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 절대로 쓰고 싶었다. 더 미룰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망각의 세계로 굴러 떨어지기 전에 나는 서형(서충일씨, Choong Suh)과의 추억을 이렇게라도 남겨야 한다. 비록 아주 오래 전, 기간으로 따지면 3년도 안 되고, 그 3년도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잠깐 같이 살았던 정도였지만 그 당시 서로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주 길이 남는 추억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서형께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서 사죄하고 싶기도 하다.
머리 속에서 간신히 견디고 있는 가물거리는 기억 이외에 남아있는 것은 Kodak Instamatic 110 camera로 찍은 색갈이 바랜 서형의 사진 한 장..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글을 쓰려면 사진 한 장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기억을 그것도 자세히 생각해 내야 한다.
내가 서형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일까? 나는 기억력이 남보다 좋은 편이다. 하지만 서형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처음 봤을 때 인상이 어땠는지.. 그것이 기억에 확실치 않은 것이다. 이 사실이 오랫동안 나를 조금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대강은 안다. 처음 보게 된 것이 1975년 가을쯤이 아니었을까? 시카고 lake side 쪽의 Broadway에 있는 허름한 working class 벽돌 아파트였나..
Broadway apartment, Chicago
그 전해, 1974년 말부터 나는 그 당시 시카고 한국일보지사의 기자였던 고려대 출신 임송백 씨와 roommate로 그 Broadway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 아파트의 문과 마주보는 방에 서형이 혼자 살고 있었다. 그 당시에 어떤 한국사람이 거기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인사를 하거나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아파트에 다른 한국사람, 이기홍(다른 이름은 이창엽씨)이란 분이 잠깐 같이 살았는데 그 분이 서형과 알고 지내기 시작하면서 우리와 인사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75년 말에 임송백씨의 가족이 한국에서 올 때에 헤어지게 되면서 나는 바로 문 마주편의 서형의 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의 자세한 과정은 정말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1976년 초부터 나는 거의 2년간의 시카고 생활을 청산하고 West Virginia Tech으로 학교를 transfer를 하게 되었지만 방학 때마다 서형의 아파트를 나의 고향 집처럼 여기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명실상부한 나의 제2의 고향 집이 된 것이다. 1976년 여름, 겨울방학, 1977년 여름, 겨울방학.. 이렇게 4번의 방학을 서형과 같이 지낸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서형과의 추억은 바로 그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1977년 12월부터 나는 완전히 시카고를 떠나서 Columbus, Ohio로 가게 되었고 사실 서형과는 그때 완전히 헤어지게 된다.
서형은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지만나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썼다. 비록 그것이 조금은 거리감을 느끼게도 했지만 나는 그런 깔끔한 성격이 좋았다. 한마디로 예의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키는 나와 거의 비슷했지만, 겉으로 잘 안 보이는 팔 다리의 근육이 대단해서 무슨 물건을 만져도 그 힘이 대단했다. 가끔 무거운 것을 옮기거나 할 때는 나를 막내 동생처럼 생각하듯 자기가 다 힘을 쓰곤 했다. 자랄 때, 부산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누누이 들었고, 필라델피아에 친형님 가족이 사신다고 했는데 형수님과 별로 잘 맞지를 않아서 무작정 시카고로 왔다고 했다. 한번도 대학 때의 이야기를 듣지를 못했지만 영어를 기기 막히게 잘했다. 그것은 절대로 엉터리 broken English가 아니고, 문법이 정확한 good English였다. 그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묘하게 생긴 truck을 타고 다녔고, 정식 job은 개인 taxi driver였다. 그러니까 택시기사인 것이다. 운전을 하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가끔 얻어듣곤 했는데, 서형은 아주 모범적이고, 정직한, customer를 첫째로, 절대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택시비가 모자라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손님을 먼저 생각해서 도와주고,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것을 보고 참 나의 마음도 흐뭇해지곤 했다.
1976년 시카고에서 산 악보 책,가요반세기. 지금은 고서가 되었다.
내가 방학 때마다 와서 지냈으므로 나야 낮에 시간이 많았지만 서형은 주로 밤에 택시를 몰고 낮에는 자는 편이라 어울린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 비교적 짧은 시간을 같이 보낸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했다. 비록 자란 환경은 전혀 달랐지만 비슷한 나이가 서로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특히 노래의 취향이 많이 비슷해서 참 많이도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즐겼다. 서형은 부산에서 어렸을 때 많이 본 영화들에 대한 추억이 많았다. 특히50년대 최고스타 최무룡이 부른 영화주제곡 <외 나무 다리>와 <꿈은 사라지고>, 왕년의 액션스타 황해 주연의 영화주제곡, <한 많은 청춘>, 그리고 참 구성지게 들리던 <삼팔선의 봄> 등등 그때 내가 배운 노래들이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새로 산 <가요반세기> 라는 세광출판사 에서 나온 노래책에 나오는 옛 노래를 서로 앉기만 하면 같이 부르곤 했다. 그 책은 기적적으로 아직까지 살아 남아서 나의 고서(古書)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원래 이런 트로트 풍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잘 몰랐지만 그때 서형과 같이 부르면서 많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특히 둘 다 고향을 떠난 신세가 같아서 더욱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추억에는 이것 이외에 사실은 조금 더 심각하고 로맨틱 한 것도 있었다. 20대의 팔팔한 나이였고 둘 다 “침을 질질 흘리는” 총각들이어서 여자에 관한 추억이 없을 리가 없다. 서형과 조금 알고 지내는 간호사 아가씨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 아가씨의 이름을 잊어 버렸다. 서형과 그 아가씨는 로맨틱한 관계가 아니고 돈 관계로 조금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형이 그 답지 않게 그 아가씨와 사귀어 보라고 해서 집에 데리고 왔다. 나는 사실 조금 당황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대로 셋이서 잘 어울리며 놀았다. 그 후부터 그 아가씨는 우리 퀴퀴한 총각냄새가 진동하는 아파트에 와서 청소도 해주고 음식도 같이 해 먹고, 노래도 부르고 참 건전하게 놀다 가곤 했는데, 문제는 아주 곤란하게도 그 아가씨는 조금 심각한 사귐을 전제로 한 듯하고 나는 그저 젊은이들의 사귐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삼팔선의 봄
그 당시 나는 서형으로 부터 오래된 가요곡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같이 부르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이 바로 이 “삼팔선의 봄”이었다. 다행히 가요악보에 있는 곡이라 그 뒤에도 계속 나의 애창곡이 되었다.
가요 삼팔선의 봄, 악보
그 아가씨는 아주 활달한 성격이었고 한국에서 학교에서 근무도 한 사회경험이 있는, 우리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이어서 어떨 때는 우리가 어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주 당당하게 희망하는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행동에 나는 사실 상당히 부담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보다 덜 성숙한 편이었다. 그녀는 간호사 출신이지만 그 당시는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 바로 옆에 있는 Bensonville이란 곳의 어떤 nursing home(양로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어떤 미국 여자의 양녀가 되어서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게 셋이서 어울리긴 했지만 서로 생각이 너무나 달라서 곧 좋지 않은 관계로 발전을 하고, 친구관계까지도 금이 가고 말았다. 나는 그러한 미묘한 남녀관계를 멋있게 끌고 나가기에 너무도 미숙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듯하고.. 중간에 다리를 놓은 서형도 나에게 아주 실망을 한 듯했다.
그 당시 서형에게 비밀의 취미가 있었다. 그것은 조금은 중독성의 경마로 하는 도박이었다. 그 당시는 그렇게 심각하게까지 생각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거의 중독이 된 상태임을 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서 곧 경마장으로 가서 돈을 잃곤 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보고 한번도 경마장엘 가자고 안 했던 사실이었다. 물론 학생이었던 나에게 돈이 많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형의 성격으로 보아서, 경마하는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라 짐작을 한다. 위에 말한 아가씨도 사실은 경마를 하기 위해서 돈을 빌린 것으로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액수로 짐작이 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나는 시카고를 떠나서 잘 몰랐지만 그 후에 사실은 서형과 그 아가씨는 서로 깊이 사귀게 되었고 결국은 동거를 하게 되었다. 1977년 말 시카고를 완전히 떠날 무렵 새로 신혼의 보금자리가 된 아파트에 들려서 작별 인사를 했는데.. 그 아가씨는 아직도 그때 받은 자존심의 상처를 되뇌는 듯해서 사실 나와 서형의 관계도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이 느껴져서 한편으로 참 슬프기도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하는 심정뿐이었다. 나의 희망에는 그 아가씨가 조금 더 관용이 있었으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것이었다. 그 중간에 있었던 서형은 사실 그 아가씨보다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 후에 예상대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 나도 잊으며 나의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정말 가끔 그 때를 생각한다. 괴롭던 때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은 그런 것도 참 많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몇 명의 자녀를 두었을까? 어디에 살고 있을까.. 서형.. 서충일 형!
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기타의 줄을 갈았다. 오랜 만이란 것이 과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20년은 넘었을 것 같다. 아틀란타로 이사를 와서 줄을 간 기억이 전혀 안 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1989년에 이곳에 이사를 왔으니까 20년은 분명히 넘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줄을 안 갈았을까? 쉽게 말해서 ‘사는데 바빠서’, 그러니까 별로 기타를 칠 기회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현재 나의 기타는 1981년경에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살 때 산 $200짜리 중고 “야마하” 통기타(acoustic guitar)이다. 그 전에는 총각 때 시카고에서 심심풀이로 쓰던 싸구려 기타가 있었지만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 싸구려 기타는 1970년대에 여름방학 때마다 시카고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서충일 형과 같은 아파트에 살 때 같이 흘러간 노래를 부를 때 톡톡히 한 몫을 했던 것이었다.
그것에 비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YAMAHA기타는 그 당시 나의 경제사정(그 당시도 가난한 학생부부신세)에 비해서 정말 파격적으로 비싼 것이었다. 그때 빠듯한 사정에 그것을 산 것은 그때 콜럼버스 성당에서 성가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미국인 성가 팀이 모두 베이스와 기타로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가 합세를 한 것이라 우리도 같이 기타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값으로 보아서 나에게는 조그만 ‘가보’가 되었고, 가끔 사람들과 어울릴 때 예전에 즐겨 부르던 folk song, 통기타에 맞는 노래들을 부를 때 이 기타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세월이 지날 수록 그런 기회가 드물게 되었고, 기타는 어디에 ‘쳐 박혀’있는 지도 모를 정도로 수모를 당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찾아내서 조금씩 만지고, 추억을 하고 그렇게 다 잊은 것 같았던 기타 코드(chord)들도 기억해 내면서 추억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 동안 하도 노래를 못 하면서 살아서 그런지 완전히 목이 잠겨있었지만 노력을 하니 조금씩 풀려나갔다. 옛 노래와 그에 맞는 기타 코드들도 하나 둘씩 생각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기억이 나는 곡들을 모두 정리를 해 두고, 더 나아가서 추억의 통기타 folk song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그런 꿈같은 꿈도 꾸어본다.
On April 13, 1970, Apollo 13, four-fifths of the way to the moon, was crippled when a tank containing liquid oxygen burst. (The astronauts managed to return safely.) — today’s New York Times
오늘 뉴욕타임스 이메일 뉴스를 잠깐 보니 위의 ‘오늘의 역사’ 구절이 눈에 띄였다. 1970년 오늘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유명한 Apollo 13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13이란 숫자가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나를 보게 된다..
어찌 잊으랴.. 뚜렷이 기억을 한다. 나는 그 당시 top news였던 아폴로 13호 폭발사고를 전혀 몰랐던 것을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그 뉴스의 심각성을 아직도 피부로 느끼지 못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 뉴스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이면 지금에 비하면 거의 ‘원시적’인 뉴스 매체, 그러니까 신문, 라디오, 흑백 TV가 전부였던 시절이지만 그것을 못 듣고, 보고 하는 것은 특히 그 나이 (20을 갓 넘은)에 힘들었을 것이다.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사실, 그 당시 나는 죽마고우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깊은 산중에 있었다. 그렇게 이유는 간단했다. 그 해 초에 아주 오랜만에 재회를 한 원서동 죽마고우, 손용현과, 다른 원서동 친구, 박창희.. 그리고 나 셋은 아직도 눈이 쌓였던 지리산 능선 종주등반 중이었다. 라디오를 가지고 갔지만 뉴스 같은 것을 들을 정도로 편한 등산이 절대로 아니었다. 예상을 뒤엎고, 지리산 주 능선에는 아주 깊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서 걷는 자체가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렸다. 화엄사에서 출발을 해서 노고단을 거쳐서 계속 천왕봉을 향해서 능선을 따라 걷고 걸었다. 그때 처음 주능선 등반의 매력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 유명한 지리산의 운해(雲海)란 것을 눈(雪)과 함께 즐긴 것이다. 그때 생각나는 곳들, 노고단, 토끼봉, 지보등, 세석평전.. 천왕봉에서는 다른 코스로 남원쪽으로 하산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 등반은 그렇게 흔치 않았던 것인지, 하산을 하니까 경찰에서 나와서 입산 기록부에 우리의 이름을 적기도 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속세’에 나와보니 참 기분이 달랐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을 떠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당시 나이에 일주일 동안 세상 돌아가는 것과 차단이 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으니까. 일주일 동안의 뉴스 중에 아폴로 13호에 큰 사고가 난 것과, 서울의 ‘와우 아파트’가 붕괴된 것들이 있었다. 사실 와우 아파트 사고가 우리에겐 더 큰 뉴스였다. 그때 서울 시장이 김현옥씨였는데 그 사고를 계기로 ‘불도저’ 스타일의 밀어 부치는 행정에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다. 그 것이 1970년 4월 이맘때 쯤이다. 조금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면, 지리산 등반은 나와 박창희가 연세대 전기과 4학년 졸업여행(제주도)을 빼먹고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졸업여행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지리산 등산이야 그 후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었지만 졸업여행은 그야말로 딱 한번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이런 후회될 만한 일들이 그 후에도 계속이 되었지만, 어찌하랴.. 그때는 절대로 후회란 것을 생각도 못하던 젊은 시절이었으니 말이지..
그 당시를 회상하면 꼭 생각나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지리산의 고요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시끄러운 고향 서울로 돌아와서 위의 등산친구 셋이 어느 다방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아지트는 중앙극장의 길과 퇴계로가 만나는 곳에 있는 지하다방(절대로 이름을 잊었다) 이었는데, 손용현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웃기는 것은 얼굴이 전혀 안 보이고 하얀 셔츠의 상체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투명인간’ 영화의 그런 모습이었다. 이유는 용현이가 원래 얼굴이 조금 거무틱틱한 편인데, 이번에 지리산 종주등반을 할 때 쌓인 눈 때문에 완전히 타버리고, 그 당시 지하다방들이 대부분 어두워서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박창희가 나중에 와서 똑같이 그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고, 두고두고 그것이 우리의 ‘일화’로 남게 되었다. 그 당시 다방에서는 손용현이 제일 좋아하고, 우리도 열광을 하던 CC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Who’ll Stop the Rain이 우렁차게 나오고 있었다.
Who’ll Stop the Rain –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Madison, Wisconsin.. 매디슨 위스컨신. 위스컨신주의 수도, 위스컨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가 있는 곳. 거의 찰나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심지어는 전설적으로도 느껴지는 위스컨신 주의 수도에 우리식구는 1988년과 1989년 사이에 1년이 채 안 되게 살았다. 전에 살았던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에 비해서 워낙 짧은 기간 살았던 이유인지 그곳이 지금 무섭게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거의 다 잊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는 조금씩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리가 매디슨으로 이사를 간 직접적인 이유는 나의 새 직장 때문이었다. 그 당시 콜럼버스의 나의 회사, Toledo Scales Co. (주로 weighing scale을 만들던 곳)에서 나는 layoff가 되어서 열심히 새 직장을 찾고 있었고 이곳 저곳으로 job interview를 하며 . 나는 그때 새로운 직장으로 두 곳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Oklahoma City에 있는 hard disk maker SEAGATE였고, 다른 곳이 Madison에 있던 Nicolet Instruments였다. 그러니까 두 군데서 job offer를 받은 것이다.
Oklahoma City는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조금 익숙한 곳이고 기후도 훨씬 따뜻한 곳이고 Madison은 정 반대로 아주 추운 곳이었고, 오래 전 Chicago에 있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99%는 모두 다 Madison으로 갈 것을 권했다. 왜 그러냐고 하면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었다. SEAGATE는 99% computer hardware company라서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있었지만 Madison의 Nicolet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내가 갈 곳은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audio diagnostic division이었다. 쉽게 말하면 최첨단 보청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뒷줄 왼쪽의 전기석 후배는 곧 그곳을 떠났다
결국은 Madison으로 가기로 정했는데 제일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Nicolet Instrument는 원래는 digital storage oscilloscope를 만드는 회사인데 이 audio diagnostic쪽은 biomedical분야라서 그 회사로써도 조금 모험을 하는 셈이었다. 이 회사는 위치가 바로 위스컨신대학 매디슨 캠퍼스의 바로 옆에 있어서 그쪽 연구단체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 새로운audio diagnostic venture도 이곳 의과대학 교수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직업의 안정보다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조금 더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린 것이다.
결혼 후 그것도 조그만 아이 둘을 데리고 가족이 이사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의 나이가 40정도였으니 사실 힘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혼자가’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미지의 서부를 개척하는 조금은 불안한 심정이었다. 그때 조금이나마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었다면 조금은 불이 붙었던 나의 가톨릭 신앙심과, 모교의 동창들이었다. 한마디로 처음 가는 매디슨이지만 그곳에 한인천주교 공동체가 있으리라는 희망과, 혹시 큰 학교가 있으니까 중앙이나 연세대 동문들도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추측은 맞았다. 둘 다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Internet으로 googling을 10분만 하면 다 찾을 수 있을 정보들.. 그 당시는 물론 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야 했다. 그래서 둘 다 연락처를 찾았다. 먼저 중앙고 동창회를 찾으니 65회 전기석 후배의 이름이 나왔다. 물론 유학생이었다. 역시 동창은 좋은 것인가.. 그를 통해서 그곳의 여러 가지의 정보를 다 얻을 수 있었다. 중앙고 후배들이 몇 명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인 천주교회 공동체도 역시 유학생이었던 유왕식 씨를 통해서 연락이 되었다. 그곳 공동체는 대부분 학생이 주축이 되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사실은 매디슨에 있던 세계신용조합(Credit Union)의 총본부에서 일을 하시던 강정열 박사님께서 그곳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정신적인 지주로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밀워키(Milwaukee, WI) 본당의 공소였는데 본당의 김정웅 주임신부께서 정기적으로 오셔서 학생신자를 중심으로 목회를 하고 계셨다.
이렇게 해서 사실 그곳으로 이사를 가서도 우리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정착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한국인들의 끈끈한 학교와 신앙의 ‘인연’들은 지금 생각해도 자랑할만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없었으면 참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마음 놓고 먼저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것에 온 신경을 쓸 수가 있었다.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새로니는 아직도 그 곳을 기억한다.
매디슨은 여러모로 내가 살던 콜럼버스와 비슷했지만 도시의 규모는 콜럼버스보다는 작았다. 둘 다 주의 수도였고, Big Ten 계열의 큼직한 주립대학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 비교적 깨끗하고 교육도시였던 점, 아주 유명한 기업이 없었다는 것도 비슷했다. 심지어는 Mid West의 냄새까지, 날씨까지 비슷했다. 차이는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훨씬 혹독하게 추운 곳이라는 것과 매디슨이 훨씬 더 정치적, 사회적으로 liberal, progressive한 색갈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매디슨은 콜럼버스 보다 훨씬 ‘좌익’적인 곳이다. 농담으로 옛날 소련수상 후르시쵸프가 그곳에 왔다가 “소련보다 더한 빨갱이” 라서 울고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매디슨 시내에서는 불법마약이 허용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 정도로 진보적인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시간이 좀 걸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혼자서 먼저 ‘기러기 아빠’노릇을 몇 주간 한 셈이다. 나 혼자 먼저 와서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출근을 하였다. 지리적으로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아주 작았다. 중심부에는 웬만한 작은 마을 크기의 호수가 몇 개나 있었다. 큰 도로로는 동서로 달리는 간선도로 (Beltline Highway)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Interstate Highway가 이 도시에는 없는 것이다. 지형은 조금 낮은 언덕이 조금 있을 뿐 그런대로 평지에 가까웠지만 도로는 그렇지 않았다. 바둑판형의 규칙적인 도로에 익숙한 나에게 이곳은 서울의 구불거리는 도로가 연상이 되었다. 주소만 가지고 위치를 찾는 것이 더 힘든 것이다. 특히 밤에 주소만 가지고 집을 찾는 것은 조금 모험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약 보름간 혼자 살다가 다시 콜럼버스로 돌아와 대형 트럭으로 짐을 다 부쳤다. 그리고 완전히 온 가족이 다 매디슨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가 1988년 8월 하순 경이었다. 나는 혼자 살던 보름 동안에 이미 중앙동창 후배들과 만나서 저녁을 했었다. 특히 65회 후배 전기석의 도움을 받았고, 후배 강태중은 University of Wisconsin의 campus를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기도 했다. 곧바로 우리는 매디슨의 한인천주교 공동체에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었다. 교민이 거의 없고 거의 다 유학생인 관계로 따로 교회가 없었고 위스컨신대학 내에 있는 Newman Center에서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었다. 신부님은 근처에 있는 밀워키 한인천주교회의 예수회김정웅 신부님이셨는데 그 분은 밀워키에 있는 위스컨신대학에서 Computer Science를 공부하시는 분이었다. 신부님이 어떻게 그런 공부를 하시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신학과 과학을 같이 한다는 것이 그때는 조금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았다.
그 해 가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려서 그것을 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열심히 TV 녹화도 하곤 했다. 가을은 짧았고 곧 겨울이 왔다. 완전히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베리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겨울이었다. 모든 것들이 실내로 활동이 옮겨지는데 이곳은 아주 모든 것들이 철저히 월동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이 위스컨신대학 캠퍼스에 있는 실내 테니스 코트였다. 얼마나 그 시설이 거대한 지 모른다. 겨울이 워낙 춥고 길다 보니까 이 정도의 시설 투자는 이해가 갔다. 그곳에서 중앙 후배들과 주말이면 그 추운 겨울에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당시 우리부부는 아주 신앙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곳에 가자마자 교회공동체에 적극 참여를 했고, 그 결과 정기적인 성경공부에도 나가게 되었다. 이곳도 역시 유학생중심의 모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비유학생은 나와 강정열 박사님 댁 식구가 전부였으니까. (계속)
우미관, 문화극장, 아데네 극장..19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서 내가 즐겨 다녔던 극장들의 이름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또래로 서울에서 살았으면 분명히 이 이름들을 기억할 것이다. 정확하게 이 극장들의 역사는 잘 모른다. 그저 나의 기억에 항상 그곳에 있었던 것 뿐이다. 더불어 이 극장들은 소위 말하는 일류 개봉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장료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종로2가 화신 백화점 바른쪽 옆 골목에 있었던 우미관, 낙원동 북쪽, 덕성여대 바로 앞, 천도교회관 바로 옆에 있었던 문화극장, 퇴계로 대한극장 길 건너 편 골목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 그 많은 극장 중에서도 이 세 극장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 그곳에서 많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는 주옥 같은 영화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미관과 아데네 극장은 거의 외국영화만 상영을 했고, 문화극장은 거의 국산영화만 상영을 했다. 다만 문화극장은 아주 가끔 연극도 곁들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미관은 외화를 좋아하는 일반 대중, 문화극장은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 대상이었는데, 아데네 극장만은 조금 특이하게 중고등 학생들이 주 관객이었다. 그러니까 아데네 극장만은 항상 학생입장이 가능하게 검열이 된 영화만 보여준 셈이다. 그 당시 사회, 경제수준으로 이런 중고등학생을 배려한 사업은 지금 생각해도 참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다른 극장은 대부분 ‘학생 입장 불가’ 라는 것으로 ‘성인용’ 영화를 구별하였다. 성인용 영화라 해도 요새 말하는 XXX 급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그저 조금이라도 사회기준으로 보아서 ‘낯을 붉히게’하는 것이 ‘성인용’ 영화였다.
이 세 극장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가고 좋아했던 곳이 바로 우미관이었다. 이곳이 그 당시 유행하던 미국, 그러니까 Hollywood급의 ‘멋있던’ 영화만 보여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 대한극장, 중앙극장 같은 곳에서 이미 보여준 것들이 이곳에서 다시 상영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 본 영화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쯤(1958년 쯤) 본”타잔과 잃어버린 탐험대” 라는 영화였다. 그 당시는 서부영화와 타잔 영화가 유행을 할 때였다. 그 많은 것 중에 이것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영화를 보러 갈 때의 과정이 뚜렷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때는 영화가 들어오면 제일 손쉽게 알 수 있는 광고매체가 영화벽보였다. 가게의 벽이나 길거리의 벽에 붙여놓은 poster같은 것이었다. 그때 “타잔과 잃어버린.. 어쩌구” 하는 영화벽보를 보고 그것을 보고 싶었는데.. “타잔과 잃어버린..어쩌구” 하는 제목 중에 “어쩌구” 하는 대목이 한자로 쓰여있었다. 그것이 바로 “탐험대”였는데 그것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극장을 가겠다고 돈을 달라면서 영화 이름을 “타잔과 잃어버린 코끼리“라고 둘러 댔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촌스러운’ 영화 제목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기는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미국 영화의 마력과 위력에 빨려 들어갔다. 대부분 국산영화는 우리 같은 어린이들이 보아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던 그런 시절이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비록 개봉관보다는 입장료가 쌌겠지만 우리 같은 코흘리개 국민학생에게는 그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싸게 표를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가게에 붙여놓은 영화포스터에 따라 나오는 무료입장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포스터를 붙여놓은 가게에서 아주 헐값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잔꾀를 동원해서 참 많이 영화를 보았다. TV가 없던 그 당시 만화와 더불어 우리에게 살 맛을 준 것이 이 미국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오디 머피, 게리 쿠퍼, 버트 란카스타, 아란 랏드 주연의 ‘베라크루즈’, ‘쉐인’ 같은 서부명화들, 로버트 밋첨 주연의 ‘상과 하’ 같은 2차 대전 전쟁영화들, 그리고 프랑크 시나트라, 케리 그란트 주연의 ‘자랑과 정열’ 같은 유럽풍의 사극영화들..
그때 본 영화들을 미국에 오면서 쥐 잡듯이 찾아서 TV로 다시 보거나, video tape등으로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 집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자라게 되었다. 거의 50년대의 영화들이었으니, 아이들에게는 완전히 ‘활동사진’ 류의 화석 같은 느낌이었겠지만 미국의 그 당시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역사적’인 가치가 없지도 않았다.
1961년 12월 초 개관 된 아데네 극장의 광고, 그 당시에는 미국영화 이외에도 가끔 여기에 보이는 유럽쪽의 ‘명화’들도 상영 되곤 했다. 광고를 자세히 보면, 화폐의 단위가 ‘원’이 아니고 ‘환’.. 1962년 화폐개혁 때 ‘원’으로 바뀌었다.
퇴계로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은 주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많이 갔다. 그곳에서는 주로 외국영화를 많이 했지만 가끔 국내영화도 보여 주곤 했다. 절대로 학교 선생님에게 잡히지 않는 곳이라는 장점이 있어서 아주 어깨를 쭉~~펴고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서 많이 본 영화들은 주로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영화들이었다. 아깝게도 그 영화들의 이름이 생각 나지 않는다. 이것들과 대조적인 곳이 바로 낙원동에 있었던 문화극장이었다. 이곳은 정말 ‘서민’의 냄새가 풀풀 나던 곳이었다. 100% 국내 영화만 상영하였고, 가끔 연극도 보여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연극이란 것을 보게 되었다. 주로 국민학교 때 많이 갔는데, 내가 살던 가회동에서 정말 가까운 곳이어서 더욱 편했다.
이곳에는 참 기억에 많이 남는 추억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 당시 전쟁 후 가난에 찌들었던 국민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코메디 듀오가 있었는데 바로 “뚱뚱이와 홀쭉이“였다. 뚱뚱이는 “양훈”, 홀쭉이는 “양석천” 두 분이었는데 둘 다 우연히 양씨였지만 한자가 같지를 않았다. 이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문화극장에서 본 것이 “천지유정“이란 홍콩 현지에서 찍은 코메디 영화였다. 물론 흑백영화였다. 그것을 그때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던 ‘필동 아줌마’와 누나, 셋이서 아침에 가서 보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또 보고 싶어서 나만 혼자 남아서 또 보게 되었다. 그렇게 보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을 보게 되었다. 같은 영화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더욱 그랬다. 결국은 저녁 무렵에 필동아줌마가 극장으로 들어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갔다. 몇 번을 계속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을 정도로 하루 종일 본 것이다. 이것이 두고 두고 우리 집의 얘기 거리가 되었다. 덕분에 그 영화는 아직도 눈에 선할 정도로 뚜렷이 머리에 남아있다. 아직도 나는 이 세 극장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 가난하고 순진하던 시절 이곳들은 사실 나에게 거의 마음의 등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1년, 신묘년, 토끼해 새해도 벌써 5일이 지나간다. 1월은 우리 집에선 조금 바쁘게 느껴지는 달이다. 큰딸 새로니와 나의 생일이 있고,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도 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1월 5일,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오늘 Columbus, Ohio의 Riverside Hospital에서 태어났다. 보통 Ohio의 1월은 사실상 거의 옛날 (내가 살던 때) 서울의 겨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달랐다. 아주 따뜻했고 눈이 아닌 비까지 내렸다. 머나먼 타향에서 첫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을씨년스럽고, 쓸쓸하게 느껴지는데 날씨까지 추웠으면 우리들의 마음까지 더 쓸쓸하게 했을 것이다. 갓난 새로니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던 날, 가깝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김원백씨, 그의 wife, 도성이 엄마가 우리 집 (Ohio State University, Buckeye Village)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기다려 주어서 얼마나 포근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정이라고 하던가.
1월 21일은 나의 생일이다. 1.21 (일-이-일)하면 나의 생일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1968년 나의 20세 생일날 에 터진 김 신조 일당의 북괴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어쩌다 나의 생일날에 쳐들어 왔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우스운 생각이지만 나의 생일과 연관되어서 바로 어제의 사건같이 느껴진다. 지금은 이렇게 여유 있게 회상을 하지만 사실 그 당시는 아주 심각했다. 이것은 요새의 연평도 포격 사건보다 심리적으로 더 충격적이었다. 특히 공비들 중 김 신조가 유일하게 생포 되었는데 사전의 각본도 없이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짙은 북한 사투리로 말을 하는 바람에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몇 년 뒤에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이 “나도 모르게 극단분자들이 저지른 망동”이었다고 말 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이는 자기 이외는 모두 바보들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말을 누가 믿는가?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야, 김일성이 개새끼야, 북괴왕조에서 누가 너의 승인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곧 뒤이어, 1월 25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 된다. 그것은 1980년이다. 그러니까 올해는 31주년이 되나.. 허~~ 참 세월이여.. 우리는 그 당시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도 서울 명동에 있던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배경에 크게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다. 그 당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것도 무슨 뜻이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정말 아주 매서운 전형적인 ‘서울의 겨울’ 날씨였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보니 결혼식은 ‘아름다운 계절’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황량하고, 춥게 느껴지는 겨울의 결혼식은 크게 매력적이 아니니까. 물론 우리부부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그것이 사실 결혼을 바로 앞둔 사람들의 심정이리라. 31년을 큰 탈없이 같이 살았다는 것을 요새는 조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앞 날도 기대를 해 본다.
나의 본관인 평창이씨 익평공파의 족보를 통해서 최근에 알게 된 나의 “친 삼촌”, 이준모 아저씨.. “듣도, 보도” 못했던 거의 전설적인 인물, 이준모 아저씨의 생일이 분명히 족보에 1월 10일로 나와있다. 그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서 이것은 분명히 음력일 것이라서 언제 ‘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의 1월은 예년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를까도 생각을 해 본다. 제일 큰 차이는 역시 새로 시작된 나의 레지오 활동에 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1월이 가기 전에 나는 정식단원 선서를 할 것이다. 활동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을 기대해 본다. 본당의 IT support team (전산팀이라 부른다)에 가입이 되어서 이제부터는 실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외부로 나타나는 제일 큰 차이가 아닐까? 올해는 사실상 잠정적으로 일년간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데, 이것은 레지오 활동을 생각하면서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시간을 정말 효율적이고, 보람차게, 조금은 높은 뜻에 맞게 쓰려는 노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나의 serony.com published blog count가 이번으로 94번째가 된다. 그러니까 100번째가 아주 멀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에 올해가 가기 전에 100회라는 milestone을, 조금은 우습지만,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쓰고 싶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은 최소한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하게 느껴진다. 그것들을 어떻게 ‘한글’로 표현을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던 ‘한글 형용사‘들이 다 어디로 도망을 갔단 말인가? 참 슬프다. 한글도 잘 못하고, 영어도 잘 못하고.. 이것이 진정 30년 넘게 만들어진 나의 bilingual culture 라면 참 나도 나에게 실망을 금할 수가 없다.
약 1년 반전에 시작한 이 ‘초라한’ 나의 public diary는 사실 나의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이미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는 ‘놀라움’에서 시작이 되었다. 사실은 더 급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이러한 digital records의 수명은 원칙적으로 거의 무한에 가깝다. 일부러 없애지 않는 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누가 보건 간에 (희망에는, 나를 태고 적부터 이미 알았던 사람들) 나의 진실된 생각을 알리고,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시작의 모든 것이었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아직도 계속이 되어서 자그마한 100회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200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500, 혹은 1000.. 그저 겸손한 희망일 뿐이다.
올해의 연말 휴일은 한마디로 ‘죽을 쑨’ 격이 되고 말았다.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다. 하나도 앞뒤가 맞지를 않았다. 제일 중요한 천주교회 미사란 미사는 모조리 빠진 결과가 되었고, 반갑지 않은 ‘세속적’인 모임에서 쓸데없이 ‘세속적’인 마음의 상처만 입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이보다 더 망친 휴일이 이제까지 있었을까.. 암만 생각해도 이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위로한 것이 있다면 강추위를 동반한 하얀 눈뿐일 것이다. 문제는 이미 다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잘 못한 것은 인정을 하고 앞으로 반복을 하지 않는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 나이에 이렇게 ‘잘못’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것이다.
아주 우연히도 “‘이란’에서 한국의 TV 사극드라마 ‘대장금‘이 인기”였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문제는 그때가 또 이미 몇 년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옛날과 그 옛날’의 것을 본 것이다.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내가 요새 사는 것이 이런 식이다. 무언가 새로 알았다고 한 것은 대부분 최소한 몇 년 전의 것이었다. 이것도 archived googling 때문일까? 이제 이런 digital contents들은 여간 해서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한마디로 Internet에 무언가 ‘남기면’, 거의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생각해 봐야 할 현상이다.
왜 이란과 대장금을 연관하게 되었을까.. 오래 전 1970년대에 West Virginia에서 학교(West Virginia Tech)를 다닐 때 나는 유난히도 많은 Persian(Iranian student를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들을 알게 되었고 어울렸었다. 물론 그때는 Shah (of Iran)가 이란을 통치할 당시였다.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의 바로 전이었다. 그래서 그 Persian들은 연일 학교근처 도시(Charleston, West Virginia)로 몰려가서 데모를 하곤 했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가까운 친구들은 공부벌레들이 많았다.
대장금과 관련된 기사에서 그들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대부분 나의 경험과 일치한다. 종족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중간이라 그런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들 handsome, attractive한 모습이고, 아주 다정다감하였다. Shah의 친미정책으로 그 들도 미국,유럽문화에 상당히 빠진 상태였다. 아마도 그것이 호메이니의 이란혁명으로 완전히 제지를 당한 듯 하다. 짧은 시간 (1년 반정도) 였지만 그들과의 우정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졸업 후 다 연락이 끊어지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사진을 꺼내 보면서 그들을 생각한다. 비록 정치적으로 이란이 곤경을 겪고 있지만 국민성은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사극 대장금을 보았다니 참 믿어지지 않는 즐거운 소식이 아닐까?
지금 이맘때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절정을 이룬다. 듣기에도 제일 편안하고 추억까지 곁들이면 더욱 따뜻하게도 느껴진다. 캐롤의 추억에 대해서는 역시 고국에서 맞았던 중 고교 시절의 순진했던 크리스마스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당시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를 않았고 집에서도 전혀 신앙적인 환경을 주지 못해서, 그저 성탄절은 유럽이나 미국 것이라는 인상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국민학교 시절에는 성탄절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있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리는 것, 바로 그것이 그렇게 좋았다. 그 당시 고국의 품질 좋은 인쇄산업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므로 주로 주한 미8군에서 흘러나온, 이미 사용된 카드를 잘라서 다시 우리의 카드로 만들곤 했다. 그런 것을 아예 가게에서 팔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걸 ‘재생’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에 이것도 일본사람들이 먼저 시작을 해서 그곳에서 ‘재생’이라는 이름을 썼을 것이다. 우리 같은 국민학생들은 그 ‘진짜 재생’ 카드의 그림을 보고 비슷하게 그리곤 했는데, 성탄 무렵이 되면 누나와 누나친구들 까지 한 방에 모여서 같이 그리곤 했다. 그 이후로는 내내 그때의 기억이 너무도 아름답게 남아서 지금 까지도 그때의 추억을 즐기곤 한다.
그 당시에는 캐롤은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것을 들으려면 ‘전축’이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 경제사정이 그것은 대부분에게 무리였다. 군사혁명(1961년) 후에 조금씩 전축이 보급되면서 레코드 ‘판’ (거의 다 LP)이 대량으로 복사되어서 팔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본격적으로 외국의 캐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처음 산 것이 Pat Boone의 Christmas album이었고 그것이 아주 뚜렷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YouTube를 보니 그때의 앨범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몇 곡만은 다른 앨범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가 1964년 (중앙고 2년 때) 경이었는데, 성탄 전야에 보통 밤 12시부터 4시까지 있었던 통행금지가 해제 되었고.. 고요한 밤이 완전히 ‘시끄러운 밤’ 으로 변해버렸는데, 재미있던 사실은 이런 비슷한 현상이 일본 도쿄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한다. 그들은 사실 우리 같은 통금해제 같은 해방감도 없었을 것인데..그날 후 언론에서도 모두 반성을 하는 논설을 폈다. 성탄의 본고장에서는 그날이 제일 조용한 날이라는데.. 어찌 이곳은 이렇게 시끄러우냐 하는 논조였다. 물론 이런 추억은 종교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성탄에 관한 것이다.
대학시절에는 외국의 캐롤이 많이 정착이 되기 시작했고, 우리 또래의 젊은 가수들이 편곡을 해서 토착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제일 추억에 남는 것이 송창식, 윤형주 Vocal Duo Twin Folio가 불렀던 Silver Bells라는 곡, 이것이 그들의 목소리에 가장 잘 맞았던 곡이었다. 그 후에 미국에 와서는 본고장, 본토박이 캐롤을 듣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찬송가’ 스타일의 classic carol들을 듣게 되었다. 그 이후 매년 이맘때면 거의 같은 것들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었다. 1979년 성탄을 고국에서 결혼을 앞두고 맞게 되었는데 그때에 거의 우연히 세종로 네거리, 교육회관 옆의 어떤 서점에서 Paul Mauriat (폴 모리 악단)의 1967년 크리스마스 앨범 카세트 tape을 사게 되었다. 어찌나 편곡과 연주를 감미롭게 잘 했던지.. 그 중에서도 White Christmas와 Trois anges sont venus ce soir.는 “편곡,연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이 앨범은 그 이후로 우리 집의 classic Christmas favorite 로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1990년대 중반 쯤이었을까.. 출퇴근을 하면서 나는 주로 PBS 를 듣는데, 거기에서 The Roche라는 여성그룹의 carol CD가 소개 되었다. 세 자매인 듯 한데.. 모든 classic carol들을 정말 신선하게 arrange를 하고 티없이 깨끗한 화음으로 불렀다. 어렸던 우리 아이들도 듣기에 좋았던 모양으로 이것도 역시 family favorite가 되었다.
Advent 2010 (2010년 대림절)… 오늘은 천주교 달력으로 새해가 되고 예수님 탄생인 12월 25일 성탄절까지의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개신교회에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이름이 따로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에 들어본 적이 없다.예수님 활동 당시 12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이 Roman Catholic, 천주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 전통들은 알면 알수록 , 더 알고 싶은 것 투성이다. 이날부터 제대 옆에는 대림을 상징하는 4개의 촛불이 세워지고 한 주일마다 초가 하나씩 켜진다. 이것도 천주교의 특징인 ‘상징’적인 의식일 것이다.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우리는 주일미사를 집 근처에 있는 미국인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본다. 이곳도 거의 10년 넘게 다녀서 정이 들었다. 아침 8시 반의 미사에 가면 거의 앉는 자리가 정해질 정도로 익숙한 신자들이 많다. 혹시나 낯익은 얼굴이 안 보이면 신경이 쓰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제는 사실 주임신부님 보다는 부제님 중에 있다. Deacon John이라고 불리는 부제님, full name은 Deacon John Duffield인데 건장한 체구에 단정한 흰머리, 항상 진실된 웃음을 띈, 순진하게도 보이는 얼굴, 그 보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그 ‘경건’한 태도이다. 주임신부님보다 더 경건하게 미사를 돕는다. 이분이 부제가 된 것도 5년 정도 되어간다. 나이도 나와 같고 직업은 사실 nuclear engineer, U.S. navy officer로 nuclear submarine (핵 잠수함)이 전공이다. 그가 이렇게 공학도라는 사실이 나를 참 기쁘게 한다. 가끔 하는 설교도 어찌나 그렇게 틀에 박히지 않았는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것들..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속으로 나도 여생을 그분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내일은 이 미국본당에서 penance service(판공성사)가 있는 날이다. 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한번 하고 부활절 전에 또 있다. 쉽게 말해서 천주교 특유의 ‘고백(고해)성사’인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만큼 이 성사를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것을 하려면 정말 심각하게 자기를 되돌아 보는 ‘양심성찰’을 해야 하니까. 자기의 죄를 찾아 내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2년간 이 성사를 못 보고 있고, 이것이 항상 나를 찜찜하게 한다. 사실 이것을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로 하는 고백성사는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니까..
I Understand, by G-Clefs… 며칠 전부터 정말 이상하게도 oldies중의 I Understand란 곡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발전이 아닐까.. 년 말이 되어가고, 그러면 분명히 Auld Lang Sine이 불릴 것이다. 그 곡이 background 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G-Clefs가 불렀던 60년대 초의 hit,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이 곡을 부른 group G-Clefs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 이번에 알고 보니 이들은 내가 잘 못 추측한 대로 영국계통의 그룹이 전혀 아니고, 미국의 ‘흑인’그룹이었다. 사실, 적지 않게 놀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이 곡은 미국에서 1961년에 나온 것이지만 우리 때는 거의 1964년경에 많이 알려진 곡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고2 때였다. 년 말에 많이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2때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역시 1964년이 저물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학급회의, 그러니까 home room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에 모두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을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고2때 특유의 감상에 젖은 그런 분위기.. 고3이 되기 전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듯한 심정으로 이별을 서러워하는 기분에 모두들 휩싸인 것이다. 바로 그때다.. 제일 키가 컷 던 김용만이 G-Clefs의 I Understand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순진했던 가슴들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고교2학년은 정말 모두들 문학소년,소녀들이었다. 지독히도 순진하고, 이상적이었던 그 일년.. 그때에 생각하고 꿈을 꾸었던 장차 다가올 인생들.. 과연 어떠한 인생들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기쁨, 행복, 괴로움, 후회를 만들며 살았을까? 갑자기 지독한 감상에 젖는다.
I Understand by G-Clefs, 1961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Your love for me, why not be mine?
It’s over now but it was gr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miss you so, please believe me when I tell you
I just can’t stand to see you go
You know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SPOKEN: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Let bygones be bygones. But always
remember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We’ll sip a cup of wi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
비가 오락가락하고 포근한 깊은 가을.. Thanksgiving Day가 내일로 다가왔다. 작년 이맘때도 지금처럼 아주 포근한 날이었다. 우리의 조촐한 가족만이 모였던 휴일이었고 모두 조금씩 요리를 하는 것을 거들었던 기억이다. 그때는 새로니가 Washington DC에서 일을 할 때여서 급하게 왔다가 급하게 떠났는데 올해는 다시 학생이 되어서 거리와 시간 모두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대신 작은 딸 나라니가 처음으로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첫 해가 되었다. 올해 4월에 따로 나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 오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사실을 본인도 즐기는 듯 하다.
올해의 Thanksgiving Day는 오랜만에 guest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새로니의 Emory friend인 Galina가 뉴욕에서 현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집에 놀러 온 것이다. 식사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게 되어서 조금은 신경이 쓰이지만 예년과 조금 다른 휴일이 되어서 흥미롭다.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이런 때면 한방에 모여서 재미있는 movie같은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절이 거의 먼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이곳의 전통인 turkey요리를 해 왔다. 아마도 그때가 1980년대 초, 그러니까 우리가 Columbus, Ohio에서 살 때였을 것이다. 연숙이 그곳 성당의 원로로 계시던 이봉모 선생님(지금은 고인이 되셨음)의 부인으로부터 recipe를 받아서 첫 turkey 요리를 했던 때가 그때쯤이었고 그 이후로 거의 한해도 빠짐없이 turkey 요리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추석이나 설날의 한식 전통요리보다 이 turkey 요리에 대한 추억과 애착 같은 것도 생기게 되었다. 가끔 한국 손님들이 참석을 하면 별로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다. 특히 김치를 꼭 같이 찾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금 당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김치와 먹어도 사실 맛이 있었다)내가 개인적으로 turkey 요리를 제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사실 결혼 훨씬 전의 일이었다. 1974년 가을의 Thanksgiving Day였나.. 그 당시 알고 지내던 서울사범대 지학과 출신 성성모씨가 Indiana주 Purdu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그곳에 놀러 갔는데 , 같은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부부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turkey 요리를 푸짐하게 대접을 받았다. 특히 여러 가지 side dish들이 굉장했는데 그 유학생 부인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미국요리를 배웠는지 모두들 혀를 찰 정도였다. 처음 먹어본 것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리가 잘 되었는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ANY CHARACTER HERE
요새 며칠 사이 내린 비로 그나마 남아서 안간힘을 쓰며 가을을 지키던 아름답던 황금색 나뭇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글자 그대로 “낙엽의 장관”을 이루었다. 특히 우리 집 차고로 들어오는 길은 길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낙엽으로 덥혔다. 이들은 해가 다시 나오면 완전히 마르면서 바람에 휘날려 다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겨울로 향하는 12월의 입구..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작이다. 천주교 달력에서는 이날이 새해의 시작이 된다. 11월 28일이다.
낙엽, 낙엽, 낙엽…
12월로 들어설 즈음이면 가끔 그리운 곡이 생각난다. 1960년대 말, 대학시절.. 멋진 가사에 매료되어 guitar로 따라 부르곤 하던 Duo Simon & Garfunkel의 rock version “I am a rock”이 그것이다. 그 대학시절, 가끔 지독한 고독 같은 것을 느끼곤 하면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들었다. 이 가사의 주인공이 내가 된 듯한 기분으로..특히 친구 유지호와 같이 부르던 것도 즐거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별명 “우중충” 유지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천안함 도발사건 이후 다시 이번에는 연평도 포격.. 정말 끝이 없다. 김정일이 “개XX”는 그 괴상하게 생긴 머리”통”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나중에 해부를 해서 히틀러와 비교해 볼 만하다. 촌스러운 북쪽 사투리로 “영쩜 영 미리메타라도 조국을 침범하는 원쑤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북괴왕조의 방송을 들으면 이런 Shakespeare 희극이 역사상 더 있었으랴..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과 버금가게 웃기고 한심한 친구들이 바로 대한민국에도 “수두룩 닥상” 으로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금메달 깜은 소위 말하는 “친북 기독교 단체” 들이다. 이 사람들 과연 머리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의 이간을 배격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동족 형제”인 김정일을 사랑하라“고.. 허..여보세요.. 정신 좀 차리십시오.
중앙고 57회 동기회에서 또 결혼식 소식이 날라왔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확실한 통계는 물론 없다. 그저 느낌일 뿐이다. 아마도 동기녀석들의 반수 이상이 이미 할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 아~~ 세월이여. 이번의 결혼식 소식은 조금 나에게 의외의 느낌을 주었다. 주인공이 심인섭인데.. 심인섭의 차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왜 의외의 느낌을 주었느냐 하면, 이 친구의 소식을 1965년 졸업 이후 처음 듣게 되어서 그렇다.
물론 친구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동창회에도 나왔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연락을 하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이제 처음 그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혹시 ‘사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나타났을까? 그의 이름은 연락처, 주소록 등등에 전혀 없었다. 고2때 같은 반이었다. 경주 수학여행 때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것보다도 이 친구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고2때 교지에 실렸던 그의 시 때문이었다. 시의 제목이 <실비아>였다. 제목도 독특하고 이국적이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천주교신자의 세례명일 수도 있을 그런 이름의 시.. 하지만 그 시의 내용은 기억을 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그 시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 “사라진” 친구가 홀연히 딸의 결혼식 소식과 같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은, 결혼식 장소만 있지, 연락처가 없다는 것..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이 친구는 ‘신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일까. 정말 나도 모르겠다. 그 긴 세월, 어떻게 살았을까, 참 궁금하다. 그 친구는 아직도 시, <실비아> 를 기억하고 있을까? 좌우지간,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며칠 전에는 또 한번 googling의 덕을 보았다. 이건 내가 googling을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googling을 해서 나의 site를 찾은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발견이었다. 고국 과천시에 사시는 이종환씨, 평창이씨 익핑공파 29세 되시는 분이니까 나의 족보가 맞는다면 항열로 내가 이분의 아버지벌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나와 같이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사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뿌리 찾기 노력에 대한 성모님께 드린 기도에 답을 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비약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이분의 할아버지가 ‘모’자 돌림이라고 하셨고, 나의 아버님이 이정모, 모자 돌림.. 너무나 반가웠다. 더구나 현재 익평공파 최근의 족보를 소장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러면 혹시 나의 직계 조부님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꿈과 상상의 나래를 다시 편다.
Home Office를 바꾸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몰랐다. 더위가 닥치기 시작하긴 바로 전 6월초에 이동이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은 사실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거의 10년 이상인 방치 되었던 것들을 이번에도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버리는 것이 일이었다. 문제는 어떤 것을 버리는가 하는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책 종류였다. 골동품이나 고서의 가치가 없는 것은 무조건 쓰레기 통으로 보냈다. 다음이 서류 종류인데 이것도 옛 직장에서 쓰던 것들은 이번엔 용감히 버리기로 하였다. 남겨야 하는 것이 조금은 있지만 그건 아주 예외에 속한다.
나의 필적, 사인 같은 것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보관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사진인데.. 어떤 사람들은 가차없이 버린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신발상자에 모조리 보관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닌가? 누가 보건 안 보건 그것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paper print된 사진이라 수명이 있을 것이고, 앨범에 넣지 않은 것들은 보기도 어렵다. 그렇게 되어서 숨어있던 사진들을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던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1989년, 아주 오래 전이고, 같이했던 기간도 짧았지만 그 동안 사진조차 못보고 살아서 기억이 더욱 많이 희미해졌다. 얼마 전에 중앙고 후배 강태중의 생각이 났는데 이번에 그 사진을 찾은 것이다. 그 젊었던 모습들을 다시 보니 이 많은 후배들 이제 다 생각이 난다.
우리가 아파트를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나서 집들이를 한 모양이다. 바로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전기석 후배만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정태춘보다 더 잘 불렀던 이주호 후배,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뻤다) 쌍둥이 딸을 두었던 수재 형의 윤정로 후배, (wife도 같이 공부를 했었다) 나와 같이 천주교회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던 강태중 후배, 씩씩하고 활달하던 강상봉 후배, 통계학과의 이제준 후배.. 문제는 그 나머지 후배들의 이름이 가물거린다는 슬픈 사실이다.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하지만 노력을 하면 생각이 날지도.. 이 머리 좋던 중앙고 후배들, 다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그렇게 쓰기가 힘 들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계속 나를 push하곤 했지만 그 시작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왜 그럴까? 추억거리가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나 많아서 그랬을까? 기억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장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그 시절 이야기들의 끝을 맺는 것이 섭섭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추억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최복현 교장 선생님, 1965년
1965년은 지난해의 6.3사태 같은 정치적인 불안을 그대로 안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최소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경제발전에 모든 운명을 걸고 있었고, 한일외교정상화가 그것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해방 된지 겨우 20년 만에 국민감정이 그렇게 쉽사리 변할 리가 없었다. 지난해의 도쿄올림픽으로 일본은 튼튼한 경제기반으로 경제대국으로의 첫걸음을 걷고 있었고 그것에 걸 맞게 ‘고자세’로 한국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냉전체제의 국제정세가 우리의 국민감정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반공’에서 출발을 했으니까.
그 해 가을에 박정희 정부는 완전히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본격적인 전투부대인 청룡부대를 월남으로 보냈다. 그 전해에는 이미 비전투 부대인 비둘기부대를 보냈다. 서서히 월남전이 국내의 뉴스에 정기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반공의 이념을 실력으로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숙적인 일본이 우리의 6.25전쟁 중에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챙긴 것을 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짱구, 정운택 선생님, 1965년
그런 배경에서 고교3학년을 맞은 우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나라가 처해있는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공부 잘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의 첫 조건이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특히 1965년에 우리 중앙고교는 벌써 최복현 교장선생님의 원대한 ‘6개년 계획’의 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학년이 이루어야 할 목표 (서울대 몇 명, 연고대 몇 명 같은)는 사실 아주 어려운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확한 목표는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목표가 주는 심리적인 효과였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인 campaign이었고, 심지어는 ‘재미’로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나의 짝꿍, 원병태
고교 3학년이 되면서 시작된 수업에서 느끼는 그 신선한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무슨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떠나는 가미가제 특공대원 같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 가짐은 사실 대학입시까지 신기하게 이어졌다. 이것에 대해 나는 아직도 우리 최복현 교장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비록 최교장 선생님은 2학기가 되면서 서울시 교육감이 되셔서 모교를 떠나셨지만 그 분이 남긴 것은 참 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큰 계획의 뒤에는 후유증도 있었다. 불과 몇 번의 시험과 지난 해 학기성적으로 3학년 학급배정을 한 것이 그 중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성적 순위로 분반을 한 것이다. 그런 반 배정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친구들은 실망과 좌절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학반, 목창수유학준비, 윤중희
그때 분반은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졌는데 이과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의 8반은 이과에 속했다. 나는 원래부터 전기,전자공학 쪽으로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과를 선택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이 압도적으로 이공계 쪽은 선호한다는 사실이었고, 각 대학도 그것을 반영하듯 최우수 학생들이 가는 곳은 예외 없이 이공계, 특히 공대 (화공과, 전기과, 기계과 같은) 쪽이었다. 최고의 커트라인은 몇 년 째 서울공대 화공과가 독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문제점은 공부만 잘하면 거의 무조건 공대로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풍토였다. 공대 쪽에 적성이 맞고 안 맞고가 크게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전기, 기계 같은 것을 싫어해도 수학만 잘하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나의 앞자리에는 고2때부터 옆에 있었던 김진수가 앉았고, 뒤에도 오래된 친구인 이종원이 앉았다. 바른쪽 옆에는 원병태가 앉았는데 모두 나에게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갈 때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김진수는 해군, 이종원은 외대, 원병태는 고대로 가버렸다. 원병태는 사실 키가 상당히 큰데 어떻게 나의 옆에 앉게 되었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별명이 짱구인 정운택 선생님이셨는데, 조금 흥분을 잘 하시지만 속 마음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 긴장되는 고3시절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007, 고석찬Love Potion, 이영윤
왼쪽 옆으로는 목창수, 문영직, 허영식, 차정호, 윤중희 등등이 앉았다. 바로 뒤 이종원의 뒤에는 고석찬, 이영윤이 앉았는데 이 두 친구들은 대학시절 종로2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석찬의 유머러스 한 표정도 여전했고 이영윤의 멋진 미소도 여전했다. 어떻게 그 둘이 같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났던 모양이다.고석찬, 그 당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된James Bond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영화를 가지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처음 개봉되었을 때 미성년자는 볼 수가 없었고 나중에 그것이 풀어져서 가서 보았다. 물론 검열과정에서 많이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모르고 그 영화를 보기도 전에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장난으로) 고석찬이 비웃으면서 미성년자가 어떻게 그것을 보았냐고 꼬집었다. 금새 거짓말이 들통이 나고 나는 조금 창피했다. 나는 분풀이라도 하듯이 나중에 가서 본 것이다.
이영윤은 미국 pop song을 비롯해서 노래를 좋아한 듯하다. 그가 잘 따라서 부른 노래는 “Love Potion No. 9” 이란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었다. 그리고 고2때 정귀영이 Al Martino의 I love you more..를 너무 좋아해서 따라 불렀다면 이때는 정귀영이 황석환으로 바뀌었다. 노래는 Matt Monro의 Walk Away로 바뀌고.. 나도 그 당시 그 노래를 무척 좋아했지만 황석환은 더 좋아했나 보다. 교실에서 크게 부르며 다녔으니까. 나는 그 때 Matt Monro가 영국가수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다시 45년 만에 찾아서 들어보니 역시 기가 막힌 노래와 목소리였다. 여자로 치면 아마도 미국의 Karen Carpenter에 버금가는 그렇게 티없이 맑은 목소리였다. 나중에 그의 노래, Born Free, Wednesday Child, Portrait of My Love같은 것도 무척 좋아했는데 다만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곳의 풍조에 따라 다른 나라의 노래들을 거의 잊고 살았을 뿐이다.
From Russia With Love – Matt Monro
1965 봄 쯤에서 그 소문이 자자하던 James Bond 007 시리즈의 “007 위기일발” 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이 되었다. 반드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니까 아마도 1964년 쯤 나온 영화가 아닐까. Sean Connery도 멋이 있었지만 Matt Monro의 영화 주제곡 또한 못지 않게 멋이 있다.
Love Potion No. 9 – The Searchers
이영윤이 잘 따라 불렀던 이 노래, 사랑의 향수 9번, 그 당시에 라디오에서 잘도 흘러 나왔다. 비디오를 함께 보니 The Beatles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차림새가 아주 비슷하다.
Walk Away – Matt Monro
황석환이 좋아하던 거의 명곡에 가까운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더욱 가슴이 찌릿해진다. 숙명적으로 맺지 못할 사랑을 떠나 보내는 남자의 절규.. 참, 슬프다.
“관조”, 백정기 선생님고문, 주왕산 선생님국문학사, 김창현 선생님
그 당시 중앙고 3학년 교사 진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아마도 최교장선생님의 배려였을 지도 모른다. 국어의 백정기 선생님, 정열적으로 가르치시고 입시국어에는 외부에도 잘 알려지신 분이다. 입시전문지인 월간 진학 지에 글도 실으셨는데 그 글을 안 읽은 학생들을 나무라기도 하셨다. 백선생님의 정열적인 강의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관조“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수업은 역시 주왕산 선생님의 고문(古文)시간이었다. 확실히 는 모르지만 주 선생님은 주시경님의 자제분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고문강의는 더 무게가 있었다. 특히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의 강의는 재미와 더불어서 이런 것을 평생 공부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김창현 선생님의 국문학사도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명 강의였다. 특히 김선생님은 개인적으로도 향토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그런 해박한 지식이 강의 때마다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숯장사, 원성욱 선생님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썩은 살, 손영섭 선생님
담임 정운택 선생님, 숫제 일본 수학참고서를 그대로 들고 문제를 내시고 가르치셨다. 왜 그런지 그 당시는 일본의 입시풍조가 그대로 시험에 반영이 되곤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특히 미적분을 다루는 해석시간은 숯 장사 원성욱 선생님의 독무대였다. 얼굴이 까매서 그런지 숯 장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명 강의였다. 기하 (geometry)는 “썩은 살, 깨막이“, 손영섭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얼굴에 걸맞지 않게 항상 멋지게, 맞춘 듯한 옷을 입으시고 가르치셨다. 영어(문법)는 옆 반인 7반의 담임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이 작은 키에 맞지 않게 폭 넓고, 크게 잘 가르치셨다. 항상 산더미 같이 print물을 들고 들어오셨는데, ‘마누라가 밤새고 typing‘한 것’ 이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특히 이 선생님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입시용 영어비결이 있었다. 특히 문법을 외우는 방법을 ‘한시’ 나 시조같이 음률을 넣어서 외우도록 했다.
나는 3학년이 시작되고 서울고 출신으로 그 당시 서울공대 섬유공학과에 다니 던 송부호 형의 지도를 몇 달간 받았다. 솔직히 수학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과외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어머님 친구의 아들이 서울고 출신이라 그쪽으로 부탁을 했더니 송부호형이 걸린 것이다. 조금은 수줍은 듯한 형인데 참 자상하고 때로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그 형에게 참 많이 배웠다. 수학 자체보다도 입시 체험담 같은 것이 더 재미있고 도움이 되었다. “James Bond: 007 위기일발” 영화도 사실 그 형과 같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것이었다.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PSSC, 이지홍 선생님
빼놓을 수 없는 선생님들 중에 체육선생님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이 계셨다. 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셨는데, 고3때 체육시간은 완전히 서자취급을 면치 못하는 시간이고, 심지어 어떤 때는 체육시간에 골치 아픈 머리를 식힐 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다. 나는 그 시간이 그래서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간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곤 했으니까. 이 정선생님의 얘기는 정말 실감나게 재미있었다. 그 화제가 대부분 깡패들의 싸움이야기, 무협적인 이야기.. 등등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선생님의 경험을 듣는 것 같아서 더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 내내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비록 키가 조금 작아서 “똥자루” 라는 별명은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유쾌한 기억을 간직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다른 기억으로 남는 선생님, 물리담당 이지홍 선생님이다. 물리는 사실 이공계의 꽃인데 입시에서는 “국(어),영(어),수(학)”에 밀려서 어디까지나 ‘선택’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 선택과목의 시간은 대부분의 필수과목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있게 마련이다. 오전에 이미 머리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점심까지 먹은 뒤에는 사실 잠이 기가 막히게 잘도 온다. 그 때에 이 물리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 시간은 달랐다. 이지홍 선생님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랄까? 이 선생님은 얼마 전에 PSSC라는 미국에서 하는 물리교사를 위한 과정을 미국 하와이에서 이수를 하고 오신 아주 상당한 실력 파 셨다. 그 프로그램은 미국이 space program에서 소련에 뒤지기 시작하자 뒤 늦게 과학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대부분 ‘실습’을 위주로 하는 ‘산 교육’이었다. 물리시간 중에는 꼭 미국에서 연수를 받으실 때 쓰신 듯한 실험기재들을 가지고 들어 오셔서 정말 ‘실감나게’ 보여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내 눈으로 ‘목격’한 물리 실험들은 대학에 가서도 한번 못 보았다. 특히 음극관에서 음극선이 자석에 의해서 굴절하는 것, 고압에서 공기가 방전을 하는 것..등등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지홍 선생님께 머리 숙여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1965년 6월 중순경 방학을 몇 주일 앞두고 한일기본협정이 체결되면서 아예 학교에 미리 휴교령을 내려 버렸다. 반대 데모를 방지하려는 심산이었고 물론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실 나쁠 것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사실 지쳐있던 상태에 방학을 몇 주 앞 당긴다는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담임인 정운택 선생님 들어오셔서 침통하신 표정으로 이런 것들을 이해 못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흑판에 커다란 글씨로 “절호의 기회” 라고 한자로 쓰셨다. 그 뜻은 모두다 알았다. 밀린 공부를 이때에 만회를 하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일기본조약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른 편으로는 bonus로 생긴 몇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어진 여름방학 중에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며 돌아가셨다. 우리들은 국민학교 6년을 우리의 아버지로 여기며 존경하던 대통령이었다. 독재자로 낙인이 찍히고, 군사정부는 국민감정을 이유로 귀국도 못하게 하였다. 장례식만은 그리던 서울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 때의 비 오던 날, 길고 긴 운구행렬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학 중에도 데모가 계속 되곤 했다. 하지만 개학이 되면서 어느 정도 가라 앉게 되고 우리들은 다시 입시공부에 돌입을 하였다.
그 당시 입시준비 풍경은 학교 밖으로 입시전문 학원과 입시전문 도서실이 있었다. 도서실이란 것은 책을 빌려보는 곳이 아니고 그저 조용한 방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 중에 나는 동아 학원이란 곳에 잠시 다녔다. 그곳은 입시용 참고서를 제일 많이 출판하는 동아 출판사에서 직영을 하던 새로 생긴 학원이었다. 그 곳이 다른 곳과 다르게 기억이 나는 것은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입학시험’을 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새로운 개념의 학원이 그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이었다. 사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것이 상업적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었다. 무슨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으니까.
누가 생각을 한 것인지 몰라도 별로 생각이 없이 만든 학원임이 곧 들어났다. 그 정도 학원이면 다른 학원과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과목은 다른 곳에 비해 더 나쁜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 장맹열을 만났는데 그도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얼마 못 가서 다 그만두고 말았다. 한 때는 도서실에 다니기도 했다. 서대문 로터리로 가는 곳에 서강 도서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같은 반 친구 차정호를 만났다.
2학기가 되자마자 (아니면 바로 전) 6개년 계획의 주역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서울시 교육감으로 뽑히셔서 학교를 떠나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기 싫으셨던 듯 한 것이 발령을 받고 한때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후임으로 최형련 선생님이 부임하셨는데 너무나 우리들과는 짧은 기간이어서 별로 특별한 기억이 남지 않았다. 다른 교우들도 마찬가지라 짐작을 한다. 그리고 고교 본관과 학교 운동장 사이에 3층짜리 석조 과학관을 시공하였고 졸업 즈음에는 골격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3학년 때도 역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 함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기 선생님, 평소에는 침착하시고 공정하신 선생님이시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문제의 발단은 국어 모의고사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사실 모의고사가 끝나면 꼭 수업시간 중에 문제를 같이 풀어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모의고사에 관한 것은 완전히 무시하시고 정상적인 수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궁금하긴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차정호가 끈질기게 문제를 풀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백 선생님은 막무가내로 거부를 하시고.. 그러다가 아마도 차정호가 “선생님이 모르니까” 라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뒤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백선생님, 완전히 이성을 잃으셨다. 완전히.. 차정호의 뺨을 치시는데 거의 제 정신이 아니신 듯 했는데, 아무도 말릴 용기가 없었다. 그 시간도 꽤 길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참 씁쓸한 추억이었지만, 선생님도 인간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나중에 백선생님께서 차정호를 불러서 ‘사과’ 비슷한 것을 하셨을까.. 아니라고 추측을 한다. 그때의 학교의 풍토는 체벌을 교육의 일부로 여겼을 시기였으니까. 그와 비슷한 사건은 바로 옆 반인 3학년 7반에서 났는데, 역시 지나친 체벌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는 7반의 담임 영어 박시희 선생님과 그 반의 이수열이었다. 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는 간단하다. 옆 반에서 때리는 소리가 우리 반에 고스란히 다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때 우리 반에는 우리담임 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선생님도 그 때리는 소리에 조금은 거북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아마도 몽둥이로 큰 소리로 오랫동안 때렸던 모양이다. 나중에 그 반에 있던 김호룡에게 물어보니 바로 이수열이 그렇게 맞았던 것이다. 왜 맞았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 사건도 역시 선생님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아우성”, 반장 이유성수학귀재, 박상돈
우리반의 반장은 멋있게 키가 컸던 이유성이었다. 나와 이종원은 그를 ‘아우성‘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 당시 국어시간에 배웠던 유치환의 시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이란 구절에서 나왔다. 아마도 제목이 ‘깃발’이 아니었을까. 우리 반에는 키가 아주 훤칠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유성, 김용만, 안승원, 김명전, 고송무, 김영철, 한정환, 박상돈, 김연응, 조남재, 황석환, 신창근, 김종호..등등 “쭉쭉 잘 빠진” 친구들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는 학교 내에서 키가 주는 영향이 상당했다. 쉽게 말하면 대부분 비슷한 키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뜻이다. 번호를 키의 순서로 정하고, 그 순서에 따라 자리를 잡으니까 더 그런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간혹 예외는 있지만 키가 크면 힘도 세고, 외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키가 컸던 친구들을 기억하면 무언가 조금은 서먹서먹 할 때가 있다.
박상돈은 키고 크고 공부도 그것도 수학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역시 그는 서울공대 전기공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나에게는 거의 ‘이상형’이라고나 할까. 김연응, 김영철, 조남재, 신창근, 이윤기 등은 나와 같이 연세대로 갔는데 김연응과 김영철은 기계공학과, 나머지는 모두 전기공학과였다. 신창근은 대학시절 일찍 군대를 가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1973년과 1975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호남정유에 근무를 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해사에 간 최민은 연세대학 졸업식 때 우연히 만났는데, 7반의 송영근, 강교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 고송무도 1975년에 정교성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북구라파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타계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조금 섭섭한 것은 송희성과 배희수, 둘 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들인데 그들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배희수는 연세대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송희성은 국민학교 6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고교 졸업 후에는 정말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동기회 총무, 신동훈
신동훈은 요새 57 동기교우회의 총무로 맹활약을 해서 email로 나마 만나게 되었다. 정말 오랜 만이랄까. 또한 천주교신자임도 알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이 친구는 그 이외에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이름이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학원 영어 강사에 신동운 이라고 있어서 더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되곤 한다. 이 친구 역시 pop song과 연관이 되는 것이 있다. Eddie Arnolds의 Sunrise Sunset과 I really don’t want you to know란 노래였는데 왜 이 노래와 신동훈이 같이 생각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
제일 꼬마인 김윤필은 대학졸업 후에 한번 김진수, 정양조 그룹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신사복차림이었지만 그 때도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목창수를 통해서 해병대 입대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놀라운 소식도 들었다. 정말 슬픈 소식이었다. 장난꾸러기 오수만은 역시 그가 장담한대로 서울치대, 치과의사,그리고 ‘중앙치과’. 윤중희는 대학 졸업 후에 가끔 만났는데 그때 그는 미국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에 그대로 국내에 남았다고 들었다. 목창수는 화학을 좋아했던 친구인데 서로 잊고 살다가 1987년경에 정말 우연히 Columbus, Ohio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창수는 Ohio State University로 과학 교사단을 인솔하고 연수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온 것인데 정말 우연히 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목창수와는 가끔 연락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둘째 딸이 서울에 갔을 때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 신세를 갚을 길이 난감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남가주 동창회장, 권명국이희진
권명국은 57회 동창회의 소식을 통해서 미국 LA지역(남가주)의 동창회 지부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이름은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된 것이다. 또 얼마 전에는 동기 회에서 명국의 딸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게나마 email로 연락이 되었고, 또한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종원은 1980년 초 나의 결혼식에도 왔었는데, 그 이후로 직접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우진규를 통해서 월남의 싸이곤 (호지민 씨티)에 정착을 해서 산다고 들었다.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키가 큰” 원병태는 고교 졸업직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고대 화학과에 “꽁지” 로 합격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대학졸업 후에 그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미국에 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척집에서 하는 주유소를 도와주러 간다고 했다. 그 당시 그를 따라 고려대학에 자주 가서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고 그를 알던 친구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차형순은 연세대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LA 지역으로 이민을 와 있었다. 아직도 business를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희진은 정교성을 통해서 현재 캐나다의Calgary에 거주하면서 geological engineer로 일을 하는 것을 알았다. 가끔 정교성이 살고 있는 Toronto에 놀러 온다고 들었다. 나머지 반창(3학년 8반) 들은 애석하게 개인적으로 소식을 모르며, 궁금하기가 말할 수 없다. 혹시 타계라도 한 친구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신축중인 과학관, 1965년
이상 대강 기억에 나는 것을 적어 보았는데 이외에도 사실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이 현재 내 기억력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력이 더 앞으로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긴장되고 살벌한 고교3학년의 생활이었지만 졸업 후에 대학으로 간다는 가벼운 흥분,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 간다는 그런 기대감이 일년 내내 있었다.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다방, 술집, 연애,당구장, 영화..등등 우리를 기다리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일본처럼 공식적인 성인식은 없다지만 우리에게는 고교 졸업이 바로 성인이 되는 시기였다. 그것들을 기대하며 열심히 공부를 한 때가 바로 고교 3학년 때였다. 특히 중앙고교가 우리에게 준 그 알찬 교육의 결실을 맺게 한 그때를 어찌 잊으랴. 우렁차게 중앙, 미래의 상징 과학관이 신축되는 것을 보며 졸업반을 보낸 우리들, 45년 동안 모두들 얼마나 민족교육의 요람인 중앙의 꿈을 실현하며 살았을까? 이미 타계한 친구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우리들 모두 건강하고 보람된 후년을 보내기를 기원해 본다.
비록 패잔병 같은 심정이었지만 다른 한 구석에서는 ‘대륙탐험’ 을 했다는 재미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물론 나이 탓이었을 것이다. 그 나이에 비관적이거나 한 감정은 몇 시간도 못 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지루한 Greyhound bus는 급행이 아니라서 조그만 곳이란 곳은 모조리 들리면서 달렸다. 학교에서는 차를 두 대나 잡아먹은 여행이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웃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Purdue Stadium 앞에서 성성모씨와, 1974년
그때 축 쳐진 나를 위로하며 격려를 한 사람이 바로 성성모씨였다. 그때 성형이 나의 옆에 없었다면 참 오랫동안 쳐진 어깨를 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반대로 이승조씨는 한 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을 해서 여행 중에 공동으로 쓴 돈을 갚으라고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것도 차게 바뀐 사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어려워졌을 때 진정한 친구를 알아 본다더니 이것이 바로 그런 때였다. 나는 성형을 그때부터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다. 학기가 무사히 끝이 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약속대로 그 망가진 차를 찾으러 가야 했다. 이승조는 물론 그런 것은 관심에도 없었다. 나와 성형이 다시 Indianapolis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차가 없었다. 다시 bus를 타고.. 와.. 아찔했다. 그때 또 성형이 도와주었다. 약혼자에게 돈을 빌려서 차를 한대 산 것이다. 물론 used car였다. Full size Buick Electra였다.
그 차를 사고 나서 우리 젊음의 모험심이 또 발동을 했다. Indianapolis까지만 갈 것이 아니라 아예 New York까지 또 가자고.. Why not? 그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 시작이 되어서 더 재미까지 느끼게 되었다. 눈에 쌓인 highway를 달린다는 생각만 해도 피가 용솟음 치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갈 때는 시간의 제한이 없었다. 마음껏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Oklahoma를 빠져 나오기 전에 성형과 기숙사를 같이 쓰던 미국학생, Gary Fugate 의 집에 잠깐 들렸다. 그 친구가 어떻게 집에 잘 이야기를 해 놓았던지 그 집에서 아주 환대를 받았다. 성형의 이야기로 기숙사에 있을 때 시간이 나면 그 학생에게 합기도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차를 Nebraska주로 돌렸다. 이번에는 내가 아는 한국간호원들에게 들릴 차례가 되었다. Auburn, Nebraska라는 Kansas주에 가까운 조그만 town에서 3명의 한국간호원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명을 한국서부터 알고 있었다. 김성혜씨.. 초가을에 나는 이미 이승조씨와 같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성형은 이번에 처음 가는 것이고.. 처음에 갔을 때는 조금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구면이 되어서 처음 갈 때와는 달랐다. 그 ‘촌’에서 근무하는 3명의 한국간호원들.. 생각만 해도 외로워 보였다.
그때는 이미 눈이 나리기 시작해서 모든 곳이 흰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를 세 간호원이 데리고 어느 곳으로 갔다. 근처에 있는 다른 작은 town.. Peru였다. 남미에 있는 나라이름도 Peru지만 이곳은 도시의 이름이었다. 그곳에는 Peru State College가 있었다. 조그만 liberal art college였는데 그곳에 외롭게 한국인 교수 한 분이 계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 교수가 세 간호원을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미 그들은 가끔 만났던 것 같았다. 그 교수님의 이름은 John Hahn이었는데 50년대의 초기 유학생이었다.University of Minnesota출신이었고 시카고에 누님이 사신다고 했다. 너무나 외로워서 시카고엘 놀러 가면 다시 오는 것이 무서워서 이제는 자주 대도시에는 안 가신다고 했다. 전공은 political science였다. 교수님의 조그만 apartment에서 같이 저녁을 해 먹었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때, 그곳을 생각하면 조금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거의 40년 뒤의 John Hahn교수가 조금 궁금해져서 Internet의 힘으로 찾아보니.. 와.. 그 같은 학교에서 retire를 하신 모양이었고, 명예교수로 이름이 남아있었다. 정말 자랑스럽다.
Ford XL, Nyack Hospital 앞에서, 1973년 겨울
차를 바른쪽으로 돌려서 다시 Interstate 80를 달려서 Indianapolis에 갔다. 약속대로 그 의사부부가 사는 곳으로 가서 차를 끌고 폐차 장에다 처리를 하고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New York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가는 곳마다 눈이 나리고 있었다. 두 번째의 New York trip은 별로 놀랄 것이 없었다. 아주 매서운 바람이 뉴욕의 빌딩 사이로 몰아치고 있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 빠른 결론이었다. 이번에는 성형이 조금 기분이 발동을 했는지 새로 사가지고 간 차를 약혼자와 같이 밤에 몰고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건 완전히 악연이 아닌가.. 또 차가?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차는 또 disable이 될 정도였다. 성형은 약혼자에게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다. 적지 않은 $$이 없어진 것이니까. 우리는 또 차가 없어졌다. 발이 묶인 것이다. 또 생각 끝에 이번에는 내가 서울로 도움을 청하고.. 해서.. 내가 그곳에서 차를 사게 되었다. 68년형 Ford XL이라는 비교적 큰 차였다. 상태도 아주 좋았다. 그때 느낀 것은 미국에서는 ‘절대적’으로 자기 차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우리는 간호원 기숙사에서 ‘몰래’ 숨어서 잤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무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스릴만점이었다. 성형이 차 사고를 낼 때, 그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지만 그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면허증에 사진이 없는 주가 많아서 나의 면허증을 빌려갈 정도였다. 아마도 Nyack,NY police의 accident report file에 나의 이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2개월 만에 차를 3대나 잡아먹은 성형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우리는 같이 학교를 떠나 Dallas, Texas로 가서 학교를 옮길 준비를 하면서 조그만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먼저 시카고로 떠나게 되고, 성형은 그 당시 Purdue University의 admission을 받고 생각 중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는데, 물론 서로 연락은 끊지 않았다. 소식에 성형은 Dallas에서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려서 부부가 되었고 Purdue University(Indiana)에 입학을 하였다고 들었다. 그곳 (West Lafayette, Indiana)은 시카고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1974년 9월 Labor Day holiday때 그곳으로 달려가 반가운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같은 해 Thanksgiving holiday때 또 그곳에 놀러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한국유학생이 상당히 있었고 유학생 회도 있었다. 모두들 모여서 신나게, 건전하게 놀던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졸업이 가까워진 어떤 선배유학생 부부의 초청으로 처음 Thanksgiving turkey 를 맛 볼 수 있었다. 그 분들의 정성들인 추수감사절 초청은 아직도 기억에 남고 아직도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이듬해, 1975년 봄 무렵에 성형부부가 시카고로 놀러 왔다. 조금 있으면 Master’s degree를 받게 되고 취직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의 취업조건이 별로 좋지 않아서 대부분 졸업을 하면 현지에서 취직을 하려는 풍조였다. 그리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 서로 연락처를 찾을 방법이 쉽지를 않았다. 게다가 나는 single이라서 이사를 수시로 하던 터라 더 쉽지를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잊었다. 사진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요새는 특히 겨울이 되면 설경의 Peru State College에서 성형과 같이 눈길의 언덕에서 헛바퀴 도는 어떤 차를 밀어주던 생각이 나곤 한다. 왜 그럴까? 나도 모르겠다. 성형은 어떻게 살았을까? 자식이 몇일까? 그대로 미국에 남았을까? 아니면.. 상관없다. 그저 건강하고 보람찬 인생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 끝
**위의 music video는 그 당시 car stereo에서 거의 24시간 들려오던 힛트송 Charlie Rich(일명 silver fox)의 The Most Beautiful Girl…
까마득하게 오래 전, 잠깐 알고 지내던 사람, 성성모씨. 그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카톨릭신자가 되어서 생각하니 그것이 그의 특별한 이름이었다. 성모는 사실 발음상 Mother of God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가 아닌가? 혹시 성형(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 은 카톨릭 신자였을까? 그 당시 성형으로 부터 천주교회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아니 들었어도 내가 전혀 무관심이라 잊었는지도..
1973년 말에 미국의 조그만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다. 나보다 한 학기 이상 뒤에 온 한국 유학생이었다. 학기시작보다 조금 일찍 캠퍼스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 유학생이 몇 명 밖에 없던 때 반가운 사람이었다. 나와는 나이가 비슷하고 성격이 털털해서 비교적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춘천고교 출신으로, 서울대학 사범대 지학과를 졸업하고 아마도 이곳에서는 본격적으로 지질학을 공부할 모양이었다.
파안대소의 성성모 씨, 1974년 Purdue University
1973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Christmas다음으로 큰 holiday인 Thanksgiving holiday 를 미국에서 처음 맞게 되었다. 학교는 순식간 ghost town으로 변하고, 결국 우리도 조금 휴일기분에 젖게 되고, 우리는 New York을 가기로 즉흥적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른 유학생인 이승조씨와 셋이서 경비를 분담하고 나의 차로 가기로 했다. 사실은 두 명 다 그곳에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성형은 약혼자가 간호원으로 뉴욕근교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이승조씨도 어떤 간호원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두 명은 이미 New York에 간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처음이었다.
이 ‘유명한(최소한 나에게는)’ New York trip 1973은 사실 영화에서나 볼만한 disastrous trip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거의 생생한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부터 말하자면 “불과 며칠 사이에 2 대의 차를 잡아먹은 여행” 이었다. 우리의 차로 떠났다가 한 명은 비행기, 다른 두 명은 Greyhound bus로 돌아오는 무슨 Napoleon의 Russia campaign을 연상케 하는..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사실 조금 비참한 심정이었다.
기세 좋게 출발한 우리는 Oklahoma를 벗어 나기도 전에 차가 highway에서 서버리는 위기를 맞았다. 그 때의 나의 차는 그 당시 $900 주고 산 used car 1969 Volkswagen Beetle 이었는데 비교적 좋은 차였다. 하지만 long haul을 하기엔 역 부족인 차였는지.. engine oil이 새어나가는 큰 사고였다. 아마도 내가 engine oil을 너무 많이 넣었던 것이 문제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engine이 못쓸 정도로 망가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차(Ford Fairlane 500)로 trade가 되어서 그 차를 몰고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대로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그때의 젊음이 여행을 계속하게 한 것이다.
그 trade한 차는 물론 고물 차에 속했지만 최소한 잘 구르는 차였다. 문제는 manual transmission, 그러니까 clutch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clutch란 것을 써본 적이 없었다. 망가진 차는 비록 gear shifting을 하긴 했지만 clutch는 없었다. 그래서 공터에 가서 연습을 한 시간 정도 한 후에 출발할 수 있었다. 그때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깨가 더 무거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역시 젊음은 좋은가.. 우리들은 그 당시 전혀 힘든 것을 몰랐다.
Joplin, MO를 지나고 St Louis, Indianapolis, Columbus, Pittsburgh, Harrisburg를 거쳐서 New Jersey turnpike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뉴욕 city에 거의 다 온 것이다. 그때의 New Jersey turnpike는 정말 ‘공해’의 본산지였다. Highway 양쪽으로 늘어선 화학공장들에서 나오는 연기가 차의 창문을 닫아도 소용이 없었다. 뉴욕지방의 인상은 그랬다. 오랜 전통과 최첨단의 기술이 기가 막히게 융합이 되어서 미국의 이상(ideal)을 성취시키던 곳.
성형은 자기의 약혼자가 근무하던 Nyack Hospital로 가고 나는 이승조씨가 안다는 간호원 둘이 사는 apartment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그 당시 한국출신의 취업간호원들은 의사들과 더불어 전문직으로 이미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보아서 그들은 분명히 훨씬 나은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뉴욕의 상징인 곳을 몇 군데 구경을 하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고생해서 간 것에 비해서 너무나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장거리운전의 경험을 쌓았다는 위안으로 다음에 다시 오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차를 돌렸다.
이제 main attraction이 끝나고 나니 현실이 눈앞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던 차가 갑자기 ‘고물차’로 바뀌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웃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집에다는 뭐라고 변명을 할까..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밤을 새우며 운전을 하는데 도저히 잠이 참을 수 없어서 길옆에 차를 세우고 말았다. 조금 눈을 부치고 가려고 했지만 이승조씨가 월요일에 수업을 꼭 가야 한다며 갈 것을 주장하고, 결국은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거의 운전경험이 없던 그 친구.. 결국 차를 몰고 가다가 운전미숙으로 curb에 차를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뒷좌석에 누워 자다가 요란한 소리에 깨고.. 우리가 발견한 것은 또 차에 문제가 생겼다는 bad news였다. 이번은 전번같이 engine이 아니고 front axle이였다. 차가 curb 에 올라타면서 그곳이 부딪쳐서 무언가 찌그러진 듯.. 차를 운전해 보니 속도에 비례해서 요란한 소리가 차 밑에서 들렸다. 고속으로 달리면 완전히 싸이렌 소리가 날 정도가 되고 옆의 차들이 다 쳐다 보는 정도가 되었다.
그때의 결론은 이 상태로는 더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Indianapolis 근처여서 기를 쓰고 시내로 들어가 repair shop엘 갔더니 고치지 말고 버리라고 했다. 우리는 결국 차로 집에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을 하고 우선 시간을 벌기로 하고 궁리 끝에.. 차를 어느 곳에 맡기기로 했다. 그냥 주차장에 놓고 가기는 뭐하고 해서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한인들을 찾아보았다. Kim씨만 찾으면 되니까..하고 여기저기 걸어서 결국 재수 좋게 어떤 분이 겨울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맡아 주겠다고 했다.
그 전화를 받은 분은 어떤 가정부인이었고 의사의 wife였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 가보니 어떤 apartment여서 그곳의 한 구석에 차를 주차시키고 그 부인을 찾았다. 놀란 것은 아무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불고기 저녁을 대접해 주신 것이다. 그 의사인 남편 분까지 와서 계셨다. 아주 젊은 의사부부였는데 정말 불행하게도 성함을 기억할 수가 없다. 저녁을 잘 얻어먹고 이승조씨는 공항으로, 나와 성형은 Greyhound bus terminal로 남편 분께서 친절하게 데려다 주셨다. 아직도 그 분들의 도움에 감사를 드리는 심정이다. — 계속
** 이곳에 있는 YouTube video는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long haul trucker song: Convoy인데 운전중 하도 많이 들어서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배경상, 이도영, 이경증.. 나에게는 서울 창신동 삼총사..라는 인상이 깊이 깊이 뇌리에 남아있다. 동대문 옆에 있는 산동네.. 창신동. 나는 물론 그곳의 근처에서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운동장에 갈 때 동대문 옆으로 보이는 산동네..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곳이다. 그 곳이 내가 알던 이 삼총사가 자라던 곳이었다.
이중에 이도영, 배경상은 모두 이대부고(이화여자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이경증은 나와 같이 서울 중앙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경증이는 고2때 담임 박영세 선생과의 trouble로 학교를 떠나게 되어서 검정고시를 보고 연세대 지질학과에 입학, 졸업을 했다. 그러니까, 경증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헤어지고 연세대학교 졸업 무렵 쯤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교를 군대에 가지 않고 계속 다녔지만 경증이는 연세대에 입학한 후에 곧 바로 입대를 했는데, 거기에 멈추지 않고 월남전에 자원을 했고 그곳에서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케산전투 같은 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친구였다. 나는 경증이의 이런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삶’을 참 좋아했다.
다시 만났을 당시 우리들은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라온 동네가 서로 아주 다르고 거기에 따른 친구들의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 한 마디로 그의 동네친구들은 내가 전혀 모르고 경증이도 나의 친구를 모르는 것이다. 그 중간에 중앙중, 고교의 친구들이 서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창 김호룡, 우진규 같은 친구들은 경증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는 역시 내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다시 만났을 때 조금은 서먹서먹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게 진정한 ‘어리고 순진한 우정’이 아니었을까.
그 때부터 나는 경증이의 ‘동네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어울리면서 우선 놀란 것이 그 많은 창신동 친구들의 숫자였다. 그 중에는 그때 한창 인기절정의 통기타 가수 이장희도 그 중의 한 명이라고 들었다. 어찌 그렇게나 많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녀서 오래된 동네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경증이는 아마도 그 창신동의 토박이여서 그렇게 친구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 처음 사귀게 된 사람들이 바로 이도영, 배경상이었다. 어떻게 같은 이대부고를 다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공학을 다닌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진한 농담으로 이도영은 이대부고 다닐 당시 여학생의 옆에 가면 냄새로 지금 period 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해서 모두들 게면 적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연스레 여자들을 대할 수가 없었다.
이도영은 이미 어떤 재수하는 어떤 귀여운 여자와 동거 중이었고, 배경상은 그 보다 더 야심이 커서 ‘돈 있는’ 여자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에 걸 맞지 않게 최고급 까만 정장 양복을 입고 다녔다. 키도 커서 멀리서 보면 무슨 영화배우 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경증이는 사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의 그런 초연한 태도가 그렇게 신선하고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다고나 할까. 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성은 잊어 버렸다. 이름은 경화였다. 꼭 여자이름 같지만 아주 예술가처럼 멋지게 생긴 남자였다. 그 친구는 미술학도인데 참 그림을 재치 있게 잘도 그리는 예술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성격, 배경, 취향이 다른 친구들이 경증이 주변에서 아주 멋있게 어울리며 청춘을 구가하던 그 시절.. 하지만 모두들 쉽게 풀지 못하는 고민들은 한두 가지 다 안고 ‘밤을 잊은 그대’ 의 청춘을 보내던 시절이 우리젊음의 전성기, 1970년대 초였다.
그때 우리들이 명동 같은 곳의 다방에서 모이면 주로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을 골라서 만났다. 물론 여자들에게 장난스럽게 ‘추군’대려는 의도가 갈려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것을 hunting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그저 “꼬신다” 고 했다. 심지어는, 그것에 관한 방법론 같은 것은 “꼬셜로지”, 그러니까 sociology같이, 라고까지 했다. 우리는 완전히 아마추어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런 곳에 가보면 완전히 고정멤버 같은 프로 급 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 팀에서는 배경상이 조금은 프로급이 아니었을까? 주로 장난스러운 게임을 하곤 했는데 여자들이 그룹으로 모인 곳에 혼자 가서 미팅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게임이었다. 다들 잘 했는데 나는 끝까지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의외로 점잖은 경증이가 그런 것을 대담하게 잘 하곤 했다. 대부분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지만 아주 가끔은 성사가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재미가 있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성사가 된 미팅그룹이 생각이 난다. 출신성분이 아주 다양한 여자들의 그룹이었다. 그런대로 정기적으로 만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혜씨였다. 조금은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하는 듯한, 툭하면 영어로 대답을 하곤 했다. 어떤 미국사람에게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해서 물어보니 얼마 있다가 간호원취업으로 미국엘 간다고 했다. 또 생각나는 사람, 이대생, 오연희씨.. 우리는 우연희, 라고 불렀다. 밝고, 항상 웃는듯한 얼굴.. 그들은 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무엇을 할까.. 간호원 김성혜씨는 나중에 미국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을 가지게 된다.
1970년대 초에 그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이 아주 적게 남아있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제일 궁금하던 배경상이 빠져있다. 등산가서 찍을 때 왜 배경상이 빠져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 돈 많은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이도영은 왜 재수생 cute girl friend를 안 데리고 왔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꼭 붙어 다니고 했는데. 그들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1975년이었다. 잠깐 여름에 귀국을 했을 때 정말 반가운 만남을 했다. 몇 년 전 여자들을 쫓아가느라고 명동을 헤매던 때를 서로 그리며 다시 명동을 누비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3~4년은 더 늙은 것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까? 이도영은 그 재수생과 결혼을 했을까? 배경상은 정말 부잣집 딸을 만났을까? 경화는 무슨 예술 대상을 받지나 않았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그 중심에 있었던 나의 친구, 이경증.. 1980년 나의 결혼 때 잠깐 보고 다시 없어졌다. 이 친구는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한 셈이었다. 조금은 방랑자 기질이 있다고 할까. 자식 어디로 증발을 했니..이제는 슬슬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니? 죽기 전에 한번 소식이라도 듣자.
미치 밀러.. 어렸을 적에 많이도 들었던 이름이다. 그 당시 그의 합창단 (Mitch Miller & Gang)이 부른 영화 주제곡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1962년) 쯤이었을까. 그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라는 영화의 주제곡 콰이강의 행진, The River Kwai March.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니고 완전히 남자들의 휘파람 합창이었다. 그들이 바로 Mitch Miller 합창단이었다.
그 당시 그의 합창곡들은 거의 유행가처럼 불려졌었다. 그들의 영향이었을까.. 곧 이어서 한국에도 Sing Along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전석환씨가 이끌던 Sing Along Y (YMCA)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한결같이 노래들은 밝고, 복고적이고, 심지어 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나중에 classic으로 남을 만한 그런 곡들이었다.
99세로 세상을 떠난 Mitch Miller,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 어린 주옥 같은 미국적인 노래를 남겨 주었다. 그 많은 곡 중에서 아직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몇 곡만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라면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RIP.. Mr. Miller….
콰이강의 행진,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곡영화속의 거의 비참한 행진과는 달리 아주 경쾌한 곡이다. 그 당시 아주 유행을 한 멜러디,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교에서는 그 당시 이곡을 등교시간에 맞추어 계동골목을 향해서 아주 우렁차게 들려주었다. 그 긴 계동골목을 걸어서 등교하던 우리들은 이것을 들으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져을 것이다.
The Yellow Rose of Texas, 전통 미국민요: 텍사스의 전통민요인데, 전설에 의하면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독립할 당시 텍사스 leader였던 Sam Houston이 전쟁 상대였던 멕시코의 General & President Santa Ana에게 비밀리에 보냈던 (spy?) 텍사스의 여자가 바로 Yellow Rose of Texas였다.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와.. 이게 장난이 아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글거리는 아침 해를 보며 오늘은 heat index(불괘지수)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지난 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여름은 그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무척 덥다. 올 여름의 전기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개는 1층의 에어컨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올해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거의 보통 여름의 2배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를 더 쓰면 그만큼 CO2가 더 유출될 것이고, 그것은 더 지구를 덥게 한다.. 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왜 더울까 암만 생각해도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고 불평이다. 그저 Mother Nature가 가끔 하는 경고이거나 장난하는 그런 것일 것일지도 모르니까. Weather person들도 해답이 없는 모양이다. 예보는 하고 있어도 왜 올해는 이럴까 하는 해답은 ‘절대로’ 안 한다. 모르니까. 과학이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올해의 특징은 온도, 습도가 같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하면 밤에도 별로 시원하지를 않다. 결국은 그때에 에어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사실 무척 고물에 속해서 사실 언제 고장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별로 신경을 쓰지를 않았는데 요새는 조금 걱정도 된다. 제일 더운 날 이것들이 stop working을 한다면 그야말로 ‘비상’ 일 것이다. $$이 많으면 이럴 때 brand new energy efficient model로 바꾸면 전기료도 덜 들고 더 시원할 것이지만..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추억에 남을만한 더위가 몇 번 있었다. 아마도 1972년 쯤이 아니었을까? 그 해 서울의 여름은 정말 지독하였다. 1973년에 고국을 떠났으니까 그 후에도 그런 더위가 또 있었을 듯 하다. 그때가 특별히 왜 기억에 남는가 하면 밤에 잠을 전혀 못 잤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울의 민가나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날이 일년에 며칠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보통 밤에 잠은 잘 수 있었는데 그 해는 예외였다. 그때 조금 겁이 났다. 밤에 잠을 못 자게 되면 이건 큰일이 아닌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증이와 새벽같이 연세대로 테니스를 치러갔던 확실한 기억이다. 그 다음은 1975년 초여름 (6월 초였나?), 시카고에 열대야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때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시 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 아마도 그때의 밤 기온이 80도(화씨)가 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잠은 설쳤으니까..하고 Lake Michigan으로 갔는데.. 그렇게 차게 느껴지던 곳이 그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그 정도였다. 그때 시카고의 많은 집에 에어컨이 없었고, 사실 필요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지독한 더위가 여기 저기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global warming의 경고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이런 ‘설’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기후(extreme high & low)가 자주 나타남은 믿는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불쾌지수가 높다 함은 기습적인 폭우의 가능성이 많다는 뜻도 된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하루 종일 찌더니 급기야 오후 늦게 터지고야 말았다. 우박과 더불어 폭우가 쏟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여름의 즐거움이다. 이런 더위에 이렇게 폭풍과 같은 빗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싸늘한 가을 비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부터는 이런 열대성 여름 비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이럴 때, 태고적 시절 (고2) 여름방학 때 서울 남영동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 ‘삼국지’를 읽던 것을 회상하면 더욱더 시원해짐을 느낀다.
어제는 새로니가 Nashville로 떠났다. 차로 이곳에서 4시간 정도의 거리여서 전에 있던 Washington DC 보다 너무 편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리하지 않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내일은 새로니 이사 짐의 대부분을 우리의 mini-van에 싣고 우리가 다녀 올 차례가 되었다. 계획은 그곳에서 자지 않고 밤에 돌아올 생각이다. 우선 집에 있는 Tobey와 Izzie (dog & cat)가 조금 마음에 걸리고, 새로니가 살 곳이 studio apartment라서 분명히 방이 좁아서 자는 것이 조금 불편할 거 같아서이다. Google Map을 보니까 direction이 아주 간단했다. I-75 North로 90 마일 가면 Chattanooga, TN가 나오고 거기서 I-24W를 타고 135 마일 정도 가서 Nashville metro가 나오면 I-440 (toward Memphis) 로 갈아타고 6 마일 정도 가면 Vanderbilt University가 나온다. 새로니가 살 곳은 학교에 바로 옆에 있었다. 아마도 걸어서 다녀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새로니가 갈 곳은 Peabody College of Education인데 사립학교라 학비가 무척 비싸다. 하지만 1/3 정도는 각종 장학금으로 충당이 될 듯하고, 나머지는 거의 loan으로 될 듯. 이래서 요새 대학 졸업생들은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빚쟁이 신세가 되고 있다. 거의 그게 정상일 정도로. 우선 2년 course에 도전을 하고 여력이 있으면 더 공부할 생각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본인 조차도.
김수근교수님댁 가족들과 1973년 Sherman, Texas
Vanderbilt University..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수근 교수(님).. 대구 계명대학출신으로 그곳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지금은 한국의 어느 학교에서 가르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 처음 온 1973년 여름에 Sherman, Texas에 사시던 김교수 가족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Oklahoma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이 Texas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Dallas에 가끔 놀러 나가곤 했다. 그 가는 길 (US-75) 에 Sherman 이라는 조그만 town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Austin College라는 조그만 사립대학이 있었고 그곳에서 김교수는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당시, 김교수의 박사학위과정이 아직 덜 끝난 상태였고. 다니던 학교가 바로 이 Vanderbilt University였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그 대학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야 사립명문대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김교수님 댁에 놀러 가면 우선 그 귀한 한국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김교수님 부인의 음식솜씨가 상당하였지만 그것 보다도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당시 어린 딸 두 명이 있었고 한국에서 아버님이 방문 중이셨다. 나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를 않아서 모든 것이 불편한 때에 내가 차를 사는 것을 도와 주셨다. 그래서 김교수님의 도움으로 그 당시에 산 차가 69년 형 Volkswagon Beetle이었다. Semi-automatic의 그 차는 사실 그 당시 나에게 과분한 차였다.
Nashville하면 미국 country music의 수도나 다름이 없다. Grand Ole Opry 란 country music전당이 그곳에 있다. 일주일에 한번 country music stage concert가 그곳에서 열린다. 가장 기억이 나는 것 중에 하나가 The Carpenters가 그곳에 왔을 때다. 아마도 1973년 정도였을까.. 갑자기 인기절정에 오르면서 (Top of the world) 이곳으로 날라와서 공연을 했고 완전한 top country pop stardom에 오르게 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면 한번 그 유명한 Grand Ole Opry공연을 보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