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 OF LOVING
BY
ERICH FROMM
머리말
I. 사랑은 기술인가?
II. 사랑의 이론1 사랑 –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한 해답
2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사랑
3 사랑의 대상a. 형제애
b. 모성애
c. 성애 性愛
d. 자기애
e. 신에 대한 사랑III. 사랑과 현대서양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IV. 사랑의 실천역자 후기
머리말
사랑의 기술 技術에 대한 편리한 지침 指針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반대로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 成熟度와는 관계 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 感傷 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어서낼리티 personality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한다. 위에서 말한 성질들이 희귀한 문화에서는 사랑하는 능력의 획득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은 그 누구든 참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몇 명이나 알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이 어려움을 알아보고 사랑에 도달하는 조건들을 알아보는 일조차 삼가 해서는 안 된다. 불필요한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이 문제를 가능한 한 비전문적 용어로 다루려고 했다. 같은 이유로 나는 사랑에 대한 문헌 文獻도 최소 한도로 한정했다.
다른 문제, 곧 이전의 나의 저서들에 표현된 사상의 되풀이를 피하는 문제는 아주 만족스럽게 해결되지는 못했다. 특히 나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립적 인간>, <건전한 사회>에 친숙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앞에 말한 책들에 표현되어 있는 사상을 상당히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技術>은 결코 단순한 요약은 아니다. 이 책에는 이전에 밝힌 사실을 넘어선 많은 사상이 제시되어 있고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옛 사상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기술이라는 하나의 주제 主題에 집중됨으로써 새로운 시야를 얻게 한다.
– 에리히 프롬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그럴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 파라켈수스
I. 사랑은 技術인가?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 幸運 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이 작은 책은 사랑은 기술이라고 하는 견해를 전제 前提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한 사랑의 이야기,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 무수한 영화를 구경하고 사랑을 노래한 시시한 수백 가지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특별한 태도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전제는 단독으로 또는 결합되어서 이 태도를 뒷받침해 준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 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이 목적을 추구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남자들이 특히 애용하는 방법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는 것이다. 특히 여성이 애용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몸을 가꾸고 옷 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남녀가 공용하는 또 한 가지 매력 전술은 유쾌한 태도, 흥미 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 처신하는 것이다. 사랑스러워지는 여러 가지 방법은 성공하기 위해, 곧 ‘벗을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같다. 사실상, 우리 문화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경우,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인기와 성적 性的 매력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 對象’의 문제라는 가정 假定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 또는 사랑 받을 – 올바른 대상의 발견이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태도에는 근대 사회의 발전에 바탕을 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이유는 ‘사랑의 대상’의 선택에 대해서 20세기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이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많은 전통적 국가의 경우처럼 대체로 사랑은 다음에는 결혼으로 이어지게 될, 자발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은 아니었다. 반대로 결혼은 관습 慣習에 의해 – 쌍방의 가족에 의해, 또는 중매인에 의해, 또는 중매인 같은 중개자 仲介者의 도움 없이 – 계약되었다. 결혼은 사호적 고려를 기반으로 결정되었고, 사랑은 일단 결혼이 성립한 다음에 전개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념이 서양에서 거의 보편화된 것은 최근 수세기 동안의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관습적 성격을 가진 고려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만적 사랑’, 곧 다음에는 결혼으로 이어지게 될 사랑의 개인적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새로운 자유 개념 自由槪念은 ‘능력’의 중요성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대상’의 중요성을 몹시 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문화의 또 하나의 특징적 성격은 이러한 요소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우리들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 購買欲에, 또한 상호간 유리한 거래 去來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 thrill 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현금 또는 월부로 사는 맛 –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다. 그는 (또는 그녀는)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본다. 남자에게는 매력 있는 여자 – 여자에게는 매력 있는 남자 – 는 탐나는 경품 景品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서낼리티 personality 시장 市場 에서 잘 팔리고 있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 包裝을 의미한다. 사람들을 특히 매력 있게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 시대의 유행에 달려 있다. 1920년대에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튼튼하고 성적 매력 있는 소녀가 매력적이었다. 오늘날에는 유행은 오히려 가정적이고 얌전하기를 요구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매력적인 ‘포장’이 되려면 남자는 공격적이고 야심적이어야 했으나 오늘날은 사교적이고 관대해야 한다. 어쨌든 사랑하게 되었다는 느낌은 보통 자신의 교환 가능성 交換 可能性의 범위 내에 있는 인간 상품 人間 商品에 대해서만 나타난다. 내가 거래를 하러 나갔다고 하자. 상대는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 보아 바람직해야 하며 동시에 상대자도 나의 명백한, 또는 숨겨진 재산과 능력을 고려한 다음 나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 냈다고 느낄 때에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부동산 不動産을 사는 경우 앞으로는 개발될지 모르지만 현재는 숨겨져 있는 가능성이 거래에서 대체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장지향적 市場志向的이고 물질적 성공이 현저한 가치를 갖고 있는 문화권에서 인간의 애정 관계가 상품 및 노동 시장을 지배하는 것과 동일한 교환 형식 交換形式에 따르더라도 놀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가정에 이르게 하는 세 번째 오류는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우리를 모두와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지내 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 버리고 밀접하게 느끼고 일체 一體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 合一의 순간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격앙된 경험의 하나이다. 특히 폐쇄적이고 동떨어져 있어서 사랑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의 경우라면 특히 놀랍고 기적적인 경험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더욱 촉진 促進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어서,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상호간의 권태가 생기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熱中, 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사랑의 열도 熱度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 – 사랑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 – 는 반대의 경우에 대한 압도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일반적 관념으로서 지속되고 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이것이 다른 활동의 경우라면 사람들은 열심히 실패의 원인을 가려 내려고 하고 개선 改善의 방법을 찾아 내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이 활동을 포기 抛棄할 것이다.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초의 조치 措置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기술, 예컨대 음악이나 그림이나 건축, 또는 의학 醫學이나 공학 工學의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쳐야 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는 무엇인가?
편의상 기술 습득 과정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 둘째는 실천의 습득이다. 만일 내가 의학 기술 醫學技術을 배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인간의 신체와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러한 이론적 지식을 모두 배웠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은 의학 기술에 숙달하지는 못한다. 상당한 실무 實務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의학 기술에 숙달하게 되고 마침내 나의 이론적 지식의 결과와 실천의 기술이 합치될 것이다. 곧 나의 직관 直觀이 모든 기술 숙달의 본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의 습득 이외에도 어떤 기술에 숙달하는 데 필수적인 세 번째 요인이 있다. 곧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 關心事로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음악에도, 의학에도, 건축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해당된다.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랑의 기술을 거의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아마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뿌리 깊은 갈망에도 불구하고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곧 성공, 위신 威信, 돈, 권력이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들의 거의 모든 정력이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돈을 벌거나 특권을 얻는 데 필요한 것만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면, ‘오직’ 영혼에 유익할 뿐, 현재적 의미에서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 사랑은 우리가 대부분의 정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어쨌든 앞으로는 사랑의 기술을 앞의 구분에 따라 다루기로 한다. 곧, 나는 우선 사랑의 이론을 검토하겠으며 이러한 검토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사랑의 실천을 검토할 것이다. 다른 분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실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긴 하지만.
II. 사랑의 理論
1 사랑 – 人間의 實存의 問題에 대한 解答
사랑에 대한 어떠한 이론이든 인간론 人間論으로부터, 곧 인간 실존론 人間實存論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 또는 사랑과 비슷한 것을 동물에서도 발견하지만, 동물의 애착 愛着은 동물의 본능적 기구 本能的 機構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엔 다만 이러한 본능적 기구의 잔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동물계 動物界로부터, 곧 본능적 적응 適應의 세계로부터 벗어났고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 비록 인간은 자연을 결코 버리지 못하지만 – 사실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한번 자연과 결별하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일단 낙원 樂園 – 자연과의 원래의 합일 상태 合一狀態 – 으로부터 쫓겨나면, 인간이 다시 돌아가려고 노력해도, 불타는 칼을 가진 케루빔 천사 [아홉 천사 중 둘째로서 지식을 맡은 천사 – 역주] 가 길을 가로막는다. 인간은 철저하게 상실한 전인간적 조화 全人間 的調和 대신에, 이성 理性을 발달시키고 새로운 조화, 곧 인간적 조화를 찾아 내면서 오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 있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 非決定的 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 開放的인 상황으로 쫓겨 난다. 확실한 것은 과거뿐이고 미래에 대해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 實在로서의 자기 자신의 인식 認識,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 分離와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의 자신의 무력함의 인식, –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 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 버릴 것이다.
분리의 경험은 불안 不安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 – 사물과 사람들 – 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反應能力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게다가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 罪責感을 일으킨다. 분리 상태에서의 죄책감과 수치심의 경험은 성서 聖書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표현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열매’를 먹은 다음에, 그들이 복종하지 않게 된 다음에 (불복종의 자유가 없으면 선악도 없다), 자연과의 원래의 동물적 조화로부터 벗어나 인간이 된 다음에, 다시 말하면 인간 존재로서 탄생한 다음에, 그들은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오랜 된 단순한 신화에도 19세기적 외관 外觀인 시치미 떼는 도덕이 있는데, 이 이야기의 핵심을 성기 性器가 보임으로써 느끼게 된 곤혹 困惑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며, 이 이야기를 빅토리야 시대의 정신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곧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알게 된 다음, 그들은 분리되어 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성 性에 속하는 것처럼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남남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아담이 이브를 감싸기보다는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 사실에 의해서도 매우 명백해진다). 인간은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 狂氣가 생긴다. 우리는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분리감이 사라질 때에 완전한 고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 세계도 사라져 버린다.
인간 – 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 – 은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 個體的 生命 을 초월해서 합일 合一을 찾아 내는가 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동굴 속에 사는 원시인 原始人에게도, 양떼를 돌보는 유목민 遊牧民에게도, 이집트의 농부에게도, 페니키아의 상인에게도, 로마의 병사 兵士에게도, 중세의 수도사 修道士에게도, 일본의 ‘사무라이’에게도, 현대의 사무원이나 직공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있다. 문제는 동일하다. 이 문제는 동일한 근원, 곧 인간의 상황, 인간의 실존 實存의 조건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답은 여러 가지다. 이 문제는 동물 숭배 動物崇拜에 의해, 인간의 희생 또는 군사적 정복 軍事的 征服에 의해, 사치에의 탐닉에 의해, 금욕적 禁慾的인 단념에 의해, 강제 노동 强制 勞動에 의해, 예술적 창조에 의해, 신 神의 사랑에 의해, 인간의 사랑에 의해 대답될 수 있다. 많은 대답 – 이 대답의 기록이 인간의 역사다 – 이 있지만 무수하지는 않다. 반대로 중심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에 속하는 보잘 것 없는 차이를 무시한다면 제시된 대답의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고, 또한 이러한 대답은 여러 가지 문화권에 살고 있는 인간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종교와 철학의 역사는 이러한 대답의 역사이고, 이러한 대답이 한정되는 동시에 다양화 다양화되는 역사이다.
이러한 대답은 어느 정도로는 개인이 도달한 개성화 個性化의 정도에 달려 있다. 유아 乳兒의 경우, ‘나라고 하는 것’ (I-ness) 은 발달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보잘 것 없다. 유아는 여전히 어머니와의 일체감 一體感을 느끼고 어머니가 있는 한 분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유아의 고독감은 어머니의 육체적 현존 現存, 곧 어머니의 가슴과 어머니의 피부에 의해 달래진다. 어린애는 분리와 개성의 감각이 발달됨에 따라 어머니의 육체적 현존만으로는 이미 충분하지 못하고 다른 방식으로 분리 상태를 극복하려는 욕구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그 유아기 乳兒期에는 역시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낀다. 토양 土壤, 동물, 식물은 아직도 인간의 세계이다 인간은 동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것은 동물 가면 動物假面을 쓴다든가, 토템 totem 으로 삼고 있는 동물 또는 동물신 動物神을 숭배한다든가 하는 일에 표현된다. 그러나 인류가 이러한 원초적 原初的 결합으로부터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인류는 자연의 세계로부터 더욱더 분리되고, 분리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내려는 욕구도 더욱더 강렬해진다.
온갖 종류의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러한 상태는 때로는 마약 痲藥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자동적으로 유발된 황홀경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원시 민족 原始民族의 여러 가지 의식 儀式은 이러한 유형의 해결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잠시 동안의 광희 狂喜의 상태에서는 외부 세계는 사라지고 동시에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도 사라진다. 이러한 의식은 공동으로 거행되므로 집단 集團과의 융합을 경험하게 되고 이 경험이 이러한 해결을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도취적 陶醉的 해결에는 성적 性的 경험이 밀접히 관련되거나 혼합 된다. 성적 오르가슴은 황홀경에 의해 발생되는 상태 또는 어떤 마약의 효과와 비슷한 상태를 발생시킬 수 있다. 공동체의 성적 난행 性的亂行의 의식은 많은 원시적 의식의 일부였다. 도취적 경험을 한 다음에는,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분리감으로 몹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천천히 불안의 긴장이 고조 高潮 되었다가 의식을 되풀이해 거행함으로써 다시금 감소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취 상태가 부족 部族의 공통된 관습으로 되고 있는 한, 이러한 상태에서 불안감이나 죄책감은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올바르고 또한 미덕 美德이기도 하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방법이고 무당이나 사제 司祭에 의해 인정되고 요구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책감이나 수치감을 느껴야 할 까닭이 없다. 동일한 해결책이라도 이러한 공동 관습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개인에 의해 선택될 때에는 전혀 달라진다. 비도취적 非 陶醉的 문화권에 살고 있는 개인이 선택하는 형태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이다. 사회적으로 정형화 定刑化 된 해결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죄책감과 후회감으로 괴로워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으로 피난해서 분리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도취 상태가 지나간 다음에는 그들은 더욱 분리감을 느끼게 되며, 더욱 자주, 더욱 강렬하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성적 도취를 해결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는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의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르지 않은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이며 결과적으로는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 性行爲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취적 합일 合一의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강렬하고 오히려 난폭하다는 것, 둘째는 퍼어서낼리티 personality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 셋째는 일시적이고 주기적 週期的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 – 그 관습, 관례, 신앙 – 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당한 발전을 볼 수 있다.
원시 사회에서는 집단은 소규모이고 피와 땅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가 점점 발달됨에 따라 집단은 확대된다. 집단은 ‘도시국가 都市國家 Polis’의 시민 市民, 큰 나라의 시민, 교회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다. 가난한 로마인 조차 ‘나는 로마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긍지를 느꼈다. 로마와 그 제국 帝國은 그의 가족, 그의 가정, 그의 세계였다. 또한 현대 서양 사회에서도 집단과의 합일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 自我가 대부분 사라지고 그 목적을 군중에 소속하는 데 두고 있는 합일이다. 만일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 類型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구제된다. 고독이라는 가공할 경험으로부터 구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로 이끌어 가기 위해 독재 체제 獨裁體制는 위협과 공포를 이용하고 민주 국가는 암시와 선전을 이용한다. 물론 두 체제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에서는 불일치 不一致는 가능하고 사실상 불일치가 전혀 없을 때는 없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소수의 비범한 영웅이나 순교자 殉敎者만이 복종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사회도 압도적인 일치를 보여 주고 있다. 그 이유는 합일의 추구에 대해서는 응답 應答이 있어야 하는데, 만일 다른 방법 또는 더 좋은 방법이 없다면, 군중과 일치하는 합일은 유력한 합일로 된다는 사실에 있다.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이해한다면, 남과 다르다는 데에서 느끼는 공포, 군중과 약간 떨어져 있다는 데에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공포는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자를 위협하는 실제적 위험에 대한 공포로서 합리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어도 서양 민주주의에서는, 사람들은 일치하도록 ‘강요 받는’ 정도 이상으로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 嗜好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만인의 의견 일치는 ‘자신의’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만족된다. 곧 핸드백이나 스웨터에 새겨 놓은 머리 글자, 은행 출납계원의 명찰, 공화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가입하는 것 등은 개인적 차이의 표현이 된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경우에 ‘이것은 다르다’는 슬로건을 떠들어대는 것은 차이를 추구하는 애처로운 요구 要求를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이와 같이 강화되는 것은 가장 발달한 산업사회 産業社會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등 平等의 개념 및 경험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평등은 종교적 맥락에서는 우리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식이며 우리들은 모두 인간으로서 똑같은 신성한 천품天稟[필사주: 타고난 성질, 기품]을 갖고 있고 우리들은 모두 일체 一體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평등은 개인간의 차이를 존중해야 하며, 우리가 모두 일체라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우리는 각기 독특한 실재 實在이고 각기 하나의 조화로운 우주라는 것도 사실임을 의미하고 있다. 개인의 독자성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예컨대 탈무드 [유태의 율법과 그 해석 – 역주]에도 표현되어 있다. 곧 “한 생명을 구한 자는 말하자면 전세계를 구한 것과 같다. 한 생명을 파괴하는 자는 말하자면 전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개성 발달의 조건으로서의 평등은 또한 서양의 계몽주의 啓蒙主義 철학의 평등 개념의 의미이기도 했다. 평등은 (칸트에 의해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었거니와) 인간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만인은 각기 목적이고 목적인 한에서만 동등하며 서로 수단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계몽주의 사상에 따라, 여러 학파의 사회주의적 사상가들은 평등을 착취 搾取의 폐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 – 이러한 이용이 잔인하든 ‘인간적이든’ 관계 없이 – 의 폐지로 정의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평등의 의미는 달라졌다. 이 사회에서는 우리들은 평등이라는 말로 자동 인형 自動人形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을 말하고 있다. 평등은 추상적 동일성, 곧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오락을 갖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우리는 보통 진보의 조짐으로 찬양되고 있는 성과들 – 예컨대 남녀 동등권 – 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 懷疑的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나는 남녀 동등권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등을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의 긍정적 측면 때문에 기만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의 일부이다. 남녀 평등은 바로 이러한 대가를 치르고 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자는 이제 다른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다. ‘정신에는 성 性이 없다’는 계몽주의 철학의 명제 命題는 일반적 관심이 되었다. 성의 양극성 兩極性은 사라지고 동시에 이러한 양극성에 바탕을 둔 성애 性愛 erotic love도 사라졌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 極으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 非 個性化 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大集團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 原子的 人間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 規格化 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 標準化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부른다.
일치에 의한 합일 合一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 慣例에 의해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현대 서양 사회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강박적 强迫的인 성애 중시 性愛 重視, 자살 등의 사례 事例는 군중과의 일치에 상대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후이다. 게다가 일치에 의한 합일의 해결책은 주로 정신에만 관계되고 신체에는 관계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취적 해결과 비교하면 결함이 있다. 군중과의 일치에는 단 한 가지 이점이 있을 뿐이다. 곧 이것은 발작적 發作的이 아니라 지속적이다. 개인은 3, 4세 때 일치의 유형으로 유도 誘導되고 따라서 군중과의 접촉이 끊기지 않는다. 개인의 장례식 葬禮式조차도 – 개인은 그의 마지막 사회적 대사건으로서 장례식을 기대하고 있다 – 이러한 유형과 엄밀하게 일치되어 있다.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의 일치와 함께 현대 생활의 다른 요인, 곧 일상적 日常的인 노동과 일상적인 오락의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평균화 平均化’되고 노동력 勞動力 또는 사무원이나 관리자 管理者의 관료적 官僚的 힘의 일부가 된다. 그는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그가 하는 일은 이 일을 관리하는 조직에 의해 지시된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들은 모두 조직의 전체적 구조에 의해 지시된 일을 지시된 속도로 지시된 방식에 따라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감정조차도 지시 받고 있다. 쾌활함, 믿음직함, 모든 사람들과 마찰 없이 지내는 능력까지도. 오락도, 비록 격렬한 방법으로는 아니더라도, 역시 상투적인 것으로 된다. 책은 독서 클럽에 의해 선택되고 영화는 필름이나 극장의 소유자에 의해 선택되고 광고의 슬로건도 그들로부터 지불을 받는다. 휴식 休息 역시 일정하다. 곧 일요일의 드라이브, 텔레비전의 연속물, 카드놀이, 사교 社交 파티 등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 旣成品化 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그는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고,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 無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합일 合一을 이루는 세 번째 방법은 ‘창조적 활동’ – 예술가의 창조적 활동이든, 직공의 창조적 활동이든 – 이다. 어떤 종류의 창조적 작업이든 창조하는 자는 외부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자료와 결합한다. 목공이 책상을 만든 든, 금세공인 金細工人이 보석 조각에 가공을 하든, 농부가 곡식을 기르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든,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는 일하는 자와 그 대상은 하나가 되고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세계와 결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적인 일, 곧 ‘내’가 계획하고 만들어 내고 나의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해당된다. 현대의 사무원의 노동 과정에서는, 노동자는 끝없는 벨트 위에 놓여 있고 노동의 결합적 성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노동자는 기계 또는 관료 조직의 부속물이 된다.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아니며 따라서 일치를 넘어선 합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생산적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대인간적 對人間的 인 것은 아니다. 도취적 융합 陶醉的 融合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일시적이다. 일치에 의해 달성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일은 실존 實存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한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인간적 융합의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발광 또는 파괴 – 자신의 파괴 또는 타인의 파괴 – 가 일어난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 人間性 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대인간적 합일의 달성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심각한 곤란성에 부딪친다. 융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이 방식의 차이점은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의 공통점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러한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까? 또는 우리는 특수한 종류의 합일, 곧 서양과 동양의, 지나간 4천년 동안의 역사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인본주의적 人本主義的 종교 및 철학 체계의 이상적 덕 德이었던 합일을 위해 ‘사랑’이라는 말을 아껴 두어야 할 것인가?
어의상 語義上의 온갖 난점 難點 때문에 해답은 자의적 恣意的 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 합일 共棲的 合一’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는 전자의 의미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겠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의 ‘사랑’을 먼저 검토하기로 한다.
‘공서적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生物學的 유형을 볼 수 있다. 어머니와 태아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들은 ‘함께’ 살고 (공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일부이고 어머니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다. 어머니는 말하자면 태아의 세계이다. 어머니는 태아를 먹이고 보호하지만 어머니 자신의 생명도 태아 때문에 강화된다. ‘정신적’인 공서적 합일에서는 두 신체는 독립적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애착이 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臨床的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음란증 被虐待淫亂症 masochism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그를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 酸素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으로부터 도피한다. 인간이 복종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 神이든, 팽창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 나는 위대성, 힘, 확실성의 일부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 統合性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다. 종교적 맥락 宗敎的 脈絡에서는 예배의 대상은 우상 偶像으로 불린다. 피학대 음란증적 사랑의 관계라는 세속적 맥락에서도 본질적 매카니즘, 곧 우상 숭배의 메카니즘은 동일하다. 피학대 음란증적 관계에는 신체적, 성적 욕망이 혼합될 수도 있다. 이 경우 복종은 정신과 관련되는 복종일 뿐 아니라 전신 全身이 관련되는 복종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복종에는 운명에 대한, 병에 대한, 율동적 음악 律動的 音樂에 대한, 마약 또는 최면적 催眠的 황홀경에 의해 발생한 도취적 상태에 대한 복종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의 통합성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또는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의 도구로 만든다. 그는 살아가는 문제를 생산적 활동에 의해 해결할 필요가 없다.
공서적 융합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되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가학적 음란증 加虐的 淫亂症 sadism이다.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감과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는 그를 숭배하는 다른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에 의존하듯이 가학상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하는 자에게 의존한다.양자는 한 쪽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 차이점은 오직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하고 착취하고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하고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 받고 착취당하고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는 점뿐이다.이것은 현실적 의미에서는 상당한 차이다. 그러나 보다 깊은 감정적 의미에서 보면 차이는 양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 다시 말하자면 통합성이 없는 융합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한 사람이 보통 가학성 음란증적 방식과 피학대 음란증적 방식의 두 방식에 의해 서로 다른 대상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더라도 놀라지 않는다. 히틀러는 우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학성 음란증적 방식으로 반응했으나 운명, 역사, 자연의 ‘보다 큰 힘’에 대해서는 피학대 음란증적 방식으로 반응했다. 그의 최후 – 전반적 파멸에 직면해서 자살한 것 – 는 그의 성공의 몽상 夢想 – 전세계의 지배 – 와 마찬가지로 특징적이다. 1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어 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고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만일 우리가 사랑은 활동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활동’이라는 말의 애매한 의미 때문에 난점에 봉착한다. 이 말의 현재적 용법에서는 ‘활동’이라는 말은 에네르기의 소비에 의해 기존 旣存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따라서 사업을 하거나, 의학 공부를 하거나, 끝없는 벨트 위에서 일하거나, 책상을 만들거나, 스포츠에 종사하는 사람은 활동적인 사람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모든 활동의 공통점은 이러한 활동들이 외부적 목표의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은 활동의 ‘동기’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깊은 불안감과 고독감에 쫓겨 끊임없이 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야망 야망이나 돈에 대한 탐욕에 쫓겨 끊임없이 일한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열정의 노예이고 쫓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사실은 ‘수동적’이다. 곧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수난자 受難者 이다. 한편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세계의 일체성 一體性을 경험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도 없이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수동적’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정신을 집중시킨 이러한 명상적 태도는 최고의 활동이며 내면적 자유와 독립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영혼의 활동이다. 활동에 대한 한 가지 개념, 곧 근대적 개념은 외부적 목적의 달성을 위한 에네르기의 사용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활동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은 외부적 변화가 일어났든, 일어나지 않았든 인간의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활동에 대한 후자의 개념은 스피노자에 의해 가장 명백하게 정식화 定式化 되었다. 그는 감정을 능동적 감정과 수동적 감정, 곧 ‘행동’과 ‘격정’으로 구별한다. 능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자유롭게 그의 감정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수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쫓기고 자기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동기 動機에 의해 움직여지는 대상이 된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는 덕 德과 힘이 동일하다는 명제 命題에 도달한다. 2 선망, 질투, 야망, 온갖 종류의 탐욕은 격정이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의 행사이고 이 힘은 자유에 있어서만 행사될 수 있을 뿐, 강제 强制된 결과로서는 결코 행사되지 않는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며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사랑은 원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듯하지만 사실은 매우 애매하고 복잡하다. 가장 광범하게 퍼져 있는 오해는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 성격이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혹은 저장 貯藏 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단계를 너머서지 못한 사람은 ‘준다’고 하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 市場型의 성격은 주려고 하지만 단지 받는 것과 교환으로 줄 뿐이다. 그에게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3 성격의 주요 방향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형의 개인들은 대부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은 주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한다는 행위에서만 성립된다. 그들의 경우,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낫다는 규범 規範은 환희를 경험하기보다는 박탈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이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潛在的 능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富,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 高陽 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 흐르고 소비하고 생동 生動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4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 活動性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이 원리를 여러 가지 특수 현상에 적용해 복 이 원리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 性의 영역에 가장 기본적인 예가 있다. 남성의 성 기능의 절정은 준다는 데 있다. 남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기 性器를 여자에게 준다. 오르가슴의 순간에는 남자는 정액 精液을 여자에게 준다. 그는 능력이 있는 한, 정액을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만일 줄 수 없다면 그는 성적 불능자 性的 不能者 이다. 여자의 경우, 비록 약간 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자도 자기 자신을 준다. 여자는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중심을 향해 문을 열어 준다.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그녀는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녀에게 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만일 그녀가 받기만 한다면, 그는 불감증 不感症이다. 여자의 경우, 준다고 하는 행위는 애인으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기능에서도 나타난다. 여자는 그녀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애에게 자기 자신을 주고 어린애에게 그녀의 젖과 그녀의 체온 體溫을 준다. 주지 않으면 오히려 고통스러울 것이다.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자가 부자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부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오직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만이 뭔가를 주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경험으로 보면 무엇을 최소한도의 필수품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그가 사실상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격에 달려 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더 잘 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 이상의 가난은 주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가난은 직접 야기시키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로부터 주는 기쁨을 빼앗는다는 사실 때문에 수치이다.
그러나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각별히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며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 顯示 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 生動感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엇인가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그에게로 되돌려지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는 행위에서는 무엇인가 탄생되고 관련된 두 사람은 그를 두 사람을 위해 태어난 생명에 대해 감사한다. 이 말은 특히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 사상은 마르크스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에는 사랑으로써만, 신뢰에는 신뢰로써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가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 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5 그러나 사랑에서만 주는 것이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생은 학생에게서 배우고, 배우는 관객들로부터 자극을 받고, 정신분석가 精神分析家 는 환자에 의해 – 그들이 서로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서로 성실하고 생산적으로 관계한다면 – 치유된다.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의 능력은 그 사람의 성격 발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거의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성격이 생산적 방향으로 발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에서 인간은 의존성 依存性, 자아 도취 自我 陶醉 narcissism 적 전능 全能, 타인을 착취하려는 욕망, 저장하려는 욕망을 극복해 왔고 자신의 인간적 힘에 대한 믿음, 곧 목표 달성에 있어서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용기를 획득해 왔다. 이러한 성질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要素 이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사랑에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어린애에 대한 모성애에서 가장 명백하다. 어머니가 어린애를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머니가 어린애에게 젖을 주지 않거나 목욕을 시키지 않거나 편안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보증을 듣더라도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감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애를 돌보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 우리는 강력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동물이나 꽃에 대한 사랑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 관심이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사랑의 이러한 요소는 요나 서 書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의 주민들에게 가서 그들이 악행을 그만두지 않는 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라고 명령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뉘우치고 하느님이 그들을 용서하게 될 것이 두려워 전도 傳道의 사명을 피해 버린다. 그는 질서와 율법 律法에 대해서는 강렬한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사랑은 모르는 사림이다. 그러나 그는 도망하려고 애쓰다가 고래의 뱃속에 갇히게 된다. 이것은 사랑과 연대감 連帶感의 결여로서 그에게 일어난 고립과 폐쇄의 상태를 상징하고 있다. 하느님은 그를 구해 주고 요나는 니느웨로 간다. 그는 니느웨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명령대로 설교하고 그가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난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그들의 생활 태도를 고쳐서 하느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이 도시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요나는 몹시 화가 나고 실망한다. 그는 자비가 아니라 ‘정의’가 실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마침내 태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하느님이 자라게 한 나무 그늘에서 간신히 위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이 나무를 시들게 만들자, 요나는 낙담하고 화가 나서 하느님에게 불평을 한다. 하느님은 대답한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덩굴을 네가 아꼈거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구약 ‘요나’ 4장 1절 – 역주] 요나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뭣인가를 위해서 ‘일하고’, ‘뭣인가를 키우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 不可分 의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일하기 마련이다.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은 책임이 흔히 의무 義務, 곧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 – 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 – 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 應答 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요나는 니느웨 주민들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카인처럼 “나는 나의 형제들의 보호자인가?”라고 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응답한다. 형제의 생활은 형제의 일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 .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포들에게도 책임을 느낀다. 어머니와 어린애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책임은 주로 신체적 욕구에 대한 배려와 관련된다. 어른 사이의 사랑에서는 책임은 주로 상대방의 정신적 요구와 관련된다.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 支配와 소유 所有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 畏敬은 아니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 (respicere: 바라본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 (또는 그녀)와 일체 一體임을 느끼지만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가 노래하듯 ‘사랑은 자유의 소산 所産’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은 아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 盲目일 것이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공허할 것이다. 지식에는 여러 층 層이 있다. 사랑의 한 측면인 지식은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예컨대 나는 어떤 사람이 화를 냈다는 것을 그가 분명히 나타내지 않을 떼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화를 냈다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그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가 불안하고 근심에 싸여 있으며 외로움을 느끼고 죄책감 罪責感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의 노여움이 보다 깊은 어떤 것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를 근심하고 당황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말하면 화낸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로워하는 사람으로서 보게 된다.
지식은 사랑의 문제와 또 하나의, 게다가 더욱 근본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분리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융합하려는 기본적 요구는 또 하나의 각별히 인간적인 욕망, 곧 ‘인간의 비밀’을 알려는 욕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아도 인간의 생명은 기적이고 신비이지만 인간적 측면에서 보아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그 동료들에 대해 불가해 不可解 한 비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고 있지만,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 자신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동료를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사물이 아니고 우리의 동료들도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존재 또는 다른 사람의 존재의 깊이에 도달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인식의 목표는 더욱 멀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영혼의 비밀에, 곧 ‘인간’의 가작 내면적인 핵심에 침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비밀을 아는 한 가지 방법, 절망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힘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그로 하여금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하고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서 그를 사물, 우리들의 사물, 우리들의 소유물 所有物로 바꿔 놓은 힘으로부터 생기는 방법이다. 인간의 비밀을 알려는 이와 같은 시도 試圖의 궁극적 단계는 극단적인 가학성 음란증, 곧 인간을 괴롭히고 고문해서 고통 속에서 자신의 비밀을 누설하도록 강요하는 욕망과 능력이다. 깊고 강렬한 잔인성과 파괴욕의 본질적인 동기는 인간의, 그의, 따라서 우리 자신의 비밀을 침투하려는 이러한 갈망에 있다. 이러한 사상은 아이자크 바벨에 의해 매우 간결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러시아 내란 內亂 때 이전의 주인에게 죽음의 낙인을 찍은 동료 장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인용하고 있다. “총살 銃殺에 의해서는 – 나는 이와 같이 말하리라 – 총살에 의해서는 당신은 그 녀석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총살에 의해서는 당신은 영혼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녀석의 어디에 영혼이 있고 또 어떻게 보이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나는 몇 번이나 한 시간 이상 적을 짓밟은 적이 있었다. 아다시피 나는 생명이 정녕 무엇이며 우리들의 방식에 따라 생명이 어떻게 쓰러지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6
어린애에게서 흔히 우리는 지식에 이르는 이 길을 매우 분명하게 본다. 어린애는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분해하고 해체한다. 또는 동물을 해부하기도 한다. 나비를 알기 위해, 나비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잔인하게 날개를 잡아뜯는다. 이러한 잔인성의 동기는 보다 깊은 것, 곧 사물과 생명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소망에 있다.
이 ‘비밀’을 아는 또 하나의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는 나 자신을 알고 나는 모든 사람을 안다 -.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인간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의 사고 思考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 . 가학성 음란증의 동기는 이러한 비밀을 알려는 소망에 있지만 나는 여전히 무지 無知 하다. 다른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놓더라도 내가 한 일은 그를 파괴한 것뿐이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 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들 두 사람을 발견하고 나는 인간을 발견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동포를 알려고 하는 갈망은 델포이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모토에 표현되어 있다. 이 모토는 모든 심리학의 주요 동기이다. 그러나 이 욕망이 인간의 모든 것, 곧 인간의 가장 깊숙한 비밀을 알려고 하는 한, 이 욕망은 평범한 종류의 지식, 곧 사고에만 의존하고 있는 지식에 의해서는 충족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우리 자신을 천 배쯤 더 잘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근저 根底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들의 동료가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수수께끼인 것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언제나 수수께끼이다. 충분한 지식을 얻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에 의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충분한 지식을 위해 불가결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실상 實相을 보기 위해서는, 오히려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 像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나는 인간을 궁극적 본질에 있어서 알 수 있다.
인간을 아는 문제는 신을 아는 종교적 문제와 병행된다. 인습적 因襲的인 서양 신학 西洋神學 에서는 사고에 의해 신을 알고 신에 ‘대해’ 진술 陳述하려고 노력한다. 이 신학은 나의 사고에 의해서만 신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유일신론 唯一神論 의 결과인 신비주의 神秘主義는 사고에 의해 신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신과의 합일의 경험을 추구하는데, 신과의 합일에는 신에 ‘대한’ 지식이 끼어들 여지 – 필요 – 는 전혀 없다.
인간과의 합일, 또는 종교적으로 말하면 신과의 합일의 경험은 결코 불합리하지 않다. 반대로 알버트 슈바이처 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합일은 합리주의 合理主義의 결과, 합리주의의 가장 대담하고 철저한 결과이다. 그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우리들의 지식의 한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곧 우리들은 인간과 우주의 비밀을 결코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지식이다. 심리학은 과학으로서 그 한계를 갖고 있으며, 신학의 논리적 귀결이 신비주의인 것처럼 심리학의 궁극적 귀결은 사랑이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지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는 전지전능 全知全能 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內的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사랑, 합일에의 열망을 실현하는 사랑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합일에 대한 보편적 실존적 實存的 요구를 바탕으로 보다 특수하고 생물학적인 요구, 곧 남성과 여성이라는 극 極 사이의 합일에 대한 요구가 일어난다. 이러한 양극성 兩極性의 사상은 원래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었으나 두 몸으로 갈라졌고 그때부터 모든 남성은 여성이라는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다시 그녀와 결합하려고 한다는 신화 神話에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원래는 양성이 일체였다는 사상은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어 냈다는 성서의 이야기에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이 이야기에는 가부장주의 家父長主義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신화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다. 성적인 양극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특수한 방법, 곧 다른 성 性 과의 합일이라는 방법으로 합일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 사이의 양극성은 각각의 남녀 <속에도> 존재한다. 생리적으로 남자든 여자든 각기 반대되는 성의 호르몬을 갖고 있는 것처럼, 심리학적 의미에서도 남녀는 각기 양성적 양성적이다. 남녀는 그 자체 내에 받아들이는 요소와 침투하는 요소, 물질의 요소와 정신의 요소를 갖고 있다. 남자는 – 여자도 마찬가지이지만 – 그의 여성적 극 極과 남성적 극의 양극이 합일할 때에만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합일을 발견한다. 이러한 양극성은 모든 창조 創造의 기초이다.
남녀라는 양극성은 대인 관계 對人關係에 있어서의 창조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 점은 생물학적으로는 정자 精子와 난자 卵子의 결합이 어린애 탄생의 기초라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순수하게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남녀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녀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 (동성애적 일탈 同性愛的 逸脫은 이 양극화된 결합의 성취에 실패한 것이고 따라서 동성애자 同性愛者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분리, 곧 이러한 실패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사랑할 줄 모르는 이성애자 異性愛者에게도 공통되는 것이다.)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라는 동일한 양극성은 자연에도 있다. 동물이나 식물에서 명백히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기본적 기능, 곧 받아들이고 침투한다는 기능의 양극성에도 존재한다. 이것은 지구와 비 [雨], 강과 바다, 밤과 낮, 어둠과 빛, 물질과 정신의 양극성이다. 이 사상은 회교 回敎의 위대한 시인이며 신비주의자인 루미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정녕 사랑하는 자가 사랑 받는 자를 원하는 것은 사랑 받는 자가 그를 원할 때뿐이다. 사랑의 불꽃이 ‘이’ 가슴에서 타오를 때 ‘저’ 가슴에도 사랑이 깃든 줄을 알게 된다. 그대의 가슴에서 신에의 사랑이 자라날 때 온갖 의심을 넘어서서 신은 그대를 사랑했다.
또 한 손이 없으면 한 손으로는 손뼉을 칠 수 없다. 거룩한 지혜는 운명이거늘, 이 지혜는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운명 때문에 세계의 각 부분은 짝을 찾아 짝을 이룬다.
현자 賢者의 눈에는 하늘은 남자, 땅은 여자이다. 땅은 하늘이 떨어뜨리는 것을 키운다.
땅에 열이 없으면 하늘은 열을 보내고 땅이 신선함을 잃고 메마르면 하늘은 이를 회복시킨다.
하늘은 아내를 위해 식량을 찾아 헤매는 남편처럼 땅 위를 돌고
땅은 주부 主婦처럼 바쁘고 땅은 자식을 낳아 젖을 먹인다.
땅과 하늘은 지혜로운 자로서 일하므로 땅과 하늘도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라.
땅과 하늘이 서로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면 왜 땅과 하늘이 애인들처럼 포옹하고 있는가?
땅이 없으면 어떻게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랄 것인가? 그렇다면 하늘은 무엇을 위해 물과 열을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의 결합에 의해 세계를 보존하려는 욕망을 끝까지 품게 한 것처럼
하느님은 존재자 存在者의 모든 부분에 다른 반 쪽을 찾는 욕망을 심어 놓았다.
낮과 밤은 겉으로는 적이지만 동일한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고,
서로의 일을 완성하기 위해 밤과 낮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밤이 없으면 인간의 본성 本性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따라서 낮에는 소비할 것이 없으리라. 7
남녀라는 양극성의 문제는 사랑과 성 性이라는 문제에 대한 더 많은 검토를 요구한다. 나는 전에 프로이트가 성욕을 사랑과 합일의 요구의 나타남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서 성적 본능 性的 本能의 표현 – 혹은 승화 昇華 – 만을 보려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잘못은 더 심각한 것이다. 그의 생리학적 유물론 唯物論과 일치하거니와, 그의 성적 본능을 몸 속에 화학적 化學的으로 생긴, 고통스럽고 해방을 갈망하는 긴장의 결과라고 본다. 성욕의 목적은 이 고통스러운 긴장을 제거하는 것이고 성적 만족은 이러한 제거에 성공하는 것이다. 유기체 有機體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할 때 굶주림이나 갈증이 생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욕이 생긴다고 하는 점까지는 이 견해는 타당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성욕은 갈망이고 성적 만족은 갈망의 해소 解消이다. 이러한 성욕의 개념을 갖는 한, 사실상 자위 自慰는 이상적인 성적 만족이리라. 매우 역설적이지만 프로이트가 무시하고 있는 것은 성욕의 심리적 생물학적 측면, 남녀의 양극성, 결합에 의해 이 양극을 연결하려는 욕망이다. 이 기묘한 잘못은 아마도 프로이트의 극단적인 가부장주의 家父長主義에 의해 촉진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주의 때문에 그는 성욕을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라고 가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특수한 여성적 성욕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성의 이론에 대한 세 가지 공헌”에서 전개했는데, 리비도[성욕] libido는 남성 안에 있는 리비도이든 여성 안에 있는 리비도이든 관계 없이 원칙적으로 ‘남성적 성격’을 가졌다고 말한다. 또한 사내애는 거세 去勢 된 남성으로서 여성을 경험하고 여성 자신은 남성 성기 性器의 상실에 대해 여러 가지 보상을 구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도 똑같은 사실이 합리적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은 거세된 남성이 아니며 여자의 성욕은 ‘남성적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여성 특유의 것이다.
양성 兩性간의 성적 매력은 부분적으로 긴장을 제거하려는 요구에 그 동기가 있다. 주요한 것은 이성 異性의 극 極과 합일하려는 욕구이다. 사실상 색정적 色情的 매력은 결코 성적 매력에 의해서만 표현되지는 않는다. ‘성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성격’에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있다. 남성적 성격은 침투, 지도 指導, 활동, 훈련, 모험이라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정의된다. 여성적 성격은 생산적인 수용성 受容性, 보호, 현실주의, 인내력, 어머니다움에 의해 정의된다. (각 개인에 있어서는 두 성격이 혼합되어 있으나 ‘남성’ 또는 ‘여성’의 성과 관련된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매우 흔히 있는 일이거니와 남성이 정서적으로 어린애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의 남성적 성격의 특징이 약화되면, 그는 ‘성교’에 있어서 남성적 역할을 배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결함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 결과는 돈 환 Don Juan 이다. 돈 환은 성격적인 의미에서는 남성다움의 마비가 극단적일 때, 가학성 음란증 (폭력의 사용)은 남성다움의 주요한 – 도착 倒錯된 – 대용품이 된다. 여성의 성욕은 약화되거나 도착되면, 피학대 음란증 또는 소유욕 所有慾으로 변한다.
프로이트는 성을 과대평가한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흔히 이러한 비판은 프로이트의 체계로부터 인습적 因襲的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이에 비판과 적의 敵意를 일으킨 요소를 제거하려는 소망에 의해 촉진되었다. 프로이트는 날카롭게 이러한 동기를 알아차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의 성의 이론을 변경하려는 온갖 시도 試圖와 싸웠다. 실제로 그의 시대에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도전적 挑戰的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에 타당하던 것이 5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타당할 것일 수는 없다. 성적인 관습 慣習이 매우 변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론은 서양의 중류 계급에는 이미 충격적인 것이 아니며 정통적 正統的인 분석자 分析者가 오늘날도 프로이트의 성의 이론을 옹호하는 것을 용감하고 급진적인 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동키호테적 급진주의 急進主義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그들의 심리 분석의 특색은 순응주의자 順應主義者라는 데 있으며 현대 사회를 비판하게 되는 심리학적 문제는 제기하지 못한다.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가 성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을 충분히 깊게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의 정열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그의 철학적 전제 前提에 따라 그의 이러한 정열을 생리학적 生理學的으로 설명했다. 정신분석은 앞으로의 발전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통찰을 생리학적 차원에서 생물학적 및 실존적 차원으로 옮겨 놓아 프로이트의 개념을 수정하고 깊게 할 필요가 있다.8개념과는 전혀 다른 평면에 놓여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본능에 대한 이론은 정통적 분석가들에 의해 사실상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수용 受容은, 특히 임상적 臨床的인 일에 관한 한, 리비도 개념의 근본적 수정에 이르지는 못했다.]
2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사랑
자비로운 운명이 어머니로부터의, 곧 자궁 내 존재 子宮內存在로부터의 분리에서 생기는 불안을 알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어린애는 태어나는 순간에 죽음의 공포를 느낄 것이다. 태어난 후에도 갓난애는 탄생 이전과 거의 다르지 않다. 갓난애는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며 자기 밖에 있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갓난애가 적극적으로 느끼는 자극은 따뜻함과 음식뿐이지만 따뜻함과 음식을 그 근원, 곧 어머니와 구별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따뜻함이고 어머니는 음식이며 어머니는 만족과 안전의 유쾌한 상태이다. 이 상태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사용하면 자가 도취의 상태이다. 사람과 사물 등 외부의 실재 實在는 신체의 내적 內的 상태를 만족시키든가, 또는 신체의 내적 상태를 실망시키든가 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현실적인 것은 내부에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밖에 있는 것은 나의 욕구라는 관점에서만 – 결코 외부적인 것 자체의 성질이나 욕구라는 관점에서는 아니다 – 현실적이다.
어린애는 성장하고 발달함에 따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 自覺하게 된다. 젖을 먹는 데서 얻는 만족은 젖꼭지와 구별되고 어머니의 가슴은 어머니와 구별된다. 마침내 어린애는 갈증, 만족을 주는 젖, 가슴, 어머니를 각지 다른 실재 實在로서 경험한다. 어린애는 다른 많은 사물들을 서로 다른 것으로서, 곧 스스로의 존재를 갖는 것으로서 지각할 줄 알게 된다. 이때에는 어린애는 이 사물들에 명칭을 부여하는 것을 배운다. 이때에는 어린애는 이 사물들에 명칭을 부여하는 것을 배운다. 동시에 이 사물들을 다룰 줄 알게 된다. 불은 뜨겁고 고통스러우며 어머니의 몸은 따뜻하고 유쾌하며 나무는 단단하고 무거우며 종이는 가볍고 찢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어린애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배운다. 내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는 어머니는 미소를 지을 것이고 내가 울면 어머니는 나를 안아 줄 것이며 내가 배변 排便을 하면 어머니는 칭찬해 줄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경험은 결정 結晶되고 통합되어 “나는 사랑 받고 있다”는 경험이 된다. 나는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 나는 무력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 나는 아름답고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 어머니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사랑 받는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현재의 나로서 사랑 받는다.” 혹은 아마도 더욱 정확하게는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 받은’ 것이리라.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러한 경험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사랑 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 無條件的인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현재의 상태’, 곧 그녀의 자식으로 남아 있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지복 至福이고 평화이며 획득할 필요도, 보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의 무조건적 성질에도 역시 부정적 否定的 측면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보답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획득될 수도 만들어 낼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없다면 그것은 마치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이 소멸한 것과 같다. 따라서 어머니의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八세 반부터 10세 이전의 연령의 대부분의 아동들9에게 있어서 문제는 거의 예외 없이 ‘사랑 받는’ –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 받는 – 문제이다. 이 연령까지의 아동은 아직도 사랑할 줄 모른다. 그는 사랑 받는 경우 기쁘고 즐겁게 반응할 뿐이다. 아동 발달의 이 단계에서 아동의 심상 心象에는 새로운 요인, 곧 자신의 행위에 의해 사랑을 만들어 내려는 새로운 감정적 요인이 생긴다. 처음으로 어린이는 어머니(또는 아버지)에게 뭣인가 ‘주려는’, 무엇이든 – 시(詩)나 그림, 그 밖의 것들 – 만들어 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이의 생활에서 처음으로 사랑의 관념은 사랑 받는 것으로부터 사랑하는, 창조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변한다. 이렇게 처음 시작할 때부터 사랑이 성숙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마침내 어린이는 이제 젊은이가 되어 자기 본위성 自己 本位性, 곧 다른 사람들을 오직 자신의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극복한다. 다른 사람들의 욕구도 자기 자신이 욕구만큼 중요해진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더욱 중요해진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욱 만족스럽고 더욱 즐겁게 된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된다. 사랑함으로써 그는 자아 도취와 자기 본위의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 고독과 고립의 감방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는 새로운 합일감 合一感, 참여감 參與感, 일체감 一體感을 느낀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랑받음으로써 받아들이는 의존 依存의 상태보다는 오히려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만들어 내는 잠재력을 느끼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작고 무력하고 병든, 또는 ‘착한’ 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애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르고 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능력’의 발달과 사랑의 ‘대상’의 발달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몇 달 동안 또는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어린애는 어머니에게 가장 밀접한 애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애착은 어머니와 어린애가 둘이면서도 하나였던 출생 이전의 시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출생은 어떤 점에서는 사태를 바꿔 놓지만 겉에 나타나 있는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 어린애는 이제 자궁 子宮 밖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독립의 정도가 높아진다. 그는 걷는 것을 배우고 말하는 것을 배우고 스스로 세계를 탐험할 줄 알게 된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사활 死活과 관련되는 중요성을 차츰 잃게 되고 그 대신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점점 더 중요하게 된다.
이와 같이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에게로 옮겨 가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갖는, 그 성질상의 본질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는 고찰한 바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무조건적 無條件的이다. 어머니가 갓난애를 사랑하는 것은 이 애가 어떤 특수한 조건을 만족시켜 주었거나 특별한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애가 그녀의 애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말할 때, 나는 ‘이상형 理想型 – 막스 베버의 의미에서. 융의 의미에서는 원형 原型 -을 말하고 있고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다운 사람, 어머니다운 사람에게 나타나 있는 부성적 원칙과 모성적 원칙에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애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의 하나이다. 한편 어떤 장점 長點 때문에, 곧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언제나 남아 있다. 곧 언제나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더 나아가서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자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랑받는 게 아니고 이용될 뿐이라는 쓰라린 감정을 쉽게 일으킨다. 우리들 모두가 어린애로서, 또 어른이 된 다음에도 어머니의 사랑에 집착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는 행복하게도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는다. (어느 정도인가는 뒤에 말하겠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동일한 갈망의 충족은 매우 어려워진다. 가장 만족스러운 발달에 있어서는 이러한 갈망은 정상적인 성애 性愛와 한 요소로 남아 있다. 흔히 이러한 갈망은 종교적 형태로 표현되며 신경증적 神經症的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는 더욱 많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주 다르다. 어머니는 우리를 탄생시킨 고향이고, 어머니는 자연이고 대지이고 대양 大洋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자연적 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어린애의 생활에서 처음 몇 년 동안은 어린애와 거의 관련이 없고 이 초기 단계에는 어린애에 대한 중요성이라는 점에서는 어머니의 중요성과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연적 세계를 나타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인간 존재의 다른 극 極, 곧 사상 思想, 인공적 人工的 사물, 법률과 질서, 훈련, 여행과 모험 등의 세계를 대표하고 있다. 아버지는 어린애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어린애에게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지시해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기능은 사회적 경제적 발달과 관련된 기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유재산 私有財産이 성립되고 사유 재산이 아들에게 상속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재산을 남겨 줄 만한 아들을 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후계자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아들, 아버지와 가장 많이 닮았고 따라서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게 된 아들을 상속자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너는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조건부의 아버지의 사랑에서도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보답을 바라고 있어서 기대하고 있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잃게 된다는 사실은 소극적 측면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에는 복종은 주요한 덕이고 불복종은 주요한 죄라는 사실이 가로 놓여 있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으면) 그 벌은 아버지의 사랑의 철회 撤回이다. 적극적 측면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인가 할 수 있고 또 노력할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나의 통제 統制를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에 대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는 어린애 자신의 욕구와 일치한다. 갓난애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과 보호를 욕구한다. 어린애는 6세 이후에는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권위와 지도를 욕구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어린애의 생명을 안전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아버지는 이 어린애가 태어난 특수 사회가 직면하게 하는 문제들을 처리하도록 어린애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상적인 경우에는 어머니의 사랑은 어린애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무력감을 조장시키지 않는다. 어머니는 삶에 신뢰를 갖고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어머니의 걱정이 어린애에게 감염 感染되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생애의 일부를 어린애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참을성 있고 관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애에게 능력감 能力感을 증대시켜야 하고 마침내 어린애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 良心을 갖게 되어야 한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 惡行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피할 수 없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사람은 밖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 超自我 super-ego의 개념과는 달라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편입 編入’시킴으로써 내면에 그들의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어머니다운 양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간직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숙한 사람은 어머니다운 양심과 아버지다운 양심이 서로 모순되는 듯 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두 양심을 갖고 사랑한다. 그가 오직 아버지다운 양심만을 간직한다면, 그는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오직 어머니다운 양심만을 간직한다면 그는 판단력을 잃기 쉽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발달을 방해하기 쉽다.
정신적 건강과 성숙의 기반은 어머니 중심의 애착으로부터 아버지 중심의 애착으로의 이와 같은 발달, 그리고 이러한 애착의 궁극적 종합에 있다. 이러한 발달의 실패에 신경증 神經症의 근본적 원인이 있다. 이 사상을 좀더 충분하게 전개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는 일이기는 하지만, 간단히 몇 가지 점을 지적하면 앞에서 한 말을 명백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경증이 생기는 한 가지 원인은 어떤 소년이 애정은 있으나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지나치게 간섭을 하는 어머니와 약하고 냉담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에 있다. 이 경우, 이 소년은 어릴 때의 어머니에의 애착에 집착할 것이고 따라서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수용적 受容的 인간, 다시 말하면 받아들이고 보호받고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특징인 갈망을 갖게 되고, 따라서 아버지다운 성질 – 훈련, 독립심, 스스로 삶을 익혀 나가는 능력 – 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발달한다. 그는 누구에게서나, 때로는 여자에게서 때로는 권위와 권력이 따르는 지위에 있는 남자에게서 ‘어머니’를 찾아 내려고 한다. 한편 어머니가 냉담하고 동정심이 없고 지나치게 간섭한다면, 그는 어머니의 보호를 바라는 욕구를 아버지에게, 따라서 부친상 父親像으로 옮겨 가거나 – 이 경우 결과는 전자의 경우나 같다 – , 또는 일방적으로 부친 지향적 父親志向的인 인간으로 발달해서 법률, 질서, 권위의 원칙에 순종할 뿐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은 갖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발달은 아버지가 권위주의적이고 동시에 아들에게 강한 애착을 갖는 경우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모든 신경증적 발달의 특징은 한 원칙이, 어머니다운 것이든 아버지다운 것이든 발달하지 못했거나, 또는 – 이것은 더욱 심각한 신경증적 발달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밖에 사람들에게 대해서나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에 있어서의 이러한 역할에 대해서나 혼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좀더 검토해 보면 강박 신경증 强迫神經症 등 신경증의 어떤 유형은 아버지에의 일방적인 애착을 토대로 해서 생기고 히스테리, 알코올 중독,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능력과 현실적으로 생활에 대처하는 능력의 결여, 억압 등 다른 신경증은 어머니 중심의 태도로부터 생기는 결과임을 알 수 있다.
3 사랑의 對象
원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 共棲的 愛着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 利己主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동일한 오류이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요한 것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 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따라서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뒤로 물러난다. 이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면서도 기술은 배우지 않고, 올바른 대상만을 고르면서 이 대상을 찾아 내면 아름답게 그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와 비교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 사이에 차이점이 없다는 생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a. 兄弟愛
사랑의 모든 형태의 바탕에 놓여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형제애’이다. 나는 형제애라는 말로 책임, 보호, 존경,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촉진하려는 소망 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성서 聖書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이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특색은 배타성 排他性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의 능력을 발달시켜 왔다면, 나는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형제애를 통해 사람들과의 결합과 인간적 유대와 인간적 일치를 경험한다. 형제애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재능 才能, 지능 知能, 지식의 차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인간적 핵심의 동일성 同一性과 비교하면 무시해도 좋다. 이러한 동일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주변으로부터 핵심으로 침투할 필요가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주로 표면적으로 지각 知覺한다면 나는 주로 차이점을 지각하게 되고 이 차이점은 우리를 분리시킨다. 내가 핵심으로 파고들면, 나는 우리들의 동일성, 곧 우리는 형제라는 사실을 지각하게 된다. 중심과 중심과의 이러한 관계는 – 주변과 주변의 관계와는 달라서 – ‘중심적 관계’이다. 또는 시몬느 베에유가 아름답게 표현한 바와 같이 “같은 말도 (예컨대 남자가 아내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말하는 것) 그 말을 하는 태도에 따라 평범할 수도 있고 각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있는 영역 –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지 없이 이 말을 나오게 하는 영역 – 의 깊이에 달려 있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일치에 의해 이 말들은 이 말을 듣는 사람의 동일한 영역에 도달한다. 따라서 듣는 사람은, 약간의 분별력이라도 있다면, 이 말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려 낼 수 있다.”10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는 동등한 자로서도 항상 ‘동등’하지는 않다. 우리가 인간인 한,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움의 필요는, 한 사람은 무력하고 또 한 사람은 강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무력상태 無力狀態는 일시적인 상태이고 스스로의 발로 서서 걷는 것은 영원하고 공통된 상태이다.
그렇지만 무력한 인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와 이방인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시작이다. 육친 육친을 사랑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니다. 짐승도 새끼를 사랑하고 보호한다. 무력한 자는, 그의 생명이 주인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한다. 어린애는 어버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버이를 사랑한다. 어떤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랑에 있어서만 사랑은 펼쳐지기 시작한다. 구약 성서에서는 인간의 사랑의 핵심적 대상이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 고아, 그리고 끝으로 국가의 적, 곧 이집트 인과 에돔 인이라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무력한 사람을 동정함으로써, 인간은 형제에 댛나 사랑을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섣 인간은 도움이 푤요한 곧 약하고 위태로운 자기를 사랑한다. 동정에는 지식과 동일시 동일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구약 성서에서는 ‘너희들은 이방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 너희들은 이집트 당에서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을 사랑한다.’11고 말하고 있다.
b. 母性愛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의 차이를 말한 앞 장 장에서 우리는 이미 모성애의 본성 본성을 다룬 바 있다. 모성애는, 앞에서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어린애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無條件的 肯定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설명에 중요한 점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애의 생명의 긍정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어린애의 생명 유지와 성장에 절대로 필요한 보호와 책임이다. 또 하나는 단순한 생명의 유지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애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가르쳐 주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소년 또는 소녀인 것은 좋은 일이고 이 지상 地上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감정을 갖게 하는 태도이다. 모성애의 이러한 두 측면은 성서의 천지 창조 天地創造의 이야기에 매우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다. 이것은 존재의 단순한 보호 및 긍정과 대응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이 최소한의 요구를 넘어선다. 자연 – 그리고 인간 – 이 창조된 뒤, 매일같이 신은 ‘참으로 좋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제2단계에서는 모성애는 어린애로 하여금 태어난 것은 좋은 일이라고 느끼게 한다. 모성애는 어린애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주고 있다. 같은 사상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약속된 땅 (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쳐 흐른다’고 묘사되고 있다. 젖은 사랑의 첫 번째 측면, 곧 보호와 긍정의 측면의 상징이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고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주게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못하다. 어린애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리 심하게 말해도 과장이 될 수 없다. 삶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불안도 감염된다. 이 두 태도는 어린애의 퍼서낼리티 personality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사실상 어린애 – 그리고 어른 – 사이에서 ‘젖’만 먹은 자와 ‘젖과 꿀’을 먹은 자를 가려 낼 수 있다.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인 형제애나 성애 性愛와는 대조적으로 어머니와 어린애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이며 이 관계에서는 한 쪽은 전적으로 도움을 요구하고 또 한쪽은 도움을 준다. 모성애를 최고의 사랑, 모든 감정적 유대 중 가장 거룩한 것으로 여겨온 것은 이러한 이타적 利他的이고 비이기적 非利己的인 성격 때문이다. 그러나 모성애는 연약한 갓난애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 성장하는 어린애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진정한 실현을 보는 것 같다. 사실상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갓난애가 연약하고 아직도 완전히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에만 사랑을 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어린애를 원하고 갓난애가 태어나면 행복하며 열심히 갓난애를 돌본다. 어린애의 얼굴의 미소나 만족한 표정 이외에는 어머니는 어린애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러한 사랑의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여성은 물론 동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본능적 기제 本能的 機制에 뿌리박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본능적 요소의 중요성이 어떻든 간에, 여기에는 또한 각별히 인간적인 심리적 요소가 있고 이 요소가 이러한 형태의 모성애의 원인이다. 우리는 모성애에서 자아 도취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어린애를 아직도 그녀의 일부라고 느끼고 있는 한, 어머니의 사랑과 탐닉은 그녀의 자아 도취적 만족일 것이다. 힘 또는 소유 所有에 대한 어머니의 소망에서 또 하나의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어린애는 무력하고 어머니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배욕과 소유욕을 가진 여자에 대해서는 자연히 만족스러운 대상이 된다.
흔히 이러한 동기를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동기는 아마도 초월 超越에의 요구라고 부를 수 있는 동기보다 덜 중요하고 덜 보편적이리라. 이러한 초월에의 요구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 인간은 피조물 被造物로서는 만족하지 못하다는 사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컵에서 던져진 주사위로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사실에 뿌리박고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의 하나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자 創造者, 창조된 자의 수동적 역할을 초월한 자로 느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창조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창조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장 자연스럽고 동시에 가장 쉬운 방법은 어머니로서 자신의 창조물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애를 통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어린애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녀의 생활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한다 (어린애를 낳음으로써 초월에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남성의 경우에는 인공적 사물과 사상의 창조에 의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려는 충동이 있다).
그러나 어린애는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애는 결국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애의 성장을 돌보아 주는 것이며 이것은 그녀로부터 어린애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점에 성애 性愛와의 기본적 차이가 있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 모성애에서는 한 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어머니는 어린애의 분리를 관용할 뿐 아니라 바라고 후원해 주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비이기성 非利己性, 곧 모든 것을 주면서도 사랑하는 자의 행복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과업으로 변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 많은 어머니들은 모성애라는 그들의 과업에서 실패를 겪는다. 자아 도취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는 여자는 어린애가 연약할 때에만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있다. 오직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 받기보다는 주는 데에서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여자, 그녀 자신의 실존 實存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여자만이 어린애가 분리의 과정을 밟고 있을 때에도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 있다.
자라나는 어린애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곧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아마도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사랑의 형태일 것이며, 어머니가 연약한 어린애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기만적인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난점 難點 때문에 여자가 ‘사랑할’ 수 만 있다면, 다시 말하면 그녀가 그녀의 남편, 다른 애들, 낯선 사람들,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여자는 참으로 사랑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 없는 여자는 어린애가 연약한 동안에는 상냥한 어머니일 수 있으나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는 없다. 사랑하는 어머니인가 아닌가를 가려 내는 시금석 試金石은 분리를 견디어 낼 수 있는가,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c. 性愛
형제애는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각기 다르지만 이러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내가 내 형제 중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나의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내가 내 애 중에서 어떤 애를 사랑한다면, 나는 나의 모든 애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나는 모든 애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애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형태의 사랑과 대조적인 것이 ‘성애’이다. 성애는 완전히 융합 融合,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선 성애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곧 그 순간까지도 두 낯선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 버리는 경험과 혼동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갑작스럽게 친밀해지는 이러한 경험은 본질적으로 오래 가지 못한다. 낯선 사람들이 친밀하게 아는 사이가 되면 이미 극복해야 할 장벽도 없고, 더 이상 갑작스럽게 접근할 수도 없다. ‘사랑 받는’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거의 모른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상대방에 대해 더 깊은 경험을 했다면, 또는 우리들이 그의 퍼서낼리티 personality의 무한성 無限性을 경험할 수 있다면, 상대방이 이와 같이 친밀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장벽을 극복하는 기적 奇蹟은 매일 새로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곧 탐구되고 곧 고갈된다. 그들의 경우, 친밀감은 우선 성적 교섭을 통해 확립된다. 그들은 상대방의 분리를 우선 신체적 분리로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 결합은 분리 상태의 극복을 의미하게 된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에 대해 분리의 극복을 나타내는,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개인 생활, 자신의 희망과 불안을 말하는 것, 자신의 어린애 같은 또는 유치한 면을 보이는 것, 세계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확립하는 것 – 이러한 모든 일은 분리의 극복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분노, 증오, 그리고 자제심 自制心의 완전한 결여를 보이는 것도 친밀감으로 여겨지고, 이것은 부부가 흔히 서로 느끼고 있는 변태적 變態的인 매력 – 이 부부는 잠자리에 들었거나 서로 증오와 분노를 발산시킬 때에만 친밀하다 – 을 설명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형태의 접근감 接近感 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 他人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함’ 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 언제나 새로운 사랑은 이전의 사랑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을 품고 – 바라게 된다. 이러한 환상은 성적 욕망의 기만적 성격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성적 욕망은 융합을 지향하지만 결코 육체적 욕망, 고통스러운 긴장의 해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의 불안에 의해,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에 의해, 허영심에 의해, 상처를 내고 심지어 파괴하려고 하는 소망에 의해 자극된다. 성적 욕망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뒤섞이고 강렬한 정서에 의해 쉽게 자극되고 사랑은 강렬한 정서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사랑은 성적 결합의 소망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육체적 관계에는 탐욕이나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은 없고 부드러움이 섞일 뿐이다. 육체적으로 결합하려는 욕망이 사랑에 의해 자극되지 않는다면, 성애가 동시에 형제애가 아니라면, 이러한 욕망은 도취적 陶醉的이며 일시적인 합일 合一 이외의 합일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 합일의 환상을 일으키지만 사랑이 없는 한, 이러한 ‘합일’은 낯선 사람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때로는 이러한 합일은 서로 부끄러워하게 하거나 심지어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환상이 사라질 때 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그들의 격리감 隔離感을 느끼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은, 프로이트가 믿고 있는 바와는 달라서, 결코 성적 본능의 승화 昇華는 아니다. 부드러움은 형제애의 직접적 결과이고, 비신체적 非身體的 사랑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형태의 사랑에도 있다
성애에는, 형제애와 모성애에는 없는 독점욕 獨占慾이 있다. 성애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은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 성애의 독점욕은 소유적 所有的 애착으로 오해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서로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이기주의이다. 그들은 서로 동일시 同一視 하고 있는 두 사람이고, 그들은 분리의 문제를 단일한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해결한다. 그들은 고독의 극복을 경험하지만 그들 이외의 사람들과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서로 분리된 채로 있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소외 疎外되어 있다. 곧 그들의 합일의 경험은 환상이다.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 인류를, 모든 살아있는 자를 사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오직 한 사람과만 충분하고 강렬하게 융합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성애는 배타적이다. 성애적 융합, 곧 생명의 모든 면에 있어서의 완전한 위임 委任이라는 의미에서만 성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척하며, 깊은 형제애라는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성애는, 만일 이것이 사랑이라면, 한 가지 전제를 갖고 있다. 나는 나의 존재의 본질로부터 사랑하고 있고, 다른 사람을 그의, 또는 그녀의 존재의 본질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전제를. 본질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동일 한다. 우리는 모두 일자 一者의 한 부분이고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이와 같다면,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든 차이는 없을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 곧 나의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여야 한다. 이것은 결혼은 결코 파기 破棄 할 수 없다는 사상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 이유이고, 또한 두 배우자 配偶者가 결코 서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며 그러면서도 서로 사랑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여러가지 형태의 전통적 결혼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현대의 서양 문명에서는 이러한 사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사랑은 자발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의 결과이며 거역할 수 없는 감정에 갑자기 사로잡힌 결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우리는 관련된 두 개인의 특수성을 볼뿐, 모든 남자는 아담의 한 부분이고 모든 여자는 이브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보지는 못한다.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 곧 ‘의지’라는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 決斷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기반은 없을 것이다. 감정은 닥쳐왔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의 행위에 판단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견해를 고려할 때 우리는 사랑이 철저하게 의지와 위임 委任의 행위이고 따라서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는 입장에 도달할 수도 있다. 결혼이 다른 사람에 의해 주선되든, 개인적 선택의 결과이든 일단 결혼이 성립하면 의지의 행위가 사랑의 계속을 보증할 것이다. 이 견해는 인간성과 성애의 역설적 성격 逆說的 性格을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지만 우리는 각기 독특하고 복제 複製할 수 없는 실재 實在이다.
d. 自己愛12
사랑의 개념을 여러 가지 대상에 적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 德이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수록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애는 이기심 利己心과 같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견해는 서양 사상에서는 멀리 소급될 수 있다. 칼뱅은 자기애를 ‘페스트’라고 말한다.13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적 精神醫學的 용어로 자기애를 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치 판단은 칼뱅의 가치 판단과 같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자아 도취, 곧 리비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아 도취는 인간의 발달에 있어서 매우 초기의 단계이고 후에 이 자아 도취적 단계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 사람은 미친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나타남이라고 보고 리비도는 다른 사람을 향하거나(사랑),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 (자기애) 고 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랑과 자기애는 한 쪽이 많을수록 다른 쪽이 줄어든다는 의미에서 상호 배타적이다. 자기애가 나쁘다면 비이기적 非利己的인 것은 덕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곧 심리학적 관찰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사이에는 기본적 모순이 있다는 명제 命題를 뒷받침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기심과 같은 현상 現像인가, 또는 오히려 그 반대인가? 더 나아가 현대인의 이기심은 정말로 모든 지적 知的 감정적 감각적 능력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인가? ‘그’는 그의 사회적 경제적 역할의 부속품이 되지 않았는가? 그의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한가, 또는 이기심은 자기애의 결여로 생기는가?
이기심과 자기애의 심리학적 측면의 검토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하는 견해에 나타나 있는 논리적 오류 論理的 誤謬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도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악덕 惡德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의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의 제외를 선언하는 이론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모순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에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 統合性과 특이성 特異性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기본적인 심리학적 전제들에 도달했고 이 전제를 위에서 우리들의 논의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도 우리들의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며,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는 모순되기는커녕, 기본적으로 ‘결합적’인 것이다. 지금 토의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 말하며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자택일적 二者擇一的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대상’과 ‘우리 자신의 자아’ 사이의 관련이 문제되는 한, ‘사랑’은 원칙적으로 ‘불가분의 것’이다. 수수한 사랑은 생산성 生産性의 표현이고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의미한다. 순수한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힘의 실현이고 집중화 集中化 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적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성질의 구현자 具現者로서의 사랑하는 사람을 지향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하는 이른바 ‘일종의 노동의 분업’ – 이러한 분업에 의해 우리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갖지 못한다. – 은 사랑에 대한 기본적 무능력을 보여 주는 징후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흔히 생각되고 있는 바와 같이, 특별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뒤따르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록 발생적 發生的으로는 특별한 개인에 대한 사랑에서 획득된다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은 특별한 사람을 사랑하는 전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곧 나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의 생명, 행복, 성장, 자유에 대한 긍정”은 “우리 자신의 사랑의 능력”, 곧 보호, 존경, 책임, 지식에 근원이 있다. 만일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한다. 만일 그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원칙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분명히 배척하고 있는 이기심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에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은 데에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에 대한 유용성 有用性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불가피한 이자택일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만일 이기심과 자기애가 동일하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하는 오류이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커녕, 사실상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 배려의 결여- 이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 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는 반드시 불행하며 생활로부터 만족을 강탈하려고 초조해 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는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이기적인 사람은 마치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철수시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과 같다고 해서 프로이트는 이기적인 사람이 자아 도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예컨대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비교하면 이기심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쉬워진다. 이 어머니는 그녀의 어린애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의식적으로 믿으면서, 사실은 그녀의 관심의 대상에 대해 깊이 억압되고 있는 적의 敵意를 갖고 있다. 이 어머니는 어린애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애를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을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기심의 본질에 대한 이론은 신경증 神經症의 한 증상인 신경증적 ‘비이기주의 非利己主義’ – 이것은 흔히 이 증상만이 아니라 이 증상과 관련된 다른 증상, 곧 억압, 피로, 노동에 있어서의 무능력, 애정 관계에서의 실패 등으로 시달리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관찰되는 신경증의 증상이다. – 에 대한 정신분석적 경험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비이기주의는 ‘증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흔히 이러한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는 구원적 救援的 인 성격의 특색이다. ‘비이기적인’ 사람은 ‘가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뿐이고’ 자기 사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며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원활하지 못하면 당황한다. 분석적 연구 분석적 연구에 의하면, 그의 비이기주의는 그의 다른 증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증상 중의 하나이며 사실은 흔히 가장 중요한 증상이다. 또한 분석적 연구에 의해 그는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본위 자기본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의 비이기주의도 다른 증상과 함께 증상으로 해석되어서 그의 비이기주의와 다른 고통의 근원인 생산성의 결여가 고쳐질 수 있을 때에만 이 사람은 치유 治癒될 수 있다.
비이기주의의 본질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특히 명백하게 나타나고 우리들의 문화에서는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 의해서 자녀들이 사랑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다음에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의 비이기주의의 영향은 그녀의 기대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어린애들은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행복감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불안해 하고 긴장해 있고 어머니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살려고 애를 쓴다. 보통, 이 어린애들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적의의 영향을 받는데, 이러한 적의를 명백히 인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느낄 뿐이며 마침내 그들도 이러한 적의에 감염된다. 결국 ‘비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은 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과 별로 다르지 않다. 사실상 비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은 흔히 더욱 나쁘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비이기주의 때문에 어머니를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애들은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속박을 받고 있다. 어린애들은 덕이라는 가면 밑에서 삶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만일 우리들이 순수한 자기애를 가진 어머니의 영향을 연구할 기회를 갖는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랑, 기쁨, 행복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람보다 더 전도력 傳導力 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이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14
e. 神에 대한 사랑
앞에서는 분리의 체험과, 여기서 생기는 분리 상태의 불안을 합일의 경험에 의해 극복하려는 욕구가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욕구의 기반임을 검토했다. 사랑의 종교적 형태, 곧 이른바 신에 대한 사랑도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별로 다른 점이 없다. 신에 대한 사랑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 합일을 이룩하려는 욕구에서 생긴다. 사실상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다른 성질과 측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발견되는 차이도 대체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차이와 동일하다. 모든 유신론적 有神論的 종교에서는, 그것이 다신론 多神論 이든 일신론 一神論이든, 신은 최고의 가치 價値, 가장 바람직한 선 善 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특별한 의미는 한 사람에게 가장 바람직한 선 善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신의 개념의 이해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의 성격구조 性格構造의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 인류의 발달의 특징은 자연으로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와 땅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이 탈출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 역사의 시초에는, 인간은 자연과의 원래의 합일로부터 내던져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러한 원초적 原初的 결합에 집착하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원초적 결합으로 거슬러올라가거나 또는 이러한 원초적 결합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찾아 낸다. 인간은 아직도 동물 및 나무의 세계와 일치하는 느낌을 갖고 있고 자연 세계와 하나로 남아 있음으로써 합일을 발견하려고 한다. 여러 가지 원시 종교 原始宗敎는 이러한 발달 단계를 증언하고 있다. 동물은 토템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가장 엄숙한 종교적 행위나 싸움터에서는 동물의 가면을 쓰고 동물을 신으로 숭배한다. 좀더 발달한 단계에서 인간의 기술이 직공 職工과 예술가의 기술로 발달되었을 때, 인간이 더 이상 자연의 선물 – 인간이 찾아 낸 과일과 인간이 죽인 동물 – 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인간은 손수 만들어 낸 것을 신으로 바꿔 놓는다. 이것은 점토 粘土, 은, 금으로 만든 우상 偶像을 숭배하는 단계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기술을 자신이 만드는 사물에 투입 投入하며, 따라서 소외된 형식으로 자신의 솜씨와 자신의 소유물을 숭배한다. 더욱 발달된 단계에서는 인간은 신에게 인간의 형태를 부여한다. 인간이 좀더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세계에 있어서 인간이 최고의, 그리고 가장 고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잇는 것 같다. 신인동형 神人同形 의 신을 숭배하는 이 단계에서 우리는 두 방향의 발달을 발견한다. 한 방향은 신의 본성이 남성적이라든가 여성적이라든가 하는 것과 관련되고, 또 한 방향은 인간이 도달한 성숙도 成熟度, 그리고 신의 본성 本性과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본성을 결정하는 정도와 관련된다.
우선 어머니 중심의 종교로부터 아버지 중심의 종교로의 발달을 말하기로 하자. 19세기 중엽의 바하오펜과 몰간의 위대하고 결정적인 발견에 따르면, 그들의 발견이 가장 학문적인 분야에서 직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여러 문화에 있어서 부계적 父系的 종교에 앞서 종교의 모계적 母系的 시기가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계적 시기에는 최고의 존재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여신 女神이고 또한 가족과 사회의 권위자이다.
모계적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모성애의 본질에 대해 이미 말한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모든 것을 보호하고 모든 것을 감싸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은 또한 통제 統制되거나 획득될 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있으면 사랑받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으면 상실감 喪失感과 궁극적인 절망감이 생긴다. 자녀들이 ‘착하고’ 순종하거나 어머니의 소망과 명령을 실현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들이 그녀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어머니의 사랑은 평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만인 萬人은 모두 한 어머니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모두 ‘어머니인 대지 大地’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평등하다.
인간의 진화 進化의 다음 단계는 우리들이 철저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추리 推理나 재구성 再構成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단계이거니와, 이 단계는 부계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어머니는 최고의 지위에서 퇴위 退位 당하고 아버지가 종교에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최고의 존재로 된다. 부성애 父性愛의 본질은 아버지가 명령하고 원칙과 법칙을 수립하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아들의 복종에 달려 있다는 데 있다. 아버지는 자기를 가장 닮고 가장 잘 복종하고 자신의 재산 상속자로서 그의 후계자가 되는데 가장 적합한 아들을 가장 좋아한다 (부계 사회는 사유 재산의 발달과 병행한다). 그 결과로 부계 사회 父系社會는 계급 조직적 階級 組織的이다. 형제로서의 평등은 경쟁과 상호 투쟁에 굴복한다. 인도 문화, 이집트 문화, 그리스 문화, 또는 유태적 기독교 猶太的 基督敎 또는 이슬람교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남성적 신들이 있고 그 중에서 으뜸되는 신이 지배하거나 모든 신이 일자 一者, 곧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제거되어버린 부계적 세계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소망을 지워 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자애로운 어머니의 상 像이 신전 神殿에서 전적으로 추방되지 않았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태의 종교에서는 신의 모성적 측면은 특히 신비주의 神秘主義의 여러 가지 흐름 속에 재도입 再導入 된다. 가톨릭의 종교에서는 ‘어머니’는 ‘교회’에 의해, 그리고 ‘성처녀 聖 處女’에 의해 상징된다. 심지어 개신교 改新敎에서도 ‘어머니’의 모습은, 비록 그녀는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지워지지는 않는다. 루터는 인간이 ‘하는’ 어떠한 일도 신의 사랑을 획득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의 주요한 원리 原理로 확립했다. 신의 사랑은 ‘은총 恩寵’이고 종교적 태도는 이 은총을 믿고 자신을 연약하고 무력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신을 움직이지는 못하며, 또한 가톨릭 교리 敎理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이 우리들을 사랑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좋은 일에 대한 가톨릭의 교리는 부계적 양상 父系的 樣相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복종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획득할 수 있다. 한편 루터의 교리는 가장 현저한 부계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숨겨진 모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획득될 수 없고 어머니의 사랑은 여기에 있거나 여기에 있지 않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15라고 시편 詩篇의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오직 믿고 나 자신을 의지할 데 없고 무력한 어린애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을 가장 명백한 상 像 에서 제거하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대체한 것은 루터의 신앙의 특이성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실성 대신에,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을 희구 希求 하는 것과는 어긋나는 강렬한 회의 懷疑가 최고의 특색이 된다.
신에 대한 사랑의 성격은 종교의 모계적 및 부계적 측면의 상대적 중요성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나는 종교의 모계적 요소와 부계적 요소의 차이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계적 측면은 나에게 신을 아버지처럼 사랑하게 한다. 나는 아버지를 올바르고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곧 아버지는 벌을 주고 상을 주며 마침내 나를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 선택할 것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처럼, 이삭이 야곱을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이 사랑하는 민족을 선택한 것처럼. 종교의 모계적 측면에서는 나는 신을 가장 자애로운 어머니오서 사랑한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믿고 있고, 내가 아무리 가난하고 무력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할 것이고 어머니의 다른 자녀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며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미는 나는 구해 주고 나를 구제하고 나를 용서하리라고 믿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신에 대한 나의 사랑과 나에 대한 신의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신이 아버지라면 신은 나를 아들처럼 사랑하고 나는 신을 아버지처럼 사랑한다. 만일 신이 어머니라면 어머니와 나의 사랑은 이러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신에 대한
<ARCHIVING STILL IN PROGRESS…. STAY TUNED…>
III. 사랑과 현대서양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IV. 사랑의 실천
역자 후기 譯者 後記
현대에 이르러 세계 어디서나 가장 처참하게 평가 절하 評價 切下 되고 있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해방 후 심한 인플레 현상을 빚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값싸게 된 것이 ‘사랑’이라는 말, ‘사랑한다’는 일이 아닐까. 사랑의 타락 현상에 대한 경계는 이제 도덕군자의 관심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사랑의 고갈을 느끼고 있다. 인간 관계에서, 사회 관계에서,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에서, 애인들 사이에서, ‘사랑’이 자취를 감추고 ‘관습’과 ‘계산’이 대신 들어선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러한 사랑의 상실을 심각하게 겪으면서 또 하나의 미신 迷信이 생겼다. 인간이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미신, 사회 관계, 대인 관계의 빈틈 없는 조직화 때문이라는 미신, 인간의 본성으로 보아 사랑은 원래 환상이고 허영이었다는 미신 등 사랑의 결핍을 합리화하는 무수한 구실이 횡행하고 있다. 이러한 구실은 인간의 비인간화 非人間化를 촉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고갈 현상을 야기시킨 외부적 원인을 인정하다 하더라도, 이에 앞서 우리들의 내면에서 사라져 버린 것, 우리들이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을 컴퓨터처럼 정밀한 기계라고 보는 기계론적 機械論的 인간관이나 인간을 물질의 덩어리로 보는 유물론적 唯物論的 인간관이 우리들에게서 파괴해 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가려 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연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환상이고 인간의 허영이고 인간의 자기 기만일가? 이렇게 보면 우리는 지금도 농촌 어느 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티 없이 맑고 희생적이고 순수한 모성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가끔 신문 기사로 보도되어 우리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자식을 돌보는 정성스런 어버이의 사랑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실존 철학자나 그 밖의 무수한 철학자, 사상가, 문학자들의 설명을 빌리지 않더라고 인간이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존재임은 우리들의 근본적 경험에 속한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하지 않거나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인간의 근본적 존재 방식 存在 方式의 하나를 회피하려고 하지 않는 한, 사랑을 떠나서는 우리들이 옛[예]부터 가꾸어 온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은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E. Fromm 에리히 프롬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가 시장 市場의 교환 원칙 交換 原則의 지배를 받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치도 결국 경제적 교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평가 받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이용 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현실은 우리의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지혜도 ‘돈’으로 환산되고 아름다움도 ‘돈’으로 환산되고 정의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고, 더구나 ‘사랑’ 따위는 이제 감각적 쾌락내지는 매음 賣淫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은 개탄의 영역을 넘어서 있지 않은가.
단적으로 이것이 인간의 사랑을 고갈시킨 외부적 원인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사랑의 알리바이는 되지 못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카뮈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또 ‘자유는 지옥’이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을 음미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랑의 알리바이를 전적으로 외부적 원인에서만 구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인간이 반항하는 존재, 자유로운 존재, 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까지도 옛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고 또한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참된 자아 자아 – 이것을 실존 실존이라고 부르든 또 다른 말로 부르든 용어나 개념에는 개의치 말자 – 의 상실에서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내재적 원인을 밝혀 내야 할 것이다.
프롬은 개인의 무의식층 無意識層 까지 파고들어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를 밝혀 낸다. 그의 진단은 인간의 참된 자아의 상실이 사랑의 상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상실, 따라서 사랑의 능력의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형이상학적 천착이나 종교적 설교나 도덕적 교훈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나 자신, 타인, 인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또 모든 사람이 이러한 외침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사랑의 부재현상 不在現像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사랑이 없는 인간 관계의 황량함, 사람이 결핍된 사회의 처참함, 진정한 사랑이 없는 부부 관계의 의례성 儀禮性 등은 누구나 절감하고 있다. 또한 사랑의 회복이 긴급하고 긴요하다는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려고 해도 안 된다. 사랑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사랑에 실패하고 점점 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뼈저린 고독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사랑하려는 노력의 실패는 사람에 대한 공포를 일으키고 자기 자신의 무능력을 은폐하기 위한 합리화에 급급하게 만든다. 분리 상태에서 불안과 고독이 두려우면서도 이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다.
여기에서 이제 사랑은 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기술적 技術的인 문제가 된다, 사랑은 하느님이 준 능력이므로 우리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안이한 대답을 하기에는 현재의 사회와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교묘하다. 그러므로 이제 사랑을 회복하는 데에는 절실하게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참으로 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이러한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기술의 미숙성 未熟性에 있다.
이 점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사랑의 기술을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밝혀 놓는 것이 바로 E. 프롬의 <사랑의 技術>이다. E. 프롬이 제시한 분석과 기술을 상세히 말하는 것은 피하기로 하거니와, 적어도 사랑을 천부적 天賦的인 능력으로 보지 않고 훈련과 인내의 습득이 필요한 능력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현대성 現代性을 갖는다. 맹목적인 사랑, 다시 말하며 사랑의 본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사랑의 기술에 숙달되지 못한 사랑은 오히려 인간에게 위험하다고 하는 경고에 이르면 우리는 숙연히 우리 자신이 사랑의 역경을 뒤돌아보게 된다.
프롬이 제시하는 이론이 반드시 옳다거나 프롬이 제시하는 기술이 반드시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프롬이 보여 주는 사랑의 실상 實相과 기술은 우리들이 사랑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 추상적이 아니라 – 생각하는 계기로서는 매우 탁월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널리 읽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사랑에 대한 이론이나 사랑을 실천하는 기술만이 아니라,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현재 문명과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도 있고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소묘 素描도 있다.
프롬 Erich Fromm 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했다. 하이델베르크, 뮌헨, 프랑크푸르트 등 각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배웠다. 그는 1926년부터 1932년 까지 프랑크푸르트의 정신분석 연구소 精神分析 硏究所 의 강사를 역임했고 이 대학의 사회조사 연구소 社會調査 硏究所 연구원을 겸임했다. 나치스의 사상 통제가 강화되자, 연구소는 파리로 옮겼는데, 프롬은 1933년 미국 시카고의 정신분석 연구소의 강사로 초빙되어 도미했고 미국 국적을 얻었다.
1939년까지는 컬럼비아 대학 국제 사회 연구소의 멤버로 일했으나 그 후 몇 개의 정신의학 관계 연구소를 거쳐서 멕시코 국립 대학 교수로 근무했다. 1957년 이후로는 미시간 주립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는 D. 리이스만 등과 함께 군사력 군사력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적 활동을 하면서 정력적인 문필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랑의 技術> 이외에도 다름과 같은 저서들이 있다.
Escape from Freedom, 1941 (自由로부터의 逃避)
Man for Himself (自立的 人間)
Psychoanalysis and Religion, 1950 (精神分析과 宗敎)
The forgotten Language, 1950 (잊어버린 言語)
The Sane Society, 1955 (健全한 社會)
<사랑의 技術>은 1956년 9월에 발간되어 1962년 말까지에 19판이 나왔다. 이것으로 이 책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963년 5월 Bantam 문고 文庫에 수록된 후에도 거의 40판에 가까운 발행을 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동안에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의 대본으로는 Bantam 문고를 사용했다.
1975년 6월
譯者 職
<譯者 紹介>
황문수 黃 文 秀
고려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현, 고려대학교 문과대 전임강사
저서: <古筠 金玉均>, <동학운동의 이해>
역서: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理解>
니이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칼 야스퍼스 <理性과 實存>
윌 듀란튼 <哲學 이야기>
윌리엄 드레이 <歷史哲學>
프리쯔 하이네만 <實存哲學>
버트란드 러셀 <幸福의 征服>
外 多數
황문수 역
THE ART OF LOVING
BY ERICH FROMM
문예출판사
1976년 6월 초판
1977년 9월 중판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가학성 음란증과 피학대 음란증에 대한 좀더 자세한 연구는 E. Fromm, Escape from Freedom을 참조할 것. ↩
- Spinoza, Ethics ↩
- 이러한 성격의 방향을 자세히 검토하려면 E. Fromm, Man for Himself를 참조할 것. ↩
- 환희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와 비교해 보라. ↩
- Nationalökonomie und Philosophie ↩
- I. Babel, The Collected stories ↩
- R. A. Nicholson, Rumi ↩
- 프로이트 자신은 삶과 죽음의 본능에 대한 이후의 개념에서 이 방향으로 한 걸음 전진했다. 종합 綜合과 통일의 원리로서 이 사랑의 개념 (에로스 eros)은 그의 리비도 libido [성욕 性慾 ↩
- The Interpersonal Theory of Psychiatry에서 Sullivan이 이러한 발달에 대해 한 설명을 참조할 것. ↩
- Simone Weil, Gravity and Grace ↩
- 동일한 사상은 Hermann Cohen 의 Religion der Vernunft aus den Quellen des Judentums에도 표현되어 있다. ↩
- Paul Tillich 는 Pastoral Psychology 지 誌 1955년 9월초의 The Sane Society 에 대한 서평에서 ‘자기애’라는 애매한 말을 버리고 ‘자연스러운 자기 주장’ 또는 ‘자연스러운 자기 수용 자기수용’이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이 더 좋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 제안의 장점을 인정하지만 나는 이 점에서는 그와 동의할 수 없다. ‘자기애’라는 말에는 자기애의 역설적 요소가 더욱 명백하게 내포되어 있다. 사랑은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대상에 표시하는 동일한 태도라는 것- 이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에서는 ‘자기애’라는 말은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로 명령한 것은 자기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도 똑같은 의미로 자기애를 말하고 있다. ↩
-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
- Meister Eckhart ↩
- 시편 詩篇 22장 9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