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2021년 summer reading 목록 중에서 제일 빨리 독서/필사가 끝난 책이 예수회 America magazine 편집장 James Martin신부의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원제: My Life with the Saints, 2006)’ 이다. 이 책이 최근에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듯 싶다. 몇 개월 전에 Martin fever로 이름한 나의 초 超관심 기간 중에 이 신부의 책 4권을 거의 한꺼번에 산 적이 있었다. 그것들을 천천히 이것 저것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그의 문체와 지적 철학에 조금 적응하려는 의도였다. 이 예수회 신부는 news media상에서 가끔 ‘지나친 진보적 신부’라는 비판을 받는 것 외에는 별로 큰 관심을 끈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속단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결국은 Bishop Robert Barron에 못지않은, 아니 버금가는 미국 가톨릭 [거의] 차세대 최고 지성의 거목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연숙과도 나누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그분의 책 몇 권을 이미 읽었던 과, 이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교리반 시절 선물로 받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한국어 번역본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이었다.

이제까지 성인전 종류의 책은 나에게 별로 손이 가지 않은 것들이었다. 기억 속에서도 그런 책들은 우선 오래된 낡은 책들, 하나같이 고통을 지나치게 묘사한 것들, 감히 다다르지도 못할 인간의 능력을 넘은 초인간들, 난해한 고유명사 투성이의 조잡한 번역… 등등으로 나는 가급적 그런 책들을 피하며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도 별로 선뜻 손이 안 가는 책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제는 친근한 모습의’ Martin 신부가 쓴 책이라는 것에서 느낌이 아주 달랐다. 조금은 ‘초현대적, 초이성적, 심지어 과학적’인 접근을 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전통적인 고리타분 하고 녹 냄새가 풍기는 그런 성인전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바로 나를 위해서 쓴 책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이 책의 원제는 ‘성인과 함께한 나의 삶, My Life with the Saints‘ , 하지만 성찬성[역자] 번역본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왜 멘토란 말을 넣었을까?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성인’이란 말은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성인은 물론 그 외에도 성인 같은 삶을 산 사람들[토마스 머튼, 도로시 데이 같은]도 포함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그 ‘성인과 비슷함’을 멘토 mentor 란 단어로 표현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16명의 성인, ‘예비, 준’성인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의 특징,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모두 Martin신부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으뜸으로 다루어진 ‘성인’이 바로 토마스 머튼 트라피스트 수사신부님인데, 솔직히 나는 그런 사실에 아직도 동감을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화장실에서’ 몇 년간 읽었던 그의 대표작 Seven Storey Mountain 이란 자서전이 왜 그렇게 수많은 예비신부들의 ‘고전적’ 필독서가 되었는지 쉽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이유는 이 책은 솔직한 고백록일지는 모르지만 요점을 제외한 ‘군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웬 고유명사들이 그리도 많은지, 본인에게는 익숙한 표현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한 것들인데 알고 보면 그런 것들이 모두 불필요한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머튼은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실망까지… 그래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99% 틀렸을 것이라는 것 [사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Bishop Barron과 Father Martin 모두가 그 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마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토마스 머튼과 그 칠층산을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마틴 신부의 글은 다른 각도로 그 책을 재조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다시 그 책을 읽을 때는 조금 더 겸손한 자세로 읽게 될 지도 모른다.

 


참된 자아

 

나에게 있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화와 구원의 문제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와 같다.

 – 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대학에서 미시 美詩 American Poetry 강의를 들을 때, 월트 휘트먼을 처음 소개받았다. 우리 젊은 교수는 휘트먼 예찬자이자 연구가였다. 그녀는 시인의 전기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 어느 날 그녀는 만일 우리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거든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하라고 말했다.

 

내가 나 자신과 모순되는가?

그래, 참 좋다. 나는 나 자신과 모순된다.

(나는 크고, 내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앉아 있나니.)

 

휘트먼은 이 시구로 또 다른 시인이자 신비가요, 수도승이요, 예술인이요, 평화 운동가요, 사제요, 영성 대가요, 교회 일치 주창자요, 선사 禪師 요, 성인인 토마스 머튼을 어렵지 않게 변호할 수 있었다.

머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모순이다. 자신의 주변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봉쇄 수도회 수도승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데, 그가 바로 트라피스트 수도승 머튼 루이스 OCSO the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 (엄률 시토 수도회) 신부다. 떠돌이요 타고난 여행가이면서 정주 서원을 하고 미국 켄터키 주 외딴 산중에 터를 잡은 겟세마니 성모 대수도원에 정착하기로 작정한 사람. 자진하여 순명 서원을 하고도 수도 생활 상당 기간을 자기 수도회의 장상들과 부딪히며 보낸 사람. 자신의 소명에 반하지만 [필사주: 反인가, 반대로 魅惑인가? 정말 성의 없는 번역]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사람. 동양 종교들에 매혹당한 신심 깊은 가톨릭 회심자. 명예직과 훈장을 싫어하는 (아니면 싫어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려 노력하는) 저명한 문필가. 하루는 결코 한 줄도 더 쓰지 않겠다는 결단을 글로 쓰는가 하면, 며칠 후에는 출간된 자신의 또 다른 저서를 보고 느낀 기쁨을 글로 쓸 수 있는 사람. (그는 주목할 만한 한 일기의 도입부에서, 새로 나온 자신의 책 표지를 싸고 있는 올이 굵은 삼베가 당시 맨해튼의 현대식 나이트클럽에 사용된 천과 똑같았다는 점에 은근히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역설들, 이런 휘트먼풍의 다중성은 머튼을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변화무쌍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이르는 여정을 소상하게 기록한 1948년도에 출간한 회고록 <칠층산>은 사리를 아는 머튼조차도 예견하지 못한 출판계의 기현상이 되었다. 이 책은 수백만의 독자에게 관상 기도를 소개했고, 전후 미국 수도 생활의 쇄신을 예고했다. 평화에 관한 그의 글들은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의 전조가 되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자극은 지쳐 있던 한 미국인이 그리스도 신앙을 재정립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책은 나를 재정리하는 데도 보탬이 되었다.

<칠층산>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려면, 내가 머튼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얼마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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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일곱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 대학 와튼 스쿨에서 수강했다. 내가 경영학을 공부하기로 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거니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는 이해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미술처럼 신나게 공부한 과목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직업으로는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보았다. 일례로 나는 프랑스어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경영학을 공부해 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막연하나마 경영학을 전공하며 영어의 영업 부분 (출판), 미술의 영업 부분 (박물관이나 화랑 운영)처럼 어떤 활동 분야에서든 ‘영업 부문’에 직장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못해도 경영학 학위면 졸업 후에 봉급이 높은 직장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고, 나는 그렇게 되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가족과 친구들, 고등학교 진학 상답 교사 모두가 동의했다.

문제는 내가 ‘삶을 꾸리는 소득’을 생각할 때마다 ‘꾸리는 소득’만 생각했지 ‘삶’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나는 이러한 업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털끝만 한 개념도 없었다. 그 삶이 충족스러운 것일까? 즐거울까? 그 삶에서 내 기량을 훌륭하게 발휘할 수 있을까? 그 삶이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삶일까? 나는 바로 이런 질문을 곰곰이 따져 보지 못했다. 열일곱 살짜리로서는 그럴 수도 있기에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결국 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정확히 말하면 재정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와튼 스쿨에서 수강한 과목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를 들이켜거나 좋은 영화를 보는 것만큼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숙지할 수 있는 과목도 몇 가지 있었다.  적어도 회계학은 그랬다. 훌륭한 회계학 교수가 몇 분 있었다는 점 외에도, 회계학에서는 모든 것이 꼭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렵기는 하지만 낱개의 조각을 산뜻하고 재치 있게 조합하면 결국 해답이 나오는 수수께끼 같았다. 하지만 대차 대조표를 만들고, 손익 계산서를 재검토하고, 현금 흐름표를 정밀 조사하는 일은 내가 여가 중에 하고 싶은 일은 결코 못 되었다.

그런가 하면 와튼 스쿨에서 내가 몹시 싫어하던 과목도 여럿 있었다. 확률 통계론 교수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따분한 분으로, 한 학기 내내 자신의 확률 정리 하나하나를 설명할 때마다 똑같은 예를 들었다. “두 개의 항아리가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는 100명의 안경잡이 경영학도들을 앞에 두고 콧소리 섞인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하고 했다. “한 항아리에는 초록색 공들이 들어 있고 다른 한 항아리에는 붉은색 공들이 들어있다. 우리가 각각의 항아리에서 공 하나를 꺼내어…”

나는 책상에 엎드려 공책에 침을 흘리며 곯아떨어지기 일쑤여서 항아리와 공이 갖는 교육학적 요점을 지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많은 학기 동안 나는 확률 강의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반에서 수석을 하며 B학점조차 끔찍하게 여기던 내가 처음으로 C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끔찍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나는 성적표를 받아 보고 같은 방 친구에게 고백했다. “이 과목 C학점은 당연해. 사실 D학점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그러면서 확률관련 업체는 취업 신청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확률 과목은 예외에 해당했고, 전체적으로는 학업 성적이 좋았다. 그래서 졸업을 앞둔 가을철에 취업 면접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직업 나무에서 꽤나 매력적인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와튼 스쿨이 업계에 주는 신망 덕분에 취업은 생각 외로 쉬웠다. 졸업반이 되자마자 수백 개의 기업에서 신입 사원 모집 담당들이 학교로 몰려들어 면접을 보았다. 나는 불과 몇 달 사이에 대우가 좋은 제안을 받았다. 그 가운데 서너 개를 선택한 다음, 결국 뉴욕 시에 있는 제너럴일렉트릭사의 기업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이번에도 나의 결정은 아무런 성찰 없이 이루어졌다. 회계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나는 그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원칙들’에 따랐을 뿐이다. 일례로, 너는 경영 대학을 마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직장을 얻기 위해 면접을 봐야 한다. 너는 어떤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가장 봉급이 많은 쪽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질문은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거나 나 스스로 물어보지 않은 질문들이었다. 너는 인생에서 무얼 바라느냐? 하느님은 과연 네게서 무얼 바라시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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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된 자리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기쁨이 서서히 고갈되면서 이런 깨달음이 싹텄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업체에서 몇 년을 보내고 나니, 나 자신 시계바늘에 따라 움직이다시피 하면서, 경영자의 몰인정한 행태를 날마다 목격하고 내가 걷고 있는 지루한 길 또한 단 하나의 목표밖에 없음을 알아차렸다. 돈벌이가 그것이었다.

결국 나는 일하고 있는 내 삶이 실질적인 의미가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와서 텔레비전을 켰다. 그날 저녁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나는 회사 동료 두 명과 한 집을 쓰고 있었다. 시간은 9시 무렵이었고, 비참한 하루를 보낸 뒤라 몹시 지쳐 있었다. 이제 막 먹다 남은 파스타를 전자 레인지에 집어넣고 텔레비전 앞에 놓인 초라한 갈색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을 참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때 지나 김빠진 시트콤, 재미없는 영화, 따분한 재방송을 지나치던 중에 우연히 <머튼: 영상 전기 Merton: A Film Biography>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화면에는 다양한 사람이 출연했는데, 개중에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이도 있고 알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한 인물이 자신의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인물은 가톨릭 수도승, 좀 더 정확히 말해 ‘트라피스트 수도승’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으로, 이전의 삶을 (그것이 무엇이었든) 버리고 전기를 써서 (나는 그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본 것은 몇 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토마스 머튼에 관해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 밖에도 나를 잡아 끄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스틸 사진들 속에 나타난 그의 표정이었다. 거기에서는 평화가 발산되는 듯싶었다.

이튿날 나는 인근 서점을 뒤져서 그의 전기 <칠층산>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읽기 시작했다. 불과 몇 페이지를 읽었는데도 이전에, 아니 지금껏 읽은 어떤 책보다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머튼은 내가 전부터 알고 싶었던, 밝고 익살스럽고 독창적이고 좋은 벗이 되었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맞붙어 드잡이한 것 가운데는 내가 맞붙어 싸웠던 것도 있었다. 교만, 야심, 이기심이 그것이었다. 그가 맞붙어 드잡이한 의문들은 내가 궁금해하던 의문과 동일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머튼은 놀라운 모순들로 가득 차 있는 듯싶다. 겸손을 추구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싸우는 사람이요, 세상을 사랑하면서 어떤 의미로는 세상에서 달아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내게 머튼의 모순들은 휘트먼의 말대로 그의 심원한 인간애를 드러내는 내면의 ‘다중성’이었다. 내가 그 책을 읽는 동안 그의 탐색 작업이 나의 탐색 작업이 되었고, 나는 그의 삶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무척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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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라드라 부르는 프랑스 피레네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오언은 뉴질랜드 태생으로, 꽤나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머튼은 분명히 자랑스럽게 적어 놓았다. “우리 아버지는 세잔처럼 그림을 그렸고 남부 프랑스의 풍경도 세잔처럼 사랑했다.” 머튼의 어머니 루스는 미국 태생으로, 평범하나마 역시 화가였다. 그의 부모는 파리에 있는 화실에서 공부하던 도중에 만났다.

머튼은 프랑스의 예술과 언어와 문화를 평생토록 음미하며 즐겼다. 그는 <칠층산> 초반부에서 프랑스에 대한 느낌을 “가장 훌륭한 대성당들과 가장 흥미로운 도시들, 가장 유명한 대학들에 걸맞은 무대”라고 기록했다.

여러 곳을 전전했던 젊은 머튼에게 프랑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고향 구실을 했다. 그는 이 나라를 떠났다가 여러 해 후에, 염률 시토 수도회라는 프랑스 시토에서 창설된 수도회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함으로써 간접적인 방식으로 귀국한다. (시토라는 낱말은 원래 라틴어로 된 이 도시의 이름 시스테리움 Cistercium을 번역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배경은 수도회에서 실질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젊은 수도승 머튼은 켄터키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프랑스의 수도회 본부로부터 부탁을 받고 수많은 문헌을 번역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머튼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진정한 고향 없이 보냈다. 거의 모든 글이 그리고 있듯이, 그의 어린 시절은 서글펐다.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니며 화가로 성공하고자 노력했다. 가족은 (머튼의 동생 존 폴을 포함해) 한때 뉴욕 더글라스턴에서 외가 식구와 함께 살았고, 그 뒤 한동안은 버뮤다에서 살았다. 그들이 버뮤다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 오언은 뉴욕으로 가서 그림 몇 점을 팔고 싶은 생각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류 작가에게 머튼을 맡겼다. (그의 아버지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으로 이따금 자식을 떠넘겼다는 사실이 내게는 지금도 충격으로 다가온다.)  후에 오언과 머튼과 존 폴은 프랑스로 돌아가 생앙토냉 Saint-Antonin이라는 도시에 거처를 마련했고, 이곳에서 머튼은 중학교에 입학한다.

어느 여름에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여행길에 올랐고, 머튼은 뮈라 Murat에 사는 가톨릭 신자 집안인 프리바 가정에서 하숙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년 머튼에게는 ‘크나큰 은총’이 되었다. 초로의 부부와 머튼과 친구가 되는 그들의 어린 조카가 보여 준 애정은 토마스 머튼을 변하게 했다. 그의 자서전에서 프리바 가족과 지내던 때를 진술한 대목은 그가 적은 글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글에 해당한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이렇듯 많은 은총을 입고 궁극적으로는 내 개종과 심지어 수도 성소의 은총까지 얻게 된 것은 그분들의 기도 덕분이 아니겠는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장차 어느 날엔가 알게 되고, 그리하여 그분들을 다시 만나 그분들에게 감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가!”

그러나 머튼은 1929년에 영국 러틀랜드의 오캄 기숙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이곳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이 시절의 체험을 다룬 장에는 ‘지옥의 써레질’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무렵 그의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병상에 눕게 된다. 머튼은 여름 방학에 아버지 문병을 갔다가 병상에 ‘아버지가 그려 왔던 그림과도 다른, 수염과 큰 후광이 있는 작고 엄격한 비잔틴풍의 성인들 그림’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31년 머튼의 열여섯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밝고 논리 정연한 청년 머튼은 케임브리지, 클레어 칼리지 장학금을 받고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은 오캄보다 더 머튼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대학의 ‘어둡고 흉측한 분위기’를 이야기한다. 머튼은 그 시절의 상당 부분을 그의 말마따나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목에 두른 한 패거리, 일정한 시간에 집에 돌아가야 하는 조건이 없었다면 밤새도록 떠들어 댈 치들’과 어울려 진탕 술을 마시며 흥청대는 데 시간을 보냈다.

후기 전기 작가 몇몇에 따르면 영국에 있는 동안 방탕했던 머튼은 아이를 낳게 된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머튼이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 그의 후견인이 여자와 아이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만다. 어머니와 아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런던 야간 폭격으로 인해 숨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소식통은 머튼의 원고 심사를 맡은 트라피스트회 검열관들이 당시에 상처받기 쉬운 그의 예민한 감성을 건들지 않으려고 <칠층산>에서 이 사건을 삭제했다고 주장한다. 나는 머튼의 생애 가운데 이 부분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전기를 읽었을 때, 그가 자신의 과거 때문에 수도생활을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언급하면서 자기 혐오감을 드러내는 데에서 당혹감을 느꼈다. 후기 전기 작가들은 머튼의 생애 중 다루기 힘든 이 장을 비교적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칠층산>에 묘사된 머튼의 소년기와 청년기는 그가 가까운 친구들을 사귀지 못할 만큼 정처 없고 외로웠다. 그는 하나뿐인 동생과도 떨어져 살아야 했고, 부모를 몹시 그리워했으며,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넌더리 날 지경으로 처신했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파티에 다니고 늘 허세를 부렸다. 머튼은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았던 것 같다. 이 점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백록>에 기술한 사납게 날뛰는 청춘기와 여러 세기가 지나 도로시 데이가 묘사한 자신의 ‘기나긴 고독’ 모두를 연상하게 한다.

머튼의 영국 생활을 안 머튼의 후견인은 그에게 미국으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하도록 종용했다. 머튼은 이 조언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가 그분의 말에 동의하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컬럼비아 대학과 뉴욕 시는 머튼의 기질에 한결 맞았다.  그는 평생 친구로 삼을 만한 젊은이를 많이 만났다 (다만 여성들과 건전한 상호 관계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머튼은 또한 신망 있는 영문학 교수 마크 반 도렌에게 감화를 받는데, 이 교수는 머튼의 소명 의식과 심원한 지성에 탄복하여 머튼이 ‘스콜라 철학의 좋은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머튼은 특유의 자기도취에 빠져 이렇게 결론지었다. “나는 그가 자각한 이상으로 하느님의 섭리가 그를 도구로 이용하셨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표현대로라면 마치 반 도렌 교수가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가 머튼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자서전에서 머튼의 대학 시절을 기술한 한 대목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머튼은 마치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듯 대학의 유머 잡지 <제스터 Jester>에 만화를 연재하고 나중에는 미술 편집인이 되었노라고 적고 있다. 나는 내가 이 대목을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재차 읽어 보아야 했다. 우연한 일이지만, 내가 대학 시절에 (대마초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일 외에) 한 유일한 과외 활동이 대학의 유머 잡지 <펀치 볼 Punch Bowl>에 만화를 연재하고 후에 미술 편집인이 된 것이었다. 사소한 우연의 일치겠지만, 미국 동북부 여덟 개 명문 대학 유머 잡지에서 미술 편집인 역할을 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나를 머튼과 결합해 주는 이 대목을 읽고 나자, 나는 그의 나머지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머튼의 자서전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점은 그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널리 두각을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이 점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뉴욕에 예수회 본당에서 독서회를 운영할 때, 우리는 한 달 동안 <칠층산>을 읽었다. 그런데 연로한 한 여성이 그날 저녁 토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는 침묵하고 있다가 모임이 끝난 다음에 나에게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머튼과 알고 지냈노라고 말했다. “내 남편은 그의 책을 읽고서 크게 놀라더군요. 그이가 기억하는 머튼은 틈만 나면 술을 마시거나 파티에 나다니는 게 전부였대요. 남편은 머튼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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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의 저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외딴섬이 아니다 No Man is an Island)에서 발췌한 이 첫 대목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내가 스물여섯 살에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것은 나로 하여금 인생행로를 멈추고 예수회로 가게 했다.

 

만일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가 결코 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이 되고자 몸부림치며 우리 삶을 낭비할 이유가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멈춰 서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행하는 데 우리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지각 없고 기계적인 활동이 우리네 영혼을 혼란 상태에 붙잡아 두는 한, 자각은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서 모든 활동을 중단한 채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런 짓은 아무 쓸모가 없고 결국 우리 대부분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차분히 그리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활동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하는 일을 왜 하는지 진정한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없으며,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의도와 부합하고, 우리의 의도가 우리가 처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만사에 다 성공을 거둘 필요는 없다. 사람이 완벽해도 하는 일에서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할 수 있으며, 아주 적은 것밖에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을 성취한 듯 보이는 사람보다 훨씬 고매한 인물이 되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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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의 내면에서 진행되고 있던 것은 완만한 회심의 과정이었다. 낡은 삶의 방식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돌아서는,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특정한 종교 어디에도 귀의하지 않던 그가 로마 가톨릭교를 충심으로 끌어안는 과정이었다. 그의 자서전은 그의 변혁이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첫 번째 방향은 점진적인 지성의 발전으로, 머튼은 자신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믿음의 세계를 탐색했다. 반 도렌 교수는 실제로 스콜라 철학을 수용할 수 있는 심성을 키워 주었고, 그 덕분에 에티엔 질송이 저술한 <중세 철학의 정신 The Spirit of Medieval Philosophy> 을 접했을 때 머튼은 하느님의 존재 문제를 스콜라 철학의 시각에서 접근한 이 책에 ‘심대한 감명’을 받았다. 그러니까 머튼이 하느님께 이르는 첫 번째 방법은 지성을 통하는 길이었던 셈이다.

머튼이 회심에 이르는 두 번째 방법은 감각 작용을 통하되, 특히 미술을 통하는 길이었다. 이것 역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부모 모두 화가인 집안에서 태어난 머튼은 자신의 주위 상황을 예리하게 감지했고, 머튼의 어린 시절에 하느님은 물질세계를 통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머튼은 하느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갔다. 일례로 소년 시절에 머튼은 수도원이 그려져 있는 그림책을 뒤적이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일종의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유럽을 여행하던 중 로마에서 비잔틴 모자이크와 종교 미술에 ‘매혹되었다.’ 하느님은 이런 방식으로 그를 당신 가까이 끌어당기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례자가 되었다. 나는 의식하지도 않고 일부러 의도하지도 않으면서 로마의 모든 대성전을 방문해, 썩 올바른 동기는 아니었지만, 진정한 순례자의 열정과 열망과 소원을 가지고 성소를 유심히 살폈다.”

끝으로 하느님은 머튼의 감성을 통해 그를 끌어들이셨다. 프리바 가족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로마의 한 성당에서 남몰래 기도 드리고 임종하는 할아버지의 침상 곁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놀라운 순간에 이르기까지, 머튼은 정서 생활 속의 내밀한 작용을 통해 가차 없이 하느님 곁으로 이끌려 가고 있었다.

머튼의 회심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내가 처음 그의 책을 읽었을 때는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듯이 보였다. 머튼은 스콜라 철학을 접했고, 인근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으며, 그리고 몇 페이지 뒤에 가서 후다닥! 컬럼비아 대학 근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 성당에서 세례를 받아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머튼이 인생 전환을 향해 매진하는 모습은 내게 엄청난 호소력으로 다가왔다. 미국 대기업에 매여 있던 내 삶의 족쇄를 벗어 던지기를 열망하던 시절에, 머튼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또 그 일을 신속하게 해낼 줄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

머튼의 삶은 세례를 받고 난 몇 년 사이에 훨씬 빨리 그리고 결정적으로 변했다. 머튼은 일단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학으로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사제직 소명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는 재빨리 여러 수도회를 살펴보았다. 도미니코회는 수도자들이 공동 침실에서 잠을 잔다는 이유로 제외했다. 베네딕토희는 “내 여생을 뉴햄프셔에 있는 사치스러운 대학 예비 학교의 책상에 못 박혀 지내게 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라는 이유로 배제했다. 그리고 예수회는 ‘강력한 활동과 군대식 일과로 매진하는데, 이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라고 보았다. 이런 배제 사유가 우스꽝스러운 것은 머튼이 결국 트라피스트회로 들어가면서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공동 침실보다 훨씬 소박한 침실에서 잠을 자고, 대부분의 베네딕토 회원보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 ‘못 박혀’ 지내며, 대부분 예수회원을 능가하는 ‘강력한 활동과 군대식 일과에 매진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머튼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회칙뿐이었다. 그의 친구 댄 월시가 뉴욕 주 북부 지방 도시 올레안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의 프란치스코 회원들과 친하게 지낸 것도 일종의 섭리였다. 그 덕분에 머튼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9년 11월에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신청을 한다. 하지만 이듬해 6월 그의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첼 모트는 자신이 쓴 머튼의 전기 <토마스 머튼의 일곱 개 산 The Seven Mountains of Thomas Merton>에서 프란치스코회가 머튼을 거절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고 본다. 머튼이 아이를 낳았다는 점과 최근에야 개종했다는 점, ‘그 자신이 스스로 부적격하다고 느끼는 점’이 거기에 해당했다. 이유야 무엇이든, 절망한 머튼은 맨해튼의 카푸친 성당의 고해소에서 위안을 찾았다.

하지만 고해 신부는 지나치게 근엄했다. “신부는 내가 약간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미련한 면이 있다고 판단해 더욱 강한 어조로, 그 수도원에 성소가 없음이 분명하니 더구나 내게 사제직은 어림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고해소에서 쓸데없는 넋두리를 하여 그의 시간을 낭비하고 고해성사를 모독할 뿐이라고 꾸짖었다.” 머튼은 눈물로 이 시련을 이겨 낸다.

머튼은 놀라운 침착성과 그답지 않게 스스럼없는 태도로 프란치스코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성 보나벤투라 대학으로 돌아가 수도 승들과 함께 일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교직 생활에 안착했고, 프란치스코회에서 입회를 거절당했음에도 수도회에 입회한 것처럼 사는 생활에 점점 이끌렸다. 정기적으로 기도를 바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검소하게 살아간 것이다. 몇 달이 지나 부활 시기 피정 장소를 찾던 머튼은 켄터키 구릉 지대에 겟세마니의 성모라 불리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관해 들려준 댄 월시의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이 대목에서 나의 맥박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책을 급히 읽어 나가지 않도록 자제해야 했다. 머튼은 오래도록 찾고 있던 것을 찾아내기 직전에 와 있는 듯싶었다. 무슨 이유로 나의 역시 똑 같은 길을 걸었다고 느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머튼은 어느 날 밤늦은 시각에 겟세마니에 도착했고, 수도원의 문지기가 그를 맞아 주었다. 이 무뚝뚝한 트라피스트 수사가 물었다. “여기에 살려고 왔습니까?”

머튼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 질문이 나를 전율하게 했다. 꼭 나의 양심의 소리처럼 들렸다.”

문지기가 다그쳤다. “무엇 때문이죠? 왜 머물지 못한다는 겁니까? 결혼 같은 거 하셨나요?”

“아니요,” 머튼은 대답했다. “직장이 있어서.”

하지만 머튼은 수도원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확연히 깨닫는다. 머튼은 이렇게 썼다.

 

거룩하고 평화로운 밤의 깊고 깊은 적막이 나를 사랑처럼 안온하게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 침묵의 포옹! 나는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고독 속으로 들어온 것을 느꼈다. 그러자 나를 감싸고 있는 침묵이 어느 목소리보다도 우렁차고 유창하게 말을 걸었다. 이 고요하고 청량한 방 안의 열린 창으로 따스한 밤공기와 함께 달빛이 평화를 쏟아 부을 때, 나는 이 집이 참으로 누구의 집인지를 깨달았다. 오,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모친이시여!

 

머튼은 고향에 와 있었던 것이다.

머튼은 몇 달 후에 이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그에게 이 수도원은 ‘미국이 지닌 모든 생명력의 근원’이었고, 그래서 당장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게 되었다.

머튼은 겟세마니의 매력에 흠뻑 취한 채 성 보나벤투라 대학으로 돌아와, 수도 공동체의 생활 양식에 한결 가까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45분 동안 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석한 뒤 아주 많은 ‘영적 독서’를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은총 면에서도 큰 선물을 받았다.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를 그녀의 글을 통해 만난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소화 데레사가 참으로 성인이라는 것, 즉 수많은 감상적인 노파들이 상상해 낸 말 못하는 종교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소화 데레사는 보통 성인이 아니라 위대한 성인이라는 사실도 발견했다. 나는 그녀의 위대함을 그토록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다는 점에 갖가지 방식으로 사죄를 하고 보상할 생각이다.”

머튼은 성인에 대한 열정을 느끼며 이렇게 덧붙였다. “새 성인을 발견한다는 것은 기막힌 체험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성인들로 인해 크나큰 현양과 경탄을 받으시되, 개개인 안에서 다르게 받으신다.”

내가 머튼을 알아가고 있을 때 이 대목을 읽고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시점에,  머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의문을 품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차례 심사숙고하기는 했다. 몇 달 전에 머튼 건강상의 이유로 군 면제를 받았다(그는 치아에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전쟁이 다가오면서 규정이 완화되었고, 머튼은 징병 위원회에서 편지를 받았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미첼 모트가 머튼의 전기에 적시하고 있듯 “만일 겟세마니에서 받아 주지 않으면, 머튼은 단념하고 군에 입대할 작정이었다. 그는 살인은 하지 않되, 군복무는 하겠다는 점은 확고했다.” 그러나 머튼은 만일 하느님이 수도 생활을 하기 바라신다면 그렇게 할 작정이었지만, 그렇지 않으신다면 군에 입대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머튼은 자신의 계획에 따른 삶을 추구하는 대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던 것이다.

결국 그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1941년 12월 10일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들어갔다.

<칠층산> 나머지 부분은 그가 수도원에서 보내는 삶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짤막하게 정리하면 머튼은 수련자용 수도복을 받아 입고, 트라피스트 회칙을 학습하고, 청빈과 정결과 순명, 세 가지 유기 서원을 발하고, 관상 기도 세계의 탐사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평생 갈망했던 평화를 찾는다. 그는 책 말미에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여러 달이 흘렀건만 당신은 이 소망을 조금도 줄여 주지 않으셨으며, 또 평화까지 주셨으므로 나는 평화가 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알아듣기 시작했습니다.”

<칠층산>은 아름다운 책으로, 나는 책 끝머리에 갈 때쯤 머튼이 느꼈던 평화를 어느 정도 맛보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 하나 뒤로하지 않고 무엇 하나 떠난 적이 없으면서도,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 밤늦게 이 책을 다 읽고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았을 때, 나는 내 생애에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일이 머튼이 한 일과 똑같지 않고 트라피스트 수도승은 물론 수도원과도 무관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과 대단히 흡사한 무엇이었다.

머튼이 묘사한 수도 생활은 나를 새로운 삶으로 부르는 초대였다. 수도원 세계는 대단히 완벽한 장소로 보였다. 목표와 기도로 충만한 평화롭고 고요한 장소 같았다. 나는 그때 이미 이것이 이상적으로 그려진 그림일 거라고 생각했다. (머튼은 후에 그렇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상황에서 벗어날 길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던 나에게는 어떠한 대안도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머튼이 묘사한 삶이 내 마음을 잡아 끌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은 ‘부르심’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심지어 신자들까지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로의 부르심을 목소리를 듣거나 환시를 보는 것처럼 무언가 초자연적인 체험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그것은 그저 단순한 매력, 절실한 갈망, 일종의 감정적 끌림이었다. 그리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행복한 무력감이었다. 내가 일단 그 길을 따르기 시작하고 나 스스로 여러 해 전에 물었어야 했던 물음을 던지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내 영혼에 오래도록 잠복해 있던 이런 의문을 곰곰이 따져 보니 실로 놀라운 답변을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칠층산>을 읽은 지 2년이 채 안 되어 나는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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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망감이 내 나날에 기어들고 있다고 느끼면 (이는 영성 생활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분명한 표지이기에)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외딴섬이 아니다>에서 “자비”라는 제목의 장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구절로 곧잘 눈을 돌린다.

 

우리가 우리의 미천함을 알고 받아들이며, 근심 걱정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때, 하느님은 실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 인간의 온갖 예상과는 달리, 그분은 뒷받침이 필요한 우리를 떠받쳐 주시고 우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도록 도우신다. 우리는 이제 추상적인 사고를 통해 발견하는 ‘현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화려한 옷으로 그분을 치장하는 현존이 아니라 자칫하면 절망으로 치달을 수 있는 희망의 부재 속에서 그분을 체험할 줄 안다. 완벽한 희망은 절망 직전에, 우리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발이 허공에 떠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늘 절망으로 변할 듯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극도의 위기 순간에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의 허약함을 통해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만사가 더없이 위험할 때 차분하게 그분의 자비를 바라고, 위기를 맞으면 조용히 그분을 찾으면서, 우리가 의인들에게서 비난 받고 그분에게 확연히 사랑 받고 있노라 주장하는 이들로부터 배척당할지라도, 그분은 결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실 수 없음을 굳게 믿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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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튼의 저서 <요나의 표징 The Sign of Jonas> 을 통해 그 후 몇 년에 걸친 머튼의 삶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그의 몽상적인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수도 생활의 현실을 선명하게 기술할 수 있었던 만큼, 어떤 면에서는 <칠층산>보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의 일기에서 발췌한 이 글들은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초창기 몇 년부터 그 스스로 ‘내가 맛보기 위해 태어난 크나큰 신비의 하나’로 묘사한 서품 때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토마스 머튼 (이제는 루이스 신부 Father M. Louis, OCSO)은 여생 동안 관상 생활과 비폭력, 시토 수도원의 삶, 그리스도교 교의 및 선 禪 에 관한 책을 저술해 전 세계 수백만 사람들에게 영적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는 몇 권의 책을 자신의 시로 채웠다. 그는 모든 종류의 종교 지도자와 활동가, 작가들과 광범한 교류를 지속했다. 그는 학생들의 스승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자기 수도원의 수련장으로 봉직했다. 평화 운동가들과 작가, 시인, 화가, 음악가, 사제, 수녀, 수사 및 현대 세계에 대한 그의 안목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겟세마니로 그를 찾아왔다. 그는 한 지역 병원에서 건강을 회복하던 중에 만난 한 간호사에게 깊은 사랑을 느꼈지만 관계를 청산하고 수도승으로 남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허락을 받아 은수자가 된 다음에는 수도원 소유지에 있는 작은 가옥에서 살았다.

물론 그는 자신의 내적 생활을 꾸준히 탐구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심화시켜 나갔다.

머튼은 여전히 모순이 많은 사람이었고, 나를 그에게로 끌어당긴 것도 바로 이런 모순들이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사람, 자랑하기 좋아하는 이 오만한 수도승, 때로는 조언을 듣기 싫어하고, 때로는 너무 자기도취에 빠지고, 때로는 과도하게 심술을 부리는 이 사람은 성스러움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하느님과 교회에 헌신했으며, 많은 사람을 도왔고, 재능과 시간과 기도에 인색하지 않았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기 바랐다.” 이토록 인간적인 누군가가 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게 큰 희망이 된다. 특히 머튼에게서는 죄와 고결함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나는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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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역설: 몇 해 동안 수도원 장상들과 충돌해 오던 머튼은 장기간 아시아를 돌아보기 위해 허락을 받고 1968년에 수도원을 떠났다. 여행 도중 그는 실론 (지금의 스리랑카)에 있는 폴로나루오라는 곳에 들러, 거대한 부처 석상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지금껏 느껴 본 어떤 것과도 다른 은총과 안도감에 휩싸였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 형상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별안간 반쯤 신물이 났던 평소의 사물관이 씻겨 나가고, 내적인 맑음과 명쾌함이 마치 옷에서 저절로 발산하듯 선명하고 확연해졌다.” 독실한 가톨릭 수도승이 부처상 앞에서 신비 체험을 누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1968년 12월 10일, 머튼은 세계 종교 회의 참석차 방콕에 가서 목욕을 하던 중 넘어지면서 선풍기를 움켜잡는 바람에 감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켄터키 수도원에서 정주 서원을 발한 사람이 모순들 속에서 찾아 헤매던 분의 부름을 받고 머나먼 방콕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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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칠층산>을 처음 읽고 나서부터 언젠가 켄터키의 겟세마니 대수도원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불과 몇 해 전 여름에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5월에 케빈이라는 예수회 친구가 이번 여름에 영성 지도자 실습 프로그램에 참가할 거라고 귀띔했다. 오하이오에 있는 피정의 집에서 5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더할 나위 없이 멋져 보였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영신 수련으로 피정하는 이들을 지도하는 자리였다. 그 친구가 말했다. “자네도 신청해 보지 그래?”

이튿날 아침에 예수회원이자 이 프로그램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빌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는 아직 자리가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나와 친한 또 다른 친구 데이브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간단한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더니, 승인이 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참가하기 바라시는 것처럼 보였다. 제아무리 못해도 하느님께서 내가 쉽게 참가하도록 만들어 주고 계셨다.

신시내티 행 行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켄터키와 가까운 어디쯤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얼마나 가까운 곳일까? 나는 비행기 안에서 데이브와 우르술라회 소속이자 프로그램 공동 지도자인 마르타 수녀를 만났다. 마르타 수녀는 자신이 루이빌 태생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지만 켄터키 주에 있으며 겟세마니 수도원과도 가까우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음…. 켄터키에 가까이 와 있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마르타 수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린 켄터키에 들어와 있는 거라고요!” 이때 우리는 신시내티와 북부 켄터키 공항이라 적힌 표지판을 지나고 있었다.

이어서 오하이오 주 밀퍼드에 있는 예수회 피정의 집에서 보낸 두 주일은 대단히 바빴다. 케빈과 데이브와 나는 오전이면 마르타 수녀와 빌과 함께 영신 수련과 피정 사목, 영성 지도에 초점을 맞춘 수업을 받았다. 피정에서 다른 지도자들과의 ‘팀 모임’은 정오에 이루어졌다. 그러고 나면 전통적으로 인색한 피정의 집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서너 시간 동안 영성 지도 실습을 했다. 미사는 오후 5시에 드렸고, 우리는 간혹 강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와 케빈과 데이브는 영화를 관람하고 (우리는 그 여름에 영화가 아무리 저급해도 상관하지 않고 모조리 관람했다) 비디오를 빌려 보고, 그레이터스라 부르는 신시내티의 저급한 오락장에서 이제 막 유명해진 아이스크림을 지나치게 많이 먹었다. 대체로 말해서 케빈과 데이브는 그 여름에 나의 완벽한 동반자였고, 명랑하고 근면하고 재미있었다.

밤을 느슨하게 보냈다면, 낮에 활동이 그만큼 격렬했음을 방증한다. 어느 날 아침에 빌이 엄숙한 목소리로 우리가 훌륭한 영성 지도자가 되려면 관상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점심밥을 간신히 목에 넘기고 케빈과 데이브는 피정하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달려 나갔다. 우리가 피정의 집 복도를 질주할 때, 케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그야말로 관상적이구나!”

이튿날 아침, 나는 빌에게 농담 삼아 생활이 한결 느긋한 뉴욕으로 돌아갈 때가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영신 수련이 중간쯤 지나 우리와 피정하는 이들에게 하루 ‘휴일’이 주어졌는데, 이는 이냐시오 성인이 30일 내내 바치는 침묵 기도가 더없이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알고 피정에 삽입시킨 휴식이었다. 다행히 영성 지도자 실습 중인 우리도 휴식 시간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와 케빈과 데이브는 인근에 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결정한 뒤, 내가 사전 협의에 나섰다.

하지만 그곳 손님 담당은 주말에 하룻밤만 묵은 길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수도원은 사흘 피정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말 내내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의 방을 빼앗는 셈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사흘로 기간을 늘릴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면 일이 훨씬 간편해지리라는 것이었다.

“글쎄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우리가 피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야기를 하는 건 가능한가요?” 데이브의 이 물음에는 나와 케빈이 품고 있던 우려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피정 중에 취하는 휴식이 또 다른 피정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아주 커 보였다. 결국 우리는 겟세마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피정이든 휴식이든 주말 탈출이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것으로 믿고 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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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이 기도는 머튼의 저서 <고독 속의 사색 Thoughts in Solitude> 에서 발췌한 것으로, 내 생각에는 누구나 바칠 수 있는 기도다.

 

내 주 하느님, 저는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길이 어디에서 끝날지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진실로 알지 못하며, 제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열망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행하는 모든 일에 이런 열망이 서려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런 열망 없이는 결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만 한다면 비록 옳은 길에 관해 아는 것이 없을지라도 주님께서 저를 그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걸 압니다. 그러기에 저는 길을 잃고 죽음의 그림자에 싸여 있을 때라도 늘 주님을 의지하렵니다.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닥쳐온 위험을 저 혼자 맞서도록 버려두지 않으시니, 저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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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에, 우리는 빌의 낡은 승용차에 올라 길 떠나는 이들의 성모님께 기도를 바친 다음 출발했다. (우리는 피정 중에 하루가 다르게 신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차는 루이빌을 지나 초원의 말들의 고장 켄터키를 통과했다. 몇 시간이 채 안 되어, 우리는 작고 둥그런 언덕이 점점이 박혀있는 풍경 때문에 켄터키의 ‘구릉’ 지대로 알려진 고장을 통과하고 있었다.

바즈타운을 지나 몇 킬로미터를 가니 겟세마니 성모 대수도원의 높다란 뾰족지붕이 눈에 들어왔는데, 초원 지대에 우뚝 솟은 모습이 푸른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돛대처럼 보였다. 대수도원은 낮은 잿빛 담장을 두르고 있었고, 이 담은 지평선을 뻗어 나간 푸른 초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나오자마자 열기에 깜짝 놀랐다. 머튼이 <요나의 표징>에서 수도원의` 여름을 이야기하던 대목이 떠올랐다. 1947년 8월 8일 자 일기에 나오는 말이다. “무덥고 끈적거리는 날씨. 따가운 열기. 목과 양 어깨가 온통 빨갛게 부어 올랐다. 모든 것이 진득거린다. 그래, 속죄다 Paenitentiam agite!그래도 고행 속옷보다는 낫다.”

우리는 휴대품을 들고 수도원 손님 숙소로 들어갔다. 돌로 된 출입문 상인방에는 한 단어가 블록체로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평화 Pax.” 광장 너머 맞은편 출입문은 수도원 봉쇄 구역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여기에도 문 위에 명각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오직 하느님 God Alone,” 손님 숙소 내부는 상쾌할 정도로 서늘했다.  실내에서는 누구나 더위로 고생할 염려는 없어 보였다. 접수대에는 문지기가 전통적인 트라피스트회 수도복으로 하얀 장백의 위에 까만 어깨걸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는데, 내게는 이 옷이 일종의 유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많이 보아도, 내가 장차 순수한 관상 생활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현실 속의 머튼과 한결 결합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어떤 기쁨이 나를 채워 주기 때문이었다.

수도원 문지기는 손님 명단을 내밀며 말했다. “어디 보자, 마틴 신부라. 신부님 방은 이 방입니다.” 그는 수도원 건물 맨 위층에 있는 방 하나를 가리켜 보이고 내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데이브 신부님.” 문지기가 말했다. 데이브는 나와 케빈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사제품을 받지 않았지만, 문지기의 실수를 바로잡아 주기에는 너무도 얌전했다. “신부님은 이 방인데, 이 방 역시 수도원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케빈 신부님, 수도원에는 더 이상 마땅한 방이 없어 신부님은 바로 옆의 손님 숙소에 배정했어요. 그곳에는 에어컨이 있답니다.”

데이브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말은 우리 방에는 에어컨이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문지기가 말했다. “손님 숙소는 대단히 쾌적하답니다. 혼자 쓸 수 있는 욕실도 있고요.”

그가 말했다. “저녁 기도는 5시 30분이고, 이어서 6시에 저녁 식사를 합니다. 나머지 일과표는 경당 바깥에 붙어 있고요. 여러분 중에 미사를 공동으로 집전할 분이 계십니까?” 이 대목에서 케빈과 데이브는 문지기에게 일행 중 사제는 나뿐임을 알려주었다. 나는 내일 꼭 미사를 함께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미사는 아침 6시 15분에 있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식당에 비치된 카드에 기입만 해 놓으면, 내일 신부님이 입을 장백의와 영대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나와 케빈과 데이브는 각자 짐을 방에 넣어두고 몇 분 후에 손님 숙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엄숙하고 검소한 내 방은 다른 피정의 집 방들과 대체로 비슷했다. 침대 하나에 나무 탁자 그리고 세면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혹독한 더위 때문에 천장에 설치한 커다란 선풍기로, 오버드라이브 장치를 달아 놓은 듯 비행기 프로펠러처럼 맹렬하게 돌고 있었고, 문을 열자 뜨거운 공기가 확 달려 들었다.

손님 숙소 아래층에서 케빈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난 자네가 내 방을 썼으면 하네. 자네는 오래도록 이곳에 오고 싶어 했으니, 자네가 쓰는 게 마땅하다고 보네.”

나는 케빈의 제안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이처럼 아량 있는 친구가 많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이내 생각했다. ‘흠…. 토마스 머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장 큰 자애는 케빈이 그 방을 쓰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예기치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기에 내가 배정받은 방에서 지내기를 바라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행을 실험한다는 의미에서 케빈의 방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냐, 그 방은 자네가 쓰게나.” 나는 초특급 성자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아냐, 그 방은 자네가 써야 해.”

“아냐, 자네가 쓰게.”

데이브가 눈을 부라렸다. “자네들 중 하나가 그 빌어먹을 성자 노릇을 집어치우지 않으면, 내가 그 방을 쓰겠네!”

결국 그 방은 케빈이 차지했다. (그 후 몇 주일이 지나 케빈은 나와 데이브가 더위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자기 역시 에어컨을 조절할 줄 몰라 지독하게 추운 탓에 잠을 설쳤노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방 문제로 한동안 입씨름을 하고 나서 경당을 찾아갔다. 경당은 좁고 긴 건물로, 구조는 단순하되 높다란 천장이 인상적이었다. 이 대수도원의 경당은 원래 야단스러우리만큼 치장되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공동체는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를 데려다가 소박한 모습으로 단장하게 했다. 브로이어는 장식 기둥과 천장 돌림띠를 제거하고, 지금은 하얗게 칠해 놓은 벽돌들을 그대로 노출시켰으며, 거무스름한 각목들을 교차해 천장을 받치고 제단 뒷벽도 각목으로 괴어 놓았다.

경당의 출입문 가까이에는 손님들이 앉도록 낮은 철문으로 구분해 놓은 작은 공간이 마련되었다. 철문 너머에는 수도승들이 앉는 나무 의자가 벽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자갈이 깔린 마루 저 멀리 끝에는 평범한 나무 제단이 자리하고 그 주위에 철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경당은 놀랍도록 시원했고 향내와 (그럴 리 없지만) 새 융단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나는 성소로 이어지는 중앙 통로를 응시하며 머튼이 아빠스 앞에 무릎을 꿇고 서원을 발하고, 서품식 내내 마룻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경당을 둘러보고 난 우리는 손님 숙소 옆을 돌아 공동묘지로 발길을 옮겼다. 하얀 칠을 한 작은 철제 십자가가 여러 겹 줄을 이루며 풀밭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몇 분 후에 우리는 보고 싶었던 것을 찾아냈다. 청동 명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루이스 머튼 신부, 1968년 12월 10일 선종.”

나는 뙤약볕 아래 서서 몇 십 년 전에 이 자리를 에워싸고 머튼의 모순된 삶과 문학적이라 할 만큼 기묘한 죽음을 되새겼을 수도승들을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일어난 감전으로 선종한 머튼은 <칠층산>을 “네가 하느님의 형제가 되어 불에 탄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알아 모실 줄 알도록” 이라는 말로 끝맺었다.)  그리고 나의 예수회 성소가 사실상 이곳 겟세마니에서 싹트게 된 경위도 생각해 보았다.

 저녁 기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줄지어 경당으로 들어가 시간경이 수록된 작은 책자를 집어 들었다. 아내 스무 명 가량의 사람이 우리 곁 철제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종소리가 울렸고, 몇 분이 채 안 되어서 수도승들이 옆 문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서자 돌로 된 성수반의 성수를 손에 찍어 천천히 십자성호를 그었다. 머튼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낸 성당에서 그들 특유의 수도복을 입은 수많은 트라피스트 수도승을 보니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머튼의 삶과 이 장소에 관해 많은 글을 읽어서 그런지,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이 한동안 믿기지 않았다.

기도 역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레고리오 성가 CD에 실린 어떤 것, 필경 굵직한 오르간 소리를 곁들인 멋진 다성 음악과 잘 닦인 목소리 같은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가 들은 것은 훨씬 단조로운 소리, 다수의 노인이 포함된 66명의 사내가 시편을 평범하게 노래하는 소리였다. (우리가 돌아올 때 마르타 수녀가 말했다. “아, 그래요. 베네딕토 수도승들이 트라피스트 수도승들보다 훨씬 나은 가수이지요.’) 그래도 그 소리는 아름다웠고, 나로서는 이 수도승들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런 식으로 기도를 바쳤고 내가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그렇게 하리라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했다.

우리는 경당 바깥 안마당에서 토요일 기도 일과표를 확인했다.

 

새벽 기도: 오전 3시 15분

아침 기도: 오전 5시 45분

3시경: 오전 7시 30분

6시경: 오후 12시 15분

9시경: 오후 2시 15분

저녁 기도: 오후 5시 30분

끝 기도: 오후 7시 30분

미사: 오전 6시 15분

 

저녁 기도가 끝나면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피정하는 이들이 식사하는 방은 둘이었다. 큰 방은 침묵을 지키도록 되어 있었고, 작은 방은 이야기가 허용되었다. 영적 운동 선수인 우리 세 사람은 침묵하는 방을 선택했다. 예수회 피정의 집에서 싱거운 음식을 먹은 뒤끝이라 대수도원의 환상적인 요리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신선한 채소와 훌륭한 빵에, 때마침 금요일이라 생선이 풍성하게 나왔다. 치즈도 내가 지금껏 먹어 본 것 중 최상품으로, 농장에서 갓 만든 것이었다. 머튼은 그의 일기에서 겟세마니 ‘치즈 공장’을 놀려댄 바 있었다. 나는 이 점만은 그에게 동조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 후에 피정하는 이들을 위한 모임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연로한 수도승 하나가 예수회원이자 시인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구를 낭독하고 그의 시심과 삶을 실감 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우리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이날의 마지막 기도인 끝 기도 시간이 되었다 (이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는’ 까닭에 이렇게 불렀다). 끝 기도는 수도승과 피정하는 이들 모두가 중앙 통로로 줄지어 나와 밤을 위한 아빠스의 축복을 받았다.  그런 다음 나와 케빈과 데이브는 경당 바깥에 모여, 내일의 첫 기도로 오전 3시 15분에 드리는 새벽 기도에 누가 나갈 것이냐를 두고 서로를 귀찮게 했다. (나간 사람은 데이브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말로는 너무 더워 잠들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고 했다.)

나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샤워를 하고 혼자 기도를 바친 다음 경당을 다시 한 번 찾기로 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해 가면서 경당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기뻤다. 그곳은 더없이 고요했다. 나는 방문자용 문간에서 무릎을 꿇고 재빨리 기도를 바치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긴 하루를 끝낸 터라 기진맥진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안간 내 인생행로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어떻게 해서 수도 생활에 이끌리게 되었던가? 돌아보면 나는 불행한 삶에서 우격다짐으로 끌려 나와 기쁨에 찬 삶을 누리게 된 것 같았다. 하느님이 내 삶 속에 개입하여 나 혼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여러 장소로 나를 이끌어 주신 그 손길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나를 늘 솔직하게 만들고 나와 함께 기도하고 나에게 웃음을 주는 훌륭한 예수회 친구들과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여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생각해 보았다. 예수회 가족이 되었다는 고마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행복감이 너무도 벅차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으며, 고마우면서도 그 고마움을 온전히 표현할 길이 없어 나는 경당 안에서 한동안 흐느꼈다.

이른 새벽, 아침 기도를 끝내고 널찍한 제의실에 들어가니, 수도승 하나가 촉감 좋은 장백의와 쪼글쪼글한 비단 원단으로 만든 금빛 영대를 건네주었다. 미사 중에 사제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가 아니면, 내 눈길은 머튼이 사제품 받던 자리를 맴돌곤 했다. 그곳은 옛날 사진을 통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식사는 훌륭했다. 내가 지금껏 먹어 본 것 충 최고의 치즈와 아울러, 대수도원이 자랑하는 오트밀 또한 최고의 맛이었다. 나와 케빈과 데이브는 아침 식사 후에 거리를 가로질러 들판을 거닐었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 얼마나 큰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러자 케빈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가 자네를 이곳에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 것 아냐?”

그날 우리는 피정을 빼먹고 인근에 있는 바즈타운으로 차를 몰았다. 동부에서 벌어진 종교 박해를 피해 달아난 많은 가톨릭 신자가 1800년대 초엽에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 덕분에 켄터키 주 한가운데 성 마리아, 성 프란치스코, 로레토처럼 생소한 가톨릭 이름의 도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심지어 예수회원들이 바즈타운에 들어와 시내 중심지에 성 요셉 대학을 설립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 예수회원들이 후에 뉴욕으로 옮겨 와 포드햄 대학교를 세웠다.)

우리는 저녁 기도와 저녁 식사에 맞추어 서둘러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예수회원들에 대한 인상이 구겨질 것을 우려하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작정했다. 내가 말했다. “누가 알아보리라고?”

나는 식사를 하면서 내가 한 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 식당에서는 두 수도승이 손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케빈이 소곤거렸다. “이런, 저들은 예수회원들이 이틀 동안 참고 침묵을 지킬 줄도 모른다고 다른 수도승한테 일러바칠 거라고.” 저녁 식사 후에 또 한 차례 모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침묵의 은총이 주제가 되었고, 이어서 끝 기도가 있었다.

사흘 동안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생활 리듬을 따르다 보니, 막판에는 수도승 생활이 내게 적합하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줄곧 경당에서 지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것이 핵심이었다). 나와 함께한 많은 피정 참가자가 으레 그러했듯, 나 또한 ‘활동적인’ 삶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깊어져 있었다.

이튿날 5시 45분에 아침 기도를 바치고 나서 우리는 가방을 손님 숙소로 가지고 내려왔다. 그런데 나는 그곳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 아니 해야 할 말 한 가지가 생각났다.  그걸 깜박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수도원 모퉁이를 돌아 머튼의 무덤으로 갔다.

나는 밝은 초록빛 풀밭을 내려다보며 기묘하고 복잡하고 모순된 머튼의 삶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러자 월트 휘트먼의 시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나 자신의 노래> 끝머리 시구가 머리에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풀로 자라나고자 나를 낮추어 흙으로 갑니다.

나를 다시 원한다면 당신의 구두 밑창에서 나를 찾으십시오.

 

나는 머튼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온갖 것을 생각해 보았다. 내 성소는 다른 누구보다 예수님 덕분이라는 것. 머튼의 저서들 덕분에 나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여전히 수도 생활에 끌리고 있다는 것. 모순되고 복잡다단한 그의 삶이 나로 하여금 우리네 삶이 아무리 엉망으로 보일지라도 우리 모두가 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는 것. 그는 자신이 ‘참된 자아’라 부른, 하느님 앞에서의 현재 나의 모습과 내가 갖추기로 되어 있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는 것. 그리고 흠이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나의 위대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았다는 것.

하지만 무엇 하나 정확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그가 안다고 믿고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달려 나가 내 친구들과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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