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이진섭

1922년 서울 출생

景福中, 서울大 사회학과 졸업

合同 외신기자, KBS 아나운서, 서울신문, 조선일보 기자, 국제신문 문화부장, 경향신문 정경부장, 기획위원, 부국장

코리아 헤럴드 편집위원, KBS 심의위원 역임

주요저서:

장편 <저 하늘에 내가 있다>

넌픽션 <포로일기>

희곡 <오해 마세요> <민중의 적>

오페라 <論介>

시나리오 <생명> <대원군과 민비>

수필집 <물방울 인생>

그 외 방송극 50여 편과 컬럼, 논문 다수

 

 

박기원

1929년 서울 출생

淑明女專 국문과 졸업

서울신문, 경향신문 기자 역임

주요저서

장편 <花魂> 외 5편

중편 <鶴夫人> 외 10여 편

단편 <어느 부국장> 외 50 여편

단편 <父子>로 반공문학상 수상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지라도

 

序文: 그이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

 

제1장 그 눈동자 내 가슴에 있네

목이 길고 착하기만 하던 그 눈

새 신랑과 문화부 여기자

부산 ‘휘가로’ 에서의 청혼

마지막 불꽃을 사르다

직함도 많았던 팔방미인

나의 실존 원 원 에게

해프닝과 위트의 일생

묵향의 풍류와 멋

 

제2장 또 한번의 만남을 위하여

또 한번의 만남을 위하여

동심 동심으로 산 나날들

가을 같은 여자

서울행 ‘로맨스’

내 작은 사랑의 땅

그의 고통은 나의 고통

우리의 딸을 얻다

남편에서 두 딸의 아버지로

 

제3장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속전 속결 부부 싸움

두 딸과 두 아들

사랑하며 사랑 받으며

첫 번째 해외 나들이

KBS와의 재회

파리에서 그이와 만나다

잊지 못할 유럽의 ‘두 연인’

미국서 맞은 결혼 기념일

 

제4장 새벽 세 시의 고독

50대 소년, 50대 소녀

하나님 앞에 나아가다

꺾을 수 없었던 ‘술 고집’

그이의 분신을 떠나 보내며

새벽 세 시의 고독

인생은 언제나 가는 것

 

 

序文: 그이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

 

1천 2백 매 중에서 마지막 한 장을 메꾸자니 그 한 장이 힘들었다. 허탈과 탈진과, 그리고 의지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마지막 원고를 탈고하는 순간까지 나를 밀어 주시고 붙잡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원고를 넘기고 보니 갑자기 숨어 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별나게 잘 산 삶도 아니라서 그런지 꼭 길거리에 옷을 벗고 나선 것 같은 수치심이 전신을 엄습했다.

어느 부부나 산다는 것은 소중하고 아름답고 그 나름대로 이야기 거리와 추억과, 그리고 그들만이 지니고 싶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과 나와의 차이점이라면, 내게는 그 사실을 기록하고 글로 옮길 수 있는 능력과 혜택이 부여돼 있다는 사실의 차이뿐이다.

그 동안 나는 죽음과 삶의 징검다리 위를 오고 가면서 이 글을 써 왔다. 사는 동안의 그 많은 희로애락, 그리고 사랑과 미움의 세월은 그대로 한 폭의 두루마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실감 實感 속에서, 또 그것을 확인해 가면서 썼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은 어쩌면 그렇게도 짧고 생생하고, 그리고 선명할까?

누군가는 인생을 길고도 지루한 여로 旅路 라고 했지만, 살아서 같이 눈뜨고 잠들다 이제 그이가 간 이 시간 – 그것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었다.

그가 간 지 7개월이 넘었다. 그리고 그가 간 후 이 세상은 너무나 놀랍고도 견디기 힘든 시련과 슬픔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혔다.

나는 내 슬픔 위에 도 하나의 공동의 아픔과 공동의 슬픔으로 매일 꺼져가듯 잠겨 버렸다. 그것은 어쩌면 내 개인의 슬픔이 그 큰 덩어리 속에서 용해되어 가는 순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그것이 모두 남의 일이랴! 매일 밤 나는 그분들의 명복과 그 유가족의 위안을 위해 기도 드렸다. 누구도 그 아픔과 슬픔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이 순간에, 나는 내 자신의 슬픔이 더 겸허해지고 주춤해져 버리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잇는데 휴가 나온 큰아들과 막내가 이층에서 부른다.

“엄마, 이 노래 신곡인데 한번 들어 보세요. 아빠가 참 좋아하셨을 것 같은 분위기의 노래예요.”

그것은 이태리의 유명한 칸조네 가수 ‘밀바’가 부르는 노래로서, 어느 남편이 초로 初老의 아내에게 바치는 ‘당신은 아직도 젊소’라는 제목이었다.

물결치듯 흐르는 밀바의 노래는 정말 그이가 들었으면 좋아 할 멜로디와 분위기의 노래였다. 나는 그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 버렸다.

나는 이 작은 책을 이 세상 마지막 선물로 그이의 영전에 바친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4 남매, 그리고 우리 손자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책이라고 봐 줄 때 나는 보람을 느끼리라.

끝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 이 책을 빛을 보게 해주신 ‘주부생활,학원사’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1983년 10월 박기원

 

 

 

 

제1장 그 눈동자 내 가슴에 있네

 

 

목이 길고 착하기만 하던 그 눈

 

인간의 만남은 어쩌면 엄격한 의미에서 이별의 시작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은, 그 절대적인 이별만은 내 것이 아닌 양 외면하고 비켜서서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닥쳐올 그 두려운 순간에다 뚜껑을 덮고 산다.

그것은 살아 남은 사람에게는 그날부터 살아야 하는 의미의 대상을 잃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남편은 하늘’이라고 했다. 그 고루하고 평범한 말이 이토록 큰 뜻을 지니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가 간 그날부터 내 하늘의 뚜껑은 휑하게 열려져 버렸다.

이제 바람도 비도 막을 수 없는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 있게 된 것이다.

자식, 가족, 좋은 친구들, 그 사람들도 소중하고 내 울타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남편 이진섭 李眞燮 일 수는 없다.

이진섭, 그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였고, 그리고 간 것이다. 그와 나의 30년간의 생활은 종장 終章을 맺은 것이다.

처음에는 애인이었고 부부였고 또 친구였으며, 그리고 말년에는 형제, 나아가 그보다 더 큰 것, 그가 나를 필요로 했고 나도 그를 필요로 했던 칡덩굴같이 질긴 인간애 속에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나는 남녀의 만남 속에서도 부부의 인연이란 우연은 있을 수 없고 절대적인 필연에서만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거역 못할 숙명일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다. 아직도 신앙면에서 부족한 내가 하나님을 입에 올리기에 는 너무나 부끄럽고 송구스럽지만, 수십 억의 인간 중에서 단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뜻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신비감마저 든다.

오늘이 그가 간 지 86일째 되는 아침이다. 참새 소리에 잠이 깨어 눈을 뜬다.

6시 반!

너무나 넓고 큰 방, 이 무섭도록 썰렁한 새벽이 싫어졌고, 밤 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초저녁의 그 적막이 두렵다. 구멍 뚫린 가슴에 찬 바람이 지나간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 아픔이다.

세수하고 옷 맵시를 가꾸고, 막내 조반을 차려 준다. 그이의 분위기를 많이 닮은 막내를 현관까지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온다. 파출부 할머니가 올 시간은 한 시간 반이나 남아 있다.

그이가 있을 때는 항상 시간이 그렇게도 빨리 가고 할 일도 많았는데, 그이가 간 후 이 시간을 추체하기가 힘이 든다. 나의 의식의 세계와 동장이 고장 난 시계같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이 나는 그를 따라 움직이고 숨쉬었던 것이다.

키 1미터 78센티미터, 몸무게 64킬로그램, 학과 같이 목이 길고 착하기만 하던 그 눈, 그리고 항상 멋쩍고 조금은 수줍음이 담겼던 미소….

근년 들어 어느 때는 그 미소가 섬뜩할 만큼 쓸쓸하고 외로워 보일 때가 많았다. 30년 동안 사는 동안 이부자리 한 번 자기 손으로 걷어 본 적이 없는 그. 못질 한 번 빗자루 한 번 든 적이 없는 그이는, 집안에서는 제왕 帝王 이었고 귀족이었고 또 큰 어린애였다.

그이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인 기인으로서 상식적인 것과 어떤 틀 속에 갇혀 자신을 속이는 것을 제일 경멸하던 사람이었다. 비굴함과 아니꼬움을 못 참았던 사람이었다. 두 아들에게도 가끔

“남자가 비굴함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이는 극 극 과 극의 양 면을 지닌 사람이었다. 한없이 따뜻한 가슴과 그리고 냉혹할이만큼 날카로운 면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처세에 능하다거나 세상을 잘 사는 사람들은 이 양면을 잘 조화시켜 때와 장소에 따라 세상을 유연하게 넘어가는데 그이는 그것을 못했다.

적당히 얼렁뚱땅하는 것을 못 보고 못 참았다. 그만큼 자기 학대도 심했다. 겉으로는 심약한 것 같아도 등 뒤에는 강한 용수철을 달고 있었다.

그러니까 못 견디게 울화통이 터지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그때는 참고 술 안 먹은 맨 정신으로 따져야 할 것을 그의 심약성은 그걸 못하고 결국 술기운을 빌어 그 용수철이 튕겨 나오곤 했다. 나는 그것이 심히 못마땅해서 어떤 때는 극언까지 하며 말렸지만 술이 깬 아침에는

“당신 말이 옳아. 그런데 왜 나는 그걸 못하지?”

하고 야단 맞은 어린애같이 고개를 떨구고 잠잠해져 버린다.

그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주로 술 때문이지만) 생각하면 아내인 나에게나 자기가 잘못했다고 부끄러움 없이 사과를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런 되풀이되는 생활 속에서 우리는 지치고 체념하고, 그보다 더 많고 따뜻하고 큰 것 – 즉, 그이의 순수함과 착실함, 그리고 나와 애들에게 베풀어 준 풍요한 사랑 속에서 우리들은 그의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 온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사랑’이란 말을 지극히 거북하게 생각하고, 또한 쉽사리 입으로 내뱉을 수 있는 쉬운 뜻의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첫사랑이란 감미로움도 있을 게고, 남녀가 첫눈에 반해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뿐이지 그 자체가 사랑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랑이었노라’고 어떻게 감히 누구에게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말로도 설명으로도 할 수 없는 자기 가슴 속에만 묻어 둘 수 있는 영원한 밀어이고, 비경 秘境이며, 그리고 소중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길이 얼마나 험준하고 고되고, 그리고 인고 忍苦와 희생이 따르는 것인지는 알고 있다. 계산과 조건이나 대가가 있을 수 없다.

산악인에게 그 험한 산에 왜 오르느냐고 물었을 때 ‘산이 거기 있고 그저 산이 좋아 오른다’라는 그 단순 명료한 대답과 통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신혼 때 어느 잡지사에서

“이진섭씨의 어디가 좋아서 결혼했느냐?”

고 나에게 물었고, 그이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해온 적이 있었다. 둘은 설문을 따로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똑같이

“이유가 없다. 어머니가 낳아 준 그대로의 그 사람이 좋았다”

라고 한 기억이 난다.

허물 많은 인간끼리 만나 살므로 절대적이고 완전할 수 없는 게 부부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소중한 것은 인간적인 믿음, 그리고 이 절대적인 인연을 지키고 가꾸고 살아야 한다는 노력, 그리고 사랑의 확인, 그런 것이 아닐까?

그이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란 이 세상에서 지고 至高의 예술품이다. 도 가정이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남자가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곳, 그렇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

이라고 했다.

나는 아침마다 내 방과 그이 서재로 꾸며 놓은 건넌방은 내가 손수 청소를 한다. 그이가 집에 있을 때는 안방은 떨이질도 제대로 못하고 항상 대강 치웠다.

그가 간 후 얼마 있다가 벽 도배도 하고 부엌 도배도 했다. 그러나 끝내 그가 9년 동안 몸 담았던 장판지만은 뜯지를 못했다.

형체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체취가 배어 있을 그 장판지를 모질게 뜯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재떨이가 곁에 있어도 무심코 재를 방바닥에 떨어 탄 자국이 열 일곱 군데.

나는 니스칠을 하다가 그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며 하염없이 울었다. 방바닥이 누렇게 탈 때마다 나는 그이에게 신경질도 많이 부렸다. 그것도 이제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흔적이 되었다. 전구 하나를 갈아 낄 때도 마음이 좋지 않다.

“그이 살아 있었을 때 갈아 주었다면 얼마나 더 환한 불빛 밑에서 지낼 수 있었을까?”

그것도 뉘우침과 회한이 된다. 얼마 전에는 파출부 할머니가 먹음직스런 고추장 게 찌개를 했다. 나는 밥상을 받고 한 숟가락도 뜨지를 못했다. 그이는 고추장 게찌개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그이의 소지품은 하나도 누구를 줄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건넌방을 그이 서재로 꾸미고 그가 아끼던 책, 마지막 원고지의 글씨, 잉크, 만년필, 안경, 담배, 재떨이… 그리고 그의 사진 앞에서 나는 아침마다 혼자 이야기를 한다.

그는 한 손에는 담배, 한 손에는 원고지를 들고, 그 특유의 멋쩍은 웃음을 띤 얼굴로 나를 반기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이런 말을 했다.

“여보, 큰일났어요. 잡지사에 우리들이 살았던 이야기를 쓰기로 했는데 겁이 나요. 당신 욕도 써야 하고 모든 것을 털어 놔야 할 텐데…”

그때 그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여보. 그냥 그대로 쓰는 거야. 있는 대로 말야. 그러면 되는 거지 뭐.”

나는 항상 하던 대로 손바닥으로 사진을 한 번 어루만지고 묵상을 한다.

유난히도 탐스럽게 핀 마당의 장미꽃을 꺾어 꽂은 화병이 시야에서 흐려진다. 나는 마당으로 나왔다. 잡초도 생명 있는 풀이니까 뽑지 말라던 우리집 정원은 그이가 그렇게 좋아하던 개들… ‘점순이’, ‘갑돌이’, ‘곱단이’ 세 놈이 판을 치고 다녀 그 잔디나마 벌겋게 벗겨졌다.

개똥을 치고 꽃에 물을 주고 들어온다. 나는 요새, 시간에 정신을 쏟으려고 일거리를 찾는다. 아래 위층, 지하실 구석구석 모두 정돈이 되어 이제 일거리가 없다.

그가 간 후 며칠은 빗자루 끝에 묻어 나온 그의 백발 한 오라기가 그렇게 반갑고 소중스러워 휴지에 싸서 두었다.

나는 바보같이 혹시나 하고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돋보기를 쓰고 방을 쓸었으나 다시는 그의 머리털 한 올, 깍다 떨군 손톱 한 조각도 찾지 못했다.

이제 86일이 지났다. 그가 깊은 땅 속에서 퇴화해 가듯, 이제 이 넓은 집 구석에는 그의 형체의 모든 자국이 소멸해 가고 있는 것이다.

정좌를 하고 원고지 앞에 앉아 소제목 ‘사랑과 죽음’, 그리고 이름을 썼는데 그냥 울임이 터져 나온다. 갑자기 쓸 수 없을 것 같은 망설임, 두려움, 그리고 약속을 해 놓고 흔들리는 제 자신에 대한 미움.

나는 울면서 다이얼을 돌렸다.

“한 선생님, 나 어떡하죠? 못 쓸 것 같아요…..”

그냥 엉엉 울어 버렸다. 자다 깬 것 같은 한운사 韓雲史 씨의 느리고도 정겨운 목소리

“응, 그럴 거야. 그래도 써야지”

 

 

 

새 신랑과 문화부 여기자

 

우리들의 만남과 결혼은 어떻게 생각하면 정해진 숙명이었고, 하나님만이 알고 계셨던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뜻을 나는 순종하며 받아들였고, 우리 둘은 그 소중한 대가를 위해 아낌없이 사랑하고 살아 왔었다. 그이가 간 지금, 그 사실은 더 내 가슴에 선명하게 짙어만 간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49년 10월, 내가 21세의 햇병아리 여기자로 서울신문 문화부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이는 3층 주간서울 기자로 있었고, 28세 때였다. 내 친구였던 이정희 李貞姬 – 지금의 시누이 – 의 오빠라는 인연으로 처음 인사를 했을 때 그이는 4개월 전에 결혼한 새 신랑이었다.

키가 크고 곤색 양복에 붉은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눈이 로맨틱하다고 느끼면서 첫 인사를 했던 그이 ….

그러니까 엄격히 따지면 그이의 결혼 넉 달 후 나하고 첫 대면이 있었던 셈이다. 결혼 후 그이는 나에게 그때의 첫 인상을

“어떻게 저런 여자를 지금 보게 됐을까? 이상하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었어.”

그때 나는

“공연한 소리 말아요. 임자 있는 몸이 감히 누구를 어떻게 봐요?”

“아냐, 뭐 어떻게 하자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구 뭐라구 그럴까? 가슴이 철렁했던 것은 사실야.”

그리고 그 후 그이는 벌써 그때부터 운명의 신은 자기에게 어떤 암시를 준 거라고 그러기도 하면서 나를 웃겼다.

하여튼 인생은 정말 신비롭고 오묘하고, 더구나 남녀의 만남, 특히 결혼의 인연만은 인간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그리고 5년 후…. 나는 이정희의 오빠 이진섭이란 남자하고…

또 그이는 가슴이 철렁했던 그 여자와 결혼해서 부부가 되리라고 누가 알 수 있었단 말인가? 그 앞날이란 정말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었다.

그 후 나는 꼭 한 번 이진섭씨와 신문사 밖에 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숙전 때 동창이고 정희의 친구였던 유정선이 미국 유학을 갔는데 그 주소를 이진섭씨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진섭씨는 나를 데리고 그의 누님이 하신다는 명동 뒷골목의 ‘메람방’이라는 다방에서 가서 차를 사주고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그때 다시 한번 느낀 인상은 어렵지 않고 사람을 편안케 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때 이진섭씨의 존재는 나에게 이정희의 오빠, 그리고 주간서울에 있는 선배 기자 – 단순히 그것에 그쳤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성으로서는 엄연히 관심 밖의 남자였다.

나에게는 그때 3년이나 나를 연모하고 짝사랑해 오던 세브란스 의대생 전창식 田昌植 이란 남자가 있었다. 그는 6.25 전쟁으로 군의관이 되어 일선으로 갔는데, 사실상 우리들의 아련한 첫사랑은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었었다. (그때 우리는 전쟁 탓도 있었지만 나이도 어리고 결혼을 약속할 만한 의지도 자신도 없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이별은 큰 고통도 아픔도 동반 못한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그는 수복 후 유학을 떠나 지금은 미국여자와 결혼해서 개업의로 활약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그는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않은 걸로 듣고 있다)

6.25 전쟁! 그 전쟁으로 우리들의 만남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첫 결혼은 결국 결혼한 지 1년도 못되어 전쟁으로 파경에 이르렀다. 그의 첫 번 아내는 폭격이 한창이던 7월에 첫아들을 낳고, 그리고 1.4 후퇴 때 친정을 따라 월북한 것이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고향이 이북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결혼을 파기하고 남편을 떠나 친정을 따라서 월북해 버린 그 여자만이 아는 비애와 깊은 아픔을 알 길을 없지만 이해는 할 것 같았다.

일 년이 못된 결혼 생활이었지만 정신적으로 서로 불행했었다는 것을 그이는 자인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사람에게서 나는 어떤 공통 운명의 연대감마저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그녀의 비운과 운명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그녀가 그의 아내였다는 사실이 젊었을 때는 가슴 한 구석에 앙금같이 가라앉아 얼마 동안 씻기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솔직한 고백이다.

그것은 미움도 질투도 아닌 나만이 느낄 수 있었던, 어쩌다 찔려 오는 가시 같은 아픔이었다. 그러나 30년을 그와 함께 사는 동안 그가 나한테 준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1년과 30년의 긴 세월은 그것을 말해 주었다.

나와 이진섭씨와의 재회는 내가 대전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현지 답사를 하러 부산에 내려간 날, 즉 1953년 봄 광복동 거리에서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이진섭씨를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6.25가 터지고 두 달 후 8월이었던가, 명동 거리에서 정희를 우연히 만났는데 불안해 하고 근심 어린 얼굴로

“큰일 났어. 진섭 오빠가 행방 불명 야”

하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후 그를 궁금해할 겨를도 정신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부산 피난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이진섭씨였다.

그를 만났을 때 우선 서로가 살아 있었다는 놀라움과 서울신문에 같이 있었던 작은 인연으로 그 재회가 반가웠다.

그때 그이는 결혼의 파경, 그리고 미망인 Y 여사하고의 치욕적인 비련의 끝맺음, 더욱이 전쟁에서 얻은 절망과 불안까지 합쳐져 몸과 마음이 매미 껍질 같이 벗겨져 있을 때였다.

좀 야윈 것 같았으나 그이는 서울에서 3년 전에 본 인상과 다름 없이 상냥하고 친절했다. 그이는 명랑한 어투로

“정말 반갑군요. 우리 차나 같이 하실까요?”

했다. 나는 그를 따라 광복동 지하에 있는 ‘스타’ 다방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나는 그때 우리 둘이 똑같이 오렌지 주스를 시켰던 것이 기억난다.

“언제 부산에 내려오셨어요?”

그이는 담배를 물면서 물었다.

“저는 그 동안 대전에 피난 가 있다가 오늘 막 도착했어요. 그리고 처음 만난 분이 이 선생예요.”

“허, 그래요… 경향신문도 여기 내려와 있는데요.”

“네. 그래서 우선 부산 사정을 보고 저도 내려올 생각예요. 대전은 답답하고 심심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러실 거예요. 전쟁 때일수록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어울려 살아야죠. 저는 지금 국제신문사 문화부에 있고, 누님이 창선동에서 ‘휘가로’ 다방을 하고 있어요. 부산 오시면 그리로나 신문사로 연락 주세요.”

그때 그 시간에 스타 다방에서 틀어 주었던 음악이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었던 것을 그는 20년 후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들의 재회는 뜻밖에 길거리에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절대 우연이었지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부산에 며칠 있는 동안 이진섭씨한테 다시 연락도 안 하고 대전으로 왔다. 그리고 두 달 후 우리 가족은 대전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영도 影島 에 있는 목욕탕 2층에 피난 짐을 풀고 본격적인 부산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기울어질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나는 다시 피난지 경향신문 문화부에 나가게 되었다. 그 당시 문화부장은 소설가이신 고 김광주 金光洲 선생님이셨고, 문화부 기자는 나 한 사람 뿐이었다.

그 당시의 편집실이라곤 베니어판으로 칸막이를 한 사장실 옆 작은 방이었다. 당시의 사장은 고 한창우 씨였다.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6.25의 공포. 그리고 아직도 전쟁의 판가름이 안 나 생 生과 사 死의 확증이 없는 나날은 슬프고도 우울했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을 것 같은 내 25세 청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나를 고독하게도 했다. 그런 어느 날, 내가 부산에 정착한 후 어느덧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어 가을비가 시름 없이 오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그날 그이는 파리한 혈색에 한쪽 팔에는 미국 잡지와 원고지를 낀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신문사 근처 다방에 갔었다.

“대전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을 듣고 들렀습니다. 어때요, 지낼 만 하세요?”

봄에 길거리에서 보고 몇 달 만에 본 그의 얼굴은 얼굴색이 말아 아니었고 몹시 피곤해 보였으나, 이제나 그제나 눈만은 슬프게 보이면서도 도 정겨워 보였다.

나는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의 그 선량하고 조금은 맥없어 보이는 눈이 결국은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눈이 나는 좋았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도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전쟁이 어떻게 될 지 무섭고 두렵고…. 부산까지 밀려오면 우리는 어떡하죠?”

그때 그런 말을 하는 내가 한심하고 귀여웠던지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모두 부산 바다로 들어가야죠. 별 수 있습니까? 그래도 염려 마세요. 기원 씨, 아마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때 그이는 흔히들 부르는 미스 박이라고 하지 않고 기원 씨라고 했던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럴까요? 저는 억울해서라도 이대로는 죽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사람이 그렇게 쉽사리 죽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리 무서운 전쟁 속에서라도 살아 남을 사람들은 살게 마련이죠.”

그때 그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에는 항상 흡인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이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봄에 ‘스타’ 다방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마르고, 얼굴색은 푸른 기 마저 돌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시켰다.

“얼굴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그때 그이는 씁쓰레한 웃음을 띠며

“네, 좀 좋지 않습니다. 그 동안 고생도 좀 하고 그래서요.”

“그러셨군요.”

나는 그때 고생이라는 말은 피난민들이 겪고 있는 예사로운 걸로 알고 되묻지 않았다. 그때 그는

“왜, 3월에 기원 씨가 대전에서 내려오던 날 광복동 뒷골목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요?”

“네. 아마 스타 다방이었던가요?”

“네, 그래도. 그때 다방문을 나와 길거리에서 막 기원 씨하고 헤어져 돌아서려 할 때, 그 길로 형사한테 연행되어 인천까지 끌려가 두 달 동안 고생하고 나온 지 몇 달 안 됩니다.”

“어머나! 뭐, 저와 만난 것하고 연관이 있었나요?”

“천만에요. 그런 것은 아니죠. 제 개인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또 한번의 만남은 전쟁이란 극한 상황 속에서 도 이런 예기치 못했던 극적이고 쓰라린 상흔을 그에게 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그날 그 자리에서 나를 안 만났다면 그는 그런 화도 면했을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날 그 순간 저하고 안 만나셨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게 아녜요?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기원 씨가 미안해 하실 일은 아니죠. 인생에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사는 맛도 있겠죠. 저는 두 달 동안 인천 간장 공장 창고에 갇혀 있으면서 인간의 만남의 어던 기연 奇緣 같은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기연이라니요?”

“나는 고생은 했지만 그날 기원 씨 하고의 만남 이후에 그런 돌발 사건이 나서 굉장히 인상적인 만남이 됐으니까요.”

“끝내 좋은 인상이 안 돼서 송구스럽네요. 그것보다 무슨 일로 그런 고생을 당하셨나요?”

“부역죄라는 것입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끝을 맺었다. 그러나 전쟁이 아직 끝이 안 났고 거기에 대한 법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마구 잡아 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그이가 이야기해 준 부역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6.25가 터지자 전에 월북했던 대학 동창들이 대거 남하해 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가까이 지내던 친구 몇 명이 찾아와서 자기네 일에 협조할 것을 끈질기게 권유해 왔다고 한다.

자기는 학교 때 물론 좌경한 적도 없었고, 그들의 공산주의 이론인 ‘마르크스’, ‘볼셰비키” 등을 책으로 접한 적은 있지만 그 당시 그런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이는 그때 그 사상에 흥미나 관심조차 없었다고 한다. KBS 아나운서를 했고,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도 사변 전까지 관지 官紙 서울신문 기자의 직함을 가졌던 그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러데 그이는 망설임 끝에 그들의 협조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단 한 분인 형님이셨고 그 당시 일본에서 외교관을 지내셨던 그분이 그 놈들에게 납치당하신 것이었다.

형님은 바로 6.25 보름 전에 프랑스 파리로 발령을 받으시고 서울에 오셨다가 납치되시는 바람에 행방을 알 길 없어 집안이 난감해 했던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결국 그 형님은 납북되신 채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는 비운을 겪고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형님에 대한 정보나 소식을 그들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는 석방이란 길도 어떻게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협조에 동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결국 그런 생각은 그들의 생리를 몰랐던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들의 일에 참여한 후 얼마가 지나도록 이쪽의 요구 사항이던 형님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고, 더구나 그들의 허무맹랑한 선전과 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실망하던 차, 전세가 기울어지자 그 길로 그이는 그들을 피해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이는 결국 전라도 곡성에서 내내 피신했다가 부산으로 먼저 내려와 인편으로 가족에게 살아 잇다는 소식과 빨리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전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국 이유는 어떻든 간에 부역은 한 걸로 됐죠. 그래서 인천서 재판을 받고 1년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셈이죠.”

다음해 우리가 결혼하기 한 달 전, 수복 후 서울에서 그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이는 그때 일로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결혼 후에도 그 후유증이 오래 갔었다.

 

 

 

부산 ‘휘가로’ 에서의 청혼

 

1953년 9월 3일

이대로 죽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아직 너무 젊고 그리고 아름답다. 하나님은 창조물에게 단 하나의 기둥을 주셨다……….. 그것은 사랑이다. 내일 모두 죽을지도 모르는, 아니 다음 순간 죽을지도 모르는 하루살이 같은 것….. 그냥 지내 버려야 하나?

빛이 잇는 한 나는 언제나 아름다워지고 싶다.

나는 나를 혼자 두게 하는 이 공간이 싫다. 두렵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나를 위하여 생각하고, 또 나 아닌 누구를 위하여 내가 생각하고…… 그런 순간이 없으면 나를 잃은 것만 같다.

모든 것…… 밑바탕에 설움이 흐른다.

 

 

이상은 그 당시의 내 일기였다.

그때 25세 된 나의 젊음에는 목마름이 있었나 보다.

그 시절 피난지 부산에는 비도 많이 왔다. 그 후 이진섭 씨는 가끔 일하는 애를 시켜 쪽지를 보내왔다.

 

‘기원 씨

오늘도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이런 비 오는 날이면 가슴이 더 죄어듭니다. 새 책을 몇 권 구해 놨습니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의 ‘사양 斜陽’과 레마르크의 ‘개선문 凱旋門’입니다. 퇴근길에 ‘휘가로’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비 오는 날 ‘휘가로’ 다방은 우중충했고, 그 속에 이진섭 씨는 벽에 기대어 나목 裸木 같이 앉아 있었다.

언제나 푸른기마저 도는 얼굴색이 피곤해 보였고, 조금은 슬퍼 보이는 눈이 나를 맞이하곤 했다.

그 무렵 ‘휘가로’ 다방은 누님의 명성도 있었지만 각계 각층 손님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전쟁 속 피난지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휘가로’ 를 통해 서로의 외로움을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 기억으로는 화가 박고석, 김훈, 이중섭 씨 등이 단골 손님이었고, 시인으로는 이봉래, 박태진 그리고 이한직 씨 등의 얼굴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화가 이중섭 씨는 하루 종일 벽화 같이 앉아 담배 은박지에 그림도 그리고 하던 때였다.

우리는 그때 ‘휘가로’ 에서 주로 만나 어떤 때는 광복동이나 남포동에 나가 신선한 회집도 찾아 다니고 중국 음식점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즐거운 식사를 할 때에나 어디를 가거나 무심코 나를 보는 그의 눈은 항상 어둡고 슬퍼 보였다.

그이는 그 당시 나를 얻어야겠다는 갈망과 한편 그럴 수는 없다는 자책과 고뇌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담담한 만남을 이어 가면서 1953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그런 어느 날 오후, 그 집 심부름을 하는 점순이가 그의 쪽지를 전해왔다. 여느 때와는 달리 난필 亂筆로

 

‘기원씨, 어제 드디어 제3 육군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오늘 들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진섭’

 

나는 점순이를 편집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아저씨 많이 아프시니?”

하고 물어 보았다.

“네. 그러신가 봐요. 어제 육군 병원에 계신 아저씨 친구분이 지프 차로 모시고 갔어요.”

나는 제3 육군병원이 바로 우리 신문사 길 건너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날은 가지 못하고 그 다음날 점심 시간에 꽃을 한아름 안고 갔었다.

교실같이 썰렁한 크고 넓은 병실…. 일선에서 후송돼 온 부상병들 속에 그는 누런 담요에 검불같이 누워 있었다.

내가 병상으로 다가가자 그이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와주셨군요. 어제 안 오시길래 바쁘신가 했어요.”

그는 자기 얼굴빛보다 좀 짙은 초록색 스웨터를 비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무섭게 몰아치는 슬픔의 덩어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대 그이는 눈만 감으면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그때 병명은 ‘폐결핵’, ‘십이지장 궤양’, ‘노이로제’, ‘심장 협심증’ 등으로 몇 가지 병이 한꺼번에 그를 좀먹고 있었다.

그의 몸이 바스러져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불면증에 걸려 잠을 통 못 자지만 병원에서 주는 수면제는 안 먹고 있다고 했다.

간호해 주는 식구도 없는 덩그런 병실에는 가끔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만이 들려 오고 있었다.

“전쟁터에도 안 나가시구 육군 병원에 한가하게 입원하실 수 있어요?”

나는 상식적인 병 위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를 위로하기에는 내 말이 부족했고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잘하셨어요. 좀 쉬셔야 할 것 같군요.”

나는 얼마를 있다가 일어났다. 그때 그이는

“미안한 부탁이 있는데요.”

“뭔데요?”

“저어,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주시겠어요?”

“네, 바쁜 일이 없으면요.”

병실을 나오면서 나는 인색했던 대답에 좀 후회도 했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나는 병원을 나와 걸으면서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32세의 남자, 그의 얼굴빛 같은 푸른 외로움이 나를 가슴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 속에서 길에 널려져 잇는 무수한 시체도 보았고, 또 나 개인적으로는 싹트기 시작했던 아련한 첫사랑의 고별도 맛보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닌 25세의 인생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하고 겪고 있는 이진섭 그 남자의 망가진 몸과 아픔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안이했고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그 남자만 보면 비길 데 없는 쓰라림이 오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모든 일은 나하고 만나기 그 이전의 그의 인생이었고, 나는 상관도 동정도 하기 싫은 모두 그의 것인데…

나는 왜 그이만 보면 가슴앓이 같은 아픔이 오는 것일까? 그이는 너무나 지쳐 있었고, 그리고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그것은 그대로 그의 분위기, 그의 체취였는지도 모른다.

비 내리는 광복동 거리.

‘휘가로’ 다방의 어두운 불빛…

그 불빛 밑에서 벽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던 그의 모습….

그리고 초라하고 벌판 같은 육군 병원 병실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

그것은 마치 제목도 없는 석양의 한 폭의 쓸쓸한 그림 같았다.

한 인간의, 한 남자의 고독이 밀물같이 내 가슴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것은 전쟁의 타버린 폐허가 아니라 이진섭 그 남자의 부서져 버린 사랑의 상실의 빈 터였다.

나는 그의 부탁대로 며칠은 퇴근길에 병원에 들러서 그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사흘째 돌아오는 길에 내 자신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너는 그 남자에게 무엇이냐?

친구? 애인? 누이동생 같은?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그 아무것도 아닌 불투명한 자비심으로 내가 그의 병상을 더 이상 찾기는 싫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어떤 고발이었다.

나는 그 후 병원에도 안 가고 ‘휘가로’에도 안 들렀다. 그건 어쩌면 내 자신에 대한 투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신문사 길 건너가 그가 있는 병원이라는 거리감이 나를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휘가로’에 들러 그 누구에게 그의 안부를 묻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1953년 늦은 가을은 깊어가고, 가을비는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나는 비 내리는 광복동 거리를, 또는 남포동 거리를 많이도 걸었다.

그이가 이미 내 관심 속으로 들어왔다는 자의식 自意識 과, 또 그를 내 관심 밖으로 내쫓으려는 상반되고 모순된 감정이 나를 비 속으로 걷게 했었다.

그런 감정은 어쩌면 뜨겁다기보다 빗물같이 차가운 것이었다. 그의 초록빛 스웨터, 그리고 삭막한 병실…. 그리고 착하고 맥없는 눈… 그 모든 것이 나를 매질하고 있었다.

그런지 얼마나 되었던가. 어느 날 점순이가 신문사로 또 전갈을 가지고 왔다.

 

‘기원 씨

어제 퇴원했습니다. 퇴근길에 들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진섭’

 

간단 명료했으나 ‘기다리겠습니다’라는 말이 나를 당황케 했다.

그날 그이는 나에게 사랑의 고백을 했고,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그이는 그 동안 많은 망설임과 주저가 얽힌 가운데, 그리고 그것보다 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랑의 욕망과 또 인간적인 고뇌 등 그 모든 것을 너무나 순수하게 털어 놨다.

나는 그 순간 마음 속으로 나는 이 남자로부터 피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아니 그의 곁에 내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진실만이 나를 침묵케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었다.

어떤 이유도 설명도 조건도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얼룩진 과거, 병약한 몸 – 그 모든 인간적인 약점을 그이는 벌거벗은 마음으로 나에게 대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내가 순교자적인 자애심이나 너그러움으로 그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모든 그대로의 그가 좋았고, 그것은 그의 인간적인 바탕에서 착함과 끝없는 낭만성과 그리고 따사로운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물론 전쟁 때이기도 했지만 돈도 집도 없었다. 그리고 수복 후 1954년 10월 16일!

이정희의 오빠로 인사를 나눈 지 5년 만에 결혼했다. 그리고 30년을 살다 그이는 간 것이다.

 

 

 

마지막 불꽃을 사르다

 

순간은 어쩌면 불꽃일지 모른다. 인간의 삶은 그 순간의 연속이고, 그리고 그 불꽃이 명멸하는 불연속성의 긴 행렬이 한 인간의 연속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 지금 내 순간은, 아니 내 하루의 지나감은 그이와의 추억이 한 장 한 장 퇴색해 가는 과정임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시간은 잔혹하고 그리고 정직하다. 그러므로 그와의 어제의 추억이 나에게는 더 신선하고 밀도 있고 도 아플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 수기를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쓰기로 했다. 그이의 병상 일기는 그런 뜻에서 그의 마지막 추억이 될 것이다.

나는 결혼 후 30년 동안 일기를 계속해 써 왔다. 이 병상 일기는 병원에서 그가 잠든 시간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것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이 고통을 기록해 두어야만 할 것 같은 절박한 마음과, 다른 여자와는 달리 글을 쓰는 여자라는 사명감과 의지가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 그의 마지막을 기록할 수 있는 증언자는 그의 아내인 나뿐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월 1일, 화요일

집에 있었다. 그이, 식욕은 괜찮은데 소변량이 줄고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2월 4일, 금요일

낮에 기영 기영 내외가 독일로 떠나면서 인사차 오다. 약식, 떡, 과실 대접하다. 아무도 공항에는 안 나가기로 했다. 기영이 인사하고 떠날 때 저희 아빠 얼굴 전면에 골고루 키스하다. 순간 나는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다신 아빠의 얼굴을 못 볼 것 같은, 마치 확인이나 하는 것 같이… (결국 기영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그 속 깊은 것이 무슨 생각으로 저럴까? 기영이의 마음이 그대로 나한테 다가와 나는 외면을 해 버렸다.

사위 영창 영창도 장인을 포옹하고 볼에 키스하다.

그이, 담담하고 약간 쓸쓸한 표정.

그이, 현관까지 겨우 나와 배웅하다. 나는 언덕까지 나가다.

4월에 다시 오니까… 기영아 너는 네 인생이 있다.

 

 

2월 6일, 일요일

그이, 교회 간다고 옷 입는데 아주 전신이 무거워 힘겨워 한다.

기민 基民 에게 집 보게 하고 그이와 같이 대문을 나서다.

2월의 찬 바람이 싸늘하다. 그이를 쳐다보니 아주 추워 보인다. 오늘은 교회 끝나면 미국에서 돌아오신 큰 누님하고 점심 약속이 있어 그이는 어제부터 나가기로 별렀던 것이다.

그이는 골목으로 돌아서자 도저히 못 가겠다고 걸음을 멈춘다. 얼굴이 흑색이고 숨이 차고 엉망이다.

도로 집으로 들어가는 그이 뒷모습.

하늘이 무너지고 눈물이 쏟아진다.

내가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 갈까?

교회에 들어가 뒷좌석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는데 어쩐지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다지도 눈물이 말랐던 내가 왜 이럴까?

간구한 기도를 올린다.

“하나님, 그이를 붙잡아 주소서. 좀더 제 곁에 머물게 해주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검불같이 누워만 있어도 산채로 있게 하소서…. 제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를 버리지 마소서”

 

 

2월 8일, 화요일

점심 먹고 1시쯤 그이가 연세대 병원에 가겠다고 차 부르라고 자진해서 말한다. 그렇게 병원 가기를 권했는데 미루어 오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토혈 吐血이 멎지를 않는다. 휴지에 선형이 묻어 나온다. 내주쯤 강 박사에게 가기로 했었는데…

기일 基一 – 처남, 연세대 외과 의사이고 응급실장 – 점심시간이라 없어서 바로 응급실로 들어가다. 토혈, 멎지를 않는다. 응급실도 만원이라 베드가 없다.

기일이 와서 별관 837호로 병실을 정하다. 토혈보다는 간복수 肝 腹水 가 걱정이다.

3년 동안 여섯 번째 입원….

그냥 시진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병원에 들어오면 무슨 기적이 일어날 것 같고 덜 불안하다.

 

 

2월 9일, 수요일

오늘 아침부터 토혈이 심하다. 폐에서 나오는 건지 간에서 나오는 건지 의사들은 말도 안 해 준다. 밤새 계속 나와 잠 못 이루다. 왜 지혈이 안 될까? 한 가지도 아니니 어찌 될 것인가?

라디에이터 모터 소리,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 새벽 2시인데 잠이 안 온다.

그이, 잠든 것 같다. 결국 인생의 종착역이고 병고 病苦와 죽음일진대, 너무도 길고도 지루한 여로구나.

정말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행복했었을까? 인간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프로그램 대로 돼 가는 것일까?

하나님! 이 밤에는 그저 저이의 가슴에서 피 토하는 것만 멎게 해주소서.

일어나 앉아 그가 못다 한 모짜르트 원고 번역하다. 이 와중에도 일을 해야 하니… 빨리 날이나 밝았으면…

 

 

2월 13일, 일요일 (구정)

나, 어제부터 감기 기운이 있는지 두통이 나고 나른한 게 좋지 않다.

그이, 담배 달라고 성화다. 며칠 전에도 변소에서 담배 피다가 그렇게 기침을 하고 또 토혈을 했는데…

조금 낫다고 그걸 못 참나? 순간 미운증이 생긴다. 제멋대로의 인생! 자기 좋을 대로 하다가 급하면 내가 제일 당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지독히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 자신을 억제 안 하고 막 마시고 막 피우다 이렇게 엉망이 되지 않았나.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내던진 사람 같다. 짜증나고 우울하다.

 

 

2월 14일, 월요일

이제 토혈은 멎고 혈담만 나오다. 그 혈담을 가지고 당산동에 있는 결핵 협회에 검사 받으러 가지고 갔다.

그이의 복수는 좀 꺼진 것 같지만 얼굴색은 여전히 나쁘고 독한 약 때문인지 식욕을 잃어 겨우 흰 죽만 들다.

의사들은 단백질 우유도 안 된다니 영양이 너무 떨어져 걱정이다.

장미 담배 사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사다 주었더니 한 대 피고 머리맡에 두었는데, 저녁 회진 때 젊은 레지던트가 냉혹하고 매몰차게 가차없이 담배를 압수해 가다. 그이, 선선히 가지고 가라고 한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나도 그의 담배를 말렸으면서도 타인이 저렇게 매몰차게 담배를 갖고 나가는 것을 보니 가슴이 저려온다. 가엾은 생각만 든다.

그렇게 피고 싶어하는 담배도, 그렇게 마셔대던 술도 이제 그만인가?

인간이 마시고 싶고 피고 싶은 그 모든 욕망을 거절당하다니…. 그 자유인이…. 측은하고 그저 가엾기만 하구나…..

눈을 감고 누운 얼굴은 마르고 까맣고 눈도 꺼져 처절하다. 눈이 하염없이 온다. 이 누 오는 밤, 그이와의 1분 1초를 내 눈에 식어 두어야 할 것 같다.

이건 떨어 버리고 싶은 무서운 예감이다.

 

 

2월 15일, 화요일 (폭설)

밤새 폭설. 올해 들어 제일 많이 온 눈 같다. 그의 토혈 거의 멎고 복수도 좀 가라앉았다. 어려운 고비는 넘긴 것 같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날은 따뜻해지고 눈은 녹아간다. 오늘이 8일째구나. 그이, 저녁대 입원한 이래 처음 목욕하다.

배에 긁힌 손톱 자국, 간 환자는 피부가 가렵다고 들었다. 정성들여 비누 수건질 하고 닦아 주다. 그이는 시원하다고 어린애같이 웃는다.

며칠 만에 그이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 같다. 체중을 달아 본다. 57 킬로그램. 병원에 들어올 때 63 킬로그램이었는데 일주일 동안에 6킬로그램이 줄었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간구한 기도를 드리고 잠들다.

 

 

2월 16일, 수요일

5시 반에 일어나다. 새벽 어둠 속 창 밖의 불빛! 건너 병실에서는 사람이 움직인다. 어둠 속으로 자가용들이 들어온다. 어느 가족을 남겨두고 갔길래 이렇게 일찍 들 오나?

멀리 경부선 기차의 창 불빛이 오렌지색으로 보인다. 새벽 기차를 타 본 지도 오래이다. 창문을 반쯤 열고 창 밖을 향해 담배 한대를 피운다.

담배. 말없는 나의 지극한 벗….

그이와 같이 맞담배 필 때 불을 붙여 주던 그의 손, 정겨운 얼굴이 먼 옛날 같이 느껴진다.

신촌에서 그이가 좋아하는 도루묵 사다가 옆방에서 전기곤로를 빌어와 고추장찌개 해주다. 그이 달게 들다.

저녁 때 독일의 기영이한테서 전화 오다. 아빠 걱정. 이틀 전에 아빠 장례식하는 꿈을 꾸었다고….

그 애는 무당인가? 무섭다. 그 애는 항상 너무 예민해 마음 고생이 많다.

그래도 자식은 좋은 것….

그이, 복수도 좀 내리고 토혈도 멎었는데 얼굴 그대로 나쁘고 식욕 부진, 주치의 강 박사 저녁 회진 때 환자에게 위트 있는 말을 하고 가는데 그 속은 모르겠다.

병세의 어떤 확답을 못 받아 보호자로서 일말의 불안을 씻을 수 없다.

 

 

2월 20일, 일요일

아침 9시 반에 병원 안에 있는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다. 그를 위한 간구한 기도를 드리다.

인간의 생명과 삶과 죽음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까? 하나님 당신만이 아실 겁니다. 그이를 구해 주십시오.

무릎을 얼굴에 묻고 하염없이 울다.

 

 

2월 21일, 월요일

그이, 별 호전 없다.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강 박사 말로는 간경화가 심하면 독소가 뇌에 퍼져 ‘간성 혼수’가 되는 거라고 한다.

깨어나도 의식이 몽롱하고 이야기의 줄거리가 선명치 않아 답답하고 기가 차는구나. 병원도 의사도 약도 이 사람을 이 늪에서 살려낼 수 없단 말인가?

오후에 큰댁 조카사위 홍승면 洪承勉 씨가 검사 받기 위해 11 증에 입원하다. 그도 그 좋아하는 술을 못한다고…. 그도 별일이 없어야지. 가엾은 수재들…

 

 

2월 22일, 화요일

간성 혼수를 막기 위해 약물을 관장시키다. 그 약을 넣으면 5분도 안 돼서 쏟는다. 먹는 것도 없는 사람이 더 형편 없어져 간다. 오른팔은 주사를 너무 놔서 맥이 안 보이고 퉁퉁 부었다.

이게 무슨 형벌일까? 종이 기저귀를 채워 주다. 그래도 기저귀에 싸지 않고 꼭 변소로 가잔다. 침대가 높아 한 번 오르내리는 데 내가 붙잡아도 힘이 든다. 링겔병을 들고 부축해 간 것이 새벽까지 열 두 번….

꼬박 새벽까지 밤을 새다. 신열이 나는지 춥다고 해서 내 담요를 덮어 주고 나는 그의 코트를 덮고 새우같이 잠깐 눕다.

하나님 저에게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2월 23일, 수요일 (새벽 3시 45분)

그이가 헛소리를 한다. 검은 모자에 검은 양복을 입은 놈이 데리러 와 안 간다고 호통을 쳐 보냈다고…. 그리고 또 헛소리가 계속된다.

“시간을 줘, 나에게 시간을…”

지금까지 없었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경 예민한 본인이 무엇인지 감지를 했을까?

계속되는 헛소리, 알아 듣지를 못하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아니 우주 공간을 배회하고 있단 말인가?

의식의 세계가 흐려져 가는 것 같다. 간경화 증세가 극도로 악화된 상태? 간성 혼수 상태 계속된다. 소화 기능도 극도로 악화되어 우유만 마셔도 10분 내에 설사한다. 변소에서 주사 바늘에 괸 피를 보고 마지막 증거라며 보라고 한다.

자기 정신에서 하는 소리 같지 않다. 어린애 같이 달래어 천 근 같이 무거운 몸을 침대에 눕히다.

 

 

2월 25일, 금요일

아침에 기저귀를 갈려고 보니까 선혈이 낭자하다.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막혀온다. 그이, 자기 선혈을 보더니 “생각보다 빨리 왔군” 하고 눈을 감는다. 이게 이제 마지막 순간인가?

나는 복도로 뛰어가 간호원을 부르고 울면서 고모들한테 전화하다.

손 孫 목사님이 고모들보다 먼저 오시다. 두 고모도 뒤따라 오셔서 울음 속에서 그이의 손을 붙잡고 기도를 올리다. 마치 임종을 맞는 것 같은 처절한 속에서…

나는 정신이 나가 버리고 그 동안 버티어 왔던 힘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목사님의 손을 힘있게 붙잡고 의식이 몽롱한 속에서 목사님께 부탁 말씀을 하는 것 같다.

“저는 죽으면 화장 화장을 원하는데 기독교에 귀의했으니까 그건 안 되겠지요?”

나는 뒤에서 우느라고 그의 말을 잘 못 들었다. 나중에 목사님의 말씀인데, 그때 목사님을 잡은 그의 손이 어찌나 강하고도 억센지 놀랐다고 하셨다.

그이는 2년 전에 세례를 받고 믿음 속에서 간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출혈은 다행히 내출혈이 아니었다. 목사님 가시고 솜 좀 돌리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비를 넘기게 해주셔서….”

냐는 점점 어떻게도 거역할 수 없는 두려운 순간이 멀지 않은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래도 두 고모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이 이렇게도 큰 힘이 될 수가 없다.

 

 

2월 27일, 일요일

아침에 회진 들어온 강 박사, 내일 퇴원시킬 것을 결정내리다. 주치의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20일 동안 입원을 햇어도 환자의 차도는 기대할 수 없고 마치 낭떠러지 밑으로 차가 구르듯 하루하루 악화만 돼 가니…

누구를 어떻게 믿고 매달려 보나?

이대로 하루가 다르게 퇴색해 가는 저이를 그대로 나는 두 손 잡고 보고 있어야만 하나?

“하나님 꺼져가는 저이를 붙잡아 주시고 살려 주세요.”

레지던트가 그이를 일으켜 양 손바닥을 들어 보라고 한다. 매일 아침 하는 것. 손바닥이 똑바로 있지 못하고 자꾸 앞으로 기울어진다. (간 환자의 특징은 중심을 잃어 간다)

레지던트가 메모지와 연필을 그의 앞에 내놓으며

“선생님, 선생님 댁 전화번호를 좀 적어 보세요.”

했다. 그러나 그이는 연필을 든 채 레지던트와 내 얼굴을 힘없이 바라보며 멈칫하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수줍은 듯 웃는다. 그렇게 착하고 티없는 표정!

이미 그의 두뇌는 자기집 전화번호도 잊었단 말인가. 내가 앞으로 다다가

“여보 내 이름이 뭐죠?”

그래도 그이는 부끄럼 타는 어린애같이 미소만 짓는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변소로 뛰어들어가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그 명석했던 두뇌, 재기 才氣가 번득였던 그의 두뇌 세포는 이제 파괴되었단 말인가?

자기집 전화번호도, 아내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가엾은 그이…

나는 세면대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2월 28일, 월요일

완쾌 아닌 거의 절망 상태에서 하나의 기적을 바라며 퇴원하다. 지나간 3년 동안 다섯 번 입원했다 퇴원할 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말없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던가.

“이 사람을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마다 둘의 마음은 똑같았다. 그러나 이번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의 소생을 거의 기대 못하는 절망 상태에 빠진 길이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내가 조금 냉정해지는 것 같다.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할 길이라고들 한다. 그 이별을 어떻게 해야 아름답게 헤어질 수 있나?

그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실감이 나를 망연하게 만든다.

실제의 그의 따뜻했던 인간적인 무게. 우리 둘이 살아온 뜻과 보람과 그리고 가치.

그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끝을 맺으려 하고 있다. 내 곁에 그가 있었다는 존재의 소중함과 고마움에 가슴이 멘다.

술을 먹고 떠들던 그 지겨웠던 광태도 그가 살아 있었으니까 할 수 있던 일이었지… 이제 그가 없어진다면 그 소리의 절단, 그 적막 속에서 나를 어떻게 지탱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

먼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할까?

우리가 또 만날 수 잇다는 가상적인 희망에서 살아 볼까?

미움과 사랑이 진흙처럼 엉켜진 30년 …. 한약, 사약, 나머지 모든 인간의 지혜를 동원해 보자.

노란 물을 들인 것 같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간다. 오후 2시에 퇴원하다.

작은 고모가 구해온 진달래 뿌리, 쑥물을 계속해 먹이다. 보료 위에 요를 깔고 고무 헝겊을 깔고 기저귀도 채우다.

“여보, 집에 오니까 좋지요?”

뺨을 쓰다듬으며 물으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또 웃는다. 그이 말을 못하니까 모든 감사의 뜻을 이제 웃음으로 전하나 보다.

큰 고모와 함께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듣다.

참 좋은 강론이다.

수고 중에 감사하고 뜻있는 시련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 하나님,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뜻대로 하옵시고 그이가 고통없는 마지막이 되게 하옵소서…..

 

 

3월 3일, 목요일

새벽 1시 반 잠결에 나의 볼을 스치는 손!

눈을 떠 보니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애기같이 웃고 있다.

“왜 그래요? 오줌 마려워서? 그럼, 똥?”

놀라 일어나 앉았다. 다른 반응은 없이 여전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눈만은 여느때나 다름없는 착하고 정겨운 눈…

오줌통을 들이댔더니 벌써 싼 다음이다. 뒤도 한 보따리 싸고, 치우고 닦아 주고 자리옷 갈아 입히고 자리에 눕히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아직도 지저분한 것을 느낄 수 잇는 감각이 있으니 고맙다. 자기 자리에서 내 자리까지 엎디어 기어 왔을까?

말을 잃은 그가 손바닥으로 내 볼을 만져 깨운 것이다. 자리옷에 오물이 너무 심하게 묻어 파출부 할머니에게도 빨래 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목욕탕에서 내가 직접 빨며 하염없이 울다.

그를 위한 어떤 궂은 일도 나로서는 힘이 안 든다. 그 동안 몇 끼를 안 먹어도 배 고픈 줄도 모르고 지낸 것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그이가 살아서, 먹고 많이 싸주는 것만 해도 우선 고마운 것 같다. 감사합니다.

잠이 안 온다. 그이가 다시 눈을 감고 잠잠하다.

봄비 내리는 밤! 이제 봄인가?

그가 죽을지도 모르는 3월, 아니 그가 죽을 수는 없는 1983년 3월!

 

 

3월 4일, 금요일

그이, 의식이 오락가락하다. 동네 고 高 내과에서 간호원이 와서 영양주사를 꽂고, 쑥물, 고기 국물 등을 누인 채로 넣어 준다. 어쩌면 살아날 수도 있을 거라는 기적 같은 기대감과 절망적인 갈림길에서 헤맨다.

푹 꺼진 눈, 눈썹, 나에게 그 많은 애정을 주던 입술! 그 모든 것이 그린 것같이 아름답게 잠잠하다. 말 없는 침묵 속에 잠들어 있다.

그는 다시 어린애로, 그리고 이 세상 인간의 잡다한 모든 것에서 떠난 무심 바로 그것이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그를 다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인간으로, 나를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한 순간이나마 돌려 주십시오.”

오후 5시 넘어 그이는 신열이 오르고, 복통이 나는지 몸을 뒤척이며 괴로워한다. 이건 또 처음 나타나는 증세이다. 큰고모하고 나하고 기도하며 번갈아 배를 문질러 주었다. 이 원시적인 간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래도 불안해서 기일한테 연락해 10시 넘어 앰블런스에 태워 연세대 7층 732호에 다시 입원시키다.

거의 완전 혼수 상태!

산소 호흡기 씌우고 팔뚝을 절개해서 주사기 꼽다. 이제 입으로 마시는 것은 못하고 산소 호흡과 주사로만 지탱하다.

“하나님 어찌하오리까? 인간의 능력, 인간의 생명의 한계가 왔습니다. 주관해 주시옵소서.”

 

 

3월 5일, 토요일

그이, 깊은 잠에 빠지는 혼수 상태 계속. 산소 호흡, 주사로만 지탱한다. 체온 34도, 혈압 100에 60….. 심장만 움직이는 가사 상태…

집에서 하던 몸부림도 없어졌다. 거친 숨소리뿐 –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나? 그래도 그의 숨소리가 내 곁에 있고, 눈은 감았지만 살아 있는 몸체가 내 곁에 있는 실재감 實在感!

이것도 며칠이나 계속될 것인가? 월요일 기영이가 올 때까지 살아 있게 해 주소서…

밤 12시 반, 시한부의 삶. 이어가는 그의 호흡소리. 어느 기적을 바라는 마음에서 아직도 나는 벗어나지 못한다. 벌떡 일어나 “여보” 하고 부를 것 같은 착각 속을 맴돈다.

입 속에 손을 넣어 본다. 이미 차게 굳어진 혀…. 체온이 내려간다. 손발의 냉기를 더운 물주머니로 지탱해 준다.

저토록 잠잠할 수 있을까? 나에게 들려 주던 그 많은 다정했던 말소리. 나를 당황하고 슬프게 했던 그 많은 일들…. 그 모든 것은 모두 어디 두고 저토록 잠잠하단 말인가.

어쩐지 죽음과 같이 있을 이 시간이 점점 두려워진다. 나의 영혼과 육신이 같이 살던 30년. 그 세월이, 그 순간이 순간마다 단절돼 간다.

“하나님. 이제 당신만이 아실 겁니다. 이제 저이는 구함을 못 받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긴 터널 같은 영원한 잠 속에 들어가는 그에게 고통만이라도 멈추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기영이가 볼 아빠 얼굴은 의식은 없더라도 살아서 숨쉬는 얼굴을 보게 해주소서…. 내일 기영이가 비행기를 탑니다”

절대 절명인 이 순간…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순간….

내 앞에서 그가 죽어가고 있다. 그것을 나는 지켜보고 앉아만 있다. 12시 50분!

금방 끊어질 것 같다가 또 이어지는 숨소리!

하나님, 이 밤을 넘기게 해주소서…. 손을 잡아 주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나에게는 이제 그것밖에는 더 이상 그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다.

 

나는 그가 간 후 죽음에 대한 느낌과 해석이 달라진 자신을 알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지금 살고 있어도 순간순간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고의 능력도 한 조각 세포도 어김없이 노화되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죽음, 그 길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심판은 하나님의 주관이고 뜻이지 인간 누구의 것도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지, 이미 죽음의 인 印이 찍힌 사람은 누구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의 생명을 맡은 의사 자신도 의술과 인간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 이상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인하는 말도 들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간의 약함을 더욱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이가 간 후 나는 어쩐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엄청나게 멀고 아득한 딴 세상같이 느껴지지는 않게 되었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가까이에서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나 다만 누구도 그 순간을 점 찍어 어느 날인가를 모르고 산다는 것 뿐이다.

그이는 생전에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즉, 30대의 젊었을 때 “당신보다 내가 오래 살아야 저 4남매를 거두지. 당신은 가계부 하나 제대로 못 적은 여자니까 불안해서 내가 먼저 죽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때 그이는 진심으로 그런 것 같았다. 멍청하니 건망증 많고, 천둥 번개만 쳐다 자기 곁으로 뛰어드는 여자에게 어떻게 4남매씩이나 맡기고 죽을 수 있을 것인가 한고 불안해 했던 것은 사실이다.

실은 그때만 해도 내가 먼저 죽는 게 낫지 그이가 나와 애들을 남겨 놓고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죽음에 대한 선후론이 바뀌어진 것은 20여 년 전 내가 막내 기민 基民이를 낳은 며칠 후 ‘페니실린 쇼크’고 거의 절망 상태인 사경 死境에서 살아난 후부터였다.

그때 내가 살아난 것은 거의 기적이었고, 그 당시 병원에서도 신화 같은 이야기가 됐었다.

나는 목숨이 길었던 것이고, 그는 상처 喪妻할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선은 그이가 나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만약에 그날 그가 집에 없었고 출타 중이었으면 나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죽어 가는 나를 안고 맨발로 병원으로 달려가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48시간을 꼬박 뜬 눈으로 내 머리맡에서 나를 살리는 데 전심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나를 살려 놓고 집에 들렀던 저녁, 그이는 큰아들 (당시 2살)을 부둥켜 안고

“너, 엄마 놓칠 뻔했다!”

고 통곡을 했었다고 한다.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서도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인명의 정해진 척수 尺數 였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20년 후, 그는 나를 살렸는데 나는 그를 살리지 못했다. 어쨌든 그 후부터 그이는

“당신이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해. 아니, 그런 무서운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까 오래 살 거야.”

했다. 그러다가 그이는 술이 들어가면 가끔

“내 명 命은 내가 알지. 병들어 구질구질하게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이의 건강이 서서히 나빠져 병원 출입을 하고부터는 둘 다 불문율같이 죽음에 대한 말은 서로 꺼내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퇴원 후 한 달쯤 지나면

“이건 건강 테스트야”

하고 술을 시작했었다. 그럴 때마다

“여보, 딸 둘은 시집 갔지만 아들 둘이 있잖아요. 막내 장가 들 때가지 당신은 살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만 하세요”

하고 말렸다. 그럴 때 그이는 그 말에 대꾸 없이, 지금 생각하면 자기 명을 짐작이나 했는지 씁쓰레하게 웃으면서 술잔만 비우던 것이 생각난다. 이번에 퇴원했을 때만 해도 그이는 의식이 있었을 때 너무나 담담하고 초연했었다.

 

 

 

직함도 많았던 팔방미인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그와의 30년의 세월을 되새겨 본다.

한 마디로 그는, 평범하고 근엄하고 또 돈을 잘 벌어 물질적으로 처자식을 호강시키는 모범적인 남편,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보다 술로 인해 나를 처음에는 놀라게 했고, 다음에는 당황케 만들었고, 그리고 슬프게, 가슴 아프게 울리기도 한 그였다.

젊었을 때는 조바심 나게 많이도 기다리게 했고, 50대 후반에는 그의 건강을 염려해 소변 보는 소리만 들어도 그날의 주량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모든 신경과 오관 五官을 그에게 집중해 가면서 살아왔다.

주정도 많이 받았고, 기절 초풍할 정도의 기행 奇行을 나는 맨 정신으로 감수해야 하는 고역도 겪었다.

나는 이 세상에 술을 만든 주신 酒神을 미워도 해 보고, 그렇게 끊임없이 마셔대는 그를 미워도 했다.

그는 다른 잡기 雜伎는 몰랐다. 오로지 술이었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했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양면성을 지녔던 그는 40대 후반까지가 전성 시대였다.

그러나 그가 간 지금 나는 술로 인해 겪은 아픔, 그 모든 것을 덮어 무산시킬 수 있을 만큼 이진섭이란 인간 그 자체에 몰입되어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술은 마셔도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자기 능력 안에서 최대한의 가정 관리의 책임을 져 온 사람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살아온 그 시대 그 사람으로서 의식주와 애들 교육을 제대로 해결해 준 것만 해도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는 좋은 머리와 많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통해 그것을 한 군데로 집약시켜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고 한스럽다.

 

그이는 서울대학 때 전공 과목이 사회학이었다. 성대 城大 예과 豫科 를 나오고 서울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가정 사정으로 그는 만학 晩學을 한 셈이다. 일제 日帝 말기라 그 당시 성대 예과는 일인들이 판을 쳐 한국 학생은 그야말로 준재 俊才 들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이었다고 한다.

졸업이 가까워 오자 그 당시 사회학과 주임 교수였던 고 故 이상백 교수는 그이에게 연구실에 남을 것을 권유하셨다고 한다. 장차 자기의 후계자로 대학에 남을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14세 때 아버님이 작고하시고 사실상 가장의 책임을 진 그로서는 한가하게 연구실에 남아 있을 입장이 못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가정 교사를 하고, 또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종로 구청에 시험을 보고 들어가 그때 22세의 나이로 ‘판인관’이란 파란 딱지를 붙이고 부하를 몇 십 명 거느리는 관리 노릇도 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종로 구청에서는 최연소자로 그런 직위에 있는 그가 선망과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이는 그때 몇 년의 관리 생활을 통해 관 官의 행정도 배워서 예산 짜는 것, 기타 사무 행정을 많이 익혀 편리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리 생활을 몇 년 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서울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그 후에도 그는 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많았음에도 결국 집안 형편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당시 가까이 지내던 미국 사람의 알선으로 시카고 대학에 전 장학금으로 유학 갈 길도 있었는데 그것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양반 중에서도 명문이었고, 아버님은 머리가 명석하셨으나 방랑벽이 있으셔서 생활의 기복이 많았고, 가난한 소년기를 맞아 고생도 많이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보아도 그렇게 가난에 찌들어 고생한 티가 안 보였던 것은 천성이 명랑하고 맑은 성품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뼛속 깊이엔 많은 슬픔과 한이 서려 있었다.

생전에 가끔 신문사에서 “원고 뒤에 쓰는 직함을 무얼로 할까요?” 하고 물어 올 때가 있었다. 그에게는 ‘방송국 심의의원’, ‘시나리오 작가’, ‘방송 작가’, ‘칼럼니스트’ 등 어느 것이나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흔히 고 유한철 劉漢澈 씨 다음가는 팔방미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칭찬 아닌 칭찬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아내인 나에게도 그런 변명 같은 것을 안 했지만 그의 생애를 돌아볼 때 그럴 만한 소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런 뼈저린 가난의 아픔을 겪고 자랐기 때문에 자기 애들에게는 아빠로서의 책임과 임무를 다했었다. 가난은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죄라는 생각이 투철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생존을 위해 뛰었기 때문에 자립심과 강인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런 고생을 했고 돈의 소중함과 아쉬움을 알면서도 돈에 연연하지 않고 돈에 목 매이기를 싫어했다.

돈이 호주머니에 있으면 그날 그이는 부자였다. 어떻게 보면 그이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애들 먹을 것을 포식하도록 사온다든지, 세상에서 먹는 것은 죄 없다며 아껴 먹지 말고 실컷 먹으라는 것이었다. 애들이 먹는 것을 볼 때처럼 행복할 때가 없다고 그이는 말했다.

20년 전만 해도 애들 먹을 과자가 그리 고급스럽지 못했다. 그 당시 경향신문사 부국장으로 있을 때 명동 입구에 큰 식품점이 있었다. 그 집에서는 이진섭 씨가 큰 단골 손님이었다.

거의 매일 밤 한 잔 걸치고 한 아름씩 먹을 것을 사들고 들어왔으니까…. 그리고는 자는 네 놈에게 차례로 뽀뽀해 가며 일어나 먹으라고 하니 애들이 고역일 때도 있었다.

그이는 지극히 나와 애들을 사랑했다. 섬세하고 그리고 다정다감했다. 술로 가끔 폭풍우를 일으키긴 했지만 우리는 그의 따뜻함과 사랑 속에서 구김살 없이 살았다.

 

사랑, 믿음, 정직

그는 가정은 사랑과 믿음과 정직 이 세 가지의 근본만 있으면 웬만한 역경이나 고난은 이길 수 있는 거라고 말했다.

그것은 평범한 이치였지만 돈이나 물질보다 사랑과 믿음과 정직이 더 소중하다는 그의 소신은 우리 가정을 굳게 다져 나갔었다.

도, 우리 둘은 모두 글을 쓰는 사람들이어서 살면서도 많은 편지가 오고 갔다. 집안에서 쓴 것은 주로 그이가 과취 過醉한 날 밤 내가 속이 상해서 쓴 것과, 그것을 보고 그가 사과하는 편지라든가, 애들이 어렸을 때 자막 字幕 번역, 시나리오 작품 등의 일거리를 밖에 나가서 할 때 집에 들어와 써 놓고 간 쪽지 등이었다.

이 밖에 국내 여행, 해외 여행 때 보내온 것도 있다. 그는 밖에 나가면 그가 있는 소재지를 꼭 전화로 알리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일러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지게 되면 꼭 전화로 가 있는 곳을 알리는 습관을 들이게 했다.

그이는 편지쓰기를 즐겨 어떤 대는 그이가 집에 돌아왔는데도 계속 편지가 뒤따라 도착하는 웃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결혼 전 편지는 ‘기원 씨’, 다음에는 ‘진 眞이 모 母’, 그리고 ‘당신’으로 변해 갔다.

그 모든 편지, 그리고 쪽지 한 장도 그이가 간 지금의 나에게는 아름다운 추억과 소중한 기념물이 된다.

 

 

 

나의 실존 원 媛 에게

 

<결혼 전에 받은 글(부산 피난지에서)>

 

기원 씨

오랫동안 적조했습니다.

김광주 씨 편으로 몸이 불편해서 아직 출근도 못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항상 건강을 자랑하시던 당신이었던 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 가시던 날 아침, 추근추근 부슬비가 내리고 차 속에 몸을 싣던 음울한 공기 속의 당신 표정을 그려 보던 날 이래 소식만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들리는 말에 병석에 누워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막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잇는 이 시간에 당신의 편지 두 통이 한꺼번에 날아 들어 왔소이다.

참 반가웠어요.

병석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 있는 신안 神眼을 가질 수 있는 심경이 부럽고, 글월을 통해 녹음 우거진 초하 初夏 서울의 냄새를 흡족하게 맛볼 수 있었습니다.

‘녹음 우거진 플라타나스 가로수 밑으로 길게 뻗치는 나의 그림자’

참 좋습니다. 담담한 심경과 포근한 동심의 호기 好奇가 풍기는군요.

어렸을 때 무심코 몸을 신축 伸縮 해 보던 그러한 풍정 風情이 눈에 떠오릅니다. 아울러 무심코 쳐다보는 어린 당신의 눈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요새 몸이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시름시름 앓기도 하고 술에 물 탄 것 같은 모양이올시다.

허나, 나의 현실을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발 서울의 적막을 충분히 만끽하시고 돌아오시기를…

그래서 나에게 푸짐한 그 무엇을 던져 주시게 될 것을 기대하고 이만 총총 붓을 놓겠습니다.

부산은 한꺼번에 삼복 三伏이 닥쳐온 것 같더니 어제 오늘은 또 미치광이 같은 비바람이 갈겨 축축히 마음 속을 적셔 줍니다.

진섭 배

 

 

이 편지는 1953년 여름 피난지 부산에서 내가 서울에 잠깐 다니러 올라왔을 때 그이가 서울에 보낸 편지였다.

 

기원 씨

어제도 또 서로 어긋나서 못 뵈었군요.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우중 雨中에 안되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시간에 집으로 와주셨으면 해요.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진섭

 

기원 씨 앞

어젯밤은 공보처의 사정으로 휴식, 오늘도 휴식, 그래서 집에 있습니다.

밀인 원고나 써 보려 합니다만 위장병으로 간밤에 하도 혼이 나서 진종일 단식이라 눈이 핑핑 도는군요.

시간 나시는 대로 좀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진섭

 

기원 씨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어제도 가고 그저께도 갔는데 서로 엇갈려 못 뵈었습니다. 또 발작이 나서 어제는 최영해 최영해 씨에게 신세를 많이 끼쳤답니다. 오늘 12시 정각까지 ‘로맨스’로 나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진섭

 

기원 씨

어제는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뵙고자 하오니 자동차 타시고 곧 좀 와 주세요.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그럼 기다립니다.

청운동에서 진섭

 

 

이 사연들은 피난지 부산에서 둘의 사랑이 약속을 이룬 다음 유전이 되어 서울로 환도한 후 10월의 결혼을 앞두고 몇 달 동안에 걸쳐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 무렵 거의 매일 만났고, 어쩌다 못 만나면 그이는 곳곳에 쪽지를 남겨 놓고 나를 찾아 불렀다.

그 해 여름은 길고도 무더웠고, 우리에게는 잠시라도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지루했을 때였다.

 

 

<결혼 후에 받은 글>

 

진이 엄마

일 관계로 오후에나 나가게 되겠소.

혼자 애쓸 것이 뻔하구려. 그러나 내일 아침 연구생 백남성 白南成 군이 내 대신 거들어 줄 테니 이사를 진행시키시오. 될 수 있는 대로 내가 나가서 일을 보도록 하겠소만 어쨌든 내일 이사를 단행하시오.

트럭은 성북서 城北署 뒷길에 가면 많이 있소. 돈이 부족하면 혜화동 누님에게 가서 꾸어 가지고 하도록 하오. 뒷일은 내가 처리하겠소. 한 3만원 있어야 할 것 같소.

진섭

 

 

이때 그이는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의 각본을 써서 안양 촬영소에서 촬영 중이었는데, 돈암동 전세집에서 문화촌을 이사 갈 때였다.

 

원 媛 이

간밤에 혼자 애 많이 썼겠지. 밖에 나와 일하게 된 것이 후회도 되고…

열심히 쓰느라고 하지만 이것 저것 걱정이 되어 붓대가 잘 안 나가는구료. 하지만 아침에 당신 얘기 듣고 일사천리로 내 갈리고 있어.

기영이 감기도 일사천리 완쾌의 길로 들어섰으니 좀 안심이 되오. 지금 일 나감새로 봐선 내일 저녁 8시면 떨어질 것 같아. 헌데 역시 쌓이고 쌓인 노독의 끈기가 일의 소도를 저해하는군. 하여튼 기영이 잘 부탁해.

특히 방 안의 습도를 잘 조절하고 이따금씩 문을 열어 환기를 하되, 기영이는 푹 씌워 줄 것.

주스와 보리물은 차갑지 않게 먹이고, 손발은 따뜻하게 해 줄 것.

그럼 수고 좀 하오. 제법 어머니 노릇을 하려면 이것도 하나의 귀한 시련이니까…..

진 眞

 

 

어쩌다 애들이 병이 나면 그이는 며칠씩 술도 끊고 간호를 했다. 밤시간에 약 먹이는 것은 꼭 자기가 했다. 나는 어떤 때는 밤시간은 귀찮으니까 초저녁까지만 먹이고 자 버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이는 꼼꼼하고 세심했기 때문에 집을 비우면 걱정이 되었나 보다.

 

 

 

<국내 여행지에서 보낸 글>

 

원 媛이 앞

오랫동안 못 본 것 같구료. 불과 네 시간의 거리밖에 안 되는 곳에 와 있는데.

여기 대구 날씨가 무척 차갑구료. 당신 말대로 아랫도리 속옷을 안 입고 왔더라면 혼날 뻔했소. 고맙소.

유성 儒城에선 강행군 끝에 여독을 풀고 전화했듯이 한 잔 슬쩍 걸치고 잘 쉬었소. 오늘은 대구에서 농경지를 보고 도지사의 초대로 한턱 먹었소.

기광아! 기민이 때리지 말고 아빠 돌아갈 때까지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모두들 칭찬하고 있으니까 신용을 잃지 마라.

기민아! 공연히 심술 부리지 말고 엄마 성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 순둥이는 순둥이의 매력이 있는 거야.

혜자 (일하는 아이)도 잘 부탁한다.

진 眞

 

맏아들 기광이는 어렸을 때 장난이 보통 아니어서 한 살 아래 동생 기민이를 곧잘 못살게 굴었다.

 

 

<월남 越南 취재 갔을 때> (제 3신)

 

원 媛이

간 밤에 꿈을 꾸었소. 무엇인지 시름에 찬 당신의 쇠진한 모습.

손목의 맥이 약하고 앙상해서 뒤흔들며 깨우려고 애쓰다가 잠이 깨었소. 별일은 없겠지만 어쩐지 뒷맛이 좋지 않아 곧 붓을 든 것이오.

나는 이제 8일, 일선을 두루 다니며 취재 활동을 마치고 돌아왔소. 마침 공항에서 16일에 도착한 심연섭 沈鍊燮 씨를 만나 당신의 편지를 받았소. 모두들 놀리는 바람에 혼이 났소.

그러나 애들 편지랑 당신 글 보고 너무나 반가웠소. 당신의 글에서 당신이 그대로 투영 투영 된 모습으로 나타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소.

나는 아마 당신이란 여자의 이미지를 영원히 안고 갈 사람인가 보오. 홍콩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편지를 보고 이곳에서 이 글을 쓰는 거요.

윤 부장 (코리아 헤럴드 사진부장이었는데 몇 년 전에 작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밤거리를 도무지 나돌아 다니기 싫고, 일 (그 당시 월남 티우 대통령 단독 회견)에 대한 이야기, 찾아오는 손님 등쌀에 정신이 없소. 내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오.

더구나 항상 박기원이란 이름 (특히 같은 작가, 원앙 부부 임을 잡지에서 알고)이 묶여 다니기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당신이 죽 내 곁에 있었던 거요. 그럴수록 당신이 그립고 그리워지는구료. 서울서 온 신문을 보니까 월남 전세 戰勢를 대서특필하고 있던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소.

어머님께 드리려고 호박 불상을 샀고, 당신 목걸이, 애들 인형, 사내놈들한테는 채명신 蔡命新 장군의 사인이 든 사진과 연필 등을 준비했소.

월남 노인들을 볼 때마다, 더욱이 어려운 환경에서 허위적 거리는 노인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옵니다.

홍콩, 도쿄를 거처 21일 2시경에 귀국하겠소. 그럼 애들 데리고 그 동안 잘 있소 정말 보고 싶고 곧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소.

그럼 안녕

진섭

 

 

 

<내가 월남으로 부친 글>

 

당신에게

어제 4일 첫 편지를 받고, 지금 막 당신의 두 번째 전화를 받고 붓을 들었습니다. 목소리만 듣고는 건강이 어떠신지, 얼마만큼 피곤한지 추측할 수 없지만 그저 반갑기만 했어요.

당신 떠나시자마자 신문에 월남 전세가 수선스럽게 보도돼서 꽤 걱정했어요.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또 대가 센 당신이기에 어떤 믿음 같은 것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 전에 애들하고 아빠가 별일 없이 돌아오시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요새 잘 때는 애들이 모두 우리 방에 내려와 몰려 자고 있어요. 여전히 건강들 하고, 무섭게 먹어 치우고, 가끔 아빠 보고 싶다고 그래요. MBC 것 정신 차려 듣고 있는데, 계실 때 같이 들을 때보다 당신 안 계시는데 목소리만 들으니까 좀 다른 느낌으로 들리는 것 같아요.

5일, 오늘 기민이 입학식예요. 새 옷도 사 입히고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이제 막내가 학교에 들어가게 됐으니…

기진이는 아침 7시 반에 나가고 기영이는 한약 덕택으로 입맛이 너무나 좋아 걱정예요. 얼굴도 좋아지고요.

기광이는 2학년 말에 저희 반에서 3등을 했어요. 3학년부터는 란도셀이 싫다고 해서 드는 가방을 사주었더니 책을 모조리 넣고 다니고 있어요. 아빠 떠나실 때의 말을 명심했는지 요새는 장난을 좀 덜 하고 얌전해졌어요.

저는 연재물 <춘무 春 霧> 외에도 심심치 않게 일거리가 생겨 매일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밤에는 여전히 당신 없으면 일어나는 지병 持病 인 깊이 잠들지 못하는 버릇으로 단잠을 못 자고 있어요.

취재 의욕도 좋지만 너무 욕심 부리지 마시고, 위험 지구나 깊숙한 곳에도 가지 마시고, 강단만 믿고 너무 무리 마세요. 요새는 마치 전쟁터에 남편을 내보낸 아내의 마음 같아요.

술도 과음 마시고, 너무 피곤한 채로 떠나 긴장이 풀리면 병이라고 날까 걱정예요. 가지고 가신 약은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잊지 마시고 식후에 꼭 드세요.

아마 제 편지는 이것으로 더는 못 받으시겠죠. 도쿄서 전화 주시고, 돌아올 때까지 몸조심하세요. 안녕

당신의 기원 올림

 

 

<집안 일로 쓴 글>

 

원 媛이

쑥스럽지만 사과한다. 곧잘 나가다가 그만 오늘 하루 종일 내 시간은 익소 내 집에 집중되었었다.

금시라도 그 허허벌판 같은 좁은 천정 밑에서 내 자신을 벌 세우고 싶었지만 그게 안 되는 어색함이 나를 붙들고 겨우 이렇게 고백한다.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간 뜨악했던 병이 나온 게다. 이래서 내가 나이 먹은 엄연한 사실을 도피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너무나 행복에 겨워서 지랄병이 난 건지도 모른다. 좀 더 바르게 생각한 대로 내 움직임을 지키고, 그래서 우리 울타리 안에 있는 생명들에게 후회없는 애정을 심어 주려 한 것이다.

애들의 그 새까만 눈동자가 내 가슴을 판다.

기원이!

결코 변명은 아니다. 어딘지 내 몸뚱이 속은 잘못된 데가 많은가 봐.

우리끼리는 못할 얘기가 없고, 흉허물도 같이 나누며 서로의 아량을 섞어 온 지 오래라고 생각해. 꾸지람을 듣지. 정말 고개 숙이고 듣겠다. 먼지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울음을 삼키며 꾸짖던 자네 모습!

홱 돌린 얼굴의 리듬에 나는 순간 썰렁했단다.

한 마디 – 순옥 (일하는 애) 보고 한씨 (목수) 에게 부탁해서 메꾸어 놓으라 하고 나왔지만 문턱을 나서는 내 머리 뒤는 너무나도 차가웠고, 등골이 얼음장 같았어. 햇살이 맑고 하늘은 너무나 파래서 내 자신 더욱 더 오금이 저려들고 저리기 한이 없었어. 외로웠어.

사서 하는 짓이라고 꿀꺽 침을 삼켰지만, 취몽 醉夢 간에 천정에서 쥐가 다니는 소리를 나는 천정 속으로 도둑이 움직이는 걸로 생각한 거야. 그래서 기어 올라가 천정을 뜯어낸 거야. 도둑을 잡으려고 말야.

내 사랑하는 당신 애들을 지키려고 말야. 왜 그렇게 추워지는지 몰랐어. 이마는 써늘한데 얼굴은 화끈거리고, 열도 熱度 의 밸런스를 잃어서 와들와들 떨고, 자학 自虐의 시간이 온종일 내 몸을 저미는 거야.

따뜻한 것을 벗기고 헐뜯고 지랄을 했으니 인과응보의 명쾌한 응징이 자연히 나를 저미게 한 거라 생각해.

기원이!

TV를 마치고 겨우 가게에 들러 맥주 두 병을 걸머쥐고 또 한 초콜렛을 들고 – 이것으로 뭔가 때우려는 야멸찬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 없는 것을 땜질하려는 서글픈 반주가 그래도 필요했다는 것만은 알아 줘.

계면쩍다기보다도 내가 밉고 돼먹지 않아서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니 아직도 어딘지 모자라는 게 많은 나야. 구덩이 같은 허전한 천정 밑에서 잠자는 애들을 두고 나만 이렇게 편히 자려는 꼴이…

그만 두지, 그만 하는 것이….

24일 AM 2tl

재건하세. 진섭

 

이 글은 애들 방 천정에서 쥐가 달음질치는 것을 그이는 도둑놈인 줄 알고 천정으로 기어 올라가 천정을 뜯어내는 소동을 벌인 후 쓴 글이다

 

 

다음 글은 큰 아들 기광 基光 이가 입대하기 전날 밤에 그이가 써 놓은 글이다.

 

1982년 4월 12일, 월요일

 

<새벽 3시 45분>

원 媛이도 잠을 설쳐 뒤척이는 것 같다. 무엇인가 내 몸 속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그런 아픔이 있다.

기영이 때, 기진이 때, 그리고 광 이가…. 잠시라지만 계집애들과 좀 다른 느낌이 든다. 저 녀석이 벌써 그런 나이가 되다니…

떠나는 것이라곤 하지만 머리를 박박 깎고 들어섰을 때 내 가슴은 미어지는 것이었다. 왜? 아무리 의무라지만 왜 저렇게 머리를 박박 깎고 가야만 하는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내 연륜을 흔들어 놓는다.

 

<아침 6시 20분>

나는 또 깼다.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 꿈을 꾸었나 보다. 난데 없이 윤보선 尹潽善 씨 (우리하고는 사돈이 되신다) 가 휘호를 써 주셨다.

산수화로 음양을 그려내는데, 눈 앞에 일필휘지로 써 보여 주셔서 새삼 놀랐다. 한 폭의 그림 위에 섞은 글씨가 양 陽이라 했던가?

한 군데 큰 바윗돌 산이 우뚝 서고 그 아래 강물이 흐르는데, 바위 산 사이에 꼬부랑길이 허리띠를 두르고 빠져 나가는 큰 호숫가 같은 곳. 그 모래사장 오른편에 나, 광 光이, 그리고 원 媛이가 큰 제실 祭室 앞에 놓인 제상 祭床 앞에서 기도 드리는 맑은 그림이 눈에 선하다.

그게 무엇일까?

파도 소리. 지나가는 바위 산 꼬부랑길의 소나무 바람 소리. 어떻게 그 먼 길을 왔는지? 숨가쁨도 없이.

제사 앞에 선 나, 광이, 원이의 모습. 참 이상한 꿈이다.

 

 

앞의 꿈 얘기는 그이가 돌아간 후 그의 노트에 적힌 것을 옮긴 건데, 무언지 그이의 죽음을 예견한 것 같은 불길한 꿈 같아 섬뜩했다. 그런데 지금 기이가 잠들고 있는 유택 주위의 경관과 그의 꿈 속에서 보았다는 경치가 너무나 흡사해서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광 光이 떠나는 아침 7시 5분>

광이 내게 절하고 악수하고 일어섰다. 새삼 아들의 맛을 느낀다.

벌거숭이 머리. 그러나 얼굴 빛은 나처럼 검거나 찌들린 색이 없고 엄마를 닮아 희고 환해서 다행이다.

꼭 동승 童僧 같구나. 부디 건강하게 너 할 일, 너 갈 길, 그리고 은혜 입은 존재로 조심성 있게 만인의 앞길을 비출 성숙한 미래를 겨누어 주기 바란다.

 

 

<오후 2시>

훤하다. 기민과 나 둘뿐.

사방 벽을 나이 탓일까? 한꺼번에 기진, 기영, 기광의 얼굴, 모뚱이, 목소리, 그림자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냄새가 나를 현혹시킨다.

내 자식이라는 불덩이 같은 괴상한 열 熱이 속에서 훌뿌려 터질 것만 같다. 이상하지 참.

이 다음은 원 媛이 당신이 써요. 가슴이 찢어지는 걸 어떡해…

클라리넷, 오보에 곡을 연거푸 들으면서 2시 30분!

(이때 나는 광이가 논산 훈련소로 떠나는 것을 배웅하기 위해 고속 터미널에 가 있었다)

 

 

그이는 퇴직 후 거의 두문불출 집에만 있었다. 책 읽고 쓰고 음악 듣고 술도 거의 반주 정도로 조금씩 했다. 그것도 안 하면 숙면을 못했기 때문에 그것마저 말릴 수는 없었다. 정말 선비의 풍모를 느낄 수 있게 조용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런데 큰아들 기광이 입대한 다음부터는 눈에 띄게 쓸쓸함이 보였다.

작은 딸 기영이는 19세 때 미국에 먼저 유학 갔다가 23세 때 결혼해 독일에 있었고, 큰딸 기진이는 작년에 뉴욕에서 결혼해 한꺼번에 셋의 자리가 비니까 집은 너무나 썰렁했고, 막내가 올 때까지는 항상 우리 둘뿐이었다.

 

다음 글은 그이가 회갑을 앞두고 며칠 전에 자기 노트에 쓴 것이다.

 

기원

근 삼십 년 세월 속에 곡절을 딛고 넘어 오늘 당신 덕분에 회갑을 맞이했소.

희비애락의 인생 곡절 프리즘을 통해 새로운 무지개가 영롱하게 보이는구료. 감사.

그 모든 곡절이 하나로 걸려서 풍요한 날이 됐으니 당신의 고마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 봅니다. 네 마리와 함께… 청정지애원 [淸 正之愛媛: 청정하여라. 원媛을 사랑함을 이에 바로 하느니라]. 감사. 감사.

나의 실존 實存 원에게

 

1982년 9월 24일

청재 靑齋 진섭 배

 

 

 

해프닝과 위트의 일생

 

그이는 한 마디로 다채로웠던 사람이다. 낭만과 정과 그리고 구식과 신식이 공존했던 사람이다.

또한 다분히 낙관적이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비위에 거슬리는 일은 못 참는 그런 면이 있었다. 나에게도 많이 너그러운 것 같으면서도 아주 완고한 데가 있었다.

내게도 글을 쓴다는 내 생활이 있고 밖의 모임도 가끔 있는 편이었지만 밤에 혼자 나가는 외출은 싫어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회합이 있어도 그것만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야 했기에 여류들끼리 자주 어울릴 수 있는 2차나 3차 모임에는 끼어 본 적이 없다.

그이에게는, 아내란 남편이 들어올 시간에 집에서 맞이하는 것이 정도 正道 라는 관념이 뿌리 박혀 있었다.

KBS 에서 그이가 9년을 근무하는 동안 그이는 거의 시계였다. 6시 아니면 5시 반 퇴근차로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나이 탓도 있었겠지만, 젊었을 때처럼 낭만과 흥취를 돋울 만한 벗도 술집도 없어졌다고 했다.

종로나 무교동 명동에 나간 지도 몇 년이다 됐었다. 자기는 여의도에 유배당해 살고 있다고 가끔 농담 삼아 말했었다. 더구나 차 잡기 힘든 세상에 나이 먹고 머리 허연 사람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꼴도 싫다고 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나는 둘이 같이 나가는 저녁 외출 아니면 나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부득이한 일로 할 수 없이 외출한 때도 있었지만, 그러고 보면 30년 사는 동안 늦은 밤 외출은 혼자서는 거의 못해 본 것 같다. 영화 구경도 혼자 간 적이 없다.

언젠가는 좋은 영화(외화) 두 편을 동시에 두 극장에서 상영한 때가 있었다.

우리는 일요일 날 조조 할인 것부터 오후까지 두 편을 봤다. 점심, 저녁까지 먹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하여튼 당신과 살다 보면 도깨비 장난 같은 때가 있어. 안 볼 때는 1년 내내 안 보다가 보면 하루에 두 편씩이나 보고…”

“그게 재미나지 않아요?”

그는 장난기 어린 어린애같이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이 하고 마지막 본 영화가 작년 여름이었던가?

대한극장에서 상영했던 <십계>였다. 그이는 영화 심사 때 봤지만 내가 못 봐서 같이 갔었다. 낮에는 더우니까 아침 걸로 보자고 해서 첫 상영 시간이 8시 반인 것에 맞춰 하여튼 집에서 7시 반에 나갔었다.

초콜렛, 팝콘 등을 사가지고 들어가 먹었던 기억이 난다. 끝나고 나오니까 8월의 태양이 눈부시고 따가웠던 기억. 그리고 둘이서 어린애같이 손을 잡고 육교를 건너 좁은 골목을 지나 ‘우래옥’에 가서 불고기로 점심을 먹고 돌아왔던 기억이 어제 같다.

좋은 음악회, 좋은 친구들끼리의 부부 동반 모임, 또 우리들 역사의 하이라이트였던 1971년 파리에서 만나 유럽, 미국을 거쳐 돌아온 꿈 같은 여행….

그 모든 것이 그가 있길래 빛나고 즐거웠던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또 그이는 가끔 기가 막힌 위트와 해프닝으로 나를 즐겁게 했었다.

언젠가 문화촌에 살 때 일이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아침에 깨 보니까 아름다운 눈이 엄청나게 퍼붓고 있었다. 아마 서설 瑞雪 이었던 것 같다. 나는 출근하는 그를 대문까지 배웅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눈 오는 날 어딘지 기차 타고 여행이나 했으면”

지금 생각하니 그날이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1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그이 목소리였다.

“난데, 여기 서울역 특급 대합실이야. 2시까지 세면 도구만 들고 나와요.”

나는 어린애같이 좋아 고함을 지르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만 해도 애들이 어려서 부랴부랴 시누님 댁에 가 계신 시어머님께 집 좀 봐 주십사 하고 전화를 건 다음 서울역으로 향했다. 나는 기차 속에서

“왜 갑자기 떠날 생각이 났우? 하여튼 당신은 도깨비라니까!”

“생각 났을 때 움직여야지. 당신 팔 신경통도 아프다고 했잖아? 유성 온천에 가서 몸도 풀고 안마장이 불러 안마도 좀 해.”

그 순간 나는 최고로 행복한 여자였다. 그 후 그이는 매년 한 번씩 유성에 있는 행정고시 합격자 연수원에서 강론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이는 나와 동행을 했고, 애들도 함께 갔었다. 결혼 20주년 때는 큰딸 기진이를 데리고 세 식구가 다녀 오는 길에 온천 박물관도 구경하고 돌아왔다.

한번은 5, 6 년 전, 그이가 해외여행을 하고 귀국한 날 김포 공항에서 택시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이는

“여보, 나 밀수 좀 했어.”

하며 안주머니에서 무엇인가 휴지에 아무렇게나 싼 것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펴 보니 그것은 여자 용 고급 ‘오메가’ 시계였다. 그의 마음은 집에 도착할 때가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동심 童心 같은 데가 있었다.

지금, 그가 준 시계는 장롱에 넣어두고 그가 찼던 같은 상표의 남자용 시계를 차고 있었다. 문자판도 크고 자동이라서 감아 주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무엇보다 나의 그이가 팔목에 찼던 시계라는 의미에서 더 소중하다.

그리고 30년 전 우리가 결혼할 때만 해도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선물로서의 반지는 있었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풍습은 없었던 때였다. 나는 그에게서 백금에다 알 다이아몬드 세 개가 박힌 것을 받아 지금도 그것을 끼고 있다.

나는 도대체 다이아몬드의 값어치도 모르고 보석이나 장신구에 취미 내지 흥미도 없어서, 그저 그 반지는 우리의 결혼을 상징한다는 뜻 하나로 지금까지 몸의 일부분 까지 끼고 있다. 그런데 시대가 달라져 젊은 남자들은 물론 어쩌다 보면 나이 든 남자들도 요란하지 않은 바지 (주로 결혼 반지)를 끼고 잇는 것이 그런대로 보기 좋았다.

나는 뒤늦게나마 그에게 결혼 반지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돈으로 해주는 것은 아무래도 뜻이 없을 것 같아 내 원고료로 들어오는 돈을 그대로 모았다. 그래서 결혼 20주년 되는 해 민짜로 된 두 돈짜리 백금 반지를 선물했다. 놀라워하고 조금은 계면쩍어 하는 그에게

“뒤늦게나마 당신을 이 반지로 묶어 두는 거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빼 놓지 말고 끼세요.”

라고 말했다.

애들 박수 속에 반지 증정식이 끝났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잠자리에 보니까 그 반지가 머리맡에 놓여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여보, 정 그 반지가 거북하고 싫으시면 도로 돈으로 바꾸겠어요.”

그랬더니 그는 당황해 하며

“아냐, 그게 아니라니까. 어쩐지 처음 껴서 그러지 좀 근지럽고 그래서 잘 때 빼 둔 것뿐야. 이리 줘. 도로 낄께”

하며, 그날부터 그는10년 동안 한 번도 반지를 빼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물으니까

“그것 참 이상하지. 이제 반지를 끼었다는 것마저 무감각해졌어. 그리고 어쩌다 목욕할 때 빼놓으면 손이 허전해.”

그러나 그가 내 곁에서 가는 날 나는 그 반지를 뺐다. 그리고 그의 반지도 내가 같이 끼고 있다. 반지 안쪽에는 우리의 결혼날짜 1954년 10월 16일과 그와 나의 성씨 姓氏 이니셜 ‘LP”라고 새겨져 있다.

이 반지는 내가 무덤으로 가는 그날까지 내 손에 끼어 있을 것이다.

 

 

나의 부활절 11월 11일

1963년 11월 11일 오전 11시는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날이다.

막내 기민이를 낳고 2주일 후 나는 젖유종이 날 것 같아 페니실린 두 알을 먹었는데, 이것이 페니실린 쇼크를 일으켜서 나는 순식간에 사경을 헤맸던 것이다. 만 이틀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그 후부터 그이는 그날을 나의 덤 인생, 재생의 날이라고 말하였다.

그날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애들에게 그날의 숨막힐 것 같았던 상황을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되면 매년 어김없이 직장에서나 밖에서 곡 전화를 걸어 왔다. 워낙 집에 전화를 잘 걸어 직장에서도 하루에 한두 번은 꼭 별일 없어도 전화하는 버릇이 있었다.

“난데, 당신 오늘 외출하지 마”

워낙 건망증 많은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요?”

“오늘 당신 부활절 아냐?”

그제서야 달력을 보면 바로 11월 11일이었다. 또 어떤 때는 ’11시’ 시간까지 맞추어 전화를 해줄 때도 있었다. 어느 해 그날에는 해외 여행지에서까지 전화를 걸어 온 적도 있었다.

그이에게 그날은 너무나 끔찍했던 날이었기 때문에 뼈에 사무쳐 있었다.

한번은 그가 인도 여행 중일 때 일이다. 나는 밖에 외출했었고 집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애들과 집을 보고 있었다. 그때 전보 한 장이 왔다.

일하는 아주머니는 전보라 급한 것인 줄 알고 펴 보았으나 영문으로 돼 있어 알아 볼 길이 없었고, 동네 몇 집을 돌아다녀도 해독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급한 마음에 차를 타고 우리 작은 고모 이정희 씨 집으로 갔었단다. 그랬는데 그 전보 내용은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오. 나의 사랑을 당신께 띄워 보내오.

진섭’

 

그것은 11월 11일을 기억해 보낸 그이의 전보였다. 그 전보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진섭 자작곡의 밤

그이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리고 음악 속에 살다 갔다.

그이는 젊어서 KBS 아나운서를 하던 시절, 한국 최초의 ‘라틴 뮤직’과 ‘샹송’ 음악을 소개하고 해설해서 그 당시 많은 젊은 음악 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 후에도 프랑스 샹송 가수 ‘이벳드 지로’가 한국에 와서 공연했을 때 그 사회를 맡아 보기도 했다.

그이는 평상시에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소원은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어. 그래서 형님께 일본에 있는 우에노 上野 음악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정신 없는 소리를 한다고 한 마디로 거절당했지. 어쨌든 나는 그때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꿈이고 소원이었어”

그는 음악을 듣는 귀가 예민하고 정확했다. 음악회에 가서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도 어느 파트의 어느 악기가 지금 어떻게 잘못 연주하는지 잡아낼 정도로 그이는 음감 音感이 예민했다.

악전 樂典 도 혼자 공부했고, 서양 음악사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이는 이 세상에서 음악만큼 인간의 혼을 순수하게 정화시키는 예술도 없다고 말했다. 그가 살아 있고 딸 둘이 시집 가지 전, 그리고 장남이 군대 가기 전에 나는 얼마나 많은 소리 속에서 살아 왔던가?

큰딸의 오보에 소리, 작은 딸의 클라리넷 소리, 그리고 피아노 소리.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화려한 음색이 소리를 죽이고 침묵 속에 잠잠하기만 하다. 사람들도 가고 따라서 그 많은 소리도 가버린 것이다.

근년에 그이가 건강이 좋지 않아 방에 누워 있을 때, 그러니까 작년에 한번 그이가 퇴원했던 날 두 아들들은 아빠가 안방에 누워 음악을 들으시게 전축 스피커 두 개를 안방 벽을 향해 장치해 주었다. 그는 누워서 가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음악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었다.

그이는 꼭 볼륨을 크게 트는 것을 좋아해 눈을 감으면 음악회장에 있는 것 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막내 기민이가 DJ 노릇을 해서 아빠가 원하는 곡을 들려 드렸다. 막내는 그런 면에서 아빠하고 많이 닮았고 잘 통했다. 그이는 막내에게 용돈 외에도 레코드 판 값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이는 특히 바하의 곡을 좋아했고, <브란덴브루크 협주곡>, <스코틸랜드 환상곡>, 또는 말러의<대지 大地의 노래>, 알비노의 <아다지오>와 <오보에 협주곡>, 무조로스키의 오페아 <보리스 그드노프>, 라흐마니토프의 <교항곡 2전 2악장>, 오르간 교회 음악, 하이페츠의 <베토벤 협주곡 1번>, 그리고 둘째 사위 영창이 잘 연주하던 드보르작의 첼로 곡을 좋아했다.

그리고 술 한잔 들고 2층에서 들을 때는 꼭 같이 듣자고 성화를 부렸다. 파출부가 못 오는 날에는 나는 부엌 일도 있고 할 일이 많은데도 꼭 옆에 앉아 같이 듣자고 했다. 어떤 대는 내가 신경질도 냈다.

“지금 저녁 해야 해요, 이들도 곧 돌아올 텐데….”

“그까짓 밥이야 매일 먹는 것, 한끼 쯤 안 먹으면 어때? 여보 이렇게 좋은 것을 혼자 들을 수 있어?”

그이는 눈을 감고 정열적인 표정을 지으며 지휘까지 한다. 완전히 황홀경에 빠져 있다. 그럴 때의 그이 표정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티없이 행복해 보였다. 나는 부엌에 켜 둔 밥불, 국 끓이는 데 신경이 가 좀 같이 앉아 있다가 몰래 내려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을 나는 왜 번번히 짜증을 내고 퉁명을 부렸는지 후회 막심이다. 그이가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정말 밥 한끼 안 먹고 좀더 그이 곁에서 그 좋은 음악 속에 함께 파묻히기나 할 것을.

좋은 것은 같이 보고 같이 듣고 같이 느끼자던 그의 다감했던 정이 가슴을 메이게 한다.

또 술 한 잔 들어가면 악보도 없는 자작곡에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피아노도 잘 쳤다. 애들과 우리만이 아는 ‘이진섭 자작곡의 밤’이 수시로 열렸던 것이다. 싫어도 들어야 했는데, 애가 탔던 것은 그이는 술이 들어가면 시간을 초월해서 완전히 그 시간 속에 빠져 든다는 점이었다. 흥만 나면 새벽 2시, 3시까지도 오페라 ‘아리아’를 악을 쓰고 불렀다. 그럴 때는 누구도 그를 못 말렸다. 노래가 아닌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참고 듣는 데 우리 가족은 모두 익숙해졌지만 나는 동네에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안절부절 못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골목 동네 분들은 점잖고 이해심이 많았다.

한번은 내가 하도 미안해서 앞집 부인에게 사과를 했더니 그 부인은

“아녜요. 우리 그이도 하도 음악을 좋아해서 우리 집에 없는 음악이 들려올 때는 도리어 창문을 열고 들을 때도 잇는 걸요. 조금도 걱정 마세요.”

했다. 이것은 애교 있는 겉치레 인사가 아니라 참말이었다. 그 댁에서도 가끔 가족 합창을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었으니까.

그이가, 시인 박인환 朴寅煥 씨가 생존 시 명동 술집에서 낭만의 명동이 사라져 가는 것을 서러워하며 지은 시 <세월이 가면>에다 그 자리에서 작곡을 한 것은 지금도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 잇다.

지금 생각나는데, 그날 밤 그이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내가 시집 올 때 갖고 온 어린이용 장난감 피아노에 키를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오선지에 채보까지 했던 것이 기억난다.

샹송풍의 그 노래는 당시엔 어려워서인지 그리 알려지지 않더니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서서히 대학생들간에 유행이 되었고 몇몇 가수가 불러 레코드까지 나왔다.

이번 그의 영결식에서 식 중 계속해서 그이가 평소 좋아하던 음악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아들의 친구들이 틀어 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를 최초로 불렀던 최양숙 崔洋淑 씨가 그 노래를 다시 불러 그의 마지막 길을 장식해 주었다.

그가 간 후, 우리 막내 기민이는 한 번도 아빠가 즐겨 듣던 음악을 나에게 들려 준 적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자청해서 그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바하 곡이나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악 2악장>을 들어 보련다.

 

 

 

묵향의 풍류와 멋

 

그이는 술 한 잔 들어가면 붓글씨 쓰기를 즐겼다. 그런데 그렇게 붓글씨 쓰기를 즐기면서도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종이를 꺼내고 먹을 갈아 쓴 적은 거의 없다. 꼭 그 준비를 나에게 시켰으며,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곁에서 그 시중을 들어 주어야 글씨를 썼다. 먹을 갈 때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먹 쥐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하도 많이 쓰게 되니까 자기가 일본 여행을 갔다 올 때는 종이와 붓과 개명묵즙 開明 墨汁 이란 먹물도 몇 통씩 사오곤 했다. 아직도 쓰다 남은 먹물이 남아 있다.

나는 붓글씨를 잘 모르지만 그의 필체는 누구를 모방하거나 흉내낸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개성과 품격을 나타내는 그이만의 것이었다.

그이는 한시 漢詩, 특히 두보 杜甫의 시를 즐겨 썼다.

그의 필체는 힘 있고, 어떤 대는 자기 체격같이 늘씬하고 유연한 데가 있었다. 그이가 좋아하고 즐겨 쓰던 글자는 ‘목숨 수 壽’ 자와 ‘사랑 애 愛’ 자였다. 친하고 마음에 맞는 친구에게는 이 글자를 잘 써 주었다.

주로 나에게 써 준 것이 제일 많고, 애들에게도 많이 써 주었다. 특히 시집 간 딸들에게는 두 부부의 이름자를 섞어 자작시 自作詩 로 서 보냈다.

붓글씨를 쓰기 시작하면 그이는 몇 시간이고 몇 장이고 썼다. 그래서 종이는 항상 풍부하게 마련돼 있어야 했다.

나를 위해 써 준 글씨에는 대형인 것이 많아서 모두 표구를 해 유리를 끼거나 족자로 만들어 집 안에 걸어 놨다. 아직도 그가 써 준 글씨가 반닫이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이제 우리 집의 가보 家寶 일 수밖에 없다. 시간 나는 대로 병풍도 꾸미고 가리개도 만들어 4남매에게 고루 나눠 줄 작정이다.

그리고 20년 전에 그이가 충청도 어느 절에 여행 갔었을 때 파초 잎에 세필 細筆로 써 보낸 편지는 너무 좋았다. 나는 그것을 기념 삼아 표구를 해서 현관에 걸어 놓았다.

그 동기는 그때 가을이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 절 마당에 나오니까 지난 밤 바람에 손바닥만한 파초 잎이 마당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잎을 보니까 거기에 글씨를 쓰고 싶어 나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엄마, 기진, 기영’으로 시작된 글이다. 그때는 사내 애들을 낳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이의 그런 멋, 그런 풍류에 나는 반해서 살았나 보다.

또 문화촌 살 때 일이었다. 그때가 봄이었나 보다. 안방 아랫목 장판이 연탄불이 과해서 길게 터져 버렸다.

나는 새 장판지를 사다가 터진 곳을 정성 들여 붙였다. 즉 땜질을 한 셈이다. 그날 그이는 술을 기분 좋게 걸치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저녁은 마다하고 붓글씨를 쓰겠다면 준비를 하라 해서 먹을 갈고 종이를 꺼내 주고 했다.

그는 붓에다 먹을 듬뿍 묻히더니 아무 말 않고 느닷없이 그 새 장판지로 땜질을 한 방바닥에다 글씨를 갈려 쓰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수 壽’자 위가 약간 흔들렸다. 그러자 그는

“가만 좀 둬 보라니까”

하며, 그는 마치 신 들린 사람처럼 써 내려 가는 게 아닌가.

眞 媛 (진 원)

乙卯年 立春大吉 을묘년 입춘대길

순식간에 노란 장판지에는 먹물도 선명하게 그의 붓이 휘날리고 있었다.

‘진원 眞 媛 ‘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기 이름과 내 이름에서 하나 씩 딴 것이었다. 그는 붓을 놓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응, 좋았어. 진실로 아름다워라”

나의 놀란 가슴은 순간 어떤 감격과 희열로 두근거렸다. 노란 색 장판지 위의 글씨는 백지 위에서보다 더 돋보이고 멋있어 보였다.

“어때, 여보. 근사하지?”

그는 어린애같이 희색이 만면했다. 과연 걸작이었다.

온 방 안에 묵향이 향기롭고 땜질한 방바닥에 쓴 그의 글씨가 큰 암석같이 두드러져 보였다.

그날 밤 글씨 위에 요를 깔면서 나는 슬며시 한 마디 했다.

“여보, 방바닥에 글씨 쓰고 그 위에서 자는 사람은 이 세상에 우리들밖에 없겠죠?”

“물론이지, 어떤 부자 놈들이 이 멋을 알겠어?”

나는 그 다음날 그이가 출근을 한 후 니스를 사다가 그 위에 정성스럽게 칠했다. 니스 칠을 해 놓으면 물걸레질을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친구들은 이걸 보고 우선 놀라고 그런 다음에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너희 내외는 어떤 금방석보다 멋있는 자리에서 자는구나”

“쓰는 이진섭 씨나 도 고기에다 니스 칠을 하는 마누라나 어쩌면 그렇게 천생연분이냐?”

“둘이 똑같이 미쳐 살지 않으면 저 꼴 저 짓들을 하고 살겠니?”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문화촌에서 이리로 이사 올 때 나는 면도칼로 그 장판지를 정성 들여 오려냈다. 그리고 크게 표구를 해 걸었다. 다락 속에 넣어 두었다가 한여름이 지난 후 표구를 했더니 윗부분에 곰팡이가 슬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표구했더니 더욱 골동품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그날의 그의 기행 奇行은 우리 집 가보 家寶 품목을 또 하나 더 늘려 준 셈이다.

그 액자는 그의 서재 가운데에 걸려 있다. 그 글씨는 그의 정열과 힘과, 그리고 사랑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장미꽃 잎에 쓴 천자문

그이는 장미꽃 잎에도 글씨를 썼다. 우리 집 장미는 문공부 장관을 지내셨던 윤주영 尹胄榮 씨가 10여 년 전에 보내 주신 것이다.

그분은 장미 재배에 전문적인 식견과 재주가 있어 손수 장미원을 가꾸시며 많은 친구, 지기들에게 장미꽃을 나눠 주셨다.

매년 5월부터 늦가을까지 분홍색, 자주색, 노랑색, 흰색의 꽃을 소담하게 피우는 그 장미는 올해에도 만발해 가을까지는 꽃을 사지 않아도 온 집안이 장미꽃으로 그득하다.

그 장미꽃이 만개되었다가 꽃잎이 떨어질 무렵, 나는 그 꽃잎을 정성껏 따서 물기가 있을 때 하루쯤 책갈피에 꽂아 둔다. 그리하여 아주 마르지도 않고 아주 축축하지도 않을 때 그 꽃잎을 두꺼운 한지 韓紙에 대고 풀칠을 한다.

색깔을 맞추어 책 한 페이지 크기에 배열하면 대강 한 장에 꽃잎이 열 두 개 정도 붙게 된다. 그러면 그 꽃잎 위에다 그이가 글씨를 썼다.

글씨 내용은 천자문 千字文 이었다. 매년 수십 자를 써서 거의 3백 자를 넘게 썼다. 이것이 한 권의 책이 되면 고서 古書 같이 제본을 해서 그야말로 대대손손 두고 보게 하겠다고 그이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네 놈들한테 한 권씩은 돌릴 수 없으니까 장남인 기광이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돌려 보게 하지. 여보, 그게 좋겠지?”

그이는 장차 볼 손자들의 귀여운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작업에 열중하고 신나 했다. 그러나 그이는 작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작년에는 쓰지 못했고, 올해는 장미가 만발하기도 전에 그이는 갔다. 우선 외손 外孫 이라도 보기를 은근히 바랐던 그는 소원을 풀지 못했다.

목표로 한 천자문 책을 만들 수 없게 되자 나는 우선 한 장씩 표구해서 유리에 끼우기로 했다. 이번에 작은 딸 기영이가 두 개를 가지고 갔다. 이제 뉴욕에 사는 큰딸의 것과 아들들의 것, 그리고 내 몫도 해 두어야 하겠다.

장미빛 같았던, 묵향 같았던 그의 인생의 여향 餘香을 나와 애들은 심호흡을 하듯이 오래오래 맡으며 살 것이다.

 

 

주선 酒仙의 모습

그이의 일생에서 술은 아내인 나 다음 가는 반려자이자 동반자였다. 좋은 술도 한없이 마셨고, 또 그이와 술에 얽힌 일화도 많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자한테서 질투를 느껴 본 적은 없지만 젊어서 술에 대해서는 질투를 했다. 술은 어떤 마력, 어떤 괴력이 있길래 저이를 저토록 사로잡고, 나에게 있어야 할 시간과 정신을 저토록 앗아 가는 것일까?

그이 집안은 조부께서도 아버님께서도 형님도 술을 못하지는 분들이었다고 한다. 즉, 내력에 없는 술이었다. 그이는 가끔 우스갯 소리로

“조상께서 못하시는 술을 내가 도맡아서 마시게 된 것은, 선대에서 사시던 큰 기와집을 헐어서 없앨 때 그 목재를 동네 양조장에 팔았기 때문이야. 그 큰 집 서까래 기둥으로 모두 술집을 만들었으니 그 술집 귀신들이 어디 붙겠어? 만만한 나한테로 흠뻑 씌우졌지. 나는 이씨 댁 희생물야.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시나? 마시게 돼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마셔주는 거지.”

술 마시는 이유치고는 궤변이고 걸작이었다.

그이는 정말로 술을 즐기고 사랑했으며, 또한 줄기차게 마셨다. 젊어서는 명동이나 종로에도 나갔었다. 후반기에는 신문회관 아래층에 있던 프레스 싸롱이 그의 단골이었다.

그 무렵에는 심연섭 선생님과 주로 프레스 싸롱에서 만나 기염을 토하곤 했다. 경복고 하나 아랫반 후배이신 심 선생님과는 같은 언론인 출신인데다 술, 그리고 해학적인 지식, 또 깔끔하고 선비적인 품성 등에 서로가 반해 친해지셨다. 국내 여행, 해외 여행도 여러 번 같이 하셨고, 그때마다 두 분은 술과 벗했다.

두 분은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대작을 시작해서 목적지에 닿을 때는 모두 거나하게 취해서 트랩을 내렸다고 한다.

한번은 홍콩에서의 일이었다고 한다.

두 분이 비행기 속에서부터 잡수신 술에 어지간히 취해 호텔방에 들어갔는데, 심 선생님이 창가에 서서 왈-

“이것 봐, 이형. 저 바닷물이 왜 자꾸만 이리로 오지?”

“참 그렇구면. 지가 이 10층까지 기어올라 봤자지 뭐”

호텔 10층 창에서 술에 취해 내려다 보는 바다가 그분들 눈에는 바닷물이 자꾸 기어 오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심 선생님은 미식가였으나 그이는 음식에는 별로 탐이 없었고, 육류보다는 채식을 좋아했었다. 그이는 가끔

“나는 고기를 즐기지 않으니까 내 피는 탁하지 않고 맑을 거야”

라며 자랑도 했다. 심 선생님이 먼저 가신 후 술과 말벗을 잃은 그는 한동안 친동기를 잃은 것같이 슬퍼했고, 그리고 많이 외로워 했다.

젊었을 때는 거의 안주를 들지 않고 깡술을 했었는데, 50대 후반부터는 그래도 몸을 생각해서 고기랑 안주를 든 편이었다. 그이는 양주도 얼음에다 소다수나 물을 타서 엷게 해야 마시지 독한 그대로는 목에 안 넘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마셔도 어떤 때는 물 안 타고 그대로 든 다른 사람보다 먼저 취하곤 했다. 결국 술은 그의 간을 서서히 침식해 들어간 것이다.

그이의 간은 워낙, 부산에서 병 중에 수혈한 것이 잘못되어 다친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보다 간 기능이 약하고 완전치 못했으므로 상식적으로도 술을 조심해야 할 몸이었다.

그러나 그이는 그 상식을 외면했다. 젊어서는 그래도 간이 더 악화되지 않고 현상 유지를 해주었지만, 모든 기능이 쇠약해지고 노쇠해지니까 간이 더 이상 지탱을 못한 것이다.

한번은 그이가 술잔을 들면서 새삼스럽게

“세상에 술같이 정직하고 멋지고 맛있는 것은 없어.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싫어하지?”

그이는 술잔을 어루만지고 마치 혀 끝에 술이 녹아나는 듯 너무나 황홀하게 도한 맛있게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이 세상에서의 재미라곤 우리 집과 술밖에 더 있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말을 잃었다. 그 말이 너무나 실감나고 정직하며, 한편 왠지 서러웠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뭐, 당신 건강 때문예요. 우리들 때문에 오래 사셔야죠.”

하고 앵무새같이 지껄였지만 그 범부 凡婦 의 말은 빛을 잃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마음 속으로

‘이제 내가 어떻게 더 말리겠어요? 오래만 살아 주세요’

하고 빌었다.

그이는 사는 동안 가정 관리나 모든 것에 대해 내 의견을 믿고 맡겨 주었고, 또 내 말을 모두 잘 들어 주었다. 그러나 끝내 술만은 내 영역 밖의 일이 되었고, 그리고 그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이는 한없이 좋은 술도 많이 마셨다. 이와 관련해 매년 때마다 그 좋은 술을 꾸준히 공급해 주시던 몇 분들에게 대해서는 그이도 물론이겠지만 나도 잊지 못할 것이다.

‘조니 워카 블랙’, ‘시버스 리거’, ‘나폴레옹 꼬냑’, ‘로얄 설루트’.

그 술병을 받아 첫 잔을 따를 때의 그 행복스럽고 즐거워하던 얼굴.

한 가지, 그가 나에게 유감스러워했던 것은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나는 전연 못했던 사실이다. 그럴 때 나는

“하나님이 잘 조화를 이루어 주셨지. 나까지 술꾼이 돼서 부부가 같이 노상 술판을 벌이고 앉았으면 이 집은 어떻게 되겠수”

“허허, 그렇게까지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글도 쓰고 술꾼 남편하고 살려면 술 맛 정도는 알아야 할 텐데…..”

“걱정 말아요. 나는 마시지 않아도 당신 술 냄새만 맡고도 취한 것 같이 살아 왔으니까요. 술 안 마셔도 마신 것 같은 기분 속에 젖어 산다는 내 고역을 당신은 알아야 해요”

“알구말구. 그러니까 내 마누라지”

나는 내가 자라난 친정 내력이 술 못하는 집안이었고, 더구나 나는 체질적으로 술이 몸에 안 받았다. 맥주 반 컵만 마셔도 전신이 붉어지고 두통 내지 심장이 뛰어서 괴로웠다.

그런 여자가 그리도 술을 좋아하고 평생 술 속에 산 남자와 살았으니 그것도 무든 업보라고 생각되었다.

그이는 세상에서 다른 욕심은 정말 티끌만큼도 없었는데 술 욕심만은 대단했다. 무엇이든지 그렇게 선선히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그가 술만은 남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취했어도 그 전날 마시다 남아 냉장고에 넣어 둔 맥주병 수효는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치의 무서운 병만은 결국 그에게서 술을 거부케 했다. 그이는 술을 안 마실 때는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다. 건강 때문에 한 달씩 금주를 할 때, 그이는 집에 있을 때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뿐 말을 많이 안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답답해서

“어쩌면 당신은 극과 극이우. 그토록 시끄러운 분이 술이 안 들어가면 또 그렇게 돌부처 같으니….”

근년에는 폭음은 거의 안 했고, 몸의 컨디션이 좀 나쁘면 며칠 쉬었다 드는 등 그렇게 조절도 했었다.

많은 주객 酒客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술을 끊었다는 말을 그리 못 들었다. 결국 몸에 병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도어서야 술이 끊어지는 것이다.

언젠가 그이가 살았을 때, 어느 잡지에서 미국 배우 험프리 보가트의 기사를 같이 읽은 적이 있었다. 그도 유명한 주객으로 이름 나 있었다.

그도 술을 사랑했고 술 속에서 살았는데, 결국 불치의 병인 암 癌에 걸렸다. 그는 음식물을 거의 전폐하다시피 하고 주사로 연명하면서도 운명 직전까지 입술에 조니 워카를 발라가며 절명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운 적이 있었다.

그 철저함에 미움보다 가슴을 적셔 오는 아픔이 있었다. 내 남편이 술을 좋아하니까 먼 나라 남의 남자의 이야기지만 그토록 실감이 났던 것이다.

 

 

기상천외했던 그이의 행적

그이는 입원 후 병이 점점 깊어져 돌아간 그날까지 거의 언어를 잃다시피 하고 무언 속에 있었다.

의식이 있어 말을 할 수 있을 때도, 또 자기의 깊은 병을 알고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했으면서도, 그이는 일체 죽음 그 자체나 또 자기 사후 死後의 인간사적인 일체의 일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

구질구질하게 남겨 놓을 말이나 부탁 같은 것이 얼마나 허망 된 것인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이 성격처럼 깨끗하게 간 것이다.

그렇게도 앉으나 서나 불러대던 ‘여보’ 라는 말 한 마디도 그는 하지 않았다. 그이는 눈과 미소로만 답하다 갔다. 나는 그가 간 후 얼마 동안은, 그의 목소리와 그이와의 대화의 단절이 꼭 몇 백 년 된 아득한 그 옛날이었던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았다.

이 잡을 수 없는 착각이 얼마를 갈지 나는 예측을 할 수 없다.

지금 그이가 가고 없는 이 시간의 나에게는, 그가 술 취해 들어와 나를 놀라게 했던 모든 일들이 한 장의 파노라마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눈 오던 추운 겨울 밤, 소공동 빌딩 밑에서 거적을 두르고 자는 어린 거지를 업고 와서 하룻밤을 재워 주기도 했던 일.

“그 놈이 그날 밤 꼭 얼어 죽을 것만 같았어.”

그는 다음날 이런 말을 했었다. 씻기고 잠재우고 입히고 먹여서 출근길에 손 잡고 데리고 나가던 모습이 엊그제 같다.

또 어느 해 겨울, 길에서 메밀묵 장수 할아버지를 만나 데리고 와서는 메밀묵 한 광주리를 다 쏟아 놓게 해 며칠을 온 동네가 메밀묵 잔치를 했던 일.

그 메밀묵 장수 할아버지는 합장을 하면서

“60평생 살아 왔지만 이렇게 착한 생불 生佛 같은 분은 처음 봅니다.”

하며 절을 했다. 모두가 술김에 한 짓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가엾고 불쌍한 사람을 그냥 못 본 체하고 지나가지 못하는 그의 본심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또, 친구 원계홍 씨 (이분도 몇 년 전에 미국서 작고)와 밖에서 취해 들어오면서 맥주를 사가지고 들어왔는데, 느닷없이 112에다 간첩 신고를 해서 파출소와 서대문 본서에서 무장을 한 경관 30여 명이 집을 포위하고 들이닥쳤던 일.

두 분이 똑같이 간첩이 들어왔다고 큰일났다며 번갈아 신고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112을 돌리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서슬이 퍼래서 들어온 경관들을 보고 처분에 맡길 터이니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고 했지만 장본인들은 벌써 코를 맞대고 싶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음날 펄펄 뛰는 나에게 두 사람은 맥주를 사들고 들어온 봉투에 씌어진 자잘한 숫자가 난수표롤 보였다나?

어디서 그렇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나왔는지 술 안 먹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도 이해도 못할 노릇이다. 그 다음날 아침 그이는 허옇게 돼서 서대문 본서에 가 시말서를 쓰고 백배 사죄하였음은 물론이었다. 이때 담당 경관이

“이 선생님, 술도 좋으시지만 지금 어떤 때라고 112를 돌리십니까? 하셔도 너무 하셨습니다. 저희는 어제 초비상이 걸려 한잠도 못 잤습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은 인심도 좋군요. 저런 사람들은 며치 가두어 혼 좀 내주지 곧바로 풀어 주어요?”

그이는 당시 며칠 동안 근신 반성했던 것 같다.

문화촌에 살 때는, 무악재 고개에서 밤늦게 교통정리하는 경찰관 아저씨들 사이에 이진섭 씨는 유명했었다.

택시를 타고 들어오다가 택시를 세우고는 수고들 하신다면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을 모조리 주먹에 쥐어 주고, 돈이 없을 때는 극장표나 자기 명함 등을 주곤 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인심도 좋고 세월도 좋아, 이진섭 씨가 건네 주는 몇 푼의 사례는 뇌물도 부정한 수입도 아니어서 따뜻한 애교 넘친 인정의 한 토막이 되었다. 어떤 대는 통행금지 시간이 넘어 그를 백차로 정중히 모셔다 줄 때도 있었다.

그는 살아서 유명세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한 번은 공화당 때 일이다. 당시 국회의원이었고, 당의 높은 정책위원으로서 날아가는 새도 잡을 만한 당당한 세도가였던 어느 분이 그이와 몇몇 언론인들을 정중하게 고급 요정에 초대를 했었다.

그 자리를 주선한 언론인 친구분의 후일담인데, 처음에는 그이가 말도 없이 아주 조용히 술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얼마 안 있다가 다짜고짜 그날 초대해 준 주인공에서 술잔을 내밀며

“야, 이 더러운 새끼야. 내 잔 좀 받아라.”

로 시작하더니 정면으로 갖은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주로 ‘너희 놈들은 모두 도둑놈’이라고.

그이의 주벽을 아는 언론인 친구들은

“야– 이진섭이 또 한 가닥 하는구나”

하고 박수치고 고함치고 야단인데, 제일 난처한 것은 그 자리를 주선한 그 친구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정치하는 분은 도량이 큰고 다른지, 그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주정을 다 받아들인 후 자기 승용차로 그이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다음날, 중간에 섰던 분이 대신 사과를 했더니

“그분 참 통쾌한 사람이더군요. 우리 연말에 또 한번 합시다”

하더란다. 그 해 크리스마스 때, 그 도량 넓은 분은 비서 편에 고급 양주를 우리 집 현관에 놓고 갔다.

또한 어떤 대는, 막역한 친구분들을 집으로 초대해 술 대접을 하면서 주인인 자기가 먼저 취해 가지고

“다들 처먹었으면 빨리들 가. 나 자야겠어”

하며, 손님들이 일어서기도 전에 먼저 코를 골고 자버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분들은 그이를 이해하고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던 진정한 벗들이었다.

 

 

 

제2장 또 한번의 만남을 위하여

 

 

또 한번의 만남을 위하여

 

텩걸이 제너레이션의 한 恨

그이가 가고 없는 지금 나는 혼자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어쩐지 한국 남자의 한 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뒤늦게 얻은 이해심도 아량도 아니다. 술을 마셔야만 살았을 것 같은 그 시대에 살았던 남자!

그 안에서 제일 다치기 쉽고 멍들기 쉽고 상처 받았을 그이의 외로웠던 가슴을 뒤늦게나마 아내인 나는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술 먹은 그 자체의 행위만 미워하고 야속해 하고 짜증스러워 했던 그 많은 세월을 나는 알고 있다.

그이는 생전에 이런 말을 가끔 했다.

“우리 시대는 턱걸이 제너레이션이야. 무언가 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그것은 아마 불안정했던 한국의 역사와 격동기를 겪고 살아야만 했던 고뇌에 찬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의 진정, 깊은 남자의 마음을 나는 그가 살았을 때보다 그가 간 지금 되새겨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진정 그의 아픔이었지 아내인 나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남자만의 고독이었다.

그이의 영혼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곁으로 갔음을 나는 믿고 있다. 그이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시간에 손 孫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실 때 목사님의 손을 그토록 굳게 잡고 “하나님….” 그리고 일본 말로 “가미사마 (하나님)” 그러면서 “아~멘”을 조용히 부르짖었다.

그이는 거의 열흘이 넘도록 말을 잃은 사람이 되어 침묵 속에 긴 영면 永眠으로 빠져들어갔다. 마치 이 세상 인간사의 집을 벗은 듯, 고통 없는 맑고 깨끗한 얼굴로 갔다.

그리고 말썽을 부리며 제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던 간 肝 도, 독소로 가득 찼던 배도, 그리고 의식을 잃어 가던 뇌세포도 그 모든 기능을 정지하고 60여 녀의 고되고 벅찬 노동에서 벗어나 긴 휴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영원한 안식 그것인 것이다.

 

그가 우리 곁에서 말하고 만지고 움직이던 그 따스한 체온의 육체는 우리를 버리고 갔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뿜어 주고 심어 주던 그 많은 대화와 사랑! 그것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묻혀 있다.

그이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해서 나를 웃긴 적이 있다. 자기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100년 후 1000년 후라도 나를 찾아 살겠다고.

그래서 나는 정색을 하면서

“이승에서 한 남자하고만 산 것도 한인데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는 술도 당신같이 안 먹고 돈도 잘 벌어다 주는, 당신과는 전혀 다른 남자하고 살 거예요.”

“그럼 그 놈하고 사생 결단을 해서라도 뺏어 오지.”

“당신하고 결투를 해서 지는 그런 시시한 남자를 내가 택할 줄 알아요?”

했더니 금세 무안 당한 어린애 같이 시무룩해지더니

“글쎄, 그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그럼 당신 집 강아지가 돼서 대문 안에서 당신 보고 꼬리만 칠게. 그럼 당신은 나한테 밥만 주면 될 것 아냐?”

그때 나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때 막내가 그런 아빠가 안 됐는지

“엄마, 아빠 가엾지 않아? 제 세상에서도 같이 산다고 해”

“글쎄, 생각 좀 해 봐야겠다.”

이래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었다. 그런 아빠를 위해 두 아들은, 그이가 자기 지갑 속에 항상 마스코트 같이 넣고 다니던 내 여학교 3학년 때 사진 (머리 땋고 교복 입은 사진)을 크게 복사해서 아빠 가슴 위에 얹어 주었다.

그이는 그 사진을 참 좋아해서 여행을 가거나 어디를 가나 양복 안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최후의 낭만인 이진섭’

그이는 가는 길이 덜 외로웠을 것 같고, 나도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나는 영생을 믿으며, 그리고 그와의 재회를 믿으며 매일 밤 기도한다.

“여보, 오늘 밤도 편히 쉬세요. 다시 한 번 우리의 만남을 믿고 있어요.”

아직은 잠들기 몇 분 전이 제일 두렵다. 모든 일체의 생각을 끊고 어금니를 깨문다.

바람 소리도 빗소리도 싫다. 이 넓은 방에 혼자라는 거짓말 같은 사실이 또다시 나를 망연케 한다.

그가 묻힌 금촌 金忖 기독교 공원 묘지는 우리 집 길과 잇닿은 곳에 있다. 시원스레 앞이 트이고 높은 곳…..

바로 뒤에 임진강이 흐르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딴 세상 같은 곳…

아들들하고 가고, 나 혼자도 간다. 그가 좋아하던 ‘삼바’ 한 병, ‘하이네켄’ 맥주 두 병, 그리고 ‘아몬드 초콜렛’ 등을 가지고…

묘비 제막식 전날도 나 혼자 갔다. 바로 우리 집 언덕 앞을 내려가면 금촌 가는 시외 버스도 있고 일반 버스도 있다.

나는 요새 길을 지나가다 금촌 행 버스만 봐도 반갑다. 그것만 타면 그이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집 언덕 아래에서 버스를 타면 40 여 분만에 금촌에 도착하고, 거기서 탄현면 묘지까지 택시를 타면 10 여 분만에 도착한다.

그 길은 깨끗하고 한가롭고 녹음이 울창한 길!

그리고 남의 묘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 넓은 공원 묘지에 나 혼자일 때도 있다. 오동나무 꽃, 개나리, 철쭉꽃도 핀 기 길은 사자 死者 가 더 많은 길 – 그런데도 무섭지 않다.

그이 묘 앞에 꿇어 앉아 기도와 묵상을 하고 묘분에 술을 붓는다. 그리고 은하수 하 개비도 꽂아 놔 준다. 초콜렛도 펴서 놔 주고… 나도 담배 한 대를 피어 물고 그렇게 앉아 있다.

문득 죽는다는 것은 별것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휴식과 평화를 그이가 나보다 몇 년 앞서 소유했다는 안도감도 든다.

어떻게 생각하면, 살기 위해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고 얻어야 하는 그런 번거로움, 고뇌, 그리고 인간사적인 욕망에서 해방되어 진정 허허 虛虛 와 무 無의 세계에 있을 그이가 부러운 마음마저 든다.

그런 신경, 그토록 엉망이 된 몸으로 많이 버티어 주었다는 고마움도 든다.

일체 무언 無言으로 간 그에게 이 세상 무슨 말이 또 필요 있을까?

그와는 동창이시고, 많이 통하며 많이 비슷하고, 멀리 있어도 가슴 한구석으로 걱정을 해주며 살던 친구 한운사 선생님의 비문 碑文이 그를 외롭기 않게 하고 있다.

 

 

비문

 

무엇인가를 쓰고

예술을 논하고

노래를 짓고, 노래 부르고

인생의 멋과 맛을 찾아다니며

소유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진섭 이진섭 이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마침내 여기 영원히

잠들었다.

새야, 바람아, 교교한 달아

찬란한 태양아

이 사람과 더불어 놀아 주라.

 

1932년 3월 10일

 

 

글씨는 송지영 宋志英 선생님께서 써 주셔서 그 빛을 더했다.

 

딸들이 심어 준 상록수가 울타리를 두르고, 언젠가 나도 와야 될 그이 옆 빈 땅에는 이름 모를 풀이 돋아 있다. 아직 때도 덜 자라 붉은 흙이 덮여 있는 그의 묘분을 어루만지며

“여보 잘 있어요. 내가 또 올게요.”

내 눈에는 그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나를 반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보, 넘어지지 말고 조심해 내려가’

이렇게 걱정도 해줄 것 같다.

인사도 나눈 적이 없는 많은 망인들이 이제 그의 친구임에 틀림없다. 거기에는 이제 그곳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여기보다 아름다울 것만 같다.

길고도 긴 오솔길! 중간 쯤 내려오면 내가 항상 쉬는 자리가 있다. 거기서는 그의 자리가 똑바로 바라다 보인다.

나는 언제나 거기 앉아 또 한 대의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내려오면 시골길에는 석양이 깔린다. 이제 내 세상으로 가는 길은 다시 먼지와 사람들로 득실거린다.

산 사람들의 땅!

금촌역에서 불광동 행 버스를 탄다. 언제나 나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는다. 어둠과 사람이 사는 불빛과, 그리고 그를 두고 온 벌판을 생각하며….

얼마 전 비와 우박이 오는 날 밤 나는 꼬박 밤을 샜다.

혹시 빗물이 스며 들지 않을까?

그 벌판의 바람 소리가, 그리고 빗소리가 나를 못 자게 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이 슬픔만은 아니어라.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는 것은 그와의 또 한번의 만남이 가까워 오는 것이니까…..

 

 

당신 없는 빈 자리

 

다음 글은 그가 간 후 그의 노트에서 옮긴 것이다.

 

기원!

언제 어느 때고 나는 간다. 무지하게스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랑 속에서 우리는 그래도 별스런 것 없이 편편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쑥스런 말을 던지고 있는 이 시간은 바로 기영 (둘째 딸) 이 기막힌 행복 속에 젖어 있는 시간! (그때 기영과 영창 내외는 결혼 2주년 기념으로 파리에 여행 중이었다)

또 한 군데! 기진이는…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시려서…

그만큼 바깥 애들의 여인상과 내 책상과의 연결이 시간을 초월해서 낮과 밤이 한꺼번에 내 가슴 속에 있구나.

두려울 것이 없다.

살고 있는 동안의 영성과 믿음과 사랑으로 다시금 다지고 살자.

 

 

항상 새벽 3시 넘어 잠이 깨는 버릇이 없었던 그이가 멀리 떠나 있는 딸들이 생각나 적어 둔 것이다.

큰딸 기진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그냥 ‘시려서’ 하고 끊은 것은, 그가 큰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고 저려 와서 더 아무런 표현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첫딸이기도 하였지만 유난스레 사랑과 정을 주어 왔던 그 딸을 끝내 생전에 다시 못 보게 된 것은 그이도 큰딸 기진이도 한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끔찍이 사랑했던 큰딸의 결혼식이 작년에 뉴욕에서 있었을 때 그이는, 막내만 혼자 있게 되니 자기가 집에 남고, 나는 결혼식 준비랑 엄마로서 뒷일 봐 줄 게 많으니 혼자라도 가라고 해서 혼자 큰딸 결혼식에 참석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갔다 온 것이 후회스럽고 한이 된다. 그래서 한 번 상면도 못한 큰 사위의 이름이 장인 비석에만 새겨져 있다.

그때 그이는 내가 없는 동안 유난스럽게 외로움을 많이 타 술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40일이란 공백이 그에게는 어느 때보다 길었고, 더구나 그리도 끔찍이 사랑했던 딸 기진이 결혼식에 참석 못한 아픔이 그를 더 술 마시게 한 것 같아 지금까지 내게는 그 아픔이 응어리져 있다.

내가 뉴욕에 도착해서부터 귀국하는 날까지 몇 차례나 전화가 왔고, 편지도 계속해 왔는데, 그 편지는 한 잔 걸치고 썼는지 종횡무진, 자유자재, 그리고 그의 외로움이 젖어 있는 지금 봐도 가슴이 쓰려 온다.

 

 

(제2신)

단 하나 기원이!

새삼 생각나서 쓰는 거요. 우리 진 진 이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구료.

모든 것이 잘 진행돼 나갈 줄 믿소.

나는 매우 행복하고, 매우 만족하고, 그리고 매우 그립습니다.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살 맛이겠지요.

나는 우선 당신의 모든 것…

그 바탕 위에 자라난 애들의 사랑스런 자라남!

그 모든 것은 정신, 육체, 그리고 신앙까지 성숙한 것…

그 자연스런 과정을 다만 ‘당시 없는 빈 자리’가 아니라 당신 하나의 존경과 아름다움과, 그리고 사랑, 믿음을 다시금 어금니 깨무는 것으로 대신하겠소…

우리 아들 기광이가 제2사단 본부의 150명 중에서 단 한 마리 뽑혔어. 얼마나 감사로운 일이겠소.

기민이가 첫 면회를 갔다 왔는데 ‘사람이 달라진 것 같다고’,

기특한 놈이요.

새삼 당신이 같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 —

열매가 영글어 언제나 떨어져 나가는 것.

지금 우리들 자식들도 우리들 날개 밖으로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소.

결국 당신과 나만 남는 것.

그들은 그들의 인생이 있을 거요. 이 시간, 이렇게 글을 당신에게 쓸 수 잇는 것은 확실히 행복한 일이요.

아직 나는 살아 있으니까….

‘STILL BE SURVIVED’. 이런 실감은 현대인이라는 척도에서 지난날 매우 문제시돼 왔고, 지성인의 감각적 장난이 새삼스럽게 내 머리에 떠오르는구료.

기민이가 만든 애니메이션 – 건축 모형도가 기가 막혀요. 새벽 4시까지 만듭디다. 나도 덕분에 못 잤지만…

지금 내 방 스피커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소.

그럼 또 쓰지.

 

진섭

 

 

(제3신)

 

나의 벗 기원이…

우선 전화 맙시다. (내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계속적으로 전화가 와서 내가 싫은 소리를 했더니)

오늘 얘기는 하나밖에 없어요. 곱단이 (우리 집 푸들 종류의 개 이름) 가 ‘기’가 있어 몇 군데 전화했으나 신랑감이 아직 안 나와 안 됐지만 이번에는 흘릴 수밖에 없을 것 같소.

우리 막내 끼미(기민의 애칭)가 어떻게 칠칠하게 구석구석 살펴 주는지 몰라. 오늘은 목욕 싫어하는 ‘개띠’ 아범을 목욕탕으로 끌고 가 비누질해서 씻겨 주고, 허 참…

기진이 결혼, 몇 군데서 축하 전화 왔오.

고맙죠? 메모해 놨오.

그런데 잠자코 있는 사람 공연히 흔들어 놓는 것 같구료. 하지만 이제는 나의 가장 진실스런 당신과 나와의 시간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새벽 4시에 잠이 깼오.

당신이 잊지 말고 물 주라고 부탁한 아프리칸 바이올렛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어째 꽃 필 생각을 안 하는구료. 그것도 당신 손을 기다리나 보오.

석양이 질 무렵이면 베란다 위의 베튜니어 화분에도 어김없이 물을 잘 주고 있으니 걱정 마오.

내년쯤 기진이 신접 살림 가 보겠다고 전해 주오. 따로 편지 안 하니까…..

진섭

 

 

그이는 작의 명 命을 감지했는지, 편지 말고도 구석구석 노트 종이에다 순간순간의 자기 마음을 두서없이 적어 놓아 나를 울렸다.

어쩌면 주체할 길 없었던 정을 구석구석에 뿌리고 간 것만 같다.

새벽에 잠이 깬 시간….

그이는 혼자 많이 외로워 했고,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자기 생에 대한 정리를 서서히 한 것만 같다.

그런 시간 어떤 때는 반닫이에서 술병 꺼내는 소리, 똑 부엌에 나가 냉장고에서 얼음 깨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눈을 뜨고

“여보, 새벽 술은 그만 해요.”

그러면 그이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없이 술잔을 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는 씩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새벽에 잠을 깨어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의 마음을 아내라고 해서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었을까? 그 깊고 깊은 심연 深淵은 자기만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퇴직 후 그이는 거의 외출을 안 하고 대부분을 집에만 있었다. 밖에 볼 일이 있을 때는 약속이나 돼야 나가지 일부러 나가는 일이 없었다.

시간 낭비, 또 남의 소중한 시간을 자기가 한가하다고 뺏는 것 같아 싫다고 했다. 양주가 있을 때는 양주를 마셨고, 그것이 떨어지면 삼바 (옥수수로 만든 술)에다 하이네켄 맥주 두 병을 곁들여 들었다.

 

 

동심 童心으로 산 나날들

그이는 새벽이면 기독교 방송을 들었고, 또 일본에서 주문해온 <신약성서 이야기>, 또 <예수의 존재 의의와 그 생애>를 읽기도 했다. 그이는 말년에는 종교 서적에 심취돼 있었다.

우리는 2년 전에 세계 교인이 되었고, 덕수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덕수 교회는 우리가 30년 전에 결혼식을 올렸던 인연 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이는 매주 주일 예배도 기분 내키는 대로 나가고 싶을 때만 나갔다. 그런 그이를 손 孫 목사님은 이해해 주시고 항상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올해 정월 첫 일요일에 그이는 나와 같이 교회에 갔다. 정월이라 그이는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제단, 맨 앞자리에 앉았었다.

그런데 그날 뜻밖에도 나는 목사님한테서 ‘집사’ 임명을 받고 임명장까지 받았다. 나는 놀라고 당황해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것은 내 자신이 신앙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하나의 직함을 맏음으로 해서 더 믿음을 굳건히 하고 교회에 봉사하라는 뜻으로 알고 감사히 빋아들였다.

내가 제단 앞에 나가 목사님한테서 임명장을 받고 자리에 앉으니까 그는 안경 밑으로 손수건을 넣어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이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집사 사령장을 받은 본인이 나는 울지 않고 있는데 그이가 울고 있었다.

나는 그날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고, 그날 그가 왜 울었는지는 그가 간 후에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이는 그날 그 예배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영영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그이는 내가 집사 된 것을 어쩌면 나보다 더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날 교회에서 돌아오자

“여보, 그 집사 사령장 틀에 끼어 벽에 걸어 놓읍시다”

나는 그런 그의 말이 하도 우스워

“싫어요. 뭐 애들 우등상장인가요? 부끄럽게스리…”

나는 끝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장롱 속에 넣어 두었다.

그 무렵, 아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오면

“이것 봐, 기진 엄마가 집사 됐어.”

하고, 사방에다 자랑을 해서 내가 질색을 했다. 그이는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순수하고 동심 같은 데가 있었다.

나는 그가 간 후 교회에 나가면 그이가 앉았던 자리만 봐도 눈물이 쏟아져 내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덕수 교회는 70년 전에 지는 건물이 그대로인, 고색 창연한 작은 교회이다. 다분히 고루하지만 들뜨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가 우리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우리 둘은 신앙 생활에 뜨겁고 빠르게 몰입할 수는 없었지만 무명에 물이 먹듯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믿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작은 고모 이정희 씨와 또 앞서 가신 고모부 현 玄 박사님의 인간적인 후광이 우리를 조용하게 인도해 준 덕분임을 알고 있다.

그이는 순수하니만큼 큰 거역 없이 우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고, 그리고 받아들였다.

임종하기 이틀 전, 그이는 손 목사님의 마지막 기도 속에 그이의 모든 것을 의탁했다.

그이가 말년에 하고 싶어하던 일과 소망은, 자기가 더 공부를 해서 아직도 읽기 불편하고 어려운 성경을 알기 쉽게 풀이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른 일로 경제적인 기반을 닦은 다음 필생의 일로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이는 시작도 못하고 갔다.

그이는 감히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고, 그 속에서 헤엄치듯 살았다.

술잔을 들면서 혼자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그랬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우스워

“여보, 술잔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우? 그건 하나님에 대한 모독예요. 하나님을 접할 때는 몸도 마음도 정결하게 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죠.”

그러면 그이는 너무도 당당하게

“모르는 소리. 술 안 먹은 맑은 정신 속에서도 음모, 살의, 도둑 심보 등 갖은 잡스런 생각을 지닌 채 기도하는 놈들도 있을 거야. 나는 술은 먹어도 마음만은 맑은 거울같이 깨끗해. 성경 말씀에도 있지. 착하고 순진한 어린애 같아야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말야. 나는 술잔은 들고 있지만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실 수 없을 거야.”

나는 이론이 정연한 그의 말에 말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누구에게 구애받거나 간섭 안 받고 자기 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같이 모든 것에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도 드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점순이와 곱단이

그는 어린애와 동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대문 밖 골목에 나가면 꼬마들은 그이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길을 지나다 공이 자기 앞에 오면 같이 차고 던져 주고 놀아 주며 지나갔다.

그리고 애들은 너무나 예쁘게 차려 입은 애들보다 야채 장수 엄마 등에 업혀 잠든 어린애, 또는 노점상 길가에 엎드려 자는 어린애들에게 더 정감이 간다고도 했다.

젊어서 한때 고만고만한 4 남매를 키울 때, 좁은 마루에서 뛰고 뒹굴고 울고 아우성을 쳐도 그이는 악 한 번 안 쓰고 그 속에서 자기 일을 했다.

그는 또 무척이나 동물을 좋아했다. 개, 고양이 등…

우리 집엔 그런 동물이 끊임없이 우리 가족하고 같이 살았다. 더구나 개와 우리 집 가족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그는 개를 무척 좋아하고 사랑했다.

“세상에 개같이 정직하고 주인을 배신 안 하는 놈은 없어. 인간은 인간을 배신하고 서로 의심하고 하지만 개는 그대로 사람을 믿는 거야. 당장 죽인다고 칼을 들이대도 그 놈들은 꼬리를 치거든. 그런 놈들을 어떻게 싫다고 할 수 있어? 인간들이 개만큼 정직하고 사랑한다면 이 세상엔 아마 평화만 있겠지.”

그이가 개를 좋아하는 것만큼 개들도 그이를 잘 따랐다. 길가에 아무리 ‘명견 주의’란 표를 붙이고 있던 개도 그이가 손을 내밀어 턱을 긁어주면 꼼짝도 못하고 꼬리를 치는 것이었다.

개 주인도 나도 아슬아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 그이는 득의 만면해서

“그 놈들은 나를 알아준단 말야. 저한테 해를 안 끼칠 것을 알고 그냥 믿어 주는 거야. 인간들은 그럴 수 없지.”

우리 집 개는 거의 새끼 때 그이가 안고 들어온 것들이다. 그리고 그이가 개를 너무 좋아하는 것을 아는 친구분들은 또 수시로 개를 공급해 주셨다.

지금 집에 있는 ‘점순이’ 도 낳은 지 두 달 때 그이가 친구 집에서 양복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온 것이다.

흰 털에 점박이인 점순이는 보통 똥개인데, 영리하고 극성맞아 그이가 간 후 우리 집 파수군 노릇을 한다.

또 애완용 푸들 ‘곱단이’는 다섯 살이다 그이 친구분이 준 것인데, 너무 영리해서 얄밉다고 말하면서도 무척이나 귀여워 했다.

내가 낮에 외출할 때는 곱단이가 그이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이는 곱단이와 같이 이야기하고, 또 밥상 가에서 맛있는 음식도 집어 먹여 가며 보살폈다.

작년 가을에 곱단이가 첫 해산을 할 때는 새벽까지 지켜 앉아 곱단이를 보살피며 뒤치다꺼리를 했다. 그 후 그는 사람 손자는 못 보았지만 개 손자 틈에 끼어 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니까 개하고 우리는 같이 산 셈이다. 애들도 아빠 닮아 개를 좋아해, 어쩌다가 개가 죽은 날이면 우리 집은 완전히 초상 집이었다. 딸들이 있을 때는 더했다. 울고 안 먹어서 사람이 병들이 나고 야단이었다.

그이도 며칠씩 우울해 하며 다시는 개를 안 기르겠다고 결심을 하다가도 또 다시 개를 기르며 정을 주고는 그랬다.

그이가 없는 세상은 모든 게 그대로다. 해가 뜨고 밤이 되고 바람이 불고, 산 사람은 먹고 움직인다.

 

 

결혼식장보다는 초상집에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것 – 그것은 하나의 엄숙한 현실이고 규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아내의 가슴에 점철해 놓고 간 그 많은 자국과 추억은 눈만 뜨며 새롭다.

그이는 생전에도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론이 있어, 결혼식장에는 잘 안 가도 초상집에는 빠지지 않고 가서 뒷일을 돌봐 주었다.

그것은 죽음같이 절대적이고 엄격한 긍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정성과 예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이는 가깝거나 먼 친척이 상을 당한 때는 물론, 친구분들의 상에도 빠짐없이 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장례식 절차나 진행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초상이 나면 자연히 우리 집에 먼저 연락이 올 때가 많았다. 그이는 어떤 때는 식사하다가도 수저를 놓은 채 달려갔다 심지어는 해외 여행을 나여 와서도 밀린 신문의 부고란부터 먼저 보곤 했다.

나는 그런 그이가 하도 미워서

“당신은 부업으로 장의사나 차려요. 그러면 손님이 많을 거예요”

“그거 좋지. 산 사람 것 보다 망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장식해주는 직업이 얼마나 성스러워. 그것 생각해 볼 만해.”

농담으로 한 이야기를 그는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상가집’하면 으레 벌어지는 술판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서러워서 마시고, 위로한다고 마시고…

한번은 밤샘하는 데서 여승이 목탁을 치며 독경을 읊는데, 그 이가 취중에 들어 봐도 막 빼먹고 하더란다. 그이는 술김에 ‘망자 앞에서 사기를 친다’며 여승을 내쫓고는 자기가 대신 독경을 읊었다고 한다.

그이는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불전 佛典도 잘 알았으며, 불교 자체는 인정하나 한국에는 이제 참다운 승 僧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인생은 뜬 구름 같은 것이고, 그 잠깐 동안을 인간들은 허욕과 과욕으로 스스로를 멸망시키고 있다고 자탄 自嘆 도 했다.

 

 

백두 白頭의 바텐더

그이는 자기가 더 늙으면 가장 막역했던 친구분인 윤현배 尹顯倍 선생님하고 멋있고 큰 술집을 인수해서 두 분이 바텐더 노릇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두 백두 白頭 – 그 두 분들은 머리가 똑같이 백발에 가까웠다. 그래서 백두회 白頭會 를 만들어 몇 분이 모인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이는 한때

“얼마나 멋있겠어. 머리가 허연 노신사 둘이 까만 양복에 흰 공단 조끼를 입고 까만 나비 넥타이를 매고 바텐더 노릇을 한다고 상상해 봐. 윤현배, 이진섭이가 한다고 하면 장안에 내노라 하는 고급 술꾼들은 모두 모여들 거야. 계집애가 없는 서울 최고의 고급 술집! 권위와 품격이 있는 그런 술집을 만들 자신이 있어.”

나는 하도 기상천외한 발상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모주꾼 두 분이 바텐더 노릇을 하면 그 술집이 얼마나 가겠어요?”

“무슨 소리야, 그건 안 되는 소리지. 장사인데 그럴 수가 있나. 가게 문 닫고 집에 올 때나 살짝 한 잔 걸치고 오는 거지.”

“알았어요. 한 가지, 개업하기 전에 이혼장에 도장이니 찍고 시작하세요.”

“그런 왜? 당신이 뒤를 봐 주어야 할 텐데”

“미쳤어요? 내가? 술이라면 진저리가 나는 사람이 늙어서 바텐더 여편네 노릇까지 하게. 나는 사절하겠어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바텐더의 꿈은 이처럼 내가 찬물을 끼얹어 머쓱해졌지만, 그이의 노년 꿈 치고는 낭만적인 것이어서 허무맹랑하다고 밀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순수한 꿈이었다.

 

 

 

가을 같은 여자

 

가을의 차가운 빗속에서 우리들 사랑은 서로의 아픔을 지닌 채 익어갔고, 나는 그이 곁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믿음 속에 가을이 깊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많은 아픔이 내 것처럼 전달돼 온, 가장 힘들고 한편 보람 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의 나는 또, 감당 못할 것 같은 깊은 불안에 울기도 많이 했다.

그것은 사랑의 감미로움이 아니라 가슴 저 밑에서 흐르는 무겁고도 힘겨운 통증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럴 때면 집으로 돌아오는 영도 다리에 서서, 검은 바닷물과 그리고 많은 불빛 속에서 불나비 같은 자신을 생각해 본 때도 여러 번 있었다.

 

 

4월 19일, 1953년

오늘도 비가 온다. 매일같이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오후에 그이가 신문사로 찾아왔다. 피로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 신선하게 보였다.

소바 집에서 같이 소바를 먹고, 레인코트를 걸치고 야자수 다방에서 까뮈의 <이방인 異邦人> 을 같이 이야기하다. 나는 그에게서 목마름같이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마구 갈기는 빗발을 맞으며 배를 탔다. 커다란 우산 속에 염치 없이 들어간다. 빗발이 차가웠다. 안개 낀 것 같은 뽀얀 천지 속에 둘이 만 있는 것 같다.

 

4월 25일

신문사 월급 22만 환으로 인상.

내가 그이에게 갈비 국을 대접하다. ‘휘가로’에 잠시 들러 환담하다. 같이 포도주를 마시다. 포도주 기운이 전신에 올라와 볼이 화끈거린다. 그이는 저혈압이라서 오히려 혈액 순환이 좋아진다고 한다.

오늘도 나는 그의 안색을 염려한다. 그에게는 좀 곡이 좋은 한가한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가장 자연스런 마음으로 그이 건강을 걱정한다.

칸델라 불이 일렁거리는 밤길의 책 노점상을 기웃거린다. 그이가 찾는 책이 없다. 입에서 술내가 날 것 같아 그이가 츄잉껌을 사다. 둘이서 어린애같이 껌을 씹으며 밤거리를 걷다.

사흘 뒤에 내가 서울 갔다 와야 한다고 말을 했더니 그이가 좀 우울해 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의 감정에 지배된다는 것이 싫지 않다.

 

4월 29일

그이와 서울 가는 송별 점심을 같이 하다. 그이에게서 만년필을 받다. 그이는 내 수첩에 ‘새 만년필과 책과 명결 明決 으로’ 라고 써 주었다.

검푸른 잉크빛과 예리한 만년필 촉의 움직임과도 같이 청신한 순간이었다. – 맥추 麥秋 에서

 

4월 30일

온 몸이, 온 정신이 유리알같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다.

가을 같은 여자.

가을 아침에 피부에 차끈차끈 느껴지는 공기. 그것과 같은 여자.

아미엘의 <일기>를 계속해 읽었다. 그 침착한 사색, 자기 분석, 잔잔한 호수 같은 청명한 생각 –

그러나 너무나 도승 道僧 같다. 진흙에 파묻힌 인간의 냄새가 없다.

사람은 제각기 대상이 있다. 인생은, 인간 생활은 설명이 아니다. 이유도 아니다.

 

그 무렵 내가 좋아하던 시를 다시 한 번 써본다.

 

 

회랑 도로 回廊 道路

 

열매와 같이 익은 눈을 감으시고

낙엽이 지는 긴 이 길을 내려갑니다.

이 길이 바로 그 많은 현화족 顯花族 식물들이

사랑도 모른 채 피다 돌아간 그 길이올시다.

나비들과 같이 화장을 한 소녀와 소년들이

손에 손을 잡고 노래 부르다

사랑을 앓은 채 돌아가 버린 그 길이올시다.

아름다웁다 외로운 한 시인이

검정 나비와 같이 이 길에 머물러

보라색 불꽃이 접어들 도시를 향하여…

사랑도 없이 눈을 감은 그 길이올시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은 이 길을 두려워하실 것이 없읍니다.

영 외로움을 참으시고 가셔야 할 이 길!

아예 종점일랑 묻지 마시고

낙엽이 지는 긴 이 회랑 도로를 내려갑시다.

 

 

31년 전 그날을

3년 동안이 넘는 전쟁이 사실상 휴전으로 끝나고, 환도 還都 의 물결이 피난지 부산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가슴에 서러움과 아픔을 남긴 채, 그래도 서울 집으로 올라간다는 한 가닥 희망은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고마움이었다.

그이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났고, 그리고 점화된 불꽃같이 사랑의 결실이 익어 갔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31년 전 그날, 나한테 정식으로 청혼을 했을 때의 그의 떨리던 목소리를!

그는 목소리뿐이 아니라 온 몸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피난지 부산, 그의 13조 방! 사방이 책으로 메꾸어져 있고,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방 한구석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그런 방에서…

나는 그의 고백과 청혼에 응낙했다. 그것은 1953년 여름이었다.

그에게 손을 잡힌 채 나는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은 아마 내 소명 召命에 대한 순수한 긍정의 눈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따져 볼 것도 망설일 것도 없는 그와 내 운명에 대한 정직한 받아들임이었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한 절대성과, 그리고 내가 그의 곁에 있어야 만 될 것 같은 사명감.

그리고 그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

그것은 사랑이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소유할 수도 없었던 6.25 3년 동안의 전쟁의 상흔이 입을 벌리고 있는 그런 땅에서, 우리 둘만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이 자신도 전쟁의 폐허 못지 않게 가슴과 몸이 벗겨진 속에서 나를 가지려 했고, 나는 그 진실에 용기와 힘을 주었다.

그의 몸은 꾸준한 복약 服藥과 그의 의지로 많이 좋아져 갔다. 다만 심장이 죄어드는 협심증만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방에서 만날 때도 그의 심장과 신경은 한 시간 이상을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공기가 모자란다고 해서 우리는 곧잘 밖으로 나오곤 했다. 그럴 때 그이는

“이제 결혼해 안정되면 이 모든 병은 나을 거야.”

이렇게 그이는 나를 위로했다. 우리들의 데이트 장소는 송도 해변가, 비 오는 광복동 거리, 영도 다리나 부둣가 아니면 휘가로 다방 등이었다. 나는 신문사에 그대로 나갔고, 그이도 국제 신문에 적을 둔 채 번역물을 많이 했었다.

그이는 우리들의 결혼 준비를 위하여 일을 했다. 주로 정음사 正音社 최영해 사장님이 번역물을 많이 주셨다.

최 사장님은 인품이 크셨던 분으로, 많은 문인들에게 다른 출판사보다 후한 원고료를 주셨고, 더구나 그이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많이 베풀어 주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고료 이외에 따로 편리를 봐 주시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이진섭 씨 어머님께 인사를 드릴 기회가 왔다.

우중충한 휘가로 다방 안의 구석진 방! 거기 어머님은 깨끗한 보살같이 앉아 계셨다.

은실같이 하얀 머리와 넓으신 이마, 그이를 연상케 해주는 인자하신 눈이 나에게 믿음과 안도감을 주셨다. 그리고 그의 어머님이라는 사실 하나로 그 깨끗하신 노인에게 호감이 갔다.

이 첫 번의 호감은, 내가 결혼 후 그분이 92세로 가시는 날까지 정작 시어머님 이전에 한 여인으로 존경하게 했고, 나에게 큰 기둥인 동시에 한없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둔덕이 돼 주었다.

첫 대면에서 긴 말은 없으셨던 것을 기억하나, 어머님도 나를 좋아하셔서 당신의 며느리 감으로 원하셨다고 들었다.

그 후 나는 그의 공인된 애인으로서 그의 피난지 창선동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날이 갈수록 걱정이 됐던 것은 우리 집에 아직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아 부모님께 허락 받을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분들의 강력한 반대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이는 나의 이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아버님께 인사드리고 허락을 받아 내겠다고 서둘렀다. 그러나 그런 그이를 나는 만류했다. 내가 먼저 내 진실을 말씀드리고 어느 정도 아버님을 설득시켜 애소를 해야지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사태가 어려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반대와 비장한 결심

며칠을 궁리 끝에 나는 어느 날 이른 저녁이 끝날 무렵 보모님들 앞에 대좌했다.

영도 피난살이 방은 하나였기 때문에 동생들을 밖에 내보내고, 나는 비장한 결심으로 이진섭 그 사람에 대한 정직한 자초지종 이야기와, 끝으로 우리들은 누가 뭐래도 사랑하고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버님의 떨리는, 조용하고 나직한 음성이 나를 경직케 만들었다.

“나는 너를 25년 기른 애비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것 하나 만으로 나는 이 결혼을 응낙할 수 없다. 너희끼리 이미 약속이 됐다면 할 말은 없고, 그렇게 되면 너하고 나하고는 그만이다.”

그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응낙을 오늘 당장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보통 아버지들이 딸의 결혼에 걸고 싶어하는 평범한 조건을 그이는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는 그이를 비릴 수 없는지 모릅니다. 그이는 또 저를 잃게 되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아버님은 냉철한 음성으로

“너보다는 내가 인생을 많이 살았어. 사랑은 동정도 자비심도 아냐. 더구나 결혼은 생활이고 현실야. 그런데 구태여 모든 것이 합당치 않은 남자를 택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아버지, 그래요. 저에게는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저는 그에 대한 동정도 자비심도 아녜요. 그의 인간성의 바탕을 믿고, 그리고 사랑해요. 아버지는 왜 사람을 보지도 않고 반대만 하세요? 한번 보시고 결정을 내려 주세요.”

“나는 만날 필요도 없고, 만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딸을 주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만나야 할 이유가 없어.”

아버지의 강경한 태도는 예상대로였다. 아니, 그 이상의 상황에 나는 당황했고,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노여움마저 치밀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지만, 25년 동안 길러 준 부모에게 등을 돌리고 그에게로 달려가기에는 나는 너무나 허약했다.

그때 나는 고개를 들고

“네,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마지막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저는 그이를 택하겠어요. 25년 동안 길러 주신 부모님 은공은 제가 잊지 못하겠지만 이제부터는 제 인생이니까요.”

그때 그 순간 아버님의 얼굴이 창백해지시고 처절하게 일그러지신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어떻게 그렇게 담차게 불효스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내가 두 딸을 시집 보낼 때 그제서야 딸을 둔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밤새 눈이 붓도록 울었다. 맏딸로서 많은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했던 내가 아버지 앞에서 그런 당돌한 말을 해 가슴 아프게 해드린 미안함과, 그리고 이런 지독한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그에게 가야만 될 것 같은 내 자신이 가엾은 생각마저 들었다.

중간 입장이라 곤란했던 분이 엄마였지만, 엄마는 그때 나를 많이 동정해 주셨고, 내 편에 서서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는 데 힘써 주셨다.

후일담이지만 엄마는 하도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그때 부산에서 이름난 점장이 보살한테 가서 점을 쳤다고 한다.

엄마는 교육자이셔서 그런 것은 통 보러 다니지 않으셨는데,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답답하고 다급한 심사에 친구분을 따라 가셨던 것이다.

그 보살은 한참 점괘를 흔들더니 두말도 없이

“나무 목 木 성 姓 가진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 천생연분야. 왜 반대를 해? 아들 딸 4남매 낳고 잘 살 텐데…. 이 색시는 그리고 가게 될 팔자인 걸. 누구도 못 말려…”

엄마는 우리가 결혼한 뒤에도 가끔 그 보살 말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점장이의 말을 믿으실 분이 아니셨다. 그 후 아버지하고 나 사이에는 거북한 냉전이 계속되었다.

그이는 내 보고를 듣고,

“아버님의 반대는 너무나 당연하시고, 가만한 벽에 부딪칠 것은 각오가 돼 있어. 그러니까 기원이 마음만 흔들리자 않으면 걱정 없어. 우리, 아버님의 노여움이 가실 때까지 시간을 벌어 보자구. 그리고 때를 봐서 찾아 뵙고 단도직입적으로 떼를 써 볼 테니까… 그러나 기원이, 이것만은 각오해 둬. 만약에 끝까지 반대하시면 그때는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무슨 생각요?”

“납치해 가지고 결혼해 버리는 거야.”

그때 나는 비로소 겁이 났다.

“그렇게는 싫어요. 승낙 받고 떳떳이 결혼해요.”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를 말하는 거 아냐. 그런 사태까지 안 가게 내가 잘 할 테니 나만 믿어.”

깡마른 그가 그때같이 미더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서울행 ‘로맨스’

그런 와중에 나는 가족과 함께 먼저 부산을 떠나게 되었다.

부산은 전쟁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담아 주었고, 그리고 나는 한 남자의 선택을 받아 그 어려운 사랑을 했던 곳이다.

그 당시 25세 된 내 마음은 겁도 없이 사랑만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이가 내 곁에 있고 내가 그의 곁에 있으므로 그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내가 부산을 떠나는 마지막 날 밤, 우리는 남포동 조용한 일식 집에서 저녁을 나누었다.

그이는 백포도주를 땄다.

“기원이가 먼저 서울로 올라가지만 나도 여기 뒤처리하고 보름 안에 뒤쫓아 갈 거야. 가서 몸조심하고, 내가 서울로 올라가는 대로 곧 연락을 할게.”

나는 그와의 얼마 동안의 이별이 두렵고 서러웠다.

“이제 전쟁은 완전히 끝난 건가요?”

“사실상 끝났다고 볼 수 있지. 그 대신 이 나라가 허리가 잘린 비운 悲運을 겪게 됐지만…. 결국 우리는 약소 민족의 아픔을 당하고 만 거야. 3년이란 전쟁 통에 우리들은 나라의 운명과, 개인들의 삶과 죽음과 그리고 인생을 모두 바꾸어 놓은 셈이지.”

나는 그의 말에 잠잠했다. 이 전쟁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것을 잃게 해다. 그러나 우리 둘은 이 전쟁 때문에 우리들의 만남과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나는 국가의 비운 속에 맞게 된 우리의 사랑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이 환희만도 아니었다.

그이는 혈색도 많이 좋아졌고 생기가 돌아 보였다. 어쩌면 그의 혈색과 건강을 걱정하는 내 마음은, 그와의 만남부터 그가 가는 날까지 30년을 사는 동안 계속된 나의 정신적인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서울 도착하는 대로 아버님을 찾아 뵙고 정식으로 인사드릴 거야. 올해 안에 우리는 결혼을 해야 돼. 빨리 기원이를 내 곁에 갖다 놔야 안심이 되겠어. 어디론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그는 포도주잔을 비우면서 내 얼굴을 안막에 찍어 놓기라도 하듯 쳐다보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같이 있고 싶은 마음, 같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결국 결혼일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의 구체적인 뜻을 몰랐던 나는 그이하고만 같이 있으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우산 속의 이별

그날도 부산 거리는 비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한 우산 속에서 그 많은 추억과 망설임과 아픔, 그리고 그와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이루어졌던 거리를 음미하듯 천천히 걸었다. 휘가로에 들러 부산의 마지막 밤 커피를 나누었다. 휘가로에서 그와의 더 많은 추억이 깔려 있는 곳이다. 그가 나를 제일 많이 기다려 주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이는 영도에 있는 우리 집 앞까지 와, 길고도 뜨거운 포옹 속에서 부산의 이별을 고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 식구는 서울행 기차를 타러 부산역에 나갔다. 많은 피난민들이 서울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일등 삼등도 없이 좌석에 앉는 것만도 고마워했다.

다행히 우리 식구는 창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하고의 부자연스런 감정이 풀리지 않은 채였다.

아침의 부산 역두에는 어디선가 해풍이 불어 찝찔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겨 왔고, 나는 창가에 기대앉아 1년 반 동안 정든 부산 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비도 많이 오고, 불도 많이 났던 부산!

경향신문 편집실, 광복동 거리, 휘가로 다방, 그가 입원했던 제3 육군병원의 삭막했던 병실! 그리고 영도 다리 위에 불빛! 또, 목욕탕 위층 피난살이 방…

그리고 비 오는 날의 좁고 침침한 거리. 그 거리 속에 그의 눈, 코, 입술 모든 것이 모자이크 되듯 내 가슴에 모여들었다.

그때였다. 역사 驛舍 기둥 한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길고 큰 형체가 보였다. 그는 나와 있었다. 어제의 이별이 아쉬워 그이는 약속도 없이 나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고함이라도 치며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창 밖을 향해 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러나 그이는 창가까지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웃으며 손을 크게 한 번 흔들었다. 그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차가 떠나기 직전에 그이는 역사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허락 받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가족의 눈에 띄기 싫어한 그의 섬세하고도 단정한 마음이 나를 소리 없이 울게 했다.

나중에 들으니까 그 역두에서 나를 만나리라고는 기대조차 않은 채 내가 떠나는 기차라도 보려고 나왔던 것이라고 했었다.

그이는 많은 사람 중에서도 넓은 이마, 훤칠한 키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던 파티 장소, 국제 공항 등 어느 곳에서나 그이는 항상 내 눈에 금새 들어왔었다.

 

 

청운동의 신접 살림

잃어 버린 가족도 상한 사람도 없이 우리는 기적 같은 고마움 속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 거리는 전쟁이 스치고 간 처참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다시 소공동에 있는 경향신문 문화부에 출근을 했다. 그이는 약속대로 보름 넘어 서울에 올라왔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이는 우리 아버님을 찾아 뵈었다. 나는 따라가지 않은 채, 남자끼리의 대면이었다.

그이는 정중하게 자기의 모든 것을 장인 될 분에게 털어 놓았고,, 그리고 간절히 나를 원하며 결혼해야겠다는 의사 표지를 단호히 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그의 솔직 담백함에 어쩔 수 없으셨는지 결국 우리의 결혼은 승낙되었다. 이미 둘만의 약속은 됐으니 형식적인 약혼 절차는 밟지 말고 가을에 곧 결혼식을 올리자는 양가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집에서는 엄마, 고모님들이 서서히 결혼 준비를 하는 가운데 나는 신문사에 그대로 나갔고, 그이하고는 서울 명동의 휘가로에서 주로 만났다. 폐허가 된 명동은 다시 우리들의 거리가 되었다.

그이는 가끔 저녁때 명동에서 술 한 잔을 걸치고 서대문에 있던 우리 집까지 찾아와 같이 사직 공원을 산책했다.

부산에서 그이를 만났을 때는 그이는 병 중이어서 술은 건강 때문에 못했던 상태였으므로, 나는 그이가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었다.

나는 결혼 후 술 때문에 싸움할 때

“나는 당신이 이토록 술을 좋아하는 남잔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곡 사기당한 것 같아요.”

라고 하면 그이는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소리, 술 아니라 그보다 더 못된 놈이라도 당신은 나에게 오게 돼 있어. 당신은 나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여자야”

하며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결혼 전에 하루는 그이가 집으로 찾아와 번역료라며 꽤 많은 돈을 나한테 맡기면서

“나도 집을 구해 보겠지만 이제 기원이가 살 집이니까 집 봄 아라 봐 주었으면 좋겠어.”

했다. 물론 집을 살 만한 돈은 못되었고 전세 얻을 정도의 돈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어쩐지 막막하고 불안했다. 도대체 셋집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 나이 될 때까지 부자로는 못 살았지만 셋집에서 산 적은 없었고, 사람이 사는 데 있어 먹을 것과 집은 누구나 당연히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것은 항생 돼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이는 살면서도 가끔 나를 ‘천둥 벌거숭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것은 내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모르고, 현실 생활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정말 그랬다.

그이가 집을 구해 보라고 할 때, 나는 그제서야 결혼 생활이 현실이라는 게 어렴풋이 감이 잡혀 겁이 났다.

그때 마침 내가 교제하던 언니가 사는 청운동에 얌전한 사랑채가 나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바로 청운 국민학교 뒷골목, 청운 양로원으로 올라가는 곳의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골목이었다.

넓은 돌계단을 올라가 아주 웅장하고 위풍 있는 큰 기와집이었다. 사랑채는 뜰 아랫방 하나와 꽤 넓고 큰 방 하나, 거기에 달린 세 간 방 하나, 그리고 기역 자로 빙 두른 마루와 거기에 분합 유리문이 달려 있었으며, 부엌은 뜰아랫방 옆에 있었다. 넓은 중간 마당도 모두 우리가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어느 산장 山莊에 들어간 것 같은 조용함과 정갈함이 마음에 들었다.

의과대학에 다니는 아드님을 둔 모자뿐인 단출한 주인 댁의 가족 조건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주인 아주머니의 후덕스럽고 품위 있는 모습에도 호감이 갔다. 더구나, 이진섭 씨 이야기를 하니까 아드님하고는 친구간이고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첫 살림집을 청운동의 그 댁하고 인연을 맺게 되었다.

 

 

결혼과 홍일점 여기자

나는 결혼을 석 달 앞두고, 경향신문 한창우 사장님께 결혼을 사유로 사표를 냈다. 그런데 한 사장님은 나만 괜찮다면 애기 둘 정도 낳을 때까지라도 그냥 다니라며 적극 만류하셨다.

그때만 해도 여기자는 나 혼자였고, 비록 전쟁은 겪었지만 인심이 각박하지 않았던 세월 좋은 시대였으며, 또한 한 사장님은 무뚝뚝하시면서도 나를 귀여워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사장님의 호의를 물리치고 결국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직장과 결혼 생활을 양립할 자신이 없었고, 그리고 그이도 물론 반대였다.

여자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새로운 탄생이고,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인데, 그 첫발을 직장을 가짐으로써 분산시키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전쟁 후 아버지가 관직을 그만두셔서 서대문 관사를 떠나 신설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이는 어머님, 누님들과 청운동 집으로 옮겼다. 이때 작은 시누이가 될 이정희 씨는 유학 길에 오르게 돼서 (그때만 해도 부산에서 배로 갔다) 그이는 누이동생을 전송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결혼 택일을 우리 집에 부탁하고 떠났다.

그때가 월이었고, 결혼 날짜는 10월 16일로 나왔다. 그이는 동생을 보내고 부산에서 올라오는 길로 우리 집에 먼저 들렀다. 결혼 날짜를 알리자 그이는 급하게 됐다며 좋아했다.

 

 

5년만의 ‘부부’

우리들 결혼식은 1954년 10월 16일, 하늘은 청명하고 국화꽃 향기가 한창일 때 덕수 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그이는 곤색 양복, 나는 꽃 화관을 쓴 한복 차림으로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그의 옆에 섰을 때 가늘게 떨리는 나를 의색했었다.

그이는 33세, 내 나이는 26세.

서울신문사 편집국에서 첫 인사를 나눈 지 5년 만에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인연은 부부로 맺어진 것이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지 않고 친정에서 사흘 을 지낸 후 곧 청운동으로 갔다. 말하자면 아주 가는 날 – 대문 밖 트럭에서는 세간 살림, 도구, 큰 목판에는 콩찰떡, 고기, 국수, 과실, 그리고 나를 어릴 때부터 봐 주던 완섭 엄마 (그때는 행랑 엄마라고 했다)가 후행으로 따라가기로 했다.

짐을 모두 싣고 그이와 나는 부모님께 큰절을 했다.

“이 서방 기원이 잘 부탁하네”

그렇게 반대하시던 결혼을 허락하신 아버님은, 딸을 보내는 날 사위에게 부탁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눈자위는 붉어지셨고,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큰 정을 안 나는 가슴이 저려 왔다.

 

 

 

내 작은 사랑의 땅

 

나의 신혼 생활은 전세집이나마 산장 같이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싱그럽게 들리는 청운동 집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은 그 당시의 신혼 일기이다.

 

0월 0일

조그만 지역을 하나 가졌다.

남자와 여자가 사는 이 작은 땅!

그것이 결혼일지 모른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등불과 기다림이 있는 곳!

나는 그런 지역을 갖게 됐고, 또한 나는 그 땅의 여주인이 된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몇 번이고 지나다니던 어느 샛길의 아늑한 인상과도 같이, 평범하고 익숙한 그런 곳이기도 하다. 거리 [道] 표시도 세우지 않은 지역…. 나는 조그만 면적의 지주 地主.

문풍지 소리에도 소스라쳐 놀라고, 저녁놀이 길어지면 멍하니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도 하는 바보 같은 지주이다.

평수도, 곡식 이름도, 쟁기 이름도 모르고 가을만 기다리는 그런 터무니없이 믿을 수 없는 지주이기도 하다.

그래도 서투른 신부는 공연히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앉았다 섰다, 또 서성거려 보기도 한다.

그이 없는 시간이 허공에 맴도는 것 같다.

이 높은 산장 같은 꼭대기에도 온갖 장수들이 찾아와 준다.

아침 결에는 먼 바다 냄새가 풍길 것 같은 생굴 장수가 온다. 탐스런 굴 알이 신선하기도 하다. 지게에다 화분을 가득 얹은 꽃 장수도 온다. 오늘 아침 흰 국화 화분을 하나 샀다. 마루 끝에서 국화 향기가 은은히 풍긴다.

흰 송이가, 화려하다기보다는 너무나 깨끗하다. 그 옆에는 당꽈리 화분을 놓았다. 빨간 꽈리가 조롱조롱 달린 것이 무슨 산호 단추 같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대로 물을 주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무슨 꽃이라도 문전에 꽃을 놔 두는 것은 먼 훗날까지 지켜나가고 싶다. 마당이 있으면 갖는 꽃을 한껏 심어 꽃에 파묻혀 살고 싶다.

전에 여학교 때, 학교 뒷산 밑에 있던 조그만 꽃집을 기억한다. ‘목야 牧野’라는 꽃집이었다. 늙은 부부가 꽃을 팔며 살았다. 부인은 얼굴은 고운데 장님이었다. 꽃을 사러 가면 간혹 그 부인이 나와 꽃을 꺾어 줄 때도 있었다.

가위를 들고 꽃 향기를 따라 눈뜬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그 꽃 앞에 가서는 꽃을 어루만지며 꽃을 베어 주었다.그 꽃을 베는 손의 동작은 오랜 습성이 낳은 정확성과 아름다움이었다.

자기 거처에서부터 꽃밭까지 오는 좁은 길을 걸을 때 그 부인은 꽃 향기만으로 지금 내 옆에 무슨 꽃이 있는가를 알았다.

수십 년을 한결같이 걷는 그 길에는 눈먼 부인만이 아는 세계가 있었다. 맹인만이 가질 수 있는 세밀하고 조용하고 특별 난 감각의 세계가 있었다. 냄새와 촉감만으로, 그것은 아무리 하여도 눈뜬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정적 靜的 이고 깊은 것일 게다.

그 눈먼 부인의 표정은 언제나 평화스럽고, 모든 것을 믿는 것 같았다. 항상 어루만져 가며 앉고 싶은 곳에는 앉을 의자가 있고, 서서 붙잡고 싶을 때는 곧 붙잡을 수 있는 그 믿음성이 그 눈먼 부인을 그렇게 온화하게 만든 것 같았다.

깊은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갈 무렵, 그 꽃집에는 두꺼운 낙엽으로 길이 덮였다. 넓은 정원은 앙상한 가지와 서리 맞은 잎으로 변했다. 꽃이 만발했을 때보다 그 황폐한 마당이 더 좋았다. 초동 初冬이 되면 그 꽃집 마당과 눈먼 부인이 생각난다.

저녁이 되어 마루 끝에 앉아 그이를 기다린다. 이제 점점 남편을 기다리는 새댁의 모습에 익숙해져 간다. 깊은 가을의 국화 뿌리를 모종하듯, 나는 내 새 생활에 나를 모종시켜야겠다.

 

현실적인 결혼은 나를 조금씩 꿈에서 깨어나 여자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 변모시켜 가고 있었다.

살림은 주로 시어머님이 일하는 애를 데리고 봐 주셨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집에서 통 일을 안 하고 시집을 왔다.

대학 나오고, 신문사 기자로 취직해 다니고, 그리고 전쟁, 피난…

선머슴 같은 세월 속에 꿈과 책만 안고 살았다. 요리나 살림은 제대로 배울 사이가 없었다. 그런 며느리를 시어머님은 막내 딸같이 이해해 주셨고, 때마다 시댁의 입맛, 그이의 기호 음식을 가르쳐 주셨다. 그저 그의 건강을 살펴 주고 뒷바라지만 해주면 그만이라고도 하셨다.

그이는 결혼 초에는 술을 안 하더니 몇 달이 지나자 서서히 술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놀랍고도 새로운 발견이었고, 그를 알고 처음 당하는 아픔의 시작이었다.

그이가 술을 좋아한다는 말은 작은 시누이 정희 씨한테서 들었지만, 전연 술을 못하시는 정확하고 근엄한 친정 아버지만 봐 오다가 술 취해 흐느적거리고 들어오는 그이를 보니 전연 딴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도 다행히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신문 기자들의 생리, 생활, 그들이 얼마나 술을 퍼 마시고 술 속에 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문인 文人 들, 그리고 문화부장이라는 직장 상사로서 낮 시간을 거의 같이 생활했던 소설가 김광주 선생님 – 그분의 술 실력도 대단하셨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는 보지도 경험도 못한 남자들의 술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셈이다.

그러나 내 남편되는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온다는 이 현실에 당혹감과 실망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로맨틱하고 다정한 눈이 뜨물처럼 흐려지고, 정신없이 쓰러져 잠이 들었을 때, 나는 두렵고도 서러운 마음에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북어국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머님께 그 국 끓이는 법을 배워 아침상에 놓기도 했다.

“여보, 어제 나 좀 취했나 보지. 기자 애들하고 한 잔 했어. 오늘은 일찍 들어올게”

그런 말만 들어도 나는 또 금시 울어 버리곤 했다. 어떤 대 한번은, 그런 나를 달래느라 오전 중 출근을 못한 때도 있었다.

그이는 그때 경향신문 한창우 사장님의 부름을 받아 정경부장 겸 부국장으로 일하게 됐었다.

그때 신혼 때의 내 마음과 몸은 마치 유리 그릇 같았다. 투구 치면 깨질 것 같은 아주 여리고 맑은 그릇 같았다.

남자하고 산다는 현실감에서 오는 놀라움, 그리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그이…. 그 모든 것이 놀랍고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0월 0일

아무리 부부라도 하나의 개별적인 인간이 어찌 한 인간 속에 자기의 존재같이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보다 밤과 낮의 구별이 너무 확실한 그 사실에 놀라고 있다. 술이 그렇게 좋다는 그가 취하여 돌아오는 이 현실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하루의 반 이상을 자기를 위하여 기다리는데….

아무리 자기 마음대로이고, 아무리 제약과 구속을 받기 싫어하는 그이라지만 나는 억울하고 섭섭한 마음만 든다.

그렇지만 그 행위, 그 생활 관념이 그의 전적인 모든 것이라면 나는 부정도 반항도 하기 싫다. 내 속에 그를 조화시키려는 어리석은 노력보다는 그의 생활 속에서 나대로의 보람과 뜻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하여튼 생활은 설명이나 이유가 아니다. 따지고 정신을 분열시킬 필요없이 그대로 가는 것이다.

그는 너무나 뜨거운 불꽃이다. 모든 것을 저미고 태우고 요동한다. 거기에 비하면 내가 너무나 가라앉고 잔잔해 그것을 감당 못하는 것일까?

 

2월 5일

제한된 시간과 직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 남자에게는 마치 활동의 생명력인 것 같다. 분주하게 일에 열중해 다니는 그의 모습이 다행스럽고 즐겁다.

건강만 조심하고 절주만 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아니 일생 동안 그에게 내 주장이나 강력한 요구를 하는 태도보다 가장 정확한 포인트를 찾아 가장 가까운 아내라는 입장에서 제사만 해 가며 살아야겠다. 점순이가 혜화동에 갔다가 미국서 정희 언니가 보내 준 선물을 갖고 왔다. 내게는 빨간 블라우스, 빨간 장갑과 양말 등. 그이 일찍 들어오다. 혜화동에서 가지고 온 만두를 저녁으로 했다.

그이, 낮의 신문사 일 외에 밤에는 집에서 자막 字幕 번역을 시작하다. 그것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풍요함을 주려는 그이 노력이다.

2월의 삭풍이 몰아치는 밤, 나는 일하는 그이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눕다.

심한 바람 탓인지 전깃불이 나가 촛불을 켠 바람벽에 그의 옆 얼굴이 영상같이 일렁인다.

“여보 당신 졸립지? 내가 머리 긁어 줄게 먼저 자”

그이는 한쪽 손으로 펜을 놀리며 한쪽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긁어 준다. 솜털보다 다사로운 잠이 솔솔 온다. 밤에는 무서워 변소에도 혼자 못 가는 나를 그는 큰 애기라고 한다. 나는 결혼 후 정말 더 바보 어린애가 되는 것 같다.

결혼은 어쩌면 여자에게 제2의 탄생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같은 배를 타고 떠나는 긴 항로일 것이다.

 

0월 0일

얼마나 어렵고 소중하게 만난 우리들인가. 가끔 어쩌다 내가 잠을 깨 보면 그이는 일을 하다 말고 잠자는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을 때가 있었다.

자는 내 얼굴이 그토록 가엾어 보일 수가 없다고…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 가엾어하며 사는 것일까?

 

격려와 이해 속에서

그는 자막 번역을 할 때면 꼬박 밤을 새며 일할 때도 있었다. 일을 시작하면 그이는 무서운 정력과 속도로 일을 해냈다.

우리는 주말이나 일요일이 돼도 밖에 나가기를 싫어했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별식이나 먹고,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도 하고, 도 나는 그이가 일하는 곁에 누워 책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이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자기가 출근하면 그 낮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얼 하고 지내느냐고.

자기 욕심 같아서는, 결혼한 모든 여자들이 밥 짓고 빨래하고 살림에 찌들리며 남편 들어오기만 기다리기보다는 자기 시간도 갖고 문학할 수 있는 길을 계속 닦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정신적인 그런 재촉과 격려와 이해가 있었기에 오늘날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기초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아내를 원하기보다 오히려 자기 세계, 자기 것을 갖고 있기를 원했고, 그런 길을 걷는 나에게 항상 힘과 용기를 준 그에게 나는 그가 간 지금도 고마움을 느낀다.

대학 다닐 때도 조금은 재질을 인정받아 그때부터 신문 기자를 하면서 수필은 간혹 써 왔지만,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의욕은 결혼 후 그의 권고 덕분에 용기를 얻은 것이 사실이다.

그 무렵 처음으로 소설을 써 본 것이 나의 데뷔작 단편 <귀향 귀향>이었다.

그 소설은 70매 정도로서, 1955년 당시 ‘여원 女苑’ 잡지사에서 처음으로 여류 소설을 모집했을 때 소설을 구상하고 사흘 만에 서 낸 것이 당선되었다. 그 시상식은 12월에 있었는데, 마침 나는 첫 애기 기원이를 낳은 직후라 나 대신 그이가 시상식에 참석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이는 나를 위해 항상 새로운 책을 공급해 주었고, 그 내용을 같이 이야기도 나눴고, 새로운 문학 조류에 관한 지식도 알려 주었다.

나는 그를 출근시키고 나서 그를 기다리는 시간에 많은 독서를 했다.

 

12월 2일

날씨 혹한 酷寒. 자살자와 동사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따뜻한 방, 밝은 불빛,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이랴. 그가 내 곁에 있고 내가 그의 곁에 있다는 이 삶의 의식 意識! 하루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어느 부자보다도 배 부르다.

이 세상의 누구도 굶거나 얼어 죽지 않고 따뜻이 지낼 수 있는 세상이 돼야 할 텐데…

그이가 어제 갖고 들어온 책 그레이엄 그린의 <사건 事件>의 핵심을 완독하다. 그리 읽기 쉬운 문체는 아니나, 인간의 심리 묘사를 박력 있고 끈기 있게 끌어 나가는 데 새로운 맛이 있다. 로맨틱한 감상보다 어디까지나 사실적으로 끌고 나가는 수법이 눈에 띈다.

인간의 육체에 결부된 사랑을 인간에 대한 구원으로 규정지은 신의 사랑과 대립시킨 내용이었다. 그 인간의 사랑에 있어 순수하게 되고, 신과 동질화되는 것은 인간의 파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린의 논리에 많은 공감을 가졌다.

나는 결혼함으로써 어설펐던 문학 소녀 취미에서 탈피해 문학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굳어져 갔다.

그이는, 장차 소설은 철학과 논리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고통은 나의 고통

 

그이는 방황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가정이란 정착지에 안주했지만, 심장 협심증의 가벼운 증세만은 깨끗지가 않았다.

추운 겨울 밤에도 문을 열고 통풍을 시켜 맑은 공기로 갈아야만 했다. 그리고 가끔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다고 하며 등을 문지르게도 했다. 또한 꿈에 가위에 눌려 식은 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 앉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 그는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진정하는 게 버릇같이 되었다. 나는 그이를 가만히 안고 등도 문질러 주면서 그의 고통이 내 가슴에 그대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전쟁에서 얻은 불안과 피해 의식은 그이의 섬세한 신경을 조각 내고 있었다. 이제 그의 몸은 그의 것만이 아니다. 그가 그런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나는 그이 아픔 못지않게 내 가슴이 죄어드는 아픔을 느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고쳐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결국 그의 심장 협심증은 병원 약도 끊고 그이의 의지와 내 정성으로 결혼 3년 만에 깨끗이 완쾌되었다.

 

 

0월 0일

함박눈이 퍼붓다. 그이와 같이 <인생 유전 인생 유전> 영화를 보러 갔으나 만원이라서 되돌아오다.

길은 백설이고, 사람의 홍수…. 오늘은 일요일 하루를 즐기려는 망상이 아름답게 난무!

그 많은 군중 속에 그가 내 옆에 있다. 신경이 곤두선 찡그린 얼굴, 또 가슴이 죄어드나 보다. 보행이 곤란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이 그를 순간순간 억압한다. 종점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귀가. 유리알 같은 얼음 길에 그를 부축해서 돌아오다.

이 부축의 포우즈. 조심스런 심경. 불쌍한 생각만 든다.

산산이 조각난 신경을 내 체온으로 품어 주면 될까? 내 인생은 이제 따지지를 말자. 이사람 앞에 이 길 닫는 데까지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저녁에는 효자동 한의 漢醫한테 가서 한약을 지어 가지고 오다. 어둠은 깊고 바람은 세차게 불고 발 밑은 미끄럽다. 고기 한 근과 약 뭉치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

오늘 따라 이렇게도 집이 멀구나. 나는 나를 타진해 본다.

 

 

남편이란 뜻의 무게

오래간만에 그이와 밖에서 만났다. 경향신문사 지하실 다방!

나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결혼한 이래 한 번도 경향신문사에 들르지 않았다. 더욱이 이제 남편 직장이 된 그곳에 들른다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았다.

그이는 소공동에서 양식 점심을 사주고, 내가 보고 싶어하던 덕수궁에서 전시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시회를 보고 가기로 했다.

그이는 내 접시의 고기에 소스를 쳐 주고 샐러드를 섞어 주는 등 서비스가 만점이었다. 그리고는 결식 아동으로 아는지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성화다. 결혼 전의 데이트 때보다 남편이란 뜻의 무게가 고기 맛보다 더 무겁다. 밖에 나오니 가는 비가 뿌리고 있었다.

둘은 손을 잡고 전시회장을 돌았다. 그림마다 발길을 멈추게 한다. 여인의 선이 어쩌면 그렇게 부드럽고 우아하며, 더구나 여인의 눈매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다. 짙은 유화보다 선만에 중점을 둔 스케치 같은 형식의 그림이 더 산뜻하고 좋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너무 사진으로 봐서 그런지 큰 감명은 없었고, 여인의 가슴과 머리털을 소묘한 그림이 좋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비스듬히 모로 수그린 여인의 안개 낀 것 같은, 또 동경에 찬 눈 표정과, 부드러운 턱 아래 아무렇게나 걸친 가운 위로 부풀어오른 가슴의 두 봉오리.

그 부드러운 곡선은 평화와 미와 사랑의 상징 같았다. 전체적인 선이 따뜻한 생명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

또 성모 聖母가 검은 옷깃을 헤치고 성자 聖子에게 젖을 물리는 표정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어머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찌고 건강한 애기가 입으로는 한쪽 젖꼭지를 물로, 한 손으로는 나머지 젖가슴을 움켜쥐고 엄마를 쳐다보는 그 표정이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 숨이 막힐 정도였다.

아름다운 것을 본다는 것은 역시 즐거운 것이다. 그이는 전시장을 나오면서,

“아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지금 한국서 산다면 우리 마누라보고 모델 좀 서 달라고 조를 거야. 아까 그 여자들 그림을 보며 당신하고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거든…”

“어머, 그래요? 오늘은 내 최고의 말이네요. 맛있는 점심 얻어 먹고 당신한테서 최상의 찬사까지 들었으니…”

이처럼 그이는 사는 동안 가끔 기상천외한 생각으로 웃기는 소리를 해서 나를 즐겁게 했다.

 

 

첫아기를 갖다

결혼한 후 다음해 3월 – 정확히, 결혼하고 다섯 달 되는 한식 寒食 에 그이와 고령 高靈의 선산 先山에 시아버님 성묘를 하고 왔다.

3월이라도 쌀쌀한 날씨였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나는 감기 기운인지 고열이 나고 온 몸이 쑤시는 것이 밤새도록 아팠다.

시어머님과 그이는 꼬박 밤을 새우셨다.

“네가 허 허 하더니 지독한 몸살 감기가 났나 보다. 내일 당장 병원에 가자.”

시어머님은 며느리 팔다리를 주물러 주시면서 한잠도 못 주무셨다. 아침에도 열은 떨어지지 않아 억지로 그이의 부축을 받아 효자동 종점 내과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의 자세한 진찰이 끝나자 그이는 잔뜩 겁 먹은 표정으로

“선생님 감기 몸살인가요?”

그러자 늙수그레한 의사 선생님은

“축하드립니다. 부인은 임신이신데요”

그 말에 그이도 나도 너무나 놀라 좋은지 어떤지 어안이 벙벙했고, 그이는 무슨 죄나 진 사람처럼 의사 선생님께 ‘감사합니다’만 연발하고 나왔다.

그이는 나를 부축하고 나오면서

“기원아. 우리 애기가 생긴 거야”

하며, 당장 하늘에다 고함이라도 칠 듯이 흥분돼 있었다.

나는 열도 내리는 것 같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가슴 밑 잠잠히 흐르는 어떤 감동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이의 애기를 가졌다는 이 실감은 부끄럽고도 벅찬 희열이었다.

“여보, 그럼 우리들 애기 언제 낳게 되는 거예요?”

“그건 당신이 알잖아? 집에 가서 엄마랑 따져 보자구”

둘 다 그 순간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결혼을 하면 여자는 임신을 한다는 막연했던 상식이 이제 내 몸에 현실로 나타나게 되자 실감도 안 나고 어쩐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이는 나를 부축해 날 듯이 집으로 와서는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엄마, 기원이가 애기래요”

“뭐라구? 애기라구?”

시어머님도 너무 좋으셔서 침착하신 분이 들떠 계셨다.

“어휴, 고마워라. 나는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얼마나 은근히 기다렸는데…. 아가, 열 좀 내렸니? 어서 여기 누워라”

시어머님께서 따지시더니 12월이 산월이라고 하셨다.

그런 내가 그는 불안한지

“엄마, 어린애가 어린애를 가졌으니 어떡하죠? 괜찮을까요?”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여자가 결혼하면 애기 갖는 게 당연하지. 그것보다 너도 이제 애비가 됐으니 술 좀 작작 퍼 마시고 정신차려요. 기원이 더 위해 주고…. 이제 먹을 거나 부지런히 대요”

그이는 나보다 더 들떠 있었다. 누워있는 내 곁에서 손을 잡고 얼마간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나 오늘 먹을 것 사 가지고 일찍 들어올게”

그리고 그는 신문사에 늦은 출근을 했다. 나는 누워 있으니까 감자기 온 세상이, 내 곁의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았다.

정말 그날 저녁 그이는 고기, 과일, 초콜렛 등 먹을 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집안은 완전히 축제 기분이었다.

“이제 열심히 먹고 순산해야 돼…..”

그이는 퇴근하면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첫 애고 예민해서 그런지 입덧이 몹시 심했다. 시어머님의 정성 어린 음식도, 그이가 수시로 공급해 주는 어떤 고급스런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가 면도 후에 바르는 스킨 냄새나 세수 비누 냄새도 역겨워 모두 바꿀 정도였다.

아침이면 담벼락을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고, 나중에는 노란 위액까지 토해낼 정도였다.

그이는 그런 내가 애처롭고 가엾어서 자기도 아침을 거르고 그냥 나가곤 했다.

다섯 달이 지나니까 입덧은 좀 가셨는데, 아주 몸이 쇠약해져 누워만 살았다. 눈만 더 커지고, 배는 불러 오는데 기운을 못 차렸다. 시어머님은 보약을 달여서 먹여 주며 순산만 하라고 온 정성을 쏟아 주셨다.

 

 

7월 16일 (임신 5개월 째)

엎드리면 가끔 경미한 태동 胎動을 느낀다. 벌레가 꼼지락거리는 정도의 움직임.

내 속에서 또 하나의 생명의 맥동 脈動이다. 머리 끝까지 움칫해진다. 신기하기 짝이 없다.

아아! 이제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다. 우리의 것이 생긴 것이다.

배를 깔고 엎드리면 벌써 갑갑하다고 어미한테 반항을 하는 것 같다. 배를 가만히 만져 본다. 또 잠잠하다.

거무스름한 감 꼭지 같은 젖꼭지에서 말간 젖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하고 찝찔한 물이 나온다. 벌써 자연의 준비가 생리적으로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것을 보고 자기가 위대하다고 그이는 웃는다.

과연 여자는, 혼자만의 여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일까? 또 한번의 완전한 여자란 남자가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나는 혼자 꿈꾼다. 우리의 애기에 대해서…

나는 어쩐지 첫딸이면 좋겠다. 아들이면 명석하고 용감하고, 딸이면 아름답고 정이 많은 여자가 됐으면 싶다.

아무것도 물려 줄 게 없는 우리들에게 그래도 줄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착한 마음씨 그것뿐이다.

이제 우리들의 전부인 우리들의 애기가 다섯 달 후면 태어날 것이다.

 

 

오늘도 내 가슴엔 차가운 슬픔이

오늘도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내 찬 가슴에는 빗물같이 차가운 슬픔이 흐른다.

비가 안 와 가물 때는 그의 묘분의 때가 죽을까 봐 걱정이고, 이렇게 장마가 들면 그가 누운 땅이 너무 습해질까 봐 잠이 안 온다.

차가운 것, 뜨거운 것, 싫은 것, 좋은 것에 남 유달리 예민했던 그이가 그 답답하고 어두운 땅 속에서…

나는 아직도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를 구분 못하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그가 있는 세상과 내가 있는 세상의 그 엄격한 갈림길에다 모질게 선을 긋지 못해 헤매고 있다.

문 앞에서 차 멈추는 소리가 나면 무의식 중에 몸을 벌떡 일으키다 주저앉는다. 그이가 두 번 누르던 초인종 소리, 그리고 헛기침 소리….. 그 모든 것이 환청 幻聽으로 들린다.

그가 간 후 얼마 동안은 사진첩을 꺼내 볼 수가 없었다. 어느 사진을 보아도 그이는 웃고 노래하고, 그리고 얘기하는 것 같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선명하고 다채로웠다. 30권이 넘는 사진첩을 정리하고 나니, 나는 우리의 30년 생활과 세월을 정리한 것 같은 안도감이 생겼다.

사진만이 우리들의 산 역사를 다시 조명해 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우리의 딸을 얻다

 

첫딸 기진이는 1955년 12월 7일 초산 初産의 심한 난고 難苦 끝에 이화대학 부속 병원에서 태어났다.

희미한 겨울 햇살이 드는 입원실에서 나는 내가 여자에서 어머니가 되었다는 신비감에 젖어 있었다. 한편 너무나 무섭고 아픈 진통이 하루 반이나 계속되어 정말 그 순간만은 죽었다 깨어 났으면 싶은 심정이었다.

그이는 내 심한 고통에 말을 잃은 채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길고도 끔찍한 사투 死鬪의 시간이었다.

“따님입니다”

하는 의사의 말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듣는 순간

‘딸이면 언젠가는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겠구나’

하는 가엾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첫 애였고 심한 입덧 때문에 내가 제대로 먹질 못한 탓인지 기진이는 영양도 체중도 보통 애보다 빈약한 신생아였다.

더구나 눈만은 아빠 엄마를 닮으면 크고 예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작은 눈이 위로 찢어질 듯 예쁘지를 않아서 조금은 나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기진이는 커 가면서 매력 있는 소녀, 숙녀로 변신해 갔다. 위트와 유머 감각이 뛰어난 그 애는 커서 우리를 늘 즐겁게 했다.

“엄마 아빠는 나를 못난이로 낳아 주었지만 저의 후천적인 노력으로 요만큼 예뻐진 거예요”

아빠하고 제일 많이 닮은 기진이는, 첫정이라는 것도 가미되어 할머니와 아빠, 온 식구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기진이의 육아 일기

난산 끝에 낳은 첫 애가 돼서 그런지 발육이 좋지 못해 걱정이다. 그래도 우유보다는 모유가 좋을 것 같아 젖을 먹인다. 젖 양은 많이 않으나 기름기가 진해서 질은 좋은 것 같다는 시어머님의 말씀이시다.

기진 – 한 달이 가까워 오니까 제법 살도 쪄서 정상으로 되어가는 것 같다.

밤에는 한 번씩 우유를 섞어 먹인다.

기진이에게 우유를 타 먹일 때마다 그이도 꼭 일어나 거들어 준다. 기진이는 젖만 먹으면 밤에도 별로 보채지 않고 매우 순한 편이다.

밖은 추운가 보다. 그가 들어와 술 기운이 있는데도 기진이를 껴안고 뽀뽀를 한다. 아빠 수염이 따가운지 기진이가 얼굴을 찡그린다.

 

 

12월 6일

소아마비, 파상풍 예방 주사를 모두 맞혔다. 오늘도 책방에 나온 육아 책을 가져다 읽는다.

낮에 소아과에서 체중을 달아 보니까 이젠 몸무게가 표준을 넘는다. 살이 찌니까 눈이 더 작아진 것 같다.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 같은 건 나만의 성급한 착각일까?

 

 

8월 10일

이제 제법 예뻐져 간다. 기진이는 목욕을 좋아한다. 그 동안 푸른 변 便 한 번 안 보고 탈없이 자라 주는 게 고맙다.

젖도 제가 먹을 만큼 먹으면 젖꼭지에서 입을 싹 떼는 것이 신기하다. 욕심이 없고 분수를 아는 애가 되려는 건가?

 

 

10월 6일

마구 기어 다녀서 화장대의 화장품을 모두 치웠는데, 이젠 아빠 책상 위에 기어 올라가 마구 책을 빼 던진다. 그이는 기진이의 그런 장난이 대견한지 같이 책을 던지며 놀아 준다.

내가 야단을 치면 하얀 이를 내놓고 웃는다. 아빠가 목말 태워 주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나는 아빠의 키가 너무 커서 어지러워할까 봐 걱정이다.

돌이 가까워 오는데 ‘따로따로’도 안 하려고 한다. 하지만 무리를 해서 세우지는 말아야지. 여자애인데 다리가 휘어지면 안 될 테니까…

 

그 해는 나로서 뜻있고 수확 찬 한 해였다. 첫딸 기진이를 낳았고, 또 여성지에 단편이 당선돼서 내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문학에 뜻을 두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생겼다.

또 한번의 완전한 여자.

 

 

2월 8일

입춘도 지났다. 올 겨울은 동면 冬眠을 한 셈이다. 먹고 자고 기진이 젖 먹이고, 완전히 동물에 가까운 생활이었다.

문득 이런 생활의 연속일까 봐 두렵다. 그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기진이가 하루가 다르게 예뻐져 간다. 엄마를 알아보는 그 까만 눈동자가 신기하다.

나의 사색의 줄기가 아주 평범해진 것 같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 일을 착수해야지.

1백 원 한 장이 새로운 요즘이다. 그렇지만 별로 걱정이 안 된다. 쌀 뒤주에는 쌀이 있고, 김장 김치가 독에 있고,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배 고프지 않고 춥지 않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닌가.

거울을 보면 내 눈동자에는 티끌만한 불안도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잘 산다는 것이 결코 물질만의 풍요는 아닐 것이다.

기진이를 재우고 문 밖으로 나오다. 백설 白雪에 뒤덮인 길과 지붕과 나무의 눈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잠시 현기증이 난다. 공연히 오래간만에 마음이 흥겨워진다. 이런 날이면 무던히도 걷고 싶었다. 어린애 모양 돌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갔다 해 본다.

바스락, 머리 위 나뭇가지에서 눈 한 송이가 떨어졌다. 무겁고 차가운 꽃 한 송이가 떨어지는 것 같다. 설화 雪花 일까? 모든 것이 곱게만 보이는 오후이다.

3월부터 써야겠다. 부지런히 써야겠다. 그저 꾸준히, 기교를 부리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종이에 옮기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다.

나를 혹사하고 학대시켜서라도 가정과 문학을 같이 양립해 나갈 수 있는 나로 키워야겠다. 하루에 몇 분이라도 붓을 드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무엇인지 가슴에 팽창해 오는 느낌이다.

지독히 사랑하고 무지무지하게 쓰고 곱게 죽고 싶은 밤이다.

자다 깨서 그가 담배를 피운다. 밤 10시 반, 방 안에 그의 향긋한 담배 향기가 퍼진다.

기진이가 자면서 옹알거린다.

우리의 세 덩어리가 어쩐지 눈물겹도록 고맙게 느껴지는 밤이다. 젖이 찌르르 괸다.

처마 끝에 눈 녹는 소리가 찰싹대고, 기진이는 젖을 찾아 울고, 그이는 그가 서투르게 작곡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리.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거

여름 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박인환 씨의 시에 그이가 곡을 붙인 <세월이 가면> 은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와 곡이 명동 어느 술집에서 만들어진 날 밤, 그이는 집에 들어와 내가 시집 올 때 갖고 온 장난감 피아노로 음을 잡아 다듬고 오선지에 채보를 했었다. 이것이 1956년 봄인 것으로 기억한다.

 

 

2월 13일

여자는 모든 정세에 대응하여 거기서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는 노력을 남자보다 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남자나 직면하는 것과 같은 외부적인 순응도 해야 되겠고, 그 위에 여자만의 내면적 성장과 육체적인 경험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이란 남녀가 서로 안심하고 서로가 각자의 자기 파괴적 행위에 대항하여 방어하는 것이라는 소극적인 요소 이외에, 적극적인 본능적 인력 引力 과 힘을 그 기초로 하는 것 같다.

구체적인 결혼의 뜻을 모른 채 결혼 전의 정신적인 낭만과 아련함만이 있었던 나는, 육체의 경험과 함께 여자에서 어머니로 변신한 것이다. 또 한번의 완전한 여자란 남자가 싹트게 해준다.

놀랍고 부끄럽고, 또 기다리며, 그 속에 파묻혀 나는 성숙해 갔다.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음 속에 우상화 偶像化 한 여성형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역사 속의 인물도 아니고 현세의 유명인도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 군림한 뚜렷한 하나의 이상적인 존재였던 그 여자는 어디까지나 아름다웠다. 성과 理性 이성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뜨거운 가슴과 빙산 같은 차가움을 동시에 지닌 여자….

나는 철들 때부터 희미하게나마 결혼에 대해 거부의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의 소망은, 문학을 숙명적으로 하겠다는 생각과, 또 하나 결혼은 나의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창조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가정과 문학의 두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면, 서슴지 않고 혼신 魂身을 썩히고 정화시킬 결혼을 택할 것이다.

우리의 생활은 곧 문학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결혼 그리고 1년

결혼 1년! 그것은 내 생애에 있어 하나의 변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코 감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놀라고 당황하고 슬프고 도 실망하고, 그러나 또 미워할 수 없을 만큼 무조건 그대로 끌려 들어가 자신을 무너뜨려 버리고…. 그렇게 우리는 사랑했다. 생활은 곧 영혼과 육체의 부딪침 그 조화였다.

그리고 결혼 1년은 혼돈과 깨우침과 감미로운 비애 悲哀의 반복이었다. 이진섭 그 사람은 다채롭게 복합된 색깔의 남자였다. 그리고 나한테 대한 소망도 기대도 컸다.

아름다운 아내이어야 하고, 칠칠한 애기 엄마이어야 하고, 제 시간 제 일을 가질 수 있는 지적인 여자이어야 하고, 또 언제나 자기 시야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이는 나에게 욕심 많은 남편이었다. 항상 소유하고 확인하고 그리고도 미흡해 했다.

시어머님과 일하는 애가 살림을 봐 주었지만, 나는 기진이 기르고 그이 뒷바라지만 하는 것도 힘이 들었는지 몸이 많이 수척해졌다. 눈은 더 커지고 얼굴 색도 좋지 않았다.

친정 나들이도 못하고, 친구들과 만나 놀러 다닐 사이도 없었다. 그때 시집 안 갔던 동생 기선 基善이가 주로 와서 말벗도 돼 주고 기진이를 데리고 놀아 주기도 했다.

 

 

영화에 손 대다

청운 동 집에서 기진이 돌을 지내고 걸음마를 할 무렵, 우리는 4년 동안 살던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

주인 댁 아드님의 혼사가 결정되어 사랑채를 비우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두 번째 애기를 임신 중이었다.

기진이 때보다는 입덧도 수월히 넘기고 몸도 좀 건강해졌다. 집은 옮겨야 할 텐데 그때만 해도 집을 살 돈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우선 그 동네로 옮겨 앉기로 하고 집을 보러 다녔는데 마음에 드는 온채 집이 없었다.

하지만 주인 댁하고 집을 비우기로 한 약속 날짜가 촉박해 우리는 할 수 없이 그 아래 골목에 허술한 방 두 개가 있는 집으로 옮겼다.

방문 뒤는 주차장이어서 아침마다 차 시동 거는 소리가 시끄러웠고, 처음으로 남의 집이라는 초라한 마음이 들었다. 걸음마를 시작한 기진이가 뜰 같지도 않은 마당에서 뒤뚱거리며 다니는 것도 가엾어 보였다.

그이도 그것이 가슴 아팠는지 무리를 해서라도 큰 온채 집으로 옮겨야 되겠다며 곧바로 집을 다시 보라고 했다. 그 정 안 가고 초라한 집에서 길고도 무더운 장마철을 지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사람이 사는 데 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했다.

그런 속에서도 기진이는 종알대며 말을 배우고, 저녁이면 쪽 마루에 앉아 달을 보며 “딸, 딸”이라고 해서 우리들을 웃겼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돈암동 온채 기와집으로 좀 무리를 해서 이사를 했다. 그것도 물론 전세였다. 마당이 돌바위로 된 것이 흠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이 넓고, 긴 마루에 뜰아랫방까지 있는 제대로 된 집이었다.

그이는 그때, 경향신문사 한창우 사장님 후임으로 오신 새 사장님과 뜻이 안 맞아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이가 경향신문사에 있을 때, 후반에는 조사부장까지 맡아 그 당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축소판 신문이라는 것을 냈었다. 즉, 신문을 축소해서 다시 찍어 연도별로 책같이 만든 것이다. 이것은 신문사의 연구 보존용으로 그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 후 그이는 고 故 홍찬 洪燦 씨가 큰 의욕과 포부로 시작한 안양 촬영소 수도 영화사에 창설 멤버로 들어갔다. 이 안양 촬영소의 후신 後身을,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인수했던 것이다.

그때 창설 멤버로 기억나는 분들은 故 유한철 劉漢徹 씨, 차태진 씨, 그이 등 여러 분들이 있었는데, 제각기 하나씩의 부서를 맡아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 시스템으로서 우수한 한국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정열과 의욕으로 가득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 生命>이었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멤버들은 안양 촬영소에서 기숙을 해 가며 정열을 쏟았다. 물론 그이도 그 작품이 끝날 때가지 수차 밤을 샜고, 먹는 것, 잠자리 등이 고생스러웠음에도 온갖 열정을 쏟았다. 때로는 열흘 씩 집에 못 들어와 나는 그이가 갈아 입을 옷을 챙겨 가지고 안양까지 가기도 했다.

그때 그이는 얼굴이 까칠해지고 고생스런 티가 역력했지만, 남자가 뜻을 두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신선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안 되었다. 생각과 의욕만 앞섰지 그때 홍 사장은 그렇게도 고생하는 이들의 뒤를 대지 못했다. 그리고 사업상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홍 사장이 역경에 빠지게 되어 안양 촬영소도 더 이상 버틸 능력이 없게 되자 모두들 패잔병같이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고생한 사람들한테 한 달치 봉급도 지불이 안 된 것이었다.

그이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좀 고생스럽지만 그것은 잊어 버립시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고, 도저히 가망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배신감만은 씻을 수 없지. 걱정 말아. 나는 또 일거리가 많으니까. 부지런히 쓰면 되는 거야.”

그이는 워낙 성격이 대쪽 같은 사람이라 길게 꾸물꾸물 끄는 것을 싫어했다. “이것은 아니다’ 라고 판단을 내리고도 그것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는 것같이 어리석고 싫은 것은 없다고 했다.

그이는 또 사디 자막 자막 번역을 시작했으며, <망향 望鄕>이란 한국과 홍콩의 합작 영화 시나리오를 위촉 받아 쓰기도 했다.

 

 

남편에서 두 딸의 아버지로

 

그이가 <망향> 시나리오를 썼을 때 각본료의 일부를 둘째 애 출산 준비로 마련해 놨다. 그때만 해도 은행에 예치해 놓을 만한 돈도 없었으므로 목돈이 생기면 나는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나만 아는 장롱 깊이 넣어 두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산기가 있어, 그이하고 병원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한 뒤 돈 뭉치를 찾으니까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경산 경산 이었지만 진통은 시시각각으로 찾아 드는데, 장롱 구석구석을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잘 생각해서 찬찬히 찾아 봐. 확실히 거기 넣었단 말야?”

그이의 말에 나는 배가 아픈 것도 참고, 징징 울면서 온통 장롱을 다 쏟아 놓고 찾았다.

“이 바보야, 지금 울 때야? 애가 나오려고 하는데….”

그이는 드디어 폭발했다. 나는 그 경황에도 바보란 소리가 서러워 또 울었다. 그러던 중 천우신조로 돈 뭉치가 나왔다. 나는 돈 뭉치를 안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항상 너무 조심성 있게 잘 둔다는 게 탈이었다.

1957년 6월 29일 12시, 가랑비가 내리는 날 나는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둘째 딸 기영 基英이를 순산했다. 초산인 기진이 때와는 달리 뜻밖에 빨리 순산을 했다. 그이가 입원을 시켜 놓고 집에 간 사이 두 시간 만에 낳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이는 먹을 것을 한아름 사 안고 병실에 들어왔다. 애기를 낳은 후 남편과의 첫 대면은 사경을 딛고 선 고통 뒤에 얻은 영광 때문인지 각별한 감동이 이었다.

“수고했어. 순산해서 다행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보, 어떡하지? 또 딸이래”

“딸이면 어때? 상관없어…. 그것보다 많이 먹구 젖 잘 나와야 해.”

그때 간호원이 우리에게 애기를 첫 대면시키러 데리고 왔다. 간호원은 애기를 아빠에게 안겨 주면서

“요렇게 예쁜 따님이니 아빠는 섭섭해 하시면 안 되겠어요.”

했다. 기영이는 살이 토실토실 찌고 등에는 곰새끼 같이 털이 소복히 난 게 기진이 때보다 영양이 좋아 보였다.

그이는 멋 적게 웃으며 내 팔에 애기를 눕혔다.

“아직 예쁜지는 모르겠지만 얼굴판은 당신 닮은 것 같군”

나는 몸도 가볍고 깨끗해 사흘 만에 퇴원해 집으로 왔다.

 

 

 

기영이의 육아 일기

 

7월 1일

젖이 돌지 않아 걱정이다. 밤 11시쯤 애기가 몹시 울어 간호원이 데리고 왔다. 우는 소리가 한 달이 넘은 애기보다 크고 우렁차다며 칭찬 아닌 칭찬.

목도 적시지 못하고 간다. 애기가 배가 고파 우는데 젖이 안 나와 그냥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고 나도 울었다.

애기 낳고 24시간이면 보통 사람은 젖이 도는데…. 밤에 우유 사러 다니는 꿈을 꾸었다.

 

10월 21일 (기영이 세 살 때)

밤새 기영이 열이 오르고 보챈다. 체온계가 39도에 가깝다. 어린애로는 고열이다. 소아마비, 기타 예방주사는 모두 끝났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에 든 눈으로 밤을 새우다.

새벽에 동네 소아과에 데리고 가다. 편도선이 붓고 감기라 해서 주사를 맞히고 약 가지고 오다. 밤 공기가 건조할까 봐 물 끓여 김이 오르게 하고, 오렌지 주스를 미지근하게 해서 먹이다.

 

 

10월 25일

여전히 열 안 내리고 숨이 가쁘다. 가엾어 볼 수가 없다. 내가 대신 아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네 병원에서는 안될 것 같아 아빠와 같이 혜화동 할머니 댁 병원에 데리고 가다. 온 식구가 혜화동에서 자다. 이 병원에서도 역시 편도선염 감기라고 한다.

크면 수술을 해줄까 고 물었더니 수술한 만한 정도는 아니라며, 더 커서 건강해지면 걱정할 게 없다고 한다. 이렇게 어려운 때 시어머님 곁에 와 있으니까 마음이 든든하다.

 

 

9월 2일 (기영이 다섯 살 때)

기영이는 보통 애보다 음감 음감이 예민하다. 엊저녁에 라디오에서 ‘봉선화’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같이 듣고 있던 기영이가 금새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라디오 스위치를 제가 가서 끈다. 하도 이상해서

“기영아, 왜 그래?”

하고 물었더니, 기영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싫다고 한다. 참 이상한 애다. ‘봉선화’ 노래를 들으면 슬퍼지나 보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운다. 싫다는 것이다. 슬픔을 안다는 것은 두려움을 안다는 것인데…

엄마로서는 신기하고 두려운 사실이다. 감정이 너무 예민한가 보다. 기영이가 커서 슬픔을 알되 참을 줄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할 텐데…

그 후에도, 아빠가 그런 기영이를 신기해 하며 ‘봉선화’ 노래를 부르면 여전히 나한테 뛰어와 얼굴을 파묻고 영락없이 울었다. 이리하여 기영이 앞에서의 ‘봉선화’는 금지곡이 되었다.

기영이가 큰 다음 그 당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저도 그때 일이 기억난다며, 지금도 ‘봉선화’ 노래를 들으면 슬퍼진다고 했다.

그런 기영이가 커서 음악을 하고, 도 음악가 부인이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 아닌가 한다.

 

 

시발 택시 위의 해프닝

돈암동에서는 반 년 넘어 살았다. 그때는 정기적인 고정 수입이 없어 그이는 자막 번역과 시나리오 집필을 주로 했다. 집에서 일을 할 때는 술을 안 하고, 밖에 나가면 술을 하고 들어왔다.

그 해 겨울이었나 보다. 눈이 많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낮에 나간 그이가 통행금지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 둘을 재우고 온 정신이 문 밖에 쏠리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히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감적으로 뛰어나갔다. 당시엔 시발택시가 한창인 때였다. 시발 택시 지중은 널찍하고 편편했다.

그이는 흰 눈이 덮인 시발택시 지붕 위에 누워서 늘어지게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은 달빛이 은색으로 빛나고, 이진섭 씨는 하늘을 향해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운전 20년에 저런 양반은 처음예요. 아주머니 빨리 요금 주시고, 같이 끌어 내려요.”

어린애 달래듯이 겨우 택시 지붕에서 끌어 내렸다.

그랬더니 이진섭 씨 왈

“자네는 차만 끌 줄 알지 이런 멋진 밤을 모르는 불쌍한 놈야. 자 요금”

그이는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내 한줌 집어 준다. 그 돈이 타고 온 요금의 몇 배가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제서야 운전수는 갑작스런 횡재에 입이 벌어지며

“아저씨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하며, 깍듯이 정중한 인사를 하고 가버린다.

나는 그때쯤엔 별로 놀라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두꺼워졌다. 그때는 운전수 옆에 조수가 탈 때도 있었다. 그이는, 어떤 대는 조수 녀석이 잘 생겨 기분이 좋다고 더 주고, 어떤 때는 운전수가 늙어서 가엾다고 더 주곤 했다.

나는 그런 일을 처음 겪었을 때는 그 억울한 택시 값이 아까워서 안달하며 잠을 못 이루었던 때도 있었다. 그 돈이면 며칠간 반찬 값일 텐데….

그 후 나는 택시 값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모래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술에 취했을 때 그의 호주머니에 있는 돈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휴지 조각보다 못한 값어치의 그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이 걸작이다. 술이 깨서 호주머니가 엄청나게 빈 것을 안 그이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중얼거린다.

“이상한데…. 술은 아무개가 사고 나는 택시 탄 것밖에 없는데…”

이제 그때부터 내 차례다. 전날 밤 그런 해프닝이 있었던 아침이면 이미 내 기색이 좋을 리 없다. 잔뜩 독이 올라 무언 無言 공세를 취하다가 그이가 먼저 말을 꺼내면 나는 공격을 개시했다.

“알았어, 알았지. 그만 둬. 오늘은 별일 없으니까 이걸로 될 거야. 오늘은 일찍 들어올 게”

마음 약한 그는 그날 용돈이 모자라도 나한테 더 달라는 말을 못한 채 뒷덜미를 잡힐까 봐 휑하니 나가는 것이었다.

 

 

정치 요원 암살단 두목(?)

그때만 해도 문인들, 화가, 기자들이 저녁때 어울려 모이는 곳은 주로 명동이었다. 다방은 주로 동방 東邦 살롱, 휘가로, 모나리자, 돌체 등이었다.

나는 3년 동안 애 둘 낳고 거의 집에만 있었지만, 그런 옛날에 다녔던 거리에 향수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나는 기진이하고 놀 때 노래도 해주고, 자기 전에는 ‘왕자와 청개구리’, ‘백설공주’, ‘심청전’ 등의 옛날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애들이 읽을 만한 동화책이 없었다.

기진이는 서럽고 가엾은 대목이 되면 눈물을 글썽이며 한숨까지 쉬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애였다. 기영이는 토실토실 살이 찌고 인형같이 예뻤다.

그런 어느 날, 낯선 손님이 그이가 출타 중인데 찾아왔다. 말쑥하게 생긴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자기의 신원을 밝혔는데 기관원 機關員, 즉 정보부원이었다.

“놀라지는 마십시오. 이 선생님께 긴히 상담드릴 게 있어서요. 선생님께서 내일 아침에 저희 사무실로 똑 출두를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단, 꼭 이 선생님이 나오셔서 증언을 해주셔야 저희가 일을 해결할 수 있고, 이 선생님께도 유리한 일이라는 것을 들어오시면 전해 주십시오.”

나는 그 남자가 간 후 불안하고 조바심이 났다. 또 무슨 일일까?

경찰서도 아니고 정보부라면 더 으스스하고 무서운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정신이 나간 상태로 그이를 기다렸다. 저녁에 그이가 들어오자마자 그 말부터 전했다.

“나가 보지 뭐. 별일 아닐 거야. 내 신분이야 이제 누가 뭐래도 깨끗한데 무슨 일이야 있을라구. 걱정 말어. 남의 일로도 증인으로 부를 수 있는 거니까. 대한민국에서 나를 빨갱이로 몰 놈은 한 놈도 없을 거야.”

그이는 대수롭지 않게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그날 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이는 다음날 9시까지 그 사무실로 출두했다. 나는 그이를 내보내면서

“여보, 그쪽에서 무엇을 물어 볼지 모르겠지만 공손하게 대답하세요. 그리고 내가 궁금하니까 일 끝내면 곧바로 집으로 들어오세요.”

“응, 걱정 말어. 별일 없을 테니까. 내 곧장 집으로 올게”

나는 그이를 내보내 놓고도 하루 종일 마음이 공중에 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부라는 곳이 마음에 걸렸다. 자기는 그렇게 쉽게 말하고 나갔지만 어쩌면 오늘 밤도, 내일 밤에도, 아니 더 오래도록 그이는 소식도 없이 못 들어올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런데 그이는 3시 좀 넘어 맥주와 애들 먹을 것을 한아름 안고 명랑한 얼굴로 들어왔다. 나는 그이를 몇 년 만에 만나는 것 같은 기쁨으로 반겼다.

“여보, 별일 없었군요. 어떻게 된 일예요?”

“당신 걱정할 것 같아 지금 곧자 집으로 온 거야. 정말 웃기는 세상야.”

“왜 그런 무서운 곳에서 당신을 불렀대요?”

“글쎄 말야. 어떤 미친 놈이 나에 대해 투서를 했는데, 그 죄목이 무엇인지 알아? 기가 차서”

“뭐라구요? 누가 투서를 해요?”

“글쎄, 이진섭이가 정치 요원 암살단 두목이라고 했대”

순간 나는 그만 눈물이 나도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라구요? 당신이? 어쩌면 이진섭 씨를 그렇게 무섭고 어마어마한 남자로 봤을까요? 누가 그런 장난을 했어요?”

“장남 같지가 않으니까 그쪽에서도 좀 긴장을 했겠지. 정보부가 어던 덴데 장난질을 해?”

“그런데 어떻게 조사도 안 하고 당신을 풀어 주었대요? 또 오라 가라 귀찮게 되는 거 아녜요?”

그때 그이는 맥주를 마시면서 껄껄거리고 웃어댔다.

“글쎄, 그 다음이 걸작이란 말야. 투서를 받은 정보부에서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두 달 동안 전담 요원이 나를 아침부터 꼬박 미행을 했대. 그랬는데 암살단 두목이란 작자가 어디서 단원을 모아놓고 모의 같은 것을 하는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저녁때면 노상 술이나 걸치고 영락없이 집으로 직행하니까 맥이 빠진 거지. 그래서 거꾸로 투서한 놈을 모함죄로 잡아 넣은 거야. 그래서 내 증언이 필요했던 거고…”

“도대체 그런 정신병자 같은 작자가 누구예요?”

들도 보니까 그 사람 이름은 나도 알 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감정이 있었나요? 왜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을 했어요?”

“글쎄,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작자한테 잘못한 기억이 없고, 친분도 없어. 세상이 하도 시끄러우니까 그 사람이 약간 광대망상증에 빠진 거지. 오히려 그 작자가 혼나게 돼서 안 됐어.”

“안되다니요? 멀쩡한 사람을 무고하게 장난질한 그런 작자는 무고죄로 혼 좀 나야죠. 요즘이 어떤 세상이라고 대천지 밝은 날에 죄 없는 사람을 갖다 까바쳐요?”

나도 은근히 화도 나고, 어이도 없었다.

그이는 내가 걱정할까 봐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두 달 동안 자신이 기관원한테 미행당했다는 사실이 불쾌하고 신경에 걸렸던지, 그 후 얼마 동안은 술기만 있으면 누가 자기를 뒤쫓고 있다는 피해 망상증에 사로 잡혔다.

광속에 놓여 있는 숯 섬을 보도고 사람이 숨어 있는 걸로 착각하고, 물 끓는 소리만 나도 자기 말을 누군가가 수군거리며 엿듣는다고 겁을 내곤 했다. 결국, 예민한 그이의 신경을 그 무고한 사건이 자극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와 내가 같이 겪었던 아픔의 하나였다.

 

 

 

새 보금자리와 철부지 아내

 

돈암동 집에 이사를 해서 그 해 겨울을 맞이한 어느 날, 그이는 아주 기분이 좋아 들어왔다.

“여보, 우리 집 하나 생겼어. 그리고 이사합시다.”

나는 그이의 갑작스런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집 살 돈은 아직도 멀었는데 누가 집을 거저 준대요?”

“거저가 아니라니까. 대한주택영단에서 홍제동 넘어 세검정 거는데다 집을 몇 십 채 지었는데, 입주 우선권을 집 없는 문화인들에게 주기로 했대. 우선 입주금 얼마만을 내고 몇 년 연부로 갚으면 내 집이 되는 거래. 방이 셋이고, 마당도 있고…. 오늘 몇 사람이 우선 신청을 했는데 나도 신청하고 오는 길야.”

그이는 마치 개선 장군처럼 의기양양해 했다. 하지만 나는 금방 좋아지지 않았다.

“왜? 당신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방 셋에 마당도 있고, 변두리가 돼서 공기도 좋대”

“당신, 집이나 보고 신청하셨어요? 집이라고 다 집인가요? 살 사람이 집을 보고 정해야죠”

그이는 따지거나 남을 의심 못하는 성격이라 그것이 불안했다.

“생각해 봐. 집 없는 문화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경쟁이 심해 우선 신청부터 해 놨어. 그리구 내일 남자들이 먼저 보러 가기로 했어.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집을 장만하는 게 수지. 애들은 커 가고, 언제까지 전세로 다닐 거야? 그렇잖아?”

그이는 이 보고를 하면 내가 금방 반기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좀 냉랭하자 약간 풀이 죽었다.

“내일 내가 우선 보고, 당신은 며칠 있다가 가 보면 될 거야”

그이는 새 집 가는 일로 들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그이를 다라 소설가 고 故 김광주 선생님 내외분과 시내에서 만나서 함께 갔다.

12월이었다. 눈이 녹지 않은 허허벌판, 밭이 양 옆에 있는 길을 우리는 10 분이나 걸어 들어갔다. 나는 서울 토박이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서대문 밖을 나가 본 적이 없고, 이렇게 광야 같은 데를 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홍제동이라면 화장터가 있다는 인상밖에 없었다.

그날도 멀리 보이는 화장터 굵은 굴뚝에서는 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북악산에서 내려 부는 바람은 볼을 에었고, 그보다 나는 마음이 시려 오고 처량스러워 겨울 햇살보다 더 찌푸린 얼굴로 일행을 따라 갔다.

포장도 안 된 논두렁 같은 곳에 빗살같이 쪼르르 서 있는 성냥갑 같은 집. 담도 없고, 겨우 집의 형체만 갖추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대지 30평에 건평이 18평이나 됐을까?

촌색시 분 발라 놓은 것 같은 페인트 칠에 시풍덩하기 짝이 없었다.

“여보, 이제 담만 두르고 대문만 달렴 제법 아늑해질 거야.”

하지만 나는 좋다는 대답이 선뜻 안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걸어 나오면서 드디어 우리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철이 안 났는지, 도대체 찻길에서 10여 분을 걸어 들어간다는 것과, 밭에 (그때 그 밭은 서대문 형무소 죄수들이 나와 농사를 짓는 밭이었다) 수렁 같은 길, 그 모든 것이 서글프고 싫었다.

“도대체 당신은 고생을 몰라. 철부지야. 첫술에 배 불러? 우선 이런 기회에 목돈 안 내고 작은 집이라도 장만하면 차차 좋은 집으로도 갈 수 잇지. 왜 그래?”

나는 대답도 안하고 잔뜩 부은 채 눈 길만 터덕거리고 걸었다. 기진이, 기영이, 그 어린 것들을 이 구석까지 데리고 와 담도 없는 초라한 집에서 살 생각을 하니 서럽고 공연히 화가 났다.

그의 무능을 탓하기보다, 집이란 언제나 자기가 원하고 살고 싶은 곳에서 사는 것쯤으로 안 나로서는 기가 찬 노릇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올 거야 안 올 거야?”

“난 싫어”

나는 드디어 내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드디어 그이의 신경질이 폭발했다.

“좋아. 그럼 나는 기진이, 기영이 데리고 이사할 테니까 당신은 친정으로 가 살어.”

그 순간 나는 훌쩍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병신. 밤낮 울기는 …. 뒤통수에다 우물을 팠어? 어휴 답답해. 고집장이 어린애를 데리고 사니…”

그 말에 나는 마침내 소리를 내며 울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김광주 씨 내외분이 나를 달랬다.

그때 내 나이 스물 아홉이었느니, 지금 생각하면 애는 둘 낳았지만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모르는 철없는 애 같은 어른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학 소녀 티에서 조금 벗어난 결혼 3년에, 아직도 낭만과 현실 생활의 중간에서 그의 얼굴만 쳐다보며 웃고 울고 하던 믿을 곳 없는 여자였다.

그이는 집에 돌아와 그날부터 전술을 바꾸어 나를 회유하고 달래기 시작했다.

이런 기회에 그런 집이라도 꼭 잡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자기 결심과, 그렇게 살다가 자기가 열심히 벌어 내가 원하는 집을 꼭 사 주겠다는 약속, 도 시댁과 우리 친정 어른들의 권유로 나는 결국 그에게 승복하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그 집 – 문화촌에서 그이가 큰 집을 사 주겠다는 그 약속도 잊은 채 20년을 산 것이다.

 

 

문화촌 시대의 문화인들

우리는 그 다음해 3월에, 문화인들이 모여 산다고 문화촌 文化村 이라고 이름 지은 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름 그대로 문화인들이 주축이 돼서 이룩된 마을이었다. 그때 같이 입주한 문화인들로는 이해랑, 김광주, 유호, 이순재, 장민호, 조항, 코주부 김용환, 조능식, 유화열 제씨들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이사할 당시는 자유당 때로서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던 때였다. 그래서 서대문구에서 출마했던 고 故 이기붕 씨가 비서를 통해 쌀 한 가마와 화분 하나를 선사해 준 일이다. 그리고 선거 연설 때 약속했던, 문화촌까지 들어오는 새 버스 노선을 다음해에 신설해 주었다.

이사 가서 얼마 동안은 서로 담이 없으니까 마당에 내려서기만 하면 모두 한 울타리 같았다. 아침이면 남자들이 파자마 입고 이 닦는 것도 보이는가 하면, 옆 집에서 무슨 생선을 굽는지도 알 정도였다. 우리 집 건너 집이 신협 新協 멤버이자 배우였던 고 故 조항 씨의 신혼 보금자리였고, 우리 뒷집이 장민호 씨, 그 윗집이 이해랑 씨 댁이었다.

얼마 있다가 울타리 담을 하고 쇠 대문을 달았는데, 그제서야 내 집이라는 아늑한 마음이 생겨 정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부지런히 마당에 나무를 심었다. 감나무, 포도나무, 앵두나무, 라일락, 장미꽃 등…

작은 마당이지만 우리 두 딸은 꽃나무 밑에서 소꿉장난도 하고 아빠하고 뛰놀기도 했다.

건넌방은 겨우 두 사람이 누울 정도였지만, 거기는 아빠 서재로 했다. 서재라기보다는 ‘일방’ 이라는 말이 알맞을 그런 방이었다.

그래도 집이 정남향이라 햇살은 하루 종일 밝게 들었고, 북악 기슭에서 우는 새소리로 잠이 깨곤 했다. 그때만 해도 집들이 안 들어서서 넓은 공간 속에 우리 문화인들만이 비슷비슷 한 처지에서 대가족같이 살았다.

토요일 오후면 어느 한 집에 모여 소주 파티도 벌어지고, 일요일이면 애들을 모두 데리고 세검정 계곡의 맑은 물가에 가서 닭 죽 파티를 열기도 했다.

집 값은 일 년에 두 번 내기로 돼 있었다. 그이는 자기 말을 듣고 이 집에 이사 와 제법 내 집 마련한 것을, 사는 동안 내내 대견해 하고 고맙게 생각했다. 나도, 작으나 내 집이라는 안도감에 살림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냉장고는 큰 시누님이 주셨고, 그때만 해도 가스 레인지가 흔하지 않을 때였는데 하루는 그이가 가스 레인지를 사 들고 와서 나를 신나게도 했다.

그 무렵 나는 그릇도 많이 사고, 여자가 살림을 한다는 평범한 재미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여튼, 가기 싫다고 징징 울다 간 문화촌 시대 20년은, 결국 그이와 나의 결혼 생활에 많은 역사와 추억이 깔린 시대였고, 국가적으로는 자유당 붕괴, 4.19 혁명, 또 5.16 혁명 등 역사적인 격동기를 겪었던 시대였다.

시대의 변혁과 함께 우리는 그 속에서 숨쉬고 살았는데, 그이 개인으로서는 일도 많이 했고 술도 절정으로 마셔댔으며, 도 처음으로 해외 여행 문이 열리고 계속적인 여행길에 오르게도 되었다.

도 문화촌 집에서 기광 基光, 기민 基民 두 아들을 얻었고, 그때마다 겪은 여러 가지 일…

어쨌든 우리 결혼 생활 30년 중 20년을 차지했던 문화촌 시대는 우리 생활의 절정기였고, 도 그만큼 격동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이진섭 씨 생애 중에 일도 제일 많이 했고.

그 일이 비록 한국 문화 역사에 크게 기여할 만한 자국을 남기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한 개인의 흔적으로는 열심히 정열적으로 일했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이는 60년 대부터 70년 대 후반까지 코리아 헤럴드 – 대한공론사 大韓公論社 편집 위원으로 재직했었다. 그가 코리아 헤럴드 편집 위원으로 있을 때 사장은 김봉기 金鳳基 씨였고, 편집국에는 수주 樹州 변영로 선생님의 자제인 변문수 씨가 같이 있었다.

그이는 살아 있는 동안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을 때, 그것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원인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모든 결과는 먼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세대만은 이 렇게 살아야만 하는 원인을 시대에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비극을 지니고 있다.

‘턱걸이 제네레이션’이라고 할까? 즉, 철봉틀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오르려 하면 철권으로 내리쳐 주저앉게 만든다. 한 번도 그 푸른 하늘을 못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생각 있는 남자의 몰골은 마치 주문진 해변가에 널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 같다. 축 늘어져 말라 가는 오징어들 그것일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가끔 반발도 해 보았다.

“같은 시대, 같은 상황에 살면서도 당신같이 안 살고 편안하게, 물결에 배 가듯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물론 있지. 그렇다고 내가 그 자들을 힐난하거나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그렇게 사는 게고, 나는 내 식대로 이렇게 산다는 차이가 있을 뿐야”

그이는 평생 동안 돈을 크게 벌어 보겠다고 힘써 본 적도 없으며, 도 권력이나 관권에 야심을 가지고 뛰어 본 적도 없다.

아내인 내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그이는 술을 벗하여 자기를 낮춰 가며 산 느낌이 든다.

 

 

한 줌의 재가 된 첫 장편 <설화 雪花>

그 무렵 기진이가 다섯 살, 기영이가 세 살 때였다. 그때 마침, 나에게 장편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재질이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서울신문에서 신춘 장편을 공모한 것이다. 신인, 기성 작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문호가 개방되었고, 더구나 500만 환이란 파격적인 상금도 구미에 당겼다. 신문사로서는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나는 며칠을 생각했다. 아직 소설가로서 뚜렷한 자리를 굳히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런 기회에 내 자신의 본격적인 소설을 구성해 쓰고 싶다는 의욕과, 또 그런 목적 의식을 가짐으로 해서 시간과 정열을 쏟아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재와 구상을 정해 놓은 나는 마감 석 달 전부터 집필에 착수했다.

그이를 출근시키고, 일하는 애한테 ‘새알 초콜렛’ 한 봉지와 함께 기영이는 업히고 기진이는 손 잡고 걷게 해서 내보낸 후 집필에 들어갔다.

석 달을 꼬박, 아침 밥 먹고 저녁때 그이가 들어올 때까지 쓰다가 그이가 잠들면 또 쓰기 시작하고, 그렇게 마치 신 들린 사람처럼 써 나갔다. 초고 草稿 도 없이 메모해 놓은 것만 가지고 써내려 갔다. 그이는 먹을 것을 대 주고, 밤에는 애들도 봐 주며 격려해 주었다.

2천 장 가까운 것을 석 달 하고 마감날 오전 중까지 썼다. 마감하는 날 그이와 동생 기선 基善이가 대충 교정을 보았고, 그이가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묶었다.

제목은 <설화 雪花>

어쩐지 자신감이 들었다. 응모를 한 바에야 당당히 당선을 해야지, 가작이나 입선 같은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원고만 내놓은 채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알아 볼 생각도 않고 잠잠히 결과만 기다렸다. 결과는 보기 좋게 낙선이었다. 후일담으로 알았는데, 마지막 두 편 중에서 한 표 차로 내 작품이 떨어졌다고 한다.

패자 敗者 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속으로 울었다. 석 달 동안 애들과 살림을 전폐하다시피 한 도전 치고는…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이와 대작했다. 쓴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당신에게도 장편을 쓸 수 있는 저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도 큰 수확이야”

그러나 그이의 그런 위로도 말도 나에게는 위로가 안 되었다.

인간이 자기 최선을 다하고 혼신의 힘을 불어 넣었을 때, 후회는 없더라도 노력만큼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대한 좌절도 큰 것이다. 그 후로 나는 한 번도 응모에 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낙선보다 더 큰 비운 悲運이 왔다.

4.19 의거…. 세상이 뒤바뀌고, 우리 눈앞에서 자유당은 무너지고, 학생들의 피와 애국심은 우리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날 낮에 그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 지금 서울신문사가 타고 있는데, 그곳에 보관된 당신 원고를 찾으러 들어가려니까 순경이 막고 못 들어가게 해. 저거 다 타 버리겠는데….”

나는 전화를 끊고 망연해 했다. 그 원고는 서울신문사에서 작품이 아깝다고 당선작 다음에 연재 連載로 싣기로 해서 문화부에 보관 중이었다.

초고 한 장 없던 <설화> 원고는 4.19 와 함께 재가 된 것이다. 젊은 학생들이 죽어 가고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낙선된 원고 뭉치쯤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그 후 그것을 회상해서 작품으로 낸 것이 <망각의 선상 線上에 서서>로, 전남 매일신보에 연재되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첫 작품 <설화>와 같을 수 없었다.

 

 

 

제3장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속전 속결 부부 싸움

우리는 사는 동안 부부 싸움의 종목이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이의 술로 인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쪽으로서 나의 건망증과 돈 헤프게 쓰고 살림 알뜰히 안 한다는 것…

그이의 술은 거의 매일 하는 것이었지만, 과음을 해서 무엇인가 일을 저질렀거나 나를 못살게 굴 때면 나는 그 다음날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이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했다.

“이만큼 살았으면 당신도 이제 내 술에 좀 도통해 봐. 나기가 몇인데 새삼스레 그렇게 야단야?”

그러나 그이가 취했을 때면 섬광같이 번뜩이는 광기에 같이 미쳐야만 했다.

어떤 대는 백지 위에 동그라미만 그리는 화가가 되고, 또 어떤 대는 오페라 가수, 샹송 가수, 아니면 심포니의 지휘자도 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밤이 없었다. 그러다가 장난에 지친 어린애같이 잠들어 버릴 때 그때가 내가 자는 시간이었다.

한편, 애가 그이한테 몰려 그이의 위세가 당당해질 때는 내 건망증 때문이었다.

그이가 무얼 찾으라고 하면 나는 엉뚱한 데부터 찾으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기가 찰 노릇이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두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잘 두어서 항상 탈이었다.

처음에는 펄펄 뛰며 야단을 치던 그이도 10여 년을 살고 나니까 자기도 지쳤는지, 나중에는 미리 시간을 두고 찾아보라고 했다.

“당신 같은 남자하고 사는 내가 이 정도의 건망증과 빈 구석이라도 있으니 같이 살지, 꼼꼼하고 주판알 같은 여자라며 살지도 못했을 거예요.”

이렇게 공박을 하면 그이는

“살아 주는 이유도 여러 가지군”

하면서 웃어 버렸다.

그리고 항상 돈을 다 썼다고 할 때가 문제! 이래서 또 다른 싸움거리로 번지는 것이었다. 그런 때는 내가 생각해 봐도 아주 치졸하고 일자 무식쟁이 같은 여자 중의 여자로 된 적이 있었다.

“언제 그렇게 쓰다가 만을 만한 돈이라도 갖다 주었어요? 내가 언제 명동 일류 의상실에서 옷을 해 입어 본 적이 있어요. 친구들하고 어울려 번쩍하게 놀러 다니기라도 했어요?
부부 싸움이란 항상 시시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똑같이, 자기 감정을 속에 담아두지를 못했다. 모두 털어 놔야 개운했다. 그러나 똑같이 반복되던 유치한 부부 싸움도 결국 나이가 들어 가며 지혜가 생기자 서로 양보하게 됐다.

그이는 부부 싸움도 자기 성미같이 속전속결이었다. 몇 시간 지나면 말 안 하는 것을 불편해 하고, 내가 부어 있는 꼴을 못 보았다.

그이는 ‘여자가 질긴 것이 제일 참을 수 없는 일이고, 싸움은 끝나는 순간 곧 화해’라고 말했다.

 

 

단 한 번의 가출

나는 그이와 30년을 사는 동안 단 한 번 지독한 싸움을 했는데, 그 싸움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것은 장남 기광이 돌 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이는 바쁜 원고가 있어 밤새 원고를 쓰고, 일요일 아침에야 겨우 탈고를 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원고를 쓰기란 힘들고 고단한 작업이었다.

“여보, 원고도 끝났으니 낮에 한 잔 하게 안주하고 점심으로 별식을 좀 준비해요.”

나는 기이가 좋아하는 튀김도 하고 칼국수도 만들며 부엌에서 부리나케 일을 했다. 그이는 일요일이면 거의 외출을 안 하는 버릇이 있어 나는 일요일이면 더 바쁘고 고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요일에 남편이 집에 있어 주고, 그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고 떠들썩한 것은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교회에 안 나갔으니까 일요일은 완전히 가정의 날이었다.

“여보, 술도 좋은 게 있고 안주도 좋은데 혼자 먹기엔 심심하니까 애들 시켜 김 선생 좀 오시게 하지”

김 선생님이란 그때 몇 집 걸러 사시던 김광주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내가 경향신문사에 다닐 때 문화부장으로 계셨던 분이고, 이사 올 때도 같이 온 분이다 그이도 평소에 김 선생님의 깔끔하고 경우 바른 서울 기질이 좋다며 존경하는 사이였다.

“참, 그게 좋겠군요. 애들 보낼게요”

그러나 애들이 갔다 와서 전하는 말이

“김 선생님도 급한 원고가 있으셔서 못 오시겠대요”

그 말에 그이는 조금 기분이 상한 채 혼자 술을 들기 시작했다.

밤새 원고를 쓰고 피곤한 터에 점심도 안 든 그의 빈 속은 여느 때보다 빨리 술이 올라왔다. 더구나 김 선생님이 못 오신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그이는 기차가 레일을 벗어난 듯 이상하게 비뚤어져 가며 엉뚱하게 나한테 시비를 걸어 왔다.

“왜? 김 선생은 뭐가 걸려서 우리 집에 못 온다는 거야? 그 양반이 이사 온 지 몇 년 돼도 언제 한 번이라도 우리 집에 들르셨어? 그럴 수는 없어”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김 선생님의 성격을 같은 직장에 있어 봐서 좀 알지만 아무튼 괴짜셨다. 남의 결혼식에는 통 안 가시고, 이 문화촌에 오신 후에도 남의 집에는 잘 왕래를 안 하시는 걸로 알고 있었다.

“무언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신문사에 다닐 때 항상 김 선생이 잘해 주고 좋다고, 당신 그랬지? 무얼 어떻게 잘해 주셨어? 똑똑히 말해 봐. 김 선생님더러 술 한 잔 하자고 했는데도 우리 집에 못 오는 이유를 말해 보란 말야”

나는 기가 차고 어처구니가 없어 한 동안 말을 잃었다. 그때 나는 너무 말이 말 같지 않아 웃으면서

“당신 취했구료. 무슨 뜻에서 김 선생님을 그렇게 걸고 넘어가요? 당신도 원고 쓰다 보면 바쁜 원고 때는 누가 불러도 못 갈 때가 있잖아요. 공연히 엉뚱하게 신경 돋구지 말아요”

그러자 그이는 정말 무서운 얼굴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잘난 김 선생 편야? 당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그 김 선생이 우리 집에 못 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그때 참을 수가 없었다.

“여보, 술 취해 말이면 다 말예요? 지금 당신 말 속에는 가시가 있고 저의 底意 가 있는데, 확실히 까놓고 말해 봐요. 내가 뭘 어떻게 했단 말예요? 김 선생은 내 직장 상사였고, 같은 직장에서 나를 딸같이, 어떤 때는 동생같이 봐 주신 거예요. 그게 어떻게 됐다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녜요!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는 거예요?”

“이제 제 입으로 실토를 하는군. 그래 의심한다. 왜 그 양반이 우리 집에 못 올 만큼 당신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냔 말야?”

“여보, 당신은 어쩌면 7년을 데리고 산 여편네를 어제 길에서 주워서 가는 여자같이 못 믿어 해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리고 당신은 내 앞에 그렇게도 자신이 없어요? 주정이면 주정이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길게 변명 늘어 놓지 마. 뻔뻔스럽게…. 꼴도 보기 싫어”

우리는 그때 최고로 격조된 상태에서 악을 쓰며 싸움을 했다. 그이가 아무리 술 김이라지만 나로서는 그런 의심받는 일만은 절대로 용서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그때 그이가 그이 자신같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질투와 분노로 찬 가장 추악한 남편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억울하고 기가 차서 눈물이 쏟아졌다.

조금 점까지만 해도 평화롭고 행복했던 우리 집은 순식간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좋아요. 꼴 보기 싫다니, 내가 나가 줄 거예요. 나도 당신의 그 추악한 얼굴을 봐 줄 수 없어요”

엄마 아빠의 싸움 통에 겁에 질려 있는 애들을 남겨 놓은 채 나는 옷을 갈아 입고 집을 나왔다. 이건 결혼 후 처음의 용단이었다. 눈물도 마르고, 5월의 햇살은 부부 싸움을 하고 집을 뛰쳐 나온 몰골 사나운 여자의 등을 가차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잡았다. 그런데 순간 나는, 내가 어디고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가슴에서 바람이 이는 처절한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서 택한 길! 이런 꼴을 하고 친정집에는 갈 수 없었다. 친구 집은 더구나 싫다. 그렇다고, 시어머님께서 계신 시댁에도 걱정 끼칠 것 같아 더욱 못 갈 것 같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울역 요”

나는 서울역에서 내려 인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때만 해도 고속버스가 없을 때였다.

인천행 낮 기차는 사람도 없고 한가로웠다. 나는 눈물도 말랐고, 아직도 그이를 용서 못할 것 같은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찼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이도, 애들도, 누구도 내 곁에 없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혼 생활 7년을 사는 동안 한 번도 혼자서는 먼 외출을 안 해 본 나는, 하늘도 바람도 온 세상이 다른 것같이 느껴졌다.

하인천에서 내려 혼자 바닷가를 걸었다. 파도가 이는 해변가를 나는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천천히 걸었다. 시즌이 아닌 바닷가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여자같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어떠면 의식적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7년 전 그와의 아름답고 뜨거웠던 만남! 결혼! 그리고, 그 많은 일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전연 딴 사람같이 그이가 밉고 야속하고 억울한 생각만 들었다.

결혼이란 현실은 어쩌면 이렇게도 일상적이고 유치하고 추악하고, 또 남녀의 치부 恥部를 그대로 드러내는 놀음인가.

우리는 서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나의 첫사랑의 고백도 그이는 다 들어 주었다. 또, 그이의 모든 것을… 손톱 밑의 가시까지 우리는 빈틈없이 알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그이가, 아무리 술 김이라지만 그토록 감정의 비약을 해서 나를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혼자 바닷가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아침도 제대로 안 먹고 신경을 썼더니 현기증이 났다. 그러나 생각뿐이지 밥이 제대로 들어갈 리 없었다. 식사를 물리고 커피를 시켜 마시면서 생각을 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젖먹이 기광이였다. 일하는 애가 제대로 우유를 타 먹일까?

그러면서도, 벌써 집 나온 지 2시간도 못되어 마음이 집으로 가고 있는 내 자신이 싫기도 하고 처량했다. 나는 바닷가를 지나 언덕에 보이는 커다란 화원으로 갔다.

큰 화원에는 5월의 갖은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사랑과 미움도 없는 그냥 아름답기만 한 꽃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화원 주인 같은 40대 남자였다.

“아주머니, 어떤 꽃을 원하십니까?”

“네…. 그냥 하도 좋아서 구경 좀 하려구요”

“그러세요. 꽃은 누구나 항상 봐도 좋지요…. 그런데 혹시 서울에서 꽃가게라도 내실 의향은 없으세요? 아주머니 같은 분이 종로나 명동 같은 좋은 자리에 꽃가게를 내시면 잘 팔릴 것 같은데요. 저는 주로 서울 상인들한테 꽃을 넘기고 있죠. 만약에 아주머님이 하신다면 특별히 염가로 잘 해드릴 수도 있어요”

“아녜요. 저는 꽃 가게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누구나 그러면서 시작하는 거죠. 이렇게 일요일에 혼자 화원에 들르시는 아주머니들은 할 의향이 있으시면서도 구경 삼아 나왔다는 분들이 많죠”

나는 속을 꽃구경도 마음대로 못하구나 싶어 발길을 돌려 나오려 하는데

“아주머니! 실례지만 젊고 혼자 사시는 여자 분들에게는 꽃가게가 그만이죠. 고상하고 깨끗한 장사니까요”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남편도 있고 애들도 있는 사람예요. 손님을 잡기 위해선 될 말 안될 말 아무렇게나 해도 되나요?”

그러자 남자도 당황했는지

“어휴,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럼 제가 말 잘못한 보상으로 예쁜 화분 하나 선사해 드릴 테니 바깥어른 책상에 놔드리시죠”

수다스럽고 유들유들한 주인이 꽃을 가리러 온실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나는 화원 언덕을 뛰어 내려왔다. 여자 혼자서는 꽃구경도 마음대로 못할 만큼 우리 집 밖은 무섭고 살벌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해변가를 걸어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 화원 주인은, 친구도 없이 혼자 화원을 기웃거리는 나를 젊은 미망인이거나 혼자 사는 여자로 착각한 것 같았다. 비실비실 입가에 웃음도 띤 채…. 여자가 잠시만 호자 나와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이 재미나다 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새 저녁 기운이 사방에 서리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집 잃은 어린애같이 집 생각이 나고 겁이 났다. 역으로 나왔더니 서울행 기차가 막 떠난 후였다.

할 수 없이 역 앞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모처럼의 해변가 낭만도 그 화원 주인 때문에 깨지고…. 어딘지 뜨내기 손님만이 차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은 역 앞 다방은 초라하고 스산해 보였고, 이미자의 ‘섬 마을 선생’ 노래만 구성지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젖을 짜내지 않은 젖가슴은 무겁게 팽창해 오고, 그것은 기광이의 배고픔을 알리는 것 같아 나는 바보같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내 스스로가 한심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집 나온 지 겨우 반 나절이 되었는데 이렇게 사방이 두렵고 자식 생각에 훌쩍거리니, 나 자신이 매인 데 없이 미덥지 못하고 바보같이 느껴졌다.

집에 들어가면 그이가 어떤 얼굴로 나를 맞이할까?

보라색 어둠이 깔릴 때 나는 대문에 들어섰다. 딸 둘이 좋아서 치마에 매달리고 내 손을 붙잡고 들어가면서

“아빠, 엄마 왔어. 엄마, 엄마!”

그이는 여전히 맥주잔을 들면서

“응, 당신 왔어. 바람 좀 잘 쏘였어?”

흘깃 쳐다보는 그 눈길에는 아침에 그 서슬이 퍼랬던 기세도 간 데 없이 사라진 채 미안함과 멋 적음과 그리고 안도의 기색과… 그 복잡함을 나는 일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눈만으로 아침의 감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때 안방에서 시어머님이 기광이를 안고 나오시면서 처음으로 나한테 구중을 하셨다.

그이는 급하니까 혜화동에 계신 어머님께 SOS 를 청해 곧장 오시게 한 것이다. 그것도 얼마나 속없는 짓인지…

“나는 네가 며느리지만 항상 네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네가 잘못한 걸로 안다. 너희 둘이 툭탁거리고 싸움하는 것은 이해한다. 그리고 그 싸움거리가 항상 아범 술 때문이니까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천금같이 귀한 이놈을 하루 종일 굶기고 집을 나가다니… 이것이 무슨 죄가 있니? 그리고 부부 싸움을 해도 울타리 안에서 끝내야지, 속 상한다고 여자가 집을 나간다는 것은 말도 안될 일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시어머님의 꾸중을 듣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이는 그 후 그 터무니 없는 오해를 풀고 나한테 사과하고, 며칠 금주하고, 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부부 싸움을 신나게 하던 때가 젊고 생기에 찼고, 그만큼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예민하고 짙었던 때였다고 생각된다.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가 무디고 너그러워진 것이고, 너그러워졌다는 것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그이가 50을 넘고서는 거의 싸움다운 싸움을 못했고, 더구나 말년에 가서 우리는 마치 황혼 빛 같은 조용함 속에서 살았다.

그이는 술에 관한 것은 언제나 사과했다. 나도 나이가 듦에 따라 고집이나 따지기보다는 내가 잘못하면 금새 사과하는 버릇이 생겨 자연히 판정패로 끝날 때가 많았다.

그이는 평소에, 부부란 어떤 큰 잘못으로 피치 못할 경우에 이르더라도 거짓말과 비밀만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신조였다. 그것이 바로 부부 사랑의 근본이라고 했다. 세상에 부부같이 미더운, 이 세상에서 못할 말도 할 수 있는 진정한 인간 관계는 또 없다고도 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서로를 속인 적은 정말 티끌 만큼 도 없었다. 말년에 와서는 두 사람에게 재미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이가 막 어떤 생각을 하고 그 말을 하려고 할 때, 나도 느닷없이 그 생각 그 말을 먼저 해버릴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그이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경을 치게 통하는군”

하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 일은, 부부가 오래 같이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똑같은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되는 파장 波長이 한 순간 같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젊어서부터 남매같이 얼굴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는 말도 들었다.

그이가 어떤 동작을 취할 때는 무엇이 지금 필요하다는 등의 생각은 평상적인 일이지만, 생각에 있어서의 동시점 同時點 은 결국 그이와 내가 공유하는 시간이 나이 들수록 더 많아짐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결혼 생활의 모든 것 – 격렬했던 환희, 고통, 도 보람과 슬픔, 그리고 빛과 이슬을 담은 초목같이 자라 준 아이들 … 이 모든 것이 뿌리 내려진 곳은 작은 후생 주택이었던 문화촌 시대였다.

우리는 열심히 사랑했고, 부지런히 일했고, 그리고 그이의 술도 절정에 다다랐었다.

 

 

 

두 딸과 두 아들

나는 둘째 아들 기민 基民 이를 한 해 걸러 1962년 10월 26일에 연년생으로 낳았다.

친정 할머니의 발인 날 나는 소복을 입은 채 이대부속병원에서 기민이를 낳았다. 아들 기광이를 얻은 다음이라서 이번에는 아들 딸에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결국 결혼 7년 동안 4남매를 낳은 셈이다.

한꺼번에 집안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내 애이고 남의 애기도 모두 사랑스럽고 예뻤다. 나는 원고를 쓸 대보다 애기를 안고 들여다볼 때가 더 행복했다.

이제 기민이를 막내로 끝마치기로 우리는 마음을 정했다. 그런데 기민이를 낳고 나서 집안은 새로운 소동을 매일 한 차례씩 겪어야만 했다.

돌 지나 곧 아우를 본 기광이는 엄마 품을 빼앗긴 때문인지, 기민이에게 젖을 먹이려면 저고 엄마 무릎에 올라 앉아 애기 볼을 잡아당기거나 눈을 손 끝으로 찌르고 야단이었다.

밤에도 꼭 엄마 품에서 떠나지를 않으려고 심술을 부렷다. 그러니까 자연히 애기를 한꺼번에 둘 기르는 셈이 되었다.

할머니도 계셨고 일하는 애도 있었지만 잘 때만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피곤했고,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기민이를 낳고 2주일이 되는 날 아침이었다.

아침에 깨니 온 몸이 쑤시고 열이 나며 젖몸살이 잔뜩 성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때는 마침 어머님도 시누님 댁에 가시고 안 계셨을 때였다.

애기 셋을 낳아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같은 골목에 사는 절친한 친구 안석자 씨를 불렀다. 사람 무던하고 남의 일을 내 일같이 해주던 성실한 친구였다. 그녀는 아들 생일 떡시루를 안치다가 고물 묻은 손으로 뛰어왔다.

“젖이 뭉친 거 같은데…. 그냥 두면 젖유종이 되기 쉬워. 이럴 때는 페니실린 두 알이면 그만야”

그러면서 우리 딸들과 자기 딸을 같이 약방에 보냈다. 그 친구는 나에게 페니실린 한 알을 먹이고, 기민이 목욕까지 시켜준 후 돌아가면서

“이것 봐요. 두 알째는 11시에 꼭 먹어야 해. 이럴 때는 시간을 지켜 먹어야 하니까”

그 친구가 가고 나는 잠에 빠져 들어갔다. 얼마를 잤는지 시계를 보니까 11시가 다 돼 있었다. 그날 그이는 마침 고모부 상을 당해 밤샘을 며칠 하고 와서 그때까지 자고 있었다.

나는 두 알째 약 먹을 시간이 생각나 부엌에 나가 페니실린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순간 내 혀는 안으로 잡아당겨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숨이 탁 막혀 왔다.

나는 마루로 비틀거리며 나오면서

“여보, 나 페니실린 쇼크인가봐”

이 한 마디를 하고 쓰러졌다. 그날이 1962년 11월 11일 11시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삶과 죽음! 이 오묘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나는 20년 후에야 늦게나마 조금씩 터득한 것 같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만이 아시는 뜻이고 섭리라는 것을, 그 뜻이 어느 때는 너무나 억울하고 통분해서 하나님이 이러실 수는 없을 거라는 섭섭함과 원망에 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돌이켜 보면,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큰 뜻을 우리는 뒤늦게나마 알게 될 때가 있다.

내가 20년 전에 그 무서운 사경 死境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오늘의 내가 필요했기에 살려 주신 것만 같다.

페니실린 쇼크는 심장마비이다. 만 만에 한 사람 꼴인 특수체질! 더구나 산모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하는 그 무서운 약을 먹었던 것이다.

그이는 맨발로 나를 안고 연세대 병원 응급실에 갔을 때에는 이미 촌각을 다투며 내 생명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의식이 명멸하던 가운데 어쩌다 그가 굽어 보는 얼굴이 내 안막에 비칠 때면, 나는 숨이 막혀 이를 갈면서도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떠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날 연세대 병원에는 페니실린 해독제가 한 병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20년 전이라, 그 약은 연세대 뿐 아니라 어느 병원에서고 구하기 힘든 때였다고 한다. 다만 수원에 있는 미군 병원에 가야 얻을 수 있었는데, 내 생명과 수원의 거리는 이미 너무나 벌어져 있었다.

혈압이 40으로 내려가고, 이미 손발도 식어 가고, 오직 심장만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담당 의사는 그 당시 연세대 인턴이던 동생 기일이를 불러 최후 통고를 내렸다고 한다.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테니까 모든 준비를 서둘러라’고.

그 준비란 장례식 준비를 뜻하는 것이었다.

후일담엔데 의사의 마지막 통고를 받고 온 가족이 눈물로 비통에 싸여 있을 때도, 그이만은 어쩐지 내가 죽을 것 같지 않고 죽을 수도 없다는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

“무슨 소리야. 기원이는 안 죽는데 왜 이렇게 미리 울고들 야단야?”

그이는 48시간 동안 내 손을 잡고, 그이만이 고집하는 믿음 속에 눈물도 마른 채 지켜 보았다고 한다.

그러한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동생의 남편이 메디컬센터에 있는 친구한테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그 병원 냉장고에 그 해독제가 곡 한 병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한 병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거다. 약을 가지고 와서 내 팔에 주사기를 꽂으려고 하니 이미 내 팔의 정맥은 주사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의사들은 마취주사도 할 겨를 없이 발목을 절개해서 거기에 주사 바늘을 꽂았단다.

그것은 정말 생과 죽음의 갈림길이었고, 내가 다시 이 세상에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그 해독제가 들어가자 내 혈압은 40에서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고, 사신 死神은 내게서 물러갔다. 거의 50시간의 사투 死鬪였다. 의사도 사형 선고를 내린 상황에서 오로지 그이만이 나의 소생을 믿었던 그 의지는 그의 절대적인 큰 사랑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기 지금도 나는 눈물이 난다.

그 당시 연세대 병원에서는 나의 소생이 기적을 일으킨 신화 같은 이야기로 소문날 정도였다.

보름 후 퇴원을 할 때, 나는 아예 젖이 불지 않는 주사를 맞고 나왔다. 그래서 막내 기민이는 2주 동안만 엄마 젖을 먹였을 뿐 우유로만 자랐다. 기민이가 크면서 잘 울 때면 나는 제대로 엄마 젖을 못 먹고 자라 울기를 잘하나 하고 가슴 아파 했었다.

보름 만에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도 얼마 동안 그이는 가끔 잠들어 있는 내가 불안해서, 내 심장에 귀를 대고 고동 소리를 들어야 안심을 하고 잠들곤 했다.

그이에게 항상 불안하고 믿을 곳 없던 나는, 그 후부터 매인데 없이 불안하고 허약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그이는 매일 밖에서 집으로 꼭 한 번씩 전화하는 버릇이 생겼고,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씩 전화하기도 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불안해지고, 또 부슨 변고가 생기지 않았나 해서 전화를 걸게 된다고 하며, 내 목소리를 들어야 안심을 하곤 했다. 전날 밤에 자기 꿈자리가 좀 뒤숭숭했던 아침이면 출근할 때

“여보, 어제 꿈자리가 좋지 않은데 오늘은 외출하지 마”

하고 나가면 나도 그의 말을 듣고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안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이는 사는 동안, 술이 들어가고 애들이 모두 있을 때면 그 때의 숨막힐 것 같았던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애들에게 설명해 주곤 했다.

“너희들이 복 있는 놈들야. 엄마를 안 잃어 버렸으니까…”

그러다가 그이는 자기 감정에 못 이겨 어떨 때는 울어 버리기도 했다. 그때 애들 나이가 일곱 살, 다섯 살, 두 살, 그리고는 갓난애였으니…

지난 일이지만 정말 그이로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기가 막혔던 일이었을 거다.

그 후 몇 년간을 나는 그대로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또 한번 큰 일을 치러 그이를 놀라게 했다.

자궁 근종이 생겨 자궁을 제거해내야만 하는 대수술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가 바로 그 엄청난 사건이었던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무장 게릴라가 남파됐던 1.21 사건이 벌어진 날 아침이었다. 그날 낮에 나는 한일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이는 애들 때문에 잠만 집에서 자고, 아침 저녁으로 내 병상을 지켰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수술 후 혈압이 갑자기 내려가 그이를 또 한번 놀라고 당황케 했다.

나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좋아하는 생선초밥을 사 가지고 와 마지막 한 덩어리를 먹을 때까지 지켜 보던 그이의 모습… 또, 창 밖으로 아름드리 고목이 검게 보이는 1월 병실 안… 병실 보호자 침대에서 고단하게 잠들었던 그이의 모습 등….

그이는 그때 집에서 병원으로, 그리고 직장으로 매일 고단한 나날을 보냈었다. 잔병은 그다지 않지 않는 내가 아프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자기 정신을 함빡 빼 간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다.

그이는 결혼 전에든 그렇게도 병약했고 결혼 후 3년까지도 심장 협심증이 가시지 않아 고생을 했지만, 그 후에는 정말 무병하여 50대까지는 병원 출입을 거의 안 하고 살았다. 그이는 스스로가 강단이 있다고 그랬고, 나도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 강단에도 결국 한계점이 있었고, 빨리 달린 차는 그만큼 소모가 빠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는 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결정 4남매

결혼 7년 동안에 거의 연년생으로 4남매를 낳았다. 그때만 해도 산아제한이 지금처럼 거론되지 않던 때이고, 그이도 나도 애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4남매가 많다는 생각도 안 하고 살았다.

생각해 보면, 문화촌 생활 20년은 4 남매를 기르느라 정신 없이 분주한 속에 살았다. 제일 고마운 것은 애들이 잔병치레를 안 하고 건강하게 자라 준 것이었다.

그 당시 맏딸 기진이는 동네의 홍제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할머님의 성화로 큰고모 댁 옆에 잇던 혜화국민학교로 옮겼다.

그때 할머님은 큰 고모 댁에 계셨다. 그때만 해도 홍제국민학교는 변두리 학교여서 장마 때면 다리 하나도 없는 냇물을 업어서 건네 주어야 했다. 기진이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유별난 것이어서, 기진이를 그런 촌학교에 보낼 수 없다며 혜화로 옮기게 하셨다.

그래서 기진이는 어딜 때부터 시내 학교에 유학건 셈이 되었고, 제 의사와는 달리 모정 母情을 그리워하며 살게 되었다.

나는 토요일마다 기진이를 보러 갔다. 학교에도 가 보고, 공부도 봐 주고.

내가 집에 돌아올 때면, 기진이는 혜화동 로터리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러면 나는 먹을 것을 한아름 들려 주었고, 기진이는 버스가 떠날 때까지 헤어지는 아쉬움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진이는 커서도 엄마하고 헤어져 돌아갈 때면 ‘나는 왜 엄마하고 떨어져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그런 날 밤엔 혼자 이불 속에서 울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기진이는 5학년 때, 중학 입학 문제가 있어 홍제동에 새론 생긴 인왕국민학교로 다시 옮겨 오게 되었다.

우리 내외가 늦게나마 터득한 것은 애는 엄마 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할머님은 기진이를 너무 맹목적으로 사랑하셨다. 학교가 바로 집 옆인데도 추우면 학교에 안 보냈고, 도시락은 꼭 때맞춰 더운 것을 지어 보냈고, 모든 것을 기진이 해 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그것은 좋지 못한 교육 방법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기진이는 어쩌다 집에 와도, 제가 맏딸임에도 우르르 밑에 있는 제 동생들을 귀찮아 하기도 했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마치 외동딸같이 저만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기진이는 어릴 때부터 환상적인 소녀였다. 예민하고, 약간은 이기적이고, 또 옷이나 액세서리 등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아 싸구려 귀걸이나 목걸이를 하기 좋아했고, 스스로 의상이나 소 도구 따위를 마련해 혼자 춤도 잘 추는 소녀로 자랐다. 또 007의 숀 코넬리 배우를 좋아할 만큼 좀 조숙한 그런 소녀였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파는 아니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오보에를 시작해 결국 서울음대에 들어갔다.

둘째 딸 기영이는 언니와는 다른 개성을 지녔었다. 얼굴은 나를 제일 많이 닮았고, 고집 센 것도 나를 닮았다.

기진이가 마음 약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영이는 의지가 굳고, 좀 과격하고, 도 어릴 때부터 칠칠했다. 항상 뚱 하고 말수가 적은 것도 언니와 다른 점이었다.

기진이는 항상 말이 많았고, 유머나 위트가 뛰어나 그이와 나, 온 집안 식구를 웃겼다. 사람 흉내도 잘 냈고… 하여튼 기진이가 밖에서 들어오면 저희 아빠는 기진이 이야기 듣는 것을 평소의 큰 낙으로 삼았다.

한편, 기영이는 말수가 적었음에도 이상하게도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동네에 같이 사시던 방송작가 유호 兪湖 씨가 기영이에게 ‘다마네기’, ‘옥파’ 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동글동글 예쁘다고…. 그래서 기영이는 동네의 이집 저 집에서 데리고 다닐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국민학교 때도 친구가 많았는데, 항상 보스 기질이 있어 모든 것을 제가 명령하고 부리는 것을 좋아했다.

두 사내 동생도 어떤 때는 엄마인 내 말보다 둘째 누나인 기영이 말을 더 잘 들었다. (주로 이발소 갈 때) 커서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부리는 것도 나보다 요령 있게 잘 해냈다.

두 딸은 정말 향기와 모양이 다른 꽃같이 아름답게 커 갔다.

기영이는 예술고등학교에서 클라리넷을 공부했다. 기영이 자매는 예고에서도 눈에 띄는 자매였다. 더구나 기영이가 예고 다닐 때는, 그때 한창 청춘 물을 만들던 영화 감독 문여송 文如松 씨로부터 아빠를 통해 영화 주연으로 교섭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 예고를 졸업하고 기회가 닿아 일찍이 19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딸 둘을 기르다가 아들들을 기르게 되니 이건 전연 딴 세상이었다.

더구나 맏아들 기광이는 얼굴은 여자애같이 예쁘면서도 그 장난 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애들을 때리기도 잘하고 골탕도 잘 먹여, 기광이가 나가면 애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든가 하면, 어떤 집에서는 기광이한테 한번 이겨 보라고 아들을 태권도장에 보낸 엄마도 있었다.

기민이는 비록 한 살 아래였지만 그런 형한테 치어 순하고 겁이 많아 울기도 잘했고, 항상 형의 부하 노릇을 하며 쫓아다녔다.

집안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기광이는 말 그대로 골목대장이었다. 하도 장난이 심히 일찌감치 유치원엘 보냈다. 그랬더니 유치원에서도 유명해져, 어쩌다 자모회 姉母會 에라고 나가면 다른 아이 엄마들이 ‘기광이 엄마가 누가냐’고 물을 정도였다.

학교 가서는 가방이나 신발 주머니, 심지어는 도시락 가방까지도 항상 부하에게 들고 다니게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그런 장난꾸러기 기광이가 결벽증이 대단했다는 점이다. 씻기도 잘하고, 물 컵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해야만 마시고, 음식 그릇도 아무렇게나 담아 주는 것을 싫어했다.

어렸을 적 낮잠 잘 때도 어쩌다가 일하는 아줌마가 안아서 옮겨 누이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런 애가 국민학교에 들어가니 곤란한 것이 변소 문제였다. 기광이는 절대로 학교 변소엔 들어가지를 못했다. 한번은 참고 오다가 오줌을 싼 적까지 있었다. 결벽증은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천성이 그러했다. 커서도 기광이는 ‘여자는 미인보다 청결한 여자가 제일’이라고 했다.

그이는 보기보다 음식이나 모든 것이 털털한데, 기광이는 그런 것은 아빠를 전연 닮지 않았다.

기광이는 대문이 잠겨 있으면 초인종 눌러 대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새가 답답해 주로 담을 넘어 들어왔다. 지붕 위까지 놀이터였다. 벌레고 동물이고 무서워하거나 징그러워한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쥐만은 무서워했다. 아무튼 머리와 몸이 똑같이 빨리 움직이는 애였다.

그리고 기광이는 사내애 치고는 얼굴이 너무 하얗고 잘 생겨서, 어렸을 때 어쩌다 음식점에라도 데리고 가면 손님이나 일하는 종업원들의 구경거리가 되곤 했다.

나는 기광이를 다루는 데 하도 힘이 들어 아빠한테 기광이 단속 좀 하라면

“사내 놈은 장난이 심하고 자랄 때 세차야지 커서 무엇이라도 해내는 놈이 되는 거야. 가만 두어요”

그이는 항상 전쟁터 같은 그런 속에서도 악 한 번, 매질 한 대 없이 원고도 쓰고 책도 보고 했다. 어쩌면 그런 아들을 오히려 대견해 하는 눈치였다.

기광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딴 애들같이 점잖아졌고, 정말 그이 말대로 그 극성스럽던 것만큼 지금까지 제 구실을 잘 해내고 있다.

막내 기민이의 우리 집 애칭은 ‘끼미’로 통해 왔다. 어릴 때는 극성스런 형에게 치어 울보였으며, 누구 한 번 때려 보지 못하고 항상 양보하고 친절했다. 감정이 깊고 세심해서 음악을 좋아했으며, 로맨틱한 남자로 커 왔다. 아빠의 좋은 점을 제일 많이 닮은 애 같다. 나는 가끔 기민이의 어느 순간적인 모습에서 그이를 느껴 섬뜩할 때가 있다.

 

 

 

사랑하며 사랑 받으며

 

1963년 12월 27일

오늘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그이가 스스로 불임수술을 받았다.

넷째 막내로만 그치자던 것이 또 다시 임신을 했었다. 그이는 오랜 망설임 끝에 결단을 내렸는데, 아침에 아무 말없이 나가더니 병원에서 전화를 했다. 돈암동 친구 병원인데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그이는 내가 도착하자 곧 수술을 받았다. 그의 가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내 몸의 한 조각이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 같았다.

나를 위해, 우리들을 위해, 그이는 용단을 내려 준 것이다. 나는, 수술을 끝내고 멋 적게 내려오는 그이를 부축하며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 수술을 해 준 친구이신 김 박사가

“여보게, 생각 같아서는 축하로 맥주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당분간은 금주일세”

“알았어. 이 사람아. 그런데 운사 雲史 도 여기서 했다면서? 그 자식이 저 혼자 해서 외로운 요새 매일 아침 나보고 수술하라고 전화로 성화를 해댔어”

“그랬어? 거기는 쌍동이까지 해서 아들만 넷이라면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마음이 착잡했다.

“여보, 나는 수술 안 할까 봐. 입덧도 지나고 했으니까 그냥 하나 더 낳을까 봐. 이제 당신도 수술하고 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요. 그냥 가요.”

여자의 마음은 복잡하고 약했다. 애기에 더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우리의 생명 모든 것을 끊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냐. 나도 많이 생각한 끝에 용단을 내린 거야. 당신 오기 전에 김 박사한테 당신 수술도 부탁해 놨으니까 그냥 합시다. 우린 네 놈만으로도 족하기로 한 건데…”

“다른 때와 달리 오늘은 마음이 이상해요.”

“글쎄, 당신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어차피 하려고 했던 것 아냐?”

나는 결국 수술을 받았다. 우리는 사는 동안 별다른 죄를 짓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나는 몇 번의 수술로 몸과 마음이 상해 있었다. 자연의 생명을 끊는 이 무서운 행위를 아무런 가책 없이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그 자책과 고뇌는 나를 가끔 우울하게 만들었다. 산부인과의 어느 오물 처리장에 버려졌을, 싹트지 못한 내 생명의 덩어리에 대해 애처로움과 모정에서 비롯되는 무서운 죄의식을 느꼈다. 직접적인 육체적, 정신적 이 아픔을 남자인 그이는 모를 거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결혼 생활 10년에 혁명을 일으킨 날이다. 차가운 밤거리에서 나는 그이의 체온과 정신의 훈기를 느끼면서 돌아오다.

이제 우리는 그 야만스럽고 끝이 없는 죄는 짓지 않게 되었다.

 

 

1월 6일

집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 요잇 시치고 집 정리하다. 식모가 있어도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내가 일생 공들여 가꿀 일이란 그이의 건강을 보살피는 일과, 그이를 도우는 일과, 귀엽고 사랑스런 우리 네 아이를 잘 기르는 일이다. 우리들의 사랑의 결정 結晶인 모든 것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다. 그 다음으로는 내 문학을 하는 일이다.

이제 가족계획도 제대로 했으니까 일하고 터전을 닦는 일 뿐이다. 그이가 감기가 잘 안 나아 걱정이다.

 

 

1월 12일

그이, 집에서 나가지 않고 일하다. <십년 세도 十年 勢道> 집필.

식사도 잘하고 얼굴도 좋아졌다. 그이는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라 수술 다음을 걱정했는데 모든 것이 순조롭다.

저녁 때 홍은동 시장 보러 가다. 나는 시장 바구니를 들고 냇가를 따라 시장 가고 오는 길에 소설도 구상하고, 수필 제목도 생각하는 등 나대로의 시간을 즐긴다.

그이와 애들 모두 저녁 식사를 맛있게 잘 들다. 저녁 후 아빠는 애들을 목말 태우고, 기진, 기영은 노래를 부르며 신나는 시간을 보내다.

나는 그저 그 행복스런 소음 속에 잠잠히 앉아 있다. 작은 것, 아주 작은 것! 그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1월 17일

오늘 한가한 시간을 타서 한 달의 고정 지출을 계산해 본다.

엄청난 물가고의 실정이 그대로 가계부에 반영된다. 언제나 고정 지출보다 기타가 더 많다.

별로 잘 먹는 것도 없고 과용하는 것도 없고 사치하는 것도 없는데, 따지고 보면 그이의 용돈이 적지 않다. 버는 자랑보다 덜 쓰는 자랑을 해야겠는데…

그이, 낮에 전화로 <십년 세도>가 계약됐다고… 집 값을 내고 집도 수리해야지.

하루 종일 애들하고 놀다. 올해는 생활의 기틀을 잡아야지…

 

 

1월 22일

오늘, 돈 때문에 말다툼! 그이 말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대로 할 말이 있다. 과용도 안 하고 자기와 애들 때문에 쓴 것인데 항상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썼다고 한다.

하여튼 가정 경제에 있어 그이가 그렇게 세밀히 검토하고 계산하고 걱정하는 것이 마음 든든하게 느껴진다. 나도 내 힘 닿는 대로 내 일을 해서 작으나마 보탬이 돼야겠다.

그런데 나는 10년 동안 살았어도 그이 앞에서 계산할 때는 언제나 몰리고 당황하게 된다. 그이가 큰 소리만 치면 나는 바보 어린애가 된다. 아마 그이 앞에선 영원히 그럴지 모른다. 더 야무져야 할 텐데 내 자신이 그렇지를 못하다. 무섭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텐데….

내가 우니까 그이는 애처로운 듯 금방 성이 풀어져 달래 준다. 그이는 뒤끝이 없다.

그는 역시 나를 어쩔 수 없는 어린애로 안다. 저녁 늦게까지 딸들하고 같이 놀아주는 그의 모습은 자상하고 다정한 아빠이자 남편이다. 우리가 좀더 잘 사기 위해 나는 더욱 노력하고 그이를 따라야겠다.

 

 

2월 18일

물가가 나날이 올라 쌀 값이 4,000원대…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위정자 爲政者 에게 있는지? 그래도 우리 집은 생활난하고는 상관없는 무풍 지대이지만 영세민들은 어떻게 살까? 우리가 배 부를 때 배 고픈 사람들을 생각해 보지만 마음뿐이지 아무 힘도 못 된다.

이럴 때일수록 절약을 해야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절약할 만한 게 특별히 없다. 고민이다.

그이와 <나자 裸者 와 사자 死者> 라는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그이 예정이 바뀌어서 못 갔다. 오후에 동네의 석자네 집에 가서 점심 먹고 놀다 오다. 언제 보아도 좋은 친구….

내일이 보름! 장에 가서 나물거리와 애들 주려고 부럼 좀 사오다.

요새 막내 끼미가 이쁜 짓을 한다. 뒤뚱거리고 걷다가 머리가 무거워서인지 넘어진다. 아빠한테서 세 반이나 전화 오다.

 

 

3월 1일

그이, 밤새 소나기 일을 하다. 꼬박 밤을 새서 <십년세도> 시나리오를 쓰다. 그이는 꼭 불똥이 떨어져야 일을 하는 버릇이 있다.

기진이 일주일 동안의 봄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혜화동 가는 날이다. 가기 싫어한다. 집에 있는 동안 공부도 별로 안하고, 동생들 하고 놀며 싸움만 하다 가는 것 같다.

아무리 할머니가 잘해 주셔도 어미 밑에서보다는 못한 법. 성적에도 지장이 있고 해서, 혜화동 할머니께 따로 떼어 놓았던 게 후회된다. 어머님이 섭섭해 하실 테니까 좀더 있다가 데려오는 방향으로 해야겠다.

 

 

3월 4일

그이, 요새 일 때문에 밖에서 술을 안하고 들어왔는데, 아침에 빠에서 술 먹으러 오라고 전화가 왔다. 기가 찰 노릇이다. 은근히 짜증이 난다. 술집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해서 품는 유치한 노여움이 아니라, 자는 사람 코를 찌르는 격이지!

저이에게 술 팔아 먹으려는 장삿속인지 모르겠지만, 술 먹으러 나오라고 집에까지 전화 거는 상술은 이 나라에 밖에 없을 것 같다.

그이는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미친 것들 이라고 욕을 한다. 내가 한바탕 싫은 소리를 해주었더니 그만 하라며 화도 안내고 실실 웃는다. 그것이 더 보기 싫다.

 

 

3월 11일

그이가 이제 욕탕 속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혈압도 제대로 올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어 간다. (전에는 그이가 저혈압이어서 뜨거운 욕탕에는 어지러움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었다)

몸이 좀 좋아진 탓인지. 10여 년 산 나와 어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님께 효도하는 길은 그의 건강과 절주 節酒 에 달렸다.

오후에 경향신문사에서 청탁 받은 것을 전하고, 기영이 가방과 광 光 이 자전거 사 가지고 들어오다. 기민이도 뒤에 태울 수 있도록 좀 큰 자전거를 사다.

 

 

3월 12일

아침에 기영이 데리고 학교 가다. 키가 커서 뒷줄에 서다. 학교 운동장은 춥고 을씨년스럽다. 머리가 무겁고 정신이 맑지 않다. 그이 4시에 나가다.

광이가 동생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신나게 달린다. 오늘은 <어린이 극장>을 써야겠다.

 

 

5월 28일

나에게 있어 5월 한 달은 라일락 향기도 잊은 채 긴장과 생각과 조심스러움 속에 산 달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그이의 오랜 신병 身病이 도졌다. 나는 그의 팔뚝과 가슴에 돋은 작은 혈점을 보고 놀라고 당황했다. 간연 증세였다.

그이는 너무나 태연하고 침착해서, 요만한 정도는 아루렇지도 않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의사는 당분간 금주하고 약물 치료를 하라고 한다.

의사 말을 절대로 들어야지. 요새는 약도 좋고 그만한 것쯤이야 공식화된 병이라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오늘부터 나의 모든 신경이 그의 몸에 쏠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10년 동안 그이는 내가 결혼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무병했고 강단이 있었다.

그 지독한 연일 술에도 앓아 누워 본 적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속으로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원래 그이 간은 결혼 전 피난 대 수혈한 것이 잘못되어 이상이 생겼지만 지금까지 큰 증세는 없었다. 과로와 과음의 대가가 나타난 것이다.

그이는 전에 앓아 본 일이 있어서인지 별로 크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데, 나는 초긴장 상태이다. 내 시간과 정성을 그에게 쏟아야겠다.

애들과, 내 일과, 그이의 섭생 생활. 이 모든 것이 오늘부터 나한테 부여된 과제이다.

그의 신념과 내 정성으로 그이의 건강은 회복될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번 기회에 얼마 동안 금주 禁酒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그이의 42세 때의 일이다.

그 전에 이미 간이 나빠져 ‘황달’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나이도 젊었기에 보름 동안의 통원 通院 치료로 황달기가 가시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동안의 금주가 끝나고 그이는 다시 술을 머기 시작했던 것이다.

 

 

6월 6일

10년 만에 금주를 하니까 정말 조용하고, 그이의 선비다운 면모도 보인다.

독서하고, 쓰고, 애들 데리고 놀아주고…

병세는 별로 큰 진전이 없지만, 너무나 시끄럽던 그이가 너무나 조용한 그이로 바뀌니까 좀 가엾은 생각도 든다.

그이, 가회동 큰댁에서 저녁 먹고 온다고 해서, 불광동에 가 기선이와 목욕한 후 9시가 통금 (당시엔 계엄하) 인 것을 깜빡 잊고 아슬아슬하게 귀가.

그이가 정신 나갔다고 펄펄 뛰고 신경질 내는 것이 우습다.

나보고 천둥 벌거숭이 어린애라고 야단!

 

 

6월 10일

날씨 흐리다.

그이, 원고를 쓰고 있다. 생각한 것보다 건강이 좋아져 안심이다.

그이가 일하는 동안 기고아이와 끼미를 데리고 산책 나가다. 빨리 애기 보는 애를 구해야 할 텐데….

그이는 원고 갖고 나가더니 며칠 만에 10시 넘어 술 좀 약간하고 들어오다. 벌써 결심이 무너진 것은 아니겠지. 아직은 술을 입에 대서 안 되는데…

‘한양 漢陽’ 것 해결이 난 모양. 돈 갖고 들어오다. 이 돈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집을 수리해야지. 장독간을 헐어 방을 만들고, 따로 떨어진 그의 서재를 만들어야지….

12시까지 잠이 안 온다. 광을 헐어서 딸들 방도 만들까? 나는 상상 속에서 만리장성을 쌓는다. 정해진 작은 땅을 어떻게 해야 잘 이용할 수 있을까? 나는 건축과 실내 디자인에도 취미가 있다. 조각보 잇는 것 같은 개축 改築이지만 그 돈 안에서 최선의 효과를 내야겠다.

그이는 벌써 곤히 잠이 들었다. 음악도 멈추어지고… 아빠가 사온 하얀 털보 강아지가 귀엽게 텔레비전 위에 앉아 있다.

평화와 고요함이 깃든 밤! 마음 속으로 그의 건강을 빈다.

 

그 해 1968년. 그이가 첫 해외 여행을 나간 사이에 나는 집을 개축했다. 문화촌에서 이사온 지 처음으로 벌이는 대공사였다. 그이는 돈만 내줄 뿐 그런 것은 나한테 맡기고 통 모른다. 그래서 그이의 여행 중에 시작한 것이다.

일은 도급으로 맡기고 설계 감독은 내가 했다. 재료에서부터 문고리 하나까지 일일이 내가 을지로에 가서 사오는 극성을 부렸다. 나는 매일 인부들과 같이 마당에서 하루 해를 보냈다.

나는 신바람이 났고 재미있었고 행복했다. 그이가 여행지에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 끝내려고 강행군을 했다. 여름 공사라 진전이 빨랐다.

장독간을 뒤꼍으로 옮기고, 대문을 들어서서 마당 건너편에 그의 서재를 마련했다. 그리고, 마루 뒤 헛간을 헐어 딸들 방을 만들고, 마루에는 유리문을 내어 드나들게 만들었다.

돈과 내 아이디어와 그리고 시간이 잘 맞아 떨어진 공사였다.

그이 오기 전에 장판의 니스칠까지 끝내고, 골동 장, 책장, 문갑 등을 모두 제자리에 놓고, 문 앞에는 큰 라일락을 한 그루 옮겨 심었다. 5월이 되면 서재까지 라일락 향기가 풍기게…

철없는 애들은 우리 집 새로 지었다고 동네에 나가 자랑이 한창이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이가 여행지에서 돌아와 새로 꾸민 서재에 들어가 어린애같이 환성을 올리던 그 모습을….

그이는 도깨비가 요술방망이나 흔든 것 같이 새로 단장된 방을 둘러 보며

“당신 참 신통하군. 혼자 이렇게 다 해놨으니…. 애썼어”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우리는 어느 호화 주택보다도 요긴하고 우리에게 맞는 집 – 장독대가 서재가 되고, 헛간이 딸들 방이 된 그 집에 감사하고 만족해 하며 20년을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여자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남자는 일에 의욕이 차 있고, 애들은 죽순같이 자라 주고, 오래 꿈꾸고 계획했던 집 수리를 하고….

그때는 피곤한 것도 고단한 것도 몰랐다. 그때 나는 35세였고, 그이는 42세 때였다. 늙는다는 두려움도 없이 마냥 이런 꿈과 희망 속에서만 살 것 같았다.

새로 꾸민 서재에서 그이도 나도 일을 많이 했다.

 

 

6울 28일 (그이가 첫 해외 여행을 떠나고)

그이가 떠나간 지 꼭 일주일. 결혼 생활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그가 내 곁을 떠나 먼 여행을 갔다.

그가 즐겁고 보람 있는 시간은 나에게도 기쁨이다. 그 동안 그이의 술로 인한 파상적 괴로움 때문에 많이도 가슴 아파 했다. 그러나 그의 본성 本性이 나를 괴롭힌 적은 없었다. 나는 그가 없는 이 시간에 우리 둘을 생각해 본다.

내 생애에 있어서의 살았다는 보람은 그가 나를 얻은 것과 내가 그를 얻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분신인 네 아이들일 것이다. 잠깐 머물렀다 가는 생애의 한구석에 나는 소중한 것들을 소유하고, 도 그 속에서 숨쉬며 그들 곁에서 죽게 될 것이다.

나의 모든 시점 始點은 그에게서 시작되고, 종점 終點도 그이 곁에서 끝나리라. 날이 가고 나이가 먹을수록 귀중하다는 밀도가 더 짙어가고, 핵 核이 굳어만 간다.

산다는 의의가 더 깊고 요원한 데 있는 것 같다. 사랑받고 사랑하다 죽을 수 있는 것 그것만이 전부이다.

돈에 대한 욕심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있으면 될 것 같다. 오늘도 애들 옷만 사고 내 것은 하나도 못 샀다. 같은 빛 같은 옷을 입어도 나는 과히 불편하지 않다. 우리들은 돈이 너무 많아도 그걸 건사 못할 것 같다.

나는 요새 길에 나가면 지극히 불안하다. 차량의 홍수, 내 옆에 좀 험악하게 생긴 사람만 있어도 혹시 폭탄을 터뜨리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감. 정말이다. 무언지 발 디딜 곳 없는 삭막하고 무서운 땅이 옆에 있는 것 같다. 노이로제일까?

그이가 떠난 지 일주일. 처음으로, 이 반에 내가 이 집의 어른이라는 불안감이 잠을 못 이루게 한다. 가까운 곳에 있다면 목소리라도 듣게 전화라도 걸고 싶다.

지금은 새벽 1시 40분! 잠이 안 온다. 바람이 부나 보다. 전기마저 나가 촛불 밑에서 쓰고 있다.

지금쯤 그이는 하꼬네 箱根, 아다미 熱海, 이즈 伊豆 중 어디에 있을까?

 

 

 

첫 번째 해외 나들이

 

그이는 그 동안 몇 번의 격동기를 지내면서 본의 아니게 ‘요시찰 인물’로 낙인 찍혀 여권 신청을 못하는 입장에 있었다. 집안내의 여자들도 모두 해외 바람을 쏘이는 판에 그이만은 나가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답답했던 사슬이 풀려 처음으로 일본에 해외 여행을 나가게 되었다. 그이보다도 내가 더 좋았다. 너도 나도 다 나가는 해외 여행을 그이만이 못 나가는 것이 내내 가슴 아파 왔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역사와 부수를 자랑하는 문예춘추사 사장 초청으로, 동창이면 친우인 한운사 韓雲史 선생님과 같이 떠나게 되었다.

한 선생님도 그이와 같은 여건으로 해외 여행이 금지되었다가 이번에 풀려나 같이 떠나게 된 것이다. 하여튼 그이와 한 선생님은 좋은 일 궂은 일 여러 가지로 비슷하고, 그리고 같은 ‘개띠’ 동갑으로서 인연이 깊다.

1968년 6월 23일에 서울을 출발해서 7월 24일에 귀국했다. 한 달 동안의 첫 해외 여행이었다.

나는 옷가지에서부터 약, 모든 것을 세심하게 신경 써서 트렁크에 넣어 주면서 그의 첫 나들이가 뜻있고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빌었다. 그것은 곧 나의 기쁨이었다.

 

 

<첫 해외 여행 중에 보내온 편지>

기원 基媛이

한 시간 40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곳. 이곳이 일본 도쿄.

김포를 떠나 약 30분만에 동해안, 다시 15분만에 일본 해안, 적자색으로 물든 황혼의 하늘을 나는 기분은 정말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소. 이토록 쉽게 훌쩍 날아 올 수 있는 곳인데 무려 28년 만에 두 날개를 펴고 떠날 수 있었다니….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내 자신 속에서 부글거리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고, 바로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지.

도쿄에 닿자 훅 하고 끼치는 야릇한 냄새와 중후한 공기로 답답하더군. 이튿날까지 공기가 모자라서 혼이 났어. 그래도 아직 도쿄에 와 있다는 실감이 안 나는군.

무엇보다도 공항에 닿을 때까지, 초청측에서 과연 충심으로 환영하는 건지, 소위 그들의 상투적인 기질인 겉과 속이 다른 채 입발림만으로 ‘척’ 하는 건지 궁금했었지.

그러다가 공항에 가지야마, 마쓰야마, 후지다 사장이 다 같이 나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때 비로소 그런 의구심이 가셨어. 역시 그 사람들은 정치가가 아니고 문화인들이었으니까….

첫날은 호텔에서 그냥 쉬고, 이튿날부터 바쁜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게 됐지.

마쓰야마 씨 (시나리오 작가)는 밤새 원고 쓰느라 바빠서 대신 그의 부인 다까미네 히데코 (유명한 영화 배우)가 호텔에 직접 찾아와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생각한 바가 있어 사양했어. 어느 정도 일본인의 현실과 속마음의 측량이 필요했기 때문이야. (첫 번 해외 여행이고, 일본이라는 데 굉장히 신경이 쓰이고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히데코는 총명한 여자였어. 자택으로 초대해서 손수 만든 음식에 일본 술로 이야기 꽃을 피웠지. 다음날에는 문예춘추사 사장 이케지마 신페이 씨한테 새로 지은 가스미세키 빌딩 36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점심 대접을 받았어.

이곳은 동경 시내가 창 밖으로 한눈에 보이는데, 비로서 동경에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되었지.

이케지마 사장은 퍽 지적이며 친한적 親韓的 인 사람이었어. 그만큼 이해심이 많고 솔직한 분야.

우리는 한국의 입장, 특히 일본 학생들의 좌경 左傾 과 그들의 행복에 겨운 욕구 불만에 대해 말했고, 우리 반공 정신의 근본을 전했지. 그랬더니 동감이더군. 어느 정도 PR하려고 했는데 먼저 다 알고 있더군.

무엇보다도 부모들의 나쁜 대한 對韓 인상을 그대로 영향 받고 있다는 점을 씻어서 좀더 새로운 생각을 하게끔 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보았지.

일본은 정말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불안정한 사회야. 그만큼 큰 나라의 눈치, 동남아 각국의 눈치를 보거나 저울질하고, 자기들의 실리와 번영 유지에 급급해 하는 게 분명해. 그만큼 우리는 경계하며 대해야겠다.

저녁에는 ‘맥심 Maxim’에서 일본의 거물 평론가 오오야쇼이치 씨가 롯데 사장 가지야마 씨 내외의 초대를 받았어. 음식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거물 오오야 씨의 칼날 같은 자국 自國 비판이 큰 참고가 됐지. 역시 거물다웠어.

2차고 긴자 銀座 의 고급 요정 ‘히엔 秘苑’ 에서 무진장 먹었지. 그곳의 한국 색시들이 모두 다 나하고 한운사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더군. 우리가 유명인이라는 것을 그들 일인 측에게 증명한 셈야.

26일에는 NHK와 TBS 방문 예정. 도오호 東寶 로부터 특별 시사회에 초대받아 저녁에 관람 예정. 그 후 시마다레 사브로 (紫田鍊三郞, 작가), 구로이와 주우고 (黑岩重吾, 작가), 도오고 (東仰, 화가) 씨들과 합류할 계획.

27일에는 교토, 나고야, 나라 를 거쳐 하코네, 아다미, 이즈를 돌아보고 일본 문단인들과 일본 일간지 문화부 기자와의 좌담회 등 무척 바쁜 스케줄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척 자유로운 곳이야. 그리고 먼지가 없어. Y셔츠, 신발 닦을 필요가 없으니 잔손이 안 가 참 좋군. 언젠가 가까운 날 당신하고 같이 오고 싶은 곳이야.

그럼 어머니, 누이, 애들에게 안부 전해 줘. 조금도 불편한 것 없고 호화판이니 그리 알고… 술? 걱정 마. 두어 잔만 하니까… 손님이 와서 나가야겠어.

몸조심해요. 전화할게….

26일 아침 8시 20분

진섭

 

 

1968년을 보내면서

벌써 12월 중순, 올해도 다 갔구나. 역시 못다한 것이 많은 것 같다. 감사드리고 싶은 것도, 올해도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큰 일 없이 넘어간 것 그것만이 고맙다. 그리고 그이도 첫 해외 여행에서 무사하게 돌아와 주었고.

그 동안 애들이 많이 커 주었다. 그리고 작으나마 우리의 서재도 가지게 되었다. 증축이 우리들의 노력의 대가로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쫓기고 부족했던 한 해였다.

제일 불만스러운 것은 돈을 위하여 메꿔 나가는 신문 연재소설 쓰는 일이다. 완전히 돈 벌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그 작업은 내 문학 활동에 욕이 되면 됐지 조금도 보탬이 안 되는 일이다. 1년은 더 이 치욕적인 고통을 참아야겠다. 그리고는 전작 全作을 써야지. 이대로는 못 견디겠다.

올해도 바쁘고 고단하고 노력한 한 해였다. 기선(동생), 이민 가기로 결정! 다행스럽다고 생각해야 할까? 그 애는 너무나 한국적인 여자인데… 가슴 아프다.

 

기선이는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인데, 나보다는 네 살이 아래이다.

그 애는 내 그림자였고, 내 얼굴만 봐도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애였는데, 어떻게 그 애가 나 없는 그 넓은 땅에 떨어져 살 수 있을까?

기선이는 내 남편 내 자식과는 달리 도 다른 육신의 정을 느끼게 하는 동생이다.

1970년 3월 20일, 그 애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지금 12년째가 됐다. 그 동안 나도 몇 번 가보고, 저도 두 번쯤 왔다 갔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가슴 저리게 보고 싶은 그 아픔에 비해 너무나 짧고 허망한 만남이었다.

기선이는 형부를 무척 좋아했고, 그이도 이 처제를 아끼고 좋아했다. 나는 지금도, 손님같이 만났다가 헤어져 살고 있는 우리들의 생이별을 원망하며 살고 있다.

 

 

이민을 떠난 동생에게

이제 가을인가 보다.

네가 내 곁에 없는 가을!

그건 나의 생 生에 다른 도 하나의 의미를 주었다. 바람이 부는 밤이다. 이렇게 맑고 가슴이 썰렁한 가을 바람이 거기 로스앤젤레스에는 없을 거다.

8월 한 달은 마치 뜨거운 태양같이, 찝찔한 해수 海水의 뒷맛같이 정말 분주하게 지냈다.

보고 싶다는 말이 소리로도 말로도 안 나오는 밤! 그저 내일 도 눈을 뜰 때 너를 볼 수 없다는 사실! 그 두려움이 이 밤에 나를 목 메이게 한다. 이렇게 소식이 없고 침묵만을 지키는 네가 두렵고 짜증스럽다.

다만 보고 싶다는 감상 뒤에 끈덕진 너에 대한 조바심이 슬프구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옛 말이 실감이 안 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금쯤 거기는 낮일 거다. 눈코 뜰새 없이 분주할 너….

지금쯤 가게 한 구석에 한가롭게, 아니 우울하게 앉아 있지나 않은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편지도 숫자의 보고도 아닐 거다.

언젠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우리 둘이 바보같이 마주 보며 앉을 그날! 내년일까, 내후년일까? 아니면 더 가까운 날이 될까? 혹은 더 아득한 먼 날이 될지?

낮에는 잊고 산다는 것이 편리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조용한 시간, 내 곁에 형부가 있고 애들이 있다는 실재 實在의 안도감 뒤에는, 이제 네가 없다는 공간이 정말 미치도록 기막힐 때가 있구나.

이렇게 떨어져 살아서는 안될 것만 같다. 그렇게 진저리 나게 같이 붙어 다니던 우리! 정말 같은 혈육 덩어리의 아픔이 뼈에 스민다.

되도록이면 평범한 구절로 메꾸려 했던 내가, 너에게 편지를 띄우다 보면 어느새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선아! 어느 땅엔가 네가 살고 있다는 믿음, 그것만이 내 자위일 뿐이다. 가을, 어느 때보다 다른 가을이 점점 더 나를 못 견디게 할 것 같다.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어.

 

 

그이는 1968년 일본, 동남아 여행을 비롯, 계속해서 1969년에는 월남의 티우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하기 위해 월남으로 떠났다.

그때는 코리아 헤럴드 특파원으로서, 사진부 윤부장하고 같이 떠났다. 한국 기자로는 최초로 티우 대통령과 단독 회견했다 해서 화제도 됐었다.

그때만 해도 그이의 건강은 호조였고 의욕에 차 있었으며, 활동적이었다. 그이는 일을 할 때는 세밀하고 계획적이었으며, 몸을 돌보지 않고 정열적으로 해냈다.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도 원고지를 잡을 때까지가 시간이 걸렸지 일단 잡았다 하면 속필인데다가 파지 破紙 한 장 안 내고 단숨에 써내는 것이 특징이었다. 가끔 원고 청탁 약속 날짜가 임박해서 내가 옆에서 걱정이 돼 재촉을 하면

“당신 내 솜씨 알지? 걱정 마, 붓만 들면 일사천리니까…”

하고 자신있는 소리를 했다. 그것은 나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잔소리는 삼갔다.

원고 마감에 좀 늦기는 했어도 그이는 원고 약속을 어기거나 질질 끌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이는 새로운 지식에 목 말라 해서 외국에 원서 原書를 주문하기도 했고, 해외 여행 때는 신간 서적을 많이 사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의 곁에는 항상 책이 있었고, 또 책 속에서 살았다. 그이는 새 책을 사면 꼭 책 안에 책을 산 날짜를 기록해 두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그의 책을 펴 보면 달필로 날짜와 자기 사인을 해 놓은 게 보인다.

그리고 그이는 책을 정독했기 때문에, 감명 깊거나 기억에 남겨 두고 싶은 구절에는 언더라인을 해두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그가 남기고 간 많은 책에는 언더라인 자국이 그대로 있어, 그것을 볼 때면 그이가 독서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의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중 헌 책일수록 그의 손때가 많이 묻은 것이고, 나는 그런 책에서 그의 체취를 느낀다.

그이는 술값과 책값을 아끼지 않았다. 말년에 우리는, 일요일이면 교회 갔다 오는 길에 점심 먹고 광화문의 서점에 들러서 오는 것이 정해진 코스처럼 되었다.

그이는 오래된 서점들이 문을 닫게 되는 것을 가슴 아파했고, 한탄도 했다.

 

 

 

KBS와의 재회

 

그이는 1972년 봄에 코리아 헤럴드 를 8년 만에 그만두고, 얼마 후 KBS 심의위원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엔 윤주영 씨가 문공부 장관이었다.

KBS 심의위원 자리가 어떠냐고 교섭이 들어온 것은 코리아 헤럴드를 그만두고 몇 달 놀던 때였지만, 솔직히 말해 그이는 그 자리를 그리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

나도 그런 생각이었지만, 월급장이였던 사람이 퇴직금 한 푼도 없이 (코리아 헤럴드는 그때만 해도 퇴직금 제도가 없었다) 두 손만 잡고 나왔으니, 금방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생활의 위협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항상 남편의 신상 身上에 관한 최종 결정은 스스로에게 맡겼지 내가 어떻게 하라고 말은 안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이는 내 생각과 내 의견을 존중했고, 내 말을 믿고 많이 따라 준 것도 사실이다.

그때 이미 그이 나이 52세 때였다. 다른 직장 같으면 이제 퇴직할 나이가 가까워진 때였다. 그이도 나도 많이 생각했다. 나는 그때 한마디 내 의견을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남자 나이 50이 넘으면 권력이나 돈이 없는 한 월급장이로서는 사양길예요. 나는 지금껏 당신한테 권력이나 돈을 탐냈다거나 그것을 못한 당신을 탓하고 살아온 적은 없어요. 그리고 지금 말하는 자리가 당신이 흡족하게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여건의 자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모든 면에서…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두 길이 있어요. 그 자리를 응낙해서 월급장이가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문필 文筆로써 생활을 하느냐…

그런데 문필로 나간다면, 언제 당신이 구상하고 계획한 대로 당신 필생의 대작 大作을 지어 마지막 이름과 작품을 남길 수 있겠어요? 그건 너무 늦었고 힘든 작업 같아요.

그렇다고 당신 성격에, 마음에도 없는 방송국이나 TV극을 써서 매문 賣文 하겠어요? 더구나, 팔팔한 젊은 애들이 판을 치는 그 살벌한 방송계에 어떻게 밀고 들어가겠어요? 그렇게 작품도 못 남기고 생활을 위한 방법밖에 안 될 바에야… 그 나이에 얼굴 깎이고 이름 더럽혀질 짓은 당신 못할 것 같아요. 나도 그건 불편하구요.”

“그럼, 응낙하란 말야?”

“글쎄,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 아내로서의 의견일 뿐예요. 당신 생각이 마지막 결정이 되죠.”

그때의 그이의 고뇌를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이 50이 넘어 새 직작을 결정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을씨년스럽고 우울했던 그의 마음을…

그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가족회의를 했다. 그이는 애들의 의견도 항상 존중했고, 또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때 다 큰 세 아이는 위기 의식을 느꼈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때 국민학교에 다니던 막내 기민이가

“나는 아빠가KBS에 나가면 좋겠어. 아빠가 글 쓴다고 파자마 입고 매일 집에 있으면 실업자 같아서 난 싫어”

우리는 그때 모두 막내 끼미 말에 폭소를 터뜨렸지만, 그이는 막내 말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누가 애들 말은 천사의 말이라고 했던가. 솔직하고 꾸밈없는 막내의 말에 나는 숙연해지고 눈물이 날 만큼 가슴이 아파왔다.

결국 그이는 그 순간에 KBS로 가기로 마음을 정해 버렸다.

그날 밤 우리는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이는 막내 끼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착하고 순수한 그의 마음에 막내는 정직한 돌을 던졌던 것이다. 그이가 마음을 결정하고 나니까 나는 나대로 만감 萬感이 오고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이는 KBS 에 심의위원으로 일하면서 많은 회의를 느끼면서도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해냈다.

따지고 보면 초기 KBS 아나운서로 일한 적도 있고 해서 KBS 하고는 깊은 인연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음악, 극 대본, 고증 考證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심의위원으로서 일도 많이 했고, 방송국에서 필요한 사람이었음을 나도 안다.

그러나 그이는 말년 末年에 들어, 자신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과 비례해서 술을 계속해 들었다. 술이 들어가면 그이는 자조적인 말을 가끔 했다.

“방송국 심의위원이란 절대 필요한 자리면서도 대접을 못 받는 자리야. 나는 그래도 치사하게 월급 도둑놈은 되기 싫어. 남자의 직장이란 자기가 즐거워하면서 또 그 자리에 곡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때 보람이 있는 거지.”

그런 마음의 갈등을 지녔으면서도 그이는 9년을 버티어 주었다.

KBS에 들어가기 전에 그이는 TV 프로를 맡은 적도 있고, 방송극을 쓴 적이 있었는데, 심의위원이 되고부터는 KBS에 방송극을 쓰는 것은 물론 TV 출연조차 꺼려했다.

자기가 방송국 심의를 하면서 자기 작품을 낸다는 것은 경우에 어긋난다며 다른 방송국에도 작품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직장을 가지면서 작품을 쓴다는 것은 굉장한 체력 소모가 뒤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이는 하나의 직장인으로서는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꼬운 꼴 못 보고, 윗사람이라 해도 특별히 저자세로 받들지 못하고, 그리고 자기 마시고 싶은 대로 술 마시고, 하고 싶은 말은 못 참고 해야 했으니…

어떤 때 과음한 날 아침이면, 출근차가 와도 출근 안하고 그냥 돌려 보내기도 했다. 자기 마음대로였다. 겁나고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럴 때면 내가 가끔

“대한민국에는 사람도 없나 보우. 직장이라고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마음대로 해요? 나는 KBS에 감사 드려야겠어요”

하면, 그이는

“무슨 소리야? 나는 목 매어서 사는 게 아냐. 무슨 짓을 해도 어디 가서 그만한 것 내가 못 벌 것 같아? 걱정 말아요”

나는 지금도 같은 방에 계셨던 심의위원 여러분께 고마움을 느낀다. 더구나 같이 계셨던 윤현배 선생님은 마치 그이의 형님같이 그이를 여러 모로 돌봐 주신 분이다.

그 자신감과 오기도 결국 무너지는 건강에는 감당할 길이 없었다. KBS에 있을 때 그이는 두 번의 해외 출장이 있었다.

한 번은 팔도강산 팀을 데리고 파리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보름 예정으로 떠난 사람이 일주일 만에 소식도 없이 집으로 들어왔다. 일은 모두 끝냈지만 일행들은 아직 파리에 있는데 그이만 먼저 와 버린 것이다. 그 이유인즉

“당신이 없는 파리는 하루도 더 있을 필요가 없어”

라는 것이었다. 영국에 있는 조카 집에 들르기로 해서 그 애들이 삼촌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음은 물론이다.

나는 고맙다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남은 한 번 나가기도 힘든 파리 여행인데 당신은 정말 우기는 사람예요”

“내 일만 끝내고 왔으면 됐지. 을씨년스럽고 비만 뿌리는 파리 거리를, 내가 미쳤어? 혼자 다니게…. 당신하고 다시 한 번 나갈 때 같이 보려고 그냥 와 버렸지”

담백한 그의 성격으로는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그것은 1971년도에 그이와 내가 같이 파리에 다녀온 후의 일이었다. 그렇게 나 때문에 서둘러 온 파리 여행은 결국 다시 같이 못 나가고 그이는 가 버렸다.

그 후에 그이는 KBS 게획으로 ‘불교의 뿌리를 찾아서’ 라는 프로를 취재하기 위해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 인도 여행은 더위와 음식이 맞지 않아서 고생도 많았지만, 방송 프로로서는 성공적이었다. 그때엔 얼마 전에 열반하신 탄허 呑虛 스님 일행도 같이 떠났었다.

 

 

 

‘불교의 뿌리를 찾아서’

기원이!

서울을 떠나면서 지금까지 (새벽 3시 30분) 줄곧 달음질 치느라고 편지 한 장 쓸 시간이 없었단 말이오.

매일 해야 할 일들, 사진 협의와 민간 외교…..

일행이 5명인데다가 행동 범위는 넓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을 통역까지 해야 하고… 정말 고되고 힘겨운 여행이오. 더구나 한곳에 이틀을 묵지 못하고 또 옮겨야 하고, 짐도 챙겨야 하고, 일행들의 뒷바라지, 쓸 비용 지불하는 것, 쇼핑하는 것까지 일일이 따라다녀야 하니, 이번 여행은 고행 길임에 틀림없소이다.

우리끼리 느긋이 다니던 여행이 새삼 그립고 귀중하다는 것을 다시 실감하오.

다행히 가는 곳마다 성실하고 착하고 몸소 나서서 애써 주는 사람들이 많아, 일하기 전에 모든 절차가 수월하게 풀리니 고생을 좀 덜 하오.

역시 그 동안 내 몸에 쌓였던 경험과 대인 관계, 외교성 등이 다소나마 보탬이 되는 것 같소.

지금 밀림 속 방갈로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쓰고 있소. 스리랑카 중부 지대 ‘포푸나푸라’라는 곳, 야생 코끼리, 원숭이, 코브라 뱀이 득실거리는 밀림 속!

타잔이 못된 것이 한스럽구료…

더 쓸 시간이 없어 그러니 다음 지시 사항을 이해해 주시오.

1. 모든 것이 예정대로 잘 돼가고 있다는 것을 홍 사장님 비서실로 연락할 것.

2. ‘십년세도’ 편찬실 이영신 씨와 심의위원 윤현배 씨에게도 안부 전할 것.

애들 데리고 당신 모조심 하오.

진섭

 

 

 

<제2신>

기원에게

어제 이곳으로 와서 오늘 인도의 상아탑을 찍고 내일 벌팔을 거쳐 모레 뉴델리로 들어가오.

그 동안 수 만리 길 다니느라 혼났소.

음식과 물 사정, 게다가 피로로 모두들 야단이오. 너무나 큰 대륙, 떴다 하면 30리 길, 차로 달렸다 하면 6백 리. 생각만 해도 대단해요.

그래도 폭풍우나 모든 장애를 용케 피해 다니고는 있으나 배탈이 걱정이오. 아무래도 뿌듯하고 식욕이 안 나요. 술은 맥주조차 허가제라서 목 먹어요. 28~30도의 무더위, 게다가 건기 乾期라 공기도 칼칼하고, 집 생각, 김치 생각 간절하오!

기진, 기광, 기민 다 잘 있지 누이랑 정희, 현 박사도…

기진이 옷 사고, 몇 가지 토종 민속품과 액세서리를 샀소. 먹고 자고 뛰고 움직이는 것 외에는 쇼핑 같은 것에 눈도 안 돌리고 있소. 너무 기대하지 마시오.

23일에는 스리랑카의 문화장관과 인터뷰. 대통령, 수상, 각료급 참석. 민속 무용제 개최. (우리일행이 문화 협정 후 최초의 사절단이라며 격조 높은 대우) 24일에는 대통령과 수상 인터뷰. 25일에는 다시 Kandy 대종정 大宗正 면회.

다시 콜롬보로 와서 26일 9시 10분 비행기로 인도 봄베이로 떠나오.

27일 새벽 5시에 출발해서 불교 사적지인 애로아, 아잔타 싼치를 돌아 12월 3일 뉴델리로 갈 예정이오.

이틀 동안 수도 중심을 몇 군데 돌아다니며 마저 찍고, 제2 코스로 (가장 힘들고 고생이 많은 곳) 진짜 불교 성지 순례 길로 (캘커타, 배나래스, 부다가야, 네팔) 떠날 예정이고, 나는 제 3코스 파키스탄을 포기하고 곧바로 도쿄 거쳐 귀국할 예정이나, 예정대로 간다 해도 12월 27일께나 귀국할 것 같소. 대강 그리 아시오.

보리수 잎사귀 (불타가 남긴 최고의 보리수 2,100년 된 나무에서 떨어진 잎사귀)를 특별히 선물 받아 가지고 가오. 이것은 당신에게 주는 귀중한 선물이 될 거요.

옮겨 가는 대로 또 편지하리다.

몸조심하고….

당신의 진섭

 

 

그이는 이 인도 여행에서 과로와 음식이 안 맞아 장에 탈이 나 돌아와서 한 동안 고생했었다.

그이를 비롯한 일행의 수고로 그 TV프로는 평이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이는 여행 중 그 바쁜 속에서도 항상 자상하게 편지를 해서 나는 그이는 여행 중 그 바쁜 속에서도 항상 자상하게 편지를 해서 나는 그 편지를 볼 때마다 그이의 다정함을 느낀다.

 

 

 

파리에서 그이와 만나다

 

그이는 1968년에 첫 해외 여행 문이 열린 이래 거의 2년에 한번 꼴로 해외에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1971년, 드디어 우리 둘은 해외 여행을 같이 갈 기회가 왔다. 그 해 아이레에서는 펜 클럽 대회가 있어 그이는 일행과 함께 먼저 떠났다. 그때 마침 나는, 미국 워싱턴에서 세계언론 여류작가회의가 있어 거기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여자들의 해외 여행에는 규제가 많아 나가기가 힘든 때였다. 솔직히 말해, 영어를 좀 듣기는 한다지만 말이 잘 안 나오는 형편에 국제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드물었던 때라 나는 참석하는 쪽으로 마음을 결정했다. 더구나 부부 동반 여행은 더욱 힘든 때였으니만큼, 그이를 밖에서 만나 같이 세계를 돌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절호의 찬스였다.

당초 그이가 떠날 때 나는, 구라파 쪽은 돌 생각도 못하고 뉴욕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여행사에 알아보니까 조금만 더 보태면 세계 일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용단을 내렸다.

이왕이면 미구보다는 구라파 구경을 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이도 어차피 구라파를 돌아 뉴욕으로 오게 되어 있었으니 내가 구라파에 먼저 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생각에, 인생에서 그처럼 절대 적시 適時 에 잡아야 할 찬스라는 것이 수비사리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좋은 찬스를 잡아 행동에 옮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때 내 판단은 옳았다. 그때 안 나갔으면 우리의 영원한 기념이었던 그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내게는, 그 전 해에 한국일보에 연재소설 <화혼 花魂> 을 쓰면서 들어 둔 100만 원짜리 적금이 있었다. 그때 100만원이면 꽤 쓸 만한 가치가 있었을 때였다. 그 적금을 들 때는 애들도 커 가니 비상금으로 저축해 두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나는 그 뜻있는 100만 원을 융자받았다. 그때 세계 일주 비행기 값이 89만 원이었다.

우리 일행은 정충량 선생님을 단장으로 해서 언론인 김혜영 (그리이스 김) 씨, 소설가 송숙영 씨, 신아일보 이민자 기자,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떠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여류들에게는 이 단체가 생소해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청자가 많지 않았다.

우리는 몇 번이나 해외 여행 경험이 있으신 정충량 선생님과 어학에 능통한 그레이스 김이 계셔서 든든했다.

처음 여권을 받는 날, 나는 흥분이 돼서 잠이 안 왔다. 여권 넘버는 884! 빳빳하고 선명한 곤색 여권은 신기하게까지 보였다.

제주도도 못 가 본 여자가 처음으로 큰 나들이를 하게 되니 챙길 것도 많고 집에 준비해 놓고 갈 것도 많았다. 그이가 집에 있었으면 자상하게 모두 알아서 챙겨 줄 텐데 그이도 없이 혼자 하려니까 나는 초긴장 상태였다. 더구나 건망증이 심한 나는 일일이 수첩에 메모하고 몇 번씩 체크하는 등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시어머님이 오셔서 집도 봐주시기로 하고, 오래 살림을 봐 주던 일하는 언니도 있었지만, 애들을 남겨 놓고 떠나자니 어쩐지 좀 불안했다. 그 당시 막내 나이가 10살이었다.

그때 영국에 있던 그이한테서 뉴욕에 며칠 날 도착하느냐고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나는 파리로 직행하겠다고 했더니, 그이가 놀라면서 좋아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무렵 영국에서 보낸 그이의 편지>

기원!

당신이 파리고 직행을 한다니 정말 꿈만 같구료.

잘 결정 내린 것 같소. 나도 난생 처음 나온 구라파 행이라 참 즐거웠어. 특히 로마에서 파리로 갈 때 본 알프스 산맥의 위용은 기가 막히더군. 사진을 찍어 놨어.

런던에서는 혼자 시내로 들어가 중심지에 있는 카도간 호텔에 묵었지.

오스카 와일드가 집필하다가 잡혀 간 뒤 많은 문인들이 투숙했고, 헤밍웨이도 젊었을 때 들렀던 곳이라고 해.

18세기 때 헨리 7세가 사랑하던 명 여배우 리리 렌트리에게 내준 저택인데, 고색창연한 게 운치가 있고 멋있어요.

이틀 푹 쉬는 동안 혼자 런던 시내를 다녔지. 마침 중앙일보의 박중희 朴重熙 씨를 만나 안내를 받았어.

한마디로, 런던은 집집마다 역사가 깊고, 낡은 맛과 멋이 있고, 차분히 가라앉은 저력 있고 사색하는 도시임에 틀림없어.

거리는 깨끗하며 조용하고, 융단 같은 잔디가 기가 막히는구료. 높은 빌딩이 거의 없고 넓은 평야야. 널찍널찍하게 자리잡고 숲이 우거진 주택들은 모두가 안정돼 있고 여유가 많은 것 같아.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베푸신 은덕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다시 한 번 우리를 생각하게 되는 군.

이곳, 더블린에서 8마일 떨어진 곳인 던 레아리는 피서지로 정말 조용한 곳이야.

그리고 21일에 파리로 들어갈 생각야. 파이에 있는 윤 공사 公使 에게 연락을 해 놓았으니 그리 알고…

될 수 있으면 북극을 통해 오는 직행 JAL을 타는 것이 가장 편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 (그때는 서울에서 파리로 가는 직행이 없었다) 남행 南行은 너무 고생스러우니…

아무튼 약속대로 소식 없으면 23일 오전 6시 15분에 도착하는 줄 알고 오를리 공항에 나가겠어.

변동이 있으면 윤 공사 앞, 또는 KAL 변 卞 전무께 곧 연락해요.

그럼 또 편지 못 쓰니까 어머님께 애들 잘 부탁드리고….

당신의 진섭

 

워싱턴에서 열리는 회의는 10월 4일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나는 일행보다 보름 앞서 서울을 출발했다.

1971년 9월 22일, 서울발 아침 8시 30분 KAL을 타고 오전 10시 20분에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일기에 씌어진 그 감격

하네다 공항의 대합실에서 애들한테 엽서를 띄우다. 기착지 공항에서마다 애들한테 그림엽서를 띄워야지. 세계의 풍물이 담긴 그림엽서는 훗날 그 애들에게 좋은 추억과 기념이 될 것이다.

난생 처음 딛는 외국 땅! 좀 흥분된다. 정각 12시에 ‘AIR FRANCE 183’으로 출발!

이제 제대로 갈아탔으니 싫어도 파리에 도착하겠지.

난생 처음 밖으로 나와 세계의 땅을 밟아 보니 좀 긴장은 되지만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다.

이제 나도 세계인의 하나라는 큰 생각이 든다. 그이는 지금 이렇게 의젓한 나를 굉장히 불안해 하고 있겠지.

모든 것아 자유롭고, 나만 혼자라는 데 오래간만에 해방감을 느낀다.

산다는 것은 역시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내 좌측에는 필리핀 여자, 내 앞에는 일본인 남녀, 구라파 사람! 비행기 안은 작은 지구촌이다. 12시 45분에 오사카에 도착.

5시에 마닐라 공항에 도착. 허약하고 가난한 인상! 일제 때 마닐라의 격전지 섬을 내려다보며 통과하다.

공항에서 마 麻로 된 테이블보를 사다. 애들한테 제2신 띄우다.

8시 20분에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도착. 비행기가 기착은 했으나 국부전 局部戰 때문에 비행기에서 승객을 못 내리게 한다. 멀리 불빛이 보인다. 그때 캄보디아는 시아누크가 실각하고 론놀 장군이 장악했다가 다시 시아누크가 복귀했을 때였다.

프놈펜을 8시 30분에 출발.

시계 바늘을 고치다. 완전히 어둠 속을 날다.

두 젊은이들 속에서 대화를 나누다. 스페인으로 가는 애인들. 인간도처 人間到處! 얼굴과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가 살아 잇다는 그 사실만이 뚜렷하다. 하늘에는 국경도 지역의 구별도 없다. 떴다 내리면 또 뜨고, 어느 나라라는 이름만 달라진다.

오후 9시 10분, 방콕 도착.

비 내리는 방콕 공항 터미널에서 기다리다. 무덥고 끈적거린다. 10센트 내고 비싼 화장실에 가다. 피곤이 서서히 온다. 지금쯤 어머니와 애들은 잠들었을까? 벌써 그것들 넷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이국의 공항 대합실!

나를 알아 주는 얼굴도, 내가 아는 얼굴도 아무도 없다. 내가 혼자라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일 게다.

어두운 밤, 공항의 여자 판매원의 얼굴에 피곤이 깃든다. 방콕 공항 10시 3분! 샹송 ‘라비안 로즈 [장미빗 인생]’ 가 흘러 나온다. 서울서 듣던 맛하고는 다르다.

방콕, 10시 40분에 출발.

어둠 속을 가도가도 한이 없다. 한참 잔 것 같은데 아직도 파리는 먼 것 같다.

그리스의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다.

한국 사람은 완전히 혼자다. 그러나 꿀릴 것은 없다. 언어는 통하지 않으나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급한 것은 그대로 통하기 마련이다. 공항 대합실에서 기념으로 티 스푼을 사다. 불편한 것이 없는 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모든 것은 어디서나 질서만 지키면 된다.

새벽 2시 15분!

별빛 속에서 아테네 시가가 내려다보인다. 언젠가는 아테네에도 와 봐야지. 가도가도 밤! 비행기가 별 속을 헤치고 가는 것 같다. 요령이 생겨 침대식으로 의자를 꾸며 다리를 높이 했더니 훨씬 편하다.

공항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아테네 공항은 규모가 대단해 보인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등불! 그것이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따뜻함을 준다.

다음이 파리겠지. 어지간히 날아온 것 같다. 파리가 가까워온다.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한다. 창 밖으로 무지개 같은 ,아니 바다 넘어 지평선 같은 것이 보인다. 파리의 새벽을 내다보게 되겠지.

그이는 지금쯤 일어났을까?

보름 만에 그이를 파리에서 만나다니… 너무나 너무나 멋있는 재회가 아닌가.

오렌지 냄새가 나는 물수건이 나온다. 그이를 만나기 위한 가벼운 화장을 했다. 곧 아침 식사가 나올 것 같다. 어쩌면 프랑스 스튜어디스들은 모두가 그림처럼 예쁠까? 화장술이 아주 회화적 繪畵的이고 아름답고 세련됐다.

다행히도 긴 여로 旅路에 긴장한 탓인지 몸의 컨디션은 좋은 편이다. 기내 음식도 프랑스 요리라 그런지 맛있고, 특히 커피 맛이 좋구나.

파리 – 오고 싶었던 곳. 그 굼이 생각보다 빨리 온 게 꿈 같고 고맙구나. 서울-파리, 구름과 밤 속을 날아 왔다.

그이가 나와 있겠지.

새 담배에 불을 붙이다.

 

예정대로 새벽 6시 25분에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다. 안개비 속에 그이는 레인 코트를 입고 서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와 트렁크를 받으며

“서울 촌색시가 드디어 파리에 왔군”

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멋 적게 웃으며 그이 친구가 갖고 나온 차에 탔다.

“두 분이 파리에서 재회하시니 정말 보기 좋습니다”

친구 분은 핸들을 잡으면서 백미러 속에서 웃었다.

“그럼. 우리는 신혼여행도 못 갔으니까 구혼여행인 셈이지”

그이는 나를 쳐다보고 어린애같이 웃고 있었다. 나는 대답도 못할 만큼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내가 지금 파리에 왔다니… 그리고 내 옆에 이렇게 그이가 있다니…

차는 실날 같은 안개비 속을 뚫고 파리 시내로 들어갔다. 회색 빛 고색이 짙은 건물들이 아침 비 속에 잠들고 있었다. 새벽이라 거리에는 인적도 드물었다.

비, 바람, 공기! 그 모든 것이 파리 속에서 젖고 있었다.

“여보, 호텔은 몽마르뜨르 언덕 아래 있는 ‘까미리아’ [춘희 椿姬 라는 뜻]란 곳이래. 작은 호텔인데 이름이 좋지”

“그래오. 그런데 나는 지금 정신이 홈빡 나갔어요. 꿈만 같아요.”

“아주머니, 계시는 동안 언제나 차는 대령하겠습니다. 좋은 파리의 아침이 되시기를…”

그이 친구는 우리를 호텔 문 앞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호텔 현관에 들어서자 주인 마누라가 나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호텔이라기보다 좀 큰 가정집 같은 아늑한 인상이었다.

우리들 방은 3층 에 있어 아래층에서 ‘라샹세루’를 탔다. 라샹세루란 엘리베이터인데, 옛날 영화에서 보던 쇠창살로 돼 있어 밖이 모두 내다보이는 2인용의 작은 것이었다. 낡고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는데, 트렁크 하나 놓고 사람 둘 타니까 꽉 차는 고풍스럽고 로맨틱한 엘리베이터였다.

라샹세루가 움직여 올라가기 시작하자 그이는 내게 다가와 나를 안고 따뜻하고도 섬세한 키스를 해주었다. 파리 도착 환영의 키스였다. 그이는 그런 감미롭고도 로맨틱한 데가 있었다.

방은 널찍하고 좀 낡은 것 같았으나 정결해 보였다.

“여보, 나는 아직도 꿈 꾸고 있는 것 같아요.”

“꿈이 아냐. 여기는 몽마르뜨르 언덕 아래야. 그리고, 당신하고 내가 여기 이렇게 있고… 빨리 내려가 아침 식사 하고 나가자구”

창 밖을 내려다보니까 우유 배달차가 지나가고, 비가 갠 회색빛 보도 위에는 엷은 아침 햇살이 뿌려지고 있었다. 나는 짐을 풀고 목욕을 한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호텔 주인 내외, 심부름하는 여자, 우리까지 합친 투숙객 대 여섯 명이 긴 식탁에 같이 앉았다.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깔끔하고 맛깔스런 음식! 프랑스 특유의 딴딴하고 맛있게 구워진 빵, 주인이 나를 환영한다고 해서 붉은 포도주로 모두가 건배를 했다.

그이는 프랑스 맥주도 한 병 곁들였다. 그이는 매일 아침 맥주를 해서, 벌써 이 호텔에서는 그에게 ‘무슈 비야”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빨리 거리로 나가고 싶어서 식사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호텔에서 가까운 몽마르뜨르 언덕에 먼저 가기로 했다.

“나는 당신 오면 같이 다니려고 아무 데도 안 다녔어. 파리 날씨는 변덕스러우니까 레인코트는 들고 나가야 해”

그이는 사진기를 메고는 내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갔다.

고층 건물이 없는 파리 거리는 건물의 쇼윈도 하나하나가 예술적이고 아름다웠다.

몽마르뜨르 언덕 올라가는 길가 왼편에 개 묘지 공원이 있었다. 거기는 사람의 공동 묘지나 마찬가지였다. 꽃과 개 동상과 비석이 그림 같았다. 아직도 개를 잊지 못해 꽃에 물을 갈아 주는 여인, 묵상하고 서 있는 노파도 있었다.

어떤 비문에는

‘너를 보내고 나는 영원히 개를 다시 기르지 않으리’

라는 어떤 주인의 애통의 소리도 있었다. 그이는

“보신탕 감이 되는 우리 한국 개하고는 팔자가 다르지”

몽마르뜨르의 긴 언덕에는 무명의 화가들이 제멋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관광객의 초상화도 그려 주는 등, 거기는 자유 예술의 거리였다.

몽마르뜨르 언덕에서는 회색 빛 파리 거리도 내려다보였다. 우중충하고 고색이 창연한 싸크레 켈 사원 寺院 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어 생화로 화관을 쓴 애 띤 신부가 신랑과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이는 나를 계단 위에 서게 하고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고, 둘이서 찍을 대는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셔터를 눌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모든 것이 신기해서, 내가 20세기에 있지 않고 17세기 어느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는 몽마르뜨르 언덕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마셨고, 무명 화가 옆에서 포즈를 취해 또 사진을 찍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관광객보다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몽마르뜨르 언덕을 내려오면서 길가 어느 집 문 앞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목격했다.

그것은 젊은 부인이 무릎을 꿇고 대문 문고리를 닦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문고리는 노란 쇠붙이였고, 엄마 옆에는 애기가 놀고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들은 상식은, 프랑스 여자는 사치하고 향락적이고 다분히 소비형이라고 들었는데, 문고리를 닦고 있는 젊은 주부를 보고는 감동을 받았다.

와서 보고 들으니까, 프랑스 여자들은 지극히 보수적이고 살림꾼이고 가정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에게 참정권 參政權 을 인정한 것도 구라파 중에서 제일 늦었다고 한다.

 

 

잊지 못할 유럽의 ‘두 연인’

 

9월 23일

몽마르뜨르 언덕에서 내려와 ‘동경 동경’이란 일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샹제리제 광장에 가다.

샹제리제는 파리 유일의 푸로무 나드 (산책길)이다. 양편에는 플라타나스 가로수가 즐비하다.

광장 길가 카페에서 작은 잔의 독한 커피를 마시다. 이제 조금씩 파리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난다. 파리의 공기, 파리의 분위기는 길에 앉아 그냥 이렇게 눈요기만 해도 좋구나. 그이가 담배불을 붙여 준다. 나는 지금 가슴으로 피리를 즐기고 있다. 그이는 신기하다는 듯, 내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같이 바라보며 웃는다.

 

9월 25일

윤하정 공사 (그이와 경성대 예과 豫科 동창) 부부와 베르사이유 궁전을 구경가다.

기하학적으로 꾸며 놓은 아름다운 정원에 눈이 환하구나.

17세기 때 루이 14세가 만든 프랑스 군주제도 최후의 소산인 이 베르사이유 궁전은 인간 최고의 호사와 화려함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안트와네트의 방은 호화 극치로서, 그녀의 최후가 비참했던 만큼 인상도 깊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9월 26일

파리 일주일의 스케줄은 빠듯하다. 나는 자는 시간도 아까운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혼자 호텔을 빠져 나와 산택을 하다가 길을 잃어 혼났다. 더구나 뒤에서 알제리아 남자가 ‘마담 마담’하고 쫓아오는 바람에 무서워 가게 안으로 숨는 촌극을 벌였다.

오늘은 KAL 의 송 송 부장이 안내해 사진 찍는 날로 정했다. 개선문 앞 광장, 에펠 탑, 노트르담 사원에 가다.

그이더러 에펠 탑에 오르자고 했더니, 그런 데 올라가는 것은 촌사람이나 하는 짓이라며 그만두자고 한다. 그럼 우리가 촌사림이지 뭐, 파리쟌인가? 할 수 없이 올려다 만 보고, 에펠 탑 밑에 있는 선물 가게에서 애들 줄 것을 몇 개 사다. 송 부장은 오늘은 사진 찍는 날이라고 계속 셔터만 누른다.

자구 보면서도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파리의 매력은 일주일 관광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9월 27일

파리 거리의 가운데를 세느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세느 강에는 2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다.

그 다리에서 파리를 바라보는 경치는 유별난 게 있었다. 세느 강변에는 탐스런 푸른 허리띠 같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北回歸線>이라는 소설 속에 이 경치가 묘사돼 있는데, 이 소설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는 그 세느 강변을 걸었다. 강변에는 화상 畵商, 골동품 가게, 그리고 책 가게가 즐비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자의 강변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치 젊은 연인들같이 어깨를 감싸고 걸었다.

그이가 49세, 내가 42세! 우리는 좀 늙은 연인들인지도 모른다. 세느 강변의 산책은 아마 영원히 우리를 즐겁게 해주리라.

 

9월 28일

파리의 하루가 저문다는 것이 아쉽고, 자는 시간도 아까운 생각이 든다.

오늘은 루블 박물관을 갔다. 보수 중이라 일부분만 보게 돼서 아쉬웠다. 완전히 보려면 사흘이 걸린다고 한다. 그 많은 그림 앞에서 그대로 숨이 막힌다. 서울에서 귀로 익히고, 복사판으로나마 간접적으로 접했던 그 그림들이 생생하고 거대한 실화 實畵로 내 눈 앞에 있을 때 그것은 실로 큰 감동이었다.

세잔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의 살아 있는 호흡을 같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그림들! 또,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 주는 웅장한 성화 聖畵 들!

정말 우리가 살아서 이것을 볼 수 있다는 감동에 그이와 나는 손을 잡은 채 같은 자리에 얼마 동안은 숙연히 서 있었다.

재미나는 것은 그 평화 앞에서 그 그림을 그대로 흉내 내어 옮겨 그리는 모조 화가들의 모습이었다. 한 노인 화가는 자기는 30년 동안 이 루블 박물관에서 모조 그림만 그렸다고 했다. 모조화를 그리고 있던 그 노인 화가와 나는 같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 행위를 정식으로 허가해 주는 프랑스는 과연 예술의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이한테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러 가자고 했더니

“그까짓 것 서울서 항상 보던 건데 그냥 나가자구”

서너 시간을 돌아다녀 그이는 피곤했던지 이처럼 무식하고 어린애 같은 소리를 했다.

여학교 때부터 커서까지도 ‘모나리자’의 그 신비한 미소에 매료 당했던 나는, 그 원화를 직접 볼 수 있는 루블 박물관에까지 와서 그것을 못 보았다는 아쉬움에 속이 좀 상했다.

“어쩌면, 당신 같지 않게 그렇게 무식한 말을 해요?”

“모르는 소리. 아쉬움과 다시 볼 것을 남겨 놓고 가야지 또 한 번 보러 올 것 아냐?”

루블 박물관을 나와 점심을 먹고, ‘산 제루만 데 푸레’ 에 갔다. 이 거리는 유명한 소르본느 대학이 있는 거리다. 얼마 전에 데모가 있어 관광객은 못 들어가게 해 밖에서만 보았다. 그이는

“형님이 항상 벽에 소르본느 대학 사진을 붙여 놓고 오고 싶어 하시던 곳인데…”

라며, 지금 이 자리에서 형님 생각이 나서 언짢아하고 있었다.

“그렇게 형님이 오고 싶어 하시던 파리를 형님은 영영 못 오시고 내가 먼저 왔으니…”

그이는 목이 메어 낙루 落淚 했다.

오는 길에 그이는 나에게 양산, 가죽 장갑, 머플러, 샤넬 5번 향수를 사 주었다. 양산은 작은 거였는데, 개선문과 볼로냐 숲이 그려진 파리 냄새가 물씬 나는 예쁜 것이었다.

나는 너무 좋아 소녀처럼 얼굴이 함박꽃으로 환해졌다. (그 후 장갑은 잃어 버려서 그이 혼자 또 한번 파리에 갔을 때 다시 사다 주었고, 양산만은 12년이 된 지금까지도 잘 간직하고 있다)

그이는 파리 거리를 걷다가 샹송만 부르는 집이 없느냐고 물어 보았는데 파리에서도 이제 샹송은 구세대의 노래에 속해 그것만 부르는 집은 없어졌다는 말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샹송의 본고장인 파리에 오면 그 노래, 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

우리는 서울에서 심연섭 선생님이 꼭 찾아보라고 하던 유명한 술집을 찾아갔다.

마드레느 뒷거리.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은 작은 술집이어싿.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낮인데도 가게 안은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이름은 ‘뉴욕 해리스 바 New York Haeris Bar’였다. 세계의 유명한 문인들이 즐겨 찾던 술집이란다. 역사가 깊고 권위와 전통이 있는 술집이다. 헤밍웨이, 휘츠 레랄드, C.D. 루이스, 장꼭또, 까뮈, 사르트르 등 기라성 같은 유명한 문인들이 이곳에서 술을 마시면서 인생과 문학을 토론도 하며 스쳐 지나갔다는 집이다.

낡고 묵직한 사인첩에는 그들의 사인이 남아있고, 대한민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심연섭 선생님의 사인이 있었다. 물론 우리 이진섭 씨도 그 사인첩에 사인을 함으로써 술을 좋아하는 유명인의 관록을 파리에 심었다.

주인이 나와 인사를 나눌 때 심연섭 씨 소개로 왔다고 하니까, ‘무슈 심’은 파리에 오시면 이 집에 상근하다시피 하는 고개이라며 사교적인 인사를 했다.

이 술집에는 45개국의 회원이 있고 그 명칭은 IBF (International Bar Fly)라고 한다는데, 우리도 그 배지와 수첩을 받았다.

이 술집은 1970년도에 정부로부터 국민문화훈장 (레콘 도넬)을 받았다고도 한다. 술집이 문화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프랑스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일 거다.

거기서 그이는 ‘브라디 메리’라는 술을 마셨다. 그것은 우리 한국의 해장술 비슷한 거라고 했다. 그이는 굉장히 행복한 얼굴이다.

‘불행과 불안을 모르도록 잊자. 내일의 평화를 위하여’

이런 문구가 해리스 빠의 간판에 써져 있었다.

해리스 빠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마로니에 나무 숲을 걸었다. 노래 가사와 말로만 들었던 마로니에 잎은 길에 융단같이 깔려 있었다. 파리에서는 길에 떨어진 그 많은 낙엽을 쓸어 버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우리는 마로니에 숲을 걸으면서 일주일 동안의 파리를 회상하며 걸었다. 내일이면 떠날 파리의 구석구석 거리에 나는 그이와의 추억을 심었다.

“여보, 우리 또 한번 와야지. 더 늙기 전에….”

“그래요. 일주일로는 너무 모자라요”

 

브뤼셀에서의 추석

일주일 동안의 짧고도 아쉬운 파리 여정을 끝내고, 우리는 큰 댁 장조카 (그 당시 프랑크푸르트 외환은행 지점장)가 살고 있는 서독으로 날아 갔다.

안개 낀 언덕, 사과나무가 있는 집에서 조카 내외와 애들 세은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독일 체류 기간은 사흘 분이라 먼 곳에는 못 가고, 점심을 먹고 조카 차로 우선 라인 강변을 따라 로렐라이 언덕에 갔다. 라인 강변 멀리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것 같은 고성 古城 이 보였다. 요새는 부호 富豪 들의 별장으로 많이 개축되었다고 하니 인간이 사는 규모가 달라진 셈이다.

로렐라이 언덕은 이름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서울의 무악재 고개보다 좀 얕고 특징도 없는 데 약간 실망을 했다. 그 유명한 로렐라이 언덕의 신비로운 전설에 비한다면 너무나 평범한 언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서독의 부흥은 ‘라인 강의 기적’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곳을 떠나 케니히슈타인 성 城 에 들렀다. 황금색 낙엽이 융단같이 깔린 길에는 우리들밖에 없었다. 그런데, 성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안에서 쇼팡의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신비가호 아름다워서 이 세상 소리 같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껏 수수께끼다. 안에서 어느 사람이 쳤던 것인지, 관광객을 위해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인지. 하여튼 그날 고성에서 흘러나온 쇼팡의 피아노 곡을 잊을 수가 없다. 오늘 길에 ‘도로셀카스’라는 좁고 낭만적인 골목에 있는 선물 가게에서 접시를 샀다. 돌아올 때는 안개가 자욱한 길이 인상적이었다.

다음은 서독에서 브뤼셀로 갔다. 공항에는, 그 당시 브뤼셀 대사였고 그이의 동창이신 정일영 씨 내외분이 마중 나와 계셨다.

브뤼셀은 작은 파리라고 할 만큼 아담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그랑프랑스 광장에 있는 시청 건물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정 대사 내외분은 시청 뒤 유명한 요리점에서 저녁을 사셨다.

다음날, 정대사가 직접 운전을 하며 북해 北海로 가서 유람선을 탔다. 깊고 푸른 바다가 신비스러울 만큼 차가워 보인다.

다시 국경을 넘어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안개길을 거쳐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구라파는 비자도 없이 국경을 넘어 갈 수 있어 편리하다는 생각과 함께 신기한 마음마저 들었다. 정 대사님은 한국의 가수 배호 노래를 좋아해서 우리는 배호의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등을 내내 들으며 갔다. 구라파 이 거리에서 애수 짙은 배호의 노래를 들으니까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먼저, 네덜란드에서 분사 憤死 한 이준 李儁 열사의 묘소를 찾았더니 그날은 문이 닫혀 참배를 못했다.

암스테르담 광장은 히피들의 본산지로 유명하다. 각양 각색의 옷을 입은 각 나라의 히피들이 기타를 치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 히피는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부랑배도, 또 남에게 폐를 끼치는 범법자도 아니란 점이다. 다만 문명과 풍요로움에 지친 젊은 정신적 방랑자들이었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망한 나폴레옹의 기념관에도 갔다. 산타헬레나 섬의 모형, 전투 상황 등이 생생하게 모형화된 데는 놀랐다.

 

10월 3일

브뤼셀 마지막 밤!

오늘이 추석이다. 브뤼셀 하늘의 달도 만월 滿月이다.

정 대사 댁에서 마지막 저녁을 하고 같이 춤을 추다.

언제 또 브뤼셀에 오게 도리지. 정 대사는 나온 김에 스위스, 스웨덴, 그리스 등 구라파를 더 돌고 가라고 적극 만류하셨다. 그러나 나는 10월 5일부터 워싱턴에서 회의가 있으니 그럴 수는 없다. 그 회의 때문에 내가 여권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의리 없는 짓은 못하겠다.

그이는 따로 더 돌아도 좋은 조건인데, 나 혼자 보내기가 불안하다며 같이 떠나기로 했다. 정 대사 부부의 인간적이고 따뜻한 환대가 고맙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10월 4일

브뤼셀에서 아침 11시 8분 파리행 기차를 타고 오후 2시 20부넹 파리의 북역 北驛에 도착했다. 다시 까미리아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10시 출발 뉴욕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구라파의 역사는 기독교 정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고, 더구나 프랑스는 아직도 옛 영화 榮華와 대국 大國의 자존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구라파의 관광은 ‘당신이 가지고 갈 만큼은 준다’는 느낌 그대로였다.

 

 

 

미국서 맞은 결혼 기념일

 

10월 5일

구라파에서 대서양을 날아 일로 뉴욕으로.

그이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다. 세계일주의 반은 넘은 셈이다. 그이가 내 곁에 있고, 세계를 돈다는 실감에 새삼 가슴이 뿌듯하다.

밖에 나오니 그의 인망 人望과 그의 뜨겁고 깊은 애정을 더욱 느끼게 된다. 나도 그를 위해 남은 생애의 최선을 다해야겠다. 그는 나의 절대 전부이다.

소원이었던 세계일주가 뜻하지 않게 빨리 이루어진 데 감사한다. 네 놈이 보고 싶다. 우리의 사랑의 것들, 내가 나온 지 벌써 2주가 되고, 그이가 나온 지 한 달이 된다.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1시 15분 도착, 워싱턴으로 가 일행과 합류. 일행들은 내가 워싱턴에 올 거다 안 올 거다 하며 양론으로 갈라져 있었다고…. 아무튼 일행들 모두가 나를 반겨 주었다.

그이, 같은 호텔에 유숙하다. 내가 회의 중 그이는 자기 볼일 보러 나가다. 이 회의에 참석한 회원 중에 부부 동반은 우리와 멕시코 부회장 부부하고 두 쌍뿐이었다.

 

10월 8일

10시부터 회의가 시작되다. 영국 대표가 발언을 시작하다.

영국 대표는 70이 넘은 할머니로서 젊어서는 일류지의 여기자 생활을 했었고, 지금도 명예직을 갖고 있다는 노인. 백발에 체구도 당당하고, 대영제국의 품위와 관록을 보여 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선 국제출판법에 대한 그의 발언은 방송이나 TV에 관해 새로운 국제법이 필요없다는 의견이었다.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국제법은 필요가 없다는 논조였다. 그러니까 모두 자기 나라 법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발언이었다.

영국 대표의 발언은 70세 노파답지 않게 발음이 똑똑하고 논리가 정연했다. 투표 결과 만장일치로 가결이 되었다. 오늘은 의제 議題가 다양했으나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음은 인구 기아 문제아 대한 마닐라 대표의 발언이었다. 그 여자는, 협의를 통하여 선진국으로부터 1불 씩이라도 기금을 거두어 후진국을 위해
쓸 용의는 없는가 고 외쳤으며, 자기가 이번에 유엔에 가서 우탄트를 만나게 되면 이것을 제의하겠다고 했다.

회의 첫날에는 우리 한국 대표로 정충량 회장의 인사가 있었고, 또 그레이스 김은 회의 내용과 결과를 밤새 타이핑해서 서울로 송고 送稿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분의 어학 실력은 국제 회의에서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고 ‘그레이스 김’ 하면 각국 대표들간에 무척 인기였었다.

오늘은 회의를 일찍 끝내고 버지니아 주에 있는 리즈버그에 갔다. 아침, 점심을 굶은 채 2시간이 넘도록 달렸다.

점심 먹은 후 주지사가 살던 106년 된 집을 구경했다. 넓고 푸른 숲 속에서 옛날의 영화를 상징하는 듯한 규모와 품위가 놀라웠다. 자손이 없어 국가에서 보존하고 있단다.

6시 넘어 워싱턴으로 오는 길에 ‘로지카디’라는 사람의 집을 구경했다. 이 집은 1800년부터 1803년 사이에 지어졌다는데, 마치 동화 속의 집 같았다. 미국의 옛 집에는 전통과 역사가 서려있다. 미국 부호의 옛 집은 그 크기와 호사에서부터 우리하고는 규모가 다르다.

8시 넘어 호텔에 도착하니 현관에서 이재현 문정관 文政官과 그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스 김, 이민자 씨와 함께 동양통신의 송 宋 특파원 댁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대한공론의 홍 洪 특파원 가족, 한국일보의 조새연 씨 가족, 디자이너 서 徐 여사, 미국인 부부 등과 술과 저녁으로 유쾌한 시간을 보내며 외지에서 동포의 그리움을 나누었다.

 

10월 7일

날씨 쾌청. 워싱턴 사흘 째.

그이는 체중이 3 Kg이나 줄었다고. 여행은 역시 피곤한가 보다.

오늘 오후 2시 반부터 백악관을 방문하다. 닉슨 대통령 부인의 접견을 받다. 백악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고 수수한 데 놀랐다. 닉슨 부인은 지적이고 기품이 있었다.

저녁때 도미니카 대사관에서 파티가 있어 다녀 오다. 조촐하고 아늑한 파티였다. 8시 반에 호텔에 왔다. 그이, 먼저 들어와 잠들어 있다.

 

10월 8일

8시 30분에 ‘보이스 어브 아메리카’의 김영호 씨가 찾아와 그이 인터뷰하러 나가다.

 

10월 9일

나흘 동안의 회의를 마치고 일행과 헤어져 우리들은 뉴욕으로 오다. 워싱턴에서 50분 만에 뉴욕에 도착.

큰댁 조카 금주 내외가 뉴저지에서 마중 나오다. 금주를 보니 꼭 우리 기진이를 보는 것처럼 많이 닮아 있어 반가웠다.

오늘이 10월 9일! 그이 49세 생일. 금주 내외가 뉴욕으로 나와 브스데이 케이크까지 준비, 저녁 성찬을 대접받다.

그이의 49세 생일을 인상 깊게 지내다. 밤의 뉴욕 거리는 불빛은 찬란해도 스산한 느낌. 높은 빌딩과 깨끗지 못한 거리. 어쩐지 정이 안 간다.

 

10월 10일

오늘, 뉴욕을 떠나는 날.

아침 9시 40분에 짐을 싣는데, 백발의 미국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가다가 “여행지에서 떠나는 아침이냐?” 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더 놀다 가지, 왜 벌써 떠나느냐? 인생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 내 남편도 항상 go go하며 서두르더니 결국 먼저 가 버리고, 나는 지금 혼자 산다. 가는 길일랑 재촉을 말라”고. 그 할머니는 우리에게 ‘굿바이’를 하더니 새벽 이슬 깔린 길을 빈 수레를 끌고 천천히 사라졌다.

‘인생은 가는 것뿐이지 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옮겨 쓰면서, 12년 전 그 미국 할머니의 뜻있는 말이 너무나 생생하게 가슴에 와 닿음을 느낀다.

5시 50분에 미네아폴리스 공항을 출발하여 로스앤젤리스로 직행. 그이는 가는 곳마다 화제와 유머를 뿌리고 다녀 나는 심심치 않았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자면…

기선이와의 재회의 기쁨이 분초 分秒를 다투며 기다려진다. 산다는 것은 역시 다채로운 것. 기내 식사를 마치자 그이는 단잠에 빠졌다.

그에게 있어 여행길의 잠은 보약과 같다. 내 소중한 사람! 그가 얼마나 나를 필요로 하고 원하고 사랑하는가를 이번 여행에서 정말 더욱 뜨겁고 깊게 느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들의 혼과 육체는 하나라는 것을 절감한다.

로스엘젤리스에 7시에 도착. 기선이 가족과 재회.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기선이 얼굴을 일년 반 만에 보다. 기선이의 얼굴은 살이 찌고 좋아진 것 같다. 곧바로 기선이네 아파트에 와 정성 들여 차린 저녁을 먹다.

아파트는 헐어서 낡았으나 편리하게는 만들어졌다. 기선이는 가발 가게를 하고, 동생 남편의 직장은 낮 2시에 나가 새벽 2시에 퇴근하는 고된 곳인 것 같다.

이민의 고된 생활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미국 사회란 피눈물 나는 노동을 하면 그만한 대가가 나오는 곳이다. 기선이도 5년쯤 고생하면 자리 잡을 것 같다.

로스앤젤리스는 겨울이라 해도 서울의 초가을 같다. 어쩐지 나는 미국 와서는 못 살 것 같은 저항감을 느꼈다.

 

10월 6일

기선이 내외와 우리들, 그 애 차로 롱비치에 가다. 가는 도중에 라그나비치라는 작은 거리에 내리다.

해변가 – 세련되고 우아한 거리, 화상 畵商과 도자기 가게가 많다. 아주 깨끗하고 친절한 레스토랑에서 공짜 커피를 마시다. 돈을 내로고 하니까 언제 조반이나 팔아 달라며 커피값을 굳이 받지 않았다. 미국의 큰 인심을 알 것 같다.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그 유명한 롱비치의 하늘은 맑고 공기도 너무나 깨끗하다. 도자기 가게에서 재미나는 물건을 몇 가지 사다. 나는 뉴욕의 어머어마한 쇼윈도보다 이런 가게가 더 흥미롭고 정이 간다.

돌아오는 길에 유리 교회에 들르다. 천정과 벽이 모두 유리로 되었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송림 松林 속에 서 있는 유리 교회는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롭다. 우리 넷은 제단 앞에서 앉아 묵상했다. 그이는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다. 기선이와 나는 교회 의자에 앉아 재회의 기쁨을 조용히 나누다.

오늘이 우리 결혼 19년 째 기념일이다. 그이와 교회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귀로에 오르다.

기선이 아파트에 돌아오니 서울의 큰 시누님한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어머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고, 기민이가 저녁이면 운다고.

그이도 나도 마음이 서둘러진다. 막내 끼미 생각에 잠을 설치다.

 

10월 19일

큰시누님의 딸인 혜자 (지휘자 원경수 씨 부인)가 사는 스턱턴에 가다. 로스앤젤리스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한적한 동네다. 원경수 씨는 ‘스턱턴 교향악단’의 지휘도 맡으며 그곳 주립대학의 교수로 있는데, 한국인이 드문 그곳에서는 유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두 내외가 마중 나와 함께 원 서방 학교를 둘러보고, 하와이 식 식당에서 점심 하고 들어오다. 혜자네 아파트는 아름답고 깨끗했다. 원경수 씨는 내일 음악회 준비로 연습 나가고, 혜자하고 몇 년 만에 해후를 풀다.

 

10월 22일

원 서방이 운전해서 애들과 우리 내외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나가다. 골든 게이트 (금문교)에서 사진 찍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과시하는 아름다운 다리, 항상 안개비가 내리는 샌프란시스코 날씨인데 오늘은 쾌청하고 좋은 날씨란다.

거기서 해물 요리로 점심 먹고, 애들 팔찌와 지갑 등 자잘한 선물을 사다. 케이블카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나오다.

샌프란시스코는 아무래도 미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도시 같다고 한다. 해변가 비탈길에 그림 같은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도시가 동화적이고 구라파적인 냄새가 나는 재미있는 도시이다.

세계 제일의 꼬부랑길이라는 수국 水菊 이 활짝 핀 길을 차로 내려와 사진 찍고, 남자들은 술을 하며 기다리는 동안 혜자하고 같이 몇 가지 쇼핑을 했다.

저녁은 차이나타운 연경관에서 그이가 사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혜자 집에서 이틀째를 지내다.

 

10월 23일

날씨 여전히 좋다. 원경수 씨는 학교에 레슨하러 나가고, 그이와 앞으로의 여행 스케줄을 이야기하다. 오늘 스턱턴을 떠난다. 비행장 나갈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루빈시타인의 피아노 곡을 듣다.

혜자는 내가 시집와서 몇 년을 같이 데리고 있었기에 조카딸이라도 특히 더 정이 가는 애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보고 떠나니 마음이 뿌듯하다.

 

10월 24일

기선이네 집으로 다시 돌아오다. 기선이 내외는 며칠 안 남은 날 동안 최대한으로 우리에게 봉사하기 위해 여러 모로 신경 쓰고 있다.

오늘은 기선이네 식구 모두와 디즈니랜드에 가다. 돈과 꿈과 예술, 기계의 총합체. 곡 요지경 속 꿈만 같다.

집에 있는 애들 생각이 간절하구나. 우리들만 이런 좋은 구경을 하다니. 언젠가 될지, 우리 애들이 디즈니랜드를 보로 올 때는 모두 어른이 됐을 때겠지.

도깨비 귀신집을 돌 때는 정말 섬뜩하고 무서웠는데, 그이가 옆에서 놀라게 해서 더 무서웠다. 그이는 웃으며

“애를 넷 낳고 40이 넘었어도 당신은 어린애야”

라며 웃는다.

세계 인형 인형 음악제에는 일본 인형도 있는데 우리 한국 인형이 없어 좀 서운했다. 그것도 국력의 탓인가. 새와 꽃과 인디언의 밀림 속, 영화 등 정말 다채로운 꿈의 세계! 과연 미국다운 규모와 디즈니의 예술적 창조성에 감탄하였다.

7시 가까이 돌아다녔더니 그이가 피곤하다고 해서 그만 돌아왔다.

 

10월 25일

기선이 내외와 함께 새벽 1시 15분에 집을 떠나 5시간 만에 라스베가스에 도착하다. 미국 와서 라스베가스를 안 보면 후회 한다고.

바스토 Bastowo에서 점심 먹다. 끝없는 사막. 곳곳에 키 큰 선인장이 보인다. 이런 사막에다 도시를 만든 미국인의 저력에 또 한번 감탄했다.

그런데, 가다가 요절복통할 일이 생겼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사막을 5시간 가까이 달리다 보니 화장실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남자들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동안 나하고 기선이는 화장실에 갔다.

나는 확실히 노크를 했다. 그리고 안에서 응답이 없기에 나는 용감하게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백인 여자의 흰 궁둥이가 보이며 여자가 악 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놀라 문을 닫으며 한다는 소리가

“댕큐 베리 마치”

하고 말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이 엠 소리’를 한다는 게 오발을 한 것이다.

내가 허옇게 질려서 뛰어나오면서 그 소리를 했더니, 모두들 엎드려 웃느라고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이는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으며, 동생 남편은 운전할 생각도 잊은 채 엎으려 웃기만 했다.

“빨리 가요. 그 여자가 쫓아오면 어떡해”

모두들 정신없이 웃는데도 나는 아직도 놀란 가슴이 울렁거리고 겁이 나서 그랬더니

“또 한번 댕큐 하지 뭐”

한다. 그 다음부턴 서울 올 때까지 내 별명은 명예롭게도 “댕큐’가 되었다.

라스베가스는 새벽인데도 낮과 같지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카지노의 본 고장. 도박꾼이면 누구나 한 번쯤 오고 싶어 하는 곳….

오는 도중에 길목에 푯말이 걸작이었다. ‘라스트 찬스’. 퍽 인상적이다. 시재 전부가 카지노 판이다. 스테이트 States라는 큰 곳에 들어가 20불 짜리로부터 시작해 봤다. 영화에서만 보던 도박장, 환락의 도시… 편리하고 돈을 쓰게 만든 곳. 미국의 또 하나의 개척지로서 사막 위에 세워 놓은 인간의 놀이터. 돈을 딴다는 것보다 돈을 엔조이하는 인간들의 표정들…. 진짜 ‘꾼’들은 몇만 불도 날리겠지.

김 시스터즈가 2주 후부터 이곳 나이트클럽에서 일한다고. 유주용과 윤복희도 나온다는데 만나 보지는 못했다.

아래층에서는 서커스가 열리고, 회전 빠에서는 술을 판다.

우리 넷 중에 그이만 ‘블랙잭’을 했는데 세 번이나 좌르르 돈이 쏟아져 나왔다. 기계에 빨간 불이 켜지고 미국 아가씨가 축하한다며 스카치 한 잔을 가지고 왔다.

그이는 마치 어린애같이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미국 놀음판도 이진섭은 알아 준다며… 20불 넣고 60불 딴 셈이다. 넷 중에 성적이 제일 좋다.

하여튼 근심, 걱정, 초조, 불안이 없는 것 같은 세계, 인간이 산다는 가치관이 달라지는 곳 – 열심히 벌어 아낌없이 엔조이 한다. 딴 세상 사람들 같다.

미국은 그런 속에서도, 무서우리만큼 짜여진 질서와 친절과 자유, 그리고 규모가 커져 가는 범죄. 이런 것들이 이상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커 가고 있는 나라 같다. 마음이 헤퍼서인지 외로운 인간들이 많아서인지, 먼저 웃고 먼저 말을 건넨다. 부 富의 여유에서 오는 여백 餘白 때문일까?

늙은이도 많은 것 같다. 미국의 노인들은 어쩐지 한국 노인들보다 더 외로워 보이고 측은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노인들은 그 외로움을 딛고 서서 천천히 늙어 가는 것 같다.

우리 넷 중에 그이 혼자서만 개가를 올리고 라스베가스를 떠나다. 빵과 콜라고 저녁을 때우고, 차 뒤 칸에 침대를 만들고 기선이와 내가 눕고 남자들은 앞자리에 앉았다.

저녁 온도는 서울의 5월 밤 기온 정도! 별은 빛나고, 차는 라스베가스의 불빛을 뒤로 하며 달렸다. 짧은 시간에 재미나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기선이와 나는 노래를 불렀다. 둘의 가슴에는 내일 모레면 있을 또 한번의 이별을 서러워하면서도 서로가 말을 못 꺼냈다. 기선이의 깊은 외로움이 내 피부에 전해 온다.

 

10월 31일

이별의 슬픔을 둘이서 아침부터 참고 견디다. 오늘은 기선이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날! 가슴이 저려 온다.

그 애는 나의 분신 분신! 막막한 땅에서 외롭게 고생하는 것이 측은하다.

11시 넘어 집에서 공항으로 향하다. 열흘 만에 떠난다. 차 속에서도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이런 아픔을 지닌 채 서로 언제까지 떨어져 살아야 하나? 기가 막히다. KAL의 이 부장 나오다. 기다리는 동안 서로 침묵! 떠날 때는 말없이….

연발해서 2시 반 출발 점보 747….

기선아 잘 있거라. 참아야지, 살다 보면 어떤 가능성이란 생기기 마련이다. 너를 내 가슴에 심고 간다.

미국이여, 기선아, 안녕!

뒤를 안 보고 비행기에 오르다. 거대한 기체가 태평양을 날다. 올 때는 혼자였는데 갈 때는 그이가 옆에 있다. 즐겁고 다채로웠던 여정 旅情이 기선이 때문에 좀 흐려졌다.

가도가도 끝없는 태평양을 건너 7시 20분에 하와이의 호노루루에 도착하다. 세계의 하늘을 날며 우리들의 역사를 세계의 하늘과 땅에 새기다.

하와이 공항에 내려 대합실에서 기다리다. 공항에서는 하와이 시가지가 전연 안 보인다. 그이는 나한테 담뱃불을 붙여 주면서

“여보, 하와이는 우리 또 한번 나올 때 며칠 간 스케줄을 잡아 제대로 구경하도록 하지. 고적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휴양지로는 볼 만하니까”

“그래요. 그때가 언제나 될까? 늙기 전에 나와야지, 늙으면 마음만 있고 기운이 없어 호텔에서 잠만 자는 여행이 된대요”

“허허, 그렇게 되기 전에 나오도록 해야지. 구라파도 다시 한번 돌고”

“정말 기대해도 돼요?”

“그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거야”

“나, 보약 먹고 오래 살아야겠네요”

“응, 당신은 보약 안 먹어도 오래 살아. 걱정 마”

우리는 만년 萬年이라도 살 것 같은 마음 속에서 또 한번의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나만은 보약을 안 먹어도 오래 살 거라던 그이는, 그 꿈을 다시 한번 이룩하지 못한 채 혼자 갔다.

 

11월 1일

도쿄 시간 9시 23분에 하네다 공항에 도착. 데이고꾸 帝國 호텔에 투숙하다. 집에 전화해 어머니, 애들 모두 바꾸었다. 애들 목소리를 들었더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시차 때문에 서서히 피곤이 온다.

 

11월 2일

도쿄에서의 첫 아침. 서울이 가까워 오니 긴장이 풀어졌는지 온 몸이 나른하다. 그이는 면도를 하면서

“여보, 우리 조반은 내려가 먹지 말고 가지고 올라오라 할까?”

“더 비싸면 어떡해요?”

살림하는 여편네는 별 수 없었다.

“뭐, 음식 값에다 서비스료나 더 붙겠지. 이것도 멋이고 재미니까…”

“그래요? 그것도 재미나겠는데요. 당신 덕분에 촌여자가 여러가지로 호강하네요.”

도쿄에 내려 호텔을 정할 때 나는, 며칠 안 있을 거니까 공항 근처 산 호텔에 들자고 그랬다. 그랬더니 그이는 그게 아니란다. 구라파에서는 오히려 싼 호텔이 운치가 있고 멋도 느낄 수 있지만 도쿄에서는 그렇지 않다며, 전통과 품위를 자랑하는 일류 호텔인 데이고꾸 호텔을 잡은 것이다.

주문한 지 얼마 후 노크 소리가 나더니, 풀기 빳빳한 모자를 쓰고 제복을 입은 예의 바르고 상냥한 말씨의 여자가 조반을 갖고 들어왔다. 그게 겉으로는 어머어마해 보였다. 순 은쟁반에 바퀴 달린 손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그릇도 모두 수 은제 銀製 였으며, 그릇마다 조각이 된 뚜껑이 달려 눈이 부시도록 호화로웠다. 나는 먹기도 전에 우선 그릇에서 질려 버렸다. 여자는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즐거운 아침 식사가 되시기를….”

하며 나갔다. 나는

“여보, 내가 갑자기 16세기 구라파 귀분인이라도 된 것 같네요. 이제 실크 가운을 걸치고 침대로 도로 기어들어가 베개에 기대고 있을 때 당신이 음식만 날라다 준다면 더욱 무드가 날 것 같네요.”

방도 품위있고 호사스러웠으며, 어제 누가 다녀 갔는지 붉은 장미꽃 한 바구니가 조반 은그릇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런데 조반 내용물은 그릇만 요란했지 별게 아니었다. 커피와 빵, 과실 등 간단한 것이어서 우리를 실소시켰다.

나는 교토 京都 등을 관광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도쿄 시내는 택시로 한 바퀴 돌아 보았고, 식사할 때만 호텔 근처에 나가 사먹었다. 그래도 긴쟈 銀座 니 록봉기 六本木 니 하는, 옛날 소녀 때 일본 소설에서 읽었던 귀에 익은 거리 이름을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이나 나나 웬지 일본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아직도 용서 못할 풀리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이는 공항에서도 절대로 일본 말을 안 쓰고 영어만 쓰는 고집을 부렸다. 우리는 일본에서 아무도 찾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다. 아침에 그이가 호텔비를 계산하려 하니까 누군가가 이미 지불을 했단다. KAL의 조 趙 사장님이 내주셨단다.

떠나는 날 아침 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KAL의 조 사장님을 만나 같이 아침 식사를 했는데, 덕분에 서울 올 때는 KAL의 일등석으로 올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이는 조 사장님한테 여러가지로 신세를 끼치고 있었다. 도쿄에는 나흘밖에 못 있었다. 1시에 하네다 공항 출발!

40일간의 꿈 같은 그이와의 여행!

김포 공하에 내려 송영대에서 엄마 아빠를 목 메어 부르는 네 아이의 얼굴을 보자 나는 눈물이 솟아났다.

새삼스레 우리 둘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무사하게 한국 땅에 밝았다는 안도감과 고마움이 뒤늦게나마 가슴을 메웠던 것이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외국에서도 긴 여행 때는 가능한 한 부부가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다. 그러나 우리 둘은 40일 동안을 겁도 없이 꼭 같이 다녔던 것이다.

내가 40일 동안 비운 집은 어머님과 중학 2학년이던 기진이가 가계부까지 적은 알뜰한 살림을 해 주었다. 다만, 막내 끼미만은 저녁때 해가 질 무렵이면 일하는 언니 등 뒤에 얼굴을 파묻고

“엄마 아빠는 좋은 구경하러 갔는데 나는 왜 이렇게 슬프지?”

하고 매일 울었다고 한다. 끼미는 막내라 그런지 지금도 다정 다감한 청년으로 자라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여행 회상기를 쓰면서 마치 그이와 같이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있다.

낮선 공항 로미, 파리 오를리 공항에서의 첫 만남, 호텔 라상세루 속에서의 감미로운 키스, 팔짱을 끼고 걸었던 세느 강변의 산책과 몽마르뜨리 언덕, 샹제리제 길가 카페에서 마시던 작은 잔의 독한 커피 맛, 그가 사 주던 작고 정성 어린 선물, 그리고 비행기 속에서의 그 많은 우리들의 대화….

그 모든 추억들은 그와의 30년 동안의 추억 중에서도 아름답고 영롱한 불빛으로 내 가슴 속에 빛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발병 發病 하기 전에 또 한번의 세계일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뉴욕에 사는 큰 딸 기진이의 신접 살림을 가 보는 게 그이의 큰 꿈이었다. 얼굴도 못 본 맞사위, 또 결혼 때도 참석 못한 기진이에 대한 섭섭함과 그리움이 그이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딸 기진이. 그이는 그 후 기진이 말을 입 밖에 잘 내지 않았다. 기진이가 미국으로 떠날 때는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인사도 주고 받지 못한 서러운 이별. 그이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살았음이 분명하다. 그이는 기진이가 있는 뉴욕을 돌아 독일에 있는 둘째 딸 기영이 집에 들르자고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구라파를 돌자고 도 했다.

12년 전에는 급한 여행길이었지만 이번만은 관광 코스를 따라 기차로 구라파를 돌자고 했다. 그것은 꿈만은 아니었다. 실현 가능성 있는 일이었기에 그이의 회갑 기념 여행이라고 이름까지 붙였었다. 더 늙기 전에 내년 쯤 나가자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그의 명 命은 그것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 추억은 퇴색해 가는 사진과 12년 전 여행 때 기록해 두었던 낡은 수첩만이 전부이다. 그 수첩 안에는 그이가 달필로 같이 기록한 영자 英字 글씨도 많다.

이제 언젠가 나는 딸들을 보러 나가겠지만, 그가 내 곁에 없는 혼자만의 여행은 아무런 뜻도 즐거움도 없을 것만 같다.

그와 같이 걸었던 길 어느 구석, 어느 자리를 가더라도 나는 그와의 추억, 그의 생각에 가슴 메이리라.

 

 

 

제4장 새벽 세 시의 고독

 

 

50대 소년, 50대 소녀

 

어느 여자들같이 능력 있어 맞벌이로 같이 생활을 했더라면 그이한테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았을 것을…

이런 내 마음은 오래 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직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고정되지 않은 뜨내기 원고료는 보탬이 못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4남매 기르고 그이 뒷바라지하다 보니 세월이 그냥 가 버린 것도 사실이다.

한편 생활은 그이가 책임져 왔으니까, 나는 남편이란 큰 언덕에 의지하고 기댄 채 그이만 바라보고 살아온 주변 없는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경제적인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은 감히 해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항상 마음 한구석으로는 나도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골동품 목기 木器 가구에 심취되어 내 원고료나 가계 家計 에서 절약한 돈으로 골동 가구, 그릇 등을 사 모으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65년 후반기였으니까 골동품 붐이 일기 전이었고, 나는 내가 아낀 돈으로 소품 小品을 사 모으는 재미를 맛보게 됐다.

그이는, 별다른 사치도 없는 내가 그런 것을 사다가 방에 놓고 좋아하며 즐기니까, 자기도 말리지 않고 같이 좋아했다.

우리 집은 내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장롱만 허드렛방에 남겨두고 집안이 모두 골동장으로 꾸며졌다. 비싸게 큰 돈 들인 것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모두 값이 올라 귀중품이 되었다.

나는 골동품에 좀 눈이 뜨이고 어느 정도 안목이 저절로 생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골동품상도 알게 되었고, 수리하는 사람도 알게 되었다. 그 중에 독립문 근처에 살며 대대로 고가구 古家具를 수리하고 만들던 이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아주 정직하고 근면해서 나하고는 몇 년째 단골이었다. 이씨는 가끔 동업으로 골동품 가게를 하자고 말했었다.

그대는 막내도 중학에 들어가고, 큰 딸은 대학에 다니고 해서 웬만큼 애들의 잔손이 덜어질 때였다. 나는 며칠 생각 끝에 드디어 독립문 앞에 이씨와 동업으로 골동품 가게를 차렸다. 상호는 목란사 木蘭舍!

큰 길가 가게 치고 집세도 쌌고, 더구나 동업이라서 일체 비용을 반반씩 부담하니 벅차지도 않았으며, 목기만 주로 취급하므로 자본도 적게 들여 시작했다.

처음에 그이와 의논하니까 그이의 첫 마디가

“당신이 무슨 장사야? 공연히 늦게 안 하던 진 하지 마, 장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글쎄, 그래도 큰 자본 들이는 것 아니고, 이씨가 그 바닥에 경험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애들도 이제 계속해 대학 들어가니 당신 혼자서는 너무 힘들어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요.”

“글쎄, 당신 마음은 아는데, 크나 작으나 장사는 장사야. 시장 가서 셈도 잘 못하고, 항상 속거나 더 주거나 하는 사람이 장사라니 무슨 소리야”

그이는 처음에는 말 같지도 않은지 상대도 안 하고 거론도 못하게 했다. 그런 것을 며칠을 조르고 애원하고 달래고 해서 겨우 승낙을 받았다.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도 반대하던 그이가 막상 허락을 하고서는 가게 이름도 지어 주고, 먹글씨로 현판까지 써 주었다. 그이의 선량한 일면을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름 좋고 글씨 좋다고 내 친구들이 놀려댔다. 나는 신바람이 나고 재미났다. 소파도 갖다 놓고, 작더라도 아담하고 분위기 있는 골동품 가게 여주인이 되려고 애썼다. 그이는 승낙을 해 준 만큼 주문이 많았다.

가게에 나갈 때는 자기의 아침 출근차로 나가고, 들어올 때는 자기의 5시 퇴근차로 같이 들어와야 하고, 토요일에는 일찍 들어와야 하고, 일요일에는 가게 문을 닫을 것 등…

나는 가게 해도 좋다고 허락해 준 것만도 고마워 그 모든 조건에 응낙했다. 동업하는 이씨가, 아침에는 먼저 나와 가게 문을 열어 놓고 저녁에는 10시에 닫고 들어갔다.

3월에 열었는데, 처음 몇 달은 내 친구, 그이 친구, 또 친척들이 인사 삼아 와서 사 가니까 꽤 재미가 났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사 가지고 간 후 돈 계산할 때마다 찜찜하고 부끄럽고 죄지은 것 같아서 항상 개운치가 않았다.

담배 한 갑 같은 공정 가격이 아니라 골동품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물론 그 나름대로 시세는 있지만…. 하여튼 그것이 싫고 괴로웠다. 어떤 때는 어정쩡하게 안면 있는 사람이 오면 아예 숨어 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씨는 착실하고 정직해서 좋긴 좋은데 그 사람 역시 악착 같은 데가 없고 마음이 약해 상인답지 않은 상인이었다.

여름이 되니 골동품 가게도 여름을 타 손님이 줄기 시작했고, 나는 공연히 턱 괴고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싫어졌다. 그래서 손님이 없을 때는 원고도 쓰고, 도 가끔 모여드는 친구들 덕분에 가게는 반쯤 다방같이 되었다. 그이는 가게에 들어오는 일도 없이 차 속에서만 기다렸으며, 수지 타산에 관해서도 일체 묻는 일이 없었다.

언제까지 하나, 꼴만 보는 눈치였다. 나는 기세  좋게 시작한 오기도 있고 해서 불평도 못했다.

그런데 가게는 서너 달째 겨우 집세만 낼 정도였다. 나는 새삼 장사라는 것이 얼마나 머리를 써야 하고, 또 노력과 상인다운 근성이 있어야 하는지를 절감했다. 그러다 가게 낸 지 8개월 째 되는 11월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비바람이 불고 을씨년스런 아침이었다. 순간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늘 가게를 그만두자. 하기 싫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는 그 길로 미련도 없이 가게를 그만 둘 것을 가게집 주인과 이씨에게 통고했다. 이씨는 좀더 두고 보자고 권했다.

“장사는 항상 기복이 있는 건데, 그 고비를 참고 넘어야 무슨 승부를 보게 되고… 더구나 골동품 가게는 꾸준히 오래 해야 가게 이름도 알려지고 단골 손님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그러나 이씨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알면서 나는 결국 내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가게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그에게 했다. 그이는 기가 찬 듯 웃으면서

“용단을 잘 내렸어. 장사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지. 장사는 좀 거짓말도 해야 하고, 속임수도 쓰고, 또 얼굴에 철판을 깔 정도로 뻔뻔하고 대담한 데도 있어야 해. 당신 성격으로는 장사 못할 것 같았어.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해보라고 했지만 이럴 줄 알았어. 큰 손해 보기 전에 들어 앉아. 송충이는 싫으나 좋으나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해”

그의 말이 명언이었다.

나는 그이보다 고집이 센 편이었다. 사는 동안 내 고집이 그이한테 잘 통했고, 또 그 고집의 결과가 좋을 때도 많았지만, 이번 가게는 실패를 자인했다.

그날로 나는 내가 내놓은 물건을 싣고서 집으로 와 버렸다. 이씨는 아직도 ‘목란사’ 간판을 내건 채 그 자리에서 크게 돈도 못 벌고 졸 듯 말 듯하고 있다.

 

 

문화촌 17년을 청산하다

 

우리는 1975년에 17년간 정들었던 문화촌에서 지금 사는 불광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우리 결혼 생활 중 가장 많은 일과 역사가 돌담같이 차곡차곡 쌓였던 문화촌 집 – 울며 안 가겠다고 내가 어린애같이 고집을 부렸던 그 집을 나는 조각보 모으듯 손질하고 증축도 했었다.

어느 한 구석, 내 정성 내 손때가 묻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평면적으로는 더 증축을 못하게 꽉 들어차, 다시 더 늘리려면 아주 헐고 2층으로 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공사이고, 그때 우리로서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덩치가 커 가는 4 남매를 볼 때마다 우리 둘은 ‘이 집이 이제 정말 좁구나’ 하고 실감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애들 덩치는 줄지는 않을 게고, 딸 둘 시집 가면 그냥 그냥 살지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 내외는 똑같이 무리나 모험을 못하는 성격이라서, 정말 그 집에서 딸들 시집 보내고 아들들도 장가들어 나가면 우리 둘이 이 집도 클 거라는 자위를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 우리는 이사를 하게 될 찬스가 왔다. 그것은 아랫집에 살던 유화열 씨가 크게 성공을 해 큰 집을 짓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유씨 집에서 우리 집을 내려다보면 우리 집은 정말 초라하고 보잘것 없이 더 작아 보였다. 그러나 우리 내외는 그런 사실에 별로 신경도 안 썼고, 어떤 위압감이나 우리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화열 씨 자신은 우리 집에 굉장히 신경 쓰고 마음에 두었던 것 같다. 이 살벌한 세상에 형제도 아닌 타인 누구가, 자기 능력으로 자기 땅에 큰 집을 짓고 살면서 남의 사정, 남의 일을 그토록 생각해 줄 수 있을까?

그분은 결국 우리 집을 그때 시세로 아주 과분할 만큼 웃돈을 얹어 사들였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큰 집을 살 만큼 보태 준 셈이다. 그것은 그분의 인간적인 후덕 厚德과 우리 내외를 생각하는 깊은 정이 그런 용단을 내리게 한 것이다.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그냥 문화촌에서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은덕을 입은 것이고, 그것은 영원히 잊지 못할 고마움이다.

불광동 집은 가파른 언덕이 있지만 골목 안에 들어서면 아늑하고 정갈한 동네였다. 북한산 줄기 밑!

붉은 벽돌의 2층 양옥! 우리에게는 이제 넉넉하고 훌륭한 집이다. 앞이 탁 트이고, 아침이면 뻐꾹새, 참새 떼가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깨는 목가적인 동네이다. 공기도 좋고, 찻길이 멀어 공해도 없다.

이사온 날, 90세 된 할머니를 기광이가 업고 2층으로 옥상으로 구경을 시켜 드렸다. 손자 등에 업히신 어머님은

“좋구나, 참 좋아”

하시며 좋아하셨다. 어머님은 결국 이 집에서 2년 더 사시다가 92세로 천수를 다하셨다.

 

 

촛불 꺼지듯 가신 시어머님

 

우리 집안의 큰 기둥이셨고, 나에게는 의지가 되고 둔덕이시던 시어머님! 흔히 말하는 고부간이란 인간 관계를 떠나 며느리인 나를 정말 사랑해 주셨고, 나의 아픔, 속마음까지 먼저 이해하시며 위로해 주셨고, 깊은 정을 주셨던 분!

92세로 천수를 다하실 때까지 외아드님이 된 그이를 위해 기도하시고, 아드님의 건강과 장수를 염원하시던 어머님이셨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도 여인으로서 많은 아픔을 겪고 이겨내셨지만 항상 경우 바르시고 영특하시고 크셨던 그분!

말년에는 노환으로 고생하시다가 가시는 날엔 정말 촛불이 꺼지듯 너무나 깨끗하고 조용하게 가셨다. 항상 아드님의 술을 걱정하시고 가슴 아파 하시던 어머님이 그래도 92세까지 앞세운 자손없이 먼저 가심은 그분의 후복 後福이 좋으신 거라고 했다.

그이는 머리가 허옇고 60을 바라볼 때까지 항상 ‘어미니’라고 못 부르고 어머님이 가시는 그날까지도 ‘엄마’였다. 그것이 흉하게 들리지 않고 그래야만 맞는 것같이 들린 것은, 어머니 앞의 그이는 항상 불안하고 위태로운 큰 어린애 같았기 때문이다.

그이가 취해 들어와서 ‘엄마’를 부르면서 어머니 방에 들어가 어머님의 넓은 이마에 뽀뽀를 하고, 모시 바구니같이 하얀 머리를 쓰다듬어드리고, 어떤 때는 엄마 방에서 같이 자겠다고 때를 쓸 때면 어머님은

“어유, 언제나 이게 철이 드남…. 어멈아, 어서 데리고 가 재워라. 내가 어지러워 죽겠다”

하시면서도 아들의 그 응석과 어리광을 싫어하지 않으시던 어머님이셨다.

어머님 눈에는 60을 바라보는 아들이 아직도 미덥지 못하고 불안한 애 같아만 보이셨던 모양이다.

노환이 깊이 드시기 전가지만 해도 아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치마 끈을 안 끄르신 어머님이셨다. 내가 새댁 때는 달 밝은 밤, 추운 겨울 밤에도 담 너머로 그이를 같이 기다려 주셨고, 아침이면 구수한 국을 끓여놓고 늦잠 자는 우리들이 조심스러워 깨우지도 않으셨던 그런 분이셨다. 70세 후반까지도 커피에 양담배 ‘펄머’를 즐겨 피셨고, 며느리인 나 보고

“어멈아, 네 나이 때 영어 공부 좀 해 두지. 늙으면 후회한다. 공부는 평생 하는 거다”

그렇게 총명하시고, 또 멋을 아는 분이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한동안 우리 집은 큰 자리가 빈 것 같았고, 그이는 몇 달 동안 술만 들면 ‘엄마’를 부르며 악을 쓰고 울었다.

“이제 당신이 엄마 겸 마누라야”

정말 그이는 어머니가 가신 후 많이 허전해 했고, 얼마 동안 그 슬픔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다

 

1976년 1월 30일

둘째 딸 기영이는 예고 藝高만 나오고 19세 나이로 먼저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기영이는 진취적이고 극성스럽고, 또 분명한 애니까 잘 해 나갈 걸로 믿었다. 우선 로스앤젤리스 이모 집으로 가게 했다.

어디 가나 제 구실을 할 애니까 어려서 떠나 보냈는데도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기영이는 UCLA에 3학년까지 다니다가 결국 영창 永昌 과 열애 끝에 24세에 결혼 했다.

작은 사위 영창은 첼로 연주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인간 그 자체가 예술이었다. 둘의 사랑은 열띠고도 아름다웠다. 기영이는 연주가의 아내로서 빈틈 없는 보필을 하면서 지금 독일 퀼른에서 살고 있다. 아빠 엄마를 무척 생각하고, 너무나 섬세하고 다감한 애다.

 

1977년은 그이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 두 분을 잃은 해였다. 한 분은 어머님이시고, 또 한 분은 가장 가까웠던 친구분인 심연섭 선생님의 별세였다.

심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그이가 마지막 위문을 갔다 왔는데,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래도 알아 보시더라고 했다. 그날 밤에 그이는 혼자서 그렇게 많이 울 수가 없었다. 남자들의 뜨거운 우정에 나도 같이 울었다. 그분과의 우정은 두텁고 역사가 길었는데…. 결국 그 다음날인 3월 6일에 별세하셨다.

그이는 심 선생님 상 중에 제대로 음식도 안 자시고 술만 들며 애통해 했다. 결국 심 선생님 장례식이 끝난 후 그이도 병이 나서 병원 시세를 지며 출근도 못했다. (언제나 병이 나면 그때마다 간이 점차로 더 악화된 것이었다)

남자 형제가 서로 없던 두 분은 정말 형제같이 가까웠다. 심 선생님이 가신 후 그이는, 얼마 동안은 짝 잃은 기러기같이 눈에 띄게 외로워 보였다. 얼마 동안은 집에서 혼자 술을 할 때도 꼭 빈 잔을 하나 앞에 놓고 술을 따라 놓으며

“이건 심연섭이 잔야”

하며, 그분을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이제 두 분은 저 세상에서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같이 나누면서

“그렇게 퍼 마시더니 이 형 당신도 뒤쫓아 왔구료”

하고 심 선생님이 죠크를 던지실 것 같다.

 

1977년 7월 28일에 나는 처음으로 문학상을 받았다. 그것은 <부자 父子>라는 단편으로 그 해 반공문학상, 문공부 장관상 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정말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었다. 상금 100만 원에 시상식이 문예진흥원에서 있었다. 그이와 기진이가 참석해 주었다.

 

12월 31일

1977년은 호사다마였다. 큰 일이 많았다. 어머님께서 별세하셨고, 그이의 좋은 벗이 가셨고, 나는 반공문학상을 타고, 장편 <화혼 花魂>이 책으로 햇빛을 보기도 했다. 애들은 건강했다. 그이의 건강이 더 중요한 한 해이기도 했다. 점선을 잇듯, 인생은 이렇게 짜여져 가나 보다.

 

1978년 1월 1일

봄날같이 푸근하다. 올해는 말띠 해. 분주할 것 같다. 아침에 어머님 사진 앞에 기도 올리다. 어머님께선 편안한 데 계시겠지.

올해 소망도 역시 그이 건강, 애들 건강, 기광이 대학 입시, 그리고 부지런히 글 쓰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매년 정월 초하루의 기원이 항상 같다. 그것은 큰 욕심 없는 작은 소원들이다.

 

 

한집안 준재 현경호, 홍승면 선생

 

1978년 1월 8일에 어머님 100일 탈상이었다. 어쩐지 어머님은 어디선가 항상 우리 곁을 지켜 주실 것만 같은 믿음이 있다. 그이와 나는 어머님께서 세상 떠나신 후부터 덕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애들은 이미 그 전부터 나갔지만…

우리 둘의 가슴 속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천천히 하나님의 존재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것은 누구의 간곡한 권유나 전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 가지, 정신적으로 간접적인 감화를 준 분이 있다. 그분은 시누 이정희 씨의 부군이셨던 현경호 玄京鎬 박사이시다.

현 박사는 영국에서 10여 년간 원자력을 공부하셨고, 그때 원자력 연구소장직에 계셨다. 과묵하고 깨끗하시고, 학문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셨다.

그이는 그런 매제 妹弟 를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자랑으로 느끼고 있었다. 현 박사도 전혀 다른 방향, 다른 성격의 처남인 그이를 좋아하셨다. 서로 바쁘다 보니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두 분은 항상 반갑고도 좋은 친구였다.  그 자리에는 큰댁 조카 사위이신 고 故 홍승면 洪承勉 씨도 기어, 바둑을 좋아하셨던 현 박사와 홍 서방은 곧잘 대국을 하셨고, 그이는 옆에서 술잔을 들며 참관을 했다.

이 세 분은 일정 말기에 같은 성대 城大 예과 豫科를 나온 준재들이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제각기 하는 일들은 달랐지만 ‘이씨 댁 인물’ 들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세 사람이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우리 집안에 너무나 큰 자리가 비게 된 것이다.

현 박사는 78년 그때 이미 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에 계셨다. 우리들은 옆에서 가슴 죄고 안타까워 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 다만 그의 아내인 작은 시누 이정희 씨만이 정말 초인적인 간호와 정성을 쏟았을 뿐이다.

현 박사 댁은 서울의 학자 집안이시고, 그리고 대대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셨다. 부모님 모두가 덕수 교회 신자셨고, 현 박사도 장로직에 계셨다.

워낙 과묵하고 말수가 적으신 현 박사는 처님인 그이에게나 우리 애들에게 한 번도 교회 나오라고 전도하신 적이 없었다. 다만 현 박사 자당 되시는 사돈 할머니께서 가끔 나를 보시면

“기진 엄마, 교회에 나오세요. 기진이 엄마가 나오면 자연히 이 선생도 따라 나오시게 될 텐데….”

하시면, 꾸준하고 간곡한 전도를 하셨다. 그런 사돈 할머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우리 내외는, 한 번도 전도를 안 하신 현 박사의 무언의 그 인격과 생활 태도에 끌리고 감화 받은 게 사실이었다.

범인 凡人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그 처절한 투병을 하시면서도 그분은 너무나 의연하셨고, 또 과학의 최첨단인 원자력을 연구하신 과학자로서의 그분의 믿음은 조용하면서도 절대적이셨다. 홍차 한 잔을 마실 대도 기도를 잊지 않으셨고, 그 병중에도 주일 예배를 거르신 적이 없으셨다.

우리는 그런 현 박사를 볼 때, 백만 인의 전도보다도 강한 충격과 존경심을 금치 못했다. 시누 남편이었지만 나는 그런 현 박사를 우러러보게 되었고, 가슴 아파 했다. 우리 4남매 모두가 그런 고모부를 마음으로 존경했고, 우리 가족 모두는 그분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상상력이나 소망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지성이나 원명 원망 을 훨씬 뛰어 넘은 그 자체, 독립, 충만한 유일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마음이 우리 둘에게는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갔다.

또 나에게는 문우 文友 이며 사돈간이 되는 윤남경 尹男慶 여사의 오랜 권유와 기도의 덕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아무리 봐도 몰랐던 성경 읽기가 재미나게 되었고, 또 공부하고 싶어졌다. 범사 凡事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기도 속에 잠드는 습관도 익혀졌다.

 성경 말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장 평범하고 올바르게 가르쳐 준 인간 기본의 말씀같이 생각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또 허망하고 믿기 어려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점점 절가하게 되었다.

1978년 3월에는 큰딸 기진이가 서울음대를 졸업하는 경사를 맞았고, 큰 아들 기광이는 내년 대학 입시 준비로 바쁜 해였다.

그리고 또 나에게는 뜻하지 않고 5월에 도미 渡美 할 기회가 왔었다. 그건, 그이가 3월에 호주에 나갈 계획으로 비행기표까지 마련했었는데, 일이 잘 안 돼서 나가지 않게 됨으로써 그 비행기표가 쓸모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저녁 그이는

“여보, 어차피 나는 이번 호주행은 힘들게 됐고, 또 직장 일이 바쁘니까 올해는 어디고 나가기 힘들게 됐어. 그렇다고 이 비행기표를 그냥 묵히기는 아까우니까, KAL에 부탁하면 비행기표를 미국행으로 바꿀 수는 있으니 그 표로 당신이 나갔다 와요. 이건, 그 동안 당신이 노모 老母를 잘 모셔 주었고, 큰일 잘 지러 준 고마움의 선물야”

나는 뜻하지 않은 그의 고마운 선물에 말을 잃었다. 기선이와 둘째 딸 기영이를 또 보게 되는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결국 나는 5월 6일에 서울을 떠나 20일 동안의 미국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했다. 나로서는 두 번째의 외유 外遊가 된 셈이었다.

 

1979년 1월

그이는 항상 연초 휴가 때면 술로 시간을 보낸다. 세배 손님도 있고 해서 자연히 어울려 그렇게 되지만, 나는 정월 초부터 항상 그이의 술 때문에 신경을 쓰게 된다.

1월 23일, 큰 아들 기광이가 인하대학에 합격했다. 그것도 1,000 명 중에서 40등인 상층 성적으로 합격한 것이다. 그러나, 저도 나도 우선 기쁘기는 하면서도 섭섭한 한구석이 없지 않다.

생각보다 예비고사 점수가 잘 안 나와서 제가 원하던 학교에 응시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도 어렸기에 학교서도 과외 선생님도 재수를 은근히 권했는데, 그이가 재수는 절대 반대였다. 요새는 능력의 세상이니까 어디서든 저만 잘하면 인정받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이는 그날 밤 아들 합격에 흠분했는지, 새벽 3시에 잠이 깨어 말을 시켰다. 자기가 예과 시험을 쳤는데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고…

아무튼 나는 기광이의 인하대학 합격이 그이만큼 좋지는 않았다. 대학을 붙기보다는 떨어지는 율이 더 많은 세상에 한 번 쯤 떨어진다 해서 큰 흉이 도리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 일생에서 1년의 실패쯤은 큰 의미에서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다. 모두가 제가 원하는 대학에 꼭 입학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냥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을 없앨 수가 없었다.

기광이 본인도 그랬던 것 같았다. 기광이는 인하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계획을 세워 작심하고 공부를 했다. 그것은 기광이의 오기요, 그리고 의지였다.

결국 기광이는 1980년에 제 소원을 이루었다. 연대 延大 정외과의 편입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어렵고 고된 노력의 대가였다. 1년 동안 와신상담, 정말 위장까지 버려 가며 얼굴에 핏기도 잃은 채 밤낮을 파고 도전한 결과였다.

나하고 저만 알고 있었지, 발표하는 날까지 저의 아빠도 가족들도 몰랐다. 기광이는 합격 발표를 보고도 집에 즉시 알리지 않고 혼자 얼마 동안 길을 걷다가 들어왔다.

그날 그이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자식을 둔 기쁨 중에 이런 기쁨이 으뜸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로서 목적을 세운 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이겨냈다는 그 자체가 장했다.

무엇보다도 뜻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이 소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 아이에게 앞으로 남자로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하나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고, 또 저력이 되리라는 것을 믿고 싶었다.

기광이는 연대 3학년에 올라갈 때 휴학계를 내고 카츄샤 부대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다. 지금 동두천 2사단에 복무중이다. 그 애가 입대한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내년 6월이면 제대이다. 제대하면 복학을 해야겠지.

나는 앞으로의 그 애 진로에 대해서 모든 것을 저에게 맡긴다.  그이도 생전에 그렇게 말했다. 부모 된 의무로서 대학까지만 교육시켜 주면 되었지 그 다음은 제 인생을 제가 개척해 나가야 된다고 했다.

기광이 자신은 어릴 때부터 외교관이 꿈이었고, 또 제가 소원하던 정외과에도 들어갔지만, 그 소원이 달성될지는 이제 저 하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남자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험난하고 고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나는 엄마로서 그 애에게 ‘무엇이 되느냐’ 하는 문제보다 어떤 바탕이 확실한 인간이 되느냐에 기대를 두고 있다.

 

1월 30일

그이, 출근하려고 일어나더니 으스스하고 어지럽다면 도로 눕다. 미열이 있고 감기 기운.

과로, 과음의 탓이겠지. 중용 中庸을 지키지 못하는 탓. 건강해 술 마시면 너무 시끄럽고, 술 안 마시면 너무 조용해서 극과 극인 사람!

자주 감기 드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남자는 59세를 잘 넘겨야 안심한다고들 하든데 어쩐지 불안하다. 어젯밤에는 취해서 나기 말을 테이프에 녹음하라며 마치 유언이나 하듯이 서두른다.

그러나 나는 20녀 전부터 듣던 말이니만큼 별로 놀랍지도 않고 겁도 안 나는데, 하여튼 이것도 정시니 학대의 하나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 말을 할 때마다 입고 짜증이 난다.

 

1월 31일

전국에 폭설 주의보. 서울은 처음으로 많은 눈이 왔다. 강릉 쪽은 대설 大雪 이라고! 우리 집 설경이 절경이구나.

그이 하루 더 쉬기로 했다. 열이 내리고 그만한 게 다행이다. 식욕도 다시 도는 것 같다. 하루 더 쉬면 낫겠지. 그이가 있으면 원고가 잘 안 써진다. 그이 건강 보살피는 것이 나의 큰 목적이다.

 

2월 4일, 일요일

그이, 기진이 기광이 데리고 교회에 나가다. 그이는 생각나면 마음대로 나가는 교회였지만, 오늘은 기광이 대학 입학 감사 예배로 나가다. 나는 집이 비어 집에 있었다.

예배 끝나고 고모부 (현 박사) 내외가 신라 호텔에서 축하 점심을 내셨다고. 그리고 다시 고모집으로 가서 저녁들 먹고 늦게 돌아오다.

 

3월 3일, 토요일

나는 집에 있었다. 책 읽고 좀 한가한 시간을 갖다. 날씨는 좀 풀렸다. 그이, 토요일인데 보통 때보다 늦게 들어와 웬일인가 했더니, 혼자 어머니 산소에 성묘 갔다 왔다고. 취해서 시골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오다. 또 목이 메어 울면서 밥상을 받다.

그이의 마음은 알 것 같지만, 지하에 계신 어머님은 반가우시면서도 술 먹고 왔다고 싫어하셨을 것만 같다. 며칠 전 어머니 꿈을 꾸었다더니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갔나 보다. 그이는 꼭 어머니하고 가난하게 살았던 소년 시절을 생각하며 슬퍼한다. 그것은 그이 가슴에 응어리진 씻기지 않는 아픔일 거다.

그이, 내 여학교 때 사진을 지갑에서 꺼내 가슴에 품고 흐느끼더니 어느새 잠들다. 자기는 항상 30여 년 전 내 소녀 때 사진과 연애한다고. 그 사진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슬프게 생겼다.

 

4월 22일, 일요일

일요일이면 그이는 나가려 들지 않는다. 그이 점심 시중 때문에 교회도 못 가다. 혼자 건넌방에서 기도 드리다.

낮에 그이 목욕시켜 때 밀어주다. 애들만 교회에 가다. 그이, 먹고 낮잠 자며 하루 종일 집에서 쉬다. 그에게는 휴식이 큰 보약이다.

낮에는 미국의 기영이한테서 전화 오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제가 벌 테니까 아빠더러 돈 안 보내 줘도 된다고. 기특한 것!

그 의지가 갸륵하다. 전화비도 제가 내겠다고. 내 딸이지만 정말 대견하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기영이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다. 그이, 기영이 전화 받고 기분이 좋다.

 

5월  14일, 월요일

기민이의 경주 수학여행 떠나는 날 새벽 4시 20분에 기광이가 형답게 먼저 일어나 기민이 깨우다. 기민이는 수학여행도 가기 싫다고 한다. 사내 애가 너무 정적 靜的이다. 형이 짐도 챙겨 주고, 서둘러 준비 해준다. 기민이는 형하고 한 살 차이지만 어딘지 막내 티가 난다.

그이도 오늘 대전에 출장 떠난다. 기민이 4시 반에 나가고, 그이는 8시에 KBS 차가 와서 떠나다. 기광이하고 문 앞에서 배웅하다. 16일 오후에 온다고…

그이 나간 후 하루 종일 두 방 장롱 정리하다. 남자가 없을 대 할 일이 더 많다. 스웨터 정리해 안 입을 것은 트렁크에 좀약과 같이 넣어 두다.

하루 종일 일했더니 저녁때 피곤했다. 9시 30분쯤 유성에서 그이 전화 오다.

 

5월 16일, 수요일

오늘, 그이 이틀간의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기민이도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가게에서 새우 사고 맥주 사고, 저녁 준비하다.

그이 4시 반쯤 땀 빼고 광낸 훤해진 얼굴로 돌아오다. 잘 대접받고, 오늘은 고시 합격자 연수원에서 강연하고 끝에는 걸쭉한 잔소리도 해주고 왔다며, 기분이 좋아서 돌아왔다.

9시 반쯤 기민이도 수학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오다.

 

7월 20일, 금요일

무덥다. 작은 고모한테서 전화 오다.

현 박사 역시 가슴까지 암 기운이 침투한 것 같다고. 암담한 결과이다. 첫 번째 수술을 말아야 했지 않나? 환자의 정신적 충격 때문에 이번에는 윗부분만 수술하게 될 것 같다고 한다.

하나님은 너무하신 것 같다. 그분을 기어이 데려가실까? 좀 더 어떤 새로운 기대를 걸 수 없을까? 국가적으로도 인재지만 작은 고모 애들이 너무 가엾다. 고모의 의연한 태도에는 가슴이 뭉클하다. 그이도 무거운 침묵.

우리의 육친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이런 불행이 목을 조르듯 다가온다. 너무나 큰 형벌이다.

기일 基一 한테 전화해 본다. 그 애는 또 한번의 수술에 반대이다. 좋은 결과를 기대 못하는 수술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왜 이런 무서운 대가를 받아야 하나.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밤, 정희 고모 마음은 어떨까? 누구도 아무도 지금 그의 마음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안타깝고 무서운 현실.

이 두려운 시간 시간을 같이 너며 주어야겠다. 그는 시누이지만 우리의 육친이다. 가엾어. 간구한 기도 드리고 잠자리에 들다.

 

 

 

꺾을 수 없었던 ‘술 고집’

 

1979년 10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산업 사회와 문학’ 이란 주제로 대구에서 세미나가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돌아오려는 27일 아침 7시 40분에 박 대통령 저격, 서거 소식을 호텔 방에서 듣다. 너무나 큰 충격에 모두들 침묵, 침통한 가운데 3시 넘어 고속버스로 귀로에 오르다. 나는 그 뉴스를 조경희 趙敬姬 여사한테서 듣는 순간 갑자기 설사가 나기 시작해 조반도 못 들고 차에 올랐다.

인생무상. 결국 장기 집권의 병폐가 끝내 이런 비극을 몰고 온 것 같다. 그래도 18년간 중흥국 中興國 을 이룩했느니 죄보다 공이 많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는데, 한 인간의 역사로는 너무나 불행한 말로이다.

육 陸 여사는 이 끔찍한 남편의 최후를 안 보게 됐으니 오히려 다행이었을까?

 

 

11월 3일

오늘 박 대통령 서거 9일째. 9일장으로서 국장 國葬. 역사의 장 章은 바뀌고, 후세에 역사가 증명할 인물은 갔다.

8시 반부터 TV 중계. 건국 이래 처음인 국장. 청와대에서 부터 중앙청 영결식장,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될 때까지 실황 중계. 엄숙하고도 품격 있게…. 3남매의 애처로운 모습. 1분간 묵념하다. 연도의 소박한 서민들의 곡성!

이제 역사는 바뀌어지고, 새로운 뜻의 한국의 영사적 풍토가 이루어지겠지. 이 난국을 잘 이겨 나가야지…. 당분간 공백기가 있겠지. 청소도 하지 않고 밥만 해먹고 하루 종일 TV보다.

우리 민족은 많은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 온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것을 오늘 따라 확인하고 자부하고 싶다.

난세 亂世에는 인물이 난다고 하지만, 이 격동기를 누가 잡아 잘 수습을 할까? 나라가 안정이 되어야 국민이 좀더 잘 살 수 있는데.

항상, 하나의 권력이 무너지면 이미 그때 권력과 영화를 누리던 무리들은 어마어마한 치부 致富를 해 좋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아직도 우리는 후진국의 면모를 못 벗어나고 있다.

이제 정말 제대로 정치를 하고 구국 救國 을 할 정치가라면, 저희 광에 재물 쌓이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정말 언제 물러나더라도 국민 앞에 떳떳이 얼굴 들고 나설 수 있는 인물이 나와야 할 것 같다.

그이와 나는 국장 TV 중계를 보면서 이런 국론 國論 을 벌이기도 했다.

 

 

잔잔한 충족으로 맞은 은혼식

 

올해는 우리 결혼 25주년 되는 해였다. 10월 16일! 생각해 보면 세월이 너무 빠른 것 같다. 25년을 돌이켜 보아 이 남자를 택해 큰 후회가 없다는 실감!

그 무서운 주정 – 그 폭풍우를 잘 견디어 온 보람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 같다.

그의 착한 본바탕! 그리고 나를 생각하는 사랑의 깊이, 또 4남매를 출중하게 얻은 사실! 이 모든 것이 그 힘든 시간을 덮어 준 것 같다.

조금씩 안정된 생활 형편. 나는 그와 애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 온 부피가 그저 조용히 와 닿을 뿐이다. 어제와 아무것도 다른 것 없다. 별다른 은혼식 銀婚式 의식이 필요 없다. 하루 종일 일하며, 조용히 지금의 잔잔한 충족감을 겸허하게 혼자 음미했다.

다음달 11월에 우리는 뒤늦게 은혼식 기념 여행으로 기진이를 데리고 유성 온천장에 갔다. 그이가 대전의 중앙 공무원 훈련원에서 강연이 있어서 그 편에 갔던 것이다.

 

11월 30일

아침 10시, 새마을호 특별차로 서울 출발. 대전에 11시 50분에 도착.

중앙 공무원 훈련원에서 차 가지고 나와 바로 유성에 있는 군인 요양소 호텔에 짐을 풀다.

처음으로 기진이까지 대동한 세 식구의 여행이다. 식당에서 그이 식성에 맞을 것 같은 멀건 식사를 끝내고, 그이는 훈련원에 1시부터 강의가 있어 나간 후 기진이하고 같이 아래층 공중탕에 내려가 목욕하다.

온천 물이라 매끄럽고 좋다. 그이, 강의 끝내고 3시쯤 들어오다. 그이는 맥주를 들고, 기진이하고 나하고는 커피 끓여 먹으며 TV보다.

처음으로 갖는 세 식구의 겨울 여행…

기영이 생각이 난다. (그때 기영이는 미국에서 영창이와 사랑 중이었다). 기진이도 이제 시집 가고 나면, 이런 셋만의 가족 여행은 일생 중 정말 좋고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다.

겨울 나무, 석양의 맑은 공기, 모든 것이 아름답고, 이런 시간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방에 들어와 세 식구 모두 기영이한테 편지 쓰다.

기진이는 붓 들더니 일곱 장을 순식간에 쓰다. 저희 자매끼리는 너무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이럴 해든 기영이 그것의 자리가 빈 것이 커 보인다. 나도 쓰고 그이도 썼다.

방은 따뜻하고, 보라색 어둠이 깔렸다. 나가기가 귀찮아 호텔 식당에 내려갔더니, 음식이 밋밋하고 형편없어 썰렁한 저녁을 먹다. 서울에 전화했더니 일하는 언니하고 기광이가 받는다. 그이는 가지고 온 꼬냑에다 맥주를 들다.

기진이 감기 기운인지 으스스하고 팔다리가 아프다 해서 아스피린을 먹이다. 모처럼의 여행인데 병 날까 봐 걱정이다. 자꾸 만져 본다. 그이는 그저 맥주와 오징어만 열심히 먹는다.

그이도 잠들고 기진이도 촉촉히 땀에 젖은 채 곤히 잠이 들었다. 그이 자는 얼굴 뿌옇고 좋다. 감사합니다. 그이의 얼굴이 좋아진다는 것은 내 보람이다. 모두 잠들었는데 나만 잠이 안 온다. 늘 집을 떠난 첫날은 잠을 못 자는 버릇이 있다. 가지고 온 <문학사상>을 읽다.

12시 넘어 그이 자가 깨 시장기 난다고 도 수선을 떤다. 담당여자한테 부탁해서 계란을 사오게 하다. 계란을 삶아서 그이 두 개나 맛있게 자시다. 서울 집을 떠나도 그이 행동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였다. 하여튼 보통은 넘는 사람이다. 시장기 못 참는 것은 어디서나 여전하다.

방이 너무 더워 환기시키다. 그이 3시쯤 일어나 목욕하고, 또 맥주에 오징어를 열심히 먹고 있다. 남편이 건강하다는 것은, 도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기쁨이다.

아침은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8시 넘어 나오다. 서부 터미널에서 온양행 표 샀는데, 9시 50분 출발이라고 해서 다방에서 우유 마시며 기다리다.

 

12월 2일

온양에 12시 도착, 온양 호텔 118호실에 짐 풀다. 큰 온돌방, 오래된 호텔이 돼서 그런지 좀 깨끗지 않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기광, 기민이 데리고 왔던 생각이 난다.

바로 나가 식당에서 나하고 기진이는 설렁탕을 먹고, 그이는 ‘대구 지리’를 먹다. 며칠 만에 고기 국물 먹는 것 같다. 택시로 3분 거리인 온양 박물관에 가다. 개인 박물관으로는 규모나 소장품이 대단하다. 도서 출판 계몽사 회장인 김대원 씨 것이란다. 한국 고대의 의식주 에 관한 가구 등을 골고루 잘 모아놓았다. 4 전시실까지 돌다.

옛 우리 조상의 입김과 멋과 지혜를 보는 듯 즐거운 시간이었다. 더구나 골동품에 취미가 있는 나는 이번 여행에 정말 보람을 느꼈다.

마당에 나와 사진 찍다. 마당에는 석물 石物 도 많았다. 하룻밤은 온양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귀로에 오르다.

기차 속에서 그이, 이번 여행으로 결혼 25주년 은혼식 기념 선물은 때운 거라고…. 기진이가 아빠하고 한 여행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항상 불안해 하면서도 그래도 믿고 싶고, 별일 없기만 바라며 기원해 오던 그의 건강은 엄격히 따져 1980년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염려와 불안은, 내가 그이하고 살면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정신적인 강박 관념이었는지도 모른다. 설마 했던 두려움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3월 초순부터, 이사 와서 처음으로 대수리를 했다. 방 도배, 바깥의 페인트 칠, 그리고 연탄에서 기름 보일러로 고쳤다. 레일식 연탄으로 몇 년 살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용단을 내려 기름 보일러로 바꾼 것이다.

기름 보일러 장치를 하고 처음 점화해 본 날, 그것은 나에게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여보, 나는 다이아몬드 반지 값어치는 잘 모르겠지만, 이 기름 보일러 값어치는 그것에 비길 게 아닐 것 같네요”

하고 기뻐했다. 우리 집은 정남향이 돼서 겨울에도 채광이 좋아, 아침 저녁으로 몇 시간만 보일러를 돌리고 낮에는 안 돌려도 살만 했다. 그러나 그이는 들어오기만 하면 보일러 스위치를 넣으려 했고, 나는 또 기름값이 무서워 웬만하면 끄고… 항상 숨바꼭질을 했다. 그럴 때면

“사람이 추울 때 뜨겁고 편하게 살자고 한 건데, 뭘 그렇게 안달야?”

하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어쩌다 자다 깨서 몰래 스위치를 올리다가 내가 눈을 뜨면, 똑 몹쓸 장난하다가 들킨 어린애같이 멈칫하고 무안해 하며 웃던 그이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등이 차면 기침이 난다고 엄살을 떨던 그이. 그러나 그이도 나도, 기름 때는 집에서 살 수 있는 고마움을 조용히 절감하면서 살았다.

 

3월 15일, 토요일

아침에 큰고모 오셔서 내일 어머님 성묘 가기로 약속이 됐는데, 현 박사 (고모부) 건강이 좋지 않아 연세대 병원에 입원하셔서 못 가겠다고 한다.

정말 어떻게 될까? 이제 그분의 의지도 인내도 시간이 다 된 것인가. 정말 정희 고모 가엾어 어떡하나?

장판을 뜯어 놓았더니 집구석이 이사 가는 집 같아 마음이 더 산란하다.

 

3월 16일, 일요일

그이는 집에 있고, 오전 중에 고모부 뵈러 병원에 가다. 입원하신 지 사흘 째. 며칠 사이인데 거의 딴 분 같다.

순간적으로 사상 死相을 느낀다. 호흡을 가빠 하시며 잠 드신 것 같다. 부인만 찾으신다. 정말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 식사가 나왔는데 수저도 안 드시려고 한다. 자꾸 고모가 권하니까 억지로 한 술 뜨시며

“그건 당신 마음이지”

처절한 한 마디를 하시고 수저를 놓으신다. 어쩐지 불길한 생각만 든다. 고통이 심하신 것 같다. 어떻게 하나?

기진이 기광이가 병원에 들러 고모부 발 씻겨드리고, 안마해 드리고 뒤늦게 오다. 존경해 온 고모부였는데…. 깊은 잠이 안 온다.

 

3월 17일

현 박사 결국 11시 5분에 별세하시다. 그이와 내가 급히 전화 받고 병원 정문에 도착한 시간에 운명하셨다. 국가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너무나도 아까운 분! 52세, 나이가 아까우시다.

작은 고모는 허탈 상태. 정말 4년 넘어 간호하느라 무서운 강인성을 보였다.

7시에 입관 모시고, 8시에 영안실로 내려가시다. 현 박사는 운명하시기 얼마 전에 부인에게

“오늘은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날이다”

라고 하시며 10분 사이에 부인 품에서 임종하셨다고 한다. 정말 허망하고, 인간의 능력과 의학의 한계를 느끼다.

기일 基一이도 임종을 지켜 봤다고.

‘현 박사님, 영생 永生이 있다면 저 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시누 남편이라기보다 한 인간으로 존경했던 분!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날, 현 박사는 포천 선산에 안장되셨다.

 

현 박사 가신 지 벌써 만 3년이 넘었다. 작은 고모는 그 슬픔을 딛고 딸 둘 데리고 믿음 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내가 이번에 그이 일을 당했을 대, 끝까지 두 고모 분이 의지가 되고 힘이 돼 주었다. 그이가 입원한 날부터 가는 날까지 두 분은 병상을 지켜 주었는데, 그 형제애에는 정말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이는 현 박사가 별세하신 후 한동안 침식을 잃고 슬퍼했다.

 

4월 3일

그이, 새끼 발가락 마디에 통증이 있어, 구두 신고 출근했다가 슬리퍼 신고 퇴근했다. 오늘 결근하다. 통풍 痛風 이라는 병인데, 고단백질 과다에서 오는 병이라고….

그이는 육식도 많이 안 하는데 웬일인가? 밤새 잠 못 자고 괴로워해서 찬물 찜질해 주고 나도 잠 못 자다. 기일 基一 한테 연락해서 내일 아침에 병원 가기로 하다. 이제 서서히 노인병의 시작인가? 나도 대공사 끝내고 쉴 사이가 없어서 그러지 팔다리가 수시고 좋지 않다.

그이 결국 연세대 병원에 입원해서 이번 기회에 종합진단을 받기로 기일하고 결정 보다. 하여튼 검사해 보면 어디가 나쁜지 나타나겠지. 연령도 연령이고, 걱정이다.

밤새 깊은 잠 못 이루고 전전반측 轉轉反側. 별 일이나 없었으면… 얼마 전 현 박사 때문에 놀란 가슴이라 두렵기만 하다.

새벽에 그이 속 쓰리다고 그런다. 통풍 약과 십이지장 궤양 때문인 것 같다며 자가진단을 하는데, 제발 별일 없이 검사가 끝났으면….

그이 자는 얼굴이 갑자기, 갑자기 늙어 보인다. 인생의 황혼. 그 보채고 술 마시고 시끄럽고 귀찮게 굴던 때가 좋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잘해 주어야지.

 

4월 12일, 토요일 (첫 번째 입원)

부슬비 오는데, 간단한 일용품 싸 들고 기광이와 같이 연세대 병원에 오다. 그이는 KBS 에 출근했다가 병원에 오기로 했다. 10층 305호 실에 입원 수속 끝내다.

그이, 병원 옷으로 갈아 입고 누우니까 정말 환자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다시 집에 가서 반찬 해 가지고 기진이하고 또 오다. 애들은 9시 넘어 가고, 그이는 깊은 잠 안 오는 모양. 나도 생각이 ㅁ낳아 뒤척이다.

 

4월 13일

오늘도 비가 온다. 6시부터 체온 재는 등 들락거린다. 오전에 이 박사 와서 폐 사진 보고 설명. 폐에는 별 이상 없다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검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친구 병정이 운전수 시켜 바나나와 주스를 보내오다.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그 예절, 안목, 품위, 그 우정이 나를 시큰하게 만든다.

 

4월 14일

그이의 간 검사 동위원소 同位元素 찍으러 지하실 검사실에 같이 내려가다. 우중충하고 음산한 것…

간의 정밀 검사. 가슴 위에서 큰 기계가 웅웅 소리를 내며 왔다 갔다 한다. 도중에 몇 번 고장이 나 시간을 끌다. 항상 그이의 간이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새로운 검사 기계가 나와 다행이다.

검사 끝나고 올라와 나는 또 죽 끓이고 알쌈 좀 부치고 반찬 해 가지고 오다. 일등실인데도 병원 반찬이 입에 안 맞아 그이 싫어한다. 4월인데 날씨가 흐리고 음산하다.

그이 어제부터 12시간 동안 위 검사 때문에 굶었다고 야단이다. 12시 반에 같이 점심하다. 시장기를 느끼는 것은 좋은 현상. 꽤 많이 자시다.

간 검사 결과는 결국 간경화 초기 증세라고…. 더 악화 안 되게 주의하고 예방하면 괜찮다고 하지만, 내가 항상 불안해 하고 걱정했던 결과가 돼서 우울하다.

그이, 낮에 병원 이발사가 들어와 이발했더니 훨씬 젊어 보인다. 술 수분이 빠지니까 손등이 할아버지 같다.

 

4월 18일

그이, 아침에 위 검사 받고 올라오다. 호스에 카메라 걸고 위 사진 찍은 후 조직도 떼어냈다고. 끔찍한 검사를 했는데도 그이는 명랑했다.

어제부터 오던 비가 태풍으로 변했다. 그이도 나도 책을 읽다. 말이 없는, 너무나 조용한 시간!

8시 넘어 정전이 됐다. 병원에 정전이라니 말도 안 된다. 1시간이나 지나야 들어온다는데, 한국 사람들은 정말 착하고 인내심도 많다. 촛불도 없는 불 꺼진 방! 밖의 시가지 불빛이 꿈 속같이 따뜻하게 보인다.  간간히 수색으로 가는 기치 소리가 들린다.

소리와 불이 없는 병실! 그이는 눈을 감고 있고, 나는 색다른 분위기를 맛보고 있다.

 

4월 26일

그이 퇴원하는 날. 꼭 2주 만에 나간다. 기일이 소개로 신촌 독수리 약국에서 ‘알비늄’ 사서 8시부터 맞다.

주치의 主治醫 들어와 퇴원 후 주의 사항 일러주다. 결국 간이 나빠진 것은 술이 원인이라며, 술만 끊으면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혈압도 위궤양도 걱정할 것은 못 된다고 한다. 그만한 결과니 다행이다. 얼굴색이 깨끗해진 것 같다.

그이하고 택시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감회가 깊었다. 이런 상태로 소강 소강을 유지해 나가고, 과하지 말고 무리 않고 조심하면 괜찮겠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벚꽃이 지고 버들가지가 푸른 길을 오다.

 

4월 27일

새벽 뉴스에 유한철 선생님의 비보를 듣고 그이도 나도 말을 잃었다. 22일에 우리 병실에 위문 오셔서 그렇게 웃기고 가신 분이…. 거짓말 같다. 그이를 많이 아껴 주시던 분이었는데, 그것도 교통 사고로 가시다니.

안치소인 퇴계로 성심병원에 둘이 가서 영전에 분향 올리다. 그이 목메어 울다. 그이는 한국일보에 유 선생님 추도문을 썼다.

 

4월 28일

그이 첫 출근! 아침을 오트밀과 계란으로 들다. 머리도 몸도 가볍다며 나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의 등 뒤에서 무언의 전송! 낮에 점심이 궁금해 전화했더니 우유하고 빵으로 들었다고 한다.

 

퇴원 후 그이는 술조심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단 것을 싫어하던 사람이 매일 아이스크림을 찾고, 또 초콜렛도 사오라고 해서 먹었다. 또한 조갈증이 난다며 물을 보통 때보다 많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다. 본인도 나도…

그리고, 목이 컬컬하다고 독한 술은 안 하고 맥주를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어떤 대는 아침에도 물 대신 맥주를 마실 때가 있어 나는 잔소리를 했다.

퇴원 후에도 병원 약은 계속 먹고 있었는데 약이 독한지 입 안에 침이 마르고, 술을 안 자셔도 말소리가 똑똑 치 않아 꼭 술 먹은 사람 같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연대 주치의한테 갔더니, 별다른 새 증세는 없으니 당분간 약을 바꾸어 보자고 했다. 그리고 혈액 검사를 다시 한 번 받아 보기로 했다. 혈액 검사 결과 놀랍게도 당 糖이 300을 넘었다. 결국 심한 당뇨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얼굴이 마르고 통 기운을 못 차렸다. 간경화증 증세가 있는 사람은 갑자기 당뇨병이 생기는 수가 많다고 한다.

9월 1일에 다시 두 번째 입원을 했다. 그 동안 맥주도 계속하고 담배도 피며 60년 내내 강단으로 버티더니, 이제 체력의 조화가 무너져 가나 보다. 암담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병원 영양사한테서 당뇨병 환자 식단 인쇄물을 받아 오다. 당뇨병 환자에게는 식이요법이 중요하다는데, 환자보다 내가 더 신경을 써야겠다.

그때, 기영이하고 영창이는 미국에서 서울로 와 있었다. 결혼식 날짜를 10월 11일로 잡아 놓았기 때문에…

나는 대사 大事를 앞두고 몸과 마음이 두 갈래가 되어, 근심 중에서도 바빴다.

당뇨병은 식이요법하고 인슐린 주사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인슐린은 계속해서 놓아야 된다고 한다. 이번에는 보름만인 9월 16일에 퇴원하였다. 그이, 큰 변고 없이 퇴원하게 돼서 고맙다. 59세. 1980년에 두 번이나 입원했으니, 그것으로 액을 모두 때웠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이는 항상 퇴원 후 보름쯤 지나면, 건강 테스트 삼아 한 잔 한다면 시작하는 것이 또 다시 술을 들게 되는 계기가 됐었다. 물론 양도 줄고 전같이는 못했지만, 어쨌든 술을 입에 댄다는 것이 나는 못 견디게 싫었는데, 항상 술 고집만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이의 분신을 떠나 보내며

 

10월 11일

기영과 영창의 결혼식! 강원룡 姜元龍 목사님 주례 하에 신당동 영락 교회 분당 分堂 에서 오후 2시에 거행됐다.

2년 동안의 열애 끝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됐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한 쌍!

그이는 아직도 병색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딸을 데리고 들어갔다. 색시보다 아버지가 더 떨어 보기에 민망했다. 서로 예술을 하고 비슷한 집안. 마음 속으로 나는 만감이 오고 갔다.

나는 기영이를 믿는다. 시부모 잘 모시고, 남편 잘 보필할 것을. 건강하고 행복하고 믿음과 사랑 속에서 살기를 축원했다. 그이도 나도 사위 영창에게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정말 소중하고 사랑스런 사위임에 틀림없다.

이제 한 가지 대사 大事는 무사히 끝냈다. 동생인 기영이가 먼저 시집간 게 좀 마음에 걸리지만, 결혼 인연에는 순서가 없는 것 같다. 기진이는 언니로서 이번에 동생인 기영이를 위해 많은 수고를 했다.

다음날 일요일, 나는 교회에 나가 감사 기도를 드렸다.

영창은 결혼 후 음악에도 큰 발전을 보여 작년에 뮌헨 콩쿨에서 입상했고, 지금은 독일 쾰른 방송국 심포니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그저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다.

 

1981년 9월 22일

그이의 얼굴, 손발이 너무 부어서 또 병원에 가다. 주치의 강 박사가 진찰하더니, 혈압이 높고 간이 또 나빠졌다며 입원해야 된다고 한다.

할 말을 잃는다. 그 동안 그렇게 퍼 마실 수는 없는 일! 이런 사태가 올 줄 알았다.

오후 4시에 겨우 10층에 입원하다. 기일이도 강 박사도 더 이상 술을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된다고 경고한다. 정말 우울하고 기가 차다. 정말 어찌하오리까?

입원하면 술을 끊고 퇴원해서는 도 그 상태라면, 나는 정말 이제 모를 것 같다.

 

9월 23일

새벽에 끼어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사 赦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다. 성경책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정말 이제 그이는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나님, 그를 붙잡아 주소서! 그이 9일만에 퇴원했다.

 

10월 9일

그이 60세 생일 – 하나님, 오늘을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에 기진이와 아들 둘 아빠에게 절하다. 내년 그이 생일에 는 큰 사위를 보게 되겠지. 기영이 내외한테서 아빠 생일 축하 전화가 오다.

 

10월 16일

그이 직장에서 12시에 전화 오다. 롯데에서 점심하자고. 결혼 28주년을 기억하고 전화한 것이다. 9층 ‘식도원’에서 먹다.

밖에 나오면 그의 안색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아직도 얼굴색이 건강색은 못 된다. 지하에 내려와 커피 하다. 28년간 많은 시간이 갔다. 그이, 술 끊고 깨끗하고 맑은 얼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대로, 그 상태로 붙잡아 주소서….

 

11월 15일

추수감사절! 오늘 9시에 덕수 교회에서 손 목사님 집전 집전 하에 그이와 나 세례 받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의 몸과 마음을 거듭 나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 둘은 세례 교인이 됐습니다. 그 동안 오만불손하게 살아 온 저희들을 용서하소서. 당신을 믿고 당신 말씀 밑에 살겠습니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시편 詩篇>

‘복 잇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당신의 사랑 속에서

 

저는 그 동안 혼자서나마 대상 없는 감사를 드리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그 동안 너무나 감사할 게 많았습니다. 저는 오래간만에 눈물을 흐렸습니다. 저는 아마 덥석 당신에게는 못 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 당신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고,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를 해주는 많은 분들의 참뜻이 조금씩 저의 마음에 다가옴을 이 밤에 느끼고 있습니다.

20년 전 제가 죽음에서 살아난 그 기적, 그리고 이만한 집에서 우리를 있게 하시고, 그리고 착하고 좋은 네 자식을 얻게 한 그 고마움, 그리고 불안하나마 그의 건강을 유지케 해 온 고마움, 큰 사고나 불행 없이 살아온 30년의 세월!

저는 그 모든 고마움을 제 자신의 노력과 정성의 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큰 은혜를 저는 오늘밤에 하나님 당신께 돌리고 싶습니다. 그 동안의 저의 오만, 자산에 차서 그 겸손하지 못했던 마음을 저는 오늘밤 버려야겠습니다.

제가 한 가지 제 힘 밖이라고 생각해 온 하나의 사실 – 그건 그의 술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사랑해 왔다고 자부해 왔고, 그이도 저를 어느 만큼이나 무섭도록 사랑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60 평생 반 이상을 취기 속에 살아왔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그이 술을 막을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이를 제대로 취하게 해서 썩은 몸으로 늙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술을 안 마셨을 때의 저이는 너무나 착하고 총명하고 예의 바릅니다. 그러나 그는 술을 끊을 수 없고, 술 속에 자신을 담그어 파멸돼 가고 있습니다.

어느 만큼 더 착하고 용해야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제 감히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바라고 기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를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살펴 주옵소서. 저에게 굳은 믿음과, 하나님 곁에 조금씩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를 미워하지 않고 저의 사랑으로 그가 술 속에서 깨어나게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

제가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의 제단 앞에 나갈 수 있는 시간과 용기를 주옵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한 가지 남은 인생의 작업은, 그이와 제가 겸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당신을 믿는 일과, 당신의 사랑 속에 저이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 진심으로 간구한 기도를 올립니다.

 

 

큰딸과 그이의 마지막 이별

 

인간이 산다는 것은, 어쩌면 어머니 뱃속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 인간이 사는 프로그램이 한 치도 틀림없이 이미 다 짜여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인간은 웃고 울고 그리고 체념하다가 죽는 것인가 보다. 그것은 또 크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큰딸 기진이의 경우 그것을 너무 절감했고, 그리고 거기에 승복하여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앞에서도 되풀이했지만 기진이는 첫딸로서 제 아빠의 유난스런 사랑을 받고 자랐다. 어려서는 순하고 바탕이 착해 마음씨 곱게 자랐다.

한편 할머니와 아빠의 지나친 사랑 때문에 조금은 이기적이고 다분히 현실 감각에 예민한 처녀애로 성장했다. 모양 잘 낼 줄도 알았고, 약간은 사치스런 경향도 있었고, 꿈도 많았다.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KBS 교향악단에 입단을 해서 오보에 를 불었다. 그런 한편 애들도 가르치고, 학교 다닐 때부터 자립을 해서 제 용돈은 제가 벌어서 쓰는, 우리 집에서는 생활력이 강한 애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결실이 없는 연애 비슷한 것도 해 보고, 또 성격이 쾌활하고 양성적이라 그 나름대로 제 일을 가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외국 유학 나가서 좀더 공부하고 싶다는 게 소원이었다.

그이하고 나는, 같은 자식이지만 공연히 기진이한테 미안한 감이 있었다. 그것은, 둘째 기영이는 일찍 유학 나가 좋은 남자 만날 기회도 생겨 행복한 결혼을 했지만, 형인 기진이는 뒤처져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결혼엔 연분이고 순서가 없다고 하지만 부모로서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서, 늦은 감이 있지만 기진이도 미국에 유학 보내기로 결정을 보고, 수속이 끝나 여권도 받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는 기영이 내외도 뉴욕에 있을 때였다. 그 동안 기진이한테는 중매 혹은 친지를 통해 꾸준히 결혼 말이 오고 갔지만 성사는 못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여권까지 받고 떠날 날만 정하게 된 판국이니, 저나 부모들은 결혼을 조금 보류한 상태인 때였다.

말이 유학이지 우리의 능력이나 형편으로는 기진이의 뒷바라지를 해 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우선 제가 그 동안 저축해 놓은 것에다 왕복 비행기표, 그리고 약간의 비용만을 보태줄 정도였다.

비행기표 말이 나오면 지금도 나로서는 잊지 못할 분이 있다. 그이의 외유 外遊 대마다 편리를 봐주신 KAL 의 조 사장님 말이다. 그분은, 그이하고는 전연 다른 분야에서 살았지만 서로 인간적인 매력에 끌려 오랜 교유가 계속됐었다.

기진이는 늦은 유학길이고, 또 나이 들어 나가는 길이라서 어미로서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마치 체력이 모자라는 운동 선수를 불안한 마음으로 경기장에 내보내는 그런 심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진이가 어학에 소질이 있어 유학 가서도 우선 언어에는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이니 그것이 큰 힘이 되리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체념과 적응성이 빨라 웬만큼은 해나갈 것 같은 믿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여자 나이 28세면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가 좀 지난 나이였다. 내가 기진이데 대한 기대감은, 오보에로 대성해서 유명한 음악가가 되기보다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 주는 게 더 바람직했다. 다만 좀더 욕심을 내자면 음악과 좋은 결혼이 병행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모녀는 기진이가 떠나는 전날 밤 이층 기진이 방에서 같이 밤을 지냈다.

“아빠 때문에 떠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요. 이럴 때 내가 엄마 곁에 있어야 하는데…”

기진이는 울고 있었다.

그이는 말로는 떠나라고 해 놨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기진이를 막상 자기 곁에서 더나 보내려고 하니 말은 안 하면서도 많이 상심해 했고, 그 때문인지 술도 계속해 자시더니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다.

“걱정 마라. 아빠는 엄마가 있으니까…. 이제 너는 우리 곁을 떠나 네 인생을 시작하는 거야. 네가 혼자 일어나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시험해 보시는 좋은 기회니까. 어느 하늘 밑에서라도 아빠 엄마의 딸이라는 긍지를 갖고 겸손하게, 범사에 감사하고 살아라”

1월 4일로 출발 일자를 정했다. 그런데, 또 변고와 시련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이가, 그 끔찍이 사랑하던 딸과의 이별에 상심한 나머지 또 다시 병이 난 것이다. 이번에는 저당 低糖 증세가 나타나, 정월 초하룻날에 거의 인사불성이 된 채 연세대 병원에 입원했다.

의지와 인내력이 강하다고 자부했던 나도 그때는 정말 비통과 절망에 사여 버렸다. 30년 가까운 세월 속에 이토록 무서운 시련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처음 겪기 때문이었다. 그저

“하나님, 어찌하오리까?”

그 말만 나왔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기진이의 미국행을 연기하지 않고 떠나 보낼 것을 결심했다.

가족이란 서로 큰 일을 당할 때 같이 있음으로 해서 힘이 되고 보탬이 되지만, 아빠 그이한테는 자식 그 누구보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진이에게는 이제 기진이의 새 인생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진이를 정한 날짜에 떠나 보내는 것이 오히려 내 마음에 편할 것 같았다.

기진이는 예정대로 1월 4일 아침 8시 40분 비행기로 떠나게 되었다. 떠나는 기진이는 의식아 안 돌아온 아빠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비고 울며, 비장한 마음으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결국 그것이 기진이하고 아빠하고의 마지막 이별이 됐다)

나는 비행장에서도 기진이가 떠날 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울 수 있다는 처지는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을 때였다. 그때 내 마음은 밀폐된 공기가 압축 당해 폭발직전인 상태 같았다.

기진이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제 기진이는 제 인생 제 갈 길을 혼자 찾아야 된다는 냉혹하고도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내 발걸음과 마음은 온통 그이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이는 이번에는 사흘 만에 퇴원했다. 완전히 깨끗한 의식은 아닌 채….

손 목사님이 집에 오셔서 간구한 기도를 올려 주셨다. 나도 그의 발 밑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는 내가 신기했다.

기진이는 미국에 도착하자 아빠한테 전화했다. 아빠 목소리 듣고 기진이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됐으리라.

기진이 떠나고 처음으로 2층 기진이 방에 올라갔다. 침대 위에 벗어 둔 옷가지, 쓰던 물건, 벽에 걸린 사진 등 온 방에는 아직도 기진이 냄새, 기진이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내 가슴으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나는 방 가운데 주저앉아 그 애를 공항에서 떠나 보내고 참아 왔던 슬픔에 둑이 무너지듯 무너졌다.

얼마를 하염없이 울었다.

어미를 너무 좋아하며 보살펴 주던 기진이… 갑자기 나는 내 등 뒤가 허전하고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동생 (기선이), 두 딸! 나한테 가장 필요로 하고, 내 곁에 있어야 할 그것들이 모두 내 곁에 없다는 현실감이 순간 나를 미치도록 외롭게 했다. 그이가 있고 아들 둘이 있지만 그건 또 다른 정이었다.

 

 

결국은 우리 둘이 남는 거야!

 

기진이는 뉴욕으로 가 대학원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면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 왔다. 그러다 3월 들어서 기진이로부터 우리한테 충격적인 편지가 왔다.

그것은 사랑을 하게 됐다는 것으로, 상대는 서울음대 선배이고, 현재 쥴리아드 대학원 작곡과에 재학중인 남자로 임헌정 林憲政  이라고 했다.

진실한 기독교 집안의 사람인데, 물론 본인의 믿음도 강하고 두뇌도 명석하며, 유학생으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족 치 못하지만 아주 진실하고, 더구나 기진이 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사연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우선 반대는 않으나 어차피 공부를 하러 간 길이니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서 좀 더 사귀어 본 후 결정하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고모와 또 서울음대 교수님을 통해 임 군의 인적 사항을 알아 보았더니 별 하자가 없다며 칭찬들을 해 주셨다.

그런데 부모로서 막상 허락을 내리려니 한 번 얼굴도 못 본 데다, 작은 사위가 음악가라 구색을 맞추자는 게 아니라 큰 사윗감은 좀 다른 방면의 전문직이었으면 해서 망설여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중 임 군한테서 정식으로 장인 될 그이에게 정중하고 지성어린 청혼과 부모님의 허락을 바란다는 편지가 왔다.

우리는 사위마다 떨어져 있어 얼굴도 못 보고 편지로 청혼을 받는다고 실소했다. 둘째 사위 영창이 때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응낙 편지도 내기 전에 기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5월 20일에 약혼을 하고, 6월에 결혼할 것을 결정했다는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어쩐지 좀 섭섭하고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그이도 나도 깊은 잠을 못 자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내가 서운해 하는 눈치를 보고 그이는

“여보, 허락을 해줍시다. 여자 나이 스물 여덟이면 이제 남자 보는 눈이나 판단도 섰을 거야. 더구나 기진이는 서울서 판을 치는 겉치레 결혼 조건 따위에 실망하고 간 애야. 제 눈으로 인간 하나에 중점을 둔 이번 선택은 잘한 거라 믿어져. 우선 믿음이 있고, 같은 인생의 목적 – 대화가 통하는 같은 음악을 학, 또 거기에 사랑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우리 영창이와 기영이가 저렇게 재미나고 행복하게 사는 걸 봐요…. 음악 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고 착할 거야.”

“글쎄, 그건 당신 말이 옳아요. 그런데 여기서 응낙도 하지 전에 저희끼리 먼저 결혼 날짜를 정해 보내니 그게 섭섭하죠.”

“그러야 형식이지. 우리가 태평양 건너에서 반대한다고 해서 어떡하겠어. 임 군도 나이가 있으니 마음 정하고 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거지. 우리 축복을 해주고, 당신은 준비나 서둘러요.”

결국 그이는, 기진이 결혼식에는 나만 갔다 오라고 결정을 내렸다.

둘이 같아 나가면 막내가 혼자 집에 있게 되고, 또 그만큼 비용도 많이 들게 될 것이고, 특히 결혼 준비는 현지에서 하더라도 엄마인 내가 있어야 할 거니까 나만 가라는 판단이었다.

인간은 항상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살게 마련이다. 나는 지금 기진이 결혼식 때 그이와 같이 안 갔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좀 무리를 해서라도 같이 갔더라면 이런 회한은 남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큰 사위도,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던 기진이도 다시 못보고 간 그의 가슴에는 한이 맺혔을 것만 같다.

나는 서둘러 기진이 결혼식 준비를 했다. 임씨 댁 사돈들과도 인사를 끝내고, 서울서 색시 집에서 차릴 인사를 간소하게나마 정성껏 했다. 사돈댁은 믿음이 독실한 집안이었는데, 그 가족 분들도 겸허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그이는 사돈댁과 인사하고 식사를 나누고 들어와서는 만족해 했다.

“사돈댁 분들을 보니까 임 군을 보지 않았어도 그의 성품과 가정 교육을 짐작할 것 같아 안심이 돼”

“그래요, 결국 산에서 산 사람들은 산 사람끼리 만나야 되고, 물에서 산 사람들은 물에서 산 사람끼리 인연을 맺어야지 서로 거북하지 않고 마음이 편해요. 이제 우리도 사위 둘을 보게 됐구료. 그런데 두 딸 다 밖에서 살게 되니 나는 외로워서 어떻게 살죠?”

나는 가슴에서 찬 바람이 일고 있었다.

“여보, 자식들은 다 크면 부모 날개 밖으로 떠나게 마련야. 이제 저희들 인생은 저희끼리 개척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 주면 그것으로 그만인 거야. 당신은 내가 있지 않아. 이제 두 놈 장가 보내면, 정말 우리 둘이 남는 거야”

그이는 내 곁에서 천년 만년 살 것같이 그렇게 말했다. 그때까지는 그이의 그런 생각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보다 더 확실했는지 모른다.

그이의 주장은 항상 자식보다 부부가 먼저라고 말했다. 자식들에게 대학 교육까지만 의무를 다하면 그 다음은 저희 갈 길 저희가 알아서 가야 된다고 말했다. 기진이의 결혼도 제가 선택했다는 사실에 그이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새벽 세 시의 고독

 

1982년 6월 3일, 나는 기진이 결혼식 참석차 뉴욕으로 떠났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순간까지 모든 순서를 순조롭게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6월 20일의 기진이 결혼식을 위해 저를 보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천지 천지가 있고 남편 그가 있다는 고마움을 느낀다.

기진이 결혼식에 그와 동행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녁 8시 15분. 그이와 친구들의 전송을 받고 떠나다. 그이가 자기가 갖고 있던 라이터를 주다. 비행기 속에서 쓰라고….

 

진 眞아! 이제 네가 정말 시집 가누나. 네가 택한 이 결혼, 정말 사랑과 믿음과 책임 속에 잘 이끌어 나갈 줄 안다. 우리들은 그 많은 인생의 프로그램 속에 이제 제일 소중하고 뜻있는 결혼을 네 자신이 택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고마운지 모른다.

6월의 신부! 너는 참 멋지고 좋은 여자, 현명한 아내가 될 것이다. 우리의 첫 분신 分身. 많은 것을 너는 갖고 있었다.

오늘 떠나기 전, 손 孫 목사님이 오셔서 기진이 결혼식을 위해 기도를 해주시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비행기는 서울을 등지고 구름 속으로 날다. 기진이 곁으로 일초 일초 다가간다. 그것을 똑 5개월 만에 보는구나. 생각보다 빠른 재회….

집에 있을 대보다도 몇 시간 후면 기진이를 본다는 반가움에 마음이 설레인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가 만든 구름이라는 융단 위를 마냥 날아간다. 지금쯤 서울의 그이와 민 民이는 단잠 속에 빠져 있겠지.

점점 밝아 온다. 앵커리지가 가까워 온다. 눈 덮인 산하가 굽이굽이 보인다. 6월의 시간에서 7시간 만에 눈 덮인 산을 보게 되다니…

흰 아이스크림이 흘러 내리듯, 산등성이의 눈 덮인 모습이 절묘하다. 비행기 위에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세계는 하나라고 실감하게 된다.

평화로운 인간의 체온이 느껴지는 풍경! 인간에게 사상 思想이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 이제 6시간 후면 뉴욕 도착!

구름의 장관. 솜 뭉치 간은, 보드라운 옷자락 같은 끝없는 구름 위의 거대한 구름 밭 속을 두둥실 떠 간다. 새삼 하나님의 천지 창조, 그 위대한 품 속에 안긴 듯하다.

비행기 속에서 하루가 지났다. 인간의 존재, 인간의 감정 조각은 이 대자연 속에 정말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구나. 멀리 분홍빛 엷은 색채가 보인다. 어둠이 깔린 뉴욕이 가까워 온다.

현지 시간 9시 50분에 도착 예정. 길고도 지루했던 17시간. 기진이하고의 재회의 시간이 자꾸 다가온다.

기진이의 여자로서의 역사가 바꾸어지려는 새로운 장 章에서 모녀가 만난다.

 

6월 3일

기진이 하고 임 군이 마중 나와 있다. 임 군의 첫인상은 체격이 그리 크지 않고 왜소해 보였으나 침착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맨해튼에 있는 수진 (동생 기일의 딸)네 아파트에 간다. (그때 수진이는 16세로, 피아노 전공 유학 중. 기진이하고 같이 있었다)

저녁 대출 먹고, 기진이하고 새벽까지 이야기하며 꼬박 밤을 새우다. 아빠를 제일 걱정하는 이야기였다.

 

6월 4일

뉴욕 날씨, 비바람 불고 을씨년스럽다. 임 군은 제 아파트에서 아침 일찍 오다. 조용하고 침착하고 말수가 적다. 그러나 대단히 섬세하고, 또 날카로워 보인다.

믿음, 사랑, 음악. 둘은 공통의 것이 있으니까 잘 맛을 것 같다. 기진이는 뉴욕에 온 5개월 동안에 살이 쪄 옷이 모두 안 맞는다며 즐거운 비명! 자유로운 뉴욕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고, 사랑을 해서 좋아졌나 보다.

임 군과 기진이와 같이 임 군이 사는 아파트 (신접 살림 할 곳)에 가 보다. 고풍스런 건물에 수리 중이었다. 침대도 맞추어 꾸며 놓으면 아담할 것 같다. 신통하게 생각한 것은, 집 수리도 사람을 사서 하지 않고 저희 둘이 손수 페인트칠에서부터 모두를 하고 있었다.

낮에는 셋이서 허드슨 강변을 산책하고 사진도 찍었다.

 

6월 7일

저녁에 먹은 커피 탓인지 잠이 안 온다. 진이하고 새벽 2시까지 이야기하다. 진이의 진면목을, 그리고 그 애의 구석구석 마음의 한 조각까지 알고 진정 이해해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미밖에 없을 것 같다.

서울에서 품고 온 나의 불안이 진이 앞에 부끄럽다. 임 군을 택한 깊이를 알 것만 같다. 우선 임 군은 인간의 기초가 다져진 젊은이 같다. 우수한 두뇌, 선량하고 성실한 인간적인 바탕, 믿음, 진이를 열망하는 사랑, 그리고 일생을 예술적이면서도 서로 창조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진이는 평범한 범속 凡俗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진정, 결혼의 행복이 어디 있는가에 눈뜬 것 같다. 엄마는 그것을 이 세상 누구보다 믿고 축복해 주고 싶다.

 

이모 기선이가 로스앤젤레스 에서 오고, 둘째 기영이가 독일서 뉴욕으로 날아와 그나마 신부측 가족은 있는데, 신랑측 가족이 없어서 섭섭하다.

기진이 결혼식 전날 밤에 기도하고 자다. 날씨를 맑게,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해주십사 하고…

아침에 깨니 날씨 쾌청하고, 살랑거릴 정도의 바람이 불어 덥지도 않다. 오늘, 기진이가 시집 가는 날! 그이 생각이 난다.

기영이랑 같이 미장원에 안 가고 집에서 신부 화장을 하다. 웨딩 드레스 입고 거울 앞에 서니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 저희 아빠가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28년 길러, 타향에서 어미만 보는 데서 결혼하게 된 게 만감이 오고 간다.

식장은 저희들이 다니는 교회, 맨해튼에서 40분 쯤 거리에 있는 브롱스 교회로서,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교회였다. 유 목사님의 집전 하에 식이 시작됐다. 둘이 음악을 하니까, 결혼식도 음악회 같다. 뉴욕에 있는 서울음대 선후배들이 많이 참석해 주었다.

이인성 씨의 오보에 연주 – 바하 곡 <G선상의 아리아>로 시작해, 소프라노 김영미 양의 <주기도문> 노래에 이어 신랑 입장하고, 아빠 대신 이 장로님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하셨다.

순간 나는 울음이 나왔다. 아빠가 있으면서도 아빠가 못 온 기진이 결혼식이 가슴 아팠다. 기영이 때와는 달리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가 없다. 많은 사연과 곡절과 방황 끝에 이루어진 기진이 네 결혼이 꼭 행복할 거라고 엄마는 믿는다.

교회 지하실에서 300명이 넘는 하객들과 성대한 피로연까지 있었다. 이번 결혼식 때 브롱스 교회 교우 여러분들의 뜨겁고도 진실한 보살핌은 저희나 나나 일생 못 잊을 것이다. 너무 고맙고, 정말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기진이는 뉴욕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파트에 오자마자 기진이하고 사위는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기진이가 전화를 끊고 엎드려 울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이는 내가 기진이 결혼식 참석차 미국에 가 있는 40일 동안 많이 외로워했고, 어느 때보다도 마음을 못 잡았던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는 나를 혼자 보내게 됐지만, 기진이 결혼식에 자기가 참석 못한 것을 그이는 혼자 상심해 하고 그 시간을 주체 못했던 것 같다.

나 없는 동안, 동네에 사는 소설가 최의선 崔義善 이가 그이를 많이 보살펴 주고, 술도 대작해 주며 위로를 해주었다. 의선이는 우리 집에서 수양딸로 불리우고 있다. 그이가 간 후 의선이는 친딸 못지 않게 애통해 했고, 초상 때도 뒷배를 봐 주는 등 애를 많이 서 주었다.

나는 기진이 결혼식에 갔다 온 후 될 수 있는 대로 그이하고의 시간을 많이 갖기 위해 외출도 삼가고 집에 있는 시간을 늘였다.

그이는 KBS도 그만두고, 이제 완전히 은퇴 생활로 들어간 셈이다. 요새는 인간의 생명도 연장돼서 흔히들 60 부터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떠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소리 같다. 더구나 남자들의 생명은 직장과 사회적인 활동에 비례해 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적으로 벌써 어떤 소외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남은 일을 할 때 자기는 이제 놀고 있다는 현실은, 남자를 정신적으로 위축시키고 생활이 리듬을 깨고 만다는 것을 나는 옆에서 보아 왔다. 그것은 또 직장을 그만둔 샐러리맨의 마지막 비애이다.

나는 그이가 직장을 그만둔 후 그이에게 더 신경을 썼음은 물론이다. 반주를 안 하면 잠이 안 오는 그 심정을 내가 왜 모를까. 반찬에도 더 신경을 쓰고, 외출을 안 할 때도 항상 직장에 다닐 때보다 더 넉넉한 용돈을 그의 지갑에 몰래 넣어 주곤 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내가 받아 오던 날, 나는 혼자 차 속에서 서글픔과 비감 悲感에 젖었다. 한 남자가 60이 돼 마지막 직장을 나온 그 대가의 부피가, 아내인 내 가슴에 차갑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마를 버티어 나갈까? 더구나, 그이에게도 남에게도 군색함을 보이지 않고 어떻게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

그날 그이는 퇴직금을 세어 보지도 않고 명세서도 안 보고

“은행에 넣어 두지”

간단한 한 마디를 하고 보던 책에 눈을 돌렸다. 나는 속으로 그이답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꼭 새벽 3시에 잠이 깨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그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같이 잠을 깨야 되는 고역을 겪었다. 그리고 그이는 곧잘 자기가 자랐던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 동안에도 많이 들었던 이야기를, 가난하고 고생했던 소년 시절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같이 열심히 했다. 나는 졸려서 어떤 대는 듣다가 코를 골면

“당신, 그렇게 졸려? 남의 얘기를 듣다가 코를 고니… 에이, 그만두지”

섭섭했는지, 못 마땅한 듯 혀를 차며 돌아 눕기도 했다. 그럴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어떤 때는 또 그런 내 꼴을 보고

“역시 당신은 나보다 젊군. 그렇게 잠이 쏟아지니”

그렇게 부러워할 때도 있었다. 나는 그 무렵, 어쩐지 나 혼자 잠에 빠져드는 게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늙으면 모두 잠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저이도 영락 없는 늙은이가 돼 가는구나 싶어 가엾은 생각도 들었다.

그 무렵 그이는 자기 노트에 이렇게도 적어 놓고 있었다.

 

8월 8일

요새 이상하게도 새벽 3시경이면 잠이 깬다. 내 자신을 가다듬으려고 술자리도 외면하고, 내 방 내 자리에 눕는 습관을 들여왔다.

술 안 마시는 며칠. 잠이 없어 밤이 괴롭다. 새벽 3시 경이면 영락없이 잠이 깬다 왜? 심불안 心不安? 왜 마음이 이렇게 불안할까? 하기야 모든 상황에서 심안정 心安定은 있을 수 없겠지.

기진이가 내 곁에서 떠나려고 기를 쓴다. 보내야지. 다만 건전한 기진이의 사고 思考를 믿을 따름이다. 나는 제1단계 경험 시대에 살아온 사람, 기진이는 제2단계 경험에서 살아 나가야 할 존재. 억지로 제1단계 경험을 참고 삼아 전해 줄 뿐이겠지. 그 이상의 강요는 안 된다. 가만히 지켜 볼 뿐. 내가 나이가 찼다는 것을 내 스스로 느낄 뿐이다.

가라, 가라, 가라! 서슴지 말고, 네 길은 네가 찾아서 가라. 인생은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는 것. 그 가는 길에 위험한 건널목이 있어 내 딴에 조심스러워 보이는 것 뿐.

가라, 가라, 가라! 그리고 더욱 믿음이 살쪄 대지 위에 두 발을 굳게 딛어라.

(기진이가 미국으로 떠나게 될 무렵이었던가 보다. 딸 기진이에 대한 사랑과 이별의 정이 이렇게 표현됐던 것이다)

 

8월 9일 (AM 3시 45분)

아무래도 어제 꿈이 이상합니다. 회색 양복의 키 큰 신사가 저를 어느 교회당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써늘한 마음으로 저도 모르게 그저 이끄는 대로 교단 앞으로 따라 갔습니다.

카페트는 그린 색, 그 위를 소리 없이 발자국을 옮기고….  성단 聖壇 앞 양 옆 계단에도 그린 색 카페트가 깔려 있더군요.

정면을 바라보니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양 옆 창에서 빛이 휘황찬란하게 비쳐 십자가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나는 순간 온 몸이 오싹해지며, 내 자신을 억누르려 해도 이상하게 그게 안 되고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온 몸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을 실감했습니다. 두 손 모아 정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회색 양복 신사를 보니, 왼쪽 계단을 내려서며 왼쪽 엄지 발가락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면, 왼쪽 어둠침침한 벽 쪽으로 가더군요.

저는 온 몸에 땀을 느끼고, 도한 두 눈에서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씻으면서 문 쪽으로 혼자 나갔지요. 휘황찬란한 햇볕이 저의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뒤의 그 신사는 생각지도 않고 혼자 나왔지요.

아무래도 뒤에 남기고 나온 그 회색 양복 신사가 능섭 能燮 형 같기에 뒤돌아 보려는 순간, 저는 그만 눈물과 땀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잠에서 깨었지요. 아무래도 그 회색 양복 신사가 능섭 형님 같아서 이렇게 혼자 눈물지고 그리워합니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75세, 며칠 전부터 기원에게 형수님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더니, 그런 생각이 그렇게 꿈 속에서 형님을 대하게 됐는지, 아무튼 죄가 많습니다. 용서하세요.

부디 살아서 뵙고 싶습니다.

(능섭 형님은 그이이게 단 한 분의 형님이셨는데, 6.25때 납북되신 채 지금껏 생사를 모른다)

 

그날 새벽 그이는 그 꿈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래도 형님이 돌아가신 것 같다며, 형님 회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형님이 가시면서 아마 자기에게 기독교에 인도하시고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도 그이는 계속해 메모해 놓았다.

 

8월 10일 (AM 3시 40분)

새벽 3시가 채 못돼서 또 눈을 떴다. 어제에 이어 형님의 꿈이 아슴하게 흐린 속에서, 안타깝도록 답답한 속에서 잠이 깼다.

할 말씀도 있음직한데 그것도 없고, 나도 얘기를 하려 애써도 안 되고, 답답만 하던 그 몇 초, 깨고 나서 그 답답함을 이렇게 쓴다 해도 가시지 않는다.

아무래도 능섭 형님은 돌아가신 것 같다.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 그렇게 모진 세상을 사시다가 가셨을까?

 이 세상 어디서 어떻게 형님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새벽의 북녘 하늘에는 소리는 없어도 대포가 여기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이 순간의 현실입니다.

저에게는 육순 六旬이란 옛 감각은 없습니다. 왜? 아직도 누구에게나 의존할 생각은 결코 없고,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내 생존의 활기를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형님이 하셔야 할 일을 제가 조금이라도 대신 못해드린 것이 죄송할 뿐입니다. 용서하세요.

진섭

 

9월 18일

며칠 전, 나는 아내의 절규의 글을 보았다. 내게 주는 마지막 편지처럼!

전날 늦게 시작한 술잔은 혼자 생각하며 들이켰으리라. 깨어 난 시간이 꼭 3시. 목이 말라 살그머니 바깥 냉장고 문을 열어 초정 약수를 찾았지. 마리가 맑지 않아서…..

기원이는 자면서도 그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나 보다. 그것이 슬퍼진다.

이제 술을 안 마시면 잠을 못 잔다. 이 [齒]가 물러지고, VC가 깨져 잇몸에서 피가 난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머리맡에 사다 놓은 CC정 錠을 까서 입에 털어 넣는다. 영락없이 AM 3시에 눈이 떠져, 나를 나무라는 기원이와 언성이 좀 거칠어졌나 보다. 충고도 고맙고, 그 기막힌 내 거동 하나하나의 심상 心象 을 후벼낸 기원이의 애고 哀苦 절절한 글귀를 나는 잊지 않는다.

겨우 48시간의 무주 無酒 상태에서 나는 또 새벽 3시 마 魔의 시간에 걸려 남은 술을 마셨다. 그렇게 쏟아져 나오던 입 안의 피가 싹 멎었다. 목 속에서 나오는 혈담 血痰이라는 기원이의 걱정은 가셨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자신의 자가 진단으로 자위하지 못할 만큼, 그 동안 내 몸을 패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나는 결국 내 자신과 싸워서 내 자신을 신생 新生의 길로 바꾸어야 할 진정한 시기에 이른 것 같다.

아내의 눈, 애들의 눈! 그것이 내게는 다시 없는 보석의 빛. 결코 생명을 재촉하지는 않는다. 내 소중한 것들을 위해서라도….

월급장이 생활에 뜸해져서 이끼가 낀 붓대를 가다듬어 움직이는 대로 써 보자. 그것이 우선 내 길이다.

 

여기서 나는 그의 고뇌를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새벽 3시면 영락없이 깼을 때의 그의 고독을 나는 뒤늦게나마 알고 울었다.

그것은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자신의 건강을 예민한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아내인 나한테는 한 마디도 비감 어린 말을 안 했다. 그것은 마지막 명멸해 가는 그이의 자존심이었고 의지였다.

나는 그이 앞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명랑 하려고 노력했고, 궂은 이야기나 걱정스런 말은 일체 함구하고 살았다.

새벽에 그이는 곧잘 언덕 아래 해장국 집에 가자고 해서 그때마다 나는 따라갔다. 어떤 때는 내가 일어나기 싫어 짜증을 부리면 자기는 옷을 다 입고 머리맡에 앉아

“응, 같이 가자. 혼자 가면 맛이 없어. 그래, 꼭 오늘만 같이 가”

하고, 어린애같이 조르면 앉아 있기도 했다.

사실 술꾼이나 아침부터 해장국을 좋아하지, 나는 무거워서 먹기 싫었다. 언젠가는 마지못해 혼자 갔다 오더니 기분 좋지 않아 해서, 그 다음부터는 싫어도 곡 동행을 했다. 캄캄해 집을 나가 먹고 집에 올 때쯤 되면 훤하게 동이 틀 때도 있었다.

둘이서 손을 잡고 그 긴 언덕을 오르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숨 찬 줄도 몰랐다.

 

 

인생은 언제나 가는 것

 

그이는 가끔 65세 만세론 萬歲論 이란 말을 했다. 즉, 65세 까지만 살면 인생은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이상은 ‘덤’으로 사는 거지,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사실상 죽은 인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가까운 친구분이던 윤현배 선생님과 몇 분이 서 항상 65세 만세론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그이는 그 소원이던 65세도 채우지 못하고 가 버렸다.

어떤 때는 외출을 같이 나갔다가 길에서 나이 많은 노인이 죠깅 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늙은이다워야지. 저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면서까지 오래 살라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은 좋게 안 보이는군”

하던 말이 기억이 난다. 더구나 모든 면에서 노욕 老慾 같이 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늙어갈수록 저물어 가는 낙조 落照 를 보듯 담담해야 된다고도 말했다.  도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는 두 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나 두 손을 편안하게 펴고 죽는 것처럼, 그 동안 두 손 안에 담았던 천태만상 千態萬象 의 욕심을 미련 없이 머리고 가야만 된다고도 말했다.

그러니까 자식 덕을 보겠다는, 그러기 위해서 오래 살아야겠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자기 몸 움직여 60 평생까지 살고, 그 이상 못 움직이게 되니까 ‘이만하면 너희끼리 살 수 있겠지’하고,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훨훨 가 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몸 져 눕기 두 달에서 이틀 모자라는 날만 채우고…

어떻게 생각하면 매몰차고, 너무나 명확하게 자기 인생 몫을 살고 간 것 같다.

그이는 평소에 다음 한시 漢詩를 좋아해 잘 읊었고, 먹 글씨로도 썼다. 제일 잘된 글씨를 족자를 해서 걸어 놓기도 했다.

 

 

천의지석산위침 天 依 地 席 山 爲 沈

월촉운병정작준 月 觸 雲 屛 情 作 樽

대취거연하기무 大 醉 居 然 何 起 舞

각혐장수괘곤륜 却 嫌 長 袖 掛 崑 崙

 

하늘을 옷자락 삼고 땅을 자리로 삼으며 산을 베개로 삼노라.

달빛을 촛불 삼아 구름은 병풍 삼고 정 情 으로 술을 만들었노라.

크게 취해 일어나 춤을 추니

장삼 자락이 곤륜산 산마루에 걸려 거추장스럽구나.

 

 

이 시는 당나라 때 두보 杜甫 의 시라고 들었다.

그이는 이 시를 좋아했는데, 역시 중국 사람들은 시 詩 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웅장하다고 감탄했다.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큰 자유로움 속에서 살다 죽을 수만 있다면 최고의 행복이라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은 당나라 때 태어날 사람이 20세기 한국에 태어났으니, 자학도 많고 고생도 많구료”

하고 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이는 이 각박하고 살벌한 세상 속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 속에서 자유와 낭만과 정신적인 호사를 누리다 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고집과 독선과, 그리고 멋이 있었다.

애들은 아빠를 ‘학 鶴’ 이라고 별명을 붙였다. 목이 길고, 머리가 희고, 또 다리가 길어 학 같다고 했다. 그이는 목욕하고 나오면 수건을 두른 채 학춤을 잘 추었다. 긴 목을 움츠리고 덩실덩실 춤 추면 애들이 박수를 치고 웃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이의 학춤은 어딘지 슬픔이 서려 있었던 것같이 느껴진다. 그이의 학춤뿐만이 아니라, 그이의 눈과 전체적인 데서 풍기는 분위기 전부가 오지고 단단하고 그런 데가 없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서로가 맺힌 데가 없어 불안하다고 똑같은 평을 했다.

자기 조상한테 자기만 오래 살아 미안하다고 송구해 하기도 하던 그이가 회갑을 맞데 됐다.

이씨 댁 가까운 선대 先代 분들은 모두 회갑을 넘기신 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이는 항상 그것이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했다. 더구나 단 한 분인 형님은 40대 때 납북 당하셔서 생사조차 모르시니 그렇게도 말하게 됐다.

1982년 10월 9일. 나는 그이의 회갑 전날 밤 혼자 길고도 간구한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때도 그이의 건강은 깨끗지 못했을 때였다.

누구나 맞이하는 단 한 번의 회갑이지만, 줄다리기 하듯이 항상 그의 건강을 불안해 하고 염려하며 살아온 나는, 그날이 남의 80을 맞는 것같이 고맙고 감회가 깊었던 게 사실이다.

처음에 우리 둘의 계획은, 딸들도 모두 밖에 있고 아들도 장성하지 않았으니까 잔치도 하지 말고 둘이서 조촐한 여행이나 갔다 오자고 했다. 그러나 대소가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낮에는 사돈 댁들과 친정 식구, 저녁에는 밖에서 시댁 식구들과 회식이 있었다.

회갑 날 큰 아들 기광이는 부대에서 나와 사상 최대의 걸작 회갑 선물을 했다. 두 아들은 아침에 아빠한테 절을 하고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리고 나서 기광이는 샴페인 한 병과 플레이보이 잡지 한 권. 그리고 카드에는

“아빠, 회춘 回春 하세요. 그리고 오래오래 사세요, 화이팅!’

그때 저희 아빠의 먹 적어 하고 기쁨에 찼던 얼굴은 잊을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장난기 심하던 기광이는 아빠 선물도 장난기 어린 특색 있는 걸로 했다. 막내 기민이는 아빠가 피는 ‘은하수’ 담배 한 보루를 선물했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큰딸 기진이는 서류 원고를 넣는 가죽 가방과 영양제 약을 보내 왔다. 둘째 딸 기영이는 두 달 동안 제가 정성들여 짠 스웨터를 보내 왔다. 기영이 난생 처음 짠 첫솜씨였는데, 색깔도 좋고 점퍼형으로 큼직하고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두 딸의 선물에 만족해 했고, 특히 기영이가 짠 스웨터는 그날부터 입고 원고도 썼으며, 어떤 때는 잘 때도 입고 자고, 또 외출할 때도 입고 나가곤 했다. 누가 오면

“이거 기영이가 짜서 보낸 거야. 좋지?”

하고, 어린애같이 자랑도 했다. 그이는 그 스웨터를 그렇게 좋아하고 애용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하러 가는 날에도 그것을 입고 가서 파자마 위에 노상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딸에게서는 회갑날 아침에 모두 국제 전화로 축하 인사가 왔고, 그이는 사위들하고도 통화를 했다.

또 그이의 생일을 기억하고 계신 몇몇 친구분들은 다음날 점심에 초대를 했다.

그렇게 해서 그이의 회갑 잔치는 생각보다 성대하게 잘 지내게 됐었다. 나는 그날 밤 혼자 감개무량해 했다. 흔히들 아홉 9 수가 어렵다는 59세를 넘어 이제 회갑을 넘었으니 어쩐지 그이는 오래오래 살 것 같은 믿음이 들었다.

“오늘을 있게 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이를 붙잡아 주십시오”

내가 그이에게 주는 회갑 선물은 그날 밤 간구하게 드린 내 기도였다.

그러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 – 5개월 후의 그이의 한명 限命을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그이는 자기 회갑이 지난 며칠 후 나에게 붓글씨 한 장을 써 주었다.

 

爲 回甲 紀念 위 회갑 기념

淸正之 愛媛 청정지 애원

十月十八日 眞 시월십팔일 진

 

“이건 돌아올 당신 회갑 기념으로 써 주는 거야”

“성미도 급하우. 내 회갑은 7년 후인데 웬 걸 벌써 써 주어요?”

“글쎄, 표구집에 가져가 유리 껴서 마루에 걸어요. 내가 봐도 아주 잘된 글씨야”

그 글씨는 내가 봐도 어느 때 글씨보다 시원하고 유연하게 보였다.

워낙 그이는 필묵을 때없이 잡고 기분 날 때마다 쓰는 사람이라 나는 그날 받은 글씨도 별 뜻없이 받은 게 사실이었다. 나는 며칠 후 그이 말대로 표구를 해서 유리틀에 끼어 마루에 걸었다. 그이는 남의 글씨를 감상하듯

“참 잘 됐어”

하고 좋아했다. 그가 간 후 나는 그 글씨를 볼 때마다 자기의 마음에 집히는 게 있어 7년 후의 내 회갑을 위해 서둘러 써주고 간 것 같지만 했다.

그이는 그 무렵 모 출판사하고도 관계를 맺어 일주일에 한 번 씩 나갔고, 도 국제 문화 교류 관계로 4월엔 워싱턴 회의에 참석하기로 돼 있어서 준비 중에 있었다. 그이는 가끔

“나는 지금부터 할 일이 많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고마워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이의 건강이 속으로 그토록 악화되고 기울어져 가는 것을 짐작 못했었다.

1982년 연말에 그이는 또 하나의 일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KBS 출판국에서 내는 번역물로서 <음악가 모차르트의 인생> 이라는 전기물이었다. 원서 原書 가 아니라 일본 말로 번역된 것을 우리말로 다시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보통 전기물이 아니고 음악가의 일생이고 보니 음악의 전문적인 용어, 역사, 또 구라파 건물의 양식 이름 등 좀 까다롭고 난해한 것이었다.

그이는 일을 시작했다.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이는 일을 시작하면 꼼꼼하고 세밀했다. 음악 사전을 비롯해 번역에 필요한 자료부터 먼저 수집해 놓고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어떤 대는 새벽 2시, 3시까지 강행군도 했다. 일을 잡으면 술은 안 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식사에 신경을 썼다. 롯데 제과에서 나오는 아몬드 초콜렛을 잘 자셔 그것은 매일같이 공급했다.

원고 탈고 기한은 2월 말로 약속이 돼 있었다. 그러나 마감 날짜를 지키는 사람은 드물고 그이도 그런 편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이가 너무 무리하는 게 불안해서

“여보, 이렇게 까다롭고 방대한 것을 어떻게 날짜를 지키겠어요? 몸을 돌봐서 천천히 해요”

“아냐, KBS 출판국하고는 처음 일인데 약속을 지켜 주어야지”

피곤하면 잠시 누웠다가 도 앉아서 하곤 했다. 중간 부문 넘어서는 나도 같이 거들었다. 큰 교자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 밤 늦게까지 했다. 아몬드 초콜렛을 한 쪽씩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삭풍이 부는 1983년 정월의 긴 겨울 밤을 우리는 그렇게 마주 앉아 일을 했다. 나는, 천재이면서도 불우했던 모차르트 일생의 어느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우리 둘은 그렇게 밤을 새며 마주 앉아 일을 하면서도 두 달 후의 이별은 감지 感知 하지 못했었다. 나는 지금, 그 지나간 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했던가를 되새기고 있다.

결국 그 원고는 그이가 마지막 입원할 때도 갖고 가서 일주일 동안은 그이가 했고 후반 마무리는 내가 했다. 탈고하던 날, 막내 기민이가 와서 묶어 주었다.

2월 8일에 입원했는데, 2월 17일에 KBS 장 국장에게 원고를 넘겼다. 장 국장은 놀라며, 어떻게 병 중인데도 예정대로 원고를 받게 됐다며 고마워했다.

그날 그이는 기분이 좋아 장 국장이 갈 때 병실 문 밖까지 전송을 하며

“요 다음 일거리 줄 것도 생각해 놔야 돼”

하고, 농담까지 했다. 그러나 그건 아마 농담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그날 그이의 말에 가슴 저려 온다.

<모차르트의 일생>의 번역은 그의 집필로서는 마지막 작업이었고, 그리고 꺼져 가는 그 몸으로 죽음 직전까지 태풍같이 몰아친 마지막 정열이었다. 결국 탈고 후 17일째 그이는 갔다.

 

 

벌거숭이 ‘이진섭’

 

인생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고 바라던 길을 걷고, 남자로서 필생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끝맺을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이는 젊어서 한때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했고, 도 외교관이 꾸이었던 한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꿈은 이룩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남자 일생에 붙는 어떠한 화려한 직함이나 명예보다도 그이는 ‘벌거숭이 이진섭’ 그 자체로 한없이 깨끗하고 화려하게 살고 갔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그 많은 허물, 시행 착오, 실수, 주정, 또 사랑과 미움… 그 다채로운 무지개를 내 가슴에 뿌리고 갔다.

망각 妄却은 세월이 말해 주리라. 그러나 올올이 엮어진 추억은 내가 가는 그날까지 내가 살 수 있는 힘과 꿈이 되리라 믿는다. 한 가지 고마운 것은, 그이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 속에서 마지막을 끝냈다는 것을 진실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그의 영생 永生을 믿고 있다. 그리고 또 한번의 만남을 믿고 있다. 밤마다의 기도 속에 나는 그것을 확인해 가며 살고 있다.

 

그이는 생전에 성경 속의 시편 시편 23장 ‘다윗’의 시 구절을 좋아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牧者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 草場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 義 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 主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安慰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 床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 居 하리로다.

 

 

끝으로 나는, 그이 생전에 그이를 먼 밭에서 지켜주시고 염려해 주신 분들, 더욱이 그이와 가깝게 그의 곁에서 그이를 붙잡아 주고 보살펴 주신 많은 친구분들께 늦게나마 이 지면을 통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9년 동안 그이가 몸담았던 KBS 의 사우 사우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린다.

 

 

 

눈물로 쓰는 마지막 편지

 

당신께

울면서 쓰기 시작한 이 글이 4개월이 지났고, 봄에 간 당신이 반 년이 지나 내일이면 10월이 됩니다.

당신의 유택에는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쌓여져 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그 들판에 눈이 덮이겠지요.

눈물보다 이제 내 가슴은 돌이 돼 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슬플 수도 없는 시간 속에 나를 매질하며 이 원고를 썼습니다. 아니, 울며 웃으며, 누가 보면 마치 미친 여자같이 이 글을 썼습니다. 밤마다 기도 속에

‘이 글을 끝마칠 때까지 아파서 눕지 않게 해주십사’

하고 하나님과 당신께 기도했습니다.

산더미 같이 그 많은 추억 속에 나는 또 매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일기장 속에서 당신과 나는 매일 눈뜨고 잠자고 그랬습니다. 사랑하고, 싸우고, 미워하고…. 그리고 용서하며, 그렇게 말입니다.

30년의 세월이 한 폭의 선명한 그림같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어제 일 같고, 시간과 세월을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어쩌면 행복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착각 속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해낼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슬픔을 망각할 수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부터 당신이 가는 날까지의 그 많은 일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애기 낳고, 당신 술 시중하고, 또 주정도 받고, 웃고 울고….

당신은 젊어서는 가족을 위해 밤을 새며 많은 일도 했고, 그리고 늦게까지 월급장이 노릇도 해주었습니다. 애 쓰셨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나는 당신 앞에서 항상 설레임이 있었어요. 사랑할 때도, 야단을 맞을 때도. 여행지에서 오는 편지를 가슴 설레이며 기다렸고!

항상 내 군, 내 귀는 당신을 위해 크게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 나의 보람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살고 있는 뜻의 전부였습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들어 오면 당신은 나한테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늙어서 새벽잠을 잃은 당신은 나를 깨워 말을 시켰습니다. 나는 잠 속에서 들은 적도 많았지요. 당신은 지금 궁금한 게 많을 거예요.

당신이 떠나간 이 세상은 여전히 해가 뜨고 날이 저물지만, 매일 가슴 철렁하고 놀랄 일이 많이 일어났어요. 한 번은 공습 경보도 났었어요. 그 순간 나는, 당신만은 멀고 아늑한 곳에 숨겨 놔 둔 것 같은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꿈에 나타나는 당신은 항상 말이 없고 슬퍼 보입니다. 병원 계단에 앉아 나를 기다리기도 하고, 하얀 바지저고리를 고이 입고 산허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런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말을 주고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나한테 많은 이야기를 한 당신이 이제 저승에서는 할 말이 없어졌나요?

당신의 방을 꾸며 놨어요.  그 방은 당신의 그 모든 것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햇볕이 들고, 우리들의 산 소리를 차단하기 싫어 방문을 닫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기진이, 기영이들도 잘 있고, 항상 아빠가 저희들하고 같이 있다는 믿음 속에 살고 있대요. 집에도 편지가 자주 오고, 나보고 길에서 뛰지 말고 넘어지지 말라며 잔소리가 많아요.

기광이는 추석 때 다녀갔어요. 그 애가 오면 집안이 떠들썩 하고 꽉 차는 것 같아요. 그 애는 당신 꿈을 잘 꾼대요. 그 전날도 당신이 베레모를 쓰고 웃으며 나타나, 지금 송추 松秋에 있는 ‘후라밍고’ 라는 술집에 심연섭 선생하고 술을 먹으러 간다며, 기광이 손바닥에 섭 燮 자 두 자를 써 주더래요. 나무도 꿈이 생생하고 손바닥에 써 준 감각이 확실해서 꿈을 깨서 손바닥을 만져 봤대요.

내 잔소리가 없는 그 세상에서 마음 놓고 술 잡술 거예요?

아마 심 선생님하고 여전히 신나게 다니시겠지요. 좋도록 하세요. 이승에서도 못 말릴 것 저승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안주나 들고 자세요.

 

이제, 아침 저녁 썰렁하고 찬바람이 불고 이 일도 끝나려 하니까, 갑자기 줄 끊어진 연같이 흔들리고 있어요.

옆의 집에서 저녁 찬 만드는 도마 소리만 나도 눈물이 나고, 어느 집 남자가 타고 들어오는 차 멈추는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나요. 기민이가 볼까 봐서 며칠 전에는 목욕탕에 들어가 문 잠그고 실컷 울었어요. 이래서는 안되겠지요, 안되겠지요….

여보! 당신 가고 천둥 번개 치던 첫 밤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잘 견뎠어요. 그리고 전깃불이 나간 밤에서 촛불이 싫어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잘 견뎠어요.

당신 없어도 이제 이렇게 혼자 사는 그것에 훈련되고 익숙해질 거예요.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순간이라는 것은 누구나 영락없이 죽어 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하루가 죽음에 도달해 가는 행진이라면 나도 죽어 가고 있는 것에 틀림없습니다. 형체와 영혼의 차이뿐, 그것은 어쩌면 같은 길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죽음의 미화 美化가 아니라 신념으로 변질돼 가고 있어요. 금촌 金村과 불광동 같은 길인 것같이…

지금, 통일로의 당신 집 가는 길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입니다.

10월 9일, 당신 생일 날에는 애들하고 갈게요. 이번에는 술만 아니고 당신이 좋아하던 음식도 몇 가지 장만해 갈까 해요.

끝장을 메꾸려니까 갑자기 한기 한기를 느껴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어떡하죠

이게 사마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드리는 마지막 공개 편지가 될 것 같군요. 이제 할 말이 없어져 가요. 내 등골에서 기운이 빠지듯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미숙한 글이 끝맺음을 맺는 오늘까지 저를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붙잡아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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