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콜럼버스 한인성당의 추억들
30년 전, Ohio State University의 한인천주교회 교우들, 오랜 세월의 여파로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을 도와줄 사진들은 몇 장이 남아있다. 그것을 보면 물론 와~우리들이 이렇게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형제자매님들은 그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지금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에 그 형제자매님들을 만난 것이 우연은 아닌 듯 싶다. 이 형제자매들, 비록 잠깐 만나고 헤어졌지만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시작을 멋있게 인도해 주었다. 이들과 만나면서 우리는 “뜻밖”의 천주교 영세도 받을 수 있었다. 유아영세가 아니고 우리 둘 모두 30대가 되어서 받는 것이라 이것은 100% 자발적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우리 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던 육사출신 유근호형(대한민국 현역 소령)과 알게 되면서였다. 1977년 겨울부터 같이 공부를 했지만 그 당시 그 형은 전혀 나에게 천주교신자 티를 낸 적이 없었다.그러다가 나는 1980년 초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유근호형의 학위과정이 서서히 끝이 날 무렵, 그 형이 한번 콜럼버스 한인성당에 가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지만 가지를 않았다.그 이후, 나는 서서히 결혼에 의한 경제적인 책임감과 장래의 목표(학위, 직장)에 대한 회의로 정신적인 방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Turkey출신 교수의 밑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가 새로 구상한 digital control laboratory를 만드는 project에 참여를 해서 우선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을 했지만 그만큼 학위를 위한 과정은 더 길어지게 되었고 난생 처음 ‘깊은 고민’ 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서서히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고 바로 옆에서 충고를 해 줄만한 ‘친구’가 없는 것을 느꼈다. 정말 외로웠다. spouse가 이럴 때 친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유근호 형이 softball game을 하는 picnic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했고 우리 부부는 스스럼 없이 그곳엘 따라 갔다. 나는 어디로든 간에 탈출을 하고 싶었다. 그곳은 사실 콜럼버스 한인천주교회의 왕영수 신부님 송별 야유회였다. 그때가 아마도 1981년 여름이었을까?
그곳에는 한인성당 주임신부인 왕영수 신부님도 와 계셨다. softball game도 하고 한 나절을 그곳에서 거의 처음 보는 천주교 교우들과 지냈다. 콜럼버스는 일반 교민들이 비교적 적은 도시라 학생교우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보였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지만, 그때는 우리 부부도 몰랐다. 그것이 평생 천주교 신자로 가게 되는 첫날이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의 야유회는 왕영수신부님의 송별회를 겸한 것이었다. 왕영수 주임신부님은 신시내티 한인성당으로 가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인 신부님이 없어진 콜럼버스 한인성당은 미국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시게 되고, 그 때부터 우리는 유근호 형을 따라서 일요일에 성당엘 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생소한 천주교 미사였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개신교의 설교중심의 예배보다 신선하게 느꼈다. 그렇게 모르겠고 이상하게만 보이던 성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것은 나와 연숙(wife)의 신앙여정의 시작이 거의 비슷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정도도 거의 비슷했다. 천주교에 대해 알고 싶은 의욕도 거의 비슷했다.
천주교 교리공부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때에 우리와 비슷한 예비학생신자들이 몇이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왕영수 신부님을 초청해서 교리공부를 받기로 했고 그것은 정기적으로 꾸준히 진행이 되었다. 그때 같이 공부를 한 사람들은 우리부부(이경우, 전연숙), 고완석씨 부부, 김명환 중앙고 후배, 김준성씨(김태성씨 wife), 김원백씨 부인(도성이 엄마), 이화준씨, 석영중씨 등등이 있었다. 결석 한번 없이 꾸준히 1982년 부활절 영세를 목표로 왕영수 신부님을 모시고 성당 사제 관에 모여서 공부를 했고, 낙오자 한 명 없이 전원이 부활절에 모두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착실히 신자생활을 시작하였다. 특히 연숙은 나보다 더 열심히 성령세미나 같은 곳에도 갔다. 그래서 이미 영세 받기도 전에 “무엇을” 체험한 것 같았다. 더 많은 학생, 교민교우들과도 알게 되고 어울리게 되었다. 특히 softball game은 우리들을 모이게 하는 제일 좋은 기회였다. 틈만 나면 그 넓은 Buckeye Village 잔디에서 game을 하곤 했다. 거의 pro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남백희씨, 이성철씨,김태성씨, 이동준씨, 김명환 중앙고 후배, 이철의씨..등등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중앙고 후배 김명환은 원래 soccer 선수로 학교 신문인 The Lantern에 크게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우리 성당의 softball team은 사실 막강한 실력이 있었다. 선수 대부분이 과거에 야구를 좋아하고 잘 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softball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도 있었다. 선수 중에는 성당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끼어있었다. 김태성씨와 이동준씨. 김태성씨는 우리와 같이 영세를 받은 김준성씨의 남편인데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우리들과 항상 어울리고, 이동준씨도 마찬 가지인데 야구실력이 상당하였다. 독신인 그는 비록 신자도 아니고 성당과 관계도 없는데 야구를 좋아해서 우리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위에 언급된 softball대회에서 우승하던 날, 우리들은 너무 기뻐서 모두 남백희씨 집에 모여서 축하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이때는 남자고 여자고 다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특히 그때 최 데레사(옥진)씨의 독창은 참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최옥진씨는 콜럼버스에서 태권도 도장을 오래하고 한인회장을 역임한 최준표씨의 여동생이었고, 그 집 식구들은 또한 모두 성당의 주요 원로 급 교우들이었다.
대부분의 학생신자들은 성가대의 member이기도 했다. 하기야 그 나이에 음악을 싫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음악실력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얼마나 좋아하느냐.. 그것이 더 중요했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organ을 따라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가 있었다. 물론 우리도 멤버였는데, 특히 천주교에서 중요한 날에는 특별히 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때 이병남씨와 남백희씨 wife가 성가대를 아주 멋있게 이끌었다. 그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명동성당의 아퀴니스 성가대 멤버였고 대학에서는 음악을 전공 했다고 했다. 이병남씨의 성악은 가히 pro급 이었다. 특히 “주 찬미하라 (라우다떼 도미눔)”를 연습하면서 가톨릭성가의 맛을 찐하게 느끼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곡의 화음을 기억할 정도다. 그러던 것이 연대동창(기계과출신) 이성철씨가 미국인 성가그룹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같이 ‘앞에서’ guitar를 들고 노래를 하게 되었다. 완전히 고전적 성가대에서 통기타 스타일의 현대판 성가대로 변한 것이다. 그때의 한국팀 멤버는 기억에: 우리부부, 이병남씨, 이성철씨, 남백희씨 부부, 박재승씨, 최옥진씨, 김명환 후배 등등이 있었다. 분명히 더 있었을 것인데, 사진이 남아있지를 않아서 모르겠다.
우리와 같이 노래를 한 미국 팀을 우리는 Mary’s Group이라고 불렀다. 멤버 중에 Mary Karen Carey라는 lady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부부들이 member였는데 어느 특정한 교회에 소속이 된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 옮겨 다니던 철저한 volunteer같은 그룹이었다. 이성철씨가 그 그룹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기적으로 Columbus east side에 있던 그들의 집에 가서 성가연습을 하곤 했다. 그들의 성가 스타일은 ‘화음’ 이었다. 누가 부르는지 모를 정도로 화음을 중요시 했다. 그때 우리 큰딸 새로니가 갓난아기로 그곳에 같이 가곤 했는데 그들이 참 귀여워 했다. 특히 Ms. Mary Carey는 새로니에게 나무팻말에 글까지 써서 선물로 주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앞면은 새로니의 신상명세를 적어 놓았고 뒷면에는 종이에 typewriter로 짧은 편지를 써서 붙여놓았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Dear Serony,
This is your American friend Mary Karen! She is being given to you by people who knew you when you were very small. You were so very special, such a pleasant happy baby that it was easy to love you. We know that American must have seemed strange to you and your parents, but we hope that your stay here was a happy one.
We want you to know dear little Serony Lee, that you will always have friends in America, and someday when you come here we hope you will visit.
Also, we want you to know that if ever again your country is having problems, and you need us, that we will be here for your and your family. Or, perhaps it will be us calling on you and yours.
Our address is
Mary and Gene Carey
5239 Brownfield Ct.
Columbus, Ohio 43227 Telephone 614-861-1662
AmericaMay you always be Christs special child!
Love from us all!
어느 곳에서나 사람이 모이면 ‘정치’란 것이 끼어드는 법인데 그 조그만 한인성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왕영수 신부님이 콜럼버스 성당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다분히 그런 것이었다. 학생교우들의 입장과 현지 이민자 교우들의 입장이 다른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특정한 원로 교우 분들(선우창원 박사, 임진창 교수)의 입김도 무시 못할 정도였다. 우리부부는 전혀 그런 것들을 모르고 다녔지만 시간이 가면서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학생교우는 우리의 그렇게 수수방관적인 입장을 너무 ‘이기적’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도 역시 세대간의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특히 교민들이 보기에 학생들은 잠깐 있다 떠나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리가 아주 큰” 학생이 나타나서 왕영수 신부님을 떠나게 한 것을 성토하면서 문제가 커지게 되었다. 결국은 원로 급 교우가 그 학생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주 원색적인 말로 비난을 하게 되었고 성당은 한때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위기라 함은 학생교우들 전체가 성당을 boycott 하자는 조금은 극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임시적 체제’의 한계 때문에 이런 문제는 오래 가지를 못했다.
나는 1983년 여름 무렵에 Columbus에 첫 직장(DTS: Dynamic Telecom System)이 정해지고 완전히 학교(Buckeye Village graduate residence)에서 나와서 ‘일반인’ 같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은 거의 학생 같고 생활은 현지교민과 같은 그런 것이었다. 직장생활은 사실 학교 다니던 생활의 연장선에 있었다. 다른 정착한 교민과 같이 나의 business가 없기 때문일까. 성경공부도 Buckeye Village 학생들의 그룹에서 하고 있었다. 그때 쯤에는 전에 알고 있던 80년대 초의 학생들이 아니고 80년대 중반에 새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조금씩 우리들은 성당에서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 하였다. softball game도 없어지고 가끔 모여서 노래를 부르던 즐거운 시간도 거의 없어진 후였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1988년 콜럼버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쯤에는 학생들 보다 정착한 교민들과 그런대로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 특히 이봉모씨 부부, 조동훈씨 가족(특히 씩씩 하셨던 손마리아 할머님), 돌아가신 김상식씨, 태권도 사범 최준표씨 가족, 특히 최 데레사(옥진)씨 등등 잊을 수 없는 교우들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천주교 신앙생활의 기나 긴 여정을 시작한 셈이다. 즐거웠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기억들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후로 그곳을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조금은 ‘전설적’인 기억이 되어가기도 한다. 언젠가는 한번 가야지..하는 ‘희망’을 남기었다고나 할까. 그런 ‘희망의 곳’이 여기저기 많아졌지만 Columbus, Ohio는 우리 가족이 시작된 요람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그런 곳을 어찌 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