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울란바토르와 연변 체험에서 얻어진 메시지는?

2013.07.10

거짓과 거짓말은 불완전한 인간이 지닌 악한 심성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로 악함을 누르고 선한 쪽이 이기도록 갈고 닦으면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에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명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2007년 몽골국제대학(MIU)에서 여름계절 학기에 경영학을 지원해 달란다는 요청을 받고, 필자와 집사람이 경영전략과 기업윤리를 커버하는 과목을 공동으로 맡고 미국CPA 소지자로 회계학 전공의 경영학 박사인 필자 후배가 국제경영을 맡아, 집중강의로 진행되는 특별학사(學事)프로그램을 위해 울란바토르에 3주간 체류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몽고음식이 입에 맞질 않아 우린 비교적 자주 한식식당엘 가곤 했는데 당시 한국관광객이 많았던 탓이었는지 그곳에 의외로 한국식당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단골식당에서 식사하던 어느 날 15여명의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밀어 닥쳤다. 그 식당에는 이런 단체손님 때문이었는지 평소 때에도 홀 서비스를 맡고 있는 몽고아가씨 종업원들이 10여명 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날 한참 주문을 받느라 씨끌 뻑정했는데 주문이 끝나고 얼마 지나 음식이 나오자 또 한번 난리가 난 듯 큰소리도 나고 고함소리도 터지고, 식당주인 아주머니가 연방 미안하다며 주문한 손님들의 성질을 누구려 뜨리려 애쓰고 있었다.

필자는 어인 일인가 흥미롭기도 해서 가만히 그 소동을 지켜보았다. 소동은 손님 몇 사람이 당초 주문 내용을 바꾸는 바람에 주문 받은 몽고 아가씨가 얼떨떨해져서 주문한대로 음식이 안 나오고 딴 게 뒤죽박죽 나오다 보니 모처럼 여행 중에 특별히 먹고 싶었던 기대가 깨지는 바람에 손님들의 불평이 터졌던 것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손님들이 빠져나간 다음 필자가 그 여자주인에게 왜 그런 실수가 일어나느냐니까 이런 경우가 여기서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단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2007년 당시 몽고사람들은 어른이건 애들이건 머리회전(回轉)훈련이 별로 되어 있질 않아서 국내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도 하는 머리 회전이 여기서는 제대로 안 된단다. 그래서 자기도 처음엔 몽고 종업원들이 국내와 같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여러 번 낭패를 보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시킨 것은 시킨 대로 아주 잘 하는데, 한번만 변경하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이 헷갈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몽고인들이 대체로 센스가 약하고 집중력이 덜하면서도 정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15년 가까이 그곳에 살면서 느낀다는 여주인의 설명이었다.

 

정직(正直)이라는 말이 나오니, 필자 후배교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심사 중에 있었던 일이라며 들려주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구두(口頭)심사 때 한 심사위원이 던진 질문에 잘 모르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둘러대고 있는데 갑자기 ‘너, 거짓말쟁이(You are a liar)!’ 하며 고함치더란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박사학위는 이제 물 건너가는구나 생각하며, 지체 없이 잘못을 인정했더니만 ‘그래, 자네 이게 정직한 거야’ 하더란 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박사학위를 받고 상당 시간이 흘렀어도 그때의 그 경험은 그의 일상에서 늘 정직하자는 것이 생활신조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2000년대 초반 집사람이 겸임교수로 있는 중국 연변의 한 대학교에 특강 차 갔을 때 일이다. 강의 일정이 끝나고 비교적 한가로운 시간을 맞아 근처 관광지 몇 곳을 돌아보고 그곳 안내하던 사람의 제안으로 북한에서 운영한다는 식당엘 가게 되었다. 손님들이 식사하는 중에, 마치 우리나라 5-60년대 초등학교 학예회를 연상케 하는 노래와 춤으로 식욕을 돋으려는 그곳 식당의 여종업원들은, 사실여부는 모르겠지만 그곳 설명으로는, 평양 어느 여자대학교에서 선발되어 왔단다.

 필자와 집사람은 그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육류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를 몇 번이나 확인하며 주문하였고 또 주문 받는 여종업원도 절대로 고기가 안들아 가는 거라며 여러 번 확인해 주었는데 얼마 후 우리 앞에 갔다 논 음식에는 버젓이 고기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문 받은 여종업원을 불러 여기 고기가 들어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만 고기가 안 들어 있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젓갈로 들어 보이며 이게 고기 아니고 뭐냐니까 그래도 안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임자를 좀 불러달라고 했더니 별별 말을 다하며 이리저리 빼길래 직접 책임자인가 하는 한 남자를 불러 자초지종 얘길 했더니만 그 역시도 고기가 안 들어간 거란다.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계속 아니라고 우겨대는 그 막무가내를 보면서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천연덕스럽게 해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니 저들이 과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끔찍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저들이 저럴 정도로 진실과 정직과 먼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그래서 우릴 안내한 사람에게 왜 이런 델 데리고 왔느냐니까, 그는 저런 거짓말 정도는 당시 연변 지역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란다. 왜 사람들이 저렇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개방 전 공산당 시절엔 거짓말을 전술적・예술적으로 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학습 받곤 한 게 몸에 베인 것 같다는 얘기다. 살아보진 않았지만 공산당 치하 생활이 어떠했을까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그곳 교수에게 거짓말을 전술적・예술적으로 하라고 배웠는지를 확인하였더니 구공산당 치하에서는 수도 없이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그걸 학습 받았단다.

 필자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구 공산당 치하란 참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기막힌 곳이었음에 틀림없었구나. 온통 거짓말들이 넘쳐나니 거짓말에 익숙해지든가 둔감해지지 않으면 진실과 정직을 큰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살 수 없는 생지옥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었던 기억이 난다.

계속 거짓말로 속이고 속는 세상일 테니 그야말로 속이는 자(deceiver)라는 뜻을 지닌 사탄(Satan)이 지배하는 곳임이 분명했고 상호신뢰(mutual belief)란 찾아볼 길이 없는 그야말로 불신(不信)의 심연(深淵) 속에 푹 잠긴 참으로 생지옥(生地獄)이었을 것으로 인식되었다.

 

연변 북한식당에서 황당한 경우를 체험한 그 다음날 필자는 연변 중소(中小)기업 CEO 약 100여분을 상대로 ‘전환기 시대의 기업 CEO, 그 역할과 사명’이란 제목의 특별강의를 하였다.

강의요지는 공산권 치하의 통제된 사회에서 글로벌 개방경제로 편입되는 상황에서‘기업은 거짓이 아닌 진실(眞實)을 바탕으로 고객의 선(善)한 니즈를 혁신을 통해 옳은 방법으로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데 악(惡)한 니즈 까지도 충족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또한 설령 선한 니즈 일지라도 이를 옳지 않은 그릇된(wrong)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것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에는 해악(害惡)을 주는 일이므로 그런 기업은 결코 지속번영 할 수 없을 것임을 강조하는 강의였다.

 그러면서 ‘옳은(right)’이란 말의 의미부터 이해해 보자며 다음의 질문을 던졌다.

 

‘10 위안과 100 위안을 빚진 두 사람이 빚을 갚으려고 애를 써도 갚을 수가 없음을 알고 돈을 빌려준 사람이 그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시켜주었다면 두 사람 중 누가 더 감사해 할까요?’

이 물음에‘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다, 더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이다, 둘 다 모두 똑같이 감사할 것이다, 금액의 크기에 대한 각자의 인식의 차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감사할 필요가 뭐 있느냐 누가 탕감시켜 달라고 했느냐’는 등등의 답변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탕감시킨 하나의 사실(fact)을 놓고서 앞의 질문에 이렇게 여러 의견이 나오니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좀 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첫째, 지금 나온 여러 의견 중에는 옳은 의견이 아예 없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니까 모두 수긍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만약 그 여러 의견 중에 옳은 의견이 있다면 나머지는 무엇이겠는가를 물으니 그른(wrong) 의견들이라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그렇다면 이들 중에 과연 옳은 것이 있으며, 만약 있다면 어느 것이 옳은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를 물으니 여기저기서 각기 자기가 주장한 의견만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장내는 갑자기 어수선한 혼재(混在)의 장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계신 대로 각자의 의견을 모두 존중해 주어야 한다면, 과연 옳은 의견이 있는지, 있다면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지 않겠느냐, 하니까 모두 동감을 표하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에 관한 한, 이와 같이 각자의 의견을 모두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이른 바 다원주의(pluralism)를 따라서는 결코 옳은 답을 얻을 수 없다.

 또한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없다는 식의 상대주의(relativism)를 따라서도 역시 옳은 답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옳은 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원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닌 절대적 관점의 가치판단기준이 필요할 것 아니겠는가, 라고 하니까 모두 그렇다고 동감을 나타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옳고 그름에 관한 절대적 가치판단기준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앞 의 두 사람의 빚 탕감 이야기는 예수라는 분이 당신 제자들에게 물으신 성서의 한 대목임을 밝히며, 베드로라는 제자가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다, 라고 답하자 옳은(right) 생각이다, 라는 답을 예수라는 분이 주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옳음에 대한 절대적 가치판단기준을 얻을 수 있음을 전했다. (물론 이 대목은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육화(incarnation)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독자일지라도 단순히 예수는 지난 2,000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 중 현자로 불리어 온 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일단 그의 말씀은 그름이 없는 옳을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리라 본다.)   

요컨대 일단 탕감 받은 두 사람은 모두 다 감사하지만,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라는 게 옳은 의견임을 예수라는 분이 확정해 주었다는 설명에, 처음에 다른 의견을 답했던 사람들도 모두 명쾌하다며 공감을 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내친 김에 하나만 더 생각해 보자며‘여러분이 만약 10 위안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할 때, 100 위안 탕감 받은 다른 사람을 보며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에 대해 솔직하게 답해 달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1) 화난다, 억울하다, 라고 답하는 많은 사람들과

2) 아무렇지도 않다는 소수 사람들로 크게 나뉘는 가운데

3) 딴 사람이 더 탕감 받은 게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런데도 괜히 자기마음도 흐뭇해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a)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남이 잘되니 자기 맘도 기쁘다는 사람들로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어떤 곳일까요, 를 물으니 일제히 천국(天國)이요 한다.

b) 다음 남이 얼마를 탕감 받든 자기는 상관 않는다는 사람들로만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요, 물으니 너무 이기적인 세상이다, 자기만 아는 세상이다, 라는 등의 의견이 나오길레 그렇다면 그들 간에 시기 질투 분쟁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재차 물으니, ‘아니오.’하며 일제히 큰소리로 답하는 것이었다.

c) 이번에는 탕감 받았으므로 감사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가 더 탕감 받은 걸 보니 화난다, 억울하다, 라고 느끼는 사람들로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어떤 곳일까요, 하고 물으니 모두 지옥(地獄)이요, 한다. 

 

또 천국에서는 시기 질투 분쟁이 있을까요 하고 물으니, 아니오, 한다. 그렇다면 너무 이기적이며 자기만 안다는 사람들도 최소한 천국에는 속해 있을 것 아닌가요, 하니까, 예, 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천국에 속할 사람은 남이 얼마를 탕감 받든 상관 않는 사람들과 남이 더 많이 탕감 받으니 자기도 기쁘다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자기도 탕감 받았는데도 남이 더 탕감 받으니 화나고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갈 곳은 지옥임을 강조했다.

탕감 받은 것은 탕감금액의 다과(多寡)에 관계없이 모두 자비(charity)를 입었으므로 모두 감사할 일이지만 더 많이 탕감 받으면 더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설령 다른 사람이 더 탕감 받았을 경우 함께 기뻐해주질 못할망정 억울하다 화난다, 라고 하는 것은 남 잘되는 걸 보고 배 아파하는 아주 못된 불의(injustice)한 마음 아닌가요, 라며 요약하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경청하고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일제히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라를 외치던 그네들로부터 그들이 얼마나 옳고 그름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가 강하게 전달되어 왔다.

 

오랜 동안 전술적・예술적으로 거짓말을 하도록 학습되어 온 사람들에게 진실(眞實)을 강조하며, 옳고 그름에 대해 그들의 이해를 돕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필자의 선입견과는 달리 인간은 누구든 옳음과 진실의 가치를 희구하고 갈구하는 내면의 열망을 갖고 있으며 이를 논리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지적 역량도 다 하늘로부터 부여 받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나니 연변방송국 PD라는 어느 분이 집사람을 방송출연 섭외 차 만나려고 필자가 강의하는 회의실로 막 들어서는 순간 교수님께서 옳은 방법으로…. 라고 하는 대목에서 옳은 이라는 말이 귓전을 때리면서 자기가 뭔가에 감전된 듯 강의에 빨려들더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구 공산권 하에서 진실이라든가 옳음이라든가 와는 관계없이 거짓과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 살아오다가 중국경제가 뜨기 시작하자 거의가 오직 돈만 벌기에 혈안이 되어 아무 가치관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던 터인데, 갑자기 옳은 이란 말이 들리니 너무 감격했다며 감사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사회에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이라는 말이 돌면서 웬만한 사람이면 한번쯤은 당했거나 경험해 보았으리라. 십 수 년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현상이 외국인 근로자의 증가와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의 거의가 다 중국인 특히 중국 조선족 또는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소행임을 알리는 경고메시지가 매스컴이나 인터넷에 자주 뜨고 심지어는 코미디 프로에까지 등장할 정도니 그들이 오랫동안 전술적・예술적으로 해온 익숙한 거짓말로 우리사회를 상대로 마음껏 돈벌이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비쳐진다. (여기서 이 글은 거짓말과 거리가 먼 진실하고 정직한 중국인, 중국 조선족 및 탈북자까지도 지목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거짓과 거짓말에 길들여진 사람에겐 부끄러움이나 창피란 찾을 길 없고 오직 자기가 취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뭔 짓인들 다 할 수 있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공산체제하에서 거짓말을 전술적・예술적으로 학습되어 온 중국사회에서 지금 불량식품과 유해식품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리라. 그들은 지금 구 공산당 치하에서 잘 훈련된 거짓과 거짓말의 대가(代價)를 혹독히 치르고 있는 중으로 보이나 그 치유에는 상당 시일이 걸릴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어쩌면 애를 쓰더라도 제대로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치유는커녕 불신의 나락으로 더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과장은 아닌 듯싶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중국인 중 가진 자들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세계에서 살기 좋다는 곳으로 빠져나가고들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리고 중국인 여행객들이 외국에서 사들여가는 첫 번째 품목이 식료품이란 얘기는 이미 오래된 얘기다.

 

거짓과 거짓말은 불완전한 인간이 지닌 악한 심성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로 악함을 누르고 선한 쪽이 이기도록 갈고 닦으면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에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명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한 사회나 국가의 건강상태는 바로 그 사회나 국가에서 거짓과 거짓말이 어느 정도로 행해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중국과 북한 통계자료가 알려져 있진 않지만, 중국은 북한에 비해 거짓과 거짓말이 훨씬 덜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자기의사를 표할 수 있으며 진실과 옳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특히 기독교 선교활동에 힘입어 강하게 퍼져나가고 있는데 반하여, 북한은 지금도 거짓과 거짓말을 여전히 전술수단으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범죄건수 국가별 순위는 1위 미국 2위 영국 3위 독일 4위 불란서 5위 러시아 6위 일본 순이며 한국은 11위다.

여기서 일본과 한국의 범죄건수를 비교해 보면 일본은 2,853,739건이고 한국은 1,543,220건으로 일본이 1.85배 많지만, 인구 10만 명당 비율은 일본이 2,245건이고 한국은 3,180건으로 한국이 오히려 1.4배 높다.

그런데 이중에서 거짓과 거짓말에 바탕 둔 사기(詐欺)범죄를 보면, 사기범죄건수가 일본 49,482건, 한국 136,206건으로 절대건수에서도 한국이 일본보다 2.8배 많을 뿐만 아니라 인구 10만 명당 일본이 39명인데 반하여 한국은 280명으로 한국의 사기범죄율이 일본에 비해 7.2배나 높다.

총 범죄율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1.4배 높은 데 반하여, 사기범죄율에서는 무려 일본의 7.2배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한국이 사기대국(詐欺大國)임을 잘 나타내준다.자, 그러면 우리나라에선 왜 사기범죄가 그렇게 높은 것일까?

한 두 마디로 답할 순 없겠지만, 우리를 속이는 자들(deceivers)의 거짓과 거짓말에 너무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세뇌되며 길들여져 온 탓은 아닐까?

 

 어느 때부턴가‘짜가(가짜를 거꾸로 표현한 말임)’라는 노래가 나와서 냉소적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그 무렵 얼마 전부터 부쩍 더 심해진 건 아닌가, 하는 유추가 개연성 있어 보인다.

 우리 부모 같은 사람만 있으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다, 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띄고 또 생전 한 번도 거짓말 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을 지경이니 ‘짜가’가 유행함도 너무 당연하다.

특히 요즈음 필자가 십 수년 전 연변 북한식당에서 경험했던 황당한 해프닝이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가 많다. 이는 아마도 들어난 뻔한 사실을 가지고도 얼굴에 철판 깔고 막무가내로 거짓과 거짓말을 일삼는‘짜가 족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탓이리라.

‘짜가’의 시발점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권과 방송언론계가 크게 작용해 온 게 아닌가, 하는 감이 최근에 들었던 때가 있다. 얼마 전 애국(愛國)과 국익(國益)을 강조하며 우리의 지속발전을 다지기 위한 기초로 거짓과 그름의 지적을 통해 진실과 옳음의 가치 회복을 역설하는 의식 있는 한 젊은 언론매체 경영인이 새 정치를 표방하는 어느 정치꾼의 허위와 기만과 거짓말에 대해 하나하나 명백한 증거를 대가며 지적하는 대목에서, 장난기 띈 농담조이긴 했지만, 그런 걸(거짓과 거짓말 지적) 왜 하느냐, 밥이 나오느냐, 돈이 생기느냐며 되묻던 인터넷TV 진행자를 보며 아쉬움을 접했던 때였다. 물론 더 자연스레 방송을 진행하려는 그의 의도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면서도 진실의 가치에 대해 몰이해인 듯한 그의 내면이 확인되는 순간이어서‘옳은’이란 말에 감격하던 연변방송 PD가 동시에 떠오르며 두 방송언론인이 비교되었던 까닭은 왜였을까?

 

글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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