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들어가며

Apologetics.. 아폴로제틱스..흠.. 이 단어를 보면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은 apology 아폴로지.. 가 아닐까? apology 하면 우선 사과, 사죄, 변명, 변론 정도의 뜻이다. 여기의 apologetics는 마지막 것인 변론에 가까운 것으로 거의 99% 이것은 ‘자기 믿음, 신앙의 방어, 변론’을 뜻 한다. 이 blog에서는 내가 현재 믿고 있는 가톨릭, 천주교 신앙에 대한 변론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개신교에서는 이 말조차 ‘구교, 천주교’ 냄새가 난다고 오래 전에 팽개쳤을 지도1 모른다. 이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가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당대의 다른 apologist 변론가 들을 언급하고 나 나름대로 형성을 하게 된 것 (이것도 사실 지금도, 매일 변화,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 을 남기고자 한다.2

 

가까이 온 죽음과 신앙

처음 이 ‘신앙 변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가톨릭 신앙을 되찾고자 시도를 할 때였다. 나의 유일한 등대, 나의 분신이셨던 어머님의 타계와 더불어 나는 죽음이란 것을 인생 처음으로 피부로 느끼며 나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50이 훨씬 넘은 후에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던 나는 한마디로 철부지였다. ‘죽음’의 ‘죽’자만 보면 나는 외면하고 그런 것은 나의 사전에 없다고 피하고 살았고, 죽음에 관련된 어떤 것, 장례식 같은 것도 나에게는 없었다. 죽음은 한마디로 ‘수백 년 뒤에 있을’, 나에게는 그저 ‘추상 명사‘였다.

 인간의 수명을 생각해보니 기껏해야 70~80세 정도였고 그것은 나에게 불과 20~30년 정도의 여유를 주었지만, 20~30년 정도의 세월은 전에 생각하던 것 보다 ‘훨씬’ 짧다는 것도 50년 이상 살아본 경험에 의해서 쉽게 짐작이 갔다. 나의 20~30년 정도 전의 ‘개인 적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엊그제 같이 느껴지니, 사실 나의 수명은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음은 암만 죽음의 죽 자를 피하려 해도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였다.

한마디로 죽음의 그림자는 나를 덮치기 시작하는 것이고, 아니 이제부터는 내일의 태양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몇 안 되는 가족들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아닌 듯 싶었다. 이런 것이 지나친 우려처럼 들렸으면 하고 바라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것, 죽음이 진리이고 사실임을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철학적 실존과 죽음

이제는 죽음을 의도적으로 가까이 보려고 노력을 하고, 그 동안 꽤 보아왔기에3 조금은 그 보이는 모습과 배경도 생각하게 되었다. 천차만별의 모습을 한 죽음의 과정, 여정도 알게 되었고, 남아있던 사람들의 모습과 반응도 보게 되고, 그것을 보는 나 자신도 보게 되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나는 조금은 냉정하게 죽음을 대하게 되었고, 무조건 피할 때보다 훨씬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의 제일 큰 명제는 이것이다. 죽음은 과연 그 죽음의 주체에게 모든 것의 끝일까? 그 당시까지 신앙심이 거의 사라진 나에게 대답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 깜깜한 암흑‘이란 것이 대답이었다. 모든 것의 끝.. 모든 것의 끝.. 이 거대한 우주 안에 유일한 존재였던 나, 이경우란 생물,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그러니까 실존이 허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나를 괴롭고 슬프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통은 사실 젊었을 적, 대부분 10대에 잠깐 찾아오긴 하지만, 사회란 거대한 보호 막 속에서 자연스레 잊게 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나란 사람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왜 실존이 되었다가 허무로 사라지는 것인가? 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과연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대답을 주었을까? 모두 ‘말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었을까?

절대로 철학이 이것에 대답을 주지 못함, 그것이 바로 ‘유한한 인간’의 슬픔일 것이다. 이런 ‘안 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잊고 살 수도 있겠지만, 중년이 훌쩍 넘었던 나에게 그것은 사치였다. 죽음이 striking distance에 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의 순간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파스칼의 내기, Pascal’s Wager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신앙적 변론들이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쉽고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 것으로 Pascal(파스칼)의 Wager 란 것이 있다. 여기서 wager라면 ‘도박이나 내기’ 정도의 뜻이 아닐까? Pascal 하면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름일 것이다. 그는 신이 있다 와 없다 중에서 어떤 것이 맞는지 ‘내기’를 한다. 내기에 참가를 안 하면 ‘신은 없다’로 간주가 된다. 만약 내가 ‘신이 있다’를 고르고 그런 믿음으로 살다가, 그것이 틀렸더라도, 그러니까 하느님이 없었더라도.. 아무런 ‘손해’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사실 ‘거룩한’ 삶을 살았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신이 있었다면? 나는 이긴 것이고 내가 가고 싶었던 천국이 나의 것이다. 내가 신이 없다는 것을 선택했고, 없는 것처럼 일생을 살았고 실제로 하느님이 없었다고 해도 내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틀렸다면, 그러니까 하느님이 계셨다면.. 나는 하느님을 안 믿는 ‘죄’를 지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현명’ 한 것이고, 믿어서 손해를 볼 것이 ‘하나도’ 없다는 논리다. 나도 이런 식의 ‘논리’를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현자와 성인’들이 하느님이 있다는데, 그것 믿어 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 만약 믿었다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 손해 보는 것은 극소적이 아닐까 하는 지독히 타산적인 생각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논리는 너무나 ‘타산적’인 것으로, 가슴으로 하느님이 믿어지지 않을 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 외의 훨씬 더 이성적이고 수긍이 가는 변론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적 이성으로, Cosmological Reasoning

파스칼의 조금은 타산적인 이유보다도 훨씬 이성적이고 심지어 과학적인 논증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바로 깜깜한 밤에 찬란히 떠오른 달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 막막한 우주인 것이다. 이 ‘우주적 논증’이 내가 얼마 전까지 ‘사랑’하던 것이었다. 종교적 믿음에 회의가 들면 나는 ‘무조건’ 하늘과 우주를 생각했다. 그러면 십 중 팔구 회의감을 무마할 수 있었다. 우주적 논증은 우주 과학 같은 것과 상관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는 할 수 있다.

이 논증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명백한 ‘공리’로부터 출발한다. ‘원인과 결과’, 모든 현상이나 결과는 분명히 원인 제공이 필요하다는 너무도 명백한 이론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알 수 있는 크기는 무한대에 가깝다.. 무한대가 아니고 가까운 것은 사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한계를 알 수가 없고, 실증적으로 관념적으로도 알 수가 없다.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 어디까지가 우주의 끝인지 ‘모른다.’

그것이 현대인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기술적 과학의 끝이다. 그러니까 그 끝을 이어 받아 해답을 주는 것이 종교적 신앙인 것이다. 최첨단 기술과학이 밝힌 것은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 Big Bang 이론이 있다. 태초에 ‘꽝!’ 하고 gas가 터지고 그곳에서 현재의 모든 우주의 물질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천문학’이 되었고, 생물이 나오며 생물학이 되었다. 그러면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그 ‘태초의 꽝!’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그것은 과학이 아니란다. 과학의 영역 밖이란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까지 계산을 해낸 천문과학자들, 크기가 있으면 그 변두리도 있을 것인데.. 그 변두리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도 과학 영역의 밖이란다. 이런 근본적인 과학의 한계를 알면, 사실 누구나 ‘겸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머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모르는 것 투성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바로 ‘하느님의 만드신 우주와 피조물인 인간’ 설, 바로 종교인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실험으로 알려진 기술적 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실보다 엄청 커다란 진리의 일부가 과학인 것이다. 그 진리가 바로 ‘하느님의 세계’를 말하는 종교 신학이 아닐까? 여기까지 모든 것인 ‘과학적 실험’에서 벗어나지만 완벽한 이론과 이성에 부합되는 것 들이다.

 

역사적인 접근, Historical Signs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하느님, 그것도 유대교-기독교적인 생각에서 보는 하느님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을 말하는 ‘믿음 체계, 종교’는 지구상에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그 중에서 왜 나는 그리스도교 적인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왜 그것이 나에게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해답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불교는 아니고, 왜 일본 신도나 이슬람은 아닌가?

이것은 비교적 길지 않은 인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다름아닌 유대-기독교에서 모두 사용하는 ‘구약성경’을 말한다. 이 구약성경은 신앙적인 bible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서’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이것은 현대적 세속적 과학적인 ‘보이는 것’을 찾는 관점으로 보면 ‘설화’에 가깝지만 그 속에서 ‘안 보이는 것’을 찾는 것 또한 의미가 크다.

제일 큰 의미는 바로 하느님의 존재와 ‘우주 창조’에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인 절대 유일 존재, singularity, 시 공간 이전의 창조의 모든 근원이 하느님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계시 받은 것이라면, 그 절대존재, 야훼라고 불리는 그것이 하느님이 아닐까? 물론 이런 접근 방식은 어느 정도 ‘믿음의 문’을 열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것도 ‘은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나가며

기독교에는 ‘믿음은 은총‘ 이라는 말이 있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주시는 ‘공짜의 선물’이란 뜻이다. 이 말은 누구나 받는 선물이란 뜻이지만, 인간 고유의 특성인 ‘자유의지’에 따라서 이 선물을 받고, 안 받고 한다. 애써서 거부만 안 하면 받는 선물이 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는’ 능력인 것이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하느님이 주신 ‘이성’이라는 인간의 능력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이성이란 것은 신앙적 차원에 못 미치는 불완전한 것일 수 있다.

위에 나열한 여러 가지의 ‘변론, 이유’들은 개개인 마다 다른 의미로 비쳐지기도 하고 이런 이유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믿음이란 것이 ‘이성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서 믿음의 부정이 오히려 비이성적임도 보여주기에, 파스칼의 말 대로 ‘믿어서 손해 보는 것이 없다’는 것만 인정해도 어떤 무신론자에게는 거의 천지개벽 같은 변화를 주지 않을까..

 

  1. 추측에 그들은 주로 신앙간증이란 형식으로 이것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2.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이것이 어떤 한 사람에게라도 ‘이 험한 세상이 알고 보면 생각보다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 그것뿐이다.
  3. 주로 장례행사: 장례미사, 연도 등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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