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모교, 서울 계동1번지 중앙중고등학교.. 너를 어찌 꿈엔들 잊으랴.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이고, 아마도 죽어서도 (영생을 믿는다면) 못 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추억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선명 하게 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인간들이 인생을 정리하면서 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것들일까.
오늘은 고등학교 2학년 때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러니까 1964년인가. 그때의 신문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때의 한국의 정치,사회 등등을 같이 엮을 수 있으련만.. 그때는 박정희 시대였다. 100% 말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은 사실 $$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가 제일 목말라 했던 것은 역시, 경제개발.. 그가 제일 주목한 것은 역시 일본.. 그가 기댈 수 있는, 그런대로 편했던 나라다. 폐허에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을 하려는 그런 시대였다. 그런 배경에서 한일회담이 거듭되고, 야당은 그것을 반대하고.. 데모로 이어지게 되는 그런 시기. 중화학 산업으로 시작이 되어서 정부는 그것을 제일 큰 업적으로 홍보를 하던 때. 1964년.. 김승옥의 “서울, 1964년“이란 단편이 월간잡지 신동아 新東亞에 실리던 그런 배경이었다.
나는 1년도 못되게 짧게 살았던 서울도심지 회현동에서 그런대로 조금 조용하지만 교통이 편리한 위치에 있었던 용산구 남영동으로 이사를 갔다. 금성극장에서 50m 도 안 되는 거리, 뒤쪽으론 미8군 사령부가 담 넘어 있었고 남산이 그 뒤로 가까이 보이던 곳. 2층집인데 일층은 주인의 가게가 있었고 2층은 우리가 모두 차지했다. 옥상도 있어서 나는 밤만 되면 이곳에 올라와 내가 만든 망원경으로 남산 팔각정을 보기도 했다. 너무나 나에겐 좋은 주거환경이었다. 거기서 나는 중앙고 2,3학년을 보냈다. 집에서 바로 코앞, 금성극장 앞에서 버스를 타면 재동 신작로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계동골목을 통해서, 휘문, 대동중고등학교를 지나서 숨이 목까지 차오르면 막다른 골목에 majestic 한 모습의 웅장한 석조전 모교가 우리를 맞는다. 그 당시 나는 지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반대로 거의 매일 첫 번째로 가곤 했다. 늘 지각하는 애들의 얘기를 들으면 매일 그 긴 계동골목을 뛴다고 들었다. 그래서 휘문 애들이 부러웠다고.. 바로 골목의 입구에 있었으니까.
고2가 되면서 반은 본관 뒤 왼쪽 벽돌건물로 옮겨졌다. 2학년 6반이었다. 담임은 기하를 가르치는 새로 부임한 박영세 선생님. 고려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중앙출신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른다. 나의 고2시절은 조금 특징이 있다. 제일 과외활동적인, 기억에 남아야 될 일이 많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지 않게 기억이 제일 희미하게 된 학년이었다. 왜 그런지 나도 의아스럽다. 사진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무엇인가?
먼저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다. 좋은 추억이 아니다. 나의 친구였던 이경증에 관한 것이다. 이름도 비슷하고 중2때부터 친했던 다정스런 친구. 그가 중3때부터 조금 사춘기적 반항을 시작한 듯 했는데 그것이 결국 새로 온 담임 박영세 선생님으로 끝이 나 버렸다. 확실히 무슨 사건이 발단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결국 박선생님이 ‘퇴학’을 시킨 결과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 경증이와 대학 이후에 재회하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 조차 지금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렸다. 경증아, 이 글을 읽으면 다시 한번 들을 수 있게 해다오. 그 이후 나는 박선생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게 되었다.
First thing, first.. SECC 이것을 빼 놓고는 고2에 대한 추억을 말할 수가 없다. 우리들은 그저 에쓰이씨씨 라고 불렀다. Student English Conversation Club의 약자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고2때의 일이었다. 중3때 알던 김호룡이 와서 영어회화클럽이 있으니 같이 하자고 제의를 해 왔다. 나는 그 당시 고1때의 외로움을 만회하려고 무엇인가 과외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던 때였다.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았다. 그래서 따라가 보니 이건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그 club이 모이는 곳이 바로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가정집이었다. 우리 집 옥상에서 거의 보일 듯 말듯한 위치가 아닌가?
그곳에 가 보니 이미 학생 몇 명이 모여서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웬 ‘어른’들 몇 명 있었고, 회원으로는 김호룡, 이종원, 우진규, 이상기, 한형업.. 등등이 우선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그때는club이 크려고 하던 그런 초창기에 속했다. 어른들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던 ‘신광수’선생, 그리고 대학생처럼 젊어 보이는 영어의 귀재,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잡일을 도와 준다는 신선생의 동생이라는 남자. 이렇게 어른 세 명이 이 클럽을 이끌고 있었다. 물론 회비는 걷었지만 얼마 되지를 않았다. 그에 비해서 ‘서비스’는 거기에 맞지 않게 좋은 편이었다. 우리가 내는 회비는 턱도 없이 모자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농담으로 이 사람들, 혹시 북괴 간첩이 아니냐는 말도 하곤 했다.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가끔 극장도 데리고 갔다고 했다 (나는 못 가봤지만) 일주일에 몇 번이나 모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정기적으로 모였다. 그리고 영어회화를 배웠다. 그 신선생이란 분은 미국과 영어문화의 신봉자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미국 것은 무조건 좋다는 식이었고, 그러니까 영어를 절대적으로 잘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의 영어회화 실력은 사실 대단하질 못했지만. 다른 선생 (대학생 같은) 은 달랐다. 완전히 미국방송 AFKN에 심취해서 라디오를 귀에 대고 살았다. 그만큼 그의 영어 회화실력은 대단했다. 사실 나는 영어회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새 친구들을 사귄다는데 더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후일에 계속 친구로 남게 되는 김호룡, 우진규, 이종원, 등등과 그곳에서 어울리게 되었고 고1때와 같은 ‘외로움’을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클럽은 나중에 목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회원을 늘리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다른 학교 학생들 까지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그 신선생이란 사람은 아마도 이곳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한 모양이었다. 결국 근처의 빌딩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는 일반인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기억이 잘 안 나는 것은 그 모임이 어떻게 끝이 났나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고3이 되기 전에 그곳에서 우리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USIS(미국공보원)에서 모이는 대학생들 영어회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당시 영어회화를 얼마나 배웠는지는 사실 미지수지만 나에게는 보람 있던 과외활동이었다. SECC에서 조금은 더 알게 된 사람들, 한형업, 주응권, 김희태, 호봉일 등등이 생각난다.
고2 시절에서 꼭 생각나는 행사가 중앙고의 특별한 행사인 ‘토요코스‘라는 것이다. 왜 이름을 토요코스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토요일에 열리니까 그런 것인가. 그러면, 코스라는 이름은? 먼 후일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중앙후배들로 부터 그 행사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듣고 너무나 반가웠다. 이 토요코스는 간단히 말해서 지금의 summer camp같은 것을 학기 중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학교에서 하는 고등학교 2학년 전체가 참가하는 캠프 행사였다. 그 당시도 참 신선하고, 재미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머릿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줄은 미쳐 몰랐다. 그렇게 대학진학 6개년 계획까지 세워서 입시공부를 강조하던 최복현 교장선생님께서 이렇게 교육의 여러 가지 면을 다 생각하신 것을 보면 지금도 머리가 숙여진다.
그 당시의 경제여건으로 봐서 지금은 흔한 단체 camping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하려면 각자가 알아서 친구들과 해야 하고 캠핑장비가 없어서 거의 모두 암시장에서 군화, 군용장비를 사야만 했다. 그런 것들은 남자들만이 그런대로 할 수 있는 취미였다. 그런 것을 학교단위로 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역시.. 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토요일 방과 후, 오후부터 우리 2학년 6반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간단한 야영장비를 가지고 모였다. 거의 모두 군용장비였다. 밥을 해 먹는 ‘항고’가 필수였다. 중앙고 캠퍼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아름다웠다. 비원의 담을 끼고 밖에서 밥을 해 먹었다. 물론 코스담당교사인 나까무라 주길준 선생님의 지도하게 질서 정연하게 진행이 된다. 등산, 캠핑을 해본 사람들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아마도 신기한 경험을 했으리라. 나도 못해본 축에 속해서 아주 재미있었다.
어둠이 깔린 교정.. 어둠 속에 보이는 캠퍼스는 다소 신비스럽게도 보였다. 처음 그런 광경을 접한 것이다. 교련조회 비슷한 열병식도 했고, 본관 앞 잔디에 모두 모여서 열 띈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주길준 선생님께서 능숙하게 지도하셨다. 그렇게 짧은 시간들이 그때는 참 오랜 시간으로 느껴진 것은 지루해서가 아니라 모두 생소한 경험을 축적하느라 body clock이 천천히 간 것일 것이다. 교정에서 camping을 하면 이상적이겠지만 실제적인 (안전)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관 다락방 (도서관 자리) 에서 군용침대를 놓고 잠을 잤다. 물론 개구쟁이 친구들은 잠을 제대로 잘 리가 없었지만 그런 소란스러움은 잠시 후 주길준선생님의 군대스타일 취침 checkup으로 끝이 났다. 자기 전에 모두 침대 옆에 서서 취침 전 점검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참 재미있던 추억이었다.
저녁때 잠깐 보니 1층 숙직실의 노~오란 장판 위에서 주길준 선생님과 우리 반 담임 박영세 선생님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너무나 정겨워 보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특별한 행사는 없었고 오전 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 행사는 이렇게 간단하고 짧았지만 그렇게 신선하고 ‘탈’ 입시적인 기억은 절대로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듯 하다. 이것과 연관해서 생각나는 사람은: 이종진 (별세), 김진수. 이종진은 밤에 잠을 제대로 안 자고 소란스럽게 해서 기억이 나고, 김진수는 항상 나의 옆에 있던 친구라 생각이 난다.
고2때의 다른 추억은 역시 그 흔한 수학여행이다. 이것은 물론 다른 학교들도 다 하는 것이라 특별한 것은 없다. 하지만 역시 이런 것은 빠지면 후회하게 되는 그런 행사일 것이다. 지금도 추억을 하면 아름다우니까. 그 당시의 표준코스는 역시 그런대로 시설이 되어있던 신라의 고도 경주였다. 교과서에서 귀가 따갑게 듣고 들었던 곳이라 사실 호기심도 많이 있었다. 특히 석굴암과 불국사.. 얼마나 많이 국어와 국사시간에 들었던가. 기억에 아마도 2박 3일의 여행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학급일지를 보면 확실하겠지만.. 기억이 나는 동창들은 없을까? 구체적으로 언제였는지? 아마도 10월 정도였지 않을까?
그 당시는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이라 모두 서울역에서 시커먼 기차를 탔다. 그 때의 사진이 졸업앨범에 남아있다. 아마도 하루 종일 걸려서 경주에 갔을 것이다. 여관에서 식사도 하고 잠을 잤는데, 역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매일 만나던 친구들이었지만 학교 밖에서 며칠 같이 잠도 자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역시 신선하다고 할까?
나의 추억은 서울역에서 Steam Engine, (화통)기차를 타면서 시작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여행까지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다. 갈 때는 기대감으로 들떠서 유행가를 불렀는데, 웅변반의 최고변사 김흥국의 선창으로 맨발의 청춘을 악을 쓰며 불렀다. 그 당시는 신성일과 엄앵란의 콤비가 나오는 영화가 제일 인기였고 이 맨발의 청춘 도 그 중의 하나였다. 최희준씨가 부른 주제곡은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 따라 불렀다.
그 고속도로 이전시대에는 완행열차가 제일 손쉬운 교통수단이었는데, 글자 그대로 느렸다. 급행이 있다고 하지만 열차 자체가 느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늦게 가는 기차에서 보이는 농촌의 풍경이 너무 정겨웠다. 경주에서는 아주 깨끗한 여관에서 짐을 풀었는데, 그 당시는 그것이 최고의 숙박시설이었다. 경주에 호텔이란 것이 없었을 것이고 있다고 해도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이번의 여행에서는 고1때와 같은 외로움은 없었다. 이종원, 김호룡 같은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우진규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애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우리와 같이 사진도 못 찍었다. 그때 나는 사진기가 없었지만 다행히 그곳에는 사진사들이 많았다. 비록 돈을 주고 찍어준다고 하지만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것조차 없었으면 그때의 기억은 완전히 머릿속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사진을 보니 이종원, 김호룡은 물론 같이 찍었고 다른 친구들도 그 속에 있었다.
석가탑 앞에서 찍은 사진은 사진사가 찍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 중에서 누가 찍었다.물론 이 사진 속에 그는 없었겠지만. 이 속에는 왼쪽부터: 김선일, 장맹열, 심인섭, 필자 이경우, 그리고 이종원이 다보탑 앞에서 포즈를 하고 있다. 그때 우리들은 그룹을 지어서 행동을 했는데 이들은 분명히 우리그룹에 있었다. 이중에 궁금한 것은 김선일과 심인섭이다. 장맹열은 나중에 교수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심인섭, 나처럼 항상 말이 없으나 친절한 사람, 학교잡지(계우)에 ‘실비야’라는 멋진 시도 실었다. 사진사가 찍은 사진에는 김호룡이 있다.그는 1995년경에 타계를 했다. 나와 참 친한 친구였는데 너무도 일찍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그 사실을 나는 5년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고 그때의 충격과 허탈감, 그리고 외로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수학여행의 모습들은 역시 졸업앨범을 봐야 했는데 불행히도 우리 반을 비롯한 많은 반 단체사진이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인쇄가 되었다(사진 탓인지, 아니면 인쇄 탓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내가 관심이 가는 사진은 역시 우리가 타고 갔을 그 증기엔진기차(그때는 화통기차라고 불렀다) 기관차, 서울역 앞에 집합한 우리들의 뒷모습.. 등등이었다. 그때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던 더 잘살던 동창들이 있으면 그때의 사진을 모두에게 공개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새벽같이 일어나 단체로 토함산을 올라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날씨가 조금 흐렸지 않았나?) 석굴암을 보았다. 그때 나는 화장실이 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관광개발이 거의 안 되었던 시절이라 화장실이 쉽게 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밤에는 한방에 모두 모여서 카드놀이도 하면서 학급친구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서 모든 것이 신기롭기까지 했다. 다른 방에서는 베게 싸움도 했다고 들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향열차를 타고 또 모두들 미친 듯이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어떤 그룹은 춤을 추며 열차는 밤을 달렸다. 그때 놀란 것은 대구역의 거대함.. 서울역보다 더 큰 것처럼 느껴졌다. 깜깜한 시골을 달리던 기차가 세상에서 제일 밝게 느껴지는 끝없는 불빛 속을 뚫고 달렸는데 그곳이 바로 대구였다. 물론 서울보다야 작았겠지만 나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찬란하게 빛나던 대구시, 대구역.. 그 인상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대구에서 잠깐 내려서 그룹별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식사를 같이 하고 뿔뿔이 헤어져서 대구 도심지를 해 메었다. 나는 이종원과 같이 다니다가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온도계를 사가지고 나왔다. 왜 온도계를 그곳에서 샀을까? 참, 우습기도 하다. 대구의 기념품이 온도계가 된 것이다. 기차 속의 광경은 볼만 했는데, 한쪽에서 미친 듯이 밤새 춤을 추고 있고, 기차 천정에 붙어있는 짐을 싣는 곳은 간이 침대로 둔갑이 되기도 했다. 기차는 달리고 달려 아침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자기도 하고 놀기도 하며 왔지만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물론 학교수업이 없었고.. 하루 집에서 논 셈이 되었다. 이 여행은 지금 생각해도 안 갔으면 일생 후회를 할 만한 그런 유익하고 추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고2때의 소풍이다. 보통 소풍..하면 대개 경치가 그런대로 좋은 곳이나 유적지 같은 데로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때의 소풍은 달랐다. 김포 근처에 있는(맞나?) 대한민국 공군 제11전투비행단.. 아마도 이런 곳으로 소풍을 간 학교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건 누구의 idea였던가? 그게 조금 궁금하다. 아마도 역시 우리의 자랑인 “수위모자”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아닐까? 그때 비행단에서는 우리들을 트럭으로 싣고 그곳으로 안내를 했다. 물론 경치 좋은 곳에 모여 앉아서 소풍점심은 못 먹었어도 우리들은 모두 기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곳의 시설을 완전히 우리들에게 공개를 한 것이다. 전투기의 조종석에도 앉아보게도 했다. 전투기는.. 그 유명한 F-86 Saber였다. 그것들이 우리의 앞에 있었고, 우리들 앞에서 뜨고, 착륙하고.. 정말 멋이 있었다. 요새 같았으면 기념 사진들이 요란하게 남아있으련만 아깝게도 그때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어떤 동창 중에는 아마도 남아있는 것이 있을지도. 그때 돌아오는 트럭 위에서 OB 맥주를 병 채로 신나게 마셔대던 아이들도 있었다. 아~~ 추억이여.
박영세 담임 선생님,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도 정이 별로 안 가는 것은 내가 좀 심했을까? 왜 그럴까? 물론 친구 이경증을 퇴학시킨 것도 이유가 될 듯하다. 2학기 중에 내가 조금 방심하면서 나의 시험성적이 떨어졌는데, 그것 때문에 나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나는 질책과 더불어 성적을 올릴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시간을 보낸 뒤, 가정방문을 꼭 할 것이라고 ‘으름장’ 비슷한 말을 했다. 그저 내가 불쌍하다는 표정만 보았는데 나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그것과 더불어 나는 박선생님의 ‘폭력성’에 놀랐다. 물론 그 당시 선생님들은 학생을 자주 때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도가 있었다. 사랑의 매를 들었는지, 증오심으로 개 패듯 하는 우리들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은 하루 공부가 다 끝나고 홈룸 시간이 있었다. 그때 아마 반장이 정귀영이었는데, 홈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박선생님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로 정귀영을 패기 시작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학생을 그렇게 경고도 없이, 설명도 없이 모든 학생 앞에서 개 패듯이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그 이유도 잘 모른다. 그런 선생님이었다. 박영세 담임선생님은.. 절대로 은사님으로 존경을 할 수가 없다.
정귀영은 그렇게 해서 기억에 남았지만, 기억을 할 이유가 한가지 더 있었다. 그때 그 나이 정도면 대부분 미국(간혹 영국, Beatles, Cliff Richard같은)의 pop song에 심취하기 마련이다. 우리들도 예외 없이 마찬가지로 그랬다. 그때 Top Tune Show라고 하는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최동욱씨가 disc jockey로 미국 pop song을 소개하면서 맹활약을 할 때였다. 프로그램 이름이 아마도 <> 이었던가? 그리고 그때 히트 곡 중에는 Al Martino의 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day)란 것이 있었다. 나도 정말 좋아하는 곡이었다. 하루는 정귀영이 그 노래에 거의 미쳤는지, 수업시간 사이에 교실 뒤편 구석에 벽을 향해 서서 완전히 성악가처럼 열창을 하고 있었다. 한번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부르는 것이었다. 아주 멋있게 잘도 불렀다. 그 광경이 거의 45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아주 선~하다. 정귀영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day – Al Martino
교실 안에서 일어난 조금 심한 싸움을 기억한다. 쉬는 시간에 갑자기 최상철과 송관헌이 싸움을 했는데, 이건 흔히 보는 주먹싸움이 아니었다. 송관헌이 “이노무새끼 주겨버린다!” 하면서 칼(jackknife)을 들고 최상철에게 다가간 것이다. 아마도 최상철이 송관헌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런대로 조용하게 행동을 하던 그가 칼을 들었던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이다. 주먹깨나 쓰던 최상철도 조금 얼어붙은 표정이었지만 체면이 있는지 곧바로 펜촉을 들고 맞섰다. 곧바로 선생님이 오시고 해서 무마가 되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무엇이 송관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조용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독기가 나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최상철은 자타가 공인하는 ‘주먹’이었지만 송관헌은 그런 면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고2때 나의 주변에 앉았던 친구들을 생각한다. 김진수, 박필상, 김태영, 장맹열, 우근영..등등이 떠오른다. 김진수는 고3때에도 내 앞에 앉았다. 대학 졸업 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해군에 있을 때였다. 그때 아마도 정양조, 김윤필 등도 같이 만났던 기억이다. 김태영은 1973년경 중앙청으로 여권을 신청하러 갔을 때 그곳에서 잠깐 만났다. 박필상, 졸업 후에 한번도 못 보았다. 오래 전 동창 박우윤이 보내준 1989년 57회 연말모임의 사진을 보니 그가 보였다. 반가웠다. 장맹열.. 중3때 같은 반을 했다. 항상 1등이었던 진짜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는 지휘, 통솔력도 뛰어났다. 홈룸 시간이면 앞에 나가서 말을 조목조목 잘도 했다. 나는 그것이 정말 부러웠다. 그는 주소록을 보니 현재 경남대 경제과 교수로 있다. 그곳은 역시 그에게 적합한 곳이 아닌가?
중앙고2 시절은 나에겐 황금기였다. 분에 넘치는 과외활동으로 학교성적에는 많은 스트레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electronics에 대한 것에 눈을 뜨고 그것을 나의 전공으로 굳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어회화클럽으로 필수적인 영어회화를 배울 수도 있었고, 여름방학에는 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서 삼국지를 즐기는 여유도 있었고, 문화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심취하면서 팝송에 눈을 뜨고, 새로 복간된 월간지 신동아 를 과감히 구독하며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뜨기도 했다. 일기를 계속 쓰면서 문득, 처음으로 이대로 일기가 계속되면서 나는 언젠가 죽는다..하는 인간수명의 한계도 그때 느꼈다. 이러한 모든 사치스러운 것들은 고3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입시준비로 뒤로 밀리고 만다. 선배들이 항상 그렇게 말했다.. 고2때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과연 그렇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앨범,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