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와 들장미

영화 보리수 광고, 1959
영화 보리수 광고, 1959

보리수, 들장미.. 허~ 웬 꽃 나무 이름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여기서는 사실 영화의 제목들이다. 머리를 짜내고 내며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 들추어서 다시 새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 두 영화이름은 사실 그렇게 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거의 50년 이상을 견디어온 그 기억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두 영화는 모두 독일(그 당시는 서독, West Germany)의 영화로써 1950년대 중반에 나왔고 수 년 후에 곧바로 ‘일본을 거쳐’ 대한민국에도 들어와서 특히 ‘재미있는 것이 거의 없던’ 그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대인기를 끌었었다.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보리수’란 영화를 국민학교 4학년, 그러니까 1957년경, 화신 백화점 옆 골목의 우미관에서 보았었다. 들장미란 영화는 사실 나는 못 보았지만 내가 ‘거의’ 본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 우리 누나가 이것을 보고 완전히 ‘빠져’ 버렸기에 사진처럼 그 장면들이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던 옛 극장 (주로 1950~60년대)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신문에 나오는 영화 광고를 보다가 보리수와 들장미의 광고를 찾아 내었다. 보리수의 광고는 1959년 신문에 ‘문화극장’에서 재개봉되는 것으로 나왔지만 내가 본 것은 아마도 1957~1958년 사이였고 극장은 분명히 우미관이었다.

누나와 우리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았던 ‘필동 아줌마’와 아침에 갔다가, 아줌마는 한번만 보고 극장을 떠나셨고, 누나와 나는 거의 연속으로 계속 몇 번을 보았다. 그 정도로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것이 ‘독일어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국’ 영화라는 것만 알았다.

‘수많은’ 예쁜 남녀 아이들이 등장하며 노래를 부르고, 장난을 치고.. 우리로써는 그 당시 ‘침만 삼키는’ 부러운 광경들을 몇 시간이고 즐긴 것이다. 영화 제목인 보리수 라는 것은 그 주인공 대가족이 살았던 저택의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의 이름이었고, 그들은 보리수란 명곡을 불렀던 듯 하다. 그것은 슈베르트(F. Schubert)의 Der Lindenbaum(보리수, 菩提樹) 이란 명곡이었다.

그 이후 나는 미국의 서부영화, 전쟁영화에 완전히 빠져서 이 영화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영화가 미국의 musical, The Sound of Music과 plot이 거의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Ohio State (Univ.)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김종수의 wife(선희 엄마)가 나에게 그것이 맞는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니까 ‘영화 보리수 = 영화 The Sound of Music‘이었던 것이다.

이제 Googling의 힘을 빌려서 찾아보니, 너무나 오래된 것이라.. 별로 나오는 것이 없었지만 ‘간단히’ 한가지만 찾아 내었다. 그 옛날 독일영화 보리수의 원제목은 역시 보리수가 아니고 The Trapp Family( Die Trapp Familie) 였는데, 이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이름이 Von Trapp 이었으니 말이 된다. 서양식은 이렇게 ‘구체적’인 영화이름을 쓰지만, 동양식으로는 조금 곤란했을 것이다. ‘트랩 가족’.. 이런 영화제목을 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보리수.. 아마도 99% 이것은 ‘일본아이’들의 발상일 것이다.

 

 

독일영화 보리수, Die Trapp Familie 1956
독일어로 나오지만 줄거리는 미국영화 The Sound of Music과 거의 비슷하다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들장미 주인공 Michael Ande
들장미 주인공 Michael Ande

들장미.. 이것도 천신만고 끝에 딱 한가지 가느다란 단서만 찾아내었다. Keyword는 역시 내가 찾아낸 신문광고에 가느다랗게 나오는 ‘원제목’.. ‘Der schoenste Tag meines Lebens‘ .. 와~~ 이것이 ‘들장미’란 말인가.. 아닌 듯 하다. 이것도 역시 서양식 영화이름과 동양식은 차이가 있기에 들장미 조차 일본아이들의 발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원제목의 ‘뜻’은 무엇인가? 비록 고등학교 1,2학년 때 독일어를 배웠건만 나는 지지리도 그것을 못했다.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 같은 정관사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Der 만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의 The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Googling이 도와준다. 독일어로 찾으니 단서가 드러난다.

역시 1957년 독일영화, 우리 말고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 이것을 그 옛날에 많이 보았던 모양, 특히 일본사람들.. 그들의 제목은 Heidenröslein, 野ばら, 한글로 역시 ‘들장미’였다. 이것은 아마도 대만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듯, 순 짱께 표현도 있는데, 그것은 野玫瑰, 한글로 읽으면 ‘야매괴‘ 이 듣기 거북한 말이 바로 ‘장미’의 순 한자어인 것이다. 이제 ‘매괴의 여왕’이 왜 성모님인가 이해가 간니, 장미의 여왕인 것이다.

이 영화 들장미에 나오는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주인공이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인 듯 싶다.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Michael Ande 는 정말 귀엽게 생겼다. 그는 1944년 생으로 그 당시 나이가 13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누나가 이 영화에 ‘홀딱 반했던’ 것은 바로 이 Michael Ande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누나가 이 영화를 보고 와서 (누나는 중학생, 나는 못 보았다) 아마 한 동안 정신이 멍~ 한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런 긴 ‘잠’에서 깨어나더니 하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비엔나 소년합창단에 ‘식모’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식구)들은 하도 기가 막혔지만 덕분에 실컷 웃기는 했다.

그런 추억의 영화를 신문에서 광고로 다시 보니 감개무량하긴 하지만, 누나를 생각하니 참 옛날이 그립고 이렇게 운명적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것이 슬퍼지기만 한다. 이런 어릴 적의 ‘보물’들을 기억이나 할지..

 

 

영화 들장미, Michael Ande가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1957

20 years ago, Storm of the Century

Storm of the Century최근에 ‘요상한 기후’에   대해서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문득 storm of the century란 것을 기억했다. 일명 super storm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치매 예방’ 기억력 test였다. 나에게 제일 알쏭달쏭한 것이 지나간 10년에서 20년 전 일들의 기억이다. 각가지 연상technique를 동원해서 아마도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일 것이라고 일단 결말을 지었다. 그 super storm이 온 것이 3월 이때 쯤인 것도 기억했다.

문제는 100% 자세한 것이 어떤 것일까.. 1992년은 우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온 해였고, 장모님과 나의 절친한 친구, 지금은 타계해서 없는 김호룡 식구가 거의 같은 때에 우리 집에 온 해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1일에 이사를 왔는데, 곧 이어서 이 super storm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1994년을 생각해보니 여름에 누님의 아들, 준형이가 다녀갔던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결국은 1993년임을 알았다.

나의 제일 큰 문제는 이 1990년대의 기억이 제일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억해내기 싫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큰 기쁨이나 즐거움, 그렇다고 특별한 괴로움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세파’속에 휩쓸려 간 듯한 그런 10년간인 듯한 느낌인 것이다.

고국이나 이곳이나 그 나이쯤이면 ‘샐라리맨’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생활을 많이 보내니까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후에 관한 사건들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때에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가 한창 유행할 때여서 그런 것들의 기록도 남아있어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것은 1993년 3월 13일, 토요일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기예보는 그렇게 ‘자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 미리 커다란 ‘경고, 경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각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얼어붙는 눈보라’ 에 그냥 당한 것이다. 다행히 토요일 아침이라 교통에 관한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냥 퍼 붙는 눈보라를 집에 틀어 박혀서 ‘즐긴’ 것이다. 그 전날만 해도 봄 같은 포근한 날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을까? 예보, 경보도 그렇게 없이..

하루 종일 강풍과 함께 쏟아진 얼어붙는 눈에 나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기도 나가기 시작하고.. 길은 완전히 얼어붙고.. 이곳 지역은 완전한 시베리아를 연상하는 광경으로 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의 전기는 나가지 않아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덩치가 큰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나중에 차가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무슨 요란한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남자 몇 명이 power chainsaw로 우리 집의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치워주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마음 좋은 아저씨’들이었다. 동네를 돌면서 우선 급한 것들을 치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TV 뉴스에서는 이번의 snow storm은 ‘아마도’ super storm, storm of the century정도로 monster 급이라고 했다. 멕시코 만에서 시작된 사상 최저기록의 저기압과 북쪽에서 하강한 cold front가 ‘완전히’ 결합이 된 그야말로 perfect storm이었다. 결국은 이 system은 우리가 사는 Georgia를 거쳐서 northeast의 덩치 큰 도시들로 갔고 그곳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것으로 느껴졌지만,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때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점점 더 큰 monster storm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찍어둔 video tape을 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년 전 우리 집 주변이 남아있고, 그 눈 속에서 ‘신나게’ 놀던 우리 집 두 아이들.. Wisconsin에서 이사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 그 추운 곳에서 타던 ‘썰매’와 겨울 옷들을 다시 꺼내어서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큰 애 새로니는 Ohio와 Wisconsin에 살 때 경험했던 눈과 얼음으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겠지만 작은 애 나라니는 거의 기억이 나지를 않는지 신기하게 눈과 얼음을 바라보며 썰매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젊었던 45세.. 와.. 정말 젊었다.. 피곤을 모르며 직장생활(‘embedded software’ engineer at Automated Logic Co)을 했고, 연숙은 home-based business, housewife, mom, PTA등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앙적으로는, 유일했던 한국본당에 ‘대 파란’이 나던 때여서 아마도 그 근처에 가지도 않던 ‘신앙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Internet이란 것이 아주 미미하게 보급이 되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는 것 같은 graphical web browser가 없어서 일반인에게는 그런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그림의 떡이었다. Email은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만 쓸 정도고, PC 는 Microsoft Windows 95 전의, 조금은 원시적이었던 Windows 3.x이 전부였고, 지금 쓰는 cellular mobile phone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틀란타 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이곳에 한인의 인구는 현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참 변한 것이 많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이 내가 40대에서 60대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20년 전 1993년 3월 13일을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Stupid (YouTube) ‘copyright police’ bot

얼마 전에 정말 오래된  vinyl LP record 중에서 통기타 시절 김세환 album을 digital format (mp3)으로 바꾸었다. 과정이 아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귀찮은 job에 속한다. 이 특별한 LP record는 1975년경에 Chicago에서 산 것으로 아마 1974년경에 발표된 것으로, 김세환 특유의 ‘감미로운‘ 곡들이 실려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자주 들었지만 Cassette tape, CD등이 나오면서 눈앞에서 거의 사라졌다가, 1990년 초에 새로 audio system을 장만하면서 큰 마음 먹고 ‘한동안 없어졌던’ LP disc turntable을 다시 사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가끔 이LP를 듣게 되었다. 문제는 그 turntable이 좋은 것이 아니어서 (너무나 fragile, 장난감 수준의 제품) LP disc를 걸 때마다 손이 떨릴 정도로 조심을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가고, 음악 듣는 방식도 많이 바뀌어서 ‘거창한’ audio system앞에서 듣는 것도 사치로 보이게 되었다. 거의 주로 desktop pc아니면 mp3 player, smartphone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보물처럼 간직했던 그 많은 LP record들을 digital format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나 같은 older generation을 의식했는지 이제는 시장에 LP record를 ‘직통으로’ mp3로 바꾸어주는 ‘smart-turntable’이 등장을 하고, high school student들이 이것으로 돈까지 벌기도 한다.

내가 택한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은 값이 많이 떨어진 personal voice recorder를 쓰는 것이다. 요새 것들은 audio recording을 곧바로 mp3 format으로 flash card에 save를 해 주기 때문에 이 방식은 거의 ‘직통’ 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래된 analog audio, music (on cassette tape, LP record, VHS tape etc)들이 하나 둘씩 mp3 audio로 바뀌면서 제 1호가 ‘오래 된’ 조동진 album audio tape, 제 2호가 위에 언급된 김세환의 LP album 인데, 요새의 standard video cloud 의 대명사가 된 YouTube에 이것들을 upload해서 Internet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도 의외로운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저작권(copyright)문제인데, 40년 전의 analog music을 digitize한 것이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문화적 유산을 보존한 것으로 상을 받아야 할 지경이 아닐까? 제일 웃기는 것은 이것이다. 김세환 앨범에 Bee Gees의 word란 곡을 한국어로 바꾸어 부른 것이 있었다. 그 위력을 자랑하는 Google의 database 속에서 그 곡이 ‘걸려들고’ 말았다.

저작권이 ‘영국’의 어느 단체에 있다는 것이다. Bee Gees의 word를 digital format으로 그냥 올려 놓았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 당시(1974) 국제문화계에서 거의 ‘거지취급’을 받던(dollar 보유고가 없어서) 한국의 ‘학생가수’가 부른 곡을 40년 뒤에 mp3로 바꾸어서 인터넷에서 다시 듣겠다는데 ‘저작권 침해’라고? 웃기지 마라.. 이것은 물론 ‘사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니고 monster같은 YouTube의 ‘감시경찰 bot’ 이란 software가 ‘실수’를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system은 보통의 사법system처럼 ‘Innocent until proven guilty’ 가 아니고 ‘Guilty until proven innocent‘ 인 것이다. 우선 ‘죄인’으로 취급하고, 억울하면 무죄를 밝히라는 것.. 참.. 웃기는 세상이다.

 

 
김세환 Gold, 1974

 

 
조동진 47 minute classics

The Homecoming, 귀향

Homecoming, 다른 말로귀향‘ 정도가 될까? 하지만 영어와 한글의 어감은 분명히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할 것이다. 언어는 그 원산지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고, 영어의 homecoming은 아무래도 서구문화적인 것, 한글의 귀향은 한반도의 배경을 흠뻑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귀향은 늙어가시는 어머님을 만나러 오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어머니, 그리고 고향이 그리워 시골길을 걷는 나그네가 연상이 되고, homecoming.. 하면 어떨까.. 폭풍설이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속에 있는 자기가 자랐던 통나무 집, 그곳에는 사랑하는 어머님이 계신 그런 집으로 기를 쓰고 찾아가는 다른 나그네, 그런 것이다.

사실 오늘 나와 연숙은 서양적인 homecoming에서 한국적인, 김치냄새기 풍기는 듯한 우리의 고향 집으로 ‘귀향한 온 기분이었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일요일 주일 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와서 본 것이다. 거의 20년 만인가.. 물론 2010년 가을부터 이곳에 레지오 단원으로 화요일 마다 들락거리고, 일요일에도 ‘과외 행사’에 참여를 하긴 했지만 “진짜” 미사를 이곳에서 본 것은 아주 우리에게는 커다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고향’에 온 것이다. 1994년 즈음 이곳을 ‘완전히’ 떠날 때, 언제 다시 올지는 전혀 idea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우리, ‘최소한 나’는 완전히 하느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미국성당에 꾸준히 다니면서 익숙해지고 친근해지고 해서, 더 ‘귀향’할 구실도 없었지만, 하느님은 오묘하신가..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2010년 가을 레지오에 입단하기 전과 비슷한 느낌.. 무엇인가 변하게 되리라는 불안하기도 한 심정 속에서 무언가 ‘결단’이 필요함을 느끼며 몇 개월이 지났는데, 우연만은 아니게 오랜 옛 ‘후배, 지인’ 설재규씨와 재회를 하게 되고, 그것의 열매가 오늘, 우리의 ‘귀향’으로 goal-in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연’만은 아님을 느낀다.

20년이 지난 주일미사의 풍경은, 흡사 내가 Rip Van Winkle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어제 본 듯한 연대동문 이원선씨를 그곳에서 보았지만, 역시 그와 알았던 것도 20년 훨씬 전이었다. 어쩌면 10년 20년.. 이렇게도 오래된 세월이 지났단 말인가? 모두가 생소한 얼굴들..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현재의 목표가 한 달에 한번 이곳에 오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가게 될지, 나도 자신이 없다.

 

 

Hagood HardyThe Homecoming

 

귀향과 homecoming이란 단어를 떠 올리면서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 바로 The Homecoming 이란 제목의 연주 곡(instrumental).. 역시 아련히 떠오르는 이 단어와 그 감미로운 연주 곡.. 이 감미로운 곡은 1970년대 말에 총각으로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때, office (graduate student)에서 자주 듣던 것이고, 그 때마다 세상에서 저렇게 감미로운 것이 있을 까 감탄을 하곤 하던 그런 곡이었다. 한번은 나의 옆자리에 있던 전기과 후배 이재현씨에게, 나는 저 곡을 들을 때마다 ‘쉬 마려울 정도로’ 찌릿하다고 ‘고백’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그 곡의 title을 몰랐고 아주 후에 그것이 The Homecoming임을 알았다. 이 곡은 캐나다 출신작곡가 (Hugh) Hagood Hardy 의 곡으로,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일설’에 의하면 TV movie였던 (Canada) drama: Anne of Avonlea/Green Gable에 삽입된 곡이었다고 한다.

고향.. 하면 어렸을 적에 일제시대 때를 연상하곤 했다. 그 어렵던 시절 고향을 ‘강제로’ 떠나 만주 등지로 갔던 동포들.. 그들은 찌들게 가난했던 고향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을 그리워했다. 세월이 지나고, 6.25 동란 때는 ‘지옥’같던 북한 땅을 떠났던 동포들.. 그래도 죽을 때가지 갈 수 없었던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그 이후에는 어떠한가? 멀리 갈 필요가 없이 나도 지독하게도 넓은 바다를 건너와 또 ‘죽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며 산다. 아니 이제는 가 보아도 ‘없어진’ 고향을 꿈 속에서 그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글 단어 ‘고향, 귀향’ 이 주는 영원한 느낌이고 의미일 듯 하다.

 

2월 중순, 와~ 춥다..

¶  2013년 2월도 반을 넘기고 이제 겨울과는 아주 멀어진 듯한 날씨에 익숙해지더니, 역시.. 자연의 ‘엄마’, mother nature는 못 말리나? 예고도 거의 없이 하루아침에 영하..로 그것도 낮 기온이 영상을 간신히 유지하는 싸늘함, 역시 아직도 춘분이 공식적인 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듯하다.

모처럼 한가한 날 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어도 문제다. 사람은 역시 몸이고 마음이고 계속 움직여야 사는 것이니까. 2013년 사순절이 지난 수요일에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우리의 매일 routine이 크게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지난 일년을 거의 사순절처럼 살려고 해서 그런가.. 이건 너무 자화자찬일 것이지만. 커피도 계속 마셔대고, 즐기던 것을 끊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취’할까.. 이것이 계획으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 과정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마음은 아직도 있다. 2월 20일부터 시작이 되니 만큼 아직도 생각해볼 여유는 있다. 지난 해 바쁘고 힘들었던 한 여름에 열심히 33일 과정을 거쳤고, 그 후에 내가 느꼈던 것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지만, 알았던 것 보다 의문과 생각할 것들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았고, 역시 다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또 역시, it’s now or never의 정신으로 도전해 볼까..

 

¶  요즈음 내가 즐기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있다면 역시 computer system hacking정도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요새 나의 관심은 mobile OS, 그 중에서도 Google의 Android (on Nexus tablets, mobile phones) ecosystem이 제일 관심이 간다. 지난 가을에 연숙 생일 때의 선물이 Google의 Nexus 7 tablet이었고, 올해 들어서 우리 가족이 family plan으로 T-mobile Samsung Galaxy phone으로 바꾼 뒤에 그 쪽으로 관심이 간 것이다. 두 system 모두 Android system이어서 이것 하나만 익히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듯하다.

이런 것들이 요새 들어서 워낙 바쁘게 변하고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2~3년 만에 ‘고물’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것들 모두 한마디로 embedded computing device들이고, 이것을 지난 25년 넘게 ‘직업적으로 만들어’ 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  정말 오랜만에 김인호 형으로부터 email이 왔다. 지난 연말 연시 때 연락이 되지를 않아서, 혹시 아프신가.. 아니면 세계일주 여행을 가셨나 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 동안에도 계속 ‘연구’만 하신 듯,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이라는 장문의 column을 쓰셨고 그것의 web links(1, 2, 3, 4)도 같이 보내 주셨다. 잠깐 읽어보니 경영, 경제 쪽의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나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이 많았다.

나의 ‘경제, 금융’ 등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 대부분 부정적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전문 용어를 제외하면 이런 평론의 논지는 짐작이 간다. 우리 세대 (인호 형은 나보다 조금 위지만) 입장의 경제, 경영론이겠지만, 그런 매체에 실린다는 사실은 세대에 구별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형만 동의를 한다면 그 평론들을 나의 blog에 전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2월 중순에 느끼는 으스스한 추위와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 소식, 영동 산간 지방의 때아닌 폭설..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을 얘기하는 김재진 시의 구절이 멋지게 어울리는 그런 날이었다.

 

세월

김재진

 

그런 잠 있었네. 낮고 흥건한

간다던 이 가고 없는

빈방에 불 켜놓고

후회없이 자리라 저녁 거르고 누운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소식 분분한데

영동 산간 지방엔 때아닌 폭설

환한 이마 찌푸린 채

가고는 오지 않을

아니면 오고는 가지 않을

그러나 사실은 가든지 말든지

아까울 것 없는 세월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

때로는

잘 나가던 시절의

해 놓고 지키지 않던 맹세 따라

가리라 가리라 노래하다 못간

그런 날 있었네.

품팔던 사람들 돌아오는 길목마다

소리없이 타버린 심지처럼

버려야지 버려야지 마음먹다 울던

그렇고 그런

그래서 그런

낮고 흥건한 세월 있었네.

 

 

¶  40년 전 이 맘 때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1973년.. 그 해 6월에 나는 나를 25년 동안 품에 안아주었던 고향산천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는 나의 긴 이어지는 역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슬프기도 하지만, 그 때는 희망과 낭만의 쌍곡선의 연속이었고, 그 당시의 추억은 역시 우리의 등대 pop song에 고스란히 얽혀있다.

그 당시에 어떤 것들이, 그 중에서 Lobo의 노래들은 쓰레기 같은 많은 것들에 눌려서 오랜 동안 숨어있었다. 다시 들어도 그것은 역시 ‘명곡, classic’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 정말 정말 오랜만이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Lobo 1973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Lobo 1973

영화 자유부인과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1956

영화 자유부인, 1956

얼마 전에, 어렸을 적에 귀따갑게 들었던 1950년대 화제의 영화, 자유부인을 기적적으로 보게 되었다. 기적적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영화는 1956년에 나온 것으로 그 바로 전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같은 이름의 정비석 원작의 신문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고, 그 당시에 불과 국민학교 2~3학년 정도였던 나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세기가 지난 뒤에 실제로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surreal한 기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화제의 단계를 넘어서 그 소설, 영화는 ‘문제작’의 수준까지도 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자유’라는 단어가 붙었던 그 당시였다. 당시의 이승만 여당도 자유당이고, 대한민국은 자유란 말만 붙으면 모든 것이 ‘멋지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급기야 ‘자유부인’이란 말까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자유와 부인“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던 비교적 엄격한 ‘남녀 유별’의 전통이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 보면 간단히 말해서 ‘남녀차별, 남존여비’의 전통이다.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런 ‘구식 전통’을 보며, 느끼며 자란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개XX’의 도움으로 6.25 사변을 거치며 거대한 미국의 ‘신식 문화’가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을 timing좋게 당시 유명했던 대중 소설가 정비석 씨가 인기소설로 이끌어내고, ‘폭발적’인 화제가 되자 곧바로 영화가 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로 바람 피는 대학교수 부부의 주변을 그린 것이지만, 특히 교수부인, 춤바람 난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결과는 비교적 예상하기 어렵지 않게 끝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 피는 여자’에 대한 질타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여자의 권리’ 같은 것도 나란히 잘 그려낸 듯 하다.

한태석 역의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한태석 역의 김동원, 1956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는데, 이 영화에 보이는 location(로케, 촬영 장소)들이 너무도 눈에 익었던 곳이어서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우선 시청과 국회 의사당 주변에서 당시의 차들이 오가는 거리 풍경은 정말 내가 보고 기억한 것과 100% 일치하였다. 특히 행인들의 옷차림: 중절모의 남자, 한복의 여자들을 보면서 ‘맞다, 그때는 그랬다’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다.

시발 택시도 나오기 전 차량들은 거의 ‘미제 시보레’ 급의 세단들과, 일본이 남기고 갔거나, 수입했던 ‘동글 동글한’ 시내 버스들.. 물론 그립던 ‘귀여운 에노 전차’들이 명동, 미도파 앞에서 굴러가는 모습들은 사진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동화 백화점, 남대문 시장입구, 미도파.. 심지어는 화신백화점 옆에 있었던 ‘신신백화점’이 깨끗이도 보인다. 이 영화의 보존 상태는 정말 어제 찍었던 흑백 사진과도 같이 좋았다.

1967년 용가리의 김동원
1967년 대괴수 용가리의 김동원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민 이란 남자배우를 보게 되었다. 귀에 많이 남았던 배우였는데, 자세히 보니 참 잘생겼다. 왜 그 이후에 큰 스타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간판배우 박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한 그의 연기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징이 없다. 여자 주연인 ‘김정림‘.. 정말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그녀가 주연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깜깜 이다. 구닥다리 안경과 새카만 콧수염의 ‘주선태‘.. 좋은 역으로 나오긴 힘든 배우고 배역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 중에 하나다.

문제는 이곳에 나오는 ‘연극배우’ 김동원.. 나는 그가 이런 ‘대중영화’에 그것도 초창기에 출연했는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연극배우’ 김동원은 아니겠지 할 정도로 조금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문제는 머리칼 머리 숱.. 내가 아는 김동원씨의 머리는 절대로 ‘대머리, 반대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당시의 가수였고, 배우 황해씨의 부인이고 전영록의 어머니

나의 머리가 빠지다 보니, 더욱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분명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연극배우’ 김동원이 분명했다. 그의 머리 스타일은 반 대머리.. 훨씬 이후에 보이는 김동원씨의 모습은 절대로 대머리가 아니고 숱이 많은 모습들이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원래 대머리였고, 그 이후에는 ‘가발’이었을 가능성과, 영화 자유부인에서 ‘역할에 의한 삭발’의 가능성..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물론 100% 확신을 할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유부인 이후의 김동원씨, 가발 수준은 정말 수준 급이라고 해야 할 듯하고, 많은 fan들에게는 그렇게 상대적으로 ‘젊은’ 모습을 남기려 했던 그 노력은 참 상당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까지 한 것에 100%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었을지 않을까.. 그저 benefit of doubt을 주고 싶어진다.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1956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자유부인 1956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바른쪽 끝에 가수 김세환씨가 보인다

 

True Love – Bing Crosby & Grace Kelly, 1956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 High Society의 주제곡

‘용가리 통뼈’의 추억

대괴수 용가리, 1967
영화 <대괴수 용가리>, 1967

얼마 전에   ‘옛 한국고전영화’ (redundant , 옛 과 고전은 거의 같으니까)를 접하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어느새 ‘옛, 고전’이 되었을까 하는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히 현재 살아서 숨쉬는 우리들의 것들이 ‘화석, 고생대, 공룡‘등과 연관이 되어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세월의 횡포’ 란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괴수 용가리‘란 ‘우리의 영화’를 보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용가리란 단어를 보면서 희미한 느낌에 ‘분명히 이것은 나의 대학시절’의 것이라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100% 자신은 없었다. 그 영화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떠오른 ‘강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통뼈’ 였다. 그러니까 ‘용가리 통뼈‘ 인 것이다. 그것이 언제였던가?

와~ 맞다 용가리 통뼈.. 그것이 처음 유행하던 당시, 참 많이 그 말을 썼다. 내가 그 말을 좋아하며 쓴 기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친구 중에 한 명이 유난히도 그 말을 좋아하며, 잘도 썼다. 그 친구는 바로 나의 죽마고우, 중앙중,고교, 연세 대학, 전기과 동창, 요델 산악회 산악인 박창희 였다.

사실 나는 ‘영화 용가리’보다는 박창희가 ‘가르쳐’ 준, ‘용가리 통뼈’를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그 뜻은 물론 그 어감이 나타내듯이, 바보스럽게 겁이 없는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꽤 많던 시절이었으니, 그 말은 참 잘도 쓰였고,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나 우리들은 그런 류의 ‘통뼈 류 인간’들과는 거리가 먼 쪽에 속했다.

기억이 그 정도에서 멈추고, 확실히 그 영화가 나온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럴 때, Googling은 역시 powerful한 것이지만, 이 정도로 ‘오래된’ 것은 역시 무리인가.. 예상을 비껴가서, 딱 한가지 자료만 찾았고, 그것도 그 당시를 ‘전혀 모르는 듯’한 사람의 ‘해괴한 변증’ 속에 파묻혀 있었다. 부산영화제 site에 실렸던 한가지 글, 그것이 바로 박성찬이란 ‘시민평론가’가 쓴 ‘<대괴수 용가리>: 한국괴수 영화의 고생대지층‘ 이란 요란한 제목의 글이다.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시민평론가치고는 꽤 이론적임을 보이려는 노력이 뚜렷한 이 글에서, 내가 필요한 것을 찾았다. 우선 이 영화는 1967년에 방영이 된 것이고, 감독 ‘김기덕‘, 주연 진에는 당시 간판 여배우 남정임, TV 쪽에 더 알려진 이순재, 조연 쪽으로는 약방의 감초, 원로격 김동원, 주증녀, 정민.. 그런데 이순재의 신혼부인으로 등장하는 여자배우.. 그녀는 누구일까, 낯이 그렇게 설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명한’ 정도는 아니었다.

1967년이면, 사실 우리 영화는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문희 등의 고정된 ‘간판급’ 얼굴의 시대였고, 거의 모두 ‘순정 멜러 드라마’ 였던 시대였는데, 이런 ‘과학공상, SF’ 영화는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 당시 국민학교, 중학교 정도의 나이였으면 물론 100% 열광을 하면서 보았을 것이지만 이마 그 당신에 나는 조금은 ‘탈 공상’ 적인 대학생이었다.

현해탄을 건너오는 소식에서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영화가 열광적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듣긴 들었다. <고지라> 같은 영화가 그런 것인데, 이런 류의 ‘일본 공룡’ 영화는 유치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서 미국에서도 이것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이 꽤 많고, 이제는 이것으로 돈을 버는 business도 있다고 들었다.

간신히 찾은 이 영화를 보니 모두 말이 영어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English dubbing이 된 것이다. 사연인즉, 역시 ‘원판’이 없어지고 ‘수출용’이 살아 남은 요새 흔히 듣는 case 중에 하나다. 1967년이 이제는 정말 ‘고생대’ 층이 된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사실, 지금 보아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그 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뜻일지도.. 문제는 역시 그 당시 ‘기술적인 수준’인데, 이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암만 ‘장난감 set’를 해도 그 당시의 수준은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일본 영화 고지라를 지금 보면 그 들도 역시 그 한계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 ‘시민 평론가’ 의 말을 조금 들어보면, 알게 모르게 이 평론가는 ‘영화 이론 평론가답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어떤 것들은 too much stretching, overreaching 한 것들도 있다. 영화의 original이 없어진 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와 미국 문화의 침투 속에 우리 것을 다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과 너무나 닮아..‘ 와 같은 논리로 비약을 한다. 하지만, ‘우주, 과학, 과학도’ 적인 자세가 당시에 우리나라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적인 영화의 효과는 그 당시를 겪어본 나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분석이다.

하지만, 3대의 ‘정상적인 부부‘의 등장을 분석하며, 이런 것들은 ‘기득층: 가부장적 부르주아의 과잉억압에서 억눌린 부류: 여성, 동성애, 신체기형자 등등이 종종 괴물로 등장하고, ‘정상 부류’가 ‘비정상 부류’를 물리친다‘는 ‘영화학자 로빈 우드’의 말을 인용한 것은 조금 ‘웃기는 비약‘인 듯하다. 이런 표현은 어떨까.. “여보세요, 지금 용가리 통뼈가 한강 다리를 들어내고 있는데.. 기득층, 피해층이 어디에 있단 말이요?” 이런 것은 정말 ‘이론을 위한 이론의 전개’의 대표적인 case일 듯하다.

더욱 웃기는 것은, 용가리와 어린이 ‘영이 (남자 아이)’ 가 아리랑 트위스트를 추는 장면에서 ‘남북의 이상한 평화’가 찾아오고, 더 나아가서 이런 ‘전통’은 나중에 <남부군>에서 적군과 같이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는 것, <공동 경비 구역: JSA>에서 남북한 두 병사들이 얼싸안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과장중의 과장은 정말 ‘압권 중의 압권‘ 일 듯. 이런 ‘이론’을 다 잊고 나는 나의 황금기 전야였던 1967년으로 돌아가서 박창희의 ‘용가리 통뼈’ 론.. 확전(escalation)으로 치닫던 월남전, 뿌연 공해먼지 속에도 힘찬 대도시로 탈바꿈하던 ‘강북’ 서울의 모습들, 미니 스커트의 여대생으로 가득 찼던 우리들의 보금 자리 다방 구석에서 꽁초까지 빨아대며 들여 마셨던 신탄지 담배 연기를 생각하고 싶다.

 

Our Mid-Winter Classic

지나간 일요일, 1월 27일은 ‘피로하게만 보이는’ 우리 집에 때아닌 대청소 하던 소리가 들렸다. 얼마만인가.. 머리 속의 ego만 커진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은 고요하기만 하고, 별로 어질러 놀 만한 것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먼지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대 청소는 아래층에만 있었다. 위층까지 할 힘도 없고, 절실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Guest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에 오는 손님들인가..

이번의 모임은 내가 붙인 이름이 ‘mid-winter classic‘ 이다. Mid-Winter는 1월 말에서 2월 초 정도에 있다는 뜻이고, classic은 이 모임이 그만큼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마 15년은 되었을 듯 싶다. 이 정도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이다.

4집 부부(가족)가 ‘가끔’ 모여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이 그룹은 시작이 15년 전쯤, 서울고,서강대 출신 최동환 (Phillip Choi), aka, ‘최형’ 과 연관’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훨씬 전에 우리 부부가 아틀란타 한국학교 에서 가르칠 때, 나의 반에 최형의 외동 딸, 진희(Alicia)가 있었고, 최형은 ‘아빠’로서는 드물게 학교에 얼굴을 보이곤 했었다. 그때 그의 인상이 참 자상한 아빠로 남았고, 항상 웃는 모습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기억이다.

우리가 한국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인연이었을까.. 우리 작은 딸 나라니와 한국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었던 인연으로 나라니의 생일에 진희를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대부분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곤 하는데, 그 당시 진희는 꼭 아빠가 데리고 왔기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인연이었다. 엄마가 데리고 왔더라면.. 아마도 이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고, 얘기를 좋아하는 최형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새 통성명을 다시 하고 보니 그는 서울 최고 명문인 덕수국민학교, 서울고등학교, 서강대 화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집 근처의 어떤 한국식당에서 정말 우연히 최형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다른 ‘우연’을 맞게 되고, 드디어 진희 엄마도 보게 되었다. 둘 다 나이가 우리부부보다 한두 살 정도 아래였던 이곳에서 ‘고르기’ 힘든 부부 ‘친구’를 얻은 기분이었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식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친구’를 별로 사귀기 꺼리며 살던 나도 이런 모임은 거부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 수준의 한국말’을 다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인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일까.. 추억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좋은 것일까.. 만나기만 하면 어렸을 적 서울거리를 회상하며 열변을 토하곤 했으니까..

최형은 역시 성격 ‘탓’인지 사람들을 좋아하며, 잘 사귀었고, 특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몇이 있었다. 곧바로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에는 Ohio State동문인 나이가 한참 밑(10살 이상)인 ‘전 사장’도 있었고, 최형의 서강대 동문인 윤형, 지금은 2005년에 타계해서 없는, 이대부고,경희대 출신 박창우씨가 있었다. 그렇게 모인 사연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아주 인상적이었고, 역시 최형의 ‘사람을 끄는 힘’이라는 공통분모가 이모임에 있었다고 느낀다.

직업도 다양해서, 최형네는 jewelry wholesale, 윤형댁은 liquor retail, 전사장네는 Italian Furniture, 박창우씨 댁은 fashion clothing retail..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businessmen들이었다. 나만 예외적으로 비교적 시간의 여유는 있지만 항상 cash가 모자라는 월급쟁이여서, 항상 나는 ‘공통관심사 화제’에서 애를 먹으며 그저 이 ‘이상한 나라의 얘기’를 듣기만 하곤 했다.

이중에서 2005년 여름이 정말 아깝게 타계한 박창우씨, 생김새에 비해서 호탕하고, 잘 놀며, 활달한 사람,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의 중심지에 대한 해박한 경험과 기억력은 우리를 항상 놀라게 했다. 특히 어느 곳에 무슨 술집, 다방이 있다는 것은 정말 ‘사진과도’ 같은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양반’의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고 실감나고, 흡사 time machine을 타고 1960-70년대를 간 것과 같은 기분에 빠지곤 했다. 특히 ‘동네 친구’인 트윈 폴리오 folk duo 중에 윤형주에 대한 이야기, 당시의 명소였던 명동 OB’s Cabin 에서 술김에 노래를 부르던 조영남을 ‘팼던’ 이야기 등등.. 나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이야기들.. 언제까지나 들으려 했지만 하느님도 무심하시게 너무도 일찍 데려 가셨다.

이날 모임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소식은, 최형의 외동 딸, 진희 (우리 딸 나라니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단원’이 되었다는 사실..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진희는 아주 자유분망 (easy going)해서 어떻게 이렇게 ‘조직적인 신심단체’에 가입을 했을 까 상상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적인 격차를 초월해서 꾸리아 모임에서 그 ‘애’를 보게 될 생각을 하니..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사실 당황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일 것이다.

12/12/79, 눈발 날리는 백양로, 1968

2012년 12월 12일도 어제로 지나갔다. 12/12/12로 ‘난리’를 치는 사람들.. 참 부럽다. 단순한 부류의 사람들일까, 아니면 참 한가한 사람들일까 생각도 나지만, 12가 세 번씩이나 겹치는 것보다는 각자의 일생에서 드물게,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숫자이기에 그럴 것 같다. 우선 13/13/13은 아예 불가능 할 것이고, month의 숫자와 맞는 햇수라면.. 2101년이 되어야 01/01/01 라는 숫자 놀음이 가능한 것이다.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2012년에서 2101년까지의 공백이 생기고.. 앞으로 89년을 더 살아야 그것을 보는 것이다. 현재의 ‘피상적인 의학’의 발달을 감안 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20대나 30대 정도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로써는 정말 오랜만에 ‘백일몽’같은 생각과 망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이것도 인간이 겪는 유한성, 잠깐 왔다가 가는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피조물’의 신세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요새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달렸고,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매년 12월 12일이 되면 연숙과 빠짐없이 한가지 얘기를 나누며 웃는다. 1979년 서울의 12월 12일을 서로 회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날 밤에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빌미로 전두환이 무혈 쿠데타를 하던 날이었다. 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오기 바로 전에 우리 둘은 김포공항에서 연숙의 지도교수 김숙희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그 쿠데타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기억을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날 저녁 김포공항으로 둘이 걸어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연숙의 손을 잡은, 그것을 회상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결혼 약속은 얼마 전에 했지만 손을 잡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더욱 재미있었던 사실은 그날 날씨가 매섭게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라서 손목을 잡힌 연숙은 너무나 ‘고생’을 했다고 한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해맑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날 12/12가 남았다.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의 모습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 screen, New York Central Park

오늘 아침에 나의 workstation kvm virtual pc의 desktop background art를 보니, 이것은 거의 흑백으로 눈에 덮인 뉴욕 city, Central Park 의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바뀐 것이 한 달도 채 안되지만, 이것을 보면서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아름답게 기억되는 광경이고, 그것도 역시 흑백의 영상이었다. 그곳은 바로 연세대의 상징인 백양로.. 그곳이 완전히 눈 속에 쌓이고 있던 그 광경이었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려 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계속 생각해 본다.

1967년 겨울 아니면 1968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겨울 방학 때였고, 성탄이 훨씬 지난 때였다. 그러니까 1월 쯤이었을 것이다. 한낮에 함박눈이 그야말로 ‘펄~펄’ 내리던 날, 시커먼 공해로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서울거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그런 날, 어찌 나와 같이 한가한 사람들이 집의 안방에 앉아있겠는가? 지독히도 한가했던 대학시절의 겨울방학의 ‘누에고치’ 속에서 나는 눈 덮인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상도동 버스 종점에 살던 나는 ‘portable’ FM radio를 들고 나갔고 시내 버스 <상도동-모래내 >를 타고 연세대로 갔다. 왜 그곳에 갔는지.. 하기야 그 당시 잠깐 갈 곳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연대 앞 굴다리 앞에서 내려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백양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작지도 않았던 ‘소형’ 금성 FM radio를 들고, 신나게 pop song을 들으면서.. 눈 속에서 기가 막히게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던 연세대 백양로.. 이제 시간적인 단서가 잡힌다. 그것은 1968년 한겨울 방학 중, 1월 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서재에 보이는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와 SPAM can 재털이
나의 서재,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 SPAM can 재털이 1968

그 당시의 timeline을 확실히 잡아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진인데, 바로 여기에 보이는 사진, 나의 책상에 놓여있는 새로 산 금성 FM radio, 이것을 찍었던 때가 1968년 3월 경. 1967년 성탄 때에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FM radio였다.

그 당시에 들을 수 있었던 FM 방송은 딱 한군데였지만 물론 미8군의 FM 방송은 그 훨씬 전부터 있었다. 잡음이 많았던 AM 방송에 비해서 FM방송은 정말 음이 깨끗해서 대부분 classical 쪽의 음악을 방송하곤 했다. 이후에 이 radio는 장기간 등산을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사진에도 몇 군데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969년 여름에 요델 산악회 친구 박창희와 갔던 소백산, 그때의 사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수준은 그렇게 간단하게 보였던 FM radio를 ‘간신히’ 만들고, 커다란 업적을 이룬 ‘금자탑’으로 소개하던 때였다. 일제를 배척하던 것이 애국이었던 당시에 그나마 ‘국산’으로 그렇게 깨끗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때, 그것을 들고 함박눈을 맞으며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걸으며 ‘백일몽’을 꾸던 그 죄 없던 시절이 왜 이다지도 그리울까.. 육신적으로 다시는 못 겪을 일이지만, 기억이라는 선물이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이종원, 이경우, 이경증, 윤인송, 이진섭, 김호룡, 신창근

 

Postscript: 나의 머릿속의 기억을 뛰어 넘어서 그 당시의 서울 일간지를 인터넷으로 찾으면 아마도 그 함박눈이 내렸던 날짜까지 확실히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한가함을 달래주는 좋은 project가 아닐까.

 

 
그 당시에 듣던 golden oldie, Ruby Tuesday by the Rolling Stones, 1967

 

인생은 Given Way (?)

서서히 물러가는 2012년, 올해에 기억에 남는 큰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1965년 초에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 김인호 형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이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다시 연락이 된 경위는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먼저 1960년 중반 때의 서울 일간지를 훑어 보다가 (물론 인터넷으로) 영화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거기서 ‘박계형’ 이란 이름을 보게 되었다. 불현듯 스치는 것이..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애인’이 바로 그 당시 베스트셀러 소설의 ‘대학생 저자’ 박계형 이었던 것이 기억이 난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그 ‘박계형’이란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blog에 내가 기억하던 아르바이트 “서울고, 서울상대” 대학생 김인호 형을 회상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정말 정말 ‘우연히’ 인호형이 보게 된 것이다. 정말 모든 것들이 우연의 연속이었다. 이것까지 필연 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지만, 누가 알랴.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은 어딘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서로 email을 교환 하면서 형이 보내 준 이미 공개된 ‘글’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서울 상대 동창회지에 실렸던 글 같았다. 서울 상대에 입학하게 된 동기나 경위도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인생의 여정이 정말로 ‘웅장하게’ 압축 된 글이었다.

이미 공개된 글이라서 다시 공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해서 나의 blog에 전재를 해도 좋겠냐고 물어 보았는데.. 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글이 너무 솔직한 인생의 고백록 같아서 나는 ‘무엄 하게도’ 이렇게 공개하기로 했다.

 

 

+ Deo Gratias

 

인생은 Given Way (?)

 

 

김 인 호 (서울상대 상학과 19회)
한양대 명예교수 (경영학)

입학 50주년이라니 문득 서울상대를 지원하게 된 연유가 새삼 닥아 온다. 고3 내내 이과(理科)반을 듣고서 느닷없이 문과인 상대로 왔기에 말이다. 원래 성품이 온순했던 탓(?)에 여름방학 하던 날 (당시엔 실제로 이날부터 고3생의 대입특강이 본격화되는 첫날이었음) 무기정학을 당해 50일을 열외가 되다보니 대입지원서 작성 시 가장 중시되는 고3 2학기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의예과 아니면 서울공대 화공과나 기계과를 써달라는 나의 막무가내와 이 점수로는 서울대 어떤 과에도 못 간다는 담임선생님과의 승강이 끝에 ‘자네 상대가면 어때?’ 하는 급작스런 제의에 선택과목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문과인 상대를 갈 수 있느냐고 항변하자 나의선택과목인 화학과 생물을 가지고도 서울상대에 응시가 가능하다며 지원서를 써주셨던 선생님. 전형조건이 그 전해의 것과 같을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상대지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상대는 애초부터 전혀 고려조차 않고 있었던 터였다. 기실 그 전해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부터도 또다시 안 되게끔 다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해엔 어쩐 일로 가능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어떤 손길이 아니었나, 쉽다.

아무튼 일순간에 이과에서 문과로 나의 행로가 180도 바뀌었고, 이후 상대생활은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분위기 덕에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인 4년을 얼렁뚱땅 마치게 되었다. 나는 곧장 국방의무를 보다 충실하게(?) 다하고자 공군장교 코스를 택했다. 소위로 임관된 지 4개월여쯤 되던 어느 날 국군의 날 행사일환으로 당시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군사관학교 종합체육대회응원단으로 차출되어 응원을 마치고 공군장교버스를 타고 오산으로 귀대하던 중 수원 세류동 건널목에서 내가 타고 있던 공군장교버스가 서울발 하행열차에 박치기 당해 즉석에서 3명의 장교가 죽고 약 5-60여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난 얼굴과 몸이 묵사발이었는데도 피가 안 나는 바람에 경상자축에도 끼이지 않을 만큼 운이 좋았던 몇몇 장교 중 하나였다. 몇 십 미터 열차에 끌려가며 구겨지는 버스 안에서 순간 ‘야,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어릴 적서부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온 긴대목이 일순간에 쫙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묘한 체험을 잊을 수가 없으며 이는 나로 하여금 그 후 지금까지도 우리 삶과 또 우리의 기억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기게끔 해 준다.

아무튼 그때 그 사고는 당시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많은 사유의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때 그 충돌사고는 과연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물론 사고가 난 다음에 생각이 미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탄 장교버스와 그 기차는 노량진역을 지날 때에도 나란히 같이 가고 있었고 또 안양으로 진입하는 구름다리 위에서도 같이 마주쳤던 것이 아무래도 우연 같아 보이질 않았었다.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만사가 필연 아닐까,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등등. 어느 문학도의 여유로운 넋두리가 아니라 당시 나에겐 대단히 심각한 현안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그 사고는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사고 후 몇 달이 지나 사고후유증이 거의 가시어 갈 무렵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같이 초등학교 다녔던 한 여학생과의 상봉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던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은 이런 나의 사유를 더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삶과 죽음의 견지에서 볼 때 내생명이 내의지로 또는 내 부모의 뜻에 따라서 생성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 또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 한 적어도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는 추론을 당시 난 쉽게 받아들이고 있던 터이었으므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두 젊은 남녀는 그래서 자연스레 아무 장애 없이 그이후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난 공군제대를 2, 3개월을 앞둔 어느 날 내 근무지였던 공군본부로 찾아온 어느 선배의 스카웃 아닌 스카웃으로 KIST에서 첫 작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과를 듣고도 상대를 다녔던 내가 첫 직장을 이과의 본산인 KIST에서 시작하게 된 것도 과연 우연이었을까,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KIST에 입소한 그해 늦가을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집안인 처갓집의 요구대로 성당에서 관면혼배라는 것을 했고 또 일반예식장에서도 결혼식을 올리는 등 두 번의 행사를 거쳐 드디어 원하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뒤이어 제왕절개로 힘들게 얻은 첫아들은 나에게 또 한번 생명의 신비와 생명의 주관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해 주었다. 양수과다증이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태어난 첫아들은 식도가 위가 아닌 기관지와 연결되어 있는 태중에서부터 기형이었던 것이다. 기형이란 사실을 처음 알려주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까무라쳤고 잠시 후 깨어났는데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내 죄 때문에 저애가 내벌을 받고 저렇게 태어났구나, 라는 죄의식이 내 인생 안에서 최초로 강력하게 밀려왔다, 사실 난 그 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죄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천방지축의 생활을 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술시키겠다며 울부짖는 나를 진정시킨 병원 측의 말은 수술성공률은 제로이며 애를 수술시킨다는 것은 자기네에게 애를 실험용 재료로 내주는 일일뿐 아니라 수술비용도 퍽 많이 들므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충고였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고 의논한 끝에 결국 병원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며칠 후 졸지에 배를 가르고 첫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에 차있던 산모의 충격을 달래며 빠른 퇴원수속을 밟던 중 이미 세상을 떴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접한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네가 뭔데 감히 한 생명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느냐? 는 음성에 난 성공가능성이 제로일지라도 수술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술을 서두르는 나에게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무리 서둘러도 월요일이라야 수술이 가능하다며 집도의사가 던진 또 한마디 말, ’수술은 내가 하지만 애가 살고 안 살고는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란 당시엔 퍽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술은 잘되었다고 했다. 그간 동일한 수술에서 제일 오래 산 아이의 기록이 2주일이었는데 2주일이 지나자 국내기록을 깼다는 것이다. 약 40여일이 지나자 이 수술은 국내 최초의 성공이라며 퇴원시켜도 좋다는 집도의사의 말에 따라 집으로 데려 온 아이는 아주 강건하진 않았지만 보통아이처럼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로 정상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mental 면에서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불안감을 달랠 겸 또 생명의 주관자(사실 난 그때 소위 때의 교통사고와 첫애의 탄생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존재케 하는 주관자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도 인정할 겸 해서 난 집근처의 성당신부를 찾아갔다. 왜 왔느냐는 신부님의 물음에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왔다는 나의 답변에 앉기를 권한 후 양주 한잔을 건네며 느닷없이 엄숙한 어조로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나에게 재차 묻자 ’약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났던 한 청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자 ‘그러면 그분이 우리와 다른 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하며 연이은 질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인성(humanity)을 지닌 인간인 동시에 또한 신으로서 신성(divinity)도 지닌 분으로 듣고 있습니다.’ 란 나의 답에 ‘내일 모레 오시오 내가 영세를 주겠소. 올 때 본명(세례명)이라는 걸 하나 지어갖고 오시오.’ 하며 가도 좋다고 했다.

물론 당시엔 몰랐지만 그 분은 벨기에에서 신학을 공부한 좀 트인(?) 분이었던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옛날 서울고를 다닐 때 광화문 코너에서 언젠가 보았던 국제극장의 영화간판에서 ‘스테파노의 세레나데, 란 뮤지컬 영화제목이 퍼뜩 떠 오르길레 본명을 스테파노로 정하고 영세를 받게 되었다. 이는 최소 6개월 이상 교리공부를 거치지 않으면 영세를 주지 않던 당시의 관례로 본다면 난 분명히 엉터리로 영세를 받은 것이고 또 그 신부님은 엉터리로 영세를 주신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공군소위 시절 당한 교통사고와 제대 후 결혼과 첫애의 태어남과 포기 그리고 그 다음 수술성공으로 인한 재탄생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던 젊은 날의 나와는 달리 생명의 원천이 어디이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존재가 누구이신가의 관점에서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우리가 자유의지로 어기는 것이 죄며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 지은 만큼 벌을 받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꽉 차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견지에서 우리가 지은 죄가 사(赦)하여지려면 반드시 죄 없는 존재가 내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바로 육화(incarnation)되어 오시어 우리 죄의 대속(代贖)제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어떤 죄도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 지식의 원천임을 알게 된 나에게 그분은 커다란 은총으로 내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던 교직을 천직으로 주셨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당시 보이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국이 수정헌법을 통해 도덕 다원주의를 그리고 영적세계의 중심인 로마가톨릭교회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자 더욱 기승을 부리며 판을 치는 대 혼란의 격랑 속에서 미국사회와 로마가톨릭교회야말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최대 피해자임을 교직기간동안 확인할 수 있는 눈도 주셨다. 그래서 난 내 전공영역인 경영전략과 기업윤리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엄존’함을 근거로 상대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에 입각한 ‘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를 amazon.com과 해외학회에서의 발표, 세미나, 특강 등을 통해 국내?외 학계와 산업계에 보급 확산시킬 수 있는 토양도 갖추게끔 해주셨다.

상대입학 후 어느새 훌쩍 지나버린 50년 세월은, 인간은 자기의지로 뜻을 세우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고 않고는 온전히 하느님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을 터득케 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첫애가 잘못 태어났을 때 내 죄 탓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던 마음을 보시고 아들을 살려주셨음같이 낮 추인 마음을 그분은 아니 낮추어보신다는 성경의 경구도 참임을 굳게 받아들이게끔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누구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낮출 때라야 하느님께서 천상은총을 듬뿍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순간 죄를 성찰하며 만물을 만드시고 보전하시며 다스리고 계시는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송민도, 송민영, 김시스터즈, 목장의 노래

YouTube video를 download하는 software (요새는 이런 것들은 모조리 Apps라고 부른다.. 이것도 Steve Jobs때문인가. 이것은 물론 applications software를 줄인 말이다.), ‘Free YouTube Download‘를 test 하다가 우연히 까마득히 먼 옛날 1950년대의 유행가 ‘목장의 노래’를 찾고 보게 되었다. 이 clip은 사실 나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것이었다. 2분 30초의 짧은 이 video에는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고, 그 추억도 사실 거의 60년도 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 자체는 아직도 가사를 외울 정도로 생생한 것이지만, 여기의 주인공들은 사실 책, 잡지 같은 것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이들은 거의 radio를 통해서 알려진 유명인 들이다. 그러니까 TV가 널리 보급되기 전에 이들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이 video clip은 정말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물론 가운데 서있는 송민도 씨, 들러리를 서있는 아가씨들은 그 유명한 김 시스터즈, 악단 지휘자이며 멋진 baritone을 구사한 미남은 송민도 씨의 남 동생인 송민영 씨.. 와~~ 이들은 모두 그 당시 유일한 AM Radio HLKA를 통해서 육이오 전쟁 후 피로에 지친 국민들에게 그나마 위로와 기쁨을 주던 최정상의 연예인들이었다.

이 video가 어떤 show를 보여 주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1955년에서 1957년 사이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2학년에서 4학년 사이가 될까. 왜냐하면 김 시스터즈는 그 즈음에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아마 송민도 씨도 그 즈음에서 연예계를 떠났을 것이다. 녹음 상태가 그 당시의 녹음 기술 과 오랜 세월 탓으로 별로지만 송민도 씨의 육성은 정말 그 당시에 듣기에 우렁차고 낭랑했었다. 김 시스터즈는 완전히 미국으로 갔고, 송민도 씨와 송민영씨는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듣기에 송민도 씨도 미국으로 왔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른다. 송민도 씨의 이 ‘목장의 노래’를 들어보면, 아침을 ‘아츰’.. 하루를 ‘하로’라고 발음을 하는데 이것은 어떤 사투리인지 모르겠다.

 


목장의 노래, 송민도, 1950년 대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원도 다시 한번, 1968
미원도 다시 한번, 1968

42년 만에 다시 생각해 보는 유치하기도 하고, 진부하기도 한 이 구절은 물론 1968년에 대한민국에서 나온 영화의 제목이요, 주제곡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연히 Internet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참 감회가 깊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42년이면 강산이 최소한 4번 변할 정도라고 하지만 요새의 강산은 아마도 그보다 더 변했으리라..

나는 이 영화를 아마도 개봉관이었던 을지로 4가쯤이 있었던 국도극장에서 당시 같이 모이곤 했던 혼성그룹의 여대생들과 같이 보았을 것이다. 당시는 사실 외국, 특히 미국문화가 판을 치던 당시라서 국내의 영화는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대학생이 되면 사실 국산영화는 피하는 것이 ‘멋’이었다. 국내 영화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만은 예외였다. 그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수준 작’이라고 평가를 했었던 것이다.

최고의 배우였던 신영균, 문희, 전계현, 박암.. 우선 cast가 화려했고, 비록 ‘신파조’의 진부한 story였지만,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자아낸 영화였었던 것 같았다. 우리의 나이에서 그 영화를 보면, 그저.. 와 저 남자 참 복도 많구나.. 하는 정도였지만 남녀관계, 특히 결혼과 가정과의 역학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도 되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끼는 것 중에는 신영균, 생각보다 세련되었고, 연기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문희의 연기는 기억보다 실망적이었다. 그 당시 영화기술의 수준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넣을 수 없었으므로(동시 녹음) 성우가 대신 대사를 했는데.. 그것이 문희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를 않았다. 당시에 나는 문희가 ‘최고의 미인’으로 기억에 남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사실은 ‘별로’ 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내가 보는 ‘미인’의 눈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나는 영화에서 보이는 그 당시의 배경 물들 (길거리, 버스, 택시, 집안 풍경)이 더 흥미로웠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보고 나의 기억은 퇴색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곡도 영화와 같이 크게 인기가 있었는데, 당시의 역시 최고로 잘 나가던 ‘이미자’, ‘남진’이 같이 불렀고, 나는 영화보다 주제곡이 더 좋았던 기억이다.

멜러드라마의 특징은 모조리 갖춘, ‘눈물을 찔찔 짜게’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그 목적은 달성한 영화였고,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느낌이 비슷하니 이것이야 말로 한국의 movie classic이 아닐까?

이 movie classic미워도 다시 한번‘은 이곳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재동학교 백승호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할 때면 그 느낌들이 갖가지임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나도 피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희미한 기억들이라서 그런지 실제라 기 보다는 파란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듯한 거의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한마디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싶은 친구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금 급속히 저하되는 듯한 기억력과 싸우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blog은 사실 그것을 위해서 시작했고 계속 그런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나의 감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것도 이제는 쉽지는 않다. 사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어린 친구들은 그 당시의 사진이나 앨범들을 보면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분명히 친하게 뛰어 논 기억은 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는 더 자세히, 생생히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승호의 기억이 유난히 머리에서 맴돈다.

백승호, 재동국민학교졸업앨범에서, 1960
백승호,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에서, 1960

나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이 백승호는 1958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였다. 한때 아주 가깝게 지냈고 분명히 서로 좋아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인가,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친구였었던 기간이 1년도 채 안되게 짧았지만 아직도 어제 본듯한 기분인 것이다. 원래가 잘 웃는 얼굴의 이 친구, 백승호 6학년 때 헤어지고 말았지만 멀찍이 볼 양이면 저 애는 나의 친구였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백승호는 완전히 나의 시야, radar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되었던 다른 친구 신문영처럼 이 친구도 거의 꿈같이 연세대 campus에서 보게 되었다. 신문영은 몇 초 정도 잠깐 보고, 혹시 저 친구가 신문영.. 하며 어 떨떨 했었지만 이 백승호는 아예 자주 얼굴이 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ROTC(학훈단, 일명 바보티씨) 생도의 모습으로 자주도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눈에 보일 때마다 왜 나는 반가운 마음을 접고 ‘모른 척’을 했었을까? 성격 적으로 그 당시 나의 먼저 나서서 백승호를 아는 척 못했을 것이다. 그저 멋 적은 것이다. 느낌에 어떤 때는 백승호도 나를 보았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그도 멋 적어서 나를 모르는 체 했을까.. 그것이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백승호의 image는 이곳 저곳에 남았다. 재동국민학교 5학년 시절의 사진 2장,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하지만, 연세대 앨범.. 을 기대했지만 그는 1966년 입학으로 나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한 듯, 그곳(1971년 앨범)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학훈단 베레모를 쓴 모습도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공학부 토목학과를 다녔던 듯 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살아온 역사를 알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바램일 것 같다. 하지만 build it, they’ll come의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찾았다! 재동학교 6학년 1반 신문영

나는 몇 개월 전 이곳,   나의 blog에서 연세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신문영을 그의 졸업앨범 사진과 함께 같이 다루었다. 그 많은 재동국민학교 동창생 중에서 신문영은 나의 희석되어가는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기에 얼마 전에 그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나는 사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나의 blog을 ‘우연히’ 보았기에 연락이 되었을 것이라 serony dot com blog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제일 궁금했던 사실들 대부분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1960년 중학입시에서 어떤 중학교에 갔느냐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경복중학이었다. 다른 재동 동창 심동섭이 경복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다른 동창 조성태, 정세종, 장세헌 등도 같이 경복중학교에 갔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조성태, 정세종은 같은 분단에 있어서 아는 동창들이고, 장세헌은 1학년 때 같은 반인 것만 기억을 한다.

이번에 email로 느끼는 신문영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듯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학교 당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서 삼선 고교로 갔다’ 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부선망 단대독자(아버지가 없는 외아들)로 군대를 안 갔었다고 했고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느낌에 아주 ‘정석적’인 인생을 산 듯했고, 명함을 보니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재동학교 동창회가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회장은 김영환, 일년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했고, 거기서 이만재, 육동구 등도 보았다고.. 듣기만 해도 흐뭇하고.. 부럽고.. 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모이면 사진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만 바라지만, 세월의 횡포로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문영을 기억하면 꼭 같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1959년) 때 같은 분단 (공부를 제일 잘하던 1분단)에 있을 때 어느 날 이른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담임 박양신 선생님이 나와 신문영을 부르더니, 심부름 좀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선생님이 댁에서 가져와야 하는 물건 (서류?)이 있으니 둘이서 곧바로 선생님 댁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우리에게는 큰 일에 속했다. 왜 나와 신문영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을 믿고 그런 일을 주신 것이 내심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간에 학교를 빠져 나와서 인사동 입구의 선생님 댁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모험 같고 신기롭게만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모양이다.

아들 딸 모두 결혼, 손주들까지 있는 신문영, 부럽기도 하고, 보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도 가상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니 이만큼이라도 오래 살았다고 위로를 하며 만족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다시 찾은 인호 형

인호 형, 김인호 형을 다시 인터넷을 통해서 다시 찾게 되었다. 실마리는 나의 blog 을 정말 ‘하느님의 뜻’으로 인호 형이 보게 된데 있었다. 시간적으로도 사실 아주 빨랐다. 요새는 가끔 이렇게 surreal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긴 하지만 이것도 점점 빨라지고 거대해지는 global information network를 감안하면 이런 추세는 가속화 될 듯 싶다. 비록 전화를 통한 음성은 못 들어도, 가깝게 느껴지는 문자 소식으로 50년이 가까워오는 거대한 세월의 징검다리를 넘는 듯 느꼈고, 가벼운 흥분 감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인호 형이 나를 ‘분명히’ 기억하는 사실에 더욱 반가웠다.

유명인이었던 박계형 여류 작가의 조그만 신문광고가 이렇게 나를 50년 전 나를 잠깐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인호’ 형을 찾게 되어서 형의 부인이신 박계형 여사에게도 특별한 감사의 심정을 전하고 싶지만.. 조금 시기상조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 옛날, 나는 여사의 ‘청춘 물’ 책을 ‘하나도’ 읽었던 적이 없지만 근래에 들어서 쓰신 책들은 무척 많은 관심이 간다. 특히 이번에 알게 된 여사의 심혈작인 ‘환희’는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대학생과 고교생으로 만났던 때를 50년 훌쩍 뛰어넘어서면 ‘호칭’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비교적 쉽게 그때와 같이 ‘인호 형’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인호 형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데 없이 나타난 환갑을 훌쩍 넘긴 ‘동생, 제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곤혹스러웠을까.. 이해가 간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그저 나보고 ‘경우 야..’ 하고 불러주면 너무나 반가울 터인데..

친절하게도 두 번째 편지에서 형의 ‘과거와 종교관’ 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을 보내주셨는데, 아마도 형의 출신고교인 서울고교 동창회지에 투고된 글인 듯 싶었다. “인생은 Given Way“라는 제목의 일종의 ‘고백록’은 형의 고통과 영광스러움이 조화된 아주 멋진 신앙여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대강 나의 ‘형이 긴 인생여정에 대한 호기심’ 은 충족이 되었다. 대강 추측을 해 보면 우선 박계형 여사는 천주교 집안 출신이었고, 형은 관면혼배로 결혼을 했던 것 같아서, 그때까지만 해도 교인은 아니었던 듯.. 이 글로 나의 궁금증이 풀린 것은 다음과 같다.

  1.  나를 가르칠 때 상대생(인문계)으로 왜 그렇게 과학이론을 여담으로 가르쳐주었나 하는 것은, 형이 원래는 서울고교 재학 당시 이과에 속했고, 이공대를 지망했었다는 글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갑자기’ 공대 지망에서 상대로 바꾸어서 진학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2.  박계형 여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원래 형이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박여사를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했고, 대학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이 공부를 하던 1965년 형이 서울상대에 다닌 그때에는 사실 박계형 여사와 다시 만나기 이전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나중에’ 형의 친구였던 건우형을 통해서 우리 집에 전해졌을 것이다.
  3.  인호 형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역시 공군 장교 근무 중에 당한 ‘대형사고’ 의 후유증과,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던 문학소녀 박계형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 아니었을까?
  4.  그러한 ‘부부결합’ 된 신앙가족이 꾸준히 신앙을 지키게 되었던 것은 다음에 일어난 첫 아기(아들)의 ‘생명을 건 수술’ 이 도움이 되었을까.. 그리고 거의 ‘공짜’로 받게 된 형의 영세도 ‘생각하며 서서히 진행된’ 긴 신앙여정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을 듯하다.
  5.  제일 궁금한 것은 역시 형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경영학 이론, dynamic management theory인데.. 단순히 요새의 networked economy를 의식하고 가볍게 만든 것이 아니고, 형의 인생관, 종교관, 세계관 나아가 우주관이 총 집결된 그런 조금은 ‘높은 곳’의 이론이 아닐까.. 특히 엉망진창인 세계경제, 특히 미국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새로운 ‘절대적 기준’의 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다신 ‘만난’ 형은 나에게 부인인 박여사의 심혈작 ‘환희 1.2부‘를 보내 주시겠다고 했고, 나는 정말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 이것도 형의 인생 반려자였던 여사의 인생,종교관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인호 형을 처음 우리 집에 소개시켜 주었던 건우 형, 내가 ‘이건우‘ 가 아닌 ‘박건우’로 성을 잘못 알고 있어서 정말 당황하기도 했다. 그저 ‘건우 형’으로만 알고 있어서 성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정말 ‘창피’한 노릇이었다. 나의 어머님이 아직도 살아계셔서 이 사실(인호 형을 찾은)을 알았으면 얼마나 반가워 하셨을까..

book, dynamic-management

 인터넷 경제에 부응하는 새로운 경영학 이론, 김인호 교수와  북경대 교수들 공저

 

 

대구의 불볕 더위

heat wave, 2012
6월 마지막 날의 대구같은 더위

“대구 같은 더위”가 최근 이 지역에 들이닥쳤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3자리 숫자의 더위, 그러니까 화씨 100도, 섭씨로 36도 쯤 되나.. 심리적으로 이 세자리 숫자는 꽤 으스스한 효과가 있다. 시원하게 올해 초여름을 즐겼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 난 듯하다. 다행히도 이번의 불볕은 습기가 별로 없는 듯해서 견딜 만한데, 이것은 아마도 미국 Southwest, 그러니까 미 남서부 ‘아리조나’ 주 지역 같은 더위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이 3자리 숫자의 더위는 까마득히 오래 전 대한민국 대구를 생각하게 한다. 좀더 자세히 기억하면 1972년 쯤이었나.. 그 해 여름은 한반도가 전체적으로 무척 더웠다. 에어컨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서울의 기온도 34~5도까지 올라갔는데, 그 해 처음으로 ‘습기’를 동반한 ‘찜통’ 더위가 며칠 계속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기억이다.

당시에는 사실 조금 ‘겁’을 먹기도 했는데, 그것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어디 도망을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우면 무언가 덮고, 입고 하면 될 터인데, 이렇게 견딜 수 없는 더위에는 어찌할 것인가? 해답은 물론 ‘신비의 이기’, 에어컨에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은 당시의 경제수준에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1972년 이후로 나는 사실 지독한 더위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추운 것이 더운 것 보다 낫다는 결론이 머리 속에 새겨진 것이다.

그 당시 대구의 더위는 어떠했을까? 당연히 그곳의 기온은 한반도에서 제일 높았다. 지형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때, 대구에 잠깐 가게 되어서 처음으로 ‘대구 더위’를 맛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세자리 숫자의 더위였다. 섭씨로 36도 훨씬 이상이었을 것이지만 습도는 그리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대구에서 느꼈던 ‘화덕’ 같은 공기를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서 맛을 보게 되었다. 거의 똑같은 기분이었다. 절대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습도가 없는 이 불 같은 공기는 사실은 생각보다 기분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요새 대구의 더위는 어떠할까? 서울보다 아직도 더 높을까? 1972년의 한반도 불볕 더위와 그 당시 대구에 살았던 ‘그 아가씨’도 오랜만에 기억한다.

15소년 표류기, 十五少年漂流記

Jules Verne의 15소년 표류기
1880년대 Jules Verne의 ’15소년..’의 책 표지

“15소년 표류기”..  까마득히 옛날 옛적, 중학교 1학년 (서울 중앙중학교) 때 읽었던 세계명작중의 하나, 정말 재미있던 모험, 소설책의 제목이다.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머리에 거의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면 이것은 참 대단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는 인터넷에서 이것을 찾아보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아직도 널리 사랑을 받으며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만화책과 골목 밖에는 별로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재미있는 것과 곳이 없었던 그런 찌들었던 시대가 아닌,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으로 밤을 새는 요새 아이들에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다. 내가 읽었던 때 이후, 50년 뒤에도 아직도 그 나이또래들의 ‘고전적인’ 탐험 심과 호기심은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일까?

이 책은 나의 중학입시 준비를 도와주었던 (재동학교 6학년, 1959년) 가정교사였던 경기고 (김)용기형이 나에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주었던 것인데, 하도 재미있어서 하루 이틀 새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나고, 용기형 자신도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거의 무슨 의식처럼 읽는 ‘명작’ 전집이 있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학원사에서 발행된 거의 100권이 넘는 것이었고, 그것도 한국 명작과 세계명작으로 따로 있었다. 중학교를 마치기 전까지 그것을 다 읽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나는 별로 그런 것들에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유는 ‘만화’가 훨씬 더 재미있고 배울 것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의 15소년 표류기는 그 ‘표준’ 명작전집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한창, 모험심, 공상적 상상이 극에 달하던 그 시절에 이 책은 사실 그렇게 ‘과학적, 공상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은 1세기 전 사람들이 겪었던 거대한 바다, 미개척 된 대륙, 특히 섬들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바다를 뗏목으로 항해하는 꿈을 많이 꾸기도 했다.

특히, 실제로 구체적으로 서해안, 인천에서 출발해서 제주도 쪽으로 가는 뗏목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물론 중학생에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자살행위였겠지만, 그런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하는 것 만도 너무나 행복하였다.

이번에 이 책을 어렴풋이 회상하면서 과연 그것이 어떤 책이었는지 궁금해져서 조사를 해보니,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나 많았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책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어서 누가 언제 쓴 책인지도 몰랐다. 이러한 사실을 찾는데 책의 제목부터 문제였다.

도대체 ’15소년 표류기’라는 영어 제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Fifteen Boys로 아무리 찾아도 없었고, 표류기 같은 castaway, adrift 로 찾아도 헛수고였는데, 혹시..하고 한글로 ’15소년’을 찾았더니 bingo! 재수가 좋았던 것이 이 책이 ‘요새에도’ 읽히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옛날에 읽었던 나 같은 나이의 ‘꼰대’들이 그런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놓았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인데, 요새는 아마도 ‘극성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생각해서 ‘권장하는 아동도서’로서 이런 ‘독후감’ 같은 것을 쓰는 모양이었다.

Jules Verne classic, Two Years Holiday
2003년 영어판, 15소년 표류기

이런 모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에서 제일 ‘웃기는’ 것이, 책의 제목이었다. 원래의 제목은 Deux ans de vacances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나온 책이었던 것이고, 영어로는 Two Years’ Vacation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저자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바로 그 유명한 Jules Verne!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Jules Verne 하면, 우선 ‘해저 2만리(Two Thousand Leagues under the Sea)’,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 ‘기가 막힌’ 책들의 저자가 아닌가? 나는 그 당시에 전혀 모르고 읽었던 것이다.

원제가 ‘2년간의 휴가‘인데 어떻게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15소년.. 어쩌구 로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이것은 쉽게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일찍이 개화를 한 일본 아해들이 이미 열광적으로 일본어로 출판을 했었고 그 책의 제목이 바로 十五少年漂流記, 가난했던 우리 출판사 아저씨들은 ‘그대로’ 찍어낸 것이다.

일본 쪽으로 자료를 찾으면 1951년에 나온 것이 있는데 내가 읽었던 것은 분명히 이 것을 ‘100% 그대로’ 한글로 직역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출판계는 분명히 그랬다. 거의, 아니 100% 일본 것들을 ‘베낀’ 것들 뿐이었다. 문제는 일본 판의 번역이 충실했으면 그런대로 괜찮을 법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읽었던 ‘세계명작’ 들은 완전히 ‘오역’으로 즐겼던 셈이다.

이 책의 대강 줄거리는 생생히 기억을 하지만, 자세한 지명이나 사람이름들은 거의 잊어버렸다. 분명히 생각나는 이름 중에는, 거의 주인공이나 다름이 없는 프랑스 소년 ‘브리안, Briant‘ , 나중에 등장한 ‘Friday 아줌마’ 등이 있다. 대부분이 영국소년들이고, 이들과 ‘정치적’인 갈등까지 겪지만 어른들과 다르게 그들은 빛나는 화해와 협력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참 듣기 좋은 Utopia적인 얘기다.

이런 것들은 요새 생각을 해본 것이고,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제치고, 무인도의 동굴 속에서 2년간 살면서 겪는 각가지 탐험, 위험, 모험 등에 ‘열광’을 했었다. 특히 실감나게 잘도 그린 무인도의 지도는 흡사 ‘보물섬’ 을 연상시키는 것이라서 그 당시 나이에서는 완전히 우리를 압도하곤 했다. 1880년대에 나온 책이라 당시의 바다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이 책을 기억하면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기분이다. 요새의 모든 관심사는 그저 ‘우주’가 아닌가.. 바다에 대한 경외심은 이제 많이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을까.

Annie Laurie, 애니 로리

 

Maxwelton’s braes are bonnie,

Where early fa’s the dew,

And ’twas there that Annie Laurie..

Gi’ed me her promise true,

Gi’ed me her promise true,

Which ne’er forgot will be,

And for bonnie Annie laurie,

I’d lay me doon and dee.

 

Maxwellton’s Braes 로 시작되는  이 감정 짙은 스코틀랜드 시와 노래를 언제 처음 듣고, 따라 부르고 했는지 확실한 때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분명한 것은, 대학 시절 전前은 아니라는 사실 뿐이다. 이런 ‘외국의 명곡’들은 대부분 중학교에 들어 가면서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배웠지만, 이 곡을 우리는 그때 배우지 않았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대학시절, 언제 듣고 배웠을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분명히’ 기타를 배운답시고 이곳 저곳에서 ‘쉬운 기타 코드’로 부를 수 있는 곡들을 찾고, 배울 당시에 이것이 있었다. 우선 멜로디의 정서가 비록 장조이지만 슬픔이 깔린 은은함으로 그 당시의 감수성 많던 나이에 좋았고, 또한 기타의 코드가 우스울 정도로 초보 단계의 것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영어 가사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사연이 있음직한 역사적인 시 라는 사실조차 몰랐고, ‘괴상한 스코틀랜드 식 영어‘에만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많은 유명한 외국 곡을 한글로 번역하여 sing-along style로 노래를 지도하던 전석환 선생도 이 노래는 몰랐는지, 그런 것도 없었다. 당시에, 그렇게 해서 나는 이 향수에 어린 노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홀연히 요새 다시 나의 눈앞에 다가왔다.

이번에는 옛날같이 그냥 기타를 치며 노래만 부를 것이 아니고 이 노래의 배경을 알고 싶어서, 알아보니 (주로 Wiki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연을 가진 노래였고,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얼마 전 다시 보게 된 오래된 1940년 명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를 연상케 하는 18세기 즈음 영국의 시대적 배경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 옛날에는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며 쓴 시와 민요들이 꽤 있는데, 이것도 그런 ‘애가’ 중의 하나일 것이다.

Wiki로 이 노래를 찾아보면 영어판과 한국어 판이 거의 다르다. 그만큼 두 언어권의 문화와 관심사가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이 노래의 역사는 양쪽이 비슷하지만 각 문화권에 소개되고 평가되는 것은 다르다. 역사적인 것은 Wiki를 보면 자세히 나와있지만, 나의 관심사는 내가 어떤 경로로 이것을 접했는가 하는 것인데, 한국어 Wiki에 그것에 대한 hint가 보인다.

이 명곡이 한국어로 번안이 되었고 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최소한 1970년대 이후일 것이다. 내가 전혀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이것을 접하게 된 과정은 다른 기록에서 밝혀진다. 아마도, 이 노래를 ‘유행곡’으로 만든 스코틀랜드의 folk (song) group이었던 The Corries에 의해서 한국에도 그들이 record가 들어왔을 것이고, 우리들은 그것을 들었을 듯 하다. 그것이 1970년이었으니까,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내가 이 노래를 듣고, 배울 당시를 회상하면서 music video를 만들어 보았다. 너무나 높은 음정 때문에 vocal은 엉망이지만 그런대로 나의 사랑하는,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YAMAHA guitar가 잘 cover를 해 주었다. Audacity software로 ‘음향효과’를 낸 것을 들어보니 조금은 pro맛이 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듣는 이에게는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 naked vocal version을 사용했다.

 

 

Annie Laurie, my own rendition

Annie Laurie, GVerb’ed by Audacity 

서울 1964, 해괴한 변증

서울 세종로 네거리, 1964

1964년 4월 서울 세종로 네거리의 모습

 

¶  1964년 4월 경에 발간된 고국의 한 신문에서 한 사진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서울, 1964.. 이런 소설의 제목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실제로 1964년 경의 서울 심장부의 실제 모습을 말한다. 1964년의 대한민국 서울의 심장부는 역시 세종로 네거리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외국에서 말하는 Boulevard의 전형이 이곳에서 ‘중앙청’까지 펼쳐지고, 외국의 원수들이 방문하면 이곳을 ‘꼭’ 거치면서 사진기록을 남긴다.

보신각(사진, 왼쪽 아래) 같은 역사유물과, 일제에 맞서 조선인의 입과 귀를 살리려 애쓴 민족신문 동아일보사, (사진, 왼쪽 중간)가 이 네거리에 당시에 흔치 않던 5층, 고층빌딩으로 버티며, 6.25, 4.19, 5.16같은 굵직한 역사적 격동의 모습을 이곳에서 보며 기록을 하기도 했다. 새로 ‘도입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고자 몸부림치던 현장, 4.19당시 고대생들이 진을 치고 자유당의원들을 ‘감독, 질책’하던 그곳, 삼성 밀수사건 때는 깡패출신 야당의원 김두한이 파고다 공원 ‘변소’에서 퍼온 민중의 분뇨를 정일권 국무총리 얼굴에 뿌렸던 곳, ‘원래’의 국회의사당 tower가 바른쪽 먼 곳에 보인다.

 

일제 에노 전차¶  1964년 당시의 traffic jam의 모습.. 당시에 느끼기에 그곳에 이렇게 움직이는 것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거북이 전차 (일제 유물, 귀엽게 생긴 ‘에노 전차‘ 들과 San Francisco style 미국 대형 전차들)가 당시에 ‘활개를 치며’ 이 세종로 네거리에서 공중가설선에서 불꽃을 튕기며 좌,우회전을 하는 모습도 있다. 그 ‘장관’은 어린 시절 하도 ‘멋져서’ 하루 종일 네거리에 서서 입을 벌리고 서서 구경을 하기도 했다. 이런 거북이 전차는 2년 뒤까지 모두 철거가 되고 완전히 자동차 전용도로로 변했다.

네거리의 바른쪽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간판 격 극장, 국제극장이고, 그것의 조금 왼쪽으로 ‘신성일, 엄앵란’ 단골인 ‘아카데미 극장’, 그 바로 옆, 붙어서 Cinema Korea(시네마 코리아)라는 외화 전용 재 개봉관이 있었다. 이 사진이 찍힐 시절, 나는 용산구 남영동에서 효자동행 전차를 타고 중앙청 앞에서 내려서 중앙고등학교까지 걷거나, 시간이 급하면 시내버스를 타고 아예, 안국동, 재동 까지 가기도 해서 이곳 네거리는 ‘꼭’ 지나가곤 했다. 그 당시 그렇게 넓게 보이고, 멀게 보이던 것들이 지금 자세히 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좁고, 가까울까.. 그곳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세월과 함께 변해서 그럴 것이다.

 

¶  정말 오랜만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천주교회 공식 월간지, 경향잡지를 보게 되었다. 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날짜가 많이 지난 실제의 책을 보기도 했지만, 요새는 인터넷으로 그런대로 편하게 접할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진짜 책’으로 느끼는 그 편안하고 게으른 느낌은 ‘절대로’ 이 곳을 통해서 얻을 수는 없다. 진짜 책이 주는 느낌을 ‘전자 책’ 의 형태로 옮기려면 생각보다 더 긴 세월과 더 큰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에 발행된 2012년 6월호를 훑어 보다가 정말 우연히 ‘성염‘이라는 저자의 글의 시작 부분을 읽게 되었다. 기사의 제목은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하느님 나라의 초석: 사회적 사랑, 「신국론(De civitate Dei)」” 이라는 아주 거창한 것이다. 나는 이 ‘성염’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제목이 주는 느낌이 ‘역사적인 종교론’ 이고 특히 로마제국이 등장을 해서 나의 눈길을 잡았다. 요새 급속히 세속화 되어가는 선진국 문화에 대한 경고를 4세기 때의 ‘사건’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희망을 하며 읽다가 다음의 ‘해괴한 변증‘에서 손을 놓고 말았다.

제3천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국이 이른바 ‘9·11 테러’를 당한 후유증으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를 상대로 벌이는 무차별한 군사행동, UN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제정치와 세계윤리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 그 포학성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인류 지성계의 심각한 번뇌를 염두에 두면, 「신국론」은 현대에도 읽힐 만한 명분이 되고 남는다.

세계문학전집에 이 책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하느님의 도성(civitas Dei)’을 다룬 「신국론」은 다섯 단원, 22권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1-10권)는 로마 몰락이 그리스도교 탓이라던 로마 지성인들에게 건네는 호교론으로, 그들의 종교와 역사가 정치사회에도, 도덕적 문화에도 불완전했음을 밝혀 보인다.

 

 기묘하게 반달족의 쇠퇴하는 로마제국 약탈사건을 미국의 9.11 테러와 대비시키는 저자는 과연 ‘어떤 머리’를 가진 ‘로마 교황 대사’인가? 그런 해괴하고, 일방적인 논리로 어떻게 그는 학생들을, 그것도 ‘사랑의 하느님’에 관해 가르친단 말인가? 나는 “인류 지성계의 심각한 번뇌를 염두에 두는” 이 성염이라는 인간이 절대로 대한민국의 main-stream 의 일부가 아니라는 희망만 할 뿐이다.

내가 본 글이 주는 느낌이 out-of-context에서 나왔을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류지성계의 심각한 번뇌‘와 이 저자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context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out-of-context’ 가 주는 느낌은 느낌 정도가 아니라 ‘성염’이라는 사람 자체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현재 대한민국, 그것도 천주교계가 아직도 ‘사상’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한 물 지나간 ‘사상’을 종교와 기묘하게, 그것도 ‘지식인’의 이름으로 cocktail하는 것이 어떻게 ‘경향잡지의 desk를 통과했는지 앞으로는 더 주의를 해서 읽기로 했다.

50년 전: 오늘은.. 한미행정협정

요새 새로 생긴 ‘소일거리, time-killer’ 중에는 옛날 내가 소싯적일 때의 신문을 보는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과거에는 ‘너무나 비싸서, 거의’ 불가능 했던 것들이 마음만 먹으면 거의 무료, 아니면 값싸게 다가온다. 이것도 조금 오래 산 보람중의 하나다. 소싯적이란 때도 그리 짧은 것이 아니어서, 요새는 특별히 반세기라는 이정표에 그 시기를 맞추어서, 그 당시를 회상해 본다.

반세기, 역사시간에 그것은 아득하게 긴 시간으로 들렸지만, 이제 보니, 아직도 기억이 또렷한 것들도 많아서 그 정도로 긴 것 같지 않다. 50년 전이라면, 1962년 6월이 되고 그 당시 나는 서울 중앙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그 나이에 당시의 ‘한자 투성이’ 신문을 쉽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읽는다 하더라도 거의 모두 ‘관심 밖’의 일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며 그 ‘사건’들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은 뜻 깊고, 보람된 일이라고 느껴진다.

50년 전의 이맘때의 ‘시사’를 그런대로 기억한다. 5.16 혁명이 비교적 안정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신선한 기분으로 ‘재건‘이란 말을 염두에 두며 뛰었다. 정치적인 안정은 그런대로 경제 문제로 에너지가 집중이 되면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 라는 구호로 이어진다. 그래서 기억에 그 해 4월 쯤에 경복궁 안에서 ‘산업박람회‘라는 것이 열렸고 나도 그곳에 가 보았다. 그때 나에게 인상적인 ‘상품’은 일본회사의 ‘칼피스’ 같은 자동 주스기 였는데, 물론 값이 아주 비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뉴스’에 속했다. 진짜 문제는 새로 부각된 ‘한미행정협정’이란 골치 아픈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이것에 대해서 나의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으로부터 이것에 대해 ‘쉽게 설명되어’ 듣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의 범죄를 어느 정도 우리 정부가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것인가는 어렸던 나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번번히 미군들이 우리동포들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하는 신문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에 아직도 손이 부르르 떨게 되는 사건은, 미군들이 집단으로 위안부(직업여성들)의 머리를 삭발시키고 도로포장용 tar (까만 ‘타마구’)를 머리에 붓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던 끔찍한 일이었다. 그것이 신문에 사진으로 까지 나왔으니.. 국민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이런 사건이 왜 그렇게 처리하기 어려운가는 간단히 말해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들은 치외법권적인 절대적 특혜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형사문제가 생기면 전적으로 미국의 법에 의해서 처리가 되었고, 그것은 우리들의 ‘울분’을 조금도 씻어주질 못했다. 여기에 역시, 또, 우리의 자랑스런 혈기 왕성한 ‘고대생’ 형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고려대학 전체의 영웅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민족적 민주주의 교육의 요람‘ 이었다. 물론 그런 항의데모는 곧 바로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거의 언제나 그들이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정말 한미당국의 ‘고도의 정치 기술’을 요하는 민감한 사건들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위치는 거의 대한민국의 보호자 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짐을 싸서 가버리면 바로 그 다음날 김일성의 탱크가 의정부 가도로 행진을 할 것은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국가자체의 생존문제가 걸린 것이다.

그날 일어난 고대생 평화적 시위는 이 골치 아픈 문제의 해결을 향한 길고도 긴 여정의 첫 발을 띄게 하는 역사적인 것이었다. “반미는 곧 용공” 이라는 슬픈 등식이 횡행하던 때, 그런 반미시위는 고도의 용기와 기술이 필요한 것이었고, 국민 감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정부 측인 군사정부도 사실을 마찬가지였다. 그 혈기왕성한 군인들이라고 우리 동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과 다르게 느낄 리가 있을까? 그날 곧바로 박정희(최고회의 의장)의 성명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전적으로 학생들과 동감‘이라는 요지는 사실 파격적인 발언이었고, 이 시위가 그런대로 control된 상태로 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특히 김일성이 ‘절대로 좋아하는’ 사건들이었고, 그 당시 그들의 방송을 들어보면,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빨리 “미제도당”의 군대를 철수시킬 때가 되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그 당시 고대생들의 성명을 보면 그들은 ‘절대로 반미, 반정부 적이 아니라’ 고 누누이 강조를 했다. 그것은 또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 동포가 미군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인권이 침해 당하지 않게 하라는 요구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위는 평화적이었다. 고대생들의 결의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하여 공동의 적과 싸워 피로써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상호관계가 미국으로 보아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며 한국으로서는 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접종하는 불상사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손상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일부 몰지각한 미군인들 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만행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의 격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미 양국이 주권국가로서 서로 존중하여 양국의 권리와 의무를 명백히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서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로서 성명한다.
6.25 이후 미국군대 주변에서 빈번히 일어난 한국인 ‘린치’ 사건과 이를 둘러싸고 자주 논의된 행정협정체결 문제가 아직까지도 뚜렷한 이유 없이 지연되어 왔음은 심히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미국인의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인권의 침해와 인간존엄을 유린하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장 합리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타국에서와 같이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요청한다.

 

고대생들의 대 정부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봉이며 ‘심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어났던 ‘린치’ 사건은 미 국민 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정부의 무능한 소치다. 정부는 성의를 다하여 주권국민임을 해외에 선언하라.

 

고대생 한미행정협정촉구 시위, 1962년 6월 6일

1962년 6월 6일, 군사정부 계엄령하에서 일어난 고대생들의
한미행정협정 촉구 데모, 평화적인 시위였다

 지금 이 사건을 되돌아 보면서 느낀다. 그 당시의 객관적인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통계를 감안하지 않고서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우리를 앞서 갔던 일본의 경우를 보면 간단하다. 국가 안보 다음에 ‘통하는 것’이 경제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그 당시 대한민국은 소위 말하는 ‘후진국’이었다. 일단 전쟁은 끝냈지만,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실정이었던 것이고 국가 안보와 직결이 되었던 미국의 원조와 미군의 존재는 거의 ‘성역‘에 속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어찌 그것을 몰랐으랴.. 대학생의 절규를 그들도 못지않게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불행의 ‘원죄’를 만든 민족반역자, 1급 전범 김일성 개XX 를 견제하며, 경제개발을 해야 했던 군사정부, 박정희 정권이었다. 단 한가지.. 경제적인 안정과 성장 그것만이 고대생들이 절규했던 동등한 지위에서의 한미행정협정을 가능케 하리라는 것이 당시 정권의 믿음이었다. 비록 군사정권 하에서 ‘시위금지’ 라는 법을 어겼지만, 고대생들은 결과적으로 군사정권이 더욱 경제개발에 총력을 하게하는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