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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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체, 성모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하며 찾아간 우리의 영적인 고향, 아틀란타 순교자 천주교회 주일 아침 8시30분 ‘진짜 onsite’ 미사,  Pandemic 이후 5개월이 넘는 긴 세월의 가뭄을 깨고 ‘진짜 영성체’를 하였다. ‘신영성체’가 아닌 ‘영성체’였다. 손에 성체를 받아 나의 입으로… 이런 것에 무덤덤한 나도 별 수가 없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성모님의 손길!

모든 분위기가 좋았다. 당장 생각에 이 정도면 매주 이 시간에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성급한 결정까지 내린다. 물론 연숙도 대 찬성이고… 또한 8시 반에 온다는 조시몬 형제까지 곁들여서 일요일 오전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몇 명의 아는 얼굴들을 보고 감개가 무량하기도 했다. 역시 그 동안 알건 모르건 간에 정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 나온다고 하던 헬레나 자매가 늦잠을 자서 못 나왔다고… 이것으로 나는 이 가정에 평화가 조금씩 깃들인다는 성급한 진단까지 했다.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온 김에 내쳐서 ‘운동, 운동, 운동’을 결심하는 연숙과 동네를 걸었다. 걷는 길에 B 선생 댁에 잠깐 들려 과일 box를 드리고 왔다. 며칠 전에 수박을 주시고 간 일,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 가정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희망은 아직도 줄지 않고 있다.

 

오늘은 정말 정말 오랜만(한 달?)에 조금 들뜨며 평온한 마음으로 일요일 오후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제일 큰 이유는 나의 눈 앞의 광경들이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끌어서 그랬던 것… Pandemic 전 일상적인 외출 후에 귀가하던 때의 느낌이었을까?

 

드디어 8월 첫 화요일이 되었다. 화요일, 화요일, 레지오 화요일… 5개월 이상 잊고 살았던 화요일아침의 성당행 drive.. 하지만 오늘부터는 편하게 집에서 카톡 음성채팅으로 ‘약식 주회합’을 시도했다. 우선 ‘가상 주회합’, 이런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커다란 심리적 도움을 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주안점이다. 활동 내역 보다는 모두 음성으로나마 성모님 군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서로가 확인하는 데에 큰 의미를 두자. 과연 어떻게 이것이 진행될 것인가.. 사실 나 자신도 궁금하기만 했지만…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났다. 우리 자비의 모후, ‘약식’ 주회합, 서로의 음성을 느끼며 실제로 모여서 하는 것에 못지 않은 기쁨으로 무사히 기도를 나누었다. 특히 신 단원 카타리나 자매가 있었고, 안나 자매님이 묵주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반가웠다. 첫 번째가 이 정도로 큰 문제가 없어서 앞으로는 기술적인 문제는 별로 큰 걱정을 안 해도 될 듯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가는 가가 제일 큰 관심사다. 이제는 화요일에 이런 중요한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조금 생기가 나고 사는 맛도 느끼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성모님.

이제 불현듯 중지 되었던 것, 레지오, 그것이 일단은 정상 쪽으로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나으면 나았지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고 일주일 우리의 생활에도 조금 활력소가 가미 되리라 희망한다.

오늘 평화방송의 매일 online 미사, 누구의 탓인가? 양쪽 모두 문제가 있나? 어쩌면 미사를 그렇게 장례미사를 연상하게 하는, 괴로울 정도로 느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미사해설자는 마치 우리의 폐활량 훈련을 시키는 양 ‘기록적’으로 느리게 느리게,  집전신부님은 그것에 맞추었는지, 아니면 경쟁이라도 하는지 정말 정말 쳐지고 느리고…  정상적이면 25분이면 끝나는 것이 35분이 훨씬… 도대체 미사란 것이 무엇인가? 영어로는 흔히 celebration을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장례식처럼 하는가? 그렇게 엄숙하고, 가라앉는 기분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  매일 매일 각종 모습, 말투, 언동의 집전자를 경계하면서 마음을 졸이지만,  그것을 미리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한마디로 ‘정말 사람들 예의, 배려, 감각이 없다’…

어제 도라빌 순교자 성당의 online 주일미사, 이제는 구면인 방문신부가 집전을 한 것은 큰 뉴스가 아닌데, 나는 미사에 집중해야 될 머리 속에서는 갑자기 무엇인가 다르게 보이는 집전자의 ‘얼굴모습’ 으로 차있었다. 원래 이 신부의 hairstyle에 대한 거북함이 일었는데 이번에는 난데 없이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 허~~ 또 다른 잡념이 머리를 흔든다.  함께 머물고 있는 거주신부의 ‘해괴한’ 영향을 받았나…  콧수염이 잘 어울리면 큰 문제가 아닌데… 암만 보아도 이것은 distraction의 모범 case인 것이 문제다.

 

Yesteryear…  요새는 가끔 지나간 해의 달력일지를 훔쳐본다. 지난해 이즈음에는 과연 나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이런 것도 요새처럼 시간이 넘칠 때는 time killer로 으뜸가는 것 중에 하나다.

이것들을 보며 예상보다 훨씬 격심한 변화가 있었음을 절감하며 한숨을 쉰다. 올해의 대부분이 너무나도 개인적이나 사회적, 국가적으로 변해버린 것, 물론 어두운 쪽으로 변해버린 것. 비록 현재의 시간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조금 더 위에서 바라보니 조금은 겁이 나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의 일상을 보니, 비록 거의 고정적인 일상 routine이었지만 엄청 바쁜 세월들을 보냈음을 알게 된다. 일주일을 너무나 짧게, 바쁘게, 보람 있게 살았던 것, 그때가 그리워진다.

주일인 일요일에는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성당에서 ‘진짜 미사’를 보고, 우리들의  성당 친목 모임 ‘등대회’에서 동년배 형제, 자매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가끔 [레지오]특강도 있었고 모든 주일일정이 끝나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성당근처의 단골 집들, ‘동네방네 [한식점]’ 나 운동장처럼 널찍하고 시원한 Mozart Bakery에서 향기로운  coffee로  평화로운 일요일을 마감하기도 했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거의 완벽하게 고정된 스케줄이 있었다. 매일 아침 9시 동네성당 Holy Family CC의 아침미사,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은 Sonata CafeYMCA gym workout이 있었고, 화요일은 절대로 예외 없이 도라빌 순교자 성당으로 30분 드라이브, 레지오 주회합이 있었고 그날 정오에는 그곳에서 정오미사. 그 후에는 자주 채 형제님, 신 자매님댁, 손 형제님댁으로 봉성체 봉사를 했었다.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Rosewell Nursing Center 방문을 해서 Parkinson 병으로 고생하시는 두 자매님들을 만나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이제는 거의 꿈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시계처럼 돌아가는, 거의 정해진 ‘과제’들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는 것,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은총의 시간’이다. 보람 있다고 생각되는 ‘봉사, 선교, 친교’의 시간들은 현재 우리 주임, 이영석 신부님이 주장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들’ 인 것이다. 이것도 ‘중독성’이 있는데, 물론 세속적 의미의 중독과는 정 반대쪽의, 사실은 은총이다.

그것들이 지금 거의 5개월간 완전히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처음 3개월 정도는 ‘우리도 이 참에 좀 쉬자’ 라는 자세로, 심지어 즐기는 기분으로 지났지만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신경질이 나기 시작하고, 현재는 약간 우울감까지 느낄 정도가 되었다. 제일 관심사는, 내가 게을러졌다.. 라는 자책감이 과연 정확한 진단인가 하는 것이다. 제일 괴로운 것은, ‘언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하는 불확실성이다.  기도와 묵상, 의도적으로 규칙적인 일상생활, 그것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참, 어쩌다가…

 

The Persistence of Memory – Salvador Dali

 

오늘까지도, 며칠 전에 선종하신 윤 요안나 자매님의 성당 장례미사, 밤에 있는 장의사 연도,  참석할까 말까 하는 것,  계속 우리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교과서적, 안전한 쪽’으로  모두 불참하는 쪽으로 결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10년 차 레지오 단원으로써 계속 찜찜하고, 지난 간 세월들,  ‘코로나 前’ 세월이 그립기도 하다. 이런 연령행사 때, 우리는 ‘두 번 생각’을 안 하고 그들과 함께 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이고 생각하고 생각을 해야 하니까, 한마디로 ‘부조리 absurd 不條理적, 말도 안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어제 도라빌 H-Mart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이 마리아 자매님, 한국인 집단, 공동체, 단체 등에도 서서히 감염자가 생기고 있다고 경고한다. 당분간은 성당 공적 미사에는 안 나가는 게 좋겠다는 강한 의견을 보이신다. 그래… 7월 말까지 미사참례의무가 없다고 하니까, 그것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이성적인 판단일 듯하다.  ‘싸가지 없는 젊은 애들이 겁 없이 마스크도 안 쓰고 설쳐대는’ 이때다. 너희들은 걸려도 무감할 수 있지만 우리들은 ‘그대로 간다’.  마스크가 정치적 쟁점으로 둔갑한 이 ‘말도 안 되는, 빌어먹을’ 정치판도에서, 역시 우리들에게는 나이가 ‘웬수’인가… 나이가.. [너희들은 나이를 안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3월 24일부터 거의 3개월 반 동안 우리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례해 오고 있는  대한민국 CPBC 평화방송의 매일미사, 현재까지도 없으면 난감할 정도로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우리들의 본당 주일미사가 온라인으로 재개 된 후부터는 평일미사만 평화방송에 의지하고 있다. 이 매일미사에 참례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는:  참으로 다양한 신부님들의  언행, 특히’말투’가 있다.  장소가 바뀌고 신부님이 바뀌는 것,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이제는 익숙해 졌지만,  문제는 ‘일상적인 말투’를 벗어난 그런 것들이 분심을 일으키는 그것에 있다. 어떤 때는 정말 괴롭기도 하다. 우리 둘이 똑같이 느끼는 것을 보면 우리가  지나치게 민감한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래서 요새는 과연 오늘은 어떤 ‘이상한 말투’의  신부님을 보게 되는 것인지 은근히 걱정까지 될 정도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면 우리가 그 동안 겪어온 ‘이상하지 않는 말투’의 신부님 복은 과분하게 받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어제 치과 방문에서는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궁금했지만, 치아가 없어도 우려한 만큼  ‘치명적’인 것이 아님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먹을 때 조금 불편한 것과 많은 사람들 대하는 것, 그것 뿐이다. 대신 음식준비의 연숙이 좀 더 신경은 쓰겠지만… 이번 방문에서는 조금 서로 느긋하게 relax를 하며 토니 씨와 신변, 배경, 주위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다행히 Ohio State [University] connection 이 그 중에 하나였고,  뜻밖으로 ‘경복고 景福高 connection’으로 그들의 동창회 임 형의 이름까지 나왔다.  하여튼 앞으로 2~3주 더 가면 모든 dental work 일 이 끝나겠지… 이렇게 일주일 일주일의 여름을 징검다리 건너듯 넘어간다.

 

오늘은 오랜만에 한 시간 이상 마늘을 까주며 연숙을 도왔다.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에 신경을 써주는 연숙을 보면 흡사 엄마나 누나의 느낌이 든다. 그런 때가 참 많았다. 나를 거의 동생 돌보듯, 아들 보살피듯.. 참 재미있다. 그런 것을 나는 많은 경우에 무시하거나 귀찮아 할 때가 있었다. 오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대로 나를 도와주며 인정해주는 여성이 나에게 가장 가까이서 살고 있다는 사실, 왜 나는 그렇게 잊고 사는 것일까? 미안해… 미안해…  앞으로도 역시 또 귀찮아 하고 무시할 때가 있겠지만 정말 결사적으로 노력을 하게… 정말…

 

7월 들어서 첫 주일, 연중 제14주간 온라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주일미사 봉헌을 하였다.  오늘은 지난 주 보다 더 많은 교우들의 모습이 보였다.  예고된 대로 한달 반 동안 계실 임시로 오신 신부님이 소개되었다.  예수회 신부 서품이 된지 2년 밖에 안 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를 듯한’ 그런 장래를 위한 목자.  

앞으로 2달 반 공석일 주임신부님의 ‘철학’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오늘의 강론에서도 조금씩 드러난다. ‘신학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영성’에 더 치중하는 것을 본다. 특히 개개인 적인 소명, 식별, 파견의식, 행복 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임기 중에 가급적 많은 교우들이 ‘신앙의 기쁨’을 느끼게 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나는 비록 신학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더 중요할 것이라 믿는다.

 

 

오늘 신부님 강론, ‘파견 론’에 대한 것인데 의외로 나도 느낀 바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오늘의 큰 수확이다. 나의 ‘칼국수’는 무엇이었던가?  기어코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는 ‘그것 (일명, 칼국수)’에 대한 집착,  그것을 버려야 행복하다고… 나의 칼국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젊음,  아련하고 행복했던 지나간 세월,  바꿀 수 없는 지나간 과오,  그런 신기루를  내가 붙잡고 있었다는 깨달음, 그것을 나는 이제 놓아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 신 구역장 소개가 있었는데,  우리가 전에 있었던 구역에서는 ‘별로 호감이 안 가는’ 사람이 소개되어서 기분이 엇갈리고 착잡하였다. 나쁜 기억들에 파묻혀서 나는 아직도 지난 날의 정리를 깨끗이 못하고 있지만, 이제 즐겁지 않은 과거는 흘려 보내야 할 듯하다.

미사 중에 신부님으로부터 뜻밖의 발표가 있었다. 진희네 부부의 이름이 나오고, 아프리카 수녀님 후원 장학금으로 거금  $10,000 이상이 진희네로부터 봉헌이 되었다고…  그렇다. 돈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기고 , 쓸 줄 모르는 것이 문제다. 돈을 현명하게 쓰는 것, 돈의 노예가 아니고 돈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우리는 어떤가?  돈도 없지만 현명하게 쓰고는 있는가? 그들이 부럽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병으로 입원했던 윤 요안나 레지오 간부 (부단장) 자매님이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같은 사태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지 안타까웠고, 그 동안도 계속 기도 요청이 있어왔다. 그러던 것이 그제 갑자기 선종기도 요청이 들어와서 병세가 아주 심각함을 알게 되었다. 자세한 병명을 모르지만 암 같은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선종기도를 한 지 불과 하루 만에 life support system을 떼어낸다는 슬픈 소식이 왔다.  그러니까, 그 동안 coma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오늘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고 레지오에서 연락이 왔다. 그 동안 큰 관심과 우려로 기도를 바쳤던 이 자매님, 애 띠고 밝은 얼굴로 가냘픈 몸으로 레지오 활동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예상은 했던 것이지만 어찌도 이렇게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인지? 항상 미소를 머금은 눈과 얼굴이 이렇게도 선 한데…

건강한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본 것이 아마도 올해 초 (아니면, 지난해 말) 에 레지오 방문을 갔었을 때, 단장 부재로 대신 주회합을 주재했던 그 모습이었다. 항상 어딘가 아픈 듯, 약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끝까지 레지오의 간부로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무슨 사연으로 그렇게 몸이 아팠던 지는 잘 모르지만, 너무나 안타깝다. 더욱이 이런 코로나 사태 때에…  우리는 장례미사도 못 갈 듯하고 레지오 장 葬 도 못하고, 이 얼마나 모두가 쓸쓸한가?  코로나 사태의 최악의 결과 중에는, 장례미사에 갈 수가 없다는 기막힌 사실이 있다.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제대로 고별식을 못하는 것이 이렇게 안타까울지 예전에는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Independence Day, 비록 barbecue와 beer는 못했어도 연숙이 정성 드려서 만들어준 아주 부드러운 갈비찜으로 점심을 포식을 했다. 모든 음식을 부드럽게 해야 하는 것, 얼마나 신경이 쓰일까…. 내가 이런 것에 약하다, 너무나 그런 정성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Barron의 ‘하얀 책’에서 Barron & Trump란 section을 보게 되었다. 흥미가 인다. 나는 이런 사람의 의견이 필요하다. 유명한 신부님을 넘어서 새로 된 주교의 입장으로 쓴 이 글, 어떻게 그는 balance를 찾고 있을까? 신자의 입장에서 이런 각도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엄청 흉하게 자란 앞쪽 yard의 잔디를 깎았다. 이것은 최소한 2시간이 걸리는 지루한 job이지만 오늘은 지루한 것 보다는 무섭게 쏟아지는 UV radiation으로 더욱 피곤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힘든 일 뒤에 찾아오는 즐거움, ice cold Yuengling 맥주, 모밀국수, 사라진 입안의 통증,  Tubi movie, Charlie Chan old movie등이 있는 것에 감사.

 

오랜만에 예전에 Tobey와 같이 누웠던 playground엘 갔다

 

오늘 우연히 나의 손이 간 곳에 Bishop Robert BarronTo Light a Fire on the Earth  책이 있었다. 한때는 하룻밤에 다 읽을 것 같았던 것이 몇 년이나 되었다. 내용이 Barron의 해박한 지식답지 않게 읽기에도 가볍고 쉬운데 그것은,  John Allen이란 유명한 Vatican 주재, 가톨릭 journalist가 Barron과 인터뷰를 하며 거의 쓴 것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이 책을 읽으면 곧 바로 나는 Barron 주교의 ‘지성적, 영성적’ 깊이에 감탄을 연발한다. 어떻게 이런 ‘나보다 어린’ 사람이 이런 때, 세속화가 가속되는 때에 세상에 나왔을까?

나의 주관심사는 물론 그의 독특, 해박한 ‘깊은 지성에 바탕을 둔’  apologetics, 호교론 이다. 또한 어떻게 그렇게 어렵고 깊은 신학적 idea를 ‘호전적’인 무신론적 대중에게 전달하는 가 하는 것, 역시 주관심사다.  그가 Social Media를 종횡무진 오가며 일반대중과 ‘건설적인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을 보면, 이 주교님은 한 세기에 한번이나 나올까 하는 ‘가톨릭계의 거성’ 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이 ‘가볍게 보이는 책’을 다 읽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입 속 ‘느낌의 천지개벽’, 하루도 못 가서 나의 혀는 그것을 익숙하다고 말을 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모양새만 문제가 없다면 이렇게 살아도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먹는 것, 이 없으면 잇몸이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 실감이 가는 것일까? 우선 죽을 먹으니까 배고픈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고, 맛있는 것? 그런 것 나는 참을 수 있다. 우선 ‘통증’이 사라진 것에 나는 감사하고 감사한다.

어제, ‘치과 월요일’의 여파가 조금씩 지나가려 하고 있다. 머릿속에 이 이날에 일어날 일을 잠재적으로 알기에 조금은 stress로 느껴졌지만 예전에 비하면 ‘양반’이다. 물론 이빨을 뺀다는 사실이 나를 움츠리게 하지만 이것도 나의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른다 . 이번에는 드디어 3개의 ‘흔들리고, 쑤시던’ 이를 뽑았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 진 듯 (빼는 과정)..  치과를 나올 때의 날라가는 즐거움, 누구에게 ‘발설’도 못하고 속으로 가벼운 심정을 토로한다. 집에 와서 Tylenol PM을 먹고 2시간 빠져들 듯 잤더니 또 다른 개운함과 편안함이 나를 반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시 새롭게 변한 ‘입안의 지도’로 나의 새로운 경험이 시작된다.  윗니가 없는 감각은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심한 변화는 아닌 듯 싶다. 물론 씹을 때는 다르겠지만 현재까지 100% 유동식을 넘기는 것은 예전과 큰 차이가 없다. ‘치통’이 거의 사라진 희열감을 또 다시 만끽하고 싶다. 며칠 내에 그것도 정상적으로 돌아오겠지만.  이렇게 해서 나의 새로운 경험의 세월은 또 흐른다. 다음에 올 경험의 변화는 과연 무엇일까? 제발 즐겁고 편한 것이 되기를…

 

이를 거의 모두 뽑은 첫날의 음식은 죽 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박기원 여사의 ‘이진섭 전기’인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을 지라도: 이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진섭’을  필사하기 시작하고  이제는 속도가 붙었다. 옛날 20년 전쯤에 하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어제 읽은 듯 반갑고 익숙하게 느껴진다. 이진섭씨의 생각과 말을 내가 꽤 많이 ‘도용’했고 빌렸던 것도 재미있다. 65세 만세론 같은 것… 지금 내가 70세가 훌쩍 넘으니 이 ‘준재’ 님 아깝게도 나이 60에 일찍 가셨다는 생각이고, 이제부터 나는 누구를 ‘따르고, 모방’하며 살아야 할지 난감하다.

 

일주일 만에 순교자 성당 미사에 ‘참여’를 하였다. 오늘은 지난 주에 비해서 교우들 숫자가 확실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100명 한계에 도달했을까? 오늘 신부님의 강론은 예상을 벗어나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지난 주에 조금 실망을 해서 아예 녹음을 하지 않더라니… 하지만 나중에 다시 녹화된 것을 보면서 녹음을 하였다. 중요한 복음중심의 메시지를 비교적 간단한 주제로 깊이, 하지만 쉽게 전달하는 스타일이 바로 이 신부님의 독특한 것이다. 신학적 깊이를 드러나지 않게 일상적 예를 들어 쉽게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 미사 끝에 구역장 임기를 마친 것에 대한 상패 수여가 있었다. 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조금은 착잡하고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벌써 2년이 흘렀구나… 나는 도중하차 했지만 하늘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을 한다. 하나도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부님이 7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한국엘 간다고 (예수회 일로), 임시로 사목할 신부님이 이미 오셨다고 했다. 이래저래 우리의 성사,  레지오, 교회생활은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불투명하게 되었다. 오늘 말씀이, 7월 중에도 성당 단체들의 활동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단체들은 ZOOM video 를 통해서 모임을 하라고 한다… 우리 레지오는 이런 가상적 모임은 상상할 수가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난감하다…

 

은비령, 드디어 ‘탈고’를 하고 ‘출판’을 했다. 아주 빨리 끝낸 듯 느끼고 있었지만 사실은 거의 2주 만에 끝난 것이었다. 하기야 그 동안 이것에 매일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느니 2주면 빠른 것이다.

이 소설의 느낌에서 내가 공감, 동감, 빠져드는 것들이 꽤 있었다. 산, 눈, 우주, 여자… 등등… 하지만 끝 부분에 나는 큰 사고를 겪었다. 이 작자의 1992년 소설 ‘압구정동..’ 어쩌구 가 있어서 잠시 훑어보다가 그만 shock를 받고 다시 서가로 쫓아 보냈다. 어쩌면 그렇게 ‘음란성 묘사’를 잘 해 놓았는지… 한마디로 은비령의 인상이 거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으로, 잊기로 했다. 이 작자가 그런 묘사를 했다는 것은 분명히 porno 음란성 매체에 가까이 했거나 심취 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것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잊자, 그저 잊고, 은비령의 ‘정수 精髓’ 만 나의 것으로 남기자.

 

요사이 무척 많은 ‘續, new’ 역사스페셜 video를 download하였다. 유인촌의 classic series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그 후의 것은 적응하려면 시간이 조금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현재 까지 HD series ‘고두심’  진행은 별로인 느낌이다. 사회자, 진행자로서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역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실망이었고,  전원일기의 고두심이란 원래의 인상이 흐려지는 느낌으로 남게 되었다. 그 다음 것은 더 보아야 하겠지만, 역시 유인촌 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KBS 역사 스페셜  ‘삼국사기의 역사논쟁‘  video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삼국사기 책을 모두 해체하는  장면을 보고, 나도 나의 ‘古書’ 만화책: 내가 1962년에 그린 만화, ‘민족의 비극을 그렇게 해 보는 것… 그러니까 ‘해체’ 해서 scan하고 복원하는 것…. 이것도 시간이 났을 때 하는 것, 재미있지 않을까?

 

 

주일날 아침. 거의 잊고 살았던 2020년 Father’s DayOzzie와 같이 우리들, 시원한 아침에 걸었다. 연숙과 걸음을 맞추는 것, 오늘은 전혀 문제가 없다. Ozzie가 오랜만에 고향에 온 듯이 산책길 곳곳의 냄새를 기억하며 시간을 끌었다. 정말 평화로운 산책이었다. 어찌 평안함과 푸근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무서운 고통, 실망, 우울 등에서 갑자기 해방된 기분을 누가 이해를 할 수 있을까? Father’s Day라고 몇 가지 message도 받았고 새로니와 Richard로부터는 TACKLIFE Laser Distance Meter를 선물로 받았다. Tool을 좋아하는 Richard로부터 그 동안 받은 선물은 대부분이 tool종류였고,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맞게 선택을 한 편이었다.

 

TACKLIFE laser distant meter

 

오늘 아침에 배달 된 따끈따끈한 매일 성경묵상글을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구절이었다. 마태오 복음 10장의, 아하! 이 구절은 그 유명했던 Billy Graham 전도대회에서 끝 무렵에 신앙개종권유의 메시지였다.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그렇게 익숙했던 것. 그 목사님, 정말 한세기에 한번이나 나올 까 말까… 젊었던 시절 나도 그의 집회 중계를 많이 보았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  ‘믿음은 공적, 공개적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Everyone who acknowledges me before others

I will acknowledge before my heavenly Father.

But whoever denies me before others,

I will deny before my heavenly Father.

Mt 10:26-33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지난 주일 미사, 예의 이영석 세례자 요한 주임신부님의 강론, 그 ‘독특한’ 스타일은 계속된다. 아마도 이임할 때까지 이런 식의 강론은 안 변할 듯 하다. 비록 의도적으로 깊은 학문적 신학 대신 개인적, 사회적 신학은 풍부하다. 서로를 위한 기도를 잊지 말고, 제발 모두들 행복하게 살라는 신신당부의 강론은 가끔 가슴을 저리게 한다. 감사 합니다. 신부님, 신부님도 행복하세요…

 

 

교구청에서 공식적으로 7월 말까지 주일미사 의무를 면제한다고 공문이 왔다고 한다. 아무래도 요새의 코로나 현황을 의식한 듯하다. 안전한 쪽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주임신부님의 희망은 그것이 아닌 듯 들린다.  짐작에 제발 빨리 많이들 나오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어려운 개인적 판단이 필요한 것,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성당 공동체에서 너무 오래 떨어지는 것, 나는 사실 경계하고 싶다. 현재의 상황이 우선은 편하기도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이렇게 사는 것, 개인적으로도 문제다. 옛날에 이미 쓰라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신앙공동체에서 멀리, 오래 떨어지면 위험하다.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임을 잊지 말자.

오랜만에 우리 가족 저녁기도를 했다. 거의 5일이나 되어가나… 하지만 나 혼자의 묵주기도는 아직도 못하고 있다. 내일부터는 할 수 있겠지. 문득 생각한다… 나의 신앙심이 혹시 약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다. 전처럼 영적독서를 안 하고 있는 것이 증거다. 다시 2010년대 초에 내가 심취했던 것들, 특히 과학과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apologetics, 그것들이 그립다. 정말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니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분명히, 기필코, 결사 코…

 

 

이번 주일은 성체성혈 대축일, 매년 이때를 기해서 아틀란타에서는 20, 000명 이상이 모이는 연례 성체대회가 열리곤 했었다.  그것이 올해는 완전히 취소가 되었다.  정말 세상이 완전히 바뀐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 열기에 찼던 성체대회, 언제나 다시 그런 모습을 보게 될 것인가?

순교자 성당 주일 온라인 미사, 비록 제한적인 미사였지만 주임신부님의 강론은 성체성사의 깊은 의미를 조명하는 명 강론이었다. 비록 성당에 가서 교우들과 같이 어울리지 못해도 이렇게 멀리서나마 성당내의 환경을 공유한다는 것, 불행 중 다행이다. 문제는 오늘 같은 성체성혈 대축일에도 성체를 영할 수가 없었다는 것, 그것이다.

 

요새 며칠 밤에 나의 잠은 평상시와 다른 것이 되었다. 내가 ‘자랑하던’  시계처럼 잠에 떨어지는 습관이 변한 것이다. 잠드는 속도가 느려진 것. 나에게도 불면증이 드디어 온 것인가? 분명히 나는 정신이 말짱하게 밤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지만 나중에 일어날 즈음에는 잠깐 꿈을 꾼 것을 또 기억하니… 어찌된 일인가? 이래서 나는 ‘공식적인 잠’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잔 것이니까, 지난 밤도 그렇게 해서 ‘공식적으로  잤다!’ 로 선포한다….

시간이 갈 수록 나는 고통, 치아의 통증에 더 민감해지는지 우울해진다. 하지만 육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고통, 이것도 머리를 다른 곳으로 집중하면 훨씬 나아진다. 이런 사실을 실감한 것도 이제는 꽤 오래 되었다. 나의 모든 정신을 다른 곳으로 쏟으면 말초신경도 둔해지는 모양이지? 그런 신체역학을 나는 지금 조금 위안으로 이용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이것이 통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오래가면 좋겠다.

 

이순원이란 사람이 쓴 ‘은비령‘이란 1997년 경의 수상작품을 ‘읽으며 필사’ 하기로 했다. 계획적인 아닌 아주 우연하게… 며칠 전 청옥산에 대한 회고를 하면서 강원도 생각이 난 것도 이유가 될지… 언젠가 이것을 조금은 읽었을 듯한데… 불현듯 떠난 여행… 그것이 나에게는 청옥산이었기에 공감을 하고 싶었다. 여기도 여성과 얽힌 여행담이 있는 듯 보여서 호기심도 난다. 100여 쪽인 중편소설… 이것으로 조금 ‘납량’의 효과와 추억의 포근함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온 세상이 시끌벅쩍, 요새 주위에 들려오는 소식들, COVID-19 Pandemic 에다가 엎친 데 덮인 격으로 이제는 [흑백] 인종차별 폭동 riot 으로 이어지고….  한마디로 어디에서도 GOOD NEWS가 찾을 수 없는, 정말 암담한 현실이 되었다. 이번 뉴스의 추이를 보며 문득 그 옛날 1968년 경의 미국과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우리 조국은 ‘민족반역자, 萬古 역적 김일성’이 5.16 군사혁명 주체 박정희의 ‘목을 따러’ 김신조 무장공비 31명을 청와대로 보냈고, 곧 이어 미국 첩보선 프에블로 Pueblo를 동해상에서 강제로 원산으로 끌고 가  한때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우리에게 너무나 암담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도 유례없는 사회적 혼란과 위기감 속에 있었다.  국론이 수렴되지 못한 월남전으로 완전히 분열된 국론, 흑백 인종문제의 갈등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또한 당시 젊은 진보세대 희망의 상징이었던 로버트 케네디까지 저격을 당하고, 시카고에선   민주당 전당대회 와중에 벌어진 격렬한 폭동성 데모… 정말 미국이 곧 망할 듯한 느낌을 주던 때였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던가, 요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위기감을 느낄 듯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위기와 도전은 언제나 상응하는 변화를 초래하고 그것은 거의 언제나 전보다 진보,  향상, 개화된 것이어서 너무 지나친 걱정은 안 한다.

 

이번 주말에 새로니 네Florida beach엘 머리를 식히려 간다고 해서,  9살 짜리 dog, Ozzie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게 되었다. 아침마다 그 녀석과 걷는 것도 그렇게 2년 전의 Tobey의 추억과 맞물려 6월을 다시 보내게 되었다. 이것도 나에게 기분전환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세월과 나의 생은 흐른다. 이별할 것은 이렇게 하나 둘 씩 나를 떠나고 나도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요새 우리와 친하게 지내려는 늙은 고양이 Izzie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같이 있을 때 잘하자.

 

지난 밤 자다가 갑자기 끈끈함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이 너무나 말똥거리고 그 ‘덕분’에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불면증의 괴로운 밤을 보냈다. Ceiling fan의 도움으로 조금 끈끈함은 물리칠 수 있어서 새벽녘에 조금 잠을 잤는데.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결과적, 공식적으로 나는 밤잠을 자긴 잔 것이다. 갑자기 습도가 뛰어오른 것인데, 아마도 shower를 안 하고 잔 것 때문에 더 끈끈하게 느꼈던 것 같다. 솔직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그런 type의 날씨가 예년에 비해서 일찍 온 것인가… 옛날 고국에서 7월 초부터 느꼈던 ‘장마성’ 기후와 비슷한 것이다.

3월 중순부터 시작된 코로나-19 Pandemic 이후,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나의 머리 속을 조금 현재와 다른 것으로 청소하고 싶은데, 그 방법이 문제다. 며칠 집을 떠나는 것이 제일 효과적임은 알지만 지금 여행하는 것은 한마디로 stupid한 것이다.  설사 여행이 자유스럽다고 해도 우리는 둘 다 집을 떠나는 것은 고생으로 느끼기 때문에 역시 Home Sweet Home 안에서 여행을 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우리의 머리를 청소할 수 있을 것인가?

 

어제는 순교자 성당의 공개된 주일 미사가 있었지만 우리는 65세 권고를 받아들여 집에서 온라인 미사를 보았다. 작은 놀라움은, 예상을 뒤엎고 교우들의 숫자가 공개미사 첫날보다 적었다는 사실이었다. 신부님도 꽤 실망을 한 듯한 표정. 또한 참석한 대부분이 ‘고정멤버’들인 듯 보였는데 그들의 나이도 만만치 않아서, 도대체 비교적 젊은 층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각자의 사정이 다 있겠지만 아주 젊은 세대가 주로 오는 토요일 특전미사는 아예 당분간 중지한다는 발표까지 있었다.  아마도 모두들 아직까지 조심들 하는 것이겠지만 참 어려운 문제다. 불현듯 모든 권고사항을 무시하고 우리도 평상시처럼 가볼까 하는 충동까지 들었다.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현명한 결과가 안 나올지도…

 

삼위일체 대축일 주일미사 강론 – 이영석 세계자 요한 주임 신부님

 

이날 오후에는 김계환 안토니오 형제님의 가족장례미사가 있었을 것이다. 호스피스로 옮긴지 불과 하루 만에 선종하신 것인데, 이분에 대한 기억도 그렇고 그렇게 열심히 ‘소리없이, 조용히’ 봉사하신 분도 드물어서 애석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연도, 장례미사에 가 본지 도대체 얼마나 되었는지, 정말 그런 연령 행사가 고인과 유족들은 물론이고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위안을 주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나의 blog post 가 드디어 1,000을 넘었다. 십 년 전부터 post 했던 ‘원래’ blog에 덧붙여 그 이전 것을 조금 더했기 때문에 1,000의 의미는 조금 퇴색했지만 그래도 이것은 조그만 이정표 역할을 한다. 1,000… 에다가 10년이 넘었다는 사실은 나도 놀란다.  나는 이렇게 오래 끈기 있게 했던 것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모두 이런 ‘좋은’ 습성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언제까지 이렇게 갈 지는 솔직히 나도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변할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posting하는 작업 자체는 나를 하루하루 ‘제 정신을 가지고’ 살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됨은 분명하다.

 

아~ 청옥산…  얼마 전부터 자꾸만 ‘청옥산 靑玉山’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백두대간 중에 청옥산이 있음을 알고부터였다. 나의 추억으로 알았던 ‘청악산’이 사실은 청옥산이었음은 오래 전에 알았다. 왜 이때의 생각이? 아마도 나의 잠재적인 ‘현실도피’의 표현이 아닐까? 눈이 쌓였던 산봉우리, 화전민 집의 아가씨, 풍경소리 은은하던 사찰의 진흙 벽 방… 모든 것이 꿈처럼 아름답고 그립기도 하다. 이것에 대한 ‘회상기’를 한번 블로그로 써보는 것도 기분 전환을 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청옥산을 googling하면서 새로운 사실은 대한민국에 청옥산이란 이름은 3곳이나 있다는 사실이고, 이중에 두 곳의 청옥산은 모두 강원도에 있고 다른 곳은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음도 밝혀졌다. 게다가 백두대간 중의 하나인 1,400m의  청옥산은 내가 갔던 곳이 아님을 알고 조금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간 곳은 삼척시 부근이 아닌 평창군 (미탄면) 부근의 산이었음도 확인을 하였다. 문제는 그 산이 Google map에 아직까지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Deep Cleaning, 어제 무려 15년 만에 main bathroom tile grout에 깊숙이 스며든 곰팡이 자국들을  모조리 긁어내었다. 15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우리는 게으르게 살았는가? 누구를 탓하지 말자… 유혹은 강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조금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것 뿐이다. 골치를 썩히던 shower door frame 문지방을 최신의 design으로 바꾸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metal work이었다. $23 을 아끼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내가 하고 싶었다. 결국은 해 내었다. 이것이 이번 일의 보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갈고 닦아 모든 것이 반짝거리지만… 언제까지 그 맑음을 간직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일은 모든 끝났지만, 생각을 한다. 이런 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니 10년이 아니라 1년에 한번씩 대청소를 하면 이렇게까지 힘과 시간이 들지는 않을 듯해서 앞으로는 일년에 두 번 정도 간단히 하기로 생각을 맞추었다.

 

거의 완전히 복원 된 main bath tub shower closet

 

새로니의 Vegetable Container, 지난 토요일 첫 손자 Ronan의 백일축하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Sandy Spring에 있는 새로니 집엘 잠시 들려서 백일음식을 전해주었다. 새로니는 완전히 방학이 되어서 stress가 많았던 online class  가르치는 것이 피곤한지 요새는 거의 완전히 gardener, 그것도 vegetable gardening에 심취를 하고 있었다. 엄마의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만 요새 아이들 모든 것을 science & technology의 시각으로 각종 야채들을 그 좁은 deck에서 잘도 기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Tobey를 보는 듯한 Ozzie를 다시 보니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 녀석도 우리를 보고 깡충깡충 뛰며 오줌까지 흘릴 정도였다. 다시 나는 2년 전 6월 19일 날 세상을 떠난 나의 Tobey 모습과 이 녀석의 모습이 함께 어울림을 느낀다.

 

 

성령 강림

 

5월의 마지막 날인 동시에 마지막 주일인 5월 31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그리스도 교회가 탄생한 날로 기념하는 성령강림 대축일 Pentecost Sunday 이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이 사도들에게 불꽃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잇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2:1-4]

 

이날을 왜 그리스도교회가 탄생한 날로 정했는가를 보면, 이 성령의 힘으로 사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이들이 담대히 전세계에 퍼뜨리기 시작한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이었고 그것이 교회공동체, 가톨릭 교회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날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미사가 정지되었던 이후, 처음으로 아틀란타 한국순교자 성당이 공식적으로 공개 미사를 드리는 주일이기도 해서 관심을 가지고 online미사에 참례하였다.

미국 성당들도 하나 둘씩 미사를 재개했지만, 이곳 저곳 모두 미사참례 조건이 비교적 자세하고 까다로웠다.  100명으로 제한, 마스크 착용 등은 기본이지만 미사 이외의 모든 활동은 전면 금지였다. 게다가 권고사항으로 65세 이상은 당분간 자제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현명한 선택 분별을 해야 하는 것으로, 솔직히 귀찮고 골치까지 아픈 것이 아닌가? 결국 우리는 당분간 지켜보기로 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날 미사광경을 보니, 미사 참석인원이 30명 정도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비교적 나이가 있는 교우들로 보였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비교적 젊은 교우들로 100명 가까이 올 줄 알았는데 이것은 조금은 뜻밖이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평소에 열심히 참석하던 열성교우들이 역시 이날도 자리를 채운 것이다. 신부님도 이것이 조금은 뜻밖인 듯한 인상을 보였는데, 30여명 정도면 일단 ‘수칙준수’에 대한 안심은 되겠지만, 적은 숫자에 실망도 하셨을 듯… 하지만 이것은 첫날이니까 다음 주에는 분명히 훨씬 더 많은 교우들이 ‘몰려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공식미사 재개 첫날

 

이날의 강론의 주제 역시 성령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로서는 이 강론을 들으며 묵상할 자료들이 참으로 많았다. 개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신학적인 것까지…

평화란 무엇인가? 나에게 평화와 이기적인 평화. 모두가 갖는 평화를 위해서는 싸워라. 그렇게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탓. 이 용기는 성령의 선물이고 가장 중요한 성령의 은사다. 이 용기의 은사가 결여되면 다른 은사들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강론, 이영석 세례자 요한 주임신부님

 

나와 우리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이 강론으로 얼마나 ‘용기의 은사’가 중요한 지를 느낀다. 개인적으로 나도 체험을 했지만, 사실 선택의 용기와 실천의 용기가 없었던 삶은 사실 죽은 삶에 가까운 것이다. 선택과 결단을 미루며 산 것도 용기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용기란 놈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질 않는다. 역시 높은 곳,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Online Vigil Mass, Holy Family CC.  May 16, 2020

 

며칠 전부터 간간히 들려오던 아틀란타 대교구의 ‘공식미사재개’ 소문이 현실화 되었다.  소문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사실은 5월 말까지 대교구의 모든 성당 미사를 정지되었기에 6월 초까지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예정이었다.

만약 이 지역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피해가 심해서 모든 사회적 기능이 정지된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문제는 아주 간단했을 것이다. 미사 정지를 무기한 연기를 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예상만큼 피해가 심하지 않았고, 경제적 피해를 의식한 조지아 주지사는 미국에서 제일 먼저 경제활동 제한 조치를 풀어가기 시작했기에, 대교구도 이제는 중대한 선택을 할 순간이 온 것이었다.

지난 월요일 5월 18일에, 예상한 대로 대교구는 5월 31일 ‘그리스도교회가 탄생한’ 성령강림대축일 Pentecost Sunday를 기해서 일단 공적인 미사재개를  결정을 했고,  각 본당은 그런 방침에 따른 ‘자세한 행동수칙’을 정하여서 공고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어떤 절차와 과정으로 문을 여는 가, 어느 정도 여는가.. 이것은 ‘본당차원 단체’의 골칫거리일 듯하다. 위에서 내리는 결정이야  어떻게 보면 간단하지만 진짜 문제는 ‘자세한 행동 수칙 결정 사항’에 있지 않은가?

오늘 ‘갑자기’ 받은 아틀란타 순교자 (우리 한국본당) 성당의 공지사항에 의하면 대교구의 결정사항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자세한 절차나 과정은 본당 차원의 문제니까, 그것으로 주임 신부님을 비롯한 사목회에서 ‘골머리’ 를 썩었을 듯하다.

이 미사재개의 세부 수칙을 읽으면서, 우리는 당분간 이곳에 ‘물리적 참여’는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100명으로 제한 된 것 등을 비롯한 많은 수칙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자체가 거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정말로 영성체를 원하거나 교우들과 친교를 원한다면 위험부담을 무릅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현명하고 숙고된 결정일까?

우리가 코로나 Pandemic 전까지 평일에 가는 동네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website에 가보니 역시 이곳에서도 대교구의 방침에 따라 ‘제한적’으로 미사재개를 한다고 공지가 나와있다.  이곳에서도 한국본당처럼 대교구의 미사재개 절차가 공지가 되어있는데 물론 두 곳이 거의 비슷한 제한절차, 조건들이 자세히 나와있다.

이번 조치는 Phase One, 그러니까 제1단계인데, 제한 조건 중에 우리에게 ‘치명적’인 것이 65세 이상은 당분간 ‘쉬시라’는 것, 참… 그렇구나.. 우리도 65세가 넘었지.. 한마디로 6월까지는 ‘푹 쉬시라’는 말이었다. 전에는 store나 restaurant에 가면 senior discount등으로 우대를 하더니, 이번엔 쉬시라는 우대(?) 를 받게 되니, 참 기분이 묘하다.

 

 

제일 나의 큰 관심사는 다름이 아닌 레지오 활동 재개 여부였다. 은근히 미사 재개와 함께 성당 중요 신심 소단체들은 모임이 가능할까 하는 희망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미사재개 방침에는 아주 확실하게, 미사 이외의 모든 활동은 계속해서 6월 말까지 정지, 라는 방침이었다. 미사도 중요하지만 나에게는 레지오 ‘봉사활동’도 중요한 것이었다. 이 활동은 사실 ‘주임신부님의 강론 말씀’처럼 나에게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선물이었기에 더욱 그런 것이다.

참, 세상이 변하긴 변했다. 그렇게 항상 당연시 되던 것들이 이제는 특별한 것이 되었으니…  3월 중순부터 시작된 이 ‘사회적 실험’기간, 사실 이제 조금은 익숙해 지긴 했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이, 이것 언제까지.. 언제까지.. 하는 소리는 막을 수가 없다. 인간이 인간을 피하며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 보기 좋던 보기 싫던 간에,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음양으로 받는다. 이것이 고갈되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제1단계 미사참례 행동 수칙

지난 2주일은 그야말로 화살이 나의 눈앞을 쌩! 하고 날라가는 듯한 느낌, 게다가 귀가 멍~할 정도로 외롭고 고립된 느낌들, 이것은 코로나사태의 영향일 듯하다. 둘이서 그렇게 규칙적인, 정상적으로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이것은 역시 ‘비 정상적’인 생활이 아닌가? 역시 물을 떠난 고기와 같은 그런 꼴일 것이다. 서서히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듯하니 지긋이 기다려 보자. 오늘부터는 명심하고, 미완성인 것들, 자질구레한 서류정리, 겨울 옷 정리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머리 청소도 되고 집도 깨끗해지고, 얼마나 좋은가?

 

우연히 손이 간 곳에 책 ‘탈무드 Talmud 의 지혜’가 있었다. 역시 오래된 아주 연약하게 정장이 낡은 책, ‘탈무드의 지혜’였다. 오래 전부터 나의 눈에 가끔 뜨이던 책이지만 한번도 심각하게 읽은 적이 없었다. 그것으로 나의 손이 간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요새 성경통독의 일환으로 모세 오경을 매일 읽으며 다시 나의 눈에 들어온 글들, 유태인들에 관한 것이다. 한번 필사를 시작해 보는 것은? 그래 책의 분량이 그렇게 무섭게 거창하지 않아서 우선 안심이다. 이것도 나의 online library에 큰 무게를 더할지도 모른다. 해보자!

 

이번 코로나 사태 중에 나에게 조금 마음의 여유와 즐거움을 주었던 것들, electronics, IoT, microcontroller etc etc, 지금까지 거의 완전히 손을 놓은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다시 시동을 걸 수는 없을까? 이것에 어느 정도 길들여지게 되면 앞으로 두고 두고 시간, 정신 활용에 도움이 될 것인데.

 

Agony & Ecstasy of Microcontrollers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부활 제 6주일 online 미사

강론중인 이영석 세례자 요한 주임 신부님

 

오늘,  순교자 성당 online 주일미사, 역시 좋았다. 이영석 신부님 어쩌면 그렇게 기억에 남을만한 그런 강론을 하는 것일까? 오늘 말씀도 참 좋았다. 비록 우리보다 한참 어린 것은 분명하지만 이 신부님도 나름대로의 연륜의 빛을 발하는 것일까? 불교철학을 통한 폭넓은 인생 안목이 더해져서 그런 것일까?  근래에 우리는 정말 ‘신부님 복’이 많다고 생각하며 산다. 이것도 우리의 운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윗동네 형제성당의 볼품, 예의, 매력 없는 신부와 비교하여 생각하면 더 그렇다. 분명히 그 신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영석 주임신부님 복음, 미사 강론 – 2020년 5월 17일 online 미사 중

 

정말 오랜만에 비가, 그것도 늦은 저녁에 내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이거 정말 오랜만이 아닌가, 거의 잊고 살았던 느낌이 든다. 맞다 지난 주 한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렇다. 5월이 들어서 처음 보는 비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비! 반갑다… 새로 단장한 tool shed에 비 챙, 이런 말도 있나… 그러니까… awning, 이제는 shed 근처에 조금 더 비를 피할 공간이 생긴 것이 흐뭇하다. 이제 더 정리를 하고 나면 밀렸던 tool shed를 정리하는 일들을 하자.

 

¶  5월의 성경통독 일정표:  지난 4개월 하루도 빠짐없이 참여했던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전신자 성경통독 일정표가 나왔다.  이번 달 일정을 보니, 민수기가 끝난 다음 ‘신명기’를 제치고’ 여호수아기’로 넘어간다. 이것의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시편이 모두 끝나게 되어있다.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코로나 사태를 거쳐가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자 마자 읽는 이것은 나에게 하루를 사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제까지 매일 성경말씀을 단편적으로 듣고 묵상하다가, 이렇게 ‘전체의 문맥’을 접하니 정말 커다란 놀라움을 만나게 되었다. 일년 동안 이런 식으로 ‘놀라움’이 있다면 순교자 성당이 바라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부활 제4주일, 2020년 부활절 Easter은 벌써 3주가 지나고 있지만 부활 season은 아직도 3주가 남았다. 이 부활 시즌이 끝나는 날, 5월 24일부터는 무려 4 가지의 ‘대축일’이 계속 이어진다.   5월 24일 ‘주님승천대축일 THE ASCENSION OF THE LORD‘, 5월 31일  ‘성령강림대축일, PENTECOST SUNDAY‘, 6월 7일 ‘삼위일체 대축일 THE MOST HOLY TRINITY‘, 6월 14일 ‘성체성혈 대축일, THE MOST HOLY BODY AND BLOOD OF CHRIST‘. 

가톨릭 전례력에서 이렇게 무려 4번이나 대축일이 연속으로 나타나는 때가 끝나면 제일 중요한 시기가 끝나고,  비로소 ‘연중시기, ORDINARY TIME’가 시작된다. 따라서 아직도  ‘부활 축제 분위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시기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완전히 중단된 것이다. 이것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제일 당혹스러웠던 곳은 바로 가톨릭의 정점, 중심인 로마 교황청 VATICAN, 그리고 교황님이었을 것이다. 신자들이 물리적으로 모이지 않으면 미사가 불가능하니, 차선책으로 가상적, 영상적, 원력적으로 미사를 해야 하는 것, 이천 년 역사의 교회에 이런 적이 있었을까? 미사와 친교가 중심인 교회생활이 없으면 사실 믿음의 생활에는 치명적인 영향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기에 걱정도 되지만 물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  천경자 화백의 수필집을 필사하며 그분만의 독특한 수필체를 배운다. 말의 힘, 단어의 힘, 의성어의 힘… 그리고 ‘욕의 힘’ 등등… 그러다가 이 분의 생년월일을 보고 나는 아연..실색… 1924년! 그러면 거의 100세? 그러면 지금은 살아있나… 하다고 연숙에게 물어보니 단번에 ‘언제 죽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는 철퇴를 맞는다. 아~ 내가 또 세월의 횡포를 맛보는 구나… 아, 세월이여…

 

¶  오랜만에 backyard에 나가서 묵주기도 5단을 바치며 주위를 돌아본다. 보통 desk에서 하던 것인데 이렇게 시원하고 흐린 하늘을 보며 바치니 기분이 새롭다. Tool shed가 조금씩 변하는 것에 내가 흥분을 했는지, 기분이 새로워지는지, 다시 내가 우리 집의 ‘흉물’인 siding, 이 siding work을 내가 손수 해보는 생각을 굴린다. 과연 이것은 나의 꿈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다, 아니다!

 

¶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된 YouTube 로 보는 주일미사, 오늘도 예외 없이 10분 전부터 기다리다가 참례를 하였다. 우리들이 본당내의 광경과 소리를 접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신부님은 사실 허공을 향해서 수많은 정든 교우들의 모습들을 머리로 그리면서 집전하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찡~ 해진다.

얼마 전 뉴스에서 미국의 어느 본당에서는 성전 내 텅 빈 신자석에 일일이 교우들의 사진을 배열해 놓고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식으로 하는 미사는 집전 신부님에게는 조금 도움이 될 듯하다.

오늘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영상 미사, 계속되는 주일미사의 강론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아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신부님께는 조금 미안하지만 음성으로나마 남기고 싶어서 녹음을 해 보았다. 나중에 또 듣고 싶은 것이다.

이날의 강론은 신부님의 지난 시절에 대한 솔직하고 고백적인 회상이었다. 너무나 솔직한 개인적인 듯했지만 복음 주제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명 강론이었다. 계속 되는 즐거운 놀람이 이것이다. 어떻게 우리 성당은 이렇게 신부님 복이 많은가? 내가 겪은 3명의 예수회 신부님들, 정말 우리들에게 과분한 박학다식한  사제들이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주일미사 복음과 미사강론 – 이영석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020년 5월 3일

 

 

거짓말 같이 평화로운 2020년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은..

 

¶  구름과 해가 오락가락하고 바람이 살살 불더니 해가 떨어지면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눈치를 미리 채고 backyard의 picnic table의 파라솔을 접어 놓았는데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심하게 바람이 분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한 것이다. 다행히 기온이 그렇게 낮지 않아서 밖에서 걷거나 일 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는 이런 ‘비상적’인 날씨를 무척 좋아하기에 속으로는 쾌재를 부를 정도다.

4월도 거의 저물어 간다. 벌써 마지막 토요일을 맞은 것이다. 코로나19라는 뉴스가 온통 우리의 머릿속을 맴돈 지도 2달에 가까운 것이다.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어서 이것이 new normal이 아니고 그냥 normal인 것처럼 느껴진다.

 

¶  코로나19, COVID-19, 이름도 부자연스러운 이것, 언제까지 우리의 주위에서 맴돌 것인가? 장기적인 여파는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 가족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모든 (사회) 공동체들, 특히 신앙공동체들, 나아가 우리가 사는 이 지역, 나라 아니 나아가서 NOOSPHERE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우선 과학적으로 알고 싶고 다음은 영적인 눈으로…

 

나를 ‘살려준’ Tech Guy podcast, 과학적인 코로나 뉴스를…

 

이것에 관한, 요새 나의 안도감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은 바로 tech-guy style podcaster들이다. 코로나19 뉴스는 이들의 의견으로 간접적으로 듣게 되는데 이것이 (빠가, 또라이) 트럼프의 웃기는 발언들이나, major news outlet들의 조금은 과장된, dramatic한 style들보다 훨씬 믿음성이 있고 공감이 가는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tech news podcast그 자체보다는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로 코로나 사태의 모든 것을 가늠할 것이다.

 

Backyard에 있는 open shed를 tool, workshop shed로 바꾸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  어제 밖 backyard에서 일을 하며 라디오로 조지아 주의 코로나19  소식을 간간히 들었다. 이발소 같은 곳이 문을 열기시작 했다는 소식이었다. 성급한 느낌은 떨칠 수는 없지만 다른 쪽으로는 심리적으로 무엇인가 평상으로 돌아 간다는 느낌도 있었다. ‘과학적’으로 아직 business 를 열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 그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면 이것도 이해는 된다. 먹고 사는 것, 그것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문제를 피부로 못 느껴도 머리로는 알 수 있지 않을까?

 

¶  오늘 우리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본당 레지오의 꾸리아에서 한국 서울 세나뚜스 단장의 글을 forward 보내왔다. 레지오 마리애 잡지에 난 기사를 보낸 것인데, 역시 코로나19로 인한 레지오의 시련, 도전, 그리고 희망에 관한 메시지였다. 교회전체가 겪고 있는 시련과 도전에 못지 않게 레지오도 앞으로의 운영과 선교 방향이 미지수인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 distancing’ 와 레지오의 (대인 선교) 활동방식을 어떻게 지혜롭게 절충하느냐 하는 것인데, ‘쫄짜’ 단장인 나도 요새 이것에 대해 생각을 하면 한숨부터 나올 지경이다. 이것이야 말로 올해 우리들의 풀어나가야 할 제일 큰 도전인 듯하다.

 

¶ 故 최인호 (연세동문선배, 작가) 의 1990년대 말 자전적 수필집 ‘작은 마음의 눈으로 사랑하라‘ , 요새 신들린 듯이 필사를 하며 읽고 있고 이제 거의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다. 그 중에서 오늘 읽으며 생각하는 것, ‘젊은 날의 약속’ 이 제목인 데.. 이것을 아마 언젠가 한번 읽었고 그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다. (서울)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던 이야기였다. 당시에 나는 ‘꿈속에서나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리운 동창회 광경이었다. 한마디로 슬프기만 했던 심정이었다.  이 글은 그가 50세가 넘으며 쓴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들 그 당시에 벌써 ‘늙음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을까? 나는 그것이 부러운 것이다.

 

 

¶  어제 일기예보는 거의 정확했다. 아침 9시경에 드디어 꾸르릉거리며 새카만 하늘로부터 빗물이 쏟아질 태세를 잔뜩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열대성 기후 같은 소리지만 밖에 나가보니… 이건 아주 싸늘한 공기였다. 오늘 하루 종일 온다고 하는 비, 내일이면 개일 듯…  갑자기 초록색의 농도가 진해지는 뒷마당을 보니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느낌,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로 시작되는, 김대붕 선생님의 추억이 어린 ‘4월의 노래‘ 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제 4.19 학생혁명의 추억도 색깔이 바래지고, 모든 것들은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Tobey Trail, 2년 전 떠난 나의 분신 dog, Tobey가 묻힌 곳으로..

 

¶  일요일마다 오랜만에 이영석 신부님 얼굴을 ‘화면’으로 ‘제 시간’에 보게 되는 것, 솔직히 즐거운 일이다. 가급적 주일미사 기분을 느끼게 해 주려는 ‘생방송’ 미사, 얼마나 멋있고 효과적인가? 신부님, 정말 정말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편한 곳에서 편하게 미사 봉헌하는 것,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한국본당 도라빌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우리에게는 거의 순례자적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  예의 주일 교중 미사 YouTube Live stream 으로 주일미사 참례를 마치며, 다시 한번 느낀 것은 우리 신임 주임신부님, 정말 멋진 사제로구나 하는 것. 처음보다 더욱 이곳에 적응하며 잔잔한 빛을 발하는 듯한 인상도 받는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어떻게 그렇게 ‘양떼들, 전 신자들’의 고민과 관심에 공감, 동참하는 것일까… 그렇다. 진정한 목자라는 것은 이래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의 공지사항으로 알게 된 것, 궁금하던 것,  언제 아틀란타 대교구의 미사가 재개 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결국은 ‘무기한 미사 중단’이란 답을 듣게 되었다. 우선 당분간 우리의 적당히 적응된 daily routine에 변동이 없는 것은 마다할 것은 없으나, 이것 좀 이 지역의 코로나 사태가 이 정도인가 하는 의구심과 걱정되는 마음은 떨칠 수가 없다.

 

¶  요새 열심히 읽고 있는, 연세대 동문선배, 최인호 님의 수필집 ‘작은 마음의 눈으로 사랑하라‘, 손을 놓을 수가 없다. 흡사 나의 분신, 아니 다른 이상형이 쓰는 듯한 그런 감정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동류의식’… 이것이야 말로 지금이라도 찾고 보는 보물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벌써 반 정도 독파를 하는데, 이 수필에 열거되는 각가지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나의 추억과 생각을 정리하면 어떨까 하는 야무진 생각까지 치솟는다. (또 다른 서울고교 출신) 인호(형), 고맙습니다!

 

¶  어둠 속에서 central heating의 저음 소리를 들으며 침대를 기어 나오면 또 습관적으로 ‘성모님, 하루 또 부탁합니다!’. 생각보다 싸늘한 날로 시작되는 모양, 비가 완전히 그치지 않은 모양으로 그래서 더 춥게 느껴지고 아래층에도 히터가 요란하게 나오고 있다. 그래, 4월에도 이렇게 추운 느낌이 있었어… 하지만, 곧 따뜻해질 거야…

곧이어 월요일 새벽을 알리는 trash truck 요란한 저음의 진동, 또 한 주일이 시작되는구나… 저 청소부 아저씨들, 가랑비를 맞으면서 거의 로봇처럼 일을 하는데,  저들이 요새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시켜주는 ‘천사’들이 아닐까?

 

¶  어제 어떤 자매님이나의 blog에서 성녀 파우스티나 Faustina 의 冊 ‘자비는 나의 사명‘을 smartphone에서 볼 때 글자를 더 크게 볼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이 분야는 나의 약점이다. 나의 브로그 는 사실 작은 화면을 의도적으로 염두에 안 두었다고나 할까… 커다란 screen위로 멋지게 design된 것으로부터 ‘초라하게 작은 창’으로 그것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이게 한단 말인가? 이런 추세가 시작되면서 이렇게 ‘싸가지 없게’ 걸어가며 webpage를 보는 것을 상상하며 ‘치를 떨었다’. 하지만 역쉬~~ 세상은 나의 뜻대로, 나의 마음대로 가만히 있어주지 않는가? 더 많은 사람들, 주로 ‘게으른?’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 어쩔 수가 없다.

부랴 부랴 나의 phone으로 나의 website를 보니, 요지부동, 전혀 글자나 화면의 모든 것들을 크게 작게 할 수가 없다. 다른 site들은 손가락 두 개로 pinch-zoom 자유자재로 크기가 control이 된다. 왜 그럴까? 나의site의 technology가 또 뒤쳐진 것인가? 그렇다. 나의 것도 기왕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여야 하고 (선교의 차원), 이 문제를 풀어보자.

오늘의 pop project, pinch & zoom function on touchscreen device… 결국은 한가지 방법을 찾았다. 문제는 나의 Artisteer theme 들의 <head> tag에 있는 viewport meta data 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는 이 head meta tag을 바꿀 방법이 한마디로 더럽다는 것이다. 일일이 server에 이미 있는 theme folder에 가서 header.php 를 reedit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꾸어서 test를 해보니 정말 와~  pinch & zoom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급할 때 글자나 모든 것들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Code:

<meta name=”viewport” content=”initial-scale = 1.0, width = device-width” />

 

 

Omega Seamaster, ticking & live again!

 

¶  Omega ‘wrist’ watch: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shelter-in-place 의 결과로 수난을 겪는 것 중에 하나가 나의 손목시계였다.  Pandemic 전의 ‘정상적인 생활’에서 나는 이 손목시계를 아침에 꼭 끼고 외출을 하였는데 외출이 거의 없어지니까 이것의 ‘죽어버린’ 것이다. 40년 전 결혼선물로 받았던 이 Omega Seamaster, 결혼 초에 쓰다가 값싼 Timex 같은 것 때문에 보석상자 속에 보관을 하였던 것을 몇 년 전부터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계는 automatic이라서 어느 정도 움직여 주지 않으면 서버리는 불편함이 있었기에 사실 실용성에는 문제가 있었다.  한때는 Electric motor를 사용해서 움직여주는 gadget을 살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사치다.

요새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아하! 아침에 일과를 시작하면서 그것을 손목에 차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사실…  그래서 집에서도 오전 8시에 꼭 차고 오후 5시에 벗는 습관이 지금의 코로나사태의 선물로 남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의 희생제물, 동네 성당의 sanctuary가 굳게 문을 닫았다

코로나 사태의 선물: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이 보이게 늘어났다

 

¶  그제의 열대성 stormy day 이후에 갑자기 싸늘해진 날씨, 바람이 그렇게 싸늘할 수가 없다.  이른봄에  흔히 보는  바람이 싸늘한, 하지만 찬란한 태양이 작열하는 날,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을 달래기 위해서 거의 한달 여 만에 동네본당 Holy Family성당으로 차를 몰았다. 차로 1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 거의 10년 가깝게 정든 이 차길, traffic은 한산하였지만 계절의 신호는 현 사태와 전혀 상관없이 뚜렷하였다.

 

8여 년 동안 거의 매일 drive하면 다니던 Robinson Road, 한 달만에 주위의 초록색이 더욱 진해졌다

 

비록 공개적 모임은 없지만 그래도 성전 내부 자체는 open한 것으로 안 우리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신부님 차가 보이길래 반가웠지만 성당 입구는 굳게 닫혀있었다.  한 달에 한번씩 봉사단체에 food donation하려고 가지고 간 것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데 누가 나오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물건을 전해 주고 대성전 sanctuary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으니, 모두 close되었다고 알려준다.

 

14처,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는 입구

 

도라빌의 한국 순교자 성당은 성전의 문은 열어놓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은 닫았을까… 아쉽기만 하다.  대신 성당 뒤쪽의 수풀 속에 마련된 14처, 십자가의 길 station of cross 을 오랜만에 걷고 나왔다.  돌아오면서 다시 느낀다… 이런 상태로 더 오래가는 것, social distancing 은 흔히 아는 것같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사람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는 엄숙한 사실을.

 

Thanks, Uncle Benjamin!

 

¶  Stimulus Gift: 평상시 오늘은 일년의 Tax Return을 하는 마감날이었는데, 그것이 코로나 사태로 7월 15일로 연기가 되었다.  IRS (Internal Revenue Service)에 세금보고를 하는 대신에, 오늘 Bank account를 보니 IRS에서, 예상하던 대로 deposit한 돈이 얌전히 들어와 있었다. 결국 지난 몇 주 동안 congress에서 그렇게 토론하던 것이 현실화 된 것이다. 완전히 정지된 경제활동으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Stimulus Package, 이것은 한글로 어떻게 표현하나… 요새는 이런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고등학교 수준의 한글단어가 머리에 맴돌고 있는데 이런 전문용어는 무리다. 좌우지간 ‘경제활동 촉진을 위한’ 그런 정부지원책이 하나다. 2 Trillion Dollars, 이것은 그러니까… 2000, 000,000,000 dollars! 20조 달러인가… 이번에 완전히 all stop된 경제활동을 그야말로 구원하기 위한 단기 대응책이다. 이것이 모자라면 같은 규모의 2차 지원을 할 모양이다. Dollar는 미국 돈이니까, 하기야 찍어내는 것은 우선 큰 문제가 없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것 모두 자가적 빚이 아닌가? 누가 갚을 것인가? 아마도 우리 딸들의 세대가 아닐까…

 

¶  Plateau, 코로나19의  최악 사태를 지나가며:  비록 어제부터 코로나에 대한 ‘난잡한 뉴스, 선동적인 것들’과 완전히 인연을 끊었지만 아주 믿을 만한 단편 소식은 접하고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블로그 source가 하나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retire한 대학교수 출신, computer scientist, engineer  Michael Covington 박사, 그의 블로그 로부터 나는 간접적으로 이 미국과 이 조지아 지역의 코로나 확산뉴스를 접하는데, 이번의 post 에서 그는 현재의 코로나 pandemic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었다.

 

1.  What is vital is to stay in touch with reality. Coronavirus is not a piece of political ideology that somebody made up. It is a real, physical enemy. Those deaths in hospital corridors are real. Dr. Fauci really does know more about viruses than you do. And so on.

Our enemy is speculation — people who can’t distinguish “it might be” from “it certainly is,” and who promote unconfirmed possibilities as if they were confirmed truth. See also (9) and (10) below.

현실을 직시하는 것,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상적, 정치적이 아니고 물리적인 적이다. 병원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것도 사실, Dr. Fauci (NIH 전염병, 바이러스 책임자) 가 우리보다 이 병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음도 사실이다. 우리의 적은 근거 없이 추측하는 것, 실증되지 않은 사실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2.  Ignoring the virus was never an option. We’ve had 22,000 deaths. Would you rather have had half a million? You could easily have had that, if there had been no restrictions.

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무시하는 것, 언어도단이다. 22,000 명이 벌써 죽었다. 50만 명이 죽는 것, 사회적 제한 조처가 없었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3.  Our restrictions have paid off. Quite possibly, hundreds of thousands of lives have been saved. The national new-case rate peaked a few days ago. State by state, some states are going to have much later and lower peaks, which is a good thing.

[Afterthought: Models may have been inaccurate, but there’s no denying that the virus spread a lot less with our lockdowns than it would have without them.]

이런 사회적 제한조치는 성과가 있었고 수십만의 생명을 보호했다. 확진자의 수가 이제 고비를 지나고, 각 주에 따라서 늦게 완만한 고비가 올 것인데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바이러스 확산 정도는 확실히 사회적 제한, 봉쇄조처와 비례하고 있다.

4. The virus would have damaged our economy no matter what we did (even if we had ignored it and just let a lot of people die). The reason you didn’t hear economists objecting to those stimulus payments is that knowledgable people recognized that a rise in the national debt would be better than sudden mass poverty.

어떤 조처를 취했든 간에 경제적 타격의 정도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감염자, 사망자의 숫자는 상관이 있었을 것이다.  정부가 모든 시민들에게 보조금을 준 것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알만한 사람이면 모두 동의하듯이 ‘빚을 지는 것이 갑자기 모두가 가난해 지는 것보다 낫다’ 라는 논리 때문이다.

5.  Our economy can’t sustain forever what it sustained for a month. Damage to the economy itself causes deaths, not only here but (perhaps even more so) in poorer nations that rely on us for trade.

현재 몇 개월 지속되는 경제적 타격은 무기한 오래갈 수는 없다. 이런 피해는 다른 사망자를 유발하기 때문이고,  무역에 유지하는 빈곤국은 더욱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6.  We are going to have to do some kind of gradual, careful reopening of the economy, starting with businesses that don’t involve crowds of strangers.

이런 상태의 경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다시 가동시켜야 한다.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그런 사업, 가게 부터 제한을 풀어야 한다.

7.  With the wider availability of coronavirus tests, some experts are recommending a shift to a strategy of restricting only people who are known to be infected and their immediate contacts. I hope this proves feasible.

바이러스 테스트가 광범위하게 실시될 때, 관계자들은 감염자나 그와 접촉한 사람들만 골라서 거주제한을 하여야 한다고 권하고 있고, 이런 방법의 실행이 어렵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8.  The virus will linger. For a couple of years, we are going to have to behave as if we were in a bad flu season, continuing to take some precautions.

코로나 바이러스는 질질 끌며 계속될 것이다. 몇 년 후에는 이것도 보통 독감 같이 취급을 하며 살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해 조심을 하며 살게 될 것이다.

9. I know you’ve heard that some people say the virus escaped from a lab in China. Please be assured that many governments around the world are looking at this, and that they know more about it than you do, and are going to pay attention. In the meantime, it doesn’t affect what we need to do going forward.

[Afterthought: The lab thing is a red herring. Even if it was just bad sanitation, it was an international hazard that came from China. Flu epidemics have been coming from China with some regularity. This can’t go on.

사람들은 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의 어떤 연구소에서 새어 나온 것으로 많이들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보다는 이미 세계의 많은 정부기관들이 이것을 조사하고 있고, 그들이 우리들 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알려질 때가지 우리들은 현재 하고 있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비록 이 중국 연구소 이야기는 확실한 것은 아니더라도, 중국으로 부터 출발한 많은 위험들, 특히 독감 역병 같은 것은 거의 정기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는 것이다.

10. There is research on hydroxychloroquine and other drugs that might kill the virus. Please let medical research proceed, and don’t spend your time trumpeting one success story without knowing whether others have gotten the same results.

[빠가 또라이] 트럼프가 ‘자기의 직감으로’ 코로나 특효약처럼 볼 때마다 언급하던 이것 [읽기도 힘든 화학용어]은 그야말로 먹을 때 기도를 잘 하면 낫게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인데… ‘과학적’으로 확인이나 증명이 되기 전에는 선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 먹고 5년 후에 ‘확실히’ 사망에 이르면…  [이것은 나의 철저한 상상적 의역에 불과함]

 

동네를 걷다가 하늘을 보니.. 지난 밤의 폭우성 구름이 걷히며 청명한 하늘이…

 

봄바람이 시속 10+ 마일 정도로 불며,  갑자기 파래진 나무 이파리들이 계속 살랑거린다. 꽃, 나무, 송학가루가 진해지기 시작하기만 하면 시원한 바람과 빗물로 씻어 진다. 이것이야말로 천혜 天惠 라고 하던가… 거의 완벽한 날씨가…

2020년 부활절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부활주일 월요일인 셈이다. 가톨릭 전례용어로,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영어로는 ‘Monday within the Octave of Easter‘ 인 셈이다. ‘그 망할 놈’의 pandemic 코로나 바이러스만 빼면 near perfect,  gorgeous day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날, 지나간 한 주일, 특히 성주간, 성삼일 을 되돌아본다.

 

성목요일 온라인 미사, 이날은 각자의 가정에서 ‘세족례, 발씻김’ 의식을 했다

 

제일 큰 관심사였던 성삼일 Triduum  미사와 부활절 낮 미사는 예정된 대로 online live YouTube stream 으로 각자 집에서 참례할 수 있었다. 매일 미사를 이미 online으로 하고 있어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모두 live라서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TV/Monitor앞에 있어야 한다. 매일미사 (대부분 cpbc, 평화방송) 는 사실 on demand format이라 우리에게 편한 시간에 했지만 Live Format은 모든 신자들이 같은 시간에 참례하는 것이라 더욱 큰 의미와 무게를 가진다.

이번에 아틀란타(나는 ‘애틀랜타’라는 ‘괴상한’ 이름을 지독히 싫어함, 언제 누가 왜 바꾸었나?)  도라빌 순교자 성당은 주임신부님 (이영석 세례자요한 신부)을 비롯한 봉사자들이 4일 동안 정말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듯 보인다. 아마도 주임신부님의 의지였을 듯 하다. 또한 부활절 낮 미사의 강론은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문,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명 강론으로 꼽고 싶다.

안방 TV screen 위로 4일 동안 계속 마주보게 되는 주임신부님의 얼굴은 ‘교우 여러분들, 그립습니다…’ 그 자체였고 그것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였다. 어려운 시기에 어떤 목자가 진정한 목자인가는 이런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코로나 사태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미사 자체는 순교자성당의 대성전에서 평소에 하던 그대로 집전이 되었지만 일반 신자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저 ‘쓸쓸한’ 그런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부님을 보좌하는 사람들과 성가대의 보조를 최소한 인원으로라도 참여시켰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만 하다.

 

현재의 Shelter In Place (Stay Home, 칩거?) life style도 거의 한 달에 가까워 온다. 지난 주일 날, 성지주일 Palm Sunday에는 ‘용단을 내려’,  새로 태어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손자를 보러 20 마일 떨어진 곳까지 외출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 그야말로 ‘칩거생활’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Social Distancing 같은 New Normal에 아주 적당하게 적응을 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너무나 평화스럽고 건강한 나날들이 된 듯하다. 

한때 ‘난무하는’ YouTube의 함정에 빠져 우울하기도 하고 기운도 빠지곤 했었다.  그곳에 잘못 빠져서 하루 종일 코로나19 뉴스를 보게 되면 정말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오늘부터는 ‘완전히’ 그곳에서 빠져 나오니, 정말 세상이 다르게 보이며 살 맛도 제자리로 오는 듯 하다. 그래… choice다, choice… 이제는 지긋지긋한 또라이 트럼프가 10대 깡패의 얼굴로 기자들을 위협하는 희귀하고 희한한 광경을 안 보게 될 희망이 생긴다.

 

우리 subdivision의 30분 walking course ‘trail’ roadway, Guilford Circle

 

이제는 연숙과 30분 걸리는 우리 동네 Hanover Wood trail (사실은 roadway)를 걷기 시작한지 한 달도 넘는다. 이번에 느낀 사실은 이 walking trail course가 정말로 우리 나이에 알맞은 코스 [거리나 경사] 라는 사실이다. 이것으로 나는 물론이고 연숙에게 나타나는 ‘건강의 신호’는 정말 놀랍기만 하다. 고질적인 불면증도 아주 안정이 되어 혈압수치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걷는 그 자체보다 그것에서 얻는 평화의 느낌 때문일 것이라고 우리는 진단한다. 게다가 그 동안 각종의 외출로 힘들었던 뒤뜰의 텃밭을 가꾸는 일은 이럴 때 정말 완벽한 소일거리가 되었다.  이런 것도 어떻게 보면 코로나19가 준 good side effect가 아닐까? 하지만 이런 모든 예상치 못했던 ‘좋은 점’들에도 불구하고 우울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Scientist correcting & teaching… whom, Stupid!

 

¶  March Madness:    3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지나간 한 달을 뒤돌아 본다. 이상하게도 빨리 지난 듯 하면서도 사실은 근래에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것은, 3월 달 이전에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한가지 밖에 없다.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pandemic 그리고 pandemic …  한마디로 이것이 바로 March Madness가 된 것이다.

오늘 저녁 major network TV 로 pandemic news를 마지막으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인재 人災 인가, 천재 天災 인가.. 그 중간인가.  생각보다 피해가 너무나 처참할 정도로 심한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몸을 추스르게 된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대비할 시간이 그런대로 충분히 있었는데, ‘빠가’, ‘또라이’ 트럼프,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red button’을 누른 결과가 되었다. 부활절 이후 경제활동을 풀겠다고? 재선 再選의 유혹이 그렇게도 달콤했던가, 아니면 자기도취의 역병 疫病에서 아직도 못 깨어난 것인가?  결과론은 둘째치고,  몇 일전의 생각과 발언을 거의 발뺌으로 넘어가며,  비위에 거슬리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거의 깡패 수준의 발언을 서슴지 않으니.. 정말 우리는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남미 나… 하나 같이 지도자 부재현상의 홍역을 겪고 있다.

결국 이 ‘또라이’는 4월 말까지 ‘금족령’을 발표한 모양인데, 어떻게 며칠 새에 마음이 그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 모든 과학적 자료를 듣거나 읽을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니 아마도 밤에 자기 전에 ‘뺑뺑이’를 돌리는 것은 아닌지 우습기도 하다. 문제는 이제 정면으로 대처하기는 늦은 것 같고, 이 거대한 파도를 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인재에 가깝다. 240,000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는 놀라운 예보는 이제 거의 실제로 다가오는 사실로 느껴진다.

 

 

 

¶  성경통독:     3월의 마지막 날,  이번 달 성경통독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한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올 들어서 아틀란타 순교자 본당 신자 전체가 일년에 걸쳐서 성경을 전부 읽는 것을 목표로  ‘성경통독’ 계획표를 배부하여 현재 우리도 매일 읽고 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읽는 것이 이제 거의 습관이 되었다.

오늘까지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기상 시간에 맞추어 이렇게 신약성경 전체를 읽고 있는 것이 나는 은근히 자랑스럽다. 조그만 습관이나마 내가 이렇게 습관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특히 더 가슴이 뿌듯한 것이다.

‘매일 성경, 묵상글’에 꽤 오랜 동안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에 ‘통째로’ 읽는 경험은 아주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매일 말씀, 묵상의 단편 단편의 말씀들이 앞뒤로 연결되어서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살아나는 것, 흩어져 있던 수많은 점들이 하루 하루 연결이 되어서 새로운 뜻들이 너무나 편하게 이해가 되어온다.

또한 그렇게 한없이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던 ‘성경’, 특히 신약이 어쩌면 이렇게도 짧을까 하는 오만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인류의 정신적인 역사를 만들어 왔던 ‘예수부활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짧았단 말인가 할 정도였다.

오늘로서 신약성경 마지막 ‘요한묵시록 the Apocalypse’, 그것도 마지막 부분을 끝으로 신약을 다 읽게 되었다. 묵시록에 등장하는 상징적이고 종말론 적인 이야기 중에서도  four horsemen, 그 중에서도 첫 번째의 white horse는 아마도 역병 plague 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오늘의 코로나바이러스 Pandemic 과 연관되어서 아주 실감나게 느껴진다.

내일부터는 그러니까 구약 성경을 읽게 되는 모양인데… 매일 밤 우리집의 저녁기도에서 이미 구약을 읽기 시작한 것이 꽤 되어서 조금은 덜 생소할 것이지만 미리부터 겁이 안 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바보같이 잔인하고, 반복적으로 지루한 부분들이 많을까… 아직도 의아해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뿐이다. 하지만 내일부터 다시 그것을 반복하며 읽게 되니, 이번에는 또 다른 깨달음을 기대해 본다.

 

 

¶   3월도 며칠 밖에 남지 않았다. 3월, 특히 중순을 넘으면서 ‘전통적 기억의 단절감’을 절실히 실감했다. 흔하게 생각나던 나와 친숙하던 어휘, 단어 등등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기억력 감퇴일까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런 것들을 모두 가리는 또 다른 것들이 머리 속에 가득했기 때문일 것, 이라고 나는 희망적인 추측을 한다. 그러니까, 일시적인 기억 상실증이라고 할까. 물론 이유는 한꺼번에 물결치듯 나를 덮친 정보의 홍수, 그것도 오랫동안 (또라이 트럼프 등장 이후) 피해오던 세속적 주류 미디어 mainstream media 로부터, 바로 그것의 위력이었다. 물론 ‘그 놈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것들이다.

 

 

작년 3, 4월의 일지 日誌달력을 본다. 올해의 것의 밑에 놓고 수시로 작년과 올해를 비교하는 것이 이제는 버릇이 되었다. 물론 1년 전의 일들이 궁금한 것도 있지만, 그 당시 만나거나 연락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그 때 만났던 장소, 날자 등을 참고로 다시 연락하는 등 편리한 것,  탁상달력의 조그마한 일지, 메모는 이제 꽤 나의 개인전통이 되어 간다.

지금 이것을 다시 보며, 작년 3,4월의 일들이 너무나 신선하고, 건강하고, 그리운 것으로 느껴진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이렇게 세상이 뒤숭숭한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Beatles의 Yesterday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작년 이 맘 때의 ‘보통, 정상, 지루한 하루하루’ 가 지금은 거의 천국처럼 느껴진다. ‘새 정상 new normal’이란 것이 작년에 비하면 거의 비상사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바로 눈 앞에서 ‘적군이 쳐들어 오는’, 실제적인 전쟁이 난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어렸을 적에는 당장 쳐들어올 것 같던 김일성 빨갱이들의 제2의 6.25의  공포에 떨었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미국에서도 거의 20년 전 9/11 사태도 등골이 오싹한 공포를 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먼 곳의 불’ 이라고 위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 COVID-19  Pandemic은 game의 scale이 완전히 바뀌어서 그렇게  간단하게 숨을 곳이 별로 없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공포다. 이렇게 ‘숨을 곳이 없다는’ 공포는 사실 아주 젊었을 때 한번 잠깐 느낀 적이 있었다. 1973년의 classic psychic horror movie였던 The Exorcist,  그 심령 귀신영화를 본 후 거의 일주일간 밤에 불을 끄지 못하고 잤다. 그때의 공포도 지금과 비슷하게… 숨을 곳이 없었던 그런 공포였다.

이번에 경험하게 된 이 ‘폐렴’ 류의 전염병, 나이와 크게 상관이 있다고 했고, 나의 나이는 이제 아주 위험한 쪽에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심각하게 간주하게 되어서, ‘일부러, 자진해서’ 관심을 두고 걱정을 하기로 했다. 그것이 나와 모두를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급적 밖에 안 나가는 것, 그것이 알고 보면 최선의 방법이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YouTube 주일 미사

이영석 세례자 요한, 주임 신부님

 

¶  오늘의 사순 5주 주일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Youtube Channel 을 통하여 ‘참례’를 하였다.  아틀란타 대교구 내의 모든 공적인 미사전례가 정지가 된 이후 대부분의 신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인터넷 비디오를 보며 하게 되었는데 우리 본당도 지난 주부터 시작을 해서 오늘이 두 번째가 되었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예전 같으면 아주 힘들었을 것들이 가능해지고 교회의 전례까지 이렇게 혜택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문제는, 개신교와 비교해서, 전례의식의 중요성이다. 쉽게 말하면 개신교는 ‘강론’만 들으면 거의 다 끝이 나지만, 가톨릭에서는 ‘전례 의식’ 자체 특히 성체성사가 절정 絶頂이기에 이런 ‘virtual mass’는 교의적 사목적으로 결함이 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몸을 ‘먹는’, 영성체가 문제다.  예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것,  그것을 물리적으로 ‘영’하는 것이 빠지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을 ‘신영성체’, Spiritual Communion이라는 기도를 통해서 보완을 하고 있지만 이것을 정식 미사라고 하기에는 신학적인 문제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대수인가? 신부님을 big screen으로 보는 것만 해도 사실 성당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만으로도 사실 감지덕지가 아닌가?

또한 이렇게 YouTube Live로 주일미사를 가능하게 한 성당의 ‘전산팀’이 있었을 듯 한데 그들에게 뜨거운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들도 현재 진행중인 코로나 사태에서 발견하게 되는 많은 ‘착한 영혼’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김형철 시메온 보좌 신부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20년 3월 22일 온라인 online 주일교중미사가 무사히 끝났다. 처음 독서부분을 놓쳤지만, 김형철 신부님 집전의 고별미사를 대부분 참례할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 애석하게도 고별미사의 날짜가 대교구에서 공적미사 중단령이 나온 이후 첫 주일이 되어서 교우들과 직접 작별인사를 나눌 수 없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과 슬픈 마음이 교차되는 경험이 되었다.

첫인상이나 이임시의 인상에 전혀 차이 없이, 전형적인  ‘착한 목자’의 모습은 나, 우리들 모두에게 오랜 세월 동안 감동으로 남을 듯하다. 어린애, 청년, 장,중년, 그리고 나 같은 senior층, 모두에게 차이 없이 많지 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인자하고 환한 모습을 보여준 것, 평화의 인사에서 가능한 한 많은 교우들과 따뜻한 악수를 나누고 싶어하던 모습 등 그런 것들이 김형철 시메온 신부님의 legacy가 될 것이다.

우리 부부와는 특별히 개인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그래도 몇 가지 짧은 일화는 남아있다. 물론 연숙은 예비자 교리반 관계로 사무적, 공식적인 만남의 인연이 있지만, 나는 아주 우연한 짧은 대화의 기억이 남는다. 테이야르 샤르댕 신부님의 ‘진화적 영성’에 심취할 때, 신부님과 마주친 기회에 의견을 나누었던 기억.  역시 신부님도 샤르댕신부의 ‘진보적, 예언적, 과학적 영성’에 예수회신부님 다운 열정을 보여 주었던 것, 그것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이후 마주치면 나의 얼굴을 알아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연숙과 나의 관계를 아시고, 나이답지 않게 우리를 격려해 주신 것 등등.. 모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주임신부와 보좌신부의 밀접하고 원만한 관계를 몇 번이나 언급하시던 주임신부님, 고별미사에서 그 심정을 일화와 더불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애석함을 보여 주셨다. 물론 그런 광경을 Youtube live로 보면서, 우리도 모든 기억들과 더불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는다.  부디 건강하시고 큰 신부님이 되시길 기도하며..

 

 

 

¶  Social Distancing? Huh….  ‘社會적 距離 두기’?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새로운 시사 時事용어, 이것 한글 용어 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괴롭다.

사람들과 사이를 두라는 쉬운 그림은 그려지는데… 간단한 것이 아닌가?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갔을 때 어떻게 그들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어울리는 것, 그것일 것이다.

이유는 물론 공기로 전염되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몇 feet 사이를 두면 안전한 것인가? 말을 크게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귀찮으면 아예 사람들 근처에 가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도 역시 ‘사회적 거리’를 두는 지혜다. 당장 우리가 쌓아온 오랜 전통, 주일과 매일미사, 레지오 주회합, 봉성체, 양로원 봉사, 그리고 YMCA  gym 운동..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오랜 세월 동안 믿었는데, 이것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당분간 아니면 꽤 오랜 동안 이런 활동을 못할 듯한 예감인 것이다. 아틀란타 대교구의 본당을 위시한 한국성당의 평일, 주일미사와 레지오 주회합, 활동도 거의 마찬가지 위치에 있다. 어떻게 결정을 할 것인가? 어떻게?

신중하고 사려 깊고 지혜로운 결정의 순간들이 계속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아마 이런 사회적 곤란함은 계속될 듯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올바른 길인가? 내가 안 움직이고 안 나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임을 알면서도 그것의 ‘정도’가 문제인 것이다. 관건은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데 있다. 100명 이상인가? 10명 이상인가? 오늘 주일미사도 100명 이상일 것으로 예상하고 모처럼 online mass를 보고 가능하면 참례의식을 지키도록 노력했지만 그것이 실제 진정한 성당미사의 근처에나 갈 것인가?

 

 

¶  오늘 우리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일미사를 빠지게 되었다. 점점 느낌이 안 좋은 이 시국의 그림자가 나의 머리를 짓누르는 가운데  싸늘하고 잔뜩 찌푸린 날씨와 연숙의 ‘급성 불면증’을 핑계로 그렇게 했는데, 솔직히 크게 후회는 안 한다.  대신 급히 찾은 online (English) mass [from USA] 에 혼자서 참례해서 조금은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오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일 교중미사에  평상의 1/3 정도가 참례했다고 조시몬 형제 용감하게도 보고를 해 주었다. 그 형제의 ‘올바른 신심’은 우리도 감탄하고 있지만 우리와 조금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60대와 나의 70대의 차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다음 주부터일 듯하다. 매일미사, 주일미사, gym, 레지오… 등이 관건이다.  아틀란타 대교구에서 공식 결정을 내리면 간단한 것을 어떻게 이렇게 꾸물거리는 것인가?

¶  Grandparents at last:   드디어 우리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지난 해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느낌을 생생히 기억하기에 이번에 결국 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느낄 것으로 예상을 했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또 다른 느낌들을 정리하고 처리하느라 사실은 꼭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일들이 작은 딸애의 급작스런 ‘속도위반’성 결혼의 결과임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도 정리를 못하는 정말 ‘모든 것이 늦은’ 인생을 사는 한심한 늙은이라는 생각 뿐이다. 주위의 대강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찾아오는 ‘손주들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어느 분들은 지나칠 정도로 흥분을 하는데 나는 그때마다 미안할 정도로 묵묵히 응답을 했던 기억이다.

우리 부부의 출산경험은 사실 거의 40년 전에 가까운 태고 太古 적 때의 일이었고, 이번에 다시 가까이 이 출산과정을 지켜보면서, 거의 새로운 것을 보는 듯했다. 오래 전, 두 애 모두 (제왕절개)수술 경험이 있어서 이번의 예정된 수술은 크게 생소한 것은 아니었지만,모든 기억이 사라진 후여서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이 탓인지 정말 필요 없는 것들이 걱정거리로 둔갑을 하는 모양이다.

그 긴 세대차를 통해서 의학도 발전을 했을 것이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을까? 걱정을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통한 나름대로의 근심은 떨쳐 버릴 수가 없어서 주위에 기도를 청하기도 했다.  한가지 다른 것은 그 옛날 우리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사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기억, 그래서 충분히 즐길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것은 비교적 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들 즐겁고 기쁜 것이라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아기엄마(작은 딸) 는 이미 내가 할아버지가 되었음을 강조하느라 지난 성탄 때에는 MY GRANDFATHER’S BLESSINGS이란  DR. RACHEL REMEN의 Bestseller 책까지 선물로 주었으니, 별다른 거창한 생각을 안 하며 기다렸던 나도 이제는 조금 ‘책임감’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은 무엇일까? 나에게 할아버지, 할머니 상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없다.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숙에게는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6.25 발발초기 때 납북되셔서 기억에 남는 아버지가 없었기에 내가 아빠 노릇 하는 것도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할아버지 노릇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난감하기만 하다.

태어난 파란 눈을 가진 건강한 남자아기를 계속해서 보니 시간이 가면서 나의 마음에도 평화와 기쁨이 찾아온다.  또한 주위의 친지들에게 태어난 아기의 사진을 보내주니 그렇게 함께 기뻐할 수가 없었다. 특히 반세기 떨어져 살아왔던 고국의 친구들도 제일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된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들은 ‘정상적, 모범적 인생’을 살았는지 벌써 중학생까지 된 손주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이번에 겪는 ‘인생사’는 지나간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예상하며 살았던,  ‘인생에서 거쳐야 할 큰 사건들’ 중에서 거의 마지막에 속할 것이라 생각이 되어서 조금은 의미를 두고 싶지만, 완전히 ‘세계화’된 여건에서 파란눈의 손자, 사돈들과 어울리는 새로운 모험이 시작됨은 우리 평창이씨 족보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  Yellow Perils:  Corona Virus, 코로나 바이러스로 주위가 시끄럽다. 이것이 시끄럽게 된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우리야 별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는 많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리도 피할 수 없게 관심을 안 둘 수가 없게 되었다. 당면 문제는 우리가 일 주일에 한두 번은 가야만 하는 ‘도라빌 한국 순교자 성당’이 ‘한국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도 다른 한국사람들과 잠시나마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암만 생각해도 조금 overacting이 아닌가. 본당에서 공식적으로 ‘자발적 모임 자제’는 물론이고 봉사활동의 첨단위치에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모임도 단장재량으로 취소, 연기한다고.. 꾸리아 월례회의, 사순특강 취소… 사순절인데 어쩔 것인가?  이곳 아틀란타에 위치한 CDC에서도 별로 크게 공포감을 주는 발언이 없고, 다른 미국본당들은 전혀 개의치 않음을 알기에 성급한 한국인의 성질이 이곳에서도 역시.. 하는 생각이 든다.

제일 웃기는 것은 역시 그 문제의 다른 쪽 한국인사제, 미사 때 신자들에게 ‘대꾸도 하지’ 말고, ‘기도도 말로 하지 말고’, ‘성가도 부르지 말고’.. 등등 예의 일장 훈시를 한 모양이다. 역시 그 신부의 해괴한 인상 그대로인 듯.

이번 ‘사건’을 통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Yellow Peril이란 말을 정말 오랜 만에 떠올렸다. 서양문화가 보는 황화론 黃禍論, 아마도 영국의 역사학 거장 universal historian,  Arnold J. Toynbee가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1 황화론의 현대적 해석은 다음 세계전쟁은 서방과 중국의 종말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중반의 일이었고 당시의 중국은 정말 전 인민이 굶어 죽어가는 한심한 공산독재의 표본이어서 쉽게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서방에 도전을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50여 년 후에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이제는 이 말이 장난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기본 도덕관념(서구적인)이 거의 ‘의도적’으로 결여된 ‘비정상적 공산주의자’들이 억수로 돈을 벌어서 어떻게 쓰고 있는가. 이런 배경에서 이번의 코로나 전염병을 결과적으로, ‘비밀리에’ 퍼뜨리게 한 짱깨(정부 주도로)들의 행태를 다시 보면서 그들과 함께 춤추는 대한민국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1960년대 말 한국 시사영어주해 잡지, 월간 ‘시사영어연구’에서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2020년의 사순절 Lent가 시작되었다.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아침 9시 미사엘 가서 이마에 재 灰로 긋는 십자가를 엄숙하고 고맙게 받았다. 문득 ‘아, 또 새로운 사순절이…’ 하는 자괴감 비슷함을 잠깐 느꼈지만, 올해의 사순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생각을 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갑자기 다가온 ‘손자’의 출산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걱정보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온통 머리 속을 맴돈다.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고?  증손주를 볼 가능성은 제로이므로 이것이 우리가 거쳐야 할 중대사의 거의 마지막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쁨, 후회, 걱정, 안도감들이 완전히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각종 개인적인 관문들, 국민학교입학,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 졸업, 대학교 입학 졸업, 유학출가, 결혼, 출산, 취직, 은퇴, 고아가 되는 슬픔, 자녀 출가, 출산… 70여 년에 걸쳐서 계속되는 이런 일들은 모두가 겪겠지만, 그래도 ‘해 냈다’ 라는 안도감이 앞선다. 전에는 이런 ‘과업’들이 우리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때 늦게나마 이런 모든 것이 ‘안 보이는 은총’의 덕이었음을 알고 가는 것이 제일 다행스럽다.

나를 근원적으로 일깨우고 변화시켰던 2014년 사순절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워낙 거대했던 깨우침이라서 죽기 전까지는 다시 그런 경험을 못하리라고 거의 확신하지만, 그래도 사순절은 나에게는 신비로운 의미를 주는 40일이다. 또한 올해의 사순절은 이런 큰 가족적 진화과정을 겪으며 ‘사람을 사랑으로 구하시려는 사명’의 예수님의 의미를 다시금 차분히,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 사순절의 결론은 역시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잊지 않고, 사순 40일을 보낼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싶다.

 

장례식, 장례미사, 연령회 연도..  이제 나에게는 너무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 말들은 모두 죽음에 관련되는 말들이다. 불과 10여 년 이전만 해도 나는 이런 것들을 거의 모두 피해가며 살아왔었다.  ‘죽음의 진리’를 요리조리 피하며, 모래 밑으로 얼굴을 파묻고 살았다는 표현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이 ‘죽음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기리며 보내는 것이 거의 습관화가 될 정도로 많아졌고, 나름대로의 ‘망자 亡者와의 이별’ 하는 방법과 철학까지 생기게 되었다. 물론 기본적인 철학은 가톨릭적인 것이지만 이제는 내 생각의 일부가 되었음을 느낀다.

각양 각색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보내는 모습도 모두 다르겠지만 그런대로 경건함을 지키는 가톨릭 장례미사는 그 나름대로의 ‘장엄 의식’이 있고 그에 따른 조문객들의 엄숙함이 보인다. 일반 장례식은 물론이고 개신교 의식 조차도 이에 비해서 나의 눈에는 너무도 ‘사회적 모임’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한마디로 고인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 목적, 가는 곳, 등등에 대한 것들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은 올해 들어서 첫 장례미사에 가게 되었다. 작년에는 1월 초에 간 기억인데 올해는 조금 늦은 셈인가. 오늘의 주인공은 40여 년 전,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창립멤버로 활약을 했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사회봉사활동을 해서 이 지역에선 잘 알려진 분이었다.  지병으로 한국의 어떤 요양원에 계시다 며칠 전, 향년 80대 중반에 선종하시고 유골함이 다시 이곳으로 왔는데, 고인의 경력을 감안하셨는지 신임주임신부님, 최대한의 예우로 장례미사를 거행하셨다. 예를 들면 부활초가 켜지고 제대의 초의 숫자 등, 모두 평소의 장례미사와는 달랐던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전의 고인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이런 분의 영결식에 참여하는 것은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의무로도 생각되어서 ‘갈까 말까’하다가 온 것이었고 신부님의 고별사도 다시 기억하고 싶은 ‘신학적 깊이’를 더해 주는 그런 것이어서 ‘오길 잘 했다’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성당을 떠날 즈음의 느낌은 그것이 아니었다.

 작년 이맘때에 있었던 장례미사의 ‘악몽’이 떠올랐고, 그 이전에도 간혹 겪었던 좋지 않던 기억도 되살아 난 경험을 다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지나간 두 가지의 비슷한 경험은 모두 ‘너무나 무리하게, 길고 길었던 미사’라는 것, 놀랍게도 그것이 오늘 다시 찾아온 것이다.

장례미사는 일반 장례식과 조금은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고별식’이란 것, 각종 지인들의 고인에 대한 고별사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짧지 않은 강연을 하기도 하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조문객들이 거의 없는데 모든 말을 영어로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한다.  제일 괴로웠던 경험은 ‘정말 보기 언짢은 태도’로 한 없이 계속되는 ‘우리 사상 최고의 영웅’ 아빠에 대한 추억들.. 정말 끝도 한도 없었다. 내가 죽었을 때 딸들이 그렇게 하는 것, 관속에 들어가 내가 듣게 된다면 아마도 관 뚜껑을 열고 나올 정도가 아닐까..  어제도 큰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번엔 ‘반세기 추억의 영화’까지 가미가 된 것이 이채로웠다. 일반 장례식장에 가면 예식 전후에 뒤 배경으로 계속 보여주던 video를 이번엔 성당 미사 중에, 그것도 ‘끝이 안 느껴질 정도로’ 무수한 영상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앉았던 위치로 보아 도저히 탈출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나에게 이것은 완전한 show stopper로 느껴진 셈이고 앞으로 ‘장례미사 공포증’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생긴다.

이래서 크건 작건 성당의 연령 행사는 ‘상식을 가진 책임자’가 책임을 지고 시작부터 끝까지 행사에 참여한 조문객들의 사정도 조금은 사려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애석하게도 이제까지 이런 것들에 대한 책임자의 존재여부는 정말 불확실한 것이었다.  또한 앞으로 장례미사에 올 때는 끝나는 시간을 먼저 확인 받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뿌리칠 수가 없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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