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5

니즈맞춤혁신, 대박성공의 진원지

2013.07.31

기업이 지나치게 영리만을 꾀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가치창조(또는 부(富)창조)등의 우호적인 표현을 빌려서 기업존재에 대한 사회적 당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떻게 표현하든 기업의 본질은 여전히 이익추구에 있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기업 CEO가 지녀야할 자질과 역량을 기업의 존재목적과 관련시켜보기로 하자. 기업의 궁극적 목적은 이익추구다. 기업이 지나치게 영리만을 꾀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가치창조(또는 부(富)창조)등의 우호적인 표현을 빌려서 기업존재에 대한 사회적 당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떻게 표현하든 기업의 본질은 여전히 이익추구에 있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건 리더로서 기업 CEO의 소임과 책무는 기업본연의 목적인 이익추구에 충실해야함을 강조해 준다. (여기서 이익추구에 충실해야 함에는 물론 옳은 방법으로 추구해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기업이나 이익추구란 말만 나오면 대뜸 그러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 많이 내면 되느냐며 대드는 단세포 인간들과 또 기업은 돈 버는 조직이 아닌 사회봉사기관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얼빠진 친구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 너무 많기에 본 독자들 중에는 그런 류의 인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익추구에 충실한 기업 CEO의 대표적 인물들은 어떤 분들일까? 물론 성공한 기업 CEO들임이 틀림없지만 가장 두드러진 분들은 아마도 자수성가(自手成家) 억만장자들일 것이다.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여기에 물이 있다’.. 표지가 노~란 촉감이 아주 부드러운 책의 제목인데, 이 책은 천주교 영세를 원하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 반 학생용 ‘교과서’이고 내가 가진 것은 ‘교사용’이란 말이 더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용 책에다가 교사에게 도움이 되는 것(cheat sheet,해답) 덧붙인 책이다. 잠깐 훑어보면 교과서치고는 정말 부드럽고 읽기 쉽고, 읽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을 준다.

이것을 어제 연숙과 같이 성당에서 받아가지고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교리교사의 역할을 ‘조금’ 맡게 된 것이다. 정식으로 는 예비자 교리반의 ‘교리반 봉사자’ 가 되는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리반은 교리교사 여럿이서 책임지고 가르쳤지만 올해부터는 ‘완전히’ 체제가 바뀌어서 새로 부임하신 수녀님이 교리반의 ‘유일한 책임 교사’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봉사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는지 아직도 우리는 모른다. 아니 확실치 않다. 어느 날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신부님(하태수 미카엘)께서 연숙에게 ‘제안’을 했다고만 들었고, 기왕이면 부부가 같이 ‘봉사’를 하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사실 ‘청천벽력’ 같이 느끼기도 했지만, 우리가 속한 레지오(마리애)의 으뜸 사명인 봉사(service), 순명(obedience)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거절할 명분도 느낌도 없음을 알고 비교적 쉽게 OK를 하였다. 드디어 예비자 교리반이 8월 초에 시작하게 되어서 어제 수녀님을 중심으로 봉사자 모임에 참석하여, 이 책을 받아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제 수녀님께 분명히 ‘우리는 왕초보’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왕초보라는 말에는 별로 신경을 크게 쓰지는 않으심을 알았고 ‘교리 실력’ 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도 받았다. 보살핌과 가르치는 방법, 그리고 ‘간단한 정통교리’가 더 중요한 것을 알았고, 자칫하면 쉽게 범할 수 있는 ‘은밀한 개인적 밀착’의 위험성을 수없이 강조함을 듣기도 했다. 모두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말씀들이었다.

비록 봉사, 순명의 정신으로 (봉사자 역할을) OK를 했고, 이 ‘교리반 봉사’의 과제와 책임이 우리 둘의 신앙생활, 여정에 어떤 의미와 결과를 남길지는 미지수 이지만, 신부님께서 친히 부탁(지시)을 하신 것을 보면 조금은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7월 넷째 주, 줄줄이 사탕..

World Youth Day 2013이 표현을 쓰며, 혹시 spelling checker가 불평을 하지 않을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깨끗한 ‘하얀’ 반응 (빨간 줄이 없는)을 보였다. 최소한 내가 매일 쓰는 Microsoft Notes가 쓰고 있는 spell-checker engine은 이 표현이 괜찮은 모양인가..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글사전은 아직도 한반도를 떠난 1973년에 고정이 되어있기에 한글은 항상 나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줄줄이 사탕은 나와 연숙이 쓰는 우리들의 ‘속어’로써, 무언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새겨서 들어 짐작을 하곤 할 것 같다.

 2013년 7월 21일로 시작되는 주일.. 무언가 줄줄이 사탕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은 미리 숨이 찬 느낌일까, 반은 기대, 반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23일 화요일은 평상적으로 우리의 자비의 모후 레지오 주회가 있는 날이지만 덤으로 그날에는 우리단원 실비아 자매님의 부군 Billie Neal 베드로 형제의 1주기 연도가 있다. 그러니까 미사 후에 연도를 하고, 의례적으로 상주가 준비한 점심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작년 7월처럼 올해의 7월도 세상을 떠나는 영혼들을 보내는 시간을 적지 않게 보내고 있다. 관혼상제 중에서 이 ‘상喪’ 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라 나는 가급적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런 곳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물론 떠난 영혼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쪽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이틀 후 7월 25일, 목요일은 ‘우리들이 1년 동안 기다리던’ 우리 레지오 단원이었던 고故 은요안나 자매님의 연도가 저녁에 예정이 되어있다. 암으로 오랜 투병을 했던 이 자매님은 운명 직전까지도 레지오 행동단원이었다. 작년 7월 26일 아침에 긴 투병생활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몇 년간의 투병생활에서 보여준 ‘믿음과 활동’의 생활은 우리들과 특히 나에게는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의 영혼을 기리는 연도가 더 빠른 시기에 있기를 기다렸지만 결국은 1년 주기가 되어서 열리게 되었다. 각각 다른 사연과 교훈을 주는 연도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에게 가장 ‘가까운’ 연도는 아마도 이 은요안나 자매의 연도일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다음날 7월 26일 금요일은 우리가 속한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주관 2013년 레지오 피정이 시작되는 날이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3일 예정의, 집을 떠나는 진정한 피정(retreat)이고, 우리 부부도 올해 처음으로 육체적으로 집을 떠나는 다른 의미의 휴가, vacation가 된다. 집을 밥 먹듯이 떠나며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이런 2박3일의 피정이 별 것이 아니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

연숙은 꾸리아 간부이므로 준비와 진행과정을 꿈속에서 볼 정도로 일이 많아서 stress까지 느끼고, 나는 비록 수동적으로 참가하는 단원이지만 ‘간부의 spouse’ 이기에 나에게도 무언가 일의 불똥이 튀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하태수 주임신부님이 같이 retreat center에 기거하며 우리를 지도해 주시게 되어있는데, 이 하태수 신부님의 주일 강론을 가끔 들어보면 우리와 무언가 잘 맞는 느낌이 많이 들고 ‘학구적’인 각도가 많아서,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부터 1주일간은 사실 몇 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World Youth Day 2013 행사가 브라질 항구도시 Rio de Janeiro의 유명한 코파카바나 Copacabana 해변에서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브라질의 바로 옆 나라) 출신 새 교황님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진다. 조금 있으면 성인이 되실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요한 바오로 2세, John Paul II, 가 젊은이들에게 ‘다른 희망’을 주고자 1985년경에 시작한 이 ‘멋진 행사’는 이제 관록이 대단하고, 이곳에 참가한 많은 청년들이 나중에는 성소를 받고(하느님의 부르심), 다름 세대의 universal church를 이끌기 시작하고 있다.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선견지명이 그 동안 뿌린 씨앗들의 수확을 거두고 있고, 이런 ‘세계적 행사’를 통해서 계속 씨를 뿌리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 같은 신세대 매체의 도움으로 이들은 아주 효과적인 선교를 하고 있는데, ‘한 물이 간’ 우리 세대에 까지 이렇게 ‘도움’을 주고 있음에 그저 ‘성인이 되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감사를 드린다. 2년 전 스페인 마드리드의 대회도 관심을 가지고 나는 이 의미 있는 행사를 ‘따르며’ 보았는데, 올해는 과연 얼마나 가까이 따르게 될는지는 미지수이다.

무언가 많은 이번 주 일주일이 지나면 7월도 거의 끝나게 된다. 이 아틀란타 지역의 올해 기후가 완전 ‘이상, 이상, 이상’ 해서 한 여름 같은 느낌을 잊을 정도지만 절대로 불평은 없다. 8월이 시작되면 역시 기울어지는 여름이 될 것이고 찬 바람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8월부터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절 목표로 신 영세자 교리반이 시작되는데 올해부터는 format이 완전히 바뀌어서 새로 부임해 오신 ‘진짜 국산 수녀님’의 주도로 진행이 되고, ‘어쩌다’ 우리 부부도 ‘봉사자’로 ‘곁다리’를 들게 되어있어서 우리부부의 ‘교리실력’에도 많은 보탬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누가 알 것인가.. 어떻게 될는지.. 하지만 우리들의 ‘중재자’, 어머님께 모든 것들이 잘 되도록 부탁해 본다.

Two Poets

50대 초에 처음으로 시의 세계에 눈이 뜨이면서, ‘오래 살고 볼 것이다..’ 라는 생각도 할 정도로 나는 나의 ‘변신’에 놀라기만 했다. 소설이나 역사라면 조금 그렇다 할 지라도, ‘시’라면 나에게는 정말 hell no 였다. 이것과 비슷한 종류 중에는 opera가 또 있는데, 이것은 ‘아직도’ hell no 의 영역에 속한다.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오래 살고..’ 어쩌구.. 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기만 한다. 시의 세계는.. 한마디로 ‘상상의 여지’를 너무나 많이 주고 있어서 나에게 appeal하는 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우연히’ 서로 전혀 상관도 없고 반대편의 세계에 있는 두 시인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하나는 서울을 중심으로 만주 용정과 일본 등, ‘3개국’ 을 오가며 불운의 시기 일제강점기(나는 ‘일제시대’가 더 익숙하다)에 반항적이지만 서정적으로 포근한 시의 세계를 펼치고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연세대 동문 큰 선배님, 연희전문 출신 시인 윤동주 님, 다른 하나는 20세기 후반,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반대 쪽의 캐나다 출신, poet, novelist로 시작한, 하지만 folk singer song-writer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읊조리는 노래의 주인공 Leonard Cohen (한글 표기는 어떨까.. 아마 ‘레너드 코언‘, ‘레너드 코헨’ 정도가 아닐까? 나는 직감적으로 ‘레너드 코언’으로 육성 발음을 들었다.)가 바로 그들이다.

20대 윤동주 시인
20대 윤동주 시인

윤동주 시인은 사실 어렴풋이 익숙했던 이름이지만 (왜 그런지 잘 모름), 알고 보면 연희전문 출신이라는 것, 20대에 요절한 서정시인이라는 것, 그 이상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시인의 유일한 출판물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도 시인이 타계하고 3년이 훨씬 지난 1948년(내가 태어나던 해)에 ‘유작’으로 나왔고 1970년대 이후가 돼서야 다른 유작이 발행되었기에, 우리의 중,고교시절의 국어 교과서에서 못 보았던 이름이었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분이 숨어있는 보물인 모양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case는 몇 년 전, ‘불후의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님의 슬픈 일생을 나의 blog에서 회상했을 때도 있었다. 역시 늦게 ‘숨은 보물’을 찾는 그런 기분이 똑 같았다.

 이 두 시인들이 나에게 요새 다시 다가온 것은 조그만 이유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경우는, 윤 시인의 초기 대표 작 ‘별 헤는 밤‘을 통해서 왔다. 나는 정말 심심할라 치면 typing 연습, 그것도 한글typing연습을 ‘즐긴다’. 내 나이 또래의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빠른 속도를 자랑하지만 그만큼 ‘오타’도 피할 수가 없는데, 그 ‘오타’좀 줄여보려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시간 죽이는데 이것처럼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래아 한글 typing practice program으로 연습을 하는데, 그곳에 바로 예문으로 나오는 것 중에 ‘별 헤는 밤’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윤동주 시인 시의 세계가 나에게 왔는데, 웃기는 것은 얼마 전까지 나는 이 ‘글’이 보통의 시가 아니고 아주 짧은 ‘산문’인 줄로 착각을 하였다. 그만큼 나는 윤동주 시인을 잘 몰랐던 것일까? 이 글을 typing할 때마다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적막, 고요, 쓸쓸함, 천국의 어머님, 소백산 연화봉 하늘의 쏟아지던 별빛.. 등이 온통 나에게 지독한 감정의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옴을 느끼곤 하고 전율마저 느끼곤 하였다. 그것이 바로 윤동주 시의 세계였다.

 

singing poet, Leonard Cohen
singing poet, Leonard Cohen

레너드 코언.. 윤시인과는 은하계의 반대편에 있음직한 느낌을 주는 시인, 읊조리는 시인 가수.. 캐나다 사람, 1934년 생..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보다 17세가 ‘젊고’ 80세가 가까운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시인출신 가수는 아마도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인데 반해서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cult적인 존재로 사랑을 받는다.

그의 가창 style은 미국의 Bob Dylan 정도로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지만 시인출신인 만큼 아무래도 ‘가사’에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초일까, Ohio State University에서 만났던 연세대 후배 금속공학과 심상희씨가 그의 열렬한 fan이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 당시에 나는 사실 레너드 코언 을 잘 몰랐지만 그가 나에게 아느냐고 물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그때의 그의 표정이 코믹할 정도로 ‘냉소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당신 거짓말이지..’ 하는 그런 표정이었던 것이다.

심상희씨가 이 시인출신 가수에 심취했던 것은 나중에 조금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불교가 이유가 아니었을까. 심상희씨는 비록 그 당시 우리와 같이 성당에서 영세를 받긴 했지만 대학시절에는 불교에 심취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레너드 코언 도 알고 보면 불교에 심취했었고 1996년에는 ‘공인 승려’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 더 심취했었을지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이 시인가수지만 그 후에 세파에 휩쓸려 또다시 그의 세계를 잊고 살았다.

Leonard Cohen in 60's
Leonard Cohen in 60’s

며칠 전, New York Times 기사 중 에서 정말로 우연히 Leonard Cohen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도서관에 사서 librarian 로 근무하는 어떤 중년여성이 1975년경에 경험한 이야기로서 ‘레너드 코언과 지낸 어떤 밤’ 이란 제목의 회고수필이었다.

그 당시에 그 여성은 University of Chicago의 여대생이었는데 자기 친구와 같이 그의 concert에 갔었고, 공연 후에 근처 diner에서 식사를 하다가 Cohen의 band 일행과 우연히 마주쳤고, 호텔로 따라오라고 해서 갔다가 그와 한 침대에서 밤을 지낸 이야기였다. 이런 류의 여성들을 흔히 groupie라고 불렀는데, 이 두 여성은 사실 그런 류는 아니었고, Cohen역시 그런 류의 여성들과 ‘밤을 보내는’ 그런 type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주 ‘깨끗한 밤’을 셋이서 보낸 이야기였다.

이기사를 쓰면서 이 여성은 Cohen의 manager에게 편지를 보낸 모양이고 회답에 ‘흥미로운 추억’이라고 썼다고 한다. 거의 40년 전 몇 시간의 일이었으니 사실 아름답게도 느껴지는 추억일지도 모른다. 당시 불교에 심취했던 Cohen이 여대생들을 밤에 어떻게 대했을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게 해서 레너드 코언이 나에게 다가왔고 잠깐이나마, 오래 전에 알았던 Ohio State의 심상희씨와 그의 가족도 회상한 계기도 되었다.

 

캐나다 출신의 가수 중Gordon Lightfoot라는 folk singer가 있었다. 1970년대에 나는 꽤 그의 곡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특히 비 오는 우중충한 그런 날에 우중충한 ‘자취방’에 누워 ‘백일몽’을 꾸며 그의 곡을 듣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의 백미였다. 그는 레너드 코언보다 훨씬 더 대중적이라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들 모두 곡 자체보다는 ‘가사’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다.

어딘지 모르게 캐나다의 ‘춥지만 포근한’ 기분을 듬뿍 맡게 해 주는 진정한 folk singer들이었다. 모두들 이제는 classic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도대체 요새 ‘아해’의 ‘음악’은 그것이 과연 10년의 생존율이라도 있는 것인지.. 한마디로 이 분야는 솔직히 말해서 시대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Leonard CohenSuzanne

 

Neil DiamondSuzanne
나는 이 Neil Diamond version을 Leonard Cohen의 original보다 더 좋아한다

 

 
Judy Collins‘ rendition of Suzanne

 

 
Gordon LightfootEarly Morning Rain

 

 

A Day in the Life

Florida Keys
Florida Keys

¶  7월도 tipping point를 지나간다. 이제는 서서히 8월을 향해서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새의 한 달의 느낌은 예전의 일 주일 정도라고나 할까.. 어찌 그렇게 세월의 느낌은 나이의 느낌과 비슷할까.. Mother Nature의 축복을 흠뻑 받으며 올해의 여름은 기가 막히게도 시원하고 시원하다. 몇 년간의 갈증을 완전히 복수라도 하듯이 엄청 많은 ‘물’을 쏟아 주셨고,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머지 여름, 기껏해야 한달 반.. 암만 더워도 달게 받으리라. 그러다 생각하니 그렇게 많이들 가는 여름휴가.. 이제는 ‘휴가’라는 말 조차 잊은 것일까. 연숙도 다 잊은 모양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 자체가 summer house같이 느끼는 것일까? 집에 있는 자체가 summer vacation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편하게 느끼면 되지 않을까?

올해는 잠시 잠시, 미국의 ‘최남단’ Florida Key West와, Hemingway의 소설이야기를 향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고 집을 떠날까 하는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학교 때 영화로 보았던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등을 최근에 다시 보게 되면서 더 그곳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속에서만 머문 것이 되나 보다.. 그렇게 올해의 여름도 끝날 것인가?

 

 ¶  이동수 목사.. 이동수 선생, 어떨 때는 형제와 같이도 느껴지는 사람.. 하지만 꿈속에서나 보는 느낌으로 오랜 세월을 못 보고 지낸 그런 사람, 어제는 우리 부부가 정말 오랜만에 꿈에서 깨듯이 그 집을 방문해서 부인, 이미섭 선생이 정성스레 마련한 ‘일식’ 점심을 같이 하며 해후를 풀었다. 한마디로 ‘은혜로운’ 몇 시간을 우리들은 만끽하였다.

골방에서 거미줄을 치우며 조금씩 빛을 향해 개미행진을 시작한 지 2년여가 되어가지만 아직도 나는 그 개미행군을 계속하는 느낌이다. 1990년 초,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온 후 시작한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우리부부와 그 집 부부는 같은 선생님으로 만났고 그것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서 우리들은 ‘인연’이 생기게 되었는데 교장문제 같은 하찮은 ‘정치싸움’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휘말리고 결과적으로 다 그곳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 사실 우리 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생사 여부나 간신히 알 정도로 지내게 되었는데 얼마 전 연숙이 정말 우연히 이동수 목사를 보게 되었고 어제는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의 ‘지인’에 속하는 이동수 목사.. 이렇게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이제는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세상에는 100%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  몇 년 전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얻어온 선교용 CD를 조심스레 rip해서 youtube에 올려 놓았다. youtube 를 배우려 한 목적도 있었지만 내가 들어 본 그 CD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것이라 아주 professional한 것이라 나도 다시 들은 것도 많은 수준 급이어서 혹시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인기’가 있을 것은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고, 사실 그랬다. 불과 200 views도 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문제가 되는가.. 단 한 명이라도 ‘무언가’ 느끼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toxic comments에 있음을 오늘까지 몰랐다.. stupid, toxic, absurd, destructive comments..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시간을 죽이는 한가한 인간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comment review & approval을 해야 하는데..하는 후회가 있었지만 늦었다. 어떤 ‘불쌍한 자매님’이 불쌍한 comment를 달아놓았다.

‘교황은 지옥에 있다’라고 시작된 이 Kafka-ish한 느낌은 정말 어찌 처리하는가.. 속으로는 ‘지옥은 당신들… 당신이나 잘하시오..’ 하는 감정도 잠시 치솟지만 그래도 나는 레지오(마리애)의 정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곧바로 평정을 가다듬고 이 불쌍한 영혼을 위한 기도가 생각나면서 ‘아하.. 이래서 우리 레지오가 세상에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불쌍하고 무식한 영혼들이 많이 있구나.. 하지만 무식해도 바르고 깨끗한 영혼들도 많이 있는데..

 

¶  Coursera: 약 6주전에 성당교우 설재규씨가 이곳, online university course website, coursera.org를 소개해 주었다. 이곳은 전 세계(주로 미국)의 여러 대학 online course들을 online student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비교적 새로운 academic course provider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computer로 강의를 듣게 하는 idea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다양하고 세계 굴지의 교육기관 (주로 미국의 대학들)의 course들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각 대학들은 이미 자체 방식대로 그 동안 credit course들을 ‘유료’로 제공을 해 왔지만 이 coursera.org는 ‘기본적으로’ ‘무료’인 것이다. course를 제공하는 학교들과 이것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coursera 는 어떻게 무료를 가능케 한 것일까? 특별한 ‘광고’들이 보이지 않기에 광고수입은 관계가 되지 않는데,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이 course들의 학생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이것 자체가 각 대학들을 ‘선전’하는 금전적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Open & Free가 새로운 문화로 정착하는 이즈음, 이것도 그런 맥락에서 절대로 이해가 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주간 나는 University of Rochester에서 제공하는 Fundamentals of Audio & Music Engineering : Part 1 Musical Sound & Electronics란 ‘거창한’ 제목의 course를 ‘경청’하려고 노력을 해 보았다. 학교 강의실이 아니고 편한 집의 cushy한 환경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oxymoronic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나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 course로 나의 성적표 기록이 남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이제 취직을 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재미와 보람’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 sound & music course를 택한 것은 내가 이곳을 처음 찾던 날 ‘개강’을 한 것이 제일 큰 이유였지만, course description에 final project로 guitar amplifier를 설계, 조립을 한다는 것이 귀가 솔깃해진 것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요사이 나는 야마하 ‘통(acoustic)기타’를 guitar pickup과 Beringer amplifier, buzz pedal을 연결해서 쓰는 중이어서 이런 분야에 관심을 둔 것도 또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 중에는, calculus를 포함한 대학 level 수학을 정말로 많이 잊어 버렸다는 것.. 학교를 떠난 후 이 ‘이론적 수학’을 써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변명만 찾기에 나는 급급하고 있을 정도로 사실 당황을 하였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 때문일 것이다. 전기공학과 2학년 수준의 AC circuit analysis도 많이 잊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생애 전공’이 거의 digital, microcontroller, embedded software였으니, 그 쪽은 정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너무나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리움 같은 것도 느껴서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다.

My current & upcoming courses from Cours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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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뒤에는 다음 course, Introduction to Guitar가 시작이 되는데, 사실 이것을 ‘청강’해 보려는 것은 과연 진짜 pro들은 어떻게 guitar를 치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course의 설명을 읽어보면 ‘아마도’ 기타를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 같아서 시간 낭비가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되지만 무슨 상관.. Free & Open이 아닌가? 3주 뒤에는 올해 나의 진짜 관심사, 이스라엘의 대학에서 제공하는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인데, 소개 video를 보면 정말 어떤 각도로 ‘인간역사’를 조명하는가가 궁금해진다. 나의 다른 희망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지만 어떨지 모른다.

 

 
A Day in the Life, Beatles, 1967

 

 

 

Guest Blog: 김인호의 조갑제 컬럼 2

시대사조(時代思潮) 탁류에서 우리의 선택은..

2013.07.15

시대사조(時代思潮) 탁류에서 우리의 선택은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는 원자레벨 이하에서는 확정적 질서가 아닌 다만 하나의 패턴을 갖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관계는 단지 확률로서만 얘기될 수 있다고 전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선의의 거짓말(a good lie)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쓰이곤 한다.

사람에 따라서 거짓말은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기에 선의의 거짓말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유익을 가져오거나 적어도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한 거짓말이라도 선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거짓과 거짓말을 전략・전술수단으로 활용하여 인간이 지닌 이해력과 판단력은 물론 양심을 마비시켜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옳음과 그름에 대한 인식을 헷갈리게 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구현시키려고까지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을 놓고,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상대주의(relativism)와 각자마다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다원주의(pluralism)가 현대를 풍미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거짓과 거짓말을 전술적・예술적으로 구사해 온 공산권은 이미 망하는 길로 접어든 북한만 남겨두고 모두 망했거나 사라진 사실을 역사는 생생하게 전해준다.

 거짓과 거짓말 이외에도 동성애, 사형제도폐지, 안락사, 낙태, 피임, 수간 등등에 대해서도 서로 상충되는 무수히 많은 주의주장들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다.

 상대주의 하에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없다며 모든 게 다 수용되게 되다 보니 서로 상충․모순 된 것들도 동시에 공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상대주의가 지향하는 상호이해(相互理解)에 의한 공존(共存)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게 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오히려 이견(異見)과 반목(反目)과 투쟁(鬪爭)과 전쟁(戰爭)을 불가피하게 만들 수 있다.

 

Guest Blog: 김인호의 조갑제 컬럼 1

하늘이여! 이 땅에 인재들을 보내소서!

2013.07.11

국익(國益)과 애국심(愛國心)이란 말을 우리들이 아닌 오히려 탈북동포로부터 듣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십 수년 전 영국 쉐필드(Sheffield)에 있는 한 단조(鍛造)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노후해 보이는 공장시설과 주로 수동(手動)으로 이루어지는 원시적인 작업방법을 보면서, 국내의 현대화된 공장과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생산시설 등을 주로 보아온 필자에게 은근히 자긍심이 솟았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의 주 생산품이 우주항공물체의 머리 부분에 들어가는 특수재질의 특수부품이며 그 납품처가 NASA라며 세계에서 자기네만이 만들 수 있다는 득의에 찬 설명을 접하는 순간 약간의 외경심이 솟으며 산업기술력(産業技術力)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새삼 되새겨본 기억이 난다.  

  25여 년 전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기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배스또로스(Vstors)라는 곳의 한 핵연료가공(nuclear fabrication)공장을 어렵게 방문한 적이 있었다. 경계가 엄한 핵단지(核團地)인 그곳에서의 인상은 대단히 평화스러워 보였지만 장미열매를 익혀서 먹는다며 자기고장의 특징을 유창한 영어로 설명해 주던 건장한 체구의 공장장은 대단히 거만하고 교만해 보였다. 핵연료 가공시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던 당시 비(非) 엔지니어인 필자가 던지는 우문(愚問)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받는 자가 아닌 주는 자의 입장에서 내보이던 여유로운 태도에서 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사실 스웨덴은 900만 명 정도의 조그마한 나라이면서도 노벨상(Nobel Prize)을 주는 나라다. 주는 자리와 받는 처지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은 그네들의 산업에서도 당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동차, 전기통신, 원자력발전, 항공사, 기관차 부문에서 Volvo, Saab, Ericsson, ASEA, SAS 등 유수의 세계적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당시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있지만. 

 

  십여 년 전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철강 엔지니어링회사 Voestalpine 를 방문해서 그네들이 자랑하는 연구진의 연구결과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연구진들은 나이가 꽤 듬직한 기술자들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도 어리고 화장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젊은 여성 엔지니어들이 상당수였던 사실에 오스트리아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일면 깨달았던 기억이 새롭다.

  시드니(Sydney)의 해수욕장이나 몰디브(Maldives)의 고도(孤島), 태국 파타야(Pataya)해변, 필리핀 보라카이(Boracay)해변 등의 요지에 의례 있기 마련인 스위스인 소유의 별장이나 빌라를 보면서 문득 커피 한 톨 생산되지 않는 나라가 향(香)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역량을 지닌 스위스의 저력이 연상되었던 적도 있었다. 사실 스위스의 저력은 국토면적이 우리의 반(半)도 안 되며 인구는 1/6이 안되면서도 2012년 현재 Fortune 글로벌 500대기업에 우리보다 2개사가 더 많은 15개가 속해 있는 데서도 확연히 들어난다.

  전 세계 많은 당뇨환자들이 맞고 있는 인슐린(insulin) 주사약은 양돈(養豚)국인 덴마크에서 생산되어 미국의 제약회사를 통해 공급함으로써 고(高)부가를 이룬다는 사실은 2011년 덴마크의 1인당 국민소득 4만 불선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특수강(特殊鋼)하면 당연히 독일 회사이려니 생각했던 필자에게 한 독일인 기술자가 특수강은 누가 뭐래도 이태리 밀란(Milan)의 다니엘리(Danielli)라며, 섬유 패션을 비롯한 전문성의 원천이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인의 후손(後孫)이라는 그네들의 자부심과 무관하지 않음도 상기시켜 주었던 적이 있다.

  유럽의 대학교 하면 제일 먼저 Oxford, Cambridge 등을 떠 올리지만 영국의 Cranfield, 네델란드의 Erasmus, 스위스의 St. Gallen, 이태리의 Bocconi 등이 굉장한 경쟁력을 지닌 학교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호주의 소젖을 덴마크의 기술로 가공 처리하여 동남아 시장에서 판매하는 우유 사업주는 대만인 화교다.

  한국은 대(大)국도, 소(小)국도 아닌 중간 정도 국가로 작년(2012)에 50-20 (인구 5천만 일인당 소득 2만 불) 클럽에 진입한 세계 7번째 국가로 선진국(developed country)으로 불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G2를 자처하는 중국은 힘을 바탕으로 역사왜곡(歷史歪曲)을 통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고 있으며 또 떼거리로 서해를 유린하면서 이어도(離於島)도 들먹이고 있고 한편 일본은 독도(獨島)의 영토관할권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그들의 패권을 신장시키려 하고 있다.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체제세습의 북한은 핵(核)놀이를 통해 까놓고 우리의 생존을 본격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자, 이들 틈바구니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한 강한 힘을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지금 우리는 글로벌 대(大)격변의 어려움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지속번영을 추구하려는 국가수호(國家守護)애국세력과 오직 지역(地域)과 이념(理念)과 과거(過去)를 붙들고 늘어지는 국가부정(國家否定)무리들, 반(反)국가세력들로 대단히 혼란스럽다.

  군복무 10년간 휴가 한번도 못나오는 군대를 오직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가려 해도 키 147cm, 체중 35kg이 못돼서 군대에도 못가는 북한의 그 수많은 피골이 상접한 젊은이들을 보면서도, 심지어는 몇 십, 몇 백만의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그런 곳을 그렇게도 향모 하는 반(反)국가무리들의 광란은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심각한 수준에 다 달은 느낌이다.

  국익(國益)과 애국심(愛國心)이란 말을 우리들이 아닌 오히려 탈북동포로부터 듣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이런 절박함 속에서 지역・세대・계층 간 대립(對立)대신에 화합(和合)과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며 우리의 강함을 과거(過去)가 아닌 미래(未來)에서 찾고 반(反)국가세력에 대한 정화(淨化)・순화(醇化)를 도모하면서 국력을 응집시켜 대한민국을 선(善)하고 강(强)한 나라로 키워갈 국가경영 지도자와 그를 보필할 참으로 깨끗한 인재들이 과연 이 땅에는 없는 것일까?

  하늘이여! 당신 뜻을 경외(敬畏)하며 따르는 의(義)롭고 깨끗한 지혜로운 인재들을 이 땅에 보내소서!

 

글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

 

 

17세의 생애, viewing과 연도

김민호 프란치스코, 17세의 소년.. 어떻게 그런 100% 희망의 나이에 우리들의 곁을 떠날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우리의 머리 속을 완전히 지배하던 어제였다. 3일 전, 요사이 뜸하던 ‘위중한 환자기도’의 소식에 우리들은 ‘서서히’ 환자기도를 시작했지만 너무나 빠른 ‘병의 진행’으로 그제에는 신부님의 병자성사가 필요할 정도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고 어제 아침에 그 17세의 소년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병명은 역시 ‘암’의 일종인 ‘투명세포육종’이라는 희귀한 것이었다.

레지오 입단 3년이 다가오는 나는 그 동안 많은 죽음을 보았고 연도, 장례미사를 하였지만, 이렇게 ‘누구나’ 100% ‘언젠가’ 거쳐야 하는 ‘과정’은 정말 100% 모두 다른 사연과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평균’ 수명을 다 채우시고 떠나는 분들은 비록 다행인 case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 수명 동안 겪은 수많은 사람들, 경험들과 이별을 하는 고통이 따르고, 반대로 이번의 17세 소년의 case는 평균적인 인연과 경험을 못 보고 떠나 보내야 하는 슬픔의 고통이 따른다. 역시 이것도 공평하다고 할까.

이럴 때는 어떤 말로 유족들을 위로해야 할까.. 그저 간단하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는 너무나 형식적인 것일까?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겁니다.’ 는 사실 맞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조금 오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래도 나는 그 애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는 반응이 나온다면 분명히 그 말은 그 부모를 더 슬프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hug이나 눈의 맞춤으로 슬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좋지 않을까. 또한 이럴 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장례의식 중, ‘연도’임을 어제 또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들 전에 이미 떠난 그 수많은 성인의 이름을 열창하며 17세 소년을 받아 주시라는 기도는 듣거나 참가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그 의미나 느낌을 모를 것이다.

 

장례미사를 다녀와서..

모처럼 하늘의 습기가 가신 후, 청명한 날씨가 된 오늘 정오에 고인 김군의 부모가 속한 본당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성당’ 에서 장례미사가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당을 꽉 채운 가운데 치러졌다. 부모님이 성당 공동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어떤 조문객이 올지 나에게는 미지수였지만, 어제 viewing에 온 상당한 숫자의 ‘미국 친구’들을 보고 아마도 반 수 이상이 ‘영어권’ 일 것이라 짐작을 하긴 했다. 나의 짐작은 맞았지만 결과적으로 ‘영어권’ 조객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석을 했다.

성당 parking lot에 아틀란타의 ABC-TV affiliate(계열방송사)인 Channel-2의 crew van이 있었고 camera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고, 대강 이 김민호군의 됨됨이를 짐작하게 되었다. 이태리 계통인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아직도 영어권 문화가 서먹하신지 전례해설자에게 모든 ‘영어 소통’을 의뢰하신 모양으로 대부분의 ‘영어권 친구 친지’들은 소수의 ‘한국어’ 권 신자들을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로마 가톨릭 식의 미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조금 다른 식의 미사도 사실 큰 무리가 없음을 이번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톨릭 전례는 한마디로 universal한 것으로 같이 동참하여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미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고인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과연 김민호 프란치스코 군이 어떤 인물인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성전을 꽉 메운 그들을 보면 그것을 짐작하기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의 성품, 추억, 행적을 간접적으로 그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eulogy)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게 해 주었다. 김민호, Nicklaus, Francis군, 그는 한마디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17세였다. 한국적인 예절이 몸에 배인 것도 그렇고, 모든 일을 착실히 최선을 다하던 그였고, 그렇다고 해서 ‘지루한 공부벌레’도 아닌 유머감각이 있던 정말 크게 인생을 살 수 있을, 무언가 큰 업적이라도 낼 듯한 잠재력을 지녔던 고교생 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그 조사를 통해서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심정은, 주위의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그가 지금 ‘육체적, 물리적’으로 우리들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운명 직전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I love you all..이란 말을 남겼다는 것으로 그는 사랑이 충만한 한 고귀한 젊은 영혼이었음도 알게 해 주었다.

김군을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가게 한 직접적인 원인, ‘투명세포육종(Clear Cell Sarcoma)’ 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암, 이 비교적 희귀한 병은 그렇게 치유 율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왜 이병에 걸렸으며 왜 그렇게 1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 영역에 속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만 절감하게 된다.

생각한다. 아니 이제는 믿는다. 김민호 군의 ‘불멸의 영혼’은 지금 괴로웠던 육신을 떠나 (미사 후 곧바로 화장이 되었다) ‘훨훨’ 하느님의 영역에 돌아갔거나 돌아가고 있고 아마도 장례미사를 하는 우리들을 미소 머금은 모습과 마음으로 보고 있으며, 괴로워 할 가족들을 보며 위로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제는 믿는다.

Holy Family 40th Anniversary

 

 

Dear Father in Heaven,

As we celebrate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our parish, we thank you for the gifts that you have given us. Most importantly, thank you for the gift of love that brings so many people from such different backgrounds together as one family.

Please help us to learn by your Son’s example to continue to love and care for one another so that we may grow and welcome others into our Holy Family.

We ask this in Your sweet name,

Amen

 

Holy Family statue
Holy Family statue

오늘 2013년 7월 10일은 우리가족의 제1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가 본당 창립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여 저녁에는 ‘성대한’ 기념 미사와 행사가 열린다. 우리 가족이 이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제 거의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 집에서 불과 5마일인 관계로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parish가 된다.

원래 거의 30마일 떨어진 도라빌(Doraville) 한국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이 우리의 본당이었지만 1990년대 초에 그곳에서 벌어지고 목격이 된 ‘기가 막히는’ 사건들에 식상을 하고 완전히 주저앉아 (냉담) 버렸다. 그 당시 대신 가까운 미국 본당에라도 나가야 했었지만 최소한 나에겐 그렇게 해야 할 절심함과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애써’ 얻은 신앙을 거의 무시하며 살 태세였고, 속수무책, 수수방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지금 생각을 하면,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서 의견을 달리했고 최소한 영세를 받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돕지도 않았지만, 반대도 안 했다. 완전히 나는 ‘교회 business’에서 손을 땐 듯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연숙이 미국 본당 Holy Family 성당을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위기감을 느낀 연숙이 집 부근을 뒤지며 찾아 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같이 googling의 혜택도 그 때는 기대 못하던 때였으니까…

행동이 빠른 연숙은 곧바로 아이들의 신앙 절차를 ‘최소한’ 빠지지 않게 주말 미사엘 (나를 제외하고) 나가기 시작하고 작은 애 나라니의 첫영성체, 두 아이의 견진성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 때 나는 ‘돈 버는 가장’의 핑계로 간신히 C&E (Christmas & Easter) 신자로 위태로운 신앙생활로 일관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Holy Family 성당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나의 ‘완전한 본당’이 되었다. 10년 이상의 냉담을 깨고 그곳에서 Pastor, Father Edward Thein께 고백성사를 보고 최소한 Sunday Catholic 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사실 가족들과 미사를 가더라도 나만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 때가 참 괴로웠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은 명실공히 우리 가족의 ‘안정하고 안전한’ 신앙의 피난처가 되어갔다. 덕분에 영어미사와 미국인 미사 문화도 많이 익숙하게 되고 미국 천주교와 그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나는 더욱 자신을 가지고 ‘진짜 본당’인 한국 순교자 성당으로 조금씩 더 관심을 두고 그곳으로 향한 먼 여정의 길을 2011년 가을 그곳 소속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함으로써 디디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미국본당에서 여러 해 받은 경험들이 씨앗이 되었다.

미국 천주교가 지금 경험하고 겪고 있는 시련들, 이곳에서 고스란히 보고 느낀다. 유럽계 가톨릭 세력의 수축과 히스패닉 계열의 급 성장, 아시아 계의 ‘가톨릭 역수출’ 등등으로 사실 미국 천주교의 입장은 무슨 큰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빨리 오는 듯 하다. 특히 연방정부의 급속한 교회간섭 정책, 대법원의 동성결혼 ‘묵인’ 등은 1970년대 초의 낙태 합법판결의 파장을 훨씬 웃도는 그런 위기감을 주고 있어서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으로의 사목정책의 중요성은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나와 연숙은 작년 사순절을 계기로 이곳 미국본당의 ‘매일 미사’를 참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일년이 훨씬 넘게 실행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이 ‘쾌거’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 졌는가.. 암만 생각해도 나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안 보이는 ‘힘과 손’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만 되 뇌일 수 있을 뿐이다.

Holy Family 성당과 사제관
Holy Family 성당(left)과 사제관

이곳 미국 본당도 미국 천주교를 반영하듯 Irish, Polish로 대표되는 ‘급속히 쇠퇴하는’ 유럽계 가톨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새로운 ‘피’는 역시 ‘다른 곳: 히스패닉, 브라질’로 대표되는 중남미계열과 열기가 느껴지는 아프리카 대륙, 뜻밖의 복병 아시아의 월남(베트남), 필리핀, 한국의 신자들이 그 고령화를 상쇄하듯 메우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white-power가 이곳에서도 역시 퇴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미사를 가는 덕분에 이곳의 regulars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정신자들, 열심한 신자들인 것이다. 역시 여자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이것은 절대로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신자의 숫자 (남자에 비해서)에 나는 처음엔 ‘그게 정상이다’라고 일축했지만 지금은 사실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보기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자랑스럽던 남성 동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생명의 불멸성을 이미 알고 태어났단 말인가?

 우리가족은 비록 이렇게 두 본당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생활 그 나름대로 장점과 특징도 없지 않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많은 가톨릭 한인신자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많을 듯 하다. 20여 년 전에 유일한 한인공동체였던 순교자 성당이 ‘90% 이상 망가졌을 때’, 우리는 choice가 별로 없었다. 계속 나갈 것인가.. 아니면 냉담을 할 것인가..

나와 같이 간이 큰지 못한 인간들은 가장 쉬운 방법, 냉담을 택했을 것이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택했다. ‘분열’의 참담한 파괴 성을 그때 절감을 했지만, 나의 평화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그때 backup shelter(다른 본당)가 있었으면 100% 냉담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다 역사가 되었다.

 Holy Family 성당은 현재 우리가 사는 East Cobb county에 많은 ‘비교적 안정된’ 한인들의 비공식 피난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30분 drive거리에 있는 한인 순교자 성당이 조금 멀다 싶으면 10분 거리의 이곳이 항상 우리를 맞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사람들도 익숙해지고, 정도 많이 들었다. 고정적(regular)인 한인 교우들, 물론 여기도 대부분 젊은 자매님들이지만 그들과도 많이 얼굴도 익숙해져서 진정한 ‘영혼의 고향’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혹시라도 안 보이는 얼굴이 있으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와 연숙에게 이 Holy Family CC는 신앙의 징검다리 역할을 많이 해주었고, 계속 해 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우리가 도라빌 한인 순교자 성당에 더 많이 개입이 되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것은 정말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기에 더욱 ‘맡기고’ 살기로 했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4

울란바토르와 연변 체험에서 얻어진 메시지는?

2013.07.10

거짓과 거짓말은 불완전한 인간이 지닌 악한 심성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로 악함을 누르고 선한 쪽이 이기도록 갈고 닦으면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에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명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2007년 몽골국제대학(MIU)에서 여름계절 학기에 경영학을 지원해 달란다는 요청을 받고, 필자와 집사람이 경영전략과 기업윤리를 커버하는 과목을 공동으로 맡고 미국CPA 소지자로 회계학 전공의 경영학 박사인 필자 후배가 국제경영을 맡아, 집중강의로 진행되는 특별학사(學事)프로그램을 위해 울란바토르에 3주간 체류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몽고음식이 입에 맞질 않아 우린 비교적 자주 한식식당엘 가곤 했는데 당시 한국관광객이 많았던 탓이었는지 그곳에 의외로 한국식당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단골식당에서 식사하던 어느 날 15여명의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밀어 닥쳤다. 그 식당에는 이런 단체손님 때문이었는지 평소 때에도 홀 서비스를 맡고 있는 몽고아가씨 종업원들이 10여명 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날 한참 주문을 받느라 씨끌 뻑정했는데 주문이 끝나고 얼마 지나 음식이 나오자 또 한번 난리가 난 듯 큰소리도 나고 고함소리도 터지고, 식당주인 아주머니가 연방 미안하다며 주문한 손님들의 성질을 누구려 뜨리려 애쓰고 있었다.

필자는 어인 일인가 흥미롭기도 해서 가만히 그 소동을 지켜보았다. 소동은 손님 몇 사람이 당초 주문 내용을 바꾸는 바람에 주문 받은 몽고 아가씨가 얼떨떨해져서 주문한대로 음식이 안 나오고 딴 게 뒤죽박죽 나오다 보니 모처럼 여행 중에 특별히 먹고 싶었던 기대가 깨지는 바람에 손님들의 불평이 터졌던 것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손님들이 빠져나간 다음 필자가 그 여자주인에게 왜 그런 실수가 일어나느냐니까 이런 경우가 여기서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단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2007년 당시 몽고사람들은 어른이건 애들이건 머리회전(回轉)훈련이 별로 되어 있질 않아서 국내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도 하는 머리 회전이 여기서는 제대로 안 된단다. 그래서 자기도 처음엔 몽고 종업원들이 국내와 같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여러 번 낭패를 보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시킨 것은 시킨 대로 아주 잘 하는데, 한번만 변경하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이 헷갈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몽고인들이 대체로 센스가 약하고 집중력이 덜하면서도 정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15년 가까이 그곳에 살면서 느낀다는 여주인의 설명이었다.

 

정직(正直)이라는 말이 나오니, 필자 후배교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심사 중에 있었던 일이라며 들려주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구두(口頭)심사 때 한 심사위원이 던진 질문에 잘 모르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둘러대고 있는데 갑자기 ‘너, 거짓말쟁이(You are a liar)!’ 하며 고함치더란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박사학위는 이제 물 건너가는구나 생각하며, 지체 없이 잘못을 인정했더니만 ‘그래, 자네 이게 정직한 거야’ 하더란 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박사학위를 받고 상당 시간이 흘렀어도 그때의 그 경험은 그의 일상에서 늘 정직하자는 것이 생활신조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향수(鄕愁), nostalgia..

nostalgia, 노스탤지어1, 향수(鄕愁).. 사전2을 보면 이것의 뜻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정도가 된다. 그렇게 힘든 뜻이 절대로 아닌 것이 누구나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가 ‘애독’하는 New York Times, the 신문에 ‘향수, nostalgia에도 과연 바람직한 것이 있는가?‘ 란 제목의 기사가 나의 눈을 끌었다. 이 제목을 보면 우선 향수란 것은 원래 ‘바람직하지 않은 것’ 으로 암시가 되어있고 그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향수, nostalgia란 용어는 의학적인 것도 있어서, 이것은 분명히 disorder (장애 障碍) 에 속하고 따라서 그에 따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의 어원은 ‘망향심 望鄕心’의 그리스어 nostos와 고통이라는 뜻의 algos가 합성된 말로서 17세기 어떤 스위스 의사가 ‘전쟁 중에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군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병’ 을 뜻하는 말로 시작이 되었다고 했고, 이후로 이 ‘병’은 부정적인 뜻으로 이해되고 쓰이고 있다.

향수(병) 연구 Constantine Sedikides
향수(병) 연구
Constantine Sedikides

이 기사의 ‘주인공’은 영국에 사는 그리스(희랍)계 (사회)심리학 교수 콘스탄틴 세디키데스 (Constantine Sedikides, University of Southampton, U.K., Ph.D Ohio State University, 1988) 인데, 그리스에서 대학을 졸업, 곧바로 미국 유학으로 사회심리학으로 연구를 계속, 현재는 영국의 University of Southampton에 재직하고 있는 사회심리학계의 권위자이다. 이런 배경이면 젊었던 시절을 포함해서 고향을 두 번씩이나 떠난 셈이고, 고향의 그리움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사회심리학적으로 파헤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날 고향 생각에 빠진 그를 보고 주위에서는 ‘우울증’으로 우려를 했지만, 그는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고 그가 느낀 것은 ‘고통적, 병적’인 것이 아닌 ‘포근함, 심지어 즐거움’에 가까운 것들이었고, 과연 고향과 지나온 과거가 앞으로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향수(병)이라 것은 꼭 부정적인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과연 향수(병)이 과거에 짓눌려 살아야 하는 고통인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사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주인공 자신의 느낌으로 출발된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학문적, 통계적’으로 10년 이상 연구가 되어서 그 결실을 맺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그가 이런 향수(병)에 걸렸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이런 향수적 감정은 내 존재의 뿌리와 연속성을 느끼게 해 주고, 내 자신과 주변과의 관계도 긍정적으로 보게 해 주었으며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였는데.. 과연 나만 그런 것일까.. 하는 선에서 출발을 했다고 한다. 연구의 결과는 그가 느낀 그대로였다. 그 골자는:

향수적 감정은 고독과 지루함, 불안함과 맞서 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자신을 더 관대하고, 포용적이고 더욱 참게하며 특히 부부들은 공통된 향수, 기억 감정을 나누며 더욱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 이 감정은 글자 그대로 우리를 훈훈하게 해 준다. 물론 고통스럽던 기억도 동반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이 향수감정은 우리의 인생을 더 의미 있게 보게 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도 덜 무섭게 느끼게 한다.

 이 향수(병)이란 것은 지역적, 연령적 차이가 거의 없이 또한 생각보다 더욱 자주 겪게 된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예전, 특히 19, 20세기에는 이 감정(‘병’)이 실향민,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겪는 ‘이상 증세’라고 분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결과로는 이것은 ‘누구나’ 겪는 훨씬 보편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친구, 가족, 명절 휴일들, 결혼, 노래, 석양, 호수.. 등등의 추억으로 더욱 나타나고 특히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은 항상 ‘좋은 주인공’의 역할을 했다고 기억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이상 이런 경험을 하고, 거의 반수 이상이 일주일에 3~4번 겪는다고 한다. 특히 고독을 겪는 사람이 더 자주 겪는데, ‘향수 감정’이 그런 고독과 우울의 고통을 덜어 주며 그런 데서 빨리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로 향수가 그렇게 ‘좋은 면’도 있다면, 이것을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가장 빠른 방법 중에는 추억의 음악을 듣는 것이 있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하며 정말로 이 ‘추억의 음악’ 효과는 대단해서 실제로 몸 자체가 따뜻해 진다고 한다. 간혹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인생의 연속성’이 끊어지는 위험도 없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 오히려 과거와 현재,미래를 더욱 더 연결시켜주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연구 팀의 일원인 Dr. Routledge는 “향수 감정은 우리의 ‘실존 감’에 탁월한 도움을 준다. 내가 아끼는 귀중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그것이 우리가 의미 있는 생을 보내는 값진 한 사람 임도 일깨워 준다. 또한 많은 향수 감정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감정도 잘 처리한다.” 고 보고를 했다.

 다른 흥미로운 것은 이 ‘향수 감정’의 빈도나 심도는 젊은이에게 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떨어지다가 다시 올라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젊은이들의 경우,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그 이전의 시절을 회상, 음미하며 건강한 변화를 추구하며, 가족과 보냈던 크리스마스, 애완 동물과 학교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이럴 때 바람직한 것은 좋은 추억거리가 많을 수록 좋고, 이것은 거꾸로 살아가며 좋은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향수 감정을 잘 ‘이용’하려면, 가급적 기억 속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를 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한다. 그 대신, ‘존재적인 방법’으로 그 때의 일들이 나의 현재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도 극단적인 것만 피하면 ‘추억 향수의 감정’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병적인 노이로제나 극단적 성향만 없다면 이런 향수적 감정은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 일주일에 2~3번 정도 빠지는 것도 좋고, 이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번 값진 상품이라는 것도 기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며 나는 또 한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몇 년 전에 이런 ‘we didn’t know then..‘ 류의 ‘연구 보고기사’ 중에 ‘내성적인 사람들의 시대’ 란 조금 걸맞지 않은 제목도 있었고 나는 ‘신나게, 열심히’ 읽었다. 내가 내성적인 사람 중의 ‘대표’이기에 그랬을까? 생각보다 더 많았던 ‘동료 내성적 인간’들을 알고 흐뭇해 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내성의 장점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회 심리학’적인 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지역간에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런 변화는 큰 것이 못 된다. 한마디로 인간은 대개 ‘공평’하다고 할까.. 그런 보편적 경험적 진리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면 지금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이것도 ‘안도감’이었다. 일방적인 사회적 압박에 못 이겨 ‘나는 향수 감정 같은 것 별로 없다’ 하며 살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과거에 매달리는 ‘현재가 불행한 한심한 인간’이란 딱지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이 말하면, 나는 위의 연구 결과에 있듯이 일 주일에 몇 번씩이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어떨 때는 즐기고 산다. 그렇다고 나의 현재가 과거에 비해서 덜 행복하거나 심지어 비참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연구 보고와 같이 나는 조금 우울해지면 ‘일부러, 자연적으로’ 향수 감정을 이용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 자신 성격의 일부가 된 것 같다. 그런 ‘추억적 행복’도 없다면 아마도 위의 연구결과에도 있듯이 괴로운 감정을 더 느끼며 살았는지 누가 알랴?

 그러면서 나의 blog을 찬찬히 뒤돌아 보면, 역시 나는 ‘과거의 좋은 추억’들을 적극적으로 총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현재를 더 의미 있게 ‘견디는’ 영양제가 된 것일까? 주변의 어떤 ‘골프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친지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왜 과거에 집착을 하느냐?‘ 라는 간단한 반응이다. 과연 그는 그의 ‘아름다운 추억’을 즐기지 않는 것일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는 조금 평균이상으로 ‘향수 감정’을 겪고 있고, 그것으로 나의 ‘아픔’을 잊으며, 그것이 현재를 더 건강하게 살고 미래를 준비하는 원천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 어차피 원어 발음이 힘들면 간단하게 그냥 노스탈자 하면 더 좋지 않을까?
  2. 네이버 사전

Gutters down..up

ladder & gutter time!

ladder & gutter time!

우리 집의 지붕에는 거의 대부분의 다른 가정집처럼 지붕에 떨어지는 빗물을 안전하게 땅으로 내려 보내는 rain gutter가 있다. 이것을 한글로 무엇이라고 했는지 금새 생각이 나지를 않지만 추측에 아마도 ‘물받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gutter하면 시궁창의 또랑 같은 기분의 조금은 ‘더러운 하수로’ 정도의 느낌이 있지만 지붕에 있는 gutter는 사실 그 중에서 제일 깨끗한 지붕에서 흘러 내려오는 빗물을 받아서 한 곳으로 모아 spout(대롱)을 통해서 땅으로 ‘안전하게’ 내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것들은, 집을 사면서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내다가 이사 온 후 몇 년 후 어느 날 우연히 녹 쓸어가는 것과 구멍이 뚫려서 비가 새는 것을 목격을 하였다. 집을 살 당시 (1992년), 그런 것까지 자세히 못 본 것이 나의 실수였지만 때는 늦었다. 자세히 보니 gutter전체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녹이 쓸어가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비교적 ‘젊은’ 나이였고 무언가 ‘고치는 것’을 즐겨 했던 나는 ‘내가 한번 고쳐보자’ 하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한창 붐을 일으키면 승승장구 확장하던 Home Depot엘 가서 gutter들을 살펴보니 알루미늄과 비닐(플라스틱)로 된 gutter들을 팔고 있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DIYer (Do-It-Yourselfer), 그러니까 ‘시로도, 아마츄어’들을 겨냥한 제품이었고, 절대로 gutter Pro들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둘 다 비교적 ‘가벼운’ 것들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gutter pro들은 공사현장에서 직접 gutter maker(extractor)란 machine으로 규격에 맞게 ‘뽑아’내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완전한 ‘custom-made(주문형)’인 것이고 그래서 ‘엄청’ 비싼 것이었다.

비닐과 알루미늄, 그 중에서 나에게 매력적인 것이 vinyl로 만든 gutter인데, 쉽게 말해서 ‘절대로’ 녹슬 염려가 없지 않은가? 나의 문제가 녹슨 gutter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우리 집의 지붕은 보통 2층의 높이 지붕이어서 보통 DIYer들이 사용하는 사다리를 쓰면 큰 무리 없이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다. 왕년에 산을 오르고 바위를 타던 아득한 경험을 떠 올리면서 한창 녹이 슬어가는 ‘철제’ gutter들을 뜯어서 내리고 비닐로 된 gutter들을 책을 보아가며 나의 최선의 노력으로 완성을 하였다. 큰 돈을 절약했다는 생각도 즐겁지만 내가 했다는 ‘자부심과 만족감’은 이런 일을 안 해본 사람은 절대로 상상을 못할 것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위신’도 올라갔음은 자명한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gutter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십 수년을 살았다.

 

내려온 gutters.. 겨울내내 쌓인 낙엽, 솔잎..모두 썪어서 목불인견..

내려온 gutters.. 겨울내내 쌓인 낙엽, 솔잎..모두 썪어서 목불인견..

 

하지만 ‘싼 것이 비지떡‘이란 말을 어찌 무시할 수 있으랴.. 싼값의 모습이 몇 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온도에 의한 팽창, 수축’에 의한 joint (이은 부분)에서 비가 새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참을 만 했는데 점점 심해지면서 비가 떨어지는 바닥에 물이 고이고 그것이 집의 foundation으로 조금씩 스며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워낙 미미한 것이어서 참을 만 했지만 정문 앞으로 떨어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앞문 계단에 물이 고이며 그곳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이었다. 앞문에도 물이 튀기면서 기초부분의 나무들이 썩기도 했다.

이런 저런 것으로 나의 ‘체면’은 말이 아니고.. 해결책을 찾았지만 역시 ‘새것’으로 바꿀 용기는 없었다.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단코 내가 모조리 고쳐야 했고, 결국은 나는 다시 사다리를 기어오르며 ‘하루 종일’ 근육을 쓰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를 save했을까?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것 보다는 나의 ‘자존심, 만족감’이 더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으로 나는 대만족이다.

Wet and Monsoonal Atlanta’s 4th

Monsoonal Atlanta우아~~ 정말 굉장하다. 스고이! 아틀란타 지역에 장마? 1989년 이곳으로 온지 아마도 이런 ‘해괴한’ 날씨는 처음인가. 간단히 말하면 그 옛날 20세기, 50~60 년대에 고국 대한민국에서 여름이면 ‘당연히’ 겪었던 바로 그런 ‘장마’ 인 것이다. 이것의 느낌을 나는 오랫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것을 나는 요새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서 고스란히 맛보고 있는 중이다.

기상 위성의 사진을 보니 바로 이것이 ‘몬순, 장마’ type의 모습인데, 극동지역에서는 태평양의 뜨거운 구름이 올라가는 것이고, 이곳은 멕시코 만의 뜨거운 바다 바람이 올라오는 것, 그것이 다른 것이고 나머지는 꼭 같다. 하지만, 한반도 지역의 장마는 사실 매년 겪는 ‘정상적’인 것이라면 이곳의 것은 아주 드문 예외에 속한다.

7월 2일부터 시작된 이 아틀란타 장마는 이곳의 최대 ‘역사적’ 휴일인 Independence Day 를 완전히 축축히 젖게 만들었는데, 그래도 매년 열리는 이제는 연륜이 깊어가는 Peachtree 10K(6+ miles) Road Race는 다행히 폭우가 멈추고 가랑비가 내리는 덕에 진행이 되긴 했다. 새로니와 나라니도 참가를 했다고 했는데, 6만 명이 ‘실제로 뛰는’ 대규모였지만 날씨 탓에 구경꾼의 숫자는 별로 없었다고. 그것 뿐만이 아니고 제일 큰 attraction인 firework도 대부분 cancel이 되었고, 각 동네에서 자체적으로 하던 ‘꼬마들의 행진’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wet July 4th Peachtree 10K

wet July 4th Peachtree 10K, 2013

왜 이것이 ‘장마’같이 느껴지냐 하면, 이곳에서 이렇게 1주일이 넘게 ‘계속’ 흐리고 비가 내리는 것은 아주 희귀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열흘 넘게 해 구경을 못할 것 같은 예보여서 벌써부터 집안의 곳곳에서 ‘냄새’가 풍기는 기분이 든다. 이것도 바로 그 옛날 서울에서 겪던 장마 때의 그 냄새일 것이다. 예상치 않은 이변적인 날씨에 손해를 보는 곳도 많을 듯 한데, 특히 roofer들이 제일 큰 타격이 아닐까? 이런 때 지붕을 새로 갈거나 고치는 것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이 장마가 시작되던 날도 우리 동네에서 지붕을 고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바로 후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그들은 아마도 그날 완전히 ‘공을 쳤을’ 것이다.

올해는 이번의 이 장마 전에도 사실 비가 많이 내렸고, 기온도 90도 (섭씨 31도)를 넘은 날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예전에는 ‘정상’에 속했는데, 그 동안 (지난 20여 년) ‘지구 온난화’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갔는데, 올해의 기후는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무서운 hurricane도 없고 twister, tornado도 생각보다 잠잠하고.. Mother Nature가 갑자기 왜 이렇게 온순해 졌을까? 의문은 많지만 나는 ‘무조건’ 감사, 감사를 하며 이런 날씨를 즐긴다. 왜 안 그렀겠는가?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3

오스트리아 복지 스타일이 전하는 감동

 2013.07.02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경영학을 좀 아는 사람에게 경영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얘기해 보라면 의례 능률의 학문(discipline of efficiency)이라고 한다. 이는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일어난 대량생산혁명으로 확립된 대량생산체제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차 오일쇼크(1979)전까지 약 80여 년간 지속해 오는 동안 얻어진 경영관리의 산물이리라. 요컨대 대량생산체제에서는 동일제품(identical products)이거나 표준제품(standardized products)을 다루므로 제품에 대해서는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보니 자연히 최대관심사는 일정의 제품산출량(output)을 생산・제공하기 위해 투입되는 투입량(input)을 최소화하거나 또는 일정의 투입량을 가지고 제품산출량을 최대화시키는데 집중하기만 하면 되게 된다. 다시 말해 투입-산출 비(input-output ratio)를 높이는, 곧 능률(산출/투입으로 표시되는 양적 개념)을 향상시키는 데만 신경을 쓰면 족하단 말이다. 그래서 대량생산시대에는 더 능률적인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간에 차이가 생기게 되고 더 나아가 성공기업과 실패기업이 생기므로, 이 모든 것이 능률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는 건 당연하다.

이런 배경에서인지는 몰라도 오랫동안 경영학을 가르쳐 온 필자도 알게 모르게 능률이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었던 듯 쉽다. 필자가 해외여행 중 능률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 몇 번의 사례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을 잠시 되짚어 본다.

  1.  1997년 IMF 직전에 필리핀 마닐라와 보라카이 휴양지엘 갈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필리핀에서는 아주 조그마한 상점일지라도 사설경비원과 어카운턴트(accountant)를 꼭 고용하고 있었다. 사설경비원을 두는 연유는, 사설경비원에게 밤에는 일정한 수칙에 따라 발포권(發砲權)도 주어져 있다는 걸 봐서 그곳의 불안한 치안분위기 탓으로 이해되었지만, 조그마한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도 어카운턴트가 전표(voucher)를 써주지 않으면 절대로 물건을 건네주질 않는 시스템은 아마도 미국 식민지시절부터 정착된 선진방식이려니 이해되었다. 특히 휴양지에서는 전표를 써주는 어카운턴트와 물건을 내주는 사람의 역할이 더 철저하게 분담되어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법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관행이었는지는 당시 필자가 확인한 바는 물론 없었다.
  2. 2000년 집사람과 같이 중국연변의 한 대학교 AMP과정에 특강 차 갔을 때의 일이다. 집사람과 필자의 강의가 다 끝나자 학교 측에서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엘 가게 되었는데 예약식당 문을 들어설 때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 뱅뱅 돈다. 아주 고급식당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급이었다고 느끼며 식당 문을 들어서는데 문 양쪽에 각 5명씩, 10명이 허리 굽혀, ‘어서 오십시오’ 하며 손님을 맞는 것이었다. 능률이라는 것에 늘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 이렇게까지 손님 맞는 품이 쉽게 이해되질 않았다. 물론 손님을 대하는 영업전략 차원일 것이라고 이해는 했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던 탓이다.
  3. 2001년 태국 방콕과 해양휴양지 부켓(Puchet)엘 다녀 온 적이 있었다. 방콕의 호텔에 도착하니 태국 아가씨들이 정문 양 옆에 각 15명씩, 30명이 도열하여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이었는데 필자가 머문 이틀 동안 지켜보니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손님에게 그들은 하루 종일 그렇게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 역시도 능률의 견지에서는 쉽사리 이해가 안 갔는데, 그들이 단순히 손님맞이 영업전략 차원에서 하는 것일 뿐일까 하는 생각을 그때에도 해보았었다.
  4. 2007년 북경에서 그리고 2011년에는 북경과 천진과 하얼빈에서 지인의 초청으로 고급식당의 별도 룸에서 식사할 경우가 몇 차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마다 유사한 경험을 했다. 매번 룸 안에 의례 젊은 청년 3명이 서있었는데 그들의 역할이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주문 받는 사람과 주문한 음식을 가져 오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그들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방을 비우질 않고 우리 곁을 줄곧 지키고 서있었던 때문이었다. 후에 그곳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냥 영업전략 차원과 일자리 제공차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고급식당 별실에서 식사할 정도의 손님이라면 그 정도의 추가비용을 부담시켜도 크게 문제될 게 없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일거리 없는 청년들에게 다소의 수입이 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강제로 하는 건지, 협약에 의해서 하는 건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하는 건지는 당시 필자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능률만이 아닌 또 다른 뜻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 조그마한 또 하나의 계기였다.
  5. 2005년 중유럽을 여행하던 일정 중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중심가에서 점심을 하려고 오후 3시 조금 전에 어떤 식당엘 들어갔는데 홀 안에 들어서자 뭔가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리일행이 들어가자마자 부랴부랴 식당주인이 식당 문을 닫는데 뭔가에 쫓기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래서 조금 지나 그 연유를 물었더니 제시간에 문을 닫지 않으면 벌칙(罰則)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문을 닫아야 하며 또 문을 제때 닫지 않으면 범칙금을 내야 하는 이유가 여행객인 필자에게는 선뜻 이해되질 않았다.

     

끈적거리는 2013년 6월 말에..

¶  이런 끈적이는 여름이면  ‘철 없던, 무언가 세상을 잘 모르던’ 대학시절의 장마가 한창이던 때, 세월이 무한정 길다고 느끼던 시절, 시원한 장판에 대짜로 누워서 즐겨 듣던 Johnny RiversSummer Rain이 생각나고, Nancy Sinatra, Lee Hazlewood의 classic oldie ‘Summer Wine‘도 함께 그립다.

그 때는 1968~9년 경 여름,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경부고속 도로를 비롯해서 대한민국의 부동산 전체가 파헤쳐지기 시작되던, 박정희 ‘민간’ 정부의 경제부흥의 소음이 요란 한 시절, 삼선개헌 반대 대모를 핑계로 학기말 시험을 피하고 산 속으로 도피하던.. 그런 여름이 생각난다. 나는 역시 지금의 나이대로 new normal 보다는 old normal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Good ‘Ole‘ Days.. 가 그리운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과연 진화, 진보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퇴보를 하는 것일까..정말 모르겠다.

 

Johnny Rivers, Summer Rain 1968

 

Nancy Sinatra, Lee Hazlewood, Summer Wine, 1968

 

¶  어제 밤 잠깐 어떤 email을 잠깐 보니supreme court same-sex 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고, 불현듯 역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news blackout을 속으로 선언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실수’로 그것을 더 자세히 읽는 짓을 해 버렸다. 솔직히 나는 이런 류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심지어 배까지 불편하고 더 나아가면 토하고 싶은 심정까지 된다. 그러니까 나는 바로 homophobia인지도 모른다.

나의 물음은 참 간단하다. 어떻게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하고,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간단한 질문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들은 정자와 정자로, 난자와 난자로 아이를 갖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진 동물들인가?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심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숨어살았던 그들.. 이유가 있어서 숨어 살았지만, 그 이유는 이렇게 너무나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해괴한 변태적 동물집단’이라면 어떨까? 그들이 우리들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혜택을 받겠다니, 나의 심정은 이제 동정심에서 증오심으로 변하고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낯짝을 가졌기에 그렇게도 철면피 같을까?

이것을 종교로 연관을 시키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point를 잊고 있다. 이것은 신앙, 종교, 교회와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법 중의 법, 헌법과도 같은 정상적인 인간이면 가지고 태어났을 기본중의 기본적인 도덕률이기에 사실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자명한 사실’을 무슨 이유로 헌법 조항에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법 조문에 없으면’ 어떤 수단으로라도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바꿀 수 있는 최근의 시대 조류.. new normal들이 속출을 하는 초현대 인간들.. 그래서 그래서 절대 불변, 법이 필요 없는 ‘진리 중의 진리’를 찾는 신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일까? 너무나 끈적거리는 6월 말, 아침부터 나의 어깨는 쳐지기만 한다. 이럴 때 시원한, 가슴이 열리고 피부가 뽀송뽀송해지는 마른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올까?

 

Jackie, a handsome dog
Jackie, a handsome dog

¶  Jackie,  어떤 handsome한 개, 내가 부르는 이름이다. 얼마 전 우리 동네를 배회하던 이 Jackie는 6월 동안 나의 머리 속에 있었다. 하도 답답해서 주변의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도 하며 마음을 달랬지만, 이 개가 혹시 잘못 될까 봐 하는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네를 걸을 때마다 보게 되어서 어떨 때는 걷는 것도 피하곤 했다. 비가 오면 비 맞는 모습을 그리며 걱정이 되었고 해가 쨍쨍하면 어떤 집 그늘에서 더위를 식힐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저 어떤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이 나의 제일 큰 희망이었다. 최후의 사태에는 내가 데려올 생각도 서서히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다시 Jackie를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동안 자주 보이던 집의 길 건너편 Johnson부부의 집 앞 잔디에 있었다. 반가워서 눈을 마주치니 Jackie도 그런 표정이었는데, 의외로 모습이 ‘건강’하게 보였다. 그런 모습을 간직하며 그 옆에 있는 playground에서 살펴보니 이번에는 Johnson씨가 나와서 잔디를 깎기 시작했는데, 그때 Jackie와 Johnson씨의 행동이..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이것은 사실 뜻밖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Jackie가 Johnson씨의 개? 하지만 dog tag, collar같은 것이 없지 않았는가? 그래도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분명히 Johnson씨가 최소한 돌보아 주고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제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제 연숙과 집에 들어오다가 혹시나 해서 차로 동네를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Jackie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Jackie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 같은 동네, 우리 집 뒤쪽에 우리보다 더 오래 사시는 한인교포 방선생님이 산책하는 것을 보고 차를 세우고 염치불구하고 Jackie에 대해서 묻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나.. 하시더니 나중에 혹시 Johnson네 집에서 ‘돌보아 주는 ‘개 아니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추리는 맞았다. 역시 stray dog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Johnson씨네 집에서 밥을 주고 돌보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adopt는 안 한 듯 했다. 이것은 정말 정말 반가운 소식이어서 연숙과 나는 너무나 안심을 하게 되었다. 최소한 Jackie는 현재 shelter가 있는 셈이 아닌가?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adopt할 가능성도 높을 것이라 짐작이 들었다. 그 후 Jackie가 배회하던 Johnson집 주변에서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완전히 집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혹시 animal shelter로 보내진 것일까? 나의 걱정과 관심은 아직도 끊이질 않는다.

 

Jackie Update: Happy Note

Jackie에 대한 나의 ‘필요 이상의 걱정’은 전염성이 있었는지 주변에도 알려지고 특히 연숙이 제일 관심을 갖는 듯 했다. 내가 그런 ‘측은지심’이 결여된, 아니면 최소한 그런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을 해 왔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거의 ‘이상할 정도로’ 내가 걱정을 하니까 조금은 재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big news가 있다고 소란을 떨면서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얼마간 보이지 않았던 Jackie가 Mr. Johnson과 같이 동네를 걷고 있었다는 목격담이었다.

Mr. Johnson은 원래 자기의 개가 있어서 그 개는 leash에 끌고, Jackie는 그 옆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할 바를 몰랐다. 결국은 Mr. Johnson이 adopt를 한 것일까.. 최소한 그 집에서 키운다고 결론을 내리고.. 긴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animal control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 Johnson은 내가 결여되었던 ‘측은지심’이 있었나 보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2

북경대 MBA가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가르치는 이유

 2013.06.27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근육운동을 기계로 대체시킨 산업혁명이 확산되는 가운데 19세기 경험율(rule of thumb)에 의존하던 영국의 공장관리경험을 거쳐 1900년대 초반 대량생산혁명이 미국에서 일어나면서 산업현장과 밀착한 토양 위에서 경영학이 태동하게 되었다. 미국의 산업화가 철강산업-자동차산업-전기통신 산업을 중추로 진행되어 온 탓에 경영학도 이들 각 산업현장에서의 문제해결을 돕는 산업밀착형 형태로 발전되어왔다.

 대량생산관점에서 미국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산업이 철강산업이다. 미국 US Steel사가 영국 British Steel사가 채택한 베세머(Bessemer)공법을 그대로 채택한 대량철강생산 공정을 갖추면서 철강산업이 발흥하게 되었고 그래서 경영학도 물론 철강산업에서 제일먼저 태동되게 되었다.

 경영학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Taylor하면 금방 그를 알지만 그가 1890년경 미국의 한 철강공장의 제강공정(steel-making shop)에서 압연공정(milling shop)으로 강괴(steel ingot)를 주먹구구식(rule of thumb)으로 옮기는 작업을 유심히 지켜본 후 ‘과학적 관리법(scientific management)’을 주창했고 그로부터 경영학이 싹트고 자라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이 나오기 전에는 주로 과거의 경험율에 비추어 일을 처리해 왔다. 이런 배경에서 테일러가 작업현장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장의 각 작업자가 오늘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할까를 각자가 알아서 하는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그는 주목했다.

 그네들의 그런 방식으로 하루 평균 작업량은 1인당 8톤 정도였다. 만약에 각자가 할 과업(task)을 정해주고 과업실적에 따라 임금을 달리 주며 일을 계획하는 기능과 작업하는 기능으로 분리시켜 각 기능의 전문성을 발휘케 한다면 얼마나 생산성이 올라갈 것인가를 그 엔지니어가 계산해 보니 최소한 49톤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작업연구와 시간연구를 통해서 과업을 책정하고, 직능별 조직을 마련하고, 오늘날의 성과급제와 비슷한 임금체계를 갖추어 작업을 시켰더니 작업량이 평균 49-51톤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확인과 확신으로부터 1911년에 과학적 관리의 원리(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란 책을 펴냈다. 이것이 그 후 Taylorism으로 더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미국 관리학으로 발전했고 이게 경영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6.25,사필귀정(事必歸正)

올해도 어김없이 6월 25일, 6.25가 찾아왔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주로 재동국민학교 다닐 당시, 어렸을 적에는 신나는 전쟁놀이, 서울 하늘 가로지르며 북으로 날던 ‘쌕쌕이‘ 미군의 젯트 전투기들(F-80, F-86), 만화책을 장식하던 ‘용감한 국군’의 무용담으로 정신을 빼앗기던 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2의 6.25가 그날에 또 일어날까 봐 어린 마음에 ‘전전긍긍’하던 날이었다.

그런 걱정이 심한 때에는 6월 25일이 오면 그날 저녁의 붉은 저녁노을조차 다시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괴뢰군의 탱크’의 포화로 착각하기도 했다. 꿈을 꾸면 남산위로 갑자기 나타난 김일성의 대포들을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릴 적, 우리는 ‘공산당, 괴뢰군, 김일성, 소련의 후르시초프, 중공의 모택동’의 공포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았다.

 

F-80-Korean-War

6.25 발발 직후부터 일본으로부터 나르기 시작한 미국의 F-80, Shooting Star Jet 전투기들.. 북괴의 Yak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소련제 탱크를 공격하였다. 전쟁 직후에도 서울의 상공을 가로지르며 나르던 날개 끝에 달린 연료탱크가 독특하던 이 전투기..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올해는 한 살을 더 먹어서 그런지 조금은 다른 각도로 6.25가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 가정은 6.25로 인해서 ‘처참하게’ 망가진 case다. 한 가정의 주인인 아버지가 갑자기 없어졌다면.. 그것도 생사를 모르게 완전히 없어졌다면 그 가정은 어찌되겠는가. 군인으로 나가서 수많은 사망자, 불구자가 나왔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불구 가정이 되었다.

어렸을 때 그것이 사실 크게 생각할 것은 못된 것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재혼을 했으면 또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 있기에 나와 우리누나는 항상 고마워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을 해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위해서 ‘완전히’ 인생을 바친 것이다. 젊은 30대초에 남편을 잃은 어머님,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었던 때, 원산에 대가족을 남겨두고 서울 색시가 된 어머님,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이제는 김일성이 덕분에 남편까지 잃었으니..

일방적 통일을 빙자해서 쌍방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전범 김일성이 처단도 못 받은 채 줄줄이 2대의 자식들을 다른 ‘잠재적 전범’으로 만들고 죽었으니, 이제는 사실 원수도 갚을 수 없는 지경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고사성어가 어찌 이렇게 잘도 맞는가? 한 정권을 거의 마피아 스타일 범죄조직처럼 공포의 정치로 움직이더니 결과가 과연 어떠한가?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놓고, 최후의 수단으로 동족을 ‘불바다’ 로 말살하겠다고 장난감 원자탄을 만들고.. 과연 이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그리고 이들을 옹호하는 ‘똥포’ 집단은 어떤 인간들인가? 또 다른 거대한 범죄조직이었던 소련연방이 거의 순식간에 넘어간 것을 보고 나는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숨막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고수하던 조국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most vibrant democracy로 성장했다. 정의는 결국에 승리를 하고, 역시 사필귀정인 것이다. 역사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들은 절대로 모를 것이지만 나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Jackie

Jack, Jackie.. 잘 생긴 어떤 개의 이름이다. 암컷, 수컷을 잘 모르기에 이름도 내가 “gender-neutral”, Jackie로 부르고 있다. 짐작에는 아마도 암컷일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거의 한달 간 나는 이 의문의 개를 우리가 사는 Hanover Woods Subdivision 에서 목격을 하고 있다. 처음 본 것이 거의 한달 전, 비 오는 날 낮 우리 집 앞으로 비를 맞으며 ‘방황’하는 모습을 목격한 때였다.

우리 집 목소리 큰 개 Tobey가 미친 듯이 짖어대서 보게 된 것인데, 그때의 모습은 ‘아마도’ 어느 집에서 실수로 ‘풀어놓은’ 듯한 인상이었었다. 그래도 비를 맞는 모습과 조금은 당황하던 자태가 나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비록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비 맞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것이 아닐 거라고 머리로는 생각이 되지만 나의 가슴속 그렇게 위로가 되지를 않았다. 그저 불쌍하고 안쓰러운 그것이었다. 그리고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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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매일 하던 산책 중에 우리는 다시 Jackie를 보게 되었다. 깜짝 놀랐다. 왜 아직도 또 ‘풀려’ 돌아다닐까? 내가 우려하던 것, 혹시 누구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나의 걱정이 현실화 됨을 느끼고 다시 나는 괴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비교적 순하게 생긴 잘 생긴 개, 나는 그 종자를 잘 모르지만 친근감까지 가는 그런 Jackie.. 비교적 먼 거리에서 보았지만 느낌은 ‘또 방황’하는 듯한 그런 것이었다.

그야말로 stray dog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나의 머리 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런 걱정을 하는 내 자신이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이 될 정도로 나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나는 다시는 그렇게 밖을 돌아다니는 Jackie를 못 보게 되기만 빌고 있었다. 만약에 정말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다면 다른 주인을 빨리 만나기만 나는 속으로 빌었다.

며칠 후에 나의 희망은 사라지고 다시 Jackie를 보았다. 이번에는 바로 나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만약을 사태를 대비해서 같이 걷던 Tobey를 품에 안고 Jackie에게 가까이 가 보았다. 전에 비해서 조금은 ‘덜 깨끗한’ 모습.. 턱 밑에 부스스하게 털이 뭉쳐있어서 ‘분명히’ 누구의 보호를 받지 않는 돌아다니는 개 임을 깨닫게 되고, 나는 더욱 우울해 졌다.

제발 어떤 마음씨 좋은 집에서 거두어 주기만 바랬는데.. 이렇게 긴 나날을 밖에서, 그것도 자주 쏟아지는 비를 맞았을 것을 생각하니 슬프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집으로 데려올 ‘용기’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 더욱 괴로웠다. 그저 그저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혹시 Lost and Found같은 곳에 그 Jackie의 사진이 보이지 않을까 Internet을 뒤져 보아도 Jackie는 없었다. 그리고 dog tag이 없음을 보니 전 주인이 ‘완전히’ 포기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런 버림 받았다는 사실이 나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괴로움을 주었다. 정말 오래 전, 우리는 아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강아지를 포기했던 일이 있었고, 그 사실이 나의 가슴에는 지독한 응어리로 남아있었다.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더 괴로움을 받고 있다고 나는 확신했다.

일 주일 전에 산책 중에 또 Jackie와 상면을 했다. 항상 튀어나오는 집 근처에서 보는데 이번에는 조금 침착하게 가지고 다니던 mobile phone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것으로 최소한 breed (종자)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print를 해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살이 빠지거나, 배 고파하는 모습이 아니고 비교적 침착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어찌된 셈일까?

Jackie는 과연 stray dog일까.. 매일 어디서 밥을 먹는 것일까? 계속 우리 동네에서 보이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 근처를 배회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하도 괴로워서 연숙과 잠깐 집에 들린 ‘개를 좋아하는’ 나라니에게 실토를 하며 도움을 청했다. 모두의 의견이 나와 비슷했다. 분명히 집 주위를 배회하며 밥을 얻어 먹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아주 조금은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나라니의 말이, 그렇게 사는 개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고, 나는 정말 오랜 만에 수 많은 개들의 ‘불안전’한 생애를 실감하게 되었다. 아하.. 그래서 그렇게 많은 humane society, shelter들이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

제일 ‘무서운’ 것은 시 당국의 animal control에서 나와 잡아가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를 put to sleep(a.k.a. kill)한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 아마도 이렇게 비를 맞고 배가 고프더라도 안정된 집들 사이를 배회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깨끗한 가정에서 집 주인 행세를 하며 호강하는 pet들과 비교를 하면 그것도 큰 위로가 되지를 않는다.

그러다가 바로 며칠 전에 차를 타고 집에 들어오다가 불현듯 동네를 한 바퀴 돌면 Jackie를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타고 있던 연숙에게 동의를 구하고 돌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 보던 그 곳에서 다시 Jackie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우리 차가 가는 차도의 반대편 차도에 Jackie가 쓰러져있는 것이 아닌가? 차도 한 복판에! 우리는 너무나 놀라서 차를 차도에 그냥 세우고 뛰어 나갔다. 불현듯.. Jackie가 차에 치었거나 피로에 지쳐서 쓰러져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 스쳤다. 연숙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의 순간적으로 Jackie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더니 그 도로 옆 집의 앞 잔디로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짐작에 그 차도에 그냥 누워있었던 것인데.. 왜 그랬을까? 그곳은 curve인 도로여서 차가 갑자기 오면 차도에 누워있는 개를 보기가 힘든 곳이라.. 분명히 치었을 것인데.. 본능적으로 Jackie는 그것을 몰랐을까? 아니면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누웠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연숙의 추측은 아마도 몸이 젖어서 비교적 물기가 마른 차도에 누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아직도 산책을 꺼리고 있는 상태이다. 솔직히 또 보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비’, ‘소낙비’ 같은 것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비록 Jackie는 비를 피해 어떤 집의 deck같은 shelter에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비교적 pet들을 많이 기르고 있고 Jackie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거나 알았으면 분명히 무슨 action을 취했을 것인데 아직도 이렇게 밖에서 배회함을 보면 .. 어떨까..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집에 ‘입양’하기에는 무리였던 것이고 그저 feeding이나 shelter만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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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Jackie가 내 눈앞에 나타난 후에 내가 겪고 있는 이 ‘괴로움’은 무엇일까? 연숙이나 나라니의 표정을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인상인데 왜 나만 이렇게 괴로움을 느끼는 것일까? 오래 전 내가 ‘범한 죄’ 탓일까? 이제 나는 인과응보를 믿고, 세상 이치가 그것이 맞을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Jackie는 나에게 그런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1

“노키아 쇠락 이유 알았다” 연발하던 핀란드 교수

 2013.06.19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미국 샌디에고(San Diego)에 갈 기회가 필자에겐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2007년 센디에고 쉐라튼 호텔에서 있었던 제27차 세계전략경영학회 연례회의(SMS Annual Conference)참석 때였고, 두 번째는 2011년 센디에고 근교 리조트의 LOEWS 호텔에서 열렸던 SMS 특별회의(Special Conference)참석 때였다.

 2007 년 첫 번째 센디에고 갔을 때 그곳 인상은 2008 월가 붕괴 1년 전이어서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무언가 무력감이 느껴지던 분위기였다. 약 700여명을 헤아리는 학회 참가자들로 쉐라튼 호텔 로비는 붐비고 있었는데도 호텔도 예외는 아닌 듯 생동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특히 배정받은 룸의 세면대 발브가 제대로 작동이 안 돼 물이 줄줄 새고 있어 프론트에 알리자 수리공들이 왔다 갔다 하며 손을 봤지만 임시변통도 잘 안 되는 걸 보면서는 뭔가 큰 이상(異常)이 감지되었다.

 그러함에도 SMS 연례회의 행사는 그런대로 성대하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필자는 그간 교분관계를 맺어 온 영국 Warwick의 John McGee 교수, 스위스 IMD의 Bala 교수, 북경대 GSM의 Changqi WU 부원장을 비롯한 10여명의 회원들과 해후의 인사를 나누며 미리 준비해 간 Dynamic Management Theory(DMT)에 대한 PPT 자료를 첫날 일정이 끝나고 저녁을 마친 후 나눠주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SMS전 회장이었던 McGee 교수가 스티븐 킴(당시 그는 필자를 그렇게 불렀음)하며 큰 소리로 필자를 부르며 필자를 일찍부터 기다렸다며 전날 준 PPT 자료에 뭔가가 잔뜩 쓰여 진 것을 들고는 질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얼른 필자에게 다가 온 생각은 McGee 교수가 DMT에 대해 대단한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가 DMT와 관련하여 필자에게 제기한 질문의 요지와 주고받은 대화는 이러했다.

 

1) 공급과잉과 수요부족 간의 불균형(imbalance)이 1929년 세계대공황을 야기 시킨 것처럼 1997년 이후 10년 사이에 미국 GDP의 25배가 넘을 정도로 급증한 파생금융상품으로 인한 금융경제(money economy)의 초거대화와 1980년대 초반부터 쇠락해 온 제조업으로 인한 실물경제의 왜소화와의 불균형으로 미국경제는 결국 머지않아 큰 파국을 맞으리라 보는 필자의 시각이 너무 지나친 건 아닌가?

 이에 대해, 아직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므로 누구든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큰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선에서 일단은 봉합하였음.

 

2) 1980년부터 전략경영(strategic management)이 경영학의 한 영역을 형성하여 온지가 27년이나 되었는데 거의 같은 기간 동안(1980-2007) 미국경제가 계속 쇠락하여 온 사실을 들어 전략경영이 그간 제공해 온 이론/모델/분석도구들이 결국 실용성이 덜한 것들이라고 보는 필자의 사고 역시 논리의 비약 아닌가?

 이에 대해, 전략경영의 기본관점이 요소환원주의(reductionism: 각 요소의 총합이 전체라는 철학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어 인터넷혁명 후 상호의존성이 높아지고 상호작용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기업과 산업을 각각 하나의 전체로서(as a whole) 파악하는 개념적 틀이 요구되며 이런 면에서 전략경영은 한계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는 인식에는 공감을 표했음.

 

3) 한국의 대기업인 재벌(Chaebol)들이 잘나가는 이유가 뭔가? 특히 삼성(Samsung)이 Fortune Global 500에서 2005년에 40위권으로 진입했고 2007년에도 30위권으로 상승무드인데 그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더욱이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금과옥조처럼 가르쳐 온 우리들로서는 삼성의 경우가 참으로 당황스런 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McGee 교수와 필자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진지한 토론을 계속했고 발표세션이 시작되었는데도 발표장엔 들어가지도 않고 서로의 주장을 주고받았는데 이는 삼성성장의 면모를 몇 마디로 정리하는 게 어렵다는 선에서 얘기를 맺었다.

 

김시스터즈 특급, Kim Sisters Express

얼마 전에 1960년 내가 서울 중앙중학교 1학년 다닐 때와 그 해 일어난 4.19 학생혁명을 생각하며 그 즈음의 미국 주간화보잡지 LIFE를 뒤져 보다가 뜻밖의 반가운 사진 기사를 보게 되었다. 바로 그 당시 대한민국의 자랑, 김시스터즈에 관한 기사와 사진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훨씬 이전에 그 세 자매가 ‘목장의 노래‘를 송민도씨와 같이 부르는 video를 보며 그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고, 1950년대 피난도시 부산에서 촬영을 한 국산영화 ‘청춘 쌍곡선‘ 에서 역시 세 자매가 간호원으로 나온 것도 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목장의 노래, 송민도, 김시스터즈

나는 그 당시 어린 국민학생이었기에 그 영화를 볼 수는 없었고, TV가 없었으니 (아마도 그 당시서울에 TV를 가진 집은 손으로 꼽을 정도..) 그 세 자매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라디오로 목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희망의 상징’이었던 미국으로 간다고 들었을 때, 섭섭하지만 얼마나 모두 자랑스럽게 느꼈는지 모른다. 일종의 ‘특상품 수출‘이었다고 할까..

그녀들은 그렇게 해서 완전히 미국에 정착을 했고, 가끔 귀국을 해서 선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 LIFE 잡지에 나온 기사를 읽으면서 그 세 자매는 정말 재주가 넘치는 멋진 trio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을 보면 아마도 Chicago에서 잠시 공연을 할 당시 취재를 한 것 같고, 김시스터즈의 manager와 사이가 좋았는지, 시카고 근방 그 manager의 어머니 농장에서 머무르며 미국의 일반 가정과, 서민문화를 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내가 잘못 알았던 사실은, 그녀들이 195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 기사를 보니 그 것은 1959년경이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놀랍게도 거의 국민학생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8남매의 대가족이었는데 어떻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Googling을 해 보면 순간적으로 알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당분간은 모르고 지내기로 했다.

 

이 사진 기사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 10년 전, 그러니까 6.25 당시부터,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했고,
  • 그들의 talent를 본 어떤 전 GI, 가 미국에 가서 활동하도록 주선을 해서 일년 전부터 Las Vegas casino 에서 공연을 했고,
  • 최근에는 Chicago의 Polynesian Village에서 공연을 했고,
  • 이 세 자매는 철저히 한국식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상당한 금액의 일주간 공연료 $2500의 거의 전부를 서울의 ‘대가족: 어머니, 5명의 형제, 자매’ 에게 송금을 하며,
  • 남자관계를 철저히 관리해서, 공연이 끝나서 남자에게 초대를 받으면 반드시 세 자매가 ‘단체행동’을 해서 ‘scandal’을 방지했다.

 

여기의 기사 본문을 읽어보면 그 trio가 어떻게 미국의 문화, 노래들을 배우며 미국에서 적응했는지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Three Korean Kims and Their Kayagum

When Min Ja, Ai Ja and Sook Ja Kim enter wearing their colorful hangobs and start strumming on their Kayagums, the song they go into is Tom Dooley. For the Korean girls now appearing in the Polynesian Village in Chicago, the old mountain tune is a mass of phonetics that means nothing to them but is a delight to their audiences. Americans find the Oriental touch on U.S. tunes a highly refreshing one, and just one year after leaving Seoul the Kim Sisters are an all-out nightclub hit over here.

The act began 10 years ago when the girls were taught Ole Buttermilk Sky and Candy and Cake by U.S. troops in Korea. Min Ja sang off key and Ai Ja chewed gum while she sang, but to the GIs they were the Oriental’s answer to the Andrews Sisters. Last year an ex-GI named Bob McMackin who had heard them in Seoul brought the Kims over. The girls learn their songs by note since they know little English. They managed to master the phrase “lots of luck” and could enunciate it perfectly as an exit line. But to audiences it lacked Oriental character and the Kims have changed back to “rots of ruck”.

After a year in the U.S. the Kim sisters still keep the custom of Korea. Most of the $2,500 a week they earn by singing here is dutifully sent back to their mother and five brothers and sisters in Seoul. They are faithful to a Korean tradition that a girl should not go out alone until she is 23. Sook Ja, who is the oldest Kim and the trio’s spokesman, solves the stage-door Johnny problem by telling the men who want to take her out after the nightclub show that her younger sisters have to come along. Ai Ja, 20, and Min Ja, 18, do what Sook Ja tells them to. A recent visit to an Illinois farm was a welcome break from their hectic life, which they find involves continual adjustment. In Chicago they miss the noise of Las Vegas where they had to sing a lot louder so they could be heard over the din of the slot machines.

 


LIFE 기사, "한국의 세 김씨와 와 가야금"

LIFE 기사, “한국의 세 김씨와 와 가야금”

가야금 반주로 Tom Dooley를 부르는 김시스터즈

가야금 반주로 Tom Dooley를 부르는 김시스터즈

SPLIT-SHEATHED SINGERS, Min Ja (with guitar), Sook Ja (with clarinet) and Ai Ja (with saxophone) leap off the stage after performing Five Foot Two. The trio plays 10 instruments, including a bass fiddle and banjo.

 Show Five Foot Two 를 마치고 무대에서 뛰어나오는 (왼쪽에서) 민자, 숙자, 애자
이 세 자매는 banjo, bass fiddle을 포함, 무려 10가지의 악기를 능란하게 다루었다.

LIFE-22260-KIMS-3 old-style jazz 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는 김시스터즈

LIFE-22260-KIMS-4
IN PONY-TAILS girls watch Queen for a Day at manager’s mother’s farm in Marengo, Ill. Girls were surprised to learn show’s winner ruled nothing.
ON A SLEIGH, the three Kim sisters start off for a horse-drawn tour of the snow-covered farm. From the left are Sook Ja, Ai Ja and Min Ja.
ON A SLEIGH, the three Kim sisters start off for a horse-drawn tour of the snow-covered farm. From the left are Sook Ja, Ai Ja and Min 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