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s of 64

  • Post published:

Star of 64

1964년 한국 최고의 여배우: 전계현, 엄앵란, 김혜정, 태현실, 방성자

 

이들이 누군가? 한눈에 알아보았다. 반세기 전에 보았던 신문 속의 흑백사진,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1964년 1월 1일 동아일보에 실렸던 설날 특집기사 중의 하나, ‘새해의 꿈’ 에서 그 당시 ‘최고의 여배우 5명‘ 들이 1964년에 바라는 꿈을 짧게 적어놓았다. 글 보다는 역시 이 사진이 이 기사의 주역이었다.

기억한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매년’ 1월 1일에 그 당시 최고 인기 여자배우들 5명을 뽑아서 큼직하게 사진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싣곤 했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이 바로 이사진이었다. 다시 보고 놀란 것이, 내가 기억한 것이 ‘거의’ 정확했다는 사실.. 이것이 star power일까..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현재의 미(美)의 기준으로 보아도 이들은 아직도 멋진, 미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왼쪽부터, 전계현, 엄앵란, 김혜정, 태현실, 그리고 방성자.. 정말 그들은 그 당시 어린이, 어른 상관없이 사랑을 받던 우리들의 ‘멋지고 예쁜’ 누나들이었다. 그들은 과연 어떠한 인생들을 살았을까?

 

Young Lovers – Paul and Paula – 1963
‘젊은 연인들‘ – 당시를 풍미하던 ‘old fashioned love’  oldie

 

John Glenn, the Right Stuff

  • Post published:

John-Glenn-1962

1962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의 1면 기사, 존 글렌의 미국 첫 지구궤도비행 성공뉴스

 

The Right Stuff.. 책과 영화의 제목.. 미국의 우주개발 초창기 때에 관한 얘기들, 특히 첫 프로그램이었던 머큐리의 7인 우주비행사 (우주비행사를 미국에서는 astronaut, 당시의 소련에서는 cosmonaut라고 했다) 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바로 50년 전, 그러니까 반세기 전, 오늘이 이 프로그램의 절정에 해당하는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2월 20일은 소련에게 완전히 선두를 빼앗겼던 미국의 첫 완전 지구궤도 비행이 성공한 날이다. 그 우주인이 아직도 90세로 건재한 한국전에도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해병대 중령출신인 존 글렌, John Glenn, 그는 1969년에 달에 사상 최초로 착륙한 Neil Armstrong과 같이 Ohio주 사람으로, 나중에는 오랫동안 연방 상원의원으로 정치를 했고, 한때는 미국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기도 했다.

The Right Stuff의 영화를 보면 짐작이 가듯이 그는 7인의 astronaut중에서도 유별나게 ‘도덕적, 신앙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곧디 곧은 성품으로 전 인생을 보낸 셈이고 90세인 지금의 나이에도 전혀 나이에 의한 장애를 느끼지 않는 듯한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보인다. 나는 이 미국의 첫 지구 궤도비행 성공 소식을 서울에서 중앙중학교 3학년이 시작되기 전 2월에 신문과 라디오 방송으로 들었다.

미국, 소련의 심각한 냉전의 공포 속에서 두 초강국은 우주경쟁을 전쟁의 연장으로 보았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이것은 미국의 절대 열세였다. 1957년의 Sputnik 소련 인공위성을 필두로 Yuri Gargarin의 사상 첫 소련 우주인 탄생 등등 계속 소련의 연전 연승이었다. 그럴 때, 미국은 로켓을 쏘아 올릴 때마다, 거대한 화염에 싸여 곧 추락을 하곤 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젊고도 젊었던 40대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고, NASA가 본격적으로 가동을 하면서, 이렇게 John Glenn의 성공적인 첫 궤도비행이 탄생한 것이다.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것은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끼친 심리적인 효과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으로 보인다. 조금 자신감이 생긴 것이고, 케네디 대통령의 “1970년 전까지 인간의 달 착륙과 귀환” 공약까지 나오게 되고, 결국은 이것을 출발점 으로 1969년 여름에 달에 착륙을 함으로써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space program은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나는 곧이어 중앙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같은 반에 있던 윤태석이 수시로 가져다가 교실 뒤의 벽에 붙여놓은 우주 프로그램의 총천연색 화보 (아마도 미국 공보관을 통해서 나온 것)를 보면서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 당시의 신문을 다시 보게 되면서, 그때의 우리들을 생각한다. 그전 해(1961년)에 5.16군사혁명으로 박정희 의장시절이었다. 그러니까 민정으로 이양이 되기 전, 군사혁명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치되던 시절이었다. 경제는 말도 아니었고, 미국 원조 수준은 떨어지고, 휴전선 너머에는 살이 더 찐 김일성 개XX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철전지 원수 일본은 우리 동족간의 전쟁 덕분으로 날로 부강해지고, 급기야 올림픽을 눈앞에 두었고, 우리는 구차스럽지만, 일본에게 돈을 꾸어달라는 외교를 해야만 했던 그런 시절.. 하지만 박정희는 ‘한가지를 향해서’ 뒤도 안 보고 달리기 시작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평화의 십자군’ 으로 보이던 미국에서 이런 신나는 소식이 온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박수 갈채를 보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무언가 앞으로 ‘잘 풀릴’ 것이라는 그런 희망들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다.

 

 Bert Kaempfert – “Wonderland By Night”
‘밤하늘의 트럼펫’, 그 당시의 hit instrumental melody  

 

김두철, Ash Wednesday

  • Post published:

¶  우등 한번 못해본 서울대 수석합격: 김두철을 다시 찾았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3학년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특히 6학년 때는 나와 같은 ‘1 분단’에 있기도 했던 ‘머리 좋은’ 동창이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추억에 관한 blog에서 잠깐 언급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100%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력으로 쓴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의외의 도움(Internet, what else?)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1966년 2월 중순경의 일간지는 서울 주요 대학입시 합격자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조그만 기사 중에 김두철의 사진과 이름이 보였다. 그 것이 동아일보였는데,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아주 어렴풋이 그 기사를 그 당시 나도 본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세기가 가까이 되는 엄청난 과거였으니..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그 기사는 김두철이 서울대학 ‘전체 수석’ 합격자 였다는 기사였다.

김두철 서울대 입시 전체수석, 1966그는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를 지망했는데, 거의 만 명이 넘는 지원자중의 수석 합격자였던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김두철은 ‘항상 일등, 우등생’이었는데, 아마도 경기중,고에 진학하면서 1등은 별로 못했던 듯, 우등을 못해본 수석합격이라고 기사는 강조를 했다. 본인이 ‘점수벌레’를 싫어 한다고 했지만, ‘의외로 수석’이 되었다고.. 참 이렇게 부러운 친구가 있을까? 그러니까, 별로 ‘노력을 안 했어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심리는 아마도 ‘일류 심리’에서 비롯 되었을 듯 하다. ‘거의 항상 top’으로 일관을 했으니, 크게 자랑스러운 것도 없다는 뜻일까? 평소의 실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조금은 거슬리기도 하지만, 어찌하랴.. 그렇게 태어났으니. 이 기사로 나는 그가 나와 같이 ‘납북자’ 가정, 편모슬하의 외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우리 집과 다르게 그의 어머니는 이화여대 교수(金蓮玉, 당시 41세)였다. 그의 아버님은 서울 공대교수로 재직 중 육이오 동란 시 납북이 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과 참 비슷한 환경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게다가 기사는 김두철이 절대로 ‘공부벌레’가 아니라는 것으로, ‘산 사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장기는 rock climbing이라고.. 기자조차 부러운 듯이 “힘껏 공부하고 맘껏 노는 화려한 대학생활”을 예상했는데, 과연 그는 어떻게 대학생활을 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업적’으로 이름을 ‘크게’ 남겼을까 궁금하다.

 

¶  뼈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가운 안개 비가 하루 종일 나리는 2월, 중순이 완전히 접히고 하순으로 접어드는 일요일, 무슨 꿈에서 깨어나는 듯이 놀란다. 어느새 2월의 삼분의 2가 없어졌나? Groundhog Day, Lincoln’s Birthday, Valentine’s Day.. 모두 지나갔다. 내일은 President’s Day,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화요일은 Legio (Mariae) Tuesday인 동시에 Mardi Gras, 그러니까 그 다음날 수요일이 중요한 날인 것이다.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인 것이다.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새해부터 거의 예외 없이 high note로 지내왔다. 그러니까, euphoric하다고나 할까? 이 나이에 ‘신난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고, 아마도 ‘잔잔히 들뜨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난 10년간 항상 나는 depression속에서 살았다고 ‘나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지난 한 달여를 보면서 아마도 나는 서서히 그런 길었던 ‘동면’의 기간에서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몇 가지의 ‘단순한 계기나, 이유’로 그렇게 어두운 터널에서 나왔다고는 절대 생각 치 않는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고 나의 반려자도 같이 느끼는 듯 하니까, 아마도 맞을 듯 하다. 그 이상의 것은 과연 무얼까?

ash-wednesday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 2월 22일은 2012년 부활절 (Easter) 전까지 교회력으로 40일간 계속되는 Lent (사순절)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Passion (수난)을 거치며 부활의 절정에 이르는 기독교신앙의 절정기에 속하는 정말 중요한 40일이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어떨지 몰라도, 천주교는 아주 ‘겸손, 절제, 회개’로 이 시기를 보내게 되는데, 이제는 나도 조금 익숙해져서 미리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의 수요일 바로 전날은 Mardi Gras (Fat Tuesday)는 ‘고난의 40일’ 전에 마음껏 ‘세속의 맛’을 느끼자는 축제의 절정인데, 이곳에서는 New Orleans (Louisiana주) 의 Mardi Gras 축제가 유명하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는 작년의 Palm Sunday에 썼던 palm tree leaves(종려나무 잎)을 태운 것을 기름이나 물에 섞어서 신부님께서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주신다. 대부분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이마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재는 아마도 이런 뜻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Genesis 3:19)의 “Remember that thou art dust, and to dust thou shalt return“.. 그러니까 사람은 먼지에서 왔다가 먼지로 돌아 간다는 뜻이 아닐까?

이날로 시작되는 사순절, 40일을 올해는 어떻게 보낼까? 회개와 절제와 고행..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하려면 복잡해진다. 회개는 물론 고백성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느 해에는 좋아하는 커피를 완전히 끊기도 했고, ‘절대로’ TV를 안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의 요점은 역시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묵상하며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공부’가 중요할 것이다. 또한 나는 레지오 단원이라서 이것 외에도 하려면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얼마나 의지력을 가지고 실행을 하는 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썩은 사과, 황동규 시인

  • Post published:

¶  The Rotten Apple, 이제는 완전히 부풀어 오른 monster기업, 크기가 이제는 Microsoft와 Google을 합한 것 보다 커진 상태가 되어서 결국은 조금은 defensive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듯, 중국 내 산재해 있는 ‘조립공장’의 열악한 환경을 규탄하는 단체들과 비우호적인 언론의 압력을 의식한 듯하다. 물론 이 문제는 ‘문제의 진실’을 누가 조직적으로 파헤치지 않는 한, 어느 쪽이 옳다고 볼 수가 없는 성질의 복잡한 것이다. 이럴 때는 결국 ‘가진 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금고에 넘쳐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억수같이 많은 돈을 경쟁적인 기업을 소송하는 노력만큼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그들의 덩치가 이제는 예전같이 빨리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인다 해도 예전같이 ‘독립적이고 자유스러운’ 입장이 절대로 아니다. 현상유지를 하려면 ‘어떤 술수’라도 써야만 하는 아주 어려운 입장인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앞으로 닥칠 필연적인 문제는 그들의 stock price가 얼마나 올라가느냐가 아니고, 엄청난 technology outsourcing (more than manufacturing) 에 의한 중국기업의 세계적인 일류기업으로 발 돋음인 것이다. 최근의 세계적인 최첨단 기업의 역사를 보면 결과가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young poet DG Hwang¶  황동규시인  너무도 오랜만에 황동규 시선 “三南에 내리는 눈” 을 꺼내어 읽어보게 되었다. 비록 vinyl cover 덕분에 겉은 멀쩡했지만 속을 펼치니 거의 目不忍見..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의 30여 년간 빛을 별로 못 보다가 근래에 무슨 골동품 고서처럼 나의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시집에 대한 특별한 사연은 나의 2010년 blog에 이미 밝혀 두었고, 기록을 위해서 재빨리 사진까지 찍어 놓은 이후에는 항상 나의 눈에서 떠나지 않는 곳에 꽂아 놓았다. 지금 보니 2년 전보다 낱장들이 더 ‘노랗게’ 변했다. 질이 낮은 인쇄 종이를 써서 그럴까, 아니면 ‘지독히도 긴 세월’ 덕분일까..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고서’ 같은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래서 부랴부랴 책 ‘전체’ 를 typing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황시인의 그 당시 시 세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시대적으로도 아주 내가 회상하기 좋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그의 시 세계.. 그 시대는 나에게도 너무나 그립고, 잊고 싶지 않은 때가 아니었던가? 황시인도 이제 나이가 70세 중반으로.. 서울고, 동숭동 서울대 출신, 그때의 그 세대 선배들의 대강 몸가짐과 모습들, 그리 상상하기 어렵지 않게 그리운 모습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은 (wikipedia에서) 이 황동규시인이 바로 그 유명한 원로 소설가 황순원씨의 장남이었다는 사실.. 그 동안 왜 내가 그것을 몰랐을까? 너무나 의외롭다. 황시인과 어울리던 ‘친구’ 마종기, 김영태 제씨들.. 나도 익히 듣던 반가운 이름들.. 어떻게 이 세분이 친구가 되었는지, 그것을 찾아보는 것이 다음의 과제다. 현재의 Wikipedia의 황동규 페이지는 사실 너무나 빈약한 듯 보인다. 혹시, 희망에, 내가 더 알아내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더 멋지게 만들고 싶다

겨울밤 노래    황동규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를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午後에는 배가 안
고프고
언덕에서 내려뵈던 깊은 黃昏
캄캄하게 그 黃昏 속을 달려가던 사내여 오라

겨울날 빈 터에 몰려오는 바람소리
그 밑에 엎드려 얼음으로 목을 추기고
얼어붙은 못 가에
등을 들판으로 돌리고 서서
못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바라볼 때
몸과 함께 울던 우리의 옷을 보라

걷잡을 수 없이 떨리던 손
그 떨리는 손에는 네 목을 잡고
머리칼 날리며 빙판에 서서
서로 마주 보며 네 목을 잡고
내 들려주리
쓰러지지 않았던 쓰러지지 않았던 사내의
웃음을

어둡다 말하면 대답소리 들리는
쇳날을 만지면 살이 떨어지는
그런 떨리는 노래는 이제 우리에게
서로 붙잡은 우리의 어지러움
어지러움 속으로 길은 헐벗고 달려가고
그 길 끝에 열려 있는 술집은 이제 우리에게

친구여 너는 술집의 문을
닫아도 좋다
문을 닫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午後에는
배가 안 고프고
그때 땀 흘리던 우리의 배를 記憶하라
열린 채 땀 흘리던 우리의 배를 記憶하라

하면 아침이 눈길 위로 올 때까지
우리 서로 얼음 냄새를 풍기며
때로 주먹으로 壁을 두드리고
기름냄새를 맡으며
줄어드는 심지를 바라보며
단추 떨어진 우리 젊은 날의
어둡다 말하며 벗어던진 옷을 말리자.

완전히 역사 속으로, 나의 2011년

  • Post published:

2012년 2월, 이제 ‘완전히’ 과거가 된 2011년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때가 되었다. 대부분 년 말이 다가오면 지난 해를 기억하고 정리를 하지만 한 해가 완전히 지난 때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것을 나의 제일 활동적인 나이에 했으면 얼마나 더 효과적이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하는 것도 다행이라고 자위를 한다. 지난 2011년 나에게 제일 중요한 정치 사회적, 개인적 뉴스, 사건, 일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틀란타 지역 폭설과 강추위

2011년 1월 8일의 폭설과 강추위로 1주일간 대도시기능 거의 마비된 ‘사건’, 이것은 심리적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일본 도오쿠(동북) 대지진, 해일과 원전 사고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재산피해와 뒤따른 원전의 방사능 유출 사고, 비록 바다건너 먼 곳이었지만 우리가 일본에 대한 복잡하고, 특별한 관계로 더욱 생각하게 되는 비극적인 재해였다.

 

 

아랍, 중동의 격동과 봄

이집트와 리비아의 오랜 독재자들 군중에 의해서 피살되거나 실각, 주변의 국가로 퍼짐. 서구식 민주주의가 드디어 범 세계적으로 퍼지는 시작일까, 아니면 다른 종류의 종교독재주의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나의 신앙적 영웅, 전 교황님 성인 품으로 한걸음 더 다가섰다. 종교를 초월한 인류의 모범인 이 교황님은,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분이시다.

Extreme Spring Weather disasters

조플린과 알라바마 지역이 거의 파괴되는 무서운 천재지변, 몇 초간에 운명이 바뀌는 비극적인 순간들을 거의 체감적으로 느낀다.

DIY, self-installation of home water heater

누구의 말대로 내가 바보일까, 내자신의 기계실력을 과시하려던 만용일까, 고생은 했지만 큰 보람을 느끼던 나만의 Independence Day 였다.

아틀란타 성체대회 참가

10년이 넘게 뉴스에서만 보던 성체대회에 내가 드디어 가서 보고 듣고 은총을 받고 왔다. 내년을 기대해 본다.

연례 레지오 봉쇄피정 참가

레지오 중심으로 인생 항로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참가한 피정, 나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All work PCs now on home Proxmox VE(PVE) network

Near perfect home network system이 완전한 KVM-based virtual machine으로 탈바꿈을 해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보는 home system이 되었다.

Summer ‘critical’ reading

근래에 들어 ‘치열한’ 독서의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여름을 보냈다. 참, 많이 읽었던 여름, 두고두고 기억이 날 것이다.

연숙 레지오 꾸리아 임원 피선

인간의 머리로 피하고 싶던 ‘고된 일’이 결국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운명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서 연숙을 돕기로 약속을 했다.

레지오 중심의 생활, 철학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생활의 중심에 ‘레지오’의 정신을 놓기로 성모님과 약속을 했다.

한국 본당 전산팀 실질적 탈퇴

레지오가 나의 탤런트를 전산팀에 쓰도록 인도를 하고, 나도 노력을 했지만, 무리한 인간적인 마찰은 피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다.

고교 동창 이성복 발견과 실망

시간과 세월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나의 ‘순진한’ 생각과 꿈에서 깨어나는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새로니, Vanderbilt 2nd degree

대학을 3년에 졸업한 기세로 다시 단기간에 Vanderbilt 학위를 받은 새로니, 이번에는 조금 안정된 career path에 진입하기를 희망한다.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 참가

레지오 중심의 생활의 연장선에 있던 큰 행사, 결과보다는 참가가 중요한 행사, 잘 참가하고, 치렀다.

믿지 못하게 웃기는 Republican Primary

언제부터인가 ‘지독히도’ 혐오하게 된 이 정치 군상들, 대부분 과격파들은 성경의 바리사이파 보다 더 추악한 것들, 미국을 좀먹고 있는 그들의 추태를 언제까지 보아야 하나?

연숙의 폴라와의  聖戰, 부분적 승리

중동의 봄에 힘 입은, 일본기업과의 부조리에 맞서는 용감한 성전,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옆에서 보기에도 멋진 싸움이었다.

레지오 단원 선서

나의 후반인생의 큰 획을 긋는 쾌거, 나는 확신한다.

김, 정박아, 정일 지옥 행

민족반역자, 전범 김일성 일가의 두 놈이 이미 지옥으로 떨어지고, 나머지 놈마저 가려고 준비 중이다.

 

이중에서 5가지를 골라 뽑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를 않았지만, 고심 끝에 다음의 다섯 가지를 나의 2011년 5대 사건,뉴스로 정했다.

  1. 레지오 단원 선서
  2. 일본 도오쿠(동북) 지진, 해일 참사
  3. 중동의 봄: 이집트, 카다피 사망
  4. 새로니 Vanderbilt Peabody College 졸업
  5. 김정일 지옥 행

 

유지호, 나의 원서동 竹馬故友

  • Post published:
Number 1 죽마고우, 유지호
죽마고우 제1번, 유지호 1980

유지호, 나의 원서동(苑西洞) 죽마고우(竹馬故友)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친구, 별로 잊고 산 적이 없는듯한 착각도 든다. 헤어져서 못 보고 산 세월이 꽤 오래되었지만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아직도 가슴 아련히 찐~하게 느껴지니 참 어릴 적 친구는 별수가 없다. 그 녀석을 정말 오랜만에 얼마 전 꿈에서 생생히 보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녀석, 유지호와의 어린 추억을 회상한다.

사실 나의 블로그 에서 옛 친구들을 그리며 쓴 글이 꽤 많이 있었지만, 몇몇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쓸 엄두를 내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 감정이 복받친다고 나 할까, 심지어 괴로울 것 같아서 미루어 온 것이다. 친구 유지호가 바로 그런 친구 중에 하나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그를 꿈에서 보게 되었고, 잘못하면 못 보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과 함께,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 유지호(柳池昊).. 구수한 얼굴만 생각해도 정겹게 느껴지는 친구, 이 친구와 이렇게 일생을 떨어져 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80년1월 나의 결혼식 때였을까.. 마지막 소식은 우리 어머님께서 그 해 5월쯤 그 녀석의 딸이 태어났을 때 병원으로 찾아가셔서 본 때였고 그 이후 우리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 이후 우리 어머님은 항상 지호의 안부를 걱정하셨다. 심지어는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치어서 정신 없이 살아온 것이다. 한동안 여러 군데로 수소문을 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이 지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호는 친구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친구다. 물론 우리들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숨은 사연이 있었다. 원래 육이오 동란 전에 지호의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은 친구였던 것 같고 (우리 아버지는 지호 아버님을 ‘원동 친구’라고 불렀다고 함, 원동은 지금의 원서동), 전쟁 발발 후에 두분 다 납북행렬에 끼어서 북으로 끌려갈 때, 지호 아버님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납북되신 것을 우리 어머님께 알리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1.4 후퇴(1951년 1월 4일) 당시 지호네 식구는 모두 피난을 가게 되었고, 우리 집은 그대로 원서동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지호의 나이가 (나와 동갑인) 두 살밖에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우리 어머님께 임시로 맡기고 전라도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납북되신 후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어머님께서는 우리 집 남매, 그리고 지호를 데리고 원서동 비원 담 옆 텅 빈 지호네의 커다란 한옥의 사랑채에서 머물며 우리들을 돌보셨는데, 나중에 지호는 전라도로 피난 간 가족의 품으로 갔다가, 휴전 후에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원서동에서 살게 되었다.

지호와는 이런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묘한 인연이 있었다. 어머님의 추억에, 그 길게만 느껴졌던 지호네 사랑채에서의 생활이 참 무서웠다고 한다. 젊은 여자 혼자서 어린 애들 세 명을 데리고 텅 빈집에서 전쟁을 겪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고,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지호가 우리 집 식구처럼 느껴지곤 할 때도 있었다. 나의 가장 오래된 지호에 대한 기억은 역시 원서동의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던 국민학교 1학년 시절이 아닐까..

우리는 승철이네 집에서 세 들어 살고, 지호네는 비원 담을 끼고 있던 커다란 한옥에 살았다. 그때의 지호는, 우리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구제품 옷을 입고 신나게 개천을 중심으로 뛰어 놀았다. 지호와 우리가 뚜렷이 달랐던 것은, 그의 말투였다. 분명히 우리와 다른 말투..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전라도 사투리였다. 전라도에 잠깐 피난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가지고 신나게 놀리곤 했다.

 비원에서 흘러나오는 비교적 맑은 원서동 개천은 그 당시 우리들 꿈의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시원한 물장난, 종이배 띄우기, 목욕을 할 수 있었고, 겨울에는 더 신나는 썰매타기, 빙판에서 팽이 돌리기를 하며 놀았다. 하지만 지호는 그런 것 이외에도 개천을 좋아하는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폐품수집” 이었다. 개천가에는 군데군데 폐품, 심지어 쓰레기까지 버린 곳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더럽다고 피하는데 지호는 그곳을 열심히 뒤지면서 ‘보물’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어른들은 더럽고, ‘거지같다’ 고 핀잔을 주곤 했다.

 원서동에서 가까운 국민학교는 옆 동네에 있는 재동(齋洞)국민학교였고, 대부분이 그곳을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지호는 낙원동 덕성여대 옆에 있던 교동(喬桐)국민학교를 다녔고,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승철이네 누나 시자 누나도 교동국민학교엘 다녔고, 졸업을 했다. 사실 왜 그곳을 다녔는지 그 이유를 모르지만, 학군에 관한 정확한 법적 제한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건재한 재동국민학교와 달리 교동국민학교는 비교적 일찍 폐교가 되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중고등학교는 지호 아버님이 서무부장으로 근무하시던 계동(桂洞) 입구의 휘문(徽文) 중 고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시절에 철봉을 하다가 잘못 떨어져서, 팔이 골절되는 바람에 일년을 휴학을 해서 나보다 1년 늦게 (1967년) 졸업을 하였다.

내가 원서동에서 가회동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사를 가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연락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가지 특기사항은 나에게 그 당시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 서로가 다 친구는 물론 아니었다. 심지어는 지호와 다른 친구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의 다른 절친한 죽마고우인 안명성과 지호의 아주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들 서로가 좋아하지 않는 그런 사이였다.

그 가운데 내가 있어서 가끔 모두 만날 때에도 느껴지는 분위기기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이들과 별도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생각을 한다. 왜 그들은 그렇게 서로 좋아하지 않았을까? 뚜렷한 이유가 없었는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지호보다 명성이와 더 가깝게 중 고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지만, 육이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 때문일까, 무언중에 서로의 우정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음을 서로 느끼며 살았다.

 중 고교 시절, 지호네는 육이오 때부터 살던 오래된 원서동 집을 새로 아주 깨끗하고 중후한 느낌의 한옥으로 개축을 하였다. 그 당시 동네에서 아마도 가장 멋진 한옥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식구 수에 비해 방이 많아서, 항상 직장인 하숙생을 두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방송국의 기술자 (아마도 엔지니어)가 하숙을 들어 살았는데, 가끔 그의 빈방을 우리는 몰래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 당시, 아마도 고교 1년 때, 나는 한창 라디오를 중심으로 전기,전자 쪽에 관심이 많을 때여서 각종 전기,전자 부품으로 가득 찬 그 방의 책상설합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TV가 귀하던 그 시절, 그 하숙생 아저씨는 아주 옛날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스크린을 가진 흑백 TV 수상기가 있어서 비록 화면은 엉망이지만 그것으로 권투 중계 같은 것도 보곤 했다.

그 ‘악동’의 시절, 더욱 흥미로웠던 기억은 지호와 광순 형(지호의 형)으로 부터 들었던 ‘이웃집 여자 담 넘어보기‘ 이야기였다. 바로 이웃집에는 ‘화류계’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당에 나와서 목욕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당시는 개인 집에 목욕탕이 거의 없어서 공중 목욕탕을 쓰는데, 더운 여름에는 어두운 밤에 마당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숫제 대낮에 나와서 목욕을 한 모양으로, 지호와 광순형이 손에 땀을 쥐고 담을 넘어 엿본 것은 완전히 김홍도의 그림1 같은 이야기가 된 것이고, 아직도 생생한 지호의 손에 땀을 쥐게 하던 이야기가 귀에 쟁쟁하다.

상도동 우리집에서, 1968
상도동 우리집에서, 1968

1966년 봄이 되면서 지호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우리 집이 연세대 1학년 초,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당시 이미 지호네는 원서동에서 상도동 김영삼의 집 근처의 멋진 양옥으로 이사를 가 있었던 것이다. 지호 아버님이 이전에 무진회사(당시의 금융회사) 출신으로 수완이 좋으셔서 그랬는지, 큰 수입이 없으신 것처럼 보였는데도 아주 크고 멋진 집을 잘도 구하셨다.

나의 집은 비록 전세였지만 완전히 단독주택으로 그 당시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 옆에 있어서 지호네 집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웠고, 방 두 개의 작은 우리 집에서 그 녀석의 ‘파란 잔디에 별채까지 딸린 커다란 저택’에 가서 노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지호는 휘문고를 졸업하고 일차대학에서 낙방을 했는지, 한전(한국전력 주식회사) 산하의 수도공대에 입학을 하였는데, 서로 학교가 다르고, 학교 환경에 의한 관심사와 대학 친구들이 달라서 생각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한번도 연락이 끊기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이, 이 녀석은 친구라기 보다는 나의 친척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친척이야, 자주 못 보거나, 잠시 헤어져도 그 기본적인 관계는 없어지지 않기에 바로 우리들의 관계가 그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지호는 그 당시 나이에 비해서 조금 느린 듯 하지만, 대신 여유 있고 폭 넓은 행동과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느낌을 주었다. 느린듯한 인상은 그 나이에 맞는 유행이나 멋 같은 것에 남보다 둔감한 편이고 그것은 옷이나 유행 같은 것에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쉽게 짐작이 되었다.

그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 같은 비슷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 이외, 나이와 배경 같은 것이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대학시절부터 지호는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 라는 김준곤 목사가 이끄는 개신교 대학생 선교단체에 관련이 되어서, 나도 끌리다시피 그곳에 몇 번 가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지호가 그때 그렇게 신앙심이 깊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그는 아주 진지하게 활동을 하곤 했고, 흔히 생각하듯이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서 그곳에 들어갔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당시 CCC는 명동입구 부근에 어떤 빌딩의 옥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도 지호와 몇 번을 가보았다. 지호는 이미 AS (Athletic Society, 체육부)라는 부서의 멤버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신앙적으로 너무나 유치해서 그곳에서 하는 신앙적인 활동에는 큰 관심을 없었고, 그저 대학생들, 그것도 꽤 많은 여대생이 있는 것만 관심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지호는 ‘인심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이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편하게 사람들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하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조금 ‘영감’ 같은 그런 지호의 모습이었다.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 1966 – Live
그 당시 둘이서 즐겨 ‘따라’ 부르던 smash hit oldie 

 

이때에 일어난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발동하는 ‘악동기질’을 발휘해 지호에게 부탁을 해서 CCC소속 여대생들의 주소를 얻어낸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1968-1969에 걸친 겨울 방학이었을 것인데, 그때는 거의 매일 광화문 근처에 있던 교육회관 지하다방2에서 살다시피 할 때였는데, 장난기가 발동해서 주소록에 있는 몇몇 여대생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다방으로 불러낸 것이었다. 편지는 ‘연세춘추3‘에서 보낸 것처럼 하고, 무슨 설문조사(대학생의 팝송취향)를 한다고 꾸며 댄 것이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내가 편지를 쓰고 보내고 했지만 내가 보아도 거의 ‘완벽’한 각본이었다. 그때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와, 양건주, 이윤기 등이었는데, 물론 이들은 ‘주저하는 공범’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그 당시 너무나 심심해서 한 장난이었고, 그들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나왔다는 사실이었고, 물론 그들과 ‘설문조사’까지 해야만 했다. 이구동성으로 그 여대생들은, 혹시 속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왔다고 했고, 우리들의 ‘진지한 모습’에 안심을 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우리들 너무 장난이 심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이 ‘연극사건‘은 사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편지를 보낸 여대생 중에는 CCC와 상관이 없었던 전에 잠깐 알았던 윤여숙(창덕여고, 이대 생물과) 이라는 여대생도 끼어있었는데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사실 그녀가 나올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전혀 기대를 안 했던 것인데, 놀랍게도 그녀가 ‘편지를 들고 출현‘을 한 것이었다.

우리와 만나서 ‘설문조사’를 했던 여대생들에게는 편지로 우리가 기다리는 위치를 미리 알려주었지만, 윤여숙씨 에게는 카운터(계산)로 와서 찾으라고만 해 두었는데, 역시 그곳에 편지를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얼굴도 못 들고 옆에 앉아있던 이윤기에게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묻기만 한 것이 고작이었다. 카운터에서 편지를 들고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내가 너무 지나친 장난을 했구나 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이 ‘지나친 장난’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추억이 되었고,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 나이에 그런 악의 없는 장난은 조금 애교 있게 보아도 되지 않을까?

 

관악산에서, 1968
관악산에서, 1968

연세대 2학년 시절, 나는 연호회라는 남녀 대학생 클럽에서 활동을 했다. 말이 활동이지.. 그저 남녀 대학생들끼리 만나는 것이 주목적인 조금은 맥 빠진 듯한 클럽이었지만, 그 나이에 젊음을 발산하는 알맞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활동이란 것에는, 정기적으로 다방에서 만나는 것, 야외로 놀라가는 것 등, 주로 ‘노는 것’ 이외에도, 조금은 심각한, 말도 그럴듯한 ‘견학’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공부하는 활동인데, 우리들이 유일하게 성사시킨 것이 ‘동양방송국 견학‘ 이었다. 그 당시 동양 방송국, TBS는 삼성재벌 산하의 아주 큰 언론기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간 곳은 서소문에 있던 동양 텔레비전 방송국이었는데, 그것을 성사시킨 것이 바로 지호였다. 지호가 알고 있던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역시 지호네 집에서 하숙을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지호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들을 많이도 알고 있었다.

 대학 3학년 (1969년) 때 즈음,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은 물론이지만 서울에서도 환갑이란 것은 집안, 친척의 경사요, 동네의 경사이기도 할 정도로 나이 60세를 장수한 것으로 여길 때였다. 그때가 1969년 경이었으니까, 지호 아버님은 아마도 1909년 생이셨을 것인데, 우리 아버님이 1911년 생이셨으니까,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위셨다. 나는 그 잔치에 특별히 관심은 없었지만 지호가 스냅사진 좀 찍어달라고 해서 갔고, 우리 어머님도 잠깐 들리셔서 돈 봉투를 놓고 가셨다. 나는 사실 처음 환갑잔치에 갔던 것인데, 신발 표까지 나누어 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그때 지호네 친척들이 또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족들 마다 모여서 합동으로 절을 하였고, 그런 것들을 그 당시에 고가였던 플래시를 써서 모두 찍었는데, 상당히 많은 양의 사진을 찍고 다녔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자격으로 찍은 것이고, 프로 사진기사가 와서 정식으로 사진을 다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프로 사진기사가 찍은 사진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서 모두 못쓰게 되었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내가 찍은 사진이 ‘완전히’ 환갑기념 공식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내가 보아도 괜찮게 나왔던 것이다. 만약 이날 내가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그 큰 환갑잔치의 모습들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사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기도 했고, 두고두고 그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는 머리에 사진처럼 남게 되었다. 특히 지호 아버님, 기분이 좋으셔서 커다란 안방에 사람들에 둘러싸여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모습, 지호의 형 광순형 또한 완전히 만취가 되어서 나를 붙잡고 ‘기분 좋게’ 술주정을 하던 모습 등등.. 참 기억하고 싶은 잔치였다.

 1970년 (대학 4학년) 쯤에는, 항상 폭넓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지호를 통해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원서동) 친구들과도 다시 만나게 되기도 했다. 그 중에는 국민학교 친구, 김천일과 또 다른 죽마고우였던 손용현이 있었고,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원서동 개천친구, 한성우(한성택 형의 사촌) 도 다시 보게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지호가 그들과 끊어지지 않는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천일은 원서동의 토박이로 재동국민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사소한 나의 철없던 실수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지호를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는 조금 밑이었지만 박창희와 같이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았던 손용현.. 이들은 나중에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 되었다.

지호는 언뜻 보기에 그다지 노래 같은 것을 잘 부르지는 않았어도 아주 좋아하여서, 그런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다. 그 예로 어느새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가입을 해서 활동을 하였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고, 우리들은 사실 장난끼 섞인 말로 ‘비웃기’도 했다. 지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꾸준히 그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나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공식적이고, 역사 있던’ 단체여서 나도 놀랐다. 그곳은 장상덕이란 분이 지휘자로 있었고, 그분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지호가 나보고도 가입하라고 했는데, 회원이 부족하다고 하던가.. 했는데, 사실은 그 때, 10월 유신이 나고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란 것을 만들어서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는 시기였는데, 그 취임식이 열리는 장충체육관에서 ‘공화당 찬가’를 이 서울합창단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사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공화당찬가를 부른다는 것이 별로였지만 이미 청탁을 받고 연습을 시작한 모양이어서 나도 ‘끌려 가다시피 해서’ 합창 연습을 하곤 했다. 실제로 나는 장충체육관에 가지는 않았지만, 두고두고 이것은 별로 좋지 않은 찜찜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후 지호는 군대로, 나는 미국으로 가서, 헤어졌다가 1975년 여름에 지호를 서울에서 다시 잠깐 만났는데, 어엿한 대기업의 자재과 샐러리맨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5년 뒤, 1980년에는 나의 결혼식에 왔고, 그 후 소식이 끊어졌는데, 주위를 암만 찾아도 그 녀석은 없었다.과연 지호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동국대 사학과를 나온 지호의 형, 광순형 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회고담 속에서나 듣고, 보고, 느낄 수 밖에 없는가?

 

1. 17세기 조선,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단오
2. 위치가 좋아서 1960년대 말 대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잘나가던’ 다방
3. 연세대학교 발행, 학교신문 

postscript: 오랫동안 기억해낸 추억을 글로 옮기는 것, 몇 시간이면 될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한 가지를 쓰고 나서 다음 날, 다른 추억이 되 살아나고, 그런 것이 며칠이나 걸렸다. 이제 내 기억력의 한계를 분명히 느낀다.

 

지독한 부자(富者)들과 지나친 자본주의

  • Post published:

¶  현재 진행되고 있는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향한 치열한 공화당 후보들의 debate와 이틀 전부터 시작된 2012년 스위스 다보스(Davos, Switzerland)의 World Economic Forum(WEF)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조금씩 복잡한 나의 심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선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것이다. ‘지독한 부자’에 대한 혐오감이다. 여기서 지독한 부자는 ‘돈 장난’을 해서 ‘지독히도’ 많이 번 부자들을 말한다. 자칫하면 ‘질투’로 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그들이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front-runner인 Mitt Romney의 ‘거대한 재산’은 아주 눈에 가시처럼 보인다. 과연 그가 99%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본인은 분명히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참 힘들 것이다.

Warren Buffet같이 부자들이 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는 양심들도 있지만, 이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우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법적인 것 만이 아니다. 인간과 사회는 법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쟁점이 되는 것이 법 자체를 바꾸자는 의견이다.

그런데 이 법은 단순한 법의 차원을 넘어서, 숫제 자본주의 자체를 수정하자는 정도까지로 나갔다. 문제는, 그 것이 예전 같았으면 ‘배가 나온, 지독한 부자’ 들이 총 동원해서 반격을 할 텐데.. 이번에는 Occupy Wall Street 때문일까.. 비겁하게 눈을 깔고 관망만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Davos에도 그들 특히 banker, investment fund manager같은 부류들이 대거 불참을 했는데, 내 생각에 그들은 ‘무서워서’ 못 온 것 같다. 나도 그런 ‘대중’의 의견에 100% 동감이 간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I TOLD YOU SO department:  이 분명한 사실이 믿기는가? 바보 같은 iPxx customers & Apple Lover 들이여, 그대들이 꾸뻑~하고 흠뻑 빠져버린 iPxx (iPod, iPad, iPhone, iWhatnext?)가 $Apple company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마나 되는가? 46 BILLIONS! 이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아시는가?

거기에 비해서 지난 10년 이상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벌던 $Microsoft조차도 년 수입이 $20 BILLIONS이고, 고철 컴퓨터의 대부, computer science를 독자적으로 창시한 IBM 조차 $25 BILLIONS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애플이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번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벌고 있고, 그렇게 번 $$$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이 어떨까가 더 회의적이고 문제라는 것이다.

그 들은 현재의 상태를 결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허재판 전쟁으로 엄청난 돈을 뿌리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모조리 특허로 만들었다. $Apple company가 앞으로도 그들의 ‘대부’ S. Jobs의 그늘에서 계속 머문다면 역시 그들의 운명도 분명히 시간문제일 것이다. Jobs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그의 국가 대통령인 Obama에게 ‘죽어도 iPxx 는 미국땅에서 만들지 않을 것(결국은 중국에서만)’ 이라고 단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가 그런 생각으로 죽고 싶었을까 하는 측은지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이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경쟁국이며 잠재적인 군사적국인 ‘공산당 중국’의 착취적인 노동력을 이용해서 사상 초유의 이익을 추구하는 Jobs 의 집단, 완전히’무엇인가에 미친 영혼’을 보는 것 같아서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슷한 배경의 억수 부자라도 Microsoft의 Bill Gates는 완전히 스펙트럼의 반대쪽에서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과연 누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일까?

 

Number 1 죽마고우, 유지호¶  나의 친척 같이 느껴지는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생각하며 쓰기 시작한 글, 시작한지 이제 보름도 넘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음날 아침에 꿈결에 새로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이 있어서 보충을 하고, 다음 날 또 새로운 것이 되 살아나고.. 그런 식으로 보름이 지난 것이다. 왜 이리 기를 쓰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기억하고 기록을 남기려 할까.. 생각해 보니 나도 조금 웃음이 난다.

혹시 내가 치매예방을 염두에 두고 두뇌운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하기야 그렇게 두뇌 운동을 하면 조금 치매방지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 동안 오랜 동안 잊고 산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갈 수록 기억이 새로워질 리는 만무하고, 지금이라도 기록을 어디엔가 남겨두면, 그 친구를 ‘죽기 전에’ 다시 소식을 들을 chance가 조금은 올라갈 것이라는 그저 희망에서 쓰기 시작한 것이고, 다시 들을 수 없다면 그저 그가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새로니가 세상에 왔을 때

  • Post published:
새로니의 첫 나들이, 1983년 2월말
김원백씨 wife 매듭전시회장으로 난생 처음 엄마와 나들이 간 새로니, 1983년 2월 말쯤

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1월 5일, 큰딸 새로니가 태어난 것은 남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가정에 첫 생명이 태어난 날이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더 생각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의미를 주어가며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는 사실 무언가 ‘인간이면 거쳐야 하는’ 인생사의 하나 정도로 생각한 정도였다. 결혼을 했으면 가정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자식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문제는 몇 명을 언제 낳을까 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둘 다 나이가 있으니까 빨리 낳을수록 여러 가지로 유익할 텐데, 그러기에는 신혼의 즐거움이 너무나 짧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딸 새로니는 아주 적당한 때에 태어난 것 같다. 신혼생활을 거의 3년이나 즐겼으니까.. 그 3년 중에 사실 임신기간을 빼면 2년이 좀 넘을까.. 내가 독자라서 사실 어머님께서 은근히 압박을 넣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으셔서 전혀 그런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을 연숙도 은근히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둘 다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 있는 OSU (Ohio State University main campus)에 재학 중이었고, 그렇게 ‘모든 것이 불안정한 학생 신분’에서 첫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어찌 치밀한 계획대로 될까. 게다가 그 당시 나는 학교 공부와 학비를 버는 교수 돕는 일로 한마디로 ‘어디론가 (잠깐) 도망가고 싶은 심정‘ 이 들 때가 있었던 시절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자식을 두게 될 한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에 짓눌리는 괴로움도 느낄 때였다.

경제적인 이유로 그 당시 나는 새로 부임한 (그러니까.. 끝 발이 없는) Turkey출신 교수 밑으로 들어가서 그가 새로 계획한 Digital Control Laboratory(DCL)를 현실화 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을 쓰고 있는데 결국은 어느 날 학과장(Dr Ko, a Chinese)이 와서, 계속 학위를 위한 공부를 계속 할 것이냐, 그곳(DCL)에서 일을 할 것이냐 결정하라고 엄포를 놓고 갔다. 한 마디로 더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하며 시간을 지체하려면 학위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골치 아픈 와중에서 연숙이 임신을 한 것이다.

이후종씨 wife가 열어준 baby shower
이후종씨 wife가 연숙을 위해서 baby shower를 열어주었다

한마디로 1982년은 나에게 학교에서는 어려운 한 해였음이 분명했지만, 다른 쪽으로 우리는 그 해에 천주교를 알게 돼서, 그 해 부활절 때는 우리 부부가 같이 영세를 받는 (축복 받을) 일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신이 된 것은 절대로 우연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유학생 부인들 중에서 임신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면서 (예를 들면 성당교우 유학생 남백희씨)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부유학생들의 기숙사인 Buckeye Village 우리 바로 옆에 살던 물리학과 유학생 배재고 출신 이후종씨 집 ‘마저’ 임신한 것을 알고 우리도 용기를 갖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의 여러 가지 사정이 불안정적이었지만, 모든 것을 무언가에 내 맡긴 기분이었다.

엄마와 첫 생명과의 첫 만남
새로 태어난 생명과 모성의 신비, 1983년 1월

임신 중에 입덧(morning sickness)이 너무나 심해서 연숙은 한 때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지만, 그 당시 새로 얻은 신앙이 그런 어려움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한 예로, 아플 때마다 축성된 성유를 바르고 기도를 하면 신통하게도 낫기도 했던 것인데, 이것도 우리의 영세동기이고, 역시 임신 중이었던 상대 고완석씨의 부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한편, 신기하고 신났던 때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였다. 이것도 부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라고 생각이 돼서 신중하게 의논한 끝에 ‘순 한글’ 식으로 짓기로 하고 어머님께 허락을 받는데, 정말 다행으로 어머님도 대 찬성이셨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한글이름 지어주기가 유행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배우리 씨라는 분께서 그런 운동을 펼치고 계셨는데 어머님께서 극성맞게 그 선생님으로 부터 ‘새로니‘ (새로운+이)란 예쁜 이름을 받아오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자이름의 오랜 전통과 호적, 족보 등을 고려하면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까지 느끼지 않았다. 또한 다행히 호적에도 순 한글이 허용이 되어서 큰 문제가 없었다.

Niagara Falls, Thanksgiving Day, 1982
만삭의 몸으로 추수감사절 때, 나이아가라 에서

연숙의 산부인과는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Riverside Hospital에 있었고 의사는 Dr Baird, 비교적 잘 한다는 사람이었고, 다른 유학생들도 이 의사에 대한 경험들이 있어서 조금 마음도 놓였다. 비록 임신 초기에 심한 입덧으로 한때 고생은 했지만 나중에는 별로 큰 문제가 없었다.

남편이 출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도와주는 Lamaze (라마즈) class에 같이 가서 출산준비 교육도 열심히 받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숙은 제왕절개 출산을 하게 되어서 자연분만을 못한 아쉬움도 남게 되었다.

첫 아이라서 그런가.. 연숙은 혼신의 힘으로 임신기간을 절제하는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고, 뱃속에서 움직이는 생명에 대해서 너무나 신기해 하며, 이런 것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자랑’까지 하곤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고생하는 여자들이 너무 불쌍한데..” 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연숙은 남자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소프트볼을 할 정도로 기본적인 체력이 아주 건강해서 제왕절개출산만 빼놓고 모든 과정이 아주 순조로웠다. 하지만 새로니가 태어났을 때 가장 큰 놀라움은 새로니가 여자아이 였다는 사실이다. 연숙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모두 남자아기일 것이라고 결론을 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그렇게들 추측을 했는데, 여자아이가 나온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남자아이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연숙의 친정은 ‘관례’대로 ‘미안한 마음’을 피력하셨고 우리 어머님은 ‘첫딸의 축복’을 강조하시긴 했지만 속마음은 짐작이 되었다. 내가 독자였으니..

29년 전 1월 초, Columbus, Ohio는 예외적으로 유난히 포근함 속에 가랑비가 내리던 날 갓난 새로니를 안고 Buckeye Village Mahoning Court의 ‘우리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금속공학과 유학생 김원백 씨의 부인(도성 엄마)가 우리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려 주었는데 그제서야 모든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우리가 이제 엄마,아빠가 되었구나, 실감을 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는 인간사가 지금 생각하니 왜 이리도 거창하게 무슨 ‘인간의 성스러운 의무‘를 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결혼을 안 하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신앙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은 역시 이렇게 ‘유별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Leader of the Band – Dan Fogelberg – 1982

 

Goodbye, Vanderbilt & Nashville

  • Post published:

¶  Goodbye Nashville: 지난 주말에는 이번에 Peabody College at Vanderbilt University에서의 1년 반 teacher’s degree (석사과정)가 끝나고 졸업을 하게 되는 큰딸 새로니의 이사를 도우러 Nashville에 연숙과 다녀왔다. 물론 우리의 ‘짐 차’ Plymouth Voyager van을 가지고 가서 새로니 이사 짐을 모두 싣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작년 여름에 Washington DC에서 이사를 내려 올 때도 똑같은 과정을 겪어서 사실 조금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 외에는 익숙한 것들이었다. 편도 3시간 반정도의 드라이브가 이번에는 덜 지루했던 것이, 처음으로 연숙과 같이 묵주기도를 하며 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장거리 드라이브는 ‘절대로’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도 했다. 

Vanderbilt off-campus Apartment, Westboro
일년 반을 산 off-campus 아파트 Westboro, Nashville

그 동안 집에 다녀갈 때마다 조금씩 짐을 가져 오곤 했지만 이번에는 주로 무겁고 큰 것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과연 다 가져올 수 있을까 우려를 했지만, 기가 막히게도 잘 싣게 되었다. 새로니는 일년 반 동안이나 Nashville의 off-campus apartment에서 혼자 살았지만, 요새의 일년 반은 예전의 한달 반 정도로 짧게 느껴져서 나중에 그곳에 그렇게 기억에 남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생각보다 짧은 일년 반이 지나고 보니, 우리로써는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이 country music 의 본고장을 제대로 한번 못 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 했으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조금 늦지 않았을까? 새로니는 이제부터 teacher’s job을 구해야 하겠지만, 하도 피곤한지 우선은 아무것도 안하고 휴일을 즐기겠다고 미리 선언..

다행히 동생 나라니의 condo가 비교적 커서 그곳으로 대부분의 짐을 옮겼고, 당분간 그곳에서 같이 살자고 해서 아마도 휴일이 다 끝나면 그곳에서 동생과 같이 있게 될 듯하다. 안정되고 편안한 ‘연방 공무원’ 자리를 걷어차고 ‘고생길’이 훤한 선생님의 길을 택한 큰 딸의 사명감 있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다른 편으로는 조금 측은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Go Serony Go!

 

New & Callista Gingrich at Capitol
Newt Gingrich와 현재의 부인

¶  Catholic Newton: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것인가? 최근 가열되고 있는 이곳의Republican Primary (공화당 예비선거)을 보며 이것이야 말로 ‘원숭이들의 서커스’ 가 아닌가 생각을 하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한 마리가 박수를 받으며 올라가면 사소한 실수로 떨어지고, 다음 것이 올라가 똑같은 짓으로 떨어지고.. 한 마리 한 마리에게 한번씩 떨어질 기회는 차례차례로 주어진다.

완전히 떨어져 나간 놈(like the pizza man, Herman Cain)도 있고 나머지들은 현재 올라간 놈을 끌어 내리려 각가지 모양으로 날 뛴다. 이것이야 말로 서커스가 아닌가? 현재 높은 줄에 올라가 안 떨어지려 안간 힘을 쓰는 그래도 조금은 침착하고, 덜 미친 놈처럼 보인 것이 바로 Newt(Newton) Gingrich인 것이다.

이 인물은 1990년대에 House Speaker (연방 하원 국회의장)를 역임한 화려한 경력을 가졌고, 한때는 ‘지적이고, 혁신’적인 idea로 많은 주목도 받았지만, 그에 반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결혼, 이혼경력, 허세, 위선, 돈 문제로 항상 ‘도덕적 결함’의 대표적인 인물로도 지목이 되어서 미국 대통령이 되기는 힘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 공화당서커스에서 지독히 운 좋게 상승세에 있으니..내가 사는 곳 구역 연방하원이라 그는 낯 설지 않다. 언제는 가까운 supermarket Publix에서 wife (전 부인)와 grocery를 보고 checkout counter에 서있는 그를 본 적도 있었다. 비교적 서민적인 인상을 보여 주기도 했다.

사상이나 정책적으로 그는 사실 나머지 ‘미친놈’들 보다는 훨씬 온건파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그렇게 혐오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헤매는 공화당에 이런 ‘실용주의자’는 나오기 참 힘든 상황인데, 그가 홀연히 물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대학교수를 역임한 ‘지식인’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감한 용기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가 생각하는 가톨릭의 ‘매력’은 내가 보는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또한, 그의 ‘이민법’에 대한 생각(제한적 사면)은 공화당 내에서는 거의 ‘치명적‘인 생각으로 또한 과감한 용기의 표현일 것이다. 그저, 그저, 인정머리 없이 여자들을 ‘걷어 찬’ 그의 ‘철없는’ 과거가 그의 현재에 가장 걸림 돌인 것이다.

생각한다.. 혹시 혹시 이 인물이 지금 현재 미국에서 오바마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외의 생각.. 그렇게 미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지어다.

 

¶  Silver Bells: 이맘때가 되면 가끔 생각나는 것,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곡이 있다면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은 어떤 곡일까? 이 우리에게 친숙한 캐롤들은 물론 대부분 미국에서 불리고 알려진 것들이 육이오 동란 이후 미군들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진 것들이다.

하도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것이라 사실 이것들이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하고 자라서 아직도 친근하기만 하다. 개신교의 찬송가 스타일 것들은 물론 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멋있던’ 것은 역시 그 이외의 것들이다. 예를 들면 영화 주제곡에서 나온 것들, 전래 민요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이런 노래들은 학교 다닐 시절(주로 고등학교, 대학교) 성탄절이 될 즈음이면 성탄 하루 이틀 전부터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 나오고 대부분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요란하게 나오곤 했다. 그 중에 Bing Crosby의 classic carol White Christmas나 Jingle Bells같은 것은 너무나 알려져서 한창의 젊은 나이에는 조금 진부하게, 그러니까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무렵, 1968년 경, 우리에게 새로운 carol Silver Bells가 서서히 알려지고 퍼지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부터 그 곡이 나에게는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된 것이다. 이유는 물론 확실치 않지만, 그 당시 우리시대를 대표하던 ‘통기타 듀엣, Twin Folios‘, 그러니까 송창식과 윤형주가 그것을 유행시키는데 일조를 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도 한다. 그들이 그 곡을 record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기억에 그들의 Silver Bells는 미국의 내노라 하는 가수들보다 훨씬 나았던 것이다. 최소한 그 당시 내가 듣기에.. 이런 확실치 않은 이유로 아직까지도 나는 이 곡을 소중히 추억한다.

 

Andy Williams‘ rendition of Silver Bells

 

십이 십이의 추억

  • Post published:

잿빛 하늘이 완전히 holiday기분을 유발하게끔 하는 12월 12일.. 그러니까.. 십이십이 로구나. 연관이 되어서 십이십이 사태.. 아니 전두환의 쿠데타. 그때가 1979년 12월 12일이었던가? 이날이 되면 나는 잊지 않고 그때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벌써 와~~ 32년 전이 되었다. 그 해 가을, 10월 26일에 유신정권의 총수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부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피살이 되었고, 그를 수사하던 또 하나의 박정희 심복이었던 전두환이 그날, 12월 12일에 무혈 쿠데타로 흔들리던 정권의 권력을 잡은 것이다.

 

 

당시 추억의 oldie, Heart of Glass – Blondie – 1979

 

그 해, 1979년 초가을에 나는 일시 귀국을 하고 서울에 머물고 있어서 이 격변하던 역사의 소용돌이를 몸소 다 겪은 셈이 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없어진 우리 집 세운상가 아파트에 머물면서 그 당시 나는 가끔씩 맞선을 보기도 했는데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완전히 모든 관심은 사실 10.26 사태에 쏠리고 있었다.

박정희가 아무리 독재자라고는 하지만 국민정서는 그것보다는 그가 불쌍하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도 오래 전(1974년)총격으로 사고를 당해서 더 그런 생각이 우세했을 것이다.

 

 

Sultans of Swing – Dire Straight – 1979

 

이런 상황에서 맞선을 계속 보는 것도 쉽지를 않아서 포기를 하려는 때에 우연히 누나가 인연이 되어서 지금의 연숙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가 11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일련의 일들은 사실상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었고, 그 역사의 일부로 십이십이사태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섭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던 우리부부의 인연은 가족 상견례로 이어지고, 12월 12일전에 결혼에 대한 결정이 서로 이루어졌다. 이런 것이 바로 인연이라고 할 것이다. 날씨가 매섭던 12월 12일, 그날 우리는 결혼 결정 후 처음으로 데이트 겸 해서 김포공항으로 나갔는데, 왜 하필 김포공항?

그날 연숙의 이대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김숙희 교수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이어서 나간 것인데, 사실은 나를 인사시키려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다. 몇몇 학생들과 함께 우리도 인사를 한 셈이 되었는데, 김교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우리의 선입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우리의 결혼을 탐탐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사랑하던’ 제자를 하루아침에 잃게 된 입장이었으니까..

그날, 김포공항에 도착을 해서 걸어 들어갈 때 매섭게 추운 날씨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게 되었는데, 순순히 손을 잡아 주어서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나 손이 시려서 불편했지만, 내가 미안할 까봐 말을 못했다고 실토를 했고, 이 ‘일화’는 두고두고 잊지 않고 아직까지 ‘재미있는’ 일화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날 밤에 일어난 전두환의 무혈 쿠데타 12.12사태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김포공항에서 돌아 온 후에 바로 전두환이 한강다리를 건너온 것이었고,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는 집에 못 돌아올 신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고 두고 이날이 기억에 남게 된 것이다.

 

 

It’s a heartache – Bonnie Tyler (Live in Paris, France)

당시에 유행하던 탁한 저음의 블론드, 영국가수 Bonnie Tyler의 hit oldie

 

온돌이 그립다..

  • Post published:

지난 Thanksgiving 때부터 불편했던 나의 뱃속 사정이 아직도 여파가 남았는지 깨끗하지를 못하다. 특히 밀가루 (yeast?) 음식에 더 고생을 하고, 옛날 우리 불쌍한 엄마 생각이 난다. 항상 소화로 고생을 하시던 우리 불쌍한 엄마.. 불편한 것은 사실 나의 ‘의지’로 얼마든지 견딜 수는 있지만, 사실 나의 걱정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만약.. 만약.. 더 큰 문제라면.. 하는 끔찍한 상상을 떨쳐버리려 노력을 한다. 어쩔 것인가? 그저 담담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견딘다. 그것이 우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아~~ 무언가 무언가를 멋있게, 나의 심중을 다 표현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것이 이렇게도 어렵던가? 나의 깊은 심중을.. 심중을.. 어떻게 표현을 한단 말인가? 추운 겨울이 좋으면서도 차가워지는 나의 ‘발’이 귀찮고, 불편하다. 따뜻한 온돌방이 그립다.. 아~~ 우리 가족, 엄마야, 누나야.. 언제가 그곳에서 만나서 다시 그 옛날을 살자.. 그런 날이 언제 과연 다시 올까?

동짓달 이레

  • Post published:

동짓달..이란 말, 참 오랜만에 써본다. 동짓달 하면 팥죽생각이 나야겠지만 나는 그것 보다 먼저, 국민학교시절 아마도 국어 교과서의 이순신장군 이야기가 생각나곤 한다. 참, 나도 못 말리는 인간인가, 어찌 그것까지 옛 생각과 연관을 시키고 ‘지랄’일까? 그 교과서, 이순신 장군이 동짓달에 거북선을 몰고..가는 그런 글이 아직도 생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음력의 동짓달이었을 것이니까 사실은 양력으로 정월일 것이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 거북선을 몰았단 말인가.. 참으로 놀랍다. 좌우지간 지금은 동짓달 이레, 7일이다. 요새의 날씨는 거의 규칙적으로 삼한사온을 지키고 있다. 며칠 따뜻하던 흐리고 비가 오던 날씨가 차가운 비로 서서히 변하고, 급기야 싸늘한 바람이 부는 그야말로 동짓달 기분을 내게 한다. 분명히 나는 이런 날씨를 ‘사랑’하는 것이다.

요새는 조심스럽게 ‘평화로운 집’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날들이다. 이것이 평화라면 아주 오랜만에 우리 부부가 서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엄청난 ‘고민’을 안고, 시한 폭탄 같은 짐을 지고 늙음과 죽음을 향하는 우리 부부라고 할 수도 있으련만, 그런 것이 아주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듯 살 수 있는 지혜의 은사가 우리 부부에게 선물이 된 진도.. 물론 연숙이 변하거나 변하는 것이 아닐 것이고, 분명히 내가 변하고 있어서 이런 평화가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지나간 세월이 조금 아까워 진다. 특히 지난 10년이 정말 정말 아쉽고, 아깝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라도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이런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느냐에 하는 것인데, 느낌에, 조금 자신이 있다고 느껴진다.

지난 7월 초 온수기를 새로 갈면서 완전히 손을 놓았던 ‘집안 일’들.. 산더미 같이 쌓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일, 내일 하며 미루었던 것이 순식간에 5개월이 지나간다. 이제의 목표는 해가 가기 전까지 조금은 ‘움직여’ 놓아야 한다는 것이 되었다. 이거이야 말로 시작이 반인 그런 일들이다. 한번 손을 잡으면 많은 일을 끝낼 수 있다고 자신을 한다. 그것 말고도 계속 미루는 것, 나의 사랑하는 ‘tech note’에 넣을 수 있는 나만의 tech projects들.. webbot, Arduino, php, WordPress PlugIns.. Sebald’s novels, 일본어, Medjugorje, Social Network Bible..참 많이도 나를 기다린다. 차분히 앉아서 다 읽고, 만들고 싶다. 그것은 항상 나를 흥분하고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니까..

박시희 선생님

  • Post published:
박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박시희 선생님..

박시희 선생님.. 나의 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의 영어선생님, 별명은 “대추 방망이“.. 정열적으로 영어(문법)를 강의 하시던 모습이 45년이 넘도록 눈에 선한데, 나의 중앙고 3학년 때 추억의 글을 보고 박 선생님의 자제분(박용규 교수님)께서 글을 남겨 주셨다. 반가움은 물론이었지만, 곧바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선생님의 안부였다.

나는 그 당시 선생님들께서 건강하게 살아들 계실까 궁금한 것들이 많지만 시원하게 그 대답을 들을 길이 없었다. 선생님들의 연세를 계산을 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데.. 평균적으로 나보다 15~20년 정도 나이가 위라면, 지금은 대부분 80세를 넘으셨으리라.. 그러면 요새의 평균수명 정도일 것이고, 돌아가신 선생님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오늘 박시희 선생님 자제분으로부터는 선생님께서 1993년에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 박 선생님께서는 60대에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을까? 혹시 무슨 사고나, 아니면 병? 아마도 고국에 있는 동창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이렇게 나는 모르고 살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타향살이의 서글픔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 담임 “짱구” 정운택 선생님도 혹시 타계하신 것이 아닐까? 정직하기만 한 세월이 참 무섭게 느껴진다. 박시희 선생님, 죄송합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Sunday before Thanksgiving

  • Post published:

¶  와~~ 벌써 11월 20일 일요일.. 2011년 추수감사절이 4일 밖에 남지 않고, 가톨릭 달력으로는 2011년의 마지막 일요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음 주 일요일부터 새 전례력이 시작 되고, 성탄까지는 대림절 (Advent)의 4주가 또한 시작되는 등, 세속적인 제일 큰 두 명절(추수감사절, 성탄절)로 겹쳐서 조금은 휴일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지혜도 함께 쌓여서 조금은 나은 편이다. 각종 휴일의 유래와 전통, 목적, 뜻을 음미하면 훨씬 도움이 된다. 비 직계가족 식구가 아무도 없는 우리 집은 이럴 때 잘못하면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모이면 네 명은 되지 않는가? 혼자서 휴일의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한다.  

 

Archbishop Emeritus John Francis Donoghue
아틀란타 전 대주교님 John Francis Donoghue

¶  지난 11월 11일 (이곳은 Veteran’s Day, 유럽에서는 Armistice Day?), 전 아틀란타 대교구의 John Francis Donoghue 대주교님께서 향년 83세로 선종하셨다. 그 동안 별로 주교님의 건강에 대한 뉴스가 없어서, 이런 갑작스러운 뉴스에 놀라게 되었다. 특히 나는 이 뉴스를 4일이나 지난 11월 15일 레지오 회합에서 듣게 되어서 아주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 지역소속 종교지도자의 선종은 사실 큰 뉴스는 아닐지라도 내가 어떻게 4일씩이나 늦게 알게 되었을까? Local TV뉴스를 자주 보면 아마도 알았을 것이지만 제일 큰 이유는 11월 13일의 주일 미사를 못 간 것이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신자들 대부분은 그 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도노휴(도나휴, Donahue와 스펠링이 조금 다른 common Irish name) 대 주교님은 1993년에 아틀란타 대주교가 되시어 2004년 12월에 은퇴하실 때까지 참 많은 일을 하셨다. 그 전 오랫동안 침체 속에 있던 이 아틀란타 대교구를 눈부시게 활성화 시키신 것이다.

미국에서 제일 큰 <아틀란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를 크고, 단단히 성장시키고, 대교구에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신심행사를 강력히 권고하셔서 우리 ‘미국성당’ 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형적인 ‘사제 같은 인자한 품성’을 보이시고, 대교구내 수많은 크고 작은 본당의 견진성사를 주관하셔서 우리 아이들도 가까이서 뵙고, 사진도 찍기도 해서 대주교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 은퇴 후에는 ‘명예’ 대주교라는 직함으로 사실 전과 같은 정열로 그 모습을 보이셔서, 이번의 ‘뜻밖의’ 선종은 너무나 아쉽고, 슬프기만 하다. RIP, Rest In Peace.. Archbishop John Francis Donoghue..

 

¶  YouTube에 조금씩 나의 조잡한 video를 올리면서, 조금씩 이곳을 더 자세히 보게 되고, 가끔은 그 동안 못 찾던 것을 찾게 되기도 하는데.. 이번이 바로 그런 때가 되었다. 작년에 나의 중앙고교 3학년을 추억하는 블로그를 쓸 때, 이 추억의 노래를 찾고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는데, 이번에 찾은 것이다. 아마도 그 동안 어떤 분이 만들어 올려놓았던 것 같다. 그것을 찾을 당시, 노래의 제목을 잊은 상태여서 더 찾지 못했을까?

 

행복의 샘터 , 박재란 이양일 1965년

 

알고 보니.. 그것은 <박재란, 이양일> 두 분의 <행복의 샘터> 였다. 이제 생각을 하니 제목이 어렴풋이 기억이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은 1965년 초에 나온 거의 ‘가곡 풍’의 유행가였다.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 바로 내가 중앙고 3학년 초였던 것이고, 그 때부터 고3 하면 두 분이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46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그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박재란씨와 이양일씨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Draganflyer X8
카메라가 달린 Draganflyer X8

  DraganFly?  <dragonfly, 잠자리> 의 misspelling일까? 내가 만일 내일 아침을 못 보는 신세가 된다면, 이것도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인터넷 파급효과의 하나를 건진 것이다. 거의 10년이 넘는 역사의 이 흥미로운 UAV (Unmanned Aerial Vehicle) technology를 그 동안 나는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름에서 연상이 되고, 어렸을 때 꿈도 많이 꾸었던, ‘잠자리 비행기’와 비슷한 이것의 특징은 회전날개가 1개나 2개인 기존의 헬리콥터와 달리 최소한 4개의 회전날개를 가지고 remote control로 조종이 되는 ‘취미용 비행기’인 것이다. 장난감 헬리콥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취미의 수준과 ‘상업용’ 수준의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기술’이라는 점이다.

Canada에 본사를 둔 이 DraganFly Innovation이라는 회사는 Zenon & Christine Dragan이라는 발명가에 의해서 무선조종 풍선, 비행접시 등의 취미로 시작을 해서 근래에는 완전히 심각한 상업용 UAV technology회사로 성장을 해서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의 demo video를 보면 따로 이것의 잠재성에 대해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차원에서 쓰는 UAV는 크고, 비싼 것들이지만 이것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저렴한 것들이다. 현재는 주로 공중 비디오 촬영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의 쓰임은 상상력에 달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세대학의 추억(2): 길었던 1학년 시절

  • Post published:

연세대학교 독수리상

연세대학교 상징 독수리상, 1970년 5월 무악축제때 제막식이 있었다

 

내가 연세대를 지망하게 된 것은 복잡한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철학적인 이유보다,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서울공대 전기, 전자공학과는 나에게 조금 ‘위험한’ 선택이었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외에도, 무언가 부드럽고 ‘낭만적인 인상’을 주던 신촌 독수리의 요람, 반짝이는 구두, 바로 옆에 ‘기다리고’ 있던 이화여대생들.. 등등이 자연히 나를 그곳으로 끌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관심은 100% 전기,전자 ‘과학’ 쪽이어서 전공을 선택할 때에 한번도 다른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의 학과를 지망할 때, 본인의 취향이나, 포부보다는 성적 순위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 이었다. 성적순위로 경쟁 학과를 지망하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 당시 서울공대 화공과나 전기,전자과의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고, 그런 분야를 자기가 좋아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학교 성적만 좋으면 지망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저 그런 과를 졸업하면 보장된 취직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나 있었을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불행한 친구들,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 분야에 진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내가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고 결과였다.

 

Petri camera로 찍은 자화상, 1966
Petri camera로 찍은 자화상, 1966

연세대학 전기공학과의 경쟁률은 상당히 높아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느끼긴 했지만, 사실은 끝났다는 안도감과 편안함도 잔잔하게 느끼며 발표를 기다렸는데, 그만큼 입학시험이란 것이 괴로운 것이었다. 그 당시, 입학시험 발표는 대부분 라디오에서 제일 먼저 발표를 했고, 나도 그것을 통해서 합격 발표 결과를 들었다. 입시 전에 합격하면 ‘진짜’ 카메라를 사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나는 정말 합격발표를 기뻐했는데, 진짜로 며칠 후에 나는 일제 페트리(Petri) 란 카메라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나중에 가까웠던 친구들의 대학입시 결과가 속속 알려졌는데, 김호룡은 연대 기계공학과에 합격을 했는데, 나머지 이종원, 우진규 등은 모두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2차 대학을 응시하거나 재수를 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고, 종원이는 2차였던 외국어대에 갔는데, 우진규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남영동에서 본 남산 야경, 1966년 3월
남영동에서 본 남산 야경, 1966년 3월

비록 추운 겨울 날씨였어도 입학식 전까지의 시간은 정말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악몽’ 같던 시절이 끝나고, ‘완전 자유’의 대학시절이 눈 앞에 보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드디어 ‘학생입장불가’ 라는 영화도 당당히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용산구 남영동, 금성극장 바로 앞에 살았고, 그곳에서 연세대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사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약간 달라진 것은 까만 교복대신에 곤색 대학제복을 입었던 것, walker(군화) 대신에 진짜 신사화 (단화)를 신었고, 머리는 조금 자라서 스포츠형 정도가 된 것, 그것이 전부였다. 어떤 애들은 완전히 기름까지 바르며 머리를 기르고, 신사복까지 입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그 때 연세대 캠퍼스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여기저기 보이던 “멋진” 여대생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속한 과에는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여기저기 강의실 이곳 저곳에 여대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도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곳에서 소개된 도서관, 학생보건소, 채플시간 등등은 나중에 연세대만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입학을 한 후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비록 멀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버스노선이 있어서 사실은 더 편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매일 왔다 갔다 한 것이다. 이곳에서 대학졸업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나의 대학시절의 추억은 이곳과 항상 연관이 되어있었다.

 

연세대 입학 직전, 죽마고우 안명성과, 1966년
연세대 입학 직전, 죽마고우 안명성과, 1966년 봄

연대 전기과, 우리는 그저 그렇게 불렀다. 내가 1966년 입학할 당시 연세대학교는 공과대학이 아닌 이공대학이 공학부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기공학과와 비슷한 전자공학과란 것이 생기기 전이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 전자공학과가 분리되었을 것이다. 내가 다닐 당시에는 3학년이 되면서 강전, 약전 이란 이름으로 갈라졌다. 그러니까 강전(强電)이란 것은 전통적인 전기공학이었고, 약전(弱電)이란 것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자공학인 셈이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강전은 (electric) power system, 그러니까 전력의 발전,송전 같은 ‘강한, 높은 전압’의 것을 다루고 약전은 그 이외의 것, 특히 electro-magnetic, radio, amplifier, control systems 같은 것을 다루었던 것이고, 이 약전이 바로 전자공학(電子工學)인 것이다. 나는 약전, 전자공학에 관심을 두고 입학을 했기 때문에 3학년 때 약전 반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각자의 지망대로 배치를 하지만 워낙 약전, 전자공학에 지망생이 많아서 교수님들도 조금 골치를 썩힌 듯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서 재학생, 복학생으로 갈라지는 판에 3학년부터는 약전,강전으로 거의 반반으로 갈라게 되어서, 심하면 서로 모르는 학생도 생길 정도였다. 지금 졸업 앨범을 보니 그것을 느끼게 된다. 얼굴만 조금 익혔을 뿐 이름 이외에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학 이전의 동창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나는 1학년 가을학기부터 1년 휴학을 했기 때문에 입학동기들은 거의 놓치게 되었다. 이런 조금은 복잡한 이유로 나의 연세대 4년은 조금 비정상 적인 것이 되었다.

1학년 1학기 때, 그러니까 1966년 봄 학기, 그야말로 freshman의 기분으로 인생에서 조금은 새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대학생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 그러니까 사람 취급을 받았다. 머리도 기르고, 신사복도 입고, ‘단화’ 구두도 신을 수 있고, 극장도 마음 놓고 들어가고, 다방, 술집..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또한 마음 놓고 남들이 보이게 ‘연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대학에 들어와서, 아차..하고 한눈을 팔면 완전히 자제력을 잃기가 아주 쉬웠다. 내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나 할까..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갑작스런 개인적 자유를 슬기롭게 감당할 준비가 덜 되었던가.. 자유의 전당에서 나는 첫 학기를 혼돈과 방황으로 보냈다. 대학 강의란 것도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고3때의 스파르타 식, 우스꽝스럽게 어려웠지만, 멋지던 수학, 화학 같은 것이 대학에선 수준이 ‘낮아진 듯’이 느껴졌다. 1학년의 교양학부 과정 전체가 고등학교와 수준이 비슷한 듯했다. 한가지 다른 것은 강의를 ‘땡땡이’를 쳐도 당장 아무런 ‘처벌이나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던 것이었는데, 그런 ‘안심’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나중에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환경에서 전기공학과 1학년에는 중앙고 동기동창 2명, 그것도 3학년 8반 때의 ‘반창’이었던 신창근과 조남재가 있었다. 중앙고의 같은 반에 있었어도 개인적으로 별로 가깝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중앙고 1년 선배인 구장서, 더 위의 선배인 (2~3년?) 차재열 형.. 등등, 그러니까 중앙고 출신이 전기과 1학년에 나까지 5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은근한 ‘힘’을 가진 집단이어서, 무슨 투표,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절대로 무시 볼 수 없는 숫자였고, 과 대표를 뽑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보슬비 오는 거리 – 성재희

1965년 말에 발표된 성재희씨의 데뷔 힛트, 입학시험 즈음에 거의 매일 듣었던 곡으로, 그 당시를 추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가요가 되었다. 레코드가 크게 힛트한 후에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I Could Easily Fall in Love with You – Cliff Richard

 연세대 입학 후에 참 많이 듣고 좋아했던 곡, 전 해에 Cliff Richard는 이미 The Young Ones라는 영화로 일본과 한국에 많은 fan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연세대에 입학한 중앙고 동창 중에는 기계과에 나의 절친했던 친구, 김호룡을 비롯해서 김연응이 있었고, 다른 과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나중에 총학생회장을 뽑을 때에 은근한 세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별로 그런 것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작은 규모의 정치적 발상이고 행동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체질에 별로 맞지 않았지만 기성 정치인을 흉내 낼 정도로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투표에서 표 하나가 사실은 땀과,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사실도 그때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전기과 3학년에 어머님의 절친한 원산 루씨여고 동창 친구분의 아드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위재성 형, 보성고교 출신으로, 학훈단(ROTC) 생도였고, 성적도 뛰어나고, 지도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형이었다. 그 형의 여동생인 위희숙씨는 1967년에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을 해서 나와 같이 1971년에 졸업을 한 졸업동기생이 되었다. 어느 날 그 형이 나를 보자고 불러서 갔더니, 그곳은 전기과 학생회 선거본부였다. 알고 보니 그 형이 학생회장(이공대 회장)으로 출마를 해서 겸사겸사 나를 보자고 한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실 곤란한 것도 없지 않았다. 이미 나는 다른 과에서 중앙고 출신의 선배가 출마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대학 학생회 선거는 일반 선거의 풍토와 별반 다름이 없고, 완전히 ‘출신지’에 좌우되는 판이었다. 출마 후보의 경력, 자질, 포부 같은 것은 사실 뒷전에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선거풍토를 그대로 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출신고의 압력에 굴복한 셈이 되었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1학년 1학기의 시작 무렵에 나는 ‘사진 찍기‘에 완전히 빠졌고 그것이 조금 수그러질 무렵에는, 나의 다른 blog에서 다루었던 ‘모형 비행기‘ 로 시간을 다 보냈다. 온통 정신이 그곳에 가 있어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교시절의 학과목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역시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 시험도, 출석도 문제가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체육 같은 것은 출석미달로 시험도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반대로 ‘성공’을 하겠다고 정신무장을 하고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가 군대(공군)를 마치고 입학한 사람, 이름이 강성모 였다. 나이나 성품, 성숙함 등으로 전기과 1학년 과대표로도 뽑히고, ‘공부도, 활동’ 도 잘해서, 결국 강성모씨는 나중에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학과장의 추천으로 미국유학(Fairleigh Dickenson College, NJ)을 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 강성모씨는 내가 한창 ‘놀던’ 그 학기에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절대로 재수가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67년 가을학기, 이윤기와 함께
이윤기와 찍은 사진, 중앙동창 김복희가 찍음, 1967년 가을학기

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휴학계를 제출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나에게 최적의 선택이었다. 1966년 입학 동기들은 사실 이때부터 1년 휴학을 하면서 완전히 ‘놓치게’ 되었고, 1967년 가을 2학기에 복교를 하고 보니, 전기과의 학생들은 사실상 1년 뒤에 입학했지만 나와 나이는 거의 비슷했다. 거의 모두 생소한 얼굴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도와서 나의 중앙고 반창인 이윤기와 나의 죽마고우 박창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는 3학년 때 그런대로 친하게 지낸 친구였는데, 재수를 해서 들어왔고, 박창희는 나의 중앙고 1년 후배여서 제대로 입학을 한 것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엘 다니면 1학년의 차이에도 존댓말을 써야 했지만, 나와 창희가 죽마고우의 친구여서 그럴 수는 없었고, 이것 때문에 창희와 윤기도 서로 말을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앙 1년 후배인 김태일, 이상일 등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외에도 전기과에는 조금 낯이 익은 얼굴 두 명이 보였는데, 그 들은 이헌제, 김현식.. 이름보다는 얼굴이 낯이 익어서 생각해보니 작년, 나의 입학동기생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일년 뒤에 다시 보게 되었을까? 나와 같이 휴학을 하지 않았으면, 유급일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헌제는 유급이 분명했는데, 김현식은 그 당시 이유를 분명치 않았다. 그래도 이헌제는 나를 알아보아서 나도 아주 반가웠는데.. 그 해(1967년) 겨울이 지나면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겨울방학 중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과의 한창만으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한강 파출소로 가보니, 이헌제 가 한강 철교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충격적이고 어이가 없었다. 이헌제.. 얼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어떻게 그가 자살을.. 나중에 들어보니 열렬히 연애하던 여대생(이대 음대생)과 결별을 하면서 비관 자살인 것 같다고 했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며 담배 피던 모습이 흡사 외국 영화배우 같았고,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얼마나 충격과 절망이었으면, 그 나이에 자살을 했을까.. 아직도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채 피지 못한 그 영혼의 명복을 빈다.

 이윤기, 박창희 같은 뜻밖의 ‘친구’들 때문에 나의 대학 1학년 2학기의 시작이 아주 순조롭게 시작 될 수 있었고, 1년 전의 ‘악몽’을 되씹으며, 단단히 결전의 자세로 학교생활에 임하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실수도 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학교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학교의 강의,과목을 충실히 공부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되었다. 사실 이것이 정상적인 대학생활이었고, 나는 처음 그런 대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새로 만나게 된 과 친구들과도 큰 무리 없이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이윤기와 박창희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이미 이윤기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이 있었는데, 흔히 그들을 ‘식당파‘라고 불렀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그 당시의 학생식당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모두 쾌활하고, 다양한 남자들.. 그 중에는 과 대표였던 고종태, 기타를 귀신처럼 잘 치던 보성고 출신 심재흥, 항상 옷을 멋있게 입던 문욱연,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일찍 군에 입대하고 나의 졸업앨범에 남지를 않아서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 중의 한 명, 이름은 비록 잊었지만 그 당시 가요 히트곡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 홈” 을 좋아했던 친구, 그 노래는 나도 좋아하던 것이라 더 그를 기억한다.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홈 

 

이윤기, 박창희와 더불어 그 당시 어울리게 된 사람들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 전기과의 강원도 출신 김철수, 중앙고 후배 김태일, 그리고 지방(전라도) 출신의 김진환 등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그룹이 형성이 된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연세대 굴다리 바로 앞에 있던 다과점(빵집)에 둘러 앉아 얘기를 하고 했는데, 그 때의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한다. 어떻게 그런 ‘순진’한 순간들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우리들은 어린이처럼 모이곤 했는데, 재미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그날 돈을 낼 사람을 뽑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모인 우리 그룹은 다음해에는 완전한 남녀 혼성 클럽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67년 1학년 2학기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해서 사실 나에게는 보기 드문 완벽한 학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 꼭 좋은 일에는 악재가 낀다고, 작은 사고 하나로 나는 조금은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어린애들처럼 분필 던지는 놀이를 하다가 내가 앞 이빨을 부러뜨리는 조그만 사고가 났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치과를 계속 다니게 되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서 더욱 학교공부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학년 1학기에 겪었던 학교공부의 어려움을 1년 뒤의 2학기에 완전히 만회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다시금 대학생활에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하게 되었고, 학기가 끝나면서 대망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계속)

 

연세대학의 추억(1): 졸업 앨범

  • Post published:

 

연고전 Classic

연고전 Classic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둘려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을 안고 푸르고 맑은 정기 하늘까지 뻗치는
연세 숲에 우뚝 솟은 학문의 전당. 아~ 우리들 불멸의
우리들 영원한 진리의 궁전이다 자유의 봉화대다.
다함 없는 진리의 샘 여기서 솟고 불멸의 자유의 불
여기서 탄다.

우리들은 자랑에 찬 연세 아들딸. 슬기 덕성
억센 몸과 의지로 열성 진실 몸과 맘을 기울여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 승리와 영광으로
길이 다한다. 찬란한 우리 이상 밝은 누~릴 이룬다.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너무 너무 오랜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앨범을 보며 교가 연세의 노래를 듣는다. 얼마나 오랜 만인지는 정확히 그 햇수를 모른다. 다만 1971년 2월 졸업 후에 처음으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물론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은 보았을 것이지만 느낌 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10여 년 동안 가끔이라도 즐겨 본 졸업 앨범은 거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의 것이었고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앨범에는 손이 가지를 않았다.

어떻게 나는 이렇게 대학시절의 추억과 그 이전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게도 다를까?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그 나이의 추억은 그 이전의 추억과 근본적으로 깊이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심하게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지만 순진한 추억과 더 성숙하지만 조금은 덜 순진했던 시절의 추억, 그런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더 복잡해진 대학시절의 추억을 글로 간단히 표현하기도 그 이전에 비해서 더 힘들었고,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준비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전의 졸업앨범에 비해서 대학의 것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는 제일 큰 이유는 대부분 ‘생소한’ 모습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앨범의 주인공들은 같은 학과가 아니면 사실상 전혀 모르는 ‘동문’ 인 것이다. 같은 학과라도 재학생과 복학생(민바리 vs. 군바리 라고 불렀다) 으로 갈라지고 거기다 나이차이까지 있다. 물론 여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래서 대학 앨범을 자주 안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특히 학교 내에서 활동을 안 하거나 하면 다른 과의 동문들은 이름도 모르고 졸업하게 된다. 입학 동기들의 얼굴은 교양학부의 과정에서 조금 익히고 나머지들은 채플 시간(연세대는 개신교 재단의 학교), 그리고 과외활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후회스럽지만 나는 연세대학 시절,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을 하나도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학생회나 과외 서클(그때는 동아리라는 말조차 없었다) 같은 것들이다. 한때 전통 있는 교내 사진(동호회) 서클인 연영회 의 가입 모임에 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전혀 나가지 못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일초도 주저 없이’ 그런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부분 대학시절의 ‘멋과 보람’을 학교 밖에서 찾으려 했고, 또한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결혼 후에 ‘아내’ 연숙이 학교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교내 활동의 멋과 보람 같은 것도 충분히 실감 하게 되기도 했지만, 재학 당시 나는 그런 교내 활동은 그저 고리타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 졸업앨범을 다시 보면서 그 오랜 세월 잊었거나 몰랐던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정말 우연히 이 재동국민학교 동창을 이번 앨범에서 보게 되었다. 일부러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신문영은 나의 지나간 재동국민학교의 추억 blog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던 바 있었고, 그 후에 또 우연히 googling으로 다시 이 친구이름이 연세춘추(연세대 교내신문)와 연관됨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재학 당시 연세춘추 교내 신문에 관련된 과외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문과대학생들이 하는데 어떻게 상과대학 생인 그가 그곳에 관련에 되었을까? 연대 입학 후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사실 이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외모가 완전히 ‘현대식’이었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고수한 것이다. 아마도 최현배 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남과 조금 다르고, 앞서가는 연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이 좋았다. 연세대 다닐 당시 (아마도 도서관이 아니면, 학생회관에서) 잠깐 신문영의 얼굴과 완전히 닮은 사람을 보았었는데, 이제야 100% 그의 존재가 이 졸업앨범을 통해서 확인이 된 것이다. 상경대학의 상학과를 다녔고, 연세춘추에 관련된 사진에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1971년 졸업이었으니까 이 친구도 일년 재수를 했거나 휴학 같은 것을 했던 모양이다. 이제 유일한 의문은, 어떤 중,고등학교를 다녔나 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꽤 많은 중앙고 동창도 이곳에서 처음이나,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분 재수 입학을 해서 보통보다 1년이 늦게 졸업을 하게 되는 듯 싶었다. 나처럼 1년을 휴학을 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재수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 중에 경영학과의 이수열과 박종섭이 있다. 이수열은 나의 중앙고 3학년에 대한 blog에 이미 회고한 바가 있다. 졸업식 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어서 사진도 남아있다. 이수열은 중앙고 3학년 때, 이과(理科)로 분반이 되어서 대입준비를 했는데, 어떻게 상경대로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박종섭은 중앙고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그러니까 역시 이과였는데, 어떻게 이 친구도 상경계열로 가게 되었는지? 특히 박종섭은 국민학교 때부터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학교, 중앙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그것도 졸업동기.. 이 정도면 참 우연치고는 대단하지 않을까? 그것에 비해서 우리는 한번도 친구가 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참 대단한 인연이다. 박종섭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크게 성공한 동창, 동문이 되었다. 나중에 현대 반도체(Hynix) 의 사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는지.. 확실치 않다. 그 이외에도 상학과 권세용, 정외과 구만환, 지질학과 윤병훈 등이 졸업앨범에서 반갑게 보이는데, 이들 역시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다. 기계과의 김영철.. 중앙고 3학년 ‘반창’인데, 사실 연세대 재학 시 그를 본 기억이 거의 나지를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친구도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대성공’을 한 친구로, 동국제강의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중앙고 1년 후배들, 내가 1년을 휴학을 한 바람에 ‘동급생’이 된 친구들이다. 전기과 박창희, 김태일, 기계과 양규식 등… 박창희는 나의 죽마고우로써 후배라는 생각보다는 ‘불알친구’ 라는 생각뿐이다. 김태일, 재학 시 같은 클럽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양규식, 재동국민학교도 1년 후배인 활발한 친구, 역시 재학 시 학생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학훈단(ROTC, 일명 바보티씨)을 거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오래 전 시카고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1976년 쯤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들으니 LA로 이사를 갔고, 지금도 거기서 ‘매일’ 동창들과 골프를 즐긴다고..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상경대 상학과 김상우..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금새 알아 보았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는 중앙중학교를 나와 같이 다닌 김시영 이었다.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안 바뀌었다. 중앙중학교 3학년 때 나의 다른 친구 이경증과 단짝이던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친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졸업앨범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연세대 시절 사실 그를 캠퍼스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시영이 김상우로 이름이 바뀌었던 친구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

건축과의 장학근씨.. 64학번이라고 하니까 나의 2년 정도 연배인 셈이다.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곳 아틀란타에 왔을 때, 이곳 연세대 동문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부인 장(피)영자 동문도 66학번 연세대 기정대 출신으로 나와 사실 입학 동기인 셈이었다. 학번이 거의 비슷한 연대 선배가 이곳에 같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조금 가까이 지내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선배의 얼굴을 이번에 졸업앨범 건축과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장 선배는 이곳의 ‘유지’ 격에 속해서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한인사회의 이곳 저곳에 많이 관여가 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식, 장례식 같은 데서 꼭 이 장 선배를 만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오래 전, 이곳의 다른 ‘유지’ 격이었던 김예순씨 (치과의사)의 장례식에서는 ‘울면서’ 조사를 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연세대 동문 (박만용씨)의 장례식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전공(건축과)도 충실히 살려서 이곳 주택에 관련된 연방정부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기계과 민옥기..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나의 졸업앨범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Ohio State 다닐 때 그를 잠깐 보았다. 역시 같은 기계과에 있었다. 학교 기숙사 버스에서 가끔 보기도 하고 같은 공대라서 얼굴이 익었고, 연세대 피크닉에서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동문이라서 웬만하면 조금 친해질 수도 있으련만.. 전혀 mutual chemistry가 없었을까.. 느낌이 그랬다.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표정’ 일 수도 있고, 좋게 말하면, 그저 사람을 피하는 듯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와 연세대 졸업동기라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같은 기계과 출신 나의 친구 김호룡에게 물으니 ‘검정고시 파‘ 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연세대 재학 당시에도 그렇게 ‘행동’을 했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김호룡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뒤 늦게 그 소식을 확인하려고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본적이 있었다. 둘 다 연세대 기계과 교수단에 있어서 그리 한 것인데, 나를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의 그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들어맞았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앨범, 1971년

 

Mary Hopkin – Those Were The Days – 1968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British Oldie, Beatles 의 Paul McCartney가 제작한 이곡은 역시 비틀즈의 Apple Record label 판매로  Mary Hopkin 의 debut곡이 되었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까지 올랐다. 그 당시를 생각케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Mary Hopkin – Goodbye – 1969

다음 해, 역시 비틀즈의 Paul McCartney 곡으로 Mary Hopkin의 두 번째 hit song이 되었다. 그 후에 다른 hit song 도 있었으나 우리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생인 그녀는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세계적 fashion model이었던 영국의 Twiggy가 Beatles에게 소개 했다고 한다.

 

 

윤태석, 박종원 그리고 비행기

  • Post published:
윤태석,  중앙고 57회 앨범에서 1966
윤태석, 중앙고 57회 앨범에서 1966

윤태석, 박종원, 그리고 비행기.. 이들은 오래 전 한때 나의 친구들이었다. 처음 만난 친구가 윤태석.. 중앙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1962년이었다. 교실에서 윤태석은 나의 바로 뒤에 그의 짝꿍 정만준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때 윤태석은 이미 우주과학과 비행기 광이었다. 그 나이에 그런 것들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것들을 알고, 좋아하는 정도가 완전히 프로 급이었다.

 윤태석과 박종원은 그 당시 이미 서로 친한 친구로써 모형 비행기를 같이 날리고 있었지만 내가 윤태석을 통해서 박종원과 만나게 된 것은 대학 1학년에 된 후였다. 윤태석은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비행기와 더불어 우주과학에도 심취해 있었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부지런히 총천연색으로 인쇄된 미국 우주개발에 대한 화보들을 교실의 뒤에다 붙여놓곤 했다. 그 당시 반 친구들, 좋건 싫건 간에 그런 사진들을 보면서 소련과 미국의 우주경쟁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요새 같으면 물론 칼라 텔레비전 현장 중계로 보겠지만 그 당시는 사실 흑백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Soviet Union)은 1957년 10월 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프트닉(Sputnik)에 이어서 역시 사상 최초로 cosmonaut 유리 가가린 (Yuri Gagarin)의 지구궤도 완전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미국이 또 한발 늦은 것이다. 한 달 후에 미국도 알란 쉐퍼드, astronaut Alan Shepard의 우주비행에 성공을 했지만 그것은 완전 지구궤도비행이 아니고 비교적 짧았던 15분 정도의 우주비행이었다. 그러다가 1962년 2월 드디어 미국도 존 글렌, astronaut John Glenn Jr.를 space capsule 우정7호, Friendship 7에 태우고 거의 5시간 동안 지구를 3번 선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때가 바로 미국의 첫 번째 NASA space program인 머큐리 프로젝트, Mercury Project가 진행되던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던 때였다.

John Glenn Jr. on Friendship-7, 1962
John Glenn Jr. on Friendship-7, 1962

이 당시에 윤태석을 알게 되어서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을 생생한 화보로 목격을 할 수 있었고, 또한 모형비행기에 대해서도 그에게 많은 것을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 모형비행기라면 조잡한 수준으로 대나무와 습자지 같은 종이, 고무줄로 프로펠러를 돌리거나, 글라이더로 날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가끔 만들어 보고 날리기도 했지만 무언가 잘 되질 않았다. 재료가 형편이 없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가끔 학생을 중심으로 모형비행기대회가 열리곤 했지만 나는 꿈도 못 꾸었는데 윤태석은 박종원이란 자기 친구와 같이 참가하곤 했다고 들었다.

 그때 윤태석이 학교로 가지고 와서 보여준 잡지는 미국의 Model Airplane News 였고, 그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만들던 모형비행기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습자지, 창호지로 만들던 것은 전혀 없었고, ‘진짜’ 비행기와 똑같은 것들, 게다가 고무줄 동력이 아니고 조그마한 엔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짜 비행기를 그대로 축소한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흥분한 것은 잠깐이고,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미국에서는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미국 환상’만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윤태석과 헤어지게 되었다. 중앙고교 3년 동안 한번도 같은 반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에 대해서도 거의 잊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비행기 대신에 망원경과 전파과학에 심취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가면서 윤태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연세대 전기과엘 갔고, 태석이는 고대 물리학과에 갔는데, 어떻게 연락이 되어서 만나게 되었는지 그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런 어느 날 태석이가 박종원과 함께 우리 집엘 놀러 와서, 말로만 들었던 박종원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도 나와 함께 중앙 중 고교 6년을 다녔지만, 한번도 같은 반을 해 본적이 없어서 사실상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큰 상관이 없이 우리들은 같은 취미를 가진 동창생으로 다시 만나서 비행기 이야기로 얘기꽃을 피웠다.

gas engine powered model airplane, Angst, 1966
나의 ” engine, Enya 019″ line-controlled 모형비행기, Angst, 1966

 알고 보니 태석이보다 박종원이 이쪽 계통은 더 프로였다. 청파동에 있던 그의 집에 가보니 진짜 미국 잡지에서 보던 엔진이 달린 비행기들이 있었다. 엔진도 꽤 많이 가지고, 숫제 조그만 machine shop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은 2층 양옥으로 상당한 고급주택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립학교 재단의 이사장이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그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진짜’ 모형비행기 만드는 데 시간을 쏟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쓰인 시간 때문에 대학의 강의를 듣는데 상당히 stress를 주어서 성적을 유지하느라 상당히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1966년 봄이었다. 그 봄을 나는 온통 엔진 비행기 만드는 것, 날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것들에 필요한 재료들은 거의 전부가 미8군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라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그런 것을 취급하는 유일한 곳은 ‘스카라 극장’앞, 퇴계로 근처에 있었던 ‘합동과학교재사‘ 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도 사실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날린 장소가 더 중요했다. 어느 곳이고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서울에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학교 운동장은 예외였지만 대부분 출입이 제한 되어있어서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 곳이 교외선을 타고 가는 화전비행장이었다. 말이 비행장이지 제일 작은 신문사에서 쓰는 경비행기들이 활주하는 커다란 풀밭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한가한 곳이고 넓은 평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교통편이 불편했는데, 그 복잡한 교외선 열차에 비행기를 들고 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모형비행기 대회, 1966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모형비행기 대회, line-control 비행기가 나르고 있다.1966

한번은, 졸업 후에 처음으로 중앙고교 뒷산까지 비행기를 들고 가서 날렸는데, 나의 실수로 비행기가 완전히 박살이 나기도 했다. 그때 비행기 조종은 거의 U-reely 이라는 것을 비행기 날개에 연결해서 빙빙 돌게 만들고 그것으로 뒷날개의 elevator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별로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사실 진짜 프로들은 radio control로 조종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radio control의 값이 너무나 비싸서 머리만 굴리다가 못하고 말았다. 무선 조종 비행기의 시범을 한번 보았는데,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공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열린 ‘한국 모형비행기 대회’ 란 것이 박종원과 참가를 했다가 본 것이다. 학생도 많았지만, 직장인, 미군들이 대거 참가를 한 아마도 제일 큰 대회였을 것이다. 기어코 무선조종을 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기재를 구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조금씩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서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만났던 윤태석과 박종원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경에 마지막으로 윤태석을 그의 짝꿍이었던 정만준과 같이 한번 만났고, 그것이 그들과의 마지막이었다. 세월의 수레바퀴가 구른 한참 뒤에 윤태석과 중앙고 동창회의 인터넷을 통해서 연락이 되었는데, 그는 경인에너지에서 오래 근무를 했고, 학교 선생님인 부인과 결혼을 했다고.. 현재는 비행기 대신에 망원경에 더 관심을 쏟는 모양이었다. 한때 개인 천문대를 만들 계획을 다 세웠다고 들었다.

미국에서는 모형비행기는 상당히 프로 급의 취미에 속하고 역사도 amateur radio(HAM)과 더불어 상당히 오래 되었다. 고국도 경제여건에 따라 이런 취미는 미국이나 일본 수준까지 온 듯하다. 나의 조카(임준형)도 한때(대학시절) 이것에 심취를 한 모양이고, 그것이 거의 15년 전인데 그때 벌써 무선조종을 손쉽게 하는 것을 보고 그 수준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이 ‘고급취미’ 때문에 학교공부를 소홀히 해서 두고두고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멋진 추억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윤태석, 박종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의 추억

  • Post published:

1980년 가을, Columbus, Ohio.. Ohio State University campus.. 그러니까 31년 전 이맘 때쯤인가, 그들을 처음 만났다. 이 오랜 세월에 비하면 거의 찰나에 가까울지 모를, 기껏해야 3~4개월 정도나 알고 지냈을까? 그 당시 신혼이었던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한두 살 정도 적었던, 젊었던 부부, 남편 고석태씨, 부인 나혜성씨, 가끔 추억하고, 생각한다. 남편 고석태씨, 콧수염의 미술전공 유학생 (홍대 출신이었던가?)으로 그 해 가을학기에 OSU로 왔고, 아내인 나혜성씨는 남편을 따라서 온 것이었다.

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1980년
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graduate student Apt. 1980년

1980년, 여러 가지로 의미 있던 해였다. 그 해 1월 25일에 나는 서울에서 연숙과 결혼을 했고, 그 해 6월에 연숙이 이곳에 와서, 본격적인 우리의 신혼’유학’ 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 해는 또 대한민국에서 ‘해외 유학자유화’가 시작이 되어서, 가을 학기에 맞추어 ‘대거’ 유학생들이 OSU 에 도착했다. 유학자유화란 것이 자세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의례 치르던 문교부 유학시험이 면제된 듯 했다. 그러니까 지망학교의 admission만 받으면 여권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50,000+)인 OSU에도 그 전까지는 한 학기에 몇 명 정도 유학생들이 오곤 했는데, 이번은 완전히 공식이 바뀌어서 수십 명이 넘게 ‘몰려’ 온 것이다. 전공 학과도 다양해 져서 전에는 못 들어보던 학과에도 유학생들이 왔는데, 그 중에 고석태씨 부부가 끼어있었다. 그의 미술전공은 그 전에는 사실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이공계 아니면 경제학 등이 주류였었으니까.. 이때를 계기로 유학생 문화가 일시에 바뀌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지냈는데, 일 순간에 그것이 불가능해 진 것이다. 그와 때를 맞춰 ‘중공’ 에서도 ‘짱꼴라’ 유학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중국유학생이면 100% 대만 출신이었는데,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 좋은’ 중공 학생들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새로 이곳에 유학생으로 도착한 고석태, 나혜성씨를 만나게 되었다. 만나게 된 인연이란 다름이 아니고, 아내 연숙과 나혜성씨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이다. 연숙은 이대 학생회의 임원이고, 나혜성씨는 이대 학보사(학교신문)의 학생 기자였다고 했다. 그 당시 과외 활동으로 ‘중간 집단 교육‘이란 것을 같이 받을 때 만났다는데, 나는 아직도 이 중간집단교육 이란 ‘해괴한’ 이름이 무엇을 뜻 하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친목도모’를 위한 것이 아닌 조금 더 ‘고상한’ 이념을 위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교육의 지도교수가 아틀란타의 Emory University 출신인 한완상 교수였다고 했다. 나의 대학시절 활동이 모두 ‘남녀 친목도모’인 것에 비해서 연숙은 거의 이렇게 조금은 ‘심각한 정치적’인 색깔이 있었다. 나혜성씨는 이런 활동에서 만난 ‘동무’라서, 그 들은 보통의미의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기만이 알던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서 연숙은 미국에 온 후 3개월 동안 느끼던 약간의 ‘미국적’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우리는 이들 부부와 자연스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남편 고석태씨는 콧수염을 기르는, 역시 미술학도의 개성을 들어내고, 아주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미술전공 남자 유학생을 나는 본 적이 없어서 사실 공부하는 얘기는 미리부터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주로, 젊은 부부가 사는 얘기를 하곤 했지만, 가끔 여자 둘이 모두 ‘사회 문제 의식’에 경험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런 쪽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 해 1980년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우리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밖으로 나가 마구 뛰어 놀았다. 나를 제외한 이 세 명은 모두 미국에서 처음 맞는 눈이어서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오래 전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고석태씨보다 나혜성씨의 기억이 더 나는 것은, 나와 조그만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해 1979년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결혼을 염두에 두고 신부 감 소개를 조금 받았던 사람 중에 나혜성씨의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좁다고나 할까.. 조금 놀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 만났던 그 여자는 한마디로 좋은 집안을 가졌고, 그들도 역시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찾던 참이었으니.. 나는 사실 ‘면접시험’에서 낙방을 한 셈이 되었다. 그때 그 집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정말 ‘무례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때 사실 ‘아버지 없는 설움’ 을 처음 느꼈다. 여자 본인은 그 아버지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역시 ‘본인의 사람됨 이전에 집안‘ 이라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나혜성씨의 얘기가, 나중에 그들이 바라던 대로 ‘근사한 결혼’을 했다고 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조그만 우연이었다.

 이렇게 알고 지내던 고석태씨 부부가 겨울이 지나고 ‘갑자기’ 없어졌다. 사실, 아직도 어떻게 없어졌는지 그 자세한 과정은 우리부부 모두 기억을 할 수가 없지만, 그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것이다. 생각에 OSU에서 별로 좋은 전망을 기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대부분 학교를 옮기는 case는 이렇게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것이고, 또한 확실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중에 듣기에 Oregon State로 갔다는 소문도 듣긴 했지만 확실치 않다.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더 궁금한 마음이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이다. 나혜성씨가 이대출신이라 연고를 통하면 알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역시 거대한 세월의 바퀴에 치어서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지금 살고 있을까?

 

Longer – Dan Fogelberg, 1980
그 당시 추억의 oldie, 사랑이 전부였던 시절..

 

용기 형!

  • Post published:

김용기, 형.. 형은 내가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형이 경기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 봄, 우리 집에서 처음 만났다. 참 오래 전이었다. 6학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용기형을 집으로 데려 온 것이고, 그날부터 나는 용기형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용기형은 그날부터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는 나의 방문 가정교사가 된 셈이다. 그런 단순한 인연으로 만났던 용기형은 사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게도 거의 친척이상으로 가끔씩 왕래를 하며 지냈다. 우리들이 용기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66년 내가 연세대에 입학한 해였다.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서 우리 집에는 거의 ‘전설적’ 인물로 인상이 남게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가정교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대부분 방문, 입주 가정교사들은 대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기형은 불과 고등학교 2학년 생이었지만, 우선 내가 국민학생이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의 제일 명문고교인 경기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용기형에게도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형의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고학생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사정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왜 어머님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셨는지는, 사실 그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이 중하위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5학년까지는 그런대로 나를 지켜보다가 6학년이 되고, 중학교 입시를 치러야 할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점점 더 심해졌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입시지옥’이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한창 놀기에 바쁜 그 시절이었지만 어찌 우리들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까? 하지만 어머님이 나의 공부를 돌보아 주기에는 너무나 바쁘시고, 누나도 사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은 나에게 공부를 분위기를 주질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도, 주위의 ‘놀고 싶은’ 유혹에서 항상 벗어나질 못했고, 그것이 ‘시험위주’의 성적제도에서 항상 중 하위에 머물게 한 것이다. 용기형이 매일 방문 가정교사로 오면서 부터, 바로 옆에 ‘어린 선생님’이 붙어 있으니,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싶은 유혹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곧바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노력을 한 만큼 결과가 온다’ 라는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몇 시간은 꼭 용기형과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하니 결과가 안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나라가 조금씩 안정되던 그 당시부터 과외공부라는 것이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조직적이고 상업적인 학원 같은 것은 거의 없던 시절.. 하지만 나같이 개인적인 과외공부보다는 과외선생님 댁에 단체로 모여서 공부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예외적으로 행운아였을지도 모른다. 방과 후에 골목에서 뛰어 놀던 즐거움은 조금 없어졌지만, 용기형과 둘이서 그날 학교공부를 복습하며, 다음날 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점점 즐거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거의 그 다음날 시험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6학년, 특히 우리 ‘박양신 사단’ 1반은 가히 시험 전쟁터의 현장을 방불케 해서, 다른 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루 ‘종일’ 시험의 연속이었는데, 아침 첫 시간부터 시험을 보곤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시험에 의해서 곧 좌석의 배치가 바뀌는, 가히 시험 지옥이었던 것인데, 이것은 우리 반 담임 ‘박양신’ 선생님만의 방식이었고 다른 반에서는 이런 방식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박양신 선생님의 ‘수험의 신’, 에 가까운 선생님이었고, 그렇게 일년 내내 우리는 단련을 받았다.

그 당시 이미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대강 일류,이류, 삼류 등으로 ‘일본식’ 등급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이 형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고려대 등이고, 고등학교는 경기고,경기여고, 서울고, 이화여고,숙명여고, 경복고,용산고 같이 거의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고, 지방에서도 경북, 경남, 대전, 광주일고 등과 같은 일류들도 있었다. 어떻게 이 같은 학교들이 일류로 평가가 되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고교는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정도를 보면 될 것이고, 대학교는 취직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민학교도 분명히 이런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일류 중 고교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된다. 하지만 국민학교는 아직까지 별로 등급이 형성되지 않았다. 예외는 덕수 국민학교와 수송, 혜화국민학교였다. 어떻게 이 학교가 그 시기에 이미 일류로 되었는지 과정은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부자 집’ 자녀들이 많이 이곳을 다니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따라서 ‘좋은 선생님들, 수험의 신’ 들이 그곳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들이 일류 중 고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 가히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는 어땠는가? 일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로 밑을 맴돌고 있었고, 수험의 신 박양신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박양신 선생님이 재동국민학교를 1류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뒤에는 정말로 일류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학기 초에 성적이 딱 중간 밑을 맴돌았는데, 용기형과 같이 공부하면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거의 10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반에서 자리를 분단 별로 앉게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성적에 의한 배치였다. 1분단은 거의 10등까지 앉고, 다음의 20등까지는 2분단에 앉는 그런 ‘잔인’한 배치였다. 게다가 1분은 딱 가운데 앉혀서 남들이 ‘우러러’ 보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의 잠재적인 심리적 효과를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리의 변동이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시험에 의한 성적이 그렇게 자주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용기형은 나와 ‘궁합’ 이 잘 맞아서, 제일 큰 목적이었던 나의 학교 성적이 오르고 해서, 우리 집에서는 아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형을 아주 친척같이 따뜻하게 대하곤 했다. 용기형은 절대로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다. 깡패와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정도의 ‘깡’은 가진 학생이었다. 용기형이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 ‘대’ 경기고 학생이니까 그것 만으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이때 내가 배운 것은 공부뿐이 아니고, 사실은 조그만 교훈, 모든 일의 결과는 운이나 배경만큼, 노력에도 많이 좌우된다는 간단한 진리였고, 이것은 나중에 내가 사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억에는, ‘선거권, 피선거권 논쟁‘, 그것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이런 한자로 된 어려운 정치용어로 용기형과 싸운 것이다. 나는 분명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했는데, 용기형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논쟁이었는데, 누가 보아도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잘못 기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자체가 재미 있어서 내 고집대로 밀어 붙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용기형의 ‘깡’을 몰랐기에 계속 ‘똥’ 고집을 부렸다. 결국에는 용기형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기를 무시 본다는 것이었고, 나에게 따귀를 계속 올려 붙였다. 그 당시는 학교에서도 잘못하면 따귀를 맞는 것은 흔했지만, 가정교사에게 따귀를 맞는 것은 절대적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내가 자기의 ‘고객, 학생’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것 같았다. 나도 기가 막혔지만 이것을 집에다 ‘일러’ 바칠 수도 없었다. 그랬으면 그날로 용기형과의 공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사실 관계도 끊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그냥 조용히 잊고 지나서 말썽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용기형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아서 더욱 아쉬운 기억이다.

 나의 성적은 계속 1분단의 ‘제일그룹’ 을 유지했지만, 사실 나의 성적은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거의 1~2등까지도 하는가 하면 갑자기 10위로 밀려나는 등 그런 식이었다. 이런 상태로 중학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용기형은 경복이나 서울 중학교에 응시하라고 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아주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모험’을 하는 것이 싫었다. 안전한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립 중앙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로 가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원의 반 정도를 졸업성적만으로 뽑던 제도가 있었다. 시험 지옥에서 쉽게 벗어난 것만 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역시 용기형이나, 어머니는 두고두고 불만이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가 속했던 1분단의 다른 녀석들이 대거로 경기, 서울,경복중학교에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 자신은 후회가 없었다. 재수를 할 가능성보다는 조금은 안전한 것이 편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시에 재수생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용기형은 가끔 놀러 왔고 고궁 같은 곳에도 같이 가족과 놀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나의 성적이 좋아서 용기형도 안심하는 듯 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가 용기형에게 나를 데리고 영화를 보게도 했는데, 그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나에게 형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용기형과 대한극장에서 ‘백사의 결별‘ 이라는 요란한 제목의 미국 영화를 보았는데,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과 데보라 카(Deborah Kerr)주연의 2차 대전 영화였는데,그 것을 보면서 내가 하도 형에게 질문을 해서 조용 하라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용기형을 따라서 경기고교 강당에서 프랑스의 영화,”장 가방(Jean Gavin)” 주연의 ‘잔발잔(Jean Valjean)’을 같이 보았는데,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정말 부자여서 없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극장수준의 영사기까지 갖추고, 가끔 영화, 그것도 외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용기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1961년) 때, 경기고를 졸업하고 대학엘 갔는데, 예상을 뒤엎고 서울대가 아닌 고려대엘 갔다. 왜냐하면 경기고생은 거의 서울대를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 연세대 정외과로 편입을 했는데, 사실 편입이었는지 아니면 새로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어렴풋이 형이 대입준비를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게 되어서, 두고두고 나중에 내가 대입 준비할 때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의 입시 문화는 거의 100% 일본식이었을 것이다. 입시준비 잡지도 있었는데, 용기형 시절에는 ‘향학‘ 이란 국내 유일의 입시준비 잡지가 있어서 나도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이 대학입시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말 ‘전쟁’이었다. 몇 년 뒤에 그 잡지는 없어지고, 새로 ‘진학‘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고3때 나왔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중학교 3학년(1962년)이 되고, 고교 입시가 다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다시 용기형을 부르셨다. 나의 학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야 말로 ‘일류’ 고등학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다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3년 전과는 아주 달랐다. 용기형은 이미 대학생(연세대 정외과)이 되었고, 나도 이미 꼬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은 열기는 사라진 것 같고 공부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안전’하게 본교로 진학하기로 결정을 해 버렸다. 이런 나의 결정은 후에도 별로 후회를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사학의 명문 중앙에 정이 흠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용기형과 의 왕래는 가끔이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용기형은 언제나 자신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외교관의 꿈인 프랑스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외교 계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입김이 강했다. 꿈이 있고 계속 좇으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믿었다.언젠가는 유명한 국제적인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요새로 말하면 반기문 같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시나마 용기형이 우리 집에 입주해서 나를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다. 기억에 아주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나와 같이 자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용기형은 ‘가르치는’ 데는 이미 김이 빠져있었다. 별로 열기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공부보다는 인생공부를 많이 한 셈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그 당시 용기형은 연세대에서 데모를 주동하는 ‘정치 학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연세대에 입학을 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만나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용기형은 그곳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용기형은 우리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 이후 항상 ‘얘, 혹시 용기가 죽은 것 아닐까?’ 하시곤 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아주 길게도 흘렀고, 1999년 초쯤에 인터넷의 Yahoo! 같은 search engine과 학교 동창회의 website등을 통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용기형을 찾아 보게 되었다. 운이 좋게 연세대 동창회에서 용기형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전호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이 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곧바로 어머님께서 그 전화번호로 용기형과 이야기까지 하셨다. 전화번호는 한국산업정보센터 라는 곳이고 용기형은 그곳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셨다. 나와는 곧 바로 email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사실, 나도 어머님과 같이 용기형이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던 참에 소식을 들은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고, 옛날의 추억들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email에 있는 사연은 간략하지만 그것으로 대강 용기형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60년대 중반에 데모주동으로 몰려서, 군대로 ‘끌려’ 갔고, 복학 후에는 그런대로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파리의 외교관이 되는 꿈은 접은 듯 했다. 용기형 말씀이, 그런 꿈들을 이루지 못해서 연락을 계속 미루었다고, 참 순진한 말을 곁들였다. 고시공부, 동아일보 입사, 국세청 장기 근무, 대경기계 창업, 한국산업정보센터 고문 등으로 이어지고 결혼을 해서 딸, 아들을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을 해서 미국 LA에 살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1999년)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기형의 부인과도 잠깐 전화로 인사를 드렸는데, 까마득한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라고 알고 계셨다.

 하지만 세월의 횡포는 그렇게 그립던 생각을 곱게 보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약속을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나에게도 다시 연락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용기형을 생각하고 안부를 걱정한 것과 같은 정도의 생각을 우리는 용기형으로부터 느낄 기회조차 없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세월의 장난일 것이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겨놓을 것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연락이 된 후 10여 년이 또 흘렀으니, 용기형도 나이가 거의 70세로 육박을 하지 않았을까? 부디 건강한 후년을 즐기는 용기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2011년 9월이여, 사요나라

  • Post published:

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집에서 실컷 읽어서 큰 후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무의식 중에 생각을 해오던 1950년, 구일오 인천상륙, 구이팔 서울 수복 기념일들도 다 지나갔다.
만약 그 때의 역사를 계속 따라간다면 조금 있으면 UN군이 한 맺힌 삼팔선을 지나 노도와 같이 북진을 하게 될 것이다. 올해는 어쩐지 그 때의 <1급 전범, 민족반역자, 김일성 개XX>를 ‘죽이거나, 사로 잡거나, 만주로 쫓아내려는 국군과 유엔군을 계속 따라가며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미 해병대의 장진(Chosin Resevior) 저수지 사투와 흥남 철수, 일월 사일 서울 철수(일사후퇴) 등이 포함될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서 중앙고 동창 이성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비대칭적 추억‘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비대칭적 추억이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 같은 추억을 서로 아주 다른 정도로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첫 경험한 것이, 10여 년 전,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 이윤기와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나의 이윤기에 대한 추억과 그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그 전에는 별로 못 했기 때문에 사실 무척 당황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부작용’ 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 뚜렷하게 기억을 한 것이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지만 이것은 ‘나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을 ‘대칭적인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번에 이성복을 통해서 조금은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case는 한번 알던 사람이 나를 완전히 잊은 경우다. 1974년 경에 시카고에서 잠깐 만났던 연세대(철학과) 동문 신경시 씨 부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나중에 연락을 해 보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진까지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조금 심한 case라서 나는 물론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기억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잠깐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서 그랬을까.. 이것은 사실 조그만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