌 이렇게 잘 어울릴까… 요란하게 온 것이 아니고 ‘조용히’ 우리를 덮치듯 온 느낌인 것이다. 비교적 mild한 날씨와 더불어 오랜만에 평화스럽게 보이는 날이 되었다. 세속적, 저편으로는 Thanksgiving Holiday가 끝나자 마자 요란하게 ‘소비자를 유혹하는’ 각종 신조어로 표현되는 해괴한 날들이 도래하고.. Black Friday, Cyber Monday..(이 말들, 참 웃기지 않는가?) 를 기다리며 목을 매는 소비자 ‘우매한’ 대중들.. 머릿속은 온통 ‘물질’로 가득 차 있는 모양이다. 극과 극을 이루는 대림절 시기의 모습이다. 신부님은 이 시간을 ‘차분히, 딴 것들에 한눈 팔지 말고’ 지내라고 하지만 수도원에 있지 않는 한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대림 4주간을 상징하는 4개의 초.. 그 중에 첫 번째 초에 불이 붙었다. 대림 1주인 것이다. 올해 나는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낼 것인가 잠깐 생각을 해본다. 특별한 것이 있을까? 지나간 시절의 감사드릴 일은 며칠 전에 생각, 감사를 했고 이제는 ‘humanity의 희망‘이라는 구세주의 도래를 생각하는 것이 4주 간에 할 일일 것이다. 달력을 보니 4주 간..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세속에 사는 우리들.. 세속적인 것과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 마치 곡예를 하는 기분도 든다. 작년부터 나는 이런 균형 맞추는 일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노력을 한 결과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내왔던 12월의 4주간 관습이 어찌 그렇게 쉽게 바뀔까 했지만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Scan10110-1앞 집 Winter family는 일주일 전에 벌써 holiday decoration을 장식하고 밤이 되면 휘황찬란한 light를 자랑하고 있다. 그 집이 독실한 Christian 인 것을 감안하면 나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비교적 젊은 가정으로 새로 난 baby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를 한다. 그는 분명히 차분한 쪽 보다는 축제의 쪽으로 12월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게 이른 Christmas light가 아닐까?  이런 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 집의 Christmas tree & light는 성탄 4일 전인 12월 21일에 하리라 결정을 해 버렸다. 분명히 ‘Christmas girl, 나라니’가 불평을 하겠지만 그것이 올바르고 알맞은 날일 듯 싶다.

올해도 예의 ‘five minutes with the Word‘라는 대림절 묵상 소책자가 Holy Family 본당에서 배부되었다. 몇 년 전부터 이것을 받고 읽고 하는데 ‘매일 말씀과 묵상’이 있는 것이지만 대림절에 맞추어 특별히 나온 것이라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우리 ‘한국 본당’을 중심으로 매일 말씀이 email로 보내지고 있고 그곳은 한국의 신부님들이 묵상이 실려 있지만 이곳에는 ‘영어 문화권’에 속한 말씀과 묵상들이라 읽는 기분이 아주 다르다.  매일 말씀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로 복음) ‘해설과 묵상’을 하는 짧은 글인데 어떻게 그렇게 ‘잘’ 썼는지.. 감탄을 하곤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코 앞에 다가온 12월 성탄과 새해를 미리 그려본다.

Readers: Hope, Merton

¶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Scan10105-1 몇 개월 전이던가.. 확실치 않다.. 하지만 6개월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 우리가 다니는 미국 본당 Holy Family CC (Catholic Church)의 성체조배실 (adoration chapel) 에서 비교적 낡은 책 하나를 읽게 되었다. 조그만 책자였는데,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HIS HOLINESS JOHN PAUL II.. 그러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저자인 책이었다. 제목이 바로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였다. 직역을 하면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정도가 될까. 나 나름대로의 의역은 ‘희망으로 넘어 가며’  조금은 어색한가.. 희망이 없던 사람이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비로소 조금씩 그것을 찾아간다 정도가 아닐까?

성체조배실에서는 주로 성체를 앞에 두고 명상이나 묵상 나가가서 관상까지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무엇을 하던 사실 제한은 없는 것 같다. 연숙과 그곳을 거의 정기적으로 가게 된 것은 우리가 ‘평일 미사’를 시작하면서였고 평일 미사가 끝난 후에, 필수적으로 일주일에 몇 번을 하는 것은 정하지 않고, ‘가고 싶으면’ 가는 것으로 했는데 의외로 정기적인 것이 되었다. 이 본당의 성체조배 활동은 참으로 활발해서,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만 하다. 왜냐하면 순교자 성당에는 ‘성체조배실’이란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항상 비어있는 듯한 컴컴하고 춥고, 더운  순교자 성당의 분위기1와 이곳의 24시간 쾌적하게 돌아가는 성체조배실이 있는 미국본당의 ‘눈에 안 보이는 차이’는 아마도 상상을 초월할 듯 하다. 어떤 자매님은 경험적으로 성체조배 활동이 있는 모든 본당의 신심 수준2은 ‘거의 자동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란 것이 처음에 너무나 생소했지만 의외로 좋은 ‘선배’들을 만나서 큰 무리 없이 합류가 되었고 이제는 ‘좋은 시간’ 중에 하나가 되었다. 레지오 덕분에 처음에는 ‘기본’ 묵주기도 의무를 채우려 이곳에서 그것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만의 ‘묵상, 생각’의 시간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다른 것 중에는 그곳에 비치된 ‘좋은 책’들을 ‘난독’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독을 할 수는 없기에 눈에 ‘꽂히는’ 것을 읽는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여기에 언급하는 이제는 ‘성인’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책인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직감적으로 ‘괜히 어려운 책을 골랐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교황님이 쓰신 글들은 ‘무조건 어렵다’ 는 선입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교황 회칙이 어쩌구.. 교회 헌장이 어쩌구..’ 하는 글들이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원인이었을까.. 이 책을 조금 읽으며 나는 너무나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웬만한 교구신부님3들이 일반 본당에서 하시는 수준의 글들.. 주제 들은 ‘항상 궁금했지만 창피해서 물어보지 못하던 것’들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것이.. 아닐 듯 하다.

그렇게 성체조배실에서 ‘가끔’ 즐기던 이 책이 어느 날 보니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빌려간’ 모양인지..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그 책이 돌아왔기에 이번에는 never again의 심정으로 그 책의 제목을 적어와서 Amazon.com에서 찾았다. 1994년 발행된 책으로 그러니까 20년이 된 책이었다. 역시 이것도 contemporary classic 영역으로 들어가는가.. 왜 이렇게 세월이 빨리 가는가. 아직도 ‘출판’이 되는 책인 것을 보니 역시 popular classic이 된 듯하다. 거의 free로 사게 된 (shipping & handling + nothing!)이 책.. 나와는 우연이 아닌 인연으로 성체조배실 보다 더 쾌적한 나의 서재에서  ‘정독’을 하게 되었다.  읽으며 ‘남기는’ 방법.. Reading by Typing..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을까? ‘성경필사‘를 하는 이유와는 다른 것이지만 아마도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읽은 후에 다른 ‘영혼’들과 이 생각과 글을 나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레지오의 사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연유, 과정이 머리글에 자세히 적혀있다. 그것을 읽어보니 ‘왜 이 책이 그렇게 읽기 쉽던가?’ 하는 의문이 저절로 풀린다. 1993년 가을 이탈리아의 TV 방송국에서 ‘교황청 역사상 유례없는’ 기획을 했는데.. 교황과 TV인터뷰를 하는 idea였다. 그것도 ‘전세계로 방영이 되는’ 것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 당시에도 거의 ‘의외적’인 교황으로 ‘예상을 불허하는’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런 제안을 ‘수락’한 것도 전혀 예상 밖은 아니었다고 한다. 교황과 인터뷰를 하려면 아마도 미리 ‘예상적인 질문’ 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 대답, 반응도 예측 불허였을 것이다.

하지만 또 예상을 뒤엎고 이런 기획이 취소가 되었다. 너무나 바쁜 교황의 스케줄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기를 할만한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TV 인터뷰 계획은 ‘물 건너 간 것’이 되었다. 몇 개월 후에 또 다른 surprise가 있었는데,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예측 불허’한 행적이었을까.. TV 인터뷰 대신에 ‘서면’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교황님의 대답이 왔고 그 결과가 이 책이 된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질문의 ‘수준’이 거의 예비자 교리공부의 것과 비슷할 정도다. 그러니까 교황님이 직접 지도하는 예비자 교리반 같은 분위기인 것이다.

이 책의 비교적 짧은 질문, 대답 을 읽는 것은 한마디로 즐겁기만 하다. 감히 교황님께 이런 질문이… 가당한가.. 하는 것들이지만 ‘기가 막힌 대답’들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이분의 ‘지식’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실력은 더 놀라운 것이다. 내가 제일 놀라워한 질문은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 교리반 교사들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그것도 모르며 어떻게..’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그것은 ‘무조건’ 믿어야 하는 ‘공리’ 중에 하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대답은 그런 것들을 모두 뛰어 넘는 ‘자상한’ 대답들이다. 현재 1/4 정도 typing을 하고 있고, 덕분에 더 빠른 pace로 모두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독을 하며, 각 질문과 대답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제일 듯 하다.

 

 ¶  MERTON by Thomas Merton

Scan10109-1Thomas Merton, 가톨릭 교회, 특히 ‘미국 가톨릭’ 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트래피스트 수사님’..이기전에 bestseller author 인 것을 나는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그 분의 사후 posthumous 의 인기와 power를 실감을 하게 되었다. 우선 1968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 ‘선종’한 이 Trappist Monk가  왜 아직도 그렇게 화제이며 유명할까.. 흥미롭지 않은가? 현대판 성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노 라고도 불리는 이분의 일생은 비록 50세를 조금 넘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만 너무나 색채가 진하고 강하고 다양해서 이분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아주 애를 먹으리라 생각이 된다. 50세의 인생을 이렇게 강렬한 후광을 뿌리고 갔다는 것 자체가 ‘멋진’ 것이 아닐까?

The Seven Storey Mountain 칠층산 이란 제목의 ‘자서전, 참회록’이 초기 대표작이지만 그 이후 수 많은 주옥 같은 시집을 비롯한 저서를 남겼고, 사후 이분에 대한 저서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수도자’라 할 것이다. 일화에 위에 말한 그의 첫 자서전이 세상에 나온 뒤 1950년대에 많은 ‘건강한 젊은 남자’들이 이 책의 영향으로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뒤 주머니에 이 책을 끼고 왔다고 했다. 그 정도면 대강 짐작이 가지 않을까?

Thomas Merton
Thomas Merton

여기서 이들의 공통점은 그 책의 저자도 당시 ‘젊다’라는 것이고 영향을 받았던 이들도 젊었다는 것인데.. 지금 60대 중반을 훌쩍 넘어가는 나는 과연 이것들과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나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진리를 찾고 싶고, 그 진리로 생을 살고 싶다.’ 라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수도승이 되고 싶지도 않고 사실 이제는 되고 싶어도 될 수도 없다. 그것 빼고 나머지는 나도 ‘진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Thomas Merton을 가장 ‘짧게 소개한’ 글이 있을까? 대강 2~3 페이지 정도로.. 물론 내가 신뢰하는 Wikipedia를 보았지만 그곳은 ‘객관적’인 역사, 사실, 업적 들을 dry하게 기술했을 뿐이다. 그곳에는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A Thomas Merton Reader란 책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그 방대한 Merton 저서들을 모아서 500 여 페이지 한 권으로 압축한 편리한 이 책의 서두에 있는 Introduction(by M. Scott Peck) 바로 그것이다. 이 ‘소개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Merton은 짧은 글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사람’ .. 이것은 나도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책들이 그를 모든 각도에서 조명하려고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Merton에 대한 Introduction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It is impossible to adequately “introduce” Thomas Merton. I have a sense I might almost as well attempt to introduce God. This is not because I worship Merton but because he was an extraordinarily complex and complicated man, multifaceted, diverse, and variable. He was one of those occasional people who could be described as “larger than life”.

 

500 페이지의 Reader 어떤 방식으로 읽을까 생각하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다. Reading by Typing 물론이지만.. 페이지부터 읽을 것인가.. 아니면 난독random 하게 골라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움 받아서 읽을 것인가.. 아직은 전혀 idea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나는난독으로 시작할 하다. 나에게 방법이 제일효과적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1. 한 여름에 순교자 성당 대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해본 사람들이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2. 이것은 또한 신자 수와 헌금액수에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3. 예수회신부님들이나 수도회 수사들과 다른 일반 목회자들

Inaugural feast day, John Paul II

st-john-paul-2며칠 전이던가.. 우리의 미국본당의 달력을 보니 10월 22일에 Bl. John Paul II라고 적혀 있었다. 이 달력은 교회달력이라서 일년 열두 달 거의 매일 성인의 feast day가 적혀있다. 매일 미사를 다닌 이후 나는 이렇게 매일 성인의 축일이 있던 사실에 새삼 놀랐고 얼마나 내가 ‘무식한 천주교 신자’였던가 부끄럽기도 하였다. 매일 미사를 다니다 보면 ‘부수입’으로 이렇게 성인열전을 가볍게라도 공부하게 되어서 아주 유익하다.

그런데 오늘 10월 22일 수요일 미사엘 가니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축일’ 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며칠 전에 잠깐 본 Bl. John Paul II가 생각났다. Blessed John Paul Second 그러니까 ‘복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축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inaugural feast day, 시성 후 첫 축일이라서 나는 무슨 ‘역사적인 사건’을 겪는 듯 가벼운 흥분이 스며들었다. 올해 부활절 때 시성이 되신 후 첫 축일.. 역시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살아 생전에 ‘살아 계셨던’ 교황님이었고 나의 살아 생전에 돌아 가셨으며, 또한 살아 생전에 성인이 되신 것은 나로써는 조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무척 많은 ‘일반 인’들이 이 성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나도 그들에 못지 않게 이분을 좋아한다. 아니 존경, 아니 공경을 한다. 내가 꿈에도 꿀 수 없는 role model로 삼고 살아간다고 하면 조금 over일까? 2005년 선종을 하실 때, 나는 처음으로 이분에 대해 깊이 공부를 하고 묵상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나는 이분이야 말로 나의 남은 평생 role model로 삼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100% 확신을 하였다. 그 이후 나는 얼음처럼 차갑게 얼었었던 나의 신앙심을 조금씩 녹여 나가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 그 여파로 녹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어떠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세속적인 변화에도 이분만은 변함없이 ‘진실’을 밝히고 선포하실 것이라 나는 믿게 된 것이다. Do not be afraid라는 간단한 명언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처음에는 약간 감상적인 기분으로 이분을 존경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 이 성인을 알아가며 인간 요한 바오로 을 ‘절대적’으로 믿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매료시켰던 면은 이분의 ‘찬란한 지적 은총’이었다. 철저한 신앙적 믿음에 못지 않는 지성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듯 하다. 한 마디로 ‘공부 잘하는’ 교황인 것이다. 후계 교황인 베네딕트 16세가 아마도 지적으로 이분을 능가할 지도 모르지만 베네딕트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에 비해서 다른 면이 떨어지는 듯 느껴진다. 절대로 굽힐 수 없는 지켜야 할 ‘진리, 교리’를 지켰고, 세계 정치를 신앙적인 눈으로 설득시켜는 힘은 아마도 이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을 따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이날을 맞아 ncregister.com에 관련 기사가 실렸는데 Catholics Remember St. John Paul II’s Personal Impact on Inaugural Feast란 제목으로 몇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날을 맞아 이 성인에 대해 회고를 하는 기사였다. 평범한 젊은 신자에서 신부님까지 포함 된 이런 개인적 경험 일화를 보면서 1978년부터 2005년까지 이 성인이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 거의 한 세대에 걸친 범세계적인 불굴의 선교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험난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등대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

우울한 자비 주일 2014

성인 요한 23세(왼쪽),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요한 23세(왼쪽),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2014년 4월 27일 일요일.. Divine Mercy Sunday 그러니까 2014년 자비의 주일이다. 교회 전례력으로 매년 부활주일 다음주일이 자비의 주일이지만 올해는 두 명의 새 성인이 탄생하는 날이기도 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런 ‘경사스런’ 날 아침에 나의 머리는 복잡하고 우울하기만 할까? 나의 무거운 머리 속은 시성식이 거행 되었던 바티칸 시국과 내가 낳고 자랐던 정든 조국의 남쪽바다, 진도의 상상된 광경으로 가득 차있다. 이렇게 대조적일 수가 있을까?

하느님의 자비가 두 명의 성인을 탄생시켰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철저히 비어있던 불쌍한 곳에서는 죄 없는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끝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구약성서 ‘욥기, Job’의 절규조차 질리게 할 만한 슬픔이 있을 수 있을까? 짧은 생을 살아야만 했던 순진한 영혼들은 다음에 어떤 ‘생’으로 이어질까..여기에도 하느님의 자비가 관계가 되어 있을까? 나는 믿고 싶다.. 이 어린 영혼들의 ‘지상에서의 삶’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내세에서 더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세월호 참극 뉴스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더 피할 뻔뻔스러움이 싫어졌다. 아예 슬픈 감정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것을 알았다. 피하고 피할 수록 더 불안하고 미안한 심정을.. 아예 100% ‘가슴을 열고 슬픔에 동참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Vatican youtube site에서는 이곳 시간으로 오늘 새벽 3시에 거행된 두 분 교황의 시성식이 뒤 늦게 stream되고 있고 다른 쪽 CNN에서는 대한민국 prime minister의 사임 뉴스가 보인다. 청와대 바로 직전까지 불똥이 튄 것이다. 현재의 국민적 심리로 보아서 거의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인 여파는 거기서 끝났으면 좋겠다. ‘박’씨라면 이를 가는 ‘빨갱이’들을 위시한 정적 政敵들이 이런 비극을 ‘이용’하는 것은 절대로 추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심정을 아는 듯, 부활절 때 그렇게 좋았던 바티칸의 날씨도 이번에는 흐리고 가랑비까지 내린다. 내가 그렇게 존경했던 20세기의 진정한 거목, 요한 바오로 2세와, 어렸을 때(1960년) 신문에서만 보고 들었던 요한 23세.. 이제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요한 23세는 카리스마는 없지만 천주교를 21세기로 향하는 발판을 마련한 바티칸 공의회 Vatican II를 과감하게 밀어 부친 실로 큰 일을 하였다. 라틴어로 보던 미사가 지역언어로 바뀌는 등 그는 실로 미래를 향한 초석을 깔아 놓고 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세속화가 가속되는 초 현대를 이해하고 유럽과 남미에 치중된 천주교를 전세계로 그야말로 세계화, 지구화를 시킨,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카리스마의 인물.. 자기의 조국 폴란드에서 시작, 공산당의 그림자를 지구상에서 몰아내는 시발역할을 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는 서서히 21세기의 신앙 주역을 맡기 시작하게 되었다. 실로 이 두 전 교황은 성인의 요건을 100% 이상 가진 인물 들이었다.

자비는 나의 사명: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자비는 나의 사명: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자비의 예수, 상본
자비의 예수, 상본

자비의 주일.. Divine Mercy.. 사실 이것도 ‘성인’ 요한 바오로 2세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런 축일이다. 자비의 축일의 근원은 요한 바오로 성인의 조국인 폴란드 출신의 ‘못 배우고, 가난한’ 어떤 수녀, 지금은 성녀인 성녀 파우스티나 St. Faustina였다. 20세기 초반,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살았던 그녀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온 세계에 퍼뜨리라는 사명을 받고 그것을 일기에 모두 적는다. 주위 시기에 가득 찬 동료 수녀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그녀의 사명은 세상에 알려진다. 그것이 그녀의 일기였던 ‘자비는 나의 사명‘이란 책이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인간을 사랑하고 싶고 자비를 주고 싶은 예수’가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2000년 초에 그녀는 동족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시성이 되었다. 자비의 축일은 사실은 예수께서 그녀에게 지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결국 그녀의 일기, ‘자비는 나의 사명’이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 책을 reading by typing으로 모두 읽어 보았는데.. 신체적인 병고를 무릅쓰고 주위 수녀들의 질시, 방해를 극복하던 그 성녀, 수녀님의 모습들이 머리 속에 그려지곤 했다. 성모님의 발현도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서 예수님의 심장에서 찬란하게 퍼져나가는 ‘자비의 빛’을 상본으로 그리라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잘 믿기가 힘들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다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받은 ‘작은’ 은총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자비 주일, 두 거대한 교황성인.. 이 세가지는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위안을 받고 싶다.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을 필두로 두 분의 성인 교황님들의 전구의 효과 등을 감안한다면 죄 없이 일찍 하늘나라로 간 어린 영혼들과 불쌍한 영혼들은 충분히 위안을 받으리라.. 또한 유족들도 그에 못지않은 천상의 위안을 받으며 슬픔이 치유되리라.. 기도하고 기도한다.

첫 Holy Triduum

Triduum..트리듐, the Three Days: 부활 일요일을 향하는 목,금,토요일 3일을 뜻한다. 다른 말로 Easter Triduum, Paschal Triduum이라고도 한다. 우리말로는 그저 ‘성삼일’ 정도가 될까? 그 첫째 날 목요일이 바로 오늘이다. 그러니까 2014년 Easter season의 절정 문턱에 있는 첫 날이 되는 것이다. 참.. 세월도 빠르지 엊그제 주님 성탄을 향한 대림절을 지낸 기억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스도 교의 결정체인 주님의 수난, 묻힘, 부활을 기리는 바로 그날이 코 앞에 온 것이다.

가톨릭 전례에서 성삼일은 성 목요일, Maundy Thursday, 성금요일, Good Friday 그리고 성 토요일 Easter Vigil 로서 정확한 시작은 목요일 저녁 미사로 시작되어 토요일 미사로 끝난다. 인상적인 것은 시작점인 목요일 마사로 전통적으로 이날 신부가 신자 12명을 뽑아서 발을 씻기는 것이 있고 (세족례) 대영광송이 끝남을 시작으로 오르간과 종 소리가 금지되고 부활아침까지 결혼예식도 금지가 된다. 성 목요일 미사의 마침을 기해서 성전 내부 제단 주변의 모든 ‘장식물’이 모두 철거가 된다 (움직일 수 있는 것들만). 처음에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나는 이런 상징적인 의식들이 하나하나가 모두 성서적, 신학적, 전통적인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고, 너무나 인상적이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예수의 수난 passion의 의미를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금요일 Good Friday는 실제로 예수님이 ‘죽는’ 날로서 전례적인 행사는 거의 없는 것인데 (정확하게 미사는 없는 것이다) 전날 축성이 된 성체를 분배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며 특히 십자가 경배 veneration of cross라는 것을 통해서 십자가 죽음을 애도하며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성토요일 밤의 미사는 부활을 기다리는 주제로 깜깜한 밤, 성전의 밖에서 만들어진 ‘촛불’이 성전으로 들어오면 촛불 미사가 진행이 된다. 이런 광경도 너무나 인상적인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원칙적’으로 성삼일을 체험적으로 기리는 것으로 정하고 ‘절대로 빠지지’ 않고 3일 ‘행사, 미사’에 참가를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큰 부담도 느꼈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제는 은근히 기다리게 될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분명히 이 부활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면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절감하게 되었다.

작년 2013년의 성목요일은 나의 첫 체험 시도로 성삼일 시작인 저녁 미사 후부터 시작되는 “감실성체조배”에 참가를 하였다.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계속’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이었는데 한 사람이 계속하기가 쉽지 않아서 1시간 정도로 시간을 정해서 대부분 레지오 단원들이 책임지고 감실을 지키며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정 후 1시부터 한 시간 참가했는데.. 그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글로 쓸 수없이 강해서 오늘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 이후 나는 내년에도 ‘꼭 참가’하리라 각오를 했다. 그 ‘내년’이 오늘 밤으로 다가온 것이다.

작년 성목요일 감실 성체조배 때에는 그 당시 발견한 Dr Eben Alexander의 The Proof of Heaven이란 신간 NewYork Times bestseller를 읽으며 묵상도하고 했는데, 그때 나는 거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처럼 ‘이성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신경외과의 그러니까 자연과학자인 저자의 ‘간증’이 그렇게 나에게 실감 있게 다가온 사실은 정말 나에게도 뜻밖이었는데 아마도 그 때의 성체조배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 그 이후 나는 이성과 신앙만이 아닌 ‘과학과 믿음’의 접근 분야에 대해서 거의 일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어서 현재까지 이르렀다. 이것의 출발 점이 바로 작년 성목요일이라서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올해는 ‘첫 성삼일’이라고 이름을 부쳤다.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첫 ‘한인 순교자 성당’ 성삼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한국 순교자 성당에서 부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것도 우리에게는 두고두고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해 본다. 암만 동네의 미국본당에서 긴 세월을 보냈지만 어찌 우리말이 울려 퍼지는 고향 같은 다른 본당과 비교가 되겠는가? 아직도 반반 정도 미국본당과 순교자 성당 본당을 번갈아 가지만 조금씩 순교자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감을 느낀다. 앞날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더욱 더 한국본당으로 가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추측도 해 본다. 워낙 미국본당에 정이 든 탓에 한국전례문화가 너무나도 생소한 우리 두 딸들을 설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져서 우리의 큰 과제로 남게 되었다.

 

아틀란타 부활 영세식 2014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 영세, 세례식

 

2014년도 부활절 영세식이 4월 12일에 뜻 깊게 막을 내렸다. 천주교에서 영세, 세례의 의미는 아마도 개신교회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쉽게, 편하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그들과 상징, 과정, 연수, 고행이 따르는 우리 천주교의 하느님 만나는 과정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와 연숙에게 올해의 영세식은 분명히 다른 해와 다르게 가슴으로 찡~ 함을 느끼게 다가왔다. 영세식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 멀리서 몰래 찍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한결같이 행복하게만 보이는 이 모습들.. 나이나 성별에 상관이 없다. 세례를 주관하신 주임신부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아마 그런 모습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30여 년 전을 부지런히 떠올리며 이들의 심정을 헤아렸지만 아무래도 30년의 세월은 조금 긴 것 같이, 자세한 그때의 정경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거의 100% 기억하는 것은 그 때의 우리의 ‘행복한 느낌’이었다. 그 희미한 감정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례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의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이번 영세식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상당했다. 나와 연숙이 지난 해 8월부터 모두 봉사자란 이름으로 예비자 교리반에 참가하여 무사히 이들을 ‘요르단 강’ 가로 배를 함께 저었다는 느낌이고, 예비자 거의 전부가 끝까지 항해를 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등으로 우리가 다시 세례를 받는 것처럼 가슴이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번 교리반 봉사자로 참가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이 예비자 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많이 얻고 배웠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리는 수녀님과 신부님이 담당했지만, 우리 부부도 두 번 정도 담당할 기회가 있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수녀님과 자유분방한 신부님의 스타일은 정말 대조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신부님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들고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맡았던 ‘교리 강의’에서 나는 신부님 스타일 흉내를 잠깐 냈는데, 역시 예상대로 수녀님의 재빠른 질책을 받았다. 아직도 나는 그런 수녀님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저 그저 benefit of doubt 만 되 뇌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대상한 예비자들은 거의 ‘고학력, 젊은 층’이 대부분이어서 우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우리에 비슷한 또래들도 마찬가지로 personal chemistry가 좋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었던 것은 대부분 예비자들이 봉사자들을 격의 없이 믿어주고 사의를 표하는 자세들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신선한 것이.. 요새 ‘젊은 층’을 많이 보았기에 너무나 비교가 될 정도로, 건전한 말투, 모습들.. 보기만 해도 했다. 중장년 층의 예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머있고, 협조적이고, 한마디로 멋진 신사 숙녀들이었다. 이들이 하느님을 찾으려 8개월 동안 눈이오나 비가오나 매주 목요일 밤에 모였다는 것은 속된말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비슷한 비율의 남녀 형제, 자매들.. 우리에게는 모두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영혼들이다. 한창 ‘외우는 공부’가 더 쉬울 듯한 15세의 등치가 큰 소녀, ‘마누라’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지만 이제는 ‘교리반 재수’을 끝낼 각오로 참여 각가지 유머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던 Clint Eastwood를 연상시키는 60세 형제님, 무게가 실려있는 comment로 일관 한 귀공자 스타일, 옛날 알랑 드롱을 닮은 ‘백수’ 형제님, Tom Cruise를 연상시키는 30대 유학생 화학공학도, 항상 질문이 많고 심각하지만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50대 자매님..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생기고, 아버님과 같이 교리공부를 한, 멋진 약혼자의 후원을 받았던 (내가 제일 부러운 case) 형제, 20대의 젊음의 향기로 교리반의 공기를 채웠던 몇몇 유학생 자매, 형제들.. 그들을 보면서 우리도 30년 전을 회상하기도 했고, 그들 신앙여정의 앞날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제 세례, 영세식은 끝났지만 사실 학교 졸업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가 진짜가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이들의 교회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서..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속사회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20~30대의 젊은 층은 참 길 수도 있는 ‘파도’길을 가야 한다. 중장년 형제자매들.. 이들은 그렇게 시간이 길지 않다. 사실 내가 제일 큰 관심을 갖는 것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가 아니고 이들이 ‘무사히’ 세파를 헤쳐나가는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받고 쓸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내가 30년의 세월을 ‘실패’로 보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분 들이 ‘하느님’이 생각보다 가까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 본다는 깨우침을 하루빨리 가질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