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재학 중 6.25를 맞게 되어 학교를 중퇴했다. 우리나이로 마흔 살이던 1970년 <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뒤 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박완서는 이후 정력적인 창작 활동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뚝>, <미망>등의 주옥과 같은 작품들을 펴냈다.
동생의 전화 목소리는 속사포처럼 빨랐다. 충분히 상냥했고 응석이 깔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할 틈을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 명령조로 들렸다.
“그럼 언니 부탁해, 어머머 큰일 났다. 오늘 직원조횐데 또 교장 눈총 맞으면서 들어가게 생겼네. 언니 지금 통탄통탄 하고 있지? 날 옆으로 끌어들인 거 말야. 그렇지만 때는 이미 늦었구. 우리 언니의 요 꿀맛을 안 이상 악착같이 붙어다닐테니까. 약올르지롱.” 제 할 소리 다하고 농지거리까지 하고 나서 가타부타 이쪽의 사정 따위는 들을 척도 안하고 전화는 찰카닥 끊겼다. 동생의 용건은 제 자식 슬기 유치원에서 재롱잔치가 오늘 오후에 있는데 학기 말 성적처리 때문에 도저히 그 시간에 빠져나올 수가 없으니 나더러 대신 가달라는 거였다.
동생은 여자고등학교 가정선생이었다. 가정이 살림솜씨를 가르치는 과목은 아니라고 해도 동생이 가정선생이라는건 웃기는 일이었다. 살림에는 솜씨도 뜻도 없이 다만 최소한으로 하는 거 하나가 주특기였다. 잘 기르기 위해 하나만 낳겠다고 공언하고 외아들 슬기를 놓은 후에도 학교를 안 그만두었다. 산전 산후 휴가 동안에 비로소 전업주부가 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고 깜작 놀랐다고 했다. 그때부터 내가 동생의 가정선생 노릇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출부를 고용할 때 면접하는 일로부터 임금 협상, 길들이기 등을 뒤에서 코치했고, 우리 장볼 때 동생네 것도 같이 봐가지고가 파출부에게 요리실습까지 해보였고, 아기 옷이나 기저귀 빨래에 비누기가 남아 있지 않나 의혹의 눈초리를 번득이기도 했다. 같은 강남이긴 해도 그닥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두 집 사이를 오가며 일 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씩은 그 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손수 운전할 수 있는 내 차 덕도 컸다. 그러나 파출부한테 아무리 공을 들여봤댔자 직업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서 예고없이 안 올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런 날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어린것을 포대기에 싸갖고 달려들어 짐 부리듯이 현관에다 동댕이를 치고 총총히 출근을 했다. 동생도 동생의 남편도 각각 제 차를 가지고 있어서 기동성은 그만이었고, 동생의 남편이 혼자서 어린것을 싣고 올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내 쪽에서 되레 동생 남편의 눈치가 보여 싫은 내색은 커녕 보물단지처럼 반색을 하며 안아들여야 했다. 더욱 난처한 것은 워낙 칠칠치 못한 동생인지라 젖먹이가 이동하려면 반드시 안동해야 할 잡다한 물품 중 한두 가지는 으레 빠져있는 거였다. 그럴 때는 참을 수 없도록 울화가 치밀어 다시는 받자를 안할 것처럼 푸념을 하다가도 짐짝처럼 끌려다니는 어린것이 안쓰러워 마음을 풀곤 했다. 잔손 갈 나이는 지났다고 해도 내 자식도 셋이나 되었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나의 이런 동생네 치다꺼리를, 유별나게 아기를 좋아해서 사서 하는 고생쯤으로 밉지 않게 봐주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동생은 우리 식구들한테 얌체라는 별명으로 통할만큼 나한테 신세진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온종일 뼛골 빠지게 애를 봐주고 나서도 좋은 소리 듣기를 기대하긴 어려 웠다. 맡겼던 보물단지를 찾아가기 전에 혹시라도 없어진 거나 달라진 게 없나 점검하듯이 아이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안아보고, 냄새까지 맡아보고나서 하루 동안에 훌쭉하고 꾀죄죄해졌다는 소리나 하기 십상이었다.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나는 기가 막혔지만 드러내놓고 탄한 적은 없었다. 세대차에서 오는 이질감이 흔히 그렇듯이 단지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생이 하는 짓을 미워해지지가 않았다. 숫제 우리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오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먼저 꺼낸 것도 나였다. 그렇게 되면 동생이 나한테 더 기대게 될 건 뻔했지만 이사가 그렇게 쉬울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냥 해본 소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내 쪽에서 먼저 그런 말이 나온 걸 기회로 마치 나를 위해서 이사를 하는 것처럼 생색까지 내가며 제까닥 제 집을 팔아 버렸고, 우리 동네에 새 집을 구하는 건 나만 믿고 걱정도 안했다. 집값이 뛸 때라 어물어물하다가 동생네 집 날리는 꼴 보게 될까봐 나 혼자 후끈 달아서 옆동에 마땅한 집이 나는 즉시 계약을 했다. 동생은 잔신경 쓰는 일은 질색인 반면 되레 이사처럼 큰일은 힘 안 들이고 휘딱 잘도 해치웠다. 한 단지 내에 붙어 살게 되고 동생네가 편해진 건 말할 것도 없지만, 나는 더 자주 불려 가거나 아이를 떠맡게 되어, 내가 자초한 일에 비명을 올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첫돌을 바라볼 때 이사온 녀석이 내년이면 학교 갈 나이가 되었으니 다 기른 셈이었다. 동생은 얌체답게 그동안 나한테 진 태산 같은 신세를 고작 우리 언니 맛이 꿀맛 따위 식의 경박한 표현밖에 못했지만 그 정도라도 생각해주는 건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언니 곁으로 이사오고 나서 팔자가 늘어지다 보니 허리 치수가 해마다 일인치씩 늘어난다는 투정을 더 자주 들었다. 내가 단지 어린애를 좋아해서 그 낯 안 나는 치다꺼리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 식구들의 생각은 실은 맞지 않았다.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조카보다는 얌체 짓까지도 감싸주고 싶은 동생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애정 따위하곤 다르다. 동생이 때때로 내 생활을 훼방놀아주기를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뭇 열정적으로.
그런 생각 때문에 유치원 문턱까지 와서야 중요한 걸 빠뜨리고 온 생각이 났다. 동생은 슬기가 출연하는 연극을 포함해서 중요한 장면들을 비디오로 찍어 달라고 했다. 엄마가 안 와서 섭섭했을 아이에게 엄마하고 다시 한번 재롱 잔치를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위로가 될 터였다. 비디오 카메라는 우리 집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요 긴하게 쓰는 건 주로 동생네였다. 일본 갔다 올 때 그걸 사온 남편도 남이 가진 것은 일단은 다 갖추고봐야 한다는 소유욕 때문이지 그 방면에 취미가 있어서 장만한 건 아니었다. 놀러도 잘 다니고 아이 하는 짓도 한창 예쁠 때라 그렇겠지만, 그걸 쓸 일은 우리보다 동생네한테 더 자주 생겼다. 그러나 툭하면 빌려다가 뭘 그렇게 찍어 대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찍은 걸 동생도 보여주려들지 않았고 나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 뒷바라지를 시켜 먹고도 동생은 이런 내 성격을 차갑다고 비난했지만 옆에서 신물이 나게 보는 사람의 일상적인 행동을 화면에서 다시 보는 일이 뭐 그리 재미있을까.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모습이라 해도 크게 다를 바 가 없었다. 나 보기엔 그걸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되레 이상했다.
영화나 텔레비젼 연속극 따위를 좋아하는 건 나도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그건 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게 빛나는 사람들이 내가 이룰 수 없는 세계를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서 아무리 찾아도 비디오 카메라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동생의 신신당부가 아니더라도 이번만은 나도 비디오로 찍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가 없었다. 슬기는 연극의 주연이라지 않나. 주연이 아니더라도 연극에 출연하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아닌 남이 돼보는 일이다. 빨리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은 이상하게도 절대로 못찾을 것 같은 절망감하고 붙어다녔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뭘 찾다찾다 안 나오면 어느 순간 뭘 찾고 있 었는지조차 생각나지않게 되면서 모든 생각이 정지되는 일종의 치매현상이 올적도 있었다. 남편은 나의 그런 상태를 갱년기현상이 라고 별명짓고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군더더기 없는 갓 마흔이었다. 동갑내기 동창 중엔 늦동이를 임신중이어서 우리 모두를 기대에 부풀게 하는 친구도 있는데 갱년기현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지금도 그 증상이 올까봐 미리 두려워하는 마음때문에 손끝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비디오카메라를 귀중품 취급해서가 아니었다. 외출하려는데 열쇠가 없다든가, 한참 바쁜 등교시간에 빨아서 챙겨놓은 중학생 딸의 덧신이 안 보일 때도 그런 증상이 왔다. 마치 이 세상이 끝장나버릴 것처럼 눈앞의 사물 뿐 아니라 머릿속의 생각까지 가물가물 무화(無化)돼가는 느낌은 아주 고약했다. 이 세상 마지막 느낌이 고작 공포와 절망이라니.
이렇게 내가 뭘 못 찾아 우두망찰을 하고 있는걸 남편한테 들키면 사정은 더 나빠졌다. 그는 매우 부드럽고 침착하게 굴었다.
“여봐 그렇게 덮어놓고 서둘지만 말고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라고. 자아 차근차근. 그래 그렇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지금 현재 그게 어디 있을가 하는 생각은 일단 잊어버려요. 그까짓건 당신 털끝 하나만도 못한 거니까. 그리고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 물건을 마지막보았을 때나 마지막 사용했을 때 상황을 떠올리는 거야.
옳지 옳지 그렇게.”
남편의 친절한 인도로 나는 어제 딸의 덧신을 누가 빨았나부터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제는 파출부 아줌마가 오늘날이니까, 그녀가 빨았겠구나. 그녀는 장독 언저리에다 신발 빤 걸 너는 버릇이 있지. 아 참, 저녁때 화초에 물을 주다가 덧신이 덜마른걸 보고 욕실 스팀 위로 옮겨 놓았었지, 하는 데까지 더듬어 올라가면 현관 신장과 딸의 방 책상 언저리만 뱅뱅 돌던 행동반경을 비로소 벗어난다. 물론 바삭하게 마른 덧신은 스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렇게 남편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이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의 남편은 꼭 즈이 어머니한테 하듯이 나에게 대했다. 그가 어머니를 대할 때 가면처럼 뒤집어쓰는, 과장되고 위선적인 친절과 공손을 나한테까지 써먹으려드는데 내가 어떻게 구역질이 안 나겠는가. 그래도 결국은 남편한테 배운 방법으로 카메라의 행방을 소급해 올라가 동생네가 빌려간 걸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동생네로 뛰어가서 좀 모자라는 듯하여 붙박이로 오래 붙어 있는 아줌마하고 한동안 온 집안을 들쑤성거려 그놈의 카메라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럭저럭 반시간은 넘어 지체를 한 모양이다. 재롱 잔치가 시작된지도 아마 그쯤은 되었으리라. 슬기가 다니는 유치원은 이 동네 뿐 아니라 강남 일대에서도 시설좋고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데였다. 원아를 끌려고 전단을 돌리고 가정방문까지 하는 군소 유치원하곤 달라서 선착순으로 뽑는 정원 안에 들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는게 그 유치원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 무얼 어떻게 잘 가르친다는 건지 그 실속보다는 줄을 서야 한다는 소문 때문에 자꾸만 더 유명해져서, 내년에는 필경 그 전날 밤부터 유치원 문간에서 오리털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지 않으면 뽑히기 어려울 거라고들 했다. 이 년 전 슬기가 들어갈 때만 해도 새벽 네신가 다섯신가에 지금 있는 아줌마를 대신 내보내 줄을 서게 함으로써 겨우 선착순에 들 수가 있었는데 이 년 전이 옛날이지 뭐유, 하며 동생이 다행스러워 하는 소리를 몇번인가 들은 적이 있다. 시간에도 가속이 붙는 걸까. 스쳐 지나간 시간들이 너무 빨리 옛날이 된다.
이름난 유치원답게 마당의 정원수 중 추위를 타는 나무들이 벌써 짚으로 맵시있게 월동 준비를 하고 칙칙한 상록수와 늠름한 낙엽수 사이에 서 있는 게 밍크코트를 입은 귀부인처럼 품위가 있다.
양지바른 곳을 차지한 놀이터의 놀이기구들도 목제로 돼 있어서 친밀감을 주면서도 어느 한군데 허술한 데 없이 견고해 보였다. 나는 서울대학 학부모라도 된 것처럼 한껏 으스대는 마음으로 거만하게 마당을 가로질러 아담한 단층건물로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창을 가린 커튼의 동화적인 무늬가 문득 병원 신생아실을 연상시켜 나는 문득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어물어물하진 않았다. 학교로 치면 대강당에 해당하는 넓은 홀엔 학부모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차 있었고, 무대에선 여자아이하고 남자아이가 짝을 지어 포크댄스를 추고 있었다. 무대 옆 벽에 재롱 잔치 순서가 붙어 있었다. 슬기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다는 동극이 그 다음 차례인걸 확인하고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비디오카메라 때문에 늦으면서도 그걸 가져오는 게 유난스러워 보일까봐 쭈뼛쭈뼛하는 마음 이었는데 적어도 이런 유치원에 자식 보내는 집치고 그거 안 가진 집은 없는 것 같았다. 무대 앞은 포크댄스를 찍으려는 엄마들이 출연하는 아이들 수효보다 더 여럿이 붐비고 있었다. 손잡고 춤추 던 아이들 중 한 쌍이 별안간 싸우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멱살을 잡더니 엎치락뒤치락 레슬링으로 변했다. 음악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춤판은 그냥 추는 아이와 레슬링을 구경하는 아이들로 갈라졌다. 그냥 춤을 추는 아이들도 마음은 싸움구경에 가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선생님이 무대로 뛰 어오르고, 싸우는 애의 가족인 듯싶은 사람들도 가세해서 아이들을 뜯어말렸다. 관람석이 시끌시끌한 웃음판이 되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음악이 멎고 아이들도 깔깔대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사내 녀석끼리 짝을 지어 놓으면 저렇다니까.”
“그럼 어떡해요? 여자애가 모자라는걸.”
“하필 포크댄스를 할 게 뭐람. 짝이 안 맞는 걸 번연히 알면서.”
이런 수군댐으로 미루어 남자끼리 짝이 된 아이들이 춤을 추다 말고 싸움이 붙은 모양이었다. 선생님들이 무대 뒤에서 뭘 어떻게 수습했는지 포크댄스는 다시 계속됐다. 싸움이 붙은 쌍만 아니라 남자끼리 짝지어진 쌍은 다 제외시킨 듯했다. 아이들이 허룩하게 줄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포크댄스보다는 싸움 구경이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에 무대나 관람석이나 다같이 시큰둥 열없어졌다.
다음이 슬기가 출연하는 연극 차례였다. 일곱 마리의 새끼 염소와 늑대 이야기 였다. 동생이 주연이라고 뽐낸 슬기의 배역은 늑대였다. 올해 졸업하는 세 반 중 한 반이 총 출연하는지라 억지로 만든 배역도 많았다. 토끼나 다람쥐, 오리나 황새로 분장하고 염소 일가가 겪는 수난을 구경만 하는 배역도 여럿 되었으니까 늑대쯤 되면 중요한 배역이었다. 슬기가 몸이 큰 것도 늑대 역할에 맞았다. 털이 북실북실한 천을 두르고 갈고리처럼 험악하게 생긴 발톱이 달린 커다란 신을 신은 슬기는 다른 아이들보다 곱절은 더 큰 것 같았다. 험악하게 꾸몄는데도 내 조카라 그런지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얼른 케이스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면서 찍기 좋은 자리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고 보니 눈앞이 깜깜했다.
렌즈가 닫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디를 어떻게 돌려야 되는지 눌러야 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처음 찍어 보는 건 아니라 해도 동생네하고 한자리에 있거나 어디 놀러 갔을 때 동생이 찍다 말고 저도 찍히고 싶으면 나한테 넘겨주었고 그럴 때 잠깐 잠깐씩 찍어 본 게 고작이었다. 마치 관광지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셔터 좀 눌러 주세요, 하고 카메라를 넘겨줄 때 위치나 거리뿐 아니라 어 떤 것이 셔터라는 것까지 가르쳐 주어, 카메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찍을 수 있듯이, 주인 의식 없이 시키는 대로 만져 보았을 뿐이었다.
염소 엄마가 새끼들을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보면서 무대 뒤로 사라져 갔다. 바위 뒤에서 웅크리고 망을 보던 늑대가 나타날 차례 였다. 나는 초조하게 요기 조기 돌리고 눌러보면서 다시 들여다 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급하게 뭘 찾다가 안 찾아질 때나 다름없이 정신이 지리멸렬해지면서 손끝이 떨려왔다. 여러 사람 앞에 나의 쓸모 없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마음의 떨림을 보는 것 같았다.
“도와 드릴까요.”
아주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키가 훌쩍 큰 남자였다. 남자는 웃고 있었지만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는 엉거주춤 허리를 굽혀 나하고 같은 눈 높이가 되면서 빨간 단추를 살짝 만지고나서 카메라를 내 눈에다 대주었다.
“이제 보이지요?”
그러나 나는 뭐가 보이나를 확인하기 전에 그를 다시 한번 쳐다 보았다. 선량하고 친절한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늑대가 사방을 휘둘러보면서 걸어나왔다. 나는 카메라로 늑대를 쫓다 말고 키 큰 남자를 돌아다보면서 물었다.
“그냥 이러고 있으면 찍힙니까?”
남자가 다시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더니 또한 군데를 만졌다. 화면의 영문 글자가 스탠바이에서 카메라로 바뀌었다. 바뀌는 걸 보기 전에는 거기 자막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여지껏 건성으로 들고 있었단 말예요?”
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곧 그의 위로하는 듯한 웃음을 따라 웃고 말았다. 그는 나하고 카메라를 번갈아 들여다보면서 이것저것 설명을 하려고 했다. 나는 듣는 척하다가 알아들을 자신이 없다는 표시로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가 축 늘어뜨려 보였다.
“제가 찍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는 내 손에서 스르르 카메라를 넘겨받으면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나에게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넘겨주었다.
“잘 찍으세요. 늑대가 우리 아이예요. 조카지요.” 그가 남의 아이들까지 골고루 찍을까 봐 나는 이렇게 영악한 소리로 못을 박았다. 그는 엄마들이 붐비는 앞자리에서 되레 뒤쪽으로 물러나 적당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하는게 그의 큰 키에 어울렸지만 나는 혹시나 그가 카메라를 노리는 좀도둑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 자꾸 고개를 비틀고 돌아다 봐야만 했다.
또한 아이들의 연기가 웃음을 자아낼 때도 저런 장면을 잘 찍어야 된다는 뜻으로 그를 돌아다 보았다. 그럴 땐 그도 나를 흘긋 보았다. 그렇게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공감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재롱을 같이 귀여워하고 있다는 단순한 공감의 즐거움이 군중 속에서 고개를 뒤로 튼다는, 다분히 피곤한 일을 조금도 힘 안들게했다. 재롱 잔치가 끝난 후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같이 나왔다. 아니, 그건 자연스럽지 않았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 하고 같이가기 위해 또는 선생님의 노고도 치하하며 제 자식 똑똑하단 자랑도 늘어놓기 위해 남아 있었다. 동생도 내가 마땅히 그런 뒤풀이까지 해주려니 하고 있을 터였다. 끝나자마자 나오는 학부모는 거의 없어서 그와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겨울해가 아쉽게 엷어지는 마당을 거닐 듯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유치원 정문에서 길 건너가 바로 우리 아파트 단지 후문이었다. 그가 같은 단지에 살지 않는 한 헤어지게 돼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가나 해서 흘긋 쳐다봤을 때 그가 황급히 말했다.
“추워 보이시는군요. 어디 가서 차 한잔 할까요?” 뜻밖의 제안이기도 했지만, 놀란 것처럼 붕 뜬 목소리 때문에 나는 나의 순간적인 눈빛이 갈고리가 되어 그를 낚아챈 것처럼 느꼈다. 내가 내 눈빛에 그렇게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와 헤어지는걸 아쉬워하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진하게 드러내 생각이 나서 였다. 짐짓 못 이기는 채 그가 가는 대로 상가 쪽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꽤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안내한 건 나였다. 조명과 음향을 은은하게 줄인 찻집에 마주앉자 비로소 이건 내가 안하던 짓일 뿐 아니라 나에게 너무도 안 어울리는 짓이라는 떨떠름한 낭패감이 왔다. 나는 교활하게도 이렇게 된 건 전적으로 네 책임이라는 듯이, 그러나 네가 어떤 개뼉다귀이든 관심없다는 듯이, 쌀쌀하고 고상한 표정을 꾸몄다.
“조카라고 그러셨던가요? 그 늑대가.”
나의 지어먹은 마음에 개의치 않고 그가 소탈하게 말했다.
“예, 동생의 아들이죠. 이웃에 살기도 하지만 동생이 선생이라 제가 가끔 엄마 노릇을 대신할 적이 있답니다.”
“우리하고 사정이 비슷하군요. 아직 맞벌이를 하다보니 아이들한테 오늘같은 일이 생길 때는 장모님이 학부모 노릇을 해주시곤 했는데 요새 마침 효도관광을 떠나신 후라서. 집사람은 내가 유치원에 들른 거 모를 겁니다. 오늘 아침에 즈이 엄마 몰래 아이하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거든요. 아빠가 꼭 가봐 줄 테니 열심히 하라구요. 아주머니 조카만 주연을 한 줄 아세요? 우리 아이도 주연이었답니다. 딸내미가 여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아비가 어떻게 안 가보냐고 회사에다가도 큰소리치고 나온걸요.”
“직장 가진 엄마들보다 낫네요. 같은 직장 내에서도 확실히 남자가 여자보다 융통성이 있는 것 같아요.”
“직장 나름이죠. 잡지사니까 밖에 나올 구실을 만들기가 비교적 쉽다뿐이죠. 어떻게 맨으로 땡땡이를 칩니까.”
나는 아까 잠시 맡아 가지고 있던 서류봉투에서 눈여겨본 꽤 괜찮은 종합지 이름이 생각나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을 따라온 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연이면 엄마 염소였겠군요?”
“아니죠. 그 극의 주연이 어떻게 엄마염솝니까? 시계 속에 숨어서 혼자 살아남았다가 해피엔드를 만들어 내는 막내염소죠.” “아아, 고 꼬마. 참 예쁘고 당차던데요.”
“뭘요, 역할이 역할이니까 그래 보였던 거죠.”
칭찬 한마디에 제 딸이 주연이라고 핏대를 올릴 때와는 딴판으로 겸손해지는 그가 보기 좋았다.
“그건 그래요. 제 조카도 덩치만 컸지 계집애한테도 맞기만 하 는 허풍선이랍니다. 그런 주제에 그 역할을 그렇게 좋아하고 으스댄대요. 나중에야 어찌 됐건 당장 여자 애들한테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게 신나나 봐요. 사내 코빼기가 뭔지. 참 몇 남매나 두셨습니까?”
“남매가 아니라 자매를 두었습니다. 국민학교 일학년짜리하고 오늘 꼬마 염소 노릇한 녀석하고 딸만 둘입니다.”
“어머, 그럼 또 낳으셔야겠네요.”
“아뇨, 둘이면 족합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우리 능력도 그렇고, 지구 환경한테도 미안하고.”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속마음은 아니실걸요. 남 다 있는 아들 자기만 없어보세요. 얼마나 비참하고 섭섭한가. 물건이면 당장 훔치고 싶다는 옛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죠. 하긴 요새처럼 편리한 세상에서야 훔칠 것까지야 있나요, 뭐. 수단 방법 안 가리게 되는 거죠, 그가아짓 거.”
나는 걷잡을 수없이 수다스러워지다가 무엇에 놀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수다가 걷잡을 수 없었던 것보다 더 지독하게 수치심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실수로 중환자리에서 속바지를 까내렸다가 치켜올린 것처럼 황당하고 망신스러웠다. 다행히 그가 내 치부를 본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속으로 그럴리가 없어, 저 자식은 시방 능청을 떨고 있는 거야, 라고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다.
“섭섭하지 않다고는 않했습니다. 아내가 둘째 애를 뱄을 때는 아들이길 바란 것도 사실이고요. 이왕이면 아들 딸 섞어서 색색아지로 갖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거하곤 다르지요. 첫아들 낳은 사람이 둘째는 딸이었으면 하는건 괜히 그래보는 배부른 수작이라구요. 그 사람들 조금도 절실하지 않아요. 두번째도 아들이면 즈네는 특별한 기술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으스대면 으스댔지 손톱만큼도 섭섭해 할 줄 아세요.
아시겠어요?”
나는 다시 열오른 목소리가 되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바보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왜 내가 그걸 알아야 하는지는 더욱 모르겠구요.”
“지금 행복하지 않으시죠? 내 말이 맞죠? 아들이 없다는 건 결혼생활의 행복의 중대한 결격사유라는 걸 인정하셔야 돼요.” “왜 그걸 강요하십니까? 본인이 조금도 그렇게 안 느끼는 걸 가지고.”
그는 여간 곤혹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엄만 그래도 나보다는 덜 곤혹스러우리라. 나는 이 세상에 아들이 있고 없고 하고 인생의 행, 불행하고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은 남자를 만난 게 대단히 곤혹스럽고도 기분이 나빴다. 뭐 저런 족속이 다 있나 재수 옴붙었다 싶으면서도 그 남자를 행복한 채로 놓아주기가 싫었다. 그것은 분명히 거짓 행복이고, 거짓은 깨부숴야 한다는 사명감이 대단한 정의감처럼 치뻗쳤다.
“야구구경 좋아하지 않으세요?”
나는 화제를 바꾼 것처럼 전혀 딴소리를 했지만 어림없었다.
속으로는 점점 더 집요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운동은 다 좋아하지만 야구엔 특히 광이죠.”
떨떠름하던 그의 표정이 반짝 환해졌다. 나도 속으로 옳지 너 잘 걸렸다 싶었지만 애써 무표정을 꾸미고 말했다.
“야구장에도 가끔 가시겠네요?”
“그럼요 고교야구 시즌에는 못 참죠.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나다닐 때만 해도 우리 모교가 야구 명문이었거든요.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때 버릇이 남아서 그런지 일 년에 한두 차례라도 구장에서 직접 목이 터져라 열광을 해야 살맛이 난달까, 스트레스가 풀린답니다.”
“혼자서만 즐기세요?”
“어디가요, 나갈 땐 혼자라도 자연히 동문들과 만나게 되니까, 끝나면 이겼다고 한잔, 졌다고 한잔, 오래간만에 만났다고 한잔 하다보면 돌아올 땐 엉망으로 취해서 꼬리까지 달고 들어와 마누라 머리에 뿔을 돋게 하는걸요.”
“아들하고 야구구경 다니고 싶단 생각 없으세요?” 나는 너 약 좀 올라봐라 하는 듯이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또 아들 타령입니까. 내참, 솔직히 말해서 아들하고 같이 와서 부전자전으로 열광하는 친구를 보면 부럽지 않은 것도 아니라니까요. 여북해야 큰딸을 길들이려고 했겠어요. 실패했어요. 커갈수록 야구장 따라가는 걸 고역스러워하길래 놓아주었어요. 그렇지만 작은애가 또 있으니까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요. 남자보다 비율이 낮다뿐이지 여자라고 야구를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요.”
“구차스럽게 그럴 것 없이, 부인한테 솔직히 아들데리고 야구장 다니는 친구가 부러워서 죽겠다는 시늉을 자꾸만 하세요.” “부부간에 뭣하러 그런 상처를 줍니까?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상처뿐이겠어요. 모욕이고 모독이죠. 그래야 부인도 별수 없이 아들 낳을 방도를 강구하게 될 거라, 이거죠.”
나는 앞에 있는 그를 의식하지 않고도 괜히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허망한 자신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곧 꺼지게 될 게 두려웠다.
“글쎄요. 만일 나에게 아들만 있는데 아내가 옆에서 콩나물 다듬어 줄 딸 하나 없다고 아무리 구시렁거려도 단지 콩나물을 다듬게 할 목적으로 내가 딸을 만들고 싶어할 것 같진 않네요. 혹시 내가 그 정도로 싹수머리 없는 인간이라 해도 아들딸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지막 장치가 남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음양의 조화만은 아직도 신의 영역인 게 감사할 따름이죠.”
그러면서 그는 팔운동을 하듯이 큰 동작으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나하고 상대하기 싫다는 걸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몸짓이리라. 그 마지막 장치인지, 음양의 조화인지가 신의 영역을 벗어난지 오래라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척하긴. 순진한 탓일 거야. 몇 살이나 되었을까. 나하고 동갑 아니면 기껏해야 서너 살 아래일 것이다. 저런 남자하고 자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다 말았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나른한 기분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아마 말문이 막힌 줄 알고 이때다 싶었나 보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실은 인터뷰 약속을 해놓고 그 사이에 잠깐 틈을 낸 거라서.”
“요령이 좋으신가 봐요.”
“요령은요. 남 보기엔 시간의 구애를 덜 받는 직장처럼 보이지만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도 일해야 하는 게 이놈의 팔자랍니다.
차값은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그럼.”
그는 필요 이상 서둘고 있었다. 누가 잡아먹나. 순진하긴. 그가 그럴수록 나는 그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어째보겠다는 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갖고 놀고 싶었다. 조그만 더.
나는 따라 일어서서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차값을 내가 내겠다고 날치진 않았다. 나는 남들이 그런 일로 투사처럼 열렬하게 다투는 걸 보는 것조차 질색이었다. 그 대신 나는 그가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는 걸 지켜보는 동안 기막힌 생각을 해낼 수가 있었다.
“명함 있으면 한 장 주세요.”
“왜요? 참 명함이 어디 있더라.”
그는 양복 주머니엔 손도 넣지 않고, 겉으로만 위아래를 양 손바닥으로 탁탁 쳐 보이면서 찾는 시늉만 했다. 명함을 줄까말까 결정할 시간을 벌려는 그의 이런 어색한 동작을 나는 속이 근질근질하도록 귀엽게 바라보았다.
“아까 찍으신 필름 잘 됐으면 하나 복사해서 드릴려구요. 남자 주인공 찍는데 여주인공을 빼놓았을 리 없잖아요.”
나는 짐짓 사무적으로 말했다. 예상대로 그가 반색을 했다.
“아, 그러문요, 그러문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초점을 우리 애한테 맞췄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으니까 용서하세요.”
그의 얼굴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헤벌어졌고 손엔 이미 명함을 꺼내들고 있었다. 나는 관심없다는 듯이 명함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핸드백 속에 집어넣으면서 고개만 약간 까딱해 보이고는 먼저 획 등을 돌렸다.
“그림이 잘 안 나왔어도 보내주셔야 돼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가 내 등뒤에서 소리치는 걸 들으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음이지만 멀리 퍼지는 기분 좋은 목소리를 천천히 음미했다.
저녁을 먹고나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데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두 딸은 과외공부 가고 아들은 숙제를 하고 있는 호젓한 시간이었다. 남편은 중국으로 출장 중이었다.
“언니, 우리 집에 차 마시러 오지 않을래. 언니 언제 그렇게 기술이 늘었수? 너무너무 잘 찍었어. 슬기 재롱잔치 찍은거 말야. 근사해. 볼만해.”
오는 길에 동생네다 카메라를 놓고 왔더니 지금 식구가 모여 그걸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까짓거 찍는데 기술이고 뭐고가 어딨냐? 제 새끼 재롱이니까 근사해 보이는 거지.”
“아냐, 언니. 전에 언니한테 잠깐잠깐 찍어 달랜 거 얼마나 못 찍었는지 알아? 나도 잘은 못 찍어도 그냥 눈에 안 거슬릴 정도는 찍는데 언니 찍은 건 한 카트만 끼어들어도 아아 저건 언니 솜씨라는 걸 알만큼 못 봐주게 튀었다구. 그런 언니가 웬일이유? 오늘 찍은 건 이건 작품이야, 작품. 카메라는 줄창 우리 집에다 내꼰자 놨으면서 언제 그런 장족의 발전을 했을까?”
동생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나는 아들의 방문을 열고 이모네 마실 갔다오마고 말했다. 아들은 하던 숙제에서 눈도 떼지 않고 알았다고 했다.
“같이 가지 않을래? 엄마가 찍은 비디오 보러 가는데.” 나는 현관에서 안해도 될 소리를 던지고 대답을 기다렸다.
“흥미없어요.”
아들의 시큰둥한 대답이 들렸다. 열한 살짜리가 저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싫어, 라든지 바빠, 라고 했더라면 좋았을 걸. 열한살, 만 십 년하고 일곱 달짜리가 흥미있어하는 건 뭘까.
나는 아들의 멱살을 잡고 내가 널 어떻게 낳아 기른 자식인 줄 아느냐고 한바탕 악다구니를 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느라 현관 신장을 잡고 심호흡을 했다. 나는 떨고 있었다. 손끝이나 가슴이 아닌 더 내밀한 곳이 분심으로 떨고 있었다.
동생네는 마침 일가단란의 시간이었다. 오붓한 세 식구 곁에 주책없이 아줌마까지 끼어들어 빨래를 개키면서 시시덕대고 있었다. 나도 기분을 바꾸려고 아줌마 점점 고와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형님은 경기 좋으신가 봐요. 일 년이면 반 이상은 해외에서 보내시니. 이웃에 살면서도 까딱하단 형님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 다탁에 들러앉아 차를 마시면서 동생의 남편이 말했다.
“해외에 자주 나간다고 경기가 좋겠어요. 중소기업들이 다 어려워하는 것만큼 그이도 어렵겠죠, 뭐.”
“언니는 또 죽는 소리, 누가 사업가의 아내 아니랄까봐. 형부가 왜 중소기업이유?”
“얘는 그럼 우리가 재벌이냐?”
“부동산 재벌 아니우? 뒤가 그만큼 든든하면 맨날 윗돌빼 아랫돌 고였다, 아랫돌빼 윗돌 고이다 마는 중소기업하곤 다르지. 남은 죽기살기로 하는 사업을 형부는 취미로 하니까 돈이 벌릴 수밖에.”
시집이 대대로 살던 서대문 밖 구옥 앞으로 길이 나면서 번화가가 되어 그 자리에 빌딩을 올린걸,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는 전적으로 시어머니 관리하에 있지만 장차 남현이 상속하게 되리라는 것 때문에 동생은 툭하면 이렇게 시샘이 섞인 소리를 했다.
“나도 따분한 은행 때려치우고 형님 밑에 들어가서 사업이나 배울까?”
“듣기 싫어요. 누가 붙여주기나 한다구. 난 사장 마누라는 안 바랄테니 지점장 마누라라도 한번 돼봅시다.”
그러면서 동생이 비디오 세트의 리와인드를 누르자 동생의 남편은 주섬주섬 담뱃갑을 챙겨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가고 아줌마도 제 방으로 가버렸다.
“이번이 네번째야, 언니. 다들 질렸나봐. 요녀석은 그래도 지가 나오니까 또 보고 싶은가보네.”
기대에 부푼 얼굴로 화면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슬기를 보며 동생이 눈을 흘겼다. 곧 화면이 나오고 나는 슬기보다 더 열심히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낮에 본 어설픈 동극하고는 전혀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화면은 아름답고도 생동감이 넘쳤다. 아, 저런 장면도 있었던가 싶은 귀여운 실수, 깜찍한 연기, 지엽적인데 숨어서 등극을 동극답게 하는 천진난만, 그런 것들을 어쩌면 저렇게 낱낱이 끄집어내어 저다지도 귀엽게 살려놓은 걸까. 그 삼십분도채 안 되는 아마추어의 기록 필름이 나에게 걸작품일 수 있는 것은,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끼리만 통한 귀여운 것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비디오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남자와 눈을 맞추고 있는 거였다. 출연한 아이들이 모두 손에 손을 잡고 무대를 한 바퀴 돌고는 손을 흔들면서 퇴장을 했다. 슬기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동생도 하품을 했다. 네 번씩이나 보고나니 시들한 모양이었다. 내 기술에 대한 칭찬도 안했다. 나도 약간은 지루했던 양 기지개를 켜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덤덤하게 그 테이프 한 통 더 복사해 달라고 말했다. 서로 잘 자라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저만치 아파트의 각진 모서리에 반달이 걸려 있었다. 어머, 자연이라는게 있긴 있었구나. 나는 무료하게 걸려 있는 달을 향해 까닭없는 능멸의 시선을 보내고는 종종걸음을 쳤다.
아들은 그새 잠들어 있고, 딸들이 과외공부에서 돌아올 시간은 아직 멀었다. 고2짜리와 중3짜리의 과외학원은 꽤 멀었지만 이웃끼리 서로 조를 짜서 돌아가며 데리러 가기 때문에 내 차례가 아닌 달은 문만 열어주면 된다. 그 조에 끼려면 차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나처럼 기계 무서움증이 심한 사람도 운전을 배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딸애들이 올 때까지 텔레비젼이나 볼까 하다가 비디오를 틀었다. 남편이 출장가고나서 빌려온 [장미의 전쟁]이라는 영환데 그동안 서너 번은 본 것 같다. 나는 연속극도 비디오도 영화도 보긴 보지만 결코 즐기는 편은 아니다. 재미로나 감동으로나 푹 빠진 적이 없으니까. 아주 정신차리고 보지 않으면 스토리도 제대로 못 따라갈 적이 많다. 본 것을 연거푸 또 보고 싶어하긴 처음이다. 그런게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그 영화를 연거푸 보고 있다는 걸 누가 알고있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묘하게 떳떳지 못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만 보고 돌려주리라 혼자서 다짐까지 한다. 그까짓게 무슨 금지된 쾌락이나 되는 것처럼. 실은 별것도 아닌 얘기다.
부부가 싸우는 얘기다. 그러나 예사 부부싸움은 아니다. 어찌나 격렬하게 싸우는지 제목 그대로 전쟁이다. 정력적이고도 지능적으로, 잔혹하고도 줄기차게, 물불 안 가리고도 교활하게, 상대방을 해치고 골탕먹인다. 나치하고 유태인하고 전쟁이 붙었대도, 왕년의 우리 국군이 인민군과 싸울 때도 이 부부의 전쟁보다는 그래도 감미(甘味)나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으리라. 참 기막힌 증오 였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들이 왜 그렇게 싸우고 미워하게 됐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는 거였다. 제대로 된 영화라면 그걸 안 밝혔을 리가 없다. 내가 같은 필름을 반복해 보는 것은 혹시 내 영화 보는 법의 미숙 때문에 그걸 못 읽어낸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 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보기 시작하면 그 까닭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놓쳐 버리고는 격렬한 증오만이 고스란히 옮아 붙는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거 없는 부부였다. 지성과 미모와 건강 을 겸비한 남녀가 첫눈에 반해 열렬하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출세하고 고급 주택 고급 가구 미술품을 모으며 살아간다.
너무 아쉬울 게 없으니 권태로울 수도 있으리라. 아니다. 이건 권태 따위 나른한 것하곤 다르다. 아내가 먼저 이혼하자고 한다.
그 전에 남편이 아내가 하는 일을 경멸하는 태도를 한두 번 취한 것 같긴 하다. 그것이 빌미가 됐든 어쨌든 아내는 부부생활의 의미 상실을 선언한다. 그러나 집이나 소유물에 대해선 서로 한치도 양보를 안한다. 상대방을 내쫓고 자기 소유로 하기 위해 지혜와 체력을 다해 가열한 투쟁을 벌인다. 병적일 정도로 무서운 집착과 증오가 화면을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아내의 고양이를 남편이 실수로 치어 죽이자 아내는 남편이 사랑하는 개를 일부러 치어 죽여 그걸로 요리를 만들어 남편에게 먹이는 식으로 구원의 여지가 바늘구멍만큼도 없는 증오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치닫는다. 증오의 클라이맥스는 죽음밖에 더 있겠는가. 용서니 화해니 하는 거짓된 정서는 양념으로 쓰려도 찾아지지 않는다. 나는 마치 자웅을 붙은 짐승이 이유도 체면도 없이 다만 어쩔 수 없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듯이 참담하게 헐떡이며 그들의 파국을 쫓는다. 쫓고 쫓기던 부부가 마침내 천장의 휘황한 샹들리에에 같이 매달렸다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박살이 나서 죽는 장면까지 봐야만 비로소 열병처럼 옮아 붙은 증오로부터 놓여나게 된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영화를 나는 왜 또 보고 또 보는 걸까. 더 기분 나쁜 것은, 증오 때문인지 소유의 공평한 분배 때문인지 남자가 핏발선 눈을 하고 아내의 구두 나부랭이를 톱으로 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그때마다 그 구두가 내 아들의 몸뚱이가 되는 엉뚱한 환상 때문에 진땀을 흘린다는 사실이다.
초인종 소리가 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딸이 돌아왔다. 엄마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마치 골속에 공기돌이 잔뜩 든 것처럼 무거운 통증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너희들 기다리다가 잠깐 졸았나보다. 그새 무서운 꿈을 꿨더니 골치가 좀 아프구나.”
나는 이렇게 둘러대고는 남편이 돌아올 날을 달력으로 짚어보았다. 사흘 남았다. 어른도 무서운 꿈을 꾸냐고 작은딸이 물었다.
그 아이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하고 같은 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대답 대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더는 [장미의 전쟁]을 보지 않았다. 꼭 해달라는 투로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동생은 재롱잔치 테이프를 복사 해왔다. 형부 보여주라, 좋아할 거야. 동생은 모든 사람이 저처럼 제 아들을 예뻐하길 바란다. 남편도 슬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제 자식 사진도 찍을 때는 신나게 찍다가도 현상해온 사진을 관심있게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식구가 다 모인 자리에서 그걸 한 번 틀어 보여주었다. 길지 않으니까 다들 의무적으로 봐주었고, 아무도 누가 찍었나 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내 속셈도 그 필름으로 식구들의 관심을 끌 생각이 아니라, 복사를 부탁하면서 품었던 야릇한 조바심이 안심할 정도로 희석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거였다. 그러나 외간남자에 대한 매혹과 거기 따른 죄책감이 충분히 사그라진 후까지도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게 문제였다.
실상 나처럼 심심한 여자에게 그런 유의 감정적인 외도는 번번이 처음 같으면서 처음이 아닌, 차라리 진부한 거였고, 지나놓고보면 무엇에 씌었던 것처럼 황당한 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겐 그렇게 가볍게 흘려보낼 수만은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들이 없이도 불행하기는커녕 쓸쓸하지도 허전하지도 않은 인간이 이 한국땅에 있다는게 참을 수 없이 께름칙했다. 만약 그 께름칙한 걸 떨쳐 버리지 않고는 생전 아무 재미도 못 느끼고 살아야 할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그걸 떨쳐 버리기는 간단할 수도 있으리라.
그 남자의 그런 생각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내면 된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나는 그의 잡지사로 전화를 걸어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해 놓았는데 만나서 전해 주고 싶다고 했다. 나를 반가워하는 그의 기분 좋은 저음을 듣자 나는 갑자기 새처럼 지저귀고 싶었다.
“솜씨가 여간 아니시던데요. 잘 나왔어요. 슬기편에 댁의 따님한테 전할까 하다가 그냥 내주긴 아까운 필름이더라구요. 차라도 한잔 더 얻어먹고 싶어서요.”
“허허, 그렇습니까, 그렇게 잘 나왔어요? 그럼 제가 솜씨 턱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치가.”
“그렇게 되나요? 좋아요. 이번 차는 제가 사고, 테이프 턱은 그 다음에 받을게요.”
나는 무턱대고 즐거워서 들뜬 목소리를 냈다. 사춘기로 퇴화한것처럼 필름이나 솜씨 따위 사소한걸 핑계삼아 낯간지러운 즐거움을 줄줄이 창출할 작정이었다.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난 후였다. 저녁때 집으로 참기름을 꾸러 온 동생이 나를 자꾸만 쳐다 보는 것 같았다.
“왜 그러니? 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
“아냐. 언니가 달라진 것 같아서. 더 젊어진 것 같기 도하고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생기가 넘쳐 보여. 늘 늘쩍지근하더니만. 언니 혹시 연애하는 거 아뉴?”
“망할 거, 참기름 갚으란 소리 안할 테니 객쩍은 소리 작작하고 어서 가봐라. 콩나물 무치다 왔다면서.”
“내가 언제 갚는 것 봤수? 하긴 집구석에서 누굴 만날 기회가 있어야 연애도 하지.”
동생을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동생이 말한 걸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달라진 것 같았다. 젊고 예쁘고 싱싱한 것, 그건 얼마나 좋은 건가. 그 후 나는 거울 앞에서 그런 것들을 나한테서 찾아내려고도 애썼지만 그렇게 꾸미려고 더 많이 노력했다. 아들이 없는 걸 조금도 고민스러워 하지 않는 괴짜가 한국땅에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께름칙하게 여기고 있는 걸까, 신나는 일로 여기고 있는 걸까, 그것조차 왔다갔다 했다. 내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그 남자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아들하고 키를 대보는 걸 좋아했다. 나는 키가 백육십이센티나 되었다. 체중은 이 킬로 정도는 들쭉날쭉했지만 오십 킬로를 넘은 적이 없어 늘씬해 보였다. 그런 내 키를 열한 살밖에 안된 녀석이 육박하고 있었다. 어려서는 기둥에다 아들의 키가 커가는걸 눈금으로 표시하는게 낙이었지만 국민학교 들어가고부터는 어깨동무를 해보는걸 더 좋아했다. 어깨동무를 하는 척 아들의 볼을 애무하면서 앞으로 끌어당기면 아들은 고분고분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엄마 심장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끌어당길 수 없을 만큼 키가 자라면서 아들은 고개도 뻣뻣해져서 좀처럼 나에게 안겨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아들하고 육체적 접촉을 하는 게 좋았다. 그 뿌듯한 느낌을 갈망할 적도 많았다. 아들은 건강한 나무처럼 잘자랐다. 근육은 유연하고도 단단했다. 긴 바지를 입었을 때도 아들의 정강이가 얼마나 곧고 강하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아들이 그냥 집 안을 왔다갔다 하는 것만 봐도 좋았다. 아들을 가슴에 안으 면 온몸이 뿌듯하듯이 아들이 집 안에 있으면 온 집안이 가득해졌 다. 그애가 눈에 안 보일 때도 그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떳 떳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있었다. 그애가 있다는 것은 나의 최고의 성취감이고 그애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행복감이었다. 두 딸도 물론 사랑했다. 큰딸은 첫정이라 애틋하고 둘째는 딸로 막내라 예쁘다. 한번도 사랑으로 딸 아들을 층하하지 않았다. 그러나 딸은 둘을 다 합쳐도 아들 하나만큼 나를 충만하게하지 못한다.
그 남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 나는 공들여 화장하고 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많은 옷을 입어 보았다. 젊고 싱싱하다는 동생의 말을 다시 음미하며 미소지었다. 동생도 가끔 가다 그런 쓸모있는 말을 할 때가 다 있다니.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나와 세차까지 했다.
그 남자하고 장소를 의논할 때 아무렇게나 정한 것 같아도 실은 분위기는 물론, 운전에 자신있는 지점이라는 것과 주차하기 편한 것까지 계산하고 정한 거였다. 칠전팔기도 더 되게 고전하고나서 면허를 딴 운전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밤길에 딸들을 태워다 주는 일 외에 다닐 수 있는 코스가 한정돼있고 그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그 정해진 코스는 곧 나의 옹색한 사교범위를 의미했다. 남편은 그 정도 밖에 차를 이용할 줄 모르는 나를 무시하면서도 다행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남들한테도 나의 차운전을 [우리 집사람의 딸 효도.]라고 말하곤 했다. 남편 말대로 딸들을 위해 쓰는 것외엔 그닥 탐탁한 이용가치를 못 느껴본 차였다. 그러나 오늘은 차도 비싼 옷과 공들인 화장처럼 나를 빛내주길 바랐다. 술이 달린 모자를 쓰고 옆솔기에 진홍색 줄이 쳐진 제복을 입고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웨이터에게 생긋 웃으면서 차 키를 맡기고 또박또박 걸어가 호텔의 회전문을 미는 맛이 그럴듯했다. 남들이 그러는걸 볼 때는 아니꼽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더니만 해보니까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남자는 먼저 와 있었다. 강이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가 먼저 잡아 놓고 있었다. 나는 젊고 싱싱하다, 이렇게 최면을 걸듯이 타이르면서 그에게로 걸어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남자 앞에 앉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나는 속으로 여간 실망스럽지가 않았다.
그는 지치고 후줄근해 보였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스스로가 무안했다. 아뇨, 방금이오. 그러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그의 턱에서 삐죽대는 수염이 땟국물처럼 꾀죄죄했다. 무안한 정도가 아니라 모욕감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어젯밤 야근을 했더니.”
그는 또 한번 하품을 하려다 우물우물 씹어 삼키면서 말했다.
나는 커피를 시키고나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따뜻한 커피를 음미하며 마시는 사이에 어지러운 망상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원하고있는게 설사 마주앉은 저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라 해도 내 속에 있는 께름칙한 것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차를 마시는 동안도 마시고 나서도 골똘히 바깥만 내다보았다. 창 밖으론 물을 뺀 겨울 수영장과 호텔을 휘감고 동북으로 뻗은 아스팔트 길이 보이고 길과 평행으로 겨울 강이 고여 있는 것처럼 나른히 있었다. 여름엔 요트가 한유로히 떠 있는 게 평화롭고도 이국적으로 보이던 강이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새떼가 무리지어 떠다니고 있었다. 여름에 못 보던 새니 물오리나 천둥오리 따위 겨울새일 것이다. 강이 얼면 저 오리떼들은 어떻게 될까. <한 큰 연못이 있었는데, 가을날 많은 오리떼들이 날아왔다. 밤새 추위가 닥쳐 연못이 꽁꽁 얼어붙었다. 오리떼들은 어찌 되었을까? 연못을 물고 날아가 연못은 더 이상 거기 있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를 본 생각이 났다. 산다는 것의 덧없음에 가슴이 저리면서 내가 보고 있는 풍경도 실제로 저기 존재하는게 아니라, 나에게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뺨에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돌렸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틈에 졸음이 걷힌 부드럽고도 그윽한 시선이었다.
“쓸쓸해 보이십니다.”
내가 너무 갑자기 돌아다보았기 때문인지 그가 좀 놀란 듯이 말했다. 이번엔 그가 내 시선을 부신 듯이 피했다. 나는 그가 나에게 매혹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쓸쓸한 걸 눈부셔 할 까닭이 없다. 내 표정은 아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쓸쓸해 보인다는 건 그의 발견일 터였다. 그가 쓸쓸해 보인다니, 아마도 내가 쓸쓸한 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 비싼 옷과 공들인 화장을 뚫고 그가 내 내부를 정확하게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이다. 그게 매혹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마음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헤프게 그에게 경도되는 자신을 걷잡을 수가 없다. 곧 체면이니 예의니 하는 심리적 균형이 깨질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힌다. 뇌졸중이나 간질의 전조(前兆)가 이런게 아닐까 싶게 그런 느낌은 막연하면서도 기분 나쁘다. 어서 사무적이고 온당한 대화의 꼬투리를 찾지 않으면 무슨 실수를 저지르고 말 것 같다.
“그림이 괜찮게 나왔다면서요?”
그가 나의 용건을 일깨워 주었다. 아 네, 나는 핸드백에서 누런 봉투에 든 테이프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슬기네 식구와 우리 식구가 번갈아 가며 그걸 보며 얼마나 즐거워했다는 얘기를 과장되게 했다. 나는 말을 한번 부풀리기 시작하면 풍선을 터질 때까지 불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조정을 못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보통 수다쟁이하곤 달랐다. 말문이 열리려면 시간도 걸리고 말상대도 가리는 편이었으니까. 그의 앞에서도 말문이 일단 터지자 계속해서 나만 일방적으로 지껄였다. 그 유치원이 홍보전략에 능해서 장사가 잘 된다는 얘기로부터 유아교육의 전반적인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한바탕 아는 척을 하고 나서 요즈음 아이들 다루기 힘든 얘기며, 교사의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우려등 할 얘기는 무궁무진했다. 별안간 봇물처럼 터지는 내 수다를 남편도 병이라고 까지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외국에서 전화를 걸어왔을 적이었는데 식구들 안부에 예, 아뇨라는 말밖에 안하자 전화값 걱정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신경질을 냈다. 그때부터 말문이 터져 큰애가 어쩌구저꺼구, 둘째가 이만저만, 셋째가 여차저차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쳤다. 그가 정말로 전화값이 겁나 끊어버린 것도 모르고 지껄여댔던 것이다. 병이라는 소리까지 들어도 싸다.
“집사람이 좋아할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가 내 수다 사이를 용케 비집고 들어와 인사치레를 하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우리 동네 다방에서 차를 마신 날처럼 팔운동이라도 하듯이 과장된 동작이었다.
“아직도 딸이 더 좋다고 우기실 작정인가요?”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리라고는 나도 미처 예상 못한 일이었다. 나는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갈 지에 대해 무책임한 편이다.
“또 그 얘기가 하고 싶은가요?”
그래 난 당신처럼 딸만 있는 주제에 천연덕스럽게 행복한 체할 수 있는 남자가 이 땅에 있다는 게 께름칙해. 그 께름칙한 걸 떨쳐 버리지 않으면 미치겠단 말야, 이런 눈빛으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진저리가 난 티를 감추지 않다가 용케 자제하고 냉정한 얼굴이 됐다. 나는 그가 억지로 가다듬은 냉정 뒤에 지친 듯 희미한 연민이 번득이는 걸 본 것처럼 느꼈지만 어째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는 딸이 더 좋다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아들이 더 좋다는 것과 같은 척도를 가진 발상이기 때문이죠. 장차는 딸이 더 좋을 거라느니,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 타고 아들 가진 부모는 고속버스 탄다는 식의 위로나 발상이 제일 싫습니다. 마치 내년엔 무슨 농사를 지으면 수지를 맞을 거라든가, 앞으로 무슨 장사를 하면 떼돈을 벌 거라는 식의 상업적인 전망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 발상은 남녀의 올바른 인간관계를 더욱 해칠 뿐 조금도 도움이 못 될 겁니다. 그야 딸 가진 부모가 경제적 이득을 더 많이 볼 날이 의외로 빨리 올지도 모르죠. 남녀의 성비율이 이런 속도로 허물어져가면 말입니다. 재롱잔치날도 보셨죠? 춤출 때 여자 짝이 차례가 안 간 사내애들이 싸우는 거 말예요. 어렸을 적이니까 순전히 완력으로 결판내려는 원시적인 싸움을 했지만 어른이 돼 보세요. 어른도 역시 힘이 있어야 여자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건 틀림없지만 어른의 힘이란 뭐겠습니까. 금력 권력 그런거 아니겠어요. 의사나 판사 사위 얻는답시고 바리바리 싣고 지참금까지 안동을 시켜 시집보내던 딸을 앞으로는 가만히 앉아서 그 몇 배를 받아 내면서 보내게 될지도 모르죠. 아니, 보낼 건 또 뭡니까. 데릴사위로 들어가지 않으려면 결혼 못할 세상이 올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달라진 게 뭡니까. 손해나던 장사가 수지맞는 장사로 변했을 뿐 여성을 상품 취급하긴 마찬가지지요. 수지가 맞을수록 상품화는 더 심화될 겁니다. 더욱 더 어떡하면 비싸게 팔리나 하는 쪽으로 길러지고 교육될 테니까요. 남자는 또 어떻구요. 물욕과 성욕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예쁜 여자는 재산목록이 되고 권력의 상징이 되겠죠. 여자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건 곧 남자도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내가 첫눈에 이끌렸을 때의 꽤 괜찮은 남자하고도, 아까 실망했을 때의 지치고 꾀죄죄한 인상하고도 달라 보였다. 어느새 지난 시대의 일이 되고 말았지만 자유를 위해 외치던 운동권의 거친 열정의 그루터기 같은 걸 얼핏 본 것처럼 느꼈다.
“그러니까 여자는 수적으로 흔해도 천하고 귀하면 더 천해진다는 전망 아닌가요? 그럴 줄 알면서도 딸로 만족한다면 그건 허세 부리는 거지 본심은 아닐 겁니다.”
그를 설득하는 것보다는 약을 올리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참 집요한 분이군요. 두 번째도 딸이었을 때 섭섭했단 실토를 한 것 같은데 왜 저를 자꾸만 그쪽으로 몰아붙이려고 하십니까. 저는 제 자식의 성이 여자라는게 그 아이 잘못도 아니고 더구나 인간으로서의 하자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섭섭해할 수 밖에 없었던 악조건을 걷어 주고 싶을 뿐입니다. 얼마짜리 성적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건 아들 기르는 것보다 훨씬 값진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향수로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대학시절 운동권에 몸담았던 적이 있죠. 덕택에 대학을 칠년만에 졸업하고 어머니 애간장도 많이 태워드렸죠. 그 시절의 이상은 비록 좌절됐습니다만 나는 그때의 내가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때의 나하고 청탁(淸濁) 안 가리고 타협의 타협을 거듭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벌어들이는데 급급한 현재의 나하고 동일인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도 딸의 아버지 노릇을 통해서라면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나는 역시 그랬었구나, 나의 혜안에 적이 놀랐지만 그의 말뜻을 다 알아들은건 아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못 알아들으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저는 남을 찍어 누르고 억울하게 만들고 우뚝 선 자보다는 억울하게 짓눌리고 소외된 자의 편이 될 수 밖에 없는, 양심이랄까 정의감을 타고났고, 거기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북해야 나보다 출세하고 돈도 더 잘 버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기가 죽기는 커녕 자신을 군계일학처럼 느낄 적이 있는 걸요. 그런 정의감이 사회적으로 좌절됐다고 해서 내 가정 속에서 내 식구 사랑 속에 구현시키려는 노력까지 그만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운동할 때 가장 큰 고민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가 어려운 거였고, 동지들의 같은 모습에 실망하고 불화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비록 독불장군으로나마 내 가정 안에서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식구들에게 영향을 끼치면 결국에 가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도 부담 줄텐데요.”
“아들 노릇하도록 키운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라니까요. 남자와 여자는 혼자서는 부족함으로써 저소 평등한 거 아닙니까. 자연이 완전하게 아름다운 것도 개개의 종의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조화 때문이듯이. 우리 나라의 남녀 불평등구조가 마침내 자연의 조화 중에도 가장 오묘한 조화인 성비율의 균형을 깨뜨리기 시작했다는데 대해 저는 거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실상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만.”
나는 무엇에 찔린 것처럼 뜨끔했다. 앉은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잔기침을 했다. 싸고 싼 비밀을 찔린 기분이었다. 나는 내 비밀을 누구한테 들킬가봐 늘 전전긍긍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들키기를 갈망해왔다. 그 두 가지 상반된 갈망은 나를 늘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수습할 수 없이 헝클어지려는 자신에게 위기의식을 느끼며 가냘프게 말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대를 잇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해결책도 생겨난 거 아니겠어요. 만일 남자와 여자가 생활 감정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완전히 평등한 세상이 온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평등해 질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을 게 바로 아들에 의해서만 대가 이어진다는 문제 아닐까요?”
“딸만 있는 집이 주위에서 동정받는 것도 바로 그 점이라는 것 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님처럼 트인 분도 우리를 딱하게 여기시는 걸요. 느이 집에 아들 하나만 있으면 무슨 걱정이겠느냐 고요. 그 말씀도 그런 뜻이겠죠. 우리 부부도 그런 고정관념이나 주위의 동정을 저절로 극복한 건 아니랍니다. 대(代)란 무엇인가? 대가 후손이면 족하지 왜 반드시 성(姓)이여야 되나? 그렇게 자문도 하고 자위도 했죠. 거꾸로 생각해서 아버지성만 잇도록 돼있는게 현행 제도고 인류의 거의 공통된 문화라고 해서 그럼 인간을 만드는 데 남자가 더 많이 기여하고 더 많이 자신의 특징을 유전시키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사람의 최소단위를 만드는데 있어서의 남녀의 기여도야말로 완전히 평등한거 아니겠어요. 결국 아들에 의해서나 딸에 의해서나 자기 핏줄은 면면이 이어진다고 봐야죠. 후손을 통해 아주 죽지 않고 자기 생명이 영속되기를 바라는 게 본능이고 실속이라면 성은 껍데기고 문화 아니겠어요.” “성이 완전히 빈 껍데기라고 해도 그렇죠. 처음부터 여자는 제 속으로 낳은 자식에게 제 성을 따르게 하지 않고 남자 성을 따르도록 한 것은 여자가 그만큼 못났다는 증거 아녜요?”
“사람이 이름 외에 성을 갖게 된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거니까, 성은 굉장히 문화적인 거고 확실히 여자의 경제적 열등과 관계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남자가 잘나서 그 권리를 차지했다기보다는 여자는 처음부터 자식에게 자기 성을 따르게 하고 싶은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자에겐 자기 자식이라는 게 너무도 분명하니까요. 애를 배고 낳는 여자의 수고를 남자는 동정도 하지만 질투하는 마음도 있거든요. 에미는 제 자식이라는 걸 의심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그만큼 아비의 의식의 저 밑바닥엔 과연 내 자식일까 하는 의구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걸 꿰뚫어 본 여자는 아이가 아빠 닮은 걸 강조하고 한편 부계의 성으로 네 자식이 틀림없다는 걸 문서화까지 해주고 대신 부양의 의무를 씌운 게 아닐까요.” “그럴듯하군요. 그렇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게 뭔데 문화적인걸 무시할 수가 있습니까?”
“무시하자는게 아니라 더욱 문화적이 돼야죠. 후손의식을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혈통을 이어간다 정도로도 사실은 부족합니다. 딸도 못 가진 사람에게도 후손의식은 있고 제도적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성직자라도 제대로 된 성직자라면 반드시 후손의식이 있을 겁니다. 내가 죽은 후에도 세상은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이 오늘을 함부로 살 수 없게 하는 후손의식이고, 민족애 더 나아가서는 인류애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딸을 안 섭섭해할 구실을 준비해 가지고 있는걸 보니까, 도대체 얼마나 섭섭했으면 저 정도가 된 걸까 되레 동정이 갑니다.”
약을 올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한 내 심정이었고 이제 그만 듣고 싶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결코 나 개인을 위로하려는 구실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너무도 아닌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대한 위기의식에서 해본 고민의 일단을 피력했을 뿐이죠.”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가당치 않게도 내가 그에게 보낸 연민을 몇 배로 진하게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제가 감히 나를 불쌍히 여기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만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벌써 작년의 일입니다만 우리 잡지사에서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부부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산부인과 병원 몇 군데를 취재한 적이 있죠.”
이 남자가 시방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나는 겁에 질려 무슨 핑계든지 대고 어서 이 자리를 떠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듣기 좋은, 그러나 우울한 저 음은 이어졌다.
“그런 계획안을 처음 낸 건 저였죠. 아주머니 같으면 그것도 아마 딸만 가진 콤플렉스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유치원 유아원 등 꼬마들 사회의 남녀 비율이 심각할 정도로 정상을 일탈하고 있다면 그 까닭을 한번 심층 취재해서 규명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 거죠. 남들은 무슨 재주로 저렇게 아들을 잘 낳을까 하는 호기심도 아마 없지 않아 있었을 겝니다. 옛날서부터 내려오는 아들 낳는 비법이야 좀 많습니까. 그래도 인간의 성비율에 털끝만한 영향도 끼치지를 못한 걸 보면 다 엉터리였던 건 분명한데, 도대체 현대의학은 어느 만큼 와있길래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궁금도 하려니와 그 일이 설사 마음대로 된다고 해도 인류 의 미래를 위협한다면 의학의 개가로 봐야 할 게 아니라 지양되야 마땅하다는 사회적 공감을 끌어내고 싶은 야심도 있었구요. 정말 기막힌 현장을 목격해야 했지요. 아주 확실한, 거의 백 퍼센트의 방법이 있긴 있었습니다. 그게 뭔 줄 아십니까?”
그가 나에게 추궁하듯이 물었다. 나는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본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금이 저려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취급을 당할 까닭이 없으므로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늘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실패할 리 없는 방법이라는게 여아(女兒) 살해를 전제로 했으니까요. 치밀하고 계획적이고 과학적이고 감쪽같이 태아가 단지 여아라는 이유만으로 없애버리는 겁니다. 의학은 그게 틀림없이 여아라는걸 보증할 뿐 아니라 살해까지를 책임지지요. 남자애를 밸 때까지 몇 번이고 그 짓을 하는 겁니다. 그게 소위 과학의 발달이라는 거구요.”
“그만, 제발 그만 좀 해두세요. 중절수술이 어제 오늘 비롯된 게 아니잖아요. 우리 어머니 시대만 해도 일곱 번 여덟 번씩이나 애 긁어내는 수술을 경험한 사람도 있다던데요, 뭐. 그때 그렇게 라도 하지 않았으면 이 땅이 그 인구를 이루 다 어떻게 먹여 살렸겠어요.”
“우리가 다같이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식구 느는게 살아 있는 식구들의 생존권까지 위협할 지경이었던 시절에 대해선 저도 압니다. 그때는 피임하는 방법도 불확실했을 테구요. 그러니까 그건 여아를 교묘하게 선택적으로 살해하는 데다 대면 엉겁결에 저지른 정당방위 정도밖에 안 되죠. 그 시절엔 아들 낳고 싶은 사람은 아마 득남한 집 대문 밖의 인줄에서 고추나 훔쳐서 달여 먹었겠죠.
얼마나 귀엽습니까. 인간은 원래 다만 얼마라도 귀여운 점이 있는 법 아닙니까. 그러나 여아 살해범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귀여운 점이 조금도 없는 사람, 숨이 차게 정 떨어지는 사람을 취재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걸 그때처럼 절감한 적도 없었죠. 여북해야 내가 내놓은 계획안을 내가 없었던 걸로 하자고 했겠어요. 기사를 쓸 신명이 안 나서였지만 데스크한테는 딴 핑계를 댔죠. 남아 선호 사상과 현대 의학이 합작을 해서 성비율을 조작하는게 장차 환경에 미칠 영향을 경고하고자 기획한건데 역기능이 우려된다고요. 모르고 있던 사람들까지 흉내내게 될까봐 고민이 된 것도 사실이구요. 우리 잡지가 환경문제를 다루는 비교적 점잖은 잡지라 그 정도로 없었던 일이 될 수가 있었죠.”
“여자만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 여자들도 오죽해야 그 짓을 했겠어요.”
“남편 몰래 했다고는 안했어요. 하나같이 남편이 호흡이 아주 잘 맞는 공범자던데요. 너무 장시간 떠들었습니다.” 그가 도망치듯이 먼저 가버렸다. 머릿속에서 공범자란 말이 벌떼처럼 잉잉댄다. 뭔가 이치에 닿는 말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쓴다.
가까스로 나를 줄창 괴롭혀온 그 께름칙한 느낌, 그걸 떨쳐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느끼게 될 것같은 몸에 철갑을 친 느낌은 바로 공범자와 같이 사는 느낌이었구나, 라고 생각한다. 나른하게 누워 있던 강에 잔물결이 이는 게 보인다. 올 겨울에도 강물이 안 얼려나. 이상난동 때문에 안 얼든 오염 때문에 안 얼든 오리떼가 강물을 물고 날아가는 일도 생기지 않겠구나. 오리떼가 강물을 물어가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 그를 다시 만나는 일도 없으리라, 이렇게 철저히 단념을 하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그가 그 일을 취재 한 건 작년이라고 했던가. 내가 아랫배에서 양수를 빼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누워 있던 침대머리엔 친절하게도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십여년 전 일이다. 그 남자가 보았을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한테 내 가장 추하고 비참한 모습을 들켜버린 것처럼 느꼈다. 미안하지만 합석을 좀 해달라고 웨이터가 정중하게 양해를 구해왔다. 그걸 기화로 나도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니 춥고 정처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제복 입은 청년이 차를 내 앞까지 가져다주었을 때 나는 가볍고 우아하 게 미소 지으며 천원짜리를 쥐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눈 여겨 봐준대로 썩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리막길로 빠져나와 곧장 가면 집 방향인데 나는 굳이 좌회전을 해서 시내와는 반대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내 차로 교외에 나가보긴 처음이다. 마땅히 가고 싶은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집과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도 한강 줄기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나는 길눈이 어둡다.
사실은 기계 무서움증보다는 그게 더 운전에 결격사유다. 되돌아 나오기 위해 긴 끄나풀을 풀며 미로에 들듯이 악착같이 한강 줄기만은 안 놓친다. 왕복 사차선은 그러나 가끔 강을 버리고 능청스레 산모롱이로 접어들다가 다시 강을 옆구리에 낀다. 그러면 안심이 되고 반갑다. 어떻든 강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림길에서도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강을 끼고 갈 때도 차가 강에 바싹 붙어 가는 것은 아니다. 강과 찻길 사이에는 축구장도 있고, 비닐하우스 단지도 있고, 강촌도 있다. 찻길과 강 사이가 이렇게 넉넉하니 잘못해서 강으로 추락할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래도 나는 추락을 꿈꾸며 달린다. 이쪽의 교통량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흐름은 도심보다 쾌적하다. 흐름을 잘 타고 있다는 쾌감 때문에 운전을 잘하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맛본다. 또 갈림길이 나타난다.
나는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일 필요가 없는데도 비스듬히 가지를 친 왼쪽 길의 전방을 흘긋 곁눈질한다. 그 길은 아마 새로 난 길 인가보다. 앞에 봉긋한 야산이 보이고 길은 그 한가운데를 뚫고 있다. 길 양쪽에 잘린 동산의 시뻘건 단애가 보인다. 지질이 진흙인가보다. 흙빛이 섬뜩하도록 싱싱하다. 단애라고 하지만 급한 낭떠러지는 아니고 길을 향해 비스듬히 깎아 내렸기 때문에 멀리서 보니 꼭 두 무릎을 세우고 가랑이를 벌리고 누워 있는 여자의 사타구니를 보는 것 같다. 머리도 동체도 생략하고 허벅지와 사타구니만 강조된 여자, 그리고 그 사타구니는 온통 피로 범벅이 돼 있다.
그 가운데로 빨리듯이 흘러들어가는 차 차 차들, 흘러나오는 또 차 차 차들, 나는 그 차선이 아닌데도 전방의 그 거대한 사타구니로 빨려들게 될 것 같아 무섭다. 무섭고 구역질이 난다. 저 꼴이 뭐람, 창피한 건 또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길을 뚫기 위해 잘린 산의 단면이 벌린 가랑이처럼 보이자 나는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내가 거기 옮아붙은건지 그게 나한테 옮아붙은건지 그 끔찍한 꼴과 나 자신을 분간할 수가 없다. 이 뒤죽박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희미하지만 유일한 구원이다. 오른쪽으로 평화로운 강마을이 보이고 포장은 안 됐지만 널찍한 진입로도 보인다. 나는 달리고 있던 일차선에서 무작정 직각으로 차를 꺾어 아슬아슬하게 그 길로 차를 꼬나박는데 성공한다. 내 차 옆구리를 이차선을 달려오던 차머리가 들이받을 듯이 급정거하는걸 환각처럼 보았을 뿐 차의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뭐라고 한마디쯤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맵사하게 차다.
우선 심호흡부터 하려는데 욕지거리가 들린다. 나 때문에 사고를 당할 뻔한 차들이 서너 대 붙어서서 어떤 남자는 내려서서, 어떤 승객은 차유리만 내리고 삿대질을 하면서 욕들을 한다. 미친년, 쌍년, 미칠려면 집 안에서 곱게 미쳐라, 뭐 그런 소리일 것이다.
폭포수처럼 솔아지는 그들의 욕이 나에겐 강바람보다 더 상쾌하다.
질식할 듯한 실내에서 뒤쳐나와 마시는 신선한 바깥공기처럼 나는 그들의 욕을 달게 호흡한다. 그들은 나에겐 말할 기회를 안 주었기 때문에 나는 바람 쐬는 자세로 머리를 나부끼며 그냥 서 있다.
기분이 상쾌하니 아마 미소까지 짓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정말 미쳤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장 내 멱살을 쥐러 올 것처럼 흥분했던 남자가 황황히 올라타고 뒤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얼굴들도 일제히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차들이 차례로 움직이자 강을 낀 도로의 차의 흐름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연해졌다.
나는 그들이 마치 나를 악의로 따돌리고 저희끼리만 좋은 데로 가고 있는 것처럼 막막하고 외로웠다. 차들의 소음 저 밑바닥을 강 바람소리가 계면조의 퉁소 소리처럼 구슬프게 깔려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깊이 모를 나락으로 투신하듯이 곧장 그 소리를 향해 침잠한다. 울음이 복받칠 것 같다. 실컷 울리라. 나는 아무렇게나 꼬나박은 차를 마을 어귀까지 찬찬히 끌고 갔다가 돌려서 길섶으로 비켜 세우고 운전대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울기 좋은 자세를 취하고 나니 되레 울고 싶은 마음도 눈물도 싹 가셔 버렸다. 나는 정말 공범자하고 같이 살고 있는 걸까. 또 그 생각이다. 남편이 공범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남편이 내 앞에서 아들 상성을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던가. 남편은 아들놈하고 티격태격하면서 야구 구경 가는 친구가 제일 부럽다는 얘기밖에 한 적이 없다. 자주 그런 것도 아니고 어쩌다 그랬다. 나는 고작 그 소리에 왜 그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까. 남편도 그렇지, 야구 구경을 그닥 좋아하는 편도 아니면서 그 말을 할 때는 마치 아들놈을 대동하지 않았다고 입장이 금지당해 야구장에 못 들어간 경험이라도 있는 것처럼 처량한 시늉을 하곤했다. 나는 그때 딸도 야구를 즐기게 될 수도, 아들이 그걸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단 소리를 왜 못했을까? 그까짓 야구구경이 뭐관대, 아니다. 그가짓 야구구경이 아니다.
나는 남편에게 야구 구경을 같이 갈 아들을 낳아주기위해 딸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태중의 생명이 딸이라는게 밝혀지고나서 그 아이에게로 집중되던 집안내의 살의(殺意)와 남편은 과연 무관했을까. 그가 정말로 초연한 입장이었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은 노여움이 치받친다. 그는 나의 남편일 뿐 아니라 살의가 집중된 생명의 아버지이면서 어떻게 초연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럼 그는 공범자인가. 나를 줄창 괴롭히는 께름칙한 느낌은 공범자하고 같이 사는 느낌이란 말인가.
방금 헤어지고 온 외간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헤어진 옛날 애인처럼 그립고 정감있게 회상한다. 다시는 못 만나리라는게 여간 섭섭하지 않다. 그 남자의 아내는 어떤 여자일까. 막연히 궁금하고 부러운 것도 옛 애인을 남편과 비교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들으면서는 충격도 받고 공감도 했건만 다시 생각해보니가 내가 그동안 뭘 너무 모르고 살아서 그렇지 하나도 새로울게 없는 소리였다. 열심히 준비하느라고 하긴 했는데 아직 소화가 안된 논문 발표를 듣고난 후처럼 알아들은 것도 같고 못 알아들은 것도 같다. 쉬운 것도 같고 어려운 것 같고, 어려운 소리를 쉽게 푼 것도 같고, 뻔하게 쉬운 소리를 어렵게 포장한 것도 같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중요한 건 그가 자기 딸을 섭섭해하지 않기 위해 그만큼이나 다양한 근거를 모아들였다는 데 있다. 비록 그게 난삽하다 하더라도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의 결과라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자기가 모아들인 걸 근거로 하여 자기 딸뿐 아니라 남의 딸까지도 껴안을 태세다. 그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남편이 그런 노력이나 고민을 한 적이 있을까. 두 번밖에 안 만난 외간남자가 남편감으로 부러운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렇지만 남편을 대뜸 공범자 취급한다는 것은 내가 너무 쉽게 그 남자에게 설득당한 결과가 아닐 까. 남편을 최초로 공범자로 바라보게 된 것은 그 남자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소리는 그에게서 처음 들은게 아니라 내 속에 늘 있었지만 내가 항상 피해 다니던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딴사람은 몰라도 남편이 공범자여서는 안 된다. 공범자끼리는 언제고 반드시 해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공범자하고는 같이 사는 게 아니다.
영화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범행은 단독범행일수록 안전하고 뒤끝도 깨끗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할 얘기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에 범죄영화는 반드시 공범이나 목격자가 있게 마련이다. 공범자끼리 서로 쫓고 쫓기면서 싸우고 해치는게 기둥줄거리가 된다.
나는 공범자끼리는 해칠 수밖에 없는 심리를 너무도 잘안다.
나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저지른 후 공손한 며느리, 착한 올케에서 쌀쌀하고 무도한 여자로 표변했다. 나는 그들과 사사건건 불화했다. 그들과의 불화는 나의 삶의 유일한 활력소가 됐다. 나는 정기적으로 시댁을 방문할 때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고 뻣뻣하게 굴었고, 시어머니가 오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남편이 좋아한다고 시어머니가 해나르는 갓김치나 청국장 따위를 절대로 남편상에 올리지 않았다. 골마지가 낄 때까지 내버려뒀다가 일부러 시어머니 눈에 띄도록 했다. 시누이하고는 대학 동창이었다.
결혼하고도 시어머니의 양해 아래 서로 이름을 부르고 지냈다. 학교 때는 과가 달라 서로 얼굴이나 아는 정도였는데 시누이 올케가 되고부터는 단짝이 됐다. 피차 어렵게 살다가 처음 집 장만할 무렵은 청약예금만 들면 아파트 신청권이 생기고 써넣는 채권 액수에 따라 당첨이 결정될 때였다. 우리는 늘 붙어다니면서 당첨권에 들 채권액 정보를 수집하고 의논해서 같은 단지에 같은 액수를 쓰곤 했다. 시뉘 올케끼리는 조금 떨어져 사는 게 좋다는 어른이나 친구들의 충고도 우리에겐 먹혀들지 않았다. 우리는 시뉘올케끼리가 아니라 단짝 친구였으므로 이웃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편의만 생각했다. 같은 액수를 써넣다보니 같이 떨어지기만 하다가 같이 당첨이 되었다. 이웃해 살면서 반찬거리도 같이 사고 애도 서로 봐주고 남편을 꼬셔서 두 집이 어울려 놀러 가는 일도 꾸미느라 우애는 더욱 돈독해졌다. 내가 태중의 여아를 지우고 아들을 낳게 되기까지도 시누이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나서 나는 시뉘가 꼴도 보기 싫어 이사를 했다. 그렇게 의가 좋던 처남 매부지간도 교묘하게 이간질을 해서 뜨악한 사이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그렇다고 서로 초대하거나 방문하는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시누이 집을 방문할 때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음식은 조금 먹고 말도 조금밖에 안한다. 그리고 시누이 이름은 실수로도 안 부른다. 깍듯이 아가씨라고 부르고 집에 와서 남편한테는 누구 엄마라고 부른다. 시누이가 우리 집에 올 때 마지못해 사오는 과자 나부랭이를 거들떠도 안 보다가 나중에 남편 보란듯이 쓰레기통에다 처넣는다. 내가 이러다 죄받지 싶을 적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에 대한 회한 따위가 아니라 음식에 대한 일말의 미안감이었다.
그 착하고 유순한 며느리가 이렇게 달라지기 시작한게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낳고나서부터라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너 아들 낳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냐? 라고 맞대 놓고 비아냥거릴 적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겁날거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안하무인으로 굴수록 그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장손을 낳아준 맏며느리가 아닌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나는 내가 남자가 된 것처럼 당당해졌다. 정말이지 나는 그들 앞에서 더는 여자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들 생각만 하면 나는 겁날게 없었다. 아들은 나에게 있어서 후천적인 남성 성기였다. 그러나 남자가 된 느낌이 고작 남을 해치고 싶은 충동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유난히 시어머니하고 시누이를 보는 게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공범 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만 보면 병원 침대 머리에서 나를 지켜보던 두 얼굴이 떠올라 저절로 진저리가 쳐진다. 양수를 빼려고 들어간 방은 수술실이 아니라 주사실이라고 써 있는 장방형의 방이었다.
한쪽 벽으로 소독장이 붙어 있고, 차가운 비닐커버를 씌운 바퀴 달린 침대가 다른 한쪽 벽에 붙어 있었다. 시누이의 친구의 남편이라는 그 의사는 무슨 대단한 신기라도 뵈줄 것처럼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다 들어오게 했다. 팬티를 아주 벗게 하지는 않았지만 불두덩까지 까내리게 했다. 시누이가 애처로운 얼굴로 얼른 자기 머플러로 그쪽을 가려주었다. 의사의 찬 손이 나의 제왕절개 수술자리를 만졌다. 의사의 그런 행동은 시어머니의 입에 붙은 탄식을 유발했다. 나는 귀를 막을 수가 없었으므로 눈을 감았다.
“글쎄 우리 아가가 남들처럼 쑥쑥 아래로 순산만 할 수 있어도 내가 선생님한테 이런 부탁 안합니다. 딸도 못 낳는 사람도 있는 데 마냥 낳다 보면 아들 낳는 날도 있으려니 기다리죠. 그러나 방 금 선생님도 보시다시피 마냥 낳을 수 없는 몸이니 시에미가 어떻게 성화를 안합니까. 이번이 마지막인데 또 딸이면 어쩌나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소스라쳐 눈이 말똥말똥해지는걸요. 의학이 이렇게까지 발달한것도 모르고 괜한 걱정을 한 생각을 하면……” 눈은 감았지만 귀를 막은건 아니어서 말을 마친 시어머니가 휴우, 하고 안도의 숨을 쉬는 소리까지 명료하게 들렸다. 시어머니가 나를 우리 아가라고 부르는게 벌레가 기는 것처럼 스멀거렸다.
의사의 젊은 나이답지 않게 기름진 목소리가 들렸다.
“뭘 너무 모르고 계셨군요. 요새 누가 둘씩이나 딸을 납니까? 두 번째는 다들 검사를 해보고 조치를 취하는걸요. 하나만 낳기로 작정한 부부 중에는 첫애부터 해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우리가 말리지만요 막무가내예요.”
그러면서 의사는 아랫배를 약냄새나는 솜으로 이리저리 문질렀다. 나는 의사의 얼굴을 똑똑히 봐주려고 눈을 떴다. 의사는 잘 안보이고 바로 눈 위에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긴장하고 기대에 찬 얼굴이 둥실 떠 보였다. 마취를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두 얼굴은 마치 동체를 떠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기괴해 보였다. 내가 어찌 그 얼굴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천장은 하얗고 부연 갓을 쓴 백열등도 거의 얼굴 높이와 같이 떠 있었다. 의사의 찬 손이 뱃속의 작은 덩어리를 자꾸 한쪽으로 몰아붙이려 하고, 작은 덩어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는게 선연하게 느껴졌다. 정신을 가다듬어 그쪽으로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따끔한 통증이 왔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려는 나를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황황히 양쪽에서 찍어눌렀다. 못 참을 만큼 아파서가 아니라 뱃속의 것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참아라 아가, 아무것도 아냐. 그냥 주사바늘이야. 시어머니가 애원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참아야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모성본능까지 참아야 한다는게 서러워서 눈귀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못나긴, 얘가 나이를 헛먹었다니까. 시어머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의사는 양수를 뽑아내지 못했다. 보름쯤 있다가 다시 오라고 했다. 아직 자궁 내에 뽑아낼 만큼 양수가 생성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의사가 손에 들고 있는 빈 주사기를 쳐다보았다. 바늘도 몸퉁도 엄청나게 커 보이는 주사기였다. 세상에 맙소사. 아직도 콩꼬투리만밖에 안할 연약한 생명을 저렇게 무지막지한 걸로 공격을 하 다니.
그날은 그래도 그 정도로 놓여날 수가 있었다. 보름을 기다리는 동안 그런 무서운 자극을 외부로부터 받은 태아가 어딜 다쳤으면 어떡하나 하는 근심으로 살이 마르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 태아가 아들인지 딸인지 아직 모를 때였다. 그렇다고 아들이면 무사하고 딸이면 다쳐도 그만이라는 생각 같은 건 한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내 핏줄, 아니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애련이었다. 그 전에 첫애를 뱄을 때도 그 후에 아들을 뱄을 때도 뱃속의 것을 그렇게 귀애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름 후에 나는 또 병원으로 끌려갔다. 이번에는 양수를 뽑는데 성공이었고, 그 결과는 다음날이나 나온다고 해서 우리는 그냥 돌아왔다. 입시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초조해하며 시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우리 집에 머물렀다. 시누이를 통해 태아가 딸이라는 결과를 알려 왔고 우리 세사람은 다시 작당을 해서 같은 병원으로 아이를 떼러갔다. 그 의사가 소파수술에는 도사라고 했다.
“세상 참 좋아졌지 뭐냐? 옛날 같으면 꼼짝없이 또 딸을 낳을뻔 했구나.”
시어머니는 그게 그렇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같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소파 수술하러 가는데 시집 식구가 둘씩 따라가는걸 고마워하라는 투의 소리도 했다.
“소파수술 그거 별것도 아니다. 나도 세 번씩이나 했어도 시어머니가 알지도 못했으니까. 낮에 하고 멀쩡하게 걸어와 저녁 해먹었는걸 뭐. 만만한 영감한테야 밤에 몇 마디 징징거렸지만 들은 척 할 양반도 아니고, 어려운 세상이었으니까. 딴 낙이 없어서 그랬는지 두 내외가 쳐다만 봐도 애는 들어서고.”
나도 시어머니 몰래 그 짓을 한 적이 있었다. 첫애 낳고 백 날 겨우 지나 또 아이가 들어섰을 때는 남편이 대책없이 회사를 그만 두어 앞날이 막막할 때였다. 다행히 친정 연줄로 기업체에 신설한 부설 학교에 일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의식화되면서 노조결성이 기업체마다 확산될 때여서 그 무마책으로 부설학교를 만들어 소년소녀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게 유행처럼 돼 있을 때였다. 봉급은 되레 정규 교사보다 후한 편이었지만 신분 보장은 안 됐다. 산전 산후 휴가제도는 정규 학교에서도 정립이 안 돼 있을 때였다. 설사 그게 가능하다해도 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어린것을 맡아 준 친정어머니에게 한 아이를 더 덮어씌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번 아이는 지우자고 상의하고 행여나 남편이 기죽을까봐 대단찮을 일처럼 명랑하게 굴었다. 그래도 그 수술을 받을 때 남편은 동행해 주었고, 집에 와서는 극진히 간호해 주었고 밤엔 몰래 흐느끼기까지 했다. 그 남자의 해석대로 정당방위였기 때문인지, 혹은 남편하고 그 고통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인지 그 첫 번째 중절수술 생각을 하면 죄의식보다는 가난은 참 무섭다는 궁핍에 대한 공포감이 먼저 떠오른다.
단지 딸이기 때문에 없애러 가는 길을 남편이 정말 눈치 못 챘는지, 왜 의논이라도 한마디 해볼 생각을 안했는지, 그 언저리는 나도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그땐 나도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살의가 옮아붙은 것처럼, 양수검사에서 딸로 판명되면 없앨 수밖에 없으리라고 일찌거니 각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순순히 양수검사를 당했을 리가 없다. 내가 그렇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할 만큼 무력해지기까지는 시누이의 공이 컸다. 시누이는 가장 친한 친구인 척 소곤소곤 아들 낳고 먹는 미역국과 딸 낳고 먹는 미역국 맛이 얼마나 다르더라는 얘기를 내 귀에 독처럼 불어넣었다. 그녀는 아들 딸 남매를 두고 있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도 시누이는 어디서 알아내 왔다.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멋쟁이에다 덕망이 있는 인사로 세상에 알려진 교수 한 분이 상처를 했다. 덕망있는 멋쟁이가 흔히 그렇듯이 소문난 애처가였다. 나도 여성지 컬러면에서 곱게 늙은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한두번 본 게 아니어서 친척의 죽음보다 더 애도하는 마음일 애틋했더랬다. 그분이라면 아마 생전 재혼도 안하고 오직 부인의 추억 속에서만 살겠지, 그런 기대는 감미롭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 후 몇달도 안 돼 시누이가 오도방정을 떨며 전해준 소식통에 의하면 교수님은 벌써 재혼을 해서 깨가 쏟아지게 사는데 놀랍게도 사모님 생전부터 십여 년이나 그늘에 살던 여자라는 것이었다. 두 분 사이엔 딸만 둘이었는데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은 벌써 중학생인데 교수님을 빼닮아 준수하더라는 대목에서 시누이의 눈빛은 비수처럼 나를 가르고 지나갔다.
나는 그날 밤잠을 못 잤다. 그 후에도 시누이는 그 댁 이야기라면 왜 그렇게 자세히 아는 것도 많고 신이나 하는지. 사모님은 그걸 모르고 돌아가신게 아니라 실은 감춰놓은 아들이 있다는 걸 알고나서 그 충격을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암으로 발전해 죽음에 이르렀다고도 했다. 들을수록 소름끼치는 얘기였다.
시어머니가 부쩍 아들 손자타령을 하게 된 것은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재산가가 되고나서 부터였다. 내가 시집갔을 때 시아버지는 중풍으로 누워 계셨다. 살림은 오래되고 불편한 구 옥을 방방이 세를 놓아 근근이 꾸려가는 형편이어서 장남을 데리고 살 엄두도 안 냈다. 낡았지만 대지는 넓은 서대문 밖 집 앞으로 시아버님의 사후 갑자기 큰길이 나면서부터 시어머니한테는 재복이 붙기 시작했다. 빚을 내고, 미리 전세돈을 받아내가며 빌딩을 올릴 때만해도 위태위태해 보이더니만 시절을 잘타 전세금이 이태도 안돼 사글세 보증금 정도밖에 안되게 화폐가치가 떨어졌다. 혼자가 된 후, 집 하나 가지면 너희들 신세 안 지겠느라고 집을 자기 명의로 해가진 시어머니는 그때부터 호기있고 당당해지면서 거침없이 아들 손자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기회만 있으면 아들을 붙들고, 내 딸이나 네 딸이나 딸은 소용없는 출가외인이니 그까짓 것들은 칠 것도 없고, 맏이 너한테서 영 아들 손자를 못보면 양놈 다 된 둘째네라도 불러들여야 할까보다는 소리를 의논처럼 한탄처럼 하곤했다. 남편 밑의 시동생은 집안이 한참 어려울 때 미국으로 이민가 영주권도 얻고 그럭저럭 거기서 발붙이고 사는 모양이지만 보고 온 남편 말에 의하면 온 식구가 나서서 벌어야 사는 영세한 장사꾼인 모양이었다. 그들이라도 불러들이겠다는 말이 남편에게 얼마나 위협적이고 모욕적이라는걸 나는 옆에서 안 느낄 수가 없었다.
욕심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남편의 물욕도 만만치가 않았다.
시어머니는 빌딩이 무슨 왕권이나 되는 것처럼 대를 이을 든든한 아들 손자가 없는 집엔 지고 갈지언정 물려주지 않을 뜻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대를 잇는다는 건 핏줄도 성도 아니고 결국은 상속권이었다.
딸을 지우기 위해 가랑이를 벌리고 수술대에 누울 때도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곁에 붙어 있었다. 지극정성이었다. 나는 그들이 확인 사살을 위해 지키고 있는 사람들처럼 무서웠다. 그들은 양쪽에서 내 손을 잡고 뭐라고 위로의 말을 했다. 내가 그들을 미워하기로 작정한 건 아들을 낳고나서가 아니라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곧 스러질 생명에 대한 에미가 바칠 수 있는 애도는 그것밖에 없었다. 마취가 듣고 하나둘을 세면서 의식이 멀어져가는 중에도 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얼굴을 망막에 새겨 두려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큐베이터 속에서 내 아기가 꼼실대고 있었다. 손가락만한 아가였다. 너는 엄지아가씨로구나. 가엾어라. 불면 날아가게 생겼네. 인큐베이터를 지키고 있지 않으면 누가 훔쳐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졸음이 와서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지 않아서 이상했다. 그때였다. 검은 옷을 입은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투실투실한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방안이 가득해졌다. 시어머니가 그들에게 그 큰애를 넣기 위해 우리 엄지아가씨를 내보내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안 돼요. 그애는 그 안에서 나오면 당장 스러지고 말 거예요. 나는 소리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검은 옷 입은 사람하고 흰 옷 입은 사람하고 저희들끼리 흥정을 했다. 얼마 주면 엄지아가씨를 내쫓고 그 아이를 넣어 주겠느냐는 흥정 같았다. 사람들은 악마처럼 웃으며 액수를 자꾸 올리고 나는 그 짓을 말려야겠다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몸도 안 움직여지고 말도 안 나왔다. 그러다보니 인큐베이터 속의 엄지 아가씨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슬처럼 사라졌구나. 나의 슬픔엔 아랑곳없이 방 안이 사람들의 무례한 홍소로 가득 찼다. 나는 내 몸이 그 거친 웃음소리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들들들 진동하는 걸 느꼈다. 뛰어내릴 수 있는 거라면 뛰어내리고 싶었다. 속이 온통 메슥거렸다.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점점 사람의 소리 아닌 걸로 변하더니 자갈밭 위를 지나가는 쇠바퀴 소리가 됐다. 그런 소리는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쇠바퀴소리가 뇌수로 파고드는 것 같아 나는 귀를 틀어막으려고 몸부림쳤다.
미는 침대에 실려 회복실로 가고 있었다. 아가 괜찮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굽어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또 동체를 떠나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처럼 아득하고 기괴해 보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요다음 임신에 지장이 없겠느냐고 시어머니가 의사한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는 그 소리가 고장난 음반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일그러진 채 마냥 반복해서 들렸다. 태아는 소파수술로 제거하기에 적당한 날짜가 지나 좀 어려운 수술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다음 임신을 걱정했구나. 나는 하염없는 마음으로 내가 인큐베이터에 지나지 않았다는걸 수락했다.
시어머니가 달여 바친 보약의 효험이었던지 다음 임신이 빨리 되고 다시 양수 검사를 받았다. 또 딸이더라도 소파수술을 거부해서 그들에게 나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뜨겁고 야무진 각오로 그 지겨운 검사에 다시 임했던 건데 아들이라고 했다. 낳기도 전에 축하를 받고 위함을 받았다. 아들을 낳았지만 그들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정열은 식지않고 계속됐다.
차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학교 갔다 오는 듯한 소년들이 네댓 명이나 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꼼짝 않고 운전대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이상하게 여긴 듯했다. 나 는 걱정말라는 뜻으로 빙그레 웃어 보였다. 볼이 이글이글 붉은 소년들도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씩 웃고 멀어져갔다. 저만치서 머리에 임을 인 아낙이 걸어오고 있었다. 요즈음 도시에선 머리에 다 뭘 이고 다니는 풍경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달랑무 줄거리 같은게 몇 가닥 늘어진 커다란 광주리를 인 여자가 차 옆을 지나갔다. 여성지에서 본 매력적으로 걷는 법에 의하면 정수리와 양쪽 귀를 위에서 수직으로 땡기는 것처럼 머리를 곧바로 치켜들고 걸으라고 돼 있다. 지금 임을 인 여인의 자세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머리에서 무거운게 찍어누름으로써 도리어 빳빳이 세울 수밖에 없는 여인의 모습을 나는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직선이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당당하다 못해 존엄한 걸음걸이였다.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친정어머니는 남편이란 머리에 인 임과 같은 것이라는 소리를 자주 했었다. 나는 내가 본 어머니 아버지의 부부관계로 미루어 그 소리를 남편은 아내를 어떡하든 찍어 누르고 머리 위에 군림하려는 존재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였었다.
그런 뜻도 있겠지만 거기 덧붙여 그 찍어 누르는 존재에 의해서만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는 여자 팔자를 빗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어머니다운 발상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생전 어려워만 하며 살았다. 당신도 집 안에서 눈코 뜰 새없이 일하면서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 오는 넉넉지 않은 생활비를 황송해했고 자기는 거저 얻어먹는 것처럼 비하했다. 아들 둘, 딸 둘, 사남매한테도 아버지는 손님처럼 어렵게 굴었지만 아들 딸을 축하해서 대하는 것 같진 않았다. 공평하게 무심했다고나 할까. 어머니가 되레 아버지 앞에서 딸들은 오금을 못 펴도록 가르쳤다. 상에서 반찬도 못 집어먹게 했고, 아버지한테 아들 등록금을 타낼 때는 그리도 떳떳하게 굴던 어머니가 딸들 등록금을 탈 때는 그지없이 비굴하고 조마조마한 표정을 했다. 타낸 걸 건네줄 때도 아버지한테 미안해서 혼났다는 소리를 꼭 덧붙였다. 아들 장가 보낼 때는 사돈한테 점잖고 품위있게 굴던 어머니가 딸 시집보낼 때는 꼭 무슨 흠이라도 있는 자식을 남의 집에 속여서 들여보내는 것처럼 위축되고 조마조마하게 굴어서 나를 속상하게 했다. 더 속 상한 건 내가 딸을 낳을 때마다 어머니는 기껏 해산 구완 다하고나서도 사위나 사돈한테 꼭 죄인처럼 구는 거였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게 어디 시켜서 되냐,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내가 동생이 첫아들을 낳았을 때 너무도 좋았던 것은 어머니가 그런 억울한 해산 구완을 안해도 되겠기 때문이었다. 내가 첫딸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남편하고 나하고는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섭섭한 마음이 없었다. 세상에 우리만 자식 낳아 본 것처럼 자랑스럽고 신기한 것 천지였다.
친정에서 산후 조리를 하는 동안 남편도 아기가 보고 싶어 처가에서 출퇴근을 했다. 남편 앞에서 아기 기저귀를 가는 건 예사였고 남편에게 기저귀를 갈아달랠적도 있었다. 어느 날 그걸 본 어머니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질색을 하더니 나중에 사위 못 듣는데서 야단야단 치시는 것이었다.
“아니 이 철딱서니없는 것아. 남편한테 어떻게 계집애 아랫도리, 그 흉한 걸 보이냐, 보이길.”
“아들은 괜찮구요?”
“여부가 있냐? 고추 달린 아랫도리야 남편 앞에 여봐란 듯이 풀어놔야지.”
우리 기를 때도 어머니는 그랬었겠구나. 그건 물어보나마나였다. 그건 아무도 못 말린 어머니의 버릇, 아니 도덕관념이었다.
내가 나의 인큐베이터 됨을 참아 낼 수밖에 없었던 소인은 그러니까 기저귀 찰 대부터 비롯됐던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어떡하든지 달라져야 한다. 남편도 나도. 이건 사는 게 아니다. 그렇게 간악한 짓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못 느끼는 그 께름칙함을 떨쳐 버리지 않는 한 생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을 것 같다. 우선 차에서 내려 다시 한번 강바람을 들이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
차도로 나왔으나 좌회전을 하지 못해 돌아가야 할 도시를 뒤로 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유턴 지점이 있겠지, 유턴 지점을 열심히 찾는 것도 아니면서 막연히 그렇게 믿으며 상쾌한 속도를 냈다.
도시와 더불어 내 집 또한 뒤로 뒤로 멀어져 가는 기분 또한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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