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기 여름에서 늦가을 같은, 아침 저녁이 시원한 것을 넘어서 아예 추울 정도의 진정으로 멋진 가을이 접어든 10월 초, 한마디로 glorious, cool days가 연일 이어졌다. 한낮은 알맞게 따뜻한, 믿을 수가 없는 ‘은혜로운’ 자연의 조화가 아닌가? 이런 날씨는 아마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지만 일 주일을 넘게 변치 않게 써늘한 한 가을 같은 이 느낌이 ‘아마도’ 가을이 그냥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낙관을 해 본다.
그렇다면.. 거의 4개월 동안 우리 집 backyard에서 완전히 방치 되었던 것들을 슬슬 찾아내어서 비지땀 걱정을 하지 않고 ‘고치고 정돈하고’, ‘월동준비’를 하는 즐거운 순간이 온 것인가.. 믿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 집에 정차하고 있는 두 마리의 아기 고양이들의 shelter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 아무리 outdoor에서 태어나고 자란 애들이지만 우리의 느낌은 다르다. 우리가 춥고 축축하면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추측이 앞으로 10일 이내에 반드시 찾아올 central heating moment, 위층은 electronic system이라 상관이 없지만 아래 층의 ‘고물’ 은 전통을 자랑하는 pilot light 를 다시 켜 주어야 한다. 예년에는 그냥 켜두고 여름을 보냈지만 올 여름부터는 gas energy 도 절약하고 thermocouple도 보호할 겸 꺼 두었기에 귀찮지만 ‘기어들어가서’ 다시 그 pilot light를 켜 두어야 한다. 귀찮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올 겨울은 어떨까.. 여름이 ‘잔인’했으니.. 이것도 아마 다르게(추운 쪽으로) 잔인한 것은 아닐까.. 봐 주세요..
¶ Retarded Korean: 오랜 이국생활에서 고국에서 오는 소식들, 예전에는 그런대로 관심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아주 옛날에는 가끔 날라오는 신문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모든 것이 Internet으로 직접 볼 수도 있게 되었다.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희귀함과 호기심 같은 것은 거의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정보라는 것은 어렵게 구하는 것이 가치가 높다는 것, 자명한 진리다.
이제는 과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던 옛날의 영화나 드라마도 무료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1980년대부터 ‘한반도의 느낌’을 완전히 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한국말 TV program은 따라서 완전히 잊고 살게 되었지만 연숙은 간간히 한국 grocery에서 빌려주는VHS tape를 통해서 고국의 인기 프로그램은 본 모양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난 2개월 동안 YouTube를 통해서 1980년대 장수 농촌드라마였다는 ‘전원일기 田園日記’ drama를 간간히 보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면서 고국의 1980년대의 분위기, 특히 농촌의 ‘발전상’을 보게 되었다. 나의 시대 TV talent는 딱 두 명, 최불암과 김혜자.. 나머지는 그저 얼굴만 본 정도의 ‘후세’ 사람들이다.
사실 이런 배경이 본론이 아니고.. 나를 ‘한 시간’ 동안 배를 잡고 웃기던 ‘장면’, 그것이 본론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 했는데, 그것은, 이 ‘전원일기’ 화면에 조그만 ‘뿌연’ 점 같은 것이 계속 움직이는 것이 보이며 눈을 거슬렸는데.. 자세히 보니.. 최불암이 담배를 필 때마다 그 담배를 쫓아가며 그 것을 ‘감추려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하도 믿을 수 없고 어처구니없는 이것을 보며.. 처음에는 이 video를 ‘올려 놓은 upload 사람’의 일시적인 장난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런 ‘screen doctoring‘은 다른 한국 비디오에도 보였다. 이것은 무엇일까? 담배를 증오하는 미친놈의 장난일까.. 아니면 ‘혹시’ 대한민국 판political correctness 중에 하나일까, 벼라 별 생각이 다 든다.
고국을 방문하는 우리 같은 ‘담배세대’는 한결같이 ‘지나친, 불쾌한’ 담배에 대한 경험을 들려준다. 한국과 일본이 어쩌면 그렇게 다른 ‘담배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도 알려준다. 그렇다면.. 혹시 이것도 무슨 ‘빨갱이 담배 법‘ 같은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이것은 political 한 것인 모양이다. 나의 결론은 some retarded Korean policy 로 끝났다. 정말 정말 이것도 오래 살다 보니 목격하게 된 세기적 희극에 속한다. 수 십 년 전 drama video의 ‘담배 모습’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policing을 하는 그 예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어떨까? 정말 그들은 retarded Korean 이다.
¶ “오래 살다 보니” department: 내가 오래 살았다고 느끼게 하는 ‘것’들, 주로 뉴스에서 찾는데 요새는 이것을 찾을 필요가 없이 살고 있다. 바로 그’놈’ 때문이다. 아니 심하게, 그 ‘새끼’라고 말하자. 양아치중의 양아치, 망종 중의 망종.. 말세 중의 말세.. ugly 중의 ugly.. (I truly love to hate this ‘thing’) 이름을 쓰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의 ‘말세적 인간 retarded Donald Duck‘.. 어떻게 제 정신을 가진 이성적이어야 하는 ‘대국의 대 정당 republican‘이 이런 역사적 과오를 범하게 된 것인지..
이 인간을 따라다니는 인간들은 한마디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일 것이다. 교훈 중의 교훈은 많지만 나의 등골을 계속 서늘하게 하는 것 중에는 1930년대의 ‘불만의 독일 정국’이다. 민중, 민의가 민주주의의 근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만약에 ‘틀린 것’이라고 하면 Hitler같은 monster는 언제고 부활할 수 있는 것, 지난 일년간 실감을 하면 산다. 한심한 ‘우매한 white trash’ 들, 그들이 바로 1930년대 독일에서 Jewish business들을 몰아내던 바로 그 ‘우매한 민의’인 것, 역사는 돌고 돈다.
내가 이곳에서 살며 느끼며 보아온 미국, 지난 40년 간 많이 변한 것, 부정할 수가 없다. 자연법을 거스르는 지나치게 ‘개인적 자유’를 요구하는 progressive들, 장기적으로 그것은 절대적으로 progressive가 아니고 degenerative한 것, 역사를 보면 잘 안다. 이렇게 북극성이 안 보이는 ‘난세’에는 어떤 ‘망종’도 쉽게 출현할 수 있는 것, 어찌 잊겠는가.. 이쪽이나 저쪽이나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역사는 변하지만 안 변하는 것, ‘불변의 진리’를 기대고 사는 것이 이런 난세의 지혜중의 지혜다.
¶ 오늘은 Catechism, 천주교 교리교육, 교리반, 교리교사 등에 관련이 된 Catechetical Sunday, 한국어로는 교리주일 정도가 될 듯하다. 오늘 주보를 보고 오늘이 바로 교리주일임을 알았다. 2주 만에 우리의 ‘동네 본당’ Holy Family에서 주일 미사 참례를 하였다. 10시 미사에서 낯익은 반가운 얼굴들이 이곳 저곳에 보이고 인사를 나눈다. 세월이 무언지.. 이들 전혀 얼굴, 문화, 나이 다른 교우들, 특히 Irish쪽의 푸른 눈의 수려한 모습의 ‘아줌마, 아저씨, 할머님’들, 어쩌면 그렇게 정이 들었을까? 이름도 성도 잘 모르지만 이웃 친척처럼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잠시 안 보이면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근래 평일미사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는 FatherJoseph Morris, 예의 극적인 언어로 마이크 필요 없는 우렁찬 목소리가 일요일 아침을 압도한다. 이 신부님은 모습 자체가 liberal 한 분이지만 60을 훨씬 넘는 나이에 그런 성향은 드물지 않을까? 모습자체가 나이에 비해서 훨씬 젊은 이 신부님, 아마도 ’60년대의 아이들 baby boomer‘ 일지도 모른다. 오늘 강론은 생각할 기회를 많이 준 주제다. ‘하느님을 사기 칠 수 있는가?’ 하기야 오늘의 복음말씀(Luke 16:1-13, 루까복음)은 처음에 이해가 전혀 되지를 않았다. ‘사기치는’ 시종이 주인으로부터 ‘사기 쳤다고’ 칭찬을 받는 모습… 신부님 말씀이 이 대목은 성서학자들도 골머리를 썩는다고 했다. 예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 반대가 되는 이 색다른 논리를 어떻게? 이 liberal한 사제 Joseph의 해석이 뒤따랐는데, 나는 그 뜻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의 제1독서는 Amos예언자가 ‘사기꾼’들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음말씀에서는 사기꾼 시종이 칭찬을 받는 내용이 나왔을까? 이것이 신비가 아닐까? 인간의 논리와 하느님의 논리는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것인가? Joseph신부는 여기 나오는 시종이 예수님이고 주인이 하느님이라고 하는 묵상주제를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지만 조금씩 정리가 되는 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조적으로 매일 인터넷으로 받아보는 복음 묵상 글에서 신부 기경호 프란치스코 라는 분은 아예 이 사기치는 행위를 평하기를 ‘하느님의 빚을 받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에 슬기롭게 대처하듯이 슬기롭고 민첩하며 능동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해석을 하고 있다. 분명히 ‘사기치는 것’이 ‘치열하게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동감이 안 간다. 글쎄요..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미사가 끝날 무렵 본당의 모든 교리반 staff들(주로 catechist 교사들)이 불려나가서 신부님의 강복을 받았다. 연숙은 현재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 교리반 director를 맡고 있어서 느낌이 아주 달랐을 것이다. 어째서 같은 대교구 소속인 이곳에서는 교리반 교사들이 공적으로 강복을 받고 한국 순교자 성당에서는 아예 교리반 주일이란 말조차 없으니.. 일을 맡은 이상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녀지만 가끔 맥 빠지게 하는 일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곳 미사가 끝나자마자 그곳 본당 교리반 때문에 부리나케 혼자 순교자 성당으로 떠난 연숙의 뒷모습이 조금은 쳐져 보인다.
¶ 오랜 만에 guitar를 손에 잡았다. 아니 3주 만에 case에서 꺼내본 셈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이렇게 몇 주 동안이나 기타 코드를 안 잡았던 것이 처음이었나.. 손가락 끝의 굳은 살이 벌써 얇아졌나.. 어찌나 손가락이 아프던지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3주 정도면 암만 굳었던 손끝 살갗도 다시 원상복구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3주 이상 기타 치는 것을 쉰 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기억에 이 정도로 손가락이 아팠던 기억이 없으니까.. 요새 느낌으로 3주란 것은 시간이란 축에도 끼지 못하는 찰라 같은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나의 육신의 일부인 왼손가락 끝은 짧지 않은 시간을 느낀 것인가?
이 시점에서 지난 3개월 정도 group coaching을 하며 관계를 맺게 된 Six String Friends 기타 동호회를 다시 생각한다. 내가 guitar coaching을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고, 덕분에 오랜 역사를 가진 내 ‘알량한’ guitar ‘실력’을 재점검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7번 정도 lesson과 coaching을 하면서 느낀 것은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커다란 차이’ 였다. 나의 현재 기타실력은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남과 비교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엄청난 세월 동안 그런대로 꾸준히 기타가 나의 옆에 있었다는 사실, 때에 따라 꾸준히 즐겼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시도한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것 가르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어휴~’ 소리만 나온다. 우선 배우는 사람들의 실력이 각양각색으로 3/4, 4/4 조차 구별할 수가 없는가 하면 4/4 는 숫제 5/4, 6/4로 리듬 감각, tempo감각이 예외적으로 둔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리 노래’ 실력들에도 각양각색이고.. 50~60대이므로 70/80 style의 곡들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문제는 어린 학생들이 아니어서 배우는 과정이 느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몇 주나 몇 달을 예정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open end로 ‘무작정’ 진행된다는 사실도 문제로, 그렇게 조급하게 배우려는 자세도 결여가 된 듯 보였다. 그래서 일단 지금이 중간 정도의 단계 mid-term정도로 보고 지금까지의 정도를 더 coaching을 하고 일단 phase out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야 조금은 조급하게 열심히 노력을 할 듯 보인다.
¶ Rain Shower, rare sight: 이것이 무엇이냐?: 오늘 아침에 새벽에 일어나서 backyard의 deck로 어둠을 헤치고 맨발로 걸어나가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그 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던 그 느낌.. deck 바닥이 질척거리는 것.. 그것은 ‘물’이었다. 마르고 말라 수축을 거듭하던 deck floor가 아마도 놀랐을 것이다. 그것은 ‘잔잔히 내리는’ 이슬비였다. 한마디로 ‘이것이 웬 떡이냐!’ moment가 되었지만 오후에는 숫제 정말 오랜만에 보고 듣게 된 ‘소나기’가 쏟아졌다. 올 여름의 그 모든 더위가 한 순간에 싹~ 사라지는 순간이 되었다.
살인적인 맹더위도 놀랍지만 올해의 여름은 그야말로 double whammy였다. 맹더위에 겹친 가뭄, 아마도 기록을 깼을지도 모를 일이다. 9월 중순이 지나가는 이 시점의 느낌이 ‘이것은 가을이 아니다’ 라는 것.. 올해 이 지역 농작물들 모르긴 몰라도 피해가 컸을 듯 하고 우리 집도 마찬가지.. 연숙의 희망에 찼던 edible garden (victory garden), 정말 수확이 초라하기만 했고 나중에는 거의 포기한 상태.. 지나간 몇 해는 참 Mother Nature가 그렇게 인자롭기만 했는데 어찌 올해는 그렇게 심술궂은 모양을 했을까? Mother (Nature)를 인간들이 너무나 괴롭힌 것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우선 소음덩어리 에어컨 소리가 안 나는 것만도 날라갈 듯한 기분이다. 올해 에어컨 compressor fan을 교체하면서 소음의 강도가 높아져서 언제라도 에어컨이 꺼지는 아침에 손을 보려고 벼르던 것이 이제는 여름이 완전히 가고 있다. 그렇게 잔인하던 올 여름, 혹시 ‘평균기온을 채우려’ 올 겨울은 또 다른 살인적인 추위가 오는 것은 아닐지.. 올 여름의 electric bill은 보기도 무섭지만 그래도 이제는 ‘거의’ 끝이 나고 있음을 느끼기에 오늘 아침의 가랑비는 나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자연의 선물이 되었다.
¶ 동갑내기, 동갑님네: 말만 들어도 가슴이 찌릿해온다. 최근 몇 주일 동안 YouTube로 간간히 즐겨 보아왔던 고국의 80년대 장수 長壽 농촌드라마였던 ‘전원일기 田園日記’의 한 episode에 ‘동갑님네’란 것이 나왔다. 어떨까.. 왜 나의 가슴이 찌릿한 것이었나? 동갑, 동갑이란 말, 요새도 쓰기나 하나.. 우리 때는 참 정겹던 말이었다. 특히 음력으로 계산한 띠 동갑은 더 정이 가는 말이었고 나와 같은 ‘돼지띠 동갑‘은 그 중에서 제일 나를 즐겁게 한다. 나를 이렇게까지 제일 반갑고 즐겁게 하던 이 말 동갑, 이국생활에서 이것은 사치중의 사치스런 말이 되었다. 이것을 별로 크게 신경 안 쓰고 모르는 척하며 하도 오래 살아서 그렇지.. 조그만 이렇게 생각을 하면 너무나 쓸쓸하고 심지어 괴롭기까지 하다.
고국에서 살았으면 동갑내기가 동창을 비롯해서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그렇게까지 동갑내기의 값어치가 높지 않을지도 모른다. 동갑이란 것, 무엇인가.. 같은 해 태어나서 같은 때 학교를 다니고 거의 같은 역사를 산 동류가 아닌가? 그러니까 거의 같은 시대관을 가진 값진 ‘친구’들이 아닐까? 특히 이곳에서는 동갑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이 어려워서 아주 가끔 돼지띠 동갑을 찾으면 그렇게 뛸 듯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근래에 나는 2명을 찾은 경험이 있었고 한 명인 현재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행운을 맛보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돼지띠는 여성이라서 조금 거리감이 있다. 다른 남자 돼지띠는 나와 큰 인연이 없는지 몇 년 전에 영구 귀국을 해버려서 그 쓸쓸함은 생각보다 컸다. 70을 곧 바라보는 돼지띠 동갑들.. 6.25 민족비극은 직접 겪지 못했지만 그 여파의 피해를 톡톡히 보며 앞만 보고 달렸던 세대… 참 파란만장한 ‘인생 십자가’를 진 세대였다.
Georgia 10, 굴림 10: 얼마나 멋진 type shape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멋진 것은.. 아~~ 그립다, 태곳적 太古的 둔탁하지만 경쾌한 typewriter의 잔잔한 소음들.. 지금은 원시적인 얼굴의 mono type Pica, 그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아~~ 그 예전에 ‘학문적, 지적 정보’의 총아 寵兒 였던 mechanical typewriter 의 멋진 추억들이여!
나와 typewriter의 첫 만남은 1960년대 초쯤이었다. 서울 중앙중학교 1, 2학년 쯤이었나.. 나의 경기고교생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 나이에 비해서 조숙했던 그 형이 나의 typewriter에 대한 꿈을 며칠 동안 이루어 주었다. 나의 꿈은 그 것을 직접 만져보고 쳐보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괴물처럼 무겁게 보였던 Underwood typewriter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내가 하도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기에 그 형이 어디선가 며칠간 ‘빌려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것, Underwood typewriter는 ‘고철’이었다. 크고, 무거운 쇠 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어린 애는 들기도 힘들 정도였다. 당시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고 학생전용 영어 신문도 학교에서 가끔 볼 수도 있었는데 typewriter는 집에서 활자체로 인쇄물을 찍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그것의 위력에 매료되기도 했다. 영자신문 비슷한 것을 찍어보기도 하며 즐거워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의 typewriter는 물론 거의 모두 ‘중고’, 아마도 미8군 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왔을 것이고 그 값은 만만치 않은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집에 가진 사람은 거의 못 보았다. 당시에 이미 한글타자기(공병우 3벌식)도 나와 있었지만 아마도 대부분 기업체에서나 쓸 정도고 학생들은 그것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 그랬나 할 정도로 당시는 거의 모든 학교 공부, 강의 시간에 손으로 받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Typewriter가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은 대학교 4학년 당시의 겨울방학 때였다. ‘무위도식의 극치’를 실행하던 당시 나는 한강 남쪽 ‘변두리’에 속했던 숭실대학이 있었던 상도동 종점 부근에 살았는데 무슨 구실로든가 시내 그러니까 종로, 명동 등지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타자학원이었다. 왜 타자학원을 골랐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좌우지간,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유학 같은 것을 가려면 타자기를 칠 수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번 씩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배우려고 한 것이라 열심히 배우긴 했다.
타자학원에 가서 놀란 것은 이것이다. 학생들이 ‘모조리’ 여자, 그것도 아주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은 그 ‘기술’로 취직을 하려 했기에 나와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심각한 자세였고 청일점인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학원 강사는 남자였는데, 나의 출현에 꽤 놀란 눈치였고 아주 반가운 모습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나와 사무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유일한 남자들이었다.
집에 타자기가 없었던 관계로 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비교적 값싼 방법이었고, 종로2가에 학원이 있어서 나는 매일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었기에 그것은 지루한 겨울방학을 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타자 실력이 얼마였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그것은 나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최소한 touch typing만 알면 나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 이후 미국유학을 준비할 때 나는 ‘중고’ 아주 portable 한 typewriter, swiss 제 Hermes란 것을 살 수 있었다. 싼 것은 아니었어도 미국에 가면 필요할 것 같아 미리 투자를 한 것이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 나는 이것으로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왜 그렇게 그 타자 소리가 나에게는 멋지게 들렸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당시 그것을 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 그것도 회사의 비서급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간혹 남편이 논문 같은 것을 쓰게 되면 그의 아내들이 그것을 돕느라 타자를 치곤 했다. 남자가 손수 타자를 치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남자들은 나중에 쓰지 못할지도 모를 기술 touch typing을 미리 배운 셈이 된 것이다.
미국에 와서 사실 내가 직접 typewriter를 쳐야 할 기회는 별로 찾아오지 않았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꼭 typewriter로 쳐서 내는 숙제는 별로 없었다. 쓰려면 도서관에 가면 되기에 꼭 나의 것을 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바로 electric typewriter, 바로 그것이었다. electric! 보통 typewriter는 완전히 수동, manual, 온 손끝의 힘으로 치는 것이지만 electric은 조금만 touch를 하면 electric striker가 이어받은 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나는 그것을 사고 말았다. 비록 큰 돈이었어도 당시만 해도 100% 자유스러운 ‘총각’시절.. 마음만 먹으면 아무 것이나 가능하던 그 자유스러운 시절..
비록 멋으로 샀지만 실제로는 방 구석에서 놀고 있었는데, 결국은 시간은 찾아왔다. 70년대 중반 쯤 나는 West Virginia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course들 중에 typewriter를 써야 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옛날 ‘타자학원’에서 배웠던 기술, 철저히 쓸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때 보니까 나의 typing 속도는 꽤 빨랐고 제출해야 할 것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 소문을 듣고 나에게 typing을 부탁하는 classmate들도 등장했다. 여자들 같으면 돈을 받고 쳐 주곤 했지만 나는 ‘취미’로 생각했기에 모두 무료로 service해 주곤 했다.
Electric typewriter의 위력은 나중에 Ohio State University에서 논문을 쓸 때 절정을 이루었다. 남들은 모두 professional typist를 찾는 고역을 치렀지만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내서 내가 모두 치곤 했다. 그 때 나는 상당한 분량의 논문을 typing했는데, 나중에 ‘책’으로 나온 그 논문집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역시.. professional이 typing한 것과 비교하니.. 완전히 아마츄어 냄새가 났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이후 typing의 필요는 사라지는 듯 했다. 가끔 영어로 쓰는 서류, 편지들 이외에는 그것이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예상을 했으랴.. digital computer의 출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집채만한’ mainframe ‘monster’ (e.g., IBM S/360), 다음에는 minicomputer (e.g., PDP11) 이것들은 거의 모두 keypunch input으로 결국은 typing기술이 필요한 것, 나중에 나온 personal (micro)computer들 (e.g., Apple II, IBM PC) 모조리 앞 모양은 거의 typewriter의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touch typing 의 위력이 돋보이는 세월이 도래한 것이다. Touch typing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나는 그때 비로소 느꼈다.. 무언가 배워서 절대로 손해를 볼 수가 없다는 사실..
Engineer들의 필수 portable ‘analog calculator’ 였던 slide rule (계산척)은 197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한 ‘digital’ calculator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향수에 젖은 ‘mechanical’ typewriter는 personal computer/printer의 등장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리운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것들,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갑자기 무언가 쓰고 간단히 ‘하~얀’ 종이 한 장에 까~만 typeset의 짧은 문장을 쓰고 싶을 때… 그것이 그립다. computer로 쓰면 고치는 것 떡 먹기지만 한 장 정도 print 할 때 얼마나 overhead가 많은가.. 귀찮고.. 그립다.. 그립다.
그 지겹게 공해로 찌들었던 서울의 겨울 하늘아래서 꽤죄죄한 타자학원을 다녔던, 비록 동기는 뚜렷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꽤 쓸만한 겨울방학을 보냈던 것이다. 그 touch typing 기술은 현재까지도 두고 두고 나를 도왔다. 특히 빠른 typing이 필요했던 때, 나는 1960년대 말 서울 종로에 있었던 ‘xx 타자학원’을 떠올리곤 하며 빙그레 웃곤 한다.
나만의 올해 summer retreat 하계피정의 3분의 1일 지나가고 있다. 말이 좋아서 하계피정이지.. 하얀 모래사장, 시원한 바람과 바닷물이 보이는 어느 East Coast 의 a summer place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보내는 하계피정은 별로 시원하지 않은 나의 this old house 지붕 아래에서.. 그것이 벌써 3분의 1일, 11일째 날을 맞는다.
1장: 세속 정신을 끊음, 제11일: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33일 봉헌준비기간 중 11일 째, 첫째 편인 ‘세속정신을 끊음‘ 12일 중에서 11일 째, 그 동안 세속 정신에 대한 인식과 결단에 대한 ‘공부, 묵상’ 한 셈이다. 과연 얼마나 ‘피정 retreat’ 을 한 것일까?
Daily routine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루 중 머리가 그런대로 깨끗한 시간 아침 6시~6시 30분경에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며 그날의 ‘과제, 주제’를 생각하며 묵상하는 것, 처음에는 거북한 느낌도 들고 ‘잡 것들 distraction, 주로 Internet’ 같은 것과 씨름을 하기도 했지만 며칠 만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좋은 습관’을 만드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자부하기에 이것도 그 중에 하나가 되었다. 비결은 간단한: ‘just do it‘와 몇 가지 화살기도가 전부지만..
내일까지 과제는 ‘세속정신과의 싸움‘ 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 오늘 것은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이다. 이것은 다른 것과 다르게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것이 절대 아니라서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왜 그렇게 익숙한 말이 되었나? 그렇다..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오늘 주제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데, 공감이 가는 글이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지극히 태연자약해 보이지만 삶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갖은 수단을 다해 갖가지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다하고 무엇보다도 돈과 재물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그러한 것들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안정과 평화를 구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청하며 그리하여 평화와 기쁨 중에 살아간다. 하느님 안에 참 된 안전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삶이란 과연..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의 자취‘ 가 아니었을까? 그 불안은 사실 육감적인 피부로 느끼던 불안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가장 밑 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원초적인 불안’이다. 대부분 너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없앨 수도 없는 것.. “나이에 따른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내가 사는 의미” 바로 “내가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가?” 삶의 목적과 의미다. 이것을 잊고 살려고 하던 노력들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물질적 육감적 보호‘에 치중하다 보면 반드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이런 불안에 궁극적인 해답이 안 된다.
이것에 대한 삶의 예는 얼마든지 있고, 비교적 가까운 주변에도 있다. 삶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아무것도 못하며 가족을 괴롭히는‘ 그런 형제님.. 너무나 그런 생각에 빠져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거의 depression에 가깝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은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나의 소리만 듣겠다’라는 심하게 꼬인 이기심의 소산이라고 나는 본다. 어떻게 그런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초자연적인 것.. 나만의 육감에만 의존하던 과거의 경험으로 해답은 바로 이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Good OleDays 의 시원한 여름에 대한 추억은 역시 어린 시절 poster로만 보았던 Troy Donahue, Sandra Dee 주연의 영화 A Summer Place 보다 더 멋진 것은 없었다. 학생입장불가 급의 poster도 화려했지만 몇 년 뒤에 취입된 Percy Faith 악단의 영화주제곡이 또한 ‘불후의 명곡’으로 남았고 아직도 그 당시 평화스러웠던 여름을 연상하게끔 한다.
¶ Dog Days afternoon,daydreaming: 와~ 7월도 되기 전에 언제 여름이 이렇게 무르익었나? 그야말로 relentless heat (stress) days after days.. 머리가 조금은 몽~롱~ 해진 상태에서 아하.. 요새가 바로 dog days.. 라는 탄식이 나온다. hot & sultry.. days.. 이것이 바로 dog days가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에다가 Dog Day Afternoon같은 Al Pacino1975년 영화까지 머리에 겹치니까 아주 더 머리가 혼란하기까지 하다. 더운 것은 여름이니까 그런대로 참는다고 하지만 문제는 ‘물’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공짜 물’, 그러니까 비가 안 오는 것이다. 예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backyard의 green field를 상상한 것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Hose water.. 의 무력함을 이렇게 실감하는 나날도 없는가? 암만 암만 홍수가 날 정도로 뿌려도 몇 분이면 땅이 완전히 다시 굳는다. 아.. Mother Nature여.. 오후에 딱 5분만 폭우를 보내 주어도 모든 문제가 일순간에 사라지는데.. 기우제라도 드려야 하는 것인가?
오래~전 오래~ 전.. 직장생활을 할 때를 가끔 기억에 떠올린다. 그때의 여름도 사실 요새와 그렇게 다를 것 없이 무더웠을 터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정 반대였다. 당시 corporate life (a.k.a salaried man)의 혜택.. ‘빵빵’ 사정없이 냉동이 된 건물 안에서 Nine to Five 를 견디고 집에 오면 몸이 녹는데 몇 시간이 걸린다. 한마디로 ‘푸근~’한 집이 그렇게 덥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훗날.. 연숙과 이야기를 하며 느낀 것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던 사람은 내가 요새 느끼는 것과 같이 항상 더웠던 것.. 가정 집에서 암만 에어컨이 나와 보았자 그것은 사실 별 것이 아니었던 것.. 그제야 나는 실감을 한 것이다. 아무리 여름에 78도 에 맞추어진 집이어도 그것은 그렇게 시원한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것을 안 후에는 조금 미안한 심정도 들었다.
¶ Greenfields are gone now, parched by the sun.. Yonsook Trail이라고 이름이 된 backyard의 깊숙한 곳 오솔길.. 초 여름까지 푸른 화초들이 길을 따라 ‘파~랗게’ 도열을 하며 맞아 주었지만 하늘에서 물기가 사라지고 대신 인정사정 없이 작열하는 태양열에 하나 하나씩 마르기 시작하며.. 이 1960년 초 folk classic Greenfields 의 가사 중 Greenfields are gone now parched by the sun.. 이란 구절이 떠오른다. Greenfields.. 어쩌면 그렇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대학생 출신 quartet The Brothers Four의 이 노래는 중학생 때 귀따갑게 듣던 명곡인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quarter이었던 불루벨즈가 멋지게 ‘모창’을 한 기억도 난다. 나중에 가사를 음미해 보니 역시 이것도 ‘가버린 연인’을 그리는 노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때의 Greenfields가 가버린 연인을 따라 모두 황폐해진 것.. 잔잔하지만 격조 있게 은은하게 불린 멋진 4중창의 화음.. 역시 60년대 초만이 가질 수 있었던 멋진 추억이었다.
parched, dried up, Yonsook Trail
Greenfields란 말은 그 이후에도 유행어가 되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하숙생들이 고기와 계란이 없는 순전히 야채 중심의 밥상을 꼬집을 때 하던 말.. 그것도 Greenfields였다. 세상이 많이도 변해서 당시에 야채중심의 식사는 ‘가난한’ 것이었다. 요새는 어떤가.. 돈이 없으면 야채를 많이 먹지 못하는 희한한 세상이 아닌가? 참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것인가..
서울 특별시 종로구 鍾路區 원서동 苑西洞 비원 秘苑의 서쪽 담장을 따라 맑은 시냇물 (당시에는 개천 이라고 불린)을 따라 아늑하게 남북으로 펼쳐진 그 옛날 1950년대의 종로구 원서동,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의 기억 제일 깊숙한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 특히 1954년 경 그 동네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억하며 그릴지도 모른다.
육이오 6.25란 글자가 보이면 원서동에 연관된 추억들이 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나를 깨우는가. 이런 이유로 나의 blog 특히 memoir 에는 이곳의 추억이 이곳 저곳 산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나의 추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것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6.25 동란, 66주년 아침에, 남기려는 것들, 6.25 동란 기록영화의 추억,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하고 기억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원서동 극장, 한성택, 조흔파’ 정도가 keywords가 될 듯한 오늘의 추억은 정말로 아련한 추억들이다. 뒤 늦게 연대를 찾아보니 분명히 1954년 에서 1955년 사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6.25 동란이 일단 끝난 휴전 바로 다음해 쯤이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 전쟁 이후 휴전이 될 무렵까지 우리는 원서동의 아래쪽, 휘문중고교 바로 옆, 동섭이네 집이라고 불리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의 주인이 휴전 이후에 피난에서 돌아왔기에 우리 3식구 (아버지는 전쟁 초에 납북)는 가까운 곳, 아주 작은 ‘무당집’ 단칸 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때의 기억들은 나의 오래 전 blog1에서 이미 회상을 하였다. 그 이후, 우리 세식구는 1954년 초에 이곳, 승철이네 집의 건넌방으로 이사를 왔고 본격적인 ‘재동국민학교 1~2학년’ 시절의 ‘평생 기억’을 만든다.
승철이네 집.. 최승철.. 어찌 잊으랴.. 나보다 2살 밑이었지만 그 나이에 나의 제일 친한 ‘한 집’ 친구가 되었다. 안 방 주인집은 양 부모가 있는 ‘정상적’인 주인이었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그 집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집이라고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비록 큰 집은 아니었어도 승철이네 집에서 보낸 2년 정도는 한마디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집의 위치도 원서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북쪽과 서쪽은 비원의 담으로 완전히 가로막힌 아늑한 곳, 여름에는 비원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잠을 설칠 정도였고, 겨울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청계천으로 흐르는) 에서 썰매를 타는 그곳은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승철이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나이도 비슷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큰 딸 시자누나는 나의 누나와 동갑이었는데,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는지 성이 ‘주’씨여서 원래는 주시자 누나로 통했는데 나중에는 성을 최씨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두 남동생인 승철이와 승관이는 현재 아버지와의 자식인 것이다. 당시에 그런 것이 그렇게 관심은 없었지만 기억에 뚜렷이 남은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 그것도 두 누나들까지 포함 된.. 그런 승철이네 집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승철이 아버지는 경찰출신으로 (해방 전에도 그랬는지는 몰라도) 훤칠한 키의 호남형, 하지만 사나운 사나이 기절도 있었다. 일정한 직장이 없으셔서 거의 집에 계신 것이 특이한 점이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하셔서 놀지는 않으셨다. 항상 무언가 하신 것 같았다. 기계 쪽에 관심과 특기가 있으셨는지, 엔진 같은 것을 집에다가 갖다가 놓으시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얼음을 만드는 냉동기였다. 그것을 가지고 후에는 경기도 연천 인가 하는 곳으로 가셔서 가게를 차리셨다. 물론 아이들은 집에다 두고 부부만 가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온 후의 일이었지만.
구파발의 추억: 가끔 승철이 아빠는 우리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인 경기도 구파발로 놀러 가시기도 했다. 여름 겨울 모두 갔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즐겁고 신기한 추억이 되었다. 구파발.. 어찌 잊으랴.. 그것이 그러니까 1954, 5년 경이었을 것이다. 서울역 염천교 옆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한없이’ 달려서 간 곳.. 구파발, 구파발.. 그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시골’이었다. 시골, 시골,.. 처음으로 ‘쌀나무, 벼’를 보았고, 논을 보았고 ‘진짜 초가집’ 안에 들어가서 자 보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그곳은 아름답기 전에 너무도 가난한 곳이었음을.. 서울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름다운 곳, 진짜 시냇물에서 수영, 미역을 감고, 미꾸라지를 잡고, 차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깜깜한 밤에 술래잡기를 하고, 한없이 많았던 메뚜기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리가 가서 자던 초가집이 승철이 아빠와 어떤 친척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에 ‘희덕이’라는 우리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것이 전부다. 겨울에 놀러 갔을 때는 얼어 붙은 논에서 ‘한 없이 하루 종일’ 썰매를 타는 황홀에 빠지기도 했다. 승철이 아버지, 감사 드립니다. 셋방에 사는 아이까지 데리고 가신 것..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 황홀경의 추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억에 뚜렷한 것 중에, 그곳 (구파발)에서 나올 때 어떤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이 승철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것, 그러니까 그 집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던 것, 그 아내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승철이 아빠에게 매달리던 것,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된 후 그 집을 떠나는데 또다시 그 집 아내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를 쫓아오던 모습.. 어린 나이에도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의 장면이었다. 그것을 만류하고 해결해 주었던 승철이 아빠.. 존경을 받을 만 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쪽도 있다. 다른 기억에, 한 때 어떤 ‘장판지 외판원’을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 한번 장판을 파는 젊은 청년이 왔었는데, 무언가 잘 못 되어서 승철이 아빠가 그 청년을 거의 구타하다시피 해서 쫓아 낸 것이다. 나는 너무나 혼동스러웠던 것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어린 나이에 그것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의 상에 흠이 간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없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까지도 한 것이다.
작가 조흔파: 집에서 북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조금 더 좋은 집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바로 ‘작가 조흔파’ 선생의 집이 있었다. 당시에 솔직히 조흔파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그 집의 둘째 아들 ‘조영환’과 같이 놀았기에 그 집엘 놀러 가며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소설가라는 것, 학생잡지를 보면 그의 이름이 눈에 뜨일 정도였지만 그런 것을 읽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그 집의 큰 아들이 이름, 그러니까 조영환의 형의 이름이 조영수였다. 나중에 휘문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기억이 난다. 조영환은 장난이 조금 심한 애였고 우리들을 조금 괴롭힌 기억도 나는데.. 의문은.. 분명히 나와 같이 재동국민학교에 다녔을 텐데.. 졸업 앨범에 그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졸업하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을 것이다.
그 집에 몇 번 놀러 갔을 때 느낌은..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다른 집이다.. 그러니까.. ‘작가, 문필가 소설가’의 집이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아빠 조흔파 씨는 집에 없어서 못 보았다. 그리고 그 엄마도 못 보았는데.. 그 집 툇마루에서 이상한 것을 본 기억, 바로 수영복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 수영복을 보았다. 그리고 들었던 소문이 있었다. 그 집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고, 후처였다는 사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게다가 그 후처는 당시에 숙명여대 학생이었고 조영환이 엄마는 ‘쫓겨 났다’는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하~ 그 새 엄마는 조흔파씨가 아마도 숙명여대에서 가르친 학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아마도 맞지 않았을까? 그 이후 ‘사라진’ 조영환이네 기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TV가 나오면서 가끔 조흔파씨가 출연하는 game show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또한 알게 된 것은 조흔파씨의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이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김관형, 종맹이 형들: 집 바로 앞, 골목길 건너에 붙어있는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김) 관형이 형 살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은 기억이 안 남) 또 한 집은 ‘원서동 극장’ 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집, 종맹이 형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관형이형, 종맹이 형으로 기억이 나는 두 집이다. 관형이 형, 어린 눈에도 그 형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형이었다. 말도 부드럽고 우리들, 나와 같은 동생뻘 아이들을 잘 돌보아 준 형.. 가끔, 옆집인 종맹이 형네 집에서는 극장처럼 영화를 상영하였다. 아마도 종맹이 형의 아버지가 기록영화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심심하면 여름 밤에 우리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 몇 집을 불러다가 대청 마루에서 영사기를 돌렸다. 극장가는 것 당시에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활동사진’을 집에서 본다는 것은 참 희귀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화’라는 것이 모조리 6.25 전쟁 기록영화였다는 사실..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네 아낙네들인데 그들이 그것에 열광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은 아주 달랐다. 만화를 보아도 전쟁, 군인들에 관한 것만 보는데.. 실제 전쟁 기록 영화를 집에서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완전히 꿈같은 일이었다. 심심치 않게 많이 보았던 6.25 기록영화들.. 군대 사열식하는 것부터 실제 대포를 쏘는 것, 군인들이 쓰러지는 것.. 그것은 당시 여름 밤을 다시 회상할 수 있는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종맹이 형은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관형이 형은 나중에 중학교까지 가서도 멀리서 가끔 본 기억이 난다. 나를 특별히 잘 돌보아 주었다는 나만의 상상인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되었다.
한성택 형.. 집 옆에 흐르는 개천 건너 쪽에 있는 나즈막 한 집들에 ‘한씨 일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나의 다른 기억을 만들어준 성택이 형이 있었다. 그 나이가 얼마 정도 였을까? 아마도 중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집에는 사촌으로 알려진 한성우도 있었는데 그는 나와 동갑으로 재동국민학교도 같이 다니고 졸업도 같은 때 하였다. 성택이 형, 전형적인 ‘형 type’ 이라면 어떨까.. 동생뻘 아이들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조종’을 하는 type, 나와 승철이는 그를 ‘하느님’처럼 따르기도 했지만 내가 훨씬 더 ‘보살핌’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다.. 그 나이에 어떻게 야쿠자도 아니고, 그런 ‘돈 관계’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의 사고방식은 간단했다. 그 형에게 더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내가 받는 용돈을 그에게 바치곤 한 것이다.
덕분에 동네에서 나는 주먹 같은 아이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도 ‘돈의 위력’을 실감하게도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형만 보면 고맙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그 성택이 형의 심정은 어땠을까? 돈을 받으니 좋았을 것이고, 졸졸 따라다니며 ‘숭배’를 하는 꼬마가 있었으니 좋았을지 모른다. 한번은 한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그 형을 따라서 ‘한없이 걸어서’ 썰매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위치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도 삼선교 부근이 아니었나.. 돈화문, 창경원 앞 전차 길을 따라 걸어 간 곳, 눈부신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던 그 추억.. 결국 간 곳에서는 썰매를 살 수가 없었다.
6.25의 기억을 다시 생각하면 100% 생각나는 원서동 어린 시절, 그 중에서도 1954년 무렵의 승철이네 집 주변의 추억들은 나의 6.25에 대한 심각한 역사를 조금은 부드럽게, 포근하게 만든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 인물들.. 지금 다 어떻게 살고들 계신지..
¶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임마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빠가야로‘!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대구더위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내가 고친’ 에어컨 바람이 더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물론 오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 하지만 느낌에 그런 chance는 거의 zero 인가 보다. 아니면 Johnny Rivers 의 60’s classic oldie, Summer Rain을 연상케 하는 그런 추억의 비는.. 어떨까.. 하지만 이것은 거의 꿈같은 이야기다.
1968년 여름의 추억, Summer Rain – Johnny Rivers
오랜만에 그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던 우리 집 두 마리의 ‘재미있는 개’ Tobey & Ozzie, 오늘은 내가 더 쳐지기 전에 용감하게 끌고 동네를 돌았다. 거의 할아버지 나이가 된 우리의 개 Tobey가 언덕을 ‘새로니의 개’ Ozzie를 앞지르며 나를 끌고 올라간다. 얘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 언덕을 나와 걸었기에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공을 던지면 총알처럼 뛰어가는 다리가 긴 ‘젊은’ Ozzie, 2주째 우리 집에 머물며 자기 엄마 ‘새로니‘를 거의 잊은 듯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혼자’ 자야만 하는 그 녀석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이곳을 걸었을 때 내가 열을 받았던 것, TRUMP FOR PRESIDENT,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SIGN이 두 곳에서 나를 자극했던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빠가’ 트럼프의 ‘쌍통’을 연상시킨다. 이 두 집이 바로 우리동네의 idiots, white trash인 셈이다. 이곳 East Cobb county는 물론 very conservative한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잘 사는 Republican white trash’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SIGN을 본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니.. 이건 분명히 내가 over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I CANNOT HELP IT..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덩치 큰, ‘젊은’ 나라는 어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날씨에 더 열을 받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래.. 이래 저래해도..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리라..
¶ 6월 24일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오늘 평일미사를 가면서 6월 24일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 임을 매일 복음묵상 ‘newsletter’에서 보고 알았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사건’으로부터 였다. 바로 이날 6월 24일에 발현을 하신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이 ‘대축일’ 때문에 집에서 쉬던 (놀던) 그 ‘애’들이 본 것이다. 그 당시 이 발현 과정에서 이날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 말의 의미조차 잘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금요일 평일 미사엘 가면 분명히 세례자 성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짧은 강론을 듣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요새 거의 본당신부님 역할을 하시는 방문 신부님 Fr. Joseph, 뜻 밖에도 새로 부임하실 본당 신부님에 관한 얘기를 하며.. 우리의 ‘이해’를 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연은 물론 본당 Holy Family 성당에 7월 초에 새로 부임할 주임신부님이, ‘부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 라는 우리에게는 ‘폭탄’ 같이 느껴지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 방문 신부님의 설명과 ‘양해’는 나도 아는 사실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모든 가톨릭 ‘종파’들이 모두 다른 Rite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보편 된’ 것이 Latin Rite, 이곳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 하지만 다른 극소수의 종파에서는 성공회같이 결혼을 한다고.. 듣던 얘기다. 이번의 새로 부임할 신부님은 Melkite 에 속한 신부님이라서 신부님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그래도.. 하필이면.. 왜 그런 ‘소수 종파’의 신부님을 ‘주임신부’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본당 Holy Family는 지역적으로도 보수적이고 Irish Catholic의 전통이 농후한 곳인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가족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제관에서 생활을 하며 가족들과 같이 미사에 들어 온다는 광경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서는 구역문제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 같은 미국본당에 부인, 가족을 동반한 주임신부가 온다는 사실.. 참.. 오래 살다 보니..
¶ 성모님, 좀 봐주세요.. 근래 우리부부와 자주 보게 되고, 예전 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C 자매님,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member를 중심으로 새로 생긴 Guitar Friends 그룹에도 참여 열심히 guitar도 연습하고,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에 보게 된 멀게도 느껴지고 가깝게도 느껴지는 자매님, stress받는 것이 제일 싫어서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하며 조용히 살지만 할 것은 다 하며 열심히 사는 자매님.. 왜 하느님은 어떻게 그런 병고를 주셨을까. 병고라면 이미 오래 전에 가족을 통해서 겪을 만큼 겪지 않았을까, 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아픔이 아물어가며 어떻게 다시 이런 고통을 보냈을까? 오늘 아침 미사가 끝나며 어제 doctor visit의 결과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우리 부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하며, 어쩔 수가 없어진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기도를 더 열심해 해야겠군요’ 정도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무엇일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성모님, 좀 봐주세요…
¶ 육이오 6.25, 66년: 66년, 허~ 66년이라.. 여기다 6 하나를 덧붙이면 666가 되는구나. ‘악+악+악’, triple ‘악’ 인가? 그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단어가 육이오, 유기오, 융요 (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그래,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단어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 것이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제는 ‘사학자’들도 총대를 멜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역사 교과서는 현직 대통령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는데.. 우리나라의 ‘병신 사학자님’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아직도 빨갱이 운동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육이오의 노래
요사이 재동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를 읽고 읽고 읽으며.. 다시 느끼는 것, 나도 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니 육이오가 없었으면, 아니 김일성 개XX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의 인생은 아마도 김정훈 부제의 ‘사직동 김판사댁‘ 못지않게 ‘원서동 이정모 교수댁‘ 이란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컸을 지 누가 알랴? 어떻게 육이오의 몇 개월 사이에 한 가정, 한 가족의 운명이 그렇게 뒤집어 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보다 더 ‘처참한’ 인생의 역전을 겪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반드시 ‘김일성’을 찾아내리라.. 그 개XX를 찾아 내리라.. 아마도 그 아들 김정일 개XX도 같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찾기가 힘들 것이 분명히 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2주일 대출기한이 수개월을 지나가면서 이 책을 우선 반납하여야 한다는 stress를 느끼며 이제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저곳을 훑어보고, 비교적 가볍게 접한 이 책에서 나의 재동 齋洞 동창, 김정훈 부제에 대해서 알게 되고 느낀 것을 정리한다.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사실은 정훈이가 어떻게 그렇게 일찍 타계 他界 를 했던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의 집안, 가족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신앙, 성소를 가지게 되었는지..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20대를 훨씬 넘은 시절부터 쓰여진 일기 형식이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이 정성스럽게 담겨진 ‘문학적 냄새’가 나는 글로써, 꼼꼼히 ‘정독’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강 책을 훑으며 느꼈던 감정은 의외로 반갑지 않는 나의 반응이었다. “좋은 집안, 머리가 좋은 덕으로 선택된 선망의 대상으로 어려움과 고민 같은 것 별로 없이 유럽 유학 중, 좋아하는 등산을 하다가 조난사고로 운명”.. 비록 너무나 이른 인생의 비극적인 마감이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이력서적인 눈에 쉽게 뜨이는 사실들 만으로는 정훈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김수환 추기경의 서문’이 실릴 정도로 큰 화제나 영원히 남을 만한 책으로의 가치가 될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물론 이 책을 계속 읽으며 이것은 나의 ‘너무나 성급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 김정훈 유고집의 제목인데.. 과연 이것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 궁금증은 19 쪽을 보면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이 대목은 김정훈의 신학교 영적 지도 신부인 Stefan Hofer신부의 추모의 글에 있는데 그 신부님은 김정훈이 조난을 당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에 세르레스(Serles)에 등반하였던 적도 있었다. (중략) 베텔풀프(Bettel Wurf) 정상 정복자가 된 우리는 그 곳의 방명록에 우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베드로(김정훈)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 말로 무엇인가 썼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묻자 그는 독일어로 그 밑에 주를 달았다.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김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단순한 산에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깊은 종교적 느낌 속에서 산을 찾고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회고’를 보며 생각한다. 정훈이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등반을 했지만 단순히 산이 좋아서, 산이 그곳이 보이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통한 등반을 더 사랑하였던 듯 싶다. 나도 대학시절 참 산을 많이 찾아 다녔지만.. 어떨까, 종교적인 체험을 하였던 기억이 거의 없음에 정훈이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생체험은 더욱 돋보인다.
¶ 정훈이의 가족관계는 어떤가? 이것은 사실 기본적인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재동 동창생이지만 ‘공부를 잘 해서 경기중학교에 갔다’는 사실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재동학교 졸업 후 중학교 시절, 파고다공원 수영장에서 그가 아이(아마도 동생)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남자 동생은 있었을 듯 하다. 이 책에 가족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간단히 이곳 저곳에 나오기에 한 눈에, 명확하게 알기는 힘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묘사한 가정은 204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직동 김판사네 가정도 한국에서는 신앙으로 가꾸어진 훌륭한 이상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사리를 스스로 옳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인생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그런데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손보기가 어려워져 버린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중략) 곧 아버님 돌아가신 지 10년째가 된다. 벌써 그렇게. 강산이 정말로 크게 변했다. 아버지의 그 보화를 캐내어 나눠 줘야 할 큰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 이 순간 확연해진다. (1975년 3월 10일)
이 글은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친구 클레멘스의 가정을 부러워하는 글 뒤에 나온 것이다. 그 친구의 가정이 부러운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고 건강한 아이들, 높은 교육을 받은 것, 3남 2녀라는 것.. 이런 것과 더불어 잘 화합된 부모의 교육, 그것도 참된 신앙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 아마도 김정훈의 가정도 이에 뒤지지 않았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10년 전에 돌아가신 ‘김판사’ 아버님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에 가정은 ‘난맥상’이 드러났다는 판단이다. 그러니까.. 1965년 경에 아버님이 타계를 하셨으니까, 정훈이 경기고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혹시 그런 충격이 정훈이에게 깊은 성소의 뜻을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신앙심이 깊고, 가정을 사랑하는 아버님을 가진 정훈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로써는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천주교 가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천주교인이었을 정훈이네 가정, 혹시 대대로 내려온 ‘박해 받았던 가문’은 아니었을까? ‘비중에 컸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이곳 저곳에 나온다.
나가이 다카시의 ‘만리무영’에서 여러 대목을 읽었는데 느끼는 점이 많다. 우선 그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원만하고, 노력을 기막히게 많이 한 신앙인인 것을 알게 해 준다. 내게 특히 좋게 여겨지는 것은 그 글의 분위기와 저자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신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러하고, 어투며 그 상황까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까. 공감 가는 점이 정말 많다. 자식에 대한 배려, 아내 생각 등도 아버지 경우와 같다. 동시에 그 사람의 아들들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이나 나에게 대해 갖는 기대와 주시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불쌍하신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자녀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에 젖으셨을까? 얼마나 우심 憂心 이 크셨을까? (1972년 6월 11일)
위의 일기에서, 아버지가 권해준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저자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좋은 점’들을 열거한다. 여기서 보아도 그 아버지는 정말로 존경 받을 만한 가장이었음이 짐작이 된다. 일찍 운명을 하신 아버지, 아마도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 듯하다. 장남일 것 같은 정훈이, 이때부터 아마도 가장으로써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 20대를 꽉 차게 살아오던 정훈이의 모습, 언행, 성품 등은 어땠을까? 이것은 친구들이 본 것이 아마도 제일 정확한 것이 아닐까? 일찍 타계한 친구를 보내며 친구 대표 ‘기헌’의 ‘조사’에 잘 묘사되어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바랐던 대로, 평소에 너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기대했던 대로, 너의 훌륭한 재능과 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더욱 닦아지고 완성되어 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서른 해를 넘기고 가다니.. (중략)
너는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어. 너의 신심 생활의 진보는 언제나 앞서 있었고, 너의 정신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예리하게 우리를 압도했었지.
책 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너는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러면서도 네 마음은 언제나 뜨거운 인정이 넘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낀 너였는지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잘 해 주었어. 특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던 너였지. 너의 특징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던 너.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나누고 싶어 너는 애썼지. (중략) 그러기에 친구이면서도 우리는 너를 존경하였고, 우리를 대신해서 큰 일을 해 주리라 믿었다. (중략) 착하고 아름답게 산 너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백 배의 보상을 틀림없이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너와 영결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1977년 6월 7일, 정훈이를 보내며.. 친구대표 기헌이가)
비록 고인을 기리는 조사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정훈이의 이목구비, 면모, 표정, 성격 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다 보인다. 나로써는 이것이 ‘성인’ 정훈이를 상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기대를 받았던 ‘장래가 촉망되던 큰 재목’ 이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 가톨릭 신부와 여성, 신부 지망생 그러니까 신학생이었던 김정훈은 어떤 여성관, 여성 경험을 가졌을까..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멋진 남자’에게 여성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나와 동갑(돼지띠) 이기에 1970년대 중반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가는 것이다. 다만 나의 background와 그 이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나와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한다.
우선 절대자 하느님, 예수님을 자연스레 알고 믿는 그, 완벽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유복한 가정.. 등을 생각하면 정말 ‘자격을 갖춘 멋진 여성’이 그의 주변이 있었을 듯 하다. 다만 이 유고집에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J 라는 여성만이 눈에 뜨인다. 과연 J란 여성은 누구일까? 거의 한 chapter “J와 인생” 이 J 라는 여성에 관한 일기인 것을 보면 ‘신부와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에서 가장 심각한 인물이었음 에는 틀림이 없다.
J에 대한 나이, 출신배경, 알게 된 경위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집 식구들에게는 알려진 사람, 공개된 데이트였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부를 지망하는 신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들일까? 결혼을 전제로 할 수가 없는 100% 순수한 지적인 만남이었을까? 계속되는 깊어지는 만남에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자신의 결심도 보인다.
J와의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 하고, 내렸으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
1. 실험적인 사귐은 있을 수 없다.
2.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하게 됨.
3. 그녀를 위해서도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나의 결론은 지어졌는데, 실행은 빠를수록 좋다.
4. 언젠가 끝에 가선 내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내 햄, 내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니 주님, 빛과 길을 주소서. 이럴 때 주님을 찾는다고 나무라지 마소서.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조직적’으로 차근차근하게 문제의 본질과 방향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문제의 심각함과, 어려움을 알고 그는 결국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며 돌아본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절대로 혼자였다. 절대자가 절대로 나에게는 없었다. 혼자였던 나는 모든 것을 ‘나침반’이 없이 헤매며 허우적거린 세월들이었다. 나와 정훈이의 20대 중반은 이렇게 하늘과 땅만큼 멀리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은총을 일찍 받았던’ 영혼이었다.
곧바로 그는 J에게 쓴 ‘헤어짐의 편지’를 쓴다. ;7월 23일자 일기에 편지가 실려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편지는 일기인가 아니면 실제로 J에게 보내진 편지인가 하는 것이다. 이별의 편지, 참 balance와 courtesy, essence가 모두 있는 편지가 아닐까?
J씨 귀하,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있어야 할 순간이고 또 그 때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이며 글 같은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글로 써야 제 뜻을 그래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기존의 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기가 뜻을 정하고 온 가능성을 모으고 있는 터에 이와 상치되는 사상 (事象)을 지닌다는 것은 일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가 확실한데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저로써 더 이상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J씨를 크게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쓰라림만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이것을 알면서도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린 거지요.
지금 이 글월을 쓰면서 저는 이 글의 의미가 엄청난 데 스스로 놀랍니다. 이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결단일 뿐 아니라 저로서는 제 삶의 의미를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이 일방적이고, 제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고 또 회피가 아니냐고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일이 그런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냐고 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또 그런 만큼 얼마나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를 J씨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몇 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만나고, 또 한 번 내린 결정은 단호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씨는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 심정도 몹시 단호함으로 차 있습니다. 아니, 단호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소도 아시고 또 9월에 학관에도 나가겠지만 제게 소식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 말했다고 한 것처럼 저도 J씨가 그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그 동안 얘기했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 김정훈
이 책은 그 동안의 우정에 대한 저의 기념의 선물입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별편지를 보면, 그의 확고한 결심을 J에게 전하며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이 정도만 아주 단호한 결심이 아니었을까? 이런 것으로 보아서 J라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정훈이를 만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아주 나이에 비해서 성숙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9월에 학관에도 나간’다는 구절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도 같은 ‘학관’에 다녔던 것은 아닐까? 학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대강 그 당시에는 ‘학원’이라는 말을 썼는데.. 학관은 종류가 다른 것이었을까? 마지막 구절에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이것으로 J라는 여성도 무슨 뚜렷한 목표를 향한 ‘지식층’ 여성이었을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 ‘편지 일기’ 이후에도 그는 사실 J를 잊은 것이 아닌 것 같다. 계속 J를 만나며 그녀에 대한 글이 나오니까.. 아마도 서로가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한’, ‘진정한 친구’로써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8월 21일의 일기는 J에 대한 끈질긴 미련과 자신의 필연적인 결심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J를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 금요일과 월요일에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면서도 보고 싶다.
그냥 당겨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왠가? 누가 무엇이라 한다 해도 이런 마음은 참 순수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현상이다.
간단한 기록으로 끝나려 했는데 또 길어진다. 내심에 잠겨 있는 것이 들고 일어나는 까닭이다. 파헤쳐 본다는 것도 힘에 겨웁다. 문제는 결단만이 해결의 관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결단을 내렸으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도 포기하고, J와 같은 사람과의 사귐도 금기(禁忌)인 신부가 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부행(神父行)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일 터인데 과연 그런가? 어째서 내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사제에다 걸었는가? 사제가 무엇인가? 그 본질을 분명히 보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비교적 분명하게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신부에 대한 정의, 그 신원(身元)은? 고전적 정의로서는 내게 그 의미가 약하다.
위의 일기로 나는 그가 아직 신부가 되려는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을 안다. 하지만 계속 내면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적으로 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이성, 그것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찌 간단히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김정훈의 ‘결단의 힘’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인 여성에 대한 사랑, 관심, 끌림 등과 신부가 되려는 성소의식이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몇 개월로 1973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김정훈, 드디어 무서운 결단을 내리며 편지를 쓴다. 신부가 된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J씨 귀하.
이 시각을 위해 사귐을 해 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는 초조하리만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뜻밖의 이 글월을 받고 놀라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을 지고(至高)로 모시고 있고, 그 동안 J씨나 저나 거짓 한 점 없이 서로 성실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벌써 짐작을 하실지 모르나 정말 그렇습니다. 결단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저는 신부행(神父行)을 결단했습니다. 설령 각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저의 그 선택에는 후회나 변함이 없습니다. J씨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J씨가 말한 뜻대로 그 동안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피치 못할 불성실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제가 J씨를 아끼는 그만큼 이 문제는 절실합니다. 이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어떤 식으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항상 의식한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껏 회피하려 했으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단호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가 쉬웠고, J씨는 어렵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 사귐이 그렇게 순수했던 것처럼 이 시작도 서로에게 순수해야 하고, 전적인 동의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J씨는 J씨의 길을 힘차고 명랑하게 가십시오. 저도 제 길을 용기 있게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상이 제가 쓰고 싶은 전부입니다. 사실 J씨는 이 글의 진의(眞意)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집 전화번호도 알고 또 찾을 수도 있지만 저를 찾지 마십시오. 이별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저도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
1973년 12월 26일 김정훈
정중하고 진심이 우러나오는 글이지만, ‘영원히’ 남녀로써 헤어져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미련을 0%도 남기지 않고 그는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라는 작별인사로 끝을 내는 그.. 얼마나 괴로웠을 결단이었을까? 그 나이에 나라면 ‘절대로 절대로’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1974년 봄 무렵 유럽 유학을 떠나는 그는 아마도 그 때서야 J씨를 조금은 더 쉽게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남녀관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Part 2로 계속 됨)
¶ 5월 13일.. 2016년 5월 13일 Friday.. 아하 ‘또’ Friday the 13th 인가.. 하였지만 곧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금요일 13일은 맞았지만 문제는 5월 13일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맞다 바로 Fatima.. Fatima.. Portugal, 1917년 5월 13일인 것이다. ‘묵주의 성모님’으로 일컬어지는 파티마 성모님 정확히 99년 전 5월 13일에 3명의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셨다. 그리고 확고한 역사로도 자리를 잡았다. 당시 Lisbon의 유력 정부기관지였던 the Seculo에 보도가 되었을 정도로 큰 ‘사건’에 속했다.
기록(그러니까 역사)에 근거한 영화나 책들이 많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흥행성’을 의식한 영화들은 너무나 ‘색깔’들이 끼어있다. 근래에 발견한 ‘고서’ 중에 The True Story of Fatima 가 있는데 이 책은 주로 목격자 중 제일 오래 생존했던 Lucia수녀님의 증언에 의한 것이고 발현 당시 다른 일반인들의 증언에 의한 교회의 치밀한 발현승인 과정을 거친 것이라 거의 정확한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인 발현이었지만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일까? 발현 성모님의 모든 예언들이 역사적으로 다 실현이 된 것을 보면 ‘등골이 써늘해 짐’을 느낄 때도 있다. 일관되게 비교적 간단한 요구사항을 요구하시는 성모님의 message들, 과연 쉽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 message 의 중심에서 초 현대의 세속세계는 내가 보아도 ‘너무나 너무나’ 멀어져 있고 무섭게 멀어져 간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성모님은 희망의 상징이다. 희망은 원하면 언제나 자비와 함께 우리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가?
¶ 마리에타 2구역 점심봉사: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구역미사에 이어서 곧바로 구역이 담당하는 ‘의무적’인 순교자 천주교회 본당 점심봉사 날이 다가왔다. 이것이 주는 stress로 구역장을 못하겠다는 의견도 많이 있을 정도로 사실 이것은 큰 일이다. 200여 개 이상의 serving을 예상하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 한마디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서 각가지 knowhow가 축적이 되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공식’같은 것도 있음 직하다.
우리는 advanced age라는 이유로 봉사의 의무에서 excuse가 되고 있었지만(우리가 희망하기에), 이번에는 조금 사태가 다르게 되었다. 구역이 둘로 나뉘고 우리가 속한 ‘반’은 숫자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특히 형제님의 숫자가 안심할 정도가 못되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이번에는 봉사하기로 하고 준비하는 날, 점심 봉사하는 날 full-time으로 일을 하였다. 솔직히, 기분 좋게 일을 해서 그런지 일은 비록 많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 동안 못 했던 미안한 심정도 어느 정도 위안을 받게 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지만 ‘호사다마 好事多魔’라고 하던가.. 모든 것이 끝나고 하얀풍차에 몇 명이 모여서 뒷풀이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즐겁지 않은 뉴스, persona-non-grata 를 접하면서 조금은 흥이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고 main event자체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이 나서, 이틀간의 service는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감사합니다, 예수님! 메주고리예: 매달 2일에 메주고리예에서 visionary Mirjana에게 ‘공개적으로 publicly’ 발현하시는 성모님, 이제는 게으르지만 않으면 Youtube를 통해서 주로 Italian pilgrim들과 함께하는 group이 찍은 video를 볼 수 있게 되었다. 5월 달은 초부터 무언가 바빠서 깜빡 하고 이것을 check하는 것을 잊었다. 이제야 보니.. 무언가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렸다. 바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하는 우리말 노래가 아니었던가. 비록 영어 accent가 섞였지만 아주 정확한 우리말 노래, 그것도 통역을 전담하는 형제가 유창하게도 불렀다. 어떻게 이렇게 우리말 노래가 불려지도록 주선이 되었을까? 추측에 대한민국도 ‘메주고리예 신심’이 상당해서 이곳 메주고리예에서도 인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완전한 나의 상상,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은 상당히 높을 듯하다.
성모님 발현 – 메주고리예 2016년 5월 2일
¶ The Seekers:I’ll Never Find Another You 1967, 우연히 우연히 이 노래 video를 보게 되었다. 요새 비교적 잊고 살았단 나의 지난날의 추억이 나를 아득~하게 만든다. 나에게도 그런 꿈같던 시절이 있었지.. 하는 조금은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나만의 추억들.. 추억의 얼굴들.. 이런 것들이 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것, 특히 ‘유행가’와 연관이 되어서, 뇌세포 깊숙한 곳에서 꺼떡없이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옛 유행가를 그렇게 아직도 좋아하나 보다.
오늘 본 것은 Australian vocal group, The Seekers의 경쾌한 country style ballad ‘I’ll Never Find Another You‘. 가사야 큰 의미가 없지만 이 노래의 lead singer의 목소리가 이 노래의 tone과 style을 그렇게 classic으로 만들었나 보다. Judith Durham, 바로 이 그룹의 간판 격 ‘청순한 tone’.. 몇 년 뒤에 미국의 The Carpenters의 Karen Carpenter 가 바로 이런 독특한 음성의 소유자였고 역시 그녀의 모든 노래들, 주옥같이 역사에 남는다.
이 모두 1960년대 말 경이었다. 그 시절, 그 시절, 어떻게 time travel을 꿈 속에서라도 할 수 있을까? The Seekers의 경우, 그 lead singer, Judith Durham의 얼굴과 자태가 내가 한때 ‘좋아했던’ 어떤 아가씨와 그렇게 닮았다. 키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그 때의 그 노래가 그래서 그렇게 그리운가 보다.
¶ 또다른 ‘젊은‘ 엄마의장례미사: 오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뜻밖의, 급작스러운’ 연도와 장례미사가 있었다. 모든 죽음이 어떤 면에서는 뜻밖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의 죽음은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느낌’을 주는 Camilla 자매님의 죽음이었다. 지난 3월 사순절 막바지에 오랜 투병을 끝내고 선종을 한 다른 ‘젊은 엄마’ 보나 자매님의 기억이 생생한 이 마당에 또 한 명 자매님의 선종은 예기치 않았던 글자 그대로 ‘급작스런’ 죽음인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 같았다.
한창나이 쉰 을 갓 넘은 ‘젊은 엄마’의 죽음.. 불과 3일 전, Mother’s Day 하루 전에 급작스러운 엄마의 타계..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로써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학생나이의 두 따님의 심정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고향’같을 수도 있는(견진성사를 이곳에서 받았다기 에) 순교자 성당에서, ‘해맑은’ 한 토마스 신부님의 ‘젊지 않게 깊이 있고, 자상한’ 고별강론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유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리라..
비교적 앞 자리에 앉아서 고별미사 내내 나는 고인의 사진을 응시하며 생각을 한다. 60/70년대 통기타 folk singer였던 박인희씨를 연상시키는 그런 ‘청초’한 모습, 저렇게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떠나는 것.. 본인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가족들과 지인들의 놀라움과 슬픔을 한동안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우리 부부가 그런 처지를 당하면.. 상상을 한다. 그런 제로가 아닌 가능성을 매 순간 생각하며 살면 비록 피곤은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사랑스런 말이나 표정’으로 서로를 대할 것 같지 않을까?
고인의 큰 따님(순교자 성당 종교학교 교사였다고 함)이 사실 불과 일 주일 전 마지막 고인을 보았을 때 별로 좋은 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고 후회를 했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아마도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난 날 다음날이 Mother’s Day임을 생각할 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비록 평소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교우 자매의 고별식이었지만 뜻 밖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레지오 화요일’ 오후가 되었고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가족들끼리 틈이 날 때마다 ‘We love you‘라는 message를 교환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 돼지띠프란체스카: 장례미사가 끝나고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 ‘본가 설렁탕’이란 순교자 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뜻 밖에도 20년 지기 知己, 최형 (a.k.a.진희 아빠)의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님를 만나게 되어서 합석을 하게 되었다. 참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때도 오는가.. 최형은 비록 ‘전통적’인 가톨릭 교우이지만 Sunday Catholic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비해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는 매주 화요일 레지오 주회합 우리 바로 옆 방에서 모이는 다른 레지오의 부단장을 하는 비교적 활동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최형의 집에서 모임이 있을 때 가끔 볼 정도로 잘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주일 마다 얼굴을 보게 되기도 하고 꾸리아 월례회의에서도 우리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등 가까워진 느낌까지 들게 되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은.. 이 자매님, 비록 ‘누님’ 격으로 통했지만 나와 띠가 같은 ‘돼지띠’였다. 최소한 나와 동갑인 셈이 아닌가? 깎듯이 누님으로 대하던 것이 조금은 어색해지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식사까지 하게 되니 이제는 동갑친구 같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돼지띠를 만나거나 보게 되면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정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2년 전까지만 해도 ‘전요셉’ 형제가 돼지띠 동갑으로 사귀게 되어서 나를 기쁘게 했지만 사귀자 마자 ‘영구귀국’을 해 버려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차에 돼지띠 ‘누님’이 나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친구누님으로 대할 것인가 돼지띠 동갑친구로 대할 것인가.. 조금은 혼란스럽기까지 하지만 이날 동석으로 식사를 하면서 ‘말이 통하고, 재미있는 자매’임을 느끼고 안심을 하였다. 동생 최형과 같이 서울 덕수국민학교 출신 임도 알게 되었는데, 나와 정확히 같은 해에 같은 서울 하늘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만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으니..
이날 같이 합석을 한 ‘자매님’들은 같은 레지오 단원들인데 우연히 이들 group이 몇 년 전 최형과 같이 기타 강습을 받았던 것을 알았는데, 다시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니 나보고 가르쳐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글쎄..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잘 모를 텐데, 꼭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으로 짐작을 하였다. 우선 생각을 해 보자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의 guitar솜씨로 남을 가르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나의 기타 솜씨는 완전히 ‘등 넘어 배운’ 정도인데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무언가 배우며 살고 싶은 건강하고 멋진 자매님들이 레지오에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고 기쁘기까지 했던 명랑했던 장례미사 후의 식사시간이 되었다.
¶ Morning routine gone: 4월보다 더 싸늘한 5월의 어떤 날들을 기억한다. 오늘 2016년 5월 5일이 바로 그런 ‘싸늘한 날’ 이 되었다. 그런 싸늘한 아침에 ‘비상용’ 이불을 더 덮어서 잠은 포근했지만 온 몸은 완전히 권투시합 15 round에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떤다. 아프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특히 손, 팔, 허리, 이빨 등등이 더 아픈 듯 느껴졌다. 어제 갑자기 ‘남용’한1 나의 근육들이 치열하게 데모를 하는 것인가? 곧바로.. 아하~ 나의 몸이 나에게 ‘오늘 아침 morning routine은 없는 것으로’ 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아~ 미안합니다..
오늘 아침의 ‘regular routine’은 9 AM daily mass와 breakfast@SonataCafe, 이후 곧바로 YMCA workout 바로 그것들인데 이 세가지가 순식간에 없어진 것이다. 이런 routine들, 특히 ‘영육간’에 중요한 routine들, 전부터 둘이서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다. 얼마 더 남은 인생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절대로 sprinter가 아니고 marathoner라는 생각으로 살자는 것이다. serious Moderation, compromise..하는 기분이 아니면 절대로 한 달도 못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그런 덕분에 ‘좋은 routine’들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최소한 5년 이상 꾸준히 지켜지는 routine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서 지금은 생활, 몸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daily mass를 빠진 것은 아무래도 미안합니다… 라는 말이 귀속에서 맴돈다. ‘성체,성혈’을 놓친다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서 생사 生死같은 큰 차이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인자하신 우리 천상의 어머니께서.. 그래 무리하지 마라.. 오래 오래 뛰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하고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실 것 같다. OK, 간바로, 성모님!
¶ 어린이 날: 5월 5일하니까, 직감적으로 친근한 5/5의 연속.. 아하.. 어린 시절에 제일 좋았던 일년의 하루, 우리들의 날 어린이날이구나! 하지만 지금도 대한민국에 5월 5일이 어린이 날인지는 잘 모른다. 이것도,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의 유행으로, ‘일본강점기의 잔재’라고 하루아침에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조선 어린이를 사랑했다던’ 방정환 선생님, 이 날을 제정하면서 왜 왜 하필 보기 싫은 일본의 어린이 날인 5월 5일을 그대로 답습을 했을까? 다른 의문점은 해방 이후에 일본이라는 생각만 해도 잠을 못 잘 정도로 반일 증오의 표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이 날을 그대로 놔 두었을까?
상관없다. 우리들 이 어린이날 덕분에 멀쩡하게 한창 화창했던 봄날에 학교공부 완전히 쉬고 하루 종일 선생님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놀았으니까.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물에 빠지면 우리들부터 먼저 구해준다는 등등 참 기분 좋았던 하루를 보냈다. 당시에 불렀던 ‘어린이날의 노래’,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고 가사도 100% 완전히 외운다.
시대적으로 찌들고, 세계에서 모든 ‘좋은 통계’ 에서 거의 바닥에 머물던 조국이었지만, 우리들 눈에 그런 것 크게 상관이 없이 그날 하루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골목에서 만세를 부르며 달리고 숨고 웃고 떠들어댔다. 그렇다.. 바로 그 때의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었다. 다른 것 없었다. 그 동안 강산이 다섯 번 이상이나 변했어도 그 당시의 추억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 Cinco de Mayo: 싱코-드-마요, 이곳에 오래 살면서 주변국들에 대한 것들 듣고 배우고 알게 된 지도 꽤 세월이 지났다. 특히 남쪽에 사는 멕시코는 사실 북쪽의 캐나다 보다 더 정이 가고 친근한 느낌으로 관심도 많이 가는 편이다. 우선 역사가 그렇고 종교가 그렇다. Guadalupe 성모님은 물론이고 다수가 가톨릭인 순진한 사람들, 비록 잔인하고 부패한 인간들도 ‘닥상’으로 널린 나라지만 그래도 정이 간다.
오늘은 5월 5일, 바로 멕시코 독립기념일(9월 16일) 다음으로 중요한 명절인 Cinco de Mayo, 글자 그대로 ‘5월5일’이다. 혹시 여기도, 어린이날? 물론 아니고.. 이날은 역사적인 날로 1862년 5월 5일, 멕시코 군대가 프랑스 ‘침략군’을 ‘프에블라 전투, the Battle of Puebla‘ 에서 최악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역전승을 한 ‘전승기념일 戰勝紀念日’이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이 ‘막강, 기계화 된’ 일본군대를 섬멸한 정도가 될까?
이 전투에서 만약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면 미국 역사도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의미가 있었던 전투여서 아주 흥미롭다. 간단히 말하면, 침공을 했던 프랑스군 (나폴레옹 3세의 군대)이 멕시코를 제압했었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 중에는 미국의 ‘남부 정권 Confederates’를 돕는 일이었고, 그 남북전쟁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날 승리의 의미는 미래적, 국제적인 것이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멕시코는 더욱 확고해졌고, 링컨이 승리한 미국은 초강대국가 superpower로 운명적인 발걸음을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역사는 재미있고도 심각하다.
popup project, 보기흉한 outdoor deck을 고치는 일, 보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
5월 1일의 친구들이여 용현아, 창희야.. 잘들 있었는가? 다시 5월 1일이 일년을 지나서 우리를 이렇게 ‘허공’에서 만나게 하는가? 허공에서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는가? 생각과 의식적 역학으로 우리는 일년 동안 계속 만날 수 있으니까. 이래서 일년의 흐름을 가늠하며.. 자네들의 지난 지난 일년, 옛 친구의 정을 이런 찬란한 어머님의 계절에 다시 한번 추억하는 것.. 나쁘지 않네..
코흘리개 원서동 개천시절부터 연인들까지 합세한 대학시절들까지.. 우리의 시대, 역사 속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사진 같은 그런 추억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제는 다시 이 세상의 친구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나가는 생각이 들 때는 하찮은 ‘느끼고 보여야만 하는’ 이 세상이 지나면 다른 그림들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지난 일년 어디서라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냈으리라 믿고 싶고, 우리 집도 하느님의 보호로 비교적 건강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 하고 싶다. 너희들은 분명히 출가한 자식들이 있으리라 추측을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두 single을 고수하는 이상한 풍조에 휩쓸려 편안한 ‘혼자의 인생’을 고집하고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것만은 조금 progressive한 쪽인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기들의 인생은 이미 우리에게서 떠난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것인지 그것은 공식이 없지 않은가?
70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자네들은 나머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사는가? 나는 아직도 뚜렷한 계획이 없지만 조만간 어떤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예전에 그렸던 노후인생의 모습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다른 세계관에 의한 것들이 우리의 앞에 나타나는구나. 아마도 그것이 진정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아무리 ‘나의’ 세계관이 엄청 변했어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역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일 것이다. 내년 2017년 5월 1일에 다시 만나자! Adios Amigo!
4월의 마지막 주에 접어들고, 작년 4월 ‘배 베로니카’ 자매님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며 겪었던 바쁜 4월에 비해서, 올해 ‘우리의 4월’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다고 서로의 의견을 모은다. 또한, 올 3월 말 보나 자매님과 영원한 작별을 한 후, 슬프고 바쁘고 정신이 없었던 느낌의 3월에 비해서 갑자기 무슨 휴가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아주 한가한 그런 4월이 거의 가고 있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의 전원 목가적인 박목월 시인의, 낮고 파아란 하늘과 수줍은 꽃들이 핀 파~란 청라 언덕과 이름 없는 항구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지만 실제로 그런 아련~한 꿈같은 모습은 나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4월의 노래’를 회상하며 이제는 타계하신 가톨릭 음악가, 나의 중앙고 1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 김순애 교수 작곡의 4월의 노래가 그렇게 맴돌았을 것이다.
올해의 point는 가사 중에 나오는 ‘이름 없는 항구’.. 어찌 그렇게 그 구절이 나를 헤매게 하는가? 암만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아마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분명히 계획 없이 훌쩍 떠난 나그네의 넋두리였을 것이다. 나도 그런 ‘부러운’ 나그네가 되고 싶다면.. 그렇다. 이제 그런 나이도 아니고, 그런 처지도 아니다. 꿈을 깨고 잠을 깨자.. 다시 ‘나를 필요로 하는 항구’로 배를 저어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4월을 보낸다.
4.19 에 대한 것, 물론 나의 기억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당한 부분은 news media에 의한 것들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당시 서울의 일간지가 제일 그렇고 나머지 것 중에는 미국의 LIFE magazine도 한 몫 낀다. 특히 당시의 ‘최첨단’ 사진기자, 기술을 자랑하던 잡지라서 그 역사적 가치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 화보 이외에도 사설, 논설 등도 수준급이었는데, 다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금은 left-leaning (좌향적) 한 쪽이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든다. 4.19 학생 혁명이 난 후 처음으로 기사와 화보를 다룬 것이 5월 9일자였고 거기에는 아주 비중 있는 ‘논설, editorial’이 실렸다. 제목이 바로 The Student Phenomenon, 학생현상(?).. 그 전문을 여기에 발췌하였다.
논설의 주제는 바로 ‘학생’들이다. 한국의 학생을 중심으로 세계도처의 학생들,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하였다. 이 논설을 쓰게 된 동기는 ‘분명히’ 한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곧바로 터키에서 4.19 와 비슷한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의 친구’ 멘데레스 수상이 실각을 하였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난처한 사태가 아닐 수가 없었다. 두 나라가 거의 같은 미국의 ‘맹방’, 제1의 적인 소련의 공산당과 총칼로 맞선 나라가 아닌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보니 나라 안에 조금 잡음이 있어도 외교적으로 무마할 정도였다. 4.19 혁명 당시도 미국은 한국 학생의 ‘유혈사태 희생자’정도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에 일이라도 이 사태를 이용해서 김일성 개xx가 제2의 6.25 라도 꿈을 꾼다면 그것이 진짜 미국의 악몽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맹방의 지도자, 사실 또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터키 또한 비슷한 상황이고 보니 한쪽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 다른 쪽은 나토 NATO로 묶여 있는 상황의 미국, 참 입장이 어려웠을 듯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자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태는 흘러갔고 미국의 입장 또한 큰 문제없이 해결 된 셈이다.
이 LIFE magazine의 논설은 다음 사실을 주목하였다.
이 두 나라의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지독하게 심각한 미국 소련간의 냉전상태 라는 사실. 이 편이 아니면 저 편, 중간이 없었던 그런 심각한 냉전 상태에서 ‘약소국’들은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 남용이 허용되었고, 그들이 독재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을 견디지 못한 첫 그룹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미국의 경우,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운동권’ 형성이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의 혁명이 ‘완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문제는 아마도 ‘노예제도의 전통’을 고수하는 주들과 연방정부간의 마찰, 충돌이다.
이어서 논설은 유럽의 사례를 들며, 1848년 Hungary 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예로 든다. 근래의 예로써 1956년 역시 Hungary의 소련침공을 유발시킨 ‘자유운동’을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운동들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지만, 극단적인 예외는 세계 제1차 대전을 유발시킨 ‘사라예보사건’ 이었다.
논설은 다시 LIFE magazine의 progressive value를 다음과 같은 ‘미국 흑인차별’의 사건들에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South (남북전쟁의 남쪽 측)에서 흑인 학생들이 제도적인 흑백차별에 항의해서 식당 같은 곳에서 백인들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데모’를 벌리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남측의 웃기는 전통’에 대항하는 이런 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신세대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덕이 아닐까.
동정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논설은, 학생들이 정부의 극단적인 탄압적인 정책에 반발을 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정치깡패, 정치경찰들이 얼마나 웃길 정도로 비행을 저질렀던가? 그저 휴전선 넘어 김일성 개xx가 ‘무서워서’ 침묵만 지키던 일반 국민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그런 목불인견 적인 꼴들을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런 백주대로 강도 같은 정책을 싫어한 것은 한국 대학생만이 아니었음을 주지하는 논설은 당시의 국무장관 ‘허터 Herter‘와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맹방이고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탄압적인 정책이 안보를 위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국무장관 허터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대한 것도 거의 같은 ‘미소 냉전’의 산물이었다. 공산당을 잡으려는 부패정권에 대항한 학생들의 데모와 항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미국의 기본 자세는 이곳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미의 좌익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쿠바 카스트로 를 왜 미국에 반대하는가 항의를 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스트로 Fidel Castro 가 ‘공약’을 어기고 ‘자유를 억압’ 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것의 밑에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논설은 한국과 터키의 학생들을 지지하는 결론을 내린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불만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의 credo가 Don’t tread on me! (밟지 마!)라는 사실임을 주지해야 한다.
논설을 4.19혁명이 난지 66년이 지난 뒤에 읽으니 격세지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적으로 가치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느낌이니까. 기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논설이 조금 과소평가한 낙관적인 분석은: ‘미국 학생들은 절대적 자유가 보장된 덕분에 조용할 것이다’ 라는 것.. 이 논설이 쓰여진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서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반정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겪게 되니까.. 월남전의 정당성에 대한 불만에 의한 것, 이것은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가 ‘보장, 허용’ 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irony가 아닐 수가 없다.
There is a fascinating pattern emerging in Latin America, Korea and now Turkey. What is taking place in these widely separated lands is an outburst of resentment by university students against governments which – partly as a result of the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 have become tyrannical. And what the students are proving – which free men must of course welcome – is that young, spirited and determined people can still make tyrants tremble, and even totter.
Political revolt by university students is a well-known story abroad, thought not common to our own land. This may be a reflection on the seriousness and maturity o f U.S. students but, whatever the cause, other students around the world are politically minded by traditional and are accepted as a dynamic political force.
Perhaps the contrast exists because our own revolution was so complete – in establishing the basic freedoms of conscience, press and speech for once and all – that there has been no need to question what it has settled. The greatest challenge was met in our War Between the States which settled forever that no man may be another’s master.
In Europe, where things have been different, it was a young poet, Sándor Petöfi, who in 1848 set off the revolution in Hungary against the tyranny of the Habsburgs, only to be crushed later by the Russian czar. And it was the students of Budapest again in 1956, acting in the name of Petöfi, who overthrew – if only briefly – the czar’s successors. Serious, impassioned Italian students were the backbone of Garibaldi’s Risorgimento. In France, it was students who in 1897 rioted in defense of Captain Dreyfuss. Students were the nihilists, the anarchists, the Marxists of Russia. What all these movements had in common was idealism backed up by willingness to fight. Sometimes this violence was bent to good ends and sometimes ill. It was, we must remember, a Bosnian student named Princip who at Sarajevo lit the fuse which doomed more than eight million men.
Most of these revolts of the young have been beneficial. We are seeing something of that sort now in our own country. By their sit-ins Negro students in the South are demonstrating the silliness of a system which denies the right of humans to eat alongside one another. They are getting an impressive amount of support from which students outside the South. They are getting some, too, from which students in the South, who find they cannot rationalize or defend these paradoxes. The spread of education in the South has produced a force to make men think.
The students who have overthrown the government of Syngman Rhee in Korea have obviously been stirred to the depths by oppressive practices. Rhee’s motives were understandable in a land which has been horribly devastated by Communist incursions and must still live beneath the gun of possible new attacks. This is true in Turkey, which lies immediately beneath the guns of the vast Soviet Union and is subjected to continuous and insidious subversion. Yet, when all is said and one, the fear of losing freedom can never be made an excuse for suppressing freedom – certainly not as a permanent policy.
The demonstrating students who are insisting on freedom have an ally in Secretary of State Herter. In his denunciations of the killings of South Africa and Korea, he has made clear that he will not allow the common interests of defense to put the U.S. in the position of endorsing practices which offend our basic principles. The students have another wise friend in President Eisenhower. On his Latin American visit Chilean students asked him trenchant questions about our alleged hostility to Fidel Castro. The President’s written answer to them left little more to be said: Castro has betrayed “the ideals of freedom of expression,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and the right freely to choose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course, that is also what Rhee did, and what Menderes is doing in Turkey. Students are letting them know that the time is later than they thought – and are right to do so. And we are right to endorse their legitimate grievances and their right to have them redressed. That is what the world would expect – and is entitled to expect – of a nation born in revolution and whose credo was, “Don’t tread on me!”.
아래의 사진을 보라.. LIFE에 실린 내 또래 아이들의 모습들.. 국민학생, 중학생이 섞인 이 데모는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송요찬 장군휘하의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내 중심을 장악했을 때 ‘군인 아저씨 우리를 쏘지 마세요’ 라고 다시 학생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외쳤다.
당시 계엄군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며 자기 국민을 ‘보호’하였다. 1년 뒤 5.16으로 ‘그 고마운 군인아저씨’ 들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진을 유심히 보며.. 서울 시청을 뒤로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는 아이들.. 바로 나를 보는 듯 했다. 꾀죄죄한 구제품 옷, 신발, 교복을 ‘걸치고’ 골목 뒤에서 놀다가 나온 모습들.. 바로 나의 모습, 이 사진의 ‘아이’들 다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되었을 것인데 그 날 ‘형님 학생’들에게 이끌려 나온 사연이나 기억하고 있을는지..
아침에 달력을 보니 4월 19일.. 화요일, 물론 4.19라는 숫자는 56년이나 지났어도 어제처럼 느껴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만큼 비록 세월의 깊이에 맞게 뇌의 깊숙한 곳에 잠겨있어도 아주 ‘큰’ 세포에 간직된 것이라 그럴 것이다. 그리고 화요일.. 이었다. 1960년의 4월 19일도.. 99% 화요일이었다는 기억. 5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을 함은, 그 세월이 그렇게 역사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세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일제 36년, 유럽의 100년 전쟁.. 등에서 느꼈던 그 햇수는 너무도 길었던 것이지만 내가 이런 56년을 어제처럼 기억하게 살면서 느낀 것은 너무나도 짧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것이다.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당시의 데모 열기 함성과 카빈 소총 소리, 어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수 많은 군중들.. 그렇게 찬란한 4월의 계절은 소음과 정적이 교차하는 순간들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새카만 교복의 물결, 심지어 대학생 형님들까지도..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뛰고, 트럭을 타고, 소방차를 타고 서울의 중심가를 돌고 도망가고 숨고 쓰러지던 그 때.. 모습들.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공격을 받던 날 우리 중학교 1년생의 혼란한 심정.. 누가 누구를 쫓아가고 쫓겨가던가.. 누가 우리의 역적이던가? 우리들은 그저 놀란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들려오던 요란한 카빈 소총 소리들.. 종로 경찰서 지붕에 설치된 만화에서만 보던 ‘기관총’들.. 곧 이어 아스팔트 길에 우람한 바퀴자국을 내며 웅장하게 들어오던 탱크의 무리들.. 4월 달.. 4월 달 ,1960년의 찬란한 꽃이 만발하던 4월 달이었다.
쓰러진 형님, 누나들.. 그렇게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던 그들.. 지금은 다 어디에 가셨는가? 그들은 과연 그들이 싸우던 목적을 이루며 살았던가? 혹시 그들도 나중에는 ‘역적’들과 같은 무리를 닮아가지는 않았던가?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이승만, 이기붕, 이강석, 프란체스카, 장면, 윤보선, 허정, 그리고 장도영, 박정희..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의 열차에 남았던 역사 속의 그들.. 모두 어디에 있는가? 젊으셨던 우리 어머니, 그래도 이승만의 잘못을 지적하시던 지성을 가지고 침묵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우리는 아직도 그 말의 뜻을 새기고 감사하며 산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그것에서 배우고 최소한 되풀이 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기에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2016년 4월 19일, 싸늘한 아침에 머리를 맴도는 넋두리, 이렇게 정리를 하지만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정상이다.
내가 예전에 알았고 사귀었던 그 모두들 어디로 갔나?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며 특히 그들이 완전히 나에게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놀란다. ‘모두들 다 어디로 갔나?’ 하는 생각..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나에게 보이지 않게 된 것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들.. 그들이 나의 옆에 없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험이다. 이것은 Charles Dickens의 holiday classic, A Christmas Carol 에서 Scrooge가 Spirit of Christmas Past를 따라서 자기의 과거로 돌아갔을 때의 경험이라고나 할까?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사실 모두들 그런 경험을 조금씩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은 역사 고금을 통해서 짧지 않은 과거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라면 다들 겪을 듯 싶지만 나는 더 예민하게 느끼는 모양인데 이런 경험과 생각들이 때로는 아주 괴롭기까지 하다.
이런 생각과 비슷한 ‘내용,가사’를 가진 folk song이 있다. 그것이 바로 Pete Seeger의 1960년대 초 hit song인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이란 노래다. 처음에 2절이던 곡이 나중에 3절이 더해져서 무려 5절이나 되는 긴 노래이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한 ‘구성’이다. 처음에 flowers로 시작되어 마지막도 flowers로 끝난다. 그 동안 이 flowers가 주인을 옮기는 과정이 5절에 걸쳐 나온다. 처음에 flowers가 young girls로, young girls가 husband(man)로, husband(man)이 soldiers로, soldiers가 grave yard로, grave yard가 결국 flower로 돌아온다는.. 불교의 윤회설을 연상시키는, 인생의 여정을 생각하게도 만드는 곡으로 1960년대에는 월남전과 어울려 반전 反戰 곡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던 불후의 classic이 되었다.
내가 이 곡을 알게 된 때도 바로 1960년대의 war protest song 시절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pop chart에 올려놓은 Kingston Trio의 경쾌한 곡으로 들었지만 나중에 이 곡의 원조인 Pete Seeger의 banjo 반주로 된 것을 듣고 역시 그의 것이 이 곡의 진정한 정신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곡은 수 많은 국제적인 가수들이 불렀고 record로 취입을 했다. 그 중에도 Johnny Rivers와 Searchers 것은 완전히 Go go style로서 옆에 있으면 춤이라도 추어야 할 듯하게 경쾌하기만 하다. 나머지 것들은 그 가수 나름대로 ‘해석’을 잘 한 듯해서 모두 천천히 감상을 하면 이 곡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을 뽑으라면.. 글쎄 아마도 60년대 대표적 folk, rock stars 였던, Kingston Trio와 Johnny Rivers 가 아닐까..
달력에서 오늘이 2016년 1월 25일임을 보면서 다시 생각에 잠긴다. 36 주년 결혼 기념일.. 어제 아이들과 Marlow’s Tavern에서 나의 ‘늦은 생일’ brunch를 먹으며 이 ‘긴 세월 36년‘이 또 언급되었다. ‘무척 오래 같이 살았다’라는 딸들의 이야기.. 별로 생각 없이 36년을 거론하곤 했지만 듣고 보니 과연 ‘우아.. 같이 참 오래 살았다…‘ 라는 탄성이 낮게 나온다. 총각 때의 자유연애 시절이 끝나는 시점인 결혼은 사실 조금은 자유가 없어지는 시점이기도 해서 결혼 전에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막상 결혼 후에는 그런 생각이 스스럼없이 사라졌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이여.. 1980년 1월 말 honeymoon 제주도 서귀포에서
36년이란 숫자의 세월은 공교롭게도 일제시대 36년 이란 말이 연상이 된다. 그 옛날 일제시대 36년 어쩌구.. 했을 때 참 오랫동안 ‘쪽바리 치하’에서 고생했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바로 그런 긴 세월의 36년이었다.
얼마 전에 25주년 결혼 은혼식Silver Anniversary 축하를 친지들과 조촐히 했던 기억인데.. 그것이 벌써 11년 전이 되었고, 이제는 숫제 50주년 금혼식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결혼 당시 흔히 듣는 주례님의 말씀 중에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하는 말로 오래 오래 같이 살라는 뜻의 주례사가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미사여구 美辭麗句 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시간과 세월에 밀리듯이 이렇게 36년을 맞게 되니, 가급적 50주년도 기념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생긴다.
지금의 세상이 하도 요상하게 돌아가다 보니.. 예전에는 당연시 되던 ‘백년 해로’하던 미풍양속이 흡사 ‘희귀동물’ 취급으로 축하를 요란하게 받게 되고, 심지어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부부가 남달리 돋보일 정도로 한마디로 ‘해괴’한 추세를 느끼며.. 이런 ‘반역사적’인 것들이 과연 어디까지 ‘퇴보’할 것인가 한숨만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부부.. 36년을 맞으며 ‘자연법 인간역사‘에 일조를 했다고 자부하고 싶다.
36년 전의 세상은.. 그 동안 강산이 3번 이상 변했다고 하면 짐작이 갈까? 잊고 살던 결혼 당시의 세상모습들이 떠오르고, 우리가 변한 모습에 또 한번 놀라고.. 이런 모든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크게 놀랄 것 하나도 없다. Soviet를 위시한 살기등등했던 세계 공산당들이 물러간 자리에 목을 자르는 살인강도들이 종교의 이름을 팔며 설쳐대는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변했다. 자연법에 따라 우리의 자식들이 세상의 빛을 보며 커가고 그에 맞갖게 부모님 세대들이 황혼의 빛으로 사라지셨다. 그 자리로 우리가 서서히 사라지는 중.. 이것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지극히 자연적이고 순리적인 것이다. 아하~~ 이제서야 이런 변화들이 왜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이유가 어설프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이렇게 큰 사고 없이 36년간 가정을 유지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We are all alone.. Rita Coolidge의 이 oldie는 결혼 전후로 꽤나 듣고 따라 불렀던 추억의 곡이다. 이 곡은 총각시절에는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낄 때, 결혼 후에도 둘이서 외로움을 느낄 때 듣곤 했다.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서정적인 시를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사실 어떤 ‘유고집 遺稿集’ 책의 제목이다. 언뜻 들으면 “산에 가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하느님을 생각하는 나” 정도로 연상이 되기도 하지만 과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주일 전에 아틀란타 도라빌 소재 한인 천주교회, 순교자 성당의 ‘성물방 책 코너 book corner’엘 들렸다가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것이다. 전혀 계획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연이 정말 우연일 chance는 과연 얼마나 될까?
평소에 보통 나는 성물방엘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예외적으로 10시 반 미사에 맞추어 성당 주차장 교통정리 봉사를 하게 되어서 아침 8시 30분 미사에 참례했어야 했고 12시 45분에 예정된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문에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성물방에 있는 book corner에 들린 것이고 그곳에서 이 책을 잠깐 보고 대출을 받게 받게 되었다.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 유고집 저자의 이름, 김정훈, 김정훈 베드로 부제 副祭.. 나의 거의 60년 된 깊숙한 곳 뇌세포에서 이 오래된 이름을 찾아 내었다.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동창이었다. 이 책을 대출 받으며 곧바로 나는 옆에 서있던 연숙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이 책의 제목을 알아본 것이다. 1990년 쯤 아틀란타에 이사 와서 처음 살던 Norcross의 직장 바로 근처에 있던 Four Seasons Apartment.. 우리 살던 아파트 건물 아래 쪽에 한국 상사직원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두 딸이 곧바로 우리 애들과 학교를 같이 가게 되었고 알고 보니 그 집 엄마가 나의 중앙고 동창 박우윤의 여동생이었다. 그 집에 책이 많이 있어서 연숙이 가끔 빌려보곤 했는데.. 그 당시 연숙이 그 책을 보고 ‘나와 비슷한 나이로 일찍 타계한 아까운 젊은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까물거리는 기억.. 그 당시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김정훈’이란 나와 동갑인 신부의 이름이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책은 곧바로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연숙은 그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이번에 다시 나의 ‘손에 들어온’ 이 책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재동 동창생 김정훈을 다시 발견하게 될 기회라는 ‘사명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되었다. 김정훈, 김정훈 부제.. 1960년 재동국민학교 졸업, 1966년 경기중고교 졸업..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인스부르크 대학교 유학, 부제 서품, 1977년 6월 2일 예기치 않았던 등산길에서 조난 사.. 김수환 추기경까지 참석예정이었던 사제 서품을 바로 코앞에 두고 선종.. 흡사 작은 ‘개인 서사시’ 같은 느낌.. 흠~ 30세에 선종..이란 말이 나의 코를 찡~~하게 만든다. 어찌 채 날개도 못 펴고 그렇게 갔단 말인가?
내가 아는 김정훈은 사실 단편적인 평범한 오래 된 동창의 기억 정도다. 나와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이라는 정도지만 이 ‘친구’는 조금 더 기억이 나는 것이.. 6학년 때 ‘아마도’ 전학을 왔던 것 같다. 학년이 시작되고 중간에 들어온 case였던가? 당시 우리 반은 6학년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애들이 몰려있었는데.. 당시 담임 박양신 선생님 왈: ‘김정훈은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말로 소개를 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이 애는 기기 막히게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말이 별로 없었고.. 그러니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다고 할까? 그것이 전부였다. 말썽을 피우지 않으니 크게 기억할 사건이 없는 것이다. 우리 반에는 당시 ‘경기중 지망’ 수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집안들이 떠들썩하던 치맛바람이 아니면 아이들이 그다지 겸손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 김정훈은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경기중학교에 간 것이다. 그런 사실만 나중에 알았고 곧 잊었는데.. 중학교 당시 나는 이 친구를 서울 낙원동 파고다 공원 (일명 탑골공원) 수영장 앞에서 ‘멀리서’ 보았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들어가던 모양.. 그 이후로 나는 김정훈을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다시 이렇게 불현듯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죽은 모습’으로…
연숙이 처음 이 책을 대하면서 아주 인상적이었던지 나에게 몇 번 언급을 하긴 했지만, 저자 김정훈이 나의 재동학교 동창인 김정훈이라는 100% 확신도 없었고 신부지망생이었다는 말도 나에게는 가슴 가까이 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만큼 성소 聖召 란 말의 느낌도 나는 피하고 싶었던 ‘마음과 가슴이 황폐하던’ 기나긴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주 아주 달랐다. 두말없이 그 책을 ‘2주 대출’을 받아왔고 관심 있게 이리저리 요모조모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김정훈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의 버릇인 ‘난독’으로 거의 한번은 읽은 듯하고 이제는 조금은 체계적으로 읽어볼 까.. 현재의 느낌은 김정훈의 30세가 되어가던 그 당시 그의 생각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너무나 애와 같은 생각으로 살던 나 자신을 보았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 하나다. 아무래도 하느님을 이미 찾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세를 나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참 너무나 차이가 나는 30세까지의 우리 둘의 인생이었다.
내일 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새로니의 33번째 생일이다. 그 옛날, 한때 뻑적지근했던 아이들의 생일이 이제는 어쩌면 그렇게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는가..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거의 신비에 가깝다. 세월의 횡포인가 마술인가, 나이를 먹는 것이 그렇게도 좋았는지 싱글벙글 생일 잔치를 받던 아이들, 20대에 이르러 한결같이 시들해진 표정들로 변했고 30대에 이르러 이제는 숫제 거의 관심도 없다.
출산 5일 전, 신정 미사 후에 박재승 부부, 김원백 부부와.. 콜럼버스 한인성당에서.. 1983년 1월 1일: 2명 가족으로 마지막 모습
우리세대는 가난하고 찌들은 전통인지 생일날에는 그저 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을 먹던 것이 전부였고 더 나아가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께도 감사를 드리던 겸손한 전통이었는데, 그런 소박한 것들이 지금은 아주 신선하고 그립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들이 이제는 세계 보편적인지 서구적인지는 잘 몰라도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앵무새처럼 ‘Happy Birthday to You..’ 를 따라 부르며 자기가 100% 주인공인 된 조금은 ‘오만한’ 생일을 맞는다. 이것이 요새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생일은 100% 자기의 날인 것이다.
벌써 4년이나 된 나의 blog에서 당시를 피상적으로, 감상적으로 회상을 해 보았지만, 오늘은 ‘4년 동안 더 배운’ 것으로 1983년 1월 5일.. 을 회상해 본다. 그 날은.. 우리가 만든 첫 생일이었다. 지금은 반드시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begotten, not made..], 신비롭기만 한 새 생명, 그것도 ‘우리가 만든’ 생명이 세상의 빛을 본 그날이었다. 이런 표현은 사실 신앙의 눈이 뜬 지금에서야 차원이 높게 표현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도 과연 그랬을까? 우리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던 한 생명의 실존적 의미를 그 당시에 거의 실감을 못하며.. 그저 ‘한 인생의 자취’를 역사에 남기는 의무 정도로 생각하며 자질구레한 출산, 유아 쪽에 모든 신경과 노력이 쏟아지기 시작하던 겨울답지 않게 가랑비가 내리던Columbus, Ohio의 1983년 1월 5일.. 이제는 조금은 더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태어날 당시 새로니는 참 많은 주위의 축복을 받았기에 그 애는 ‘잘 클 것’이라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대로 ‘자식은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뼈저리기 절감을 할 정도로 놀라는 순간들도 많았다. 한 마디로.. 저 애가 과연 우리의 자식인가.. 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는 세월을 거치며 지금은 체념하는 심정이 되었고.. 아하.. 이것이 순리적인 인생의 법칙이로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것과 더불어, 나의 자식들은 ‘내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라는 말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었다. 고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우리가 ‘만든다는’ 것이 한마디로 어불성설 語不成說 인 것이다.
‘남아도는 풍부한 cash’가 없던 우리 집, 편안한 도움을 줄 수 없어서 거의 모든 것들을 자력으로 공부하고, 난관을 헤쳐나간 우리 큰 딸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런 사실이 우리들이 생각한 ‘간접적인 효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큰 걱정하지 않고 이 ‘애’를 두고 ‘보이는 세상’을 떠나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색다른 선물인가?
1월 3일 모두에게 편한 날을 잡아서 다시 한번 ‘미역국’을 나누며 33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나누며 또 한번 가족의 생일을 축하한다. 이제는 ‘완전한 노처녀’가 되었다고 우리는 푸념하지만 주위 ‘선배’들의 말처럼 요새는 옛날 같은 노처녀는 아니라고 하니.. 조금은 덜 신경이 쓰일 정도다. 요새 ‘아이’들.. 그야말로 self-sufficient generation, 부족한 것이 없으니 ‘남편의 도움’이 크게 절실하지 않은 모양이다. ‘할 것 다하고’ 생각하겠다는 태도에 우리도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서 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남은 인생은 그렇게 짧지도 않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다는 사실만 하루속히 깨닫는 순간이 오기만 바라고 있다.
Hold on Tight to Your Dreams – ELO – 1980년대 초 oldie
연말이라 또 그런 것일까? 아니다.. 나는 이런 참을 수 없는 가슴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뼈 저린 아픔과 그에 수반되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을 때가 적지 않다. 물론 눈물을 쏟아내면 이상하게 시원함이 따른다. 하지만 아련한 아픔은 잔잔하게 남는다. 엄마와 가족들을 그리는 원초적, 생물적인 본능일까.. 아니다 그보다는 후회와 안타까움으로부터 나오는 참회의 눈물임이 분명하다. 곁들여.. 나의 아련한 옛날 옛적, 이제는 분명히 70년에 가까워지는 길어지기만 한 나의 인생역마차, 역정, 누나와의 운명적인 이별의 인생.. 이런 것들이 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듯 하고, 나는 ‘불행한 인간’이라는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에 젖는다.
비록 근래에 나는 다시 찾은 신앙의 도움으로 가정과 나의 주위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제 정신으로 돌아오고, 하느님의 세계관에 의한 인간과 인생의 근본적인 위치를 알았다고는 하지만, 나의 옛적부터 쌓인 그리움의 기억들은 ‘조금도’ 지울 수가 없다. 아니 지워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이 나인 것을 어찌하랴? 하지만 나는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그리움의 노예가 되기는 싫다. 새로 만난, 찾은 세계관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그리움, 그 속에서 포근한 安住感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포근한 엄마의 자상한 ‘경우야~ 걱정 마’ 하는 말씀이 듣고 싶다.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나에게 현재 없다. 엄마의 그런 따뜻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위로의 말씀을 나는 이제는 들을 수가 없다. 내가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나의 다른 어머니 성모님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면서 그런 ‘무조건적 사랑’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은 한다. 우리 쓸쓸한 가족 3명이 살던 시절을 그린다. 나를 그렇게 보금자리 같은 곳으로 느끼며 자라게 해 주셨던 나의 어머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나는 따뜻한 곳에서 이렇게 달콤하고 포근한 추억들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것을 나는 비록 감상적이긴 하지만 나의 보물로 간직하며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느낌을 남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지만 그것이 쉬울까? 요새 우리부부가 돌아다니며 노력하고 있는 봉사활동이 그런 것에 속할까? 얼마나 우리는 그런 포근한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일까? 어둡게 살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기분을 알 듯하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그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남은 삶을 사는 것이 제일 보람된 방법일까? 묵주기도 속에 그것의 해답이 있을까? 새해를 맞이하며 계속 기도를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