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의 추억(1): 졸업 앨범

 

연고전 Classic

연고전 Classic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둘려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을 안고 푸르고 맑은 정기 하늘까지 뻗치는
연세 숲에 우뚝 솟은 학문의 전당. 아~ 우리들 불멸의
우리들 영원한 진리의 궁전이다 자유의 봉화대다.
다함 없는 진리의 샘 여기서 솟고 불멸의 자유의 불
여기서 탄다.

우리들은 자랑에 찬 연세 아들딸. 슬기 덕성
억센 몸과 의지로 열성 진실 몸과 맘을 기울여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 승리와 영광으로
길이 다한다. 찬란한 우리 이상 밝은 누~릴 이룬다.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너무 너무 오랜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앨범을 보며 교가 연세의 노래를 듣는다. 얼마나 오랜 만인지는 정확히 그 햇수를 모른다. 다만 1971년 2월 졸업 후에 처음으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물론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은 보았을 것이지만 느낌 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10여 년 동안 가끔이라도 즐겨 본 졸업 앨범은 거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의 것이었고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앨범에는 손이 가지를 않았다.

어떻게 나는 이렇게 대학시절의 추억과 그 이전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게도 다를까?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그 나이의 추억은 그 이전의 추억과 근본적으로 깊이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심하게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지만 순진한 추억과 더 성숙하지만 조금은 덜 순진했던 시절의 추억, 그런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더 복잡해진 대학시절의 추억을 글로 간단히 표현하기도 그 이전에 비해서 더 힘들었고,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준비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전의 졸업앨범에 비해서 대학의 것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는 제일 큰 이유는 대부분 ‘생소한’ 모습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앨범의 주인공들은 같은 학과가 아니면 사실상 전혀 모르는 ‘동문’ 인 것이다. 같은 학과라도 재학생과 복학생(민바리 vs. 군바리 라고 불렀다) 으로 갈라지고 거기다 나이차이까지 있다. 물론 여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래서 대학 앨범을 자주 안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특히 학교 내에서 활동을 안 하거나 하면 다른 과의 동문들은 이름도 모르고 졸업하게 된다. 입학 동기들의 얼굴은 교양학부의 과정에서 조금 익히고 나머지들은 채플 시간(연세대는 개신교 재단의 학교), 그리고 과외활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후회스럽지만 나는 연세대학 시절,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을 하나도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학생회나 과외 서클(그때는 동아리라는 말조차 없었다) 같은 것들이다. 한때 전통 있는 교내 사진(동호회) 서클인 연영회 의 가입 모임에 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전혀 나가지 못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일초도 주저 없이’ 그런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부분 대학시절의 ‘멋과 보람’을 학교 밖에서 찾으려 했고, 또한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결혼 후에 ‘아내’ 연숙이 학교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교내 활동의 멋과 보람 같은 것도 충분히 실감 하게 되기도 했지만, 재학 당시 나는 그런 교내 활동은 그저 고리타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 졸업앨범을 다시 보면서 그 오랜 세월 잊었거나 몰랐던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정말 우연히 이 재동국민학교 동창을 이번 앨범에서 보게 되었다. 일부러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신문영은 나의 지나간 재동국민학교의 추억 blog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던 바 있었고, 그 후에 또 우연히 googling으로 다시 이 친구이름이 연세춘추(연세대 교내신문)와 연관됨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재학 당시 연세춘추 교내 신문에 관련된 과외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문과대학생들이 하는데 어떻게 상과대학 생인 그가 그곳에 관련에 되었을까? 연대 입학 후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사실 이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외모가 완전히 ‘현대식’이었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고수한 것이다. 아마도 최현배 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남과 조금 다르고, 앞서가는 연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이 좋았다. 연세대 다닐 당시 (아마도 도서관이 아니면, 학생회관에서) 잠깐 신문영의 얼굴과 완전히 닮은 사람을 보았었는데, 이제야 100% 그의 존재가 이 졸업앨범을 통해서 확인이 된 것이다. 상경대학의 상학과를 다녔고, 연세춘추에 관련된 사진에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1971년 졸업이었으니까 이 친구도 일년 재수를 했거나 휴학 같은 것을 했던 모양이다. 이제 유일한 의문은, 어떤 중,고등학교를 다녔나 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꽤 많은 중앙고 동창도 이곳에서 처음이나,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분 재수 입학을 해서 보통보다 1년이 늦게 졸업을 하게 되는 듯 싶었다. 나처럼 1년을 휴학을 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재수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 중에 경영학과의 이수열과 박종섭이 있다. 이수열은 나의 중앙고 3학년에 대한 blog에 이미 회고한 바가 있다. 졸업식 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어서 사진도 남아있다. 이수열은 중앙고 3학년 때, 이과(理科)로 분반이 되어서 대입준비를 했는데, 어떻게 상경대로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박종섭은 중앙고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그러니까 역시 이과였는데, 어떻게 이 친구도 상경계열로 가게 되었는지? 특히 박종섭은 국민학교 때부터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학교, 중앙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그것도 졸업동기.. 이 정도면 참 우연치고는 대단하지 않을까? 그것에 비해서 우리는 한번도 친구가 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참 대단한 인연이다. 박종섭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크게 성공한 동창, 동문이 되었다. 나중에 현대 반도체(Hynix) 의 사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는지.. 확실치 않다. 그 이외에도 상학과 권세용, 정외과 구만환, 지질학과 윤병훈 등이 졸업앨범에서 반갑게 보이는데, 이들 역시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다. 기계과의 김영철.. 중앙고 3학년 ‘반창’인데, 사실 연세대 재학 시 그를 본 기억이 거의 나지를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친구도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대성공’을 한 친구로, 동국제강의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중앙고 1년 후배들, 내가 1년을 휴학을 한 바람에 ‘동급생’이 된 친구들이다. 전기과 박창희, 김태일, 기계과 양규식 등… 박창희는 나의 죽마고우로써 후배라는 생각보다는 ‘불알친구’ 라는 생각뿐이다. 김태일, 재학 시 같은 클럽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양규식, 재동국민학교도 1년 후배인 활발한 친구, 역시 재학 시 학생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학훈단(ROTC, 일명 바보티씨)을 거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오래 전 시카고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1976년 쯤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들으니 LA로 이사를 갔고, 지금도 거기서 ‘매일’ 동창들과 골프를 즐긴다고..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상경대 상학과 김상우..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금새 알아 보았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는 중앙중학교를 나와 같이 다닌 김시영 이었다.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안 바뀌었다. 중앙중학교 3학년 때 나의 다른 친구 이경증과 단짝이던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친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졸업앨범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연세대 시절 사실 그를 캠퍼스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시영이 김상우로 이름이 바뀌었던 친구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

건축과의 장학근씨.. 64학번이라고 하니까 나의 2년 정도 연배인 셈이다.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곳 아틀란타에 왔을 때, 이곳 연세대 동문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부인 장(피)영자 동문도 66학번 연세대 기정대 출신으로 나와 사실 입학 동기인 셈이었다. 학번이 거의 비슷한 연대 선배가 이곳에 같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조금 가까이 지내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선배의 얼굴을 이번에 졸업앨범 건축과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장 선배는 이곳의 ‘유지’ 격에 속해서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한인사회의 이곳 저곳에 많이 관여가 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식, 장례식 같은 데서 꼭 이 장 선배를 만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오래 전, 이곳의 다른 ‘유지’ 격이었던 김예순씨 (치과의사)의 장례식에서는 ‘울면서’ 조사를 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연세대 동문 (박만용씨)의 장례식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전공(건축과)도 충실히 살려서 이곳 주택에 관련된 연방정부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기계과 민옥기..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나의 졸업앨범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Ohio State 다닐 때 그를 잠깐 보았다. 역시 같은 기계과에 있었다. 학교 기숙사 버스에서 가끔 보기도 하고 같은 공대라서 얼굴이 익었고, 연세대 피크닉에서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동문이라서 웬만하면 조금 친해질 수도 있으련만.. 전혀 mutual chemistry가 없었을까.. 느낌이 그랬다.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표정’ 일 수도 있고, 좋게 말하면, 그저 사람을 피하는 듯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와 연세대 졸업동기라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같은 기계과 출신 나의 친구 김호룡에게 물으니 ‘검정고시 파‘ 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연세대 재학 당시에도 그렇게 ‘행동’을 했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김호룡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뒤 늦게 그 소식을 확인하려고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본적이 있었다. 둘 다 연세대 기계과 교수단에 있어서 그리 한 것인데, 나를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의 그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들어맞았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앨범, 1971년

 

Mary Hopkin – Those Were The Days – 1968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British Oldie, Beatles 의 Paul McCartney가 제작한 이곡은 역시 비틀즈의 Apple Record label 판매로  Mary Hopkin 의 debut곡이 되었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까지 올랐다. 그 당시를 생각케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Mary Hopkin – Goodbye – 1969

다음 해, 역시 비틀즈의 Paul McCartney 곡으로 Mary Hopkin의 두 번째 hit song이 되었다. 그 후에 다른 hit song 도 있었으나 우리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생인 그녀는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세계적 fashion model이었던 영국의 TwiggyBeatles에게 소개 했다고 한다.

 

 

윤태석, 박종원 그리고 비행기

윤태석,  중앙고 57회 앨범에서 1966
윤태석, 중앙고 57회 앨범에서 1966

윤태석, 박종원, 그리고 비행기.. 이들은 오래 전 한때 나의 친구들이었다. 처음 만난 친구가 윤태석.. 중앙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1962년이었다. 교실에서 윤태석은 나의 바로 뒤에 그의 짝꿍 정만준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때 윤태석은 이미 우주과학과 비행기 광이었다. 그 나이에 그런 것들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것들을 알고, 좋아하는 정도가 완전히 프로 급이었다.

 윤태석과 박종원은 그 당시 이미 서로 친한 친구로써 모형 비행기를 같이 날리고 있었지만 내가 윤태석을 통해서 박종원과 만나게 된 것은 대학 1학년에 된 후였다. 윤태석은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비행기와 더불어 우주과학에도 심취해 있었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부지런히 총천연색으로 인쇄된 미국 우주개발에 대한 화보들을 교실의 뒤에다 붙여놓곤 했다. 그 당시 반 친구들, 좋건 싫건 간에 그런 사진들을 보면서 소련과 미국의 우주경쟁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요새 같으면 물론 칼라 텔레비전 현장 중계로 보겠지만 그 당시는 사실 흑백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Soviet Union)은 1957년 10월 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프트닉(Sputnik)에 이어서 역시 사상 최초로 cosmonaut 유리 가가린 (Yuri Gagarin)의 지구궤도 완전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미국이 또 한발 늦은 것이다. 한 달 후에 미국도 알란 쉐퍼드, astronaut Alan Shepard의 우주비행에 성공을 했지만 그것은 완전 지구궤도비행이 아니고 비교적 짧았던 15분 정도의 우주비행이었다. 그러다가 1962년 2월 드디어 미국도 존 글렌, astronaut John Glenn Jr.를 space capsule 우정7호Friendship 7에 태우고 거의 5시간 동안 지구를 3번 선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때가 바로 미국의 첫 번째 NASA space program인 머큐리 프로젝트Mercury Project가 진행되던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던 때였다.

John Glenn Jr. on Friendship-7, 1962
John Glenn Jr. on Friendship-7, 1962

이 당시에 윤태석을 알게 되어서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을 생생한 화보로 목격을 할 수 있었고, 또한 모형비행기에 대해서도 그에게 많은 것을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 모형비행기라면 조잡한 수준으로 대나무와 습자지 같은 종이, 고무줄로 프로펠러를 돌리거나, 글라이더로 날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가끔 만들어 보고 날리기도 했지만 무언가 잘 되질 않았다. 재료가 형편이 없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가끔 학생을 중심으로 모형비행기대회가 열리곤 했지만 나는 꿈도 못 꾸었는데 윤태석은 박종원이란 자기 친구와 같이 참가하곤 했다고 들었다.

 그때 윤태석이 학교로 가지고 와서 보여준 잡지는 미국의 Model Airplane News 였고, 그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만들던 모형비행기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습자지, 창호지로 만들던 것은 전혀 없었고, ‘진짜’ 비행기와 똑같은 것들, 게다가 고무줄 동력이 아니고 조그마한 엔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짜 비행기를 그대로 축소한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흥분한 것은 잠깐이고,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미국에서는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미국 환상’만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윤태석과 헤어지게 되었다. 중앙고교 3년 동안 한번도 같은 반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에 대해서도 거의 잊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비행기 대신에 망원경과 전파과학에 심취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가면서 윤태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연세대 전기과엘 갔고, 태석이는 고대 물리학과에 갔는데, 어떻게 연락이 되어서 만나게 되었는지 그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런 어느 날 태석이가 박종원과 함께 우리 집엘 놀러 와서, 말로만 들었던 박종원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도 나와 함께 중앙 중 고교 6년을 다녔지만, 한번도 같은 반을 해 본적이 없어서 사실상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큰 상관이 없이 우리들은 같은 취미를 가진 동창생으로 다시 만나서 비행기 이야기로 얘기꽃을 피웠다.

gas engine powered model airplane, Angst, 1966
나의 ” engine, Enya 019″ line-controlled 모형비행기, Angst, 1966

 알고 보니 태석이보다 박종원이 이쪽 계통은 더 프로였다. 청파동에 있던 그의 집에 가보니 진짜 미국 잡지에서 보던 엔진이 달린 비행기들이 있었다. 엔진도 꽤 많이 가지고, 숫제 조그만 machine shop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은 2층 양옥으로 상당한 고급주택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립학교 재단의 이사장이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그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진짜’ 모형비행기 만드는 데 시간을 쏟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쓰인 시간 때문에 대학의 강의를 듣는데 상당히 stress를 주어서 성적을 유지하느라 상당히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1966년 봄이었다. 그 봄을 나는 온통 엔진 비행기 만드는 것, 날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것들에 필요한 재료들은 거의 전부가 미8군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라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그런 것을 취급하는 유일한 곳은 ‘스카라 극장’앞, 퇴계로 근처에 있었던 ‘합동과학교재사‘ 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도 사실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날린 장소가 더 중요했다. 어느 곳이고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서울에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학교 운동장은 예외였지만 대부분 출입이 제한 되어있어서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 곳이 교외선을 타고 가는 화전비행장이었다. 말이 비행장이지 제일 작은 신문사에서 쓰는 경비행기들이 활주하는 커다란 풀밭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한가한 곳이고 넓은 평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교통편이 불편했는데, 그 복잡한 교외선 열차에 비행기를 들고 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모형비행기 대회, 1966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모형비행기 대회, line-control 비행기가 나르고 있다.1966

한번은, 졸업 후에 처음으로 중앙고교 뒷산까지 비행기를 들고 가서 날렸는데, 나의 실수로 비행기가 완전히 박살이 나기도 했다. 그때 비행기 조종은 거의 U-reely 이라는 것을 비행기 날개에 연결해서 빙빙 돌게 만들고 그것으로 뒷날개의 elevator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별로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사실 진짜 프로들은 radio control로 조종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radio control의 값이 너무나 비싸서 머리만 굴리다가 못하고 말았다. 무선 조종 비행기의 시범을 한번 보았는데,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공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열린 ‘한국 모형비행기 대회’ 란 것이 박종원과 참가를 했다가 본 것이다. 학생도 많았지만, 직장인, 미군들이 대거 참가를 한 아마도 제일 큰 대회였을 것이다. 기어코 무선조종을 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기재를 구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조금씩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서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만났던 윤태석과 박종원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경에 마지막으로 윤태석을 그의 짝꿍이었던 정만준과 같이 한번 만났고, 그것이 그들과의 마지막이었다. 세월의 수레바퀴가 구른 한참 뒤에 윤태석과 중앙고 동창회의 인터넷을 통해서 연락이 되었는데, 그는 경인에너지에서 오래 근무를 했고, 학교 선생님인 부인과 결혼을 했다고.. 현재는 비행기 대신에 망원경에 더 관심을 쏟는 모양이었다. 한때 개인 천문대를 만들 계획을 다 세웠다고 들었다.

미국에서는 모형비행기는 상당히 프로 급의 취미에 속하고 역사도 amateur radio(HAM)과 더불어 상당히 오래 되었다. 고국도 경제여건에 따라 이런 취미는 미국이나 일본 수준까지 온 듯하다. 나의 조카(임준형)도 한때(대학시절) 이것에 심취를 한 모양이고, 그것이 거의 15년 전인데 그때 벌써 무선조종을 손쉽게 하는 것을 보고 그 수준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이 ‘고급취미’ 때문에 학교공부를 소홀히 해서 두고두고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멋진 추억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윤태석, 박종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의 추억

1980년 가을, Columbus, Ohio.. Ohio State University campus.. 그러니까 31년 전 이맘 때쯤인가, 그들을 처음 만났다. 이 오랜 세월에 비하면 거의 찰나에 가까울지 모를, 기껏해야 3~4개월 정도나 알고 지냈을까? 그 당시 신혼이었던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한두 살 정도 적었던, 젊었던 부부, 남편 고석태씨, 부인 나혜성씨, 가끔 추억하고, 생각한다. 남편 고석태씨, 콧수염의 미술전공 유학생 (홍대 출신이었던가?)으로 그 해 가을학기에 OSU로 왔고, 아내인 나혜성씨는 남편을 따라서 온 것이었다.

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1980년
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graduate student Apt. 1980년

1980년, 여러 가지로 의미 있던 해였다. 그 해 1월 25일에 나는 서울에서 연숙과 결혼을 했고, 그 해 6월에 연숙이 이곳에 와서, 본격적인 우리의 신혼’유학’ 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 해는 또 대한민국에서 ‘해외 유학자유화’가 시작이 되어서, 가을 학기에 맞추어 ‘대거’ 유학생들이 OSU 에 도착했다. 유학자유화란 것이 자세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의례 치르던 문교부 유학시험이 면제된 듯 했다. 그러니까 지망학교의 admission만 받으면 여권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50,000+)인 OSU에도 그 전까지는 한 학기에 몇 명 정도 유학생들이 오곤 했는데, 이번은 완전히 공식이 바뀌어서 수십 명이 넘게 ‘몰려’ 온 것이다. 전공 학과도 다양해 져서 전에는 못 들어보던 학과에도 유학생들이 왔는데, 그 중에 고석태씨 부부가 끼어있었다. 그의 미술전공은 그 전에는 사실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이공계 아니면 경제학 등이 주류였었으니까.. 이때를 계기로 유학생 문화가 일시에 바뀌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지냈는데, 일 순간에 그것이 불가능해 진 것이다. 그와 때를 맞춰 ‘중공’ 에서도 ‘짱꼴라’ 유학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중국유학생이면 100% 대만 출신이었는데,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 좋은’ 중공 학생들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새로 이곳에 유학생으로 도착한 고석태, 나혜성씨를 만나게 되었다. 만나게 된 인연이란 다름이 아니고, 아내 연숙과 나혜성씨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이다. 연숙은 이대 학생회의 임원이고, 나혜성씨는 이대 학보사(학교신문)의 학생 기자였다고 했다. 그 당시 과외 활동으로 ‘중간 집단 교육‘이란 것을 같이 받을 때 만났다는데, 나는 아직도 이 중간집단교육 이란 ‘해괴한’ 이름이 무엇을 뜻 하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친목도모’를 위한 것이 아닌 조금 더 ‘고상한’ 이념을 위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교육의 지도교수가 아틀란타의 Emory University 출신인 한완상 교수였다고 했다. 나의 대학시절 활동이 모두 ‘남녀 친목도모’인 것에 비해서 연숙은 거의 이렇게 조금은 ‘심각한 정치적’인 색깔이 있었다. 나혜성씨는 이런 활동에서 만난 ‘동무’라서, 그 들은 보통의미의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기만이 알던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서 연숙은 미국에 온 후 3개월 동안 느끼던 약간의 ‘미국적’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우리는 이들 부부와 자연스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남편 고석태씨는 콧수염을 기르는, 역시 미술학도의 개성을 들어내고, 아주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미술전공 남자 유학생을 나는 본 적이 없어서 사실 공부하는 얘기는 미리부터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주로, 젊은 부부가 사는 얘기를 하곤 했지만, 가끔 여자 둘이 모두 ‘사회 문제 의식’에 경험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런 쪽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 해 1980년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우리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밖으로 나가 마구 뛰어 놀았다. 나를 제외한 이 세 명은 모두 미국에서 처음 맞는 눈이어서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오래 전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고석태씨보다 나혜성씨의 기억이 더 나는 것은, 나와 조그만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해 1979년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결혼을 염두에 두고 신부 감 소개를 조금 받았던 사람 중에 나혜성씨의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좁다고나 할까.. 조금 놀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 만났던 그 여자는 한마디로 좋은 집안을 가졌고, 그들도 역시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찾던 참이었으니.. 나는 사실 ‘면접시험’에서 낙방을 한 셈이 되었다. 그때 그 집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정말 ‘무례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때 사실 ‘아버지 없는 설움’ 을 처음 느꼈다. 여자 본인은 그 아버지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역시 ‘본인의 사람됨 이전에 집안‘ 이라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나혜성씨의 얘기가, 나중에 그들이 바라던 대로 ‘근사한 결혼’을 했다고 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조그만 우연이었다.

 이렇게 알고 지내던 고석태씨 부부가 겨울이 지나고 ‘갑자기’ 없어졌다. 사실, 아직도 어떻게 없어졌는지 그 자세한 과정은 우리부부 모두 기억을 할 수가 없지만, 그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것이다. 생각에 OSU에서 별로 좋은 전망을 기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대부분 학교를 옮기는 case는 이렇게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것이고, 또한 확실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중에 듣기에 Oregon State로 갔다는 소문도 듣긴 했지만 확실치 않다.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더 궁금한 마음이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이다. 나혜성씨가 이대출신이라 연고를 통하면 알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역시 거대한 세월의 바퀴에 치어서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지금 살고 있을까?

 

Longer – Dan Fogelberg, 1980
그 당시 추억의 oldie, 사랑이 전부였던 시절..

 

용기 형!

김용기, 형.. 형은 내가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형이 경기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 봄, 우리 집에서 처음 만났다. 참 오래 전이었다. 6학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용기형을 집으로 데려 온 것이고, 그날부터 나는 용기형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용기형은 그날부터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는 나의 방문 가정교사가 된 셈이다. 그런 단순한 인연으로 만났던 용기형은 사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게도 거의 친척이상으로 가끔씩 왕래를 하며 지냈다. 우리들이 용기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66년 내가 연세대에 입학한 해였다.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서 우리 집에는 거의 ‘전설적’ 인물로 인상이 남게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가정교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대부분 방문, 입주 가정교사들은 대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기형은 불과 고등학교 2학년 생이었지만, 우선 내가 국민학생이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의 제일 명문고교인 경기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용기형에게도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형의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고학생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사정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왜 어머님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셨는지는, 사실 그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이 중하위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5학년까지는 그런대로 나를 지켜보다가 6학년이 되고, 중학교 입시를 치러야 할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점점 더 심해졌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입시지옥’이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한창 놀기에 바쁜 그 시절이었지만 어찌 우리들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까? 하지만 어머님이 나의 공부를 돌보아 주기에는 너무나 바쁘시고, 누나도 사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은 나에게 공부를 분위기를 주질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도, 주위의 ‘놀고 싶은’ 유혹에서 항상 벗어나질 못했고, 그것이 ‘시험위주’의 성적제도에서 항상 중 하위에 머물게 한 것이다. 용기형이 매일 방문 가정교사로 오면서 부터, 바로 옆에 ‘어린 선생님’이 붙어 있으니,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싶은 유혹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곧바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노력을 한 만큼 결과가 온다’ 라는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몇 시간은 꼭 용기형과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하니 결과가 안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나라가 조금씩 안정되던 그 당시부터 과외공부라는 것이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조직적이고 상업적인 학원 같은 것은 거의 없던 시절.. 하지만 나같이 개인적인 과외공부보다는 과외선생님 댁에 단체로 모여서 공부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예외적으로 행운아였을지도 모른다. 방과 후에 골목에서 뛰어 놀던 즐거움은 조금 없어졌지만, 용기형과 둘이서 그날 학교공부를 복습하며, 다음날 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점점 즐거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거의 그 다음날 시험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6학년, 특히 우리 ‘박양신 사단’ 1반은 가히 시험 전쟁터의 현장을 방불케 해서, 다른 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루 ‘종일’ 시험의 연속이었는데, 아침 첫 시간부터 시험을 보곤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시험에 의해서 곧 좌석의 배치가 바뀌는, 가히 시험 지옥이었던 것인데, 이것은 우리 반 담임 ‘박양신’ 선생님만의 방식이었고 다른 반에서는 이런 방식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박양신 선생님의 ‘수험의 신’, 에 가까운 선생님이었고, 그렇게 일년 내내 우리는 단련을 받았다.

그 당시 이미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대강 일류,이류, 삼류 등으로 ‘일본식’ 등급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이 형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고려대 등이고, 고등학교는 경기고,경기여고, 서울고, 이화여고,숙명여고, 경복고,용산고 같이 거의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고, 지방에서도 경북, 경남, 대전, 광주일고 등과 같은 일류들도 있었다. 어떻게 이 같은 학교들이 일류로 평가가 되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고교는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정도를 보면 될 것이고, 대학교는 취직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민학교도 분명히 이런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일류 중 고교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된다. 하지만 국민학교는 아직까지 별로 등급이 형성되지 않았다. 예외는 덕수 국민학교와 수송, 혜화국민학교였다. 어떻게 이 학교가 그 시기에 이미 일류로 되었는지 과정은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부자 집’ 자녀들이 많이 이곳을 다니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따라서 ‘좋은 선생님들, 수험의 신’ 들이 그곳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들이 일류 중 고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 가히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는 어땠는가? 일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로 밑을 맴돌고 있었고, 수험의 신 박양신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박양신 선생님이 재동국민학교를 1류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뒤에는 정말로 일류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학기 초에 성적이 딱 중간 밑을 맴돌았는데, 용기형과 같이 공부하면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거의 10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반에서 자리를 분단 별로 앉게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성적에 의한 배치였다. 1분단은 거의 10등까지 앉고, 다음의 20등까지는 2분단에 앉는 그런 ‘잔인’한 배치였다. 게다가 1분은 딱 가운데 앉혀서 남들이 ‘우러러’ 보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의 잠재적인 심리적 효과를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리의 변동이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시험에 의한 성적이 그렇게 자주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용기형은 나와 ‘궁합’ 이 잘 맞아서, 제일 큰 목적이었던 나의 학교 성적이 오르고 해서, 우리 집에서는 아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형을 아주 친척같이 따뜻하게 대하곤 했다. 용기형은 절대로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다. 깡패와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정도의 ‘깡’은 가진 학생이었다. 용기형이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 ‘대’ 경기고 학생이니까 그것 만으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이때 내가 배운 것은 공부뿐이 아니고, 사실은 조그만 교훈, 모든 일의 결과는 운이나 배경만큼, 노력에도 많이 좌우된다는 간단한 진리였고, 이것은 나중에 내가 사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억에는, ‘선거권, 피선거권 논쟁‘, 그것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이런 한자로 된 어려운 정치용어로 용기형과 싸운 것이다. 나는 분명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했는데, 용기형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논쟁이었는데, 누가 보아도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잘못 기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자체가 재미 있어서 내 고집대로 밀어 붙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용기형의 ‘깡’을 몰랐기에 계속 ‘똥’ 고집을 부렸다. 결국에는 용기형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기를 무시 본다는 것이었고, 나에게 따귀를 계속 올려 붙였다. 그 당시는 학교에서도 잘못하면 따귀를 맞는 것은 흔했지만, 가정교사에게 따귀를 맞는 것은 절대적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내가 자기의 ‘고객, 학생’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것 같았다. 나도 기가 막혔지만 이것을 집에다 ‘일러’ 바칠 수도 없었다. 그랬으면 그날로 용기형과의 공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사실 관계도 끊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그냥 조용히 잊고 지나서 말썽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용기형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아서 더욱 아쉬운 기억이다.

 나의 성적은 계속 1분단의 ‘제일그룹’ 을 유지했지만, 사실 나의 성적은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거의 1~2등까지도 하는가 하면 갑자기 10위로 밀려나는 등 그런 식이었다. 이런 상태로 중학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용기형은 경복이나 서울 중학교에 응시하라고 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아주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모험’을 하는 것이 싫었다. 안전한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립 중앙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로 가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원의 반 정도를 졸업성적만으로 뽑던 제도가 있었다. 시험 지옥에서 쉽게 벗어난 것만 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역시 용기형이나, 어머니는 두고두고 불만이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가 속했던 1분단의 다른 녀석들이 대거로 경기, 서울,경복중학교에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 자신은 후회가 없었다. 재수를 할 가능성보다는 조금은 안전한 것이 편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시에 재수생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용기형은 가끔 놀러 왔고 고궁 같은 곳에도 같이 가족과 놀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나의 성적이 좋아서 용기형도 안심하는 듯 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가 용기형에게 나를 데리고 영화를 보게도 했는데, 그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나에게 형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용기형과 대한극장에서 ‘백사의 결별‘ 이라는 요란한 제목의 미국 영화를 보았는데,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과 데보라 카(Deborah Kerr)주연의 2차 대전 영화였는데,그 것을 보면서 내가 하도 형에게 질문을 해서 조용 하라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용기형을 따라서 경기고교 강당에서 프랑스의 영화,”장 가방(Jean Gavin)” 주연의 ‘잔발잔(Jean Valjean)’을 같이 보았는데,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정말 부자여서 없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극장수준의 영사기까지 갖추고, 가끔 영화, 그것도 외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용기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1961년) 때, 경기고를 졸업하고 대학엘 갔는데, 예상을 뒤엎고 서울대가 아닌 고려대엘 갔다. 왜냐하면 경기고생은 거의 서울대를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 연세대 정외과로 편입을 했는데, 사실 편입이었는지 아니면 새로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어렴풋이 형이 대입준비를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게 되어서, 두고두고 나중에 내가 대입 준비할 때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의 입시 문화는 거의 100% 일본식이었을 것이다. 입시준비 잡지도 있었는데, 용기형 시절에는 ‘향학‘ 이란 국내 유일의 입시준비 잡지가 있어서 나도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이 대학입시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말 ‘전쟁’이었다. 몇 년 뒤에 그 잡지는 없어지고, 새로 ‘진학‘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고3때 나왔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중학교 3학년(1962년)이 되고, 고교 입시가 다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다시 용기형을 부르셨다. 나의 학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야 말로 ‘일류’ 고등학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다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3년 전과는 아주 달랐다. 용기형은 이미 대학생(연세대 정외과)이 되었고, 나도 이미 꼬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은 열기는 사라진 것 같고 공부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안전’하게 본교로 진학하기로 결정을 해 버렸다. 이런 나의 결정은 후에도 별로 후회를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사학의 명문 중앙에 정이 흠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용기형과 의 왕래는 가끔이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용기형은 언제나 자신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외교관의 꿈인 프랑스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외교 계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입김이 강했다. 꿈이 있고 계속 좇으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믿었다.언젠가는 유명한 국제적인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요새로 말하면 반기문 같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시나마 용기형이 우리 집에 입주해서 나를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다. 기억에 아주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나와 같이 자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용기형은 ‘가르치는’ 데는 이미 김이 빠져있었다. 별로 열기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공부보다는 인생공부를 많이 한 셈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그 당시 용기형은 연세대에서 데모를 주동하는 ‘정치 학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연세대에 입학을 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만나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용기형은 그곳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용기형은 우리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 이후 항상 ‘얘, 혹시 용기가 죽은 것 아닐까?’ 하시곤 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아주 길게도 흘렀고, 1999년 초쯤에 인터넷의 Yahoo! 같은 search engine과 학교 동창회의 website등을 통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용기형을 찾아 보게 되었다. 운이 좋게 연세대 동창회에서 용기형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전호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이 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곧바로 어머님께서 그 전화번호로 용기형과 이야기까지 하셨다. 전화번호는 한국산업정보센터 라는 곳이고 용기형은 그곳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셨다. 나와는 곧 바로 email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사실, 나도 어머님과 같이 용기형이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던 참에 소식을 들은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고, 옛날의 추억들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email에 있는 사연은 간략하지만 그것으로 대강 용기형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60년대 중반에 데모주동으로 몰려서, 군대로 ‘끌려’ 갔고, 복학 후에는 그런대로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파리의 외교관이 되는 꿈은 접은 듯 했다. 용기형 말씀이, 그런 꿈들을 이루지 못해서 연락을 계속 미루었다고, 참 순진한 말을 곁들였다. 고시공부, 동아일보 입사, 국세청 장기 근무, 대경기계 창업, 한국산업정보센터 고문 등으로 이어지고 결혼을 해서 딸, 아들을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을 해서 미국 LA에 살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1999년)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기형의 부인과도 잠깐 전화로 인사를 드렸는데, 까마득한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라고 알고 계셨다.

 하지만 세월의 횡포는 그렇게 그립던 생각을 곱게 보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약속을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나에게도 다시 연락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용기형을 생각하고 안부를 걱정한 것과 같은 정도의 생각을 우리는 용기형으로부터 느낄 기회조차 없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세월의 장난일 것이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겨놓을 것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연락이 된 후 10여 년이 또 흘렀으니, 용기형도 나이가 거의 70세로 육박을 하지 않았을까? 부디 건강한 후년을 즐기는 용기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2011년 9월이여, 사요나라

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집에서 실컷 읽어서 큰 후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무의식 중에 생각을 해오던 1950년, 구일오 인천상륙, 구이팔 서울 수복 기념일들도 다 지나갔다.
만약 그 때의 역사를 계속 따라간다면 조금 있으면 UN군이 한 맺힌 삼팔선을 지나 노도와 같이 북진을 하게 될 것이다. 올해는 어쩐지 그 때의 <1급 전범, 민족반역자, 김일성 개XX>를 ‘죽이거나, 사로 잡거나, 만주로 쫓아내려는 국군과 유엔군을 계속 따라가며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미 해병대의 장진(Chosin Resevior) 저수지 사투와 흥남 철수, 일월 사일 서울 철수(일사후퇴) 등이 포함될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서 중앙고 동창 이성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비대칭적 추억‘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비대칭적 추억이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 같은 추억을 서로 아주 다른 정도로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첫 경험한 것이, 10여 년 전,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 이윤기와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나의 이윤기에 대한 추억과 그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그 전에는 별로 못 했기 때문에 사실 무척 당황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부작용’ 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 뚜렷하게 기억을 한 것이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지만 이것은 ‘나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을 ‘대칭적인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번에 이성복을 통해서 조금은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case는 한번 알던 사람이 나를 완전히 잊은 경우다. 1974년 경에 시카고에서 잠깐 만났던 연세대(철학과) 동문 신경시 씨 부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나중에 연락을 해 보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진까지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조금 심한 case라서 나는 물론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기억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잠깐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서 그랬을까.. 이것은 사실 조그만 비극이다.

 

빛의 속도, 조탁 이성복

Albert Einstein
Albert Einstein

빛의 속도에 대한 논란: 이 우주에서 제일 빠른 속도는 ‘이론적’으로 정해져 있다. 바로 빛의 속도인 것이고 변치 않는 상수(常數) c 로 표시된다. 이것은 고등학교 물리시간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을 통해서 배운다. 이것을 배울 때, 대부분은 담담히 받아 들인다. 어찌 의문을 제기할 수가? 상대는 ‘상대성 원리의 천재, 아인슈타인’ 인데.. 말 잘못 했다가는 물리 선생으로부터 면박이나 당할 것이다. 이 우주에서, 어떤 물체가 아무리 빨라도 빛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하고 그의 상대성 이론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100여 년 동안 그의 이론은 실제와 거의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거의’라는 단서인데, 100% 증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빛의 속도도 마찬 가지다. 만의 일이라도 어떤 것이 빛 보다 빠르다고 판정이 되면: 그것은 판정이 잘 못 되었거나, 상대성 이론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6개월 이상 실험 끝에 어떤 ‘입자,neutrino‘가 빛 보다 60 ns(nano-second, 1/1000,000,000초) 빠른 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은 ‘우선’ 이 실험에 결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실험자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문제는 60ns이면 실험 오차치고는 상당한 오차인 것이고, 그들의 실험이 그렇게 허술했나 하는 것이다. 100여 년 동안 우리의 ‘삶의 철학’ 까지 바꾸어 놓았던 ‘상대성 이론’ 도 조금씩 무너지나.. 그 다음은 어떤 것이 나오려나.. 100년 마다 이렇게 큰 이론의 변화가 나오면 1000,000년 뒤에는 어떨까? 이래서 인간이다. 인간은 역시 신이 아닌 것이다.

 

이성복을 찾았다! 일년도 넘는 비교적 오래된 나의 blog <누가 이성복을 보았는가?> 라는 나의 외침에 대한 답이 온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Google’s indexing power의 위력을 실감한다. 비약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보는 우주 전체를 포함한 하느님의 성역 전부를 indexing할 날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어느 것이 이길까? 하느님, 아니면 Google’s Datacenter? 좌우지간.. 나의 ‘도박’은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성복의 comment에 의하면, 성복이의 아우가 이 blog을 보게 되어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성복이가 만든 navor blog 을 보게 되었다. 나의 예상을 뒤엎고, 완전히 ‘국어학 박사’ 급의 글들로 가득.. 거기다 저서가 다섯 권씩이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제목을 보니: <한국어: 맛이 나는 쉬운 문장>, <논리적인 글의 요건>, <논문 맵시 내기>, <마침한 말 바른 표기>, <틀리기 쉬운 맞춤법> 등등.. 

이 녀석, 분명히 고대 농대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한)국어학 박사가 되었단 말인가?이 녀석, 요새 흔치 않은 호까지 있다. “조탁(彫琢) 이성복”, 와~~ 근사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조탁’이란 호는 어떤 뜻인가? 새길 조에, 쫄 탁? 암만 생각해도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성복’을 ‘만나게’ 되었는데.. 현재 나의 의문, 어떻게 농대출신이 국어학박사, 저자가 되었나? 곧 의문은 풀릴 것이지만,그래도 궁금하다. 5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왜 동창회 연락처에 이 친구가 빠져 있었을까? 이런 의문도 곧 풀릴 것이다.

 

가회동의 추억

가회동.. 이 이름만 들어도 나는 너무나 진한 추억의 감정에 눌려버린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가회동이 만들어 주었다. 나의 개인 역사에서, 유치하지만 순진하고 희망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찾던 시절..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조국의 현실도 가식 없는 눈으로 지켜 보았던 시절들이었다.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나는 정면의 본관 건물의 바로 뒷쪽에서 살았다

 

나는 1956년 가을부터 1963년 봄까지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에서 살았다. 학년으로 치면 재동국민학교 4학년 2학기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곳은 재동과 가회동의 경계선 쯤이었을 것이다. 재동과 가회동은 남북 신작로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의 가회동 ‘한옥 촌’이라는 곳이 나오고, 내려 가게 되면 재동으로 이어지면서 창덕여학교를 만나고 다시 가로지르는 더 큰 길을 만난다. 그 당시에는 그 길의 이름들이 없었고, 그저 모두 ‘행길, 한길, 신작로’ 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아마도 율곡로 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자신은 없다.

 우리 집의 본적이 종로구 재동 80번지라서 나는 그곳에 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짐작을 하긴 했다. 그 전에 우리는 원서동에서 살았는데 사실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제일 오래된 동네다.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초에 납북이 되시고 누나, 어머니와 정말 험난한 전후 시절을 원서동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이북(원산) 여자였던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하셔서 원서동에 아주 작은 집까지도 사셨는데, 그것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를 당하게 되어서 가회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결국 후에 원서동의 “우리 집”은 정말로 철거되고 그 위에는 대로가 생겨서 작았지만 추억이 아롱졌던 집은, 그전까지 원서동을 따라 흐르던 개천이 전부 자취를 감추고 덩그러니 길로 변해버렸다.

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원서동 죽마고우들:  새로 이사를 오니까 원서동에서 잔뼈가 같이 굵었던 코흘리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새로운 곳에 금새 적응이 되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동네친구들을 사귀는 데는 그런 성격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서동의 친구들은 시간만 나면 ‘장거리 원정’을 오듯이 놀러 오곤 했는데, 그 당시 원서동의 ‘죽마고우’ 친구들; 유지호, 손용현, 박창희, 안명성, 김동만, 최승철, 김천일.. 그 외에도 참 많았다. 우리가 이사온 집은 골목 깊숙이 위치한 아담한 2층 양옥이었는데, 말이 양옥이지 사실은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는 뜻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일본식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기둥들이 약하게’ 보이던 집이었다. 2층집과 1층집이 같이 직각으로 붙어 있어서 두 집에 살기에는 아주 좋았고, 화단이 있는 그런대로 커다란(그 당시 나의 눈에는) 마당까지 있었다. 우리는 1층의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사랑채’에 살게 되었다.

 

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재동학교:집에서는 재동국민학교 4층 건물의 뒷면 거대한 모습으로 보였고, 집 골목이 재동학교 강당을 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사오면서 제일 신났던 것은 학교 가는 시간이 5분도 걸리지 않았던 사실이다. 전에 살던 원서동에서 등교할 때는 그때 어린 나이의 걸음으로 30분은 넘어 걸렸을 것에 비교하면 이건 정말 ‘천국’에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도 못 꿨지만, 그 동네에 사는 어떤 ‘잘살던’ 아이들은 숫제 점심시간에 집에서 식모들에 의해서 학교 교실까지 배달된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즐길 정도였다.

 

함경도 출신 주인집 염씨 가족:  이사온 집의 주인은 함경도 출신, 그러니까 아마도 육이오 동란 때 피난을 온 집일지도 모르는 나이가 있으신 부모님과 시집간 딸, 고등학생 딸,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족이었다. 주인 어르신의 성함은 아직도 기억을 한다. 염영혁 선생님, 그 당시는 ‘거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환갑 정도를 갓 넘기셨을 정도였지 않았을까? 외 아드님은 훤칠한 키의 호남형, 염철호 형이었다. 중앙대를 졸업했다고 들었고, 아이들과 잘 놀아줄 수 있는 그런 쾌활한 미혼 청년이었는데, 대학시절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염철호 형은 나중에 결국은 농구 계로 투신을 해서 방송국에서 농구경기 해설자로 활약을 함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형의 소식을 아주 짧게 들었는데, 나이도 많이 드시고, 부인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정말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식이었다.
작은 따님, 염경자 누나는 그 당시 거의 졸업반의 여고생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주 얼굴이 예뻤다. 얼마 뒤에 이화여대를 갔는데, 그 당시 최고로 경쟁이 높았던 영문과에 지망을 했는데, 애석하게 제2지망이었던 사회사업학과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영어를 아주 잘했고, 한때는 어떤 미군을 집으로 데려와서 영어강습을 받기도 했는데, 영어실력과 뛰어난 미모로 역시 나중에, 그 당시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항공사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큰 따님은 그 당시 이미 갓난 딸 둘 (주경아주동원)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당시 육군 대위였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 오면 갑자기 집이 떠들썩 해지곤 했다. 나는 특히 그 대위 아저씨를 좋아했는데, 아주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군인 장교’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이 주인집은 함경도에서 오셨는데, 친척들이 근처에 계셨고, 그 중에는 나와 재동국민학교 동창인 ‘황석기’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조금 이상했던 것은 이 주인집이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아무도 바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가지고 있던 돈이 상당히 많았던 것일까?

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삼청공원 말바위: 이 집이 있던 골목이 그때부터 나의 천국이 되었고, 꿈 많던 소년시절의 주옥 같은 많은 추억이 이곳에서 형성이 되어 이제까지도 내 추억의 바탕이 되었다. 시대적으로 보아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일구를 거쳐 오일육으로 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어졌고,학교 학년으로는 재동국민학교 4학년으로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까지였다. 거리적으로 이 학교들은 정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삼청공원북악산이 있었는데, 이곳들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사시사철 자주 놀러 가던 곳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말바위‘라는 곳은 북악산 중턱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들이 좋아하던 곳이었고, 우리들이 발견한 아주 작았던 비밀의 바위, ‘늑대바위‘도 우리들이 전쟁놀이 할 때마다 찾던 꿈의 거처였다..

가회동 성당: 가회동 큰 길에 나가면 재동학교 주변으로 많은 만화가게들이 즐비했고 그 곳들은 우리들의 꿈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삼청동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가회동 파출소가 있었고, 그 옆에는 가회동 성당이 있었다. 나는 지금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그 어린 시절에 내가 본 성당의 인상은 그리 편한 곳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 입구부터 ‘무섭게 보이는 외국인 성인’들 석고상들의 모습이 으스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네마다 많이 있던 개신교 ‘예배당’은 친근한 인상이었고,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천주교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 정도로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가회동 부자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그때부터 으리으리하게 우람한 기둥을 자랑하는 깨끗하고 커다란 한옥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중앙 중고를 다닐 때면 그곳을 지나서 가곤 했는데, 얼마 전에 ‘겨울연가’를 보면서 다시 한번 그곳 들을 보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그 당시 가회동에는 알려진 부자들도 살았는데, 그 중에 화신 백화점 주인이었던 ‘친일파’ 박흥식씨의 집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정말 집이 으리으리하게 컸다. 우리가 살던 집의 뒤에도 아주 커다란 집이 있었는데, 아직도 거기 누가 살았는지 확실치 않다. 가회동에서 재동 쪽으로 내려가면 물론 재동국민학교가 있었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공립 여자학교, 창덕 여중고가 있었다. 이곳은 여자학교라서 보통 때는 못 들어갔지만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강당엔 들어갈 수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 사일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전 겨울에 동네 사람들을 이곳 강당에 불러놓고 영화를 보여준 일이었다. 나는 국민학생이었지만 따라 갔는데, 가서 보니 영화는 영화인데, 선전용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드리마 같은 것은 아니었어도 나는 너무나 재미있게 본 기억이다.

박달근:  그 당시 동네 골목은 우리 나이또래들의 천국이었다. 나이에 거의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던 곳.. 우리 골목도 그랬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중학생들 까지 모두 어울렸다. 많은 애 들이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까지 기억이 나는 애들.. 골목 바로 건너 집에 살던 박달근,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을 한다. 나보다 한두 살 밑이었고, 공부도 잘했던 애, 나중에 일류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가슴이 좀 아픈 추억을 남긴 애였다. 나와 보통 애들이 하던 싸움을 했는데, 이 녀석은 나에게 아직도 가슴에 남는 욕을 했다. 그 녀석 왈, “우리 아버지가 (너같이) 아버지 없는 애와는 놀지 말랬어!” 라는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는 참으로 슬픈 욕이었다. 그 말로 사실 그 애와는 헤어지게 된 셈이다. 나도 그 녀석과 그 아버지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와 같이 아버지가 없는 집이 꽤 많았지만 그 골목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정상적’인 가정이었던 것이다.

이원영:  우리 집에서 두 집 아래에 이원영 이라는 나보다 아마도 한두 살 정도 아래인 애가 있었다. 그 아버지가 어느 중학교 수학선생인가 그랬는데, 정말로 고약한 성격의 남자였다. 항상 아이들을 보면 험악한 얼굴, 짜증난 얼굴이어서 속으로 저런 아빠라면 그렇게 부럽지 않겠다고 생각도 했다. 이원영의 엄마는 정반대로 항상 친절하게 웃는 안경을 낀 지적으로 생긴 다소곳한 엄마였는데.. 나중에 원영이는 경복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가 생각을 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어떤 명절날 원영이의 친척들이 놀러 온 모양인데, 그 중에 국민학교 나이의 소녀가 있었는데, 그 애가 너무나 예뻐서 그 나이에 처음으로 ‘연정’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이 아하..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연애감정’이란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예쁜 얼굴’의 그 애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나의 감정이 기억된다. 이원영은 헤어진 것이 너무나 오래 되어서 별로 그의 생각을 못하고 살았지만, 그는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최씨 삼형제:  그 아래 한집건너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삼형제 집이 이사를 왔다. 최씨 삼형제 집.. “최희천, 최희춘, 최희승“.. 어떻게 내가 그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나도 놀란다. 그것은 어린 나이의 추억들이 그 정도로 뚜렷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 추억들을 소중하게 기억에서 놓치지 싫었다는 뜻일 것이다. 제일 큰 형이 최희천, 나보다 한두 살 밑, 그 아래가 최희춘, 막내 최희승은 한참 아래인 꼬마였다. 그들에게는 누나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였고, 우리또래 아이들이 그녀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집의 ‘주인’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바뀌고 그 집은 그 많은 식구들이 방하나 문간방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사업이 실패를 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집 장사’ 라고 들었다. 요새말로 하면 ‘부동산 업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큰형 최희천은 과묵하고, 성실한 타입이었고, 그 동생 최희춘은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래서 성실한 애였다. 특히 나를 많이 따랐다. 동네의 애들이 모이게 되면 이들이 항상 끼어서 나를 도와주곤 했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이 형제들을 포함한 동네 꼬마 일당을 데리고 삼청공원 위에 있는 ‘말바위’에 놀러 갔던 추억이었다. 나는 이 꼬마 ‘소대’를 데리고 흡사 소대장이라도 된 듯이 그들과 이곳 저곳을 놀러 다녔다. 그 중에 말바위를 포함한 북악산 일대를 누빈 추억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아찔하다. 왜냐하면 무슨 사고라도 나면 내가 ‘소대장’이기 때문에 몽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가질 집은 거의 없었다. 사는 것이 더 급한 세상에 귀찮은 꼬마들을 집에서 끌어내어서 놀아 준 것이 더 고마웠을 것이니까..

말바위의 종이비행기:  말바위는 북악산 중턱에 있는 완전히 바위로 된 언덕이고 그곳에서는 서울시내가 거의 다 보였다. 정남쪽으로 남산이 나지막하게 보이고, 그 뒤로 한강, 관악산이 멀리 보이던 우리에게는 거의 환상적인 곳이었다.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어서 위험한 곳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 나이 우리에게는 더 재미를 주었다. 한번은 못쓰게 된 책을 한 권 들고 아이들을 몰고 가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는데, 골목에서 날리다가 이곳,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날렸을 때 아이들의 환성을 잊지 못한다. 한번 비행기를 날리면 떨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낭떠러지가 있어서 더운 기류를 타게 되면 공중에 오래 머물곤 했다. 그때 한 종이비행기가 완전히 뜨거운 기류를 타고 하늘 위로 올랐다. 그것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오르며 북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그것을 보며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비행기는 안 보일 정도로 높이 떠서 북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것을 본 꼬마들.. 아마도 잊지 못할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동네 야구:  이 골목에서 나는 야구를 배우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은 주로 “찐뽕” 이란 것과, “왔다리 갔다리” 란 것을 했고, 그 때만해도 야구를 하려면 글로브와 ‘진짜 야구공’ 같은 것이 비싸서 아무나 못 하던 시절이었지만, 찐뽕이란 것은 거의 야구와 비슷하지만 모두 맨손으로 받는 것이라 그것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야구’ 가 바로 찐뽕이었다. 이것은 배트도 필요 없이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느 날 어머니가 미8군 암시장에서 ‘미제’ 야구 배트와 공을 사오셨는데, 배트는 진짜 “Louisville”이란 상표가 보이는 것으로 신나게 했지만, 공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 보통의 공보다 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소프트볼 이었다. 소프트볼이라고 하지만 공 자체는 더 단단했고, 배트로 쳐도 그다지 빨리도, 멀리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안전’한 야구 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진짜 야구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일본에서 쓰이던 ‘중경식‘ 야구공이란 것을 써서 ‘진짜 야구’를 하게 된 것이다.

 야구를 할 때 문제는 동네 골목이었다. 그 좁은 골목에서 야구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사고’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 사고는 대부분 골목에 있는 집들의 유리창이 깨지는 것들이었고, 가끔가다 공이 사람을 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가끔이지만 그 골목에 차라도 지나가면 게임은 완전히 올 스톱이 되곤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악다구니처럼 지치지 않고 즐겼다. 그러다가 바로 코 옆에 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모교 재동국민학교로 야구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야구의 천국이었다. 비록 야구장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널찍한 공간이 그 당시 어디에 또 있었겠는가? 문제는 그곳을 아무 때난 쓸 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나게 되면 문을 완전히 닫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들이 학교를 다 떠나기 전에나 운동장을 쓸 수 있었고, 일요일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나마 우리는 그곳에서 야구 연습을 열심히 하고, 실력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팀(동네)들과 시합을 하기 시작했고, 어떨 때는 다른 동네까지 ‘원정’ 경기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곳은 삼청 국민학교까지 원정을 간 것이었는데, 그 당시 조건은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야구공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 자리에서 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빚처럼 남게 되어서 꼭 갚아야 했다.

 그 당시에 야구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데, 주로 고교야구가 꽃이었고, 실업야구도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등학교는 야구부가 상당히 활동적이었고, 대회에서 가끔 우승권까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투수 김옥수, Short Stop 하갑득 선배들이 고등학교에서 활동을 했는데, 오후에 학교가 끝나서 운동장을 거쳐서 걸어나올 때면 꼭 그들이 연습을 했는데, 나는 빠지지 않고 그것을 구경하곤 했다. 동네야구만 하다가 그들을 보면 정말 ‘신의 경지’로 까지 보였다. 김옥수 투수의 던진 공을 옆에서 보면 정말 총알같이 느껴지고, 하갑득 선배가 육탄 돌격대처럼 쓰러지며 공을 잡을 때면 그것도 역시 ‘야구의 신’처럼 보였다. 꿈에서도 내가 투수가 되어서 총알 같은 직구와, 기묘한 커브 볼을 던지는 꾸곤 했다. 그 당시 입학시험에는 체력장 같은 시험이 끼어있었는데, 그 중에는 공 던지기가 있어서 이렇게 야구를 했던 것이 나중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를 때 큰 도움도 되었는데, 그 당시 나의 공 던지는 실력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기 멀리 나가곤 했다. 그만큼 던지는 어깨가 발달이 되었던 것이다.

 오자룡:  이 동네야구를 회상하면서 꼭 생각나는 것, 우리 앞집에 살던 ‘오자룡‘ 이란 아이..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고 했나… 나보다 아마 4~5살 쯤 어렸을, 아주 꼬마였다. 야구는 그 나이에 비해서 잘 한 편이었지만 역시 나이가 어려서 실수가 많았다. 어떨 때는 1루에 주자로 나갔다가 홈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팀에 꼭 끼게 된 이유는 그 녀석의 아버지 (그 당신에는 아빠란 말을 쓰지 못하고 꼭 아버지란 말을 써야 했는데, 아빠란 말은 그 후에나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이었다. 비록 대머리 였지만 비교적 젊은 아저씨였는데, 그 아저씨가 야구광이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오자룡’을 그렇게 참가시킨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힘이 되었고, 자랑스러웠다. 다른 아버지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그 오자룡의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옆에 와서 코치까지 해 주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꿈도 못 꾸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가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이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지만 그 아저씨가 학교 ‘소사’ 아저씨를 구어 삶아서 우리들이 정식 게임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셨고, 게임의 심판까지도 자청하셔서 보아 주셨다. 얼마나 즐거운 광경이고, 추억이 되었던지.. 오자룡,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Oh, Carol by Neil Sedaka

1959년 닐 세다카의 오 캐롤, 이곡은 우리에게는 1960년에 알려지고 따라부르던 노래가 되었다. 하도 따라 불러서, 뜻도 모르고 영어 가사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 가사를 엉터리로 들어서, I’m but a fool이 아앰 빠다빵으로, You hurt me는 유어 할머니로 둔갑 하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

 

미국의 시대: 나는 가회동 시절, 정치적으로는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삼일오 부정선거, 학생들이 피를 흘렸던 사일구, 장면 내각 (윤보선 대통령)의 짧았던 1년, 그리고 오일육 군사 쿠데타 (혁명)으로 이어지던 비교적 숨가쁜 변화 속에서 살았다. 비록 육이오 동란은 이미 끝나서 전쟁의 잔혹함은 간신히 비켜 지나게 되었지만, 우리 집처럼 아버지가 전쟁으로 없어진 집도 많았고, 길거리에는 전쟁고아, 거지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사실 육이오 전쟁 후의 정말 살기 힘겨운 시절이었다. 철저한 반일, 반공 교육 속에서 위와 아래가 모조리 적국으로 둘러싸인 시절, 그저 믿을 곳이라고는 ‘정의의 십자군’ 미군과 그들의 나라 미국, 그리고 조그만 섬 으로 쫓겨난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 대만 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유지되던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도 전쟁 때 반 이상이 불타버려서, 미군들이 와서 새로 지어주고, 고쳐주었다.

이승만과 멘데레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나는 국민학생이었는데,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와 비교적 가까워서 그랬는지, 가끔 새벽같이 단체로 대통령을 마중하러 나가기도 했다. 제일 기억에 나는 것이 1958년, 5학년 때,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이 왔을 때 환영을 나간 것과, 터키를 방문하고 도착해서 일행이 경무대로 돌아온 때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깜깜한 새벽에 동원되어 나가서 한참 기다리다가, 몇 초 만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태극기를 흔들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때 모습의 사진이 경향신문 조간에 나왔는데, 기적적으로 내가 거기에 찍혔다. 그때의 신문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묘한 사실은 그때의 그 두 나라의 원수 급,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비슷한 때에 대중 혁명으로 실각을 한, 조금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Soviet's Sputnik-1, Oct 1957
사상 첫 인공위성 소련의 스프트닉 Oct. 1957

소련의 스프트닉:  가회동으로 처음 이사를 가자마자 전세계적인 큰 뉴스가 터졌다. 그때가 1957년 가을이었다. 공산당 소련이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그러니까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 스프트닉, Sputnik 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사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 이었다. 비록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우주 궤도였지만 그곳은 분명히 ‘새카만’ 우주 공간이었던 것이고 그곳에 농구공 만한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서 지구를 돌게 만든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미국도 못하던 쾌거였고, 이때 소련이 이룬 폭발적인 ‘선전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은 분명히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니까.. 상대적으로 미국이 당한 ‘수모’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때의 그런 수치가 미국을 13년 뒤에 소련을 제치고 달에 첫 우주인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회동은 바로 아래쪽에 붙어있던 재동과 더불어, 전에 살던 원서동에 비해서 깨끗한 동네에 속했다. 큰 차이는 원서동에는 그때까지도 초가집들이 즐비했었던 것에 비해 이곳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서울에 웬 초가집?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금 나은 가회동, 재동의 행길(맞는 철자는 한길, 부를 때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골목을 제외한 길을 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고, 종로와 같은 큰길을 제외하고는 길 이름이 전혀 없었다. ) 조차도 지금에 비하면 아마도 ‘난민 촌’을 연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잡상인’들이 거리를 완전히 덮고 지나가는 사람을 상대했다. 특히 국민학교 앞에서 코흘리개들을 손님으로 하는 가게는 정말 다양하고, 조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곳은 역시 만화가게, 빙수,국화빵 가게 같은 것이었는데, 텔레비전이 없었던 그 시절에 그곳은 우리들 꿈의 전당이었다. 재동학교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좋던 싫던 나의 어린 시절 6년의 추억을 만들어 준 가회동 시절.. 어찌 잊으랴.. 그때 알고 지냈던 코흘리개 친구들.. 다들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진다.

 

 

Come September

중학교 (서울 중앙중학교) 때 나온 미국영화, Come September의 주제곡을 수십 년 만에 들었다. 거의 분명히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의 영화니까 분명히 ‘학생입장불가’로 볼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고, 영화자체도 그 나이에 보기에는 너무나 ‘지겨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주연배우는 Rock Hudson(록 허드슨)과 이태리의 Gina Lollobrigida(지나 롤로브리지다) 등의 그 당시 최고 정상급 국제 스타들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의 주제곡 때문이다. 영화 내용은 모르지만 그 주제곡은 그야말로 ‘경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말 경쾌한 것이었다. 그것이 왜 9월과 연관이 있는지, 그러니까 그 영화의 제목이 왜 ‘9월이 오면‘ 이었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9월이 오면 생각나는 ‘음악’ 중의 하나라는 , 그것이 더 중요하니까.

 

 

Come September: 9월이 오면, 1961

어제, 9월 1일은 3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나의 인생 반려자로 살아온 아내 연숙의 생일이었다. 원래 내가 우리 둘의 아침식사를 준비한 것이 이제 몇 년째가 되어서, 이것으로 생일의 “깜짝 서비스” 를 할 수도 없고, $$$도 그렇고, 너무나 흔한 ‘생일 축하 메시지’ 를 만들기도 낯 가렵고.. 그래서 요새는 생일이 맞거나 축하해주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은 부담이 되어간다. 그저 한마디로 XX 년 전에 ‘인간으로 세상에 나온 신비’ 를 서로가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게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며, 먹으며, 선물포장을 뜯어야만 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올해는 작은 딸 나라니 가 ‘먹는 생일’을 마련해 주었다. Cumberland Mall에 있는 커다란 Italian restaurant, Maggiano’s (Little Italy) 에서 오랜만에 ‘밀가루 음식’ 과 bottle of wine으로 포식을 시켜주었다. 이태리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음식의 크기 (flat dish가 아니고 bowl)에 먹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우리는 원래 저녁식사를 거의 안 하고 살아서 아마도 위장이 꽤 놀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음식값에 carry-out 메뉴가 덤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까지 하면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봉’에 시달리는 작은 딸의 저금 통장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이래서, 우리도 이제 오래~~ 살았구나.. 실감을 했다.

 

Try to RememberThe Lettermen

9월과 12월 사이의 감정을 보여주는 멋진 시

오래된 추억의 9월은 어떤 것들일까? 그 중에서 추석이 으뜸일까? 타향살이에서 제일 그리운 것이 ‘추석의 느낌’ 이다. 이것은 타향에서는 ‘절대적으로 느끼기 불가능’ 한 것 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추억이던가. 실제로 그 추억이 현실적인 추석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것들이 ‘느리기만 하던’ 시절.. 시간도 느리고, 버스도 느리고, 비행기, 기차도 느리고, 전화도 느리던 그 시절.. 그런 명절은 정말 천천히 즐기는 느린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설날과 달리 날씨가 알맞게 따뜻해서 얼마든지 밖에서 ‘딱총과 칼’로 무장을 해서 전쟁놀이로 뛰어 놀고, 뛰어 들어와서 송편, 고기 등 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골목으로 뛰어나가던 그런 추석.. 그날 밤에 재수가 좋으면 어둡기만 하던 동네를 완전히 대낮으로 바꾸어 놓았던 보름달 아래서 골목 이웃들이 몰려나와 수다를 떨던 아저씨, 아줌마들.. 세월을 따라 모든 것들이 빨리 움직이면서 그런 순진함 즐거움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대학 다닐 때, 갈비씨(skinny people, 이런 말을 요새도 쓰나?) 인 신세로 주눅이 들었던 시절, 9월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모든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짧은 팔에서 조금은 가려주는 긴 팔의 옷으로 천천히 바뀌던 첫 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심각했다. 아마도 뚱뚱한 것이 마른 것보다 ‘가치가 떨어진’ 요새 사람들은 절대로 상상을 못할 듯 하다. 분명히 그 당시는 ‘살이 찐 것’이 마른 것 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아마도 마른 사람의 대부분이 가난했던 사람들이라 그랬나?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건가? 가난하게 보이게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족이 생기고, 대부분 가장이 겪게 되는 세파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9월과 가을을 거의 잊고 살게 되었고, 그에 따르는 추억도 메말라 가게 되었다.그러다가 50대에 접어 들면서 우연히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詩)에 눈을 뜨게 되었다. 거의 완전히 메말랐던 감정들이 이 신기한 것을 통해서 조금씩 스며 나옴을 느끼게 되어서, 나이와 감정, 감상이 꼭 반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9월은 그런 찐한 감정의 보물창고인 가을과 겨울의 입구와 같은 때인 것을 매년 조금씩 실감해 가게 되었다. 올해는 과연 어떻게 그런 감정의 보고(寶庫)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을 그림자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빠진 감잎에 근심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서는 여윈 추억들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김재진

 

 

9월의 노래

누가 처음 발표를 했는지는 몰라도 9월의 classic은 바로 곡이 아닐까? 패티킴의 version이 바로 그것인데 아깝게도 그것은 이마 유튜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에 버금가는 ‘연숙’을 닮았던 “혜은이”의 것이 건재하니까..라고 했지만 다시 찾게 되었다. 멋진 패티김의 pose와 함께… 감사합니다~~

 

dream dream

 
Dream Dream – Everly Brothers – 1960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좋은 꿈’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좋은 꿈’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이상한’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

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날라서 사뿐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진했던’ 그런 ‘초원과 하늘’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찐~’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라이파이, ‘철인 28호‘, 왕현의 ‘저 별을 쏘라‘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잠자리 채’ 로 ‘잠자리 비행기’를 잡던 꿈이었다. 그러니까 ‘방충망’으로 ‘헬리콥터’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잠자리 비행기’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잡았다’.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좋은 꿈’ 중에 하나였다.

 청춘의 절정기에는 ‘성장, 남성 male’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이성을 그리는 환상’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건강’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변태’가 아닐까 하는’틀린’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

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최고’의 꿈은 역시 ‘지적이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가위 눌림‘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히다카 켄조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고민’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천천히, 완전히’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The Exorcist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악몽’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대머리’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서서히’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된 정도로 역사와 ‘실감’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공부, 성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성적’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PBS TV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The Paper Chase..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CBS TV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고전’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Riverview Apartment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PBS TV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진짜’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Hart)이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간신히’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고통’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Prof. Kingsfield)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Hart)을 심리적으로 거의 ‘죽이는’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아직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완전히’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안도감과 기쁨’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그런 ‘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

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역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

 

2011년 7월이여, 안녕..

어느덧 2011년 7월과 작별을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덥긴 했지만 의외로 다른 지역 (특히 Texas, Oklahoma, midwest, & northeast)들이 이곳보다 ‘더’ 더워서 상대적으로, 심리적으로 조금 ‘덜 덥게’ 느껴진, 아니 그렇게 느끼려고 했던 그런 더위였고, 거기다가 다행히 늦은 늦은 오후에 한바탕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가 가끔 우리들을 즐겁게도 했던 그런 올해의 7월 달이 간다. 7월의 초순에 ‘일단’ 끝냈던 water heater project 에서 하도 의외의 고생을 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knockout이 되어 그 이후로는 ‘일부러’ 그것들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이 project는 아직 완전한 끝마무리를 못 지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끝이 나서 현재 우리 집의 더운 물을 쓰는 데는 지장이 없다. 7월이 가기 전에 100% 끝을 내려고 했지만, 사실 아직도 다시 손을 대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 푹~ 쉬는 동안에는 summer reading 에 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갑자기’ 읽어야 할 must-read-list가 늘어나고 있어서 더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올 여름은 아직도 한달 이상이나 남아 있어서 당분간 이 ‘게으른 독서’는 계속이 될 것이다. 
 

1980년대 에스페란토 교본
1980년대 에스페란토 교본

이번에 전에 읽었던 책을 반납을 하러 도서관엘 가서 아주 우연히 에스페란토(Esperanto)에 관한 책을 보고 빌려오게 되었다. 나는 이 에스페란토란 말 자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꽤 친숙한 것이었다. 물론 중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잠깐 그 말을 본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세계사에서 잠깐 언급할 정도인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왜, 그것이 친숙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생전 보지도 못한 나의 아버지(이정모, 평창이씨 익평공파 27세손)께서 육이오 동란 전까지 ‘조선 에스페란토 ‘의 회원이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로 보아서 중요 멤버였을 것이다. 회원들이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을 본 것도 또렷이 기억을 한다. 그 이외에도 아버님께서 쓰시던 책들 속에서 에스페란토에 관한 것이 꽤 많이 있었다. 물론 어린 나이에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중에 세계사 시간에 잠깐 배우게 되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추억과 더불어, 150년 전에 폴란드의 자멘호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세계평화를 위한 인공 언어’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갑자기 궁금해 진 것이다. 빌려온 책은 1980년대에 발행이 된 그런대로 오래된 책인데, 잠깐 훑어보니 나의 예상과 달리 꽤 잘 보존되고 살아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아직도 희망한 만큼 널리 알려진 언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동호회’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다.

 

 

아.. 윤용하(尹龍河) (교우)님이여

1972년 경향잡지, 윤용하 교우님에 대한 기사
1972년 경향잡지, 윤용하 교우님에 대한 기사

아주 우연히 옛날 옛적의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가톨릭 월간 , 1972년 8월호를 인터넷으로 보다가 귀에 익은 노래제목이 눈에 띄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였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대중 유행가로 불렸던 가곡 가사의 첫 부분이었다.

흔히 말하는 유행가가 아니고 오래 전에 작곡이 되었던 가곡을 인기 여가수 문정선씨가 유행가로 편곡이 된 것을 부른 것이 그 당시 크게 인기를 얻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경향잡지 기사의 제목은 사실 “복음의 증인들” 이라는 연재 기사로서 제목은 “보리밭 사잇길로: 작곡가 윤용하(요셉) 일대기” 였다. 그러고 보니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라는 이름이 조금은 기억이 나는 듯 했다.

우선 이분이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그래서 우선 반가웠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무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 문득, 윤용하 형제, 교우님” 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이 잡지 기사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일대기” 라고 부제를 부칠 정도로 이분의 전체적인 일생을 간략하게 묘사를 해 놓았다. 이 기사는 아주 엄숙하고 심지어 처절하게 시작을 한다.

 

예술가는 가난했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빈이무원(貧而無怨)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 처참한 곤비(困憊) 속에서도 신앙과 순수와 낭만을 지킨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요셉)는 죽어서 이름을 남겼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으면 이렇게 일대기가 시작되었을까? 1922년에 태어나고 1965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43년을 사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너무 일찍 가신 것이라 우선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를 살아본 경험은 그 당시 가난하고 병이라도 있으면 참 불운한 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라는 것,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분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신 듯 한데, 왜..라는 것보다는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더 들 정도로 이해를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나의 blog에 썼던 이진섭씨에 관한 글이 생각났다. 이진섭씨도 술로 인해 명을 다 채우지 못하시고 가신 것이다. 나이도 비슷하니 비슷한 격동기를 사신 분들이어서 자꾸만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인생, 일생은 너무도 달랐다. 그 두 인생은 어디에서 왜, 어떻게 바다와 같이 넓게, 멀어져 갔을까?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너무도 안타깝고 나중에는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더 알려지게 된 것도 그렇다. 사후의 그런 때늦은 ‘예술가로서 인정 받음’을 왜 생전 시에는 못 받았을까? 그랬으면 그렇게 가난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더 이 불운의 ‘천재’ 예술가에 대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 바라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가서 본 것을 이런 글로 남겼는데 흡사 천재작곡가 모차르트의 죽음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윤용하가 4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보도의 필요성에 쫓겨 빈소를 찾는 데 신문사의 기동력을 동원했지만 한 번지에 수천 호가 잡거하는 판자촌인지라 이틀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천재가 누워 있는 곳은 판잣집도 못 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저렇게 이승을 마칠 수 있었던가 가 원망스러웠던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이 천재적인 수준일지도 모르는 예술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상세하지를 못하다. 아마도 그를 알고 지냈던 인물들 대부분이 일말의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느껴서 밝히기를 꺼려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각자의 운명은 우선 각자 자신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환경적인 것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예술가가 다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 가난했다고 다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니다. 숙명, 신앙, 순수, 낭만.. 이런 것들 만이 과연 불우한 삶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윤용하씨의 대명사가 될 수 있을까? 다음의 음악 평론가 이상만씨의 글은 나를 다시 더 슬프게 한다.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 용하였다.

 위에 언급한 1972년 가톨릭 경향잡지의 기사를 보면 다른 각도로 본 님의 불우한 생의 마침을 보게 되어서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이 당시 자녀들은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 아마도 어렸을 듯 한데,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누가 보아도 용하의 병색은 완연하였다. 용하가 간장질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의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그를 성모병원에 입원시킬 생각으로 성모병원의 의사를 그의 필동 셋방살이 단칸방에 보내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치료를 받아도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용하는 입원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앰블란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더라고 한다.
병상에 누운 지 3개월, 최 모이세(광연) 신부에게 최후의 성사를 본지 사흘 만에 아내와 어린 남매를 두고 조용히 운명하니 1965년 7월 23일이었다.
26일엔 명동 대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지내고 금곡리 천주교 묘지, 먼저 간 그의 부친 무덤이 마주 보이는 곳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아무리 님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 공헌을 높이 사고 싶어도 가정적으로 한 가장으로써는 완전한 실패인 인생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윤용하 평전을 읽으면 한층 그런 나의 생각이 굳어진다. 

윤용하,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의 소유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산 중턱 움막판자집 단칸셋방이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등진 후 유전만을 거듭했을 뿐, 다시는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면서 부터 부모와 다른 오 남매 동생들과 더불어 함께 한 일이라곤 없는, 그가 살다간 시대만큼이나 불행한 유랑인 이었다.
그가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생전에 자신의 작곡 집 한번도 내보지 못한 부실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 당해 부인마저 집을 나가버릴 정도로 초탈한 생활무능력자였다.

 

 이렇게 아주 듣기에 거북할 정도의 냉정한 글도 모두 사실일 것이다. 본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다 술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절대로 찬성을 할 수 없는 생활방식이 아닐까? 그런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아닐 것이다. 나의 어머님도 육이오 때, 남편을 잃고 우리 집 두 남매를 여자의 몸으로 다 키우셨다. 그것은 아마도 우선가정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이 제일 크게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재능을 가시셨고 음악계에서 활동을 하셨던 분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는 자신까지 희생을 해야만 했던가? 이것은 정말 비극중의 비극이다.

 이렇게 거의 체념과 체질에 밴듯한 ‘가난의 생’은 아마도 님의 선조들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님의 부친 대에 이르러 대원군 당시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심심유곡(황해도 구월산)에서 옹기를 구워가며 살게 된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신앙을 고수하려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인데 어찌하여 이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런 불안한 환경 속에서 자란 님은 사실 이때부터 ‘떠돌이’ 기질이 배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이진섭씨와 같이 술을 ‘통제’ 못한 것은 결국 병과 일찍 타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시대, 울분, 신앙심 등이 조금 짐작이 간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삶을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신앙’과 ‘작곡’과 ‘술’ 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가 막걸리를 들지 않는 날은 이상한 날로 꼽힐 만큼 현실의 불만이나 불우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기염을 토하곤 하였다. 그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줍어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는데, 사순절 기간인 40일 동안만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사실로 그의 신앙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을 죽을 때가지 간직한 윤용하 교우님, 교회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조선인’들의 음악 활동을 그 어려운 때 만주에서 조직, 활성화하려고 노력을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그의 ‘저돌적, 동키호테적’ 인 면모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자유인 예술가’ .. 그것이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사회란 굴레’에서도 못 견디었을 자유인..그런 그가 어떻게 ‘학벌과 연줄’이 판을 치던 곳을 술 없이 견딜 수 있겠는가? 다음의 글을 보면 그 만의 ‘졸업장’에 대한 독특한 고민을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윤용하 님께서 젊은 시절 활약할 당시의 ‘조선 음악인’들은 거의 현재 한국의 음악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님의 재능을 한결같이 인정을 하고 있다. 특히 제일 가까이에서 ‘자랐던’ 오현명씨의 증언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거의 드라마에 가까운 비극적인 이 ‘인생 역마차’ 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한 사람은 남산 중턱의 번지 없는 판자집에서 치료 제대로 받지 못하며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다른 사람은 대한민국 음악계의 중심에서 ‘건강’하게 활약을 하는 이런 것이 현실이었다니.. 물론 그이 주변에서 ‘도움’을 주셨을 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노래는 즐겁다 – 윤용하 작곡

 물론 ‘보리밭’이라는 유명한 가곡을 남겼지만, 그것보다 나는 이분이 동요 <노래는 즐겁다>의 작곡자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이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전쟁 후의 황량하던 그 어린 시절, 이런 추억의 동심 어린 아름답고, 주옥 같은 노래를 남겨주신 것이다. 그 당시 우리들, 이 동요를 부르고, 들을 때면 정말 그야말로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는 어떠한가? 광복절만 되면 이 노래를 열심히 도 불렀다. 누가 작곡했는지도 모르고.. <나뭇잎 배>란 동요도 기억을 한다. 여자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것이라 나는 그다지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아내 연숙에게 물어보니 아주 애창곡이었다고.. 덧붙여 ‘심각한 가곡’ 인 고독’이란 가곡도 들어 보았다. 어떻게 이런 곡이 그 동안 숨어있었을까?

1965년에 돌아가셨는데, 세월은 님을 역시 알아보게 되었고, 2005년에는 ‘윤용하 기념사업회‘ 까지 발족이 되어서 역사에 남게 되어서 그 동안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가게 되는 모양이다. 가실 때가지 간직하신 신앙이 자랑스럽고, 남겨주신 주옥 같은 동요, 가곡들도 자랑스럽다. 천국에서도 이런 것을 아시고 조금이나마 만족을 하시리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님의 명복을 빈다.

 

한여름 ‘게으른 독서’의 즐거움

한 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이다. 고국은 아마도 이맘때 쯤이면 장마가 한창이지 않을까.. 하지만 전혀 감이 없다. 그저 수십 년 전의 서울의 모습을 회상을 하면서 떠 오른 이맘때면 아마도 매일 ‘구질구질’하게 내렸던 비, 그것이 장마가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다. 이제는 해변가의 하~얀 모래 백사장을 본 것도 아주 오래되어간다. 그 찬란한 여름의 햇살아래 펼쳐진 푸른 파도와 하얀 백사장.. 그것이 여름의 맛일 것이다. 그곳에 못 갈 것도 없건만 다른 한편,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도 않다. 한마디로 귀찮은 것이다. 이럴 때, 최고의 낙은 역시 게으르게 뒹굴며 읽는 책들이 아닐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summer reading이란 말 조차 있지 않던가? 오래 오래 전,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살던 중앙고 2학년 시절이 그랬다. 입시준비의 압력이 오기 전해 여름방학 때, 그야말로 시원한 마루바닥에서 누워서 읽던 책들.. 이것이 바로 ‘독서의 즐거움’의 진수일 것이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그야말로 ‘재미로서의 독서’, 그것이다. 그때 제일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그 흔하던 ‘삼국지‘였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삼국지..하면 1964년 여름의 남영동 집 마루가 생각나는 것이다.

올해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몇 권의 책을 준비하고 읽고 있는데, 현재까지 거의 2권을 읽었다. ‘피서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옛날에 느꼈던 ‘게으름’은 조금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영어 판 Dan Brown의 <The Da Vinci Code>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의 한역 본이 그것인데, 두 권 다 ‘재미’ 있기는 하였으나, 끝 맛은 개운치를 않았다.

우선 2003년에 나와서 “시끌벅쩍” 하게 화제를 뿌리고 그에 따라 돈을 ‘억수’로 벌었던 다빈치 코드.. 몇 년 후에는 영화까지 나왔던 그 책이다. 왜 시끄러웠냐 하는 것은 나도 안다. 문제는 그 당시에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주 마음이 상한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것은 좋은데, 그 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까?

거의 사실을 가장해서 쓴 ‘허구’ 이지만, 자칫하면 소설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이 만약 이슬람교회를 주제로 했다면, 그들의 이제까지의 경험을 보아서 아마도 암살단이 곧바로 이 저자의 저택으로 쳐들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가톨릭을 이렇게 비하한 것은 기독교의 기본 사상인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사상을 역 이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피해를 보았자 그저 흔한 ‘법정소송’ 정도였을 것이다. 이래서 나는 이 저자를 개인적으로 ‘증오’ 하기로 했다. 아무로 $$$가 좋기로 서니..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을까?

시오노 나나미,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70대의 일본인 여성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한역 본은 우선 번역이 아주 산뜻하게 잘 되어있어서 읽는데 쾌적하였다. 아마도 일본 글과 한글의 유사성이 번역이란 거창한 과정을 아주 쉽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글이라도 원저자의 ‘문필 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우선 저자가 역사학자인줄로 잘 못 알았다. 그런 시각에서 보니 아주 부자연스러운 점이 너무도 많았다. 암만 ‘이야기 체’로 썼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역사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저자의 정치,역사 철학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야기 체로 그 긴 역사를 풀어 쓴 ‘솜씨’는 가상하지만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로마인을 찬양’ 하는 것은 조금 다시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게 하였다. 역사와 문학을 거의 의도적으로 접목을 시키고 상업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듯한 냄새, 거기다 저자의 은근한 feminism까지 곁들여, ‘매력적인 로마의 남자’들을 부각시킨 것들을 보면서 참, 너무나 상업화된 출판계 현실도 거슬린다.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저자는 ‘이 남자, 저 남자’를 거론했는가. 왜 그들이 남자임을 그렇게 밝혀야만 하는가? 그것은 심지어 번역자까지도 합세해서 ‘멋진 남자’들을 강조한다. 저자가 결론으로 내놓은 것에 나는 아연실색을 하게 되었는데.. 골자는 이것이다. 현재까지의 로마 역사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필요이상으로 ‘악하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공산주의적 유물론적 탈 신앙적인 저자의 발상인 듯 싶다. 그것과 더불어 로마사의 대가들을 ‘비판, 의심’하는 것은 아무리 저자가 1970년부터 이탈리아에 살면서 로마를 느꼈다고 하지만 너무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역사’과학’자가 아님을 자꾸 잊는 것이 아닐까?

 

2011년 7월 초순을 간다..

2011년 7월 초순이 서서히 흐른다. 비에 젖어 조금은 덜 시끄럽게 느껴진 Fourth of July의 fireworks도 다시 잠잠해지고, 찌는듯한 여름더위가 조금은 주춤해졌다. 이제부터 약 2개월의 더위를 ‘즐기면’ 다시 찬란한 단풍을 보게 되는가.. 이것이 세월의 흐름이고 계절의 순리인 것이다. 올 봄의 ‘극악한’ 날씨들도 조금씩 ‘착해지는’ 듯 별로 날씨에 대한 빅뉴스가 없어지고 있고 hurricane도 long-term forecast 는 못 보았지만 평년보다 조용하다.

Rheem 40 gallon gas water heater
Rheem 40 gallon gas water heater

Rheem Gas Water Heater,  지난 휴일을 낀 주말은 완전히 water heater(온수기?) 에 매달려 시간을 보냈다. 거의 15년을 무사고로 우리 집의 더운물을 공급해 주던 온수기(이런 말이 있던가?)에서 거의 한 달 가량 조금씩 물이 새고 있어서 이것을 새것으로 갈 때가 온 것을 알았다. 지난 번, 그러니까 거의 15년 전에는 조금씩 샌 것이 아니고 거의 폭포수처럼 새어서 고치는 사람을 불러서 새것으로 갈았던 기억인데 이번은 품질이 좋았는지 아주 조금씩 새면서 ‘경고’를 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한번 모험을 하기로 하고 내가 직접 갈아보기로 해서 이번에 작업을 한 것이다. Amazon.com으로 Rheem brand중에서 아주 high efficiency model로 order를 해서 지난 주 금요일, 집에 배달이 되었는데, 전에 쓰던 것 보다 ‘덩치’가 컸다. 거의 100파운드가 넘어서 평소에 운동을 안 한 사람은 아주 힘이 들었을 것이고, 이것을 교체하려면 이런 큰 덩치의 ‘고철’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이런 것 때문에 사람을 시키면 거의 $400이 드는 모양이다. 이것을 내가 절약하는 의미도 있고 해서 직접 시도를 한 것이다.
YouTube video를 보면 사실 아주 ‘쉽게’ 묘사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 수도관에 관련된 plumbing job이 ‘재수’가 나쁘면 정말 사람을 괴롭히는 그런 것이니까..결과부터 말하면 ‘예상 외로 운이 나빠서’, 지독히도 고생을 했다. 7월 4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Home Depot를 4번이나 왕복해야 했고, 결국 밤 늦게 더운물을 쓸 수 있었다. 속으로 $400 절약이 사실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제일 골치가 ‘묘한 위치’에서 soldering(납땜질)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역시 pro가 아니면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납땜을 안 하는 new technology (Sharkbite)를 쓰게 되었는데.. 사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밤 늦게 ‘더운 물’이 나온 것은 정말 감격적인 경험이었다.

복자 때 그려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본
1971년 당시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본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지난 7월 5일은 고국의 가톨릭 성인중의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날이었다. 그날이 주중에 있어서 당겨서 7월 3일 주일에 대개 ‘이동 경축’ 미사를 드린다. 내가 ‘소속’된 이곳의 한국 본당의 이름이 ‘아틀란타 김대건 순교자 성당‘이다. 그러니까 더 의미를 느끼게 된다. 고국의 103위 성인은 익히 들어서 익숙하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 그렇게 관심을 일부러 가진 적은 별로 없었다. 우선 과거에 순교자 성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은 끔찍한 생각들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순교하는 장면을 ‘생생히’도 묘사를 했는지.. 인간적으로 얼마나 고통과 비참함을 안 느낄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그런 중에 우연히 고국의 천주교 잡지, ‘경향잡지‘ 의 1970년대 간행본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한국주교회의 website에는 1900년 초부터 현재의 것 까지 모두 이곳에서 볼 수가 있어서 정말 ‘보물 창고’와 같다. 나는 특히 내가 고국에 있었던 1970년대 초의 것들이 제일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사회 상’을 간접적으로나마 회상을 할 수 있을지 모를 기사들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1971년 크리스마스 때의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 1972년 여름의 남북 7.4 공동성명, 그 해의 10월 유신 같은 것들이다.

과학적인 김대건 신부 유해 조사, 1971
과학적인 김대건 신부 유해 조사, 1971

이 곳에서 나는 ‘복자 김대건’ 성인 탄생 150주년 특집기사를 접하게 된 것이다. 성인이 1821년 생이어서 1971년이면 150주년이 되는데 1971년 8월호에는 나에게는 거의 보물과도 같은 특집기사가 있었다. 조금은 움츠려 드는 것은 성인의 두개골을 ‘분석’하는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복자로 부터 성인이 되게 하는 여러 노력의 일환으로 ‘철저한’ 조사를 한 셈이고 그 중에 대형 동상 제작도 있었는데 그러려면 성인의 ‘진짜 모습’에 관심이 많았던 듯 하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요새 우리가 보는 성인의 ‘상본’이 나온 것이 아닐까?

그 당시 유해 측정의 결과가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서울) 가톨릭 대학 신학부 에서는 지난 3월 16일(1971년) 학장 신부님을 비롯하여 조각가, 안과의, 피부과의, 치과의 등 약 10여 명이 모여 125년 전의 김 신부님의 두개골을 3시간에 걸쳐서 정밀히 조사했다. 이날의 측정으로서 25세의 젊음으로 순교한 김 신부님은 신장이 약 177cm이며 미남형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제2 한강교 주변에 있는 복자 성당에 세워질 김 신부님의 석상은 높이 3m로 수단에 각모를 쓰고 오른팔에 십자가를 들고 왼손은 가슴 높이에서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이번 조사에 의해서 생전의 모습을 닮게 동양화가 정재석(비오)씨에 의해 3월 초부터 조각이 되고 있다.

말로만 듣던 성인을 이렇게 ‘가까이’ 접하게 되니 정말 기분이 달라짐을 느낀다. 실제로 살았던 우리들의 ‘할아버지’라는 역사의식이 강하게 들게 되고 너무나 가까이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육이오를 다시 생각하며..

육이오, 6.25, 한국전쟁, 조선전쟁, 해방전쟁, 육이오 동란, Korean War, Korean Conflicts, 심지어 박정희를 위시한 꽤 많은 사람들이 “융뇨” 라는 괴상한 발음으로도 불렸다. 이중에 조선전쟁은 아마도 일본 “아해” 들이 쓴 말이고, <해방전쟁>이란 말은 분명히 전쟁을 도발한 1급 전범, 김일성 빨갱이 개XX이 부른 이름이다. 우리는 자랄 때, 그저 <육이오 동란>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언제 어느덧 61년이나 흘렀을까..

Murder Kim Il-sung with stupid cap
살인자, 민족반역자, 1급전범 김일성 개XX, 전쟁 중의 영양상태가 좋았는지 휴전 후, 병신XX 같은 모자를 쓰고 살이 더 찐 모습으로 ‘승전대회’에 나왔다.

육이오 동란에 대한 나의 어린, 가장 오래된 기억의 대부분이 1952년부터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 해당을 하고 그 때를 어떤 것들은 꿈같이, 어떤 것들은 사진같이 기억을 한다. 하지만 절대로 나는 ‘전쟁이나 전투의 공포’에 관한 것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어떨 때는 한번 쯤 보았었으면 하는 아쉬움 같은 것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조국의 엄청난 격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제일 많은 피해자는 역시 전투를 해야 하는 군인들일 것이다. 죽거나 다치고 다친 군인들 중, 불구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비참한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들을 상이군인이라고 불렀다. 어렸을 적에 참 많이 보았다.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 그들이 거의 거지처럼 구걸을 하는 것을 보았다. 국가는 그들까지 돌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 민간인들도 ‘곁다리’로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특히 육이오 같은 사상전쟁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다른 전쟁에 비해서 더 심하다. 사상전쟁은 사실 그 옛날의 종교전쟁과 비슷할 것이다. 무언가 믿고, 홀려서 싸우게 되니 얼마나 더 치열하고 처참할 것인가? 한마디로 증오로 똘똘 뭉친 전쟁인 것이다.

 

도대체 이 전쟁을 일으킨 사상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평화를 사랑하던 우리 같은 민족끼리 그렇게 저주와 증오로 서로 죽여야 했던가? 전쟁이 없이 해결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분명히 말을 해 준다. 전쟁의 원인을.. 하지만 그렇게까지 서로 죽여야 했었을까 하는 것에는 역시 대답이 없다. 모든 전쟁이란 것이 정당성과 비정당성을 다 내포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력으로 짧은 시간에 자기의 체제로 바꾸려고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공산주의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100% 적나라 하게 노출시킬 뿐이다.

50년 뒤에 그들의 체제와 이념은 거의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그들의 주장은 다 허구인 것도 들어났다. 하지만 우리가족과 수많은 동포를 유린했던 제일 범죄자 집단은 아직도 이북에 도사리며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고, 바보 같이 순진한 ‘남조선’의 일부 인사들은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참 이날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전쟁 발발 초에 납북되셔서 행방불명이 되신 당시 경기고교 영어선생님, 평창이씨 익평공파 27세, 이정모, 우리 아버지를 꿈속에 다시 그린다. 답답하셨던 어머니, 점쟁이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끌려가시다 운명하신 것으로 들었다고, 그것이 전부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 되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고생에 찌들은 피난민들..이들은 지금?
고생에 찌들은 피난민들..이들은 지금?

어릴 때, 육이오 날이 다가오면 나는 사실 공포에 떨었다. 그때의 반공교육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공산당이 다시 쳐들어 오는 가능성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을 모르는 어린 우리들은 그저 공산당이 또 6월 25일 날 쳐들어 온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6월 25일 저녁 때 쯤이 제일 무서웠는데, 그 이유는 그때 만약 저녁 노을이 ‘빨갛게’ 져서 서쪽 하늘이 빨갛게 물들면 그것이 바로 공산당의 포격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우리들은 순진했다. 설마 설마 하지만 그 때 제 2차의 육이오 전쟁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무서운 꿈도 많이 꾸었다. 한번은 꿈속에 남산을 바라보니 그들의 대포가 일렬로 정열을 하고 우리를 향해서 포격 준비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전쟁의 결말이 휴전으로 끝이 나면 역사적인 판정을 누가 내려줄 것인가? 왜 휴전으로 끝을 내어야 했을까? 이것은 암만 역사가들이 머리를 굴려도 명확한 해답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거의 종교적인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나의 종교관의 변화로 이제는 한 단계 높여서 해석을 하고 싶다. 하느님의 한반도에 대한 원대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바꾸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Ohio State, First Years (2)

고윤석씨 부부, 1979
고윤석씨 부부, 1979

고윤석씨는 비록 전기과의 undergraduate에서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는 나이 때문에 그의 classmate들 보다는 우리들과 더 잘 어울리고 학교의 규칙에 어긋나지만 우리들과 같이 대학원생의 office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활발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호남(好男) 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데는 남모르게 힘들어했다. 우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상대적으로 수학실력이 같은 학년의 한국학생들보다 떨어졌고, 그 다음은 전공에 대한 정열이 그렇게 많지를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전기과의 직업전망 때문에 이 과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끔 유근호씨에게 ‘전기’에 대한 정열이 없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우스웠다. 내가 보기에는 정 반대로 보였는데..

고윤석씨의 부인은 연대 사학과 출신의 연상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고윤석씨의 활발한 성격으로 열렬한 구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억에, 유학생들의 파티에 가서 보자마자 춤추기를 청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구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였다니.. 나는 조금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OSU Admissions Office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누가 다음학기에 이 학교로 오느냐 하는 것 뿐만 아니고 대부분 유학생들의 상세한 학력이나 이력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부부와 나는 가깝게 지낸 편이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 특히 나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아직도 고윤석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다. 언젠가 편할 때 정식으로 사과를 하려 했지만 그것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유근호 형과 박호군씨, 1978
유근호 형과 박호군씨, 1978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비록 나와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나는 사람이다. 화학과의 박호군.. 고등학교는 모르겠지만 서울대 출신으로, 거의 영화배우 같은 느낌을 주는 호남형이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까 거의 ‘이상적인 남자’ 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이분은 내가 입학하자마자 부터 유근호씨 덕분에 자주 보게 되었다. 내가 유근호씨와 가까이 지낸 때문에 사진에도 남아있다. 기억에 유근호씨가 참 이 분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아마도 둘 다 천주교 신자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가까이 지냈는지도.. 그리고 이분의 부인이 남편과 같은 화학과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유학생이었고, 남편은 유기화학, 아내는 무기화학을 한다고 해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우연히 인터넷 으로 한국천주교 주교회 발행 월간 경향잡지를 보다가 어떤 여자분이 화학에 대한 수필을 쓴 것을 보았는데 저자의 이름이 조금 귀에 익어서.. 약력을 보니 역시 Ohio State 출신이었고, 이분이 바로 박호군씨의 부인인 황영애 씨 (상명여대교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첫 학기, Winter quarter 나의 ‘기본실력’을 테스트하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이곳에서 잘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때였다. 내가 좋아하던 나의 passion 이던 control system의 여러 과목을 ‘대거’ 신청, 수강을 하게 되었다. 이것만은 내가 자신을 하던 것들이라 아주 ‘과중’하게 신청을 하고 단단히 별렀는데, 과정과 결과가 아주 ‘참담’하였다. 수강과목이 너무나 많았고, 대부분 ‘어려운’ 것들이어서 겨울을 거의 office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과목은 결국 withdraw를 하게 되었다. 제일 공을 많이 들인 과목이 digital control system이었는데, 교수가 아주 어려운 사람, Dr. Fenton이어서 사실 A학점 받는 것은 미리 포기할 정도였다. 이것 때문에 나는 사실 classical control system에서 많이 열기가 식었지만, 뜻하지 않게 친하게 된 digital system쪽으로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 겨울학기는 유난히도 힘이 들었는데,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에게는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다. 차 사고가 아니고, 내가 타고 다니던 bike(자전거)사고였다. 이것은 시카고 있을 때부터 타던 그런대로 편리한 12 speed, disc brake이 있었던 것이어서 이렇게 큰 캠퍼스에서는 정말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그런데 추운 어느 날 캄캄한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 학교 내의 어떤 길에서 신나게 달리던 중, 바퀴 밑에 무언가 걸리고, 나는 공중으로 떠서 완전히 얼굴로 아스팔트 도로에 떨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얼굴에 심한 마찰,타박상을 입게 되었다. 정신은 말짱해서 다시 office로 돌아와서 얼굴에 흐르는 피를 씻고 보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office에 남아서 공부를 하던 고윤석씨와 이규방씨가 보고 놀라서 학교병원에 전화를 하고 구급차까지 와서 나는 졸지에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여자 의사가 다짜고짜로, “Who i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하며 물었다. 아마도 나의 머리를 의심한 듯 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해서, “Jimmy Carter“라고 대답을 하고 얼굴에 상처를 소독을 한 후 나를 내보냈다. 그 상처는 거의 한 달이 갔는데, 붕대를 얼굴에 처매고 매일 학교 식당을 드나드는 것도 웃기고, 그것을 계기로 한 과목을 withdraw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봄학기 때는 조금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Dr. McGheeAutomata Theory란 과목에서는 100점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Graduate Research Associate (RA) 자리를 소개받게 되기도 했다. 그 자리는 인도 출신의 digital system교수인 Dr. Jagadeesh 가 일하던 OSU 약학대학의 연구실이었다. 그러니까 전기과와 약학대학간의 공동 연구실인 셈인데 그곳엘 가니 전에 말한 김미영씨와 최희경씨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이 연구실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1979년 여름까지 계속 되었다. 최희경씨는 경기여고, 서울대 약학과 출신의 전형적인 수재 형이고, 그녀의 남편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의사로 조금 있으면 OSU로 올 예정인, 부부 둘이 소위 말하는 KS 마크 부부였다. 김미영씨는 최희경씨의 선배였는데 이분도 은근히 공부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하는 그런 재주 있는 분이었다. 그 당시는 처녀였지만 1년 뒤에 수학과의 최봉대씨 와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된다.

가을학기가 되면서 비교적 가족적인 분위기의 우리 전기과에도 조금 찬 공기가 느껴지게 되었다. 새로운 유학생들이 도착한 것이다. 경복고, 서울대 출신의 민위식씨, 용산고, 서울대 출신의 박인규씨.. 완전히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이들은 그런대로 reasonable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절대로 chemistry는 맞지를 않았다. 이것은 참 아까운 노릇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Randy VanWarmer

1979년 OSU campus를 생각케 해 주는 classic

가을학기가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Dr. Jagadeesh 밑으로(RA) 들어가서 그의 약학대 연구실에서 digital speed control of DC motor 란 주제로 논문을 쓰는 준비를 하게 되었고 실제로 전에 이용한씨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만들어 놓았던 centrifuge control system을 내가 물려받아 거기에 쓰일 microprocessor-based(Intel-8085) motor speed control system을 design하게 되었다.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하는 과제로 논문을 쓰게 되어서 큰 부담이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약학대학이라는 인상보다 computer lab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최첨단의 컴퓨터 시설이 되어있었는데, 그 제일 큰 이유는 나의 지도교수의 약대 상대편 교수가 완전히 컴퓨터 ‘광’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 mini computer가 단과대학 연구실의 주 기종이었는데 실제로 전기과나 computer science 쪽 보다 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그 교수는 Dr. Olson이라는 사람인데 어디에서 돈이 그렇게 오는지 계속 새 것만 나오면 사곤 했다. 하기야 이것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참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온통 낮과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많이 몸을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것과 더불어 실제적인 것을 이때 많이 배우게 되어서 나중에 직장에서 일할 때 두고두고 이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같이 공부하던 이재현씨는 거의 ‘이론적’인 것에 관해서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아마도 computer hardware쪽에 큰 흥미가 없어서 그런 듯 싶었다. 이런 approach는 나중에 대학에 남게 되면 좋겠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제한을 많이 느끼게 된다. Digital hardware와 일을 하는 것은 밤을 새우고도 결과가 별로 없을 수 있는 고된 일이고, 그것에 맞는 software가 성공을 하면 그것의 ‘임자’가 대부분 ‘칭찬’을 받곤 했다. 이런 것들을 이때 뼈저리게 몸으로 경험을 해서 나중에 나는 완전히(more) software (than hardware)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고, 나의 lifelong career가 되었다.

김정국 씨, 1979
Computer Science, 김정국 씨, 1979

논문의 결과가 서서히 윤곽을 들어낼 쯤, 1979년 Spring quarter쯤에는 computer science쪽으로 새로운 유학생이 도착하였다. 이름은 김정국씨… 나와 비슷한 나이고 유근호씨와 서울공대 전기과에서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서울공대 전기과 출신인 것이다. 청주고 출신이었으니 얼마나 그때 공부를 잘 했던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자마자 우리 그룹과 잘 어울리며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김정국씨는 비록 전기과 출신이었지만 졸업 후 은행에서 이미 전산(computer)쪽으로 경험을 쌓은 경력자였다. 그래서 완전히 computer science쪽으로 공부를 하려고 유학을 온 것이고 그것도 은행에서 ‘보내준’ case여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강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나의 매부가 그 쪽에서 일을 해서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김정국씨는 도착 후 일년 뒤쯤에 부인도 뒤따라서 오게 되었고, 나도 그 당시 결혼을 해서 두 couple이 만나서 식사도 했는데, 섭섭하게도 곧 바로 Georgia Tech으로 transfer를 하고 말았다. 우리는 사실 비슷한 나이의 부부여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참 섭섭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인연이 있었는지 우리는 1989년에 아틀란타에서 정말 오랜만의 해후를 하게 되었다. 서로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김정국씨 부인은 다른 인연으로 아틀란타 한국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부부도 그곳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한참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세월의 바퀴 속에서 나중에는 거의 잊고 살 게 되었다. 김정국씨는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비교적 일찍 암으로 운명을 하고 말았다. 비록 가깝게는 못 지냈어도 항상 마음 속에 있었던 김형..이었다. 세월로 보아서도 참 오래 된 ‘지인(知人)’ 이었고, 무엇 보다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1979년 여름학기가 지나가면서 Master’s degree 과정이 다 끝이 나고 나는 곧 귀국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여서 어딘가 좀 쉴 곳이 그리웠다. 물론 다시 올 것을 예정하고 돌아갔지만 나이 때문에 결혼을 피할 수가 없어서 거의 6개월을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시 Ohio State로 돌아와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되지만 전의 2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과 환경이고 주변의 사람들도 거의 ‘완전히’ 바뀌게 된다. 특히 1980년 유학자유화가 이루어 지면서 ‘대거’의 유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게 돼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가 더 좋으냐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good ole days를 그리게 되고, 마음이 편할 정도의 학생 수가 있었던 1980년 이전이 더 그리워 짐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끝)

 

시카고 서울식당, 1974

시카고 서울식당 자리 by Google Street View
시카고 서울식당 자리 (by Google Street View)

가끔 생각한다. 1974년 봄을.. 미국생활 일년이 조금 안 되던 그 해의 초여름, 5월부터 나는 시카고 N. Clark Street 있던 조그만 한국식당, 서울식당이란 곳에서 dishwasher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해 3월 말에 나는 텍사스주의 달라스에서 홀로 차를 몰고, 전혀 연고가 없던 이곳으로 왔다. 달라스에서 잠깐 알고 지냈던 University of Dallas 유학생, 경기고 출신 유승근 형 그룹 중에 경기고 배형(이름은 잊어버림)이라고 있었는데 그 형의 조언으로 이곳에 혼자 오게 된 것이다. 자기가 여름방학 때 시카고에서 일을 했던 경험을 내게 일러준 것이었고, 그 것이 나와 시카고의 인연을 맺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는 사실 유학생들이 여가시간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수두룩 닥상’ 으로 많았다. 비록 이민법에 유학생들의 임시 취업에 제한은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거의 자유스러웠다고 할까. 특히 여름방학 같이 긴 기간에는 돈을 꽤 많이 버는 학생들도 많았다. 고국에서의 $$ 송금이 아주 힘이 들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이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일 중에서 제일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유학생이면 거의 예외 없이 해 보았던 ‘전설적’인 dishwasher, 그러니까..접시딱기 였다. 이 접시딱기라는 단어를 typing하니까 계속 spelling error가 나와서 살펴보니 사전에 그런 말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행어, 구어 정도이고 아마도 요새는 그런 말 조차 없어진 것을 느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그 해 3월 말, 음산하게 춥고 눈이라도 올 것같이 흐리던 시카고에 도착을 해서 배형이 가르쳐준 대로 Lincoln Avenue 근처 Cornelia Avenue에 있던 낡은 한국교회를 찾아가서 그 교회의 지하에 있던 “기숙사” 칸막이 방에 짐을 풀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이 바로 아마도 그 당시 서울 청계천변에 있던 봉제공장의 기숙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곳은 음산하고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좁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칸막이로 만든 방이라 천정이 서로 다 통해서 서로의 말 소리가 모두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말을 해서 그렇고 그 당시 그 젊은 시절에는 그것도 ‘재미’로 느꼈다.

나이들이 거의 내 또래인 남자들이 너 댓 명이 있었고, 놀랍게도 여자도 한 명이 있었다. 나의 바로 옆방에는 농업연수생으로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청년, 그리고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업이민 온 청년, 그리고 아직도 이름이 생각나는 사람, ‘최 식‘씨가 있었다. 이 분은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위였는데 아주 정이 많고 친절한 분이었다. 그 당시 많은 시카고의 교포들은 소규모 제철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템펠 steel이란 곳에 제일 많았다. 이 분도 그곳에서 일을 했었던 듯 싶다. 비록 힘이 든 일이었지만 그 당시 고국의 경제에 비해서 훨씬 많은 보수를 받으니까 사실 모두들 만족스럽게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보아서 아무리 이곳에서 고생을 해도 그것은 보람이 있었고, 장래가 밝아 보였다.

나는 비록 수중에 $$은 거의 없었지만 힘차게 잘 구르는 “8기통” 차(’68 Ford XL)가 있었고 한창 젊은 나이로 모든 것들이 새롭고 멋있게 보여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교회의 지하 기숙사는 월세가 거의 공짜에 가까웠고 식사는 같이 살았던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먹으니 그것 또한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의 분위기는 ‘일 없이 놀고 먹는다’는 것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무언가 일을 해야 서로 말도 통했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달라스를 떠날 때 배형으로부터 시카고의 한 남자를 소개 받은 적이 있었다.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이성용” 씨가 아니었을까? 우리들 보다 나이가 조금 밑이었던 이민을 온 친구였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 부인과 합류를 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도움을 좀 받았고, 그 때 배형이 이곳에서 여름방학에 일을 할 때 어울렸던 우리 나이 또래의 여자까지 소개를 받게 되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박영선” 씨였는데, 물론 처녀였고 시카고 영사관 직원의 친척이었다. 그리고, 그 집의 ‘가정부’ 로 일하는 조건으로 미국엘 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아가씨의 아파트에 혼자 초대까지 한 번 받기도 했다. 그녀와 배형, 이성용씨가 어떤 관계인지 나는 전혀 아는 바는 없지만 별로 큰 생각 없이 초대를 받았고 대접도 받은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고 이들 그룹이 아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아주 불미스러운 소문들을 듣게 되었고, 나도 거의 봉변에 가까운 일을 당하게 되어서.. 그 때를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아직도 언 짠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관계가 아주 복잡한, “난순이” 형의 여성이라고나 할까… 정서적으로 아주 불안한, 미안한 표현으로 조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 타입이라고나 할까.. 이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시카고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계속 비슷한 스토리로 듣게 되었다.

이런 불쾌한 일도 있어서 다 잊고 일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역시 이성용씨가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묵고 있던 교회의 한 분이 자기가 일하는 곳을 소개 시켜주어서 가보았는데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성용씨가 같이 서울식당이란 곳에 가보자고 해서 가서 주인 아저씨,아줌마를 만나게 되었는데, 일자리가 현재는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곳에서 일을 하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그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Clark at Montrose facing North, Chicago

Clark Street는 생각이 났는데 확실히 어디쯤인지 생각이 안 나서 36년도 넘은 기억을 살려서 Google Satellite를 보니 거의 확실해 졌다. 그곳은 Clark & Montrose였다. 이 Google Satellite view를 extreme zooming을 하면 곧 street view가 나오는데.. 나의 짐작이 맞았다. 식당의 입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필리핀 식당으로 변한 것을 보게 되었다. 식당에서 일을 하므로 parking을 건물의 뒤에 하기 때문에 사실 나는 뒤쪽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정말 작은 식당이었다. dining table이 대강 10개 정도가 되었을까? 그래서 일하는 사람도 극소수였는데 주방장은 주인 남자아저씨였고, 손님은 주로 주인 아줌마가 상대를 했다. 그리고 주방 보조를 Mrs. 안 이란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새댁’이 보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내가 주방보조의 보조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주로 접시를 닦는 것과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아침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완전히 12시간의 중노동에 속하는 일이었는데 일주일(6일)에 $120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20을 받으니까 시간당 $2 정도인가.. 그 당시 minimum wage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이것 보다는 높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큰 불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주일에 $120은 나에게는 상당히 큰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2주일을 일하고 번 돈으로 나는 그때 처음 나온 ‘personal’ electronic calculator를 Sears에서 $175을 주고 샀다. 그러니까 지금 쓰는 $10짜리 calculator가 처음 나올 당시에는 그렇게 비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일은 나에게 상당히 큰 경험과 교훈을 남겨 주었다. 교훈이란 것은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꼭 돈을 번다는 것 보다 인간의 존재는 ‘일’에 의해 더 돋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랄까.. 내가 그때까지 정말 ‘심각하게’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특히 고생을 해서 번 돈은 쉽게 번 것보다 더 값어치를 느낀다는 사실도 알았다. 여기서 만난 사람, 주인 부부.. 일명 세란이 엄마, 아빠 애석하게도 성함을 다 잊었다. 두 분은 월남에서 군속으로 일을 하다 만나서 결혼을 했다고 했는데, 젊은 아줌마는 무용을 하던 연예인 출신이었고, 아저씨는 훤출 한 키의 멋쟁이였다. 어떻게 그 식당을 시작했는지는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이 부부는 일이 10시 넘어서 끝이 나면 자주, 거의 정기적으로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Chicago downtown으로 drive를 나가서 영화나 공연 같은 것을 보고 왔다. 어떤 날 밤에는 새로 나온 영화 Exorcist를 보고 와선 완전히 공포에 떨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의 피로를 푸는 모양이었다. 말이 쉽지 하루 12시간을 그 좁은 곳에서 일을 하며 산다는 것.. 참 힘든 일이었고, 후일 에 나는 식당엘 가면 꼭 그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얼마나 힘든 일을 하나 생각을 하곤 했다.

설거지만 하루 종일 하다가 나중에는 조금씩 음식 하는 것에 관여를 하게 되었다. 주로 쉬운 것들이었지만 그 당시 등 넘어 보고, 해 본 것들은 지금도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다. 특히 만두를 ‘빨리’ 빚는 비결, 비빔밥 재료 준비, 냉면 끓이는 법, 우족 만드는 법.. 등등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식당은 우족이란 것이 유명했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것이 비위에 맞지를 않아서 한번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음식을 좋아하는 손님 중에 이지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민 초기에 보험(State Farm)을 하던 젊은 남자였고 한국일보같은 신문을 보면 꼭 광고가 나곤 했다. 그는 우족을 좋아해서 자주 오곤 했는데 꼭 주방에 들려서 주인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서서 먹곤 했다.

주방 보조였던 Mrs. 안 이라는 여자는 얼마 전에 결혼을 해서 한국에서 온 새댁이었다. 남편의 집안은 그 당시 이미 시카고에 이미 정착을 한 안광순 씨였다. 그 분은 템펠 제철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꼭 Mrs 안을 차로 데려다 주곤 해서 인사도 하곤 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농담도 잘 통해서 그 분주한 주방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는 내가 혼자인 것이 측은 했는지 집에 데려다가 손수 밥을 해 주기도 했던, 참 마음씨가 따뜻한 새댁이었다. 하지만 2년 후에 Mrs. 안 부부가 이 서울식당을 인수했을 때, 나의 사소한 실수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전혀 소식을 못 들었다. 어떻게 사시는지 가끔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 아저씨의 도움으로 거처를 환경이 조금 밝은 시카고 중앙교회로 옮기기도 했다. 그곳은 Lawrence Avenue에 있었는데, 그 당시는 거의 한인들이 그곳에 없을 때였다. 나는 거기서 우연히 중앙고 1년 선배 박현식 형을 만났는데, 그 때의 이야기는 나의 다른 blog에 자세히 나온다. 그 해 여름을 완전히 그 서울식당에서 지냈는데, 한번은 많이 듣던 남자 목소리가 식당 쪽에서 들렸다. 알고 보니 가수 조영남의 목소리였다. 주인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였는데, 아마도 전에 이곳에서 식사를 했었고 주인 아저씨와 안면이 있었던 듯 했다. 그리고 기억나는 사람들.. 그때 시카고의 다른 식당, 행복원(Lincoln Ave)이란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밴드가 나오는 큰 곳이었다. 그곳의 밴드 매스터 부부가 밤에 일이 끝나면 이곳에 들리곤 했다. 목소리가 아주 husky하고 부인이 아주 미인이었는데 무슨 미인대회에도 나갔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얘기가.. 연주를 하고 보수를 못 받는 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관객, 손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교민들의 숫자가 그 정도였다. 어느 곳을 가보아도 ‘청중’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서울식당의 조금 위로 올라가면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가 있었다. 이름이 재미있고 따라서 기억하기 쉬웠다. USAKO, 유사코.. 그러니까 미국과 한국(USA & KOREA)이라는 뜻이었을까? 좌우지간 이 정비소의 주인이 서울식당의 단골이었는데, 더 자주 보게 되는 이유는 주인부부의 애지중지하던 딸인 세란이를 이 유사코 사장님의 부인이 babysitting을 하고 있어서 저녁 때 일이 끝난 무렵 부부가 서울식당에 세란이를 데리고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내차도 가끔 문제가 있을 때 이곳에 맡기곤 했는데, 규모가 생각보다 큰 곳이었지만 손이 모자라면 주인아저씨가 직접 차를 고치기도 했다. 아마도 정비기술을 가진 기술자였던 것 같았다. 주말이면 아주 말끔하게 차려 입고 부인과 같이 식당엘 들리기도 했는데, 남편의 ‘보통’ 모습에 비해서 부인은 약간 남편과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사람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해서 하루 12시간, 6일 동안 일을 하면서 그 해 여름을 보냈다. 그 해는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나던 여름이어서 더욱 기억이 또렷하다. 처음 해 보는 중노동이었지만 아주 즐겁게 일을 했고, 일의 보람, 일의 중요성,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에서,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등등을 일깨워 준 시카고 서울식당, 가끔 회상을 해 본다. 특히 주인 아저씨부부 세란이 아빠, 엄마, Mrs.안, 그리고 가끔 나와서 도와주던 ‘옥분이’ 아가씨.. 그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If you love me (let me know) – Olivia Newton-John, 1974
그 당시의 top ‘country’ oldie, 그녀의 전성시대가 시작되던 때
시카고의 TV 뉴스 앵커 Jane Pauley 와 더불어 하루의 피로를
풀어 주던  멋진 여성들이었다 

 

그 당시 거의 매일 듣던 hit song:
Seasons In The Sun by Terry Jacks

레지오 피정에 들어가며..

이번 주말에는 아틀란타 본당 레지오 주최 연례 3일간 봉쇄피정이 있어서 연숙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서 집을 같이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피정(retreat)이라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임은 어쩔 수가 없다. 일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름이 아주 거창하다. 봉쇄피정이라.. 한자로 읽으면 아마도 완전히 3일 동안 외부와 연락이 차단이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상만사를 다 잊으라는 뜻일까? 아직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다. 들은 이야기로 이런 곳에 가려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면 가기 전에 꼭 무슨 유혹이 생긴다고 들었다. 나는 ‘치명적’인 유혹은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벌써 경험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말들이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다 타당성이 있다고 믿게 된다.

나의 집을 ‘물리적’ 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일년이 되어온다. 작년 여름 새로니가 살고 있던 Nashville, TN에 한번 놀러 갔던 것이 전부다. 비록 피정은 Atlanta Metro에서 열리지만 좌우지간 집을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피정은 조금 있으면 주임신부에서 물러나시는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이 지도를 해 주신다고 한다. 비록 새 신부님이 곧 오시게 되어서 주임신부직은 물러나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그 들이 우리의 ‘영원한’ 주임신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에게서 나 개인적으로 받은 은총이 많음을 느낀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웹싸이트를 보면 그곳 발행,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향잡지가 1900년 초 부터 연도별로 거의 모두 수록이 되어있다. digital scanning을 한 것인데 원래 책의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있어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특히 해방 전 것들인데 잘 보여도 읽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국어’에 비하면 거의 훈민정음 스타일의 ‘고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실 한글 맞춤법도 없었을 것이고 한자를 많이 쓰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고색창연한 천주교 월간잡지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살 찌는 약!
살 찌는 약!

내가 우선 관심이 갔던 때는 해방 후와 육이오 동란 전후, 그리고 1960년대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것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천주교의 입장에서 본 것을 알게 되어서 그렇고, 육이오 이후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던 때를 다시 간접적으로 보게 되어서 관심이 간다. 1960년대는 조금 다르지만 약간 ‘근대화’한 한국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라 우선은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조금은 정독을 하려는 희망도 있다.

우선 반가운 그림들을 몇 개 보았다. 광고인 것이다. 천주교 잡지에 광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지만 반세기 넘게 잊고 살던 ‘인기 있던’ 상품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더 반가웠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것이기도 하다. 우선 조금 웃음이 났던 것은 “살이 찌는 약”에 대한 것이다. 요새의 기준으로 보면 과연 얼마나 이해를 할까? 나도 살찌는 약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나도 갈비씨였지만 그 당시는 갈비씨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독일회사 훽스트.. 거기서 나온 ‘고기 먹으면 필요했던’ 훼스탈.. 고기를 많이 못 먹었던 시절 그것을 소화할 효소가 제대로 안 나와서 그랬던 것일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했던 그 때는 피부염, 종기가 참 많아서 그랬던지 ‘이명래 고약’은 정말 그때의 구세주 였다. 어찌 잊으랴?

 

시리즈, 내가 읽은 책: 박기원씨의 이진섭(3,끝)

이진섭씨와 일본

박기원씨는 조금 그렇다 치더라도 이진섭씨는 시대적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일본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다. 그만큼 그들이 속했던 문화는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할 만큼 복합적일 것이다.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가 바로 그 세대여서 사실 우리도 조금은 친숙하다. 일본..하면 우선 정치적으로 ‘죽일 놈의 나라’에 속했지만 확실히 앞서간 근대문명을 악착같이 따라가던 그들을 보고 다르게 봐야 하는, 말하기 싫은 시각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뒤의 우리세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1971년 국제회의 참석차 이들 부부는 쉽지 않았던 해외여행을 하게 되고, 일본을 경유해서 귀국을 하게 된다. 그때 느낀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정이 이렇게 그려진다.

나는 교오토(京都) 등을 관광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도쿄 시내는 택시로 한 바퀴 돌아 보았고, 식사할 때만 호텔 근처에 나가 사먹었다. 그래도 긴자(銀座)니 록봉기(六本木)니 하는, 옛날 소녀 때 일본 소설에서 읽었던 귀에 익은 거리 이름을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이나 나나 왠지 일본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아직도 용서 못할 풀리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이는 공항에서도 절대로 일본 말을 안 쓰고 영어만 쓰는 고집을 부렸다. 우리는 일본에서 아무도 찾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느낌이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아주 이성적인 감정이라고나 할까. 1968년 이력서에서 ‘요주의 인물’의 딱지가 떨어지고 첫 일본여행 당시 느낌이 대표적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퍽 자유로운 곳이야. 그리고 먼지가 없어. Y셔츠, 신발 닦을 필요가 없으니 잔손이 안 가 참 좋군. 언젠가 가까운 날 당신하고 같이 오고 싶은 곳이야.

위의 글은 1968년 당시니까, 그 당시 서울의 풍경과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간다. 완전히 공해에 찌들었던 서울하늘이 완전히 먼지 범벅이던 그런 시절, 손수건이 없으면 100m도 못 걷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미 올림픽 4년 후였던 그곳과 비교가 될 듯하다.

 

샹송과 이진섭

나의 기억에 이진섭씨는 불란서 풍의 문화를 좋아한 듯 하다. 특히 샹송 풍의 노래에 조예가 깊었고, 한때 샹송가수 <이벳드 지로, Yvette Giraud>가 서울에서 공연을 했을 때 공연무대에서 사회를 보았고 그 기사를 어느 잡지에서 사진과 함께 본 기억도 난다. 그렇다면 이진섭씨는 영어, 일어는 물론이고 불어도 잘 했을까? 그렇다면 과연 그가 팔방미인, 박학다식 하다는 말이 맞는 것이다. 그 당시 어렵게 살던 때 어떻게 세계적인 가수 <이벳드 지로>가 서울에 왔을까.. 생각해보니 이것도 역시 일본 때문이었다. 이 샹송가수는 그 당시 일본에서 활약을 하며 일본어로 샹송을 취입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주 후에 영국가수 Cliff Richard가 왔을 때도 비슷한 경우다. 어떻게 그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음악에 관심이 있었을까..아마도 좋던 싫던 간에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그이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리고 음악 속에 살다 갔다.

그이는 젊어서 KBS 아나운서를 하던 시절, 한국 최초로 ‘라틴 뮤직’과 ‘샹송’ 음악을 소개하고 해설해서 그 당시 많은 젊은 음악 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 후에도 프랑스 샹송 가수 ‘이벳드 지로’가 한국에 와서 공연했을 때 그 사회를 맡아 보기도 했다.

그이는 평상시에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소원은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어. 그래서 형님께 일본에 있는 우에노(上野)음악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정신 없는 소리를 한다고 한 마디로 거절 당했지. 어쨌든 나는 그때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꿈이고 소원이었어”

그는 음악을 듣는 귀가 예민하고 정확했다. 음악회에 가서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도 어느 파트의 어느 악기가 지금 어떻게 잘못 연주하는지 잡아낼 정도로 그이는 음감(音感)이 예민했다. 악전(樂典)도 혼자 공부했고, 서양 음악사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Yvette Giraud, 이벳트 지로

 

파리의 연인

유럽에서 만난 연인 부부, 1971
유럽에서 다시 만난 연인 부부, 1971

이진섭씨 부부는 어떻게 보면 정말 행복한 부부였을 것이다. 1971년 그 당시 부부동반 파리여행을 한 다는 것은 이미 평범한 부부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니까. 지극히 낭만적인 이진섭씨는 거의 의도적으로 이런 영화 같은 ‘파리의 연인’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낭만인 이진섭씨가 세계적인 낭만의 도시에서 부인과 만나게 여행계획을 짰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운 일이다. 이런 기회가 일생에서 한번 올까 말까 한다는 사실은 박기원씨가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100만원 짜리 적금을 이 “일생의 여행”에 투자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9월 27일, 1971년

파리 거리의 가운데를 세느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세느 강에는 2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다.

그 다리에서 파리를 바라보는 경치는 유별난 게 있었다. 세느 강변에는 탐스런 푸른 허리띠 같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北回歸線)>이라는 소설 속에 이 경치가 묘사돼 있는데, 이 소설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것이 생각 난다.

우리는 그 세느 강변을 걸었다. 강변에는 화상(畵商), 골동품 가게, 그리고 책 가게가 즐비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자의 강변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치 젊은 연인들 같이 어깨를 감싸고 걸었다.

그이는 49세, 내가 42세! 우리는 좀 늙은 연인들인지도 모른다. 세느 강변의 산책은 아마 영원히 우리를 즐겁게 해주리라.

 

죽음과 재회

거의 영혼의 친구같이 살았던 두 분의 관계를 볼 때, 배우자의 타계는 아주 심각한 것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부부보다 더 고통을 느꼈을까? 일생 문필가로서 서서히 꺼져가는 남편 생명의 촛불을 보며 남긴 일기는 참 감동적이다. 그런 와중에서 글을 쓴 것은 보통사람 같았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이, 깊은 잠에 빠지는 혼수 상태 계속, 산소 호흡, 주사로만 지탱한다. … 가사상태.. 집에서 하던 몸부림도 없어졌다. 거친 숨소리뿐 –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나? 그래도 그의 숨소리가 내 곁에 있고, 눈은 감았지만 살아 있는 몸체가 내 곁에 있는 실재감(實在感)!

….

저토록 잠잠할 수 있을까? 나에게 들려주었던 그 많은 다정했던 말소리. 나를 당황하고 슬프게 했던 그 많은 일들.. 그 모든 것은 모두 어디 두고 저토록 잠잠하단 말인가.

어쩐지 죽음과 같이 있을 이 시간이 점점 두려워진다. 나의 영혼과 육신이 같이 살던 30년. 그 세월이, 그 순간이 순간마다 단절돼 간다.

절대 절명인 이 순간…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순간….

 

이 부부는 가까운 분의 감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이진섭씨는 비록 열정적인, 모범적인 크리스천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분명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갔다. 그래서 남아있게 된 ‘연인’은 저 세상에서의 재회를 믿고 싶고 믿으면 살고 싶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다 읽고 나서…

처음 읽기 시작 할 때, 이진섭씨가 못 채우시고 가셨던 환갑이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제 그것을 넘어서, 이렇게 조금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니 이 책의 느낌이 새롭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나이 때문일 것이다. 많은 부분에 나와 감정이 일치하는 부분은 내가 마음속에 새기며 흉내를 내 보기도 하곤 했다. 그리고 반대로 ‘술’의 멋에 대한 나의 생각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멋도 중요하지만 정도껏.. 그러니까 ‘중용’, 알맞은 멋과 건강과의 균형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는 박기원 여사도 많이 연로하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렇게 솔직한 “일기의 진수”를 남겨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행복하고 건강하신 노후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다. 다시 한번 팔방미인, 다재다능 님의 명복을 빌며…

 

Ohio State, First Years (1)

Ohio "Buckeye" Stadium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나는 1977년 12월 초에 시카고에서 나의 모든 짐을 Plymouth Fury에 싣고 이곳에 도착했다. 같은 해 9월경에 한번 온 적이 있어서 그렇게 낯 설지는 않았다. 그리고 ColumbusI-80 interstate highway로 지나간 경험이 많이 있어서 더더욱 먼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그 해 가을학기, Fall Quarter에 입학을 했어야 했는데 admission office의 사무착오로 한 학기를 기다려야 했다. 대부분의 graduate course가 가을학기에 시작이 되었지만 한 학기 늦는다고 그렇게 불편할 것도 없어서 그냥 한 학기를 편히 쉰 셈이다. 나는 그 당시 그렇게 easy going,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면 ‘급할 것 없다’는 자세로 살고 있었다.

OSU의 graduate school로 오게 된 것은 조금은 우연이었다. 특별하게 오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우선 application fee가 없었던 것이 첫째의 인연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저 그것도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학교 electrical engineering(EE) program의 brochure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진 중에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radio telescope (전파 망원경)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 EE department의 lab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Carl Sagan의 billions of billions of stars.. 에 심취해 있던 시기였고 extra terrestrial(ET)에 관한 것들이 유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런 것들이 ‘어쩌다’ 나를 그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이 학교는 그 ‘덩치’가 아주 컸다. 단일 캠퍼스로는 학생 수 50,000 이상인, 아마도 미국에서 제일 큰 캠퍼스에 속했다. (UT Austin이 제일 크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한국유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는 좋은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그 전까지 한국유학생이 거의 없었던 학교를 다녔던 이유로 나는 사실 큰 학교가 좋았다. 덜 외로울 거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주위에 하면 즉시로 ‘야.. 외로울 시간이 어디 있냐?’ 하는 직격탄이 꼭 나오곤 했지만.

비록 radio telescope의 사진에 반해서 오긴 왔지만 나의 진짜 passion은 그것이 아니고 (feedback) control system이었다. undergraduate에서 나는 이미 advanced control system에 아주 심취해 있었다. 특히 그 당시는 microprocessor(8080-class)의 등장으로 digital control system의 매력이 상당하던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OSU 대학원 한국 유학생회장인 김광철씨에게 연락을 해서 수고스럽지만 rooming house(자취방)를 알아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갈 전기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는 한국유학생에게도 연락을 부탁하고 있어서 정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도착한 날이 12월 초였는데 모든 것이 완전히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 OSU campus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Summit street에 내가 살 자취 집으로 가 보니 한마디로 환경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이에는 사실 모든 것들이 adventure처럼 느껴져서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젊음에 따른 ‘자연적인 낙관성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기시작까지는 사실 한달 이상이 남아있고 그 나이에 완전한 자유의 12월은 느낌이 아주 좋았다. 도착하자 곧바로 학생회장 김광철씨의 연락을 받았는데, 주말마다 학교체육관에 모여서 배구를 한다고, 그리고 그곳에 전기과 학생들도 나온다고 귀 띰을 해주었다. . Lane Avenue에 있던 실내 체육관(Jesse Owens?) 으로 가 보니 한국유학생들이 나와서 배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 중에 전기과에 있던 유근호씨, 이재현씨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학과의 이규방씨도 거기서 처음 만났다.

유근호씨는 나보다 한두 살 위였고, 이재현씨는 반대로 한참 밑이었다. 육사출신의 현역 육군장교인 유근호씨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소탈해서 금새 친해질 수 있었고, 이재현씨는 막내 동생 같이 순진한 청년이라 호감이 갔고, 무엇보다도 내가 속한 전기과에 있어서 이들과 더 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외도 꽤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여학생들도 있어서 조금 색다른 느낌도 주었다. 이 당시 한국유학생(대학원)의 숫자는 아마도 100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학생회장 김광철씨도 만났는데 약학대학에 다니고 테니스를 프로처럼 치는 유학생인데 부인도 같이 공부를 하는 유학생부부였다.

이렇게 콜럼버스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12월 달에는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일 기회가 그런대로 많았다. 특히 자주 모인 곳은 Frambese St.에 있는 rooming house였는데, 이곳에 내가 알게 된 유학생들이 많이 몰려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살았던 사람은 유근호, 안서규, 이규방, 이재현, 국찬표 제씨 등등이 생각난다. 배구를 할 때, 모였다가 우르르 몰려서 그곳으로 가서 놀곤 했다. 나의 자취방은 이곳에서 그런대로 떨어져 있어서 나는 항상 차를 타고 가곤 했다. 이들은 대부분 온지가 한 학기밖에 되지 않아서, 오랜 만에 한국에서 바로 온 ‘싱싱한’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신선하고 색다른 기분을 주었다.

이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 이규방 씨와 안서규씨, 나보다 나이는 한 둘이 밑이었던 것 같지만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이규방씨는 대전고, 서울대 경제학 전공이고 안서규씨는 서울고, 서울대 출신으로 이곳에서는 Industrial Engineering을 공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은 미지의 인물인 국찬표씨라는 사람, 아마도 경영학 전공이었나. 특히 이 분의 이름이 기억나는 것이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극장표’라고 농담을 한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미혼이었지만 유근호씨와 국찬표씨는 기혼이라고 했다. 둘 다 배우자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때 유학생 연말파티가 두 군데서 있었는데 나는 이 새로 사귄 그룹덕분에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어울릴 수 있었는데, 특히 내가 차를 가지고 있어서 빠질 수도 없었다. 유학생 연말파티에서 인상적인 것 중에는 약학대의 김미영씨, 얌전하게 보이던 분인데 춤을 기가 막히게도 추었다. 여기서는 그날 신시내티에서 올라온 중앙고 후배 토목과 고광백을 만났다. 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transfer를 해서 그날 이곳에 도착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콜럼버스 한인회주최 연말파티도 가보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교포사회, 한인 교수들을 포함해서 다 보게 되었다. 그 당시 한인회장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최준표씨였는데, 국악의 퉁소를 독주하는 재주를 보여주었고 특이했던 것은 사회를 이규방 씨가 보았다는 것이다. 이규방 씨는 그 이후에도 이야기 거리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유근호씨(울고 넘는 박달재)와 안서규씨(댄서의 순정) 모두 나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 모두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게 놀아서 아주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Harrison House에서 여자 유학생들과..1977년 12월
Harrison House에서 여자 유학생들과..1977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여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 그들이 몰려 살고 있던 Harrison House란 off campus 고층 아파트에 한 그룹이 놀러 가기도 했다. 그것이 기억에 뚜렷한 것이 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남자 중에는 전기과 이재현씨, 이규방 씨(빠질 수가 없는), 미남형 오용환씨, 그리고 여자 중에는 김영라 씨, 백추혜 씨, 김미영씨, 최희경씨, 김진수씨 등등이 있었다. 김영라 씨는 한국의 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재원씨의 딸이고 서양미술사를 전공한다고 했다. 백추혜 씨는 이화여대 영양학과 출신, 김미영씨, 최희경씨, 오용환씨는 모두 서울대 약학대 출신이고 전공이었다. 이 중에 최희경씨와 김미영씨는 나중에 내가 약학대학에서 RA(research associate)를 할 때 가까이서 보게 된다.

이 중에 이규방 씨는 학기가 시작되면서 계속 우리들(전기과 유학생들)과 가까이서 어울리게 된다. 공부하러 숫제 우리들이 있는 EE graduate student office로 거의 매일 오곤 했다. 그는 비록 경제학도였지만 우리와 어울리는데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대전고, 서울대, 한국은행을 거친 두뇌형인데, 내가 봐도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말도 많아서 자주 구설수에도 오를 정도였다.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나중에 백추혜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백추혜 씨는 알고 보니 다른 인연으로 아내 연숙과 이대 영양학과 선후배 간이고 조교, 학생 사이로 알고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경기,서울,경복고 출신과 서울대 출신들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특히 대학교는 서울대가 압도적이었고, 나와 같은 연대출신은 그 당시만 해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2년 뒤, 1980년 유학자유화를 계기로 이런 통계는 많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유근호씨(육사), 이재현씨 (Rutgers)같은 비서울대 출신만 보면 더 가까움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 전기과에는 위의 두 사람 이외에 공부가 거의 끝나가던 이용한씨, 김태중씨가 있었다. 이 분들과는 사실 거의 교류가 없었다. 이용한씨는 내가 나중에 일을 하게 될 약학대학을 통해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1978년 나의 첫 학기는 겨울학기여서 그런지 눈을 동반한 추위가 기억에 남고, Dreese Lab에 있는 EE student office에서 완전히 밤을 지새며 열심히 공부를 하던 것이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식사도 Jones Tower근처에 있던 카페테리아에서 세끼를 먹으니까 사실 우중충한 rooming house으로 자러 가는 것도 사실 귀찮았다. 유근호씨, 이재현씨, 그리고 undergraduate에 있던 고윤석씨 (이들 모두 전기과) 등이 같은 방에서 공부를 했는데 여기에 경제과 이규방씨가 특이하게 우리들과 같이 공부를 하곤 했다. 안서규씨는 Industrial Engineering 전공인데 건물이 바로 전기과 옆에 있어서 가끔 그의 office로 놀러 가곤 했는데, 그 office가 으리으리하게 넓고 커서 무슨 사장실을 연상시켰다. 일개 대학원생이 어떻게 그런 방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정치적인 재주’ 를 가진 듯 했다. 우리들과 어울릴 때도 ‘무작정’ 어울리지는 않았다.

다른 과의 유학생들은 식당에서 만나게 되는데 항상 같은 table에 모여서 먹곤 했다. 다른 나라 유학생들도 그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니까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들.. 수학과의 최봉대씨, 금속과의 최호진씨, 농업경제과의 노영기씨.. 이중에 최봉대씨는 나중에 약학과의 김미영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들은 물론 대부분 미혼자들이고 기혼자 부부들은 거의 학교 대학원 아파트, Buckeye Village에서 살았다. 나중에 나도 이곳에서 살게 되지만 이곳은 값도 저렴하고, 학교 bus가 있고, 주거환경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유근호씨가 이곳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이중에 생각이 많이 나는 사람, 고윤석씨.. 어찌 잊으랴.. 나이는 나보다 밑이었지만 아주 건장하고 세련된 친구다. 고등학교 때, 조기유학으로 이곳에 와서 지금은 EE undergraduate(학부)의 졸업반이었다. 이미 기혼자였는데, 부인은 연대 출신, 연상의 여인 (나의 연대(사학과) 선배)이었고, OSU의 Admission Office에서 일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학벌, 이력, 신상’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 때문인지 대부분이 대학원생들인 우리들과 어울리고 그 인연으로 우리가 쓰는 전기과 대학원생 office를 같이 쓰게 되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그 부부가 사는 Riverview apartment로 초대를 받아가서 후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계속)

 

그 당시의 즐겨듣던 hit oldie,

Do It Or Die by Atlanta Rhythm Section

 

 

시리즈, 내가 읽은 책: 박기원씨의 이진섭(2)

턱걸이 제네레이션

박기원 씨는 사랑하는 남편 이진섭씨를 통해서 그 당시를 “살아 가야만”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 가장들의 한(恨) 같은 것을 몸으로 느꼈다. 평범하게 매일 매일을 생활하는 엄마, 주부로서만이 아니고 한 지식인, 문인으로서 남보다 더 깊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입장을 비록 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더 이해하려 노력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진섭씨는 1922년 생이고 박기원씨는 1929년 생, 모두 왜정(주: 그때는 ‘일제강점기’라는 고급스러운 말을 이렇게 불렀다)때 태어나셨다. 특히 이진섭씨는 청년기까지를 모두 왜정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일본식 교육과 충성을 강요 받고 잘못하면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갔을 그런 ‘기가 막힌’ 시대를 사셨던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도 거의 다 그랬을 것이다.

… 어쩐지 한국 남자의 한(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뒤늦게 얻은 이해심도 아량도 아니다. 술을 마셔야만 살았을 것 같은 그 시대에 살았던 남자들!

그 안에서 제일 다치기 쉽고 멍들기 쉽고 상처 받았을 그이의 외로웠던 가슴을 뒤늦게나마 아내인 나는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

그이는 생전 이런 말을 가끔 했다.

“우리 시대는 턱걸이 제네레이션이야. 무언가 해 보려고 안간 힘을 썼다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그것은 아마 불안정했던 한국의 역사와 격동기를 겪고 살아야만 했던 고뇌에 찬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의 진정, 깊은 남자의 마음을 나는 그가 살았을 때보다 그가 간 지금 되새겨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진정 그의 아픔이었지 아내인 나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남자만의 고독이었다. (본문 97쪽)

그이는 살아 있는 동안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을 때, 그것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원인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모든 결과는 먼저 자시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세대만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원인을 시대에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비극을 지니고 있다.

‘턱걸이 제네레이션’이라고 할까? 즉, 철봉 틀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오르려 하면 철권으로 내리쳐 주저앉게 만든다. 한 번도 그 푸른 하늘을 못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생각 있는 남자의 몰골은 마치 주문진 해변가에 널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 같다. 축 늘어져 말라 가는 오징어들 그것일 것이다.” (본문 169쪽)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

1983년 3월 이진섭씨의 장례 시, 동창, “많이 통하며 많이 비슷하고, 멀리 있어도 가슴 한구석으로 걱정을 해주며 살던 친구” 한운사(韓雲史)씨의 비문(碑文)이 명필 송지영(宋志英)씨의 글로 세워졌다.

 

비문

무엇인가를 쓰고

예술을 논하고

노래를 짓고, 노래 부르고

인생의 멋과 맛을 찾아 다니며

소유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李眞燮)이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마침내 여기 영원히

잠들었다.

새야, 바람아, 교교한 달아

찬란한 태양아

이 사람과 더불어 놀아 주라.

1983년 3월 10일

 

이 글에서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란 말이 이채롭다. 영어로 하면 “last Romanist among our generation“정도나 될까. 이분의 일생을 알고 나면 이 표현은 정말 설득력이 있다. 또한, 멋과 맛을 찾아 다닌다고 했지만 그 정도와 걸 맞는 철저한 책임 있는 한 가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건강을 해친 사실이다. 나의 기억에 그 당시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 중에는 이런 분들이 꽤 있었다. 지나친 자학과 불만을 거의 모두 ‘술’로 달래다가 일찍 운명을 하신 불쌍한 세대였다. 우리 세대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많이 술 문화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0% 그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진섭씨는 아마도 최후의 “자유인” 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이진섭씨는 비록 말년에 세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흔히 말하는 독실한 신자 처럼 같이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부인의 눈으로 보아서도 그런 것이다. 종교도 ‘자유’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었을까? 틀에 얽매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까?

 

그이는 감히 남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고, 그 속에서 헤엄치듯 살았다.

술잔을 들면서 혼자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그랬다. 나는 그런 그이 모습이 우스워,

“여보, 술잔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우? 그건 하나님에게 대한 모독 예요. 하나님을 접할 때는 몸도 마음도 정결하게 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죠”

그러면 그이는 너무도 당당하게

“모르는 소리. 술 안 먹은 맑은 정신 속에서도 음모, 살의, 도둑 심보 등 갖은 잡스런 생각을 지닌 채 기도하는 놈들도 있을 거야. 나는 술은 먹어도 마음만은 맑은 거울같이 깨끗해. 성경 말씀에도 있지. 착하고 순진한 어린애 같아야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말야. 나는 술잔을 들고 있지만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실 수 없을 거야”

나는 이론이 정연한 그의 말에 말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누구에게 구애 받거나 간섭 안 받고 자기 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같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도 드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본문 110쪽)

 

위의 글을 보면 이진섭씨는 위선자 부류를 아주 싫어한 것 같다. 올바른 소리에 비해 행동이 다른 사람들, 이진섭씨도 올바르고 이론 정연한 이론을 펼쳤어도 행동이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고 나면 그의 ‘자유론’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율법에 얽매여서 ‘법의 기본 정신’을 모두 잃어버린 ‘바리사이파’ 같이 예수를 팔아 넘길만한 사람들이 ‘수두룩 닥상’인 이 세상을 살면서 어찌 이런 자유인의 행동을 마다할 수가 있을까?

 

시발택시 위의 해프닝

자유와 멋을 제대로 승화시킨 ‘사건’은 아마도 시발택시 위에서 샹송을 부른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얼마나 이진섭씨가 술과 자유와 샹송을 사랑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 해 겨울이었나 보다. 눈이 많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낮에 나간 그이가 통행금지 시간(필자 주: 어린이 들, 그때는 midnight curfew란 것이 있었음)이 다가오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들을 재우고 온 정신이 문 밖에 쏠리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히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감적으로 뛰어나갔다. 당시엔 시발택시가 한창인 때였다. 시발택시 지붕은 널찍하고 편편했다.

그이는 흰 눈이 덮인 시발택시 지붕 위에 누워서 늘어지게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은 달빛이 은색으로 빛나고, 이 진섭씨는 하늘을 향해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운전 20년에 저런 양반은 처음 예요. 아주머니 빨리 요금 주시고, 같이 끌어 내려요”

어린애 달래듯이 겨우 택시 지붕에서 끌어 내렸다.

그랬더니 이 진섭씨 왈,

“자네는 차만 끌 줄 알았지 이런 멋진 밤을 모르는 불쌍한 놈야. 자 요금”

그이는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내 한줌 집어 준다.

그 돈이 타고 온 요금의 몇 배가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제서야 운전수는 갑작스런 횡재에 입이 벌어지며,

“아저씨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하며, 깍듯이 정중한 인사를 하고 가버린다. (본문 159쪽)

 

국산차 1호, 시발 승용차
국산차 1호, 시발 승용차

물론 이때 이진섭씨는 한잔을 거나하게 걸친 취중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행동을 보면 이상하기 보다는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누구라도 마음 속 깊이 이렇게 한번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까.

 

여기 나오는 시발택시가 무엇인지 상상이 전혀 안 가는 “어린애”들이 많을 듯 하다. 이승만 정권 때 나온 ‘국산 차’의 이름이었다. 군용 Jeep을 완전히 승용차로 개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body(차체)만 군용drum통을 사용해서 우리 디자인으로 씌운 것이다. 대강 찝 차와 비슷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택시들이 이차였다. 이것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일육 군사혁명 뒤부터 일제 차, “blue bird”가 들어오면서 부터 였다.

 

65세 만세론(萬歲論)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읽고 읽고 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넘어가곤 했다. 아직도 나에게 멀었다는 막연한 생각과 죽음이나 수명 같은 화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것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나이나, 세대가 바뀌면서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영어에도 여기의 화제와 비슷한 말이 하나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 “dirty old man” 이란 말이다. 이진섭씨도 이런 ‘어감’을 제일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 이는 가끔 65세 만세론(萬歲論)이란 말을 했다. 즉, 65세까지만 살면 인생은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이상은 ‘덤’으로 사는 거지,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사실상 죽은 인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가까운 친구분이던 윤 현배 선생님과 몇 분이 서 항상 65세 만세론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그이는 그 소원이던 65세도 채우지 못하고 가 버렸다.

어떤 때 외출을 같이 나갔다가 길에서 나이 많은 노인이 조깅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늙은이다워야지, 저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면서까지 오래 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은 좋게 안 보이는군” 하던 말이 기억난다.

더구나 모든 면에서 노욕(老慾) 같이 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늙어갈수록 저물어 가는 낙조(落照)를 보듯 담담해야 된다고도 말했다. 또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누구나 두 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나 두 손을 편안하게 펴고 죽은 것처럼, 그 동안 두 손 안에 담았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욕심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야만 된다고도 말했다.

그러니까 자식 덕을 보겠다는, 그러기 위해서 오래 살아야겠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자기 몸 움직여 60 평생까지 살고, 그 이상 못 움직이게 되니까 ‘이만하면 너희끼리 살 수 있겠지’ 하고,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훨훨 가 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몸 져 눕기 두 달에서 이틀 모자라는 날만 채우고…

어떻게 생각하면 매몰차고, 너무나 명확하게 자기 인생 몫을 살고 간 것 같다. (본문 311쪽)

 

이진섭씨 세대에선 분명히 60세, 즉 환갑이란 나이는 커다란 개인적 업적에 속했다. 평균수명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유교질서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개념을 생각해도 그렇다. 나이가 듦은 ‘무조건’ 가치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요새는 사실상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젊은 것이 ‘무조건’ 좋게 보이는 세상인 것이다. 강제로 늙어감을 늦추는 것.. 정도의 문제다. 지나치면 ‘노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연스러운 것보다 더 추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자꾸 들어가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어떨 때는 깜짝 놀랄 때도 있으니까.. 10년 전 보다 더 젊게 보인다면 이건 좀 이상하다. 그런 배경에서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으면서 가급적 자연스럽게 늙는 것을 바라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