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앞 표지 flap:

사색을 통한 신앙 전승의 습득을 촉구하는 우리 세대에 몇 안 되는 위대한 제안자의 한 사람인 벨테가 그의 창작 활동의 원숙한 결실을 내놓았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사유함이 자율적으로 진전된 우리 시대에 이성의 광장 앞에서 종교가 가진 권리이다. 일체의 것을 결정짓는 의미물음을 통해서 그는 오늘날의 우리가 걸어갈 수 잇는 신에게로 향한 사유의 길들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이미 일상적 행위 안에서 의미물음을 어떻게 함축적으로 긍정하는가를, 도 우리가 같은 인간들에 대해 책임성 있게 행위 함으로써 계시를 통해 인간의 경험의 지평에로 들어온 무조건적인 신비의 인격적 특성을 어떻게 요청하는가를 명시하고 있다. 이 인격적 신이 인간의 태도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곳에 그 완전한 의미로 종교가 있으며 신앙과 기도와 예배로 종교를 실행하는 종교적 인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종교를 실행함에 있어서 신으로부터의 운동(예컨대 선포)과 신에게로의 운동(예컨대 회중의 기도)은 함께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실제 종교생활의 본질적은 것을 사유함 안에서 모사 模寫 하는 일, 그것은 이 저작의 이해를 따르면 종교철학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오늘의 묻는 인간, 종교와 신앙의 일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모두를 향해 있다.

 

뒤 표지 flap:

지은이 베른하르트 벨테

1906년 3월 31일 독일 바덴의 메쓰키르히 에서 태어났으며, 1951~1973년 프라이부륵 대학교에서 종교철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1983년 9월 6일 사망하였다.

가톨릭 신학과 현대철학 사이에 가교를 놓으려 했던 벨테의 사상적 노정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안셀무스 가 표현하였던 유명한 정식, 즉 “통찰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벨테에 의하면 종교철학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뿌리와 전제들에 충실하면서도 순수한 철학적 사유의 특성을 견지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확신은 동향인 하이데거의 경우에서처럼 현상학적으로 뒷받침되었다.

 

벨테의 저작으로는

<영원한 것의 자취를 따라서>(1965), <구원의 이해>(1966), <유한과 무한의 겨룸터>(1967: 한국어 번역판 1996), <시간과 신비>(1975),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1982) 등이 있다.

 

옮긴이 오창선 Ph.D 은

가톨릭 사제로서 오스트리아 인스브룩 대학교와 독일 뮌헨대학교 철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베른하르트 벨테

종교철학

오창선 옮김

분도출판사

 

 

머리말

내가 여기에 제시하는 종교철학은 강의들에서 태동된 것이다. 1962년 이후부터 1973년까지 나는 종교철학에 관한 강의들을 정기적으로 해야만 했다. 나는 나의 생각들을 매번 반복하면서 고쳐 썼는데 그 결과 이 시기 동안에 새로운 전망들이 늘 또다시 부분적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와 같이 불어난 전체 생각을 이번의 간행을 위해 다시 한번 철저하고 면밀히 검토하였다.

친구들, 동료들 그리고 제자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들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나는 많은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내가 여기에 제시하는 것은 오랜 기간의 숙고와 많은 대화들의 결실이다.

여기에서 논할 주제들을 나는 부분적으로는 종종 논문들이나 개별 연구들에서 다루었는데, 그것들은 이따금 거기에서 비교적 더 상세히 취급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적당한 곳에서 감히 그것을 환기시키고 나 자신을 인용할 것이다.

이 종교철학을 완성하면서 나는 종교철학적 문헌과 논쟁할 의도가 없었다. 이것은 다른 저자들이 이 중요한 주제에 공헌한 것을 내가 경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을 직접적이고 곧바로 사유 안에서 착수하려고 의도하였다. 계몽주의 시기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교철학의 가장 중요한 현상들에 대한 훌륭한 문헌 개관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도 환기되어야만 한다.  쇠에 와 특히 트릴하스 가 RGG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보충으로 메츠 가 LThK에서 한 상론과 보고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 높이 평가될 만한 작업들을 고려해 볼 때에 거기에서 이미 훌륭하게 언급되어 있는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는 것은 내게는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오늘날의 철학함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조 思潮들이 전문 영역을 넘어서 공공의 견해를 형성하면서 영향을 미치는 한에 있어서 그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내게는 중요한 것처럼 보여진다. 이것은 특히 비판이론과 현대의 실증주의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이 이론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세계관이 된 한에 있어서 그것들은 종교 문제에 대한 오늘날의 숙고의 전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안 자체의 전개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것에 대한 이전의 중요한 견해들을 다루게 되었을 경우에 현행의 본문들에서 그것을 환기시키게 될 것이다.

각주들의 교열, 정리 및 보완하고 또한 교정을 본 데에 대해 나는 괴르츠 박사와 슈나이더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이 책이 몇 가지 측면에서 유익할 수 잇기를 기대해 본다. 계속해서 사유하도록 하는 자극들이 이 책에서 제공되기를 나는 특히 기대해 본다.

 

1977년 10월 15일, 프라이부륵

베른하르트 벨테

 

 

목차

머리말

 

제1장: 서론적 물음

1.  철학적 사유 전반의 의미에 대해

2. 종교철학의 의미에 대해

3. 종교의 예비 개념

4. 현대의 철학적 상황에서 종교와 종교철학

 

제2장: 종교의 원리로서의 신

5. 신에게로 향한 첫 번째 노정 路程의 구상

6. 신에게로 향한 두 번째 노정의 구상

7. 이전 시대의 견해들에 비추어본 두 구상들

8. 절대적 신비의 인격적 특성

9. 절대적 신비의 신격 神格

10. 신의 모습의 역사적 변천

11. 무신론

 

제3장: 종교의 실행자로서의 인간

들어가는 말

12. 신앙

 

기도 -들어가는 말

13. 침묵의 기도

14. 언어로서의 기도

15. 예배로서의 기도 I: 회중, 선포 그리고 회중의 기도

16. 예배로서의 기도 II: 실재 상징적 행위로서의 예배

17. 종교의 폐해 弊害

 

맺는 말: 끝없는 끝맺음

역자 후기

 

 

 

제1장: 서론적 물음

 

1.  철학적 사유 전반의 의미에 대해

우리의 출발점은 종교철학이 여하간 철학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철학이라는 이것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물음에 대한 명백한 해답이란, 더욱이 최종적인 해답이란 있지 않다. 철학문제에 있어서 약간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철학이라는 것이 결코 미리 주어지는 어떤 정의 定義에 의해서 확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메타-철학” 에서 얻어진 것이어야 하는데, “메타-철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말할 수 있고 또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스스로-생각함

우선 철학이란 자기 자신만을 밝힐 수 있고 규정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해명과 규정은 다시금 인간이 철학하면서 스스로 생각하는 그 정도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철할이란 철함함이며, 철학함이란 그것이 얼마나 더 상세히 계속해 규정되든 여하간 사유함 Denken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철학이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거기에서, 그 자신의 능력에서, 그 자신의 사고력에서, 그 자신의 근원에서 생기는 것이다. 철학함이란 독창적인 인간 사고가 전개해 나가는 한 출중한 형태이다.

그런 까닭에 철학은 철학적 명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현존하는 것으로서 표상되거나 인지되는 거기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지식이란 다만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던 철학에 대한 지식일 뿐이지, 그 자체로 철학은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오직 사유함 자체의 사건으로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건은 때때로 명제들 안에서 파악될 수 있고 또 파악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이 명제들 또는 그 밖의 무엇이 철학함의 파악될 수 있는 요소들에서 등장하든간에, 그것들은 현실적이고 생동적인 사유의 요소이며 또 그런 것으로 남으며, 우리가 이를 뒤따라 체험해 봄으로써 또다시 생겨난다는 점이다. 오직 이 점에 있어서만 그러한 요소들은 철학과 같은 어떤 것의 요소들이라고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사정을 숙고하는 사람은 누구나 철학이 동시에 뛰어난 인간사로서 특징지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철학적 사고 안에서 인간은 그에게 고취된 자신의 사고력에 힘입어 자유롭고 독자적으로 그의 이 힘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언급되고 있는 것들이 본래 어떠한 것인지 또 세계의 진리가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서 그에게 빛을 발하는가를 스스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며, 혹은 보고자 하는 그의 원의가 생기는 것이다. 철학하는 자는 우선 외부로부터 그에게 제시된 일체의 의견들과 명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러한 명제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 스스로 보고 나 스스로 생각하게 놔두시오. 철학함은 인간에게 보증된 자유로운 자아존재 Selbstsein의 힘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자아존재의 이 자유를 펼쳐나가고 이렇게 하여서 자유롭게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본다. 그러므로 철학함으로써 인간은 단순히 피상적인 명제들과 견해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사유함”에 의해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는 인간 자유의 한 출중한 행태이다.

 

2. 사유의 관심사

사유함은 여기에서 물론 내재적 內在的 인 한 과정, 즉 인간 주관성의 일종의 내면 공간 안에서만 진행된다고 할 수 있을 어떤 무엇으로 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유함은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생동적인 개방성이며, 인간과 세계의, 사유하는 자와 그의 사유의 투명한 공간 안에서 그에게 떠오르고 그를 만나는 그것 사이의 어떤 만남이며, 한편으로는 인간 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공간 안에서 사유하는 이 생을 만나는 표징과 신호와 물음과 경탄 사이의 한 대결이다.2

그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철학의 사유함을 특징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문제에 엄격히 매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문제로 삼는 것은 진리와 존재라는 점에서 세계의 모습들에서부터 사유함에 마주해 오는 그것이다. 사유함은 그것을 만나는 진리와 존재의 이 격려에 “부응하여-말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에 대해 “책임을-떠맡으면서”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성으로서 사유함의 자유는 자신의 문제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제에 매여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사유는 물론 모든 진지한 사유, 예컨대 과학적 사유와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그리고 오히려 바로 철학적 사유를 위해서도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사유함이란 진리와 존재의 격려 속에서 사유되어야 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확실한 사유가 되는 곳에서 사유는 단지 제 스스로 구상된 형태들의 내부 공간에 계류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사유에 있어서 저마다 문제가 되는 관심사를 사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명제들과 견해들에 대해 철학적 사유가 그토록 자유로운 것이지만, 그것은 문제와 그리고 이 문제로부터 철학적 사유에 마주해 오는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해 그토록 매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철학적 사유가 취하는 일체의 조처들을 그것의 문제에서부터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의미에 있어서 그것은 논증되고 논증하는 사유이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적 사유의 논증적 성격은 우선 이 사유가 정확히 그의 문제를 주시하고 그 문제로부터 건네진 말을 정확히 듣는다는 데에 있다. 거기로부터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것의 근저,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를 알리는 것으로부터 그것이 보고 듣는 것을 들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로 철학적 사유는 그 근저로부터 높여진 것을 조심스레 개념화하고 언어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작업은 다시금 이 개념들과 말들로써 그 근저가, 즉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것이 그것 스스로에서부터 보여지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게끔 이루어져야만 한다.3

오로지 그러한 논증 절차의 엄격성에 의해서만 철학적 사유는 우연치 않게 늘상 반복해서 그것에 대해 제기되는 정밀과학의 그 비난, 즉 그것이 근거 없는 비현실적 사변이라는 비난을 벗어난다. 현실에서 또는 관련 문제의 존재나 진실에 있어 입증되지 않은 머릿속의 구성물이나 모델을 구상하는 것은 재치 있는 것일 수는 있겠지만, 본래의 의미의 철학은 아니다.

따라서 사유가 그토록 자유롭고 사유하는 사람 저마다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문제에 엄격히 매여 있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의 존재와 본질 그리고 이로써 도한 그 진리에 마음이 끌리어서 이 문제를 개념화하고자 하는 사유는 인간의 원천적인 자아 및 존재이해를 펼쳐나가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현존재하면서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을 그의 거기에 Da 또는 그의 세계 내에서 이해한다. 동시에 그는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그의 세계를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이해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자이 맟 존재이해로서 현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이 사유한다면, 그에 예컨대 이것은 무엇이냐 또는 나는 무엇인가 또는 내가 나의 세계 내에 현존재한다는 이 사실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서 바로 이 자아 및 존재이해를 펼쳐나가는 것이다. 그는 사유하는 것이며 자신과 그의 세계를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존재의 빛 안에서 질문하는 것이다. 오직 이 이유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의 현존재의 계기들의 존재에 마음이 끌리어 이 존재와 관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모든 것이 존재의 관점에서 분명해지고 그가 거기에 응할 수 있음으로써 본질 역시 그에게 분명해지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는 본질과 비실재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하는 일체의 사유, 일체의 철학함은 인간 그 자체의 자이 및 존재이해의 전개이다.

그 안에서 자신을 펼쳐나가고 움직일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그 자아 및 존재이해는 또한 이성 理性이라고도 일컬어진다. 따라서 인간이 철학하면서 그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때에, 그는 그에게 주어진 자아 및 존재이해 안에서 그의 문제에 매여 있는 가운데 그 자신의 원천에서부터 활동하는 것이다. 이 활동이 그 자체로서 전개되어 있는 거기에서 우리는 철학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본래적 존재와 사실

물론 철학적 사유가 사유해야 될 문제에 매여 있음은 정밀과학들의 경우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논증의 방식들, 즉 해당 문제의 관점에서부터 증명하는 방식들은 다르고 고유한 성질의 것이다. 이것은 특히 철학적 사유가 관계하는 문제가 정밀과학들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어떤 특유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가 철학적 사유의 문제를 더 정확히 통찰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는 이 사유가 그것의 길과 방법들에 있어서 특유의 성질을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간략히 말했고 그에 대해 약간 더 논하고자 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철학적 사유를 특징짓는 것은 그것이 숙고될 필요가 있는 것의 존재 또는 진리(또는 진정한 존재)와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자이 및 존재이해가 펼쳐져 나가는 중에 되는 것인데, 그러한 자아 및 존재이해 안에서 우선 그의 세계가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 역시 그 스스로에게 열려져 있는 것이다.

이 자아 및 존재이해의 빛 안에서 펼쳐져야 할 문제는 문제의 본래적 존재라고 일컬어진다. 즉, 문제의 존재를 본래 특징짓고 그것에 본질적인 그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본질적이고 본래적인 존재는 또한 전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즉, 절연되어 있는 일체의 부분 관점들을 극복하고 그것을 망라하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러 까닭에 철학적 사유는 그것의 대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것은 전체로 보아 본래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무엇인가? 이 문제의 존재와 진리와 본질적 특성은 어떠한 것인가? 마침내 그것은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존재와 진리와 본질은 전반적으로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 간략히 말해서 철학적 사유는 숙고되어야 할 것의 존재를 질문하면서 추적하여 이 존재와 관계한다. 즉, 사유의 자유를 호출하고 의무 지우고 책임 지우는 존재자의 존재에 응한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즉, 사실들을 확인하고 정밀과학들의 경우에서처럼 확인된 사실들을 체계화하는 것이 문제에 매여 있는 사유의 또 다른 방향이다. 이점에서 그것은 마찬가지로 상당한 정도로 문제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차는 본래 또한 사실들이나 사물들 또는 사실들 및 사물들의 연관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것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확인하는 과학적 사고는 이것 또는 저것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것은 사실적인 “그와 같이- 있음” So-Sein의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에 상당히 의지하는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물음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본래 무엇인가?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저에는 무엇이 본질적인 것으로서 있는가? 매우 다양하게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에서 개별적으로 파악되는 그것은 전반적으로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 본래적 본질에 있어서 무엇인가?

그래서 확인하는 사고는 참으로 필요한 사실과학들에 이르게는 하지만, 철학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종교의 영역에서 그러한 사고가 적용된다면 그것은 종교학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것을 안중에 둔다는 것은 종교철학을 위해서는 언제나 유익하고 심지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철학으로서의 종교철학은 또한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존재하는 그것의 확인할 수 있는 개개의 특징들이나 특성들을 확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개별 과학들의 과제이지 철학이 아니다. 철학적 사유는 자연이나 역사에서 또는 그 밖의 어느 것에서이든 어떤 개개의 특징들이 확인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상세히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이나 역사 또는 그 밖의 어느 것이든 이것이 본래 전체적으로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학 學으로서의 역사 Historie에 있어서 역사적임 Geschichtlichsein이 그렇듯 자연과학들에 있어서 자연의 존재 그 자체는 좀처럼 주제가 되지 않는다. 그 반면에 그러한 사정들은 바로 철학적 사유의 주제를 이룬다.

 

4. 본질적 존재와 비현실적 존재

숙고되어야 할 문제의 본래적 존재인 그것에 대한 사유의 질문에는 우리가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그 이외의 특징이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있다.

숙고되어야 할 문제의 존재를 숙고한다는 것은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존재와 비본래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 사이의 구별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포함한다. 존재의 대한 사유가 만일 이 구별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단순한 사실성에 매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이것은 사유의 경우가 아니다. 철학적 사유는 사실적인 것을 조망함에 있어서 본질적이고 본래적인 존재와 진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존재와 진리는 사실적인 것의 척도들이라는 그것들의 근본 특징을 그 자체로 갖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적인 것은 그것이 그 본질 또는 그 본래적 상태대로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측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사실적인 것은 그 존재 또는 그 진리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 까닭에 철학적 사유는 사물들을 그것들이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 그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철학적 사유는 그것이 사물들의 존재를 묻고 이렇게 해서 그것들의 진리와 본질을 질문하면서, 사실적인 것이 거기에 따라서 측정되어야만 하는 그 본질적인 것이 이 사실적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동시에 묻는다. 따라서 어떤 문제나 어떤 문제 영역을 철학적으로 숙고한다는 것은 또한 언제나 비판적인 숙고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비판을 가능케 해야 하며 본질적 존재와 본질적인 존재관계의 발견으로부터 논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철학적 사유의 논증 방식

이로써 철학적 논증들이 왜 개별 과학들의 논증들과 같은 종류의 것일 수 없는지 또한 명백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발견-됨”이라는 확인할 수 있는 사실성으로 말미암아 결정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사실성은 방법적인 절차에 있어서 상호주관적으로, 학문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발견될 수 있고 확인될 수 있는 사실 이상의 다른 것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본질과 존재가 고려되는 곳에서는, 또 여기에서부터 사실적인 것을 측정할 수 있는 그 척도들이 쟁취되는 곳에서는 그러한 사실성은 복원될 수 있는 일체의 상호주관성에 대해 더 이상 똑같은 것일 수 없고 또한 더 이상 의미있는 것도 되지 못한다.

이것은 철학의 사고 과정들이 왜 개별 과학들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논증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기 쉬운가라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사유는 이미 말했듯이 자기 방식으로 문제에 매여 있으며 논증적으로 있다. 그것은 자신의 방식으로 엄격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문제에 매여 있는 그것의 논증은 근본적으로는 철학적 사유가 세계의 현상들에서부터 그것에 마주해 오는 본래적 존재를 발굴해 내고 찾아 내어 이를 개념화하고 언어화하면서 그것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단순히 실증적으로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유가 볼 수 있는 바로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 거기에서 중요한 것이다. 만일 그것이 발견되었다면, 물론 이렇게 발견된 본래적 존재를 사유하면서 보아야만 하고, 그리고 그것이 보여졌다면, 그것을 개념 안에서 발굴해야만 한다. 철학적 사유에 의해서 찾아내진 것을 사유하면서 보고 또 발굴하면서 파악하는 데에 철학의 본래적 논증이 있다. 그것의 근거들은 문제의 관점에서부터 명백하게 되었고 명백해질 수 있었던 것에 있다.

자연이란 본래 무엇인지 또는 예술이란 본래 무엇인지 또는 종교란 본래 무엇인지를 우리는 왜 사유함으로써 분명히 하여 인식할 수 없단 말인가? 왜 그것은 언어화되어 재차 다른 사람들을 비출 수 있을 정도로 인간에게 명백하게 되고 분명해지지 말아야 하는가? 철학적 사유의 엄격함이 성공적으로 명백한 언어가 되었다면, 그것 자체는 할 수 있는 한 그들 자신의 힘으로 보아야만 하는 다른 이들에 대해 재차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 덧붙여 늘상 다음과 같이 말해져야만 한다.  아무도 꼭 이 방식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외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강요될 수 없다. 사유하면서 봄과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본질적인 철학적 사유의 논증 성격은 그것의 문제로 말미암아 강요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단순히 임의적인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의 문제가 “자기-스스로를-알림” 에 직면하여 그것은 정당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점에 그것 고유의 엄격함이, 근본적으로 그것의 증명과 논증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유하면서 그리고 “함께-생각하면서” 철학적 사유의 방식으로 볼 수 있고 또한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자명하다. 둘 다 요구된 것이지만, 그 어느 것도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6. 철학적 사유의 종결될 수 없는 것

그러한 철학적 사유와 사유하는 논증이 종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또한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는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자신의 문제를 끝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자의 존재는 사유함의 파악방식에는 고갈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철학적 사유가 이렇게 종결될 수 없음은 사람들이 언제나 새로운 철학적 길들을 간다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날의 철학적 길들, 예컨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생각들이 늘 되풀이하여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된다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함께 생각하면서 그것들과 더불어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들을 통해서 늘상 새로운 것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동시에 그는 그 자신의 새로운 사유의 길들을 더 잘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진정으로 철학적인 생각들이란 결코 완전히 시대에 뒤진 것이 아니지만, 또한 완전히 완성된 것도 아니다. 이점에서 그것들은 정밀과학들과 기술의 발전이 갖는 역사성과는 아주 다른 완전히 고유한 종류의 역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갈되지 않음은 곧 극복될 수 있는 철학의 어떤 불완전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철학의 본질에 속한다. 이점에 있어서 그것은 마찬가지로 옛 것이 결코 시대에 뒤지지 않고 새로운 것이 결코 결정적으로 최종적인 것이 아닌 예술과 비슷하다.

이것은 재차 철학의 문제와 사유함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존재자의 본래적 존재는 고갈되지 않는, 질문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매번 새롭게 접근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만, 그 어떤 접근으로도 모든 것이 다 나타나지는 않는다 사유함의 길들은 그것들이 실현되는 한에 있어서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존재자의 존재에 의해서 사유함에 열려지는 그 가능성들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

철학은 사유함을 요하는 것을 늘 새롭게 맴돈다. 늘 새롭게 맴돌면서 그것의 문제를 이렇게 접촉함에 있어서 철학은 결코 결말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비생산적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보에티우스 는 철학이 감옥에 갇힌 그에게 어떻게 위로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묘사하였다. 그러한 여인을 만난다는 것은 남자에게는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며, 그에게는 심지어 무한하고 건설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것으로 끝나고, 그의 동반녀를, 말하자면 별볼일 없는 것으로 내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그러한 만남이 그에게 풍부하게 선사할 수 있는 바로 그 가장 본질적인 것을 잃게 되 것이다.4

같은 이유에서 플라톤적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지혜 sophia와 구별하였다고 하였다. 즉, 그것은 사랑하면서 완성을 열망하는 것이지 완성 그 자체가 아니다.5 이 의견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뒤를 따랐음을 우리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6

우리가 여기에서 이해한 바대로 철학적인 사유함의 몇 가지 특징들에 주목하게 하는 데에는 이상의 것으로 우선은 족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해석된 특징들은 대단히 임시적인 것이고 또한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맥락으로서는 그것들은 충분할 것이다.

 

 

2. 종교철학의 의미에 대해

 

1. 사유의 문제로서 종교

종교철학이란 종교를 자신의 문제로 삼고 따라서 종교의 본질과 존재방식을 그러한 사유를 통해 밝히려고 노력하는 철학적인 사유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철학은 사유하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파고든다. 종교, 그것은 본래 무엇인가?

 

2. 종교와 인간의 사유

종교철학이 그것의 문제, 즉 종교를 숙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유에 종교가 우선 주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이 단순한 사태는 종교가 전적으로 자신의 뿌리에 존립해 있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종교들의 세계를 잠시만이라도 일견해 봄으로써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기원들을 일견해 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더욱더 알 수 있다. 종교는 분명히 철학적 사유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며, 철학이 그것을 명확히 동반하지 않고서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때때로 심도있게 영위되어 왔다. 그러니까 종교는 전혀 철학이 아니며, 오히려 찰학의 타자이다.7

그렇다면 철학은 어쩌면 종교에 대해서 불필요한 것 같지 않은가? 아니면 결국에는 심지어 위험스럽기까지 한 것은 아닌가? 파스칼이 살았던 시절 이래로 철학자들의 신은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신과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는 어느 정도 예리하게 대조된다. 변증신학 辯證神學 은 인간편에서 구상되고 따라서 그 기원이 인간의 사유의 덕분인 그런 종교에 대적해 투쟁하였다.

그것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관계는 무엇인가? 종교적 삶은 철학에 대해 다양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철학에 의해서도 영향받고 함께 형성되었다는 사실 역시 여하튼 알 수 있다. 서양의 역사와 서양의 그리스도교 및 그 신학의 역사는 이 연관과 교환에 대한 풍부한 예들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 연관을 보는 바로 거기에서 그리스도교, 즉 비록 배타적으로 거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무엇보다도 방향 기준으로 삼고 있는 그 종교는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비록 언제나 똑같이 명백하게 의식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자신의 기원을 늘 의식하였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종교는 전적으로 철학적 사유의 타자로서, 그것과 마주하고 그것보다 이전의 것으로서 그것을 만난다. 그러나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살아가고 그것이 어쩌면 신의 선물일지라도 인간적 사건과 인간의 생 및 현 존재의 형태로서 실행된다는 사실이 환기되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의 전망 안에서 생긴다. 신앙하거나 기도하거나 예배를 위한 집회를 열거나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과 현존재의 지평 안에서 실행되는 것은 또한 인간의 자아 및 존재이해의 지평 안에서 실행된다 사람들은 예컨대 신에 대한 그들의 신앙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리고 – 비록 명확한 것은 아닐지라도 – 신을 신앙한다는 이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자아 및 존재이해는 종교의 경우에 전반적으로 생동적이다. 종교가 생동적으로 존재하는 거기에는 그것이 아무리 위로부터의 선물이며 이로써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매번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존재하는 그것으로써 이해하는 인간적 이해 안에서 언제나 살아간다.

인간이 그의 자아 및 존재이해를 사용한다면, 종교,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그는 묻는 것이며, 그리고 사유하면서 이 물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질문하면서 사유함은 철학적으로 사유함이다. 이 이유에서 종교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함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든 종교가 인간에 의해서 이해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가능하다.

이 연관은 인간이 왜 그 자신의 신앙에 대해, 그 자신의 예배와 그 자신에 의해 생활화된 그의 종교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맹목적으로 그리고 적당히 아무런 생각 없이 검토해 보지도 않고 그러한 것에 자신을 내어 맡겨서는 안 된다. 물론 인간이 종교를 스스로 생산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가 인간의 자아 및 존재이해의 매개 안에서 인간적 현존재의 한 형태로서 실행되는 한에 있어서 그는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다.8

인간의 자아 및 존재이해가 종교에서 특유의 방식으로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는 인간의 언어 안에서, 인간적 범주와 사유 가능성들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며, 인간적 실행의 형태들 안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오로지 그러한 이유에서만 종교가 인간의 자아 및 조재이해의 역사적 변천에도 그것의 방식으로 참여함으로써 종교는, 비록 그것의 자아이해의 출처인 신의 불변적이며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 있다 할지라도, 인간적이고 때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역사를 가진다는 아주 명백한 사실이 설명될 수 있다.

바로 이 이유로 인간은 늘 반복해서 새로이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으며 또 물어야만 한다. 종교, 그것은 본래 무엇인가? 그리고 특히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생의 형태로서 실행되는 나의 종교, 그것은 무엇인가? “이다”Ist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존재이해에서부터 생겨나는 커다란 질문이다. 그것은 그것이 문의하고 있는 문제가 비록 철학의 바로 그 타자이고 그 자신의 뿌리에 존립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구조상 철학적 물음이다.

따라서 종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가능하다면, 종교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뒤따르는데, 더욱이 자유로운 인간의 사유의 물음으로써 그렇게 제기된다. 종교 역시 그것이 인간의 사유 안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단순히 사실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종교와 관련해서 인간의 사유의 폭에 사실적인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허용하는 철두철미 그것의 본질과 같은 어떤 것이 출현한다.

이 점들이 종교철학을 언제나 가능케 하는 사정들이다.

 

3. 종교에 대한 철학적 반성의 시간

가능한 것은 물론 무조건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종교의 본질에 대한 사유의 명시적 물금과 이 물음을 체계적으로 마무리 짓는 것은 확실히 어떤 경우라도 부득이하거나 예고된 것은 아니다. 종교는 명시적인 철학 없이도 그것의 생을 형성해 나갈 수 있으며, 흔히 철학이 동반되지 않고서도 살아왔는데, 특히 종교적 삶의 초기의 강력한 시원적 始原的 단계들에서 그랬다.

그러나 종교가 더 이상 초창기의 시원적 강도를 갖지 못했음에도 사유는 반성으로서 강력하고 자율적으로 전개되어 나갔을 경우에, 종교철학은 예고된 것이며 아무튼 역사적 의식의 그러한 상태와 관련해서 부득이한 것이다. 그럴 경우에 인간은 종교인 그것을 스스로에게 비판적으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해당된다. 종교와 그리스도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인간의 보편적 현상들이 아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여전히 종교와 신앙이 존재하며 또 널리 만연된 생각과는 달리 마르크시스트인 가르다프스키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신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9

그러나 물론 종교와 신앙과 그리스도교는 이전의 자명성을 사실하였으며, 현대사회와 현대의 문화적 의식 안에서의 그것의 위치는 상당한 곤경에 처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러한 현상들에 대해 숙고하지 못할 또는 더 이상 숙고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못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수된 그들의 종교적 표상들의 옛 껍질을 떠나버린, 그러니까 종교가 그것의 장소에 다소간 아직 머물러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그것과 갈라선 이들을 위해서도 위기적인 상호아이 되어버린 바로 그런 시대에 그와는 반대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강화되고 더욱더 비판적으로 면밀하게 제기되고 숙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 그것은 본래 무엇인가?

이 특별한 시대사적 상황에서 철학적 사유가 숙고되어야 할 것의 본래적 존재와 본질 그리고 또한 그 권리에 동시에 전념할 수 있고 또한 전념해야 한다는 것은 결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종교라는 단순한 사실 이상의 다른 것이 이전보다는 더 문제이지 않을 수 없다. 종교의 사실로부터 출발해서 비판적으로 종교의 존재와 본질 및 권리에로 자주적이고 사려 깊게 파고들어가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 성공적으로 조망된다면 사실적인 것이 그에 따라 측정될 수 있고, 또 측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척도들이 거기에서 얻어질 수 있고 또 얻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가 더 이상 자명한 것이 못 되는 시대에 더욱더 그렇다. 그럴 경우 또한 종교의 영역에서도 있을 수 있는 부당함과 무의미에 대해 종교의 권리와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가능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비종교와 비신앙의 마찬가지로 있을 수 있는 부당함과 무의미에 대해 그것을 해명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가능해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적인 종교에 대해서도 만연되어 있는 실제적인 비종교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비판적 토대를 얻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어느 한쪽도 검토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여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이성의 광장 앞에서의 종교의 권리가 문제가 된다.

 

4. 종교에 대한 종교철학의 위험과 유익

물론 종교철학에 대한 종교편에서의 이론 異論들도 있다. 철학이 종교에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지는 않은가? 종교는 그 자신의 기원을 가지고 잇는데, 이성과 이성의 철학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에 참견토록 해도 좋은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철학이 부당하게, 즉 그것의 문제의 의미에 반해서 종교에 참견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종교에 대해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이 바로 이 문제를 그에게 미리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존중하고 이렇게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을 그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해명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위험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이성과 이성의 철학은 그것들이 종교를 그냥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인간 사유의 자율적 힘으로 그것을 자유롭게 구성해 내거나 파괴까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확실히 부당한 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이성의 철학이 종교가 미리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의 종교를 인간의 자아 및 존재이해의 힘으로 뒤따라 구성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부당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닌데, 인간의 그 자아 및 존재이해란 종교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바로 그 요소인 것이다. 이 의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종교의 본래적 존재와 본질을 고려해 이미 주어져 있는 종교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러한 철학적 재구성은 – 만일 그것이 올바로 행해진다면 – 종교에 유익할 수 있을 뿐이며 도한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당연히 그렇게 비판적일 경우에 더구나 특히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의 본질적 특징들에 대한 그리고 본질과 폐해의 비관적 구분에 대한 그 자신의 안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 자신의 자기 및 존재이해에 따르면 종교는 당연히 인간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책임지어져야만 한다. 바로 이점이 또 다른 한편으로 철학이 존재 및 자아이해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해석하는 한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철학의 역량에 속하듯이 종교적 삶의 문제에 함께 속한다.

그런 까닭에 비판적인 철학적 반성을 단념하고 비반성적으로, 직접적으로 종교적 삶을 살고자 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이 비판적인 철학적 반성을 단념한다면, 특히 종교의 시원적 힘이 약해지고 사유가 고도의 반성력을 갖게 되었을 때에 종교는 쉽사리 그것의 본질에 더 이상 부합하지 못하는, 반성되지 않고 제어되지 않은 제멋대로의 모습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철학이 종교를 그리고 우리의 숙고와 관련해 특히 그리스도교를 전제로 하지만, 그러나 어떤 전제의 형식으로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 철학적 조망에 대해서 종교는 이 조망이 사유하면서 관련을 맺는 문제 영역으로서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위한 그것의 권리와 본질은 비로소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은 거기에서부터 자명한 것처럼 출발할 수 있는 그런 토대가 아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그것은 신학과 관계되는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직접적으로 신학적 전제들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으로서의 종교철학에서는 사유에 이미 주어져 있는 종교 사실이 사유의 자유와 자력 自力으로 숙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종교와 그리스도교는 사유하는 자 자신의 전제들일 수는 있다. 그는 아마도 신앙에 의거해서 그리스도교의 소식을 그의 삶의 기초로 삼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 경우에라도 사유하는 자는 자신의 사유의 자유로운 힘을 여전히 지닐 것이고, 또한 이를 사용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유함의 이 자유로운 힘, 즉 종교의 문제에 대해 그것이 적절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3. 종교의 예비 개념

 

1.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로서의 종교

시사된 의미로써 종교철학이라는 것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종교를 조망하고 이 조망 안에서 종교의 예비 개념 을 구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는 철학적 사유가 어떤 문제 영역을 다루어야만 하는지 이미 그 발단 發端에서부터 알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시작에서부터 곧바로 사유함의 필수적인 조처들이 생각되고 계획성 있게 정돈될 수 있기 위함이다.

종교라는 말로써 오래 전부터 이해되어 온 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 내지 또한 신적인 것의 영역에 대한 관계이다. 이 이해는 아무튼 종교에 대한 임시적 이해로서 여전히 수용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오늘의 우리의 비판적 의식을 위해서 그것의 모든 술어들, 즉 인간-관계 그리고 특히 신이나 신적인 것의 영역이 더 자세히 설명될 필요가 있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모든 것이 질문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무엇인가? 신은 본래 무엇인가? 신과 인간 사이의 연관은 본래 무엇인가? 우리가 종교라고 일컫는 전체는 무엇인가? 이 전체의 본래적 본질은 무엇인가?

우선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근본적인 사정에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예비 개념에서 신 또는 신적인 영역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언급될 경우, 그것으로 우리는 우선 어떤 일정한 인간적 현존재 방식에 유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현존재와 그의 실행의 방식은 우리가 종교라고 일컫는 그 관계가 이루어지고 살아지는 장소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관계에서 아주 일정한, 즉 종교적 방식으로 태도를 취한다.

사람들이 신 또는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태도를 취할 때에 우선 사람들은 그들이 신적인 것에 의해서 말 건네졌다고 알고 있으며, 따라서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 내에서 인간에게 태도를 취하는 것은 먼저 신이다. 신이 먼저 인간에게 태도를 취한다면 이것은 인간이 “그-스스로-태도를-취함” 내에서, 인간 현존재와 그의 자아이해 내에서 생긴다. 이처럼 우리는 이 중요한 경우에도 인간 현존재의 한 형태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종교에서 늘 발생하듯이 이 관계의 방향이 바뀔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경우에 인간은 그 편에서 신으로부터 건네진 말에 응답하면서 동의한다. 양편 모두, 신적인 것으로부터 건네진 말과 인간의 응답은 인간 현존재의 지평 안에서 생긴다. 이 의미에서 종교는 어느 경우이든 인간적 현존재의 방식이다. 그것은 신 또는 더 미확정적으로 말해서 신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크기에 의해서 자신이 규정되어 있음을 인간이 알고 있는 그러한 현존재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자신과는 다르고 더 위대하고 또한 더 근원적인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자신이 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인간적 현존재의 방식을 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현존재의 방식이 “초-인간적인 것”, 그러니까 신적인 것으로부터 독특하게 구성됨을 뜻한다. 이 구성은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삶의 방식 내에서 신 또는 신적인 것이 언제나 전체 태도의 일차적이고 기초적인 크기인 한에 있어서 그렇다.

그 때문에 종교철학에서는 비록 인간이, 즉 인간의 종교적 현존재의 방식이 문제이긴 할지라도, 혹은 오히려 바로 그러한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단지 인간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 말해질 수 있어야만 한다. 심지어 우선 인간의 타자 他者, 신적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신이 우리가 종교라고 일컫는 인간 현존재 방식의 일차적으로 기초 짓는 그 요인 要因이기 때문에 그렇다. 신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현존재는 종교적인 것으로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신적인 것과 신, 그것이 본래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철학적 개념 槪念을 구상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한 후에 우리는 신의 신비가 인간과 관계되고 상관 있는 한에 있어서 인간이 이 신비에 대해 어떻게 적절한 태도를 취하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고서 종교의 인간적 측면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에서 인간의 태도가 요구되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그것이 관계하는 것에 걸맞느냐에 따라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본질적인 종교와 공허한 종교를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처음부터 성립한다.

 

2. 종교의 내면성과 외면성

종교의 기준점을 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교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종교 역사가 보고할 수 있는 종교의 다른 형태들도 덧붙여 함께 생각하고자 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개관하고자 한다.

인간의 종교적 관계 또는 종교적 현존재의 형태를 우리는 그 밖에도 포괄적으로 이해한다. 종교적 현존재는 수많은 차원들에서 펼쳐진다. 예컨대 신앙이나 명상 같은 내면성의 차원들과, 예컨대 예배나 전도 등과 같은 외면성의 차원들이 거기에 속한다.

때때로 문헌에서 종교라는 낱말은 단지 외적인 것에 대해서만, 폴 틸리히 P. Tillich가 말했듯이 종교의 문화적 복장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사용된다. 10  이것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라는 낱말이 지닌 좀더 광범위한 의미로부터 출발한다. 그럴 경우에 그것은 종교적 태도와 종교적 관계의 모든 형태들과 모든 차원들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초기의 칼 바르트 K. Barth와 디트리히 본회퍼 D. Bonhoeffer에 의해서 구상되었듯이, 우리는 종교가 자신의 힘으로 신의 정의 正義를 획득하려는 시도로서 간주되어야만 하는 그 종교 개념에도 속박되지 않고자 한다.11 이 신학자들에게서 종교가 신학적 이유들로 인하여 비판적으로 다루어지는 한에 있어서 아주 특정의 종교 이해가 그 기저에 깔려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숙고들이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무튼 출발에 있어서 그러한 특정의 이해를 억제하고 여기에 속하는 현상들을 가능한 한 개방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3. 비판적으로 반성된 종교

그러한 철학적 숙고에서 종교의 존재방식과 본질이 성공적으로 개진되는 한에 있어서, 그리고 거기에 규범적인 관점들도 포함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종교는 한편으로는 종교철학보다 이전의 것, 즉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이며, 철학적 사유가 자신에 앞서 와 있는 것으로서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임이 결과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단순히 종교철학에 앞서 있는 것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주어진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리고 철학적 반성에서 그 주어진 것의 존재와 본질을 해명하고 척도들을 획득하면서 철학은 역시 종교의 영역에서 결과들 역시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끈질기게 결과들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관련해서 철학은 실천적으로, 다시 말하며 미래적으로 정향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경우에 철학은 한편으로는 종교보다 철학보다 나중에 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철학의 비판적 기능에서 종교의 비판적 쇄신을 위한 유일한 척도들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같은 종교는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 자신의 내적 원리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완전히 다르고, 자신의 본질에 더 인접한 가능성들 에로 역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이로써 이성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말하도록 불리어져 있다는 것이 방해 받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예비적 숙고가 의도했던 것은 종교가 더 이상 자명한 것이 못 되지만 비판적 반성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 시대에 실행될 수 있는 종교철학의 권리와 의미와 가능한 의의를 명백히 하는 일이다.

 

 

4. 현대의 철학적 상황에서 종교와 종교철학

종교철학도 그것에 관계하는 것, 즉 종교와 마찬가지로 시간과는 무관하게 진해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배경과 맥락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 역시 그것이 설령 반성 이전적 이전적인 것일 수 있을 경우에라도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시간적 운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그것들과 관련하여 종교를 고찰하고 숙고하고자 하는 그 현대사적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는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철학과 세계관

철학적 상황은 다양하게 서로 얽혀 활동하는 두 수준에서 규칙적으로 형성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됨에 있어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에 표명되었던 중요한 철학적 견해들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견해들은 누군가를 위해 그것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펼칠 경우에만 사회 전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적 상황의 또 다른 면이다. 철학적인 간결한 표현들 안에서 일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확신의 요소들이 예리한 개념에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개념적 특성은 그 편에서 다시 지배적인 확신에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사정에 따라서는 공공의 세계관이 된다. 이 세계관이라는 말로 우리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공공의 확신과 공공의 언어를 규정하는 일반적으로 유포되어 있는 신념의 본보기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세계관으로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이 신념의 본보기들이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현존재 전체에 대한 한 해석이고자 하는 요구를 지니고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적 견해들은 이중적인 일반성을 지닌다. 철학적 견해들은 일반적 확신을 규정하는데, 이렇게 규정함으로써 이 일반적 확신은 그것이 살아가는 전반적 세계와 연관하여 그것에 따라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철학적 상황의 이 두 가지 형태, 즉 만들어진 철학과 유포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결코 서로 분리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구별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를 철학적으로 다룸에 있어 그 현대사적 배경을 조금은 더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그 두 가지 형태들에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중요한 철학적 견해들은 두 개의 집단으로 요약된다. 그 중 한 무리는 현대의 정밀 경험과학에 맞춰 그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과학철학이다. 여기세 속하는 것은 특히 신 실증주의 新 實證主義 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일체의 것과, 또한 대다수의 철학적 언어학과 비판적 합리론이다. 또 다른 집단의 중요한 철학적 견해는 사회에 대한 비판에 전념하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속한다. 이 두 철학적 조류들은 세계관 형성과 관련해서 공공의 확신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해 왔다.

 

2. 과학철학과 종교: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우선 우리가 논할 것은 과학철학이다. 우리는 그것을 초기의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과 칼 포퍼 Karl Popper와 한스 알베르토 Hans Albert의 예들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 형성의 요소에 특히 유의할 것이다. 과학철학에는 일반적으로 신과 종교 또는 심지어 종교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전형적으로는 어떤 관심도 일으키지 못하는 대상들이다. 이것들이 왜 그러한 것인지 우리는 유념해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이 영역에 전형적으로 왜 존재하지 않는지 그리고 게다가 그와 같은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혐의마저 받는지 유념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논고 論考>12 의 초기 비트겐슈타인에 맞추어 우선 방향설정을 하겠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여전히 과학철학의 고전적 표현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논고>가 끼친 역사적 영향을 말해준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충분한 근거에서 <논고>의 관점을 나중에, 즉 <철학적 탐구들>13에서 극복하고 본질적으로 확장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비트겐슈타인을 좇아서 과학철학이라고 일컬었던 그것의 발전을 위해 <철학적 탐구들> 그 이상으로 계속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특히 <논고>이다. 그것은 기초적이고 말하자면 고전적 문헌으로 남아 있다.

<논고>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논고>의 명제 4.112 에서 “생각들의 논리적 설명”이 철학의 목적으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더 계속해서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적 작업이란 본질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성립한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명백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해되는 바대로 철학은 “생각들”, 즉 명제들과 관계가 있게 된다.14 이 명제들은 스스로 철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전제이며, 철학적 생각에서 이루어지는 작업들의 영역이다.

따라서 철학이 해명하고자 하는 그 명제들은 “어떤 사태의 묘사”15 이다. 명제는 “사태들의 성립과 그것들이 성립되지 않음을 표현한다”.16 그러나 사태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진다. “경우인 그것은 사실 Tatsache이며, 사태들의 성립이다.”17

사실들의 전체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논고> 1.11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는 사실들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일체의 사실들이다라는 것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철학이 관계하는 명제들은 사태들을 묘사한다. 그리고 참 명제들의 전체는 사실들의 전체, 즉 세계를 묘사한다. 그러나 참 명제들의 이 전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참 명제들의 전체는 모든 자연과학(또는 자연과학들의 전체)이다.”

따라서 그러한 언명들에서 표현되는 철학은 정밀 자연과학 내지 자연과학들의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그것의 유일한 목적으로서 인정한다. 그것은 사태들을 서술하는 고유한 언명들의 의미로는 아무런 명제들도 개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명제들이 사태들이나 사실들 또는 세계의 전체를 서술하기 때문에 철학은 그러한 명제들 전체를 주시한다.

신과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입장에서 불 때 전적으로 필연적인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실들 내지 사태들이 과학의 유일한 대상이며 과학의 중재에 의해서 또한 그와 같이 이해된 철학의 유일한 대상이라면, 사태들은 그것들의 규정 안에서 파악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파악될 수 있고, 심지어 정확히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그것들을 측정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그것들은 그것들의 규정들 안에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규정된다는 것은, 특히 측정될 수 있게 규정된다는 것은 아무튼 한계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한성을 의미한다. 사태란 그것이 한정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파악될 수 있고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한계 없는 것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제한적인 것은 측정될 수 없는 크기들이다. 따라서 이 철학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사태들은 그 근본적인 발단으로부터 유한한 사태들이다.

사실들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 사태들이다. 그것들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필연적으로는 추론될 수 없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이 안중에 두었던 자연과학들은 원칙적으로 경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살들은 연역될 수 없는 것이며, 경험으로부터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이점 역시 정밀과학과 과학철학의 근본 관점들에 속하는데, 이것들로 말미암아 그것이 정밀과학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무한하고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과학과 그리고 그것에 맞추어진 철학의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은 결코 조망될 수 없으며, 따라서 종교는 가능한 대상 영역이 되지 못한다.

<논고>의 입장과 가까운 <윤리학 강의>(1929)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 사태를 힘주어 강조한다. 거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윤리적 및 종교적 언명들이 “의미있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윤리학 강의>에서도 그의 종교적 감각과 종교에 대한 그의 깊은 존경심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그럴수록 더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서 개진된 의미로서는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미있는 언어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히 그 발단에서부터 비롯된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비록 종교 또는 – 비트겐슈타인이 앞서 언급된 곳에서 말하였듯이 – 신비적인 것의 가능성이 열려져 있다 할지라도, 종교와 종교철학이 의미가 없다는 혐의는 철학의 근본 입장에서 논증된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무의미의 혐의는 정밀과학을 그것들의 성찰의 영역으로 삼는 한에 있어서 다른 철학적 구상들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그것들은 개별적으로는 상이하게 강조되고 있다.

 

3. 과학철학과 종교: 칼 포퍼

현대의 정밀과학의 입장에 기초한 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넘어 그 이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뛰어난 실례는 칼 포퍼의 유명한 저서 <탐구의 논리>이다. 포퍼는 우리의 지식의 성장 또는 발전을 그의 연구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포퍼가 분명하게 말했듯이 그의 선택은 각별한 어떤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서 다른 가능성들 역시 열려 있으며 선택될 수 있다는 것이 언급된 것이다. 사유의 지평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처럼 근본적으로 열려져 있는 것이다.

그것의 발전이 탐구되어야 할 과학들이라는 말로 여기에 이해되는 것은 경험과학들인데, 그 전형은 재차 현대물리학이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철학이 경험과학에 속함을 보게 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벗어나 포퍼는 그의 (경험-과학적) 탐구논리를 이론 형성의 한 이론으로서 개진한다. 이론 형성에 관한 이 이론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일체의 이론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허위일 수 있음이 요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보편명제들 또는 명제 체계들로서의 이론들은 포퍼에 따르면 허위일 수 있어야만 한다. 즉, 그것들은 상호주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험에 의해서 반박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포퍼에 따르면 어쩌면 논박할 수도 있는 그러한 명제들은 경험의 명제들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특히 주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들은 또한 기초명제들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 표현되는 그러한 기초명제들은 그것들이 보편명제들의 가능한 논리적 추론들을 제시하거나 그러한 추론들을 거부할 경우에만 그러한 보편명제들의 이론이나 경험을 논박할 수 있다.

이 숙고들 중에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특별히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인식이란 근본적으로 규정되고 따라서 제한되고 또한 사실적인 것의 규정으로서 전제된다. 이론들은 그것들이 당연히 의미있는 이론이어야만 하는 한에 있어서 오로지 참으로 그러한 성질의 것에만 관련되는 명제들 혹은 명제 체계들이다.

규정되고 그것의 규정에서 제한된 것과 사실적인 것이고 따라서 “필연적이지 않은 것”,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다려야만 하는 것 – 이것들은 근본적으로는 신을 고려하지 않는 전제들이다. 왜냐하면 신은 종교에서 언제나 무한하고 그 무한성으로 말미암아 파악될 수 없는 자로서 그리고 절대적이고 그 절대성으로 말미암아 단지 사실적인 것 그 이상인 자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신에 대한 이론 역시 또 이와 더불어 가능한 종교철학이란 칼 포퍼가 의미하는 그러한 과학적 이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4. 한스 알베르트의 비판적 합리론

정밀과학을 기준으로 한 철학의 또 다른 형태는 한스 알베르트가 의도하는 비판적 합리론 Kritischer Rationalismus에 의해서 제시된다. 비판적 합리론은 그것이 경험도 또 거기에 속한 이론 형성도 근본적으로는 틀릴 수 있고 따라서 끊임없이 비판될 수 잇는 것으로 간주하는 한에 있어서 신실증주의의 범위를 넘어선다. 따라서 이 이론에 의하면 진리로서 제시된 명제들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이용하여 진리에로 다만 지속적으로 다가가는 접근만이 있을 뿐이다.

이 숙고는 특히 이른바 뮌히하우젠의 상호모순된 세 가지 결론에 대한 논증을 적용하여 지지되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일체의 명제들을 의심의 여지가 없게 확실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들에 대해 어떤 논거를 요구하고자 한다면, 결국 그들에게 남겨진 할 수 있는 일이란 실제적으로는 실행될 수 없는 논거들의 무한한 후퇴, 또는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논리적 순환, 또는 마침내 어떤 특정의 지점에서 그러한 절차를 중단하고 이 특정의 지점이 확실한 기초를 형성한다는 자의적 恣意的 선언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특히 이 세 가지 가능성들 중에서 세 번째의 것, 이른바 독단주의 獨斷主義 혹은 특정의 위치에서 다소간 자의적으로 확정지음이 비판적으로 탐구된다. 그것은 모든 종교적 또는 종교철학적 체계들의 주요 오류라고 주장된다.

실제로 종교 및 이와 더불어 또한 종교철학에는 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속한다. 비판적 합리론에서는 그러한 것이 방법론적 이유들에서 의심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되어야만 한다. 논거에 대한 요구나 또는 사람들이 그것을 좌우간 어떻게 이해하고자 하든 간에 원인문장 原因文章 은 그것이 철저히 실행될 경우에 사정에 따라서는 어려움들을 안겨준다고 해서 이미 무의미한 것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우선 뮌히하우젠의 세 가지 딜레마의 당혹스런 논증에서 생겨나는 그 어려움들은 그것들 편에서 이 세 가지 상호모순된 결론에서 사용된 논증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전제들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논증에 있어서 진리란 여기에서 언명들에 걸맞은 한 가치이다. 언명들과 그것들의 진리 내지 비진리는 모두 똑같은 수준에서 인식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체의 언명들에 대해 충분한 논거를 요구하는 명제는 언제나 동일한 수중에서 인식되고 있다. 그 때문에 형식상 동일한 언명들이 어쩔 수 없이 무한히 연속된다는 착각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언급한 전제들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다.  그것들에 의해 언명된 것에 대해 여기에서 전제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관계에 있는 언명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충분한 근거의 표현이 언제나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 한스 알베르트가 제시하는 논증은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업는 것이 못 된다. 그렇지만 종교철학이 만족할 만하게 추진되어야만 한다면, 명제들과 또한 충분한 근거의 명제가 질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겪어야만 하는지 밝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것을 이하에서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덧붙여 한층 더 근본적으로 언급되어야만 하는 것은 한스 알베르트가 의도하는 언명들은 경험과학들의 언명들에서 그 모델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것들에서 근본적으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제한되고 사실적인 존재자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는 언명들이다. 그러나 앞서 논했던 견해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절대자는 이로써 그 발단에서부터 이미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비판적 합리론 역시 원칙적으로 그것의 숙고들의 영역을 제한함에도 불구하고 이 숙고들이 일체의 가능한 언명들과 관계한다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렇지 않다.

따라서 지금까지 거명된 철학적 구상들은 그것들이 어떤 출발점, 즉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존재자를 선택하고 다른 것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 점에서 모두가 공통된다. 특히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에게서 분명한 것은 그로써 상이한 가능성들 중에서 어떤 선택이 이루어졌음을 이들 사상가들이 의식하고는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사고상 思考上 의 구상의 한계 내에서는 이 관점이 실종되고 있다.

거명된 철학들에 대해 특히 언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것들이 유포된 세계관을 형성한다는 의미로써 대단히 폭넓은 영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될 경우에 섬세하게 구별될 수 잇는 것들이 생략되고 방법적-과학적으로 파악하고 서술될 수 있는 것이 전체이다라는 확신이 유포되게 된다. 오로지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며, 예컨대 시사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표명될 수 있는 의미있는 진술들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유포된 세계관적 생각은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제시된 유형의 철학적 구상들은 모두 그것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 취급될 필요가 잇는 모든 것이며, 그밖에 또 다른 차원들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종교와 종교철학은 아무튼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배경에서 그것은 앞서 논했던 철학들의 발단에서부터는 이미 고려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어떤 차원이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게 된다. 이 증명에 오늘날 종교철학의 특히 중요한 과제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적극적으로는 과학철학들에 의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도정 道程에서 그 자신의 차원을 나타냄으로써 이 철학들과 적극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5. 비판이론과 종교

우리는 여기에서 특히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 즉 그 중에서도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와 위르겐 하버마스 Jurgen Habermas에 의해서 개진되었던 비판이론 Kritische Theorie에로 넘어가 이를 잠시 고착해 보도록 한다. 이 비판이론은 그것이 현대의 과학적 확신에서 태동된 철학과 논쟁적으로 거리를 두는 바로 거기에서 본래 그러한 확신을 전제하고 있다. 1960년대의 이른바 실증주의 논쟁은 두 방향들이 서로 구별됨과 마찬가지로 함께 속해 있음을 입증한다. 논쟁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칼 포퍼의 견해들을 그의 관심사를 위해 그 당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비판이론은 광범위하게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영향을 행사한 또 다른 중요한 이론이기 때문에, 우리의 맥락 안에서도 중요하다. 그것은 전문가들의 영역을 넘어 공공의 확신에로 파고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현대적 삶을 전반적으로 평가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그 정립된 입장들과 본보기들을 야기시켰다.

비판이론은 대체로 실천적 목표를 갖고 있다. 그것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성적이고 성숙한 인류의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이다. 그래서 비판이론은 전반적으로 실제 實際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방법은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관계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 분석의 밑바닥에는 사회가 그 테두리 내에서 모든 개인의, 특히 과학과 그것의 철학의 의미가 인식되어야만 하는 더 커다란 전체이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 점에 있어서 비판이론은 처음부터 상이한 형태들 안에서 전개되는 신실증주의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광범위한 지평, 즉 사회적 삶의 지평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 의미에 있어서 전체, 즉 사회적 연관들의 분석은 이 연관들 안에서 극복되고 부정되어야만 할 것을 노출시키는 목적을 가진다. 부정되어야만 할 것과 여기에서부터 추론되는 부정적 변증법을 이렇게 노출시킴으로써 이 이론은 각기 현재의 상태의 한계를 극복되어야만 할 것으로서 비판적으로 지시해 보이는데, 이것은 실제 안에서 비로소 도달될 수 있는 더 나으니 미래를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관련하여 비판이론은 종교를 일반적으로 도외시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칼 마르크스 Karl Marx와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 의 종교비판에 대한 그의 관계를 추종하든가, 아니면 종교가 똑같이 관심을 유별하는 사회적 분석의 한 영역으로서 함께 고려된다. 특히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자주 그것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종교를 다루는 주된 관점은 그 경우에 다시금 사회적 전체 맥락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의 관점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전체 맥락은 다시금 억압과 해방의 변증법이라는 주도적 관점 아래 주로 고찰되고 있다.

따라서 세계관적인 광범위한 영향을 행사하는 비판이론은 신실증주의에 비해서 더 폭넓은 지평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더 폭넓은 지평에 대해서도 그것이 실제로 전체적인 것인지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일체의 인간적 관계들이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조건이 유념될 수 있어야만 하는 그 유일한 관점인가? 그것 역시 재차 당분간은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아마도 무제한적인 더 큰 전체 안에서의 한 측면일 뿐이 아닐까? 바로 그 비판이론 역시 여러 주어진 가능성들 중에서 그것의 관점들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일체의 인간적 관계들이 사회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이 중요하더라도, 그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들 역시 함께 숙고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와 종교철학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 물음이 다름아닌 비판이론을 고려해 보더라도 근본적으로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비판이론과 또 이와 유사한 견해들은 우리에게 종교가 어떻든 사회적 차원도 갖고 있으며, 그 편에서 비판적 검토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사실을 표현하고 있음을 환기시켰다. 종교는 그것의 출현에 있어서 그 안에서 그것이 매번 나타나는 그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조건 지어져 있다. 종교는 스스로 사회들을, 예컨대 교회들로, 형성하며 그 안에서 그것이 매번 살아가는 더 큰 사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한다. 종교는 실제로 사회적으로 관련에 있다.

그런 까닭에 종교철학은 오늘날 종교의 이 사회적 관련성을 고려해서 스스로 사회분석적이고 사회비판적으로 숙고할 동기를 갖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에 있어 사회적 차원은 유일한 차원이 아니며, 일차적으로 결정적인 차원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가 사회적 측면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이 사회적 차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명제를 세우고 논증하는 것 자체는 종교철학에 속한다. 그것의 우선적 측면은 오히려 본래 종교적인 측면, 즉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그것이 신앙으로서, 기도로서 또는 그 외 어떤 것으로서이든 이 관계가 영위되는 방식들이 연역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키에르케고르 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들의 본래적 근거와 그것들의 직접적인 본성에서 사회비판적 분석의 개입에서 벗어나 있는 우선적으로 실존의 관계들인 것이다. 종교의 이 중심에서부터 그것의 사회적 현상이 우선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개의 기본 형태들의 논평 정도로 끝내기로 하자. 물론 그 밖의 많은 다른 철학들이 있지만, 그러나 똑같은 정도로 공공의 확신을 규정한 다른 철학들이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오늘날의 종교철학이 그 앞에서 전개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배경을 형성한다.

종교철학이 현대적 확신에서 피력되는 견해들을 주시할 이유를 가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에 간단히 좌우될 이유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와 동시에 대체로 명백해진다. 종교철학은 무엇인가 거기에서 배울 수 있는 그 모든 견해들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롭게 그 자신의 길을 찾고 나서 동시에 물론 현대의 확신에서부터 제기되는 물음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이 물음은 우리가 그것을 실행해 가면서 비로소 스스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종교의 원리로서의 신

 

5. 신에게로 향한 첫 번째 노정 路程의 구상

1. 현존재 現存在

2. 비-현존재 非-現存在 또는 무 無

가) 무의 본질

나) 무의 경험

다) 무의 모호성

라) 무의 억압하는 것

마) 무의 끝없음과 무조건성

바) 무는 아무런 사물도 또는 주체도 아니다

사) 현존재의 타자로서 무

3. 의미물음과 의미전제들

4. 귀결: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것이 존재한다

5. 지금까지 언급된 것에 대한 설명들

가)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것의 나타남으로서의 무 차체

나) 존재자를 뛰어넘어서

다) 현상학적 차이

6. 이 노정의 비판

가) 신학적 비판

나) 철학적 비판

 

6. 신에게로 향한 두 번째 노정의 구상

1. 우리 뒤에 놓여 있는 무 無

2. 무 無 그리고 어떤 무엇의 설명 필요성

3. 근거들의 대열

4. 결정적인 “근거-물음”

가) 질문된 것의 보편성

나) “물어 알게 된 것”으로서의 “비-존재자” 非-存在者

5. 결론

6. 근거로서의 신비

7. 이 생각의 논리

 

7. 이전 시대의 견해들에 비추어본 두 구상들

1. 토마스 아퀴나스의 결과 논증

2.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

가) 더 큰 것은 생각될 수 없는 그것

나) 이 생각이 어떻게 사유되게 되는지

다) 현실의 입증

3. 신존재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

 

8. 절대적 신비의 인격적 특성

1. 인격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가) 자아실행 自我實行

나) 시작할 수 있음

다) 통교 通交

라) 세계지평 世界地坪

2. 의미물음과 인격성

3. 존재자의 근거와 인격적 근본구조

4. 초월성 인격성

 

9. 절대적 신비의 신격 神格

1. 인간적 모델 안에서의 형태와 계시

2. 가능성으로서의 신적 발현

3. 발현적 현상으로서의 거룩한 것

4. 현실로서의 신적 발현

 

10. 신의 모습의 역사적 변천

1. 계시와 벗어남

2. 모습의 증가

3. 사회적 신원 확인들과 분리들

 

11. 무신론

1. 그 성격상 강요하지 않는 구상들

가) 더할 수 없는 질문들

나) 무의 모호성

다) 윤리적 요청

라) 역사적 회고들

2. 무신론의 가능한 종류들

가) 소극적 무신론

나) 비판적 무신론

다) 적극적 무신론

라) 무신론과 변신론 辯神論의 문제

 

 

제3장: 종교의 실행자로서의 인간

 

들어가는 말

 

12. 신앙

1. 신앙과 지식

2. 신앙과 인격적 자유

3. 신앙의 모델들

4. 신뢰함, 긍정, 앞에 내어놓음

5. 신과 모든 것을 신앙함

6. 신에 대한 신앙과 악

7. 신앙과 기적

 

기도 -들어가는 말

 

13. 침묵의 기도

1. 침묵의 부정적 특성

2. 잠심 潛心으로서의 침묵의 적극적 특성

3. 대월 對越 로서의 침묵의 긍정적 특성

4. 감사의 회심 回心과 종교의 순환

 

14. 언어로서의 기도

1. 언어의 신학적 차이와 부정적 언어

2. 적극적-상징적 언어

3. “마음을 쏟아놓음”

4. 언어의 관계적 특징

5. 대월과 감사

 

15. 예배로서의 기도 I: 회중, 선포 그리고 회중의 기도

1. 예배회중 禮拜會衆

2. 선포

가) 선포의 신학적 및 인간학적 극점

나) 자아와 신의 동일화 同一化

다) 신의 이름을 부름

라) 위임 委任과 기억

마) 회중과의 언어 공동체

바) 선포의 당혹케 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특성

사) 선포와 회중

3. 회중의 기도

 

16. 예배로서의 기도 II: 실재 상징적 행위로서의 예배

1. 실재 상징적 행위로서의 언어

2. 실재 상징적 행위로서의 예배언어

3. 예배의 활동 공간으로서의 거룩한 시간들과 장소들

4. 예배언어의 예식화

5. 예식적 예배언어의 긴장과 위기들

6. 예배의 다중적 종합

 

17. 종교의 폐해 弊害

1. 폐해가 가능한 이유들

2. 공허한 확대 재생산

3.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

4. 종교적 광신

5. 종교의 혼합된 현실

 

맺는 말: 끝없는 끝맺음

역자 후기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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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러한 생각을 근거로 할 때에, 그 외에는 흥미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철학적 체계 안에서의 종교철학의 위치에 대한 S. 홀름의 그 견해는 내게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S. Holm, Religionsphilosophie  (Stuttgard 1960) 11-63.
  2. 이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려면 M. Muller, Sein und Geist (Tubingen 1940)을, 그리고 최근의 것으로는 K. Hemmerle, Thesen zu einer trinitarischdn Ontologie (Einsiedeln 1976)을 참조하라.
  3.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을 알려면 M. Heidergger, Sein und Zeit (Halle 1927) 7. Die phanomenologische Methode der Untersuchung, 27-39; 재인쇄, <전집> 제2권. F. -W. von Hermann 간행 (Frankfurt a.M. 1977) 36-52를 참조하라.
  4. Boethius, De consolatione philosophiae,  PL 63.
  5. Phaidros 278d
  6. Metaphysik A 2, 982b 28ff.
  7. H. Dumery, Phenomenologie et religion (Paris 1958) 99 참조
  8. 이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의 저서들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Heilsverstandnis. Philosophische Untersuchugn einiger Voraussetzungen zum Verstandnis des Christentums (Freiburg i.Br. 1966) etc..
  9. V. Gardavsky, Gott ist nicht ganz tot (Munchen 1968).
  10. P. Tillich, Reglionsphilosophie, <전집> 제1권. 간행: R. Albrech (Stuttgart 1959), “종교와 문화”의 주제에 대해서는 329-331을 참조하라.
  11. 더 상세한 것을 알려면 Grenzsragen desGlaubens. Theologische Grundfragen als Grenzprobleme, Ch. Hoergl/F. Rauh 편찬을 참조하라.
  12. L.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보라. 처음 1921년 런던에서 출간되었고, 현재 저작집 1권 (프랑크푸르트 1960) 7-83에 실려있다. 이하 <논고>로서 인용된다.
  13. L. Wittgenstein,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유작)을 보라. 처음 1953년 옥스포드에서 출간되었고, 현재 저작집 1권 (프랑크푸르트 1960) 279-544에 실려 있다.
  14. 참조: Traktat, 명제 4: “생각은 의미 있는 명제이다.”
  15. Traktat, 명제 4.023
  16. Traktat, 명제 4.1.
  17. Traktat, 명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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