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rcy or Conspiracy? Wife와 family가 있는 주임신부 부임: 드디어 그날이 오늘 아침에 갑자기 왔다. 결혼한, 부인과 자식 그러니까 자기만의 ‘단란한’ 가정이 있는 주임 신부님의 첫 주일미사가 있었던 날.. Father Miguel.. Spanish full name이 너무 길어서 가급적 first name 이자 영세명인 Miguel로 불러달라는 50대의 건강하게 보이는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님.. 제일 염려했던 Spanish accent문제는 완전한 기우.. native, full American accent로 주일 첫 부임 미사를 자유자재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설득력 있게 끝냈다. 그러니까.. 첫 인상은 완전한 pass였다. 몇 년이나 계실지는 모르지만 그런대로 안심을 한 것이다.
그것까지는 문제가 없지만 제일 우리의 관심사요 염려는 역시 ‘기혼 신부‘라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아주 ‘자신 있게’ 30년 역사의 wife와의 결혼생활을 언급을 하는데.. 성실한 것을 강조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기정사실을 받아 들이라는 호소인가? 모르긴 몰라도 ‘인상은 좋았어도’ 이 wife와 가정이 있는 Roman Catholic priest를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최소한 얼마 동안은.. 우리는 이미 한달 이전에 이 신부님에 대해서 다 알아보고 심리적인 대비를 하긴 했지만, 이런 것을 잘 모르고 오늘 처음 알게 된 교우들은 아마도 크게 놀랐을 것이다.
오늘 우리 둘이 같이 느끼는 것,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고 그것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항상 깨어서 대비하라는 말씀을 잊지 말라는 것 바로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교황 Francis의 big Mercy agenda중에 하나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계획적으로 ‘밀어 부치는’ 바티칸의 주도에서 우리 대주교도 그것에 따른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mercy를 너무나 강조하다 보면 신앙 교리와 교의 敎義의 경계선에 자칫하면 실수를 하거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기에 항상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심지어 교황이 homosexual 들에게 ‘사과’를 했다는 ‘억측과 conspiracy theory’도 나도는 이때.. 이번에는 결혼신부가 ‘전통 보수’의 아성인 East Cobb에 부임.. 우리들이 심려는 전혀 불가능한 추측은 아닐 듯 하다. 모든 ‘교회를 떠난 무리’들을 다시 불러 들이는 현 교황의 염원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람직한 부류가 아니더라고 교회만은 당신을 사랑한다.. 그것 아닐까? 그것이 mercy의 정신이라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생각도 서서히 그것에 맞추어가야 할 듯 하다. 덥기만 한 Independence Day 전날, 조금은 가라앉는 듯한 심정이다.
¶ 피하고싶은사람들: Persona Non Grata, 피하고 싶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case by case인 case이지만.. 그래도 일반론 一般論은 있을 듯하다. 정도의 차이도 중요하다. 얼마나 피하고 싶은 가 하는 것.. 우리도 인간이기에 예외는 아니고.. 피하고 싶은 ‘인간’들이 있고, 그것에 슬기롭게 처신하는 것, 생각하고 노력한다고 자부하지만 한마디로 괴롭다. 생각만해도 싫은 것이다. 이것도 mercy mercy하면 할 말이 없지만 억지로 mercy 를 베풀고 싶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들을 미워하는 것인가.. 하면 반드시 그것도 아니다. 다만 안 보고 살면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 뿐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이름은 persona non grata.. 그러니까.. 기피인물 인 것이다. 지난 수 년 동안 이들이 ‘사라진 것’은 정말 우리에게는 기적과 같은 ‘성모님의 손길’이었다. 우리가 손끝 하나 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기적적으로 ‘자멸의 길’로 들어가고 사라진 것일까?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가.. 시간은 흐르고 그들이 다시 꿈틀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하고 심지어 우리 앞에 나타나 스스로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고 요새 본당 ‘weekly bulletin’ 사진에도 그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어쩔 것인가? 이런 것들이 현재 우리들의 가장 심각한 challenge가 되고 있다. Mercy? Ignore? Shun?어쩔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이 뻔뻔할 수가 있을까? 크지 않은 ‘교회 공동체’이고 보니.. 아마도 안 보려 피하는 것은 조금 stupid한 것일 듯하고.. 연극을 하며 마주서서 웃는 것은 더더욱 싫고.. 우리의 희망은 역시 BVM1 밖에 없는 듯.. 몇 년 전에 보여 주신 기적을 다시 보여 주소서…
¶ Dog Days afternoon,daydreaming: 와~ 7월도 되기 전에 언제 여름이 이렇게 무르익었나? 그야말로 relentless heat (stress) days after days.. 머리가 조금은 몽~롱~ 해진 상태에서 아하.. 요새가 바로 dog days.. 라는 탄식이 나온다. hot & sultry.. days.. 이것이 바로 dog days가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에다가 Dog Day Afternoon같은 Al Pacino1975년 영화까지 머리에 겹치니까 아주 더 머리가 혼란하기까지 하다. 더운 것은 여름이니까 그런대로 참는다고 하지만 문제는 ‘물’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공짜 물’, 그러니까 비가 안 오는 것이다. 예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backyard의 green field를 상상한 것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Hose water.. 의 무력함을 이렇게 실감하는 나날도 없는가? 암만 암만 홍수가 날 정도로 뿌려도 몇 분이면 땅이 완전히 다시 굳는다. 아.. Mother Nature여.. 오후에 딱 5분만 폭우를 보내 주어도 모든 문제가 일순간에 사라지는데.. 기우제라도 드려야 하는 것인가?
오래~전 오래~ 전.. 직장생활을 할 때를 가끔 기억에 떠올린다. 그때의 여름도 사실 요새와 그렇게 다를 것 없이 무더웠을 터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정 반대였다. 당시 corporate life (a.k.a salaried man)의 혜택.. ‘빵빵’ 사정없이 냉동이 된 건물 안에서 Nine to Five 를 견디고 집에 오면 몸이 녹는데 몇 시간이 걸린다. 한마디로 ‘푸근~’한 집이 그렇게 덥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훗날.. 연숙과 이야기를 하며 느낀 것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던 사람은 내가 요새 느끼는 것과 같이 항상 더웠던 것.. 가정 집에서 암만 에어컨이 나와 보았자 그것은 사실 별 것이 아니었던 것.. 그제야 나는 실감을 한 것이다. 아무리 여름에 78도 에 맞추어진 집이어도 그것은 그렇게 시원한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것을 안 후에는 조금 미안한 심정도 들었다.
¶ Greenfields are gone now, parched by the sun.. Yonsook Trail이라고 이름이 된 backyard의 깊숙한 곳 오솔길.. 초 여름까지 푸른 화초들이 길을 따라 ‘파~랗게’ 도열을 하며 맞아 주었지만 하늘에서 물기가 사라지고 대신 인정사정 없이 작열하는 태양열에 하나 하나씩 마르기 시작하며.. 이 1960년 초 folk classic Greenfields 의 가사 중 Greenfields are gone now parched by the sun.. 이란 구절이 떠오른다. Greenfields.. 어쩌면 그렇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대학생 출신 quartet The Brothers Four의 이 노래는 중학생 때 귀따갑게 듣던 명곡인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quarter이었던 불루벨즈가 멋지게 ‘모창’을 한 기억도 난다. 나중에 가사를 음미해 보니 역시 이것도 ‘가버린 연인’을 그리는 노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때의 Greenfields가 가버린 연인을 따라 모두 황폐해진 것.. 잔잔하지만 격조 있게 은은하게 불린 멋진 4중창의 화음.. 역시 60년대 초만이 가질 수 있었던 멋진 추억이었다.
parched, dried up, Yonsook Trail
Greenfields란 말은 그 이후에도 유행어가 되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하숙생들이 고기와 계란이 없는 순전히 야채 중심의 밥상을 꼬집을 때 하던 말.. 그것도 Greenfields였다. 세상이 많이도 변해서 당시에 야채중심의 식사는 ‘가난한’ 것이었다. 요새는 어떤가.. 돈이 없으면 야채를 많이 먹지 못하는 희한한 세상이 아닌가? 참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것인가..
S2 Android ICS Blues: 여기서 S2는 Samsung Galaxy S2 smartphone을 뜻하고, ICS는 그것을 ‘움직이는 system software: operating system’ 인 Google의 Linux-based Android의 version 4.0x code name ‘Ice Cream Sandwich‘를 말한다. Android code name은 전부 ‘달고 맛있는 당과 糖菓’류의 이름들인 것이 재미있다.
우리는 2012년 경에 나온 삼성 smartphone Galaxy S2를 아직까지 쓰고 있다. 그러니까.. 벌써 4년이 지나가는 ‘고물’이 되었나.. 우리의 30~40대 같았으면 아마도 매년 새로 나온 것으로 바꾸었겠지만 지금은 older & wiser, smarter 해 진 것인지.. 절대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한다. 30대에 타던 차들이 100,000 마일이 되면 못 쓰게 되곤 했지만 요새 차들은 200,000 마일까지 쓸 수도 있다는 것처럼 근래의 electronic hardware들, 정말 ‘잘만 만들면’ 절대로 쉽게 고장이 안 난다. 그런 덕분인지 고물이 된 S2, 거의 새것처럼 보이고 느껴지고 그렇게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면 뒤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함정과 그늘이 있다. 바로 software인 것이다. Smartphone이라고 하지만 phone의 기능 이외에 desktop computer의 기능을 능가하는 computing power를 가진 이 ‘조그만 괴물’,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이 software에 문제가 생기고, 성질이 급하면 아주 고장 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새것으로 바꾸곤 한다. 무언가 잘 안 되면 과연 그것 hardware가 고장이 난 확률은 아주 낮다. 근래의 값이 저렴한 Desktop PC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digital device들 (desktop pc, smartphone, tablet etc), 요새는 거의 다 Internet에 연결이 되어있기에 아차..하면 virus나 malware 같은 것이 들어오고 갑자기 성능과 속도가 떨어지고 심지어는 완전히 고장 난 것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공평한 것인가.. 복잡한 것은 물론 기능이 많다는 뜻에서 좋지만 그에 비례해서 이런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니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최근 연숙의 smartphone이 각종 문제가 생긴 것을 다시 보았다. 나와 똑 같은 T-mobile version S2 model인데, 내 것은 거의 새것처럼 보이고 연숙의 것은 완전히 ‘기어가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을 참고 쓴 것은 좋았는데 아주 최근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phone이 항상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물론 이것은 phone이 ‘지독히 busy’ 한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battery를 최고로 많이 쓰는 것이고 그래서 뜨거운 것이다. Battery가 금새 discharge (방전) 가 되어 버리니.. 몇 시간마다 charge (충전)를 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이것으로, phone을 새것으로 바꾸느냐 마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잠깐 내가 살펴보니.. 역시 cpu (microprocessor)가 거의 80% 이상으로 ‘계속’ running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쓰지도 않는데 무엇이 그렇게 뒤에서 ‘돌아가는’ 것일까? 처음에는 ‘아마도’ 이것 저것 download가 된 program들.. 거의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려니.. 추측을 했지만 암만 뒤져 보아도 그런 것은 없었다. OS Monitor란 app으로 살펴보니.. 항상 바쁜 것은 ‘Android_system‘이란 process 였다. 이것은 download가 된 user app이 아니고 Android system의 일부가 아닌가? 이 정도가 되면 아주 심각한 문제다. 문제가 된 것이 Android system자체이니 이것 자체를 바꾸거나 reset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Android system을 새로 hard-reset을 하거나 re-install을 해야 할 듯하니.. 골치가 아픈 것이.. user setup data들을 backup 해야 하는데, 다행인 것은 거의 모든 것이 Google cloud에 있어서 자동 backup이 된 상태고, 예외적은 것은 아마도 KakaoTalk 정도가 아닐까.. 생각보다 local data는 제한적, 거의 모든 것이 Google소관, 참 묘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렇게 시작해서 소위 말하는 hard-reset, re-install을 했지만 surprise! No change! 그래도 battery는 빠르게 discharge가 되고 phone은 항상 뜨겁게 달구어진다. 왜 그럴까?
거의 포기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알게 된 사실.. Samsung Galaxy S2 에 마지막으로 upgrade가 되었던 Android는 Ice Cream Sandwich로 불리는 4.04이 아니고 Jelly Bean으로 code name이 된 version 4.12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Jelly Bean으로 upgrade를 시도하였다. 어떻게 upgrade를 하는가? 보통은 OTA mode 인데, 그러니까 Over The Air.. ‘자동적’으로 upgrade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를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그것이 upgrade가 되었으면 거의 4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Googling을 해 보니.. 방법이 있었다. 역시 Samsung의 도움으로.. Samsung에서 나오는 Kies란 Windows software가 그것이다. S2 phone을 usb 로 PC에 연결하면.. ‘재수가 좋으면’ 큰 문제없이 Jelly Bean으로 upgrade가 되는 것이 원칙인데.. 세상이 그렇게 공식, 원칙대로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첫째, 생각 없이 usb 로 연결을 하면 Kies는 절대로 S2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록 PC Windows는 phone을 storage로 알게 되지만, 그것은 useless). Android의 developer mode를 ON하고 그곳에서 developer usb mode를 set하여야 비로소 Kies가 연결이 되고 모든 upgrade business가 가능하게 된다.
Upgrading 은 무려 overnight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서 download, re-flashing이 되는데 이때가 제일 긴장이 되는 순간들이다.. 무슨 일이 이때 생기면 최악의 경우 phone자체가 무용지물 bricking 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긴 여정을 끝내고 연숙의 Ice Cream Sandwich는 드디어 Jelly Bean으로 booting을 하고..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것.. 모든 모든 모든 문제가 일 순간에 다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 예상을 넘는 변화였다. 완전히 S2 phone이 새것으로 바꾼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한 기쁨이 가시면서.. 다시 생각을 한다. 과연 연숙의 phone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Hardware자체는 완벽하게 문제가 없었음도 증명이 되니까.. 100% Android system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Battery문제가 한창 극성을 부릴 때, ‘Battery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message가 떴다는 연숙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거의 분명히 이것은 의도적인 외부에서 들어온 malware, 그것도 $$$을 요구하는 그런 criminal한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것은, 제일 처음에 시도한 system total reset때 Android system은 ‘원래의 상태’로 restore가 되었을 것인데 어째서 그 때에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 upgrade를 했을 때야 비로소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원래의 Android 였던 Ice Cream Sandwich 자체가 malware로 infect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가? flash-rom은 비록 read-only 지만 flashable한 것은 사실이니까, 불가능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이 malware는 ‘지독한’ 것이다. 어떤 ‘놈들이’ 만들고 보낸 것일까?
한창 더운 여름에 2~3일을 이런 것으로 골머리를 썩힌 것, 즐거운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우선 ‘놀라운’ 결과가 모든 것을 시원한 오후의 소나기 처럼 깨끗이 씻어 주었다. ‘고물 phone’에 대한 불평을 최근에 끊임없이 말하는 연숙이 잠잠해진 것이 나는 제일 기쁘다. 이것도 요새 우리 집의 많은 clunker들을 손수 고치는 것의 일환이 되었지만 ‘save-the-earth 보람’의 일부도 되었다.
서울 특별시 종로구 鍾路區 원서동 苑西洞 비원 秘苑의 서쪽 담장을 따라 맑은 시냇물 (당시에는 개천 이라고 불린)을 따라 아늑하게 남북으로 펼쳐진 그 옛날 1950년대의 종로구 원서동,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의 기억 제일 깊숙한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 특히 1954년 경 그 동네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억하며 그릴지도 모른다.
육이오 6.25란 글자가 보이면 원서동에 연관된 추억들이 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나를 깨우는가. 이런 이유로 나의 blog 특히 memoir 에는 이곳의 추억이 이곳 저곳 산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나의 추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것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6.25 동란, 66주년 아침에, 남기려는 것들, 6.25 동란 기록영화의 추억,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하고 기억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원서동 극장, 한성택, 조흔파’ 정도가 keywords가 될 듯한 오늘의 추억은 정말로 아련한 추억들이다. 뒤 늦게 연대를 찾아보니 분명히 1954년 에서 1955년 사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6.25 동란이 일단 끝난 휴전 바로 다음해 쯤이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 전쟁 이후 휴전이 될 무렵까지 우리는 원서동의 아래쪽, 휘문중고교 바로 옆, 동섭이네 집이라고 불리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의 주인이 휴전 이후에 피난에서 돌아왔기에 우리 3식구 (아버지는 전쟁 초에 납북)는 가까운 곳, 아주 작은 ‘무당집’ 단칸 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때의 기억들은 나의 오래 전 blog1에서 이미 회상을 하였다. 그 이후, 우리 세식구는 1954년 초에 이곳, 승철이네 집의 건넌방으로 이사를 왔고 본격적인 ‘재동국민학교 1~2학년’ 시절의 ‘평생 기억’을 만든다.
승철이네 집.. 최승철.. 어찌 잊으랴.. 나보다 2살 밑이었지만 그 나이에 나의 제일 친한 ‘한 집’ 친구가 되었다. 안 방 주인집은 양 부모가 있는 ‘정상적’인 주인이었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그 집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집이라고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비록 큰 집은 아니었어도 승철이네 집에서 보낸 2년 정도는 한마디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집의 위치도 원서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북쪽과 서쪽은 비원의 담으로 완전히 가로막힌 아늑한 곳, 여름에는 비원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잠을 설칠 정도였고, 겨울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청계천으로 흐르는) 에서 썰매를 타는 그곳은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승철이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나이도 비슷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큰 딸 시자누나는 나의 누나와 동갑이었는데,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는지 성이 ‘주’씨여서 원래는 주시자 누나로 통했는데 나중에는 성을 최씨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두 남동생인 승철이와 승관이는 현재 아버지와의 자식인 것이다. 당시에 그런 것이 그렇게 관심은 없었지만 기억에 뚜렷이 남은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 그것도 두 누나들까지 포함 된.. 그런 승철이네 집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승철이 아버지는 경찰출신으로 (해방 전에도 그랬는지는 몰라도) 훤칠한 키의 호남형, 하지만 사나운 사나이 기절도 있었다. 일정한 직장이 없으셔서 거의 집에 계신 것이 특이한 점이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하셔서 놀지는 않으셨다. 항상 무언가 하신 것 같았다. 기계 쪽에 관심과 특기가 있으셨는지, 엔진 같은 것을 집에다가 갖다가 놓으시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얼음을 만드는 냉동기였다. 그것을 가지고 후에는 경기도 연천 인가 하는 곳으로 가셔서 가게를 차리셨다. 물론 아이들은 집에다 두고 부부만 가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온 후의 일이었지만.
구파발의 추억: 가끔 승철이 아빠는 우리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인 경기도 구파발로 놀러 가시기도 했다. 여름 겨울 모두 갔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즐겁고 신기한 추억이 되었다. 구파발.. 어찌 잊으랴.. 그것이 그러니까 1954, 5년 경이었을 것이다. 서울역 염천교 옆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한없이’ 달려서 간 곳.. 구파발, 구파발.. 그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시골’이었다. 시골, 시골,.. 처음으로 ‘쌀나무, 벼’를 보았고, 논을 보았고 ‘진짜 초가집’ 안에 들어가서 자 보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그곳은 아름답기 전에 너무도 가난한 곳이었음을.. 서울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름다운 곳, 진짜 시냇물에서 수영, 미역을 감고, 미꾸라지를 잡고, 차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깜깜한 밤에 술래잡기를 하고, 한없이 많았던 메뚜기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리가 가서 자던 초가집이 승철이 아빠와 어떤 친척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에 ‘희덕이’라는 우리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것이 전부다. 겨울에 놀러 갔을 때는 얼어 붙은 논에서 ‘한 없이 하루 종일’ 썰매를 타는 황홀에 빠지기도 했다. 승철이 아버지, 감사 드립니다. 셋방에 사는 아이까지 데리고 가신 것..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 황홀경의 추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억에 뚜렷한 것 중에, 그곳 (구파발)에서 나올 때 어떤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이 승철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것, 그러니까 그 집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던 것, 그 아내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승철이 아빠에게 매달리던 것,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된 후 그 집을 떠나는데 또다시 그 집 아내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를 쫓아오던 모습.. 어린 나이에도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의 장면이었다. 그것을 만류하고 해결해 주었던 승철이 아빠.. 존경을 받을 만 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쪽도 있다. 다른 기억에, 한 때 어떤 ‘장판지 외판원’을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 한번 장판을 파는 젊은 청년이 왔었는데, 무언가 잘 못 되어서 승철이 아빠가 그 청년을 거의 구타하다시피 해서 쫓아 낸 것이다. 나는 너무나 혼동스러웠던 것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어린 나이에 그것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의 상에 흠이 간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없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까지도 한 것이다.
작가 조흔파: 집에서 북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조금 더 좋은 집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바로 ‘작가 조흔파’ 선생의 집이 있었다. 당시에 솔직히 조흔파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그 집의 둘째 아들 ‘조영환’과 같이 놀았기에 그 집엘 놀러 가며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소설가라는 것, 학생잡지를 보면 그의 이름이 눈에 뜨일 정도였지만 그런 것을 읽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그 집의 큰 아들이 이름, 그러니까 조영환의 형의 이름이 조영수였다. 나중에 휘문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기억이 난다. 조영환은 장난이 조금 심한 애였고 우리들을 조금 괴롭힌 기억도 나는데.. 의문은.. 분명히 나와 같이 재동국민학교에 다녔을 텐데.. 졸업 앨범에 그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졸업하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을 것이다.
그 집에 몇 번 놀러 갔을 때 느낌은..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다른 집이다.. 그러니까.. ‘작가, 문필가 소설가’의 집이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아빠 조흔파 씨는 집에 없어서 못 보았다. 그리고 그 엄마도 못 보았는데.. 그 집 툇마루에서 이상한 것을 본 기억, 바로 수영복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 수영복을 보았다. 그리고 들었던 소문이 있었다. 그 집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고, 후처였다는 사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게다가 그 후처는 당시에 숙명여대 학생이었고 조영환이 엄마는 ‘쫓겨 났다’는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하~ 그 새 엄마는 조흔파씨가 아마도 숙명여대에서 가르친 학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아마도 맞지 않았을까? 그 이후 ‘사라진’ 조영환이네 기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TV가 나오면서 가끔 조흔파씨가 출연하는 game show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또한 알게 된 것은 조흔파씨의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이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김관형, 종맹이 형들: 집 바로 앞, 골목길 건너에 붙어있는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김) 관형이 형 살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은 기억이 안 남) 또 한 집은 ‘원서동 극장’ 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집, 종맹이 형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관형이형, 종맹이 형으로 기억이 나는 두 집이다. 관형이 형, 어린 눈에도 그 형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형이었다. 말도 부드럽고 우리들, 나와 같은 동생뻘 아이들을 잘 돌보아 준 형.. 가끔, 옆집인 종맹이 형네 집에서는 극장처럼 영화를 상영하였다. 아마도 종맹이 형의 아버지가 기록영화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심심하면 여름 밤에 우리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 몇 집을 불러다가 대청 마루에서 영사기를 돌렸다. 극장가는 것 당시에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활동사진’을 집에서 본다는 것은 참 희귀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화’라는 것이 모조리 6.25 전쟁 기록영화였다는 사실..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네 아낙네들인데 그들이 그것에 열광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은 아주 달랐다. 만화를 보아도 전쟁, 군인들에 관한 것만 보는데.. 실제 전쟁 기록 영화를 집에서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완전히 꿈같은 일이었다. 심심치 않게 많이 보았던 6.25 기록영화들.. 군대 사열식하는 것부터 실제 대포를 쏘는 것, 군인들이 쓰러지는 것.. 그것은 당시 여름 밤을 다시 회상할 수 있는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종맹이 형은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관형이 형은 나중에 중학교까지 가서도 멀리서 가끔 본 기억이 난다. 나를 특별히 잘 돌보아 주었다는 나만의 상상인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되었다.
한성택 형.. 집 옆에 흐르는 개천 건너 쪽에 있는 나즈막 한 집들에 ‘한씨 일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나의 다른 기억을 만들어준 성택이 형이 있었다. 그 나이가 얼마 정도 였을까? 아마도 중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집에는 사촌으로 알려진 한성우도 있었는데 그는 나와 동갑으로 재동국민학교도 같이 다니고 졸업도 같은 때 하였다. 성택이 형, 전형적인 ‘형 type’ 이라면 어떨까.. 동생뻘 아이들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조종’을 하는 type, 나와 승철이는 그를 ‘하느님’처럼 따르기도 했지만 내가 훨씬 더 ‘보살핌’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다.. 그 나이에 어떻게 야쿠자도 아니고, 그런 ‘돈 관계’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의 사고방식은 간단했다. 그 형에게 더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내가 받는 용돈을 그에게 바치곤 한 것이다.
덕분에 동네에서 나는 주먹 같은 아이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도 ‘돈의 위력’을 실감하게도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형만 보면 고맙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그 성택이 형의 심정은 어땠을까? 돈을 받으니 좋았을 것이고, 졸졸 따라다니며 ‘숭배’를 하는 꼬마가 있었으니 좋았을지 모른다. 한번은 한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그 형을 따라서 ‘한없이 걸어서’ 썰매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위치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도 삼선교 부근이 아니었나.. 돈화문, 창경원 앞 전차 길을 따라 걸어 간 곳, 눈부신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던 그 추억.. 결국 간 곳에서는 썰매를 살 수가 없었다.
6.25의 기억을 다시 생각하면 100% 생각나는 원서동 어린 시절, 그 중에서도 1954년 무렵의 승철이네 집 주변의 추억들은 나의 6.25에 대한 심각한 역사를 조금은 부드럽게, 포근하게 만든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 인물들.. 지금 다 어떻게 살고들 계신지..
¶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임마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빠가야로‘!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대구더위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내가 고친’ 에어컨 바람이 더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물론 오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 하지만 느낌에 그런 chance는 거의 zero 인가 보다. 아니면 Johnny Rivers 의 60’s classic oldie, Summer Rain을 연상케 하는 그런 추억의 비는.. 어떨까.. 하지만 이것은 거의 꿈같은 이야기다.
1968년 여름의 추억, Summer Rain – Johnny Rivers
오랜만에 그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던 우리 집 두 마리의 ‘재미있는 개’ Tobey & Ozzie, 오늘은 내가 더 쳐지기 전에 용감하게 끌고 동네를 돌았다. 거의 할아버지 나이가 된 우리의 개 Tobey가 언덕을 ‘새로니의 개’ Ozzie를 앞지르며 나를 끌고 올라간다. 얘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 언덕을 나와 걸었기에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공을 던지면 총알처럼 뛰어가는 다리가 긴 ‘젊은’ Ozzie, 2주째 우리 집에 머물며 자기 엄마 ‘새로니‘를 거의 잊은 듯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혼자’ 자야만 하는 그 녀석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이곳을 걸었을 때 내가 열을 받았던 것, TRUMP FOR PRESIDENT,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SIGN이 두 곳에서 나를 자극했던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빠가’ 트럼프의 ‘쌍통’을 연상시킨다. 이 두 집이 바로 우리동네의 idiots, white trash인 셈이다. 이곳 East Cobb county는 물론 very conservative한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잘 사는 Republican white trash’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SIGN을 본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니.. 이건 분명히 내가 over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I CANNOT HELP IT..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덩치 큰, ‘젊은’ 나라는 어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날씨에 더 열을 받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래.. 이래 저래해도..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리라..
¶ 6월 24일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오늘 평일미사를 가면서 6월 24일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 임을 매일 복음묵상 ‘newsletter’에서 보고 알았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사건’으로부터 였다. 바로 이날 6월 24일에 발현을 하신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이 ‘대축일’ 때문에 집에서 쉬던 (놀던) 그 ‘애’들이 본 것이다. 그 당시 이 발현 과정에서 이날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 말의 의미조차 잘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금요일 평일 미사엘 가면 분명히 세례자 성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짧은 강론을 듣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요새 거의 본당신부님 역할을 하시는 방문 신부님 Fr. Joseph, 뜻 밖에도 새로 부임하실 본당 신부님에 관한 얘기를 하며.. 우리의 ‘이해’를 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연은 물론 본당 Holy Family 성당에 7월 초에 새로 부임할 주임신부님이, ‘부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 라는 우리에게는 ‘폭탄’ 같이 느껴지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 방문 신부님의 설명과 ‘양해’는 나도 아는 사실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모든 가톨릭 ‘종파’들이 모두 다른 Rite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보편 된’ 것이 Latin Rite, 이곳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 하지만 다른 극소수의 종파에서는 성공회같이 결혼을 한다고.. 듣던 얘기다. 이번의 새로 부임할 신부님은 Melkite 에 속한 신부님이라서 신부님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그래도.. 하필이면.. 왜 그런 ‘소수 종파’의 신부님을 ‘주임신부’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본당 Holy Family는 지역적으로도 보수적이고 Irish Catholic의 전통이 농후한 곳인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가족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제관에서 생활을 하며 가족들과 같이 미사에 들어 온다는 광경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서는 구역문제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 같은 미국본당에 부인, 가족을 동반한 주임신부가 온다는 사실.. 참.. 오래 살다 보니..
¶ 성모님, 좀 봐주세요.. 근래 우리부부와 자주 보게 되고, 예전 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C 자매님,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member를 중심으로 새로 생긴 Guitar Friends 그룹에도 참여 열심히 guitar도 연습하고,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에 보게 된 멀게도 느껴지고 가깝게도 느껴지는 자매님, stress받는 것이 제일 싫어서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하며 조용히 살지만 할 것은 다 하며 열심히 사는 자매님.. 왜 하느님은 어떻게 그런 병고를 주셨을까. 병고라면 이미 오래 전에 가족을 통해서 겪을 만큼 겪지 않았을까, 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아픔이 아물어가며 어떻게 다시 이런 고통을 보냈을까? 오늘 아침 미사가 끝나며 어제 doctor visit의 결과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우리 부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하며, 어쩔 수가 없어진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기도를 더 열심해 해야겠군요’ 정도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무엇일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성모님, 좀 봐주세요…
¶ 육이오 6.25, 66년: 66년, 허~ 66년이라.. 여기다 6 하나를 덧붙이면 666가 되는구나. ‘악+악+악’, triple ‘악’ 인가? 그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단어가 육이오, 유기오, 융요 (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그래,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단어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 것이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제는 ‘사학자’들도 총대를 멜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역사 교과서는 현직 대통령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는데.. 우리나라의 ‘병신 사학자님’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아직도 빨갱이 운동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육이오의 노래
요사이 재동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를 읽고 읽고 읽으며.. 다시 느끼는 것, 나도 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니 육이오가 없었으면, 아니 김일성 개XX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의 인생은 아마도 김정훈 부제의 ‘사직동 김판사댁‘ 못지않게 ‘원서동 이정모 교수댁‘ 이란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컸을 지 누가 알랴? 어떻게 육이오의 몇 개월 사이에 한 가정, 한 가족의 운명이 그렇게 뒤집어 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보다 더 ‘처참한’ 인생의 역전을 겪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반드시 ‘김일성’을 찾아내리라.. 그 개XX를 찾아 내리라.. 아마도 그 아들 김정일 개XX도 같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찾기가 힘들 것이 분명히 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나의 e-mailbox에 아침마다 배달이 되는 newsletter 중에 The Catholic Thing 이란 것이 있다. 우연히 찾은 이곳 website는 시각적, 내용적 balance가 잘 맞아서 나의 favorite site 중에 하나가 되었고 곧 이어서 daily newsletter를 받아보기 시작하였다. ‘지속적으로 매일 받아 읽는 글’의 영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것은 습관적으로 읽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날의 생각에 첫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008년 6월에 시작된 이 site는, 주로 대학 교수급, 지식층, 다양한 저자들이 교대로 글을 써서 ‘매일’ 이곳에 발표를 한다. 그러니까, 내용은 우선 pro 레벨, fresh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일반인에게 크게 무리 없이 읽힐 정도로 아주 자상하게, 조심스럽게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일반인’ 도 큰 무리 없이 읽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용들도 박사학위 논문 같은 것, 아주 현실과 동 떨어진 것, 자기자랑을 하려는 것 같은 것보다는 대중적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현재’에 필요한 ‘모든’ Issue를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것이란 예를 들면: “politics, economics, culture & warfare,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children and careers, and many other contemporary questions” 라고 처음에 밝히고 있다. 영어를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가톨릭 신앙인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대답을 줄 수 있는 곳이다.
WHO IS GOD? 오늘 아침에 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거창하게: WHO IS GOD? 평범한 질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것을 하루 동안 기억하며 살면 그래도 조금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지식적인 출발로 하느님은, 기하학의 공리 같은 출발로 정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핵심교리에 선언된 것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that there is one true and living God, creator and lord of heaven and earth, almighty, eternal, immeasurable, incomprehensible, infinite in will, understanding and every perfection.”
Self-Existence: 육감적으로 전혀 느낄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이 표현에 전부 들어가 있다. 아니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다. 존재를 만든 것이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한 ‘분’이 아니다. 모세에게 하느님은: “I am who I am” 이라고 선언을 하신 것이 그와 비슷한 뜻이 아닐까?
The First Cause: 시공간의 연속은 인과관계의 무한한 연속이다.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결과를 낳고.. 그 중에 바로 ‘the first cause, 첫 원인’이 바로 하느님이란 ‘분’이다. 모든 결과는 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접근으로, 모든 존재의 그 모든 것(생명체나 물체)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 이것을 조금 더 생각하면: 사람은 이 물체들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특별한 은총을 받은 존재인가, 아니면..물리적인 위치로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무한한 시공간 속,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 ‘지구’ 위에서 복닥거리는 인간의 존재는 성경의 표현대로 특별한 존재일 수가 있을까? 창조의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성경을 믿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도 믿는다면..하느님의 존재와 그가 ‘특별히’ 보내셨다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철학적인 접근으로는 보통 사람 특히 육감을 사랑하는 요새 세속적인 존재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으니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물리적’인 육감을 믿기에 물리적인 접근으로도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런 접근은 상상 이외로 빠르게 시도되고 현재도 시도되고 있다. 그런 설명은 나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이렇게 ‘물리적, 철학적’인 접근을 왔다 갔다 하면 확실히 무언가 보인다.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했던 것들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Father’s Day 2016… 어김없이 왔고 어김없이 간다.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고 생각도 안 했던 올해의 ‘아버지 날’, Father’s Day.. 왜 그랬을까? 그저 불과 며칠 전부터 아하.. 이번 일요일이 그날이었지.. 한 정도였다. 손톱을 깎을 때마다 선물로 받았던 ‘손톱깎기 set‘, case에 적혀있는 희미해진 글자들: ‘Father’s Day 2001 FROM KIDS‘ 를 볼 때 마다 조금은 젊었던 나의 모습도 추억으로 간직한다. 아이들에게 기억이 되었던 나의 아빠 모습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당연히 있어야 했던 가족의 하나, 자기들을 낳아준 협조자, 어렸을 적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었고, 낮 시간 동안 집을 비우며 돈을 벌어오고, 여행을 갈 때면 운전을 주로 하고, 무거운 것들을 들어주고.. 그 정도였을까? 지금은 그런 것들 보다는 조금 더 ‘멋진’ 것들이 기억에 남아있어 주기를 바라지만.. 글쎄..
나에게 Father란 말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올해는 그날이 되어서야 Father의 진정한 의미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올해는 그것도 조금 특이하다. 내가 나의 Father를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Father로써 처신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그저 김일성 공산당이 아버지를 끌고 갔다는 것과, 남아있는 바랜 사진 들.. 그것으로 ‘아버지 상’을 상상을 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엄마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를 다정하게 들어 올리는 그런 아버지를 본 적이 없이 그저 영화나 다른 집을 통해서 상상하는 것, 왜 집에 아버지가 필요한 지도 잘 모르던 나, 지금 생각하면 참 불쌍하게 컸다는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지만 불운한 시대의 소산이라고 생각의 끝을 접는다.
어떤 ‘아빠’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배우자에게 남기고 갈 것인가.. 그것이 이제는 나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우리 부모들 세대처럼 불운한 시대의 고생만 하며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절대적인 존재’.. 는 이제는 나도 바라지 않는다.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의 아빠 상을 남겨주고 싶다. 아니 만족하며 사는 모습을 가급적 더 많이.. 남기는 것.. 훗날 자기 아빠를 생각하면 그저 “아빠는 우리를 즐겁게 해 준 것보다 아빠 자신이 더 행복했었다” 라고 생각하기를 원한다. 궁극적으로 ‘왜 아빠는 그렇게 훗날 행복한 모습으로 변했을까”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며..
¶ 첫 구역 ‘반’ 모임 shocker: 예외적으로 시원했던, Father’s Day 저녁에 구역이 2개의 ‘반’으로 나뉘어 진 후 첫 ‘반’ 모임이 있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본당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공식적인 구역조정’의 결과였다. 본당 구역체제는 변함이 없이 ‘마리에타 2구역’이지만 실제적으로 둘로 나뉘어 2개의 반으로 갈라진 것이다. 반의 이름이 재미있는데, Zip Code의 마지막 2 digits를 따와서 (300)62반, (300)68반이 되었다. 흔히 1, 2반 하면 쉽겠지만 조금 더 지역적인 특성을 살렸다는 점에서 이것도 나쁜 idea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한 구역에 ‘장’이 3명이나 된다.
모든 것이 신부님의 ‘승인’하에 이루어진 만큼 이 결과의 여파는 아마도 다른 구역에서 주시하게 될 지도 모른다. 너무 커다란 덩치 (너무 많은 구역가정) 라서 이것이 제일 쉽고 직접적인 해결책이었다. 우리가 속한 ‘반’은 62반이지만, 사실 우리는 68반으로 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첫 번 예외를 명시한 조치에 우리는 예외적으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62반으로 간 것이다. 2 반의 규모를 조금 더 비슷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사실 여기에는 잘 안 보이는 politic이 없을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가 은근히 기대했던 것은 사실.. 62반에는 소위 말하는 trouble-maker가 안 보였다는 것.. 이곳에 나가서까지 일부러 싫은 사람들을 봐야 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싫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나의 의도를 완전히 비켜가시고.. 그곳에서 ‘다시’ 안 보아야 할 인물들을 한 명도 아니고 2명 이상 이나 만나게 되었으니.. 아마도 나는 이곳에 가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눔의 시간’ 담당이 된 연숙의 입장을 고려하니.. 나는 정말로 난처하게도 되었다. 부단한 생각과 기도 밖에 없다는 생각 뿐이다.
¶ 아~~ 시원하다 언제부터 시작된 ‘여름 전의 한여름 더위’ 였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만큼 갑자기 ‘당한’ 열대성 무더위에 머리조차 멍~ 해진 기분이다. 특히 새벽에 느끼던 찜찜하고 끈적거리는 듯한 머리 속.. 그것이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열흘 이상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된’ 그런 것.. 하지를 며칠 안 남겨두고 한차례 한여름을 치른 것이다. 그러던 것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조금 느낌이 달랐다.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넘었다. 부리나케 창문을 열고 공기를 마셔보니.. 와~~ 이것이 웬 떡이냐.. 습기가 완전히 빠지고 산들바람까지 불어대는 초가을의 아침이 아닌가? 이것이야 말로 웬 떡이냐..란 탄성이 나온다. 띵~~ 하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는 듯한 날라가는 느낌.. 아~~ Mother Nature여.. 이래서 살게 되어 있나 보다.
지겨운 일기예보를 안 보고 산 것이 몇 주가 되었나? “Donald Duck쌍통”을 비롯한 또 다른 해괴한 뉴스들, 같은 식으로 이런 것도 안 보는 이상한 세월을 보낸다. News TV, outlet을 거의 피하며 나의 sanity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몇 개월째 그런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살다가는 나야 말로 cavemen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하지만 결론은, 요새 세상은 cavemen 쪽이 더 낫다는 것이라.. 문제가 없다.
6월도 훌쩍 반을 넘어간다. 새로니는 오랜만에 지루한 학교생활을 떠나 유럽여행으로 집을 완전히 잊은듯한 기분으로 3주 여행 중 2주째를 맞고 있다. 우리는 언제 온 가족이 여행을 같이 가보나.. 하는 바램이 항상 머리를 떠나지 않지만.. 그래.. 다 때가 있는 거다.. 지긋이 기다리면 된다. 특히 ‘조직신앙’을 떠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 때가 우리가족 여행의 적기 適期 라는 생각도 한다. 과연 그날이 올까? 기다리자.. 기다리자..
Vatican St. Peter’s Square 에서
¶ Ozzie Grounded 새로니의 ‘아들’ Ozzie, 3주간 여행 중 우리가 맡고 있다. Midtown condo에서 살던 기운이 왕성한 덩치가 큰 강아지, 다리가 유난히도 길어서 우리 집의 3′ 짜리 Tobey fence를 임시로 3′ 높여서 6′ Ozzie fence로 ‘사고로 뛰어 나가는 것’에 대비하는 등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Condo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mansion처럼 크게 느껴지는 우리 집에서 얼마나 뛰고 싶을까.. 오는 날부터 지겹게도 더운 바깥으로 나가자고 하루 종일 졸라대며 우리를 괴롭히더니.. 결국은 사고를 냈다. 우리가 없는 동안, Publix fried chicken, 먹고 버린 것, 쓰레기 통을 열고 모조리 먹은 것이다. 뼈 투성이의 그것을 흔적도 없이 다 먹은 것이다. 작은 뼈들을 잘못 먹으면 큰일이 난다고 들었기에 우리는 혼비백산, 걱정을 했지만.. 큰 문제가 없는 듯 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은 strict하게 하는 것으로 정하고 완전히 하루 종일 ground를 시켜 버렸는데 이것이 아주 큰 효과를 내서 이제는 아주 얌전하게 우리 집 분위기에 적응을 하고 있다. 하기야 그 동안은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왔기에 너무나 ‘풀어 주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런 것 말고는 2주를 우리 집 개처럼 Tobey와도 잘 지내고 고양이 Izzie의 territory도 잘 지켜주고.. 문제가 거의 없다. 날씨가 시원해져서 이제는 grooming도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새로니가 돌아오면 이 녀석이 자기 엄마도 몰라보고, 혹시 누군가.. 하는 것이 아닐까, 재미있는 상상도 해 본다.
guest인 Ozzie와 나란히 누워 있는 Tobey.. 모습이 너무 좋다
¶ Happy Note, Central A/C humming again! 올 들어서 제일 더운 거의 5일간 아래층 에어컨이 없이 살았다. 아래층은 낮에 잠깐 에어컨이 나올 정도지만 그래도 음식을 하거나 하면 83F 까지 올라가고 그 여파로 위층의 에어컨이 overworking 을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며칠을 살고 보니 예상보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급하게 order했던 condenser fan motor, run capacitors, 그리고 제일 필수적인 tool, Fan Blade Puller가 하나하나 씩 도착을 했고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땀을 폭포처럼 쏟으며 repair mode로 돌입, 천신 만고 끝에 결국은 다시 에어컨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이론적인 것이 거의 없는’ 거의 mechanical work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는 정말 surprise 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서 성공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나는 더욱 stress를 받았다. 제일 나를 괴롭혔던 것은 망가진 fan motor에 완전히 녹으로 붙어버렸던 fan blade를 빼 내는 일이었다.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 fan blade가 망가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만 ‘전문적’으로 빼 내는 tool이 ‘발명’이 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써야 했는데.. 그것 역시 automatic이 아니고 완전히 ‘완력 腕力’이 필요한 것, 평소에 운동을 안 했으면 아마도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천신만고 끝에 결국 그것이 빠져 나오고 새 motor에 끼운 후에는 간단하지 않은 electrical wiring까지.. 휴~~~ Power Switch를 킨 후, 다시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와 찬 바람이 느껴질 무렵에는 나는 거의 완전히 쓰러지는 느낌이었는데, 피곤함 보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만약 pro service를 받았으면 얼마나 charge를 했을까? 아마도 최소$700~$800 정도였을 것이다. 나의 이 job의 total expense는 $100 정도였으니까.. 최소한 $600 정도는 save한 셈이다. 비록 두 식구가 사는 집의 가장이지만, 집안의 환경에 대한 책임감은 정말 무거운 것이었고 그것이 주는 stress역시 상당한 것.. 하지만 기대했던 결과는 언제나 모든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 그것을 바라며 땀을 흘렸던 지난 주의 한가지 happy note가 되었다.
2주일 대출기한이 수개월을 지나가면서 이 책을 우선 반납하여야 한다는 stress를 느끼며 이제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저곳을 훑어보고, 비교적 가볍게 접한 이 책에서 나의 재동 齋洞 동창, 김정훈 부제에 대해서 알게 되고 느낀 것을 정리한다.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사실은 정훈이가 어떻게 그렇게 일찍 타계 他界 를 했던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의 집안, 가족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신앙, 성소를 가지게 되었는지..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20대를 훨씬 넘은 시절부터 쓰여진 일기 형식이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이 정성스럽게 담겨진 ‘문학적 냄새’가 나는 글로써, 꼼꼼히 ‘정독’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강 책을 훑으며 느꼈던 감정은 의외로 반갑지 않는 나의 반응이었다. “좋은 집안, 머리가 좋은 덕으로 선택된 선망의 대상으로 어려움과 고민 같은 것 별로 없이 유럽 유학 중, 좋아하는 등산을 하다가 조난사고로 운명”.. 비록 너무나 이른 인생의 비극적인 마감이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이력서적인 눈에 쉽게 뜨이는 사실들 만으로는 정훈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김수환 추기경의 서문’이 실릴 정도로 큰 화제나 영원히 남을 만한 책으로의 가치가 될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물론 이 책을 계속 읽으며 이것은 나의 ‘너무나 성급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 김정훈 유고집의 제목인데.. 과연 이것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 궁금증은 19 쪽을 보면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이 대목은 김정훈의 신학교 영적 지도 신부인 Stefan Hofer신부의 추모의 글에 있는데 그 신부님은 김정훈이 조난을 당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에 세르레스(Serles)에 등반하였던 적도 있었다. (중략) 베텔풀프(Bettel Wurf) 정상 정복자가 된 우리는 그 곳의 방명록에 우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베드로(김정훈)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 말로 무엇인가 썼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묻자 그는 독일어로 그 밑에 주를 달았다.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김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단순한 산에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깊은 종교적 느낌 속에서 산을 찾고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회고’를 보며 생각한다. 정훈이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등반을 했지만 단순히 산이 좋아서, 산이 그곳이 보이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통한 등반을 더 사랑하였던 듯 싶다. 나도 대학시절 참 산을 많이 찾아 다녔지만.. 어떨까, 종교적인 체험을 하였던 기억이 거의 없음에 정훈이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생체험은 더욱 돋보인다.
¶ 정훈이의 가족관계는 어떤가? 이것은 사실 기본적인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재동 동창생이지만 ‘공부를 잘 해서 경기중학교에 갔다’는 사실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재동학교 졸업 후 중학교 시절, 파고다공원 수영장에서 그가 아이(아마도 동생)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남자 동생은 있었을 듯 하다. 이 책에 가족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간단히 이곳 저곳에 나오기에 한 눈에, 명확하게 알기는 힘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묘사한 가정은 204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직동 김판사네 가정도 한국에서는 신앙으로 가꾸어진 훌륭한 이상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사리를 스스로 옳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인생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그런데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손보기가 어려워져 버린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중략) 곧 아버님 돌아가신 지 10년째가 된다. 벌써 그렇게. 강산이 정말로 크게 변했다. 아버지의 그 보화를 캐내어 나눠 줘야 할 큰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 이 순간 확연해진다. (1975년 3월 10일)
이 글은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친구 클레멘스의 가정을 부러워하는 글 뒤에 나온 것이다. 그 친구의 가정이 부러운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고 건강한 아이들, 높은 교육을 받은 것, 3남 2녀라는 것.. 이런 것과 더불어 잘 화합된 부모의 교육, 그것도 참된 신앙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 아마도 김정훈의 가정도 이에 뒤지지 않았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10년 전에 돌아가신 ‘김판사’ 아버님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에 가정은 ‘난맥상’이 드러났다는 판단이다. 그러니까.. 1965년 경에 아버님이 타계를 하셨으니까, 정훈이 경기고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혹시 그런 충격이 정훈이에게 깊은 성소의 뜻을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신앙심이 깊고, 가정을 사랑하는 아버님을 가진 정훈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로써는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천주교 가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천주교인이었을 정훈이네 가정, 혹시 대대로 내려온 ‘박해 받았던 가문’은 아니었을까? ‘비중에 컸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이곳 저곳에 나온다.
나가이 다카시의 ‘만리무영’에서 여러 대목을 읽었는데 느끼는 점이 많다. 우선 그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원만하고, 노력을 기막히게 많이 한 신앙인인 것을 알게 해 준다. 내게 특히 좋게 여겨지는 것은 그 글의 분위기와 저자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신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러하고, 어투며 그 상황까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까. 공감 가는 점이 정말 많다. 자식에 대한 배려, 아내 생각 등도 아버지 경우와 같다. 동시에 그 사람의 아들들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이나 나에게 대해 갖는 기대와 주시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불쌍하신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자녀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에 젖으셨을까? 얼마나 우심 憂心 이 크셨을까? (1972년 6월 11일)
위의 일기에서, 아버지가 권해준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저자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좋은 점’들을 열거한다. 여기서 보아도 그 아버지는 정말로 존경 받을 만한 가장이었음이 짐작이 된다. 일찍 운명을 하신 아버지, 아마도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 듯하다. 장남일 것 같은 정훈이, 이때부터 아마도 가장으로써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 20대를 꽉 차게 살아오던 정훈이의 모습, 언행, 성품 등은 어땠을까? 이것은 친구들이 본 것이 아마도 제일 정확한 것이 아닐까? 일찍 타계한 친구를 보내며 친구 대표 ‘기헌’의 ‘조사’에 잘 묘사되어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바랐던 대로, 평소에 너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기대했던 대로, 너의 훌륭한 재능과 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더욱 닦아지고 완성되어 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서른 해를 넘기고 가다니.. (중략)
너는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어. 너의 신심 생활의 진보는 언제나 앞서 있었고, 너의 정신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예리하게 우리를 압도했었지.
책 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너는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러면서도 네 마음은 언제나 뜨거운 인정이 넘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낀 너였는지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잘 해 주었어. 특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던 너였지. 너의 특징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던 너.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나누고 싶어 너는 애썼지. (중략) 그러기에 친구이면서도 우리는 너를 존경하였고, 우리를 대신해서 큰 일을 해 주리라 믿었다. (중략) 착하고 아름답게 산 너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백 배의 보상을 틀림없이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너와 영결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1977년 6월 7일, 정훈이를 보내며.. 친구대표 기헌이가)
비록 고인을 기리는 조사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정훈이의 이목구비, 면모, 표정, 성격 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다 보인다. 나로써는 이것이 ‘성인’ 정훈이를 상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기대를 받았던 ‘장래가 촉망되던 큰 재목’ 이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 가톨릭 신부와 여성, 신부 지망생 그러니까 신학생이었던 김정훈은 어떤 여성관, 여성 경험을 가졌을까..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멋진 남자’에게 여성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나와 동갑(돼지띠) 이기에 1970년대 중반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가는 것이다. 다만 나의 background와 그 이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나와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한다.
우선 절대자 하느님, 예수님을 자연스레 알고 믿는 그, 완벽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유복한 가정.. 등을 생각하면 정말 ‘자격을 갖춘 멋진 여성’이 그의 주변이 있었을 듯 하다. 다만 이 유고집에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J 라는 여성만이 눈에 뜨인다. 과연 J란 여성은 누구일까? 거의 한 chapter “J와 인생” 이 J 라는 여성에 관한 일기인 것을 보면 ‘신부와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에서 가장 심각한 인물이었음 에는 틀림이 없다.
J에 대한 나이, 출신배경, 알게 된 경위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집 식구들에게는 알려진 사람, 공개된 데이트였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부를 지망하는 신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들일까? 결혼을 전제로 할 수가 없는 100% 순수한 지적인 만남이었을까? 계속되는 깊어지는 만남에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자신의 결심도 보인다.
J와의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 하고, 내렸으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
1. 실험적인 사귐은 있을 수 없다.
2.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하게 됨.
3. 그녀를 위해서도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나의 결론은 지어졌는데, 실행은 빠를수록 좋다.
4. 언젠가 끝에 가선 내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내 햄, 내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니 주님, 빛과 길을 주소서. 이럴 때 주님을 찾는다고 나무라지 마소서.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조직적’으로 차근차근하게 문제의 본질과 방향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문제의 심각함과, 어려움을 알고 그는 결국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며 돌아본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절대로 혼자였다. 절대자가 절대로 나에게는 없었다. 혼자였던 나는 모든 것을 ‘나침반’이 없이 헤매며 허우적거린 세월들이었다. 나와 정훈이의 20대 중반은 이렇게 하늘과 땅만큼 멀리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은총을 일찍 받았던’ 영혼이었다.
곧바로 그는 J에게 쓴 ‘헤어짐의 편지’를 쓴다. ;7월 23일자 일기에 편지가 실려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편지는 일기인가 아니면 실제로 J에게 보내진 편지인가 하는 것이다. 이별의 편지, 참 balance와 courtesy, essence가 모두 있는 편지가 아닐까?
J씨 귀하,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있어야 할 순간이고 또 그 때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이며 글 같은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글로 써야 제 뜻을 그래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기존의 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기가 뜻을 정하고 온 가능성을 모으고 있는 터에 이와 상치되는 사상 (事象)을 지닌다는 것은 일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가 확실한데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저로써 더 이상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J씨를 크게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쓰라림만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이것을 알면서도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린 거지요.
지금 이 글월을 쓰면서 저는 이 글의 의미가 엄청난 데 스스로 놀랍니다. 이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결단일 뿐 아니라 저로서는 제 삶의 의미를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이 일방적이고, 제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고 또 회피가 아니냐고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일이 그런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냐고 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또 그런 만큼 얼마나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를 J씨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몇 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만나고, 또 한 번 내린 결정은 단호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씨는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 심정도 몹시 단호함으로 차 있습니다. 아니, 단호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소도 아시고 또 9월에 학관에도 나가겠지만 제게 소식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 말했다고 한 것처럼 저도 J씨가 그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그 동안 얘기했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 김정훈
이 책은 그 동안의 우정에 대한 저의 기념의 선물입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별편지를 보면, 그의 확고한 결심을 J에게 전하며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이 정도만 아주 단호한 결심이 아니었을까? 이런 것으로 보아서 J라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정훈이를 만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아주 나이에 비해서 성숙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9월에 학관에도 나간’다는 구절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도 같은 ‘학관’에 다녔던 것은 아닐까? 학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대강 그 당시에는 ‘학원’이라는 말을 썼는데.. 학관은 종류가 다른 것이었을까? 마지막 구절에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이것으로 J라는 여성도 무슨 뚜렷한 목표를 향한 ‘지식층’ 여성이었을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 ‘편지 일기’ 이후에도 그는 사실 J를 잊은 것이 아닌 것 같다. 계속 J를 만나며 그녀에 대한 글이 나오니까.. 아마도 서로가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한’, ‘진정한 친구’로써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8월 21일의 일기는 J에 대한 끈질긴 미련과 자신의 필연적인 결심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J를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 금요일과 월요일에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면서도 보고 싶다.
그냥 당겨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왠가? 누가 무엇이라 한다 해도 이런 마음은 참 순수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현상이다.
간단한 기록으로 끝나려 했는데 또 길어진다. 내심에 잠겨 있는 것이 들고 일어나는 까닭이다. 파헤쳐 본다는 것도 힘에 겨웁다. 문제는 결단만이 해결의 관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결단을 내렸으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도 포기하고, J와 같은 사람과의 사귐도 금기(禁忌)인 신부가 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부행(神父行)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일 터인데 과연 그런가? 어째서 내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사제에다 걸었는가? 사제가 무엇인가? 그 본질을 분명히 보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비교적 분명하게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신부에 대한 정의, 그 신원(身元)은? 고전적 정의로서는 내게 그 의미가 약하다.
위의 일기로 나는 그가 아직 신부가 되려는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을 안다. 하지만 계속 내면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적으로 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이성, 그것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찌 간단히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김정훈의 ‘결단의 힘’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인 여성에 대한 사랑, 관심, 끌림 등과 신부가 되려는 성소의식이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몇 개월로 1973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김정훈, 드디어 무서운 결단을 내리며 편지를 쓴다. 신부가 된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J씨 귀하.
이 시각을 위해 사귐을 해 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는 초조하리만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뜻밖의 이 글월을 받고 놀라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을 지고(至高)로 모시고 있고, 그 동안 J씨나 저나 거짓 한 점 없이 서로 성실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벌써 짐작을 하실지 모르나 정말 그렇습니다. 결단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저는 신부행(神父行)을 결단했습니다. 설령 각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저의 그 선택에는 후회나 변함이 없습니다. J씨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J씨가 말한 뜻대로 그 동안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피치 못할 불성실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제가 J씨를 아끼는 그만큼 이 문제는 절실합니다. 이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어떤 식으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항상 의식한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껏 회피하려 했으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단호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가 쉬웠고, J씨는 어렵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 사귐이 그렇게 순수했던 것처럼 이 시작도 서로에게 순수해야 하고, 전적인 동의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J씨는 J씨의 길을 힘차고 명랑하게 가십시오. 저도 제 길을 용기 있게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상이 제가 쓰고 싶은 전부입니다. 사실 J씨는 이 글의 진의(眞意)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집 전화번호도 알고 또 찾을 수도 있지만 저를 찾지 마십시오. 이별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저도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
1973년 12월 26일 김정훈
정중하고 진심이 우러나오는 글이지만, ‘영원히’ 남녀로써 헤어져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미련을 0%도 남기지 않고 그는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라는 작별인사로 끝을 내는 그.. 얼마나 괴로웠을 결단이었을까? 그 나이에 나라면 ‘절대로 절대로’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1974년 봄 무렵 유럽 유학을 떠나는 그는 아마도 그 때서야 J씨를 조금은 더 쉽게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남녀관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Part 2로 계속 됨)
HVACHeating, Ventilation, Air Conditioning 일주일 이상 90도를 넘게 괴롭히던 올해 무더위의 첫 희생자가 나왔다. 희생자가 아니라 희생물이라고 해야 하나? 결과적으로, 우리 집 2층의 air conditioner (a/c)가 ‘찬바람’을 내 보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항상 묻는다.. 왜 하필 이때에.. 그러니까 why now?인 것이다. 조금 선선할 때 고장이 나지 왜 제일 필요할 때인가 말이다. 제일 무덥던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같이 ‘조심스럽게 평화로운 시간’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나의 머리는 거의 순간적으로 emergency mode로 바뀌며 비지땀을 흘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럴 때마다 또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왜 남들은 이럴 때, 그저 간단하게 ‘업자, hvac contractor, repairmen’에게 전화 한 통으로 다 끝날 것들을.. 나는 이렇게 비지땀을 흘려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유는 간단하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내가 고쳐야’ 한다는 오기와 그에 따른 ‘낭비, 폭리를 일삼는 repair shot’들’을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하지만 a/c에 관한 것은 최근까지 나에게 ‘금기사항’이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전화를 한 것이 2~3년 전쯤인가.. 아래층 a/c에 문제가 생겼을 때, Coolray truck이 집으로 온 것.. 그 때 비록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고친 것은 outside condenser unit 속에 있는 ‘타버린 wiring’ 몇 개를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독히도 간단한’ 것,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일단 truck-rolling (repair truck이 찾아온 것)되면 그것에 대한 기본 charge를 내야 한다. 그 이후부터는 아예 여름이 되기 전에 색깔이 변하는 듯한 wiring은 내가 바꾸어 버렸다.
Dead blow fan motor
하지만 이번 것은.. 사태가 심각한 것, condenser unit의 blow fan을 돌려주는 motor가 죽은 듯.. fan이 돌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overheating이 되고 system이 shut-down된 것이다. fan motor를 보니.. 고장이 나게도 생겼다. motor label이 삭아버릴 정도로 ‘오랜 된 것’, 이런 것은 하루아침에 고장 나기 보다는 서서히.. 기증이 저하하는 것인데, 밖에 있는 것이라..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천천히 돌면’ 아마도 cooling function이 크게 저하했을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여름만 되면 ‘올 여름에는 이것들이 잘 견딜까..’ 하는 불안감하고 싸우기도 한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의 머리’는 완전히 ‘비상 mode‘로 바뀌는 것이고 머리는 보통 때의 10배 정도로 잘 돌아간다. 위층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 그곳은 우리의 저녁 생활 공간이고, 잠을 자야 하는 곳, 그곳이 너무 더우면 아무 것도 못한다. 아래 층은 구조상 그렇게 더운 곳이 아니기에 여차하면 그곳으로 내려 오면 되지만, 귀찮은 노릇.. 그러니까 어떡하든지.. 고쳐야 한다. Replacement fan motor를 어떻게 당장 구하나.. ‘무리, 무리’.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순간적으로.. 아하~ 아래 층 a/c fan motor를 ‘빌려 쓰면’ 되지 않을까?
그런 쪽을 머리는 돌아가고.. 두 대의 condenser unit 를 자세히 살펴보니..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차이는 아래 층 것의 radiator 가 위 층 것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그러니까.. fan, fan motor같은 것이 ‘거의 같은’ 것이다. 즉시로 행동개시.. 아래 층의 motor unit (motor+ fan blade)를 빼 내어서 고장 단 위 층 것과 교체를 했다. 물론 이 작전은 motor자체가 고장 났다는 전제에 의한 것이다. 만약 motor가 아닌 다른 것이 원인이었다면 이 작전은 완전히 끝이 나는 것이다. 이 때 내가 하는 것.. 묵주기도 ‘비슷한’ 성모님의 도우심이다. 급하니까, 초자연적인 힘까지 동원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긴급작전은 100% 성공했다. 문제의 원인은 그러니까 ‘죽어버린 fan motor’에 있었다. 이 이후 아래층의 a/c는 완전히 shutdown이 되고 위층은 원래대로의 ‘시원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시간을 번 것이지만, 아래층의 온도가 83도까지 올라가고 그 결과 위 층의 a/c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돌아야 했지만 그래도 편하게 위 층에 머물 수가 있으니 불평은 없다.
이제부터의 문제는, replacement fan motor를 찾고 구해야 하는 것, 역시 Internet의 도움을 받아 under $100 로 order를 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고장 난 motor에 붙어서 꼼짝 을 안 하는 fan blade, 오랜 세월을 견디며 motor에 완전히 ‘붙어서’ 빠지지 않는 것이다. hammering을 하며 빼 내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거의 포기 단계, 해결책은 똑 같은 것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를 않다. 너무나 오래 된 것이라.. 없는가?
stuck & stuck fan blade!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진 ‘미국 사람’들이 부지기수인가? Goolging 을 하면 해결책이 나온다. 아예 stuck fan blade를 빼내는 tool까지 ‘발명’ 이 된 것이다. 이것이 fan blade자체보다 더 비싸면 문제지만 의외로 affordable.. under $35, 이것을 쓰면 ‘아마도’ 쓰던 blade를 다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나의 plan에 의하면 이 모든 문제들은 $100 정도 선에서 해결 될 듯하다. 만약 ‘그들의 truck’이 굴러 나왔으면 얼마나 들까.. 아마도 $500 정도면 재수가 좋지 않을까?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소위 말하는 run capacitor의 역할이다. Condenser Unit에는 항상 이것이 붙어있고 이것의 기능은 두 대의 ‘중요한’ motors (1. compressor, 2 blow fan)를 smooth하게 start하는 것이다. 이것에 문제가 생기면 motor자체가 돌지 않을 수도 있고 수명이 단축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이것의 역할은 정말 중요한 것인데 의외로 그것이 싼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두 대의 condenser 모두 새것으로 바꾸기로 하고 order를 했다. 비록 고물 a/c 지만,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수명이 연장이 된다면 이 투자는 것의 ‘공짜’인 것이다.
Order한 것들을 기다리며.. 생각한다. 과연 우리 집 ‘고물 a/c들’,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proactive하게 고치거나 교체를 할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budgeting이 절대로 필요한 spending이다. 만약 두 대 다 교체를 한다면 올 겨울 제일 쌀 때가 적기 適期 일 듯 하다. 다른 ‘공상’은 이런 것이다. In-house unit 가 비교적 새것이라서.. Outside unit자체는 내가 ‘혼자서’ 설치할 수는 없을까? 현재 단계에서는 ‘공상’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research에 의하면 충분히 가능하게도 보인다. 위험부담은 무엇인가? 더 연구하면 분명히 새로운 ‘비밀’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 Dona nobis pacem.. Grant us peace.. 요새 평일미사에서 더 자주 듣고 말하는 ‘멋진 라틴 말’.. ‘평화를 주소서’.. 왜 ‘이것’을 달라고 기도하는지 이해가 조금 간다.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nobis pacem
아뉴 데이, 퀴 톨리(스) 페카타 문디, 미세레레 노비(스).
아뉴 데이, 퀴 톨리(스) 페카타 문디, 미세레레 노비(스).
아뉴 데이, 퀴 톨리(스) 페카타 문디, 도나 노비스 파쳄.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grant us peace.
천주의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천주의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천주의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
미국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주임 신부님이 교체되는 6월에 들어서 평일미사에 방문신부님들이 더 자주 오신다. 그 중에 ’40대’같이 보이는 ‘은퇴신부’님, Father Joseph, 나이에 비해서 너무나 젊고 패기가 만만해 보여서 왜 벌써 retire를 하셨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이분의 Mass를 ‘들으면’ 우리들도 같이 ‘뛰어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르고, 미사가 끝나고 나가시면 거의 뛰다시피 (실제로 jogging하신다)나가신다.
이분이 오시면 영성체 전에 하는 ‘Agnus Dei, 천주의 어린양, Lamb of God..’을 꼭 라틴어로 하시는데, 솔직히 나는 이 라틴기도를 듣기는 했지만 따라 하기에는 자신이 없다. 오늘, 이제야 Wikipedia의 도움으로 ‘정확한’ 라틴어로 알게 되었다. 그 중에 Dona nobis pacem.. 평화를 주소서.. 란 말, 미사가 끝나가며 진정으로 마음 속으로 바라는 매일 ‘청원 기도’가 되었다.
신앙이란, 믿음이란, 종교란 것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궁극적인,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겉으로의 평온함, 잔잔한 기쁨과 차원이 다른 저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믿음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걱정을 없애주는’ 느낌.. 그것이 진정한 평화일 것이다. 그러니까, 세속적, 환경적, 물리적인 요건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요지부동 搖之不動’ 적인 안전한 느낌..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들은 비교적 어렵지 않은가.. 근래에 가끔 느낀다. 아~ 이것이 바로 ‘신앙선배, 교부’들이 그렇게 말하는 peace is flowing like a river (강물처럼 흐르는 평화).. 가 아니었을까? 진정한 평화는 (죽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비슷한 것은 어떤가?
지나가는 6월의 두 번째 주, 비록 ‘살갗이 타는듯한 바깥 일’ 로 육체적인 고통은 다른 때에 비해서 컸지만, 머리 속 깊은 곳의 평화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니까.. dona nobis pacem을 계속 기억하며 지낸 것이다. 아마도 그만큼 나는 peaceful했을 것이다. 비록 나의 얼굴과 언동은 주위에서 보기에 불쾌했을지 몰라도.. 짜증나기 시작하는 90+ 더위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것도 하느님이 주신, 자연적 순리임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겠는가?
Under $100 deckover renovation 2016
¶ Deck (Paint) surprise: 우리 집 손바닥만한 backyard (attached) deck, 무엇이 그렇게도 말썽이었던가? 언뜻 보기에, 일주일이면 ‘깨끗하게’ renovation을 할 것처럼 보였던 ‘손바닥’만한 것, 결국은 한 달이 걸렸다. 나는 결국 이번 job의 어려움을 너무나 underestimate한 잘못을 한 것이다. 반대로 overestimate했으면, 아마도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즐기며’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크게 실수한 곳은 deck floor자체가 아니고 deck railing, step등의 ‘복잡한, 골머리 썩이는’ miter cutting job이었다. 그 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cutting tool들을 쓰지 않아서 더욱 힘이 들었다. 이런 것과 더불어 ‘더 이상 cash’를 쓰는 것을 자제하며 cash와 time을 trade하는 기분으로 한 것이 역시 칠순이 다가오는 육체에 무리를 주었을지도 모르며, 피곤한 기분은 아무래도 나의 평온 감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surprise가 있었다. 바로 painting, 전에는 ‘자연스러운 나무색깔’을 고집하며 waterproofing정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floor lumber가 rotting하는 고역을 치른 것을 잊지 않으며 이번에는 ‘진짜 paint’를 하기로 하고 $10 discount sale을 하는 Memorial holiday 에 Home Depot에서 Deckover® deck paint 2 gallon으로 paint를 해 보니.. 이것이 보통 때 보던 그런 paint가 아닌 special paint로 거의 ‘죽’ 같은 정도로 끈적거리는 그런 것, 그래야 floor traffic을 견딘다고 하니.. 이런 것을 나는 그 동안 모르고 지낸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paint는 2nd coating이 ‘필수’라고 하는 사실.. 그러니까 보통 paint의 2배가 드는 것이다. roller가 아닌 brush를 쓰는 것도 고역이었고, railing, steps등을 estimate에 뺀 것도 잘못이었고.. 역시 나는 weekend ‘amateur’ 였던 것이다. 2nd coating 은 고사하고 한번도 ‘겨우’ 덮을 수 있었던 마지막 작업은 참 기분이 씁쓸한 그런 것.. 즐기며 일하겠다는 결심에 도전하는 잡스러운 surprise들.. 결국 나는 슬기롭게 manage를 못했다. 이것도 이번에 배운 것, 언제나 surprise에 대비하며, worst case를 항상 염두에 두라는 진리, 바로 그것이었다.
¶ Ozzie Fence UP! 새로니가, 계획했던 대로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3주 Europe 여행을 떠났다. 철저하게 계획하는 성미대로 큰 문제가 없었지만 pet dog Ozzie를 우리가 3주간 봐 주어야 하는 것이 조금 문제였다. 우리만 믿고 안심하고 떠나는 것을 우리는 바라기에 최선을 다 해서 dog sitting을 하려고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리가 큼직하게 긴 (키가 큰?) 탓에 웬만한 장애물은 문제없이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 집의 backyard fence중에 길을 향한 fence는 10년도 전에 우리 집 Tobey 때문에 만든 3 feet 높이의 fence였다. Tobey는 다리가 유난히 짧은 종자기에 문제가 없었는데 Ozzie에게는 그것은 장애물도 아니었다. 전에 우리 집에 며칠 보아줄 때, 자기 엄마 (새로니)를 찾아 그것을 뛰어넘고 길 쪽을 돌진해서 우리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악몽이 있었다. 이번에 3주 동안 무슨 수를 써야 했고 그 대책이 바로 Ozzie Fence였다.
현재의 Tobey Fence 3 feet에 3 feet를 더해서 6 feet짜리 ‘임시 temporary’ fence를 세운 것이다. 50 feet steel welded wire를 사다가 Ozzie fence 를 ‘급조’를 했는데, 막상 하고 보니 Ozzie는 그것을 한 번 쳐다보고는 별로 넘겨다볼 생각조차 안 한다. 조금 맥이 빠진 기분이지만, 이제는 ‘사고로 길로 뛰어나가는’ 일이 없음이 거의 확실하기에 우리도 3주 동안 다리를 쭉 뻗고 잘 수가 있게 되었다.
¶ Guitar club, evolving..얼마 전부터 모이기 시작한 기타 클럽이 조금씩 ‘진화’를 하기 시작한다. 이런 모임에 관련이 된 것, 참 오랜만이라는 느낌, 그만큼 삭막한 세월을 보냈기에 그럴까, 아니면 이것이 hobby club이기에 그런 것일까? 소위 말하는 hobby club, special interest group, 동호회, 동아리.. 같은 말의 느낌이 ‘젊다’는 것이어서 이미 나의 세월은 그런 것을 훨씬 지났다는 쳐지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주 목적이 guitar를 배우는 것이기에 더 젊은 느낌인가..
처음에는 ‘기타 선생, instructor, teacher’로 생각들을 했지만, 나의 생각을 바꾸어서 guitar coach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한마디로 그들과 어울려 guitar를 서로 배우며 즐기는 것이다. 물론 현재 나의 역할을 거의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기본 technique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들과 어울려 ‘지속적’으로 모이는 것이다. 현재의 대부분 member들은 몇 년 전에 이미 ‘장기간 자주’ 모여서 ‘기타선생님’으로부터 기타강습을 받았기에 기타의 기본적인 경험을 다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 활동이 거의 없었던 듯 했고, 그 당시 경험은 주로 sing-along ‘strumming’ style이어서 chord fundamental에 대한 것, 특히 개별적인 playing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 것.. 한마디로 그들은 ‘다시 배우고 싶다’는 것이어서 실제적으로 다시 guitar 101으로부터 시작해야 입장으로 보인다. 소 그룹의 장점을 살리면 개별적인 coaching도 가능할 것으로 보여서 앞으로의 활동이 은근히 기대가 된다. 왜, 지금 이것을 내가 해야 하는가?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그저 timing이 그렇게 나의 schedule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니.. 이것도 조금은 높은 뜻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나를 따라오며 유혹하던 Screwtape1을 당당히 물리치고 ‘하루 종일’을 Atlant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보냈다. 그곳은, 이제는 완전히 classic이 된, 연례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EC) 가 열린 곳이다.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2011년부터 줄곧 ‘도장’을 찍었던 ‘초여름의 향연’, 아틀란타 성체대회, 작년에 나의 ‘게으름’으로 우리 둘 모두 참가를 못했었다. 못 갔던 이유는 있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것은 그럴듯한 유혹에 굴복 당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 나 자신은 속일 수가 없다. 그것이 화근인가. 올해에도 그런 ‘약점’을 이용한 각가지 유혹들.. 요란하고, 간교하고, 그럴 듯한 핑계거리가 줄줄이 나를 괴롭혔고, 거의 그것은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senior devil은 나의 어머니에게 굴복한 셈이 되었고, 그것이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뿌듯하게, 기쁘게 할 수가 없다.
작년에 나를 유혹했던 screwtape의 point는 “유명하고 멋지고, 잘나가는 speaker가 없는 것.. 무엇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하냐?” 정도가 될 듯하다. 너무나 나의 기대가 커서 생긴 유혹이었다. 그러니까 재탕을 방지하려면 그 expectation을 ‘하향 조정’하면 된다. 더 간단한 것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 무기로 올해의 유혹에 대비했지만, 역시 senior devil Screwtape은 경험이 많은 악마인가.. 다른 쪽을 공격을 한다. 성체대회가 열리는 날 이후에 나의 신경을 많이 쓰게 하는 schedule들이 몇 달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나를 괴롭힌 것이다. 한마디로 가벼운 마음으로 성체대회에 참가할 기분이 안 나는 것이다.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대회 전날 밤까지 나를 유혹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조금 ‘조직적’으로 대비를 했는지, 굳세게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고 하루 종일을 일 만 여명의 신앙 동료 catholic들과 보낼 수 있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올해는 이제까지 우리의 format을 조금 바꾸어서 순교자 성당bus를 안 타고 우리 차로, 대신 아침 더 일찍 출발을 해서 비교적 쉽게 parking도 할 수 있었다. 필요할 때 우리의 돌아오는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편하지만 bus를 타고 오고 가며 순교자 성당 교우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예상보다 적은 사람들이 bus를 탔다고 했고 김밥 점심을 같이 먹을 때 보니, 자기 차를 타고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비교적 일찍 도착했기에 우리는 ‘처음으로’ 대교구 소속 각 교회 공동체의 banner procession하는 것을 보았고 우리 순교자 성당 팀 banner group에는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과 같이 우리 부부도 낄 수도 있었다. 이것이 올해에 우리에게 신선한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올해 성체대회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2016은 어떤 쪽으로 기억에 남을까.. 소위 말하는 superstar급 speaker는 없었지만 (2년 전처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신부님의 ‘인생역정’은 가히 올해 성체대회의 백미 白眉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 surfer, rockstar같은 인상을 주는 젊은 신부님, Father Donald Calloway, MIC 란 분이다. Donald란 말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하필이면 Donald일까..
알고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신부님의 ‘개인 신앙 여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 처음 알게 된 분이다. 아직도 신부가 되기 전의 ‘말 습관’들이 뚜렷이 남아있었기에 그의 ‘간증’은 더욱 더 믿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완전히 ‘패륜, 반항’ 적으로 자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근본적으로’ 아주 smart한 영혼이었음을 안다. 인상적인 것이.. 잠깐 일본에서 ‘전통적인 일본 조폭’ 야쿠자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 물론 ‘백인 야쿠자’이었지만.. 각종 비행으로 ‘시설을 들락날락’ 했던 그에게 큰 변화는 부모가 ‘갑자기’ (그의 말에 의하면 하루 아침에) ‘매일 미사 가톨릭 신자’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가 그런 사실을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 중에는 ‘성모님’의 역할이 중심적인 것인데 그에게는 거의 기적과 같은 ‘만남’이었다고.. 그는 그렇게 포근한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기적 같은 변화를 체험하게 되고 결국은 신학공부로 시작을 해서 사제로까지 변한다. 이것으로 그는 ‘머리가 좋은 불량소년’이었음을 알게 된다. 공부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끝에는 그 유명한 Mariology의 세계 권위인 University of Dayton에서 ‘성모신심학’ 학위까지 받고 그의 체험, 경험을 토대로 ‘묵주기도의 기적’에 관한 책을 간행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모신심의 대부 代父 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물론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과 힘이 뒤에서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역할은 역시 그의 어머니의 기도였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성 모니카 (St. Monica,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아오스딩의 어머니)에 비유를 한다. 뒤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하신 것이다. 한때 마약과 rock music에 심취, 찌들어 자살이 다음이라고 장담한 그가 어떻게 Marian Fathers of Immaculate Conception (MIC) 신부님이 되었을까.. 이런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닐까? 그는 과연 제 2의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를 꿈꾸고 있을까? 자신의 ‘기적 같은’ 개인 체험이 그런 꿈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speaker 들도 나름대로 독특한 style과 주제로 힘을 썼지만 Fr. Calloway의 ‘체험에 저린 웃음’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분의 차례를 제일 마지막에 넣었을까? 비교적 지루하고 졸린 오후 였으니까.. 그 분의 책과 성지순례 안내서는 날개 돋치듯 없어졌고 나는 집에 와서 그 신부님을 더 알아보려는 googling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도 인상에 남는 사람은 power country singer Collin Raye와 함께 출연한 Andrea Thomas라는 젊은 여성, 가창력이 정말로 뛰어났고, 흡사 오랜 전의 Celine Dion같은 느낌을 주었다. Collin Raye의 독특한 power country는 물론 좋긴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크게 호감은 안 간다. 그의 style은 country와 Italian Tenor를 합친 것 같은 그런 것인데, 성체대회의 분위기에는 어떨까?
우리는 ‘전통적’으로 closing ‘vigil’ mass를 하고 오기에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많은 UN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양각색의 교우들과 ‘장엄 미사’를 하는 것 독특한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집전 대주교님의 우렁찬 목소리도 좋고, 각종 언어로 행하는 ‘지향기도’도 색다르다. 하지만 몇 번이고 경험하는 것.. ‘한국어 기도’다. 기도하는 ‘자매님’들.. 기도 끝에 ‘we pray to the lord.’ 를 싹둑 빼버리고 하단을 하니.. 그 말이 나와야 끝난 줄 알고, ‘Lord, hear our prayer‘ 를 하려고 준비했던 모두들 그저 어리둥절.. 당황을 하니.. 이것이 누구의 실수인가, 잘못인가.. 왜 꼭 한국 자매님들만 그런 것인가? 한 때는 어떤 수녀님까지 그런 실수를 해서.. 뒤에서 coach하는 staff들, 한국 자매님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Convention center의 엄청난 내부 시설과 크기에 버금가는 수많은 사람들, UN 총회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참 이곳에 각종 인종, 나라에서 온 사람들 많기도 하다. 하지만 뚜렷한 것은 역시 Hispanic의 막강한 power다. 물론 수 數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모두 family 단위로 참가를 해서 더욱 인상적이다. 그에 못지 않게 Vietnamese power는 더욱 놀랍기만 하다. 한국 community에 비해 이민역사가 그렇게 길지도 않건만 특히 가톨릭 power는 인상적으로 크게 성장을 해서 벌써 커다란 성당이 2개일 뿐 아니라 성소자들도 속출, 신부, 사제, 수도자, 수녀들이 거의 없는 우리들에 비해 그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많다. 대교구가 그것을 모를까.. 그들을 위한 따로 program을 마련하고 그들만이 옆에 있는 건물에서 따로 모인다. 물론 closing mass에는 함께 하지만. 왜 월남과 우리는 그렇게 차이가 난 것일까?
이 closing mass에서는 다음 해 성체대회의 주제가 발표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video를 통해서 보여졌는데, 내년 주제 성경구절은 조금은 생소한 것: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구약, 여호수아기 24장 15절에서 나온 것이다. 2005년 ‘가톨릭 공용 성경’ 에 의하면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인데 문맥을 보면: “전에 살던 이집트의 신을 버리고,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눈에 거슬리면 오늘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을 하라” 라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말이다. 한 분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뜻 같다. 이렇게 2016년 성체대회가 막을 내리고 우리는 traffic 이 비교적 한산한 I-285 North를 질주, ‘유혹을 물리친’ 멋진 결과를 만끽하며 긴 하루의 피로를 푼다.
¶ I’m sorry, Tobey! 일년에 한번씩 하는 annual ‘medical’ checkup for Tobey 그 날이 돌아왔다. 이렇게 veterinarian 을 일년에 한 번씩 가서 ‘법적인 의무’ 각종 vaccine shots, 특히 rabies shot..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이번에 어떤 surprise가 있을까? 암만 보아도 우리 11살 짜리 ‘small breed, 작은 개’는 우리 눈에는 별로 문제가 없는데 이곳에 가면 반드시 무언가 그들은 찾아낸다. 작년에는 ear infection이 우리를 놀라게 해서 2번이나 가야 했던 기억이고 그 만큼 $$$ 도 쓰고 해서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skin에 몇 군데 불룩 나온 것들도 걱정이 되지만 doctor의 표정을 보니 별로 문제가 아닌 듯해서 안심을 한다. 하지만 결국 올해의 surprise도 별 수 없이 ear infection 에서 걸렸다. 작년과 100% 같은 것으로 각종 test와 처방들.. 결국은 우리의 잘못인가. 왜 귀를 긁는 것과 냄새가 좀 난다는 것을 ‘모른 척’하고 지냈을까? 그들의 말에 보기보다 통증이 심했을 것이라고 해서 너무나 Tobey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달력을 보니 작년과 timing도 거의 같다. 일 주일 동안 우리가 받아온 처방으로 치료를 하고 다시 가서 test를 받고 그때야 법정 예방주사들을 맞는 것.. 귀찮은 일이지만, 어쩔까.. 우리에게 100% 생 生 을 맡기고 있는 귀한 동물, 우리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며, 내년의 checkup때에 이 녀석의 건강상태는 어떨까 걱정과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인간나이로 Tobey는 환갑, ’60세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서 조금 안심을 하기도 했지만 조금만 있으면 나의 나이를 넘어설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생각하니 조금 아찔해 진다. 동물들도 인간과 같은 영혼 같은 것이 있을까, 동물 신학은 없는가, 이제는 신학자들도 같은 공동체 환경에 사는 생명체에 조금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을까.. 무더운 초여름 낮에 나는 또 백일몽을 꾸고 있다.
¶ Wish had a Tundra:Home Depot에 가서 lumber나 siding같은 덩치, 특히 길이가 10’가 넘는 물건들을 살 때면 생각나는 것, ‘아, 나도 pickup truck같은 것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그런 것들이 필요할 때면 hauling하는 작업이 그것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제일 골치 아픈 때는 물론 siding같은 무겁고, 휘청거리고, 엄청 긴 것들이 필요할 때이다. 어떤 것은 16’를 육박하는 ‘키다리’들도 있다.
8′ lumbers를 실는 것은 Voyager로도 큰 문제가 없다.
큰 문제는 없지만.. 참 모습이 웃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truck은 아니지만 truck frame을 가진 mini-van, Plymouth Voyager가 가족여행 용으로 오래 전부터 있어서 그것이 그 동안 lumber-hauling하는데 쓰였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truck인가? 특히 Tundra같이 힘 좋고 큼직하고 멋진 ‘pickup truck’을 가지고 와서 그 많은 ‘길고 큰’ 물건들을 쉽게 실어 나르는 weekend handymen들.. 부럽기만 하다.
친지 ‘최형’에게는 근사한 Tundra가 있는데, 막상 그는 그렇게 ‘집 고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지 거의 lumber hauling 목적으로 쓰지를 않는 듯해서.. 참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하는 탄식도 나온다. 집이 좀 가까우면 잠깐 빌려볼까 하는 만용 蠻勇도 생길 정도지만 Sugarloaf, 30+ miles이면 너무나 멀다.
한 때 집 고치는 일에 푹 빠졌을 때, Home Depot를 자주 다녔을 때는 ‘고물 pickup truck’ 하나 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지만.. 세월은 흘~러 흘~러 prime time은 다 지나가고, 칠순이 가까운 나이를 고려하면 이제는 아무래도 늦은 느낌이 든다. 역시, 역시 나는 15년 이상 우리 가족을 충실하게 실어 나르던, ‘power-train, body상태가 예외적으로 좋은’ 120,000+ mile 1999년 Plymouth Voyager에게 계속 부탁을 할 수 밖에 없나 보다.
5월의 포근한 느낌, 우리 어머니, 성모님, 그리고 나의 주위에 머물고 있는 ‘자매님’들.. 5월은 더욱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생각 속에서 ‘응석’을 부릴 수 있었던 진정 내가 좋아하는 ‘성모성월’이었다. 7순이 가까운 나이에 이렇게 ‘응석’을 부린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하지만 때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미리 알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 닥상’ 이라는 것, 나이를 먹는 혜택 중에 하나다. 신록의 나날들, 비록 가끔 가을처럼 느껴지는 싸늘한 며칠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름을 예고하는 각가지 자연적 현상들이 이제는 새롭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눈에 안 보이던’ 초록색깔의 생명들이 이제는 하나 둘 씩 늘어나서 아주 친근한 친구들이 되었다.
Yonsook’s Saybrook Trail
텃밭을 사랑하는’ 연숙은 backyard의 ‘원시림 our own rainforest‘를 하나하나씩 ‘갈고 닦아서’ 드디어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멋진 ‘오솔길’을 만들어 주위에 자랑하기 바쁘다. 그렇게 모기에 물리며 땀을 쏟는 정성이 참 가상하다고 할까? 작년에 새로니가 Mother’s day 선물로 준 포도나무가 겨울을 견디고 살아서 올해는 드디어 arbor structure가 필요하게 되어서 부리나케 남아도는 조각 lumber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부지런히 그곳을 푸른 모습으로 덮을 것을 꿈꾼다.
grape vine arbor structure up!
Memorial Day, 우리는 누구를 기리는 날인가? 자유세계를 지키던 미국 veteran들인가, 김일성 개xx와 싸우던 veteran들인가.. 조금은 혼란스럽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정의를 위해 싸우며 우리를 직접 간접으로 지켜준 영령들을 기리면 된다. 이날은 아이들이 모이지 못해서 우리 둘이서 전에 나라니가 만들었던 chicken wing 을 grill해서 둘 만의 Memorial Day를 보냈다.
2016년의 성모성월,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다. Daily priority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고, 크게 아픈 적도 없었다. 쳐 저가는 느낌의 근육들을 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도 ‘정상적’으로 했고, 친근한 느낌이 없는 고양이 가족이 새로 생겨난 것도 놀라워하고 돕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두 creator의 creature라는 진리를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도 엄마가슴같이 포근한 달에 엄마와 아내를 졸지에 보내야만 했던 가족들과 슬픔을 나누기도 했던 것, 기억에 생생하다. 피하고 싶기만 했던 구역정치 상황도 본당과 교우들의 노력으로 안정세에 접어들어서 오랜 만에 구역 미사도 갈 수 있었고, ‘점심 부엌 봉사‘도 할 수도 있었다.
그 와중에 가톨릭 전례력은 어김없이 부활시기에서 연중시기로 바뀌며 성탄을 예고하는 대림시기까지.. 여름과 가을을 보낼 준비를 하는, 이렇게 돌고 도는 것..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갑자기 찾아온 습기 섞인 무 더위에 잠을 깬 a/c 의 소음이 요란하게 들리는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6월 달엔 어떤 일들이.. 아니 가능하다면 2017년 5월은 어떨까 생각한다.
Closer to Truth?혹시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인가? 하지만.. 아니다. 예수님은 closer to truth 라고 하시지 않았고, 간단하게 I am the truth.라고 하셨다.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극명 克明 하게 보여주는 말 들인가? 철학적, 과학적으로 truth란 것은 어떻게 정의가 되어 있는가? 한가지인가, 여러 가지인가? 여기서의 Closer to Truth는 다행히 복잡한 정의가 불필요한 TV Program과 그에 연관된 website의 이름이다. 자기 나름대로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멋진 format’으로 마음껏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생각 좀하며 살라’는 교훈까지 주는 program이다.
PBS channel로 방영이 되지만 나는 commercial이건 public이건 근래 ‘완전히’ TV 보는 것을 끊었기에, 이것은 program website: www.closertotruth.com을 통해서 video-on-demand 로 편안하게 생각하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program에 대한 나의 견해는, science 특히 natural or applied science background를 가지고 신앙이나 철학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사람에게 이 program은 편안하고도 냉철하게, 폭 넓게,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생각하게 하는 topic들을 세계적 석학들의 view interview를 통해서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성서적 사실과 natural science’의 ‘사실적, 역사적 마찰’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나 같은 경우) 다시 한번 ‘진실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program의 tag line을 보면 어떠한 주제를 다루는지 간단하게 알 수 있다. “The Greatest thinkers exploring the deepest questions: Your Sources for Cosmos, Consciousness, Meaning” 이 정도의 introduction이면 얼마나 깊고 넓은 주제인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등장하는 the greatest thinkers란 누구인가? 일반에게 알려진 석학도 있고 전혀 생소한 얼굴들도 있다. 예를 들면: John Polkinghorne, Deepak Chopra, Michio Kaku 등은 나 정도도 알만한 ‘석학’들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생소한 얼굴들이다. 하지만 나의 제일 관심사는 이 program의 producer, host인 Robert Lawrence Kuhn이란 인물이다. 이 program전에 나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할 정도였다. 이번에 ‘알고 보니’ 조금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는 background의 소유자인 것이: 비록 natural science 배경 (life science)은 가졌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은 ‘돈에 관심이 많았던 money man’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가.. 돈을 억수로 벌고 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철학적, 신앙적인 눈이 뜬 것인가? 특히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라 중에 하나인 ‘짱께, 중국’을 상대로 아니, 정권에 아첨하며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나를 실망하게 한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그가 만든 이 ‘심각하고 의미 있는’ TV program에 관한 것이니까.. 그렇게 실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는 ‘세계적 석학’들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인류가 가진 가장 심각하고 심오한 주제를 그들과 거침없이 토론을 하니.. 참 ‘재주 꾼’임에는 틀림이 없다.
3가지 주제: Cosmos, Consciousness, Meaning 중에서 나의 깊은 관심은 역시 자연과학적, 거시적 물리학 Cosmology이고 다음은 자연과학과 신학을 함께 다루는 Consciousness 인데, 마지막의 Meaning은 주로 철학적인 것으로 내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분야다. 이 중에 ‘중간적’인 것, Consciousness 는 알면 알수록 정말 신비스러운 분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가슴과 마음을 활짝 열고 신앙적, 신학적인 것을 이해하려는 지금, 나에게 이 분야는 실제로 physical 한 것과 metaphysical한 것을 골고루 융합을 시킨다는 것으로 현재 내가 practice하고 있는 모든 ‘신앙적인 노력’이 결코 감상적이거나 신화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의 자아 의식이 과연 뇌 안에만 제한되어 존재하는 것일까? 뇌가 죽으면 의식도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현재 나의 입장은, 의식은 뇌에만 존재하는 local적인 것이 아닐 것 그러니까 nonlocal 이라는 심증이다.
이런 ‘아슬아슬한’ 주제를 세계적인 석학들이 ‘무서움 없이, 거침 없이, 열린 마음으로’ 이 program에서 토론을 하는 모습들 너무나 너무나 인상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열린 과학’의 도래를 진심으로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이런 추세들이 과학 특히 자연과학 background를 가진 ‘수세에 몰린 듯한’ 신앙인들에게 많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갑자기 눈을 떠보니 이번 주말이 Memorial weekend, 별로 큰 느낌 없이 ‘당한’, 기분이다. 이런 ‘휴일 주말’이 예전과 같이 기분을 좋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기야 full-retirement에서 특별한 휴일이 따로 있을까? 매일 매일이 휴일일 수도 있고 반대로 남들이 놀 때 일을 할 수도 있는, 그야말로 자유 중의 자유.. 하지만 ‘절제 moderation와 자기수련 self-discipline’이 빠지기 시작하면 이 자유는 완전한 ‘지옥’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만간 早晩間 변한다는 사실, 뼈저린 체험으로 안다. 나는 값 비싼 대가를 이미 지불했기에, 이제는 문제가 없다.
갑자기 ‘여름 같은 밤’이 들이닥친 지난 밤, 오랜만에 아.. 드디어 여름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습기가 잔뜩 섞인 바람 한 점 없는 안 보이는 air, 피부에서 땀을 날려보낼 기운이 떨어진 듯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공기가 움직여야 땀을 말리고, 이런 바람이 없으면 강제로 바람을 내게 해야 한다. fan 그것도 electric fan, 바로 ‘선풍기’가 필요한 바로 그때가 온 것이다. 밖으로부터 들리는 가라앉은 잔잔한 소음의 a/c compressor소리보다는 ‘앵앵’거리며 귀를 건드리는 귀여운 fan의 소리를 더 원한다. 창문을 열고 바닥에 누울 수 있다는 건 이맘때부터는 ‘특권’에 속한다. 더불어 벼락을 동반한 시원한 오후의 소나기나 소리 없이 내리는 굵은 물방울의 비.. 이것들이 모두 여름의 dreaming of white.. 인 셈이다.
드디어 올해 a/c unit cleanup, tune-up, test-up 할 때가 왔는가?
매일 미사에도 조금 줄어든 사람들을 보며.. 아하.. 휴일에 여행들을 갔구나.. 그래서 더욱 holiday 기분이 든다. 우리는 집을 떠난 지 참 오래된 느낌.. 여행 예찬론을 귀따갑게 듣지만, 우리와는 그렇게 인연이 없나 보다. 여행을 간 듯이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 둘의 지론 持論 이다. 인생 자체가 ‘서사시’ 적인 여행이 아닐까? 새로니는 이제 학교가 방학이 되어서 완전히 몇 달 동안 자유인이 되고, 일 주일 후면 계획을 했던 ‘유럽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고, 덕분에 pet dog Ozzie 는우리 집에서 당분간 살게 된다. 몇 주일 동안 같이 살면 이 녀석 어떻게 변할까 주목이 된다. 항상 바쁜 나라니는 이번 짧은 주말, 친구와 Panama City Beach로 떠났다. 그곳은 우리 가족 오래 전 regular summer place였는데.. 그곳도 많이 변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backyard에 ‘연숙이-오솔길’이 새로 생긴, 우리의 ‘피곤하고 낡은 집, depression-era shack’이 최고의 summer place 다.
오래~ 오랜 만에 이 ‘번쩍거리는 표지’를 가진 책의 먼지를 털고 책상 위에 꺼내 놓았다. 1990년경에 산 책이다. Atlanta 지역으로 이사온 즈음에 산 것인데, Internet 이 일반인들에게 ‘유행’하기 전이고, 그러니까 Amazon.com 같은 것은 물론 없었고, 집 근처에 있는 ‘정다운’ bookstore에서 산 것이다. 당시 나는 Norcorss와 Doraville 이 마주 닿는 곳, Pleasantdale road@I-85 (near Spaghetti junction) 에 직장, AmeriCom 이 있었고 그곳에서 5분 떨어진 Four Seasons Apartment에서 살 무렵이었으니까.. 거의 분명히 가장 가까운 Jimmy Carter Blvd에 있었던 Green’s Corner shopping center에 있던 Green’s Corner bookstore에서 샀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런 ‘조그만 책방’은 다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big-name bookstore가 나오기 전이었고 비교적 작은 local bookstore 가 ‘동네 근처’에 많았다.
이 guitar에 대한 책을 왜 그때 샀을까.. 아직도 머리를 굴리지만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때에 나는 분명히 ‘머리를 식히려’ 가끔 ‘고물’ YAMAHA acoustic guitar를 만지작거리며 살았을 것이고, 1969년 부터 연세대 같은 과의 ‘기타 귀재 鬼才’ 심재흥에게 자극을 받아, 등 넘어 배우며 즐기기 시작해서 그런대로 중년 때까지 명맥을 이어온 나의 ‘알량한’ 기타솜씨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거나 잊지 않게 하려는 ‘처량한’ 희망에서 그 glossy한 책을 샀을 듯 하다.
당시에 나는 그 책의 ‘사진, 그림들’을 다 즐긴 후에 곧바로 책을 덮고 서재의 깊은 곳에 내동댕이를 쳤는데.. 이유는 기타 technique 을 다룬 ‘소위’ magic technique 들은, 암만 보고 읽어도 알 수가 없는 난해한 것들 투성이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콩나물 대가리’들로 각종 전문용어를 쓰며 해설을 했던 기타 가르침.. 나에게는 한마디로 무용지물 無用之物 이었다.
그리고.. fast forward해서 25년 뒤에 그 책의 먼지를 털고 다시 나의 시야에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유는 25년 전과 같은 것, ‘혹시, 혹시, 혹시’ 이 책에 무슨 ‘하루아침에 기타 귀재가 되게 하는’ 그런 보물이 없을까 하는 가느다란 희망은 아니고.. 그럴만한 이유가 갑자기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성당에서 가밀라 자매님의 장례미사 후 식당, 본가설렁탕, 에서 만났던 레지오 은총의 모후 자매님 두 분이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말과 혹시 내가 시간이 될지를 물었었는데, 그 자리에는 진희아빠의 누님인 프란체스카 돼지띠 자매님도 있어서 일언지하 一言之下 로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이 ‘그룹’은 오래 전에 어떤 ‘기타 전문가’ 30대 청년으로부터 9개월 이상 강습을 받았다고 했고, ‘발표회’까지 했다는데 (이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진희아빠가 그 중에 하나였으니까) 아마도 그 이후에는 별로 활동이 없었고 실제로 ‘코드, guitar chord’도 많이 잊은 듯했다. 하지만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그 관심과 열의 (그들의 gesture나 face expression)를 나도 느낄 수가 있어서 나도 관심이 갔던 것이다.
우리부부의 레지오 ‘활동’도 이즈음에는 조금 덜 바빠졌고, 나도 자꾸만 rusty해지는 손가락이 근질근질하기도 했기에 이번에는 깊이 생각 안 하고 이것도 It’s Now or Never, Before it’s too late 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2주 뒤에 그러니까 지난 화요일 레지오 회합이 있던 날 드디어 ‘동호인’ 2명과 만나서 잠깐 나의 guitar 치는 style (acoustic, picking) 을 보여 주었고 그들도 큰 하자가 없는지 계속해서 모임을 추진하자고 했다.
그날 그 자매들이 가지고 나온 ‘강습 Note, 악보’ 잠깐 훑어보니, 다행히 나에게도 친근한, 생소하지 않은 곡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니까 늦어야 80년대 folk-ballad style 대부분은 아마도 70년대 ‘젊은이들의 노래’가 아닌가 싶었다. 그 정도라면 내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인데, 문제는 과연 이들이 지난번에 어떤 format으로 배웠냐는 것인데.. 아무도 친절히, 자세히 설명하는 자세가 아니어서 조금 실망을 했다. 그러니까.. ‘무조건, 적당히..’ 해 달라는 것인가?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내가 조금 성급하게 승낙을 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걱정이 든 것이.. 내가 반세기 전에 기타를 ‘치기’ 시작한 이후, 남에게 ‘정식으로’ 가르쳐본 적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부분 ‘등 넘어 로’ 배웠으니 그들도 등 넘어 로 가르쳐 줄 수가 있는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기타 경험자’를 가르칠까 하는 것,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이런 연유로 기타에 대한 개인적 추억과 역사를 더듬게 되었다. 사실, 앞으로 써야 할 memoir blog 중에는 연세대 3학년 시절, 1969년이 다음 차례인데 그 1969년 일년의 대부분이 guitar에 얽힌 것들이다.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들.. YMCA에서 하던 전석환 씨의 Sing-along-Y란 곳에도 갔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전석환씨가 가르치던 YMCA guitar class에서 한 달 강습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러니까 비록 등 넘어 배웠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정식으로 시작’은 한 셈이었다. 처음에는 통 acoustic기타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electric guitar로까지 발전을 했지만 결국은 통기타로 돌아와서 현재에 까지 이른 셈이다. 그러니까 나는 비록 intensive하게 배우고 멋지게 연주는 못 했어도 그 오랜 세월 한번도 이 것에서 멀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근래에는 즐기는 노래들의 chord를 악보를 안 보고 치는, 그러니까 완전히 ‘외우는’ 는 쪽으로 노력을 해서 많은 성과를 얻었다. 바로 이것이 끈기 있게 guitar를 ‘즐기는’ 비결이었음을 이제야, 황혼기에 깨달은 것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알았으니.. 게다가 나에게 배우겠다는 ‘자매님’들이 생겼으니 이것도 내실 흐뭇한 일이 아닌가? 간바로!!
P.S., 아래에 보이는 video, The ventures의 walk don’t run은 당시 electric guitar를 배우는 사람들의 standard였다. 이들이 rock-style instrumental guitar 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다.
며칠 전 아침,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 집 backyard shed 에서 출산 후에 계속 우리 집 backyard에서 살던 feral shed cat family (1 mom + 4 kittens)… 그날 하루 종일 섭섭하고 우리를 우울하게까지 했던 ‘그 귀여운 녀석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새벽에 쓸쓸한 심정으로 shed에 가보니.. ‘모두’ 돌아와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암만 추측을 해도.. 그들이 어디에 ‘하루 종일’ 갔다 왔는지 알 수가 없다. pet 특히 cat behavior의 ‘전문가’ 인 나라니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주변을 explore를 하려고, kitten들을 ‘훈련 시키려’ 외출을 했을 것이라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떻게 거의 24시간을 밖에서 보냈을까.. 먹이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지만 그런 궁금증 상관없다. 돌아온 것만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우리 집 식구가 돌아온 듯한 기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안 떠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우리 집을 완전히 떠났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닐까? ‘공짜’ 먹이가 ‘보장’이 된 곳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 이후.. 이들이 밖에서 ‘활발하게 노는’ 모습을 back porch 안에서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들, 4마리의 모습이 다 다르고, 크기도 차이가 나기 시작하고, 활발한 정도도 다 다르다. 제일 활발한 녀석은 이제 shed옆에 붙어있는 높은 나무를 기어올라 shed roof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놀기도 한다. 제일 작은 두 녀석은 자기의 모습이 비슷함을 알았는지 서로 껴안고 누워있기도 하는데.. 그들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 귀엽다.
문제는 이들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는 셈인가.. 아니면 우리 집을 결국 떠날 것인가?
결국, 의견들을 종합하면 아마도 시간이 되면 엄마가 떠날 것이라고, kitten들을 뒤로 두고..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동물들은 거의 모두 그렇게 살지 않는가? 자식들이 자립할 때까지 보아주고 떠나는 것.. 인간도 거의 마찬가지니까. 아니면.. 이 가족이 모두 이사를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또 없어져서 안 돌아오는 것이다. Case마다 다르니까 자신은 없지만, ‘아마도 당분간’, 식량이 풍부한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도 있고..
우리가 해 주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이들의 ‘불임수술: neutering, spaying‘이다. 다시는 이들이 kitten을 더 못 낳게 하는 일, 이것이 불필요하게, 비 인간적으로 이들을 ‘죽일 필요 euthanasia’가 없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Internet을 찾아보니..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정의 운동’으로 되어서.. 정말 많은 사람들, 특히 cat lover 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작은 딸 나라니도 그런 쪽에서 한 몫을 하고 있었다. Kitten들은 최소한 6개월이 되어야 불임수술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시간이 조금은 있는 편이지만, 문제는 mommy cat이다. 그 녀석, 또 임신을 하면 문제가 아닌가? 그 녀석은 원래 밖에서 살던 녀석이라 trap하는 것도 큰 일이라.. 우리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이 kitten들에게 adopt family를 찾아 주는 것이다. 특히 제일 귀여운 이 때에 이들의 입양 chance가 높을 것 같다. 그래도 주위에 만나는 사람마다 알리고 있지만, 글쎄.. 예상보다 이 것이 쉽지 않다. 모두들 그렇게 바쁜지.. 특히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미국에 오래 살았어도.. 전통적인 고양이에 대한 allergy가 있는 모양이다. 개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이곳의 추세도 모르는가? 먹이와 litter box만 있으면 거의 ‘공짜’로 키울 수 있는 것인데..
¶ Kitten family gone: Backyard shed에서 태어난 4마리 kitten과 엄마 가 갑자기 오늘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고, 하루 종일 밥과 물을 살펴보아도 없어지질 않고.. 나의 느낌이 이 5가족이 사라진 듯 하다. 우리 집에서 낳은 4마리 아기 고양이들과 엄마가 모두 귀신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 동안 밥을 엄청 먹기에 거의 바닥이 난 고양이 밥을 사러 내일 Costco에 가기로 계획까지 세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우리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갔단 말인가?
너무나 화창하고 가을같이 서늘한 일요일, 비가 그친 후 다시 backyard에 나가서 deck, grape trellis 등 일을 하였지만 계속 이 5 고양이 가족이 돌아오나 shed쪽에 신경을 썼지만.. 그렇게 뒹굴며 놀았던 shed 옆 마당은 고요하기만 하다. 너무나 기분이 이상한 나 자신에 내가 놀란다. 몇 주 동안 그 애들 밥을 부지런히 주며 보살폈던 하루하루가 선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왜 갔을까? 왜? 이것이 출산 후의 고양이 일가의 습성일까? 일단 kitten들이 건강하게 크면 이렇게 낳은 곳을 떠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추측에는 어제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들려서 backyard에서 짖어대며 떠들어 댄 것이 화근이었을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mom이 용단을 내려서 떠난 것일까? 너무나 서운한 마음, 괴롭기까지 하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그래도 정성스레 먹이와 shelter를 제공한 우리에게 ‘감사’하며 떠났을 것이라는 ‘억지 희망’을 갖는다. 언제라도, 먹이가 떨어지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 New pastor shock: 오늘 모처럼 동네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주일 미사를 보러 갔다. 우리의 지정석이 있고 그 주위의 교우들 이제는 거의 고정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아는 얼굴이 안 보이면 그래도 관심을 가져줄 정도가 되어, 그야말로 정든 ‘미국 본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하는 곳이다. 3주 전에 Irish pastor Father Darragh Griffith 가 본당을 떠난다고 발표를 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하지만 10년이 넘게 주임신부로 계셨으니 (50세가 넘은 젊은 신부) 사실 크게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10년 이상 있었으니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것이 문제다. 6월 초에 떠나게 되고 Norcross (Peachtree Corners) 에 있는 본당으로 가신다고 했다.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서 사실 조금은 덜 섭섭하기도 했고, 새로 오시는 주임신부는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늘 주보를 보니 드디어 새로 오는 주임신부가 소개되어 있었다. 사진과 간단한 약력을 암만 보고 읽어도 시원스럽지 않은 점들이 있었다. ‘전통적인 신부님의 약력’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Atlanta Metro에서 가장 conservative한 ‘동네’인 이곳 East Cobb에 Cuba 출신인 Father Miguel.. 정말 이제 Irish power는 사라지고 있는가? 가장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얼굴이나 Hispanic 등이 아니고 Greek Orthodox Melkite background란 것이다. 기억에 Melkite 쪽은 celibacy (독신) 제도가 없는.. 그러니까 성공회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이 있는 신부라고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집에 와서 부리나케 googling을 해 보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 새 주임신부님.. 정말 colorful한 인생, 신앙 여정의 소유자였다. Cuba 에서 온 망명인사의 가정에서 자라고, 개신교 (침례교) 출신에다가, 다음에는 Episcopal Church (성공회)의 신부가 되더니, 이제는 Melkite로 변신, 결국은 Roman Catholic으로 오긴 했지만 Melkite의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 둘은 이 ‘난감한 소식’에 아연실색.. 어쩔 것인가? Wife가 있고 가정이 있는 천주교신부.. 라니.. 암만 생각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신부님이 아닌 것이다. 대주교가 미쳤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우려하는 것들이 다 이유 있게 설명이 될 것이라는 희망은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