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해후邂逅, 침묵피정
¶ 묘~한 인연과 슬픈 해후邂逅
피정이 끝나고 우리는 그 전날 약속이 되어 있었던 어떤 환자 자매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리에타 지역에 사시는 어떤 병중의 자매님께 ‘급하게’ 천주교 영세를 받게 하는 조그만 과제가 생긴 것이다. 아마도 아들과 둘이 사시는 어떤 우리 또래의 자매님이 중한 병에 걸려서 아마도 오래 못 사실 것이라는 판단으로 다른 주에서 급히 방문하신 친 가족(오빠와 여동생)들이 순교자 성당에 연락을 해서 혹시 외인(비신자)에게 ‘급하게’ 영세를 줄 수 있는가 문의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연숙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2년 전 모니카1 자매님이 그런 case였고 그 후의 결과가 너무나 좋았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해 주었으면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때가 바로 레지오 단원들이 제일 사명감을 느낄 때라고 할까..
이때 우리가 방문한 목적은 상황판단이 전부였다. 어느 정도 병이 위중한지.. 그것이 제일 궁금한 것이다. 과연 짧더라도 교리공부를 받을 상황인지..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면 과연 신부님이 ‘비상 영세’를 주실 수 있는지.. 모든 것이 우리들이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데 달려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불안한 심정으로 찾아간 곳은 우선 middle-high-class 주택가로서 아마도 financial한 문제는 없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반갑게 맞이한 오빠 형제님 2 여동생 자매님들.. 모두 인상도 좋았고 친절하였다. 전화로 이미 들었던 ‘사연’에 덧붙여 더욱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비교적 대 가족이었지만 모두들 지역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서 그것이 우선 문제였다. 아픈 환자가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간호를 할 것인가? 비록 두 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침대에 누어있는 환자자매님.. 모든 것이 아주 불편해 보였고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계속 물끄러미 주시를 했는데.. 우리는 무언가 우리를 ‘의심’이라도 하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 아픈 자매님은 알고 보니 우리도 낯이 익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다니던 YMCA에서 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자매님 부부가 YMCA에서 janitorial staff으로 일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이 불과 2~3년 전이었지만 서로가 첫 눈에 못 알아 본 것이다. 그 자매는 처음에 나를 먼저 알아보고 나중에 연숙을 알아 보았다.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반가워서 한동안 어쩔 줄을 몰랐고 옆에서 보고 있던 가족들도 너무나 기쁜 얼굴들이었다.
놀란 것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 자매님의 부군 형제님이 올해 4월에 이미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형제님은 남자 locker area에서 너무나 자주 보았고 이야기도 나누었던 사이었는데.. 나이도 아마 나와 비슷해서 더욱 친근감을 느낀 그런 분이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남편의 병간호가 너무나 힘이 들었는지 곧 바로 자기도 이런 중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비극이 있을까?
오빠와 여동생이 모두 이미 천주교 신자였고 이 아픈 자매님은 아직도 외인이었지만 가족들은 그 자매님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비록 중병이라 할 지라도 하느님, 특히 천주교의 하느님을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동생 암브로시아 자매님3과 이야기를 하다가 오하이오 주 Dayton, Cincinnati 지역에서 성당을 다녔다고 했고 우리의 영세 신부님 왕영수 신부님과 같이 신자생활을 한 것도 알게 되었다. 근래에도 한국으로 비행근무를 할 때 가끔 왕신부님과 만난다고.. 이런 뜻밖의 인연이 어디에 있을까? 성령운동에서 음악찬양을 하는 최데레사도 잘 안다고 했다. 이런 것들로 우리는 순식간에 ‘친구’처럼 느끼게 되었고 우리가 레지오 단원으로 자매님을 도울 수 있을것을 알게 된 그들은 어린이들처럼 기뻐했다. 다음날 직장 관계로 모두 떠날 그들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던가.. 이런 인연으로 우리 부부는 레지오 단원의 한 조 로써 이 위중한 병으로 고생하는 자매님을 위해 봉사할 기회가 찾아 왔고 우리가 옛날 레지오 단원들에게 받았던 ‘은혜’를4 갚을 chance가 왔음을 느낀다. 얼마나 우리가 도울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이지만 최선을 다할 각오는 되어있다고 느낀다.
¶ CLC 일일’一日’ 침묵피정 어제는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아틀란타 CLC 가 주최한 ‘일일 침묵피정’이란 곳에 연숙과 참가하였다. 지나간 순교자 성당 주일 미사 후 점심 시간에 낯이 익은 CLC 자매가 갑자기 와서 ‘일일 침묵피정 신청서’를 건네주며 꼭 오라고 해서 조금 당황한 적이 있었다. ‘원칙적’으로 ‘못 간다’고 나는 이미 생각을 하고 있다가 후에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가 또 올지 안 올지 확신이 서지를 않았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it’s now or never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지 안더라도 연숙은 물론 갔을 것이지만 나의 결정으로 생전 처음 CLC주최 피정을 둘이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번의 일일 피정은 ‘CLC 골수단원’ 대상이 아니고 ‘일반인’ 대상이라 마음이 가벼웠지만 ‘침묵’이란 말이 조금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CLC (Christian Life Community)하면 로욜라의 아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을 바탕으로 예수회의 영적지도(spiritual guidance)를 받는 전세계 ‘평신도 단체’란 것을 나는 예전부터 연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다. 연숙이 전에 이런 ‘과정’을 거쳤었기에 나는 옆에서 조금씩 보고 듣게 된 것이다. 인간적인 갈등으로 비록 그’단체’를 떠나서 지금은 나와 전심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하고 있지만 그곳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크게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어제 그곳에 참석을 해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알아 보았다. ‘옛 동료’들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비교적 많은 참석 인원(100+?)이 모인 그곳에서 우리가 속한 마리에타 2구역 ‘자매님’들도 만나서 너무나 반가웠는데, 그 중에는 전 스테파노 부부, 마르쎌리나, 히야친타 자매들도 보였고, 이곳 ‘역시’ 대다수가 자매님들이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정상’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피정 자체는 ‘피정의 달인’이라고 소개된 방문신부 ‘정구평 마르코’ 신부님이 담당을 했는데 우리와는 최형 댁에서 ‘개인 적’으로 만난 경험도 있고 해서 큰 거리감 없이 강론을 따를 수 있었다. 피정 주제는 ‘기도와 관상’ 이었고 아마도 아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중 ‘제 1과’ 정도가 아닐까 추측이 되었다. 배부된 handout text를 보면 피정 강의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기도와 관상 1
- ‘나’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
- ‘나’에 대한 조명
- 하느님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 나’
- 기도란 무엇인가?
- 기도의 방법
- 기도의 목적
기도와 관상 2
영신수련에서 기도의 외적 형식
- 기도와 호흡
-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호흡의 방법
- 생각 조절하기
- 기도 준비단계
기도와 관상 3
영신수련은 이성을 도구로 다양한 감정들을 분석하는 피정인가?
- 기도할 때에 올라오는 다양한 감정들
- 분심과의 싸움
기도와 관상 4
- 성 이냐시오의 관상
- 두 개의 깃발
기도와 관상 5
- 영적 여정의 시작(원리와 기초)
- 일상 안에서의 성찰
- 첫째 감사
- 둘째 조명
- 셋째 반성 및 성찰
- 넷째 결심
- 다섯째 마침기도
기도와 관상 6
생각, 말, 행동
이런 주제와 내용들에 대한 강의를 듣고 두 번에 걸친 30분 가량의 침묵기도 시간이 주어졌다. 아침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이 조용했고 침묵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뚜렷했다. 그런 중에 두 번 30분 기도는 놀랍게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바로 전에 들었던 내용이 머리 속에 가득 찬 도움으로 평소에 꿈도 못 꾸었던 나의 모습도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문제는 그런 나의 모습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가 못 느꼈지만 그래도 사랑을 받았던 나 였는가.. 긴 인생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기도에 대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것으로 이것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묵주기도와 기도문 기도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것에 비하면 이런 것들은 아주 제한이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무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 같은 것이다. 비록 짧았던 하루 피정이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쪽으로 눈을 뜨는 듯한 신선한 피정이었다. 아마도 ‘구면’이었던, 친근한 인상의 정구평 마르코 신부님의 피정 스타일이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다가 깨어 생각해도 ‘신부생활, 하느님과의 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신부님의 말씀도 큰 과장이 아닌 것으로 들리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이쪽으로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의욕도 느끼나.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