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IMG-31-208x300하루 한 순간을

홍윤숙 저

 

성바오로출판사

 

 

 

 

 

책 머리에

 

호도(胡桃)를 까는 마음

 

1960년 대를 휩쓸었던 로크 음악을 우리는 지금도 기억한다. 샌프란시스코우에서 기아에 허덕이던 불쌍한 어린이에게 바쳐졌던 한 무명 작곡가의 로크 <샌프란시스코우>가 전미국의 히피들을 열광케 했던 일도 어제 같다.

흑인음악에 반발하여 일어났던 미국의 현대 대중음악이 열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로크도 이젠 퇴색하고 다시 쏠과 싸이키의 시대로 전환한 지도 오래다.

물론 나는 음악에 대해선 전혀 문외한이지만 이 현상을 흑인음악에서 시작했던 미국의 현대 대중음악이 로크를 거쳐 다시 그 발상지인 흑인음악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표현한다면 터무니 없는 잘못일까.

한 때, 우리의 고유한 의상인 한복이 나일론 만능의 물결을 타고 버선에서 속옷에 이르기까지 나일론 일색의 가관을 이룬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뜻있는 이들의 의장 속에는 옛날 우리네 어머니들이 사랑하시던 주사, 고사, 갑사, 모시옷들이 또다시 장만되어 갔으며, 잃어버렸던 고전의 아쉬움을 되찾아 보려는 아름다운 정서가 소생하고 있다.

나는 왜 이런 부질 없는 이야기들을 열거하고 있는 걸까. 세계는 날로 변하고, 땅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로크 이건 쏠이건 싸이키이건 또 나일론이건 모두가 지나가는 것들이다. 잠시 지나가는 물결 같은 것들이다. 그렇게 지나가는 것들을 우리의 전부인 양 매달릴 수는 없다. 지나가지 않는 것, 거기 머물러 있는 불변의 것, 그런 것을 찾아보고 싶다.

겨울이 오면 눈(雪)을 생각하고 여름이 오면 바다를 그리워하는 변함 없는 인정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 타는 촛불이 되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기도를 잊지 않는 본연의 모습을.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회귀(回歸)의 순례 길을, 영원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다.

하루 한 순간도 아껴, 주어진 시간에 순명(順命)하며 어떻게 생명을 쓸(使用) 것인가 생각하고 싶다.

신(神)은 우리에게 호도(胡桃)알을 주셨지만 그것을 깨뜨려 주시지는 않는다.

땅 위에 떨어져 굴러가는 호도알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하루, 어느 하루인들 우리는 진심으로 그 호도알의 껍질을 깨뜨리는 노고를 기울인 날이 있었던가.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행복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것을 발견하는 기쁨, 이용하는 자유를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신다.

손안의 호도알도 까야만 먹을 수 있는 것이니, 여기 그 한 알의 호도를 까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 모았다.

끝으로 이 책을 펴내주신 성 바오로 출판사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차례

 

책 머리에

I 만남과 약속

  • 이 세상, 最良의 것
    모순과 背律의 혼돈
    그 이중의 얼굴, 선인가 악인가
    여자, 그 불변의 영원성
    사랑의 고전
    만남과 약속
    생명의 향연
    에로스와 프쉬케
    사랑의 조건
    사랑의 性과 成
    우리의 여름은 끝없이 긴가
    漁夫 王과 쿠마의 巫女
    빠져버리는가, 남는가
    젊음을 사는 지혜
    밟히고 잊혀지는 하나의 길
    이 세상에 행하여진 가장 용감한 싸움
    밟히고 잊혀지는 하나의 길
    오직 그 곁에 살아있어 주는 일뿐
    잃어가는 어머니, 잃어가는 자식

II 모든 길의 마지막에

  • 욕망을 걸러내는 체
    인생은 신이 쓴 동화
    그의 요람(搖籃)에 잠드는 욕망
    모든 길의 마지막에
    신은 잔인하였다
    십자가(십자가)에 못박은 신의 자비
    모든 길의 마지막에
    하늘의 저울대
    아나톨 프랑스의 사제와 목서초(木犀草)
    하강(下降)의 고뇌(苦惱) 없이는
    이 세상 먼지 하나도
    갈빗대 하나의 여자(女子)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바닷가에 버려진 아리아도네 공주
    물과 흙이 만나는 이 세상 인연
    우리가 걱정할 일
    행복과 사는 보람
    일상(日常)이라는 이름의 불행(不幸)
    행복과 불행의 차이
    황해를 건너는 욕망의 배
    여자의 행복 그 실체
    끊임 없는 감동과 의미 발견
    그 이름 없이 작은 행복의 조각들
    남편, 자식, 그리고 거울 속에
    슬픔을 이기는 약
    나의 평화(平和), 나의 기쁨
    아들의 대답
    어머니의 푸념과 딸의 엄살
    다섯을 주면 다섯만큼의 평화
    사랑과 죽음의 동의어(同義語)

III 일(一) 달란트의 우화(偶話)

  • 희망의 이름
    한 송이 장미
    내가 나의 기쁨을 만날 때
    자유에의 길
    란(蘭)의 외로움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인생(人生)의 고의(故意)
    두 개의 한국(韓國)
    이름 없는 피해자(被害者)들
    어린 의지(意志)
    득실(得失) 상반(相反)
    잃어버린 길
    일(일) 달란튼의 우화(偶話)
    착각(錯覺)의 공해(公害)
    정의(正義)의 행방(行方)
    인생(人生)의 수사학(修辭學)
    건망증(健忘症)
    이상(異常) 공항(空港)
    양식(良識)의 부재(不在)
    색안경(色眼鏡)
    사마천(司馬遷)의 기개(氣槪)
    눈과 귀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
    달의 신비는 가고
    레저, 그 침묵(沈默)의 상실(喪失)

IV 잃어버린 겨울

  • 솜사탕의 정물(靜物)
    잃어버린 겨울
    세모(歲暮)의 거리에서
    배율(排律)의 가을
    내가 그린 그림
    서울 유감(有感)
    가을 나그네
    한복(韓服)의 멋
    세모시 옥색치마
    여자(女子)가 잃어버린 <여자>
    사라져가는 선물의 기쁨
    자수정(紫水晶) 후련한 보라 빛 속에
    한 줌의 흙, 한 켤레 바가지
    아주 작은 일
    여성(女性) 실격(失格)
    그 반신(半身)의 이름은
    남성(男性), 그 벼랑같은 위엄(威嚴)
    영웅 호걸, 아담이여

V 파밭에 울던 그날

  • 겨울과 불
    그 뒷산엔 지금
    잃어버린 고향(故鄕)의 추석(秋夕)
    미류나무 환상(幻想)
    찔레꽃 덤불 속의 유년(幼年)
    납량(納凉) 여행(旅行)
    고향(故鄕)의 겨울
    파밭에 울던 그날
    사랑과 시(詩)와 전란(戰亂)과 결혼
    한 군의 시집(詩集)
    내가 받은 빨간 털목도리
    한 폭의 그림
    생(生)의 후반(後半)에 서서
     

 

 

I 만남과 약속

 

 

이 세상 最良의 것

 

왜 왔는가

목숨의 來意를

물으십니까

 

…. 하면

다만 알길 없어

망연히 고개 숙여

웃을 수 밖에

 

먼 길 걸어오기

그만 바빠서

젊은 날은

바늘허리 실매 쓰듯

허둥댔을 뿐

 

….

….

 

서른이

꽃잎처럼 아쉬워지는

사십의 싸늘한

고갯길에서

 

늦지야 않았으리

十一月 찬 서리에 홀로 피는

염향의 菊花, 菊花꽃인양

조용히 하늘가에

서보는 마음

(問答)

 

 

 

矛盾과 背律의 혼돈

 오척 단신(五尺短身)의 작은 생명체 안에 삶과 죽음을, 긍정과 부정을, 영원과 찰나(刹那)를, 빛과 그림자처럼 지니고 태어난 인간. 인간이란 도시 무엇일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무엇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일까. 이러한 시원적(始原的)인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일이란 도시 벅차고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겨울날 밤, 따뜻한 방에 난로 불이 발갛게 불붙고 있었다. 잠시 더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었을 때, 눈보라 치는 찬 바람을 안고 한 마리 이름 모를 새가 어디선지 갑자기 날아들어 왔다. 새는 겁에 질린 듯 잠시 온 방을 푸드득거리다 이내 좁은 문틈으로 날아가 버렸다. 춥고 얼어붙은 겨울 하늘로.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고 있던 임금님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그대들 말하라

저 새는 하나의 비유가 아니겠는가

어둠에서 와서 어둠으로 사라졌다

지극히 짧은 순간 빛 속에 있었다

그처럼 우리도 왔다가 자취 없이 떠나거니

빛 속에 있는 것을 지극히 짧은 순간인 것을.

 

이것은 헷세의 시, 전설(傳說)의 일부를 풀어본 이야기다. 한 마리 새가 잠시나마 따뜻한 불빛에 몸을 녹인 것은 불과 2, 3분, 다시 지척도 없는 세상으로 몸을 던졌다. 인간도 어쩌면 한 마리 새와 같은 것. 한 치의 앞길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해 발돋움하며 떨고 있다. 기실 이 어려운 해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고금(古今)의 서적을 뒤적이고 종교의 문을 두드려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인간이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부터가 하나의 질문(質問)이었다. 때문에 인류역사가 시작한 그날부터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질문을 향해 끊임 없이 던져져 왔던 것이다.

불과 잠시 동안 빛을 누리다 어둠 속에 사라지고, 수유(須臾)의 생을 영원한 죽음으로 대치해야 하는 인간의 유한성, 그 슬픈 존재의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기원(祈願)을 걸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득 차기를 원하며 또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는 충족을 희구하는 것이다.

희랍신화의 에뤼식톤 왕(王)은 텟살리 주(州)의 임금이었다. 테메테르 사당 둘레의 숲을 찍어내어 그 재목으로 자신의 궁전을 지었다. 그 숲속에는 특히 신성한, 커다란 밤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왕은 신하들이 말리는 말을 듣지 않고 그 밤나무마저 찍어 내게 했다.

이에 노한 여신(女神)은 에뤼식톤 왕에게 벌을 내리어 기갈병(飢渴病)에 걸리게 했다. 왕은 기갈병으로 하여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고통에 시달린다. 대대로 내려온 곡창의 쌀을 죄다 풀어먹고, 집과 땅을 팔아먹고, 마지막 남은 딸 하나마저 팔아 먹는다. 그러나 배고픈 기갈병은 낫지 않는다. 고통에 시달리는 에뤼식톤 왕은 마침내 자신의 살을 베어 먹기 시작하고, 이윽고 는 죽어버리고 만다.

누가 말했던가. 인간은 스스로 만든 가스실(室)에 스스로 양연히 고개를 쳐들고 걸어 들어가는 배리(背理)의 모순체라고. 진실로 슬픈 인간의 실존(實存), 자신의 생명에 자신이 곡(哭)을 올려야 하는 운명의 조객(弔客)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 다시 말하여 사람의 생명을 몇 만 줄기의 불꽃이라 가상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불길을 한 가닥 한 가닥씩 꺼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마지막 불길마저 꺼져버리고 생명은 캄캄한 어둠 속, 다시는 문 열 수 없는 밀실(密室)로 사라질 것이다.

 

 

그 이중의 얼굴, 善인가 惡인가

 그러나 인간은 절망할 수 없는 실존이다. 아니 보다 더 절망할 수조차도 없이 약한 실존이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약하기 때문에 삶을 이어가고, 약하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미지(未知)의 내일을 기다리고, 희망에 매어 달려 가이 없는 꿈을 꾸는 것도 기실은 우리가 모두 약하기 때문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암담한 어둠 속에서도 때문에 우리는 터무니 없는 공상가가 되며, 안일한 향락자가 되며, 염치 없는 욕심장이가 된다.

나는 무엇일까?

한 마리 뱀의 유혹에 이끌려 그토록 지엄한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에와, 호기심 많고 유혹에 약한 ‘여자’인 ‘나’의 본성은 기실 악(惡)인가 선(善)인가. 어쩌면 근원부터 악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던가.

거리를 걷다가 또는 앉았다가 나는 문득 주위의 사람을 의식한다. 누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까닭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한편, 내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는 누구든 나를 보아주기 바라는 뱀 같은 얼굴도 숨어 있다. 이 이중의 얼굴을 가진 나는 무엇일까?

창 너머 바라 뵈는 남의 집 불빛은 유난히 밝고 따스해 보이며, 먼 곳의 불빛일수록 더욱 가슴을 설레게 한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선망하는 나는 무엇일까?

때로 불 같은 사랑에 온 몸을 태우는가 하면, 죽음 같은 미움으로 가슴이 어는, 그 요사스런 변덕은 또 무엇일까?

모든 곳으로 나의 사닥다리는 걸려 있으며 그 중의 한 사닥다리를 나는 올라간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나는 비로소 잘못 선택한 길에 실망하고 후회한다. 항상 그것의 되풀이다. 우둔한 실패와 후회를 거듭하는 나는 무엇일까?

한 손에 황금을 다른 손에 명성을, 그리고 한 가슴에 사랑을 꽃피우며, 탄탄한 대지에 두 발을 디디고 백 세까지 젊음을 누리기 원하는 염치없는 탐욕의 나는 무엇일까?

엎지른 물을 주어 담듯이 밤은 나에게 소리 없는 태형으로 채찍질하고, 낮은 다시 갈피 없는 천(千)의 얼굴로 나를 위장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발 돋음 하며,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여 탄식하는 환상의 악기(樂器), 창을 향해 서면 비상을 꿈꾸고, 먼 기적소리엔 번번이 출분(出奔)을 생각하는 정신의 가출아(家出兒).

때로 홀연히 독(毒)을 마시고, 온 몸에 퍼지는 감미로운 독기(毒氣)에 스스로 눈감는 위험한 유희에 황홀하고, 채워지지 않는 공복의 굶주림을 안고 가을의 마지막 시간까지 익기를 기다리며 섰는 사과나무의 고독한 대망(大望)도 내 안에 있다.

내일을 위한 도약(跳躍) 속에 있으면서 어제에 미련(未練)하고,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면서 여름을 나태(懶怠)하는, 모순과 배율(排律)의 갈피 없는 의지(意志).

곧 나의 안은 온갖 부조리(不條理)와 미망(未亡)의 동굴인 것을, 나는 그 미망을 슬퍼하지도 않거니와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고 연민한다. 마치 독버섯 속에 취해 있는 한 마리 개미처럼 측은하고 민망한 나를.

나는 무엇일까?

 

 

女子, 그 不變의 永遠性

 모든 것이 가변적(可變的)이며 배율적인 내 안에서 그러나 나를 지주(支柱)하는 불변의 영원성을 나는 또 발견한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이렇게 에덴 동산 한복판 어디쯤엔가에 있었을 지혜의 사과나무 열매를 따먹은 인간은, 천상의 낙원을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인간이 지은 최초의 작죄(作罪)에 뜨거운 연민과 찬탄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만일 지혜의 열매를 먹지 않았던들 인간은 ‘완전하고 천진난만하고 어리석고 성스럽고 그래서 바보같이 행복된 상태로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으리라. 지금도 그렇게 어리석게 살고 있으리라.

욕망도 희망도 사랑도 미움도 슬픔도 기쁨도 분명치 않은 인생, 그것은 무서운 공허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지혜와 인식이 없는 세계에서, 선과 악이 없는 세계에서, 신(神)에의 인지(認知)나 열망인들 또한 있을 수 있을까. 진실로 낙원을 잃고 얻은 지혜와 인식은 생명의 제 2의 탄생이며 기쁨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보다 더 실락원(失樂園)에 이르러 여인에게 주어진 형벌, 분만(分娩)의 고통은 우리가 짊어진 무류(無類)의 형벌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은혜롭고 완미(完美)한 희열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유대의 율법(律法)학자는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음’ (로마서 5.12)을 통탄하여, ‘죄가 시작한 것은 모성에서부터이며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하는 것도 여자 때문이다. 어떠한 악(惡)도 여자의 악의 깊이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집회서 25.13-24참조)고 가혹하고도 통렬한 매도(罵倒)를 퍼붓고는 있지만 그러나 어찌하랴, 그러는 그들 자신도 기실은 여자의 가랑이 밑으로 나온 자들임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을. 보다 더 그들이 ‘그 한사람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세상에 탄생하였고, 일월(日月)의 밝은 빛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것을 어찌 부인할 것인가.

참으로 여자에게 주어진 무류의 형벌, 그 고통과 환희의 어느 부분을 세상의 남자들은 안단 말인가. 작은 한 몸에 죽음과 부활을 잉태하여 지고지순(至高至順)한 모성의 완덕(完德)을 배우지 않고 터득해 가는 그 슬기로운 유혈의 고투(苦鬪)를.

모성은 신의 전능(全能)한 걸작이었다.

이 세상에 한 요람(搖籃)으로서 그는 가장 비옥하고 절묘하고 자비한 모성을 지상에 보내셨다.

그 위에는 신(神) 밖에 없고 그 아래엔 신 아닌 일체의 것이 있는 그래서 신과 신 아닌 것의 중간에서 우리를 용서하고 굽어보며 자애로 목욕시키는 생명의 요람. 그 안에 무수한 신성(神性)을 방불케 하는 완덕의 모상(母像).

하여 모든 모성은 스스로 어머니이며 또한 어머니일 수 있다는 인식 하나로 부릅뜬 눈과 돌같이 굳은 주먹을 유순히 풀고 무한한 사랑의 성(城)을 구축하는 기도와 인내를 알고 있다.

자신을 위해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끊임 없이 망설이는 방황도 어머니의 자리에 서면 결연한 빛으로 집중되고 응결되는 모성의 권위를.

나는 내 안에서 어머니의 자리를 마련하면서부터 경건하고 줄기차고 신비스런 생명의 소유자가 된다.

인간을 초월한 신성(神性)의 모상.

여자이기 때문에 유독 불행했던 일도, 유독 행복했던 일도 없다. 그러나 어머니이기 때문에 나는 행복했고 또 슬펐다.

나는 나무 중에도 꽃나무, 꽃나무 중에도 열매를 익게 하는 과실나무다. 나의 흔들리지 않는 목숨의 뿌리는 모성이며 바람타는 가지와 잎은 연연한 여성이다.

이윽고 대지(大地)에 씨를 뿌리고 돌아가는 낙조(落照) 속의 여인, 그 적막한 영광도 우리 안에 있다.

‘이 세상 최량(最良)의 것은 여자의 무릎에서 만들어진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한 마리 새와 같은 삶일지라도 한 순간 한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복 위에서 누가 무어라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최량(最良)의 것을 빚어 만드는 생명의 도공(陶工)임에 스스로 자긍(自矜)하며 또 다짐한다.

거듭, 내가 온 것은 이 세상에 한 그루 사과나무가 되어 가지마다 아픈 열매를 맺는 기다림과 유열(愉悅)을 알기 위해서다.

나의 추수는 오직 그것 뿐이다.

 

 

 

 

사랑의 古典

 

뜨거운 것은 아니올시다

불붙는 것은 더욱 아니올시다

 

높고 막은 것

겨울날 두터운 얼음장 밑에 고이는

파란 옹달샘같은 그러한 것이

나의 태양이었읍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미움 바치지 않고

잊히워버린 작은 灌木 처럼

살아온 나날

 

나는 마음 착한 소녀처럼

인내라는 험준한 戀人을 섬겨 왔읍니다.

 

季節이 가고

빗발이 창문을 두드리는 밤엔

눈 먼 여인처럼 지척거리는

마음의 고삐를 채찍질하며

당신의 무서운 형벌 앞에

나 엎드려 생각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풀을 길 없는

하나의 約束을

어찌할 수 없이 지켜야만 되는

무서운 約束을 주셨읍니까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죽어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그러한 懊惱스러운 約束을…

 

<하나의 約束을>

 

 

 

 

만남과 약속

 염열(熱)의 계절이 온다.

불같이 작열하는 태양 붉은 일년감처럼 익어서 터지는 태양이 도시를 태우고 바다를 태우고 젊음을 태운다.

벗은 살이 영근 석류알처럼 툭툭 벌어지고 무르익은 과실이 제 열에 못이겨 파열한다.

산에서,

바다에서,

전원(田園)에서,

밤과 낮, 새벽과 황혼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여름이 만삭의 몸으로 숨막히는 삼복(三伏)의 고개를 넘고 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아우성치는 생명의 소리, 그것은 불의 함성이요, 피의 용솟음이요, 터져 나오는 시원(始原)의 육성(肉聲)이다.

여름이 되면 나는 파도를 생각한다.

물결치는 파도 그 벌거벗은 나신(裸身)의 자유분방함을.

여름이 오면 나는 또 불을 생각한다.

불같이 발화(發火)하는 젊은이의 현란한 꿈을, 난숙한 육체를.

그리고 또 여름이 오면 나는 생각한다. 잃어버린 반신(半身)들이 짝을 찾아 헤매는 소리, 산과 바다에 넘치는 사랑의 메아리 소리를. 원시림의 사슴떼처럼 화려하고 날렵한 그들 사랑의 화음을.

여름은 젊은이의 계절이다.

혈기차고 성염(盛艶)한 젊은이들의 사랑의 계절. 그들은 분수 같은 자연의 화염(火焰)속에 기름처럼 스스로를 태운다. 밤을 새워 젊음을 태운다. 사랑의 진하고 아프고 감미로운 미약(媚藥)으로.

사랑!

그렇게 흔하고 그렇게 낡고, 그러면서도 항상 처음같이 신선하고 눈부신 사랑, 그것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의 박사’ 성(성) 아우구스띠누스 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선 사랑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또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에겐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할 수 없다.’ 고 말하고 있다. 기실 사랑을 설명하는 말은 오직 사랑 뿐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말도 사랑 뿐이다. 사랑을 다는 저울이 오직 저울 없이 사랑하는 일 뿐이듯.

‘최초에 관계가 있었다’ <부우버>

야훼와 아담, 아담과 에와, 다시 말하여 ‘너’와 ‘나’의 관계가 있었다. 이 ‘너’와 ‘나’의 관계는 바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야훼의 사랑에 의하여 아담이 태어났고 에와가 태어났다. 그 신의 모상(模像)인 아담과 에와의 관계는 곧 사랑의 관계였다. 하여 인류 최초의 관계는 사랑이었다. 바로 인간의 본질은 사랑인 것이다.

기실 사랑은 ‘너’와 ‘나’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이성이든 이웃이든 혈연이든 절대자이든 그것은 ‘나’에 대한 ‘너’의 관계다. 너를 떠난 나의 사랑이 성립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너’는 ‘나’ 와의 사랑의 관계 속에 최초서부터 계약되어 온 것이다. 때문에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망설이며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관계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생명의 뿌리다. 그것 없이는 낳지도 자라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명의 뿌리다. 사람의 가슴에 사랑의 견고한 뿌리가 내릴 때, 그 줄기에선 아름다움 싹이 트고 고귀한 꽃이 피어난다. ‘사랑하라, 그러면 무엇을 해도 좋다’ 고 아우구스띠누스 는 말한다. 그것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면 어떠한 악(惡)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키는 모든 일은 선이며 진리이며 미덕이다.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이 숨쉴 때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즐겁게 일한다. 어린아이를 가진 어머니를 보라. 기저귀를 빨고, 우유를 끓이고, 밤을 새워 지킨다. 마치 어린아이의 노예처럼 일한다. 기실 사랑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노예처럼 희생하고 봉사하며 자기를 바친다.

사랑은 너와 내가 서로 부르며 대답하는 영혼의 목소리다. 고독한 생의 광장에서 고독한 마음의 빈 자리를 서로에 의해 채워지기 원하는 너와 나의 관계다. 우리를 둘러 싼 말없는 침묵 속에서 생동하는 ‘말'(對話)을, 나의 부름에 대한 너의 분명한 응답을 듣는, 너와 나의 만남의 관계다. 때문에 사랑은 ‘나’에 집착하여, 다시 말하여 이기적인 자기 중심의 욕심에 의하여, ‘너’를 ‘나’의 내용이나 대상의 일부로 삼는 감정이 아니라, 나의 부름과 너의 응답에서 빛나는 화답(和答)을 얻고, 그 화답이 창조해 내는 새 생명을 얻는 기쁨이다. 기실 사랑은 창조의 행위인 것이다.

사랑의 기쁨은 고통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일은 내가 너를 내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뜻이다. ‘그는 어떤 성격의 사람일까, 그의 장점은 무엇일까,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렇게 그의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계산하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와 이해(利害)를 초월해서 그대로 그의 전인간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내 작은 가슴에 ‘너’의 전부를 싸 안는 사랑의 ‘무게’, 그것은 아픔이다. 너의 고통, 너의 짐이 나의 고통 나의 짐이 되는 일치의 아픔이며 곧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의 탄생이다. 하여 사랑이 깊고 클수록 그 무게의 아픔도 깊고 크다. 그리고 그 아픔 속에서 너와 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만나게 되고 굳게 맺어진다. 기실 사랑의 가장 큰 기쁨은 그 아픔을 이기는 고통이며 서로가 짊어지는 책임의 일치다. 그것이 진실한 사랑(아가페)이며 영속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욕망의 사랑(에로스)은 단명하여 계속이 없다. 그것은 처음 불꽃처럼 황홀하고 분수처럼 눈부시지만 이내 사라지는 빛이고 말라버리는 샘 이다. 거기엔 아픔이 없고 책임이 없다. 껍질처럼 적막한 후회가 남는다. 기실 욕망의 사랑은 사랑의 허상(虛像)이며 그림자다. 슬픈 사랑의 낙태아(落胎兒)다.

이 세상의 가장 무서운 지옥은 자신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괴로움이다. 스스로 사랑을 거부하는 영혼의 추운 상태다. 증오로 굳어버린 마음이다. 이 세상의 천국은 시들지 않는 사랑의 화원을 가꾸는 마음이다. 하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 무엇으로 사랑을 살 수 있을까.

‘당신은 빵을 사고 싶을 때 동전을 지불한다. 가구를 사고 싶을 때 은전을 지불한다. 그리고 토지를 사고 싶을 때 금전을 지불한다. 그러나 사랑을 사고 싶을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지불해야 한다. 사랑의 값은 당신이다.’

아우구스띠누스 의 말이다.진실로 사랑의 기법은 이것 뿐이다.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이 하나 뿐이다.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던져 불멸의 사랑을 샀던 것이다.

 

 

 

생명이 향연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리

기다리지 않아도 좋으리

 

우리는 地上에 떨어진 수만의 별들

제각기의 길을 가는 각각의 그림자

 

나와 더불어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살아 있다는

다만 살아 있다는 그것만으로

다행한 우리들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씨를 뿌려

가히 虛無의 열매를 거두며 살아 왔거니

서러워하지 말자 언제가 다시

邂逅의 약속 없음을

 

굳이 바래옵거니

時空을 넘어선 무상의 언덕 위에

무심히 마주 천 한 쌍의 銀杏이기를

 

久遠한 마음의 하늘, 수정의 바다를

머리에 이고

아득히 바라보는 바래움 없는 위치에서

묵묵 自盛하는 나무의 역사

 

살아 있음은 오직 하나의 榮光

우리 옆에 이웃 있음은 또 하나

다사한 기쁨

내 마음 줄 그 한 사람 있음에랴

크나큰 생명의 향연이어니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리

기다리지 않아도 좋으리

 

나와 더불어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살아 있다는

다만 살아 있다는 그것만으로

다행한 우리들

 

우리는 욕망의 밭에 핀 흰빛 허무를

거두며 살아온 무상의 園丁

서러워하지 말자 언젠가 다시

邂逅의 약속 없음을

 

(生命의 饗宴)

 

 

한 권의 양서(良書)를 얻음은 마음의 향연이요,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음은 인생의 불빛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하나의 그리움을 얻는다면 그것은 무엇이라 이를까. 어디에다 비길까.

타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는 그날이 그날같이 변함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멀리 차단 히 소슬한 바람인양 가슴 속에 그 하나만의 소리를 울려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또 한 번의 탄생이 아닐까. 황홀한 목숨의 환희…. 그리움은 바로 이 새로운 목숨의 발굴이리라.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며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그저 나와 더불어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살아 있다는, 다만 살아 있다는 그것만으로 다행한 우리들.’

그렇다, 서로 만나지도 말고, 서로 말하지도 말고, 피아(彼我)의 거리는 언제든 건널 수 있는 가능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강물의 이편과 저 편 같은 그러한 위치에서 허심 무욕하게 바라다 보는 한 가닥 따스한 눈길만을 머리 위에 느낄 수 있다면, 그 눈길 또한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담담한 인정으로 가득히 넘치는 한 잘 술처럼 익은 사람이라면…

흐린 날, 비 오는 날, 또는 첫눈 내리는 날, 예고 없이 찾아가 그의 창변에 선다면, 그 또한 그런 날을 못내 기다린 듯 문을 열고 반겨 맞아주며, 격하지 않은 눈길로 잠시 시공을 넘어선 무아의 경지에서 태초의 정적 같은 충만 된 희열에 잠길 수 있다면….

 

 

 

먼 後日 … 내가

유리병의 물처럼 맑아질 때

눈부신 소복으로

찾아 가리다

 

문은

조금만

열러 놓아 주십시오

 

잘 아는 노래의

첫 귀절처럼

가벼운 망설임의

문을 열면

당신은 그때 어디쯤에서

환히 눈 시린

銀白 의 머리를

들어 주실까

 

알 듯 모를 듯

아슴한 눈길

비가 서리고

 

난로엔

곱게 세월 묻은

주전자 하나

숭숭 물이 끓게 하십시오

 

손수 茶 한 잔

따라 주시고

가만한 웃음

흘려 주십시오

 

창밖에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그런 날 오후에

찾아 가리다

 

(訪問 I)

 

 

 

만일 이 세상에 끊이지 않는 요원의 불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들 인간의 마음에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한 줄기 뜨거운 그리움을 두고 말함이리라. 자연에의 인간에의 또는 학문에의 지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타고 또 타는 염원.

인간은 이 그리움으로 하여, 인간에의 학문에의 또는 신(神)에의 뜨겁고 연연한 그리움으로 하여 무수히 다치면서도 성장하고 원숙하고 또 슬기로와져 왔다.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이 시키는 모든 일을 하라.’ 누구의 말이던가. 주고 바치며 희생하는 사랑, 사랑이 시키는 일에 죄는 있을 수 없으니 원하는 모든 행위를 사랑의 이름으로 하라.

누구인지 알지 못할 그 한 분 창조주는 사랑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드셨다. 누구인지 알지 못할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누구인지 알지 못할 그 많은 여인들은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남자를 눈물로 섬기었다. 어머니는 자식을, 이웃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이 세상을 풍요로운 화원으로 가꾸려 했다.

우리는 잠시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생명이다. 그 사랑이 비록 주고 받지 못하는 무상(無償)의 봉사이며 ‘언젠가 다시 해후(邂逅)의 약속 없는’ 비련일지라도 사랑이 시키는 모든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사랑을 심은 그 누구인지 알지 못할 한 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오직 사랑에 있어서만 완성되는 것이며, 한 알의 열매는 그것을 맺게 하는 사랑의 죽음 없이는 이룰 수 없다.

생명의 구체적인 표현은 사랑이며 사랑의 궁극적인 희망은 생명이다. 하여 우리는 ‘만날 수 없어도 좋고, 기다리지 않아도 좋으니 나와 더불어 이 세상 어느 한 구성에 다만 살아 주기를, 나를 위해 살아있어 주기를’ 빌고 또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기실 내 안에 그를 영원히 살게 하는 불망(不忘)의 기념비(紀念碑)이다.

 

 

 

오래 품어

사슴같이 길러 온

말 한 마디

 

꽃잎으로 에워 싼

노란 암술 하나

한 가슴에 받들 듯

그렇게 긴 세월

남몰래 키워온 말입니다.

 

해와 달이 바뀌어 가는

日月의 窓밖에

사철의 꽃 빛이 스며드니

달랠 길 없이 차오르는 가슴

머리채 검고 눈빛 젖은

나이 찬 계집애로 자랐읍니다.

 

어느날 내가 당신 앞에

그 말 한 마디를 드리고 나면

나는 그만 하늘 끝에 닿아버린

저녁 해

까맣게 타버린 꽃씨입니다.

 

그 말 한 마디만이

그 가슴에 남아

부리 고운 사슴으로 살아 주기를

오래오래 향기되어 피어 주기를

 

나야 검게 영근 씨방 하나

가지에 남기고

곱게 저버릴

어느 저문날의 꽃잎이어도 좋은

말 한 마디.

 

 

(말 한 마디)

 

 

 

 

에로스와 프쉬케

 

‘나의 음식은 밤이나 낮이나 눈물 뿐이었다’ 고 시편(詩篇)의 작가도 인간의 고독한 영혼을 노래하고 있다.

무한대한 생명의 고독을 한정된 명예나 부귀, 권세나 영화 따위로 채울 수는 없다. 그것들은 오히려 더 큰 영예, 더 큰 부귀를 위해 목숨을 저미며 질타하는 채찍이 될 뿐, 고독한 영혼의 평안도 기쁨도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상처투성이의 얼어붙은 생명의 내실(內室)은 자양(慈養)하고 뜨거운 햇빛, 사랑의 유약(油藥)으로 밖에는 아물 길이 없다. 무한대한 생명의 고독은 무한대한 사랑으로 밖에는 채울 길이 없다.

하여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안겼을 때 고향처럼 평안하고, 벗들의 우정에 잠길 때, 초원처럼 기쁘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묻힐 때 천국처럼 가슴 설레는 환희에 충만 한다.

참으로 사랑은 인생의 비밀이다.

모든 것을 수학의 공식처럼 풀어낼 수 있는 현대, 달나라의 비밀까지도 벗겨대고 만 현대이지만 사랑의 신비만은 아직 누구도 풀 수 없는 비밀의 성역(聖域)이 되고 있다. 어떠한 교과서도 철학서적도 사랑의 비의(秘義)를 가르친 글이 없다. 누구에게 배우거나 가르침을 받아서 깨닫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참으로 우연하고도 신비스런 만남에 의해 순간적으로 점화(點火)되는 불꽃이다. 그것은 또 서로가 자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지극히 순열한 신앙과도 같다.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의 신(神)이 되는 것이다. 그 없이는 살 수 없고 그 없이는 의미를 상실하는 절대적인 신앙.

사랑은 신성한 것도 추악한 것도 아니다. 고귀한 것도 비천한 것도 아니다. 그대로 한 인간의 잃어버린 자신의 짝을 만나는 운명이며 생(生)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가장 범속(凡俗)하면서도 비의(秘義)에 찬 새크라멘트(秘蹟)다.

어려서 들은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의 신화, 지금도 신선한 감동을 자아내는 그 동화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기실 사랑이 갖는 현실적인 속성을 얼마큼은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너무도 아름다왔기에 미(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미움과 질투를 샀던 프쉬케, 그러나 공교롭게도 여신의 아들 에로스는 프쉬케를 한 번 보자,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뜻을 어기고 그 아름다운 신간의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

머나먼 곳 아무도 모르는 궁궐 속에 어머니의 눈을 피해 엮은 사랑의 보금자리, 에로스와 프쉬케는 인간과 신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승리자들이었다.

다만 에로스는 프쉬케에게 ‘누가 무어라 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지 말고, 내 얼굴을 보아서도 안 된다. 만일 내 말을 어기고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우리의 사랑은 마지막이 되리라’ 고 굳게 사랑의 다짐을 약속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언니들의 꼬임에 빠진 프쉬케는 마침내 에로스를 의심하게 되고, 기어이 어느 날 밤, 에로스와의 맹서를 스스로 깨뜨려, 등불을 밝혀 들고 잠든 에로스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 순간 너무도 황홀한 에로스의 모습에 놀라는 프쉬케, 허나 그때, 한 방울의 뜨거운 기름이 에로스의 맨 살 위에 떨어지고, 소스라쳐 놀라 깨어난 에로스는 분연히 일어나 마침내 배신한 프쉬케의 곁을 떠나고 만다.

‘믿음이 없는 곳에 에로스(사랑)는 머물 수 없다’ 는 슬픈 한 마디를 남기고.

‘믿음이 없는 곳에 사랑은 머물 수 없다.’

진실로 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심 없는 믿는 마음의 만남 속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너와 나의 관계인 것이다.

에로스가 어머니인 여신 아프로디테의 말을 어기면서까지 지불한 희생에 대하여 프쉬케가 에로스와의 맹서를 파기하는 불신으로 대답했다면 이는 분명히 사랑의 배신이며 종말이 아닐 수 없다. 기실 에로스가 제의한 사랑의 조건 ‘결코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고도 하지 말고 내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라’ 던 그 무조건의 믿음과 절대적인 신뢰 위에서만 사랑은 성립되는 것이다.

 

 

 

사랑의 조건

 스스로 에로스를 배신하여 사랑을 잃어버린 프쉬케는 다시 그 잃어버린 사랑의 회복을 위해 말할 수 없이 신산(辛酸)한 악전고투를 치러내는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보리, 조, 양귀비 씨앗들을 밤이 되기 전에 보리는 보리대로 조는 조대로 따로따로 가려 놓아야 했고, 맨땅 위에서 잠을 자고 마른 빵부스러기로 요기를 하며, 또다시 강뚝 숲속에 있는 황금털이 난 사나운 양털을 베러 떠나야 했다.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리는 무서운 폭포수의 물을 길러 가고, 죽음의 망령(亡靈)세계로 천신만고 내려가서 아프로디테에게 바칠 미(美)의 상자를 얻어 가지고 와야만 했다. 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와 시련을 겪는 프쉬케.

그리하여 마침내 에로스를 다시 만난 그들 사랑과 마음, 즉 에로스와 프쉬케는 비로소 뜨겁고 이별 없는 결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프쉬케가 치러내는 가지가지 곤욕과 시련은 무조건의 희생이며 사랑의 절대성을 말해 주고 있다.

절대적인 사랑, 그것은 신의 마음을 닮은 사랑이다. 어떠한 고난, 어떠한 시련 아래서도 굽히지 않고 변절하지 않는 사랑이다.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위해서 몇몇 선인(先人)들이 죽어갔다. 인류를 사랑하여 그리스도가 죽어갔고, 진리를 사랑하여 소크라테스가 죽어갔다. 아배라아르 와 에로이즈, 트리스탄 과 이졸데, 모두가 사랑의 극치를 이룬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들이다.

노바리스는 ‘결혼은 죽음을 위해 계약된 결합이며, 연애는 죽음에 있어서 가장 감미로와진다’ 고 말하고도 있지만 사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은 어쩌면 고뇌에 찬 비극적인 과정이나 결말에 있는지도 모른다. 절망에 눈물을 뿌리며 황금 양털을 베로 가는 고난 속에 더없이 아픈 사랑의 아름다움이 있고, 무서운 망령세계로 죽음을 각오하고 내려가는 처절한 결의 속에 지순한 사랑의 진실이 숨어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 보다 더 지순한 사랑은 노바리스의 말 그대로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갈망과 비탄, 죽음 속에서만 보석처럼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그러한 고난이 없는 현세의 젊은이들의 순간적이고도 향락적인 사랑의 행위는 어쩌면 그림자 같은 사랑의 허상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거론하고 아베라아르 와 에로이즈 같은 중세기적 플라토니즘 의 사랑에 비해 오늘이 사랑은 정신적인 것에서 육체적인 것, 성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조이스, 푸루우스트, 포렌스, 쟌 쥬네, 그들 누구의 작품도 사랑은 이미 성(性)으로 대치되어 있으며, 고갈해 가는 사랑(정신)의 불모지대에서 정신은 성으로 거무죽죽하게 더럽혀지고 썩어가는 것만 같다.

‘성은 정신을 자궁 속으로 즉 대상 속으로 풀어 넣으려 한다. 다시 말하여 정신을 끌어다 깊이 모를 암흑 속 무(無)로 용해시켜 버리려 한다.’

누구의 말이던가. 진정한 사랑이 왜곡된 성으로 인해 죽음과 허무 속으로 용해되어 가는 현대, 쾌락이 진실을 불모화 (不毛化)하고 있는 현대, 이런 순수부재(純粹不在)의 시대에 있어 우리는 좀더 성에 도전하고 스스로 견고해지지 않으면 안되지 않을까.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베라아르 와 에로이즈의 사랑, 에로스와 프쉬케 같은 사랑, 다시 말하여 지고지순한 사랑을 아직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사라져 가는 고전(古典) 속에 역시 버릴 수 없는 불변의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사랑의 신비, 사랑의 순결을 믿는 낡은 고전주의자임을 스스로 자처한다.

 

 

 

사랑의 性과 城

 인간의 현세적인 사랑의 형태는 역시 남녀의 사랑, 성(性)의 사랑일 것이다. 10여 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성에 눈뜨고 그리움을 깨닫는 인간의 불가사의한 생명의 신비, 자석처럼 서로 끌고 잡아당기는 알 수 없는 생명의 인력(引力)에 우선 놀라고 당혹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사랑을 알기 이전의 생명이란 한낱 생명 이전의 무가치한 서식(棲息)일는지도 모른다. 평강 공주를 사랑한 바보 온달, 그가 만일 보석 같은 사랑에 눈뜨지 않았더라면 그는 고작 거리의 부랑배로 떠돌다 이름 없이 죽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형체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불세출의 조각가로 완성 시켰고, 아름다운 음률에의 사랑이 베토벤으로 하여금 음악의 대악성(大樂聖)으로 완성케 했던 것이다. 기실 인간이 철들면서 최초로 눈뜨는 감정은 사랑이며, 그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하여 한 생애가 지주(지주)되어지는 것이다. 잠자리에서까지 가지고 놀던 인형이나 장난감 총대를 놓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자는 어린이들이나, 까닭 없이 가슴 설레며 먼 곳을 동경하는 소년들, 그 모두가 이미 사라에 대한 막연한 눈뜸이며 무엇인가 사랑하고 싶은 갈망의 표현들이 아닌가.

무엇인가 사랑하고 싶은 갈망, 가슴 설레는 막연한 동경, 그것은 이미 사랑이며 사랑의 간절한 행위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감정은 어느덧 막연한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대상을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하여 반쪽의 성이 다른 반쪽의 성을 찾아 완전한 하나가 되고자 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때문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합하는 결혼의 형태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성(性)의 사랑은 처음 반짝이는 불씨처럼 가슴에 불붙고, 이내 활활 타는 불꽃으로 전신을 태우고, 이윽고 타버린 재의 시꺼먼 잔해만을 남기고 끝나 버린다.

또 성(性)의 사랑은 정신적인 것에보다, 물질적인 것에 더 많은 중량을 두고 있다. 밤하늘에 별처럼 멀고 요원한 것에 견디지 못하며, 바람이나 햇빛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거에 만족하지 못한다. 금시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빵, 아니면 빵에 바르는 버터나 잼이기를 원한다. 먹어서 금시 배가 부르고, 불러서 이내 물려버리는 한이 있어도 탐욕스럽게 먹기를 원한다.

성의 사랑은 또 육체적인 것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눈길이나 마음으로 교환하는 내면의 미진함을 견디지 못하며, 적극적이고 감각적인 육체의 소리에 더 많은 열망을 기울인다. 기실 그것이 얼마나 쉽게 다치고 허물어져 버릴 성벽인지도 모르고 마치 불꽃에 날아드는 불나비 처럼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성의 사랑은 또 곧잘 계산과 흥정으로 얼룩지게 한다. 입으로 영원한 사랑을 맹서하면서도 머리 속에선 더 좋은 조건의 남자, 또는 여자는 없을까 생각하고 계산한다. 상대의 능력(미모)과 학벌(두뇌)과 재산과 지참금 등을 남모르게 치부하며 흥정하는 것이다. 다섯을 주면 다섯만큼, 열을 주면 열만큼, 그 이상을 베풀거나 손해 보려 하지 않고 또 자존심을 굽히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건전한 사고(思考)이며 정신이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나 그러한 사람들의 사랑이 제대로 성취한 예를 나는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어딘가 미흡하고 부족하지만 그 미흡하고 부족함을 탓하지 안는 무조건의 계산 없는 헌신 속에서만 진실한 사랑은 성취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어떠한 사랑이든 간에 그것이 완전히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일 수만은 없다. 또 처음부터 버터나 잼으로, 또는 계산이나 흥정으로 더럽혀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든 최소한 아침 한 때의 신선한 기쁨을 갖는 것처럼 사랑의 출발에도 순수하고 감동적인 기쁨의 한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기실 이른 새벽, 이슬 한 방울도 멎지 않은 풀 잎사귀가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시간이 지나고 때가 끼면서 어느덧 누렇게 퇴색하고 바삭바삭 말라서 떨어지는 것이지.

하면 그 슬픈 사랑의 조락을 막는 길은 무엇일까. 언제까지나 신선하고 감동적이며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은 무엇일까. 무너지지 않고 퇴락하지 않는, 견고한 사랑의 성(城)은 어디 있는가. 성(性)으로 거무죽죽하게 더럽혀지지 않는 사랑, 버터나 잼으로 물려버리지 않는 사랑, 이기심이나 계산으로 흥정되지 않는 사랑, 그것이 고통이면서도 기쁨이 되고, 암흑이면서도 밤하늘의 별이 되고 희생이면서도 보람이 되는 그런 사랑의 성(城)은 어디 있을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 고린토 13.4-7).

이 얼마나 잘 아는 말들이며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말들이냐. 그러나 이처럼 실행하기 어렵고 지키기 어려운 말들도 다시 없을 것이다. 기실 사랑의 높은 성(城)은 바로 이 쉽고도 어려운 산봉우리 위에 세워지는 순금의 탑일지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멀리 바라만 볼 뿐 감히 그 높은 성문을 열지 못하는 빛나는 순금의 성(城).

진실로 그 견고한 성문을 여는 열쇠는 인고와 믿음과 헌신과 겸손으로 무쇠처럼 굳어진 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높은 절벽에 거는 다리는 아낌 없이 주는 사랑의 무욕한 빈 마음이고.

항상 빼앗는 사랑의 손에는 무거운 쇠 저울이 들려 있지만 아낌 없이 주는 사랑의 손에는 하늘같이 빈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무한히 빈 마음이야말로 바로 어떠한 절벽이라도 오를 수 있는 견고한 사다리가 되며 날개가 되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숙지(熟知)하고 있다.

거듭 말하여 그 높은 사랑의 성문은 무욕한 희생으로 사다리를 놓고, 인고와 믿음의 길고 긴 세월로만 비로소 열리는 문이다. 그를 위한 끊임 없는 기도와 축원으로만 열리는 문이다. 기실 피 흘리는 십자가의 아픔 없이는 사랑을 여는 열쇠는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사랑의 성(性)은 말과 웃음으로 열리고, 그 성(城)은 침묵과 아픔으로 열린다.’

달나라를 정복하고 우주 비행장에서 밀회를 하게 될지언정 이 사랑의 고전(古典)만은 불변의 진리임을 나는 믿고 있다.

 

 

 

우리의 여름은 끝없이 긴가  – 젊음의 回歸 –

 

 

女子가

裝飾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은 하나 만도

빛나는 裝飾이 아니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 보면

쇼우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裝飾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같은 生活의 衣裳들은

무엇일까

 

안개 같은 疲困으로

門을 연다

피하듯 숨어 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滿發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裝飾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 장의 落葉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紫水晶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裝飾論 I)

 

 

 

 

漁夫 王과 쿠마의 巫女

 뜰에 햇살이 금빛으로 눈부시다.

너무 부시어 차라리 손이 부끄러운 정오의 햇살.

때 끼지 않은 계절의 빛을 먹고, 방금 벌기 시작하는 모란은 왜 또 그리 찬란한가.

마치 성년(成年)한 여인의 풍만한 자태처럼 화려하고 전아(典雅)하다.

젊음!

그렇다, 속에는 뿜어내는 물줄기 같은 젊음이다.

농밀한 꿀의 밀도(密度)!

생명의 분수!

그 진하고 끈끈한 생명의 실제를 나는 지금 손 속에 쥔 보옥(寶玉)처럼 감촉한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

 

우리가 누리는 여름은 과연 얼마나 길 것인가. 모란은 그 풍만한 용자(容姿)를 몇 날이나 유지하는가. 그늘에 가리운 가지는 꽃도 맺어보지 못하고 지는 것이 아닌가. 그보다 더 저 뜰에 넘치는 햇살은 눈에 보이게 이미 기울고 있지 않는가.

항성(恒性) 없는 자연의 무상(無常) 속에 젊음도 그같이 잠시 비쳤다 스러지는 햇살인 것을.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난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禹倬)1의 글귀가 아닌들 저무는 일몰, 서리 같은 백발을 뉘라서 막을 수 있을까. 저리 휘척휘척 서발 막대 사려 짚고 저승의 사자(使者)처럼 다가오는 시간의 발자국을 …..

 

젊음!

도시 젊음이란 무엇인가. 녹의홍상(綠衣紅裳)에 칠보단장한 염려(艶麗)한 청춘을 말 함인가. 창공의 백운(白雲)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 그 아득한 꿈을 이름인가.

항시 채워진 그릇이 아니라, 완성을 향하는 미완의 악곡(樂曲)이며 끊임 없이 발화(發火)하고 연소하는 심연의 불. 기실 젊음은 그 안에 빛과 어둠, 생(生)과 사(死), 희망과 절망을 밤과 낯처럼 교직(交織)하는 배율의 모순체다.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 때 쓰신 성배(聖杯)를 둘러싸고 재미있는 원시전설이 있다.

어부 왕(Fisher King)이라는 임금이 신의 저주를 받아 성(性)불구가 된다. 그러자 나라 안엔 질병이 돌고 곡식과 과실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며 모든 짐승들이 생산을 중단하고 만다. 국토가 삽시간에 불모의 땅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왕은 곧 신과 같은 존재이어서 왕의 병만 고치면 이 나라 안의 모든 질병도 사라지고 다시 풍요한 국토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때 한 기사(騎士)가 나타나, 가진 고생 끝에 그리스도의 피가 담겨있는 성배를 찾아내어, 그 피를 어부 왕에게 발라 줌으로써 비로소 왕에게 내린 저주가 풀리고 불모의 국토는 다시 비옥하고 풍성한 나라로 되돌아 간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어부 왕이 성배에 의해, 다시 말하여 잃어 버렸던 신앙을 되찾음으로써 황폐한 생명을 구원받고 다시 부활한다는 뜻이다.

그러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런 기독교적인 의미론보다는 어부 왕이 성불구가 되자 나라 안이 황폐해졌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생산의 기능을 잃어버린 어부 왕은 이미 살아있으되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상태다. 때문에 온갖 생물이 고갈하고 황폐해지는 불모의 땅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젊음을 일어버린 죽음과 같은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기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우리가 무엇이든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우리가 무엇이든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젊다는 뜻이고, 젊음이 없는 곳에 생산은 있을 수 없고 생산이 없는 곳에 삶 또한 있을 수 없다.

하여 자연은 철이 오면 한 송이 모란을 피우고, 여자는 한 남자를 사랑하여 아기를 낳고 가정을 이룩한다. 그리고 남자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출항하여 고기를 잡고 풍랑과 싸우며 삶을 구축하고. 이 모든 행위가 다름 아닌 생산의 모습이며 곧 젊음의 표현이고 살아있는 증거다. 젊음은 곧 생산의 기능이며 창조의 힘이다.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荒蕪地)> 첫 머리에 나오는 에피그라프(제사)가 있다.

 

‘쿠마에서 한 무녀가 독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때 아이들이 <무녀 당신은 무엇이 소원이요?> 하고 묻자 그는 <나는 죽고 싶다> 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李昌培 譯 엘리어트 選集에서).

 

한 무녀가 아폴로 신으로부터 장수(長壽)를 허락 받았으나 젊음을 받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무녀는 몸이 말라 항아리 속에 매달려 간신히 목숨만 붙이고 있을 뿐 완전히 생의 의미를 상실한 죽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엘리어트 가 현대라는, 신을 잃어버린 황무지 속에 서식하는 인간의 무의식 상태를 상징하여 인용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여기서도 쿠마 의 무녀가 아폴로 신으로부터 허락 받기를 잊어버렸던 젊음이란 바로 앞에서 어부 황이 상실했던 생산의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항아리 속에 매달려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며 죽지조차 못하는 쿠마의 무녀, 행위의 근원인 생산의 기능을 잃어버린 어부 왕, 그들은 꼭 같이 젊음을 상실한 죽음 같은 무의식 상태에 놓인 인간들이었다. 자신의 현주소도 행선지도 일어버린 정신의 미아(迷兒)들.

 

 

 

빠져버리는가, 남는가

 우리의 생활은 타성적이며 꼭 같은 일의 반복이다. 어느 날 모란이 피어날 때, 우리는 문득 신선한 감동에 눈 비빈다. 그러나 다음날 그 기쁨은 반으로 사라지고 이윽고 는 꽃의 모습조차도 잊어버린다. 그렇듯 변화 없는 일상의 반복 속에 감정은 녹슬고 의미는 희박해 진다. 매사에 감동을 잃고 방심과 무의식에 빠져들며 이윽고 자기를 상실해 간다.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길이건만 가로수의 잎사귀를 쳐다보는 일도, 그 잎새들의 변화를 느껴보는 일도 없다. 아침에 무엇을 먹고 저녁에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는 일에도 힘겨웁고 기쁨이 없다. 모두가 권태로운 반수(半睡)의 가사(假死)상태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과 무관심과 무의식 속에 잠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날이 아무런 생산 없이 황폐한 불모지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젊음은 날개 달린 금빛 독수리여서 아득히 먼 하늘, 미지의 세계에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누구든 한 번쯤 시선을 바로잡고 자신의 쓸쓸한 동굴 속을 들여다 본다며 거기 버려진 불모의 황폐한 폐허를 볼 수 있을 것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놓은 평상복(平常服) 뒤에, 잡다하게 쌓여있는 일상의 일거리들 속에 모습도 없이 묻혀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그 비싸고도 값없는 젊음의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을.

기실 젊음이란 우리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무의식의 상태를 허물고 끄집어 내는 자기 인식의 작업이 아닌가.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머리 위의 푸른 하늘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하고 느끼는 그 신선한 감동,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막연히 세상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열어제친 창 너머로 햇살을 헤치며 달려 나가는 행위의 결단, 젊음의 회복은 바로 그런 인식과 결단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나태한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만 있을 뿐, 실제로 결단하고 움직이지 못한다. 근면한 사람은 하고 싶다는 희망에 앞서 무엇이든 ‘한다’는 행동으로 나선다. 바로 이 ‘한다’와 ‘하지 않는다’의 차이가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며 젊음과 늙음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안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악(惡)이라도 행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T. S. 엘리어트 의 말처럼 진실로 우리는 항아리 속에 매달려만 있지 막고 차라리 죽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죽을 수 있을 만한 각오만 가졌다면 불가능한 일도 없을 것이다.

누구의 말이던가.

‘제일 나쁜 것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지면에 남는 일이라’ 고 한 것은. 선이 든 악이든 그것에 전신으로 빠져드는 열의(熱意),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와 정열, 그것이 젊음의 모습이며 정신이다. 엉거주춤 빠져들지도 못하는 무기력과 회의, 방심과 무의식이야말로 젊음을 좀먹는 병마다.

기실 전진하는 사람에겐 위험이 따른다. 바위에 부딪치고 파도에 휩쓸리고 하는 위험이.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형태는 다르지만 위험이 있다. 나태라는, 무의미라는 자기 붕괴의 위험이.

어는 것도 어려운 위험이다. 그러나 보다 더 무서운 위험은 그대로 지면에 남아있는 위험이다. 부딪쳐 쓰러진 후, 다시 한 번 일어서려는 의지 없이 그대로 지면에 남아버리는 좌절의 위험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패배의식의 위험이다. 젊음은 바로 이러한 좌절과 패배의식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재기(再起)의 힘이다.

하면 쓰러지는 것도 자신이지만 일으켜 세우는 것도 자신이다. 누구의 손도 빌릴 수 없는 자신의 손, 자신의 의지로 치러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 인간이며 살아있는 의무다. 어부 왕이 성배를 찾는 것도 쿠마의 무녀가 항아리 속에서 탈출하는 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하는 자신의 과업이다. 때문에 인간은 고독하며 그러한 일들을 짊어지고 있는 젊음이 또한 고독한 것이다.

 

 

 

젊음을 사는 지혜

 신이 인간에게 주신 많은 자산(資産) 가운데 가장 근원적이며 크고 빛나는 것이 젊음이다. 사실 모든 것이 불공평한 지상의 인간에게 오직 하나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누구나가 다 공유할 수 있고 행사할 수 있는 젊음이란 자산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유일무이한 자산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목적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지는 않는가?

허망한 것에 마음을 쏟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가?

순간의 쾌락을 위해 내일을 저버리는 혼미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나태와 회의와 무기력과 좌절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분명한 현주소와 행선지(行先地)를 잊고 있지는 않는가?

젊음은 여름 숲 속 같아서 그 속에 들어앉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숲 속에 있는 향기로운 꽃, 살랑대는 바람, 우거진 나무들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한다. 수풀 바깥의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고, 뜨거운 여름날이 한없이 계속될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소유하는 젊음이 끝도 없이 긴 줄로만 착각한다.

 

 

그 나날은

배추 꽃,

노랑 나비,

이슬 진 햇살의 精을 섞은

꽃물처럼 달디단

아침이었다.

 

사방에 門

門마다 종이 달린

초여름의 집을

벌판처럼 열어 놓고

세상의 끝을

떠돌아 다녔다.

 

그때 우리의 가슴은

온통 부글대는 香水병이어서

언제나 향기에 취해 있었고

조금씩 안으로 지쳐 있었다

풀숲의 딸기처럼

혼자서 히히대며 익고 있었다

 

이따금

가랑비 스쳐가고

별들이 하얗게 사위어 갔지만

그 널은 벌판에

한낮은 변함 없이

타고 있었다

 

여름이

끝도 없이

긴 줄만 알았다

 

(그 나날은)

 

 

 

진실로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의 젊은 날이 끝도 없이 긴 줄로만 착각하고 있다. 무한한 영원을 놓고 영원 안에서 본다면 젊음이란 마치 일 순간의 광망(光茫)처럼 짧은 것을. 빛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인 것을. 숲 속에 저녁 해가 물들고, 무성한 일들이 바람에 떨어지기 시작하여 비로소 바깥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여름이 눈 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에 얼마간 눈이 떴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시간은 이미 반 이상 허비해 버린 뒤일 때가 너무도 많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회를 놓치고, 일을 그르치며, 실의에 빠져 후회하지 않는가.

역사적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시대를 좌우한 위인이나 영웅들은,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도 젊음을 가장 유용하고 값있게 쓴 사람들이었다.

가비라성의 왕자, 싯다르타는 29세에 생사해탈의 법을 구하여 출가(出家)하였고, 35세에 이미 정각(正覺)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동양의 성인(聖人) 공자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30에 섰으며, 불혹(不惑)과 이순(耳順)과 지천명(知天命)하는 40, 50, 60을 거쳐 마침내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하는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보다 더 인류의 구세주, 그리스도는 불과 나이 12세에 공생활(公生活)에 들어가시어 33세에 골고타 산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정사(釘死)되시기까지 불과 3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류가 몇 세기를 걸려도 하지 못할 사업을 이룩하셨던 것이다.

진실로 곰팡이가 슨 장수(長壽)보다는 있는 힘을 다 써버리고 일찍 꽃처럼 산화(散花)하는 편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냐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아무려나 일찍 산화한 생명이나, 70, 80의 수를 누린 생명이나 그가 가진 젊음을 남김 없고 유감 없이 써버린 데는 다를 것이 없다. 그런 분들은 하나같이 사정 없이 자신을 혹사하였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정신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신의 안전을 위해 상식에 따르는 법이 없고, 수만 냥을 지불하여 불로장생의 보약을 구하는 일도 없었다. 평안히 생지안행(生知安行)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구(求)하여 행(行)하는 도(道)의 삶이었다.

젊음을 사는 지혜는 기실 이렇듯 두려움 없이 자신을 죄다 쏟아놓고 써버리는 전신투여(全身投與)의 정신이다. 마치 촛불의 양쪽 끝에 한꺼번에 불을 붙여 태우는 것과 같은 전신연소다. 어느 쪽으로도 물러설 수 없는 전진 뿐이다.

‘나는 나면서부터 그것을 아는 자가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며 민첩히 그것을 구한 자이다'(孔子).

기실 젊음을 사는 지혜는 바로 구(求)하는 정신이다. 끊임 없이 구하여 수학(修學)하고 실행하는 정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뒤돌아 보지 않으며 전진하는 정신.

‘나는 결코 자신의 뒤를 보지 않았다. 롯2의 아내는 뒤돌아다 봄으로써 멸망하였다. 달콤한 회상 뒤에는 파괴다.   … 40세까지는 당신들보다 나이 먹은 연장자들과 사위고 40세 이후엔 당신들보다 젊은 사람과 사귀도록 마음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나는 매일같이 5시부터 6시까지 산책을 했지만 동행인은 언제나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항상 희망이나 야심, 포부 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노령(老齡)에 이른 말년까지도 늘 사상과 심정이 젊고 싱싱했던 가톨릭교의 기번스 추기경의 회고록의 한 대목이다.

진실로 롯의 아내는 뒤돌아다 봄으로써 멸망하였다.

감미로운 회상 뒤에는 나태한 무기력만이 찌끼처럼 남는다. 화려한 가상(假像)에 도취하면 심약한 감상만이 비대해 진다.

뜰의 햇살은 너무 눈부시어 가슴이 비고,

찬란한 모란은 정신의 가출(家出)을 유발한다.

하여, 나는 그 가환(假幻)의 것들에 흔들리지 말고 기우는 하오(下午)의 일광 속에 견고한 사념의 성(城)을 쌓아야 한다.

시간에 도괴(倒壞)되지 않는 원목(原木)같은 나의 젊음을 위해.

 

 

 

밝히고 잊혀지는 하나의 길

– 갚음 없는 사랑의 相續者 –

 

빨간 사과 한 봉지

캬라멜 한 갑

다시 못 볼 엄마의 따스한 얼굴처럼

안고 돌아서는 너,

자주빛 붉게 타는 뺨과 눈언저리는

西天을 물들인 노을의 탓만은 아니리

어린 딸이여,

 

올해 다섯 살

몽실한 어깨 까만 눈망울

영특한 말솜씨도 잊어버렸나

한 마디 어린 보챔도 없이 다시 오라 손짓도 없이

팔랑팔랑 조그만 그림자 사라져 가는

어스름 비탈길에 얼룩진 가을바람

 

자가가도 깜박 尿意 에 깨고

캄캄한 마당귀 잿간을 혼자서 찾아 간다는 너,

어미 없는 세상은 너로 하여금 새알같은 가슴에

숙성한 意志와 야무진 忍苦를 어느 사이 가르쳤던가

 

야속한 어른들의 모진 意思로 하여

몽매에도 그리운 어미 곁을 떠나

눈과 목청이 우악하신 시골 할머님 곁에

오늘도 너는 雜草처럼 쑥쑥 자라리

바람 속에 사과처럼 익으면서

짓밟아도 문질러도 다시 머리 솟쳐드는

草芽같은 의지를 닮으면서

 

이제는 누렇게 물들어

한불 落葉 졌을 뒷산 밤나무 밑

조약돌 주먹에 턱을 고이고

훤한 新作路며 그 너머 꼬불꼬불 숨어가는 까만 선로를

눈망울 시리도록 바라보리라

 

풀잎같은 손가락 폈다 곱았다

‘몇 밤이나 더 자면 엄마가 올까’

착한 것이여

빛나는 눈자위엔 구름이 흘렀을까 바람이 지났을까

 

가슴 멍멍히 오늘도 엄마는

먼 너를 생각하며

다가올 추위를 걱정하는

서울의 얇은 지붕 밑

 

어느새 작은 손등엔 龜裂 이 지고

아침 저녁 손끝은 빨갛게 얼었으리라

엄마처럼 따뜻하게 너를 감싸 줄 한 켤레 장갑

눈마다 정을 들여 짜서 보낸다

 

(母 情)

 

 

이 세상에 행하여진 가장 용감한 싸움

 이 세상에 온갖 생물을 살게 하시는 사랑과 생명의 신(神)이 계시다면 그 신의 마음을 닮은 인간의 마음은 곧 어머니의 마음이리라.

안델센 동화의 슬픈 어머니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잃어버린 아기의 행방을 찾기 위해 진주보다 아름다운 두 눈을 바치고 검은 윤 나는 머리칼을 백발과 바꿔 주고, 온 몸과 가슴을 가시덩굴에 찔리며 죽은 아기의 넋이나마 만나보고자 소원하는 어머니의 정을.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꼭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음독(飮毒)한 아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아들의 입을 빨아 독을 씻어내다 죽은 강원도 두메의 어머니.

아침 저녁 파도를 헤치고 나룻배를 저어 6년을 하루같이 어린 딸을 학교에 실어 나른 어느 섬마을의 어머니, 이들은 모두 자식의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이며 자식의 괴로움이 곧 자신의 괴로움이었던 것이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엔 이성과 계산이 따르지 못한다. 두 아들을 가진 제베데오의 여인처럼.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렇게 소청한다. “당신의 나라가 서면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당신의 오른편에 하나는 당신의 왼편에 두어 주세요.”

이 염치 없이 욕심스런 어머니의 마음 또한 기실은 거짓 없는 세상의 어머니들의 정 임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한다.

이렇듯 자식 앞에 눈이 없는 어머니의 정은 먼 곳에 어린 것을 떼어 보내고는 더우면 땀흘릴가 걱정하고, 추우면 감기들까 걱정하며, 밤이면 혼자서 캄캄한 잿간(변소)을 불도 없이 찾아갈 것을 애처로와한다.

우악하신 할머니 곁에 엄마를 그리워하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남몰래 뒷곁에 돌아가 혼자 훌쩍거릴 것을 생각하고는 가슴 아파한다.

흙장난, 물장난에 얼마나 손이 트고 피가 맺혔을까 걱정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 모정은 진실로 구비치는 여울 같은 기도와 눈물과 아픔으로 범벅이 되는 것이다.

 

 

아가야 업어 줄까

내 아기 엄마 등에

하얀 민들레 씨

바람개비 날릴까

 

옛날에 내 어머니 나에게 그랬듯이

지금 나 또

네게 주는 오직 하나의 情

母情의 아득한 무지개 다리

 

좀더 예쁘게, 좀더 슬기롭게

태어줄 것을

주고 주어도 준 것이 없는

아기에게 엄마는 슬픈 債務者

 

무우밭에 피어난

장다리꽃같은 걸까

주절이 꿈을 열은

葡萄園의 가을일까

 

모두다 가버린 빈 果園에

새벽바람 홀로 가슴에 불면

내 착한 아들의 손길이라 어루만지리

 

어느날 落魄 한 그 分身들

돌아와 곤히 내 곁에 누우면

아기야 다시 한 번 꿈길에

내 아기 엄마 등에

하얀 민들레씨 바람개비 날리자

 

세상은 너와 나 모두가

허망하게 날려 보낸

꽃씨 주머니

 

(하얀 민들레씨)

 

 

 

자식을 놓고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평생 갚을 길 없는 채무자의 마음이다. ‘주고 주어도 준 것이 없는 아기에게 엄마는 슬픈 채무자’

진실로 모정은 그 무상의 희생, 대가 없는 봉사, 끊임 없는 염려와 겸손한 기도, 바다 같은 자애(慈愛)로 범벅이 된 고단한 정(情)이다.

자식은 어머니 앞에 머리가 희어도 항상 물가에 선 어린아이처럼 위태롭고 조심스럽기만 한 애물이다.

못 생긴 자식, 못 사는 자식일수록 더욱 가슴 아픈 것이 모정이다.

시간과 거리를 초월하여 죄인처럼 빌고 섰는 마음이 모정이다

때가 오면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자식을 떠나 보내는 아픔 속에 견디는 것이 모정이다.

그리고 새벽바람 저녁연기 속에 떠나 보낸 자식의 안부를 걱정하며 기다림에 지치는 것이 또한 모정이다.

실로 자식의 영광 앞에선 몸 둘 바 없이 송구스럽고, 인생에 낙백(落魄)하여 돌아온 자식 앞에선 또한 자신의 부덕인양 애타하며 자책하며 슬퍼하는 것이 모정이다.

기실 어머니 앞에  자식은 영원히 숙명적인 불효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시인 밀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행하여진 가장 용감한 싸움, 그것을 당신은 세계 역사 속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머니들에 의하여 행하여진 싸움이다.”

기실 세상의 어머니들은 그들 자식을 위해 남모르는 인내와 희생, 고난과 노고를 물심(物心) 양면으로 치러내는 것이다. 그 어떤 싸움과도 비길 수 없는 정신과 육체의 피나는 싸움을 헤내는 것이다. 참으로 이 세상 역사에 그들에 의하여 행하여진 싸움보다 더 용감한 싸움은 없었을 것이다.

 

 

 

밟히고 잊혀지는 하나의 길

 그러한 절대적인 어머니의 정에 비하여 자식의 정은 어떤 것일까. 실로 무심하리만치 탐욕스럽고 냉정하며 때로 터무니없이 반항적이지 않는가.

우주 사소한 일로 조금만 마음을 상하여도 밥상에 마주 안지 않고 그대로 나가 버린다. 싸 보낸 도시락을 고스란히 뚜껑도 열지 않고 들고 돌아온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도대체 자식들의 마음속엔 어떤 악(惡)이 숨어 있는 것일까.

D 유치원 보모로 있는 K 선생은 아침마다 원아(園兒)들에게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게 한다. 원아들이 그리는 어머니의 얼굴로 그날의 아이의 기분을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사실 원아들은 아침마다 제각기 신이 나서 둥글고 모든 어머니의 얼굴을 각양각색으로 도화지 가득히 그려놓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이가 그런 엄마의 얼굴에는 커다란 가위표가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의아하여 묻는 선생님 말에 영이는 울상이 되어 ‘엄마 미워!’ 하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영이는 그날 아침 엄마에게 떼를 쓰다 매를 맞았던 것이다.

영이에게 매질을 하여 보낸 엄마는 하루 종일 가슴이 얼얼하게 아프고 측은하고 가엾었다. 자책하고 후회했다.

돌아오면 영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좋아하는 과자를 준비하고 깨끗하게 영이의 방을 치워놓고…

그러나 영이는 귀가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놀러 갔는지, 아니면 어디서 잘못하여 다쳤는지, 엄마의 가슴은 불안과 자책으로 범벅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유치원으로 영이의 친구집으로 사방 찾아 다닌다.

아이는 어머니의 마음을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불안과 자책에 떨며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을 알 만큼 커버린 나이에도 역시 그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모르는 척 외면하기 일쑤다.

조그만한 꾸중에도 이맛살을 찌푸리고 반발하고 투정하며 때로는 원망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나 커서 자기 생활을 갖게 되면 먼 곳으로 떠날 것을 생각하고, 떠나서는 아주 잊은 듯 소식조차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과연 어버니 마음엔 부처가 살고 자식의 마음엔 악인이 산다는 속담이 있을 법도 한 일이다.

나에게도 지금 칠순이 다 되신 노모(老母)가 계시다. 그러데 40평생이 넘도록 그 어머니 마음 단 하루도 즐겁고 편안하게 해드린 일 손꼽으라면 열 손가락에도 꼽을 것이 없는 것 같다.

마치 마른 나무에 물말라 가듯 한 해 한 해 기력이 쇠진하여 가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쓸쓸한 정경에 이따금 목메여 혼자 느껴도 보지만 기실 날이 새면 또 다른 생활의 핍박으로 그분의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인 것이다.

27년 시를 썼다고 하나 도시 그 어머니를 위해 몇 편의 시를 썼던가 생각하면 송구스럽기만 하다.

 

 

深深山川

외로운 골짜기에

홀로 앉아 사는

할미꽃처럼 살으셨네

나의 어머닌

 

달이

앞 江에

물먹은 菊花송이처럼

싱싱한 밤엔

서러운 情 붙일 데 없는

바람처럼 살으셨네

나의 어머닌

 

지금은

하얗게

사위어 가는

질화로의 재

한 生의 歷史가

불 속에 타버렸네

예순 다섯 해

 

(할미꽃처럼 살으셨네)

 

 

 

어느 어버이가 안 그러랴마는 이분 역시 자식을 위해 홀로 희생의 본보기처럼 살아오신 분이다. 그런데도 나는 거듭하는 말이지만 이분을 위해 별로 자상스럽지도 따뜻하지도 못한, 한 마디로 무심하기 그지 없는 딸이다.

마음속에서야 어떻든 간에 외적인 정의 표시에 지극히 인색하며 둔하다. 어머니는 중년이 넘는 딸을 아직도 어린애처럼 생각하시고 끼니 때면 많이 먹으라고 권하시고 외출하면 일찍 돌아오라고 당부하신다.

평생 한 번도 ‘내가 뭣이 좀 먹고 싶은데’ 하시는 희망을 말하신 적이 없고, 오직 ‘너 뭣 좀 먹어야 하지 않느냐’ 는 근심으로 가득 차 계시다.

평생을 다 주고도 잊지 못하시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에게 지극히 작은 기쁨 하나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자식, 이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란 도시 무엇일까.

기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정이 절대적이며 근원적인 것에 비해, 자식이 어머니에 대한 정이란 지극히 감상적이며 즉흥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어버이의 정을 무한히 주는 일광의 빛이라 하면 자식은 그 빛을 받아 피어나는 꽃처럼 오직 피어주는 것만으로 어머니의 기쁨이 되며 보답이 되는 것인지 모른다.

하여 나의 어머니 앞에 나는 아직도 조심스런 어린아이이며 내 앞에 내 아이들은 또 한 영원히 염려스러운 애물인 것이다.

 

갚음 없는 사랑의 상속자, 우리의 어머니는 우리에게는 버림받고 우리는 또 우리의 자식들에게서 버림받으며 면면이 갚음 없는 사랑을 이어받는 이름 없는 사랑의 상속자들. 나로 인해 섭섭했던 어머니의 슬픔을 내가 이어받고, 또 그 슬픔을 내 자식들이 이어받음으로써 우리는 그 슬픈 ‘어머니’의 영혼에 속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수한 발길에 밟히고 언젠가는 잊혀져 버리는 하나의 길 어머니는 바로 그 밟히고 잊혀져 버리는 ‘길’인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가슴엔 무수한 아픔의 발자국만이 훈장처럼 남는다. 그리고 자식은 때를 놓치고서야 비로소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아들이 모시려 하나 어버이 계시지 않는’ 뉘우침 속에 눈뜨는 것이다.

누구도 이 천리(天理)를 바꾸지도 고치지도 못하여 왔다.

그것은 신(神)이, 이 세상 어머니의 사랑을 더욱 더 영광되게 하시기 위해, 절대적이며 고독하신 당신의 사랑을 닮게 하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그 속에 숨어계신 하느님을 엿보는 것이다. 늘 자식을 위해 울고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아니 하느님의 모습을.

 

 

어머니

당신은 이따금

신기하게 작은 人形이 되고

놀랍도록 가벼운 物體가 되십니다

그리고는 부서질 듯 꺼지는 한 줌의 體重이

무거운 탄환처럼 가슴에 와 박힙니다

짜고 辛酸한 한 生涯의 무게가…

 

우리가 흘러온 물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까맣게 한바다를 헤매 다닐 때

당신은 홀로 남은 山 골짝에서

텅텅 속을 태워 버리시고

아무도 모르게 태워 버리시고

이윽고는

南風에도 부서지는 마른 잎이 되십니다.

 

<아 저 山허리를 넘어가는 노을같은 뒷모습>

 

五月의 純金빛 햇살을 깔고

소꿉놀이 하시듯 반짇고리 뒤적이며

오색의 아롱진 조각보 모으시는

어머니,

당신은 오늘

이상하게 아름다운 少女가 되고

문득 눈부신 부처님이 되십니다

 

(어머니, 당신은)

 

 

 

오직 그 곁에 살아있어 주는 일뿐

 

고등학교 2학년의 딸이이가 있다.

이 아이가 항상 밤샘을 하고 아침이면 으례히 늦어서 번번이 나를 애먹이는 말썽꾸러기다.

자아가 강하고 비판이 신랄하며 기분이 내키면 위인들의 경구(警句)를 곧잘 주워대는 재치와 응변을 가지고도 있다.

사실 나는 이 아이뿐 아니라, 어느 아이하고도 마주 앉아 긴 시간 이야기할 겨를이 없다. 항상 내 일에 쫓기다 보니 아이들의 내면생활에 어둡고 멀다.

어느날 아이의 둔부에 생긴 약간 심한 조기에 고약을 갈아붙여 주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픔 때문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며칠이면 날 것을 커단 게 울기는…”

어쩌구 하며 위로삼아 눙치는데 아이는 별안간 홱 돌아 앉으며 말끔한 눈으로 꼿꼿이 얼굴을 들고 입을 떼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 내가 아파서 우는 줄 알아? 엄만 아무것도 몰라! 뭘 알아! 엄마가 내 뭣을 안단 말이지? 난 살기 싫단 말야! 내겐 아무것도 없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끝났어. 내 생활은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엉망진창이란 말야. 나같은 나쁜 애는 살 권리가 없어….”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도 않는 반 독백이었다.

그야말로 엉만진창인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폭소를 했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이라니 그 과장된 표현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폭소를 하다가 점차 가슴이 뭉클하게 치미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처럼 괴롭히는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 많은 것들을 하고 싶었던만 단 한 가지도 못하고 말았다’ 면서 울먹이며 엎어지는 아이의 등 뒤에서 나는 한 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기쁨과 위안엔 한계가 있다. 이미 나는 그 한계에서 아이의 괴로움을 위로해 줄 수 없는 무력을 느낀다.

기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엄마의 힘이란 얼마나 작고 무력한 것이다. 우리가 그애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자리와 옷가지와 먹을 것을 장만해 주는 그 정도의 힘밖에 없는 것이다.

이따금 그애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속을 살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기질 그것이 그애들에게 얼마만한 위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몇해 전 어느 선배작가가 외동딸을 시집보내면서 하던 말이 새삼 생각난다.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에게 줄 기쁨이 없어요. 그 아이는 이미 엄마의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자랐어요.”

결국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애들 곁에 살아있어 주는 일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 자신이

‘내가 여러해 동안 소원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소원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배웠다.’ 고 독일의 시인 가이벨이 말했듯이 스스로 인생을 깨우쳐 가는 괴로운 과정을 지켜보아 주는 일 이외엔 없는 것이다.

 

 

 

잃어가는 어머니, 잃어가는 자식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엔 요리조리 밀어만 대다가 정작 코앞에 닥쳐야만 불을 끄듯 설쳐대는 칠칠치 못한 버릇이 항상 있다.

아이의 방과 아빠의 방을 바꾸고 나니 높은 서가(書架)로 가리워졌던 유리창이 썰렁한 맨살을 드러내게 되었다. 바늘 구멍에서 황소바람이라던가.

‘저 창에 커튼을 쳐 줘야지.’

생각하고 벼른 지가 열흘이 넘었건만 차일피일 밀어만 오다가,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고서야 더 이상 밀 수가 없어 무거운 궁둥이를 일으켰다.

오랜 만의 외출,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밀린 일들을 한꺼번에 몰아가지고 기왕 나온 길에 처리해 버리자고 몇 군데를 돌다 보니 어느새 저물고 말았다.

부랴부랴 시장에 들러 커튼지 몇 마를 사들고 돌아온 것이 여섯 시가 넘었다.

‘밤 안으로 박아서 고리를 달아 둘러쳐 줘야지, 내일 아침은 영하 9도로 내려간다는데…’ 하는 생각으로 저녁도 대강대강 치우고 바쁘게 서둘러 치수를 재고 잘르고 해서 재봉틀에 박기 시작했다.

그때 제 방에서 건너온 끝의 놈의 신기한 듯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야! 웬일이야, 엄마가 미싱을 다 할 줄 알아!’ 반은 놀리는 말투였지만 기쁨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아니 네 어민 미싱도 못하는 줄 알았더냐?’ 하시었다.

‘헤, 참 이상한데. 엄마 정말 괜찮은 거야? 나중에 뜯는 것(잘못해서) 아냐?’ 어쩌구 키득거리며 연신 놀려대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딸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싶으셨던지, 원병(援兵)이라도 내시듯

‘이녀석아, 네 어미가 하질 않아서 그러지 하지만 해 봐라, 바느질을 얼마나 곱게 하는지 아냐. 옛날에 네 고모 시집갈 때도 엄마가 흰 치마 저고리 예복까지 지어 입혔어요. 누나들 양복이며 네 양복두 지어 입혔구. 털 스웨터 털 장갑 모두 짜 입혔구… 이녀석이 어미를 아주 바보로 아는구나.’ 감회에 잠기듯 띄엄띄엄 그런 말들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한 담화를 흥흥 코웃음으로 등 뒤에 흘리면서 나는 문득문득 야릇한 비애, 적이 미안하고 부끄러운 비애에 빠져 들어갔다.

아이의 눈에 비쳐진 엄마라는 여자, ‘엄마’ 하면 아이의 머리에 떠올랐을 나라는 여자의 모습, 그 너무도 쓸모 없이 초라하고 빈약한 영상이었던 것에 나는 갑자기 커다란 실물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휑하니 비어버리는 것이었다.

일찌기 생각조차 못했던 실망과 자기 환명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 한테만은 남못지 않게 변변한 어미였기를 원하고 또 자부했던 마음이 여지 없이 부숴져 버리는 듯하였다.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뿐인데 그것이 그처럼 서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나라는 여자는 그렇게 여성적이지도 가정적이지도 못하다. 조그마한 가사에도 힘이 들어 낑낑거리기 일쑤고, 매사를 어머니와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맡겨 버리고는 죽을 끓이는지 밥을 끓이는지 모르는 때가 부지기수다.

그야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가 아직 젊었을 때, 나 역시 여자다움에 무심하지 않았고, 그런 일에 적지 않은 기쁨을 느끼기도 했었다.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이는 재미나 도우넛을 굽는 소꿉놀이같은 즐거움에 부풀기도 했었다.

예쁜 꽃무늬의 포플린을 끊어다 아이들의 양복을 짓는 기쁨이나, 인두불을 피워놓고 저고리의 섶을 달고 깃을 붙이고 도련을 꺾어 안을 받치고, 솔기솔기 화서 뒤집어 바늘 끝으로 섶부리를 끌어내고 깃고대를 막아 시침을 뜨고, 동정과 고름으로 끝을 마물던 바느질의 삼매경을 헤맨 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뭔지 그것만으로는 욕심을 채울 수 없었던 천성의 고(孤)가 또 다른 세계로 나를 몰아갔고, 그 또 다른 세계에 빠져들다 보니 나는 어느듯 여자로서의 본분, 엄마로서의 의무를 저버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 끝의 아이가

‘난 엄마가 해준 것 먹어본 기억이 꼭 두 번 밖엔 없다. 한 번은 떡국, 한 번은 라면.. 참 맛있더라.’

무심결에 쏟아놓은 말을 들었을 때도 서글프다고 할까 한심하다고 할까 예리한 회초리로 호되게 얻어맞은 것같은 심정이 되어 대답할 바를 몰랐었다.

그때도 옆에 있던 대학에 다니는 큰 딸아이가 엄마의 붉어진 얼굴을 쳐다보며 안되었던지

‘네가 어려서 기억이 없어서 그렇지, 난 안 그래, 엄마가 얼마나 큰일을 많이 했다구, 제사 때나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 때마다 엄마 혼자서 다 했단말야.’ 하고 거짓말 아닌 위로의 말로 나를 도와주었지만 허점을 찔린 내 심정을 달래주진 못했었다.

다 큰 아이들이라 가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엄마를 공격할 때가 있다.

‘대체 엄마는 뭐야, 부엌에도 안 나가고 바느질도 안하구, 빵이나 궈서 우유나 한잔씩 따라주는 게 엄만가, 맨날 원고뭉치나 신주단지처럼 붙잡구 앉아서…’

지당하고 지당한 말씀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 정도, 토우스터에 빵을 굽고, 우유나 따라주는 일. 내복이나 양말 켤레를 시장에서 사다주는 일, 감기 걸리면 약 먹으라고 잔소리나 하는 일 밖엔 없는 것이다.

옛날의 우리 어머니처럼 깎두기를 유난히 맛있게 담그시고 동태찌개를 별나게 시원하게 끓여 주시던 솜씨도 없고, 손수 물을 들여 다듬이질하시고 밤새워 지어 주시던 명주치마 저고리의 그 따습던 정성도 없다.

하루같이 새벽밥을 지으시느라 어두울 때 일어나시고, 곱은 손에 얼음을 깨시던 어머니의 기억이 내게는 있지만, 내 아이들의 머리 속엔 밤을 새우다 새벽잠에 떨어진 엄마의 미운 몰골 밖엔 없을 것이다.

오는 날도 오는 날도 부엌과 장독대를 맴도시고, 빨래나 바느질에 묻혀 사시던 어머니,

봄이면 쑥버무리, 가을이면 무우 시루떡을 맛있게 쪄주시던 어머니의 기억 대신, 밖에서 돌아와도 코빼기도 볼 수 없는 잦은 외출과, 고작 케이크집 빵조각이나 덜렁 들고 오는 엄마의 기억 밖엔 없을 것이다.

진실로 아이들 가슴 속에 오래오래 그림처럼 향기처럼 남아줄 엄마의 기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엄마에 대한 향수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엄마에 대한 기억도 향수도 없는 아이들의 가슴은 불빛이 없는 오두막같이 쓸쓸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가슴 속에 아무런 기억도 남겨주지 못한 엄마의 위치 또한 슬프고 민망하기 그지 없다.

면면한 정서의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는 어머니와 자식, 빛깔도 향기도 없는 삭막한 유대, 그래서 아이들은 조금씩 어머니를 잃어가고 어머니 또한 자식을 일어가고 있다.

어머니의 현대화는 자식의 가슴에 적막을 키우고 어머니와의 사이에 벽을 쌓는 이별의 서곡인 것만 같다.

 

 

 

 

 

 

II 모든 길의 마지막에

 

 

慾望을 걸러내는 체

 

그 골목엔

사철 유리문 덜컹거리는

야채가게와

신기료 할아버지의

露店이 있었다.

 

테레지아 성당에선

주일마다 울리는 맑은 彌撤소리

목소리 우악하신 長身의 神父님이

이따금 巨木처럼 골목 밖을

내다 보셨다

 

세상은 완벽한 神의 風車

아침이면 삐걱대는 생활의 문소리

골목을 열고

한낮이면 셀로판紙에 싼

한 포기 꽃처럼 잠드는 골목

 

그 골목에

二十年 뿌리 내린

나도 변함 없이 生活을 쪼아 온

빛의 石手다

 

(골목 안 풍경)

 

 

 

인생은 神이 쓴 童話

 

‘모든 사람의 일생은 신의 손에 의하여 씌어진 동화에 지나지 않는다.’ 고 안델센은 말하고 있다. 사실 아무리 불행한 일생이건만 또는 행복한 일생이건 간에 신의 눈으로 본다면 그저 아름답고 귀엽고 대견한 한 토막의 이야기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아니 보다 더 신은 동화를 써내듯, 하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을 제멋대로 구상하고 짜내서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슬프게 그리고 때로는 유쾌하게 써 갈기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량 생산하신 신의 각본대로 한 평생을 달리고 웃고 울며 별의별 곡예를 다 부리다 마침내 끝나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러는 해피 엔딩으로, 더러는 눈물 콧물의 홍루물(紅淚物)로. 모두가 신이 진작 준비하신 연출대로 말이다.

아무튼 신에게 있어선 재미있는 동화이고, 기분 내키는 대로의 작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삶을 부채(負債) 처럼 등에 짊어지고 앉은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결코 꿈같은 동화일 수도 일시적인 장난일 수도 없는 일이다. 하기는

“이 세상에서의 한 주일은 죽은 뒤의 8백 년의 영광보다 낫다”

고 프랑스의 문학자 쌍 테브즈몽은 말하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그 비슷한 속담이 있어

“죽은 정승이 산 개만도 못하다”

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누가 저 세상에 가보고 온 것도 아니다. 그저 지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레 짐작일 뿐 저승의 망자(亡者)의 대답은 아예 엉뚱할는지도 사실은 모른다.

“웃기지 말라. 지상의 8백 년의 영광인들 지하의 이 평화와 안식과는 바꿀 수 없다”고 반발할는지 누가 알 수 있는가.

신은 인간에게 참 많은 것을 주셨다. 지상에서 누릴 갖가지 영화와 권세를, 그리고 그것과 동량(同量)만큼의 비애와 불행도 고루 고루 주셨다. 그런데 이왕에 주실 바에야 빠짐 없이 주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 중 하나를, 가장 요긴한 한 가지를 빼놓으셨던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릇을 채우는 마지막 ‘만족’이라는 이름의 잔 하나를 잊으셨던 것이다.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 한,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 한 구석을 인간은 운명처럼 지고 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갖가지 욕망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우리가 먹고 살고 입고 가지고 하는 것은 당연한 생의 조건이다. 그런데 그 먹고 살고 가지고 입고란 글자 위에 ‘잘’이라는 부사가 붙는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그런데 그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로 끝나면 문제는 없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 ‘잘’ 위에 ‘더’라는 비교급이 붙는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고’… 그러다 얼마쯤 지나보면 또다시 ‘더’자 위에 ‘더’가 더 붙는다. ‘더’위에 ‘더’, 그 ‘더’ 위에 또 다른 ‘더’, 이렇게 한없이 더 가 붙어 올라간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마음은 기실 무한대한 공간이지도 모른다. 하면 어찌하여 신은 한정된 생명체인 인간에게 그처럼 무한대한 마음을 넣어 주셨을까. 어찌하여 그처럼 어이 없는 미스테이크를 저지르셨을까. 마지막 그 한 잔 ‘만족’이라는 잔 하나를 채워 주셨다면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배불리 젖을 먹은 어린아이처럼 만족하여, 유순하게 싸움도 시기도 하지 않고 태평세월을 누릴 수 있을 것을.

그러고 보니 누군가 뒤에서 그것이 바로 인간이 짊어진 원죄가 아니냐고 호통치는 것 같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에와의 작죄(作罪), 고 조그마한 불장난에 이처럼 엄청난 형벌을 내리신 야훼도 기실은 관대한 분이 못 되시는 것 같다. 아니 그분이 얼마나 지독한 분인가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구약(舊約)에서 보아왔다. 하면 인간이 짊어진 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고통도 기실은 그분의 지독한 형벌 중의 하나인지 모른다.

번번이 맑은 정신과 밝은 판단을 흐리게 하는 불길 같은 욕망.

자유로운 정신을 구속하는 전제군주 같은 욕망.

채워도 채워도 밑 빠진 그릇처럼 끝이 없는 탐욕스런 욕망.

벌레 먹은 나무등걸 같고, 악취를 풍기는 썩은 과실 같고, 감미로운 독약 같고 호랑이 같고 여우 같은 욕망. 이 욕망을 씻어내는 선약(仙藥)은 무엇일까. 곱고 순수한 것만을 걸러내는 체는 없을까. 하느님의 미스테이크를 다시 그분께로 돌리는 방법은 없을까.

 

 

그의 요람 搖籃 에 잠드는 욕망

 

어느 시인에게서 들은 우화 한 토막이 생각난다.

외딴 섬, 무인고도에 홀로 바다를 지키는 등대지기가 있었다. 어느 날 그를 위로코자 일부러 육지에서 방문한 한 도시의 대학교수가 진심으로 그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외딴 섬에서 얼마나 외롭고 갑갑하시겠습니까. 어떻게든 당신을 돕고 싶은데 다행히 나에게 적지 않은 서적이 있으니 당신이 원하신다면 돌아가는 길로 즉시 보내드리겠습니다.”

한데 그 등대지기, 조용히 고개를 흔들면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뜻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두 권의 희귀한 진서(珍書)가 있으니, 그 하나는 하늘이라는 이름의 책이요, 다른 하나는 바다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이 두 권의 책만 가지고도 평생을 못다 읽을 터인데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하나의 우화다. 단지 사철로 변하는 하늘의 신비로움과 바다의 무궁무진한 조화를 비유한 이야기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한다. 바로 이 등대지기의 너무도 초연한 정신세계다.

허심 무욕하고 의연(毅然)하며 신념에 찬 자세, 스스로를 아는 분별과 양식의 지혜, 자신이 소유하는 영역(領域)밖의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대도 욕망도 걸리 않으며 바라지도 않으며 결연히 거절할 수 있는 결백과 용기.

 

 * transcribing in progress…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원전의 ‘탁’ 자 한자는 사람인 변이 아닌 듯…
  2. 롯의 아내 – 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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