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51편의 묵상 잠언

류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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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사랑이 손짓하면

 

사랑이 그대를 향해 손짓하면,

그를 따라가라

그가 가는 길이 가파르고 험난할지라도

 

 

 

 

 

사랑이 손짓하면

 

 

사랑이 그대를 향해 손짓하면, 그를 따라가라.

그가 가는 길이 가파르고 험난할지라도.

사랑이 날개를 펴서 그대를 안으면 그에게 안겨라.

날개깃 사이에 숨겨진 칼이 그대를 상처 입힐지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속삭일 때, 그를 믿어라.

마치 북풍이 정원을 황폐시키듯

그의 목소리가 그대의 꿈을 산산이 부서지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왕관을 씌워 줄 때가 있듯이

그대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가 있으리라.

그대를 성장하게 할 때가 있듯이

그대에게서 가지를 쳐낼 때가 있으리라.

그대의 머리 위로 올라와서 햇살 가운데 춤추는

가장 부드러운 가지를 어루만질 때가 있듯이

대지에 뿌려 내린 그대의 발바닥까지 내려와서

온통 흔들어 놓을 때가 있으리라.

 

마치 곡식을 단으로 묶어 추수하듯

사랑은 그대를 묶어 거두리라.

도리깨로 두드려 그대를 벌거벗기리라.

체로 쳐서 그대의 겨를 걸러 내고

맷돌로 갈아 희게 하리라.

그대 안에 덩어리가 깨지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대를 반죽하리라.

그런 다음에 거룩한 불로 그대를 구우면

그대는 비로소 하느님이 베푸는 향연에서 쓰게 될

성스러운 빵이 되리라.

사랑이 그대에게 이 모든 일들을 하게 되면

그대의 내밀한 가슴이 지닌 비밀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인생의 깊은 신비도 깨달으리라.

 

그대가 이것이 두려워

사랑이 주는 평화와 기쁨만을 추구한다면

그대의 벗겨진 알몸을 덮고 도리깨 방으로 나와

사계절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라.

거기서 웃게 되겠지만, 진정한 웃음은 아니리라.

울기도 하겠지만 진정한 눈물도 아니리라.

 

사랑은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 당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으로 만족한다.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오래 결혼 주례를 해주었던 부부가 결혼 10주년을 맞아 딸아이의 손을 잡고 찾아왔습니다. 요즘처럼 이혼율이 높은 세태에 헤어지지 않고 살아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주례 신부를 잊지 않고 찾아온 부부가 참으로 귀한 보석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날 밤, 저는 이 부부가 살아가면서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사랑에 관한 부분을 우리 말로 옮겨 메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차를 마시며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노래한 <Somebody to Love>를 들었습니다.

 

누가 내게 사랑할 사람을 찾아 줄 수는 없나요.

매일 아침 일어나며 나는 조금씩 죽어 갑니다.

두 발로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요.

거울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 나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주님, 누군가, 오 누군가를, 내게 사랑할 누군가를 찾아 줄 수는 없나요.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요? 그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도 대상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할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은총입니다.

 

 

 

 

두 사람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되어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아파치족 인디언들의 결혼 축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결혼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시입니다. 이 시가 들려주는 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신비의 시작입니다.

결혼은 하느님이인간에게 베푸시는 최상의 축복입니다.그러나 그 축복은 열매가 아니라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기다려 주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가만히 받아 주어야 하고 때로는 가만히 들어 주어야 하고 때로는 가만히 손 잡아 주어야 합니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는데, 시장에 가서 새로 문을 연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으며 인사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가게에는 무엇을 파느냐고 여인이 묻자 주인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팝니다.”

놀란 여인은 한참 생각한 끝에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인이 말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그러자 가게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부인, 가게를 잘못 찾으신 것 같군요. 우리 가게에서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팔지요.”

 

하느님이 두 사람에게 주신 그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싹이 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하십시오. 주변에 잡초가 나거든 뽑아 주십시오.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기도 힘들듯이 ‘행복’이라는 싹과 주변에 그럴듯하게 자라나는 ‘불행’ 이라는 잡초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잡초는 더 왕성하게 자라 더 푸르게 보이고 더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고 있으니까요.

하느님께 늘 청하십시오.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는 풀과 잡초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도록.

 

 

 

 

해와 햇살

 

 

해는 그 빛, 햇살을 쏟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햇살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지만 결코 고갈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퍼져 나가는 것은 자신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 햇살은 빛줄기라고 불리는데 이 말은 ‘퍼져 나가 넓혀 준다’는 어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은 창문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찬찬히 바라보면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햇살은 똑바로 나아가다가 진로를 가로막는 장해물을 만나면 굴절한다. 그러나 그 빛은 정지하거나 방향을 바꾼 것일 뿐 미끄러지거나 추락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 정신은 이 햇살과 같다. 햇살처럼 사라지거나 고갈되지 않고 퍼져 나가야 한다. 퍼져 나가다가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 그 장애물을 거슬러 다투거나 그 장애물에 의해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에서

 

 어느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눈부신 햇살이 창에 부딪혀 반사되어 방 안으로 비쳐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영혼이 매우 메마른 상태로 간절히 하느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방 안으로 햇살이 비껴 드는 것이 마치 하느님이 제게 오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제 등 뒤로 다가와 한 손을 제 어깨에 얹으시며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네 곁에 있단다” 하고 포근하게 저를 안아 주시는 것 같았지요.

그날 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흐린 날이나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구름 속에 태양이 존재하듯, 하느님이 늘 제 곁에 계시다는 것을. 선명하고 강렬한 빛으로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 부드럽게 비껴서도 오신다는 것을. 위대한 황제이자 철학자인 아우렐리우스가 햇살의 고귀함에 대해 말한 이유도 알게 되었지요.

사제 서품을 받을 때 저는 요한의 첫째 편지 중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를 성구(聖句)로 택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 순간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좌절합니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상대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참혹함은 죽음의 고통과 맞먹지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고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으며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햇살처럼 가만히 머물러야 합니다. 햇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길이 보입니다.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햇살처럼 그곳에 머무르며 인간 정신에 내재한 빛을 찾아야 한다는 아우렐리우스의 성찰은 한 줄기 햇살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부당하거나 사랑 때문에 상처받더라고, 오히려 그 상황에 머무십시오. 참 사랑은 거슬러 다투지도, 절망하여 추락하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온 마음으로

 

 

많이 먹을 필요는 없어.

생선 한 마리라도 뼈까지 맛보렴.

그 편이 진짜 ‘맛’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많이 읽을 필요는 없어.

한 권의 책이라도 책장이 뚫어질 때까지 읽어 보렴.

그 편이 진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많이 사랑할 필요는 없어.

한 사람이라도 마음 구석구석 사랑해 보렴.

그 편이 진짜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까.

 

가난한 나라의 넉넉한 사람들이

나에게 살며시 미소 짓는다.

 

다카하시 아유무, <핵(核)>

 

 언젠가 찻집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탁자 위에 이름 모를 꽃이 놓여 있어 “꽃이 참 예쁘게 피었군요” 했더니 찻집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 거라고는 물을 준 것밖에 없는데 이 꽃이 저의 친구가 되어 주네요. 어느 날 꽃망울이 맺히고 봉우리를 터뜨리더니 매일 저렇게 저한테 환하게 웃어 주지 뭐예요. 신부님, 저는 아주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랍니다.”

그 말을 하는 찻집 여주인의 얼굴은 그 꽃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한 송이 꽃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길가의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피어나는 민들레꽃이나 제비꽃을 볼 때도 환희를 느낄 것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제비꽃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제비꽃은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어디 제비꽃만 그렇겠습니까.사랑도 허리를 낮추고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보입니다.

저는 그 찻집을 나오면서 영화 <기도하고 먹고 사랑하라> 의 한 대사를 기억했습니다.

“얼굴로만 웃지 말고 마음으로 웃으세요 간까지 웃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단 한 송이의 꽃이라도 깊이 그 향기를 음미할 수 있고, 단 한 권의 책이라도 집중해서 읽을 수 있으며, 단 한 사람이라도 깊이 사랑할 수 있다면……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그대가 홍차를 끓이면

나는 빵을 구우리이다.

우리 그렇게 살아가노라면

때로 어느 이른 밤

불그스레 물든 보름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때로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리이다.

그것으로 그뿐

이제 이곳에는 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바깥문을 내리고 빗장을 걸고

그대는 홍차를 끓이고 나는 빵을 구우리이다.

언젠가 그대가 나를

아니면 내가 그대를

무덤에 묻어 줄 날이 있을 거라고

늘 하던 이야기를 하며

평소처럼 먹을 것을 가지러 가게 되리이다.

그대가 아니면 내가

내가 아니면 그대가 상대를

무덤에 묻어 줄 때가 오게 되면

누군가 남은 자는 홍차를 홀짝홀짝 마시게 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마치게 되리이다.

그러면 그대의 자유도

바보들이나 하는 이야기 같은 것이 되리이다.

 

토미오카 다에코, <새살림> 중에서

 

  시를 읽노라면 문득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라는 가요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하고 시작하는 첫 소절에 저는 벌써 콧날이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애틋한 이 노래는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로 끝이 납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수도자이자 사제인 저를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이 기도하셨고, 특히 저를 위한 미사 참례를 하루도 빠지지 않으셨지요. 그런 어머니는 새벽 미사를 가시던 중 그만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남으신 아버지가 곧 따라가실 것 같아 안쓰러웠는데, 그럭저럭 10년을 넘게 더 사셨습니다.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매일 연도(위령기도)를 바치며 먼저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분의 품에 맡길 줄 아셨던 것이지요.

이별은 예기치 않고 찾아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남게 됩니다. 그러니 함께 살아 있을 때,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을 때 정성껏 사랑하십시오.

 

 

 

 

 

그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그에게 이끌린 것이 단지 나의 외로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윽한 그의 향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름다움을 갈망한 것은 내 눈이 미(美)를 탐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진정 내가 그의 미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일까요

진정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 없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문득 나 자신이 벌거벗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새벽의 여명처럼 은은한 그의 눈이 나를 응시했을 때

지금까지의 어두운 밤은 사라지고 나는 비로소 막달라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나는 온전히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내면의 빛이 내 안의 용을 죽인 바로 그날

나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라고 불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칼릴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중에서

 

 고금을 통해 막달라 마리아만큼 수많은 화가와 작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여인이 또 있을까요? 칼릴 지브란 역시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으로 예수를 대면하는 장면을 통해 그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치유를 깊은 성찰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는 매우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인으로 뭇 남성들을 유혹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의 연인이었지만 가슴 한쪽은 늘 텅 비어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오직 그녀의 육체를 욕망했고, 여자들은 그녀를 질투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녀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상처받은 영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한 남자가 아무도 바라본 적 없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합니다. 여인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느끼며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이내 그 연민의 눈길이 자신의 삶에 새로운 새벽을 여는 여명의 눈동자임을 알아챕니다. 어둠뿐이던 자신의 가슴에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이지요. 예수를 만난 ‘막달라’라는 장소는 새롭게 자신을 찾은 땅이 되었고, 그녀는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여인이 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

‘내 안의 용’ 이란 무엇일까요? ‘용’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영혼의 갈등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지키는 용을 처치하고 양털을 손에 넣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것처럼, 우리도 자기 안의 용을 물리쳐야만 순수한 본성을 되찾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혼자 힘으로는 괴물을 죽일 수 없습니다. 이아손이 메디아가 준 마법의 약초로 용을 잠재운 것처럼,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막달라 아리아는 항상 자기 영혼의 갈증을 채워 줄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자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사랑스러운 연민의 눈길이 그녀 안에 있던 용을 죽이고 사랑의 마음을 되찾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도 사랑과 연민의 눈길을 보내오는 누군가를 만날 때, 영혼이 날개를 달고 자유를 향해 날아오를 것입니다.

 

 

 

 

 

사랑하고 잃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

 

 

어떤 일이 있어도 난 부럽지 않네

고귀한 분노를 모르는 포로가

여름 숲을 알지 못하는

새장에서 태어난 방울새가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것보다

사랑해 보고 잃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

 

알프레드 테니슨, <사우보(思友譜)> 중에서

 

영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죽음의 이별에 부치는 시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 시의 마지막 2행,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것보다 / 사랑해 보고 잃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 는 영미 문학에서 아주 유명하고,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한 비평가가 ‘테니슨의 생에는 단 한 가지 사건, 할렘과의 만남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만큼 할렘은 테니슨의 시와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테니슨은 할렘이 뇌출혈로 죽은 지 17년이 지나서야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이 시를 쓴 것입니다.

시인은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아니 표현하기 위해서 17년이나 걸렸지만, 그 상실의 아픔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고 행복이었다고 읊고 있습니다.

여름 숲을 모르는 새장의 새가 진정한 자유를 모르듯이,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지 못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표현을 통해 그 우정과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故 장영희 교수와의 만남과 우정, 그 우정을 감히 테니슨과 할렘의 우정에 비할 수 없겠지만, ‘친구 장영희’를 만났던 것은 제 생에 큰 행운이고 행복이었습니다.

 

 

 

 

 

 

이제 양쪽에서 바라보게 되었지요

 

 

부드럽게 물결치는 천사의 머릿결과 리본,

하늘에 떠 있는 아이스크림 모양의 성들,

그리고 깃털처럼 비끼어 이어진 협곡,

난 그렇게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 그들은 태양을 가릴 뿐

모두에게 비와 눈을 내리게 하네요.

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구름이 내 앞을 가렸지요.

 

이제 난 구름을 양쪽에서 바라보게 되었지요.

위에서, 아래에서, 그런데도 왠지

내가 떠올리는 것은 구름의 환상일 뿐,

나는 정말 구름이 뭔지 알지 못해요.

 

이제 난 사랑을 양쪽에서 바라보게 되었지요.

주고받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왠지,

내가 떠올리는 것은 단지 사랑의 환상일 뿐,

나는 정말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

 

조니 미첼의 노래 중에서

 

 우연히 어느 음악 카페에서 이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들었습니다. 조니 미첼은 30여 년 전 자신이 작곡하고 불렀던 이 노래를 영화 <러브 액츄얼리> 에 삽입하며 다시 불렀습니다. 원래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유명했지만 인생의 연륜은 무시할 수 없나 봅니다. 목소리가 훨씬 더 굵고 깊어졌으니 말입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서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삶의 의미를 한쪽뿐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환상만 좇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도 보입니다. 여전히 구름이 뭔지,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가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제 인생을 가로막는 구름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육십 가까운 고개를 넘어온 인생이 무엇인지 정말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제 어느 한쪽에서만 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사랑도 양쪽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느끼고, 사랑에는 미소뿐 아니라 눈물도 동반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두려워 미리 피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사랑하며 살아온 나날 속에서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이 더 많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 바람이 둘 사이에 춤추게 하라.

 

 

그때 알미트라가 말을 이었다.

“스승님,결혼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희는 함께 태어났나니, 언제나 한결같이 함께하리라.

죽음의 천사가 흰 날개를 펄럭이며

이승의 삶을 마감하려고 다가올 때도

너희는 함께 있으리라.

 

그렇다. 신의 고요한 기억에서조차

너희는 함께 있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함께 있는 단란함 속에도 공간이 필요하나니

하늘 바람이 너희 둘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지 말라.

오히려 두 영혼의 해변을 오가는 파도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가득 채워 주되 한 잔으로만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나누되 한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각자 홀로 머물게 하라.

마치 하나의 음률을 내는 악기의 현이 각기 홀로 있는 것처럼.

 

그대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을 지니려고 하지는 말라.

오직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지닐 수 있나니.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나니.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사랑,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대중가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랑이 왜 쓸쓸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쓸쓸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의 열병에 걸려 보았을 것입니다. 사랑의 열병에 걸리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저만치 물러나고 오로지 사랑의 황홀함에 취해 상대를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무것도 내 손 안에 움켜잡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오게 마련입니다. 아름다우니 황홀하고 황홀하니 쓸쓸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노래 제목은 ‘열병, 그 쓸쓸함에 대하여’로 바꾸는 것이 더 적적할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느 한때의 열병이 아닙니다. 서로 간에 자유의 공간을 인정하고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표현대로 ‘하늘 바람이 둘 사이에서 춤추게 하는 것’입니다.

열병은 지나가는 것, 그러나 사랑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PART 2

달래지지 않는 슬픔

 

내 가슴속 깊은 슬픔을

다른 이들의 기쁨과 바꾸지 않으리

 

 

 

 

 

길을 잃었습니다

 

 

주 하느님

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길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항상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저의 열망만은

당신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에 그 열망을 가지고 있길 원합니다.

 

그 열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 무엇도 절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저의 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지라도 당신이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항상 당신을 신뢰합니다.

비록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에 놓여 있다고 여겨질 때도

당신을 깊이 신뢰하며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늘 제 곁에 계시고,

저를 혼자 위험 속에 버려두지 않고

절대로 저를 떠나지 않으시므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토머스 머튼의 기도

 

 사제로 살아가면서 한계에 부닥칠 때마다 이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몇 년 전 저는 토머스 머튼의 일기를 번역해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당신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위대한 사상가의 책을 번역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머튼의 기도는 제 마음을 잔잔히 적셔 주었습니다. 그 역시 나처럼 슬프고 좌절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 제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잃고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맬지라도 주님께서 반드시 이끌어 주시리라는 것을 머튼의 기도를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토머스 머튼은 시간이 지닌 한계는 영원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변하기 마련이고 결국은 사라지게 되니까요.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시간이 무의미하며 영원이 바로 현재 안에 있다고 머튼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를 만나십시다.

숲에서 산책을 가보니 봄에 파릇하게 올라와 여름에 울울하던 나뭇잎들이 어느새 발갛고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화가가 미세한 붓으로 그려 놓은 듯 아름다웠습니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습니다. 자연의 신비로운 물결 속에서 그분의 숨결을 느끼며 가만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두 가지 종류의 슬픔

 

 

슬픔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달랠 수 있는 슬픔과 달래지지 않은 슬픔이다.

달랠 수 있는 슬픔은 살면서 마음속에 묻고 있는 슬픔이지만,

달랠 수 없는 슬픔은 삶을 바꾸어 놓으며 슬픔 그 자체가 삶이 되기도 한다.

사라지는 슬픔은 달랠 수 있지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은 영원히 달래지지 않는다.

 

펄벅, <자라지 않는 아이> 중에서

 

 <대지> 작가 펄벅에게는 장애를 가지 딸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에 살던 펄벅은 딸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딸의 장애를 고쳐 줄 수 있는 의사를 찾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미국 전역을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만나는 의사들마다 모두 그녀에게 희망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독일인 의사만이 현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당신 딸은 절대 정상이 될 수 없으니 그만 포기하라고, 아이의 지능은 네 살 이상 자라지 않을 거라고, 아이한테 삶을 다 바쳐서는 안 된다고, 그 의사의 말에 펄벅은 딸의 장애를 인정하고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후일 그녀는 딸 캐롤에게 인내를 배웠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그 누구에게든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능만으로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음도 배웠습니다.”

펄벅은 달래지지 않는 슬픔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그 슬픔이 바로 삶이 되었다고 토로합니다.

우리에게도 도저히 달래지지 않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이 나를 바꾸어 놓습니다. 슬픔을 인내하는 법을 배우려 하지만 어쩌면 슬픔은 견뎌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펄벅의 말처럼 때로 슬픔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슬픔을 겪고 인내한 사람은 삶을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고 되고, 누군가 좌절을 겪을 때 진정으로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슬픔이 지혜를 키워 주기 때문이지요.

슬픔은 그저 피하고 싶은 감정, 행복과 반대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는 지혜의 길목에서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인지도 모릅니다.

 

 

 

 

 

눈물과 미소

 

 

내 가슴속 깊은 슬픔을 다른 이들의 기쁨과 바꾸지 않으리.

온몸에 흐르는 슬픔이 금세 웃음으로 바뀌는 눈물이라면

나는 그런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

눈물과 미소가 내 삶이기를

 

눈물은 마음을 씻어 주고 감추어진 생의 비밀을 알려 주네.

미소는 나를 후손들에게 이끌어 주어 신들에게 바치는 찬미의 상징이 되네.

 

눈물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하나가 되게 하고

미소는 존재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표징이 되어 주네.

 

지루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기보다 열망과 동경 속에서 죽기를

영혼 깊은 곳에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기를

 

만족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라네.

열망과 동경을 가진 이들의 탄식 소리를 들었네.

부드러운 선율보다도 더 달콤하다네.

 

저녁이 되면 꽃들은 그리움을 품은 꽃 잎을 접고 잠이 들고

아침이 밝아 오면 꽃들은 입술을 열고 태양과 입맞춤하네.

한 송이 꽃에도 아픈 그리움과 성취가 들어 있다네.

눈물과 미소가

 

바다의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에 올라 함께 모여 구름이 되고

구름은 언덕과 계곡을 떠다니다 부드러운 바람을 만나면

비가 되어 들판을 적시고 시냇물로 흘러 강물과 만나

고향인 바다로 돌아가네.

 

구름의 생이란 헤어짐과 만남

그리고 눈물과 미소

이렇듯 영혼은 더 위대한 영혼에게서 분리되어 물질의 세계로 들어가

구름처럼 슬픔의 산과 기쁨의 평원을 떠돌다

죽음의 미품과 만나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네.

사랑과 아름다움의 바다 – 하느님에게로.

 

 

칼릴 지브란, <눈물과 미소> 중에서

 

  시를 읽다 보면 영화 <신과 인간>이 생각납니다. 영화 속 수사들은 성탄 전야에 침입해 온 반군 부상병을 치료해 준 일로 정부군의 의심을 받게 되고, 정부군과 반군 양측 모두에게 위협을 받는 상황에 놓입니다.

수도자로서 신의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려 하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선 두려울 뿐입니다. 두려움에 질린 한 수사가 그들이 오면 어떡하느냐고 묻자 의사인 뤽 수사는 말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두려워하는 이들과 함께 이곳에 사는 것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되묻자,그는 미소 지으면 답합니다.

“숨바꼭질하는 거지.”

그 미소 안에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불안감도 극에 다다릅니다. 하지만 감독은 그들이 희망을 잃고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빌론 유배를 알면서도 밭을 산 예레미야처럼 수사님과 마을 처녀들은 밭을 사고 씨를 뿌립니다. 씨앗은 희망의 상징이지요.

원장 크리스티앙 수사의 고뇌의 눈물이 빗속에 서 있는 성모상의 눈물과 오버랩됩니다. 그는 눈물을 씻고 다시 환하게 미소 짓습니다. 나무 위로 밝게 비치는 햇살 속에 크리스티앙 수사는 양 떼를 모는 목동처럼 언덕에 오르며 희망을 노래합니다.

우리 삶은 늘 눈물과 미소의 교차인지도 모릅니다. 이는 울 일, 웃을 일이 번갈아 일어난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거기에는 눈물과 미소가 함께 있습니다. 눈물 나는 상황에서도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햇살이 환히 비치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는 아이였다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 받는 아이였다.

 

 

잠언 8, 24~30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 받는 아이였다.”

인간이 얼마나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인지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요?

심연이 생기기 전, 산들이 자리 잡기 전,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인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존재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곁에서 사랑 받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분 곁에서 사랑스러운 아이,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때때로 사랑 자체이신 그분이 나누어 주시는 사랑이 흘러 넘쳐 우리의 마음을 흠뻑 적실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없이 절망스러운 그 순간에도 변함없이 그분의 사랑을 믿는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어떠한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여기서 아들을 딸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이니까요.

만약 내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이임을 느꼈다면, 당신은 그 신비의 가장자리에 가까이 간 것입니다.

 

 

 

 

 

기쁨을 선택하기

 

 

언제였던가

너희가 하늘을 나는 걸 봤단다.

바람에 실려

소중한 것 하나만 지닌 채

훨훨 길을 떠나는 모습이

마냥 기쁘게만 보였단다.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하잘것없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나면 나도

하늘 높이 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단다.

 

 

호시노 토미히로, <민들레> 중에서

 

 호시노 토미히로는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가 된 지 두 달 만에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사고를 당해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장애를 딛고 일어섰습니다. 손이 아닌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화가이자 시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도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은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절망하고 번민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에 시달리던 그에게 문득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시절 그는 동네 아이들과 강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그만 급류에 휩쓸렸습니다. 강기슭으로 되돌아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물살에 휩쓸려 물만 더 먹게 될 뿐이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문득 강의 하류 쪽으로 가면 수심이 얕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발버둥을 멈추고 물살에 가만히 몸을 맡겼습니다. 얼마를 떠내려가자 하류에 도달했고, 무사히 강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호시노 토미히로는 자신에게 닥친 장애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밤이 있기에 아침이 눈부시듯, 무언가를 잃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되지요.”

이제 그의 영혼은 민들레 꽃씨처럼 자유롭습니다. 장애의 몸이지만 영혼 안에서 그는 무한한 자유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자유를 느끼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마다 삶이 주는 무게가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처했다 해도 서로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절망이 아닌 희망을, 기쁨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호시노 토미히로는 불행 앞에 굴복하지 않고 기쁨을 선택해 기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희망을 주었습니다.

육체는 비록 마비되었지만 그의 영혼만은 민들레 꽃씨가 되어 세계 여러 곳으로 날아다니며 절망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박두진, <청산도> 중에서

 

 <청산도> 천천히 맑게 낭송을 해야 제 맛이 나는 시 입니다.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낭송을 하다 이 구절에만 이르면, 아련한 슬픔에 잠시 숨을 고르게 됩니다. 시인은 왜 풀밭에 엎드리면 가슴이 운다고 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 이라는 책에서 아버지가 되는 길에 대해 쓰고 있는데, 첫째가 슬픔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저지르는 엄청난 방탕과 욕망, 탐욕, 폭력, 분노, 원망 등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이 지니신 마음의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볼 때, 저는 너무 슬픈 나머지 소리 내어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는 길의 첫째가 슬픔이라는 말이 선뜻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깊은 연민을 지니게 되면 거기에는 자연 슬픔이 따르기 마련인가 봅니다. 또 그 슬픔은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세상에는 슬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지닐 때 함께 슬퍼하게 되고, 그 슬픔은 사랑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슬픔이 단지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여는 창이 되는 것이지요.

슬픔은 그리움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슬픔은 바람, 소망, 나아가 희망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다시 한 번 <청산도>를 읽으며 제 가슴 깊은 곳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습니다.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다리를 더 절으리라

그대의 말에 구태여 변명 아니하며

 

그대의 뜻이라면

지금까지 그대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게 하리라

 

그대가 가는 곳에는 아니 가리라

내 입에 그대의 이름을 담지 않으리라

불경한 내가 혹시 구면이라 아는 체하여

그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그리고 그대를 위해서

나는 나 자신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으므로

 

셰익스피어 소네트 89

 

  이웃에게 불만투성이인 사람이 있었답니다.

“난 이 마을 사람들처럼 비열하고 치사한 사람들은 본 적이 없어. 그들은 저질에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지.”

우연하게 그 곁을 걷던 천사가 물었습니다.

“정말 그렇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저 사람 좀 보라고요. 저 탐욕스럽고 잔혹한 눈을 보세요. 자신이 무슨 사립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아보고 있잖아요.”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정확히 봤군요. 정말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만은 파악을 못 하고 있네요. 지금 거울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예수님은 사람들의 내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비춰 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자신인지도 모르고 미워하고 욕을 합니다.

우리에게 적이 있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요? 인생이라는 삶의 장에서 이겨야 할 상대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 욕을 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를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저 주정뱅이 같은 놈’ 대신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나무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 꽃 같은 놈’이라고 하면 바로 나 자신이 꽃 같은 놈이 되지 않을까요?

참, 이 방법은 <벗에게 부탁함>이라는 시에서 정호승 시인에게 배운 것이랍니다.

 

 

 

 

 

 

기기기익 (己飢己溺)

 

 

맹자가 말하였다.

“우(禹)와 직(稷)과 안회(顔回)는 같은 길을 걸었다. 우는 천하에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자신 때문에 물에 빠진 듯이 생각하였고, 작은 천하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 때문에 굶주리는 듯이 여겼다.”

 

<맹자(孟子)> 이루(離婁) 편 중에서

 

  이야기에서 ‘기기기익(己飢己溺)’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남이 굶주리면 자기가 굶주리게 한 것과 같이 생각하고, 남이 물에 빠지면 자기로 인해 물에 빠진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으로,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면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말입니다.

깊은 연민으로 상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얼마나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지요.

저는 사제이기에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거의 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저는 나름 선하게 사는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이 물음은 인간에게 던져진 가장 오래된 물음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내가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신이 있다면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가?”라고 묻게 되지요.

나의 고통이든 다른 사람의 고통이든,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할뿐더러 아무런 해답도 줄 수 없습니다. 위로해 줄 수 있는 말을 찾지만 대개는 부질없는 일이 됩니다.

고통을 덜어 줄 수는 없지만, 상대의 아픔에 같이 동참하는 연민을 지닐 수 있다면 그 마음 – 기기기익의 마음은 그가 고통 때문에 겪게 되는 외로움을 덜어 줄 수는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함께 있어 주고 함께 아파해 주고, 또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이 왜 고통을 겪는지 저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 체험이 저를 조금은 더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압니다.

 

 

 

 

 

 

슬픔의 끝에는 열려 있는 창이 있다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 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며

욕망은 충족되고

굶주림은 채워진다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폴 엘뤼아르, <그리고 미소를> 중에서

 

 폴란드의 여류 작가 마리아 누로브스키는 폴 엘뤼아르의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소설 제목을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다’라고 붙였습니다.

살다 보면 때때로 절망에 빠져 칠흑 같은 캄캄한 길을 헤쳐 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도 가도 어둠만 있고 도저히 여명이 오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밤이 아무리 길고 춥더라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동녘에서 반드시 해는 떠오를 것이며, 어딘가 지친 우리를 잠시 쉬게 해줄, 불 켜진 창이 있으며 그 창은 열려 있을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소낙비와 천둥 번개도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하물며 인간의 일임에야.”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 없이 절망과 기쁨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 아닐까요. 이 롤러코스터를 잘 조절하는 사람만이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무척 게을러 방 청소는 잘 하지 않지만 저는 늘 창문만은 깨끗하게 합니다. 오늘 아침도 창문을 힘껏 열어젖힙니다. 제 마음의 문을 늘 열어 두겠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빛나는 것은 모두 다 금이라고 믿는 여인이 있는데

그녀는 천국에 오르는 계단을 사려고 하지요.

천국에 이르면 가게가 모두 문을 닫아도

한마디만 하면

그녀가 마음먹은 것은 모두 얻을 수 있다고 알고 있네요.

그녀는 천국에 오르는 계단을 사려고 하네요.

 

서쪽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이 온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은 떠나고 싶은 갈망으로 타오르네요.

머릿속에서

저는 나무들 사이를 흐르던 연기가 만든 반지를 보았지요.

그리고 서서 바라보는 사람들 목소리도 들었답니다.

그 생각을 하면 놀라게 되지요.

그 생각을 하면 정말 놀라게 된답니다.

 

금방이라도 알 것 같으면서 떠오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피리 부는 사람이 자기를 따라 부르라고 하네요.

사랑하는 그대 여인이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리나요?

이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속삭이는 바람결에 있다는 걸 아셨나요?

 

그리고 길 아래에 내려서면

그림자가 영혼보다 더 크게 보인다는 것을 아셨나요?

 

레드 제플린의 노래 중에서

 

 세상살이에 회의를 품은 참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먹이를 찾아 다녀야 하는 삶이 괴로웠습니다. 또한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하는 삶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날로 세상은 공해에 찌들어 더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서로 낱알 한 톨이라도 더 먹으려 싸우는 모습을 보며 삶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는 스승 참새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저는 이 세상살이가 싫어졌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각박하고 비참합니다. 어제는 제 친구가 농약이 묻은 벼를 먹고 죽었습니다. 며칠 전엔 다른 친구가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승 참새가 물었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참새가 대답했습니다.

“깊은 산에 들어가서 불쌍한 우리 참새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냐? 나를 따라오너라.”

스승 참새는 그를 데리고 근처 연못으로 날아갔습니다. 연못은 위에서 내려온 흙탕물 때문에 더럽게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뿌리를 내린 연에서 놀랍게도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피어나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스승 참새는 말했습니다.

“보아라. 연꽃은 저 더러운 훍탕물에서 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꽃밭으로 만든다. 너도 이 험한 세상을 떠나 도피하려 하지 말고 이곳에서 살면서 네 터를 꽃밭으로 만들도록 해라.”

제가 들려드린 이 참새 이야기와 연길시켜 음미하면 의 노랫말이 담고 있는 상징이 더 쉽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터, 비록 각박하고 공해로 찌들었다 해도 바로 그곳을 우리의 천국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PART 3

다시 태양에게 인사를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꽃

 

 

나는 태양에게 다시 인사하겠다

내 안에 흐르던 개울에게도

내 오랜 생각이었던 구름에게도

나와 함께 가뭄의 계절을 견뎠던

정원 사시나무들의 고통스런 성장에도

밤이 스며든 밭의 향기를

나에게 선물로 가져왔던

한 떼의 까마귀에게도

거울 속에 살고 있던

내 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에게도

내 반복되는 욕망 속에서 자신의 뜨거운 열기를

푸른 씨앗으로 채웠던 땅에게도

나는 또다시 이들 모두에게 인사할 것이다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내 머릿결과 함께

땅 밑에서 물씬 풍기는 기름 냄새

내 두 눈과 함께

어둠의 빽빽한 경험들

담장 너머 숲에서 꺾은 꽃다발 들고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나는 오고 있다

문지방은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 문지방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 그곳,

사랑 넘치는 문지방에 서 있었던 그 소녀에게

또다시 인사할 것이다

 

 

포루그 파로흐자드, <나는 태양에게 다시 인사하겠다> 중에서

 

 여성에게 억압적인 이슬람 사회, 완고한 집안에서 태어난 포루그 파로흐자드는 억압과 구속을 벗어나고자 열여섯 살에 이웃에 사는 만화가와 결혼을 감행합니다. 남편은 시인으로서 그녀가 가진 감수성을 사랑하고 지지해 주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주변의 비난을 불러왔고 그로 인해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됩니다. 그 뒤 그녀는 더욱 자유를 구가하며 저항적인 시를 씁니다.

이 시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그녀가 시를 통해 치유되고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는 오고 있다’를 반복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새 희망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어느 날 중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 가정을 위로하고자 방문했습니다. 그 집은 지난해에도 한 아이를 병으로 잃었던 터라 상심이 매우 컸습니다.

“저 아이를 잃어도 당신에게는 아직 두 아이가 있잖아요.”

이웃 사람들이 위로라고 해주는 말이 어머니에게는 더욱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는 아이가 열 명이 있어도 잃어버린 한 아이의 자리를 채울 수 없어요. 그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답니다. 아이들 하나하나가 다른 존재니까요. 그 중 누군가 없어진다면 남은 아이들을 다 모은다 해도,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 빈자리를 채울 순 없어요. 고생시킨 아이일수록 엄마는 더 애정을 쏟게 되니까요.”

며칠 후 프란치스코 성인은 레오 형제와 함께 아픈 아기를 보러 다시 왔습니다. 성 다미아노 수녀원에서 글라라 자매가 준 꽃씨 주머니를 가지고 온 성인은 말했습니다.

“나는 이 꽃을 아기 방 창문 아래에다 심을 거야. 그러면 그들의 눈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줄 테고, 오두막집이라도 곁에 꽃이 피면 좋을 거야.”

성인은 오두막집 창가 아래에 있는 돌로 된 여물통의 잡초를 뽑아내고 흙을 파서 꽃씨를 심었습니다.

앓는 아기의 형이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걸 심어요?”

“왜냐하면 나중에 꽃이 햇빛을 받고 피어나서 아름답게 웃는 것을 보면 너도 같이 웃을 것이고, 하느님은 참 예쁜 것을 만드셨다고 말할 테니까.”

“그런데 이 작은 꽃의 이름은 뭐예요?”

“아, 그것은 잘 모르겠는데, 네가 좋다면 ‘희망’이라고 부르자. 너, 그 이름을 외우겠니? 이것은 희망의 꽃이란다.”

어느 날 창가에 꽃망울이 맺히면 어머니는 아픈 아기를 안고 그 꽃을 보여 줄 것입니다. 아기는 매일 아침 꽃이 점차 피어나는 것을 보며 병이 나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꽃이 활짝 피어났을 때 아기가 그 앙증맞은 손으로 꽃을 만지면 어머니는 태양에게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되겠지요.

당신에게도 반드시 태양에게 다시 감사의 인사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은총의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실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깨끗한 눈짓만을 남기고 모두가 떠나가 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조국은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리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 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얼빠졌었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때문에 결심했다 가능한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루오 할아버지같이 그렇게.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시기에 청춘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시인은 그때의 상처와 절망감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조국은 전쟁에서 졌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풍 가는 여고생처럼 발랄한 문체로 패전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어 조금도 절망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는데, 직접 자신의 부고문을 작성해 사후에 개봉하게 했습니다.

“내 의지로 장례, 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니 조의금이나 조화 등 아무것도 보내지 말아 주세요. ‘그 사람도 떠났구나’하고 한 순간, 단지 한 순간 기억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참으로 그녀다운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녀가 한때 아름답고 발랄한 아가씨였듯, 저 역시 친구들과 장난치며 소풍 가던 시절도 있었고 열정을 불태우던 청춘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지나 이순(耳順)의 나이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보니 젊은 시절을 쓸데없는 고뇌로 낭비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마치 고3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수능 시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시간을 낭비하듯, 우리 역시 무언가를 해야 할 시간에 불안과 걱정으로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그렇게 살진 않을 텐데…..”,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고 아쉬워만 합니다.

지금이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살아 갑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은총의 때입니다.

 

 

 

 

 

희망이란 죽을 때까지 간직하는 것

 

 

네 바퀴가 없다면

훨씬 더 쉬울지도 몰라

훨씬 더 쉽게 즐길 수 있겠지

훨씬 더 쉽게 움직일 수 있겠지

남자 친구를 만나기도 쉬울 거야

하지만 난 믿어

네 바퀴 때문에

삶을 알 수 있었고

삶에 맞서 이겨 내는 법을 알았어

 

 

알리체 스투리알레, <핸디캡> 중에서

 

 알리체는 태어날 때부터 척수성 근위축증이라는 병을 앓다가 겨우 13년의 생을 살고 하느님 곁으로 간 이탈리아 소녀입니다. 또래 아이들처럼 마음대로 걸을 수도, 뛰어다닐 수도 없어 휠체어를 타야 했습니다. 하지만 늘 미소를 잃지 않아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알리체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분입니다. 때로 마음이 나약해지면 이렇게 외쳐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누구세요?”

그리고 이렇게 독백합니다.

“만약, 모두 다 알고 있다면 영원히 따뜻한 천국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세요.”

알리체는 자신의 ‘장애’로 삶을 알 수 있었고, 삶에 맞서 이겨 내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알리체는 제1회 국제어린이회의에서 발표한 시 <장애인들에게 장벽이 되는 도시 건축의 문제에 관한 보고>는 <라 나치오네>지에 실렸고, <언어의 비밀>이라는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재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알리체도 여느 소녀들처럼 사춘기를 맞고 첫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또래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힘들어하지요. 밤에는 그 소년의 꿈을 꾸고 편지를 씁니다. 그러면서도 소년이 자신의 마음을 눈치챌까 봐 두려워합니다. 매일 밤 알리체는 결심합니다. 내일은 소년에게 ‘너를 좋아해’라고 고백하겠다고. 그리고 이렇게 다짐합니다.

“희망이란 죽을 때까지 간직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온 아이

 

 

오늘은 재원이가 태어난 날입니다. 첫째 다예는 재원이가 신기해서 그저 만지작거리고 킁킁거리고 눌러 보고….. 아빠는 병실에서 사진을 찍어 주었지요. 다예가 그때까지 젖을 떼지 못해 한쪽씩 머리를 들이밀어 양쪽으로 젖을 물려야 했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온 재원이는 태어난 날부터 천국에서 쓰는 말만 듣고 자랐지요. 그런 걸 보면 재원이는 천국에서 온 아이가 분명합니다.

 

천국에서 쓰는 7가지 말 (The 7 languages used in heaven)

 

미안해요(I am sorry)

괜찮아요(That’s Okay)

좋아요(Good)

잘했어요(Well done)

훌륭해요(Great)

고마워요(Thank you)

사랑해요(I love you)

 

 

상록수 자활센터 ‘인터넷 카페 글 중에서

 

 제가 달에 미사를 드리러 가는 발달장애 아이와 어머니들의 공동체 ‘상록수’의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글입니다.

재원이의 어머니는 첫 아이 때는 그렇게 많이 해주지 못했던 이 말들을 재원이를 낳고서는 얼마나 많이 했는지 셀 수조차 없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자라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발달 장애가 있는 재원이를 기르면서는 아이가 숨 쉬고 웃고 떠들고 속 썩이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기적이고 축복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일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내 글이 김매던 아낙네의 호미 끝에 걸려 반쯤 뽑혀져 힘없이 고개 숙인 잡초 같다면, 이 글은 어부가 방금 끌어올린 그물에서 펄펄 뛰는 싱싱한 생선 같은 글이구나.”

두 아이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는 재원이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항문이 없는 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를 기르는 한 어머니가 제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아이가 다른 가정에 가지 않고 우리에게 온 것을 감사해요. 그리도 제가 간호사로서 경험이 있으니까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셨다고 생각해요.”

천국에서 특별한 아이를 이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저도 재원이의 축복을 빕니다.

 

 

 

 

 

 

행복한 삶

 

 

행복한 삶이란

나 이외의 것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은

식어 버린 불꽃이나 어둠 속에 응고된 돌멩이가 아닙니다.

별을 별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발에 채인 돌멩이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 때,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행복은 시작됩니다.

사소한 행복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루 한 시간의 행복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용범, <무소유의 행복> 중에서

 

 ‘행복은 나 이외의 것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보내는 것’이라는 말이 제 마음을 기쁨으로 출렁이게 합니다.

별을 별로 바라볼 수 있을 때 행복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저는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행복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나 이외의 것들’에는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도 포함되니까요. 서로에게 미소를 건네고 함께 웃음 지을 때 느끼는 기쁨,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삶의 밀핵(密核)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자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면 존재의 소중함을 잊게 될 때가 많으니까요. 자연은 새로운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치유해 줍니다.

며칠 전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저수지를 산책했습니다. 저수지를 향하는 길 양 옆으로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고, 어느덧 가을 물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기적이듯 이 조그만 나뭇잎 하나하나도 모두 기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거대한 대자연 속에서 작은 잎사귀들마다 ‘광합성’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공기와 물과 햇빛의 작용으로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원을 이루는 분자들이 생겨납니다. ‘결국 모든 생명이 – 아무리 고상한 사상이라도, 아무리 위대한 성덕이라도 – 푸른 잎 속의 광합성의 기적을 먹고 산다”고 한 프랑스 작가 쟈크 뢰브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경탄할 손길인 광합성의 기적을 통해 생명체로 살아 숨 쉽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다시 우리의 본향인 창조주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우리의 생은 참으로 덧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더욱 찬란하고 값진 것이며, 하루 한 시간의 행복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소중합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고동영

 

 

화창한 어느 봄날, 농장에 새로 온 강아지 한 마리가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아지가 마구간 가까이 다가가자 말이 말했습니다.

“못 보던 녀석인데 새로 왔나 보구나.”

말은 우쭐대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너는 새로 와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이 농장에서 주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동물이란다. 주인을 위해 짐을 날라 주기도 하고 때론 직접 주인을 태우고 다니기도 해. 넌 너무 작아서 주인을 위해서 할 일도 없고 쓸모가 없을 테니 천덕꾸러기가 될 거야.”

그 말에 강아지가 풀이 죽어 떠나려고 하는데 옆 우사에 있던 암소가 우습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천만에. 이 농장에서 주인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는 귀한 동물이 바로 나라는 것을 모르는 동물은 없지. 안주인은 내가 주는 젖으로 버터나 치즈를 만들어 식사를 한단 말이야. 새로 온 강아지인가 본데 너야말로 주인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을 테니 사랑 받을 길이 없어 참 안됐구나.”

이 말을 들은 양이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암소 양반.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요. 주인에게 내 털을 줘서 옷을 지어 입게 하는 동물은 바로 나란 말이오. 주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면서 그러네. 하긴 이 강아지라면 당신 말이 그리 틀린 건 아니지.”

동물들은 저마다 자신이 농장 주인을 위해 큰 기여를 하고 있으며, 그래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닭들은 자기들이 알을 낳아서 주인을 기쁘게 한다고 했고, 고양이는 많은 쥐를 잡아 곡식을 보호해 줘서 주인을 기쁘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목소리로 강아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주눅이 든 강아지는 너무 속이 상해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 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늙은 개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와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강아지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늙은 개가 말했습니다.

“정말 그럴까? 강아지야, 못 하는 것을 두고 서럽게 울고 있는데 그건 바보짓이란다. 다른 동물들은 할 수 없지만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니? 바로 네 존재 자체로 주인에게 사랑과 기쁨을 주는 거야.”

저녁이 되어 주인은 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다가 지쳐서 돌아왔습니다. 그때 강아지는 주인에게 달려가 발을 핥고는 품으로 펄쩍 뛰어올랐습니다. 주인은 강아지를 껴안고 건초 더미에서 함께 나뒹굴며 말했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너를 보니 다시 힘이 샘솟는구나. 농장의 다른 동물들이 아무리 많아도 너처럼 내게 기쁨을 주는 녀석은 없을 거야. 모두를 준대도 너랑 바꾸지 않을 테다.”

 

존 에이킨의 우화 중에서

 

 저는 이야기를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미사에서 들려주었습니다.

“자, 여러분! 동물 중에서 누가 주인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았나요?”

그때 한 아이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고동영!”

고동영은 그 아이의 이름입니다. 그토록 순수하고 거침없는 표현에 저는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사랑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그 순간 고동영이라는 아이의 표정에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흘렀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부족한 이 아이들의 얼굴을 대할 때마다 저는 하느님이 진정 이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내 곁에 올 수 없다”(마태오 18, 3)라고 하셨지요.

우리가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순수한 마음을 지니려고 노력한다면 예수님 곁에 그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대 나이 들어

 

 

그대 나이 들어 머리 희끗해지고 잠이 쏟아져

난로 옆에 앉아 꾸벅거리며 졸게 되거든

이 책을 꺼내 무릎에 놓고 천천히 읽으며

한때 그대 눈동자가 지니고 있던 부드러운 시선

그리고 그 눈동자가 만든 깊은 음영을 꿈꾸게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대의 기쁨에 찬

은총의 순간들을 사랑했으며

진실한 사랑이었든 거짓이었든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가!

그러나 한 사람만이 진정

그대 안에 있는 순례자의 영혼을 사랑했으며

바뀐 그대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나니

 

붉게 타오르는 장작 옆에 몸을 구부리고

조금은 슬픈 어조로 중얼거리게나.

어떻게 사랑이 그대로부터 달아나

저 멀리 보이는 산 위를 지나

무수한 별들 사이로 얼굴을 감추었는지를.

 

 

B. 예이츠, <그대 나이 들어>

 

 시인 예이츠는 분명 나이 들어 머리가 희끗해질 무렵, 저녁식사 후 절로 잠이 쏟아져 난로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게 되는 즈음에 이 시를 지었을 것입니다. 마치 늙어 가는 자신에게 들려주는 위무(慰撫)인 듯한 이 시를 읽노라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습니다.

시인은 이제 영원을 향한 삶의 종착역이 가까워졌음을 느낍니다. 이승에서의 순례의 여정에서, 멀리 보이던 산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습니다. 종착역을 앞두고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제야말로 진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누구나 그렇듯 저도 마음은 청춘인데 요즘 들어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즐겨 치던 테니스를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는데, 테니스를 치다가 세 번의 근육 파열을 겪었고 그때마다 2주 정도를 쉬어야 했습니다. 결국 테니스가 제게 무리한 운동임을 인정해야 했지요.

영어로 ‘old’는 ‘나이 들어 늙다’는 뜻도 있지만 ‘낡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제가 ‘young’은 아니어도 아직 ‘old’는 아닌 줄로만 알았습니다. 내심 나이 드는 것을 거부해 왔지만 이제 ‘old’임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습니다.

물건은 오래되어 낡기도 하지만 잘 관리하지 못해도 쉬이 낡아 버립니다. 관리 소홀로 낡아 버린 제 몸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몸보다 마음을 추스리며 그분을 향한 마지막 남은 여정을 평화로이 맞고자 합니다. 난로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이 당신을 짓누를 때면

그래서 당신이 기도할 힘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 버렸을 때

이 한 가지 진실만이 당신을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지친 당신의 일상을 홀가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를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 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윌슨 스미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1 중에서

 

 저희 집은 딸 없이 아들만 7형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싸워 코피가 터져서 들어오기도 하고, 책가방을 잃어버리거나 심지어 신발을 잃어버리고 올 때도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자식이 잘되는가 싶으면 또 다른 자식이 부모님 속을 썩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니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와 일맥상통하는 말이지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역시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말이란 인류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형성된 사유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결집되어 나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힘든 순간도 결국 지나갑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거나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한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공기와 같습니다. 들어 쉬고 내 쉬는 공기처럼 손을 내밀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물과 물결

 

 

사제는 빛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사람들에게 비추어 주는 수면입니다.

 

거친 파도가 이는 수면은

있는 그대로의 빛을 반사할 수 없습니다.

고요 속에 머무는 빛.

 

 

졸시 <잔잔한 수면>

 

 이른 새벽, 잠을 깼습니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 어둠이 남아 있었지만 걷기에는 무리가 없고 새벽 공기는 상쾌했습니다. 섬강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풀벌레 우는 소리가 온 새벽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합창이라기보다 거의 아우성에 가까웠지요.

이 밤, 왜 저리 울고 있을까? 문득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풀벌레의 존재 이유, 소명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듯 풀벌레가 우는 것도 풀벌레의 소명이겠지요.

한참을 걷다가 바위에 앉았습니다. 호수처럼 고요한 물에 산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습니다. 바위에 앉은 제 그림자도 실제보다 훨씬 크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자를 보며 문득 제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랑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틱낫한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물과 물결로 비유합니다. 물과 물결이 하나이듯 하느님과 저는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하나 됨을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흘러서 하나인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칼릴 지브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다움과 사랑의 바다인 하느님께로’ 말입니다.

 

 

 

 

 

다시 하프를 켜야 할 때

 

 

주님, 저는 압니다.

사람은 제 길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간은 그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발 걸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주님, 저를 고쳐 주시되 공정하게 해주소서

저를 진노로 다루지 마시어

저를 없애지 마소서.

 

 

예레미야서 10, 23~24

 

 예언자 예레미야가 남긴 예언들은 대부분 지도자에 대한 비판과 바빌론 유배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유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회심(回心)을 촉구하며 내리시는 일시적인 벌이며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희망의 날은 꼭 온다고 외칩니다.

예레미야서는 문학 작품으로도 유대 문학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예레미야는 친구 바룩에게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적게 하고, 그 말씀을 유대 성읍의 모든 백성이 듣는 가운데 들려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여호야킴 임금은 그 두루마기를 칼로 베어 화롯불에 던져 버립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작품이 모두 한 줌 재로 변한 것입니다.

다른 작가라면 실성할 노릇이지만 예레미야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시 받은 그는 담담하게 다른 두루마기를 가져다가 바룩에게 받아 적게 합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흑야>의 저자인 엘리 비젤은 이 대목에 모든 작가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교훈이 담겨 있다고 말 합니다.

“처음 쓰는 것보다 다시 쓰는 것이 더 어렵지만 더 중요합니다. 전수하는 것이 처음 발명하는 것보다 더 소중합니다.”

한편 조국에 다가오는 어두운 미래를 예언하던 예레미야는 결국 치드키야 왕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 그에게 사촌이 찾아와서 형편이 어려우니 밭을 사달라고 청합니다. 곧 나라를 잃고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아는 예레미야에게 밭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그 밭을 삽니다.

조지 프레더릭 와츠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한 여인이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을 그렸는데, 유심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프의 줄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머리를 숙여 몸을 거의 하프에 붙이고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화가는 이 그림에 ‘희망’이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다 끊어지고 한 줄밖에 남아 있지 않은 하프로 연주를 하는 여인이나 곧 망할 나라에서 밭을 사는 예레미야나 범인(凡人)의 눈에는 모두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희망의 정체입니다.

 

 

 

 

 

 

PART 4

받아 들임

 

단지

그대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대는 받아들여졌다

 

 

그대는 은총에 매혹된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우리는 자신의 삶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은총의 이끌림에 의해 변화하도록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은총의 움직임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만한 나머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은총은 우리가 커다란 고통과 불안에 싸여 있을 때,

오랫동안 추구했던 완벽한 삶이 실현되지 않아 좌절을 겪을 때,

오랜 강박 관념이 갑자기 강하게 엄습해 올 때,

실망이 모든 기쁨과 용기를 거두고 갔다고 느낄 때,

그때 은총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줄기의 빛이 어둠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목소리의 속삭임과 같습니다.

‘그대는 받아들여졌다.’

그대보다 위대한 누군가에 의해, 그대가 알지 못하는 이름의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고요한 속삭임입니다.

지금 그 이름을 묻지 마십시오. 아마도, 훗날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어떤 것을 추구하려고도, 완성하려고도, 의도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단지 그대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때 우리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폴 틸리히, <잠언록> 중에서

 

  남자가 있었습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낙오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도 하지 못했고 결혼 생활에도 실패했으며 그나마 벌어 놓았던 돈도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잃고 말았습니다.

스스로에게 실망한 그는 가족들과 연락을 완전히 두절하고 세상을 떠돌며 방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집으로 달려갑니다. 맏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는 간신히 눈을 뜨고 그에게 오직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

그 말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형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사흘간을 버티셨어. 의사가 기적이라고 하네.,”

순간 그는 참고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습니다. 그토록 못난 불효자인 그가 밥은 굶고 다니지 않는지 어머니는 평생 그 걱정만을 하고 사셨던 것입니다. 스스로 하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머니에게는 그토록 소중한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미워하며 살아왔던 그는 스스로를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린 아니, 술주정뱅이 아버지, 사기를 친 친구도 용서했습니다.

<잠언록>의 저자 폴 틸리히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믿음이란 받아들일 수 없음 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용기는 큰 감동을 받거나 누군가에게 이끌렸을 때 생깁니다. 내가 사랑스럽고 중요하며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면 쉽게 다른 사람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은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가 자기 거부라고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가야”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둠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저기서 빛이 나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데, 어둠을 향해 발길을 돌리는 어리석은 일은 저지르지 마십시오. 다만 폴 틸리히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빛을 향해 나가십시오.

“단지 그대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내 영혼이 내게 들려주네

 

 

내 영혼이 내게 들려주네.

시간을 깊이 헤아리는 법을 배우라고.

“어제가 있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이나니.”

 

여태 나는

과거란 잃어버린 채 잊힌 시간이며

미래란 얻을 수 없는 시간이라 여겨 왔네.

 

이제는 알게 되었네.

덧없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시간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언젠가는 얻어지는 것이며

마침내는 완성되리라는 것을.

 

 

칼린 지브란, <내 영혼이 내게 들려주네> 중에서

 

 보이지 않는 영혼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봅니다.

삶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다만 완성을 향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딛고 있는 것이라고,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시간의 심연 안에 머물며 시간을 깊이 헤아리는 법을 배우라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거기에 깊이 스며든 삶의 향기를 맡으라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내일이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합니다. 어제가 있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이니 어제의 일을 감사하고 내일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현재를 즐기라고 격려합니다.

지천명의 나이가 지나서야 저는 살아간다는 것이 불안정을 이해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불안정한 삶보다는 안정된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삶 자체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자신의 불안정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남미의 예수로 알려진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미숙아로 태어난 데다 두 살 무렵 극심한 폐렴을 앓은 탓에 중증의 천식을 앓았습니다. 천식 발작이 심해지면 산소 호흡기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과대학에 진학한 체 게바라는 6개월 동안의 남미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을 직접 목격하고 의사가 아닌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프랑스의 화가 로트레크는 소년 시절 두 다리의 골절로 평생 불구가 되었고 헬렌 켈러 역시 어려서 뇌수막염을 앓아 시각과 청각을 잃었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안정한 여정을 걸었지만 이들에게 고통과 장애는 절망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안정된 삶만을 원한다면 죽을 때까지 안정이라는 허상만을 찾아 방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만약 당신이 불안정을 느끼고 있다면 영혼의 내밀한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따스하게 속삭일 것입니다.

언젠가는 얻어질 것이며 마침내는 완성되리라는 것을.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샬롬!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 27

 

 지난 중국 텐진에서 석 달 정도 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미사를 드리던 중 평화의 인사 시간에 성가대에서 <샬롬>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날따라 제 귀에는 ‘샬롬’이 ‘살 놈’으로 들리는 겁니다.

‘어라, 나더러 살 놈이라고 하네. 그럼 죽일 놈은 누구지?’

예수님이 ‘죽일 놈’이 되신 덕분에 내가 ‘살 놈’이 되었구나,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신자들은 ‘저 신부 살짝 돌았나 보다’ 했겠지만, 저는 기쁨의 웃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샬롬’은 단지 ‘평화’ 만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충만하게 살게 해주는 ‘살 놈’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전쟁이 없는 평안한 상태의 소극적 평화를 뜻하지만, 오히려 성경에서 보면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축복을 비는 인사말로 흔히 쓰였습니다. 단순히 ‘안녕하세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느님의 축복을 비는 인사입니다.

‘샬롬’이라는 인사는 태어나는 아기에게는 ‘너는 살 놈이니, 건강하게 자라서 잘 살아라’라는 의미가,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는 ‘당신도 살 놈이야. 그러니 쉽게 포기하면 안 돼. 힘내. 다시 마음 다잡고, 잘 살자’라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제가 혼인 주례를 하면서 ‘샬롬’이라고 하면 ‘그대들은 잘 살 분들입니다. 절대 이혼하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샬롬’은 모든 사람들에게 죽을 놈이 아니고 살 놈이라고 힘을 주는 인사말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수행자가 비단을 그물처럼 걸치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둘러쓴 것이요,

수도자가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원효대사,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중에서

 

 3 수도생활 30년을 돌아보며 재충전하기 위해 안식년을 얻었는데, 오히려 더 바쁘게 쫓기듯 살았습니다. 그래도 새로운 마음으로 새 삶을 다짐하고자 선인들의 지혜를 구하던 중 발견한 글귀가 바로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입니다. 거기서 두 구절을 뽑아 수도자로서 저 사신을 위한 성찰의 문구로 뽑았지요.

라망(羅網)은 ‘비단을 그물처럼 걸쳤다’라는 뜻입니다. 그물 하면 떠오르는 불가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습니다. ‘라망’이란 단순히 비단 옷을 입는다기보다는 그물에 걸리는 상황, 부자유를 말합니다. 개가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쓰면 얼마나 부자유스럽겠습니까? 수행자가 무엇 때문에 수행을 합니까? 내적으로 자유롭기 위해서입니다.

또 ‘연회(戀懷)’라는 말은 보통 ‘분별심’을 일컫습니다. 언뜻 ‘연정을 품다’로 읽히지만 ‘회’를 ‘사모하다’보다는 ‘생각’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즉 ‘연회’란 수행자가 수행이 아닌 다른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갈 때는 온몸에 돋아난 가시를 눕혀 쉽게 들어가지만, 뒤로 나오려면 다시 세워진 가시에 걸려서 못 나옵니다. 즉 한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참 어렵다는 뜻이지요.

나에게 무엇이 ‘라망’이고 ‘연회’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라망’은 무엇이고 ‘연회’는 무엇입니까?

저는 이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싶습니다.

 

 

 

 

 

당신의 눈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들을 바라보시던 당신의 눈길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눈길

부자 청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던 눈길

제자들의 마음을 안으시던 눈길

그 눈길을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사시던 그대로의 당신을.

당신의 이미지가 당신을 만났던 사람들을 바꾸어 놓으신 까닭입니다.

 

 

베드로 아루페2 신부의 기도문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눈길은 그 자체로 바로 대화입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바라보던 눈길은 질책보다는 따뜻한 위로였고, 부자 청년을 바라보던 눈길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모드 그 눈길에 반했고, 만남 이후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아는 까닭에 아루페 신부님은 그분의 눈길을 더 깊이 느끼고 싶다고 하십니다.

만남, 참으로 가슴 설레는 말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과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말없이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예수님이 돌아서며 묻습니다.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선생님, 묵고 계신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이 단순한 대답 안에는 아직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함께 머물면서 당신을 깊이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와서 보시오”라고 하십니다. 함께 묵으면서 당신을 만나 보라는 초대입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복음사가는 전해 줍니다. 이는 단순히 시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시간, 은총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특별한 만남의 시간은 그 자체로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새겨집니다.

누구나 그런 특별한 만남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바쁜 삶의 격량 속에서 잊고 지내기 쉽습니다. 그때 바로 오후 네 시쯤이 상징하는 그 시간을 기억 속에서 떠올려 보십시오. 깊은 평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도 달라질 것입니다.

 

 

 

 

 

인생의 종착항에 다다라서

 

 

내 인생의 여정은 폭풍의 바다를 건너

지난날 모든 삶의 궤적을 적은 기록부를 내야 하는

모든 이들이 다다라야 하는 항구에 도달했다네.

지난날 나를 가두었던 환상은 얼마나 허무했던가!

예술을 우상이나 왕으로 여긴 환상이라네.

환상과 자만심이 나를 망쳐 놓은 열망이었다네.

사랑의 꿈은 달콤한데 영혼과 육신의 죽음은 다가오는구나.

하나의 죽음은 확실하고

또 하나의 죽음이 나를 놀라게 하네.

나의 어떤 그림이나 조각도 내 마음을 달래지 못하네.

이제 내 영혼은 우리를 껴안기 위해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린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있다네.

 

미칼렌젤로의 소네트 중에서

 

 미칼렌젤로가 79세에 자신의 추종자이며 제자였던 바사리에게 보낸 소네트입니다. 죽음을 예감하며 쓴 글이지만 그는 이 시를 쓴 후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것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의 말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비참하거나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노년에도 승마를 즐겨 했고, 빗속에서 승마를 즐기다가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말년에 미칼란젤로는 주로 성경을 주제로 한 작품에 천착합니다.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작품이 많습니다.

십자가를 다룬 드로잉 작품에서 그는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제자 요한을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몸으로 죽어 가는 예수의 다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는 모습으로 그들이 나눈 사랑을 표현하려 했지요.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는 두 사람을 모자 관계로 맺어 줍니다. 그는 십자가의 참 의미가 사랑임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칼란젤로는 사랑의 꿈은 달콤하지만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으며 이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죽음 앞에서 어떤 작품도, 어떤 업적도 자신의 마음을 달래 주지 못함을 절규합니다. 이제 자신의 영혼은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미칼란젤로는 먼저 어머니 마리아를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윤곽을 반복해서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천 갈래의 바람으로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십시오.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잠든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천 갈래로 부는 바람입니다.

나는 흰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여무는 곡식 위에 비친 햇살입니다.

나는 조용히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그대가 아침의 고요에서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선회하다가

갑자기 비상을 감행하는 새입니다.

나는 밤하늘에 부드러운 별빛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십시오.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니까요.

 

작자 미상, <천 갈래로 부는 바람>

 

  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던 것을 누군가 영어로 번역했다는 설이 있고, 1932년 메리 프라이라는 여성이 어머니를 잃고 상심한 이웃을 위해 쓴 시라고도 합니다.

그 후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노래가 되어 수많은 장례식에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시가 알려지게 된 것은, 9-11 테러 1주기 때였지요.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한 소녀가 낭송해 전 세계인을 눈물짓게 했습니다.

이 시는 죽은 이가 산 이에게 보내온 따뜻한 위로의 편지입니다. 사랑하던 이가 죽어 이승을 떠나면 이제 더 이상 그를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됩니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그 육신을 다시는 만날 수 없습니다.

한 자매가 제게 고백하기를, 자신은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다듬잇돌을 거실과 화장실 사이에 두고 본다고 했습니다. 어느 때는 그 다듬잇돌에 발을 세게 부딪치기도 하는데, 어찌나 아픈지 주저앉아 발가락을 잡고 울기도 한답니다. 그래도 그 다듬잇돌을 다른 곳으로 치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꼭 어머니에게 매를 맞는 것 같아서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자매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습니다.

촉촉이 봄비가 내리는 오후입니다. 오래 전 작고하신 어머니가 메마른 대지에 뿌리심을 느낍니다. 어머니는 바람으로, 봄비로, 밤하늘의 별빛으로 늘 제 곁에 머물고 계십니다.

 

 

 

 

 

천하언재(天何言哉)

 

 

어느 날 공자가 제자 자공과 산책을 하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말합니다.

“이제 되도록 말을 하지 말아야겠어.”

그 말을 듣고 자공이 놀라며 말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말씀을 하지 않는다면 저희가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자공에게 말합니다.

“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대들이 배울 수 없는 것이 아니지. 하늘이 언제 무슨 말을 하여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던가?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때가 되면 나무에 잎에 돋고 푸르러지고 열매를 맺지 않는가. 세상의 온갖 조물들이 각기 제자리에서 배움을 얻어 각자가 할 일을 알지 않는가. 하늘이 어찌 말을 하는가?”

 

 

<논어(論語)? ‘양화(陽貨)’ 편 중에서

 

 <논어> 주해한 주자에 따르면 제자인 자공이 이미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 다다랐기에 공자가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혹 자공이 뛰어난 언변과 재기발랄 함을 경계해 한 말은 아니었을까요? 공자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들어야 깨닫게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불가(佛家)에서는 무언설법을 행한 고승이 여러 분 계십니다.

만공스님이 행한 한 시간의 무언설법이 가장 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월스님의 일화도 유명합니다.

어느 선사가 지월스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의 참뜻이 무엇입니까?”

지월스님은 굳게 닫힌 성문처럼 입을 닫고 묵묵히 앉아 계시다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지월이라는 명호도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사제의 강론도 말 대신 침묵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저도 강론을 하는 대신 성경을 가리키고 싶습니다. 성경 본문을 마음의 눈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좋은 강론을 듣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 저의 영적 지도 신부님이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장점이 많으신 분이지만 그 중에서도 잔소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네.”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가급적이면 말을 줄이고 마음으로 보고 듣는 법을 터득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지극히 새겨 신자들과 면담할 때 되도록 말은 줄이고 더 깊이 귀 기울여 들으려고 애씁니다. 잘 들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면담은 없으니까요.

 

 

 

 

 

제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

제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저의 외침은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전쟁과 폭력에 희생된 모든 이들의 외침입니다.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저의 기도는

무기 개발과 전쟁에 혈안이 된 이들 때문에

지금까지 고통 받고 있고

앞으로도 고통 받을 모든 아이들의 기도입니다.

 

모든 이의 마음에

평화의 지혜와 정의의 힘이 뿌리내리도록

당신께 청하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주님

제 목소리를 들어 주시고

통찰력과 힘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증오에는 사랑으로

불의에는 완전한 헌신으로

정의와 이웃의 필요에는 나눔으로

전쟁에는 평화로 대응하게 해주십시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기도문

 

 평화의 사도라 불리었던 교황님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이들을 생각하며 절절한 마음으로 이 기도문을 만드셨고, 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언젠가 캄보디아의 난민촌에서 오랜 내전으로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연민과 동시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독재자와 소수의 거대 자본가들과 군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아무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무기를 만들고 약소국으로 수출합니다.

그런 현실 앞에 서면 하느님께 절규하게 됩니다.

‘하느님! 제발 저들의 마음을 좀 어떻게 해보세요.’

故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외침은 단순히 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외침이며 이들이 바치는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의 기도처럼 증오에는 사랑으로, 불의에는 완전한 헌신으로, 정의와 이웃의 필요에는 나눔으로, 전쟁에는 평화로 대응하기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처럼 진정한 마음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기도가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전단향 나무처럼

 

 

나 아닌 것들을 위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험한 날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 험해지지 않는다.

부서지면서 도끼날을 향기롭게 하는

전단향 나무처럼.

 

마음이 맑은 사람은

아무리 더러운 세상에서라도

그 마음이 흐려지지 않는다.

뱀들이 온몸을 칭칭 휘감아도

가슴에 독을 품지 않는

전단향 나무처럼.

 

 

재연스님 엮음, <수바시따3> 중에서

 

 도끼날에 맞아 스스로 부서지면서도 오히려 그 도끼날을 향기롭게 하는 전단향 나무. 그 나무는 뱀이 온몸을 칭칭 휘감아도 독을 품지 않고, 오히려 향을 내뿜습니다.

정아는 태어난 지 6개월도 채 안 돼 뇌성마비로 팔다리가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정아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개학 날 짝이 된 미현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을 자청해 정아의 짝이 되었습니다. 수업 시간이면 정아의 필기를 도와주었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여 주고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가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두 소녀의 우정은 3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었습니다. 미현이의 꿈은 정아와 같은 친구를 도와주는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이었고, 정아의 꿈은 친구 미현이에 대한 글을 쓰는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움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맑은 마음이고 고마움을 주는 마음도 맑은 마음입니다. 저도 전단향 나무처럼 나 아닌 것에 마음을 나누는 사람,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에 이런 맑은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환히 밝아지겠지요.

 

 

 

 

 

영원을 향해

 

 

오! 아버지!

제가 이 먼 여행을 한 것은 ‘머나먼 곳’이라고 불리는 당신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을 헤매었고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며

바다를 건너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오, 아버지!

당신께 삶과 죽음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길가메시> 서사시 중에서

 

 <길가메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입니다. 기원전 3,000년경, 문명의 발생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 ‘우룩’을 다스리던 왕 길가메시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 바로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길가메시는 벗을 만나 함께 길을 떠납니다. 여신 이슈타르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지만 거짓임을 알고 그녀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그로 인해 동행하던 벗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알리는 서곡임을 아는 그는 영원한 삶의 비밀을 안다는 한 사람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납니다.

해가 뜨는 동족 산기슭에 이르러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나아가 해를 만나고, 드디어 죽음의 바다를 건너 영원한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이를 만납니다.

“당신께 삶과 죽음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영원한 삶은 다만 신의 선물이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영원한 세계를 갈망하는 인간의 갈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니, 영원이신 그분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 깊은 곳에 당신을 향한 그리움, 당신을 추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영원에 대한 갈증을 심어 놓으셨나 봅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은 우리 인간의 몫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길가메시처럼 영원을 향한 여정에서 늘 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PART 5

삶을 위하여

 

삶에서 지켜야 할 의무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행복해야 할 하나의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늘 행복 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소란하고 분주한 가운데서도 고요히 머무십시오.

고요 안에서만이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될 수 있는 한 포기하지 말고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나누십시오.

그대가 옳다고 믿는 바를 분명하고 차분하게 말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말도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비록 똑똑하거나 유식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들 나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며 싸울 태세를 갖춘 사람들을 피하십시오.

그들은 그대 영혼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공허하고 씁쓸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그대보다 그릇이 더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대가 이룬 성과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었던 계획까지도

즐기십시오.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무상의 세월 안에서 진정으로 그대가 지닌 것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세상에는 속임수들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경계하느라 세상 안에 있는

아름다운 미덕을 못 보는 일은 없도록 하십시오.

어느 곳에서나 영웅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대 자신이 되십시오.

특히 애정을 지니고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지도 마십시오.

겉으로는 물기 없이 메마르고 척박해 보일지라도

사랑은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륜을 지닌 사람들이 들려주는 조언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젊은이들이 지닌 사고에 유연하게 열려 있으십시오.

갑자기 불행이 닥치더라도 굳건히 대처하기 위해서

영혼의 힘을 기르십시오.

그러나 미리 어두운 상상으로 그대 자신을 괴롭히지는 마십시오.

두려움을 지니면 쉽게 지치고 외로워집니다.

그대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말고

부드럽게 대하십시오.

 

나무나 별들이 우주의 자녀인 것처럼

그대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대는 여기 우주 안에 머물 권리가 있습니다.

그대에게 확연하게 보이든지 아니든지

우주는 섭리에 따라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늘 그분의 현존을 마음속에 지니십시오.

삶의 혼돈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열망을 지니든지

늘 그대 자신의 영혼과 평화를 이루십시오.

 

때로 거짓이 판을 치고

삶이 힘겹게 느껴지고

꿈이 산산이 부서질지라도

여전히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즐거워하십시오.

늘 행복 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맥스 어만, <소망(Desiderata) 중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매일 번씩 읽으셨다는 미국 시인 맥스 어만의 시입니다. 이 시에서처럼 ‘영혼의 힘’을 기를 때 우리는 조건에 상관없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님은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상황도 그분에게서 행복을 빼앗아 갈 수는 없었습니다. 늘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셨기에 죽음을 맞으면서도 “행복하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삶을 요약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황님처럼 인류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저도 주변의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행복합니다. 제가 행복한 이유는 단 하나, 주님께 깊은 신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젊었을 때는 물질과 명예, 성공과 출세가 행복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목표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고 좌절하며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차츰 이해하게 됩니다.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 비바람 몰아치는 날을 견뎌 내야 할지라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영혼에 보탬이 되는 친구

 

 

어느 지역에 해마다 새로운 영주를 뽑는 관습이 있었답니다. 어떤 영주가 뽑히든 통치기간 동안은 그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지만 일단 임기가 끝나면 모두 권위를 박탈하고 발가벗겨 무인도에 홀로 유폐시킵니다.

어느 해에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 영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역시 1년이 지나면 앞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인도에 갇힐 것이 명약관화했습니다. 그는 임기 중에 자신이 살 섬을 아름답게 꾸미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편의시설과 생활 필수품을 갖춰 놓도록 은밀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통치 기간이 끝나자 사람들은 그의 영지를 거두어들이고 발가벗기 채 섬으로 내쫓았습니다. 앞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이미 지어 놓은 좋은 집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후안 마누엘, <백작 루카노르> 중에서

 

 <백작 루카노르>라는 책은 루카노르 백작이 조언자 파트로니오에게 조언을 구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백작이 재산과 명성을 계속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충고를 들어야 하는지 묻자, 파트로니오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백작에게 말합니다.

“백작님이 발가벗고 떠나기 전, 즉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백작님이 가게 될 영원한 집을 찾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죠. 영혼의 삶은 정신적인 것이고 영원한 것이기에 실패해선 안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 사는 동안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에 좋은 집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명예나 지위 때문에 유일하게 영원하고 확실한 것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으스대거나 자만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비록 다 아는 일이더라도 겸손하게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 삶에서 백작님이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해 백작님의 영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을 두십시오.”

세상을 사는 동안은 마음대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기간이 지나면 발가벗겨진 채 미지의 세계로 가야 합니다. 우화에서처럼 우리는 이승에 사는 동안 저승에 거처할 집의 재료를 올려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파트로니오의 충고 중 가장 깊이 새겨듣게 되는 것은 ‘영혼에 보탬이 도는 좋은 친구를 두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삶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대신해 줄 좋은 친구가 항상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

 

 

삶에서 지켜야 할 의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행복해야 할 하나의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행복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왔습니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일치를 이루고 사랑을 한다면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세상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유일한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헤르만 헤세, <행복하다는 것> 중에서

 

 어느 교우가 휴가를 갔다 그곳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날의 강론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며 제게 들려 주었습니다.

“여러분, 행복하게 사세요.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제게 하신 유언이 딱 두 가지예요. 한 가지는 개인적인 것이라 말씀드릴 수 없고 나머지 하나가 ‘신부! 행복하게 살아!’였습니다.

‘행복하게 살아!’

순간 교우가 전해 준 그 말이 제 뒤통수를 한 대 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부와 명예,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삶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할까요?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만족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아무 부러울 것 없는 사람들이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기 위해 위험한 등정을 하다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찾아 그토록 험난한 길을 택했을까요? 정답이 있다면 오로지 ‘형복’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행복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행복만이 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조용히 순응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을 내면의 음성을 가만히 귀 기울이며 그날의 삶에 충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 속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것은 잘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을 잘 살아 내는 것이 행복입니다.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시야는 온통 어둠의 구렁텅이

나를 휘감고 있는 칠흑의 밤으로부터

나는 그가 어떤 신이든지

내게 불굴의 영혼을 주셨음에 감사 드린다.

 

분노와 눈물로 범벅이 된 이곳 너머로

공포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도 짓눌림의 세월이 지속되고 있지만

여태 두려워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운명의 두루마리가

얼마나 형벌로 채워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내 영혼의 선장이다.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굴하지 않는 영혼> 중에서

 

 얼마 세상을 떠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애송시입니다. 이 시의 원제인 ‘인빅투스(invictus)’는 라틴어로 ‘굴하지 않는’ 이라는 뜻입니다. 시인이 영시의 제목을 굳이 라틴어로 정한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라틴어는 영어의 모태입니다. 더 근원적인 상황을 말하려니 고어(古語)가 지닌 어떤 힘이 필요했나 봅니다.

이 시를 쓴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는 12세 때 폐결핵을 앓았고, 다리까지 감염되어 오랜 무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왼쪽 무릎 아래를 잘라 내야 목숨을 건진다고 했지만 그는 거부했고, 대신 3년에 걸쳐 끈질긴 치료를 받으며 지독한 고통을 참아 냈습니다.

오랫동안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짓눌린 세월’을 살았지만, 그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그와 친구였던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목발을 짚고 다니는 외다리 실버 선장으로 그를 소설 속에서 등장시키기도 했지요.

27년간의 모진 감옥살이를 하고도 자신을 가둔 자를 용서한 넬슨 만델라와 모진 육체의 고통에 굴하지 않았던 어니스트 헨리. 그래서일까요? 이 시를 읽다 보면 고통에 굴하지 않는 사람의 영혼이 광휘처럼 빛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번이란 없다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인생의 학교에서는

꼴찌라 하더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같은 공부는 할 수 없다.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고

서로 닮은 두 밤(夜)도 없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하나 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

 

어제, 누군가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불렀을 때,

내겐 열린 창으로

던져진 장미처럼 느껴졌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난 얼굴을 벽 쪽으로 돌렸네.

장미? 장미는 어떻게 보이지?

꽃인가? 혹 돌은 아닐까?

 

악의에 찬 시간, 너는 왜

쓸데없는 불안에 휩싸이니?

그래서 넌 – 흘러가야만 해

흘러간 것은 – 아름다우니까.

 

미소하며, 포옹하며.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방울의

영롱한 물처럼 서로 다르더라도.

 

 

비스바와 심보르스카, <두 번이란 없다>

 

 미국에 잠시 머물 때의 일입니다. 자동차로 미 대륙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미국은 주에서 다른 주로 넘어가면 바로 여행 안내소가 나타납니다. 가운데 커다란 지도가 놓여 있고, 지도에는 현재 위치를 나타내는 빨간 X 표시가 있습니다.

그 표시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까지 온 길이 제대로 온 것이었는지, 앞으로 갈 길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처음 가는 길도 전혀 헤매지 않고 잘 갈 수 있습니다.

저는 길을 잘 찾는 편입니다. 관측하사 출신이라 지도도 능숙하게 읽어 냅니다. 하지만 인생길이란 여행길과 달라서 아무리 길을 잘 찾고 지도를 잘 읽어도 늘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럭저럭 제대로 왔는가 싶으면 별안간 벼랑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앞이 아득하고 뒤도 막혀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막다른 길을 만나 되돌아온 적도 여러 번입니다.

인생길에도 어디를 잘못 지나왔는지 알려 주는 빨간 X표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연습도 없고, 두 번도 없습니다. 인생은 그만큼 가혹한 것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삶의 지도에 빨간 X자를 그려야만 합니다. 연습도 없고 두 번도 없지만 빨간 X를 부단히 표시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나는 넘어지더라도 뒤에 오는 길손만은 이정표로 삼을 것입니다.

 

 

 

 

 

삶을 위하여!

 

 

외할아버지는 잔을 부딪치며 히브리말로 ‘러하이엠’을 외치는 전통적인 건배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러하이엠’은 ‘삶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외할아버지는 항상 힘찬 열정으로 ‘러하이엠’을 외쳤다. 한번은 내가 여쭈었다.

“외할아버지, ‘러하이엠’이란 말은 ‘행복한 삶을 위하여!’라는 뜻인가요?”

그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네쉬메레야, 그냥 단순히 ‘삶을 위하여!’라는 의미란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삶을 위하여’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우물쭈물 자신 없이 다시 여쭈었다.

“그러면 기도문 같은 거예요?”

“아니란다. 네쉬메레야, 기도로 많은 것들을 청하지만, 우리는 이미 생명을 받았고 그 삶을 살고 있지.”

“그럼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왜 이 말을 꼭 해요?”

그분은 대답 대신 다정한 미소를 보내셨다.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지어낸 것이지요?”

그분은 크게 웃으시더니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수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건배하면서 서로 이 말을 했고 그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나는 여전히 궁금했다.

“외할아버지, 성경에 그런 말이 쓰여 있어요?”

“네쉬메레야, 성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말이란다.”

여전히 이해 못 하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면서 그분은 계속 말씀하셨다.

“러하이엠은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당하게 느껴지더라도, 삶은 거룩하고 서로 축복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의미란다.”

외할아버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씀하셨다.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그 달콤함은 우리 삶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단다.”

 

 

레이첼 나오미 레멘,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 중에서

 

 오래 제가 옮기 책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2,500년 전 디아스포라 이후 전 세계로 흩어져 지난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늘 삶 자체를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러하이엠’을 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레이첼 레멘은 ‘러하이엠’은 삶을 사는 특별한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몇 년간 암 환자들과 상담하는 동안, 상실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그녀는 오래 전 외할아버지가 ‘러하이엠’을 외치실 때의 빛나던 기쁨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진정으로 상실과 고통을 체험한 사람만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러하이엠’을 외칠 수 있는지 모른다고요.

얼마 전 저는 봉성체(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병자에게 성체를 모셔가 영해 주는 것)를 위해 말기암 환자 한 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성체를 받아 모신 후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그분이 저를 받아 주시리라 믿으니까요. 다만 지금 살아 있는 것에 감사 드려요.”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난 후에도

저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제 정신은 안개처럼 희뿌옇지만

제 마음은 수정처럼 맑답니다.

 

제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여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

제 마음대로 어떤 일에 대한

작은 기억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제가 드렸던 질문을 다시 반복한다고 해서

화를 내기 마십시오.

저도 겁이 나고 혼돈스러우니까요.

 

제가 이제 자주 천천히 걷는다고 하여

그리고 본향으로 가려고 한다고 하여 화내지 마십시오.

이곳은 저의 본향이 아닙니다.

이제 이곳에서는

아무 것도 친숙하지 않고 안심이 되지도 않습니다.

본향으로 돌아가면

제 기억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 하페츠, <기억해 주십시오>

 

  하페츠라는 치매 노인이 글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가장 큰 불안 중 하나가 세상에서 잊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죽음 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오히려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이 노인도 자신이 떠난 후에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청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워낙 건망증이 심했습니다. 남들 눈에는 늘 정신을 놓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마음마저 희뿌옇지는 않았답니다. 이 노인도 자기 마음은 수정처럼 맑지만 기억의 능선은 늘 안개 자욱한 산자락이라고 합니다. 하여 같은 말을 하고 또 하지만 그것을 나무라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자신도 겁이 나고 혼돈스럽지만 묵묵히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노라고, 그러니 제발 참아 달라고 하소연합니다.

저는 그의 시선이 이미 영원을 향해 있음에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그분이 계시는 그곳이 자신의 본향이며, 이제 그곳에 가면 다시 기억을 되찾고 온전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이를 통해 배운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혼자 걸어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동행해 주셨다는 깨달음입니다.

이제 그 동행의 장소를 알려 달라고 청합니다. 다른 기억은 더 이상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누가 공기를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한 줌 흙일지라도

나의 사람들에게는 거룩합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솔잎과

부드럽게 밀려오는 물결,

어두운 숲 속을 휘감은 안개와

때로는 맑게, 대로는 소곤대는

숲 속의 곤충들도

나의 사람들의 체험과 기억 속에서

성스럽습니다.

 

나무를 가로질러 놓여 있는

숲 속의 길이

붉은 사람들의 기억을 실어 나릅니다.

백인들은 죽음의 사자와 함께 별들을 걸을 때면

그들이 태어난 땅을 잊겠지만

우리는 죽음의 계곡을 걸으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않나니

땅은 우리 붉은 사람들의 어머니인 까닭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육신을 거둔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대지를 휘감아 도는 강과

봄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들판과

바람이 밀어내는 연못의 반짝이는 물결,

화려한 색깔의 새들을 사랑하고 기억합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이고

대지 또한 우리의 분신이며

향기를 내뿜는 꽃들이 우리의 자매이며

사슴과 말과 독수리가 우리의 형제입니다.

 

 

테드 페리, <시애틀 추장의 편지> 중에서

 

 미국 서부 개척시대 초기, 워싱턴 주지사가 시애틀의 인디언 추장에게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냈을 때, 그 답으로 쓴 ‘시애틀 추장의 편지’를 테드 페리가 시어로 고쳐 쓴 것입니다. 20여 년 전,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이 시를 처음 대하고 밤새워 옮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시애틀 추장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하늘을 마치 양이나 빵처럼 사고팔고 빼앗을 수 있는 물건으로 대하는 사고방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땅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닌 신이 주신 선물이며, 땅 위를 흐르는 시내의 물은 선조들의 피인데 그것을 팔라니 요.

시애틀 추장은 하나의 조건을 답니다.

“만약 우리가 그대에게 땅을 판다면 그대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땅이 우리에게 거룩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대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 땅이 거룩하다는 것을.”

인디언들에게는 대지오 하늘뿐 아니라 연못을 가로질러 달리는 바람과 한낮의 소낙비를 씻어 준 바람의 싱그러운 내음, 공기 또한 소중합니다. 짐승과 나무, 인간 모두가 같은 공기를 마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람을 인간에게 첫 숨결을 주고 마지막 숨을 받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고, 히브리어로 숨과 바람은 한 단어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디언과 히브리인의 사고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애틀 추장이 말합니다.

“산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연못에서 개골거리는 개구리들의 합창을 들을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에게는 우리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상기하라는 말로 들려 깊이 경청하게 됩니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

 

 

지극히 높고 강하며 선하신 주님,

모든 찬미와 영광과 기림과 축복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오로지 당신,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 이

합당한 까닭이나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지존한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창조물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특별히 형님인 태양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태양을 낮이 되게 하시어

우리에게 빛을 주시었사오니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띠나니

당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달과 별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맑고 빛나고 사랑스럽게

하늘에 그들을 지으신 분은 당신이시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바람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맑고 고요한 날씨와

온갖 기후를 통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들을 통해

당신은 손수 지으신 창조물들을 살피시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물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물은 쓸모 있고 겸손하며 맑고 소중하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불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불은 아름답고 장난스러우며 활달하고 강하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이며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찬미를 받으소서.

우리를 지켜 주며 다스리는 대지는

온갖 과일이며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아픔과 고난을 참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을 바라보며 고요히 참아 내는 이들은 복되나이다.

그들은 월계관을 받을 것이옵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찬미를 받으소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이 없나이다.

대죄를 짓고 죽음을 맞는 사람은 불행할진저!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 따르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복되나이다.

두 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칠 수 없는 까닭이옵나이다.

 

나의 주님께 찬미와 축복과 감사를 드리오며

지극한 겸손으로 당신을 섬기나이다.

 

 

성 프란치스코, <형님인 태양의 찬가> 중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2천 년 교회 역사상 가장 사랑 받는 성인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창조물을 형제, 자매로 본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에게 깊은 경의를 느끼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를 인간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의 마땅한 의무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태양과 달, 별 등의 빛나는 존재뿐 아니라 바람, 공기, 구름, 물 등 모든 존재를 인간과 동격으로 놓아 형님, 누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각 존재의 특성을 통해 하느님의 오묘하신 손길을 말하며 찬미를 드립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며 모든 생명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물은 얼마나 쓸모 있고 겸손하며 소중한지 감탄합니다. 그에게 물은 단순히 우리 인간 삶의 수단이 아니라 함께 찬미를 드리는 주체이기에 누님이라 부릅니다. 아름답지만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마력도 함께 가지고 있는 불에 대해서는 활달하고 장난스럽다고 표현합니다.

보통 우리는 죽음을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라고 여기지만, 그는 육신의 죽음마저 누님이라 부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누님을 맞이하듯 따뜻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깨끗한 영혼으로 그 순간을 맞이해야 함을 성 프란치스코는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과 같은 일

 

 

우리 집 마당에는 인도빵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당시 철모르는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 나무에서 열매가 자라는 것을 보고, 언제 그것을 먹을 수 있느냐며 보채기 시작했다.

결국 때가 되어 열매가 익자, 어머니는 그 나뭇잎들을 따서 오목하게 접시 모양으로 만든 뒤 열매를 거기에 담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그 접시들을 동네 집집마다 선물로 돌리라고 하셨다.

접시를 다 돌리고 나자 어머니는 그제야 나를 옆에 앉히시고는 달콤한 그 열매 몇 조각을 주셨다. “비냐, 우리는 먼저 베풀고 나중에 먹어야 하는 법이란다”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내용을 간단한 시구로 지어내셨다.

 

베푸는 것은 하느님과 같은 일이고

쌓아 두는 것은 지옥이라네.

 

 

칼린디, <비노바 바베> 중에서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인물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들라고 하면 서슴없이 인도의 ‘토지헌납운동’으로 유명한 비노바 바베를 듭니다.

간디의 제자 또는 정신적인 후계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간디는 비노바 바베를 자신보다 영적으로 탁월한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인도가 독립하는 날 인도의 국기를 처음으로 게양해야 할 사람’으로 그를 꼽았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컸습니다.

비노바 바베는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 자기가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 덕분이라고 했지요.

비노바 바베의 어머니는 그에게 예법보다 사랑의 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손 씻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음식을 드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공경의 마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 없이 겉으로만 경건을 표시하는 정결례는 허례임을 분명히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저는 비노바 바베와 그의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우리 마음 안에 남을 먼저 생각하고 베풀 수 있는 너그러움을 지릴 수 있다면 예(禮)는 자연스럽게 갖추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라

 

 

떠나라!

그리고 고향의 아가씨들이 가장 예쁘며

고향 산천의 풍치가 가장 아름다우며

그대의 집 안방이 가장 따뜻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돌아오라!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에서

 

 떠나라! 말보다 미묘한 울림을 주는 말이 또 있을까요? 저는 보헤미안 기질이 있어서인지 수시로 낡은 카메라를 덜렁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납니다. 비록 전문 사진가는 아니지만 길 위에 잠시 머물렀던 순간을 기록하는 일이 기쁩니다.

여행은 일상의 권태와 공허, 우울을 잊게 하고 꿈을 꾸게 합니다. 저는 떠날 때나 돌아올 때나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어디선가 어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낯선 이방인이 되어 타지를 떠돌 때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그리움으로 행복합니다. 그리움은 제 영혼에 아련한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연금술사>의 주인공인 양치기 산티아고도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해 양을 팔고 여행을 떠납니다. 그에게 살렘의 왕 멜키세덱은 이런 말을 해줍니다.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산티아고는 여행 도중 사기꾼을 만나 여행경비를 몽땅 털리고 좌절하지만 곧 생각을 달리 합니다.

‘이 세상은 도둑에게 가진 것을 몽땅 털린 불행한 피해자의 눈으로도 볼 수 있지만, 보물을 찾아 나선 모험가의 눈으로도 볼 수 있다.’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여행을 이어 나간 산티아고는 드디어 피라미드에 도착합니다.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스승이 들려주는 말들을 새기며 길을 떠난다면 우리도 고향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파울로 코엘료처럼 “고향이 가장 아름답고 편안한 곳”이라는 심오한 깨달음을 얻게 되지 않을까요?

 

 

 

 

 

인용 출처

 

 

Part 1

다카하시 아유무 지음, 양윤옥 옮김, <핵(核)>, , 에이지 21, 2010

 

Part 2

호시노 토미히로 지음, 이윤정 옮김, <민들레>, <내 꿈은 언젠가 바람이 되어>, 문학사상사, 2001 (星野富弘, <風노旅>, 立風書房, 1982)

 

Part 3

포루그 파로흐자드 지음, 신양섭 옮김, <나는 태양에게 다시 인사하겠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문학의 숲, 2012

알리체 스투리알레 지음, 이현경 옮김, <핸디캡>, <알리체의 일기>, 비룡소, 2001

이용범 지음, <무소유의 행복>, 초당, 2001

 

Part 4

재연스님 엮음, <전단향 나무처럼>, <수바시따>, 자음과 모음, 2000

 

Part 5

칼린디 지음, 김문호 옮김, <비노바 바베>, 문학사상사, 2001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연금술사>, 문학동네, 2001

 

 

 

 


 

류해욱

가톨릭 사제이자 시인,번역가입니다. 1955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예수회에 입회하여 1991년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웨스턴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했으며 서강대 ‘말씀이 집’ 원장, 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 원목사제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영적 지도자로서 강연과 피정 지도를 하며,영혼이 지친 이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여 그들과 함께 섬김과 나눔의 삶을 누릴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순간> <토머스 머튼의 시간> <일상 삶 안에서의 영신수련> 등의 영성 서적뿐 아니라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 <할아버지의 기도> 와 같은 감동적인 에세이들도 다수 번역했습니다. 시집 <그대 안에 사랑이 머물고> 와 사진묵상집 <自然 산 들 호수 그리고 하늘>, 수필집 <사랑이 없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라네> 등을 썼습니다.

기도 안에서 길어 낸 겸손과 성실을 바탕으로 나직이 말하는 듯한 그의 글은 우리 모두를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1. 유대교 경전 <미드라시>에 나온 페르시아 왕의 일화를 인용해 랜터 윌슨 스미스가 쓴 시.
  2. 베드로 아루페(1905~1991): 스페인 예수회의 신부. 탁월한 성덕으로 성 이냐시오 이후 가장 성인을 닮았다는 칭송을 들었다.
  3. 인도 민중들 사이에 오랜 세월 동안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고전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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