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나에게 2014년은 어떤 세월들이었을까? 어떤 일들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고, 궁극적으로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조금은 심각하고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도 좋을 듯 하다.
요새는 일기를 특별히 쓰지 않아도 최소한 ‘일지’같은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남는다. 제일 좋은 source가 email이나 blog같은 것이 아닐까? 별로 쓰지 않는 사람들도 최소한 email 같은 것을 통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을 할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많은 일들이 거의 모두 social media를 통해서 Internet (cloud)에 archive가 되는 세상이라.. 숨길 수 없이 거의 반영구적으로 남기도 한다.
나는 조금 집착적으로 ‘인생 기록’을 남기려는 부류에 속해서 큰 어려움 없이 나의 개인역사를 들추어 볼 수 있다. 1년 정도는 어제 일을 보듯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며 숨은 의미가 있기에 그것을 모두 남기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것이다. 특히 글을 pro처럼 쓰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너무나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으로 남길 수는 있고 그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나중에 누가 보건 안 보건 상관이 없다. 그것을 남긴다는 그 행위자체가 나에게 중요한 것이니까.
2014년, 내 나이 66세를 보내던 일년.. 66세면 어떨까, 한 세대 전 같으면 벌써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라졌을 것 같고, 예전의 언론인 이진섭씨의 65세 만세론(萬歲論)에 의하면 이제는 덤으로 사는 나이긴 하지만, ‘과학적 세상’이라는 요즈음에는 그런대로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나이 일지도 모른다. 작년에 비해서 내가 얼마나 ‘느려’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2014년.. 무엇을 기억하고 싶고 잊고 싶은 것일까.. 생각을 해 본다.
Atlanta Snowmageddon, Snowcalypse, SnowJam: frozen on highway:
전 요셉, 황 프란치스코 형제님들.. 모두 듣기만 해도 가슴이 편안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 되었다. 특히, 전 요셉 형제님의 이름은 요새같이 추운 날씨에는 따뜻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전 요셉 형제님, 나와 같은 돼지띠 동갑으로 친구, 형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분명히 나보다 생일이 위였으니까, 형 뻘이 되겠지만 그런 것 서로 따지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가깝게 알고 지낸 것이 불과 1~2년도 채 되지를 않았다. 채 깊이 알게 되기도 전에 전 요셉 형제님은 ‘갑자기’ 조상의 땅,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을 해 버렸다.
그때 느낀 기습적인 쌀쌀한 가을바람과 같은 공허감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것이 벌써 1개월 도 지났나? 귀국 후 잠깐 온 소식에 시차 적응으로 매일 잠만 잔다고 하더니 드디어 카톡(카카오톡)으로 잇달아 소식이 날아왔다. 계속 시차 적응 중이고 눈이 내린 고국의 모습이 멋있다며 사진도 보내왔다. 온양으로 간다고 했으니 아마도 온양 교외의 어느 곳인가 짐작을 한다. 처음에는 사업을 시작하려고 ‘땅’을 보러 갔다가 찍은 곳이 아닌가 했던 나의 상상이 너무나 우습기만 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드디어 ‘사람의 사진’이 왔다. 전요셉 형제님의 모습이 ‘대한민국화’가 되었는지.. 완전히 ‘때 빼고 광 낸’ 모습이어서 놀라고 반갑기도 했다. 역시 평생을 살아온 고향 물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탁한 공기를 걱정하며 귀국을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 그런데 이 사진을 누구와 같이 찍었는데.. 처음에는, 귀국하면 꼭 보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분을 만나서 같이 찍은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곧 이어서 사연인즉.. 그 분은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우리부부는 반가웠다. 황 형제..
우리 부부가 봉사자로 수녀님을 보조했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교리 반에 2014년 부활절 영세를 목표로 가족 4명, 전원이 등록했던 황 형제였던 것이다. 그 사진은 황 형제가 대전 노은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전 형제와 같이 찍은 것이라고 했다. 영세명은 교황님과 같은 프란치스코.. 너무나 반가웠다. 황 형제님 부부 가족은 작년 가을 교리반에 등록 후에 사정이 생겨서 교리반 공부 도중에 올해 초에 ‘영구’ 귀국을 했는데.. 아마도 귀국 후에 교리공부를 계속해서 부부가 같이 영세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이 모두 영구 귀국을 했고 이렇게 다시 재회를 하며 찍은 사진.. 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4년여 전 레지오 활동단원을 갓 시작하며 나에게는 생소한 ‘병자기도’ 란 것이 있었고 그 대상 중에 레지오 단원이며 중병환자였던 전요셉 형제가 있었다. 멋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 기도를 했다. 생전 처음 ‘남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속으로는 회의도 많이 있었지만 ‘성모님의 군단’의 규율을 따라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열심히.. 1~2년 후에 우리는 기적과도 같은 소식에 놀라기만 했다. 그 ‘중병’이 ‘완치’가 된 것이다. 본인도 놀라고 레지오 단원들도 놀라기만 했다. 겨우 신앙을 찾아가고 있었던 레지오 햇병아리였던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살아있는’ 신앙공부가 됐다. 그 이후 전 형제는 가끔 보는 정도였지만 만나면 최소한 얼굴을 익힌 정도가 되고 건강에 대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 말 우연히 인사를 하다가 나와 돼지띠 동갑임을 알게 되었고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near-perfect chemistry가 있음도 느끼게 되었다. 서로 가끔 식사를 같이 하며 서서히 조금씩 상대방을 알게 되어갔지만, 역시 나이 들어서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됨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이곳에 오래 산 이유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았지만 전요셉씨는 내가 오랜 전에 알았던 ‘그 옛날’ 기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는 너무나 그립고 신선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우리는 무언가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가깝게 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너무나 서로 다른 개인 역사가 너무나 흥미롭지 않을까? 작년 말에는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준비하며 난타와 중창에서 가깝게 어울리기도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고, 봉성체, 교구 성체대회 같은 곳에도 같이 참가를 하는 등 오랜 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도 들었다. 전 형제님은 어르신들과 참 잘도 어울렸는데, 그때 받는 느낌은 한마디로 ‘사람이 좋다’라는 그런 것이었다. 순진하기도 하고, 우직하기도 한 세상을 약삭빠르게 사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성품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는지 결국은 귀향을 결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한마디로 조금은 더 쓸쓸한 기분을 남기고 사라진 돼지띠 사나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우선 섭섭함을 달래는 수 밖에 없나.. 전 형, 그곳에서 하시는 일 순조로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 4th Advent candle: 대림절 넷째 주.. 촛불이 켜졌다. 역시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하는 반복되는 탄성과 탄식이 귓가에서 속삭인다. 예년 같으면 제발 시간이 천천히 흐르며 ‘성탄의 기분’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을 것이지만 올해는 ‘기억나는 인생’을 통해서 처음으로 비교적, ‘그래.. 조금 빨리 가도 좋다’ 하는 자신감을 유지하였다. 그것이 멋지게 성공을 한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Christmas Past에 완전히 묻히고 빠지고 즐기던 예전과는 조금 다른, Christmas Present 를 사는 느낌.. 바로 이것이 나에게 처음같이 느껴진다. 올해 성탄의 제일 큰 선물이라면 바로 이 느낌이다.
과연 Christmas가 무엇인가.. 어렴풋이, 가늘게 그 ‘진짜’ 의미가 느껴지는 올해 성탄시즌.. 몇 주간 굳세게 hold했던 carol, movie, decors, tree등이 쏟아져 나오고 일년 전의 반가운 모습들, 특히 나의 favorite ‘YouTube‘ holiday movies들을 나는 반긴다. 그 중에 일년 만에 다시 보는 movie, Christmas Wishes, 작년 이맘때 이런 류의 영화를 ‘계속’ 보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작년과 같이 올해도 12 days of Christmas를 보낼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희망, 그 희망은 하늘만이 알 것’인 성탄절에 시작되는 멋지고 값진 시간들이 될 것이다.
성탄 3일 전에 첫 모습을 보이는 작고 귀여운 Christmas tree
¶ family room Redux: 우리 집 family room은 dark wood panel 벽으로 둘러싸인 중후하고 무거운 느낌의 방이지만 우리 가족에게, 아이들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저녁 식사 후에 모여서 가족적 시간을 보내던 보금자리 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러니까 가족 모두에게 추억의 방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주로 Chinese food를 takeout 해서 ‘퍼지고 누워서’ family video (VHS movie)를 즐기곤 했다. 그 시간이 그렇게 편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고 어른이 된 아이들에게도 ‘가족의 추억’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모두 떠난 후 그 방은 완전히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먼지가 쌓이는 ‘빈 방’으로 방치가 되었다.
4 년 전쯤 아래 층 전체를 IKEATundra laminate flooring으로 바꾸었는데.. 우리 집 수준에 알맞은 선택이었지만 내가 직접 install을 한 관계로 ‘문제’가 많았다. Flooring 에는 완전히 ‘시로도, amateur’ 였던 나는 그 당시 몇 개월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을 얼마나 save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을 할 정도였다. 남들은 그렇게 쉽다고 했던가.. 나는 무언가 ‘운이 나빴는지’ 고생을 한 것이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 우리 가족 추억의 보금자리, family room의 floor에 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습한 관계인지.. 마루 자체가 ‘울렁울렁’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floor은 습하면 ‘팽창, 확대’가 되어서 wall edge (가장자리)에 1/2″ (반 인치) 정도 여유를 두게 되어있고 나는 그런 instruction을 충실히 따랐는데.. 그래도 문제가 있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나의 불찰임이 들어났다. 실수로 ‘벽돌 벽’ 쪽에 여유를 두지 않았던 것이고 그곳으로 마루가 팽창, 밀리면서 마루가 뜨는 것이다. 다른 방은 문제가 없는데 왜 유독 family room은 그랬을까.. 역시 그곳에 제일 습한 방이었고, 나의 실수로 벽돌 벽 쪽에 더 여유간격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Pro들은 이런 문제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tongue & groove 방식의 flooring은 ‘원칙적’으로 설치 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고치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산 IKEATundra 는 설치가 제일 쉬운 종류도 아니다. 생각 끝에 새것으로 갈기로 하고 지난 여름에 Home Depot에서 dark tone 색으로 골라서 구입을 했지만, 설치하는 것은 미루고 미루고 하다가.. 무려 4개월 뒤에 끝을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산 것은 Hampton Bay laminate floor (from Home Depot) 인데, review가 아주 좋았고, 값도 우리에게 맞는(경제적), 색깔도 family room에 걸 맞는, walnut tone, 밤색 계통으로 방에 편안하게 잘 맞았다. 설치를 하며 놀란 것은 그 동안 제조 기술이 발전을 했는지.. 설치하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4 년 전 IKEA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쉬웠던 것이다. 이런 정도면 2 층의 방들도 이것으로 모조리 해 볼까 하는 꿈같은 상상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80/20 rule (마지막 20% job에 80%의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을 깜빡 잊어서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거의 며칠 일이 걸렸다.
아이들이 떠난 이곳 family room을 어떻게 ‘재활용’할 것인가.. 새로 단장이 된 이곳은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인데.. 역시 ‘사람이 머무는’ 방으로 만들려면 내가 그곳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라서 이번 기회에 아예 ‘다목적 multi-purpose’ 인 곳으로 쓰기로 하고 일단 나의 ‘낮 서재’로 만들기로 했다. 나의 ‘day work’ desk를 이곳으로 옮기고 guest (아이들 포함) 가 오면 desk를 한 쪽으로 옮기면 ‘멋지게’ guest room역할을 할 것이다. 손님이 거의 없는 요즈음 이지만.. 그래도 누가 알랴? 이렇게 해서 추억의 보금자리가 다시 ‘살아있는’ 보금자리로 탈바꿈을 하게 되는데.. 새해에는 생산적, 창조적인 보금자리의 추억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해 본다.
¶ ‘Legio’ fatigue: 조금 피곤한가.. 그것도, 왜 레지오 ‘Legio‘, (레지오’는 Legio Mariae, Legion of Mary의 한국식 표현) 가 피곤한가.. 요새 부쩍 그런 느낌을 받고 있어서 그런 나 자신도 싫고, 애써 이런 생각을 피하려고 한다. 하기야 60중반이 넘은 나에게 ‘나이와 때가 늦은 레지오 활동 단원 4년’이면 아주 짧은 기간도 아니고, 그 동안 정말 ‘뒤를 안 보고’ 쉬지 않고 열심히 달리기만 했기에 이 나이에 피곤을 안 느낀다면 그것도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그 4년간’ 나는 정말 많은 것을 깨닫고, 느끼고, 배우고,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보았고, 별로 피곤하게 느끼지도 않았다. 그것이 암만 생각해도 나에게는 별난 현상이었고 예외적인 세월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서히 조금씩 느끼는 것은 나는 분명히 ‘성모님과의 개인적인 친근감‘ 이다. 그냥 친근감이 아니고 ‘개인적’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지난 ‘4년간 노력’의 보람이라고 할까..
그것은 좋은데.. 내가 속한 ‘성모님의 군대’에 조금씩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그야말로 badnews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현재 좋은 idea가 없다. 그것이 2014년이 지나가며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문제없던’ 우리 쁘레시디움(레지오의 기본적 활동 단체).. 나를 그 동안 편안하게 감싸 주던.. 것도 결국은 ‘평균적인, 아니면 평균 이하인 인간의 집단’으로 변하고 있는지, 실망의 연속을 맛 보고 있으니.. 레지오 교본을 암만 읽어도 단기적인 전술적인 해답이 안 보인다. 그 위에 ‘고목처럼’ 버티고 있는 상급 평의회 역시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구태의연한 모습들, visionlessconventional wisdom만을 자랑하는 자세가 답답하기만 하다. 짧지 않은 역사와 ‘덩치’를 갖추게 된 현재, 왜 ‘영웅적’인 도전을 못하는 것일까? 현재 가지고 있는 potential은 생각보다 훨씬 큰데.. 제대로 크지를 못하고 있다. 비싼 시간을 할애한 ‘영웅적’인 단원들의 시간들, 아깝지도 않은가? ‘그들’이 바뀌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바라기 전에는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결국 내가 입장을 바꾸어야 하는 것인가? 참 어렵다. 이것이 fatigue.. 권태기라면 일시적이기를 성모님께 빌어보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성모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case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2014년 성탄절이 3일 남았다. 올해의 성탄과 새해는 무언가 확실히 다르고.. 아니 달라야 한다. 그 다른 것은 바로 수 십 년 만에 처음 느낀다고 확신하는 진정한 평화일까? 평화, 진정한 평화가 바로 이것인가? 비록 근래 특히 2010년 이후는 그 전보다 더 평화를 느꼈다고 할 수 있지만 올해는 그 차원이 다르다. 바로 성모님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밀어주신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벼랑으로 밀어주시긴 했지만.. 죽이시지는 않고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밀어 주셨다. 하늘에 계신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성모님께서 나를 친히 돌보아 주신다는 ‘기발한 생각’이 언제부터 들었을까? 처음에는 그렇다고 우격다짐으로 믿으려 노력을 했지만 현재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믿어진다. 아마도 이런 나의 변화가 올해 내가 받은 최고의 천상의 선물일 것이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가정의 평화는 나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Tobey와 Izzie가 뛰고 달리고 자는 모습들.. 최고의 평화스런 선물이다. 연숙과 ‘매일’ 가까운 본당에서 미사에 참가하는 것 어떻게 표현을 하랴? 그렇게 으르렁대던 새로니 나라니도 이제는 여엿한 숙녀처럼 행동을 하고 가족을 돌본다. 이것이 올해 현재 우리가 받고 있는 은총의 선물 들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각하고, 뛰고 미사를 갈 수 있는 건강을 가지고 있다. 이것보다 낳은 선물이 어디에 있을까?
비록 우리는 불안한 심정을 떨칠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것도 솔직히 성모님의 보살핌을 느끼고, 기대하며 산다. 그런 평화를 느끼는 것이다. 비록 고향의 가족들과의 관계를 해결 해야 하는 거대한 숙제가 있지만 그것도 크게 걱정을 하고 싶지 않다. 노력을 하면 될 것이다.
비록 나의 신앙적인 ‘본부’인 레지오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고 있지만 이것도 역시 천상적인 도움을 기대하고 싶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 투성이인 이곳.. 어떻게 문제들을 헤쳐나갈까? 하지만 최소한 현재 우리들은 그곳에서 벗어나 평화를 즐기고 싶다. 특히 이런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더욱 평화를 느끼고 싶다.
¶ Our Lady of Guadalupe: 과달루페의 성모님! 처음 이 성모님 발현에 대한 것을 듣게 된 것은 ‘아마도’ 무척 오래 전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당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저 ‘마음 약한 영혼들’이 애타게 찾는 천상의 예수님의 어머니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89년 쯤 위스컨신 매디슨에 살 적에 한국에서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위스컨신 주립대로 ‘연수 차’ 오셨던 김희선 신부님 (본명을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께서 멕시코에 다녀 오시면서 과달루페 성모님 상 사진을 선물로 사가지고 오셔서 우리집도 한 장을 받았고 기회가 있으면 벽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그 당시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신부님으로부터 분명히 들었을 터이지만 역시 ‘관심 밖’이어서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것이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의 전부였다.
25년을 fast forward한 현재는 어떠한가? 오늘이 바로 천주교 전례력으로 ‘과달루페 성모님 축일 feast’로 나는 처음으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뜻 깊게 축일 미사를 맞았다. 그렇게 바뀐 나 자신이 나도 놀랍기만 하다. 세월의 장난일까.. 아니면? 이제는 이 특별한 발현의 배경, 역사, 뜻, 그리고 인류 구원사, 세계사에서의 의미까지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발현 사건’은 알면 알게 될수록 신비롭고 특히 ‘과학과 신앙’의 각도로 깊이 연구한 결과는 가히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 ‘발현’을 ‘믿는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지금 나 자신은 100% 이 발현 ‘역사’를 믿는다.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시대 이후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이 ‘계속’ 인간들에게 발현하시는 첫 번째 이유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같이 자신이 없는 신앙인들을 ‘응원’하시는 그것이 첫 번째 발현 이유가 아닐까?
1531년 12월 9일에 지금의 Mexico City 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과달루페 성모님이라고 하는데 이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성모님 자신이 발현 당시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특별한 뜻은 없는 것 같다. 16세기 초 멕시코 지역은, 물론 Aztec 아즈텍 원주민들이 살던 땅이었지만 Spain 에게 ‘정복, 개척’되기 시작했던 때였고, 따라서 가톨릭 신앙이 전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그 당시 Aztec ‘나라’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원시,태양숭배 종교로 통치되던 때였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인적 희생물’로 바쳐지던 공포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당시 이들의 태양숭배 인간제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오래 전 Indiana Jones (Temple of Doomed) 영화에 나온 그런 장면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손으로 꺼내는 끔찍한 장면.. 그런 ‘공포 정치’속에서 살던 원주민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이 ‘사랑과 자비’를 기치로 가톨릭 신앙을 전하던 때에 ‘과달루페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이다. 발현은 그래서 어떤 원주민 ‘아저씨’ Juan Diego (후안 디에고?) 에게 나타나셨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지고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 하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아저씨’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지역이 피지 않는 장미를 ‘증거’로 Juan Diego에게 주시고 그것을 의심 많은 주교에게 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가 그 장미를 tilma(망토) 에 담아 왔고 그것을 주교에게 보여주려 펼치자.. 장미를 쏟아지고.. 그 tilma에는 ‘찬란한’ 성모님의 상이 ‘각인’이 되어 있었다. 선인장으로 만든 그 tilma에 그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더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주교님은 그대로 땅으로 쓰러지면 경배를 하고.. 성모님의 요청인 ‘성모님 성당’을 그곳에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과달루페의 역사’가 되었다. 이후 그 ‘성모님 상’에 많은 피해와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기적적’으로 극복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발현 자체도 기적이고 그 ‘상본’이 하나도 변질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도 기적이고.. 발현 이후 수많은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것도 기적이고… 기적의 집합체인 것이 바로 과달루페 발현이다. 신학적으로도 신세계인 America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성모님 사랑의 배려로 충분히 설명이 되기도 한다.
이런 ‘흔한’ 배경 이야기 보다 나는 그 유명한 성모님 상본이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더 관심이 많이 간다. 과학적 분석만으로는 기적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과 ‘수학적’ 과학의 차이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특히 무신론적인 일본인 과학자가 digital image analysis를 통해서 분석한 성모님의 눈동자 속에 반사된 Juan Diego(목격자)와 주교의 모습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울 뿐이다. 나에게 정말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성모님 발현의 목적은 분명하고 뚜렷하다는 것.. 특히 초 현대를 살아가는 요새의 인간들에게… 절대로 희망은 있다!
¶ Tobey, 10! 12월 9일.. 은 우리 집‘수컷강아지‘ Tobey의생일이다. 그런데올해는조금특별한생일인 10살생일을맞았다. 이런중요한날을완전히잊고넘어갈뻔했는데 Tobey와오랜역사를같이해온 East Cobb Animal Medical Center에서 ‘축하카드‘가 email로와서알게되었고곧아하.. 올해가 10살생일이구나..하는탄식이나왔다. 10살이면이제인간나이로나와맞먹는것이기에더욱감회가새로웠다.
현재까지 Tobey는건강이좋은편이다. 하지만 10살이라는느낌이그리좋은것은아니다. 한마디로본격적인노년으로접어든것인데, 주변에서듣고보고한것으로앞으로일어날가능성이있는문제들을생각하며우울해지기도한다. 진희네집의개, ‘공주‘는하루아침에눈이멀었고, 다른쪽에서는개가제대로걷지를못한다. 사람은아프면말이라도하지만이애들은어떨까? 사회적, 문화적으로이제개나고양이들은거의 ‘사람같은식구‘대접을받게되어가고우리도큰차이가없다. Tobey에게무슨문제가생긴다면사람못지않게정말슬플것같다. 열살을맞이한 Tobey.. 우리와사는동안건강하게살아다오!
¶ Bernadette.. 버나뎃, 벨라뎃따, 흔히들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님 발현의 목격자 소녀의 이름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의 Bernadette는 캐나다에 사는 나의 중앙고 동창 정교성 딸의 이름이다. 인 친구는 매년 꼬박꼬박 크리스마스 카드를 12월 초만 되면 보내준다. 요새 우표를 붙여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련만 이 친구는 고집불통으로 ‘인터넷’을 외면하고 이렇게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해 왔다. 오랜 전에는 나도 우편 카드로 답을 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작은 친 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언제나 성숙한 친구, 전통적인 천주교인’ 정교성.. Wife를 병으로 잃은 후 재혼한지도 꽤 오래 전인데 이제는 딸 (큰 딸인지 작은 딸인지 확실치 않지만) Bernadette이 결혼을 한다고 결혼 안내장을 동봉해 주었다. 청첩장이 아니고 청첩장을 예고하는 card였는데.. 신부와 신랑감에 대한 아주 자세한 설명이 그곳에 있었다.
신랑감은 테네시주 내쉬빌 출생의 미국인, 그리고 evolutionary biology (진화생물학) 박사학위 소지자 로서 캐나다 시민인 Bernadette을 Toronto의 Royal Ontario Museum에서 post-doctoral research하면서 만났다고 한다. 교성이는 딸이 두 명이 있는데 Bernadette이 장녀인지 차녀인지.. 확실치 않다. 오래 전에 보내준 가족사진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 집도 두 딸이고 해서 ‘동지’같이 느꼈는데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을 보니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두 딸은 요새의 풍조대로 결혼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더욱 부러운 것이다.
신랑이 우리가 사는 인접한 테네시 주 출신이라서 혹시 결혼식을 그곳에서 하게 된다면 이 친구가 미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십 년 만에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우리 둘은 서로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을 것 같은데.. 교성이는 옛날 부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별로 변하지 않았을 것에 비하면 나는 ‘완전히 변한’ 모습이라서 더욱 그렇다. 하기야 내년에는 더 늦기 전에 캐나다 쪽으로 여행을 할 계획도 있어서 딸의 결혼과 상관없이 한번 보게 될지도 모른다.
친구야.. 정말 축하한다. 정든 딸을 보내는 아비의 심정 나는 현재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어찌 섭섭하지 않겠니?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순리가 아니겠니.. 덤덤하게 행복을 빌어주며 보내렴.. 인자하신 성모님과 주님의 가호가 딸 부부에게 함께하기를 빌어본다.
올해로 다섯 번째 맞는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 2014.. 나의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올해 마지막 ‘의무’ 행사가 오늘 있었고 ‘무사히’ 막을 내리면서 2014년 ‘beginning of end‘ 를 장식하게 되었다. 진정 2014년이 우리에게서 떠나게 되는가.. 아직도 실감은 안 가지만 아마도 그런가 보다. 66년 동안 보낸 12월이 그렇게 대수인가.. 그저 지나가는 세월의 한 부분인걸..
레지오 단원의 생활은 일년 열두 달 그렇게 ‘재미 만’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렇게 레지오 마리애의 창시자이신 Irish, Frank Duff는 ‘절묘하게도’ 년 말에 조금은 긴장을 풀고 ‘신나게 놀라고’ 공식적으로, ‘의무적인’ 여흥 시간을 마련했던가. 여흥을 곁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가진 annual member reunion 의 이 시간은 평소에는 잘 못 보던 Curia 동료 단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에 아주 느낌이 색다른 행사다.
요새 세상이 그러하듯이 이곳도 대다수의 단원들이 ‘자매님, 여성’들이어서 남자들만이 갖는 ‘형제 의식’은 기대할 수 없지만, 사실 이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이런 환경에 아주 익숙해진 것일까?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평생 못 느끼던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란 것이 너무나 신선한 것이다. 통상적인 ‘이성’이 아닌 그들도 ‘나와 같은 human being, 인간’이었구나 하는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 이것도 레지오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갈 뻔했다.
올해의 총 친목회는 이제까지와 다른 입장으로 맞게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연숙이 Curia간부인 관계로 나도 ‘말려들게’ 된.. 그러니까 남들 보다는 조금 더 행사자체에 깊이 개입했었지만 올해는 오랜 만에 ‘홀가분하게’ 둘이서 조금 더 쉽게, 여유 있게 맞게 되었다. 그런 다른 쪽에는 조금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특히 작년에 극소수의 ‘희귀동물’ 남성단원 몇 명이 ‘의기투합’, 모여서 중창을 했던 것.. 올해는 ‘상전벽해’ 같은 느낌으로, 조금은 황량한 기분이 되었다. 특히 돼지띠 동갑으로 나와 chemistry가 잘 맞았던 전요셉 형제가 영구귀국을 한 바람에 나는 더욱 외롭게 되어서, 작년의 ‘신나던 총친목회’가 이제는 나에게는 그리운 과거가 되었다.
올해는 우리 쁘레시디움 자비의 모후, 그리고 ‘옆 동네’, 평화의 모후가 함께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오승근의 hit곡으로 ‘장기자랑’을 했는데, 4번의 연습을 거쳐서 그런대로 즐기며 공연을 끝냈다. 예전 같으면 이런 곡을 합창으로 하려면 ‘반주’가 골치겠지만 이제는 완전히 karaoke문화가 성숙이 되어서 웬만한 pro들 같이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다른 team은 숫제 미리 vocal, 노래까지 recording으로 가져와 lip singing만 할 정도였다. 하기야 출연해서 즐기고, 관람해서 즐거우면 목적은 달성된 것이니까,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친목회를 하면서 새로운 단원을 알게 되면 친목회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데 올해는 의외적으로 연세대 ‘대선배님’을 알게 되었다. 같이 노래 연습을 하면 자연적으로 사람을 알게 되는데 이 선배님도 나의 노래 partner로 인사를 하게 되었고 연세대 11년 선배님임을 알게 된 것이다. 올해 친목회에서 느낀 두드러진 것 중에는 Curia전체가 ‘젊어진’ 느낌을 받은 것인데 물론 이것은 반가운 현상이지만 다른 쪽으로는 우리들 세대, 그룹은 이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조금은 편치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일까.. 할 수 있는 그 때까지 뒤를 안 보고 ‘성모님의 지시’를 받으며 뛰면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 HolidayLIFE Kickers: 12월 들어서 처음, 우리들이 정기적으로 찾는 YMCA gym을 갔었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12월’의 냄새와 모습이 그대로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듯 했다. TV같은 곳에서 그런 ‘너무 이른 요란함’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별 수 없이 미국 최대의 휴일의 공기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decoration, light 각종 ‘최신’의 것들이 선을 보였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데 성공은 했지만 basketball court에 있는 indoor running track에서는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나의 gym routine이 30분 걷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데, 오늘 그곳에 가 보니.. 무언가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아~~~ 하는 한숨이 나오고.. 이것을 오랜 세월 잊고 살았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오랜 전에는 ‘재수가 좋아서’ 이것을 보게 되었고 12월의 멋진 holiday 기분을 만끽하곤 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어쩐 일인지 이 공연을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이것은 YMCA member중에서 대강 60대부터 80대까지의 ‘아줌마’들, 30명 정도가 모여서 이맘때면 공연을 하는 Kicker club인데, 주로 Christmas에 맞는 곡들에 맞추어서 30분 정도 dance를 하곤 한다. 물론 몇 개월 전부터 ‘맹연습’을 하는 것은 가끔 목격하곤 했다. 순전히 ‘재미와 사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춤 솜씨 같은 것은 큰 문제가 될 수가 없다.
요새는 나 혼자 track을 걷기에 (연숙은 이제 100% 수영만 하게 되었다) 아깝게도 연숙은 못 보았지만 나는 이 ‘100% 백인 아줌마 (사실은 할머니지만)’들의 performance 전체를 running track에 서서 볼 수 있었다. Dancer들 숫자나 관객들 숫자가 거의 비슷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신나게 즐기며 춤을 추는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이들 공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이들의 주 연령대가 70대 정도니까 나보다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Irish처럼 생긴 파란 눈의 white ladies.. 오랜 전의 미국의 모습과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이들이 몇 십 년 전에 이 땅의 ‘주인’들의 모습이었다고 할 것이다. 생각나는 것이 오랜 전에 없어진 화보잡지 LIFEmagazine이었는데, 아마도 이들이 바로 LIFE generation이 아닐까? 이들만 해도 지금은 완전히 normal이 된 ‘깡패 같은‘ feminism같은 것에 ‘물들지’ 않았던 세대였을 것이고, 99% 가정주부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분명히 white power를 만끽하며 살았을 것인데.. 지금은 어떨까? 앞을 보고 뒤를 보아도 UN 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종 인종이 득실거리는 YMCA gym에서 옛날을 얼마나 그리며 살고 있을까? 40년 전부터 미국을 보아왔던 것을 생각해도.. 참 이곳 미국, 많이 변했고, 그것도 지금은 더 무섭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놀라움까지 느낀다.
¶ Crabby Feast plus: Thanksgiving Holiday가 끝나자 마자 마리에타 Y형 댁에서 우리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세시봉’ 그룹이 다시 모였다. Y형 댁은 작년에 큰 ‘喪상’을 당했던 관계로 2년 만에 방문을 하는 셈인가.. 그 동안 그 바쁜 중에도 수만 불짜리 kitchen remodeling 이 끝나고 pikapika한 granite island가 위용을 자랑하고, custom made cabinetry가 초현대식 편리함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 집의 old clucky 한 것들을 비교하면 조금 기분이 쳐지긴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우리의 현재 더 중요한 value는 이런 것들 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역시.. 우리도 저런 것들을 가지고 싶은 바람이 없다고 하면 솔직하지 못할 것이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날 정말 과장을 해서 ‘수십 년’ 만에 배가 터지도록 humongous Alaskan king crab을 포식을 하게 되었다. ‘옛날’ cash가 풍성하던 시절에는 가끔 이것을 사다가 집에서 즐긴 기억이 있었고, 심심치 않게 seafood restaurant에서 온 가족들이 먹기도 했다. 이날의 king crab은 정말로 king다운 큰 놈들이었는데 seafood wholesaler에서 직접 사온 것이라고 했다. 이것들과 맛있는 wine이 곁들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덕분에 오랜만에 취한 기분을 느끼는 저녁이 되었다.
오랜 만에 간 이곳에서 kitchen remodeling만이 아닌 다른 것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home music studio라고나 할까.. 최신 digital technology를 총 동원한 amateur music production system 이었다. 모든 것들이 excess로 치닫는 근래의 사회풍조인가.. 모자람 없이 모든 것들이 ‘사치’쪽으로 흐르는가? 돈과 시간이 넘쳐흐르는 ‘적지 않은’ 60대들은 보기에도 행복하게 보인다. 젊은 시절보다 더 짜릿한 ‘자극’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새로 악기를 배우는 것이 있는데 이 집주인은 saxophone에 심취되어서 배운지 불과 몇 년 만에 이제는 거의 수준급에 들어섰다.
반주 없이 불던 saxophone은 조금 dry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 장만한 이 home studio는 우선 값이 $1500에 달하는 ‘준’ 프로 급’으로 거의 완전한 background sound (karaoke sound)를 갖추고 있다. 10000여 곡을 저장하고 있는 software와 4 channel audio mixer, usb amplifier, Bose portable speaker.. 이것을 써서 ‘live’ saxophone연주를 ‘눈 감고’ 들으면 어느 full-sound Cafe에 온 느낌을 준다. 나에게는 ‘그림의 떡‘ 으로 보이지만, 생각한다.. 조금 더 머리를 쓰면 1/3정도의 가격으로 비슷한 성능의 gear를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 백일몽일지도 모르지만.. 생각하는 것은 cash가 필요 없으니까..
¶ My first ever ‘Kindle book‘Kindle.. Kindle book.. 이 말도 꽤 오랜 전부터 들었고 Amazon.com에 가보면 항상 눈에 뜨이는 것이다. electronic book의 ‘한 종류’라고 하지만 지금은 한 종류가 아니라 그것 electronic book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며칠 전 처음으로 kindle book title하나를 $5 정도에 구매를 하였다. 종이 책은 $12 정도니까.. $7 save한 것인가? Kindle은 순전히 software format이지만 Amazon.com의 hardware Kindle tablet 과 짝을 이루면서 이렇게 electronic book의 champion format이 되었다.
여기의 ‘교훈 lesson’은 역시 Apple Company, Steve Jobs의 철학.. software/hardware의 ‘완전한 지배, 장악, control’ 이라고 할 것이다. Microsoft의 모든 ‘문제’는 hardware를 ‘지배’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것이 납득이 간다. ‘옛날’에는 사실 software와 hardware는 완전히 ‘다른 장사’의 영역이었고.. 그것은 거의 gentlemen’s agreement 같은 불문율이었는데.. 완전한 profit, control crazy monster Apple company (사실은 Steve Jobs’)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후로, 그들, Steve Jobs’ Apple의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profit을 보고 침을 흘리며 모든 사람들을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떼돈을 벌려면 software/hardware가 완전히 ‘붙어버린’ whole system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kindle book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버금가는 ‘책’의 역사는 ‘변함 없는’ 종이역사였지만 그 오랜 역사가 ‘느리지만 무섭게’ 변하고 있다. 종이가 없어지는 역사인 것이다. 종이 책과 ‘전자’ 책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analog와 digital의 차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간단하고, 성의가 없는 대답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대답이 정답이다. ‘부드러운 느낌의 analog’와 ‘명암이 뚜렷한 차가운 digital’의 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부드러운 analog 촉감의 종이 책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제공하려는 노력을 한 것이 바로 Amazon.com의 Kindle book이다. 근래 수많은 ‘종이 책’들이 Kindle option을 주고 있고, 종이 책보다 항상 싼 값이다. 구매 즉시 download를 받을 수 있고 이제는 PC나 Smartphone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Kindle hardware tablet 이 없어서 PC에서나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 시간을 desktop PC에서 보내고 있는 관계로 이것이 나에게는 최적의 solution이다. 하지만 ‘화장실’ 에서 이 ‘책’을 볼 수가 없는 것은 분명히 아쉽고, 따뜻한 아랫목 (전기장판)에 누워서 볼 수 없기에 역시 digital은 차게만 느껴진다.
¶ Candle Reflections: Candle, 초, 양초, 촛불.. 우연히 나의 주변에서 ‘초, 촛불’이 눈에 뜨임을 느끼게 되었다. 눈에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 ‘가슴으로 보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기에 이렇게 초와 촛불이 ‘나의 눈에 보였다’ 는 사실이 나에게는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촛불이 보이는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인가? 나는 이것이 나에게 전보다 가슴이 조금 더 열렸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 둘씩 초와 촛불이 주변에 늘어나고, 날씨가 싸늘해지면서 그것들의 느낌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성당에 가도 제일먼저 하는 일도 촛불을 켜는 것이고, 요새같이 대림절이 되면 4개의 초가 하나 둘씩 켜져 가는 것을 보게 되며 그 의미도 생각하게 되고, 나의 서재에도 초의 숫자가 더욱 늘어난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soothing candles’ light & aroma, my desk
이와 더불어 반세기 전의 추억을 더듬기도 한다. 6.25 (a.k.a. Korean War)가 끝난 후에 대한민국에서 산 사람들이면 서울이나 지방, 시골이나 거의 예외 없이 겪었어야 했던 ‘전기부족’.. 제한 송전 등으로 ‘초’는 100% 필수품이었음을 알 것이다. 낮은 물론이고 저녁, 밤에도 정기적으로 전기가 나갔다. 낮에 전기가 나가는 것은 가정집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전제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라디오’ 나 전기 다리미가 있었지만 낮에 하는 방송은 거의 없었고 당시에는 battery radio가 흔해서 (군수품) 전기가 필요 없었다. 문제는 밤인데.. 가족이 모두 모인 때 전기불이 없으면 초를 켜야 하고 그것으로 제대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은 어두울 때에도 밖에 나가서 놀거나, 대부분 일찍 자는 수 밖에 없었다.
조그만 방에 초를 한 개 켜놓으면 그 주변에 모두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숙제도 하곤 했는데..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오손도손’한 가족의 따뜻함을 촛불과 함께 나누던 시절이었다. 특히 겨울에는 방 한가운데 ‘화로’를 놓고 무언가 ‘구어 먹으면’ 그 정취는 지금 도저히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1960년대가 되어서 전기사정이 좋아져 ‘촛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살 때는 아주 가끔 날씨관계로 정전이 되면 ‘혹시’ 초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너무나 편리한’ flash light들이 있어서 역시 초를 볼 기회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희한하게도 ‘신앙, 종교’적 연계로 촛불이 포근하게 나에게 다가온 것..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올 겨울에는 유별나게 촛불을 키고 촛불을 바라보며 ‘회상, 명상’을 하고 싶어 진다.
Fleeing for freedom.. 아주 오래 전,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했던 표현.. ‘자유를 찾아서‘.. 여기서 이런 표현을 쓴 사람은 ‘박연미‘라는 젊은 ‘탈북자’ 여성이다. 탈북자들의 이야기들은 이제 아주 흔하게 들을 수 있고 인터넷의 도움으로 널리 알려지게도 되었다. 이제는 지리적으로 너무나 먼 느낌이 들어서 피부로 느껴지는 정도는 미미해졌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참 슬픈 이야기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이런 강도집단들이 21세기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심정 뿐인 것이다. 도대체 UN이란 국제단체는 왜 만들어 놓은 것인가? 이런 강도집단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UN군의 개입이 아니던가? 이런 휴전선 바로 넘어서 역사상 유례없는 Kafka의 연극이 재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남쪽의 ‘주사파와 좌파’의 인간들.. 어떻게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가?
박연미 양의 슬픈 이야기도 역시 인호형의 email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은퇴자들의 잡담’ 정도로 생각을 했지만 조금씩 자세히 내용을 알아가고 보니.. 이것은 ‘큰 뉴스’ 감에 속했다. ONE YOUNG WORLD라는 국제 젊은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본인 자신이 ‘영어’로 폭로를 한 북한의 실상이었다. 처음에는 보내진 YOUTUBE의 VIDEO를 보았고 나중에 그녀가 참석한 국제회의를 찾아서 그곳에 발표된 그녀의 blog을 보게 되었다. 그 국제회의는 18세부터 30세까지의 전세계의 ‘지도자 급’ 젊은이들이 초청을 받고 모인 명망이 있는 회의였다. 비록 역사는 4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young DAVOS (Davos World Economic Forum)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권위를 자랑한다고 한다. 2년 전에는 미국의 Pittsburg에서 열렸는데 그 당시에는 미국의 전 대통령 Bill Clinton이 초청연사였고 올해 Dublin, Ireland회의에는 전 UN 사무총장이었던 Kofi Annan이 초청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어떻게 박연미 양이 ‘초청’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현재 어느 나라에 속한 것도 궁금하지만 현재 나이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녀가 폭로하는 북한의 참상, 실상은 comic할 정도로 믿기가 힘든 것들이지만 나는 그것들이 단편적일 수는 있어도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다. 충분히 그것이 가능한 ‘강도 집단 3대’ 가 북녘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연미 양이 국제사회에 눈물로 호소하는 골자는: 김씨 왕조 이야기를 그만 보도하고 탈북자, 강제노동의 참상 들을 보도 하고 그들을 ‘구해주자‘는 것이다. 이런 것에,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 짱께들은 도움이 거의 안 되는 듯하고 다음이 남녘에 있는 동포들이 아닌가? 쏟아지는 돈에 치여서 정신을 못 차리거나 북녘을 아직도 사모하고 있는 정신병자들이 지도자 층에 득실거리는 현재 사정으로 이곳도 거의 도움이 안 될 듯하다. 남은 곳은 역시 지구 반대쪽에서 그런대로 ‘객관적’인 눈을 가진 해외 동포들이 아닐까? 하지만 이곳 동포들 중에서 정신 나간 주사파, 좌파들이 득실거리기는 마찬가지니.. 과연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