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 성함이 보이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족보
아버지 성함이 보이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족보

오늘 나의 핏줄을 찾는 내 자신의 노력에 커다란 전환점이 왔다. 내 눈으로 나의 아버지의 성함(이정모, 李正模)을 평창이씨 익평공파 족보에서 처음 확인한 것이다. 물론 100%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99.9% 정도는 확실해서 실제로 나는 아버지를 찾은 셈이다.결정적인 단서는 생년월일에 있었다. 어머님으로부터 들었던 희미한 기억에 아버님 태어나신 해가 1910년대 초반이라고 했는데, 족보에 신해년(그러니까 나와 같은 돼지띠!) 3월 11일 생으로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아버지의 성함과 나란히 이준모 라는 성함이 기재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분이 ‘전설적’인 나의 삼촌 이준모..일 것이다. 이 준모 삼촌은 나이가 1914년 생이니까 아버지보다 3살이 아래였다. 이것은 정말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이다.

이번의 이 scoop은 한국 과천시에 사시는, 인터넷으로 알게 된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이신 이종환 종친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에 운이 좋았던 것은 이 종친님이 익평공파 족보를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바쁜 직장생활에서 틈을 내어서 족보의 몇 쪽을 copy해서 보내주신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보면서 조금 놀란 사실 중에 하나는 아버님의 남자 사촌들이 5분이나 계신데 (그 당시에는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하나도 개재되지를 않았다) 그 후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후손이 없었다기 보다는 기재가 되지를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우선 나의 이름도 아버님 밑에 기재되지를 않았으니까. 왜 그랬을까? 아마도 동족의 비극, 육이오 전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아버님은 내가 2살, 육이오 이후 납북이 되셔서 호적이 올려놓을 시간을 놓치셨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나의 가까운 친척을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을 느낀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나는 나의 아버님의 후손을 족보에서 없애는 불효는 절대로 반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Carols, Cards & Christmas past..

지금 이맘때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절정을 이룬다. 듣기에도 제일 편안하고 추억까지 곁들이면 더욱 따뜻하게도 느껴진다. 캐롤의 추억에 대해서는 역시 고국에서 맞았던 중 고교 시절의 순진했던 크리스마스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당시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를 않았고 집에서도 전혀 신앙적인 환경을 주지 못해서, 그저 성탄절은 유럽이나 미국 것이라는 인상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국민학교 시절에는 성탄절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있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리는 것, 바로 그것이 그렇게 좋았다. 그 당시 고국의 품질 좋은 인쇄산업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므로 주로 주한 미8군에서 흘러나온, 이미 사용된 카드를 잘라서 다시 우리의 카드로 만들곤 했다. 그런 것을 아예 가게에서 팔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걸 ‘재생’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에 이것도 일본사람들이 먼저 시작을 해서 그곳에서 ‘재생’이라는 이름을 썼을 것이다. 우리 같은 국민학생들은 그 ‘진짜 재생’ 카드의 그림을 보고 비슷하게 그리곤 했는데, 성탄 무렵이 되면 누나와 누나친구들 까지 한 방에 모여서 같이 그리곤 했다. 그 이후로는 내내 그때의 기억이 너무도 아름답게 남아서 지금 까지도 그때의 추억을 즐기곤 한다.

그 당시에는 캐롤은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것을 들으려면 ‘전축’이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 경제사정이 그것은 대부분에게 무리였다. 군사혁명(1961년) 후에 조금씩 전축이 보급되면서 레코드 ‘판’ (거의 다 LP)이 대량으로 복사되어서 팔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본격적으로 외국의 캐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처음 산 것이 Pat Boone의 Christmas album이었고 그것이 아주 뚜렷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YouTube를 보니 그때의 앨범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몇 곡만은 다른 앨범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가 1964년 (중앙고 2년 때) 경이었는데, 성탄 전야에 보통 밤 12시부터 4시까지 있었던 통행금지가 해제 되었고.. 고요한 밤이 완전히 ‘시끄러운 밤’ 으로 변해버렸는데, 재미있던 사실은 이런 비슷한 현상이 일본 도쿄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한다. 그들은 사실 우리 같은 통금해제 같은 해방감도 없었을 것인데..그날 후 언론에서도 모두 반성을 하는 논설을 폈다. 성탄의 본고장에서는 그날이 제일 조용한 날이라는데.. 어찌 이곳은 이렇게 시끄러우냐 하는 논조였다. 물론 이런 추억은 종교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성탄에 관한 것이다.

대학시절에는 외국의 캐롤이 많이 정착이 되기 시작했고, 우리 또래의 젊은 가수들이 편곡을 해서 토착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제일 추억에 남는 것이 송창식, 윤형주 Vocal Duo Twin Folio가 불렀던 Silver Bells라는 곡, 이것이 그들의 목소리에 가장 잘 맞았던 곡이었다. 그 후에 미국에 와서는 본고장, 본토박이 캐롤을 듣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찬송가’ 스타일의 classic carol들을 듣게 되었다. 그 이후 매년 이맘때면 거의 같은 것들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었다. 1979년 성탄을 고국에서 결혼을 앞두고 맞게 되었는데 그때에 거의 우연히 세종로 네거리, 교육회관 옆의 어떤 서점에서 Paul Mauriat (폴 모리 악단)의 1967년 크리스마스 앨범 카세트 tape을 사게 되었다. 어찌나 편곡과 연주를 감미롭게 잘 했던지.. 그 중에서도 White Christmas와 Trois anges sont venus ce soir.는 “편곡,연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이 앨범은 그 이후로 우리 집의 classic Christmas favorite 로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1990년대 중반 쯤이었을까.. 출퇴근을 하면서 나는 주로 PBS 를 듣는데, 거기에서 The Roche라는 여성그룹의 carol CD가 소개 되었다. 세 자매인 듯 한데.. 모든 classic carol들을 정말 신선하게 arrange를 하고 티없이 깨끗한 화음으로 불렀다. 어렸던 우리 아이들도 듣기에 좋았던 모양으로 이것도 역시 family favorite가 되었다.

 

 

The Roches – Star of Won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