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연옥실화 煉獄 實話 – 막스 퓌상

 

막스 퓌상 지음

한국 순교 복자 수녀원 옮김

가톨릭 출판사

 

 

서론 – 내세 來世 는 있나 없나

1. 연옥의 존재

2. 연옥에서의 감각 感覺의 고통과 벌

3. 실각 失脚의 고통과 벌

4. 버림받음의 고통과 벌

5. 연옥에 대한 흥미 있는 제 가지 문제

6. 연옥 영혼의 기쁨

7.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

8.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이유

9.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방법

10.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각가지 회

결론

 

 

 

서론 – 내세 來世 는 있나 없나

 

 

무대의 마지막 장면

대지는 밝아 오는 동쪽 하늘을 신호로, 생명의 고동 소리도 드높이 하루 생활의 막을 올린다. 기쁨과 슬픔, 선과 악이 서로 엉크러진 하루 해가 지나면, 깃드는 황혼과 더불어 일 막이 내려진다.

각양 각색의 인간살이 모습이 연출되어 온 이 무대는, 언어와 피부색,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하나의 종막 終幕을 보아 왔다.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마지막 장면이 것이다.

그러면 이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간 첫 인간으로부터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람들은 죽은 후에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은 죽음이라는 도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는 멀지 않아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당할 운명이다.

우리는 내세에서 어떻게 될까. 아니, 내세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할까.

 

수수께끼의 해결

내세가 있나 없나 하는 문제는 개벽 이래 인류에게 걸린 수수께끼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동안에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세에서 영원한 행복을 얻어야 한다. 죽음과 동시에 영혼은 하느님 앞에 나아가, 혹은 천국 天國, 혹은 지옥 地獄, 혹은 죄를 깨끗이 씻기 위하여 연옥 煉獄 으로 보내진다. 세상 마칠 때에 육신은 하느님의 전능으로 부활하여 다시 영혼에 결합되어서, 천국의 영원한 행복이나 지옥의 영원한 고벌로 판정되는 것이다.”

 

왕과 목동

어느 날 어떤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들판에서 한 목동을 만났다.

“너는 이 양을 쳐서 얼마나 이익을 보느냐?” 하고 왕이 물었다.

“폐하, 저는 폐하와 곡 같은 이익을 봅니다.” 목동의 대답에 왕은 이상스런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나와 꼭 같은 이익을 본다고? 그건 또 어찌해서?” 그러자 목동이 대답했다.

“폐하, 자는 양을 쳐서 천국이나 또는 지옥을 얻습니다. 폐하께서 나라를 다스리지마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얻으실 수는 없습니다.”

왕은 끄덕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어 목동과 헤어졌다. 이 목동의 말은 진리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운명은 천국이나 지옥,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후 死後 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가

어떤 이는 사람이 죽으면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오만한 사람이 아니면 품행이 나쁜 사람이다. 그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기운을 내려고 목이 터져라 소리질러 스스로를 속이는 겁쟁이와 같은 자이다.

유명한 사상가 라 브뤼에르는 말했다. “절제하고 청정하며, 정직하고 자비로웠던 사람이 내세가 없다고 선언한다면 그 주장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귀한 사람은 개벽 이래 아직 볼 수 없었다. 또 세상 마칠 때까지도 볼 수 없으리라고 단언한다.”

 

영혼의 불멸

(1) 물질은 불멸이다. 사람의 몸은 썩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원소 元素로 돌아갈 뿐이다. 영혼은 육신보다 존귀하고 아름답다. 노예인 육체가 없어지지 않는데, 주인인 영혼이 없어져 버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는 하느님의 예지 叡智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2) 현세에서는 악인이 번성하고 선인은 박해를 받는다. 장 자크 루소는 말했다. “현세에서 악인이 잘 살고 선인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질서 있게 돌아가는 삼라만상 가운데서 이 명백한 모순을 해결하기에는 내세가 있을 수밖에 없다. ” 무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던 볼테르도 말한다. “선과 악이 내세에서 그 응보 應報를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영혼이 없어져 버린다고 하면 이 세상은 무서운 혼란에 빠진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간난 신고 중에 일생을 마친 자도, 부정과 방탕 속에서 한 평생을 보낸 자와 마찬가지다. 싸움터에서 쓰러진 용사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의 구별이 없어진다. 상식을 갖춘 사람 중에 이것에 승복할 자 있겠는가.

혁명 때, 리용 시의 재판관이 한 신부에게 물었다. “그대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가?” 신부는 “당신들의 행동을 보고 어찌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있겠소. 나는 설령 이때까지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확신한다고 단언하오” 라고 말했다.

영혼의 불멸을 부인하는 것은 도덕의 모든 토대를 파괴하고 또한 하느님의 공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빅토르 유고는 “학교 하나를 늘리면 형무소 하나를 줄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물질적 문명만을 채용한 사회에서는 정반대이다. 왜?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인간이 만든 도덕은 범죄를 줄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을 제 될 대로 내버려 두신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샤토브리앙은 말했다. “풀 한줌은 양에게 만족을 주고, 몇 잔의 피는 호랑이를 배부르게 한다. 그런데도 인간만은 만족하지 못한다”라고. 모든 사람은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밑 없는 그릇처럼 만족될 때가 없다. 사람은 지식을 구한다. 그러나 이것도 만족이 안 된다.

파스칼은 말했다. “첫째가는 학자는 위대한 무식꾼이다.”

저명한 설교가 보쉬에 주교는 말했다. “울는 아무리 작은 일에 대해서라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뉴턴은 말한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도 같다. 어떤 때는 반짝거리는 조약돌을 줍고, 어떤 때는 진귀한 조개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럴 동안에 아직 탐험하지 않은 ‘진리의 대해 大海’는 항상 눈앞에 가로놓여 있다.”

천문학자 프랑 마이롱은 말한다. “전세계에 있는 모든 학사회의 학문은 모두가 한없는 무식을 나타내고 있다. 진실, 정밀, 완전한 것은 하나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한 가지 권리 외에는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것은 곧 ‘겸손’이다. 우리는 ‘무지 無知’에 싸여 있고 또한 그 속에 잠겨 살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즉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만족할 줄 모른다. 솔로몬 왕도 그 영화 끝에는 “아아,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부르짖었다.

여기 부모 자녀가 다 함께 재미있게 살고 있는 한 가족이 있다. 그러나 “즐거움도 멀지 않아 끝난다”라는 생각만으로도 모든 즐거움을 지워 버리기에 넉넉하다.

복숭아나 사과나, 어떤 과일을 짜서 그 속의 맛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짜내듯 만물 중의 즐거움이나 아름다움을 죄다 짜내어 맛본다 하자. 그래도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즐거움은 숲 속의 꾀꼬리처럼, 가만가만히 발소리를 죽여 붙잡으려고 하지만 언제나 달아나 버린다. 사람의 마음은 세계보다도 더 넓다. 창조된 만물은 이를 만족시킬 수 없다. 온갖 쾌락, 재산, 명에 같은 것은 사람 마음속에 있는 고상한 소망을 채우기에는 나무나 보잘것없다. 죽음의 캄캄한 터널은 인간의 영원한 희망을 방해한다.

사람은 무한의 품속에 들어가서 비로소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터널 저 편의 이 순수하고 무한한 복락을 가르치는 자는 다만 ‘그리스도교’ 뿐이다.

(4) 어떤 인종이든지 모두 영혼 불멸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파스칼은 말한다. “영혼의 불멸은 우리와 얼마나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인가. 거기에 대하여 무관심한 자는 참으로 미욱한 자이다. 내세가 있나 없나, 또 영원한 행복을 희망하는가 안 하는가로 써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상은 달라진다. 이것을 눈앞에 두지 않는다면 도리와 상식에 맞는 행위는 여간 해서 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를 믿어서 만일 내세가 없다면 그것은 별로 손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내세가 있다면 어떨까. 대단한 이익이 아닌가. 이와 반대로 만일 그때,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더라면 실로 기울 수 없는 큰 손해다.”

성서에도 영혼의 불멸을 가르치고 있는 구절은 퍽 많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 10, 28).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루카 12, 33).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마태 23, 34. 41).

 

잠깐만 기다리시오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생긴 일이다. 때는 밤 8시경, 어떤 순회 극단의 천막은 만원이었다. 연제 演題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주인공이란 자가 아주 고약한 놈이어서, 보호해야 할 고아를 속여서 부자가 되고, 음모와 부정으로 남의 존경을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제2막 중간쯤에서 한 구경꾼이 참다 못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먹을 휘두르며 그 자를 향해 소리쳤다. “이 악한아, 너는 편히 살며 남의 존경을 받고 훈장까지 타고 있지만…. 높은 기둥에 목이 매달릴 가치밖에 없는 나쁜 놈이다!”

배우는 이 난데없는 고함 소리에 놀라 중지하였다. 구경꾼들은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웃고,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혼잡을 가라앉히기 위해 극단 대표가 무대 위로 나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증 可憎할 나쁜 놈에 대하여 손님 한 분께서 격분하시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감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큰소리로 호통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제3막에서 정의 正義의 보답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일이 있은 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는 무덤에 한 쪽 발을 들이밀고 있는 늙은이다. 내 일생 동안에 악인과 무종교자가 성하는 것을 보고 걸려 넘어질 뻔할 때는, 항상 이 구경 중에 일어났던 일을 상기한다. 현세에서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한때만의 일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선이 승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제3막까지 기다려라. 그때는 각자에게 상응 相應한 갚음을 받을 것이다.

 

수도원의 손님

어떤 이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구경하러 갔다. 수도자들의 헌신과 고달픈 생활을 보고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님, 만일 후세에 천국이 없다면 당신들은 몹시 놀라시겠지요.” 원장이 대답했다. “벗이여, 걱정 마시오. 만일 천국이 없다 할지라도, 선생으로 보낸 생활은 현세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위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만으로도 넉넉한 보상입니다. 그러나 벗이여, 만일 후세에 지옥이 있다면, 우리보다도 당신 편이 몇 곱 더 놀라실 것입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 벽에는 다음 격언이 수도자 눈에 띄도록 쓰여 있다.

“괴로움 없는 죽음은 즐거움 없는 삶의 대가이다”

 

사제와 의사

“환자를 수술해 보아도 메스 끝에 영혼이 닿아 본 적이 없다. 영혼 같은 건 없다니까…” 하는 의사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신앙 없는 의사는 웃으면서 사제에게 말했다.

“당신은 항상 영혼의 ‘구원 구원’ 이야기를 하십니다만, 당신은 영혼을 보았든 가, 냄새를 맡았든 가, 만져 보았든 가, 또는 그 소리를 들었든 가 하신 일이 있습니까?”

사제 – “아니, 나는 다만 그 존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의사 – “그야 느끼는 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오관 五官 중 사관 四官이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데, 어찌 영혼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제 – “당신은 의사이시지요. 당신은 ‘아픔’이란 것을 보거나, 그 소리를 듣거나,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하십니까?”

의사 – “아니, 아직 해본 적은 없습니다.”

사제 – “그러나 아픔을 느낀 일은 있지요?”

의사 – “있습니다.”

사제 – “그렇지만, 우리의 오관 중의 사 관까지는 아픔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아픔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까요?”

의사 – 아, 참…”

19세기의 유명한 외과 의사 뒤퓌트랑에게 어떤 의사가 자만스럽게 말했다.

“나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건 믿을 수 없습니다.”

뒤퓌트랑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그럼 당신은….. 수의 獸醫 시군!”

 

폴란드의 귀족과 농부

다음 이야기는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 라코르데르 (1802-1861)의 설교 한 구절이다.

폴란드에 신앙이 없는 한 귀족이 있었다. 그는 영혼 불멸에 반대하기 위하여 책을 쓰고 있었다. 그 원고를 인쇄소에 막 넘길 무렵, 그는 어느 날 공원을 산보하였다. 도중에 한 부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울면서 귀족에게 말했다. “제 남편이 죽었는데, 돈이 없어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장례를 지내고 미사를 청할 수 있도록 좀 도와 주십시오.” 귀족은 이 말을 듣고 불쌍히 여겨 금화 한 닢을 주었다.

그로부터 닷새 후, 귀족은 자기 방에서 한 번 더 그 원고를 읽고 있었다.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낯선 농부가 서 있었다. 그 농부는 “저는 당신에게 도움을 청한 불쌍한 여인의 남편입니다. 당신 은덕으로 드려진 미사의 은혜로 저는 연옥에서 구원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허락으로 당신께 감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 말을 들은 귀족은 원고를 불에 태워 버리고 회개하였다.

 

제일 아름다움 것

시에나 의 성녀 카타리나 는 어느 날 천당 영복을 누리고 있는 영혼을 보여주시라고 하느님께 청하였다. 그 기도는 윤허되었다. 성녀는 이 영혼을 보고 몹시 감동하였다. 그리고 넘쳐흐르는 열정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아 주여, 만일 하느님은 단 한 분 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저는 이 영혼도 하느님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후에 성녀는 말했다.

“만일 사람이 한 영혼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안다면,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백 번이라도 즐겨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탈혼상태 脫魂狀態에 있는 이 성녀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에는 어떠냐, 나는 좋은 사업을 이룩하였지? 귀한 다이아몬드와 같은 저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나는 하늘에서 내려와 갖가지 치욕과 간난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이는 참으로 훌륭한 사업이 아니냐?”

 

주정꾼의 아내

손댈 수도 없는 한 사람의 주정꾼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여러 가지 의견을 털어 놓고 결론으로 말했다. “세상에 없어도 괜찮은 건 자본가, 경찰, 신부다. 하하하, 신부…. 자네, 상상해 보게. 내가 아내를 얻었을 때 그는 내 머리에다가 매주일 미사 참례를 하고, 금요일에는 소재[금육재 禁肉斎]를 지킨다는 따위의 생각을 일으키게 했거든.”

‘정말인가, 그게?”

“정말이지. 그러나 여보게, 그건 오래가지는 않았지. 곧 팽개쳐 버렸어.”

이런 이야기를 하고 몇 잔을 비운 후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런데 이 주정꾼이 집에 돌아오니, 문전에 몇 사람의 순경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상히 여겨 급히 방으로 갔다. 가 보니, 아내는 세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자살하였고, 책상 위에는 다음과 같은 유서가 놓여 있었다.

“내가 하느님을 신앙하고 있었을 때는 간난을 참아 견딜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참혹한 남편은 나를 신심 없는 실망자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빈곤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마저 나와 같은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아 나는 애들과 함께 이승을 떠난다.”

 

왜 내게 알려 주지 않았어요

열 두 살이 된 한 소녀가 크리스마스 때 영세를 하고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꽃은 깨끗한 채로 예수님께 꺾이어 천국에 들어갔다. 마음 가득히 즐거움을 안고 감은 그 눈은 이제는 다시 이 세상 빛에는 눈뜨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열 여섯 살 난 오빠의 슬픔은 대단했다. 왜냐하면, 그 모친은 신자였지마는 수계 守誡 를 하지 않고 자녀들에게도 종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슬퍼하는 것을 본 어머니는 그제서야 자기가 처녀 시절에 들었던 교리를 생각해 내어 그를 위로하였다. “얘야, 그렇게 실망하지 말아라. 나중에 천국에서 귀여운 누이를 만나 그때부터는 언제까지나 영영 함께 있을 테니까.”

이 말을 들은 아들은 이상스런 얼굴을 하고 말했다. “어머니, 뭐라구요? 천국이 어디에요?”

어머니의 신앙은 갑자기 되살아났다. 그리고 성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을 상기하고 “사람의 목적은 이 덧없는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니, 언젠가는 네 누이처럼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단다”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아들은 이 말을 듣고 부르짖었다. “어머니,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이때까지 안 들려주셨어요?”

그는 그로부터 성세와 첫영성체 준비를 하였다. 어머니는 다시 처녀 시절과 같은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이것은 모두가 저 소녀의 아름다운 죽음의 결과였던 것이다.

 

유명한 세 사람의 말

프랑스의 이름 높은 시인 프랑스와 코페는 <좋은 고통>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친구 한 사람은 형이상학적 형이상학적 공상에 꽉 차서 불교 비슷한 것을 만들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그 철학상의 실패를 내게 고백하기를, “나는 10년 동안 애써 철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건 모두 공상이요 무익하였다. 얼마 전에 갑자기 내 귀여운 딸이 중병에 걸렸다. 그때 나는 무릎을 꿇고 하늘에 계신 자비로우신 분께 기도하고 그 애를 이 세상에 더 살려 두시도록, 혹은 적어도 내세에서 다시 함께 있게 해주십사 고 진심으로 빌었다”라고 말했다.

루이 파스퇴르 는 ‘인류의 대 은인’이라고 불린다. 그는 세균학을 연구하고 그 예방법을 발견하여 사람의 평균 수명을 33세에서 36세로 연장시킨 사람이다.

어떤 이가 그에게,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실증론자 實證論者 콩트의 철학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말하기를, “철학의 여러 체계에 대하여 나로서는 의견을 말할 수 없음을 솔직이 고백합니다. 콩트의 설에 대해서는,  나는 이치에 맞지 않는 몇 페이지를 읽었을 뿐입니다. …나의 철학은 지식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예를 들면, 귀여운 자식의 베갯머리에 서서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볼 때 나의 사념 思念은 절로 영원한 일에 이끌려 갑니다. 이 괴로운 경우에 심중에 느끼는 위안은 ‘사람의 생명은 현세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라는 일입니다”라고 했다.

18세기 말엽이었다. 볼네 라는 무신론자는 르아브르 항 港 에서 뉴욕까지 고요한 바다를 항해하는 중, 무 신앙의 이야기로 많은 선객을 어이없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날씨가 돌변하여 폭풍이 일고 배가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 볼네 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그는 벌벌 떨면서 배 밑바닥에 숨으러 가서, 거기 있던 한 수사를 보고 그와 함께 열심히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

폭풍이 그친 후 선객들은 이 무 신심가를 찾아내어 비겁한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볼네 는 대답했다 “날씨가 좋을 때까지 무 신앙도 좋았는데, 벼락이 떨어질 때는 안 되겠더라.”

 

기관사와 주교

메르미요드 주교가 어느 날 정거장 플랫폼에서 거닐고 있으니까 곁을 지나가던 기관차의 기관사가 모자를 벗고 인사하였다. 그래서 주교는 “나를 알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당신 은혜를 대단히 받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안 잊어버립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를 한 후에, 그 기관사가 말했다.

“일을 하다 보면 몹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발과 가슴은 뜨거운 증기로 타고, 등엔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밤낮 없이 무서운 속력으로 달리기 때문에 정신은 쉴 수 없고, 눈은 몹시 피로하고, 폐는 그을음과 먼지로 꽉 차고, 발은 지쳐서 떨리고, 점점 건강을 잃고 있습니다….. ‘이건 무엇 때문인가? 부드러운 융단 위에 편안히 드러누운 게 으름뱅이나 하이칼라 여자들을 태우다 주기 위함이다’라고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기관을 터뜨려 버리고 사회에 복수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주교 – “그럼 어째서 그걸 단념하시오? 재판의 선고 때문이오?”

기관사 – “아니, 그땐 나도 목숨이 없을 때죠. … 실은 하느님과 내세를 생각하고 사람은 현세만이 아니라고 마음먹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말

“가난한 이의 운명의 저울이 여기 있다 ‘곤란 困難’이 들어 있는 접시와 내세의 확실성과 영원한 행복의 희망, 한마디로 말한다면 ‘천국 天國’이 들어 있는 접시를 올려놓아 보자. 이로써 다시 균형이 잡힌다. 즉 현세에서도 가난한 이의 행복은 결코 재산가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잘 알고 계셨다.”

 

결론

독자 여러분, 내세는 확실히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위안과 격려의 원천이다. 내세에서 선은 상을 받고 악은 벌을 받는다. 거기서 우리는 무한한 진리와 행복에 싸여 영원히 즐긴다. 나는 영혼의 불멸과 끝없는 생명을 믿는다.

 

 

1. 연옥의 존재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육신을 떠나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일생 선악의 상벌을 받는다. 그리고 사 赦 함을 받지 못한 대죄를 지니고 죽은 자는 지옥에, 또 조그마한 죄도 없이 하느님의 공의 公義에 대한 보상을 다한 자는 천국에, 또 소죄로 더럽혀졌거나 혹은 사함을 받은 죄의 잠벌 暫罰을 완전히 기워 갚지 못한 자는 연옥에 가는 것이다. 연옥은 우리 신앙의 보배로운 한 조목이다. 하느님의 공의, 예지, 전선의 오묘함을 나타내는 진리이다.

 

계시 啓示

모든 민족에게 연옥의 사상이 있다. 히브리 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 중국, 이집트에도 사람은 완전한 행복을 얻기 전에 정화 淨化 되어야 한다는 신앙이 있었다. 이것은 세상 시초에 인류에게 계시된 초자연적 진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성서

유다 마카베오는 전사한 병사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은 2천 드라크마를 보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사소한 죄를 가지고 죽은 병사는 정화되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그곳을 가톨릭 교회에서는 ‘연옥’이라고 부른다.

위에 소개한 성서의 저자는 덧붙여 말했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2마카 12, 24)라고 말했다.

신약 성서에도 동일한 신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 31). 이 말씀으로 후세에서 지가 사해지는 곳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장소는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그것은 연옥이다.

성 바오로는 코린토 인에게 보낸 첫째 편지 (3, 15) 에서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영혼은 구원되니까, 지옥에 넣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통 중에 정화되는 연옥 불을 거쳐 간 것이다.

 

성교회의 가르침

성령의 감도 感導 하심으로 그르칠 수 없는 성교회는 처음부터 끊임없이 연옥의 존재를 선언하고 있다. 교회의 예식은 연옥의 존재를 단언한다. 사도 시대나 중세기나 또 현세에도, 동서 남북의 여러 나라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기도는 모두 연옥의 존재를 확인한다.

미사의 거양 성체 후 사제는 하얀 성체를 쳐다보고 자신이 원하는 또는 부탁 받은 죽은 이를 기억하여 그들을 위해 잠시 동안 기도한다. 성무일도 에서 각 시간경마다, 즉 적어도 하루에 여덟 번, 수십만 명의 사제는 “죽은 믿는 자의 영혼이 하느님의 인자하심으로 평안함에 쉬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되풀이하여,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영혼의 구원을 비는 것이다.

교회 학자들은 연옥의 존재를 단언하고 있다. 사자 死者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에게 물으니 “열심한 기도, 특히 미사 성제로 저들을 도와 주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사랑하던 이가 죽어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성 암브로시오는 말했다. “부디 눈물을 줄이시오. 그리고 기도를 더 하십시오. 눈물을 흘리는 것은 괜찮지만, 그보다도 당신과 떨어져 있는 귀여운 여동생을 위해 기도 드리는 일에 더 유의하시오.”

교회는 공의회로 연옥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16세기에 이단자 루터는 연옥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트리텐틴 공의회는 “성교회는 성령의 감도 하심과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전의 공의회에서 확정된 연옥의 존재와, 거기 있는 영혼은 신자의 기도와 특히 미사 성제로써 도움 받음을 믿으며 굳이 지킨다”라고 말하여, 주교들에게 깊이 주의하도록 명하였다.

또 이단자에게도 공의회는 같은 확정을 다짐하고 무서운 파문 破門을 경고하였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화 義化 된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금세나 후세 연옥에서 잠벌이 안 남을 정도로 죄가 사해진다고 말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

또 “산 이, 죽은 이, 죄, 보상, 보속, 그 밖의 필요로 미사 성제를 거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도 연옥의 존재는 확실하다.

 

아름다운 신앙

연옥 존재의 신조는 우리네 지식의 빛일 뿐만 아니라 마음의 큰 위안이 된다. 그러나 두렵게도 사람이 죽으면 곧 슬픈 의문이 생긴다. 즉 “그 영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하느님의 예지와 무한하신 인자

영세한 천진한 어린이, 순교자, 극소수의 특별한 성인 외에는 신자 대부분이 보속을 완전히 다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다. 이런 사람의 여혼은 어떻게 될까? 천국에 갈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미소한 더러움도 천국에는 들여지지 않는다” 라는 격언은 참말이다. 그러면 지옥에 가는가? 그것도 결코 그렇지 않다. 너무나 맞지 않는 벌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하느님의 공의는 잔인하다는 말을 들어도 하는 수 없다. 무한하신 하느님의 예지는 이에 대단히 흡족한 해결을 지으셨다. 즉 ‘연옥의 존재’이다.

또 연옥의 존재는 하느님의 예지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그 무한하신 자비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천사가 시험을 당할 때는 두 가지 결과밖에 없었다. 즉 충실하였던 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하느님을 거스른 자는 지옥에 떨어졌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허약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현세에서는 죄인이 회개할 시기를 주시고, 또 후세에서는 그 영혼을 완전히 정화할 여유를 주시는 것이다.

죄 중에 오랜 세월, 혹은 한평생을 보낸 죄인까지도 임종 때에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는 까닭은, 연옥에서 저들의 영혼을 깨끗이 닦아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자로 만드시기 때문이다. 즉 연옥은 하느님의 무한한 인자를 보이는 ‘완전한 방법’이다.

 

우리를 성화 聖化 하는 기묘한 방법

현세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의 입구요 참 생명의 불완전한 조작 粗作이다. 그러기에 성서에도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 (1데살 4, 18)라고 하였다. 뒤에 남은 자는 아주 쉽고도 대단히 유효한 수단으로 죽은 이를 위로하고, 그 고통을 덜어 주고, 천국에 들어가는 때가 빨리 오도록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연옥의 신조는 우리를 위해 훌륭한 교훈이 된다. 즉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한 엄위 嚴威, 사람의 최종 목적인 구령, 현세 영화의 덧없음, 하느님의 무한한 인자, 십자가의 가치, 모든 성인의 통공의 절실한 위안, 시간의 가치, 영원한 생명의 준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회개의 필요성, 쉽사리 범하게 되는 소죄도 후세에서 엄히 처벌된다는 것 등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의 걸작

우리는 연옥을 두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여야 한다. 도 실상 자주 연옥을 상기해 본다면 우리는 거기서 고생하고 있는 영혼을 위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두터운 신앙으로 살아, 이승에 있을 동안에 될 수 있는 대로 하느님의 공의를 채워 드리고, 후세에는 빨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드 메스트르의 말

철학자이며 유명한 정치가인 요셉 드 메스트르는 말했다. “비상한 감동을 일으키는 연옥의 신앙 조항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고상한 경향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것인가 하면, 연옥 문제로 가톨릭 교회를 떠난 프로테스탄트 교도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와 위로가 필요함을 통절히 느끼고, 그것 때문에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는 이가 많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미사를 청한 프로테스탄트의 한 전도사

성공회의 한 전도사는 아내와 부모를 잃고 몹시 슬퍼하였다. 거기서는 망자를 위한 기도가 없으므로 퍽 섭섭하게 여겨 첫 기일 忌日을 당하자 내게 미사를 청하였다. 두 시간 남짓이나 기차를 타지 않으면 성당에 올 수 없는 불편한 고장인지라, 전날 여관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미사 참례를 하고 돌아갔다. 그 후에도 그와 같이 하고 있다.

 

백작 부인과 주교

영국의 스트래퍼드 백작 부인은 아미앵 시의 드 라 모트 주교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후에 개신교의 신앙이 어지간히 흔들리었다.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는 데 장애는 다만 미사와 연옥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의혹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이걸 보고 주교는 “부인, 당신은 런던의 개신교 주교를 아시지요. 만일 그분이, 성 아우구스티노는 망자를 위하여, 특히 자기 모친을 위해 미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증명할 수 있다면, 나는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지만 개신교도가 되겠다고 그에게 전해 주시오” 말고 말했다.

부인은 즉시 런던의 개신교 주교에게 편지를 띄웠지마는, 그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인의 의혹은 사라지고 그녀는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였던 것이다.

 

연옥의 신앙을 듣고 개종

와수르 자작의 이야기인데, 루터파의 한 신도가 연옥의 존재에 감동되어 프로테스탄트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 개종자의 동생이 어느 날 식사 중에 급사하였다 식사 중에 준비 없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그는 늘 괴로운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천국의 행복을 누리려면 결백한 영혼이어야 함은 잘 알고 있었으나, 루터파에서는 천국과 지옥뿐으로, 그 중간에 죄를 보속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동생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밤낮 고민한 결과 불면증이 생겨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휴양하기 위해 여행이나 하면 좋을 거라고 권하면 그는 대답했다.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 영원한 나그네 길을 떠나게 될 테지.  ‘이 나그네, 여기 발을 멈추고 잠들다’라고 작은 묘비게 쓰여지고, 성명을 기록하기 위해 여행증을 조사 당하는 건 싫다.”

그러나 친구 친척의 새삼 권유로, 이 스코틀랜드 인은 마침내 대륙으로 여행을 나섰다. 나 [子爵]는 이 사나이와 동승하고 상륙 후에는 같은 여관에 묵었다. 그는, 동생은 반드시 지옥에 갔을 거라고 실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 교회의 연옥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기쁨에 넘쳐 11월 2일 위령의 날에 나와 함께 미사 참례를 하고 성당을 나올 때 내게 말하였다. “동생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제 동생의 영혼은 아마 연옥에 있겠지요. 선업 善業을 하여 그를 돕겠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가 될 결심을 했습니다.”

 

망자를 위해 기도하라

1882년, 그는 나의 본당과 약 20리 떨어진 한 교회의 주임 사제가 되었다. 내가 그를 알기 시작한 것은 1869년이었는데, 가까이 살게 되고부터는 점점 친하게 지내어 친형제보다 더한 사이가 되었다.

매주 두세 번 나를 찾아오는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와서는 언제나 가운데 손가락으로 세 번 문을 두드렸다. 그 두드리는 품은 처음 두 번은 빨리 연달아서, 그리고 사이를 두고 또 한 번 두드리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왜 내가 이렇게 자상한 것까지 스느냐 하면, 다음을 읽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41세로 이 세상을 떠났는데, 모범적인 생애를 보내었으며, 만사를 하느님 섭리에 맡기고 병자 성사를 받고 본당 교우들의 기도 속에 영면하였다. 장례는 5월 29일 집행되었으며, 신자는 물론이요 각 지방에서 많은 신부가 참석하여 이 망자를 칭찬하고, 그 영혼은 확실히 천국 영복을 누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그날 밤, 나는 다른 한 신부와 함께 어느 교회의 주임 사제한테서 일박하였다. 내일 아침은 발차 시간 관계로 미사 드리기 전에 돌아가리라고 말하였다.

피로를 풀려고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까, 별안간 침실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뜨고 “들어오시오” 하고 대답했다.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다. 촛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꼭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얼마 동안 생각해 보고는 “아, 꿈이었나? 혹 잘못 들은 소린가” 하고 또 머리를 베개 위에 뉘고 잠을 청했다. 12시 10분이 지나서 문밖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나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똑똑, 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정직하고 고백한다. 나는 이 소리를 듣고 “들어오시오”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포에 짓눌려 그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두드리는 품으로 보아 그가 누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슬프다. 내 친우의 영혼은 연옥에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괴로우니까 내게 기도를 청하는 것이리라”라고 생각할 즈음, 또 문밖에서 옷자락 소리가 나고 같은 방식으로 세 번 가운데 손가락으로 문을 두드렸다. “망자의 영혼은 살아 잇는 자를 해치지는 않는다. 벗의 영혼은 조만간 천국에 들어갈 테니까 될 수 있는 대로 그를 도와 주자” 하고 생각하자 무서운 생각은 다소 누그러졌다.

성무일도서를 들고 죽은 이를 위한 기도문과 일곱 가지 통회의 시편을 바치고, 또 여러 가지 은사 恩赦 가 붙어 있는 기도를 하고, 끝으로 어떤 경우에나 큰 위로가 도는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 세 시간 남짓한 동안에 약 10분마다 옷자락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전 3시 20분이 되니까 문을 세 번 두드린 후, 빠르고 쨍쨍한 발소리로 내 침실 앞에서 떠나 급히 계단을 내려갔는데, 요란하게 교회 정문을 여는 소리가 나고, 그 후로는 조용하여 문도 두드리지 않았다.

의심 없이 벗은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나는 3시 40분에 침실을 나와, 이런 사정을 모르는 다른 두 신부와 함께 성당에서 죽은 벗을 위해 미사를 드렸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그를 위한 미사를 드렸으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이상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상은 나 (어떤 신부)의 5월 30일 일기를 옮겨 적은 것이다.

이 신기한 사실은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항간의 많은 도깨비나 유령 이야기가 전부 다 사실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미신이나 경솔함 도는 상상에서 오는 수가 많다. 그렇지마는, 자연계와 초자연계와의 거리는 실로 종이 한 장밖에 안 된다. 또 망령이 이승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은 하느님의 전능, 정의, 인자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성 토마스는 그의 신학에서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로 연옥에 있는 영혼이 생존자의 기도를 청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믿어도 좋다.”

 

십자가의 예수의 마리아 수녀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 베들레헴에 있는 가르멜회 수녀원에서 산 이 수녀는 1878년 성녀 같은 최후를 마쳤다. 다음의 여러 가지 사건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겠으나, 히스테리적인 여인의 상상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1) 마리아 수녀는 인도의 망갈로르 시의 교황 사절 마리 에프렘 주교가 사망할 때 (1873년) 를 예언하였다. 이 주교는 연옥불 속에서 여러 번 마리아 수녀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수녀는 베들레헴에 창립되는 수도원 성당에서 첫 미사가 봉헌될 때 주교의 영혼은 승천하리라는 하느님의 묵시 默示를 받았다. 1876년 11월 21일, 급히 서둘러 지은 베들레헴의 새 성당에서 예루살렘의 브라코 주교가 첫 미사를 드릴 때, 마리아 수녀는 에프렘 주교의 영혼이 연옥에서 나와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2) 마리아 수녀가 지원자 시절에 카브렛 시에 있었을 때, 20년 전에 죽은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나타나서, 5년 전부터 친척은 모두 자기를 잊어버렸으니, 미사 세 대를 바쳐 주고, 또 사제가 자기를 위해 한 시간 묵상해 주기를 청하였다.

(3) 1867년 11월, 원장 수녀는 수십 년간 고민하고 있던 자기 심정을 마리아 수녀에게 털어 놓았다. 그것은, 35년 전에 급히 죽은 자기 부친은 사회 사람들의 눈에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수계 범절은 아니했고 또 성사도 받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영혼 사정이 크게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마리아 수녀는 기도하고 나더니, 그 영혼은 임종 때 특별한 은총을 받아 통회했으며 지금도 연옥에 있고, 아직도 6개월 동안의 보속이 남아 있다고 말하였다.

원장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만일 부친의 성 姓을 말한다면 믿겠다고 하였다. 수도원에서는 이름은 알려져 있지만 성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마리아 수녀는 잠시 기도하고서 원장에게 “부친께서는 레이슈 씨 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장은 부친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즉시 선업 클럽을 짜서 기도, 고행, 십자가의 길 기도, 미사 등을 죽은 이를 위해 바쳤다. 밤 12시, 일동이 마흔 꿰미의 묵주의 기도를 마치자 원장 부친의 영혼은 천국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리아 수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현세의 덧없음을 깨닫는 영혼은 복되도다.”

(4) 가르멜회의 들어가기 전에 마리아 수녀는 이전에 죽은 수녀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청빈 허원 淸貧 許願을 거슬러 제 맘대로 쓰기 위해 수도원 다락방에 5프랑짜리 은화 한 닢을 숨기고, 임종 때에도 그것을 고백할 용기가 없어 그대로 죽었다.  그것 때문에 연옥에서 몹시 고통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장소를 보니 과연 앙화로운[殃禍,  죄로 인한 재앙]  5프랑짜리 은화 한 닢이 있었다. 원장은 이 묵시에 대단히 감동하여 곧 이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하였다.

(5) 이 무렵 또 다른 수녀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연옥에서 탐도죄[貪饕罪: 음식,재물을 탐내는 죄 ]를 보속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녀가 나타났었다는 증거로 사탕 세 개를 마리아에게 주었다. 그녀는 죽은 수녀의 원장에게 하나를 주고 불쌍한 수녀를 위하여 모든 이에게 기도를 청하였다.

(6) 1873년 10월 26일, 마리아 수녀는 연옥불 속에 있는 한 총장을 보았다. 그녀는 생존  시 청빈 덕목을 거슬러 50년 전부터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7) 또 마리아 수녀는 1874년 7월, 수도원에서 성녀라며 평판이 높았던 수녀를 연옥에서 보았다. 그녀는 옛날, 뒤 구멍으로 웃사람에 대하여 다른 수녀들에게 불만을 품게 하였던 것이다.

(8) 1974년 12월 21일, 또 한 수녀가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녀는 동료들이 자기를 총장으로 선출해 주지 않자 교만과 원한에서 자기 재산을 수도원에 남기는 대신에 친척에게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9) 1878년 3월 1일, 다른 수녀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도원에서 높은 직책을 맡기를 원했으므로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10) 프랑스 서남방 포 시에 신심 깊은 부인이 있었다. 마리아 수녀는 그녀의 딸에게 “수년 전에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는 그분의 기부 기부 로 세워진 성당 축성식 날에 승천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딸은 그렇게 오랫동안 보속해야 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겼다 그런데 죽은 이가 얼마 후에 마리아 수녀에게 나타나 “지금 나는 하느님의 흠 없으심과 자비하심을 깨달았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11) 같은 지방 바욘느 시의 신학교장이며 신앙이 두터운 미노다스 신부는 단 다섯 시간 연옥에 머물렀는데 그 기간이 50년 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한다.

(12) 1874년 6월 2일, 마르세유 시의 가르멜 회 창립자 힐라리온 원장은 연옥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마리아 수녀는 이를 보고 “당신은 어떻게 막바로 천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원장은 “애덕을 거스리지 않고 또언제나 규칙을 엄중히 지켰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13) 1875년 6월 2일, 마리아 수녀는 탈혼 상태에서 깨어나 원장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 할머니 한 분이 제 앞을 지나가면서 ‘나의 귀양살이는 끝났다. 날마다 당신을 위하여 충실히 묵주의 기도를 바쳐 나의 귀양살이가 끝나 기쁘다’라고 말했습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몽펠리에 시에서 3년 전에 저를 친절하게 재워 준 앙죠르 부인인 것 같습니다.” 마침 그날 밤 가르멜회에 전보가 왔다. 그것은 ‘앙죠르 부인 사망’이라는 소식이었다.

 

유령인가

1878년 벨기에 루벵 시에서 예수회의 필립 쇼프 사제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앙베르 시에서 전교하기 시작했을 때에 일어난 다음 이야기를 가끔 하였다.

어느 날 두 청년이 열 살쯤 되는 파리한 아이를 데리고 신부를 찾아와서 “이 애는 저녁마다 환상을 보기 때문에 몇 주일 전부터 쇠약해져서 이처럼 딱한 꼴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좋을는지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부는, 청년에게는 고해 성사를 보고 영성체하도록 권하고, 아이에게는 “열심히 저녁 기도를 바치고 안심하고 자거라. 그래도 유령이 나오거든 또 알려 다오” 하였다.

보름이 지나서 두 청년은 또 찾아왔다. “말씀대로 했습니다만, 역시 유령이 나옵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신부는 말했다. “그러면 오늘 밤부터 종이와 펜과 잉크를 가지고 아이 방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유령이 나타났다’ 하거든 들어가 보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군가, 언제 죽었는가, 어디서 살고 있었는가, 왜 나타나는가를 물어 보시오.”

다음날 청년들은 대답이 쓰여 있는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왔다. 이 유령은 노인이며 상반신만 보였다. 청년들도 보았다는 것이었다. 앙베르 시의 어느 집에 살고 있었으며, 1636년에 죽은 은행장이었다. 시의 사료 史料를 조사해 보니, 이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지금은 연옥에 있는데, 자기를 위하여 아무도 기도해 주지 않으니까 부디 이 집 사람들은 모두 고해 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해줄 것과, 루벵 시와 브뤼셀 시의 성모 성당에 참배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신부는 “그럼 당신들은 부탁 받은 선업을 실행하시오. 또 만일 한 번 더 나타나거든, 딴 이야기를 걸기 전에 먼저 주의 기도, 성모송, 사도 신경을 외게 하시오”라고 일렀다.

청년은 그 선업을 한 후에 신부에게 왔다. “신부님, 나타난 노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두터운 신앙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열심한 기도를 우리는 이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주의 기도를 바칠 때의 그 존경, 성모송을 바칠 때의 그 사랑, 사도 신경을 바칠 동안의 그 확신,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 은혜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노인은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게 일을 보는 처녀는 만일 모고해 冒告解[고해성사를 모독함]를 하지 않았다면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처녀에게 해주었더니,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 범한 독성죄 瀆聖罪를 우리에게 고백하고 즉시 사제에게 가서 고해 성사를 보았습니다….

이때부터 유령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집에 살던 일 가족은 퍽 행복하게 되었다. 두 청년은 모범적 신자가 되고, 그 누이는 수녀가 되어 나중에는 수도원장이 되었다.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1891년 12월 6일 목요일, 오몽 시의 구조원 救助院에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한 수녀가 죽었다. 요세피나 라는 이 수녀는 5년 전부터 거기 살았으며, 특히 병자를 돌봐 주고 있었는데, 암 종류의 병자를 간호하다가 자기도 병들어 몇 해 동안 심한 고통을 참아 견딘 후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장례 날 저녁 6시경, 프로스페르 라는 절름발이가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고 성당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가는 어둔 복도를 지나가는데, 별안간 꼼짝할 수 없게 되고, 그의 손에 사람 손길의 따스함을 느꼈다. 그리고 귀에 익은 요세피나 의 목소리로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하는 말이 들렸다. 프로스페르 의 몸의 피는 얼음같이 되었다. 곧 성당으로 되돌아가서 원장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였다. 원장은 잠자코 있으라고 이르고는, 주임 신부에게 이 사정을 말했다. 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침묵을 지키기로 하였다.

8일 오후 5시, 강복 첨례 瞻禮 후에 프로스페르 는 자기 고해 신부인 보좌 신부에게 전전날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랬더니 신부는 비웃으며, 그건 프로스페르 가 병자라서 그렇다고 했다. 신부가 자기 방에 돌아가 보니, 책상 한가운데에 프로스페르 가 한 말, 즉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라는 글이 쓰여 있는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보좌 신부는 그 종이를 집어 들고 건넌방에 있는 주임 신부에게 보이고, 또 아가 비웃었던 일도 이야기하였다. 이 종이 뒤쪽에는 로마의 역사가 적혀 있었다. 구조원 수녀에게 보이니까, 그것은 요세피나 수녀의 필체라고 단언하였다.

4개월 후 예수 부활 다음 목요일 오후 3시경, 프로스페르 는 피곤하여 누워 있는데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가 났다. 둘러보니 요세피나 수녀가 서 있었다. 성광이 양 어깨에 걸려 있었다. “안심하세요, 접니다. 연옥에는 있지 않습니다. 영복 永福을 얻었습니다” 라고 했다. 프로스페르 는 몹시 감동하여 부르짖었다. “수녀님, 제발 저를 고쳐주십시오” 하니까, 수녀는 “아닙니다. 이 병은 당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합니다. 복된 고통입니다. 한결같이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죄인을 위해 보속하십시오” 하고는 사라졌다.

독자여, 이 이야기를 읽고도 아직 연옥의 존재를 의심하는가? 물론 이것은 믿을 교리는 아니다. 또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그런 것 위에 세워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인전 에도 연옥 영혼이 나타난 실례는 적지 않다. 이런 실례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을 뿐더러, 이를 비추어 주는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믿어지고 있는 유령 이야기는 주로 망신 妄信 이다. 그러나 진실한 출현 출현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2. 연옥에서의 감각 感覺의 고통과 벌

 

가톨릭 신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들 중 한 사람의 고락 苦樂은 전체의 고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연옥은 크나큰 고통의 장소여서, 거기 있는 망자의 영혼은 우리의 동정을 청하며 “주의 손은 우리 위에 무거워졌으니, 벗아,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라고 부르짖는다.

이 불행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그 감각과 정신의 고통을 깊이 고찰해 보자. 그러나 도저히 있는 그대로를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이승에서 알 수 있는 데까지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연옥 영혼은 죄수이다

이는 망자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바치는 기도문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도 “심한 고통에 시달림을 받고 있는 불행한 자를 도우시어 사로잡힌 감옥에서 구원하소서” 라고 되어 있다.

감옥이란 말은 잔혹하게 들리고 우리에게 슬픈 생각을 일으키지마는, 연옥에 비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다. 내세의 감옥은 바다처럼 넓은 곳이며, 또 심연처럼 깊고 사막처럼 쓸쓸한 곳이다. 거기 있는 자는 졸 수 없다. 어느 때고 잠을 잘 수 없는 곳이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흠숭하며, 기도하고 기억하고 희망할 수는 있으되,  완전히 정화 정화 되기까지 끊임없는 괴로움을 당하는 곳이다.

 

빛의 결핍

빛의 결핍은 연옥에서의 둘째 고통이다. 만물 중에 처음 만들어진 것은 빛이다. 빛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위로하며 또 기쁘게 해준다. 빛은 즐거움을 가리킨다. 그러나 어둠은 고통과 죄의 상징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히브리 인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열 가지 고통, 특히 어둠으로 벌받았다. (출애 10, 22-23).

혼인 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았던 한 사람의 손은 ‘어둠’ 속에 던져졌다 (마태 22, 13).

그런데 연옥 영혼은 항상 어둠 속에 있다. 그래서 성교회는 자주 “영원한 빛을 저들에게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되풀이한다. 미사 때에도 “주여, 저들을 광명의 곳에 들여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혹심한 불의 고통

성교회는 불의 존재와 성질에 대하여 아무것도 정한 바 없으나 교부들의 학설에 의하면 이는 물질적인 것이다. 어찌 유형한 불이 무형한 영혼을 괴롭힐 수 있는가? 어찌 각 사람을 죄의 경중에 따라서 괴롭힐 수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비밀이다. 하느님은 그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지는 않으나, 그 ‘불’의 존재와 고통을 알고 거기 걸리지 않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각가지 묵시를 받아 ‘연옥 박사’라고 불리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선 연옥의 불티에 대해서조차 말할 입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또 그것을 깨달을 지식도 없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보았지만, 이를 표현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연옥불과 지옥불은 같다. 다만 틀리는 점은 거기 있는 자의 모습이다. 즉 지옥의 죄인은 하느님을 원망하고 죄에 붙잡혀 하느님의 선의 영향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영원히 실망과 악의에 잠겨 있다. 이와 반대로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선의에 붙잡혀 영복을 얻을 희망을 품고 천명 天命에 맡기고 있다”고 했다.

성 치프리아노,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베르나르도 등에 의하면 연옥불의 고통은 순교자들이 받은 박해보다 더하다. 불은 짚을 살라 없애듯 영혼을 태운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뿐이지 지옥불과 똑같다. 그래서 성교회는 ‘서늘함과 광명과 평안함’을 언제나 저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순교자 토마스 모어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불이 그림의 불보다 더한 것처럼, 연옥불은 이 세상의 모든 불보다 더하다.”

성 히누 는 중병으로 5년간 딱딱한 나무 침대 위에 누워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와 마음으로 일치되어 자기 고통을 참아 견디었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상처에 벌레가 끓었고, 때때로 그걸 갉으러 오는 쥐를 내쫓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 괴로움도 연옥 고통에는 도저히 비길 수 없다.

성 토마스가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연옥은 우리 영혼을 완전히 정화할 수 없었던 일곱 가지 성사에 추가된 여덟째 성사라고도 할 만한 엄한 성사이다. 현세의 성사는 따뜻하고 받기 쉬운 것이지만, 연옥의 성사는 혹독하고도 긴 것이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는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하다.”

성녀 데레사는 연옥에 있는 어떤 영혼의 지독한 고통을 보고 괴로움과 두려움에 죽을 뻔하였다.

성녀 비르지타 가 본 바에 의하면, 연옥에는 삼 단계가 있다. 즉 첫 단계에서 영혼은 몹시 괴로워한다. 둘째 단계에서는 쇠약한 상태를 참아 견딘다. 마지막에는 하느님을 뵙고 싶은 비상한 열망의 고통에 짓눌린다.

하여튼, 천당과 지옥 문제처럼 연옥은 명백히 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연옥 영혼은 몹시 괴로워하고 있고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효과적인 기도와 선업으로 저들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폴리뇨 시에 있는 탄 손자국

1859년 11월 4일, 폴리뇨 시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지원자의 감독을 하고 동시에 수녀원 가축을 맡아보고 있던 데레사 마르가리타 제스타 라는 열심한 수녀가 갑자기 졸도하여 죽었다. 이 수녀는 1797년에 바스티아 의 코르소 라는 데서 출생하여 1826년 2월 수녀원에 들어왔다. 물론 훌륭하게 선종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수녀가 죽은 지 열 이틀이 지난 11월 17일에, 데레사가 죽은 후 혼자서 가축을 돌보고 있던 조수 안나 페리시 라는 수녀가 가축을 기르는 곳으로 갔다.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쩐지 탄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급히 문을 열어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좀 있다가 또다시 탄성이 똑똑히 들렸다. 안나 수녀는 놀라 “예수, 마리아, 무엇입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그랬더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아아, 하느님은” 하는 슬픔에 찬 탄식이 들렸다. 그것은 12일 전에 죽은 데레사의 목소리였다. 안나가 놀라 “그토록 청빈했던 당신이 어떻게…?” 하고 부르짖으니 데레사가 “예… 그러기에 이건 나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이 점에 대하여 너무나 자유롭게 해 두었던 수녀들 때문입니다. 당신도 당신 자신에게 주의하십시오” 라고 말하자, 방안에 연기가 꽉 차고 데레사의 그림지가 나타나서 벽을 따라 차츰차츰 문 쪽으로 나아가더니, 한층 목소리에 힘을 주어 “여기 하느님의 자비하심의 증거를 남겨둡니다”라고 말하고는 문 맨 위에 판자를 두드려 거기다 고스란히 오른쪽 손바닥의 탄 자국을 새겨 놓은 것처럼 남기고 사라졌다. 안나는 거의 정신을 잃었다가 얼마 후에 소리를 질러 다른 수녀를 불렀다. 한 사람 두 사람 모두 모여들어 안나를 둘러싸고 모두가 나무 탄 냄새를 맡고 놀랐다. 그래서 찾아보니 문에 탄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데레사의 손자국이었다. 데레사의 손은 남달리 작았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모두 무서워져 바삐 성당에 가서 그날 밤은 식사하는 것도 잊고 밤을 새워 기도하고, 다음날은 일동이 데레사의 죄 보속을 위해 성체를 영하였다.

이 소문은 곧 사방에 퍼졌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회 사람들과 신부와 동네 사람들 모두가 마음을 합쳐 데레사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쳤다. 안나는 심한 마음의 충격을 가라앉히고자 다음날은 어떻게든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데레사는 또 그녀에게 나타나서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 소망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남긴 손자국을 지워 버리고 싶지요. 그러나 그건 당신 힘으로는 안 됩니다. 이는 모든 이의 경계 警戒와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으로 내가 다른 수녀에게 행한 결점 때문에 40년 동안 연옥에서 무서운 불의 고통을 받도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여러분의 기도 은혜로 하느님은 내 영혼에 자비를 베푸시고 특히 대단히 위로가 되는 일곱 성시 聖詩 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데레사는 기쁜 얼굴로 “복되도다 가난한 자여, 참으로 청빈을 지키는 자는 크나큰 기쁨을 얻는도다” 하고 사라졌다.

그 다음날 밤 안나 수녀가 자리에 들어 잠들려는데 또 이름을 불렀다. 놀라 뛰어 일어나서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벌벌 떨면서 침상 위에 앉았다. 잠시 후 환한 광채 덩이가 안나의 침대 발 쪽에서 나타나서 방안은 낮처럼 밝아졌다. 그리고는 월계관을 쓴 승리자와도 같은 데레사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금요일, 즉 예수님 수난 날에 죽었습니다. 오늘 또 금요일에 천국에 갑니다. 부디 인내하고 십자가를 지십시오. 용기로써 고통을 참으십시오” 하고는 다시 정다운 목소리로 “그럼 천국에서…” 라고 덧붙이고는 부드럽고 흰, 눈부신 연기가 되어 천국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기적 때문에 얼마 후에 폴리뇨의 주교와 재판관에 의하여 조사가 시작됐다. 11월 23일, 대중 앞에서 데레사의 무덤을 열어 손바닥의 치수를 재어 보니, 수녀원에 남긴 탄 흔적과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이 문은 아직도 소중히 보존되어 있다. 또 위 사건의 저자는 동행한 순례자와 함께, 기적의 증인 중 한 사람인 교장에게 안내되어 직접 그 탄 자국에 손을 대어 보고 왔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은 후세에서 한때 혹은 영구히 불의 고벌 苦罰 을 받는다. 그리고 그 불은 데레사가 남긴 불과 꼭 같은 불로써 태워지는 것이다”라고 거듭 보증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이유로 연옥 영혼에게 이승에 나타나기를 허락하실 때, 그 영혼이 닿는 곳에는 언제이고 이를 괴롭히는 불의 흔적을 남기게 한다. 불과 영혼은 마치 숯이 불이 되었을 때처럼 한 덩어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신비를 밝힐 수는 없지만 연옥의 불은 물질적 불일지라도 영혼을 괴롭힌다는 것을 잘 깨닫고, 이에 대하여 의심해서는 안 된다.

 

현세 보속의 이익

성 톨로메이 의 여동생 안젤라 수녀는 연옥에서 고통 받기보다 이승에서 죄 보속을 하기를 원했는데,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 장례 때 복자는 별안간 영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둠’의 나라를 떠나라고 여동생에게 명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수녀는 머리를 들고 일어섰다. 하느님께서 무슨 이유로 이 기적을 허락하셨는가를 잘 깨달은 수녀는 여러 가지 고행을 하여 보속을 다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기 몸에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고 비난을 받으면 “현세에서 쉬이 범하는 소죄 때문에, 연옥에서 얼마나 괴로워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이보다 백 배의 고행을 해도 좋다” 라고 대답하며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상한 박물관

수십 년 전의 일인데, 로마에서 쥬에 신부는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예수 성심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전파하였다. 그런데 5, 6년 후에 이 소성당에서 불이 나다가 말았다. 연옥 영혼의 주보이신 성모 마리아의 성화 聖畵 둘레에 드리워져 있던 막은 곧 타버렸으나, 성모의 그림과 그 그림틀은 아무 탈도 없었다.  재를 털어 보니까 그림틀 위에 이상한 모양의 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잘 들여다보니 슬픔에 잠긴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쥬에 신부는 연옥 영혼이 나타난 기념품을 모아서 소성당 옆방에 연옥 박물관 을 열었다.

연옥 영혼은 나타난 표적으로 주로 손자국을 남기고 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어느 병사의 다섯 손가락이 탄 자국으로 열 여섯 페이지가 뚫린 기도소도 있다. 옷의 소맷자락이나 종이 위에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불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도 있다.

1731년 11월 1일, 판지니 신부는 이탈리아 페루지아 근처 토디 시의 성녀 글라라 수녀원장 이사벨라 포르나리 에게 나타나 그 기도와 고행으로 일찍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감사하고, 그 앞에 있는 대 臺 위에 십자가를 표하고 또 손을 대 위에 얹어서 거기다 탄 흔적을 남겼다. 그밖에 여기저기에 흑점 黑點을 남겼는데, 그것은 땀방울이 떨어져 탄 자국이었다. 1901년 7월 19일, 위의 신기한 박물관을 연 쥬에 신부는 성녀 글라라 수도원에 가서 이 진귀한 기념품의 사진을 찍었다. 판지니 신부를 알고 있는 자는 그것은 확실히 판지니 신부의 손이라고 말했다.

‘죽었다가 되살아 온 사람은 없으니까” 하면서 내세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는 이 손의 탄 흔적을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꼬집혔다

1896년,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의 하일리겐탈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한 수녀는, 두웨 시에 있는 같은 수도회의 주방 수녀를 도와 주기 위해 파견되었다. 헤어질 때 원장은 “내가 죽거든 기도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 후 얼마 도지 않아 5월 초순에 원장은 죽었다. 6월 26일의 일이었다. 두웨 시에 파견된 수녀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지하실로 음료를 가지러 갔다. 통 앞에 몸을 굽혔을 때 계단 아래 한 수녀가 있는 것을 보았으나, 별로 유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별안간 자기 팔을 꼬집혔다. 동시에 두 달 전에 죽은 원장 목소리로 “고통 받고 있으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라는 말이 들렸다.

수녀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른 수녀들이 혹시 무슨 사고나 생겼는가 하고 걱정하며 지하실에 내려왔다. 얼마 동안 이 수녀는 눈물에 젖어 한마디도 말을 못 하더니 좀 있다가 “나는 꼬집혔다”라고 말하며 자기 팔을 보였다. 위쪽에 다섯 손가락의 자국이 보이고, 벌써 그 위에 벌겋게 물집이 생겨 있었다. 릴 시의 의사 티손은 수녀 팔뚝의 사진을 찍었다. 그 후 이 상처는 화상 火傷처럼 차차 나았다.

 

귀족이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16세기 성 도미니코회의 수녀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는 죄인의 회개와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에 커다란 분발심을 품고 있었다. 연옥 영혼을 위해서라면 그 대신 자기가 고통 받기를 청할 만큼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은 때때로 이 자비심 깊은 기도를 들어 허락하시었다.

성녀는 어떤 귀족을 위하여 기도와 고행을 바쳐 덕택으로 이 귀족은 죽기 전에 회개하여 좋은 최후를 마치고 연옥에 갔다.

카타리나는 묵상 때 영감을 받고 이 귀족의 불쌍한 모양을 보고서 그 대신 보속하기를 청했다. 그랬더니 즉시 40일 동안 기묘한 병에 걸렸다. 성녀의 몸에는 많은 물집이 생겨 불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끓고 있었다. 방은 그 때문에 몹시 더워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살은 불에 탄 것같이 보이고, 혀는 새빨갛게 탄 쇠붙이 같았다. 끓어오르고 난 뒤의 살은 불에 덴 자국처럼 보였으며, 좀 있으면 다시 물집이 생겨 먼저와 같은 열을 뿜고 있었다.

이 고통 중에 성녀의 얼굴은 한시 안온하고 마음은 평화로웠다. 그뿐만 아니라 비상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의사는 이것은 이상한 병이니까 의학상의 치료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면서 물로 씻는 일과 그 밖의 치료를 하라고 하였다. 이 치료법은 자기 고통을 더할 뿐이었지만, 성녀는 순명으로 즐거이 그것을 실행하고 있었다. 마음속의 느낌은 겸손을 위해 조심하여 감추고 있었다.

때때로 10분 또는 20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은 심하여 아예 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사랑 깊으신 하느님께 그렇게 지독한 고통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면, 성녀는 “부디 용서하십시오. 하느님은 연옥 영혼을 몹시 사랑하시어 그를 천국에 들여 놓기를 무엇보다도 원하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즐거이 고통을 참아 견디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40일이 지나니까 성녀의 몸은 전과 같이 되었다. 귀족의 친척은 그의 영혼 사정에 대하여 물었다. 성녀는 “안심하십시오. 지금은 영복을 얻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독자 여러분, 위의 실례로 연옥불의 괴로움을 얼마쯤은 상상할 수 있으리라.

 

 

3. 실각 失脚의 고통과 벌

 

영혼의 애타는 갈망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각고 覺苦 즉 감각의 벌은 혹독하기는 하지마는, 실고 失苦 즉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고벌에는 도저히 비길 바가 못 된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설에 의하면, 사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뵙는 일은 선인의 위안이기는 하나, 그것이 보속을 못 다한 까닭에 아직 얼마 동안 더 떨어져 있어야만 할 때의 영혼의 열망의 고통은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영혼은 하느님 외에는 원하는 것도 없고, 사랑하는 것도 없다. 하느님 자체가 그들의 고통이 된다. 영혼은 채워지지 않는 자기네 사랑으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한다. 하느님에 굶주리고 있기에 그 외의 것으로는 그 목마름을 가시게 할 수 없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했다. “하느님을 뵈올 수 없을 때는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이 일어나 영혼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라고.

“어머니로부터 억지로 떼어낸 어린애는 한사코 어머니를 부른다”, “자석 磁石은 쇠붙이를 당긴다” 따위의 비유는 연옥 영혼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극히 부적당하다. 사랑이 완전하며 할수록 이를 채울 수 없는 고통은 심하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일심으로 하느님을 부르고 그분을 향해 두 손을 들지마는, 보속이 다 되기까지 하느님은 멀리 계시어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말

“예수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서는 천만 번 죽어야 한다”든가, 또는 “얼마 동안 지옥에서 고통 받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하였다. 이 감동적인 부르짖음으로 성인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성인이 사심판 때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보았더라면, 그때야말로 성인의 마음을 사랑에 녹아 버려, 그 비상한 갈망은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으리라.

 

하느님의 아름다움

인간은 절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현세의 불완전하고 하찮은 미美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그로 하여 입맛을 잃고 잠을 못 이루곤 하는 따위의 예는 적지 않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마는, 한편으로 볼 때, 오물 汚物 단지에 불과하다. 그의 아름다움만 해도 위와 같은 힘이 있다 할 것 같으면, 온간 ‘미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어떠할까? 그건 도저히 이승에서는 상상도 못 한다.

영혼은 자진하여 연옥에 간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 보속을 하는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연옥에 보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흠 없으심과 제 자신의 더러움을 보고서는 온전히 깨끗해지기까지 슬퍼하면서도 제 발로 달갑게 연옥에 가는 것이다. 더러운 그대로 천국에 있기보다 연옥에서 고통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는 훌륭한 방에 더러운 작업복이나,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가는 것보다 부끄러워서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희생자가 된 카롤리나 클레망은 1880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8년 전 나는 내 일생에 비상한 영향을 준 한 환상을 보았다. 나는 죽어서 사심판을 받았다. 구세주는 몹시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내게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크나큰 선하심과 양선하심을 지니고 계셨다. 그래서 나를 맞아 주는 그 두 팔에 뛰어들어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은밀한 데까지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눈초리가 있었다. 그래서 사함을 받기는 했으되 그 보속을 못다 한 죄의 큰 더러움이 내 눈앞에 나타났고,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고통을 받았다. 한 순간일망정 그 옆에 있기보다 만일 지옥이라도 그 옆에 있었다면 주저 없이 거기 뛰어들려고 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보속을 다 못하고 하느님 대전에 있기보다는 연옥에서 고통 받는 편이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방자

연옥 영혼은 고아 孤兒 다.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를 볼 수 없다. 그들은 천국에서 추방된 자이다.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부모, 형제, 벗을 만나기를 몹시 원하고 있다. 성녀 데레사는 말한다. “하느님을 뵈올 수 없는 괴로움은 상상 이상이다. 연옥 영혼은 하느님 곁에 살고 싶지만, 그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 갈망에 괴롭힘을 받는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어느 정도 이 일을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흉내 낼 수 없는 미소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성모 마리아께서 루르드에서 성녀 벨라뎃다에게 나타났을 때 두 사람의 무신앙자가 ‘그 망신 妄信을 깨뜨려 주려고’ 루르드에 갔다. 그 동굴 앞에 이르러 벨라뎃다의 얼굴을 보니까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무신앙자는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다.

루르드의 성모에 대해서 프랑스의 부르사이 백작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코트레 온천장에 있었을 무렵, 항간에서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 이야기로 떠들썩하였다. 그 당시 나는 방탕자이며 또 무신론자였기에 그 발현을 믿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신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지방 신문에서 벨라뎃다가 보았을 때 성모께서 미소하였다는 대목을 읽고, 나는 호기심으로 구경꾼이 되어 그 자리에서 가면 假面을 벗겨주리라고 생각하며 직접 벨라뎃다의 집을 찾아갔다.  벨라뎃다는 입구의 계단에서 검은 양말을 손질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녀가 한갓 천한 소녀로 보였다. 그러나 그 용모는 여위기는 했을망정 어딘지 모르게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내 질문에 간단하고 꾸밈없이 발현 이야기를 해주어서, 나는 대단히 감동하였다. 끝으로 나는,

‘그럼 그 귀부인은 어떤 모양으로 미소 지으셨소?’ 하고 물었다. 이 시골 소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좀 있다가,

‘아이 참, 그런 미소를 천국에 사시는 분이 아니고는 누가 흉내 낼 수 있겠어요?’하고 대답했다. 나는,

‘어떻게 좀 내게 그 미소를 보여줄 수 없겠소? 나는 의심 많은 무신론자라서 그 발현을 안 믿으니까요’ 하니, 그녀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하고 엄연히,

‘그럼 당신은 나를 거짓말쟁이로 여기시나요?’ 하며 힐문하였다. 나의 이때까지의 생기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어찌 이 소녀가 거짓말쟁이일 수가 있으랴.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 사과하고픈 심정이 됐다. 그러자 벨라뎃다는,

‘당신은 죄인이니까 성모님의 미소를 흉내 내어 봐 드리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서 두 손을 모으고 천국에 계시는 분의 미소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소녀가 눈을 하늘로 우러러보고 미소하고 있을 동안에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나는 성모의 미소도 이와 같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 부터 나는 이 깨끗한 미소를 마음에 새겼으며, 이를 상상할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아내와 두 딸을 잃었지만, 이제는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외롭게 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성모의 미소와 함께 살고 있다.”

 

당신은 성모 마리아를 보셨나요

벨라뎃다는 그 후 수녀가 되어 마리 베르나르도라 불리고, 수도원 병실에서 천식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다른 자매의 네 살 난 조카딸이 문병 왔다. 어린애는 성당에 들어간 것처럼 얌전하여 발끝으로 가만가만 침대 가까이 가서 조심조심 벨라뎃다에게 말했다.

“수녀님, 수녀님은 성모 마리아를 보셨나요?”

“그래, 성모님을 뵈었어요.”

“성모님은 퍽 예쁘죠?”

이 말을 들은 벨라뎃다의 얼굴은 즉시 달라졌다.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어,

“아아, 또 뵙고 싶어서 죽고 싶을 정도야…” 하고 말했다. 어린애는 이 두터운 신앙과 사랑에 몹시 감동하여 말했다.

“수녀님, 엄마와 나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기도하겠어요. 아기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어요.” 어린애는 너무나 좋아서 성모 마리아를 본 이 수녀에게서 떠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벨라뎃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문 앞까지 뒷걸음질치며 나갔다.

 

성모의 아름다움

리용 시의 유명한 조각가는 루르드의 발현 동굴에 안치하기 위하여 벨라뎃다의 지시에 따라 섬세한 데까지 물어서 실물에 못지 않게 자기 솜씨와 신앙과 사랑으로써 정성 들여 원죄 없으신 성모상을 만들었다. 이것은 명작이라고들 하였다. 벨라뎃다도 이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기대에 어긋났었다. 그녀는 두 번 다시 보기를 꺼리고 성모님께 용서를 청하여 말했다.

“내 어머니, 어찌 이다지도 당신을 못난이로 만들까요? 미술가도 실제로 당신을 뵙는다면 정말 깜짝 놀랄 거예요.”

이 말을 들은 한 사람이 물어봤다.

“성모님은 그렇게 아름다우십니까?”

“그럼요. 한 번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벨라뎃다의 얼굴이 성모님의 미소의 반영 反映 만으로서 그렇게 아름답다면, 성모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또 성모 마리아가 피조물이면서도 그만큼 아름다우시다면, 온간 선미 善美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시랴. 이를 보기 위한 비상한 갈망에 괴로워하고 있는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자.

 

 

4. 버림받음의 고통과 벌

 

연옥이 있음은 가톨릭 신앙의 한 조항이다. 또 이승에 있는 신자는 연옥 영혼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신앙의 한 조항이다. 그러나 이승에 살아 남아 있는 이가 얼마 전 죽은 이를 멀지 않아 잊어버린다는 것은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물결이 일 때 맨 처음 들어간 사람이 낫는다고 믿어지고 있던 베짜타의 못 곁에 있던 중풍 환자는 “낫기를 원하느냐?” 고 예수께서 물으실 때, “저를 못에 넣어 주는 자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연옥에 있는 대부분의 영혼은 바로 그렇다. 자기가 생존자로부터 잊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를 도와 주는 이가 없구나” 하고 되풀이하리라. 연옥에는 감각의 혹독한 벌과, 실각 실각의 무서운 벌만이 있는 게 아니라 버림받음 [遺棄]이란 고벌 苦罰 도 있는 것이다.

 

가는 이는 날로 멀어지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진다. 모든 성인의 통공 通功 이라는 교회의 진리도 잊어버린 듯, 죽은 이를 걱정하지 않는다. <준주 성범>의 저자가 “사람들 눈에서 떠나갈 때는 생각에서도 또한 떠나간다”라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비석 비석 이 사늘한 시체를 누르듯이 망각은 문득 죽은 이에 대한 생각을 누른다”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옳다. “망각은 죽은 이의 두 번째 수의 壽衣 다”라는 유명한 시인 라마르틴은 말했다.

슬프게도 이런 이들은 사실이다. 자모이신 성교회는 이 야박한 인정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미사, 성무일도, 예식, 망자의 기념일 같은 것으로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제2의 죽음

죽은 이를 잊어버림은 원죄 原罪가 낳은 부끄러운 결과이다. 우리는 사욕이나 세속에 정신을 빼앗겨 쉽사리 이를 잊어버리고 만다. “괴로워할 때 위로해 주는 이가 있으면 고통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지마는, 동정해 주는 이가 없을 때는 괴로움이 겹치는 것이다” 라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연옥 영혼은 자기네가 잊혀지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섭섭해 한다. 자기를 구해 주기 위하여 바쳐지는 기도나 선행을 알고 기뻐하는 것처럼, 잊혀지고 있음을 알고 몹시 슬퍼한다. 이 잊혀졌다는 일이 그들에게는 ‘제2의 죽음’이다. 즉 물질적 죽음에 정신적 죽음이 더해지는 것이다.

 

조난자

“살려 주세요. 사람 살려요.” 절해 고도에서 파선 당한 사람이 지나가는 배를 보면 두 손 모아 이렇게 부르짖는다. 그런데 이를 들은 항해자가 본척만척 하고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면 조난자의 심경은 어떠하랴.

그러나 여기 이 조난자보다 더 불쌍한 자가 있다. 그것은 곧 연옥 영혼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이들이 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극히 미소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은 복음에서 지워 버린 것처럼 보인다. 연옥 영혼은 이것을 보고 탄식한다. “아아… 앙화로다. 우리는 생존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자연적으로도 초자연적으로도 우리는 형제들 마음에서 죽어 있다.”

 

혈연 血緣

죽은 이가 이승을 떠나서 몇 주일 후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어 그 생애를 보낸 집에 돌아가 본다면 그는 무엇을 듣겠는가? 기나긴 이야기 속에서도 제 이름은 한 번도 못 듣는다. 못내 서러워 연옥으로 돌아오면서 부르짖는다. “아이, 모든 이들이 나를 잊었구나. 인간계에 나를 맺어 놓은 모든 인연은 끊어졌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나를 잊고 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없고, 내 무덤에 와 보는 이도 없다. 유감스럽다…..”

죽은 이는 만사를 하느님 섭리에 맡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버림받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탄식한다.

“안심하세요. 기도도 잘해 주고 언제까지나 안 잊어버릴게….” 망자가 세상을 떠나기 조금 전에 우리는 그 손을 다정스레 잡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약한 마음이여. 눈에 보이지 않는 이는 차츰 마음에서 떠나는 것이다.

 

배은자

은혜를 잊어버림은 사바 인생의 상사 常事이다. 나음을 받은 열 사람의 문둥이 중에 감사하러 온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죽은 이는 살아 있을 동안에 각가지 수고를 하였다. 그러나 은인이 연옥에서 무서운 결핍과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리 있는 사람마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어, 조그마한 위로도 짧은 기도도 안 한다. 육신을 떠난 영혼은 이승에 있을 때보다도 더 깊이 배은의 소행을 느끼고 탄식한다. 각가지 은혜를 뿌려 주었던 사람들 마음에서, 자기라는 존재가 아주 사라져 버린 꼴을 보고 깊이 슬퍼하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

“아, 슬프다! 죽은 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불충분하다. 장례식 종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그들의 생각은 우리 심중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성서에 의하면, 참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이와 함께 살자

독자 여러분, 우리가 다만 이승에 살아 있는 사람들하고만 사는 것은 부족하다. 그 위에 또 죽은 이와 함께 사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마음과 영혼으로 죽은 이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고 한평생 간단없이 죽은 이를 기억해야 한다. 또 다만 상기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도 없다. 선행, 기도, 애긍, 은사, 영성체, 미사 성제 등으로 위로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은 이의 ‘진실한 형제’가 된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 34) 라는 말씀이 아름다운 노래처럼 우리 귀에 울릴 때가 오리라.

 

 

5. 연옥에 대한 흥미 있는 네 가지 문제

– 들어가는 사람, 장소, 시간, 고통의 등급

 

신학에는 인간의 지혜가 얕음을 증명하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연옥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똑똑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일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사랑과 분발의 정도를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신덕은 우리의 사상을 넓혀 죄의 성질과 근원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네 가지 문제를 논함은 무익하지는 않다. 그러나 일은 흥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것임을 고백해야겠다. 성 바오로가 “내가 이제 심오한 지리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코린 15, 51)라고 한 말은 이 경우에 잘 들어맞는다.

 

누가 연옥에 가나

성세의 결백한 상태로 이승을 떠나는 어린이, 최상의 사랑을 드러내 순교자, 현세에서 죄의 잠벌 잠벌 을 다 보속한 자, 극소수의 성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은 천국 영복을 얻기 전에, 그 현관 玄關, 즉 연옥을 거쳐 간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

자기 시대의 주요한 성인들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혜로 그들의 사후 영혼 상태에 대하여 묵시를 받았던 유명한 성녀 데레사는 말했다. “이 많은 성인 중에 연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단지 셋밖에 보지 못했다.”

현세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말하자면 최고점까지 올라간 듯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녀 데레사는 임종을 당하여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수녀들에게 말했다. “제가 연옥에 있을 때 저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 말만으로 “성녀 데레사는 연옥을 거쳤다”라고 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마는, 거쳐 갈지도 몰랐기에 성녀는 그 준비를 하고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이 방법은 가장 유익하고 안전하다. 우리도 성녀를 본받자.

 

‘천사’라는 별명의 수사

파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신심가로 이름이 높아 ‘천사’라 불리던 수사가 죽었다. 그의 벗 중에 신학 박사가 있었다. 그는 망자를 위해 드리기로 규정되어 있는 미사 세 대를 일부러 드리지 않았다. 그것은 이 수도자는 틀림없이 천국에서 영광의 맨 윗자리에 있을 테니까 그를 위해 기도함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미안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후, 이 박사가 수도원 뜰에서 산보하고 있는데, 죽은 이가 불에 싸여 그에게 나타나 슬픈 소리로 말했다. “부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당신이 나를 위해 드려야 하는 미사 세 대가 봉헌될 때까지 나는 연옥에서 고생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규칙에 따라서 당신의 의무를 다해 주셨더라면 지금 나는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

박사는 놀라서, “형제여, 어찌 그대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겠소. 그래는 어디서나 탄복할 만한 모범적 수사가 아니었소? 그대가 영복을 얻고 못 얻고를 걱정하는 일은 꿈에도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죽은 이는 말했다. “아아, 슬프다. 하느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한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무한한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우리의 가장 완전한 행위 안에서도 부족을 발견하십시다. 하느님 대전에는 천사까지도 불완전합니다. 어찌 우리 인간이 부족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고행의 도구

성 비안네는 에퀼리라는 본당의 보좌 신부로 있으면서 주임 사제 발레이 신부로부터 좋은 교훈을 받아 그것을 한평생 지켰다. 임종 때 주임 신부는 베개 밑에서 고행의 도구 – 채찍, 쇠사슬, 고복 따위 – 를 비안네에게 내어 주면서 말했다. “비안네 신부님, 이걸 빨리 숨겨 주십시오 내가 죽은 후에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내가 벌써 죄 보속을 다한 줄로 알테고 난 세상 끝날 때까지 연옥에서 고생해야 할테니까요.” 그리고 울고 있는 비안네 신부를 보고, “당신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시오… 미사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시오… 안녕히, 천국에서 또 만납시다”라고 하였다.

성 비안네는 강론에서 말하기를, “형제들이여, 연옥불에 괴로움을 당하기 위해서는 아주 미소한 죄로도 넉넉합니다”라고 하였다.

 

십중 팔구

독자 여러분, 이런 까닭에 “당신도 십중 팔구는 연옥을 거칠 것입니다”라고 단언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닌 줄 생각한다. 또 그건 아주 알기 쉬운 일이다. 생각해 보라. 천국에 들어가는 이는 하느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켜 청정 결백 淸淨 潔白 하게 된 자라야 한다.  그렇지마는 이런 상태로 이승을 떠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우선 완전한 통회나, 또는 불완전한 통회더라도 고해 성사 덕택으로 대죄의 영벌은 없어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나머지 잠벌은 이승에서는 보속을 다할 겨를이 없으니까 연옥에 가서 해야 한다. 소죄를 지니고 죽는 이나, 또 그 소죄의 사함은 받았더라도 조그마한 보속도 안 남을 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연옥에서 자기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

성녀 비탈리나는 모범적인 여인이었다. 성녀의 높은 평판을 듣고 투르 시의 주교 성 그레고리오가 그 무덤에 참배하였다. 그 일에 대하여 주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는 먼저 성녀께 인사하고 하느님께 기도한 후 무덤 속에서 내 강복을 청하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하였다. 그리고 ‘당신은 천상 영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슬픈 목소리로 ‘살아 있을 때 범한 소죄 하나 때문에 아직 누리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옆에 있던 이이게 ‘아이 적부터 자기 몸을 하느님께 봉헌한 이 가련한 동정녀가 사후에는 영적을 행할 만큼 완전한 자이면서도 단 하나의 소죄 때문에 아직도 천당 영복을 얻지 못한다면, 불쌍한 죄인인 우리는 어떠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예수회의 유명한 사제 드 라 콜롱비엘은 그 장례 때가지 연옥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일을 친히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알려 주시며, 이 사제는 ‘착한 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예들만 보아도 천사들에게서도 더러움을 보시는 하느님께 인간 속의 더러움이 안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문제가 절로 머리에 떠오른다. 즉 “어린이는 연옥에 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어린이의 영혼

어린이라도 알면서 불순명, 탐도, 게으름 따위의 소죄를 범한다. 도 그것을 개의치 않으니까 그 보속은 아 되어 있다. 따라서 만일 그대로 죽는다면 연옥에서 그 보속을 다해야 한다.

195년 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태어난 디노크라테스는 뺨에 생긴 흉한 혹 때문에 일곱 살에 죽었다. 그때 그의 누이 페르페투아는 신자로서 우상 숭배를 안 했기에 옥에 갇혔다. 필요한지 어떤지는 모르나 그녀는 동생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했다.

며칠 후엔 야수에게 먹혀 순교자가 될 이 처녀는, 밤에 돌연 환상 중에 동생 디노크라테스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깜깜한 암흑 속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얼굴은 창백하고 그 눈은 불처럼 타고, 뺨에는 혹이 나 있었다. 동생 곁에는 물이 가득히 들어 있는 큰 항아리가 있는데도 동생은 키가 거기까지 자라지 않아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페르페투아는, 동생이 몹시 목말라하는 모습은 연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표지라고 깨닫고, 그를 구해 주기 위하여 일심으로 기도했다. 한참 후에 그녀는 또 환상 중에 동생을 보았다. 그러나 이번은 몸 전체가 깨끗해지고, 옷은 새하얗고, 얼굴은 건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의 어버이들 중에는 예닐곱 살 나는 귀여운 어린이의 천진스러움을 보고 천사처럼 바로 천당에 갔으리라고 생각하고는 기도도 안 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를 위해 기도함은 유익할 뿐만 아니라 부모의 의무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볼 때 연옥을 거쳐 가는 영혼은 대단히 많다.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많은 영혼은 연옥에 간다.”

한편으로 임종 때, 최후의 일순간에 대죄인이 그 생애 중에 몇 가지 선행을 했기 때문에, 도는 미래에 친척이나 신자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와 고행을 할 것을 하느님께서 미리 보시기 때문에 그 특별한 은총에 비추어져 회개하여 연옥에 가는 수가 있다.

또 한편으로 선인이라도, 이승에서 세속 사물로부터 마음을 떼어 죽을 때까지에는 보속을 완수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어서, 많은 선인들이 연옥에 있다.

형제여, 연옥에는 확실히 많은 우리의 친척, 벗, 동포, 또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구해주기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한다.

 

연옥은 어디 있는가

이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 토마스나 다른 교부들의 설에 의하면 연옥은 지옥 옆에 있다고 한다. 성서와 교회 예식은 이 설을 허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 대 大 그레고리오나 성 토마스의 설에 의하면, 어떤 영혼은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불 옷에 감싸여 이승에서 연옥을 치른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승에 있는 이들에게는 훌륭한 교훈이 되고, 다른 편으로는 망자의 괴로움이 알려져 구원받기 위함이다. 저승에서의 영혼 상태는 망자의 출현과 성인이 보는 발현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성 말라키아의 여동생

성 베르나르도는 성 말라키아의 전기에서 다음 실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날 말라키아 주교는 얼마 전에 죽은 자기 여동생을 보았다. 그녀는 묘지에서 연옥벌을 받고 있었다. 허영심 때문에, 특히 머리와 몸 치장이 지나쳤기 때문에 제 시체가 놓은 무덤에서 살고 그 부패는 열석 列席 [주: 자리에 죽 벌여서 앉음] 하는 선고를 받고 있었다. 말라키아 주교는 30일간 계속해서 여동생을 위해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또 여동생을 보았다. 이번엔 그녀는 성당 입구에서 연옥 보속을 할 선고를 받았다. 그것은 아마 성당에서 불경스러웠고 또 제 몸치장에 신자들의 주의를 끌려고 애썼기 때문이리라. 검은 수건에 싸여 심한 괴로움에 젖어 있었다. 주교는 또 30일간 여동생을 위하여 미사를 바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성당 안쪽 성소 聖所에 나타났는데, 얼굴은 안온하게 빛나고 흰옷을 입고 있었다.

 

두 수녀

시토 (트라피스트) 회 의 어느 수도원에 자매처럼 퍽 사이가 좋은 수녀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다 덕을 갖추고 있었다. 성당에서도 둘은 항상 나란히 앉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인 제르투르다는 가끔 침묵을 깨뜨려 제 동무 마르가리타에게 같은 과오를 범하게 하고 있었다. 그 후 제르투르다 수녀는 죽어 수도원 성당에 묻혔다. 그런데 밤기도때가 되면 동무 옆에 나타나서 노래를 부르고, 기도가 끝난 후 제단 앞에 가서 엎드리고는 사라졌다.

동료들은 너무나 놀라서 이를 총장에게 알렸다. 그랬더니, 이것은 홀림수나 또는 마귀의 장난인지도 모르니, 만일 또 나타나거든 수도원 인사로 서로 쓰고 있는 “천주께 감사하나이다” 하는 말을 시켜 보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같은 시간이 되자, 죽은 수녀가 또 나타났다. 마르가리타가 인사말을 하자, 그녀도 “천주께 감사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마르가리타는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또 무엇을 원하십니까?” 죽은 이는 대답하였다.

“당신과 함께 범죄 한 이곳에서 하느님의 공의를 배상하러 왔습니다. 아아, 나의 무서운 불의 고통, 특히 이루 말할 수 없는 혀의 괴로움…”

기도와 크나큰 희생이 그녀를 위해 바쳐졌다. 그랬더니 제르투르다는 연옥에서 구원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온천장의 머슴

성 대 大 그레고리오 교황은 <문답>이라는 책에서 다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직 성직자가 되기 전 청년 시절에, 로마의 부제 파스카스가 성인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이야기를 노인한테서 들었다. 그러나 교황 선거에 관한 싸움이 일어났을 때 파스카스는 반항자 편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장례 날 어떤 병자가 죽은 이의 옷을 만졌더니 곧 나았다.

얼마 후, 카루아 시의 제르만 주교는 의사가 아브르찌의 온천에 가라고 하여 거기 갔다. 그런데 그 온천장에서 제일 천한 일을 하고 있는 이가 그 부제 파스카스임을 알고 놀랐다. 파스카스는 주교를 보더니, “나는 반항자의 편이었기 때문에 이 온천에서 보속을 해야 합니다. 부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당신이 여기서 내 모습을 보지 않게 됐을 때는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으로 생각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제르만 주교는 파스카스를 위하여 기도했다. 며칠 후 그를 몹시 찾았으나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말한다. “성 세베리노는 강물 속에서 연옥 보속을 하였다”라고.

 

기이한 간호원

1629년 프랑스의 프랑슈 콩테 주 돌 시에서 어떤 연옥 영혼이 한 앓는 부인에게 나타나서 40일 동안 하루에 두 번씩 빠지지 않고 찾아와 충실한 종이 주인을 섬기듯 여러 가지 시중을 들었다. 병자는 너무나 고마워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17년 전에 네게 적은 재산을 남기고 죽은 백모 네로날드 코린이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또 성모님께 대한 신심의 덕분으로 구령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40일간 너를 보살피도록 허락해 주셨다. 만일 네가 성모 마리아의 성당 셋을 참배해 준다면 나는 이 40일이 지난 뒤에 연옥에서 구원된다.” 이 말을 들은 병자는 몹시 놀라 당황하였다. 속임수가 아닌가 고 여겼다.

“당신이 어찌 레오날드 백모님이시겠어요? 백모님쎄선 신경질이 심하시어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인내스럽고 친절하고 선할 수 있나요?”

“아아, 내 말을 들어 봐라. 17년 동안 연옥에 있으면 인내나 친절 같은 걸 배우기엔 넉넉하단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는 자니까 악덕을 하나도 가질 수 없단다.”

 

빚을 남긴 귀족

교황 베네딕도 13세는 어느 설교 중에서 다음 실화를 들려주었다.

재산이 있고 세력이 있던 한 귀족이 많은 부채를 남기 채 이승을 하직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전력을 다하여 간신히 그 빚을 다 갚았더니, 죽은 남편이 아내에게 나타나 온몸이 밧줄에 묶인 채 부르짖었다. “이 줄을 풀어 주오. 사랑으로 나를 풀어 주오.” 아내가 몸서리치면서 수원대로 해주자, 남편은 감사하며 말했다. “당신이 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나는 이 밧줄에 묶여 있는 서고를 받았던 것이오.”

성 프란치스코 회의 스테파노는 어느 날 밤 자기네 회의 한 죽은 이가 성당의 성가대석에 앉아 잇는 것을 보고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성가를 부를 때 알면서도 큰 부주의와 냉담으로 지냈습니다. 그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예로 보아, 내세에 보속을 하는 연옥은 모든 이에게 장소가 같은 것이 아니라, 벌의 종류와 하느님 뜻에 따라 다름을 알 수 있다.

 

연옥벌의 시간

이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대답을 하기란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 이승에서 우리는 내세에서의 시간의 성질, 고통의 정도, 보속과 벌의 균형 같은 것을 전혀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것이 셋 있다. 즉 첫째, 연옥벌은 10년을 넘지 않는다는 설은 1666년 3월 18일, 교황 알렉산더 7세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둘째, 성교회는 무한히 미사를 드리기를 허용한다 (교회법 1544). 셋째, 연옥에서 영혼의 보속은 경중이 있고, 또 그들을 도와 주는 우리의 열성의 정도에 따라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괴로움이 심하면 똑같은 시간이지만 여느 때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앓을 때의 하룻밤은 한 달처럼 길다. 또 내세에서는 시간을 잴 수 없기 때문에 잠깐 사이라도 여간 오랜 세월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성인들의 설에 의하면, 어떤 영혼은 10년, 20년, 어떤 영혼은 백 년, 천 년 혹은 세상 마칠 때까지 연옥에서 고벌 苦罰을 받는 것이다.

아내와 어머니의 모범인, 자기의 성스러운 모친 모니카를 존경하던 성 아우구스티노는 매일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도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30년간 어머니를 위하여 신자들에게 기도를 청하고 있었다.

성 베르나르도는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기 부친에 대한 염려와 분발을 늦추었다가, 총장 성 스테파노로부터 충고를 받았다.

성 루도비코 베르트란은, 자기 부친은 8년간 연옥에서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부친은 하느님의 열심한 종이어서 각가지 은혜, 특히 성인이 그에게 나타나서 같이 담화한 일까지 있던 사람이었다. 한편 그렇게 말하고 있는 아들도 18세기의 대 성인이었던 것이다.

돌 같은 마음에도 감동을 일으킬만한 부친의 대단한 고통을 보고, 성인은 힘을 다하여 8년간 시편과 묵주의 기도를 셀 수 없을 만큼 바치고, 엄한 대재를 지키고 피가 흐르도록 매질을 하고 미사를 드렸던 것이다. 기이하게도 이 성인의 기도를 언제나 잘 들어주시던 하느님께서는 8년 후에야 뛰어난 덕을 지녔던 그 부친의 영혼을 구원하셨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로마 11, 33-36).

성녀 데레사의 말에 의하면, 자기 수도원의 한 수녀는 채 이틀이 못 되게, 다른 한 수녀는 단 4시간 연옥에서 고생했다고 한다. 이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동안에 그들이 땅에서 나와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성녀는 보았다고 한다.

늘 연옥 영혼과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던 성녀 마르가리타에 의하면, 그녀가 잘 알고 있던 인망 있던 한 부인은 생애의 햇수와 같은 시간을 연옥에서 고생하게 되었다. 위험한 세속에 살던 이로서는 비교적 가벼운 보속이었으니, 예컨대 90세의 장수를 한 이라도 3개월간 연옥에 있어야 했다. 또 어떤 수녀의 부친은 딸의 기도가 필요 없이 곧바로 천국에 갔다.

 

브느와 수녀의 묵시

17세기에 프랑스의 동남방에 살다가 성녀가 된 브느와 수녀는 연옥 영혼에 대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각가지 묵시를 받았다. 그 중 몇 가지를 여기 들어 본다.

 

(1) 어떤 부인이 난산 難産의 무서운 고통 중에 죽었다. 그 동생은 언니의 구령을 걱정하며 브느와 수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수녀는 “고통 중에 인내한 표양으로 천국에 갔다”라고 대답하였다.

(2) 어떤 상인은 중량과 치수를 잴 때 좀 속였기 때문에 10년간의 연옥벌을 선고 받았다.

(3) 이웃 동네에서 그다지 옳지 못한 생활을 하던 어떤 부인이 죽었다. 그 딸은 어머니의 구령을 걱정하며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셨을까 하고 브느와 수녀에게 물었다. “임종 때에 당신 어머니는 완전히 통회를 했기 때문에 구령했다. 그러나 10년 간 연옥에서 고생해야 한다”라고 수녀는 대답하였다.

(4) 어떤 과부의 남편은 4년간 연옥벌을 받아야만 했다. 과부는 가난하여 다른 이에게 기도를 청할 수 없어 끊임없이 열심으로 묵주의 기도를 바쳐 남편의 영혼을 구하였다.

(5) 브느와 수녀는 어느 날 4년 전에 죽은 이를 만났다. 그는 수녀에게 인사를 하고, 살았을 때는 악마의 손에서 구해 주고, 사후에는 연옥에서 구해 준 것을 감사하며 좋은 향기를 풍기며 사라졌다.

(6) 성모께 대한 큰 신심을 가지고 있어 매 토요일에 성모 성당을 참배하고 있던 이웃 남자는 성인처럼 죽어서 단 6개월의 연옥벌을 선고 받았다. 같은 신심과 선행을 한 그의 아내는 7개월 간 연옥벌을 선고 받았다.

(7) 복녀의 모친은 주일에 아이들을 지나치게 치장시키느라고 가끔 미사에 늦었기 때문에 3년간의 연옥벌을 선고 받았다.

(8) 성모 마리아께 깊은 신심을 가졌으며, 가난한 이를 도와 주다가 방탕하여 구령이 의심스러웠던 신분이 높은 사람도 연옥에서 단 1년간 고생했을 따름이었다. 이로 보면, 죄를 없애는 데는 애긍이 대단히 효력 있다는 것과,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죄인은 임종 때에 그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가프 시의 마리용 주교는 마지막 때를 당하여 온전히 천명 천명에 맡기지 않고 이승을 떠났기 때문에 연옥에 1년간 있었다.

(1) 신심 깊은 어떤 부인은 고해 신부에게 순명하지 않았으므로 7년 연옥벌을 선고받았다.

(11) 어떤 부인은 여러 가지 망령된 판단을 한 것을 보속하기 위해 10년, 다른 이는 인내하지 않은 죄로 3년 동안 연옥에 있었다.

(12) 한 방직 업자 紡織業者 는 자기가 맡은 실꾸리의 수를 엄정히 장부에 기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고통 받았다.

(13) 두 사람의 가장은 아이들을 너무 제 맘대로 풀어놓고 교육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50년간 연옥에 있었다.

(14) 도미니코회의 한 수도자는 성인과 같은 최후를 마치고 단지 3일만 연옥에 있었다.

(15) 한 부인은 허영심의 보속으로 6개월간 연옥에 있었다.

(16) 한 사제는 여러 가지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7개월간 연옥에 있었다.

(17)어떤 부인은 인내하지 못한 죄의 보속으로 9개월간 연옥에 있었다.

(18) 불쌍한 가난뱅이는 마지막 병을 앓을 때 천명에 만족하였기 때문에 단지 한 순간만 연옥에 있었다.

(19) 어떤 지위 높은 사람은 30년간 옳지 않은 삶을 산 후 사제를 청했으나 이미 늦어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임종 때 극진히 죄를 통회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연옥에서 5백 년 동안 보속해야 한다고 선고를 받았다. 너무나 위험해서 흉내 낼 수 없는, 그러나 감동적인 이 예는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즉 대죄인의 구령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연옥에 있다

1896년 벨기에의 데르몽즈 시에서 바오로 신부는 고덕 高德을 닦고 죽었다. 그의 전기는 진실하고도 이상한 사건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 중 연옥에 관한 몇 가지를 다음에 적는다.

(1) 1894년 데르몽즈 시에서 어떤 이는 무서운 사변 事變의 희생자가 되어 죽었다. 바오로 신부는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은 무 종교자로 한 번도 성당에 간 일이 없다. 그러나 죽는 순간에 한평생 지은 죄의 배상으로 자기 생명을 하느님께 바쳤기 때문에 지옥에서 구함을 받고 연옥에 가게 되었다.”

(2) 우렐이라는 마을의 한 부인이 바오로 신부에게 와서 호소하였다. 그것은 어떤 탈혼 脫魂   상태가 된 사람이 조금 전에 죽은 자기 부친이 연옥에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열심한 신자이며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맡기고 죽었기 때문에, 아직 연옥에서 고생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오로 신부는 부드럽게 대답하였다. “왜 당신은 그것을 안 믿는지요. 정녕 당신 부친은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토록 하느님의 섭리에 완전히 맡겼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여간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당신 부친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많은 영혼은 조금도 고통 받지 않고 오로지 천국만을 기다리고 있고, 또 다른 많은 영혼은 성당에서 성체 대전에 조배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보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어느 무종교 신문을 읽고 있던 자가 죽었다. 그 아내는 그걸 안 읽었지만 여전히 그것을 받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죽었다. 바오로 신부 말에 의하면, 이 부인은 단지 집에 무종교 신문을 들여놓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오래 연옥에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4) 어떤 부인이 오랜 병으로 죽었다. 그 딸이 바오로 신부에게 물었다. “우리 어머니는 두터운 신앙으로 저와 같은 고통을 참아 받았으니까 바로 천국에 가셨겠지요?”

“당신 모친은 자기 자녀를 하자는 대로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천당에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기에 지금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5) 앙베르 시의 한 처녀가 조금 전에 죽은 자기 오라버니를 위하여 기도를 청하였다. 바오로 신부는 말했다.

“당신 오라버니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이번 토요일에 연옥에서 구원됩니다. 성모님 말씀에 의하면 매 토요일에 친히 연옥에 오십니다.”

“신부님, 성모님께서 친히 신부님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첨례날마다 연옥에 오시어 많은 영혼을 구하시고 또 다른 이를 위로해 주십니다.”

 

두 수사

착한 두 수사가 있었다. 한 사람은 급환에 걸려서 눈을 감기 몇 시간 전에 발현을 보았다. 수호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확실히 구령은 한다. 그러나 너를 위해 미사 한 대가 바쳐지기까지 연옥에 있어야 한다”라고 알려주었다. 병자는 곧 벗을 불러 위의 사정을 알려 주고, 죽거든 즉시 미사를 드려 달라고 청했다. 벗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기로 약속했다.

이튿날 병자는 죽었다. 그 벗은 한 때를 지체하지 않고 곧 제의를 입고 제단에 올라가서 열심으로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마치고 제의실에 돌아와 제의를 벗는데, 죽은 벗이 빛에 싸여 나타나서, 그러나 불만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형제여, 자네의 우정은 어떻게 되었나? 연옥불 속에 1년이 넘도록 나를 내버려 두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고 나를 구해 줄 한 대의 미사마저 오늘까지 미루다니!”

벗은 놀라서 말했다. “자네야말로 나를 놀라게 하는군. 자네가 눈을 감자마자 나는 곧 약속을 이행하고 방금 제단에서 돌아온 길일세. 자네 영혼이 육신을 떠난 지 아직 한 시간도 못 되지 않는가.”

어떤 수사는 죽은 후에 나타나서 연옥의 사흘을 10년보다 길게 여겨진다고 하였다.

또 어떤 수사는 밤 12시부터 날새기까지 연옥에 있었는데 150년간 고통 받은 것으로 믿고 있었다.

연옥 고통을 경시 輕視하던 어떤 이는, 환상이겠으나, 하여간 갑작스레 연옥에 던져져서 15분 후에 부르짖었다. “도와 주세요, 도와 주세요. 수년 전부터 여기서 고생하고 있습니다”라고.

성 안토니오의 말에 의하면, 오랫동안 앓고 있던 회개한 한 죄인이 하느님께 죽기를 청하였다 그랬더니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말했다. “네가 지금 죽어서 3일 연옥에 있든지, 또는 2년간 이 병을 참아 받고 바로 천국에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 병자는 주저하지 않고 연옥을 원했다. 얼마 후에 천사가 거기 가 보니 병자가 말했다. “사흘만 있으면 될 이곳에서 나는 벌써 몇 년이나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말했다. “아니, 그대는 여기 온 지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어리석은 청을 했습니다.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거기서 가장 괴로운 병을 몇 해라도 즐거이 참아 받겠습니다.”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병자는 연옥의 비상한 고통을 기억하고 그저 인내했을 뿐만 아니라, 크나큰 기쁨으로 먼저의 병을 참아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비록 비유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연옥에서의 시간의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흥미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연옥에 가기만 하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괜찮다. 언젠가는 천당에 갈 수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신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를 읽어 보고도 아직도 그런 이치에 맞지 않는 미련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했다.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다.”

 

연옥 괴로움의 등급

어려운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얕은 지식으로는 분명하 ㄴ답변을 할 수 없다. 정직하게 고백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상상은 못 할 것도 없다.

우선 연옥을 아주 지옥 같다고 하는 것은 성교회에서 금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의로우심으로 천국에 갈 영혼을 정화하실 때도 역시 한없이 인자하진 분이다. 또 많은 영혼은 육신을 떠나기 전에 죄 보속을, 온전히는 아니라도 대부분 할 수 있기 때문에, 연옥에서 해야 하는 보속은 각기 다르다.

무릇 실고 失苦, 즉 잠시 동안 천주를 뵈올 수 없다는 일은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에 대하여 예외가 없다. 연옥 영혼이 몹시 천국을 희망하고 있음이다. 이 고벌의 도를 조금도 덜어 주지 않는 이 괴로움은 도저히 말로써 형용할 수가 없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불의 고통이다. 이 불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죄의 종류와 회수에 따라서 각자를 슬프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에 정화되는 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1) 성직자, 수도자, 또 세속에 산 자라도 일심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에 진력하는 성인 같은 자, 그들은 십계명과 교회 법규을 지키고, 도 자기 본분을 충실히 완수하고, 무엇보다도 대죄를 두려워하고 피하였으나, 부주의나 의지의 약함으로 때대로 소죄에 떨어진다. 복음의 여러 가지 권고를 열심히 지키고 또 하느님의 영광과 타인의 구령을 위해서만 생활하였던 것이다. 이 선택된 영혼은 불의 고통을 조금밖에 안 받는다.

성 벨라르미노는 거기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의 고통은 거긔 없다고 여겨질 만큼 가벼우리라. 그들의 이승에서 받는 괴로움 이상으로 고통 받는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2) 이중에 드는 신자는 주요한 자기 본분을 지키며 대죄에 떨어지는 일은 드물다. 또 이 재앙에 부딪칠 때 진실한 통회로써 그것을 뉘우친다. 그러나 소죄를 피하기에 그다지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 정의, 애덕, 오관의 근신 따위를 습관적으로 거스른다. 만일 죽기 전에 자기네의 냉담을 기워 갚지 않는다면, 연옥의 정화의 불은 그들에게 엄하고 또한 무서우리라.

(3) 여기에 드는 신자는 게으르고 변덕스럽다. 기도를 게을리하고 소홀히 하며, 가끔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며 저의와 결백을 깨뜨린다. 그들은 주의해야 한다. 남에게 끼친 손해를 발리 기워 갚고 고행과 회개를 하지 않는다면, 임종 때에 죄 사함을 받은 후에도 하느님의 공의에 대한 무거운 부채를 보고 놀랄 것이다. 그들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는 복수하는 것이다.

(4) 이 부분에 대하여 연옥불은 실로 무서울 것이다. 임종 때에 회개한 자, 방탕하게 일생을 지내버린 자, 일부러 하느님을 떠나고 혹은 거슬러 생활한 자, 일생의 대부분에서 무엄하게도 하느님의 계명을 깨뜨리고 또 중대한 본분을 짓밟은 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말미암아 그들은 최후의 일순간에 회개하였다. 그러나 보속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런 자들의 괴로움은 아아 무서우리라.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듯 그들은 불의 不義를 마셨기 때문에, 연옥에서 불을 마셔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 의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하리라” 는 말은 그들에게 적절하다.

하느님의 무서운 공의, 사함을 받아도 그토록 엄한 보속이 필요한 대죄의 중함과 소죄의 악함, 악업의 더러운 진창 바닥에서 성인을 가려내어 연옥에서 잠시 깨끗하게 한 후 그들 앞에 천국문을 여는 하느님의 깊은 자비, 아아 오묘한 현의 玄義, 신비의 신비다.

 

 

6. 연옥 영혼의 기쁨

 

연옥에 대해서는 주로 그 혹독한 괴로움만 말한다. 거기서의 기쁨을 설명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렇지마는 이 문제는 죽은 이를 위해서나 산 이를 위해서도 훌륭한 교훈이 되는 것이다.

 

성화 聖化의 은총

우리는 이승에 있을 동안에 사랑 받음직한 자인가 미움 받을 만한 처지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연옥 영혼은 상존 은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의심 없이 하느님 뜻에 맞음을 알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부친이 자기 아들 가슴에 경건하게 입맞추고 있었다. 그것은 성세로 말미암아 이 천진한 가슴이 성인의 거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루이의 모후 블랑슈 드 카스틸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의 아이들 이마에 입맞추기를 퍽 좋아하였다. 왜냐하면, 그 이마에 성녀 엘리사벳이 입맞추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영세 때 하느님의 입맞춤으로 거룩하게 된 어린이의 영혼이 넋을 잃을 만큼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면, 한평생 스스로 은총에 따라 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불타면서 이승을 떠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은 어떻겠는가. 연옥 영혼은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을 반사한다 그 충실한 거울이다.

연옥 영혼 중 가장 신분이 낮은 자라도 하나의 훌륭한 세계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 하느님의 영광은 영원히 나타난다. 연옥에 있는 제일 못난 영혼이라도 그것만으로도 물질 세계보다 가치가 있다.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는 자기 고해 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님, 만일 신부님께서 상존 은총을 갖추고 있는 한 영혼을 볼 수 있다면, 신부님께서는 자기 구령을 위하여 온갖 고통과 치욕과 가난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고 또 보존하기 위해서는 한 번이 아니라 천 번이라도 죽기를 원할 것입니다.”

연옥 영혼은 청정 결백한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흡사 천사와 같은 것을 알고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또 사람을 받은 죄의 잠벌을 받기에 몹시 괴로워함은 의심 없는 일이지마는, 즐거이 이 고통을 참아 받으며 순명과 인내로써 안심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불타서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순교자는 연옥 영혼의 상징이다.

괴로운 감옥에서도 사랑과 상존 은총으로 말미암아 연옥 영혼은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다. 그 고통으로 자기네는 천국에 맞갖는 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몹시 갈망하는 것이다.

제노아의 카타리나는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연옥 영혼에게 비상한 영향을 미치게 하여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저들 안에 일으킨다. 이 크나큰 즐거움이 연옥 영혼의 고통을 조금도 덜어 주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로 그들의 즐거움은 점점 더해가고, 또 방해가 되는 잠벌이 다 없어짐에 따라서 이 교제는 친밀해지기 때문에 연옥 영혼은 비상한 즐거움과 비상한 괴로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영복 永福 의 확정

“관 뚜껑을 덮어 봐야 결과를 안다.” 이승에 있을 때부터 나는 구령할 거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1 코린 10, 12) 라고 성 바오로가 말한 바를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즐거움과 함께 죄로 그 사랑을 잃는다는 정당한 두려움을 항상 품고 있어야 한다.

성녀 데레사는 말했다. “주여, 제가 오늘 당신을 거스를지도 모릅니다. 부디 저를 믿지 말아 주십시오. 이런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굳센 은총으로 저를 도와 주십시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에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너는 구령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확정되었다”는 묵시를 받았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그는 일 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아무것도 원할 것이 없고 마음은 즐거움의 바다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께 감사하나이다” 라고 되풀이하였다.

연옥 영혼의 기쁨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 큰 것이다. 제 구령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일생을 보내었건 어떤 죄를 범하였건 현세를 떠나기 전에 다 사해졌기 때문에 조만간 천국에서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 성인과 함께 온갖 덕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뵈옵고 끝없이 사랑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유명한 신비 신학자 페버 신부는 말한다. “현세의 덧없고 변하기 쉬운 즐거움을 얻기보다 나는 확실한 거처인 연옥의 가장 낮은 자리를 좋아한다.”

 

거룩한 교제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현세에서 고상한 마음을 가진 이, 정직한 사람, 덕을 갖춘 어진 이들과 만나기를 누구나가 원한다고 하면, 하물며 착함과 거룩함의 장소인 연옥에서야 더욱 어떠하랴. 한 집안, 한 동네, 한 나라가 모두 일치하여 산다면 아주 즐거울 것이다. 그러면 연옥은 어떤가. 거기 있는 선인이 서로서로 위로해 주리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나중에 들어간 영혼은 먼저 와 있던 이에게 싸우고 있는 교회의 새 소식을 전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설에 의하면 “인간계에서 자기네를 도와주기 위하여 기도와 선업을 하느님께 바친 형제들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연옥 영혼은 의심 없이 천사들, 특히 자기 수호 천사의 방문을 받는다.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는 말한다. “한 영혼이 연옥에 내려가면 그 수호 천사는 안에까지 안내한다. 그리고 영혼이 깨끗해지기까지 문밖에 서서 가끔 그를 찾아보고 위로해 준다. 하느님의 의노를 풀기 위하여 살아 있는 이의 기도와 선업을 모아서 하느님께 바치고 또 괴로워하고 있는 영혼에 향응 饗應 하는 것이다.”

도 수호 천사는 생존자에게 기도를 하고 미사를 바치며 고행하라는 등으로 권고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연옥 영혼은 상상 이상의 괴로움과 함께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상기하고 큰 위로를 받아야 한다. 아직 천국의 완전한 영복을 얻지 못했을망정, 불완전하기는 하나 이승에 있는 모든 즐거움보다 더한 즐거움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히 위로를 받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는 영혼에게 동정을 기울여야 한다. 한시 바삐 저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

제노아의 카타리나는 말한다. “천국에서의 성인들의 복락을 제외하고는 연옥 즐거움에 비길 수 있는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현세보다 연옥

이로써 본다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연옥의 관념으로써 우리는 두려움보다 위로를 받아야 한다”라고 한 말은 참되다. 두 가지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해 보자.

 

성 필립보 네리와 왕자

16세기 로마 시몬 가 家 의 왕자 바오로가 여덟 살에 죽었다. 그 당시 네리의 성 필립보는 빈자와 병자를 자비로이 돌보아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크게 감복하고 있었다. 바오로는 언제나 성 필립보에게 고해 성사를 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왕비는 성 필립보에게 임종 때 있어 달라고 청했다. 성인은 “그때는 알려 주십시오” 하고 헤어졌다.

그날 밤 병세가 대단히 나빠졌다. 날이 새기 전에 심부름꾼이 성인을 부르러 갔다. 마침 미사가 시작되었기에 미사를 끝마치고 성인은 곧 아이에게 갔으나 이미 한 시간 전에 아이는 죽었다는 것이었다.

성인은 아이의 손을 잡고 슬픔에 겨워 침대 곁에 꿇어 앉아 기도하였다. 그러자 아이는 홀연 눈을 뜨고 성인에게 말했다. “아, 신부님이세요?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고백 때 죄를 잊어버렸었어요.’ ( 이 말을 들은 부모 형제의 기쁨을 상상해 보라) 잠시 후 아이의 고백을 듣기 위하여 신부만 혼자 남았다. 고해 성사가 끝나고 성인은 모든 이 앞에서 아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제 바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 봅시다.” 성인은 아이에게 물었다. “바오로야, 너는 우리하고 같이 있고 싶으냐, 아니면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신부님,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성인은 모친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오로는 당신 뜻대로 할겁니다.” 두터운 신앙의 소유자인 모친은 주저하기 않고 대답했다. “바오로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곳에 가 있다면 억지로 붙들지는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아이는 곧 눈을 감고 다시 죽었다.

이 아이는 소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옥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에 돌아오기보다는 거기 있기를 원하였다. 혹 여러분은 ‘그건 천진한 어린이였으니까 연옥은 그다지 괴롭지 않았겠지” 하고 생각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의 의혹을 푸기 위하여 더욱 감동적인 실례를 말씀 드리고자 한다.

 

성 스타니슬라오와 지주

폴란드의 옛 서울 크라코프의 주교 성 스타니슬라오는 1079년 잔인한 볼레슬라오 왕 때문에 순교하였다. 그 수년 전의 일이었는데, 주교는 “교회를 위하여 어떤 토지를 빼앗았다”고 고소를 당했다. 주교는 증인 앞에서 대금을 치렀지마는 그 영수증을 받아 두지 않았던 것이다. 판 사람은 베드로라는 그 고장의 지주였는데, 그는 3년 전에 죽었다. 증인은 살아 있지만 주교의 대적인 볼레슬라오 왕이 두려워 침묵하고 있었다. 죽은 이의 상속자인 조카들도 모두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국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함께 주교를 고소하였다. 그래서 이 성인은 “남의 땅을 빼앗았다”는 선고를 받게 되었다. 국왕은 전국의 재판관을 거느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으므로 이 선고는 전국에 알려진 것이다.

그래서 주교는 3년 전에 죽은 지주 자신을 증인으로 출정시키기 위하여 3일의 말미를 청했다. 심한 조소를 당하며 이 청은 허락되었다.

대재와 기도로 3일을 보낸 후 성인은 성복을 입고 성직자와 군중에 에워싸여 묘지에 가, 지주의 무덤을 파고 그를 부활시켜서 재판소로 데리고 왔다. 지주는 사실을 진술하여 증인을 부끄럽게 하고 또 자기 조카들을 몹시 비난하였다.

재판소에서 나온 후 성인은 베드로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몇 해 동안 이승에서 지내고 싶다면 나는 하느님께 그걸 청해 보겠소” 하자 베드로는 “나는 연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현세에서 구령 때문에 불안해 하느니 거기 돌아가서 고통 받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또한 성인께 빨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를 청했다. 그리고 성인과 군중에 에워싸여 묘지에 돌아가 사람들의 기도를 청하면서 무덤에 몸을 누이고 다시 죽었던 것이다.

 

 

7.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신심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만덕 萬德을 갖추고 계신다. 그러나 눈물의 골짜기인 현세에서는 다른 덕, 예컨대 ‘공의’ 보다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우리로 하여금 이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느님 뜻에 맞는 일이다. 왜냐하면 한시 바삐 천국문을 저들 앞에 열어 주는 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도와 드리고 그 협력자가 되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는 “거룩해진 한 영혼은 전세계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이 된다”라고 말했다. 연옥 영혼을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은 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할 자를 늘이는 일이다.

이렇게 한다면 심판 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 7)라는 말씀은 즐겁게 우리 귀에 울리게 되리라.

성 비안네는 말한다. “지극히 미소한 자인 우리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음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교회의 가르침

죽은 이의 운명에 대하여 교회는 우리에게 명백하고도 위안이 되는 일을 가르치고 있다. 즉 “죽은 이의 생명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영혼은 한때 육신과 헤어졌다가 세상 마칠 때에 다시 결합하여 영원히 하느님의 선미 선덕을 바라보는 것이다” 라고.

또 교회는 연옥 영혼을 도와 주는 데에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미사 성제, 성무 일도, 장례 등 여러 가지 예식으로써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또 교회는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대단히 유력한 보호자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즉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 천사의 으뜸인 성 미카엘, 연옥의 주보인 성 요셉, 하늘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기도와 고업을 하느님께 전달해 주는 것이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말한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에 들어갑니다. 이승에서 당신들에게 말하지 못한 것을 나는 천국에서 당신들에게 깨닫게 해 드리겠습니다.”

 

성인의 권고

인류 중에서 선발된 성인들은 죽은 이의 영혼을 도와 주기 위하여 항시 분발하였다. 구약 시대부터 그러하였고, 특히 유럽의 전란 후에는 도처에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고업이 바쳐지고 있다.

19세기의 유명한 수사 미레리요 신부는 죄인의 회개와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전심 전력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기와 마찬가지로 전교에 종사하고 있는 벗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무엇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나요? 천국을 위해서겠지요.”

“그렇고말고요.”

“나는 천국을 위해서는 일 안 하오.”

“그건 또 어째서요?”

“나는 연옥을 위하여 일하지요. 그리고 확실히 천국에 들여지리라 믿소. 나의 고행, 기도, 은사 같은 것은 모두 다 연령을 위하여 바칩니다.”

우리도 이 훌륭한 신부를 본받자. 구원된 영혼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천국에까지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요체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연옥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가난한 이에게 자선하는 것보다 더 고상하고, 교회의 신심으로서 이보다 적합한 일은 많지 않으리라.”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 중에는 자연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초자연적이다. 그들의 영혼의 고통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다만 신앙으로 이를 알 뿐이다. 사람도 우리의 기도와 고행을 모른다. 그것을 아는 이는 하느님뿐이다.

유명한 신부 페버는 말한다.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초자연의 중심이다. 다른 신심은 모두 그것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 드 메스트르는 말한다. “연옥은 상식 常識 중의 하나이다. 제시로만이 아니라 이치로도 알 만한 진실한 조항이다.”

 

크나큰 위안 – 오자남 의 편지

19세기의 이름 높은 문학자요 자선가였던 오자남은 모친의 죽음을 당하여 어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슬픔에 겨워 나는 위로를 받을 수 없었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일이 지나가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곁에 계신다고 깨달으니, 옛날 그 발소리와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무슨 좋은 일을 했을 때도 어머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눈물을 흘리더라도 그 속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평안함을 누립니다. 내가 선을 행할 때나 가난한 이를 도와 줄 때는 어머님이 일심으로 사랑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어머님의 미소를 봅니다. 기도할 때도 어머님과 함께 십자가 아래 무릎 꿇었던 옛일을 회상하고 그 기도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아들을 만나러 간다

아들은 임종이 다가오자, 이때까지 참아 왔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불쌍한 어머니는 침대 곁에 앉았고, 부친은 슬퍼하면서 방안을 왔다 갔다 거닐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하느님은 어찌하여 이 어머니 마음이 큰 상처 이도록 그냥 두시는걸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같은 방의 같은 침대에서 다 죽어 가는 이 불쌍한 어머니의 임종에 가서 여러 가지로 위로하였다. 그러자 이 어머니는 “신부님, 나는 아들을 만나러 갑니다”라고 말하고 조금 후에 죽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2년 전에 몰랐던 수수께끼를 그제야 풀었던 것이다. 즉 “인간의 목적은 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은 현세에서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지 않는다. 그리고 각가지 ‘공로’를 쌓게 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즐기게 하시는 것이다” 라고.

 

내 딸은 하느님을 보고 있다

‘투르의 성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뒤퐁은 19세기 중엽, 아내를 잃고 외딸 브리에와 함께 투르 시에서 선업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딸은 열 다섯 살이 되었다. 본시 타고난 우아한 덕에다가 두터운 신앙을 더하였으나, 그 쾌활한 성격은 도리어 부친의 걱정거리였다.

“아아, 만일 저 애가 수녀가 되고 싶어한다면…” 부친의 최상의 소원은 이것이었다.

어느 날, 부친은 나이 많은 수녀와 딸의 장래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이 귀여운 아이의 구령을 위하여 만일 수도원 하나를 지어야 한다면 나는 내 손으로 땅을 고르고 돌을 등에 져서라도 갖다 나르지요…” 딸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부친의 걱정은 더할 뿐이었다.

“주여, 만일 이 애가 장차 바른 길에서 멀어질 양이면 세상의 덧없는 손에서 그 애를 빼앗아 당신 곁에 불러 주시기를 원합니다.” 부친은 자주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 후 딸은 감기가 들었다. 각가지로 약을 썼지만 병은 점점 중태에 빠졌다. 부친은 여러 수도원에 딸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를 청했으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았다.

노자 성체 路資聖體 를 영한 후 딸은 곁에 있는 수녀에게 “수녀님, 어느 피정 때, 이 세상의 모든 보배나 보석 같은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비한다면 마치 돌과 같다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아, 참으로 이 세상 보배가 무엇이겠습니까? 만물의 조물주이신 예수님만이 가치 있습니다” 라고 뜨거운 신앙으로 말했다. 침대 곁에 꿇어 앉아 기도하고 있던 부친은 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얘, 이 크나큰 위로를 받고 기쁘겠구나. 너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겠지?” 딸은 조용한 목소리로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만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부친이 말하였다.

“너는 내게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천국에서 하느님 곁에 있고, 나는 이승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다.그러니까 둘이 한데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개의 장막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숨겨 둔다. 네 장막은 조금 후에 찢어지고, 내 것은 나중에 찢어지겠지. 그때야말로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단다.” 임종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부친은 딸의 손을 잡고 감격에 넘친 신앙으로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여, 이 세상을 떠나라. 하느님을 거스르는 현세에 머물지 말고 천국에 가라. 죽음은 생명이요 세속은 죽음이다. 하느님 곁에 가서 ‘우리는 오로지 당신 뜻대로 따르겠나이다’라고 말씀드려라. 진정 내 마음은 으스러질 만큼 슬픔에 잠겨 있다. 그것은 나는 지금 산고 産苦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천국을 위하여 너를 낳는다. 하느님 대전에서 먼저 나와 네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다오. 그리고 친척과 너를 가르쳐 주신 수녀님들, 또 너를 갖가지로 돌봐 주신 분들과 네 동무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그리고 잠시 묵묵히 있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네가 어릴 적부터 헌신적으로 돌봐 주시고 갖가지로 치료를 하셨다만 헛일이 돼 버린 존경하올 이 의사 선생님을 위해서도 기도하여라” 라고 말했다. 딸은 말없이 듣고 있었으나, 깊이 감동된 듯이 끄떡이었다. 모두가 눈물에 젖었다. 의사도 감동되었다. 그는 아무리 애써 봐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슬픈 경우에 부친을 위로하려고 그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곁에 서 있었다.

죽음의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 부친은 여전히 안온한 얼굴로 열심히 기도하였다. 숨이 끊어졌을 때 부친은 천사가 아닌가 싶은 표정으로 의사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내 딸은 하느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자연적 기쁨에 충만하여 마니피캇 (Magnificat, 성모의 감사 노래)을  외웠다. 어떤 이는 이를 보고 상식을 벗어난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의사는 신앙의 눈으로 보고 몹시 감동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야말로 신자의 이상입니다”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내 딸은 하느님을 보고 있다”는 두터운 신앙의 절규를 하면서, 부친은 눈물로써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 이 아름다운 슬픔을 전하며 말했다.

“우리는 희망 없는 자처럼 슬픔에 잠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을 따르고, 마침내 천국에서 함께 있음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내 딸은 그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어찌 슬퍼하겠습니까.”

딸을 관에 넣기 전에 부친은 팔짱을 끼고 그 옆에 섰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망자의 얼굴을 보자 부친의 얼굴은 갑자기 변하고 북받치는 눈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하고 눈물에 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자칫하면 질 뻔했어. 그러나 이제는 살아 있을 때보다 내 딸은 더 가까이 있다. 하느님을 가리고 있는 장막이 내게서 찢어지면 볼 수 있겠지.”

그때부터 부친은 하느님의 섭리에 완전히 맡겼다. 2층에서 관을 내릴 때 이 훌륭한 신자는 관에 입맞추고 거듭 말했다. “귀여운 딸아, 잘 가거라. 있다가 만나자.”

기도하러 망자 곁에 온 사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부친은 말했다.

“이 귀여운 아이는 세속과 싸워 이길 작정이었지만, 질까 봐 도망을 쳐서 이겼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정원사처럼 당신 정원에 내려오셔서 이 아름답고 결백한 꽃을 보시고 그가 폭풍에 꺾이기 전에 꺾어서 천국에 들이신 것입니다. 내 슬픔은 큽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 모든 쾌락보다 더한 즐거움을 내 심중에 느끼고 있습니다. 딸은 천국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지금 거기 가 있습니다. 아비로서의 나의 의무는 수행되었습니다.”

관을 무덤에 내려놓을 때 부친은 그 위에 십자 성호를 긋고 벅찬 감격과 그러나 한결같은 훌륭한 신앙심으로 말했다. “귀여운 아가, 잘 가거라, 천당에서 또 만나자.”

아아, 죽음은 다만 낮잠에 지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던 시체가 태양처럼 빛날 때가 온다. 죽은 이와 우리의 인연은 안 끊겼다. 우리는 항상 이를 돕기 위하여 기도하면 된다.

 

안심할 수 없는 최후

회개할 겨를이 없이 죽는 사람의 구령은 어떻게 될까? 이는 우리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마음가짐 하나만으로도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에 넉넉하다.

단테는 <신곡 神曲>에서 말한다. “모기 눈물만큼의 눈물로도 지옥에서 영혼을 구해 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니까 성 바오로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로마 4, 18)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 위에 일생 동안 자연과 초자연의 은혜를 비처럼 내리셨다. 그 최후 순간에는 구속 사업이 헛되지 않도록 전보다 한층 더 힘을 기울여 이 불쌍한 영혼을 은총으로 비추시는 것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현세를 떠나 영원하신 심판자 앞에 나아갈 때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환상을 본다”고 하였다. 이때 사람은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가 되면 이제까지 회개하기를 방해하던 육욕, 편견, 체면 같은 것은 아주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신의 배은 망덕을 깨닫고 완전한 통회를 하여, 전날의 대죄인도 돌연 하느님의 사랑스런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른편에 못박혔던 도둑의 회개는 그 확실한 증거이다.

사람이 임종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 함은 성인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성 그레고리오의 백모 타르실라는 임종 때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돌아가시오. 방금 예수님이 나를 마중 오셨습니다.”

유명한 클루니 수도원의 수사 투르킬은 임종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온순한 무리를 보았다”고 하며 숨을 거두었다.

같은 클루니의 수사 카르디날 마티아는 임종을 당하여 “나는 이 밤에 죽은 이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전에 나아가 성모님을 보았습니다. 나는 발 밑의 자리를 얻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영원히 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성녀 제르투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일생 중에 때때로 나를 기억한 자나 혹은 선업을 한 자에게는, 나는 그 임종 때 나타나서 한없는 나의 친절과 사랑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마음 속에 통회의 정을 일으켜 구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아무리 구령이 의심스러운 경우일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기도함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에 의합하는 일이다.

심장의 고동이 멎고 호흡이 끊어질 때가 육체와 영혼이 갈리는 때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겉으로는 아무런 ‘표’도 없다 할지라도, 인체 조직 속에 생명은 남아있다. 즉 숨은 생명은 긴 병을 앓고 난 뒤라도 적어도 1시간, 특별한 사변이나 즉사 때는 3시간에서 18시간, 또 때로는 수일간 계속된다. 그러니까 죽은 이 곁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이 동안 잠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좋다.

 

철교에서 수면까지

어느 날 한 귀부인이 슬퍼하면서 성 비안네에게 위로를 받으러 왔다. 그의 남편이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기 때문이다. 신부는 자비스런 눈으로 이 부인을 바라보고 영감에 싸여 그에게 말하였다. “철교의 난간에서 강물까지의 거리는 길었습니다. 당신 남편은 뛰면서 완전한 통회를 했고 지금 연옥에 있습니다. 부인,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기도하십시오.”

 

성모께 바친 꽃

어느 날 성 비안네 신부에게 낯선 부인이 울면서 찾아왔다. 그리고 “내 남편은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종교 본분을 게을리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급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구령이 의심스러워 무엇보다도 그게 슬픕니다” 라고 말했다. 신부는 그녀를 위로하여 말했다. “그렇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부군께서 5월의 매주일, 성모님께 꽃다발을 바치던 일을 잊었습니까?”

부인은 깜짝 놀랐다. 정말 그렇지! 이 5월에 남편은 주일마다 교외에 산보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반드시 길가의 꽃을 꺾어 와서 예쁘장한 꽃다발을 만들고 그걸 자기 집 성모상 앞에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걸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자기도 벌써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비안네 신부님이 아실까 하고 눈이 둥그래져서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신부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열심한 기도를 들어 허락하시어, 부군께서 꽃다발을 성모님께 바치고 공경하셨기 때문에 임종 때에 통회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령에 대해서는 염려 없으나, 빨리 연옥에서 구해 내기 위하여 기도와 선업을 하십시오.”

 

순명의 갚음

어떤 신부는 자기 부친과 형이 외인처럼 생활하는 것을 몹시 슬퍼하여 특별히 죄인의 구령을 위하여 힘쓰는 수도회에 들어갔다. 얼마 후에 사랑하는 부친과 그 형은 여행 중 배가 파선되어 익사했다. 이 신부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구름에 휩싸였다.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고행, 선행을 하는 외에는 조그마한 마음의 위로도 얻을 수 없었다.

시일이 흘렀다. 그 동네의 어떤 병원에 다 죽어 가는 병자가 하나 있었다. 딴 신부가 몇 사람이나 불려 갔으나 병자는 그 권면을 듣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까 그 신부가 불려 갔다. 가 보니 죄 사함을 받기를 거부하는 그 병자는 죽었다고 생각한 자기의 형이었다. 그러나 병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신부는 병자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남인 것처럼 하고 마지막 준비를 권했다. 병자는 기진한 목소리로 간신히 “부친은 바다에 빠졌지만 나느니 이러이러하게 구조되었다”라고 거듭 뇌었다. 그러나 선종 준비를 하려 들지 않고 성사 받기를 거절했다. 신부는 슬퍼하면서 수도원에 돌아왔다.

신부가 수도원 문에 들어서자마자 원장은 그를 보고 말했다. “지금 어느 동네의 묵상회에 가려던 참인데, 모 신부가 급병이란 전보가 왔소. 내 대신 강론을 좀 해주시오.”

순명 서원을 한 그 신부는 마음의 번민을 돌보지 않고 머리 숙여 승낙의 뜻을 나타내고 자기 방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엎디어 주님의 발에 입맞추며 눈물과 함께 형의 회개를 기도하여 이 비통을 희생으로 바치고는 짐을 챙겨 출발 하였다.

그런데 그 동네에 도착하여 교회에 들어가니, 지금 곧 고해 성사를 보고 싶다는 청년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본당 신부는 너무나 미안스러웠다.

“이건 너무 염치가 없습니다. 이제 막 오셨는데 좀 쉬십시오. 그 청년은 잠깐 기다리게 해도 괜찮습니다.”

“염려해 주시는 건 고마우나, 남자는 모두 참을성이 부족합니다. 내게 고해 성사를 보고 싶다는 그 초면의 청년을 기다리게 하지 맙시다. 아시는 바와 같이 청년의 고백은 짧습니다. 게다가 남의 죄를 사해 줌은 사제 마음에 가장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함께 나란히 성당에 가서 고해소에 들어갔다. 그러자 청년은 근엄한 태도로 빛나는 얼굴을 하고서 말한다.

“신부여, 내가 여기 온 것은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네게 큰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셨다. 그대의 형은 병원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이것을 원망하지 않고 원장의 명령으로 여기 왔다. 그 희생은 크게 하느님 뜻에 맞았다. 그대가 십자가 아래 엎디어 그 발에 쏟는 뜨거운 눈물을 하느님께서 세어 보셨다. 이 비통한 경우에도 그대는 순명을 잘 하였다. 그리하여 위독 상태에 있던 그대 형은 특별한 은혜를 받아 훌륭한 준비를 하고 마지막 성사를 받고서 그 영혼은 지금 연옥에 있다. 그대 부친은 파선 때 죽었다. 그러나 그는 성난 파도와 싸울 동안에 통회와 신앙을 일으켰다. 이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음은 그대가 수도원에 들어가 밤낮으로 헌신적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부친의 영혼은 천국에서 그대를 위하여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말을 들은 신부는 놀라움과 기쁨에 충만하여 자기를 잊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물러 보려고 하는 동안에 이 이상한 청년은 사라졌다. 이 교회 사람들은 아무도 이 청년을 알고 있는 이가 없었다 또 아무도 그 뒤에 이 청년을 만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이 신부는 이는 부친이나 형의 수호 천사가 알려 준 것이라고 믿었다.

 

영육 분리 靈肉分離의 순간의 비밀

하르트만 신부의 모친은 유대인이었다. 가톨릭 교회에 귀의하기를 완강히 거절하고 이승을 떠났다. 하르트만 신부는 몹시 슬퍼했다. 그 수기 手記에 말하기를 “불쌍한 어머니는 죽었다. 어머니 구령이 몹시 걱정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회개를 위하여 내가 하고 또 남에게 청하여 바친 기도를 생각한다면 여기 희망의 빛이 생긴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순간 어머니와 하느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겉 모양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깊은 인자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신부의 모친을 위하여 바쳐진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얼마 후, 모친의 구령에 관한 기쁜 소식을 받고 아주 안심하게 되었다.

하르트만 신부는 어느 날 프랑스 남쪽 아르스의 유명한 신부를 찾아가 영세도 못하고 죽은 모친의 구령을 걱정하였다. 그러니까 덕이 높은 신부는 ‘희망을 가지시오, 희망을. 어느 해 성모 무염시태 첨례날에 당신 모친의 구령에 대하여 큰 위로가 되는 편지가 올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 예언적인 말이 하르트만 신부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을 만큼 세월은 흘렀다. 1861년 12월 8일, 즉 성모 무염시태 첨례날, 모친이 영면한 지 6년째에 하르트만 신부는 예수회의 어떤 신부가 보낸 한 수녀의 편지를 받았다. 이 사람은 성체에 대하여 책을 쓰고 거룩히 선업을 행한 후 세상을 떠난 유명한 수녀였다. 그 수기는 다음과 같았다.

10월 18일, 영성체 후의 기도를 하는 내 마음은 주의 현존에 잠겨 기쁨과 만족에 가득 차서, 이제는 신앙도 필요 없을 만큼 깊은 영감을 받았다.

이렇게 친밀한 교제를 하느님과 맺을 동안에 전날 어떤 자매와 담화한 기억을 환기했다. 그때는 하르트만 신부의 기도를 왜 들어주시지 않았나 하고, 자칫하면 하느님의 섭리마저 원망할 만큼 의론이 분분하였다. 나는 자매에게 “하느님의 깊은 뜻을 섣불리 추측하기보다는 그 섭리에 맡기는 편이 낫다. 하느님의 비밀은 사람의 힘으로는 알 수 없다”라고 말했더니 자매는 참으로 그렇다며 납득을 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주께 여쭈었다.

“내 주여, 주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신데 왜 하르트만 신부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습니까? 왜 그의 모친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까?” 하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벗 안나는 어찌하여 내 정의의 비밀과 깊은 진리를 깨닫고 싶어하는가? 나는 아무에게나 은총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준다. 더욱이 그것은 정의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을 동무에게 알려 주어라. 내 영광과 남의 구령을 목적으로 바치는 합당한 기도를 나는 언제나 들어준다. 그 증거로서 하르트만 어미의 임종 광경을 지금 네게 보여주리라.”

그리고 내 지혜는 비춰져 기묘한 현상을 보았다. 병상에서 신음하는 하르트만 신부 모친이 죽을 때가 다가왔다. 그녀는 단말마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자 성모는 성자의 발 앞에 엎드려 청했다. “내 아들이시여!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 이제 조금만 하면 이 영혼을 영원히 잃게 됩니다. 내 종인 하르트만을 대신하여 청하오며 당신 어미인 내 청이오니,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죽어 가는 사람의 구령은 하르트만에게는 무엇보다 귀합니다. 그는 몇천 번이고 나에게 이 빈사자의 회개를 빌었습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영혼은 내게 몇 번이고 봉헌되었습니다. 내 것입니다. 당신이 흘리신 성혈과 내가 십자가 아래서 받은 고통의 값으로 그의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

성모님의 간청이 끝나자마자, 온갖 은총의 샘이신 주의 성심에서 구령에 필요한 은총이 나와, 완고한 유대 부인의 지혜와 마음을 비추었다. 완고함과 장래를 이겨낸 병자는 부르짖었다.

“예수여, 그리스도인 하느님, 내 아들이 섬기는 하느님, 저는 당신께 신앙과 희망을 가지오니 저를 구해 주소서…” 빈사자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쳐 나온 말은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기도 중에는 평소에 완강하게 온갖 권고를 물리치고 회개하지 않았던 일과 본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 망, 애의 마음이 이 영혼의 최종 상태였다. 마음속으로부터 이 뜻을 표하고 무한한 자비의 샘이신 하느님을 대하였다. 그리고 눈을 감자 곧 지극히 높으신 심판자 앞에 나아가 그 영혼은 엎디었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하르트만 신부에게 말하라. 이는 그가 어미의 구령을 위하여 오래도록 고통을 참아 받은 갚음이라고, 도 내 어머니의 성심의 깊은 자비와 내 마음에 있는 위력을 보고 내 어머니께 감사 드리고 또 남에게도 감사 드리게 하라.”

 

결투자의 구령

17세기에 성모 방문회에, 겸손하고 여러 가지 덕에 뛰어난 성인과 같은 일생을 보낸 마리 말띠기아 라는 수녀가 있었다. 그녀는 속세에 있던 시절에는 ‘궁정의 꽃’이라고 불리었던 궁녀였다. 수도원에 들어간 후로는 기도와 극기로 명성이 높은 수녀였다. 어느 날 말띠기아는 하느님의 묵시로 사보이 국의 궁정에 있었을 때 잘 알고 있던 황족 샤를르 아마데우스 느무르 태공이 그 의제 義弟와 결투하다가 상대방 칼에 찔려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원장은 이 말을 듣고 태공의 구령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말띠기아는 말했다.

“임종 때 태공의 지혜는 은총에 비춰져, 번갯불이 번쩍할 일순간에 통회할 수 있었습니다. 결투하는 자는 영원한 죽음을 받은 것이 당연하지마는, 태공을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친 어떤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정의는 달래어지고 그 자비로 구원되었습니다.”

 

엑세크망스 원수 元帥

드 라비냥 신부의 의형제 엑세크망스 원수는 수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전에 고해 성사를 보기로 약속을 하고 있었으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날 항상 영감을 받고 있던 한 사람은 심중에 다음 말씀을 들었다.

“나의 자비 깊음을 누가 깨달을 수 있으랴. 바다의 깊이와 또 거기 가득히 찬 물을 아는 자 있는가? 사람이 모르는 자 중에 용서함을 받는 영혼은 많이 있다.”

 

오를레앙 공작의 즉사

국왕 루이 필립의 장남 오를레앙 공작은 무서운 마차 사고의 희생이 되었다. 신심이 깊은 마리아 아멜리아 모후는 아들의 영혼 사정을 생각하고 못내 슬퍼하였다. 그리고 드 라비냥 신부에게 그 슬픔을 호소하였다. 사제는 말하였다. “이승의 마지막 호흡을 할 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의 영혼 사이에는 조그마한 장애도 없습니다.”

 

사형수의 고상 친구

소화 데레사는 그 자서전에 다음 한 구절을 쓰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브란지니라는 대죄인이 여러 가지 중죄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래도 통회의 정을 일으키지 않고 영원한 벌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불쌍한 최후, 되 물릴 수 없는 불행한 길에 들어가는 불쌍한 영혼을 도와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로 그 수단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한하신 공로와 모든 성인의 공로를 빌어 그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 청을 반드시 들어 허락하시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다른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도할 생각이었으므로 그 용기를 얻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여, 저는 주께서 불행한 브란지니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설령 그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고해 성사를 보지 않고 또 통회하는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는 주의 무한하신 인자를 깊이 믿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를 용서해 주시리란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오나, 이 사람은 저의 첫 번 죄인이오니, 저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그가 통회했다는 표 하나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는 허락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절도로 우리에게 신문을 잃게 하지 않았지만 이 브란지니의 기사를 본다고 아버지 명령을 거스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되어서 그의 사형 집행 이튿날 급히 라 크르와 신문을 펼쳐 봤습니다. 다음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이 브란지니는 고해도 하지 않고 교수대에 올라갔으나, 형리가 막 그 목숨을 끊으려고 할 때, 그는 어떤 영감의 충동을 몹시 받은 것처럼 갑자기 머리를 돌이켜 신부가 곁에서 받들고 있던 십자가를 바라보더니, 부리나케 이를 빼앗아 들고 세 번 그 손발의 거룩한 상처에 입맞추었다…’

 나는 이것을 읽고 얼른 그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깊은 감격에 넘쳐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깊이 주의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실망해서는 안 된다

백 년 전 파리의 유명한 수녀원에 한 수녀가 있었다. 그녀는 유대인의 피를 받았으나 그 덕과 지식의 뛰어남은 이 수녀원에서 첫째로 꼽히었다. 양친은 순수한 유대인이라는 것 이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하여튼 그녀는 스물 살 쯤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모친은 유대교의 열심한 신자일 뿐더러,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현모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딸이 유대교를 버리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모친의 노여움은 대단하여, 사랑의 반동에서 야기된 협박적 방해의 화살을 자기 딸의 몸에 마구 쏘아, 이 유대교를 버린 자를 되찾아 오려고 갖가지로 책략을 꾸미고 있었다. 영세를 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딸은 열심으로 어머니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희생을 바쳤다. 그러나 그 효과는 조금도 없었다. 딸은 결심을 굳게 하고 어머니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려고 25세 때 수녀원에 들어갔다.

“부모의 마음을 자식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으나, 딸의 마음을 어머니가 몰라 주어, 딸이 진심을 다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분노는 더하였다. 이 심전 心戰 은 20년 간 계속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머니의 노여움도 약간 풀리고 딸도 이따금씩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의 마음 속은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딸의 정성도 아무런 보람이 없어 보였다.

이 효성스러운 딸에게 어느 날 “모친이 갑자기 죽었다” 는 슬픔 소식이 왔다. 딸은 비통함에 미칠 것같이 되어 편지를 움켜쥐고 성당에 들어가 성체 대전에 엎디어 울었다. 그리고,

“내 주여, 제가 20년 동안 어머니의 회개를 위하여 뜨거운 기도를 바치고 눈물을 흘린 갚음이 이 소식입니까?” 하면서 이때까지 해온 고업 苦業 들을 늘어놓고 “이런 일들이 아주 허탕이 되고 어머니는 지옥에 떨어졌다!” 라고 몸부림치며 애통하였다. 이상도 하다. 감실 속에서 좀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네 어미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녀는 위엄에 눌려 엎드렸다. 그랬더니 또,

“너의 불신앙 不信仰 을 책함과 동시에 또 너를 위로해 주리라. 네가 어미의 구령을 위해서 이때까지 한 일 때문에 네 어미는 임종의 고통 중에 ‘하느님, 저는 회개 하겠사오며, 제 자식이 받드는 종교를 희망하나이다’라고 마음 속으로부터 통회하고 세상을 떠났다. 네 어미는 얼마 동안 연옥에 있으니, 영복을 얻도록 너는 항상 기도해 주어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수녀의 오랜 세월의 슬픔의 눈물은 곧 기쁨의 눈물로 변하고, 그녀는 깊이 하느님께 감사하였다.

 

단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어떤 희생이 아직 바쳐지기 전에 또는 못다 바쳐졌을 적에 어떤 이가 죽을 경우에는 구원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럴 때라도 우리는 계속 희망을 가져야 한다. 모든 성인의 통공과 하느님 안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모두가 현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참아 받은 간난이나 기도의 공로를 보류하실 뿐만 아니라 아직 실행되지 않은 선업이나 고행도 예지 豫知 하시어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교회의 성사를 못 받고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벗들의 구령을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것은 헛수고가 아니다. 이는 진정 우리의 깊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행해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 말미암아 성모 마리아를 원죄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녀 제르투르다가 나중에 바칠 기도 때문에 죄인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친히 성녀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하느님의 정의 쪽만 보고 모든 사람을 지옥에 떨어뜨린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하느님의 사랑만을 보고 모든 사람을 천국에 올려 준다 한다. 그러나 양쪽이 다 틀린 단정이다.

몇 해 전 파리의 어떤 집 아들이 무서운 사정으로 하여 급사하였다. 모친은 실망한 나머지 이틀 동안 집안을 뒹굴며 “아아 내 아들, 가엾은 내 아들이 지옥불에 빠져 영원한 벌을 받는구나” 하고 울부짖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또 베르사유 교구의 어느 교회에서 한 아이는 준비가 부족하였기에 첫 영성체를 연기하게 되었다. 아이는 순순히 따랐다. 그런데 아이 모친은 체면이 안 서고 모처럼 지은 옷이 소용없어진다며 억지로 다른 애들 속에 끼여 성체를 영하게 했다.

그러자 아이는 경련을 일으켜 신부의 위로도 거절한 채 “지옥에 간다, 영원한 벌받는다” 하고는 숨이 졌다.

이 두 사람은 확실히 지옥에 갔는가? 실제는 모른다. 신을 욕한 볼테르 따위도 지옥에 떨어진 것 같지만, 그렇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임종 때 하느님과 죄인 사이에는 사람의 지혜를 초월한 많은 비밀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성자의 피로써 우리를 속량하시고 그 구령을 무엇보다도 원하신다. 특히 임종 때는 회개에 필요한 은총을 주신다. 성교회는 어느 개인이 지옥에 떨어졌다고 단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선고를 내릴 분은 다만 하느님뿐이시다. 피조물인 우리가 이런 단정을 내리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판 유다나 주님의 왼쪽에 못박혔던 도둑, 기타 성서에 기록된 다른 이에 대하여 함부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쯤 그레고리오 16세 때, 파로타라는 신부가 있었다. 성덕으로 이름이 높아서 죽은 뒤에는 복자위 福者位에 올리기 위해 조사가 시작되었다. 일찍이 이 신부는 사형수를 회개시키려고 단두대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 죄인은 하느님을 욕하면서 죽었기 때문에, 신부는 신앙에 격동한 나머지 그 목을 움켜쥐고 높이 치켜들어 보이면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보라, 지옥에 간 자의 얼굴을!” 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서 복자위에 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한다. 그것은 여하한 경우이든 어떤 이가 확실히 지옥에 갔다고 단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어떤 노인이 몇 십 년 동안 신자 본분을 지키지 않는다. 어떤 이는 성교회를 욕하고 불신앙을 스스로 증명했다. 어떤 이는 방탕에 빠졌다고 급사한다. 어떤 이는 대죄를 범하면서 죽는다. 통회할 시간이 없었다. 위에 말한 자들이 확실히 지옥에 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 생각해서도 안 된다. 겉만 보고 속단하는 것은 성교회의 정신을 어기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런 일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임종 때 통회할 시간을 주신다 하여 회개하기를 미루면서 구령하려는 자는 화염 속에서 얼음 덩이를 찾는 것과 같다. 십자가의 도둑은 좋은 예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구원되었다. 희망을 가졌다. 하나는 지옥에 간다. 두려워하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

“신앙을 얻는 것은 인간의 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총으로 인함인 것처럼, 신앙을 견지 堅持 함도 그 가치 이외의 은총 때문인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

연옥 영혼을 구하는 자는 사랑의 계명을 수행하는 자이다. 그것은 만사를 넘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성심에 의합하고, 그 영광을 드러냄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또 영원한 행복을 고대하고 있는 가장 불쌍한 자를 구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만일 지구가 큰 은덩이고, 바다가 값진 보옥에 가득 차 있으며, 공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좋은 향기를 풍기고 있다 하자. 그것을 네게 주면 너는 만족하겠느냐?”

“주님, 저는 그렇게 막대한 재산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하오나, 만일 당신의 천한 종에게 한 가지 소원을 말씀 드리기를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위의 재산보다도 가치 있는 것을 청하고자 하오니, 주님, 불쌍한 이 죄인에게 당신 천국을 주옵소서.”

연옥 영혼을 구하는 자는 마치 이 귀한 은혜를 저들에게 주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는 선업 중에서도 최고의 것이다.

옛날 성 도미니코회의 열심한 두 수사, 베르트란과 브느와는 죄인의 회개와 연옥 영혼을 구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필요한가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한 사람은 말했다. “실상 연옥 영혼이 고생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죄인은 구령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이를 구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구속 사업은 헛되이 된다.”

한 사람은 말했다. “죄인은 자유로이 하느님을 거스르고 있다. 은총에 따른다면 언제든지 회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연옥 영혼에게는 자유가 없다. 어쩔 도리 없이 고생해야 된다. 예를 들면 여기 두 사람의 거지가 있다. 하나는 건강하지만 일하는 것이 싫어서 거지가 되었고, 하나는 병자라서 할 수 없이 거지가 되었다. 연옥 영혼은 후자이다. 성 토마스도 말하고 있다.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살아 있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보다 하느님 마음에 든다. 죽은 이는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구하는 일은 대단히 필요하다’라고.”

앞의 수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인의 회개를 기도하오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연옥 영혼이 괴로워하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의 기도, 고행, 선업 등을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반, 연옥 영혼을 위하여 반을 바치기로 하였다. 독자 여러분, 우리도 이 수사처럼 하자.

 

구령의 확증 確證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있는 자, 성모 성의패를 정성되이 달고 있는 자, 매일 열심히 묵주의 기도 한 꿰미나 몇 단을 바치는 자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구령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더 보태야 하니, 그것은 충실히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일이다. 이로써 진복 팔단의 덕을 실천하는 셈이 되니까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설에 의하면, 연옥 영혼을 구하는 자는 육신과 영신상의 온갖 선업을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 7)라는 말씀은 그 위에 성취될 것이다.

1913년 안티르 섬의 한 수사는 모든 성인의 날 첨례 며칠 전에 중병에 걸린 병자한테 불리어 갔다. 그는 62세의 이름만의 신자로, 44년 전부터 수계를 하지 않고 죄와 나쁜 평판 중에 살고 있었다. 사제는 말을 타고 한 시간 반이 걸려서 노인에게 갔다. 병자는 오랜 세월 동안 악한 표양을 보인 것을 모인 사람들에게 사과한 후 뜨거운 신앙으로 성사를 보고 경건하게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강복하고 모두가 착한 신자로서 살도록 약속하게 했다. 사제는 이를 보고 못내 감동하여 본인에게 물어 보았다.

“44년 동안이나 죄 중에 지낸 당신에게 어떻게 하느님께서는 이 귀한 회개와 은혜를 주셨을까요?”

“아아, 신부님, 저는 매일 빠지지 않고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병자는 이튿날 이승을 떠났다. 우리도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일 선업을 한다면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신심의 특성

죄인의 기도와 선업이 연옥 영혼을 구하는 데에 무효가 아님은 위의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하다. 상존 은총을 가진 하느님 성의에 의합한 자의 신심이어야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 더욱 이 신심은 부단해야 한다. 첨례날이나 이따금씩 죽은 이를 도와 줌은 진실한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복음에서도 “너희의 제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참으로 죽은 이를 사랑한다면 그들의 생각이 우리에게 배어 있어 밤이나 낮이나 간단없이 즐거이 그들과 함께 살고, 그 영혼을 위로할 기회라면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또 일반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물론 우리 부모, 형제, 친척, 은인, 벗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을 더 넓혀야 한다. 즉 그 사랑은 아담의 자손 전반에 뻗쳐져서 전세계에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구별을 두지 말고, 한 사람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함은 성교회가 희망하는 바이고 실행하고 있는 바이다. ‘위령의 날’이 제정되어 있음은 그 증거이다. 미사 중에도 “그리스도 안에 쉬는 자가 서늘함과 광명과 평안함의 곳에 들어가도록” 기원한다.

가톨릭 교회는 공식으로는 신자를 위해서만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전세계의 망자와 미신자를 위해서도 기도하여야 한다. 그들 중에 선의를 가지고 또 하느님께 충실한 자로서 죽는 이도 적지 않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성 아우구스티노는 죽을 때까지 매일 미사 때에 모친 성녀 모니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30년이 넘도록 그치지 않았다. 진실한 사랑의 증표요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이 방법을 우리도 본받자.

 

 

8.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이유

 

구제자의 권리

우리는 죽은 이를 천국에 보낼 수 잇는 열쇠를 쥐고 있다. 즉 기도를 하고 하느님께 그들의 구원을 청하면 그들은 천국에 들여지는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요한 16, 23).

트리텐틴 공의회는 선언하였다. “연옥은 존재한다. 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생존자의 기도와 특히 미사 성제로써 도움을 받는다’라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는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소방수 消防手이다. 이승 불에는 도저히 비길 것이 못 되는 연옥 불을 어떤 영혼을 위하여 아주 꺼주거나 혹은 누그러뜨릴 수 잇는 소방수이다.

국왕이 대사 大赦를 베풀어 죄인을 사해 줌은 감탄할 권력이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연옥의 감옥으로부터 몇 사람이건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고 천국에 들여 줄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연옥 영혼은 구세주의 성혈로 속량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런 자녀가 된 자이다. 한시라도 빨리 천국에 들여지면 들여질수록 하느님께선 기뻐하신다. 적의 포로가 된 왕자가 충성스런 신하 때문에 구출되고, 중병의 아내가 완치되었을 때의 왕과 남편의 기쁨은 크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연옥 영혼이 천국에 들여지는 것을 기뻐하시는 데에는 도저히 비길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구해 준 자 위에 큰 은혜를 내리신다.

성 피에르 드 브느와는 말했다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하느님의 영광에서 보아 이교 異敎 나라들에게 선교하는 사업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면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낫다. 왜냐하면 하느님 대전에서 연옥 영혼은 미신자의 영혼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품격이 놓은 것이니까.”

우리의 기도와 선업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영혼을 천국에 들여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최상의 사랑의 증좌이다.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 신앙의 바로미터이다. 이에 열심한 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깊고, 이에 미지근한 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미지근하다. 만일 전혀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죽은 이에 대한 사랑

예수께서는 사흘 전부터 끼니조차 잊고 가르치심을 듣기 위하여 뒤따라온 사람들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시어” 빵을 많아지게 하시어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셨다.

연옥에는 수천, 수만 명이 고생하고 있다. 또 그 괴로움은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이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구해 주기 위해 분발한다면 크나큰 사랑의 사업을 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혀 잊혀지고 아무도 기도해 주지 않는 영혼을 위하여, 또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천국에 들어갈 영혼을 위하여, 그 밖에 모든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의 義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연옥에 있는 영혼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구해 주는 일은 양심의 중요한 책임이다. 상속인이 망자의 재산만 빼앗고 그 유언을 이행하지 않음은 몹쓸 짓이다.

 

우박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의 어떤 이의 토지는 우박 피해가 매우 심했는데 다른 땅은 조금도 해를 입지 않았었다.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이가 하고 이상히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연옥 영혼이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은혜를 모르는 자식들이 ‘자선 사업을 위하여 쓰라’ 하고 죽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벌을 받은 것이다.

 

페라라 시의 유령

이탈리아 페라라 시의 제일 훌륭한 저택에 밤이 되면 큰 소음이 난다. 집 주인은 여러 가지로 손을 써 봤으나 아무리 해도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살려는 이가 없었다.

법률을 연구하는 한 학생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상상이다. 10년 동안 그 집의 방 한 간을 거저 빌려 준다면 들어가 살겠다.” 그 청년이 그 집에 거처하게 되었다. 짐을 나르고 그날 밤은 내일의 논제 論題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이 청년은 열심한 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축성한 초를 켜고 있었다. 만일 마귀가 그를 해치려고 나와도 이것으로써 보호를 받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밤중이 되자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마룻바닥 위에 무거운 쇠사슬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다. 소리는 점점 청년 방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이 열리고 무서운 유령이 손발을 쇠사슬에 묶인 채 나타났다. 청년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책상 옆에 앉아서 무서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점점 무서워졌지만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서 모르는 체하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유령이 물었다.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습니까?”

“내일 논문을 위하여 꼭 필요한 법률의 명문 明文을 찾고 있습니다.”

“그 책에는 없습니다. 책상 위에 있는 바르톨로의 저서 이러이러한 곳에 있습니다.”

청년이 찾아보지 과연 그대로였다. 잠시 후 유령은 일어나 쇠사슬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청년도 성초를 손에 들고 유령의 뒤를 밟아 지하실까지 따라갔다. 가 보니 땅 바닥이 절로 열리고 유령은 그 속으로 사라졌다. 청년은 거기에다 성초를 두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날이 새지 친구들을 불러 거기를 파 보았더니, 이름 모를 해골이 있었다. 사제가 와서 장례를 치르고, 성대한 미사가 봉헌되었다.

연옥에서 잊혀지고 있던 영혼이 사람들의 기도를 청하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허락으로 나타났다고 모든 이들은 믿고 있었다.

 

보은 報恩

성 비안네는 말한다. “자녀가 제 부모에게 어찌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랴.” 부모가 우리를 양육하기 위해서 겪은 노고와 근심 걱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부모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는 자녀는 적다. 부모 다음으로는 은인과 벗들이 빨리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는 말한다. “연옥 영혼에 대하여 깊은 신심을 가지십시오. 이 신심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크나큰 재앙을 면케 하는 피뢰침입니다.”

 

우리의 이익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연옥 영혼을 도와 줌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영적 이익을 생각하는 것도 결코 나쁘지는 않다. 연옥 영혼을 도와주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합당한 자이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 40).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 7).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태 7, 2).

성 암브로시오는 위의 복음 말씀을 “우리가 애덕으로 연옥 영혼에게 베푸는 모든 것은 모두 은총으로 변하여 우리는 후세에 그 백 배의 갚음을 받는다”고 설명하였다.

제노아의 카타리나는 말한다. “나는 다음 말로써 이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온 사방에 메아리 치는 우렁찬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 즉 가련한 자여, 왜 너희는 덧없는 이 현세에 속는가. 임종의 어려운 고비에 너희의 보호자가 될 자를 만드는 선업을 왜 살아 있을 동안에 하려고 하지 않는가?”

 

완덕의 학교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무서운 대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많은 소죄를 범하고 있던 악한 습관을 고치게 한다.

왜냐하면 연옥에서 고생하는 영혼은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오. 또 우리처럼 비방, 조소, 멸시, 질투, 교만, 허영 따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리고 선행을 하도록 힘쓰시오. 선종을 위하여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키시오. 죽음은 도둑처럼 갑자기 오니, 대죄를 지닌 채 살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페넬롱 주교는 말한다. “현세에서 고통은 하나의 연옥이다. 병원을 세우듯 우리는 고통으로써 이승에 연옥을 세우자. 연옥 영혼처럼 우리는 이승에서 하느님 손 안에서 순종하여야 한다. 이승에서 자기의 연옥 고통을 치른다.. 아 주여,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옵니까…”

 

유력한 보호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는 말한다. “천국의 성인과 연옥 영혼은 공로를 세울 수는 없으나 생전에 쌓은 공로를 우리를 위해 쓸 수는 있다.이 성인들이 신앙을 위하여 자기네 몸에 받은 각가지 상처, 행한 고업, 선생, 대재 등은 하느님 대전에 유력할 것이다. 이는 군인이 싸움터에서 받은 상처를 국왕에게 보이는 것과 같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 예로니모도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페넬롱 주교는 슬픔에 겨워하는 이에게 말한다. “죽은 이와 마음으로 일치하라. 그들은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보고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고 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볼로냐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한다.

“우리가 오래도록 성인들의 전구 傳求로 기도해도 은혜를 못 얻었을 때, 연옥 영혼의 전구로 즉시 은혜를 받은 일이 가끔 있다.”

성 비안네는 말한다. “우리가 만일 연옥 영혼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안다면, 그리고 또 그들의 전달로 받을 수 있는 커다란 은혜를 안다면 그들을 그리 쉽사리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라. 그들도 우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할 것이다.

60이 되는 어떤 부인이 중병에 걸려 나을 가망이 없는데도 항시 사제가 곁에 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사제는 연옥 영혼에게 부탁하며, 만일 이 병자가 회개한다면 천국에 제일 가까이 가 있는 영혼을 위하여 미사 한 대를 드리고 또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한 번 하고 이 일을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회의 잡지에 발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고서 사제는 한 번 더 이때까지 항상 거절만 당하던 집에 갔더니, 곧 병자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고해 성사를 보고 병자 성사를 받고 성체를 영하고서 십자가와 성모패에 입맞춘 채 세상을 떠났다.

다음에 어느 장교의 편지 한 구절을 소개한다.

“1919년 1월 1일, 나는 바아즈의 라스타드 거리를 산보하다가 결혼 반지를 떨어뜨렸다. 그걸 알고 나는 지나온 길을 여기저기 찾아보기도 하고 성당에 들어가서 사방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래서 연옥 영혼에게 만일 반지가 다시 내 손에 들어온다면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 몇 대를 바치겠으며, 그 감사로 이 은혜를 발표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1일 밤부터 2일 아침까지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문득 ‘진흙투성이인 신발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솔로 한 번 문지르니 결혼 반지가 조금도 상하지 않은 채 전날부터 끼여 있던 구두굽 속에서 떨어졌다. 그런 채로 전날은 십리 남짓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의심 없이 이는 연옥 영혼의 덕택이었다.”

성녀 안나 마리아의 기도와 선업의 덕택으로 구원된 연옥 영혼이 가끔 그녀에게 나타났다. 어느 날 성녀는 한 망자를 위하여 성체를 영하였다. 그랬더니 곧 그는 영광 속에 은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사랑하는 자매여, 당신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기도 은혜로 빨리 영복을 받으러 갈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서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성녀는 말했다. ‘여러분은 연옥 영혼에 대하여 큰 신심을 가지십시오.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위하여 미사를 바치십시오. ‘주여, 망자에게 길이 평안함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어 주소서’라는 기도를 매일 백 번 외십시오. 미사 때 그들을 위하여 이 거룩한 희생을 봉헌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포르토 마우리지오의 성 레오나르도는 44년 간의 설교 가운데 가끔 다음 말을 되풀이했다.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시오. 만일 단 하나의 영혼을 연옥에서 구할 수 있다면 천국은 그대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은 은인인 당신의 영복을 얻기 전에는 당신을 위한 분발을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연옥 고통을 면케 해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짧은 시간, 또는 가벼운 보속을 다하면 영복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는 말했다.

“죽은 이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라. 그들을 위하여 자비를 베풀어라. 한마디로 해서, 손쉬운 모든 방법으로 도와 주어라. 이 영혼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느님께로부터 통회와 죄 사함의 은혜를 얻게 해줄 것이다.”

우리도 연옥 영혼을 도와 주기 위하여 분발하자.

 

 

9.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방법

 

미사

하느님께 대한 최상의 기도이며 또 연옥의 문을 여는 황금 열쇠는 성체의 희생 곧 미사 성제이다.

아아 성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이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는 없다. 만일 이것을 잘 깨달았더라면 우리 마음은 사랑에 녹아 버렸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돌아가시기 전날 만찬 때에, 빵과 포도주를 당신 몸과 피로 변화시키시고, 또 세상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으로 주기 위하여 그 권리를 사제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한 번 십자가 위에서 행하여진 희생은, 봉헌하는 방식은 다르더라도, 그 가치는 조금도 변함이 없어 밤낮 없이 지구 위 어디선가 봉헌되고 있다. 50만이 넘는 사제들은 매일 한 번은 미사 성제를 드린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은 성부 대전에 우리 죄의 사함과 연옥 영혼의 구원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어떤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가 봉헌되면 그 동안은 그 영혼의 괴로움은 아주 중지되든가 또는 적어도 얼마만큼 완화되는 것이다.”

성 예로니모는 말한다.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가 봉헌되면 그 동안 그들은 조금도 고통을 받지 않는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연옥에서 영혼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물론 미사이다.”  연옥에 있던 성 토마스의 누이는 오라버니에게 나타나 몇 대의 미사를 청했다. 그 미사가 봉헌되자 천국에 들어갔다는 알림이 있었다.

성 요한 다빌라의 임종 때 곁에 있던 이가 물었다.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미사, 미사, 미사 성제를 청합니다.”

매일 전세계에서 봉헌되고 있는 하나하나의 미사 뒤에는 연옥에서 구출되어 천국에 올라가는 영혼이 많이 있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어느 날 미사 중에, 제대의 성작 속에서 천사들이 금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을 퍼내어 연옥 영혼 위에 부어 주자 그들이 차츰차츰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광경을 보았다.

 

포로의 쇠사슬

한 군인이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손발을 무거운 쇠사슬로 묶인 채 감옥에 갇혔다 오랜 세월 동안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내는 죽은 줄 알고, 그의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청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하게도 포로의 손발에서 저절로 쇠사슬이 풀렸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그 이상한 사건을 이야기했다. 날짜를 따져 보니, 그것은 마침 그 사람을 위해 미사가 봉헌된 날이었다.

 

방탕한 부인

로마에서 한 방탕한 부인이 청년을 타락시키고 쾌락에 빠져 있었다. 자기 구령 같은 건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나 다만 때때로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청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부인은 급작스레 그 천한 생활이 싫어졌다. 그리고 이때까지 범하고 있던 죄가 무서워져 통회하고 고백하여 올바른 생활을 하였다. 연옥 영혼이 은인을 위하여 기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후에 이 여인은 감탄할만한 최후를 마쳤고, 그의 구령에 대해서 의심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생미사

일반 신학자들의 설에 의하면, 선종하기 위해서는 미사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성녀 메히틸드에게 말씀하셨다. “살아 있을 때 열심히 미사 참례를 한 자는 임종 때에 마귀의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성인들과 천사들의 보호를 받는다.”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묵시를 받아 1921년 5월 31일 ‘선종회’의 회장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미사의 은덕은 사후보다도 생존 중에 더 많다. 그것은 사후보다도 더 직접적이요 더 확실하다. 미사는 우리에게 신앙을 굳게 하는 은혜를 주는데, 그것은 또 현세에서 하느님의 의노를 푸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다. 그것은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연옥 보속의 많은 부분을 감한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죽은 이를 위해 미사 청하기를 게을리하지마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보다 살아 생전에 미사를 드리는 편이 훨씬 더 은혜가 많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 버렸다면, 그 뒤에 미사를 드린들 아무 소용이 없다. 구령에 대해서는 남에게 부탁하기보다 먼저 제 자신이 걱정해야 한다. 선종할 수 있도록 살아 있는 동안에 미사를 청해야 한다.

 

부정한 상속자

부정한 수단으로 모은 재산을 죽은 후에 아들에게 갚게 하겠다고 말하고서 아버지가 죽었다. 장례가 끝나고서 어떤 이가 아들에게 부친의 약속을 이행하라고 하자, 아들은 냉소하며 말했다.

“만일 아버지가 천국에 있으면 그것을 갚을 필요가 없다. 또 지옥에 있다면 쓸데없는 짓이다. 만일 연옥에 있다면 언젠가는 구원될 테니까, 살아 있을 동안에 저지르는 일로 잠시 고통을 받은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저 얼마 동안 참으면 된다.”

 

현명한 상인

이탈리아 제노아의 어떤 상인은 자기가 죽은 뒤에 기도를 청할 일에 대해서 조금도 준비하지 않았었다. 많은 돈이 있는 열심한 신자로서 남을 위하여 그토록 자비로웠는데 자신에 대해서는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사람들은 이상히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장례 후에 이 상인의 어느 장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내 구령을 위하여 미사 예물 10만 원, 가난한 사람의 딸들 지참금 50만 원, 신학생을 위하여 25만 원, 성당에 기부 3만 원…” 그리고 맨 끝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업을 하고 싶은 자가 죽은 후에 남을 의지한다는 것은 대단한 착오이다.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 행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낙이요 또 확실한 일이다.”

성 안셀모는 말했다. “생존시의 한 대의 생미사 봉헌이나 미사 참례는 사후의 천 대의 미사보다 유익하다”라고. 이탈리아 속담에 “눈앞에 켜진 한 개의 촛불은 등뒤에 켜진 횃불보다 더 밝다”라는 말이 있다.

 

재산 분배

1870년 보불 普佛 전쟁 때 어떤 이의 두 아들이 전사하였다. 20년 동안이나 이 모친은 아들을 위하여 미사를 바쳤다. 어떤 사람이 이상히 여겨 물어 보았더니 모친은 대답하였다.

“내가 죽으면 다른 자식은 재산을 분배 받습니다. 죽은 아들에겐 재산을 물려 주는 대신 미사를 드려 주는 것입니다.”

 

성 베드로의 모친

클루니 수도원의 창립자 성 베드로의 모친은 대단히 열심한 신자였다. 남편이 죽었을 때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많은 미사를 청하고 많은 돈을 가난한 이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신분과 재산을 완전히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결심하였다. 친척과 하인들은 모두가 이를 말렸다. 그랬더니 성인의 모친은 말했다.

“너희에게 무기, 말, 돈, 토지 등을 준 내 남편은 그 답례로서 너희로부터 무엇을 받았는가… 그를 위해 미사도 기도도 드려 주지 않았다면, 하물며 나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여 주겠는가…”

그녀는 끝내 결심을 이루어 수녀가 되고, 마침내 수녀원장이 되어서 선업과 공덕이 차서 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 성인은 동회의 모든 수도원장에게 모친의 영혼을 위하여 서른 번의 미사를 드려 달라고 부탁하고, 열 두 사람의 빈자를 돌보고 각 수도원에 미사 두 대씩 봉헌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게을리한 미사 일곱 대

1859년 9월 18일에서 11월 19일 사이에 매일 오전 11시쯤부터 정오까지, 또는 밤 12시부터 2시까지에 베네딕도회의 한 수사가 빈첸시오회의 한 수련자에게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드려야 할 미사 일곱 대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77년 전부터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다. 11년마다 일곱 차례 일곱 명의 수도자에게 나타났지마는 헛일이었다. 이번에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11년 후에 다시 한 번 나타나야 한다.  부디 내 뜻대로 미사 일곱 대를 바쳐 다오. 그리고 수련자는 7일간 완전한 침묵을 지켜 묵상하고 33일간 맨발에 두 팔을 벌려 십자 모양으로 하고 통회의 시편 50 ‘미세레레메이’를 하루에 세 번 바쳐 다오.”

죽은 이의 청은 11월 21이부터 12월 25일까지 전부 실행되었다. 그랬더니 마지막 봉헌된 미사 후에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성 비안네의 기도

성 비안네는 몹시 사랑하던 그의 벗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를 위해 미사를 드리고 거양 성체 때 성체를 받들면서 말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성부여 바꾸어 주십시오 당신은 제 친구의 영혼을 연옥에 가지고 계시오나, 저는 지금 제 손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히 자비로우신 성부여, 제 친구의 영혼을 구해 주소서. 그 대신 저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심의 공덕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이 기도는 들어 허락되었다. 사제는 영성체 후 기도 중에 벗의 영혼이 영광에 충만하여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것이다.

 

빅토르 위고를 위한 미사 석 대

1904년 어느 날, 대서양의 안티르 섬에서 도미니코회의 베르트란 유론지히 신부는 한 흑인 노파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유명한 시인 빅토르 위고 (1802-1885)를 위하여 미사 석 대를 청하며 말했다

“옛날 나는 파리에서 시인의 딸의 까다로운 병을 간호하여 많은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하직인사를 하러 가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 고향에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거든 나를 위하여 미사 석 대를 바쳐 주오.’ 나는 상당히 늦게 서야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약속을 이행하는 터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위고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스왕 신부가 이 시인의 집을 구경하러 갔더니, 옛날 이 집을 보살피던 안내하는 부인이 말했다.

“주인은 스스로 자유 사상가라 하였지만, 우리에게는 퍽 좋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층 방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우리는 가끔 보았습니다.”

 

미사, 미사!

어느 날 도미니코회의 성 수소에게 죽은 친구 하나가 나타나 성인이 자기를 위해 미사를 드려 주지 않는 것을 몹시 슬퍼했다. 성인은 용서를 청하면서 그 대신 각가지 선업을 한 것을 말했다. 그러자 죽은 이는 “이사, 미사! 미사가 없으면 나는 흡족한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약속대로 미사를 드려주오” 라고 부르짖고 사라졌다.

 

죽은 이의 금고

어머니는 열 두 살이 되는 누나와 그 동생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둘이서 의논하여 죽은 이 금고 金庫를 만들어 선업을 모아 두기로 하고 다음 규칙을 정했다.

(1) 십자가 앞의 ‘죽은 이 금고’에 매일 저녁 두 사람이 같이 기도한 후에 조금씩이라도 영적 기부를 넣는다.

(2) 첫 영성체 날에는 여기 와서 어머니 무덤 위에 좋은 마음의 꽃다발을 바친다.

(3) 만일 어머니가 아직 천국 영복을 얻지 못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얻을 수 있도록 절약한 용돈을 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반은 어머니를 위해 미사를 청하기로 한다.

6개월 후 누나는 훌륭히 첫영성체를 하고, 동생은 하느님의 뜻으로 천국의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기특한 효성

베트남의 어느 가난한 집 딸은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죽었다. 14세의 이 소녀는 노동으로 하루 백 원을 벌어서 두 동생을 길러야만 했다. 어머니가 죽은 지 한 주일 후 이 소녀는 어머니를 위해 미사를 드려 주십사 고 돈 4백 원을 가지고 왔다. 사제는 승낙하고 어떻게 해서 이 돈이 생겼을까 하고 조사해 보았더니 세 남매가 어머니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일주일 동안 대재 大齋를 지킨 것을 알았다.

미사 문제를 끝맺으면서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교회가 예로부터 사용하고 있는 특별한 공효 功效 가 있는 방법 한 가지를 들어보자.

 

성 그레고리오의 서른 대의 미사

교황 성 그레고리오는 <문답>이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의학을 배운 수도자 유스토는 임종 때 ‘나는 금화 세 개를 숨기고 있었다’라고 고백하였다. 정녕 병실에는 세 닢의 금화가 숨겨져 있었다. 청빈 허원을 한 수도자의 이 죄를 보고 나는 몹시 분개하였다. 다른 이에게 교훈이 되도록 죄인 옆에는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다. 외딴 곳에 무덤을 파고 시체를 묻을 때에는 금화 세 닢을 그 위에 던지며 ‘너와 함께 이 금화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수도자 일동이 말하도록 명했다.

본인은 훌륭한 통회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또 시체는 명령대로 매장되었다. 이 수도자가 받은 벌 때문에 다른 수도자들은 대단히 감동하여 허용되어 있는 사소한 것까지 원장에게 가지고 왔다.

유스토가 죽은 지 30일 후, 그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30일 동안 계속하여 그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도록 했다 .어느 날 밤 유스토가 한 수도자에게 나타났다. 수도자는 그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때까지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오늘 영복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날수를 헤아려 보니 그것은 마침 30 일째의 미사가 봉헌된 날이었다.”

그레고리오의 서른 대의 미사는 이 신비롭고도 두려운, 그러나 기쁜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진실한 전기에 의하면 성 그레고리오 (540-604)는 어느 날, 자기가 죽은 후에는 연옥 영혼을 도와 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슬픔에 잠겨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다음과 같이 약속을 하셨다.

“벗아, 나는 네게 특권을 주겠다. 즉 연옥 영혼을 위하여 너의 기념으로 30일을 계속하여 서른 대의 미사를 봉헌한다면, 그 영혼이 아무리 무거운 빚을 지고 있더라도 즉시 구해 주겠다.”  그때부터 30일간 계속해서 한 영혼을 위하여 서른 번의 미사를 봉헌하는 관습이 교회에 전파되었다. 또 이 방법은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기 때문에, 연옥에서 오래 고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이 미사 봉헌을 위해 살아 있을 때에 준비를 한다.

이 거룩한 관습은 먼저 베네딕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ㅈ금도 충실히 지켜지고 있다. 즉 수도자 한 사람이 죽으면 30일 동안 계속 그 영혼을 위하여 미사가 봉헌된다. 그리고 그 동안 생존시와 마찬가지로 음식이 나온다. 그러나 본인 대신 그 자리에는 큰 나무 십자가를 둔다. 그리고 음식은 가난한 이에게 베푼다.

이 선업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임은 가끔 입증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신심이 대단히 성하다. 유럽 전란 후 이 관습은 각국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레고리오의 서른 대의 미사는 한 망자를 위하여 30일간 계속해서 서른 번의 미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사제, 제단, 성당은 달라도 상관없다. 30일간 계속하면 넉넉하다. 그러나 부활 전 성 목, 금, 토 의 3일을 제외하고는 만일 부탁 받은 사제가 잊어버리고 한 번이라도 그 미사를 빠뜨렸으면 다시 새로 시작하는 중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보통 미사 예물의 두 배 또는 적어도 한 배 반을 내는 것이 관습이다.

 

영성체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최상의 방법은 미사이지만, 버금가는 것은 영성체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말한다. “미사를 제외하면 영성체는 최상의 구속 사업이다.”

성체를 영한 자는 자기 마음에 전능하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없는 공덕을 바친다면 적어도 몇 사람의 연옥 영혼을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복자 루이 드 블로와의 벗

복자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그의 벗이 한 연옥 영혼의 방문을 받았다. 이 영혼은 충분한 준지 없이 소홀히 성체를 영했기 때문에 연옥에서 불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영혼이 벗에게 말했다. “친구의 정의로 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성체를 영해 다오. 그렇게 하면 나의 냉담은 다 기워 갚아진다.” 그의 원대로 해주었더니, 망자는 영광에 빛나며 감사하고 사라졌다.

 

천사가 가지고 온 성체

생존 시 성체에 대하여 두터운 신앙을 가지고 있던 어떤 사람이 사후에 연옥에 갔다.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 영혼은 구원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천사가 그 때문에 성체를 모셔 왔다.

어떤 수녀가 성인 방에 들어가니까 성인이 막으며 말한다. “돌아가십시오. 이 백포 위의 거룩한 물건에 손을 대지 마시오. 그건 천사가 가지고 온 성체입니다.” 수녀는 놀라서 말한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성인은 말했다. “어떤 죄인이 겉으로만 회개하고 성체를 영했습니다. 성체를 입에 문 채 그 영혼은 지금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더럽혀진 입에 성체를 둘 수가 없어 천사가 그것을 여기에 모셔 왔습니다. 이것은 생존시에 성체께 대하여 두터운 신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 아직도 연옥에 있는 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내일 아침 영하기로 명령받은 것입니다. ” 우리도 성체를 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영하도록 해야 한다.

 

미사 참례

부모가 못에 빠졌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는 아니고 조금 손을 내밀면 구할 수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우리는 못 본 체할 수 있겠는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부모, 형제, 벗들이 불바다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것은 조그마한 수고, 예를 든다면 조금 일찍 일어나서 미사에 참례하는 등으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을 하는 자가 적다.

만일 이 세계에서 백 년마다 한 번 또는 단 한 군데서만 미사 성제가 거행된다면 어떠할까? 수천만 명이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거기 가는 수고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리라.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이 성제가 봉헌됨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하고 주일의 중한 본분마저 까닭 없이 게을리함은 얼마나 유감스럽고도 참혹한 일인가.

 

모친의 탄식

파리 대학의 유명한 학자 제르송 신부는 그 저서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불쌍한 어머니는 사후 오랫동안 아들에게 잊혀졌는데,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어 아들에게 나타나 말하였다. “내 아들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어미를 상기해 다오. 내가 죄의 보속을 하고 있는 이 슬픈 불을 보아라. 사랑의 샘이신 하느님을 무엇보다 원함에도 불구하고 뵈올 수 없음을 생각해 보아라.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구해 다오. 내 탄식을 듣고 나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다오.”

 

참된 희생

프랑스 남쪽 어떤 동네에 신심 깊은 부잣집 마님이 살고 있었는데, 검소하게 살면서 남을 도와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인은 이때까지 자기가 하고 있던 생활이나 선업은 희생이 아니고 낙 樂 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참된 희생을 바치고 싶어했다.

어느 날 이 부인은 빛나는 얼굴로 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님, 저는 겨우 참 희생을 발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늦잠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일년 내내 5시에 일어나서 첫 미사에 참례하겠습니다. 저에게는 괴로운 일입니다만, 저는 비로소 참된 희생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건 대단한 게 아니야, 애들 같군” 하고 생각하는지? 실행배 보면 어떨까?

 

보상 補償 미사 참례

“부디 아버지와 엄마를 위해 기도해 다오. 아버지는 주일 미사도 거반 빠졌었으니까.”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고 죽었다. 딸은 어머니를 위하여 기도하고 또 아버지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렇지,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고해 성사도 보시고 잘 준비하신 뒤 병자 성사도 받으셨어. 하지만 오랫동안 주일 미사를 게을리하셨지. 그래서 엄마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하신 거다.” 딸은 이렇게 생각하고 계산해 보았다. “아버지는 16세에서 40세까지 24년간 미사에 빠졌어. 일년에는 주일과 지켜야 할 첨례가 대개 56번, 그렇다면 1344회가 된다. 나는 아버지의 이 게으름을 배상을 해야 한다.”

그로부터 딸은 4년간 매일 미사 참례를 하고 성체를 영 했다. 그리고 1344회째의 영성체를 끝마치고 아버지 무덤에 참배하였다. 가슴에 기쁨이 가득하여 “주께서 이제 나의 아버지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셨도다” 하는 부르짖음이 절로 나왔다.

 

매일 미사 참례

슬픔이 있는 자, 청원이 있는 자, 자비를 받고 싶은 자, 감사를 드리고 싶은 자는 모두 미사 성제에 참례하라. 성녀 데레사는 각가지 은혜를 받고 “주여, 저 같은 자가 어찌 이를 맞갖게 감사드릴 수 있겠나이까”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한 대의 미사에 참례하라”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미사 참례를 한 날에는 여느 때보다 더 많이 하느님의 은혜가 내린다. 어떤 부인은 말한다. “나는 미사 참례를 한 날은 다른 날보다 일어 더 잘 됩니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원의만 있으면 매일이라도 미사 참례를 못 할 것은 없다. 좀 일찍 일어나서 집안 일을 하고 미사에 참례한다면 고요한,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귀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부인이 미사 참례하러 가다가 이웃에 사는 두 부인을 만났다. 그들이 말했다. “당신은 행복하시군요. 우리는 아침엔 일이 많아 미사 참례할 겨를이 없다우.” 부인이 30분 후에 미사에서 돌아왔다. 겨를이 없다던 두 여인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부인을 보고는 부끄러워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신자의 본분을 채우는 데는 시간이 있고 없고 에 상관없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많은 이가 하느님께 대한 본분을 채울 겨를은 없어도 이를 거스르는 짓을 할 시간은 많이 있다.

만일 예수께서 근처에 나타나시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자. 우리는 얼마나 기뻐 날뛰며 주 대전에 달려갈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매일 아침 성당 안에 나타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제대 위에 희생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께 흠숭을 드리고 감사드리며 속죄하고 은혜를 간구하고 계신다. 참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피는 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예배하는 데 드는 시간은 백 배로 갚음을 받는다.

성 이시도로 는 가난한 농부로서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고 있는 몸이었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빠지지 않고 미사 참례를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 동안 천사를 보내어 밭을 갈게 하셨다. 우리에게는 그런 기적을 행하시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다. 어떻게든 우리에게 갚아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을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 33).

참으로 원의만 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17세 된 어떤 목동은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소젖을 짜고 그 후에 자전거를 타고 30마장 떨어진 성당에 가서 복사를 하고 성체를 영한 후에 집이 돌아와 일을 하였다.

 

성체 조배

어느 큰 도시에서 한 사제가 사순절 설교를 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대도시에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 성사에 계시어 끊임없이 우리의 예배와 기원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고마운 은혜는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주일 외에 성체 조배를 하는 신자는 아주 적다. 그러나 물건 사러 가는 길에라도 성체 대전에 엎디어 주의 기도 한 번을 외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자기와 연옥 영혼을 위하는 일인지 모른다. 어려운 때에 제일 위로 해 주는 분은 성체 성사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루이 파스퇴르는 연구소에 갈 때 일부러 둘러서 성 에티엔느 뒤 몽 성당에 에 가서 입구 오른편 소 제대 앞에 꿇어 잠시 기도하였다. 이 학자가 여러 발견을 해낼 수 있었던 원인은 성체 대전에 기도한 때문이었다.

전기에 관한 여러 가지를 발견한 앙페르도 마찬가지로 성체 조배 하기를 일과로 삼고 있었다.

 

십자가의 길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성모 마리아와 예루살렘 부녀들과 함께 처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때부터 많은 신자들은 이를 기념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그 발자취를 밟고 그 고난을 묵상하여 크나큰 은사를 얻었다.

17세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비로소 프란치스코회의 모든 성당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도록 허락하였고 그 후에 점점 전파되어 지금에 와서는 어느 성당이든지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그 앞에서 기도하는 자는 옛날 일부러 예루살렘을 참배하던 자와 꼭 같은 은사를 얻을 수 있다. 교황이 권장한 일반 신심 중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는 첫째이다.

요즈음에는 교황의 윤허로, 신자 가정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상이 붙어있는 십자가에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제가 강복하면 성당의 14처와 꼭 같은 은사가 붙게 된다.성당에 갈 수 없는 병자가 그 십자가를 들고 수난을 묵상하면 십자가의 길 기도의 모든 은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전대사와 한대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고난의 묵상은 고행, 헌신, 순명, 겸손, 인내, 회개 등을 낳는다.

어떤 수도자가 하느님께 “어떻게 하면 당신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겠나이까?”라고 기도 드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라”는 대답이 들렸다.

성 보나벤투라는 말한다. “선에 나아가고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라.”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은 예루살렘 참배가 1년 간의 대재보다 더 낫다.”

성 보나벤투라 가 어느 날 성 토마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그런 심오한 연구를 하실 수 있었습니까?” 성 토마스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책이 아닙니다. 저 아래서 묵상했습니다.”

성 바오로는 말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 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1고린 2, 1-2).

 

복녀 마리아 드 티니아

복녀는 오랫동안 매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며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차츰 열성이 식어 나중에는 아주 그것을 빼먹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같은 수도원의 한 수녀가 복녀에게 나타나 슬퍼하며 말했다.

나의 자매여, 어찌하여 옛날처럼 나와 연옥 영혼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해주지 않습니까?”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녀에게 나타나시어 엄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내 딸아, 너의 태만은 나를 성나게 한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연옥 영혼을 위해 비상한 공덕이 된다. 그것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지금 그 대표로서 이 수녀를 너에게 오도록 한 것이다. 이 기도의 중요성을 다른 수녀들에게 알려라. 그들과 죽은 이를 위하여 이를 이용하도록 권하여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는 데는 항상 기도에 실려있는 정한 기도문을 월 필요는 없다. 실제로 일정한 기도문은 없다. 10분이나 15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고 우리 죄를 통회하는 정으로 각처 앞에 꿇어 잠시 기도하는 것으로도 넉넉하다.

성당에 갈 수 없는 병자는 십자가의 길 방사를 받은 십자가를 들고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각각 스무 번, 즉 14처를 위해 열 네 번,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을 위하여 다섯 번, 교황을 위하여 한 번을 외면 십자가의 길 기도의 모든 은사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을 할 수 없는 병자는 다만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각각 세 번 외면 된다.

우리는 자주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도록 힘써야 한다.

 

성모께 대한 신심, 특히 묵주의 기도와 성의 聖衣

근심하는 이의 위로자이신 성모 마리아는 연옥에서 고생하는 영혼의 주보이시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에 의하면 연옥에서 구원된 영혼이 한 친구에게 나타나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성모 마리아는 로마 시에 살고 잇는 사람의 수효보다 더 많은 영혼을 연옥에서 구하셨다.”

이 성인은 로마의 유명한 성녀 체칠리아 성당에서 어떤 신부가 본 이상한 발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신부는 죽은 친구 때문에 잠이 깨어 이끌리듯 이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녀 체칠리아, 성녀 아녜스, 성녀 아가다가 다른 동정녀의 무리와 함께 성모님이 앉아 계시는 훌륭한 옥좌 옆에 서 있었다.

그때 몹시 가난한 차림을 하고 어깨 위에만 상당히 값진 모피를 걸친 한 부인이 나타나서, 성모의 발 아래 겸손되이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눈물을 머금고 애원하며 세 반 다음과 같이 말씀 드렸다.

“아아, 자비로우신 성모여, 방금 죽어 연옥에서 몹시 고통받고 있는 불쌍한 장 파트리치를 구해 주옵소서. 간청하옵나이다.” 그러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부인은 또 덧붙였다.

“성모여, 아시다시피 저는 겨우내 누더기를 입고 당신 성당 입구에서 구걸하던 거지입니다. 추워서 몸이 떨려 저는 당신 이름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저 장이 자기 어깨의 모피를 벗어서 제게 입혀 주었습니다. 아아 성모여, 당신 이름으로 행하여진 이 자선 행위는 상을 받을 가치가 있나이다.”

성모는 사랑에 가득 찬 눈길로 부인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너를 도와 준 이 사람은 많은 중죄를 범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무서운 벌을 받도록 선고받았다. 그러나 가난한 이에게 자비롭고 또 나의 제단을 꾸미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용서해 주겠노라.”

성모의 명령으로 파트리치를 데리고 왔다. 얼굴은 창백하고 무거운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사슬이 풀리면서 성모 곁에 있던 성인들 무리에 들여졌다고 생각하자, 모두 다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고 성당은 본래의 정적으로 되돌아갔다.

이 발현을 본 사제는 그 후로 여러 곳에서 성모를 특별히 공경한 영혼은 연옥에서 그 보호를 받는다고 설교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성녀 비르지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의 모후이며 자비의 어머니다. 내 전달로써 연옥에서 누그러뜨릴 수 없는 고통은 하나도 없다. 나는 천주의 성모인 것처럼 연옥에 있는 자의 어머니다.”

이로써 본다면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기 위하여 묵주의 기도 한 꿰미 혹은 일부를 바치는 것은 연옥 영혼 위에 은혜의 이슬을 내리게 하는 셈이 된다. 또 성모 마리아의 성의를 몸에서 떼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도 커다란 은혜의 연유가 된다.

 

매괴회의 한 여인의 신기한 구령

스페인 아라곤 주의 어느 신분 높은 이에게 알렉산드라고 하는 딸이 있었는데, 성 도미니코의 설교를 듣고 매괴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화장이나 잡담에 시간을 보내어 묵주의 기도를 하는 것도 가끔 잊어버리는 수가 많았다. 몹시 아름다워 청혼자도 많았는데 그 중에도 두 청년이 결투를 해서 이긴 편이 그 여자를 얻기로 하였다. 신호와 함께 결투가 시작되고 두 사람은 서로 찔러 얼마 후에 죽었다. 두 청년의 가족은 몹시 슬퍼하며, 이런 재앙도 이 여자 때문이라며 달려들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구타하였다 불쌍한 여인은 제발 고해 성사를 볼 여유를 달라고 애걸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목이 잘려 시체와 함께 우물에 던져졌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성모는 묵주의 기도를 바친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다른 동네에 있던 성 도미니코에게 이 일을 알리셨다. 성인은 놀라 용무를 제쳐놓고 며칠 후에 이 우물 옆에 왔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잠시 기도를 하 후에 “알렉산드라!” 하고 불렀다.

기이하게도 우물 속에서 시체가 움직여 머리가 몸뚱이에 붙었다. 피투성이였으나 살아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나와서 성인의 발 아래 엎디어 눈물을 흘리면서 총고백을 하고 매괴 회원이 되었던 일을 감사하였다. 보속으로 명해진 묵주의 기도를 하기 위하여 그녀는 이틀 동안 살아 있었다. 그 동안 각처에서 온 구경꾼들에게 그녀는 성모께 대한 신심을 권했다.

성인이 사후 사정을 물었더니, 세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을 말해 주었다. 즉 그녀는 지옥에 떨어질 터이었지만 매괴회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임종 때에 통회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 또 목이 끊기자 마귀 무리에 둘러싸였으나 성모님 때문에 구원되었다는 것, 그리고 또 청년들을 죽인 원인이 되었으므로 2백 년, 그 밖에 허영 때문에 5백 년의 연옥벌을 선고 받았으나, 매괴 회원의 기도 은혜로 구원될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깊은 신심을 드러내고 죽었다. 성 도미니코는 친히 그 장례를 지냈다. 그녀를 위해 기도와 고업, 자비와 대재를 행하였다. 15일 후 그녀는 별처럼 빛나며 성인에게 나타나 사람들의 기도를 감사하고, 또 연옥 영혼의 대표로서 성인에게 더욱더 묵주의 기도를 전파하는 데 힘써 달라고 청했다.

성인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전보다 더 열심히 묵주의 기도를 바치도록 격려했다.

 

140만의 영혼

성 도미니코회의 수도자 성 요한 마티아스는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여러 가지 고업을 하고, 그밖에 매일 적어도 묵주의 기도 세 꿰미를 바치고, 또 틈이 있는 대로 성당에 들어가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연옥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였다.

성인의 고해 신부가 “당신은 연옥 영혼을 얼마나 구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성인은 처음에는 침묵하고 있었으나, 임종 때가 되어 “140만의 영혼을 구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 수도자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 140만의 영혼이 환영했던 것이다.

 

성삼의 마리아 수녀

이 수녀는 묵주의 기도를 청하는 연옥 영혼을 보았다. 이 영혼들 자신도 묵주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이 기도를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시켜 달라고 청하여 그렇게 했더니 그 영혼은 천국에 올라갔다.

 

성녀 클로디아

생존 시에 이 성녀를 공격한 어떤 수녀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성녀에게 나타나 말했다. “하느님의 자비로 나는 연옥에 있습니다. 당신이 바치는 묵주의 기도는 내게 대단히 도움이 됩니다.”

성녀는 이 말을 듣고 살아 있을 때 자기를 반대한 이 망자를 위해 기도하고 또 다른 수녀들에게도 기도를 청했다.

 

성녀 브느와 수녀

제5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수녀는 날마다 반드시 묵주의 기도 15 꿰미를 연옥 영혼을 위하여 바치고, 거기다 여러 가지 고업을 더 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의 특별한 윤허로 연옥 영혼이 가끔 그녀에게 나타나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수녀가 망자를 위하여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자기 옆에 있는 한 영혼을 보았다. 이 영혼은 몹시 초조하게 그 기도로 자기가 구원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묵주의 기도로 구원된 영혼은 작별할 때 천국의 좋은 향기를 그 방에 남겨 놓고 가는 일이 가끔 있었다. 어떤 영혼은 천국에 갈 때 “내 자매여 안녕히, 하느님 곁에서 뵈옵시다”라고 말했다.

성녀 루트가르다 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한 영혼이 육체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승천하며 성녀에게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묵주의 기도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신심 덕택으로 몇 시간만 연옥에 있었습니다.”

 

성모 몽소 승천

로마에서는 몽소 승천 전날, 축성된 초를 손에 들고 시내 각처의 성당을 참배하는 관습이 있다. 어느 해 열심한 한 부인이 아라첼리의 성 마리아 성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보다 서너 자리 앞에 1년 전에 죽은 부인이 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옆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몹시 붐비어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성당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 부인도 나왔다. 그래서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옛날 성세대에서 저를 봉헌한 마로지아 대모님이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당신이 지금 살아 계시니 어쩐 영문입니까? 죽은 후에 당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녀 시절에 허영심, 음담, 좋지 못한 애정, 한마디로 마래서 그 시절에 범한 모든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이때까지 무서운 불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런 죄들은 전부 살아있을 때 고백했지마는, 영벌은 사해져도, 잠벌은 남아 있습니다. 그걸 연옥에서 보속하고 있었는데, 오늘 몸소 승천 첨례를 맞아 성모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윤허를 얻어 나를 천국에 들여 주시게 되었습니다. 내 말은 참말입니다. 내년 오늘 당신은 죽습니다. 만일 그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으면 내가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사라졌다. 부인은, 이는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때부터 이 세상의 헛된 일을 피하여 고복 苦服 위에 검소한 옷을 입고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하며 고해, 영성체를 자주 하였다.

이듬해 8월 14일, 이 부인은 갑작스레 병이 났다. 그리고 그 이튿날, 즉 성모 몽소 승천 첨례날에 세상을 떠났다. 성모님의 자비로 구령했을 것이다.

 

성모 성의 聖母聖衣

이탈리아 오트란토 시의 한 귀부인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권하고 있는 어떤 사제의 설교를 즐겨 듣고 있었다. 이 사제는 성모 성의를 지니는 모든 신자가 회의 극히 쉬운 조건을 지킨다면 임종 때 확실히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고 그 토요일에 연옥에서 구원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부인은 깊이 감동되어 그 성의를 받았다. 그리고 밤낮으로 성모께 기도하는 것을 낙을 삼고, 특히 토요일에 죽기를 원하고 있었다.

몇 해 후 이 부인은 중병에 걸렸다. 의사는 수요일까지 지탱하지 못한다고 말했지마는, 부인은 “나는 토요일에 죽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통을 바치며 온전히 천명에 맡기고 토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딸은 몹시 슬퍼하며 그 영혼을 위하여 성당에 기도하러 갔다. 그곳에서 이름 높은 성인을 만났는데, 성인은 그녀에게 말했다.

“눈물을 거두시오. 당신의 괴로움을 큰 기쁨으로 바꾸시오.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천국에 한 사람의 보호자를 얻었습니다. 오늘 토요일에 성모님의 자비로 당신 어머니를 연옥에서 구원되어 천국에 있습니다. 기뻐하시오. 그리고 성모님께 감사드리시오.”

우리도 늘 성의를 몸에 지니고 조금씩이라도 묵주의 기도를 바치도록 하자.

 

자선

토비트 서에서 대천사 라파엘은 말한다. “황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내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버립니다.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12, 8-9)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이에게 말한다. “당신 손 가까이에 아주 쉬운 방법이 있소. 이 아들이 당신으로부터 받을 터이었던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자선하여 영복을 얻게 하시오. 이것이 사랑하는 아들을 구하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꽃다발

11월 2일 위령의 날에 어떤 부잣집 부인이 꽃다발을 들고 자기 아들의 무덤에 갔다. 그런데 도중에 죽은 자기 아들 또래의 소년이 자선을 청했다. 부인은 불쌍히 여겨 그 소년에게 꽃다발을 주며 “팔아서 빵을 사라”라고 말했다. 소년은 꽃다발을 두 팔에 받아 안고 집으로 뛰어 갔다.

그 해 이 부인은 꽃다발로 무덤을 꾸밀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이때까지 알지 못했던 마음의 기쁨을 느낀 것이다. 꽃다발은 훌륭할지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자선, 선공, 선업, 특히 미사는 망자의 영혼을 위해 유익하다. 외적인 일은 우리 신분에 따라 꽃 해야 할 것만 하고, 먼저 일심으로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데 힘을 다하는 것이 참된 사랑의 증거이며 신자다운 법도이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선을 베푸는 이가 영복을 얻는다면, 최상의 자선인 연옥 영혼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연옥 영혼 대신으로 나 또는 그를 위하여 자선 사업, 전교, 학교, 성당 등을 위해 자선을 한다면 연옥 영혼은 위로를 받는다.

어떤 성인은 말했다. “성세의 물이 지옥불을 끄듯이, 자선은 연옥불을 끈다.”

 

대주교의 망토

이탈리아 카푸아 시의 대주교 제사르 코스타는 어는 날 예식 중에 자기 조카 쥴리 오만시네리 신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망토를 사라고 돈을 주었다.

대주교가 죽은 후 이 사제가 망토를 입고 수도원 문을 나가려고 하는데 주교가 불에 싸여 가까이 와서는 잠시 그 망토를 좀 빌려 달라고 했다. 이상히 여기면서 망토를 내어 주자 주교는 이를 몸에 둘렀는데, 그건 마치 불을 막는 것처럼 보였다. 사제는 이를 보고 자선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외출해야 한다고, 주교로부터 망토를 돌려 받고 이때까지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기를 약속하고서 수도원 문을 나갔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느 형제 밑에서 학대를 받고 있던 성인은 어느 날 길에서 은화 한 닢을 주웠다. 떨어뜨린 사람을 찾았으나 없었다. 어디다 쓰면 좋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바치기로 했다.

이상스럽게도 이때부터 이 소년의 운명은 달라졌다. 이번에는 딴 형제 밑에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사제, 주교, 추기경이 되고 교회 박사, 성인이 되었다. 이것은 오직 연옥 영혼을 위하여 바친 미사의 은덕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인도된 처녀

프랑스 파리에 18세 되는 한 처녀가 있었다. 양친을 여의고 어떤 집에 하녀로 있었는데, 어쩌다 큰 병에 걸려 겨우 나았을 때는 이미 그 집에서는 딴 사람을 쓰고 있으니 필요 없다고 하였다. 어디든 써 줄 곳이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 찾아봤으나 아무도 써 주는 사람이 없다.

그녀는 어느 날 유명한 ‘승리의 성모’ 성당에 들어가 평소에 열심히 의지하고 있던 성모께 기도하였다. 기도한 후, 문득 자기는 매월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바치고 있었는데 그 달은 깜빡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1프랑짜리 은화 한 닢밖에 없었다. 이걸 써 버리면 당장 그날의 빵을 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미사를 바치지 않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아, 때마침 제의를 입고 제대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제에게 1프랑을 바치고 미사를 청했다. 그리고 미사 참례를 한 후 대체 이제부터는 어쩌면 좋을까 하고 걱정하면서 성당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그랬더니 한 남자가 그녀를 불러 세우고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여보시오, 당신은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아무 데 몇 번지의 이러이러한 집에 가 보시오. 거기서 하녀를 구하고 있습니다”라고 일러주고 바쁜 듯이 어디론지 가 버렸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어째 저 꿈에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 내가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것을 알았을까?” 하고 이상히 여기면서 그 집을 찾아갔다.

그 집 주인도 몹시 놀랐다. 자기가 쓰고 있던 사람을 내보낸 건 오늘 아침 일이고, 하녀를 구한다는 말은 아직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누가 그걸 알려 주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겼다.

그럴 동안에 처녀는 문득 벽에 커다란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마님, 이 분이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작년에 죽은 이 집 아들이었다. 처녀는 아까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바친 일을 자상히 이야기했다. 아들은 연옥에서 구원되어 그녀에게 집을 안내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인은 하녀로서가 아니고 자기 딸로서 그녀를 맞이하였다.

 

이상한 편지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가정이 심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주인이 빚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게 되자, 아내는 일심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간청하였다. 사람들의 권유로 어느 자선가에게 자기네의 딱한 사정을 말해 봤으나 백 원을 동정 받았을 뿐이었다. 낙심하여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했다. 그러고 나서 문득 연옥 영혼의 전달을 청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 곧 사제에게 청하여 미사 한 대를 봉헌하고 그 예물로 받은 돈을 드렸다.

미사가 끝난 후 거리를 걷고 있는데 그 근심스러운 얼굴을 보고 어떤 노인이 까닭을 물었다. 그래서 사정 이야기를 하니까 노인은 그를 위로하며 겉봉에 적혀 있는 사람에게 전해 달라면서 편지 한 통을 주었다.

그녀가 그 편지를 전했더니, 받은 사람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그것은 얼마 전에 죽은 자기 부친의 필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 편지를 가지고 왔느냐고 여러 가지로 물어 보고 놀라면서 겉봉을 뜯어 보니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 불쌍한 부인이 드려 준 미사의 은혜로 방금 네 아비는 연옥에서 구원되었다. 이 부인은 몹시 곤란하다. 부디 그녀를 도와 주기 바란다.”

아들은 이 편지를 몇 번이고 거듭 읽었다. 그리고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께서는 나의 부친에게 영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당신 가족을 편안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위의 두 사건으로 보더라도, 연옥 영혼을 위하여 행한 사소한 자선이 현세의 큰 은혜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은사 恩赦

이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귀에는 나쁘게 들리고, 일반 사람에게는 오해 받는 점이다. 대사로 어떤 죄인이 사면되고, 어떤 이는 감형되는 따위의 일이 있다. 은사는 마치 그와 같은 것이다.

대죄를 고백하고 다시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영원한 벌, 즉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용서를 받지마는, 사함을 받은 죄의 보속 즉 유한한 벌은 현세나 후세에서 영복을 얻기 전에 다 받아야 한다.

자모이신 성교회는 자기 자녀들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갚는 데 교회의 재산 즉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모든 성인들의 공로를 사용하여 기도나 고행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이것이 은사이다. 예를 들면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의 기도 같은 것을 바침으로써 해야 할 보속의 전부나 또는 일부가 사해지는 것이다.

성 마리아 드 귀도는 한 환상을 보았다. 어떤 넓은 장소의 책상 위에 많은 금, 은, 보석, 다이아몬드 따위가 얹혀 있었다. 그리고 “이 재산은 아무다 써도 좋다. 원하는 자는 맘대로 가져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은사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이런 재산을 우리는 연옥 영혼의 빚을 갚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아이가 나쁜 짓을 했다. 아버지한테서 벌을 받아 외출을 못 하게 된다거나 또는 찬 없는 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자. 어머니가 불쌍히 여겨 네가 학교 숙제를 잘하면 아버지께 용서를 청해 주마 고 한다. 또는 누나가 이를 보고 어떤 좋은 일을 해서 동생을 위하여 빌고 벌을 용서받는다. 이것이 은사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치 이와 같다. 우리가 규정된 어떤 일을 하면 연옥 영혼의 빚을 갚고 그로써 저들의 고통이 다소 감해지고 영복을 얻는 시간이 빨라진다.

은사는 교회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어떤 고린토 인이 공공연하게 중죄를 범했기 때문에 성 바오로는 그를 교회에서 파문하였다 그러데 이 사람은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고 목숨을 건 고행을 했으므로 1년 후에 완전히 사함을 받아 또 전과 같이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박해 시대에 감옥에 갇힌 순교자들이 주교들에게 글을 보내어, 자기네의 가난화 가까운 장래의 신앙을 위하여 바칠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드러난 죄인의 벌을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이것이 곧 은사이다.

어떤 자선을 베푼 자에게 교회는 은사를 베푼다. 그러나 그것은 루터가 말한 것처럼 성물을 파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부나 자선을 하며 죄가 사해진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어떤 자선을 한 자가 자기 죄를 통회하고 개과 천선할 결심을 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조건 하에서는 은사를 얻어 연옥 영혼을 구해 줄 수 있다.

은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전대사와 한대사이다. 전대사는 잠벌을 아주 사해 주는 것으로서, 이를 얻고 곧 죽으면 연옥에 가지 않고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

한대사는 잠벌의 일부를 사해 주는 것이다. 10일, 40일, 1년, 10년 등의 은사란 그 날수나 또는 햇수의 연옥 벌을 감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옛날 교회에서 드러나게 범한 죄의 벌로서 명해졌던 10일, 40일, 1년, 10년 따위의 보속과 같은 공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12세기까지 교회는 죄인에게 길고 엄한 보속을 주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점을 친 자는 5년간의 고행.

하느님, 성모, 모든 성인을 공공연하게 모욕한 자는, 일곱 주일은 성당 입구에 서고, 그 마지막 주일에는 맨발로 목에 끈을 걸고 서며, 일곱 금요일에 대재를 지키고, 신분에 따라 일곱 주일에 세 사람이나 두 사람 또는 적어도 한 사람의 가난한 이를 대접하고, 그것을 할 수 없는 자는 다른 선업을 한다. 보속을 다하지 못한 자는 성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도 장례 예절을 받을 수 없다.

주일과 첨례날에 노동한 자는 3일간의 대재. 대제를 깨뜨린 자는 20일간의 고행.

사순절 중에 고기를 먹은 자는 부활날 영성체 하지 못하고, 그날 소재를 지켜야 한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은 자는 3년간의 고행. 폭행을 한 자는 7년간의 고행, 저주한 자는 40일 동안 대재. 욕한 자는 7일간의 대재. 거짓 증언을 한 자는 5년간의 고행. 거룩한 예식 중에 지껄인 자는 10일간의 대재. 고리 대금, 사음은 3년간, 간음은 7년 혹은 10년, 간통은 12년의 고행.

정부나 교회의 권리를 가진 자에게 폭동을 일으키는 자는 한평생의 보속. 암살자는 일생을 성제를 드리는 동안 성당 입구에 서고 임종 때에만 영성체가 허락된다.

그러면 10년 은사가 옛날 10년의 고행과 마찬가지의 공로를 발생케 한다면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얼마만한 효력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나지마는, 유감스럽게도 이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하기는 전연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느님의 비밀이다.

무릇 은사를 얻기 위해서는 상존 은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대죄가 없고 하느님 뜻에 맞는 자라야 한다. 또 은사를 얻는 데는 지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아침에 일어날 때 모든 행위를 하느님께 바침과 동시에 “오늘 모르는 중에서도 은사를 얻고 싶다”라고 뜻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명하여진 일, 예컨대 고해, 영성체, 어떤 선업, 교황을 위한 기도 등을 하여야 한다.

은사의 중요한 부분은 연옥 영혼에게 사양할 수 있다. 교회의 정신에 따라서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선업은 없다.

 

성녀 막달레나 드 파찌

성녀는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모든 은사를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수녀원에서 많은 덕을 쌓은 동료 수녀가 죽었다. 그러나 천사들 가운데서도 흠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수녀 안에서도 더러움을 보시어 길고 엄한 연옥의 선고를 내리셨다. 성녀는 망자의 관 옆에 엎디어 기도와 은사로써 수녀의 영혼을 구해 주려고 했다. 그랬더니 영원한 심판관 앞에 나아간 지 15시간 후, 수녀의 영혼이 태양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며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막달레나는 부르짖었다.

“나의 사랑스런 자매여, 잘 가시오. 그대는 영복을 얻지만, 나는 아직 이 눈물의 골짜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 영광의 위대함이여, 그리고 또 연옥 고통의 짧았음 이여. 그대 시체가 아직 묻히기도 전에 천국에 올라가는구나. 지금 그대는 현세의 모든 고통과 여옥 보속도 영복에 비한다면 온전히 무 無와 같았음을 깨달았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저 수녀의 영혼이 단 15시간만 연옥에 있었던 것은 너의 은사 은혜이었다” 고 말씀하셨다.

 

10일 은사의 가치

성 베르톨드 는 프란치스코회의 유명한 설교사였다. 교황의 특별 윤허로 자기 설교를 듣는 이에게 10일 한대사를 줄 권리를 받았다. 어느 날 자선에 대하여 훌륭한 설교를 하자, 몹시 빈궁에 빠진 한 귀부인이 불행한 사정을 말하며 도움을 청했다.

성인은 옛날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에게 성 베드로가 한 말을 상기하며 말했다.

“나는 금, 은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기꺼이 드리지요. 나는 설교를 들은 사람에게 10일 은사를 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영호의 재산보다 물질의 보배를 더 소중히 하는 이러이러한 은행가한테 가서 자선을 청하고 당신의 은사를 넘겨 주십시오. 반드시 환영할 터이니, 주저하지 말고 가 보십시오.”

다행히 그 시대의 은행가는 이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무시하지 않았다. “10일 은사 대신에 얼마의 돈이 필요합니까?”

부인은 두터운 신앙으로 한 장의 종이 위에 ’10일 은사’라고 써서 저울의 한쪽 접시에 얹고 말했다. “이것과 비등할 만큼 필요합니다.”

은행가는 한쪽 접시에 은화 한 개를 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은사를 놓은 접시가 올라가지 않고 도리어 내려갔다. 2개, 5개, 30개, 50개, 아무리 놓아도 접시는 올라가지 않았다. 마침내 이 부인이 필요한 만큼의 액수가 되었을 때 양쪽 접시는 균형이 잡혔다.

은행가는 이것을 보고 그때부터 영적 재산의 가치를 알고 전날보다 더 구령을 걱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안함에 쉬어지이다

어떤 청년이 부친을 여의었다. 아버지의 영혼을 빨리 구해 주려고 어떤 수도원에 가서 많은 예물을 바치고 기도를 청했다. 원장의 명령으로 수도자들이 전부 성당에 모였다. 일동이 “평안함에 쉬어지이다”란 말을 노래하자, 원장은 “아멘”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모두 각자 자기 방에 돌아갔다.

청년은 이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단 한 번 ‘평안함에 쉬어지이다. 아멘’이라니. 아버지는 참 불쌍하구나.” 그래서 원장한테 가서 겸손하게 자기 심정을 터놓았다. 원장은 각 수도자에게 작은 종이 위에 ‘평안함에 쉬어지이다’라고 쓰게 하고 그것을 저울의 한쪽 접시에 담고 또 한쪽에는 청년이 바친 많은 돈을 담았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돈이 담긴 쪽의 접시는 위로 올라가고 종이가 담긴 접시는 아래로 내려갔다. 뜻밖의 이 결과를 보고 청년은 자기 신앙이 부족했던 것을 원장에게 사과하였다. 그리고 부친 무덤에는 ‘평안함에 쉬어지이다’라는 글만을 새겨 두었다.

 

화살기도

은사 문제를 끝마치기 전에 화살 기도에 대하여 한마디 하기로 하자.. 이것은 사람이 한숨을 쉬듯 짧은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게 하고, 마치 아궁이 속에 5분이나 10분마다 석탄을 잔뜩 넣는 것처럼 한다. 신앙을 가지고 다음 화살 기도를 하며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각가지 은사를 얻을 수 있다.

“예수” 한 번에 3백 일 은사.

“예수, 마리아” 2백 일.

“예수, 마리아, 요셉” 7년.

“십자 성호” 50일.

“성수로 십자 성호” 백일.

“내 주, 내 하느님” 7년.

“주 예수여, 나 만유 위에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50일.

“마음이 양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여, 내 마음을 당신 마음과 같게 하소서” 백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달아드는 울를 위하여 빌으소서” 백일 (하루에 한 번만).

“선종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3백 일.

“임종 때에 우민 憂悶 하신 예수 성심이여, 임종하신 사를 가련히 여기소서” 3백 일.

“자비로우신 예수여” 백일.

“루르드의 성모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3백 일.

“주여, 망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3백 일.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 7년.

“삼종 기도” 10년.

“성 베르나르도의 성모께 바라는 기도 (생각하소서…)” 3년.

자기 묵주알 위에 3백 일 은사의 기도. 예컨대 “선종의 모후여…” 기로를 외면 2, 3분 동안에 1만 8천 알의 은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원의만 있으면 후세를 위하여 대단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수도자가 무덤 앞을 지날 때마다 거기 묻혀 있는 망자의 영혼을 위하여 “주여 망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라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신앙 없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한다면 짤막한 기도가 무슨 도움이 되랴는 생각도 들지마는 죽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어느 날 이 수도자는 깜박 잊어버리고 이 기도를 하지 않고 묘지 앞을 지나갔다. 그랬더니, 대여섯 명의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불만스런 모습으로 시편 128, 8 을 읊었다. “주님의 강복이 너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하고 지나가는 길손조차 말하지 않는도다.”

이것을 들은 수도자는 부끄러워하며 곧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하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위로를 받은 듯한 모습으로 그들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갔다.

위의 이야기로도 은사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은사에 무관심한 신자는 마치 여문 이삭을 발로 짓밟는 어리석은 농부와 같은 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현세 재물은 탐내어도 영적 재산은 버리고 돌아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후세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은 선업뿐이다. 다음의 병자처럼 한다면 영원한 재산가가 될 수 있다.

 

백만 장자

어떤 병자가 자기를 친절히 간호해 준 수녀에게 감사하고 싶었으나, 재산이 없어서 기도를 해 드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모송 을 백만 번 외웠다. 어느 날 그는 수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녀님, 수녀님은 부자가 될 생각은 없으시죠? 그렇지만 수녀님은 부자이시랍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농담이시겠지요.”

“아니,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수녀님께 사례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어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당신에게 갚아 주십사 고 청했습니다. 그래서 성모송을 백만 번 외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것을 끝냈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백만 장자이십니다.”

 

용감한 원의

일반적으로 말해서 원의 願意 란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만일 그것을 하지 않게 된다면 죄가 되는 것이다. ‘용감한 원의’는 그래서 특별한 것이다.

이것은 신자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일생 동안 자기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공로를 연옥 영혼을 위해 조금도 남기지 않고 성모 마리아께 드리고, 또 사후의 자기 영혼을 위하여 봉헌되는 모든 선업과 미사나 은사 등을 전부 사양하는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알몸이 되신 것처럼, 연옥 영혼을 구하기 위해 빈털터리가 되고 알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돼. 나 역시 연옥에서 오래 고생해야 될 텐데. 속담에도 ‘자애 自愛는 타애 他愛 보다 낫다’고 했는데, 빨리 연옥에서 구원되도록 나를 위해 공로를 쌓는 것이 당연하지. 남의 일은 뒷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착오이다.

 

성녀 제르투르다

성녀는 일생 동안 매일 세운 모든 공로를 전부 연옥 영혼을 위하여 사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종 때에 마귀는 이를 시기하여 그 때문에 오래 연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할거라는 생각을 일으켜서 괴롭혔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위로하여 말씀하셨다. “내 딸 제르투르다 야, 연옥 영혼에 대한 너의 애덕은 몹시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지금 네 죄의 모든 보속을 완전히 용서하노라. 또 이 완전한 사랑의 상급으로 천국에서의 네 행복의 정도를 더해 주리라. 네가 연옥에서 구한 영혼은 내 명령으로 성가를 부르면서 너를 천국에 영접하리라.”

그리하여 성녀는 확신과 기쁨에 충만하여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빨리 연옥에서 구원되는 첫째 방법은 이 영웅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묘지 참배

요즘은 묘지를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나, 신앙이 두터운 시대에는 묘지가 성당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매주일 미사 전후에 가족 묘지에서 기도하고 묵상했다. 묘지 참배란 무덤을 손질하고 꽃을 새로 갈아 놓는다든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나쁘지는 않으나, 죽은 사람을 위해 특별한 이익은 못 된다. 첫째로 신자는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묘지에서 하는 기도는 특별히 죽은 이에게 동시에 산 이를 위해서도 퍽 도움이 된다.

거기에 잠시 동안 세상의 허무함과 소음 嘯音은 사라지고 감동적인 침묵 속에 좋은 묵상이 된다. 묘지 한복판에 세워진 십자가, 그 둘레에 있는 수많은 무덤. 이런 것은 온갖 재산,  명예, 쾌락의 덧없음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사회주의자는 모든 계급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현세에서는 불가능한 이 위험한 주의는 다만 묘지에서만 완전히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졸렬함을 알 수 있다. 각 무덤에서는 이런 부르짖음이 들려 온다. “조심하라. 너는 그 날과 그 시각을 모른다. 오늘은 내 날이나 내일은 네 날이리라.”

 

루이 14세의 궁전

루이 14세는 그 전성 시대에 궁전을 지을 계획을 했다. 건축가는 파리 가까이 생 제르맹 시의 동산 위에 짓기로 설계를 하였다. 그는 찬성하고 실지검분 實地檢分 에 나섰다.

“여기에 성당, 저기에 무대, 저기는 대사들의 방, 짐의 발밑에는 파리가 있다. 짐은 파리를 지배하고, 파리로 프랑스를 지배하고, 프랑스로 세계를 지배한다.” 왕은 이렇게 의기 양양하게 말하고 뒤를 보았다. 거기서 그는 무성을 보았던가. 그것은 예로부터 국왕의 묘소가 되어 온 성 디오니시오 성당의 두 개의 종루 꼭대기였다.

“이건 안 되겠군. 베르사유로 하자.”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었다. 무덤이란 올바른 생활을 위한 가장 확실한 의논 상대인 것이다.

 

에우제니게라스 의 편지

이 이름 높은 부인이 어떤 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사랑하는 마리아여, 내가 지금 어디서 돌아왔는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요? 여간 해서 맞히실 수 없을 겁니다. 나는 묘지에서 몸을 녹이고 왔다오. 거기서 친척들과 함께 있었답니다. 먼 곳에 묻혀 있는 내 어머님 외에 우리 조상들은 모두 거기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나는 묘지에 있었을까요? 묘지가 좋아서? 아니 나는 유달리 묘지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고해 성사를 보러 갔더니,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몸을 녹이려고 추운 성당을 나와 묘지의 양지바른 곳에 갔었습니다. 거기서 후세 사정, 하느님 대전에 일생의 결산을 내어야 하는 일 등을 생각했습니다.

아아, 묘지는 좋은 성찰 지도서입니다. 거기서 진리를 읽고 빛에 비추어집니다. 삶의 꿈, 공상, 쾌락 등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거기서 나오면 속세의 허무함을 알 수 있습니다. 속세에 대한 애착이 엷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한 길을 밟기 위하여 자기 머리의 관과 무도복을 벗지 않는 여자는 없을 것입니다. 또 자기 아름다움을 잊어 버리지 않는 처녀도 없을 것입니다.

묘지 참배는 죽은 이를 위해서나 산 이를 위해서도 유익하다. 묘지 참배를 하면 악을 거부하고 선을 힘쓰며 구령에 대한 분발이 생긴다. 묘지 참배는 ‘덕의 대학 大學’이다.

보날 주교는 말했다. ‘교회는 위대한 협동 조합이다. 회원을 서로 맺어 주는 줄은 모든 성인의 통공이다. 천국, 현세, 연옥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의 삼국 동맹 三國同盟 이다.”

 

용서

17세기 성 프라치스코 살레시오가 이탈리아 파두아 시에서 공부하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이 시절에는 청년들 사이에 나쁜 습관이 있었다. 밤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누구야?” 하고 묻는다. 그리고 대답을 안 하면 권총을 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한 청년은 이렇게 하여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이 과오를 범한 청년은 놀란 나머지 근처의 친구 집으로 도망쳐 갔다. 그리고 과부인 친구의 모친께 청했다. “제발 저를 좀 숨겨 주세요. 저는 불행히도 사람을 주였습니다. 지금 쫓기고 있습니다. 제발 좀 숨겨 주세요.”

부인은 자기 외아들 방에 그를 숨겼다. 얼마 후 경관이 와서 물었다. “이 근처에 살인범이 도망쳐 오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찾아도 없군요.” 부인은 자기 집을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경관은 살인범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30분도 채 안 돼서 밖이 시끄러웠다. 문을 열어 보니 시체를 자기 집에 떠메고 온다. 자기 집에 숨겨 준 청년에게 살해된 것은 슬프게도 자기의 외아들이었다. 불쌍한 어머니는 애통해 하면서 그 청년에게 가, 어찌하여 아들을 죽였느냐,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고 힐문하였다.

청년은 자기가 친구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절망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몸부림치며 부인 앞에 꿇어 용서를 청하고 제발 경찰에 넘겨 달라고 말했다.

이 크나큰 슬픔을 당하여 모친은 자기가 그리스도 신자임을 상기하였다. 그리고 자기 원수를 용서한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본받아서 말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젊은이를 용서하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시오. 경찰의 손에서도 벗어나게 해주겠소.”

이튿날 밤, 살해된 청년은 광채를 띤 채 모친에게 나타났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베푸신 관용으로 축복을 받으소서. 저는 오랫동안 연옥에 있어야만 했지만, 저를 죽인 자를 어머니께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은 저의 죄벌을 온전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형제를 죽인 자

16세기 중엽, 이탈리아 로레토 시 근방 레카나치 라는 작은 동네의 ㅇ어떤 신심 깊은 부인은 두 아들의 교육을 프란치스코회의 루체시오라는, 사후에 성인처럼 존경을 받은 수도자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덕을 닦으면서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돈 문제로 싸움이 벌어져 하나가 형제의 뺨을 치자 또 하나는 칼로 형제의 가슴을 찔렀다.

1542년에 일어나 사건이었다. 형제를 죽인 자는 곧 도망쳤으나 얼마 후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시대에는 살인이 점점 늘어 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일반의 교훈이 되도록 이 살인자는 자기 형제의 시체에 묶여 산 채로 함께 매장되는 선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두 사람 다 수도자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튿날 아침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땅이 솟았다 내렸다 하는 것이었다. 놀라서 성당에 모여 있던 수도자들에게 알렸다. 수도자들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파 보니 형제는 둘 다 살아 있었다.

이 사실은 곧 사방에 알려져 시장, 주교, 사제, 관리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모두 급히 달려왔다. 두 형제에게 물으니, 먼저 살해된 자가 말하기를 “나는 찔렸을 때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복자 루체시오의 보호를 청했더니 내게 연옥을 면하는 은혜를 주시고, 또 죄를 보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게 해주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도 한 사람은, “형제 시체에 묶여서 그대로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나도 복자 루체시오에게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통회를 하고, 만일 구해 주신다면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재판관께서 허락해 주신다는 이 약속을 실천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모친의 기쁨, 복자 루체시오에 대한 두터운 감사에 대해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모인 사람들도 이 기이한 사건 때문에 하느님께 깊이 감사 드렸다. 재판관은 재판상의 선고는 실행되었으므로 하느님의 뜻에 맡긴다고 하였다. 살아난 자는 집에 돌아가서 고행을 하며 살았다. 형제를 죽인 편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도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연옥에 들르지 않고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는 묵시에 어떤 수련자의 부친이 연옥에 들르지 않고 바로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임종을 맞아 노자 성체를 영할 때에 사제가 데리고 간 사람들 가운데 홀로 병실 안쪽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병자는 그 이름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 그 손을 잡고 전에 이 사람에게 거친 말을 했던 일에 대해서 겸손되이 여러 사람 앞에서 용서를 청했다.

이 행위가 무엇보다도 하느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을 바로 천국에 불린 것이었다.

 

천명 天命에 맡김

예수회의 수원장이 된 카라파 신부는 부정한 선고로 사형을 당한 젊은 황족에게 착한 마음 준비를 시켰다. 즉 이 부정한 선고를 이때까지 범한 죄의 보속으로 받을 필요가 있다고 열심히 타일렀던 것이다.

황족은 온전히 천명에 맡기고 사형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참으로 신앙에 찬 기쁨을 드러내어, 이 부정한 사형 덕분에 하느님께서 자기 죄를 온전히 용서해 주시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카라파 신부는 청년의 목이 잘렸을 때, 승리를 거둔 그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모친에게 이를 말해 주었다. 사제는 기쁨을 누를 수 없어 “아아, 복된 자여” 하고 거듭 되풀이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미사를 드려 주십시오”라고 하였으나, 사제는 “저 영혼은 바로 승천했다”라고 단언하였다.

그 후 사제가 용무를 보고 있다가 별안간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퍽 이상한 형상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부르짖었다. “아, 복된 운명이여!” 곁에 있던 이가 그 뜻을 물으니, “사형자의 영혼이 영광 중에 내게 나타났다. 천명에 맡긴 것이 그에게 크나큰 이익이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로 보면, 특히 임종 때 하느님의 섭리에 완전히 맡기면 연옥벌은 다소 사해지는 듯하다.

 

쓸데없는 눈물

토마스 드 칸팀브레에 의하면, 어떤 어머니가 밤낮으로 죽은 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묵시를 보았다.

젊은이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크나큰 기쁨으로 충만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를 멀찍이 떨어져 그의 아들이 간신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애야, 어찌하여 혼자서 다른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느냐?”

아들은 젖은 옷을 보이면서 말한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께서 흘리시는 이 쓸데없는 눈물 때문에 무거워서 걸어갈 수가 없군요. 부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시고 미사를 드려 주세요. 그렇게 하면 제가 승천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고행, 특히 대재와 희생

10세기에 스페인 레조 주의 제후 산슈는 적에게 독살되었다. 아내 구우드는 남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몇몇 부인과 함께 수도원에 들어가 고행을 하였다.

성모께 봉헌되어 있는 토요일에는 여느 때보다 한층 더 열심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토요일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남편이 검은 옷을 입고 불에 단 쇠사슬에 묶여서 아내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더 많이 선업을 해 달라고 부탁하며 또 말하기를 “만일 내가 받고 있는 고통의 정도를 당신에게 알려 줄 수 있다면 당신은 나를 구하기 위해서 더욱 분발할 것이오. 하느님의 자비로 나를 구해 주오. 이 불 속에서 나는 몹시 고통을 받고 있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전보다 한층 선업을 더하고 대재를 엄히 지켰다. 남편을 괴롭히는 불을 끄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묶여 있는 쇠사슬을 풀기 위해 기도를 더 많이 하며, 많은 미사를 봉헌하고 거룩한 예식을 장엄히 하기 위해 성 스테파노 성당에 훌륭한 제복을 기부하였다.

40일이 지난 후 역시 토요일에 남편은 다시 아내에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때는 영광에 빛나며 훌륭한 흰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부인이 성당에 기부한 그 제복은 남편의 구령과 개선의 기념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쓰여지고 있었다. 남편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덕택으로 나는 구원되었소. 당신은 영원히 축복을 받으시오. 후세 고통보다 영원한 행복을 묵상하시오. 한결 같이 고업에 힘쓰시오. 천국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소.”

아내는 남편을 포옹하려고 두 손을 내밀었으나 만질 수가 없었고, 다만 남편이 걸치고 있던 제복만이 잡혔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성 스테파노 성당에 바쳤다.

실제로 소중히 간직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제복은 없어졌다. 사람들은 이 이상한 사실을 보고 모두 감격하였다.

 

목마름을 희생으로

이탈리아 베르첼리 시 도미니코회의 수원장 성녀 에밀리아는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수녀들에게 작은 희생을 시키는 습관이 있었다. 특별히 허락이 없으면 식사 중에 음료를 마실 수 없다는 한 규칙이 있었다.

어느 날 체칠리아 아오가트라 수녀는 심하게 갈증이 나 원장에게 마실 수 있도록 관면을 청했다. 그러나 성녀는 영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기념으로 이를 참고 연옥 영혼을 위하여 이 음료를 수호 천사께 맡겨 놓도록 하라고 권했다. 수녀는 몹시 목이 말라 적잖은 희생이라고 생각했으나, 원장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이를 예수게 바쳤다.

얼마 후에 이 수녀는 죽었다. 그리고 사흘째에 빛에 싸여 성녀 에밀리아에게 나타나 그녀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저는 부모에게 애착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지만, 목마를 때 순명하여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구원되었습니다. 사흘째에 수호 천사가 하느님께 바쳤던 음료를 연옥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불 속에 부었습니다. 그리하여 곧 불은 꺼지고 영복을 얻기 위해 데리고 나와 준 것입니다.”

 

기도에 염증 난 수녀

같은 수녀원의 한 수녀 마리아 이사벨라는 기도가 하기 싫어져 다른 수녀보다 일찍 성당을 나오곤 하였다. 원장이 까닭을 묻자 그녀는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원장이 말했다.

“지금 그대는 이 생활에서도 성가 부르기가 싫다면, 연옥 고통 속에서는 어떠하겠소? 이 무서운 시련을 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그대는 맨 마지막으로 성당을 나가시오.”

수녀는 이에 따랐다. 그 때문에 오래 기도하고 맨 끝에 성당을 나가는 것이 대단히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연옥에 머문 시간이 줄었다. 이는 또 성녀 에밀리아의 기도 은혜였다고 생각된다. 성녀의 전기를 쓴 사람에 의하면, 그의 부친의 3일 연옥 고통이 에밀리아의 기도 은혜로 3시간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연옥벌을 아주 면하거나 혹은 누그러뜨리는 방법은 이 밖에도 더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그치고 이 문제를 끝마치겠다. 이상으로 본다면, 사소한 희생으로 쉽게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다. 그러니까 매일 적어도 몇 가지 희생을 바치기로 하자. 제노아의 카타리나는 말했다. “현세의 빚 1원 때문에 연옥에서는 만 원을 지불해야 하리라.”

 

 

10.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각가지 회

 

연옥 영혼의 조력자회 助力者會

1825년 프랑스 북부 릴 시 부근에서 탄생한 에우제니아 스메트는 젊을 때부터 연옥 영혼에 대한 깊은 신심이 있었다. 그런데 1853년 11월 2일 위령의 날에 성체를 영한 후 다음과 같은 느낌이 일어났다.

“전투 교회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회가 창립되어 있다. 그러나 단련의 교회(연옥)을 위하셔 선업 고행을 하는 회는 없다. 나는 그 회를 창설하기 위하여 하느님께로부터 간택되었다.”

그래서 몇 해 동안 숙고하고 기도하며 각가지 의견을 들은 후에 마침내 하느님 성의라고 깨달아 ‘연옥 영혼의 조력자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1855년 파리 시부르 대주교의 인가를 얻어 수녀원을 개설하게 되었다.

이 회의 목적은 무료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동시에 영혼을 구하고 그것을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바치는 데 있다. 수녀들은 가난, 정결, 순명의 세 서원 외에 자기네의 공로를 전부 연옥 영혼에게 사양한다고 약속한다.

지금 이 회는 프랑스에 몇 군데 있고, 벨기에, 이탈리아, 미국, 중국 등에 있다.

이 회에는 본 회원인 수녀 외에 명에 회원이란 것이 있다. 그들은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 고행, 희생을 한다.

(1) 기도: 매일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과 “자비로우신 내 예수여”라는 기도를 죽은 자기 친척을 위하여 바치고, 또 그 기도에 붙어 있는 은사를 그에게 사양한다.

(2) 고행: 마찬가지로 연옥 영혼을 위하여 나날의 근심, 간난 등을 신앙으로써 참아 견딘다.

(3) 희생; 자선은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데 효력 있는 방법이므로 명예 회원은 무료로 일한다. 회의 유지를 위하여 매년 임의 희사한다. 그 때문에 본인은 물론이요 죽은 친척도 보조자의 선업과 봉헌되는 많은 미사와 매월 바쳐지는 영성체의 공덕에 참여한다.

명예 회원이 된 사제는 매월 한 번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고, 또 다른 회의 수도자로서 명예 회원은 매월 한 번 보조자의 정신에 따라서 성체를 영한다. 비오 9세는 1860년 7월 4일, 명예 회원에게 다음의 전대사를 주었다.

(1) 입회일.

(2) 11월 2일 위령의 날, 11월 15일 성녀 제르투르다 축일, 3월 19일과 25일 즉 성 요셉 축일과 성모 영보 축일, 예수 성심 축일,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로욜라 축일.

(3) 임종 때에 통회하고 “자비로우신 내 예수여”라는 화살 기도를 바치는 자.

 

연옥에서 잊혀지고 있는 영혼을 위로하는 회

1884년 프랑스의 부게 신부가 설립한 이 회는 얼마 되지 않아 세계 만방에 퍼져, 지금은 회원수가 2천만 남짓하다. 교황을 비롯하여 20명의 추기경, 2백 명의 대주교가 이 회를 칭찬하였다.

극빈자라도 회원이 될 수 있도록 1년 회비는 10원이나, 해마다 내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20년, 30년, 50년 분을 한꺼번에 내는 회원도 적지 않다. 또 많은 이가 한 목에 천 원을 내어 회원증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일생 동안 아무런 수고도 필요치 않다. 회원이 되는 생사자 生死者의 이름은 본부 장부에 기재되어 있지마는, 그것이 없어도 무효는 아니다.

모든 회원은 그 희사금이 백 원이면 10년, 5백 원이면 50년, 천 원이면 영구히 봉헌되는 미사 공로에 참여한다. 이 회에서는 매주 7회를 잊혀진 연령을 위하여, 또 매월 3회를 잊혀진 사제를 위하여 미사를 봉헌한다. 그 밖에 매일 천 대도 더 되는 미사가 봉헌된다. 생사자의 회원이 받는 이익은 대단하다.

회원은 다음가 같은 날에 전대사를 얻을 수 있다.

(1) 입회일.

(2) 예수 성탄, 부활, 승천, 성령 강림, 성체, 예수 성심, 성모 무염 시태, 성모 성탄, 성모 몽소 승천, 가르멜의 성모 (성모 성의), 성모 통고, 모리존의 성모(성령 강림 후 주일), 성 미카엘, 성 요셉,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성 그레고리오, 모든 성인의 17 축일, 기타 7일 중 임의의 하루

(3) 매월 첫 주일.

(4) 임종.

한대사 중 두 가지만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묘지 참배를 하고 묘지에서 기도하면 7년과 280일.

(2) 주의 기도, 성모송 및 “주여 망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5백 일 (1일 1회).

회원은 모든 은사를, 임종 때의 몫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은 이에게 사양할 수 있다.

 

연옥의 무사회 武士會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프랑스의 성모’  라고 불리는 성당에 한 회가 창립되어, 십자군의 무사를 기념하여 ‘연옥의 무사’란 이름이 붙여졌다.

무사, 즉 회원과 그들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매 월요일, 예루살렘과 파리에서 여러 대의 미사가 봉헌된다. 매주 ‘프랑스의 성모’의 수도자들은 연옥의 무사를 위하여 갈바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참배한다. 매월 성지에 있는 성당에 참배하고, 11월의 매 금요일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고 가신 발자취를 밟으며 공식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한다.

규칙: 본부 장부에 예루살렘, 혹은 파리에 입회한 생사자의 본명과 성을 기입한다.

다은 무사와 뜻을 합하여 날마다 성모송을 바치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천주의 성모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성 미카엘 대천사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기도한다.

매년에 한 번, 죽은 이를 위하여 성체를 영한다.

 

연옥 영혼을 돕는 신심회

1884년 시토 수도원에 속해있던 마리 베르나르도가 이 회를 창립했다. 교황과 많은 주교의 칭송을 받았다. 이 회의 목적은 회원인 생사자를 위하여 될 수 잇는 대로 많은 미사를 드리고, 죽은 이에게는 빨리 영복을 얻게 하고 산 이에게는 선종할 수 있는 은혜를 얻게 하려는 데 있다.

모든 신자가 회원이 될 수 있다. 자기 본명과 성을 본부 장부에 올리고 생사사를 불문하고 입회 때 250원을 낸다. 이는 일생에 한 번뿐으로, 그 증서로서 회원은 미사의 효력을 나타낸 상본 한 장을 받는다.

 

연옥 영혼 방문회

이 회는 1884년 로마에서 창립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성심의 공로, 특히 미사 성제로써 먼저 연옥 영혼을 위로하고 또 회원의 성화와 죄인의 회개와 영육을 위하여 필요한 은총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회원은 성심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일반 연옥 영혼, 특히 회원과 부탁 받은 영혼을 위하여 생존 회원의 공덕을 베풀어 준다. 또 모든 회원은 생존시와 사후에 회의 모든 선업과 크나큰 미사 은혜를 입는다.

회원은 회의정신을 받들어 될 수 있는 대로 매년 미사 한 대를 바친다. 그 장소, 시일, 사제 등은 각자의 자유이다. 또한 기도, 선업, 은사로써 연옥 영혼을 위로하고 성심의 공덕을 연옥 영혼에게 베풀도록 하는 것이다.

 

 

결론

 

아직 더 20만 시간을

한 죄수가 11년 전부터 감옥에 갇혀 있었다 어느 날 그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지자, 당시에 대단한 세력을 갖고 있던 어떤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탄원서를 제출했다.

“부인, 금년 (1760년) 이달 25일로 제가 감옥에서 고생한 지 10만 시간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20만 시간을 더 고생해야 합니다…”

아아 10만 시간! 병자가 고통 때문에 밤에 잘 수 없을 때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를 하나하나 세는 것처럼, 이 불쌍한 죄수는 시간을 일일이 세고 있었던 것이다.

현세 감옥에 갇힌 사람이 이렇다면, 연옥불의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연옥의 1분은 이승의 하루 같고, 하루는 1년, 백 년, 또 천 년처럼 길다.

이를 생각한다면 소죄라도 짓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보속해야 할 잠벌은 후세까지 남겨 놓지 말고 이승에서 보속하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구해 다오

수십 년 전 대단히 무서운 중죄가 신문에 게재되었다. 즉 한 청년이 타락하여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자기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더러운 못에 처넣어진 모친은 물속에서 허위적 거리며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자에게 구원을 청했다. 다른 자는 그녀가 못 언덕으로 기어오르려고 하면 발로 차 넣고 있었으나, 아들은 잔인하긴 했으나, 아기 때 자기를 안아 준 어머니의 쳐든 두 손을 보고 인정을 일으켜 두 팔을 뻗어서 어머니를 구했던 것이다.

이 무서운 사실은 연옥불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영혼의 상태를 긴 이론보다 더 잘 말해 준다. 우리의 과오로 우리 부모, 형제, 벗들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을 구하는 데 무심하거나 냉정하다면 이 타락한 아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 호랑이나 사자 따위도 제 새끼를 구하기 위해서는 불 속에라도 뛰어드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이요,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목숨을 내걸 것까지도 없이, 다만 약간의 선업으로 불 속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 있는데도 그걸 게을리한다. 이는 현세에서도 때때로 벌을 받는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어떤 영혼이 한 사람에게 나타나, “나는 친척의 유언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우박의 피해를 입었고, 벌써 2년 이상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가난한 이에게 재물을 나눠 주기를 미루었기 때문에 즉사했다.

성 도미니코회의 존경할 만한 수도자가 죽은 후 성 토마스에게 나타나 “파리 대주교의 유언 이행을 등한히 했기 때문에 연옥에서 고생했다”라고 말했다.

 

망자의 영혼을 위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망자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해진 후 한 시간 있다가 모든 성당의 종을 치도록 명하였다. 이 유익한 관습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우리도 매일 밤 취침 전에 연옥 영혼을 위하여 적어도 주의 기도 한 번이라도 바치자. 또 묵주를 머리맡에 두고 밤에 잠이 깨면 곧 죽은 이의 영혼을 상기하여 그 고통 받고 있는 불을 누그러지게 해주자.

성녀 데레사는 일생 동안 모든 행위와 고통을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고 있었다. 성 도미니코도 연옥 영혼을 위하여 매일 저녁 몸을 매질하고 있었다. 성녀 마리아도 연옥 영혼을 위하여 20년 동안 대재를 지켰다.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종을 치면서 시내를 돌아다녀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하였다. 밀래카의 어떤 이는 성인의 명령으로 매일 밤 등불과 종을 들고 동네 사방 거리에서 이렇게 외쳤다. “연옥에 갇혀 있는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15세기에 낭트의 한 주교는 신자들의 권유에 따라 자기 교구의 모든 읍과 마을에서 사람이 종을 치며 순회함으로써 망자의 영혼을 위하여 신자들에게 기도하기를 알리라고 명했다.

 

아주 쉬운 방법

어떤 수도자가 원장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저는 연옥에서 몹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제발 이러 이러한 부인에게 기도를 청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원장은 부인한테 가서 “당신은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특별히 무엇을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부인은 대답했다. “따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남편이 때리거나 학대할 때 인내로써 그것을 참아 받아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 말을 듣고 원장은 수도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 며칠이 지나니까 그 수도자는 영광에 빛나면서 원장에게 나타나 “그 부인 덕택으로 구원되었으니 부디 감사 드려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눈물의 골짜기인 이승에서 근심 고통 없이 지내는 자는 없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인내하며 참아 받고 연옥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한 번 외는 ‘천주께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은 유쾌한 때에 천 번 되풀이하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라는 격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확실히 는 알 수 없다. 포로가 되지나 않았는지? 그러니까 그들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제일 안심되고 이치에 맞는 일이다.

 

인색한 수도자의 벌

 9세기 경에 마인츠 시의 대주교가 된 라바누스 마우루스 신부가 풀다의 수원장이던 시절에, 늘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아델하이트란 회계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이 회계는 가끔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다.

원장은 또 수도자들의 찬성을 얻어 수도자 한 사람이 죽으면 30일간 그 식사를 희사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인색한 회계는 그것을 게을리하든지 미루든가 하고 있었다

830년, 전염병으로 그 수도회의 총장과 수십 명의 수도자가 죽었다. 원장은 회계에게 소정의 희사를 하도록 명했다. 그는 그것을 승낙은 했으나 앙화롭게도 살아 있는 수도자에게 부족해서는 안 된다는 구실로 수십 명의 수도자의 영혼을 구하는 데 게을리 했다.

어느 날 아델하이트는 하루 종일 대단히 바빴다. 그리고 그날 밤 다른 수도자가 전부 나간 뒤에 등불을 들고 집회소를 지나갔다. 그랬더니 한 명의 총장이 많은 수도자와 함께 가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밤늦게 신간 외에 집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어쩐 영문인가 하고 이상히 여기면서 천천히 보니 그건 죽은 총장과 수도자들이었다. 놀라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에 일어난 일에 비긴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홀연 총장과 몇 명의 수도자가 일어나서 아델하이트에게 가까이 와, 옷을 벗기고 실신할 때까지 그를 매질하면서 말했다.

“앙화로운 자, 네가 인색한 대가이다. 3일 후 너는 죽은 사람 가운데 있겠거니와, 그때는 더욱 엄히 처벌될 것이다. 그리고 네게 바쳐지는 선공은 네게로 돌아가지 않고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지리라.”

밤중에 수도자들이 성당에 가다가 회계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여간 놀라지 않았다. 곧 반사 반생 半死半生 이 되어 있는 그를 병실로 메고 가서 간호를 하였더니 소생하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원장님을 빨리 불러 주시오. 육신 치료보다 영혼의 약이 필요합니다.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습니다.”

원장이 오자 그는 모든 이 앞에서 위의 끔찍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아델하이트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3일 후 죽는다는 것도 말하고 아델하이트는 진정한 통회를 하며 병자 성사를 청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에 의탁하고 수도자들의 기도 중에 3일째에 죽었다.

즉시 망자를 위하여 미사가 봉헌되고 규칙대로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는 베풀어졌다. 그러나 인색한 자의 벌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창백하고 가련한 모습으로 원장에게 나타나 말했다.

“아아, 형제들의 기도로써 저는 상당히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인색 때문에 구원되지 못했습니다. 먼저 죽은 수도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저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를 위해 베풀어지는 자선의 공덕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제게가 아니고 그들에게 돌려집니다. 그러하오니, 살았을 때 부친처럼 저를 아껴 주신 원장님, 제발 자선을 배로 해주십시오. 그래야만, 우리 형제들은 구원되고 저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원장은 승낙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수도자들도 각자의 식사를 줄이고 그것을 베풀 만큼 망자를 위하여 힘을 다 썼다.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아델하이트는 새하얀 옷을 입고 기쁜 모습으로 원장에게 나타나 수도자들의 기도를 감사하고, 이제부터 천국에서 끊임없이 은인을 위하여 기도하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로 보면, 의를 거슬러 남에게 해를 끼친 자는 내세에서 그를 위해 바치는 자비, 공로, 선업 등이 남에게로 돌아가고, 그들이 승천한 후 그 나머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꽃을 사절합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파브르 대주교는 자기 관 棺 위에 꽃다발을 놓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주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관 위에 2천 번의 미사 예물을 두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루 사이에 시드는 화환보다 이 미사 예물로 주교의 영혼은 얼마나 더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최근에 프랑스의 어떤 원로원 의원은 유언에서 말했다. “내 무덤 위에 놓아 주기를 원하는 것은 꽃이 아니고 기도이다.”

그래서 요즘은 부고 訃告 에 “꽃을 사절합니다. 단 망자를 위한 미사는 감사히 받겠습니다”라고 쓰는 관습이 생겼다. 이 때문에 일부러 ‘미사 목록’이란 것이 생겼다. 망자를 위하여 봉헌될 예정의 미사수를 적어 그것을 우송하든가 또는 조상 때 시체 위에 두는 것이다.

이 신자다운 방법은 산 이의 마음과 죽은 이의 영혼에게, 한 대의 미사라도 백, 천의 꽃수레보다 더 반갑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물론 각기 신분에 따라 장례를 지내야 한다. 그러나 생존자의 체모 때문에 행해지는 훌륭한 예식은 망자를 위해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떠들썩한 장례보다 기도와 선업이 따른 검소한 장례가 얼마나 더 나은지 모른다. 망자를 위해서는 묵주의 기도 한 단이나 성체 조배 한 번, 미사 한 대가 다른 모든 장식보다 더 유익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고 천국의 상속자가 될 영혼 일은 내버려 두고, 빨리 묻어 버려야 할 육체를 위해서는 아까워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망자에 대하여 불충실하고도 잔인한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자의 초상 때 받은 부의 賻儀로 미사를 청한다고 알린다 해도 이상히 여기는 자는 없을 것이다. 또 이 미사 은혜로 그 부의를 한 미신자가 늦어도 임종 때에는 신앙의 은혜를 받을 수 잇는 것이니, 어느 모로 보나 대단한 이익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은, 가톨릭 교회가 죽은 사람을 소중히 하는지 아니하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교회는 밤낮없이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또 진실한 신자는 모든 망자, 특히 가장 사랑하는 자를 언제나 상기하여 일생을 그들과 함께 살아 매일의 노고와 걱정들을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고, 도 선업이나 자선을 망자를 위하여 스스로 하며 또 남에게도 시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죽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두 명의 재산가

이 이야기로 이 책을 끝맺기로 하겠다. 이 책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 다만 이것만을 상기하고 실행하여도 대단히 유익하리라고 믿는다.

두 사람의 영국인이 멕시코에 건너가 재산을 장만하였다. 그러나 점점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그 중 한 사람은 재산을 정리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안락하게 살았다.

또 한 사람은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물쭈물 하는 동안 어느 날 밤 별안간 폭동이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겨우 피신하였다.

이 이야기에는 대단히 유익한 교훈이 담겨 있다. 즉 전자는 살아 있을 동안에 선업을 행하여 사후 백 배의 갚음을 받는 착한 신자의 상징이다. 또 후자는 자기 재산의 노예가 되어 선업을 안 했으므로 사후에 알몸이 되어 암흑 속에 던져지는 자의 상징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자는 많은 사람이 밟아가는 길이다.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알고 있다. 우리는 덧없는 현세를 위해서가 아니고 영원한 후세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재산가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마태 6, 19-21).

 

 

연옥실화

지은이 막스 퓌상

옮긴이 한국 순교 복자 수녀원

펴낸이 김수환

펴낸곳 가톨릭출판사

1964년 10월 15일 교회 인가

1987년 6월 16일 초판 펴냄 (개정)

1994년 2월 20일 9판 4쇄 펴냄

값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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