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령 隱祕嶺 – 이순원

 

 

왜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 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 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 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1

 

길 위에서 길을 바꾼 것도 그랬지만 여행도 처음부터 계획하고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혼자 집에 있었고, 여행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물론 여러 날 전부터 마음속으로 무언가 기다려왔던 건 사실이었다. 오후에 나는 한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어떤 가벼운 흥분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흥분 뒤편으로 어쩔 수 없는 무게로 더해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소금 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약속은 이미 지난주에 했었다. 여자가 먼저 전화를 걸었고, 내가 그 말을 했다. 전날 나는 처음으로 여자 앞에서 많은 술을 마셨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들은 내가 마신 술보다 더 많았는지 모른다. 여자는 내가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아직도 그렇게 말해야지만 전화를 걸 수 있습니까?”

여자는 조심스럽게 자기가 전화를 잘못 걸었느냐고 물었다. 내겐 그런 그녀의 조심스러움이 마치 그녀와 나 사이를 마지막으로 가리고 있는 계란 껍데기 속의 엷은 막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연약한 막마저 성급하게 벗겨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젠 내가 보고 싶거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를 했다고 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아,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게…”

여자는 그 말이 내게 다른 뜻으로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해선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서 그런 게… 라고 말하고 나서 방금 전 조심스럽게 고개를 밀고 나왔던 계란 껍데기 속으로 몸을 움츠렸다.

“내가 성급했나 보군요. 나는 이제 그러길 바라고 한 말인데…”

계란 껍데기 속 저편으로 여자의 고리지 않은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자에게 그럼 다름 주 토요일에 내가 잘 들어갔는지 못 들어갔는지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미리 잡힌 약속이 없었더라면 나는 당장 내일 모레로 다가온 이번 주 토요일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토요일에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저녁에 잠시가 아니라 낮부터 저녁까지, 가능하면 밤중까지도 여자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발리 보는 것보다 며칠 늦게 보더라도 조금이라도 오랜 시간 여자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간 만나온 횟수와 시간에 용기를 얻어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건 전화가 아니라 여자가 먼저 건 전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그날 세시에 엔야 로 나가겠습니다.”

술을 마시던 날보다 보름쯤 전 여자와 내가 들어가서부터 나올 때까지 줄곧 엔야의 노래를 틀어주던 카페를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 노래도 내가 먼저 누구의 노래라는 걸 알았던 게 아니었다. 음악이라면 거의 닫고 살다시피 하는 내 귀에도 뭔가 조금은 신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게 있어 누구의 노래냐고 묻자 여자는 “정말 모르세요?” 하고 되묻고 나서 엔야의 노래라고 했다. 어떤 텔레비전에서 유럽의 여러 성지들을 순례하며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배경 음악으로 쓴 다음 지금은 쥐니 개니 하는 거의 모든 연속극들과 광고들까지 그 음악을 배경 음악으로 쓰고 있다고. 그런데도 나는 그 노래를 그날에야 처음 들었다. 노래를 들으며 여자의 눈을 바라볼 때 이상하게 나는 여자와 함께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지와는 또 다른 그 어딘가를 찾아 모래언덕 같은 흰 소금산을 지나 끝없는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느낌을 여자에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앉아 저 음악을 들으니까 선혜 씨와 함께 그 어딘가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아마 여자도 내가 말한 그 어딘가의 의미가 무엇이라는 것을 금방 읽었을 것이다. <그 어딘가로> 끝없는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 아니라 <그 어딘가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의 의미가 무엇이라는걸. 그러니까 여자도 나도 저마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어떤 기억의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겐 죽은 친구이고, 그녀에겐 죽은 남편인 한 사내의 영혼이 우리에게 쳐놓은 모든 기억과 의식의 그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도 우리 마음 안에 그의 영혼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소금 짐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곳. 정말 우리는 우리 마음의 그런 곳을 찾아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죽은 친구의 아내인 그녀와 죽은 남편의 친구인 내가….

며칠 후 여자는 내게 엔야의 노래를 담은 시디 두 개와 같은 노래가 담긴 테이프 두 개를 선물했다. 여자는 내가 그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샀다고 말하지 않고 필요한 것 같아서 샀다고 말했다. 나도 고맙다는 말 대신 “선혜 씨도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도 그 노래를 듣고 자동차 안에서도 그 노래를 들으며 마치 내 옆에 있는 듯 여자를 생각했다. 함께 들으면 여자가 함께 그 어딘가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고, 혼자 들으면 끝없는 여행 중 문득문득 내 앞에 앉아 함께 노래를 듣던 여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날 아침에도 그랬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오늘이 그날이지 하는 마음으로 습관적으로 엔야의 시디를 찾다 틀었다. 조심스럽게 하루를 준비하듯 비누 면도를 할 때도 그랬고, 식탁에 우유 한 컵을 놓고 앉아 버석한 빵을 깨물 때에도 그랬다. 3시에 여자를 만난다. 여자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될 것이고 술도 마시게 될 것이다. 술을 마시고 나면 약간의 용기도 얻게 될 것이다. 바깥은 밤이 될 테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 어딘가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하듯 거리를 나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리에서 우리는…

그러다 문득, 정말 문득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그렇게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늘 마음 한구석을 누르고 있긴 했어도 얼마 전부터 엔야의 노래를 듣는 동안엔 한번도 떠오르지 않던 얼굴이었다. 그럼 또 봐. 그가 내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보이지 않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그 노래를 듣던 중엔 한번도 떠오르지 않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 것도 그랬고, 또 그러는 동안 한번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도 그랬다. 어쩌면 그래서 나도 줄곧 그 노래만 틀어두었고, 그 노래를 함께 듣고 난 다음 그녀가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얼른 오디오의 스위치를 눌렀다. 이제 그가 더 큰 무게로 내 마음의 소금 짐을 더하겠다는 뜻일까. 정말 여자와 나는 그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하면 엔야의 노래를 듣는 동안 한번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던 건 몰라도 문득 이라고 말할 만큼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때 나는 입술로 빵을 깨물며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는 생각을 했고, 술을 마시고 난 다음 우리 마음의 그 어딘가를 찾아 거리로 나서는 생각과 그 거리에서 잠시 어떻게 하지? 하고 망설이다가 어느 으슥한 골목이라도 좋고, 아니면 내가 강제로 끌고 들어가고 여자가 마지못해 따라 들어온 어느 호텔이라도 좋은 어떤 곳에서 빵을 물듯 여자의 입술을 무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제까지 한번도 그런 그림으로까지 여자와 나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여자를 만나면 당연히 그렇게 되고 말 일처럼 자연스럽게 그런 그림이 떠올랐고, 상상 속에 그녀의 입술을 무는 순간 그런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럼 또 봐….

 

 

 

2

 

오전 내내 그 말이 귓속을 맴돌았다. 빵을 먹고 난 다음 커피를 마실 때에도 그랬고, 다시 엔야의 노래를 틀었을 때에도 그랬다. 그건 살았을 때 그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가 그 말을 할 때 여자는 그의 팔을 끼고 있었다. 그날 나는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고, 여자를 처음 보았다. 대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던 것일까.

내가 여자를 처음 보았던 건, 오래 전 잠시 만났다가 소식도 모르게 헤어졌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났던 건 4년 전 운전면허 시험장에서였다. 그날 나는 필기시험 후 코스 시험에서만 네 번 떨어진 다음 다섯 번째 시험을 보러 갔었다. 학원에서 연습할 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시험장에만 가면 마지막 T자 코스에서 늘 금을 밟고 말았다. 그날도 그랬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고 전에 없던 여유까지 가지고 ㄱ자로 핸들을 꺾어 나오는데 여지없이 탈락 버저가 울렸다. 정말 개떡 같은 기분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봄 날씨도 갑자기 쓸쓸하게 느껴지고, 무언가 손 안에 다 들어왔던 것을 놓친 듯 모든 것이 허전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내 기분과 상관없이 어차피 다음 번 시험 신청은 해야 하고, 그걸 신청하고 나서도 쉽게 시험장을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도 아마 그런 쓸쓸하고도 허전한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저히 그대로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나는 다른 코스 시험장과 그 옆의 주행시험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2종 보통면허 주행시험장 앞에서 막 주행시험을 보고 나오는 그를 만난 것이다.

“어! 이게 누구야?”

내가 먼저 그를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나를 보았다.

“아니, 자네…”

나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5월 중순인데도 넥타이까지 맨 양복 차림에 한쪽 손에 사무가방을 들고 있었다.

“은비령…. 은비령 맞지?”

그는 거듭 놀란 얼굴을 했다. 내 이름보다 그곳이 먼저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의 이름을 얼른 떠올리지 못했듯 그도 내 얼굴은 금방 알아봤어도 순간적으로 이름은 가물가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의 8년 만인가 9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 은비령…”

그게 벌써 언제 적의 일인데. 군에서 제대한 다음 한두 달 집에서 머무르다 나는 곧바로 책보따리를 싸들고 강릉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은비령으로 들어갔었다. 그때 나는 군에 가 있는 동안 잠시 중단했던 고시공부를 새롭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몇 달 후 서울에서 같은 책을 싸들고 은비령으로 들어왔다. 내가 그곳에서 생활한 것은 늦은 여름부터 다음해 여름까지 1년 동안이었지만 그와 함께 생활한 건 9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먼저 은비령을 나온 다음 서로 소식도 모르게 지내다가 8년 만인가 9년 만에 서울의 한 운전면허시험장에서 만난 것이었다.

“여긴 어떻게…?”

“어떻게는. 코스에서만 다섯 번째 떨어지고 나가려던 참에 자넬 본 거지.”

“나도 네 번 만에 간신히 합격했네.”

그는 악수를 하느라 잠시 가방을 낀 쪽 손에 옮겨쥐었던 응시표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데?”

당연히 물어야 할 말인데도 나는 그 말을 묻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아침나절도 아니고 오후 늦은 시간에 운전면허시험장에 나오면서까지 넥타이를 매고 사무가방을 들고 나온 거라면, 그도 왠지 나처럼 중간에서 길을 바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 때문이었다. 예전 공부할 때와 비교해서도 그렇지만 차림새와 용모가 너무도 반듯해 한때 우리가 꿈꾸던 덕수궁 맞은편 동네의 젊은 영감처럼 보이기보다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 앞에 섰다가 퇴근해야 하는 금융기관이거나 대기업 샐러리맨 쪽으로 더 가깝게 보이던 것이었다.

“과천에 있어.”

“과천 어디?”

시사공부를 하던 친구가 과천이라니 나는 더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곳엔 이렇다 할 대기업이 없으니 아마 어느 은행 지점에서 열심히 남의 돈을 셈해주고 보관해주고 있구나 하고, 그런데 뜻밖으로 그는 그곳에 있는 어느 중앙부처에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그쪽이 아니었잖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그는 조금은 쑥스러운 얼굴로 내가 은비령을 나오던 해 1차 시험에서 떨어진 다음 곧바로 행시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시험에 합격한 건 5년 전의 일이라고 했다. 그런 그에 비해 나는 은비령에 들어가 있던 기간을 포함해 다시 시작한 공부를 3년 만에 깨끗이 포기하고 말았다. 제일 먼저 느끼던 것이 체력의 한계였고, 왠지 그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닌 것 같은 회의를 이겨낼 수 없던 것이었다. 거듭되는 실패의 예감 속에 마지막 몇 달은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니게 그저 버릇처럼 책을 붙들고 있다가 그 해 다시 봐야 할 1차 시험에서마저 낙방한 다음 차라리 잘 됐다는 심정으로 완전히 손을 놓고 만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하루 세 끼 식사조차 쉽지 않은 만성적인 신경성 장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나보다 이태를 더 공부했으며, 만성 장염에 시달리던 내가 뒤늦게 제 길을 찾듯 창작 쪽으로 문단 말석에 얼굴을 내밀던 해에 관리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자네 얘기는 가끔 신문에서 봤는데. 더러 자네가 쓴 글도 보고.”

“그런 건 무엇하러 봐?”

“자네가 글을 써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때도 자넨 그쪽으로 더 반짝였던 것 같아. 거기 마을에 우리가 붙인 이름들도 그랬고. 은비팔경 말이야.”

“그거야 심심하니 억지로 붙였던 거고. 바빠?”

“바쁜 건 아닌데 여기서 집사람을 만나기로 했거든. 자넨?”

“코스에 붙었으면 바빴겠지. 자넬 만나려고 떨어진 건지.”

“정말 반갑네, 이렇게 보다니. 그래 요즘은 어때?”

나는 오래 전에 앓았던 만성 장염에 대해 이야기했다. 입대 전 학교를 다니던 동안에도 그랬고, 제대 후 3년 동안 같은 공부를 하면서도 오히려 내가 가얄 할 길은 저쪽이 아닐까 생각하던 창작 쪽으로 마음을 다잡고 나자 공부나 창작이나 책상에 앉아 하는 일은 마찬가지인데도 이상하게 그 장염이 다스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러다 이태 후 등단 땐 내가 언제 장염을 앓았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좋아져 있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내가 공부를 포기했던 것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장황하게 변명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고 보니 그랬다. 아내에게말고는 그때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변명하듯 자세하게 이야기했던 사람이 없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한때 같은 공부를 하던 동도였고,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도 이상의 옛 길친구였다. 아내에게처럼 그에게도 나는 무언가를 이해시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내게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고, 결혼은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조금은 쓸쓸한 기분으로 네 살 난 아이가 있다고 짧게 말했다. 그때 이미 내 결혼생활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나도 그에게 언제 결혼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3년 전에 했으며 두 돌 된 아이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때 힘들어도 참 재미있었는데.”

“직장생활 힘들면 가끔 생각나기도 하고.”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여자가 왔다.

“됐어요?”

여자는 그냥 지나치는 사람처럼 눈에 띄지도 않게 그의 등 뒤쪽에서 다가와 매달리듯 그의 팔을 끼며 물었다.

“그럼 됐지.”

그는 내게 했던 것처럼 합격 도장이 찍힌 응시표를 여자에게 흔들어 보였다.

“어디 줘봐요. 네 번 만에 오른 게 무슨 벼슬이라구.”

“무슨 얘기야? 이 친구는 다섯 번 와서도 떨어졌다는데.”

“하기야 이건 지능하고는 반비례한다니까.”

여자는 햇빛 아래 하얗게 이가 부서지게 웃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한 일이었다. 처음 다가와 그의 팔을 낄 때에도 그랬지만 스물일고여덟쯤 돼 보이는 여자의 얼굴 역시 살아온 날 어디서 꼭 한번은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첫눈에 다가오는 얼굴이라 금방 생각날 듯싶은데도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우리 집사람이야.”

여자가 내게 인사를 하고 내가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쪽은, 내가 전에 얘기했지? 전에 은비령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소설가가 되었다고. 바로 그 친구야.”

“아, 예에. 반갑습니다.. 책도 잘 봤구요.”

다시 여자가 내게 인사를 했다. 그 표정이 그냥 낯익은 정도가 아니라 어떤 깊은 인상으로 뇌리에 스치는데도 생각이 날 듯 날 듯하면서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인사를 하고 난 다음 여자가 한 손으로 핸드백을 고쳐 메며 휙하고 머리를 뒤로 젖일 때 비로소 여자의 이름이 아닌 한 들꽃의 이름이 생각났다.

그래, 바람꽃….

하마터면 나는 여자가 아니라 내 앞에 양복을 입고 한쪽 손에 가방을 들고 있는 친구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뻔했다. 10년 전 향로봉 아래에서 마지막 군생활을 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세던 때 내게 그 들꽃의 이름을 가르쳐주던 일병이 있었다. 학교에서 식물학을 공부하던 중에 입대한 졸병이었다. 남쪽에선 개나리가 피고 질 때 그곳엔 아직 눈이 내렸다가 녹고, 녹다가 다시 내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이른 아침, 그와 함께 교통호를 따라 매일 같은 코스로 경계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아직 다 녹지 않은 눈 얼음 사이를 뚫고 올라와 핀 이름 모를 한 들꽃을 보았다. 저게 어떻게 얼음을 뚫고 올아 왔을까 싶을 만큼 고사리보다 가늘고 연약한 꽃대였다.

“아, 바람꽃이다. 바람꽃 … 여기 와서 바람꽃을 보다니…”

군복을 입고도 꽃 한 송이의 발견이 그렇게도 감동적이었을까. 산병호 초소에서 함께 새벽을 맞았던 일병은 어깨에 메었던 총과 방한장갑을 벗어 던지고 드문드문 남은 눈 위에 몸을 내던져 부복하듯 손과 무릎을 짚은 채 코를 킁킁거렸다.

  “바람꽃?”

“예. 바람꽃이오. 도감에서만 보던 꽃인데 여기서 보다니…”

그런 일병에게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오던 나이 어린 여자가 있었다. 바로 그 여자의 얼굴이었다. 내가 깊은 인상으로 여자의 얼굴을 보았던 건 부대 정문 위병소 앞에서였다. 여자가 면회를 왔을 때 일병은 유격훈련을 들어가 있었다. 연락을 받고 내가 대신 위병소로 나가 그 사정을 전했다. 이, 그럼 어떡해. 편지엔 오늘 오라고 했는데… 여자는 가슴에 두 손을 대고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훈련 마지막 날이니까 아마 저녁때가 되기 전 들어올 거라고 말했다. 그 동안 마을 쪽으로 내려가 다방에서 기다리든가 아니면 훈련 나간 사람들이 들어올 때까지 위병소 휴게실에서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그러자 여자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내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고 할 때 여자도 함께 인사를 하고 난 다음 핸드백을 고쳐 메며 휙 하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런 여자의 얼굴과 표정에서 나는 일병의 또 다른 바람꽃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후에도 여자는 두세 번 더 일병의 면회를 왔다. 아니, 그 이상은 오고 싶어도 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 바람꽃, 하고 감동하던 일병은 거기서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사계 청소를 나갔다가 미확인 지뢰를 밟고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가 바람처럼 가고, 주인 없는 관물대를 정리할 때 쏟아져 나오던 잘 채집해 말려놓은 온갖 들풀의 잎사귀와 일정한 크기로 잘라 고정시켜놓은 그 잎들의 줄기와 뿌리들을 볼 때에도 나는 휙하고 내 앞에서 바람처럼 머리를 뒤로 젖히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일 앞에 있을 줄 알았던 바람꽃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장 한 장 채집 표본들을 확인하며 나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일병의 여자가 아무리 어렸다 하더라도 스물이거나 스물하나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아직도 스물일곱이나 여덟쯤에서 멈춘 저 여자의 나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혹시 바람꽃이라고 아십니까?”

여자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실례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물었다. 여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젊어 보이긴 했지만 닯아도 너무 닮은 얼굴이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왜요?”

“그냥 그 꽃과 이미지가 비슷해서요.”

“그럼 한번 알아봐야겠다. 어떤 꽃인지…..”

친구는 여기에 서서 얘기할 게 아니라 자판기 쪽으로 가 커피나 한잔 하자고 했다. 그쪽으로 가며 나는 그에게 제수씨의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스물일곱 살이라고 말했다. 작은 소리라고는 하지만 면전에서 그런 걸 물은 사람 무안하게 “당신 스물일곱 맞지?” 하고 여자에게 다시 그럴 물어 확인까지 시키면서, 우리는 5월 햇빛 아래에서 커피를 마셨다. 내가 먼저 몇 개를 꺼내 들고 섰는데도 여자가 아뇨, 여기 많아요 하고 동전 여섯 개를 모두 넣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바람꽃과 이 바람꽃은…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여자가 내미는 커피를 마셨다. 그가 은비령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에도 나는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이윽고 그가 오늘은 이것을 등록만 해놓고 여자와 함께 갈 데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그럼 또 봐.”

그가 내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여자는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내내 그의 팔을 끼고 있었다. 이미 아내와 불화를 겪고 있던 내겐 그 모습이 쓸쓸할 만큼 행복해 보였다. 정말 나도 저렇게는 살 수가 없을까. 아니, 이미 그쪽 길을 포기하고 난 다음 만난 것이긴 하지만 뒤에 만날 아내를 위해서라도 그때 그 공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그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연락처를 주고받았으면서도 우리는 두어 번쯤 전화로만 연락했고, 다시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3

 

처음엔 그를 찾아 격포로 떠날 생각이었다. 아직도 그의 혼이 그곳 바다 위를 떠돌고 있을지 몰랐다. 그의 얼굴이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자 좀체로 사라질 줄 몰랐다. 다시 다른 음악을 켜놓아도 그랬고, 그것을 꺼도 그랬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마음의 짐만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왠지 그곳 바다로 가면, 아니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소금 짐이 반은 그곳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 그곳에 다녀온 다음 여자를 만나자. 그 전엔 만나도 그에 대한 부담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자를 만나러 나가는 일조차 쉽지 않게 그가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막상 그를 찾아 격포로 떠날 생각을 하자 왜 이제껏 그곳에 다녀오지 않았는지, 다녀오더라도 진작에 다녀왔어야 했을 일처럼 생각되었다.

집을 나설 때 아내에게도 한 며칠 채석강에 다녀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격포라고 말하지 않고 채석강이라고 말했다. 그곳 사람들이 아인 다른 곳 사람들에게야 거기가 거기라 하더라도 정확하게 그는 격포에서 변을 당했고, 채석강은 같은 변산에서도 그 아래쪽에 있었다. 아내가 내 마음속의 격포와 채석강의 의미를 제대로 짐작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가면 두 곳 다 둘러보게 되겠지만 나는 격포로 가는 내 마음을 채석강으로 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길을 떠나기 저 두 곳 다 둘러보고 오게 될 거라고 미리부터 생각한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그곳 가까이 있는 내소사와 선운사 역시 나는 둘러보고 오게 될 것이다. 격포에 가서도 다 녹이지 못한 소금 짐과 또 그곳에서 새롭게 내 마음속에 들어와 앉을 그 무엇을 채석강에 가 마저 녹이고 싶었던 것이었다. 동백이야 폈든 않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신은 채석강을 가든 적벽강을 가든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죠?”

아내는 전혀 낯선 사람으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은 것처럼 되물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우리한테 아직도 따로 해야 할 준비가 남았나요?”

“그건 당신이 더 잘 알잖아.”

“아뇨, 난 몰라요.”

“애는?”

“굳이 당신이 알아야 할 일이 아니잖아요? 상관할 일도 아니고.”

아내는 내 입에서 다시는 아이의 이름이 나오지 못하게라도 하듯 매몰차게 말했다. 여전히 거북등처럼 단단하고 견고한 껍질 하나가 아내와 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애 아이야. 알아야 할 일이 있고 없고 간에.”

“아뇨. 내 아이에요.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렇게 억지쓰지 마. 당신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이기도 하다는 얘기니까.”

“억지쓰는 게 아니에요.”

“어디 갔냐니까?”

“밖에 나갔어요.”

“학교는 잘 다녀?”

“잘 다니니까 그런 데까지 신경 안 써도 돼요. 당신은 우리야 어떻게 되든 당신 글만 신경쓰고 사는 사람 아닌가요?”

“알았어. 다녀와서 다시 전화할 테니까.”

“하지 마세요. 그런 전화라면.”

“언제까지 이럴 수도 없는 것 아니야?”

“내 얘기는 이미 전에 다 끝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오래도록 별거는 하고 있어도 자기 손으로는 끝까지 법적 정리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끝낸 게 아니야. 시작이지.”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전에도 얘기했지만 소송으로 해결하든 뭐로 해결하든.”

“그래,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나는 쾅, 소리가 나도록 집어던지듯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간 내가 여자를 만나온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아내와 나 사이의 불화 한가운데 여자가 있었던 걸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내와 내가 표면적으로는 서로 제 갈 길을 가듯 별거를 시작했던 건 이미 이태 전의 일로 여자를 다시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굴만 보고 헤어지고 말아 사실 그 부분에 대해 여자가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은 없었다. 뒤늦게 내 마음속에 여자가 한 역할이 있다면 이태면 이제 별거기간도 충분하고, 도 그 기간이 길어진다고 해 우리 사이에 다시 어떤 신뢰가 회복되고 내 삶의 방식이 타협될 것도 아니라면 서로를 위해서도 차라리 이 기회에 법적 정리까지 깨끗하게 끝내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틈틈이 하게 하는 정도였다. 전엔 별거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정리로 생각하다가 몇 달 전 여자가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나는 아내와 보다 완전한 정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이 여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를 찾아 격포로 떠날 생각을 하면서도 그랬다. 방금 전 전화도 며칠간의 부재를 미리 통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젠 당연히 어떤 정리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건 누구에게 문제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그 문제 이전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아내와 나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사는 동안 우리는 서로 꿈꾸었던 게 달랐다. 반년쯤 잠시 연애라는 걸 하긴 했지만, 어떠면 아내는 우리가 만났던 것보다 이태쯤 빨리 아직은 내가 손에 습관적으로 법서를 들고 있던 시절에 만났어야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만약 그랬다면 아내는 만성 장염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건강 장애가 내게 나타나더라도 스스로 어떤 절망을 느끼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내 몸을 추스르게 하여 절대 그 길로부터 포기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내가 그 대책 없는 시험에 연속 실패했다 할지라도 다음해면 곧 이루게 될지 모를 그것에 대한 막연한 희망만으로도 그간 우리가 겪어온 상황보다 오히려 그 상황을 더 잘 이겨내 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내를 만났던 건 하루 세 끼 식사조차 쉽지 않은 만성 장염과 시험에 대한 거듭되는 실패 예감 속에 이미 그쪽 길을 접고 이쪽 길로 들어서도 한참 들어선 다음의 일이었다. 아내는 내가 자기를 만나기 전에 이미 포기한 그쪽 길에 대한 이상한 미련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꼭 그 길에 대해서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긴 하지만, 이미 문단 말석에 이름 석 자를 디밀고 나서 다른 생계수단 없이 오로지 글만 쓰고 있는 나를 만났음에도 이상하게 아내는 그 많고많은 일 가운데 내가 글을 쓰는 일을 고집하는 것을 잘 견뎌내지 못했다. 만날 때 처음부터 알았던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알아도 이런 것인 줄은 몰랐다는 식을 대답했다. 결혼 전 아내에게 이제 내게 글을 쓰는 일이란 오직 그 한길뿐이라고 누누이 다짐하고 강조했어도 아내에게 그것은 막상 결혼만 하면 언제든지 다른 쪽으로 전업이 가능한 반실업상태와 같은 일시적이고도 불안정한 직업일 뿐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내게 그것을 바꾸어줄 능력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던 건 두 딸밖에 없는 장인 회사의 사세가 갑자기 커지면서부터였다. 아내는 내게 구체적인 자리까지 거론하며 또 한번의 전업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 했다.

“그럴 거면 애초 하던 공부를 계속하지.”

“그러니까 하는 얘기예요. 이 나이가 되도록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까 하는 얘기 아니냐구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니?”

“나가서 물어봐요.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가 대수롭게나 여기는지.”

“대수롭게 여기고 안 여기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아뇨, 나한테는 중요해요.”

그러다 얼마 후 아내가 친정으로 짐을 싸들고 들어가 별거를 시작할 때에도 그랬다.

“내 얘기는 아주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조금만 양보를 하라는 얘기예요.”

“대체 뭘 양보하라는 건데?”

“다른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지금도 늘 쓰는 건 아니니까 지금처럼 쓰고 싶을 때마다 쓰면 되는 거고요.”

“그게 말처럼 될 것 같아? 지금 그 일만 해도 제대로 안 돼서 그러는데 맞지도 않는 다른 일까지 함께하는 게.”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대체 뭐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거야?”

“나한테는 그래요. 당신 글쓰는 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구요.”

“안 맞는군. 우린 정말…”

“그래요. 안 맞으니까 내가 나가겠다는 거 아니에요?”

나는 내 일의 의미를 크게 보았고, 아내는 그 일의 의미를 작게 보았다. 그러나 내가 화가 났던 건 내가 크게 생각하는 일을 아내가 작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잘 맞지 않았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인처럼 아내가 나를 통해 얻고자 하는 자기 방식의 대리 성취 욕구와 그것으로 누구 앞에서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신분 상승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집착에 대해서였다. 한 가족의 생존과, 또 그것과 직결된 생계문제라면 나도 그런 말이 나오기 전 다른 어떤 방도를 취했을 것이다. 결혼 전 내가 아무리 강조하고 다짐해도 그것이 이런 것일 줄 몰랐던 아내에게 그것은 여전히 내가 가볍게 생각만 바꾸면 언제든지 다른 쪽으로 전업이 가능한 것이었고, 단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그것에 고집을 꺾지 않고 잇는 것뿐이었다. 물론 중간의 과정이야 불과 몇 년 만에 한계에 이를 만큼 악화된 건강 사정과 연속되는 실패의 중압, 그로부터 시작된 이 길이 내 길이 아닐 것 같은 회의를 견딜 수 없어서였긴 하지만 설사 생계문제와 부딪친다 하더라도 이미 이쪽 길을 나설 때부터 나는 그것을 내 삶에서 타협할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아내는 그런 것 정도는 타협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아니 타협이라는 말조차 거기에 쓰기엔 비싼 단어로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었다. 법적 정리를 밟게 된다면 흔히들 그 난에 적는 대로 넓게는 <성격 차이>가 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만약 그전에 내 삶의 방식에 대한 타협만 따른다면 아내에겐 그간의 별거가 가져온 공백과 신뢰의 회복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한 이리 아닐지도 몰랐다. 그건 얼마든지 남 앞에 감출 수 잇는 일이었고, 다른 가시적인 무엇만으로도 그런 정도는 충분히 덮을 수 있을 것이며, 설사 덮을 수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감수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었다. 아내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제는 타협도 회복도 내가 전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었다. 아니,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내주어야 할 그 일에 대한 어떠한 양보와 포기도. 아내는 그렇게 사는 내가 얼마 길지도 않은 인생 되는 대로 막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내주었을 대 되는 대로 막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차이였다.

그러다 내가 처음으로 아내에게 법적 정리 이야기를 한 건 지난 연초, 그 일과는 전혀 다른 일로 동사무소에 낙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보고 나서였다. 지난 가을 어떤 단체의 후원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다음 그 단체에서 연말 회계 처리를 위해서라면서 몇 가지 서류를 추가로 부탁해왔다. 아직까지는 당연히 세 사람의 이름이 올라가 있어야 할 주민등록등본에 내 이름만 달랑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지난해 연말 어느 날짜로 <세대 일부 전출>이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그 동안 아내는 몸은 친정에 들어가 있어도 주소지는 이곳에 두고 있다가 바로 얼마 전에 나한테는 아무 얘기도 없이 그것을 친정 쪽으로 옮긴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제 아내가 어떤 결심을 했구나 생각했다. 사실 그럴 만한 시간도 되었고, 또 그것만이라면 오히려 반가우면 반가웠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놀랐던 건 아이의 것도 함께 옮겨간 것에 대해서였다. 아마 아내의 것만 옮겨갔다면 나는 조금은 편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별거할 때 아이를 데려간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나 모르게 아이의 주민등록까지 옮겨간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동사무소엔 언제 왔다 갔어?”

아내가 전화를 받자 나는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그날요. 떼어봤으니 옮겨간 걸 알았을 테고 그러면 알 거 아니에요?”

“옮기려면 당신 것만 옮기지 애 건 왜 옮겨?”

“지금 그래서 전화한 거예요?”

늘 그랬듯 아내는 오히려 도전적으로 느껴질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긴 말 않을 테니까 도로 옮겨놔. 당신이야 발로 나간 사람이니 당신 건 놔두고 애 것만.”

“그럼 애 학교는 안 보내요?”

“….. 학교라니?”

“옮겨놓지 않으면 취학통지서가 그리로 나갈 거 아니에요? 애는 여기 잇는데 그러면 여기서 거기 학교 다녀요? 아빠란 사람은 애가 학교 갈 나이가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어차피 사립학교 보낼 거 아니야? 당신이 공립학교 보낼 사람도 아니고.”

잠시 전 학교 얘기를 할 때 움찔했던 것을 만회하듯 나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

“암만 사립이라고 해도 그렇지요. 여기 학교 다닐 아이 여기 있게 해야지 그럼 어디 있게 해요?”

“좌우지간 좋은 말 할 때 입학하고 나서라도 옮겨놔. 그리고 당신 것은 당신 스스로 옮겨갔으니까 이 기회에 주민등록말고 호적 정리도 깨끗이 하고.”

“난 그렇게 못하니까 하고 싶으면 당신이 해요.”

“언제까지 이럴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그렇게 했잖아요.”

아내는 거듭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했다. 무슨 고집인지는 몰라도 설사 헤어지게 되더라도 합의형식으로 거기에 자기 손으로는 도장을 찍을 수 없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아내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소송을 통해 법정에서 법적으로 해결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당신이야 그런 가 하자고 옛날 법 공부를 했던 것 아닌가요?”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알아?”

“왜 함께 살 여자라도 생겼나요?”

“그래, 생겼다. 생겼으니 그렇게 해야겠다고, 이제.”

“축하할 일이군요.”

그러나 아내는 아직 여자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 당장 어떤 필요에 의해 시간을 다퉈 이혼을 해야 할 게 아니라면 아내가 집을 나가 시작된 우리의 별거가 이태가 아니라 20년이 다 되어간다 하더라도 내가 그걸 합의가 아닌 소송으로까지 끌고 가 해결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랜 기간 헤어져 있으면서도 아내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고, 남 앞에 보일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먼저 별거를 선언하고 집을 나가긴 했지만, 그리고 그 별거기간이 어쩔 수 없이 길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런 아내에게 남들 앞에 스스로 이혼녀가 되는 것만큼 끔찍스러운 일도 다시 없을지 모른다. 어느 한 면 지나친 점만 빼면 아내는 둘도 없는 평강공주 쪽이었고,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그 몫과 능력을 충분히, 그리고 유감없이 발휘했을 것이다. 단지 내가 그녀의 온달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4

 

자동차는 강변도로에서 한남대교 북단 진입로로 들어가는 길 입구 훨씬 아래에서 꽉 막혀 있었다. 그렇다면 한남로에서 밀려드는 차량과 합류하는 진입로 부분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곳까지 오는 길도 한강대교 아래쪽에서부터 자동차가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움직이는 시간보다 멈춰 서 있는 시간이 더 말았을 만큼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멀리서 바라본 다리 위 상황은 그곳과 연결된 여기서는 그나마 어떻게 조금이라도 가다 서기를 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니 그 차량들과 올림픽대로를 타고 올라온 차량, 강남에서 모여든 차량들이 다시 합쳐지는 다리 남쪽 고속도로 진입로의 상황은 말 그대로 주차장이 따로 없을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라 고속도로까지 버스 전용차선제까지 실시하고 보면 어떻게든 거기까지 진입한다 하더라도 상황은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나아질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고속도로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다리 진입을 위한 진입로 진입조차 한 시간 후가 될지 두 시간 후가 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어이구, 이 일을 워치케 한대유. 한남대교는 아예 섰구만유, 섰어. 이러니 운전하는 사람들 복장이 왜 안 터지겄슈. 자동차 안에 기신 양반들 미치겄쥬? 방송하는 즈들두 환장하겼슈.”

또 한 명의 남자 탤런트와 함께 교통방송을 진행하는 여자 코미디언이 말했다. 그러면서 두 진행자는 연신 서울 한강다리 위 상황과 시내 주요도로 곳곳의 상황을 차례로 리포터와 통신원을 통해 알아보았다. 그나마 기어서라도 자동차가 움직이는 다리는 전체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근디 말여유. 저기 씨씨티브이에 자동차가 한 대도 없는 다리는 무슨 다리래유?”

“어느 다리 말여? 이 사람이 시방 차 없는 다리가 어디 있다구.”

“즈으기 저 다리 말여유. 이렇게 맥힐 때 저 다리로 돌아가믄 안 되남유?”

“에이 이 사람아, 정신차려. 그건 지지난해 무너져 아직 복구 중인 성수대교잖여. 운전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시방 사방 곳곳에 길이 워낙 막히다보니 지 마누라가 정신이 깜빡해서 실수를 했습니다. 당신, 방송 짤리고 싶어서 환장했어?”

“짜르려면 짜르라쥬, 지가 짤리더라도 우리 교통방송 가족 편하게 길이라도 시원하게 뚫렸으면 좋겄슈.”

“이봐, 이봐. 자네 그런다고 뚫릴 길도 아니고, 길 막히는 데 계시는 분들 위해 싸게싸게  노래나 한 곡조 꽝 준비혀.”

“알았슈. 이 양반은 좋은 말은 지가 다하고, 나보고는 맨날 뭔 노래를 준비해라, 뭔 노래를 준비해라 그런 갓만 시키구…”

시간은 벌써 2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다른 자동차의 운전자 몇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길게 고개를 빼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벌써 중앙 차선을 침범해 저쪽에서 오는 자동차들의 길을 막고 아예 오던 길로 되돌려가는 자동차도 있었고, 또 이차선에서 다시 일차선 쪽으로 들어가 그대로 엉금엉금 강변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자동차도 있었다. 한남대교로 진입하지 않고 계속 강변도로로 올라가는 차선은 다리 진입로 쪽으로 나가는 바깥 차선보다 상황이 나았다. 멀리 다리 위에선 꼼짝도 않는데 그나마 이곳에선 조금이라도 가다 서기를 하고 잇는 것도 그런 자동차들로 이가 빠진 자리를 채우면서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짜증 같은 것 나지 않았다. 어차피 편하자고 오른 여행 길도 아니었다.

아까부터 내가 신경썼던 건 길 위헤서 지체하는 시간과는 또 다른 시간에 대해서였다. 잠시 후 3시면 약속시간이 되고, 그보다 5분쯤 빠르게거나 5분쯤 늦게 여자가 <엔야>로 나올 것이다. 몇시까지 여자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몇시까지 기다리다가 내가 없는 집으로 전화를 할까. 이미 서울을 훌쩍 벗어나 고속도로 한중간에 있다면 그래도 그 생각을 덜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돌려 그곳으로 나갈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런다고 하면 아직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시간에 서울 거리 한복판에 있기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격포로도 한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엔야>로도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또 하나 신경쓰이는 게 집을 나올 때 전화기에 녹음해둔 자동응답 메시지였다. 누구보다 여자가 바로 알아듣게 메시지를 남겨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평소 외출할 때처럼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메시지를 남겨주시면 제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이 들으면 몰라도 여자가 들으면 <나는 지금 당신을 보러 나가기 위해 이 메시지를 남깁니다>로 들릴 것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여자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냥 기다리다가 혹시 그곳으로 나오는 중간에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닐까 하는 식으로 엉뚱한 상상을 할 것이고, 기다릴 만큼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밤늦도록 몇번이고 같은 걱정에 같은 번호판을 누를 것이었다. 그렇다고 알아들어도 너무 바로 알아듣게 ,저는 지금 격포에 가 있습니다> 할 수도 없었다. 아내에게 했던 것처럼 <격포>라는 말을 <채석강>으로 바꾼다고 해도 그랬다. 그 말은 이제까지는 그러지 않다고 갑자기 오늘 약속까지 미루고 그곳으로 갈 정도로 내가 그 친구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그러잖아도 가뜩이나 같은 부담을 느끼고 있을 여자에게 그 부담의 크기만 더하게 할 것이었다. 그 동안 많은 망설임 끝에 조금씩 이쪽으로 기울어져온 여자의 마음까지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내가 먼저 경계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 오해를 하자면 그곳으로 떠나는 것이 예전 그의 기억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의 죽음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잇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어떻게 여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여자도 오늘의 약속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그날 그녀는 전화를 걸었을 때 이젠 내가 보고 싶거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를 했다고 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묻던 말로 나는 그녀에 대한 내 생각 모두를 전한 셈이었다. 결국 내가 남기고 온 메시지는 오랜 생각치고는 밋밋하게 <저는 지금 서울을 떠나 있습니다. 돌아오는 대로 연락 드리겠습니다>였다. 그것도 처음엔 그냥 바쁜 일로 외출 중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가 그 말 역시 언제까지고 여자를 기다리게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현관문을 나서려다가 신발을 신은 채 다시 거실로 들어가 새로 입력한 메시지였다.

 자동차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토요일이라는 것 말고는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 꽃놀이철이 아닌데도 그랬다. 차선을 이탈하거나 아예 오던 길을 되돌려가는 자동차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까 다리 초입 위에 서 있던 걸 본 버스는 버스 두 대 정도의 길이밖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 앞에 서 있던 가로등이 버스 뒤에 서 있었다. 시간은 3시가 거의 다 되어가고, 이대로라면 중간에 길이 풀린다 해도 자정이 지나서야 격포에 닿을 것 같았다. 아니, 밤중에 닿는다면 나는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숙소를 정할 생각이었다. 자정이 가깝거나 자정이 지난 밤중에 그곳으로 가 짐을 풀기엔 격포는 내게 너무 무겁고, 깊고, 어둡고, 무서울 것이었다. 더구나 그 밤, 멀리 파도소리가 들리는 방에서 그가 창문을 통해 들어와 내게 손을 들어 보이며 그럼 또 봐, 하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더욱 그러고 말 것이었다.

아까 부부 역을 하던 진행자들이 대비마마와 우찬성으로 역을 바꾸어 도로공사에 나가 있는 리포터를 불러 고속도로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리포터는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순으로 상황을 전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강남 진입로에서부터 양재 기흥 구간까지는 완전히 정체된 상태이고, 기흥 오산 구간은 부분 정체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도 중부고속도로는 상일 인터체인지에서부터 하남을 지나 광주 구간까지 완전히 정체되어 있으며 곤지암 인터체인지 부근과 호법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부분 정체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영동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로 출발하든 중부고속도로 출발하든 일단 신갈 인터체인지와 호법 인터체인지만 들어서면 전 구간 소통 원활합니다. 그렇지만 영동 산간지방에 아침부터 때아닌 봄눈이 내리고 있어 대관령 구간을 운행하실 때엔 특히 눈길 안전운행에 주의하셔야겠습니다. 한낮인 지금은 대관령 정상 부근을 제외하곤 내리는 대로 녹고 있긴 하지만, 이번에 내리는 눈은 내일 아침까지 계속 내린다고 하니까 기온이 내려가는 저녁때와 밤이면 이 구간 곳곳에 긴 눈길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이상 고속도로 상황이었습니다.”

“이봐요, 우찬성.”

“예에, 대비마마.”

“우찬성도 들었지요?”

“뭘 말씀이옵니까, 대비마마.”

“세상에나 대관령에 눈이 오고 있답니다. 대관령에 눈이… 내리면 보기야 좋겠지만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대비마마, 신 우찬성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본시 눈이라는 것은 겨울에나 내리는 것이온데 지금은 삼월하고도 스무사흗날…”

“됐어요, 됐어요. 눈 얘기를 하느라고 다른 데 교통 상황은 안 알아볼 겁니까? 이거 지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무슨 말만 하면 황공하오니, 황공하오나, 대비 말꼬리를 붙잡고… 으이구 정말, 친정붙이만 아니면 진작에 짤랐어야 하는 건데. 얼른 시경 쪽을 연결해 시내 상황이나 알아보도록 하세요.”

그때 나는 이미 한 차선 안으로 차선을 바꾸어 다리 아래쪽으로 그대로 강변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자동차들 속으로 들어섰다. 도로 공사에 나가 있는 리포터가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의 정체 상황을 설명할 때까지도 별 짜증없이 그것을 듣다가 영동 산간지방에 때아닌 봄눈이 내린다고 하자 눈이 반짝 떠지고, 그 눈이 내일 아침까지 내려 저녁때와 밤이면 곳곳에 긴 눈길을 이루겠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른 왼쪽 깜박이를 넣고 핸들을 돌린 것이었다. 대관령에 눈이 내리면 한계령에도 내릴 것이고, 한계령에 내리면 은비령에도 내릴 것이었다. 그를 만나러 마음 가득 소금 짐을 안고 격포를 향해 나선 길이긴 하지만, 눈이 내린다면 정반대 방향으로 은비령으로 가는 길도 격포로 가는 길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관령의 눈 얘기를 듣지 이상하게 내 마음이 그랬다. 눈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억지로 방향을 틀지도 않았을 것이고, 억지로 방향을 틀었다 해도 격포로 가는 길과 은비령으로 가는 길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과 동북쪽으로 가는 두 길의 방향만큼이나, 도 격포는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던 곳이고 은비령은 내가 처음 그를 만났던 곳이라는 우리가 만나고 헤어짐의 의미만큼이나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대관령에 눈이 내린다는 얘기를 듣자 당연히 격포가 아닌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으로 가야 할 길을 잘못 잡은 듯한 생각까지 들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면 왠지 그와의 대화도 우리 기억의 억지스러운 정리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화해가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관령에 눈이 내리면 은비령에도 눈이 내릴 것이고, 은비령에 눈이 내리면 꼭 격포가 아니더라도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가도 나는 그를 만날 것이다. 은비령에 눈이 내리면, 우리 만난 은비령에 눈만 내린다면 늦은 밤 찾아가도 그곳은 내게 무겁지도, 깊지도, 어둡지도, 무섭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눈 내리는 마당 쪽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럼 또 봐, 하고 손을 들어 보여도 나는 놀라거나 어색해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이야기를 나눈 다음 그를 다시 창문 밖으로 따뜻하게 배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 부는 은비령 너머의 산맥으로가 아니라, 또 그가 왔던 불빛도 없는 차가운 바다로가 아니라, 봄인데도 눈이 내려 오히려 더 따뜻하게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우리 마음의 들판으로, 길까지 막혀 격포로 가는 길이 더 멀게 느껴지거나 두렵게 느껴져 갑자기 피하고 싶어졌거나, 눈 소식을 듣는 순간 그 봄눈이 보고 싶어 다른 핑계로 찾은 생각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집을 나설 때부터 오직 한 마음으로 그를 찾아 길을 떠난 내 마음이 그랬다. 은비령에 눈이 내리면, 우리 처음 만난 그곳에 눈만 내린다면 그곳으로 가는 길도 격포로 가는 길과 다르지 않다고….

교통방송을 끄고  나는 집을 나선 다음 처음으로 우리 마음의 성지와는 또 다른 그 어딘가를 찾아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대로 엔야의 노래를 틀었다. 그러니까 여자도 나도 그에 대한 어떤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잇는 곳. 나는 지금 은비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엔야의 노래를 들으며 엔야의 노래 제목대로 <어느 곳에도 있는> 길을 따라 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의 소금 짐도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그러다 노래를 듣던 중 옆에 있는 듯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고, 카폰으로 집으로 전화를 걸어 먼지 녹음해주었던 메시지를 지우고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아직 여자는 집으로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지금 서울을 벗어나 은비령으로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봄인데도 지금 그곳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돌아와 따뜻한 눈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이 메시지는 토요일 오후 세시 이십분, 길 위에서 입력합니다.”

이제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몫이었다. 길 위에서 눈 소식을 들은 내겐 은비령으로 가는 길과 격포로 가는 길이 다르지 않아도 여자에겐 그 두 곳의 의미가 삶과 죽음의 의미만큼 달라야 하고, 또 다를 것이다.

 

 

 

5

 

운전면허시험장에서 만났던 여자를 다시 본 건 지지난해 여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아내와 별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별거를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지나는 동안 아직 낯설고 불편한 일이 더 많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일에 조금은 익숙해졌을 때 운전면허시험장만큼이나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여자를 만난 것이었다.

여자를 만나기 열흘쯤 전, 어떤 사회보장보험연합회에 다니는 친구가 지난해에도 부탁했던 보험 체험수기의 심사를 의뢰해왔다. 3백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홍보실 직원들이 1차로 30편을 추려 세 명의 심사위원들에게 원고를 보내 그 중 열 작품을 대상에서부터 장려상까지 가려 뽑는 것이었다. 기관에서 하는 일이라는 게 늘 그렇듯 채점 기준과 항목별 채점방법, 나중에 서류 근거로 남길 채점표를 함께 보내왔다. 다른 두 명의 심사위원은 연합회 상무이사와 또 연합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느 건강신문의 편집국장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니까 자네가 잘 생각해서 뽑아야 돼. 자네 평가표를 보고 다른 사람들 평가표를 비슷하게 맞출 거니까.”

“그럼 심사료를 더 줘야지.”

“이게 혼자 살더니 더 무서워졌네. 돈 많은 마누라가 집을 나가서 그렇나, 작년엔 그런 말 않더니.”

그런 말도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친구였다.

“안 하긴, 작년에도 했지.”

“그럼 나한테 하지 말고 다음 심사위원 모이는 자리에서 우리 상무한테 해라. 내 봉급 올려주라는 얘기도 좀 하고.”

“미쳤냐? 내 얘기만 하면 되지.”

“그런데, 안 들어온대?”

“뭐가?”

“느 마누라 말이야. 벌서 여러 달 되잖아.”

“으응, 모르지 뭐. 어느 한쪽이 굽히지 않는 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굽힐 것도 아니고 그쪽이 굽힐 것 같지도 않고…”

“심사나 잘 봐라. 그리고 나올 때 작년처럼 채점표만 달랑 들고 나오지 말고 원고도 가지고 나오고.”

30편의 원고 모두 맨 불행한 사람들의 불행한 이야기였다. 비록 없는 가운데서도 행복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병마와 싸우고, 가난과 싸우고, 도 더러는 죽음과 싸워 그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오기도 하고, 아직 싸우는 중이기도 하고, 아내를 잃고, 남편을 잃고, 아이를 잃기도 하면서 그 과정에 저마다 그 사회보장보험의 혜택을 받긴 했지만, 보험 체험수기라기보다는 차라리 그것 자체로 삶과 죽음과 절망과 그런 절망 속에서도 꿋꿋하게 어제를 이기고 오늘을 버텨가는 사람들의 눈물과 고난의 기록들처럼 보였다. 심사기준표엔 홍보 효과와 제도의 이해, 보험 혜택의 기여도를 중시해 심사를 봐달라고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아주 잘 썼다는 느낌이 드는 한 작품을 대상으로 정한 것을 빼곤 금상에서 장려상까지 내가 정한 건 그들이 겪은 불행과 절망의 깊이에 따라서였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하나 생기면 그 집안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특히 가장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몸져눕거나 사고를 당하면 그날로 멀쩡한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될 수도 있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체험으로 일깨우는 원고들을 나는 연신 담배를 피워가며 읽었다.

본심은 점심시간 바로 직전 상무실에서 심사 시늉만 내는 사진 몇 장을 찍은 것으로 간단하게 끝냈다. 내가 매긴 채점표를 바탕으로 홍보실 직원이 다른 두 심사위원의 채점표를 작성하고, 대상 작품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다음 최근 내가 쓴 소설에 대해 지극히 의례적인, 그러나 그 무렵 1, 2, 3권을 묶어 몇 백만 부가 팔렸다는 어떤 베스트셀러 저자처럼 이 선생도 앞으로 더 훌륭한 작품을 쓰길 바란다는 전혀 의례적이지 않은 말들을 덕담처럼 주고 받았다.

“그건 뭐 아무나 씁니까? 재주가 있어야 쓰는 거지.”

“그러니까 이 선생도 열심히 공부해서…”

좀 곤혹스럽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가만히 있는데 친구가 나보다 더 부담스러운 얼굴로 연신 참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자, 그럼 식사나 하러 갑시다.”

중간중간 시계를 보던 상무가 말했다. 그와 나머지 두 명의 심사위원, 홍보실장, 친구, 내 채점표를 바탕으로 다른 심사위원의 채점표를 작성하던 직원, 그렇게 여섯 명이 함께 복도를 나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친구가 슬며시 등을 떼밀어 상무 옆에 붙어 서서 걷고, 친구의 부하 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뛰어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 여직원이 상무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순간적으로 나는 여자가 내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상무가 먼저 인사를 받지 않았다면 나도 여자에게 인사를 했을지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도 여자의 얼굴을 금방 알아보았던 것이 아니라 어디서 곡 본 듯한 얼굴인데도 어디서 본 누군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박 실장, 아까 걔 말이야. 볼 때마다 참 안됐어, 응.”

“그러게 말입니다. 사고라는 게 참…”

엘리베이터 안에서 상무와 홍보실장이 그런 얘기를 주고받을 때에도 그랬다. 왠지 내 머릿속에 생선가시 하나가 박혀드는 기분이었다. 누군지만 알며 금방 빠질 듯한데 그 가시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빌딩 건너편 일식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그랬다. 나는 상무가 반주로 따라주는 맥주를 반만 비웠다. 상무와 홍보실장, 건강신문 국장은 시작부터 끝까지 세 사람간의 내기바둑 이야기를 했다. 건강신문 국장이 가장 세고, 그 다음이 상무, 홍보실장 순인 듯 했다. 어쩌면 그게 세 사람간의 교제 바둑의 먹이사슬인지도 몰랐다. 가시는 여전히 빠질 듯 빠질 듯하면서 빠지지 않고 있었다.

“아까 그 여자는 누구냐?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하던.”

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친구에게 넌지시 여자에 대해 물었다.

“왜,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

“말하는 것하고느.”

“그래도 혼자 살더니 대번에 알아보는데. 뭐가 뭘 알아본다는 식으로.”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쪽도 혼자 사는 여자니 하는 얘기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런다. 어디서 봤는지.”

“그런데?”

“그때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더라. 정부 어느 부처에 다니다가.”

그제서야 나는 그 여자가 생선가시가 아니라 이태 전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본 또 다른 바람꽃인줄 알았다. 아니, 여자보다 먼저 은비령 그 친구의 사고 소식에 대해서 놀랐다. 그 사고야 당시 워낙 떠들썩했던 일이라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그 친구가 그곳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건 일 년 몇 개월이 지난 다음 그 친구의 얼굴도 모르는 다른 친구에게 들어 처음 안 것이었다. 그때 정부 어느 부처의 공무원들이 단체로 그곳 어느 섬에 놀러 갔다가 여러 사람 생때같은 목숨을 잃었다는 걸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보긴 했지만, 그걸 보면서도 행여 그가 그런 변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아니, 고향이 그쪽인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누가 무엇 하러 거기까지 가서 그런 변을 당했으랴 생각했다. 사고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에도, 나는 그들이 생때같은 목숨을 잃었다는 것보다 아직 쌀쌀한 봄날 저녁, 불빛 하나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그렇게 죽으면 그 영혼들은 또 얼마나 춥고 외로울 것인가 하는 것이 더 마음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바로 그곳에 가서 변을 당한 것이었다.

“아는 사람 맞아?”

“여자는 잘 모르고, 남편이 내가 산에 들어가 있을 때 같이 있던 친구였다. 여자는 그 후에 딱 한번 봤던 것 같고.”

“그래 참, 니도 그 공부 하다 말았지.”

“공부는, 그런 사람들 공부한 거에 비하면 내가 한 건 공부도 아닌 거지.”

“그러잖으면 이런 데 나올 일도 없는 여잔데 말이지. 여기 자리도 거기서 만들어준 거고, 당장 애들 데리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정말 안 됐네. 그 친구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회사에서 가끔 그 여자를 보면 그래. 한 집안에서 가장의 위치가 뭔가 하고 말이지. 사고가 나기 전날까지는 그랬을 거 아니야. 고시 출신이니까 남편 앞날 창창하지, 젊은 나인데도 어디 나가서도 대접받지, 보는 사람들마다 나는 저렇게 살 수 없나 부러워했을 텐데 말이지.”

당장 나만 해도 예전에 그랬다. 그 친구가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아내 때문이었긴 하지만 나는 쓸쓸했고, 그들의 모습은 밝고 투명해 보였다. 나는 지난밤에 읽은 글들에 이어 다시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 또 한 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수기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람꽃….. 어쩌면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두 여자 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내가 아는 그 바람꽃들은…

그럼에도 미처 여자를 알아보지 못했던 건 내 무의식 속에 여자와 직장이 잘 연결되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머리 모양이 약간 달라진 것 말고는 같은 사람의 같은 얼굴인데도 그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예전 면허시험장에서 느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여자는 정말 행복해 보였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본 것은 여자의 얼굴에 상대방의 얼굴조차 마주 쳐다보지 못할 만큼 무겁게 드리운 삶의 짙은 그늘이었다. 사고가 있은 지 거의 1년 반이 다 되어가는데도 그랬다.

“사무실에 올라갔다 가지 뭐.”

이미 심사료까지 받아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친구가 내 팔을 끌었다. 같이 올라가더라도 상무와 실장, 건강신문 국장은 바로 상무실로 가 바둑을 둘 것이기에 오히려 올라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나는 친구를 따라 다시 연합회 건물로 들어섰다. 친구로선 그냥 길에서 헤어지기 섭섭해서였겠지만, 나는 왠지 꼭 여자가 있는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참, 니 자동차 가지고 왔지?”

“그래.”

“그럼 이거 가지고 가.”

친구는 전에 기념품으로 나온 우산과 수건, 가죽덮개를 씌운 메모지통을 종이백에 넣어주었다. 물건을 받고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연신 출입문 쪽을 힐끔거렸다. 혹시 여자가 들어오지는 않는지, 또 출입문 앞 복도로 지나가지는 않는지 해서였다.

“불러줘?”

“쓸데없긴.”

나는 아까도 마신 커피를 다시 마신 다음, 올라올 때 상무실로 갔던 부장이 사무실로 돌아와 무슨 일론가 친구를 부를 때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중 상자 안에서 여자를 만난 것이었다. 나는 12층에서 탔고, 여자는 10층에서 타서 5층을 눌렀다. 이번에도 여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손에 들고 있는 서류에 눈길을 주었다. 짧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하다가 여자가 5층에서 내리자 나도 엉겁결에 따라 내렸다.

“저기 잠깐만요.”

나는 다음 말을 미처 준비도 못한 채 뒤에서 여자를 불렀다. 여자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절 모르겠습니까?”

나는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를 내어 여자에게 다가갔다.

“잘… 모르겠는데요. 누구신지…”

“전에 부군과 함께 공부를 했던 친굽니다. 은비령에서….”

“아, 그러면 글을 쓰시는….”

그 대목에서 여자는 부끄러워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 일이 뭐가 있을까 싶겠지만 나는 여자의 부끄러움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봄날처럼 행복했던 자신의 옛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 이제 먹고 사는 일로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나와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 현재의 모습에 대해 여자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걸 나도 여자도 잘 알고 있으면서 누구나 그 입장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이해를 했다.

“한번 본 적이 있지요?”

“아, 예.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일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까 점심시간 바로 전 김 상무하고 8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았구요. 바쁘지 않으면 차 한잔 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자는 그러면 잠시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나오겠다고 했다. 나는 먼저 지하 커피숍에 내려가서 여자를 기다렸다. 여자는 5분쯤 후에 내려왔다. 마음 속으로 꽤 많은 위로의 말들을 준비했는데, 막상 여자가 내려오자 어떤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소식을 1년 반이 다 지나가는 오늘에야 알았다고 말하기도 무엇 했고, 마음 속으로 준비했던 대로 그때 얼마나 상심했었느냐고 묻기에도 그랬다. 나는 예전에 그 일을 알았던 것처럼 그때 찾아 뵙고 위로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복받치는 설움 같은 것이었을까. 여자는 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나는 난감한 모습으로 앉아 찻잔을 이 손으로 만졌다가 저 손으로 만졌다가 했다. 이어 여자는 사고가 나던 날 아침 그를 먼 길로 떠나보낼 때 조금은 이상했던 자신의 예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몸이 으스스 떨려 일어나고 싶지 않은데도 누군가 자신을 호통치며 깨우는 것 같아 억지로 일어났으며, 늘 짓는 아침밥인데도 왠지 정성껏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동안 안 쓰고 올려놓았던 새 압력밥솥을 꺼내 밥을 지었으며, 그리고 그가 집을 나설 때 평소엔 아이한테 아빠 다녀올게 라고 말하더니 그날은 그냥 아빠 간다, 하고 말해 자기가 그것을 지적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아무 일 없이 돌아왔다면 그런 것들은 어떤 예감이랄 것도 없는, 어느 날에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상의 한 자잘한 부분들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여전히 눈물을 찍어냈고, 나는 빈 찻잔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좋은 친구였는데, 머리도 뛰어나고…”

“그도 그렇게 말했어요. 선생님 책을 보면서….”

나는 아이가 몇이냐고 물었고, 여자는 그때 하나를 낳고 더 낳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래도 그러고 만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언뜻 여자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집안에 남자가 없는 빈자리를 내가 그렇게 보았던 것인지 모른다. 아무래도 어색한 자리였다. 오래 앉아 있을 자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 앉았다가 내가 먼저 일어서야겠다고 말하기도 무엇 해 여전히 찻잔만 만지고 있을 때 여자가 바쁘실 텐데… 라고 말했다. 그때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제가 실례되는 일 한 가지를 하려고 합니다.”

“예?”

나는 반쯤 자리에서 일어서서 심사료 봉투를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그걸 전하려고 여자를 봤으면 하지 않았는데도 일어서는 순간 저절로 그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 있으면 무엇 하나 사주십시오.”

여자는 이러면 안 된다고 두 번 세 번 사양했다.

“여기서 받은 겁니다. 미리 준비한 건 아니지만 그때 준비해야 하는 걸 지금 준비한 거라고 생각하시구요.”

나는 억지로 여자의 손에 봉투를 건넸다. 찻값은 내가 카운터가 어는 쪽에 있는지 몰라 잠시 머뭇거릴 때 여자가 먼저 그쪽으로 가 계산을 했다.

“참, 출퇴근하시기에 멀지 않습니까?”

“멀긴 하지만…. 친정어머니가 같이 와 계세요. 아이가 있으니까.”

“아, 예. 그럼 늘 건강하시구요. 예전처럼 기운도 내시고…”

“선생님도 건강하세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여자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여자는 그곳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나는 계단으로 두 층 더 아래에 잇는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까마득히 여자를 잊었다. 아니, 잊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처음 며칠간은 대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는 게 무얼까 하는 생각을 언뜻언뜻 하다가 이내 그 생각도 죽은 친구도 여자도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가끔 연합회의 친구를 만나면서도 그랬다. 나도 그에게 여자에 대해 묻지 않았고, 그도 내게 여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집을 나간 지 일 년이 되는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도, 때로는 그보다 구체적으로 그렇게 살 거면 차라리 완전하게 갈라서고 새 인연을 찾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도, 그래서 만날 말로만 그러지 말고 어디 그럴 만한 여자가 있으면 소개라도 시켜주면서 그러라고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여자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일부러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지난해 여름, 그 친구가 전화로 다시 같은 심사를 부탁해왔다. 나는 간단하게 거절했다.

“전에 상무 때문에?”

“알면 됐고.”

“그 사람 그만둔 지 언젠데. 지난해 임기가 다 돼서 그만뒀어.”

“안 해, 그래도 거기 일은.”

“이게 마누라 없어도 등 따신 모양이네.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어디 나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지금 나갈 거니까.”

그래서 거의 일 년 만에 그녀를 생각했다. 심사 이야기가 나오자 대번에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지던 것이었다.

지난해처럼 본심을 보던 날, 연합회에 나가 사무실 아래에서 전화를 한 다음 저녁때 밖에서 여자를 만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이 년 반이 되어가고,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일 년 반이 되어갈 때였다. 저녁을 먹은 다음 함께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는 여자에게 좀 걷죠, 라고 말했다. 먼저 식사를 하면서도, 또 거리에 나와서도 마땅하게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거리를 걸으며 거의 헤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지난해엔 전화를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가끔 전화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미 앞으로 내가 여자에게 해야 할 말들을 그 한마디로 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여자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밖에서 만나기도 했다. 여자에게 내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 건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서였다.

그러다 가을에 떠났던 20일간의 서역 여행 중 처음으로 나는 여자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이나 어머니가 받지 않고 여자가 받았다.

“지금 막 돈황에 도착했습니다. 모두들 전화를 거는데, 저도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고 싶었습니다. 여긴 지금 막 저녁이 되었습니다. 전화를 받기가 곤란하면 끊구요.”

“아뇨, 잘하셨어요.”

“어쩌면 선혜 씨한테 그 말을 듣고 싶어 이렇게 멀리 왔는지도 몰라요, 나는…”

돈황에 도착한 건 북경을 출발한 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북경에서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라는 서안까지 비행기로 날아와 이틀을 머물고, 서안에서 난주까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와 하루를 머물렀다. 그리고 난주에서 주천까지 열여덟 시간 동안 상해발 우루무치 행 기차를 태고 기련산맹과 마종산 산계 사이의 낭하 같은 하서회랑을 달렸고, 주천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다시 아침 10시쯤 준비된 지프를 타고 열 시간 동안 450킬로미터를 달려 이제 서역의 첫 마당인 돈황에 도착한 것이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길 위에 몸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마음으로 가장 가깝게 나는 그녀를 느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나는 이미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6

 

은비령까지는 고사하고, 한계령 아래 원통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깜깜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눈은 인제를 지나면서부터 아주 조금씩 희끗희끗 차창 앞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린다고 까지는 표현할 수 없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와이퍼를 작동했다가 끄게 하는 정도였다. 먼 산에 제법 눈다운 눈이 쌓였을 때 그 눈들이 바람에 실려 산 아래로 내려와 날릴 때의 모습 같았다. 산허리를 깎아 만든 길인데도 길 옆에 희끗하게라도 쌓인 눈도 없었고, 교통방송에서 말한 것처럼 살짝 얼음이 낀 빙판길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눈이 그치거나 이러다 말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원통 읍내를 지나 한계령과 미시령으로 갈라지는 민예단지 휴게소 앞에 이르자 불과 수백 미터 앞과 뒤를 구분하듯 갑자기 눈발이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눈구름이 백두대간을 따라 산맥 꽃대기 위로만 길게 띠처럼 걸쳐 있는 모양이었다.  가슴속을 파고 들듯 거세게 몰아치며 내리는 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진작부터 이렇게 내린 것이라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미끄럽지 않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도 묘한 흥분 같은 것이 마음속에 일었다. 지방 방송은 주파수를 몰라 잡을 수가 없었고, 뜨거운 커피라도 한 잔 마실 겸 휴게소 마당에 차를 대었다. 커피를 마시며 산 위쪽에 내린 눈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묻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휴게소 입구로 들어설 때 저만치에서 바퀴에 체인을 치는 자동차가 보였다. 문을 열고 나서자 찬바람과 함께 거센 눈발이 얼굴에 확 달려들었다. 체인을 치는 자동차를 본 것도 그렇지만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앞쪽으로 끌어당기듯 눈발을 헤지고 지나가며 바라보는 눈과 실제 얼굴에 맞아보며 느끼는 눈의 차이는 모든 것을 짐작하게 했다. 언제부터 내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정상엔 꽤 많은 눈이 쌓였을 것이며 내일 새벽까지도 그치지 않고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없이 눈만 내렸다면 나는 내일 아침까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태어나기도 그쪽에서 태어났고, 군 생활도 그쪽 산 속에서 해 다른  건 몰라도 눈에 대해서라면 따로 일기예보 같은 걸 듣지 않고도 내리는 모습만 보고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 눈은 새벽 2시거나 3시까지 무릎 반 높이는 내릴 거라고.

“체인 안 필요합니까?”

휴게소 안에 들어가 가운데 야채를 넣은 빵 한 조각과 우유, 데운 캔 커피를 사 들고 나오는데 출입문 앞에서 어떤 사내가 공구통 같은 체인통을 들고 물었다. 아까 들어올 때 저쪽에서 체인을 쳐주며 이쪽을 힐끗 쳐다보던 사내였다.

“괜찮습니다.”

“한계령 넘어가는 차 아닙니까?”

“괜찮아요.”

“서울 차 같던데. 올라가는 건 괜찮지만 내려가는 건 여간 미끄럽지 않아요. 낮부터 내린 게 다시 얼어 그쪽은 완전히 빙판이 졌을 텐데. 따로 눈을 치우지도 않고 해서 맨 타이어 가지고는 위험할 겁니다.”

체인을 파는 사내가 다시 겁을 주었다.

“번호판만 서울 차지 여기 찹니다. 영을 올라가도 넘을 것도 아니고.”

“아, 예….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겁니다. 어디까지 가는 찬데요?”

“은비령으로 가는 찹니다.”

“은비령요?”

사내는 그런 지명이 여기 어디 있느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살아도 모르지요? 은비령이라고.”

“처음 듣는데요. 은비령이란 얘긴.”

“한계령에서 가리산으로 사는 길 말입니다.”

“아, 거기 우풍재 내려가는 길 말이군요. 한계령 꼭대기에서 다시 인제 쪽으로 내려가는 샛길 말이지요. 거기야말로 길도 좁고 내리막이 심해 체인을 치는 게 안전할 겁니다. 벼랑 쪽에 가드레일도 없는 길이니까.”

그러나 나는 일단 맨 타이어로 눈을 밟아보다가 정 힘들겠다 싶으면 오르막길이 본격적으로 시간되는 장수대 앞 휴게소에서 체인을 칠 생각이었다. 체인을 치는 거야. 사내가 대신해주겠지만 서툰 손으로 나중에 그것을 벗기는 일도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체인 없이도 갈 수 잇는 길을 체인을 치고 갔을 땐 그걸 벗기기도 전 길 중간에서부터 속은 기분이 들고 말 것이었다. 아무리 거세게 내린다 해도 때가 있고 시절이라는 게 있지 봄눈인데 뭐 그리 대단하랴 싶었다.

“비싸지도 않아요. 쳐주고 3만 5천 원이니까. 미리 치고 올라가는 게 낫지 아마 저 위에 휴게소에선 더 비사게 받을 겁니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리막 때문에 치는 거니까 한계령 휴게소에선 더 비싸게 받을 거구요.”

사내는 내 속마음을 알고 잇는 듯 뭔가 아쉬운 얼굴로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이어 또 한 대의 자동차가 휴게소로 들어오자 그쪽으로 체인통을 들고 뛰어갔다. 나는 사내가 그쪽 자동차의 체인을 다 치는 동안 자동차 안에서 빵을 깨물며 우유를 마신 다음 다시 시동을 걸고 캔커피의 뚜껑을 열었다.

눈발은 산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거세어지는 것 같았다. 3월 하순에도 눈이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옥녀탕과 하늘벽을 지나 장수대 앞에 이르자 아직 길이 미끄러운 것까지는 느끼지 못했지만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며 다진 바퀴 자리조차 검은 길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려 있었다. 꼭 고무신을 신고 눈길을 밟는 것처럼 퍼석퍼석 눈이 바퀴에 눌려 밀려나는 것이 핸들을 잡은 손에까지 느껴졌다. 쉬임없이 내리긴 해도 아직도 얼지 않아 속도만 내지 않는다면 굳이 체인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길이었다. 그런데도 자동차 안에서 느껴지는 눈발은 아까 밖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거세게 자동차를 행해 뿌려지듯 다가와 차창에 달라붙었다. 안개등을 켜고 와이퍼도 2단에 고정시켜놓았다. 먼 데서 작은 점처럼 새카맣게 몰려와선 하얗게 부서지는 것이 봄눈치고는 겨울눈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길 양쪽에 산과 깎아지른 바위들이 우뚝 솟아 마치 눈 내리는 협곡 한가운데를 자동차가 아니라 헬기를 타고, 지나간다기보다는 그렇게 내리는 눈 한가운데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엔야의 볼륨을 내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최대한 올렸다. 아마 눈 내리지 않는 평지 길에서 그렇게 볼륨을 올렸다면 나는 오히려 음악 때문에 운전에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떨어진 거라곤 빵 부스러기밖에 없는 옆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물론 그런 봄눈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태어나고 자란 대관령에도 4월까지 하룻밤과 하루  낮 사이의 폭설로 무릎 높이까지 눈이 내릴 때가 있었고, 10여 년 전 향로봉에서 군생활을 할 때에도 바닷바람 때문에 땅 가까이 납작 기듯 애쓰게 피어 오른 철쭉을 무참하게 짓밟던 5월의 미친 폭설도 보았다. 그런 눈들에 비하면 지금 내리는 한계령의 눈은 아무리 3월 하순에 내리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기이한 축에 끼지 못할지도 몰랐다. 앞서가는 자동차도 그렇고, 뒤따라오는 자동차도 처음부터 그 속도로만 가는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거리를 좁히지도 벌리지도 않았다. 더러는 나처럼 느닷없이 봄눈을 보러 설악산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떠나도 아무 준비 없이 너무 느닷없이 떠나온 길이었다. 은비령을 넘어도 그곳 화전 마을에 그때 우리에게 밥을 해주던 은자당 隱者堂 내외가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이미 은자당 내외는 쉰이 훨씬 넘어 있었다. 만약 그분들이 살고 있지 않다면…. 길 위에서 길을 바꾼 다음 처음으로 그 생각을 했다.

거기다 여자는 또 몇 시에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니까 내가 나오지 않는 동안 얼마만큼이나 혼자 거기에 앉아 있다가 들어갔는지. 서울을 벗어난 다음 쉬임 없이 달려온 탓도 있지만 격포로 가는 길을 은비령으로 가는 길로 바꾼 다음 마치 옆에 여자가 앉아 있거나 또 여자를 옆에 태우고도 엔야의 노래를 들으며 여자가 아닌 그 친구의 다른 무엇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기분 때문에 한계령 중간을 오를 때까지도 나는 집에 전화를 걸어 여자가 혹 남겼을지 모를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을 잊고 있었다. 산 허리 중간이 아니라 올라가서, 정상까지 올라가서 그것을 확인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위의 내리막길이 빙판 져 있다면 거기에서 체인을 준비하리라 생각했다. 아직은 가도가도 눈이었고, 밟아도 밟아도 끝없이 바퀴 옆으로 밀려나는 눈이었다.

 한계령 정상에 올라가 나는 잠시 자동차를 멈추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저는 지금 서울을 벗어나 은비령으로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봄인데도 지금 그곳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돌아와 따뜻한…”

나는 내가 입력해둔 메시지가 끝나기 전에 #버튼과 2번 버튼을 연속해 눌렀다. 비밀번호를 눌러주십시오. 그때마다 나는 지난 가을, 돈황에서 서울에 있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던 날을 생각했다. 어쩌면 선혜 씨한테 그 말을 듣고 싶어 이렇게 멀리 왔는지도 몰라요, 나는 …. 하고 말했던. 10월 23일이었다. 나는 그 번호를 눌렀다.

“저, 선혜예요. 나오시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 얘기를 하니 이상해지네요. 은비령 애기도 그렇고…. 이제 나오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기다리다가 들어갈게요.”

그 녹음시간은 3시 47분 것이었고, 이어 4시 23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저, 선혜예요. 이제 그만 들어갈게요. 서울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없다는 걸 믿는 데 이렇게 시간이 걸리네요. 많이 기다렸는데…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녀도 나만큼이나 오늘을 기다려왔던 것인지 모른다.

산꼭대기의 길은 살짝 빙판이 져 있었다. 몇 사람이 휴게소 마당에서 다시 체인을 치고 있었지만 나는 여기까지도 그냥 왔는데, 하는 오기로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그러나 한 굽이도 채 내려가기 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다르다는 걸 자동차를 산 쪽으로 대도 자꾸만 길 옆쪽으로 밀리는 바퀴로 알 수 있었다. 올라올 땐 바퀴에 눈이 밀렸는데 내려갈 땐 눈에 바퀴가 밀렸다. 체인을 치더라도 진작에 쳤어야 했다. 이제 기회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엉금엉금 2킬로미터쯤 한계령을 따라 내려가다 그쯤에서 만나는 샛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길을 틀어 다시 한계령의 다른 허리 중간을 되넘는 곳, 그곳이 바로 은비령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이름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고갯길도 사람들은 한계령이라고 불렀다. 작은 한계령. 대관령이 휴게소가 있는 고갯마루만 대관령이 아니듯, 한계령도 큰길 언덕만 한계령인 것은 아니었다.

그 샛길을 은비령 隱祕嶺 이라고 이름 붙인 건 나와 그였다. 그가 죽은 다음인 지금도 그 샛길의 이름을 은비령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여자밖에 없었다. 아내에게도 나는 그곳이 은비령이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나는 아내 앞에서 옛날 했던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한때 집을 떠나 공부를 했던 곳에 대한 이야기도 그냥 <한계령 너머>라고 평범하게 말했다. 우리가 사이가 좋을 때에도 그랬다. <은비령>이라고 우리가 붙인 다른 이름으로 말했을 때 행여 아내가 마음속으로라도 그 꼴난 공부도 하다가 그만둔 주제에 그런 이름까지 붙이고 했었느냐고 생각할지 몰라서였다.

처음엔 은자령 隱者嶺 이라고 불렀다. 은자가 사는 땅. 그러다 그보다 더 신비롭게 깊이 감춰진 땅이라는 이름으로 은비령이라고 불렀다. 내가 먼저 들어가 있었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그가 왔다. 은자령이라는 이름은 그가 오기 전 혼자 있을 대 내가 붙인 이름이었고, 함께 겨울을 난 다음 은비령으로 불렀다. 은자는 짝을 지어 있거나 무리 지어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보다 신비롭고 깊이 감춰진 땅의 이름으로.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그 외에도 우리가 거기를 떠날 때까지 이곳 저곳에 붙인 이름들은 많았다. 아침 산책길이거나 저녁 산책길, 마을 앞길을 오가거나 멀리는 걸어서 한 시간도 더 걸리는 우풍재까지 넘나들며 우리는 거기에 우리만 아는 이런저런 의미의 이름을 붙였다. 어쩌면 그때 우리는 우리가 품고 있던 청운의 꿈에 또 다른 의미를 두고 싶었던 것이지도 모른다.

함께 겨울을 나고, 봄이 되었을 때 하나하나 순번을 정해 붙인 은비팔경 隱秘八景 도 그 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정하고 붙인 제1경은 우리가 방을 들고 있는 화전 마을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삼주가병풍>이었다. 원통에서 한계령으로 오를 때 오른쪽으로 보이는 옥녀탕과 하늘벽, 장수대의 뒤편의 삼형제봉과 주걱봉, 가리봉이 화전 마을에선 병풍처럼 우뚝 막아선 앞산처럼 보였다. 모두 해발 1200미터에서 1500미터가 넘는, 태백산맥의 한 가지를 이루는 가리산맥의 준령들이었다. 제2경으로는 겨울 은비령의 눈 내리는 풍경으로 은비은비 隱秘銀飛를 꼽았고, 제3경으로는 마을 서쪽 한석산에 지는 저녁 노을로 한석자운 寒石紫雲을 꼽았다. 제4경으로는 맑은 날 아침에도 구름처럼 걸쳐져 있는 우풍재의 안개 [풍령무진 風嶺霧陣], 제5경으로는 가리봉을 주봉으로 한 가리산의 가을 단풍 [가리추단, 佳里秋丹, 아름다울 ‘가’], 제6경으로는 필례골의 흰 돌 틈 사이로 작은 폭포처럼 가파르게 흐르는 여울 [필동옥천 筆洞玉川], 제7경으로 장작으로 밥을 지을 때 안개처럼 낮게 피어올라 바깥 마당을 매콤하게 감싸는 우리 공부집의 저녁 연기로 은자당취연 隱者堂 炊煙 을 꼽았고, 마지막 8경으로 맨눈으로도 밤하늘의 은하수를 볼 수 있는 은궁성라 銀宮星羅 를 꼽았다.전에 그가 이야기를 해 들은 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 하나하나까지는 여자도 잘 모를 것이다. 그것은 들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본 다음에야 하나하나 가슴에 담아지는 풍경들이었다.

어느 만큼 내려온 한계령 큰길에서 다시 샛길로 은비령으로 접어들어 산허리를 타고 올라가는 길은 말 그대로 적막강산 속의 은비은비 銀飛銀飛 였다. 자동차 불빛을 받은 눈들이 새까맣게 몰려 와 작은 은조각의 깃털처럼 날리면서 내리고, 내리다가는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바람이 세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겨울나무나 다름없는 갈나무와 참나무, 흰 자작나무 가지가 끝없이 내리며 날리는 은비 銀飛 속에 몸을 떨고 흔들었다. 나 말고는 오는 자동차도 가는 자동차도 없는 길이었다. 그러다 은비령 꼭대기에 올라서서 이제 내리막길로 막 접어들려고 할 때 자동차의 별다른 충격도 없이 핸들 바로 오른쪽 옆에 붙어 있는 디지털 시계의 초록색 불빛이 한 순간 깜깜하게 거지더니 이내 0:00 으로 나타나며 깜빡이는 것이었다. 내가 주의깊게 본 마지막 숫자는 한계령에서 은비령으로 길을 바꾸기 전에 본 8시 53분이었다. 평소에 숫자는 가만히 있고 시와 분을 나타내는 숫자 사이의 두 점만 깜빡였는데, 0:00 로 나타난 다음엔 숫자도 점도 함께 깜빡였다. 그제서야 나는 서울에서 시계를 차고 오지 않은 걸 알았다. 아래까지는 엉금엉금 기어서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내려오는 길 중간에서 여러 번 자동차가 밀렸다. 기어를 1단으로 고정한 채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잡았다. 밀릴 때 밀리더라도, 그래서 자동차 몸체가 산허리에 부딪쳐 상하더라도 나는 벼랑 쪽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 쪽으로 바짝 자동차를 붙였다. 그런데도 등허리에서 서늘한 기운이 머리 위로 쭉 솟아오를 만큼 대책없이 바퀴가 밀릴 때도 있었다. 다행히 두 번 다 산허리 쪽으로 자동차 머리를 박았고, 쿵 하는 충격와 함께 엔진 체크에 붉은 경보가 들어왔다. 저녁 이후엔 저쪽에서 넘어온 자동차도 없었고, 넘어간 자동차도 없었는지 울퉁불퉁한 길 위에 자동차가 지나간 바퀴 자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엔진 체크에 새빨갛게 들어온 경보신호와 함께 내 마음속의 불안과 초조가 더하게 하듯 시계는 여전히 0:00 에서 깜박거렸다. 나는 스스로를 더 긴장시키는 방법으로 노래의 볼륨을 한 단계 더 높였다. 내가 가는 길은 눈길이 아니라 모래처럼 눈이 밀리는 눈길 같은 사막길이었다. 옆에서 여자가 연신 조심하라고 내게 말했다. 멀리 화전 마을의 불빛이 보일 때야 나는 짐승처럼 긴 한숨을 토해냈다. 넘고 보니 체인 없이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길을 나는 여자와 노래와 함께 넘은 것이었다. 등에서 땀이 끈적였다.

아마 10시가 넘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을 다 내려온 다음 뒤늦은 걱정처럼 문제는 은자당 내외가 예전처럼 아직도 그곳에서 농사도 짓고, 약초도 버섯도 따며 살고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집을 묵히고 아들을 따라가거나 이사라도 간 것이라면 당장 오늘 밤 잘 데조차 마땅찮은 셈이었다. 평지 길에서도 조심스럽게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전에 우리가 공부하던 은자당은 옛 그 자리에 있던 헌 집을 허물고 새 집이 들어서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 집이 아닌 줄 알았다. 길 밖에서 자동차를 멈추고 가만히 살펴보니 틀림없는 그 집이었다. 새 집은 단층으로 지은 조립식 주택이었다. 자동차를 길 밖에 세우고 옛터의 새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작게 텔레비전 소리가 웅웅거렸다.

“계십니까?”

“……”

“계십니까?”

그런 식으로 세 번이나 불러서야 외등이 켜지고, 이제는 완전히 할머니가 된 은자당의 안주인이 문을 나왔다.

“누구요? 눈이 오는데…”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여기서 공부를 했던 학생입니다.”

“누구라?”

“전에 여기서 공부를 했던 강릉 학생입니다. 십 년도 전에….”

“공부?”

“예, 그때 서울 학생하고 같이 와 있던.”

“옳아. 예전에 무슨 큰 공부를 한다고 저 방에 있던 학생들 말이구먼?”

“그렇습니다.”

“그때 학생들만곤 방을 줘본 사람이 없으니 알지, 얼굴만 봐가지구서는 잘 모르겠구면. 얼굴이야 다시 보면 아는 거구, 어여 들어와요. 그런데 이 밤중에 무슨 일로 눈 속에 여길 다 찾아왔수 그래?”

“그냥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별일이구만, 괴변이구… 어여 들어와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안주인보다 더 늙어 보이는 바깥주인은 방 안에서 사료 포대종이 위에 펼쳐놓은 검은색과 갈색 버섯을 만지고 있었다. 갈색 버섯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모르겠고 검은색 버섯은 예전에도 바깥주인이 따온 걸 본 적이 있는 휴전선 남쪽에선 이 지역 산의 돌 위에서만 이끼처럼 난다는 석이버섯이었다. 밖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바깥주인은 이내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두 노인 앞에 공손하게 절을 했다. 은자당 내외도 반절로 내 절을 받았다.

“그래, 전에 공부하던 건 성공했누?”

여전히 버섯에 손을 주며 바깥주인이 물었다.

“예.”

“그랬구만.”

그러나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리 간편복이라 하더라도 헐렁하게 걸친 옷차림도 그랬지만, 이미 이쪽 바닥 물을 먹고 싰는 내 얼굴 역시 예전에 했던 공부 쪽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더구나 이 밤중 눈 속을 뚫고 혼자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면 그 삶도 미루어 짐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었다.

“같이 있던 서울 학상은?”

 “성공했습니다.”

이번엔 좀더 또렷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잘사누?”

“예. 뭐 저는…”

“서울 학상은?”

“그 친구는 공부 성공하고 나서 잘살다가 지지난해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런, 어쩌다?”

“그냥 교통사고로….”

“저런, 쯧쯧…. 그래서 내 자식이고 남의 자식이고 차를 정히 몰아야 하는 게야. 나도 서울 우리 아들이 여기 한 번씩 오갈 때마다 늘 그 얘기를 하는 기. 차 서두르지 말고 정히 몰라구. 그게 늘 화근이거든. 그 좋은 공부 성공해서 그래, 쯧쯧…”

“오늘 여기 눈이 온다길래 갑자기 그 친구 생각도 나고 해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그 친구하고 같이 공부하던 방에서 잠이나 하루 자고 올라갈까 싶어서요. 두 분 어른 안부도 궁금했고요.”

“그래서 오는 길이구만. 같이 공부하다 친구 하나이 그래 세상을 가니. 우리야 뭐 여기 사는 기 별일이야 있을 게 없지만… 그래, 밥은 먹고 오는 길인?”

“예, 영을 넘기 전 휴게소에서 먹었습니다.”

“안 먹었으면 채리구.”

“아닙니다. 했습니다.”

나는 새로 지은 집에 대해서 물었다. 바깥주인은 이제 오래 살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들이 준 돈으로 두 노인네만 살다가 갈 요량으로 돈이 적게 드는 조립식 집을 지었다고 했다.

“내 나이가 일흔하나야. 할미는 내년이 일흔이구. 그러니 뭐 언제까지 살겠다고 제대로 된 집을 짓겠누. 먼젓집이 비 새고 눈 새니 이렇게라도 새로 짓고 사는 게지.”

“요즘에도 산에 늘 다니시구요?” “뭐 다른 거 할 게 인. 그래도 요샌 이게 돈이 되야서…”

그러면서 바깥주인은 갈색 버섯을 들어 보였다.

“보니 알겐?”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상황이라는 게야. 뽕낭구서 나는 버섯 말이지. 말로는 암에 걸린 사람들한테 좋다는데 어쩌다 하나씩 눈에 띄는 거라서 엔간히 비사야 말이지. 그래도 여기가 영산이긴 영산이거든. 이런 게 다 나고…”

“……예어.”

“그래도 여게두 많이 변했어. 집들두 새로 많이 짓구. 들어오다 못봔?”

“밤길이고 또 눈이 오고 해서…”

“못 쓰게 된 집들은 떠난 여게 사람들 집이구, 새로 번듯하게 지은 집들은 거반 다 서울사람들 한철 놀다 갈 집들이구 그래. 우리 바로 뒤에 지은 집두 서울사람이 그렇게 지은 집이구. 땅을 사서…”

“그래두 내다보니 어저께부턴가 사람이 보이는 것 같던데요. 지냑에 방에 불도 켜놓구.”

은자당 안주인이 바깥주인의 말을 받았다.

“지난 가을부터 늘 비워두는 것 같더니.”

“그래도 이따금은 내려옵디다. 하기사 이따금 내려오자고 지은 집들이니…”

“맨 그런 집들이야. .여게 새로 지붕 얹은 집들은.”

“아, 예에.”

“곤하지 않은? 눈길 헤치고 오느라.”

“괜찮습니다.”

“아까 내다보니 오래 올 눈 같지는 않더구만. 와두 내일 점심때면 거반 다 녹을 거구. 곤하면 그만 건너가 쉬구.”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기도 이른 봄 눈 녹을 때 바람꽃이 피는지요?”

물론 여자 때문에 난 생각이겠지만, 눈과 여자, 그리고 버섯을 보며 함께 떠올린 생각이었다. 3월 하순에도 발목 높이로 눈이 내리고, 내가 처음 그 꽃을 보았던 향로봉과도 그리 멀지 않은 데다 저런 버섯들까지 나는 영산이라면 그런 꽃인들 왜 피어나지 않으랴 싶었다.

“무슨 꽃이라?”

“바람꽃이라고…”

“모르겠는걸, 그런 꽃은. 듣기두 처음 듣는 이름이구. 생긴 건 어떻게 생긴 꽃인데?”

“전에 군에 있을 때 향로봉에서 봤습니다. 눈 녹을 때 눈얼음 사이로 보라색 꽃대부터 올라와 피는 꽃인데 혹 여기도 그런 게 피나 해서요.”

“아매 몰라두 향로봉에 있으면 예두 있을 게야. 산을 댕기다보면 겨울 지나 땅 녹을 때 그래 피는 꽃이야 더리 있긴 하지만 그게 바람꽃인지 뭔 꽃인지는 우리가 잘 모르겠구. 그런데 그게 눈 위에 올라오는 꽃대도 그렇구 꽃두 심당구(멍자국)가 든 것처럼 뿔그스름한 게 여리여리하지 않은? 밟으면 꺾이는 게 아니라 툭 부러지구 말이지.”

“부러지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겉에서 보기엔 저게 어떻게 눈얼음을 뚫고 올라왔나 싶기도 하고요.”

“그러면 그게 맞는 모양이구만. 며칠 전에두 석이 따러 우풍재 쪽으로 올라가다 독고사리 몇개 그래 올라온 걸 봤는기. 그게 보기엔 꼭 고사리순처럼 얄상하고 여리여리해두 속은 여간하지 않은 독초야. 다른 나물에 섞여 잘못 입에 들어가면 채달(풀독)이 오르구.”

“예. 그러면 맞는 것 같은데요.”

예전 꽃을 함께 본 일병도 그런 말을 했다. 보기엔 연약하고 이뻐 보여도 사실은 뿌리와 줄기 안에 강한 동성이 있다고, 그러면서 일병은 바람꽃이란 말도 어쩌면 원래 우리가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서양에서 들어온 이름을 그대로 풀어 쓴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예부터 서식지 사람들 사이에 부르던 이름이 따로 있었을 텐데 도감을 만들 때 그걸 알 길 없는 학자들이 자기들이 배운 대로 그냥 영어로 된 학명을 그대로 풀어 쓰다 보니 바람꽃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굳이 분류를 하자면 아네모네수선화과의 식물인데 아네모네가 우리말로 바람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늘 산에서 살아온 은자당 주인이 독고사리는 알아도 그 독고사리의 이름이 바람꽃인지 모르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꽃은 왜?”

“그냥 생각이 나서요. 버섯을 보다가…”

“그래도 이건 약이구 그건 독인걸. 산에 댕기다보면 그런 풀이 많아. 겉으로 보기엔 저게 뭔 독이 있을까 싶어도 잘못 만지면 채달 오르는 풀들이 말이지. 사람은 뭐 안 그런? 사람이나 풀이나 겉으로 봐선 모르는 게구. 여기 이 상황버섯도 보기엔 이게 뭐 약같이 보인? 석이두 시커먼 게 바위 위에 짝 붙어 나니 모르는 사람 눈엔 그저 이끼나 다름없는 게구.”

“예에.”

“이제 그만 건너가 쉬어. 나두 눈꺼풀이 한 짐으로 내려오는기…. 할멈이 건너가 학상 자리 봐주구.”

나는 인사를 하고 방을 건너왔다. 새로 지은 집이어도 전에 우리가 쓰던 쪽의 방이었다. 처음엔 방 하나를 혼자 쓰다가 그기 들어온 다음엔 함께 방 두 개를 하나는 공부방으로 하나는 쉬거나 잠자는 곳으로 썼다. 나는 은자당 안주인이 자리를 봐준 대로 창문 쪽으로 머리를 하고 누웠다가 요와 이불을 돌려 창문과 몸이 나란히 되게 누웠다. 피곤하긴 해도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내일 시간이 나면 눈 녹기 시작한 다음 우풍재 쪽으로 한번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그와 함께 있을 땐 운동 삼아 일 주일에 한 번씩은 우풍재까지 나가곤 했어도 한번도 거기에서 바람꽃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때는 그럴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바람꽃에 대해 내가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어떤 강렬함으로 다가온 안타까움이 있긴 했지만 제대한 다음에까지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일인 건 아니었다. 문제는 같은 얼굴에 같은 운명으로 다가온 두 번째의 바람꽃이었다.

거기에 대해 여행 중 후배 작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에 본 느낌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인데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얼굴이 똑같이 생겼으면 두 사람의 말씨며 행동도 비슷하고 운명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거냐고. 지난해 가을 돈황에서 다시 난주로 돌아오는 지프 안에서 노을을 바라보면서였다.

“여자 얘깁니까?”

후배가 물어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만나기는 두 여자 다 만났는데 지금 그 중 한 여자와 연애를 하고 잇는 모양이군요.”

나는 대답 대신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형, 기타 칩니까?”

“아니.”

“들은 얘긴데요. 두 기타가 가장 비슷한 음을 내자면 우선 무엇이 같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줄인가?”

“물론 그런 것도 있겠죠. 그런데 줄보다는 줄 밑에 소리가 울려 나오는 통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 통의 크기와 모양, 통을 만든 나무의 재질이 같으면 거의 비슷한 소리가 난답니다. 그러니까 사람도 그렇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우선 키와 몸매가 비슷하고 얼굴 생김새도 비슷하면 몸 속의 성대도 비슷할 테고, 또 그러다 보면 하는 행동도 그럴 수 있고, 운명도 그럴 수 있는 거구요.”

“그런가?”

“어떤 여잔데 그래요?”

“잘 모르겠어. 둘 다 바람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왠지 쉽게 시들 것 같지는 않네요. 형도 여자도…”

노을을 등뒤로 하고 달리는데도 한없이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끝내는 어둠 속에 묻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우선 내가 외로웠고, 바람처럼 휙, 하고 머리를 뒤로 젖혀 넘기던 두 여자의 첫 모습과 뒤에 알게 된 아픈 상처만 생각했지 어쩌면 자신의 운명 안으로 독처럼 그런 상처를 불러들였을지 모를 바람꽃의 줄기와 뿌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눈은 몇 시인지 모르는 밤중까지 내리다 멈췄다. 눈이 멈춘 다음에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 다음 우리가 여기에 다시 오게 된다면 어떤 일로 오게 될까?”

예전 함께 누웠을 때 그가 했던 말만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7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눈은 정확하게 무릎 반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바람도 자고, 구름도 말씀하게 벗겨진 다음 이른 봄볕만 눈이 아리게 눈 위에 날선 유리조각처럼 하얗게 부서졌다. 쌓인 눈과 눈 위에 반사되는 햇볕 속에 <삼주가병풍>이 원래 있던 자리보다 훨씬 앞쪽으로 다가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 이곳에 있을 때에도 언제 한번 저 병풍 위로 올라가봐야지, 하면서도 올라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이래 와두 응지하구 산꼭대기말군 낮 전에 다 녹구 말 에야. 봄 눈이 뭐 힘이 인? 내려서 괜히 땅만 질척거리지.”

함께 마당으로 나온 은자당 주인이 말했다.

“오늘 올라갈 생각인?”

“모르겠습니다. 그냥 무작정 온 길이라서…”

“바쁜 거 없으면 며칠 쉬다 올라가구. 전에 댕기던 데도 둘러보구 말이지.”

그러나 이상하게 더 머물러 있고 싶은 생각도 그렇다고 이제 처음 생각대로 여기 와 하루 잤으니 오늘 안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서울을 떠나올 때와 중간에서 길을 바꿀 때 가졌던 마음의 정리라는 것도 그랬다. 이곳으로 오면 모은 것이 저절로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 풍경을 본 것 말고는 대체 무엇 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는지 모를 심정이었다. 아마 그건 중간에 길을 바꾸지 않고 격포로 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곳으로 간들 대체 한밤처럼 어두운 바다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날 수 있었겠는가.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눈길을 헤지고 은비령까지 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가 죽은 다음에도 떠나지 못해 머물러 있는 곳은 격포나 은비령이 아니라 바로 여자와 내 마음 한가운데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처음 격포로 떠날 생각을 했던 것이나 중간에서 은비령으로 길을 바꾼 것도 그가 있는 곳으로 그를 찾아 나섰던 것이 아니라 애초의 형식이야 그랬지만 어쩌면 내 마음속에서 이루어질 그와의 충돌을 피하고 싶어서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아니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고 만 셈이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그에 대한 생각이 길을 떠날 때보다 많이 무뎌지고 덤덤해진 것도 그랬다. 지난밤의 어떤 정리로 무뎌지고 덤덤해진 것이 아니라 그녀를 만나지 않고 이곳으로 왔다는 것만으로도 어제 아침에 느꼈던 그에 대한 부담을 덜 느끼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오히려 그에 대한 부담보다는 언제 떠나더라도 다시 타고 가야 할 자동차가 더 신경쓰였다. 오다가 여러 차례 산허리를 막은 앞 범퍼는 말할 것도 없고 보닛 아래에 붙은 오른쪽 펜더도 서울에 돌아가면 판금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았다. 시계야 다시 시간을 맞춰 조정하면 되겠지만 중간에 쿵, 하는 충격과 함께 새빨갛게 불이 들어왔던 엔진 체크 경보등도 시동을 걸면 여전히 붉은 눈을 켜고 있었다. 자동차 설명서엔 운행 중 엔지 체크 경보등에 불이 들어오면 즉시 가까운 정비소를 찾으라고 했다. 경보등에 불이 들어온 다음에도 무리하게 운행하면 엔진이 완전 파손되거나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한번 작은 충격으로 엔진 체크에 경보가 들어와 길 옆 정비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엔진에 이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엔진을 제어하는 자동차 내 컴퓨터에 이상이 있었다. 정비공은 자동차의 시동을 건 채 보닛을 열고 그 안의 퓨즈 몇 개를 빼 공기 중에 식힌 다음 끼우는 식으로 가벼운 응급조치를 해 주었다. 불이 들어온다고 무조건 엔진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불이 들어올 경우가 더 많으니 앞으로도 운행 중 불이 들어오면 정비소를 찾기 전 우선 그렇게 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 정비공이 알려준 방법으로 몇 번이고 퓨즈를 뺐다 끼워봤지만 한번 들어온 불은 다시 꺼질 줄 몰랐다. 거의 1시간 동안 시동을 껐다 켰다, 퓨즈를 뺐다 끼웠다 할 때 새로 집을 지은 뒷집 사내가 어젯밤 자동차를 세워둔 길 쪽으로 나왔다. 많아야 서른다섯 쯤 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정비소로 가봐야겠는데요.”

내 대신 몇 번 시동을 걸고 퓨즈를 끼워보던 사내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한계령 휴게소 말입니까?”

“아뇨, 거기선 정비가 안 되고 원통 쪽으로 고개를 되넘어가거나 아니면 반대로 양양 쪽으로 내려가야 할 겁니다.”

“그렇게 멀리 말입니까?”

“그래도 여기선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

“그러다 중간에서 잘못되면요?”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엔진 체크에 불이 들어왔다고 여기까지 레커차를 부를 수도 없는 거고. 물론 그러는 게 가장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사내는 내 표정이 안돼 보여서인지 몇 번 더 운전석에 앉아 다시 시동을 걸로 퓨즈를 끼워보고 했다.

“컴퓨터 이상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기랄, 올라가면 치우든지 말든지 해야지.”

“차는 아직 새 것 같은데요. 이제 겨우 3만 5천 킬로 뛰고… 아마 어제 체인을 안 치고 넘어서 그런가 봐요. 여긴 눈 올 때 체인 안 치고 넘으면 나중에 체인 값 몇 배가 들어요.”

마치 그 말이 작은 걸 아끼려다 큰 걸 잃었다는 말처럼 들려 조금은 기분이 상했다. 무얼 아끼자고 체인을 안 친 것은 아니었다. 우선 그것을 치고 벗기는 일을 번거롭게 생각했고, 남들은 치더라도 나는 안 치고 넘을 수 있다는 아니, 이내 후회하고 말긴 했지만 일부러 눈을 보고 찾아온 길인데 왠지 안 치고 넘어야 한다는 어떤 이상한 오기 같은 걸 가졌었다. 그렇다고 그걸 사내에게 설명할 것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 나을까요? 양양하고 원통하고.”

“오늘 올라가실 거면 가는 길에 원통에 들러서 손보면 되고, 오늘 안 가시고 여기저기 더 둘러볼 거면 양양에 가 고치는 게 낫죠. 아무래도 동네가 큰 쪽이 사람도 낫고 장비도 나을 테니까.”

“어느 쪽도 쉽지는 않군요.”

“가시더라도 눈 더 녹은 다음 가셔야 할 겁니다. 제 차에도 안 쓰는 체인 하나가 있긴 하지만 지프 체인이라서 아마 안 맞을 겁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셨는데요?”

“그냥 눈을 보러 왔습니다. 전에 잠깐 머물던 데고 해서.”

“대단하군요. 눈을 보로 오는 분이 체인도 안 치고… 저는 며칠 전에 혼자 별을 보러 왔습니다. 그저껜 흐렸고, 어젠 눈까지 내려 못 봤는데 아마 오늘은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던 날 잠깐 보고요.”

“별을 보러 말입니까?”

“예.”

그러고 보니 사내의 얼굴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별 이야기 때문이겠지만 잠시 전 체인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이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비록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다 하더라도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서울사람의 얼굴이었는데 별 이야기를 듣고 나선 왠지 이 사내야말로 이곳 은비령에 와 머물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생각되던 것이었다.

“그러면 천문관측…”

“아닙니다. 천문관측이랄 것까지는 없고 그냥 별을 가슴에 담는 거죠.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니까. 그리고 이번엔 일부러 별 마중을 온 거구요.”

“별 마중이라뇨?”

“지금 혜성 하나가 우리가 사는 지구를 향해 오고 있거든요. 하쿠다케 혜성이라고 언론에도 몇 차례 보도되었는데 이번 주일이 지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됩니다. 그러니 별 마중인 거지요.”

“아, 그 혜성 얘긴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인 하쿠다케가 제일 처음 발견해서 그렇게 이름 붙인 거라고.”

“별을 관측하는 사람들에겐 그 이상의 영광이 없는 거죠. 어떤 별에는 공식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붙인다는 게… 사실 어떤 별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것도 큰 영광인데 그런 별에게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는 거니까요.”

“하기야 그러면 별처럼 이름도 남고…”

“그런 것보다는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던 어떤 미지의 별에게 자신의 영혼을 나누어주는 거니까요.”

“그 정도의 의미입니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라요. 영혼을 심는다는 표현을 해도 좋고요.”

그러면서 사내는 오늘 돌아가지 않는다면 자신과 함께 그 별 마중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언제 돌아갈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지만, 오늘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있게 된다면 꼭 그러겠다고 말했다. 사내는 전에도 자주 별을 보러 이곳에 왔다고 말했고, 나는 10여 년 전 이곳에 있을 때 이름 붙인 은비 제8경의 <은궁성라>에 대해 말했다.

“그러니까 저보다 먼저 이곳에서 별을 보신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별을 보았던 게 아니라 젊은 시절 철모르고 건방을 떨었던 거지요.”

사내는 다시 내게서 키를 받아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도 중간에 퓨즈를 빼 입김까지 불어가며 식힌 다음 다시 끼워보았지만 한번 들어오기 시작한 경보등은 꺼질 줄 몰랐다.

“안 되겠습니다. 눈 좀 녹은 다음 나갔다 오셔야지….”

뒷집 사내가 집으로 들어간 다음 우풍재까지는 너무 멀고 가고 오는데 1시간쯤 걸리는 필례골까지 걸어갔다 오자 담 밑으로말곤 마당의 눈이 거반 다 녹아 있었다. 산에는 아직 눈이 남았을 텐데도 은자당 주인은 버섯을 따러 갔다. 자동차만 아니라면 나도 따라갔을 것이다. 은자당 안주인이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나자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10여 년 만에 처음 대하는 석이버섯 무침이 반찬으로 올라와 있었다. 워낙 귀한 것이라 보통 땐 무침으로는 쓸 생각도 못하고 잔치 국수 고명에나 조금씩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양양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자동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은자당 안주인은 너무 늦지 말라고 했고, 나는 저녁 전에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저녁 전에 올 수 있을지 없는지는 일단 나가봐야 아는 일이었다.  오늘 가지 않는다면 내일 서울로 가는 길에 원통에 들러 손을 봐도 되지만 고장 난 차를 그냥 두는 게 왠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내일 먼 길을 떠날 때 편한 마음으로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은비령 중간에서 여자를 만났다. 그것도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모습으로 마주친 것이었다. 엔진 체크 경보등에 들어온 불 때문에 조심스럽게 산굽이를 하나하나 돌아 올라가는데 갑자기 회색 자동차가 바로 눈앞 산허리 쪽에서 돌아나오며 내 자동차를 향해 그대로 달려들던 것이었다. 눈이 녹고는 있었지만 내려오는 길은 여전히 미끄러웠을 것이다. 저쪽 자동차 안에 어떤 사람이 탔는지 살필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어, 어, 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느낌에 내가 브레이크를 밟은 다음에도 저쪽 자동차는 이쪽을 향해 상당한 속도로 계속 미끄러져 오는 듯 했다. 실수라면 크든 작든 산허리를 하나하나 돌 때마다 경적을 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눈길이었기에 망정이지 눈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둘 다 어느 정도 속력을 냈을 것이고, 그랬다면 여지없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을 것이다. 굽이마다 구부러진 산 허리를 다 돌고 나서야 마주 오는 길의 자동차를 볼 수 있는 급커브 언덕길이었다. 상대편 자동차는 거의 닿을락말락하게 앞에 와 멈춰 섰다. 여자였다.

“차라리 그대로 달려들지 그랬습니까?”

나는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하고 밖으로 나가 자동차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에게 말했다.

“정말 그럴 걸 그랬나봐요.”

아직 놀란 얼굴에도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습니까?”

“그냥 왔어요. 저도 왠지 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전에도 여기 와본 적 있습니까?”

“아뇨, 어디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여기가 은비령입니다.”

“알아요.”

“처음 그 친구를 만난 대구요.”

“예. 그래서 오셨다는 것도 알고요. 처음엔 그냥 눈을 보러 가셨구나 생각했는데 집에 와 생각하니까 눈을 보로 가신 게 아닌 것 같았어요. 정말 눈을 보러 가셨으면 선생님은 대관령 고향 쪽으로 가셨을 테니까요.”

“몇 시에 떠났습니까?”

“여덟 시쯤 나왔어요. 아침 뉴스에 여기 눈이 나오는 걸 보곤 더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선혜 씨가 오니까 다 녹아버리는군요.”

“그래도 많이 남았는걸요.”

“그럼 무작정 떠난 겁니까? 아침에.”

“예.”

“그러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려구요.”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은비령 가는 길만 알지 전 어디가 어딘지 모르니까. 거기 마을도 모르고요. 그런데 지금 돌아가시려구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가시던 길이면 가세요. 선생님이 남긴 메시지 때문이긴 하지만 저는 저대로 온 거니까. 이곳으로 온다 해도 선생님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구요.”

“지금 바다로 가는 길입니다. 저녁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별을 볼 거구요. 함께 가지 않겠어요?”

나는 양양으로 나가는 일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냥 바다로 가는 길이라고, 자동차를 고치러 나가는 길이라고 하면 그 말 뒤에 따라야 할 설명이 길어질까 봐 일부러 그렇게 한 말인데, 막상 하고 보니 <바다>라고 한 말이 마음에 걸려 다시 자동차를 고치러 나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어젯밤 눈이 올 때 체인을 안 치고 이 길을 넘었거든요.”

“그럼 오늘 안 돌아가실 건가요?
 

“선혜 씨는요?”

“모르겠어요. 그냥 내려온 길이라서…”

“그럼 차를 돌려 날 따라와줘요. 내 차는 중간 어디에서 다시 고장 나 멈춰 설지 모릅니다. 그러면 오도가도 못 할 테니까.”

내가 앞에 서고, 여자가 차를 돌려 뒤를 따랐다. 이제 중간에 자동차가 멈춰 선다 해도 정비소로 사람을 부르러 함께 갈 자동차가 뒤따르고 있어선지 엔진 체크 경보등을 바라보는 것도 아까보다 한결 여유가 있었다. 아직 산 옆으로는 하얗게 눈이 남아 있는 한계령 굽잇길을 돌아내려갈 때마다 나는 손을 들어 여자에게 신호를 보냈다. 룸미러 속에 그때마다 여자도 함께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아직은 내가 조심스러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웃는 모습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쓸쓸해 보였다. 나는 여자의 비누방울처럼 환한 웃음을 딱 한번 그녀가 그의 여자로 행복했던 시절 운전 면허시험장에서 보곤 다시 보지 못했다. 더구나 이곳은 젊은 시절 한때 그가 청운의 꿈을 안고 공부를 하며 머물던 곳이었다.

눈은 오색약수터를 지나서부턴 응달진 산등성이 쪽으로만 희끗 히끗 남아 있었다. 다행히 자동차는 한계령을 다 내려가 양양 읍내 초입에 있는 정비공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탈이 없었다. 나는 정비공에게 오늘 저녁 전엔 이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보닛을 열고 몇 군데 고장 검진을 해보던 정비공은 저녁때까지 갈 곳도 없이 2시간 후 차를 찾으러 오라고 했다. 큰 고장은 아니고 부품 몇 개만 갈면 된다고 했다. 오히려 정비공은 손을 봐야 할 자동차의 고장 부분에 대한 관심보다는 서울에서 두 사람이 이곳까지 오는데 어떻게 한 자동차로 오지 않고 두 대를 각기 끌고 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어제든 오늘이든 집 떠난 길 위에서 처음 만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여자와 남자가.

“그렇게 다니면 더 불편하지 않아요?”

나는 정비공의 말을 무시한 채 이제 나머지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야 할 지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 바다로 가는 길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바다를 보고 싶습니까?”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까 선생님이 바다 얘기를 하시니까.”

“내일 회사는요?”

“아침에 전화를 하면 돼요. 일이 있어 휴가를 내야겠다고…”

“그럼 가죠. 바다로…”

“키 드릴까요?”

“아뇨. 선혜 씨가 운전하는 것을 보고 싶은데요.”

“전 여기 길을 잘 몰라요.”

“내가 옆에 앉아 있어요.”

여자가 먼저 운전석에 올라 길게 옆으로 눕혀 옆자리의 잠금장치를 풀어주었다.

“혼자 타고 다니다 보니 습관이 돼서요.”

옆에  앉아줄 사람이 없어 늘 하고 다니는 잠금장치에 대해서보다 옆으로긴 하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길게 몸을 눕혔다 일으킨 것에 대해 여자는 부끄러워했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몸짓 하나에 대해서까지 여자는 내게 신경썼고, 나 역시 그런 여자의 모습을 앉아 있을 때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바라보았으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고 옆자리에 올랐다.

“운전한 지 오래됐습니까?”

“면허는 제가 먼저 땄는데 자주 안 해서 서툴러요.”

옆에 앉아 있는 건 나여도 기준은 오래 전 이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았던, 그리고 이제는 이 땅 어디에도 없는 그였다. 그는 그렇게 세상에 없으면서도 여자의 옆에 있어왔다. 여자가 늘 하고 다니는 조수석의 잠금장치 역시 그의 부재로서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인지 몰랐다. 둘이 앉아 있어도 셋이 앉아 있는 자동차였다.

“어디로 가죠?”

“길 따라 죽 나가면 됩니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길 아무 것에서나 우회전하면 되고요.”

중간에 여자는 엔야의 모래를 낮게 틀었지만 나는 아까부터 창 밖 쪽으로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왠지 여자와 나 사이에 의자도 없이 그가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띠처럼 길게 바다와 길 사이를 막아선 해송 숲 사이로 언뜻언뜻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들어갈까요?”

“이족 바다 쪽으로 난 길은 다 괜찮습니다.”

“참 이상해요. 들어가는 길이 하나면 망설이지 않고 들어갈 텐데 길이 많으면 어느 길로 들어가야 할지 늘 망설이게 돼요. 그러다 나도 모르게 한참 더 앞으로 가게 되고요.”

“지금처럼 말입니까?”

“예. 주차할 때에도 그래요. 빈자리가 많으면…”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게 그렇지요 망설이다 놓치는 시간과 망설이다 놓치는 일들 말입니다.”

“선생님도 그럴 때가 있나요?”

“이제까지는 많았겠지요. 그러나 앞으로 선혜 씨 앞에선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 앞에서 우회전하세요.”

나로선 크게 용기를 가지고 한 말이었다. 여자는 다음 번 길에서 오른쪽 깜박이를 넣었다. 관리인도 없는 너른 주차장에 우리만 들어와 있었다. 내가 먼저 내리고 여자가 나중에 내렸다. 바라도 불지 않는데 제법 높은 파도가 일었다. 우리는 바다 쪽을 향해 걸어갔다. 여자와 어깨를 맞추기 위해 내가 걸음을 늦추면 여자도 내가 늦춘 만큼 걸음을 늦춰 뒤를 따랐다. 지금은 그것도 내게 신경이 쓰였다. 전에 서울 길에선 그러지 않았다. 그러다 파도가 밀려오는 자리까지 가서야 조금은 떨어진 채 어깨선을 맞추었다. 내가 바다와 발밑 가까이 밀려드는 파도를 번갈아 바라보는 동안 여자는 오랜 시간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선혜 씨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요.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선생님이 여기 가실 줄은 몰랐어요.”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로 눈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이리로 오게 된 거구요.”

처음엔 격포로 갈 생각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자는 내가 <엔야>로 나오던 중 길을 바꾸었다는 말로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또 뭐가 이상한데요?”

“선생님은 동해바다와 서해바다 중 어느 것이 더 깊게 느껴지나요?”

“아무래도 동해가 더 깊겠죠. 맑기도 하고…”

“그런데 전 서해바다가 더 깊게 느껴져요. 깊고 무겁고 무섭게요.”

“거기에 아픔을 묻어서 그럴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론 한번도 가보지 않았어요. 거기 바다뿐 아니라 어느 바다에도요.”

“그럼 내가 잘못 안내했군요.”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아뇨.”

“서울도 오늘 돌아가고요. 차 고쳐지는 대로…”

“괜찮아요.”

“내가 한 발 옆으로 다가가도 돼요?”

“……………….”

“다가서면 선혜 씨 손을 잡고 싶어질 겁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어요.”

여자는 바다를 보고 말했다.

 

 

 

8

 

다시 은비령을 넘어온 건 자동차 안에서도 별을 살필 수 있을 만큼 산도 하늘도 깜깜하게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저녁을 해놓고 기다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여자와 함께 그곳으로 가 식사를 하는 것이 편치 않아 양양에서 아예 저녁을 먹은 것이었다. 10여 년 만의 방문인데도 어젯밤 빈손으로 어른들을 찾았던 게 마음에 걸려 노인들에게 드릴 내의 두 벌도 따로 준비했다. 그러니까 저녁시간으로 너무 일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사람 하나를 더 데리고 가는데 너무 늦게 가서도 안 될 시간에 음식점 옆 찻집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제는 혼자 온 사람이 저녁 늦게 다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면 은자당 내외도 무슨 일인가 하여 놀랄 테고, 그러면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여자에게 먼저 일러두어야 할 말이 있는데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냥 자동차에 올랐다. 이번에도 내가 앞장서고 여자가 뒤를 따랐다.

그러다 한계령을 지나 은비령 꼭대기에서 내리막길로 막 접어들려고 할 때 어제처럼 다시 별다른 충격도 없이 핸들 바로 옆의 디지털 시계가 0:00으로 나타나며 깜박거렸다. 고개를 오르던 중간엔 눈 여겨 살피지 않았지만 찻집에서 나와 시동을 걸 때 본 시간은 분명 8시 13분이었다. 얼른 비상등을 켜고 길 옆으로 자동차를 세웠다.

“고쳤는데 도 그런가요?”

여자도 따라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물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선혜 씨 자동차 안에 있는 시계는 지금 몇십니까?”

“8시 58분인데요. 왜요?”

“어제도 여기 곡대기까지 올라와서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시계가 나갔거든요. 0시 00으로 찍히면서.”

“뭐가 잘못된 게 아니고요?”

“아까 낮에도 그랬습니다. 여기 고개를 넘어서부턴 0시 00에서 다시 시간이 갔어요.”

“그럼 선생님한테만 시간이 멈추는 모양이네요. 여기 은비령이. 저한테는 가고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왜요? 시간이 멈추면 좋죠. 그러면 그 시간만큼 다른 세계에 있는 거니까. 선생님한테 여기 은비령이 그런 덴가봐요.”

“참 이상하네요. 두 번씩이나. 그런데 아래 내려가서 말인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래에 가면 전에 우리가 공부하던 집 말고는 선혜 씨가 따로 잠잘 만한 데가 없어요. 낮에 잠시 들르는 거라면 그 친구가 머물던 데를 둘러보러 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시간 함께 내려가서 노인들한테 선혜 씨를 누구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저도 올라오면서 잠시 그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도 되는 길인지 안 되는 길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우리는 이상하지 않지만 그분들한텐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요. 더구나 이렇게 밤중에 함께 가면.”

“그럼 어떡하죠?”

“내가 어떻게 설명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아까부터 그 얘길 하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어렵죠?”

“뭐가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제가 옆에 있는 게.”

“아뇨. 선혜 씨가 옆에 있는 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선혜 씨가 옆에 없는 게 어려워요.”

나는 가만히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걸 누가 본다면 말이에요.”

그러면서 여자는 살며시 손을 뺐다.

아래에 도착하자 은자당 내외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차를 고치러 나가던 길에 <이 사람>을 만났다고 말했다. 여자가 <이 사람> 처럼 다소곳하게 인사를 하지 은자당 내외는 우리가 집안 일로 가벼운 다툼을 하다 내가 먼저 길을 떠나고, 뒤이어 여자가 따라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 밥은 먹은?”

“예. 양양에서 했습니다.”

“이런, 그럴 거면 그냥 오잖구. 옛날 학상이 왔다구 할멈이 석이를 볶고 했는기. 아까 뒤에 젊은이도 자네 안즉 안 돌아왔느냐고 물으러 오구.”

“오늘 함께 별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거야 뭐 늘 보는 거 뭐 따로 볼 게 있다구. 아무데서나 쳐다보믄 되는 게지.”

잠시 방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여자에게 윗목에 말리고 있는 상황과 석이버섯에 대해 설명했다.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이게 상황입니다, 가 아니라 상황이야, 하고. 그러다 나도 계면쩍게 웃고 여자도 계면쩍게 웃었다.

“그런데 참, 어제 말하던 무슨 꽃이라는 게 이게 아닌?”

은자당 주인은 버섯 한켠에 따로 신문지로 말아둔 들꽃을 펼쳤다. 아직 꽃은 피지 않고 꽃대만 올라온 바람꽃이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오늘 낮에 눈 녹은 끝에 석이라도 더러 눈에 띄나 하고 우풍재쪽으로 갔다가 보고 파왔잔. 그래 무슨 꽃이라고 핸?”

“바람꽃입니다. 전에 군에 있을 때 딱 한번 봤는데, 나중에 이 사람을 만났을 때 그랬습니다. 이 사람 처음 본 느낌이 이 꽃 같다고.”

“아, 이게 바람꽃이에요?”

여자도 가벼운 놀람 속에 노인이 든 바람꽃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같긴? 이게 색시 어디하고 같다는 게누?”

노인이 말하는 건 우리가 바람꽃, 하고 말했을 때 오는 그것의 느낌이 아니라 독성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 길 없는 여자는 저도 모르게 무안한 느낌부터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꽃은 정말 시들지 않나요?”

다시 여자가 물었다.

“안 시들긴. 다 시들어 꼬부라져도 독만 안 시드는 게지.”

“그럼….”

“이게 보기엔 여리여리해두 여간 독초인 게 아니야. 신문지에 싸 놓은 것두 귀해서 싸놓은 게 아니라 그래서 싸놓은 게구. 그런 걸 어떻게 색시 같다고 하누.”

그제서야 여자는 노인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빛은 조금 전 이게 어디 색시 같다는 게누, 할 때보다 더 좋지 않았다.

“그러면 선생님이 바로 보신 거네요. 그때 이미 그렇게 보신 거면…”

내가 그 말을 할 때 여자는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여자는 그가 있던 그때와 그가 없는 지금을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꼭 바람꽃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를 떠나보낸 이후 여자는 문득문득 자기도 모를 자기 운명의 어떤 저주스러운 독성이 그를 떠나보내게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노인의 바람꽃 이야기도 다른 여유 없이 그런 식으로 연결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은자당 안주인이 하나 더 내준 이부자리를 건넌방으로 옮긴 다음 나는 여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몰랐어요, 그땐 바람꽃이 그런 성분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첫 느낌이잖아요. 다 시들어도 독만 안 시드는…”

“그렇지만…”

“알아요. 그런 뜻으로 한 말씀 아니라는 거. 저도 그렇게 들었고요.”

“밖에 그냥 서 있기는 추워요. 별을 보러 가지 않을래요? 그 친구가 관측장비를 갖추고 있어요.”

“조금 있다가요.”

“그러면 나는 다시 선혜 씨 손을 잡고 싶어져요. 안아보고도 싶어지고요.”

“…….”

“언제 처음 그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

“돈황에서 전화를 걸 때였습니다. 몸으로 가장 멀리 있을 때 마음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느낌이었어요. 어젯밤 여기에 혼자 와 있으면서도 그랬고요.”

“모르겠어요, 저는 잘 …. 오히려 여기에 오니까.”

 

 

 

9

 

처음엔 집 안의 불이 꺼져 있어 사내가 다른 곳으로 가 별을 관측하는 줄 알았다. 마당에 들어서자 사내 혼자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별을 관측하고 있었다. 사내는 흔히 보는 보통 것보다 몸체가 조금 큰 쌍안경을 목에 걸고 있었다. 나는 사내에게 별을 보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 사내가 얼른 혜성의 위치를 알려주며 내게 쌍안경을 건네줄 줄 알았다. 그러나 사내는 첫마디에 내가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 차림으론 오래 관측 못할 겁니다. 이건 군대에서 한겨울에 매목을 서는 것과 같은 거니까.”

“하긴 날씨가 많이 춥네요.”

나는 그가 건네주는 장비를 받을 채비로 주머니에서 손을 뺀 채 이를 마주치며 말했다.

“어느 위친지는 아십니까?”

“아뇨. 잘 모릅니다.”

“지금 날씨가 워낙 좋아 맨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할 테니 한번 찾아보세요. 북극성은 찾을 수 있죠?”

“예. 대충…. 저거 아닙니까?”

“그럼 큰 곰자리는요?”

“그 정도는 알죠. 북극성에서 일곱 뼘 정도 아래니까.”

“그러면 그쪽을 잘 쳐다보세요. 이 큰 곰자리를 국자 모양에 비유할 때 손잡이 반대쪽에 있는 두 개의 별을 북극성을 가리키는 별이라는 뜻으로 지극성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혜성은 지극성 부근에서 북극성 위로 북북서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보입니까?”

“아뇨. 잘 안 보이는데요.”

“밝은 걸 찾으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머리부분이 보름달 크기의 반만한데 아주 희미해요. 은하수 가장 밝은 부분에 별이 희미하게 모여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밝은 정도니까. 손을 동그랗게 말아 주변의 빛들을 차단하고요. 방 안의 불도 그래서 껐습니다. 몸체가 보이면 그것보다 조금 더 희미하긴 하지만 두 뼘 정도 뒤로 꼬리가 흐르는 것도 보일 겁니다.”

“아, 보여요.”

나보다 먼저 여자가 말했다. 나도 눈 위로 동그랗게 손을 말아 올렸다. 그러자 천천히 아주 희미하게 눈빛같이 하얀 빛가루를 꼬리 쪽으로 흩뿌리며 북극성 위로 고요히 흘러가고 있는 혜성의 모습이 잡혔다. 나로서는 태어나 처음 보는 혜성의 유영이었다. 먼 옛날 혜성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던 인류가 어느 날 밤 하늘에서 문득 저 긴 꼬리의 살별을 보았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잠시 전 그 별을 보지 못했을 때보다 왠지 가슴이 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보지 말고 쳐다보면서 그것을 가만히 가슴에 담아보세요. 저 별의 긴 여행에 우리가 동반할 수 있는 느낌이 들 때까지요. 아니면 마음 속으로 가만히 더 깊은 우주 속으로 배웅해주어도 좋고요.”

“그런데 보이긴 하지만 보는 건지 안 보는 건지도 모르게 너무 희미한데 안경 한번 줘보세요. 그러면 확실해질 것 같은데.”

“아직 안 됩니다. 저도 오늘은 아직 안경을 눈에 안 댔어요. 별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맨눈으로 그것을 그대로 우리 가슴에 담는 겁니다.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별을 처음부터 장비를 가지고 보는 건 별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요. 이따가 동네 집들이 불을 다 끄면 다시 육안으로 그러게 살핀 다음 그때 안경으로 보십시오. 자정쯤이면 아주 좋을 겁니다. 희미한 별일수록 미세한 불빛에도 영향을 받거든요.”

“관측이 아니라 종교 같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식이니까.”

오늘,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게 우리 곁을 가장 가깝게 방문했던 별은 0.7 등급 밝기의 혜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쳐다본 별보다 방으로 들어온 다음 혜성과 우주의 시간에 대한 사내의 설명이 내겐 더 큰 울림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스물세 살 때부터 별을 보기 시작해 이제까지 수많은 혜성들을 보아왔지만, 오늘과 같은 느낌은 처음이라고 했다. 어떤 흥분 속에서도 사내는 참 차분하게 보였다.

“혜성을 영어로는 Comet라고 하는데 그리스 말로 머리카락 같은 별이라는 뜻입니다. 4천 년 전 중국과 바빌로니아 사람들도 혜성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요. 모양이 이상하고 아주 가끔 돌연히 나타나곤 해서 옛날 사람들은 이 별이 나타나면 전쟁이나 큰 천재지변이 일어날 거라고 무서워했습니다. 제가 혜성에 대해 설명드리는 중 무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케플러의 제1법칙을 아시는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배운 지 오래돼서…”

“쉽게 말씀드리자면 모든 행성의 공전 궤도는 원이 아니라 일종의 타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케플러의 제1법칙입니다. 그런데 혜성의 궤도는 아주 극단적으로 길쭉한 타원입니다. 타원이 얼마나 길쭉한가를 설명할 때 쓰는 말이 이심률인데 이심률이 0에서 1.0 쪽으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모양이 더 길쭉해집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지구의 이심률이 0.017이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포물선이 바로 1.0인데 그렇게 되면 한 번 지나간 궤도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거죠. 끝없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가야 하니까. 참, 타원형을 정확하게 그리는 법을 아시는지요?”

“학교 다닐 때 수학시간 같은데요?”

“비스듬하게 자른 모든 원기둥의 단면이 타원입니다. 얼마나 비스듬하게 자르느냐 하는 것에 따라 이심률이 달라지는 거죠. 아니면 원기둥에 종이를 말고 그 위에 콤파스로 원을 그린 다음 그것을 펼쳐도 타원이 되고요. 또 평면에 바로 그리자면 바늘 두 개를 이용해 그릴 수도 있겠고요. 타원에 두 개의 궤도 중심이 있는 건 아시죠?”

“예.”

“혜성의 공전 궤도도 두 축이 있는데 하나는 태양이고 또 하나는 우주공간의 또 한 지점입니다. 먼 거리에 있는 이 두 점을 축으로 공전하다보니까 가까이 왔다가 멀어졌다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심률이 작아 이삼 년마다 나타나는 것도 있고, 또 핼리 혜성처럼 77년마다 나타나는 것도 있고, 도 어떤 것은 한 번 나타났다가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아까 말한 이심률 1.0의 포물선처럼 말입니다. 제가 영원이라는 말을 썼는데,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영원에 가까운 가장 긴 시간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한 겁 두 겁 하는 것도 그런 시간이겠지요. 그러다 그런 겁들이 모여 영겁의 시간이 되는 거니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시간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전에 어떤 책 서문에서 읽은 건데, 우리가 사는 세상 저 북쪽 끝 스비스조드라는 땅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있답니다. 높이와 너비가 각각 1백 마일에 이를 만큼 엄청나게 큰 바위인데, 이 바위에 인간의 시간으로 천 년에 한 번씩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날카롭게 부리를 다듬고 간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 영원의 하루가 지나간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가 숨쉬고 사는 게 참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오는 10분의 1시간도 안 되는.”

“그런데도 그런 시간이 그 시간의 수만큼 흘러도 한 번 떠난 다음 영원히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별이 있습니다.”

“작군요. 우리는 너무.”

“그래서 별을 보면 욕심이 없어진다고 말하는 건지도 몰라요. 그건 영원을 보는 거니까. 예전에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어요. 여자가 떠난 다음 어느 선배가 그러더군요. 별을 보라고, 나는 모르지만 어느 별엔가 여자가 가 있을 거라고 말이죠. 아마 그때부터 별을 보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래서 알았나요? 어느 별에 있는지.”

잠자코 내 옆에 앉아 사내의 말을 듣던 여자가 물었다.

“아뇨. 처음엔 금방 찾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달라요. 한 번 스쳐간 다음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별에만 가 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몇 억 광년 떨어진 곳에 가 있다 하더라도 제가 찾을 수 잇는 별에만 가 있으면 돼요. 우리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건 아주 짧은 시간이니까.”

“그런데도 때로는 아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죠.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투고 미워하고, 그 모든 일들이 지금 이 작은 별에서 이루어지니까. 우리 인연도 그렇고요.”

내가 말했다. 사내는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도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별을 보며 별을 꿈꾸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내가 아니라 내 옆의 여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별에 가 있으면 어떻게 하죠?”

여자가 물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다시 만납니다. 우리도 다시 만나고요.”

“돌아오지 않는 별에 가서도 말인가요?”

“오늘 두 분이 이곳에 온 인연에 대한 답례로 두 분이 모르는 천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조금 전 혜성의 궤도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 얘기한 영원의 시간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지만 인간에겐 또 인간의 시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를 다시 돌아오는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일도 그런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이란 일은 모두 2천 5백만 년을 한 주기로 되풀이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천 5백만 년이 될 때마다 다시 원상의 주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2천 5백만 년이 지나면 그때 우리는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다 다시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여기에 모여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며 도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길에서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을 다 다시 만나게 되고, 겪었던 일을 다 다시 겪게 되고, 도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을 다시 겪게 되는 거죠.”

“정말 그런가요?”

여자가 다시 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도 그럴 리가 있겠나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사내의 말이 그대로 가슴에 와 닿았다. 처음 듣는 말이라서 라기보다 그 말을 듣고 난 다음, 이 다음 이 세상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와 정말 그런 경험을 다시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앞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다면 우리가 살아가며 가끔씩 마주치는 느닷없는 슬픔과 불안과 공포도 그렇게 무섭거나 두렵지 않을 것이었다.

“찬 지금 두 분 다 주머니에 천 원씩은 가지고 있겠지요?”

“예.”

이번에도 별을 삼킨 듯한 목소리로 여자가 대답했다.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 천 원씩 제게 주십시오. 이 다음 2천 5백만 년 후 우리가 다시 이 자리에 만났을 때 갚겠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을 하는데도 사내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여자의 몫까지 2천 원을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됐습니다.”

사내는 빙긋이 웃으며 내 손을 밀었다.

“아니, 왜요?”

“별을 보고 나서 별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얼만큼 순진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드리려고 한 말입니다. 두 분 다 이 다음 천문학자를 상대로는 장사를 못하시겠어요.”

“그럼 조금 전 한 말이 정말이 아니란 말입니까?”

“처음 천문관측에 입문할 때 선배들한테 당하는 신고식이 바로 그건데, 사실 이 이야기는 화성의 위성을 처음 발견한 미국의 천문학자 홀의 유머입니다. 그가 아직 하버드 천문대의 조수로 일하고 있을 때 친구와 함께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할 때가 되지 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가 주인인 중년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음식이 아주 맛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답례로 자기가 공부하고 있는 천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드렸으면 한다고요. 이때 홀이 한 이야기가 조금 전의 그 이야기입니다. 2천 5백만 년 후 자기가 다시 이 레스토랑에 올 거니까 식사 대금을 그때까지 외상으로 해줄 수 없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외상으로 해주었습니까?”

“그건 외상으로 해주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꼭 2천 5백만 년 전에도 손님께서는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셨을 거고 그때에도 지금처럼 말씀하셨을 테니 그 와상 값은 지금 달라고 말입니다. 천문학자다운 스케일 큰 유머였는데 유감스럽게도 부인이 한 수 위였던 거죠. 어쩌면 지금 우리처럼 별을 보다 나눈 이야기가 아니어서 홀의 이야기가 부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는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그 말을 듣고도 정말처럼 느껴져요. 2천 5백만 년 후 우리가 다시 지금과 똑같은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게요.”

“저도 그 이야기를 들은 지 10년이 넘는데, 지금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상대로 신고식을 받으면서도 말이죠.”

여자가 말하고 사내가 말했다. 나도 그것이 한 천문학자의 유머였다는 것이 오히려 억울하게 여겨질 만큼 정말로 느껴졌다. 꼭 2천 5백만 년이 아이더라도 언젠가 스비스조드의 바위가 수도 없이 닳고 닳아 없어지고, 마침내 다시 돌아오지 않을 포물선을 그리며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던 행성들까지 다시 돌아올 만큼 영겁의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왠지 우리 삶은 다시 한번 이 별에서 그렇게 시작할 것만 같았다. 아니, 시작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럼 다시 별을 보러 나가죠.”

이번에도 우리는 오래도록 육안으로 혜성을 살폈다. 뒤창을 통해 흘러나오던 은자당의 불이 꺼진 다음이어선지 별은 아까보다 조금 밝게 보였다. 오래도록 쳐다보자 그것은 아주 희미하고 작게 반짝이다 사라지고, 사라지다 다시 반작이는 한웅큼 별가루들의 모임 같았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는 동안 사내도 함께 별을 보면서 혜성의 형태와 꼬리방향, 중력, 별의 등급과 거리 측정법, 태양 주변의 행성과 소행성, 몇 억 년 전의 빛일지 모를 시간을 싣고 우리에게 오고 있는 먼 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마 그렇게 20분 맨눈으로 뚫어져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린 시절 들판에서 바라보던 것처럼 수많은 별들이 하나하나 저마다 눈으로 들어와 가슴 안의 또 다른 하늘 자리에 별자리를 잡는 느낌이었다.

“자, 이제 안경으로 보십시오.”

사내는 자기 눈에 잠시 안경을 대었다가 내게 넘겨주었다. 하쿠다케가 처음 그 혜성을 발견할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25배율의 고성능 안경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확실히 밝고 선명하게 보였다. 쳐다보는 눈이 시릴 만큼 희미하게 반짝이다 사라지는 별가루의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노랗게 빛나는 머리부분과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듯 은회색으로 길게 뻗은 고리부분도 선명하게 보였다. 저절로 굉장하다는 감탄이 나왔지만, 아까 사내가 왜 금방 안경을 주지 않았는지 보다 밝고 선명한 별을 보면서 뭔가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순간의 어떤 감탄과 놀람의 기억으로는 오래 남겠지만 오래도록 안경을 쓰고 본다 해도 그 모습이 그 별의 가장 별다운 모습으로 간직될 것 같지가 않았다. 무엇을 억지로 만들어서 본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안경을 건네자 사내는 다시 그것을 자기 눈에 잠시 대었다가 여자에게 넘겨주었다. 여자도 안경을 눈에 대자마자 굉장하다, 놀랍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아마 그러면서 여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서로 안경을 주고받으며 육안으로 본 별과 안경을 대고 본 별의 차이에 대해서 말했다. 맨눈으로 쳐다보면 바람에 별이 몰려다닐 것처럼 맑고도 깜깜하게 어두운 하늘이었다.

“이제부터 저는 사진도 찍으며 새벽까지 밖에만 있을 겁니다. 함께 있었으면 좋겠는데 두 분 옷차림이 너무 부실해서…”

피해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사내 혼자 따로 할 일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 오래 있고 싶어도 우리 옷차림으론 연신 방 안을 들락거리지 않고는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사내는 에스키모 같은 복장을 하고서도 두꺼운 방한장갑을 끼고 있었다. 3월 하순이긴 하지만 산중이라 서울의 매운 겨울밤보다 추우면 추웠지 덜 춥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바람까지 쌀쌀하게 불고 있었다.

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고 인사를 했고, 여자는 아저씨가 찾는 별을 곡 찾길 바란다고 인사를 했다. 그 말에 사내는 오늘 본 별처럼 좋은 밤이 되라고 말했다.

 

 

 

10

 

“이제 어떡하죠?”

뒷집 마당을 나온 다음 비로소 여자는 퍽이나 난감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서울을 떠나올 때야 피차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은비령에서 만난 다름 함께 바다로 갔다가 다시 산을 넘어오는 동안엔 지금이라도 바로 서울로 돌아가지 않으면 제일 마지막엔 이런 시간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충분히 생각할 기회도 있었고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여자도 나도 그러지 않았다. 내가 그런 상황을 원해서 만든 것도 아니었고 여자가 그런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따라왔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여자도 나도 뒤늦게 서야 하루 동안 우리가 그 어떤 길로 와도 너무 많이 왔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서울로 돌아갈까요?”

“………….”

“선혜 찌가 가면 나도 따라갑니다.”

“아뇨. 있겠어요.”

“그럼 따라 들어와요.”

“…………..”

“밖은 추워요. 이렇게 밤을 샐 수도 없고요. 내가 손을 잡아줄까요?”

“그냥 들어갈게요.”

그러나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내 손만큼이나 차가워진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손을 빼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어떤 기대 어린 해석도 했겠지만 그러기에 우리 손은 둘 다 너무 차가웠다. 나는 여자의 손을 잡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정말이지 내 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채로 은자당 내외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뜨락에 올라서서 건넌방의 문을 열었다. 어둠 속인데도 아랫목 쪽으로 은자당 안주인이 미리 이불을 깔아둔 것이 보였다. 머리맡 쪽으로 베개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켜지 말아요.”

벽을 더듬어 불을 켜러 하자 여가자 말했다. 나는 별을 보는 동안 밖에서도 참았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자는 이불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위에 걸친 점퍼만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담배를 빨 때마다 여자의 얼굴이 붉은 빛으로 희미하게 보였다가 흐릿하게 지워졌다.

“난 누울 겁니다. 눕고 싶으면 선혜 씨도 누워요.”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난 서 있는 사람 옆에 누워 있으면 불안해요.”

그 말에 여자는 가만히 무너지듯 그 자리에 앉았다. 누운 채고 손을 뻗어 다시 여자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여자는 손을 빼지 않았다. 나 또한 턱없는 기대를 마음에 키우지 않았다.

“함께 누워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들이잖아요.”

“전에도 이 방에 있었나요?”

“예. 집은 다시 지었지만 방은 같습니다.”

여자는 겉옷까지 입은 채 이불 속으로 발을 넣고, 한참 그렇게 앉았다가 긴 한숨 끝에 몸을 눕혔다. 내 숨소리가 가깝게 들리듯 여자의 숨소리도 내게 가깝게 들렸다. 조금 전 앉아 있던 시간보다 길게 우리는 숨만 쉬었다.

“무얼 생각합니까?”

여자가 다시 내쉰 긴 한숨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진이 생각을 했어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많이 컸죠?”

“여섯 살이에요. 아침에 나올 때 함께 갈 거라고 떼를 쓰는 걸 떼어놓고 왔어요. 불행한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울 일이 많아요. 영호라고 했나요? 아드님도 이제 많이 컸겠어요.”

“학교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난 아이가 가방을 멘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언제 봐야 되는데 기회가 쉽지 않아요. 보고 싶어도 불행한 아빠는 의도적으로 그런 것에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불행한 엄마는 그런 일에 의도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갖는데도 그게 잘 안 돼요.”

“또 무얼 생각했어요?”

“바다 생각을 했어요. 여기 바다가 아닌 다른 데 바다요.”

“나도 선혜 씨가 생각하는 바다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길을 떠나올 땐 여기가 아니라 바다로 갈 생각이었어요. 그러다 길 위에서 눈 소식을 듣고 방향을 바꿨습니다.”

“같은 바다 생각을 해도 선생님과 제 생각은 많이 다르겠지요. 해야 할 말도 서로 다르고…”

“그리고 또 무얼 생각했어요?”

“바람꽃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이 말한 바람꽃이 아니라 아까 할아버지가 말한 바람꽃 생각요. 선생님은요?”

“별을 생각했습니다. 아까 그 친구가 말하던 시간 생각도 하고요.”

 “선생님이 생각한 별은 어떤 별이었는데요?”

“선혜 씨가 이 다음 찾는 별은 어느 별일까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아까 그 별을 이미 정하고 있었습니까?”

“………..”

“괜찮아요. 어떻게 말해도…..”

“모르겠어요, 잘….. 그런데 그런 생각은 했어요. 아까 그분이 누군가의 영혼이 가 깃들인 별을 찾는다고 할 때 그 말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우리는 2천 5백만 년 후에도 이곳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할까요?”

“…………”

“그때에도 내가 나중에 선혜 씨를 만나겠지요?”

“………”

“정말 그렇게 언젠가 이 다음 생애를 다시 시작한다면 그것 한 가지만은 꼭 바꾸고 싶습니다.”

“그런다 해도 그 생애에도 저는 바람꽃으로 태어날 거예요. 다 시들어도 그건 시들지 않을테니까…”

“그래도 나는 바꾸고 싶어요.”

“이제 서울에 가면 선생님은 무얼 제일 먼저 하실 건가요?”

“선혜 씨는요?”

“제가 먼저 물었어요.”

“”기회가 된다면 다시 돈황에 가보고 싶습니다.”

“거긴 왜요?”

“가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게 된다면 다시 선혜 씨한테 전화를 걸게 되거나 아니면 혼자 사막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다 오겠지요. 선혜 씨는요?”

“저는 작은 일부터 생각했어요. 머리를 자를 때가 됐거든요. 그 동안 너무 길었어요.”

“나한테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나는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다시 담배를 빼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이번엔 먼저여자가 물었다.

“다음 생애를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 운명을 바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비껴 지나가는 별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요.”

“………..”

“선혜 씨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 거예요.”

“우리는 정말 다음 생애에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도 왠지 꼭 다시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싶었던 건지 모르지만…”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데요?”

“아니에요.”

“말해요. 무슨 말이든 다…”

“서울에 돌아가 제가 선생님을 다시 만나지 않는다면….. 그땐 정말 우리가 2천 5백만 년 후에나 다시 만나게 되는 건가 싶어서요. 도 바람꽃으로…”

“………..”

“정말 그런가요?”

“그 친구 얘기를 하나 할게요. 전에 여기에 이렇게 함께 누웠을 때 그 친구가 그랬어요. 이 다음 우리가 여기에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땐 어떤 일로 오게 될까, 하고요. 어젯밤엔 내내 그 생각을 했어요. 선혜 씨 생각과 함께요.”

“그 사람이 한 번 스쳐간 다음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별에만 가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별을 볼 때 그분 얘기를 듣고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무래도 내일 일찍 떠냐야겠죠?”

“선생님….”

“예.”

“어쩌면 저는 내일 아침 선생님을 보지 않고 떠날지 몰라요. 그러면 2천5백만 년 후에야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러면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하나하나 벗어 윗목으로 놓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두운 하늘빛 속에서도 여자의 몸은 희미하게 빛났다. 등을 보이고 섰다가 돌아설 때 여자의 머리카락까지 내 눈엔 바람에 흐르는 혜성의 꼬리처럼 가늘게 흔들리며 떨렸다. 여자가 이불 속에 발을 넣고, 한참 그렇게 앉았다고 처음처럼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눕혔다.

“이제 제 손을 잡아주세요. 그리고 2천 5백만 년 후 다시 절 처음 봤을 때 그것을 기억해주시고요. 바람꽃 같다고 말할 때…”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 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 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작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1997년 제42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김윤식

이순원 씨의 ‘은비령’은 정겹다. 아무리 각박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도 뒤돌아보면 지난날의 삶의 길 모퉁이에 놓인 아늑한 한구석이 있는 법. 꼭 한번 있었던 일도 늘 그랬던 것처럼 회상되는 것이 기억의 본질이다. 프루스트가 찾아낸 잃어버린 시간도 이 원리에 따랐던 것. ‘은비령’의 선 자리의 정겨움은 이 원리에서 왔다. ‘은비령’의 정겨움은 이에 멈추지 않는다. 여로형 정석에 속함이 그것. 그것은 막걸리의 알코올 함량과 같다. ‘은비령’의 정겨움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의외성이다. 여로형 소설의 근본이 일상성에서의 일탈에 놓여 있기에 나그네의 심성을 본질로 한다. 일상성에서의 일탈 욕망이 아내와의 별거로 상징화되었고, 그 욕망이 닿는 곳은 의외성이다. 그러기에 거기엔 어떤 목적도 없다. ‘은비령’은 그러한 욕망의 구상화이다.

 

김화영

이순원의 ‘은비령’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심사위원 전원의 의견이 곧 일치했다. 작년에 이어서 연이어 수상한 작가에게 축하하고 싶다. 윤후명, 윤대녕에 이어서 근래에는 ‘로드 로망’에 상복 賞福 이 쏟아지고 있는 셈이다. 어느 면 유행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답답한 도시인의 생활이고 보면 길떠남이야말로 시선과 사유가 전화되는 기회일 터이니 소설에도 좋은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반복되면 독창성에 흠이 된다. ‘은비령’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격포 채석강도, 돌연 방향을 바꾸는 길의 흐름도, 쏟아지는 눈도, 수줍은 사랑도, 혼자 별을 보러 떠난 사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이 암시하는 공간과 시간의 광대무변한 넓이, 그리고 그 넓이가 암시하는 사유도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시대이고 보니 흔히 아름다움이란 것엔 힘도 생명력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광고와 구별하기 어려워진 세상이다. 그래서 ‘다 시들어 꼬부라져도 안 시드는’ 독을 담고 있는 바람꽃이 오히려 매혹을 발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정래

이순원의 ‘은비령’은 중편소설다운 무게와 균형을 갖춘 수작이었다. 심사위원들이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를 이루었던 것은 정확한 문장, 자연스런 구성, 무리 없는 전개 등이 이루어낸 작품의 완성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작가가 고향 ‘강원도’를 작품들로 살려내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노력이다. 그러나 자칫 흠이 되지 않도록 슬기를 발휘하기 바란다.

 

 

 

수상소감

작가는 떳떳하게 격려 받고 싶다

 

새해가 되었는데도 아직 새로 시작된 한 해의 계획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해 올해엔 어떤 작품을 어떻게 써야 하나를 혼자 마음 속으로 그리던 중 뜻밖에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해 가을에도 한 해를 결산하는 뜻밖의 큰 상을 받았는데, 불과 몇 달 사이 새해의 시작과 함께 다시 상을 받는다는 것이 암울한 시절, 끝없을 듯한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의 몸을 살라 작은 불빛을 밝히듯 제겐 그것 자체로 모범이었고 스승이었던 선배들께, 도 늦은 출발이었음에도 함께 격려하며 묵묵히 이 길을 걸어온 동료 작가들에게 염치없는 일처럼 보여 여간 송구스럽지 않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들은 소식이라 뭐가 뭔지 모를 얼떨떨한 느낌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더구나 문단 전체의 축제여야 할 이 땅의 문학상이 언제부턴가 복잡 미묘한 출판구조 속에 새로운 상업성과 상품성을 띠기 시작하면서 그 순기능을 제대로 다하고 있는지도 사실 적잖이 염려스러운 터라 거듭 무대에 오르게 된 송구스러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문학상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 갈 땐 과연 이 땅의 문학상이 매년 그 해의 우수한 작품을 올바른 방법으로 공정하게 선정해 그 상의 특색과 취지에 맞게 제대로 시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 작가와 독자간의 가교 역할을 문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런 문학상이 이 땅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창작의욕을 북돋우어주는 계기로서의 역할을 아직도 유효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저의 수상이 무엇보다 엄정함을 바탕으로 해야 할 이 상의 공정성을 해치거나, 그릇된 선정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 대하여 좋은 작품에 대한 판단기준을 흩트리게 하거나, 먼 길을 함께 갈 동료 후배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우는 계기는커녕 오히려 수긍할 수 없는 선정으로 문단, 혹은 문학 자체에 대한 회의감마저 느끼게나 하지 않을지 스스로 많은 반성과 많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 어느 부문의 상이나 다 그러해야겠지만, 문학상의 경우, 그런 문학상 중에서도 작품상의 경우 분명히 지켜져야 할 것은 세 가지의 원칙일 것입니다. 주는 입장에서 엄정하고 공정해야 하며, 받는 입장에서 떳떳해야 하며, 지켜보는 입장에서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원칙 아래 나는 과연 문단의 선배 동료 후배 작가들 앞에 떳떳하게 격려 받을 만한 작품을 쓴 것인지, 또 상을 받게 됨으로써 이에 뒤따를 수상 작품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조명을 내가 아닌 작품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사실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설사 자신 있게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뻔뻔함일 수 있겠지요.

상을 받는다고 해서 이미 먼저 쓴 작품의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익히 봐온 대로 세간의 평가는 더러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달라져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상이 작가와 독자간에 좋은 작품에 대한 바른 이해의 가교 역할을 못하고 단지 주어진 상의 어떤 권위만으로 우격다짐하듯 독자들에게 좋은 작품에 대한 판단기준마저 흩트리게 할 때 그런 역기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는지 요.

이 점에 대해선 상을 받는 사람 누구나 일말의 두려움 같은 것을 느낄 것입니다. 저 역시 지금 두렵습니다. 단순한 쇠봍이거나 나뭇가지에 불과한 작품을 이 상을 받는 것으로 독자의 눈을 속이는 금박 도금이나 하고 잇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작품에 대한 평가 도한 전에 없던 장점이 새로 찾아질 것도 없고, 또 전에 있던 단점이 감춰질 것도 없이 이 상의 수상 전이나 후나 여일하길 바랄 뿐입니다. 이번 현대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된 ‘은비령’이 세 근작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기에 더욱 더 그런 생각을 갖게 합니다.

원고지 4백 매 정도의 중편에 불과한 ‘은비령’에 대해서 꼬박 2년의 준비기간과 집필기간을 가졌습니다. ’94년 겨울, 어느 책 서문에선가 영원의 하루에 대하여 설명한 스비스조드의 바위 이야기를 읽고 처음 ‘은비령’을 쓸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의 운명과 인연과 사랑을 영원과도 같은 우주의 한 질서로 파악하고, 그런 운명과 인연과 사랑의 영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몽환적인 것만 깊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인물에 대해서건 사건에 대해서건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기에 더 깊고 더 크고 더 신비로울 수는 있다는 것을, 무엇에 대해 쓰건 소설은 또 그런 구체성과 개연성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을 제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아직 얼굴도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한 친구에게 꼭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주의 먼 별에 있는 친구와 교신을 하듯 <어느 별에서의 들꽃 통신>이란 이름으로 몇 달 며칠 밤을 새워가며 PC통신으로 우주와 별과 천문관측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주던 그 아마추어 천문학자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예하>라는 통신상의 이름뿐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별과 우주와 천문학에 관한 짧은 지식 또한 그 젊은 천문학자에게 듣고 배운 것입니다. 또 비회원인 제게 수시로 필요할 때마다 별과 우주와 천문학에 관한 자료를 챙겨주신 몇몇 <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95년의 봄과 여름의 많은 밤을 그 아마추어 천문학자들과 별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우고 새벽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사계절 밤하늘의 성도 星圖를 보내주시고 ’96년 봄엔 하쿠다케 혜성의 자료와 사진들을 보내주신 친구들, 그리고 그 혜성의 별 마중을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장비를 대관령 아래로까지 들고 와 안내해준 또 한 친구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3일을 기다려 이틀은 눈을 보고 하루는 별을 보았던 그 밤의 기억 또한 가슴이 아련해지도록 새롭습니다.

소설 속에서 대로라면  우주와 별의 시간이 아닌 우리 인간의 시간의 한 주기를 이루는 2천 5백만 년 전에도 저는 그 아마추어 천문학자와 <어느 별에서의 들꽃 통신>을 했을 것이고, 그러던 중 우리 곁으로 온 혜성의 마중을 하고, ‘은비령’을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2천 5백만 년 후 다음 생애에도 지금 이 생애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마추어 천문학자와 <들꽃 통신>을 하고 별 마중을 하고 ‘은비령’을 쓰고, 이 상의 수상소감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때엔 정말 이런 수상소감이 아니라 오직 기쁨과 감사의 수상소감만 쓰고 싶습니다.

‘은비령’을 쓰는 동안 내내 생각했던 것도 우리가 바로 가야 할 문학의 바른 길이지 상이 아니었습니다. 암울한 시절, 어두운 한 시대의 불빛을 위해 스스로 몸을 사르듯 글을 써온 선배 작가들의 모범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많이 부족한 줄 알면서도 외람되나마 이제 후배 작가들에 대해, 지난날과 조금은 달라진 환경 속에 새로운 무기처럼 들고 나오긴 했으되 아직은 작가 스스로도 피상적으로밖에 이해하고 있는 것이 없는 국적 모를 현대성의 미신과 – 미치는 거지요. <옳지만 오래된 것> 보다 <나쁘지만 새로운 것>이 낫다는데 – 참신성인 양 포장하긴 했으나 결국 뜯어보면 언어 학대나 다름없는 말장난의 유희에 대한 경계의 한 작은 모범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계 또한 이제까지 누구보다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방법의 글쓰기를 해왔고, 도 앞으로도 그러할 제 자신에 대한 경계로 삼고 따뜻한 삶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으로 묵묵히 제 길을 갈 것입니다.

상으로 먼저 쓴 작품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상을 받고 난 다음 앞으로 쓰는 작품들에 대해선 분명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겠지요. 이제 각오도 더 새로울 것이고, 반성도 더 새롭게 깊을 것입니다. ‘은비령’을 수상작으로 결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 역시 이제 막 마흔을  넘긴 꾀 나고 게을러지기 시작하는 작가에게 꾀 내지 말고 보다 먼 길을 준비하라는 곱절의 채찍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건 아니겠는지요.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부디 멀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원

1957년 강원 강릉 출생

강원대 경영학과 졸업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낮달’이 당선되어 데뷔

주요작품: ‘<그 여름의 꽃게> <얼굴> <우리들의 석기시대>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에덴에 그를 보낸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등.

<동인문학상> 수상.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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