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한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누구나 사연이 있다 Everybody Has a Story’라는 특집을 방영하는데 그 내용이 시청자들에게 많은 재미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출연자가 눈을 가리고 전화번호부에서 무작위로 한 사람을 고르면 그가 ‘이번 주 사연’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모님께서도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이 책을 만들게 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사실 이 책을 만들기 전에는 자주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께서 저를 살짝 찌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제가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에 입회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저는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방식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를. 하느님께서는 좀 교활한 데가 있는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살짝 속임수를 쓰십니다.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으시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우리가 해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속았다!” 하는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성경말씀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신다면 예레미야기 하느님께 한탄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예레 20, 7)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나중에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고 평소에 전혀 관심이 없던 어떤 책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로 인해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소한 ‘우연’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 몰래 ‘속임수를 쓰시듯’ 활동하시는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조용히 정원을 산책할 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한 바오로 교황님께서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를 ‘묵주기도의 해’로 선포하시고 새로운 신비를 발표하신 지 이 삼일 지난 날이었습니다.  저는 묵주기도의 힘을 믿으면서도 그것이 마치 십계명 같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도미니코 성인을 통해 우리에게 묵주를 건제 주셨고 우리는 그 묵주를 집어 들고 바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책 부록의 ‘묵주기도의 유래’를 보시면 그 시작에 놀라실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그것에 변화를 주셨고 그것은 놀랄 만한 변화였습니다. 혁신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묵주기도는 갑자기 21세기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중세와 연관된 것이었으나 동시에 ‘오늘날’에도 분명 특별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새로 더해진 신비와 더불어 묵주기도는 중세 가톨릭의 먼지를 털고 나와 새로운 생명과 경이로움을 가져왔습니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교황님께서 이미 팔순을 넘기셨지만 아직도 하실 일이 많으셨던 것입니다!

묵주기도에 새삼스레 열중하며 산책을 계속하던 중에 (제가 꾐에 빠졌다고 생각한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성모님께 더 많은 사람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장려하는 데에 우리 공동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책을 내면 어떨까?’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Chicken Soup for the Soul> 나 신앙 잡지 <가이드포스트 Guideposts>와 비슷한 내용의 책을 만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만드는 책은 묵주기도를 바치고 놀라운 응답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성모님의 책이 될 터였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문제를 던져 주신 분은 성령이셨고, 그 답을 알려주신 분은 당연히 성모님이셨음을 압니다. 그 후에 일이 진척된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백지상태에서 나온 이 놀라운 생각은 한 치의 오차도 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메리 리타 원장수녀님 이하 모든 수녀님들이 정말 멋진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에 힘입어 온라인에서 무료로 전하는 평화카드를 기부해 주시는 참 좋은 친구분들에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즉시 자신의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출판의 해변을 향해 용맹하게 노를 저어 갔습니다.

제게 보내온 여러분의 이야기는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전부 달랐고, 묵주기도의 힘을 놀라울 만치 훌륭하게 증명하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이메일을 열어 볼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도착해 있었고 마치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바치던 묵주기도를 어느 새 매일 시간이 될 때마다 바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그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저는 묵주기도서와 관련된 웹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 www.Rosary101.com –  이 새로운 사이트에서 저는 이 책이 잘 만들어지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훌륭한 친구들의 기도의 물결에 몸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묵주기도 부대’에 동참하겠다는 소식을 보내오셨습니다. 오늘까지 성모님의 묵주기도를 위한 이 작은 일에 용기를 북돋우는 묵주기도가 19,000단 이상 바쳐졌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십니다. 이 책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채 안 걸렸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 다음 권고는 곧바로 인쇄에 들어갈 것이고, 그때부터 성모님의 뜻에 따라 성모님의 손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책 한 권 한 권이 묵주기도를 더 많이 전파하고 묵주기도의 힘을 전하는 임무를 해낼 것입니다. 이는 제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은 진정 제 개인의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저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 “네.” 하고 대답했을 뿐이며 그 다음은 하느님께서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책을 읽으시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느님께 “네.”라고 대답하시기를, 그리고 여러분 앞에 놓인 일과 특별히 필요한 것을 묵주의 여왕이신 성모님의 강력한 보호와  도우심에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 워싱턴 주 스포캔의 수도원에서 파트리시아 프락터 수녀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1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이른 봄, 미주리 레오폴드에 있는 독일인과 네덜란드인 교우 공동체의 성 요한 성당에 평화의 모후께 봉헌할 성모 동산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모든 본당 신자의 힘으로 성모 동산을 건립하기 위해 어린아이들까지도 벽면에 사용할 반작이는 석영이 박힌 돌을 날라 왔다. 주변의 산과 강가의 돌들을 운반해 와서 본당 신자들 가운데 건축 일에 종사하는 교우들이 담을 쌓고 바닥에 깔아 콘크리트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 해 5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성 요한 성당 소속 형제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평화의 모후 경당을 봉헌했다. 그리고 동시에 세계 평화와 모든 군인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묵주의 기도를 시작했다. 본당 교우들은 날씨가 허락하는 날이면 저녁마다 그곳에 모여 어스름한 석양 가운데 묵주기도를 올렸다.

처음에는 제대 앞에 44명의 이름을 새긴 대리석 판이 놓여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름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본당 신자들이 한국과 베트남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본당 식구들의 묵주기도는 오늘날 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국가를 위해 복무한 본당 신자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신자는 한 사람도 없다. 거의 죽을 뻔한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들도 많았고 다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로 부상 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주리 레오폴드에서 닉 J. 엘프링크

 

 

2

묵주기도와 졸업 시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내 친구는 시험기간 내내 묵주기도를 바쳤다. 최선을 다해 시험 준비를 한 그 친구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나는 그때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그 친구에게 부탁해 묵주기도 하는 방법을 배웠다. 아직도 성모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35년 전 스물한 살이었을 때 가톨릭에 입교하게 된 것은 그때 배운 묵주기도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따금 모태 신앙을 지닌 교우들은 다른 신자들이 성사를 통해 받는 것을 이미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런 신자들을 통해 얻게 되는 신의 풍요로움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뉴욕 에티가에서 마리안 J. 페리스

 

 

3

자수정 묵주

 

나는 42년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사실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성모님의 은총을 받았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지만 결혼하시지 않고 미혼모로 사셨다. 1942년에 내가 태어났을 당시, 서른여덟 살이었던 어머니는 팔순의 부모님을 모시고 세 명의 오빠들과 함께 살고 계셨다.

내가 태어나기 4년 전, 루터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한 보석 가게에서 단지 너무 아름답다는 이유로 자수정 묵주를 사셨다. 가톨릭 신자인 친구들이 그 용도를 알려 주었지만,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어머니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방법을 몰라서 묵주를 작은 금빛 상자에 담아 장식장에 넣어 두셨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이따금 장식장을 정리하셨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내가 그 묵주를 목에 걸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하셨고 청소가 끝나면 다시 상자에 담아 안전하게 넣어 두곤 하셨다. 묵주를 목에 걸고 있으면 왠지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자라면서 가톨릭과 관련된 것들에 매력을 느끼곤 했다.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들만 봐도 왠지 좋았다. 1950년대 초에 ‘파티마의 성모’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때 어머니와 나는 그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감상했다. 나는 영화에서 본 성모님처럼 따라 하곤 했다. 일곱 살이었을 때 어머니와 나는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친구들을 따라 성당에 가서 구속주회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 시간은 참으로 즐거웠다.

내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촌언니가 성당에서 결혼했고, 그로부터 2주 후에 나는 장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났다. 물론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 후 2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 (the Knights of Columbus, 미국의 평신도 단체)의 소책자와 내가 구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통해 가톨릭의 여러 가지 기도문을 혼자 배우고 익혔다.

열여덟 번째 생일에 나는 우리 동네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가서 교리를 받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신부님께서는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기 때문에 교리를 받겠다는 것인지 물어보셨다. 그래서 가톨릭과 관련된 나의 지난 일들을 말씀 드리자 무척 기뻐하시는 것 같았다. 몇 주 후에 어머니에게 묵주를 사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자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자수정 묵주를 꺼내 주셨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어머니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4년 전에 자수정 묵주를 사셨는데 자수정은 2월의 탄생석이고 내가 바로 2월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묵주로 기도하고 있으며, 성모님께서 언제나 나를 도와주고 계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40-50년대에 사생아로 태어나 성장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적법한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나를 키우는 어머니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우리 모녀는 주일 오후에 성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온갖 놀림과 비난을 참아 내게 해 주셨고, 어머니는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것과 다르게 사람들을 대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그토록 좋은 어머니와 훌륭한 ‘아버지’였던 세 분의 삼촌들이 계신 것 또한 축복이었다. 그분들은 어머니와 나를 지켜 주셨고 사랑해 주셨으며, 나를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아이로 대해 주셨다.

작년에 영적 가르침을 받기 위해 어떤 신부님을 만난 자리에서 나의 지난 이야기를 말씀 드린 적이 있다. 신부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성모님께서 그 모슨 것을 계획하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옳다고 믿는다.

 

미네소타 헥터에서 조앤 엑스타인

 

 

성모님께 온갖 사소한 것과 모든 큰 슬픔을 전부 말씀 드리십시오. 그분은 온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분이십니다.

– 카릴 하우셀란데르

 

 

4

묵주, 그리고 웃음

 

막내딸 제인이 일곱 살이었을 때 넘어져서 왼쪽 팔꿈치를 다친 적이 있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팔꿈치 뼈가 부러진 게 보였다. 아이가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친정엄마와 함께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다가 작은 플라스틱 통에 넣어 갖고 다니는 묵주를 꺼냈다. 묵주 기도는 정신적으로 힘들 때마다 항상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친정엄마는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내 얼굴을 보면서 “너 오늘 몇 알 째 먹는 거니?” 하시다가 알약이 아니라 묵주를 꺼내면서 딸그락 소리가 났다는 것을 아시고는 웃으셨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이 웃음이 우리를 긴장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플로리다 포트 월턴 비치에서 패트리샤 M. 애거턴

 

 

5

제일 친한 친구

 

나는 열 살 때부터 성모님과 아주 특별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뭐가 그렇게 특별한 지 궁금해 하실 분들께 먼저 내가 개신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말씀 드린다. 개신교 친구들은 나를 이상한 아이로 여겼다. 친구들과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를 할 때 나는 ‘엄마’나 ‘선생님’ 역할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언제나 베일을 쓰고 성모님이나 수녀님이 되는 역할만 하려고 했다.

언젠가 이모를 따라 한 가게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모가 내게 뭐든지 사 줄 테니 골라 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정말 아름다운 꽃 장식품과 오르골 orgel이 많았지만 내 관심을 끈 것은 반대편 선반에 놓여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15cm 정도 높이에 파스텔 색의 성모님 반신상이었다. 나는 그 조각상이 너무나도 갖고 싶었다. 내가 붙박이처럼 서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자 이모는 흔쾌히 그것을 사 주시면서 “그런데 쉴라, 아빠가 뭐라 하실까?” 하고 물었다. 나는 뭐라 하실지 모르겠지만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내 방에 둘 거야.”라고 덧붙였다.

나는 지금까지 40년 넘게 그 조각상을 간직하고 있다. 이사할 때면 언제나 내 손으로 직접 들고 갔고 아무도 그 성모상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나는 개신교 신자였지만 가톨릭 신자인 친구들이 많아서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나는 마침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막내아들이 열심히 권유한 덕분이었다. 아들과 나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고 첫영성체를 했다. 미사 내내 눈물이 흘렀다. “…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우리 아들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던 것이다!

나는 성모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안다. 묵주기도를 드릴 때뿐만 아니라 친정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으로 6년 동안 고생하시다 숨을 거두신 그 순간에도 성모님께서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체험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어머니는 아직 떠나실 준비가 안 되신 것 같았다. 그 특별한 날 밤, 우리 가족은 묵주기도를 바쳤다. 어머니는 기도를 하실 수 없었지만 나는 어머니 손에 쥐어 드린 묵주로 어머니가 들으실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다. 기도를 끝냈을 때 나는 성모님께서 함께하심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분께서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이제 시간이 되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평온해지며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어머니 침대 옆에 있던 의자와 묵주를 치우고 어머니께 입맞춤을 했고 다음 순간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움 순간이었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떠나신 어머니를 바라보며 어머니를 위한 사랑과 평화가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성모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네 어머니는 평화 가운데 계시고 곧 아버지를 만나실 것이다. 아주 행복하시다.”

나는 그 말씀이 사실임을 알았고 어머니가 평생 사랑하셨던 아버지와 함께하실 것도 알았다. 아버지는 당신이 사랑하던 여인에게 오셔서 2002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어머니를 본향으로 데려가셨다.

 

오하이오 유니언포트에서 쉴라 D. 다우델

 

 

 

– 묵주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

 

신부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기의 마지막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성모님께서 새롭게 거룩한 묵주기도의 힘을 알려 주셨습니다. 현세적이거나 영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리 개개인의 삶과 가족, 세상의 모든 가정의 문제, 신앙 공동체와 민족과 국가의 모든 문제들까지도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묵주기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강조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우리는 거룩한 묵주기도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로 우리는 자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묵주기도로 우리는 거룩해 질 것입니다. 묵주기도로 우리는 주님께 위안을 드리며 많은 영혼을 구원할 것입니다.

 

– 루치아 수녀님께서 1957년 12월 26일에 푸엔테스 신부님께 거룩한 묵주기도에 관해서 하신 말씀

 

 

6

해산 임박!

 

첫아이를 임신한 지 36주가 되었을 때 나는 곧 다가올 D-day(해산일)을 생각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산 전 마지막 두 번째 검진을 하러 병원에 갔을 때는 배가 너무 불러서 진찰대에 올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담당 여의사는 익숙하게 정기 검진을 하면서 분만에 대해 궁금하거나 염려되는 점이 있는지를 친절하게 물었다. 나는 지신 있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분만 유도제도 사용하지 않고,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을 계획이었다. 임신 육아 관련 책에서 모두 그렇게 권하지 않았던가? 해산의 고통은 모두 잊힌다고 했다. 호흡법을 연습했고 남편도 옆에서 해산을 도울 예정이었다.

그렇게 자연분만만을 생각하다가 나는 의사가 배를 누르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얼른 안심시키면서 태아의 머리가 아직 아래 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의학 용어로 골반단위 骨盤端位 라는 것이었다.

“괜찮겠죠?” 내가 물었다.

“네.” 하며 의사는 다음 정기검진 전에 정상 위치가 될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나 역시 어떤 경우에는 태아가 해산이 임박해서야 정상 태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 다음 주에 아기 옷을 세탁해서 새 옷장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 밖에도 준비 할 게 정말 많았다. 드디어 해산 임박!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아기가 정상 태위로 돌았는지 궁금했고 배를 만지면서 확인해 보려 했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힘겨운 걸음으로 마지막 검진을 위해 병원에 갔고, 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초조하게 기다렸다. 의사의 얼굴에 드러나 표정이 그때까지도 골반단위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자연분만을 하겠다는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죠?”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의사는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든지 ‘외부 전위법’이라는 방법을 써서 분만을 유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제왕절개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자연분만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외부 전위법’ 이란 건 뭔가요?” 내가 물었다. 의사는 임신부의 배를 밖에서 압박해서 태아를 정상위로 돌리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겁이 났다. 무척 아플 것 같았다. 의사는 태아의 엉덩이 부분이 이미 내 골반 쪽으로 내려와 있기 때문에 그 방법 또한 성공할 확률은 50% 밖에 안 된다는 말도 했다.

“그 과정에서 태아가 골반단위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도 있고, 또 성공한다 해도 위험 요소가 있다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탯줄이 태아를 감아서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건 심각한 일이었다. 탯줄은 아이의 생명줄이 아닌가. 의사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언제라도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다고 했다. 나는 점차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집에 와서 남편과 상의했다. 우리는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외부 전위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아기가 정상 태위로 돌기를 빌며 매일 기도했고, 남편은 아기가 혹시 알아들을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내 배에 대고 배 속의 아기에게 부탁도 했다.

나는 그때까지 세상 선배들에게 들은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물구나무를 서기도 했고, 배 아랫부분에다 음악소리를 들려주어 아기가 그 소리를 들으려고 몸을 돌려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해 보려는 시도도 했다. 우리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사실을 알렸고 모두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마침내 그날이 되었다. 나는 의사가 지시한 대로 금식을 하고 두려움에 떨며 오전에 병원으로 가서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의사도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쳤다. 간호사는 언제라도 수술실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 좋았다고 의사에게 말했다. 간호사가 정맥주사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애써 웃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간호사에게 아직 정맥주사를 놓지 말라 하고는 다른 방에 있던 초음파 기계를 밀고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태아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 시작해야겠다는 의미였으리라. 초음파 검진이 시작되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신속하게 검사 준비를 하고 손을 움직여 검진을 하더니 갑자기 탄성을 지르며 태아가 몸을 돌려 정상 태위가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나는 얼른 진찰대에서 내려와 순식간에 환자복을 벗어 던졌다. 의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이 모든 것이 기도 덕분이라고 말했다. 의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을 나서며 친정엄마가 할머니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드렸다. 전화를 받으신 할머니께서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기뻐하시면서 성모님의 전구 덕분이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그걸 어떻게 아시냐고 궁금해서 여쭸더니 할머니께서 아기가 정상 태위로 돌아오도록 간절하게 청하며 묵주기도 15단을 마친 바로 그 순간에 우리 전화를 받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 주에 나는 건강하고 예쁜 여자애를 순산했다. 우리는 성모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기의 이름을 미리암이라고 지었다.

 

매릴랜드 아나폴리스에서 캐서린 J. 하프

 

 

 

성모님,

온 세상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신 당신께 경배합니다.

당신에게서 세상 구원의 시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갖추셨음을 기뻐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의 첫 불순종으로

하늘과 땅  사이를 막아 놓은 미움의 벽을 허무셨습니다.

당신을 통해 신성과 인성이 한 사람 안에 결합했을 때

하늘이 땅과 만났습니다.

 

– 성 베르나르도

 

 

 

7

묵주기도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 줄 거야

 

12년 동안 가톨릭 계 학교에 다닌 나는 자연스럽게 묵주기도를 바쳤다. 어머니날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과 아버지날(매년 6월 셋째 주 일요일)에 우리는 특별히 부모님을 위해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었고 교육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부모님과 생활할 때, 가톨릭으로 개종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는 묵주기도의 힘을 누구보다 굳게 믿는 분이셨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시기에 두 형부와 사촌 그리고 장래 남편이 될 남자친구까지 모두 전장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그들이 전부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매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겠다고 말씀하셨다. 남자친구가 전쟁 포로가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걱정 말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 해 주셨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보면 아버지는 흔들의자에 앉아 묵주기도를 하고 계신 적이 많았다.

참으로 기쁘고 자랑스럽게도 전쟁에 나갔던 형제들이 전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결혼식에 내 손을 잡고 제대를 향해 가시면서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했지,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아버지는 그 다음해에 돌아가셨지만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 지금도 살아 계신다. 내 손자들과 증손자들의 마음속에도, 남편과 나는 올해로 결혼 55주년을 맞았다. 아버지, 제가 필요할 때 곁에 계셔 주시고 그토록 훌륭한 표양이 되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웨스트버지니아 헌팅턴에서 도로시 J. 도나휴

 

 

 

성모님,

제 마음이 당신 향한 사랑을 결코 그만 두기 않게 하시고

제 입술이 당신께 드리는 찬미를 결코 멈추지 않게 하소서.

 

– 성 보나벤투라

 

 

8

묵주기도의 힘

 

15개월쯤 전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바치지 않았던 묵주기도를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새 묵주도 장만했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테라스에서 묵주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 의자에 앉아 성호를 긋는 순간, “쨘!” 하고 전기가 들어왔다. 그런 지향을 두고 기도를 시작한 것은 정말 아니었는데… 그 일로 나는 묵주기도에 대해 새로운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아베 마리아!

 

캘리포니아 어번에서 제니 E. 데비느

 

 

9

묵주기도 치유

 

나는 1931년 3월 15일에 태어났고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살고 있다. 묵주기도는 언제나 나와 함께했고 지금도 내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1982년 3월이었다. 한쪽 가슴에 혹이 만져져 나는 두려움에 떨며 병원에 갔다. 의사는 즉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수술 직전에 묵주를 꺼내 들고 수술실로 가면서 계속 움켜쥐고 있었다. 마취 주사를 맞고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내가 완전히 마취 상태에 빠졌는지 확인하다가 내 손에 들려 있는 묵주를 보고, 그것을 빼내려는데 얼마나 세게 움켜쥐고 있었는지 무척 애를 먹었다고 했다. 수술은 잘 끝났다. 그 혹은 음으로 진전될 수 있는 종양이었지만 잘 제거되었고 다른 신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 후 지금까지 19년 동안 나는 암과 상관없이 잘 지내고 있다. 내 기도의 힘과 수술 전에 남편과 딸이 나를 위해 계속 열심히 기도한 덕분에 나는 살아났다.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큰오빠는 12년간 요양원에서 지내다 돌아 가셨다. 우리 형제는 여덟 명이었는데, 부모님은 사순 시기에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밤마다 반드시 묵주기도를 바치게 하셨다. 그러나 큰 오빠는 나이가 들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결국 집을 나가고 말았다. 그 후 오빠의 삶은 비참했고 구걸을 하면서 노숙자로 지내기도 했다.

술을 가까이 하기 전에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성당에서 복사로 활동도 했지만 결국 믿음을 잃고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요양원에 들어가서는 다시 기도하는 생활을 했고 간호사들에게 묵주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폐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매일 오빠에게 갔다. 병으로 쇠약해져서 팔을 들 수 없으면서도 오빠는 우리에게 침대 옆에서 묵주기도를 하라는 손짓을 하시곤 했다. 임종이 다가왔을 때 우리 가족은 오빠 곁에 있었다. 오빠는 묵주를 손에 쥔 채 우리를 한 번 쳐다 본 다음 묵주 쥔 손을 힘겹게 들고 천장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미소 지으며 온 힘을 다해 묵주를 가슴에 올려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간호사는 “형제님은 성모님의 얼굴을 보셨어요!” 라고 말했다.

성모님의 전구로 많은 기적을 체험한 나는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성체분배자로 환자 봉성체를 하고 미사에서 기타 반주를 한다. 외아들 샤론은 네 살에 간질 발작이 있었지만 약물 치료와 기도를 통해 치유되어 지금은 교회에서 성경을 봉독하게 되었다.

 

– 캐나다 노바스코샤 야머스에서 마리안 피츠제럴드

 

 

 

우리의 선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온통 사랑과 자비로 넘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의탁만 하면 전부 들어주실 것입니다.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10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일흔 살이 되신 친정어머니께서 폐암으로 고생하시던 때였다. 아버지 (가톨릭 신자가 아니셨다)와 케빈 오빠, 수잔과 베티 리 언니와 나는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실 때마다 함께 묵주기도를 했다.

어머니의 의식이 흐려지셨을 때에도 우리는 묵주기도를 계속했다. 묵주기도는 우리 가족을 하나로 일치시켰고, 어머니가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실 때나 희망을 갖고자 하실 때마다 위로가 되었다. 또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에게 힘을 주었다.

그렇게 묵주기도를 하던 어는 순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기도 구절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모든 일은 주님께서 주관하시고,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과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그분께서 우리 어머니를 도와주실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치유를 비는 기도를 하지 않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분께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주셨다. 어머니는 1994년 11월 21일 새벽에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의 친정가족들이 모두 모여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어머니께 알려 드렸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그리고 한 달 쯤 후 성탄 전야에 나는 69세이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사시던 집에서 쓰러져 계신 것을 발견했다. 그날은 부모님의 50주년 결혼 기념일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날을 기념하지 못하실 것을 예감했다. 구급차를 불렀고 오빠와 언니들도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형제들이 병원에 전부 모였을 때 아버지는 이미 혼수상태셨다. 우리는 말없이 성당에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상황을 알리는 연락은 했지만 성 루카 성당의 성탄 전야가 얼마니 바쁜 날인지 잘 아는 나는 부제님이라도 한 분 와 주시기를 고대했다. 아버지는 힘겹게 생명줄을 잡고 계셨다.

본당에서 형제님 한 분이 오셨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방문했던 그 형제님은 방문을 통해 우리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세례를 위해 필요한 성구를 급히 챙겨 왔다고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혹시 아버지께서 세례를 받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셨다. 나는 울고 있지만 웃으면서 몇 주 전에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그때 어머니를 먼저 보내신 후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아버지가 세례를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좋을지 여쭤보았다.

내 형제들이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은 이렇다.  만약 아버지께서 싫으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듣기 싫다! 가 봐라.”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런 말씀 없이 좀 거북해하시며 다음에 얘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중에 아버지를 찾아가 다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로건 신부님께서 이 문제를 물어오셨을 때 나는 사실대로 말씀 드려야 했다. “아버지는 ‘듣기 싫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건 그러시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형제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건 신부님께서 세례수를 들고 기도하신 다음 아버지를 축복하였다. 그 순간 아버지의 몸이 편안해지시더니 숨을 거두셨다. 아기처럼 순결하게 태어나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부모님을 여의고 우리 형제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잘 견뎌 낼 수 있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힘든 일들을 이겨 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부모님 베티와 에디를 기억하며.

 

– 뉴욕 레고 파크에서 미셸 하인즈

 

 

 

 

성모님의 위대함고 전구에 대해 말하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성모님께 달려가지 않는 것은

날개가 없이 날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 교황 레오 13세

 

 

 

11

성모님 손에 안전하게

 

나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그날 그 특별한 날의 묵주기도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스무 살이 된 우리 딸 질이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임신을 한 채 집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꾐에 빠져 가족을 떠나 그 남자가 있는 네바다 로 가겠다고 했다. 그 남자는 도박꾼이었다. 이혼한 남편과 나는 그 남자가 혹시 우리 딸을 사창가로 팔아 넘길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곳에서 매춘은 불법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딸을 설득해서 집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은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집을 떠나고 없었다. 편지에는 엄마를 사랑한다는 말과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로 전남편과 딸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에 아이 아빠가 그 남자와 통화를 했는데 딸아이는 이미 네바다로 가는 버스를 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미시간에 사는 나의 ‘영적 대모’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질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 얘기를 듣고 친구는 “내가 전화할게. 기다려.” 하고는 조금 후에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다. “질을 위해 기도를 했어. 그런데 기도 중에 떠오른 생간은 네가 묵주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과 성모성심께 질을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었어.” 나는 수화기를 놓자마자 묵주를 들고 침대로 가서 (이미 아주 늦은 시각이었다) 울면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잠을 거의 못 자고 있던 터라 묵주기도를 2단 바치고는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 세 시쯤에 갑자기 잠이 깬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딸이 쓴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런데 편지 말미에 쓰인 내용은 처음 읽었을 때 미처 보지 못한 내용이 있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저는 지금 기적의 메달을 목에 걸고 있어요.’

나는 뛸 듯이 기뻐서 큰 소리로 웃으며 성모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가 묵주기도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전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너무 상심해서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나는 우리 딸이 아직 떠나지 않고 이곳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에 마음으로 안다고 했다. 전남편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나는 기도를 했고 딸이 아직 떠나지 안았다는 믿음이 있다고 말한 다음 기쁘게 미사 참례할 준비를 했다.

미사가 끝나고 돌아와 다시 전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의 아내가 받았다. 아이 아빠가 휴대전화로 딸과 통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은 저녁 버스를 타기 전까지 친구 집에 있다고 했다. 아이 아빠는 딸 친구의 전화번호만 알 뿐 주소를 몰랐기 때문에 딸을 데리러 갈 수 없었다. 나는 딸에게 전화해서 내 조카이자 딸아이의 사촌인 카를로가 데리러 갈 것이라고 했다. 조카 애는 딸아이와 통화만 할 수 있으면 30분 내로 그 애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훌륭히 해냈다.

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물었다. “왜 첫차를 타지 않았니?”

딸 아이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손에 버스표를 들고도 버스를 탈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다음 날 버스표로 교환했어.” 라고 말했다.

딸 아이가 처음 버스를 타려던 시각은 내가 묵주기도를 시작한 바로 그 시각이었다. 성모님께서 우리 딸을 지켜 주셨던 것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오하이오 애크런에서 카렌 I. 스탑스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가 성모님을 생명, 자비,

그리고 구언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에 의문을 가집니다.

이 모든 호칭이 하느님이 어머니라 불리는 것에 견줄 수 있을까요?

 

– 추기경 존 헨리 뉴먼

 

 

 

12

가망이 없습니다

 

남편의 심장발작은 치명적이었고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나는 절망감으로 주저앉았다. 남편의 나이 겨우 마흔일곱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이웃으로 전해졌고 친구 한 명이 찾아왔다. 친구는 “얘, 진정해. 그리고 아이들 좀 오라고 해. 이제부터 우리 다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자.” 우리는 식탁에 둥글게 모여 앉아 묵주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친 후 그 친구는 말없이 떠났다.

다음 날 병원에 도착해서 내가 들은 말은 지난밤에 남편의 상태가 크게 호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남편이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우리 집 지붕에 날아와 앉은 하얀 비둘기 한 마리를 보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가족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셨다고 확신했다.

성모님, 찬미 받으소서!

 

–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베아트리체 C. 스트루프

 

 

 

오, 하느님의 어머니. 당신을 믿기에 저는 안전할 것입니다.

당신의 보호 아래 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도움으로 저는 싸워 적들을 물리칠 것입니다.

당신께 의탁하는 것은 구원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 성 다미아노

 

 

 

13

깜빡이는 노란 신호등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집에서 5년 동안 병상에 계시면서 한 번도 손에서 묵주를 놓은 적이 없으셨다. 그리고 친정어머니도 2년 동안 병고를 겪으실 때마다 외할머니처럼 항상 묵주를 들고 계셨다.

1999년 1월 13일, 외할머니의 기일에 부모님과 우리 아들은 집에 있었다. 나는 당시 2년차 준교사로 전문학교 수준의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집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곳의 어느 고등학교에 수업을 하러 가게 되었다. 그곳 플래잰트뷰까지 운전하고 가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날 밤은 안개와 먹구름이 낀 칠흑 같은 밤이었다. 차의 시동을 켤 즈음에 심술궂게도 가랑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성삼위께 안전한 여행을 위한 도움을 청하고 도로에 접어들면서 묵주기도 테이프를 틀었다. 새로 포장된 도로를 가면서 혹시 길을 지나칠까 봐서 서행했다. 교통량이 많은 도로여서 차가 밀리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노란 신호등이 점멸하는 곳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그만 안개 때문에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고 말았다. 근처 정비소에서 차를 돌려 골목길로 들어섰다. 노란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학교까지는 4백 미터 정도였지만, 날씨 때문에 사거리가 온통 차로 뒤엉켜 왼쪽으로 나 있는 가파른 언덕길로 들어서서 도로가 나올 깨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게 되었다.

언덕을 올라가기 전에 성삼위에 맞춰 세 사람을 보내고, 성가정에 맞춰 세 사람을 보낸 다음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묵주기도를 계속하며 드디어 엑셀을 밟았다. 그런데 언덕길을 겨우 몇 센티 미터 진입하는 순간 젊은 여성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위에서 속력을 내며 달려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차는 내가 앉은 운전석 옆면을 치고 들어왔고 나는 얼른 엑셀에서 발을 뗐다. 내 차는 미끄러지듯 돌며 그 차를 들이받았다.

순식간에 일어나 일이었다. 내 차는 길가에 섰고 그 아가씨의 차는 길 한복판에 있었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그녀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러 갔다. 옆을 지나던 차에서 내린 여자가 자기 휴대전화로 경찰을 불렀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은총 덕분에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내 차는 시동이 걸렸고 역시 예수님과 성모님의 은총으로 자동차 외부에 흠집이 생기고 전조등이 깨졌고 뒷문과 트렁크 옆면이 조금 찌그러진 정도였다.

경찰이 도착했다. 날씨 때문에 생긴 사고라고 했다. 젊은 아가씨는 충격이 심했는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경찰관이 그녀의 남자친구를 전화로 불러 데려가게 했다. 경찰은 내 보호자를 부르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시력도 안 좋은데다 밤길 운전이 힘드셨다. 경찰은 내 차를 점검하더니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고 했다. 조금 전에 시동이 걸리던 내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후드를 열고 살펴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이너셔 스위치! 모든 포드 자동차에는 충격 시 시 폭발을 막기 위해 연료관을 차단하는 이너셔 스위치라는 것이 있다. 경찰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이너셔 스위치’란 용어를 꾸며 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스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다른 경찰이 다가오더니 “그 스위치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트렁크에 손을 넣었고 곧 엔진 소리가 들렸다. 경찰은 내게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아니라고 했다. 그 사고는 내가 겪은 최초의 사고인 동시에 꽤나 큰 사고라고 말했다.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무척 침착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묵주기도 테이프를 틀어서 들려주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은 내가 가야 할 학교로 먼저 가서 학생들에게 내가 곧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머지 경찰 두 명은 아버지가 도착해서 내게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실 때까지 나를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학교로 갔다.

내 차와 충돌한 그 여성은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리 비용을 받은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그 동안 ‘찌그러진’ 차를 몰고 다니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내 생명과 그 젊은 여자의 생명이 온전한 것이 동정 성모님의 거룩한 묵주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고 직후 시동이 걸렸던 것도 묵주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연료관이 이미 차단되어 시동이 걸릴 수 없었던 그 순간에 시동이 걸린 것은 성모님께서 엔진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내게 알려 주시고 트렁크에 있는 이너셔 수위치의 존재를 생각나게 해 주시려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차의 우그러진 부분을 고친 것이 일 년 전이다. 내 친구들은 웬만하면 새 차로 바꾸라고 하지만, 나는 내 차를 볼 때마다 내 생명을 지켜주신 성삼위와 성가정에 감사한다. 또한 운전할 때면 내가 얼마나 많은 은총을 받았는지를 다시금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 사고가 있은 지 수 개월 후에 나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카르멜 재속회’에 입회 신청서를 냈고, 입회 허락을 받아 수련자가 된 지 3년이 된다. 나는 내 삶이 묵주기도를 통해 성삼위와 성가정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성삼위와 성가정에 의지한다. 그분들의 뜻이 같기 때문이며 성삼위 없는 성가정, 성가정 없는 성삼위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 테네시 클라크스 빌에서 실린 M. 앤더슨

 

 

 

 

허락해 주신다면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 특별히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얘기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뵈오려 예루살렘에 가고 싶습니다. 참 하느님을 낳으신 그분을 뵙고 그분께 말씀 드리는 일이 우리 신앙의 벗이라면 누구에게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14

개종한 신자를 사랑하시는 성모님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이었다. 어느 날 여동생이 내게 전화를 해서 묵주를 들고 가까운 성당으로 가서 기도를 하라고 했다. 내가 왜 가톨릭교회로 가야 하는지, 또 묵주가 무엇인지를 동생에게 물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몇 달 지났을 때였는데, 나는 아버지가 진리를 깨달으셨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동생은 내가 반드시 가톨릭교회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나는 성당에 갔고 정오쯤 성당의 맨 뒷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미사 후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묵주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묵주기도를 이끌 수 있게 되었고 신부님께 나아가 강복을 받게 되었다. 그 해 예비 신지 교리를 받기에는 이미 늦었기에 다음 교리반이 시작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성체와 성모님,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강해졌고,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대희년을 준비하는 3년의 첫해에 나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1997년은 우리 집안에 많은 은총이 내린 해였다. 가톨릭 신자인 여동생 제리 외에 친정어머니와 언니가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이제 오빠가 우리처럼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며 본당에서 묵주기도를 이끄는 부선창자 副先唱者 로 봉사하고 있다. 내가 성모님과 묵주기도를 깊이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다. 교황님께서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하신 것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사랑이 많으신 천상의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만을 주고 싶어 하신다.

시댁 식구 중에는 가톨릭 신자가 없지만, 남편의 조카손녀 에밀리는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성당에 다니고 싶다고 했고 아이의 부모가 동의해서 지난 5월에 첫영성체를 했다. 에밀리의 여동생도 가을부터 어린이 예비신자 교리반에 다니기로 되어 있다. 에밀리의 사촌오빠도 성당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오면 나와 함께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미사 전 묵주기도를 하곤 한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묵주를 선물했고 성모님께서 그들을 성당으로 이끄심을 나는 알고 있다. 내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에밀리는 여섯 살이 되어 주일 어린이 미사에서 묵주기도를 이끌고 있다.

 

– 플로리다 베로비치에서 웬디 L. 보링거

 

 

 

 

삶을 이해하고 살아 보기 전에는 대체로 복잡해 보일 것이다. 특히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의 삶이 그렇다. 나이프, 포크, 스푼, 유리잔, 냅킨, 손을 씻는 그릇 등이 준비된 만찬 의식을 예로 들어 보자.

어떤 미개인이 이런 만찬에 처음 초대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이 모든 복잡한 의식이 사교와 소통과 친지들과의 모임에 배경과 부속물로 사용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음식 없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격식 없이 음식을 들면 훨씬 단순할 텐데…”

분명 훨씬 단순할 것이다. 그러나 훨씬 덜 문명화된 것이다. 묵주기도는 매우 지적이고 대단히 문명화된 기도 형식이다. 일단 이해하기만 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

 

– 메이지 워드

 

 

 

15

성모님에 대한 기억

 

어렸을 때 열두 명의 대가족이었던 우리는 밤마다 자기 전에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다. 우리는 농사가 주업인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시절에 묵주기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5월 성모 성월과 10월 묵주기도 성월이면 우리 본당 공동체는 성체 현시와 묵주기도에 대한 공경을 드리기 위해 함께 모였다. 학교에서 그리고 우리 엄마를 통해 우리는 성모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5월과 10월이면 매일 저녁 성당까지 1.5km를 걸어가서 묵주기도를 바친 기억이 난다. 또한 잠들기 전에 성모송을 세 번 외우면 성모님께서 우리가 죽을 때 틀림없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십대가 되어 집을 떠나 있을 때 나는 무엇 때문이지 어렸을 때와 달리 착실하게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항상 내 곁에 계시면서 내가 당신을 기억할 날을 기다려 주셨다. 나는 성모님께 돌아왔고 요즘은 그때 집과 학교에서 받은 가르침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 옛날 우리 본당 공동체는 주변에 많은 감화와 영향을 미쳤지만, 요즘은 성모님을 공경하는 달인 5월과 10월에 성체 현시를 하는 본당이 없다.

성모님께서는 늘 나의 보호자이시며 언제까지나 내 곁을 지켜 주실 분이라고 믿는다. 나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며 내가 잠든 밤에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한다.

 

– 캐나다 서스캐처원 프린스 앨버트에서 루이지 몰린

 

 

 

 

묵주기도는 완벽합니다.

기도로 바치는 찬미와 기도가 알려 주는 가르침.

기도로 받는 은총과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공적 때문입니다.

 

– 교황 베네딕토 15세

 

 

 

 

16

여섯 번의 심장마비

 

남편 패트릭은 32년 간 경찰관으로 일하고 은퇴했다.

2000년 10월, 우리는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39년 동안이나 즐겨 찾는 곳이었고 그때는 친구들 방문도 겸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호텔방에서 남편은 정말 무서운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무려 여섯 번의 심장마비가 찾아왔던 것이다. 호텔 구급대가 3분 이내에 도착해 전기 충격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남편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주님과 비오 성인께 남편과 조금만 더 함께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신부님을 뵙고 싶다고 했다. 다음날 참으로 아름다운 신부님이 오셔서 병자성사를 주셨다. 그리고 열흘 후에 남편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편은 집에 도착하지 미사 참례를 하겠다고 했다. 40년 넘게 미사 참례를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나는 너무도 감사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남편은 묵주를 달라고 했다.

미사 중에 내가 본 남편의 그 아름다움 모습을 여러분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넘치도록 많은 은총을 받은 이 아름다움 남자는 온 정성을 다해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나는 주님께서 사랑이 가득하신 마음으로 남편 패트릭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때로 우리 주님께서는 정신을 차리라고 우리 머리를 한 대 치시는 게 아닌가 싶다. 지난 세월 남편과 함께해 온 시간에 깊이 감사하며 더 많은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여러분도 믿듯이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채워 주시리라 믿는다.

 

– 오하이오 레이놀즈버그에서 바바라 L. 바로우

 

 

 

 

묵주기도를 정성스레 바치면 그로써 예수님과 성모님께 더 많은 영광을 드리고 다른 어떤 기도보다 더 많은 공적을 쌓는 것입니다.

 

–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17

묵주를 만들어라!

 

나에게 묵주의 기적은 2001년에 시작되었다. 나는 의학적으로 밝혀 내지 못하는 병으로 심하게 앓고 있었다. 병원에서 CT촬영, 복부 X레이, 정밀 혈액검사, 소화기관 검사, 결장경 검사, 위내시경, 쓸개 검사, 간 검사 등 수없이 많은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내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한 마약성 진통제를 권하는 일뿐이었다. 내 삶은 온통 통증과 싸우며 소진되어 갔다.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내 정신을 파고 들었다. 남편 리처드는 속수무책으로 병명을 모른 채 앓고 있는 나만큼이나 좌절하고 있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고통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내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남편은 오순절 교회를 나가면서 믿음을 갖고 행복을 느꼈다. 나는 남부침례교 신자였지만 점차 멀어졌고 다른 신앙을 가지려고도 했지만 결국 전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찍 일어난 어느 날 아침, 찻물을 올려놓고 텔레비전을 켰다. 나는 쇠약해져 있었고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가톨릭 방송 EWTN(Eternal Word Television Network)을 보게 되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방송이었지만 왠지 다른 채널로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거기서 ‘묵주기도’라는 것이 나오기에 무심하게 들었고, 이어서 ‘미사’ 라는 것이 방송되었다. 그것 역시 별로였지만 계속 보고 있었더니 안젤리카 수녀님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 프로그램은 재미있었고 수녀님도 좋았다 그때 남편이 일어나 채널을 돌렸고 나는 차를 한 잔 더 마시려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분명하고 차분하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묵주를 만들어라.”

통증이 너무 심하면 제정신이 아닌 때도 있었기에 나는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소리가 두 번 연거푸 들리자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켜고, ‘묵주 만들기’라는 사이트를 찾았다. 그랬더니 ‘성모님의 묵주 만드는 사람들’ 이라는 창이 열렸다.

켄터기 루이빌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나는 돈이 없다고 거짓말하기로 했다. 그러면 묵주 재료를 보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받은 상냥한 여자는 끈으로 만드는 묵주와 고리를 엮어 만드는 묵주가 있는데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물었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를 묻고 ID를 알려 주었다. 값을 물었더니 15달러라고 했다. 나는 ‘요때다’ 하고 가진 돈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괜찮아요. 30일 이전에 돈을 보내 주면 되니까요. 혹시 전부 지불하지 못하면 되는 대로 조금씩 지불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고맙다는 말조차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묵주 재료가 도착하려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릴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우편함에 그 물건이 들어 있었다! 두 번째 기적이었다. 그 주에 남편과 나는 백 개가 넘는 묵주를 만들었다. 세 번째 기적은 매일 아침 내가 묵주기도 방송을 틀어 놓고 그 의미도 모르는 채 묵주기도를 따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9일이 지났을 때 내 병이 완전히 나았다. 나는 그때 9일 기도가 뭔지도 몰랐다. 그리고 10일째 되는 날 아콜라에 있는 성당에 전화를 걸어 조 앨런 신부님과 캐럴 바우어 씨를 만나기로 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서였다.

네 번째 기적은 남편의 개종이었다. 나는 몇 달 동안 남편의 개종을 위한 기도를 했다. 입교식을 치르던 특별 미사에서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 신부님과 캐럴 자매에게 가서 “저도 아내와 함께 저 자리에 서야겠습니다.” 했다.

남편과 나는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세례를 받고 2002년에 함께 견진성사를 받았다. 요즘 우리 부부는 성체 분배자로 봉사하면서, 아서 요양원의 노인들을 위해 봉성체 를 하고 그분들과 일주일에 한 번 묵주기도를 바친다. 또한 예비신자 교리반 에서 봉사하면서 곧 성경 봉독자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 일리노이 아서에서 캐서린 M. 힐러

 

 

 

18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파도바 지방의 산 마르티노 디 루파리에서 1915년에 태어나셨다. 일생 동안 신심이 깊은 분이셨고 그 신앙은 아버지의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청년이셨을 때 이탈리아에서는 2년간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버지가 군에 입대하시기 전에 할머니께서는 새로운 환경에서 힘들 때 기도로 도움을 청하라시며 묵주를 주셨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뜻에 따랐고,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기 직전에 유럽에 전쟁이 발발해서 아버지는 결국 총 10년이란 기간 동안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주둔하면서 수많은 포화 砲火를 견디셨다. 주머니에는 할머니가 주신 묵주를 간직했고, 동료 군인들이 전사하는 상황에서도 참호에서 홀로 살아남으셨다. 운이 좋으셨던 것일까 아니면 묵주 덕분이었을까? 물론 아버지는 묵주 덕분이라고 확신하셨다. 아버지는 다리에 포탄 파편이 박힌 채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으셨다. 그 파편은 아버지 삶에서 전쟁을 되새기는 기념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전후에 풀려나서 살아 남게 된 것을 감사하며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모험적인 일생을 사셨다. 전쟁 후에 결혼하신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1951년 캐나다 온타리오 겔프로 이민을 오셨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전쟁 후에 이민을 갔다. 아버지는 잠시도 가만히 있는 분이 아니셨다. 캐나다에서 건설 회사를 시작했을 때에도 주머니에는 늘 묵주를 가지고 다니셨다.

어느 건설 현장에서 주머니에 있던 무주가 담벼락 뒤 깊은 틈새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너무나도 상심했고 기적을 가져다 주는 그 묵주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애를 태우셨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그 벽이 무너져서 묵주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아니, 아버지가 그 벽을 일부러 무너뜨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것이 성모님의 전구 덕분이라고 믿으셨다.

1997년 6월 24일, 아버지는 성공적인 삶을 끝내시고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와 50년을 해로하신 우리 어머니 젬마는 아버지를 당신 어머니에게서 받은 묵주와 함께 안장해 드렸다. 아버지 삶의 수많은 고난과 시련과 성공을 지켜본 묵주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기도와 믿음을 증거하는 이 글이 책에 실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다.

 

– 캐나다 온타리오 겔프에서 마리엘라 G. 르보

 

 

 

 

나자렛의 비천한 처녀가 천사의 아룀에 순명을 표하자

자연법칙의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낳으신 성자의 권세 아래

하나가 되는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모든 포도나무 가지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 성 아우구스티노

 

 

 

19

구름 위에서 기도하다

 

우리 부부는 2002년 6월에 결혼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으로 메주고리예와 루르드로 성지순례를 하기로 했다. 특별한 시간을 성모님의 인도로 예수님과 함께한 것은 진정 축복이었다. 우리는 이 성지순례를 통해 묵주기도 신심이 더욱 깊어졌고,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던 특별한 어떤 것을 다시 찾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싱가포르까지 열세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키가 185cm인 나에게 크게 불편한 비행은 아니었다. 아내가 창가에 앉고 나는 그 옆에, 그리고 내 곁에는 어떤 남자가 앉았다. 그는 예의 바른 신사로 보이려고 짐짓 애를 쓰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 남자가 잠이 들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팔과 다리까지 내게 걸쳐 놓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밀실 공포증이 있는 나는 더욱 힘들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체하려고 애를 쓰며 아내에게 “이런 상태로 열세 시간을 버티기는 힘들 것 같아!” 라고 말했다. 아내에게는 농담처럼 들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점차 약이 오르고 화가 났다. 그 남자와 내 상황이 무척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그때 아내가 묵주를 꺼내 나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고 나도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저 편안하게 숨이라도 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다. 1단을 바치고 나자 짜증으로 날카로워진 마음이 가라앉으며 편안해졌다. 그때 묵주기도 지향은 그 남자가 내 어깨와 가슴에 올려놓고 있던 팔을 치우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필을 거두어 팔꿈치를 위로 세우면서 자기 머리 뒤로 올리는 것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성모님께 괜찮으시다면 죄송하지만 그 남자의 다리도 치워 주십사고 기도했다. 감사하게도 성모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 남자의 다리는 통로 쪽으로 옮겨 갔다. 그는 비행 내내 팔꿈치로 하늘을 찌르는 자세로 잠을 잤다. 곡예사가 봤다면 대단하다고 감탄했을 것이다.

나는 평화롭게 행복한 마음으로 아내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주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그 높은 구름 위에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선하심을 찬미했다.

 

–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나레 워렌 사우스에서 존 W. 디이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루카 복음서 1장 46-55절

 

 

 

 

20

다 잘 될 거야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성모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임신 5개월째에 나는 콘크리트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그 일로 인해 엑스레이 검사 결과, 태아의 머리가 커지는 뇌수종에 걸렸다는 진단이 나왔고, 합법적인 낙태 시술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주변사람들과 싸웠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미사 참례를 시작했고 묵주 기도를 배워서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산이 임박해서 분만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분만을 담당할 의사가 그런 아이를 받고 싶지 않다면서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간호사는 얼른 다른 의사를 수소문해서 등을 떠밀듯이 데리고 들어왔다. 내가 마취를 하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지 않고 자연분만을 하겠다고 고집하자 의사는 난감해 했다.

진통이 오고 묵주기도를 하다가 눈을 들어 보니 의사 뒤에 서 계신 성모님이 보였다. 성모님께서는 의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다 잘 될 거야.”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셨고, 의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놓인 성모님의 손을 살짝 두드리며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 의사와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성모님의 현존을 함께 느꼈고 분만이 잘 이루어질 것을 알았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되었다. 나는 머리가 크지 않고 몸무게 3.9kg인 건강하고 잘생긴 사내아이를 낳았다. 지금 그 아이는 서른세 살의 멋진 남자로 성장했다. 오직 기도와 충실한 믿음만으로 하느님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 미주리 스프링필드에서 로즈마리 J. 핸리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예수님과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21

그는 자신이 유죄라고 진술했습니다

 

내 아들 토마스에게 참으로 아름다움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아들로 인해 삶의 변화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토마스는 알코올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계 미국인에게 내재한 기질 때문인지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아이는 ‘나이 든’ 사람만이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토마스는 술을 입에 대자마자 곧 중독이 되고 말았다. 여덟 살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아빠의 맥주를 훔쳐 마셨고, 얼마 후에는 친구들과 아울려 닥치는 대로 마셨다.

아들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우리 부부는 이혼 소송의 판결을 받았고 그 아이는 그날로 폭력 조직에 들어갔다. 이들은 알코올중독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폭력배가 된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족과 공동체에게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알지 못했다. 이후 그 아이의 삶은 악몽 그 자체였다.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자세히 밝히지 않겠지만  아들이 삶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다.

토마스의 외모는 무척 험상궂다. 얼굴 표정은 굳어 있고 태도는 뻣뻣했다. 그러나 오래 전 그를 재판했던 같은 판사 앞에 섰던 그날 모든 것이 변했다. 그날 법원은 텅 비어 있었다. 토마스의 사건이 그날의 유일한 재판이었다. 토마스의 변호사가 법정 앞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의뢰인인 토마스를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몰아세우며 그를 종신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토마스’라는 아들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라고 했다.

나는 그 변호사에게 그래도 엄마가 어떻게 있는 아들을 없는 셈치고 살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토마스를 위해 함께 기도해 달라고 했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기만 했다.

그 특별한 날에 토마스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등을 돌릴 것을 알았다. 판사는 아들의 변호사에게 피고를 변호하지 않으면 법정 모욕죄를 적용하겠다고 말했다. 토마스는 이미 몇 가지 혐의로 기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들은 이제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으로 재판을 받았고 중죄 혐의를 받고 있었다. 판사는 아들에게 최종 변론을 하라고 했다. 그러자 아들은 뜻밖에도 자신이 ‘유죄’라고 말했다. 변호사조차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토마스는 자신이 중독자이며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의 기도’ 와 ‘성모송’을 바치고 눈물을 흘렸다(토마스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는 아이였다). 그의 혐의에 대한 기소와 변호 내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판사는 토마스에게 중독 치료 프로그램이 있는 시설로 보낼 것을 선고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종신형을 받고 감옥으로 가겠다고 했다. 기소와 변론을 담당한 검사와 변호사는 토마스를 신뢰한다고 했고 재판관도 동의를 표했다. 속기사도 울고 있는 가운데 토마스는 재판관 이하 참석자들에게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치료 시설로 보내지기 전에 토마스는 구치소에 있으면서 주방장을 자원했다. 집에서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면회를 갔을 때 아들은 식당에 나를 데려가더니 식탁을 보여 주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대걸레로 식당 바닥을 닦고 있는데 걸레의 실이 탁자 다리 밑에 걸려서 그 실을 주머니에 넣고 방으로 돌아가 말린 다음 그것으로 1단짜리 매듭 묵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 동료들도 이제 자기 묵주를 만들어 방에 걸어 놓고 기도를 바친다고 했다.

다시 면회를 갔을 때였다. 다른 수감자가 면회 온 엄마와 함께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 엄마는 자기 아들을 살려 준 토마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방 수감자들이 그녀의 아들을 심하게 괴롭힌 나머지 자살까지 하려고 했고 그를 괴롭힌 사람들이 오히려 자살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교도관들이 그 아이의 옷을 벗기고 정신병자를 수감하는 안전장치가 된 독방에 넣었는데도 그 아이는 변기에 머리를 넣고 다시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토마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알몸인 그 아이의 수치심을 덜어 주기 위해 교도관들에게 속옷을 달라고 하고는 그 방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토마스는 아이에게 그곳에 있는 동안 보호자가 되어 주고 교도관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했으며 가혹 행위가 더 이상 없도록 해 주겠다고 안심시켰다. 조치는 잘 이루어졌고 가혹 행위를 한 사람들은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토마스는 그 아이와 매일 기도를 했다.

구치소를 떠나 치료 시설로 가면서 토마스는 그곳 동료들에게 수갑을 차지 않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치료시설에서 토마스는 훌륭한 강사가 되어 청소년기의 힘든 문제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연을 했다. 토마스의 사건을 맡았던 판사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엄마가 다른 형제들’에게 하는 토마스의 강연을 몰래 들으러 왔다. 토마스는 어린 범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낙인 찍힌 집단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범죄 통계치에 불과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미래이며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육을 받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가정을 갖게 될 때까지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의 형제이며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을 단 한 사람이라도 듣고자 한다면 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그것으로 제 삶은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토마스가 치료 시설로 갔을 때 그곳에 반대파 폭력단들이 중독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토마스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들과 마주쳤을 때 토마스는 셔츠를 벗고 자기 몸의 문신을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형제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피부색이든 이런 문신이든 어떤 것에라도 침을 뱉겠다.”

토마스와 다른 아이들에게 조용히 밖으로 나오라는 말이 전해졌다. 운동장에서 마주한 상대방 아이는 어금니를 꽉 다물고 주먹을 쥐어 보이며 자기 의사를 전달했다. 그 아이가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토마스는 그에게 달려들어 양팔로 그를 꼼짝 못하게 뒤에서 안고 “너는 내 사랑을 막을 수 없어!” 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팔을 풀고 마주보던 두 아이는 교실 창을 통해 다른 많은 아이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서로를 껴안았다.

그때부터 토마스의 무기는 묵주기도가 되었다.

토마스는 열일곱 살에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틀 동안 문상을 온 사람들로 영안실이 꽉 채워졌다. 폭력 조직에서 나와 새 삶을 사는 친구들, 경제 관계에 있던 조직원들,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신 여섯 분의 신부님과 두 분의 몬시뇰, 아들 사건의 재판을 담당하고 조사 弔辭 를 읽어 주신 판사님 등. 판사님은 토마스가 짧은 생애 동안 실천한 선행의 일부라도 본받을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토마스는 살아 있을 때 적대 관계에 있던 사람들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다. 지역 신문은 제1면에 토마스의 이야기를 실었다. 토마스는 텔레비전 광고를 찍었고 죽기 이틀 전에 방송되었다. 그런 연유로 텔레비전에서도  토마스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토마스는 낙태를 반대하는 강연을 지속하면서 낙태가 전쟁이나 폭력 조직보다 더 무서운 폭력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가족계획을 교육하는 강사를 따라다니며, 청소년 클럽에서 태아 모형을 나누어 주고 그 모형을 높이 치켜들고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이것이 조직 덩어리로 보입니까? 내게는 아기로 보입니다.” 어린 청소년들은 기립 박수를 쳤고 아이들은 안내석으로 몰려와서 임신중절 합법화에 반대하는 인쇄물을 가져가고 토마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소개하던 곳에는 한 여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토마스 주위의 많은 젊은이들은 낙태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간 희생자들이었다. 토마스는 그들에게 생명의 참모습을 보도록 도와 주고, 아무도 생명을 없앨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서 오직 하느님만이 그 권리를 지닌 분이시라고 역설했다. 토마스는 혼전 동거 연인들에게 결혼할 것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들 중 몇몇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고, 성당에 나가고 있다고 알려 주기도 했다.

토마스는 대학에 갈 예정이었고, 졸업 후에는 약물과 알코올 중독자를 상당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도 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졌지만, 왠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아들이 죽기 전날 밤, 친구들과 텔레비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친구 하나가 토마스에게 “만일 내일 죽는다면 넌 어디로 갈 것 같니?” 하고 물었다. 토마스는 “내가 천사처럼 착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일 죽는다면 나는 천국으로 갈 게 분명해.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으니까.” 하고 대답했다. 친구들은 토마스에게 ‘선교사’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토마스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죽기 두 시간 전에도 친구의 아이와 놀아 주었다. 그리고 토마스는 농구를 좋아했고 미식축구도 좋아했다. 공을 던지고 잡는 놀이도 좋아했다. 그 모든 것이 폭력 조직과 약물과 술에 빠져들어 먹고 먹히는 삶을 살기 전에 토마스가 즐기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 운명의 날에 아들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 돌아갔다. 열여섯 살이던 친구와 침수 沈水 된 다른 친구의 집에 가서 가구 옮기는 일을 도와주러 집을 나설 때 토마스는 스카풀라를 목에 걸고 있었다. 함께 탔던 친구의 트럭이 굽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가로등을 들이받는 사고가 났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쿼터백(미식축구에서 전위 前衛 와 하프백의 중간 위치 또는 그 위치에 있는 선수 -편집자 주) 역할을 잘해 낸 것을 아시고 더 넓은 경기장에서 뛸 만하다고 여기셨을 것이라 믿는다. 이곳에서 훌륭한 경기를 했으므로.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 후 태어난 남자아이 다섯 명이 토마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아무도 생명을 없앨 권리가 없습니다.” 라고 했던 토마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낙태되어 세상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아이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들의 묘지를 방문하고 묘비에 있는 토마스 사진을 본다. 그 눈을 들여다보면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그리고 치료 프로그램을 받도록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어떤 방문객들은 토마스의 메시지에 도움을 받아 가담했던 폭력 조직의 상징물이나 자신이 중독되었던 술이나 약물 등과 함께 “이것을 여기에 두고 가며 이제부터 올바른 길을 가겠다.” 하는 편지를 놓아두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편지들을 넣을 우편함을 묘지 곁에 만들었고, 토마스에게 그들을 도와주기를 청했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도와달라는 청을 했고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감사 편지를 넣기도 했다.

위령의 날에 우리는 아침 미사 참례 후에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묘지 축복식을 거행했다. 어떤 가족이 내게 다가와 기도를 청하는 편지를 토마스의 묘지에 두고 갔는데 그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 가족에게 토마스 곁에 누운 친구의 묘지를 보여 주었다. 그 아이는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죽기 전날 밤, 그는 친구에게 토마스가 죽을 때 스카풀라를 했으니까 자기도 해야겠다며 스카풀라를 목에 걸었다고 했다.

나는 토마스의 장례미사 때 사람들이 가져가도록 스카풀라와 묵주를 놓아 두었고 아들의 친구 장례미사 때에도 그렇게 했다. 그것을 가져간 사람들이 그들 삶에 ‘완전한 변화’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기도 했다.

성모님께서는 도미니코 성인에게 묵주기도와 스카풀라로 세상을 구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사회에서 그토록 멸시를 받았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어머니께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그들 젊은이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두 아이의 묘비에는 똑같이 과달루페의 성모님과 자비의 하느님 상이 놓여 있고 사랑의 힘을 증거하는 묵주와 스카풀라가 걸려 있다. 나는 아직도 토마스의 외침을 듣는다. “너는 내 사랑을 막을 수 없어!”

토마스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나는 위기에 처한 임신부들을 위한 상담소 (낙태하지 않도록, 아이를 낳도록 권유하고 실제로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비영리 단체) 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는 동안 아들이 떠나고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내가 기고했던 짧은 글이 눈에 띄었다. 그 글은 아들 토마스의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내게 알려 주고 있었다. 그 제목은 “최악의 의심과 꿈의 실현” 이다.

“나는 아이를 하나 더 가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낳은 아이들도 이미 다 성장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냥 지나가는 감기 정도이기를 바랐다. 마약 중독자 남편을 쫓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딸의 행동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딸아이가 임신한 것 같다. 딸아이를 데려가서 나와 함께 검사를 받아야겠다.”
그 모녀는 접수 서류를 작성했다. 십대의 딸은 엄마에게 ‘낙태, 입양, 부모’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물어보았다. 엄마는 딸에게 아기는 자신에게도 딸에게도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말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모녀에게 우리 가족의 지난 이야기를 해 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얼마나 유익하게 변화시켜 주셨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토마스가 죽기 전에 만든 내용을 짧게 편집한 비디오를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그 엄마는 토마스를 안다고 했다. 자기 아들과 어울리던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그 엄마는 그때 하느님께서 자신의 태내에 있는 아이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깨달았다. 내 아들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듯이, 딸도 임신임이 확인되자 그녀 역시 생명을 세상에 낳기로 결심했다. 그들 모녀는 서로 친구가 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 어린 두 아이를 키우고 보살폈다. 딸은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되었고, 엄마는 손자의 보호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런 과정과 결과에 행복했고 그들 모녀와 사이 좋게 지내고 있다.

 

– 플로리다 잭스에서 로즈 마리 댄포스

 

 

 

 

가장 훌륭한 기도 방법은 거룩한 묵주기도이다.

 

– 성 프란치스코 드 살

 

 

 

22

사랑의 표시

 

젊은 시절 나는 교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때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혼남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가 이전 혼인의 무효 판결을 받겠다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초에 두 번이나 혼인 무효 판결을 받으려고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혼인 장애는 계속 남아 있었다. 증인이 필요한 단계조차 이르지 못했고 교회 법원에 상정되지도 못했다.

이런 두 번의 시도 끝에 남편은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남편이 군대에 있어서 주둔지에 따라 옮겨 다니며 많은 신부님들을 만나 상담을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더 이상 교회 활동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었고 다시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절망했다. 남편은 점차 냉정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무척이나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첫 결혼의 무효 판결을 받지 않고는 신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런 현실 앞에서 나 역시 원망을 안고 냉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6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나는 점심시간마다 다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 후 어느 날, 성 세실리아 성당에 갈 일이 있었다. 성당 뒤편에서 아트쇼를 하게 된 친구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순간 아! 성령께서 나를 붙드시더니 나를 돌려놓으셨다!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혼인 무효 판결에 대해 신부님과 다시 상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고해성사로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며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없다는 주임신부님의 말씀을 듣자 나는 감정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그날 다시 절망에 빠져 하루 종일 울면서 첫영성체 때 받은 흰색 묵주를 들고 기도를 올렸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40년이 넘은 그 묵주의 연결고리가 금색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았고 내가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다시 무효 판결을 신청했다.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지만 4개월 후에 서류는 마침내 주임신부님의 책상을 떠나 법원 사무실을 거쳐 다시 플로리다교구로 보내졌다. 그리고 3년 후 혼인 무효 판결이 내려졌다. 우리 부부는 2002년 11월 22일, 성녀 세실리아 축일에 교회의 축복을 받았다(남편은 이날이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 모른 채 이날을 선택했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묵주 연결고리가 금색으로 변하는 것을 두 번 더 경험했다. 판결 과정이 더디게 진행되어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아, 주님. 저는 죄 사함도 받지 못하고 영성체도 못할 만큼 죄 많은 인간이에요.” 하는 생각에 빠졌을 때 일어났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하시며 내가 그토록 죄 많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네게 말씀해 주시는 방법이었다.

나는 매일 묵주기도를 드리며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기도 한다. 지금은 남편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묵주기도를 하는 동안 나의 기도와 물음이 응답을 받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묵주기도를 정말 좋아한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예수님과 성모님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할 것이다.

남편과 나는 결혼한 지 22년이 되었고 이제 열 살 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들이 우리 부부에게 축복으로 주어졌다. 다시 교회로 온전히 돌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른다.

 

– 네프래스카 라비스타에서 캐롤 페티스

 

 

 

 

여러분이 만일 누군가를 우리 주님과 그분의 신비체에

온전히 귀의시키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는 묵주기도를 그만 두거나

아니면 믿음의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 풀턴 J. 쉰 대주교

 

 

 

23

모든 사람을 위한 묵주기도

 

우리 성당은 두 개의 개신교회와 나란히 이웃하며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그들과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 때때로 종파를 초월한 미사나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지난여름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께서는 개신교회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일주일에 한 번 묵주기도를 주관해 줄 사람을 보내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말씀 드렸고, 신부님은 다른 사람을 추천해 줄 수 있는지 물으셨다. 나는 친구 리즈를 추천했다.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본당 일에 무척 열심한 신자였다. 리즈가 수락했을 때 나는 그 일이 정말 대단한 일이 되겠다 싶었다. 묵주기도를 주관하는 날을 며칠 앞두고 리즈가 내게 전화를 했다. 사실은 묵주기도를 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면서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리즈가 딸을 수영장에 데려다 준 다음 30분 정도 짬을 낼 수 있었다. 나는 리즈를 수영장 주차장에서 만나 묵주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복되신 성모님께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기도를 리즈에게 알려 주는 시간은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이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도를 알려 주게 된다는 사실 또한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리즈는 나중에 가톨릭 후원자들과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을 뿐만 아니라 몇몇 개신교 신자들도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알려 주었다.

 

– 로드아일랜드 워릭에서 도리스 A. 포스터

 

 

 

묵주기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당신의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사는

예수 성심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24

묵주기도의 비결

 

이야기는 우리 어머니에게서 시작된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자랐으며, 평범한 십대를 보내고 일찍 결혼해서 열아홉 살에 나를 낳으셨다. 그때 공교롭게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친척들이 돌아 가시는 일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어머니는 그 죽음이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믿으며 교회에서 멀어졌다.

몇 년이 지나 두 아이를 갖게 된 후 어머니는 이혼하셨다. 이 시기에 어머니는 친구와 뉴에이지 운동에 참여했다. 아마 그 뒤 수년간 거기에 몸담게 계셨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를 기억하며 떠오르는 일은, 마음이 무거웠던 어느 날 그 해 초에 첫영성체를 준비하며 내가 만들었던 묵주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함께 살던 아줌마가 “그걸 왜 꺼냈니?” 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왠지 묵주기도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어쨌든 그때 얼마 동안 묵주기도를 했다.

어머니는 어떤 남자를 만났고 그 사람과 세 번에 걸쳐 결혼식을 하셨다. 처음 결혼식은 “뉴에이지식”으로 집에서 했고, 두 번째는 몇 년 후 법정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당한 결혼식을 한 번 더 하셨다. 이 남자는 우리 삼남매를 ‘입양’ 했다 (이야기 끝에 내 성을 보기 바란다).

그리고 얼마 후에 두 가지 중대한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완성할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자각하신 것과, 비슷한 때에 외할머니께서 당신의 딸인 우리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사건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성모님 앞에서 울부짖으며 “성모님, 당신이 제 어머니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고 나서, “뉴에이지”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전환하며 어머니와 나는 처음으로 천사들을 생각했고 그분들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손을 몸에 대고 아픈 곳을 고치는 ‘신앙 요법가’를 보게 되었다 수소문 해서 그 카리스마적 치유자의 치유 기도회에 참석했다. 우리가 처음 참석한 그 기도회에서 어머니는 묵주와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의 <묵주기도의 비결> 이란 책을 사셨다.

그날 저녁,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는 묵주기도를 바쳤다. 아버지는 이때까지만 해도 동참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가톨릭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오순절교 신자로 교육받고 자랐다. 어머니는 우리 가정을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께 의탁했고, 많은 기도를 봉헌하는 가운데 때가 되자 놀랍게도 아버지의 마음이 돌아섰다. 우리 가족은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참례를 하게 되었고, 마침내 아버지도 저녁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셨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하셨고 올바른 길로 이끄셨다. 쉰아홉 개 묵주알로 이루어진 한 줄의 묵주를 통해서.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 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중에 어머니는 합당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혼인 무효 판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교회와 멀어져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묵주기도를 계속했고 미사 참례를 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키워 갔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처럼 당신 자녀들을 위해 당신 아드님께 전구해 주셨고, 비록 혼인 무효 판정이 수년 걸렸지만, 마지막 판정은 일 년을 넘기지 않고 메일로 도착했다. 과달루페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어머니의 첫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었고 일주일 후, 부모님은 교회의 축복을 받으며 혼인성사를 받으셨다.

아버지는 당시 성인 교리를 받고 계셨고 그 해에 나와 함께 견진성사까지 받으셨다. 한 가족으로서 우리는 지금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남동생은 사제직의 소명을 깊이 느끼며 복사로 봉사하는 은총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인터넷에서 손으로 만든 묵주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누구라도 원하면 아주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묵주로 기도를 바쳤다. 줄이 약해서 자꾸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첫영성체 때 만들어 사용하다가 끊어진 묵주를 가지고 있다. 그 묵주는 내가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나는 현재 스물한 살이다. 큰딸이었기에 우리 가족의 삶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전부 보고 느끼는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모든 것을 나와 다른 가족을 위해 기억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 일리노이 시카고에서 다니엘 로사리오

 

 

 

묵주기도의 비결

 

성 베르나르도와 성 보나벤투라는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께서 지상의 자비롭고 상냥한 사람들 못지않게 자상하시며 감사를 잊지 않는 분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모든 창조물을 능가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감사의 덕목에서도 우리 모두를 초월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백배의 보답을 해 주시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랑과 존경으로 드리는 영광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우리가 성모송으로 인사를 드리면 성모님께서 은총으로 보답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25

기도해야만 했어요

 

지난 해 9월,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뭔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하면서 눈물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래된 보석함을 정리하다가 리타 이모님이 몇 년 전에 사 주신 묵주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는 십 년 전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그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소생하시기를 기도하면서 묵주가 필요했는데, 이모님이 그것을 사다 주셨던 것이다. 그때 이후 한 번도 묵주를 만진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 치워 놓고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몇 년 전에 가톨릭을 떠났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묵주를 손에 들고 침실에 서 있으면서 묵주기도를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렇다. 묵주기도를 해야만 했다. 나는 두려움 앞에서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성모송’과 ‘주님의 기도’는 기억이 났지만 묵주기도를 하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갑작스런 내 말에 놀라며 이유를 물으셨다. 나는 손에 묵주를 다시 들었을 때 느꼈던 심정을 말씀 드렸다. 그러자 엄마는 다음 날 알려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가 마침 엄마 직장 동료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차에 묵주기도 책을 가지고 있던 그분을 통해 바로 그 책을 내게 보내 주셨다.

다음 날은 2001년 9월 11일이었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독자 여러분에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는 온종일 울고 있었다. 누군가가 일이 생기기 전에 기도하라고 자꾸 내게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거의 십삼 년 동안 냉담 중이었던 나는 우연히 가까운 성당에서 그 다음 날 묵주기도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다음 날 정오에 그 성당을 찾아갔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집으로 돌아온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기도 방법을 적은 쪽지가 없이도 자연스레 순서가 떠올라 잘할 수 있었다. 기도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내 곁에 계신 성모님을 느낄 수 있었다. 기도가 끝났을 때 옆에 앉았던 어느 여인이 나를 안아 주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 여인은 아마 나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내 삶은 변화되었다. 그리고 다음 첫 주일에 집 근처에 있는 본당을 찾아 갔고 지금은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아직도 성당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나는 안다. 엄마에게 묵주기도 방법을 묻던 날 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묵주기도는 그 어떤 것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나를 도울 것이다.

올해 엄마의 생신에 묵주를 선물로 보내 드렸다. 지금도 묵주를 손에 들 때면 뭔가 특별한 느낌을 갖는다.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 워싱턴 밀 크리크에서 로렐 T. 구크

 

 

 

26

오토바이 사고

 

나는 유아 세례를 받은 신자가 아니다. 2001년 9월 10일에 성인 예비신자 교리반에 다니기 시작했고, 2002년 성령강림 대축일에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내 신앙에 대해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가톨릭은 오래 전부터 나를 움직여 왔고, 다른 신앙과 달리 내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몇 년 전이었다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직장 동료가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부상을 입었다. 머리 부상이 너무 심해서 생명을 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나는 집에 앉아 눈물을 닦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에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묵주를 발견했다. 그 당시에는 묵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기도문뿐이었다. 까만 구슬로 엮은 묵주를 들고 기도문을 외우면서 하느님, 성모님, 또는 그 누구라도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면 제발 친구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다음 날 병원 응급실로 친구를 찾아가 보니 그는 혼수상태였고 당연히 내가 옆에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친구의 몸은 반쪽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머리는 피가 묻어 있는 채로 부어올라 있었다.

그런데 닷새 후 기적이 일어났다. 그 친구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고 신체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와 더 이상 보조기구의 도움이 필요 없어졌다. 병실에 들어서자 나를 알아보았고 잠시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직도 단기 기억 상실의 문제는 있지만 ‘정상’ 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의사들도 그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살아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 친구를 위해 기도했고, 무지하지만 절실한 마음으로 바친 묵주기도가 친구의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성모님께서 그날 밤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안다.

 

–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마샤 스튜어트

 

 

 

 

매일 묵주기도를 바쳐라

 

– 파티마의 성모님께서 루치아에게

 

 

 

27

묵주기도 웹 사이트

 

1960년대 후반, 나는 캘리포니아 산호세 지역 대학에 다니는 젊은이였다. 그때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어떤 점 때문에 나는 교회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3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정신적으로 황폐해졌고 온전한 삶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가톨릭 웹 사이트를 알게 되어 그곳에 있는 기도문을 복사해서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묵주기도를 알려 주는 웹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첫영성체 때 선물로 받은 묵주가 하나 있었지만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매일 기도하면서 말할 수 없이 큰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 성모님께서는 묵주기도를 통해 나를 당신 아드님과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해 주셨다. 1998년이 끝날 무렵, 캘리포니아 랭커스터에 있는 예수 성심 성당에서 나는 30년 만에 고해성사를 보고 30년 만에 다시 미사 참례를 했다. 그날 복음 말씀이 ‘되찾은 아들’의 이야기였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주님께서 되찾은 딸이었다.

지금 내 삶에서 묵주기도는 가장 중요한 기도가 되었고, 페이턴 신부님의 묵주기도 책은 기도를 하면서 각각의 신비를 묵상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묵주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하루는 더욱 활기차고 하루하루 더 나아지고 있다. 묵주기도가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지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올해 초에 나는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교회를 접하고 묵주기도를 통해 나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단체로, 이런 활동은 내게도 유익함을 준다.

내가 교회로 돌아온 지 6개월이 채 안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가톨릭 신앙에서 영적인 힘을 얻고 매일 바치는 묵주기도의 도움과 교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 캘리포니아 랭커스터에서 달린 리스터

 

 

 

28

캐시의 심장마비

 

나는 버지니아 뉴포트뉴스에 있는 카르멜 산의 성모님 성당에 다니고 있다. 2002년 12월 2일, 성 엘리사벳 길드 St. Elizabeth’s Guild 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길드 (Guild,  중세 상공업자들이 만든 상호 부조적인 동업 조합)의 조합원으로 JC 페니 미용실에서 헤어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캐시 챔피언이 근무 중에 극심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즉시 우리 길드의 자매들에게 전화를 걸어 기도를 청했고, 캐시를 위해 긴급한 기도를 청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아주 전조도 없이 찾아온 캐시의 심장 발작은 무척 심각했다. 미용실에는 당시 세 명의 고객이 있었는데 그들 중 두 사람이 간호사였다. 이것이 첫 번째 기적이었다. 캐시가 숨을 쉬지 못하자 그들은 즉시 심폐기능 소생조치를 취했고, 구급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10분 동안 계속했다. 그리고 다시 구급대원들이 15분 동안 소생조치를 하고 병원으로 이송했다. 41세의 캐시는 심장과 관련한 병력이 전혀 없었기에 우리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돌연사’의 위험이 있는 심장마비는 발생 2, 3분 내에 심폐소생조치를 하지 않으면 회복되지 못하거나 사망할 위험이 있다.

우리 길드의 자매들은 화요일 저녁 9시에 우리 집에 와서 캐시의 치유를 위한 묵주기도를 바였다. 참석하지 못한 다른 자매들에게는 각자 9시에 묵주기도를 하면서 기도 중에 함께하자고 청했다. 우리는 의사들이 캐시의 상태를 호전시켜 그녀가 깨어나기를 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캐시의 가족은 햄프턴 종합병원의 집중치료실에 있는 캐시의 곁을 지켰다. 캐시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위독한 상태였다.

수요일 아침에 두 번째 기적이 찾아왔다.  캐시가 깨어난 것이다. 캐시는 침대에 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병실을 나간 아버지를 찾았다. 매우 혼란스러워했지만 마침내 깨어났다! 의료진과 캐시를 병원으로 이송했던 구급요원들은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고, 그 병원에서 일하는 내 친구는 캐시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CAT 스캔 (X선 체축 단층 사진)을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아무도 그녀가 깨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이었다!

캐시의 상태는 약물과 심장소생기로 치료할 수 있다고 판명되었다. 나는 캐시의 문제가 평생 걱정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며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이 세 번째 기적이라고 믿는다. 캐시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아직 간호가 필요한 상태지만 나날이 호전되고 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으며, 특히 묵주기도가 그녀의 치유에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캐시의 완쾌를 빌며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

 

–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폴라 F. 크로잉하우스

 

 

 

 

우리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 던져졌고

바다는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위협합니다.

우리는 유혹의 바람과 시련의 파도 한가운데에서

우리 죄로 인해 심판의 두려움으로 떨고 있습니다.

때로 의혹의 번민이 엄습할 때면

우리는 슬픔의 심연에 빠집니다.

그때,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의 이름이

여러분의 입술 위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게 하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지탱해 주시고 희망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여러분은 안전하게

항구에 도달할 것입니다.

 

– 성 베르나르도

 

 

 

 

29

9일 기도의 치유

 

나는 17년 동안 일종의 편두통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해가 갈수록 통증은 더 길어지고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의사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을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약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친구 한 명이 편두통이 올 때마다 성모님께 기도를 올리라고 조언해 주었다. 어느 날 밤, 극심한 편두통으로 잠에서 깼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가 묵주를 꺼내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묵주기도를 마치자 편두통도 사라졌다. 침대로 돌아와 잠시 앉아 있을 때 어디선가 풍겨 오는 장미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그날 밤 성모님께서 내게 오셨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한 달에 한두 번씩 두통은 계속되었다. 한쪽 머리에서 시작된 두통은 다른 쪽으로 옮겨 가며 이삼 일 정도 계속되곤 했다.

1986년 크리스마스에는 정말 참을 수 없이 머리가 아팠다. 다음 날 나는 묵주의 9일 기도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성모님께 내가 편두통에서 벗어나도록 예수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주신다면, 그래서 편두통이 사라진다면 성모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1986년 크리스마스 이후 지금까지 나는 편두통을 앓지 않았다. 나는 묵주기도가 9일 동안 바치는 것인지 모르고 7일 동안 했지만, 어느새 편두통은 사라졌고 그래서 다시 감사의 기도를 7일 동안 바쳤다. 지금도 나는 성모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에게 성모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이야기를 잊지 않고 한다.

 

– 오하이오 톨레도에서 매리앤 보든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 교황 비오 12세

 

 

 

 

30

언덕을 올라가다

 

몇 년 전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추운 겨울 밤이었다. 밤 11시까지 직장인 성심 聖心 병원에 가야 했다. 미처 제설 작업이 되지 않아서 도로가 무척 미끄러웠다. 그런 겨울 날씨에 운전하기 쉬운 파란 소형 폭스바겐 버그를 몰기로 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시내로 차를 몰고 가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묵주기도를 했다. 자주 묵주기도를 하는 편이지만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더욱 열심히 기도를 바쳤다.

그렇게 별 탈 없이 가던 중 언덕 오르막길에 이르렀을 때 자동차 몇 대가 뒤엉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언덕을 오르려다가 미끄러진 것이 분명했다. 자동차들이 몇 번이나 오르려고 다시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걸 지켜보면서 점점 걱정이 커졌다. 아주 작은 스프츠카가 내 앞에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저 차가 성공한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스포츠카도 실패했다. 그렇지만 나도 한 번은 시도해 보기로 했다. 왼손에 묵주를 꽉 움켜쥐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모님께서 가속 페달이나 핸들을 움직여 주셨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 차는 마침내 언덕을 오를 수 있었다.  나는 긴장으로 몸을 떨면서도 성모님께 감사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제시간에 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워싱턴주 스포캔에서 매리 앤 콜론

 

 

 

 

거룩한 묵주기도는 하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가장 충직한 종들에게 내리시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기도문을 쓰신 분이시며,

기도문이 담고 있는 신비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31

묵주기도로 하나 되어

 

얼마 전 나의 이 메일 친구인 센 이 생일을 맞이했다. 센 은 묵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로, 성실한 남편이며 세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생일이 지난 후에 센 은 묵주기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 블로그에 자신의 뜻 깊은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는데, 딸에게서 받은 생일선물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빠를 위해 묵주를 만들었다. 실로 매듭을 만들고 종이 십자가를 단 아주 단순하고 작은 묵주로, 특별하달 것이 없는 평범한 것이었지만 센 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선물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가족을 하나로 묶는 고리가 될 수 있는 묵주의 역할을 설명하고 싶어서이다. 센 은 묵주를 만드는데, 그의 어린 딸은 아빠가 하는 일을 눈여겨보았고 아빠에게 묵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딸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만들어 선물한 묵주는 아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 묵주에는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묵주를 나눔으로써 가족이 하나 되는 이 평범한 유대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센 에게 우리 딸 에이미가 묵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에이미와 나는 함께 앉아 묵주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에이미는 구슬을 꿰고 구슬 사이에 매듭을 지어 묵주를 만든다. 연결 부분 장식과 십자가는 찰흙으로 직접 만든 것을 쓰기도 하고, 내가 사다 준 금속 제품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만든 묵주를 다른 아이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딸과 나는 나란히 앉아 묵주를 만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점심이나 저녁 메뉴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희생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또한 고양이가 사물을 보는 방법과 라디오가 작동되는 방법,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조용하면서도 생산정긴 시간을 함께하며 우리의 신앙과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다.

에이미가 태어났을 때 당시 남편이었던 코지 와 나는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편 이삭을 만나 나는 가톨릭으로 다시 돌아갔다. 에이미의 아빠는 미사 참례와 첫영성체, 기도 등 신앙의 문제는 에이미의 결정에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에이미가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었을 때 코지 와 나는 불교를 떠났고, 그래서 에이미는 어떤 종교의 영향도 받지 않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무척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아이가 네 살이었던 어느 날, 당시만 해도 무신론자였던 나에게 다가오더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기에 에이미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아이는 내 신앙이 다시 살아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2001년 부활 성야에 에이미는 우리 본당의 두 분 신부님께 세례를 받았다. 조 신부님이 세례를 주시는 순간 아이는 눈물을 흘렸고, 댄 신부님께 첫영성체를 하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놀라운 날이었다. 그날의 기쁨은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있다. 에이미의 아빠는 아이의 신앙이 그토록 깊은 것에 놀라워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도와주고 있다.

요즘 에이미는 나와 함께 주일미사 참례를 한다. 나와 함께 일주일에 네댓 번 묵주기도를 바치고 나와 함께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린다. 아빠의 집에 가서도 묵주기도를 바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에이미의 의지이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아이의 갈망은 대부분 나와 함께 묵주를 만드는 시간, 그리고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편 이삭과 나는 2년 전 결혼해서 지금까지 묵주기도를 바치는 시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있다. 각자 적절한 시간에 묵주기도를 바치기 때문에 우리 부부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갖지는 못하지만, 될 수 있으면 시간을 맞춰서 함께 기도를 바친다. 그 시간은 참으로 따뜻하고 친밀한 시간이며 우리 두 사람의 관계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강하게 해 주는 데 도움이 된다.

두 가족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지난 몇 년 동안 에이미와 이복형제들, 계부와 계모로서 남편 이삭과 나의 유대감이 자라났고, 우리는 온 가족이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나는 이 시간이 우리가 서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떨어져 있을 때에도 가까이 느끼도록 해 준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묵주기도는 우리 작은 가족의 튼튼한 기초가 되어 어떤 흔들림이나 폭풍우도 해결하고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가족은 사랑과 헌신으로 하나가 된다. 혈육과 공통의 유전인자로 하나가 된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유대감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묵주로 연결되는 고리이며 성모님과 주님,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 함께 바치는 기도의 즐거움이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은총을 내리시기를 빌며, 나와 내 가족이 매일 장미 화관으로 장식된 기도의 길을 걸으면서 누리는 평화와 행복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도 누리기를 바란다.

 

– 캘리포니아 벨몬트에서 진 올

 

 

 

 

아침에, 한낮에, 황혼 녘에

성모님 당신께선

제가 부르는 찬미가를 들으십니다.

기쁨과 괴로움 가운데,

행복할 때난 힘들 때에도

하느님의 어머니,

제 곁에 계셔 주세요.

시간이 반짝이며 흘러갈 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을 때,

제가 나태해지지 않도록

당신의 은총이 제 영혼을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지금 운명의 폭풍우가

저의 현재와 과거에 어둠을 드리울 때

저의 미래를 당신의 감미로운 희망으로 빛나게 하소서.

 

– 에드거 앨런 포

 

 

 

32

교황님을 위해 햇살이 빛나다

 

나는 올해 호주 시드니 남쪽에 위치한 울런공 교구 소속 45명 친구들과 함께 세계청년대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한 그룹이 되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며 각각의 신비를 묵상했다. 각 그룹의 청년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기도하면서 한 사람씩 기도를 주관하는 기회도 가졌다.

세계청년대회 축제의 마지막 주 토요일 밤에는 다운스뷰 파크에서 교황님과 저녁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주일인 다음날 아침에 거행될 교황님 집전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침 6시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잠자던 사람들을 깨웠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샤워였다. 비는 계속 내렸고 몇몇 사람들이 비를 피해 자리를 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기다리며 자리를 지켰다.

친구 한 명과 나는 묵주기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구름을 흩어 버리고 해가 다시 비추어 비에 젖은 모든 것을 말려 주기를, 그리고 미사가 거행될 수 있도록 청하는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서서히 비가 멈추기 시작했고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첫 말씀을 하셨을 때 구름에 가렸던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 호주 답토에서 캐트리오나 E. 누난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 요한 묵시록 12장 1절

 

 

 

33

무지갯빛 묵주

 

신앙심에 불타는 초보 신자인 나는 2001년 12월에 견진성사를 받기 일 년 전부터 묵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최근 호주에서 열린 꾸르실료에 참석하면서 뉴질랜드에서 만든 무지갯빛 묵주를 여러 개 가지고 갔다. 무지개는 꾸르실리스타 들의 마음에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꾸르실료 과정을 하면서 몇 개는 나누어 주었지만 과정을 마치고 일주일 휴가를 갖기 위해 시드니에 도착했을 때에도 묵주는 많이 남아 있었다. 꾸르실리스타 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성령이 임하신 가운데 남은 묵주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답을 청하며 기도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고 당당하게 자발적으로 밝히는 사람에게 묵주를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그 일은 휴가를 더욱 의미 있게 했다.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정말 그랬다.

달링 하버에서 내가 처음 만난 신자는 ‘미니밴’ 운전사였다. 그는 수호천사 핀을 꽂고 있었고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시더니 나와 함께 여행하던 친구의 시계를 땅바닥에 떨어뜨려 주시고 (시계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 운전사가 말을 걸게 하셨으며 증인이 되셨다. 두 번째 신자는 호텔에서 버스 타는 곳까지 함께 걸어간 부부였다. 그들은 꾸리실리스타였다. 패디스 마켓에서 가족이 나무를 깎아서 만든 그리스도상을 내게 팔았던 캄보디아 출신 여성도 묵주를 차지한 주인공이 되었다.

센터포인트타워 꼭대기에 있는 회전 레스토랑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신랑신부는 고향에서 가톨릭 혼인 미사를 하고 시드니로 와서 친구들을 초대해 세속 결혼식을 올리는 중이었다. 그 신혼부부도 깜짝 선물로 묵주를 받았다. 우리 단체 내 호주인들의 첫 모임에서 속죄의 형제자매회 Brothers and Sisters of Penance의 형제들에게 두 개의 묵주를 선물했다. 우리는 시드니 식물원 카페에서 만나 따오기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는 시간을 가졌다.

휴가 마지막 날 아침, 공항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가방에 세 개의 묵주가 남아 있었지만,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는 하나도 없었다. 택시 운전사에게 하나를 주었고, 내 휠체어를 밀어 준 승무원에게 하나를, 마지막 하나는 조카들과 여행 중인 시각장애우 여성에게 선물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 중에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고 밝히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내게서 묵주를 받았다. 나는 넘치는 축복을 받았고 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소망한다.

 

– 뉴질랜드 캐스터턴 에서 조이 F. 세이커

 

 

 

 

34

꾸지람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풍성하다.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 덕분에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었다.

어머니는 전적 교사셨는데, 매일 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끝낼 때쯤이면 잊지 않고 우리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하셨다. 묵주기도를 바친 다음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차례로 무릎을 꿇고 앉으면 축복을 해 주셨고 이어사 두 분의 손에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어느 날, 아버지를 대신해서 큰오빠에게 축복을 받게 되었는데 우리가 오빠의 손등에 입맞춤을 하는 순간 오빠가 손을 드는 바람에 우리 입술과 부딪치고 말았다. 우리는 그 앙갚음으로 입 맞춤 대신 오빠의 손을 깨물어 버리고는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는 그 거룩한 순간에 웃음을 참지 못한 우리를 꾸짖으셨다.

 

– 노스다코타 D. 레이크에서 리라 레스피노자 수녀

 

 

 

묵주기도는 보화와 같은 은총입니다.

 

– 교황 바오로 5세

 

 

 

35

쿠웨이트의 성모님

 

내가 여섯 살 때 아빠는 내게 처음으로 묵주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그전까지 나는 아빠가 구슬 목걸이를 손에 들고 무슨 놀이를 하시는지 무척 궁금했다. 물론 아빠는 놀이를 하시는 게 아니었고, 주님의 뜻에 따라 이렇듯 힘 있는 기도를 내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성모님은 내 삶에 큰 도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아들과 그 동료들의 생명도 구해 주셨다. 묵주기도로 많은 기적을 체험했지만 여기 한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막내아들 랜디는 사막의 폭풍 작전 당시 쿠웨이트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투가 계속되자 나는 아들이 무사한지 걱정이 되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시기에 나는 텍사스 샌앤젤로에서 열리는 가톨릭여성협의회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라브로커 몬시뇰께서 내 아들이 쿠웨이트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고 우리는 함께 묵주기도를 하기로 했다. 우리는 밤 열한 시에 기도를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네 시까지 계속했다(한 가지 언급할 것은 몬시뇰께서는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시면 우리와 함께 자주 묵주기도를 하시곤 했다는 것이다).

2주 후에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새벽 두 시에 수많은 포탄이 제 머리 위로 날아갔어요. 핑핑하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두려움 속에서 기도했어요.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고 내가 무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누군가 제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그 목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왔어요.” 그날 그 시간은 바로 우리가 묵주기도를 바치던 때였다! 나는 성모님께서 랜디에게 그 말씀을 하셨다고 믿는다.

나는 라브로커 몬시뇰께 편지를 보여 드렸고 몬시뇰께서는 우리 모임에서 그 편지를 큰 소리로 읽어 주셨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들 역시 그것이 성모님의 목소리라고 믿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보살펴 주고 계신다.

성모님, 당신의 망토 아래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당신 아드님께로 이끌어 주소서.

 

– 텍사스 버몬트에서 베로니카 M. 헤어그로브

 

 

 

36

성모님의 방문

 

성모님께서는 언덕을 넘어 그리스도와 함께 가셨습니다.

함께 그 길을 가시면서

성모님의 태중에 계시던 그리스도께서는

성모님께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은총을 풍성하게 내려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태중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아드님의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만족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로부터 벅찬 기쁨이 넘쳐나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사랑으로 흘러 들었습니다.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요한에게도

그리스도의 은총이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일 사랑의 성사로

제 마음 깊은 곳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삶의 여정을 걸으며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곁을 지나갑니다.

저도 성모님처럼 제 안의 그리스도와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그 사람들이

저를 통해 그분을 알기를 기도합니다.

 

– 에일린 릴리스 수녀,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37

강력한 기도

 

내 아내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묵주기도였다. 아내는 파티마 성모님의 ‘푸른 군대’에 가입하여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며 살았다. 베이비시터(전문적으로 아기 돌보는 일)로 일하고 있는 아내는 어느 날 이 곳 애리조나의 산꼭대기에 있는 어느 가정의 아기를 돌보게 되었다. 늦은 아침 녘에 집 밖으로 나온 아이를 데리러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전부 잠겨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저녁때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내는 밖에 앉아 묵주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친 다음 아이를 안고 다시 문들을 열어 보았다. 한 군데 문이 열렸다! 아이의 부모가 돌아왔을 때 아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아이 아빠는 어느 문으로 들어왔는지를 물었고 아내는 그 문을 가리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리가! 저 문은 오랫동안 사용한 적도 없고 항상 잠겨 있었어요! 정말 강력한 기도를 하셨군요.”

아내는 “물론이죠! 우리 성모님의 묵주기도를 했으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그 남자는 내 아내가 그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아내는 세상을 떠날 때 묵주를 손에 들고 갈색 스카풀라를 목에 걸었다. 그 전에 신부님께서 병자성사를 베풀어 주시려고 오셨을 때 아내는 “신부님, 먼저 묵주기도를 마쳐야겠어요.” 라고 말했고 신부님은 “네, 그러세요.”라고 말씀하셨다.

 

–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로데리크 D. 페룰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매일 묵주기도를 비치십시오.

사목자 여러분께도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간곡히 권하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묵주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를 권고합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38

묵주기도와 대형 컨테이너 트럭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결혼 후에도 묵주기도는 내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해 왔다. 아내와 성장한 세 아이도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치며, 우리 가족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1955년 나는 아탈리아 산조반니 로톤도에 계시는 비오 신부님께 나의 지향을 알려 드리고 기도를 청하는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 해 3월 1일에 신부님의 상급 장상께서 “비오 신부님은 형제님의 지향을 위해 기도하실 것이며 그분의 축복을 보냅니다.” 라고 쓰신 짧은 편지를 보내 주셨다.

비오 신부님도 나와 마찬가지로 묵주기도를 가장 열심히 하시며 매일 바치고 계신다고 했다. 나는 성 비오 신부님께서 우리 가족을 위해 지금도 기도해 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나는 자주 신부님께 기도 드리며 성 비오 신부님을 내 삶에 선물로 보내 주신 성모님께도 깊이 감사한다.

나는 30년 동안 URM Stores(미국 북서부에 있는 소매업 협동조합)에서 대형 컨테이너 트럭을 운전했고 때로는 두 개로 연결된 화물 트럭을 운전하기도 했다. 워싱턴, 아이다호, 몬태나, 오리곤 등지를 돌며 총 388만Km를 운전하면서 거의 하루 종일 묵주기도를 하곤 했다.

1970년대 초 어느 날, 나는 루이스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심한 커브가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트럭의 브레이크장치에는 공기탱크에 충분한 공기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도로를 4분의 3쯤 내려갔을 때 공기탱크에서 공기 누출이 발생했다. 기압계가 0으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트럭을 통제하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에서 뛰어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동안 트럭은 경사가 완만한 커브 길을 돌면서 천천히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에어브레이크가 없는 상태로 움직이고 있는 트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핸드브레이크로 속도를 낮추는 것뿐이었다. 핸드브레이크를 잡아당기자 트럭은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핸드브레이크를 잡아당기면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님, 성모님, 도와주세요!” 그러자 트럭은 속도를 점차 낮추면서 마침내 멈추었다.

그날의 악몽이 떠오를 때면 나는 핸드브레이크가 트럭을 멈춰 서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핸드브레이크만으로 그 무거운 트럭을 멈춰 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푸른 망토로 내 트럭을 감싸 주셨다. 감사합니다. 푸른 망토의 성모님!

자동차 운전에 최악의 날씨는 안개와 빙판길이다. 몬태나의 리비로 트럭을 몰던 때의 일이다. 그날은 매섭게 추운 날씨와 짙은 안개로 자동차 창에는 성에가 두껍게 끼어 있어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시속 40Km로 천천히 운전을 하면서 안전한 운행을 위해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렇게 트럭을 운전하고 있는데, 성에가 낀 차창너머 길 오른편에 얼핏 말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운전을 하고 가는데 안개 속 길 한복판에 서 있는 말 한 마리가 또 보였다. 이번에는 내 트럭과 70cm 쯤 거리에서 왼쪽 차창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도로조차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말을 두 마리나 본 것이었다. 그 말들이 어째서 고속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일까? 마치 기적처럼 두 마리의 말이 좌우로 서로 멀리 떨어져 서 있었기 때문에 내 트럭은 그 사이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눈으로 보았지만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말들이 내 트럭과 너무나도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칠 뻔했다.

리비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개는 걷혀 있었다. 내가 말을 보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말 한 마리가 죽은 채 길가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 말을 치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성모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말들이 간격을 두고 있어서 내 트럭은 안전하게 그 사이를 지나갈 수 있었다. 성모님께서 내가 지독한 안개 속에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셨던 것이다.

1968년에 워싱턴의 트위스프로 운전을 하고 갔다고 영하의 날씨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눈보라가 치더니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던 눈이 도로에 쌓이기 시작했다.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집까지 오는 데 열여덟 시간이 걸렸다. 무사히 집에 도착한 나는 “예수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올렸다.

워싱턴 월라월라로 가는 길이었다. 오르막길을 지나 막 내려가려는 찰라 오른쪽 앞 바퀴의 볼트가 헐거워지면서 바퀴가 앞뒤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몇 초 안 되는 그 순간에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바퀴가 빠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퀴는 빠지지 않았다. 성모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

대형 컨테이너 트럭을 몰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면 좋은 점이 참으로 많았다. 하느님의 창조물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선물이었다. 아름다운 산을 지나 온갖 나무가 우거진 숲을 볼 수 있고, 팔루스를 지나 월라월라로 가는 길에는 황금빛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미풍이 불고 태양이 빛날 때면 황금빛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다. 몬태나의 리비 주면과 포스오브줄라이 패스 근처의 풍광은 더욱 아름답고 몬태나에 펼쳐진 산과 강들 역시 눈을 즐겁게 해 준다. 그레이트컬럼비아 강과 거기 세워진 댐, 저지대, 고지대, 돌로 뒤덮인 평지, 산쑥, 드넓은 밭과 과수원, 산림지대 등등 그 모든 것을 보았으며 하느님의 창조물에 감사했다.

트리시티에서 얘키모에 이르는 길에는 끝도 없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다른 여러 과일과 더불어 가장 풍미 있는 포도주를 생산하는 곳이다. 오카노간 카운티를 거쳐 트위스프를 지나 웨나치로 가다 보면 수 많은 종류의 사과 밭이 이어진다. 웨나치에서 나는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수녀님들을 위해 과즙이 풍부하고 크고 아삭아삭한 레드딜리셔스 사과를 샀다. 그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아삭’ 하는 소리가 난다.

그렇게 운전을 하면서 언제나 묵주를 가지고 다녔다. 나는 고속도로와 일반도로, 좁은 길 등을 대형컨테이너트럭을 몰고 다닌 그 세월을 돌이켜 보면서 나를 보호해 주신 성모님께 감사할 뿐이다. 성 비오 신부님도 묵주기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나를 구해 주셨음이 틀림없다.

 

– 워싱턴 주 스포캔에서 웨인 샤틀러

 

 

 

 

밀랍이 불 앞에서 녹아내리 듯이 악마들은 성모님 앞에서 도망친다.

 

– 성 보나벤투라

 

 

 

 

39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느냐

 

1987년에 나는 심장 발작을 일으켜 위험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다섯 명이나 되는 전문의가 내게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혼수상태에 있는 나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다. 기적의 메달 형태 안에 계신 성모님의 모습은 손이 아닌 발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느냐.” 고 말씀하셨다.

나는 매일 기도를 바쳤기 때문에 성모님께 얼른 대답했다. “네. 알고 있어요.” 나는 마치 가족과 이야기하듯이 편안하게 성모님께 말했다. 그리고 순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곁에 있는 가족을 바라보았다. 가족들이 울고 있어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3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가족과 많은 친지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준 것에 감사하며, 성모님께 의탁할 수 있는 것에도 감사한다.

1997년 9월 췌장에 있는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제때에 발견하지 못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몇 주 내에 암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성모님께서 나를 지켜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5년 간 아무 탈 없이 지냈다. 환자 요양소에서 지냈고 수술 직 후에는 걸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집안일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우리 딸이 수술을 받게 되었지만 나는 성모님께 수술이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고 있다.

나는 성모님께 깊이 감사하며 성모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아드님께 매일 기도를 바친다. 또한 매일 시간이 될 때마다 묵주기도를 바치고 모든 사람들이 묵주기도를 바치기를 기도한다.

 

– 코네티컷 오크데일에서 캐서린 M. 디다토

 

 

 

 

40

묵주를 주다

 

나는 41세의 여성으로 16년 전 ‘꾸르실료 데꼴로레스(DE COLORES, 빛과 함께)’를 수료한 이래 매일미사에 참례를 하고 있다. 침례교파 사립학교에서 2년 간 일한 적이 있는데, 나의 신앙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일해 본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와 헤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믿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며 동시에 그들에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료들은 내게 그들을 위한 기도를 청했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 마약중독이나 이혼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매일 묵주기도를 중심으로 기도를 한다고 설명했다. 그들의 믿음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처럼 동정 마리아이신 성모님께 대한 공경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들이 원한다면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한 묵주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묵주기도와 그 기도의 힘으로 모든 응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설명도 해 주었다. 동료들은 내가 그들을 위해 묵주기도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응답이 있었다. 어떤 자매는 감옥에 있던 아들이 출옥하게 되었고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이혼 문제를 겪던 이들도 상황이 호전되었고 좋은 직장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특별히 자신을 위해 기도를 청했던 후아니타라는 여성은 가톨릭 신자였는데 내가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그녀는 가톨릭의 뿌리로 ‘다시 돌아오라는 부르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당시에는 비록 비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간청이 묵주기도의 힘으로 응답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나에게 ‘원죄 없으신 성모님’ 상과 ‘아기 예수님’ 상을 갖고 싶다고 했고, 내가 기쁜 마음으로 선물하자 아주 특별한 자리에 놓아두었다.

존경 받는 초등학교 교사인 후아니타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밝히는 것에 찬성했다. 그녀는 나와 우리 가족의 좋은 친구가 되었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자주 부탁한다. 우리가 만나게 된 것과 자신을 위해 내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삶에 하느님의 빛을 가져다 준 나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

나는 요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나와 후아니타가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 기회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으며, 성모님과 묵주기도의 힘으로 그런 날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는다.

 

– 플로리다 웨스트팜비치 에서 마리아 테리사 로리바레스

 

 

 

 

생각하소서, 성모님

생각하소서, 지극히 인자하신 동정 마리아여,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도움을 애원하고 전구를 청하고도

버림받았다 함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나이다.

우리도 굳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동정녀 중의 동정녀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당신 앞에 죄인으로 눈물을 흘리오니,

강생하신 말씀의 어머니시여,

우리의 기도를 못들은 체 마옵시고,

인자로이 들어주소서. 아멘.

 

-성 베르나르도

 

 

 

 

 

41

묵주 선물

 

2002년 11월 23일,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이메일을 주고받는 친구들로부터 메릴랜드에 사는 두 어린아이가 세례를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오하이오에있는 친한 친구가 가톨릭 신자가 되어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받고 혼인성사까지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들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다가 묵주를 만드시는 할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85세가 되신 할아버지는 4천 개가 넘는 묵주를 만드셨고, 그것을 가족과 친구, 가난한 이들과 선교사, 수감자들에게 보내셨다.

나도 선물로 보낼 묵주를 청해서 모두에게 보냈고 그들은 최고의 선물이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메릴랜드의 가족에게 다섯 개를 보냈는데 아이들의 엄마는 무척 기뻐하며 아이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겠다고 했다. 개종한 친구 잔은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묵주기도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묵주는 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이기도 하다. 20여 년 전 결혼하는 날 묵주를 선물로 받았고, 그날 이래 나는 될 수 있으면 어렸을 때부터 내 생활의 일부였다. 사순 시기에 우리 가족은 묵주기도를 바쳤고, 이웃의 교우들과 함께 각 가정을 돌면서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다.

어머니께서는 묵주기도를 바치다가 잠이 들면 천사들이 나를 위해 묵주기도를 끝까지 바쳐 준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성모님을 어머니의 본보기로 삼아 모시면 어려움과 기쁨과 슬픔 가운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모님께서 우리 가족과 나를 위해 항상 함께하심을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특히 수술을 받는 중에 묵주기도는 나를 위한 특별한 기도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수술을 받았고 남편은 심장과 다리, 폐 수술을 받았다. 나는 두 번의 관절전대치술을 받았고, 2003년 2월 11일에 또 한 번의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묵주기도는 이번에도 나의 벗이 되어 줄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아베마리아’ 이며 평화의 여왕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말씀 드리기만 하면 언제나 들어주신다. 성모님께서 아름다운 기도와 함께 언제나 내 곁에 가까이 계심을 느낀다.

 

– 미시건 뉴웨이고 에서 헬렌 M. 보취카

 

 

 

 

오, 예수님의 어머니시며

저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저를 당신 곁에 머물게 하시고

당신께 매달리게 하시며

끝없이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의 자녀가 되어 존경과 사랑과 신뢰를 약속하오니

어머니가 되시어 저를 보호해 주소서.

저에게는 당신의 끝없는 돌보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성심의 생각과 소망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당신의 성자께서 원하시는 바를

제가 열성을 다해 이룰 수 있도록

그분의 생각과 소망을 제 마음에 끊임없이 알려 주소서.

고귀한 사랑이 제게 스며들게 하시어

제가 다시는 제 의지대로 하지 않게 하소서.

사랑하는 어머니,

제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미덕을 갖추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제 자신을 잊고

오직 그분만을 위해 일하도록 하소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언제나 당신의 도움에 의지하겠나이다.

저는 그분의 것이며

좋으신 어머니, 당신의 것이옵니다.

세상에서 마지막 저녁을 보낼 때까지,

티 없이 깨끗하신 당신 성심께서

천국에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제게 보여 주실 그날까지,

그곳에서 당신과 당신 성자를 영원히 사랑하고 찬미하는 그날까지

매일매일 당신의 거룩한 모성의 은총을 제게 내려 주소서.

 

– 추기경 존 헨리 뉴먼

 

 

 

 

42

목숨을 살려 주시다

 

성모님의 묵주 덕분에 나는 여러 번 죽을 목숨에서 살아났다. 열일 곱 살 때였다. 놀이 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데 순간 갑자기 몸이 앞으로 확 쏠리는 것이었다. 그때 앞에 보이는 금속 가로 막대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다시 제자리에 앉아서 보내 내가 잡은 것은 묵주였다. 사실은 내 몸이 앞으로 쏠릴 때 옆에 앉은 친구가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롤러코스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성모님,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쳤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순간에 가방에 있던 묵주를 언제 꺼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전날 한 여자아기가 바로 그 롤러코스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성모님과 관련된 사연이 많다. 미혼이었던 시절에 나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나의 아름다운 성모님’ 께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성모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고 우리 부부는 48년 5개월의 세월을 함께해 왔다. 남녀 쌍둥이를 입양해서 잘 키웠고 지금은 다섯 명의 손자와 한 명의 증손녀를 두었다. 손자 중에 한 명을 데려다 우리 손으로 키우기도 했다.

성모님께서는 거룩한 묵주기도를 통해 내 인생을 계획해 주셨다. 나는 성모님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며 좋을 때나 힘들 때나 그분들을 통해서만 삶을 잘 살아 낼 수 있었다.

 

– 미시건 조네스빌 에서 로레타 G. 베이커

 

 

 

 

오, 마리암(마리아). 하느님이 진정 너를 간택하셨도다.

그분은 너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세상의 모든 여인들 위에 너를 택하셨도다.

 

– 코란

 

 

 

43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1944년, 나의 결혼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가 ‘무사히’ 결혼하기만을 바라셨을 것이다. 나는 사제 집무실에서 어머니가 성경에 손을 얹고 터무니없는 거짓 맹세를 하는 모습을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임신 중이었다. 남편이 될 남자는 가톨릭 신자였고 나는 그때 신자가 아니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무수히 이루어지는 주교님의 관면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관면 장애로 혼인이 성립되지 않기를 원했다. 아니 기도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에는 나도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고, “자녀들을 가톨릭 신자로 키우겠습니다.” 하는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 아이들 셋을 페이튼 신부님의 묵주기도 운동 단체에 데려갔고 특별한 시간을 함께 했다. 아이들 아빠는 함께 참석하지 않고 이렇게 투덜거렸다. “개종한 여자와 절대 결혼하지 마라. 사는 게 엄청 피곤해진단다.”

나는 페이턴 신부님의 묵주기도 묵상집을 사서 아이들을 앉혀 놓고 묵주기도를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톨릭 신자로 키우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에서였을 뿐, 이이들에게 읽어 주는 묵상 내용은 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서 나는 갑자기 예수님의 현존과 그 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놀라운 깨달음으로 잠시 동안이지만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동차로 800km 를 달려 친정아버지에게 갔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신 아버지는 오래 전에 중국에 선교사로 가고 싶어 하셨다.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제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구요.”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다. “이제 죽어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아요.” 나는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아버지의 눈빛도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언제나 선교사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지.”

내가 청하기도 전에 성모님께서는 묵주기도를 통해 내게 믿음을 가져다 주셨고, 그것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후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퍼시픽노스웨스터를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우리 신앙에 관심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하고 있다.

위싱턴 웨스트포트에서 캐럭 버그너

 

 

 

44

성모님의 보호 아래

 

나는 메인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섯 명의 어린 딸들을 키워야 했다. 두 살에서 열 살에 이르는 올망졸망한 딸들 외에도 집을 떠나 사는 언니 둘과 결혼한 오빠가 셋이 더 있었다. 막내인 나는 늘 어머니 곁에 붙어 있었는데,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때 외에도 어머니 홀로 무릎 꿇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수없이 보며 자랐다.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지금도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어머니를 무척 힘들게 했다. 고집 세고 반항적인 딸이었던 것이다. 1966년, 스무 살이 된 나는 집을 떠나 뉴욕으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내가 일자리와 거처할 곳을 찾을 때까지 언니 수녀님이 동료 수녀님의 집에 잠시 머물게 해 주었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6주마다 주말 휴무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고 집에 좀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에 뉴욕 행 마지막 버스를 타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새벽에 도착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새벽 세 시쯤 뉴욕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포트오소리티에서 내가 지내는 곳까지 가려면 아주 긴 터널을 걸어서 통과해야 했다. 그 시각에 주변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가방과 휴대용 전축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과 다른 잡다한 보따리까지 양손 가득 들고 나는 터널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터널을 반쯤 걸었을 때 마주 오는 사람이 보였다. 지팡이를 든 나이든 아저씨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지팡이를 짚지 않고 그냥 들고 오는 것이었다. 갑자기 공포가 엄습했다. 손에 든 것들을 내동댕이치고 뒤돌아 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바고 그 순간 성모님이 보였다. 내 손을 잡아 주시고 내 짐들까지 들어 주셨고 우리는 함께 걸었다. 그 아저씨와 스쳐 지나가게 되었을 때 보니 그분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날 그 순간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묵주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막내딸인 나를 위해 특별히,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엄마, 고마워요. 성모님, 고맙습니다.

 

– 코테티컷 하트퍼드에서 앤 B. 캐론

 

 

 

 

성모님을 따르면 길을 잃지 않고

성모님께 기도하면 절망하지 않으며

성모님을 생각하며 잘못된 길로 가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잡아 주시면 넘어지지 않고

성모님께서 인도하시면 지치지 않습니다.

아, 성모님.

어머니이신 당신의 마음은 온 세상이 멸시하는 죄인들을 안아 주시고

하느님과 화해할 때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 성 보나벤투라

 

 

 

45

기적의 석탄 배달

 

어릴 때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고난의 시간이 계속되었고 아버지는 직장까지 잃으셨다. 어느 추운 날, 우리가 땔 석탄은 하루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저녁 식탁에서 부모님은 우리 아홉 남매에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알려 주시면서, 그날 밤에 정부의 구호품 석탄을 받지 못하면 다음날 우리를 고아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슬픈 목소리로 덧붙이셨다. 우리가 갈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식사 후에 우리 가족은 무릎을 꿇고 앉아 묵주기도를 바쳤다. 기도가 거의 끝나갈 무렵 길을 따라 올라오는 트럭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고 잠시 후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외투를 집어 들고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짐을 부리는 일을 도와야겠구나.”

우리는 기쁨에 가득 차서 묵주기도를 마쳤다. 그러나 밖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정부 구호품이 아닌 것 같구나.” 그리고 어머니께 말씀하셨다. “전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소. 내가 서명해야 할 인수증도 내밀지 않았고.” 우리 가족은 잠자리에 들면서 그 남자가 누군지 모두 궁금하게 생각했다(집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음날 또 다른 석탄이 배달되었다. 어머니는 트럭을 몰고 온 어머니의 사촌에게 말씀하셨다. “어젯밤에 다른 사람이 석탄을 배달해 줬는데.” 어머니의 사촌은 웃으며 “이 동네에 석탄을 배달하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어젯밤 석탄을 받았다면 아마 요셉 성인께서 가져오셨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정말 요셉 성인이셨는지 아니면 천사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석탄을 보낸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은 적이 없다. 우리의 성모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묵주기도의 힘을 믿으며 하느님께 감사한다.

 

– 오하이오 페어본 에서 메리 F. 피트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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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름

 

나는 언제나 성모님과 아주 강한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때는 물론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41세에 나를 임신하셨다. 내 위 오빠를 낳으신 지 9년이 지난 후였고 어머니는 많은 나이 때문에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지 걱정하셨다. 의사는 어머니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지만 아기가 체중 미달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묵주기도를 시작하셨다. 성모님께 건강한 아기를 낳는다면 성모님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마리안 이라고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마침내 해산일이 되었고 진통이 심한 가운데 나는 2.8kg의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기뻐했다. 오빠가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와서 갓 태어난 나를 처음 보았을 때 간호사가 아기를 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오빠는 “놀라워요.” 라고 대답했다. 어린아이의 표현이 정말 놀라웠다. 성모님께 했던 약속을 지켜서 내 이름은 마리안 이 되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모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도와주셨다. 아버지는 운전을 하시고 오빠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갓 태어난 나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는데, 당시에는 안전벨트라는 게 없었기에 나를 무릎에 누이고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그때 이미 아주 작은 기적의 메달을 나에게 걸어 주셨다.

그때 갑자기 우리 차 앞에서 두 대의 자동차가 경주를 하듯이 달려 오고 있었다. 한 대는 아슬아슬하게 우리 차를 비켜 갔지만 다른 한 대는 중심을 잃고 기울어진 채로 우리 차 쪽으로 달려왔다. 어머니는 순간 재빨리 성모님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 순간 중심을 잃고 우리 차 앞까지 달려오던 자동차의 방향이 살짝 바뀌더니 우리 차의 뒷부분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만일 그 차가 우리 차와 부딪쳤다면 신생아였던 나는 목숨을 잃었거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끊임없는 사랑과 도우심을 베풀어 주셨던 것이다.

나는 늘 기도 가운데 성모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이상 묵주기도를 한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내 삶을 중재해 주신 일은 지금까지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나의 특별한 이름과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시는 우리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 펜실베이니아 레바논에서 마리안 K. 펙

 

 

 

만일 모든 악마가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나를 죄 있다 비난해야 하고 만일 지옥이 전부 일어나 나를 게걸스레 집어 삼키려 입을 벌려야 하며 모든 성인들이 나를 버릴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만일 성모님 당신께서 중재의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신다면 저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프란치스코 수아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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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신부의 기도

 

1966년, 고등학교 때 사귄 남자친구와 나는 곧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우리는 결혼증명서에 필요한 혈액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주차장에서 신랑이 될 척이 시동을 끄자 오래된 자동차 스튜드베이커가 떨림을 멈추며 조용해졌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푸른 눈동자에 두려움을 담고 이렇게 말했다. “노마, 우리 11월 4일에 결혼할 수 없게 됐어.” 충격에 휩싸인 나는 그의 말이 “우린 결혼할 수 없어!” 라고 받아들여졌다.

아버지의 학대로 갖게 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내면에서 차 올랐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물어야 한다는 괴로움에 애를 쓰고 있을 때 그가 나에게 징병 통지서가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미합중국 군 소집일 1966년 11월 4일은 우리 결혼식 초대장에 쓰인 날짜와 같은 날짜였다. 초대장에 적힌 그 설레는 날짜가 이제 그가 군복무를 위해 나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는 내가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느끼고 두 팔로 나를 감싸 안으며 결혼식을 몇 주 앞당기면 된다고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했다. 나는 잠시 안도했지만 그의 안전을 생각하자 떨칠 수 없는 더 큰 두려움이 뒤따랐다. 그 상황이 우리의 삶을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몰고 갈 것만 같았다. 척은 다시 말을 이었다. 군 징집 통지서를 받자마자 해병대에 지원했고 11월 3일에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결혼식은 10월 29일로 급히 변경되어 치러졌고 우리는 추위가 매서운 나이아가라 폭포로 6일 동안 신혼여행을 갔다. 그리고 11월 초에 척은 미 해병대로 떠나게 되었다. 그의 바람으로 나는 그가 버스 정류장으로 홀로 걸어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1967년 2월말까지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고, 다가오는 성탄 휴가와 길고 긴 펜실베이니아의 겨울이 두려웠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사랑이 내 가까이 다가왔지만 바로 떠나고 있었다.

나는 척의 부모님과 그의 네 명의 형제들과 함께 신병 훈련소로 가서 해병대가 그를 어디로 파병하는지 알아보았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때여서 그가 신병 훈련소에서 곧바로 그곳에 보내진다는 말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나는 가톨릭 신앙과 성모님께 의탁하는 것이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이 떠나던 날 나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우리 본당인 성 바오로 성당에 있는 성모상 발치에서 기도를 바치기로 했다.

매일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맘마다 그렇게 기도를 바쳤다. 대성당만큼 큰 우리 본당에는 예수님과 내가 함께 사랑하는 성모님 외에 나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묵주기도를 마친 저녁에 나는 청원을 하고 ‘생각하소서, 성모님’ 하는 기도를 드렸다. “생각하소서, 지극히 인자하신 동정 마리아여,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도움을 애원하고 전구를 청하고도 버림받았다 함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나이다….” 이 기도문은 나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약속이었다.

추수감사절에 텔레비전에서 해병대 신병 훈련소가 있는 패리스 섬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빛나는 젊은 얼굴들과 함께 호된 해병대 훈련과 열광적인 퇴소식이 이어진 다음 리포터는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곧바로 베트남으로 파병되는지,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다시는 우리 품에 돌아오지 못하는지를 정확환 통계를 인용해서 알려 주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지켜볼 수 없었다. “도대체 왜 해병대를 지원한 거야?” 나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사람을 유혹하는 운명 같았다.

나는 몇 달에 걸쳐 밤샘 묵주기도를 바쳤고 기도를 통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다른 가족들에게도 각각의 소중한 남자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듯이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었다.

“당신의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께서 즐겨 하시던 말씀이었다. 1967년 2월 초에 명령이 떨어졌다. 척은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있는 무선통신 수리 양성소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나는 3월에 그에게 가서 적어도 3개월 동안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대서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무 살밖에 안된 어린 신부가 태평양 연안을 향해 곧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 내 기도는 응답을 받아 남편이 양성소의 조교로 임명되어 우리는 샌디에고에서 1년 더 함께 지내게 되었다.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한 가운데 나는 샌디에고 발보아 해군 병원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다. 남편은 부대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출근하기 전에 택시를 불러 나를 태우고 오던 7시 30분에 병원 대기실에 데려다 주었다.

창문이 고정된 어두침침한 방에 들어가 보니 곧 분만실로 들어갈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무척 힘들어 했고 나도 곧 자신처럼 될 것이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분만실로 옮겨지고 홀로 남겨진 나는 묵주기도를 바치며 몇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다가오고 간호사들이 교대하는 시간이 되었다 야간 간호사가 참을성이 없으니 도리수록 조용히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셀 수 없이 묵주기도를 하는 가운데 12시간이 지나갔고 다시 다섯 시간이 더 지나서야 아들을 분만하게 되었다. 그런데 탯줄이 아기의 목을 감고 있어서 아기가 울지 못하자 의료진들은 조치를 취하기 위해 아기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다시 홀로 남아 ‘성모송’을 바쳤고 마침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기 찰스 패트릭 노리스 3세가 세례를 받게 되었을 때, 우리가 이사한 새 아파트 부근 가장 가까운 성당이 올드 샌디에고에 있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신부님께서 아기의 작은 머리에 물을 부어 주실 때 다른 사람들은 없었지만 나는 ‘어머니’께서 당신 아드님께 우리의 기도를 전구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 기쁨을 맛볼 수 없었음을 알았다.

이제 36년이 지났지만 ‘성모송’ 은 내 마음과 내 입술에 계속되고 있으며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날도 있다. 어느 날인가, 55세가 된 내가 지금까지 성모송을 얼마나 바쳤을까, 그 기도를 전부 연결한다면 묵주기도가 몇 단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모두 성장한 우리 아이들이 휴가를 맞아 집으로 올 때면 나는 언제나 전화를 해서 출발 시간을 물어본다. 그래야만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도착하며 다시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성모님께 특별한 의탁을 하지 않는 내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성모님의 보호와 도우심과 중재가 없다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 펜실베니아 버틀러에서 노마 J. 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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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에서 풀려나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을 믿었다. 그런데 작년에 직장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그 때문에 지속적으로 기도를 했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주저앉히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결과가 너무나 실망스럽고 부당했기 때문이다.

미신에 몰두하고 있는 친구가 내게 하느님을 잊고 자기와 함께 미신을 믿어 보라고 권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나는 우상숭배를 시작했고 그들의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우상에게 음식과 선물을 바치고 초를 태웠으며 행운을 가져다 주는 부적과 장식품을 간직하고 몸에 걸쳤다. 그런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기를 빌었더니 정말 그렇게 되었다. 나는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성당에도 가지 않았다.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일 년 이상 나는 미신에 몰두했다. 친구는 다시 나에게 마법과 비술을 소개했다. 아무런 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강력하고 유익한 것이라고 했다. 주문을 외우는 방법과 실체를 불러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효과가 있었다! 나는 우상숭배와 마법에 완전히 심취되어서 그 어느 누구도 그것에서 나를 빠져 나오게 할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 개입해 주시지 않는 한.

그렇게 몰두해서 일 년 반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인터넷을 뒤지다가 묵주기도 사이트를 보게 된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묵주기도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내용이 있었다. 묵주기도는 가장 큰 죄인을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내 삶에 하느님을 다시 모시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몇 해 전에 어느 친구에게서 받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묵주를 꺼내 매일 밤 기도하기 시작했다. 성모님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청했고 우상숭배를 멈출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했으며, 주술에 매달리는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자 서서히 성경에 마음이 쏠리면서 다시 알기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하느님께 간청의 기도를 올리자 나는 더 이상 주술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악마가 지배하는 우상숭배의 진실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신앙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묵주기도의 힘이 아니고서는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없었다. 나는 묵주기도를 사랑한다. 그리고 묵주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다. 내 삶에서 묵주기도가 기적을 선사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 태국 방콕에서 녹 N. 나파타렁

 

 

 

 

 

** 묵주의 9일 기도 기도문 **

 

거룩하신 동정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우리의 어머니,

당신께 대한 저의 사랑과 당신의 강력한 중재에 대한

저의 확신을 드러내기 위해 바치는

이 묵주기도를 받아 주소서.

저는 이 기도를 육화와 구원의 신비에 대한 믿음으로써,

저와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로써,

저와 세상의 죄에 대한 속죄로써,

이 세상 하느님 피조물들이 모든 필요를

당신의 중재를 통해 하느님께 간청함으로써,

특별히 진실한 청원(각자의 청원) 으로써 바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당신께 간청하오니,

저의 기원을 당신의 아들, 예수께 전해 주소서.

당신께서는 제가 청하는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기 원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만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청한다면,

저의 영혼에서 더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소서.

저는 당신을 무엇보다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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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응답

 

시카고 근교에 살던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당시 나는 다섯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직후 의사는 내 가슴에서 혹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혹을 제거하는 수술은 아기를 낳은 후에 가능하다는 말도 했다.

우리 부부와 네 아이는 8주 동안 긴장 속에 보내야 했다. 나는 가족과 함께 가슴의 혹이 더 이상 커지지 않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드리는 묵주기도를 매일 밤 바치기로 했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자 우리는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아이들을 다 키울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살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고 많은 세월이 흘러 소중한 우리의 다섯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성모님께 감사하며 묵주기도를 바칠 것이다.

 

– 플로리다 케이프코럴 에서 메리 L. 리고니

 

 

 

 

바다의 별,

이 이름은 거룩하신 동정 성모님께 참으로 적합한 이름입니다.

별이 밖으로 빛을 내뿜어도 그 밝음이 줄어들지 않듯이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낳으신 성모님께서도

아름다운 동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 성 베르나르도

 

 

 

 

50

기적을 바라며

 

43년 전, 내가 열 살이던 해에 미 해군은 우리 아버지를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해안에 있는 기지로 보냈다. 이삿짐 센터 사람들이 우리 짐을 싸서 샌페드로 에 있는 대형 화물 트럭에 싣고 샌디에고에 있는 우리 새 집으로 운송하게 되었다. 우리 살림살이를 전부 실은 그 트럭은 우리 가족보다 먼저 샌디에고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트럭은 그때까지 오지 않았다.

전화도 없고 아는 이웃도 없었다. 가까운 가게는 1km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왠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가스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카펫도 깔지 않은 맨바닥에서 자야 했다. 나는 아직도 그 빈 집에서 울리던 내 숨소리를 기억한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록 트럭은 오지 않았고 우리 살림살이가 전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트럭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사흘이 지났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아저씨가 전보를 가져왔는데 그 이삿짐 트럭에 불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트럭 운전사는 사로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트럭에 실은 화물의 주인들을 한 사람씩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전보의 내용을 읽는 어머니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는 트럭에 실었던 화물이 전부 불탄 것은 아니며 정리가 되는 대로 남은 짐을 보내 주겠다는 내용을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어머니는 전보문을 빈 찬장에 올려놓고 언니와 나를 내 방으로 데리고 가시더니 가방에서 진주 빛 묵주를 꺼내셨다. 우리는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때 나는 엄마의 묵주가 그처럼 특별하고 강력한 것인지를 처음 느꼈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나서 말없이 앉아 있을 때 나는 엄마에게 우리가 뭘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거야!” 엄마의 대답이었다.

그날 엄마는 지극히 거룩하신 묵주의 여왕이신 성모님께 바친 묵주기도의 힘을 내게 가르쳐 주셨다. 기도를 마치고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 트럭에 싣고 있던 화물에 불이 났지만 우리 이삿짐은 아무런 피해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캘리포니아 출라 비스타 에서 보니 N. 닉스

 

 

 

 

 

성모님께 경의를 표하고

성모님을 생각하며

성모님께 의탁하고

성모님을 공경하며

성모님께 여러분을 맡기고

여러분의 집에서 성모님과 함께 머무십시오.

세상으로 나갈 때 성모님과 함께 걸으십시오.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고

성모님과 함께 슬퍼하며

성모님과 함께 일하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성모님과 함께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발아래 서십시오.

성모님과 예수님과 함께 살고 죽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 토마스 아 켐피스

 

 

 

 

 

51

신세 진 걸 갚으세요

 

이 이야기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들은 것으로 사실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주신 어머니께 감사한다. 장례식이 끝날 무렵 한 초로의 신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조의를 표한 다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신사는 젊은 시절에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레스토랑에서 그 여자와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곳에 식사를 하러 오셨다. 그 남자와 우리 어머니는 서로 모른 척하고 식사를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우리 어머니는 그에게 전화를 해서 파이를 대접하겠다며 초대를 했다. 우리 어머니가 만든 파이는 아무도 사양할 수 없을 만큼 맛이었었기 때문에 그도 초대에 응했고 우리 집에 왔지만, 사실 그가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초대가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오라는 시각에 와서 일단 파이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전날 레스토랑에서 다른 여자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아무리 우겨도 어머니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당신이 몇 달 동안 일이 없어서 놀고 있을 때 내가 당신 가족에게 줄곧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던 일을 기억하지요?” 그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 신세 진걸 갚으세요.”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지갑을 꺼내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아니, 돈으로 갚으라는 게 아니에요.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면 돼요.” 하고 말했다. 그는 신세를 갚을 수 있다면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 드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서랍에서 묵주를 하나 꺼내 그의 손이 쥐어 주며 일주일 동안 매일미사 참례를 하고 미사 전이나 후에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했다. 또한 묵주알을 하나씩 돌릴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과 가족의 삶에 대해 좋은 점을 한 가지씩 생각하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 후에도 그 여자가 당신 아내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그 묵주를 우리 집 우편함에 넣으세요. 나도 이 일에 대해 당신 아내에게 함구하겠어요. 그렇지만 만일 당신이 아내에게 돌아가겠다고 결정하면 그 묵주를 간직하세요. 나도 기도하고 은총을 빌어 줄게요.”

그 신사는 이런 이야기를 한 다음 손에 쥐고 있던 묵주를 보여 주며 내게 말했다. “이 묵주가 바로 당신 어머니께서 오래 전 그때 내게 주신 묵주예요. 아내와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어요.”

 

– 뉴욕 칼밀러스에서 애너 E. 패러다이스

 

 

 

 

 

** 지극히 거룩하신 묵주의 여왕께 드리는 기도 **

 

지극히 거룩하신 묵주의 여왕이시여,

이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불경스러움이 만연한 시대에

그 옛날 당신의 승리의 표징으로 당신의 힘을 보여 주소서.

또한 당신의 왕관으로부터 용서와 은총을 베푸시고

이 세상에서 그분의 대리자인

당신 아드님의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며

수많은 다툼에 억눌려 비통해 하는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를 불쌍히 여기소서.

온갖 반대를 물리치시는 강력한 힘을 지니신 당신께서는

비록 하느님의 정의의 시간이

우리 인간의 헤아릴 수 없는 죄로 인해

매일 분노로 차오를지라도

자비의 시간을 앞당겨 주십니다.

보잘것없는 인간들 중 하나인 저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사는 데 필요한 은총을 얻기를,

천국에서 의로운 이들에게 둘러싸이기를 간청하나이다.

저는 세상의 모든 충실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지극히 거룩하신 묵주의 여왕이신 당신을 찬미하며 공경하나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묵주의 여왕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52

더 좋은 문

 

우리 딸 미셸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는 동안 탄자니아에 살던 우리 부부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꿈꾸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매년 비자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실망스러운 결과만 돌아왔다.

미셸의 졸업식에 참석한 후에 우리는 캐나다를 두루 여행하다가 들른 브리티시 콜롬비아가 마음에 들었고, 고국 탄자니아로 돌아오기 전에 캐나다 정부에 이민 신청을 했다. 내 나이 등 장애 요소가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매일 가족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주님과 성모님께 간청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마침내 비자를 받았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다. 우리 부부가 일하는 병원에서 퇴직하는 문제와 집을 파는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집이 전 재산이었다. 나는 23년간 간호사로 일했고 남편도 같은 병원의 매점에서 13년 동안 일하고 있었다. 병원 소유주는 이슬람교도였는데, 싸우지 않고서는 그가 우리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 지역에서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이민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두려웠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 유학 문제로 정기 휴가를 받아야겠다고 말하고 비행기 표와 여행 경비에 필요한 급여를 신청했다. 우리가 떠나기 직전, 남편은 근무 중에 망막을 다쳐 출혈이 심해져서 긴급한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탄자니아에는 그런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 가까운 인도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병원장은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성실하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 더 좋은 문을 열어 주셨다. 우리는 스위스에서 온 발데크 수도회 수녀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인도에 도착했을 때는 친구가 병원과 호텔을 예약해 주었다. 남편이 네 번에 걸친 레이저 치료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에게는 직장을 그만둘 구실이 생긴 것이다.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때에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 밑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집을 살 사람을 구해야 했다. 혹시 구매자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어느 컴퓨터 가게에 가서 알아보았지만 집이 너무 커서 곤란하다고 했다. 이왕 컴퓨터 가게에 간 김에 얼마 전에 컴퓨터 관련 공부를 마친 우리 아들의 일자리를 부탁했다. 가게 주인은 내 전화번호를 적으며 일자리를 알아보고 알려 주겠다고 했다. 이틀 후에 그는 우리 집에 관심이 있다면서 가게로 와 달라는 전화를 했다. 우리는 잠시 가격을 흥정한 다음 적당하나 선에서 합의를 보았다. 그가 말하는 한 가지 조건은 잔금을 치르고 3일 이내에 집을 비워 달라는 것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짐을 쌌고 25년간 살았던 집을 비워 주고 3일 후에 탄자니아를 떠났다. 라마단 기간이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슬람교도들이 단식하는 기간이어서 병원장의 처남이 우리를 감시하는 눈길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지 아니면 단식 중이어서 우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밤 비행기를 탔다. 어제가 바로 우리 가족이 이 아름다운 나라 에 무사히 도착한 지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 너무나 피곤하고 졸려서 – 주님과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한 단만 바쳤다. 그때까지의 일을 돌이켜 보면 마치 주님께서 유다 민족을 위해 홍해를 갈라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독수리 날개에 우리를 태워 무사히 이곳에 데려다 주신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는 우리 가족을 위해 성모님께서 주님께 전구하신 덕분이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 병원장은 우리가 이민을 갔다는 말을 듣고 펄펄 뛰며 화를 냈다고 한다.

 

– 캐나다 밴쿠버 서리에서 메리 그웬달린 페레이라

 

 

 

 

묵주기도는 무기입니다.

 

– 성 비오 신부

 

 

 

 

53

성모님께서 잃어버린 묵주알을 찾아주시다

 

나는 덴버 근처에서 가톨릭 성물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를 위해 망가진 묵주를 고쳐 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친구의 고객들이 맡긴 망가진 묵주를 잘 수리해 주면 그 묵주는 성모님 군대의 ‘전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수리비는 받지 않는다. 없어진 묵주알을 구입하는 등 재료 갑이 들어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백철석 白鐵石 을 각기 다른 모양으로 깎아 만든 아름다운 묵주를 고쳐달라고 가져왔다. 묵주알 59개 중에 한 개가 없어져서 전부 58개가 남아 있었다. 흔히 있는 일이고 그럴 경우 나는 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묵주알 가운데 하나를 채워 넣거나 구슬 가게에 가서 같은 것으로 사다가 채우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묵주알은 아주 특이해서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망가진 묵주를 묵주 주인이 넣어가지고 온 작은 가죽 주머니에 다시 넣고 성모상 옆에 놓으면서 기도했다. “성모님, 이 묵주에 어울리는 알을 찾도록 도와 주세요. 지금까지는 구할 수 없었어요.”

그러고도 계속 이곳 저곳 찾아 다녔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다. 그러고 몇 달이 지나자 아무래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성모상 앞에 놓여 있던 묵주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꺼내 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묵주를 다시 만드는데 필요한 59개의 묵주알이 있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기 전에 몇 번이나 세어 보았을 때에도 58개밖에 없었다.

성모님께서는 어울리는 묵주알이 있는 가게로 나를 인도하시는 대신에 망가진 묵주 옆에 필요한 묵주알을 놓아두신 기적의 선물을 주셨던 것이다. 나는 59개의 묵주알로 온전한 묵주를 만들 수 있었다.

 

-콜로라도 알바다에서 캐런 S. 피터슨

 

 

 

 

54

개종에 힘이 되어 준 묵주

 

내 이름은 이사벨라이며, 열아홉 살에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이탈리아 피렌체로 왔다. 그 즈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그 일로 나는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루터교도로 자랐지만 그 신앙에서도 늘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피렌체 근교 산 미니아토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 성당에 가게 되었는데, 그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지 내가 가톨릭교회로 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느껴졌다.

베네딕토회 신부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듣고, 신부님의 소개로 학생들을 데리고 계시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녀님들과 생활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수녀님 한 분이 가톨릭 교회로 오는 길을 안내해 주셨다. 첫 만남에서 수녀님은 나에게 작은 책자와 함께 묵주를 주셨다. 내가 성모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묵주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고, 특히 내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가족들과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마침내 견진성사를 받고 첫영성체를 하는 날이 되었다. 내 생애 그렇게 기쁜 날은 또 없을 것이다. 이제 일 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도 어디를 가나 묵주를 지니고 다닌다.

 

–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이사벨라 리나 소더그렌

 

 

 

 

어머니만큼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공로가 많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은 어머니의 청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며

여기에 어머니의 힘이 있습니다.

 

– 추기경 존 헨리 뉴먼

 

 

 

 

55

할머니를 바라보며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께서 매일 오후 거실에서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치시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경외심을 가지고 그곳에 서서 할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함께 기도하자고 강요하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참으로 순수한 우리 할머니를 사랑했으며 할머니의 묵주를 통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거룩하신 성모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네 살이 되던 생일에 받은 아주 작은 파란색 유리 묵주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성모송’을 외우는 데 서툴기는 했지만 성인과도 같은 할머니를 닮으려고 아주 열심히 노력했다. 매일 바치는 묵주기도는 이제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아이들이 가르침보다 눈으로 보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믿는다.

 

– 일리노이 졸리엣에서 메리 루 슈스터

 

 

 

 

여러분이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성모님의 힘으로 주어집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손을 통해 전달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눌 수 있는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이 성모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성모님을 통해서 은총을 찾읍시다!

하느님과 여러분 사이에 중재자를 원하십니까?

성모님께 의탁하십시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방법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 성 베르나르도

 

 

 

 

56

편두통을 낫게 하시며

 

(혹시 편두통을 앓고 있다면 다음의 치료 방법을 시도해 보길 바랍니다.)

나는 수년 동안 한 달에 두세 번 찾아오는 편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편두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그 증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많은 경우 전조 증상, 즉 편두통이 오고 있다는 징조를 느낀다. 처음에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적 징조가 찾아온다. 순간적 시각 장애 같은 것이다. 그리고 몇 분 안에 마치 깨진 거울 조각에 빛이 반사되는 것처럼 알록달록한 빛이 보인다. 그 상태가 몇 분가 지속되다가 통증이 시작된다. 통증은 메스꺼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극심해서 어떤 때는 결국 토하기도 한다. 이 증상이 몇 시간 계속되는 사람도 있고 며칠 동안 계속되는 사람도 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며 그게 묵주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일반 진통제와 처방 받은 진통제를 수없이 복용하다가 나는 마침내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성모님께 항상 기도하며 완전히 의탁하면서도 편두통을 사라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 적은 없었다.

30년 전, 그렇게 묵주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나는 기적을 경험했다. 통증이 서서히 사라져 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요즘에도 편두통은 전과 다름없이 순서대로 찾아오지만 횟수는 훨씬 줄었다. 이젠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그 느낌을 설명한다 해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어쨌든 나는 구원의 은총인 이 경험을 가족과 친지들과 나누고 있다. 모든 사람들과 나눌 만큼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묵주기도는 나의 구원이 되고 있다. 편두통을 앓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나와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찾기 바라며 기도한다.

 

– 캔사스 살리나에서 제니스 E. 스트레이트

 

 

 

57

묵주 신부님

 

내 여동생은 복합골수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죽기 전까지 참으로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육적 인 치유가 아니라 영적인 치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생의 친구가 본당 사무실에 연락해서 신부님의 방문을 청했다. 몇 시간 후에 신부님이 오셨고 동생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신 다음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는지 물으셨다. 그래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동생은 손에 들고 있던 묵주의 체인이 은빛에서 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 특별한 일을 겪은 동생은 무척 놀라고 흥분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에 동생은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영적 치유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동생과 그녀의 가족은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기로 하고 매일 오후 세 시에 모두 모여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로써 동생의 가족은 하나로 일치되고 묵주기도와 성모님을 다시 알고 찾게 되었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다음 그녀의 가족은 동생의 생전의 삶을 그토록 크게 변화시킨 그 신부님을 찾아 감사를 전하고 싶어 했다. 본당으로 찾아가 그 신부님을 찾았지만 아무도 그 신부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 특별한 천사를 찾지 못했고 어디에서 오신 분이신지 우리는 아직도 궁금해 하고 있다.

 

– 아이오와 드뷰크에서 케이시 M. 셀레

 

 

 

 

밤이면 잠이 든 당신의 자녀들을 내려다 보시며 미소 지으시는

아, 다정하신 성모님. 하늘에 계신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 토마스 머튼

 

 

 

58

아침과 저녁에 바치는 묵주기도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나는 묵주기도를 바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묵주기도가 그렇게 특별하고 대단하고 기적을 행하는 놀라운 것인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갖는다.

내가 집 없이 떠돌이로 타코마 커뮤니티 칼레지 근교 숲 속에서 노숙을 하는 동안에도 묵주기도는 나를 보호해 주었다. 여러분의 동정을 얻고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나와 같은 믿음을 갖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망토가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별 아래 누워 잠들어도 마음은 평화로웠다. 성경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평화는 우리의 모든 이해력을 초월하며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이다.

일본에 머물던 시기에 나는 어느 일본 가정에서 지내며 그 집 어린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보모로 일하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하던 날 밤, 밤새 낯선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직업소개소의 숙소에서 나는 묵주를 꼭 움켜쥐고 밤을 지새웠다. 스카풀라도 목에 걸고 있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동정 성모님께서 한 손에 묵주를, 다른 한 손에 스카풀라를 잡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날 밤 홀로 있으면서 창문을 통해 교회를 볼 수 있었다. 다음날은 주일이었고 미사 참례를 하기 위해 그 교회를 찾아 나섰다. 내가 생각했던 교회는 찾지 못한 대신 하느님께서 나를 가톨릭 성당으로 인도하셨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었고, 비행기 표를 잃어버리고 위협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난폭한 언쟁에서도 보호를 받았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기적’은 세 시간 동안이나 눈 속을 헤매다 구조된 내 남편의 건강이 회복된 것이다. 남편은 헬리콥터로 성 요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남편의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 동안 나는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올렸고 묵주기도를 바치다가 새벽 세 시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네 시에 남편이 깨어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아침 묵주기도를 바쳤다. 토요일과 주일 밤을 새며 남편의 병상 곁 의자에 앉아 잠이 들 때도 묵주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남편은 그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퇴원했다.

 

– 미조리 주 스타크 시티에서 마가렛 A. 옌센 

 

 

 

 

구세주의 어머니,

우리는 기쁨에 넘쳐 당신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성부께서 세상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셨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려 사람이 되실 때

당신께서 어머니가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기꺼운 순종과 오롯한 마음으로

그분을 맞이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신비스러운 정배로 당신을 사랑하셨고

귀한 선물로 당신을 채우셨습니다.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숨겨진 강력한 활동이 실천되도록

자신을 허락하셨습니다.

삼천 년기를 맞는 전야에 저희는 당신을 어머니로 알고

어머니로 선포하는 교회를 당신께 의탁합니다.

인류와 모든 국가의 어머니이신 당신께

저희는 전 인류와 그들의 희망과 두려움을 기꺼이 의탁합니다.

참 지혜의 빛이 그들에게 부족하지 않게 하소서.

평화의 길을 걷는 그들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소서.

모든 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소서.

오, 동정 성모님,

신앙의 여정을 가는 저희에게 힘을 주시고

저희가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얻게 하소서.

온화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아름다우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저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59

어둠 속에 들려온 목소리

 

부룩클린 에서 자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람과 장소와 사물들을 풍요롭게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아일랜드 계 가톨릭 집안의 어린 사내아이에게 그곳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의 미사와, 고해성사, 9일 기도, 주일학교, 가족과 함께하는 묵주기도를 의미한다. 이웃은 노동자들이었고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특별한 기간에는 거리가 온통 형형색색의 장식으로 화려했다.

삶은 즐거웠고 재밋거리는 무궁무진했다. 아이들의 생활은 몇 블록 안에 있는 이웃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었고, 어른들의 생활은 가까운 거리의 모퉁이마다 늘어선 술집과 간이식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전부 술을 마시거나 자주 술집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람들과 갖가지 눈요기거리와 온갖 소리에 매혹된 나 같은 사내아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었고, 무엇보다 맥주와 위스키를 어디서나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환경이 그러했다.

이러한 환경을 사회적으로 용납하고 거리와 집안에서 친숙하게 볼 수 있는 술 취한 사람들은 20대 초까지 나를 매혹했다. 뉴욕에서 18세에 술을 마시는 것은 법으로 허용되는 일이었고 젊은 나이에 술집에 가는 것도 일반적이었으며 때로는 증명서 없이, 때로는 조잡한 가짜 징병 카드로 사용되었다. 나는 그러한 여건과 가족 행사에서 술에 취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른 나이부터 아무런 제재 없이 술에 취하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지속되어 알코올 중독에 이르고 말았다.

그런 생활의 시작에는 좋은 날도 많았다. 사교, 댄스, 피크닉, 구기 경기와 낡은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등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생활을 잠시 즐기고 나서 취직하고 결혼하는 생활로 진입했지만 우리 가운데 몇몇은 이런저런 이유로 습관적으로 술을 마셨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알코올이 우리 삶에 어둡고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나는 급속히 술에 빠져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몇 시간도 견디지 못하는 중독자가 된 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파티는 끝나고 흥겨움은 지나갔다. 그것은 내 삶에서 가장 끔찍한 악몽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에 따라 많은 것이 변했다. 성당에 가지 않게 되었고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친구들은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가족도 물론 나를 포기하는 시점이 되었다. 육신은 점점 병들어 갔고 간경화가 시작되었다. 발작이 일어나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멈출 수 없었고 이제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어떤 도움도 전혀 소용없이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는 운명적인 밤을 맞았다. 아주 늦은 시각이었다. 새벽 두 시였는데 당시 진전섬망증(금단증세의 일종) 초기 단계에 있던 나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약간 신경이 쓰이다가 그것이 계속되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술집에 있었는데, 아무리 마셔도 손 떨림이나 위통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없었다.

그때 근처 어느 술집에서 경찰관 한 명이 총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조용하던 밤거리는 경찰차와 응급차로 북적거리며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거리의 광경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이제 끝이야.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을 거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공황 상태가 되어 겨우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졌다. 공포에 질린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내게 곧 죽음이 다가 온 것을 알았다. 나는 서랍을 올려다보다가 맨 위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에는 내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묵주가 있었다. 묵주를 꺼내 들고 몸을 바로 뉘었다.

기도를 하려고 애를 썼지만 ‘성모송’ 조차 제대로 외울 수가 없었다. 묵주의 십자가를 양손에 굳게 모아 쥐고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그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기도였고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간청이었다. 모든 고통을 넘어 하느님께 간구하는 내 목소리를 그분께서 들어주시기를 애원했다. 잠시 침묵이 있은 후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다 잘 될 거야.” 이 짧은 한 말씀을 듣고 나서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함과 함께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쇠약해진 몸에 알코올의 영향이 남아 있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살아났다. 하느님께서 내 간청을 들어주셨음을 알았고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가족들은 나를 알코올 중독치료 병원으로 데려갔고 일주일 동안 입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가톨릭재단 병원이었다. 뉴저지 패터슨에 있는 카르멜 병원이었다. 처음 3일 동안은 몹시 힘들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온갖 격심한 후유증을 겪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하느님 손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리라는 믿음으로 기꺼이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님을 잊은 날이 없다. 내 삶은 극적으로 변화되었고, 교회와 하느님과 성모님께 영적으로 이어진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내 마음에 일어난 기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며 그날 밤 내가 받은 사랑과 평화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 캘리포니아 다이아몬드 바 에서 토마스 번슨

 

 

 

 

성모님은 천국과 연결된 사다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고

사람은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성 풀젠시오

 

 

 

 

60

함께 기도하는 가족

 

나는 오래 전인 1950년에 패트릭 페이튼 신부님이 서스캐처완 지역에 오셔서 묵주기도에 관해 하신 말씀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신부님께서 “함께 기도하는 가정은 하나가 됩니다.” 하신 말씀은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영향으로 우리 가족은 맹세를 하고 다른 가족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딱딱한 마룻바닥에 꿇어 앉아 부모님과 우리 열 명의 자녀는 함께 저녁기도로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그 저녁 시간을 참으로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집안에 일이 있을 때, 특히 누가 돌아가시거나 병상에 있을 때면 우리는 지금도 모여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나는 물론 다른 가족들도 새로운 힘을 얻곤 한다. 우리 모두는 주머니나 가방에 항상 묵주를 지니고 다니면서 성모님께 이 아름다운 기도를 바친다.

오빠 제이콥 엘더는 오랫동안 묵주를 손수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자신을 위해 적어도 한 번 묵주기도를 바쳐 달라는 부탁과 함께. 묵주기도에 대한 오빠의 믿음은 오랜 전의 가족과 함께 한 묵주기도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우리 가족은 수많은 은총을 받았고 지금도 페이턴 신부님의 “함께 기도하는 가정은 하나가 됩니다.” 하는 말씀을 굳게 믿는다.

 

– 캐나다 온타리오 스카보로 에서 테레사 엘더 수녀

 

 

 

 

선원들이 별빛의 인도로 항구를 찾아오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의 인도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61

성모님께서 내 손을 잡아 주실 때

 

1970년대 초, 월남 전이 발발했을 때 막내아들 드웨인이 징집되어 국내와 국외에서 군복무를 했다. 아이의 엄마로서 나는 하느님께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아들이 무사하기 빌며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 세상에서 드웨인의 삶이 짧은 것이라면 전장에서 돌아와 고향에서 생을 마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친구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리, 아들이 그 멀고 위험한 전쟁터에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거야?” 그럴 때 나는 “하느님께 아이를 무사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 그리고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하고 대답했다.

아들이 월남에서 보내 온 펴지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피비린내를 잊지 못할 거예요.” 하면서 병사들이 받은 명령을 설명했다. 죽은 나뭇등걸에 몸을 숨기고 있는 베트콩들이 셋을 셀 때까지 항복하고 나오지 않으면 아들의 부대원들은 그 나뭇등걸이 벌집이 되도록 총질을 해야 했다.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드웨인은 무사히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가족이 다시 모였다. 우리는 주문을 받아 농산물을 재배하는 가족으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쉬는 단순한 생활을 했다. 그 해 사순 시기에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평일미사에 참례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편찮으신 부모님 중 한 분이 하늘나라로 가실 때를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했다.

1974년 4월 5일, 전례 시작 전에 장궤 長跪 를 하고 기도하는 중에 옆에 인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아들이었다. 아들과 함께 예식에 참례하게 되어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모른다. 그날이 사순 시기의 마지막 날,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다. 예식이 끝난 다음 남편 레이와 두 아들 드웨인과 게리는 또 하루의 길고 힘든 밭일을 마치러 다시 들로 나갔다.

아시다시피 농사일은 출퇴근이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날씨에 따라 어느 따라도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 농사지은 것이 우리의 유일한 수입원이므로, 어두워져서야 삼부자가 저녁 식사를 하러 들어왔다. 한 주간의 일이 끝나는 금요일 저녁은 홀가분하게 즐기고 쉴 수 있는 시간이다! 모두가 시내로 나가는 것이다.

게리는 샤워를 마치고 시내로 갔다. 드웨인과 그의 친구들은 말들과 함께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드웨인은 말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열 시 반이 되어서 드웨인도 집을 나섰다. 남편이 아들에게 시내에 있는 사촌형제와 어울려 즐겁게 지내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늦은 시각에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힘들게 일했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이 얼마나 피곤한지 잘 알았으므로 남편은 아들에게 운전을 하지 말라고 세 번이나 당부했던 것이다. 현관문에 기대서서 드웨인은 웃으며 말했다. “아빠,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북쪽에 있는 수로를 손보고 올게요.”

그 아이의 환한 미소와 강한 책임감을 우리는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 날인 토요일 아침,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침에 어떤 남자가 자동차 옆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의 드웨인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아들의 방 침대 옆 스탠드가 그때까지 불이 켜진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전화에서 보안관은 사망한 남자가 드웨인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영안실에서 드웨인의 주검 주위에 둘러섰다. 그때 나는 큰 시험에 들었다. 드웨인은 잠자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어 말없이 서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느님, 저는 저 아이가 죽었다는 걸 알지만 만약 누구라도 저 관 뚜껑을 닫으려고 한다면 가만 놔두지 않겠어요.’

그 순간 내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다음날 오후 우리 가족이 아이를 다시 볼 때까지 묵주기도는 나와 함께했다. 나의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더 많은 고통과 더 많은 괴로움 가운데 당신의 아드님을 잃으셨다. 드웨인이 고통을 겪지 않고 순간적으로 목숨을 잃은 것은 은총이었다.

묵주가 내 손을 떠난 적은 없었다. 그 흔적이 내 육신에 새겨져 있을 정도다. 나는 성모님께서 내가 용기를 가지고 이겨 낼 수 있도록 성삼위 하느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그 시기에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남편과 다른 아이들을 돌볼 수 없었다. 그때 성모님께서는 내 손을 잡아 주셨고 다른 가족들의 손도 잡아 주셨다. 관에 누워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충동적으로 다른 엄마들처럼 아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 차갑고 딱딱한 이마의 감촉이 내 눈을 뜨게 했다. 아름다운 드웨인의 영혼과 정신이 하느님께서 주셨던 그 육신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주검은 사랑스러운 내 아들이 아니었다.

그때서야 내 아들 드웨인의 관을 덮을 수 있었다. 드웨인은 영광이 가득하신 생명의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다. 나는 이제 하느님께서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때까지 육신은 영혼과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드웨인이 떠난 지 28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아들이 보고 싶다. 그러나 새로운 도성 예루살렘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감사합니다, 성모님. 그 슬픔의 시간에 저와 함께 걷고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묵주기도를 통해 당신께서 드웨인을 전쟁터에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셨고, 묵주기도를 통해 드웨인이 안전하게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으며, 제 마음에 평화가 깃들게 해 주셨음을 저는 진정으로 믿습니다.’

가족을 잃은 것은 처음이었고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1974년 그때 이래 우리는 연달아 가족을 잃는 경험을 했다. 때로 그런 극심한 고통을 참아 내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하느님, 성부, 예수님, 성령을 찾았고, 가톨릭교회와 다른 많은 이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런 온갖 고통에도 우리는 열심히 주님을 찾았다. 묵주기도를 바치고 또 바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고통 가운데 성모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당신 품으로 이끄셨으며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의 품으로 이끌어 주셨다.

 

– 텍사스 엄바거 에서 제리 C. 거버

 

 

 

 

 

묵주기도는 죄를 부수는 훌륭한 도구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도구이다.

 

– 교황 그레고리오 12세

 

 

 

 

 62

빈말을 되풀이 하다

 

오순절교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나는 기도에 관한 한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굳게 믿었다. 우리 시대에 기도를 헛되이 되풀이하는 ‘다른 민족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그 들’이 바로 오로지 전례의 산만한 기도문에만 의지하는 가톨릭 신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 중에 하나가 묵주기도라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되풀이하는 그 기도는 도저히 기도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기도를 했는가? 매일 아침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로 떠나고 나면 나는 ‘말씀 기도’ 목록을 꺼내 들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분의 상처로 제가 나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그는 지혜와 교훈을 터득하고 예지의 말씀을 이해할 것입니다.”(잠언 1,2)라고 기도했다.

나는 내 남편에게 지혜와 이해력을 내려 주시기를 하느님께 단 한번만 기도했다. 그런 다음 배운 대로 내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는 그런 간청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하느님께서 이미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그분께 매일 아침 상기시켜 드릴 수는 있었다. 그런 기도를 드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지혜와 이해력을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당신 바보 아냐?” 하는 식으로 핀잔을 주었다. 그러니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느끼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말한 대로 이루어지리라.” 나는 이 말을 되풀이했다. 진리는 내 일상에서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침 기도에서 간청하는 ‘말씀 기도’에 만 적용된다고 여겼던 것 같다. 만일 내 남편이 ‘지혜와 이해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면 말씀 기도를 그만둘 수 있었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남편에게 그러한 덕목을 내려 주셨다는 사실을 매일 아침 주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당시에 거의 100가지에 이르는 말씀 기도 목록을 가지고 매일 아침 반복해서 기도를 하고 또 했다. 정말 진심으로 열심히 반복해서 그렇게 기도했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하느님과 친교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악마와 하고 있는지, 또는 나 자신의 유익 有益 을 위해 신비한 처방을 하고 있는지 지금도 의심이 간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이나 다른 기도문을 외우지 마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이끈 분은 성모님이셨고 묵주기도였다.

내 친구 한 명이 동정 성모님의 발현에 관한 책을 내게 주었을 때 나는 코웃음을 치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좋아. 읽어 보지. 그렇지만 그것이 사람들을 얼마나 기만하는 것인지를 밝혀내려고 읽는 거야.’

주님, 감사합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시는 사랑이 가득한 말씀을 읽으며 나 자신의 기만이 서서히 드러났다. 처음에는 동정 성모님께서 가톨릭의 비틀어진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그 아이들에게 나타나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받아들였다. ‘어쨌든 필요한 도움을 받기는 했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모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은 것은 나였다.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묵주기도를 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한다는 것은 오순절교인으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채찍으로 맞아 찢기고 피 흐르는 육신으로 말없이 모욕을 당하시고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나는 그때까지 오로지 나를 위해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만 초점을 맞춰 기도를 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요즘은 조금 덜 이기적인 기도를 한다. 나는 묵주기도에 푹 빠졌다. 해로운 것에서 나를 지키려는 신비스러운 처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기 위한 기도의 역할을 해 준다. 이러한 묵상으로 나는 그분을 조금 더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겸손하고 조금 더 정직하고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친절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느님께 내 생각을 상기시켜 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 대신 묵주기도와 하느님 자비의 기도, 그리고 다른 기도를 통해 내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상기한다. 그런 기도를 되풀이하면서 때로 내 안에서 아직도 들려오는 과거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럴 때 나는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라고 말하며 기도를 계속한다.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시여, 저희 죄인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지금 이 순간.”

 

– 일리노이 퀸시 에서 데보라 대니얼즈 키

 

(이 이야기는 Our Sunday Visitor에서 발행하는 New Covenant 매거진 1997년 8월호에 처음 실렸다.)

 

 

 

** 찬미가 **

 

오, 동정녀들의 영광이시여,

별들 빛나는 하늘 옥좌에서

당신을 창조하신 어린 아가를 젖먹이시네.

불운한 하와로 길 잃은 인간이

거룩한 당신 모태로 구언을 얻나니

여기 슬픔의 골짜기에 사는 인간들에게

당신은 영원한 천국 문을 열어 주시네.

찬란한 빛들의 방,

지극히 높은 하늘의 문이시여.

구원된 사람들아,

동정녀를 통해 받은 생명에 환호하여라.

동정녀에서 나신 예수께 길이 영광 있으소서.

성부와 성령께도 영원히 영광이 있으소서.

아멘.

 

 

 

 

 

63

묵주는 끊어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매일 밤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다. 자라면서 방과 후 활동과 아르바이트 등으로 바빠지자 예전처럼 자주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저녁 식탁에 모두 함께 모이는 날이면 언제나 묵주기도를 바치는 전통을 계속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바치던 묵주기도 시간이 그리워서 나는 매일 혼자라도 기도를 바쳤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그리고 직장을 갖고 결혼해서 한 가족을 이룰 때까지 이 특별한 기도를 매일 바치고 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남자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기꺼이 미사와 이이들의 교리 학교에 참석해 주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 가족의 일상이 바빠지던 시기에 나는 가족과 함께 묵주기도의 전통을 나누고 싶었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저녁 식사 후에 각자의 묵주를 가지고 식탁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자고 말했다. 그런데 큰딸 줄리가 자기 방에서 묵주를 들고 울면서 뛰쳐나오는 것이었다. 딸애가 내미는 묵주를 보니 세 조각으로 끊어져 있었다. 다른 묵주를 주겠다고 했지만 아이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외할머니에게서 받은 묵주로 아이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손재주가 있어 늘 집안 여기저기를 손봐 주는 남편에게 딸아이의 묵주를 고쳐 달라고 했다. 남편은 묵주알이 너무 많아 없어져서 원래대로 고치기 힘들겠다고 하면서 딸아이의 서랍에 끊어진 묵주를 다시 넣어두고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식사가 끝나고 내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사 온 묵주 가운데 하나를 줄리에게 주었다. 그 묵주로 함께 묵주기도를 했지만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설거지를 끝내고 줄리의 방으로 올라갔고 다른 가족도 언제나처럼 내 뒤를 따랐다. 혹시 망가진 묵주를 고칠 수 있을지 한 번 더 살펴보려고 서랍을 열고 묵주를 꺼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묵주는 원래대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없어진 묵주알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그때까지 함께 있었고 그 묵주를 고치려고 딸의 방에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게 해 주신 것에도 감사했다. 많은 친구와 친지들에게 이 기적을 이야기해 주었고 모두들 기뻐하며 특별한 축복을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가톨릭교회에 함께하는 데 관심이 없었던 남편이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남편은 그 다음 부활 성야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묵주기도로 원하는 것을 청하면 불가능한 것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전부터 늘 내게 말씀하셨다.

 

– 사우스 캐롤라니아 포트밀에서 카멜 R. 길로그리

 

 

 

 

 

묵주기도를 가장 적절하고 좋은 기도 방법으로

권고하고 장려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신비를 자주 묵상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에 믿음이 보다 생생하게 살아나고

기도의 거룩한 불이 새롭게 타오르며

평화와 도덕적 고결함과 번영으로 빛을 발할 것입니다.

 

– 교황 레오 13세

 

 

 

 

64

천사 정비사

 

푸에트토리코 (포로리코!)의 구아바테 에는 ‘몬테 카멜로(Monte Carmelo, 카르멜 산)’ 라는 성모성지가 있다. 동정 성모님께 봉헌된 경당과 기도하는 곳이 있는데 아주 오래 전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는 아레시보에서 30명 정도 되는 일행과 함께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그곳 성모성지로 순례를 갔다.

우리 일행은 미사 참례를 하고 기도하면서 하루 종일 순례를 했다. 돌아올 시간이 되어 버스에 오른 다음 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었지만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버스에 타고 있는 남자 승객들까지 합세해서 고장 난 곳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도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우리가 처한 상황이 해결되기를 간청하는 묵주기도를 바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 아마 2단을 바치고 있었던 것 같다 – 자동차를 타고 가던 어떤 운전자가 우리를 지나쳐 가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차를 세우고 버스 운전사에게 오더니 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니 버스의 바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버스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혹시 도움이 될까 하고 차를 돌렸다는 것이다. 그는 자동차 정비사였다! 그 천사 정비사는 돈을 받지 않고 버스를 고쳐 주었고 우리는 감사의 묵주기도를 바치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푸에르토리코(포로리코!) 아레시보 에서 나이비아 곤잘레스

 

 

 

 

나의 자녀들이여, 마지막 구원의 은총을 원한다며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라.

 

– 성 필립보 네리

 

 

 

 

65

성모님, 감사합니다

 

2002년 성탄 시기였다. 남편과 나는 실직자였다. 남편은 10월에, 나는 12월 초에 직장을 잃었다. 본당 교우들이 캔 식료품 등을 보내 줘서 먹을 것은 해결했지만 의료보험을 낼 돈이 없었다.

유방 정기 검진 결과 오른쪽 유방에서 종양이 발견되어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낭포성섬유증을 앓은 경험이 있는 나는 무척 걱정되었지만 별 거 아닐 거라고 애써 위로했다. 사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검사 비용을 지불하는 일이었다. 남편과 나는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묵주기도를 바쳤다. 수잔 G. 코맨 센터의 직원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하자 메릴린 이라는 여인이 그들이 지불할 테니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감사 기도를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초음파 검사는 성프란치스코 병원의 수잔 G. 코맨 센터에서 이루어 졌다.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묵주를 손에 들고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모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했다. 담당의는 검사 결과를 이렇게 말했다. “종양이 하나 있습니다. 양성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다시 생체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때 나는 제일 먼저 ‘어떡해. 또 돈이 들게 생겼네! 양성이 아니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른 직원에게 상황을 이야기했고 그 직원은 어딘가에 전화를 해 보더니 일반적으로 생체 검사에 대한 비용은 지불해 주지 않는다고 했다.

39세에 세상을 떠난 동생이 생각났다. 동생은 유방암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 두 아이와 엄청난 빚을 남기고 떠났다. 또 81세 된 엄마 생각이 났다. 60대에 유방절제수술을 받고 얼마나 깊은 절망의 세월을 사셨던가. 나는 암이라는 진단이 초래할 심리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을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께서 나와 가족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했다. 그리고 고리 기도 단체에 지향을 올렸다. 이 특별한 고리 기도는 ‘성 요한의 수도회 재속회’에 소속된 평신도들이 성모님께 의탁하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모임이다.

그 고리 기도에 속한 어느 방사선과 의사가 고맙게도 무료로 생체 검사를 해 주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유방 관련 생체 검사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검사를 해 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닥터 R에게 연락을 해서 내 상황을 설명하고 검사 시행 날짜를 잡으라고 했다.

닥터 R에게 연락을 했을 때 전화를 받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네, 수잔 G. 코맨 센터입니다.” 방사선과 의사를 바꿔달라고 하자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대답과 함께 매릴린에게 전화를 돌려주었고,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난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센터에서 비용을 지불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검사를 받는 날, 병원에 도착해서 등록을 마치고 손가락 묵주를 들고 기도를 시작했다. 분홍색 꽃무늬의 헐렁한 검사복을 갈아입고 검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묵주기도는 계속되었다. 방사선과 보조는 콜린 마리였고 우리는 성모 마리아와 마리라는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사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닥터 R이 아니었다. 그는 휴가 중인 듯했다. 그 대신 닥터 S에게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방사선과장이었고 가장 경력이 많은 그와 함께한 의료진은 무척 자상했다. 내게 마취제를 놓으면서 검사의 진행을 한 가지씩 설명해 주었다. 보조 의료진은 내가 충분히 이완이 되어서 곧 잠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나는 손가락 묵주를 왼손에 들고, 의사가 나를 치료하듯이 예수님께서 나를 치유해 주시는 모습을 그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깊은 평화와 편안함이 찾아왔다. 마치 성모님께서 함께하시며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따뜻하고 애정 어린 방법으로 안심시켜 주시는 것 같았다. 그때 닥터 S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낭종인가? 아닌 것 같은데? 아, 낭종이 맞군!” 의사는 주사로 그것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양성 낭종이었고 생체 검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주님을 찬미하라! 예수님, 감사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남편에게 결과를 알리자 남편은 기뻐하며 그때까지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 일리노이 치릴코시에서 조앤 M. 하이만

 

 

 

 

** 묵주 축복 기도 **

 

사제: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으니

신자: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로다.

사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신자: 또한 사제와 함께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오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고 되새기게 하는 이 묵주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4 Responses to “101가지 묵주기도 이야기 – 1”

  • 안녕하세요!

    가톨릭사이트 모음에서
    101가지 묵주기도 이야기를 알게 되어 들렀습니다.
    마침 제 블로그에 묵주기도 관련 글을 올릴 계획을 하고 있던 차에
    좋은 체험담을 발견해서 기뻤습니다.
    가능하다면 제 블로그에 묵주기도 이야기를 카피해서 올려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이런 실감나는 체험담이 다른 이들에게도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힘을 주리라 예상됩니다.
    저도 그렇고요.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가정의 평화를 빕니다!

    • Ken:

      반갑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성모님의 특별한 도움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 평화를 빕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의 제가 운영하는 가톨릭 블로그에
    한 편씩 소개하겠습니다.

    이제 곧 추석명절입니다.
    즐겁게 보내세요!

    • Ken:

      자매님께도 주님, 성모님의 평화와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추억에 남는 추석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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