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재벌구조의 진화논리와 기업의 지속번영 원리

2013.04.30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가 1969년 공군중위 제대 후 첫 직장인 KIST에서 연구를 막 시작할 때 지녔던 사고(思考)의 하나는 사회현상에도 자연 질서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인식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물은 언제 어디서나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과 같은 보편질서(universal law)와‘물살은 협곡에서는 빨라지고 강폭이 넓어지면 느려진다.’는 식의 상황적응질서(contingency laws)가 사회현상에서도 적용될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을 기초로 1970년대 초반 KIST 경제분석실에서 필자가 실무책임을 맡아 행한 첫 연구 프로젝트가 POSCO 건설타당성 검토연구였다.

당시 국내 철강 시장규모는 왜소하고 철광자원도 희소할 뿐만 아니라 공장을 건설할 돈도 기술도 물론 없고 철강회사 경영경 험은 전무였으며 다만 있는 거라고는 당시 KIST로 영입되어 온 몇 분의 유학파 과학자들과 거의 무경험의 미숙한 국내 금속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들뿐이었는데 과연 이런 상태에서 POSCO 프로젝트가 국책사업으로서 타당성을 지니겠는가를 검토하는 연구였다.

 POSCO 건설 프로젝트는 이미 KISA (포스코 건설을 위한 국제 consortium)에서 2여 년 간 그 타당성을 검토한 바 있는 프로젝트였는데 그들이 포항제철 건설프로젝트는 그 사업타당성이 크게 뚜렷하질 않아서 차관을 못 주겠다는 결론을 내린 1969년 초반에 정부가 KIST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검토하라는 배경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이런 연구 배경에서 필자는 우선 철강공장의 최소 경제적 생산규모가 얼마인가를 기술연구팀으로부터 확인한 후 최소 경제적 생산규모를 갖추려면 어느 정도로 수출되어야 할 것인가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래서 5~60년대에 걸친 세계철강재의 수출입자료를 가지고 소위 철강수출모형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업타당성검토와 관련한 기본정보와 아이디어가 전무했던 터라 이리저리 밤낮없이 고민하던 끝에 떠오른 생각이 자연법칙을 원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수 출은 수입하는 나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수출하는 나라에서 수입하는 나라로 얼마만큼이 수출될 것이냐에 대한 예측은 마치 물리학에서의 중력법칙(gravity law) 곧 두 물체간의 중력의 크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근거로 하여 철강수출모델을 도출하고자 했다.

 자연법칙을 논거로 한 연구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유의적인 예측치가 얻어졌는데 이는 필자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고 POSCO 사업타당성 검토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어찌 알았는지 POSCO 건설 사업타당성에 대해 미국 USX 철강엔지니어링 회사가 찾아와 득의 찬 자세로 도움을 주겠다며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제안을 다 듣고 난 후 그들에게 우리의 작업결과와 그 방법론을 보여주었더니 ‘too academic’이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는 얼굴이 벌게 가지고 도망가듯 가벼렸던 게 아직 기억난다.

 아무튼 KIST의 검토 결과대로 포항철강공장건설이 확정되고 자금 확보와 관련한 일련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순항을 거듭하여 POSCO는 드디어 1973년 첫 출선의 기쁨을 온 국민에게 주었던 것이다.

필자가 POSCO 프로젝트를 끝내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서울지하철 2호선 노선을 마련하는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같은 아이디어로 서울시내 교통량을 예측하여 노선확정(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런데 이번에도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영국의 한 컨설팅회사가 집요하게 제안 설명기회를 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우리의 연구가 거의 끝난 상황이라 기회를 주었더니 1시간 이상 득의에 찬 설명을 하면서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연구결과를 보여주자 그들도 역시 얼굴이 벌게져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그토록 득의에 차서 설명한 방법론이 바로 우리가 이미 사용한 중력모델이었던 때문이었다.

 

필자가 지금 이를 거론하는 이유는 당시 KIST의 역량을 과시하려거나 탁월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건 자연법칙이 시회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경영 경제 연구에 있어서도 자연법칙의 견지에서 밤낮없이 끈질기게 고민하고 고민하다보면 가야할 올바른 길이 보인다, 라는 걸 이야기하고픈 것이다. 물론 당시 우리의 연구역량은 그야말로 거의 백지상태였지만 누가 시켜서도 아닌데 신나서 야근을 밥 먹 듯하며 일에 몰입하다보니 당시 세계적 컨설팅회사들이 인정할 정도의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KIST 설립 초부터 안정적 R&D 활동을 위해서는 연구소의 재정적 자립이 우선해야한다는 논리에 기초하여 미국 존슨대통령이 조성해 준 R&D기금이 있었는데 1973년 초반부터 연구소 운영회계와 R&D 기금관리를 위해 회계과를 맡았던 필자는 기금관리 경험을 통해서도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R&D기금은 당초 장기신탁예금으로 은행에 예탁되어 있었고 그 만기가 1973년 하반기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만기 때쯤 해서 10월 중동에서 7일 전쟁이 발발했고 뒤이어 1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치솟는 유가에 기금 증식(增殖)보다는 우선 기금가치를 보전(補塡)하는 문제가 더 시급한 현안으로 클로즈업 되면서 서둘러 예금을 예금, 주식, 부동산으로 3분 투자하 기로 하였는데 이때 특히 주식투자와 관련하여 3여 년 간의 실무책임자로서 얻은 값진 경험은 자본시장을 구성하는 증권발행(發行)시장과 증권유통(流通)시장과의 관계에서 유통시장은 결국 발행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필요악(necessary evil)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물론 이 의구심은 주가(株 價)에는 기업성과가 주로 반영되어 변동해야 하는데도 많은 경우 기업성과와는 거의 무관한 설(說)들에 의해 주가가 더 크게 요동하는 걸 보며 분명 유통시장의 상당부분은 국부(國富)증대와는 전혀 무관한 투기성에 상존한다는 인식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1976 년 필자는 뒤이어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 설립멤버로 참여하였는데 이 연구소의 설립 동기는 당시 집값에 버금가는 전화를 널리 보급하기 위한 혁신기술을 개발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개발이라고는 하지만 혁신기술을 얻기 위해 경제개발 초기에 추구했던 ‘모방에서 혁신으로(from imitation to innovation)’의 기술전략단계를 막 벗어나 ‘점진혁신에서 급진혁신으로(from incremental innovation to radical innovation)’의 전략을 구사하여 혁신기술역량을 내재화하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전기통신(telecommunications)은 교환, 전송, 가입자시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교환부문에서 세계적으로 1960년대부터 전기교환기에서 전자교환기로 발전하고 있는 추세였다. 전후 전쟁복구의 일환으로 독일과 영국 그리고 일본은 이미 50년대에 걸쳐 전기식으로 통신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유독 당시 드골정부의 불란서만이 전기식이 아닌 전자식 교환기로 통신시스템을 현대화시키려는 전자교환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한국도 이에 편승하고자 한 것이 우선 ETRI의 첫 과제였다. 그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중반에 KIST가 전자교환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때문이었다. ETRI가 꾸려지고 본격적인 통신연구를 시작하려 할 때 교환, 전송, 시스템의 3부문으로 나뉘어 연구조직을 갖추는데 있어서 겪었던 많은 논란은 바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와의 조화문 제였다. 교환, 전송부문은 아무래도 하드웨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시스템부문은 언제 한국이 하드웨어를 따라갈 수 있느냐며 소프트웨어 중심의 연구라야 추격이 조기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반대의견도 굽히질 않았는데 당시 연구업무심의회의 간사를 맡고 있던 필자는 중간에서 이들을 조정해야하는 입장에 있었다. 양쪽 모두 다 일리 있는 주장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필자가 견지했던 입장은 해당 기술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혁신효과가 어느 경우가 더 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혁신효과 의 강약의 견지에서 결국 힘이 들지만 하드웨어(hardware)가 있어야만 소프트웨어(software)도 살고 빛을 발할 것이라는 입장을 펴며 ETRI를 출범시켰고 이후 ETRI는 국직 국직한 ICT기술을 개발하며 한국의 정보통신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해 오고 있는 성공사례라 할 것이다.

 1979년에 필자는 ETRI에서 한국핵연료개발공단으로 옮겨 기획관리부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한미 간의 정치상황은 미국의 카터가 주한미군을 철수해가는 분위기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배경에서 자주국방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핵연료개발공단의 출범도 이와 무관했다고는 생각되질 않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를 확증해 볼만한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당시 필자가 맡았던 주 임무는 핵연료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것이었고 당장은 국내 원자로에 들어가는 핵연료를 가공하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非)엔지니어인 필자는 우선 기술제공사인 불란서 생고방이라는 핵엔지니어링사를 통해서 세계 유수 핵연료 가공공장을 방문하고자 하였다. 지금도 물론이겠지만 당시엔 핵연료가공공장 방문도 수월치 않은 일이었는데도 필자는 불란서, 스웨덴, 영국, 이태리, 일본의 핵연료가공공장을 방문하여 공장의 배치(layout)을 비롯한 공장 건설과 관련한 기본정보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필자가 오히려 비 엔지니어이었던 것이 득이 되었던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그 이유인즉 엔지니어는 아예 원천적으로 그 어느 공장에서든 접근조차도 일체 불허하고 있던 터였던 때문이었다.

 2년여가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핵연료와 관련하여 필자가 겪었던 몇 건의 behind story는 이 자리에서 밝히기가 그렇지만 핵연료사업은 수요자와 공급자간의 흥정에 의한 시장논리가 아닌 철저한 공급자논리의 사업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정치적 사업의 under table business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듯 십수 년간 KIST, ETRI, KNFC(핵연료개발공단)에서의 연구경험을 지니고 필자는 1981년부터 대학으로 생활터전을 바꿔 경영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해를 거듭해도 국내 후학들에게 전수시키는 경영학의 내용이란 것들이 미국의 대량생산체제에서 구축된 것들과 당시의 미국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여과 없이 국내에 전수시키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이 전후 세계경제를 주도하여 왔고 계속하여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선 당연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우리로선 산업구조와 풍토가 다른 만큼은 보완해서 학생들에게 전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특히 필자가 교직을 시작한 1980년대는 미소양극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은 산업구조를 비롯하여 정치&65381;경제&65381;사회&65381;국제질서 면에서 엄청난 전환기(crossover)를 맞고 있다고 필자에게 인식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영학분야에서 선을 보이는 새로운 주장들의 대부분이란 것들이 1980년대 중반이후 쇠락하는 미국의 제조업과 새로 등장하는 서비스, 유통, 금융 등 산업추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기업경영의 핵심인 생산관리 과목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운영관리라는 과목으로 바뀌면서 서비스 경영이 중요하게 클로즈업되는 분위기였다. 물론 서비스 경영은 고부가가치 실현을 위해 대단히 중요할 수밖에 없지만 서비스는 어디까지나 제조업 기반위에서 전개될 때라야 소망스런 일인데도 불구하고 제조업을 빼앗긴 미국의 입장을 반영하다보니 마치 제조업대신에 서비스로 대체되는 것이 선진의 모습이며 따라서 서비스업의 산업비중이 크면 클수록 선진국으로 취급하는 등의 헷갈리게 하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1992년 필자가 대학 부설 산업경영연구소를 맡고 있던 때 한국주택은행(당시엔 국책은행이었음) 장기발전전략수립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94년부터 주택은행이 민영화될 때까지 3여 년간 주택은행의 비상임이사로 있으면서 금융에 대해 비교적 현장밀착형의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정기이사회 또는 특별이사회에서 논의되는 대부분의 의결사항들을 보면 조직의 효과(effectiveness)와 효율(efficiency)을 높이는 혁신과 직결된 안건들은 대단히 희소했고 거의 대부분이 복리후생과 관련한 것들이었는데 이런 경험은 필자로 하여금 금융에도 과연 혁신효과가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큰 의문을 갖게 해주었다.

 물론 금융기관의 운영시스템관리에 있어서도 여타 기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정/관리혁신의 효과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여 졌지만 금융상품혁신에 있어서는 아주 특이한 것을 제외하곤 그 혁신효과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실로 컸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융상품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은행마다 명칭이나 내용면에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대동소이하게 보여 졌기에 더욱 그러했다.

 정 부출연연구소에서 주로 실물경제분야 특히 중화학공업분야의 프로젝트를 통해서 얻어진 경험과 그리고 금융부문을 접하면서 겪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 인식은 세상일 중에서 상대적으로 쉬운 것은 동질적(homogeneous)인 것을 다루는 일이고 반대로 어려운 일은 이질적(heterogeneous)인 것을 다루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명제에 기초할 때 동질적인 것을 다루는 금융은 이질적인 것을 다루는 기술(R&D)에 비해 훨씬 수월하다는 인식이었다. 뒤집어 얘기하면 실물경제 특히 제조업(조립-부품-소재산업)에서 기술개발을 통해서 얻어지는 혁신효과는 엄청 큰데 비하여 금융경제에서의 혁신효과는 별로 크지 않다, 라는 인식이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필자의 주관적 인식에 기초한 것이긴 하지만 그간의 경험을 통하여 기술과 금융의 특성에 대해 비교적 균형감각을 갖고 비교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간 필자의 연구경험과 또한 필자가 직간접으로 관련하였던 한국의 중화학공업이 성공적으로 세계 산업주도권에 접근하게 된데서 얻어진 교훈 중 가장 값진 것은 일국의 국부(國富)는 사회에 유익(positive sum)을 주는 산업 특히 제조업(소재-부품-조립산업)중심의 실물경제부문에서 행해지는, 글로벌 시장니즈건 국내시장 니즈건, 니즈진화에 부합하는 혁신 곧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에서만 얻어진다는 인식과 서비스산업은 제조업 바탕위에서 발전해야만 경제기반의 내실을 기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금융은 바로 이러한 실물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윤활유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하며 만약 실물경제와 유리된 금융활동은 그 어떤 것이든 결국 거품만 키운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그간의 연구경험을 토대로 필자는 니즈맞춤혁신만이 가치창조의 동인이며 니즈맞춤혁신에 의해서만 니즈진화가 일어나며 니즈진화의 각 단계마다마다에서 니즈맞춤혁신을 전개할 수 있는 기업만이 지속번영(持續繁榮)을 누릴 수 있다는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이론(dynamic management theory)을 국제학술회의에서 수차례 발표하여 왔다.

 

필 자는 2011년에 Wiley-Blackwell Encyclopedia of Management 3rd Edition, Strategic Management의 chief editor인 영국 Warwick Univ.의 John McGee교수(전 세계전략경영학회 Strategic Management Society 회장)로부터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관점에서 한국 재벌구조의 진화에 대해 집필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는데 그 배경은 이러했다.

 2000년대 들어 십여 차례 필자가 국제학술회의에 참여하였는데 그때마다 세계석학들이 한결 같이 필자에게 묻는 질문 중의 하나는 한국재벌에 관한 것이었는데 특히 한국재벌들이 어떻게 그렇게 승승장구하느냐, 어떻게 소유와 경영의 분리 대신에 재벌가에 의한 소유와 경영의 조화가 가능한가, 또 2, 3세로의 경영권 상속이 어떻게 그렇게 성공적이냐는 것이었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R&D 전략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이해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같은 맥락에서 McGee 교수도 필자에게 논문청탁을 의뢰했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1960년대 개발독재시절에 정부주도로 재벌이 형성되어 지난 50여 년간 진화해 오는 과정에서 재벌구조의 공(功) 과(過)에 대한 공정한 사회적 평가 없이 공보다는 과가 크게 부각되어 온 사회적 분위기에서 특히 1997년 IMF위기로 국내 30개 재벌 중 13개 재벌이 파산하는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재벌들은 김대중&65381;노무현으로 이어진 좌파정권 10년간(1997-2007)의 강한 반(反)기업정서의 정치적 사회적 도전에도 불구하고 혁신효과가 큰 제조업 중심의 사업포트폴리오를 통해 국내산업구조의 고도화에 기여하여왔고, 재벌가 중심의 중앙집권식 의사결정에 의한 발 빠른 결단과 전문경영인중심의 분권식 실행(centralized decision-making and decentralized execution)으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아닌 소유와 경영의 조화를 추구하며 정부의 혁신지원에 힘입어 제조업부문의 글로벌 시장니즈진화에 부합하는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을 전개하면서 2008 미국 발 글로벌 위기에서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살리며 한국경제를 G20로 견인할 수 있었던 과정을 시대별로 정리한 논문을 보내주었더니 수정 없이 그대로 등재키로 했다는 결정을 보내왔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Wiley-Blackwell 경영백과사전(3판)에 담긴 한국 재벌구조진화의 시대별 특징을 간략히 헤아려 보자.

 

1960-1970년대: 재벌구조 형성기

 1960 년대에 등장하여 그간 한국경제를 견인해 오고 있는 기업집단인 재벌구조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중시하는 서구의 지배구조 스타일과는 달리 오히려 창업가 집안의 소유와 전문경영인에 의한 경영으로 소유와 경영의 조화를 살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재벌구조 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형성되었는데 재벌 창시자들은 공통적으로‘빨리빨리’기질과‘헝그리’정신을 지닌 절대로 지길 싫어하는 기질의 소유자들이 고품질은 아니었지만 고학력의 의욕이 넘치는 인재들로 구성된 조직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왔다.

초기재벌들은 정부의 적극적 지원 하에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사명감을 지니고 박정희 정권의 수출지향 경제 및 산업정책을 따르면서 재벌형태의 모습을 구축해 갔는데, 이는 당시의 세계경제의 흐름과 대단히 부합하는 접근이었다.

 즉, 2차 대전 종전(1945) 후 전후 복구체제를 갖춘 1950년대부터 세계경제는 미국 주도로 전례 없는 대호황의 대량경제시대(mass economy era)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1960년대 정부주도의 경제개발추진과 재벌의 출현은 세계경제의 이러한 흐름과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베트남 전쟁 특수와 1970년대 양차 석유파동에 의한 중동 붐이 한국경제발전에 큰 기폭제가 되었고 재벌들이 그 주역을 맡을 수가 있었다. 당시 초기재벌들은 일단 재벌의 모습을 갖추면서, 당시 정부주도의 국가출연연구기관의 도움을 받아가며‘모방에서 혁신으로(from Imitation to Innovation)’의 혁신전략을 구사하며 한국경제를 견인하기 시작했다.

1980-1990년대: 재벌구조 확대기

 1980 년대 들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 구제완화(deregulation)정책으로 미국의 제조 메이커들이 서비스, 유통, 금융업으로 전략행보를 취하며 제조업(manufacturing)이 붕괴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창업 1세대의 리더스타일과 기업가정신을 이어받은 2세 재벌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수평, 수직통합 전략과 관련 및 비관련 다각화 전략을 구사하며 중화학(重化學) 중심의 사업구조를 과감하게 구축하여왔다.

 물론 이런 전략행보과정에서 특히 내수시장과 관련이 깊었던 재벌들을 포함하여 재벌들의‘문어발식 확장’과‘재벌2세 세습’이 크게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제조업 기반의 사업영역을 확장한 재벌들은‘점진혁신에서 급진혁신으로(From Incremental innovation to Radical Innovation)’의 혁신전략을 통해서 또한 다각화된 사업포트폴리오는‘재벌오너 CEO의 중앙집권스타일의 의사결정과 전문경영인에 의한 분권스타일의 집행(centralized decision-making by owner CEO and decentralized execution by professionals)’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재벌구조의 확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재벌구조 개혁기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재정위기 때 IMF 사태를 맞아 재벌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혁신역량이 부족하거나 전략감각이 결여된 재벌들과 경영이 부실한 재벌을 포함하여 13개가 파산했다.

그 나마 재정위기를 넘긴 재벌들은 1997년부터 이어진 DJ·노무현 10년 좌파정권하에서 형성된 자유기업제도(free enterprise system)에 대한 강한 정치적 반감(反感)분위기와 비자금 편법상속 등으로 거센 사회적 도전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정부의 환율제도의 현실화와 제조업기반의 재벌구조 사업포트폴리오에 힘입어 한국경제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살아남은 재벌들은 재정적으로 보다 더 건실해졌다.

2008 미국발 금융위기-현재: 재벌구조 심화기

 2008 년 월가 금융위기는 글로벌 경제위기를 촉발하며 전 세계 특히 유로 존에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는데, 이는 1985년 이래 지속되어 온 미국경제의 파행적 구조 즉, 점점 왜소화하는 실물경제와 초(超)거대화하는 금융경제(특히 금융파생상품)과의 불균형(imbalance)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할 때, 글로벌 경제위기가 오히려 한국 재벌들에게는 사업포트폴리오 구도를 업그레이드시 키며 재벌3세의 세습을 준비하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재벌들에게 금융경제 분야로의 진입을 제한하고 있는 정부정책과‘보다 더 강화된 점진혁신에서 급진혁신으로(a more intensified ’From Incremental innovation to Radical innovation)’의 혁신전략으로 무장된 제조업기반의 사업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는 재벌들의 전략행보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무튼 2000년대에 걸쳐 재벌들은 한국경제를 리드해 온 경제주체로서 2010년에 한국을 G20의 일원이 되게끔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 마디로 지난 반 세기동안의 한국재벌구조의 형성과 진화과정은‘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재벌들이 세계경제의 흐름에 맞추어 수출지향의 세계경영을 추구하며 글로벌 시장에서의 니즈진화에 발맞춰 글로벌 고객들로 하여금 지불의향을 갖게끔 하는 제품/서비스를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을 통해 제때 적가로 개발 생산 제공해 왔기에 말이다.

 한 국재벌구조가 Wiley-Blackwell 경영백과사전(Encyclopedia of Management)에 개재된 것은 1판 때부터인데, 1판은 Blackwell 경영백과사전(1판)으로 1999년에 발간되었지만 2판은 2006년에 Blackwell이 Wiley에 합병되 는 바람에 Wiley-Blackwell 경영백과사전(2판)으로 2006년에 발간되었다. 그리고 이제 7년이 지나 3판이 2013 여름부터 on/off라인을 통해 유료로 보급될 일정으로 있는데, 1판 2판 모두 한국재벌구조에 대한 필진이 영국인(Manchester Univ.의 Derek Cannon와 Warwick Uinv.의 McGee)교수였는데 이번 3판에 필자가 필진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의 등재가 하찮은 것이긴 하지만 필자가 그간 주창해 온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가 공적으로 세계 학문시장에 선보이는 조그마한 계기라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찾고 싶다.

 

글/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ihkim5611@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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