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락가락하고 포근한 깊은 가을.. Thanksgiving Day가 내일로 다가왔다. 작년 이맘때도 지금처럼 아주 포근한 날이었다. 우리의 조촐한 가족만이 모였던 휴일이었고 모두 조금씩 요리를 하는 것을 거들었던 기억이다. 그때는 새로니가 Washington DC에서 일을 할 때여서 급하게 왔다가 급하게 떠났는데 올해는 다시 학생이 되어서 거리와 시간 모두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대신 작은 딸 나라니가 처음으로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첫 해가 되었다. 올해 4월에 따로 나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 오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사실을 본인도 즐기는 듯 하다.
올해의 Thanksgiving Day는 오랜만에 guest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새로니의 Emory friend인 Galina가 뉴욕에서 현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집에 놀러 온 것이다. 식사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게 되어서 조금은 신경이 쓰이지만 예년과 조금 다른 휴일이 되어서 흥미롭다.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이런 때면 한방에 모여서 재미있는 movie같은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절이 거의 먼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이곳의 전통인 turkey요리를 해 왔다. 아마도 그때가 1980년대 초, 그러니까 우리가 Columbus, Ohio에서 살 때였을 것이다. 연숙이 그곳 성당의 원로로 계시던 이봉모 선생님(지금은 고인이 되셨음)의 부인으로부터 recipe를 받아서 첫 turkey 요리를 했던 때가 그때쯤이었고 그 이후로 거의 한해도 빠짐없이 turkey 요리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추석이나 설날의 한식 전통요리보다 이 turkey 요리에 대한 추억과 애착 같은 것도 생기게 되었다. 가끔 한국 손님들이 참석을 하면 별로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다. 특히 김치를 꼭 같이 찾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금 당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김치와 먹어도 사실 맛이 있었다)내가 개인적으로 turkey 요리를 제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사실 결혼 훨씬 전의 일이었다. 1974년 가을의 Thanksgiving Day였나.. 그 당시 알고 지내던 서울사범대 지학과 출신 성성모씨가 Indiana주 Purdu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그곳에 놀러 갔는데 , 같은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부부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turkey 요리를 푸짐하게 대접을 받았다. 특히 여러 가지 side dish들이 굉장했는데 그 유학생 부인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미국요리를 배웠는지 모두들 혀를 찰 정도였다. 처음 먹어본 것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리가 잘 되었는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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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며칠 사이 내린 비로 그나마 남아서 안간힘을 쓰며 가을을 지키던 아름답던 황금색 나뭇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글자 그대로 “낙엽의 장관”을 이루었다. 특히 우리 집 차고로 들어오는 길은 길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낙엽으로 덥혔다. 이들은 해가 다시 나오면 완전히 마르면서 바람에 휘날려 다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겨울로 향하는 12월의 입구..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작이다. 천주교 달력에서는 이날이 새해의 시작이 된다. 11월 28일이다.
낙엽, 낙엽, 낙엽…
12월로 들어설 즈음이면 가끔 그리운 곡이 생각난다. 1960년대 말, 대학시절.. 멋진 가사에 매료되어 guitar로 따라 부르곤 하던 Duo Simon & Garfunkel의 rock version “I am a rock”이 그것이다. 그 대학시절, 가끔 지독한 고독 같은 것을 느끼곤 하면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들었다. 이 가사의 주인공이 내가 된 듯한 기분으로..특히 친구 유지호와 같이 부르던 것도 즐거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별명 “우중충” 유지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천안함 도발사건 이후 다시 이번에는 연평도 포격.. 정말 끝이 없다. 김정일이 “개XX”는 그 괴상하게 생긴 머리”통”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나중에 해부를 해서 히틀러와 비교해 볼 만하다. 촌스러운 북쪽 사투리로 “영쩜 영 미리메타라도 조국을 침범하는 원쑤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북괴왕조의 방송을 들으면 이런 Shakespeare 희극이 역사상 더 있었으랴..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과 버금가게 웃기고 한심한 친구들이 바로 대한민국에도 “수두룩 닥상” 으로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금메달 깜은 소위 말하는 “친북 기독교 단체” 들이다. 이 사람들 과연 머리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의 이간을 배격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동족 형제”인 김정일을 사랑하라“고.. 허..여보세요.. 정신 좀 차리십시오.
중앙고 57회 동기회에서 또 결혼식 소식이 날라왔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확실한 통계는 물론 없다. 그저 느낌일 뿐이다. 아마도 동기녀석들의 반수 이상이 이미 할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 아~~ 세월이여. 이번의 결혼식 소식은 조금 나에게 의외의 느낌을 주었다. 주인공이 심인섭인데.. 심인섭의 차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왜 의외의 느낌을 주었느냐 하면, 이 친구의 소식을 1965년 졸업 이후 처음 듣게 되어서 그렇다.
물론 친구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동창회에도 나왔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연락을 하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이제 처음 그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혹시 ‘사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나타났을까? 그의 이름은 연락처, 주소록 등등에 전혀 없었다. 고2때 같은 반이었다. 경주 수학여행 때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것보다도 이 친구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고2때 교지에 실렸던 그의 시 때문이었다. 시의 제목이 <실비아>였다. 제목도 독특하고 이국적이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천주교신자의 세례명일 수도 있을 그런 이름의 시.. 하지만 그 시의 내용은 기억을 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그 시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 “사라진” 친구가 홀연히 딸의 결혼식 소식과 같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은, 결혼식 장소만 있지, 연락처가 없다는 것..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이 친구는 ‘신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일까. 정말 나도 모르겠다. 그 긴 세월, 어떻게 살았을까, 참 궁금하다. 그 친구는 아직도 시, <실비아> 를 기억하고 있을까? 좌우지간,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며칠 전에는 또 한번 googling의 덕을 보았다. 이건 내가 googling을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googling을 해서 나의 site를 찾은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발견이었다. 고국 과천시에 사시는 이종환씨, 평창이씨 익핑공파 29세 되시는 분이니까 나의 족보가 맞는다면 항열로 내가 이분의 아버지벌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나와 같이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사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뿌리 찾기 노력에 대한 성모님께 드린 기도에 답을 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비약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이분의 할아버지가 ‘모’자 돌림이라고 하셨고, 나의 아버님이 이정모, 모자 돌림.. 너무나 반가웠다. 더구나 현재 익평공파 최근의 족보를 소장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러면 혹시 나의 직계 조부님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꿈과 상상의 나래를 다시 편다.
Home Office를 바꾸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몰랐다. 더위가 닥치기 시작하긴 바로 전 6월초에 이동이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은 사실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거의 10년 이상인 방치 되었던 것들을 이번에도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버리는 것이 일이었다. 문제는 어떤 것을 버리는가 하는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책 종류였다. 골동품이나 고서의 가치가 없는 것은 무조건 쓰레기 통으로 보냈다. 다음이 서류 종류인데 이것도 옛 직장에서 쓰던 것들은 이번엔 용감히 버리기로 하였다. 남겨야 하는 것이 조금은 있지만 그건 아주 예외에 속한다.
나의 필적, 사인 같은 것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보관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사진인데.. 어떤 사람들은 가차없이 버린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신발상자에 모조리 보관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닌가? 누가 보건 안 보건 그것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paper print된 사진이라 수명이 있을 것이고, 앨범에 넣지 않은 것들은 보기도 어렵다. 그렇게 되어서 숨어있던 사진들을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던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1989년, 아주 오래 전이고, 같이했던 기간도 짧았지만 그 동안 사진조차 못보고 살아서 기억이 더욱 많이 희미해졌다. 얼마 전에 중앙고 후배 강태중의 생각이 났는데 이번에 그 사진을 찾은 것이다. 그 젊었던 모습들을 다시 보니 이 많은 후배들 이제 다 생각이 난다.
우리가 아파트를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나서 집들이를 한 모양이다. 바로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전기석 후배만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정태춘보다 더 잘 불렀던 이주호 후배,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뻤다) 쌍둥이 딸을 두었던 수재 형의 윤정로 후배, (wife도 같이 공부를 했었다) 나와 같이 천주교회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던 강태중 후배, 씩씩하고 활달하던 강상봉 후배, 통계학과의 이제준 후배.. 문제는 그 나머지 후배들의 이름이 가물거린다는 슬픈 사실이다.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하지만 노력을 하면 생각이 날지도.. 이 머리 좋던 중앙고 후배들, 다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그렇게 쓰기가 힘 들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계속 나를 push하곤 했지만 그 시작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왜 그럴까? 추억거리가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나 많아서 그랬을까? 기억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장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그 시절 이야기들의 끝을 맺는 것이 섭섭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추억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최복현 교장 선생님, 1965년
1965년은 지난해의 6.3사태 같은 정치적인 불안을 그대로 안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최소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경제발전에 모든 운명을 걸고 있었고, 한일외교정상화가 그것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해방 된지 겨우 20년 만에 국민감정이 그렇게 쉽사리 변할 리가 없었다. 지난해의 도쿄올림픽으로 일본은 튼튼한 경제기반으로 경제대국으로의 첫걸음을 걷고 있었고 그것에 걸 맞게 ‘고자세’로 한국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냉전체제의 국제정세가 우리의 국민감정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반공’에서 출발을 했으니까.
그 해 가을에 박정희 정부는 완전히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본격적인 전투부대인 청룡부대를 월남으로 보냈다. 그 전해에는 이미 비전투 부대인 비둘기부대를 보냈다. 서서히 월남전이 국내의 뉴스에 정기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반공의 이념을 실력으로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숙적인 일본이 우리의 6.25전쟁 중에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챙긴 것을 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짱구, 정운택 선생님, 1965년
그런 배경에서 고교3학년을 맞은 우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나라가 처해있는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공부 잘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의 첫 조건이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특히 1965년에 우리 중앙고교는 벌써 최복현 교장선생님의 원대한 ‘6개년 계획’의 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학년이 이루어야 할 목표 (서울대 몇 명, 연고대 몇 명 같은)는 사실 아주 어려운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확한 목표는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목표가 주는 심리적인 효과였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인 campaign이었고, 심지어는 ‘재미’로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나의 짝꿍, 원병태
고교 3학년이 되면서 시작된 수업에서 느끼는 그 신선한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무슨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떠나는 가미가제 특공대원 같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 가짐은 사실 대학입시까지 신기하게 이어졌다. 이것에 대해 나는 아직도 우리 최복현 교장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비록 최교장 선생님은 2학기가 되면서 서울시 교육감이 되셔서 모교를 떠나셨지만 그 분이 남긴 것은 참 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큰 계획의 뒤에는 후유증도 있었다. 불과 몇 번의 시험과 지난 해 학기성적으로 3학년 학급배정을 한 것이 그 중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성적 순위로 분반을 한 것이다. 그런 반 배정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친구들은 실망과 좌절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학반, 목창수유학준비, 윤중희
그때 분반은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졌는데 이과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의 8반은 이과에 속했다. 나는 원래부터 전기,전자공학 쪽으로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과를 선택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이 압도적으로 이공계 쪽은 선호한다는 사실이었고, 각 대학도 그것을 반영하듯 최우수 학생들이 가는 곳은 예외 없이 이공계, 특히 공대 (화공과, 전기과, 기계과 같은) 쪽이었다. 최고의 커트라인은 몇 년 째 서울공대 화공과가 독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문제점은 공부만 잘하면 거의 무조건 공대로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풍토였다. 공대 쪽에 적성이 맞고 안 맞고가 크게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전기, 기계 같은 것을 싫어해도 수학만 잘하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나의 앞자리에는 고2때부터 옆에 있었던 김진수가 앉았고, 뒤에도 오래된 친구인 이종원이 앉았다. 바른쪽 옆에는 원병태가 앉았는데 모두 나에게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갈 때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김진수는 해군, 이종원은 외대, 원병태는 고대로 가버렸다. 원병태는 사실 키가 상당히 큰데 어떻게 나의 옆에 앉게 되었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별명이 짱구인 정운택 선생님이셨는데, 조금 흥분을 잘 하시지만 속 마음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 긴장되는 고3시절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007, 고석찬Love Potion, 이영윤
왼쪽 옆으로는 목창수, 문영직, 허영식, 차정호, 윤중희 등등이 앉았다. 바로 뒤 이종원의 뒤에는 고석찬, 이영윤이 앉았는데 이 두 친구들은 대학시절 종로2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석찬의 유머러스 한 표정도 여전했고 이영윤의 멋진 미소도 여전했다. 어떻게 그 둘이 같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났던 모양이다.고석찬, 그 당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된James Bond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영화를 가지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처음 개봉되었을 때 미성년자는 볼 수가 없었고 나중에 그것이 풀어져서 가서 보았다. 물론 검열과정에서 많이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모르고 그 영화를 보기도 전에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장난으로) 고석찬이 비웃으면서 미성년자가 어떻게 그것을 보았냐고 꼬집었다. 금새 거짓말이 들통이 나고 나는 조금 창피했다. 나는 분풀이라도 하듯이 나중에 가서 본 것이다.
이영윤은 미국 pop song을 비롯해서 노래를 좋아한 듯하다. 그가 잘 따라서 부른 노래는 “Love Potion No. 9” 이란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었다. 그리고 고2때 정귀영이 Al Martino의 I love you more..를 너무 좋아해서 따라 불렀다면 이때는 정귀영이 황석환으로 바뀌었다. 노래는 Matt Monro의 Walk Away로 바뀌고.. 나도 그 당시 그 노래를 무척 좋아했지만 황석환은 더 좋아했나 보다. 교실에서 크게 부르며 다녔으니까. 나는 그 때 Matt Monro가 영국가수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다시 45년 만에 찾아서 들어보니 역시 기가 막힌 노래와 목소리였다. 여자로 치면 아마도 미국의 Karen Carpenter에 버금가는 그렇게 티없이 맑은 목소리였다. 나중에 그의 노래, Born Free, Wednesday Child, Portrait of My Love같은 것도 무척 좋아했는데 다만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곳의 풍조에 따라 다른 나라의 노래들을 거의 잊고 살았을 뿐이다.
From Russia With Love – Matt Monro
1965 봄 쯤에서 그 소문이 자자하던 James Bond 007 시리즈의 “007 위기일발” 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이 되었다. 반드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니까 아마도 1964년 쯤 나온 영화가 아닐까. Sean Connery도 멋이 있었지만 Matt Monro의 영화 주제곡 또한 못지 않게 멋이 있다.
Love Potion No. 9 – The Searchers
이영윤이 잘 따라 불렀던 이 노래, 사랑의 향수 9번, 그 당시에 라디오에서 잘도 흘러 나왔다. 비디오를 함께 보니 The Beatles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차림새가 아주 비슷하다.
Walk Away – Matt Monro
황석환이 좋아하던 거의 명곡에 가까운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더욱 가슴이 찌릿해진다. 숙명적으로 맺지 못할 사랑을 떠나 보내는 남자의 절규.. 참, 슬프다.
“관조”, 백정기 선생님고문, 주왕산 선생님국문학사, 김창현 선생님
그 당시 중앙고 3학년 교사 진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아마도 최교장선생님의 배려였을 지도 모른다. 국어의 백정기 선생님, 정열적으로 가르치시고 입시국어에는 외부에도 잘 알려지신 분이다. 입시전문지인 월간 진학 지에 글도 실으셨는데 그 글을 안 읽은 학생들을 나무라기도 하셨다. 백선생님의 정열적인 강의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관조“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수업은 역시 주왕산 선생님의 고문(古文)시간이었다. 확실히 는 모르지만 주 선생님은 주시경님의 자제분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고문강의는 더 무게가 있었다. 특히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의 강의는 재미와 더불어서 이런 것을 평생 공부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김창현 선생님의 국문학사도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명 강의였다. 특히 김선생님은 개인적으로도 향토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그런 해박한 지식이 강의 때마다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숯장사, 원성욱 선생님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썩은 살, 손영섭 선생님
담임 정운택 선생님, 숫제 일본 수학참고서를 그대로 들고 문제를 내시고 가르치셨다. 왜 그런지 그 당시는 일본의 입시풍조가 그대로 시험에 반영이 되곤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특히 미적분을 다루는 해석시간은 숯 장사 원성욱 선생님의 독무대였다. 얼굴이 까매서 그런지 숯 장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명 강의였다. 기하 (geometry)는 “썩은 살, 깨막이“, 손영섭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얼굴에 걸맞지 않게 항상 멋지게, 맞춘 듯한 옷을 입으시고 가르치셨다. 영어(문법)는 옆 반인 7반의 담임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이 작은 키에 맞지 않게 폭 넓고, 크게 잘 가르치셨다. 항상 산더미 같이 print물을 들고 들어오셨는데, ‘마누라가 밤새고 typing‘한 것’ 이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특히 이 선생님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입시용 영어비결이 있었다. 특히 문법을 외우는 방법을 ‘한시’ 나 시조같이 음률을 넣어서 외우도록 했다.
나는 3학년이 시작되고 서울고 출신으로 그 당시 서울공대 섬유공학과에 다니 던 송부호 형의 지도를 몇 달간 받았다. 솔직히 수학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과외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어머님 친구의 아들이 서울고 출신이라 그쪽으로 부탁을 했더니 송부호형이 걸린 것이다. 조금은 수줍은 듯한 형인데 참 자상하고 때로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그 형에게 참 많이 배웠다. 수학 자체보다도 입시 체험담 같은 것이 더 재미있고 도움이 되었다. “James Bond: 007 위기일발” 영화도 사실 그 형과 같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것이었다.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PSSC, 이지홍 선생님
빼놓을 수 없는 선생님들 중에 체육선생님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이 계셨다. 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셨는데, 고3때 체육시간은 완전히 서자취급을 면치 못하는 시간이고, 심지어 어떤 때는 체육시간에 골치 아픈 머리를 식힐 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다. 나는 그 시간이 그래서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간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곤 했으니까. 이 정선생님의 얘기는 정말 실감나게 재미있었다. 그 화제가 대부분 깡패들의 싸움이야기, 무협적인 이야기.. 등등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선생님의 경험을 듣는 것 같아서 더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 내내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비록 키가 조금 작아서 “똥자루” 라는 별명은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유쾌한 기억을 간직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다른 기억으로 남는 선생님, 물리담당 이지홍 선생님이다. 물리는 사실 이공계의 꽃인데 입시에서는 “국(어),영(어),수(학)”에 밀려서 어디까지나 ‘선택’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 선택과목의 시간은 대부분의 필수과목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있게 마련이다. 오전에 이미 머리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점심까지 먹은 뒤에는 사실 잠이 기가 막히게 잘도 온다. 그 때에 이 물리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 시간은 달랐다. 이지홍 선생님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랄까? 이 선생님은 얼마 전에 PSSC라는 미국에서 하는 물리교사를 위한 과정을 미국 하와이에서 이수를 하고 오신 아주 상당한 실력 파 셨다. 그 프로그램은 미국이 space program에서 소련에 뒤지기 시작하자 뒤 늦게 과학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대부분 ‘실습’을 위주로 하는 ‘산 교육’이었다. 물리시간 중에는 꼭 미국에서 연수를 받으실 때 쓰신 듯한 실험기재들을 가지고 들어 오셔서 정말 ‘실감나게’ 보여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내 눈으로 ‘목격’한 물리 실험들은 대학에 가서도 한번 못 보았다. 특히 음극관에서 음극선이 자석에 의해서 굴절하는 것, 고압에서 공기가 방전을 하는 것..등등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지홍 선생님께 머리 숙여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1965년 6월 중순경 방학을 몇 주일 앞두고 한일기본협정이 체결되면서 아예 학교에 미리 휴교령을 내려 버렸다. 반대 데모를 방지하려는 심산이었고 물론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실 나쁠 것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사실 지쳐있던 상태에 방학을 몇 주 앞 당긴다는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담임인 정운택 선생님 들어오셔서 침통하신 표정으로 이런 것들을 이해 못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흑판에 커다란 글씨로 “절호의 기회” 라고 한자로 쓰셨다. 그 뜻은 모두다 알았다. 밀린 공부를 이때에 만회를 하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일기본조약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른 편으로는 bonus로 생긴 몇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어진 여름방학 중에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며 돌아가셨다. 우리들은 국민학교 6년을 우리의 아버지로 여기며 존경하던 대통령이었다. 독재자로 낙인이 찍히고, 군사정부는 국민감정을 이유로 귀국도 못하게 하였다. 장례식만은 그리던 서울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 때의 비 오던 날, 길고 긴 운구행렬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학 중에도 데모가 계속 되곤 했다. 하지만 개학이 되면서 어느 정도 가라 앉게 되고 우리들은 다시 입시공부에 돌입을 하였다.
그 당시 입시준비 풍경은 학교 밖으로 입시전문 학원과 입시전문 도서실이 있었다. 도서실이란 것은 책을 빌려보는 곳이 아니고 그저 조용한 방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 중에 나는 동아 학원이란 곳에 잠시 다녔다. 그곳은 입시용 참고서를 제일 많이 출판하는 동아 출판사에서 직영을 하던 새로 생긴 학원이었다. 그 곳이 다른 곳과 다르게 기억이 나는 것은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입학시험’을 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새로운 개념의 학원이 그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이었다. 사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것이 상업적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었다. 무슨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으니까.
누가 생각을 한 것인지 몰라도 별로 생각이 없이 만든 학원임이 곧 들어났다. 그 정도 학원이면 다른 학원과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과목은 다른 곳에 비해 더 나쁜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 장맹열을 만났는데 그도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얼마 못 가서 다 그만두고 말았다. 한 때는 도서실에 다니기도 했다. 서대문 로터리로 가는 곳에 서강 도서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같은 반 친구 차정호를 만났다.
2학기가 되자마자 (아니면 바로 전) 6개년 계획의 주역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서울시 교육감으로 뽑히셔서 학교를 떠나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기 싫으셨던 듯 한 것이 발령을 받고 한때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후임으로 최형련 선생님이 부임하셨는데 너무나 우리들과는 짧은 기간이어서 별로 특별한 기억이 남지 않았다. 다른 교우들도 마찬가지라 짐작을 한다. 그리고 고교 본관과 학교 운동장 사이에 3층짜리 석조 과학관을 시공하였고 졸업 즈음에는 골격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3학년 때도 역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 함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기 선생님, 평소에는 침착하시고 공정하신 선생님이시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문제의 발단은 국어 모의고사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사실 모의고사가 끝나면 꼭 수업시간 중에 문제를 같이 풀어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모의고사에 관한 것은 완전히 무시하시고 정상적인 수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궁금하긴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차정호가 끈질기게 문제를 풀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백 선생님은 막무가내로 거부를 하시고.. 그러다가 아마도 차정호가 “선생님이 모르니까” 라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뒤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백선생님, 완전히 이성을 잃으셨다. 완전히.. 차정호의 뺨을 치시는데 거의 제 정신이 아니신 듯 했는데, 아무도 말릴 용기가 없었다. 그 시간도 꽤 길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참 씁쓸한 추억이었지만, 선생님도 인간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나중에 백선생님께서 차정호를 불러서 ‘사과’ 비슷한 것을 하셨을까.. 아니라고 추측을 한다. 그때의 학교의 풍토는 체벌을 교육의 일부로 여겼을 시기였으니까. 그와 비슷한 사건은 바로 옆 반인 3학년 7반에서 났는데, 역시 지나친 체벌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는 7반의 담임 영어 박시희 선생님과 그 반의 이수열이었다. 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는 간단하다. 옆 반에서 때리는 소리가 우리 반에 고스란히 다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때 우리 반에는 우리담임 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선생님도 그 때리는 소리에 조금은 거북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아마도 몽둥이로 큰 소리로 오랫동안 때렸던 모양이다. 나중에 그 반에 있던 김호룡에게 물어보니 바로 이수열이 그렇게 맞았던 것이다. 왜 맞았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 사건도 역시 선생님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아우성”, 반장 이유성수학귀재, 박상돈
우리반의 반장은 멋있게 키가 컸던 이유성이었다. 나와 이종원은 그를 ‘아우성‘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 당시 국어시간에 배웠던 유치환의 시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이란 구절에서 나왔다. 아마도 제목이 ‘깃발’이 아니었을까. 우리 반에는 키가 아주 훤칠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유성, 김용만, 안승원, 김명전, 고송무, 김영철, 한정환, 박상돈, 김연응, 조남재, 황석환, 신창근, 김종호..등등 “쭉쭉 잘 빠진” 친구들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는 학교 내에서 키가 주는 영향이 상당했다. 쉽게 말하면 대부분 비슷한 키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뜻이다. 번호를 키의 순서로 정하고, 그 순서에 따라 자리를 잡으니까 더 그런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간혹 예외는 있지만 키가 크면 힘도 세고, 외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키가 컸던 친구들을 기억하면 무언가 조금은 서먹서먹 할 때가 있다.
박상돈은 키고 크고 공부도 그것도 수학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역시 그는 서울공대 전기공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나에게는 거의 ‘이상형’이라고나 할까. 김연응, 김영철, 조남재, 신창근, 이윤기 등은 나와 같이 연세대로 갔는데 김연응과 김영철은 기계공학과, 나머지는 모두 전기공학과였다. 신창근은 대학시절 일찍 군대를 가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1973년과 1975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호남정유에 근무를 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해사에 간 최민은 연세대학 졸업식 때 우연히 만났는데, 7반의 송영근, 강교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 고송무도 1975년에 정교성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북구라파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타계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조금 섭섭한 것은 송희성과 배희수, 둘 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들인데 그들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배희수는 연세대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송희성은 국민학교 6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고교 졸업 후에는 정말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동기회 총무, 신동훈
신동훈은 요새 57 동기교우회의 총무로 맹활약을 해서 email로 나마 만나게 되었다. 정말 오랜 만이랄까. 또한 천주교신자임도 알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이 친구는 그 이외에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이름이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학원 영어 강사에 신동운 이라고 있어서 더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되곤 한다. 이 친구 역시 pop song과 연관이 되는 것이 있다. Eddie Arnolds의 Sunrise Sunset과 I really don’t want you to know란 노래였는데 왜 이 노래와 신동훈이 같이 생각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
제일 꼬마인 김윤필은 대학졸업 후에 한번 김진수, 정양조 그룹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신사복차림이었지만 그 때도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목창수를 통해서 해병대 입대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놀라운 소식도 들었다. 정말 슬픈 소식이었다. 장난꾸러기 오수만은 역시 그가 장담한대로 서울치대, 치과의사,그리고 ‘중앙치과’. 윤중희는 대학 졸업 후에 가끔 만났는데 그때 그는 미국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에 그대로 국내에 남았다고 들었다. 목창수는 화학을 좋아했던 친구인데 서로 잊고 살다가 1987년경에 정말 우연히 Columbus, Ohio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창수는 Ohio State University로 과학 교사단을 인솔하고 연수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온 것인데 정말 우연히 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목창수와는 가끔 연락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둘째 딸이 서울에 갔을 때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 신세를 갚을 길이 난감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남가주 동창회장, 권명국이희진
권명국은 57회 동창회의 소식을 통해서 미국 LA지역(남가주)의 동창회 지부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이름은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된 것이다. 또 얼마 전에는 동기 회에서 명국의 딸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게나마 email로 연락이 되었고, 또한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종원은 1980년 초 나의 결혼식에도 왔었는데, 그 이후로 직접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우진규를 통해서 월남의 싸이곤 (호지민 씨티)에 정착을 해서 산다고 들었다.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키가 큰” 원병태는 고교 졸업직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고대 화학과에 “꽁지” 로 합격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대학졸업 후에 그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미국에 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척집에서 하는 주유소를 도와주러 간다고 했다. 그 당시 그를 따라 고려대학에 자주 가서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고 그를 알던 친구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차형순은 연세대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LA 지역으로 이민을 와 있었다. 아직도 business를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희진은 정교성을 통해서 현재 캐나다의Calgary에 거주하면서 geological engineer로 일을 하는 것을 알았다. 가끔 정교성이 살고 있는 Toronto에 놀러 온다고 들었다. 나머지 반창(3학년 8반) 들은 애석하게 개인적으로 소식을 모르며, 궁금하기가 말할 수 없다. 혹시 타계라도 한 친구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신축중인 과학관, 1965년
이상 대강 기억에 나는 것을 적어 보았는데 이외에도 사실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이 현재 내 기억력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력이 더 앞으로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긴장되고 살벌한 고교3학년의 생활이었지만 졸업 후에 대학으로 간다는 가벼운 흥분,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 간다는 그런 기대감이 일년 내내 있었다.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다방, 술집, 연애,당구장, 영화..등등 우리를 기다리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일본처럼 공식적인 성인식은 없다지만 우리에게는 고교 졸업이 바로 성인이 되는 시기였다. 그것들을 기대하며 열심히 공부를 한 때가 바로 고교 3학년 때였다. 특히 중앙고교가 우리에게 준 그 알찬 교육의 결실을 맺게 한 그때를 어찌 잊으랴. 우렁차게 중앙, 미래의 상징 과학관이 신축되는 것을 보며 졸업반을 보낸 우리들, 45년 동안 모두들 얼마나 민족교육의 요람인 중앙의 꿈을 실현하며 살았을까? 이미 타계한 친구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우리들 모두 건강하고 보람된 후년을 보내기를 기원해 본다.
비록 패잔병 같은 심정이었지만 다른 한 구석에서는 ‘대륙탐험’ 을 했다는 재미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물론 나이 탓이었을 것이다. 그 나이에 비관적이거나 한 감정은 몇 시간도 못 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지루한 Greyhound bus는 급행이 아니라서 조그만 곳이란 곳은 모조리 들리면서 달렸다. 학교에서는 차를 두 대나 잡아먹은 여행이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웃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Purdue Stadium 앞에서 성성모씨와, 1974년
그때 축 쳐진 나를 위로하며 격려를 한 사람이 바로 성성모씨였다. 그때 성형이 나의 옆에 없었다면 참 오랫동안 쳐진 어깨를 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반대로 이승조씨는 한 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을 해서 여행 중에 공동으로 쓴 돈을 갚으라고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것도 차게 바뀐 사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어려워졌을 때 진정한 친구를 알아 본다더니 이것이 바로 그런 때였다. 나는 성형을 그때부터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다. 학기가 무사히 끝이 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약속대로 그 망가진 차를 찾으러 가야 했다. 이승조는 물론 그런 것은 관심에도 없었다. 나와 성형이 다시 Indianapolis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차가 없었다. 다시 bus를 타고.. 와.. 아찔했다. 그때 또 성형이 도와주었다. 약혼자에게 돈을 빌려서 차를 한대 산 것이다. 물론 used car였다. Full size Buick Electra였다.
그 차를 사고 나서 우리 젊음의 모험심이 또 발동을 했다. Indianapolis까지만 갈 것이 아니라 아예 New York까지 또 가자고.. Why not? 그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 시작이 되어서 더 재미까지 느끼게 되었다. 눈에 쌓인 highway를 달린다는 생각만 해도 피가 용솟음 치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갈 때는 시간의 제한이 없었다. 마음껏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Oklahoma를 빠져 나오기 전에 성형과 기숙사를 같이 쓰던 미국학생, Gary Fugate 의 집에 잠깐 들렸다. 그 친구가 어떻게 집에 잘 이야기를 해 놓았던지 그 집에서 아주 환대를 받았다. 성형의 이야기로 기숙사에 있을 때 시간이 나면 그 학생에게 합기도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차를 Nebraska주로 돌렸다. 이번에는 내가 아는 한국간호원들에게 들릴 차례가 되었다. Auburn, Nebraska라는 Kansas주에 가까운 조그만 town에서 3명의 한국간호원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명을 한국서부터 알고 있었다. 김성혜씨.. 초가을에 나는 이미 이승조씨와 같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성형은 이번에 처음 가는 것이고.. 처음에 갔을 때는 조금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구면이 되어서 처음 갈 때와는 달랐다. 그 ‘촌’에서 근무하는 3명의 한국간호원들.. 생각만 해도 외로워 보였다.
그때는 이미 눈이 나리기 시작해서 모든 곳이 흰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를 세 간호원이 데리고 어느 곳으로 갔다. 근처에 있는 다른 작은 town.. Peru였다. 남미에 있는 나라이름도 Peru지만 이곳은 도시의 이름이었다. 그곳에는 Peru State College가 있었다. 조그만 liberal art college였는데 그곳에 외롭게 한국인 교수 한 분이 계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 교수가 세 간호원을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미 그들은 가끔 만났던 것 같았다. 그 교수님의 이름은 John Hahn이었는데 50년대의 초기 유학생이었다.University of Minnesota출신이었고 시카고에 누님이 사신다고 했다. 너무나 외로워서 시카고엘 놀러 가면 다시 오는 것이 무서워서 이제는 자주 대도시에는 안 가신다고 했다. 전공은 political science였다. 교수님의 조그만 apartment에서 같이 저녁을 해 먹었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때, 그곳을 생각하면 조금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거의 40년 뒤의 John Hahn교수가 조금 궁금해져서 Internet의 힘으로 찾아보니.. 와.. 그 같은 학교에서 retire를 하신 모양이었고, 명예교수로 이름이 남아있었다. 정말 자랑스럽다.
Ford XL, Nyack Hospital 앞에서, 1973년 겨울
차를 바른쪽으로 돌려서 다시 Interstate 80를 달려서 Indianapolis에 갔다. 약속대로 그 의사부부가 사는 곳으로 가서 차를 끌고 폐차 장에다 처리를 하고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New York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가는 곳마다 눈이 나리고 있었다. 두 번째의 New York trip은 별로 놀랄 것이 없었다. 아주 매서운 바람이 뉴욕의 빌딩 사이로 몰아치고 있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 빠른 결론이었다. 이번에는 성형이 조금 기분이 발동을 했는지 새로 사가지고 간 차를 약혼자와 같이 밤에 몰고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건 완전히 악연이 아닌가.. 또 차가?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차는 또 disable이 될 정도였다. 성형은 약혼자에게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다. 적지 않은 $$이 없어진 것이니까. 우리는 또 차가 없어졌다. 발이 묶인 것이다. 또 생각 끝에 이번에는 내가 서울로 도움을 청하고.. 해서.. 내가 그곳에서 차를 사게 되었다. 68년형 Ford XL이라는 비교적 큰 차였다. 상태도 아주 좋았다. 그때 느낀 것은 미국에서는 ‘절대적’으로 자기 차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우리는 간호원 기숙사에서 ‘몰래’ 숨어서 잤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무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스릴만점이었다. 성형이 차 사고를 낼 때, 그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지만 그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면허증에 사진이 없는 주가 많아서 나의 면허증을 빌려갈 정도였다. 아마도 Nyack,NY police의 accident report file에 나의 이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2개월 만에 차를 3대나 잡아먹은 성형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우리는 같이 학교를 떠나 Dallas, Texas로 가서 학교를 옮길 준비를 하면서 조그만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먼저 시카고로 떠나게 되고, 성형은 그 당시 Purdue University의 admission을 받고 생각 중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는데, 물론 서로 연락은 끊지 않았다. 소식에 성형은 Dallas에서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려서 부부가 되었고 Purdue University(Indiana)에 입학을 하였다고 들었다. 그곳 (West Lafayette, Indiana)은 시카고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1974년 9월 Labor Day holiday때 그곳으로 달려가 반가운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같은 해 Thanksgiving holiday때 또 그곳에 놀러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한국유학생이 상당히 있었고 유학생 회도 있었다. 모두들 모여서 신나게, 건전하게 놀던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졸업이 가까워진 어떤 선배유학생 부부의 초청으로 처음 Thanksgiving turkey 를 맛 볼 수 있었다. 그 분들의 정성들인 추수감사절 초청은 아직도 기억에 남고 아직도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이듬해, 1975년 봄 무렵에 성형부부가 시카고로 놀러 왔다. 조금 있으면 Master’s degree를 받게 되고 취직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의 취업조건이 별로 좋지 않아서 대부분 졸업을 하면 현지에서 취직을 하려는 풍조였다. 그리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 서로 연락처를 찾을 방법이 쉽지를 않았다. 게다가 나는 single이라서 이사를 수시로 하던 터라 더 쉽지를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잊었다. 사진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요새는 특히 겨울이 되면 설경의 Peru State College에서 성형과 같이 눈길의 언덕에서 헛바퀴 도는 어떤 차를 밀어주던 생각이 나곤 한다. 왜 그럴까? 나도 모르겠다. 성형은 어떻게 살았을까? 자식이 몇일까? 그대로 미국에 남았을까? 아니면.. 상관없다. 그저 건강하고 보람찬 인생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 끝
**위의 music video는 그 당시 car stereo에서 거의 24시간 들려오던 힛트송 Charlie Rich(일명 silver fox)의 The Most Beautiful Girl…
까마득하게 오래 전, 잠깐 알고 지내던 사람, 성성모씨. 그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카톨릭신자가 되어서 생각하니 그것이 그의 특별한 이름이었다. 성모는 사실 발음상 Mother of God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가 아닌가? 혹시 성형(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 은 카톨릭 신자였을까? 그 당시 성형으로 부터 천주교회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아니 들었어도 내가 전혀 무관심이라 잊었는지도..
1973년 말에 미국의 조그만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다. 나보다 한 학기 이상 뒤에 온 한국 유학생이었다. 학기시작보다 조금 일찍 캠퍼스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 유학생이 몇 명 밖에 없던 때 반가운 사람이었다. 나와는 나이가 비슷하고 성격이 털털해서 비교적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춘천고교 출신으로, 서울대학 사범대 지학과를 졸업하고 아마도 이곳에서는 본격적으로 지질학을 공부할 모양이었다.
파안대소의 성성모 씨, 1974년 Purdue University
1973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Christmas다음으로 큰 holiday인 Thanksgiving holiday 를 미국에서 처음 맞게 되었다. 학교는 순식간 ghost town으로 변하고, 결국 우리도 조금 휴일기분에 젖게 되고, 우리는 New York을 가기로 즉흥적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른 유학생인 이승조씨와 셋이서 경비를 분담하고 나의 차로 가기로 했다. 사실은 두 명 다 그곳에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성형은 약혼자가 간호원으로 뉴욕근교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이승조씨도 어떤 간호원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두 명은 이미 New York에 간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처음이었다.
이 ‘유명한(최소한 나에게는)’ New York trip 1973은 사실 영화에서나 볼만한 disastrous trip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거의 생생한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부터 말하자면 “불과 며칠 사이에 2 대의 차를 잡아먹은 여행” 이었다. 우리의 차로 떠났다가 한 명은 비행기, 다른 두 명은 Greyhound bus로 돌아오는 무슨 Napoleon의 Russia campaign을 연상케 하는..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사실 조금 비참한 심정이었다.
기세 좋게 출발한 우리는 Oklahoma를 벗어 나기도 전에 차가 highway에서 서버리는 위기를 맞았다. 그 때의 나의 차는 그 당시 $900 주고 산 used car 1969 Volkswagen Beetle 이었는데 비교적 좋은 차였다. 하지만 long haul을 하기엔 역 부족인 차였는지.. engine oil이 새어나가는 큰 사고였다. 아마도 내가 engine oil을 너무 많이 넣었던 것이 문제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engine이 못쓸 정도로 망가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차(Ford Fairlane 500)로 trade가 되어서 그 차를 몰고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대로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그때의 젊음이 여행을 계속하게 한 것이다.
그 trade한 차는 물론 고물 차에 속했지만 최소한 잘 구르는 차였다. 문제는 manual transmission, 그러니까 clutch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clutch란 것을 써본 적이 없었다. 망가진 차는 비록 gear shifting을 하긴 했지만 clutch는 없었다. 그래서 공터에 가서 연습을 한 시간 정도 한 후에 출발할 수 있었다. 그때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깨가 더 무거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역시 젊음은 좋은가.. 우리들은 그 당시 전혀 힘든 것을 몰랐다.
Joplin, MO를 지나고 St Louis, Indianapolis, Columbus, Pittsburgh, Harrisburg를 거쳐서 New Jersey turnpike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뉴욕 city에 거의 다 온 것이다. 그때의 New Jersey turnpike는 정말 ‘공해’의 본산지였다. Highway 양쪽으로 늘어선 화학공장들에서 나오는 연기가 차의 창문을 닫아도 소용이 없었다. 뉴욕지방의 인상은 그랬다. 오랜 전통과 최첨단의 기술이 기가 막히게 융합이 되어서 미국의 이상(ideal)을 성취시키던 곳.
성형은 자기의 약혼자가 근무하던 Nyack Hospital로 가고 나는 이승조씨가 안다는 간호원 둘이 사는 apartment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그 당시 한국출신의 취업간호원들은 의사들과 더불어 전문직으로 이미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보아서 그들은 분명히 훨씬 나은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뉴욕의 상징인 곳을 몇 군데 구경을 하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고생해서 간 것에 비해서 너무나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장거리운전의 경험을 쌓았다는 위안으로 다음에 다시 오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차를 돌렸다.
이제 main attraction이 끝나고 나니 현실이 눈앞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던 차가 갑자기 ‘고물차’로 바뀌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웃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집에다는 뭐라고 변명을 할까..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밤을 새우며 운전을 하는데 도저히 잠이 참을 수 없어서 길옆에 차를 세우고 말았다. 조금 눈을 부치고 가려고 했지만 이승조씨가 월요일에 수업을 꼭 가야 한다며 갈 것을 주장하고, 결국은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거의 운전경험이 없던 그 친구.. 결국 차를 몰고 가다가 운전미숙으로 curb에 차를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뒷좌석에 누워 자다가 요란한 소리에 깨고.. 우리가 발견한 것은 또 차에 문제가 생겼다는 bad news였다. 이번은 전번같이 engine이 아니고 front axle이였다. 차가 curb 에 올라타면서 그곳이 부딪쳐서 무언가 찌그러진 듯.. 차를 운전해 보니 속도에 비례해서 요란한 소리가 차 밑에서 들렸다. 고속으로 달리면 완전히 싸이렌 소리가 날 정도가 되고 옆의 차들이 다 쳐다 보는 정도가 되었다.
그때의 결론은 이 상태로는 더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Indianapolis 근처여서 기를 쓰고 시내로 들어가 repair shop엘 갔더니 고치지 말고 버리라고 했다. 우리는 결국 차로 집에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을 하고 우선 시간을 벌기로 하고 궁리 끝에.. 차를 어느 곳에 맡기기로 했다. 그냥 주차장에 놓고 가기는 뭐하고 해서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한인들을 찾아보았다. Kim씨만 찾으면 되니까..하고 여기저기 걸어서 결국 재수 좋게 어떤 분이 겨울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맡아 주겠다고 했다.
그 전화를 받은 분은 어떤 가정부인이었고 의사의 wife였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 가보니 어떤 apartment여서 그곳의 한 구석에 차를 주차시키고 그 부인을 찾았다. 놀란 것은 아무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불고기 저녁을 대접해 주신 것이다. 그 의사인 남편 분까지 와서 계셨다. 아주 젊은 의사부부였는데 정말 불행하게도 성함을 기억할 수가 없다. 저녁을 잘 얻어먹고 이승조씨는 공항으로, 나와 성형은 Greyhound bus terminal로 남편 분께서 친절하게 데려다 주셨다. 아직도 그 분들의 도움에 감사를 드리는 심정이다. — 계속
** 이곳에 있는 YouTube video는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long haul trucker song: Convoy인데 운전중 하도 많이 들어서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배경상, 이도영, 이경증.. 나에게는 서울 창신동 삼총사..라는 인상이 깊이 깊이 뇌리에 남아있다. 동대문 옆에 있는 산동네.. 창신동. 나는 물론 그곳의 근처에서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운동장에 갈 때 동대문 옆으로 보이는 산동네..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곳이다. 그 곳이 내가 알던 이 삼총사가 자라던 곳이었다.
이중에 이도영, 배경상은 모두 이대부고(이화여자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이경증은 나와 같이 서울 중앙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경증이는 고2때 담임 박영세 선생과의 trouble로 학교를 떠나게 되어서 검정고시를 보고 연세대 지질학과에 입학, 졸업을 했다. 그러니까, 경증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헤어지고 연세대학교 졸업 무렵 쯤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교를 군대에 가지 않고 계속 다녔지만 경증이는 연세대에 입학한 후에 곧 바로 입대를 했는데, 거기에 멈추지 않고 월남전에 자원을 했고 그곳에서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케산전투 같은 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친구였다. 나는 경증이의 이런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삶’을 참 좋아했다.
다시 만났을 당시 우리들은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라온 동네가 서로 아주 다르고 거기에 따른 친구들의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 한 마디로 그의 동네친구들은 내가 전혀 모르고 경증이도 나의 친구를 모르는 것이다. 그 중간에 중앙중, 고교의 친구들이 서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창 김호룡, 우진규 같은 친구들은 경증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는 역시 내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다시 만났을 때 조금은 서먹서먹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게 진정한 ‘어리고 순진한 우정’이 아니었을까.
그 때부터 나는 경증이의 ‘동네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어울리면서 우선 놀란 것이 그 많은 창신동 친구들의 숫자였다. 그 중에는 그때 한창 인기절정의 통기타 가수 이장희도 그 중의 한 명이라고 들었다. 어찌 그렇게나 많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녀서 오래된 동네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경증이는 아마도 그 창신동의 토박이여서 그렇게 친구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 처음 사귀게 된 사람들이 바로 이도영, 배경상이었다. 어떻게 같은 이대부고를 다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공학을 다닌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진한 농담으로 이도영은 이대부고 다닐 당시 여학생의 옆에 가면 냄새로 지금 period 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해서 모두들 게면 적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연스레 여자들을 대할 수가 없었다.
이도영은 이미 어떤 재수하는 어떤 귀여운 여자와 동거 중이었고, 배경상은 그 보다 더 야심이 커서 ‘돈 있는’ 여자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에 걸 맞지 않게 최고급 까만 정장 양복을 입고 다녔다. 키도 커서 멀리서 보면 무슨 영화배우 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경증이는 사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의 그런 초연한 태도가 그렇게 신선하고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다고나 할까. 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성은 잊어 버렸다. 이름은 경화였다. 꼭 여자이름 같지만 아주 예술가처럼 멋지게 생긴 남자였다. 그 친구는 미술학도인데 참 그림을 재치 있게 잘도 그리는 예술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성격, 배경, 취향이 다른 친구들이 경증이 주변에서 아주 멋있게 어울리며 청춘을 구가하던 그 시절.. 하지만 모두들 쉽게 풀지 못하는 고민들은 한두 가지 다 안고 ‘밤을 잊은 그대’ 의 청춘을 보내던 시절이 우리젊음의 전성기, 1970년대 초였다.
그때 우리들이 명동 같은 곳의 다방에서 모이면 주로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을 골라서 만났다. 물론 여자들에게 장난스럽게 ‘추군’대려는 의도가 갈려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것을 hunting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그저 “꼬신다” 고 했다. 심지어는, 그것에 관한 방법론 같은 것은 “꼬셜로지”, 그러니까 sociology같이, 라고까지 했다. 우리는 완전히 아마추어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런 곳에 가보면 완전히 고정멤버 같은 프로 급 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 팀에서는 배경상이 조금은 프로급이 아니었을까? 주로 장난스러운 게임을 하곤 했는데 여자들이 그룹으로 모인 곳에 혼자 가서 미팅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게임이었다. 다들 잘 했는데 나는 끝까지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의외로 점잖은 경증이가 그런 것을 대담하게 잘 하곤 했다. 대부분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지만 아주 가끔은 성사가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재미가 있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성사가 된 미팅그룹이 생각이 난다. 출신성분이 아주 다양한 여자들의 그룹이었다. 그런대로 정기적으로 만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혜씨였다. 조금은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하는 듯한, 툭하면 영어로 대답을 하곤 했다. 어떤 미국사람에게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해서 물어보니 얼마 있다가 간호원취업으로 미국엘 간다고 했다. 또 생각나는 사람, 이대생, 오연희씨.. 우리는 우연희, 라고 불렀다. 밝고, 항상 웃는듯한 얼굴.. 그들은 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무엇을 할까.. 간호원 김성혜씨는 나중에 미국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을 가지게 된다.
1970년대 초에 그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이 아주 적게 남아있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제일 궁금하던 배경상이 빠져있다. 등산가서 찍을 때 왜 배경상이 빠져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 돈 많은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이도영은 왜 재수생 cute girl friend를 안 데리고 왔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꼭 붙어 다니고 했는데. 그들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1975년이었다. 잠깐 여름에 귀국을 했을 때 정말 반가운 만남을 했다. 몇 년 전 여자들을 쫓아가느라고 명동을 헤매던 때를 서로 그리며 다시 명동을 누비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3~4년은 더 늙은 것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까? 이도영은 그 재수생과 결혼을 했을까? 배경상은 정말 부잣집 딸을 만났을까? 경화는 무슨 예술 대상을 받지나 않았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그 중심에 있었던 나의 친구, 이경증.. 1980년 나의 결혼 때 잠깐 보고 다시 없어졌다. 이 친구는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한 셈이었다. 조금은 방랑자 기질이 있다고 할까. 자식 어디로 증발을 했니..이제는 슬슬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니? 죽기 전에 한번 소식이라도 듣자.
미치 밀러.. 어렸을 적에 많이도 들었던 이름이다. 그 당시 그의 합창단 (Mitch Miller & Gang)이 부른 영화 주제곡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1962년) 쯤이었을까. 그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라는 영화의 주제곡 콰이강의 행진, The River Kwai March.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니고 완전히 남자들의 휘파람 합창이었다. 그들이 바로 Mitch Miller 합창단이었다.
그 당시 그의 합창곡들은 거의 유행가처럼 불려졌었다. 그들의 영향이었을까.. 곧 이어서 한국에도 Sing Along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전석환씨가 이끌던 Sing Along Y (YMCA)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한결같이 노래들은 밝고, 복고적이고, 심지어 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나중에 classic으로 남을 만한 그런 곡들이었다.
99세로 세상을 떠난 Mitch Miller,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 어린 주옥 같은 미국적인 노래를 남겨 주었다. 그 많은 곡 중에서 아직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몇 곡만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라면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RIP.. Mr. Miller….
콰이강의 행진,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곡영화속의 거의 비참한 행진과는 달리 아주 경쾌한 곡이다. 그 당시 아주 유행을 한 멜러디,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교에서는 그 당시 이곡을 등교시간에 맞추어 계동골목을 향해서 아주 우렁차게 들려주었다. 그 긴 계동골목을 걸어서 등교하던 우리들은 이것을 들으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져을 것이다.
The Yellow Rose of Texas, 전통 미국민요: 텍사스의 전통민요인데, 전설에 의하면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독립할 당시 텍사스 leader였던 Sam Houston이 전쟁 상대였던 멕시코의 General & President Santa Ana에게 비밀리에 보냈던 (spy?) 텍사스의 여자가 바로 Yellow Rose of Texas였다.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와.. 이게 장난이 아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글거리는 아침 해를 보며 오늘은 heat index(불괘지수)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지난 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여름은 그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무척 덥다. 올 여름의 전기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개는 1층의 에어컨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올해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거의 보통 여름의 2배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를 더 쓰면 그만큼 CO2가 더 유출될 것이고, 그것은 더 지구를 덥게 한다.. 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왜 더울까 암만 생각해도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고 불평이다. 그저 Mother Nature가 가끔 하는 경고이거나 장난하는 그런 것일 것일지도 모르니까. Weather person들도 해답이 없는 모양이다. 예보는 하고 있어도 왜 올해는 이럴까 하는 해답은 ‘절대로’ 안 한다. 모르니까. 과학이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올해의 특징은 온도, 습도가 같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하면 밤에도 별로 시원하지를 않다. 결국은 그때에 에어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사실 무척 고물에 속해서 사실 언제 고장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별로 신경을 쓰지를 않았는데 요새는 조금 걱정도 된다. 제일 더운 날 이것들이 stop working을 한다면 그야말로 ‘비상’ 일 것이다. $$이 많으면 이럴 때 brand new energy efficient model로 바꾸면 전기료도 덜 들고 더 시원할 것이지만..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추억에 남을만한 더위가 몇 번 있었다. 아마도 1972년 쯤이 아니었을까? 그 해 서울의 여름은 정말 지독하였다. 1973년에 고국을 떠났으니까 그 후에도 그런 더위가 또 있었을 듯 하다. 그때가 특별히 왜 기억에 남는가 하면 밤에 잠을 전혀 못 잤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울의 민가나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날이 일년에 며칠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보통 밤에 잠은 잘 수 있었는데 그 해는 예외였다. 그때 조금 겁이 났다. 밤에 잠을 못 자게 되면 이건 큰일이 아닌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증이와 새벽같이 연세대로 테니스를 치러갔던 확실한 기억이다. 그 다음은 1975년 초여름 (6월 초였나?), 시카고에 열대야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때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시 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 아마도 그때의 밤 기온이 80도(화씨)가 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잠은 설쳤으니까..하고 Lake Michigan으로 갔는데.. 그렇게 차게 느껴지던 곳이 그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그 정도였다. 그때 시카고의 많은 집에 에어컨이 없었고, 사실 필요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지독한 더위가 여기 저기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global warming의 경고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이런 ‘설’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기후(extreme high & low)가 자주 나타남은 믿는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불쾌지수가 높다 함은 기습적인 폭우의 가능성이 많다는 뜻도 된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하루 종일 찌더니 급기야 오후 늦게 터지고야 말았다. 우박과 더불어 폭우가 쏟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여름의 즐거움이다. 이런 더위에 이렇게 폭풍과 같은 빗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싸늘한 가을 비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부터는 이런 열대성 여름 비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이럴 때, 태고적 시절 (고2) 여름방학 때 서울 남영동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 ‘삼국지’를 읽던 것을 회상하면 더욱더 시원해짐을 느낀다.
어제는 새로니가 Nashville로 떠났다. 차로 이곳에서 4시간 정도의 거리여서 전에 있던 Washington DC 보다 너무 편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리하지 않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내일은 새로니 이사 짐의 대부분을 우리의 mini-van에 싣고 우리가 다녀 올 차례가 되었다. 계획은 그곳에서 자지 않고 밤에 돌아올 생각이다. 우선 집에 있는 Tobey와 Izzie (dog & cat)가 조금 마음에 걸리고, 새로니가 살 곳이 studio apartment라서 분명히 방이 좁아서 자는 것이 조금 불편할 거 같아서이다. Google Map을 보니까 direction이 아주 간단했다. I-75 North로 90 마일 가면 Chattanooga, TN가 나오고 거기서 I-24W를 타고 135 마일 정도 가서 Nashville metro가 나오면 I-440 (toward Memphis) 로 갈아타고 6 마일 정도 가면 Vanderbilt University가 나온다. 새로니가 살 곳은 학교에 바로 옆에 있었다. 아마도 걸어서 다녀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새로니가 갈 곳은 Peabody College of Education인데 사립학교라 학비가 무척 비싸다. 하지만 1/3 정도는 각종 장학금으로 충당이 될 듯하고, 나머지는 거의 loan으로 될 듯. 이래서 요새 대학 졸업생들은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빚쟁이 신세가 되고 있다. 거의 그게 정상일 정도로. 우선 2년 course에 도전을 하고 여력이 있으면 더 공부할 생각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본인 조차도.
김수근교수님댁 가족들과 1973년 Sherman, Texas
Vanderbilt University..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수근 교수(님).. 대구 계명대학출신으로 그곳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지금은 한국의 어느 학교에서 가르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 처음 온 1973년 여름에 Sherman, Texas에 사시던 김교수 가족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Oklahoma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이 Texas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Dallas에 가끔 놀러 나가곤 했다. 그 가는 길 (US-75) 에 Sherman 이라는 조그만 town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Austin College라는 조그만 사립대학이 있었고 그곳에서 김교수는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당시, 김교수의 박사학위과정이 아직 덜 끝난 상태였고. 다니던 학교가 바로 이 Vanderbilt University였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그 대학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야 사립명문대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김교수님 댁에 놀러 가면 우선 그 귀한 한국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김교수님 부인의 음식솜씨가 상당하였지만 그것 보다도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당시 어린 딸 두 명이 있었고 한국에서 아버님이 방문 중이셨다. 나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를 않아서 모든 것이 불편한 때에 내가 차를 사는 것을 도와 주셨다. 그래서 김교수님의 도움으로 그 당시에 산 차가 69년 형 Volkswagon Beetle이었다. Semi-automatic의 그 차는 사실 그 당시 나에게 과분한 차였다.
Nashville하면 미국 country music의 수도나 다름이 없다. Grand Ole Opry 란 country music전당이 그곳에 있다. 일주일에 한번 country music stage concert가 그곳에서 열린다. 가장 기억이 나는 것 중에 하나가 The Carpenters가 그곳에 왔을 때다. 아마도 1973년 정도였을까.. 갑자기 인기절정에 오르면서 (Top of the world) 이곳으로 날라와서 공연을 했고 완전한 top country pop stardom에 오르게 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면 한번 그 유명한 Grand Ole Opry공연을 보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꽤 오랜만에 추억해 보는 이 세 이름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우선 이 세 사람은 나의 중앙고교 선배들이다. 안 선배는 53회, 오,최 선배는 모두 54회 졸업생. 내가 57회,그러니까 나의 3년, 4년 선배들이다. 그리고, 모두 연세대 전기공학과에서 같이 공부한 선배들이라는 것이다. 1968년부터 1971년 졸업할 때까지 같은 학년,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나는 오성준 선배와는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그것을 소중하게 추억하고 싶다.
연세대학 2학년이 시작되던 1968년.. 나는 1966년에 입학했지만 1학년 중간에 1년 휴학을 해서 1967년 가을에 복학을 했었다. 입학 때와 달리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것이 공부란 것도 그때 알았다. 1학년 1학기 때의 below average를 한 학기 만에 완전히 만회를 해서 이곳의 표현으로 dean’s list를 넘어서게 되었고 심지어(?)는 쥐꼬리만한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의 느낌은.. 아.. 열심히 하면 꼭 무슨 좋은 결과와 보답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1968년 초, 나의 생일날 북괴의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목 따러” 온 후에, 2학년이 되면서 대거 복학생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부분 군대를 마치고 온 3년 정도 선배들이었다. 그 중에 중앙고 출신이 3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 세 선배들이었다. 그때 재학생으로 중앙고 출신이 나까지 5명이 이미 있었다. 나(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 등등이었다. 이중 나와 이윤기는 중앙 57회였고, 나머지는 모두 58회 출신이었다. 그래서 중앙고 출신이 8명이나 된 것이다. 이 정도면 과에서 단일 고교로써는 굉장한 숫자였다. 과대표를 뽑는 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그 이(利)점은 상당할 정도였다.
1969년 비원에서, 왼쪽부터 안낙영, 최종인, 박창희, 김진환, 오성준
이 세 명의 선배들은 참 쾌활하고, 농담 잘하고, 다정한 선배들이었다. 그 전까지는 나는 선배라고 하면 우선 겁을 내곤 했다. 고등학교 때 사실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거의 군대식으로.. 일년 선배라도 길에서 보면 경례를 하곤 했으니까. 잘못해서 반말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때는 세상의 끝이라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환경들이 다 일제시대의 학교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때는 처음으로 선배들의 ‘포근함’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반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농담을 할 정도가 된 것이다.
안낙영 선배.. 노란 반팔 셔츠를 좋아한 사나이.. 짓궂고, 야한 농담을 신선하게 하고, 누나 있으면 소개하라는 농담을 즐기는 여유에 반해서 공부는 정말 심각하게 하는 학구파다. 강사나 교수에게 아주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날리는 자랑스러운 선배였다. 최종인 선배.. 정말 구수하고 다정한 얼굴의 선배다. 말도 그렇다. 그런 것에 비해서 말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진이 취미라는 것도 알았다. 연영회라는 연대 사진 서클에서 새 회원을 모집해서 양건주(화공과)와 갔는데 거기서 만났다. 그때 각자 돌아가며 자기를 소개 하는데 최 선배는 군대에서 사진에 대한 경험이 많다고 말을 했었다. 그 당시 연영회의 모임은 갈월동에 있는 연영회 간부학생의 집에서 있었는데, 그때 한창 인기가 있던 그룹사운드 까지 출연을 할 정도로 대 성황인 모임이었다.
1968년 봄 Amigos 가 관악산으로 놀러갔다
그리고, 오성준 선배..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별명도 있었다. 오박사..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만물박사처럼 참 여러 가지를 많이도 알고 있었으니까. 봄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나는 몇 명의 고정적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양건주, 이윤기, 김진환, 김태일, 박창희, 그리고 김철수 등등 이었다. 이중에 양건주만 화공과였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 과였다. 출신도 다양한데, 양건주, 이윤기는 나의 중앙고 동기이고, 김태일, 박창희는 중앙고 1년 후배, 김진환은 전라도에서 온 유학생, 김철수는 강원도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어쩌다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즐거운 기억 중에는 수업이 끝나면 연대입구에 있던 빵집에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빵 값을 지불하곤 하던 것이었다. 대부분 다방에서 죽치곤 하던 시절, 고교생처럼 웬 빵집.. 그래서 더 재미가 있었나 보다. 그러다가 날씨가 좋은 봄에 관악산으로 등산을 가기도 했다. 그때 찍은 사진 뒤에는 날짜와 함께 Amigo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것이 Spanish로 friend(남성)란 뜻인데 그 당시 모임의 이름이 없어서 우선 그렇게 붙인 것 같았다. Club Amigo..
오성준 선배와 양건주의 약식 씨름: 오선배가 이겼다, 1969년 비원에서
하지만 이 클럽엔 “치명적”,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멤버가 모조리 “우중충하고 쾌쾌한” 냄새 나는 남자들 뿐인 것이다. 조금은 하얗고 부드러운 듯한 여자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나같이 여자친구 하나 없는 그야말로 숫총각 뿐이었으니까. 어떤 친구들은 숫제 여자에게 관심도 없었다. 아직도 미성년인 것처럼.. 그러다가 오 선배에게 하소연을 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선배는 그 정도로 다정하였다. 그러더니 나와 이윤기를 데리고 연세대 뒤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어느 아담한 양옥집으로 갔다. 알고 보니 오 선배의 공군복무시절 친구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그 집에 이화여대생 딸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여대생을 소개시켜주러 간 것이다. 성격이 이랬다. 아주 화끈하게 일을 즉시로 해 치우는 그런..
그날 그 집에 그 여대생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연락처를 받아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갑귀” 씨였다. 이름이 하도 요상해서 물어보니 갑오년에 귀하게 났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는 김갑귀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성준 선배는 우리들 클럽의 활동에 ‘고문’격으로 가끔 조언을 하곤 했다. 선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대생회원 아이디어는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갑귀 씨가 열심히 자기의 classmates들을 소개 시켜주긴 했지만 글쎄.. 어딘가 우리들하고 맞지를 않았다. 키가 너무 크지 않으면 얼굴이 그렇다던가..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들이 더 어려 보일 정도였다. 이것을 김갑귀 씨가 알고 아주 섭섭해 했다. 김갑귀 씨는 조금 어리광 끼가 섞인듯한 표정과 다정함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면이 참 좋았다.
그녀는 역시 정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그룹에 대한 인상이 좋았는지도.. 곧 바로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친구가 바로 이선화 씨였다. 선화공주를 연상시키는 그런 간호사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사실 김갑귀 씨와 창덕여고 동창이었다. 김갑귀 씨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선화씨의 classmates로 대상이 바뀌었고, 지난번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조금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뒤에 “연호회”라고 하는 남녀 대학생 클럽이었다. 목적은 단 한가지: 친목도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 선배는 우리와 아주 친한 선후배관계를 유지하였다.
졸업 후에 오 선배는 곧바로 대학원 진학을 했다. 나머지 선배들은 연락이 끊기고, 나는 미국으로 오게 되어서 이 선배들과는 사실상 관계가 끊어진 셈이다. 아주 나중에 오성준 선배의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직장에서 맹활약을 한다는 것이었다. 안낙영 선배도 거의 우연히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어떤 한국유학생하나가 Old Dominion University에서 transfer한 사람이었다. 서로 우연히 얘기 하던 중에 안낙영 선배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이어 직장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바로 전화를 해서 서로 소식을 나누었다. 간호사인 아내가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쪽에서 계속 살고 계시리라 믿는다. 최종인 선배는 완전한 연락 두절.. 다른 선배를 만나기 전에는 알 길이 없을 듯 하다. 그래서 이 최종인 선배는 조금은 전설적인 이미지로 나의 머리에 남는다. 언젠가 한번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야, 친구야.. 그립다. 보고 싶다. 그때로 가고 싶다. 햇수로 세어본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10년, 20년, 30년, 40년.. 10년을 네 번이나 세었다. 그 때에 우리에게 ‘사심’이란 것은 없었다. 그게 진짜 우정이 아닐까. 우정이란 말과 의미와 느낌을 잊고 산지도 손가락으로 세어도 한참 세어야 할 정도로 오래 되었는가.
친구, 건주, 양건주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귄 기간은 이 오랜 세월에서 년 수로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는 짧은 기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는 거의 영원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중앙중고교 동창, 연세대 동창인 양건주. 내가 대학 2학년 때 연세대 캠퍼스 에서 만나서, 같이 연호회란 대학생 클럽활동도 같이 하였다. 1973년 내가 미국에 오면서 헤어졌다. 1979년 결혼 차 귀국했을 때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1970년대 초의 젊은 모습을 아직도 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건주는 중앙고교 2학년 때 SECC란 고등학교 영어회화클럽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세대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나하고 그는 중앙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건만 때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었다. 6년 동안 같은 반을 한번도 못한 것은 사실 그렇게 흔치 않은데..
건주는 나이에 비해서 확실히 성숙한 그런 친구다. 항상 공정, 공평하였고, 우선 ‘정’이 많았다. 그것을 요란스럽지 않게 은근히 풍기는 그런 다정다감한 친구.. 그런 친구가 계속 나의 옆에서 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공상도 해 본다.
1969년초 양건주가 군대가기 전에 연대앞의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바른쪽이 양건주
1999년, 20세기가 저물던 때에 다시 online으로 연락이 되었다. 이것도 나는 거의 운명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때 헤어진 연호회 친구들의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이윤기, 윤인송, 김태일, 박창희, 김진환. 이어서 건주, 윤기, 인송, 태일이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진도 보게 되었다. 김진환의 사망소식도 들었다. 다른 동창 친구 김호룡의 늦은 사망소식에 이어서 나는 한동안 충격 속에서 헤매었다.
1968, 69년,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해양다방을 생각한다.국제극장 옆을 끼고 경기여중고로 향하는 좁다란 골목길에 있었다. 어떻게 그 다방에서 우리가 모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어두운 구석 자리를 거의 전세를 내다시피, 우리들의 명실상부한 휴식처 노릇을 했다. 그 때의 그 여자회원들을 다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 중에는 현재의 건주wife도 있었다. 그는 사실 그때 미래의 wife깜을 그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추억은 흑백사진시대로 남아있다. 비교적 잘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억의 영상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가 없음을 알 때, 조금 서글퍼지는 이 마음, 어쩔 수가 없다. 영원한 친구 건주의 건강과 행복을 다시 한번 기원하면서..
1960년 4월 19일을 생각한다. 오늘 아침 문득 오늘이 4월 19일임을 느꼈고, 아마도 조금은 더 의미가 있는 해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아.. 1960~2010.. 정확하게 50년이 되었음을 알았다. 조금 부끄럽기도 한 것이 오늘에서야 50주년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Axis of power, 이기붕,이강석,이승만,프란체스카,박마리아
1960년 4월 19일 나는 서울 종로구 계동 1번지 중앙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초봄이었던 4월은 그 나이엔 참 즐거운 계절이었다. 우선 밖에서 full-time으로 뛰어 놀 수가 있기 때문이다.
No TV, No telephone, No game machine, No computer, No nothing, Yes only AM radio.. 유일한 오락은 만화책과 누나들(식모누나까지) 속에서 끼어서 순정 멜로드라마(예를 들면 청실홍실, 장희빈 같은)를 AM radio 에서 듣는 것 밖에 없었던 시절, 집 밖의 골목은 나에게나 동네 꼬마들에겐 거의 천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조금은 덜 뛰어 놀 것 같았지만, 거의 반대였다.사실은 더 나가서 놀았다. 우선 입시공부가 당분간(최소한 3년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종로 화신 백화점 옆 골목에 있었던 우리의 ‘등대’ 우미관에서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 주연의 2차 대전 잠수함과 구축함 영화, 상과 하(Enemy Below), Pat Boone주연의 과학공상영화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등 그 당시 미국영화에 열광하던 시절.. 그 때였다. 사일구 혁명이 일어난 것이.
3.15 대선 선거운동, 1960년
그 당시 나는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 에 살았다. 모두가 지금에 비하면 꾀죄죄하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모두들 생활수준이 비슷해서 사실 우리들 그렇게 가난한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고나 할까.
길에 나가면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 앉아서 할 것이 별로 없었고 생활공간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기적적으로 침묵이 흐르는 거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처음 맞고 보는 “계엄령” 때문이었다. 골목까지 사람이 사라진 것은 사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해 1960년 3월에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역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의 교과서적인 극치였다. 어린 우리가 듣고 보아도 그런 것 같았다. 재동국민학교 6학년, 그러니까 1959년, 담임선생님이셨던 박양신 선생님.. 그 선생님까지 우리 코흘리개 학생을 놓고 선거유세를 하다시피 하셨다. 이기붕이 조볌옥(야당 후보) 보다 훨씬 낫다고.. 분명히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선생님.. 너무 하셨다.
김주열군의 죽음에 항의 데모하는 마산여고생들, 1960년
그리고 기억나는 비극적인 사건, 마산 부두에서 김주열이란 고등학생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물론 신문에 그런 것들이 요란히 실렸다. 최소한 이승만 정권은 언론통제나 탄압은 안 한 듯하다. 그 당시 우리는 경향신문을 보았다. 특별히 야당 성이 강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요란히 정부를 탄핵하곤 했다. 그 때는 각 신문마다 간판 격인 만화가 매일 실렸는데, 그게 어린 나이에 보아도 무슨 정치적 배경이 깔린 무슨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때 경향신문의 두꺼비 (김경언 화백)를 즐겨 보았다. 물론 제일가는 인기는 역시 동이일보의 고바우영감(김성환 화백) 이었지만.
결국 부정선거는 짜여진 각본대로 이승만, 이기붕을 대통령, 부통령 으로 만들어 놓았다. 보통 4,5월에 선거가 있었지만 다급해진 자유당은 강제로 3월 15일로 앞 당겨 선거를 치렀는데 이유가 좋았다. 4,5월 달은 농번기라는 것이고 농민들을 돕겠다는 갸륵한 이유.. 그 당시 자유당은 그 정도로 유치하기도 하였다. 기억나는 것이,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기붕은 거의 허수아비고 모든 것은 그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움직인다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거의 사실인 듯 싶다. 그 단적인 예로 이기붕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을 박마리아가 이승만의 양자로 들여보낸 것인데, 정말로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강석이 가족을 모두 쏘아 죽이고 자기도 죽은 것이다. 대부분, 이강석의 용기를 칭찬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4.18 고려대생들의 데모, 이날 밤 돌아갈 때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4.19는 시실 급박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각종 데모가 점점 서서히 커져나간 것이다. 4월 18일에는 서울고려대 학생들이 데모 후에 자유당 ‘소속’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때는 자유당 소속의 정치깡패들이 자주 등장을 하였는데, 제일 유명한 것이 이정재, 임화수의 일본 야쿠자 같은 조직이었다. 이들은 조무래기 동네 깡패가 아니고 거의 법적인 ‘회사’를 가진 조직 폭력배였다. 이들에 관한 일화는 오래 전의 TV 드라마 ‘무풍지대‘에 아주 자세히 나온다. 그 당시 일화로, 코미디언합죽이 김희갑씨가 임화수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임화수가 “야 합죽이, 요새 잘 있냐?” 하고 인사를 한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4월 19일 (무슨 요일이었을까, 맞다..월요일이었다) 아침에 학교엘 가니.. 수업도 시작하기 전에 (확실치 않지만) 퇴교를 당했다. 우선은 신이 났지만 (그 나이에 학교보다 동네골목이 더 좋았음),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거리의 공기가 조금 이상 했음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선 ‘신나는’ 마음으로 만화가게로 향했고, 미친 듯이 애독하던 만화 김산호의 ‘라이파이‘를 즐겼다. 그러면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까지 데모대가 갔었던 모양이고,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다 (라디오의 드라마를 제외하고) 아마도 그 소리는 그 당시 경찰들의 표준무기 카빈소총이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 앞의 데모, 한 여대생이 무등을 타고 구호문을 치켜 들었다. 이 여대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4월 19일
그러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것이 느껴지고 총소리는 더욱 잦아지고.. 그러면서 저녁이 되었다. 재동 신작로엘 나가니 (지금 돈화문에서 종로경찰서로 이어지는 거리) 완전히 사람들로 들끓고 군용트럭, 화물트럭이 학생들을 가득 태우고 질주를 하고 있었다. 물론 격한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니까 4.19는 사실 대학생들의 데모였다. 희생자들도 거의 그들 이었을 것이다. 거리엔 발을 동동 구르며 귀가를 안 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들로 가득하고.. 그때 같은 동네에 사는 국민학교동창 한윤석의 어머니가 큰 딸을 부여 앉고 무사히 귀가한 것이 너무 기뻐서 뛰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러다가 계엄령 이란 것이 선포되고 군인들이 거리에 깔리기 시작하며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이런 광경은 사실 그 이후 몇 십 년 동안 흔히 보게 되는 그런 것이 되었다).. 동네 골목까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그러면서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하야 성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해진 말 ‘국민이 원한다면‘.. 이란 말.. 그 당시 아주 유행어가 되었다. 거의 친 아버지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게 교육을 받았던 우리들은 솔직히 동정 어린 심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기붕 개새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잘못은 거의 이승만에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대가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4.19 낮
그 때, 학생이란 위치가 사실 한국역사상 최고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일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대우를 하곤 했다. 특히 대학생들.. 수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던 그 용감했던 대학생 형님들..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고, 흐뭇해지는 심정 누를 길이 없다. 그렇게 나라에 희망이 없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시절, 작업복 염색해 입고, 암시장에서 산 군화를 신고 대학캠퍼스를 누비던 그 멋지던 형님들 (누님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다 어떻게 4.19를 기억하고들 계실까.. 궁금하기도 하다.
짧았던 학생혁명 시절, 결국 미성숙하고 이기적이던 야당 정치인들이 거의 망쳐놓다시피 해서 결국은 다음해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의 탱크에 의해 끝이 나고, 사일구의 의미는 희망했던 것처럼 피어 오르질 못했다.(군사정권은 사일구의 의미를 격하하진 않았다. 하지만 5.16의 의미를 올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눌렸을 뿐이다) 피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숨져간 영혼들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명복을 빌고 싶다. 고이 잠드시기를..
당시의 신문으로 본 사일구 혁명
대한민국의 신문들이 거의 모두 digital archive로 Internet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 동안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로 비싼 보물과 같은 역사적 정보들이 거의 기적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이것을 보는 것은 최고의 time-killer가 될 수가 있고, 이것으로 다시 자기만의 역사를 쓰며, 바로 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예로 아래에 보이는 사일구 혁명 당시의 신문을 보면서 희미하거나 숫제 틀린 기억들을 바로 잡게도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당시 12살 정도의 ‘한자 문맹‘에 가까운 나이어서 이런 신문들을 읽지도 못했을 것이라서, 그렇게 큰 잘못 된 기억은 없을 듯하다. 그 당시 나는 분명히 ‘그림, 사진’들만 즐겼을 것이다. 이것들을 보면서 역시 사일구는 아주 오래 전 ‘사건’이라는, 그것도 너무도 오랜 전이라는 가벼운 충격을 받고, 내가 그만큼 오래 살았고, 그 역사의 현장을 피부로 느꼈다는 것에 약간의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50년이 지난 신문 속의 글과 사진은 거의 ‘전근대적 문화’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는데, 변해버린 한글 맞춤법과 당시의 경제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꾀 죄죄’한 모습들, 당시의 ‘조잡한’ 흑백 신문사진 기술.. 너무나 나의 역사, 시대관을 시험하는 것들이었다.
4.19의 전주곡, 4월 18일의 그 유명하고 ‘영웅적’인 고려대 3천명 학생들의 4.18데모에 관한 전면기사들.. 이 고려대의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대규모 데모는 그 날 밤에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이정재 휘하의 임화수, 유지광 깡패부대의 대규모 습격을 받고, 그것이 사일구 혁명의 최후 기폭제가 된다.
이정재 사단 정치깡패의 첫 출동, 시민들과 합류해서 4.18 저녁 서울 중심가를 누비며 행진하며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100여명 깡패의 살인적인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진들이 4월 18일 혁명전야의 생생한 열기를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의사당 앞에서 끝까지 버티던 용감했던 고대생 형님들.. 그 무서운 힘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폭발된 전국적인 4.19혁명.. 서서히 전면 기사, 정치면으로 등장.. 이때는 이미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 이후였고, 비상 계엄령이 서울 전역에 선포된 후였다.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 처참한 사상자들의 실체는 아직도 파악이 덜 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경무대 앞에서 장갑차로 데모 군중을 향해 일제 사격을 했음은 밝힌다.
그런대로 점잖은 사진, 경무대 진입로 전에 있는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무장경찰과 대치한 것만 front page에 실었다. 이 효자동 종점에는 나의 외 이모님 댁의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어떠한 광경을 목격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1960년 4월 19일 저녁 6시까지의 ‘사회면’ 뉴스는 조금 더 생생한 데모의 격렬함을 보여준다. 수도지역 (그 당시에는 수도권이란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대학생 전체와 수 없이 많은 고교생들, 심지어 중학생들 (그 이하 아이들도) 까지 합세한 그야말로 혁명적인 봉기의 조짐을 여지없이 보여준 날.. 사월 십구일 낮의 일이었다.
내가 오후 한시경부터 들었던 총소리.. 경무대 쪽이었고 역시 그때부터 대학생 형님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한 때였다. 만화 속에서만 보던 진짜 총 소리를 듣는 기분이 처음에는 신기하고 흥분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공포’적인 기분으로 변했다.
처음에 서울에 내려졌던 경비계엄령이 전국적인 ‘비상’계엄으로 바뀌어 선포가 되고 경찰을 대신 군인들이 치안의 주역을 맡기 시작하고, 신문 같은 언론매체(그 당시 몇 가지 신문과 국영방송밖에 없었다)에 대한 군 검열이 시작되어서 ‘불온한’ 것들은 무자비하게 조판과정에서 삭제 당했다.
치열한 시가전을 방불케 하던 4월 19일이 저물어가면서 계엄령에 의한 중무장 군인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하며 데모대도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지만, 군검열로 생생한 사진보도는 아직 없었다. 글로 쓰여진 기사만으로는 그날의 엄청난 일들을 묘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데모대들이 ‘탈취’한 각종차량에 올라 타고 거리(원남동~안국동)를 질주하던 대학생들의 격렬한 구호, 그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고, 온통 골목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던 부모님들의 모습들.. 역시 생생하다.
비교적 민중 편에 서있었던 계엄군의 느슨한 검열을 통과하기 시작한 4월 19일의 생생한 사진들이 신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김영삼(a.k.a., 빠가)이 ‘뭉개버린’ 식민통치의 상징 ‘중앙청(이것을 없애버리면 후세에 누가 그 비극적인 역사를 느낄 수 있냐?)’ 옆에 널려진 서류들, 불에 타던 반공회관, 서울신문사, 서울 의대생들이 숫제 하얀 가운을 입고 데모에 참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의 물건들이 불에 타던 생생한 기록들이다.
4월 20일 석간신문, 드디어 본격적인 군검열을 거친 신문들.. 조판 후 에 군 검열관이 아마도 ‘송곳’ 같은 것으로 긁은 모양..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이 신문의 모습은 그 당시 나에게 참으로 신기하게 보였다. 이때의 계엄군 사령관, 송요찬 중장..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한 일련의 명령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정당’한 것들 뿐이었다. 특히 민중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경찰들을 철저히 단속,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의 많은 경찰은 실제로 일제 고등계 출신 악질들이 많아서 수시로 미성년자들까지 ‘공산당’으로 몰아 고문을 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4.19 ‘사태’에 대한 정치적 포석과 견해는 역시 정치적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한 대화’를 원하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그러한 담화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때까지도 이대통령은 사태의 진상 (원인을 포함한)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비서실을 비롯한 ‘인의 장막’에 가리워져 있었고, 고령의 나이가 별로 사태파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상계엄령의 여파, 4월 20일부터 저녁 7시 통행금지 시작.. 그렇게 복잡하던 세종로 네거리가 7시 전에 이미 완전히 비었다. 이 ‘낮’의 통행금지는 사실상 골목 골목까지 적용이 되어서 집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조심스러웠고, 꼬마들이 나가서 노는 것도 힘들었다.
처음으로 ‘공식’ 피해 진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출발점’이 이곳에 보이는 대로 111명이다. 물론 나중에 이것은 큰 폭으로 올라간다. 역시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어린 학생’들이어서 국민에게 느껴지는 심리적인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들이 발포를 할 정도로 폭도이며 위협적이란 말인가?
이러한 민심에 부응하듯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을 철저히 질책하며 ‘보복 금지’에 대한 엄단을 경고한다. 신문검열로 삭제된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계엄 사령부는 민심을 잘 파악하고, 각 병원에 안치된 데모 사망자, 거의가 학생들, 을 유족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때 민간정부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했고, 관(서울시) 주도하의 합동영결식도 유족들이 거부했다.
4월 23일자 호외(extra), 그 당시는 참 호외란 것이 많았다. 요새 같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이 없어서 빠른 뉴스는 라디오나 이런 신문의 호외 같은 것이 의지했다. 정국 파탄의 원인의 중심인물, 부정선거의 주역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 국회의장,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모양이다. 불똥이 튈 것에 대비해서 현 부통령 장면박사는 다음의 정치포석을 한다.
당시는 찌들 리게 대부분 가난했지만 빈부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생존경쟁에 발버둥은 쳤지만 기본적인 인간애와 동족애는 어느 때 보다 높고, 없는 것을 나누는 인정도 참 많고 흔했다. 위의 사진들은 절대로 pose한 사진들이 아닌 snap이었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어린 부상자를 돌아보는 한 가족들, ‘용감한 형님’을 자랑스레 찾아간 국민학생, 사망자 가족의 장례비용을 걱정하는 어떤 착한 엄마와 아들의 모습.. 참으로 눈물겹고 그립던 시절이었다.
무풍지대, 드디어 부상.. 자유당 정권과 손을 잡은 야쿠자 스타일의 이정재 휘하의 정치깡패의 부관들 드디어 여론과 군의 압력으로 얼굴이 들어나고 구속까지 된다. 이들과 동대문 경찰서는 숫제 서로 직통전화까지 가설하고 고대생 습격사건을 주도했다.
3.15 부정선거도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 중, 평화극장 사장 임화수와 두목격인 이정재는 1년 뒤의 5.16 혁명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지만, 운이 좋았던 유지광은 살아 남는다.
불란서 혁명을 방불케 하는 이 사진은 4.19가 절정에 이르던 때, 권력의 심장부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는 제일 용감하고 희생자가 많았던 때의 현장 사진이고, 계엄군 검열이 완화된 상태에서 신문에 실렸다. 이 당시 데모대의 유일한 방어무기는 탈취한 소방차 뿐이었다.
한민족에게 낯설지 않은 광경, 억울하게 어린 나이에 먼저 보낸 귀여운 자식들을 어찌 그냥 보내랴.. 이때의 슬픔은 전체 국민들의 슬픔이었고, 꼬마였던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슬픔이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상한 의사가 요새도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금 이 의사 분은 잘 살아 계실까? 그 당시 기타를 치는 의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점차 자세한 4.19 때의 현장사진들이 신문에 실리기 시작한다. 데모의 정점은 역시 권력 심장부 경무대를 향한 길이었다. 대부분 효자동 종점을 통한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후퇴를 하며 총을 쏘는 경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발포 명령을 받은 그들에게 과연 어떤 죄가 있었을까?
4.19 학생데모 가 일주일째로 접어 들면서, 자유당 정권의 미온적이고 느린 반응에 결국 학생뿐 아닌 대학교수, 일반군중들이 못 참고 일어났다. 이번의 소요는 비상계엄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 그 심각성은 더 큰 것이었다. 모든 치안의 책임은 계엄군에 있는데, 그들에게 모든 앞날의 열쇠가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계엄군은 ‘절대로’ 동포에 대한 발포명령을 받지 않았다.
계엄령 하에서 벌어진 새로운 데모는 사실상 계엄군의 ‘보호’하에 벌어진 셈이 되었고, 이것은 현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또 다른 총부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결단’이 4.19 를 진정한 혁명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이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민간인들이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 타고 얼싸안고 있던 사진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정말 멋진 군인아저씨 들이었다. 용기를 얻은 군중들은 서서히 ‘원흉’으로 지목된 이기붕 국회의장의 저택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만세!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계엄군의 멋진 결심에 굴복한 듯, 국민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육성 방송과 성명이 라디오와 신문 호외로 나오고. 나도 이 방송을 들었다, 그 유명한 말.. “국민이 원한다면”.. 나도 생각했다. “맞습니다. 그것이 국민이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 이 방송과 성명으로 4.19는 100% 완전한 학생들의 승리가 되었고, 4.19는 ‘유혈’ 혁명으로 승격한다.
이승만 정권 궤멸.. 이것이 이제는 공식, 사실화가 되어서 4월 27일자 신문의 전면에 나온다. 3.15 부정선거는 완전히 무효가 되었다. 이 역사적 결정에 이르기까지 학생대표들과 이승만 대통령은 ‘울음’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분명히 노 혁명가 이승만 박사도 그들의 눈물을 진정으로, 가슴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제는 승리의 축제가 세종로 네거리를 완전히 덮는다. 총알이 난무하고 핏방울이 튀던 같은 거리가 기쁨과 감격의 거리로 변한 것이다. 역시 계엄군 탱크가 이번 의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까.. 역시 국민의 군대였다.
4.26 대통령 하야 결심소식을 듣고 계엄군 탱크 위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이것은 세종로 네거리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사진인 듯, 멀리 중부 소방서의 소방탑이 보인다. 기껏해야 4층 정도의 높이에서 불이 난 곳을 볼 정도로 그 당시에 고층빌딩이 없었다.
아래의 사진은 계엄군의 ‘안전함’을 느낀 후 계속된 대모 군중, 가운데를 보라.. 국민학교 학생들이다! 멀리 “빠가”김영삼이 없애버린 일제의 상징 중앙청과 북악산이 보인다.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은 제2의 8.15 라고 환호를 했다. 해방, 부정,부패, 깡패, 경찰 정권에서 해방.. 이날 기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고문경찰과 자유당의원, 그 소속 깡패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 이기붕 이란 이름은 특별히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군중들은 서대문근처 그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집안 가재들을 모두 끌어내서 불태웠다. 나의 동네 친구들 중에는 그곳의 물건들 중에서 ‘최고급 야구 glove’를 “전리품”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눈물과 웃음을 함께 자아내는 사진들.. 특히 왼쪽의 국민학생 코흘리개 악동들의 데모가 그렇다. “군인 아저씨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마세요!” 란 플래카드.. 어찌 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을까? 이들은 분명히 용감하게 피 흘리며 쓰러진 대학생 형님,오빠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100% 자유를 쟁취한 군중들, 탱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타서 환호를 한다.
4.26 승리의 모습들.. 이기붕 저택 습격한 데모대 들은 사실상 ‘절도’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그런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충격적인 모습은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종로 파고다 공원 (탑골공원)에서 끌려 내려져서 차에 끌리어 가는 곤욕을 치른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 그것은 조금 심한 것이었다. 특히 그 동상을 끌고 다닌 차가 ‘분뇨 차(일명, 똥차)’ 였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빛났던 대학생 형님,누님들과 용감하게 민중을 보호했던 우리의 국군 계엄군 아저씨들.. 정말 멋진 순간들을 맞았다. 총탄에 쓰러지며 나라를 구했던 대학생 형님들이 이번에는 뒤처리를 과감히 맡았다. 계엄군이 관리하던 경찰서, 파출소 조차 대학생들을 임시 ‘고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왼쪽 위의 기사를 보면 그 당시 최고의 맛을 자랑하던 뉴욕제과점과 고려당 제과점의 최량의 빵들을 계엄군 ‘아저씨’들에게 선사를 하는데, 그 당시는 살 맛이 나던 때였다.
급속히 정리되는 용맹과 피의 거리들.. 역시 피를 흘렸던 대학생 형님들이 팔뚝을 걷고 나섰다. 경찰이 종적을 감춘 곳에 대학생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쓰레기 청소까지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기붕씨 일가 자살.. 이것은 그 당시에도 끔찍한 뉴스였다. 그렇게 많은 죄 없는 어린 학생들이 죽었지만, 이것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법의 심판을 받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결론을 내린 장남 이강석의 결단이었다. 그가 부모와 남동생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자신을 쏜 것이다. 100% 확실한 정황을 알 길은 없지만 그것이 공식적인 결론이었다. 누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잊고 싶은 끔찍한 비극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기붕씨의 출신 과정을 보면 그도 양심적인 기독교인이었고, 나름대로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음도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장기집권으로 나온 ‘악마’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국민의 ‘보복’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미국 주간 시사화보 LIFE 가 본 4.19 혁명
4.19를 보도한 1960년 5월 9일자 LIFE
4.19 당시, 그러니까 1960년에 대한민국에는 신문을 제외한 변변한 ‘커다란 사진이 가득한’ 매체, 그러니까 ‘화보지’가 거의 없었다. 사진 처리를 위한 제작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것이 읽거나 듣는 것이고 눈으로 보는 생생한 뉴스는 드물었던 것이다. 워낙 ‘못 살았던’ 때여서 TV 방송이 있었어도 TV자체가 너무나 드물어서 못 보던 시절, 미군을 통해서 흘러나온 TV로 간혹 미군 방송AFKN을 보거나 부산 같은 곳에서 일본 TV방송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4.19의 모습들은 위의 사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역시 ‘찌들리게 조잡한’ 신문의 조판사진이 전부였다.
하지만, 4.19의 생생한 모습들이 camera로 찍히고, movie film으로 기록들이 다행히 일본이나 미국으로 간 것들은 비교적 ‘고화질’로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원래부터 ‘질이 좋은 사진’을 위한 시사화보로 유명했던 미국의 주간지 LIFE가 4.19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4.19는 비록 세계 뉴스의 레이다 밑에 있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비교적 자세히 보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사논평의 주제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것을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보이고 역사에 남긴다.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가족들: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고, 이기붕은 부통령으로 당선.. 고령의 이승만의 유고 시에 그의 대통령직은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 중인 용감한 고려대 형님들.. 이들의 에너지가 그 다음 날 4.19의 원동력이 되었다.
데모대를 진압하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찰들.. 그때는 데모 진압 ‘전용’ 전투 경찰이란 것이 없었다. 그저 일반 경찰들이 모든 것을 담당해서 후의 전문 전투경찰 같은 테크닉은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힐 기술 없이 그저 두드려 패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그들은 민주경찰이기 이전에 ‘반공 경찰’이어서, 빨갱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진압을 하면 살인적인 결과를 내곤 했다.
이렇게 부상을 입고 부축을 받으며 가는 사람은 학생인지, 민간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머리에 아주 큰 부상을 입은 듯.. 아마도 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표정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까..
이 불쌍한 어머님은 얼마나 어린 아들을 잃었을까? 이런 광경은 4.19 직후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정말 슬픈 모습들이었다. 특히 아들을 중요시했던 당시의 사회 관습이나 풍조를 감안한다면 희생자 가족, 부모들의 고통과 슬픔은 상상을 하기 힘들었다.
‘살인 경찰들’이 계엄령 선포로 뒷전으로 사라지고 대한민국의 유일한 양심, 희망이었던 송요찬 장군의 계엄군 헌병이, 흥분한 어린 학생을 ‘정답게’ 제지하는 장면.. 이 학생들은 원흉으로 지목 되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을 습격하려는 중이었다. 이 헌병의 모습으로 보아서 군대는 완전히 민중의 편에 섰음을 짐작할 수 있다.
4.19 ‘참사’의 제1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이기붕 국회의장,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이 격노한 데모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서 습격을 당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는 절도까지도 용납이 될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하였다.
군인 아저씨들.. 우리 부모 형제들에게 총 뿌리를 대지 말라.. 고 외치는 초, 중,고교 학생들.. 특히 앞장을 서서 가며 힘차게 외쳐대는 국민학교 코흘리개 아이들의 모습, 특히 남루한 ‘구제품’ 옷들을 입은 모습들이 가슴을 찡~ 하게 만든다. 그들은 사실 나와 거의 같은 또래의 악동들이었다. 골목에서 뛰놀던 그들이 총탄으로 쓰러진 형님, 누나들을 보고 계엄군을 향해서 호소하는 모습이었다.
평온이 서서히 깃드는 거리, 당시의 시내 거리에는 차량의 숫자가 적었고, 특히 신호등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런 곳은 교통경찰이 손수 교통정리를 했다. 그 경찰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역시 학생, 민간인들이 자원해서 이렇게 힘차게 차량들을 정리했다. 이 형님, 아저씨는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
한국전쟁, 인천 상륙작전의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동사에 데모대들의 화환이 걸렸다. 우리는 절대로 빨갱이, 공산당이 아니라는 뜻과, 거의 중립적, 아니면 침묵으로 이승만 정권을 혐오하던 미국의 태도를 학생들과 일반인들도 느꼈을 것이다. 반공 하나로 버티던 이승만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가 반공이상으로 중요함을 몰랐던 것일까?
거의 폭도로 변한 철모르는 어린 학생들과 데모 군중은 어제까지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쓰러뜨렸고, 그것도 모자라 목에다 밧줄을 걸어서 ‘분뇨차’에 끌고 다녔다. 이것은 당시의 정서로도 너무 심한 행동이었는데, 결국은 치욕을 당했던 동상은 다시 태극기에 덮여서 정중히 안치가 되었다.
절대권력의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 ‘국민이 원한다면..’의 구성진 대통령직 사퇴, 하야 성명 방송 후 그는 돈암동에 마련된 ‘이화장’ 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차를 타고 경무대를 나와서 이화장으로 갈 때, 사실 국민들은 박수로 그를 환송했다. 그것이 당시의 국민 정서였다. 비록 살인 경찰의 우두머리였지만 ‘우리의 아버지’임도 잊지를 못한 것이다.
4.19 혁명이 이승만 정권의 사실상 총 사퇴로 이어지고 과도정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제1인자로 허정 씨가 두각을 나타내고 제2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 아틀란타에 정녕 봄이 오고 있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고3때 국어책에서 본 시의 제목처럼.. 이번 겨울은 동서남북의 구별 없이 무차별하게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하기야 Florida와 Hawaii를 제외한 전역이 눈이 덮여 있다고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Obama의 global warming agenda도 따라서 조금 잠잠해졌나 할 정도다.
공식적으로 춘분이 거의 열흘이나 지나고 내일은 사월이다. 진짜 봄인 것이다. 새벽에 아직도 central heating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주 따뜻한 낮과 아주 싸늘한 밤이 계속되는 건조한 그런 나날이 되지 않을까? 4월.. April shower brings May flower라고 오래 전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서 나에게 써 먹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만큼 싸늘한 4월의 비도 연상이 된다.
하지만 나에겐 한국가곡 “사월의 노래”가 더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1963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자 음악 선생님이셨던 김 대붕 선생님이 좋아 하셨다던 가곡, 사월의 노래.. 우리들에게 정성스레 가르쳐 주셨다. 특히 작곡가이신 김순희교수님을 잊지 않을 정도로 언급을 하셨다. 혹시 그 교수님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나곤 한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에 편지를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 노라
돌아 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없는 무지개 계절아
노래와 함께 가사까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지금 연세가 어느 정도나 되셨을까? 짐작에 아마 여든을 바라보실 연세가 아니실까. 그렇다면 요새 같은 세상에서는 건강만 좋으시면 큰 문제가 없으시리라. 기억에 선생님은 해방 직후에 고등학교 학생이셨다. 어떤 글에서 (아마도 중앙학교 교지에서) “국대안 반대 데모 때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서 뒤떨어 졌던 성적을 올렸다” 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그때 고등학생이셨으면 최소한 나보다 15살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가톨릭 성가 집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이름을 보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천주교 신자임을 알았고 성심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음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중앙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실 당시에도 천주교 신자였을 것 같다. 물론 100% 확실치는 않지만.
아주 오랜만에 Mocedades의 1973년 히트곡 Eres tu를 youtube를 통해서 다시 듣고, 보게 되었다. 이곳을 통해서 이곡이 1973년 Eurovision contest에서 2위를 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그룹이 6인조(여자 2, 남자 4)라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곡을 처음 들었던 것은 1973년 미국유학 첫해였는데, 아마도 1973년 가을부터 radio를 틀기만 하면 이곡이 흘러 나왔다. Spanish노래가 이곳의 일반 radio에서 이정도로 나오는 것은 그때 당시에도 흔치를 않았다. 어떻게 해서 이곳사람들이 잘 모르는 Eurovision Contest의 곡이 미국 top chart까지 올랐는지 확실치를 않다. 하지만 1973~4년을 생각하면 이 노래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Eres Tu – Mocedades – 1973
처음 들을 당시에는 Spanish로 불리웠다는 것만으로 짐작을 해서 그런지 그저 남미나 멕시코의 가수가 부른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아주 이후에 그들이 진짜 Spanish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Basque 민족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흥미가 간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그룹인지 사진 같은 것은 보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이렇게 세상이 좋아져서 다시 듣고 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참 좋기는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신비스러움’ 같은 것이 줄어든 기분도 든다.
1973년 미국의 광활하고 끝없는 지평선을 차로 가로 지르면서 거의 매일 들었던 이 노래를 생각한다. 그 당시에 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다 무얼 하며 지내는지 같이 궁금해진다. 특히 성성모씨, Prof. John Hahn, 3 nurses at Auburn, Nebraska, Hank Lee at Omaha, Nebraska. 이제는 거의 ‘전설’처럼 느껴진다.
Peru, Nebraska라는 제목으로 성성모씨의 추억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눈이 오면서 생각이 그 아득한 시절의 1973년 겨울, Peru, Nebraska로 멈췄다. 그러다 성성모씨와 같이 눈길에서 헛바퀴를 돌고 있던 차를 밀어주던 생각으로 흐르고 자연히 그곳에서 교수를 하던 한국인 John Hahn, 그리고 근처 Auburn, Nebraska의 병원에서 근무하던 세 한국인 간호사들.. 참 소설 같은 배경이 아닐까?
글을 쓰다가 조금 느낀 게 그렇게 또렷이 기억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 구체적인 사실로 묘사를 하려니 턱없이 ‘사실’이 부족했다. 나의 머릿속에 그냥 두서없이 기억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조금은 생겼다. 생각과 글과 말은 서로 다 그 정도의 차이가 대단하다는 것도 함께. 그래서 부랴부랴 생생하다고 자부하던 미국유학과정을 시대별로 써 내려가기 시작을 했는데..이걸 어떻게 끝을 낼지 아니면 얼마나 자세히 써야 할지 현재로써는 난감하다. 하지만 시작이 반.. 이 아닐까?
‘눈’을 기대한 월요일 아침, 하지만 ‘물’로 끝이 났다. 연숙의 business일정으로 사실 눈의 ‘사치’는 귀찮기만 할지도 모른다. 며칠 계속되는 민감하고, 차게만 느껴지는 나라니와 같이 점심을 할 용기를 못 느끼고 도서관에서 평소 때 보다 30분 더 있었다. 1월 달 충격적인 거짓말 같은 우리의 ‘고백’을 담담히 받아드린 고마움도 있고 해서 조금 더 친하게 지내려는 희망은 잠시였고, 식사도 같이 안 하려고 하고 무언가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또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제일 중요한 것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WordPress이다. 2~3년 전의 DotNetNuke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때의 것은 사실 ‘물거품’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번 것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결과가 조금은 보이니까. 이것을 기점으로 PHP를 더 배우고 그러면 무언가 내가 할 일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WordPress Bible이란 책을 $30+ 거금을 들여 사서 현재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번에는 결과를 기대해 본다.
책, 인생고수……참 제목이 좋다. 인생을 통달한 듯 한 저자의 자신 있는 실용화 된, 바로 써 먹을 수 있는 오래된 인류의 축적된 지혜와 철학.. 이렇게 책 하나에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은 사실 드물게 만나는 작은 기쁨이다. 목차를 보면 저자의 의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단한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
내 힘든 삶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건강한 생활을 위한 지혜로운 습관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어른 되기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고민 해결법
왜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는 걸까?
삶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
나이 듦에 대처하는 자세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원하는 것 하며 살아가기
왜 나는 항상 불리한 조건에 있는 걸까?
하고 싶은 일과 안정된 직업 사이에서
터닝 포인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하루하루 힘겨운 일상, 미래는 언제 준비하나?
존경 받는 리더 되기
내가 있는 집단은 언제나 옳은 것일까?
오늘도 나 혼자 모임을 준비하는 이유는
너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다
지금 하는 이 사랑, 진정한 사랑일까?
세상의 반항아들과 대화하기
인간관계가 나를 괴롭힐 때
이기적인 이웃과 평화롭게 살아가기
나를 알아주는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싸우자
서로 다른 믿음이 관계를 악화시킨다면
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가장 큰 힘
큰 제목 밑의 소 항목 들은 사실 서로 많은 연관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소 항목은 차례를 무시하고 읽어도 될 듯하다. 이중에서 나에게 제일 흥미롭거나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들을 열거 해 본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건강한 생활을 위한 지혜로운 습관
왜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는 걸까?
나이 듦에 대처하는 자세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터닝 포인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오늘도 나 혼자 모임을 준비하는 이유는
인간관계가 나를 괴롭힐 때
나를 알아주는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싸우자
서로 다른 믿음이 관계를 악화시킨다면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돈다. 혼자서 읽고 생각한 것보다 이런 것들은 누구와 같이 읽고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을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읽은 후의 서로의 생각은 비슷한 것 보다 다른 것이 많을 것처럼 생각이 된다. 바로 그것이다. 그 다른 것을 서로 생각해 보면 책을 혼자서 보는 것보다 효과가 그만큼 증가하게 되지 않을까? 사실 성경공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종교를 떠난 것이라 그만큼 제한조건이 줄어든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90년 초 내가 마리에타로 이사를 오게 만든 직장: Automated Logic Corporation(ALC) 에서 일을 할 때 그 사장 (별명이 Jaws였다) 이름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Gerry Hull이었다. Gerry는 Jerry로 발음을 하는 게 아니고 Gary로 발음을 하였다. 그 사장이 우리 그룹의 중요 멤버와 같이 공부를 하던 게 있었다. 나는 거기에 참여를 못했지만 (이미 진행 중이었다) 옆에서 보니 참 신선하고 건강한 회사로 느껴졌다. 그때 같이 공부하며 토론을 하던 책이 바로 그 유명한 Stephen Covey의 “7 Habits of Successful People” 이었다. 이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였고 후에 나도 사서 읽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도 기회가 되면 이런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결과는 역시 제로.. 나의 고질병인 timid &passive.. 최근 10년은 연숙의 ‘눈치’를 보게 되어서 아주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싶지 않다. 경제력도 없는 꼴에 사람들을 모으고 만나서 한가하게 인생철학을 토론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한가한 얘기가 아닐까? 구차하게 그녀에게 구걸하고 싶은 마음 눈곱만치도 없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discussion group이 virtual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virtual한 것은 현재도 작업 중이 아니던가! (정말 웃기는 인간이 바로 이경우, 이경우 병신XX 다) 그래도 시작해 볼만한 resource는 하나 있다. 바로 이 “진희네 그룹” 이다. 이제 보니 10년이 훨씬 넘은 관록도 자랑한다. 요새야 10년 하면 별거 아니라는 기분도 들지만 10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그 동안 끊어질 듯 말듯 교제를 해온 나의 유일한 ‘친지’들이 되었다. 친구라고까지는 하지 못하지만 10년 동안 꾸준히 만났다는 것은 그런대로 친지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이 그룹에서 만약에 이런 진지한 토론을 하게 된다면.. 아니 이게 우선 말이나 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도 wife들까지 참여를 한다면.. 말이나 되나. 아.. 조금 이건 힘들지 않을까? 성경공부에선 그게 별로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왜 그럴까? 이게 더 공부를 해야 돼서 그런가? 인원이 너무나 적어서 그런가?
결국은, 결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 이 말이 웃긴다. 시간이야 다 결국은..이 아닌가! 그래 결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가 되었다. 이 말도 웃긴다. 이브의 이브라.. 처음 써 보는 말인데 그럴 듯 하구나. 분명히 나는 이제 61번째의 ‘이브’를 맞이하는 셈이다. 구정과 추석 다음으로 나는 이날이 좋았다. 예수와 나는 개인적인 관계가 없어도 그건 상관이 없었지 않은가?
춥기만 했던 그 한겨울 누나, 누나친구들과 그리던 크리스마스카드.. 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미제 카드, 그것도 새것이 아닌 쓴 것을 그림만 잘라 가지고 다시 만든 카드를 보며 그 아름답고, 이국적인 눈 덮인 세계를 우리는 다시 옮겨서 그렸다.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크디큰 선물자루, 뉴욕의 야경에 찬란히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들…… 모두가 가난했던 우리들에겐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그림을 좋아했던 (그다지 잘 그린 것은 아니라도), 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좋았다. 비록 추웠어도 온돌은 따끈해서 화로 불을 옆에 놓고 우리들은 그곳에 누워서 만화도 즐기고 카드도 그리곤 했다. 특히 누나친구들과 같이 놀던 생각도 많이 난다. 누나야, 참 그때는 즐거웠지?
하지만 그때 우리나라는 분명히 성탄절의 나라는 아니었다. 비록 이승만대통령의 ‘희망’대로 휴일이었고 이브의 밤에는 ‘통행금지’가 없었다. 소위 통금이 없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풀어 버려서 1964년 (내가 고2때)에는 서울시내, 특히 명동의 거리는 완전히 밤새 동안 ‘광란’의 거리로 변해 버렸다.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최근에 일본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도 거의 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4년의 겪은 것을 같은 때 일본이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이라서,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흥미롭기도 하다. 그러니까 1964년 성탄절은 기억이 또렷한 게, 나도 그 ‘소란’함에 조금 기여를 했던 것인데.. 그때 명성이와 동만이를 우리 집으로 불러서 밤을 새운 것이다. 아마도 그때의 분위기가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고2 였던 우리들까지 합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창 외국 (거의가 미국이겠지)의 pop song들에 심취해 있었는데, Christmas carol도 예외가 아니었다. Living Stereo라고 label이 붙은 LP jacket에 그때의 유명했던 Pat Boone이 있었다. 그가 불렀던 Jingle Bells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TV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 라디오가 왕 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완전히 Christmas special일색이었다. 그 당시에 왜 그렇게 까지 ‘과열’이 된 상태가 되었을까? 아직도 그게 나는 궁금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분위기가 그랬어도 그것은 역시 12월 24일 하루뿐이었다. 그 전이나 그 이후에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그게 지금 내가 여기 살면서 얼마나 이곳이 그런 분위기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지 실감을 하게 된다. 요새는 거의 Thanksgiving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는 한마디로 ‘지겹다’는 느낌도 든다. ‘소박’한 기분이 거의 들지를 않는다. 너무나 상업화 되어서 그런가? Holiday blues란 말이 실감이 간다. 분명 나는 오랜 전부터 내가 즐기는 게 아니고 아이들이 즐기는 것을 보며 위안을 삼을 그 정도가 되었다. 내가 확실히 ‘우울’한 인생의 후반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12월 12일이다. 이 날짜를 우리말로 읽은 음감이 항상 기억을 더듬게 한다. 그러니까 십이 십이가 아닌가? 이날 전두환이 박정희와 비슷한 무혈혁명을 한 날이 아닌가? 1979년 12월 12일이다. 그렇다. 정확하게 30년 전이다. 아…아…하는 신음소리가 안 날 수 없다. 30년이면 어떤가? 긴 건가, 별로인가. 이제는 세월 감각이 많이 ‘역사적’ 인 단위로 적응이 되어서 별로 긴 듯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60년의 반.. 이 아닌가.
1979년 12월 12일에 우리, 그러니까 나와 연숙은 김포공항에 갔었다. 꽤 늦은 저녁시간이었는데 아마도 그날 밤에 전두환이가 일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날 전혀 그런 것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거의 결혼이 결정된 인생 최고의 기분으로 살던 때였으니까. 그날도 매섭게 바람이 불고 추웠던 기억인데 그게.. 아직도 생생하다. 연숙의 지도교수인 김숙희 교수가 미국으로 가게 되어서 공항으로 배웅을 가게 된 것인데, 아마도 그 교수에게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와 같이 나간 듯 하다. 버스를 너무 일찍 내리는 바람에 공항 터미널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그때 내가 연숙의 손을 처음으로 잡고 갔던 기억이다. 나중에 연숙의 말이 손이 추워서 혼이 났다고 했다. 그저 춥다는 말을 하면 내가 미안 할까 봐 말을 못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아름다운 추억이다. 30년 뒤에 이렇게 회상을 하니까 물론 아름답게 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때는 구름 위를 걷는 듯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걸 많이 잊고 산다. 너무나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모든 걸 미리 가정해가며 건조하게 우린 살고 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는데. 참 그게 현재 우리의 불행인지도 모른다. 그럴 능력이 모자람 없이 가득한 우리 두 ‘인간’인데. 신앙도 신앙적인 노력도 이것을 극복 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아주 싸늘하다. 아니 숫제 춥다. 이곳은 Cobb Central Library 이다. 조용한 토요일 아침, 비록 추워서 손에 입김을 불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interruption없이 ‘마음대로’ 책을 읽고, 집에서는 도저히 자주 중단이 되어서 하기가 힘들 것 같은 일들을 여기서는 할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으랴. 요새는 돋보기 없이는 책을 읽기가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거의 1년 전 까지만 해도 크게 불편이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이것을 쓰는 게 익숙해졌다. 이래서 다 살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돋보기로 보이는 나의 손등이.. 이제는 영락없이 늙었다. 그러니까 많이 쭈글쭈글해졌다. 슬프다. 하지만 이게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저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