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말 – 김남조 – 1983년
차례
제1장 오늘 생각하는 사랑
- 시작의 의미
- 먼데서 오는 편지
- 문 앞에서
- 회신 없이 오고 간 편지들
- 경대 앞에서
- 구월, 그 서늘한 큰 손
- 오늘 생각하는 사랑
- 영혼의 추위를 앓는 이들에게
-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제2장 그 먼 길의 길벗
- 나의 삶, 나의 글
- 진정한 것
- 나의 이력서
- 장미
- 친구여 화해하자
- 여름나무 같은 삶과 사랑을
- 그 먼 길의 길벗
제3장 가슴 안의 그 하나
- 기도 연습
- 백조 이야기
- 돌아오는 이를 위하여
- 마음의 얼음을 풀고
- 사랑으로 들어올리는 삶
- 시와 사랑
- 파지(破紙)를 내면서
- 결혼과 나
- 가슴 안의 그 하나
제4장 마음의 성소(聖所)
- 추운 시절 이야기
- 그 수평선을
- 마음의 성소(聖所)
- 사랑을 위하여
- 사월의 연가
- 신혼의 의미
- 잊을 수 없는 동화
제5장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 겨울새의 날개 위에
- 동일한 시대, 동일한 별에서
- 오늘을 사는 성인상(聖人像)
- 주의 영광을 앞세우는 기도
- 결혼에 대하여
- 아름다운 사람
- 칠월의 젊음들
-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 사랑의 큰 땅
- 시를 위하여
- 만들어 주는 삶
- 삶과 죽음 안의 정진(精進)
- 나의 매력남
- 신앙의 흐린 글씨
제1장 오늘 생각하는 사랑
시작의 의미
시작의 의미는 새벽의 의미와 동일하다. 밤중에라도 결정 짓고 즉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홰를 치는 첫새벽이 되는 것이다.
정녕 그건 새벽이다.
무더운 여름 밤, 잠도 설치고 번민의 늪에서 허위적 거리던 당신이 땀에 젖은 긴 머리채를 냉수에 감아 헹구고 손을 모아 기도 드린다면 신은 필시 그 음성을 들으실 것이며, 당신이 소망과 결정을 들어 올린다면 그 또한 푸드득거리는 날개 짓으로 여명의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를 것이다.
겨우 한 발자국 내디딘 발걸음에 불과하다 해도 쉬지 않고 걷는다면 언젠가 목적의 땅에 다다르게 될 필연의 약속 임도 믿을 일이다.
신은 결과를 지배하시고 사람은 과정의 권리를 차지한다. 과정은 사람의 몫이나 최선을 다하는 이상의 인간적인 힘은 없다.
좌절할 밖에 없었던 여건을 다시 점검하고 넘어진 그곳에서 몸을 일으킬 때, 비록 또다시 좌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듭거듭 일어나 걸어갈 수 만 있다면 이는 새벽의 사람이요, 그 시간이 심지어 죽음과 인접한 것이라 해도 시작의 장한 의지는 굳건한 바위가 되어 남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이 절망하여 엎어질 때의 쓰디쓴 눈물의 맛을.
몇 번을 날아올라도 매서 시도는 헛되고 진흙에 박힌 수레와도 같이 겨우 손잡이만이 뽑아져 나온 참담한 경험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손잡이를 건진 일은 전부를 당겨 올린 가능성의 시초이며 성취의 문을 열 열쇠도 되지 않으랴.
당신은 화해를 원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向)을 잡아야 한다.
당신은 풍성한 추수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농기구를 들고 남보다 먼저 밭으로 나가야 하고 더 충실히 거기서 일해야 한다. 당신은 어려운 확률의 과녁을 맞추는 능한 사수이고 싶다. 그렇다면 천 번 만 번의 실패를 감내하는 철저한 분발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사랑을 원한다.
아아, 그 목마름…
당신은 사랑을 원한다. 낙타가 제 몸 속에 저장했던 물로 갈증을 푼다고 하듯이 최소한 당신 자신의 사랑으로 목을 축이며 힘을 내야 한다.
그리고 먼저 사랑해야 한다.
감자를 심으면 어미감자는 땅 속에서 풀어져 없어지고 보석 같은 햇감자들이 그 자리에 영글듯이 당신의 사랑도 먼저 허리를 구부리고 오랫동안 흙의 능력을 신앙해야 한다. 소망 중에 인내하며 봉사해야 한다.
아무리 늦은 시작이라도 결코 너무 늦은 건 아니다. 시작은 곧 새벽의 의미이거니 창창한 긴 날이 당신을 도와 온갖 보람을 솟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시작하라.
먼데서 오는 편지
먼데서 오는 편지는 배달이 더디다. 그러나 마침내 우편함 속에 그것은 들어 있게 된다.
먼 땅의 햇빛과 바람이 배어든 보송한 종이 살갗을 두 손바닥 안에 꽉 잡아 쥐었을 때 온몸이 화끈해지는 기쁨.
기다림의 나날.
마치도 옥을 갈듯이 기다림의 지혜를 닦아야 한다.
목마름을 참아라.
정갈한 냉수사발을 받아 들고 맑고 냉쾌한 수분으로 전신을 적시는 복된 해갈을 얻으려면 아무 잔에나 입술을 대선 안 된다. 그대의 참 생수(生水)를 얻을 때까지 불 같은 갈증도 견디어라.
사람에겐 목마름이 중요하다.
배고픔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목마르거나 배고픔으로 하여 먹고 마시는 순서가 약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있다.
배고픈 사람만이 음식의 참 단맛을 안다. 눈물 나는 고마움도 안다.
생각해 보라.
멀리 가는 새는 높이 날며 값진 만남은 충실한 예비가 차지하는 그 보답이다.
선택을 준비하는 큰 아기들아
선택의 예절 잘 가꾸기를 귀중한 과수밭에 공 들이듯이 하여라.
큰 아기들아
미혼의 하늘을 이고 그대들 뙤약볕에 서 있거니, 지금은 동서남북 어디를 살펴보아도 생애의 연분인 그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하지만 조만간 에 눈앞을 가득 채우는 운명의 사람을 맞게 되리라. 만나면 즉시 알아볼 그대의 그 사람을…
큰 아기들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조바심하지 말고 만난 다음의 연분의 다난(多難)을 견뎌낼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사랑하는 사람 사이 관계의 모습은 밋밋한 비단 허리띠 같은 게 아니고 순은의 고리와 고리가 하나하나 맛 물리듯 어렵게 정교한 성실의 것이다. 그 선택은 한 번에 그치지 아니하며 살아 있는 동안 거푸 몇 번이라도 되풀이되는 집요한 질문임을 명심하거라.
사실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전력투구로 이 질문 앞에 몸을 내던져 맨살을 으깨는지.
‘이 여자가 내 영혼의 짝인가?’
‘이 남자가 내 몸의 절반인가?’
정녕 사실이다.
죽어도 이 한 가자, 진실의 속살을 들추고 싶다. 살 속으로 살 속으로 촛불을 들이대고 싶다.
‘이 여자가 나의 갈비뼈인가?’
‘이 남자가 나와 동일 혈육인가?’
사랑하는 사이에서 사랑함으로 하여 이리도 가혹하게 다가서는 물음.
큰 아기들아
그대는 선택의 관문을 다 뚫을 수 있겠는가. 줄곧 합격의 보장 위에 설 수 있겠는가. 시퍼런 작두 날이라도 밟고 서겠는가.
한 남자가 마지막 숨 거두는 자리에까지 그의 남김 없는 사랑과 의탁이 되어 주겠는가.
그의 영혼을 육체에서 갈라내어 공손히 신께 봉헌하는 그 자리 거기에 산 증인일 수 있는가.
탄생엔 그의 어머니가 함께 했듯이 죽음엔 그대가 자리를 지키며 모성의 이불자락을 덮어 주겠는가.
사랑만큼 무서운 건 없다.
사랑보다 더함 모서리는 없다.
그래도 사랑하겠는가.
이런 말이 있다.
‘진정한 결혼은 영원한 약혼자와 같은’ 성질이라고,
이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신이 한 분 이시듯 유일한 존재인 그, 혹은 그녀, 그에게 나아가며 더욱더 그의 것이기를 열망하는 불 같은 희구.
날마다 새 얼굴로 열리는 아침 하늘이나 밤 사이 새로 차오르는 단 샘물과도 같이 신선하며 무량하기 바라는 사랑의 염원이야말로 갈수록 더해질 처녀성의 심화일 듯 싶구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세상 사람들, 그러면서 그 한 존재에마다 신비한 개별성을 부여하신 조물주의 섭리란 얼마나 오묘한가. 그의 신비의 전부를 열어 주는 그녀가 될 수 있겠는가.
서로를 공손히 끌어올리는 가운데 둘이 함께 높여지는 일이야말로 바람직하다.
사람에겐 사람의 길과 염원이 있으며 사람이기에 사람의 짝을 원하게 된단다. 따라서 이를 주실 수 있는 분, 모든 베풂의 근본이신 신께 갈구하며 신의 좌석을 두 연인 사이에 마련해 드려야 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고 둘이 한 곳을 본다’는 말은 이래서 진실이 된다 할 것이다.
하나의 사랑은 하나의 성전을 쌓는 행위이므로 하나의 종교와도 같다. 그러므로 사랑의 모든 시간은 예배와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고?
그건 사랑에 빠질 때만이 이해하게 된다. 내 감히 말하리니 사랑할 때만이 사랑에 따른 온갖 내적인 음미가 가능한 법이다.
‘결혼은 사람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고 본능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제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품위란 도덕의 준수 같은 일에도 상관되겠으나 그보다도 인격과 인권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며 그 용맹한 옹호일 듯 싶구나.
저편의 유익을 보장함으로써만 그 자신도 유익을 나누어 갖는다. 그는 먹이면서 함께 먹고 그를 기르는 가운데 함께 자라며 그의 모습을 정돈해 주면서 스스로도 아름다워진다. 활력의 불심지를 실하게 할 그때 둘이 모두 광명한 땅에 머무르게 될 것을.
큰 아기들아
꿈으로만 희구하는 사랑이나 행복은 화려한 꽃다발과 같아서 아름다우나 매우 허약하다. 걸어가고 달려가야 한다. 필요할 땐 사막도 가로질러야 한다. 우물이 마르면 샘의 밑바닥을 더욱 파헤쳐서 솟구치는 새 물줄기를 디밀어 올려야 한다.
큰 아기들아
첫가을의 바람이 분다.
흘려 보낸 무수한 밤하늘과 그 새벽과 불볕의 여름 한 시절을 지내어 철철 넘치는 강물처럼 청량한 구월의 바람이 불어 오는구나.
좌르르 드러눕는 억만 파도와도 같이 도시와 산촌을 가리지 않고 단번에 쏟아 넘치는 이 상쾌함.
큰 아기들아
영혼의 짝을 만나기까지 사람은 외로운 존재이다. 영혼의 짝을 만난 다음에도 사람은 역시 외로운 존재란다.
하지만 이래서 좋지 않으냐.
외롭기 때문에 묵상하게 되고 친구를 알아보게도 되느니, 연민과 축원에 눈 떠 겸손을 배우고 잠 못 이루는 심야의 묵상과 그 깊은 곳을 지나가시는 신의 신발 끄시는 소리까지도 듣게 되리라.
자주 심약해지고 상처만 잘 입는 인간의 참 모습, 그 숙인 얼굴의 눈물 자국을 일일이 살피시는 주의 자애를 깨달음으로 사람의 소명을 남김없이 들으리라.
삶엔 리듬이 있다.
긴장과 해이, 용납과 거부, 사랑과 미움 등의 상반심리가 가로 세로의 실로 얽혀 한 솔기의 무명을 짠다. 음정의 고저 장단도 한 곡의 음악 안에서 낱낱이 쓰임 있게 되느니, 이로써 리듬과 조화를 보태어 전체의 격조를 끌어올리게 되는 이치니라.
삶은 창조이다.
첫날의 탄생은 타력에 의해 생명이 비롯된 것이었으나 일단 우리 손에 삶의 운용(運用)이 넘어 온 다음부터는 우리들 각자의 기량에 맡겨진다.
능한 자는 창조한다.
삶을 통해 그대도 창조의 영광에 동참하고 싶으리라. 그렇다면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과녁에 맞추어 화살을 겨냥하고 팽팽히 활시위를 당기는 때의 긴박감, 일심불란의 몰입에 속속들이 그대의 몸을 적셔야 한다.
사람을 그 안에 담아 넣는 삶이라는 집. 이는 벽돌과 철근으로 짓기에 앞서 인격과 협동으로 세우게 된다는구나.
큰 아기들아
혼자를 겁내지 말아라.
혼자의 내부에 친구가 있다. 여럿의 나다. 그러므로 그 모두를 한 질서에 통합시키면서 부단한 자아 점검, 성숙하는 가치관, 뿌리 내리는 신앙 등을 쌓아 가야 한다.
좋지 않으냐.
느리게나마 쉼 없이 자기를 형성하는 일이…
하여 부디 분발하거라.
불에 달궈지는 시금(試金)의 단련에서 도망치지 말지라. 정녕코 이를 이겨내는 사람들만이 서로 줄 거리를 갖게 되는 법이다.
큰 아기들아
미혼의 하늘은 창창하게 높고 그대들 때때로 서로 타인이라는 느낌에 붙들려 참담해지곤 한다. ‘타인이다 타인이다’ 라고 후련히 고함지르고 싶은 충동과, 실바람이 닿아도 피가 흐르는 과민 등은 그 모두 니네가 젊어 있는 탓인 것을.
그래서 좋지 않으냐.
사랑하는 큰 아기들아.
바라고 또 바라느니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 거라. 행복보다 먼저 형성(靈性)의 꽃핌을 크나큰 지표로 삼아라.
첫 날의 만남은 묘목에 불과하니 비바람 고비고비를 굳건히 이겨내어 우람한 성목(成木)으로 키워내거라.
연분의 성목을 기필코 이루거라.
큰 아기들아.
문 앞에서
문 앞에 서면 묘한 느낌 이곤 한다. 얄팍한 문 한 겹을 사이에 둔 것뿐인데 그 안의 형편을 전혀 헤아릴 길 없는 무딘 내 눈이다.
심지어 아이들의 방문 앞에 섰을 때도 감정이 거북한 경우가 생긴다. 단지 느낌으로서만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 흉허물 없는 가족 사이라도 갑작스런 침입에 당황하는 표정을 읽게 될 때 피차가 민망스럽다.
“왜 엄마?”
분명코 왜 왔느냐는 질문이다. 용건이 없거나, 있더라도 긴급한 게 아니라면 다음으로 미루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럴 만도 하다. 그 자신의 특별한 긴장에 감사여 손님을 맞을 마련이 못될 때가 사람에겐 있는 법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사랑하는 자식들이긴 해도 불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모처럼 매만져 놓은 질서나 형편을 깨뜨려 버린 일을 경험한 바 있다. 일각이 아깝게 바쁜 글을 쓰고 있거나 할 땐 이만저만 짜증스럽지가 않다.
“왜 그러니?”
한 마디 짧은 말에도 거부의 가시가 느껴졌던지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
문 앞에서 잠시 주저한다.
이 문은 나에게 열릴 것인가.
단지 물리적인 해결로서만이 아니고 양쪽의 심정이 순조롭게 통하게 될 내적 통로도 정녕 열릴 것인가. 서로의 진실이 과여 화락한 응답을 이루게 될 것인가.
사람은 어차피 남의 인생의 문 앞에 가서 노크한다.
자유로이 드나든다고 여김은 적잖이 착각일 때가 있고 열리지 않는 문의 차가운 나무판자에 머리를 부딪는 비참 감을 실지로 맛 보기도 한다. 화목하게 잘 지낸다고 보여지는 부부나 연인들 사이에 있어서도 한평생 언제라도 그 문이 열려 있다곤 결코 못할 것이다.
어설픈 육안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문의 비밀들.
때문에 문 앞에서 겁을 먹는 일이 생겨나곤 한다. 조심성이 늘고 마음도 추워진다. 거부의 문이라면 피해 가고 싶다는 타산마저 치 받는다. 두드려 보기도 전에 상처부터 입는 과민 현상인들 없지 아니하다. 갖가지로 묘하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성화(聖畵) 중에 예수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는 그림이 있다.
문엔 손잡이가 그려져 있지 않으므로 안의 사람이 열어야만 들어가실 수 있다는 풀이인 바,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문 안에 있는 건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내가 문 안에서 빗장을 굳게 잠그고 이웃이나 형제 사이를 차단했을 수가 있다. 사람뿐이 아니고 외계의 모든 광명한 것을 떠밀어 내면서 껍질 속의 소라처럼 답답하고 숨막혀 하는 폐쇄적 상황들.
문을 여는 건 첫째로 정신의 관용이다. 서로 소통하고 채워 주면서 진정한 왕래를 가꾸어 감이 물론 바람직하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아래의 각도에서 살펴봄도 무용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문 밖에 있고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런 때 문 밖이라는 조건은 뒤집어 놓은 문 안이 되기도 함을 살필 일이다. 내 쪽에서 볼 땐 분명코 나의 문 안이다. 그러므로 내가 열어야만 양쪽의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논법이 솟아난다.
문을 열자. 지나치게 개방적인 게 아닌 범위 안에서 서로의 울타리를 헐고 문을 열자.
사람들의 사이만이 아니고 모든 아름답고 풍요한 것과 그리고 으뜸으로는 신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자.
회신 없이 오고 간 편지들
선생님
꼭 16년을 문학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풋문인, 매사 서두르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 선 미의 주인입니다. 시인을 만나면 마음이 밝게 개고 날 듯 꿈과 낭만이 부풀어 오릅니다.
오늘은 저 불우했던 나혜석의 ‘참회의 글’을 읽습니다. 쉬는 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나혜석의 솔직한 자기 고백의 글들은 저의 내면에 성숙을 가져 왔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불우했지만 훌륭한 화가 지식인이었습니다.
편지의 묘미는 철저히 사신인 데에 있고 그 겉봉에는 친전이라고 또박이 적어 넣는다. 문갑 속에 간직하기조차 허술하다 여겨져서 명주 피륙 속 갈피에 끼워 넣고 장롱 밑바닥에 그것도 저편 구석에 꼭꼭 눌러 둔다.
편지에 적힌 사연들은 몇 년, 몇 십 년까지도 거기서 잠을 잔다. 유리병 속에 따라 넣고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히는 마술의 약품처럼 세월의 심연에서 무한정 묻혀지고 겹 절이는 사이 기묘한 화학작용을 거듭하면서 아주 다른 물질이 되기도 하리라. 그 편지를 꺼내는 순간 뽀얀 연기가 서려 올라 검은 머리를 하얗게 바꿔 놓는 따위로…
그러나 요즘 그런 편지는 퍽 드문 것 같다. 육체를 감싸는 의복에 있어서도 예사로 줄이고 잘라내는 노출시대이니만큼 마음의 속살도 애써 감출 까닭이 있겠느냐는 식의 세태임이 분명하다.
아침 신문을 전날 밤에 TV에서 읽어 주는 시대에야 편지보다 전화로, 그것도 인사 빼고 용건만 말해 주는 편을 더 좋아한다. 아니, 좋다 나쁘다 의 비교 의식조차 거르고 의당 그래야만 한다는 단일 답변이 나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런 시대이므로 해서 편지에의 향수를 골똘히 곱씹게 되는 면도 있다.
편지라는 그것.
나와 편지류와의 관계는 다소 기묘하고 어느 의미로 비극적이랄 수도 있다.
나는 여학교 시절부터 마음 속에 특별한 한 사람을 지니고자 했으며 그 허구의 인물에게 편지를 썼었다. 지금 생각하면 작게 접혀 있었던 내 마음을 광활한 외부로 열게 하는 필연의 촉매들이었다. 내 감정을 달갑고도 안식 없는 사역(使役)에 휘둘려져서 너덜너덜 닮아지는 것만 같았었다. 말하고 싶고 더하여 과녁을 쏘아 맞추든 사적(射的)의 적중을 원했었던 성싶다.
글에는 농도라는 게 있다.
가장 짙은 건 시인의 비장 수기(手記) 쯤에 가두어지고 중간 부류는 작품이 되어 독자의 손에 넘어가며 세 번째 쯤 탈색된 사연들이 봉투에 담아져 편지가 되는 건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조차 피 묻은 지문이 찍히곤 한다.
아니다. 사실은 지밀지순하고 으뜸으로 농도도 짙은 것을 편지에 채워 놓고 싶어 한다고 말해야 할 듯싶다. 더하여 별달리 공들이는 편지도 있다. 초안을 잡은 후 다음날까지 퇴고를 하여 다시 또 정서하는 경우겠는데 김 유정의 연서 등을 예로 든다면 거기엔 심성의 결정체들이 야문 왕모래 낱알처럼 박혀 있다.
송신조차 망설여질 경우도 있으리라.
벗은 칼날인 그것을 누구에게 들이대겠는가?
내 격정의 유혈을 무슨 권리로 남의 가슴에 떨구겠는가?
그렇게 해서 못 보낸 편지들의 과다한 염료를 빼내고 흐늑흐늑한 거품을 얼마 보태어 다른 형태의 글로 바꿔 놓는 일도 있으리라.
실지로 우송한 편지라고 한들 그 심정에 맞먹는 회답을 받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편지란 쓰는 그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를 일, 써졌다는 사실의 어떤 충족감 외에 더 바랄 게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답 없는 편지를 쓰곤 하던 나는 어느 때부턴가 회답을 못 주는 수취인이 되어 오기도 한다. 글 쓰는 이는 누구나 독자의 편지라는 걸 받을 것이지만 나의 경우 유인물이 아닌 서신의 대부분이 독자나 후배 시인들, 또한 흩어진 옛 제자들의 편지이다.
글을 평해 달라는 내용이거나 그 자신의 처지를 충실히 설명한 다음 하등의 조언을 부탁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회답을 쓸 수도 있겠는데 더러는 매우 아름답게 호의와 찬동의 뜻을 담아 보낸 분들의 것은 잘못 배달된 남의 편지처럼 거북하기만 하다.
사람 마음의 춥고 덧없음이여.
그들이 필요했던 건 그 자신의 감정을 열도록 도와 줄 작은 촉매였으리라. 꽉 막혀 답답한 가슴에 통풍을 가능케 하고 상쾌한 먼 수평선을 마음껏 보게 해줄 그 전환기에는 누군가 조력자가 필요한 법이다. 문제는 그 시의(時宜)1에 있으니 누구라도 있어야 했을 바로 그때 내가 그의 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풀이할 수가 없다.
어느 땐 내가 받은 편지가 그 옛날 내가 띄워 보낸 편지의 산울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바람과 구름 속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문득 내가 사는 오늘의 주소로 되돌아 온 건 아니었나?
장미의 계절 유월입니다. 지금 제 울타리에는 붉은 장미가 가득 피어 온 골목을 환하게 비춰 주는 낮의 등불이 됩니다.
이 세상 삶의 고통을 가장 많이 깨달은 자가 시인이라기에 저 역시 살아서 시인될 꿈을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거기엔 샘물 같은 생명수가, 거기엔 고통을 극복하는 소나무 같은 슬기가 있어서 앞으로 영원히 긍지를 가지고 다가설 것입니다.
글 머리에도 몇 구절을 실었듯이 이 편지를 한 젊은 시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파르스름한 연두 빛 봉서였다. 잘 닦인 거울 속같이 명징한 시정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 담긴 긴 편지이다. 이런 땐 나의 책상 위에 공손히 얼마 동안 놔 두고 지낸다. 어쩌면 침묵으로 쓰는 나의 답장이 언저리에 자잘한 바람으로 밀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편지 중의 편지.
그건 시라노 드 베라지라크 의 편지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실제 인물이었다고 전하는 그는 탁월한 검객이면서 칼보다 더 감하고 예리한 문필가를 겸하고 있었다. 가문의 질녀(姪女)인 미모의 록사느를 열애하면서도 록사느의 사랑이 크리스천에게 있음을 알고는 그를 도와 사랑의 편지를 대서해 준다.
그 편지 속에는 사랑의 모든 진실이 적히게 되었으며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 선단(仙丹) 같은 향훈을 적셔 주어 록사느는 편지 때문에 더욱더 크리스천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가 전사한 후엔 수도원의 손님으로 적적한 여생을 보내는 그녀에게 그 편지는 아직도 부족 없는 말벗이 되고 있었다. 그녀가 받은 마지막 편지는 그녀의 품 속에 간직된 채 종이도 낡고 글씨조차 희미해져 갔다.
15년 후 암살자의 손으로 중상을 입은 시라노는 록사느를 찾아와 의식도 혼몽해 가는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심중의 말을 준다. 그녀 품 속에 감추고 있는 편지와 너무나도 일치하는 말들을…
록사느는 비로소 그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한평생에 두 번이나 그를 잃게 되는 비탄에 잠기며 운다. 시라노는 덧없이 숨을 거두고…
편지의 오묘함이여
스는 이의 인격 자체일진대 받는 이의 운명을 능히 바꿔 놓기까지도 하는 것이구나.
경대 앞에서
거울을 보면 한 여자가 그 안에 있다. 차가운 유리 속에 용케도 집어 넣은 한 장의 간지처럼 얇게 끼워져 있는 그녀.
젊지도 예쁘지도 않은 모습.
눈썹 언저리는 연한 지우개로 문지른 듯이 희끄무레하게 반 가량 지워져 탈색의 느낌을 준다.
그래, 확실히 얼마간의 색소가 줄어든 것이다.
수증기 모양 증발이라도 해버렸는가.
젊었을 때 나의 눈은 두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려지고 반질반질한 까만 속눈썹이 한 둘레 윤곽을 그어 지나갔으며 그 위엔 섬세한 가시처럼 빳빳한 눈썹들이 촘촘히 고르게 돋아 있었다. 그랬는데 오늘의 여자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거울 속엔 날마다 얼마큼씩 다른 여자가 다녀갔고 그리하여 오늘의 지금엔 이 여자가 와서 얇게 셀로판지의 두께로 끼워져 있음을 보는 일이라나.
묘한 기분이다.
얼굴을 돌리고 싶은 거부와 구석에까지 몰아붙여진 기 죽은 자아가 스스로에게도 난감하다. 그러나 잠시 후 내 마음은 나직이 말한다.
‘괜찮다 괜찮다’라고….
사실이다.
삶이란 쉼 없는 유전(流轉)이요 시시각각 변모하고 변질하면서 허락된 시간 동안 줄곧 흘러가는 그 유수인 것을. 그러므로 전날엔 남과 같이 젊은 시절을 지냈었고 오늘은 당연히 이쯤의 형편들을 감내해야 한다고,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의 깊은 수긍을 스스로 권유하면서 머리를 끄덕인다.
오랫동안 친숙해 온 늙은 비애도 넌지시 내 어깨를 감사 안으며 동일한 말을 들려 준다.
‘괜찮다 괜찮다’ 라고….
아침이여
내 마음은 이 측은한 여자를 맞아 공감으로 대접의 상을 차려 주며 오늘의 일과를 평온한 심정으로 시작하기 원한다. 그 첫머리의 한 수서로서 화장을 시작한다.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의 여자를 잠시 점검한다. 이런 때 햄릿 왕자의 대사 중에 ‘여자들은 신이 만들어 주신 얼굴 이외에 연지 곤지를 찍어 만든 또 하나의 거짓 얼굴을 가진다’던 구절을 퍼뜩 생각해내기도 한다.
타월로 물기를 닦아낸 얼굴에 콜드크림을 듬뿍 발라 몇 번 문지르곤 가제로 훔쳐낸다. 희부연 눈썹 외에도 종이처럼 바싹 하고 핏기 없는 입술이 또 한 번 신경을 거스르기도 하거니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는 이 무력한 여자를 나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데엔 용기가 필요하다.
가제의 깨끗한 쪽에 아스트린젠트를 방울방울 떨구어 얼굴을 축이고 그 다음 유액 성분의 언더메이크업을 한 겹 더 바르곤 머리 손질을 한다. 머리를 만지는 동안 로숀이 살결에 잦아들어 다음 순서에 알맞게 되려니 하면서,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화운데이숀의 매우 작은 분량을 손 끝에 묻혀 얼굴에 고루 펴 바른다. 이 과정이 성가시므로 바쁠 땐 거르는 수도 많다. 가루분을 또 조금 쓴다.
세어 보자.
화장품의 수효가 몇 가지인지. 입술 연지만 하더라도 선물로 받은 것의 여벌이 늘 있곤 하여 여러 색상의 것을 동시에 내 놓고 번갈아 쓰는데 이렇듯이 사소한 선택 따위가 여자의 행복감을 얼마간 부풀릴 수도 있다.
입술 연지의 좀 탁한 것은 엷게 펴서 볼 연지로 쓰면 색깔이 자연스럽고 지속 시간도 긴 효과를 경험했다.
짙은 갈색 연필과 아이라이너로 눈의 윤곽이며 눈썹을 보충하고야 손을 뗀다. 그 사이 이십 분쯤 시간이 경과해 버렸다. 바쁜 아침 시간의 귀중한 이십 분이지만 그렇다고 할애치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 거울 속의 여자는 얼마간 착색이 되어졌고 이에 따라 생기도 좀 돋아 보인다. 화장의 마술, 이야말로 그 자신이 만들어내는 여자의 거짓 얼굴임에 틀림 없다. 어이없어 그만 씁쓰레한 웃음을 짓는다.
밤에도 거울 앞에 앉으면 한 여자가 이미 그 속에 와 있다. 하루의 삶이 묻혀 온 보얀 먼지와 함께 그날의 아침 화장을 한꺼번에 지워 버린다. 크림으로 닦아내고 비누로 씻은 다음 역시 아스트린젠트를 바른다. 청결하고 촉촉한 감촉이 상쾌하다.
거울 속의 여자를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 힘겨운 수레를 옮기듯이 하루의 삶을 전력으로 끌고 다니다가 이제 그 등 뒤에 부려놓고 잠시 쉬는 그녀.
내일의 날씨는 더더욱 그녀에게 까마득한 미지요, 비록 오늘밤이라 한들 하등의 보장은 업지 않으랴. 주어진 여건에의 최선 그밖에는.
정녕 사람에겐 무슨 지혜가 있게 되나. 삶이 명하는 모든 과제를 충실히 섬기고 일하면 이로써 족할 것인가.
때때로 ‘괜찮다 괜찮다’고 나직이 자위할 것인가.
‘괜찮다 괜찮다’고 언제까지나 되풀이할 것인가.
손을 움직여 눈썹과 입술에 조금만 색소를 보태어 주고 얼마 동안 거울 속의 여자와 마주 앉아 이렇게 있어 본다.
이 지쳐 있고 불쌍한 여자와……. .
구월, 그 서늘한 큰 손
구월의 바람이 분다.
서늘한 큰 손이 더운 이마에 와서 얹히는 느낌이다. 늦은 밤에 먼 길을 온 의사를 대하듯 한 눈 바라만 봐도 느긋이 마음 놓인다.
연초록 풋고추를 불같이 붉고 매운 당고추로 익혀내는 그 뙤약볕에 냉쾌한 찬물을 쏟아 붓고 다니는 살수차(撒水車)의 이름, 9월.
이런 시절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단지 생각날 뿐 아니라 해를 거듭할 수록 그를 닮고 싶다고 내 마음이 간절히 원한다. 우선 그에겐 정신의 휴식을 주는 별다른 힘이 있었다.
그의 거실은 지구 위의 한 작은 섬과도 같이 특별한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박하고 평범한 사각의 공간에 불과하면서.
남 못지않게 어쩌면 남 이상으로 바쁜 소임을 맡고 있건만 방문객이 문을 열면 마치도 그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듯이 전적으로 맞아 준다.
푸근하고 안정된 그분의 옆자리.
묘하게 고향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 되어진다. 사살상 그는 이미 잔에 넘치는 이해와 위로를 마련하고 있으며 한 점 흐리지 않는 거울 속에, 너의 마음을 낱낱이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서서히 말문이 열린다.
서두를 이유가 없고 가식하거나 과장할 까닭도 전혀 없다. 참으로 놀라운 건 남의 얘기를 들어 줄 때의 그분의 태도와 분위기이다. 좋은 음악에 심취했을 때가 그런가 싶게 온 마음을 적시고 있는 몰입의 표정이다.
품질 좋은 흡인지처럼 이편의 말과 감정을 깊은 내면에까지 흡수해 들인다. 잘 설명할 순 없으나 꼭 그렇게 믿겨진다.
단 한 사람이건만 열 명 백 명이 합심해서 해줄 수 있는 청중의 예절로 대접해 준다. 추운 길을 온 사람이 따뜻한 방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풀 때처럼 눈물겨웁기조차 하다.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분 앞에 있으면 서서히 나의 내부가 열림을 알 수 있었다. 나의 깊은 부분, 가둬 둔 부분, 작게 오므렸던 부분, 처음으로 새살이 돋아나는 신생의 부분까지를 열어 놓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 한편 키가 큰 가로등처럼 어진 불빛을 부어 주던 그의 능력, 정녕 부러운 능력… .
그분은 나이 드신 성직자셨다.
옆에 읽던 책의 책갈피가 접혀져 있고 재떨이엔 한두 개비의 담배꽁초가 있었으나 그것조차 정갈해 보이곤 했다.
격렬하거나 감격적인 성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발하거나 재미있지도 않았다. 다만 누구도 준 적이 없는 안식과 평화를 나에게 주었으며 그 힘, 말하자면 그 인격을 오래도록 흠모하게 된다.
지친 영혼을 쉬게 하고 애증(愛憎)의 핏발선 눈길을 거두어 맑고 유순한 눈빛으로 바꿔 줄 그분의 고결한 품격.
사람은 부지불식 중에 그 자신이 얻을 것, 먹을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주는 이가 없으면 받는 일이 생겨날 수 없다. 주면서 비로소 받는 관계, 그 바르고 아름다운 균형을 추구해야 하리라. 처음부터 줄 능력이 못 되었다면 남으로부터 받은 것을 내 안에 고이 키워 이를 또 다른 남에게 내어 주는 일이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듯싶다.
오늘, 구월의 바람 불고 서늘한 큰 손이 더운 이마에 얹히듯 지난날 내가 받은 선물을 회상케 하매 사람의 아름다움을 먼 산처럼 다시금 바라본다.
오늘 생각하는 사랑
1. 사랑하게 두십시오
‘당신은 왜 사랑을 거부했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놀라서 반문할 테지요.
내가 언제, 또 무엇 때문에 주는 사랑을 마다했겠습니까 라고.
그러나 당신에겐 사랑을 거부한 무수한 사실이 있어 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목 말라 하면서 한편으론 사랑을 낭비하고 차갑게 돌려 세웁니다. 아울러 그 자신도 거부의 쓰디쓴 잔을 수 없이 마셔 온 일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들은 어버이의 사랑을 부담 겨워하며 부부간에도 거부의 선을 그어 저편 이의 참견을 견제하는 일이 많습니다. 단순히 바라보기만 해도 엄마는 즐거운데 아들은 쏟아 붓는 눈길이 거북하여 다른 방으로 훌쩍 옮겨 버립니다. 닫겨 진 문 앞에서 방 안의 기척을 짐작하려 하는 쓸쓸한 모정(모정)쯤 오늘의 세태에선 흔한 사례입니다.
관심에 굶주리면서 관심은 푸대접합니다.
애정만으로는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이 시대, 다소의 어긋남이 끼어들면 휴지를 버리듯이 아깝잖이 호의를 내던져 버립니다.
받는 이의 겸손이나 감사의 태도가 전혀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감격하는 일이 적습니다. 감수성이 둔화되어 독선과 이기에 흐르고 있으며 어른이면서 소아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슴이 작고 피가 식어져 인간적 위급에 떨어졌습니다.
사랑하게 두십시오.
사춘기의 첫 그리움을 일기장에 몇 줄 썼다고 해서 온 집안이 떠들썩하게 사건 시 마십시오.
지나가는 소나기를 피하여 잠시 당신의 추녀 밑에 들어섰다 해서 배타의 시선을 보내지 마십시오.
모처럼의 연정으로 편지나 선물을 보내 온 것뿐인데 아무 데서나 발설하여 까닭 없는 수모를 겪게 하진 마십시오.
자만하지 말며 과장하지도 말며 저편 사람이 외롭고 허약한 고비에 이른 것을 이해하십시오.
참기 어려운 추위에 시달림으로 해서 조금만 당신의 불 화로에 언 손을 녹이려 하는 일을 연민하십시오.
돌림병과 같이 누구라도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됨을 수긍하십시오.
따스한 두 손으로 그의 시린 손끝을 공손히 녹여 주면서 당신 자신에게도 있어 온 옛 상처의 생생한 핏자국을 함께 바라보십시오.
어렸을 땐 강아지에게도 입맞추고 인형에게 털 스웨터를 입혀주며 햇솜처럼 동심이 포근했었는데 성장한 이후로는 이리도 사랑에 인색하고 겁먹게 되는 일을 슬퍼하십시오.
주었으므로 해서 오히려 피해 입은 사례들을 동정하십시오.
단지 사랑했었다는 이유 때문에 뭇사람 앞에서 치욕의 흙탕물을 뒤집어 쓴 이를 위로하십시오. 그 반대로 과도한 탐욕에 빠져 주고자 하는 손길에서 그 이상의 것을 뺏어 버리는 파렴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자타간에 경고하십시오.
사랑하게 두십시오.
사랑하는 이가 기쁘고 보람되게 하십시오.
자신의 사랑이 자랑스럽도록 그 감정을 존중하고 자존심을 대접하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처럼 저편 이의 사랑도 귀하고 보배스러움을 인정하십시오.
사랑하는 일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명심하며 사랑 받는 일에도 품위와 예절을 다하십시오.
사랑함과 사랑 받음, 이 두 가지 조화 안에서만 사랑의 능력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결실을 바라듯이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그 성취를 도와 주십시오.
모든 것을 주는 이는 모든 것을 또한 바란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주고 받음의 조화를 도모하여 사랑의 광채가 부채살처럼 퍼져나가게 하십시오.
사랑의 첫 싹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겠으나 푸르고 윤택하게 가꾸는 일은 오랜 염원과 애씀의 결실일 테지요.
단 한 번의 차가운 눈길 때문에 온 마음이 얼어붙는 일도 있습니다.
많이 바라지 않았는데 참아낼 수 없는 배고픔에 떠밀렸던 지난 날의 비참을 되돌아 보십시오. 내가 만들어낸 사랑, 온전한 내 것이던 사랑을 굳이 그의 완력으로 부숴 놓은 일도 있었습니다.
푸근하고 달갑게 주야로 미소 지을 수도 있었는데.
산을 옮길 수도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는데.
불시에 사랑이 죽었기 때문에 물거품으로 끝난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게 두십시오.
당신의 인격을 해칠 일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남의 이목에 오해를 좀 끼친다 하더라도 사람 하나의 진실을 대접함은 더 큰 가치가 됨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나 감상으로 처리하진 마십시오. 섣불리 자홀 自惚2 하지 마십시오. 경건하고 공손히, 마음 속속들이 따뜻해져서, 생애의 보람으로 공들이고 추수하십시오.
주는 이의 어여쁨에 어울릴 만큼 진실로 받는 이의 아름다움을 꽃 피우십시오.
2. 사랑스러운 이가 되십시오
사랑은 철두철미 만들어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스페인의 여관과 같아서 그 자신이 들고 온 물건만을 본다’ 고 어느 책에선가 말하고 있었듯이 사랑은 자기 자신 안에 미리부터 안고 있는 일종의 약속인 듯합니다. 사랑 받을 이유 내지는 사랑 받을 필연성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사랑스러운 이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한 번 뿐이 아니고 계속하여 사랑 받는 이가 될 수 있기 위해 부단히 성장하고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존경 없이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의 건강법’을 내세운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건강의 유지는 우리 각자의 인격과 양심에로 그 요구가 닿아 옵니다. 비록 어린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덕성과 품격을 지닐 있습니다.
동물이나 화초처럼 애완품이 되어선 안될 사람으로서, 사람들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의미와 유익함의 성찬을 차려 서로를 대접해야 합니다.
함께 지낸 시간을 행복하게 여기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스러운 이, 사랑 받기에 합당한 그 사람이 되는 일이야말로 사랑을 창조하는 첫 번째 비결일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 사랑하게 하는 일은 내가 사랑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능력의 개화인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의 중심엔 보다 더 높고 궁극적인 지향을 두는 일이 중요합니다.
‘서로 마주 봄이 아니고 둘이서 한 곳을 바라봄이 진정한 사랑’ 이라는 뜻이 옮음을 세월이 흐를수록 깨달아 갑니다. 둘만의 밀착은 오히려 함께 있는 성질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칼릴 지브란 도 말한 바와 같이 신전의 두 기둥처럼 간격을 두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관계만이 항구하고 완벽하게 둘의 공존을 성립시킵니다. 왜냐하면 ‘한 나무의 그늘에선 도 한 나무가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키워 주며 나아가선 서로의 영혼을 찾아 주는 행위입니다.
그와 그의 신을 화친케 하면서 은총 안에 생애를 보낼 수 있도록 극진히 보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배려가 나아가선 사랑 받기에 이르는 길잡이도 될 것입니다.
사랑 받는 이 되십시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 사랑스런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지며 삶은 오죽이나 영광되겠습니까.
3. 동가(同價)의 영혼을
영혼을 풀이할 수는 없으나 얼마간의 영성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어 옵니다.
원하는 물량을 채운 후에도 못 견딜 공허감이 남아 돌거나 먹어도 가시지 않는 시장기는 영혼 안에 황량한 바람이 일고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초현실-초자연의 향수처럼 치밀면서 이상한 기후의 멀미앓이처럼 우리의 느낌을 색다르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영혼에서 나오는 갖가지 탄원이 분명 있습니다. 영혼의 추위가 심각한 나머지 생명을 끊는 일조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보건을 염려하는 정도로는 영혼의 보건에 유념해야 합니다.
영혼이 아는 만남, 그 해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소름 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
이러한 실감도 드물게는 솟아나는 것입니다.
한 소명을 둘이서 듣는 일은 차라리 무서움과 통합니다. 깊이 침윤하면서 동일 혈육이 되어지는 예도 있을 것입니다.
뼛속에서, 더 깊은 데서, 기이한 전율이 차가운 지하수처럼 방울방울 뿜어나오는 일도.
사랑은 특별한 초대이기에 아주 많이 예비한 사람만이 초대받게 될 줄로 여겨집니다.
찾아서 만나는 인간 관계, 깊이 침잠하여 무르익는 인간성, 신 앞에서 동가인 영혼을, 그리하여 더욱더 그 영혼을 높이 끌어 올릴 때, 비로소 연분의 완성은 깃든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득한 능력입니다.
쉬지 않는 이가, 겸허한 이가, 오래도록 인내하는 이가 이 축복된 성취에 다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의 염원은 불변하며, 사랑의 보행자들은 끝없는 대열을 이어 걸어가고 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는 이들에게
겨울의 문턱에서 흔히들 겨우내의 긴긴 추위를 예감하게 되며 이 시각부터 한란계의 눈금은 줄곧 영하의 온도를 짚어 보입니다.
몸이 아니라 몇 곱절 영혼이 시리고 춥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띄워 보냅니다.
가령에 살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착잡한 연민을 의사의 눈빛 속에서 흘긋 읽었기라도 해서, 그때 깜깜하던 병원의 복도가 그로부터 주야로 눈앞에 펼쳐지기만 하는 사람 앞에서라며 무슨 말을 지니고 그 앞에 서겠습니까마는.
미지의 친구여,
고통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아는 사람과 고통에 미숙한 자가 마주 서게 될 때 누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정녕 고통을 알고 있는 그 편 사람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능력이라 할 어떤 ‘힘’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당신과 나의 경우에 있어서도 당신의 고통과 추위가 보다 더 우람하고 성인적일진대 부디 당신이 먼저 나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러면 그 체온을 통해 어떤 신령한 치유를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믿습니다.
‘고통이야말로 가장 영웅적인 세례’라고 말한 파스칼의 주장에 당신도 찬동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오늘 이 시대에 병폐는 고통 자체이기보다 그것의 기피 내지는 마비의 형상들일 것 같습니다. 강건하고 탄력 있는 생명력 속에선 상처입고 아물리고 또 상처입고 거듭 아물리는 역동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으면서도 막상 그 현장에선 얼마나 몸부림치며 도망쳐 나오려고 했겠습니까.
‘타인들’의 틈서리에 춥게 발붙이고 있다고 여기는 자의식의 단정이 사람의 낮밤을 얼마나 더 외롭게 황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위로란 언변이 아니고 살아 있는 행위여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누가 그것을 줍니까.
울음을 아는 이만이 남의 울음을 나눌 수 있고 화해에 목마른 자가 마침내 화해의 능동자가 됩니다. 하면 지금은 당신이 ‘그’가 되어 주십시오.
추위를 힘겨워하는 친구여.
당신의 영혼이 지쳐 쓰러졌을 때 누가 무슨 힘으로 그 다친 허리를 일으켜 세우겠습니까. 더 큰 고뇌와 한랭함과 갈증을 인내하는 이들이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맹렬히 힘쓰게 될 때만이 다시 곧은 허리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정신박약아들의 인물 사진전을 보았습니다.
두세 살 때 칭찬 받던 ‘쥐엄 쥐엄’의 장기를 지금껏 되풀이한다는 쉰 네 살 초로의 여인이나 이젠 그만하라는 말을 듣기까지는 온종일 동일한 ‘중얼거림’을 끊이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무리 중에 하반신을 교통참사로 잃었다는 청년 하나가 함께 살면서 손으로 할 수 있는 이발사 노릇, 청소 담당, 채소밭 가꾸기 등 갖가지 봉사를 도맡고 있다는 것이었고, 전시장에 나붙은 그의 사진에선 건장한 상반신으로 베어진 나무의 밑 등걸을 쪼아내는 노동의 현장이 촬영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게 된 나에겐 거센 전류의 기이한 충격이 전신을 감돌았습니다. 어떤 의미의 공포, 어떤 의미의 분노, 그리고 어떤 의미의 영혼의 세척이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고 있는 벗이여,
당신의 추위가 과연 그 젊은이와도 맞먹는 것이거나 혹여 그조차도 압도될 만한 것이라면 부디 허약한 여러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당신의 통곡 앞에서 울음을 그치고 당신의 추위 앞에서 따뜻해지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추위가 거세고 비통할수록 그 만큼에 어울리는 고통의 격조를 보여 주십시오.
눈을 뜬 사람에게도 위험한 도시의 대로변을 한 자루 지팡이 끝에 정신력의 집중을 몰아 조심스럽게 지나다니는 ‘눈먼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암실에서 사진을 구워내듯이 어둠 속에서 ‘눈뜸’과 ‘봄’을 누리는 이들의 삶은 어떨까요.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어떨까요.
점자(點字)로 읽는 성서와 점자를 더듬으며 노래하는 그네의 찬미가는 정녕 어떤 것일는지요. 이즈음 맹인 교회에는 눈뜬 사람들의 관람객(?)으로 붐빈다고 합니다. 눈으로가 아닌 마음으로, 마음으로가 아닌 영혼으로 조물주를 찬미하는 그네의 성가대를 보고 와서 깊은 감명을 얘기해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보태어 준 것은 없고 그들로부터 받아 온 감동이 그리도 컸다는 점에 오묘한 대비를 아니 살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대구행 기차 안에서 맹인 교회의 그 맹인 목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소설이 되고 영화화되면서 더욱 퍼진 그에 관한 화제 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점은 실명한 그에게 희생의 굳은 의욕을 심어 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불우고아들이란 사실입니다. 절망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그는 너무나도 가난한 그들 소년으로부터 뜨거운 사랑과 협력을 얻게 되었음을 계기로 그 낮은 땅으로부터 드높은 소망으로 치솟아 올랐고 이들로부터 채워진 생명의 충전으로 오늘날 맹인의 등불이 되고 눈뜬 이들의 머리 위에 참 신앙의 횃불을 들어 올렸습니다.
근래에 읽게 된 M. 링크 의 작은 책에서 아래의 구절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기도가 우리 생활 속에 와 닿을 때, 기도하기 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시작하게 된다. 믿기 시작하고, 용서를 구하고, 결코 사랑스럽지 않던 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기도는 그것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지 않으셨던들 십자가를 걸머지지 못하셨을 것이다.
마음 추운 친구여.
머리칼도 곤두서는 찬바람 속의 추위를 나도 얼마쯤은 압니다. 장갑도 벗은 열 손가락을 가지런히 빗살처럼 드러내 놓고 있으면 그 벗은 살결에 가지 돋치는 냉기, 그 추위를.
그러나 ‘기도하기 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기도함으로 하여 얼마나 많이 솟아나고 꽃피는지에 대하여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파른 비탈에 세워진 집에서나 하루 종일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변에서도 안전하고 어여쁘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있음을 압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배웠음으로 해서 평화로이 죽어 간 사형수의 얘기도 들었습니다.
영혼의 추위를 앓고 있는 친구여.
이 세상 어떤 고통이나 슬픔도 그분을 넘어설 수 없는 바로 그 이름이신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온갖 고뇌를 그 수원지의 물로써 씻어내고 온갖 추위를 그 원자의 불화로에서 덥혀낼 그분이 그 위대한 봉헌의 삶을 살기 시작하실 첫날이 곧 성탄입니다.
1969년 7월 20일 일요일, 오후 3시 18분 정각에 지구를 떠난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 흙먼지 덮인 달 표면에 내려 앉았다.
우주비행사 암스트롱과 앨드린이 특별히 마련된 캡슐을 달에 안치해 놓았다.
거기엔 시편 8 도 들어 있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영혼의 추위를 앓는
미지의 벗들이여,
진정히 바라노니 당신도 깊은 밑바닥에서 아득히 높은 정상까지 온전히 위안받고 거듭 나시기를, 낮은 목소리로 이에 덧붙이노니 ‘메리 크리스마스’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녀의 일과는 새벽이 아닌 그 전날 밤에 시작된다.
하루의 일을 마무리 짓고 다음날의 도시락 반찬도 대략 궁리가 잡힌 다음 잠시 빈 의자에 몸을 쉰다. 먼 길을 와서 이제야 도착한 심정이다.
이때가 몇 시인가.
몇 시 몇 분, 그런 건 상관이 안 된다.
어쨌건 이 시간 위에 내일의 삶이 얹히는, 말하자면 다음날의 그 발판인 데에 의미가 있다.
남편과 아이들은 무대 위의 연기자인 셈이고 그녀는 숨은 얼굴로 무대를 꾸려 가는 연출가이다. 꾸미지 않은 맨 얼굴과 허름한 옷매무시로 관객들의 관심 밖에 서서 전신이 땀에 젖는 그 연출가이다.
가정의 평온은 유지되고 있으며 내 집의 건강은 마음 놓을 만한가. 세면대는 청결하고 비품들은 정돈이 잘 되었는지. 또한 문단속은?
가족만이 아니고 그들과 이어진 둘레의 사람들까지 손바닥 안에 넣은 듯이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시댁의 무슨 날 무슨 날에 대비하며 애들 사일지라도 빠뜨려선 안 될 문병치레 등을 새 날의 계획 속에 일일이 짜 넣는다.
가슴 속엔 한 묶음의 열쇠꾸러미를 차고 있으며 그 열쇠들은 자주 쓰여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가구류보다 더 많이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에 쓰이는 이 자잘한 열쇠꾸러미.
희고 가느다란 그녀의 열 손가락, 손 끝의 물기는 새벽녘까지도 마르지 않는다.
일하는 손과 깨어있는 가슴.
그녀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밤의 심연을 알고 있으며 그 아득한 밑바닥에서 홰를 치며 푸드득거리는 첫새벽의 탄생을 또한 안다. 태고에서 오늘까지 온 인류의 밤의 불침번은 당신들 여성이었음을.
비 오는 소리.
낙엽 뒹구는 소리.
만상에 이슬 내리는 그 들리지 않는 소리조차 능히 들으며 밤의 요람이 당신을 품어 안고 천천히 흔들어 줄 때 세상은 잠시 그대의 체중 아래에서 출렁거린다.
잠결에도 들리는 먼 종소리.
신의 밤나들이의 신발 끄시는 소리와 사랑하는 이들의 맥박 소리, 뒤척이며 돌아 눕는 그 가물한 기척까지도 낱낱이 아는 그대. 뜨겁고 성실한 관심은 오묘한 가얏고처럼 민감히 느끼고 울려내느니 포도주보다도 더 취하는 밤의 도취, 잠시 동안의 꿀 같은 안식에도 그대의 응감 쉬지 않는 것을.
그렇다. 삶이란 밑바닥까지 그 맛을 흔들어 깨우는 자가, 그리하여 이를 속속들이 맛보는 자가 주인이니 그러므로 당신이 곧 주인이다. 삶의 음미의 가장 아래 층계에서 맨 위의 층계까지를 헤일 수 없이 오르내리는 당신이야말로 가려진 모든 얼굴을 보는 사람이라. 한 뭉치의 열쇠꾸러미는 당신의 권리요 의무이니 즉 그것은 주인의 증표인 탓이다.
뜨겁고 소금 맛 나는 눈물,
수백 번 상처 입은 마음,
하고많은 밤을 내일에 대비하는 궁리와 결단으로 다지며 뼈아픈 진실과 인내를 깨쳐 가는 당신.
그 가파로움 중에서 몸에 익히는 한 가닥 금동아줄의 신앙.
당신은 기도한다. 하루의 비롯함에 빌고 이날의 마침에도 빈다. ‘주여 함께 해 주소서’라고.
함께 함에 대한 갈구야말로 여자의 살을 가르고 나온 원초의 육성이며 오늘에 이르도록 날마다 새로이 발음되고 있음을.
‘함께 해 주소서
부디 함께 해 주소서’
이처럼 아뢰며 힘을 낸다. 실지로 힘이 솟아난다.
사람에겐 본능이 짚어내는 자구책이 있기 마련이며 자력으로 우물을 파서 청량한 단 샘물을 그 자신과 이웃에게 나누어 먹인다. 조금만 돕는 힘이 주어지면 일어나 다시 걸어갈 수가 있겠는 그 귀한 금싸라기의 촉매. 비록 겨자씨 만한 불씨일지라도 호호 입김불어 소중히 피워 올린다.
남자를 땅 위의 건물에 비교할 때 여자는 집을 세우게 하는 그 집터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쳐 돌아올 때 어깨의 짐을 벗겨 땅 위에 놓지 않는가!
어느 날, 아직 돌아올 시간이 아니데 남편이 방문을 들어선다.
“여보 웬일이세요?” 물어보면
“그냥….. 열이 좀 있어서” 멋 적게 대꾸한다.
순간 그녀는 이만하기가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린다. 사표라도 내던진 게 아니고 단지 몸이 아파서 시간을 앞당긴 것쯤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녀는 비장의 우물에서 떠 온 단 샘물로 그의 목을 축여 주고 신열도 말끔히 씻어 내리게 한다.
물론 남성들이 주는 것도 많다.
‘남자는 그 정신에서 여자보다 높고 육체에서 여자보다 낮다’고 하였다.
많이 가진 건 나눠 주고 모자라는 것은 얻어서 채우는 보완의 성질로서 남녀의 균형을 바라볼 수 있다.
신부나 수녀들의 수도서원이 신의 소명이듯이 결혼도 일종의 소명이라는 말이 나돌고는 있으나 막상 그 투철한 인식이 뿌리 내리는 데엔 이만저만 굳건한 협동 없이는 안 되는 노릇이다.
성취의 어려움, 그 과정은 지루하고 가열한 법이다. 산 밑의 돌을 산의 정상에까지 뒹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의 의지와 추진력이 있어야만 한다. 살갗이 벗겨지고 흥건히 피가 내배더라도 손을 결코 때지 않는, 이렇듯이 참담한 인내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남성은 누구나가 여성의 아들이다. 예수조차 마리아의 아들이셨다. 여성 또한 모두가 남성의 딸들이다. 이 질기고 운명적인 혈통에서 살피더라도 진실로 같은 피, 같은 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남녀의 현실은 어째서 그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것인지.
여심의 탄원, 살결에 문신 뜨듯 아픔 부르짖음…..
여인들이여
당신의 할말들을 후련히 뱉어내거라.
화려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그 진짜배기의 참말들을 남김없이 모두 말하여라. 말하여라.
그러나 복되다.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쪽 문이 열리는 이치로 마음 추운 당신은 전심의 기도를 바칠 줄 알게 되었음을. 밤낮 없이 자라는 나무들과 땅을 적셔 흐르는 시냇물처럼 당신의 신앙도 나날이 순조롭게 자라고 있음을.
여인들이여.
침몰에 대해 겁먹는 당신의 공포야말로 심각하다. 어렵게 중심을 재며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발을 헛디디면 실로 어이없는 추락…. 그러나 당신은 다시 시작한다. 그 깊고 깊은 낭떠러지에서 본래의 위치에까지 복귀하는 당신.
잠시 몸을 쉬는 밤의 의자. 내일의 무대를 염려하는 연출가의 책임에 돌아와 머문다.
가슴 속엔 한 묶음의 열쇠꾸러미를 차고 있으며 그것들은 자주 쓰여져 반짝반짝 광택을 내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당신은 기도한다.
한 가정에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기둥이 있는 법이거늘 당신이 그 기도 기둥이다.
어쩌다 쉽게 살아지는 하루가 있어 이런 날 오히려 불안하다.
생명을 걸듯이, 오로지 절박하고 가파르게만 살게 되던 오랜 날의 습관엔 이리도 낯선 생리를 견디기 어렵다.
고독하지 않은 날의 부자연스러움,
이런 말조차 조금은 과장이 아닌 당신.
수년 전에 본 영화 중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것이 있었다.
그 끝 장면은 정신 병원을 탈출하는 흑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었다. 희뿌옇게 동트는 여명을 배경 삼아 커다란 발걸음으로 달려가는 그이 새하얀 바지자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동상처럼 검고 건장한 체구로 언제나 빗자루를 들고 병원의 출입문을 반쯤 막아 서곤 하던 그.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거인, 백치인 줄만 알았던 그는 사실상 모든 백인을 능가하는 지혜와 용맹을 감추고 있었다. 칼날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그의 날개를 꼭 필요한 때에 날기 위해 검은 육체 속 누구도 못 보는 곳에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새벽 그는 날아올랐다.
백인들이 고작 창문으로 탈출을 계획하던 그 견고한 돌집의 정문을 단 일격에 분쇄하고 거칠 것 하나 없이 창공으로 날아오르던 그.
그렇다. 새는 무게와 상관 없다.
비록 탱크의 중량이더라도 원할 때 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새다. 아주 완벽한 새다.
여인들이여
당신의 본질도 새라 이르겠거니 새의 갈망이며 새의 영혼이라 이르겠거니
새.
금빛보다 더 화려한 순백의 날개로 동트는 새벽 하늘을 물살 휘저으며 날아오르는 그 웅려한 날개짓.
그렇다. 새의 영혼을 가지고만 있다면 누구든 하늘을 날게 될 것이다. 나르는 것을 막는 자 없으리니. 진실로 창공을 제압하는 그 날개를 이 세상 어떤 힘이 꺾어 내릴 것인가.
사는 일엔 머무름이 있을 수 없다. 올라가거나 아니면 내려가는 일의 두 가지로서 전부이다.
상승하는 일.
숫돌에 칼을 갈듯이, 날려는 갈망의 칼날을 세우는 일.
검은 몸 속에 날개를 숨기고.
어느 날 순백의 두 날개를 펴서 높이 높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일.
날아오르는 일.
날아오르는 일.
당신은 그 일을 할 수 있다.
여인들이여
밤의 심연을 아는 그대, 그 아득한 밑바닥에서 홰를 치며 날아오를 일을 꿈꾸면서.
꿈꾸면서 견디자.
여인들이여.
제2장 그 먼 길의 길벗
나의 삶, 나의 글
조춘의 바람은 차다.
밤글을 쓰다 피로하면 뜰에 나가 심호흡을 한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 속까지 들어가 마치도 피의 순환처럼 돌아 나온다.
이런 때 하늘은 억만 생명을 보듬고 토닥이는 청남빛 이불이다.
밤에 주로 일하게 된다.
사념의 잔 가지들이 연한 순으로 자라나 실타래처럼 덩굴을 뽑아 올리곤 하나 밝은 날에 다시 보면 볼품 없는 마른 들풀일 적이 많다.
산다는 건 우선 느끼는 일이며 이 느낌을 말이나 글자로 풀어내는 작업에 나를 던졌다 하겠건만 이 단순한 형편 안에서조차 헤일 수도 없이 길을 잃고 실패와 허탈을 부둥켜 안는다고 말해야 한다.
사람이란 항용 넘어지고 상처 입는 부상병에 불과하단 말인가.
시인은 더욱더 그러한가.
그것도 그럴 것이 한 사람의 옹색한 사유와 진실로써 다른 열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려는 염원임에 비추어 너무나도 역부족인 현실 탓이다.
사실상 시는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 먹고 입고 거주하는 일과 같이 필수적인 항목이 아니면서 적어도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까지 필수적인 욕구와 충족이 되고 싶으면 아울러 고급한 갈증을 풀어 주는 고급한 음료이기를 감히 꿈꾸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시인의 아이러니라 하겠고 그늘에 가려진 비통한 얼굴이 있게 된다.
나는 일본의 지방 도시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치렀는데 입학에서 졸업까지 한국 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도 작게 말하는 ‘죠센진’ 소리를 흔히 들었는데 ‘바로 저 애’라고 가리켜 주는 모양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졸업학년에는 장기 휴학을 하는 등 잡다한 사정들이 유감한 사춘기에 상처를 주었던 성싶고 이에 따른 반작용으로 그리 되었는진 몰라도 마음 속에 맹렬히 명망있는 어떤 이가 되기를 꿈꾸었었다. 그 당시 가장 부러웠던 건 신문에 연재소설을 싣는 소설가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문학지망의 뜻을 굳혔으나 나의 연대는 적잖이 모국어의 수난기였다.
문학작품의 우리말 번역은 없다시피 하여 읽기는 일본말로, 쓰기는 한국말로, 식의 기묘한 과도기에 해당했고 대학생들의 언어 소양은 매우 미숙한 수준에 머물렀다. 더욱 낙심하게 된 건 나에게 문학적 재능이 없다고 여기게 된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글을 힘들게 쓰고 지면에 내놓은 후에도 전혀 안도감을 누려보지 못한다.
대학 졸업반 때 6.25 사변이 일어났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군에 입대, 또는 납북 등으로 흩어지고 피난지 부산에서 가지 서울대 제5회 졸업식에는 예정자의 반 정도도 졸업생이 나타나질 못했다. 참담한 전란의 온갖 충격을 피 묻은 체험으로 치르면서 나 나름으로 몇 꼭지의 작품을 추수하여 53년 정월엔 첫 시집 <목숨>을 펴내었다.
책 속엔 시대의 신음 소리와 전란기의 비통과 혼란이 뒤범벅이 담겨져 있다. 난만히 꽃 피는 철쭉꽃 더미와도 같던 젊은 그 앞뒤 좌우에 쌓이느니 죽음이요 이별이요 죄이던 그 시절….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서울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를 맡았었는데, 55년에 이르러 숙명여대에서 전임강사의 발령을 내주어 그 후 조교수, 부교수, 교수의 과정을 밟으며 나로서 무척은 귀중한 학생들과의 만남이 잇따랐고 어느덧 세월도 많이 흘러 지금은 전체 교수 중 몇 번째로 꼽히는 고참자가 되어 있다. 숙대와의 연분은 내게 있어 그 중 길고 복된 것의 하나였다고 돌아보는 바이어니와.
두 번째 시집 <나아드의 향유 香油>에선 예수의 발에 기름 붓고 검은 머리와 샘솟는 눈물로 주의 발을 씻어드린 은총의 성녀 막달라 마리아를 주제로 쓰고자 했다. 처음엔 장시를 계획했으나 백 행 남짓으로 마무리지어 다른 작품들과 함께 묶었었는데 아무튼 이 무렵부터 어쭙잖은 이름 석자 위에 시인이란 관사가 얹어 왔다는 점, 과분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삼십여 년의 문필 생활 중에 글은 주로 밤에 서 왔었다. 낮 시간은 붐비는 대합실인 양 형편이 유동적이고 밤이 되어 깊은 물 속에서처럼 어둠에 가라앉아야 비로소 집중이 가능해진다. 밤바다 등대에 불빛을 담는 일이기는 한 듯이 작은 탁상등을 밝히고 더하여 음악이 흐르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느지막이 당도한 밤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자리를 일어서는 속절없는 손님과도 같고 밤의 어망에 낚아 올린 걸 아침의 광명에 다시 보면 참으로 내버릴 게 많다. 명징과 응축과 발효가 더 있어야겠는 문학적 원리를 들이대면 내가 쓴 글줄들은 잠시만에 맥없이 죽어져 버리곤 한다. 다만 몇 오라기 실핏줄쯤에 희망을 걸고 나는 새로이 작업을 시도한다.
앞서도 말한 바 나에겐 재능과 학식 등이 모두 미흡하여 굳이 무엇인가를 취하잔다면 한 가닥 줄기찬 감수성이리라고만 여겨진다. 위대한 자연과 위대한 예술, 보다 더 위대한 종교에 대하여 근래엔 문화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 수용의 문을 열어 두며 감격과 감동을 예비하는 점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바라느니 나의 감수성은 모든 만남에게 신선하고자 하며 모든 연분과의 사이에 충실히 이를 나누고 싶다.
사람에겐 각기 다른 윤혜가 있을 것이고 나의 경우엔 이지 理智나 용맹이나 탁월한 영성 靈性 같은 게 모두 아니면서 오로지 ‘자라나는 감정’ 하나가 이에 해당하는 듯싶고 나 스스로도 감정을 기르는 일에 마음 쓴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람의 전원 電源은 그 자신의 피땀으로 일구는 것이며 자기 안의 유산을 그 자신이 상속받음과 같다. 말하자면 자력의 충전이다. 때문에 어느 때 불이 꺼지면 또다시 작은 부싯돌을 들고 광야에 나가 불을 일구어야 한다. 여러 천만 번이라도 돌을 맞비벼야 한다.’
위와 같이 말한 적도 있거니와 그 자신의 육체를 먹이듯이 감정도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펴 왔으며 가능한 한도까지 마음 안에 양분과 단맛을 비축하려 원하고 있다.
감정은 자라고 불어나며 종내 위험한 폭발물로 터지기도 한다.
‘날마다의 애환이 날마다 뼛속에까지 파고 들어 저리고 쓰라리다. 내 몸은 천만의 더듬이로 만들어지고 나의 살갗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정교한 감전대 帶로 입혀졌다’라는 자인식에까지 왔다. 그리고 좋다거나 나쁘다거나의 품평엔 아랑곳 없이 나의 이러한 생태를 스스로의 본질처럼 받아들이게끔 되었다.
시인으로서의 나와 교수로서의 나 외에도 주부로서의 내가 더 있고 보면 세 몫의 책임과 부담이 내 안에 공존하는 셈이고 가정에서의 나의 아내와 어머니와 주부의 소임으로 다시 쪼개져 쓰이게 된다.
내 능력과 시간을 엄청나게 상회하는 일거리들을 때로는 진흙창 맨땅에 내려 놓고 어디엔가 가서 깊이 숨어 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건만 잠시 만에 관심과 집착을 회복하여 잡다한 노사 勞使에 일일이 대답한다. 하긴 일상 범사라 싶은 것도 하나하나 귀중할 것이건만 그렇다고 여기에만 머물러서도 안될 일을 이 어쩌랴.
글 쓰고 선생 노릇하고 가사를 담당하면서 되도록이면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잉태하고 해산해야 한다. 여러 가지를 고리처럼 이어 맞추면서 전체로는 고리 이상의 값어치에 다가서야 한다. 이 때문에 삶의 등반은 험준하며 사람 될 명분인들 결코 만만치 아니하다.
여자의 바람은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으뜸의 바람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선 여러 가지 회답이 있을 수 있고 시대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그 특징이 변용될 것도 같다. 그러나 보편적인 통론이 되는 건 ‘최상의 반려’를 갖고자 함이 아닐까.
‘너의 영혼을 나에게!’ 라는 요청에 ‘부르면 대답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나려는 기원 사이의 그 간절한 욕구야말로 제일로 질기고 운명적인 여심의 동아줄일 것 같다.
이 심정의 공감들을 지켜보며 동지적 확신을 말이나 글로써 드러내는 일의 어느 몫을 감당하려 한다고도 하겠으면 서 한편으론 너무나도 비통하고 상처입는 심정 없지 아니하다.
지난 겨울엔 열 번째 시집인 ,빛과 고요>를 내 놓았으며 이로써 약 1만 매의 산문과 400여 편의 시를 발표한 셈이 된다. 나 나름으로 쉼 없는 두레박질을 해 왔긴 하나 깊은 수심에서 청옥빛 단 샘물을 뽑아 올리진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앞서고 있다.
장기랄 것도 없이 나의 장기는 긴긴 세월 쉼 없이 치받던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맹목의 열중이기도 했을 세찬 격정의 염료를 온몸에 묻힌 채 오십 고개를 살고 있다.
돋보기를 쓰던 첫 강의 시간에 실없이 얼굴 붉히던 일도 이젠 묵은 책장의 한 페이지가 되었고 이즈음은 제자 문인들이 여인의 단심 丹心을 글로 짜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나의 심정을 ‘곡식 창고의 열쇠꾸러미를 넌지시 밀어 붙이고 나의 새 땅을 찾아야 할 때’라고 표현한 바도 있다.
사랑이란 말은 나에게 너무 화사한 듯한 싶고 연가 戀歌로 읊던 가락들은 기도가 기도가 의 율조로 변모 운운의 논평을 듣게도 되었다.
그 사이 아이들도 자라서 큰애는 외국 유학, 다음 애부턴 대학원과 대학에 재학 중이며 지금은 가슴 안의 모든 신열도 내린 듯 갖가지 쓰라림이 누그러져 편안하다.
더하여 이맘 때를 기다려 준 다음 순서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자기 안의 대화자요 혼자 있어도 보슬보슬 이어지는 고즈넉한 자문자답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을 신앙과 연결 지어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반론을 펴고도 싶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인간사를 매듭짓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고 그 관계들이 진정히 깊어진 때 내리 비치는 조명이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의 나는 너무나도 숨차고 궁박하고 피흘림으로 하여 쫓기는 자의 질주에 머물렀던 게 아닌가 회고하게 되며 이런 의미에서 이 정도 헐거워진 오늘의 삶에게 어떤 안도의 해석을 붙여 주련다.
너그러운 관조를 배우면서, 그 안에 철사줄처럼 뻗치는 탄력을 집어 넣으면서, 더 고요하게 존재의 소음을 통제하리라.
그렇다고 내 남은 생애에 격정과 곤혹이 없으리란 건 아니다. 삶이란 끝날까지 혼돈과 불균형의 상태일 것이며 지나친 침체에 따를 정신의 빈혈증을 또한 스스로 경고하지 않는 바도 아니다.
나의 문학 역시도 부절히 흔들리고 방황하게 될 것임으로 하여 길을 묻는 이들의 대열을 줄곧 뒤따를 일을 스스로 예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하다.
시집의 후기에도 섰듯이
‘껍질에서 부풀지 말고 뿌리에서 차올라 오기를, 사랑과 시와 신앙, 셋이 한 근원에서 나왔듯이 하나에 귀납되어 남김 없이 봉헌되기를…’
위와 같이 거듭 원하고 거듭 다짐할 뿐이다.
진정한 것
우단으로 만든 장난감 토끼가 있었는데 톱밥으로 채워진 가슴 속은 진짜의 토끼가 되고 싶은 소망으로 들끓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날엔 그렇게 될 수 있지.’
지혜로운 가죽말이 가르쳐 준다. 누구라도, 이 세상 어떤 것이라도, 사랑을 받게 되면 으뜸으로 귀하여져서 ‘진정한 그것’으로 탈바꿈한다는 얘기이다.
토끼는 그 집 소년의 사랑을 받게 된다. 몇 해 후 우단은 낡아지고 털이 빠졌는가 하면 두 눈마저 망가지고 말았지만 토끼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지금은 사랑 받음으로 하여 자랑스러운 그 진짜였기 때문이다.
병을 앓게 된 소년이 건강을 되찾아 바닷가로 휴양을 떠나게 되었을 때 병균이 묻었다는 이유로 헌 책과 낡은 장난감들은 불태워 없애라는 의사의 지시였고 이때 소년은 바다로 가는 흥분 때문에 토끼를 잊고 있었다.
내일 아침 불사르기 위해 뒤뜰에 던져진 우단 토끼는 난생 처음으로 차가운 흙바닥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그랬는데 눈물에서 꽃송이가 돋아나고 꽃포기 속에서 작고 어여쁜 요정이 나타난다.
“나는 버려진 장난감들을 돌보는 요정이란다. 이제 너를 진짜로 만들어 주겠어.”
“난 진짜가 아니었나요?”
“그 애한테만 진짜였지. 앞으로 모든 이에게 진짜가 되는 거야.”
그리하여 그 우단 토끼는 갈색의 부드러운 털을 가진 살아 있는 정말 토끼가 된다.
위의 얘기는 마조리 윌리엄즈의 동화이다.
사랑만이 능히 생명을 준다는 보편적 진리를 주제로 삼고 있으면서 매우 새롭게 충격과 감동을 자아낸다.
단지 아이들만의 동화가 아니고 어른들에게도 심장한 의미를 던진다. 혹은 상처와 참회 등도 일깨워 줄 것이다. 생애의 시간을 거의 서 버린 사람들에겐 삭막한 느낌이 씹혀질지도 모른다.
사랑했더라면 진정한 보람을 낳았을 텐데. 진정한 운명이 되고 창조가 되고 구원이 되었을 텐데, 심지어는 지선과 지복에도 이르렀을 일을.
묘한 노릇이다. 사람은 추구하면서도 그 기회를 외면한다. 저편 이가 스스로 사랑을 주는 경우에도 옹색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 붙인다. 가족간에도 그렇다. 자식이 원할 땐 부모가 다른 일에 붙잡히고 부모가 원할 땐 자식들이 둥지를 떠나가고 없다.
사랑의 시차, 사랑함으로 하여 사랑 받고 싶었던 뜨거운 바람들이 얼마나 무참히 무너져 갔는가. 사랑하게 놔 두기만 하였더라도 해원 같은 풍요로 부풀어 올랐을 일을 어째서 이유 없는 흙먼지를 끼얹었단 말인가.
단지 추위 때문에 잠시 동안 우리네 화롯가에 왔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대전 對戰의 긴장으로 방어를 일삼았는지.
사랑하고 싶어서 절로 사랑이 샘솟던 그 눈부신 능력에게 우리의 두 손을 얹고 단 한 번 축원하는 일조차 못하고 말았다니. 심지어는 시합을 하듯이 서둘러 타인이 되어 놓고 저마다 자신을 연민하며 인생을 어두운 이름으로만 부르려 한다.
세모에 접어들어 몇 차례 눈이 왔다.
온 땅을 뒤덮는 거대한 순백은 용서와 화친을 일러 주는 순결한 언어였다. 진실로 돌이켜 보자. 이제 한 해의 시간은 다 사라지고 그릇의 밑바닥에 남은 건 과연 무엇인가.
그런데 어는 아침 또다시 눈이 내려 죽어 있던 모든 희열을 되살렸다. 백색의 치유라 할까. 깊고도 화평한 묵시로써 화해와 분발의 충동을 깨워 일으켰다. 새해는 이미 와서 출입문 저편에 조심스러운 손님으로 서 있다.
그 얼굴을 우리는 안다.
진짜이기를 원하는 동화 속의 그 우단토끼를.
나의 이력서
‘나의 이력서’ 란 감정의 이력서일 밖에 없다는 느낌이 앞서고 있고, 또한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얼마간 상이점이 된다고 하겠는 한두 가지의 형편들을 들추지 않고선 얘기의 진행이 잘 되어지지 않을 것 같다.
우선 나의 집안에선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있어 온 사실과 이 일이 나의 심정에 어떤 자국을 새기게 되었는지를 빼 놓고선 글이 안될 것 같다. 그러면서 이 점이 적잖이 괴롭기도 하다.
원래 내 어머니는 4남매를 출산하였으나 정성하기 전에 모두 사망했고 부모도 오래 전에 타계하셨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할아버지 집에 작은 할아버지 내외도 함께 사셨는데 네 분이 수년 사이에 모두 별세했으며, 더욱이 작은 할아버지는 느지막이 얻은 외아들을 재해로 잃고 부사라 할 최후를 마침으로써 그의 가문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형님은 유복자를 남기고 젊어서 사망했으며, 그 아들은 자라서 혼인까지 했으나 20대에 내외가 죽고 외아들마저 역시 단명했다.
이러저러한 형편들의 틈바구니에서 결국 나 하나만이 생존자인 실정이며, 병풍처럼 에워싸는 죽음들에 대하여는 착잡한 감정이랄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이 내 삶과 나의 문학에도 적잖은 상관을 맺어 오고 있으나 아무튼 여기에선 이에 관하여 더 부연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잊지 못한다.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아 둘은 죽고 둘은 살아 남았던 것을 6.25 사변 중 무더운 8월에 그 아들이 또한 죽었다.
그 당시 나도 혈담을 뱉곤 하던 참담한 병중이라 어머니 혼자서 미아리 공동묘지에 어린 아들을 파묻고 오셨는데, 서울이 두 번째 탈환된 1.4 후퇴에 모녀가 피난을 갔었다 가 몇 해 만에 정부의 환도를 따라 다시 돌아온 후 어머니의 치열한 집념은 아들의 묘소를 확인해내는 그 일이었다.
끝내 허사로 돌아가자 급격한 시력감퇴로 두세 번 안과 수술을 받아야만 했고 그 고통 중에 생애를 마치셨다.
어머니를 상기하는 일은 곧 내가 좌절에서 일어서는 그 의미를 이루어 온다. 도저히 감당 못할 중량으로 침몰해 버린 나의 집안, 그 불가사의한 불운들을 돌아다보면 필연코 그 무게를 조금씩 조금씩 들어 올리게 된다.
내가 손을 놔 버리면 영 그만이라는 비통감으로 없는 힘을 다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결혼 후 가족을 갖게 되었으나 그들조차 이해 못할 비통한 서원 誓願 이 나의 핏속에 맹렬히 굽이치고 있음을.
어머니는 내 미숙한 글의 첫 번째 독자이셨고 나의 목마른 연정 등속에도 동조자가 되어 주셨다. 앞서도 말한 바 나의 이력서는 감정의 이력서, 혹은 감정이 입은 부상들의 이력서나 다름 없다 하겠거니와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열병 상태에 나는 빠져 있었으며, 묘한 상황 아래에서만 마음이 불붙어 몇 달 몇 해 건강의 악화마저 겹치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딸자식으로선 가장 구제불능의 문제아였건마는 어머니는 전후의 사정과 내 심정의 불가피를 소상히 짐작하시곤 지극한 연민으로 나와 함께 상심과 그 유혈을 나누셨다.
지금 쓰고 있는 ‘나의 이력서’라는 이 글은 여러 가지로 묘한 갈등을 일으킨다.
나를 벗길 것인가? 덮어둘 것인가?
이 점부터 해결하지 않고선 한 줄도 더 못 쓰겠기 만 하다.
젊었던 날, 나에게 비극이 많았었다.
전쟁과 이별, 모든 것의 잔혹한 분쇄, 그러나 보다 더한 비극은 감정의 배고픔에 있었다. 나의 ‘그’ 란 언제나 부재자였다. 그의 마음이 내 마음과 한 가닥 이어져 있었던 것밖에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나의 것일 수가 없었다. 이 운명적 공복감에 시달리고 지치다 못해 백 세의 고령자가 되는 듯한 심정이기도 했다.
서울대 사범 대학을 다니면서 어머니와 둘이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도 외롭고 가난했으나, 이에 더하여 남들이 쉽사리 지병이라고 이름 지어 주던 그 폐결핵과 위에서 말한 비극 의식 등속이 합쳐져 끝내 내 안에서 여지없는 몰락 현상을 빚어냈던 것 같다.
학교는 결석이 많아 성적이 좋지 못했고 예쁘지도 않았으며, 심한 불면증 환자였기 까지 해서 전적으로 엉망이었다. 편지를 대신 하여 서투른 시를 썼으며 꼭 한 사람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나로선 최선의 표현, 최적의 호소를 미칠 듯이 탐내었었다. 불타고 또 불탔던 그 참담한 인간 화재 火災…
6.25 사변이 일어난 1950년은 내가 대학 졸업반이 되던 해였다.
그 잿더미 속에서 몇 낱의 부스러기들로 꾸려진 피난 보따리와 함께 마산까지 흘러가 나는 졸업을 얼마 앞두고 고등학교의 국어선생이 되었다.
심히 남루한 상심의 상태에서 교단에 섰으며 당시엔 아직 알려진 범위가 좁던 윤동주의 시, 그 밖에도 교과서에 넣어져 있지 않던 여러 아름다운 시들을 학생들에게 떠 옮기고 있었다.
51년 9월, 부산의 남성여고 강당에선 서울대학교 제5회 졸업식이 있었는데 그날 마침 유가 드문 폭풍우의 날씨인데다 졸업 예정자의 반수도 못 채운 쓸쓸한 졸업식전이었고, 음대의 축가 순서에선 장내가 잠시 울음 바다이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소설가인 정한숙 씨가 나에게 축하 꽃다발을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축 졸업 전광용 군 祝 卒業 全光鏞 君’이란 글씨가 리본에 적혀있었다. 그날 함께 졸업한 전광용 씨를 위해 마련해 왔다가 생사도 몰랐던 나를 보고 즉시 회수하여 안겨 준 것이었는데 평생 처음으로 꽃다발을 받고 얼이 빠져 서 있는 나를 전광용 씨가 사진까지 찍어 줘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순수하고 귀한 친구들을 어디서 또 만날 수 있겠는가.
입대 중이어서 졸업식이 처지긴 했으나 정한모 씨도 동기였고, 그네들은 다시 ‘주막 동인 酒幕同人’을 결성하여 작품 발표도 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 홍윤숙 띠도 당시의 좋은 친구였다.
환도 후 이화여고 교사를 거쳐 나의 짧은 강사 시절이 있은 다음 1955년 숙명여대의 전임이 되 이래 오늘까지 교수직의 한 자리에 있어옴은 고맙고 무거운 행운이라 하겠으며, 좋은 제자들과의 연분이 뒤이어 이루어졌으며 문인도 여럿이 나왔고 학문하는 제자도 여럿이다.
나는 1927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은 기독교였다. 부모가 일본을 건너 가게 되어 여학교 과정을 큐슈의 후꾸오까 에서 다녔는데 입학에서 졸업까지 한국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1944년에 서울에 와서 경성여자전문학교라는 곳에 입학을 했다. 학교명이 생소하지만 실은 이화전문이 전쟁 말기에 일인들의 정책에 따라 잠시 그런 이름으로 바뀌어졌을 때의 일이었다.
저들은 조선 혼의 싹을 자르기 위하여 도처에 삭막한 개혁 바람을 일구었었는데, 그 한 예가 되는 셈이다. 당시의 동급생 중엔 나영균(이대 교수)등이 있으며, 내가 들게 된 기숙사의 사감은 후일 총장이 되신 김옥길 선생이었다.
학교 구내에까지 군대가 주둔하여 실탄을 잰 장총을 휴대하고 있었으며, 학생의 표시가 멀리서도 잘 보이기 위해 우리는 카네이션 크기의 천으로 된 배지를 언제나 달고 있어야 만 했다. 도장을 찍은 무명 헝겊을 두꺼운 종이에 잘 밀착시킨 다음 가위로 잘라내어 옷핀으로 웃옷에 부착시켰다.
밤 10시는 소등 시간인데, 이 규칙이 참기 어려워서 방공용 두건 같은 두꺼운 재료를 창문에 잔뜩 이어 붙이곤 몰래 불을 켜고 책을 일거나 놀거나 했었는데, 한 번은 갑자기 출입문을 디밀고 사감 선생이 출현했었다. 건물 밖에서 유심히 살핀 결과 규칙을 위반하는 몇 개의 방을 집어내고 바로 찾아온 것이었다. 놀라기도 놀랐지만 너무나 부끄러워 슬프기까지 하던 기억이 지금껏 역력하다.
당시 어머니와 동생은 강원도 한 지방에 머물러 있어서 방학에 그곳으로 귀성하였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다.
이듬해 초봄에야 겨우 월남하여 이대에 나갔더니 문과계는 정지용 선생이 관할하고 계셨는데 하시는 말씀이, 학생은 출교가 너무 지체되어 학적은 일단 말소되었으며 회의에 붙여 방안을 찾아보겠으니 다음 주 월요일엔가 와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해당 날짜에 여자사범대학에서 입시 入試 가 있게 되어 택일의 고민에 붙잡혔다.
시험을 치러 떨어지면 이화 쪽도 놓치게 되겠지만 이대에 가서 복교가 어렵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입시 기회도 못 가지고 일 년간을 허탕칠 판이었다.
결국 나는 입시 쪽을 선택하기에 이르렀고 요행히 합격되어 오늘날의 사범계 출신이 되게 되었다.
그 후에 우연히 들었지만 정지용 선생은 문하에 여성 시인을 내고 싶으셨고 뜻을 이루지 못해 유감이라는 말을 했다는 거였는데, 연분이 닿아 그분의 손에서 자랐더라면 나의 문학적 개안도 얼마간 더 나은 형편이 되지나 않았을는지. 서울사대에는 영문학 교수이던 시인 임학수 선생이 계셨으나 그 앞에 감히 나서 본 적도 없이 6.25 때 납북되시고 말았다.
첫 시집을 낼 때 나는 마산에 살았었고 출판사는 부산이었으므로 주말에 올라와 교정을 보곤 했다.
어느 날 드디어 첫 책의 견본을 손에 들었을 때는 정말 혹한의 날씨였다.
영도 다리를 지나는데 너무 춥고 바람이 거세어서 걸음을 옮겨 놓을 수조차 없었다. 옷은 얇고 몸도 병약하여 그랬던지 뭔가 종착지같이 정말적이고 암담한 심정이 치받았다.
다리 난간을 붙들고 검은 강물을 굽어보았을 때 순간 ‘저기 떨어져야지!’ 하는 야릇한 충동이 치받았다. 거역하기 어려운 유인이었다. 순간적 광기였을까?
바고 그 시간에 따뜻한 방에서 편히 잠들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여 뭔가 별다른 존재, 기형적 자의식이 통렬히 가슴을 쑤시고 있었다. 어느 의미에선 문하게 대한 나의 절망이 그날 밤 안에 시작되고 그날 밤 안에 끝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날처럼 시 詩가 치명적이고 절망적이던 때는 없었다.
나의 첫 책인 <목숨>에는 이헌구 선생께서 서문을 주셨지만, 그때 이후 나의 어느 책에도 다른 분을 번거롭게 만든 서문, 발문, 평론 등의 글을 한 줄도 실은 적이 없다.
돌이켜 보매 실로 아득하다.
가정도 문학도 교수직도 아직은 진행 중에 있다. 언젠가 끝내게 되겠고 한 부분도 보태거나 수정할 수 없는 가운데 손을 떼야 하는 일을 생각하면 엄청난 큰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말하자면 좋은 마무리에 자신이 서지 않는다.
더하여 근래에 와선 또 하나의 책임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건 영혼의 성패라고 할 것에 대하여 나 자신 피할 수 없는 준열한 책임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결국 나는 이와 같은 자각적 중심에 가진 것 없이 지금 서 있는 것이다.
장미
장미를 ‘나의 꽃’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간절히 원했으되 ‘나의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어떤 만남같이 장미의 화려극치도 무한한 목마름의 어느 위치에 서 있게 할 뿐 근접이 쉽지 않았다.
촉광이 과할 때 오히려 눈을 돌리게 되듯이 장미 역시 내 마음을 열기엔 자의식의 초라함이 감당 못할 눈부심을 타곤 했다.
그러면서 이 꽃과 자주 만났다.
선물로 받은 백장미 한 다발이나 초대받은 식탁에 막 이슬을 털어낸 듯 꽂혀 있는 연연한 홍장미, 어느 땐 환한 촛불처럼 이 꽃을 가슴에 달아 주는 형편도 생긴다.
그러나 장미와 나의 전정히 깊은 만남은 꽃의 명시 名詩 등을 통해서였다.
시에서는 장미가 꽃의 영역을 넘어서서 한 성숙한 사상으로 자리하는 듯했으며 꽃의 순례자들은 거의 가 장미 앞에 이르러 여정 旅程을 그치는 것 같았다.
수면에 비치는 나무나 구름들처럼 시 속에 읊어진 간접의 장미를 바라보면서 내 좌석은 비로소 편안했고 장미의 내면, 어쩌면 그 심연이라고 할 깊이에로 이끌려 들어갔다.
‘한 송이의 장미
그것은 모든 장미이다
그리고 그 이상이다’
장미의 시인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린 상처의 악화로 죽었으며 유언을 통해 당부한 그 자신의 묘비명도 ‘장미, 오오 순수한 모순이여…’이던 사실을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이다.
은수자 隱修者 들이 돌을 갈듯이 시인들은 장미의 정혼 精魂 을 불러내려 애썼으나 그 신비는 훨씬 더 무궁하던가 보았다.
장미의 진미 眞美는 단지 5분간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전후의 시간들은 미의 정점을 쌓아 올리는 시간과 그 정점을 허물어 내리는 시간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데 여기엔 나의 이론 異論이 있다.
진정히 아름다운 것은 시종 동일한 밀도의 진미일 뿐이고 그와 같이 사람의 삶도 능력의 전부를 꽃 피워 은총의 조명을 받는 한에서는 전생의 매일 매시가 절대의 의미를 완성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드는 꽃 앞의 그 숙연감.
꽃핌 이전의 꽃의 보배스러움.
내게 있어 장미는 영영 줄어들지 않는 목마름이요, 언제까지나 젊디 젊은 갈망이다. 그리하여 이 아득한 연륜의 부피에 이르러 장미는 내 마음의 중심에 생금빛 씨앗 하나를 심어 주고 있다.
친구여 화해하자
봄 이라기엔 춥다.
어느새 초록이 적시기 시작하고 새순들이 치미는 이즈음인데 저만치 가던 겨울이 문득 옥양목보다도 흰 빙과 氷菓 낱알을 솰솰 쏟아 놓는다.
꽃을 시샘해 내린다 하여 꽃샘이라 부르는 그 눈이다. 그러나 차갑진 않고 알맞게 냉쾌한 수분으로 풀어진다. 조춘의 그 좋은 습도…. 무너가 가슴 속에서 간절해지면서 나이에도 어울리잖게 울음이 치받으려 한다.
아침에 본 수녀들의 화관 花冠 탓일까.
열 한 명의 수녀가 열 하나의 촛불처럼 가지런히 서서 종신서원의 예절을 바치고 있었다. 정결, 청빈, 순명의 세 가지 수덕 修德을 중심으로, 집전자인 추기경의 강론은 보석처럼 귀한 말씀이었다. 수녀들은 검은 머릿수건 위에 순백의 화관을 쓰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흰색의 프리지어와 백수선을 엮어 만들었으며 꽃과 줄기는 싱그럽다 못해 빳빳이 풀이 서 있는 듯했다.
내 마음을 채운 염원은 무엇이었나?
산을 오르내리고 벌판을 가로지르며 또는 도시의 추녀 밑이나 키 큰 가로등에도 투명한 허리띠를 휘감는 조춘의 바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권유해 주었나?
친구여, 우리 화해하자.
이것이 내게 있어 으뜸의 소망임을 이젠 말하련다.
너무 오래 차가운 간막이를 쳐 놓고 있었던 동안 으슬으슬 마음이 춥기만 하여 어디에 있어도 어설픈 과객 같고 밤이면 밤마다 잠도 메말라서 견딜 수 없었다.
봄 이라기엔 추운 싸락눈의 2월.
우리 화해하자. 부디.
친구여!
오늘 거룩한 미사에서 이 한 가지 기도말로 바쳤거니와
우리 화해하지 화해하지 친구여.
여름나무 같은 삶과 사랑을
옛 시대에선 보고 싶은 마음을 가슴 안에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합니다. 전화도 없던 그 시절, 밤을 지새워 간곡한 긴 편지를 쓰며 지우며 하면서 말입니다.
마음을 열고 막혀 있던 진실들을 드러냄이란 먼저 그 자신의 영혼을 거울 속에 비치는 일입니다.
구름밭 같은 안개를 뒤로 두르고 한 여자가, 혹은 한 남자가 가려진 모든 속마음을 헤쳐내어 전심의 가얏고를 울려내고 있습니다. 먼 길을 와서 이제야 당도한 듯한 그 귀의심 한가닥뿐입니다.
거울 속에 담겨진 자신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더하여 또 하나의 사람이 함께 떠오름은 더욱 어떤 자태일지요.
그와 더불어 한 운명을 둘이 나누고자 원할 때 그 심정 오죽이나 절실한 것이겠습니까. 바로 이 자리 이 시간에 다다르기 위해 먼데서 오랫동안 왔으며 천만 사람 가운데서 그를 찾았다고 하겠는데 에서야 더 얼마나의 간절함이겠습니까.
하여 이제는 안주지에 이르렀다고 믿고 싶고 다시는 아무 데도 떠나지 않을 종착지의 확신을 다지고 싶습니다. 모름지기 위와 같이 희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온몸에 차오르는 건 목마름뿐입니다. 하기야 모든 사랑은 목마름과 더불어 솟아나며 마치도 열풍 속에 자라는 선인장과도 같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인 때 더욱더 그 성질이 치열합니다.
참 이상도 합니다.
모든 여건에서 충족되고 축복에 감싸인 듯만 싶을 때도 사랑의 당사자에겐 평화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연애는 실연의 심정을 면치 못하며 갈수록 더 아쉽고 허기지고 비어 있는 땅만을 바라보게 됩니다.가장 잔혹하고 야만스런 예가 되겠습니다만 식인종의 어느 부족에선 사랑하는 사람을 먹어 버리는 일까지도 발생하였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까지도 온전히 충족을 누려 보진 못했을 게 분명합니다. 소유란 단지 허무한 소멸일 뿐 사랑의 갈증을 푸는 데엔 아득히 못 미치는가 봅니다.
하면 무엇으로 그 목마름을 고치는가고 물으시렵니까.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함께 그 해답을 의논하고 싶은 것이랍니다.
현대에도 ‘보고 싶음’과 ‘긴 편지’가 있겠는지요. 손 끝을 움직여 다이얼을 돌리거나 수첩에 서 넣은 하루치의 사무절차 속에 한 줄의, 혹은 한 글자의 약칭으로 비좁게 처리되는 그 사람의 이름.
차 한 잔을 나누는 동안에도 몇 번씩 시계의 분침을 살피는 인색한 시간 할애.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각박한 세태에서도 활활 피어오르는 보고 싶음의 숯불이 있을까요. 그건 행복한 부담 쪽이기보다 고통의 멍에임에 틀림 없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있긴 있을 거예요. 칠팔월 불볕에 아스팔트조차 검은 기름으로 녹아 진득거릴 때 열 개 그 이상으로 목이 타는 그리움이 사실상 존재함을 믿을 일입니다.
여름엔 신 神마저 잊어 버리게 된다고 누군가 말했듯이, 망각과 나태의 거대한 수렁을 지나가면서 한시도 헐겁게도 지닐 도리가 없는 과부담의 격정과 불망을 한아름 그득히 앓고 있는 이들에게 나는 이 글을 보내고 싶습니다.
어김없이 그네의 주소를 찾아 배달되는 우정과 조언의 편지이고자 합니다.
되도록이면 위안과 격려의 노크이고 싶으며 최소한 그 염원의 전달이기를 바랍니다.
몇 백만의 사람이 북적대는 대도시의 그것도 끓는 용광로 같은 불볕더위 안에서 한낱 사람 이름의 화인 火印으로 살갗에 문신을 새긴 그를 위하여, 흐르며 또 채워 넘치는 사랑의 수량을 위하여, 그 성실하고 풍요한 인간적 번뇌 앞에 나는 이 글을 보내고 싶은 거랍니다.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또한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곡’을 나직한 볼륨으로 들으면서 말입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의 도시 안이라고 해서 삶의 본질이 바뀔 순 없을 테지요.
황량한 시대의 건조한 열풍 속에서도 들꽃를 심어 기르는 인간성의 녹지대를 믿어야 할 것이며 우리 모두 이 확신의 동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받은 공감의 축복이란 귀한 것이니까요.
바로 오늘 저녁 나는 여의도의 작은 찻집에서 한 친구와 마주앉아 얼음을 띄운 주스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내 마음 흡족하고 다분히 감미롭기까지 했습니다.
얘기 중에 기쁨이란 단어가 섞이게 되면서 이상하게도 이 말을 감싸 두르는 부듯한 조명을 느꼈습니다. 신선하면서 이 말 한 마디가 빛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데에 놀라면서 하나의 싯귀를 떠올렸습니다.
돌아오라 다리 위에
그 여자 만약 돌아온다면
나는 말하리라
아아 기쁘다 라고
이는 프랑스의 시인 아폴리네르의 글귀입니다. 그의 생애는 외롭고 가난했으며 실연의 깊은 상처 외에도 머리에 총상을 입어 세 번이나 개두 開頭 수술을 받는 등 참담한 고통으로 일관되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위의 시어는 더더구나 비통하고 아름답습니다.
만남은 곧 기쁨입니다.
만나기 전에 그가 이미 존재했다는 눈부심, 그와의 만남이 실현되었다는 감동, 여기서부터 기쁨은 자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한 그루 묘목이 땅 속에 뿌리 내리기도 전에 사나운 기상 氣像은 사정없이 엄습합니다. 지나치게 가물거나 엄청난 장마가 퍼붓기도 합니다. 만나는 시간은 적고 부재의 시간만이 많아 가슴과 목을 마구 감아 죄는 명주 피륙이 되곤 합니다.
너무나 빨리 사랑의 목마름은 와 버리고 그저 암담한 자의식뿐으로 날이 새곤 또 날이 저뭅니다.
그러나 만남을 따라오는 찬란한 기쁨을 결코 의심해선 안됩니다. 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아깝잖이 치를 ‘만남의 축복’을 진흙에 내굴릴 순 없습니다. 태산 준령의 시련이 가로막더라도 기쁨의 복습만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만남과 운명의 사람, 이에 절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엔 저절로 연분의 한 전형이 생겨나며 비록 한 연분을 가리고 새로운 연분이 문을 열 때라도 흙 속에 내린 나무의 핏줄을 끊어낼 수는 없습니다.
한 번 돋아난 것의 강건한 근력 위에서만 새로운 관계가 자라도 자랄 것이 바 어떤 여건 아래서도 귀중한 만남들은 깡그리 잊어지는 일이 생길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즈음 과수에서 잘디잔 과일이 달리고 여린 과육 속엔 훗날의 과일 나무를 약속하는 시앗들이 깨알처럼 박혀 있습니다. 사람 속의 능력도 이처럼 오늘을 위한 몫과 후일을 예비하는 비축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전략>
부끄러운 건 사람
사랑이 모자라 서두른 이별과
세월이 남았는데
문닫은 마음
자연이여
사람 중에 떠나간 자를 용서하라
사람 중에 보낸 자도 용서하라
이 시는 발표 후 챙겨두지 못하여 까맣게 잊었다가 우연히 어느 분의 글 속에 인용되었음을 보고 얼마 전 찾게 된 것입니다.
돌아다보면 사람에 따라오는 아픔 따위에 섣불리 겁먹은 나머지 황량한 도시인의 습성을 따라 그저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살아오기만 했었습니다.
사랑의 어려움 중에 가장 어려운 건 ‘그 사람의 부재 不在’이겠지요. 사랑하던 사람끼리 맥없이 헤어지고 마는 까닭인들 함께 있지 못하는 아픔 탓에 그리 도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그러므로 이를 인내하고 고통을 품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근력이야말로 성인적인 능력이라고 볼 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감과 촉매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가 준 것을 잘 가꾸어 꽃피워야 함이 사랑의 과제라 할 때 이 과제와 그의 부재 사이에 사랑의 험준한 계곡은 아득히 솟아 있는 것임을.
그러나 사랑은 그 자체가 이미 행운이며 축복이므로 하여 이에 더 보탤 선물까지를 꿈꾸어선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가졌으면서 충족과 독점을 더하여 탐내고 언제나 함께 있으려 하며 여기에다 영원 운운의 사치마저를 원하는 일은 과욕일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그 본연의 광채만으로도 족하다 할 겸허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크고 너그러워야 합니다. 또한 사랑은 서로를 만들어 줍니다. 만들어 주면서 만들어지기도 하는 관계 사이의 균형에도 애써야 합니다.
내면적 유대, 내적 생명이 성숙한 개화란 그 자신의 최선이면서 관계 사이의 최선도 될 것입니다.
보고 싶음을 기르십시오.
사랑의 온갖 성실이 배어들어 저편 이의 내부에 단맛의 양분으로 차오르게 하십시오. 사랑엔 어차피 편안함이 없으니 안일과 타성의 살을 가르고 고통에 섞여 자라는 생명의 새 넝쿨을 뽑아내야 합니다.
가열한 사랑의 명령이 가슴 한가운데에 떨어져 올 때 조용히 일어서야 합니다. 온 마음으로 대답하면서….
여름 나무 같은 힘과 건강. 그 신선함과 초록빛과 가장 좋은 수분으로. 그리고 기도로써 말입니다.
그 먼 길의 길벗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이는 내 마지막 영역이다.
우리는 멀리 왔다. 얼어붙은 강 위에 떨어지는 백설을 바라보며 나는 이 생각을 했다. 우리는 멀리 왔고 그리고 앞으로 더욱 땅 끝과 하늘 끝이 맞붙은 그곳까지 가련다고.
사랑이란 참 어림없는 결단.
그것이 얼마나 아득한 도정인가를 지금에야 알겠구나. 이루 잴 수가 없는 내면의 충일과 감춰진 손의 무한량한 도야가 따르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단순한 열정이기보다 단순한 기원이어야 하며 성급한 서약이기보다 맹세를 늦추는 신중한 사려 思慮, 그러면서 명백한 결단이어야 한다.
그건 감미로운 도취가 아니고 끊임없는 헌신의 가지 끝에 겨우 얼마간의 담백한 유열로 맺히는 그 이슬이요 눈물이다.
많이 바라면 그만큼 낙망을 더하게 되고 절제 속에 조금만 바람을 드러내면 매번 그 수급 受給 이 신선하고 흡족하리라.
이에 대해 경고하는 좋은 말이 있다.
‘사랑은, 저편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영혼의 경이에서 시작되고 모든 것을 탐내게 되는 자아의 실망에서 문이 닫긴다’고.
그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해 바람을 견제하는 일이 쉽겠는가. 언제나 주고 있으며 쉴새 없이 바라게도 되는 그 격정을 알맞게 조절하는 일이란 예사의 지혜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훨씬 풍성한 지혜를 맞고 있는 자만이 가능할 것이리라.
덕성과 관용의 선수들만이.
얼어붙은 폭포를 본다.
옥빛의 모시가 빳빳이 얼어 가파른 바위에 입혀진 광경이다. 수정 판자 같기도 하다.
첫봄의 햇살이 몸을 풀어 주면 구슬 같은 물줄기로 우줄우줄 흘러내릴 테지. 덩어리로 굽이치는 물의 분류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당신이 함께 이 설경을 본다면 좋았을 것을.
눈 위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광막한 벌판 한가운데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다. 쩡한 대기와 안개처럼 서려 나오는 산 정기가 당신의 살결을 씻어내고 보이지 않는 두 팔로 간절히 안아 줄 거이다. 머리 위에 머무는 겨울 하늘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유연하게 해주려마는.
말은 띄엄띄엄 조금만 나눈들 그 뜻은 썩 잘 전해지고 깊이 스며들리라.
아니지. 말은 전혀 없은들 어떠랴.
대대로 사람은 침묵을 통해 동일한 사념과 한가지 바람의 그 일치를 얻게 된다. 그것은 말하지 않는 말, 말로써 나타내기엔 너무나도 말의 한계를 넘어서는 말임으로 해서이다.
‘진정한 충실은 한 번 태어난 이를 수없이 소생시키는 일이다’
이 말은 어디선가 인용한 기억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거듭 몇 번이라도 소생시키며 활력을 넘치게 함이 사랑의 첫 번째 의의요 의무이다.
자기를 다 주고 쉬임 없는 관심으로 돌본다고 해서만 사랑의 성취를 얻는 게 아니며 근본적인 충실은 근본적인 생명을 찾아주고 이를 도와 가꾸는 총명이며 그 성의 있는 지속, 통틀어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다. 또 이것이 전후 일관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의 진실은 더 많이 그 오뇌에서 자라난다. 수없이 엎어지는 좌절이 자갈밭에서 어떠한 열망으로 이를 이겨내고 일어서는가의 그 준엄한 의지와 극기에 있다 할 것이다.
우리는 멀리 왔다.
우리는 과연 멀리 왔을까.
반은 긍정이요, 반은 부정이다.
이에 대해 당신의 말씀이 듣고 싶다.
겨울 강물은 얼어서 한 덩이가 되었다. 눈이 떡가루처럼 강 위에 떨어진다.
아무 소리도 없다.
이 침묵의 심연.
무언가 몸을 떨게 하는 게 있다.
어두운 전율이 아니고 한편 들뜬 흥분 같은 것도 아니다. 한없이 내려 눌리면서 어둑하게 솟구쳐 오르고 싶은 한 덩이의 감정이 줄곧 치받는다.
그러나 고요하게 땅 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정녕 당신의 외로움을 나에게 열어 주렴. 당신의 영혼을.
당신은 더 많이 고독을 알고 더욱 목마름에도 눈떠야 한다. 사람이 얼마나 철저하게 혼자인가를 알며 그래서 벗을 찾고 신을 부르는 간망에 일어서야 한다. 처음부터 복습하는 교과서처럼 우리도 진실의 첫 대목부터 시작하여 새로이 삶을 배우자.
당신의 가슴을 더 열어라.
나직한 맥동, 생명의 울림을 듣자. 나하고 함께 듣자.
사랑하는 친구여
몇 날 몇 밤을 당신 생각만 했다. 몇 달 몇 해, 나는 당신에게 열중하며 예까지 왔다.
아아 당신의 추위를 나에게 열어 주렴. 그 추위 속에서 우리의 포용 包容 을 다시금 거쳐 나왔으면 한다. 몇 날 몇 밤을 잠자지 않는 마술사처럼 깊은 겨울의 낮밤을 당신과 함께 나도 깨어 있고 싶다.
‘사랑에는 무게의 부담이 없다. 나의 나뭇가지가 부러질 때는 당신이 너무 기대어 온 그 탓이 아니고 당신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의 무게를 나에게 주렴.
그건 당신이 더욱 나에게 의탁해 오는 일로써 이루어진다. 나에게 기대고 맡겨 주고, 내 안에서 안식을 누려 준다면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리.
나의 중량이 더하도록, 무게를 견디는 힘이 더욱 커지도록 그래서 끝내 우리는 가지도 휘어 굽어지는 청과의 충일을 갖자. 당신의 의탁, 당신의 신망은 내 난에서 살이 되고 피가 되리라.
한없이 당신을 품어 데려오고 싶다.
이루 말할 수도 없는 열망이란 바로 이것,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허나 다른 말로 한없이 나를 내어 주고 싶다는 그 뜻과 동일하다. 어느 쪽으로 말하건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하겠다는 그 바람에 귀착하는 것이니까.
이별의 차가운 바람으로 잠깨는 일이 없는 충족과 안도의 긴 세월을 당신을 위해 마련하리라.
가난한 소유도 풍성한 소유도 내게 있어선 오직 당신이 자유롭게 재량한다. 당신은 권위 있는 자와 같이 나에게 임했으며 내 모든 영역을 관할하는 사람임을 내 어이 부인하리.
오늘 나는 당신을 청해 온다.
전적인 확신으로, 더는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내전에까지 당신을 모셔 들인다.
당신은 나의 행복한 포로가 되어 주겠는가?
당신의 의관 어느 실오라기 하나라도 나와 무연할 수는 없다. 하물며 당신의 모발 하나하나, 오죽이나 소중한가.
사랑하는 친구여
순수의 싸락눈, 운명의 싸락눈 뿌리는 천지간에 나는 그대를 본다. 내 생명 깊은 계곡에 신이 내어 걸으신 큰 축복의 계시가 바로 그대와의 만남이요 겨울에 태어나는 첫봄의 환희, 그게 곧 당신일 것을.
우리의 만남을 감사 드리며 서로의 외로움을 속속들이 쪼개는 이 손시린 영광….
내 말을 더 가라앉혀야 할 것 같다.
자못, 말이 지나치게 화사한 수식을 찍어 붙이게 될 일을 나는 경계한다. 미문은 때에 따라 글의 타락이 된다. 하고 싶은 말인들 더러는 마음에 담아두고 더러는 바람에 날려 보내며 그 일부만을 전하리라.
세월은 더욱 쌓이리.
행여 이 위에 더는 만나는 일이 없다 해도, 당신은 나에게 흡족해 주었으며 고귀한 걸 주었었다. 내 어설픈 사유의 틈서리에마다 온갖 양상의 촉매가 되어 주고 때때로는 분수에도 넘치는 영감의 불을 내 속에 당겨 붙였었다. 갖가지 애환 가운데서 나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으며 당신의 이름은 언제나 내 입술에 묻어 떠나지 않았다.
간혹 글을 쓰다 밤을 밝히게 되면 아침엔 죽은 듯이 지치고 한없는 배고픔처럼 자신의 손을 물어 뜯는 그 절대의 고적감.
유리창엔 눈물이 맺혀 글썽이듯, 몇 오리가 밤이슬이 엉겨 내리고 조간 신문은 뜰의 한편에 눅눅히 습기를 머금고 내던져져 있다.
이럴 때 누군가 손을 잡아 주었으면 싶다.
절망의 유인은 왜 그리도 많은지.
나는 자주 내 삶의 돌 층계에 쓰려져 흐느낀다.
삶에선 끝없는 용기와 분발이 솟아야 하는데 이것이 미약하기 때문에 버려진 아이처럼 울음이 치받는다. 애들처럼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
이렇게 부르면 지체 없이 격렬한 전류가 온다. 아픈 전기이다. 아프고 뜨겁고 견딜 수 없는 전기이다. 이 전기를 당신도 수없이 내 안에 일구어 준다.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를 부르면 지체 없이 전류가 온다.
서러운 전기, 사람의 외로움을 치명이 정도에까지 선동하는 전기, 이는 무참한 불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나의 핏줄에서 몇 번이라도 당신을 낳는다.
당신이 일구어 주는 그 불더미 속에서 구운 칼날처럼 당신을 끄집어낸다.
앞으로도 나의 저력의 그 근원지에서 당신과 더불어 살겠고 당신의 진실을 낱낱이 지켜 보겠다. 다만 어느 날 당신을 버려 두고 홀연히 내가 세상을 하직하게 될 그땐 오죽이나 죄스럽고 미진할 것인가.
눈이 닫길 때 귀가 열리리라.
보지 않고 알 때, 듣지 않고 느낄 때, 느끼지 않고 믿을 때, 비로소 시간마다 신을 뵈올 수도 있겠거니, 당신을 맞이할 수도 있겠거니, 이와 같은 봉별의 자율을 나는 심히 부러워한다.
그러나 한편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남김없이 다 내어 주어선 안 된다고 여겨진다. 서로 흡수하고 용해되어 마치도 한 사람의 내부와 같이 한계마저 없어지면 간혹 위급할 때 무슨 여력으로 그 어려움을 떨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내부에서 생겨나는 붕괴도 있다.
권태나 타성 따위.
이럴 때 전혀 건강한 저항이 없다면 어떻게 그 시련을 넘어설 수 있겠는지.
사랑의 모순은 사랑의 신비와도 통하거니 전후의 모든 과정에 금싸라기 같은 지혜가 알맞게 따르지 않는다면 정녕 사람은 쓰임 없이 전락할 밖에 없다.
사랑의 필연성, 그건 바로 사랑의 운명이다. 그렇다. 운명으로 오는 것 그게 사랑이다.
친구여 우리는 멀리 왔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더 먼 길을 가야 한다.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열어 드리며 이제 막 시작하듯이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운다.
당신의 길벗이고 싶은 그 갈망으로 이리 뜨겁게 나를 받치고 있다.
조용히 서두름을 누르며,
아주 간절하게.
제3장 가슴 안의 그 하나
기도 연습
1
이리 삭막함을 용서하소서.
비정함과 폐쇄, 서로 타인임을 용서하소서.
가족간에도 끼어드는 추위를 용서하소서.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 애매한 부부 사이를 용서하소서.
관계의 빈곤들을, 진흙에서 내굴린 금싸라기의 시간도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불면을 용서하옵소서. 좋은 잠은 성성 聖性의 참여라고 했는데 밤마다 잠은 메마르고 두통과 귀울림이 잦은 일을 용서하옵소서.
화해를 허락하소서.
위안과 협동과 다시금의 분발을 허락하소서. 이른바 행복을 허락하소서.
충실과 조화에 나아가게 하소서.
삶을 소중히 꽃피우게 하시고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가장 좋은 따뜻함을 누리게 하소서.
알맞게 쓸쓸하게 하소서. 피차의 고독을 살펴 줄 건강한 시력을 주시옵소서.
명주실을 뽑기 전에 누에의 온몸은 유리처럼 얼비친다 했는데 저희도 투명하기 원하옵니다.
순수하기 원하옵니다.
신앙을 원하옵니다.
으뜸으로 당신을 원하옵니다, 주여.
2
마음의 소요가 불어나서 온세상을 채우니 하나님도 이를 어쩌지 못하십니다.
첫날의 부스럼을 죽기까지 못 고치는 존재의 암담함을 굽어살피시고 먹어도 먹어도 소용없는 비극의 위장, 골수까지 허기지는 굶주림을 살펴 주옵소서.
하오나 내 하나님.
진실로 아뢰오니 사람이 그 자신에게 절망하는 일과 사람끼리 서로 절망케 하는 일의 이 비참을 신이신 당신께선 도저히 알지 못 하시옵니다.
3
오늘은 아뢸 말이 없습니다.
마음이 굳게 닫혀 제 안의 수북한 할 말들이 그 안에 갇혀 버렸습니다.
말씀드려 봤자 제 기도는 동일한 되풀이일 것이옵고 보나마다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부터 체념이 저의 기를 꺾어 버립니다.
생각해 보시옵소서. 주님이나 저나 얼마나 지루한 타성을 쌓아 왔습니까. 얼마나 쓸쓸한 숨바꼭질을 거듭했습니까. 오늘 저의 할말들은 돌의 살갗에 말라붙은 겨울 이끼와 같사오며, 겨우 이 사실만을 아뢸 수 있사옵니다. 이런 까닭으로 더 다른 말을 아뢰지 못하옵니다. 나의 주여.
4
아름다운 밀초에 불붙이고 성탄절 송가를 듣습니다.
눈물이 차올라 견딜 수 없사옵니다.
주의 자비여, 주의 자비여, 주의 자비가 곧 주의 권능이시옵고 주의 정의가 보로 주의 힘이시옵니다.
열끊는 비원 같이도 사납게 요동치는 감동, 진정히 아뢰오니 이 마음을 주의 손에 받아 주옵소서. 오직 받아 주심으로 하여 저는 추만하옵니다.
5
지난해엔 열심히 일했습니다.
집을 고쳐 세우는 흙먼지 속에서, 그리고 밤에는 흘러내리는 머리결을 쓸어 올리며 이슥토록 시를 주무르곤 하였습니다. 뙤약볕의 온종이로가 야반의 정적에서도 무시로 눈시울이 젖어 들면서 얼마든지 샘솟던 무량의 눈물.
어떤 의미론 형벌이었습니다. 주야로 형틀에 묶여 지내며 맨살에 찍히는 무수한 화인 자국을 감내했습니다. 그 마음은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하온데 올해의 여름은 다릅니다. 시원한 방에 편히 지내며 눈시울도 말라 있는 이 무서움.
이리도 값어치 없는 무사안일의 한없는 나태, 이거야말로 형벌입니다.
사랑과 고뇌는 주께서 측은히 여기시나 이별과 냉담에는 연민의 일별조차 머물지 않으심을 저희가 아옵기에 바라오니 인간적 몰락의 이 허약과 빈곤에 불의 진노를 내리시옵소서.
여름의 막바지 피를 토할 듯이 내 삶과 사랑의 불성취를 서더워, 또 서러워합니다.
6
그리도 제 기도를 외면하신 주님께 저의 승복을 아룁니다.
주님의 힘을 어찌 꺾겠습니까. 전능하신 분의 아집을.
하옵기에 돌층계에 엎드려 저는 패하옵고 지금은 조용한 미소를 드립니다.
강하신 주님. 당신은 이기시고 저는 졌다오니 이로써 주님과 제가 다시금 평온하기 바라옵니다.
7
며칠 기도 드리지 않아 며칠간 굶은 듯이 배고픕니다.
풀리지 않는 그리움의 멍울.
오늘 밤 기도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남은 일을 서둘러 치르겠습니다.
8
후끈하게 살아 생동하는 한덩이의 피가 중량을 가지고 내려앉습니다. 가슴 속의 낙뢰 落雷라 하올 것입니다.
주님도 아시는 바 엄청난 일이 생겨났습니다. 사람 하나가 죽은 것과 진배 없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입니다.
주님, 저는 무력하오나 이 충격을 승인하겠습니다. 하나의 무대와 같이 시간이 다하여 막이 내리는 이치로 소용돌이치는 격량이 다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리 긴 연극도 이윽고는 끝나도록 마련임을 아옵기에.
9
남이 제게 잘못한 일 잊게 하옵시고 제가 저들에게 잘못한 일 낱낱이 잊혀지게 하옵소서.
열 손가락 차례로 깨물어 붉은 피 점점이 흘리오리니 그 아픔 공손히 바치리니 내 안에 황황히 불 켜시고 주님 납시옵소서. 그 평화 바다같이 넘치옵소서.
10
서서히 그 순서가 다가오고 있으리니
성취보다도 완벽한 주님의 안배, 그 글씨가 읽혀지리니
여기가 내 믿음의 의지옵니다 주님.
11
양팔 기도라는 새 낱말을 배웠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형상대로 두 팔을 허공에 들어 올리고 돌바닥에 무릎 꿇어 장시간 청원을 고하는 세제, 수녀,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침 불볕더위여서 목욕하듯이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아무 말, 어떤 권유도 저에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침묵하면서 속죄 양처럼 그 자신을 바치고만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줄 밖에 세워진 어린이처럼 울음 울 것 같은 고독과 이때의 무력감도 당신은 밝히 살펴 주시는 것이옵니까.
12
구하옵니다. 주여.
바라오니 순수한 전념으로, 충실한 신뢰로, 다함 없는 분발로써 구하게 하여 주소서.
성숙한 탄원을 드리게 도와 주소서. 저로 하여금 기도에 능한 자 되게 하여 주소서. 무엇부터 또 어떻게 구하면 좋을지를 하나 하나 손잡고 가르쳐 주소서.
바라지만 말고 드리는 일도 알게 해 주소서. 어떤 봉헌이 저로서 가능하올는지 낙망 없이 추구하게 해 주소서. 그러기 위하여 저 자신의 풍요부터 힘쓰게 해 주소서.
구하옵니다, 주여.
청하거나 바치는 일들보다 더 우선하여 주님 안에 생활하는 복된 관습에 이르게 하소서. 호흡의 자연스러움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해져서 저의 심신에 심히 당연하게 하여 주소서.
13
크리스천 적 인격 없이는 크리스천 적인 말을 알지 못하옵니다. 하옵기에 바른 말씨로 기도 드리지 못함을 살펴 주소서. 크리스천 적인 자양분을 먹지 않고서는 크리스천 적인 건강을 못 누리는 이치이옵기에 병약과 나태에 자주 머무름을 살펴 주소서.
이러므로 하여 저희는 죽기까지 혹은 죽은 그 다음에도 이마에 땀방울을 맺는 견습공들이옵니다.
14
거절하시려면 하시옵소서. 끝내 주시지 않으려면 그렇게 하소서.
허락이 없으신 그 만큼을 저희도 원하지 않으려 애쓰겠습니다. 아무것도 솟아나지 않았던 원초의 상태로 시계 바늘을 되돌리듯이 상황을 환원하고 주님과 저희가 단순히 얼굴을 마주 보게 하소서.
아아 바라 뵙는 일, 그것만으로 저희의 모든 해갈을 이루옵니다.
15
주님께 저 자신을 다 드리진 못했으나 형제 중의 봉헌자들을, 자매 중의 서원자들을, 주님 앞에 보내옵고 그 헌신과 서원을 숨어서 나누겠나이다. 행여는 자식 가운데도 사도의 길을 걷게 디기 바라나이다.
아직은 모릅니다만 위의 소망들 가운데서 몇 가지는 필히 하늘의 문을 열게 되올 것을 뜨겁게 믿고 바라나이다.
16
제 영혼은 천길 물 밑에 있사옵기에 영혼 속의 주님도 거기 계시옵니다.
투박한 철문 안에 갇혀 있사옵기에 주님께서 그 어둠에 머무시옵니다. 습한 당 고약 같은 진흙에 엎드릴 때도 나의 주님 함께 하시나이다.
사삼일 울고 지낼 때는 눈물에 젖어 밤낮을 보내시고 불화와 반목에 제가 빠지오면 저로 하여 갖은 곤욕을 치르시옵나이다.
주 앞에 바라오니 차라리 제 영혼을 버려 버리시고 밝은 땅, 위로 넘치는 곳에 나의 주님 부디 납시옵소서.
17
한 여인을 봅니다.
위안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뙤약볕의 돌무지에 머리채를 풀어 헤지고 누워 신음하는 그녀를.
준열하신 하느님.
굳센 자일수록 치열한 불더미에 집어 넣으시는 당신의 완력은 저를 저항케 합니다. 그러면서 서럽고 절망적인 질투와 소외감이 저의 전령에 뭉쳐 폭발합니다. 지금 한창 그녀에게 내려 주실, 사납도록 치열하신 당신의 연민을 죽음과도 바꿀 만큼 저는 부러워합니다.
18
저의 불성취를 굽어보소서.
하오나 하늘의 허락은 이미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저희에게 닿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걸리는 것인지도, 하옵고, 끝내 주의 허락이 없으시다 한들 더 큰 테두리 그 안에서 균형과 조화가 잡혀지게 되올 것도 같사옵니다.
바라오니 주님의 선이 사람의 선 위에 장엄히 군림하시고 사람의 간망이 주의 섭리 아래 머리 수그리게 하여 주소서.
19
어제 비 오듯 하던 눈물이 지금은 걷혔습니다. 새 눈물 속에.
오늘은 오늘의 눈물로써 천지가 범람하오니 저로 하여 이 눈물에 침몰하여 죽어지게 하소서, 주여.
20
제 영혼에 불이 담아질 때.
은하 긴 성운 星雲 이 드러누울 때.
혼자가 아님을 알 때.
고맙고 서럽고 참 착해질 때.
납시옵소서, 주여.
제 앞에, 제 위에 아아, 전후좌우에, 그 둘레에까지 나의 주님 부디 납시옵소서.
21
주님은 제 마음을 유리 그릇처럼 투시하시니 갈 곳도 숨을 곳도 없사옵고 그 눈길에 못박혀 주야 사철을 지내나이다. 하오나 한편으론 심히 자유롭게 해주시어 저를 저로서 내버려 두시나이다.
주여! 라고 부르면 첫 만남 같은 설렘이 크고 둥근 파문으로 퍼져 나가게 하시나이다. 매번 신선하고 감격스럽게 해주시나이다. 전후가 신비하고 오묘하나이다.
22
시간이 모자랍니다. 바쁘고 바쁩니다.
이 중에서 가장 바쁜 일은 저의 기도이옵니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대면이옵니다.
주여, 피조물에겐 주물주께의 목마름이 질긴 철사줄처럼 들어있나이다. 전기 흐르는 본능이옵니다. 생명이 비롯하던 그날부터 가늘게 종소리를 울리는 그리움이었나이다. 사시사철 그러하였나이다.
다만 오늘에야 이 고백을 아룁나이다.
백조 이야기
당신은 가시투성이의 엉겅퀴 풀을 맨손으로 따야 하고 맨발로 밟아 짓이겨서 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실로 소매가 달린 열 한 벌의 옷을 짜서 마법으로 백조가 된 열 한 명의 왕자들에게 입혀야 합니다. 엉겅퀴풀은 마녀들이 모여 있는 무덤 위에 있습니다. 옷이 다 지어질 때까지 몇 년이 걸리더라도 결코 말을 해선 안 됩니다. 한 마디라도 말하게 되면 왕자들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되고 마니까요.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백조’라는 작품은 계모의 마술에 걸려 백조가 된 오빠들을 구하는 엘리자 공주의 장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커다란 들장미 울타리 사이를 바람이 불어 와 장미꽃를 보고
“당신보다 더 아름다운 게 있을까요?” 라고 물어보면
“있지요. 엘리자 공주님이지요.” 라고 대답할 정도니까요. 바람이 찬송가 책장을 넘겨 주면서
“당신보다 믿음이 깊은 이가 있을까요?” 라고 물으면
“있지요. 엘리자 공주랍니다.” 라고 장미는 다시 대답한답니다.
자아, 오늘은 당신이 엘리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려운 일들을 지금 곧 시작해야 합니다.
왜 내가 그녀이냐고요?
잘 아시겠지만 사랑 때문입니다. 당신에겐 사랑하는 열 한 명의 오빠가 있고 당신 만이 그들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오빠라든지 열 하나란 숫자는 작품상의 상징이므로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그가 누구건 간에 상황이 어떻든 간에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와 주려 할 때 그대는 그 즉시에 엘리자가 됩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기도를 그친 일이 없을 만큼 간절히 염려했던 나머지 꿈 속에서 선녀를 만나 위에서 말한 바의 한 가지 대책을 알아 차리는 엘리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곧 그녀라는 이치가 성립되는 거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용맹합니다. 어떤 어려움도 끝까지 참아냅니다. 결단을 망설이지 않으며 필요한 일을 지체 없이 시작합니다.
가시투성이의 엉겅퀴풀을 맨손으로 따고 맨발로 짓이겨 실을 뽑아냅니다. 불인두로 지지듯 하는 고통을 이겨내며 잠시도 일손을 쉬지 않습니다.
숲에서 왕을 만나 그의 아내가 된 엘리자는 밤중에 무덤을 찾아가 마녀들과 한 패가 되곤 한다는 나쁜 소문 탓에 사람들의 오해와 미움을 받게 되고 사랑이 깊던 왕까지도 그녀를 더는 두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깊던 왕까지도 그녀를 더는 두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필연코 마녀의 화신일 것이라는 재판 결과에 따라 불에 태워 죽이는 사형이 정해졌으나 이 지경에서도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 적어도 임금님한테만은 이 괴로움을 알려드리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 굵은 눈물 방울이 한없이 맺혀 떨어집니다. 왕궁이 아니 축축한 감옥에서 엉겅퀴풀의 베개와 거칠꺼칠한 엉겅퀴풀의 홑옷을 덮고 밤에도 아주 조금만 잠을 자곤 줄곧 일했습니다.
“오빠들을 구해야 한다. 이 불 같은 소망에 비하면 어떤 고통도 작고 가벼울 것이다.”
그녀는 더욱 더 부지런히 일손을 놀렸습니다. 이제 열 벌의 옷은 완성되고 나머지 하나도 거의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 언제나 도와 주시던 그 사랑으로 지금도 내 옆에 함께 계신다.”
그녀는 절대로 낙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용기와 믿음과 꾸준함을 낳아 줍니다. 어려움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진리를 잊지 아니합니다. 단지 거짓없이 진실한 사랑일 때만 말입니다.
도와 주는 자가 나타납니다.
조그만한 쥐가 마룻바닥을 돌아다니면서 엉겅퀴풀을 끌어다 주고 지빠귀새는 창살에 앉아서 그녀의 용기를 돋우려고 유쾌한 노래를 불러줍니다.
날이 밝아 사람들은 마녀의 화형을 구경하려고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으며 투박한 삼베 옷을 입은 왕비는 늙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형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손은 여전히 쉬지 않고 파란 실로 옷을 짜고 있습니다.
“저 마녀 좀 봐. 저러너 기분 나쁜 물건을 갖고 있다. 빨리 빼앗아서 찢어버리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옷들을 빼앗으려 할 때 열 한 마리의 아름다운 백조가 날아와서 수레 위의 왕비를 에워싸지 왕비는 커다란 열 한 벌의 풀옷을 백조 쪽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새들은 열 한 명의 훌륭한 왕자가 되었는데 맨 끝의 왕자만이 한 쪽 팔 대신 백조의 날개를 달고 있었습니다. 옷 소매 하나만 못 만든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때가 곧 성취의 시간입니다.
엘리자는 이제 침묵을 끝내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쁜 계모의 마술을 풀어 버리고 오빠들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준 기쁨과 자랑은 그녀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위의 이야기 속에는 수난과 구원의 관계가 풀이되고 있으며 사랑과 신앙을 다하여 모든 시련을 극복하는 사람에겐 기필코 승리의 월계관이 주어짐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현재 사랑하고 있는 당신, 바로 당신이 오늘의 엘리자이기에 용맹과 충실과 인내를 당신의 것으로 실히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도.
당신의 사랑을 위해 나는 충심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승리하십시오. 부디.
돌아오는 이를 위하여
언젠가 밤기차를 탔었다.
바깥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으나 그래도 눈길은 창 밖을 더듬고 있었다. 이따금 민가의 불빛이 옆으로 길게 금빛의 수실처럼 흐르다가 끊어지곤 했다.
그 검고 네모난 창문 안에 홀연히 사람 하나의 얼굴이 비치던 일은 어째서일까. 나의 아득한 과거 속에 가라앉아 있던 그가 판유리 위에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다니.
웬일일까. 마음 속엔 갑작스런 소요가 일어났다. 마치도 꿈 속에서 사람을 만나고 잠을 깬 후 실없이 그 기억을 되뇌이듯이 심중엔 작은 돌이 던져지고 자잘한 수문들이 동그랗게 주변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묘하게도 지금 문득 그 일이 생겨난다.
그건 돌아오는 행위를 연상시키며 또한 어디론가 바람처럼 떠다니고 싶은 우리들 자신의 유랑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진다.
잠재 의식 안에서 출렁이는 갖가지 파도들. 겉으론 평온하나 속에서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격랑들 중에 회귀 回歸의 열망인들 없다곤 못하리라. 하지만 이것을 받아 줄 따스한 품 안이 과연 있을는지. 생각해 보자.
오늘의 세태에선 부재자나 이탈자를 위해 어떤 마련을 해주고 있나. 맨 끝에 오고 있거나 아예 걷기를 포기해 버린 사람들에게도 그 몫의 좌석과 더운 음식을 남겨 두고 있는가.
추녀 끝엔 어슴푸레한 불빛 하나 내걸어 두었는가.
지나간 시절들은 조만간 빛 바래고 한때의 열정도 세월 따라 퇴락하련마는 그러나 뒤처져 따라오는 이와 먼 데서 돌아오는 지친 사람을 위하여 수용의 문 하나쯤은 열어 두어야지.
자식을 기다리는 어버이가 사철을 하루같이 한길에 마음 쓰듯이, 돌아올 가능성에 대비하는 한 가닥의 용납이 없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겐 언제나 영육의 배고픔이 따르며 하늘 끝 땅 끝까지 서성이는 방황에도 붙잡힌다.
이것을 채우려고 좌석을 벗어나는가 하면 상처만 더한 채 그리운 옛 둥지를 찾아 들기도 한다.
외로운 방랑과 허무한 수고.
날개가 없으면서 한없이 날려고만 하는 모순의 생리 등을 피차의 인간적 공감으로 품어 줄 수가 있지 않을까.
도처에 번성하는 건 사람의 어리석음이요, 그 때문에 사람의 회오 悔悟 도 헤아릴 수가 없을 만하다.
돌아온 탕자를 뜨거운 눈물로 껴안는 아버지의 얘기를 우리는 익히 읽고 있다. 새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죽었던 아들을 다시 만나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없다고 이웃에게 말한다.
내가 그 아들이라면 얼마나 부끄럽고 그러면서 한없이 한없이 따스하랴. 우리도 이와 같이 남을 영접하면 남이 또한 이렇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공리적인 상환 의식 따위가 아닌, 진정한 사랑과 우정 그 자체로서 돌아오는 이를 위해 안식을 마련하자.
밤 기차의 네모난 검은 유리창 안에 퍼뜩 담겨 오던 그 사람이 언젠가 추녀 밑에 와서 나직이 문을 노크할지도 모를 일의 대비로 하나의 좌석을 마련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이 일이 쉽겠는가.
마음의 얼음을 풀고
나의 마지막 연인이 당신이시면 이 편지를 받아 보십시오.
오늘 아침에 습기 찬 조간 신문을 펼쳐 들고 잠시 뜰에 서 있었을 때 공중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나무비늘들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겨울을 견뎌낸 나무들의 수피 樹皮가 해빙의 수분으로 녹아져 생선 비늘 같은 몇 부스러기의 갈색 껍질을 떨구었습니다. 올려다 보니 싱그러운 아침 창공에 나무기러기떼 떠 있듯이 나목 가지들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뭔가 가슴을 쳐 오는 장쾌의 느낌이 샘솟았습니다.
미지의 사람이여.
내 눈이 볼 수는 없었으나 천지간에 안개이듯 구름이 듯한 수증기가 완연합니다. 모든 틈서리에까지 신춘의 입김이 홍건히 전어 들고 만상이 속속들이 축여지고 있다는 사실.
처음으로 눈뜬 사람처럼 놀라움과 희열이 나의 핏줄 속을 감돌았습니다.
사람 한평생에 몇 번이나 개안 開眼의 감격이 있었는진 몰라도 이런 때 나는 막무가내로 감격합니다. 그리고 이를 나누기 위해 하나의 호명을 요구하게 되며 그가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오지 않은 사람이여.
연인이 몇 사람이나 있게 되길래 끝 번호를 들고 나서게 되느냐고, 필시 물으실 일을 예상합니다.
이에 대답하거니와 나의 연인은 그대뿐입니다. 왜냐하면 연인이란 누구나가 마지막 사람인 탓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이가 영원을 꿈꾸며 그 영원을 둘이서 나누려 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 외엔 아무도 마지막일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며 최후의 사람인 그. 오직 이 서원이 사랑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의 양심이요 도덕률인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로 하여 내게도 마지막 연인만이 존재할 수 있으며 비록 지난날의 사랑이었다 하더라도 이 절대성 안에 들어와 깊고 깊은 속 갈피에 잦아들기 마련인 겁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당신이 나의 마지막 연인이시면 오늘 아침 이 편지를 받아 주십시오. 아무리 먼 행선지라 해도 나의 편지는 필시 그 수취인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날까지 나는 늙을 수도 또한 죽을 수도 없습니다.
나의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 나로서 가능한 가장 귀한 선물들을 마련하겠습니다. 이즈음 내 안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것들이 있음으로 해서 이 일이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마음 속의 얼음이 풀리는 새로운 시절이 내 안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얼어 있는 마음들에 대하여 당신은 생각해 보셨는지요. 두꺼운 얼음장을 가슴 밑바닥에 깔아 두었으므로 항상 냉기가 감돌던 절망적인 추위를 겪어 보셨는지요.
비로소 그 얼음덩이를 떼어내고 나의 여생 지금부터 새 삶같이 살고자 합니다.
사랑을 원합니다.
많은 이를, 될 수 있다면 모든 이를 사랑하기 원합니다.
마지막 연인이 되어 주실 당신은 그 중심에 머무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이 사연을 편지에 담아 보내면서 나의 할 말들은 보모 시냇물처럼 긴 가락으로 풀리고 심히 순조롭게 이어져 갑니다.
오늘부터 날마다 편지를 쓸지도 모릅니다. 차례로 당신 손에 배달이 될 테지요. 나의 새로운 언어기 言語期 가 이로써 풀리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새로운 피부로 갈아 입는 신춘의 나무들을, 그리고 정결한 수증기로 채워져 잇는 조춘의 아침을 닮고 싶습니다. 산울림처럼 당신은 회답을 주십시오.
그럼, 오늘 이만.
사랑으로 들어올리는 삶
샘에 한없이 물이 괴듯이 공기나 바람에 있어서도 뒤를 이어 솟아나는 무량의 근원지가 있을 것 같다.
공기오염이 없는 전원이나 싱그러운 나무들을 헤치고 들어서는 산길에 이르면 혼탁한 두뇌가 수정처럼 닦여지며 바람의 단맛과 대기의 자양분도 금새 알아 차리리라.
사람의 신생아처럼 바람에도 지순무구한 탄생들이 줄을 이을 것이며 거기는 아마도 그것들의 성지 聖地겠거니 여겨진다.
갓 태어난 바람들을 만나고 싶다.
멀리는 갈 수 없고 간혹 밤글에 지쳐 가슴이 죄어들거나 하면 뜰에 나가 몇 번 심호흡을 한다. 우람하게 솟아 있는 아카시아 나무위로 웅려한 밤하늘이 아득히 얹혀 그 위의 억만 별떨기로부터 뜨거운 숯불의 불티들이 날아 내린다. 어떤 건 나의 심장 한가운데에 닿아 내림을…
갑자기 전율이 온몸에 퍼진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옛날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의 연면한 동일성을 헤집어 바라보게 된다. 몸은 늙고 주변의 가구나 소지품도 낡아졌건만 유독 옛날과 지금이 변함없는 건 날마다의 청신한 새 감수성 이것 한 가지 뿐이다.
내게 재능이 없고 교수생활을 하고 있으나 학문적 체계랄 것이 별반 없으며 견문의 테두리도 매우 좁다. 체질마저 허약한 편이고 보면 어느 한 가지도 변변한 게 없다.
그러면서도 글 쓰는 사람의 말석에 있어 온 건 내 안에 무궁한 감동과 전신의 모세혈관에까지 전류가 흘러드는 불로의 감수성 탓인 것 같고 이건 어느 의미에서 형벌 같은 고통이 되어 오기도 했다. 연모를 품기라고 했던 한철엔 그 형편이 나에게 머무는 동안 너무나 깊이 응감의 칼 끝이 닿아 와서 음악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자연도 그랬었다.
쓸쓸하고 위대한 자연, 내 영혼과 올올이 핏줄로 이어진 그 거대한 인격체.
구름, 바람, 시냇물, 나무들, 비와 군과 안개, 별, 노일, 바다, 돌…
그 하나하나가 대단한 위력으로 나를 휘어 잡고 감격과 감동의 열병 치레를 시켰었다. 정말 묘한 건 내 미약한 존재의 어디에서 그리도 한없는 새 감격과 날마다 부풀어 오르는 감수성이 있어지곤 하던 것인지.
나에겐 언제나 사랑의 대상이 있다. 사람일 때나 사람이 아닐 때나 간에.
밤마다 글을 쓴다.
글에 지치면 뜰에 나가 잠시 별을 본다. 별에서 쏟아지는 금빛의 눈을 온몸에 받으면서 나는 다시 기뻐진다.
삶을 사랑한다. 진실로.
진실로 나는 삶을 사랑한다.
이것을 따라오는 모든 고뇌와 갖가지 비극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와 사랑
내 문학의 첫 시절, 나는 한 사람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나의 시는 작게 접혀져 그의 속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족될 것이었다.
그 시절은 뜨겁고 은밀한 통곡이 가시투성이의 엉겅퀴꽃처럼 슬프고 찬란했다. 하늘은 포화 砲火에 무너지고 수많은 젊은이들에겐 예상 밖의 운명이 다가와서 시커먼 두 팔로 마구 포옹했었다.
그을음과 화약 내음이 젊은 몸뚱이에 칠을 입히는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던 때니까.
사람의 감정이란 모든 날에 과민하고 지쳐 있으면서 그 위에 굳이 숯불 같은 사람을 꿈꾼다.
사랑을 운위하는 화제, 사랑에 관련되는 시와 산문을 쓰려고 한다.
그것들은 살갗을 태우는 허무한 화상 火傷에 불과할지라도 사랑을 쫓아가는 외곬수의 추적에 돌입한다.
더우기 나는 퍽 많이 그런 편이다. 풍요 찬란한 사랑을 내 안에 담고 있는 것도 못되며 고작 피묻은 갈망으로 하나의 사랑을 빚어 만들어서 그 향유를 스스로 상속받은 셈이나 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란 한 부분만이 현실의 존재이고 그의 나머지 부분들은 이편의 꿈과 바람이 창안해낸 성질이곤 한다.
내가 말들어서 내가 가지는 나의 사랑. 반 넘어 허구인 그 사람에게서 우리는 질기고 실한 사랑의 진실을 뽑아내려 한다. 그 결과로 사랑의 품귀 현상은 심각하며 심지어는 바쁜 세상에 사랑 따위를 생각하느냐고 소리 지르는 사람조차 드물지 않다. 그런데도 살아야 하고 더하여 창작해야 한다.
사실이다. 시를 쓰면서 살아야 한다.
가슴에 불이 꺼지면 할 수 없는 노릇, 너무 오래 눈시울이 말라있어도 되어지지 않는 노릇, 적셔지고 충전되어 있고 사랑하면서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그 노릇, 시를 쓰면서 살아야 한다.
물론 시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고 삶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는 일과 시 쓰는 일의 두 준령을 넘어 감이란 예사의 어려움이 아니다.
사랑은 진지한 열정이다.
전인간으로 불 붙어 헌신하는 일에 일관되어야 한다. 아름답고 복된 그 풍요 안에만 시의 혈액들은 진한 단맛으로 엉길 수가 있었기에 고금의 서정시들을 가장 잘 도와 준 건 시인의 가슴에 귀하게 솟아나던 떨기떨기의 순열한 열매이던 것이다.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시를 썼던 젊은 날을 내 나이 이만쯤에 되돌아보매 지내온 산하에 실어 보내는 향수의 심정 없지 아니하다.
앞날인들 오로지 절대적 절실감으로서만이 시가 쓰여지고 세상에 내 놓아야 할 일을 염원 또 염원할 따름이다.
파지(破紙)를 내면서
수녀님.
어느새 가을의 설렘이 온 마음에 와 버린 듯합니다. 절기에 민감할 나이도 지났는데 여전히 저는 계절을 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음악이 흐르게 하면서 잔칫날처럼 마음이 부풀어 있습니다.
그 사이 별고 없으셨습니까.
수도원 뒷산에도 가을이 와서 만선처럼 넘쳐 출렁이겠군요. 풍요한 이 계절을 또한 크낙한 은총으로 공손히 맞이하여 관상수도 觀想修道의 귀한 촉매이게 하셨겠군요. 일과 기도 외엔 여념 없으신 수녀님들의 생활은 언제라도 제 마음을 숙연케 합니다. 자주 편지라도 드리고 싶으면서 오히려 회답조차 미루는 형편임이 송구스럽고 활자에 내보내는 긴급한 원고에 비하여 편지에 소홀해지는 점, 용서받고자 합니다.
지난 봄엔가 저의 조그마한 대담 기사에서 새 수필집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 나간 후 독자가 보내 온 한 편지 중에 ‘당신의 글은 모두가 책이 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은 저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대학 신입생쯤이라 싶은 이 편지의 말투는 다분히 당돌하고 무례했었습니다만 그러나 몇 군데 섬광처럼 번뜩이는 ‘옳은 말’은 나를 압도해 왔습니다. 때문에 여러 번 그 말들을 되새겼으며 이런 건 얼마나 겁나는 자아의 성찰이겠는지요.
수녀님.
오늘 아침엔 청과 시장에 나가 산더미처럼 쌓인 과일을 보았습니다.
자양과 향기로움이 있는 대로 잦아든 햇과일들은 숨가쁠 만큼 결실의 희열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포도만 해도 몇 종류는 되는지 더우기 마스카트라든가 하는 대형 포도는 나를 감격케 하였습니다. 몇 가지 품종을 골라 와서 과기 果器에 담고 보니 마치도 보물을 차지한 느낌이 되어집니다. 하긴 뿌리를 깊이 내린 실한 나무만이라도 신비스런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을 겁니다.
사람도 그럴 테지요.
문학 역시 그러합니다. 인식의 근본이 허약하고서는 도저히 생명감을 드러내지 못하며, 즉 혼이 없는 글은 사람의 가슴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수녀님.
제 편지가 얼마간 설법조로 흘렀나 봅니다. 긴장을 한 듯도 싶고 사실 수녀님들께 편지를 쓸 땐 여러 장의 파지를 내곤 한답니다. 마음을 열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마주 앉은 자세가 아직 못 되었나 봅니다. 방학 동안 한 번 다녀가기 바란다 하셨는데 못 가 뵙고 개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머잖아 꼭 찾아 뵙겠습니다. 아마도 이 가을의 아름다운 어느 하루, 수녀님들과의 면회 창구에 조용히 앉아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호 안에서 내내 아름답고 복되시길 축원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결혼과 나
나는 가정과 교수 생활과 문학이라는 세 가지 부담을 지고 살아왔다. 잘 모르는 이들은 무난히 조화시켜 나가는 줄로 여기는 모양이나 나 자신으로선 힘겨운 수레를 끌고 준령을 오르는 어려움이었다.
아이는 넷을 키웠고 교직 생활도 어느덧 30년의 장기근속이라 해서 지난 봄엔 서울시 교육위원회로부터 표창이라는 걸 받았는데 이때의 심정은 묘하게 씁쓸한 자아연민 그런 것이었다.
글도 적게 쓴 편은 아니어서 그간에 출판한 책들도 20권에 이르고 있으며 이러한 분량이 쉽사리 이루어졌다곤 말하지 않는다. 무능한 나로서 한 가지쯤에 묶였더라도 별반 잘 해낼 수 없었겠는데 세 몫의 세 갈래 일을 벌여 놓고 그 틈서리에서 무수히 비명을 질렀음이 사실이다.
성격도 과민하고 얼마간 병적인 완벽주의도 곁들여저 엽서 한 장도 마음에 안 들면 새로 한 장을 고쳐 서야 직성이 풀리곤 한다. 진종일 글을 써도 저녁 나절 내 손에 남는 건 가랑잎의 몇 부스러기 뿐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망연자실, 진흙 바닥에 엎드려 버리는 참담한 심정…
학교에서 퇴근하면 한두 시간쯤은 음식을 만든다. 솜씨는 없으나 도시락반찬에도 신경이 쓰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결에 아홉 시, 열 시가 되어 방에 들어온다. 강의 준비를 먼저 마무리 짓고 원고를 써야 한다는 등의 궁리로 잔뜩 긴장하면서.
나는 무능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이런 형편을 어찌 줄곧 감당해 갈 것인가. 그러나 한편으론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는 점도 좀 있다. 첫째로 내 가슴이 식지 않고 삶의 의욕과 열정이 끊이지만 않는다면 이만한 일쯤 과중하다고 여기지 말자는 자아 계명 戒名이 번져 온다.
시간이 달리고 몸이 피로해 못 견디겠는 이상으로 나의 위기는 감정의 전원 電源이 고갈되는 일인 것이니 이럴 땐 한 걸음도 내디딜 수가 없다.
나에겐 아니 모든 사람에겐 무엇보다 우선하여 내적 생명의 충전이 확보되어야 한다. 열량 탱크가 가득 채워지고 더운 피가 전신을 줄달음쳐야 한다.
이러한 근본의 힘을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 등에서나 혹은 치열한 야망, 투쟁심, 사명감 등등에서 얻어낸다.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을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첫날의 열정을 복습하면서 두 번 세 번 결의를 확인한다.
나의 경우도 이에 준하는 바가 있다. 결혼도 문학도 교직도 내가 원해서 손에 잡았던 일들이다. 욕망의 퇴색이나 주기적인 좌절도 없는 바 아니나 나의 삶, 이만큼의 고빗길에서 침몰해 버릴 수는 없다고 거듭거듭 결의를 곱씹었다고나 할 것인지.
아뭏든 진금에 와서 어느 하나를 잘라 버리기에도 그 용단 어림없음이 나의 현실이다.
우선 결혼의 책임은 곧 생명에의 책임과 이어진다. 남편과 자식들이 길을 갈 거기에 굳건한 발판의 대지를 놓아 주지 않으면 안 될 일이요 학생들과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며 시 역시도, 아니 시는 더더욱 순수 적라한 생명의 질료 質料로 빚어낼 밖엔 다른 방도가 없다.
이 세 가지가 견고한 조직체를 이루어 나를 전력으로 일하게 만들며 여기에 분명 나의 쓰임이 있다. 이 인식이 나의 두 손을 잡고 놓지 않는 한 나는 오늘의 좌석을 이탈할 수 없다. 결국 이 위태로운 균형의 허약한 중심에 서서 나는 내가 선택한 일들의 무게를 힘껏 들어 올릴 뿐이다.
더욱이 이 세가지가 모두 그 안에서 사랑을 집어 넣음으로써만이 돌아가는 기계와 같다.
한데 묘하다.
단지 하나의 사랑으로 셋을 한 몫에 가동시킬 수 있고 그 하나의 사랑이 달려서 내가 넘어지면 셋이 동시에 낙뢰처럼 쏟아져 내릴 일이라니.
결혼이란 자신을 포기하거나 비누거품 모양 풀어져 버리게 하는 소모가 아니고 존재의 밑바닥에 강철과도 같은 저력을 디밀어 넣는 보충 작용이다.
본래의 힘만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필요한 용량의 최대한 양까지도 충실한 분발로써 개발하여 만들어야만 한다.
내가 위급해지거나 좌절에 주저 앉는다면 그건 일이 과중해서라기보다 심정이 냉각기에 접어든 탓이리니 얼음에 채워 두는 물고기처럼 생명의 체온을 뽑아 버렸기 때문이리라.
며칠씩, 길게는 몇 주간도 핏기 없는 동결 凍結의 상황에 엎드려 있게 되는 나의 비참…
그러나 망가진 나를 어김없이 손 봐주시는 의사가 계시어 조만간에 새로이 조율하시고 나쁜 부품은 좋은 새것으로 바꿔 꽂으신다. 그분은 나의 의사일 뿐 아니라 모든 이의 의사이신 조물주 주님이시다.
이리하여 세상은 달라지고 사랑의 조명도 다시금 회복된다.
내 가정, 내 학생들, 그리고 나의 어쭙잖은 글조각들의 총괄적 무게를 하아름에 품어 안고 나는 또 걸어간다. 생명은 쓰임 있는 그때까지 값어치가 유지되리라 따위로 자위 아닌 자위를 다지며 힘을 낸다.
결혼이란 그 중 긴 시간 동안을 몸 담게 하는 거대한 교실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교과서가 급여되는 일임을 나는 안다.
결혼과 문학과 교직.
이 중의 한 가지를 내던진다면 셋이 모두 파멸될지도 모를 미묘한 역학 관계를 조심스러이, 마치도 출렁이는 물그릇을 운반하듯이 하며 오늘도 주어진 일과에 충실하려 애쓴다. 이 가파로움과 나로서 참담한 역부족을, 아슬아슬하게 가늠하면서 말이다.
가슴 안의 그 하나
오월의 안부를 묻습니다.
계절의 여왕이라 일컫는 이 풍요로운 달에 당신이 받으신 축복과 기쁨도 가히 넘치는 것 이길 바랍니다.
오늘 그 심정의 기후는 어떠신지요.
백옥 같이 빨아 넌 빨래들은 바람을 안고 햇빛 안에 너울거리며 해 그림자는 보얗게 마른 따 위에 망사를 덮었을 겁니다. 열어 젖힌 창문을 넘어 오는 바람은 갖가지 꽃나무를 쓸어 와 터질 듯한 꽃 향기를 솨아솨아 부려 주곤 했겠지요.
오후 좀 지나서 몇 가지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갔을 땐 물거품처럼 자잘한 땀방울이 머리밑을 촉촉히 축여 주었으며 당신은 흘려버린 무언가를 찾듯이 그 몇 번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거기에도 햇볕이 하나 가득 널려 있었지요.
구름 너머 도 구름, 아득한 날 꽃잎처럼 흘려 보냈던 유년의 종이배가 큰 바다를 굽이 돌아 하늘 한 귀퉁이 조개 빛 구름 옆에 작은 구름이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아, 꿈꾸세요.
이렇듯이 청명한 계절에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밝고 새롭고 감미로운 도취에 잠겨 보세요. 가슴 속에 접어 넣고 있던 새하얀 날개를 펴 보세요. 창공 높이 날려 보내세요. 겨우내 덮어 두었던 소중한 이름들을 기억해내고 가만가만 마음 속으로만 불러 보세요. 마치도 기도 구절처럼 간절하게…
오늘 내 얘기는 한 편의 동화에서 그 실마리를 풀려고 합니다.
안데르센의 ‘돼지 치는 왕자’라는 작품입니다. 먼저 주제부터 말한다면 보석과 유리 조각의 값의 차이를 동화 속의 공주가 알고 있었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주란 한갓 상징에 불과하며 바로 우리들 자신이 진정한 것과 가식적인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총명한 판단을 할 수 있겠는지를 스스로 살펴볼 성찰의 기회가 된다 하겠습니다.
우리의 저울, 에누리 하나 없을 그 눈금은 글쎄, 어디를 짚고 있겠는지요.
먼 나라 한 왕자가 어여쁜 공주에게 결혼 신청을 했습니다. 그는 5년마다 꼭 한 송이만 꽃을 피우며 어떤 고통이나 슬픔도 잊게 하는 기적의 장미와 온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멜로디를 그 조그마한 목청 속에 다 갖고 있는 신비의 새 나이팅게일을 은으로 만든 아름다운 상자 안에 넣어 그녀에게 선물로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공주는 손뼉을 치면서
“이 안에서 귀여운 고양이 새기가 나오게 해 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은상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미를 보고 그녀는 매우 실망했으며 또 하나의 상자 속에 들어 있던 나이팅게일도 그것이 장난감 오르골이 아니고 생명을 지닌 살아 있는 새라는 점에서 그녀를 낙담케 했습니다. 그 때문에 왕자를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
왕자는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궁 안에 들어가서 돼지 기르는 직책을 맡은 다음 작은 오두막에서 신기한 장난감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예술가였습니다. 조그마한 항아리를 빚어 둘레엔 가지런한 방울을 달아 장식했으며 이 안에 물을 담고 끓여서 김을 내면 나라 안의 모든 집에서 만드는 음식들을 척척 알아 맞출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다음날 이 소문을 듣게 된 공주는 항아리를 사려고 값을 물었더니 ‘공주님의 키스 열 번’이라는 난처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단념할 수가 없는 공주는 그대로 값을 치러 중고 항아리를 손에 넣었으며 밤낮없이 물을 끓여 남의 집 음식을 알아 맞추면서 시녀들과 즐겁고 만족스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며칠 후 왕자는 재미있는 흔들이를 또 만들었는데, 이것을 흔들면 어떤 음악이라도 들을 수 있고 신나게 춤 출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시녀를 보내어 그 값을 물었더니 ‘공주님의 키스 백 번’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결국 공주는 돼지 치는 사람과 백 번의 키스를 함으로써 흔들이를 받게 되었는데 어찌나 그 시간이 오래 걸리던지 여든 여섯 번째의 키스에 이르러 임금님에게 들켜 둘은 나라 밖으로 내쫒기고 말았습니다. 날은 춥고 주룩주룩 비까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름다운 왕자님의 결혼신청을 받아 들였다면 좋았을 걸.”
공주가 이렇게 혼잣말을 하자 왕자는 길가의 나무 그늘에 들어가서 얼굴의 숯검정을 지우고 훌륭한 왕자의 차림으로 나타나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와선 당신을 사랑할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엿한 왕자를 맞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장미꽃과 나이팅게일의 귀한 가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우스꽝스런 장난감을 탐내어 돼지 치는 사람에게 키스까지 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그러한 일들에 타당한 보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왕자 혼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걸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귀한 선물들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5년에 한 송이가 아니고 해마다 수없이 피어나는 장미, 그 종류에 있어서도 무려 4백 종에 달한다는 다양한 품종이 봄에 꽃피기 시작하여 줄곧 초겨울까지 이어 피어납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나이팅게일과 그 밖의 더 여럿의 새를 갖고도 있으나 별반 의식조차 없었다곤 못하겠습니까.
동화 속의 꽃과 새는 물론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생명의 상징, 진짜의 상징, 기쁨과 위안의 상징 등으로 말입니다. 한데 이런 성질들에 비해 남의 집 음식을 알아 맞추는 따위의 어이없는 장난에 열중하는 모습이 우리와는 전혀 무관하겠습니까. 공연한 호기심으로 남의 사정, 뜬소문에 관심을 쏟거나 옹색한 시기심이나 과민한 오해에 빠져 허위적거린 일은 없었는지요.
‘왕자가 양치기 소녀와 결혼한다 해서 안될 일은 없다. 그러나 그 여자가 왕녀의 영혼을 못 가졌다고 하면 이야말로 낭패이다’ 라는 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왕녀의 영혼이란 어느 수준의 품성과 인격을 뜻하며 아울러 왕자라는 조건과의 조화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이 만나 서로가 저편 사람의 반 半이 되고자 할 땐 우선 그 본질이 같아야 합니다. 같은 종류 그리고 동일 한 값어치라야만이 견고하고 항구적인 결속이 가능합니다. 사람에겐 동일한 값어치임으로 하여 서로 끌어당기게 되는 신비한 인력 引力이 있습니다. 한 인격은 그것과 동가인 또 하나의 인격을 만나고자 하며, 준령처럼 높이 솟은 고독은 이 역시 이와 맞먹는 높은 봉우리의 헐벗은 고독을 만남으로써만이 상호의 위안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거대한 뜻이나 사랑이나 증여 贈與나 신앙도 필연코 같은 값의 짝을 갈구해 마지않습니다.
얼마 전에 본 장편 텔레비전 영화 ‘마사다’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뛰어난 전형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침공과 이스라엘의 방어를 주제로 하고 있었는데 양 진영은 운명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절대 숙적의 사이였고 마사다 요새는 끝내 유태인 측의 비통한 집단 자해 自害로써 치욕적 패망을 미리 해소한다는 충격스런 결말이었습니다.
‘승리가 아니다. 단지 이 황무지 속의 바위산 하나를 차지했을 뿐이다’ 라고 절규하는 로마군의 제독은 아직 마르지 않은 선혈 속에 숨져 있는 유태의 장군 앞에 반신을 구부리고 침통한 애도를 바칩니다.
이들 두 사람은 지혜와 애국혼에 있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양가치 兩價値 라 하겠는바, 그 민족 안에서 가장 높이 솟은 능력의 고독, 운명의 고독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으로 해서 두 사람은 거울 속에서 그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이 긴밀한 일치감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죽음은 자신의 종말을 대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다들 적군의 장수를 보았지. 결코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
로마의 장군은 이런 방법으로나마 그의 생명을 보장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묵묵한 시체 앞에서 서서
‘우리는 함께 할 일이 있었다’고 피를 토하듯이 말합니다.
사실 그랬을 것입니다. 한 시대 한 역사는 민족이나 국가의 단위를 초월하여 더 총괄적으로 큰 정신 큰 인물을 원한다 할 수 있고 그러한 몇몇 거인들의 혼의 밑바닥을 흐르는 뜨거운 공감은 누구도 범해선 안될 신선한 권리라고 보겠습니다.
이에 있어 필자는 남녀의 만남이나 그 결합도 이와 상통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첫머리에 든 동화 또한 이 관점에 따라 인용하게 된 것입니다.
즉 왕자가 주고자 했고 실지로도 주었었던 장미와 나이팅게일은 공주가 갖고 싶었던 새끼 고양이나 장난감 딸랑이와는 서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왕자는 그 자신을 주고자 했음에 비해 공주에겐 일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남감의 주인이 훨씬 더 구체적이며 실용성 있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본질의 어긋남이란 이렇게도 무서운 비극입니다.
우리는 각자 무엇을 원합니까.
어린이는 과자나 학용품을 주로 원하게 되므로 그것의 결핍에 울게 되고 이를 가짐으로써 밝은 얼굴을 되찾습니다.
어른이 원하는 건 다릅니다.
적어도 크레용이나 스케이트보다는 갖기 힘든 걸 구하게 됨으로 해서 갈망도 격렬하고 그 의지도 항구하며 자갈밭 질풍 속을 맨발로 달려가듯 아프고 가파른 형편 속에 던져져 있게 됩니다.
어른이 원하는 것, 특히 어른이 된 여성이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평생을 함께 갈 가장 좋은 동반자입니다. 성숙한 이해와 성실한 공감의 든든한 땅입니다. 엄청난 큰 것을 죽을 듯싶은 목마름으로 추구할 뿐인, 전인적이며 전 생애에도 걸치는 여망의 몰입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는지요.
안데르센의 또 다른 동화에 아래와 같은 게 있습니다.
식품가게의 지붕 밑 다락방에 세 들어 있는 학생이 양초와 치즈를 사러 아래층 가게에 내려와 물건을 사 들고 나가던 참에 치즈를 싼 종이를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종이는 옛날 책에서 뜯어낸 한 장이었고 이렇게 쓰기에는 너무도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이라면 얼마든지 있어요. 실은 어떤 할머니가 그 책과 교환하여 커피콩을 조금 얻어 갔읍죠. 8 실링만 주신다면 나머지를 전부 드리지요.”
가게 집 아주머니의 말에 학생은 매우 기뻐하면서
“치즈 대신 그걸 가져가지요. 저는 촛불과 빵만 있으면 되니까요.”
라고 말합니다.
그날 밤 촛불을 켜 놓고 늦도록 책을 읽는 학생의 방을 전부터 이 집 안에 살고 있던 난장이 요정이 열쇠 구멍으로 유심히 들여다보았더니 책에서 큰 빛이 돋아나서 나무줄거리처럼 되었다가 어느새 커다란 나무로 변해 학생의 머리 위에 가지를 펴고 있었습니다.
잎은 싱싱하고 열매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과 같았으며 더군다나 아름다운 음악까지 울리고 있었습니다. 다음날도 학생의 다락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본 난장이 요정은 힘센 닻줄에라도 끌어당겨지듯 단숨에 뛰어 올라가 안을 들여다보다가 너무나 감격하여 엉엉 울이 버렸습니다.
이 요정은 오트밀과 버터를 얻어 먹는 재미로 이 집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새 생각이 변하여 환한 빛을 내쏘는 한 권의 옛날 책을 여태껏 즐겨 온 음식보다 더 귀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에 불이 나서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아끼는 물건들을 챙겨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아주머니는 금 귀고리를, 그리고 하녀는 애써서 마련한 비단 쇼올을 찾아 들고 나갔는데, 요정이 다락방에 가 보니 학생은 창가에 서서 건너 집 지붕 위에 솟아오르는 불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틈에 슬쩍 책을 끼고 나와선 모자 속에 감추고 지붕 위까지 오른 다름 거기서 더욱 높이 굴뚝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에겐 이 책이 무엇보다 귀한 보물이라고 굳게 믿겨졌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유인은 강렬합니다. 그리고 더 좋은 걸 찾게 되면 먼저 것에 손을 가르고 일어섭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더 좋은 것이며 가장 좋은 것인지의 가치를 재는 바른 척도가 있어야 합니다. 난장이 요정은 오트밀과 버터를 좋아했고 이는 살아가는 데 없어선 안될 물건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이 났을 때 그는 책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책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역시 일종의 양식이니까요. 육체가 먹기를 원하듯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도 끊임없이 먹고자 합니다. 책은 이의 양식이며 따라서 사람의 모습과 생리를 이 이야기 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자신을 찾고 있습니다. 내면적 자기, 진정한 자기를 평생 동안 찾고 찾습니다. 아울러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할 무류 의 반려자를 부단히 찾아 헤매는 것이고 이 일이야말로 생애의 대업이라 할 만큼의 중대사임을 그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이 점 여성에게 있어선 더욱더 그러합니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고 둘이서 같은 곳을 보는 일’이란 말은 어느덧 사랑의 정설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가치관 위에 서고 한 분의 신을 섬기며 삶의 그 해석에 있어서도 한 가지 사상에 기본을 두는 이들끼리 만나 함께 걸으며 나아가 운명의 일치에까지 참여할 그 여망을 다지고 또 다집니다. 그러므로 이 조화가 깨어지고 소망이 와해되는 곳에 아프고 참담한 좌절과 비극이 발생하고 맙니다.
진정한 짝은 선택을 거치지도 않으며 선택의 자리에 있어질 수조차 없는 절대적인 존재일 것 같습니다. 비롯함에 있어 나와 더불어 하나이던 그 절반을 어느 때 다시 만나 본래의 하나로 환원하는 것이라면 이는 여럿 속에서 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고 오로지 진정한 반인지 아닌지의 확인만이 끼어들 것이겠지요.
비교를 초월하는 연분의 소명 召命 만이 있게 되며 유일 절대한 연분의 그 완성이 사람에게 과해진 제일로 준열한 숙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법은 지금 세태에서 너무나도 추상적인 연분의 미신이라고 말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기실 꿈인지도 모릅니다. 먼저세상의 희미한 회상을 곱씹듯이 어슴푸레히 그림자를 쫓는 그리도 덧없는 염원인지 모릅니다.
여자는 꿈꿉니다.
옛날의 여자들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베틀에 앉아 무명과 비단을 짜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들 한평생에 몇 십 몇 백 필의 무명과 비단을 짜낸 놀라운 작업량을 믿게 되었을 때, 그녀들의 가슴 속 찬란히 무지개 뻗치던 평생의 긴긴 꿈을 확신할 밖에 없었습니다. 꿈꾸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다시 그리워한 그리도 아득한 여심의 돌탑, 그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만한 일을 지탱해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자는 꿈꿉니다.
단지 꿈꾼 데에만 그치지 않고 분명한 실현을 현실 안에 얻어 누리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인생의 중년을 지나 오면서 문득 또 하나의 영혼이 지척에 숨쉬고 있음을 알아 차립니다. 사람의 인기척이 아니고는 결코 이럴 수가 없을 심히 눈물겨운 따스함을…
부르면 대답하는 그 훈훈한 음성.
안개 속에서도 알아 볼 설핏한 눈매.
어느 땐 늙은 가로등에 기대어 밤의 강물을 바라보는 성숙한 침묵이면서 잠을 설친 한밤중엔 달빛처럼 머리맡을 지켜 서서 엷은 이불깃을 여며 주는 그 성실한 연민.
그건 가슴 속에서 영원한 마지막 하나의 촛불이며 한밤의 기도구절에 이슬 내리게 하는 진정한 수분이라 할 것입니다.
‘신은 결합되는 것 외엔 만드시지 않았다’는 이 믿음 앞에 돌아와 시린 두 손을 모으는 간절한 여심, 머리 위에 종소리 울리듯 여성이 듣는 그 절대의 음성.
여기가 우리의 천지요 우리의 힘이며 다시는 떠나지 않을 종착의 항구입니다. 닻을 내리고 비로소 대륙 안에 첫발을 내딛는 확신의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역시 좋은 것이고 결단코 절망할 이유가 없다고 이 하나 긍정 앞에 천천히 머리를 끄덕입니다.
지금은 오월입니다.
천하에 넘치는 오월의 상쾌가 우리의 몸을 씻어 줄 청량한 물처럼 살결 가까이에 부풀어 넘치며 그 더욱 넘실거립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즈음 당신의 형편이 그다지 편안하지 못했더라도 최선을 다 한데 비해 보답이 미흡했거나, 심지어는 월부로 장만한 냉장고 속에 며칠 새 부쩍 흔해진 풋과일조차 채워 넣지 못했다 한들 그다지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총명이 보석과 유리 구슬을 능히 식별할 수 있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나 재미있는 딸랑이 쯤을 훨씬 능가하는 생명의 꽃과 대자연의 메시지를 울리는 기쁨의 나이팅게일을 가슴 가득히 품어 안을 수만 있다면, 더하여 왕녀의 영혼으로 채워지고 견고한 성년의 사랑을 품어 가꾼다면 철철 흐르는 초록빛 오월에 더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지금은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갓 태어난 탄생의 모습뿐이곤 합니다. 우리 역시도 새로운 탄신을 오늘에 기록할 수가 있습니다.
날마다 태어나는 그 신선함을 비노니, 살아 있는 만물로 하여 거듭거듭 청결한 속살을 갖게 하시는 조물주 하나님께 찬미.
제4장 마음의 성소(聖所)
추운 시절 이야기
종이 햇빛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기름기를 뺀 겨울볕이 만지면 손에 묻는 셀로판지의 감각으로 눈길 머무는 곳마다에 얇게 드러누워 있다.
만산을 불 붙이던 단풍은 그 강렬한 주황빛 하며 달아오르던 신열도 퇴락하여 잎을 지우고 지금은 제 발부리에 낙엽 더미를 이루었다. 옅은 커피 냄새 같은 걸 공중에 흘리면서 갈색의 나비처럼 바람에 실려 다니기도 한다.
춥게 늘어선 나목들의 동산, 돌과 바위와 덧없이 시든 풀꽃들과 도시의 가로등, 전신주, 반은 붙고 반은 떨어져 펄럭이는 벽보, 노점 露店 과 행인들.
추위를 견디는 광경들이 장하고 측은하다.
성냔 한 개비만 그어대면 확 하니 불 무더기가 피어 오를 것을 단지 한 통의 불씨에도 궁핍하다.
한 개비의 성냥, 단 한 마디 사랑의 언어가 솟아나면 불현듯 심정이 더워지고 마음의 꽃들이 돋아나 잠시 사이에 만발하게도 되련마는 그 계시 그 징조가 아무 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광야에서 울려 올 예언의 말씀도 없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추운가.
신이 주신 것에 모자람이 있었나.
자연의 시혜 施惠, 예술의 향유가 결핍되었었나.
6.25 사변 같은 아비규환의 전쟁이 휩쓸었단 말인가.
시려서 빳빳해진 손을 외투 주머니에 찔러 놓고 어디를 돌아다녀 보아도 따스한 불가에 둘러 앉은 사람들을 볼 수 없고 훈훈한 손들을 만나 악수할 수도 없다.
문득 한 구절의 시가 생각난다.
내 몸이 아픔과 싸울 때
내 마음 온 힘을 이을 견디고
내 마음 고통과 싸울 때는
내 육체 전력으로 인내한다
아아 어느 날이 되면
너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기뻐할는지
암으로 죽은 이의 유고 시에서 위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녀는 28년간의 짧은 생애 그 끝 무렵을 투병과 시정 만발 詩情 滿發의 별다른 계속을 흘러가게 되었었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라는 단지 두 가지 성질만을 가졌으면서 예서 빚어지는 방정식은 복잡 미묘하다. 그런 중에 이 글은 존재의 저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좋은 사례가 된다.
그래, 우리는 원하고 있다.
육체의 고통으로 씻어내는 정신.
육체는 불타고 썩고 가라앉지만 정신은 증류수보다 더 영롱하게 정화되어 감히 바라볼 수도 없을 만한 것이 되고 싶다.
또한 꿈꾸고 있다.
몸이 추울 땐 마음에 불을 지피고 마음이 추울 땐 더운 보리차라도 마시면서 몸부터 풀게 될 그 자가처방을.
아름다움이란 고통의 극복과 정화에 있기 마련이기에 전인적인 연소에서만이 나신무구한 미의 알몸이 드러난다 하겠거니.
불붙고 불타는 일의 숭엄,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힘을, 그토록 되풀이되며 결코 다음이 없는 불을 지향해야 하리라. 말하자만 영혼 안에 성화 聖火를 간직하기 원함이다.
‘그대와 나와
그대의 추워, 나의 추위
우리 모두의 겨울’
이렇게 말해 본다.
아주 천천히, ‘그대’와 ‘나’와…
한데 이 말에 새삼스런 낯설음을 탄다. 그대라는 말의 실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면 나에겐 그대가 없는가.
조락의 나무에서 잎새들이 시들어 내리듯이 내게 있어서도 그대의 이름 깡그리 지워지고 말았는가.
젊음이란 실없이 살을 찌르는 가시밤송이 같은 것, 기나긴 뙤약볕의 그 젊음을 지내오면서 피부를 상하고 속살도 다치게 되어 너덜너덜 남루한 몸이 되어지는 사이 바람 따라 사람까지 실어 보냈는가.
‘그대’, ‘그대’, ‘그대’
역시 어색하기만 하다. 언제부터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건듯 부는 실바람조차 실없이 잘 아프던 그 유감 有感의 시절 다 지나가고 오늘은 사람 하나조차 선뜻 짚어낼 수가 없구나.
나는 미숙한 여자이다.
메마르고 인색하고 독선적인 여자이다. 풍요라거나 헌신이라는 어휘를 자주 써 오면서도 의복을 벗겨낸 속사람에 있어서는 공리적-이기적이며 불손 오만하고 욕구 과정이기까지 하다.
더하여 지배 충동과 독점 의욕이 강하며 용서에 심히 소심하다.
나는 용서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용서의 과제에서 가장 무력한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용서의 힘을 빌면서 찬 마룻바닥에 수없이 엎어져 울며 기도했으나 끝내 이를 얻어낼 수 없었다.
아마 亞麻 밧줄보다 질기고 무쇠 기둥보다 단단하던 나의 분노, 잠결에도 울게 되던 비탄.
차차로 내 기도가 바뀌었다.
용서를 포기하고 망각의 힘을 비는 그 순서에로 옮겨 앉게 되던 일이라니.
‘잊게 하소서
부디 평화를 회복하게 해 주소서
내 미음이 쉬게 해 주소서
신의 인두로 지져 없이 해 주소서
기억도 지워지게 해 주소서
잊게 해 주소서’
아아, 나는 사람을 품어 키울 가슴을 못 가졌기 만 하다.
사람의 영혼을 껴안고 어루만질 관용과 자애를 못 가졌기 만 하다.
용서의 핏방울을 떨구어 찢긴 살을 수습할 치유의 은총을 한 부스러기도 못 얻었기 만 하다.
만약에 그 힘이 있었다면 오늘 이리도 춥고 삭막할 리 없을 것을.
지금은 겨울의 문 안에 깊이 들어섰다.
어느 날 아침 첫 눈이 내려와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인 채 얼어붙어 수정 꽃 무더기를 이루었고 그 후로 광명한 아침 해가 떠올라서 순금의 빛살로 수정 낱알을 일일이 꿰뚫어 내었음이어.
그 아름다움을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연코 겨울의 염원, 겨울의 기도를 바칠 것이다. 겨울의 찬미가를 합창할 것이다. 청람 빛 하늘에 높이 나붙은 겨울 묵상의 권유를 알아 차렸을 것이다.
‘채우려거든
먼저 네 마음을 비워라
사랑 받고 싶거든
너 스스로부터
먼저 사랑하여라
이러한 뜻의 음성이 울려옴을 알아들으리라.
그나, 그뿐인가.
‘우리는 곧 당신
당신은 우리’
흑인 영화 ‘뿌리, 그 다음 세대”의 끝마무리를 장식하는 이 대사도 아울러 들으리라.
주인공인 알렉스 헤일리가 아프리카 대륙, 쿤타 킨테의 고향을 찾았을 때 그곳 주민들이 그를 환호하며 외치던 말이다. 거대한 고애 告愛를 담아 우렁우렁 울려내는 그 말.
‘우리는 곧 당신
당신은 우리’
그 음성은 핏줄의 열풍을 타고 와서 그의 심장 한가운데에 폭탄처럼 터졌다. 참다 못한 알렉스는 혈족의 하나인 킨테 소년을 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어린아이처럼.
아아, 우리의 현실은 왜 이렇게도 추운가.
너와 나 사이의 벽을 깨뜨릴 지혜는 없는지. 모두가 이해 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고 도움을 청할 뿐 저편 이의 필요에 따라 먼저 내밀어 줄 그 사람이 없다.
겨울이 오기도 전에 이미 서릿발과 빙판이 내려 덮인 그런 이가 대부분이다.
겨울볕은 셀로판지처럼 와삭와삭 소리 나는 얇은 종이라 하겠거니 거머쥐기도 전에 부서지는 이 취약한 빛으로 우리의 추위를 둘러 덮기에는 엄청나게 열량이 달린다.
진지한 사랑이 없다.
진정한 번민, 진정한 고독이 없다.
진지한 분노가 없다.
불의와 나태를 쳐부수는 건강한 완력, 결단력, 실천 능력이 없다.
있는 건 무력감의 확인, 소외감, 창백한 환상, 요행을 겨냥하는 사행심, 몰염치, 비정 등.
이 허약과 빈곤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공분과 공익의 의지도 쉽사리 그 날갯죽지가 꺾이는 일들. 이 장애물들을 걷어내고 언 손과 얼어붙은 가슴들을 회생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영 파멸일지도 므르는데.
잠시 눈을 감아 본다.
그러나 내면의 소요를 진정시킬 수는 없다.
허세, 자만심, 분심, 갈등, 뒤집히고 혼탁하고 그야말로 지리멸렬이다.
내면의 질서, 영혼 속을 비추는 고요한 등잔불을 볼 수 없다. 통풍도 안 되는 꽉 막힌 곳에서 내가 죽어 있는 듯싶은 비참만이 한껏 부풀었다.
청징 淸澄 이 모자란다. 경건이 모자란다. 시체말로 한다면 산소, 비타민, 에너지가 하나같이 모자란다.
영혼의 세척, 감정의 순화, 행동의 활력을 시급히 대령해야 한다.
수혈이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하다.
곧잘 눈시울이 젖곤 하던 지난날의 그리움도 복습하여, 보다 더 귀하고 근원적인 가치 앞에 바쳐야 한다.
관용해야지.
내 가슴을 향해 상심의 탄환을 박아 넣던 그 사람을 관용할 수도 있게 되어야지. 이제야 말하거니와 그날 그 시각에 바로 나의 최선이던 것이 죽고 말았었다.
갑작스런 유탄에 척추를 상하여 그로부터 한 번도 허리를 펴 보지 못한 사람 같을지라도 오늘은 그 일마저 한사코 관용해야 한다.
그러지 안호선 내가 다시 시작할 수가 없다. 새로이 걸음마늘 배우고 말씨를 익히며 악수하는 법, 미소 짓는 법, 기도하는 법을 끌어내 올 수가 없다.
나의 하나님,
남은 여생 중에 또 한번의 신생을 저는 소망합니다. 새로운 심장을 허락하시고 깨끗한 더운 피로 가득 채워 주소서.
남보다 뛰어나려 하지 말고 남과 함께 뛰어나려 애쓰게 하여 주소서. 온 세상의 사람이 모두 다 오늘보다 훌륭한 이들 되게 해 주소서.
머리 위 하늘에는 깃발을 걸어 두게 하소서.
살아 있다는 표지, 성장하고 사랑하려는 서원과 노력의 징표로서 사시사철 깃발을 내어 걸게 하소서.
아름다운 이웃들에게 사귀게 하소서.
개미에겐 개미가, 꿀벌에겐 꿀벌이 필요하듯이 사람은 사랑을 원하옴을 이해하여 주소서. 그러나 당신께서 주신 것만큼은 결코 받지도 나누지도 못하옵니다. 이 점을 서로 인내하게 하옵시고 진심으로 불쌍히 여겨 주게 하소서. 가장 인도적인 인간이 되도록 저희를 도와 주시옵고 또한 성실하게 새 봄에 심을 씨 곡식을 보존하게 하여 주소서.
겨울의 한가운데서 나는 노래한다.
뉘우치고 슬퍼하면서 나는 분발한다.
다시금 열애에 손 잡히게 되기를 꿈꾸며 사랑의 진실과 사랑의 아픔을 전력으로 섬기려 한다. 관용하고 연민하면서 서로의 추위를 간절히 덥혀 줄 일에 최선을 다하리라.
그 수평선을
오늘 보고 싶은 건 하늘까지 맞닿은 수평선이다.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할 만큼 둘은 한 가지 색조에 풀어져 시야의 끝머리에 가로누워 있으리라. 그 꿈 속 같은 광경을 능히 현실인 듯이 상상해낸다. 한 필의 연이은 비단 피륙처럼 머리 위 공중에서 아슴푸레한 저편까지 거대한 포물선을 그으며 높이 멀리 이어져 있을 그 수평선을.
눈에도 굶주림이 있어서 오랫동안 못 본 것에게 목마름을 탄다. 언제쯤 수평선을 봤던가 싶게 그 기억을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지경에서 나는 오늘 불현듯 치받는 충동에 겨워 간절히 바다 생각에 집중한다.
삶의 영광이여.
언제나 생각하는 일이지만 우리의 주변엔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종교와 자연과 예술만 하더라도 이에는 제약이 없고 특권자도 없으며 원하는 이가 원하는 만큼을 누려도 좋은 전적인 허용만이 있을 뿐이다.
어려운 시대, 삭막한 감정들에 기름 바를 자연과 식어가는 심장의 피를 데워 줄 예술심과 그리고 만유 위에 계시옵신 조물주 하나님. 이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혼자 있으되 혼자가 아니며 쫓겨난 듯이 마음 추운 말에도 깊고 달가운 위안의 악수를 받곤 한다.
산의 장쾌함과 바다의 무량함도 기실 위대한 관현악 안에서 호흡을 맞추는 악기들 같이 서로 도와 완미한 조화에 나아가고 있음을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바다에 가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면 오늘도 역시 그 수평선은 유순한 양떼들처럼 드러누워 느리고 유장한 심호흡을 하고 있으리니 그 맥동 가히 손에 잡히는 듯하다. 거기에선 사람의 지친 몸도 커다란 요람 속에서처럼 포근히 쉬게 될 것임을. 천천히 흔들어 주는 손길로써 온갖 긴장과 피로를 만져 치유해 줄 것이리라.
수평선이 보고 싶다.
배를 타고 한없이 바다 위를 흘러가면서 바다와 하늘이 마주 보는 광활한 공간 안에 안기고 싶다. 하늘 청청, 바다도 청청, 그 풍경을 생각만 해도 시원하다. 씻어주고 새롭게 해줄 거대한 세척장.
바다와 하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 같은 것일까? 산울림 같은 것일까. 육지에는 하늘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데 물 위엔 언제나 선명히 피어 오르는 하늘의 그림지가 있다. 작은 호수거나 허리띠처럼 가늘고 긴 실개천이나 심지어는 두메의 우물 속에도 하늘은 고요히 내려 잠기어 그림자를 지운다.
석양머리엔 화선지처럼 선주화의 염료가 번지고 서서히 은자 銀紫 로 바뀌었다가 다시 수묵색으로 갈아 입은 빛깔들의 층계. 밤이 되면 순금빛 불티를 뿌리는 억 천만 개의 별들까지 고스란히 물위에 얹히는 그 놀라움이라니.
비단실 스치듯이 미풍이 지날 때도 섬세히 그 모습 비추는가 싶은, 그토록 영롱한 명경 明鏡, 바다여! 바다여!
하늘의 거울로 생겼는가,
하늘의 산울림으로 생겼는가,
바다여.
배를 타고 육지를 떠나는 이는 약속처럼 수평선을 바라본다. 둘이, 셋이, 더 여럿이, 모두 다 수평선을 바라본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의 모래언덕인 양 이 또한 가도가도 새로운 수평선이 눈앞에 펼쳐지며 한도 없는 그것을.
그 영원한 반복, 지금 막 창조된 듯 청신한 수평선이 한 꺼풀씩 새 빛깔을 갈아 입는다. 지구는 둥글다 하니 천년, 만년을 돈들 끝이 있으랴. 새로이 솟아나는 수평선인들 진실로 진실로 다함이 있으랴.
나는 바다로 가야지
외로운 바다와 하늘을 보아야지
내가 원하는 건
키 큰 배 한 척과
길을 인도할 별 하나 뿐.
수려한 바다의 시 한 구절을 읊어 본다. 바다는 외로운 곳인가. 하늘도 외로운 곳인가. 천지만물은 다 외로운 것인가.
바다의 광막함. 산과 하늘과 그리고 사람의 영혼 속 그 무변 광대함을 잠시 묵상한다. 그러나 이는 비어 있는 성질이 아니고 꽉 차서 넘치는 그 성질이다. 자유로운 비상을 위하여 비워 두는 허공. 이만큼 헐거운 테두리 안에서만 비로소 안주할 우리의 영혼이어니.
프랑스의 작가 스땅달의 전기에는 그간의 고뇌스럽던 연애를 청산하고 여객선에 몸을 실었을 때 거기에서 무애의 상명한 바다를 보았으며 가슴 속에 폭탄처럼 터지는 감격의 소용돌이를 이로써 경험했다고 말해 주고 있다. 힘과 깨달음과 새로운 영감이 분출함으로 해서 만감의 눈물을 흘렸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사람을 희생시키는 바다, 아름답게 약동하는 새 활력의 바다가 그를 품 속에 껴안고 그간의 모든 상처를 고쳐 주었음이리라.
바다의 모성, 그러면서 때대로는 걷잡을 수 없는 맹위와 잔혹을 불지르기도 한다. 군함을 침몰시키는 바다, 도시 위로 덮치는 바다, 산 사람을 삼키는 바다 등등.
언젠가 제주도의 서귀포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을 때 나는 수시로 바다 기슭에 나가 앉았었다. 저녁 나절 수면을 굽어보고 있으면, 무섭게 끌어당기던 그 사나운 힘. 그 바다 나직이 나에게 말했었지.
들어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나의 중심에까지 부디 오너라
나는 간절하다고.
결결이 꿈틀거리는 검은 물이랑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물 속에 떨어지고 싶고 하마터면 떨어지려고만 하는 묘하게 다급한 충동이 치받아 올랐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횡포한 바다의 마력을 그때 전신을 떨며 절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없이 넓은 바다, 깊은 바다, 먼 바다, 영원한 바다, 어쩌면 신의 모상 模像 일 것도 같은 바다.
내 오늘 보고 싶은 건 하늘까지 맞닿은 수평선이다. 바람도 아닌 것이 안개도 아닌 것이 한 겹 입혀져서 꿈 속처럼 아득한 그 수평선이 보고 싶다.
마음의 성소(聖所)
사람의 마음은 잴 수 없는 수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억만 가닥의 현으로 울리는 악기와도 같다.
그것은 항상 가동되고 있는 전열기처럼 소모되면서 한편으론 쉴새 없이 새 피를 채워 주는 도 다른 활력 탱크가 있게 됨이 참으로 놀랍다. 이는 사람이 부여 받은 으뜸의 능력이면서 풀려날 길 없는 가혹한 형벌일 수도 있다.
때때로 파도치는 마음의 격랑은 마음 그 전부로서 끓어 오르는 고통의 열탕이기도 했다. 어느 날 마음의 밑바닥에 와서 닿는, 아니 각문처럼 새겨지는 인기척이 있었다.
양심의 속껍질을 찢어내는 신의 손길이거나 운명의 첫 달력을 걸어 주는 특별한 만남이었다고나 할까.
사람의 삶이란 곧 마음의 활동이다. 마음은 사람 속의 사람이며 시간 속의 질긴 동아줄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위생과 마음의 보건을 돌보지 않을 수 없고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하게 그 마음을 가꾸기 위하여 각자가 그 자신의 원정이 되어야 한다.
마음 안엔 허공과 공터도 있다.
서예나 동향화에서 귀하게 남겨 두는 여백처럼 사람의 마음에도 만년설의 수려한 봉우리를 그러낸 성소가 있다. 첫 추수를 위해 비워 두는 청결한 과기가 있다.
무상무념의 담백과 겸허로 닦고 또 닦는 내면의 거울, 스스로의 영혼이 여기 와서 설핏설핏 그 모습을 비추게 될 이 엄숙한 준비.
사람의 덕성과 품격은 그 자신에게만 책임을 묻게 된다. 마음을 비우는 일과 비워 둔 마음의 어느 끄트머리에 서서 또다시 무언가를 땀 흘리며 담게 될 일의 그 사이에서 어떤 가치와 얼마큼의 생명력을 창조할 것인가에 있어서 우리들 자신 외에 다른 누가 여기에 개입할 것인가.
사랑을 위하여
몇 차례 꽃샘 눈을 뿌리던 첫봄이 지나고 햇빛으로 향유 바르는 4월에 접어들면 깊은 고을 바위 살갗에 굴 껍질처럼 말라 붙었던 이끼조차 초록빛 햇솜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4월엔 우리나라 4.19를 생각합니다. 진달래 꽃빛보다 바람을 안은 산불보다 더 격렬하던 애국 충정과 장하고 아깝던 젊은 산화 散華 들을.
4월엔 예수 부활을 생각합니다.
해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어김없이 살아 나셨던 만민의 구세주를.
하여 오늘은 예수 성탄을 경배하려고 먼 길을 떠났다가 사람을 돕는 여러 고비의 일에 붙잡혀 기나긴 서른 세 해 만에야 뜻을 이루어, 못박혀 죽으시는 주의 십자가 아래까지 오게 되었던 ‘넷째 왕’의 얘기부터 하고 싶습니다.
한 작은 나라에 마음이 온유하고 생각이 지혜로운 젊은 왕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밤, 찬란한 큰 별이 하늘 높이 나타남을 보고 이 세상에 메시아가 오실 징조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그 아기를 뵈려는 열망으로 다섯 가지 선물을 마련하여 홀로 말을 타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 선물이란 곱고 부드러운 아마포 亞麻布와 빌로드같이 반드럽게 손질한 모피와 보리수에서 얻은 꿀과 순금과 보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의 땅 끝까지 갔으나 머리 위에 빛나는 큰 별은 한도 없이 그의 발길을 재촉하였습니다. 미지의 땅으로 들어선 후에도 아주 여러 날 동안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신비한 별은 밤마다 그의 길머리를 비춰 주었으므로 희망과 열정이 언제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다가 낙타를 타고 온 세 분의 왕을 만났는데 그들 역시 이상한 별에 이끌려 먼 동방에서 예까지 온 사람들이었으며, 결국 네 사람이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잠시 동안만 그런 좋은 형편이었을 뿐 그는 끝내 아기를 못 뵈었고 다시는 자기 나라에 돌아가지도 못했습니다. 외로운 유랑의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야 십자가 위에 계시는 주님 앞에 도착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에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예물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부끄럽고 괴로웠으며 바로 옆에 죽음이 와 있었으므로 가물가물 눈 앞이 어둡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첫 번째로 도와 준 거지 산모 産母가 그에게 왕국으로 선물한 마음과 또한 사랑으로 가득 찬 그 자신의 마음이 생각남으로써 저녁 하늘에 향기를 뿜고 있는 야생 백리향을 베개 삼고 누워서 나직이 말씀드립니다.
“저의 마음과 제가 도와 준 이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오로지 주님 앞에 바쳐 드립니다.”
라고 이렇게….
그러면 어째서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지체하게 되었던가에 대하여 그의 얘기를 얼마간 더 부연하겠습니다.
동방의 세 왕을 만나 동행이 되었던 그날 밤에 그의 숙소 바로 옆에서 딸아이를 낳은 거지 여자를 보게 되었으며 추위에 떠는 벌거숭이 갓난애를 예물로 준비했던 아마포로 감싸 주고 금화를 나누어 모녀의 숙소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때 그 여자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리 같은 분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하는데 제겐 힘이 없으니 저 혼자의 마음 안에서 저의 임금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네만 이 선물의 주인이신 위대한 임금님이 나를 용서해 주실지 어떨지를 알 수 없구나.”
라고 그는 대답합니다.
숙소에 가 보니 세 사람은 이미 떠나 버리고 없었습니다. 뒤따라 가던 길목에서 그는 또 채찍에 쓰러지는 가엾은 노예들을 보게 되었고 몸값을 치러 자유인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연이어 만나게 되는 배고픈 이나 병든 이들에게 금화와 보석을 나눠 주었습니다. 어느 때는 강도에게 얻어맞고 속옷까지 빼앗긴 부상자를 만나 혼인식 때에나 쓸 값진 모피로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소비되고 더하여 애마 愛馬 와니카 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걸어서 낯선 대륙을 지나야 하는데 불운은 더 겹쳐서 오래도록 길머리를 비추던 신비한 별조차 다시는 머리 위에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이젠 목표조차 잃은 떠돌이로 어느 항구에까지 다다랐다가 거기서 젊고 아름다운 과부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은 빚을 못 갚았기 때문에 사슬에 묶여 배를 모는 처지가 되었고 고된 일을 더 못 견뎌 죽었으므로 그의 어린 아들을 아버지 대신으로 사슬에 묶어 배를 젓게 하려는 참이었습니다.
애통하는 여자를 연민한 나머지 아이를 대신하여 배를 탔으며 그 후로 삼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을 합니다. 그리하여 너무 늙어 노 젓는 일에 쓸모 없게 되자 그를 육지로 옮겨 놓아 주었습니다.
때마침 가장 위대한 분으로 가장 비천한 자와 같이 버림받아 십자가를 지신 분의 얘기를 듣고 찾아갔을 때 한눈에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차립니다. 이제는 오직 고통 중의 주님이 단 한번 그를 바라보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의 소원은 이것뿐입니다. 그와 주님이 서로 바라보게 될 단지 그 한 순간으로써 긴 생애의 갖가지 상처를 능히 위로 받고 고칠 것입니다.
“준비한 선물은 모두 써 버렸음을 용서하십시오. 지금은 오로지 이것뿐인 제 마음을 주님께 바칩니다.”
그는 고요히 마지막 말을 아뢰고 숨을 거둡니다.
위의 얘기는 에자르트 샤퍼의 <넷째 왕의 전설>이란 책의 대략 줄거리입니다.
얘기 속의 그는 30년 이상이나 늦어서야 목적지에 닿은 사람이지만 본질적으로 결코 지각이 아니며 오히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원했던 만남의 그 가장 중심에까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구한 세월의 그의 나날은 일일이 주의 뜻에 부합되어 있었고 이런 의미에서 주와 함께 행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가 사람들에게 베푼 그 전부를 주님은 자신이 대접받은 것과 같이 높여 주실 일을 우리는 믿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이에게 베푼 것이 곧 나에게 베풂’이라고 성서에도 분명히 씌어 있습니다.
한데 보다 더 귀한 점이 있습니다.
가졌던 전부를 내어 주고 한낱 빈 그릇과 같았던 그 상황에서 아직도 남아 잇는 한 가지를 보아낸 지혜로운 시력이며 이를 드높이 들어 올렸던 점입니다. 다름 아닌 ‘마음’의 발견 그것이었습니다. 이것만은 잃을 수도 감출 수도 없는 사람의 그 마음, 더구나 여기서는 선행자의 마음이며 항구한 목마름으로 전생을 걸고 주를 찾았던 그 성실한 열정의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어둠으로 익히는 포도주처럼 곤욕의 항아리 안에 묵히며 소금 절이는 신고 辛苦를 거듭하여 마침내 폭포처럼 쏟아지는 대낮의 광명에 드러내게 된 그 마음입니다. 끝내 순결한 살결의 더운 피를 잃지 않았던 생동의 마음입니다.
이러므로 하여 우리는 실로 배울 바가 있습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오로지 불씨를 지키는 심장, 전인간적 인격, 온갖 무력감을 떠받고 나는 불사조의 의지, 눈물로 씻어내는 보옥의 광채를 원합니다.
아닙니다. 눈부시지 않고 소박하며 건실하게 안정과 조화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여러 사람이면서 마치도 한 사람의 내부처럼 서로 마음 통하는 공감과 우정을 원합니다. 행여 더 허락되는 것이라면 별달리 밀접한 하나의 영혼, 그 건강한 철사줄의 운명을….
아름다운 4월입니다.
흙 속에서 꿈꾸던 씨앗들은 모두 다 땅 위로 솟아 올랐으며 실 꾸리를 풀 듯이 연두빛 덩굴들을 한 없이 뽑아내어 이제 머잖은 날에 초록의 줄기와 잎새들로 천하의 벌판들을 덮으려 합니다.
이 중에서 사람의 성숙이 가장 더딜까 두렵습니다. 나날이 짧아져 가는 밤 시간인데도 곧잘 잠을 설쳐 피로한 아침을 맞게 되며 관계들의 개선은 더우기나 어려워서 묵은 해의 불화를 여태껏 풀지 못했음이 정녕 난감합니다. 사람의 현실은 왜 이다지 궁색한 것입니까.
우리는 때에 따라 주는 입장에 서고 때로는 얻고자 하는 의지에 앉습니다. 수수 受授의 예절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칼릴 지브란은 그의 명저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가진 것을 베풀 때 그것은 베푸는 일이 못 된다. 진실로 베푼다 함은 그대 자신을 내어 줌일 뿐’이라고.
자신을 내어 준다 함은 자신의 진실 안에서 출발함을 말합니다. 마음을 곁들이고 나아가 영혼마저 나누어 주는 가운데 행함을 뜻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할 때 사람은 주는 이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갖게 된 그 무엇이라도 보다 크신 시혜자 施惠者의 손에서 받아낸 것이므로 결코 사람이 발생자일 수 없으며 전달자 내지는 분배자에 불과한 성질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나누는 입장의 겸손을 터득해야 하겠고, 아울러 받게 되는 자의 처신에 있어선 그 얻어진 바를 농사처럼 부풀리어 또다시 뒤의 사람에게 쪼개어 주는 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받아 키워서 다시 나누어 주는 과정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고받음이 기쁨과 보람을 수확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사랑은 더구나 그러합니다.
사랑을 돕는 건 사랑 자체이며 사랑에 보답함도 오로지 사랑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여 베풂의 근원이신 신의 시혜를 꽃피우게도 되고 나눔의 복됨을 이 원리 위에 쌓아 올리게도 될 듯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받은 것 천지입니다.
더구나 4월엔 이 실감이 온 가슴을 채워 넘칩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엔 신선한 풍요로움들이 화로 속에 붐비는 불씨처럼 살아나고 있습니다. 삶에 따라오는 시련과 환난이 그칠 사이 없다 할지라도 큰 질서 안에서 맥동치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덮어 누르지는 못합니다.
자연은 더욱 그러합니다.
자연과 사람을 살필 때 저편은 주는 쪽이요, 우리는 받는 쪽입니다. 한데 다같이 복되다 할 수 있으리니 받아 주는 이가 없이는 베풂의 성립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월의 하늘 아래 나오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축복을 보배롭게 품어 안으며 이를 더 가꾸고 키워서 능동적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주고받음의 건강한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4월입니다.
그리고 예수 부활의 대축일이 다가옵니다. 다시 사시기 위하여 올해에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리니.
해마다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는다면
너의 영혼은
어디에 집을 짓겠으며
내 사랑은 어떻게 베풀겠느냐
나의 만백성아
주의 그 음성이 나직이 영혼의 밑바닥을 적시며 울려 옵니다.
아주 나직이….
사월의 연가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눈과 얼음이 얹히던 인동 忍冬 의 나무 살갗에 억 천만 만의 더운 손바닥들이 명주 피륙을 감아 훈훈히 속살마저 덥혀냄을 보러 나오세요.
봄을 맞는 나무 옆에 서서, 봄의 기운이 정수리까지 뻗치는 나무 옆에 서서 생명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세요.
이슬을 보세요.
올해의 첫 이슬이 태초의 순수 그대로 영롱히 반짝임을 보세요. 다치지 않게 그 한두 방울을 손 안에 담아 보세요. 문득 새파란 하늘을 우러러 보세요. 옛날옛적 동심의 눈물 방울이 거짓말처럼 우리들 눈시울에 다시 치받아 어이없이 후두둑 떨어지는군요.
사월의 수분을 생각하세요.
겨우내 사람의 속 마음이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고 여기던 터에 사월의 수증기를 생각하세요. 훈훈하게 축여질 알맞은 습도를 생각하세요.
사월의 아름다움을 누리세요.
단지 화사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눈과 얼음에서 뽑아 올린 장한 아름다움을 누리세요. 광야의 기도사같이 인내와 신앙의 승리를 나누어 가지세요.
꽃을 보러 나오세요.
열 가지, 백 가지의 꽃을 보러 나오세요. 모든 꽃이 이 세상 유일한 꽃의 의미로 피어나는 절대의 숭고와 충실을 배우러 나오세요. 그 환희를 배우러 나오세요. 위로 위로 솟구치는 소망을 배우러 나오세요.
꽃을 보러 나오세요.
꽃의 언니들인 보리밭을 보러 나오세요. 삼월엔 땅 속에 벌여 놓던 초록빛 잔칫상을 오늘은 땅 위로 들고 나왔군요. 2월엔 어둠 속의 진통을 견뎌낸 그 갸륵한 것, 설한 雪寒 섣달엔 희미한 꿈이었던 그 눈물겨운 것.
보리밭을 보러 나오세요.
빛과 대기 속에 펼쳐지는 신록의 성찬식 聖餐式 에 참석하세요. 보리가 펴 놓게 될 순서들을 살펴보세요. 영글어서 곡식이 되고 타작마당을 거쳐 나와선 백설 같은 가루로 빻아져 떡과 술과 온갖 것이 되어서 많은 이를 먹이게 될 그 차례들을.
풀잎들을 보아 두세요.
얼음을 뚫어내고, 돌과 아스팔트마저 뚫어내고, 송곳처럼 디밀어 오르는 무시무시한 모가지들을. 어떻게 그 단단한 것을 뚫어내고 땅 위에까지 나올 수 있었나요.
당신은 믿고 계시겠지요.
도시의 봄 경치 속에서도 새싹들이 얼음과 돌과 아스팔트를 뚫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믿으시겠지요. 해빙의 낙수물이 기왓골을 타고 흐르며 그러한 몇 십 몇 백 년의 세월 사이에 마침내 동그맣게 섬돌이 패이고 있는 그 사실을.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꽃을 불러내는 바람을 만나러 나오세요. 피리 구멍으로 숨결을 디밀어 넣어 구슬 울리는 오묘한 가락을 뽑아내는 바람은 마술사랍니다. 사월의 바람을 만나러 나오세요.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외쳐 보세요.
자신의 내부에 굳게 닫아 두었던 문들을 열고 존재의 골짜기들을 향해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외쳐 보세요.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산울림 돌아 나오게 해 보세요.
사월의 함성을 들어 보세요.
눈 감고 귀 기울이면 영혼이 율연 慄然 해지도록 아름답고 장한 사월의 함성이 들릴 거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로 깨끗한 젊은이의 함성이 뜨겁고 끈적끈적한 피에 섞여 와아~ 와아~ 울려옴을 들을 거예요.
당신은 견뎌낼 수가 있을는지.
목청껏 울어 버리지 않고 참아낼 수가 있을는지. 이십 년 전의 우리 젊은이들이 외치던 4.19 의 함성, 3.1 만세처럼 폐부 속에서 터져 나왔던 정의의 함성, 인권의 함성이 펄펄 끓는 열탕으로 지금도 와아~ 와아~ 울려옴을 들을 거예요.
사월의 강가에 나오세요.
아직도 위판은 살얼음인데 그 밑을 흐르는 물 소리를 들어 보세요.
졸, 졸, 졸, 실타래 풀리듯이 끊이지 않는 봄 시냇물 소리를 들어 보세요. 서럽게 허전하던 모든 날에 꼭 들리던 그 개울물 소리가 아닌가요.
물의 시원 始原 을 생각하세요. 삼국유사 때부터, 단군신화 때부터 흐르던 물 소리. 선사시대 때부터 흐르던 물 소리. 조상의 조상처럼 늙고 지혜로운 물을 생각하세요.
불을 생각하세요.
태초의 날, 처음으로 일궈지던 성화 聖火 를 생각하세요. 지존하신 여왕을 사모하여 그 몸을 불태운 지귀 至貴 의 불과, 불타서 새하얗게 잿가루가 되어 버린 열 아홉 살의 쟌다르크를 생각하세요.
불을 생각하세요.
불의 상징인 온갖 신성한 것, 온갖 진실한 것, 순애 殉愛 와 순국 殉國 을 생각하세요. 육체를 불사르어 영혼에 기름 따르던 이 나라의 순교사를 생각하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바위 살갗에 눈 트는 이끼, 진홍과 순백의 꽃들, 햇솜처럼 깔리는 봄 아지랑이, 꿈꾸는 연분홍의 조가비들을 생각하세요. 먼 데서 날아오는 새떼를 생각하세요. 훨 훨 훨 날아오는 빛부신 날개짓을 생각하세요.
땅 속에 뿌려지는 곡식들, 채소와 과일, 꽃씨며 갖가지 구근들…
사월엔 노동하세요.
심고 가꾸고 땀 흘리는 영광을 맛보세요.
나무 옆에 서세요. 주루룩 주루룩 속의 땀처럼 하얀 수액이 흘러 내리는 나무의 생리를 느껴 보세요. 사람의 몸 속에 피가 순환하듯이 나무들의 몸 속에도 수액이 돌아 퍼짐을 느껴 보세요.
거친 나무 등걸에 귀를 대면 똑딱 똑딱 시계 초침 소리를 내는 생명의 맥동, 생명의 울림을 들으세요.
사월엔 편지를 쓰세요.
두고 온 고향에도 편지를 날려 보내세요. 객지의 봄이 찬란하다 해도 어머니의 품과는 다른 점을 말해 보내세요.
사월에 편지를 쓰세요. 말할 기회를 미루기만 했던 사랑의 고백을 적어 보내세요.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이후에도 언제까지나 사랑하리라고 말하세요.
사랑만은 뉘우칠 수 없다고, 그 한 마디 말해 버리세요. 재회의 약속, 방문의 일정을 적어 보내세요. 아아 사월엔 사랑의 편지를 쓰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사월의 보석더미 옆에 서세요.
바라봄으로써만 기꺼운 일, 그렇게 욕심 없는 우리들의 꿈, 소박한 소유.
사월의 찬미가를 부르세요.
그리고 사월엔 교회를 찾으세요. 제단엔 성촉 聖燭 을 밝히고 신도들이 기도하고 있으리니.
사월엔 교회에 나가세요.
하나님이 땅에 내려와 사람 손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다시 하늘에 오르시는 예수 부활에 참여하세요.
부활절의 기도를 드리세요. 복받치는 통곡으로 당신도 크게 한번 울음 우세요. 영생의 증거를 눈으로 보면서 주의 기적을 심령의 전부로 신앙하세요.
기뻐하세요. 기뻐하세요. 기뻐하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신혼의 의미
‘결혼은 운명이다’
A의 말이다.
‘결혼은 노력 위에 세우는 집이다’
B는 또 이렇게 말한다.
양쪽이 다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결혼은 사랑과 인격의 결합이다’
C의 말이다.
이때에도 ‘그야 물론!’이라고 즉석에서 공감한다.
이처럼 결혼의 정의는 쉽고 누구나 일가견을 갖는다. 그러면서 모든 이의 결혼이 다소간 슬프고 어긋남은 어인 까닭인가.
그 짐은 무거워 살 속에 박히는 고삐의 쓰라림을 맛보게 한다. 신음하는 이가 있고 파멸하는 이가 있고 심지어는 생명을 뺏거나 뺏기는 불상사에까지도 이른다. 헤어지기 위해 재판정에 서기도 한다.
“선생님, 금요일에 결혼하면 불행해진다죠?”
“그렇겠지요. 금요일이라고 예외는 아닐 테니까요.”
이는 버나드 쇼우의 밀이라는 바 씁쓰레하면서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모든 결혼은 불행합니까?”
“네.”
“그렇다면 독신자는 행복하겠군요.”
“………….”
말이 막혀 버린다.
이에 대해 일찍이 아래와 같이 언급한 현인이 있다.
‘결혼하면 천 가지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독신자에겐 아무런 기쁨도 없다’고.
이 밀은 결혼의 긍정을 내포한다고 생각된다. 소금이 없는 식탁처럼 기쁨을 뺀 무사 안일엔 삶의 보람이 없고 때문에 열 가지 고통을 대가 로 치러 바꾼 하나의 기쁨이 얼마나 귀하고 인간적인가를 일깨워주며, 더하여 당신은 어느 편을 택하겠느냐고 묻는 질문마저 포함하고 있다 하겠다.
결혼이야말로 철저히 또 구체적으로 삶과의 만남이요 삶의 중심에 서서 매사를 배우는 일이다. 돌을 깨는 정과 같이 온 힘으로 바위 살갗을 뚫어 쪼개는 그 투지요 껍질을 찢어내고 새싹을 움 돋게 하는 장한 생동감인 것이다.
음식을 먹고 마시듯이 애환의 체험도 다반사처럼 삼켜 가는 사이에 멍들고 닦여지고 느린 성숙에로 걸어가면서 하나 둘 주름살을 보태는 일이 사람의 삶이 아닌가. 평범하면서도 순리를 따르는 사람의 길이 아닌가.
삶의 더듬이를 모두 써라.
깨어 있는 감관으로 낱낱이 다 음미하여라. 불로 굽고 두드려서 칼을 만드는 소성 燒成의 현장에도 머물러라. 겁내지 말고 불 속에 뛰어들어라. 사람의 허무에 절망하면서 사람에의 연민과 축복으로 돌아앉는 그 뼈저린 관용을 몸에 익혀라. 신이 하나의 이름을 부르실 때 둘이 함께 대답하게 되는 눈물겨운 순정에도 이르러 보아라.
내 감히 위와 같이 권하리니 생명에는 멈춰서는 일보다 더한 불행이 없다고 믿어 오기 때문이다 막아서 썩히기보다 열어서 만리 계곡을 흐르는 물주기이고 싶고, 빙설 氷雪을 털어내며 솟아나는 왁자지껄한 초록의 잎들이고 싶지 않으랴. 비록 오뉴월 뙤약볕에 지져 말려지고 가을엔 덧없는 조락으로 잎을 지운다 하더라도 한 나무는 사계절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근력을 지니느니 이를 어찌 상찬 賞贊 치 않으리.
‘이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성하거나 병들거나 평생을 변함 없이…’
사랑의 선서를 다시 한 번 만당의 사람 앞에서 확인케 한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께서 성교회를 사랑하심처럼 할 것이며, 아내는 교회가 주를 섬기듯 그 남편을 받들지니…’
주례사는 매번 찬물을 끼얹듯이 숙연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결혼은 사랑의 공인이며 결혼만이 품위를 보전하면서 사람의 본성을 충족 가운데 꽃피워 주리라. 하지만 결혼이란 그 이상으로 엄하고 신성한 소명 召命을 수락하는 일이다. 마치도 죽음이 부동이듯이 부부의 사랑과 신의도 부동이어야 한다는 전인격의 맹세가 이들의 양심을 화살처럼 쏘아 꿰뚫게 될 바로 그 자각이며 서약이다.
결혼하여라.
결혼함으로 삶의 교실에 들어 서거라. 게서 번뇌하고 상처입게 되는 나머지 삶의 어려움과 관계의 어려움을 배우고 깨닫거라. 인내하고 용서하고 화친하거라. 가능한 한도까지 많이많이 화친하거라.
혼기에 접어든 젊은이들아.
잊을 수 없는 동화
때때로 기쁜 경탄이 우리를 찾아온다. 얼마간 감격의 공복기에 있을 때 충격을 동반하는 불시의 감동이 넌지시 손을 잡아 준다.
1964년에 씌어졌다는 쉘 실바스타인의 짧은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75년에야 한국어 초판으로 읽게 되었는데 이때를 나는 그러한 일례로 손꼽겠다.
이 책은 일견, 그림책의 범위에 넣을 만했고 악보 같은 느낌도 갖게 했다.
첫 페이지엔 글씨가 전혀 없고 백지의 위쪽에 휘어 늘어진 나뭇가지 하나가 작게 그려져 있다. 책장이 너무나 텅 비었다고 여길뻔하다가 아래 쪽에 잎사귀 하나가 점 찍혀 있음을 보게 된다.
다음 페이지에서 나무의 모습이 드러나고 ‘옛날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라고 꼭 한 줄만 글씨가 넣어져 있다. 또 다름에 넘어가선 ‘이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라는 몇 글자가 4행으로 나눠져 음악 부호처럼 색다르게 배열되고 나무를 찾아오는 소년의 작은 신발이 오른쪽 끝에 연필 꼭지만큼 그려져 있다.
그림의 언어와 글자의 도식을 의도했단 말인가.
아무튼 나로서는 이런 형식의 동화를 본 적이 없었고 이러한 가능성을 상상도 못했었다. 책장을 넘겨 가는 사이에 더 기이한 전율에 휩싸였다. 형식을 압도하는 내용이 감당키 어려운 뭔가를 끼얹어 주고 있었다. 얘기의 대략은 아래와 같이 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한 소년을 사랑했으며 소년은 매일같이 나무에게 와서 잎을 모아 왕관을 만들어 쓰기도 하고 그네를 뛰거나 사과를 따 먹기나 숨바꼭질을 하거나 피곤할 땐 나무 그늘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다. 소년은 나무를 사랑했고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자랐고 나무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나무는 사과를 따서 팔아 돈을 쓰라고 가르쳐 주었다. 소년은 그대로 했고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
몇 해 후 소년은 나무에게 와서 집이 있어야겠다고 말했더니 나무는 제 몸의 가지들을 잘라서 집을 지으라고 일러 준다. 소년은 나뭇가지를 모두 베어 자기의 집을 지으려고 가지고 갔다. 그래서 나무는 또 행복했다.
오랜 세월 후에 다시 온 소년은 먼 곳으로 떠날 배 한 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니 나무는 내 등걸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렴, 이라고 대답한다. 소년은 나무를 베어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렸다. 노인이 된 소년이 돌아왔을 때 나무는 베어진 나무 밑둥에 그의 피곤한 몸을 얹혀 쉬게 해준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
문장의 분량은 짧게 백 이십 행 정도인데 반복법으로 겹친 데가 있고 하여 실지의 단어 수는 더 적다고 할 만하고 그림은 펜으로 윤곽만 그린 것으로 모두 28컷이 실려 있다. 간결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 점 하나도 더 보탤 곳 없는 데서 적이 탄복을 금치 못한다.
이 작품은 동화 라기엔 너무나 강렬하고 전형적이어서 마치도 청동의 각문 같은 느낌을 주었었다. 줌과 받음의 행위를 통해 역설적 행복론을 전개하고 있으면서 통일감이 선명하고 미학적 측면도 낭비 없이 정리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매울 아름답고 매우 간결했다. 무엇보다 구상이 대답하고 개성적이며 어떤 의미의 절대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이에 있어서 주는 행위란 무엇인가.
주는 일을 성립시키는 그 받음은 무엇이며 줌에는 기쁨이 따르고 받음에는 필연코 충족이 보장되는가.
나무는 소년에게 사과를 주었다.
그 다음 나뭇가지를 내주었고 마침내는 그 몸 전부를 잘라내어 속을 후벼 파고 배를 만드는 일조차 허용했다.
나무의 죽음이다. 적어도 죽음과 맞먹는 잔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를 원하는 자에겐 줄 것이 아직 더 남아 있어서
“자,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이리로 와서 쉬도록 해라.”
굽은 몸뚱이를 애써 펴면서 나무는 이와 같이 말한다.
‘소년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습니다’
이처럼 맺고 있는 끝말을 바라보며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갈래의 해석이 치밀어 오른다.
과연 나무만이 주는 행위로 일관했었던가. 이 점에 대하여도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소년은 소년대로 남은 인생을 끌고 나무에게 돌아와 습습한 그루터기에 쪼그리고 앉는다. 어버이를 찾아오는 자식의 모습처럼 애련한 바가 없지 아니하다. 나무로 말하더라도 모든 걸 주고 모든 걸 받는 궁극의 안도가 없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소년의 전의식 가운데서 나무는 언제나 그 구심점이어 왔고 지친 뱃머리를 갖다 대는 마지막 항구이었던 것이다.
나무에게 와서 나무를 통해 소유하고 해결했음도 사실이나 나무 역시도 소년이 나타남으로써 관계가 지어지고 사건이 꽃 피며 생명의 전이 轉移가 현실화된다.
바로 그렇다.
나는 이 수수 관계를 생명의 전이로 풀이하고 싶다.
오른손에 끼었던 반지를 왼손에 바꿔 낀다고 해서 별달리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없듯이 나무도 스스로의 소실을 소년의 피요 안에서 충당했었다는 해석을 붙이고 싶다. 나무는 그쯤으로 거인적이고 어버이와 같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신을 방불하고 있다. 또 한가지 늙어서도 소아적인 이 소년은 사람 둥의 범용한 자들이 지니는 그 몰골이란 말인가.
서투른 풀이는 어찌 되었건 이 동호는 한 그루 나무의 모습으로 보여 주는 사랑과 베풂의 극점을 짚고 있으며 이로써 심히 아름답다고 서슴없이 말하겠다.
제5장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겨울새의 날개 위에
겨울 하늘 높이 날 수 있어야만이 진정한 새라고 할 것이다. 날개 끝에 무수히 바늘 꽂히는 냉기를 떠받고 바르고 아름답게 몸의 평형을 지탱하며 나는 그 유연한 날개짓.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아득한 공중을 날아, 눈 덮인 준령을 넘어 오는 새들의 날개짓. 하기야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눈떠 있었을 그 날아오름의 혼백을 누가 막을 것인가.
그러나 생각해야 할 바가 있다. 새들은 그 나름의 전력을 다해 날고 있으며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저마다 혼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 공통점에 목숨을 지니는 자들의 뜨거운 공감이 있지 않으랴.
천진암 깊은 산중에 한 수도단체가 들어서게 되면서 연로한 수녀 한 분이 힘겹게 서울을 왕래한다. 하루에 한번 왕복도 벅찬 거리인 걸 두 번을 다녀갈 때가 있다고 하여 사람들은 쇳덩이 같은 건강이라고 놀라지만 본인의 표현은 더 단순하다.
“사력을 다하는 것이지요.”
단지 이 말뿐이다.
이렇듯이 새들도 그 나름의 사력을 다하여 겨울 하늘을 날고 있을 것이다. 망망대해 같은 공중에 날개를 쉴 나무 한 그루도 있을 턱 없다. 두껍고 거대한 빙판을 가슴과 날갯죽지로 쾅쾅 깨뜨려 내면서 필사의 비행을 하고 있을 것을.
생명을 누리고 있는 그 누구나가 삶의 값을 치르며 산다.
토큰을 내고 버스를 타는 일이나 혹은 먹은 후에 셈하는 점심값이라 할지라도 필연코 대가를 지불하기 마련이며, 이에 있어 더욱 중요한 건 삶이란 과연 그 이상으로 값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이때의 그 믿음이다. 한 알의 곡식이나 한 송이 꽃도 강렬한 의지와 전폭의 투신으로서만 바꿔올 수 있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한량없이 빛 부시다 하지 않으리.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생명의 탄력…
새해가 왔다.
겨울새의 날개 위에 실려 왔겠기에 우리가 지상의 창문을 열고 이를 맞아들일 땐 싸한 눈송이로부터 부스부슬 떨구었던 것이다.
시린 손끝을 타고 퍼져 감도는 온몸의 냉쾌감과 깊이 머리 수그리게 하는 삶의 위포 威怖…
저마다 한 장씩의 백지를 받아 든다.
새삼 놀랍거니와 이 분배는 만인에게 공평하여 더 받거나 덜 받은 이가 있을 수 없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저마다의 재량으로 쓰되 날이 저물면 사람들은 그날의 수확을 살피는 평가와 성찰의 저울대 위에 선다. 이때 각자의 양심은 조심스럽게 그 눈금을 지켜 본다.
삶의 두려움이여.
그러나 이만한 긴장과 드릴도 없고 서야 무슨 맛인가 말이다.
칼날 위에서 춤추는 무당들은 이따금 저들의 작두날을 손보는 것인지?
검객들은 찬물을 끼얹으면서 숯돌에 칼을 갈아 가히 이슬떨기가 맺힐 만큼 곧고 영롱하게 도신 刀身을 보존하는 것인지?
우리도 그처럼 오성 悟性의 거울을 닦아 가려진 영혼조차 환히 얼비치게 해야 할 것이리라. 거듭거듭 생각한다.
삶은 등반이라고 거듭거듭 생각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준령을 오른다. 올라가는 어려움 못지않게 내리 구르는 추락도 그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터이고 보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난감한 행로이다. 사람은 더 나은 자기를 끝없이 갈망하며 기록을 깬 운동선수조차 또다시 기록을 갱신하고 싶은 불 같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끝도 없이 자신의 충족을 탐내는 강한 집착으로 하여 눈과 얼음의 길을 걸으며 한 더위 불볕 속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녕 이상도 하다.
삶에 있어선 줄기찬 상승 본능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새처럼 하늘을 날지도 못하는 이 한정 안에서 사람은 넘어지고 일어서는 되풀이를 거듭한다.
겨울엔 햇빛이 흐리고 사방이 황량해 보이나 기실 겨울처럼 성숙하고 용사적인 계절도 다시 없다. 마치 점화 點火의 준비를 갖추어 두고 잠시의 유예에 머물고 있는 불의 축제에 비할 수 있다.
땅 속이나 바다 속에까지 불심지들을 꽂아두고 있으며, 언제라도 세찬 불기둥으로 솟게 할 수 있는 기름 탱크 옆엔 성냥이 마련되고 성냥골조차 이미 벗은 몸으로 나와 있다.
그러면서 침묵한다.
강한 자의 양보와도 같이 저력 있는 침묵 앞에서 우리는 새해의 설계도를 펼쳐 놓는다.
땅 속은 생명들의 충전으로 숨가쁘고 바깥은 이리도 고요한 이 시절의 교훈을 들으면서 우리의 새해를 설계한다. 허약한 손과 미숙한 사념으로, 그러나 감히 순백의 석고판 속에 염원과 서약의 글씨들을 다시금 새겨 넣으려 한다.
‘삶의 보람은 알프스의 바위 틈에서 겪는 에델바이스’라는 말을 새삼 곱씹으면서 말이다.
‘자신이 행복한지 어떤지는 묻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함께 있는 사람이 행복한지 어떤지는 살펴야 한다’
이런 말이 새로운 의미를 곱씹는다.
관계 사이의 지혜야말로 얼마나 어렵고 목마른가.
관계의 개선은 곧 ‘나의 개선’에서만 가능하겠으며 ‘나의 개선’이란 ‘온 세계의 개선’ 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려움을 어찌할 것인지.
새해가 다시 왔다.
눈부신 한 장의 백지를 받아 놓고 손을 씻는 심정이다. 눈을 감으면 이대로 기도가 될 것 같은 허심이요 무력감이기도 하다.
오늘의 이 겨울 풍경같이도 깊은, 침잠하면서 그 안쪽에서 순열한 불씨를 하나씩 마련하는 한해 이고자 염원과 결의를 다지는 외엔 다른 아무것도 없다.
동일한 시대, 동일한 별에서
얼마 전 열 세 번에 걸쳐 방영해 준 대형 텔레비전 프로가 있었다. 웅려절묘한 우주 과학영화 ‘코스모스’ 가 바로 그것이다.
천문학에 관한 지식을 인류 전반의 미래와 관련해서 풀이한다고 하는 13편의 TV 프로그램은 우주의 거대한 신비를 바라보게 하는 수많은 창문을 선명한 색채 화면으로 우리의 안방 깊숙이 디밀어 보내 주었다.
사람도 우주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부에 깃들이는 놀라운 능력들에 관하여도 다각도로 말해 주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사람의 뇌 腦는 한정도니 크기의 두개골 속에 계속해서 정보를 저장할 수 있도록 대뇌피질의 표면을 필요한 만큼 늘여가며 회전시킨다는 바, 이때의 정보량을 비트로 환산하면 약 2천 만 권의 책과 맞먹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뇌의 도서관은 유전인자 도서관의 1만 배가 넘는다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우리들 각자는 스스로의 책임 아래 자기의 뇌 속에 무엇을 집어 넣을 것인가’의 심각한 자문자답을 불러일으켜 주기도 했다.
다른 동물들도 감정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특징은 감정을 넘어서는 사고력에 있다는 주장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현실에 관해서보다 사람의 가능성을 재는 것인가도 싶었다.
그 프로그램은 밀도와 아름다움에서도 놀라웠으며 위대한 교향악과도 같은 예술적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현재 세계적인 천문학자요 행성 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칼 세이건 박사가 저작에서부터 기획, 총지휘, 출연까지를 겸한 것이었다.
한 커트마다 경이롭고 감격스러우며 몹시 충격적이었다. 십여 일 간의 연속 프로가 끝난 후 나는 한국어 완역본을 한 권 집에 들여왔다. 대형판 480 페이지의 책 속에 수백 매의 사진가지 곁들여 있음을 대하면서, 가능하다면 다른 일을 모두 밀어 제치고 이 책을 정독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가 책의 맨 앞에 몇 줄 안 되는 글로 나붙어 있는 헌사 獻辭를 읽게 되었었다.
앤 드류언에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감을 기뻐하면서.
이 짧은 구절은 방대한 본문의 전 중량에도 비길 만큼 나를 압도 하고 감동 시키기에 충분했다.
광대무변한 시공, 수백 억 광년 광년에 걸치는 아득한 시공에 비긴다면 단지 한 찰나 동안 왔다 감에 불과한 사람의 생애, 이토록 옹색한 여건 앞에 놀랍게도 우주의 크기만큼, 그 신비만큼의 값진 것이 깃들 수가 있다.
나는 ‘앤 드류언’과 만나고 ‘칼 세이건’이라는 나와 만나게 된 축복과 기쁨, 그 밖에도 무한량의 의미 앞에 이 책을 바친다는 바로 그런 뜻이었다.
이를 데 없이 광활절묘한 우주관의 한가운데에 그것도 중심의 중심이라 할 절대적 원심에 집어 넣고 인식하게 되는 건 하나의 사람이다.
그와 만났으며 그와 함께 동시대 그리고 같은 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귀중한 기회, 의미의 심연과 차오르는 기쁨을 그의 거대한 지성과 성숙한 감성의 일치 가운데 힘있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의 우주관, 그리고 그 안의 눈동자 같은 그의 인간관이야말로 만인이 나눠 가질 인간적 복음이라고 여겨지기만 한다.
오늘을 사는 성인상(聖人像)
대낮에 등불을 밝혀 들고 사람을 찾아 다녔다는 디오게네스의 얘기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아름다운 사람 즉 사람의 귀한 값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 이를 그는 만나고 싶었으리라. 과연 어떤 이를 찾게 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전해 오는 바가 없고, 그러나 오늘에까지도 그 작업이 이어져 온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이 시대는 사람을 찾고 있으며 지나간 모든 시대에도 역시 그랬었다. 역사란 사람의 행적과 그 평가를 기록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 중에서도 제일 고귀한 건 교회사이며, 몇몇 분의 뛰어난 영성이 이를 빛내고 있다. 그들은 신과 사람을 이어주는 순금의 고리였으니, 바로 그들이 들어 왔기에 아직도 신은 사람에게 절망치 않으신다고 보겠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인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고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 왔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건 오늘날의 성인은 그 수효가 매우 여럿일 것이라는 점이다.
사건이 중첩하고 인간은 혼자서 궁지의 낭떠리지에 서는 일이 허다하다. 벼랑에까지 서는 일이 허다하다. 벼랑에까지 왔는데도 아직 추적의 발걸음은 따라온다. 전신의 위급감으로 하여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기도 한다. 아주 잠시.
그리고 이런 때 사람은 결단하는 용기를 배운다. 친구를 만나면 어둑한 얼굴로 무주 앉아 인간이고자 하는 일련의 난제를 사이에 두고 서로서로 저편 이의 지혜를 묻는다.
세계사의 흐름을 보더라도 오늘은 중지 衆知의 시대요, 독선과 영웅주의는 이미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문화도 갈수록 세분화하여 전문적으로 발전하다. 예컨대 오늘의 명의 名醫는 인체의 한 부분밖에 상관하지 않으며, 한두 사람의 명인을 가지고는 위대한 교향악의 연주를 꿈꿀 수조차 없다.
한 편의 영화도 수십 가지 측면으로 논하게 됨으로써 영화상의 각 면이 오죽이나 다양한가 말이다.
그러니만큼 선행 또한 혼자서 담당한다고는 못할 일이다. 한 나라의 전승 戰勝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위정자나 사령관만의 공로일 수가 없고 참전한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무명전사자들의 피 값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시선은 한두 사람의 공격을 헤아린다 해도 하나님은 필연코 전모를 다 살피실 것이다.
현대의 성인은 외롭고 무력한 손들을 맞잡고 놓지 않는 평복의 친구일 것이다.
집행 직전의 사형수를 만난 사람의 말이 그 죄수의 마지막 눈빛이 성자처럼 거룩하더라고 전했을 때 우리는 충격을 받았었다.
생전의 죄값을 몇 곱절로 갚음하고 티없는 보옥 처럼 영롱이 닦여진 그런 심정이었을 것도 같다. 성세를 받고 난생 처음로 하늘에 맡기는 화평을 누렸기도 하리라. 성자처럼 이 아니고 정작으로 성자였을지도 모른다.
철로 위의 모녀를 떠밀어내고 다음 순간 기차에 깔려 죽은 역장도 범인 凡人의 행적을 뛰어넘고 있다.
저들을 맞이하신 하나님은 맨 먼저 그 몸부터 껴안자 주셨으리라. 신으로서도 참을 수 없으신 한 주름의 눈물을 흘리시면서….
죽어야만이 선행을 이룸도 물론 아니다. 매일 매시간이 죽음과 같은 고통이며 인내일 수도 있고, 평생 드러나지 않는 인종과 헌신에 살다 간 사람도 허다하리라. 나타내진 않는 사랑과 축복은 더우기나 빛부시다. 그 마음이 온유하여 화해를 시키는 일에 명수인 사람이나 남 달리 용서에 능한 자도 있었으리라.
오히려 번쩍거리는 이름과 높은 의자에 있는 이가 진정한 내면의 자격으로서는 가장 말석에, 또 제일로 남루한 행색으로 있게 될 때도 없지 않으리라. 성서에 말씀하신 바,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함은 단지 축재자만을 가리킴이 아니고 높은 의자와 유명인 일반을 두고서의 경고일 듯싶다. 세속적 성공의 전부를 포괄하는 의미심장한 지칭이라고 풀이해야 한다.
오늘의 성인은 도시의 저변에 모래알처럼 깔린 무명인들 중에 있으리라. 잡다한 소음과 흙먼지 바닥의 탁한 공기에도 익숙하면서 때로는 낡은 신문지를 깔고 경기장의 흥분에도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미숙한 투수에게도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소박한 열정 안에 시대의 의로움은 자란다.유정한 가슴들이기만 하면 서로 잘 울려퍼지는 쩌렁쩌랑한 공감의 메아리.
현대의 성인은 외롭고 무력한 손들을 맞잡고 놓지 않는 평복의 친구일 것이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돕자는 구호들이 나돌고 있으나 어찌 그들뿐이라고 하랴.
그들을 우선하여 돌볼 일은 물론이거니와 그 밖에도 능력의 한도까지 관심과 협동을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인간의 고뇌는 생태적이고 운명적인 성질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육체는 배부르고 자유로우나 영혼의 굶주림과 진정한 인간적 진로를 풀지 못했으므로 하여 땀 흘리며 번뇌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철저히 인간 속에 뛰어들되 어디에도 제한의 방어선을 긋지 않고 그 충실한 협조를 전 인류를 향해 바치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리라.
삶은 만남의 연속이고 하고많은 연분들이 저마다 무엇인가를 떨어뜨리며 지나간다. 하여 그의 소맷자락이 나의 옷깃과 잠시 스쳐 지나간 성인이나 성녀도 몇몇 분 계셨으리라.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이들이 참으로 적지 않았다. 성직자나 치유자들 중에 있었기도 했고, 다른 종교를 가진 분 중에, 그리고 심지어는 미신자들 중에도 그 영혼이 아름다운 이들이 허다했다. 이쪽에선 아직 신을 못 찾았다 하더라도 이미 신으로부터 발견되어 은총의 품 안에 있는 이들의 그 어여쁨.
나의 인간관은 다분히 낙관적인 것인지 몰라도 몹시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슴 속에 풍요한 보고 寶庫 를 이루어 온다. 비록 어떤 한 사람에게 절망했을 때라도 또 다른 사람들이 인간적 희망을 메꿔 주곤 하여 나에게는 어느 만큼의 인간적 만족이 항상 있어 온다.
세계의 인구가 수십 억이나 된다고 하니 성인의 비례로 이에 따라 불어났을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 인 印을 감추고 사는 성인 위 位의 이웃이 정녕 여럿일 것이리라. 내 남은 시간의 귀중한 일거리라면 이렇듯이 아름다운 영혼을 찾아 만나려는 소망이요, 그분들에게 배우고 본받으려는 그 다짐이다.
주의 영광을 앞세우는 기도
기도의 성취는 기도 드린 바를 얻어냄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거듭거듭 기도하라는 권장이나 다짐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 적잖이 생각할 바가 있다. 기도는 사람의 간청이요 주께서 이를 들어 주신다는 공식은 심히 일방적이며 또 너무나 단순하다. 먼저 우리가 간구하는 바의 뜻과 깊이를 스스로 목상하고 건실하게 성숙시켜야 하며, 아울러 주시는 분의 섭리에 의하여 다른 것으로 대치되거나 거부될 수도 있을 일을 충분히 수긍해야 한다.
가령 이렇다.
아이는 맛있거나 재미있는 것을 원하지만 어른은 자양분과 유익함을 더 주고 싶은 경우와 같은 일이 신과 사람 사이에 번번이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성급히 작정하고 숨쉴새 없이 졸라대는 식의 기도를 하곤 한다. 마치도 요구하면서 쳐들어가는 형세이고 이에 따라 주님은 구석으로 디밀리는 양상이나 아닌지를 잘 생각해 볼 일이다.
간청은 시간 안에 무르익혀서 확고한 인식으로 영글려야 하고, 한편으로 신의 베푸심에는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주실 수 있도록 헐겁고 편안한 여유를 보장해 드려야만 할 것 같다. 한 포기의 풀이 자람에 있어서도 수분과 대기와 햇빛이 있어야 하듯, 이에 못지않게 그 시기와 분량과 자체의 흡수 능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사람은 언제나 얻으려고 하고 신은 항상 주신다. 헌데 사람의 갈구함으로 말하면, 얻되 빨리 얻고 싶고 이것저것 많이 얻고 싶어 한다. 전후좌우의 균형을 살피거나 지루한 기다림을 인내할 작정 같은 건 아예 없다. 하물며 주시는 분의 형편이나 판별하심에 대하여는 도무지 헤아리려 하질 않는다.
이에 생각해 보자.
빨리 얻거나 많이 얻는 것보다 더 보배로운 가치는 으뜸으로 좋은 것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만이 오직 ‘가장 좋은 것’을 아시며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시고자 한다. 진정 이를 믿는다면 주님의 뜻에 사람의 강박이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분별에 다다르리라.
기도하자.
기도하고 또 기도하자.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시작에 불과하며 기도가 최미 최선의 것으로 꽃피기 위하여는 더 넓은 테두리를 우리의 뜨거운 가슴에 품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얻는 이의 유익 위에 베푸시는 분의 크나큼 보람과 가치가 임하시도록 축원하며 이를 따라야 할 것이다.
결혼에 대하여
결혼이란 신선한 언어이며 모험의 언어, 운명의 언어이기도 하다.
사람이 이 말을 갖기 이전부터 결혼은 있어 왔고, 어떠한 표현도 탄생되기 전부터 오늘날의 심히 복잡한 해석에 이르도록 까지 인간사의 주축이 되어 왔음이 사실이다.
오늘 다시 우리는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서 몹시 늙고 항상 새롭기도 한 이 개념의 속살을 들추어내 보자.
결혼이 가져 오는 건 가장 좋은 반려에서 가장 나쁜 반려에 이르는 사이의 누군가를 데려오게 되는 일이다. 이것은 결정이며 서약의 형식으로 온다. 호적등본을 떠 옮기고 주소를 바꾸며 법원에 등록을 한다. 고락과 영욕을 반분하며 가문의 위상 位相을 둘이서만 나눈다. 때문에 둘을 한몸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동일 혈육의 뜻을 지니며 가능하다면 동일 영혼에도 이르러야 연분의 완결이라 하겠는데, 이 특유의 유대를 살필 때 한 가닥 율연감 慄然感[주: 두려워 떠는 감정] 을 금치 못한다.
결혼은 선택에서 비롯된다.
누구를 선택하게 되느냐는 문제는 그 먼저 선택하는 사람 자신이 누구이냐에 많이 달려 있다. 사람의 만남은 원칙적으로 동류의 견인이라 보겠기에 결국 그 자신만큼의 성질과 값어치를 찾아낸다. 그러므로 누구를 찾아내느냐 하는 건 내가 누구이냐에 따라 거의 정해진다.
결혼은 균형을 요구한다.
이 균형을 더욱 잘 봐주기 위하여 주변의 여러 사람이 불려 나온다.
‘그들이 어울리는가’에 대해 살펴 주고 이 결과에 대한 논평도 짝이 잘 맞았다든가 아니라든가 의 표현을 취하게 된다.
결혼의 비결은 단순하다.
더 높은 지대에서 구하려면 나 자신이 보다 더 높은 곳에 이르러야 한다. 산정 山頂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피차가 거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인 것처럼 결혼의 법칙도 이것과 흡사하다. 자기를 키워 성숙의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린 이는 그 만큼에 상응하는 누군가를 알아볼 것이며 두 사람은 같은 값의 인간으로서 생애를 함께 할 연분의 글씨를 읽으리라.
동일한 것을 원하는 길벗으로서 가치관의 일치와 공동의 보람을 쌓아가는 가운데 마치도 한 사람의 내부와 같이 자연스러우며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도 서로가 충실한 보완작용에 마음 써 나아가야 되는 일을 외면할 수 없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갈망에만 조급하지 않고 피차의 허용을 더 가꾸고 고양시키는 가운데 관계의 확대를 도모한다.
사람은 결혼을 통하여 그 인간적 품격이 가장 잘 드러날 것도 같다. 저편 이를 헐어내는 결혼과 저편 이를 기르는 결혼이 있고, 나을 위해 그가 필요하다는 경우와 나를 주기 위해 그를 원했다는 결혼이 있다고 할 때 이들의 양상은 저절로 갈라져 나타날 것이다.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사랑과 참사랑을 모르는 사람의 맹목적 공상적인 사랑 사이의 거리는 클 것이고, 따라서 양자의 결혼에는 현격하게 품위의 차이가 보여질 것에 틀림없다.
결혼은 성 性의 결합이면서 그 이상으로 인격의 결합이어야 하며, 열정에서 출발하게 되는 그 이상으로 성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삶의 외경 畏敬 과 생명의 어여쁨을 마음 깊이 터득한 자만이 바르고 밝게 결혼의 진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심각한 고독은 실패한 공동생활이다’
‘이 세상에서 맛보는 지옥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사람을 옆에 두고 사는 일이며, 어이없게도 그 사람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런 의미의 말을 우리는 무수히 들어 왔다. 이처럼 고뇌의 끄나풀을 사이에 두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살아야 하는 제도가 결혼임을 어이하랴.
그 시련은 검고 끈적거리는 늪과도 같고 기적이 아니고선 도저히 구출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법정 투쟁에까지 끌고 가 다시 위자료 소동을 덧붙여서 혈투의 몰골에도 이른다. 더구나 자녀를 둔 부부에 있어서는 그 복잡한 후유증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 결혼은 그와 같은 결투장이어야 하는가.
결혼의 첫 시절엔 그들도 화목했을 것 같다. 언제 어떻게 해서 상처투성이의 암담한 골목길에 접어들었는지.
혹시는 그와 그녀가 다른 사람과 맺어졌더라면 이보다 더 나은 형편일 것인가.
지금껏 독신자였다면 여타의 사회생활을 원만히 치러 왔겠는지.
의문과 조바심은 끝이 없다.
결혼은 무엇인가?
다시금 물어 본다. 다시금 막막해져서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아무튼 한 결혼의 성공 여부를 알려면 저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결혼의 한가운데에 저들은 무엇을 두게 되었는가.
이해타산의 열병 치레였나?
질투를 수반하는 격렬한 애증이었나?
주변에의 관심에서 굴러다니는 뜬 소문들을 씹으며 소일했었나?
그 값어치 만큼의 수확으로 거두었을 것에 틀림없다.
아침 저녁으로 마음의 매무새를 바로잡는 성찰의 거울이었나?
축복, 인내, 신앙.
어쩌면 둘의 신 神을 거기에 모셨던 것인가?
어쨌거나 그 성질에 따른 심히 당연한 결과가 저들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결혼의 사회성.
대개의 경우, 하나의 가정은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의 가족들을 두고 있으며 가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마다 인간적인 연계를 가지기 마련이므로 사실상 작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물의 원심에서 둘레로 퍼지는 수문과도 같이 신속하고 민감한 영향을 입히게 됨으로 하여 그들은 이 ‘작은 사회’를 의식하고 치선의 지혜와 봉사로써 사랑의 일체감을 이루어 가야 한다.
사랑은 독점을 금한다.
‘나는 모든 것과 함께 그대를 사랑하며, 또한 그대 속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다’
‘너만을 사랑하기엔 너무나도 너를 사랑한다’
이 말들을 음미해 볼 일이다. 완전한 사랑은 배타적인 사랑을 배척한다고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그의 책 속에서 말하고 있다.
사랑은 독점이나 단절을 저지를 수가 없다. 사랑하는 이의 내면을 풍요케 하려면 아울러 모든 외적인 관련들도 따뜻이 품어 덥혀야 한다는 뜻이 된다. 나의 남편이면서 그 부모의 아들인 점, 나를 만나기 전부터 그의 귀중한 친구이던 점 등을 충분히 용납하는 가운데 둘의 ‘작은 사회’를 잘 가꾸어 가야 할 것이다.
칼릴 지브란도 말하고 있는 바 남편과 아내는 ‘신전의 두 기둥처럼 떨어져 있으면서’ 그 사이에 하나의 바다를 끼워 넣을 만큼 크고 든든한 관계를 지향해야 할 것 같다. 어린이가 아닌 성인들의 세계에서는 그들의 능력 나름으로 깊은 중심과 넓은 둘레를 요구 받게 되는 점을 명심해야 할 듯싶다.
‘너희는 너무 가까이 서지 마라. 한 그루의 사이페러스 나무 바로 옆에서는 또 하나의 사이페러스 나무가 자랄 수 없다’
지브란은 이와 같이 말하기도 했다. 연분의 완성이란 개체의 오나성 없이 바랄 수가 없다는 명확한 사유 思惟 가 드러나 보인다.
결혼은 연애와 중매 두 가지로 대략 나눠진다.
앞의 것은 스스로가 ‘그’를 찾아내는 일이며, 후자는 남이 찾아주는 셈이 된다. 그런데 중매결혼 쪽이 오히려 파탄이 적고 이혼율도 낮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앞서 말한 균형의 조건들이 미리 점검되고 인생을 먼저 겪은 이들의 배려도 보탬을 주었으려니 와, 그보다도 적은 기대밖에 갖지 않았던 출발의 겸손 탓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기 시작했고 시초의 불안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소박한 감사를 느낄 때 의외로 행복은 이들에게 미소 지었으리.
연애결혼은 흔히 열정과 자신감에서 출발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바랐던 데서 머리를 부딪는다. 열정이란 쉬이 시드는 것. 깊이와 지구력이 모자란다. 저력이 달리는 새 삶의 각오는 어느덧 실망을 불러와 버리고 이 허약한 땅에 혼란과 슬픔들이 들이 닥친다. 얼마 못 가서 주저앉아 버리고 잡초처럼 솟아나는 결혼의 비극들을 어이 없이 바라본다.
결혼의 암초는 여러 곳에 있다.
그도 그럴 밖에.
독신으로 산다 해도 어차피 면할 수가 없을 삶 그 자체의 원리인 것을 결혼했다 해서 달라질 까닭이 없다. 결혼은 단지 험난한 항로를 둘이서 가는 데 불과하며, 두 사람 몫이니만큼 위험도 갑절이 된다고 알면 대략 들어맞는다.
결혼을 반석 위에 얹어 놓으려는 사람들은 조만간에 한 가지 원리를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결혼도 종교와 같아야 한다는 그것을 말이다.
신 신을 바꾸지 않듯이 결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일종의 신앙과 그 투철한 순교 의식만이 결혼을 참담한 실패로부터 구출해 줄 것이다.
사람이 훌륭한 그만큼만 사랑이 훌륭할 수 있고, 인내를 더하는 그 한도까지만 결혼이 안전할 수 있음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 버리지 말자.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후 좌우 어디쯤에 그는 서 있는가, 간혹 이 생각을 해 본다.
인간이 생래적으로 갖고 태어난 본연의 뜻과 소명에 맞부딪치면서 시대의 목마름이 원하는 시대적 요청에도 부합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리 시대 의 義의 목마름, 정의의 목마름, 그리고 창조적 에너지의 궁핍 등도 돌아보면서 대충 손쉬운 기준부터 헤아려 본다.
장한 어머니, 모범 주부 등 장려되고 있는 부녀자상으로는 근면 절약형이 많고, 봉사하는 어머니나 저축하는 아내라는 실생활적 유형이 좋은 평가를 받는 듯이 보이며, 다른 한편으론 정신 영토의 존귀함을 내세워 덕성의 옹호부터 뜨겁게 주장하는 음성도 들린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기실 어떤 사람인가.
이 물음은 매우 중요하며 이때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그들의 수효도 인구 폭주의 상황과 비례가 잘 맞는 풍성한 복합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녕 누가 아름다우며 또한 어째서 아름다운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
풍요하고도 현란한 자연에 에워싸였으면서 사람의 내면은 차갑고 건조하며 질서는 뒤집히고 사방엔 반목들이 즐비하게 솟아 있다. 넓고 깊고 따스한 마음, 안식과 위안을 능히 베푸는 능력, 화목과 협동을 도모하는 의지,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뽑아 쓰는 충실한 용기, 감사와 겸손, 기쁨을 늘려 가는 지혜, 이런 것이 너무나 결핍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바로 이와 같은 점을 만들고 채워주는 자들일까.
뒤에 오는 이를 기다리며 앞서가는 자에게 길을 터주는 사람, 절망을 가장 멀리하는 사람, 가치관이 성숙한 사람, 좋은 감수성과 건강한 인내심, 살아 행동하는 청신한 젊은, 순수와 열정과 관용 등등을 꼽아 보기도 한다.
그리곤 또 한번 물어본다. 그런 사람이어야 아름다운가. 그쯤에 다다르면 능히 아름다운 이가 되는가.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을 원하고 있다. 단지 원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도 그렇게 되기 위해 각자가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모두가 다 함께 정진하는 일이야말로 바람직하다고 알기 때문이다.
하루 해가 저물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내 집과 내 방, 그리고 나의 잠자리가 있는 곳이다. 가족과의 상관에서 얽히는 몇 가지 절차를 마저 다 치르고 난 맨 끝의 순서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와 내 영혼이 마주 앉아 흐릿한 램프의 심지를 돋우고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로 얼마간 얘기한다. 단순한 질문과 이에 따른 단순한 긴 침묵이 흐르기도 한다.
아름다운 삶은 어떤 것인가.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나 자신은 미운 사람인가. 희망이 없을 만큼 그렇게 미운 사람인가.
마음의 거울을 닦는다.
닦으면 또 흐려지는 그것을 거듭거듭 닦고 문지르면서 생각에 잠긴다. 거울이 저면, 마음의 밑바닥엔 구불구불 이어진 기나긴 길이 있다. 생애라 부르는 그 길이다.
아름다운 이와 만나고 싶고 아름다운 이들의 틈에서 살고도 싶은 가운데 꿈꾸고 근심하면서 오래도록 묵묵히 바라보는 거울 속의 여자가 있다.
‘나’라고 부르는 그 어설픈 이름이여.
칠월의 젊음들
칠월의 새벽은 성급하다.
밤의 안식과 여명의 적막을 얇게 안으로 끼워 넣고 어느덧 세상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고층 아파트 맨 위의 창문까지도 샅샅이 들여다보는 키 큰 햇살은 한낮이 되면서 빛의 어지럼증을 사정없이 쏟아 붓는다.
건물이 밀집하는 도시의 한가운데에 어디서 오는지 새소리부터 요란하면 사람들은 이불을 걷어차고 수도물을 뽑기 시작한다.
수도적에 가득 담겨 오늘의 첫 신호를 기다리던 옥빛의 청량한 냉수는 후련하게 몸을 풀며 좔좔 쏟아져 내린다. 비누 향기에도 묻어 오는 삶의 축복을 뉘라 모른다고 하랴.
사람들은 집을 나선다.
모든 일터는 삽시에 붐비게 되고 방학을 맞은 젊은이들을 받아들이기에 산도 바다도 커다란 품 속을 열어 젖혔다.
그네들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벌거숭이다. 뙤약볕에 익는 과일 그대로인 저들의 모습을 보라. 황동 구리 빛으로 살갗이 타면서 그 안엔 가장 싱그러운 초록으로 넘치는 그 생명들임을.
그러나 이렇듯 노출의 계절일수록 마음 깊이 감싸고 동여 매는 비장의 진실들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해일처럼 부푸는 가슴 안의 불 무더기, 사나운 격정도 능히 통어 統御 하면서 보석의 응고를 기다리는 강건한 사랑인들 없을 것인가.
꿀벌이 꿀을 비축하듯이 스스로의 당분을 채워 담는 젊은 날의 순정과 서름서름 눈길을 피하는 수줍음 안에 작은 총탄같이 묻어두는 청결한 첫 고백인들 없을 것인가.
젊은 날은 등반의 시절이다.
정상을 향해 내딛는 조심스런 발걸음 동안엔 땀에 절은 등산복과 힘겨운 등산구라도 결코 느슨하게 걸머질 수는 없다. 전인 全人으로의 선택. 그 준엄한 운명과 마주 서기까지는 한 치의 속살도 보이지 않는 순결의 아집인들 없을 것인가.
저들의 더운 심장, 그리고 냉철한 절제를 위하여, 건배.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눈이 몹시 피로하여 전기 불을 줄이고 있어 본다. 그래도 원고지의 둘레는 희뿌옇게 드러나 보이므로 행간을 재면서 글을 쓸 수 있고 아침엔 손 본 다음 새 원고지에 옮겨 쓰면 된다.
글씨나 행간 쯤은 어지간히 손에 익은 셈이나 글의 내용은 매번 겁나고 확신이 잡히질 않는다. 사념이 엉기지 않고 발효가 더딘 탓일 것이다. 어두운 데서 얼마간 마음이 열리면 너네 들을 불러 보리라. 부디 몸과 마음에 향유 바르는 안식과 위안을 함께 빌자.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아.
부풀어 넘치는 밤의 고요로써 너네의 영혼을 깊은 바다와도 같이 채워 본 일이 있는가. 몇 백 억 광년이라는 숫자로써만 겨우 헤아릴 무변광막한 우주 안에서 한낱 모래알에 불과한 지구의 손님으로, 우리는 끊임없는 새 과제와 만난다. 시련이나 고통일 때도 많다. 젊은 날 젊은이에겐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이로써 단련되어 인격의 독립인 자기 확립을 얻어가기 때문이다. 나의 아픔을 통해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내 영혼의 어둠과 추위를 체험함으로써 친구들의 좌절이나 허탈을 공감하게 된다.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아.
남달리 가열했던 고통의 탓으로 오히려 위대한 업적을 기록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손쉬운 예로 누구나 잘 아는 안데르센을 들더라도 그렇다.
가난한 구두 직공이면서 희대의 추남이기도 했던 그의 생애는 외롭고 목마른 것이었다. 전심 전력으로 사랑을 바친 세 번의 열애가 있었으나 모두 보답 없는 비련으로 끝나고 말았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한없는 깊이로 침잠하고 성숙해져서 그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성찬’을 차여 놓았으며, 그의 동화는 사랑과 관용에 충만하고 연민과 축복의 빛을 띠어 능히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덮여낸다.
그의 책을 읽고 자란 어린이는 평생 동안 꿈의 세계를 잃지 않으며 정서의 고갈에 빠지지 않는다. 그의 문학이야말로 국경이 없는 ‘마음의 고향’이요 따라서 세계의 고전이 되고 있다.
‘인어공주 이야기’, ‘백조’, ‘주석 병정’, 아기 국화’, ‘엄지 공주’, ‘아빠가 하는 일은’ 등에 담겨 잇는 슬픔과 인내와 용맹한 사랑의 승리는 사랑이 불 밝힌 가장 아름다운 등불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아
몸의 중심을 잡아 주는 귀중한 척추가 불의의 상처를 입고 진흙바닥에 쓰러지듯이 은밀한 영혼 속속들이 아픈 금을 입어 실날 같은 피를 흘리는 날이 있다. 더구나 어린 나이의 엄청난 첫 부상은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충격인가를 안다 하겠으니 그런 때일수록 잊어선 안될 사랑의 계율을 명심하여라.
부상은 바깥의 작용이나, 상처를 아물리는 힘은 모두의 내부에서 솟아올라야 한다. 상처는 다른 이가 주었으되 치유는 자력의 능력일 밖에 없다. 아픔을 이겨내는 용기. 할 수만 있다면 가해자를 용서하는 관용이야말로 인생의 젊디젊은 새 주인인 모두가 익혀야 할 인간 제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커다란 영혼에선 모든 것이 다 크다’고 한 파스칼의 말을 이에 들거니와, 사납게 덜미를 휘어잡는 드센 고통과 절망의 유인도 극복하면서 부디 강하고 청순하게 꽃 피어라.
물론 인내만이 능사인 건 아니다. 총명한 분별과 준열한 절제, 그리고 남의 탓을 살피기에 앞서 자기를 반성하는 겸양도 갖추어야 할 것이나, 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의 상태와 그 자각을 다지는 일일 것이다.
삶에는 필연코 아픔이 따라오며 이로 인하여 사람이 자라난다는 원리를 수긍하면서 크고 크고 활달한 인간적 도량을 품어라. 모쪼록 불사조의 넋을 지니고 잿더미에서 푸드득푸드득 날아오르는 그런 이들 이거라.
사랑의 큰 땅
사랑의 해석이 달라져 갑니다. 그 진실성과 밀도 등의 근본은 변할 수 없으니 우선 사랑의 대상이 급격히 확대되는 현실을 놓칠 수가 없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과 이에 따른 드라마를 커다란 게시판처럼 걸어 놓고 보던 시류는 흘러가고 객석을 메우던 그 사람들이 각기 저들의 문제를 펼쳐 들고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있습니다.
사람의 수효와 늘고 삶의 상황이 복잡한 그만큼 이해 관계도 각박해진 오늘날은, 더 많은 사람의 공익과 질서가 요청되며 화목의 지혜가 시급해졌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노인 문제, 심각합니다.
청소년 문제, 더 심각합니다.
일해도 배고픈 근로자 문제, 결코 덮어 두지 못합니다. 해외취업자와 가족 간에도 잇달아 문제가 생겨납니다. 군경의 노고도 재인식할 때입니다. 고아원, 재활원, 장애자 보호기관에도 어려움이 쌓여있습니다.
더 심각한 건 삶의 직접적인 위협입니다. 가난과 질병과 각종 공해와 전쟁의 공포들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난제들을 단번에 어쩌자는 건 물론 아닙니다. 개인에게 맞추던 관심의 초점이 둘레로 번져나가 점차로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의 차원으로 부풀게 될 사실에 무심할 수 없다는 말부터 하고자 합니다.
도처에 인간의 사랑과 열성을 필요로 하는 요청이 놓습니다. 기계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의 이해와 인정이 어루만져야만 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올 것입니까. 가장 풍족한 저장 탱크에서 얻어와야 할 것이고 보면 그건 다름아닌 젊은이에게서, 특히는 젊은 여성들의 풋풋하고 풍요한 모성성 母性性에게 가져올 밖에 없습니다.
여성에겐 자체의 목마름만 해도 정녕 엄청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모든 고통과의 사이에 갖가지 위로가 솟아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해에서 출발하며 나와 이웃 사이에서 ‘타인’이란 장벽을 헐어낼 때 자랄 수 있습니다. 그와 내가 한 가지 아픔을 앓는다고 여길 때, 그리하여 한 손으로 두 상처를 함께 만져야겠다고 원하게 될 때 인간성의 문은 밖으로 열리고 존재간의 통풍이 비롯되는 게 아닐는지 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그의 몸은 헐벗고 그의 마음은 오랫동안 먹지 못한 사람처럼 굶주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가 불볕에 시달리는 갈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목마름인 동시에 목을 축이게 하는 치료법인 것입니다. 병으로 하여 치유를 찾는 구도 求道에 나서는 일입니다. 사랑에 빠진 이에겐 안식이 없으며 반면에 사랑하고 있는 사람만이 정말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생동하는 삶이야말로 아픈 살갗을 찢어내고 그 속에서 청신한 새 살결을 돋아나게 합니다.
레바논의 천재 시인 칼릴 지브란은 사랑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곡식 단이듯, 자기에게로 거두어들이고 까벗겨 껍질을 털어 버리며 순백의 가루로 변하게 하여 유연해질 때까지 반죽하며, 그 다음 거룩한 불로 구워서 성스러운 잔치에 내놓는 빵이 되게 한다’고.
그는 또한 말했습니다.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그대를 상처받게 되고 그리하여 즐겁게 피 흘리게 되라’고.
금을 만드는 가열한 연금술처럼 사랑도 준열히 가다듬어야 만이 성숙의 모습으로 다듬어질 수 있다는 원리를 위와 같이 표현했다고 여겨집니다. 순금과 같이 사랑에서도 순도를 물을 때 누가 감히 그 저울대 위에 주저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건 완벽한 사랑에 있기보다 거기를 향해 가는 과정의 충실이 아닐까요. 배우면서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손 끝이 맞닿는 최선의 길벗을 탐함이 아닐까요.
사랑에는 꿈이 있습니다.
더 깊이에 이르고자 했을 때는 그 성질의 완미한 표본을 만들게 되었었습니다. 더 높게 이르고자 했을 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동서의 순교사화 殉敎史話는 그 일례일 수 있습니다.
한데 더 넓은 테두리를 지향하여 두 팔을 길레 펴는 건 바로 이 시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나라 그 지방의 풍습에 맞추어 입는 일부 수녀회의 평복 平服도 이 점에서 살필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시내에 나가 보면 사람들이 너무 붐벼서 커다란 덩어리를 이룰 때가 있습니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잠시 현기증을 못 참는 일도 생깁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살고 싶어하고 사랑 받고 싶어함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아찔합니다. 이들을 다 덮어줄 만큼의 커다란 하늘과 따뜻한 가슴이 될 이가 누구겠습니까. 존재의 외로움을 뼈저리게 아는 젊은 날의 풍요한 영혼, 그들이 앞줄에 서야 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모성의 감정이 눈뜨게 되었던 그녀가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간혹 텔레비전에서 동물의 세계를 촬영한 영화를 봅니다. 얼마나 죄 없고 사랑스러운지요. 하물며 사람이야 훨씬 더 귀하지 않겠습니까.
첫새벽에 좌석을 메우는 대학의 도서관, 그보다 먼저 마당에 뿌려져 있는 조간 신문, 이른 시간 통근차에 맞추려고 미명에 일어나 밥을 짓는 어머니와 아내들, 모두 얼마나 대견합니까.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하여도 여러 사람의 사랑의 울타리를 먼저 두르고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 사랑하는 이의 좌석을 정해 주고 풍족히 사랑 받게 해준다면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하물며 신의 은총까지를 우리 각자의 기원과 촉매에 의하여 높고 든든한 지붕처럼 그가 사는 하늘에 얹어 줄 수 있다면 이에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일수록 배타적일 수가 없으며 넓고 광활한 평야를 온 마음으로 안아 들이는 일이라고 오로지 믿어지고 있습니다.
시를 위하여
시인은 한 장의 백지를 언제나 의식한다. 그 안에 담을 주옥 같은 싯구를 염하며 쉼 없이 내면의 작업을 이어 가지만 그 얻는 바는 심히 허적 虛寂 한 것이곤 한다.
어찌 시인뿐이랴.
사람은 자아의 준령을 가파롭게 올라가면서 이미 지치고들 있다. 아무리 올라가도 그 자신의 산기슭을 더 넘어서지 못하는 자아의 숙명, 갖가지 문제들도 실인즉 자신만이 그 원인을 알고 있다 할 것이다.
시인은 곧잘 거부의 고배를 마신다. 시는 깃들어 주지 않고 시의 조갈만 부풀어서 미칠 지경에도 이른다. 쉽사리 잡힐 듯싶은 간격을 사이하고 좀처럼 붙잡혀 주지 않는 그것.
간혹 깃털의 한두 오라기를 손아귀에 넣어 보지만 이쯤으론 어림없는 노릇임을 먼저 시인의 양심이 알아 버린다. 그날도 그 다음날도 시의 심장은 만져지지 않고 희미한 몸 그림자를 본 것쯤으로 노작 勞作의 하루 해는 닫혀 버린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의 고뇌와 당혹을 시인들은 자주 토로한다. 출발점에선 백 사람이 함께 달리는 걸, 결승점 언저리에선 한 두 사람이 힘겹게 뛰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에 패하고 말았는가. 그토록 시는 비정하며 쓴 잔만을 따라 먹이는가. 하지만 여기서도 시인 자신의 미급에 더 많이 상관되고 있음을 보아 넘기지 못하리라.
시는 결정 結晶의 작업이다.
처음엔 돌에 불과했으나 천만 년의 암울을 견디어 마침내 보석이 되는 원리를 묵상할 일이다. 좋은 술을 얻으려면 술 항아리조차 흔들거나 옮겨선 안 된다고 한다. 묵이나 한천을 만들 때도 필요한 응고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보장하듯이, 우리의 시도 우리의 가슴 안에서 충분히 엉기게 하고 전발효를 하도록 해야 한다.
한데 우리는 그와 같이 하였든 가?
더하여, 시는 시인의 점유를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시인의 영혼을 원한다. 전령의 몰입과 그 순열한 불탐을 원한다. 시인의 한낱 속령 屬領이 되기엔 시란 너무나도 핍진하는 전폭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의 일상은 이 원리에 아득히 미달한다.
세상사 틈틈이 시를 쓴다.
흙먼지 바닥에서 쉽사리 시의 낙수 落穗를 주우려 한다.
호주머니 맨 밑바닥에 시의 구겨진 초고 뭉치가 있게 한다. 용무를 위해선 여행도 하지만 시를 위해서 그런 결단까진 내리지 않는다.
실연이나 뼈아픈 손실에 대하여서는 우는 일이 허다하면서 막상 시의 불성취를 슬퍼하여 눈물짓는 일은 없다.
아아, 그래서 시는 반란을 일으키곤 했음을 겨우 내가 알게 되었다.
시를 위해 번민하고, 시를 위해 불면의 밤들과 만나며, 시 그것만을 위해 말벗 없는 여행길에도 올라야 한다.
객창의 몇 날 몇 밤을 시하고만 만나고 시와 대화하면서 그 수척한 몸매, 외로운 눈길 앞에 미루었던 애경을 흡족히 바쳐야 한다.
연애할 때 한 사람만을 생각하듯이 시도 전적인 열중을 요구한다. 이를 채워 주지 못할 때 시인의 원고지는 차갑고 황량한 백지인 채 이 날의 삶과 함께 영영 닫혀 버리는 것을.
하긴 능히 그럴 법한 일이다.
자식을 키우는 일만 해도, 전적이 바라봄으로써 시종일관 지켜주지 않으면 애정 결핍의 심각한 부작용들을 부모의 눈앞에 드러내 보이며 이를 복수한다.
금강석의 원리를 살펴보자.
하나의 다이아몬드를 쪼개내어 둘, 셋으로 갈라내면 애초의 값어치는 형편없이 감소된다. 시의 원리도 바로 이와 같으리라. 나의 경우, 시 쓰는 한 시절엔 산문을 잊게 되고 산문에 치우쳐 지내면 시를 전해 못 쓰겠기만 하다. 물론 비상한 사람들은 시, 소설, 에세이, 평론까지도 동일한 격조의 풍요한 걸작들을 생산하고 있으나 범상인의 처지로선 꿈에서도 이런 일을 바랄 수가 없다.
피아니스트가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듯이, 운동선수가 하루도 연습을 거리지 않듯이, 시인도 날마다 시로 인해 땀 흘리고 괴로워 해야 한다. 시의 안일이야말로 바로 시의 모독이며 시는 이때 형벌의 칼날을 세우고 다가선다.
전념의 두 글자야말로 무섭다.
글과 가정과 직장이 저마다 사나운 위력으로 이 ‘전념’을 나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나의 역부족인 탓에 갖가지 반란을 초래해오고 말았다.
별수 없이 나는 신음한다. 막무가내의 비참에 전 심신이 짓눌린다.
시인에겐 시가 종교며 신앙인 것에 이어져야 하며 힘의 한량까진 이를 충실히 섬겨야만 한다. 만약 거스를 땐 용서 없이 반란의 피 뭉치를 우리 앞에 내던지고 시는 바람에 실려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
몰입과 전념만이 시를 건지는 순금의 어망인 점, 이가 곧 시의 계명이요 나아가 삶 전반의 준열한 경고임을 잠시도 잊어선 안 되리라.
다시금 송년의 문턱에 서서 이즈음 내 심정은 다분히 심각하다.
절대이신 신 神을 섬기듯이 삶의 험준도 하나하나 불덩이 같은 전력 투구로써 받들고 감당해야 한다는, 절대의 한 음성이 쩌렁쩌렁 나의 귓전을 울려 주고 있다.
만들어 주는 삶
현실의 삶은 여러 가지 잡다한 관련 위에 세워져 있으며, 특별한 한 사람을 선택한 경우에도 그를 뒤따르는 부수적인 사람들이 생활 사이로 침범해 들어온다.
이때는 필시 나를 변조하고 둘 사이의 원심을 더 여럿 사이의 넓은 테두리까지 확산해야 할 것 같다. 둘의 사랑이 건강하고 함께 소명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어떤 불가능도 부숴내고 적음과 성취에로 지향을 돌리리라 여겨진다.
‘여자는 훌륭한 남자를 만드는 천재여야 한다’는 말을 음미해 본다. 다음으로 이 말을 반대의 위치로 바꾸어 놓고 본다.
‘남자는 훌륭한 여자를 만드는 천재여야 한다’고.
여기서 흥미로운 건 만든다는 말 뜻이다. 여자가 남자를 만들며 남자는 여자를 만드는가. 과연 그런가.
‘신 神은 결합되는 것 외에는 만드시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이 말을 수긍한다면 결합이야말로 조물주의 의도이며 피조물의 본성에도 배어들어 연면한 희구로 이어져 왔으리라. 태초에서 오늘까지 사람은 서로 찾아왔고 맺어지려 원했으며 이것의 성립이 깨어질 땐 암담한 낙담에 가라앉곤 했다. 서로 당기려 하는 유대의 그 운명적인 끄나풀을 손에서 놓친 일은 결코 없었다.
해후 해후의 오묘함이 사람이라고 확신이 치솟을 때는 매우 치열하게 그를 원하게 된다. 그의 것이 되고 싶거나 혹은 그가 내 것이어야만 하겠다는 절대적인 갈망과 탄원이 치받는다. 숨도 쉴 수 없도록 몰아 沒我의 열정이 솟구쳐 열병 치레를 강요한다. 그러면서 이 형편 안에서 ‘만들어 주려는’ 성질과 ‘만듦을 받으려는’ 의식이 함께 출발하고 있다.
그를 통하여 나를 발견한다.
그의 명령에 의하여 나의 이름이 솟아나고 그의 손에서 생수를 마신다. 온통 생명의 열탕으로 부글거리는 천지간에 온갖 신비가 한꺼번에 눈뜸을 보게 된다.
사람은 서로 찾아 만나고 그리하여 서로를 만들어 준다. 보다 더 잘 만들어 주려 했으나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게도 된다. 이를 연구하고 제도화한 것이 오늘날의 학교 교육, 종교 취향, 각종의 사회 시책들이기도 하다.
서로를 만들어 주는 관계, 가능한 한도까지 잘 만들어 주고 싶고 더 잘 만듦을 받고 싶은 염원과 그 결과들이 솟아난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벌써부터 이 바람이 강렬히 잠재해 왔었으며 아득한 어느 깊이에서 넘치게 담아 올리는 간망의 단 샘물이 되어지기도 한다. 눈을 감고 그 첫 모금을 삼킬 때 자주 숙연하다.
사람을 만드는 일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어떻게 만들고 싶으며 나에게 그 일이 가능한가.
둘은 어디에 설 것인가.
질문은 한이 없으되 과연 그 대답은 어디서 오는가. 문제를 풀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서로 만들어 준다.
이에 첫째로 우리는 그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 부터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어떤 값어치로 키워 왔습니까?’
이 질문과 거짓 없는 답변이 중요하다. 줄 수 있는 품목과 품질은 어떤 것이며, 그 물량은 넉넉한가.
누구든지 그가 갖고 있는 것 밖엔 더 주지 못한다. 따라서 자기를 위해 가꾸어 온 것이 없는 이는 남에게 베풀 게 없고 자기를 엉망으로 시들리고 더럽힌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그가 사랑하려 한들 이때의 사랑은 허약한 공상이거나 일시적 착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남에게 줄 수 있는 자격의 그 척도는 스스로를 어떻게 키워 왔는가에 달려있다.
둘이 만나 더 좋은 삶을 원할 때 세상은 무엇을 주는가.
아마도 그 첫 번째 것은 세상이 주거나 안 주는 사실마저 초월하게 될 뜨거운 결속이리라. 만남 자체가 이미 은총이요, 가난한 둘이 만나 놀라운 부를 이루는 환희를 낳아도 줄 것이다.
하지만 둘의 만남 속에 귀한 촉매를 두어야만 하리라.
촉매란 무엇인가.
우선 자기 자신의 공허를 인식하고 이를 채우려는 의지와 분발일 것이다. 목마름과 물을 찾는 노력이 함께 투철하며 아울러 강물처럼 넘치는 내적 충식을 원하는 가운데 인격의 동맹을 이루고 그 중심에 신을 모시는 일일 것이리라. 왜냐하면 신이야말로 더 없는 촉매자이며 신의 속성이라 할 인간 속의 모든 양심적인 것, 돕지 않고서는 관계의 견고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굶주림을 어느 정도로도 해결하고 있는 사람만이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한다. 사람을 소유하기에 앞서 기르고자 하는 심정의 여유를 가지며 소유하기 위해, 그를 원하기보다 사랑하기 위하여 그를 원하는 입장에 서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만드는 자’의 기본 여건을 묻게 된다 하겠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으며 남자들이 무언가를 쫓아가고 있음과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여자는 기다렸으나 오는 이가 없었고, 남자는 달려갔지만 찾을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관론일까. 그러나 사실상 인간들의 평균치는 이쯤에서 별반 웃도는 듯 싶지가 않다.
아래의 한 예를 들어본다.
고등학교를 나온 후 유학길을 뚫어 미국에 건너간 외아들 하나만을 바라고 혼자 살아가는 초로의 여인이 있다. 그녀의 아들은 미국민의 생활의식에 동화된 탓인지 모처럼 보내 준 크리스마스 카드는 아무 글씨도 없이 찬란한 색채 그림 하나로만 봉투에 담겨져 배달되었다. 물론 거기엔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기 바란다는 글귀가 영어로 인쇄되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선 영락없는 백지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어머니’ 라든가 ‘보고 싶은 엄마께’라고 단 한 줄만 적어 보냈더라면 그녀의 마음 가득히, 아침 해 같은 광채가 채워졌을 것이거늘.
어찌 사람은 이다지도 살 줄을 모르는가. 가슴이 춥고 손발도 연신 저려 들기만 한다. 사람의 몰골이란 이같이도 서로 상처 입히고 입으면서 마찰과 불화를 쉽사리 저지른다. 그러나 간혹은 가지는 것 이상을 주게도 된다. 진실을 주고자 하는 부푼 마음으로 하여 뜻밖의 새것을 창조하여 땀으로 영글린 새 가치를 더운 손으로 건네는 일이니 이런 만남이란 정녕 놀랍다. 사랑은 예측을 벗어나 작은 기적들을 낳기도 한다.
사람의 탄생은 오직 한 번 뿐이나 때에 따라 여러 번의 신생을 맞는 이가 있다. 능력껏 새로 창조하는 삶, 심장의 피를 새롭게 하고 양심을 갈아 끼우며 더럽혀진 것을 씻어내기도 한다. 충실한 우정이나 진지한 사랑은 한 번 뿐인 탄생을 여러 번으로 부풀려 갖게도 해주며 여기에 관계의 이상 理想과 미학 美學이 솟아난다.
삶은 만남의 연속이고 낱낱의 만남은 모험에서 비롯된다. 좋은 햇빛이 좋은 나무를 자라게 하듯, 사람도 그 자신의 능력만큼만 저편 이를 끌어 올릴 수가 있다. 결국 훌륭한 여자는 훌륭한 남자를 가꾸어내며 값진 남자는 값진 여자를 키워낸다는 당연한 귀결에 다다른다.
‘여자에게 전적인 기대를 걸어 본 남자가 아니면 사람의 고독이 얼마나 불치의 것인가를 알지 못하리라’라고 남자 중의 하나가 그의 책 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묘한 노릇이다.
이 말이야말로 여자의 살 속에서, 그리고 고통스러운 영혼 속에서 수없이 부르짖어졌던 그 말이었는데 저들 역시도 같은 말을 뇌이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남녀를 가릴 바 아닌 전체 인간의 숙명이었단 말인가.
여자에게 이 말이 얼마나 절망적인 체험이었던가를 비추어 보면서 남자들이 입은 부상에 대하여도 새삼 절절한 연민을 자아낸다. 이래저래 산다는 일은 심히 어설픈 노릇이라 하겠음을.
‘내가 그대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은 영혼이었다. 그런데 그대의 마음 밖엔 더 보아내지 못했었다’고도 그들은 말하고 있다. 여자의 영성에 대하여 심히 쓸쓸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으나 이 말 역시 여자의 내부에서 비통하게 터져 나왔던 바로 그 탄식임을 어이하리.
위에서도 알 수 있는 건 남녀 사이의 동질성이며 남자와 여자는 그 본질에서 다를 게 없고 갈구와 고뇌에 있어서도 매우 엇비슷한 모습을 나타냄으로 하여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그도 원한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궁극적인 바람은 그의 내밀한 곳에까지 영접받아 들어가는 일이며 앞서 말한 ‘만들어 줌’도 이 근거에 발붙이게 된다. 사랑하는 가운데 사랑을 통하여 그의 모든 장점을 개발해냄이 고 ‘만들어 줌’이 아닐까. 사람에겐 비교적 흡족한 시한이 주어지고 있다. 이 유장한 시간 위를 흘러가면서 서로 힘을 보탠다면 어느 땐가는 퍽이나 든든한 성숙에까지도 가게 될 것인가. 거대한 열정과, 고뇌를 돌아 나온 깊은 연민이 우리의 삶을 남김없이 안아 주기라도 한다면….
사랑한 일과 사랑 받은 일을 사람은 잊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 시절의 내적 신장 伸長을 기억하고자 한다. 높고 넓어진 세상, 살아 숨쉬는 초록빛 시절의 자기를 언제나 원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발랄한 맥동을 무한에까지 이끌지는 못하며 사랑의 시절은 막이 내리고 사람들은 한두 컷의 사랑만을 액자에 넣어 오래도록 기념한다. 그러기에 사랑만큼 심각한 향수는 없다 할 것이다.
여자들은 자식을 통하여도 ‘만들어 봄’을 시도한다. 과잉 과외나 치맛바람 운운의 사회적 지탄이 그녀들의 목덜미를 잡아나꾼다. 그러나 그녀들의 내심은 나직이 말을 뇌이고 있다.
‘지하의 광맥처럼 사람의 내부에도 갇혀 있는 힘이 있으리니 이를 밖으로 불러내어 사람을 먹이자’고
이와 같이 바라고 분발함으로써 얻어 누리는 그 역학적 균형. 여기에 만들어 주는 과제를 청하고 나설 소망의 여지가 있게도 될 것이리라.
삶과 죽음 안의 정진(精進)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에 ‘존재’를 기록한다.
초침처럼 부지런히 맥동을 울리며 이미 조물주가 승인하신 축복의 계수 計數에도 보태어져 있다. 생명의 가호는 탄생과 삶과 죽음을 도와 주며 죽음의 다음까지를 지켜본다. 이 중에서 사람이 스스로 진력할 수 있는 건 삶의 영역이다. 때문에 좋은 삶은 값진 자조 自助라고 말한다.
삶엔 부상이 따라온다.
어느 의미로 세상은 고풍한 병원일 수가 있고 사람들은 부상자의 침대에 누워 있다. 병증은 다분히 만성화에 이르렀다. 그런데 상처도 신선할 필요가 있다. 늙거나 퇴락해 버린 상처는 슬프다.
쾌유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얻기까지는 건강한 아픔이 살아 대결해야 한다. 미취나 진통의 방법은 감각을 둔화시켜 ‘나’를 놓쳐 벌리게 한다.
요즈음 나는 잠을 좋아하게 되었다. 잠드는 줄도 모르게 잠이 들어 눈 뜨면 새벽이곤 하는데 이런 일이란 거의 처음이다. 사람은 잠들 때 괴롭기 마련이고 밤마다 겪게 되는 반수면의 고통은 이것이 곧 죽음의 연습인가도 여겨졌었는데 근래엔 맥없이 잠들어 어느새 아침을 맞이한다.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직선으로 다리를 뻗어 마치도 서 있는 듯이 꼿꼿하게 있어 본다.
얼마 후 서서히 창문께로 눈을 돌리면 오늘도 와 있는 여명이라는 친구.
안개 속에 반쯤 솟아 있는 나의 잠자리는 실없이 허탈하며 누군가의 돌아 앉은 모습같이 서글프고 어슴푸레한 광선이 잠의 그물로부터 나를 건져 올린다.
여자 속에서 깨어나는 하루의 첫 본성은 안기고 싶은 것.
이를 알고 아침은 연민의 사나이가 되어 포옹의 팔을 내밀어 준다.
사람은 생애의 중요한 기억들을 자주 점검한다. 이때 나는 유아기의 몸 치수와 의탁심리에로 돌아가고 잠시 그 시절의 행복을 돌이켜 본다.
잠들 때 마지막까지, 잠 깨면 맨 먼저 손 잡아 주는 상념은 무엇인가.
남자라면 어떤 일에 관해서이고 여자는 어떤 사람에 관한 것일 듯 싶다. 여자에겐 별개의 ‘그’가 줄곧 있어준다. 언제라도 반수면의 몽롱한 의식을 지배하는 불침번의 그.
그랬는데 근래엔 이 성질도 졸고 있다. ‘그’가 여행 중인가도 싶다. 쉽사리 잠들어 아무렇지도 않는 새 날과 만난다.
이런 일이 어찌 있어지나. 둔중한 불안이 서먹한 얼굴을 들이민다.
삶에 입혀진 상흔은 여러 가지이다.
그것의 청신한 것과 노후한 것이 대화를 나눈 일도 오래이건만, 어느 날 막힌 수도전처럼 지혈 止血의 때가 온다. 진맥의 손이 어디를 만져도 아프지가 않다. 아픔의 촉수들이 일시에 반란을 저질렀나? 갑자기 당황한다.
그러나 나의 불가피는 첫째로 기억의 희박임을 알아 차린다.
기억의 동결이 덮쳐와도 내 마음을 한 꺼풀씩 얼려 버렸다. 깨워서 눈 뜨게 하기에도, 덥혀서 품 속에 안아 주기에도 그 시한이 지나고 말았다.
지난날 그리도 못 잊겠던 것들이 오늘은 모조리 눈 감았다. 나를 지탱케 하던 모든 긴장이 빠져 나갔으며, 의식의 투쟁도 쳐부수고, 망각의 도도한 밀물은 내 땅을 휩쓸었다. 어떤 힘이 시키는 대로 밤에는 쉬이 자고 그 힘의 기상나팔이 울리면 깨어난다.
한데 행복하지가 않다.
아프고 싶고, 슬프고 싶고, 고독하고 싶다. 아아 그것들은 얼마나 살아 잇는 일인가.
지난날의 교과서를 펴 놓고 옛 습성을 복습하려 함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잘 안 된다. 오직 칠을 입히듯 한 의식의 짙은 안개와 사념의 응고를 불가능하게 하는 잊음이 와 버렸다.
망각의 죄를 생각한다.
망각이야말로 삶 속의 죽음이며 생명의 배덕일 것이리라. 기억하고 싶다. 한사코 기억하기를 원한다. 날이 선 단도가 막 생살을 긋고 지나간 정결한 아픔이 차라리 소원이다.
아픔이 어떤 것인가를, 불면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금 실감하고 싶다. 눈 뜨면 꿈꾸게 되는 가치와, 자결에도 눈물짓게 되는 그리움과, 어떻게 해도 기가 꺾이지 않는 비통한 열정으로 가슴을 채우고 싶다.
소금이 없는 식탁, 사랑과 미움이 지워진 화첩 畵帖을 거부한다. 신산 辛酸에서 뽑아낸 순밀을 원한다. 고통의 즙이 없이는 한 줄의 시도 쓸 수가 없다. 맹목의 안일, 바보 같은 망아, 수술대 위의 마취된 육체는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정신의 새로운 모험을 위해 어떤 지혜를 구할 것인가.
감성의 출입구를 다 열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
여태까지 나의 삶의 진정한 용단을 외면했었다. 관념 용어를 즐겨 쓰고, 추상의 연애를 했다. 사념의 나신 裸身을 가리웠으며 활자에 얹어 보낸 글들에 있어서도 착상의 용량을 충실히 나누질 못했다. 알맹이는 뽑아 두고 포장지만 꾸려 보낸 셈인가.
정직하게 말하는 일처럼 어려운 화술은 없다.
참말일수록 거부 반응이 가로막던 일은 어인 까닭일까. 가령에 친근자 중의 하나는 삶의 무의미를 철저히 주장한다. 주어진 생명을 부담겨워 하며 몇 번이라도 죽음의 유인을 따라 나선다. 끝내 고칠 수 없는 그 아집은 내 삶의 가장 참담한 고뇌였건만도 나는 이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질 않았다. 내 입술도 만년필도 침묵의 충실한 서원자였기만 했다.
문학은 일종의 고해라고 말한 이가 있다. 그러나 이 고해는 절반에도 미달한다. 참회의 큰 몫은 영원히 작가의 가슴 속에 있다. 완벽한 봉인인 채.
말의 목마름, 드러내어 풀지 못한 시인의 언어들은 언제까지나 괴롭다. 말할수록 못다한 말의 고뇌는 정녕 참담한 것을.
무슨 일이라도 좀 생겨나야겠다. 사건의 와중에서 왜 이리도 사건에 굶주리나.
말의 포만에 잠겨 있으면서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고 연달아 내 마음은 소리지른다. 아울러 살고 있으면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고 외친다.
상처투성이이면서 도무지 아프지 않다. 이 모순은 모두 무엇인가.
낡은 상처를 따내고 새로운 상처의 피 멍을 집어 넣어야겠다.
아픔을 기억해내도록 자꾸자꾸 아픔의 복습을 부과해야 하겠다. 걸어가면서 때때로는 뛰어가지 않으면, 이별의 그날처럼 슬프지 않으면, 사는 일은 엉망이다. 망가진 장난감처럼 쓸모라고는 없어진다.
노도가 없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며, 위험이 따르지 않는 산도 산이 아니다. 거절을 모르는 신 신, 원하는 대로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면 사람은 설산 꼭대기에까지 기도의 제단을 쌓진 않았으리라.
사랑할수록 사랑하고 기도할수록 기도하는 정진, 아픔 가운데 아픔을 배우고 슬픔 가운데 해탈의 의지를 더 기르게 될 능력의 창달을 생각해 본다.
해면처럼 흡수만 하는 감관의 나태에서 일어서고 다시금 시지프스의 일터로 달려갈 일을 생각해 본다. 정직한 인식과 청결한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생명은 선한 동력이며 무궁한 가능성일 텐데 내가 빠져든 망각의 깊고 깊은 수렁을 생각해 본다. 천치 같은 타성과 폐쇄, 모순과 당착, 과실, 회오, 죽음을 생각해 본다.
죽음을 생각해 본다.
죽음은 부동이다.
이와 맞설 ‘절대’를 삶 속에서는 찾기 어려우며 꼭 하나 있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죽음과 동가인 진실은 삶이 아니고 삶의 정수인 사랑일 뿐이다. 아아 이처럼 무서워지는 마음은 다시 없으리라.
사랑과 죽음은 오직 둘만이 전적인 침윤을 누릴 수가 있다.
나는 외로움과 과로에 너무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머리의 기름이 마를 만큼 생각하고 번민하고 절망에까지 왔다. 그리고 이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의 모습일 것이리라. 세상은 낡은 병원과 같고 부상자의 침대는 많이 모자란다. 어떤 상처도 당연하게만 받아들여지며 눈 여겨 살피는 시선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가.
거절의 벽에 온몸이 으깨어졌다 해서, 그 사람은 한 부스러기도 주지 않았다고 해서 일체의 소망을 내던지며 불면의 밤과도 안 만날 것인가.
상처의 청신한 것을, 회오의 격렬한 것을, 독에 있어서도 갓 뽑아낸 효험 있는 것을, 죽음과 동가이니 사랑을, 통틀어 정시의 새로운 모험을 영영 단념하고 말 것인가. 삶과 죽음 안의 정진을 포기해 보릴 것인가.
나의 매력남
새삼스레 남성을 논하려니 기분이 묘하다. 그것도 매력남에 초점을 맞추어 쓰자니…
한데 매력 남성은 하나 둘이 아니다. 그들의 장점 또한 여러 가지겠고 보면 찬양해 마지 않을 이유 역시도 그만큼 불어난다. 때문에 첫째로는 매력남의 전부가 여자의 운명이 되는 게 아니고 오직 한 남자만을 한 여자는 선택하게 되며 여기에 연분의 필연이 생겨난다는 얘기 정도로 채워질 듯싶다.
내게 있어서의 매력남, 그리고 그 요점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건 우선 잉태에 있을 것 같다.
내 정신은 끊임없이 수태 受胎를 갈망하기 때문에 줄곧 신선한 회임을 안겨 주지 못하면 안 된다. 그러면 나는 그의 촉매로부터 솟아난 인식과 사변 思辨 들을 공손히 가꾸어서 다시 바치게 되리라.
남성관에도 변화가 온다. 젊었을 땐 부성적이며 스승이 되어 줄 이를 좋아한 듯싶은데 나이 든 후로는 반드시 대등한 위치에 앉혀 꿈꾸는 성향이 생겼다. 목마를 때 언제라도 품어 주고 지쳤을 때 거부 없이 기대게 해주는 사람, 그러나 이토록 황송한 관용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나의 이상적 아담, 그는 고결한 범부 凡夫 외의 누구도 아닐 것 같다.
진흙처럼 혼탁해진 내 심신을 청유리 같이 맑고 투명하게 닦아 내게 해준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믿고 바라고 배우면서 그에게 내 정신의 제위 帝位를 바쳐주게 되리다. 함께 흑인 영가 靈歌 라도 들으며 벽난로에 가득한 홍장미빛 불송이를 바라볼 일을 상상만해도 눈물 나게 행복하다.
남성은 나에게 필생의 주제나 다름없어 왔다.
전심 전력의 주술사 呪術師와도 같이 빈 손에 땀과 핏자국을 움켜쥐고 혼신의 주언 呪言을 바쳤기 도 하다. 거울의 짝을 맞추듯이 그를 만나야만이 내가 존재한다는 따위 다분히 전시대적 남성 집착에 살아가는, 나는 그만큼 우습게 생긴 여자이다.
나의 매력남, 그는 내 어설픈 글줄 위를 소요하는 그 사람일 수도 있다. 새까맣게 퇴고한 원고지 위에 희미하게 몸 그림자를 지우는 고뇌와 조갈의 나의 남자.
지내온 삶의 도정에선 보옥 같은 만남이 나를 기다려 주었기를 더러 했다. 하나의 특별한 만남에마다 온 마음의 충실을 남김없이 주었다 하겠건만 뭔가 운명적인 완력이 끼어들던 일, 나로서 불가항력의 이별을 치러낼 밖엔 없었다. 이런 때라도 귀중한 만남에의 감사를 저버리진 않았었다.
비탄의 뒤범벅을 유혈처럼 뒤집어 씌우고 하나의 사람이 서서히 낙조 落照 하면 회상의 짙은 염색을 오래도록 나의 심장에 물들이곤 하였었다.
아무튼 나는 몹시도 남성 씨에게 연착 戀着하는 여자이다.
신앙의 흐린 글씨
근래엔 글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정신이 피로하고 귀중한 구슬 낱알이라도 잃어 버린 듯이 전후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두레박 줄을 길게 늘이고 뭔가 길어 올리는 몸시늉을 하건만 매번 허사에 그치고 만다.
내 안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다만 존재의 오지인 그곳에 철도 아닌 백설이 자주 뿌리고 그래서 얇은 옷깃을 여며 시린 목을 감싸곤 한다. 나는 춥다.
귀 기울여 들어 보자. 이 여자가 발음하는 언어를.
‘주소서’라고 한다. 그녀는 구걸하는 사람인가. 빈 손을 포개어 허공 속에 내밀고 있다.
‘이즈음 할 말이 없사옵니다. 빈 그릇처럼 밑바닥까지 비어 있사옵니다’
생각해 보면 사건에 굶주린 지도 오래이다.
사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건에의 감각이 심히 둔화되었다. 아무것도 나를 흔들지 못하며, 사납게 휘둘러대던 완력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척추를 앓고 난 드시 허약하고 별로 치른 일도 없이 지쳐서 드러눕기만 잘 한다.
그랬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공복의 호소가 존재의 밑바닥에 치받쳐 오른다.
‘저를 먹여 주옵소서’라고.
조금만 먹고 나면 일어서서 다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삶이라고 하는 그 준엄한 명령, 그 가혹한 가동에 대하여도 의욕을 가지고 찬동하게 될 듯만 싶다.
산다는 건 무엇인가.
어떤 이는 전천후의 현역으로 그의 생업을 빛내게 가건만 내게 있어선 단 하루도 순탄하게 진척되지가 않는다. 그것은 대단한 중압감으로 어깨를 짚어 누른다. 푸르른 나무 그늘에 쉬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감당하면서 미약한 근력의 전부로써 걸어갈 뿐이다.
가장 겁나는 건 마음의 삭막함이다.
감격에 휩싸이는 일, 되도록이면 사랑에 빠지는 일, 이런 상황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에게 끌어 주고 싶은 최량의 자구책이라 믿으며 왔다. 비정에 떨어지는 일만큼 시인의 위기인 건 없다.
다른 이의 작품을 읽을 때라고 도자기처럼 식어 있는 이와 심장 속에 불씨를 간직한 이의 차이를 금시 알아차리는 심정이 되어지곤 했으며, 이런 일이 언제나 무섭게 심각하다.
시인의 능력은 여러 가지일 줄 안다. 그리고 이 시대는 투철한 관찰과 탁월한 분석력에 더 많이 상찬 賞讚 을 주는 시류임도 알고 있다. 그렇건만 마음의 따스함과 영혼의 꽃핌이 없이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시종 그 확신을 거듭해 온다.
때문에 나는 단 한 번도 위대한 시를 꿈꾼 적이 없고 오직 절실한 시, 절신할 공감을 나눠 갖기만이 소원이다.
아무튼 나는 맥 없이 지쳐 주저앉는 일이 자주 있어 왔고, 내가 엉망이라는 비참감이 자의식의 저류에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다.
사실에 있어 나의 욕구는 첫째가 무사안일일지도 모른다. 모험을 원하면서 한편 겁내고 있다.
안전한 껍질 속에서 죽은 자의 다음쯤 가는 그 편안감에 안겨 지내기를 원한다 할까. 추적과 도피의 두 갈래 길 위를 동시에 걸어간다.
한없이 솟구치고 싶고 끝없이 추락하려 한다.
언제부턴가 내 작품이 천주교적인 성향을 지적 받는 일이 생겼으며, 이때 나는 너무나 큰 땅에 들어선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누를 길 없었다.
그리스도적인 것보다 더 큰 대륙을 나는 알지 못하는데, 그 가장자리에나마 들어서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영롱한 은총의 이슬 떨기에 적셔진단 말인가. 이건 희열이요 두려움이다.
나의 시가 어느 계열이냐는 건 나의 진로가 어떤 물줄기로 흘러가고 있느냐는 것과 동의가 되겠으므로이다.
다급한 건 시간 아니고 인생 자체이다. 삶 그것과 견줄 때 시는 한낱 지류에 불과하며 때문에 둘 중에서 한 가지만을 침몰에서 건져낼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삶 쪽을 구해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시의 구제쯤은 삶의 구제 안에 어렵잖이 포함되어 있을 성싶다.
언젠가 잡지사에서 온 한 손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당신은 어떤 시를?
나는 대답했다. 필연코 신앙시의 테두리일 것이라고.
하지만 선 포만 善 飽滿 이나 구원 범람과는 달리 보다 더 은밀하고 가라앉은 송가이기를 바란다. 예수의 고상 苦像을 바라보면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이 가슴을 쳐 온다. 이로 하여 피조물의 심중에 이상한 슬픔이 샘솟는다.
이처럼 거대한 비애, 이리도 성실한 자애를 다른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다. 이상한 산울림과 같은 것이 사람의 영혼 안에 울려 퍼진다. 사랑과 연민이 한량 없이 솟아난다.
연민이란 위에서 아래로 떨구이는 것일 듯하면서 이때만은 거꾸로 피조물의 가슴에 샘솟아 감히 조물주이신 분을 껴안아드린다. 가장 낮은 땅에서 제일로 높고 풍요하신 분에게 바치는 연민, 진실로 말로선 나타내지 못할 달갑고 절절한 전령의 그 충동인 것.
돌이켜 보면 볼수록 그리스도는 내 영혼이 아는 첫 시절의 기억이시다.
나는 유년기부터 어른들을 따라 교회엘 다녔는데 어린 날의 희로애락을 낱낱이 그분에게 고해 바쳤었다. 병 중에 무서운 꿈을 꾸었을 때도 무섭지 않게 해주십사 고 기도하곤 했다. 어머니가 옆에 계신들 어머니로선 이런 일이 힘에 겹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삶이란 만남과 헤어짐의 관계이다.
어버이는 돌아가시고 자식은 슬하에 자라건만 그러나 그 누구도 주님의 기억보다 더 길거나 짙거나 하질 못한다. 만인의 구세주는 만인 각자에게 유일 절대의 대좌자이시며,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도 비교를 초월하는 가장 오래인 지면이시기에 당연히 모든 관계 중의 맨 윗자리에 계실 수밖에 없다.
‘내 영혼이 주님께 단맛 드시게 하옵소서
지고의 성총은
이것으로
받고자 하옵니다.’
꼿꼿하고 줄기찬 탄원이 치받는다.
나는 감상적인 사람이며, 신앙의 발심에서조차 몹시 애련하고 격렬하다. 달고 서럽고 묘하게 눈물겨우면서 또한 그만큼 나는 기쁘다. 감상에도 품질이 있을 양이면 이때의 그것이야말로 내 안에서 최고품인 그 감상일 것이리라.
사람은 항시 목마르다.
오랫동안 갈증에 시달리다 보면 오히려 물맛도 잊어 버리는 중환에 사로잡힌다.
불시에 발판을 잃고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마음 속의 안정은 여간 해서 이뤄지지 않는다. 피로와 기아감에 짓눌려 차마 더 못 견딜 형편에 떠밀린다. 절망이라는 단어조차 곧잘 입에 올린다. 어둡고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누구도 가해하지 않았는데 막무가내로 피해받은 심정이곤 한다.
구레박에 담겨 오는 것이 없고 매번 원고지는 벌거벗은 채 있다.
천하의 할 말들은 어디에 갔는지.
내 삶이 난항 難航의 기슭에서 부침 浮沈 한다.
춥고 허탈해저셔 견딜 수 없다. 음식을 먹은 다음에도 줄곧 배고프기만 한 이상한 시장기에 시달린다. 필연코 영혼의 굶주림 탓이리라. 젊은 시절 자주 만나던 불면이 다시 와서 감은 눈시울 안에 장미꽃보다 붉은 촉광을 들이댄다.
야반의 시계 소리, 가시처럼 못 참겠는 전신의 피로감.
정녕코 기침조차 할 수가 없다.
금세 부서질 것 같은 이때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지르게 된다.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먹게 하옵소서’라고.
나의 허탈은 곧 나의 지반 地盤이다.
절대의 무력감에까지 내려앉게 되면 다음엔 조금씩 솟사오르기 마련인 것을.
나는 분발한다. 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를 위해서이다.
삶 때문이라고도 못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궁극의 것을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하며 나 역시 이에 준하고 있다. 진실로 나는 표현할 수가 없다. 때때로의 암담과 이런 때만 만나게 되는 금싸라기 같은 위안에 대하여는.
글을 써 온지도 오래이건만 비교적 글의 집착엔 덜 붙잡히는 편이라고 나 자신을 보고 있다.
내 으뜸의 소망은 영혼의 기쁨이요 그 귀의이다. 이런 건 새삼 종교적이랄 것도 없는 모든 피조물의 공통적 본성이겠고, 나 또한 보편의 큰 길을 따라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아득한 길 머리, 없지 못할 길벗으로서 눈물 나는 한 자루의 붓을 가질 따름이며, 이 붓은 신앙의 흐린 글씨들을 쓰기도 할 것이다.
바라건대 나의 문학에서는 이러한 글씨가 제일로 높고 빛나는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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