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서울

2년 전 아래층으로 ‘이사’를 내려온 나의 office에 있는 bookshelf 에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책들을 섞는 중에 눈에 띈 책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읽다 말다 하다가 놓은 책, 동아일보사 간행, <인촌 김성수’> 란 책이었다.  김성수, 동아일보사 모두 나와는 자연스레 친근한 이름들이다.

1960년대 나의 모교였던 서울 중앙학교(중-고등)를 ‘인수, 경영’했던 ‘만석군 부호의 아들’이었던 인촌 김성수, 귀공자 답지 않게  Bill Gates같이 ‘돈을 현명하게 쓸 줄’  알았고, 당시로서는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말년에 정치계에서는 ‘이승만의 독재’를 정말 싫어했고, 아마도 그로 인해 화병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 계동 1번지에 중앙학교가 위치한 사연을 읽게 되었다.  1960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코흘리개 우리들에게 학교는 ‘민족학교의 역사’를 정식으로 가르쳤었다. 무언가 민족적 사립학교의 전통을 남기려는 것을 우리들도 숙연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남는다.

 

 

책,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중에서

 

중앙학교 교장 재직 당시의 인촌 김성수

 

새 요람,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조선의 새 인맥(人脈)

새로운 교사가 들어설 땅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인촌 仁村 은 1917년 6월, 계동 1번지인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자리를 터로 정하고 4천 3백 평을 사들였다. 당시 이곳은 북악산 줄기를 뒤로 한 계곡으로 울창한 송림만 들어찬 산골짜기였다.  민가도 없었고, 다만 학교 터 뒤편 숲 속에 당시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훈련소) 교장이었던 노백린(盧伯麟; 후에 上海 臨政 軍務總長 역임)  참령(參領)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촌이 이 땅을 사들이려 하자  고하 古下 (송진우) 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숯막 짓고 참숯 구워 팔려나?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어 어떡하겠다는 거여?”

“어째 그렇게 자넨 발등만 보고 사는가?. 자, 보라고! 앞으로는 서울 장안이 한 눈에 굽어 보이고 뒤에는 북악의 줄기가 아닌가! 그 정기를 받아 청년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배움의 터로서는 이만한 명당이 없네. 얼마나 시원한가, 젊은이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만 허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이 보게, 큰 길에서 너무나 들어온 골짜기야, 학생들 통학도 생각해야지?”

“지금은 좀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십 년만 지나보게. 서울은 지금 새 시대를 맞이하여 커지고 있어. 모르기는 해도 십 년 뒤면 학교 주변이 주택들로 차게 될걸?”

멀리 앞을 내다보는 인촌의 안목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연 십 년이 채 안되어 개발이 되고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고하는 인촌의 선견지명에 혀를 찼다고 한다. 땅을 사들이자 즉시 새 교사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인촌은 공사장에 나가 감독 뿐만 아니라 일꾼들과 함께 흙을 고르며 땀을 흘렸다. 교장이 솔선수범하니 고하를 비롯한 교사들까지 수업이 끝나면 함께 땀을 흘렸다. 스승들이 일을 하자 학생들도 부지런히 삽질을 하고 돌을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 보람이 있어 나무만 울창하던 산골짜기에 건평 2백여 평의 붉은 2층 건물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장안(長安)의 이목이 쏠리고 김성수라는 이름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붉은 벽돌 2층의 이런 신식 건물은 그때까지만 해도 장안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신식 교사인 데다가 그것을 짓고 있는 인물이 같은 동포인 김성수라는데 화제가 됐던 것이다.

뒷날 동아일보 사옥을 신축할 때나 보성전문 교사를 신축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촌은 틈만 나면 공사장에 나가 일꾼과 함께 살았다. 자재에서부터 설계, 혹은 대목(大木)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건축을 공부해서가 아니고 공사장에 가서 몇 번만 보면 다 터득하여 현장 감리(監理)들이나 목수들의 탄복했다고 한다.

어쨌든 장안의 화제였던 계동의 중앙학교 신교사는 5개월만에 그 웅자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준공을 끝내고 12월 1일에  화동(花洞) 구교사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동 1번지에 세워진 중앙학교 새 교사 낙성식, 1917년

 

폐교 직전의 중앙학교를 인촌이 인수하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의 조선인 사회 뿐이 아니었다. 총독부 관리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돈 있으면 금광이나 하라며 백산학교(白山學校) 설립계획을 까뭉개고 돌려보낸 학무국장 <세끼야> (關屋)는 조선인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터라 무명청년 김성수가 말썽 많고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던 중앙학교를 인수했지만 결과는 뻔한 것으로 추측했다.  시골 부자 아들이라니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로 얼마 안 가서 재산 다 날리고 주저 앉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전연 예상 밖이었다. 붉은 2층 벽돌의 신식 교사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80여명 정도였던 학생이 이제는 3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교사들 역시 대학을 나온 조선인들이 거의 전부 일 만큼 탄탄하게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11월 하순, 어느 날 <세끼야>는 비서가 전해준 초청장을 받아 들고 얼굴이 이지러졌다.

“뭐라구? 중앙학교 신교사 낙성식? 그 낙성식에 오라구? 으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무시했던 무명청년은 새 교사를 당당하게 지어 놓고 그 잔치마당에 자신을 초청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촌을 김군(金君)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학교설립을 신청했을 때는 부모의 승낙을 얻었느냐며 어린애 취급을 하고 얕보던 <세끼야>도 낙성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원파공과 지산공을 상석에 모시고 낙성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조선인의 힘으로 만들어진 학교였기 때문에 장안의 시민들도 구름처럼 모였다. 학무국장 <세끼야>는 금줄이 번쩍이는 제복에 긴 칼을 늘어뜨리고 식장에 나타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긴센세이> (김선생)라 존대하며 몇 번이나 장한 일을 했다고 치켜 세우고, 조선인의 힘으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게 된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는 천황폐하의 홍은(鴻恩) 때문이라며 판에 박은 공치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총독부 관리들이 인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조선의 젊은 민족지도자로 지목하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촌은 어진 성품과 큰 도량을 지녔기 때문이었는지 젊어서부터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떠날 줄을 몰랐다.

인덕(인덕)을 타고남도 하늘의 도움이다. 인촌은 늘 인덕이 있었다. 당시 그의 주위에도 제제다사(濟濟多士), 많은 인재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중앙학교와 인연이 깊었던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대가 이외에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송진우, 최두선, 현상윤, 이강현 등과 국내에서 명성이 높던 변영태, 유경상, 유태노, 조철호, 고희동, 나원정, 박해돈 등 신진기예들이 차례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 총독부로 볼 때 인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학교의 인맥과 존재는 조선 사회에서 무시 못할 민족 지도자 그룹으로 비치게 되었다.

 

 

무명 교복과 교지(敎旨)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 의 3대 교훈은 인촌 스스로 정한 것이며 인촌 스스로 정성스럽게 써서 남긴 진적(眞迹)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세 가지 중앙의 정신: 웅원, 용견, 성신

 

이 중앙학교의 교지는 인촌의 교육이념을 집약하는 동시에 그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1자의 수정도 없이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인촌의 교육관은 백년대계의 큰 안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앙학교를 인수한 후 인촌은 특히 학생들의 옷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하찮은 걸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시오? 다른 학교와 학숙의 학생들처럼 그냥 입히면 되는 거지?”

보다 못한 안재홍이 그렇게 말하자 인촌은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니오, 학교 모자와 학교 옷은 바로 그 학교의 얼굴이며 상징입니다. 관립 일반학교마냥 일제(日製) 광목으로 된 옷을 입히고 그들의 씌운 모자를 그대로 씌울 수는 없는 일이요. 조선학생은 조선학생 티가 나야지요.”

고심하던 인촌은 검은 천을 댄 교모(校帽)에 무명으로 지은 교복을 입히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질 좋고 맵시 나는 일제 광목을 두고 왜 하필이면 손으로 짠 그 투박한 무명베로 교복을 하느냐며 못 마땅해 했다. 광목(廣木)은 개화 이후 일본 상인들이 들고 들어와 가장 재미를 본 생필품이었고 널리 판을 치고 있었다.

“값 싸고 질긴 우리 전래의 무명베가 있는데 왜 비싼 일제 광목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우리 것을 쓰지 않으면 누가 쓴단 말이오?”

인촌은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찍부터 ‘산업장려’나 ‘국산품 애용’을 구국운동의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찮은 교복에까지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자기학교 학생들 한테 만이라도 그러한 민족의 얼을 심어주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참성단(塹星壇) 수학여행

 

당시 인촌 밑에서 중앙학교를 거쳐 나온 인사들의 회고만 보더라도 인촌이 평소 얼마만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민족사상을 불어 넣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유홍 柳鸿  회고

나는 1916년 그러니까 인촌 선생께서 학교를 인수하신 그 다음 해에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첫 소풍을 강화도로 갔었는데 그때의 일은 오래도록 나에게 어떤 충격처럼 남아 있었다. 전교생이 함께 갔었던 것 같다.

유근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중에는 물론 인촌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 단군 성터에서 단군설화를 얘기하면서 목이 메었으며, 인촌 선생님께서도 소리 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학생들도 그제서야 나룻배까지 빌어 타고 강화도에 소풍을 온 까닭을 깨닫고는 모두 함께 울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 바로 옆에서 단정한 자세로 눈물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리시던 인촌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도성 愼道晟 회고

중학교 입학 당시(1930년) 나는 제일고보(第一高普)와 중앙학교 두 군데 시험을 쳤는데 두 군데 다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상식은 당연히 제일고보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학교를 가느냐의 선택에 있어 어리고 철이 없으므로 선친께 의논을 드렸더니 중앙학교를 택하라 하셨다. 경남 거창에서는 우리 집이 대지주에 속했으므로 인촌의 경방, 동아일보 설립할 때 주식투자 권유를 받아 우리 선친과 인촌은 교분이 있었다. 투자는 안 하신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인촌을 퍽 존경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중앙학교를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를 들어가 보니까 역시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었고, 김성수 선생께서 교장을 하시며 수업에 들어 오시기도 했다. 그것도 좋았지만 조철호, 박용희 선생 등으로부터 훈련을 단단히 받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권덕규(역사), 문일평(한국사; 동양사), 이윤제(한글) 선생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일제하에서 배우기 힘든 보통의 교양교육을 다 배웠다. 학교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인촌 선생은 수신시간에 교재를 뒤로 제쳐놓고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은근히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곤 했다. 예를 들면 영국에 가서 하숙을 하는데 한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불을 안 끄고 나왔더니 주인이 잔소리를 하더라. 전력을 낭비하지 않고 물자를 절약하며 잘 살면서도 검약하더라. 우리는 전등불도 안 끄고 잠을 자고 그러는데 그래서는 안 되다고 충고를 하시기도 했다. 한번은 외국을 가시는데 여권에 적어야 하는 국적이 남의 나라 이름으로 되어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실감했었다. 배 안에서 식사를 할 때 식탁에 승객들의 국기를 꽂는데 그 국기 가운데 태극기가 없었다는 울분을 얘기하셨다.

 

3.1운동의 실제적 모의 장소: 중앙학교 숙직실

 

그리고 3.1운동 때의 말씀도 하셨는데 중앙학교에서 모의하던 얘기를 하셨다. “3.1운동이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줄만 알고 있지? 사실은 중앙학교에서 시작된 거야. 계획도 세우고 유인물도 만들고 그랬는데 바로 그거 한 집이 바로 저 집이야!” 하고 우리학교 숙직실을 가리켜 주셨다. 중앙학교가 민족주의 본거지임을 일깨워 주셨고 우리는 자부심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그 후에도 남아서 일제 말기에 학생의 몸으로 항일투쟁은 못 했지만 은근히 ‘일제에 협력해서는 안 된다’ ,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그런데 끌려가서는 절대 안 된다’ 는 것은 확고했다. 해방될 때가지 일제가 강요하던 국민복은 한번도 입지 않았고 ‘전투모’와 ‘각반’도 한 번도 매보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촌 선생의 교육 영향이었다.

 

 

김승태 金昇泰 회고

그때 중앙학교는 마치 기사(기사)를 양성하는 도장(도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또한 그 학교는 3.1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6.10만세 사건의 중추적 역할도 담당했다. 이것이 모두가 선생께서 웅원(雄遠)한 포부와 용견(勇堅)한 의지, 성실(誠實)한 행동을 가르치신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학교는 도장과 같았고, 배우는 우리는 기사와 같은 흥분 속에서 지냈다. 예를 들면 동지섣달 눈이 쌓였어도 팬츠 하나만 입고 운동장을 달리게 했다. 그것은 독립정신을 갖게 하기 위한 단면이었으며, 정신과 육체의 극기(극기) 훈련이기도 했다.

 

 

채문식 蔡汶植 회고

나의 인생은 중앙학교 5년 동안 교육을 받을 때 인촌의 정신, 인촌의 손길에 의해서 키워졌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문경(聞慶)의 산골에서 태어나 중앙고보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1930년대 말 일제는 국어상용 이라 하여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쓰게 했다. 중앙학교에서 가까운 어떤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한국인 교사가 학생 하나를 정학 시켰다. 그래서 부모가 찾아 왔는데 그 아버지는 일본 말을 모르는 시골 노인이었다. 한국인 담임선생은 우리말을 쓰지 않기 위해 통역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처벌을 받게 된 것은 점심으로 빵을 하나씩 나눠 주었는데 ‘아, 빵이다!’ 하고 외쳤는데 그 말이 한국말이라 해서 정학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중앙고보만은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쓰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게 중앙학교 선생은 1년은 학교에 계시고 1년은 감옥에 가 계시는 게 보통이었다. 중앙학교에 입학하면서 매를 많이 맞았다. 입학 첫 날부터 영어시간에는 회초리 하나씩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오라는데 집에 갈 때는 그게 다 꺾여질 지경이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선생님은 우리 말로 ‘채문식!’ 하고 부른다. 그때 국민학교에서는 일본어만 배웠으므로 부지불식간에 ‘하이!’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무조건 앞으로 나오라 해서는 회초리로 때렸는데 왜 맞는지 몰랐다. 선생님이 매를 들고 또 ‘채문식!’ 하면 ‘하이!’ 하게 되고 ‘하이!’ 하면 도 맞는 것이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자기가 가져간 회초리가 다 부러질 때 쯤 되면 뭔가 가슴에 뿌듯한 게 있어서 ‘예’ 하고 우리말로 대답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촌 선생이 아니면 못할 것이었다. 인촌을 보고 더러 총을 들고 독립운동도 안 했고, 외국에 가서 항일운동도 안 하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대의 한국 땅에서 인촌이 아니고 누가 그같이 민족의식이 맥박 치는 그런 학교를 경영했던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선생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었고 그 같은 한국 사람을 기르려고 무척도 애를 썼다. 그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1학년에서 5학년이 될 때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쯤은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위대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

 

 

퇴교생(退校生)이 모이는 곳

 

 인촌은 제자들에게 민족혼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일인교사(일인교사)의 배척운동이나 저항운동을 하기 위해 스트라익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한 학생들에게 항상 중앙학교는 문을 열고 너그럽게 받아 들였던 것이다. 당시 인촌이 중앙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보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일인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인촌은 이때 처벌 받은 학생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서항석 徐恒錫 회고

나는 1918년에 중앙학교를 졸업했는데 따지고 보면 1년도 못 다니고 졸업한 셈이다. 나는 보성학교를 다니다가 퇴학을 당하여 중앙학교로 편입학하게 됐던 것이다. 인촌 선생의 항일적이며 애국적인 용단을 잊을 수가 없다. 보성학교 2학년에서 문제가 생겼다. 초조시간이 되어 모두 웃옷을 벗고 나가게 되었다. 물론 교실에는 당번이 지키게 돼 있었다. 그런데 벗어 두었던 옷 속에서 시계가 없어졌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여러 방법으로 시계를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마침 보성학교에는 <고마쯔자끼>라고 하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 일본선생이 종로 경찰서에 연락을 했다. 그래서 형사가 와가지고는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했다. 우리는 4학년으로 최고 학년이었는데 이 같은 사태에 크게 분개했다. 학교에서 도난사고가 생겼다면 선생들이 자기네 잘못을 느끼고 쉬쉬하며 잡을 일이지 그것을 경찰을 불러 몸수색을 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여 일어섰던 것이다. 2, 3, 4학년의 전 학생이 들고 일어났다. 교장은 최린 선생이었는데 전교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 졌다. 더 이상 사태가 키질 것 같아 2, 3 학년들을 누르고 우리 4학년 학생 8명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교장선생께 자퇴서를 냈다. 교장선생은 제발 이러지 말라달라고 하셨지만 우리의 기세는 당당했다. 학교측에서는 퇴학을 명함 이라 내붙이게 되었다. 최린 선생은 안 되겠던지 인촌 선생에게 전화를 거셨다.

“요새 우리학교 사건 생긴거 하시지요? 정말 진퇴유곡입니다. 총독부에서 퇴학을 시키라 하니 그럴 수 밖에 없어 퇴학을 시켰소만 정말 우수한 애들인데 버리자니 가슴이 아프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 애들의 장래를 막아 놓을 수는 없지 않소?”

“좋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싹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퇴교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보내 주십시오. 소생이 맡아 가르치겠습니다.”

그래서 중앙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후에 생각하니 인촌 선생의 애국자로서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의 학무국장 세끼야 는 화가 나서 인촌을 소환했다.

“김선생, 이번 일은 좀 경솔했던 거 아니오?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소. 불온 학생 여덟 명은 받아 들이지 말구 당장 내쫓으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만 가령 일본인 학교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경찰이 학교 구내에 들어가사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스승을 배척했다면 당연히 교칙에 따라 퇴학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그것으로 벌은 충분히 받은 거 아닙니까? 배우는 학생에게 퇴학 이상의 중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벌을 받은 학생이 다른 학교에 가는 것까지 총독부가 나서서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교육적 견지에서 하는 처벌이 아니라 어떤 민족적 견지에서 하는 보복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인촌의 말을 들은 세끼야 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자기 앞에 와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 할 소리를 하는 조선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총독부 관리라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사리를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김선생의 체면을 봐서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이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우리 학무국 과 상의해서 처리하시오.”

그것은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총독 정치하에 있어서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 사학(私學)의 문을 닫게 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인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민족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뻔해 보이지만 트집을 잡으려 해도 구실을 주지 않는 인촌이야 말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다. 친일인사(親日人士)로 만들려고 유혹도 해 보고 구실을 붙여 위협도 해 보았지만 언제나 그는 정정당당했다. 그러한 편입학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게 아니고 또 있었다.

 

 

정문기 鄭文基 회고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성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신학교는 미국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가 세운 기독교계 학교였다. 4학년에 진급하자 학교에서 스트라익이 일어났다. 나는 주동 학생으로 몰려 퇴학을 당했고 중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전부터 사실은 인촌선생 밑에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신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쫓겨난 학생은 1, 2, 3, 4 학년 합쳐서 수십 명에 이르렀다. 중앙학교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 주었던 것이다. 이젠 끝장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촌 선생이 용단을 내려 받아 주시니 우리들의 사기는 충천할 뿐이었다. 당시 경신학교 교장은 미국인 선교사였는데 화가 났던지 전화로 인촌 선생께 따졌다고 한다.

“이거 보시오, 김성수 선생! 선생께서 그렇게 분별 없으신 교장이신 줄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같은 교육자끼리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처벌한 학생들입니다. 잘못해서 처벌한 학생들이라 그겁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을 중앙학교에서 그냥 받아주면 우린 뭐가 되지요? 학생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처벌된 학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오라고 한 일 없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찾아와서 저희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물론 잘못 해서 벌을 받은 것이니 반성을 하고 다시 돌아가 공부하라고 엄하게 꾸짖었소만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 중에서 1, 2, 3학년 학생들은 나의 설득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4학년들은 누구도 못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4학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볼 테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인촌 선생은 결국 4학년 학생만 중앙학교에 남게 하고 그 이하 하급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셨다. 나는 공부는 좀 소홀히 한 편이지만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를 좋아했다. 동급생 중 일석(일석: 이희승)은 모범적인 노력가였고 보성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중앙학교로 온 서항석은 머리가 우수하고 작문을 잘 했다. 둘이서 늘 1, 2등을 다투었다. 인촌 선생은 은근히 경쟁심을 고취했는데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셨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든다시며 늘 체력단련을 권하셨다. 일본인과 겨루려면 머리도 우수해야지만 몸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건강을 겸했다고 늘 사랑해 주셨다. 한번은 계동 신교사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걸 들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도 경쟁이니 두각을 내려는 것은 인지본능이며 두각을 쉽게 내는 방법을 알켜 줄까? 남들이 모두 몰리는 유행학과를 전공허지 말아야 돼. 진리탐구를 하는 학문은 어떤 학문이든 똑 같은 벱이여. 지금의 유행 학과가 후엔 무실해지고 지금 유행하지 않는 학과가 인기를 얻을 지 모르는 일이거든? 학문에는 우열이 없느니께 남이 않는 것을 해보라 이말이여”

나는 그 말씀을 명심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 <송산고>(松山高)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동경제대 수산과에 시험을 치뤄 합격을 했다. 그때 수산과를 택한 것은 인촌 선생의 영향이었다. 그때는 문과를 해야 대학생인 줄 알았지 수산학을 한다는 것은 좀 엉뚱한 것이었다.

 

 

韓紙 한지에 싸 준 인절미

중앙학교 교장 당시의 인촌이 우리 민족정신과 기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증명해 준다. 일제는 한반도 강점 후 구정(舊正)인 <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저희들의 명절인 신정(新正)설을 쇠게 했다. 이른바 <양력설> <일본설>을 쇠게 한 것이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총독부에서는 신년 하례식을 하고 천황의 하사품이라 하여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인 국화꽃 무늬가 든 이른바 ‘모찌’ (흰 찹쌀떡)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아직 소년들이라 그 떡 받아 먹는 것을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중앙학교만은 그와 같은 ‘모찌’를 주지 않고 해마다 신년 초하루가 되면 콩가루 고물 묻힌 인절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촌 댁에서 직접 떡을 하여 그것을 한지(한지)에 싸서 나눠주는 것이었다. 조선학생이 정월 초하룻날부터 나라 잃은 것만도 서러운 데 일본 떡을, 더구나 일본 왕실의 문장이 찍힌 ‘모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철 없는 학생들은 집에서 먹어보지 않은 그 일본 떡이 먹고 싶어 불평하는 측이 있었지만 인촌은 씁쓸하게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명절이면 집에서 먹는 그 흔한 인절미, 잔치 때면 흔하게 먹는 인절미라고 그러는 지는 모르겄다만 너희들도 학교를 나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우리 한지에 인절미를 싸서 주는지 그 뜻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오늘 YouTube에서 뜻밖의 email message 받았다.  7년 전쯤에 내가 만들어 ‘올려놓은, upload’ music video 성재희씨가 1965년에 취입한 노래 ‘보슬비 오는 거리‘ 가 1 million hits (백만 번 보았다는 뜻)를 했다는 사실과 함께 ‘축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의아했는데, 꽤 오래 전의 일이라 그런 것이다. 한창 youtube 에서 지나간 추억의 노래들을 듣던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에 나도 한번 무언가 남겨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요새는 웬만한 video들,  viral 하다고 불리는 것들 며칠 사이에 백만 번 hit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되었기에 7년 만에 백만 번이라고 하면 우습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놀랍기만 한데 왜 그럴까? 백만이란 숫자에 무슨 magic 이라도 있나 아니면 그저 꽤 많은 중년, 노년의 대한민국 출신의 사람들이 당시를 추억하며 보았다는 사실이 의아한 것인지.. 솔직히 덤덤한 심정이다. 하지만 ‘추억의 마술’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 ‘보슬비 오는 거리’를 내가 개인적으로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낄 정도로 좋아하는 지 생각을 해 보면 크게 특기할만한 것이 없다. 그저 그 당시, 1965년 말 서울 남영동에서 살던 때의 순진했던 기억들과 함께 중앙고 3학년으로 막바지 대학 입시공부에 열중하면 들었던 그 추억이 전부다. 그것이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며, 은은한 저음과 매력적인 자태로 보슬비의 추억을 달랬던 성재희씨의 모습이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나도 모른다.

필사1로 읽는 책 중에 노장여류화가 천경자 화백의 ‘사람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란 제목의 수필집이 있다.  소싯적에는 이분의 책은 물론이고,  이분 자체도 잘 몰랐고 관심 밖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림자체는 내가 문외한이니 자신이 없지만 수필체의 글은 정말 마음에 든다. 아마도 내가 지난 10년간 남기고 있는 blog을 통한 ‘글’, 특히 수필체 글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멋있는 표현보다, ‘감정에 솔직함’이 나에게는 거의 전부다. 여사의 글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지..

오늘 필사한 것은 제목이 ‘서울의 엘레지’란 수필인데,  이것을 읽으며 갑자기 ‘나의 서울, 나의 서울 엘레지’란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이 ‘엘레지’는 1980년대까지의 서울의 모습에 얽힌 ‘단상’들인데 나의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인 1970년대 초까지일 것이다.  그때까지 나의 모든 존재는 그곳, 조선조, 일정시대, 해방과 6.25  직후의 서울 ‘강북’ 이란 ‘좁은 곳’, 그러니까 북악 남쪽 한강 위쪽에 국한 되었다.

이곳에 얽힌 나의 ‘서울 엘레지’를 쓰라면 비록 ‘엘레지’를 논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어도 그 나이에 걸 맞는 ‘유치한 엘리지’는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그 엘레지는 이제는 99.9%  변해버린 ‘토지’위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 다 사라져 버린 그곳은 오로지 꿈 속에만 존재한다. 그것이 나의 ‘서울 엘레지’일 듯…

그래서 그런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현재의 서울의 모습’은 100% 매력이 없다. 천경자 화백의 수필도 아마 그런 각도로 본 엘레지가 아니었을까? 과거, 옛날을 그리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인간의 이상향이 아닐까? 아련한 추억을 모조지 쫓아내버린 ‘메트로 서울’의 모습 속에서 나만이 가지고 있는 추억의 서울을 꿈 속에서 찾는 것이 이제는 길지 않은 여생의 ‘취미’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저 세상’에 가면, 수정처럼 깨끗한 모습의 ‘작고 소박한 그곳’의 모습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서울 시청, 국회의사당, 시민회관, 반도호텔.. 서울의 1962경, 아담했던 모습들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1962년 경 서울의 모습, ‘중앙청, USOM, 세종로’

 


 

서울의 엘레지 – 천경자

 

거리의 체증을 뚫고 택시가 어렵게 3호 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 서울의 풍경이 환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후유 – 한숨이 터진다. 거대한 라이터가 무수히 치솟은 듯한 고층아파트들의 원경은 흡사 뉴욕의 허드슨 강에서 바라보는 한쪽 도시를 연상시켜 준다. 서울이 이토록 발전한 데에 경탄은 하지만 한편 메마르고 살벌한 시야에서 막연한 불안감마저 느낀다.

창 밖을 스치는 실버들 가로수를 보며 시각을 통해서나마 쩍쩍 금이 간 가슴에다 촉촉한 푸르름을 흡수해 보려고 깊은 호흡을 하는 것도 일상사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차가 한강다리를 달릴 때의 기분은 잠시나마 상쾌하다. 그 지점에서 나는 동남쪽 강변에 솟은 반원형의 고층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우리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정이라는 따스함도 고령의 노모가 살아 계실 동안만 지속된다는 걸 알고 있고 언젠가는 다가올 엄숙한 붕괴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차창에서 보이는 그 아파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기공되어 지금은 허물어져 동그랗게 반원형만 남아 있는 콜로세오를 방불케 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생사를 걸고 장절한 검투를 벌였던 검사(劍士)의 모습들마저 상기되어왔다.  한 인간이 두뇌와 붓을 쥐고 오른팔 하나로 살아가는 생(生) 역시 검사와 다를 것 없이 처절하고 또한 스릴과 쾌락이 있다.

띵똥, 초인종 소리에 문 열어 주는 가족이 있고 비로소 아늑한 우리 집의 작은 세계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 준다. 미완성 화판에 그려진 사람들과 뭇 생물들, 그 친구들이 나를 외롭지 않게 맞아 주고 어머니의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가 쇤 기침소리까지 고소한 누룽지 같은 정감이 되어 나를 살게 해 주는 값진 생명수가 되어 준다. 그러나 우리 모녀는 사소한 일, 전라도 사투리로 꼬막(고막) 껍질로 하나도 못 되는 일들로 잘 다투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하다.

어쨌든 추운 겨울날 폭풍우 속을 헤매다가 아늑한 찻집을 발견한다거나 밤중에 타기 힘든 빈 택시를 만난듯한 안도감 같은 것이랄까 촛불 같은 광명과 훈훈한 온기가 있다. 태어나서 오랜 세월을 나는 태반에서 탯줄을 빨듯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묘한 인생이다. 젊은 시절에 해결할 수 없던 인생의 고통이랄 지 일해도 일을 해도 넉넉지 못했던 살림살이가 지겨워 무척이나 더디게 가는 것 같은 시간을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데 어느새 세월은 흘러, 지금 이 나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어머니가 요안나로 세례를 받던 날의 기념사진을 보면 장미꽃 조화뭉치가 달린 면사포를 두른 어머니의 표정은 어색했던 때문인지 수줍은 표정이었지만 참 아름다웠다. 그분의 회갑이나 또 고희(古稀)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충분한 잔치를 못해 드렸다. 고인이 된 명창 박초월씨를 초청하여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5월의 창경원의 푸르름, 나뭇잎만 보아도 쪼르륵 엽록소가 오관에 흡수되어와 뭇 작품에의 구상이 떠올랐지만 미숙해서 충분히 소화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데 지금 막 자신이 생길 만 하니까 나는 살아온 과거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상아야 하는 소위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옛날과 변함이 없는데 남들이 그렇게들 봐 주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인생이란 번개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나의 지나친 생업에의 집념 때문에 역설일는지 모르지만 어떤 때는 차라리 평범한 촌부로 태어났으면 싶은 때도 있다. 어중간히 풍부한 감성의 소용돌이가 거추장스럽게 때문이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꼽추> 를 읽고 그의 비극적 운명을 테마로 한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지금도 그렇다. 영혼은 반드시 있고 그 어느 영혼이 누구의 모체엔가 들어가 혈육이 되지 않는가 싶다. 결국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긍정하는 뜻이 되겠지만 한 세상 살다 보면 반드시 악연선연(惡緣善緣)이 있고 설령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연이 없으면 악연이 될 수도 있어 전생래세(前生來世)에까지 어려운 문제로 뻗쳐지게 되지만 살아오다 보니까 인연설에 한해서만은 인생에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환상이 아닌 실감으로 느끼게 될 때가 많았었다.

나는 둘째 딸을 참 아기자기 예쁘게 길렀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사는 그는 어려서부터 나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가 스무 살이 넘고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공연히 안절부절 불안했고 스물다섯 살이 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이던 이유는 일란성 쌍동녀 같았던 여동생이 그 스물넷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생전에 다정했던 여동생의 외로운 영혼이 나의 모체에 들려 전생한 것이 아닐까 했던 부질없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 이전 나의 소위 세계일주 스케치 여행 때 나는 마지막으로 이태리의 피렌체에 들려 위지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뷔너스의 탄생>등 작품을 보고 참 행복했었다.

또 그의 대표작인 <봄의 탄생>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의 하나였다. 맨 앞에 현세의 히피같이 꽃에 둘러싸인 모습의 신비로운 미소를 띄운 주인공 같은 여자에게 반했었다. 훗날 책에서 읽고 안 일이지만 그 모델의 주인공은 시모네타라는 이름의 당시 성주의 딸이었다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다. 나는 또 전생의 여동생 문제가 해결되다 보니까 딸이 시모네타의 전생이 아닌가 하고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지나친 사랑에서 해방된 그녀는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딸과 나와의 인연이 끊기다시피 되어 어떤 동화에 나오는 마술사에게 어린 딸을 빼앗긴 것 같아 시모네타의 환상이 현실화 되었음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죽지 않고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지 않는데도 내 방에 있는 뭇 사물과 함께 노오란 기생(妓生) 코스모스라든가 썬세트(노을빛 코스모스), 라이락, 호박잎, 몇 그루의 상록수들 사이로 우리 개 꽃순이가 뛰어 놀던 서교동 집뜰 정경이 오버랩 해와 좁은 시야가 무척 번거롭기만 하다. 우리는 몇 달 전만 해도 그 집에서 살았고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그 시절이었지만 뜰이 있고 개도 있고 꽃도 피고 가족들도 많았던 그 시절엔 생활의 리듬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랑의 대상들이 차례차례 나에게서 떨어져나갔고 나는 노모와 함께 이 아파트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둑후둑 맥박이 뛰듯한 희비극이 소용돌이치던 서교동 생활을 청산하고 보니 이곳은 외부의 냉냉하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너무나도 고요하기만 하다. 또 대인 공포증으로 사람이 싫어진 나로서는 안성맞춤의 환경 속에 들어앉아 버려 다행한 일인지 모르나 한편 서글퍼진다.

강변도로를 연해 솟은 도신의 현대식 건물들, 그리고 멀리 엷은 빛으로 펼쳐진 산들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강변로에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이 있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버스요 승용차들일까. 그 사이에 또 어디서 오고 있는지 하얀 전동차가 평화롭게 지나간다. 유선형으로 된 머리부분과 까만 점 같은 차창들이 꼭 누에같이 생겼다.

윤회 전생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각기 정해진 칸에 수용되어 저런 열차를 타고 언젠가는 종점에 닿아 일생을 마치는 것이 아닌지.

우등열차에 오른 인생, 그리고 정감서린 좋은 동승자들과 어울려 앉은 요행의 인생은 보다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신고(辛苦)끝에 좌절되고 더러는 이겨내서 그 체험 때문에 깊고 완숙된 정신적 승리자가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열차를 탔을까, 가슴에 손을 얹어 생각해본다. 전자도 후자도 아닌 퍽 어정쩡한 완행열차를 타고 있고 어느덧 종점이 다가오는 시간을 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짧다면 아쉽고 길다면 어차피 지나가 버린 사연들은 다시 붙잡고 싶지도 않는 미련 없는 과거일 뿐 이상하게도 담담한 기분이다.

그러나 ‘나’ 어떡하란 말인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많이 잃었었다. 나는 사람은 죽으면 저승에 머무르는 동안 사랑하는 혈육이나 보고 싶은 얼굴을 만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학자 점술가의 말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에 쓰여 있는 구절인데  저승의 시간대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오백 년이 걸려도 만날까 말까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정말 어떡하란 말인가…

궂은 일, 때로는 좋은 일들로 수다한 사연들을 안고 후려치는 바람막이 하느라 정신 차릴 수 없던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고 살아 있는 혈육들마저도 뿔뿔이 너무나 먼 곳으로 흩어져 나가 있는 고독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저렇게 바라다 보이는 강 건너 수묵화같이 희미하게 보인 곳으로 말이다.

내가 타고 있는 인생열차의 칸에는 낯 설은 타인들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내가 먼저 콜라나 담배를 권하며 친해 보려고 말 붙임 해 보려는 외로움…

그런데 어느 간이역에 열차가 잠시 멈췄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누군가 다른 칸에서 뭣을 들고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엄마, 도시락 먹어. 엄마가 이 기차에 탄줄 몰랐네. 나는 쩌어기 앞칸에 타고 있었는데..’

나는 운명적으로 함께 나란히 앉은 든든한 자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비록 칸은 달라도 같은 방향을 가고 있는 자식 하나가 꼭 있다고 믿고 있다.

창 밖 저어 아래서 강변의 버들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오늘따라 유난히 친근감이 더 느껴지는 버드나무, 내 친구.

아무튼 종착역까지 가는 시간까지 끈질기게 일하고 먼 후세에까지 평화롭게 누에 같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을 수 있는 복된 세상이 무궁하게 지속되길 빈다.

요즈음 와서는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금요일 다음엔 토요일이 오기 때문이다.

금요일엔 장에 가서 이것 저것 골라 찬거리를 사온다. 토요일에는 기다려지는 혈육이 오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손자놈을 데리고 오면 나는 그놈을 안고 강 위를 훨훨 나르는 하얀 물세를 보여 준다.

무척 신난다는 표정의 그를 볼 때마다 ‘대부’의 돈 클레오네가 만년에 뜰에서 손자와 놀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한없이 애수에 잠기기도 한다.

토요일엔 또 군복무가 얼마 남지 않은 막내가 오는 날이다. 그리고 일요일엔 부대로 돌아가 버린다. 워낙 친구들을 좋아해 불려나가 버리니 무정하게도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기다린다.

노모는 아침을 들지 않고 나는 저녁을 먹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시간대가 뒤틀려 우리 식구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보기는 거의 없는 생활이다. 결국 제각기 혼자서 밥상을 받게 된다. 우리 집의 가정적인 고독은 여기에 그 근원이 있는 것 같다.

일각일각, 목각에다 칼집을 하듯 시간은 깎여 내려가는데 나는 커튼을 걷어 창 밖 경치를 바라본다. 휘황찬란한 강북(江北) 불빛 그림자가 물에 비치지 않는 것은 추위에 한강이 꽁꽁 언 탓인가 보다.

멀리 줄이어 달리는 자동차 불빛은 호박넝쿨 위를 나르는 뽀얀 반딧불같이 아름답다. 나는 이곳에서 사는 동안 무엇이든지 아름답게 나름대로 느끼며 답답하면 춘하추동 변하는 강물, 눈 오고 비 오고 때때로 안개 자욱한 강변풍경을 바라보면서 생업에 미쳐 살  길밖에 없다.

칠흙 같은 하늘에서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한다.

나는 갑자기 에밀리 브론테처럼 의젓한 자세로  창 밖을 응시한다.

브론테의 시야엔 공동묘지와 멀리 은백색으로 펼쳐진 폭풍의 언덕이 보였을 것이다.

내 시야엔 역시 어둠과 하얀 눈이 엉켜 은회색 하늘과 닿아 버린듯한 강건너 도시의 뿌우연 불빛 띠가 그지없이 묘하게 보인다. 눈 아래 강변로를 끊임없이 달리는 자동차 불빛 띠 역시 희한하다.

이런 상황은 나를 에밀리 브론테로 만들고 어떤 시대가 돼도 상관없는 어느 성주의 미망인으로도 만들어 버린다.

환상은 꼬리를 물어 먼 태고와 미지의 미래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꿈같은 풍물이 보이는 듯해 앞으로의 작품을 위해 찰칵찰칵 가슴 속에 든 사진기 셔터를 눌러재킨다.

하염없는 환상을 깨듯, 어머니 방, 텔레비젼에서 흘러간 가수가 부르는 노래 ‘아, 아, 아 황혼의 엘~레~지…. ‘가 새어 나오고 있다.

 

  1. 나의 필사 筆寫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PC keyboardtyping하는 것을 뜻함.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May Day friends: 손용현, 박창희… 용현아, 창희야.. 2018년 5월 1일 다시 한번 정다운 이름들을 조용히 불러본다. 또 일년이 흘렀구나. 또한 우리들 우정의 원년 元年 1970년 5월, 48년 전 “우리들의 오월”로부터는 거의 반세기가 지나가고 있구나. 이제 2년 뒤면 정확히 반세기… 참 우리는 오래 살아왔다. 지나간 일년 너희들 어떻게 지냈는지 이제는 전혀 ‘감’이 잡히질 않고 그림도 그려지지 않으니..  지금 어떤 모습의 얼굴들인지도 모른다. 그저 너희들의 이름과 반세기 전의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만 생생하게 기억할 뿐이다.

너희들은 일년가량 기다려야 하지만 나는 올해 먼저 70이라는 고개를 넘어섰으니 우리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남아있는 미지의 세월’을 탐험하게 될 듯하다. 몸만 제대로 도와준다면 우리가 앞으로 맞을 이 시간들은 우리들이 70년을 살아온 경험으로 멋진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재 너희들의 영육간의 건강상태는 전혀 모르지만 나 자신은 최소한 그런대로 영육적으로 ‘정상적, 양호한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1970년 5월과 2018년 5월.. 그 사이에 무엇이 변했을까 새삼스럽게 물어본다. 20이 갓 넘은 시절에서 칠순을 넘은 것도 그렇지만 그 동안 세상도 참 많이 변했구나. 그렇게 찬란했던 당시의 5월의 기억이 이제는 전처럼 찬란하지 않으니 기억력의 한계인 듯 하다. 이제 너희들이 살아온 흔적이나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 것, 그런 것에 더 이상 호기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이제 와서 그렇게 중요할까? 나에게는 그 ‘눈물 없던 시절’만 기억할 수 있는 힘만 있으면 족할 것이다. 내년의 5월 1일은 어떤 것인지 그것이 더 궁금할 뿐이다. 부디 건강하게 잘 살아다오, 친구들아.

 

¶  교동학교 형제  Birthday Party Hangover: 새로 사귄 형제친구, 서울에서 아래 윗동네에 위치한 두 국민학교를 같은 시기에 다니던 동갑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경험으로 참 희귀한 일 중에 하나다. 몇 년 전에 성당에서 우연히 돼지띠 동갑도 만났던 즐거운 경험이 있었지만 곧 헤어지게 되어서 너무 아쉽기만 했다. 왜 이렇게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없을까 의아했는데 의문이 풀렸다. 알고 보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공동체 이곳 저곳에 적지 않게 그들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였다. 내가 그들을 못 찾은 것이고, 대부분은 신심단체가 아닌 친교단체에 속해 있었기에 그 동안 그들이 ‘숨어 보였던’ 것이다.

사람은 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나이고하 高下 를 막론하고 잘도 어울리던데, 나는 그것이 체질적으로 불편한 것.. 자라난 환경 때문인가?  작년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고 ‘입회’를 한 60+ group 등대회, 나에게는 한마디로 awakening 같은 것이었다. ‘다른 세계’를 보는 듯한 그 느낌, 아직도 계속되는 것이며 나는 사실 ‘즐거운 우려’의 심정으로 임하고 있다.

동갑류 형제, 자매들을 ‘무더기’로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 timing이 아주 좋았다. 명색이 신심단체라는 곳에서 ugly하고 극단적인 위선을 통째로 경험을 했기에 아예 내숭떠는 모습이 훨씬 적은 친교단체에 신선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가?

서울 종로구의 노른자위에 위치했던 국민학교, 교동학교 출신, 그것도 동갑의 형제님을 이곳에서 만난 것,  오랜만에 가물에 단비가 내린 듯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 되었다.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같은 때, 비록 짧았던 시절이었지만 같이 뛰고 놀고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의 얼굴은 환한 웃음으로 뒤 덮인다.

교동국민학교는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 유지호와 ‘시자 누나’가 다녔고,  천도교 건물, 덕성여대, 우리들의 ‘문화전당’, 문화극장이 바로 앞에 있어서 사실 그 시절 그 주변의 광경들은 꿈에서도 나타날 정도로 익숙한 곳이었다.

나는 나이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꼭 ‘어느 국민학교 나왔느냐’ 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하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웃기도 한다. 중 고교나 대학교를 묻는 것은 당시의 ‘입시지옥’ 풍토를 생각하면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국민학교는 전혀 문제가 없는1 순진한 화제가 아닐까?

이렇게 새로 만난 ‘교동형제님’ 의 칠순 생일 party에서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푸짐한 음식, 술, 얘기를 즐겼는데.. 문제는 남자들만 앉았던 table에서 ‘예의 정치, 시사토론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술을 평소보다 더 마셨던지, 그 다음날은 하루 종일 멍~한 기분으로 ‘반성, 자숙’의 날로 보냈다. 피곤하긴 했지만, 동갑류 모임의 즐거움은 아직도 잔잔히 남고, 무척 오랜만에 느끼는 것, fraternity 형제애, 남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정은 여자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고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또 오면 적극적으로 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  Only God & Time:  지난 목요일은 4월 첫 목요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저녁 미사 후에 성시간이 있는 날이었고 연도가 있던 날이었다. 전날 ‘음주’의 여파로 꼼짝하기 싫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나가라, 나가라..’ 하는 음성이 계속 들리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사실 이날은 빠질 수가 없었다. 미사나 성시간을 그렇다 치고 연도는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날 연도는 20대 중반의 한창 나이에 ‘요절 夭折’을 한 청년을 위한 것이었다. 그 젊은 나이로 잠자는 중에 사망을 했다는 사실이 사실은 정말 믿기 힘든 것이었다. 사연이야 어떻다 치고 그 부모들의 심정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사고, 사고 하지만 이런 사고는 부모로써 정말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나의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 끔찍한 상상은 사실 상상을 하기도 벅찬데..

이 부모님들은 사실 우리가 아틀란타로 내려오기 전에 잠깐 살았던 Madison (Wisconsin)에 사셨다고 해서 반가웠다. 물론 우리가 그곳을 떠난 후부터 그곳에 사셨고, 같은 한인성당에도 다녀서 우리가 알고 지내던 분들을 많이 알고 계셨던 인연이 있다.

작년 이맘때에도 비슷한 사고로 아드님을 잃었던 자매님이 있어서 연도를 했지만 사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연도의 위력은 참 대단한 것인가.. 그렇게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지만 유족들도 마찬가지라 생각 되었다. 그저 생각한다… 왜 그런 고통이.. 그래서 하느님만이 ‘왜?’ 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는 것, 또한 하느님의 선물인 ‘시간’이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참, 사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것인가?

 

¶  Spring roll & wine,  Impromptu style: 어제는 성당 휴무관계로 연기된 레지오 주회합이 있던 날이었다. 화요일에서 금요일로 바뀐 것은 이미 전에 경험을 해서 별로 다른 느낌이 없는 것인데, 어제는 조금 달랐다. 정오 미사 후 맛있고 푸짐한 점심2 생각을 하며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다른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는 아주 희귀한 것이다. 저녁 초대를 받기는 해도 평일에 점심초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성당에 부부신자는 많지만 항상 같이 다니는 case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은데 이 couple이 그 중에 하나다. 우리보다 나이는 한참 밑이지만, 그 동안 우리와 그런대로 ‘웃는 모습’으로 대하던 부부, 요새 보면 전 보다 더 사이가 좋아 좋아 보여서 보기에도 좋았다. 자매님은 본당의 각종 일에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고, 신심은 참 부러울 정도다.

 

 

전에는 성당 근처에 살았지만 년 전쯤 비교적 먼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도 불구하고 자주 보는 부부, wife끼리 우연히, 그야말로 impromptu, 지나가는 말로 같이 점심을 먹자고, 그것도 자기의 집에서.. 이런 것도 사는 재미가 아닌가? 거창하게 계획 만들지 않고 스쳐가는 생각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식사 하는 것.  비교적 drive 하는데 시간을 좀 걸렸지만 멋진 country club 내에 있는 예쁜 집에서 한가하게 Spring roll 과 wine으로 시간을 보낸 것,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될 것이다.

 

  1. 하기야 이곳도 그 후에 사립국민학교가 나타나며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2. 우리는 평소에 저녁을 안 먹기 때문에 점심이 제일 양이 많고 푸짐하다.

4월, 四月, April.. 사월이 되었다. 4월은 나에게 어떤 것인가? 70년 동안 쌓인 기나긴 추억을 통해서 올해 4월은.. 태곳 太古 적의 원시적 온돌방에서 화롯불과  이불로 견디던 서울의 겨울을 벗어나 만나는 반가운 손님처럼 느껴졌던, 그것이 바로 4월이었다.

다시 골목으로 나와 하루 종일 놀 수 있었던 찬란한 봄의 시작이 1950~60 년대의 가회동과 삼청동의 4월의 봄이었고, 자그마했던 ‘강북’ 서울이 10~20대의 함성과 카빈총소리로 요란 했던 찬란한 계절이기도 했다.

희미해져 가는 당시의 4월과 봄의 느낌들, 우연히 찾은 김남조 시인의 에세이 집 중의 ‘사월의 연가’ 가 현재 나의 심정과 어찌 그렇게 비슷한가. 어머님이 계시던 곳으로 이제는 편지를 보낼 수 없는 불효자의 심정과 공해 없이 맑던 당시의 ‘시원 始原 의 냇물’의 순수함.. 이제는 도저히 꿈 속에서조차 희미해지는 것들, 김남조 시인의 글 덕분에 조금은 되살아나는 것들.  느낌인가.. 아니면 바램인가.. . 아 사월이여, 사랑하는 사월이여..

 

 

사월의 연가 – 김남조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눈과 얼음이 얹히던 인동 忍冬 의 나무 살갗에 억 천만 만의 더운 손바닥들이 명주 피륙을 감아 훈훈히 속살마저 덥혀냄을 보러 나오세요.

봄을 맞는 나무 옆에 서서, 봄의 기운이 정수리까지 뻗치는 나무 옆에 서서 생명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세요.

이슬을 보세요.

올해의 첫 이슬이 태초의 순수 그대로 영롱히 반짝임을 보세요. 다치지 않게 그 한두 방울을 손 안에 담아 보세요. 문득 새파란 하늘을 우러러 보세요. 옛날옛적 동심의 눈물 방울이 거짓말처럼 우리들 눈시울에 다시 치받아 어이없이 후두둑 떨어지는군요.

사월의 수분을 생각하세요.

겨우내 사람의 속 마음이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고 여기던 터에 사월의 수증기를 생각하세요. 훈훈하게 축여질 알맞은 습도를 생각하세요.

사월의 아름다움을 누리세요.

단지 화사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눈과 얼음에서 뽑아 올린 장한 아름다움을 누리세요. 광야의 기도사같이 인내와 신앙의 승리를 나누어 가지세요.

꽃을 보러 나오세요.

열 가지, 백 가지의 꽃을 보러 나오세요. 모든 꽃이 이 세상 유일한 꽃의 의미로 피어나는 절대의 숭고와 충실을 배우러 나오세요. 그 환희를 배우러 나오세요. 위로 위로 솟구치는 소망을 배우러 나오세요.

꽃을 보러 나오세요.

꽃의 언니들인 보리밭을 보러 나오세요. 삼월엔 땅 속에 벌여 놓던 초록빛 잔칫상을 오늘은 땅 위로 들고 나왔군요. 2월엔 어둠 속의 진통을 견뎌낸 그 갸륵한 것, 설한 雪寒 섣달엔 희미한 꿈이었던 그 눈물겨운 것.

보리밭을 보러 나오세요.

빛과 대기 속에 펼쳐지는 신록의 성찬식 聖餐式 에 참석하세요. 보리가 펴 놓게 될 순서들을 살펴보세요. 영글어서 곡식이 되고 타작마당을 거쳐 나와선 백설 같은 가루로 빻아져 떡과 술과 온갖 것이 되어서 많은 이를 먹이게 될 그 차례들을.

풀잎들을 보아 두세요.

얼음을 뚫어내고, 돌과 아스팔트마저 뚫어내고, 송곳처럼 디밀어 오르는 무시무시한 모가지들을. 어떻게 그 단단한 것을 뚫어내고 땅 위에까지 나올 수 있었나요.

당신은 믿고 계시겠지요.

도시의 봄 경치 속에서도 새싹들이 얼음과 돌과 아스팔트를 뚫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믿으시겠지요. 해빙의 낙수물이 기왓골을 타고 흐르며 그러한 몇 십 몇 백 년의 세월 사이에 마침내 동그맣게 섬돌이 패이고 있는 그 사실을.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꽃을 불러내는 바람을 만나러 나오세요. 피리 구멍으로 숨결을 디밀어 넣어 구슬 울리는 오묘한 가락을 뽑아내는 바람은 마술사랍니다. 사월의 바람을 만나러 나오세요.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외쳐 보세요.

자신의 내부에 굳게 닫아 두었던 문들을 열고 존재의 골짜기들을 향해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외쳐 보세요.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산울림 돌아 나오게 해 보세요.

사월의 함성을 들어 보세요.

눈 감고 귀 기울이면 영혼이 율연 慄然 해지도록 아름답고 장한 사월의 함성이 들릴 거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로 깨끗한 젊은이의 함성이 뜨겁고 끈적끈적한 피에 섞여 와아~ 와아~ 울려옴을 들을 거예요.

당신은 견뎌낼 수가 있을는지.

목청껏 울어 버리지 않고 참아낼 수가 있을는지. 이십 년 전의 우리 젊은이들이 외치던 4.19 의 함성, 3.1 만세처럼 폐부 속에서 터져 나왔던 정의의 함성, 인권의 함성이 펄펄 끓는 열탕으로 지금도 와아~ 와아~  울려옴을 들을 거예요.

사월의 강가에 나오세요.

아직도 위판은 살얼음인데 그 밑을 흐르는 물 소리를 들어 보세요.

졸, 졸, 졸, 실타래 풀리듯이 끊이지 않는 봄 시냇물 소리를 들어 보세요. 서럽게 허전하던 모든 날에 꼭 들리던 그 개울물 소리가 아닌가요.

물의 시원 始原 을 생각하세요. 삼국유사 때부터, 단군신화 때부터 흐르던 물 소리. 선사시대 때부터 흐르던 물 소리. 조상의 조상처럼 늙고 지혜로운 물을 생각하세요.

불을 생각하세요.

태초의 날, 처음으로 일궈지던 성화 聖火 를 생각하세요. 지존하신 여왕을 사모하여 그 몸을 불태운 지귀 至貴 의 불과, 불타서 새하얗게 잿가루가 되어 버린 열 아홉 살의 쟌다르크를 생각하세요.

불을 생각하세요.

불의 상징인 온갖 신성한 것, 온갖 진실한 것, 순애 殉愛 와 순국 殉國 을 생각하세요. 육체를 불사르어 영혼에 기름 따르던 이 나라의 순교사를 생각하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바위 살갗에 눈 트는 이끼, 진홍과 순백의 꽃들, 햇솜처럼 깔리는 봄 아지랑이, 꿈꾸는 연분홍의 조가비들을 생각하세요. 먼 데서 날아오는 새떼를 생각하세요. 훨 훨 훨 날아오는 빛부신 날개짓을 생각하세요.

땅 속에 뿌려지는 곡식들, 채소와 과일, 꽃씨며 갖가지 구근들…

사월엔 노동하세요.

심고 가꾸고 땀 흘리는 영광을 맛보세요.

나무 옆에 서세요. 주루룩 주루룩 속의 땀처럼 하얀 수액이 흘러 내리는 나무의 생리를 느껴 보세요. 사람의 몸 속에 피가 순환하듯이 나무들의 몸 속에도 수액이 돌아 퍼짐을 느껴 보세요.

거친 나무 등걸에 귀를 대면 똑딱 똑딱 시계 초침 소리를 내는 생명의 맥동, 생명의 울림을 들으세요.

사월엔 편지를 쓰세요.

두고 온 고향에도 편지를 날려 보내세요. 객지의 봄이 찬란하다 해도 어머니의 품과는 다른 점을 말해 보내세요.

사월에 편지를 쓰세요. 말할 기회를 미루기만 했던 사랑의 고백을 적어 보내세요.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이후에도 언제까지나 사랑하리라고 말하세요.

사랑만은 뉘우칠 수 없다고, 그 한 마디 말해 버리세요. 재회의 약속, 방문의 일정을 적어 보내세요. 아아 사월엔 사랑의 편지를 쓰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사월의 보석더미 옆에 서세요.

바라봄으로써만 기꺼운 일, 그렇게 욕심 없는 우리들의 꿈, 소박한 소유.

 

사월의 찬미가를 부르세요.

그리고 사월엔 교회를 찾으세요. 제단엔 성촉 聖燭 을 밝히고 신도들이 기도하고 있으리니.

사월엔 교회에 나가세요.

하나님이 땅에 내려와 사람 손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다시 하늘에 오르시는 예수 부활에 참여하세요.

부활절의 기도를 드리세요. 복받치는 통곡으로 당신도 크게 한번 울음 우세요. 영생의 증거를 눈으로 보면서 주의 기적을 심령의 전부로 신앙하세요.

기뻐하세요. 기뻐하세요. 기뻐하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Windy March: 김민기 작사, 작곡, 노래의 70년대 oldie folk song ‘아름다운 사람‘ 2절 가사를 보면… “세찬바람 불어오면 들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맞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40여 년 동안 잊지 않고 기타에 맞추어 읊조리는 노래, 오늘같이 세찬 바람 부는 날 실감나게 가사를 음미할 수 있다.

왜 3월 무렵 부는 바람은 그다지도 춥고 움츠리게 하는 것일까? 아마도 찬란한 햇살에 깜빡 방향을 잃은 우리의 계절감각 때문은 아닐까? 봄의 시작이 일주일 가량 남았으니 아마도 우리의 의식은 분명히 봄을 미리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 움츠려 드는 몸에 활력을 넣으려고 ‘일부러’ 동네 산책을 강행했다. Mexico에서 Spring break을 즐기는 새로니, 그 애의 home companion인 pet dog, Ozzie를 우리 집에 맡겨놓고 갔다. 이제는 하도 우리 집에서 자주 지냈기에 사실은 우리 식구같이 느껴진다. 주인인 우리 집 pet dog, Tobey도 이제는 체념한 듯, 그런대로 평화롭게 지낸다. 그 두마리 개를 데리고 동네를 걸었다. 찬란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햇빛이 무색할 정도로 ‘움직이는 공기’는 무섭게 차가웠다. 3월의 바람은 역시..

반 세기 전 서울 거리를 걸을 때의 3월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복잡한 시내에서 맞는 강풍, 괴로울 때도 많았다. 머리 숱이 그렇게도 진했던 때, 날리는 머리가 흐트러질까 그것을 shop window에 비추어보며 가다듬던 어린 시절들, 하지만 여자들이 더 고생이었을 것이다. 한창 유행하던 mini-skirt를 입고 2층 높이의 ‘육교, overpass’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우리들이 보기에는 즐겁기도 했지만 그녀들은 고역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싸늘하고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이 온통 다리를 거의 다 노출시키고 활보하는 것..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것이 머리 속 깊이 남아있는 3월의 모습들..

그 이후에 이곳에 살 때 아이들 bedtime story로 책을 읽어 줄 때, Winnie-the-Pooh 의 추억이 또한 3월에 연관되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중의 한 그림..이 바로 바람에 날라가려고 하는 Piglet을 잡아주는 Winnie의 정다운 모습이다. 이것은 이제는 ‘미국적 추억’이 되었지만 이제는 하도 오래 전이라 미국적, 한국적 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게 되었다.  바람을 동반한 3월의 추억,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3월을 맞게 될 것인지.. 아마도 그다지 ‘수많은 3월’은 아닐지도 모른다.

 

Darker Dawn again:  3월의 stupid ritual, 2째 주 일요일 오전 1시가 ‘갑자기, 강제로’ 2시로 변하는 해괴한 ‘법‘.. 나는 아직도 이 stupid하게 느껴지는 것 이해를 할 수가 없다. Daylight를 Save 하자고.. 이것 얼마나 귀찮고 번거롭고, 이제는 일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도 일깨워주는 고역이다. 벽시계 같은 것 바꾸는 것 이외는 이제는 거의 ‘자동적’으로 바뀌지만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시간을 ‘법으로 강제로’ 바꾸는 것이 문제다.

 

 

그런대로 아침에 일어날 때 여명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깜깜해 졌다. 그것뿐인가.. 특히 봄에 바뀌는 시간은 아차 하면 내가 바보로 둔갑할 수도 있다. 일요일 아침, 목적지에 한 시간 늦게 도착하는 것, 충분히 가능하니까.. 수십 년 전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TV, Radio) news를 완전히 잊고 살던 ‘공부하던 시절’, 나는 이 news를 놓치고 월요일 아침에 버젓이 수업시간에 1시간 늦게 도착한 적이 있었다. 강의를 시작할 시간에 모두 교실에서 우르르 나오는 학생들을 보고.. 정말 바보, 바보.. 라는 웃음이 나왔던 그 시절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 Tax surprise:  예정보다 늦게 2017년도의 Federal Tax Return 을 끝냈다. 작년에는 2월 중에 했는데 올해는 분명히 tax를 ‘내야 할’ 것을 예상했기에 무의식적으로 게으름을 피었는지도 모른다. Tax를 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신나는 작업이 아니니까.. 그런데 놀란 것은 그 액수가 예상보다 많았던 것, 허~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부자’가 되었나.. 의아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연숙의 ObamaCare 때문이었다.

 

 

Medicare가 얼마 전에 시작되었기에 그 이전에 받았던 tax credit을 과도하게 받았던 것, 그것을 다시 ‘물어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조금 실망했지만 어찌하랴… Health insurance 를 큰 부담 없이 cover받은 것에 감사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정당한 이유가 있는 tax는 정직하게 내야 하니까.. 사실 모든 것이 fair한 듯 하다.

 

Thursday Friends: 처음 만난 지 4 반세기 (quarter century) 가 훨씬 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실질적’으로 다시 한자리에 모인 나이 지긋한 3명의 남자들,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매달 마지막 목요일 ‘밤’에 갖는 ‘이상한’ 모임, 이름하여 ‘목요일 밤 친구들’, 하지만 이름은 짧게, 목요회가 되었다. 작년 9월 마지막 목요일에 강렬한 향수를 동반한 그리움을 느끼며 3명이 처음으로 함께 모였고, 그 이후는 짧은 역사가 되었고 지금도 매달마다 작은 역사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만남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하나 둘씩 서로에 대한 느낌들이 쌓이고 어렴풋이  pattern 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one year anniversary가 되는 올해 9월의 모임이 되면 그 pattern이란 것이 어떤 것일지 미리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은 건강한 것, 희망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오랜 세월을 같은 지역에서 살았지만 알고 보면 우리 세 명의 ‘아빠 남자’들은 꽤 다른 인생을 살았던 듯 싶다. 서서히 나누기 시작한 옛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렇고, 아주 가끔씩 간접적으로 들었던 것들도 그런 짐작을 하게 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두 old friends들과 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지나간 오랜 세월, 이들이 냉담을 고수했던 나를 성당에서 찾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내가 그들을 찾고 있다는 것, 참 긴 세월의 irony가 아닐까?  우리들의 등대였던 그곳, 성당 공동체가 어떻게 해서 나에게는 다가왔고 그들로부터는 떠난 것인지 나는 더 알고 싶기도 하고, 가급적 남은 여생에서 그들과 함께 머무는 공동체를 보고 싶기도 한 것이다.

지난 달 모임과 이번의 모임을 통해서 나는 조금 색다른 각도의 추억을 되살리기도 했다. 세 명의 남자들이 늦은 저녁식사를 끝내고, 스산하게 깜깜한 밤중에 coffee shop를 찾으러 old Korea Town (at Buford Hwy)을 걸으며..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무엇이 있었다. 70년대 초 친구들과 종로, 명동 거리를 걷던 추억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 이후 수십 년(아니, 거의 반세기?) 동안 이렇게 ‘남자들끼리’ 밤 거리를 배회’했던 기억이 거의 없는 것과 갑자기 내가 이 ‘외딴 섬, 미국 내의 stranger’란 느낌과 Frank Sinatra 의 1966년 classic oldie, Strangers in the Night의 은은한 crooning 추억, 또한 남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형제애, fraternity’를 너무나 오랜 만에 느껴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색다른 이유로 나는 우리 목요회가 ‘장수 長壽’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Strangers in the Night – Frank Sinatra – 1966  

 

¶  Happy Anniversary, 38th!  결혼 38주년, ‘삼십 팔, thirty eight’ 이란 숫자가 주는 느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와~ 축하한다.. 축하해.. 하는 자축의 느낌은 어느 해 보다 강렬했다. 우리 세대에는 그렇게 이혼이 흔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38년 ‘무사히’ 가정을 지켰다는 것은 솔직히 자랑스럽다. 이혼이나 사별 같은 것, 가정적으로 얼마나 자녀들에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1980년 1월 25일에 시작된 결혼의 세월들, ‘남녀의 결혼’이란 말에 더 심각한 의미가 실린 초 현대의 해괴한 초 超 세속사회의 격동 속에 오늘을 38년의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자연법을 거스르지 않고 두 생명이 하느님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그렇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며 간단한 Lemongrass 외식을 즐겼던 날이 되었다. 

 

September Morn – Neil Diamond – 1980  

 

¶  Serpents:  오늘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미국 본당  Holy Family church대신에 한국 본당, 도라빌 순교자 성당의 정오미사엘 갔다. 이유는 그곳에서 지난 12월에 선종하신 어떤 자매님의 50일재 추모 연도 煉禱 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례미사와 연도가 함께 있는 날은 요일에 상관없이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이렇게 금요일의 추모연도에만 참석하는 것은 예외에 속한다. 지나간 12월 달에 있었던 장례미사, 연도에 ‘snow day 날씨 관계’ 로 불참했었기에 이번에는 특별히 신경을 쓴 셈이다. 

연도가 끝나고 단체 식사를 하는 곳에서 보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는 2017년  ‘레지오 난동사건 장본인’ 그 미친년의 얼굴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차.. 했지만 늦었다. 그 인간을 상상하거나 보기만 해도 나는 밥맛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 동안 소화까지 안 되는 정도다. 아직도 아직도 나는 꿈 속에서 ‘죽이고 싶다’라고 외치고 있었고, 그 인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아하… 그 얼굴이 사람들이 말하던 serpent의 모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작년에 레지오에서 난동을 일으켰던  두 ( 왕마귀 포함) 미친 년들의 얼굴이 그러고 보니 완전한 (성모님의 발꿈치에 눌린듯한) serpent의 모습들이었다. 어쩌면 이럴 수가…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완전한 뱀(그것도 독사들)의 얼굴이 아닌가? 1978년 supernatural horror  movie sequel, The Omen II 에서 본 (Damien) serpents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잊고 싶다, 잊고 싶다, 영원히 잊고 싶은..

 

만화, 민족의 비극 표지, 1961

‘민족의 비극’, 1962년 1월..  내가 55년 전에 ‘탈고 脫稿’한 50여 페이지의 ‘먹물로 그린’ 만화 漫畵 의 제목이다. 그러니까 서울 중앙중학교 2학년 시절 1961년에 그렸던 ‘자작 自作 만화’ 인 셈인데 이것이 거의 기적적으로 그것도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이것은 나에게는 ‘가보 家寶’에 상당하는, 돈을 주고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개인 역사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지금 이 만화 책의 ‘외형적, 물리적’ 상태는 그렇게 양호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신경을 안 쓰고 조금 험하게 다루면 망가질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자주 만지지도 않고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에 더 이상 이런 상태로 모셔둘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려서 fully digitized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당시에 그렇게 ‘희귀’했던 stapler, 현재 몇 불 弗이면  살 수 있는 그것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나는 역시 전통적인 공구였던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동네가게에서 가는 철사를 사다가 이 책을 엮었다. 그것이 현재 그대로 남아있는데.. 문제는 이 homemade staple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1961년 경 서울 가회동 잡화상(철물도 취급하는)에서 산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true antique value가 있는 것, 돈을 주고 어디에서도 살 수 가 없는 것이니.. 쉽게 바꾸거나 손을 대는 것이 망설여진다.

우선 몇 page를 scanner에 책갈피를 강제로 펴서 scan을 해 보았다. 역시 보기가 안 좋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이렇게 55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았다는데 만족감을 느낀다. 당시 이 만화를 ‘애독’ 해 주었던 몇몇 원서동 苑西洞 죽마고우 竹馬故友 (안명성, 유지호, 김동만 등등) 이 자신들이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되었던 역사를 재발견하게 되면 감개가 무량할 것이라 믿는다.

이 만화의 그림 technique을 보면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그것들은 거의 99%가 당시 만화계의 영웅 ‘산호‘ (선생님)의 bestseller 우리의 영웅 ‘만화 라이파이‘를 비롯한 다른 ‘전쟁, 역사 물’에서 온 것이다. 24시간을 그런 그림을 보며 살았던 당시에 그것을 흉내 내어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랑스런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것을 거의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까지 그렸으니.. ‘공부, 공부, 입시’ 지옥이었던 당시, 우리 집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이고 결국은 이 만화가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내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그렸던 만화가 이 만화 바로 전에 완성이 되었는데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없어졌고 나중에 알고 보니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알았다. 어머님의 지나친 간섭이었지만…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서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굶어 죽는 만화가’가 될 것으로 염려가 되셨다는 것을 어린 나이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없어진 그 만화, 나에게는 아련한 아쉬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 없어진 만화작품의 그림 기법, story 같은 것이 나의 머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저 어린 나이에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날랐던  그 만화시절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고 싶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만화책을 완전히 ‘해체’해서 full scanning을 한 후에 pdf book format 으로 바꾸는 것이고 그것이 완성 되면 나의 serony.com blog에 ‘영구히’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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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ster Wang, 괴물 왕? 괴물의 왕, King of Monster란 뜻인가?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고 1967년 서울에 등장한 괴물, ‘왕마귀’ 를 뜻한다. 이것은 1967년 여름에 개봉된 대한민국에서 처음 나오기 시작한 SF (Science Fiction) 영화 중의 하나고 아마도 최초일 가능성도 높다.

1967년이기에 이 blog post는 Category: memoir 에 해당이 될 듯 싶지만 사실은 daybook쪽에 가까울 정도로 나의 현재 느낌이 더 반영된 것이다.

당시 이 ‘웃기는’ 영화의 제목은 ‘우주괴인 왕마귀‘였다. 왕+마귀: 마귀의 왕이란 뜻인 모양이다. 그 정도로 이 마귀는 악질 중의 악질이 모양인가? 하기야 당시의 우주괴인 宇宙怪人 들이 성질이 온순한 놈을 없었을 것이다. 대도시에 나타나 모조리 파괴하고 나중에는 인간의 영웅들에 의해 쓰러지는 그런 것이다.

1967년 여름이니까, 연세대학에 복학하기 전 무렵이다. 당시 TV를 보던 중에 game show같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 영화에 출연한 cast들이 모두 나와서 ‘청백팀’ 정도로 game을 했었는데 그때야 나는 이런 ‘웃기는’영화가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웃긴다는 뜻은 그 당시 미국영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이런 C-class의 장남감 영화가 통할 리가 없고, 그저 유치한 저질 comedy급으로 여겨진 것이다.

cast중에 유일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아역으로 나온 ‘전상철‘이었다. 이것 정말 의아한 노릇이다. 왜 50년 전의 그 TV에 나온 ‘전상철’을 기억하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그가 나와서 말한 내용도 기억에 남는 듯 하니.. 기억력이란 것은 참으로 신비한 것인가…

내가 본 영화도 아니고 이렇게 50년 전 서울에서 TV에 나온 영화의 cast들을 잠깐 본 이영화가 오늘의 Daybook에 소개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전에 겪었던 어떤 웃기지도 않은 해괴한 사건 때문이다 이 해괴한 사건의 주범, 주연을 100% 연상시키는 것이 바로 이 ‘우주괴인 왕마귀’인 것이고 우리는 그 사건 이후부터 그 인간을 ‘왕마귀’라고 별명을 붙여버렸다. 왜 이 왕마귀와 그 주범이 연결이 되는지는 차마 이곳에서도 밝힐 수가 없다. 아마도 그 인간이 죽기 전이라도 이 blog을 본다면 알아차릴 수 있을까.. 하지만 회의적이다. 이런 monster급 인간들이 우리의 아주 가까운 주변에 하나 둘 씩 등장하는 걸 보니.. 우리도 오래 살았구나 하는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잊고 싶다, 왕마귀의 추억을..

 

2017년 ‘우리들의 5월 1일’이 되었다. 친구들이여, 지난 한해 잘 살았던가? 아니.. 큰 변화는 없었던가? 창희는 물론 교회를 맴돌며 보람 있는 나날을 보냈을 것 같고, 용현이는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전혀 idea가 없구나. 나와 나의 가까운 사람들은 비교적 잘 살았던 듯하다.

우리들의 5월 1일은 어제였던가? 아마도 1970년부터 1973년 사이가 아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적 경제발전의 서막이 시작되던 때에 우리들 모두 생의 진로를 놓고 방황하며 불투명한 미래를 잊고자 발버둥 치지 않았던가?

당시에 느꼈던 우리들의 세상은 아무리 아무리 하늘이 어두웠어도 그 저쪽에는 밝은 태양이 맴돌고 있었지 않았던가? 젊음의 선물인 ‘이유 없는 희망’, 바로 그것을 우리들은 만끽하며 길게만 느껴지던 몇 해를 보냈지.

그 ‘어린’ 나이에 세계관이 변할만한 신앙을 찾았던 창희, 당시에 ‘우리 들’은 이해를 못할 수 밖에 없었다. ‘신나고 멋지게 오래 오래 살자’ 가 전부였던 나이였기에 ‘죽음’의 세계는 우주의 저~ 편으로 느끼던 20대 초.. 그런 느낌의 세월들이 우리들의 5월 1일,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거의’ 사라져 가고 있구나.

비록 3총사가 뿔뿔이 흩어져서 소식도 모르며 숨어 살고 있지만 이런 추억으로 인한 꿈속의 세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함이 없구나. 이런 pace로 세월이 흐른다면 이제는 서로 죽는 날도 모르고 뜨겠다는 자괴감에 젖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언제나 작은 기적이 있다는 경험을 가지며 살고 있으니까.. 내년 5월 1일, 다시 보자.. 멋진 친구들이여!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책, 二十世紀 哲學 역자, 강성위.. 1978년 대한민국 왜관 분도출판사에서 발행된 철학 번역서. 강성위 는 번역한 사람의 이름이다. 지난 주일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에도 참석할 겸해서 그곳에서 주일미사엘 갔는데, 근래에 자주했던 것처럼 ‘성물방, 도서실’ 엘 들렸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의 제목이었다.

갑자기 철학에 눈이 뜬 것이라기 보다는 번역자의 이름이 나의 눈을 끌었고 곧바로 2주 대출을 하게 되었다. 강성위.. 강성위.. 1963~4년, 무려 반세기가 지난 때의 기억 속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서울 중앙고등학교 독일어 선생님의 이름.. 바로 그 강성위 선생님이 분명했다.

지난 해에도 이 ‘조그마한’ 도서실에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그리고 나]을 발견한 바가 있었는데 그런 추억이 담긴 발견의 두 번째가 된 것이다.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식의 ‘역사 속 발견의 즐거움’을 종종 대하게 된다. 세월의 즐거움 중에 하나일 것이고 ,길지 않은 삶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거의 40년이 가까운 이 책은 비록 ‘소책자’의 느낌을 주지만 내용은 정 반대로 ‘거대한 주제를 압축적으로 다룬’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를 풍미하며 우리를 직접 간접으로 지배해 온 사상, 물론 서양적인 관점에서 본 것들을 정리한 것, 지금 읽으니 우리들도 피할 수 없던 이런 ‘사상 들’ 속에서 평생을 살았구나.. 하는 감회도 든다. 때로는 ‘사상이 밥 먹여 주냐?’ 는 때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의견일 것이다.

강선생님 졸업앨범 사진

강성위 독일어 선생님.. 비록 2년 여의 짧은 기억이지만 추억은 아주 너무나 또렷하게 남는다. 1963-64년..  박정희가 5.16 혁명 2년 후 군복을 벗고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요란하게 선전되던 때 [주로 중화학 산업개발], 강선생님, 중앙고 1학년의 독일어 선생으로 만나게 되었다.

독일어.. 는 분명히 입시중심의 교육과정에서 별로 빛이 없었던 ‘제2외국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1960년 당시만 해도 2차대전의 강국 독일문화의 후광은 그런대로 남아있어서 대학과정에서 독일어는 거의 필수적 선택이었고 대학원엘 들어가려면 독일어 시험을 치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는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했고 그렇게 ‘되길어 [당시 우리들은 풍자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강성위’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고등학교와 독일어,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는 것은 신선하고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자랑할 만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독일어 자체는 악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독일어의 재미를 못 느끼며, 게다가 핵심을 못 배운 것이다. 그저 기억 속에는 정관사 der des 같은 것이 전부다. 이런 탓으로 나는 대학시절에도 이 ‘어려운 말’과 고전을 하게 되었고 대학원 입학에 이 독일어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예 대학원은 꿈도 못 꾸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름대로 나는 노력을 했다고 기억을 하는데 결과적으로 ‘완전 실패’였다. 나는 독일어를 잘 못 배운 것이다. 다른 애들은 어땠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열심히 해도 잘 못 배운 것’은 어쩌면 선생님 탓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이 ‘강성위 되길어’ 선생님의 독일어 강의는 절대로 흥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입식으로 그저 외우는 것 외에는 기억이 전혀 없다.

이 강선생님에 대한 다른 추억은 독일어가 아니고 ‘장난치고 이상하게 때리는’ 당시로써는 ‘전통적 선생님’이 아니었던 것. 독일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수시로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했는데 그 방식이 독특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고 꼬집는 것’ 이었다. 이런 식으로 고교 1, 2년을 보내고 이과를 선택한 나는 독일어와는 상관이 없게 되었고 이 강선생님도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졸업 후에 완전히 잊고 살다가 친구 정교성에게 강성위 선생님의 이야기를 잠깐 들었던 기억,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것, 독일에 유학을 갔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은근히 속으로 놀라긴 했지만[아니.. 그 꼬집던 선생님이 독일유학?]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선생님의 이름이 들어간 책을 보게 되었고 1978년까지의 ‘약력’을 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과연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대학에서 가르치는 약력이 그 책에 적혀있었다. 정교성의 말이 맞은 것이다. 언제 독일유학을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6년 직후가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googling을 하면 더 자세한 약력과 근황을 알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에서 stop을 하기로 하였다.

 

중앙고교 천주교반 앨범사진, 1965

 

중앙고교 졸업앨범을 보고 다시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바로 그 모습을 나는 머리에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진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 바로 ‘천주교 반’ group 사진에 ‘지도 교사 격’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아하! 강선생님.. 천주교 신자였구나!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친구 정교성의 모습도 보이고..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 동창들[이태식, 김창호 등등] 의 얼굴도 보인다. 근래 나의 인생의 나침판이 된 천주교를 믿는 영혼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는 ‘꼬집는 강성위 선생님’보다는 더 친근한 천주교 교우인 ‘강성위 박사, 형제님’ 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영세 명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지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언젠가는 알 수가 있을 것이고 어떤 본당에 나가시는지도 알게 될 테니까..

 

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Georgia 10, 굴림 10:  얼마나 멋진 type shape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멋진 것은.. 아~~ 그립다, 태곳적 太古的 둔탁하지만 경쾌한 typewriter의 잔잔한 소음들.. 지금은 원시적인 얼굴의 mono type Pica, 그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아~~ 그 예전에 ‘학문적, 지적 정보’의 총아 寵兒 였던 mechanical typewriter 의 멋진 추억들이여!

나와 typewriter의 첫 만남은 1960년대 초쯤이었다. 서울 중앙중학교 1, 2학년 쯤이었나.. 나의 경기고교생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 나이에 비해서 조숙했던 그 형이 나의 typewriter에 대한 꿈을 며칠 동안 이루어 주었다. 나의 꿈은 그 것을 직접 만져보고 쳐보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괴물처럼 무겁게 보였던 Underwood typewriter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내가 하도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기에 그 형이 어디선가  며칠간 ‘빌려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것, Underwood typewriter는  ‘고철’이었다. 크고, 무거운 쇠 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어린 애는 들기도 힘들 정도였다. 당시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고 학생전용 영어 신문도 학교에서 가끔 볼 수도 있었는데 typewriter는 집에서 활자체로 인쇄물을 찍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그것의 위력에 매료되기도 했다. 영자신문 비슷한 것을 찍어보기도 하며 즐거워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의 typewriter는 물론 거의 모두 ‘중고’, 아마도 미8군 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왔을 것이고 그 값은 만만치 않은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집에 가진 사람은 거의 못 보았다. 당시에 이미 한글타자기(공병우 3벌식)도 나와 있었지만 아마도 대부분 기업체에서나 쓸 정도고 학생들은 그것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 그랬나 할 정도로 당시는 거의 모든 학교 공부, 강의 시간에 손으로 받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Typewriter가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은 대학교 4학년 당시의 겨울방학 때였다. ‘무위도식의 극치’를 실행하던 당시 나는 한강 남쪽 ‘변두리’에 속했던 숭실대학이 있었던 상도동 종점 부근에 살았는데 무슨 구실로든가 시내 그러니까 종로, 명동 등지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타자학원이었다. 왜 타자학원을 골랐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좌우지간,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유학 같은 것을 가려면 타자기를 칠 수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번 씩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배우려고 한 것이라 열심히 배우긴 했다.

타자학원에 가서 놀란 것은 이것이다. 학생들이 ‘모조리’ 여자, 그것도 아주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은 그 ‘기술’로 취직을 하려 했기에 나와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심각한 자세였고 청일점인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학원 강사는 남자였는데, 나의 출현에 꽤 놀란 눈치였고 아주 반가운 모습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나와 사무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유일한 남자들이었다.

집에 타자기가 없었던 관계로 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비교적 값싼 방법이었고, 종로2가에 학원이 있어서 나는 매일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었기에 그것은 지루한 겨울방학을 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타자 실력이 얼마였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그것은 나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최소한 touch typing만 알면 나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 이후 미국유학을 준비할 때 나는 ‘중고’ 아주 portable 한 typewriter, swiss 제 Hermes란 것을 살 수 있었다. 싼 것은 아니었어도 미국에 가면 필요할 것 같아 미리 투자를 한 것이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 나는 이것으로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왜 그렇게 그 타자 소리가 나에게는 멋지게 들렸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당시 그것을 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 그것도 회사의 비서급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간혹 남편이 논문 같은 것을 쓰게 되면 그의 아내들이 그것을 돕느라 타자를 치곤 했다. 남자가 손수 타자를 치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남자들은 나중에 쓰지 못할지도 모를 기술 touch typing을 미리 배운 셈이 된 것이다.

미국에 와서 사실 내가 직접 typewriter를 쳐야 할 기회는 별로 찾아오지 않았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꼭 typewriter로 쳐서 내는 숙제는 별로 없었다. 쓰려면 도서관에 가면 되기에 꼭 나의 것을 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바로 electric typewriter, 바로 그것이었다. electric! 보통 typewriter는 완전히 수동, manual, 온 손끝의 힘으로 치는 것이지만 electric은 조금만 touch를 하면 electric striker가 이어받은 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나는 그것을 사고 말았다. 비록 큰 돈이었어도 당시만 해도 100% 자유스러운 ‘총각’시절.. 마음만 먹으면 아무 것이나 가능하던 그 자유스러운 시절..

비록 멋으로 샀지만 실제로는 방 구석에서 놀고 있었는데, 결국은 시간은 찾아왔다. 70년대 중반 쯤 나는 West Virginia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course들 중에 typewriter를 써야 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옛날 ‘타자학원’에서 배웠던 기술, 철저히 쓸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때 보니까 나의 typing 속도는 꽤 빨랐고 제출해야 할 것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 소문을 듣고 나에게 typing을 부탁하는 classmate들도 등장했다. 여자들 같으면 돈을 받고 쳐 주곤 했지만 나는 ‘취미’로 생각했기에 모두 무료로 service해 주곤 했다.

Electric typewriter의 위력은 나중에 Ohio State University에서 논문을 쓸 때 절정을 이루었다. 남들은 모두 professional typist를 찾는 고역을 치렀지만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내서 내가 모두 치곤 했다. 그 때 나는 상당한 분량의 논문을 typing했는데, 나중에 ‘책’으로 나온 그 논문집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역시.. professional이 typing한 것과 비교하니.. 완전히 아마츄어 냄새가 났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이후 typing의 필요는 사라지는 듯 했다. 가끔 영어로 쓰는 서류, 편지들 이외에는 그것이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예상을 했으랴.. digital computer의 출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집채만한’ mainframe ‘monster’ (e.g., IBM S/360), 다음에는 minicomputer (e.g., PDP11) 이것들은 거의 모두 keypunch input으로 결국은 typing기술이 필요한 것, 나중에 나온 personal (micro)computer들 (e.g., Apple II, IBM PC) 모조리 앞 모양은 거의 typewriter의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touch typing 의 위력이 돋보이는 세월이 도래한 것이다. Touch typing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나는 그때 비로소 느꼈다.. 무언가 배워서 절대로 손해를 볼 수가 없다는 사실..

typesetsEngineer들의 필수 portable ‘analog calculator’ 였던 slide rule (계산척)은 197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한 ‘digital’ calculator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향수에 젖은 ‘mechanical’ typewriter는 personal computer/printer의 등장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리운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것들,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갑자기 무언가 쓰고 간단히 ‘하~얀’ 종이 한 장에 까~만 typeset의 짧은 문장을 쓰고 싶을 때… 그것이 그립다. computer로 쓰면 고치는 것 떡 먹기지만 한 장 정도 print 할 때 얼마나 overhead가 많은가.. 귀찮고.. 그립다.. 그립다.

그 지겹게 공해로 찌들었던 서울의 겨울 하늘아래서 꽤죄죄한 타자학원을 다녔던, 비록 동기는 뚜렷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꽤 쓸만한 겨울방학을 보냈던 것이다. 그 touch typing 기술은 현재까지도 두고 두고 나를 도왔다. 특히 빠른 typing이 필요했던 때, 나는 1960년대 말 서울 종로에 있었던 ‘xx 타자학원’을 떠올리곤 하며 빙그레 웃곤 한다.

 

¶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임마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빠가야로‘!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대구더위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내가 고친’ 에어컨 바람이 더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물론 오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 하지만 느낌에 그런 chance는 거의 zero 인가 보다. 아니면 Johnny Rivers 의 60’s classic oldie, Summer Rain을 연상케 하는 그런 추억의 비는.. 어떨까.. 하지만 이것은 거의 꿈같은 이야기다.

 

 

1968년 여름의 추억, Summer Rain – Johnny Rivers 

 

오랜만에 그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던 우리 집 두 마리의 ‘재미있는 개’ Tobey & Ozzie, 오늘은 내가 더 쳐지기 전에 용감하게 끌고 동네를 돌았다. 거의 할아버지 나이가 된 우리의 개 Tobey가 언덕을 ‘새로니의 개’ Ozzie를 앞지르며 나를 끌고 올라간다. 얘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 언덕을 나와 걸었기에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공을 던지면 총알처럼 뛰어가는 다리가 긴 ‘젊은’ Ozzie, 2주째 우리 집에 머물며 자기 엄마 ‘새로니‘를 거의 잊은 듯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혼자’ 자야만 하는 그 녀석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이곳을 걸었을 때 내가 열을 받았던 것, TRUMP FOR PRESIDENT,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SIGN이 두 곳에서 나를 자극했던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빠가’ 트럼프의 ‘쌍통’을 연상시킨다. 이 두 집이 바로 우리동네의 idiots, white trash인 셈이다. 이곳 East Cobb county는 물론 very conservative한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잘 사는 Republican white trash’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SIGN을 본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니.. 이건 분명히 내가 over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I CANNOT HELP IT..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덩치 큰, ‘젊은’ 나라는 어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날씨에 더 열을 받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래.. 이래 저래해도..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리라..

 

¶  6월 24일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오늘 평일미사를 가면서 6월 24일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 임을 매일 복음묵상 ‘newsletter’에서 보고 알았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사건’으로부터 였다. 바로 이날 6월 24일에 발현을 하신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이 ‘대축일’ 때문에 집에서 쉬던 (놀던) 그 ‘애’들이 본 것이다. 그 당시 이 발현 과정에서 이날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 말의 의미조차 잘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금요일 평일 미사엘 가면 분명히 세례자 성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짧은 강론을 듣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요새 거의 본당신부님 역할을 하시는 방문 신부님 Fr. Joseph, 뜻 밖에도 새로 부임하실 본당 신부님에 관한 얘기를 하며.. 우리의 ‘이해’를 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연은 물론 본당 Holy Family 성당에 7월 초에 새로 부임할 주임신부님이, ‘부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 라는 우리에게는 ‘폭탄’ 같이 느껴지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 방문 신부님의 설명과 ‘양해’는 나도 아는 사실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모든 가톨릭 ‘종파’들이 모두 다른 Rite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보편 된’ 것이 Latin Rite, 이곳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 하지만 다른 극소수의 종파에서는 성공회같이 결혼을 한다고.. 듣던 얘기다. 이번의 새로 부임할 신부님은 Melkite 에 속한 신부님이라서 신부님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그래도.. 하필이면.. 왜 그런 ‘소수 종파’의 신부님을 ‘주임신부’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본당 Holy Family는 지역적으로도 보수적이고 Irish Catholic의 전통이 농후한 곳인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가족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제관에서 생활을 하며 가족들과 같이 미사에 들어 온다는 광경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서는 구역문제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 같은 미국본당에 부인, 가족을 동반한 주임신부가 온다는 사실.. 참.. 오래 살다 보니..

 

¶  성모님, 좀 봐주세요..  근래 우리부부와 자주 보게 되고, 예전 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C 자매님,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member를 중심으로 새로 생긴 Guitar Friends 그룹에도 참여 열심히 guitar도 연습하고,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에 보게 된 멀게도 느껴지고 가깝게도 느껴지는 자매님, stress받는 것이 제일 싫어서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하며 조용히 살지만 할 것은 다 하며 열심히 사는 자매님.. 왜 하느님은 어떻게 그런 병고를 주셨을까. 병고라면 이미 오래 전에 가족을 통해서 겪을 만큼 겪지 않았을까, 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아픔이 아물어가며 어떻게 다시 이런 고통을 보냈을까? 오늘 아침 미사가 끝나며 어제 doctor visit의 결과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우리 부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하며, 어쩔 수가 없어진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기도를 더 열심해 해야겠군요’ 정도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무엇일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성모님, 좀 봐주세요…

 

¶  육이오 6.25, 66년:  66년, 허~ 66년이라.. 여기다 6 하나를 덧붙이면 666가 되는구나. ‘악+악+악’, triple ‘악’ 인가? 그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단어가 육이오, 유기오, 융요 (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그래,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단어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 것이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제는 ‘사학자’들도 총대를 멜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역사 교과서는 현직 대통령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는데.. 우리나라의 ‘병신 사학자님’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아직도 빨갱이 운동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육이오의 노래

 

요사이 재동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를 읽고 읽고 읽으며.. 다시 느끼는 것, 나도 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니 육이오가 없었으면, 아니 김일성 개XX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의 인생은 아마도 김정훈 부제의 ‘사직동 김판사댁‘  못지않게 ‘원서동 이정모 교수댁‘ 이란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컸을 지 누가 알랴? 어떻게 육이오의 몇 개월 사이에 한 가정, 한 가족의 운명이 그렇게 뒤집어 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보다 더 ‘처참한’ 인생의 역전을 겪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반드시 ‘김일성’을 찾아내리라.. 그 개XX를 찾아 내리라.. 아마도 그 아들 김정일 개XX도 같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찾기가 힘들 것이 분명히 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2주일 대출기한이 수개월을 지나가면서 이 책을 우선 반납하여야 한다는 stress를 느끼며 이제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저곳을 훑어보고, 비교적 가볍게 접한 이 책에서 나의 재동 齋洞 동창, 김정훈 부제에 대해서 알게 되고 느낀 것을 정리한다.

신학생 김정훈

신학생 김정훈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사실은 정훈이가 어떻게 그렇게 일찍 타계 他界 를 했던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의 집안, 가족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신앙, 성소를 가지게 되었는지..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20대를 훨씬 넘은 시절부터 쓰여진 일기 형식이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이 정성스럽게 담겨진 ‘문학적 냄새’가 나는 글로써,  꼼꼼히 ‘정독’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강 책을 훑으며 느꼈던 감정은 의외로 반갑지 않는 나의 반응이었다. “좋은 집안, 머리가 좋은 덕으로 선택된 선망의 대상으로 어려움과 고민 같은 것 별로 없이 유럽 유학 중, 좋아하는 등산을 하다가 조난사고로 운명”.. 비록 너무나 이른 인생의 비극적인 마감이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이력서적인 눈에 쉽게 뜨이는 사실들 만으로는 정훈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김수환 추기경의 서문’이 실릴 정도로 큰 화제나 영원히 남을 만한 책으로의 가치가 될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물론 이 책을 계속 읽으며 이것은 나의 ‘너무나 성급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 김정훈 유고집의 제목인데.. 과연 이것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 궁금증은 19 쪽을 보면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이 대목은 김정훈의 신학교 영적 지도 신부인 Stefan Hofer신부의 추모의 글에 있는데 그 신부님은 김정훈이 조난을 당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에 세르레스(Serles)에 등반하였던 적도 있었다. (중략) 베텔풀프(Bettel Wurf) 정상 정복자가 된 우리는 그 곳의 방명록에 우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베드로(김정훈)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 말로 무엇인가 썼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묻자 그는 독일어로 그 밑에 주를 달았다.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김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단순한 산에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깊은 종교적 느낌 속에서 산을 찾고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회고’를 보며 생각한다. 정훈이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등반을 했지만 단순히 산이 좋아서, 산이 그곳이 보이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통한 등반을 더 사랑하였던 듯 싶다. 나도 대학시절 참 산을 많이 찾아 다녔지만.. 어떨까, 종교적인 체험을 하였던 기억이 거의 없음에 정훈이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생체험은 더욱 돋보인다.

 

¶ 정훈이의 가족관계는 어떤가? 이것은 사실 기본적인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재동 동창생이지만 ‘공부를 잘 해서 경기중학교에 갔다’는 사실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재동학교 졸업 후 중학교 시절, 파고다공원 수영장에서 그가 아이(아마도 동생)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남자 동생은 있었을 듯 하다. 이 책에 가족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간단히 이곳 저곳에 나오기에 한 눈에, 명확하게 알기는 힘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묘사한 가정은 204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직동 김판사네 가정도 한국에서는 신앙으로 가꾸어진 훌륭한 이상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사리를 스스로 옳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인생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그런데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손보기가 어려워져 버린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중략) 곧 아버님 돌아가신 지 10년째가 된다. 벌써 그렇게. 강산이 정말로 크게 변했다. 아버지의 그 보화를 캐내어 나눠 줘야 할 큰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 이 순간 확연해진다. (1975년 3월 10일)

이 글은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친구 클레멘스의 가정을 부러워하는 글 뒤에 나온 것이다. 그 친구의 가정이 부러운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고 건강한 아이들, 높은 교육을 받은 것, 3남 2녀라는 것.. 이런 것과 더불어 잘 화합된 부모의 교육, 그것도 참된 신앙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 아마도 김정훈의 가정도 이에 뒤지지 않았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10년 전에 돌아가신 ‘김판사’ 아버님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에 가정은 ‘난맥상’이 드러났다는 판단이다. 그러니까.. 1965년 경에 아버님이 타계를 하셨으니까, 정훈이 경기고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혹시 그런 충격이 정훈이에게 깊은 성소의 뜻을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신앙심이 깊고, 가정을 사랑하는 아버님을 가진 정훈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로써는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천주교 가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천주교인이었을 정훈이네 가정, 혹시 대대로 내려온 ‘박해 받았던 가문’은 아니었을까? ‘비중에 컸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이곳 저곳에 나온다.

나가이 다카시의 ‘만리무영’에서 여러 대목을 읽었는데 느끼는 점이 많다. 우선 그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원만하고, 노력을 기막히게 많이 한 신앙인인 것을 알게 해 준다. 내게 특히 좋게 여겨지는 것은 그 글의 분위기와 저자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신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러하고, 어투며 그 상황까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까. 공감 가는 점이 정말 많다. 자식에 대한 배려, 아내 생각 등도 아버지 경우와 같다. 동시에 그 사람의 아들들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이나 나에게 대해 갖는 기대와 주시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불쌍하신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자녀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에 젖으셨을까? 얼마나 우심 憂心 이 크셨을까? (1972년 6월 11일)

위의 일기에서, 아버지가 권해준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저자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좋은 점’들을 열거한다. 여기서 보아도 그 아버지는 정말로 존경 받을 만한 가장이었음이 짐작이 된다. 일찍 운명을 하신 아버지, 아마도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 듯하다. 장남일 것 같은 정훈이, 이때부터 아마도 가장으로써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 20대를 꽉 차게 살아오던 정훈이의 모습, 언행, 성품 등은 어땠을까? 이것은 친구들이 본 것이 아마도 제일 정확한 것이 아닐까? 일찍 타계한 친구를 보내며 친구 대표 ‘기헌’의 ‘조사’에 잘 묘사되어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바랐던 대로, 평소에 너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기대했던 대로, 너의 훌륭한 재능과 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더욱 닦아지고 완성되어 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서른 해를 넘기고 가다니.. (중략)

너는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어. 너의 신심 생활의 진보는 언제나 앞서 있었고, 너의 정신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예리하게 우리를 압도했었지.

책 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너는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러면서도 네 마음은 언제나 뜨거운 인정이 넘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낀 너였는지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잘 해 주었어. 특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던 너였지. 너의 특징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던 너.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나누고 싶어 너는 애썼지.  (중략) 그러기에 친구이면서도 우리는 너를 존경하였고, 우리를 대신해서 큰 일을 해 주리라 믿었다. (중략) 착하고 아름답게 산 너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백 배의 보상을 틀림없이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너와 영결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1977년 6월 7일, 정훈이를 보내며.. 친구대표 기헌이가)

비록 고인을 기리는 조사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정훈이의 이목구비, 면모, 표정, 성격 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다 보인다. 나로써는 이것이 ‘성인’ 정훈이를 상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기대를 받았던 ‘장래가 촉망되던 큰 재목’ 이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 가톨릭 신부와 여성, 신부 지망생 그러니까 신학생이었던 김정훈은 어떤 여성관, 여성 경험을 가졌을까..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멋진 남자’에게 여성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나와 동갑(돼지띠) 이기에 1970년대 중반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가는 것이다. 다만 나의 background와 그 이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나와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한다.

우선 절대자 하느님, 예수님을 자연스레 알고 믿는 그, 완벽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유복한 가정.. 등을 생각하면 정말 ‘자격을 갖춘 멋진 여성’이 그의 주변이 있었을 듯 하다. 다만 이 유고집에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J 라는 여성만이 눈에 뜨인다. 과연 J란 여성은 누구일까? 거의 한 chapter “J와 인생” 이 J 라는 여성에 관한 일기인 것을 보면 ‘신부와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에서 가장 심각한 인물이었음 에는 틀림이 없다.

J에 대한 나이, 출신배경, 알게 된 경위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집 식구들에게는 알려진 사람, 공개된 데이트였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부를 지망하는 신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들일까? 결혼을 전제로 할 수가 없는 100% 순수한 지적인 만남이었을까? 계속되는 깊어지는 만남에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자신의 결심도 보인다.

J와의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 하고, 내렸으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

1. 실험적인 사귐은 있을 수 없다.

2.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하게 됨.

3. 그녀를 위해서도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나의 결론은 지어졌는데, 실행은 빠를수록 좋다.

4. 언젠가 끝에 가선 내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내 햄, 내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니 주님, 빛과 길을 주소서. 이럴 때 주님을 찾는다고 나무라지 마소서.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조직적’으로 차근차근하게 문제의 본질과 방향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문제의 심각함과, 어려움을 알고 그는 결국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며 돌아본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절대로 혼자였다. 절대자가 절대로 나에게는 없었다. 혼자였던 나는 모든 것을 ‘나침반’이 없이 헤매며 허우적거린 세월들이었다. 나와 정훈이의 20대 중반은 이렇게 하늘과 땅만큼 멀리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은총을 일찍 받았던’ 영혼이었다.

곧바로 그는 J에게 쓴 ‘헤어짐의 편지’를 쓴다. ;7월 23일자 일기에 편지가 실려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편지는 일기인가 아니면 실제로 J에게 보내진 편지인가 하는 것이다. 이별의 편지, 참 balance와 courtesy, essence가 모두 있는 편지가 아닐까?

J씨 귀하,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있어야 할 순간이고 또 그 때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이며 글 같은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글로 써야 제 뜻을 그래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기존의 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기가 뜻을 정하고 온 가능성을 모으고 있는 터에 이와 상치되는 사상 (事象)을 지닌다는 것은 일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가 확실한데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저로써 더 이상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J씨를 크게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쓰라림만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이것을 알면서도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린 거지요.

지금 이 글월을 쓰면서 저는 이 글의 의미가 엄청난 데 스스로 놀랍니다. 이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결단일 뿐 아니라 저로서는 제 삶의 의미를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이 일방적이고, 제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고 또 회피가 아니냐고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일이 그런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냐고 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또 그런 만큼 얼마나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를  J씨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몇 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만나고, 또 한 번 내린 결정은 단호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씨는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 심정도 몹시 단호함으로 차 있습니다. 아니, 단호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소도 아시고 또 9월에 학관에도 나가겠지만 제게 소식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 말했다고 한 것처럼 저도 J씨가 그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그 동안 얘기했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 김정훈

이 책은 그 동안의 우정에 대한 저의 기념의 선물입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별편지를 보면, 그의 확고한 결심을 J에게 전하며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이 정도만 아주 단호한 결심이 아니었을까? 이런 것으로 보아서 J라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정훈이를 만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아주 나이에 비해서 성숙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9월에 학관에도 나간’다는 구절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도 같은 ‘학관’에 다녔던 것은 아닐까? 학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대강 그 당시에는 ‘학원’이라는 말을 썼는데.. 학관은 종류가 다른 것이었을까? 마지막 구절에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이것으로 J라는 여성도 무슨 뚜렷한 목표를 향한 ‘지식층’ 여성이었을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 ‘편지 일기’ 이후에도 그는 사실 J를 잊은 것이 아닌 것 같다. 계속 J를 만나며 그녀에 대한 글이 나오니까.. 아마도 서로가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한’, ‘진정한 친구’로써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8월 21일의 일기는 J에 대한 끈질긴 미련과 자신의 필연적인 결심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J를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 금요일과 월요일에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면서도 보고 싶다.

그냥 당겨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왠가? 누가 무엇이라 한다 해도 이런 마음은 참 순수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현상이다.

간단한 기록으로 끝나려 했는데 또 길어진다. 내심에 잠겨 있는 것이 들고 일어나는 까닭이다. 파헤쳐 본다는 것도 힘에 겨웁다.  문제는 결단만이 해결의 관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결단을 내렸으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도 포기하고, J와 같은 사람과의 사귐도 금기(禁忌)인 신부가 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부행(神父行)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일 터인데 과연 그런가? 어째서 내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사제에다 걸었는가? 사제가 무엇인가? 그 본질을 분명히 보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비교적 분명하게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신부에 대한 정의, 그 신원(身元)은? 고전적 정의로서는 내게 그 의미가 약하다.

위의 일기로 나는 그가 아직 신부가 되려는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을 안다. 하지만 계속 내면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적으로 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이성, 그것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찌 간단히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김정훈의 ‘결단의 힘’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인 여성에 대한 사랑, 관심, 끌림 등과 신부가 되려는 성소의식이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몇 개월로 1973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김정훈, 드디어 무서운 결단을 내리며 편지를 쓴다. 신부가 된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J씨 귀하.

이 시각을 위해 사귐을 해 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는 초조하리만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뜻밖의 이 글월을 받고 놀라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을 지고(至高)로 모시고 있고, 그 동안 J씨나 저나 거짓 한 점 없이 서로 성실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벌써 짐작을 하실지 모르나 정말 그렇습니다. 결단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저는 신부행(神父行)을 결단했습니다. 설령 각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저의 그 선택에는 후회나 변함이 없습니다. J씨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J씨가 말한 뜻대로 그 동안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피치 못할 불성실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제가 J씨를 아끼는 그만큼 이 문제는 절실합니다. 이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어떤 식으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항상 의식한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껏 회피하려 했으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단호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가 쉬웠고, J씨는 어렵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 사귐이 그렇게 순수했던 것처럼 이 시작도 서로에게 순수해야 하고, 전적인 동의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J씨는 J씨의 길을 힘차고 명랑하게 가십시오. 저도 제 길을 용기 있게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상이 제가 쓰고 싶은 전부입니다. 사실 J씨는 이 글의 진의(眞意)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집 전화번호도 알고 또 찾을 수도 있지만 저를 찾지 마십시오. 이별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저도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

1973년 12월 26일 김정훈

정중하고 진심이 우러나오는 글이지만, ‘영원히’ 남녀로써 헤어져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미련을 0%도 남기지 않고 그는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라는 작별인사로 끝을 내는 그.. 얼마나 괴로웠을 결단이었을까? 그 나이에 나라면 ‘절대로 절대로’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1974년 봄 무렵 유럽 유학을 떠나는 그는 아마도 그 때서야 J씨를 조금은 더 쉽게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남녀관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Part 2로 계속 됨)

 

5월 1일의 친구들이여 용현아, 창희야.. 잘들 있었는가? 다시 5월 1일이 일년을 지나서 우리를 이렇게 ‘허공’에서 만나게 하는가? 허공에서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는가? 생각과 의식적 역학으로 우리는 일년 동안 계속 만날 수 있으니까. 이래서 일년의 흐름을 가늠하며.. 자네들의 지난 지난 일년, 옛 친구의 정을 이런 찬란한 어머님의 계절에 다시 한번 추억하는 것.. 나쁘지 않네..

코흘리개 원서동 개천시절부터 연인들까지 합세한 대학시절들까지.. 우리의 시대, 역사 속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사진 같은 그런 추억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제는 다시 이 세상의 친구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나가는 생각이 들 때는 하찮은 ‘느끼고 보여야만 하는’ 이 세상이 지나면 다른 그림들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지난 일년 어디서라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냈으리라 믿고 싶고, 우리 집도 하느님의 보호로 비교적 건강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 하고 싶다. 너희들은 분명히 출가한 자식들이 있으리라 추측을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두 single을 고수하는 이상한 풍조에 휩쓸려 편안한 ‘혼자의 인생’을 고집하고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것만은 조금 progressive한 쪽인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기들의 인생은 이미 우리에게서 떠난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것인지 그것은 공식이 없지 않은가?

70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자네들은 나머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사는가? 나는 아직도 뚜렷한 계획이 없지만 조만간 어떤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예전에 그렸던 노후인생의 모습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다른 세계관에 의한 것들이 우리의 앞에 나타나는구나. 아마도 그것이 진정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아무리 ‘나의’ 세계관이 엄청 변했어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역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일 것이다. 내년 2017년 5월 1일에 다시 만나자! Adios Amigo!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4.19 에 대한 것, 물론 나의 기억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당한 부분은 news media에 의한 것들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당시 서울의 일간지가 제일 그렇고 나머지 것 중에는 미국의 LIFE magazine도 한 몫 낀다. 특히 당시의 ‘최첨단’ 사진기자, 기술을 자랑하던 잡지라서 그 역사적 가치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 화보 이외에도 사설, 논설 등도 수준급이었는데, 다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금은 left-leaning (좌향적)  한 쪽이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든다. 4.19 학생 혁명이 난 후 처음으로 기사와 화보를 다룬 것이 5월 9일자였고 거기에는 아주 비중 있는 ‘논설, editorial’이 실렸다. 제목이 바로 The Student Phenomenon, 학생현상(?).. 그 전문을 여기에 발췌하였다.

논설의 주제는 바로 ‘학생’들이다. 한국의 학생을 중심으로 세계도처의 학생들,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하였다. 이 논설을 쓰게 된 동기는 ‘분명히’ 한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곧바로 터키에서 4.19 와 비슷한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의 친구’ 멘데레스 수상이 실각을 하였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난처한 사태가 아닐 수가 없었다. 두 나라가 거의 같은 미국의 ‘맹방’, 제1의 적인 소련의 공산당과 총칼로 맞선 나라가 아닌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보니 나라 안에 조금 잡음이 있어도 외교적으로 무마할 정도였다. 4.19 혁명 당시도 미국은 한국 학생의 ‘유혈사태 희생자’정도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에 일이라도 이 사태를 이용해서 김일성 개xx가  제2의 6.25 라도 꿈을 꾼다면 그것이 진짜 미국의 악몽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맹방의 지도자, 사실 또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터키 또한 비슷한 상황이고 보니 한쪽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 다른 쪽은 나토 NATO로 묶여 있는 상황의 미국, 참 입장이 어려웠을 듯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자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태는 흘러갔고 미국의 입장 또한 큰 문제없이 해결 된 셈이다.

LIFE magazine의 논설은 다음 사실을 주목하였다.

이 두 나라의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지독하게 심각한 미국 소련간의 냉전상태 라는 사실. 이 편이 아니면 저 편, 중간이 없었던 그런 심각한 냉전 상태에서 ‘약소국’들은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 남용이 허용되었고, 그들이 독재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을 견디지 못한 첫 그룹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미국의 경우,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운동권’ 형성이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의 혁명이 ‘완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문제는 아마도 ‘노예제도의 전통’을 고수하는 주들과 연방정부간의 마찰, 충돌이다.

이어서 논설은 유럽의 사례를 들며, 1848년 Hungary 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예로 든다. 근래의 예로써 1956년 역시 Hungary의 소련침공을 유발시킨 ‘자유운동’을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운동들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지만, 극단적인 예외는 세계 제1차 대전을 유발시킨 ‘사라예보사건’ 이었다.

논설은 다시 LIFE magazine의 progressive value를 다음과 같은 ‘미국 흑인차별’의 사건들에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South (남북전쟁의 남쪽 측)에서 흑인 학생들이 제도적인 흑백차별에 항의해서 식당 같은 곳에서 백인들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데모’를 벌리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남측의 웃기는 전통’에 대항하는 이런 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신세대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덕이 아닐까.

동정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논설은, 학생들이 정부의 극단적인 탄압적인 정책에 반발을 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정치깡패, 정치경찰들이 얼마나 웃길 정도로 비행을 저질렀던가? 그저 휴전선 넘어 김일성 개xx가 ‘무서워서’ 침묵만 지키던 일반 국민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그런 목불인견 적인 꼴들을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런 백주대로 강도 같은 정책을 싫어한 것은 한국 대학생만이 아니었음을 주지하는 논설은 당시의 국무장관 ‘허터 Herter‘와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맹방이고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탄압적인 정책이 안보를 위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국무장관 허터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대한 것도 거의 같은 ‘미소 냉전’의 산물이었다. 공산당을 잡으려는 부패정권에 대항한 학생들의 데모와 항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미국의 기본 자세는 이곳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미의 좌익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쿠바 카스트로 를 왜 미국에 반대하는가 항의를 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스트로 Fidel Castro 가 ‘공약’을 어기고 ‘자유를 억압’ 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것의 밑에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논설은 한국과 터키의 학생들을 지지하는 결론을 내린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불만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의 credo가  Don’t tread on me! (밟지 마!)라는 사실임을 주지해야 한다.

논설을 4.19혁명이 난지 66년이 지난 뒤에 읽으니 격세지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적으로 가치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느낌이니까. 기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논설이 조금 과소평가한 낙관적인 분석은: ‘미국 학생들은 절대적 자유가 보장된 덕분에 조용할 것이다’ 라는 것.. 이 논설이 쓰여진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서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반정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겪게 되니까.. 월남전의 정당성에 대한 불만에 의한 것, 이것은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가 ‘보장, 허용’ 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irony가 아닐 수가 없다.

 

LIFE cover

LIFE cover

There is a fascinating pattern emerging in Latin America, Korea and now Turkey. What is taking place in these widely separated lands is an outburst of resentment by university students against governments which – partly as a result of the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 have become tyrannical. And what the students are proving – which free men must of course welcome – is that young, spirited and determined people can still make tyrants tremble, and even totter.

Political revolt by university students is a well-known story abroad, thought not common to our own land. This may be a reflection on the seriousness and maturity o f U.S. students but, whatever the cause, other students around the world are politically minded by traditional and are accepted as a dynamic political force.

Perhaps the contrast exists because our own revolution was so complete – in establishing the basic freedoms of conscience, press and speech for once and all – that there has been no need to question what it has settled. The greatest challenge was met in our War Between the States which settled forever that no man may be another’s master.

In Europe, where things have been different, it was a young poet, Sándor Petöfi, who in 1848 set off the revolution in Hungary against the tyranny of the Habsburgs, only to be crushed later by the Russian czar. And it was the students of Budapest again in 1956, acting in the name of Petöfi, who overthrew – if only briefly – the czar’s successors. Serious, impassioned Italian students were the backbone of Garibaldi’s Risorgimento. In France, it was students who in 1897 rioted in defense of Captain Dreyfuss. Students were the nihilists, the anarchists, the Marxists of Russia. What all these movements had in common was idealism backed up by willingness to fight. Sometimes this violence was bent to good ends and sometimes ill. It was, we must remember, a Bosnian student named Princip who at Sarajevo lit the fuse which doomed more than eight million men.

Most of these revolts of the young have been beneficial. We are seeing something of that sort now in our own country. By their sit-ins Negro students in the South are demonstrating the silliness of a system which denies the right of humans to eat alongside one another. They are getting an impressive amount of support from which students outside the South. They are getting some, too, from which students in the South, who find they cannot rationalize or defend these paradoxes. The spread of education in the South has produced a force to make men think.

The students who have overthrown the government of Syngman Rhee in Korea have obviously been stirred to the depths by oppressive practices. Rhee’s motives were understandable in a land which has been horribly devastated by Communist incursions and must still live beneath the gun of possible new attacks. This is true in Turkey, which lies immediately beneath the guns of the vast Soviet Union and is subjected to continuous and insidious subversion. Yet, when all is said and one, the fear of losing freedom can never be made an excuse for suppressing freedom – certainly not as a permanent policy.

The demonstrating students who are insisting on freedom have an ally in Secretary of State Herter. In his denunciations of the killings of South Africa and Korea, he has made clear that he will not allow the common interests of defense to put the U.S. in the position of endorsing practices which offend our basic principles. The students have another wise friend in President Eisenhower. On his Latin American visit Chilean students asked him trenchant questions about our alleged hostility to Fidel Castro. The President’s written answer to them left little more to be said: Castro has betrayed “the ideals of freedom of expression,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and the right freely to choose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course, that is also what Rhee did, and what Menderes is doing in Turkey. Students are letting them know that the time is later than they thought – and are right to do so. And we are right to endorse their legitimate grievances and their right to have them redressed. That is what the world would expect – and is entitled to expect – of a nation born in revolution and whose credo was, “Don’t tread on me!”.

 

아래의 사진을 보라.. LIFE에 실린 내 또래 아이들의 모습들.. 국민학생, 중학생이 섞인 이 데모는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송요찬 장군휘하의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내 중심을 장악했을 때 ‘군인 아저씨 우리를 쏘지 마세요’ 라고 다시 학생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외쳤다.

당시 계엄군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며 자기 국민을 ‘보호’하였다. 1년 뒤 5.16으로 ‘그 고마운 군인아저씨’ 들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진을 유심히 보며.. 서울 시청을 뒤로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는 아이들.. 바로 나를 보는 듯 했다. 꾀죄죄한 구제품 옷, 신발, 교복을 ‘걸치고’ 골목 뒤에서 놀다가 나온 모습들.. 바로 나의 모습, 이 사진의 ‘아이’들 다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되었을 것인데 그 날 ‘형님 학생’들에게 이끌려 나온 사연이나 기억하고 있을는지..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아침에 달력을 보니 4월 19일.. 화요일, 물론 4.19라는 숫자는 56년이나 지났어도 어제처럼 느껴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만큼 비록 세월의 깊이에 맞게 뇌의 깊숙한 곳에 잠겨있어도 아주 ‘큰’ 세포에 간직된 것이라 그럴 것이다. 그리고 화요일.. 이었다. 1960년의 4월 19일도.. 99% 화요일이었다는 기억. 5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을 함은, 그 세월이 그렇게 역사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세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일제 36년, 유럽의 100년 전쟁.. 등에서 느꼈던 그 햇수는 너무도 길었던 것이지만 내가 이런 56년을 어제처럼 기억하게 살면서 느낀 것은 너무나도 짧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것이다.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당시의 데모 열기 함성과 카빈 소총 소리, 어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수 많은 군중들.. 그렇게 찬란한 4월의 계절은 소음과 정적이 교차하는 순간들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새카만 교복의 물결, 심지어 대학생 형님들까지도..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뛰고, 트럭을 타고, 소방차를 타고 서울의 중심가를 돌고 도망가고 숨고 쓰러지던 그 때.. 모습들.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공격을 받던 날 우리 중학교 1년생의 혼란한 심정.. 누가 누구를 쫓아가고 쫓겨가던가.. 누가 우리의 역적이던가? 우리들은 그저 놀란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들려오던 요란한 카빈 소총 소리들.. 종로 경찰서 지붕에 설치된 만화에서만 보던 ‘기관총’들.. 곧 이어 아스팔트 길에 우람한 바퀴자국을 내며 웅장하게 들어오던 탱크의 무리들.. 4월 달.. 4월 달 ,1960년의 찬란한 꽃이 만발하던 4월 달이었다.

쓰러진 형님, 누나들.. 그렇게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던 그들.. 지금은 다 어디에 가셨는가? 그들은 과연 그들이 싸우던 목적을 이루며 살았던가? 혹시 그들도 나중에는 ‘역적’들과 같은 무리를 닮아가지는 않았던가?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이승만, 이기붕, 이강석, 프란체스카, 장면, 윤보선, 허정, 그리고 장도영, 박정희..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의 열차에 남았던 역사 속의 그들.. 모두 어디에 있는가? 젊으셨던 우리 어머니, 그래도 이승만의 잘못을 지적하시던 지성을 가지고 침묵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우리는 아직도 그 말의 뜻을 새기고 감사하며 산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그것에서 배우고 최소한 되풀이 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기에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2016년 4월 19일, 싸늘한 아침에 머리를 맴도는 넋두리, 이렇게 정리를 하지만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정상이다.

bully-1깡패.. 흠.. 참 더럽고 싫은 말 중에 하나다. 귀여운 깡패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99.99999% ‘증오의 대상’ 중에 하나다. 이 말이 주는 ‘더러운’ 느낌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고 요새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참 잘 만들어진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어원은 무엇일까? 깡+패.. 그러니까 ‘깡, 오기’를 부리는 ‘패, 거리’ 정도 아니었을까? 소리지르고 깡만 부리면 통한다고 생각하는 불쌍한 쓰레기들인가.. 상관없다. 싫고 증오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나의 blog에서 ‘회고록 류’ 그러니까 memoir 는 가장 쓰기 힘든 것이지만, 그만큼 쓰는 보람은 그에 비례해서 제일 크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회고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에 따라서 일어나는 감정은 참 다르다. 그러니까 즐거운 추억이나 개인 역사를 더 잊기 전에 더 쓰고 남기고 싶었고, 나의 blog에서도 대부분 아련한, 즐거운, 포근한 그런 추억들을 주로 쓰곤 했다.

반대로 기억하기 괴로운 것들은 어쩔 것인가? 당연히 요리조리 피하며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그 중에서 ‘깡패의 추억’은 가히 괴로운 것 중에 괴로운 것, 잊고 싶은 것이다. 어떤 ‘개인적 사건들’은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잊고 싶었던 것들인데 분명히 나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버젓이 살아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의 나이가 70에 육박하면서, 조만간 早晩間 에 나는 이것을 정리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은 항상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사실 불편한 것이어서 성당에서 고해성사 告解聖事하는 기분으로 깡패의 추억들을 다 ‘정리 해고’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것, 숨어있는 ‘이글거리는’ 증오심도 나의 dark side의 일부가 되었다면 나는 이것을 가끔 하는 고해성사에 포함시켰어야 되었을 것이지만 그만한 값어치 조차도 나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싫었다.

깡패, 깡패들.. 내가 말하는 깡패는 100% 소위 말하는 ‘조무래기, 피래미 급’으로 이들의 특징은 철저히 ‘약육강식’의 쓰레기 철학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의 불만과 욕구를 철저히 채우려는 한마디로 ‘불쌍한 쓰레기’급 인간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연령층인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말하는 인간들은 모두 미성년이거나 지독히 젊었던 깡패들이어서 이것은 지금은 조금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떠한 환경이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그 ‘쓰레기’들이 과연 자기들이 하는 짓이 옳은 것인가..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 보고 한 것이었을까.. 집단심리에 의한 불우하거나 불행한 자기 환경의 산물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자라던 6.25 이후의 역사적인 환경은 사실 어쩔 수 없는 깡패들을 무수히 배출하여야만 했던 암울하고 가난하고, 법 이전에 주먹이 훨씬 효과적이었던 그런 시절이긴 했다. 게다가 급수가 아주 높았던 ‘정치깡패’들이 판을 치던 그런 시절도 겪었다. 한마디로 ‘법치국가’란 것은 말 뿐이던 ‘폭력의 사회’ 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던 6.25 전쟁 후의 대한민국 실정.. 나는 그런 ‘남자들의 험악한’ 환경에서 알맞게 적응을 못했던 것이었을까? 특히 가부장제가 굳건하였던 그 시절 아버지 없었던 집의 내성적인 남자아이가 사회적으로 겪었던 것은 남들보다 더 심각한 경험들이었다.

이번에 더 미루지 못하고 ‘깡패의 추억’을 논하게 된 마지막 계기는, 얼마 전 같은 성당구역의 교우형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그 형제님 왈 曰.. 자기가 “깡패였다”고 서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도 주저함이나 부끄러움이 그 태도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이 탓인지 예전에 보던 그런 ‘나쁜 깡패’의 인상을 풍기지도 않았다. 모두들 오래 전의 아련한 추억 정도로 무협영화를 보는 정도로 들은 듯 하였지만 나는 복잡한 생각 뿐이었고, 이렇게 ‘정리해고’를 더 미룰 수는 없다.. 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옛날 옛적의 ‘나쁜 놈들’ 이들을 용서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증오할 것인가?

내가 반세기도 넘는 옛날 옛적 70년대 초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낀 것도 깡패에 관한 것이었다. 이 나라 이 땅에는 주변에 추악한 깡패들이 안 보였던 것이다!  최소한 나의 눈앞에 그 놈의 ‘쌍판’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하! 내가 살 곳은 바로 이곳이로구나.. 쾌재를 불렀고 그 이후에도 나의 주변에는 깡패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인가? 왜 이렇게 같은 지구 위에서 사는 곳이 다른가?  경제적인 요인이 제일 먼저 떠 오르고 다음은 사회, 문화적인 것 등이 있지만 결과는 모두 ‘종합판’일 것이다. 복합적인 것들..

미국에도 bully 정도의 ‘순한 깡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경험했던 ‘한국판 bully’와는 game이 안될 정도다. 욕을 하는 정도가 하늘과 땅의 차이고, 폭력의 정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불운과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며 남을 괴롭혔던 대한민국 조무라기 깡패들, 한마디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내가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정말 무서웠던 사실은 ‘맞아서 아프고 수치심을 느끼고’ 하는 것 보다는 ‘꿈에라도 기관총으로 이들을 모조리..’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상상이지만.. 이것이 상상에서 벗어나는 것도 상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괴로운 추억들도 나이가 들면서 다 수그러지고 조금씩은 ‘자비’의 심정으로 그 쓰레기들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반전 scenario’도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역시 ‘나는 절대로 그런 쓰레기가 될 수가 없다’.. 였다. 그 쓰레기들.. 환갑을 넘기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기들의 과거를 어떻게 회상을 하며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해 줄까.. 재미있는 상상도 꼬리를 문다. ‘할아버지가 옛날에 깡패였고, 누구누구를 매일 패 주었다’ 고 자랑을 할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괴롭힘을 당한 애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심정이 들었다면 괜찮은 노후를 맞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꿈 속에 ‘기관총으로 모조리..’ 라는 표현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번 놀란다. 미국은 근래에 들어서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이 실제로 ‘기관총 급의 무기’로  깡패들은 물론 옆에 있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mass shooting이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나는 100% 그 ‘정신병자, 피해자’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mindset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 모두 극단적인 case이지만.. 원인을 따져보면 ‘쓰레기급 깡패’에게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정말로 나의 마음 속 깊이 수십 년간 눌려있었던 나쁜 추억, 잠재의식, 분노..등을 ‘정리해고’할 때가 왔다. 나를 괴롭혔던 ‘쓰레기’들.. 용서하고 싶고 그들도 진정한 회개를 하며 노후를 맞이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용서하려는, 하는 나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혼자의 힘으로 안 되면 ‘높은 곳’의 도움을 청하고 싶다.

 


Sam the Sham & Pharaohs – Wooly Bully – 1965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  El Niño Christmas Holidays   한 마디로 ‘따뜻한 성탄절’을 말한다. 지나간 몇 년간 이곳 지역은 아주 추운 겨울을 경험했지만, 그런 weather system이  Northeast지방(I-95 corridors, New York, Boston)에서는 물러가는 모양으로 National news 에서는 온통 ‘따뜻한 겨울’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5년간은 이 지역에서는 희귀한 white Christmas도 보았고 고드름과 폭설 같은 ‘북방’에서만 볼 수 있던 것도 보았던 세월이어서 사실 holiday의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는 있었다. Northeast 지방에서 그런 기후 pattern이 서서히 물러가는 모양으로, 이것이 ‘엘 니뇨‘ 현상이고 하는지 (따뜻한 태평양 수온), 앞으로 몇 년간은 그쪽 지방은 다시 비교적 조용하고 ‘따뜻한’ 성탄절이 되는가 보다. 우리가 사는 Southeast지방은 3개월 장기예보가 ‘wetter, cooler’ 라고 나와서 겨울이 가기 전에 눈(雪)같은 것을 기대해 볼만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즈음한 날씨는 ‘wet, very warm’이라고 예보가 되어서.. 미리 심리적으로 ‘white Christmas는 물 건너 갔다’ 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  Advent spirits, 2015   나의 전통적인 12월은 한마디로 Charles Dickens 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에 나오는  Christmas Past 라고 할 것이다. 평소에도 “현재보다는 과거”를 더 많이 생각하면 사는 나에게 12월이 되면 어떨 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감상적 늪에 빠지기도 한다. 설상가상 雪上加霜으로 나이가 ‘고령 高齡’으로 접어들면서는 나이를 더 먹게 되는 년 말이 되면 더욱 축~ 쳐지고, 우울해지기도 하는 괴로운 시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비정상’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분명히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아서, 나의 감정이나 느낌을 남에게 보이기도 싫었다. 한마디로.. 결국 12월은 심지어 즐겁지 않았던 season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서서히, 천천히’ 나는 이런 ‘bad trap’ 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서 올해는 현재까지 중에 ‘최고’의 spirit을 찾게 되었다. 그러니까.. Christmas present를 찾게 된 것이다. 거의 “기적”과 같은 이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참 인생이란 오묘하기만 하다.  

예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 중에는: (1) Holiday decoration은 빨라도 12월 20일 이후에 하고, (2) Christmas carols, movies 같은 것도 그 이후에 즐기고.., (3) 가급적 holiday shopping같은 것을 피하고 정 필요하면 딱 하루 날을 잡아서 하고, (4) 진정한 성탄 holiday는 12월 25일에 시작이 되어, 다음 해 1월 5일 (12 Days of Christmas) 이후까지 지속된다. 작년에 이런 것들을 부분적으로 단행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뒤 느낌이 좋았다. 올해는 ‘모두’ 실천을 해 볼 계획으로 오늘까지 Christmas tree 장식 같은 것을 hold해 오고, carol이나 movie같은 것도 안 듣고, 안 보고 있다. 어떨까? 이것은 사실 ‘교회’에서 오랫동안 권장해 오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제야 그 참 의도를 알 듯한 것이다.

과거에 성탄 전날까지 요란법석 시끌벅적 하다가 성탄 아침에 무섭게 선물을 나누어 뜯어 ‘버리고’, 거의 거짓말 같이 ‘모든 것’이 끝나던 정말 괴상한 풍습..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보냈을까.. 성탄 씨즌이 성탄절부터 시작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외면하며 살았는지.  좌우지간 이러한 것이 그런대로 진정한 ‘대림절의 정신’일 듯하다.

 

¶  염경자 누나   바로 얼마 전에, 나의 2011년  blog post: ‘가회동의 추억‘에 누가 찾아와 댓 글 comment를 올려 놓았다. 알고 보니 그 ‘사연’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고 꽤 놀라기도 했다. California (LA area)에 사시는 나와 같은 재동국민학교 졸업, 6년 정도 후배, 송요한 씨가 그 주인공인데, 오래 전 가회동에 같이 살았기에 나의 글을 찾았고 본 듯하다. 게다가 레지오 단장을 역임한 같은 천주교 교우.. 그러니까 송요한 형제님, 얼마나 반가운 사실인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가회동 내가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을 곳에 사셨던 듯하지만 내가 더욱 놀란 것은 내가 살던 ‘주인’ 집의 ‘미인중의 미인‘, 막내 따님 염경자 누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참, 인연도 묘한 것이.. 송형제의 wife와 염경자 누나가 같은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이라고 하며 그것도 같은 지역에 사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연관이 될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희미하게 알고만 있던 ‘주인집’ 소식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흠뻑 젖었던 그 당시의 한 가족들을 찾은 것이다. 이것으로 tiny blog의 ‘무서운 위력’을 다시 실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추억과 기억이 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의 사람’들을 다시 찾는 것은 오래 산 보람이라고 할 것이다.

Jul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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