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멀리 보이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 까지.

아마도 독일의 민요를 일본에서 번역해서 부르고 일제시절 우리에게 남겨지고 나의 어린 시절 그걸 또 배우고 불러서 아직도 가사와 노래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부를 적에는 사실 이 가사에서 비행기를 연상하곤 했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 에게는 비행기처럼 영웅적인 존재는 없었다.  답답한 서울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비행기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행복했으니까.

그걸 내가 조종을 해서 하늘을 나르고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을 이 노래에서 생각하곤 했다. 새의 존재는 거의 잊어버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새란 것이 현재 인간의 최첨단 비행기보다 훨씬 smart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현대 비행기를 computer로 control을 한다지만 새의 그 작디작은 머리가 아마도 훨씬 더 robust할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인 새를 생각한 것도 나중에는 이 노래에서 느끼게 된 상징적인 의미를 알고 바뀌게 되었다. 아하. 이 새가 날아간다는 것은 바로 거의 완전한 ‘자유’를 뜻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학시절 기타를 배울 때 즐겨 부르곤 하던 미국 folk song, ‘도나도나’의 가사가 비슷한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듣던 것은 당시 미국 folk song, 특히 Vietnam war protest song을 불렀던 Joan Baez의 곡이었는데 당시는 사실 가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곡자체가 좋았고, guitar를 배우기에 아주 쉬운 곡이었기 때문에 더 유행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 나중에 가사를 잘 읽으면 제비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가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제비의 거의 무한정 자유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 이 얼마나 비극적인 대조인가?

영화화 된 Anne Frank’s Diary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보면서 또 다른 새의 상장을 다른 면으로 보게 되었다. 어디까지를 구체적으로 영화화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Annex Attic에 갇힌 유대인 가족의 그룹들, 비록 숨은 쉬며 살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몇 년의 생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아갔을까.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막 사춘기에 들어간 어린 소년소녀들의 심정을 어땠을까? 아무도 그들을 구할 수 가 없고 오직 radio에서 나오는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으로 가상적인 자유를 만끽한다.  그 젊은 아니 어린 Anne Frank는 뚫어진 지붕으로 보이는 아주 파~~란 하늘을 본다. 그리고 가끔 연합군의 고공으로 나르는 폭격기편대의 하~아~얀 꼬리 연기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일 동경하며 보던 것은 역시 자유스럽게, 유유하고 천천히 하늘을 나는 새들이었다. 나 에게는 그 장면이 이영화의 climax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 몸이 새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가기 힘든, 아니면 쉽게 갈수 없는 곳, 하지만 꼭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나도 날아가고 싶을 것이다. 죽음이 결코 먼 훗날의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 했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된 곳부터 가보련다. 원서동의 아랫자락, 비원입구 돈화문의 근처, 원서동 골목은 나의 모든 기억의 출발이다. 그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길 조차 없어 졌을지도. 옛날 휘문학교 뒷문근처, 영국군 부대가 주둔 했던 곳. 조금 더 올라가면 동섭이네 집골목.  어린 시절 나는 이 골목을 오르락내리락 뛰며 달렸다. 이 집은 물론 우리 집에 아니었다. 아버님 친구 분이 피난가편서 빈집을 우리가 잠시 산 것 뿐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납북이후 소식이 끊긴 후였다.  우리 집은 엄마, 누나, 나 이렇게 3식구만 달랑 주인을 잃은 채 아버지 없는 가정의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원서동 비원 담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막히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또 살았다. 승철이네 집에서 우리는 세를 들어 살았다. 국민학교 생활도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승철이네 집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조금 내려와서 유일하게 우리 집으로 살았던 곳 그곳은 나의 어린 시절에 도시계획에 의해서 철거되었다. 그 이후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 가보면 크게 변하지 않았을 듯하다. 나의 국민학교 앨범도 있고, 사진에도 있고 해서 아주 친근한 풍경들, 없어지지는 않았겠지. 10년 전쯤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 출퇴근 하면서 그곳을 매일 본다고 들은 기억이 있어서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궁금한 곳은 그 재동 국민학교 뒷문 쪽에 있던 우리가 살던 2층 집이다. 이 집에서 나의 유년기를 거의 다 보냈다. 사랑채를 빌려서 살아서 우리 집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집을 떠난 후 나는 이집을 꿈처럼 그렸다. 참 순진했던 소년기의 맑고 좋은 추억들이 아롱아롱 매달린 집. 나는 또 그 집의 옛 모습을 보고 싶구나. 집 앞의 골목도 나의 전쟁터였다. 아마도 이곳도 상전벽해로 변했으리라.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나는 대학시절의 다방들도 다시 가보고 싶구나. 우리 연호회클럽의 추억이 찐하게 배었던 국제극장 옆 골목의 해양다방, 단성사 옆의 백궁다방, 명동에 있는 여대생이 들끓었던 SNOW다방, 미국적 멋이란 멋은 다 부리던 Rock다방,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간 다방 연대입구 복지다방, Mamas & Papas의 ‘Monday Monday’에 황홀하던 신촌로타리 왕자다방, 거짓말 편지로 어떤 여대생을 불러낸 세종로 교육회관 지하다방,  아~ 누가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랴……. 이 몸이 새라면 다시 한 번 그곳으로 날아가 보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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