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16

파생금융상품 망국론을 또다시 제기하는 이유

2013.05.13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는 2008년 이명박(MB) 정부 출범 바로 이틀 후인 2008년 2월 27일에 ‘파생상품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유’라는 칼럼을 한국경제신문에 게재한 바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부터 솔솔 나오더니 MB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우리도 두바이처럼 금융허브를 만들자, 금융선진화를 이루자, 금융 산업경쟁력을 높이자, 등 금융과 관련한 주장들이 갑자기 매체에 부쩍 등장하는 형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지금이야말로 금융선진화를 이룰 절호의 찬스이니 법으로 규제를 완화해서 선진금융기법을 습득하자며, 당시의 금융전문가들(요즘도 여전히 이런 분들이 계시지만)의 주장이 여러 일간지의 시론란을 덮더니만 유력 일간지의 사설로까지 이를 두둔하는 희한한 작태가 연출된 얼마 후 Citi 그룹에 20억불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 투자한 20억불은 결과적으로 몽땅 털리는 꼴을 당했지만 이런 배경에는 어떤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는데, 이런 나의 직감은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파산직전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를 인수시키려는 획책을 꾀하던 세력이 거론되면서 더욱 분명해졌었는데 그 뒤 이들은 슬그머니 물밑 속으로 숨겨졌다.

파생금융상품의 위험성과 그 사기성을 지적한 필자의 경고성 칼럼에 대해 당시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많지 않았지만 정확히 7개월 뒤 9월에 월가붕괴(Wall Street meltdown)가 터졌다. 만약 조금 더 늦게 월가가 붕괴되었다면 그래서 산업은행이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하였다면 어떤 파국이 초래되었을까를 생각하면 기가 차고 아찔하기까지도 하다.

 2008 월가붕괴 후 파생금융상품문제는 일단 리먼 브라더스 하나의 희생양으로 외형적으로는 일단락된 듯하지만 그 초강력 시한폭탄으로서의 본질적 문제는 2013년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나 역시 물밑에 가려진 상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강하게 이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은 간혹 모기소리처럼 잠깐씩 들리곤 하다가 금방 또다시 수면 아래로 가려지는 구도가 아직도 여전히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필자가 이를 재론하는 이유는 또다시 박근혜정부의 출범에 즈음하여 이제 금융은 실물경제 특히 제조업을 지원하는 수준에만 머물질 말고 금융과 관련한 규제를 확풀어서 금융자체를 하나의 산업으로 키워서 먹고살자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어떤 형태로든 필시 파생금융의 아이디어가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파생금융상품 문제를 이해하려면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세계경제 특히 미국경제의 흐름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2차 대전(1939-1945)은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과 패전국 모두에게 심대한 피해를 주었고 물자절대부족시대를 맞게 되었는데 이는 절묘하게도 대량생산혁명을 주도해 온 미국기업들로 하여금 대량생산체제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 기업들은 산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다각화를 통해 인류역사상 초유의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로 이어지는 대량경제시대를 주도할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세계경제의 반(半)을 점하는 막강한 경제력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기업들은 이런 과정에서 점점 오만/교만해 지면서 혁신노력을 게을리 하게 되었고 여기에 더해 노조가 막강한 힘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혁신활동이 뒷전으로 밀리는 현상이 여기저기서 생기게 되었다.

 여기 에 더하여 패전국인 서독과 일본이 1950년대에 전후 복구체제를 갖추고 1960년대 들어 미국을 맹추격하자 미국의 주종산업인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며 미국의 경제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71년에 이르러서는 1944년 결성된 고정환율제의 브래튼 우즈 시스템이 깨지면서 변동환율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환율변동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73년에 터진 1차 오일쇼크로 환율변동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금융기관들은 위험을 잘 관리할 수 있는 헤지(hedge)형 금융상품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러다 1979년 2차오일 쇼크가 또 터지면서 세계가 초(超)경쟁상황으로 심화되는 가운데 위험변동이 더 불확실해지고 상례(常例)화되는 분위기에서 19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가 추구한 신자유주의 기치아래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완화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많은 신규 금융 중개업자들이 진입하게 되었고 이들이 컴퓨터를 활용한 정보 분석을 기초로 위험을 여러 구성단위로 쪼개어 고객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 예컨대 선물(futures), 포워드(forwards), 옵션(options), 스왑(swaps) 등의 금융상품들을 재무공학(financial engineering)이란 이름으로 제공하게 되면서 파생금융상품 시장이 형성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