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집에는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그 집을 지은 자재나 규모 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집 간수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보통집의 표정 같은 것하고는 달랐다. 사람으로 치면 성깔이나 교양, 옷차림 따위에 의해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인상말고 저 깊은 중심에 숨어 있는 불변의 것, 임의로 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풍겨져나오는 예감 같은 거였다. 그 느낌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그 집에 이끌리기도 하고 그 집 앞을 돌아가기도 했다. 그 집은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집이었지만 약수터 가는 길목이기도 했고, 전철역으로 통하는 지름길 이기도 했다. 행정구역상으로 그 집이 속한 동네는 서울의 위성도시중의 하나인 Y시 안에 있었지만 Y시 사람들은 그 동네를 원주민 동네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초가집이나 조선 기와집이 남아 있는건 아니었다. 육십년대에 유행한 슬래브집들이 수리를 안해 퇴락한데다가 좁고 더러운 골목길 때문에 실제의 나이보다 훨씬 더 낡고 흉흉해 보일 뿐이었다.
아마 Y시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단지 아이들은 원주민 동네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슬래브집을 마치 남태평양의 섬이나 아프리카 오지에 남아 있다는 미개한 종족이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변화시킬 줄 모르고 유지해온 동굴이 오두막과 유사한, 우리 본래의 주거양식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생긴 지 기껏해야 삼십년이 조금 더 된 동네였다. 땅 임자와 집장수의 합작으로 허허벌판에 새로운 동네가 들어섰을 때만 해도 그 일대는 밭농사와 과수원을 주로 하는 농촌이었고 농사짓는 사람들은 그 동네를 양옥집 동네라고 불렀었다. 그때만 해도 지붕도 없이 두부모를 잘라놓은 것처럼 네모 반듯한 집에다가 벽에는 번들번들한 타일까지 입힌 집이 신기하고 부러운 나머지 그렇게 한껏 높여 부른 거였다. 양옥집 동네가 원주민 동네가 되는 데는 삼십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집은 양옥집 동네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 일대의 농촌이 감쪽같이 사라지기 차마 아쉬워 떨군 일점 혈육처럼 여러번 개조하고 증축한 흔적에도 불구하고 골수에 밴 시골티는 변할 줄 몰랐다. 대청마루가 널찍한 디귿자 집이었고, 기등과 서까래는 육송이었지만 지붕은 회색빛 슬레이트였다. 때에 전 육송 뼈대와 슬레이트 지붕과의 부조화는, 문살이 많이 빠진 창호지 덧문과 마루에 새로 해 단 유리 분합문과의 부조화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원주민 동네에 오래 산 사람이라면 그 집이 골함석 지붕이었을 적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전엔 이엉이나 양기와 지붕이었을 터이나 삼십년은 커녕 오년 이상을 눌러산 집도 희귀한 동네에서 목격자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원주민 동네라는 별명은 집뿐 아니라 주민에게도 해당되지가 않는 게 전출입이 잦기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보다 훤씬 더했다. Y시에서 낸 통계에 의하면 평균 거주기간이 아파트보다 일년 육개월이나 짧다고 했다. 중개업자의 농간이겠지만 곧 재개발에 들어가리라고 외부에 소문난 것과는 달리 막상 집을 사가지고 들어와보면 그런 기미가 전혀 없는 이상한 동네였다. 재개발이라는게 나서서 추진하는 사람 없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도 앞장설 만한 주변머리도 방법도 모르는 사람은 다시 집을 내놓았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미련을 못버린 사람도 세를 놓고서라도 빠져나가고야 말았다. 눈독을 들인 유일한 장점이 가짜였다는 걸 알고 나면 정떨어질 일밖에 없었다.
원주민 동네가 Y시의 섬이라면 그 집은 원주민 동네의 섬이었다. 아파트 아이들이나 원주민 동네 아이들이나 같은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아파트 아이들 보기에 원주민 동네 아이들은 어딘지 달라 보였다. 다른 줄 모르다가도 원주민 동네 아이라는 걸 알고 나면 어제까지 같이 신나게 하던 컴퓨터게임 얘기가 그럴 리가 없다는 느글거리는 배신감이 되어 그 아이를 뜨악하게 만들었다. 만일 그 집에 아이가 있었다면 그 동네 아이들도 그렇게 뜨악해져서 따돌렸으련만 그 집에 아이가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 집이 농가였을 때는 혹시 아이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무도 증거할 수 없는 그 집의 선사시대였다.
2
그 시간에 주차할 자리가 마땅찮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영주는 지겹다는 소리를 연거푸 중얼거리고 나서 어린이놀이터 쪽으로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아파트 뒤쪽은 어린이놀이터이고 놀이터와 녹지대를 타원형으로 둘러싼 아스팔트길은 아이들이 자전거나 롤러를 타던 길이어서 원래는 주차금지 구역이었다. 거기까지 주차선을 그어봤뎄자 언 발등에 오줌누기였다. 당장은 좀 숨통이 트이는가 싶더니 며칠이 못 가 도로아미타불이었다. 다행히 새벽에도 빼기 쉬운 명당자리가 남아 있었다. 옆자리의 수북한 짐들을 챙기면서 영주의 입에서 지겹다는 소리가 다시 한번 새어나왔다. 짐이라야 별것도 아니었다. 벗어놓은 윗도리, 구럭 같은 핸드백, 책 몇권은 보따리장수 적부터 익숙한 짐이고 오늘은 호박이 두 덩어리 더 있었다. 시골길에 피라미드형으로 쌓아놓고 파는 늙은 호박이 하도 보기 좋아 벼르다가 산 것이었다. 호박장수는 죽을 쑤면 꿀맛이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쑤는 법까지 가르쳐주려 들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어머니는 틀림없이 호박범벅을 만드실 것이다.
호박범벅을 만들면서 어머니가 신바람을 내셨으면 좋으련만 영주는 좀 망연해진다 어머니는 아직도 호박범벅을 만드실 수가 있을까. 이까짓 호박 따위로 어머니를 시험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이해해야 한다. 푸성귀를 다듬어 반찬을 만들고, 생선 비늘을 긁어 절이거나 조리고, 국이나 찌개 간을 보는 일을 반백년이 넘게 허구한 날 되풀이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신바람이 나서 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일에 진력이 나서 매사를 시들해하는 걸 이상한 눈으로 볼 게 뭐였을까. 영주는 챙기던 짐을 스르르 밀어놓고 핸들에다 이마를 얹었다. 보따리장사 육년 만에 학위 딴지 삼년만에 얻은 전임자리였다. 수도권 대학은 아니었으나 찬밥 더운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밥줄을 매단 처지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허둥댄 것은 아마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전까지 출퇴근을 한다는 것은 쉬운 노릇은 아니었으나 불가능하지는 않은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전솜씨도 능숙의 도를 넘어 노숙했고, 중고차만 물려받다가 이년전 처음으로 만져본 새 차는 지금 그녀의 몸의 일부분처럼 길들여져 있는 것도 원거리 출퇴근을 겁내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마흔 고개 마루턱에 와 있었다. 쉰까지는 미끄럼 타듯 신속할 터였다. 그 나이에 그것도 여자가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건, 그 바닥의 사정에 아주 무식한 사람만 아니라면 감지덕지할 행운으로 여겨 마땅했다. 영주도 처음 한 학기 동안은 마침내 해냈다는 성취감에 도취해서 힘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요새 그녀는 박사나 교수 값이 그동안 너무 싸진 걸 자기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차츰 열쩍어지고 있었다.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을까. 진작만 알았어도 그런 고생은 안했을 걸. 싶다가도 이런게 바로 공부한답시고 날치던 여자의 한계인 것도 같아 혐오스러워지곤 했다. 싸도 너무 싸졌다고 느끼는 게 그동안 들인 공과 시간에 비해 보수가 너무 낮다는 경제성보다는 존경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지방대학 가려고 뼛골 빠지게 박사를 했냐?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 너 따위가 아는 지식의 값이란 평생 서울에 붙어 먹고 살면서 적당히 즐기고, 품위 유지할 수 있는 자격과 같은 것일 테니까, 이렇게 치지도외할 수 도 있었으련만 그래지지가 않았다. 앙심까지 품어지도록 속이 아렸던 것은 바로 자격지심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가르치는 일, 지식을 풀어먹는 일은 생각보다 보람있지 않았다. 그 재미없음의 핑계를 학생들의 질이나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돌릴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지식이라는 것을 통틀어서 비하하느라 허탈해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아니꼽기 짝이 없는 정서불안증이었다.
영주가 학위논문으로 허난설헌의 시 연구를 택한 것은 허난설헌의 시에 끌렸기 때문이고 끌리게 된 까닭은 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애틋한 감동 때문이었다. 허난설헌에 감동하기 위해 많은 지식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그 시대배경이나 집안환경에 대해서도 보통사람 수준의 상식이 전부였다. 물론 그녀의 한문실력으로 난설헌의 한시와 직관적으로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가 매혹당한 것은 시 자체의 뛰어남보다는 한 뛰어난 여자를 못 알아보고 기어코 요철토록 한 시대적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논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출처가 분명하고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녀로 하여금 대학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충동질한 지도교수는 그녀의 상상력을 가장 경계했다. 영주가 제일 자주 들은 듣기 싫은 충고는 논문을 쓰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녀는 박사학위에 걸맞은, 난설헌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 연구라는 걸 하는 동안 난설헌에 대한 매혹과 감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난설헌이라면 넌더리가 났다. 난설헌에 대한 감동을 잃은 대신 얻은 것은 난설헌을 그럴듯하게 본뜬 수많은 제웅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무더기의 검부러기와 학위였다.
차 안에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들이 와서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 충우는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있었다. “웬일이냐? 니가 산책을 다 나오구.” “산책이 아니라 할머니 찾아나온 거예요.” 영주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충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쩌다 혼자 나가시게 했냐? 잘 보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요기 어디 계시겠죠 뭐. 들어가 계세요. 제가 모시고 들어갈 테니까요.” 그러고는 휘적휘적 걸어
갔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가지고 차에서 내린 영주는 아들의 아무렇지도 않아 뵈는 뒷모습에 문득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불러세웠다. “언제 나가셨는데 인제 찾아나선 거냐?” “얼마 안됐어요.” 아들이 머뭇거리는 걸 영주는 그냥 봐 넘기지 못했다. “정확하게 언제냐니까.” “정확하게 언젠줄 알면 붙들었지 나가시게 내버려뒀겠어요.”
영주가 깐깐하게 굴자 충우도 지지않고 도전적으로 나왔다. “나가시는 것도 못봤구나.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전화 걸구 있는 동안 없어지셨어요.” “누구하고? 계집애하고 전화질하느라 정신이 팔렸었던 게지. 그치?” 아들은 대꾸하지 않고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영주는 들입다 쫓아갈 것처럼 몇걸음 내딛다 말고 집 쪽으로 돌아섰다. 별로 고약하게 군 적이 없는 아들이건만 상습적으로 고약하게 군 것처럼 취급한 게 금방 후회스러워졌다. 정말 왜 이런지 모른다고, 그녀는 요즘 자꾸만 아슬아슬해지는 자신의 자제력을 돌이켜보며 위기의식 같은 걸 느꼈다. 정수리에서 한움큼이나 되는 흰머리가 억새풀처럼 힘차게 들고 일어아는 게 엘리베이터 속 거울에 비쳤다. 반사적으로 박사학위가 남루처럼 민망하게 느껴졌다. 화장대나 콤팩트의 거울보다 엘리베이터 속의 거울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특히 퇴근길에 볼 때 그러했다. 어깨도, 볼의 살도, 눈썹도, 아침에 드라이해서 한껏 곤두세운 머리도 기진맥진 축처져 있을 때일수록 그놈의 흰머리칼은 올올이 들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동생이 비아냥거리는 ‘언니의 박사티’였다. 박사 아니라도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머리가 세기 시작하는 건 흔한 일인데 동생은 볼 때마다 그렇게 놀렸고 영주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욕감을 느꼈다. 집은 비어 있건만 문은 그냥 열렸다. 집안은 뒤숭숭했다.
지난번 같은 소동없이 돌아오셔야 할텐데. 어머니의 건망증이 심상치않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로 이사온 게 작년인데 그 전부터였으니까. 슈퍼에 갔다가도 동 호수를 잊어버려서 헤매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러나 워낙 오래 살던 단지라 누군가가 데려다주기도 했고 수위아저씨가 알아보고 인터폰을 넣어주기도 했다. 또 늘 그런 것도 아니고 다시 멀쩡해져서 당신이 그랬었다는 걸 믿지 못해 화를 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 미처 집 정리도 안됐을 적에 있었던 일은 그런 일상적인 것하고는 달랐다. 새벽에 아무도 일어나기 전에 집을 나간 어머니를 찾은 건 그날 밤 자정이 넘어서였다. 찾고보니 어머니는 그냥 나간 게 아니라 계획적인 가출이었다. 놀랍게도 조그만 보따리와 그동안 얻다 꿍쳐놓았던지 꼬깃꼬깃한 용돈까지 챙겨 갖고 있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고속도로 순찰대가 노인을 발견한 곳이 의왕터널이었다는 것이다. 영주네가 이사온 아파트는 둔촌동이었다. 거기까지 걸어서 간 것인지 무엇을 타고 간 것인지를 어머니한테 상기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냥 횡설수설했다. 연락을 받고는 너무 기뻐서 식구들이 몽땅 정신없이 달려갔다. 특히 정이 많은 경아는 보따리를 가슴에 부둥켜안고 텅 빈 시선으로 식구들을 바라보는 할머니 품에 뛰어들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충우도 할머니의 어깨를 뒤에서 안으면서 볼을 비볐고 남편은 윗도리를 벗어서 가을밤 기온에 으스스 떨고 있는 노인의 어깨에 걸쳐주면서 순찰대한테 몇번이나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영주는 좀 비켜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는 걸 그녀 자신도 임의로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엉겨붙자 텅 빈 어머니의 얼굴에 차차 표정이 돌아왔다. 그리고 “아이고 내 새끼들, 쯧쯧 어디 갔다 이제야 왔누” 하면서 마주 엉겨붙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점점 곱게 퍼졌다. 충우 경아 남매는 어려서부터 할머니한테 그렇게 엉겨붙기를 잘했다. 엄마라고 줄창 맞벌이를 하느라 집에서 아이들한테 어리광을 부릴만한 기회를 줄 새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할머니가 그걸 좋아한다는 걸 아이들은 저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데면데면하게 굴어도 될 만큼 머리가 커진 후에도 아이들은 할머니가 만든 반찬이 특별히 맛있다든가, 즈이들이 늦게 들어올 때 안 자고 기다리다가 문 열어주고 먹고 싶은 것까지 챙겨줄 때면 답례처럼 서비스처럼 으레 할머니한테 엉겨붙는 장난을 치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행복한 장난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남보기에도 여실히 느껴지는 상호간의그 완벽한 행복감 때문에 슬그머니 샘이 날 적도 있었지만 섣불리 흉내를 내보고 싶어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영주는 낳기만 했지 아이들은 순전히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노인에겐 그 어렵고도 장한 일을 한 이의 특권이랄까, 침범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었고, 아이들하고의 자연스러움은 거의 동물적이었다. 여북해야 셋이서 그렇게 정답게 굴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영주는 어머니의 붉고도 부드러운 혀가 아이들을 핥고 있는 것처럼, 세 몸뚱이 사이를 따습고 몽실몽실한 털이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을까.
그러나 이번에 달랐다. 가슴이 뭉클해져오는 것까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토라져 있었다. 의왕터널 때문이었다. 노인네를 반기는 태도가 식구들끼리도 이렇게 다른 걸 젊은 순찰대원은 성급하게 고부갈등으로 짐작한 듯했다. “이런 효자 아드님 효자 손자들을 두고 왜 집은 나오고 그러세요. 설사 좀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노인네가 참으셔야 해요. 세상이 달라졌단 말예요. 이렇게 자손들이 득달같이 달려온 걸 보면 할머닌 복 좋은 줄 아셔요. 알아들으셨죠?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 된 세상인지 일부러 부모 내다버리는 자식도 많답니다.
그런 자식이 우리가 연락한다고 찾아오겠어요? 못 믿으시겠지만 연락도 할 수 없게스리 즈이 살던 데를 싹 옮기는 자식도 있으니까요.” 영주는 남편하고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떨구었다. 나쁜 며느리가 된 것보다 더 면목이 없었다. 순찰대원은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게 기분 좋은 듯 계속해서 명랑하게 떠벌렸다.
“할머니도 꼭 그런 할머닌 줄 알았다니까. 아들네 집에 가야 한다고 보채기는 꼭 고집쟁이 어린애처럼 막무가낸데 아들네 전화번호는커녕 동네이름도 모르는 척하는 게 영락없이 버림받고 양로원 밖에 갈 데가 없는 노인네들이 하는 짓 고대로더라구요. 그러나 어찌어찌 전화번호를 하나 생각해내시길래 걸어보긴 했어도 기대는 안했어요. 아니나다를까 그 집에 그런 분 없다면서 이사온 지 얼마 안된다길래 역시나 했지요. 그래도 그 번호가 단서가 되어 어렵사리 댁의 전화를 알라낸 건데 이런 좋은 결과를 맺었으니 참말로 보기 좋읍니다.”
역시 그랬었구나, 어머니의 목적지는 영주가 짐작한 대로였다. 영주는 말없이 그 자리를 피해 먼저 차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게 못된 며느리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진실이 탄로나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남편도 그 점을 이해하고 아들 노릇을 잘해주려니 믿기로 했다. 어머니도 그걸 바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영주는 쓸쓸하게 웃었다.
영주하고 어머니는 고부간이 아니라 모녀간이었다. 그러니까 남편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사위였다. 어머니가 언제부터 딸하고 사는 걸 굴욕스럽게 여기게 되었는지 영주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녀의 남동생이 장가를 들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그때부터 친척이나 친지들이 어머니가 아들네로 안 가는 걸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으니까. 특히 이모들은 딱하게 여기다 못해 불쌍해하려는 낌새까지 드러낼 적이 종종 있었다. “딸네 밥은 서서 먹고 아들네 밥은 앉아서 먹는다는데…”이러면서 이모들이 쯧쯧 혀를 찰 때마다 영주는 이모들의 우월감에 침을 뱉어주고 싶도록 속이 끓곤 했다. 아들네한테 죽자구나 붙어산다는 것밖엔 어머니보다 나을것이 조금도 없는 이모들이었다. 소녀적부터 영주는 장차 화려한 성공을 거두어 어머니 호강시킬 것을 꿈꿀 때가 가장 살맛이 나고 즐거웠다. 그렇게는 못되었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어차피 어머니의 행복과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참담하게 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자식밥을 얻어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손으로 자식을 벌어먹이기 위해 일생 서서 일하면서 터득한 당당함은 어머니만의 자존심일터였다. 그걸 함부로 능멸한다는 것은 아무리 어머니의 동기간이라 해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남동생 영탁이는 막내이자 유복자였고 그녀하고는 열세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다. 어머니는 영주 낳은 지 십년 넘어 아이를 못 갖다가 아우를 본 게 영숙이었고, 영숙이가 돌도 되기 전에 또 아이가 들어서고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과부가 되었다. 아버지의 유산이라고는 집 한채가 다였다. 당시엔 시골 같은 변두리 동네였지만 다행히 대학이 가까워 어머니는 하숙을 쳤다. 그때부터 영주는 하숙집 딸로 불리었고, 하숙집 딸 노릇을 마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잘 해냈다. 반찬가게 심부름은 물론 숭늉 심부름을 입에 혀처럼 잘하다가 방방의 연탄도 꺼뜨리지 않고 갈 수 있게 되었고, 고등학교 적부터는 밤 늦도록 어머니와 무릎을 맞대고 가계부를 쓰면서 다음날 식단을 짜고 한 달 예산을 세우고 동생들 장래를 걱정하곤 했다. 입시철이면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동생들을 독려해가면서 집안의 방이란 방은 안방까지 내주고 온 식구가 다락에서 새우잠을 잤다. 어머니에게 영주는 딸이라기보다는 동지였다. 함께 일하고 함께 걱정했다. 어머니의 무거운 책임을 덜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영주는 동생들에게 어머니하고 똑같이 엄하고 짜게 굴긴 했지만 샘을 내거나 경쟁하는 마음은 가져보지 못했다. 여북해야 동생들한테 제까짓게 뭔데 아버지처럼 군다는 불평까지 들었겠느가.
충우는 혼자서 들어왔다. 풀이 죽어 있었다. 영주는 그럴 줄 안 것처럼 실망하진 않았지만 속에서 불덩어리 같은 게 치밀어올라와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죄송해요.” 아들이 놀란 듯이 영주의 어깨를 잡으며 사과를 했다. “너한테 화내고 있는 게 아니야.”
영주는 어머니가 또 의왕터널에 가 있을 것 같고 그게 그렇게 화가 났다. 의왕터널은 남동생네 가는 길이었다. 어머니가 아들네 갈 일은 일년에 서너번도 안됐지만 그때마다 영주가 차로 모시고 갔고, 전에 살던 과천에서도 여기 둔촌동에서도 의왕터널을 거쳐야 했다. 어머니가 아들네에 이르는 길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특징이 있다면 의왕터널밖에 없었다.
과천터널과 의왕터널이 생긴 건 영주네가 과천에 입주한 지 몇년 돼서였다. 하숙을 치던 넓은 집에서 처음 이사한 아파트였지만 어머니는 잘 적응했다. 일층이어서 마당을 가꿀 수 있는 재미 때문이었는지 이십평 남짓한 아파트도 답답해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활동무대는 마당에서부터 청계산으로, 관악산으로,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갔다. 약수를 하루에도 몇번씩 길어날랐고 산나물 하는데도 선수여서 도시물만 먹은 이웃 노인들이 줄줄이 어머니를 추종했다. 어머니는 약수터 배드민턴 회원이었고 관악 에어로빅 회원에다 청계 노인회원을 겸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놀던 마당에 굴이 두 개나 생기는 걸 여간 못마땅해하지 않았다.
특히 의왕터널은 당신이 발음이 잘 안되니까 더 싫어했다. 그 무렵에 마침 의왕터널은 당신이 발음이 잘 안되니까 더 싫어했다. 그 무렵에 마침 의왕터널 지나서 새로 생긴 단지에 영탁이네가 입주하게 되었기 때문에 영주는 어머니가 아들네 가고 싶을 때 질러가라고 생긴 굴이라고 일러드리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편안해지곤 했는데, 실은 어머니의 건망증이 심해져서 집도 잘 못 찾게 된 게 터널이 생길 무렵부터여서 그 소리는 수도 없이 반복되었을 터였다. “그랴그랴, 나더러 영탁이네 휘딱 가라고 그 굴을 뚫어줬다구? 시상에 누가 내 마음을 그리 잘 보살펴줬을꼬.” 모녀는 그런 소리를 아마 골백번도 더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영탁이네 갈 일은 자주 생기지 않았다. 안한 게 아니라 못했을 것이다. 의왕터널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입력된 게 업었을 테니까. 둔촌동에서 의왕터널까지 걸어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걷기도 하고 타기도 했으리라. 영주는 밖으로 뛰쳐나가려다 말고 들어와서 차 키를 찾았다.
“어디 가시게요?” “의왕터널.” “또 거길 가셨을라구요?” “그 너머가 바로 외삼촌네니까. 그날 할머니가 거기 계셨다는 건 우연이 아니었잖니?” “알아요. 그렇지만 파천에서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충우가 영주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주는 과천 소리만 나오면 화를 내기 때문이다. 과천을 항한 노인네의 집착은 영주를 혼란스럽게 했다. 별안간 드러내기 시작한 아들의 보호 밑에 있고 싶다는 갈망은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다. 이상하다면 그게 너무 늦게 왔다는 것뿐,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유구한 전통이었으니까. 그러나 십년 넘어 살았다고는 하나 고작 아파트 단지에 지나지 않는 과천에 대한 어머니의 이상한 애착을 영주는 이해할수가 없었고, 설명할 수 없기 떼문에 인정하기도 싫었다. “할머니가 과천을 좋아하신다면 그건 여기보다 외삼촌네하고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니까 그게 그거야.” 영주는 필요 이상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렇게 외삼촌한테 신경을 쓰실 거면 모셔오긴 뭣하러 모셔오 셨어요?” “얘 좀 봐 너 말하는 누가 할머니를 꼭 남의 식구처럼 여기고 있잖아.”
“어머니 고정하세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오히려 어머니 쪽이에요. 정말 왜 그러세요, 어머니답지 않게. “괜히 모셔왔나봐. 아니 모셔온 것만 못해. 또 거기가 계신다고 해도 이번엔 외눈 하나 까딱 안할 거야.“ “아무튼 나가신 지 한 시간도 안됐어요. 그동안에 무슨 수로 거길 가셨겠어요.” “설마 그때 할머니가 걸어서 거기까지 가셨겠니?” “그날 할머니 말 생각 안 나세요?”
충우가 약간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온통 으깨지고 물집이 잡힌 발을 더운물에 담그게 하고는 운 생각이 났다. 분하긴 또 왜 그렇게 분했던지. 어머니에게 아들네 집은 얼마나 요원했을까? 그 아득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르고야 말겠다는 어머니의 집념이 그 무참하게 으깨진 발가락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게 안쓰럽고도 징그러워 영주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샌 영주는 다음날 영탁이를 불러 어머니를 모셔갈 수 있나를 타진 했다. 타진이라기보다는 애원이었을 것이다. 영탁이는 장가들기 전부터 어머니는 자기가 모실 거라고 큰소리를 쳤었다. 영주도 그럴 것 없다고 못 박지는 않았지만 내심 대견했었다. 언젠가는 어머니를 모셔갔으면 해서가 아니라 내 어머니만은 이 자식 저 자식에게 치이는 천덕꾸러기가 안될 것 같은 게 고마워서였다. 그 정도면 어머니는 충분히 귀하신 몸일 터인데도 왜 애원조로 굴고 있는지, 영주는 자신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바로 잡아지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가 기대한 것하고는 전혀 다르게 나오는 영탁이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듣기만 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한다는 소리가 “누나도 별수없구려”였다. 야유하는 투였다. 무슨 뜻인지 모를 소리였다. 그러나 여간 불쾌하지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도 반박을 못했다. 노후를 아들에게 의탁하지 못하는 것을 제일 불쌍하고 떳떳지 못하게 여기는 사회적 통념에 결국은 동의하고만 자신이 싫었기 때문에 불쾌한 꼴을 당해도 싸다 싶었나보다. “애엄마하고 의논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나오는 데는 한마디 안할 수가 없었다 “네 생각을 말해. 난 그게 듣고 싶어.” “노인네를 모시는 건 여자 아뉴? 나도 명령은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영탁이는 몇해 연애하던 여자와 결혼해 아들딸 낳고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군더더기가 될 건 뻔했다. 군더더기를 받아 들이려면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실제적 준비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고 간 후 함흥차사인 동생을 괘씸하게 여기느라 영주의 심사는 내내 불편했다. 명색이 장남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없는 심정은 내가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하는 자책과 오락가락해서 자신도 누굴 탓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이었다. 듣기 좋으라고 그랬는지, 정말 그럴 작정이었는지 영탁이가 어머니한테 곧 모시러 오마고 약속하고 떠난 게 화근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공공연히 보따리를 싸놓고 안절부절을 못했다. ‘우리 아들이 데리러 온댔는데, 야아가 왜 이렇게 늦나‘ 걸핏하면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대합실에 발을 묶인 사람처럼 초조하게 창밖 만 내다보기도 하고, 강하게 밀어내는 시선으로 집안 식구를 대하 기도 했다. 참다 못해 영주가 먼저 올케하고 직접 담판을 해서 어머니를 모셔가도록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영탁이네서 석달도 못 버티고 둔촌동으로 돌아 오고 말았다. 실은 버티고 말 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자신의 의지라는 걸 상실채갔으니까. 못 버틴 건 어머니가 아니라 영주였다.
어머니를 그렇게 떠맡기다시피 한 영주는 매일매일 문안전화를 안할 수가 없었고 어머니는 그럴 적마다 야아. 나 과천 갈란다. 과천 좀 데려다주려무나, 그 말밖에 안했다. 그 말이 그렇게 애절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과천은 영주네가 둔촌동으로 오기 전에 살던 동네였기 때문에 영탁이나 그의 처는 그 말을 딸네로 가고 싶다는 소리와 같은 뜻으로 알아듣는 듯했다. 그러나 두 내외가 다 영주한테 모셔가란 소리는 죽어도 안할 것처럼 깔끔하게 굴었다.
동생 내 외한테서 모셔가란 소리가 안 나오는 게 오히려 야속할 만큼 영주는 어머니가 거기 계신 게 불안했다. 어머니를 동생네로 보내고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던 것은 영주도 어머니의 과천 상성을 딸 네집으로 다시 오고 싶다는 소리로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장녀로서 동지로서 어머니와 함께 해온 수많은 세월을 잊지 않고서는 차마 못 들은 척할 순 없는 애소였다. 그러나 영주는 주리 참듯 참았다. 느희들이 다시 모셔가라고 빌면 모를까, 내 입에서 먼저 모셔오겠다는 소리가 나을 줄 알구, 하는 영주의 앙심과, 한번 모셔 온 이상 누나가 애걸복걸이나 하면 모를까 다시 어머니를 내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영탁이의 고집은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실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모시고자 한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들이 있는데도 딸네에 의탁하거나 거기서 죽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치욕이라는, 관념이었으니까.
아들과 딸의 이런 보이지 않는 버티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의 여기 있으면 저기 있고 싶고 저기 있으면 여기 있고 싶은 증세는 하루하루 더해갔다. 어머니에게는 이미 아들이냐 딸이냐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도 아닌 저기도 아닌 데가 과천이었다. 어머니는 겉으로는 지능이 퇴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발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치사하게 아들네서 딸네로, 딸네서 아들네로 보따리처럼 옮겨다니느니 여기도 아닌 저기도 아닌 과천이란 완충지대 를 만들어놓고 거기 보내달라고 보채고 있으니 말이다. 아들네서도 마침내 가출이 시작됐다. 그러나 영탁이 처가 어떻게 사전 조치를 철저히 해놓았는지 어머니의 탈출은 번번이 그 단지 안을 벗어 나지 못했다. 그녀는 그 단지의 부녀회장이어서 발이 넓을 뿐만 아니라 지능적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도저히 외출할 수 없는 옷을 입혀놓았는데 멀리 못 가게 하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잠옷이나 고쟁잇바람의 어머니의 외출은 아이들 눈에도 즉각 띄게 돼 있었고. 눈에 띄었다 하면 경비아저씨한테 즉시 연락이 가도록 돼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는 그 단지는 커녕 아마 자기네 동 경비 눈도 벗서나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의 탈출 시도가 계속되자 영탁이네 현관문엔 자물쇠가 하나 더 달리게 되었다. 보통 아파트 현관문은 밖에서 잠가도 안에서 여는 데는 지장이 없이 돼 있건만 그 집에는 나가는 사람이 밖에서만 잠그고 열 수 있는 장치가 추가된 것이다. 영주가 그걸 보고 언짢아하자 식구들이 다들 외출할 때는 그럼 어쩌란 말이냐고, 영탁이 처는 유리알처럼 정없이 빠안한 시선으로 대드는 것이었다. 하긴 노인네를 지킬 사람을 따로 고용하지 않는 한 그런 장치는 불가피할지도 몰랐다. 영주 보기에 영탁이 처가 하는 일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영주는 그녀의 완벽함이 무서웠고, 영주보다 몇배 더 무서워하며 왜소하고 황폐해지는 어머니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여 섬뜩해지곤 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수가 있었다. 며칠 만에 자물쇠가 하나 더 추가되었는데 어머니를 방안에만 계시도록 하기 위한 방 자물쇠였다. 집 밖에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납득하고 난 어머니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온종일 집안의 문이란 문을 있는 대로 열어보면서 왔다갔다하는 게 일이니 어쩌겠느냐는 것이었다. 열어본 문을 화장실이나 광문까지 열고 또 열어보면서 이 방 저 방을 기웃 대니 어머니 눈엔 그 집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기도 방이 있네. 여기도 방이잖아? 무슨 집이 이렇게 방이 많담. 비워두다니 아까워라. 땅할 놈의 여편네 같으니라구, 세나 주지 않구 ” 이렇게 중얼대면서 온종일 쏘다니는 걸 참다 못한 동생의 댁이 마침내 어머니를 방안에 가둔 것이다. “저도 오죽해야 그랬겠어요. 신경이 써져서 살 수가 있어야죠,” 그 노릇이 얼마나 못할 노릇이었나는 그녀의 여위고 스산해진 모습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영주는 서로의 인격을 죽자구나 부정하는 이 무서운 싸움을 짐짓 신경이 써질 뿐이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표현하는 동생의 댁을 가증스러워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이제 영주는 그들의 사이가 나아지길 기대하기보다는 빨리 그쪽에서 더는 못 모시겠다고 두 손을 번쩍 들기를 이제나 저제나 바라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영주가 어머니를 뵈러 간날이었다. 언제나처럼 동생의 댁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얼굴로 맞이하고 영주는 너무 자주 드나들어 미안하다는 표정을 만면에 띠고 들어갔다. 동
생의 댁은 차까지 끓여오면서도 어머니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낮잠을 주무시나?” “궁금하시면 베란다 쪽으로 나가셔서 창문으로 들여다보시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젠 방문 열어주기도 귀찮아? 해도 너무하는구먼.” “저도 어머님한테 배웠어요.” 동생의 댁이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면서 푸념을 했다. 어머니의 증세는 요새 부쩍 더 심해져서 낮에는 물론 밤에도 창문을 통해 베란다로 나와서 아들 며느리 방을 들여다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저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댁은 뉘시우 하고 물으실 때 제 기분이 어떤 줄 아세요?” 그녀는 그 기분이라는 것을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도 영주 에겐 그녀가 얼마나 진저리를 치고 있나 여실히 느껴졌다. 분노와 모멸감으로 심장이 옥죄는 듯했다. 이윽고 영주는 베란다로 나가서 어머리의 방을 엿보았다. 어머니는 벽에 걸린 거울 속의 늙은이를 노려보면서 “댁은 뉘시우?응? 저리 비켜요. 썩 물러나지 못할 까’ 연방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거울 속의 노파가 눈군지 못 알아보는 것처럼 영주는 방안에 갇힌 늙은이가 어머니라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더 야위거나 추비해진 건 아니었다. 노인에게 어울리는 편안한 옷을 입고 있어서 속고쟁잇바람으로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단정해 보였다. 그러나 영주는 어머니의 눈빛이 그렇게 방어적인 걸 본 적이 없었다. 문 열어놓고 사는 집처럼 편안한 어머니였는데… 눈빛뿐만 아니었다. 그 조그만 몸이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 물어뜯으며 덤벼들 것처럼 긴장해서 털끝까지 곤두서 있다는 걸 자기 몸처럼 느낄 수가 있었다. 어머니 혼자서 대항하기에 이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었을까.
영주는 동생의 댁한테 문을 열어달랠 것 없이 베란다로 난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뉘시오? 묻지도 않고 덤비지도 않고 방구석에 가서 붙어섰다. 혼자 갈고 닦은 적개심만으로는 도 저히 대항할 수 없는 거인을 만난 것처럼 어머니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영주는 어머니를 안았다. 나쁘지 않은 비누냄새가 났다. 방 안도 간소하지만 정결했다. 벽에는 풍경화까지 두어 점 걸려 있었다. 화장실까지 딸린 방이면 아파트에선 안방에 해당할 터였다. 처음부터 동생네가 어머니에게 그 방을 내준 걸 영주근 여간 고맙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 기분을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영주는 품 안에 들게 작은 어머니의 등을 토닥거리다가 살살 쓰다듬기 시작 했다. 영주가 지금 쓰다듬고 있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곤두서려는 분노일 수도 있었다.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셔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동생의 댁한테 좋은 말로 그 얘기를 해야지, 절 대로 얼굴을 붉히거나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지금 거기 없었지만 괘씸한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있었을 그의 마음고생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헤아리고도 남았다. 나이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없이 태어난 불쌍한 것을 남부럽지 않게 길러내야 한다는 중책을 어머니와 함께 나눠졌던 세월 때문에 그녀의 동생에 대한 느낌은 동기간의 우애라기보다는 모성애에 가까웠다. 영주는 어머니가 답답해할 때까지 오래 어머니를 쓰다듬고 있었다. 자신의 분심을 억제하기가 그 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둔촌동으로 모셔온 어머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전의 모습을 회복해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벌써 남을 무조건 의심하고 경계하는 방어적인 눈빛과 몸짓은 사라진 뒤여서 식구들은 아무도 할머니가 더 나빠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분 맞듯이 했다. 영주도 내가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동생의 댁을 덮어놓고 밉보려는 고약한 시누이 근성때 문에 그리 보였던 건 아닐까, 은근히 자책까치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가출인 것은 그때나 이때나 변함이 없는지라 어머니 혼자서 집을 보게 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전업주부가 없는 집에서는 그게 가장 어려웠다. 고2짜리 경아는 빼주고 영주하고 충우가 강의가 없는 날은 서로 당번을 서기로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사이사이 파출부를 쓰기도 하고 이모들이 와저 봐주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다시 쉬엄쉬엄 집안일을 거들기 시작하고부터는 그나마 조금씩 허술해지던 중이었다. 집안일이라야 별것도 아니었다. 콩나물을 다듬어준다거나, 도라지를 찢어 준다거나, 버섯이나 고자리를 보고 이건 우리나라산이 아니라고 분별해주는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것도 안 시키면 죽으면 썩을 몸 놀면 뭐하냐고 섭섭해했다. 영주는 어머니 입에서 그 말을 다시 듣게 된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하숙 칠 때 어머니가 가장 자주 하던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어린날, 늦도록 기다리던 나들이 간 어머이가 저만치 부우연 어둠속에 나타나는 걸 보고 뛰어가 치마폭에 안겼을 때처럼 마음이 놓이고 푸근해졌다. 더 좋은 건 빨래 개키는 솜씨가 돌아온 거였다 어머니는 빨래가 약간 축축 할 때 걷어다가 어찌나 정성을 들여 반듯하게 펴서 개키는지 내복도 꼭 다림질해놓은 것 같았다 그건 아무도 흉네낼 수 없는 어머니만의 솜씨였다. 어머니의 손은 아직도 든든하고 예뻤다. 아, 아, 빨래를 꼭 다림질해 놓은 것처럼 개키는 우리 엄마 손, 이러면서 어머니 손을 어루만지고 있노라면 경배하며 입맞추고 싶은 따뜻한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렇다고 들락날락하는 기억력까지 회복된 건 아닌데도 마음을 너무 놓았었나보다. 정 아쉬을 때는 어머니를 혼자 두고 집을 비을 때도 종종 있었다. 이모들한테 번번이 부탁하는 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모들은 무슨 말을해고 반드시 죽을 때는 아들네서 죽어야 제대로 된 팔자라는 걸 어머니한테 입력을 시키고 말 것 같아서였다. 이미 확고하게 입력된 관념이 지워졌다고 믿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잠재된 걸 이르집든 짓은 삼가고 볼 일이었다 .
3
그 집 처마밑에 온통 연등이 달렸다. 그 집에 절 표지와 천개사 포교원이라는 간판이 달리고 난 지 몇 달 만이었다. 연등으로 처마밑을 뒤란까지 두르고 나서도 남아 마당 위에다 줄을 매고 달아놓았다. 포교원 간판이 붙고 나서 처음 맞는 사월 초파일이었다. 원주민 동네에서 바라보면 연등은 분홍빛 풍선뭉치처럼 보여서 어느 순간 그 집을 매달고 둥실 승천하는게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기대는 허황하지만 기쁨에 충만한 거여서 동네 전체에 축제 분위기를 훈풍처럼 실어 찼다. 연등이 달리기 전부터도 동네 사람은 그 집에 절 간판이 붙은 걸 보고 괜히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 동네에 그 절의 신도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점도 치러 다니고 절에 치성도 드리러 다니면서 신앙이 거친라고 생각하는 집은 그 동네 가구 중 아마 반도 넘을 테지만 그 절의 신도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집에 연등이 그렇게 많이 달린 걸 보자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절에 신도가 꽤 많구나 싶어 기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남이 잘되는 걸 별로 좋아해본 적이 없는 마을 사람답지 않았다. 그 집이 절집이 되기 전엔 점집이었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동네 사람들은 점집보나 절집이 격이 높다고 생각했고, 아이들 교육상도 절집이 나을 듯했다. 그렇다고 그 집이 점집이었을 적에 마을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군 것은 아니었다. 따돌릴 것도 없이 그 길의 위치 자체가 마을로부터 배타적으로 돼 있었다. 낯선 사람이 그 동네에 들어와 처녀점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저어기 저 옛날 집일 거라고 벌판 너머 쪽을 가르쳐주곤 했다. 간판이나 깃발 따위 점집의 표시는 없었지만 그 집이 점집이라는 걸 모르는 마을 사람은 없었다.
또한 그 집에 선 처녀가 점을 치고 있겠구나 하는 것도 외부 사람들이 그렇게 물으니까 그러려니 할 뿐 그 처녀점쟁이가 예쁜지 미운지, 용한지 돌팔이인지 아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원주민 동네 사람 중 태반은 하는 일이 뜻대로 안돼 무꾸리들을 잘 다녔고, 그게 유일한 취미인 사람까지 있었지만 그 집에 가서 점을 쳤다는 이는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고향에서 인정을 못 받기는 비단 예수님만이 아닌 모양이다.
파일날도 동네 아이들만이 그 집 앞으로 몰려가 안을 기웃댔다. 바람에도 가벼운 것이 먼저 날리듯이 축제 분위기에도 아이들만 덩달아 들떴을 뿐 그 동네 어른들은 끄떡도 안했다. 파일날을 명절로 쇠는 집도 아마 각각 다니던 머나먼 절을 찾아 전철로 버스로 나들이를 떠났을 것이다. 그 집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분합문 안엔 아담한 금빛 부처님이 비단방석에 앉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많은 신도들이 자기네 식구이름을 꼬리표로 달고 있는 연등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느라 부산했다. 그들이 차려입은 색색가지 비단한복이 보기 좋았다.
그 절 스님은 비구니였다. 그 집이 점집이었을 적에 처녀점쟁이와 지금의 비구니는 같은 사람이었다. 부처님까지도 처녀점쟁이가 모시던 부처님과 같은 부처님이었다. 다만 절 표시를 붙일 무렵에 금빛이 좀더 찬란해졌을 뿐. 도금을 새로 했으니까, 신도들도 대부분 그 집이 점집이었을 적부터의 단골들이었고 새로운 신도들이 생겨봤댔자 점집 단골들한테 그 집 부처님이 영검하다는 소문을 듣고 솔깃해진 이들이었다. 단골이자 신도들은 처녀점쟁이가 스님이 된 데 대해 조금도 이상해하거나 뜨악해하지 않았다. 점쟁이였을 적에도 그 처녀는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고, 처녀의 투시력이나 예언능력이 부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점집이었을 적에 단골들이 점을 치러 오면 으레 부처님한테 먼저 절을 하고 나서 점을 쳤고, 점을 다 친 후 또 한번 부처님한테 절을 하고 물러나는 절차도 절집이 됐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이때나 신도들은 그녀의 무심히 던지는 것처럼 툭툭 내뱉는 단 두 마디에서 남편의 영화나 자식의 출세와 관계되는 영감을 얻으려는 열망 때문에 그 집을 찾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녀가 영검한 걸 부처님이 영검한 것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녀가 점쟁이 였을 적에 깍듯이 보살님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비구니가 된 그녀를 자인스님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거부감을 느끼피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한달에 한번 법문을 듣는 날이 따로 생긴 것이다. 법문은 천개사에서 내려온 노스님이 했다. 파일이나, 설, 칠석 등 이름털은 날이나 망인의 사십구재나, 간혹 신도들이 부탁해서 불공을 드릴 일이 있는 날에도 천개사 스님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 절집 신도들은 그 천개사라는 절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자연스님이 어렵게 대하고, 또 내려오신다는 표현을 쓰니까 머나먼 곳에 있는 수려한 산속의 절을 연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도들은 그 천개사 스님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이에 걸맞은 관록은 있어서 였으나 예언능력을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다. 신도 중에는 신분을 숨기고 싶어하는 고위층의 사모님도 간혹 있었는데, 그걸 알아보는 능력 하나는 뛰어나다는 것이 신도 사이의 중론이었다. 그런 능력이란 신도 사이의 친목을 해칠지언정 스스로의 권위를 위해서는 결코 득 될 게 없었다. 요컨대 신도들은 그 노스님을 점집에서 절집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있어야 하는 구색 정도로 봐주고 있는 셈이어서 하루빨리 자연스님이 염불을 잘하게 되기를 바랐다. 자연스님이 직접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도 스님은 지금 불교 배우는 대학에 가려고 공부중이라고 신도들 사이에 알려지고 있었다.
아직 천개사에서 노스님이 내려오기 전이었지만 큰 가마솥이 걸린 부엌에선 음식 장만이 한창이었다. 온갖 과일과 유과와 떡집에서 맞춰온 편과 절편도 부엌에 붙은 찬마루에 즐비했다. 파일이니까 신도들에게 점심은 물론 저녁 밤참까지도 대접할 준비였다. 국을 끓이고 나물 무치는 일손도 충분했다. 총지휘를 하는 마금네의 음성은 일흔이 다 된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름지고 극성맞았다. 마금이는 자연스님의 속명이자 호적상의 이름리었다. 마금네가 마금이를 낳고 나서 오늘처럼 행복하고 의기양양한 날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마금네는 명령만 하고 일은 며느리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마금네가 발기만 써주면 서울의 도매시장까지 득달같이 달려가서 장을 봐 오는 사위도 있었다. 이대로 이 영업이 번창을 하면 아마 이삼년 안에 이 집을 헐고 크게 짓든지 천개사와는 따로 어디다 절터를 장만하든지 해야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어깨가 으쓱했다. 마금네가 그 집을 둘러보는 시선은 탐욕스럽고도 그윽했다. 켕기는 구석도 없지 않았다. 흉가를 복가로 탈바꿈시켜 지금 한창 불 일어나듯이 일어나려는 판에 집에 손을 댄다는 것은 복을 쫓는 일이 되는 게 아닐까, 오빠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치미는 욕심이란 늘 삼가는 마음보다 우세하기 마련이다. 오늘 이 좋은 날을 기해 이 자리에 법당을 짓자는 불사를 일으키기로 신도 중 오래된 단골들과 천개사 스님과 대강의 합의를 보았으니 반은 성사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금네가 사람의 마음에 위안과 희망을 주는 이런 사업에 둔을 뜬 지 오래됐다고는 할 수 없어도 확실하게 터득한 것은, 돈 버는 데 있어서 이 사업만큼 땅 짚고 헤엄치 기도 없거니와 시작이 반이라는 소리가 그대로 들어맞는 사업도 없다는 사실이다.
마금네는 찬마루에 지키고 앉아 잔소리를 하는 한편 오늘 인등 시주로 들어온 돈, 오늘 안에 불전으로 더 들어올 돈 등을 대충 머리속으로 굴리기에 바빴다. 그녀의 표정은 싱글벙글했다. 시뜻했다 변덕스럽게 변했다. 마침네 궤도에 오른 사업이 꿈인가 생신가 대견하면서도 오늘 같은 날이면 돈을 주체를 못해 가마니에다 발로 꾹꾹 눌러 담는다고 소문난 어느 큰 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속이 부글거리곤 했다.
자연스님의 방심한 듯 흐릿한 표정도 못마땅했다. 모녀간에 손발이 잘 맞아야 이 사업이 번창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손팔은커녕 눈길 한번 맞추려 들지 않는 딸이 아니꼬워 죽겠는 걸 참자니 그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가 뉘 덕으로 이만름 됐는데, 그 천덕꾸러기가 용됐다고 감히 이 에미를 업신여겨? 그러나 딸이 그럴 만한 까닭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않되는 데서는 눈을 흘기다가도 마주친터에 얼레발을 치곤 했다. 그건 그녀도 할 노릇이 아니었지만 딸 역시도 그런 까닥으로 해서 피하려 드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서로 눈도 안 마주치려는 건 모녀간의 묵계 같은 거여서 마금네가 이 집에 드나드는 건 법회나 불공이 들 때 딸이지 평상시에는 자연스님 혼자 지네도록 네버려두었나. 그러나 처녀 점쟁이일 때나 자연스님일 때나 그녀가 그 집안의 유익한 돈줄인 건 변함이 없었다. 딸은 어머니하고 눈뿐 아니라 입도 잘 어울리려 들지 않았지만 돈주머니는 어머니가 수시로 마음대로 쓰도록 간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하루 얼마를 버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식구들과 말을 주고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걸 피하려고 스스로를 그렇게 버릇 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 집안의 밥줄이고, 그녀 돈은 마금네 돈이고, 마금네 돈은 마금네 돈이었다.
마금네야말로 그 동네의 진짜토박이였다. 그 집의 선사시대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녀는 원주민 동네에 살고 있지 않았다. 원주민 동네를 눈에 거슬리는 풍경처럼 굽어보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마금네는 아파트도 원주민 동네도 생겨나기 전 그 동네가 농촌이었을 무렵 거기 어디서 태어나서 거기 어디로 시집 가서 고달프고 어렵게 살았다. 그때부터도 그 집은 들판 한가운데 있었다. 마금네는 그 집보다 훨씬 못한 집에 태어나서 친정보다 더 못한 데로 시집가서 살았고 그 집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육이오 난리통에 처음으로 그 동네를 떠났다 돌아와보니 마을은 많이 변해 있었다. 인구의 이동도 심했고 빈집도 많았다. 그 집은 그 동안 더 몹시 퇴락한 채로 남아 있었지만 비어 있었다. 주인이 부역을 얼마나 몹시 했는지 가족들이 몰살을 당했다고 했다. 원한을 산 사람한테 죽임을 당한 장소가 그 집이었다고 해서 알만한 사람은 흉가라고 그 집 앞으로 갈 일도 돌아다녔다. 가끔 거지들의 소굴이 되기도 했다. 집은 점점 흉흥해졌다. 육이오 때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안 남아날 만큼 세월도 가고 주민의 변동도 많았건만 그 집이 흉가라는 건 더욱 과장되게 전해 내려왔다. 마금네는 과수원 날품팔이꾼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오남매나 낳아 기르면서 그 동네를 못 떠났고 그동안 한번도 제집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그 집을 단 하룻밤의 편한 잠을 위해서도 눈독들인 적이 없었다. 그 집은 흉가일 뿐 집이 아니었다.
그 흉가에서 어느날부터인가 가냘픈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또 지나가던 거지가 들었나보다 하는 관심조차 갖는 이가 없었다. 그때는 미처 원주민 동네도 생겨나기 전이었다. 벌판과 과수원에 드문드문 집이 있긴 해도 농촌이 피폐해질 조짐은 완연했다. 그렇지만 그쪽 땅까지 금싸라기땅이 되리라는 건 아무도 예측하지 못 할 때였다. 그 집의 겉모양까지 사람 사는 집 티가 나기 시작할 무렵 그 집을 주목하기 시작한 게 마금네였다. 그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가 몰살을 당한 주인의 살아남은 동생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마금네밖에 없었다. 육이오 때 청년이었던 그는 형 일가가 몰살당하는 걸 목격하고 총격을 받기도 하고 달리 의탁할 가족도 없고 하여 절로 들어가 이십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하다가 환속을 한 거였다. 마금네는 처음부터 그를 해코지할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 생각만해도 근질근질했다. 언젠가는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 근처 땅값도 만만치 않아지기 시작할 때와 맞물려서 그 집을 지켜보는 마금네의 마음은 날로 팽팽해졌다. 젊음을 절에서 보낸 사내가 어느날 느닷없이 절을 등진 것은 속세에서 먹고살 수 있는 길이 기다리고 있어서는 아닌 듯했다. 그 집에 선원 간판이 붙었다. 절에서 만든 인간관계도 왜 쏠쏠했던 듯 지식인풍의 남자들의 발길이 빈번하달 순 없어도 꾸준히 이어졌다. 마금네와 남편이 허드렛일을 거든다고 드나들면서 그 사람들이 한문이나 불경 공부를 하러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달이 정기적으로 제법 많은 사람의 모임이 있는 걸 알수 있었다. 마금네는 식구도 덜 겸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한 마금이를 그 집에 잔심부름꾼으로 들여보냈다. 입에 풀칠도 어려을 때이기도 했지만 중학교도 못 보낼 바엔 기술이라도 가르쳐야 마땅하련만, 계집애가 어려서부터 청승을 잘 떨고 가끔 남의 앞일을 알아맞히는 이상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귀동냥으로라도 불경을 좀 배워놓으면 쓸모가 있을 듯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때만 해도 원주민 동네를 양옥집 동네라고 부를 때였다. 앙옥집 동네 사람들은 무슨 선원이란 간판이 붙은 그 퇴락한 집을 경원했고 그 집에 사는 중도 속환이도 아닌 이상한 남자를 도사라고 불렀다. 물론 양옥집 동네 사람 중 누구도 그 집에 도를 닦으러 가거나 불경공부를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마금이가 심부름꾼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돼서 도사는 열네살짜리를 범하고 말았다. 마금이는 다시는 그 일을 또 당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에 엄마에게 고했다. 마금네는 길길이 뛰며 도사를 협박했고, 도사에게 많은 것을 뜯어내기 위해 도사가 그 집과 텃밭을 정식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이윽고 그 집은 마금이의 소유가 됐고 도사는 남은 공터를 얻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자였다. 마금이는 그 사건으로 남자 혐오증을 얻은 대신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그 사람의 생각을 감지하는 능력은 더욱 예민해졌다. 마금네는 딸의 그런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처녀무당으로 키웠지만 마금이가 변덕이 심하고 돈욕심이 없어서 그 사업이 마금네의 욕심만큼 번창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누이가 무당인걸 빌미로 놀고 먹으려는 여러 자식들하고 기생하기에 충분한 수입은 되었다. 처녀점집이 절집으로 탈바꿈하기까지는 텃밭을 처분해서 다시 절을 하나 사가지고 산으로 들어간 도사의 협조도 있었지만 마금이도 순순히 응했다. 공부를 할 뜻을 비친 것도 그녀가 먼저였다.
그러나 그녀는 공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나이배기가 돼 있었고, 타고난 성품도 돈에 관심이 없는 것만치나 공부에 뜻이 없었다. 직감 외에 그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핑계로든 여기 아닌, 어딘가로 가고 싶어했다. 그녀가 막연히 벗어나고 싶은 건 이 고장이 아니라 여지껏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 나이까지 만난사람들은 식구건 남이건 하나같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남의 재물이나 지위를 빼앗고 싶다는 생각밖에 머리에 든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걸 일찌감치 간파한 거야말로 그녀가 점을 칠 수 있는 주요한 밑천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를 보면 어머니는 저런 것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는데 그게 가장 괴로웠다. 그게 아닐 것 같은 거야말로 자신의 가장 정직한 속내였고 한밤에 문득 깨어나 마주 대하는 부처님의 고요한 미소가 동의해주는 바이기도 했다.
얼마를 벌었는지, 사월 파일을 치르고 난 절집은 그야말로 절간답게 고요하기만 했다. 마당의 연등을 마루 천장에다 옮겨 걸어야지, 그러나 바람에 출렁이는 게 영락없이 연못을 거꾸로 이고 있는 기분이라고, 자연스님은 하늘을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뒤란으로 푸성귀를 뜯으러 나갔다. 그렇게 음식을 많이 했건만 떡은 신도들한테 나누어주고 반찬은 식구들이 싹 쓸어가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딸이 한번도 뭘 맛있게 먹는 걸 본 적이 없는 마금네는 뭘 먹도록 해줄 생각보다는 두면 썩혀버릴 거, 하면서 뭐든지 가져가려고만 했다.
그리고는 혼자만 뭘 잘 해먹는 줄 아는지, 행여 고기나 비린 건 먹고 싶어도 참아야지 안 그러면 신도 떨어져나간다고 윽박지르는 소리를 잊지 않았다. 음식 만드는데 취미도 없고 어려서부터 제대로 배운 것도 없어서 그저 아무렇게나 굻어죽지 않을 만큼만 해먹는 게 버릇처럼 굳어져 있었다. 뒤란에 씨를뿌린 것도 그녀가 아니어서 어떻게 해먹는 푸성귀인지도 모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한움큼 뽑아다가 다듬으려는데 노파가 한 사람 스르르 들어왔다.
한눈에 점을 치러 온 사람은 아니었다. 계절에 맞지 않은 옷에 비해 환한 얼굴이 까닭없이 눈부셨다. 노파는 웃으면서 스님을 나무랐다. “아욱도 다듬을 줄 몰라 쯧쯧 나이는 어디로 처먹었누.” 그러면서 천연덕스럽게 마주앉아 아욱을 다듬기 시작했다. 아욱은 연한 줄기의 껍질을 벗겨가며 다듬는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다듬을 줄 모르니 씻을 줄은 더군다나 모르겠구먼 아욱은 이렇게 씻는 거야.” 그러면서 수돗가로 가져가더니 푸른 물이 나오도록 북북 으깨서 씻는 것이었다. 쌀뜨물 받아놓은 게 있을라구, 하면서 쌀을 내놓으라고 했다. 쌀 역시 박박 으깨서 한두 번 씻어내고 보얀 뜨물을 받아놓았다. 그리고 그 구식 부엌을 돌아보며 참 좋다고 연신 감탄을 하더니 밥을 안치고 장독에서 된장을 떠다가 국을 끓이는 것이었다. 그 모든 행동이 묵은 살림하듯 막힘없이 능수능란했다. 스님은 그 이상한 할머니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도무지 짚이는 게 없었다. 대번에 뭐가 딱 와야지 오래 생각을 굴려서 알아낸 건 맞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게 조금도 낭패스럽지가 않고 기쁨이 스멀스멀 등을 기는 것처럼 즐거웠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할머니가 차린 상에 두 사람은 정답게 겸상을 했다. 할머니가 끓인 아욱국이 어찌나 맛있던지 국에 말아 밥 한공기를 다 먹었는데도 할머니는 몸이 그렇게 약해서 어떡하냐고 자꾸 밥을 더 권했다. 누가 손님인지 헷갈리게 하는 할머니였다. 하긴 들어올 때부터 할머니는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으니까. 저녁엔 뭐 구미 당길 걸 좀 해맥여야 할 텐데… 다음 끼니 걱정까지 하는 할머니를 보면서 그녀는 슬그머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런 느낌 또한 처음이었다. 그녀는 남한테 위함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 없이 황홀했다. 저녁엔 할머니를 위해저 장까지 봐왔다.
원주민 동네에 있는 미니슈퍼에 가서 두부도 사오고 콩나물도 사오고 멸치까지 사왔다. 그리고 부엌에 들어서서 할머니하고 주거니 받거니 저녁을 차렸다. 아까운 참기름을 그렇게 들이부으면 어떡하냐고 야단도 맞았다. 할머닌 야단을 잘 쳤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 노인네가 어떻게 저렇게 거침이 없을까 신기했다. 밤엔 둘이서 나란히 자리 펴고 누웠다. 거침없이 들어왔듯이 잠든 동안 거침없이 나가면 어쩌나 싶어 살며시 할머띠 손을 잡았다. 작작고 거칠고도 말랑말랑한 손이었다. 옛날 얘기 해줄까? 할머니가 손을 마주잡아 주면서 말했다. “옛날, 옛날에 어린 자식 데리고 혼자 사는 과부가 있었더래. 과부는 바람이 났더래. 어린 자식 잠들면 서방 만나러 나가려고 밤마다 옷도 안 벗고 자더래 에미가 밤이면 몰래 빠져나가는 걸 안 어린것은 손목에다 에미의 저고리 옷고름을 꼭꼭 묶고 잤더래.
새끼가 마음놓고 새근새근 잠들자 에미는 옷고름을 가위로 싹둑 자르고 풍우같이 달려나갔더래.” “너무 슬프다. 할머니.” 그러면서 마금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푹 놓이는 숙면에서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할머니는 곁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마루에서 빨래를 개키고 있었다. 늙으면 죽어야지, 빨래 걷는 걸 잊어버리고 잤잖아? 그러면서 밤이슬에 눅눅해진 빨래를 어루만지듯 판판하게 쓰다듬어 반듯하게 개키고 있었다. 이따가 한번 더 볕을 봐야해. 그래야 부숭부숭해지거든,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금이는 어디서 저런 보물단지가 굴러들어왔을까,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쥐어짠 채로 털지도 않고 널어서 북어처럼 비틀어져 있던 그녀의 속옷과 가사가 방금 다림질해놓은 것처럼 반듯하고 얌전해졌다.
이렇게 시작된 할머니와의 생활은 꿈같이 편안하고 달콤했지만 어디서 온 할머니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 집에서 주인보다 더 자기 집처럼 자유자재로 행동한다는 것밖에 할머니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날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횡설수설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꼬리를 잡고 추궁을 당하면 헷갈리는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다가도 금세 싫증을 냈고, 딴소리를 했다. 한번은 부처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예수쟁이들도 마음이 좋더라고, 하마터면 길에서 병이 들어 죽을 뻔했는데 깨어나보니 예수쟁이들 이 기도를 하고 있더라는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거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했을때 전혀 딴소리를 했다. 멀리 보이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면서 요새 허리가 쑤시는 게 저기서 겨울을 났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 소리 또한 종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주 헛소리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직감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할머니의 기억력이 끊어졌다 붙었다 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를 만족해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 했다. 고기도 놀던 물이 좋다더니, 사람도 살던 데가 이렇게 좋은 것을, 하면서 할머니가 기지개를 켜듯이 마음껏 느긋하고 만족스럽게 굴 적에는 옛날 옛적 이 집에 살던 할머니가 돌아온 게 아닌 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자기도 옛날 옛적부터 할머니의 손녀였다고, 지금은 이 세상이 아닌 그 옛날, 전생으로 돌아와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텅 빈 시선으로 먼산을 바라보면서 우리 아들이 곧 데리러 온댔는데 왜 이렇게 안 오나?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기분이 언짢아지곤 했다. 아들이 곧 모시러 올까봐서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버림받은 노인인 것 같아서였다.
4
어머니가 또 의왕터널 쪽으로 갔으려니 한 영주의 추측은 들어 맞지 않았다. 그날은 뜬눈으로 새우고 다음날부터 가실 만한 데를 모조리 알아보고 나서 결국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동회와 구청의 가정복지과에도 신고를 했다. 전국적으로 사람만 찾는 전화번호가 따로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아무런 진전 없이 날짜만 흘러갔다. 신문에 광고도 내고, 남편 친구한테 부탁해서 청취율이 높은 시간에 방송도 몇번 내보냈다. 그러자 제보가 몇건 들어오기는 했지만 확인해보면 아니었다. 수원역에서 구걸을 하고 있더라는 식의 제보에 울먹이며 달려가기를 몇번을 했는지 모른다. 내가 지금 바로 그 할머니한테 우동을 사먹이고 있으니 빨리 우동값 갖고 나오라고 하고 나서 어디라는 말도 없이 끊어 버리는 장난질도 있었다. 검찰에 변사자 수배도 부탁했다. 그 결과 변사한 얼토당토않은 노인의 시체를 확인해야 하는 곤욕까지 몇번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못할 노릇은 주로 남편과 동생이 맡아서 해주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주는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차를 몰고 노인네가 갈 만한 데를 찾아나서지 않고는 못 배겼다. 집안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결과 과천에는 어머니가 한두 번 나타난 적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가 있었다. 워낙 오래 살 던 아파트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 그중 어머니를 민났다는 이가 나타났지만 그냥 거기 어디 다니러 오셨다 가는 줄 알고 인사만 하고 말았다고 했다. 언제나처럼 깨끗하고 명랑해서 길을 잃은 줄은 꿈에도 몰랐노라고 했다. 그 사람이 만일 미리 그 사실만 알았더라도 붙들어두고 연락을 해주었을 것이다 발을 구르고 싶게 억울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사람 찾는다는 인쇄물을 신문지 사이에 끼우는 찌라시로 만들어 뿌리기로 했다. 몇날 며칠을 두고 과천을 중심으로 평촌 산본 안양 일대의 신문보급소란 보급소는 다 찾아다니면서 그 일에만 종사하다가 신문독자들이 찌라시를 눈여겨보지 않을게 뻔해서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기로 했다. 평소의 어머니의 행동반경을 감안해서 그 범위 내만 붙이고 다닌다 해도 식구 단위의 인원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큰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해서 매일매일 뼛골 빠지게 뛸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었다.
그렇더라도 일일이 손 가고 시간 잡는 일이라 영주네 식구들만 갖고는 태부족이었다. 일손도 나눌 겸,더 좋은 방법이 뭐 없을까 의견도 교환할 겸 삼남매가 모일 적이 많았다. 모이면 말이 많아졌고 비난의 화살은 으레 영주한테로 집중됐다. 나 같은 죄인이 무슨 할말이 있겠수, 하는 건 영탁이가 자주 쓰는 말이었지만, 그 집 식구들이 가장 떳떳해 보였다. 영탁이 처는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법이라고는 없이 싸늘한 태도로 지켜보기만 했지만, 대문과 방문에 자물쇠 채운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게 증명된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는 냉소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영주는 느끼곤 했다. 영숙이도 그런 걸 감지한 모양이다. “언니가 그때 조금만 참지, 잘난 척하고 괜히 모셔와서 재들만 책임 벗게 됐지 뭐유? 보나마나 올케는 속으로는 고소해할 거야.” “지금 누구 잘잘못 따지게 됐니? 어머니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사는 판에. 그때도 난 어머니가 바라시는게 뭘 까, 그것 먼저 생각하려고 했을 뿐이야.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어이구, 박사언니의 잘난 척은 하여튼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경찰에서도 돌아가셨으면 즉시 연락이 닿게 돼 있으니 그 걱정은 말라고 했다며? 지문조횐가 뭔가로.” “거기다 왜 박사는 갖다붙이니?”
“언니처럼 알뜰히 어머니 울궈먹은 자식도 없잖우? 그만큼 부려 먹고도 뭐가 모자라 박사 욕심까지 내가지고 어머닐 늦도록 딸네 집살이를 못 면하게 하다가 기어코 이 꼴 당한 거 아뉴?”
어쩌면 어머니하고 동생하고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즈이들이 누구 때문에 대학공부까지 할 수가 있었는데… 그 일을 어머니는 장하게도 여겼지만 그 공의 반은 맏딸한테 돌리면서 늘 미안해하곤 했었다. 하숙집 딸 노릇만 안했어도 박사도 될 수 있는 딸이었는데 이렇게 못내 아쉬워하는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어서,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고 말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박사를 뒤늦게 딸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하숙집 딸답게 남편을 만난 것도 하숙생 중에서였다. 사정을 빠안히 알고 한 결혼이라 하숙집 딸에서 중학교 교사가 된 후에도 남편은 처가식구와 같이 사는 걸 조금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안한다는 처가살이를 그는 아무도 불편해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도록 잘 해냈다. 누가 가족관계를 물으면 장모님 모시고 산다는 소리를 여자들 이 시어머니 모시고 산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게 떳떳하게 했다. 영주는 그럴 때의 남편이 가장 잘나 보였고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 또한 그런 사위를 좋아했었다. 지금도 구메구메 어머니 생각을 제일 많이 하는 게 남편이었다.
그런 형부에 대해서도 영숙이는 헐뜯고 싶어했다. 따뜻한 봄날 이 계속되어 어머니가 한뎃잠을 주무시는 걸 가상해도 몸이 오그라붙는 느낌이 한결 덜해진 것만도 살 것 같은 날이었다. 남편이 아주 슬픈 얼굴로 어머니가 신 총각김치 줄거리 넣고 지진 청국장 생각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하필 영숙이가 듣는 데서 한 소리였고, 어머니의 그 솜씨가 천하일품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남편은 울먹이듯이 비통한 얼굴로 그 소리를 했는데도 영숙이는 자리 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화를 냈다. 부리던 식모가 나갔어도 그보다는 듣기 좋은 소리를 할 거라는 거였다. 그게 그렇게 어머니에 대한 모욕이요 얕봄이라면 동생이 그리는 어머니는 어떻게 생겼을까. 영주는 빨래를 다림질해놓은 것처럼 얌전하게 개키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 그리움이 가장 절절해졌으므로 남편의 진심을 이해 하고도 남았다.
어느덧 어머니가 집 나간 지 반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계절도 초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포스터를 천장씩 몇번을 더 찍었는지 헤아릴 수 멀게 되었지만 서울시내와 근교를 다 덮기는 아직아직 멀었으리라. 제보가 끊긴 지도 오래되었다. 영주는 포스터도 붙일 겸 해서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노인들의 수용기판을 찾아다니는게 거의 일과처럼 돼버렸다. 보건사회부에 등록되지 않은 사설기관도 많았다 그런 데는 소문으로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데를 한 군데 어렵게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무 특징도 없는 서울근굔데 괜히 쉬어가고 싶은 데가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우선 공기를 심호흡했다. 특별히 신선한 것 같지도 않았다. 구질구질 한 마을 어귀였다. 이 마을에도 포스터를 붙여볼까 하다가 문득 저 만치 외딴집이 보였다. 요새도 서을 근교에 저런 옛날 집이 남아 있는 게 신기했다 문화재적인 옛날 집이 아니라 그냥 나이만 많이 먹은 귀살스러운 옛날 집인데도 영주는 이상한 힘에 끌려 차츰차츰 다가갔다. 다가가면서도 무엇에 이끌리고 있는지 이상해서 주춤거렸다. 느닷없이 하숙 치던 종암동 집 생각이 났다.
그냥 생각이 난 것뿐 비슷한 것 같지는 않았다.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면서 천개아 포교원이라는 간판과 함께 빨랫줄에서 나부끼는 어머니의 스웨터를 보았다. 영주는 멎을 것 같은 숨을 헐떡이며 그 집 앞으로 빨려들어갔다. 마루 천장의 연등과 금빛 부처가 그 집이 절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그밖엔 시골의 살림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처님 앞, 연등 아래 널찍한 마루에서 회색 승복을 입은 두 여자가 도란도란 도란거리면서 더덕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화해로운 분위기가 아지랑이처럼 두 여인 둘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에 그런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아니 헐렁한 승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여지껏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드린 적이 있었을까. 칠십을 훨씬 넘긴 노인이 저렇게 삶의 때가 안낀 천진덩어리일 수가 있다니.
암만해도 저건 현실이 아니야, 환상을 보고 있는 거야. 영주는 그래서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녀가 딛고 서 있는 곳은 현실이었으니까. 현실과 환상 사이는 아무리 지척이라도 아무리 서로 투명해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별개의 세계니까.
(문학동네 199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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