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탈무드의 지혜

 

M. 토케이어 Marvin Tokayer

이준호 李俊鎬 譯

 

 

라비 마빈 토게이어

이 책은 유태인의 지혜의 결정체인 분말과 같은 것이다. 우선 시식해 보고 만일 구미가 당기면 일상생활에서, 직장, 가정에서 매일 마음대로 이용했으면 한다.

예수 그리스도,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처럼 모든 분야에서 샛별처럼 성공자를 배출해온 유태인의 힘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유태인의 지혜의 전부 전부!!

유태인은 우수하고 무서운 민족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유태인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 만큼 알고 있는가? 이 책은 유태인의 민족성을 알아 그 수수께기를 푸는 절호의 안내서이다.

 

유태인을 단련시킨 전통의 저력

* 세계의 모든 나쁜 것, 그리고 모든 진보는 유태인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라고 오해할 정도로 유태인은 우수하다.

* 그러나 유태인은 태어날 때부터 우수한 것이 아니라 교육과 계율을 쌓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 이 책은 상상을 초월하는 박해 속에서 오늘까지 독자성을 잃지 않은 유태인의 힘 – 영지 (靈智?) 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대명사 大明社

 

 

 

1. 유태민족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유태인에 얽힌 신화

당신은 유태인을 싫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편견이다. 서구화된 사회, 또는 가톨릭교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회일수록 유태에 대한 편견이 강하다.

우선 당신은 유태인을 잘 알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유태인에게 빈정댔다.

“이 세상의 나쁜 짓은 모두 유태인이 저지른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전거 탄 사라도 우리와 마찬가지지요.”

그 말을 들은 유태인이 대답했다.

“어째서 자전거 탄 사람도 그런가?”

“그렇다면 유태인이 어째서 그런가?’ 하는 물음이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유태인만큼 독특한 민족은 없다. 독특함을 다른 민족이 왜 싫어하는 것일까? 유태인은 그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한 게 없다. 그러면 과연 어떤 것이 다른 민족과 차이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대답을 하기 전에 당신에게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유태인은 지구상에 대관절 몇 명이나 될까?

1억? 아니면 8천만? …. 5천만?…..

나는 유태인 인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몹시 아프다. 2,000여 년 전 예수가 탄생했을 당시에도 유태인의 인구가 당시의 일본 인구보다 많았다고 생각된다. 어느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를 통해 볼 때 유태인에 가해진 학살과 박해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유태인의 수는 2억은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불과 30년 전[필사주: 이것으로 이 책은 1975년경에 쓰여진 듯] 의 일이지만 나치스 독일인의 계획적인 손에 의해 유럽에서 6백만 명의 학살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수는 2천만 명도 채 안 되는, 겨우 1천3백만 명이 조금 넘을 뿐이다. 이 가운데 2백 80만 명 정도가 유태인의 새로운 조국 이스라엘에 살고 있으며 그 나머지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1천 3백만 명이라고 하면 뉴욕이나 도쿄, 파리와 같은 한 도시의 인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유태인이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세계각국의 인구 순으로 나열해 간다면 중간 정도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위치일 것이지만, 그러나 유태인은 세계의 자연과학, 사회과학, 정치, 예술, 음악, 문학, 상업, 저널리즘 등의 각 분야에게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스포츠 종목에서만 신통치 않다. 다른 분야에서는 제1위가 아니면 제3위 정도의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예수,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베르그송 … 오펜하이머, 로스챠일드, 하이페츠, 트로츠키, 디즐렐리, 키신저. 더 이상 이름을 열거하다가는 끝이 없다. 무슨 전화번호부 같을 테니 말이다.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긴 유태인 중 누구나가 다 잘아는 사람의 이름만을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1천 페이지는 순식간에 메울 수가 있을 것이다.

유태인이 없었다면 모르긴 해도 세계의 사회과학이나 과학기술은 오늘날만큼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며 나치 독일의 과학기술의 수준도 극히 낮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한 유태인은 흔히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국적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인슈타인 – 독일국적을 갖고 있었으나 나치에 쫓겨 미국에 망명했다 – 은 이렇게 말했다.

“유태인이 커다란 업적을 남기게 되면 ‘그 사람은 독일인이다’ 라고 말하며 어쩌다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가차없이 ‘그 놈은 유태인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태인은 곧잘 ‘레닌이 유태인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 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물론, 지금 같은 문명의 발달이 유태인에 의해 이룩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심한 과장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유태인은 그 수가 적은 데다가 이 세상에는 유태인이 아닌 다른 많은 민족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지금 같은 문명의 발달을 유태인이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분명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유태인이 세계의 정치 금융 상업을 지배해서 이끌고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도 유태인이 지금의 문명발달에 이바지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심한 과정이다.

히틀러는 유태인이 독일의 정치,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 반 유태주의를 선동했다. 그런데 얼마 전 뉴욕에 있는 강사 한 사람이 강연에서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

“독일 국민 6천5백만 명의 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독일에 있는 유태인 65만 명이 우수민족으로서 내외에서 공히 인정하는 독일 민족을 압도할 수가 없지 않은가?”

1934년의 일이다. 히틀러는 독일인이 세계의 최우수민족임을 요란하게 선전한 일이 있었다.

 

 

환경의 작품, 유태민족

유태인이 세계를 비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심한 과장이긴 하지만 흔히 그렇게들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다른 뜻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찬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오해를 낳을 만큼 유태인이 우수하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유태인은 훌륭한 사람을 낳는 확률이 가장 높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태계 미국인이므로 곧잘 야구 이야기를 예로 들지만, 만약 세계의 모든 민족을 야구팀으로 친다면 유태인은 가장 타율이 높은 민족인 것이다. 인류 최고의 야구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30년도 채 안 되는 이민의 나라인데도 들과 모래의 사막국에다 푸린 땅을 일구고 공업화를 촉진시켜 주변을 에워싼 1억인 이상의 아랍제국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친 전면전을 치렀지만 1967년 6일 전쟁에서 본 것같이 눈부신 승리를 거둔 사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도 한 가지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유태인은 미국인구의 3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유태인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을 보면 4분의 1이 되는 것이다.

역사에 나타난 유태인의 업적을 생각해 보자. 7일을 1주일로 정한 사람은 누군가? 후에 그리스도교, 회교가 파생된 일신교 一神敎를 고안해 낸 것은 누군가? 맨 처음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것은 누군가? 민주주의를 고안한 것은 누군가? 이것들 모두가 고대 유태인인 것이다. 해부학, 의학에서 복지, 재판제도도 고대 유태인이 기초를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유태인이 지은 집 속에 그리스도교나 회교, 의학, 민주주의 등의 가재도구가 늘어서 잇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찌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유태인은 다른 민족보다도 머리가 좋다든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과신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검다든지 또는 눈이 파랗다든지 키가 크다든지 하는 따위의 신체적인 것은 혈통이 결정한다. 그러나 한 민족의 우월이나 민족성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이 아니고 어느 한 민족이 지녀온 역사 가운데 배양되는 전통과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연이며 다른 민족도 유태인과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라면 유태인과 같은 성과를 올리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우수 優秀라고 말할 때, 발명이나 발견 또는 새로운 학설을 내놓거나 아니면 예술을 창조해 내는, 개인으로 말할 때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고 높은 수입을 올리는 것에만 국한시켜 하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어떤 특정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도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느 민족은 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는 일에 능하며 또 다른 민족은 입으로 불어 쏘는 화살로 먼 데 있는 새들을 잡는 것에 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엇이 뛰어나고 무엇이 떨어진다고 하는 기준은 민족에 따라, 또는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개인에 따라서도 다른 것이다.

만약, 한 가지만을 가지고 그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고 한다면 올림픽에서 한 가지 종목에 언제나 우승하는 민족이 있다고 할 때, 그 민족이 세계에서 제일 우수민족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독일은 확실히 제복을 만드는 기술은 뛰어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민족이 세계에서 최우수민족이라고 세계 각국에 자기 소개를 한 것은 순전히 독일인의 착각에서 온 것이다.

세계의 모든 민족의 선천적인 능력에는 큰 차가 없다. 이것은 올림픽경기를 예로 들어 보다오 각 민족이 공히 그렇게 큰 능력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이 뛰어난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 많다. 유태인의 피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 늑대소년과 같이 늑대의 무리 속에서 자라난다면 늑대와 같이 이를 드러내어 짖어대거나 두 손도 발로 사용해 손을 발로 만들게 될 것이며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이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의해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태인이 우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유태민족의 환경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러나 문화나 전통,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소프트웨어 이어서 몇 천 년이나 걸려서 개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인의 문화나 전통은 상업에서나 사생활 면에서 가장 성공률이 높은 인간을 낳는 소프트웨어 라 할 수 있다.

 

 

절대의 진리 유태교

여기 이 책은 유태인의 노하우 know-how 를 팔려고 하는 것이다. 유태인 격언에는 이 노하우[역자주: ‘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 기술] 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술 術을 밝히기 위해서는 유태 민족의 발상으로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유태교와 유태문화가, 배우는 일을 최상의 것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은 유태교가 유태문화이면 유태문화가 유태교인 것이지만). 둘째는 유태인이 오래 역사를 통해 갖가지 박해를 이기고 생존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세 번째의 이유를 들려고 한다. 그것은 유태인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언젠가 일본이 학생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네? 구약성서 舊約聖書 라고요?”

이 일본 학생은 이렇게 되물으며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이것을 가지고 놀라는 것을 볼 때, 세계의 다른 민족이 유태인에 관해 너무 모르고 잇는 것이다. 그는 유태인이 이미 수 천년 전에 쓴 구약성서를 마치 2~3일 전에나 출판된 것같이 생활의 일부로서 삼고 있는 것이 놀랐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성서는 뭔가 곰팡내 나는 책으로만 지금껏 비쳤던 모양이다. 유태교는 구약성서에 그 그분을 두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유태인에게는 구약성서가 매일 아침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저네 배달되는 조간신문만큼이나 신선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편의상 구약성서라고 부르고 있지만 구약성서는 그리스도교의 호칭일 따름이다. 유태인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태인에 있어서 성서는 하나밖에 없다. 구약성서가 바로 유태인에 있어서 유일한 성서인 것이다.

성서 – 히브리어로는 ‘트라’ 즉 가르침이라고 한다 – 는 유태인의 역사책이리고 하다. 이 안에는 유태민족이 어떻게 발상하고 세계의 많은 여러 민족이 모두 태양이나 달이나 또는 산이나 짐승을 신으로써, 많은 신을 믿고 있었을 때 신은 하나밖에 없다고 일신교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신이 유태인을 선민 ‘선택된 민족’으로 택해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는 것 등이 적혀 있다.

유태인은 오늘날까지 ‘성서’의 가르침을 굳건하게 지켜왔다. 유태인은 기원 전 18세기경, 현재의 이스라엘의 한 곳에 이주해 온 유목민이었다. ‘성서’에 최초의 유태인으로서 등장하는 유태인 아브라함은 이 무렵에 생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태인은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후에도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가거나 비빌로니아로 납치되어 갔다. 또한 이 사이에 유태인의 왕국이 흥했다가 붕괴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기원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때부터 유태인은 조국에서 추방되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후 1천 8백 년 이상이나 이어진 디아스포라 이산 離散 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다. 다아스포라 는 유태인이 세계에 흩어진 것을 의미하는 말이며 희랍어의 어원으로는 ‘남김없이 흩어지다’라는 뜻이다.

유태인이 어떻게 세계각국으로 흩어져 갔느냐 하는 것은 이미 7세기 초 서기 6백 4년 경 중국대륙에 몇 군데 유태인 사회가 건립되어 있었던 것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1605년에 이에즈스회 의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하남성 개봉 에 유태인의 사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개봉의 유태인 사회는 잡혼 잡혼에 의해 인종적으로나 생활습관적으로 상당히 중국화되어 있었지만 아직 시나고오그 祈禱所 synagogue 가 존재하고 있었고 유태교의 계율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스와이에’ 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기록에는 7세기 무렵부터 유태인이 각지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유태인은 ‘쥬프 求忽 구홀’ 라고 불리어졌었다.

 조국으로부터 추방된 대부분의 유태인은 유럽으로 건너갔다. 중근동에 남은 유태인은 아랍인과 터키인에 의해 2등 시민으로 취급 받긴 했지만 그렇게 가혹한 박해는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유랑의 역사가 시작돼 유럽으로 건너간 유태인은 그리스도교도의 손에 의해 집요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왜 박해를 받아야만 되었는가?

이것은 절대로 유태인의 혈통 때문이 아니었다.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유태인은 우생학적 優生學的인, 다시 말한다면 한 핏줄을 나눈 민족은 아니다. 유태인은 유태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만 하면 그리스도교 사회 안으로 흡수되어 박해를 받지 않아도 됐다. 가량 학자 가운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개종 改宗 한 유태인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이 이야기는 개종한 유태인이 많다는 증거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유태인은 소수민족으로서 타국에 머물러 살면서 많은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유태교를 버리지 않았었다. 그 까닭은 유태인에 있어서는 유태교가 절대의 진리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세계 도처로 흩어져 있으면서도 1천8백 년 이상이나 동화되지 않고 유태인의 독자성을 지켜왔다고 하는 것은 다름 민족에게는 놀라운 일이며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유태인이 성서를 오늘날의 것으로 삼고 그 가르침을 정신과 생활의 지주 支柱로서 굳게 지켜왔기 때문이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성서는 다른 민족이 생각하는 것 같이 절대로 낡은 책이 아닌 것이다.

 

 

배움의 민족 유태인

유태인이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자 게토로써 알려져 있는 유태인가 街 라든지 유태인부락이 스페인으로부터 러시아, 터키, 중국에까지 온 세계에 탄생하게 되었다. 하나의 민족이 멸망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나라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자기의 종교나 문화를 빼앗기고 강한 민족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유태인은 국토는 잃었지만 유태민족은 멸망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1천8백 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유태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칼이나 창을 갖고 있지 않았다. 습격으로부터 유태인가를 지키기 위해 높은 벽을 간혹 쌓긴 했지만 나라가 없었던 유태인은 지켜야 할 땅이나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태인이 자기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는 오직 배움 그것 뿐이었다. 성서를 배움으로써 유태인이 되고 아이들에게 성서를 가르치는 것으로써 유태인임을 가르쳐왔다.

유럽에서는 중세 중세로부터 교육이 없는 유태인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유태인 이외로 길러진 유태인 외에는, 하는 말이 있을 정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이 유태인이 이스라엘로부터 추방당한 후 유태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비롯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유태민족은 원래 학문을 가장 숭고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라비 (유태교 지도자)는 유태 사회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태인 아이들의 동화 속에 나오는 영웅은 용감한 군인도 왕자도 아니다. 유태인 동화 속의 영웅 그것은 바로 현인 賢人이다. 유태인에게 있어서는 성서를 배우는 일, 곧 신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태인 남자는 고대부터 12세기 바 미츠바 (成年式)가 되면 성서나 기도서를 읽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유태인은 모두 글을 읽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유태인은 이 지구에서 맨 먼저 민주주의를 실현한 민족이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철저한 평등주의의 사회가 이룩된 것이다. 고대 유태인사회부터 이 평등주의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리만큼 성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배움과 생활이 하나가 돼 버린 것이다. 유태인은 <성서> 외에도 좋은 책이 있는데 그것은 성전 聖典 인 <탈무드>가 바로 그 전형적인 것이다.

<탈무드>는 <위대한 연구>라는 뜻이다. 이것은 2백50만자로 이룩된 유태민족 5천 년에 이르는 생활규범의 방대한 집대성이며 수백 년 걸쳐서 편집된 것이다. <성서>를 바탕으로 연 수만 명의 라삐들의 토론이 여기에 수록된 탈무드는 유태인의 사고방식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유태인은 한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관점과 각도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유태인은 한 인간의 생명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긴다. <탈무드>를 펼쳐보면 <성서>에 아담이 최초, 왜 한 사람뿐이었느냐에 대한 토론이 나온다. 답은 처음 아담이 단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것은 한 사람의 인간을 죽이는 것이 전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이후에도 어느 한 사람에게 있어서나 그의 세계는 단지 하나밖에 없다. 그를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신학적인 논쟁을 소개하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나 자신 옛날의 유태인의 끈질긴 인내력에 손을 들 정도의 대단한 논쟁이 많다. 그와 동시에 <탈무드>에는 간단한 지혜가 수없이 기록돼 있다. 그 예를 들면,

“인간은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두 개다. 어째서일까?” 하고 라비가 묻는다. 그러면 한 사람이 대답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갑절을 듣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검은 부분으로 보는 것일까?”

“그것은 세계를 어두운 면으로 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밝은 면만 보 너무 낙관적으로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처인 것이다.”

경건한 유태인 남자는 오늘날에도 ‘키파’라고 하는 조그마한 둥근 모자를 쓴다. 시나고그에 들어와 기도할 때는 반드시 키파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인 관광객도 쓴다.

“키파를 어째서 쓰는가?” 라는 물음에 <탈무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에게 자기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는 것을 항상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헤브라이>라고 하는 낱말은 헤브라이어로 <또 한편에 서다>나 <상대하다>라는 뜻이다. 요컨대 유태인은 항상 또 한 가지의 관점을 찾는 것이다. 이와 같은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지적 호기심에 차 있는 민족인 것이다. 이 지적인 호기심은 몇 천 년의 배움의 전통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3일 ‘탈무드’를 대하지 못한 자는 유태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경건한 유태교도가 있다. 유태인은 유태교에 의해 매일 성서를 공부할 의무가 지위지며 미국에도 이와 같은 경건한 유태인이 많다. 단 내 자신에게 누가 당신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미 계율을 지키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유태인의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 유태인의 전통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배우는 것은 유태인의 민족적인 전통인 것이다. 배운다는 것, 즉 교육이야말로 유태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유태교가 유태인을 만드므로 유태인은 배우지 않으면 유태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박해 아래서 얻어진 자신과 지혜

유태인은 역사를 통해 볼 때 많은 박해를 받았고 여러 번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집이 불태워지고 조국에서도 추방당하는 운명이었지만 그래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 교육 덕분이었다. 죽음을 당하기 전에는 교육으로 얻은 지식은 결코 빼앗기지는 않는다.

유태인이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얼마나 박해당했는지는 나치스에 의한 대량 大量 학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나치스의 대량학살은 그리스도교의 세계에서 비로소 가능했다. 그 까닭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는 오랜 세월 동안 질병으로부터 기근에 이르기까지 나쁜 일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유태인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유태인 6백만 명 한꺼번에 살해한 것은 처음 잇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토양 土壤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스와 유태인의 싸움은, 히틀러가 뮌헨의 비어 홀에서 나치스 당 黨을 만들고 나서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유태인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태인에게 있어서 천주 天主, 예수, 마리아와 같이 많은 신성 神性을 띤 신 神들이 있는 그리스도교는 다신교이었을 따름이었다. 유태인에게 있어서의 신 神은 유일신 唯一神 인 것이다.

단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마녀 魔女 재판에 의해 14세기로부터 18세기 사이에 수백만 에 이르는 유럽인들을 죽였다. 하기야 우리들도 일상생활에서 뭣인가 나쁜 일이 생기면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많은 민족주의 나라에 있어서와 같이 <공산주의의 탓>이라거나 <정치가 나쁘다>라고 하여 퍽 마음 편하게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성향이 있다.

<유태인이 나쁘다>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전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고대 희랍인은 1년에 한 번 아테네의 시가 市街를 노예 한 사람을 끌고 다니며 모든 죄과 罪過를 뒤집어씌운 다음 죽여 없앴지만 고대 유태인은 1년에 한 번 축제일에 한 마리의 산양 山羊에 모든 죄를 덮어 씌우고 예루살렘에서 사해 死海 쪽을 향해 사막으로 내쫓았다. 이것이 <속죄의 산양>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전 인류의 죄를 혼자 뒤집어 쓰고 죽었다는 것도 같은 생각인 것이다.

고난은 인간을 단련시키고 갈아서 빛나게 한다고 한다. 유태인이 다른 민족에서는 볼 수 없는 상상을 절 絶한 박해에 견디고 끝내 유태인임을 감추지 않았던 것은 1천8백 년 이상이나 되는 긴 세월에의 시련에 견뎌 이겨냈다는 걸 말해 주고 있다. 재산 財産이나 생명 生命의 위험에 직면한 유태인이 살아남는 길은 크나큰 지혜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긴 역사를 돌아볼 때 유태인은 지혜가 뛰어난 자가 생존해 남을 수 있다는 법칙 法則에 의해 어리석은 자는 도태되고 유태인 가운데에서도 지혜가 뛰어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유태인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 (유태교가 절대라고 생각하는) 과 힘이 생겼다. 유태인들이 자기들의 문화 文化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저력 底力이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을 다른 민족이 부를 때 <책의 민족>이라 부른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교육이 높은 민족이 유태민족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유태인은 전 미국 인구의 3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데 대학의 진학률은 7.8퍼센트라는 것이다. 지루하지만 좀더 숫자를 살펴 본다면 미국의 정신분석의 精神分析醫 의 14.3 퍼센트, 변호사의 8퍼센트, 수학자 수학자의 7 퍼센트가 유태인인 것이다.

유태인은 모두가 자기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이 사명감은 <성서>에서 나온 것이다. 유태인은 <성서>의 창세기에서 신은 인간에게 미완성의 세계를 부여하고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도록 하기 위해 보다 나은 세계를 이룩하도록 명 命 했노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유태인은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그 사명을 부여한 것이라고 믿어오고 있다.

이 민족의 전통은 신을 부정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조차 살아 있었다. 사회과학, 철학, 자연과학과 같은 그 모든 영역에 있어서 발전을 시키려고 하는 욕망은 유태인의 피 한가운데 역력히 흐르고 잇는 것이다. 물론 전통 위에 박해 받아 온 유태인이 자기들을 못살게 군 그와 같은 사회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된다는 생각이 정열을 불태웠던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마르크스는 나쁜 관습에 따르는 유태인의 계율과 전통을 싫어했지만 그도 유태인이 상식 常食 하고 있던 피클스 [필주: 절인 오이, pickles]  만큼이나 유태인의 전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점령지역에 있었던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의 수인이 되고서도 이 책의 첫 장에 실은 <애니 마아민>이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나는 내일을 믿고 있다>라고 하는 노래다. 이것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수인이 만들었고 죽어간 수인들의 입에 오른 노래였다. 멜로디도 아름답다. 그들은 밝은 내일과 보다 나은 세계가 반드시 올 것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독자성을 지킨 유태인 정신의 벽

유태인가 街를 둘러싼 벽은 돌과 흙이었으나 이 벽보다 더욱 견고한 벽은 유태인 만이 지닌 정신적인 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적의 敵意에 찬 주위의 그리스도교도가 시가 市街의 벽을 부수려고 한다면 언제고 부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한 일은 너무나 빈번히 일어났었다. 유태인이 오늘날까지 유태인으로서 독자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돌과 흙으로 쌓은 벽이 견고해서가 아니라 유태인 마음속에 새워진 정신적인 벽이 얼마나 견고했었나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에 있어서 봉건제도로부터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 시대가 오고 유태인은 겨우 유태인가로부터 해방되어 돌과 흙으로 쌓은 벽이 헐어져 나간 오늘날까지도 유태인의 정신적인 벽만은 계속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주 금요일 해질녘부터 다음날인 토요일의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는 유태인의 안식일 安息日의 계율을 이미 많은 유태인이 지키지 않는 것을 본다. 유태인으로서 어리석은 일이다. 안식일에는 어떤 일이나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이 날에는 쇼핑이나 요리마저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부는 금요일의 낮에 모든 음식을 장만하여 해지기 전에 붙인 불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점화 點火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부터 불도 켠 채로 그대로 두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담배도 피워서는 안 된다.

유태인은 금요일 밤에는 흔히들 유태인이 아닌 친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그런데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유태인이 기도문을 노래하며 식사를 하는 것이 아무리 신기하다 하더라도 가지 않는 편이 좋다. 불이 없는 곳에서는 연기가 나질 않으니 말이다.

또한 유태인은 안식일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며 함께 신을 공경하고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준다. 이 때도 글씨를 써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는 이밖에 차 같은 것을 타서도 안 된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다.

경건한 유태인교도라면 이와 같이 안식일의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평소 식사 때 지켜야 하는 계율이 있다. 새우, 낙지, 패류 貝類, 돼지고기는 금식으로 되어 있으며 라비 rabbi 가 계율에 따라 도살 屠殺 하여 고기를 처리하지 않은 소, 양, 닭고기도 금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음식물이 닿은 접시에 다른 음식을 담아 먹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유태인은 유태인 이외의 곳에서는 식사를 할 수 없게 된다.

유태인은 얼굴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되므로 수염을 깎을 수도 없다. (단 전기면도는 허용된다.)

식사의 계율은 아마도 뜨거운 사막에서 식중독 食中毒 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혜에서 나온 것 같으며 얼굴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스스로 얼굴이나 몸에 상처를 내는 아프리카 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인류학자가 말하는 신체변용 身體變容이 성서시대에 아프리카에 널리 퍼져 있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엄격한 계율을 유태인이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통해 지켜왔다고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계율이 유태인을 계속 유태인으로 남아 있도록 지켜져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군인은 군대적인 동작을 하는 것으로 해서 스스로를 납득시켜 군인답게 되는 것이며 자그마한 집단은 다른 집단과 다르다는 것을 몸짓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자기의 집단이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것을 서로가 확인사여 단결을 굳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율을 버리더라도 유태인은 다른 민족과 달라 좀 독특하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의 습성과 발상이 하루 아침에 쉽사리 지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세계의인간을 유태인과 타민족과로 나누어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유태인 세계 대 다른 세계로 되어지는 꼴이 된다.

 

 

광신 狂信을 배척, 적도 적도를 존중하는 유태인

유태인이 강건한 정신의 벽을 허물지 않았다고 한다면 유태인은 하느님에 의해 지시된 정의 正義를 지키고, 보다 훌륭한 세계를 만드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다고 하는 광신적인 사람들의 집단인 것처럼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도대체 그렇게 박해를 받고도 생존해 나온 1천8백 년 이상이 어떻게 광신만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버틸 수가 있었을까? 인간은 살기 위해서는 즐거워하고 슬퍼할 필요가 있다. 유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핍박 받은 민족이었던 까닭에 그만큼 희로애락 喜怒哀樂을 풍부히 지니고 왔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긴장만 하고 있다면 쉽게 좌절하고 말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원래 유태인은 디아스포라[필주: Diaspora] 의 생활로 들어서기 전부터 생활에 있어서의 균형이라는 것을 중요시해 왔다. 유태인은 광신자는 없다. 예루살렘의 한탄의 벽 앞에서 몸을 가늘게 흔들며 기도에 열심인 유태교 신자들의 모습이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눈에는 광신적으로 비칠지 모르나 그렇다고 그들의 광신자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유태교 자체가 광신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탄의 벽은 기원 70년에 로마 군에 의해 예루살렘의 신전 신전이 파괴되었을 때 오직 하나 남은 서쪽의 벽 壁일 뿐이며 디아스포라 의 생활 중 유태인은 조석 朝夕의 기도를 <내년이야말로 이스라엘에서>라는 말로 끝냈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이 상징인 한탄의 벽 앞에 선다는 것은 격한 감동을 유발 받게 되는 것이다. 한탄의 벽은 언젠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되돌아갈 날이 올 조국의 상징이었다. 유태인에게는 고대로부터 은자 隱者가 없었다. 하느님을 위해 쾌락은 물론 가족이나 생활을 버리고 산에 파묻히는 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일 – 사업이나 연구라도 좋다 – 을 위해 가정생활과 인생의 즐거움을 모두 희생해 버리는 유태인은 없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마는 것을 유태인은 미덕 美德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태교의 라비는 학자,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써, 모든 사람의 의논상대를 겸하고 있지만 대처 帶妻[필주: 아내가 있음] 하고 있으며 보통의 인간생활을 하고 있다. 가톨릭의 신부라든가 이승 尼僧과 같이 생애, 이성 異性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유태인이 볼 때 비인간적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성 性을 부여한 신 神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 된다. 유태인은 어떤 사람이건 독신으로 있는 것은 신의 뜻에 위배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 생각 또한 옳은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교도와 비교하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독자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서로 대비해 보는 것으로 해서 유태인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성 性을 그리스도 신자와 같이 불결한 것으로 멸시하지 않는다. 신이 인간에게 성의 쾌락을 부여한 이상 그것이 종교에 따라 나쁘고 좋고 할 까닭이 없다.  이성을 보고 마음속으로 은밀히 욕정을 일으키면 육체가 간음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은 유태인에게는 전연 무관한 일이 된다. 반대로 유태교는 부부라도 쾌락을 동반하지 않은 성교섭 性交涉 을 갖는 것을 금하고 있다.

유태인의 금전에 대한 견해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금전을 성과 마찬가지로 죄악시하고 불결시하여 백 보를 양보한다 하더라도 필요악 必要惡으로 밖에는 생각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태인은 이와 같은 터부에 의해 얽매어 있지는 않다. 여기에서도 돈은 성과 마찬가지로 사용여하에 따라 좋게도 되고 나쁘게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유태인은 금전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고대로부터 생각해 왔다. 유태인 세계에서는 가난이 불명예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신자처럼 깨끗한 것이라고 드러내어 코에 걸고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유태인은 식욕, 음주, 성 性, 금전에 한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과도 過度한 것을 싫어한다. 유태인은 적도 適度라고 하는 것을 전통적으로 몸에 익혀왔던 것이다.

돈에 대해 말한다면, 유태인은 돈이 모인 만큼 자선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유태인 사회는 무엇보다도 자선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유태인은 자녀가 어릴 적부터 자선용 저금통을 줘서 가르친다.

유태인과 자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본다면 영어로 (다를 유럽어로도) 자선은 ‘채리티’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베푼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자선과 정의는 같은 <째다카>라고 하는 말이 된다. <성서>에는 노아는 <째다카 (정의의 사람)>였다는 것이 되풀이해서 나온다.

 

 

꿈 많은 낙관주의자

유태인은 지식을 소중히 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지혜를 존중한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지혜가 없는 지식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지식편중 지식편중의 흠이 있는 것 같다. 과학이 가장 발달된 나라였던 독일에서는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V1, V2와 같은 로켓에서 제트기까지 만들어 냈다. 그런데도 나치스의 광신자들을 총통관저의 주인공으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도대체 인간을 잡아먹는 아프리카 식인종과  인간을 죽여서 비누를 만들었던 독일인과 어느 편이 문명적 文明的이었을까?

유태인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해학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유태인만큼 유머가 많은 민족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는 박해를 견뎌 살아가지니 웃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웃음은 피난처이며 상대방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웃음의 대상으로 삼으므로 써 상대방에 대해 순간적일망정 우월한 지위 地位를 되찾고 또한 자기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면을 본다면 짧은 이야깃거리로써의 유머로부터 생기는 웃음은 극기 지적인 것이다. 유머의 웃음은 사물을 한 발자국 비켜서서 생각하지도 않은 다른 각도로부터 바라보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히브리>의 뜻이 <또 한 편에 서다>라는 뜻임을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능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위트이며 기지인 것이다.

유태인은 가정에서나 회합에 모이게 되면 곧잘 유머를 주고 받는다. 이것은 하나의 머리의 순환체조이다.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은 두 사람 다 유머의 명수였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도 뛰어난 유머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진리에 대한 모색의 방편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유태인이 웃음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유태인이 낙관주의자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마크 샤갈의 그림은 유태인가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인생관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하늘을 떠도는 연인 戀人들이라든가 가축 家畜, 달콤한 꿈, 꽃다발과 같은 것은 유태인가의 세계이다. 더구나 유태인은 살고 있는 땅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샤갈의 그림의 세계는 동시에 슬라브인의 농민의 로맨티시즘을 다분히 나타내주고 있다. 유태인은 꿈 많고 낙관적이다.

 

 

유태인을 오해하는 근원과 진상

유태인만큼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뭐라 해도 그리스도신자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 유태인에 대한 편견을 널리 펼쳤기 때문이리라. 그리스도 신자는 강자였고, 그 강자의 음성은 멀리 크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20세기에 들어서자 독일에서 유태인은 가슴에 유태인을 나타내는 기장 記章을 달고 다녀야 했다. 이것이 하등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로마 교황 敎皇은 1215년에 제4회 라테란 Lateran  회의에서 유럽에 사는 전 유태인에게 황색 黃色의 모자를 쓰고 다닐 것과 배지를 달고 다닐 것을 명 命했었던 일도 있다.

나치스는 유태인이 쓴 책은 모두 불살랐다. 이것에도 많은 전례가 있다. 1239년에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모든 <탈무드>를 몰수하여 불태울 것을 명했다.

독자는 파리라든가 로마에 가게 되거든 단지 그곳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그 광장에서 매일 <탈무드>가 연기를 뿜으며 불태워졌었다는 사실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유태인은 돈에 관해서도 편견을 받고 있다. 돈에 대해서 <더럽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유태인은 빈틈없는 장사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특히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책에 의해 널리 퍼졌다.

우선 객관적인 사실부터 이야기해 가겠다. 유태인은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그 이전에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쓸 때에는 영국에 단 한 사람의 유태인도 있었을 수가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유태인에 대한 편견을 무턱대고 믿고 있었다고 하겠다. 도 금전에 대해서 더럽다고 하지만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금전을 멸시하고 있었을 때 대체 對替 라는 은행제도를 만들어 냈던 것은 유태인이었다는 것을 독자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유태인은 그리스도교가 금리 金利를 죄악시하고 있었을 때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늘날 모든 은행이 금전에 더러운 사람들에 의해 경영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편견인 것이다.

기원 70년에 이스라엘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유럽에는 유태인의 농민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는 유태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법률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태인은 제조업자의 조합인 길드에 가입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조업에도 종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태인은 오직 상인이 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유태인은 그리스도 신자의 대부분이 글도 읽지 못하고 겨우 자기의 손가락으로 셈을 할 때 이미 모든 유태인은 높은 교육을 쌓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에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왕후들은 다투어 유태인을 상점의 관리인으로 고용했었다. 그것은 언제나 교육을 받은 유태인 상인 쪽이 우수했었으므로 그리스도 신자의 상인은 거의가 유태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리스도 신자는 영주 영주를 부추겨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장사에서 진 이유를, 상대방이 정직한 데다가 10 이상을 헤아릴 수 잇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엉뚱하게 유태인이 교활해서 그랬다고 둘러대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에 유태인이 금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일을 했다고 한다면 왜 그리스도교도로 동화하지 않았을까? 유태인의 신 따위는 1센트도 되지 않는 것이다. 1096년에 제1차의 십자군이 팔레스티나로 향했을 때 유럽의 각지를 통과하는 대군은 가는 곳마다 유태인에게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을 강요했다. 그때 몇 만 명이라는 유태인이 집단자살을 했었다. 물론 이때에 십자군에게 습격 당하지 않은 유태인가도 있었다. 유럽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개종한 유태인은 박해를 받지 않아도 됐었다.

유태인은 모두가 돈이 많다고들 말한다. 이것 역시 잘못된 이야기이다. 유태인은 유럽에서는 거의가 유태인가에 처박혀져 살고 있어 빈민이었다. 유태인가는 빈민가였다. 그 후 유태인이 유태인가로부터 해방되고 똑같이 시민권이 부여되고부터는 유태인은 근면한데다가 교육수준이 높았으므로 사회의 상부로 옮아가는 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리지를 않았다.

미국에 있는 유태인만해도 유태인 이민은 거의 모두가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중산계급 中産階級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대도시의 빈민가에서 유태인을 찾는 것은 나비를 찾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 모두가 부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태인은 유태인종에 속해 있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말이다. 인종학상 人種學上 으로 말해서 유태인이라고 하는 인종 人種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 유태교를 믿는 자가 바로 유태인이 되는 것이다. 유태교를 인도인, 멕시코인, 인디언인, 일본인이 믿는다면 지금부터라도 유태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유태인은 세계에 흩어져 있다. 동유럽으로 흩어져 간 유태인은 독일어가 섞인 이디쉬Yiddish 어를 말한다 (이디쉬 Yiddish문학도 있다. 카프카도 이디쉬Yiddish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이디쉬 Yiddish 어 에도 독일, 폴란드, 루마니아, 에스파니아, 우크라이나에서는 작기 다른 방언이 있다. 이와 같이 세계각국에서 유태인은 그 나라 피가 섞이고, 풍토 문화, 습관에 의해 그 나라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앞서 샤갈의 그림을 예로 들었지만 러시아에 살고 잇는 유태인은 다분히 슬라브 농민과 같이 사람이 좋고 로맨틱하다. 이탈리아의 유태인은 역시 이탈리아적이라고 하겠다. 유태요리조차 지역에 따라 조리법이 다르며 그 나라의 사람들의 식성의 영향을 다분히 미치게 마련이었다.

온 세계에서 유태인이 이민해 온 이스라엘을 보면 된다. 예멘에서 온 유태인과 독일에서 온 유태인이 함께 서 있으면 머리, 눈을 색깔, 골격까지가 달라서 같은 유태인 같지가 않다. 다만 이들이 유태인이라고 하는 것은 유태교라고 하는 종교를 믿기 때문에 유태인이라고 할 따름이다.

유태인을 구별하려면 코를 보면 된다.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고들 흔히 말한다. 이것도 틀린 말이다. 곧잘 매부리코를 하고 잇는 유태인이 만화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릇된 표현이다.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것은 서부 러시아의 유태인과 근동에 있는 유태인 뿐이다. 그러니까 육체적 특징으로 유태인을 구별하려고 해도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유태인은 아시아인이므로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잇는 사람이 많다. 물론 금발도 있고 빨간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외견상으로 어떻게 유태인을 구별할 수 잇는가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그 방법이란 바로 유태인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눈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의 박해 때문이다. 오늘날 생존하고 있는 유태인 가운데 나치스에게 학살된 유족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도 많은 친척을 잃고 있다. 이 세상의 유태인 가운데 세 사람에 한 사람은 나치스에게 희생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국가 國歌 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슬픈 국가의 선율을 듣고 눈물이 나지 않을 사람도 드물 것이다. 거기다 유태인의 역사를 알고 나서 듣는다면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마음이 저려올 것이다.

유태인은 배타적이라고 하는 말에도 오해가 있다. 유태인가에서 폐쇄집단을 만들어 그 안에서 무엇인가 은밀한 일을 하고 있어 외국인에게는 들여다 보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 식의 이미지는 괘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유태인은 결코 그와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랫동안 유태인을 유태인가에 처박아 놓고 밖에서 안으로 찾아들 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유태인은 독특한 계율이라든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다. 독특하기 때문에 폐쇄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니 않은가? 게다가 유태교는 종교인 동시에 유태인 생활의 전부인 것이다.

유태인의 종교의식이나 생활을 보고 싶으면 외국에 나가는 길에 호텔 가까이 잇는 시나고그 synagogue 에 가보면 된다. 기꺼이 보여 줄 것이다. (도쿄에도 하나 있다). 유태인 가운데에는 당신을 가정에 초대해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유태인은 이름만 보면 바로 알 수가 있다고 비법 아는 체하는 사림도 있다. 그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유럽의 유태인이 어떻게 해서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알고 잇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제2장에 잠깐 언급해 놓았다). 그렇더라도 이름난 봐도 당장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겠다. 유태인이 세계를 정복할 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유포된 <시온의 의정서 의정서>를 주된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시온의 의정서>에 의하면 1897년에 스위스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유태인이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 비밀회의가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이전에도 세계의 유태인 대표가 프라하의 유태인 묘지에서 1백 년 간에 1회 정기적으로 세계지배를 꾀하는 회의를 가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것은 반유태인주의를 정책으로 하고 잇는 제정 러시아 정부의 비밀경찰에 의해 날조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유태인은 세계를 지배하려고도, 도는 세계를 유태화하려고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첫째 유태교에는 선교사가 없다. 유태인은 오랫동안, 하느님에게 선택된 민족으로써 자기 민족만이 자기들의 신의 명령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을 뿐이며 다른 민족에게 유태교를 강요하거나 팔아 넘기려고는 하지 않았다. 만약 유태인이 세계 정복을 노리고 있었더라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세계 정복계획도 있었을는지 모른다.

유태인 격언은 유태인의 지혜를 결정 結晶 시킨 분말과 같은 것이다. 먼저 맛을 보고 난 뒤에 만약 그 맛이 마음에 든다면 일상생활에 놓고 직장이나 가정에서 매일 마음껏 뿌려 사용해 주길 바란다. 유태인의 힘을 나누어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2  돈 金錢 의 가치 價値

 

√  돈이 많이 든 지갑이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텅 빈 지갑은 좋지 않다

“빈 것은 빈 것인데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빈 지갑이다.”

“물건이 가득찬 자루는 무겁다. 그러나 빈 자루 쪽이 더 무겁다.” 라는 속담도 있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돈에 대한 속담이라든가 잠언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너무나 많다. 돈은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돈, 돈, 돈, 우리들은 돈 없이는 도저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돈, 금, 돈, “<성서>는 빛을 던지고 돈은 온기 溫氣를 던진다.”

이런 것은 어떨까?

“이 세상에는 세 가지의 중대한 것이 있다. 돈, 돈, 돈”

돈은 중요하다

“돈은 아무리 더러운 때도 깨끗이 벗겨내는 비누이다.”

돈의 힘은 한정이 없다.

“금화가 소리를 내면 욕이 가라앉는다.”

돈은 지갑이 무거운 것만큼 가볍다.

“무거운 지갑을 무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탈무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몸은 마음에 의존하고 마음은 지갑에 의존하고 있다.”

유태인은 신이 날 때 “아이, 이, 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힘들 때는 “오이, 오이, 오이”라고 한다.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언제나 아이, 이, 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언제까지나 오이, 오이, 오이이다.

말하면 잔소리겠지만, 돈이란 정말 좋은 것이다. 도학자 道學者 연하여 돈이 더럽다거나 인간을 타락시킨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두자. 돈은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다. 그 돈에 의해 타락할 만큼 약한 인간이어서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  돈이 저주 받아야 할 이유도 없고 돈이 악 惡 또한 아니다. 돈은 인간을 축복하는 것이다

부호 富豪와 현인 賢人과 어느 쪽이 더 위대할까? 라고 어느 라비의 제자들이 생각해 보았지만 그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한 제자가  라비 에게 물어 보았다.

“물론 현인이지.”

라비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그런데 라비 님, 그렇다면 왜 큰 부잣집에는 학자나 현인들이 많이 드나드는데 현인의 집에는 부호들이 드나들지를 않습니까?”

그러자 라비가 제자에게 말했다.

“나의 제자들이여. 현인은 똑똑하기 때문에 부가 필요한 것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부자는 단지 돈만 가지고 있을 뿐 현인으로부터 지혜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돈은 무자비한 군주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유익한 종이기도 하다

다른 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역사를 만들고 있을 동안 유태인은 그늘에서 줄곧 박해를 받고 있어야만 했다. 유태인은 유태인가에 처박혀져 법률에 의해 토지를 소유할 수도 또는 제조업에 종사할 수도 없게 되었다. 또한 살고 있는 유태인가에서 언제 추방당할는지도 알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자기의 나라를 갖고 있는 민족이라면 자기 나라에 있는 동안 나무, 또는 내 川 를 자기와 가까운 것으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유태인에게는 그렇게는 생각되질 않는다. 그것은 길고도 슬픈 역사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유태인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에 기댈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오직 돈이었다.

그런데다가 원래 유태인은 그리스도 신자와 같이 돈을 멸시하거나 죄악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돈은 사용 방법에 따라서는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되는 것이다. 돈 그 자체에는 책임이 있을 수 없다.

‘돈은 기회를 제공한다’ 는 것으로 유태인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돈은 인간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유태인은 돈을 좋다거나 도는 나쁘다고 말하질 않는다. 돈이 있으면 인생에 이어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이름에 있어서도 그렇다. 유럽의 유태인이 이름 – 성 성을 갖게 된 것은 약 1백 50년 전의 일이다. 그때까지는 이스라엘 수상인 다빗 벤 그리온 (그리온 아들의 다빗)과 같이 누구 자식의 어느 누구라고 하는 식의 이름이라든가 칸타 (歌手), 슈피겔 (거울집), 왈샤프스키, 클라인 (꼬마) 등과 같이 직업, 거주지, 외견상의 특징 등이 성명 대신 쓰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가 되자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프러시아 정부에 연이어 유태인 등록부를 만들기 위해 유태인에게 성을 가질 것을 강요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좋은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는 없었다. 각국 정부는 유태인으로부터 수탈하기 위해 이름을 팔았다. 좋은 이름은 비싼값에 그리고 좋지 않은 이름은 헐값으로.

비싼 이름에는 꽃이나 귀금속 명이 붙었다. 로젠타알(장미), 아이젠버그(철 鐵) 등등. 동물 이름에서 딴 울프슨(늑대) 등은 값이 쌌다. 힌터게시츠(볼기) – 도 주어졌지만 오늘날에는 개명 改名하여 이러한 이름은 불 수 없게 되었다.

단, 모든 나라에서 이름까지 돈으로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돈은 확실히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확실하다.

 

√  가지고 있는 물건을 필요로 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것은 상술이 아니다. 자기가 갖지 않은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것이 상술이다

엽총을 갖고 싶어하는 에스키모에게 자기가 구입해온 엽총을 파는 것은 참다운 비즈니스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일이다.

참다운 비즈니스란 자기가 제빙기 따위는 전연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제빙기가 전혀 필요 없는 에스키모에게 제빙기 여러 대를 팔아 넘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입한 사람이 만족하게 생각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장사의 길은 준엄한 것이다.

유태인은 중세 유럽에서 오랫동안 압박만 받았지 정업 정업 에 취업하기 못한 관계로 유태인가의 유태인 대부분이 브로커 가 되었다.

그들은 비즈니스의 준엄성에 의해 단련돼 왔다. 유태인가에는 없는 것을 권해 팔고 난 다음 다급하게 그 물건을 찾아나서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많다. 많은 유능한 비즈니스맨은 이와 같이 하여 생겨난 것이다.

 

√  돈을 벌기는 쉽다. 그러나 사용하는 방법이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돈을 어떻게 해서 벌어들이는가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돈을 잘 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인간이 돈의 주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돈에는 이상한 마력 魔力이 있다. 이 세상에 대개의 모든 물건은 사용함으로써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돈은 자기가 직접 만들어 보지 않고는 그 진가를 알 수가 없다.

비슷한 속담이 있다.

“돈을 갖고 있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사용법을 알고 있으면 더욱더 좋다.”

그러나 누구라도 돈이 전부가 아님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인간은 돈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일까?

“돈으론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단 좋은 취미 이외는” 이라든가 “돈이란 현인에게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예쁜 옷을 입혀 주는 역할 정도밖에 소용되지 않는다”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돈을 악 惡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유태인은 생각한다. 그것은 사람이 돈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돈은 선 善도, 악 惡도, 그리고 만능 萬能도 아니다. 선악의 판단은 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유태인은, 이 책 속에서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지만 중용 中庸일 것, 즉 생활에서 균형이 잡혀 있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 균형 가운데에서도 돈에 관한 균형을 잡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정말로 어려운 말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돈을 <다리 足>라고 한다.

유태인의 속담에도 비슷한 발상이 있다.

“은화는 둥글다. 이쪽으로 굴러오는가 싶으면 곧 또 저쪽으로 굴러가 버리고 만다”

우리들은 매일 돈을 쫓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그 밖에 쫓아야 할 것이 많은 것이다.

 

√  돈은 모든 것을 좋게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돈이 모든 것을 부패시키지도 않는다

돈은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돈이 인생의 모든 면을 밝게 하거나 빛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돈은 수단의 하나이지 목적은 아니다. 인간답다고 하는 것은 돈에 지배되지 않고 돈을 지배하는 일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 <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인간이 지상을 지배하고 인간이 지상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세계를 인간에게 부여해 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돈은 인간보다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유감스럽다.

또 한 편에서는 돈을 필요 이상으로 천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돈은 사용방법만 좋으면 정말 좋은 것이고 사용방법이 나쁘면 돈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다만 사용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돈은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돈이란 더러운 것이니 관심이 없노라고 결백을 내세우고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다. (단 유태인은 그런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도 따지고 보면 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옳고 돈이 많은 사람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미드럿슈>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두 사람의 사나이가 당신 앞에 나타나서 각기 다른 말을 했다고 가정하자. 그 중 한 사람은 부자이고 또 하나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때, 당신은 어느 사람을 믿을 것인가? 답은 부자라고 해서 거짓말을 한다고만 은 할 수 없듯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옳다고 할 수 없다. 도한 이 반대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  돌과 같은 마음은 황금 黃金 의 끌로써만 열 수 있다

이것은 돈의 위력에 관한 속담이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사회에서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은 실로 크다 하겠다.

돈은 모든 문을 연다고 생각한다.

집안에 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느 편이 좋을까?

“집안에 돈이 있으면, 집안에는 평화가 있다.”

확실히 돈이 있는 편이 집안에 평화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돈이 없는 집안에는 불평이나 다툼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1565년에 출판된 <유태인율령집>은 “인간은 본성으로 부를 축적할 것을 희구한다” 라고 적혀 있지만 이것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 國富論>을 쓰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유태인은 오랫동안 돈에 대해 생각해 왔다. 그것은 돈은 인생 최대의 문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삐나 거리에 나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설교하느니보다 10달러를 건네주는 편이 훨씬 효과가 있다. 돈을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한 가지 차이는 사람은 돈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  부자를 칭찬하는 사람은 부자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가진 돈을 칭찬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올라 있는 사람을 그렇지 못한 사람이 공경할 때는 그 사람을 공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권력이나 지위에 대해 경의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나이 두 사람이 어느 날 라비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그 고울에서 제일가는 갑부이고 또 한 사람은 가난한 사나이였다.

두 사람은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갑부가 조금 일찍 왔으므로 먼저 라비의 방으로 안내됐다. 그 후 한 시간쯤 지나자 갑부는 라비의 방에서 나왔다.

가난한 사나이가 다음 차례여서 라비 방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가난한 사나이와의 면담은 단 5분으로 끝났다. 그러자 가난한 사나이가 라비에게 항의했다.

“라비님? 갑부와의 면담은 당신께서 한 시간 동안이나 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5분입니다. 그게 공평한 것입니까?”

사나이의 항의를 받은 라비는 바로 대답했다.

“나의 형제여! 당신의 경우엔 가난한 것을 당장 알아차렸지만, 그 갑부는 자기의 마음이 가난한 것을 깨닫기까지 한 시간이나 걸렸단 말이오.”

 

√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들이 없다. 오직 상속인만 있을 뿐이다

돈은 옛날부터 금이나 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원래 차디찬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는 여름에 동전에 손을 대보라, 동전은 냉기가 돌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줄곧 손에 꼭 쥐고 있어 동전에 사람의 따뜻함을 전한다.

부자는 금고나 은행에 돈을 잔뜩 저장해 둔다. 그 돈은 사람들의 손에 좀처럼 닿을 기회가 없으므로 돈 자체의 차가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돈은 그 주인에 따라 온기 溫氣가 돌거나 냉기 冷氣가 감돌게 된다. 돈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다.

부자는 돈에 묻혀 있으므로 금, 은이 지니는 냉기가 자기 자신이나 가족에게 옮겨지는 경우가 많다. 금, 은에 의하여 피 血과 마음이 차가워지게 된다.

 

그런 관계로 돈이 많은 사람은 자식이 있어도 그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오직 상속인일 따름이라고 한다.

 

√  재산이 많은 사람은 거기에 따른 근심도 많지만 재산이 없는 사람은 근심이 더욱 많다

그리스도 신자는 돈이나 물질을 천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것을 경원한다.

가톨릭 신부를 보면 가난을 상징하는 검은 옷과 흰 칼라를 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가톨릭에서도 세계의 가치관의 변화에 맞추어 결혼하는 승려가 나타나거나 흰 칼라와 검은 복장을 착용하지 않고 보통 신사복을 입은 신부가 늘어났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에서는 돈이라든가 물건을 많이 갖는 것을 죄악시하고 있는데 때로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에 있어서의 사치를 즐기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스도교는 돈이라든가 부를 멸시하는 것일까? 청빈 淸貧 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는 미덕 美德으로 되어 있다. 얼마만큼, 돈이라든가 섹스라든가 물질에 의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가가 그리스도교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나 쾌락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나 쾌락이 너무 가까이 있게 되면 자기들이 지배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나 유태인은 항시 과도 過度한 것을 경고하는 것이 율법에 의해 자기에게 규율을 가하고 있으므로 부나 쾌락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율법에 의해 규율 바르게 확립하고 있으므로 부나 쾌락을 스스로 지배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탈무드>는 “바다의 가장자리에 서는 자는 다리를 꼭 붙이고 서 있으면 파도에 휩쓸릴 리가 없다. 그러나 다리가 불안하면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돈과 섹스에 대한 멸시로 말미암아 충분한 자산을 만들지 않거나 인생에 있어서의 즐거움을 놓치고 만 사람이 그 얼마나 될까? 이것도 인간이 자기에게 자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  가난이 수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예 名譽로는 착각하지 말라

유태인은 그리스도교에서나 또한 동양에서와 같이, 청빈 淸貧이란 관념은 없다. 유태인은 돈을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돈은 기회를 제공한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이 있으므로 해서 많은 것을 실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난은 시 詩 속에서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집안에서는 추한 것이다. 설교 說敎에 사용되면 – 유태인은 가난을 찬양하는 설교는 하지 않는다 – 깨끗한 것으로 들리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비참한 것이다.

돈을 칭송해서는 안 되지만 멸시해서도 안 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교가 돈을 더러운 것으로 또는 죄악시하고 잇는 것을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은 더럽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다. 돈은 인간생활의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돈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도구이므로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훨씬 낫다. 그 돈이라는 도루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소유한 사람의 지성 知性과 지혜에 의한다.

 

√  돈은 좋은 사람에겐 좋은 결과를 주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결과를 준다

유태인은 그리스도교와 같이 육체 肉體에다 특별한 높은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체는 육욕 肉慾의 원천 源泉이며 따라서 육체는 죄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유태인은 육체를 정신을 담아두는 그릇이니 소중히 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육체 그 자체가 죄를 범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유태인의 행동도 같은 것이다. 돈은 그 자체가 좋은 짓도 나쁜 짓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도는 줄곧 돈을 악 惡이라고 생각하여 죄악시 해왔다.

이와 같은 견해는 유태인에게는 그들이 자신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육체나 돈이 인간보다도 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육체나 돈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써 지나치게 이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  돈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옷이 인간에게 베푸는 것과 같을 뿐이다

돈은 과연 만능일까? 돈이 만능이라면 의복도 만능이다.

돈이 제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제 아무리 값비싼 아름다운 의복으로 자기를 감싸더라도 의복이 인간의 마음까지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自身 뿐인 것이다.

물질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돈을 숭배하는 자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은 물질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숭배하고 있는 것에 되도록 가까이 가려고 마음먹고 동시에 거기에 동화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물질을 숭배하는 자는 자기도 물질이 돼버리고 만다. 인간은 돈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었기 때문에 돈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양복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의복이 인간을 필요로 한다면 인간은 옷걸이가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  빚을 지는 것은 가려운 데를 긁는 것과 같다

피부병에 걸리거나 종기가 나게 되면 그곳이 가렵다. 가려운 곳을 긁기만 한다고 낫는 것은 아니다.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은 그 때문이거나 때에 따라서는 질환을 악화시킨다. 긁게 되면 그 당장에는 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때만 얼버무릴 수가 있을 뿐이다.

빚을 얻는다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빚을 얻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역시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가난한 사람에게서 돈을 빌리는 것은 추한 여자와 키스하는 것과 같다

유태인은 오랫동안 가난했으므로 돈을 서로 융통해 썼다. 그 때문에 돈을 빌고 빌리고 하는 데 대한 속담이 많다.

이 속담에 대해서 새삼스런 설명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돈을 차용 借用하는 데 관한 유태의 속담에는 돈을 꾸거나 꿔주는 데 대한 가르침보다는 돈을 꾸는 그 자체 自體가 좋은 일이 못되므로 이의 경고가 많다. 유태인은 중세의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돈을 무조건 더러운 것으로 규정해서 멸시하거나 돈을 꿔주고 받은 이자를 나쁘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다.

나는 이 책에서 유태인과 그리스도교도의 금전과 섹스에 대한 문제를 서로 비교했지만 돈이나 섹스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꼭 소용이 되는 것이다. 유태인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쁜 것일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유태인에게 돈놀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그리스도교회가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는 것을 금 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을 빌거나 빌려주는 일이 결코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돈을 빌거나 빌려주는 것만큼 불유쾌한 일은 없다.

“친구를 적 적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빌려주는 일이다”

이 속담을 우리는 명심해야겠다.

 

√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녀는 비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매춘부 賣春婦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성서>를 읽어 보더라도 매춘부는 빈번이 나오게 되며 또한 중세의 유태인가에도 매춘부는 많았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유태인도 노력한 보람이 나타나 모두가 풍족하게 살고 있으므로 유태인 매춘부를 발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녀가 “어머, 비가 오네요”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매춘부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도 감수한다는 뜻이다.

꼭 매춘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돈이라면 갖은 나쁜 짓도 서슴지 않고 하는 인간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우화적 寓話的 으로 하는 말이다. 1달러를 주고 얼굴에 침을 뱉고는,

“비가 오는데” 한다면,

“글쎄요, 비가 오는군요” 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만약 그 돈이 1달러가 아니고 1천 달러나, 혹은 1만 달러라면 당신은 어쩌겠는가?

 

√  돈을 꿔줄 때는 증인 증인을 세워라. 그러나 자선을 베풀 때는 다른 사람 모르게 하라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라비 앗시는 언젠가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게 되었다. 그 아는 사람은 차용증을 쓰고 증인을 세워 서명 서명 해 달라고 요구했다. 라비 앗시는 놀라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합니까? 나는 율법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그 권위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라비가 말하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걱정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당신은 율법공부만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율법으로 가득 차 돈을 꾼 것을 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또한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라비가 거리를 지나다 거지에게 돈을 주었다. 그것을 본 또 한 사람의 라비가 말했다.

“그처럼 사람들 앞에서 돈을 주려면 주지 않는 편이 낫소.”

더 나아가 <탈무드>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남에게 물질을 베푸는 자는 모세보다도 위대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언 附言

“많은 수입만큼 좋은 약은 없다”

“지식이 과분하면 사람은 늙지만 돈이 과분하면 사람은 젊어진다.”

“돈이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으면 무척 귀중해 보인다.”

“돈은 어떠한 문도 열 수 있다. 돈은 황금의 열쇠인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의-식-주 외에 돈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돈이 당신을 사랑해야만 가능하다.”

“자기가 갖고 있는 돈을 벌 수 있을까. 벌 수 있다. 쓰지 않으면 된다.”

“부자가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내일 할 일을 오늘 하고 오늘 먹을 것을 내일 먹는 것이다.”

“겨울에 땔 나무를 사야 할 돈을 여름에 노는 데 쓰지 말라.”

“아무도 개처럼 가난해지는 일은 없으며 돼지처럼 부자가 되는 일도 없다.”

“부자가 굶을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의사가 굶으라고 했을 때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이 적으며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친구가 적다.”

“돈으로써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식이다.”

“만약에 부자가 돈을 가지고 자기 대신 죽을 사람을 살 수가 있다면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금은 가장 유능한 브로커이다”

“상인이 되거든 이 말을 기억하라. 나는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현금으로 지불해 주십시오” <탈무드>

“절약 하지 않은 상인은 털이 안 난 양과 같은 것이다.”

“곰이 아직 숲 속에 있을 때 그 가죽을 팔아서는 안 된다.”

 “꾼 돈을 갚는 사람은 신용을 배로 한다.”

“꾼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은 도둑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떠한 차용금도 입구는 넓으나 출구는 좁다.”

“고기를 먹고 빚쟁이를 피해 다니느니보다는 채소를 먹고 당당히 시내를 걸어 다닐 수 있는 편이 훨씬 낫다.”

“꿀 때 웃지 말라. 만약 웃으면 갚을 때는 울게 된다.”

“남에게 돈을 꿔 주고 그 사람이 정말 갚을 길이 없음을 알게 되거든 그 집 근처엔 가선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은 사계절밖에는 고생하지 않는다. 즉, 춘, 하, 추, 동 이다.”

“의학은 가난 이외는 뭐든지 고칠 수가 있다.”

“가난을 견딜 수 있는 미모 美貌란 없다.”

“밭에 돈을 뿌리면 어리석은 자를 거두게 된다.”

 

 

3  마음의 양식

4  가르침의 길

5  남자와 여자 사이

6  구설 口舌 의 화 禍

7  사교술

8  생활 生活의 지혜 智慧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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