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Tagged ‘Ohio State’

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Georgia 10, 굴림 10:  얼마나 멋진 type shape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멋진 것은.. 아~~ 그립다, 태곳적 太古的 둔탁하지만 경쾌한 typewriter의 잔잔한 소음들.. 지금은 원시적인 얼굴의 mono type Pica, 그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아~~ 그 예전에 ‘학문적, 지적 정보’의 총아 寵兒 였던 mechanical typewriter 의 멋진 추억들이여!

 

나와 typewriter의 첫 만남은 1960년대 초쯤이었다. 서울 중앙중학교 1, 2학년 쯤이었나.. 나의 경기고교생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 나이에 비해서 조숙했던 그 형이 나의 typewriter에 대한 꿈을 며칠 동안 이루어 주었다. 나의 꿈은 그 것을 직접 만져보고 쳐보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괴물처럼 무겁게 보였던 Underwood typewriter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내가 하도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기에 그 형이 어디선가  며칠간 ‘빌려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것, Underwood typewriter는  ‘고철’이었다. 크고, 무거운 쇠 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어린 애는 들기도 힘들 정도였다. 당시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고 학생전용 영어 신문도 학교에서 가끔 볼 수도 있었는데 typewriter는 집에서 활자체로 인쇄물을 찍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그것의 위력에 매료되기도 했다. 영자신문 비슷한 것을 찍어보기도 하며 즐거워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의 typewriter는 물론 거의 모두 ‘중고’, 아마도 미8군 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왔을 것이고 그 값은 만만치 않은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집에 가진 사람은 거의 못 보았다. 당시에 이미 한글타자기(공병우 3벌식)도 나와 있었지만 아마도 대부분 기업체에서나 쓸 정도고 학생들은 그것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 그랬나 할 정도로 당시는 거의 모든 학교 공부, 강의 시간에 손으로 받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Typewriter가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은 대학교 4학년 당시의 겨울방학 때였다. ‘무위도식의 극치’를 실행하던 당시 나는 한강 남쪽 ‘변두리’에 속했던 숭실대학이 있었던 상도동 종점 부근에 살았는데 무슨 구실로든가 시내 그러니까 종로, 명동 등지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타자학원이었다. 왜 타자학원을 골랐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좌우지간,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유학 같은 것을 가려면 타자기를 칠 수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번 씩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배우려고 한 것이라 열심히 배우긴 했다.

 

타자학원에 가서 놀란 것은 이것이다. 학생들이 ‘모조리’ 여자, 그것도 아주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은 그 ‘기술’로 취직을 하려 했기에 나와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심각한 자세였고 청일점인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학원 강사는 남자였는데, 나의 출현에 꽤 놀란 눈치였고 아주 반가운 모습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나와 사무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유일한 남자들이었다.

집에 타자기가 없었던 관계로 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비교적 값싼 방법이었고, 종로2가에 학원이 있어서 나는 매일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었기에 그것은 지루한 겨울방학을 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타자 실력이 얼마였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그것은 나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최소한 touch typing만 알면 나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 이후 미국유학을 준비할 때 나는 ‘중고’ 아주 portable 한 typewriter, swiss 제 Hermes란 것을 살 수 있었다. 싼 것은 아니었어도 미국에 가면 필요할 것 같아 미리 투자를 한 것이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 나는 이것으로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왜 그렇게 그 타자 소리가 나에게는 멋지게 들렸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당시 그것을 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 그것도 회사의 비서급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간혹 남편이 논문 같은 것을 쓰게 되면 그의 아내들이 그것을 돕느라 타자를 치곤 했다. 남자가 손수 타자를 치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남자들은 나중에 쓰지 못할지도 모를 기술 touch typing을 미리 배운 셈이 된 것이다.

미국에 와서 사실 내가 직접 typewriter를 쳐야 할 기회는 별로 찾아오지 않았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꼭 typewriter로 쳐서 내는 숙제는 별로 없었다. 쓰려면 도서관에 가면 되기에 꼭 나의 것을 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바로 electric typewriter, 바로 그것이었다. electric! 보통 typewriter는 완전히 수동, manual, 온 손끝의 힘으로 치는 것이지만 electric은 조금만 touch를 하면 electric striker가 이어받은 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나는 그것을 사고 말았다. 비록 큰 돈이었어도 당시만 해도 100% 자유스러운 ‘총각’시절.. 마음만 먹으면 아무 것이나 가능하던 그 자유스러운 시절..

 

비록 멋으로 샀지만 실제로는 방 구석에서 놀고 있었는데, 결국은 시간은 찾아왔다. 70년대 중반 쯤 나는 West Virginia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course들 중에 typewriter를 써야 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옛날 ‘타자학원’에서 배웠던 기술, 철저히 쓸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때 보니까 나의 typing 속도는 꽤 빨랐고 제출해야 할 것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 소문을 듣고 나에게 typing을 부탁하는 classmate들도 등장했다. 여자들 같으면 돈을 받고 쳐 주곤 했지만 나는 ‘취미’로 생각했기에 모두 무료로 service해 주곤 했다.

Electric typewriter의 위력은 나중에 Ohio State University에서 논문을 쓸 때 절정을 이루었다. 남들은 모두 professional typist를 찾는 고역을 치렀지만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내서 내가 모두 치곤 했다. 그 때 나는 상당한 분량의 논문을 typing했는데, 나중에 ‘책’으로 나온 그 논문집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역시.. professional이 typing한 것과 비교하니.. 완전히 아마츄어 냄새가 났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이후 typing의 필요는 사라지는 듯 했다. 가끔 영어로 쓰는 서류, 편지들 이외에는 그것이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예상을 했으랴.. digital computer의 출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집채만한’ mainframe ‘monster’ (e.g., IBM S/360), 다음에는 minicomputer (e.g., PDP11) 이것들은 거의 모두 keypunch input으로 결국은 typing기술이 필요한 것, 나중에 나온 personal (micro)computer들 (e.g., Apple II, IBM PC) 모조리 앞 모양은 거의 typewriter의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touch typing 의 위력이 돋보이는 세월이 도래한 것이다. Touch typing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나는 그때 비로소 느꼈다.. 무언가 배워서 절대로 손해를 볼 수가 없다는 사실..

typesetsEngineer들의 필수 portable ‘analog calculator’ 였던 slide rule (계산척)은 197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한 ‘digital’ calculator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향수에 젖은 ‘mechanical’ typewriter는 personal computer/printer의 등장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리운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것들,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갑자기 무언가 쓰고 간단히 ‘하~얀’ 종이 한 장에 까~만 typeset의 짧은 문장을 쓰고 싶을 때… 그것이 그립다. computer로 쓰면 고치는 것 떡 먹기지만 한 장 정도 print 할 때 얼마나 overhead가 많은가.. 귀찮고.. 그립다.. 그립다.

 

그 지겹게 공해로 찌들었던 서울의 겨울 하늘아래서 꽤죄죄한 타자학원을 다녔던, 비록 동기는 뚜렷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꽤 쓸만한 겨울방학을 보냈던 것이다. 그 touch typing 기술은 현재까지도 두고 두고 나를 도왔다. 특히 빠른 typing이 필요했던 때, 나는 1960년대 말 서울 종로에 있었던 ‘xx 타자학원’을 떠올리곤 하며 빙그레 웃곤 한다.

 

양지혜씨, 오랜 만에 생각난 이름이다. 1970년대 말에 Ohio State (University) 총각 시절 보았던 화학전공의 여자 유학생이었고, 80년대 초에는 결혼 이후 다른 인연으로 만났다. 알고 보니 연숙의 고등학교 후배였고, 그녀의 돌 지난 아들을 연숙이 babysit해 준 것이 다른 인연이었다. 그 당시, 1970년대는 미혼 여자 유학생들이 아주 귀한 시절이었고, 그녀는 상당히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연하의 어떤 교민1.5세 건축학 전공 한국학생, 김두순 (Albert Kim)씨와 결혼을 했고 아들까지 두었다. 그(김두순씨)는 나이보다 애 띠게 보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양지혜씨도 나이만큼 보이지 않았으니 둘이 잘 어울려 보였다. 그녀는 학위가 끝나고 post doc으로 학교에서 계속 일을 했는데, 그들의 아들 ‘진’을 연숙이 우리가 살던 곳에서 babysit한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는 대학원생(graduate student)아파트였던 Buckeye Village에 살았고, 우리의 큰 딸 새로니도 첫 돌을 넘기고, ‘진’이와 잘 놀아서 babysit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무렵에 양지혜씨의 어머님께서 딸인 양지혜씨를 보러 Columbus (Ohio) 를 방문하셨고, 우리부부도 초대를 받아서1 양지혜씨 아파트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어머님은 잘 알려진 ‘여류 문인’이 셨지만 아깝게도 나는 문학 쪽에는 거의 관심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 어머님의 문학계에서의 위치 같은 것은 잘 몰랐다. 그저,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 바로 ‘홍윤숙’ 여사였던 것이다. 그런 것은 문학과 그렇게 가깝지 않았던 아내 연숙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홍윤숙 여사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며 ‘문학적 담소’를 했는지 지금도 확실치 않으나, 홍 여사님은 참, 겸손하시고 기품이 있으셨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문인 홍윤숙’ 여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일부러 산 ‘홍윤숙’ 책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보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년 정도 뒤에 양지혜씨 가족은 San Francisco로 직장이 되어서 이사를 갔고, 그 이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남편 김두순씨는 건축가였는데, 참 사람이 건실하고 침착한 청년이어서 나이차이는 있어도 사귈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헤어지게 된 것이 못내 섭섭하기도 하였다. 이사를 갈 당시 그는 자기가 쓰던 ‘건축가 작업용 desk로 쓰던 문짝’을 나에게 주고 가기도 했고, 아직도 그것은 ‘기념’으로 남아있다.

Peer-to-peer file-sharing 이 한창이던 때, ClubBox (download website) 란 곳에서 ‘책’ file이란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서 모두 download를 해 두고는 그 이후로 한참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그것 중에 홍윤숙이란 이름이 보여서 자세히 보니 여사의 수필-산문집 <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을 typing한 text file이었다. 어느 누가 그런 수고를 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요새 하는 readying-by-typing을 연상케 하는 노력이었다. 나는 그 출판된 ‘종이 책’을 본 적이 없지만, 조금씩 그 글이 나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text format에 hard-return (carriage-return)을 사용한, 그러니까 computer wordprocessor에는 잘 맞지 않는 ‘고약한’ format으로 typing이 되었다는 사실로서, 이것은 전부 나의 손으로 고쳐져야만 했다. 그것은 비록 고생이긴 했지만, 끝나고 나니 책 거의 전부를 ‘읽은’ 셈이 되었다. 그러면서 양지혜씨 가족에 대한 추억도 생각나고, 홍윤숙 여사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Copyright문제를 떠나서 이미 오래 전에 ‘공개’된 이 글의 발췌 본을 이곳에 올려 놓았다.

하루 한 순간을 - 홍윤숙

70년대 수필 하루 한 순간을

그리고 우연히 위의 책 <모든 날에..> 보다 훨씬 전에 출판된 여사의 다른 책 <하루 한 순간을>이란 ‘진짜 책’ 을 집의 책장에서 찾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오래 전에 영구 귀국을 하는 어떤 아는 사람이 주고 간 책이었을 것이다. 1975년경의 책이라서 그 당시 여사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해 주어서 아주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 제일 큰 여사의 수필 산문의 매력은 신앙, 그것도, 가톨릭적인데 있고, 다음은 이 글들이 쓰여진 때가 여사의 나이 60대가 넘었을 때였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비록 여사는 비록 달필의 여성이지만, 요새 내가 느끼는 진솔한 감정 같은 것이 어쩌면 그렇게 공감이 갈까.. 놀라웠다. 특히 ‘나이 먹음에 따른’ 인생관, 세계관의 변화 같은 것도 그러했다. 그래서 이 글들은 한번 읽고 끝나는 것들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계속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기회에 여사를 찾아보니, 작년에 여사의 책 한 권이 출판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은 여사의 어머님을 생각하는 ‘참회록‘에 가까운 책이라고 했다. 전에 출판된 많은 저서에서 여사의 어머님이 이곳 저곳에 언급은 되었으나, 사실 피상적인 것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아마도 고령의 연세를 의식하셨는지, 본격적으로 어머님을 그리신 것 같았다. 세월은 흘러서 이제는 85세를 훌쩍 넘기신 여사님.. 근황은 어떠신지 궁금하기만 하다.

 

  1. 이것은 정말로 희미한 기억이어서 연숙은 숫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새로니의 첫 나들이, 1983년 2월말

김원백씨 wife 매듭전시회장으로 난생 처음 엄마와 나들이 간 새로니, 1983년 2월 말쯤

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1월 5일, 큰딸 새로니가 태어난 것은 남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가정에 첫 생명이 태어난 날이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더 생각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의미를 주어가며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는 사실 무언가 ‘인간이면 거쳐야 하는’ 인생사의 하나 정도로 생각한 정도였다. 결혼을 했으면 가정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자식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문제는 몇 명을 언제 낳을까 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둘 다 나이가 있으니까 빨리 낳을수록 여러 가지로 유익할 텐데, 그러기에는 신혼의 즐거움이 너무나 짧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딸 새로니는 아주 적당한 때에 태어난 것 같다. 신혼생활을 거의 3년이나 즐겼으니까.. 그 3년 중에 사실 임신기간을 빼면 2년이 좀 넘을까.. 내가 독자라서 사실 어머님께서 은근히 압박을 넣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으셔서 전혀 그런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을 연숙도 은근히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둘 다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 있는 OSU (Ohio State University main campus)에 재학 중이었고, 그렇게 ‘모든 것이 불안정한 학생 신분’에서 첫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어찌 치밀한 계획대로 될까. 게다가 그 당시 나는 학교 공부와 학비를 버는 교수 돕는 일로 한마디로 ‘어디론가 (잠깐) 도망가고 싶은 심정‘ 이 들 때가 있었던 시절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자식을 두게 될 한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에 짓눌리는 괴로움도 느낄 때였다. 경제적인 이유로 그 당시 나는 새로 부임한 (그러니까.. 끝 발이 없는) Turkey출신 교수 밑으로 들어가서 그가 새로 계획한 Digital Control Laboratory(DCL)를 현실화 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을 쓰고 있는데 결국은 어느 날 학과장(Dr Ko, a Chinese)이 와서, 계속 학위를 위한 공부를 계속 할 것이냐, 그곳(DCL)에서 일을 할 것이냐 결정하라고 엄포를 놓고 갔다. 한 마디로 더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하며 시간을 지체하려면 학위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골치 아픈 와중에서 연숙이 임신을 한 것이다.

이후종씨 wife가 열어준 baby shower

이후종씨 wife가 연숙을 위해서 baby shower를 열어주었다

한마디로 1982년은 나에게 학교에서는 어려운 한 해였음이 분명했지만, 다른 쪽으로 우리는 그 해에 천주교를 알게 돼서, 그 해 부활절 때는 우리 부부가 같이 영세를 받는 (축복 받을) 일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신이 된 것은 절대로 우연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유학생 부인들 중에서 임신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면서 (예를 들면 성당교우 유학생 남백희씨)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부유학생들의 기숙사인 Buckeye Village 우리 바로 옆에 살던 물리학과 유학생 배재고 출신 이후종씨 집 ‘마저’ 임신한 것을 알고 우리도 용기를 갖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의 여러 가지 사정이 불안정적이었지만, 모든 것을 무언가에 내 맡긴 기분이었다.

엄마와 첫 생명과의 첫 만남

새로 태어난 생명과 모성의 신비, 1983년 1월

임신 중에 입덧(morning sickness)이 너무나 심해서 연숙은 한 때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지만, 그 당시 새로 얻은 신앙이 그런 어려움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한 예로, 아플 때마다 축성된 성유를 바르고 기도를 하면 신통하게도 낫기도 했던 것인데, 이것도 우리의 영세동기이고, 역시 임신 중이었던 상대 고완석씨의 부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한편, 신기하고 신났던 때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였다. 이것도 부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라고 생각이 돼서 신중하게 의논한 끝에 ‘순 한글’ 식으로 짓기로 하고 어머님께 허락을 받는데, 정말 다행으로 어머님도 대 찬성이셨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한글이름 지어주기가 유행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배우리 씨라는 분께서 그런 운동을 펼치고 계셨는데 어머님께서 극성맞게 그 선생님으로 부터 ‘새로니‘ (새로운+이)란 예쁜 이름을 받아오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자이름의 오랜 전통과 호적, 족보 등을 고려하면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까지 느끼지 않았다. 또한 다행히 호적에도 순 한글이 허용이 되어서 큰 문제가 없었다.

Niagara Falls, Thanksgiving Day, 1982

만삭의 몸으로 추수감사절 때, 나이아가라 에서

연숙의 산부인과는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Riverside Hospital에 있었고 의사는 Dr Baird, 비교적 잘 한다는 사람이었고, 다른 유학생들도 이 의사에 대한 경험들이 있어서 조금 마음도 놓였다. 비록 임신 초기에 심한 입덧으로 한때 고생은 했지만 나중에는 별로 큰 문제가 없었다. 남편이 출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도와주는 Lamaze (라마즈) class에 같이 가서 출산준비 교육도 열심히 받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숙은 제왕절개 출산을 하게 되어서 자연분만을 못한 아쉬움도 남게 되었다.

첫 아이라서 그런가.. 연숙은 혼신의 힘으로 임신기간을 절제하는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고, 뱃속에서 움직이는 생명에 대해서 너무나 신기해 하며, 이런 것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자랑’까지 하곤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고생하는 여자들이 너무 불쌍한데..” 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연숙은 남자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소프트볼을 할 정도로 기본적인 체력이 아주 건강해서 제왕절개출산만 빼놓고 모든 과정이 아주 순조로웠다. 하지만 새로니가 태어났을 때 가장 큰 놀라움은 새로니가 여자아이 였다는 사실이다. 연숙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모두 남자아기일 것이라고 결론을 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그렇게들 추측을 했는데, 여자아이가 나온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남자아이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연숙의 친정은 ‘관례’대로 ‘미안한 마음’을 피력하셨고 우리 어머님은 ‘첫딸의 축복’을 강조하시긴 했지만 속마음은 짐작이 되었다. 내가 독자였으니..

29년 전 1월 초, Columbus, Ohio는 예외적으로 유난히 포근함 속에 가랑비가 내리던 날 갓난 새로니를 안고 Buckeye Village Mahoning Court의 ‘우리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금속공학과 유학생 김원백 씨의 부인(도성 엄마)가 우리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려 주었는데 그제서야 모든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우리가 이제 엄마,아빠가 되었구나, 실감을 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는 인간사가 지금 생각하니 왜 이리도 거창하게 무슨 ‘인간의 성스러운 의무‘를 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결혼을 안 하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신앙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은 역시 이렇게 ‘유별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Leader of the Band – Dan Fogelberg – 1982

 

1980년 가을, Columbus, Ohio.. Ohio State University campus.. 그러니까 31년 전 이맘 때쯤인가, 그들을 처음 만났다. 이 오랜 세월에 비하면 거의 찰나에 가까울지 모를, 기껏해야 3~4개월 정도나 알고 지냈을까? 그 당시 신혼이었던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한두 살 정도 적었던, 젊었던 부부, 남편 고석태씨, 부인 나혜성씨, 가끔 추억하고, 생각한다. 남편 고석태씨, 콧수염의 미술전공 유학생 (홍대 출신이었던가?)으로 그 해 가을학기에 OSU로 왔고, 아내인 나혜성씨는 남편을 따라서 온 것이었다.

 

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1980년

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graduate student Apt. 1980년

1980년, 여러 가지로 의미 있던 해였다. 그 해 1월 25일에 나는 서울에서 연숙과 결혼을 했고, 그 해 6월에 연숙이 이곳에 와서, 본격적인 우리의 신혼’유학’ 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 해는 또 대한민국에서 ‘해외 유학자유화’가 시작이 되어서, 가을 학기에 맞추어 ‘대거’ 유학생들이 OSU 에 도착했다. 유학자유화란 것이 자세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의례 치르던 문교부 유학시험이 면제된 듯 했다. 그러니까 지망학교의 admission만 받으면 여권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50,000+)인 OSU에도 그 전까지는 한 학기에 몇 명 정도 유학생들이 오곤 했는데, 이번은 완전히 공식이 바뀌어서 수십 명이 넘게 ‘몰려’ 온 것이다. 전공 학과도 다양해 져서 전에는 못 들어보던 학과에도 유학생들이 왔는데, 그 중에 고석태씨 부부가 끼어있었다. 그의 미술전공은 그 전에는 사실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이공계 아니면 경제학 등이 주류였었으니까.. 이때를 계기로 유학생 문화가 일시에 바뀌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지냈는데, 일 순간에 그것이 불가능해 진 것이다. 그와 때를 맞춰 ‘중공’ 에서도 ‘짱꼴라’ 유학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중국유학생이면 100% 대만 출신이었는데,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 좋은’ 중공 학생들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새로 이곳에 유학생으로 도착한 고석태, 나혜성씨를 만나게 되었다. 만나게 된 인연이란 다름이 아니고, 아내 연숙과 나혜성씨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이다. 연숙은 이대 학생회의 임원이고, 나혜성씨는 이대 학보사(학교신문)의 학생 기자였다고 했다. 그 당시 과외 활동으로 ‘중간 집단 교육‘이란 것을 같이 받을 때 만났다는데, 나는 아직도 이 중간집단교육 이란 ‘해괴한’ 이름이 무엇을 뜻 하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친목도모’를 위한 것이 아닌 조금 더 ‘고상한’ 이념을 위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교육의 지도교수가 아틀란타의 Emory University 출신인 한완상 교수였다고 했다. 나의 대학시절 활동이 모두 ‘남녀 친목도모’인 것에 비해서 연숙은 거의 이렇게 조금은 ‘심각한 정치적’인 색깔이 있었다. 나혜성씨는 이런 활동에서 만난 ‘동무’라서, 그 들은 보통의미의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기만이 알던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서 연숙은 미국에 온 후 3개월 동안 느끼던 약간의 ‘미국적’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우리는 이들 부부와 자연스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남편 고석태씨는 콧수염을 기르는, 역시 미술학도의 개성을 들어내고, 아주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미술전공 남자 유학생을 나는 본 적이 없어서 사실 공부하는 얘기는 미리부터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주로, 젊은 부부가 사는 얘기를 하곤 했지만, 가끔 여자 둘이 모두 ‘사회 문제 의식’에 경험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런 쪽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 해 1980년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우리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밖으로 나가 마구 뛰어 놀았다. 나를 제외한 이 세 명은 모두 미국에서 처음 맞는 눈이어서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오래 전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Longer – Dan Fogelberg, 1980
그 당시 추억의 oldie, 사랑이 전부였던 시절..

 고석태씨보다 나혜성씨의 기억이 더 나는 것은, 나와 조그만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해 1979년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결혼을 염두에 두고 신부 감 소개를 조금 받았던 사람 중에 나혜성씨의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좁다고나 할까.. 조금 놀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 만났던 그 여자는 한마디로 좋은 집안을 가졌고, 그들도 역시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찾던 참이었으니.. 나는 사실 ‘면접시험’에서 낙방을 한 셈이 되었다. 그때 그 집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정말 ‘무례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때 사실 ‘아버지 없는 설움’ 을 처음 느꼈다. 여자 본인은 그 아버지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역시 ‘본인의 사람됨 이전에 집안‘ 이라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나혜성씨의 얘기가, 나중에 그들이 바라던 대로 ‘근사한 결혼’을 했다고 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조그만 우연이었다.

 이렇게 알고 지내던 고석태씨 부부가 겨울이 지나고 ‘갑자기’ 없어졌다. 사실, 아직도 어떻게 없어졌는지 그 자세한 과정은 우리부부 모두 기억을 할 수가 없지만, 그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것이다. 생각에 OSU에서 별로 좋은 전망을 기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대부분 학교를 옮기는 case는 이렇게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것이고, 또한 확실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중에 듣기에 Oregon State로 갔다는 소문도 듣긴 했지만 확실치 않다.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더 궁금한 마음이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이다. 나혜성씨가 이대출신이라 연고를 통하면 알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역시 거대한 세월의 바퀴에 치어서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지금 살고 있을까?

 

 

 
Dream Dream – Everly Brothers – 1960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좋은 꿈’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좋은 꿈’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이상한’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

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날라서 사뿐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진했던’ 그런 ‘초원과 하늘’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찐~’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라이파이, ‘철인 28호‘, 왕현의 ‘저 별을 쏘라‘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잠자리 채’ 로 ‘잠자리 비행기’를 잡던 꿈이었다. 그러니까 ‘방충망’으로 ‘헬리콥터’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잠자리 비행기’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잡았다’.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좋은 꿈’ 중에 하나였다.

 청춘의 절정기에는 ‘성장, 남성 male’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이성을 그리는 환상’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건강’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변태’가 아닐까 하는’틀린’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 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최고’의 꿈은 역시 ‘지적이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가위 눌림‘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히다카 켄조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고민’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천천히, 완전히’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The Exorcist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악몽’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대머리’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서서히’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된 정도로 역사와 ‘실감’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공부, 성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성적’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PBS TV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The Paper Chase..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CBS TV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고전’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Riverview Apartment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PBS TV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진짜’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Hart)이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간신히’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고통’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Prof. Kingsfield)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Hart)을 심리적으로 거의 ‘죽이는’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아직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완전히’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안도감과 기쁨’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그런 ‘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

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역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

 

 

고윤석씨 부부, 1979

고윤석씨 부부, 1979

고윤석씨는 비록 전기과의 undergraduate에서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는 나이 때문에 그의 classmate들 보다는 우리들과 더 잘 어울리고 학교의 규칙에 어긋나지만 우리들과 같이 대학원생의 office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활발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호남(好男) 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데는 남모르게 힘들어했다. 우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상대적으로 수학실력이 같은 학년의 한국학생들보다 떨어졌고, 그 다음은 전공에 대한 정열이 그렇게 많지를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전기과의 직업전망 때문에 이 과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끔 유근호씨에게 ‘전기’에 대한 정열이 없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우스웠다. 내가 보기에는 정 반대로 보였는데..

 

고윤석씨의 부인은 연대 사학과 출신의 연상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고윤석씨의 활발한 성격으로 열렬한 구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억에, 유학생들의 파티에 가서 보자마자 춤추기를 청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구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였다니.. 나는 조금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OSU Admissions Office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누가 다음학기에 이 학교로 오느냐 하는 것 뿐만 아니고 대부분 유학생들의 상세한 학력이나 이력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부부와 나는 가깝게 지낸 편이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 특히 나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아직도 고윤석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다. 언젠가 편할 때 정식으로 사과를 하려 했지만 그것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유근호 형과 박호군씨, 1978

유근호 형과 박호군씨, 1978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비록 나와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나는 사람이다. 화학과의 박호군씨.. 고등학교는 모르겠지만 서울대 출신으로, 거의 영화배우 같은 느낌을 주는 호남형이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까 거의 ‘이상적인 남자’ 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이분은 내가 입학하자마자 부터 유근호씨 덕분에 자주 보게 되었다. 내가 유근호씨와 가까이 지낸 때문에 사진에도 남아있다. 기억에 유근호씨가 참 이 분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아마도 둘 다 천주교 신자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가까이 지냈는지도.. 그리고 이분의 부인이 남편과 같은 화학과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유학생이었고, 남편은 유기화학, 아내는 무기화학을 한다고 해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우연히 인터넷 으로 한국천주교 주교회 발행 월간 경향잡지를 보다가 어떤 여자분이 화학에 대한 수필을 쓴 것을 보았는데 저자의 이름이 조금 귀에 익어서.. 약력을 보니 역시 Ohio State 출신이었고, 이분이 바로 박호군씨의 부인인 황영애 씨 (상명여대교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첫 학기, Winter quarter는 나의 ‘기본실력’을 테스트하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이곳에서 잘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때였다. 내가 좋아하던 나의 passion 이던 control system의 여러 과목을 ‘대거’ 신청, 수강을 하게 되었다. 이것만은 내가 자신을 하던 것들이라 아주 ‘과중’하게 신청을 하고 단단히 별렀는데, 과정과 결과가 아주 ‘참담’하였다. 수강과목이 너무나 많았고, 대부분 ‘어려운’ 것들이어서 겨울을 거의 office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과목은 결국 withdraw를 하게 되었다. 제일 공을 많이 들인 과목이 digital control system이었는데, 교수가 아주 어려운 사람, Dr. Fenton이어서 사실 A학점 받는 것은 미리 포기할 정도였다. 이것 때문에 나는 사실 classical control system에서 많이 열기가 식었지만, 뜻하지 않게 친하게 된 digital system쪽으로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 겨울학기는 유난히도 힘이 들었는데,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에게는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다. 차 사고가 아니고, 내가 타고 다니던 bike(자전거)사고였다. 이것은 시카고 있을 때부터 타던 그런대로 편리한 12 speed, disc brake이 있었던 것이어서 이렇게 큰 캠퍼스에서는 정말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그런데 추운 어느 날 캄캄한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 학교 내의 어떤 길에서 신나게 달리던 중, 바퀴 밑에 무언가 걸리고, 나는 공중으로 떠서 완전히 얼굴로 아스팔트 도로에 떨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얼굴에 심한 마찰,타박상을 입게 되었다. 정신은 말짱해서 다시 office로 돌아와서 얼굴에 흐르는 피를 씻고 보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office에 남아서 공부를 하던 고윤석씨와 이규방씨가 보고 놀라서 학교병원에 전화를 하고 구급차까지 와서 나는 졸지에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여자 의사가 다짜고짜로, “Who i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하며 물었다. 아마도 나의 머리를 의심한 듯 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해서, “Jimmy Carter“라고 대답을 하고 얼굴에 상처를 소독을 한 후 나를 내보냈다. 그 상처는 거의 한 달이 갔는데, 붕대를 얼굴에 처매고 매일 학교 식당을 드나드는 것도 웃기고, 그것을 계기로 한 과목을 withdraw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봄학기 때는 조금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Dr. McGheeAutomata Theory란 과목에서는 100점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Graduate Research Associate (RA) 자리를 소개받게 되기도 했다. 그 자리는 인도 출신의 digital system교수인 Dr. Jagadeesh 가 일하던 OSU 약학대학의 연구실이었다. 그러니까 전기과와 약학대학간의 공동 연구실인 셈인데 그곳엘 가니 전에 말한 김미영씨와 최희경씨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이 연구실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1979년 여름까지 계속 되었다. 최희경씨는 경기여고, 서울대 약학과 출신의 전형적인 수재 형이고, 그녀의 남편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의사로 조금 있으면 OSU로 올 예정인, 부부 둘이 소위 말하는 KS 마크 부부였다. 김미영씨는 최희경씨의 선배였는데 이분도 은근히 공부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하는 그런 재주 있는 분이었다. 그 당시는 처녀였지만 1년 뒤에 수학과의 최봉대씨 와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된다.

가을학기가 되면서 비교적 가족적인 분위기의 우리 전기과에도 조금 찬 공기가 느껴지게 되었다. 새로운 유학생들이 도착한 것이다. 경복고, 서울대 출신의 민위식씨, 용산고, 서울대 출신의 박인규씨.. 완전히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이들은 그런대로 reasonable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절대로 chemistry는 맞지를 않았다. 이것은 참 아까운 노릇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Randy VanWarmer

1979년 OSU campus를 생각케 해 주는 classic

가을학기가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Dr. Jagadeesh 밑으로(RA) 들어가서 그의 약학대 연구실에서 digital speed control of DC motor 란 주제로 논문을 쓰는 준비를 하게 되었고 실제로 전에 이용한씨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만들어 놓았던 centrifuge control system을 내가 물려받아 거기에 쓰일 microprocessor-based(Intel-8085) motor speed control system을 design하게 되었다.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하는 과제로 논문을 쓰게 되어서 큰 부담이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약학대학이라는 인상보다 computer lab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최첨단의 컴퓨터 시설이 되어있었는데, 그 제일 큰 이유는 나의 지도교수의 약대 상대편 교수가 완전히 컴퓨터 ‘광’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 mini computer가 단과대학 연구실의 주 기종이었는데 실제로 전기과나 computer science 쪽 보다 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그 교수는 Dr. Olson이라는 사람인데 어디에서 돈이 그렇게 오는지 계속 새 것만 나오면 사곤 했다. 하기야 이것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참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온통 낮과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많이 몸을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것과 더불어 실제적인 것을 이때 많이 배우게 되어서 나중에 직장에서 일할 때 두고두고 이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같이 공부하던 이재현씨는 거의 ‘이론적’인 것에 관해서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아마도 computer hardware쪽에 큰 흥미가 없어서 그런 듯 싶었다. 이런 approach는 나중에 대학에 남게 되면 좋겠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제한을 많이 느끼게 된다. Digital hardware와 일을 하는 것은 밤을 새우고도 결과가 별로 없을 수 있는 고된 일이고, 그것에 맞는 software가 성공을 하면 그것의 ‘임자’가 대부분 ‘칭찬’을 받곤 했다. 이런 것들을 이때 뼈저리게 몸으로 경험을 해서 나중에 나는 완전히(more) software (than hardware)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고, 나의 lifelong career가 되었다.

김정국 씨, 1979

Computer Science, 김정국 씨, 1979

논문의 결과가 서서히 윤곽을 들어낼 쯤, 1979년 Spring quarter쯤에는 computer science쪽으로 새로운 유학생이 도착하였다. 이름은 김정국씨… 나와 비슷한 나이고 유근호씨와 서울공대 전기과에서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서울공대 전기과 출신인 것이다. 청주고 출신이었으니 얼마나 그때 공부를 잘 했던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자마자 우리 그룹과 잘 어울리며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김정국씨는 비록 전기과 출신이었지만 졸업 후 은행에서 이미 전산(computer)쪽으로 경험을 쌓은 경력자였다. 그래서 완전히 computer science쪽으로 공부를 하려고 유학을 온 것이고 그것도 은행에서 ‘보내준’ case여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강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나의 매부가 그 쪽에서 일을 해서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김정국씨는 도착 후 일년 뒤쯤에 부인도 뒤따라서 오게 되었고, 나도 그 당시 결혼을 해서 두 couple이 만나서 식사도 했는데, 섭섭하게도 곧 바로 Georgia Tech으로 transfer를 하고 말았다. 우리는 사실 비슷한 나이의 부부여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참 섭섭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인연이 있었는지 우리는 1989년에 아틀란타에서 정말 오랜만의 해후를 하게 되었다. 서로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김정국씨 부인은 다른 인연으로 아틀란타 한국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부부도 그곳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한참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세월의 바퀴 속에서 나중에는 거의 잊고 살 게 되었다. 김정국씨는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비교적 일찍 암으로 운명을 하고 말았다. 비록 가깝게는 못 지냈어도 항상 마음 속에 있었던 김형..이었다. 세월로 보아서도 참 오래 된 ‘지인(知人)’ 이었고, 무엇 보다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1979년 여름학기가 지나가면서 Master’s degree 과정이 다 끝이 나고 나는 곧 귀국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여서 어딘가 좀 쉴 곳이 그리웠다. 물론 다시 올 것을 예정하고 돌아갔지만 나이 때문에 결혼을 피할 수가 없어서 거의 6개월을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시 Ohio State로 돌아와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되지만 전의 2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과 환경이고 주변의 사람들도 거의 ‘완전히’ 바뀌게 된다. 특히 1980년 유학자유화가 이루어 지면서 ‘대거’의 유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게 돼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가 더 좋으냐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good ole days를 그리게 되고, 마음이 편할 정도의 학생 수가 있었던 1980년 이전이 더 그리워 짐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끝)

 

 

Ohio "Buckeye" Stadium

Ohio "Buckeye" Stadium

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나는 1977년 12월 초에 시카고에서 나의 모든 짐을 Plymouth Fury에 싣고 이곳에 도착했다. 같은 해 9월경에 한번 온 적이 있어서 그렇게 낯 설지는 않았다. 그리고 ColumbusI-80 interstate highway로 지나간 경험이 많이 있어서 더더욱 먼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그 해 가을학기, Fall Quarter에 입학을 했어야 했는데 admission office의 사무착오로 한 학기를 기다려야 했다. 대부분의 graduate course가 가을학기에 시작이 되었지만 한 학기 늦는다고 그렇게 불편할 것도 없어서 그냥 한 학기를 편히 쉰 셈이다. 나는 그 당시 그렇게 easy going,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면 ‘급할 것 없다’는 자세로 살고 있었다.

 

OSU의 graduate school로 오게 된 것은 조금은 우연이었다. 특별하게 오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우선 application fee가 없었던 것이 첫째의 인연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저 그것도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학교 electrical engineering(EE) program의 brochure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진 중에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radio telescope (전파 망원경)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 EE department의 lab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Carl Sagan의 billions of billions of stars.. 에 심취해 있던 시기였고 extra terrestrial(ET)에 관한 것들이 유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런 것들이 ‘어쩌다’ 나를 그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이 학교는 그 ‘덩치’가 아주 컸다. 단일 캠퍼스로는 학생 수 50,000 이상인, 아마도 미국에서 제일 큰 캠퍼스에 속했다. (UT Austin이 제일 크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한국유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는 좋은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그 전까지 한국유학생이 거의 없었던 학교를 다녔던 이유로 나는 사실 큰 학교가 좋았다. 덜 외로울 거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주위에 하면 즉시로 ‘야.. 외로울 시간이 어디 있냐?’ 하는 직격탄이 꼭 나오곤 했지만.

비록 radio telescope의 사진에 반해서 오긴 왔지만 나의 진짜 passion은 그것이 아니고 (feedback) control system이었다. undergraduate에서 나는 이미 advanced control system에 아주 심취해 있었다. 특히 그 당시는 microprocessor(8080-class)의 등장으로 digital control system의 매력이 상당하던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OSU 대학원 한국 유학생회장인 김광철씨에게 연락을 해서 수고스럽지만 rooming house(자취방)를 알아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갈 전기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는 한국유학생에게도 연락을 부탁하고 있어서 정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도착한 날이 12월 초였는데 모든 것이 완전히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 OSU campus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Summit street에 내가 살 자취 집으로 가 보니 한마디로 환경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이에는 사실 모든 것들이 adventure처럼 느껴져서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젊음에 따른 ‘자연적인 낙관성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기시작까지는 사실 한달 이상이 남아있고 그 나이에 완전한 자유의 12월은 느낌이 아주 좋았다. 도착하자 곧바로 학생회장 김광철씨의 연락을 받았는데, 주말마다 학교체육관에 모여서 배구를 한다고, 그리고 그곳에 전기과 학생들도 나온다고 귀 띰을 해주었다. . Lane Avenue에 있던 실내 체육관(Jesse Owens?) 으로 가 보니 한국유학생들이 나와서 배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 중에 전기과에 있던 유근호씨, 이재현씨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학과의 이규방씨도 거기서 처음 만났다.

유근호씨는 나보다 한두 살 위였고, 이재현씨는 반대로 한참 밑이었다. 육사출신의 현역 육군장교인 유근호씨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소탈해서 금새 친해질 수 있었고, 이재현씨는 막내 동생 같이 순진한 청년이라 호감이 갔고, 무엇보다도 내가 속한 전기과에 있어서 이들과 더 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외도 꽤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여학생들도 있어서 조금 색다른 느낌도 주었다. 이 당시 한국유학생(대학원)의 숫자는 아마도 100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학생회장 김광철씨도 만났는데 약학대학에 다니고 테니스를 프로처럼 치는 유학생인데 부인도 같이 공부를 하는 유학생부부였다.

이렇게 콜럼버스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12월 달에는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일 기회가 그런대로 많았다. 특히 자주 모인 곳은 Frambese St.에 있는 rooming house였는데, 이곳에 내가 알게 된 유학생들이 많이 몰려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살았던 사람은 유근호, 안서규, 이규방, 이재현, 국찬표 제씨 등등이 생각난다. 배구를 할 때, 모였다가 우르르 몰려서 그곳으로 가서 놀곤 했다. 나의 자취방은 이곳에서 그런대로 떨어져 있어서 나는 항상 차를 타고 가곤 했다. 이들은 대부분 온지가 한 학기밖에 되지 않아서, 오랜 만에 한국에서 바로 온 ‘싱싱한’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신선하고 색다른 기분을 주었다.

이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 이규방 씨와 안서규씨, 나보다 나이는 한 둘이 밑이었던 것 같지만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이규방씨는 대전고, 서울대 경제학 전공이고 안서규씨는 서울고, 서울대 출신으로 이곳에서는 Industrial Engineering을 공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은 미지의 인물인 국찬표씨라는 사람, 아마도 경영학 전공이었나. 특히 이 분의 이름이 기억나는 것이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극장표’라고 농담을 한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미혼이었지만 유근호씨와 국찬표씨는 기혼이라고 했다. 둘 다 배우자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때 유학생 연말파티가 두 군데서 있었는데 나는 이 새로 사귄 그룹덕분에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어울릴 수 있었는데, 특히 내가 차를 가지고 있어서 빠질 수도 없었다. 유학생 연말파티에서 인상적인 것 중에는 약학대의 김미영씨, 얌전하게 보이던 분인데 춤을 기가 막히게도 추었다. 여기서는 그날 신시내티에서 올라온 중앙고 후배 토목과 고광백을 만났다. 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transfer를 해서 그날 이곳에 도착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콜럼버스 한인회주최 연말파티도 가보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교포사회, 한인 교수들을 포함해서 다 보게 되었다. 그 당시 한인회장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최준표씨였는데, 국악의 퉁소를 독주하는 재주를 보여주었고 특이했던 것은 사회를 이규방 씨가 보았다는 것이다. 이규방 씨는 그 이후에도 이야기 거리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유근호씨(울고 넘는 박달재)와 안서규씨(댄서의 순정) 모두 나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 모두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게 놀아서 아주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Harrison House에서 여자 유학생들과..1977년 12월

Harrison House에서 여자 유학생들과..1977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여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 그들이 몰려 살고 있던 Harrison House란 off campus 고층 아파트에 한 그룹이 놀러 가기도 했다. 그것이 기억에 뚜렷한 것이 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남자 중에는 전기과 이재현씨, 이규방 씨(빠질 수가 없는), 미남형 오용환씨, 그리고 여자 중에는 김영라 씨, 백추혜 씨, 김미영씨, 최희경씨, 김진수씨 등등이 있었다. 김영라 씨는 한국의 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재원씨의 딸이고 서양미술사를 전공한다고 했다. 백추혜 씨는 이화여대 영양학과 출신, 김미영씨, 최희경씨, 오용환씨는 모두 서울대 약학대 출신이고 전공이었다. 이 중에 최희경씨와 김미영씨는 나중에 내가 약학대학에서 RA(research associate)를 할 때 가까이서 보게 된다.

 

이 중에 이규방 씨는 학기가 시작되면서 계속 우리들(전기과 유학생들)과 가까이서 어울리게 된다. 공부하러 숫제 우리들이 있는 EE graduate student office로 거의 매일 오곤 했다. 그는 비록 경제학도였지만 우리와 어울리는데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대전고, 서울대, 한국은행을 거친 두뇌형인데, 내가 봐도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말도 많아서 자주 구설수에도 오를 정도였다.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나중에 백추혜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백추혜 씨는 알고 보니 다른 인연으로 아내 연숙과 이대 영양학과 선후배 간이고 조교, 학생 사이로 알고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경기,서울,경복고 출신과 서울대 출신들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특히 대학교는 서울대가 압도적이었고, 나와 같은 연대출신은 그 당시만 해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2년 뒤, 1980년 유학자유화를 계기로 이런 통계는 많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유근호씨(육사), 이재현씨 (Rutgers)같은 비서울대 출신만 보면 더 가까움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 전기과에는 위의 두 사람 이외에 공부가 거의 끝나가던 이용한씨, 김태중씨가 있었다. 이 분들과는 사실 거의 교류가 없었다. 이용한씨는 내가 나중에 일을 하게 될 약학대학을 통해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1978년 나의 첫 학기는 겨울학기여서 그런지 눈을 동반한 추위가 기억에 남고, Dreese Lab에 있는 EE student office에서 완전히 밤을 지새며 열심히 공부를 하던 것이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식사도 Jones Tower근처에 있던 카페테리아에서 세끼를 먹으니까 사실 우중충한 rooming house으로 자러 가는 것도 사실 귀찮았다. 유근호씨, 이재현씨, 그리고 undergraduate에 있던 고윤석씨 (이들 모두 전기과) 등이 같은 방에서 공부를 했는데 여기에 경제과 이규방씨가 특이하게 우리들과 같이 공부를 하곤 했다. 안서규씨는 Industrial Engineering 전공인데 건물이 바로 전기과 옆에 있어서 가끔 그의 office로 놀러 가곤 했는데, 그 office가 으리으리하게 넓고 커서 무슨 사장실을 연상시켰다. 일개 대학원생이 어떻게 그런 방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정치적인 재주’ 를 가진 듯 했다. 우리들과 어울릴 때도 ‘무작정’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 당시의 즐겨듣던 hit oldie,

Do It Or Die by Atlanta Rhythm Section

다른 과의 유학생들은 식당에서 만나게 되는데 항상 같은 table에 모여서 먹곤 했다. 다른 나라 유학생들도 그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니까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들.. 수학과의 최봉대씨, 금속과의 최호진씨, 농업경제과의 노영기씨.. 이중에 최봉대씨는 나중에 약학과의 김미영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들은 물론 대부분 미혼자들이고 기혼자 부부들은 거의 학교 대학원 아파트, Buckeye Village에서 살았다. 나중에 나도 이곳에서 살게 되지만 이곳은 값도 저렴하고, 학교 bus가 있고, 주거환경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유근호씨가 이곳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이중에 생각이 많이 나는 사람, 고윤석씨.. 어찌 잊으랴.. 나이는 나보다 밑이었지만 아주 건장하고 세련된 친구다. 고등학교 때, 조기유학으로 이곳에 와서 지금은 EE undergraduate(학부)의 졸업반이었다. 이미 기혼자였는데, 부인은 연대 출신, 연상의 여인 (나의 연대(사학과) 선배)이었고, OSU의 Admission Office에서 일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학벌, 이력, 신상’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 때문인지 대부분이 대학원생들인 우리들과 어울리고 그 인연으로 우리가 쓰는 전기과 대학원생 office를 같이 쓰게 되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그 부부가 사는 Riverview apartment로 초대를 받아가서 후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계속)

 

 

  • 오늘은 “구이 팔”, 9.28, 9/28/1950: 서울수복 60주년 기념일이다. 60년의 강산이 변했고 “역사수정주의자” 들이 판을 치는 고국은 아마도 대부분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를 것이다. 예외는 물론 우리같이 조금은 알고, 기억하는 세대들일 것이다. Mafia 집단으로 변한 김씨 일당들은 “미제의 앞잡이”들이 퍼다 준 밥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김씨 세습을 강행하려 한다고.. 참, 이건 완전히 희극중의 희극이다.
  • LA area, 그러니까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지역이다. 기온이 120도가, 물론 화씨로, 넘었다고 한다. 올해는 참 기후에 관한 얘기가 끝이 없더니 이것도 한 몫을 한다. 올해는 동부,남부가 완전히 더위로 거의 “익어가는” 과정을 겪었다.  Weather Channel 에서는 올해 “최악의 여름” 상은 Washington DC로 정했다. 여러 가지 최고 기록이 있었겠지만 최고,최장의 무더위와 더불어 폭풍 같은 것도 곁들어서 그런 “불명예’를 차지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이지역도 내 기억에 정말 오랫동안 “쉬지 않고” 더웠다. 하지만 오늘은 6월 이후 처음으로  “긴팔, 긴바지” 에다 양말 까지 신고 Tobey와 집 주변을 산책을 했다. 그러니까 가을이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급속도로 단풍이 들 것이고, 첫 얼음이 얼고, 시베리아의 바람이 부는 날이 올 것이다. 특히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기다려진다.
  • 아주 오랜만에 서울의 처남형님(연숙의 큰오빠)과 email로 연락이 되었다. 2002년에 이곳에서 만나고 그 후에도 조금씩 연락은 하며 살았지만 언젠가부터 거의 연락두절로 살았다. 이건 100% 우리부부의 책임이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공짜”로 연락을 할 수 있었는데.. Skype은 물론이고 Google Voice같은 것을 쓰면 일반전화로도 분당 2 cent 정도로 전화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동안 조카들은 무럭무럭 장성을 해서 둘 다 결혼을 하고 이제는 손주들까지.. 형님말씀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오래 전 전화요금이 비싸던 때의 말이었던 것 있음을 실감한다.
  •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연숙이 이곳의 한인천주교회에서 활동하는 것 중에 레지오(마리애:Legio Marie, 마리아의 군단)가 있다. 성모님을 통한 봉사,기도단체다. 우리가 오랜 전에 영세를 받은 후에 이 단체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들어왔고, 다음이 꾸르실료..하는 “해괴” 한 이름이었다. 오랜 기간 그런 단체에 무관심으로 지냈다. 하지만 현재 연숙은 이것 두 신심단체에서 활동을 한다. 그렇게 된 것이 이제는 몇 년이 되어서 나에게도 그 단체들의 활동에 조금 익숙해진 것이다. 이것이 이제 나에게도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결국은 “결정”을 할 단계가 되었다. 나는 무언가 “큰”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마도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일단 가입을 하게 되면 3개월의 “대기 기간”이 주어진다. 그 기간이 무사히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되는 것이다.
  • 오랜만에 google earth에 몸을 싣고 “무전여행”을 해 보았다. 우선 우리 집 주변을 선회하며 그 동안 얼마나 변했나 보았다. 내가 만든 green roof shed와 Tobey fence가 뚜렷이 보이고 정문 앞으로 진달래가 만발한 것이 보인다. 그러니까 아마도 2009년 아니면 올해 봄의 모습이다. 그리고 parking garage 앞에는 나라니가 타는 Hyundai Elantra가 보인다. 그런데 그 차의 위치가 조금 이상하다. 이것은 나라니가 이사를 나간 후에 집에 잠깐 들렸을 때의 위치인 듯하다. 그러면 이것은 작년이 아니고 올해인 듯하다. 한마디로 거의 최근의 항공사진인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찍었으면 roof에 무슨 damage같은 것도 보일 지경이다. 참 좋은 건지, 으시시한 건지.. 그런 세상이 되어간다. 이제는 personal privacy란 말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까.
    Ohio Stadium near Dreese Lab

    Ohio Stadium near Dreese Lab

    내친김에 mouse cursor를 Columbus, Ohio로 흘려보았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많이 잊었다. 목적지는 Ohio State University campus주변이다. 처음 Columbus downtown에서 출발을 하여  I-71를 따라서 올라갔다. 그저 Ohio Stadium만 찾으면 되니까.. 역시 왼쪽 편으로 말굽모양의 football stadium이 보인다. 처음에는campus  바른 쪽의 High Street를 찾았다. Long Bookstore와  McDonalds를 찾는다. 그리고.. 잠깐 살았던 “rooming house” Frambes Avenue, Harrison House, Jones Tower.. 제일 마지막에 나의 Department (of Electrical Engineering)가 있던 Dreese Lab, Caldwell Lab을 찾았다. 그런 건물들이 쉽게 변할 리는 없다. 100% virtual bird’s eye tour였지만 그와 함께 time machine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유근호형과 이재현씨, 1979년 Ohio State University

같은과의 이재현씨와 유근호형이 나의 office로 놀러왔다, 1979년 8월, Ohio State University

30년 전, Ohio State University의 한인천주교회 교우들, 오랜 세월의 여파로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을 도와줄 사진들은 몇 장이 남아있다. 그것을 보면 물론 와~우리들이 이렇게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형제자매님들은 그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지금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에 그 형제자매님들을 만난 것이 우연은 아닌 듯 싶다. 이 형제자매들, 비록 잠깐 만나고 헤어졌지만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시작을 멋있게 인도해 주었다. 이들과 만나면서 우리는 “뜻밖”의 천주교 영세도 받을 수 있었다. 유아영세가 아니고 우리 둘 모두 30대가 되어서 받는 것이라 이것은 100% 자발적이었던 것이다.

왕영수 신부님 송별 야유회, 1981년 Columbus, Ohio

긴 여정의 첫날: 왕영수 신부님 송별 야유회, 1981년 Columbus, Ohio

모든 것의 시작은 우리 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던 육사출신 유근호형(대한민국 현역 소령)과 알게 되면서였다. 1977년 겨울부터 같이 공부를 했지만 그 당시 그 형은 전혀 나에게 천주교신자 티를 낸 적이 없었다.그러다가 나는 1980년 초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유근호형의 학위과정이 서서히 끝이 날 무렵, 그 형이 한번 콜럼버스 한인성당에 가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지만 가지를 않았다.그 이후, 나는 서서히 결혼에 의한 경제적인 책임감과 장래의 목표(학위, 직장)에 대한 회의로 정신적인 방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Turkey출신 교수의 밑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가 새로 구상한 digital control laboratory를 만드는 project에 참여를 해서 우선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을 했지만 그만큼 학위를 위한 과정은 더 길어지게 되었고 난생 처음 ‘깊은 고민’ 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서서히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고 바로 옆에서 충고를 해 줄만한 ‘친구’가 없는 것을 느꼈다. 정말 외로웠다. spouse가 이럴 때 친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유근호 형이 softball game을 하는 picnic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했고 우리 부부는 스스럼 없이 그곳엘 따라 갔다. 나는 어디로든 간에 탈출을 하고 싶었다. 그곳은 사실 콜럼버스 한인천주교회의 왕영수 신부님 송별 야유회였다. 그때가 아마도 1981년 여름이었을까?

1982년 부활절 영세 받던 날, Columbus, Ohio

1982년 부활절 영세 받던 날, Columbus, Ohio

그곳에는 한인성당 주임신부인 왕영수 신부님도 와 계셨다. softball game도 하고 한 나절을 그곳에서 거의 처음 보는 천주교 교우들과 지냈다. 콜럼버스는 일반 교민들이 비교적 적은 도시라 학생교우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보였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지만, 그때는 우리 부부도 몰랐다. 그것이 평생 천주교 신자로 가게 되는 첫날이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의 야유회는 왕영수신부님의 송별회를 겸한 것이었다. 왕영수 주임신부님은 신시내티 한인성당으로 가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인 신부님이 없어진 콜럼버스 한인성당은 미국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시게 되고, 그 때부터 우리는 유근호 형을 따라서 일요일에 성당엘 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생소한 천주교 미사였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개신교의 설교중심의 예배보다 신선하게 느꼈다. 그렇게 모르겠고 이상하게만 보이던 성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것은 나와 연숙(wife)의 신앙여정의 시작이 거의 비슷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정도도 거의 비슷했다. 천주교에 대해 알고 싶은 의욕도 거의 비슷했다.

영세신자를 대표해서 최옥진씨에게 감사 선물 증정

영세신자를 대표해서 최옥진씨에게 감사 선물 증정

천주교 교리공부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때에 우리와 비슷한 예비학생신자들이 몇이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왕영수 신부님을 초청해서 교리공부를 받기로 했고 그것은 정기적으로 꾸준히 진행이 되었다. 그때 같이 공부를 한 사람들은 우리부부(이경우, 전연숙), 고완석씨 부부, 김명환 중앙고 후배, 김준성씨(김태성씨 wife), 김원백씨 부인(도성이 엄마), 이화준씨, 석영중씨 등등이 있었다. 결석 한번 없이 꾸준히 1982년 부활절 영세를 목표로 왕영수 신부님을 모시고 성당 사제 관에 모여서 공부를 했고, 낙오자 한 명 없이 전원이 부활절에 모두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

softball우승후의 주의기도 1982년 Columbus, Ohio

softball우승후의 주의기도 1982년 Columbus, Ohio

우리는 착실히 신자생활을 시작하였다. 특히 연숙은 나보다 더 열심히 성령세미나 같은 곳에도 갔다. 그래서 이미 영세 받기도 전에 “무엇을” 체험한 것 같았다. 더 많은 학생, 교민교우들과도 알게 되고 어울리게 되었다. 특히 softball game은 우리들을 모이게 하는 제일 좋은 기회였다. 틈만 나면 그 넓은 Buckeye Village 잔디에서 game을 하곤 했다. 거의 pro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남백희씨, 이성철씨,김태성씨, 이동준씨, 김명환 중앙고 후배, 이철의씨..등등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중앙고 후배 김명환은 원래 soccer 선수로 학교 신문인 The Lantern에 크게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우리 성당의 softball team은 사실 막강한 실력이 있었다. 선수 대부분이 과거에 야구를 좋아하고 잘 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softball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도 있었다. 선수 중에는 성당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끼어있었다. 김태성씨와 이동준씨. 김태성씨는 우리와 같이 영세를 받은 김준성씨의 남편인데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우리들과 항상 어울리고, 이동준씨도 마찬 가지인데 야구실력이 상당하였다. 독신인 그는 비록 신자도 아니고 성당과 관계도 없는데 야구를 좋아해서 우리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softball game우승 후 남백희씨 집에서 뒷풀이

softball game우승 후 남백희씨 집에서 뒷풀이: 박재승,이철의,김원백,남백희,김명환,이화준,김태성 제씨들이 보인다.

위에 언급된 softball대회에서 우승하던 날, 우리들은 너무 기뻐서 모두 남백희씨 집에 모여서 축하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이때는 남자고 여자고 다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특히 그때 최 데레사(옥진)씨의 독창은 참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최옥진씨는 콜럼버스에서 태권도 도장을 오래하고 한인회장을 역임한 최준표씨의 여동생이었고, 그 집 식구들은 또한 모두 성당의 주요 원로 급 교우들이었다.

대부분의 학생신자들은 성가대의 member이기도 했다. 하기야 그 나이에 음악을 싫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음악실력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얼마나 좋아하느냐.. 그것이 더 중요했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organ을 따라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가 있었다. 물론 우리도 멤버였는데, 특히 천주교에서 중요한 날에는 특별히 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때 이병남씨와 남백희씨 wife가 성가대를 아주 멋있게 이끌었다. 그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명동성당의 아퀴니스 성가대 멤버였고 대학에서는 음악을 전공 했다고 했다. 이병남씨의 성악은 가히 pro급 이었다. 특히 “주 찬미하라 (라우다떼 도미눔)”를 연습하면서 가톨릭성가의 맛을 찐하게 느끼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곡의 화음을 기억할 정도다. 그러던 것이 연대동창(기계과출신) 이성철씨가 미국인 성가그룹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같이 ‘앞에서’ guitar를 들고 노래를 하게 되었다. 완전히 고전적 성가대에서 통기타 스타일의 현대판 성가대로 변한 것이다. 그때의 한국팀 멤버는 기억에: 우리부부, 이병남씨, 이성철씨, 남백희씨 부부, 박재승씨, 최옥진씨, 김명환 후배 등등이 있었다. 분명히 더 있었을 것인데, 사진이 남아있지를 않아서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미사후 성가 대원들과, 1981년

크리스마스 미사후 성가 대원들과, 1981년: 한규일,박재승,이병남,이성철 제씨들이 보인다.

우리와 같이 노래를 한 미국 팀을 우리는 Mary’s Group이라고 불렀다. 멤버 중에 Mary Karen Carey라는 lady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부부들이 member였는데 어느 특정한 교회에 소속이 된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 옮겨 다니던 철저한 volunteer같은 그룹이었다. 이성철씨가 그 그룹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기적으로 Columbus east side에 있던 그들의 집에 가서 성가연습을 하곤 했다. 그들의 성가 스타일은 ‘화음’ 이었다. 누가 부르는지 모를 정도로 화음을 중요시 했다. 그때 우리 큰딸 새로니가 갓난아기로 그곳에 같이 가곤 했는데 그들이 참 귀여워 했다. 특히 Ms. Mary Carey는 새로니에게 나무팻말에 글까지 써서 선물로 주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앞면은 새로니의 신상명세를 적어 놓았고 뒷면에는 종이에 typewriter로 짧은 편지를 써서 붙여놓았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Dear Serony,

This is your American friend Mary Karen! She is being given to you by people who knew you when you were very small. You were so very special, such a pleasant happy baby that it was easy to love you. We know that American must have seemed strange to you and your parents, but we hope that your stay here was a happy one.

We want you to know dear little Serony Lee, that you will always have friends in America, and someday when you come here we hope you will visit.

Also, we want you to know that if ever again your country is having problems, and you need us, that we will be here for your and your family. Or, perhaps it will be us calling on you and yours.

Our address is

Mary and Gene Carey
5239 Brownfield Ct.
Columbus, Ohio 43227 Telephone 614-861-1662
America

May you always be Christs special child!

Love from us all!

어느 곳에서나 사람이 모이면 ‘정치’란 것이 끼어드는 법인데 그 조그만 한인성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왕영수 신부님이 콜럼버스 성당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다분히 그런 것이었다. 학생교우들의 입장과 현지 이민자 교우들의 입장이 다른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특정한 원로 교우 분들(선우창원 박사, 임진창 교수)의 입김도 무시 못할 정도였다. 우리부부는 전혀 그런 것들을 모르고 다녔지만 시간이 가면서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학생교우는 우리의 그렇게 수수방관적인 입장을 너무 ‘이기적’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도 역시 세대간의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특히 교민들이 보기에 학생들은 잠깐 있다 떠나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리가 아주 큰” 학생이 나타나서 왕영수 신부님을 떠나게 한 것을 성토하면서 문제가 커지게 되었다. 결국은 원로 급 교우가 그 학생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주 원색적인 말로 비난을 하게 되었고 성당은 한때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위기라 함은 학생교우들 전체가 성당을 boycott 하자는 조금은 극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임시적 체제’의 한계 때문에 이런 문제는 오래 가지를 못했다.

나는 1983년 여름 무렵에 Columbus에 첫 직장(DTS: Dynamic Telecom System)이 정해지고 완전히 학교(Buckeye Village graduate residence)에서 나와서 ‘일반인’ 같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은 거의 학생 같고 생활은 현지교민과 같은 그런 것이었다. 직장생활은 사실 학교 다니던 생활의 연장선에 있었다. 다른 정착한 교민과 같이 나의 business가 없기 때문일까. 성경공부도 Buckeye Village 학생들의 그룹에서 하고 있었다. 그때 쯤에는 전에 알고 있던 80년대 초의 학생들이 아니고 80년대 중반에 새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조금씩 우리들은 성당에서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 하였다. softball game도 없어지고 가끔 모여서 노래를 부르던 즐거운 시간도 거의 없어진 후였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1988년 콜럼버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쯤에는 학생들 보다 정착한 교민들과 그런대로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 특히 이봉모씨 부부, 조동훈씨 가족(특히 씩씩 하셨던 손마리아 할머님), 돌아가신 김상식씨, 태권도 사범 최준표씨 가족, 특히 최 데레사(옥진)씨 등등 잊을 수 없는 교우들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천주교 신앙생활의 기나 긴 여정을 시작한 셈이다. 즐거웠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기억들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후로 그곳을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조금은 ‘전설적’인 기억이 되어가기도 한다. 언젠가는 한번 가야지..하는 ‘희망’을 남기었다고나 할까. 그런 ‘희망의 곳’이 여기저기 많아졌지만 Columbus, Ohio는 우리 가족이 시작된 요람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그런 곳을 어찌 잊으랴.

1980년대, Ohio State (University, OSU)를 회상하며 특히 중앙고등학교 동문들을 생각한다.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나는 1977년 겨울부터 1983년까지 그곳에서 공부를 하였고 Columbus, Ohio에서 직장생활을 1988년까지 했기 때문에 사실 한때는 고향처럼 느끼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앙고등학교 동창생들과의 추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처음에 그곳에 갔을 때는 중앙동창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의 유학생의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다른 학교에 비해서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학교가 미국에서 단일 캠퍼스로는 제일 큰 학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55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한국유학생들은 거의가 서울대와 경기,경복,서울고등학교 같은 소위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듯 하다. 정확한 것은 아니고 나의 느낌이 그러하였다. 하지만 내가 있던 전기 과(EE)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 당시 3명이 있었는데 (나를 빼고) 한 명은 육사출신이었고 또 한 명은 Rutgers출신, 그리고 나머지는 서울대 출신이었다..

Ohio State University 중앙고 동창생들

Ohio State 중앙고 동창생들, 1985년경 여름 Columbus, Ohio

그러던 것이 1980년이 되면서 해외유학 자유화가 되면서(그러니까, 문교부 해외유학시험이 없어진) 대거의 한국유학생들이 도착했다. 너무나 많아서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서로가 조금씩은 이름이나 얼굴을 알고 지냈고, cafeteria에서 식사를 할 때면 거의 dining table의 한곳에 같이 모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드디어 중앙고 출신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물론 모두 후배들이었다. 제일 먼저 온 후배가 여운광이다. 아마도 62회 정도가 아니었나. 토목과 전공이다. 그리고 김문경, 63회, 정치과, 이춘환, 64회, Biophysics , 조광동, 64회,  김종수, 기계과, 하재주, 원자력 65회, 안동규, 강행봉, 채인돈, CIS, 67회, 장경호, 68회 아.. 이제 생각이 가물거린다.

그리고 유학생이 아닌 동창들도 있었다. 정근화, 56회, 주유소경영, 손영찬, 59회, small business, 이명성, 63회, Bell Lab research scientist 등등이 있었다. 이 정도의 머리숫자를 자랑하는 동창회는 이 캠퍼스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이 모이면 언제나 장소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모이게 되면 거의 빠짐없이 참석을 하였다. 그리고 spouse들과 family가 열심히 참석을 해서 더 모임의 재미가 있었다. 이 모임에서는 특히 spouse들의 사이가 아주 부드러워서 더 잘 모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도 생각을 한다.

1988년 여름에 Columbus, Ohio를 떠났는데 그때까지 참 추억에 남을 정도로 동창의 정을 유지하였다. 나는 거의 제일 맞선배격이었지만 워낙 나는 선배 노릇에 익숙지를 않아서 어떨 때는 조금 불편한 적도 없지 않았다. 중앙고 시절을 이야기 하면 역시 사립고답게 선생님들의 변동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이야기가 잘 이어졌다. 특히 선생님들의 별명을 기억할 때가 제일 즐거울 때였다. 깨막이, 나까무라, 썪은살, 짱구, 숫장사.. 등등 추억에 어린 선생님들의 별명들.. 특히 중앙만의 전통이던 교련조회와 토요코스(토요일에 잠을 자며 학교에서 하던 camping) 등등은 후에도 이어졌음을 알고 참 반가웠다. 특이한 사실은, 김문경(연세대)만 제외하고 모조리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졸업하고 중앙고가 2차로 바뀌어서 그야말로 머리 좋은 재수생들이 대거 중앙고로 왔던 까닭이다. 내가 다닐 때는 최복현교장의 6년 계획으로 서울대 합격자가 꾸준히 늘긴 했지만 그 숫자는 사실 비교적 미미하였다. 그것이 2차로 바뀌면서 완전히 바뀐 것이다. 여운광의 이야기로, 서울공대에는 숫제 계공회라는 중앙출신모임이 있다고 했다.

Ohio State 중앙고 동창들, 1987년경 softball game 뒤에

Ohio State 중앙고 동창들이 softball game을 끝내고, 1987년경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대거 귀국을 해서 그곳에서 다시 거의 모였다고 연락도 받았다. 정말 반가웠다. 대부분 대학으로 갔는데 여운광은 Ohio State로 다시 교환교수로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부러 우리가 사는 아틀란타까지 drive를 해서 오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이.. 1993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세월이 질주하다시피 흘러버렸다. 거의 소식이 끊어지고.. 나는 Internet이 등장하면서 다시 virtual reunion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삶의 거센 파도를 거슬러 갈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October 2017
M T W T F S S
« Sep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29
3031  
Categories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