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h Booster Shot, Lunch at Korea Town

COVID-19 5TH SHOTS! 예정대로 아침 미사를 마치고 부지런히 거의 30마일을 drive를 해서 순병원에 가서 ‘아마도’ 마지막일 듯한 백신을 맞았다. 이제는 주사 맞는 것에 대한 심리적, 작은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이 지난 2년간의 Pandemic이 준 선물이라고나 할까… 다른 shot들, 혈액검사 등도 이제는 편하게 받게 되었으니 앞으로 나에게는 큰 심리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까?  솔직히 ‘주사’에 대한 나의 작은 공포는 부끄럽기까지 한 것이었기에 이런 일들은 나를 흐뭇한 느낌을 준다.

30마일이나 드라이브하는 것,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 이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려면 이렇게 운전을 해야 하게 된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선택은 우리가 한 것, 비교적 ‘조용한 곳’에서 살려면 현재의 상태가 적당한 것이 아닐지.. 그래도 어제, 오늘 모두 이런 한 시간 드라이브는 조금 문제는 문제다. 그러니 앞으로는 한인 town에서 일을 보려면 머리를 현명하게 잘 굴려야겠다… 그래서 오늘 할 일 중에는 거의 억지로라도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포함되었는지도 모른다. 주위에서 소문으로 듣던 self-service 방식의 삼봉냉면 집을 찾았는데… 엄청, 아니 웃길 정도로 값을 올린 각종 한인식당들에 식상을 했는데 이 집은 그런대로 reasonable한 값에 게다가 tip을 줄 필요가 없는 매력이 있는데, 글쎄 맛도 있었지만 이곳 하나만으로 30마일 외출하는 것은 조금 자제하고 싶다.

 

백신의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나는 전혀 걱정 안 한다. 아니~ 오히려 조금 눕게 될 정도로 조금만 아팠으면~ 하는 어린애 같은 생각도 한다. 물론  어릴 적 아파서 누워있을 때 극진한 가족의 서비스를 받았던 기억을 빼놓고 싶지도 않다. 그 정도로 나는 현재 아픈 것에 대한 무서움이 없다는 말인가? 아닐 것이지만, 확실치 않으니~ 나도 참 못 말릴 유치한 노인이 아닌가?

눕지는 않았어도 거의 쉬는 자세로 오후를 지낸다. 별로 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순간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게으름이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만…

오후에 혈압을 우연해 재어보니 140을 넘나든다. 실망이자만, 이건 유혹이다. 약을 먹으면 되는 것인데 왜 그런 것에 자존심을 거는 것인가? 아침에는 무조건 한 알을 먹고, 오후도 먹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어지럽거나 하면 일단 끊는 것…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듯하다. 한동안 혈압이 정상이 되었다고 자랑을 하더라니..

결국은 연숙이 열이 난다고 일찍 retire한다고 선언을 한다. 거의 확실하게 내일은 미사, 운동 계획은 물 건너가는 듯하다. 그러면서 느껴보니 나도 조금씩 몸이 나른해지고 열도 나는 듯하다. 이런 기분, 솔직히 나는 싫지 않다. 왜 그럴까? 더 편히 쉴 수 있기에 그런지도, 아니면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일지도..  내일 아침 다시 몸이 개운해지면 최소한 운동은 가고 싶기도 한 것은, 최근 근육운동 덕분이 아닐지.. 예전처럼 ‘보이는 근육’에 자신을 갖고 싶은 이 해괴한 나의 바람은 이 나이에 무슨 의미나 있는가? 허~ 병신육갑일지도..

 

COVID Shedenfreude

도덕적, 윤리적 진퇴양난 딜레마 moral dilemma… 지난 2년 간 Pandemic의 세상을 살면서 겪는 것 중에 정말 협상하기가 힘든 것 중에는 이런 case가 있다. 각종 상식적, 보편적, 과학적, 이성적,  의학적, 법적 권고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심지어는 자랑스럽게]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있다가 COVID로 인해 감염, 주위에 퍼뜨리며, 최악의 경우 아예 자신이 사망하는 것.  더욱 웃기는 것은 의외로 이 사실을 주위에 알리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접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나의 경우에는 일단 이렇게 말하고 생각한다. ‘쌤 통이다, 이 병신아!‘ 하지만 분명히 다른 머리 속에는  ‘그러면 안 되지, 안 돼..’  하며 제동을 거는 그 무엇이 있다. 아마도 대다수가 그렇지 않을까? 쌤 통까지는 너무 하더라도, ‘죽으면 너나 죽지 왜 다른 사람들까지..’ 하는 것이 다음의 단계인데, 나도 마찬가지다. 너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것, 그것은 틀린 것 아닌가? 자신 고유의 자유라고? 그래, 그러면 너만 죽으라고~~~ 동굴에 들어가서 혼자 살면 되지!  성인 군자, 교황 정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도 그런 바보들을 동정하지는 않을 듯하다. 죽음 자체는 애도할 지는 몰라도…  교황님도 백신을 맞는 것이 사랑의 정신이라고 할 정도니…[물론 예외는 있을 수 있다, 비 정치적으로 의학적, 신앙적 등]

최근에 내가 본 한 case는, 브라질 대통령이라는  ‘극우, 빠가, Bolsonaro‘ 란 인간에 관한 것이 있다.  만고의 개XX DONALD를 흉내 내는 것이 특기인 그 인간은 국민들에게 아예 ‘자기처럼’ 백신을 맞지 말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의 뒤에서 그런 정책을 ‘이론적’으로 영향을 준 [아니면 조종을 한] 인물이 백신을 맞지 않은 채 COVID로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때 나는 솔직히 ‘만세, 만세, 만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속으로 생각한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거의 반사적인 반응인 것을 어찌하랴? 그의 가족들이나 인간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불쌍한 인간이 아닌가? 하지만 나도 피가 아직도 끓는 살아있는 인간일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런 딜레마는 이미 사회정신분석으로 연구가 되었던 것이고, 일종의 증후군이라고나 할까…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심리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과 관련되어 NYT [New York Times] 최근 issue에서 내가 좋아하는 미국 예수회 저명한 spiritual author,  James Martin 신부의 guest essay를 보게 되었다. 예수회 신부니까 당연히 가톨릭의 시각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사회심리학의 눈으로 평을 해 놓았다. 한마디로 오늘 새로 알게 된 전문용어 Schedenfreude, 쉐덴프로이데, 물론 독일어, 그 민족들은 원래부터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는지…  이제는 보통명사 schedenfreude 로 쓰일 정도로 인기 시사용어가 된 모양이다.

이 말은 간단히 말하면: 남의 불행을 즐기는 현상, 사람 정도가 아닐지.

Martin 신부의 이 essay는 근래에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정치 이념의 관계를 지적하는데, 사실 나에게는 이것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고 본다. 정치적 욕망으로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자비와 사랑 능력을 모조리 포기한 ‘개XX DONALD’의 반인류적 범죄는 두고 두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 이 가증스러운 범죄자는 단지 정치적 이유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백신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회를 빼앗았으며 자기는 ‘몰래, 숨어서’ 맞는 가증스럽고 한심한 작태를 보여 주었으니…  이런 부류의 인간이 만약 감염으로 고생하거나 사망했다고 하면 인간 본성적 자비, 사랑의 감정보다는 쾌감을 느끼는 것이 반사적, 본성적,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래, 그래 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하지만 이 원수는 그렇게 오랜 동안 관용, 자세, 권고 를 모조리 무시하고 남까지 피해를 주며 자랑스럽게 사는 데… 어떻게 더 사랑을 하란 말인가?   하지만 Martin신부의 결론은 역시, ‘용서하라’ 쪽이고 그길 밖에 정당하고 이성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역시 이것도 ‘용서의 어려움’ 문제로 귀결이 된다. 이래서 현재 세상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NOT DETECTED, Out of Self-Quarantine!

NOT DETECTED! 어제 저녁에는 아예 일찍 nighttime Theraflu를 먹고 책상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별 도리가 없이 9시가 지나서 잠자리로 후퇴를 했다. 그런대로 잠은 잘 잤고, 조금 덜 괴롭히는 목의 통증에 감사하며 제시간에 일어났다. 기침은 고만고만한 정도인가~ 하지만 일어나서 보니 text message가 ‘벌써’ Viral Solution에서 와 있었다. 오늘 중에 올 것은 알았지만 빠르게 온 것이다. 약간 긴장을 안 할 수는 없었지만 ‘설마’로 위로하며 보니 ‘NEGATIVE’라는 말 대신 ‘NOT DETECTED’ 만 덩그러니 보인다. 아마도 이것이 ‘공식’ 용어인지도… 좌우지간 문제가 없는 것…   이렇게 간단히 모든 것이 끝이 났는가? 조금 싱겁기까지 한데… 혹시 애초부터 Luke의 COVID test가 FALSE POSITIVE는 아니었을까? 절대로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것, 끝이 났고 유익한 경험을 한 셈치면 된다. 이로써 5일간의 ‘자택 연금’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비록 COVID scare는 우리로부터 사라졌지만 계속되는 기침감기를 이유로 결국 내일 대림2주일 미사를 쉬기로 마음을 먹었고 연숙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혼자라도 갈지 모른다는 여운을 띄운다. 무리 무리 무리.. 나에게는…

 

올해 Christmas tree는 기록적으로 일찍 제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전에 첫 모습 뒤에 계속 ornament와 light들이 더해진 모습이, 밤에 보니 휘황찬란하기까지 하다. 축 늘어진 기분을 조금이라도 들뜨게 하는데 큰 몫을 하리라 기대한다. 남모르게 수고한 연숙에게도 감사를 하며…

 

Self-Quarantine Day 4, COVID-TEST

자가격리 4일째를 맞는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모두 감기증상을 가지고 있고 나는 점점 심해지는 듯하니…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 Test가 모든 것을 해결하긴 하겠고, 물론 우리는 negative로 나올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오늘 일어나면서 기침, 콧물과 싸운다. 다행히 열은 안 나는 듯한 것이 다행이다. 언제까지 갈 것인지… 조금 괴롭다.

예정대로 오늘 오전에 집에서 가까운 곳, United Methodist Church parking lot(on Roswell Road) 에서 차에 앉은 채 편하게 COVID test 를 받았다. 결과는 24시간 내에 text message로 보내준다고.. Insurance information을 요구하는 것은 의외였다. 없는 사람은 어쩌란 소린가? 아마도 Insurance 가 없으면 government로부터 비용을 받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24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나이와 비례해서 더 알기에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올해의 마지막 달을 가며 서서히 올해를 정리할 때가 오는 듯싶다. 물론 나는 daily journal 덕분에 그런대로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기록하며 살았지만 일년 전체를 먼 곳에서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을 오늘부터 서서히 시작하는 것, 정말 멋진 idea다. 두뇌운동도 되고…  지난 2월과 3월의 blog post가 하나도 없는 것, 놀랍기만 하다. 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살았던가? 그래도 daily journal과 smart phone에 사진들이 남아있으니 소설을 쓰는 기분으로 멋진 작품을 남기는 것도 이즈음에 가장 알맞은 일이 되지 않을까?

Self-Quarantine, Day 3

자가 격리 3일 째, 갑자기 집에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긴 사실에 조금 들뜨고 심지어 신선하게도 느껴졌지만 그것이 그렇게 오래 갈까… 어제 저녁부터 조금씩 심란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지난 10년 간 가까이 놓고 읽고, 품고 살았던 각종 책들 대부분을 desk위에 차곡차곡 쌓아놓아 제목이 눈에 보이게 하고 추억과 명상에 잠기는 사치까지 맛보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갈팡질팡하는 나의 모습이 싫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자연적으로 저절로 풀려나갈 것이다.

 

초가을 같이 포근한 날씨의 유혹을 오늘, 내일 어떻게 자제할 것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사람과 거리를 두며 둘이서 산책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음을 안다. 아마도 오늘 우리 둘은 걷게 될 것이다. 그것이 현명한 생각이다. Sope Creek에서 힘찬 냇물을 소리와 모습을 가까이 하는 것이 더 건강하게 대처하는 방법이다. 일단 내일 COVID test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모레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면 하루 연기하는 것도…

오늘의 기쁜 소식들 중에는 나라니와 로난이 COVID test에서 negative가 나왔다는 것과 COVID positive 인 Luke가 훨씬 나아지고 있다는 것, 이제 우리의 test만 신경을 쓰면 될 듯하다. 문제는 내가 점점 감기증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침이 심해지고 콧물까지… 이것은 분명히 연숙으로부터 온 것 같다. 이제 나도 감기, 독감 등에 자신이 없어진다. 예전에는 정말 이런 것들 모르고 살았는데… 왜 그럴까?

Self-Quarantine Day 2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예 night time Theraflu를 먹고 잤다. 목이 뜨끔거리는 것을 조금 피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어도 목이 불편한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소금물 양치를 안 하고 잔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지만, 그래도 일어날 즈음에는 조금 나아지고 있다. 역시 연숙이 먼저 겪던 이것이 나에게도 온 것이다. 이제는 나에게는 그렇게 생소하던 ‘잔 감기, 독감’ 에서 피할 수 없는 나이 든 인간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그래도 현재의 ‘자가 격리’ 중에 COVID 걱정에 비하면 이런 것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따뜻한 날씨가 느껴지는 self-quarantine 2일째, 무의식적으로 산책 생각을 하는 우리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자제하자고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칩거 蟄居 5일’을 고수하기로 한 것이다. 사람만 피할 각오를 하고 외출, 산책을 하려는 유혹을 느끼지만… 그래 이런 기회에 아주 푹~ 쉬자는 더 현명한 유혹에 승복을 하기로 한다. 세상이 조용하긴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이… 아~ Internet 이란 놈은 어쩔 수가 없으니… 그것도 사실 자제하면 된다. 오히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책’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오늘은 2010년대부터 나의 관심대상 제1위를 자랑하는 ‘Science & Faith, Spirituality,  Religion’ 분야, 그쪽으로 하나 둘 씩 읽었던 책들을 년도 별로 분류해서 desk 옆, 나의 눈앞에 보이게 놓아 보았다. 와~ 이것도 이제는 추억이 아롱진 유물로 변하고 있구나… 책 하나 하나에 그것을 사고, 읽었던 각종 기억들이 이제는 추억으로 아롱아롱 남게 된 것이다. 특히 2012~16년 즈음 것들은 죽을 때까지 잊는 것이 불가능, 아니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올해 holiday decoration, tree 등은 파격적으로 일찍 하게 되었다. 우리는 거의 자연스럽게, ‘일찍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엄숙한 대림절도 중요하지만 올해는 그것보다 ‘들뜬 기다림’이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New York의 tree lighting도 이미 시작되었고 바티칸 광장의 것은 12월 10일임을 알게 되어서… 지금 하는 것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예년 같으면 벌써 했을 듯한 앞집 Josh나 옆집 Dave 집은 의외로 아직도 조용하다. 며칠 전 산책 중에서 몇 집은 이미 시작을 한 것도 보았다. 오늘은 연숙이 혼자서 작고 귀여운 tree를 세워놓았다. 작년보다 led light의 수를 배로 늘렸기에 정말 멋지게 보인다. 이제는 집 앞의 bush를 따라서 icicle만 설치하면 또 다른 대림, 성탄의 시즌을 눈으로…

Self-Quarantine, Our Own

Downtown Federal Court에 가느라 Google Map과 씨름을 하던 것이 벌써 열흘이 넘어가니… 그 당시에는 온 신경을 그곳에 가는 것에 쏟았는데 이제는 그 기억도 희미해지고 있으니… 세상은 한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고, 그것을 보는 나도 변하고 있을 것인데 도대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변화는 진화인가, 퇴화인가… 진화라고 보면 어디까지 변하는 진화인가? 결국은 궁극적인 때와 곳에는 역시 절대자, 우리는 그것이 오메가라는 초월적인 그 무엇, 예수가 바로 그 오메가? 샤르댕의 얼굴이 떠오르는 새벽 한때…

모처럼 오늘은 새로니, 유나, Ozzie가 ‘놀러’오는 날이다. 이런 ‘놀러’오는 날은 유나 baby-sitting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지금은 거의 놀러 오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전처럼 큰 지장이나 변화를 안 주는 쪽으로 바뀌고 있긴 하지만 식사하는 것, 산책하는 것 등을 생각하면 그렇게 편한 날만은 아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런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한 움직이며 살고 싶은 것이다.

Ozzie와 오늘은 Sope Creek trail을 포함해서 walking과  hiking으로 거의 2시간을 보냈다. 급경사의 creek gorge 를 단숨에 뛰어오르는 녀석을 보며, 아직도 건강에 문제가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힘이 있을까? 전에 Tobey도 큰 문제 없이 잘 걸었지만 거의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라서 수명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렇게 pet dog & cat들의 ‘그날’을 생각하면 괴로울 정도로 슬픈 것, 나만 그런 것일까? 내가 유난한 것일까? 솔직히 사람보다 말 못하는 이 녀석들과의 이별이 더 슬픈 이유는 무엇일까?

올해 대림절, 어떻게 보낼 것인가? 4주 정도의 이 짧은 기간, 이제까지 거의 아무런 생각 없이 보낸 것,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경건하거나 너무 축제분위기도 그렇고, 아주 묘한 기간이다. 너무 경건하지도 않고 너무 들뜬 분위기도 아닌 딱 중간은 어떤 것인가? 적당히 성탄 트리 장식도 하고, holiday movie를 보며, 매일미사와 대림 묵상글 등의 영적 묵상, 독서를 하는 것, 그것이 전부일 듯하다. 올해는 몇 년간 뜸했던 크리스마스 영화를 더 보고 싶기도 하다.

 

날벼락, 날벼락, 이것이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식이 아닌가? Luke가 COVID positive라고? 며칠 동안 피곤하고 아픈 것이 그것이라는 이유라니~ 그렇게 강 건너 불처럼 느껴지던 것이 손끝까지 다가온 느낌이다. 우선 떠오르는 것, 나부터, booster shot까지 맞았다는 사실, 연숙도 마찬가지.. 일단 우리는 걱정대상에서 제외하고 싶다. 다음은, 새로니네 가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새로니는 극도로 조심을 하니까… 오늘도 소식을 듣자마자 걱정스런 얼굴로 돌아갔다. 다음은 나라니와 로난이다. 일단 negative라고 나왔으니 조금 안심이고, 로난은 미지수다. 허~ 결국 강 건너 불이 조금 더 뜨겁게 느껴지는 대림절의 하루를 맞는다. 성모님, 아기 예수님 자비를 …

점심은 라면으로 대충 때우고 작은 술잔을 계속 기울인다. Canadian Mist 거의 반이 날라갔다. 그렇다고 기분 좋게 취한 것도 아니고..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로 끝나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사실 COVID test같은 것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것임을 깨닫기에 조금 마음의 안정을 취한다. 우선 이번 금요일 이후에 test를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다음 단계의 대응책이다.  TEST 결과가 나올 때까지 조심하며 집에 있으면 된다. 이것이 self-quarantine,  조시몬 형제가 서울에 갈 때마다 자주 불평 아닌 불평을 하던 그 ‘자가격리’라는 것인가? 이제야 이 코로나의 무게를 느끼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What now, after plateau…

코로나 사태의 희생제물, 동네 성당의 sanctuary가 굳게 문을 닫았다

코로나 사태의 선물: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이 보이게 늘어났다

 

¶  그제의 열대성 stormy day 이후에 갑자기 싸늘해진 날씨, 바람이 그렇게 싸늘할 수가 없다.  이른봄에  흔히 보는  바람이 싸늘한, 하지만 찬란한 태양이 작열하는 날,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을 달래기 위해서 거의 한달 여 만에 동네본당 Holy Family성당으로 차를 몰았다. 차로 1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 거의 10년 가깝게 정든 이 차길, traffic은 한산하였지만 계절의 신호는 현 사태와 전혀 상관없이 뚜렷하였다.

 

8여 년 동안 거의 매일 drive하면 다니던 Robinson Road, 한 달만에 주위의 초록색이 더욱 진해졌다

 

비록 공개적 모임은 없지만 그래도 성전 내부 자체는 open한 것으로 안 우리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신부님 차가 보이길래 반가웠지만 성당 입구는 굳게 닫혀있었다.  한 달에 한번씩 봉사단체에 food donation하려고 가지고 간 것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데 누가 나오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물건을 전해 주고 대성전 sanctuary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으니, 모두 close되었다고 알려준다.

 

14처,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는 입구

 

도라빌의 한국 순교자 성당은 성전의 문은 열어놓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은 닫았을까… 아쉽기만 하다.  대신 성당 뒤쪽의 수풀 속에 마련된 14처, 십자가의 길 station of cross 을 오랜만에 걷고 나왔다.  돌아오면서 다시 느낀다… 이런 상태로 더 오래가는 것, social distancing 은 흔히 아는 것같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사람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는 엄숙한 사실을.

 

Thanks, Uncle Benjamin!

 

¶  Stimulus Gift: 평상시 오늘은 일년의 Tax Return을 하는 마감날이었는데, 그것이 코로나 사태로 7월 15일로 연기가 되었다.  IRS (Internal Revenue Service)에 세금보고를 하는 대신에, 오늘 Bank account를 보니 IRS에서, 예상하던 대로 deposit한 돈이 얌전히 들어와 있었다. 결국 지난 몇 주 동안 congress에서 그렇게 토론하던 것이 현실화 된 것이다. 완전히 정지된 경제활동으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Stimulus Package, 이것은 한글로 어떻게 표현하나… 요새는 이런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고등학교 수준의 한글단어가 머리에 맴돌고 있는데 이런 전문용어는 무리다. 좌우지간 ‘경제활동 촉진을 위한’ 그런 정부지원책이 하나다. 2 Trillion Dollars, 이것은 그러니까… 2000, 000,000,000 dollars! 20조 달러인가… 이번에 완전히 all stop된 경제활동을 그야말로 구원하기 위한 단기 대응책이다. 이것이 모자라면 같은 규모의 2차 지원을 할 모양이다. Dollar는 미국 돈이니까, 하기야 찍어내는 것은 우선 큰 문제가 없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것 모두 자가적 빚이 아닌가? 누가 갚을 것인가? 아마도 우리 딸들의 세대가 아닐까…

 

¶  Plateau, 코로나19의  최악 사태를 지나가며:  비록 어제부터 코로나에 대한 ‘난잡한 뉴스, 선동적인 것들’과 완전히 인연을 끊었지만 아주 믿을 만한 단편 소식은 접하고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블로그 source가 하나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retire한 대학교수 출신, computer scientist, engineer  Michael Covington 박사, 그의 블로그 로부터 나는 간접적으로 이 미국과 이 조지아 지역의 코로나 확산뉴스를 접하는데, 이번의 post 에서 그는 현재의 코로나 pandemic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었다.

 

1.  What is vital is to stay in touch with reality. Coronavirus is not a piece of political ideology that somebody made up. It is a real, physical enemy. Those deaths in hospital corridors are real. Dr. Fauci really does know more about viruses than you do. And so on.

Our enemy is speculation — people who can’t distinguish “it might be” from “it certainly is,” and who promote unconfirmed possibilities as if they were confirmed truth. See also (9) and (10) below.

현실을 직시하는 것,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상적, 정치적이 아니고 물리적인 적이다. 병원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것도 사실, Dr. Fauci (NIH 전염병, 바이러스 책임자) 가 우리보다 이 병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음도 사실이다. 우리의 적은 근거 없이 추측하는 것, 실증되지 않은 사실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2.  Ignoring the virus was never an option. We’ve had 22,000 deaths. Would you rather have had half a million? You could easily have had that, if there had been no restrictions.

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무시하는 것, 언어도단이다. 22,000 명이 벌써 죽었다. 50만 명이 죽는 것, 사회적 제한 조처가 없었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3.  Our restrictions have paid off. Quite possibly, hundreds of thousands of lives have been saved. The national new-case rate peaked a few days ago. State by state, some states are going to have much later and lower peaks, which is a good thing.

[Afterthought: Models may have been inaccurate, but there’s no denying that the virus spread a lot less with our lockdowns than it would have without them.]

이런 사회적 제한조치는 성과가 있었고 수십만의 생명을 보호했다. 확진자의 수가 이제 고비를 지나고, 각 주에 따라서 늦게 완만한 고비가 올 것인데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바이러스 확산 정도는 확실히 사회적 제한, 봉쇄조처와 비례하고 있다.

4. The virus would have damaged our economy no matter what we did (even if we had ignored it and just let a lot of people die). The reason you didn’t hear economists objecting to those stimulus payments is that knowledgable people recognized that a rise in the national debt would be better than sudden mass poverty.

어떤 조처를 취했든 간에 경제적 타격의 정도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감염자, 사망자의 숫자는 상관이 있었을 것이다.  정부가 모든 시민들에게 보조금을 준 것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알만한 사람이면 모두 동의하듯이 ‘빚을 지는 것이 갑자기 모두가 가난해 지는 것보다 낫다’ 라는 논리 때문이다.

5.  Our economy can’t sustain forever what it sustained for a month. Damage to the economy itself causes deaths, not only here but (perhaps even more so) in poorer nations that rely on us for trade.

현재 몇 개월 지속되는 경제적 타격은 무기한 오래갈 수는 없다. 이런 피해는 다른 사망자를 유발하기 때문이고,  무역에 유지하는 빈곤국은 더욱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6.  We are going to have to do some kind of gradual, careful reopening of the economy, starting with businesses that don’t involve crowds of strangers.

이런 상태의 경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다시 가동시켜야 한다.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그런 사업, 가게 부터 제한을 풀어야 한다.

7.  With the wider availability of coronavirus tests, some experts are recommending a shift to a strategy of restricting only people who are known to be infected and their immediate contacts. I hope this proves feasible.

바이러스 테스트가 광범위하게 실시될 때, 관계자들은 감염자나 그와 접촉한 사람들만 골라서 거주제한을 하여야 한다고 권하고 있고, 이런 방법의 실행이 어렵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8.  The virus will linger. For a couple of years, we are going to have to behave as if we were in a bad flu season, continuing to take some precautions.

코로나 바이러스는 질질 끌며 계속될 것이다. 몇 년 후에는 이것도 보통 독감 같이 취급을 하며 살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해 조심을 하며 살게 될 것이다.

9. I know you’ve heard that some people say the virus escaped from a lab in China. Please be assured that many governments around the world are looking at this, and that they know more about it than you do, and are going to pay attention. In the meantime, it doesn’t affect what we need to do going forward.

[Afterthought: The lab thing is a red herring. Even if it was just bad sanitation, it was an international hazard that came from China. Flu epidemics have been coming from China with some regularity. This can’t go on.

사람들은 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의 어떤 연구소에서 새어 나온 것으로 많이들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보다는 이미 세계의 많은 정부기관들이 이것을 조사하고 있고, 그들이 우리들 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알려질 때가지 우리들은 현재 하고 있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비록 이 중국 연구소 이야기는 확실한 것은 아니더라도, 중국으로 부터 출발한 많은 위험들, 특히 독감 역병 같은 것은 거의 정기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는 것이다.

10. There is research on hydroxychloroquine and other drugs that might kill the virus. Please let medical research proceed, and don’t spend your time trumpeting one success story without knowing whether others have gotten the same results.

[빠가 또라이] 트럼프가 ‘자기의 직감으로’ 코로나 특효약처럼 볼 때마다 언급하던 이것 [읽기도 힘든 화학용어]은 그야말로 먹을 때 기도를 잘 하면 낫게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인데… ‘과학적’으로 확인이나 증명이 되기 전에는 선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 먹고 5년 후에 ‘확실히’ 사망에 이르면…  [이것은 나의 철저한 상상적 의역에 불과함]

 

Near perfect Monday after…

동네를 걷다가 하늘을 보니.. 지난 밤의 폭우성 구름이 걷히며 청명한 하늘이…

 

봄바람이 시속 10+ 마일 정도로 불며,  갑자기 파래진 나무 이파리들이 계속 살랑거린다. 꽃, 나무, 송학가루가 진해지기 시작하기만 하면 시원한 바람과 빗물로 씻어 진다. 이것이야말로 천혜 天惠 라고 하던가… 거의 완벽한 날씨가…

2020년 부활절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부활주일 월요일인 셈이다. 가톨릭 전례용어로,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영어로는 ‘Monday within the Octave of Easter‘ 인 셈이다. ‘그 망할 놈’의 pandemic 코로나 바이러스만 빼면 near perfect,  gorgeous day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날, 지나간 한 주일, 특히 성주간, 성삼일 을 되돌아본다.

 

성목요일 온라인 미사, 이날은 각자의 가정에서 ‘세족례, 발씻김’ 의식을 했다

 

제일 큰 관심사였던 성삼일 Triduum  미사와 부활절 낮 미사는 예정된 대로 online live YouTube stream 으로 각자 집에서 참례할 수 있었다. 매일 미사를 이미 online으로 하고 있어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모두 live라서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TV/Monitor앞에 있어야 한다. 매일미사 (대부분 cpbc, 평화방송) 는 사실 on demand format이라 우리에게 편한 시간에 했지만 Live Format은 모든 신자들이 같은 시간에 참례하는 것이라 더욱 큰 의미와 무게를 가진다.

이번에 아틀란타(나는 ‘애틀랜타’라는 ‘괴상한’ 이름을 지독히 싫어함, 언제 누가 왜 바꾸었나?)  도라빌 순교자 성당은 주임신부님 (이영석 세례자요한 신부)을 비롯한 봉사자들이 4일 동안 정말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듯 보인다. 아마도 주임신부님의 의지였을 듯 하다. 또한 부활절 낮 미사의 강론은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문,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명 강론으로 꼽고 싶다.

안방 TV screen 위로 4일 동안 계속 마주보게 되는 주임신부님의 얼굴은 ‘교우 여러분들, 그립습니다…’ 그 자체였고 그것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였다. 어려운 시기에 어떤 목자가 진정한 목자인가는 이런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코로나 사태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미사 자체는 순교자성당의 대성전에서 평소에 하던 그대로 집전이 되었지만 일반 신자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저 ‘쓸쓸한’ 그런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부님을 보좌하는 사람들과 성가대의 보조를 최소한 인원으로라도 참여시켰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만 하다.

 

현재의 Shelter In Place (Stay Home, 칩거?) life style도 거의 한 달에 가까워 온다. 지난 주일 날, 성지주일 Palm Sunday에는 ‘용단을 내려’,  새로 태어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손자를 보러 20 마일 떨어진 곳까지 외출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 그야말로 ‘칩거생활’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Social Distancing 같은 New Normal에 아주 적당하게 적응을 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너무나 평화스럽고 건강한 나날들이 된 듯하다. 

한때 ‘난무하는’ YouTube의 함정에 빠져 우울하기도 하고 기운도 빠지곤 했었다.  그곳에 잘못 빠져서 하루 종일 코로나19 뉴스를 보게 되면 정말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오늘부터는 ‘완전히’ 그곳에서 빠져 나오니, 정말 세상이 다르게 보이며 살 맛도 제자리로 오는 듯 하다. 그래… choice다, choice… 이제는 지긋지긋한 또라이 트럼프가 10대 깡패의 얼굴로 기자들을 위협하는 희귀하고 희한한 광경을 안 보게 될 희망이 생긴다.

 

우리 subdivision의 30분 walking course ‘trail’ roadway, Guilford Circle

 

이제는 연숙과 30분 걸리는 우리 동네 Hanover Wood trail (사실은 roadway)를 걷기 시작한지 한 달도 넘는다. 이번에 느낀 사실은 이 walking trail course가 정말로 우리 나이에 알맞은 코스 [거리나 경사] 라는 사실이다. 이것으로 나는 물론이고 연숙에게 나타나는 ‘건강의 신호’는 정말 놀랍기만 하다. 고질적인 불면증도 아주 안정이 되어 혈압수치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걷는 그 자체보다 그것에서 얻는 평화의 느낌 때문일 것이라고 우리는 진단한다. 게다가 그 동안 각종의 외출로 힘들었던 뒤뜰의 텃밭을 가꾸는 일은 이럴 때 정말 완벽한 소일거리가 되었다.  이런 것도 어떻게 보면 코로나19가 준 good side effect가 아닐까? 하지만 이런 모든 예상치 못했던 ‘좋은 점’들에도 불구하고 우울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Work from Home

remote class 준비 중에 Ozzie가 학생 역할을…

 

Work from Home:  이번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niche technology에 속했던 remote commuting이 하루아침에 신경제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다행인 것은 data network infrastructure 역할을 하는  세계적 Internet backbone이 큰 무리 없이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한 data는 모르지만 아마도 full-capacity를 testing 할 만한 엄청난 data traffic이 현재 전세계를 흐르고 있을 것이다.

한 국가별로 보면 인터넷 기술을 발명하고 발전시켰던 미국은 비교적 작은 나라들에 비해서 뒤쳐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게다가 연방차원의 기술보급의 주도가 없었기에 여기서도 역시 빈부의 차이가 확실하다. 이런 것들을 보면 비록 현재 출마를 포기했지만 혁신적인 ‘사회주의 적 발상’을 선거 이슈로 떠올린 Bernie Sanders의 아이디어는 큰 설득력이 있다. 건강보험과 인터넷 이용을 특권이 아닌 기본권리, 혜택으로 보는 것, 이것은 사실 다수가 선택을 해야 하는, 간단하게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일 듯하다. 

요새 주변을 보면 사실 코로나 사태로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전 보다 더 ‘편한 생활방식’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적으로 사람들과 접촉, 접근만 못한다 뿐이지 그 이외는 사실 더 편할 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몸을 때우는’ 사람들, 그들의 정 반대의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 아무래도 무언가 불공평한 것 같지 않은가? 사실 그렇다.

큰 딸 새로니, private elementary school teacher로 현재 역시 집에서 ‘가르치고’ 있고, 그 애는 사실 요새 ‘일하기 편한’ 부류에 속한다. 대부분의 잘 사는 집의 아이들이 대부분인 이 학교는 remote class 의 준비가 비교적 잘 되어 있는 모양이다. 올해 년 말까지 이런 식의 가르침을 대비하고 있다고 하니…  새로니 약혼자도 Verizon (communications)의 software engineer로 역시 ‘편하게’ 집에서 일을 한다.  이 친구 말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피해는 커녕 더욱더 business가 잘 된다고… 역쉬~~ 왜 안 그렇겠는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Internet service가 필요하니까. 

문득,  Aldous Huxley의 futuristic classic novel,  Brave New World 의 그림이 떠오른다.  그렇다, 인터넷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서 이것이 어떻게 쓰이느냐는 전적으로 인류의 책임이다.

Corona List

 

평소에 독서의 [특히 양서良書 의] 기쁨과 효과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즐거움에 비례할 만큼 많은 책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은 언제나 힘들었다. 그것도 대충 읽은 것과 꼼꼼히 읽은 것, 더 나아가서 ‘공부하는 자세’로 읽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책 읽기를 시작하면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고 끈질긴 노력을 해야 끝을 내는데, 하루 하루가 뭔가 그렇게 바쁜 것인지 생각보다 힘들었다.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터득한 것 중에 하나는: ‘쓰면서 읽는 것’, 필살비법 必殺秘法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쓴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힘들고 typing을 하는 것이다.  편히 앉아서 편하게 눈으로 읽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겠지만, 조금 덜 편함을 택한 이 방법의 큰 장점은 ‘끝까지 다 읽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 그리고 끝이 나면 softcopy 하나가 거뜬히 남는다는 사실이다.

눈으로 읽는 것에 비해서 시간이 더 걸린다는 문제는, 시간을 좀 더 많이 쓰면 되는 것인데, 이번 코로나 사태가 바로 그것을 대폭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이 갑자기 ‘엄청’ 많아진 것이다. 이것으로 ‘실업자’인 내가 그 동안 그렇게 바쁘게 살았다는 즐거운 놀라움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앞으로 얼마간 이런 ‘한없이 긴 여유시간’이 계속될 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 끝내지 못한 책들을 하나 하나 모두 읽을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이름도 웃기는, 코로나 독서목록,  Corona List를 만들었다.  현재 진행중인 shelter-in-place lifestyle 이 끝날 때까지 이것만으로도 나는 절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1. A BURST OF CONSCIOUS LIGHT (Dr. Andrew Silverman)
  2. THE TURNING POINT (Fritzof Capra)
  3. THE TAO OF PHYSICS (Fritzof Capra)
  4. The Systems View of Life (Fritzof Capra & Pier Luigi Luisi)
  5. GENIUS (James Gleick)
  6. MY GRANDFATHER’S BLESSINGS (Rachel Naomi Remen, M.D.)
  7. TO LIGHT A FIRE ON THE EARTH (Bishop Robert Barron)
  8. 꽃삽, 이해인 글 모음 (수녀 이해인)
  9.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대표 에세이 (화가 천경자)
  10. 작은 마음의 눈으로 사랑하라, 수필집 (최인호)

 

Wild Turkey 그리고…

 

¶  이른 아침에 놀랍게도 wild turkey가 우리 집 정문 앞에 서있었다. 그렇게 가까이 야생칠면조를 보는 것은 물론 처음이다. 하지만 곧바로 나는 ‘얘가 어디서 살다가 길을 잃었나..’ 하는 지나친 연민을 떨치려고 애를 쓴다.  나중에 창문 틈 사이로 살펴보니 이미 떠난 후였다. 어디로 갔을까? 얘들은 이 동네의 어느 곳에서 사는 것일까? 왜 내가 이렇게 ‘animal, bird lover’가 된 것일까? 나는 이것도 분명히 성모님이 나를 ‘질책’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약한 것에 대한 무관심, 학대’에 대한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성모님,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나는 이미 그들을 나의 몸이라고 믿으니까요… 앞 집에 사는 Josh가 전화와 text로 친절히 알려 준 덕분이었다.

 

¶  이 조지아 지역도 드디어 어제부터 general lockdown 이 선포되었다. 우리에게는 물론 큰 차이는 없지만, 글쎄 이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낼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조심조심 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일부러’ 밖에 나가는 것을 조심하라는 의도라고 생각하자. 아직도 직장이나 가게에 꾸준히 나가는 사람들, 꽤 주변이 있는데…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너무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면 조금은 고개가 수그러지기도 한다. 이럴 때 재미로 나갈 사람은 없지 않을까? 설 형제와 이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New York, New York!

 

이제 조금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cpbc (평화방송) online mass, 오늘 아침도 거르지 않고 둘이서 참례를 한다. 이제까지 주로 집전신부들은 거의 ‘젊디 젊은’ 모습들이어서 조금 나에게는 생소한 느낌이었지만 다른 쪽으로는 내가 그 동안 많이 못보고 살았던 ‘젊음의 피’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매일 참례하는 신영성체, 평화방송, 목요일 미사

 

오늘 미사를 마치며 문득 현 사태의 모습이 떠나질 않고 잡념으로 들어온다. 오늘 것은 바로 New York, New York이란 것, 함께 Frank Sinatra의 classic hit 의 율동이 느껴지면서 곧바로 2001년 9/11의 치솟는 불길과 굉음이 귓전을 때린다. 역시 지금 그곳이 겪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시장의 환영을 받으며, 뉴욕 harbor에 도착한 병원선, USNS Comfort

 

미국의 얼굴, 미국의 저력, 미국의 허점, 미국의 역사… 모든 것이 똘똘 뭉쳐있는 그곳, 현재는 어떤가? 매일 매일 세상을 떠나는 불쌍한 영혼들의 숫자가 예전의 모든 사태를 완전히 넘어서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요인들은 이론적으로 설명이 될 것이지만, 나는 그 이상의, 높은 곳의 요인들을 생각하며 ‘운이 없었다’는 말은 그렇게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아침 cpbc onliine 미사가 끝나면서 그곳에서 현재 고통 속에서 사투를 벌리는 모든 New Yorker들을 생각하니 눈물까지 흐른다. 오늘 매일 미사의 결과인가… 강론 때문인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응원을 그들에게 보내고 싶다. 그야말로 fighting, fighting, 화이또, 파이팅 New York, New York!!

 

Reflection, March madness…

Scientist correcting & teaching… whom, Stupid!

 

¶  March Madness:    3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지나간 한 달을 뒤돌아 본다. 이상하게도 빨리 지난 듯 하면서도 사실은 근래에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것은, 3월 달 이전에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한가지 밖에 없다.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pandemic 그리고 pandemic …  한마디로 이것이 바로 March Madness가 된 것이다.

오늘 저녁 major network TV 로 pandemic news를 마지막으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인재 人災 인가, 천재 天災 인가.. 그 중간인가.  생각보다 피해가 너무나 처참할 정도로 심한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몸을 추스르게 된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대비할 시간이 그런대로 충분히 있었는데, ‘빠가’, ‘또라이’ 트럼프,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red button’을 누른 결과가 되었다. 부활절 이후 경제활동을 풀겠다고? 재선 再選의 유혹이 그렇게도 달콤했던가, 아니면 자기도취의 역병 疫病에서 아직도 못 깨어난 것인가?  결과론은 둘째치고,  몇 일전의 생각과 발언을 거의 발뺌으로 넘어가며,  비위에 거슬리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거의 깡패 수준의 발언을 서슴지 않으니.. 정말 우리는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남미 나… 하나 같이 지도자 부재현상의 홍역을 겪고 있다.

결국 이 ‘또라이’는 4월 말까지 ‘금족령’을 발표한 모양인데, 어떻게 며칠 새에 마음이 그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 모든 과학적 자료를 듣거나 읽을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니 아마도 밤에 자기 전에 ‘뺑뺑이’를 돌리는 것은 아닌지 우습기도 하다. 문제는 이제 정면으로 대처하기는 늦은 것 같고, 이 거대한 파도를 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인재에 가깝다. 240,000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는 놀라운 예보는 이제 거의 실제로 다가오는 사실로 느껴진다.

 

 

 

¶  성경통독:     3월의 마지막 날,  이번 달 성경통독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한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올 들어서 아틀란타 순교자 본당 신자 전체가 일년에 걸쳐서 성경을 전부 읽는 것을 목표로  ‘성경통독’ 계획표를 배부하여 현재 우리도 매일 읽고 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읽는 것이 이제 거의 습관이 되었다.

오늘까지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기상 시간에 맞추어 이렇게 신약성경 전체를 읽고 있는 것이 나는 은근히 자랑스럽다. 조그만 습관이나마 내가 이렇게 습관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특히 더 가슴이 뿌듯한 것이다.

‘매일 성경, 묵상글’에 꽤 오랜 동안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에 ‘통째로’ 읽는 경험은 아주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매일 말씀, 묵상의 단편 단편의 말씀들이 앞뒤로 연결되어서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살아나는 것, 흩어져 있던 수많은 점들이 하루 하루 연결이 되어서 새로운 뜻들이 너무나 편하게 이해가 되어온다.

또한 그렇게 한없이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던 ‘성경’, 특히 신약이 어쩌면 이렇게도 짧을까 하는 오만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인류의 정신적인 역사를 만들어 왔던 ‘예수부활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짧았단 말인가 할 정도였다.

오늘로서 신약성경 마지막 ‘요한묵시록 the Apocalypse’, 그것도 마지막 부분을 끝으로 신약을 다 읽게 되었다. 묵시록에 등장하는 상징적이고 종말론 적인 이야기 중에서도  four horsemen, 그 중에서도 첫 번째의 white horse는 아마도 역병 plague 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오늘의 코로나바이러스 Pandemic 과 연관되어서 아주 실감나게 느껴진다.

내일부터는 그러니까 구약 성경을 읽게 되는 모양인데… 매일 밤 우리집의 저녁기도에서 이미 구약을 읽기 시작한 것이 꽤 되어서 조금은 덜 생소할 것이지만 미리부터 겁이 안 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바보같이 잔인하고, 반복적으로 지루한 부분들이 많을까… 아직도 의아해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뿐이다. 하지만 내일부터 다시 그것을 반복하며 읽게 되니, 이번에는 또 다른 깨달음을 기대해 본다.

 

 

Long for Yesterday, Online Mass

¶   3월도 며칠 밖에 남지 않았다. 3월, 특히 중순을 넘으면서 ‘전통적 기억의 단절감’을 절실히 실감했다. 흔하게 생각나던 나와 친숙하던 어휘, 단어 등등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기억력 감퇴일까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런 것들을 모두 가리는 또 다른 것들이 머리 속에 가득했기 때문일 것, 이라고 나는 희망적인 추측을 한다. 그러니까, 일시적인 기억 상실증이라고 할까. 물론 이유는 한꺼번에 물결치듯 나를 덮친 정보의 홍수, 그것도 오랫동안 (또라이 트럼프 등장 이후) 피해오던 세속적 주류 미디어 mainstream media 로부터, 바로 그것의 위력이었다. 물론 ‘그 놈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것들이다.

 

 

작년 3, 4월의 일지 日誌달력을 본다. 올해의 것의 밑에 놓고 수시로 작년과 올해를 비교하는 것이 이제는 버릇이 되었다. 물론 1년 전의 일들이 궁금한 것도 있지만, 그 당시 만나거나 연락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그 때 만났던 장소, 날자 등을 참고로 다시 연락하는 등 편리한 것,  탁상달력의 조그마한 일지, 메모는 이제 꽤 나의 개인전통이 되어 간다.

지금 이것을 다시 보며, 작년 3,4월의 일들이 너무나 신선하고, 건강하고, 그리운 것으로 느껴진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이렇게 세상이 뒤숭숭한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Beatles의 Yesterday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작년 이 맘 때의 ‘보통, 정상, 지루한 하루하루’ 가 지금은 거의 천국처럼 느껴진다. ‘새 정상 new normal’이란 것이 작년에 비하면 거의 비상사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바로 눈 앞에서 ‘적군이 쳐들어 오는’, 실제적인 전쟁이 난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어렸을 적에는 당장 쳐들어올 것 같던 김일성 빨갱이들의 제2의 6.25의  공포에 떨었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미국에서도 거의 20년 전 9/11 사태도 등골이 오싹한 공포를 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먼 곳의 불’ 이라고 위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 COVID-19  Pandemic은 game의 scale이 완전히 바뀌어서 그렇게  간단하게 숨을 곳이 별로 없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공포다. 이렇게 ‘숨을 곳이 없다는’ 공포는 사실 아주 젊었을 때 한번 잠깐 느낀 적이 있었다. 1973년의 classic psychic horror movie였던 The Exorcist,  그 심령 귀신영화를 본 후 거의 일주일간 밤에 불을 끄지 못하고 잤다. 그때의 공포도 지금과 비슷하게… 숨을 곳이 없었던 그런 공포였다.

이번에 경험하게 된 이 ‘폐렴’ 류의 전염병, 나이와 크게 상관이 있다고 했고, 나의 나이는 이제 아주 위험한 쪽에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심각하게 간주하게 되어서, ‘일부러, 자진해서’ 관심을 두고 걱정을 하기로 했다. 그것이 나와 모두를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급적 밖에 안 나가는 것, 그것이 알고 보면 최선의 방법이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YouTube 주일 미사

이영석 세례자 요한, 주임 신부님

 

¶  오늘의 사순 5주 주일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Youtube Channel 을 통하여 ‘참례’를 하였다.  아틀란타 대교구 내의 모든 공적인 미사전례가 정지가 된 이후 대부분의 신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인터넷 비디오를 보며 하게 되었는데 우리 본당도 지난 주부터 시작을 해서 오늘이 두 번째가 되었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예전 같으면 아주 힘들었을 것들이 가능해지고 교회의 전례까지 이렇게 혜택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문제는, 개신교와 비교해서, 전례의식의 중요성이다. 쉽게 말하면 개신교는 ‘강론’만 들으면 거의 다 끝이 나지만, 가톨릭에서는 ‘전례 의식’ 자체 특히 성체성사가 절정 絶頂이기에 이런 ‘virtual mass’는 교의적 사목적으로 결함이 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몸을 ‘먹는’, 영성체가 문제다.  예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것,  그것을 물리적으로 ‘영’하는 것이 빠지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을 ‘신영성체’, Spiritual Communion이라는 기도를 통해서 보완을 하고 있지만 이것을 정식 미사라고 하기에는 신학적인 문제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대수인가? 신부님을 big screen으로 보는 것만 해도 사실 성당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만으로도 사실 감지덕지가 아닌가?

또한 이렇게 YouTube Live로 주일미사를 가능하게 한 성당의 ‘전산팀’이 있었을 듯 한데 그들에게 뜨거운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들도 현재 진행중인 코로나 사태에서 발견하게 되는 많은 ‘착한 영혼’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코로나’ 일기 X

¶  결국은 올 것이 왔다. 예상했던 공식적인 발표, 아틀란타 대교구의 모든 공식적, 공적, 사목적인 미사, 성사 활동이 일단 3주간 중단된 것이다. 다른 때도 아니고 일년 중 제일 중요한 사순절, 부활절을 기다리며 보내는 시기에 이것이 중단됨은 역시 (Inter) national emergency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하루 하루가 조금씩 늦게 흐르는 기분은 왜 그럴까? 쉽게 말해서 요새 내가 보고 듣는 경험들이 전혀 일상적인,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흡사 기상변화에 따른 비상사태, 그러니까 worst snow days 같은 사태를 겪을 때의 심정이다. 걱정, 불안은 물론이고 심지어 조마조마한 suspense, thrill,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조용했던 머리 속을 맴돈다. 무섭고 흥미로운 소설을 읽은 듯한 기분도 없지 않다.

우리가 이 ‘사태’를 잘 대처하고 있는지가 우리의 큰 관심사인데, 정말 이것은 자신이 없다. 지나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너무나 조심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다. 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음은 자신이 없지 않다.

 

¶  Pray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My Jesus, I believe that You are present in the Most Holy Sacrament. I love You above all things, and I desire to receive You

Into my soul. Since I cannot at this moment receive You sacramentally, come at least spiritually into my heart. I embrace You as if You were already there and unite myself wholly to You. Never permit me to be separated from You. Amen.

 

Let nothing disturb you,

Let nothing frighten you,

All things are passing away:

God never changes.

Patience obtains all things

Whoever has God lacks nothing;

God alone suffices.

 

St. Teresa of Ávila

 

I know that it too shall pass—and in its wake shall rise the vastness of God’s love, mercy, and recovery.  – Tod Worner

 

본격적으로 시작된 ‘온라인 미사’, 이것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실행할 것인가? 현재 우리의 영적생활에서 미사의 의미는 중차대한 것이어서 조금 생각을 한다. 주일의 미사는 ‘생방송’이니까 성당에 가는 것처럼 준비를 하고 참례하면 되는데, 평일 미사는 recording 된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라 우리가 하고 싶은 시간에 하면 된다. 평소의 평일미사 시간이 아침 9시이기에 가급적 그 시간에 고정적으로 하면 좋을 듯하다.

제일 큰 관심사는 역시 가톨릭 미사의 절정인 ‘성체성사, 영성체’인데 spiritual communion이라는 traditional 한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화방송의 매일미사에서는 이미 ‘신령성체’ 라는 기도문을 보여 주고 있다. 물질적인 예수님의 몸 대신 마음으로 받아 모시는 것이다.

 

¶  머릿속에 완전히 ‘코로나바이러스’로 가득 찬 하루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불안, 공포는 물론이고 나의 신앙을 시험하는 불행한 기회임을 느끼게 되는 등, 각종 혼잡한 생각이 나의 머리를 때린다.

특히 미사가 완전히 정지되는 것, 그에 따라서 레지오 주회합 ‘출근’이 없어진 첫날은 조금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10월 처음 ‘출근’하기 시작한 것, 이제까지 ‘신 神 들린 듯이’  앞만 보고 달린 것, 나는 성바오로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래 경우야, 성모님, 열심히 뛰었습니다. 앞으로는요? 결과적으로 큰 변화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특별한 날, 레지오 주회합과 그에 따른 활동[봉성체, 양로원]이 없어진 첫날 밤, 무슨 휴가라도 온 기분으로 밤 늦게까지 앉아서 online delight를 만끽하는 나, 나로서는 거의 taboo였던 10시 지난 밤 늦은 때의  2개의 doughnut과 stick coffee.. 와~~, 정말 이것은 희귀한 즐거움이다. 이런 때도 가끔은 있어야지.. 그래..

 

¶  정말 오랜만에 the TV를 본다. 테레비, 테레비.. good ole (analog) TV: ABC, NBC, CBS 바로 그것이 진짜 나에게는 미국의 믿을만한 fake news가 없는 테레비 뉴스였다. 그것만 보면 나에게 필요한 세상의 뉴스는 거의 다 보는 것이다. 믿을 만 했던, 아니 그것은 거의 다 정성을 다한 진실된 뉴스란 것을 의심치 않던 그런 시절들이었다.

세상이 그 동안, 최소한 5~10년 정도의 긴 세월, 얼마나 변했나? 오랜만에 시끄럽게 느껴지던 광고들을 다시 보니 조금은 반가움도 느낀다. 살아있는 사람들.. 시끄러운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이 이곳에 모두 보인다. 그래 이것이 세상이었지, 잊고 참 오래 살았다.

우리의 일상 생활 일과  daily routine이 ‘공식적’으로 바뀐 이후, 현실을 실감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며 지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별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사실 큰 변화로 느껴진다. 혹시 이것을 계기로 내가 찾았고, 매달리는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하기도 한다. 나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옛날처럼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

앞으로 이 시련의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집에 머무는 것, 나에게는 사실 통상적인 것이라, 웃기지만 특별하게 변하는 것은 없다. 매일 평일 미사, 레지오 활동하는 것, gym에서 운동하는 것, 그것을 대신하는 더 유익, 중요한 것을 더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짧지 않은 동네 산책길을 걷는 것, 또한 몇 가지 완독하려던 책들이 있으니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 동안 한눈 팔던 것들, garage, hardware tools,  yard work, sparky-fun (electronics) 같은 것을 하면 더욱 좋을 듯하다.

 

Social Distancing, Online Mass

 

 

¶  Social Distancing? Huh….  ‘社會적 距離 두기’?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새로운 시사 時事용어, 이것 한글 용어 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괴롭다.

사람들과 사이를 두라는 쉬운 그림은 그려지는데… 간단한 것이 아닌가?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갔을 때 어떻게 그들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어울리는 것, 그것일 것이다.

이유는 물론 공기로 전염되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몇 feet 사이를 두면 안전한 것인가? 말을 크게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귀찮으면 아예 사람들 근처에 가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도 역시 ‘사회적 거리’를 두는 지혜다. 당장 우리가 쌓아온 오랜 전통, 주일과 매일미사, 레지오 주회합, 봉성체, 양로원 봉사, 그리고 YMCA  gym 운동..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오랜 세월 동안 믿었는데, 이것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당분간 아니면 꽤 오랜 동안 이런 활동을 못할 듯한 예감인 것이다. 아틀란타 대교구의 본당을 위시한 한국성당의 평일, 주일미사와 레지오 주회합, 활동도 거의 마찬가지 위치에 있다. 어떻게 결정을 할 것인가? 어떻게?

신중하고 사려 깊고 지혜로운 결정의 순간들이 계속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아마 이런 사회적 곤란함은 계속될 듯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올바른 길인가? 내가 안 움직이고 안 나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임을 알면서도 그것의 ‘정도’가 문제인 것이다. 관건은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데 있다. 100명 이상인가? 10명 이상인가? 오늘 주일미사도 100명 이상일 것으로 예상하고 모처럼 online mass를 보고 가능하면 참례의식을 지키도록 노력했지만 그것이 실제 진정한 성당미사의 근처에나 갈 것인가?

 

 

¶  오늘 우리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일미사를 빠지게 되었다. 점점 느낌이 안 좋은 이 시국의 그림자가 나의 머리를 짓누르는 가운데  싸늘하고 잔뜩 찌푸린 날씨와 연숙의 ‘급성 불면증’을 핑계로 그렇게 했는데, 솔직히 크게 후회는 안 한다.  대신 급히 찾은 online (English) mass [from USA] 에 혼자서 참례해서 조금은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오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일 교중미사에  평상의 1/3 정도가 참례했다고 조시몬 형제 용감하게도 보고를 해 주었다. 그 형제의 ‘올바른 신심’은 우리도 감탄하고 있지만 우리와 조금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60대와 나의 70대의 차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다음 주부터일 듯하다. 매일미사, 주일미사, gym, 레지오… 등이 관건이다.  아틀란타 대교구에서 공식 결정을 내리면 간단한 것을 어떻게 이렇게 꾸물거리는 것인가?

코로나 斷想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그것이 그 옛날 우리에게 익숙했던 일제 자동차의 이름이 아니고 바이러스 이름이 되어서 며칠 째 머릿속을 맴돈다. 결국은 이곳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아무도 몰랐던가? 나도 마찬가지지만… 전문가 병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무식한 것인가? 이제는 공식적으로 COVID-19 Pandemic 이란 괴상한 이름을 가지고 우리의 일생생활까지 흔들고 있으니…

 

서울 시내를 가득메운 ‘일제’ 코로나 택시들, 1968년

 

결국 요점은 이것이다. 우리 몸에게 주어진 ‘방어능력’, 바로 면역력, immune system에 달려있는 것, 그것이 건강의 실체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신종의 전염병에서도 그것이 약한 사람부터 피해를 보는 것… 새삼 깨닫는다.

나는 어떤가?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숙은, 아무래도 나보다는 못하다. 앨러지의 반응을 보면 정확한가? 아이들은? 걔들은 나이 때문에 문제가 없다. 그러면?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관건인데 우리는 사실 이것을 control할 수 있는 혜택이 있기에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우리의 성사聖事생활이 제일 나에게는 관심사다. 이것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오래 전의 나쁜 습관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uncharted territory가 아닌가?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옛날의 나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당장,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생활방식은… 우선 사태를 관망하기 위해서 일주일 정도, 자제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YMCA를 쉬고, 다른 모임도 취소하는 것 등등이 있다. 기도를 더욱 더 강화해야 할 것이다. 성모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기다려보자.

우리의 재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당장 돈을 빼야 할 처지는 아니기에 이것도 시간이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매일 매일 집안에서 사는 것, 아직까지 큰 지장이 없지 않은가? 우리보다 더 나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자.

 

1969년부터 신진자동차에서 코로나를 시판하기 시작

 

 

‘코로나’ 극복을 청하는 기도

 

지난 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신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께 안부, 특히 코로나바이러스를 어떻게 극복하며 지내시는지 알아보고자 연락을 드렸더니, ‘기도문’을 보내 주셨다.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너무 말초신경만 건드리는 값싼 뉴스에 정신이 팔려서, 사실 기도라는 것을 거의 잊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공식인준 기도문’을 받고 보니 생각이 많이 정리되는 듯 느낀다. 맞다, 역시 이럴 때 기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성모 마리아께 의지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역시 교황님께서도 우리들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특별히 성모님께 드리는 청원기도를 발표하셨다.

 

 

코로나19 극복을 청하는 기도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기도문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인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코로나 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하여 주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지켜주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코로나19’ 감염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과 가족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국가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더해주시고,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투신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보호해주십시오.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저희가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운 시기를 이겨서고자 애쓰는 저희 모두가

생명과 이웃의 존엄,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배려와 돌봄으로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성모 마리아께 의지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역시 교황님께서도 우리들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특별히 성모님께 드리는 청원기도를 발표하셨다.

 

 

O Mary,

you always shine on our path

as a sign of salvation and of hope.

We entrust ourselves to you, Health of the Sick,

who at the cross took part in Jesus’ pain, keeping your faith firm.

You, Salvation of the Roman People,

know what we need,

and we are sure you will provide

so that, as in Cana of Galilee,

we may return to joy and to feasting

after this time of trial.

Help us, Mother of Divine Love,

to conform to the will of the Father

and to do as we are told by Jesus,

who has taken upon himself our sufferings

and carried our sorrows

to lead us, through the cross,

to the joy of the resurrection. Amen.

 

Under your protection, we seek refuge, Holy Mother of God. Do not disdain the entreaties of we who are in trial, but deliver us from every danger, O glorious and blessed Virgin.

 

 

拙譯

 

언제나 구원과 희망의 표징으로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시는 성모 마리아님.

굳건한 믿음으로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하신, 병자들의 건강이신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로마인들의 구원이신 당신은

카나의 기적 처럼 이 모든 시련이 끝날 때까지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심을 아나이다.

천상의 사랑이신 어머님,  저희가 하느님아버지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지고 가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며,

십자가를 향해 부활의 기쁨으로 이끌어 주소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당신 아래

피난처를 찾나이다.

영광스러운,  복되신 동정녀시여.

시련 속에 있는 저희의 간청을 물리치지 마시고

저희를 위험에서 보호해 주소서.

 

 

Pandemic! a Chinese Peril..

Where else? from CHINA, stupid!

 

 

Pandemic!!!!   먼데서 난 불구경을 하듯이 몇 주일이 지나면서 오늘은 드디어 한 나라, 바티칸이 있는 이태리, 가 완전히 비상사태에 들어갔음을 보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치사율은 그리 높지 않지만 감염률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폐렴의 일종이기에, 우리들 senior 부류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인터넷, 특히 YouTube를 통해서 피할 수 없게 들어오는 ‘가짜, 과장 뉴스’들은 심리적으로 더욱 몸을 도사리게 한다. 설상가상, ‘비과학적 또라이’ 트럼프는 연상, 걱정 없는 표정으로 일관한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pandemic의 양상이 아닐까…

대도시의 밀집구역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직장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도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우리의 ‘직업’인 레지오 활동에 지장이 오는 것, 또한 밖으로 나가며 사회적인 접촉을 못하게 되는 우려, 이유가 너무나 사치스러운가 미안하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큰딸 새로니는 학교 근무를 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아픈 아이들’이 생길까 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인데, 아직도 휴교의 뉴스가 없는 모양이다. 나라니와 Luke는 다행히 장기 출산휴가 덕분에 집에 있으니 큰 문제는 없는 듯.  어쩌다 세상이 이러게 돌아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할 수록 ‘중국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을 누를 길이 없다. 내가 이제까지 생각해온 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 적나라 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 갑자기 오래 오래 전, 1665년 영국 런던을 휩쓸던 Great Plague를 피해서 시골로 도망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Isaac Newton의 얼굴이 떠오르니…

 

현재 진행중인 정말 ‘거짓말’ 같은 소설, 연극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이야기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거의 피부로 조금씩 느끼면서,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잠재의식 속에 쌓이고 쌓였던 숨은, 부정적 감정들과 나의 숨은 치부 恥部가 잠재의식의 보호벽을 뚫고 나온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나의 부정적인 중국관 中國觀 에 관한 것이고, 특히 ‘공산당 중국’을 너무나 혐오하기에 감정적 bigotry trap 함정에 쉽게 빠지곤 한다. 한마디로 이 중공의  ‘해괴한 공산당 체제’는 인류사의 관점에서 보아도 ‘필요 없는, 아니 해로운’ 존재라고 굳게 믿는다.

20세기 세계적 골치거리, 우리에게는 영구분단, 자기 ‘인민’ 수백만을 굶어 죽이는 정권욕의 괴수, 이런 ‘해로운 존재’의 문제를 크게 못 느끼고 살았지만 문제는 이들에게 ‘돈’이라는 무기를 가지게 되면서다. 그들의 무신론적 유물론과 인류보편 도덕성이 결여된 비인간적 집단에서 이런 이상한 병균이 이제까지 안 나온 것도 기적이다. 시간문제였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사태에 책임을 질 것인가?  한가지 생각나는 것, 이들에게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도덕의식’ 이 있다면 이 ‘인재, 人災’에 대한 구체적인 국제적 보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안 되면 피해에 대한 법적 소송은 어떤가? 아마도 ‘법의 정신’이 전혀 없는 그들에겐 ‘소牛 귀耳에 경經 읽기’ 정도밖에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