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마이클 포터 그룹이 촉발시킨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2013.05.21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에게 누군가가 경제학과 경영학 분야에서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실제의 문제해결에 크게 기여한 사람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필자는 경제학 분야에서는 사회다윈주의에 기초하여‘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자유방임(laissez faire)’, ‘분업(division of labor)’의 명쾌한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제시해준 국부론(The Wealth of the Nations: 國富論, 1776년)의 저자 아담 스미스, 그리고 1900년을 전후한 대량생산혁명에 힘입어 그간의 적체(積滯)수요가 대충 해소되면서 점차 공급과잉과 수요 부족현상을 나타내다가 결국 수요와 공급 간의 불균형(imbalance)으로 말미암아 터진 세계대공황(1929)에 대한 치유책으로 부족한 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서라도 해결하자는 유효수요 이론의 처방전을 제시한 케인즈를 꼽고 싶다.

 그리고 경제성장발 전의 동인인 혁신의 관점에서는 경제발전의 주역은 기업이며 기업의 진수는 혁신임을 주장한 슘페터와 더불어 생태생물학을 논거로 기술변화(돌연변이)에 적응하는 기업의 루틴(routines, 무형자산)에 의한 경쟁선택으로 산업이 진화하며 경제가 발전한다는 진화경제학을 주창한 넬슨과 윈터을 꼽고자 한다.

한편 경영학분야에서는 1900년대부터 1980년까지 8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대량생산체제하에서 과학적 관리로 능률향상을 지향하는 전통경영학의 기초를 닦은 테일러와 더불어 2차 오일쇼크(1979)로 1980년대 들어서면서 환경이 격변(激變)하는 가운데 초경쟁상황이 전개되자 이에 적응하기 위한 논리/방식을 다루기 위해 등장한 전략경영분야에서 산업레벨의 5-force model과 기업레벨의 value chain 개념을 개발하고 이들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본원적 전략을 제시한 마이클 포터 교수를 꼭 뽑고 싶다. 왜냐하면 역동적 환경에서 어떻게 기업성과가 얻어지는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우선 산업과 기업을 동시에 다루어야하는데, 전략경영이 등장한 1980년 이래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산업레벨과 기업레벨을 동시에 다루며 이들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여전히 희소한 중에서도 포터의 경쟁전략 틀은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가장 돋보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포터의 경쟁전략 틀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대량생산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우선 1980년대 들어 격화하는 경쟁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논리를 다루려고 개발된 것이고 또 그 후 기업의 동태이론 추구라는 시도는 있었지만 이렇다 할 별다른 발전된 콘텐츠를 갖추지 않고 있었음에도 5-force model, value chain(가치사슬), generic strategies(본원적 전략유형)이라는 것들이 워낙 명쾌하고 창의적이어서 연구자들에게 오랫동안 어필하여 왔다.

그러다 2000년을 전후한 인터넷/스마트 혁명이 일어나면서 고객의 니즈가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니즈 변화가 빈발하며 상례화 되어가며 점차 기업에서 고객으로 힘이 옮겨가는 권력이동(power shift)현상이 심화하면서 한계를 내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들은 대량생산체제에서나 기업이 힘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여전히 유용한 전략도구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 틀은 2차 오일쇼크(1979)로 초(超)경쟁상황이 전개되던 상황에서 대단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1983년에 마이클 포터 교수를 비롯한 하버드 인맥의 8명이 기업 및 정부의 고위직을 상대로 하는 전략전문 컨설팅회사 Monitor Group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Monitor Group는 지난 30여 년간 포터의 경쟁전략 틀에 기초하여 전략컨설팅분야에서 독특한 브랜드를 쌓으며 Bain & Co. 와 Boston Consulting Group과 같은 세계적인 거물 컨설팅사와 경쟁하는 수준까지 성장하며 고객밀착형의 문제해결책 제시와 세계적 수준의 지적재산과 사고(思考)의 리더십을 발휘해 온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2012년 11월 파산하여 Deloitte에 합병되는 운명을 맞았다.

 Monitor Group의 파산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과 추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Monitor Group이 그간 사용해 온 포터의 전략적 분석 틀과 분석도구들에 대한 논거가 2010년대의 글로벌 상황과 클라이언트들의 니즈를 제대로 충족시키기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인 듯하다.

 필자가 새삼 Monitor Group을 거론하는 이유는 1980년대 후반 한국통신공사(KTA: 현재의 KA, 한국통신의 전신)에 대한 Monitor Group의 컨설팅 결과에 대한 심사 평가에 참여했던 필자의 경험으로부터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를 주창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 하고자 함에서이다.

 

한국통신공사(KTA)는 1982년에 정부기관이었던 체신부의 정책결정부문을 제외한 모든 사업운영부문을 공기업으 로 전환하는 정책전환의 일환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KTA가 발족 후 어느 정도 공기업으로서의 틀이 갖추어지자 1988년에 KTA의 장기발전 토대를 마련하려는 대형연구프로젝트가 추진되었는데 이때 경영조직부문은 서울대 곽수일 교수팀이, 기업문화에 대해서는 이화여대 이어령 교수 팀이 그리고 경영전략은 필자 팀이 맡아 수행하게 되었다.

필자가 경영전략을 맡게 된 데는 필자가 교직으로 옮기기 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통신경제연구실과 기획실을 맡고 있을 당시 직접 수행했던 전자통신 장기발전전략수립의 경험을 십분 활용해 보려는 KTA의 뜻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필자가 경영전략연구를 의뢰받고 제일 먼저 고민한 대목은 1985년부터 시작된 소련연방체제의 붕괴라는 환경변화가 전자통신과 정보통신에 어떤 충격과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정보통신에 대한 당시의 세계적 흐름과 우리의 현상(現狀)을 헤아리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전기통신은 1876년 그래함 벨이 전화를 발명 이래 80여 년간은 소폭의 점진기술혁신만이 주로 이루어져 온 분야였다. 그러다 전기통신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때는 1946년 첫 컴퓨터 ENIAC이 등장한 후 십 수년이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였다. 즉, 1960년대 초반부터 전기통신과 컴퓨터의 결합으로 기존의 전기식 교환기가 전자교환시스템으로 진화하면서부터 전기통신은 1960년대 후반부터 정보통신체제로 진화하게 되었다.

 전자교환시스템에 관한 한 이를 선도한 나라는 불란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 독일, 일본 등 국가에서는 전후피해 복구차 원에서 일찍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전기식 교환기로 전기통신시설을 완전히 복구하였지만 유독 불란서는 당시 드골정부의 특유한 기술정책으로 ESS(전자교환시스템), Concord(꽁코드), TGV(떼제베), Tidal generation(조력발전), FBR(고속증식로) 등 5개의 국책기술개발사업을 국민들의 덜 우호적인 분위기속에서도 추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드골자신은 이로 인해 대통령 재선에 낙마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불란서는 당시의 이런 국책사업에 힘입어 1970년 중반에 ESS로 정보통신망을 현대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불란서의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 KIST에서 사설(私設)용 전자교환시스템을 개발 성공시킨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록 사설용이긴 했지만 ESS의 독자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바가지를 덜 쓰고 선진 공용(公用) ESS를 해외에서 도입하여 개량하고자 한‘from imitation to innovation’기술전략으로 당시 엄청난 전화적체수요를 해소시키려는 정책을 한국정부가 1970년대 후반부터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연구개발주체로 ETRI가 발족하고 체신부의 사업부문을 KTA로 공기업화하고 한국전자통신제조회사(후에 삼성전자에 흡수됨)를 설립운영하면서 1980년대 초반부터 엄청난 전화적체수요를 해소시키고자 했던 정책을 추구하였는데 이 정책은 비교적 순항을 거듭하며 성공적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1970년대 후반 광섬유 케이블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1980년대에 걸쳐 장거리 전송부문에 사용하게 되면서 한국의 정보통신체제는 운 좋게도 ESS 혁명과 광섬유 혁명의 메리트를 제때 제대로 살린 현대화된 국제경쟁력을 갖춘 정보통신네트워크로 변모할 수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1988년에 KTA는 21세기를 향한 장기발전전략을 마련하는 연구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는데 거기에서 필자는 경영전략을 맡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서 필자가 최대로 관심을 둔 대목은 이미 얘기한 대로 1985년부터 시작된 공산권의 개방개혁으로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미소양극체제가 종식될 때 이런 변화가 정보통신분야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 시 말해 1876년 전화발명 이후 100여 년간의 전기통신을 개관해 보면 1960년대 초반까지는 전화기반의 유선전기통신으로 그리고 196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전화기반의 유선 정보통신으로 구분지울 수 있는데, 미소양극체제하에서 군(軍)통신으로만 사용되던 무선통신이 양극체제의 종식으로 상업적 목적의 민간용으로 사용하게 되면 그때에는 어떤 통신체계가 바람직한 것일까, 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필자는 이 바람직한 통신체제의 탐색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니즈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찾아야 하며, 인간의 니즈변화는 단순히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패턴내지는 규칙성을 가지고 진화하며 니즈진화는 니즈의 가장 절박한 속성(이를 어필속성으로 부르고자 함)이 바뀌는 과정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니즈진화의 관점에서 미아(迷兒)로 안절부절 못하는 엄마의 예를 잠시 보기로 하자.

아들을 잃어버리고 그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에게 가장 절박한 어필니즈속성은 생사여부를 알고 싶은 것일 것이다. 여기서 어필니즈속성이란 그것이 충족되면 만족을 가져다주는 속성이란 의미이다.

 

자, 이제 애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접한 상황에서는 어떤 것이 어필니즈속성일까?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것이 엄마에게 가장 절박한 어필니즈속성이 될 것이며, 또 목소리를 듣고 난 후의 절박한 어필니즈속성은 보고 싶다는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이 니즈 속성은 생사여부 확인-목소릴 듣고 싶다-눈으로 보고 싶다, 는 식으로 새로운 어필니즈속성이 등장하면서 진화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진화과정에서 이전의 어필니즈속성은 기본니즈속성(basic attribute)으로 바뀌면서 니즈가 진화해 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기본니즈속성이란 그것이 결여되면 그 어떤 어필속성도 아무 관심을 끌지 못하게 하는 속성을 말한다.)

 

자, 그러면 이제 면전(面前)이 아닌 원거리 의사소통에 대한 니즈는 어떻게 진화해 갈 것인가?

 1979 년에 필자는 일본 NTT(일본 전화전신공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들은 X-bar라는 기계식 시스템으로 이미 영상전화까지 개발해 놓고 상용화를 앞두고 있었는데 필자에게 시현해 보이며 영상전화가 다음 세대의 주종의 통신도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우리의 현실은 그냥 전화도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백색전화 값이 주택 값의 반(半)을 넘는 기이한 시대였던 탓에 필자는 그때 일본을 대단히 부럽게 느꼈던 게 기억난다.

 그래서 필자가 1981년 교직으로 옮긴 후에도 언제 영상전화가 일본에서 널리 보급되는가에 큰 관심을 두어왔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영상전화 보급 소식은 들려오질 않고 오히려 1985년에 Motorola의 셀류러 폰이 나오자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현상이 필자의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을 보며 당시 필자에게 터득되어 오는 바는 ‘서로 영상을 보며 하는 통화’보다는 ‘언제 어디서든 하고 싶을 때 쉽게 할 수 있는 통화’가 훨씬 더 강력한 어필니즈속성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런 어필니즈속성을 충족시키려면 통신시스템은 반드시 유무선 통합방식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필자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로서 KTA가 지녀야 할 전략슬로건으로 필자는 ATTACK 전략을 제시하고 전사적으로 공격(攻擊)경영의 조직풍토와 기업문화창달을 강조하며 그 어떤 경우든 절대로 유무선통신서비스 제공자로서의 비즈니스 도메인(business domain, 독자적인 기업의 생존 번영영역을 말함)을 견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ATTACK이란 다음을 말한다. 즉,

 

A: advanced(첨단의)

T: total(유무선,有無線)

T: telecom(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로서)

A: advantage(우위를)

C: creating(창출하는)

K: KTA가 되자!

 

당시 KTA에서는 필자가 제시한 전략슬로건에 대해 ATTACK전략 선포식까지 할 정도로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중간관리자에게 이르기까지 대단히 흡족해 하였고, 그래서 필자의 연구 성과는 성공적이었다고들 평했다.

 그런데 몇 달 후 세계적 기업으로 KTA가 웅비하려면 세계적인 컨설팅사의 연구물이 국내・외적으로 필요하다며 포터 교수의 Monitor Group에 용역을 의뢰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도 그 필요성과 당위성에 견해를 같이하며 그들의 연구결과물에 대한 기대를 키워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필자가 받았던 연구비가 그렇게 적은 규모도 아니었는데도 그 30배에 해당하는 연구용역비를 Monitor에 주는 규모로 봐서 대단한 것이 담길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몇 개월 뒤 Monitor의 최종 연구결과물에 대한 발표가 있다며 연구결과에 대한 심사 평가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이 왔는데 Monitor의 프레전테이션은 대단히 황홀할 정도로 현란했다. 방대한 DB에 기초한 데이터 분석결과를 명쾌한 도표와 그림으로 요약한 것들을 멋들어진 파워포인트 영상과 음향이 곁들인 1시간 이상의 발표 프로그램은 아마도 당시 참석했던 거의 모든 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고 생각되었다. 지금은 우리의 프레젠테이션 기법도 세계적 수준이 되었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그런류의 프레젠테이션은 거의 없었던 때였으므로.

 그런데 얼이 빠질 정도로 감동적인 프레전테이션이 끝나자 갑자기 공허감이 필자를 엄습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1980년대 후반 당시의 환경만을 개관해 보더라도 디지털화 혁명의 진전, 소련연방 해체가능성과 그에 따른 정보통신에의 충격, 그리고 막 형성되어가고 있는 무선통신의 산업화가능성, 인터넷 혁명과 그 충격 등이 예견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은 이런 것들의 상당부분을 놓치고 있었고 특히 정보통신에 대한 고객의 니즈가 향후 어떻게 변모(진화)할 것이며 이에 따라 정보통신산업은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되어 갈 것인가에 대한 통찰력이 당연히 담겨있으리라 기대했던 필자의 기대가 여실히 꺾인 탓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주된 내용은 고작 포터 교수의 경쟁전략 틀 뿐이었다. 우선 5-force 모델을 분석한 것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기실 5-force 모델은 한 시점에서 해당 산업시스템 내에서 경쟁을 유발하는 구도만을 보여 주는 것임에도 그것이 마치 산업전망까지도 보여주는 양 자신만만해 했고, 원가주도전략, 차별화전략, 집중전략 등의 본원적 전략은 이미 그 단순성으로 인해 실용전략도구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가 없음에도 이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뿐이었다.

 발표 후 심사 평가 때 기업성과를 가져오는 핵심동인으로서의 혁신전략은 거의 다루질 않고 기업가정신, 리더십, 기업지배구조 등과 같은 지극히 추상적인 것들을 Monitor가 제시한 대로 하기만 하면 과연 KTA가 세계 유수의 정보통신 서비스 제공자로서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우리를 얕잡아 본 탓이었는지 엉뚱하게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만 파는 데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래서 말미에 필자는 가장 기술변화가 심한 산업영역이 바로 정보통신 분야인데 기술전망 및 시장고객의 니즈변화, 기술과 시장과의 정합성 그리고 기술혁신전략이 담기지 않는 경영전략이라면 솔직히 용역비 규모로 봐서 대단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고 심한 표현이지만 이해하라며 마치 사기를 당한 것 같다며 혹평을 가했는데도 그들은 다만 침통해 하며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당시 Monitor의 연구결과는 필자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위 세계적 명성을 지닌 유수한 컨설팅사나 경영구류(guru)에 대한 선입견을 크게 바꾸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Monitor에 대한 당시 필자의 심사평가 경험은 필자로 하여금 가치창조(value creation)에 대하여 감히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해 주었다.

 이런 배경에서 필자는 지난 20여 년간에 걸쳐 ‘역동적 환경에서 기업성과는 기초(期初)의 기업역량(또는 핵심역량)을 초기조건으로 기중(期中)의 고객의 니즈진화와 산업진화에 적응하는 기업의 혁신전략에 좌우된다.’는 이론모델을 상정하고 이를 직관만이 아닌 자연법칙 특히 물리학에서의 법칙과 복잡성과학에서의 메시지를 논거로 빌려와 전일주의에 입각하여 기업레벨과 산업레벨을 동시에 통합적으로 동태적으로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은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가 아직 미미하지만 국내외 학계와 출판계로 보급 확산되어가는 분위기인 듯하다.

 2000년대 들어 10여 차례 이상 세계전략경영학회와 IEEE-생산관리학회 및 서비스시스템 학회 연례회의와 특별회의에서의 발표 그리고 홍콩대, 홍콩중문대, 중국 칭화대, 북경대, 난까이대, 일본 JAIST, 서울대, KAIST, 한양대, 몽골 국제대 등 아시아 유수대학에서의 세미나, 강의, 발표를 통해 알려지고 있으며 또한 Wiley-Blackwell 경영백과사전 3판(2013 여름 출간)에 등재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관점의 논문 Chaebol Structure(재벌구조)을 통해서도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가 국제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의 중국어 버전인 Dynamic Enterprise Strategy(动态企业战略)가 북경대 MBA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어 가르쳐지고 있어 중국내 여타 대학으로도 그 확산이 기대되고 있는 분위기인 탓이리라.

돌이켜 보면,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포터 교수와 그 동료 및 후학들이 1983년 설립한 세계적 컨설팅사였던 Monitor Group이 25여년 전에 KTA(지금의 KT전신)의 장기발전전략으로 제시했던 결과물에 크게 실망했던 필자였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필자로 하여금 ‘고객의 니즈진화에 적응하는 혁신경영 곧 니즈맞춤혁신’을 강조하는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구축하고 아직 미완(未完)이나 이를 국내외로 확산시킬 수 있게 된데 대해 역설적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를 느끼고 있다.

 

글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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