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는 우리 집 큰 딸 새로니의 생일, 나의 생일, 그리고 우리부부의 결혼 기념일이 모조리 몰려있다. 그래서 사실 성탄과 새해를 지내자 마자 마음이 조금은 바빠짐을 느낀다. 사실, 나는 이런 ‘명절’들을 조용하게, 소리소문 없이 보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우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절대로 불가능했고, 근래에도, 이런 날들을 조용히 보내는 것이 거의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압력을 느끼기도 했다.
전통적 ‘가장’의 위상이 거의 무너져 내려앉은 요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세월을 탓 해야 하나. 특히 ‘자기 생일’도 자기 마음대로 보낼 수가 없음이 제일 우습기만 한 것이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의 위치와 가치가 뒤바뀌고 있는 이 세상, 어디까지 가나.
올해 나는 ‘결국’ 65세의 산을 넘고 말았다. 왜 65란 숫자가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일까? 아마도 70세를 향한 내리막 길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랜 전 애독하던 이진섭씨에 대한 책,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 지라도‘ (박기원 여사 지음), 에서 보았던 65세 만세론 구절이 더 생각난 것이다. 그것은 이진섭씨의 지론 중에 하나로써, ‘사람은 65세를 살면 충분히 살았다‘는 것으로 그 이상 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서, 사람은 나이답게 사는 것이 보기 좋다고 했는데, 너무나 무리하는 것이 꼴불견이라고도 했다.
예를 들면 늙은이가 무리하게 운동을 하거나 무엇을 지나치게 즐기는 그런 것들이다. 조용히, 잠잠하게, 생각하며, 낙조를 바라보는 듯한 심정으로 지내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거의 50년 전의 이야기라서 아마도 그 당시 65세는 요새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적은 나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까? 그 당시의 65년은 사실 요새도 65년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65년을 살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이제는 사실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 쉰다는 것은 사실 이세상을 떠난 다는 것인데, 전 같았으면 아마도 그런 생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나는 죽음이 다음 세상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나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았는가 가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1980년 1월 25일에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올해로 33년째를 맞게 되었다. 잔잔한 감회를 느끼며 맞이한 올해는 정말로 조용히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의 ‘극성과 압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33년간의 결혼관계는 사실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이성과 같이 33년을 같이 산다는 것이 작은 과업’일까?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안 낳고, 편하게 혼자 사는 것이 cool하게 보이는 이 세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런대로 not bad임도 안다. 이날 우리는 정말로 ‘조용하게’ 집 근처에 있는 Thai restaurant, Lemon Grass에 가서 평소 즐겨 먹던 것으로 점심을 하였다.
눈이라도 당장 쏟아질 것 같은 그런 회색 하늘아래서 우리는 33년 전을 회상하며, 도대체 그때에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장 멋지게 보았고, 무슨 희망을 가졌는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한마디로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때였다는 것과, 그 때는 정말 ‘기쁜 우리 젊은 날’ 이었다는 것에 동감을 하였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같이 살게 될 것인가 하는 ‘말없는’ 의문도 나누었다. 그것이 인생일까. 인생은 사실 그렇게 특별 난 것이 아닌 듯 싶다.
2012년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색이 다른 것으로 기억이 남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시간문제가 아닐까? 가족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조그만 growing pain일 지도 모른다. 이런 큰 holiday때면 생각나곤 하던 ‘즐거운’ 추억들은 역시, relax된 기분으로 새벽같이 living room에 모여서 선물을 풀어보던 것, 구수하고 따뜻한 음식을 만들며 holiday classic video나 TV movie를 보던 기억들, 조용하기만 한 길거리의 풍경들.. 그런 것들이 전형적인 모습과 소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Charles Dickens원작의 classic중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1951’s movie version)과, 이제는 완전히 Christmas classic이 되어버린 1978년 미국영화, A Christmas Story (Ralphie란 안경 낀 꼬마의 성탄 추억)란 것을 ‘하루 종일’ 보던 때가 이제는 그립기도 하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머리가 큰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의 비밀을 알아 버린 후에는 모든 것이 ‘천천히’ 바뀌었다. 더 이상, 비밀이 없는 것이다.
그런대로 신앙적인 기분을 가지고 있던 그런 날들도 그 애들에게는 이제 완전한 세속적인 ‘즐기는’ 날로 바뀌고.. 그런 배경에서 이제 나는 우리의 전통적인 ‘포근한’ 성탄기분을 ‘절대로’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살아 생전에 언젠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머리가 커져버린 ‘아이’들.. 정말 재미없고, 실망스럽기만 하다.
골칫거리일 수도 있는 ‘선물’ 사기.. 거의 ‘강제성’을 지니고 있는 미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이것.. 어떻게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것인가? 오죽하면 크리스마스의 장본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2000년간 고수하고 있는 교황청과 교황님.. 제발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주는 날이 아니라고 강조하게 되었는가.. 숫제 성탄 1주일 전 이후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라고 충고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런 축제 분위기에 사로잡힌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마도 대부분 세속적인 인간들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올해 성탄에는 나에게 줄 선물 고르는 것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Costco에 갔을 때 두 가지를 골라 주었다. 하나는2-disc DVD set 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옛날’ 전쟁영화들 8개나 실려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귀엽게 생긴 battery-powered screw driver였다. 이중에 전쟁영화 DVD는 나에게는 정말로 횡재였다. 8개의 보물 같은 영화 중에서 제일 다시 보고 싶었던 것 중에는, Von Ryan’s Express, Twelve O’clock High와 The Young Lions가 제일 보고 싶었던 것이고 나머지 것들도 모두 수준급 추억의 영화들이었다.
그것 이외에 새로니는 내가 그 동안 ‘싼’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았는지 여러 뭉치의 Starbuck coffee를 주었고, 나라니는 Pancake 책을 선물했다. 내가 그 동안 아침마다 pancake을 직접 만드는 것을 보고 hint를 얻었을 것인데, 내가 instant pancake mix로 만들었기에, 이 책을 보고 ‘진짜’ 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과연 내가 이 ‘진짜’ pancake recipe를 보고 만들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를 생각해 준 나라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고맙기만 했다.
올해부터 시작된 조금 이상한holiday tradition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포함 되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가족이 집에 모이는 날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 이상적인 idea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머리가 커버린 아이들’의 생각이었고,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억지로’ 나가는 꼴이 되었다. 텅텅 비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던 극장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미국도 그 동안 변했나.. 할 정도로 생각이 착잡했다.
전통적인 가정, 고향이라는 향수적인 생각은 이제 정말 골동품이 되어가는 것인가.. 함박눈이 아닌 ‘함박 억수비’가 쏟아지던 성탄절날 우리는 어울리지 않게 ‘밖으로’ 나가서 Lincoln 영화를 보았다. 이것도 전통적인 Lincoln (Abraham)영화가 아니었다. 역시 또 다른 Political Correctness의 냄새가 심하게 풍기던 ‘명화’가 될 가능성이 많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 당시의 역사로 현재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Washington DC의 공기를 바꾸려는 가상한 노력도 짐작이 된다. 아마도 다가올 Oscar상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지도..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바로 엊그제Advent 2011을 지낸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 나이에 너무나 진부한 표현일 것 같다. 60대에서 60마일로 세월이 흐르고 70대에는 70마일로.. 아주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은 작년 대림절을 비교적 실감 있게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슬그머니 12월 1일, 2012년의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다. 무언가 또 거의 뚜렷한 이유 없이 머릿속이 바빠지는 느낌.. 이것이 바로 holiday blues의 시작일 것이다. 이것이 나는 ‘지독히’도 싫은데 빠짐없이 찾아 든다. 특히 12월에..
사실 2012년 holiday는 이미 지난 11월 셋째 목요일 Thanksgiving Day로 시작이 된 상태이다. 올해의 ‘추수감사절 (이 번역된 말이 조금 무리인 듯 느껴짐은?)’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가족은 이날에는 꼭 ‘핵가족’이 다 모여서 turkey meal을 즐겼는데, 드디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예외가 생기고 말았다. 큰 딸 새로니가 Miami, Florida로 친구와 같이 vacation을 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금 배반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도 그랬지만, 이제 아~~ 우리 가족, 가정도 변화를 겪고 있구나 하는 실감도 들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족이 만드는 turkey early dinner를 생략하고 대신 크리스마스에 turkey 를 하기로 했다. 조금은 안 되었는지 작은 딸 나라니가 그 다음날 자기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주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그곳에 갔고, 식사 후에는 Life of Pi 라는 새로 나온 fantasy 영화를 같이 보았다. 거의 일년 만에 가보는 ‘진짜 극장’이었다.
올해의 대림절은 어떨까..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지만 조금 더 ‘성숙된 믿음’으로 대림절을 지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사순절부터 시작된 ‘평일 마사’ 참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대림절 동안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내가 속하고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는 내일 연차 총 친목회를 마지막으로 올해를 마감한다.
올해, 내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레지오를 살았다. 비록 나타난 성과는 많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나의 변화, 그것은 큰 성과인 것이다. 내년에는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과가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내일은 대림절 주일 시작이고 오후에는 우리의 ‘또 하나의 본당’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열린다. 연숙이 꾸리아 부단장인 ‘여파’로 나는 여러 가지 눈에 잘 안 보이는 ‘봉사’를 해야 한다. 주로 여성 단원들이 대부분이라 남자의 역할은 대부분 ‘근육적’인 것 뿐이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소수 족’인 남자단원의 사기도 살릴 겸 해서 나와 새로 알게 된 다른 ‘남성’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와 총 친목회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했고, 지난 몇 주 몇 번 만나서 노래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남자 중창단’을 예상하고 사람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나로써는 무리였다. 워낙 남자단원의 수가 적고, 있어도 너무나 바쁜 것 같았다. 포기하려 했지만 다행히 이 안드레아 형제와 ‘의기투합’이 되어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 동안 가끔, 조금씩 ‘즐기던’ 나의 야마하 기타.. 얼마 전에 Seymour Duncan ‘Woody SC’ acoustic guitar pickup과 앙증맞게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Behringer AT-108 15-Watt acoustic mixing amplifier를 구입해서 이번에 쓰게 되었다.
지난 7월 달 허윤석(요한) 신부님이 지도하셨던 레지오 교육피정 때 ‘신나게’ 부르던 ‘개신교 스타일’ 복음 성가 ‘주님이 좋아요’, ‘실로암’과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이었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골라서 연습을 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내일singing duet performance의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그 동안의 연습과정을 통해서 얻은 ‘즐거움’ 하나 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여자가 아닌 남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올해의 대림절은 어떻게 보내게 될까? 우리는 그렇게 흔한 holiday travel은 100% 없을 것이고, 아.. 그렇다! 올해는 지난 십 수년 동안 못했던 손으로 쓰는 정성 드린 성탄 카드, 연하장을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는 것을 해 보련다.
내 인생에서 알고 지냈지만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서 ‘내가 살아있다’ 는 것을 알리련다. 그것만 해도 나는 진정한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절의 의미를 조금 알 수 있을지 모른다.
10월 31일은 이곳 미국에서Halloween (할로윈), 이어서 다음날, 11월 1일은 가톨릭 전례력으로 All Saints Day(모든 성인의 날?), 11월 2일은 역시 가톨릭의 달력으로 ‘위령의 날‘ 이다. 그 다음날, 11월 3일은 아직도 귀에 익은 광주학생 사건을 기념하는 ‘학생의 날’.. 줄줄이 이어진다. 종교성이 거의 없는 할로윈은 나쁘게 말하면 ‘귀신’에 대한 날이고, 모든 성인의 날은 정 반대로 귀신을 쫓는 ‘성인’들의 날이다. 이런 이유로 할로윈 다음 날을 모든 성인의 날로 정한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올해부터는 11월 달이 ‘위령의 달’ 임을 생각하며 돌아가신 우리 두 부모님들에게 ‘매일’ 위령기도를 바치자고 합의로 하였다. 연숙은 오래 전부터 이것을 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역시 내가 요지부동으로 가슴을 닫고 있어서 못하다가 올해는 무언가 아무 문제없이 이렇게 ‘멋있게’ 합의를 본 것이다. 나의 마음이 그 정도로 열려있음은 알고 나 자신도 사실 놀랐다.
이제는 우리의 자랑, 오랜 전통의 천주교의 일년 흐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고 그런 오랜 전통적 달력을 음미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5월의 ‘성모성월’과 11월의 ‘위령의 달’은 더 나에게 가까이 느껴짐은 왜 그럴까? 성모성월은 어머니가 주제요, 위령의 달은 돌아가신 부모, 조상, 친척들에 관한 것이라서 그럴 것이다. 가슴 깊이 고여있는 어머님, 보지도 못한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서러움, 그리움, 불효막심 등등이 한꺼번에 솟아 오르는 듯한 감정.. 그것이 무서워 항상 나는 도망만 하며 살았음을 인정하기에 더욱 더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어머님께 따로 특별히 연도는커녕 기도 한번 변변히 못한 나는 사실 이런 날이나 달들을 생각하기도 무서웠다. 그러다가 레지오에 입단하게 되면서 ‘남 들’에 대한 연도와 기도를 자연적으로 시작했고, 이제는 조금씩 마음도 열리고, 더 이상 도망하고 싶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듯이 살고 싶었다. 내 자신이 나의 부모님께 연도와 기도를 바치게 될 진정한 용기가 생김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영혼의 존재’를 나는 믿게 되었고, 영혼에 대한 기도나 연도가 정말 의미 있다는 것도 믿는다. 그 중에서도 나의 부모의 영혼께 기도를 하고, 혹시라도 아직도 고통을 받는 곳에 머물지 않게 기도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비록 하느님을 모르고 떠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11월 3일, 고국의 학생의 날.. 에 이곳에서는 11월 위령성월을 맞아 아틀란타 지역 두 천주교회(순교자, 성 김대건) ‘합동’으로 마리에타 한인 공원묘지에서 위령미사가 거행 되었다. 매년 얘기만 듣던 것.. 올해는 ‘무조건’ 참례를 하였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는 이곳에는 한인들만의 공원묘지가 따로 조성되어있고, 지난 7월에 떠나신 우리 레지오 단원 요안나 자매도 이것에 안치되어 있고, 2002년 4월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신 ‘평창이씨’ 종친 이주황 선생님도 이곳에 계셔서 우리와 익숙해진 곳이다. 가톨릭의 예식을 따랐지만 그 의식은 많이 우리나라의 전례 예절이 가미된 것이라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는가.. 아니면 많이 이런 것들에 익숙해 졌는가.. 만감이 교차됨을 느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천주교 영세 후에 ‘멋도 모르고’ 장례미사에 갔다가 ‘시체’를 처음 보고 놀라서 그 다음부터 절대로 그런 곳에 안 가겠다고 ‘결심’을 했었던 나의 유치한 믿음을 회상하며 웃어보기도 했다. 아.. 영혼들이여.. 편히 편히 잠 드소서..
¶ 4월이나 5월보다 더 시원한 6월, 셋째 일요일, 2012년의 Father’s Day를 맞는다. 한글로 ‘아버지 날’ 이라고 하면 그 느낌이 조금은 다르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냥 Father’s Day도 괜찮다. 그만큼 그 말이 더 익숙할 만큼 이곳에서 오래 살았다고나 할까. 조금은 복잡한 심정이 된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나는 가족으로부터 받는 ‘인사’보다는 우리의 미국본당에서 ‘진짜 아버지, Father(신부님)’로 부터 ‘단체로 받는blessing (강복)이 더 기다려졌고, 결국 오늘 그렇게 강복을 받았지만, 자식이 없는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그냥 앉아 있던 모습들이 조금은 외로워 보이던 순간이었다. 신부님께서는 그들의 통상 호칭이 Father(신부)라서 아침에 신자들로 받았던 Happy Father‘s Day란 인사가 조금은 착잡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여기서의 Father는 물론 영적인 아버지란 뜻이었을 것이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남자인데, 어찌 biological father를 기리는 이 날의 뜻을 모르겠는가? 이래서 주제 넘는 말이지만, 이 날만 되면 신부님(들)에게 죄송하고, 심지어는 동정심마저 느낄 정도다.
Oh! My Papa – Eddie Fisher – 1954
오늘의 강론(homily)에서 신부님은 예년과 다르게 Father’s Day의 종교적, 신학적인 측면에 대한 것으로 전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사회적인 것으로 가정에서 아버지의 ‘전통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들으며, 요새 해괴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일침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안 그렀겠는가? 너무도 쉽게 편모, 편부 가정이 형성, 용납이 되고, 이제는 ‘바보’ 지도자들(Obama, Biden)의 ‘수긍’ 하에, 남자 끼리 (동물적) 성관계를 하는 두 명 아버지의 가정들이 생기게 된 이 삐뚤어져가는 세상을 왜 신부님이 모르겠는가? 그래서 올해의 Father’s Day에는 한 ‘진짜’ 가정에서 ‘남자’ 아버지의 역할이 ‘진짜’ 자녀들에게 미치는 ‘진짜’ 역할을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정말 오랜만이 우리 집 네 식구가 모두 식탁에 모였다. 이런 날이 아니면 정말 이런 기회가 이제는 힘들어졌다. 특히 자매간의 ‘불화’가 있을 때는 더욱 힘든데, 요새가 바로 그런 때인가 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기대해 본다. 꽤 오랫동안 ‘굶었던’ Starbucks Coffee pack을 ‘선물’로 새로니가 나에게 주었다. 요새 사실 값싼 Maxwell House 커피에 싫증이 나던 때, 새로운 향기를 맡게 되어서 좋았다. 요새 연숙이 새로 ‘개발한’ 돈까츠를 맛있게 해서 먹었고, 나라니가 사온 조그만 케이크가 후식으로 나왔지만, 워낙 단 것이라서 모두들 조금씩 맛만 보았다. 새로 boy friend가 생겼다고 싱글벙글하는 나라니를 보면서..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며칠 전에는 요새 정말 많이 줄어든 junk mail(광고성 우편물) 중에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Neptune Society란 곳에서 온 것인데, 자세히 보니 간단히 말해서 cremation service(화장,火葬 장례)에 관한 것이었다. 더 쉽게 말하면 장의사에서 온 것이다. 은근히 놀란 것이.. 와~~ 내가 이제 장례식에 관련된 나이에 들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깜짝 놀랐겠지만 지금은 사실 그렇지 않다.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르니까.
이들은 ‘과학적인 통계’를 무기로 하는 엄연한 business이니까, 나는 분명히 그런 나이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business는 ‘전통적인 장의사’와는 달랐다. 이것도 ‘효율성’을 자랑하는 franchise인 것이다. Iowa에 본사를 가지고 있는 전국에 널려있는 chain service.. 말이 된다. 이것도 엄연한 service business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런 조금은 ‘비 감정적’인 조직의 형태가 그렇게 상관이 되겠는가? 이 편지를 보낸 곳은 ‘전통적인 장례의식’이 너무나 비싸고, 복잡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이 그런 것 때문에 고통을 더 받고 있다고 말하며, 가급적 간단한 ‘화장’에 의한 ‘아주 간단한’ 의식의 장점을 설명한다.
듣기에 모두 맞는 말인 듯하다. 근래에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면서 ‘누구나 꼭 직면해야 하는’ 의식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서적으로는 땅으로 묻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화장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사실 결정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듯하다. 그래도 선택을 하라면 나는 나의 어머님처럼 ‘깨끗한 화장(火葬)’을 택할 것 같다.
¶ 어제는 national news에서 Gay-friendly Obama가 ‘드디어’ 2012년 대선의 첫 정치적 포석으로 이민(법이 아니고, 시행령 Dream Act)정책에 대한 커다란 발표가 있었다. ‘젊은 불법체류자’에게 합법적 지위를 주는 ‘법이 아닌 시행령,act’ 인데, 이것은 대통령의 권한을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Congress,국회를 완전히 피해간 완전 100%정치적인 포석이었다.
우리 같은 minority(소수집단,민족)은 물론 이런 정책을, 그 동기에 상관없이,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매일 매일 겪는 (비록 자기나 주변이 만들어놓은 상황에 의한 것이지만) 삶에서의 고통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짐작을 못할 것이다. 범죄경력자를 제외하고는 사실 이들은 대부분 ‘고급 인력’에 속하고, 그들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수모와 공포’속에서 살아왔을 터이니까. 원래의 ‘원주민 인디안(native American)’들과 극소수의 청교도 이민후예를 말고는 거의가 나중에 ‘흘러 들어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나라.. 그들이 어떤 ‘자격’으로 나중에, ‘흘러 들어온’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낼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100% ‘법적’인 문제로 보면 영원히 이 복잡한 이민문제는 해결을 못한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런 식으로 보는 ‘부류’들이다. 얼마 전에 이 젊고 용감한 ‘불법인’들이 하나 둘씩 흡사 근래 gay들 처럼 ‘벽장’ 속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결국은 최근의 Time magazine의 cover story가 되었다. 그것을 혈혈단신 두 주먹으로 밀어부친 사람, 필리핀 출신 그(Jose Antonio Vargas)는 정말 용감한 젊은, 언론인 이었다. 어떻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부모들이 만들어 놓은 ‘불법성’을 온통 혼자 짊어지고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는 이제 하나의 현상,phenomenon이 되어가고 있고, 조금씩 밝은 쪽으로 가는 듯 싶다.
오늘은 2012년 5월 두 번째 일요일, 그러니까 어머니 날이었다. 먼 옛날, 고국에서는 5월 8일이 어머니 날이었는데, 나중에 그날이 어버이 날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이름을 바꾼 것, 별로 생각 없이 받아들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어머니 날과 아버지 날은 엄연히 성격이 다름을 뒤 늦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버지 날이 따로 있는 이곳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버이 날로 묶어놓은 것.. 사실 부모 두 분의 독특하게 다른 역할을 완전히 혼동시킨 것이다.
나에게 이 날은 ‘가까운 엄마’들은 모두 생각을 해야 한다. 나를 낳아준 하늘같은 나의 어머니, 사랑하는 반려자를 낳아주신 장모 어머님, 우리 자식들을 낳아준 아내인 연숙.. 모두가 어머님들이지만 연숙 말고는 모두 하늘나라로 먼저 가셨다.
두 분의 어머님들은 영적인 선물을 드릴 수 밖에 없지만, 연숙에게는 그런대로 무언가 ‘일년 동안 집안의 엄마’로 수고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에 미숙한 나는 사실 신경이 쓰인다. 전에는 ‘애’들이 극성으로 도맡아서 다 준비를 해 주었지만, 그런 시절도 다 지나간 것 같아서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다.
올해는 그래도 하느님이 도우셔서 내가 Publix에서 ‘억지로’ 꽃도 사고, chocolate도 사오는 용기도 생겼다. 하고 보니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님을 알아서 앞으로도 큰 문제가 없겠다고 자신까지 생겼다. Holy Family 성당의 주일 미사에서 신부님의 특별 강복도 받았고, 저녁때는 근처에 있는 Thai restaurant인 Lemon Grass에서 새로니와 같이 맛있는 저녁식사도 해서 모두 만족할만한 Mother’s Day를 보낸 셈이 되었는데, 옆에서 보니 연숙은 아무 만족한 모습이었다.
작은 딸 나라니는 여행 중이라서 참석을 못했지만 special delivery로 맛있게 보이는 ‘먹는 선물’을 보내 주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어머니’의 독특한 위치를 다시 한번 느끼고, 나를 낳아주신 어머님이 지금 나의 옆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들떴던 마음이 점점 가라 앉음을 느낀다.
¶ 어린이날 유감 달려라, 냇물아~ 오월은 푸르고나~ 반세기전 어린이날이면 목청이 터져라 신나게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 참으로 (19)50년대의 어린이날은 신바람 나던 하루였다. 실제로 그날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물질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님께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이날이란 것도 역시 ‘표절’ 이었다. 일본 아해들 것을 그대로 날짜도 똑같이… . 서슬이 푸르게 벤또, 구루마, 도라무 깡 같은 일본 말을 금시 시키고, 화강암 중앙청(일제 강점 때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버리면서, 어떻게 날짜도 똑같은 일본의 어린이날은 그대로 두었을까? 혹시 아니면 방정환 선생의 5월 5일 어린이날을 우리가 먼저 만들고, 일본 아해들이 나중에 표절을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동양에서 제일먼저 개화를 한 그들이 먼저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일년에 하루를 ‘어린이 전용’의 날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지.
¶ 푸르고, 따뜻한 어머님 같은 5월 인가, 온통 포근한 어머님의 손끝과 숨결을 느끼고 싶은 그런 달이 바로 5월이다. 날씨 또한 가족과 가정이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에 어울리는 화창하고, 포근하고, 때로는 비에 젖는 잔잔함과 외로움까지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준다.
가톨릭의 삶을 다시 살게 되면서 5월은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마리아)의 달, 그러니까 ‘성모성월’ 임을 느낀다. 또한 나의 그립고 사랑하는 어머님의 기일도 5월이어서 불효자로서 감정적으로 거의 주체하기 힘들 때도 있다. 나는 ‘가장’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고 (6.25때 납북) 따라서 어머니란 존재는 나의 생명, 가족의 생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후의 험난한 세상에서 만약에 어머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친척이 거의 없었던 우리 집 남매는 하루아침에 길거리의 고아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이오 전쟁 후에 가장, 아버지를 잃은 집이 부지기수로 많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있던 집은 우선 행복한 가정이었다지만 그에 못지않게 절대다수 홀 어머니들의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은 지금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한, 전설적이고 초인적인 것이었다. 최소한 우리 세대는 ‘절대로’ 그 고귀한 사랑, 헌신, 희생의 역사를 잊지 못하고 또한 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조금 접으면 갑자기 싸늘한 현세의 현실로 돌아온다. 요새의 부모님들, 특히 ‘엄마’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또한 그들의 자식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부모들은 자식들을 예전처럼 별로 보살피는 것 같지도 않고, 자식들 역시 부모 세대를 우습게 보는 것이 거의 전염병같이 cool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대체 요새의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모습은 무엇인가? 돈 많은 부모, 돈 잘 버는 자식인가?
¶ 오늘은 일월 이십일일, 一月 二十一日, January 21st, 1.21 일이일김신조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일 ..그리고 또한 나의 생일이다. 예순 네 번째의 생일이 조금은 피곤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오랜 세월이란 기분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내가 어렸을 당시 우리들의 생일축하문화는 딱 한가지였다. ‘입학시험 때는 절대로 먹지 않는 미역국‘을 먹는 것 이었다. 1%의 부자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99%는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한창 시작되던 60년대 말, 조금씩 나아진 경제사정 때문일까, 조금 생일 반찬이 복잡해 지긴 했지만, 생일 카드, cake, candle, presents같은 ‘서구식’ 생일 문화는 거의 없었다. 후에 미국에 와서야 그런 서구식의 ‘요란한’ 생일 문화가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최소한 결혼 전까지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우습게까지 보였다.
사실은, 누가 나의 생일을 기억을 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 조금은 계면쩍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이 배우자가 생기고, 애들이 크면서 생일은 완전히 조금은 ‘느끼한 행사‘로 발전을 하고, 심지어 부담까지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고국도 ‘완전히’ 서구식으로 변한 것을 볼 수가 있어서, 이제는 ‘전통적’ 생일을 찾아보기는 이제 기억 속에서나 가능해졌다.
물론 전통적 생일이란 말이 거창하지만 ‘검소하게, 가난하게, 미역국만 먹는’ 그런 생일이 그리운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완전히’ 커지면서 다시 그런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 애들이 별로 ‘느끼한 행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생일cake이란 것, 어쩌면 그렇게도 맛이 없을까.. 먹기도 고역이고, 버리기도 아깝고.. 정말 곤란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나의 생일, 나의 소원대로 비로소 전통적 생일, 미역국만 먹는 생일을 찾게 되었다. 부수입으로 애들은 내가 좋아하는 역사에 관한 것들을 선물로 주었는데, 모두 ‘전쟁역사’에 관한 것들이다. 아빠가 하도 ‘전쟁영화’를 많이 보는 것을 보아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를 이세상에 보내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님과 어머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저의 어버이 날이기도 합니다.”….
¶ Pancake to the rescue: 우리부부는 적어도 10여 년 전부터 아침식사를 ‘절대로’ 거르지 않고, 양식 스타일(boiled eggs, toasted breads, sausage or bacon, fruits and veges and freshly brewed coffee) 로 먹고 점심은 밥과 국을 중심으로 거의 한식 스타일로 그것도 아주 많이 먹는다. 대신 저녁 식사는 정말 적게, 아니면 거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끝나고 난 이후에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완전히 습관이 되었다. 이유는 직감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니면 이곳 저곳에서 들어본 이론에 근거해서, ‘많은 양의 ‘저녁식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과일,야채의 양은 많이 늘어났지만, 전체적인 식사의 양은 조금 줄었다. 나이에 의해서 분명히 기본적인 운동량이 줄었기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식사의 습관은 분명히 일반적인 건강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방에 의한 체중증가‘를 억제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게다가 5년 전부터 아침식사는 내가 ‘혼자’서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보다 훨씬 바쁜 연숙을 도와준다는 근사한 명분으로 시작을 했지만 솔직히 한 달만 계속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큰 문제없이 현재까지 잘 버티고 있다.
양식 스타일의 아침식사에 무슨 손끝 맛이 필요하랴? 그저 ‘기계적’ 으로 하는 작은 ‘노동’에 불과한 것을..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pancake을 배우게 되었다. Frozen은 아니더라도 거의 instant화 된 것이라서 그렇게 보기보다 간단한 줄 그 동안 몰랐던 것이다. 판에 박힌 아침메뉴에 변화를 줄 수 있는 pancakes..
며칠 전 연숙이 집을 며칠 비웠을 때 톡톡히 진가를 발휘해서 거의 매일 아침 실습해서 먹었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질리지 않는다. 한가지 문제는 아직도 연숙이 만드는 것처럼 예쁘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 될 듯하고, 모양보다 맛이 더 중요하니까 큰 문제는 아니다.
¶ Romney & Gingrich: 롬니와 깅그리치.. 한글로 표기하니까 조금 ‘요상’한 느낌인데, 이것은 문자 문화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미국 대통령 감 후보 가능성이 현재 한창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물론 민주당은 오마바로 완전히 전투대열을 갖추고 현재 공화당 후보의 추세를 관망하고 있는 것인데, 그 동안은 완전히 코믹할 정도로 혼전을 거듭하더니 이제는 조금 무언가 보이는 지경이 되었다. 한 사람은 주지사 출신, 다른 사람은 연방국회의장 출신, 그러니까 아주 heavy급인 배경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다른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극과 극이라고나 할까.. 경제통이지만 조금 근시안적인 롬니, 예측불허 성질이지만 미국의 거대한 꿈을 실현하려는 역사통 깅그리치.. 과연 누가 그들의 선택인가?
그간 롬니는 ‘실질적인 후보’로 여겨져 왔지만 조금 있으면 끝날 South Carolina Primary에서 그들은 완전히 neck-and-neck정도로 예측 불허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둘 중에서 고르라면 아마도 Gringrich가 아닐까.. 그는 역사를 잘 알고 있고, 옛적의 잘못을 다 인정하고, 보기에도 아주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신선함을 보여주는데.. 과연 어떨지? 한가지 더.. 그가 나와 같은 Catholic으로 개종을 한 것도 한 몫을 하지 않을까?
P.S., 극적인 역전승: South Carolina Primary 개표가 거의 끝나면서, 결국 Gingrich의 ‘놀랍고도, 압도적인’ 역전승이 확실시 되고 있다. 이것은 완전한 drama급에 속하는 것이고, 다음 차례, 1월 31일의 Florida Primary의 결과가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 되었다.
Birthday – The Beatles – 1967 – Beatles forever young!
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1월 5일, 큰딸 새로니가 태어난 것은 남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가정에 첫 생명이 태어난 날이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더 생각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의미를 주어가며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는 사실 무언가 ‘인간이면 거쳐야 하는’ 인생사의 하나 정도로 생각한 정도였다. 결혼을 했으면 가정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자식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문제는 몇 명을 언제 낳을까 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둘 다 나이가 있으니까 빨리 낳을수록 여러 가지로 유익할 텐데, 그러기에는 신혼의 즐거움이 너무나 짧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딸 새로니는 아주 적당한 때에 태어난 것 같다. 신혼생활을 거의 3년이나 즐겼으니까.. 그 3년 중에 사실 임신기간을 빼면 2년이 좀 넘을까.. 내가 독자라서 사실 어머님께서 은근히 압박을 넣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으셔서 전혀 그런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을 연숙도 은근히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둘 다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 있는 OSU (Ohio State University main campus)에 재학 중이었고, 그렇게 ‘모든 것이 불안정한 학생 신분’에서 첫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어찌 치밀한 계획대로 될까. 게다가 그 당시 나는 학교 공부와 학비를 버는 교수 돕는 일로 한마디로 ‘어디론가 (잠깐) 도망가고 싶은 심정‘ 이 들 때가 있었던 시절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자식을 두게 될 한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에 짓눌리는 괴로움도 느낄 때였다.
경제적인 이유로 그 당시 나는 새로 부임한 (그러니까.. 끝 발이 없는) Turkey출신 교수 밑으로 들어가서 그가 새로 계획한 Digital Control Laboratory(DCL)를 현실화 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을 쓰고 있는데 결국은 어느 날 학과장(Dr Ko, a Chinese)이 와서, 계속 학위를 위한 공부를 계속 할 것이냐, 그곳(DCL)에서 일을 할 것이냐 결정하라고 엄포를 놓고 갔다. 한 마디로 더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하며 시간을 지체하려면 학위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골치 아픈 와중에서 연숙이 임신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1982년은 나에게 학교에서는 어려운 한 해였음이 분명했지만, 다른 쪽으로 우리는 그 해에 천주교를 알게 돼서, 그 해 부활절 때는 우리 부부가 같이 영세를 받는 (축복 받을) 일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신이 된 것은 절대로 우연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유학생 부인들 중에서 임신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면서 (예를 들면 성당교우 유학생 남백희씨)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부유학생들의 기숙사인 Buckeye Village 우리 바로 옆에 살던 물리학과 유학생 배재고 출신 이후종씨 집 ‘마저’ 임신한 것을 알고 우리도 용기를 갖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의 여러 가지 사정이 불안정적이었지만, 모든 것을 무언가에 내 맡긴 기분이었다.
임신 중에 입덧(morning sickness)이 너무나 심해서 연숙은 한 때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지만, 그 당시 새로 얻은 신앙이 그런 어려움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한 예로, 아플 때마다 축성된 성유를 바르고 기도를 하면 신통하게도 낫기도 했던 것인데, 이것도 우리의 영세동기이고, 역시 임신 중이었던 상대 고완석씨의 부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한편, 신기하고 신났던 때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였다. 이것도 부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라고 생각이 돼서 신중하게 의논한 끝에 ‘순 한글’ 식으로 짓기로 하고 어머님께 허락을 받는데, 정말 다행으로 어머님도 대 찬성이셨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한글이름 지어주기가 유행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배우리 씨라는 분께서 그런 운동을 펼치고 계셨는데 어머님께서 극성맞게 그 선생님으로 부터 ‘새로니‘ (새로운+이)란 예쁜 이름을 받아오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자이름의 오랜 전통과 호적, 족보 등을 고려하면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까지 느끼지 않았다. 또한 다행히 호적에도 순 한글이 허용이 되어서 큰 문제가 없었다.
연숙의 산부인과는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Riverside Hospital에 있었고 의사는 Dr Baird, 비교적 잘 한다는 사람이었고, 다른 유학생들도 이 의사에 대한 경험들이 있어서 조금 마음도 놓였다. 비록 임신 초기에 심한 입덧으로 한때 고생은 했지만 나중에는 별로 큰 문제가 없었다.
남편이 출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도와주는 Lamaze (라마즈) class에 같이 가서 출산준비 교육도 열심히 받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숙은 제왕절개 출산을 하게 되어서 자연분만을 못한 아쉬움도 남게 되었다.
첫 아이라서 그런가.. 연숙은 혼신의 힘으로 임신기간을 절제하는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고, 뱃속에서 움직이는 생명에 대해서 너무나 신기해 하며, 이런 것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자랑’까지 하곤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고생하는 여자들이 너무 불쌍한데..” 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연숙은 남자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소프트볼을 할 정도로 기본적인 체력이 아주 건강해서 제왕절개출산만 빼놓고 모든 과정이 아주 순조로웠다. 하지만 새로니가 태어났을 때 가장 큰 놀라움은 새로니가 여자아이 였다는 사실이다. 연숙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모두 남자아기일 것이라고 결론을 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그렇게들 추측을 했는데, 여자아이가 나온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남자아이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연숙의 친정은 ‘관례’대로 ‘미안한 마음’을 피력하셨고 우리 어머님은 ‘첫딸의 축복’을 강조하시긴 했지만 속마음은 짐작이 되었다. 내가 독자였으니..
29년 전 1월 초, Columbus, Ohio는 예외적으로 유난히 포근함 속에 가랑비가 내리던 날 갓난 새로니를 안고 Buckeye VillageMahoning Court의 ‘우리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금속공학과 유학생 김원백 씨의 부인(도성 엄마)가 우리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려 주었는데 그제서야 모든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우리가 이제 엄마,아빠가 되었구나, 실감을 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는 인간사가 지금 생각하니 왜 이리도 거창하게 무슨 ‘인간의 성스러운 의무‘를 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결혼을 안 하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신앙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은 역시 이렇게 ‘유별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송년, 2011년.. 결국은 왔다. 결국은.. 이제부터는 내일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려고 하지만, 조금 더 확대를 해서 내년을 못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2011년이 나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살았어야 했다. 하지만 은근히 2012년을 의식도 하며 살았다.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은근히 의식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말 이것은 찢어지는듯한 외로움이다. 그렇게 외롭게 느껴진다. 곁에 연숙과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소용이 없다. 나에게 엄마와 누나가 옆에 없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정말 광활한 이 우주공간에 외톨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나는 더 성숙하지 못할까? 엄마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러니 내가 죽기 전에는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보고 싶다. 나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만한 사람은 엄마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나는.. 있어도 볼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할까? 억지로라도, 모든 것 다 잊고, 다 포기하고 고향에 간다 해도 나의 꿈의 고향이 이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는 정말 슬프기만 하다. 내가 상상하는 고향과 친구들은 사실 내가 쓴 소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아마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외롭다. 나는 혼자다. 나를 아는 사람은 이제 세월의 횡포로, 거리의 횡포로 다 피안의 세계로, 나의 상상의 세계로 다 사라진 것이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이런 고통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아무도 이런 것에는 나에게 도움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을 나는 안다. 내가 매듭을 풀어야 한다. 나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외로움, 과연 언제부터 내가 씨를 뿌렸을 까. 내가 무엇을 크게 잘 못하며 살았을까? 그렇게 내가 잘못 했을까..
모든 것이 다 나로부터 사라졌다. 나는 친구가 이제 단 한 명도 없다. 친척도 다 사라졌다. 가까운 누나도 나를 모른다. 아니 그곳에 갈 수도 없다. 아니 간다 해도 그곳이 이미 내가 그리는 고향이 아닐 수도 있다. 아~~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이천 십일 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고향 땅에 잠들어 계신 사랑하올 우리 어머님, 북녘의 어디에 잠들어 계시는지도 모르는 우리 아버님.. 생사도 모르는 우리 고모님 가족들, 원산 토박이 어머님 가족들, 항상 기도 중에 뵙고 뵙습니다.
나의 유일한 혈육, 편찮으신 우리 사랑하는 누님과 오랜 세월 저희 가족을 돌보며 사신 존경하올 매부님, 이제는 이렇게 산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 동안 저희 가족들에게 베풀어 주신 헌신적 사랑을 그날까지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그리운 조카들, 준형과 은지, 이제는 한 집안의 가장들이 되었구나. 항상 생각을 하며 산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누님 가족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한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외가댁 친척분들, 처남 흥식 형님, 형수님과 처형, 동서형님, 처조카 들: 처형 가족 분들, 형진, 혜진과 수경이네 가족들 기도 안에서 항상 듣고, 보며 산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새해에는 모두가 건강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이산가족의 외로움: 크리스마스 이른 아침, 연례 ‘가족 선물포장 풀어보기 의식’ 을 무슨 엄숙하고 의무적인 행사처럼 치른다. 이런 행사는 이제 거의 자동적으로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습관화 되었다. 이곳에서 오래 살게 되면 모이는 가족이 한 명 이상이면 (그래야 모임이 되는 것이지만) 이날 아침에는 무언가 ‘교환’을 해야 제대로 된 사람 대우를 받게 된다. 이것을 소홀히 하게 되면 그야말로 ‘왕따’를 당할 정도가 아닐까?
문제는 너무 이런 ‘세속적 의식’에 빠져서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 거의 잊을 정도가 된데 있다. 이래서 바티칸의 교황님도 크리스마스 season이 되면 계속 우려를 하시는 것이다. 선물을 사려고 store밖에서 새벽부터 문 열기를 기다리는 군중들에 대한 뉴스를 보면 이건 완전히 ‘정신이 나간’ 군상처럼 보일 정도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선물’을 주려고 발버둥치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은 하나.. 한마디로 완전히 지나친 모습들이다.
그와 다른 면으로, 이날이 되면 어찌 그렇게 쥐 죽은 듯한 고요와 평화의 기분이 느껴질까.. 분명히 99%의 ‘군상’들이 가족, 친지들과 함께 모여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피부로 느껴진다. 길거리와 심지어 동네의 산책길도 텅텅 비어버리니까.. 이것은 가족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부러운 전통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맘때가 되면 ‘대가족’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제일 부럽고, 질투가 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고통스럽기까지 한 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비교적 가까이 지내는 분들이 대부분.. 대가족 환경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더 상대적으로 우리는 ‘작은 가족’의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된다. 그들이 부럽다 못해서 질투가 날 정도니까..
딸 둘 대신, 아들 딸 구별 없이 5명 정도를 낳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우습고 쓸데없는 상상도 해본다. 현재 5명의 자녀는 사실 ‘촌스럽게’ 까지 느껴지기는 하고 그들의 키우는 것 장난이 아닐 테지만, 그래도 덜 외로울 것을 생각하면 감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면 extended family라고 할 수 있는 친척들은 어떨까? 직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까운 가족들이다. 문제는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할 정도로 멀리 사는 친척들이 이럴 때 느끼는 외로움에 큰 도움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골치 아픈 친척들 때문에 골치를 썩는 사람들도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것도 사실 응석받이처럼 들린다. 그들은 작은 가족들의 ‘외로움’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친척들은 비록 Internet등으로 옛날에 비해서 조금은 가깝게 느낄 수도 있지만, 역시 그것은 virtual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계는 절대로 virtual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입김을 느껴야 그것이 진정한 relationship인 것이다. 그래서 타향살이란 것은 보기보다 힘든가 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찌하랴.. 이것이 운명이란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을..
¶ 내가 받은 선물은: 올해는 비록 모든 경제활동이 쪼들리는 때였지만 그것에 큰 상관 없이 풍성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없는 것이 거의 없이사는 요새, 무슨 선물이 필요할까, 그래서 더 고르기 어려운 것이 선물이다. 한마디로 없어도 되는 ‘사치품’에 가까운 선물들.. 하지만 가끔 뜻밖의 것도 있다. 그 예로 하모니카..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하모니카, 그것도 아주 작은 하모니카를 받았다.
어렸을 때 그것을 얼마나 갖고 싶어했던가? 아직도 잊지 않은 곡이 하나 있어서 즉석에서 ‘연주’를 했는데, 정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불 수 있었다. 완전히 전자화 된 picture frame 을 받았는데, 편리한 것이 많은 것은 알지만 글쎄, 나는 이것이 ‘사치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멋진 얇은 스웨터, 이곳의 날씨에 딱 맞는 것이라 아주 실용적인 선물, 그것과 더불어 나이가 들면서 신경을 쓰게 되는 ‘목 주위’의 추위를 해결해 주는 스카프.. 이것도 실용적이다.
사학 전공의 나라니가 ‘조지아 시골의 뒷얘기’ 에 관한 책, The Georgia Rambler를 선물했는데, 이곳 조지아의 시골은 남북전쟁에 관련된 시골의 숨어있는 ‘전설’들이 많이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책일 듯 하다. 그 중에 코카콜라의 성분에 관한 비법이 적혀있는 책도 있어서 더 기대가 된다.
¶ 염라대왕과 김정일: 지금 쯤 염라대왕 앞에서 김정일 개XX는 어떤 모습을 하고 변명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염라대왕 동무.. 조금만 봐 주시라요” 하고 말을 시작할 듯 하고, 염라대왕은 이미 아바이 동무 김일성 개XX가 먼저 와 자리를 잡고있다고 알려줄 듯 하다. 김정일 개XX 장례식에 ‘남조선’의 조문객이 간다고?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이 미친 놈들은 과연 어떤 인간들인가?
역사 박물관에서나 찾을만한 현대판 세습제로 인민들을 굶어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서른 살도 안 된 젖먹이 김정운 개XX를 차기의 ‘왕’으로 만든다고.. 참.. 북조선 닌민 동포 동무들이여.. 어쩌면 그렇게도 참을 성이 많습네까? 지렁이 보다 못한 이 한심한 동무들아.. 죽을 때가 되면 그래도 소리라도 내고 죽으라우요!!
지난 Thanksgiving 때부터 불편했던 나의 뱃속 사정이 아직도 여파가 남았는지 깨끗하지를 못하다. 특히 밀가루 (yeast?) 음식에 더 고생을 하고, 옛날 우리 불쌍한 엄마 생각이 난다. 항상 소화로 고생을 하시던 우리 불쌍한 엄마.. 불편한 것은 사실 나의 ‘의지’로 얼마든지 견딜 수는 있지만, 사실 나의 걱정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만약.. 만약.. 더 큰 문제라면.. 하는 끔찍한 상상을 떨쳐버리려 노력을 한다. 어쩔 것인가? 그저 담담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견딘다. 그것이 우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아~~ 무언가 무언가를 멋있게, 나의 심중을 다 표현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것이 이렇게도 어렵던가? 나의 깊은 심중을.. 심중을.. 어떻게 표현을 한단 말인가? 추운 겨울이 좋으면서도 차가워지는 나의 ‘발’이 귀찮고, 불편하다. 따뜻한 온돌방이 그립다.. 아~~ 우리 가족, 엄마야, 누나야.. 언제가 그곳에서 만나서 다시 그 옛날을 살자.. 그런 날이 언제 과연 다시 올까?
얼마 전에 작은 딸, 나라니가 email로 사진을 보내왔다. 제목은 Roo-dolph the Black-nosed Kitten 이었다. 사연은 간단히:
We’re ready for Christmas!!!!!
Sometimes I wonder why she loves me. hahahaha
이 정도면 나라니가 얼마나 ‘싱거운’ 가를 알 수 있었고, 한참을 웃었다. 이것이 바로 싱거운 것이 아니던가? 원래는 나라니의 언니인 새로니가 싱거운 말과 짓을 잘해서 어릴 때부터 ‘싱순이‘ 라고 놀렸는데, 요새는 작은 애가 이렇게 더 웃긴다.
나라니는 어릴 때부터 Christmas girl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크리스마스 씨즌을 일년 내내 기다리고 좋아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수그러진 줄 알았는데, 이 사진을 보니 아닌가 보다. 벌써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려고 하니까. 여기의 고양이의 원래 이름이 Roo(루)라서 루돌프 사슴을 생각해서 Roo-dolph라고 한 것이다. 어찌나 그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런 pet들인데, 사람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 같아서 어떨 때는 조금 우려도 될 정도다. 우리도 현재 개와 고양이 둘 다 데리고 사는데 일단 정이 들면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어떨 때는 못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어서 나 자신도 놀라곤 한다. 이것이 고독할 수도 있는 이 시대에 같이 사는 애완용 동물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지난번에 우연히 빌려온Esperanto 에 대한 책을 보고, 어릴 적에 본 아버지의 책들과 문서들을 떠올렸다. 사실 에스페란토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지만, 그 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때 납북되시기 전까지 이것에 깊이 관련되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오래 잊고 살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무언가 큰 가족 역사를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에스페란토 그 자체보다 그것에 얽인 아버지의 활동에 더 관심이 간 것이다. 어렸을 때 본 몇 장 되지 않은 아버지 사진 중에 에스페란토 기념사진이 있었다. 무슨 건물 앞 중앙 현관 계단에 모두들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는데, 거기에 에스페란토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제일 앞줄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무슨 에스페란토 연수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세월의 curse가 아닌 그로 인한 technology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역시, googling 으로 한국 에스페란토 역사의 ‘여명기’에 관해서 ‘과거’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나의 ‘희망적 짐작’은 어김없이 맞았을 뿐만 아니라 상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나의 아버지(의 흔적)를 거기서 찾은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육성’ 까지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나와 같은, 아니 훨씬 더 했을 감동을 나누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너무나 늦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에스페란토의 관계를 나는 느끼며 살았는데, 관련 사진과, 책, 서류들 때문이었지만 어머니도 가끔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언급을 하신 것을 기억한다. 위에 말한 아버지의 책들과 ‘회보’ 같은 것들은 분명히 ‘영어’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 고등학교 세계(역)사 시간에서 드디어 에스페란토 란 말을 듣게 되었다. 비록 간단히 언급을 했지만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의사, 자멘호프 란 사람이 ‘세계평화‘를 염두에 두고 고안한 사상 처음으로 ‘인공 언어’ 인 ‘에스페란토’ 어를 만들었다는 간단한 구절이었다.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 말고는 더 자세한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그런 것을 더 알려면 국내 유일의 국립중앙도서관에나 가야만 알 수가 있었고, 백과사전은 너무나 비싼 ‘귀중, 사치품’에 속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대로 오래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무한정의 정보망”, 인터넷은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역사를 조금은 더 정확하게 잡아 놓았다. 첫 번째로 우리 (아버지 쪽) 집의 뿌리가 평창이씨, 익평공파, 아버지는 27세 손이고, 전설적으로만 남아 있던 작은 삼촌의 존재, 그들의 정확한 나이까지 알게 되었다. 현재는 이것으로 나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나의 자식들이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아버지의 ‘업적’까지 덧붙이게 되었으니, 나의 기쁨은 글만으로 표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연대적으로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은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라는 글이다. 이 글은 인하대학교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의 학교 웹사이트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Google의 indexing을 통하지 않고는 찾기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semi-private’한 인상을 준다. 이 저자의 전공이 molecular biology인 것 같아서 조금 의아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니 에스페란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문학적인 각도에서 본 에스페란토 어의 유용함을 ‘과시’하듯 한국문학작품의 번역(에스페란토 어로)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다.
이 글 에서 아버지의 성함이 두 번 언급된다. 첫 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홍형의 는 「삼천리」사 편집국에 근무하다 사퇴하고 1937년에 「Korea Esperantisto」지를 창간하였다. 비록 일제에 의해 곧 폐간되어 창간호 밖에는 발행되지 못하였으나 이 잡지는 표지 포함 24쪽 전문이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어 우리 운동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창간호에는 월북작가인 이태준(李泰俊)의 장편(掌篇) 소설 「천사(天使)의 분노(憤怒)」(1932)가 이정모(李正模)의 번역(「La Indigno de l’Anĝelo」)에 의해 실려 있다.
그러니까, 1937년에 창간호로 폐간이 된 언급된 잡지에 아버지(이정모)가, 1932년에 발표된 이태준의 꽁뜨, <천사의 분노>를 번역해서 실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나는 아버지가 이시기에 이미 에스페란토 어를 거의 통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1937년이면 아버지의 연세가 26세에 불과한데..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대학(보성전문: 고려대학의 전신)시절에 이미 에스페란토에 심취 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평소 직업은 영어 선생님(선린, 경기고)이었으니까, 어학 쪽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지만 어떻게 에스페란토에 접하게 되었는지는 현재까지 알 길이 막막하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99년경에 그 동안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을 총 망라한 anthology, <Korea Antologio>가 출간이 되었는데 이 글의 저자도 이 작업에 관여가 된 모양이다. 그 책에도 역시 아버지, 이정모의 번역작품이 실린 모양인데 그것이 위에 언급된 <천사의 분노>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스페란토 협회를 중심으로 이종영, 이낙기, 정원조 등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도 Antologio 발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으며, 수년 전 드디어 구체적으로 그 뜻을 모으게 되었다. 필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 1970년대 말부터 틈틈이 단편소설의 번역 작업을 해 오던 터이라 김우선과 함께 그 편집의 역할을 수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안송산, 허성, 방명현, 권혜영 등과 함께 편집진을 구성하여 기 발표된 작품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약 2년만인 1999년 말에 드디어 「Korea Antologio de Noveloj」 (이하 「Korea Antologio」라 함)가 발간되었다.
「Korea Antologio」에는 339쪽에 걸쳐 모두 2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김억의 번역 소설 중 3편, 안우생 번역의 1편, 이정모 번역의 1편, 이재현 번역의 5편, 기타 「La Espero」에 수록된 11편, 「La Lanterno Azia」 수록의 3편과 필자가 번역하여 발표하지 않았던 황석영 원작(1973)의 「삼포(三浦)가는 길(La Vojo al Sampo)」 등 25편의 소설 번역 작품과 부록으로 「La Pioniroj en Vilaĝo」가 포함되었다. 편집 과정 중 가능한 한 원래의 번역 문체를 살리기 위하여 문법적인 오류를 제외하고는 수정을 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인터넷에서 찾아 낸 것이 <제3장 혼란 속의 재건과 성장(1945~75)> 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역사의 일부분이다. 누가 저자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에스페란토의 ‘정사(正史)’ 정도 수준의 글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글의 바로 제일 첫 부분에 아버지의 이름과 ‘육성’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패하고,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자 새로운 나라를 수립하기 위한 건국준비가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동시에 에스페란토운동에 대한 탄압도 사라졌다. 이 때 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출신의 젊은 지성인을 총망라한 [건국추진대 본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우선 [평화의 사도] 연합군(미국, 소련)의 서울 진주를 환영하기 위하여 영어와 러시아로 된 환영휘장을 붙이기로 하였다. 이 때 이정모(李正模)가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창조된 국제공통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고 제의하여 젊은 지성인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들은 즉석에서 주머니를 털어 1천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1945년 8월 하순, 서울 종로에 있는 영보빌딩 정면에 에스페란토로 서울에서 가장 큰 연합군 환영휘장을 붙이고, 가두방송용 확성기를 통하여 에스페란토에 관한 선전을 하였다.
이 글을 찾고 읽었을 때 나는 피가 멈추는 듯한 충격과 감격을 느꼈다. 전설적으로만 느껴지던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로 나는 간접적으로 추측의 나래를 한껏 펴보는 기쁨을 즐겼다. 해방되는 해면 아버지는 첫 딸을 5월쯤에 보았을 젊은 아빠였을 것이다. 그 당시 아버지는 선린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이런<건국추진대> 라는 ‘운동권’에 관계가 되었을까? 전혀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는 없던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로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는 에스페란토의 정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분명히 ‘인류평등’, ‘인류평화’를 신봉하던 거의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 본다.
해방 후에 재건된 에스페란토 학회의 창설과정과 후학 연수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때가 아버지의 에스페란토 운동의 절정기가 아니었을까. 이때는 사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서울 중심의 전국적 조직은 흩어진 동지의 규합에 시간이 필요하고, 또 서울에서 사회적, 정치적 혼미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에스페란토운동의 부활이 늦어졌다. 그러나 개혁적인 에스페란티스토와 에스페란토 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모여 “약소민족어의 해방 및 에스페란토운동의 재건”을 축하하는 [에스페란토 정치선언]을 채택하고, 이것을 잡지 「혁명」(발행인 김 근)에 게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1945년 12월 15일 자멘호프 탄신을 계기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Korea Esperanto-Instituto)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홍명희(洪明憙)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고,2) 홍형의(洪亨義)를 서기장에 임명하였다. 동시에 조선에스페란토학회의 사업계획을 채택하였는데 1) 재정 확립, 2) 기관지 발행, 3) 사전 편찬, 4) 학습 교재 발행 등을 하기로 하였다. KEI창립을 위하여 김억(金億), 백남규(白南圭), 석주명(石宙明), 유기동(柳基東), 이균(李鈞), 이종률(李鍾律), 김교영(金敎瑛), 신봉조(辛鳳祚), 이정모(李正模), 장석태(張錫台), 나원화(羅元和), 송창용(宋昶用), 서병택(徐丙澤), 홍형의(洪亨義) 등 서울에 있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발기하고, 그 외 창립총회에는 홍명희(洪命憙), 이기린(李基麟), 유림(柳林), 곽경(郭敬), 김계림(金桂林), 김명진(金明鎭), 이동각(李東珏), 李正馥(이정복), 박명줄(朴明茁), 이동석(李東錫), 문홍주(文弘周), 한일(韓一), 윤봉헌(尹鳳憲), 홍숙희(洪淑熹), 이기인(李基寅), 이극로(李克魯) 및 당시 아직도 중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한 안우생(安偶生), 이재현(李在賢) 등이 참가 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대회가 끝나자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 주최 첫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1946년 2월 16일 서울대 대강당에서 [대학생 에스페란토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100여 명의 수강자에게 석주명, 홍형의, 안우생의 강연에 이어, 석주명, 홍형의 지도로 에스페란토 강습을 하였다. <중략>
1946년 8월 제2회 공개강연회 및 강습회가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개최되었고, 이 때 이극로(李克魯)가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고,3) 서울 을지로2가에 있는 청목빌딩에 KEI 사무실을 두게 되었다. <중략>
1949년 5월 서울 국학대학 강당에서 약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 및 KEI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KEI 제4대 회장으로 유기동(柳基東, Saliko, 사업가), 부회장으로 백남규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8월에 KEI 제5회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약 30명이 참가하고 서병택, 석주명, 이정모가 지도하였다.
위의 글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에 에스페란토 운동의 중심부에서 학회 발기인, 후배 양성에 전력을 쓴 것이 역력히 들어난다. 특히 아버지의 이름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대부 격인 ‘김억, 석주명,’등과 나란히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이로나 정열, 열의, 경력 등으로 보아 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특히 계속된 에스페란토 강습회에서 강의를 한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직업인 ‘학교 선생님’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상주의적인 에스페란토 운동은 사실 사상적으로 조금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완전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니까, 사실 빨갱이건, 아니건 모두가 참여할 여지가 있었고, 해방 후의 사상대립에서 이것은 정말로 아슬아슬한 운동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구의 남북합작과 같은 정도의 남쪽에서 보면 불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거꾸로 빨갱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악질반동들이 섞여있는 이런 단체를 곱게 보았을까? 그러니까 양쪽에서 모두 ‘노리는’ 그런 ‘동네 북’과 같은 ‘중립’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에스페란토의 중추적이었던 몇 사람이 납북과, 처형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차츰 정리, 활성화되어 가던 한국 에스페란토운동도 갑작스런 6.25사변으로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KEI는 1949년 5월 서울에서의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마치고 제4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1950년 6월 28일 서울 과학박물관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6.25동란으로 서울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따라서 제4차 대회는 개최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석주명은 살해되고, 김억과 KEI 회장 유기동 등 핵심인물들이 동란 중에 납북되었다. 국내에 머물 수 있었던 안우생, 이균, 김교영, 이계순(여자) 등 인사들도 전란으로 뿔뿔이 분산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스페란토학회(KEI)의 기능이 계속 될 수 없었다.
위의 글에서 왜 아버지의 납북에 관한 언급이 없었을까? 육이오 동란 이후, 국내 에스페란토 관련 인물들이 아버지의 납북사실을 이렇게 전혀 몰랐을까? 나중에 역사를 정리하면서 분명히 ‘이정모’의 실종 사실을 발견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에스페란토 정사(正史)’에서 아버지 이름이 슬그머니 사라졌을까? 나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가족의 역사는 이곳에서도 ‘찾기 어려운’ 그런 사실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하고, 내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아버지의 희미한 자취를 찾으면서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인공적인 국제 공용어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다. 언어를 천재적인 용기로 혼자서 150년 전에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안타깝게도 이 언어는 창시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역시 새로 등장한 영어의 위력 때문이 아닐까? 비록 배우기가 자연언어보다 쉽다고는 하지만 역시 이것을 배우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도 전형적인 chicken-and-egg or Catch-22 problem일 것이다. 어느 정도 쓰이고 있어야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질 터인데 그 단계에 도달하지를 못한 것이다. 15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절대 질량 (critical mass)’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내일이 하지냐? 하지.. 하지.. 해방 후 미군 군정 사령관의 이름이 하지 Hodge 였지.. 물론 영어 발음은 ‘핫지’에 가까웠지만. 하지면 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편리한 생각에 불과하고 사실은 이날부터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조금씩 짧아진다는 뜻이 더 맞다. 그렇게 새벽이 빨리 밝고, 저녁 때까지 밝던 것.. 이것도 조금씩 후퇴를 하게 되나? 6월, 하면 재작년에 준수녀석이 왔을 때, 신경질이 나던 그때가 생생하고, 작년의 Washington DC trip이 연상된다. 덥긴 더워도 그래도 7월, 8월을 생각해서 ‘무덥다’고 말하긴 이르다. 올해는 그것이 조금 더 일찍 5월 중순에 찾아왔지만.
6월에는 굵직한 ‘신심행사’가 두 개나 있다. 레지오 봉쇄피정은 이미 ‘성공리’에 끝을 냈고 이번 주말 6월25일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 듣기만’ 했던 이곳 대교구의 연례 성체대회가 열린다. 이것도 올해는 ‘하느님의 은총’ 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에 우리가 간다는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무언가 우리를 ‘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고, 그럴 것이다. 이런 ‘가까이’ 온 것을 놓치면 다시 못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it’s now or never.. 라고 나 할까.. 그럴지 모른다. 우리, 나의 근처에 오는 절대자의 손길은 이제 멀리하지 말고 그저 무조건 잡아보자.
그제 일요일은 아버지 날이었다. 잊고 사는 날이지만 그 날이 되면 잊을 수가 없다. 성당에서도 강복을 받고, 그래도 아버지의 의미를 한번은 일깨워 준다. 하지만 우리 집은, 조금 실망을 했다. 선물을 바래서가 아니라, 느낌이 그렇다. 나는 그래도 전화 한 통이면 정말 족하고 그것도 더 좋다. 이제까지는 아이들의 ‘극성’에 놀아났고, 그것은 물론 고맙지만 그것이 내가 바란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들이 원한 것인 것을 그들은 모르는 듯 하다. 그날 하루는 ‘나의 식’ 으로 축하를 해 주면 안 될까?
6월도 셋째 주로 접어들고, 6월의 세 번째 일요일, ‘아버지 날’을 또 맞는다. 오래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미국에 아버지 날이 있는 것을 알고 사실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Father Knows Best라고 한 가정의 가장이요, 제왕이던 시절에 웬 놈의 아버지 날? 일년에서 어머니 날을 제외하고 모두 아버지 날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세월은 흘러 흘러, 점점 이 날의 의미가 새로워지고 심지어 더 심각하게 되고 있다. 그만큼 ‘남자’와 ‘아버지’의 사회적 위치가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나는 그것을 모조리 보고 느끼며 산 셈이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니까 이것은 분명히 사회적으로 진보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평등화’ 되어가고 있으니까 그 동안 ‘고생’을 하던 여성들의 위치가 거의 일방적으로 올라간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젊은 아빠들은 그런대로 ‘평등교육’을 받고 자라서 잘 적응한다고 하지만 우리 같은 세대는 조금 거부감을 느낄 때도 있다. 어쩌다 ‘가장’들이 이렇게 무기력해지고 아버지 날에나 그런대로 ‘감사’를 받아야 하게 되었나. $$$의 위력이 그렇게 만들었나, 아니면 교육을 그렇게 시켰나.. 남자들이 점점 바보가 되어가나..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럴싸한 아버지 상을 갖지도 못했다. 김일성 개XX 덕분에 우리 아버지는 전쟁의 희생물이 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얼마나 당신의 두 살배기 아들을 그리시다 가셨을까 생각하면 몸서리까지 쳐진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없는 설움을 느낄 때가 참 많았다. 비록 표정이나 감정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어도 그것은 참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저 나는 그런 가정이 우리 말고도 많다고 위로하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국본당(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일요일 미사에서 신부님께서 미사 후가 아니고 미사 중에 모든 아빠들을 기립시키시고 특별히 강복을 주셨다. 나는 이것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고마울 수가 없다. 신부는 영적인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자식들의 아버지라서 더 그 의미를 느끼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우리 신부님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것이 더 신부님을 존경하게 하기도 하지만.. 머리가 다 큰 우리 집 아이들..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요란하게 선물공세를 하더니, 이제는 그것들도 다 없어졌고, 조금은 귀찮은 눈치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족이 진화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우리 두 딸에게 어떤 아빠인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별로 크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그런대로 내 딴에 ‘재미있는’ 아빠가 되어 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는데 10대의 사춘기 때를 거치면서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을 한 것이 되었다. 그저 나는 “우리 때도 저랬을까..” 하는 물음만 계속했다. 심지어는 큰 딸애는 엔지니어와는 절대로 사귀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내가 그 만큼 재미가 없었는지.. 도매금으로 다른 엔지니어들까지 인상을 구겼던 것이다. 나이가 조금 들면서 ‘의식적’ 으로 노력을 하는 듯 하지만 역시 황금기는 지난 듯 싶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해야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 아버지의 기억을 그 애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참, 사는 것, 힘들다..
Peru, Nebraska라는 제목으로 성성모씨의 추억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눈이 오면서 생각이 그 아득한 시절의 1973년 겨울, Peru, Nebraska로 멈췄다. 그러다 성성모씨와 같이 눈길에서 헛바퀴를 돌고 있던 차를 밀어주던 생각으로 흐르고 자연히 그곳에서 교수를 하던 한국인 John Hahn, 그리고 근처 Auburn, Nebraska의 병원에서 근무하던 세 한국인 간호사들.. 참 소설 같은 배경이 아닐까?
글을 쓰다가 조금 느낀 게 그렇게 또렷이 기억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 구체적인 사실로 묘사를 하려니 턱없이 ‘사실’이 부족했다. 나의 머릿속에 그냥 두서없이 기억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조금은 생겼다. 생각과 글과 말은 서로 다 그 정도의 차이가 대단하다는 것도 함께. 그래서 부랴부랴 생생하다고 자부하던 미국유학과정을 시대별로 써 내려가기 시작을 했는데..이걸 어떻게 끝을 낼지 아니면 얼마나 자세히 써야 할지 현재로써는 난감하다. 하지만 시작이 반.. 이 아닐까?
‘눈’을 기대한 월요일 아침, 하지만 ‘물’로 끝이 났다. 연숙의 business일정으로 사실 눈의 ‘사치’는 귀찮기만 할지도 모른다. 며칠 계속되는 민감하고, 차게만 느껴지는 나라니와 같이 점심을 할 용기를 못 느끼고 도서관에서 평소 때 보다 30분 더 있었다. 1월 달 충격적인 거짓말 같은 우리의 ‘고백’을 담담히 받아드린 고마움도 있고 해서 조금 더 친하게 지내려는 희망은 잠시였고, 식사도 같이 안 하려고 하고 무언가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또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제일 중요한 것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WordPress이다. 2~3년 전의 DotNetNuke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때의 것은 사실 ‘물거품’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번 것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결과가 조금은 보이니까. 이것을 기점으로 PHP를 더 배우고 그러면 무언가 내가 할 일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WordPress Bible이란 책을 $30+ 거금을 들여 사서 현재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번에는 결과를 기대해 본다.
Whispering piano가 the Whispering Piano Internet channel에서 감미롭게 굴러 나온다. 어쩌면 그렇게 피아노 소리가 감미로울까. 하지만 이렇게 듣기 좋은 것도 오랫동안 들으면 영락없이 시끄러운 ‘소리’로 변하고 만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화창한 월요일 아침 또 Cobb Central로 drive해서 왔다. 이제는 아주 친숙해진 곳.. 어쩌면 그럴까.. 예전에 이곳을 오면 그렇게 ‘빌려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가는 시간만 기다렸지 않은가. 그때는 누구와 같이 왔었고 분명히 내가 ride를 주었을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좋아하는 책을 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나의 마음가짐이 전혀 달랐다. 오죽하면 가족들이 나보고 왜 그 많은 시간을 좁은 나의 방에만 처박혀 있냐고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지 않았나. 이유는 없었다. 그냥 ‘결단’을 못 내렸던 것뿐이다. 나의 세상만사가 거의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렇게 된 것 투성이일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의 차’가 없어졌다는 것일까? 교훈은 “남의 말을 진정으로 생각해 보자” 라는 것일 게다.
현재 나를 조금이라도 지탱해 주는 것 “dadpc-2: Compaq Presario X1300″ laptop이다. 비록 거의 6년이나 된 ‘고물’ 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쌩쌩’한 보물인 것이다. 다행히 이것을 나라니가 살 당시에 wide-screen으로 비교적 비싼 model이었기 때문에 현재도 거의 문제가 없다. 그런데 역시 문제가 있다. 다행히 external한 것이라 조금은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조금은 화가 난다. 이것은 거의 예측이 가능한 고질적인 laptop mechanical weakest link 라고 해야 할까? 바로 power (from charger) connection problem이다. 전번에 새로니가 쓰던 것도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charger를 쓸 때 이 connector에 아주 예기치 않게 stress가 가는 것을 mechanical designer들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어쩌면 아직도 이것을 더 잘 만들지 못했을까. 문제는 charger connector에 연결된 pc board에 damage가 간다는 것이다. 이곳에 monster-class strain-relief mechanism이 필요한 것을 왜 그들은 더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좌우지간 이것이 더 악화되기 전에 손을 보아야 할 듯 하다.
지난 주말에는 예정대로 새로니가 다녀갔다. Vanderbilt University에 campus tour에 참가를 했는데 갔다 온 인상이 아주 좋았던 것 같고 financial aid이 더 좋게 되면 그곳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히는 모양이다. Vanderbilt하면 물론 아주 오래 전 김수근 씨가 생각이 나곤 하는데.. Oklahoma에서 조금 신세도 지고 알고 지내던 그분은 거의 공부를 끝낸 상태의 유학생이었지만 그 당시 Sherman의 조그만 college에서 가르치던 아주 ‘우수’한 경제학도였다. 그가 바로 Vanderbilt에서 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그때 그 이름을 알았다. 남부의 명문사립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학교자체는 나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아직까지 조금 이해하기 힘든 것은 현재의 job을 ‘버리고’ elementary school teacher가 되기 위해 Master’s degree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사실이다. 조금은 나의 머리로는 앞뒤가 맞지를 않아서.. 나의 희망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더 ‘재미’가 붙게 되어서 higher degree에 도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우리부부의 ‘염원’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이런 논리는 이제 너무나 구식이 (여기나 고국이나) 되어서 남에게 말하는 것은 조금 치사한 일이다.
나의 지금은 어떠한가? 이게 무슨 해괴한 질문인가? 그래.. 나의 현재 건강상태는 A-minus정도는 될 것이다. 그냥 A라고 해도 되겠지만 조금은 자신이 없다. 아침에 일어난 후의 기분 나쁜 두통과 계속 느껴지는 얼굴의 경련 (연숙은 분명히 눈 주의의 경련이라고 하지만) 등등 그리고 계속 ‘악화’되는 시력.. 등등 때문이다. Physical checkup없이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 나의 주위에 또 있을까? 조금은 창피해서 말을 못한다. 하지만 나나 연숙은 상식적인 건강보험을 규칙적으로 들고 있지 않은가? 거의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life style또한 건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도 모르게 몸 안에 무언가 ‘자라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조금은 체념을 한 상태다. 우리의 경제력으로는 조금은 말이 안 되는 ‘사치’처럼 보인다. $1000씩 한 달에 지불하고 ‘안심’을 한다는 것 말이다. 이것도 사실 우리가 좋아하던 Obama때문에 얼마나 갈지 의문이다.
결국은, 결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 이 말이 웃긴다. 시간이야 다 결국은..이 아닌가! 그래 결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가 되었다. 이 말도 웃긴다. 이브의 이브라.. 처음 써 보는 말인데 그럴 듯 하구나. 분명히 나는 이제 61번째의 ‘이브’를 맞이하는 셈이다. 구정과 추석 다음으로 나는 이날이 좋았다. 예수와 나는 개인적인 관계가 없어도 그건 상관이 없었지 않은가?
춥기만 했던 그 한겨울 누나, 누나친구들과 그리던 크리스마스카드.. 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미제 카드, 그것도 새것이 아닌 쓴 것을 그림만 잘라 가지고 다시 만든 카드를 보며 그 아름답고, 이국적인 눈 덮인 세계를 우리는 다시 옮겨서 그렸다.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크디큰 선물자루, 뉴욕의 야경에 찬란히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들…… 모두가 가난했던 우리들에겐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그림을 좋아했던 (그다지 잘 그린 것은 아니라도), 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좋았다. 비록 추웠어도 온돌은 따끈해서 화로 불을 옆에 놓고 우리들은 그곳에 누워서 만화도 즐기고 카드도 그리곤 했다. 특히 누나친구들과 같이 놀던 생각도 많이 난다. 누나야, 참 그때는 즐거웠지?
하지만 그때 우리나라는 분명히 성탄절의 나라는 아니었다. 비록 이승만대통령의 ‘희망’대로 휴일이었고 이브의 밤에는 ‘통행금지’가 없었다. 소위 통금이 없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풀어 버려서 1964년 (내가 고2때)에는 서울시내, 특히 명동의 거리는 완전히 밤새 동안 ‘광란’의 거리로 변해 버렸다.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최근에 일본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도 거의 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4년의 겪은 것을 같은 때 일본이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이라서,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흥미롭기도 하다. 그러니까 1964년 성탄절은 기억이 또렷한 게, 나도 그 ‘소란’함에 조금 기여를 했던 것인데.. 그때 명성이와 동만이를 우리 집으로 불러서 밤을 새운 것이다. 아마도 그때의 분위기가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고2 였던 우리들까지 합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창 외국 (거의가 미국이겠지)의 pop song들에 심취해 있었는데, Christmas carol도 예외가 아니었다. Living Stereo라고 label이 붙은 LP jacket에 그때의 유명했던 Pat Boone이 있었다. 그가 불렀던 Jingle Bells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TV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 라디오가 왕 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완전히 Christmas special일색이었다. 그 당시에 왜 그렇게 까지 ‘과열’이 된 상태가 되었을까? 아직도 그게 나는 궁금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분위기가 그랬어도 그것은 역시 12월 24일 하루뿐이었다. 그 전이나 그 이후에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그게 지금 내가 여기 살면서 얼마나 이곳이 그런 분위기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지 실감을 하게 된다. 요새는 거의 Thanksgiving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는 한마디로 ‘지겹다’는 느낌도 든다. ‘소박’한 기분이 거의 들지를 않는다. 너무나 상업화 되어서 그런가? Holiday blues란 말이 실감이 간다. 분명 나는 오랜 전부터 내가 즐기는 게 아니고 아이들이 즐기는 것을 보며 위안을 삼을 그 정도가 되었다. 내가 확실히 ‘우울’한 인생의 후반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