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Sunday Morning After…

6시 30분에 눈이 떠지고 곧 일어났다. 4시 경에 꿈에서 깨어난 것을 기억한다. 잡다한 꿈들 중에는 Teilhard & Berry의 영향을 받은 듯한 것이 있어서 흥미롭고, 성당교우 레 자매의 얼굴이 보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요새 저녁기도에서 환자명단 제1순위에  대건 안드레아 형제가 있는데 그것과 상관이 있었는지…. 어떻게 개인적, 사적, 조그마한 기적은 없는 것일까?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한’ 날이라고… 더운 것이 아니고 따뜻한… 참 이렇게 온도의 느낌이 하루아침에 바뀌니…  지구 생성될 때,  ‘사고, 잘못’으로 태양으로부터 23도 이상이나 삐뚤어진 자전 축, 우연[아니면 계획된]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이렇게 우리에게 계절의 변화를 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I-285 freeway drive와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기대를 넘치는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미사 후 ‘하얀풍차[하풍]’ coffee & bakery에서 함께 어울리게 된 것이다. 미사에서 의외로 만나 오랜 시간 회포를 풀게 된 박[교수]선배님 부부, 의외의 놀라움과 반가움이 겹친 행복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8시반 미사에 만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반가운 것이었다. 카톡 연락처도 받았기에 다시 그 옛날 [1990년대] 시절의 추억과 함께 앞으로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정말 오늘은 반가운 주일이 되었다.

특히 선배님은 이임하신 이영석 신부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신부님의 책에 친필 사인을 받았다고 했는데.. 무슨 책인가?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이라는 책이라는데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유명한 책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와~ 이 신부님의 그런 분이었구나…  조기 이임의 주요 원인도 어머님 간병이 포함되었다는 사실도 선배님으로부터 알게 되어서 가슴 속이 아련해 옴을 느낀다. 교수직 때문에 일방[이기]적으로 퇴임, 귀국한 것으로 알고 섭섭해 하기도 했는데, 역시…

특히 오늘 ‘하풍’ 내부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8시반 미사 regular 교우들이 우리 옆자리에 대거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가 좋았고 서로의 눈인사는 나를 ‘편하게, 안심하게, 기쁘게’ 하기도 했다.

 

당신은 어떤 멋진 일, 웃긴 일,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 놀라워할 때, 그것은 하느님이 당신에게 장난을 치시는 표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약간 다르게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이 당신을 그저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신학자 제임스 엘리슨이 종종 독자들에게 상상해 보라고 권유하듯이, 하느님이 당신을 ‘좋아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너무나 많이 들어서, 우리에게 그만 진부한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일단 벽에 바르고 나면 다시는 의식하지 않는 방의 벽지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음, 물론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셔. 그건 하느님이라면 당연한 일이요.” 하지만 우리를 ‘좋아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생각은 이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 말의 어감에는 전혀 다른 활력이 있습니다. 즉 놀랍고 유쾌하고 인격적입니다.

– “성자처럼 즐겨라!” – James Martin,  p202

위의 글을 필사하며 100% 동감을 하게 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 표현… 사실 ‘너무나 많이 들어서’ 심하게 말하면 지겹다는 생각까지 들지 않을까? 나도 그렇다. 둔감 정도가 아니라 전혀 감정이 일지를 않는 것이고 심지어는 ‘그래서 어쨌다고?’라는 비꼬인 반발감을 유발할 때도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래, ‘아’와 ‘어’ 가 다르다고, 그래 하느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신다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친구처럼 나를 속속들이 아는 선배처럼 나를 보면 웃으며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는 정다운 모습이 하느님이라면…

 

앞으로 ‘비 구경’은 기대하지 말라는 장기예보를 듣고 간사하게 다시 비가 그리워진다. 촉촉히, 잔잔한 소리를 동반한 가을비, 그것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Youtube(ambience music)에서 보는 이 ‘환상적’인 desk가 있는 방의 창문 밖의 풍경, 이것이  이 즈음의 천국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구나. 정말 멋진 모습이어라….

 

불현듯 잊기 전에 living room의 한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잠을 자고 있는 2011년 1월 ‘아이들이 준 생일 선물 ‘초보자 용’ x70 천체 망원경을 나의 desk 옆에다 갖다 놓았다. 이제는 조금 자신을 가지고 이것을 갖고 놀려는 희망이 생겼던 것. 하지만 역시 걸림돌은 그 놈의 알 수 없는 viewfinder EZ-Finder라는 괴물이었다. 암만 조작을 해도  lens 가운데 ‘red mark’가 보이지 않는 것, 이런 상태로 10년 간 가끔 사용하면서 실망감을 안고  거의 포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Google의 힘으로 그 문제의 정체를 밝힌 후 완전 포기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역쉬~ 이 것도 [빨갱이] 짱깨 들이 만든  ‘불량품’인 것이었다. 이제는 그 동작, 사용 원리도 알게 되었다. 이 viewfinder를 다시 사려면 $40 씩이나 하는 것인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선 대강의 위치를 새로 산 x10 쌍안경 binoculars로 찾은 후, 끈기를 가지고 정확한 위치로 ‘총 쏘듯이’ 조준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노력으로 이제는 밤하늘을 쳐다 볼 준비가 서서히 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번에는 부디 가깝고 커다란 행성 몇 개[금성, 목성, 토성 등] 는 볼 수 있게 되기를…

Came September…

확실히 기온이 떨어짐을 느낀다. 그렇게 습도가 높아도 별로 불편하지 않게 잠을 잔 것이다. 6시 반에 일어났지만 잡스러운 꿈을 기억하느라 누워있었다. 7시를 전후해서 아침 routine을 시작한 날, 오늘은 어떤 하루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덤덤하게 이끌려 가지 말고 내가 만드는 하루가 되면 좋겠다.

오늘은 9월의 첫날, ‘명색이 가을’의 느낌을 주는 단어가 9월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기분학상으로도 써늘한 피부의 느낌과 thermostat에 보이는 70도라는 숫자, porch door로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 등등이 가을을 느끼도록 도와준다. 그래 나는 올 가을의 ‘갈색’을 그렇게 기다렸지…

완전히 개인 날씨일 뿐 아니라 바람까지 산들산들 부는 여름 들어서 제일 시원한 느낌을 주는 날이 아니었을까?  85도 정도에 비교적 건조한 대기는 상쾌한 것이었다. 9월의 시작을 시원하게 맞는다.

 

A Coursera course:  Journey of Universe specialization No 2, conversation을 힘차게 시작하였다. 첫 번째 것의 반복도 포함 되어서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것으로 나는 ‘과학+종교’의 대화가 시작되는 과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테이야르 샤르댕의 공헌이 지대했을 것이다. 진화론을 그리스도교에 완전히 이론적으로 접목하는 그의 용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학식이 나왔을까?

늦게 손에 잡힌 책이 작년 3월 Pandemic이 선포되던 때 산 Capra (with Luisi)의 The Systems View of Life, a unifying vision.. 왜 이 책이 눈에 띄었을까? 물론 현재 ‘청강’하고 있는 Journey of the Universe 코스의 영향이다. 오늘 이 코스에서 새로 찾은 석학 Thomas Berry의 유명한 저서 The Dream of Earth 중에서 New Story 란 부분을 필사를 하면서 이미 인문학, 과학, 종교 등이 서서히 대화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지 실감을 못한 것이다. 특히 진화론에 대한 나의 얄팍한 편견, 가톨릭 교리의 영향, 정말 편견, 편협한 생각이란 것 등… 눈을 떠간다, 나는 점점, 거대한 그 무엇을 향하여..

그 다음에 나의 눈은 2014년2월에 사서 읽을 책, The Language of God,  그 유명한 BioLogos 창시자 Francis S. Collins를 알게 해준 시발점이 되었다. 그의 해박한 과학철학종교 론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이 나는 너무나 부럽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처럼 살 수 있는가?

Hurricane Ida, Bye August, Big Fish

지난 밤에도 꿈을 많이 꾼 듯한데 아~ 왜 하나도 분명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일까? 기억하고 다시 그 꿈을 살고 싶은데…

잠 속에서도 비가 오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조용하다. 아하~ 이것 또 내가 상상을 심하게 했구나~ 혹시 hurricane Ida 가 완전히 이곳을 피해서 올라간 것일까? 조금은 섭섭하기도 한데… 알고 보니 지나가기 전의 상태인 모양… 하루 종일 폭우와 tornado 가능성이 높다고… 그럼 그렇지. 덕분에 조금 시원해질 것을 기대도 하고 세월의 변화도 신선하게 느낄 수 있고… 하지만 NOLA (New Orleans) 는 완전히 power 가 끊어졌다고… 전에는 flooding을 걱정했는데 그것은 OK인데 결국 power system이 이번의 victim이 되었나? Flooding보다는 몇 배 낫지만 power가 없으면… 이것은 사람을 말려 죽이는 것 아닌가? West의 wild fire, 그리고 끈질긴 Pandemic Delta variant까지 nature는 신음을 한다. 아~ 테이야르 샤르댕 Teilhard de Chardin 신부님이시여, 저희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여름의 끝자락, 초록의 향연은 서서히…

 

8월 말, 9월 초가 되면 떠오르는 추억들, 별로 좋지 못한 것들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역사물들로 화석화가 되어가는 것들… 잊혀지지 못할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2017년 8월 말,  ‘레지오 미친년’ 사건은 추억중의 악몽, 악몽중의 악몽에 속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나는 개인역사의 다음 장으로 진입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악몽만은 아닌 것이다. 용서와 망각의 두 가지 중에서 망각을 택한 case일지도 모르지만 망각이 그리 쉽지도 않다. 아직까지 그 당시의 생생함과 놀라움이 느껴지니 말이다. 불쌍한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용서의 명분을 찾고 살지만 역시 망각이 먼저 올 것이다.

깜깜한 날씨에 알맞게 시원한 대기를 뚫고 가랑비, 세찬 비가 교대로 오기 시작한다. 이런 날이 바로 나의 날이다. 차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잔잔하고 편한 느낌, 이것이 내가 최고로 사랑하는 기분이고 즐거움이다. 물론 ‘피해’가 없는 한…  유난히 우는 모습의 유나, 쩔쩔매며 돌보는 새로니 부부의 모습이 엇갈린다. 모두 겪는 것이지만 이 둘의 모습은 왜 그렇게 안쓰럽게 느껴지는지… 바로 이것 때문에 연숙이 그렇게 유난을 떠는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죽을 때까지 이런 것들은 멀었다, 배우고 공감하려면… 하지만 노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Second Cup:  dark & rainy [hurricane] IDA day를 조금 더 가슴으로 느끼려 정말 오랜만에 2nd cup of coffee (freshly brewed Starbucks brand)를 둘이서 즐겼다. 연숙도 모처럼 문인화를 그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나는 두 번째로 보게 되는 ‘월척 越尺’ 이란 화석화 되어가는 KBS 드라마[게임] episode를 마주하며 아련~히 고향생각에 빠지는 사치함을 맛보고 있다. 그래, 이것이 우리의 IDA day가 된 것, 피해보며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너무나 응석을 부리고 싶은 것이다.      

월척이란 드라마 게임 episode는 아버지의 숨은 교훈을 가르치는 멋진 이야기였다. 낚시로 거의 모든 주말을 보내는 정년퇴직을 앞둔 아버지[이신재 분]는 사실은 시골 산중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며 땅을 개간해서 조상 묘를 모시고 퇴직 후에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고 퇴직 후에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이야기, 낚시의 월척이 아니고 후손을 위한 월척을 한 것…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있었던 그 가족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버지가 없었던 나에게는 조금 실감이 안 가지만, 부러운 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란 것만 빼고.   

80년대 KBS 드라마게임 episode ‘월척’

 

Joe Biden 바이든, no more nice guy, 평소 그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거의 싸울 듯한 모습으로 자기의 아프간 철수결정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의 인간성과 정치 철학을 지지하지만 그 결정의 시기와 눈에 보이던 결과가 문제가 아닌가? ‘개XX’ 졸개들에게 정치적인 허점을 너무나 많이 보이며 ‘정치자산’을 소비한 것, 어떻게 그것을 회복할 것인가? 산더미처럼 쌓인 big agenda들을 먼저 처리를 한 후에 했어도 그렇게 늦은 것이 아닐 텐데… 코앞에 다가오는 Nine-Eleven 9/11에 맞추려는 symbolism에 집착한 것이라면 그도 큰 실책을 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national address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최소한 그는 자신을 가지고 모든 책임을 지는 용기와 더불어 이번 결정과 결과 모두 역사가 공정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조금은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YALE University  Coursera

Journey of the Universe: A Story for Our Times Specialization

Course 1: Journey of the Universe: The Unfolding of Life

Course 2: Journey Conversations: Weaving Knowledge and Action

Course 3: The Worldview of Thomas Berry: The Flourishing of the Earth Community

얼마 전에 Course 1의 audit가 일단 끝났다. ‘청강’을 한 셈인데 그런대로 많은 것, 특히 초거시적인 과학과 인문학의 접목을 목격한 셈이다. 알고 보면 이런 우주, 세계관은 Teilhard de Chardin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번에 새로 알게 된 Thomas Berry로 이어지는 종교, 인문, 과학철학으로 보인다. 지금은 제2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나는 한동안 멀리하며 살았던 테이야르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 끈끈한 여름에 거의 우연히 얻게 된 큰 수확 중에 하나가 되었다.

 

Late Daffodils, James Martin S.J.

Nine 9 Daffodils …

어제 활짝 모습을 드러낸 수선화를 보며, 거의 3주일이 늦었다는 놀라움을 알게 되었다. 2월 초에 거의 확실히 모습을 보여주던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안다. 그것이 거의 3주일이나? 그렇구나, groundhog의 예보가 맞았다. 겨울이 6주간 더 계속된다는 예보 아닌 전설이 맞은 것이다. 이곳만 제외하고 미국전역의 2월은 완전히 사상초유의 ‘추위, 눈’ 기록을 깨는 것? 조금은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자연의 엄마’ Mother Nature가 다시 제 자리를 잡게 해 줄 것이다.

의외로 편안하고 안정되고 평화의 강이 흐르는, 가랑비가 싸늘하게 내려오는 금요일 오전을 맞았다. 최소한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이 거의 없었던 시간을 보낸 것이다. 내가 의지적으로 이런 시간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런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나의 의지력을 무심코 너무나 믿었고 의지했던 나 자신을 발견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래, 나을 움직이는 것은 나의 두뇌 혼자가 아닌 것만 절대로 잊지 말자.

 

진희네는 어제 COVID vaccine 2nd shot을 맞았는데 side effect 가 심해서 고생을 하고 있다고 연락이 되었다. 그저 몸살이라고 하던데, 어떤 것인지 상상이 가지를 않는다. 아마도 전에 연숙이 골다공증 약 부작용 때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조금 우려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나로써는 shot을 맞았다는 것에 위로를 삼으면 조금 부작용도 쉽게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자신이 있지만, 혹시 누가 알랴? 자만심은 금물이다. 그래도, 코로나에 걸리는 걱정보다는 이것을 참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우리는 아직도 2차 접종 소식이 안 오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다른 곳 예약은 정말 복권과 비슷한 것.. 며칠 만 더 기다려보고 다시 결정을 하면…

 

Fr. James Martin, SJ 책 2권이 정문 앞에서 비를 맞는 채 배달이 되었다. 기다리던 책이 제때에 도착한 사실은 기쁘지만 어떻게 가랑비가 오는 날 비닐로 덮지 않은 채… 솔직히, 그 인간이라는 조소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배려심 없을까? 종이로 만든 책, 이것이 젖는 날이면 끝장이 아닐까? 정말 나는 이런 인정머리 없는 인간들이 ‘죽도록’ 싫은 것이다.

Father James Martin SJ, 이제 나는 Bishop Barron에 이어 다른 영성적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 동안 많이 보아왔던 그 이름이 바로 James Martin이었는데, 이번에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배우게 될 것이다. 특히 사순절이라는 시기가 아주 우연만은 아닐 듯하다. 이것도 분명히 무슨 뜻이 있는 것이다.  Essential Writings, Learning to Pray, 얼마나 좋은 선택인가? 그에 대해서 배우는 것,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 좋구나 좋아…

 

uC, IoT, embedded stuffs, C, Arduino, RasPi.. 조금씩 조금씩 나의 눈과 머리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그 ‘무엇’이 나를 가볍게 밀어 주기만 바라는 나의 게으름, 역시 우리 어머님의 사랑의 손길이 이곳에도 필요한가? 작년 이즈음에 이런 urge를 강하게 느꼈을 때는 이미 입안의 고통이 나의 모든 신경을 휘어잡기 시작했었다. 이제 그것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니 조금은 better chance 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 올 봄은 조금 나은, 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자!

드디어 ESP32-WROVER 와 breadboard에 LED, jumper wires, switch등이 올라갔고 Arduino IDE가 PC screen에 떴다. 예전에 step 1, LED blinker에서 story가 끝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발전한 것이다. 이것이 더욱 커다란 것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조금 기대를 해 보자.

 

 

Pandemic Groundhog Day, COVID 1st Shot

Punxsutawney Phil saw his shadow this morning! Six more weeks of Winter! No crowd, just streamed live!

요즈음 잊고 있었다. 오늘은 2/2, 2월 2일! 바로 Groundhog Day! 이제는 추억이 조금씩 엮어진 날이 되었다. 거의 10년이 되었을까? 그 영화, The Groundhog Day를 보고 느낌을 나의 blog에 남긴 것이?  추운 겨울을 나려면 이 추억을 나는 꼭 집고 넘어가고 싶다. 주인공 Bill Murray의 얼굴도 그립고, 체감온도가 제일 낮은 2월 초의 정취를 나는 마음껏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 겨울은 얼마나 더 갈 것인가?  Pandemic 으로 운집한 군중이 거의 없이, 오늘 아침 이 ‘유명한’ 펑스토니 필’ 두더지는 자기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한다. 역쉬~~ 6주 이상을 더 기다려야 봄이 오는가…

 

아침 먹은 것이 다시 거북해져서  Alka-Seltzer를 마시고 조금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다. 왜 자꾸 소화기에 문제가? 별것은 아니겠지… 그런 상태로 오늘 외출은 조금 아찔한 기분… 너무나 오랜만에 freeway에 올라선 기분. 하지만 모든 일들이 예정대로 끝났다. 부수입으로 성당에서 이영석 주임 신부님의 건강한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드렸다. 안식년으로 방문오신 어떤[이름을 잊었다] 신부님,  3주간 머무신다고, 인사까지 드리고 왔다. 1차 코로나 백신은 거의 정확한 시간에 맞긴 맞았지만 2차 접종은 한 달 뒤에 전화로 예약을 확인해야 한다고… 2차 접종 후에는 조금 몸이 아플지도 모른다고 신부님이나 간호사가 모두 말해준다. 우리가 맞은 것은 Moderna vaccine이었다. 이제는 한달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면 큰 문제는 없을 듯… 감사합니다.

요새 거의 매일 ABC, NBC, CBS channel을 자유자재로 오고 가며 보고 있는데, Super Bowl이란 단어도 정겹게 느껴지고, 각종 약 광고들도 반갑다. Get a Life! 의 구호에 조금은 한걸음 다가가고 있는가? 이것이 true reality인가? 그래, 조금씩 조금씩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며 살자… 상식적인  태도로…

Advent 2020, 저무는 11월에…

도라빌 순교자 성당의 자랑, 기쁨, 성탄구유 점등식…

2020년 대림절 Advent 의 시작을 맞아, 어제 토요 특전미사와 성탄구유 점등식에 모두 참석하고 돌아왔다.  칠흑같이 이미 어두워진 저녁 6시 쯤 나가면서 느낌이 ‘정말 오랜만에 어두울 때 나가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예전보다 운전이 익숙지 못함은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그 동안 나가질 못해서 생소하게 보여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이런 생소해짐은 더 심해질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이것이 생의 진리인 것을…

이곳, 도라빌 순교자 성당의 성탄구유와 모든 장식들, 크리스마스 tree등은 정말 환상적이고 멋진 것이었다. 아마도 신부님의 특별한 관심과 지도로 봉사자들이 헌신적으로 수고를 했을 것이다.  꽤 오랜만에 볼 수 있는 그리운 모습들이 꽤 있었다. 정말 반가웠지만 예전처럼 깊은 악수나 hug을 못하는 것은 정말 이번 pandemic의 저주라고나 할까…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런 것인가… 별로 큰 관계도 없었던 듯 보이던 사람들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참,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게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밤늦게 집으로 들어오니 Ozzie가 그렇게 반길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Tobey때의 생각이 떠올라 슬퍼짐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나의 어깨로 뛰어올라오던 녀석… 정말 정말 Tobey야, 그립구나, 그리워…

특전미사 덕분에, 오랜만에 아침에 늦게 잘 수 있는 대림절 첫 주일날이 되었다. 어제 특전미사를 간 것, 여러모로 우리에게 참신한 기분을 제공하였다. 성탄구유 점등식에도 교우들과 같이 모여 섰던 것도 살아있는 기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모두들… 잘 살고 있음에 반가움과 감사함이 솟구친다. 그래 모두들 잘 살아보자.

 

매년 이즈음에 갑자기 요란하게 나오는 대한민국 FEBC 극동방송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사실 유별나고 유난한가? 이곳의 어느 방송에 못지않게, 아니 더 요란하게 각종 성탄기분을 자아내게 한다. 기독교 방송이라지만 문화적, 풍속적으로도 고국의 성탄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을 안겨주었지 않았던가… 누나와 같이 그리던 각종 성탄카드들..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센베이 를 나누어주던 동네 교회당의 모습, 그립다 그 시절들이…

 

예상을 초월한 평화스러운 주일 날이 되었다. Ozzie 도 행복하게 동네  산책길을 걷고, 점심도 편안하게 먹었다. 한가한 것을 기화로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치를 부렸다.

2014년에 심취하며 읽었던 Dr. Francis CollinsThe Language of God을 다시 살펴보기도 했고, 그 저자 1950년생, 에 대해서 존경심을 키우기도 했다. 그의 거의 완벽한 신앙과 과학의 접속 함의 놀라운 용기와 지식,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또한 거의 하루 종일 Robert Lanza의 책, biocentrism 을 읽게 되었다. 아직까지 그의 논제의 기본을 향하는 과정이지만, 현재까지는 아주 흥미롭다는, 혁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관심은 현재의 가톨릭의 ‘과학교리’ 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고차원적인 희망이지만… 누가 알랴.. 이것이 나의 신앙, 믿음에 더 도움이 될는 지를..

 

오늘로서 Mr. 설 의 선물,  Bourbon 의 마지막 잔을 기울인다. 과연 얼마 만에 바닥이 난 것일까? 짐작할 수가 없다. 한 두 달 정도라는 것 밖에는.. 상관없다. 아주 감사하게 맛있게 마셨으니까. 이제 앞으로 이런 것 마실 기회가 생길까, 내가 사지 않으면 힘들지도…  과음을 하지는 못하고 찔끔찔끔 나만의 특유한 모습으로 마셨으니까, 몸에 그렇게 해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설 형제,  형제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  진심으로…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나의 가슴이 조금은 따뜻해집니다…

Echinopsis

오늘, 여덟 개의 꽃 중에 여섯 개가 만개를 하고 있다… 어제 핀 두개는 다시 동면으로…

 

올해도, 기다리던 꽃이 피었다. 일년초가 아닌 바로 올망졸망한 귀여운 선인장 무리의 꽃이. 지나간 2년 동안 간신히 힘겹게 하나의 꽃을 안간힘을 쓰며 피워내던 그 꼬마 선인장이 올해는 무려 여덟 개의 꽃봉오리를 우리에게 선사를 하고 있다. 그 고맙고 귀여운 선인장의 이름이 Echinopsis 과 科 genus의 일종임을 이번에 알게 되어서 더욱 친근감과 정이 흠뻑 간다. 

Wikipedia에 의하면 (믿을만한 source)  이 선인장의 학명이 아닌 속명으로는: hedgehog cactus, sea-urchin cactus, Easter lily cactus임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 집에서 재롱을 부리며 피어난 귀여운 선인장도 이 이름을 가진 것 중에 하나일 듯하다.

나는 아주 흔한 꽃 이름 몇 개를 제외하고는 이쪽으로는 무식한 편인데 ‘뜰의 기운’을 너무나 좋아하는 연숙의 영향으로 조금씩 관심도 갖고 알게도 되었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에 비하면 수준 이하라고 자인을 한다.

하지만 이 선인장은 조금 달랐다. 나의 관심이 유별나게 간 것이다. 2년 전에는 사진까지 찍어 놓았고, 작년 것은 나의 website: serony.com 의 summer 용 head art로까지 쓰게까지 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시대, 세대, 그리고 환경의 동물인 모양이다. 내가 이런 것에 눈이 열린 사실을 보면…

 

작년 8월 중에 유일하게 하나의 꽃이…

 

그러던 차에 COVID-19,  STAY-HOME curse의 철퇴를 맞게 되고,  더욱 주위의 자연환경에 눈이 가게 되던 차에… 다시 그 선인장에 꽃봉오리가 기지개를 피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 둘은 ‘복권 추첨’을 바라보는 양, 매일 매일 보게 되었다.

비록 코로나바이러스가 공기 중에서 활개를 친다고 해도, 이 선인장은 반발이라도 하듯이 하나가 아니고 무려 여덟 개나 되는 귀여운 봉오리를 위로 밀고 있어서, 아마도 주문진의 말린 오징어처럼 처져가는 우리들에게 사기를 돋구어주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선인장의 역사를 연숙에게 알아보니, 역시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나누어주는 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정을 흠뻑 받고 우리 집에 선물로 온 것, 역쉬~~~  우리의 한국본당, 도라빌 순교자 성당의 고참, 바울라 자매님이 개인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시면서 꽃 관리에 정성을 쓰는 연숙에게 선물로 주신 것. 참 새 주인을 잘 골랐다는 느낌이다.

이 선인장을 학명으로 추적을 하면, 이 과에는 무려 128 종류가 있고,  특별하게 꽃이 피는 시기가 따로 없고, 그저 ‘조건만 좋으면’ 수시로 필 수도 있다고 한다. 원산지가 남미 쪽이고 비교적 건조한 조건에서 자라지만 우리 쪽의 환경은 그것과는 거리가 먼 ‘고운다습’한 편이라 이렇게 일년에 한 번 정도 애들 태우며 기다리게 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수시로, 쉽게 피면 이렇게까지 귀하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예년의 기억으로 며칠 (아마도 하루?) 정도 잠깐 멋을 부리다가 곧바로 지는 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더 기다리고, 고맙고, 아쉬운 모양이다. 이제는 내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 우리들은 어떤 모습의 세상(COVID-FREE) 에서 살게 될지…

 

올해, 무려 여덟 개의 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

꽃 망울이 거의 피기 직전…

첫 두 송이의 꽃이 선을 보였고…

한여름의 어느 날…

내일이 중복! 시원한 아침을 맞는다. 풀밭은 촉촉하고 하늘에는 습기가 거의 안 느껴진다. 내일이 중복이란다. 그래 우리는 여름의 한 가운데를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8월이 코앞에 다가온다. 그래 이것이 인생이고 삶이다. 항상 들뜬 기쁨이 계속되는 것은 환상이다. 오르면 내리고 내리면 또 올라가고…

일주일의 ‘여름휴가’를 나 혼자 일방적으로 선언을 했지만 무엇을 쉬어야 할지 참 나도 웃음이 나온다. 별로 없다. 기껏해야 저녁기도와 매일미사, 산책하는 것 정도다. 그것을 쉬는 것도 우리에게는 사실 큰 변화니까 휴가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갑자기 먼~~ 곳으로 차를 타고 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Smokey Mountain도 생각했다가 갑자기 겁도 나고, 가까운 곳, Redtop Mountain 도 생각하고… 하지만 여기서 생각이 멈추어 선다. 그 정도로 나는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질 못하다. Stone Mountain을 수시로 ‘산책’ 간다던 임형의 부지런함이 부러워진다. 이제 곧 사람들과 만나야 할 것이 생각되면 우선 움츠려 든다.  그 동안 너무 편한 삶에 젖어버렸나? 10년 전 내가 연숙을 따라 성당에 다시 나오기 시작할 당시가 자꾸 생각나고… 결과는 거의 기적에 가까웠지 않았던가? 상기하자… 그때를… 다시 일어서서 나가보자..

 

Overhead Lighting위치를 맞추는 것, 정말 시간이 필요한,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꿈 속에서 그리던 모습, 이제 실현이 되었다… 만세!

거의 30년 가까이 우리 가족에게 바람을 service했던 ‘일제’ ceiling fan, Thanks a lot!

Desk Lighting: 결국은 desk light를 달긴 달았고 현재 익숙해지는 노력을 하고 있다. 결과는 생각만큼 좋은 것은 아니더라도 쓸만하긴 하다. 책상 위가 넓어졌으니까..  다음 task는 물론 fan이 없어진 자리를 어떻게 다른 light로 채우느냐 하는 것, 목표는 $$를 안 쓰거나 최저로 하고 나의 ‘재주’를 쓰는 것, 그것이다. 빠른 속도로 fan light자리의 lighting을 구상, 설계, 조립하고 있다. 원래의 fan은 하도 깨끗해서 아깝지만 어쩔 수 없이 모두 해체를 해서 사살상 폐기하게 되었다. 역쉬~~ 일본 아해들이 만든 것… 잘 만들었다. 우리 집 family room을 굳건히 지켜온 것, 아쉽지만 family는 이제 다 자랐다. 나의 study room에 맞게 살면 된다.

 

Get a Life! 이 말이 왜 오늘 떠오른 것일까? 연숙이 모처럼 나보고 들으라고 Youtube 의 한국 열창가요를 틀어주었다. 나보고 요새 고국의 것, 너무 좋다고 누누이 강조하는데, 나는 물론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린다. 나는 과연 open mind인가 closed, retarded인가? 왜 그렇게 요새 것을 나는 싫어하고 무서워하며 피하는 것일까? 나는 요새의 세상을 절대로 제대로 감상하고, 즐기며 살지 못한다. 나의 선택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일까? 그것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 싫은 것, 계속 피하는 것, 과연 옳은 것이 아닐까?

교성이로부터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어찌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그 녀석 정말 나한테 화가 난 것일까? 이번엔 나도 화가 나서 대화를 당분간 끊어 버리고 싶다. 왜 내가 이렇게 불안하고 우울한 것일까?  교성이의 ‘해괴한’ 짧은 말끝에 나는 마음이 너무나 상한 모양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하늘을 우러러 보고 생각해도 그런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나의 느낌이 무언가 그 녀석의 심사를 뒤틀리게 해 놓은 죄책감이 괴롭힌다. 너무나 아는 체를 했는가, 그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었나? 잊자, 그래 아직도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있으니까,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야.

 

늙어감을 느낄 때: 나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역시 나는 늙어가고 있고 아니 늙었다는 자괴감,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잘 모르는 나의 모습, 어떨 때는 희망도 솟고 하지만 대부분 내 상상 속의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련다. 어쩔 수가 없다. 나의 거울은 연숙이다. 연숙이 불쌍하게 안 보면 그것으로 OK다. 

After pain, Ozzie’s coming..

치통이 사라진 또 하루의 아침이 밝았다. 아직도 나는 경이로운 감정으로 이 ‘무 無 고통’의 일초일초를 만끽하고 있다. 밤잠도 거의 신경이 안 쓰이는 것, 나의 즐거움, ‘엎드려 자는 것’도 완전히 오랜 옛날의 그 기분이 돌아온 것…  감사합니다.

이래서 요새는 무통의 날을 즐기는 그런 날이 되었다. 조금씩 새로운 다른 감각에 적응은 하고 있지만 그 무섭게 아프던 나날이 쉽게 잊혀지는 것도 싫다. 현재를 더 즐기기 위해서…  이제는 앞으로 새로운 입안의 감각에 적응을 해야 하는 일이 남았다. 하지만, 현재보다 나으면 낫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야 말로 ‘이 없으면 잇몸’라는 말, 너무나 실감이 간다.

꿈들을, 그것도 내가 그렇게 그리던 종류의 꿈들, 그것도 비교적 생생한 것들을 많이 꾸었던 밤, 너무 깊게 꿈에 잠겼는지 눈을 떠보니 7시도 훨씬 넘었다. 이런 꿈이 다시 돌아온 것은 분명히 입 속의 고통과 연관이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머리 속에도, 영육간으로, 잔잔함과 평화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나는 거의 5일째 이런 평화와 편안함을 ‘축하’하며 살고 있고, 그렇게 살고 싶다. 비록 이런 ‘고통의 재난’은 내가 자초한 탓도 없지는 않지만, 그것을 더 이상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저, 그저, 현재를 즐기고 싶은 것이다.

 

장마성 날씨가 시작되었나? 따가운 기운보다는 축축한 기운이 대기를 덮고 당장이라고 보슬비로 시작해서 폭우가 쏟아질 듯한 하늘이다. 100도가 넘는 불타는 대지보다는 이런 날씨가 얼마나 좋은가? 왜 사람들은 비를 그렇게 반가워 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무조건 비가 좋은데…

비가 충분히 왔던 덕인지 올해는 작년에 하나도 피지 않았던 수국이 만발을 하였다. 꽃에 조금은 무식했던 나도 이 수국만은 잘 알았고 여름이 가까워오면 아예 기다리기도 했다. 작년에 찾아오지 않았을 때 그렇게 섭섭했는데 올해 다시 우리를 찾아와 멋진 모습을 자랑하고 있어서 올 여름의 기분을 들뜨게 해준다.

 

 

오랜만에 새로니의 강아지, Ozzie가 온단다. 반갑기도 하고 나의 느긋한 일상생활이 조금은 변하겠다는 약간의 귀찮음도 없지는 않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미미하나마 작은 노력과 움직임의 기회가 필요하다. 이것도 나의 작은 ‘친구 동물들에 대한 봉사’라고 보면 지나친 것일까? 사람과 동물이 이렇게 가까이서 ‘무언으로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름다운 계기가 아닌가?

새로니도 방학이고,  Richard는 정상적으로 집에서 일을 하는데 이제 조금은 밖의 세계가 그리운 모양. 기분 전화 겸 해서 며칠 North Carolina mountain 쪽으로 여행한다고…  덕분에 오랜만에 나는 심심치 않게 되었다.

 

에어컨 woe, adventure..

지나간 며칠은 나의 머리 속이 온통 에어컨으로 가득한 나날들이었다. 갑자기 치솟는 더위가 주말로 예보가 된 가운데, 우리 집 위층의 에어컨의 gas가 다시 모두 샜다는 사실을 알고 비상사태가 선포된 것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다가 2년 전 여름에 모두 새것으로 교체한 터였다. 하지만 작년 여름에 위층의 에어컨 gas가 모두 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당시에 어느 곳에서 새는 지 찾지를 못하고 gas만 채운 채로 여름은 그런대로 보냈다.

 

gas, mostly nitrogen, pressure test

 

하지만 올해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내가 값싼 gas pressure gauge (manifold gauge set)을 사서 직접 pressure check를 해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완전히 샌 것, system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어딘가 system이 새고 있는 것이다.

에어컨을 설치한 사람들이 다시 와서 철저한 system check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거의 행운이 필요한 것인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는 지루한 작업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의 3일이나 걸려서 찾아냈기는 했지만, 원인은 에어컨 제조회사 Carrier 의 사소한 실수로 들어났다. 하지만 설치한 사람들도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유능한 사람들이었으면 사실 그런 결과는 안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일 동안 온갖 노력을 한 것은 분명하고 그것은 정당한 labor cost였다. 그들도 자기들의 책임을 인식하고 모든 labor cost를 반반씩 부담하는 것으로 끝났다. 깐깐한 사람 같았으면 싸우면서라도 책임추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3일 동안이나 거의 torture test에 가까운 각종 pressure test를 한 결과 이 system은 이번에 완전한 점검을 당한 것이기에 나는 만족하고 있다. 이제는 두 다리 쭉~ 뻗고 다가올 여름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

 

Oldest beer in America (from Germany), Yuelingling!

 

이제는 Miller Time, 아니 Yuengling Moment!   값싼 미제  ‘삐루’ 한잔 마시며 오래된 한국 TV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 田園日記’를 보는 그런 맛, 하늘아래 누가 더 부러우랴…  정말 멋진 순간을 보내는 2020년 5월 중순, 허~ 제발 이런 순간들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구나…

 

성모님과 수선화

꽃과 나무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배우자와 오래 살아왔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아주 빈약하다. 한때, 태고 적 시절, 정확히 고등학교 2~3학년 때 ‘화훼 花卉’ 라는 책을 열심히 보며 메마른 콘크리트 2층 집 옥상에다 ‘포장마차’같은 화분, 화단을 만들어서 식물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공돌이’ 성향의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한때, 그것도 공부만 해야 하는 고등학교 때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이 꽃과 나무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근래에 나이가 지긋이 들면서 조금씩 나의 눈에 이 꽃과 나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혀 의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저절로 눈이 떠졌던 것이다. 노력을 한 것도 없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하나, 둘, 셋,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들을 보며 흐뭇한 느낌까지 가지게 되었다. 시에서나 보던 그 초목들의 아름다움을 몸소 느끼게 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나의 눈을 끈 것은 그렇게 추운 2월 초에 어김없이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수선화였다. 물론 서정적인 느낌의 classic folk , seven daffodils 를 추억 속으로 연상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추위를 견디며 backyard에서 피어나는 그 모습과 성모님의 강인하고, 변함없는 인자한 미소는 잘 어울림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속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레지오 마리애 주 회합에서는 ‘총 사령관’인 성모님 상 앞에 2개의 꽃이 든 병을 놓게 되어있는데, 매주 이것을 구입하는 것도 사소한 일이 아니다. 요새같이 단원 수가 극소화 될 때는 재정상 더욱 문제가 된다. 이럴 때 집에 꽃을 가꾸는 시절이 오면 조금은 문제가 완화가 된다. 요새가 바로 그런 시즌의 시작인 것이다. 거기다 겨울이 지나가는 때의 청초한 수선화는 성모님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다시 성탄이 지나가며..

¶  공식적 겨울이 시작된 동지 직후의 며칠은 올 겨울의 추위를 예고하듯이 뼈까지 저려오는 싸늘하고 을씨년스럽기만 한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것이 깜깜하게만 느껴지는 초저녁은 과연 일년 중 제일 밤이 길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올 겨울을 맞으며 나는 작은 꿈을 꾸고 있었다. 하얀 눈이 ‘적당히’ 내리는 날 아틀란타 교외 Conyers 에 있는 Holy Spirit Monastery,  Trappists 수도원으로 연숙과 멋진 드라이브를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곳의 gift shop의 coffee또한 일품이어서, 눈 나리는 수도원의 풍경과 함께 멋진 우리들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역시 올해도 꿈으로 끝나는 듯하다.  아직까지도 전혀 눈이 올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이다.

작년에 비해서 성탄 트리, 장식은 조금 일찍이 끝났고 올해도 이것들은 새로니 생일 early January 즈음까지 성탄씨즌 동안 밤과 낮을 밝힐 것이다. 예년에 비해서 Hallmark holiday movie들을 훨씬 덜 보고 있다. 지난 2~3 년 동안 나는 이것을 정말 즐겨 보았지만 올해는 그렇게 마음의 한가함이 없었던 듯 하다. 갑자기 ‘망가진’ garage door opener  때문에, 성탄 바로 직전까지 tool time (replacing garage door opener) 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것도, 편하게 느긋하게 video를 볼 여유를 갖지 못하게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성탄 전야에 우리 extended family members 들이 모두 모일 수 있었다. 보통 4명이 모이던 가족행사가 올해는 6명으로 늘었다. 3월 초 출산예정인 작은 딸 부부,  내년 6월 결혼예정인 큰딸 새로니와 그의 약혼자까지 남녀의 비율이 1:1 이 되었다. 세월의 횡포인지 혜택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세월은 이렇게도 정직하게 흐른다는 것을 절감한다.

 

올해의 트리 장식은 연숙이 모두 했고, 가족들로부터 책을 포함한 선물도 받았다

 

¶  Smart Garage Door,   일년도 훨씬 지나간 작은 악몽의 추억이 아직도 머리 속에 삼삼하다. 2018년 새해 즈음에 갑자기 garage door가 오르내리는 모습이 이상하여 보니 extension spring 하나가 피곤한지 축 늘어져 있었다. 하나의 door 무게가 150 파운드가 넘는데, 2개의 door의 balance는 물론이고 그것이 오르는데 너무나 힘에 겨운 것이었다.  물론  늘어진 extension spring 탓이었음은 알았지만 다행히 opener motor자체는 아니어서 그대로 넘어갔지만 그때의 ‘작은 사고’는 악몽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점점 opener motor의 소리가 요란해지는 것을 알았고, 결국은 이번에 내가 보는 앞에서 door opener motor 에서 연기가 치솟으며 갑자기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30여 년의 힘겨운 service를 마치고 ‘영면’한 것이다.  실망 전에 나는 이’놈’에게 감사를 드렸다. 참 오랫동안 정직하게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것이 망가지면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 무거운 차고문을 차에서 내려서 손으로 열고 닫는 것, 못할 것은 없지만 비라도 오거나 하면 낭패지만 새것으로 바꿀 때까지 며칠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급하게 Home Depot에 가서 opener model을 살펴보고 Internet을 뒤지고 해서 찾은 것이 Chamberlain B750란 놈인데, Belt Drive라서 아주 조용하고 게다가 소위 말해서 Smart Model로 Smart Phone App으로 control이 되는 것인데 나는 이 사실 보다는, 전에 쓰던 screw drive보다 훨씬 ‘조용한’ belt drive라서 이것을 골랐다.

 이것을 고르고 산 것은 쉬운 일에 속하고, 이것을 손수  install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 나의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Pro의 service도 있지만, $100이상임은 둘째치고 나에게 이런 option은 한마디로 ‘최후의 선택’에 속한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것은 나의 몫인 것이다.

나이의 영향인지 tool을 다루는 감촉도 예전과 같지 않아서 사실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전에 garage door spring 사고를 당한 경험도 별로 즐겁지 않아서 일을 선뜻 시작하기가 싫었지만 일단 시작이 되면서 거의 ‘자동적’으로 나의 머리는 ‘공돌이’의 그것으로 서서히 바뀌고 결과적으로 며칠 만에 우리는 최신형 smart garage door opener의 혜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설치 후 첫 번 가동시에 놀란 것이.. 너무도 조용하다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시끄러웠는데 지금은 그것이 가냘픈 소음 정도로 변한 것이다. 또한 smart phone으로 control이 되면서 문이 열린 상태를 real-time으로 알 수가 있다는 것, 이것도 아주 편한 점이다. 가끔 집을 떠난 후에  ‘내가 문을 닫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 공정을 되돌아 정리하면 사실 괴로운 순간 순간들이 도처에 매복해 있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 또한 각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에 접해서 시간이 pro에 비해서 훨씬 오래 걸렸지만 이것은 나에겐 큰 문제가 안 된다. 시간이 넉~넉 하기 때문이다.

 

Into Advent, 10th 연총 2019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새 겨울이 되어가는가? 올해 날씨의 특징이 있다면 일단 일기 패턴이 자리를 잡으면 별로 변하려는 기운이 없다는 것,  그렇게 익숙하던 옛날의 三寒四溫 이란 말은 완전히 사라진 듯하다. 다행히도 그 pattern이란 것이 ‘늦가을 초겨울 같은’ 그런 것이라 다행이라고 할까..

지나간 11월 초라고 기억되는 때에 벌써 요란한 Christmas carol이 흘러나온 곳은 의외로 ‘대한민국 극동방송, FEBC streaming service’이었다. 역시 대한민국의 개신교회는 이곳과는 조금 다른가..  어떻게 이렇게 일찍이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는가? 덕분에 추억의 캐럴을 편하게 즐기게는 되었지만 Thanksgiving holiday 전에는 그렇게 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실 그런 세속적인 느낌의 성탄축제 보다는 ‘대림절, Advent‘의 엄숙하게 예수탄생을 기다리자는 전통이 있어서 매년 고민을 하게 된다. 어느 정도 ‘전통’과 ‘현세적 문화’를 절충하는가 하는 문제다. 전에는 젊은 시절의 추억적인 크리스마스 기분을 100% 기억, 만끽하려고 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교회의 권고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모든 holiday decoration을 성탄 10일 전 이내로 늦추고 있다. 한마디로 차분한 대림절이 되었고 대신 성탄의 기분을 1월 중순까지 지속시키려 노력을 한다. 그것이 진정한 대림-성탄시기의 뜻일 것이다.

 

12월이 되자 YMCA에서 성탄느낌의 색깔들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우리의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도 본격적으로 성탄 장식은 물론 주차장에는 Nativity scene 성탄구유 까지 만들어 놓았다. 우리 성당에서 이런 건물 밖의 구유는 처음 보는 듯하다. 새로 부임하신 이영석 신부님이 이런 것을 특별히 원하셨는지 올해는 조금 모든 것들이 더 일찍, 더 ‘요란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교우들을 조금 더 배려한 것은 아닐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 2019

 

오늘은 예년에 비해서 1주일 뒤늦게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가 열렸다. 손가락으로 계산을 해 보니 내가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 딱 10년째가 됨을 알았다. 갑자기 ‘오래 되었다..’ 라는 自照감이 ‘엄습’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그 동안, 무엇이 변했는가? 많이 변했다.. 

나에게 처음 레지오 연총 (2010년대 초 연차 총친목회)의 적극적이고, 참신했던 느낌은 많이 희석된 듯 느껴지고 이제는 조금은 ‘수수방관자’적인 입장이 된 듯해서 조금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통기타반주로 70/80노래를 목청을 돋구어 부르며 연총 에서 어울렸던 여러 형제님들도 이제는 뿔뿔이 헤어지고, 결국은 ‘별로 쓸모 없는’ 자매님들만 주위에 남은 듯하다. 이것이 레지오의 生老病死인가 아니면 보통 있는 진화과정인가..

나이로 보아도 leading edge에 있는 우리들, 이제는 조금씩 후진, 후배 단원들의 ‘양과 질’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양과 질 모두 정체, 아니 퇴보인 듯 우려되고, 어제 있었던 신부, 단장 간담회에서는 정식으로 ‘신부님의 전폭 협조’ 요청이 있었다.  협조란 것은 다름이 아닌, 조금이라도 좋으니 ‘레지오 선전’을 해 달라는 것이었고, 오늘 교중미사에서 드디어 그 효과가 나왔다. 전 신자들에게 레지오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간곡한 언급’.. 얼마나 ‘멋진 신임 신부’인가!

오늘 연총에서 우리는 예상대로 ‘공연’을 포기한 상태로 끝났다.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올해 초에 우리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우리의 구세주로 등장했던 ‘자매님 들’,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고 갑자기 떠난 상태에서 나는 모든 희망을 잃은 상태가 되었기에 사실 연총 같은 ‘축제’는 관심 밖에 있었다. 그 ‘기대주 자매님’은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었는지 동정심과 실망을 넘어서 화가 날 지경인데.. 이런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지 역시 해답은 우리의 총사령관이신 성모님이 가지고 계실지…

Off Day Muses..

¶  제일 따뜻한 양말도 별로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 겨울느낌의 늦가을이 서서히 계절상의 겨울로 향해 서서히 흘러간다. 더위보다는 추위가 낫다.. 라는 깊숙한 추억으로, 이런 쓸쓸한 싸늘함의 일초 일초를 즐기고 있다. 비교적 유순한 날씨의 차례가 끝나고 매서운 바람에 실려온 시베리아[이곳은 캐나다] 성 냉랭함은 달력의 넘김과 더불어 세월의 움직임을 다시 느낀다.

오늘은 예기치 못한 off day가 되었다. 얼마 전 나를 ‘가볍게 [flu-shot덕분인지..]’  스쳐간 감기가 이번에는 드디어 연숙에게 닥친 것. 이럴 때마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 하나가 있다. ‘이른 아침에 (돈 벌러) 나가지 않고, 편하게 쉴 수 있다…’ 라는 안도감. 언제까지 우리가 현재의 pace로 뛸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살 날이 그런대로 남았다면 이럴 때는 조금 쉬면서, 천천히 가면 됨을 경험을 통해서 익히 알게 되었다.  그래… 하루 푹~ 쉬면 되는 것 아닌가?

근래에 자주 성당 공동체 주변에서 알게 된 나이가 엇비슷한  ‘친구’들을 통해서 그 동안 익숙지 않았던 ‘다른 삶’들을 알게 되면서, 아직도 꾸준히 매일 매일 일하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최소한 육체적으로는 편안한 것이라는 사실. 특히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도 ‘새벽같이 집을 나간다는’ 사실을 자꾸 잊고, 실없고, 무심한듯한 comment를 하던 내가 부끄럽기도 하다.

 일년 열두 달, 매주 ‘레지오 마리애 화요일’이 우리에게는 主日과 더불어  laborious week 의 절정이기에 수요일 아침에는 언제나 조금 늦게 일어나고 싶은 유혹이 오고 ‘감기’와 같은 사유가 생기게 되면 다음날을 ‘반가운’  off-day로 결정을 한다.  그래도 daily morning mass는 우리에게 변함없는 7년 째 전통과  rule 이기에 이것을 거르게 되면 무언가 허전함을 느낀다.  하지만 매일 아침 보는 정다운 regular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것이 우리가 ‘우연히 시작한’ best ever life habit 임을 상기하면 절로 무한한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  거의 두 달 만에 Ozzie[새로니 pet dog]가 우리 집으로 ‘휴가’를 와서 열흘 넘게 머물게 되었다. 거의 14년 동안 우리 가족이었던 가족, Tobey가 작년 여름에 영원히 잠을 든 이후로는 다행히 Ozzie가 가끔씩이지만 거의 정기적으로 나의 공허함을 채워주고 있다. 가을이 되면서 동네를 개와 천천히 걸으며 단풍, 낙엽 등을 감상할 기회가 그리워지곤 했기에 은근히 Ozzie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 집에 pet sitting을 하게 되면서 새로니 는 조금 자유스럽게 되니 얼마서 좋은 일인가?

 

¶  Topless Natalie : 요새 심심할 때면 소일거리로 75+년 전의 LIFE magazine을 본다. 내가 태어나기 전 것이지만 20세기 최대의 사건인 세계 2차 대전을 전후로 한 ‘미국의 눈’에 비친 세계상을 화보 중심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신기하기에 즐겁고 보람된 소일거리로 삼게 되었다. 오늘 우연히 본 것 중에는 topless Natalie (Wood)가 있었다. 비록 6살 짜리 아이의 천진스러운 모습이지만 사진의 주인공이 우리시절의 잘 나가던 여배우 Natalie Wood 인 것, 그것도 상체가 모두 드러난 모습… 이런 사진 배경을 전혀 모르고 인터넷으로 이 모습만을 유포를 하면 요사이 태어난 젊은 아이들 아마도 pedophile로 FBI에 고발이라도 하지 않을까.. 웃음이 난다. 그녀의 부모가 Russia출신이라는 것과 그녀가 매력적인 것 뿐만 아니라 ‘머리가 아주 우수한’ 여배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창 시절에 사고로 익사한 것 등등으로,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난 The CarpentersKaren Carpenter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아~~ 모두 옛 이야기들…

Thanksgiving, no turkey

Thanksgiving SongMary Chapin Carpenter

 

2010년대 마지막 해 2019년의 Thanksgiving season 를 한가하게 보낸다. 오랜 만에 진정한 의미의 휴일 같은 기분이 든다. 거의 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인가…  가족의 진화(아니면 퇴화?) 란 것이 이런 것인가? 자식들이 집을 다 떠나고 둘 만 남은 처지에 하루 종일 아침부터 부엌 근처에서  ‘궁상맞게 지지고 볶고’ 하는 모습이 이제는 조금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거의 ‘의무적, 신앙적’으로 이곳 대다수가 하는 대로 생소하게만 보이는 터키를 굽고 거의 정해진 side dish들을 ‘만들고 먹고, 아이들이 생기면서부터는 그것의 규모도 점점 커지며 조금씩 이곳이 고향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생각으로 이날을 맞곤 했다.

아이들이 다 떠난 후부터는 아이들이 모두 모일 때와 안 모일 때가 아주 다르게 지나치곤 했다. 신앙심이 대거로 나에게 돌아오면서 이 ‘감사의 날’을 나는 조금 더 겸손하게 지나간 일년을 되돌아 보며 감사할 것들의 list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그것이 나의 불찰인가…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니 감사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 문제였다. 어쩌면 그렇게 큰 것, 작은 것들 고맙다는 생각 없이 살았는가.. 물론 후회거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고마운 것에 비하면 사실 ‘새 발의 피’ 격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나, 우리의 삶이 그렇게 변한 것인가, 아니다… 생각하는 관점, 눈의 높이, 삶의 의미에 따라서 이렇게 변한 것이다. 그것을 나는 칠십여의 나이에서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그리운 친구’ 양건주의 말대로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것은 과연 명언중의 명언이었다. 무엇이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었나?  나의 인생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훨씬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다…

올해의 추수 감사절은 11월의 마지막 날에 ‘거의 다 모인 가족들’과 같이 저녁을 나누는 것과 새로니가 정식으로 propose를  받은 것으로 나에게는 충분한 감사절이 되었다. 또한 오늘은 가톨릭 전례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날, 내일은 대림절 Advent의 시작으로 4개의 대림초가 성탄까지 주일마다 하나씩 더 켜지는 희망의 시즌을 기다리게 되었다.

Sinatra moment..

어둡고 싸늘한 가을비가 살짝 물러가며, 며칠 만에 따가운 햇살이 울려 퍼지는 하루를 맞았다. 비록 햇살은 밝고 따뜻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산들바람은 차갑게 느껴지는, 한 마디로 near perfect Fall day에 감사하는 ‘레지오 화요일’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cul-de-sac 입구에서 한창 가을채비를 하던 ‘낙엽송’의 모습이 며칠 만에 완연히 조금은 더 진한 황금색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이런 변화는 앞으로 거의 한 달 이상 지속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뛴다.

예의 레지오 주회합, 아가다 부단장님의 따님이 오늘도 방문자로 합석을 하였다. 성모님의 뜻으로 그 따님에게 레지오 입단의 의향이 생기기를 기도하지만, 어찌 우리 같은 mere mortal 이 성모님의 깊은 뜻을 알겠는가? 단장으로서 조금이라도 레지오의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는 노력은 하지만 글쎄.. 근래에 들어서 ‘눈이 반짝거리는 레지오 단원을 본 기억이 거의 없어서’..

새로 부임하신 이(영석) 요한 신부님, 느낌이 아주 좋고 희망적이다. 게다가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이 신부님, 청년시절 레지오를 하셨다고 해서, 우리는 모처럼 앞으로 4년간 재임기간에 ‘레지오 재건’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현재까지 이 신부님의 ‘인상’, 아주 편하고 ‘대화가 편한’ 목자로 보인다는 주위의 의견에 나도 공감을 한다.  이임하신 이(재욱) 신부님, 신임 신부님이 정착을 하시는 대로 (봉성체)신자가정방문을 주선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와 어느 정도 ‘mutual chemistry’ 에 문제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두 곳에 성체를 모시고 갔다.  그 중에 오늘 오전, doctor visit를 하고 돌아온 C (어거스틴, 아오스딩) 형제, 예상외로 빨리 일정이 끝나서 이발까지 하고 왔는데 아무리 보아도 ‘말기암’ 환자로 보이질 않는, 흡사 바로 퇴근한 회사원 같은 느낌이다. 얼마 전의 ‘시술’ 후에 체중이 더 불었다고.. 어찌된 일인가? 이 형제의 몸은 한마디로 단단한 steel 같은 그런 느낌, 거기에 거의 완전히 ‘절대자’에게 모든 것을 맡긴 상태… 고통 중에서도 깊은 평화 속을 산다고.. 나는 솔직히 이 형제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다른 곳, 거의 한달 만에 방문한 ‘금술 좋은 80대 손(요한) 부부’, 오늘도 도우미가 마련한 점심식사를 기다리며 성체를 모신다. 이렇게 ‘성체신심’을 가지신 분들을 방문하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는 특별한 은총이다.

조금은 늦은 점심, 비록 ‘한 접시 요리’지만 [설거지가 간단해서] 솔직히 맛은 진수성찬에 못지 않을 때가 많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던가… 문제는 피곤한 상태에서 늦은 점심은 거의 확실하게 ‘낮잠’으로 이어지는 것..  물론 ‘늦은 낮잠’은 내가 즐기는 것 중에 하나지만 대부분 30분을 넘지 못하는데 오늘 것은 완전한 예외였다. 2시간이 지난 것이다. 짧아진 해, 벌써 저녁의 어두움이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30분의 낮잠과 오늘의 2시간 낮잠의 ‘후유증’의 차이는 완연하게 달랐다. 한마디로 꿈 속을 걷는 듯한 느낌으로 저녁을 맞이한 것이다.

잠시 후에 나는 (Frank) Sinatra moment를 지나게 되었다. 너무 조용한 순간들이 싫어서 우연히 고른 background song album이 바로 Sinatra Hit Collection, 물론 오래 전에 어디에선가 download한 것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먼지가 쌓였던 Sinatra의 classic hit였는데 이것을 오늘 낮잠 후 멍~한 기분에 ‘계속’ 듣고 있었다.  오래 오래 전, ‘우리들’은 이런 것, ‘꼰대’들이나 술을 마시며 즐기던 것으로 ‘일축’해 버렸던 것인데 오늘 나는 이것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게 가슴 깊은 곳의 무언가를 어루만져주는 것일까. 아~ 나도 이제는 완전히 ‘늙었다’ 라는 조금은 슬프지만, 편하기도 한 느낌 속의 저녁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다… 인생의 황혼기를 간다는 사실은 ‘슬프기도 하면서도, 편하고 포근한 것’이라는 것. 그것이 나의 오늘 Sinatra Moment였다.  무엇이 편하고, 포근한 것인지는 솔직히 나의 짧은 ‘문학적 표현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고 진실이다.

 

 

 

우산위로 차가운 가을비가..

 

¶  결국은 보고야 말았다. 우산위로 내리는 가을비를, 그것도 마음껏.. 마음껏.. 얼마나 오랜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씨의 즐거움인가.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 추억을 연상케 하는 날, 실제로 커다란 우산을 쓰고 가을비를 맞아 보았다. 싸늘하고 어두운 비, 그것도 거의 하루 종일. 지독히도 길었던 올 늦여름, 초가을의 잔인했던 더위와 가뭄도 거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그런 날이었다. 어머니의 손길, Mother Nature의 투명한 자비하심은 역시 기다리는 끈기도 있어야…

지난 며칠 전부터 서서히 떨어지던 새벽기온 ‘덕분’에 그제 아침에 올 들어 첫 furnace fan의 은은한 소음을 듣게 되었고 나의 study에는 space (parabolic radiant) heater까지 꺼내 놓았다.  지난 해 선물로 받아서 쓰고 있는  ecobee Smart Thermostat에는 heat-cool auto (change) mode가 있어서 사실 cool mode (air conditioner)에서 heat mode (furnace)로 일부러 바꿀 필요는 없지만, 나는 이렇게까지 자동적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을/겨울에도 가끔 더운 날이 있는데 그런 때는 창문을 열어 놓으면 되지만 그 때에 air conditioner가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끈질기게 하루도 빠짐없이, 변함없는 ‘마른 뜨거움’를 유지하던 9월 말까지 사실 추위를 막는 옷, 그러니까 ‘춘추복’의 필요성은 거의 제로였는데 그것이 지난 주일부터 서서히 바뀌어서 어느 날 새벽에는 따뜻한 옷을 어둠 속에서 찾으라 애를 먹었다.  아~ 계절의 변화여..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인가… 점점 짧아지는 듯한 ‘남은 인생’이여…

 

¶  오늘은 2년 만에 다시 열린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레지오 간부 피정 (정식명칭: 레지오 평의회 의원 1일 교육)’엘 연숙과 같이 참가하게 되었다. 매년 이때쯤 실시되는 것인데 작년에는 처음 시도된  ‘레지오 토론대회’으로 말미암아 한 해를 거르게 되었다.  싸늘하고 궂은 날씨였지만 비교적 많은 ‘평의원’ (간부들) 참여 하에  오전에는 보좌 신부님(Fr. 김형철 시메온)의 특별강론 , 오후에는 서 토마스 형제의 ‘가톨릭 혼인에 대한 지침’, 꾸리아 단장님의 ‘특별 (호소} 훈화’ 등으로 아주 유익한 토요일을 보냈다.

레지오 활동 (거의 9년째) 초기에는 이런 것이 생소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세월의 연륜으로 아주 편해지고 나름대로의 추억, 생각, 아이디어 등이 머리를 맴돌곤 한다.  이제는 정이 든, 이곳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평의회)가 더 발전해서 더 큰 활동을 하면 하는 바람 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들대로 든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관건은 ‘세대 교체, 신선한 물결’.. 등.. 역시 세월을 얏 잡아 보면 불현듯 많은 것을 놓친다.

꾸리아 단장의 ‘훈화, 호소’, 나는 심각하고 심지어 숙연한 심정으로 공감하며 들었다. 100% 옳을 말씀, 어쩌면 그렇게 ‘순명과 충성’의 정신을 놓은 단원들이 대다수인 느낌이 드는 것일까? 어떻게 이들에게 ‘불을 붙일 수’ 있을까?  역시, 역시, 교육, 재교육… 재재교육..’ 뿐이다.

오늘 ‘피정, 교육program’ 중에는 ‘혼인 조당’에 관한 서(재욱) 토마스 단장의  ‘보고, 강의’가 우리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틀란타 교구청에서 수 개월에 걸쳐 ‘연수’를 마친 후 certificate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회 내에서 생기는 결혼법적인 문제를 상담하는 첫 창구역할을 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결혼성사’가 정말 ‘성사’ 임을 간과하며 살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교회법상에는 ‘이혼’이란 말이 없음을 왜 모르고 살았을까? 나도 최근에서야 이 ‘혼인성사’의 심각성을 실감하고 있는데,  우리 딸들의 결혼문제와 겹쳐서 고민을 안 할 수 없게 되었다. ‘세속적 쓰나미 tsunami’ 의 거대한 물결을 헤지고 나가는 우리 ‘불쌍한 교황님’, 절대로 굴복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이 세속적으로 무너지면 다음에는? 진실은 진실이고 진리는 진리이고 일 더하기 일은 죽어도 이(2) 입니다.

 

¶  오늘 일일 교육피정이 끝나고 점심 식사 때 우연히 오늘 미사, 피정 강론신부, 김 시메온 신부님과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 ‘비교적 젊은’ 경남 산청 출신 보좌신부님, 내가 연숙에게 ‘이 신부님을 보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던 분.  소년처럼 활짝 웃는 모습이 인상적, 얼마 전 마주쳤을 때 ‘불현듯’ 떼이야르 샤르댕 (예수회) 신부님에 대해서 짧은 대화를 했었다. 김 신부님, 샤르댕이 예수회출신임을 알기에 자신을 갖고 물었는데, 역시 잘 알고 있었고 ‘먼 앞날을 내다보는 선구자’라는 사실도 잊지 않고 언급. 그런데 오늘 대화에서 그것을 잊지 않고 언급하시는 것이 아닌가?  기억력인가, 아니면 신자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인가?

예수회의 역사적 ‘진보성, 개방성’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 그런 사실들(예수회원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셨다. ‘진보적 경향’은 요새 항상 아슬아슬한 말, 특히 정치적으로 더욱 그렇다. 한걸음 조금 더 나아가서 ‘신부님의 정치적 성향’을 살짝 듣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가 뻔하지 않던가? 그런 화제를 일부러 피하시는 듯한 모습이 나에게는 커다란 플러스로 여겨졌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윗동네’의 같은 예수회 출신 신부님들의 ‘행태’가 너무나 크게 비교가 됨을 알고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잊었던 느낌, 가을이 다시..

 

¶  어제 저녁에 backyard에 잠깐 나갔을 때, 아주 오랜만에, 피부에 와 닿는 다른 느낌의 공기를 보았다. 무언가 다른 것, 아하… 바로 ‘가을’이 ‘아주’ 멀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특별히 대지가 타는 듯이 ‘마르게’ 더웠던 올해의 여름은 인상적이었지만 추분을 며칠 앞둔 때라서 잊혀진 가을의 모습이 그리운 것이다.

달력상의 가을은 추분에서 시작되고 며칠 남지 않았다. 그때로 낮은 하루하루 짧아지기 시작하며 나와 같은 나이의 인간, 피조물들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깊은 가을’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모든 것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 올해는 어떠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인가 미리부터 궁금하다.

 

¶  진실되고 심각한 의미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절대’ 를 믿는다 함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쉽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일초, 하루, 매년 살아가는 것이 ‘믿으며 사는 것’인가? 어렵게 보이지만, 의외로 쉬운 답을 찾으면,  ‘나의 인생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의 전환을 하는 것이다. Word On FireBishop  Robert Barron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One of the most fundamental statements of faith is this: your life is not about you. Youre not in control. This is not your project. Rather, you are part of Gods great design. To believe this in your bones and act accordingly is to have faith. When we operate out of this transformed vision, amazing things can happen, for we have surrendered to “a power already at work in us that can do infinitely more than we can ask or imagine.” Even a tiny bit of faith makes an extraordinary difference.

– Bishop Robert Barron (a daily gospel reflection)

 

하루하루, 매달, 매년이 그저 지루하게 느껴지고 사는 것 같지 않을 때 이렇게 조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는가…

6월을 맞으며…

 

 

슬그머니 6월을 맞는다. 어제로 가버린 2019년 5월은 사실 온통 ‘어머니’의 모습으로 가득한 ‘제일 좋은 시절’ 이었지만 5월의 마지막 2주간의 ‘한여름 더위’는 기억에 남을 듯하다. 6월의 싱그러움은 뒷마당의 초록색의 향연으로 익히 즐기고 있지만 사실 나에게 이달은 우울한 추억이 있기에 조금은 슬퍼지기도 한다. 작년 6월에 영원히 우리 곁에서 떠나간 ‘나의 아들’ Tobey, 일년의 세월이 조금은 슬픈 기억을 무디게 한 듯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나는 ‘작은 고통’을 느낀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의 6월은 역시 그의 특유의 ‘푸른 여름,  자연의 찬가’를 들려준다. 그는 자연주의자인가, 어떻게 그렇게 주변의 소소한 것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진화하며 살아가는 친구들임을 나이가 들어가며 더욱 실감한다. 특히 birch tree, 버치, 어릴 때 따먹던 ‘뻐찌’열매로 알고 있던 것들과 함께 역시 6월, 초록색의 싱그러움을 예민하게 관찰한 이 6월의 찬가를 안톤 슈낙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들 중에 하나로 꼽았다.

이미 여름 같은 더위에 익숙해졌기에 더위는 그리 두렵지 않지만, 6월의 하루, 6월 25일을 다시 맞으며 나는 6.25 동란을 피해갈 수가 없다. 어떻게 나는 이런 ‘전쟁’의 피해자가 되었는가… 왜 김일성이란 괴물이 나의 시절에 존재했던가… 역사는 역사지만 인과응보적인 종말론으로 나는 조금 위안을 삼는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안톤 슈낙의 6월은..

풋풋한 사랑 체험으로 특허를 내어보라

 

스스로 잊어 버리도록 하라

 

시냇가에 앉아 보자. 될 수 있으면 너도밤나무 숲 가까이에 앉아 보도록 하자.

한 쪽 귀로는 여행길 떠나는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쪽 귀로는 나무 우듬지의 잎사귀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자

그리고는 모든 걸 잊어보도록 해 보자.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 질투, 탐욕, 자만심 결국에는 우리 자신마저도, 사랑과 죽음조차도….

 

조금 있다가 프랑크푸르트 시의 포도농장에서 만든 1953년도 내지는 1954년도 호흐아이머 돔데샤나이 포도주를 차가운 물에서 끄집어내 마셔 보자.

첫 한 모금을 마시기 전에 사랑스런 여름 구름, 시냇물, 숲과 언덕을 둘러보며 우리들의 건강을 축복하며 건배하자.

가까운 시야에 원을 기르며 날아다니는 나비떼, 둥글게 줄지어 피어 있는 꽃들과 골짜기의 풀밭에서 부지런히 건초더미를 뒤집고 있는 자그만 여인네들도 바라보면서…

 

 

버찌씨로 유리창을 깨뜨려 보라

 

텃밭에 있는 따리 모판을 들여다 보자.

거기엔 탐스러운 딸기가 빨갛게 타오르는 숯불처럼 잘 익어가고 있다.

그 자리에서 즉각 딸기로 볼주를 만들어 보라.

우리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모판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포도주를 약간 뿌려보자.

근처에 있는 곤충들이 애타게 볼주를 마시고 싶어 갑자기 몰려오면 가느다란 콩넝쿨대로 쫓아버리면 된다.

 

버찌나무 회초리로는 개구쟁이 사내 아이들이나 개똥지빠귀, 찌르레기들을 쫓아내면 된다.

만일 개구쟁이 사내 아이들이 버찌나무 가까이 접근해 오면 번갯불에 콩 볶듯이 뛰쳐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틀림없이 달아날 거다. 그래도 정말 소용이 없을 수가 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개똥지빠귀 암수가 적이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계속 이쪽을 기웃거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마우지새를 미끼로 고기를 낚는 중국 어부를 흉내내어 몰래 버찌를 따먹는 찌르레기를 괴롭히는 시도를 해 보자.

버찌 나무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전신기둥으로 가 보면, 숱하게 버찌씨가 떨어져 있다.

찌르레기가 주로 모여 있는 버찌나무 아래는 버찌씨로 꽉 덮여 있다. 그 수를 헤아려 본다면 수백 개도 더 될 거다. 그러나 실제로 그 씨의 오분의 일 정도만 다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니 화를 내지 말고 비를 들고 떨어진 씨들을 쓸어 모아서 자루에 넣어 겨울까지 보관해 두었다가, 버찌씨를 먹는 겁많고 부리가 딱딱한 새들의 겨울 먹이용으로 정원길에 뿌려 두면 어떨까.

 

찌르레기들이 과일 서리 수업을 받고 있는 버찌나무에 계속해서 돌을 던져 보자.

정확히 잘 맞는다고 잘난 체 으스대지 말고 차라리 나무 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집의 알록달록한 유리창을 돌을 던져 깨뜨려 보자.

중요한 건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들 때문에 끊임없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는 건데, 찌르레기들은 이런 소음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싫어한다.

다만 자기 자신들이 내는 소음만은 별반 시끄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새들이 읽을 수 있는 글자로 푯말을 세워라

 

만일 정원에 뽕나무가 있으면 인간의 탐욕에 버금갈 정도로 버찌를 먹고 싶어 안달하는 새들을 그런대로 괜찮은 과일 매장으로 유혹해 보자.

그러니까 새들의 나라 말로 작은 푯말에 ‘하늘에 계신 존경하는 새님들에게 전혀 방해 받지 않는 먹이터를 보장해 드립니다!’라고 써서 갖자 붙여 보라.

지빠귀, 녹색 방울새, 도요새들은 종종 이런 꼬임에 쉽사리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찌르레기들은 이런 걸 재빨리 눈치채고 마구 삐삐거린다.

정말로 무언가 항의할 듯이 부리와 꼬리를 흔들면서 요란스레 삐삐거린다.

 

 

개똥벌레로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라

 

밤에 갑자기 몸이 후텁지근해지면 개똥벌레를 잡아서 여자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어 보라.

그리고는 개똥벌레가 요즘 유행하는 장신구 중에서도 ‘최신의 유행’이라고 설득을 해 보라.

다이아몬드보다 더 잘 어울린다고 말이다.

만일 당신의 여자 친구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그걸 믿는다면, 당신은 남은 여름을 함께 지내게 될 기가 막히게 멋진 벗을 찾은 셈이다.

 

그녀와 같이 옛 성터나 유적지를 찾아 다니거나 진한 자줏빛 나무딸기를 따서 손으로 콕 찔러 터뜨려보기도 하고, 고색창연한 물레방아 바퀴가 돌 때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금잔화로 뒤덮인 언덕에 함께 앉아 있어 보면 어떨까.

물이 맑고 차가운 강의 상류 움푹 들어간 웅덩이에서 송어를 살짝 잡아보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발이 예쁜 소녀에게 자전거 타는 모습이 정말 잘 어울릴 거라며 은근히 칭찬을 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풀벌레 오페라에 귀를 기울여라

 

꽃피는 보리수 나무 아래로 가서 풀벌레 오페라단인 ‘찌르르단’과 ‘쓰르람단’의 공연을 들어보자.

먼저 관객이 쇄도해서 놀랄 거고 그 소리의 다양성과 위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될 거다.

높은 음에서 가장 묵직한 저음에 이르기까지…

연한 자줏빛의 사프란 색 먼지가 머리와 피부에 살그머니 내려 앉는다고 해서 불쾌하게 여기지는 마라.

그건 유황가루도 아니고 원자탄의 먼지도 아니며 다만 꽃가루일 뿐이다.

황홀한 기분으로 보리수향을 맡아 보라. 그리고는 왜 이런 대단한 향이 아직도 향수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특허를 내어 보자.

 

전문 음악지에 이 두 풀벌레 오페라단들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쓰려는 헛된 생각은 하지 마라.

이런 오페라의 형식과 내용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 못하며, 그야말로 현대의 음악 발전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풀벌레들은 날아다니기만 할 뿐 하나같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르며, 기사가 나오기 전에 이미 생명이 다했거나 새들의 부리에 찍혀서 일용한 양식이 돼 버렸을지도 모른다.

 

 

풋풋한 사랑 체험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보이는 여성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해보라.

그녀들은 짤막한 인상이나 달콤한 향기를 모으는 게 아니라, 손에 닿을 수 있는 꽃들을 모두 따버리거나, 11월에 내릴 비와 안개, 겨울에 대해 생각하거나 기관지에 담이 차지나 않을지 독감에 걸리지나 않을지 염려한다.

깜짝 놀랄 일이 있었으면 곧바로 휴가를 내어라. 가능하다면 연장을 해서 초가을까지 휴식을 취해 보는 게 어떨까.

휴가일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고 해서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은은한 차의 향, 찻물 끓일 때 나는 증기, 소금 결정체, 알프스의 들장미, 춤 출 때의 즐거운 기분, 풋풋한 사랑 체험을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내면 깊숙이 추억을 간직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5월에는 – 안톤 슈낙

은하수 길가에 졸고 있는 칠현금 별자리를 보라

 

 

ANTON SCHNACK

ANWEISUNGEN ZUM GLUCKLICHSEIN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딸기에 술을 부어 5월을 마시게 하라

 

조금씩 커져가며 서서히 붉어지고 있는 어린 딸기에 이제 물을 충분히 부어 주어라.

하지만 물뿌리개나 분무 호스로 물을 주는 게 아니라, 술통이나 술병에서 빼낸 우아한 ‘라인 포도주’를 부어라.

이런 식으로 하면 딸기가 점점 5월에 마시는 볼주와 비슷하게 되고, 동시에 딸기로 포도송이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저녁 이슬의 언덕’이라 말해보라

 

화단이나 집 가까이 있는 들판에 가 보라. 지난 밤에 누군가 파 뒤집어놓은 흙무더기를 보게 된다. 그러나 화단이나 들판을 파 뒤집어 놓은 두더지를 때려 잡겠다고 끝이 뾰족한 갈퀴나 괭이를 들고 가거나 끔찍한 흉기를 들고 가지는 마라.

차라리 두더지가 파 뒤집어 놓은 흙무더기마다 각기 독특한 명칭과 높이, 그 모양새에 대한 느낌을 글로 적어 놓은 카드를 가져다 놓아 보자.

제일 예쁜 언덕에는 ‘꽃요정의 쿠션’이라고 이름 짓고, 두 번째로 예쁜 언덕에는 ‘저녁 이슬의 언덕’이나 ‘우울한 사람들을 위한 휴식처’로 해 두고, 제 번째나 네 번째 언덕에는 ‘마거리트의 무도장 舞蹈場’이라는 카드를 놓아 보라.

 

두더지가 파놓은 그 자그만 언덕과 협곡 사이에는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살고 있다.

땅 속의 보배를 지키는 정령, 달빛 요정, 꽃의 요정, 비의 여신, 물의 요정 등이 살고 있는데 그것들이 조용히 열중하고 있는 신비에 가득 찬 일들을 살펴보라.

 

두려워하거나 불안에 떨지 말고 발 앞에 놓여 있는 동화집을 집어 보라.

그 속에 아주 자그만 황금잔이 들어 있거나 콩알 만한 진주나 이슬방울 크기에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그러나 먼 훗날 우리들 주머니 속에 숨겨 두었던 보석이나 보물들은 어쨌든 이 우주의 먼지나 무 無 로 완전히 분해돼 흩어져 버릴 것이다.

 

 

밤꽃을 촛불 대신 밝혀 보아라

 

밤나무에 꽃 촛불마냥 피어 있는 꽃 가지를 꺾어 집으로 가져와서 조명기구로 써 보아라. 하얀꽃은 거실에 두고, 불고 노란색이 섞여서 핀 꽃은 어린 소녀의 방에다, 빨간꽃은 침실에 두어 보자.

이런 꽃들을 조명으로 쓰면 황혼이 질 무렵이나 고독과 사색의 시간, 정겨운 대화를 나눌 때나 더듬거리며 사랑을 고백할 때, 연인들이 황홀하게 밀어를 속삭일 때에 온화하고 사랑스런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밤꽃을 촛불로 쓰면 환하게 비치지도 않고, 불을 켤 필요도 없으며 그렇다고 불이 꺼질 일도 없다. 그리고 촛농이 떨어질 일도 없고 불이 금방 꺼지거나 뜨겁게 달아 올라 위험할 일도 없으며, 고장이 나서 수선할 필요도 없고, 으스러지지도 않으며, 탄 자국이나 깨진 유리조각을 남기지도 않는다.

다만 약간 퀴퀴한 향이나 생기 없이 쭈글쭈글해진 꽃과 시들어버린 줄기, 가끔씩은 뻣뻣하게 말라버린 뒝벌 한 마리가 꽃 속이나 꽃 받침 속에 아무도 모르게 죽어서 잠들어 있을 때가 있을 뿐이다.

 

이제 새들이 많이 돌아왔으니 새를 잡으러 가보는 게 어떨까. 그러나 진짜 새를 잡으러 가는 게 아니라, 사실은 새 모양으로 된 연한 송아지 고기 요리 (Kalbsv gerl)나 참새처럼 짤막하게 생긴 국수(Sp tzle)를 먹으로 가자는 뜻이다.

이 송아지 고기 요리는 고기를 자그맣게 잘라서 얇게 말은 것을 말하는데 대체로 남부 독일 식당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손가락 크기만한 송아지 고기 토막에 베이컨과 계란, 다진 고기를 얹은 다음 말아서 구운 뒤에 식탁에 내놓게 된다.

이 송아지 요리는 실로 묶어서 만들기 때문에 식사 중에 이상한 실이 있더라도 불쾌하게 여기지는 말라. 다만 이 실을 먹지 않도록 주의하라.

 

‘참새 모양의 국수’와 송아지 고기로 만든 이 독특한 ‘참새’는 남부 독일 지역 중에서도 특히 바덴 지역이나 뷰어텐베르크 지역에서 잡을 수 있다.

특히 점심 시간에 새 모양의 송아지 고기 요리를 먹기 위해 이 식당 저 식당을 다녀 보라.

이 ‘참새 모양의 국수요리’를 밀가루, 계란, 소금을 물로 반죽해 만든다는 걸 듣고 놀라지는 마라. 제일 맛있는 ‘새떼’와 참새 모양의 ‘국수떼’를 골라라.

만일 ‘새떼’의 빛깔이 회색이고 끈적끈적하게 보이거든 퇴짜를 놓아 무시를 해 보리고, 자갈처럼 딱딱한 국수는 접시 위에 내동댕이쳐 버려라.

이따위 저질의 새 사냥터는 얼른 떠나는 게 좋다.

 

 

5월의 무당벌레를 회의에 초대하라

 

먼저 무당벌레 회의를 개최해 보자.

숫자를 정확하게 헤아리는 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두 번 세거나 혼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만년필이나 사인펜으로 무당벌레의 등에 각각 점을 찍어 보자.

점을 다 찍은 후에, 찌르레기와 참새용 고급 식품 시장에 공급 부족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당벌레를 다시 놓아주어 보자.

 

곧 이어서 무당벌레 앙케이트를 실시해 보라.

왜 무당벌레가 아직도 보기 싫은 갈색 옷을 입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그리고 이 갈색이 무당벌레 나라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알아보자.

혹시 무당벌레의 아랫부분 색깔이 지하 저항 운동 단체의 표시를 뜻하는 건 아닌지도 말아보고, 또 무당벌레가 어떤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지, 혹은 그들이 세습적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등판이 붉은 무당벌레는 모조리 왕실 가족이 아닌지, 아니면 좌익 국회의원이 아닌지 알아보는 건 어떨까.

 

지성적인 무당벌레는 위로 곱게 뻗은 촉수로 모든 걸 인식한다.

무당벌레 극장, 무당벌레 서정시 모임, 무당벌레 출생제한 등에 관한 회의에 이들을 초대해 보자.

이 백인종으로부터 추방당한 갈색 피부를 지닌 민족의 노래와 시문학을 테이프나 CD에 녹음을 해 보자.

가을 저녁이나 겨울 저녁, 노을이 질 때, 이 묵직하고도 한량없이 깊은 저음을 들으면서 그렇게도 멋졌던 지난 시절 혹은 청소년기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피리새의 지저귐을 조심하라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판이나 언덕에 가까이 가지 마라.

구두창이나 옷에 불이 붙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절대로 풀밭에 눕지를 마라. 민들레에게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물론 피리새가 지저귈 때도 조심을 해야 한다! 만일 너도밤나무나 밤나무, 사과나무 가지들이 늘어져 있다가 부러져 아래로 떨어지면 귀를 다쳐 청각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나무 아래 있으려면 탈지면으로 귀를 틀어 막는 것이 좋다.

 

아름다운 오월과 더불어 은밀하게 멋진 사랑을 시작하도록 갈망해 보라.

포도밭 가의 언덕에 모닥불을 지피거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담배를 피워 연기를 내뿜거나 땔나무를 지펴 연기를 피워서 그 동안 몹시 얼어 붙은 가슴과 차디찬 피부에 있었던 냉기를 몰아내고, 따뜻한 온기를 불어 넣어 보자.

젊은 아가씨와 춤을 추러 바에 가거나 디스코 장에 가든가 혹은 독한 그로크주를 마시러 가거나 갖가지 뜨거운 펀치주를 마시러 가보라.

 

그러면서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든지, 아탈리아의 리도에서 혹은 청보라빛 리비에라 해안에서 해수욕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칸느나 모나코로 여행을 가서 영화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을 거고 노르웨이의 작곡가 신딩의 ‘봄의 도취’를 들으면서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을 녹일 수도 있을 거다.

담비나 밍크 재킷을 꽁꽁 얼어붙은 어깨에 걸치고, 뻣뻣해진 손가락에는 스웨덴 제 양모 장갑을 끼고, 굳어 버린 발에는 양털이 들어있는 부츠를 신어 보자.

그러데 이런 행위들은 아직 나이 어린 소녀가 꽃이 만발하고 나뭇잎이 온통 초록으로 물든 자연으로 오월의 산책을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릴 때, 그 싱숭생숭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나 혹은 갑자기 끔찍한 추위가 몰아 닥쳐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여겨질 때에 필요한 생각들이다.

 

 

은하수를 향해 떠나가라

 

북동쪽 하늘에 펼쳐진, 음악 연주회를 개최할 ‘칠현금 별자리’에 참가 지원서를 바람에 실려 띄워 보내 보라.

손풍금을 연주해보는 건 어떨까.

천상의 악기를 켜기 위해 은하수 길가에 있는 칠현금 별자리를 바라보며 떠나보자.

어떤 비평가도 비난하지 못하는, 이 우주 공간에 있는 하늘의 음악을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해 보는 건 어떨까.

천상 오페라단의 전주곡, 별들의 교향곡, 달빛 소나타, 태양 찬가, 나그네 행진곡, 밀려가는 뭉게 구름의 축세 노래, 추방당한 천사와 가련한 영혼의 슬픈 멜로디, 구름배와 우박이 내리는 민요조의 멜로디, 비너스 소녀의 사랑이 담긴 대중가요 등을 연주해 보자.

 

연주회를 마친 후, 모자를 손에 들고 별마을 주민과 은하수 마을 주민이 살고 있는 뒤뜰에 모여보자.

사례금으로 한 줄기 햇빛이나, 무지개  빛 대리석, 달빛 금화나 혜성의 반짝임, 운석 조각, 유성을 받을지도 모른다.

딱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가 이런 공상가나 선의의 거짓말쟁이에게 제대로 대가를 치러 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