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윤용하 교우의 추억도 함께 없어졌다. 그 자리에 돈에 굶주린 듯한 stupid famer’s market이 버젓이 자리잡고 돈을 세고 있었다. 10년 전, 2005년 당시 분명히 그 자리 boribat.org에는, 시대를 잘못 만난 ‘돈 없는’ 불우한 음악가, 동요작곡가였던 윤용하님의 일대기가 간직되었던 유산이 있었다. 10년 후에 그것이 commercial website로 둔갑.. 아니 domain ORG는 분명히 non-profit일 터인데 어떻게 염치도 없이 그런 일을 했을까? 고 윤용하 님을 기리던 이름을 어떻게 그렇게 값싸게 팔아 치웠을까. 그 자세한 내용에는 분명한 이유는 있을 터이지만.. 알고 싶은 마음조차 없이 나는 식상한다.
그러면 그 많던 윤용하 님의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러다가 2011년 경 나의 윤용하 님 blog을 작성할 당시 research해 둔 기사들을 발견했다. 문제는 그 원래의 보리밭 site에서 얼마나 내용을 건졌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희망적으로 대부분 내가 save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정도다. 이곳에 내가 간직해 두었던 윤용하님 이야기: “윤용하를 말한다” 를 ‘영구히’ 남기고자 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것은 절대로 ‘팔아 넘기지‘않을 것이다.
윤용하를 말한다
성악가 오현명
내가 만주 봉천 보통학교의 분교인 북시장학교 5, 6학년때쯤 나의 집이 윤용하가 다니던 석탑 보통학교 근처여서 오후쯤 그 곳 운동장에서 놀다가 가끔 그를 보곤 했다. 그는 별로 말이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가끔 팔짱을 끼고 남들이 노는 것을 조금 멸시하는 듯이 쳐다보곤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요일마다 보천 석탑교회 성가대에서 등사도 하고 합창을 하고 있을 무렵 신문광고와 포스터에서 조선 합창단 단원모집이라는 내용을 보고 일본 천리교라는 교회로 시험을 치러 갔을 때 그 합창단원과 간부들 중에서 지도자격인 사람이 바로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보던 윤용하였다. 테스트를 한 후 그는 나에게 아주 좋다며 같이 일을 하자고 하였다. 그는 철저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그가 다니던 교회에는 어느 한국인 성악가가 카톨릭 합창단을 조직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이미 윤용하는 합창곡이나 독창곡을 많이 작곡하여 내게는 나의 음악수준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훌륭한 작곡가로 여겨졌다. 그는 이따금 일본인이 만든 봉천 방송국에서 피아노 반주로 합창을 지도 하기도 했고 기념행사 같은 것이 있을 때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약 20여명의 방송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합창을 같이 했으며, 지휘, 편곡까지 능란히 해내고 있었으므로 당시 나의 수준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수준은 상당한 것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봉천에 있던 사람들의 음악 수준은 아주 저조한 것이었다.
직업 음악가는 학교 선생님 뿐이며 1년에 한두번 정도의 음악회가 있을 뿐이었으므로 당시의 형편에서 조선 합창단을 조직한 윤용하의 활동은 대단히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합창단의 경제적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단원들 중에는 형편에 따라서 경비를 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거의 그 혼자서 꾸려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연습장소가 없어서 교회나 유치원등 여러곳을 전전 해야만 했는데, 악기가 없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아코디언을 반주악기로 삼아 그가 직접 음정을 짚어가며 합창단을 지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교성곡’, ‘조선의 사계’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제 1회 발표회를 갖게 되었으나 당시는 전쟁이 한층 가열되고 있던 때라 좀처럼 음악회 허가를 받을수 없어 명칭을 ‘승리의 음악회’라는 일본말로 고쳐서 겨우 허가를 얻었는데 나는 교성곡(칸타타)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윤용하를 따라 다녔다. 당시방송 관현악단의 반주로 30명쯤 되는 합창단이 독창곡을 낀 창작곡을 발표한다고 하여 굉장한 반응을 얻은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윤용하는 연습후면 거의 매일 아코디언을 짊어진 채 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돈이 없으면 하나밖에 없는 반주 악기인 아코디언을 전당포에 잡히는 것이 상례였다. 그때 나의 일과는 술취한 그를 십간방이라는 그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그가 신경으로 떠날 무렵, 마지막 연주회라고 하여 조선 합창단을 주축으로 약 700석 정도의 만주 봉천 기념회관을 빌려 음악회를 열었는데 이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고별 연주회를 갖고 신경으로 떠난지 서너 달 후 그는 나에게 신경으로 빨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가 신경에서 창단한 카톨릭 계통의 ‘백조 합창단’의 발표회에서 그가 작곡한 ‘독백’을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서 보니 신경에는 만주에서 최초로 조직된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이 같이 끼어있는 신경 교향악단이 있었는데, 그 단원으로는 바이올린의 한명서 선생, 첼로의 전봉초씨, 김동진씨등 한국인이 꽤 있었다. 그 교향악단은 만주 전역에 걸쳐 지방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작곡가로는 김성태씨가 전속으로 있었고 김동진, 김대현씨와 함께 약관의 윤용하씨도 끼어 그 4명의 한인 작곡가들이 공동으로 두 세번 정도의 발표회도 열고 있었다. 거기서는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본격적이며 제대로된 작곡 활동을 하고 발표회까지 가져가며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천 시절의 윤용하는 카톨릭 교회의 신부에게서 오르간을 치는 법이나 작곡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오케스트라 단원 중 밤이면 다고 한다. 어쨋든 그 나이에 오케스트라 편곡을 한 것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그때 쯤 정확히 언젠가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하여 육군군악학교 교장을 지내고 트럼본을 전공한 백 영준 이라는 음악가가 만주에서 우연히 윤용하의 음악을 들은 후, 멜로디는 슈베르트같은 점이 있고 가곡이 무척 좋았다는 평을 했을 때, 그 평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자신이 한국의 슈베르트인가 하며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인 박화목
이 청년은 처음엔 편성을 담당한 한 사람을 만났는데,그 사람을 통해 이내 나에게 소개 되었다. 당시 나는 방송국 편성과의 말단 프로듀서로서 시 낭송.소설 낭독 등 문예물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를 내게 소개하는 동료직원의 말인 즉, 그가 작곡 활동을 벌이고 싶어 방송국을 찾았는데 내가 시를 쓴다니까 나를 만나는 것이 좋을 성 싶어 소개 한다는 것이었다. ‘시를 쓰시는 박 선생을 만나게 되어서…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하고 그는 퍽이나 겸양스럽게 내게 말을 건네었다. 나는 찬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볕에 그을렸는지 조금은 거무칙칙한 얼굴이었으나, 크고 서글서글한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그런 두 눈이 창작의욕에 불타는 듯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어느 날 홀연히 서울 방송국에 찾아와, 또 나를 만나게 된 이 시골청년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작곡가 윤용하였고, 그와 나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나자 가곡을 작곡하고 싶다면서 시를 써줄 것을 부탁도 하였다.
마침 그 무렵 방송국에서는 우리가 새 가곡을 보급하기 위한 새로운 방송사업을 마련하고 있던 참이었고, 이 일을 내가 담담하고 있었으므로, 윤용하의 작곡활동에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가곡이 될 수 있는 시를 시인에게 청탁하여 그것을 작곡가에게 나눠 주어서 작곡을 의뢰하곤 하였다. 그리고 작곡이 된 새 가곡을 방송을 통해 널리 보급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의 그 프로젝트가 얼마만큼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차지하고서라도 새 가곡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윤 용하에게 몇 편의 작곡이 의뢰되었는지 지금 기억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적지 않은 작곡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 용하의 작곡이 당시 방송에 크게 도움을 준 것도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때에는 자주 방송국에 드나들었다. 아니, 그의 해방 후 서울에서의 작곡 활동이 방송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만주 땅(신경 등지)에서 살다가 해방 후 귀국해서는 약 1년간 강원도 어디엔가 있다가 상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후 방송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활발한 작곡 활동을 폈다고 볼 수 있다.
‘네가 조국을 모른다니 이게 될 말이랴…’ 이런 구절로 시작되는 ‘민족의 노래’며 ‘광복절의 노래‘등 우수한 국민 가곡을 지은 것은 이 무렵인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 오기까지 잠시 동안 함흥의 영생여고의 음악교사를 지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어째서 강원도에서 왔다는 것으로 그렇게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를 일이다. 추측 건데 이북 함흥에 있다가 잠시 강원도에서 지낼 법한 일이다. 6.25 당시 강원도 홍주 땅에서 피신을 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피신해 있으면서, 국군이 반드시 이기고 돌아온다는 신념아래 ‘개선’ 이란 표제의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6.25 와중, 항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6.25가 일어난 다음해 늦봄이었다. 1.4후퇴때, 나는 예기치 않았던 병을 얻어, 마산의 육군병원에서 서너 달 누워있어야만 했던 까닭으로, 부산으로 온 것은 늦은 봄이었다. 그리고 역시 초여름 어느 날, 남포동 거리 어느 다점에서 그를 반가이 만난다. 그 후, 윤용하와 나는 자주 만나는 편이었고, 어쩌다 돈푼이 생기면 울적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함께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전쟁 틈 바구니에서 자라는 청소년을 휘해서 정성이 듬뿍 깃든 가곡을 만드세. 전쟁 중 서정 가곡을 작시 작곡해 낸다면, 이건 정말 역사에 남을 희한한 일 일거야.” 하고 윤용하가 제안하여 내가 당장 시를 쓰고 또 작곡한 것이 가곡 ‘보리밭’이었는데, 불과 2,3일 동안에 지어졌다.
당시 그가 작곡한 가곡으로 보리밭 외에도 몇 편의 가곡이 더 있었으나, 지금 잘 모르겠고, 처음의 결심과는 달리 그리 많은 창작 가곡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난 시절 중 ‘피난 온 소년’ 등 많은 동요작곡을 남기었다.
음악 평론가 이상만
윤용하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43년의 짧은 생애, 그러면서도 굴곡이 심한 인생을 역류해 가면서 살아간 음악가 윤용하,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용하였다.
윤용하의 음악적인 경험은 모든 것이 체험적인 것이었다. 3대째 가톨릭을 신봉해 온 그의 집안인지라 가톨릭 교회를 떠나서는 그를 생각할 수 없다. 교회에서 풍금을 치고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적인 역량을 키운 그는 일반적인 교육에서도 음악적인 전문 교육에서도 체계적인 교육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학력은 보통학교가 고작이고 음악학교는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였지만 그의 음악적 경험은 작품을 통해서 볼 때 하나의 맥이 이루어진다.
그가 비교적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한 것은 옹기상을 하는 부친을 따라 고향을 떠나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성장기를 보낼 무렵이었다. 그것은 이미 국제화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종족이 모여 사는 도시 였으므로 여러 나라의 각기 다른 풍물을 함께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성가대에 출석하며 노래를 배우던 그는 프랑스 영사의 부인에게 오른을 배우게 된다. 이 접촉은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성향을 결정지었던 중요한 계기였다. ‘보리밭’같은 노래에서 우리가 느끼는 구조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흐름은 바로 흐름을 중요시 하는 프랑스적 경향이 이러한 경험에 의해 그의 멜러디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네꼬라는 일본인 지휘자에게 화성악 및 대위법을 배운 소산으로 20대에 이미 교성곡이나 칸타타등을 작곡하여 나름대로의 음악적 기량을 증명하지만 이러한 대작속에서도 그의 표현은 소박하고 선율적이다. 20을 갓 넘긴 젊은시절 신경에서 김성태, 김동진, 김대현, 오현명등과 함께 체례악 ‘양산가'(김동진), 한국 선율에 의한 ‘수상곡'(김성태), 교성곡’ 조선의 사계'(윤용하)등을 발표하며, 소위 우리 악단의 암흑기에 민족적 명맥을 유지하던 시절의 작품에도 이러한 경향은 드러난다.
이런 어둡던 시절의 경험은 훗날 그가 ‘민족의 노래’.’광복절 노래’등 애국적인 노래를 작곡하는데 반영되기도 한다. 그가 단순한 작곡가라기 보다는 거의 음악 운동가의 차원에서 6.25사변 후 음악 신문사를 차리고 주간을 맡았던 일이나 문총 중앙위원, 작각고 협회 사무국장, 음악 교육협회 사무국장 등의 직을 맡아 악단 일선에서 활동했던 경력, 그리고 틈나는 대로 합창단을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일등은 아마 신경에서 만난 무라마쓰 라는 일본인 음악 평론가의 영향을 받아서 인성 싶다.
그리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채동선을 만나 그에게 감화를 받고 민족적인 입장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부분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두르러 진다. 실제로 그는 채동선을 존경하며 그의 기일이 되면 신문에 그를 회고하는 글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약한 듯 나약하지 않으면서도 심하게 격변하는 시대를 적응 못하고 역류를 시도하다가 쓰러진 사람이 윤용하였다. ‘독백’, ‘고독’ 등 애수 어린 가사를 선택, 즐겨 작곡했던 윤용하, 티 없이 맑은 선율 속에서도 그의 고고함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그 고고함 때문인지 그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부르면 부를수록 다시 듣고 부리고 싶으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의 값어치는 발견되어 이렇게 찬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아깝게도 여기 저기 흩어져 찾을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나마 윤용하가 간지 7년 뒤에야 김대현이 노래를 모아 출판해 주었는데 그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윤용하는 진작에 마땅히 한국 음악사의 견지에서 재조명 되었어야 할 인물이었다.
논설고문 이규태
‘보리밭’ 음악회
‘보리밭’을 지은 천재 음악가 윤용하(尹龍河)와는 세 번 만남이 있었다. 그 첫 만남은 공전의 재해를 몰아왔던 사라호 태풍 때였다. 의연금품을 모집하는 신문사 데스크에 노숙자 차림과 다름없는 허술한 중년 신사가 나타나 입고 있던 겉저고리를 벗어 놓고 돌아서 나가는 것이었다. 주소 성명을 묻자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흔들며 사라졌다. 소매나 깃이 헐어 너덜너덜한 그 저고리 속 주머니 위를 보았더니 ‘尹龍河’라고 박혀 있었다. 후에 들은 것이지만 그에게는 여분의 옷이 없어 한동안 윗옷 없이 살았다고 한다. 그 낡은 옷이 도움이 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마음의 질(質)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후 ‘보리밭’을 작곡하게 된 어떤 사연이라도 있는지 물은 일이 있다. “나는 헛소리 듣는 허청(虛聽) 기가 있으며 분명히 들렸는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을 때 그곳에 아무것도 없을 리 없다고 작심하고 추구하다 보면 미(美)의 꼬리 같은 것이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한다”던―그의 집요한 예술관에 접했던 것이 두 번째 만남이다.
그 윤용하가 4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보도의 필요성에 쫓겨 빈소를 찾는 데 신문사의 기동력을 동원했지만 한 번지에 수천 호가 잡거하는 판자촌인지라 이틀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천재가 누워 있는 곳은 판잣집도 못 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저렇게 이승을 마칠 수 있었던가 가 원망스러웠던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그에게 영화음악의 작곡을 부탁하러 갔을 때, 또 대중 가요 작곡심사를 의뢰하러 갔을 때 못 들을 소리 들었다고 귀를 씻었다던 그의 순수성이 현대사회에서의 위상을 그대로 구현했던 윤용하와의 마지막 만남이기도 하다. 그 후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던―그 윤용하가 찾아낸 미의 터전에서 재즈 리듬으로 편곡된 ‘보리밭’ 고고가 판쳐, 짓밟혀 망가진 지 오래인 그 터전에서 고인이 살았을 제 공감대에서 예술을 교감했던 팔순 고개의 원로 음악가 바리톤 오현명, 피아니스트 정진우, 테너 안형일 세 분이 추모 음악회를 연다고 하니 그 보리밭에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조선일보 [칼럼] 이규태 논설고문 2005-10-24
신동아 평전 (이부영)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 노을 비인 하늘만
눈에 차누나.
이제는 [아리랑]만큼이나 우리들의 입가를 맴도는 멜로디,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의 [보리밭]이다. 설움에 마음이 올올이 젖어 있는 듯, 그러면서도 서러운 마음을 남에게 보이지 못해 홀로 삭여버리는 애잔한 숨결이 멜로디에 스며 있다.
가난과 유전, 그리고 술의 동반자이자 순수와 좌절의 벗이었던 윤용하. 그가 세상을 등진지도 올 칠월로 만 구 년째다. 그 동안 그의 묘비도 작곡집도 생전의 친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지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모든 인생의 굴레에 목조여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그의 노래들은 무엇으로 보상될 것인가. 저임에도 충실히 근무하다가 엉뚱하게 숨져가는 말단 순경 사병 철도간수들이 일계급 특진되듯. 묘비도 작곡집도 추서였다. 그리고 남은 것은 다시 망각뿐이다.
윤용하-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의 소유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산 중턱 움막판자집 단칸셋방이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등진 후 유전만을 거듭했을 뿐 다시는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부모와 다른 오 남매 동생들과 더불어 함께 한 일이라곤 없는, 그가 살다간 시대만큼이나 불행한 유랑인 이었다. 그는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생전에 자신의 작곡 집 한번도 내보지 못한 부실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 당해 부인마저 집을 나가버릴 정도로 초탈한 생활무능력자였다.
그는 삼대째 황해도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다가 조부 때 이르러서는 그것도 어려워 구월산 기슭에 옮겨와 독구이 하던 옹기장이의 맏아들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려는 뜻은 그가 움직일 수 없는 민중의 아들임을 미리 설정해놓으려는데 있다. 그의 피 응어리진 생애를 더듬어가는 동안 우리는 예술인으로서의 윤용하의 역정과 더불어 민중의 고난, 민중의 착각, 좌절로만 끝낼 수 없는 민중의 자각적 초설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가마 집 맏아들
용하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은율군 일로면 농림리다. 동남쪽으로 신기 어린 구월산의 웅봉 들이 도열, 천연의 병풍을 둘러치고 서쪽으로는 확 트인 황해의 넒은 뜰에 둘러싸인 옴폭한 곳이다. 은율이란 곳은 사실상 황해도의 중심부인 재령 신천 안악 서흥 봉산 황주 평산 등지에서는 유리된 벽지에 속한다.
용하의 오대부조는 은율 이로면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사대부조가 어떻게 황해도의 서북단 오지인 은율로 옮겨가 살게 되었는지는 기록으로나 구전으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이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으며, 이후 대원군에 이르는 대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차아 헤매다 이곳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그 자손들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추리는 용하의 부친 대에 이르면 거의 확실해진다.
그의 부친은 험준한 구원한 구월산기슭에 독가마를 차려놓은 옹기장이였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잦은 바닷가의 어부생활에서 언제 그리고 왜 심산궁곡의 옹기장이로 생활의 터전을 바꿨는지 알 길이 없다. 이들은 다시 한번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신앙의 도피행각을 벌인 듯하다.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사실로는 오늘날에도 도자기 장인(匠人)들 가운데 수많은 가톨릭신자들이 그 가업을 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원군의 대 박해가 가해지던 시절 [천주학장이]들이 피할 방법이라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심산궁곡에 파묻혀 숯가마나 독가마를 걸고 생계를 유지하는 길이었다. 더욱이 옹기나 숯을 지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팔러 나가는 것은 정보교환이나 포교의 이로운 점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숯가마나 독가마는 로마의 [가다꼼바]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삼일 독립운동의 여진이 아직 울리고 있던 일구이이년 삼월 십육일 고난의 생을 시작했다. 아버지 윤갸오로(상근)와 어머니 이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즈음은 전국에서 실향사태가 벌어지는 등 민족의 본격적인 수난기에 접어든 시기였지만 용하의 출생은 그 배경이나 경제적 기반으로 미루어봐도 어차피 리향의 쓰라림을 겪을 씨앗을 이미 품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용하가 네 살 되면 해 만삭의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사대째 뿌리내려 살던 은율땅을 등진다. 철부지 용하는 아버지등에 업혀 떠나는 고향땅이 다시는 그가 생전에 밟아보지 못할 땅이 될줄은 몰랐다. 일가가 정착한 곳은 평안북도 은주군 비현면 채마동. 이곳은 경의선의 종착역인 신의주 못 미쳐 세정거장째로 오백여 호의 가옥이 철로 변에 모여 있는 소읍이었다. 이곳에서도 윤상근은 읍밖의 산비탈에 독가마를 쌓고 천형처럼 물려진 옹기상을 또 시작했다.
그 당시 남부여대 해서 고향을 등진 수많은 실향민들이 그랬듯이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이 곧 생활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어린 용하는 양친의 뜻대로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그 곳에서는 천주 이외에도 풍금과 성가가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질은 이곳 성당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핏속을 사대째나 흘러내려온 가톨릭과의 인연은 가톨릭을 통해 음악적 잠재재능을 발휘해낸 사실 이외에도 그의 일생을 지배한 정신적 기둥을. 그리고 외곬으로 빠졌다가 결국은 좌절을 통해 자기의 껍질을 벗어버린 보편적 사고에로 의 회귀를 결과한다. 참으로 오랜 기간이다.
그의 사대부조가 왕조 말의 고난 속에서 구원의 샘을 천주에게서 찾은 것이나 별 차이 없는 백성 본래의 본능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어린 용하는
『성당에서 한번 배운 성가의 멜로디는 절대로 잊은 법이 없었지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청년성가대원들이 올간에 맞춰 연습하는 날이면 늦은 저녁에도 성당 구석에서 구경을 하곤 했어요. 올간을 타고 싶어서 주위를 맴돌기도 하고요. 어린이 성가대에서는 으레 동창자로 뽑혔고 성탄절이나 부활절의 어린이 성극에 출연도 하고요』
평북 비현면 채마동 용하의 어린시절에 같은 동네에서 지냈던 량마리아(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거주)여사의 말이다.
『저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지요. 제가 청년성가대로 있을 때 국민학생인 윤용하씨는 키가 작기는 해도 곱슬머리에 서글한 눈을 가져 귀여움을 받았어요』
채마洞 어린시절 용하의 마음속은 이미 음악에 대한 막연한 갈망으로 채워졌지만 그런 갈망을 뒷받침할 만한 형편도, 이해를 가질 만한 양친의 양식도 없었다. 도리어 학교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일에 바쁜 양친의 일손을 덜기 위해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큰 아들에게 맡겨진 몫이었다. 채마동에서 이남일녀의 가장이 된 용하의 부친은 이 곳에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만주사변 전야 국경지역인 이곳은 반도에서 살수 없어 만주로 생의 터전을 찾아 옮아가는 실향인파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하다. 용하일가는 그가 열두살 되던 해 모든 것이 생소한 만주 봉천으로 옮겼다. 채마동으로 리향할 때 이미 그의 유전은 시작된 것이지만 이제부터 그의 떠돌이 일생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비현면 채마동에서 보통학교 오학년을 중퇴한 용하는 봉천의 석탑보통학교 육학년으로 편입했다. 이즈음 그는 일인들이 월등히 많은 이 보통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다만 난생 처음 보는 피아노에 매료 당한 채 한 주일에 두 번 있는 음악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즐거움의 전부였다. 또한 그의 생애가운데 단 한번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손길을 보냈으나 부모의 반대로 허망하게 틀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부발신운』은 그로 하여금 음악회 길에서 일생 동안 헤매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용하는 일구오구년 이월삼일자 『세계일보』문화면에 그의 어린 시절과 함께 『음악가가 된 동기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처음에는 음악가가 되려는 꿈도 꾸지 않았었다. 다만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천주교회의 수사가 되겠다는 희망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사대째 천주교집안이었고 또 나의 외조부님께서는 나를 예수를 친히 길러내신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성명을 나에게 지어주시면서 『너는 장차 예수의 아버지이신 목수 요셉과 같이 되기 위해서 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나의 양친에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어려서부터 비가 내리거나 눈이 펄펄 나부끼거나 하루를 빠지지 않고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나는 음악에 대한 소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자연히 성가를 부르게 되었고 때에 따라서는 풍금을 만져보기도 하였고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큰 축일에는 연극이나 독창도 하고 교회의식에도 참례하게 되었다.
이렇게 지내던 나의 제 이의 고향 평북 비현이라는 곳을 일이세때 가친풍의 직업 관계로 떠나 나는 그리운 산천 벗들과 석별하고서 풍토가 다르고 낮 설은 이성땅 만주 봉천이란 곳에서 약 팔 년 동안 살게 되었다. 그때 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봉천보통학교 육학년에 편입되어서 공부하려니까 눈물겨운 점이 많았었다.
–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은 당시 보통학교 교과서에서도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피아노가 교실에 놓여져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어느 학과보다도 일주일에 두 번씩 배우는 음악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제일 좋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졸업기념으로 학예회에서 독창을 하였고 또 처음으로 조선어 방송시간(오후 육시로 기억됨)에 기념방송으로 독창과 합창을 해서 선물로 연필과 공책 몇 권을 받아가지고 퍽 기뻐하였다. 이렇게 학교생활을 지내는……
이 교회에는 우리나라와 이- 불 – 미- 독- 영 – 일등 여러 나라의 가톨릭신도들이 모이게 되는 까닭으로 신도들 가운데에서도 교양의 수준이 각양각색이었다.
여러 나라의 상인으로부터 영사나 고관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매주일과 복일에 참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가대만은 달랐다. 악보를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는 프랑스 영사부인이 풍금을 치면서 성가를 가르쳐 주었다. ……
이 당시 불인신부는 나를 음악신부로 만들어 보겠다고 당시 동양을 순찰 중이던 법황사절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일본 나가사끼에서 일년간 나전어와 불어를 공부하고 빠리 신학교에 가게 하려 했으나 양친의 반대로 다 깨어지고 결국 등사도 아니고 음악신부도 아닌 속된 음악가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 수 없다……
다소 장황한 느낌이 들지만 거의 전문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남긴 이 시기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우리는 그의 이 문맥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이미 봉천석탑보통학교에서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는 월등한 재질을 보였음도 글속에 나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만주에 와 있던 여러 나라 사람들 가운데 가난에 찌든 한 조선소년이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아 불인신부가 음악신부로 키우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보통학교 졸업할 나이에 음악에 관한 한 같은 연배의 다른 학생이나 신도들은 엄두도 못 낼 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발로 그쳐버린 단 한번 행운의 좌절은 그와 부모 사이에 깊은 구렁을 파놓기도 했다. 이후 그는 성년이 될 때까지 자기가 스스로 자기 길을 걸었을 뿐 양친과 상의를 거쳐 장래를 결정한 일이라고는 없다. 또한 그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용하는 자신이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점을 확신하고 그 길로 인생항로를 정한 계기가 되었다.
무학의 수기-질풍노도
나라 없는 실향민 막벌이 일꾼의 아들-그가 보통학교라도 나온 것은 그의 양친들 스스로가 배우지 못해 설움 당한 것을 큰 자식에게만은 물려주지 말자는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지 용하가 외국에 나가 더 수학할 기회라 할지라도, 아무리 그들 자신이 가톨릭신도이기는 했어도 장남을 영원히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을 신부로 만들 수는 없다는 안타까운 부모의 정이 그의 소망을 꺾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어찌 됐던 용하의 정규교육은 이것으로 끝난다. 다음은 파란과 유전과 그에 따르는 가난. 그리고 술이 모두였다.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막일을 했으나 음악에 대한 갈망을 이기지 못해 일을 걷어치웠다. 그는 일오세에 십간방천주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로 활약하는 한편 음악이론 공부에도 열중했다. 이즈음 그는 그의 생재 중 단 한번 체계적인 음악이론을 익힐 기회를 얻었다. 봉천방송국 전속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가네꼬』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열정과 재능이 충만한 어린 소년의 지식욕에 감복한『가네꼬』는 틈나는 대로 화성악과 대위법을 가르쳤다. 이 수업이야말로 그의 장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용하가 일팔세 되어서는 봉천의 한인사회에서 이미 유명한 젊은이로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구사십 년 십구세 되던 해 봄 그는 신문에『봉천조선합창단원 모집』광고를 냈다. 그랬더니 봉천 동광중학을 갓 졸업한 까까중머리의 한 청년이 응모했다. 지휘자이자 단장인 용하는 이 청년에게 발성 테스트도 받는 등 심사를 이모 저모 했다.
『목소리가 바리톤으로 아주 좋군. 전에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소?』
『예. 그저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합창 정도 했을 뿐 집에서 혼자 불러본 것 외에는 독창은 해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 함께 일해 보겠소? 이 곳에는 아직 우리 동포들로만 조직된 합창단이 없는 터에 젊은 우리들이 기틀을 잡아봅시다.』
『같이 일할 수 있다면야…… 열심히 해 보죠』
하이칼라신사와 까까중머리 중학졸업생의 대면이다. 이 까까중머리 청년은 오현명씨 (현한양대음대학장.)
『머리도 곱슬곱슬한 올백으로 멋지게 빗어 넘기고 하이칼라 양복차림에 으젓 하길래 대선배인줄 알았어요』
당시를 회상하며 오씨는 파안대소 한다. 그들은 동갑내기였던 것이다.
일구삼오년 같은 해에 용하는 석탑보통학교를. 오씨는 북시장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오 년의 세월 동안에 한 사람은 자기 재주대로 가시밭길의 사회에서 발돋움해서 그럴듯한 하이칼라신사가 되어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중학교 막 나온 풋내기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 오 년이란 짧은 세월 속에 두 사람에게 각각 생겨난 차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인 교육과 정을 밟지 않은 채 독력으로 발돋움한 조숙한 용하와 제 과정을 순탄히 밟은 오현명 – 이 두 사람의 장래를 바라보는 전망에는 그들 나이로는 헤아리기 힘든『비극적인 착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주위에서 『천재적 소질』을 지녔다고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면서『예술에 무슨 자격요건이 필요한가. 재질과 열정만 있으면 그만이지』라고 믿던 조숙한 천재가 어니 때엔가 어느 곳에 서는 『자격』이『재능』을 타고 앉고 예술이 밥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나 순정적인 젊음의 질풍노도에 들떠 있었다. 이와 같은 예술 지상론적 심리상태는 뒤집어보면 정상적 교육과정을 밟을 수 없었던 자신의 불우한 처지나, 조숙한 머리로 설사 늦게나마 학업을 계속하려 해도『젖비린내 나는 애들』과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는 자존심, 이런 등등으로 인한 반사심리일 수도 있었다.
[천구백] 사십 년대에 접어들어 이차세계대전의 전인 일제의 살기등등한 위세가 대동아 공영권을 마치 거의 이루어 놓은 듯 괴뢰 만주국의를 구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내선일체에 밀려 만중에 쫓겨간 우리 동포들은 다시 오족협화(日-한-중-만주-몽고족)의 꽹과리에 시달림을 받고 있을 즈음이었다. 용하의 일가도 그 예외일 수는 없었다. 봉천서쪽 교외의 판자촌신세였다. 그의 부친은 봉천에 처음 옮겨와서는 가업으로 물려진 옹기상을 그대로 해보았으나 도저히 생계를 이을 길이 없어 뜨내기 막벌이 노동자로 나섰던 것이다. 당시 이곳의 한인들은 일인계통의 기관 업체에 근무하는 사람이나 어느 정도 중류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뿐 대부분 밑바닥에서 방황할 때였다.
20세가 못돼 시작된 음주벽
오현명이 조선합창단원으로 합류한 이후 자주는 아닐지언정 어쩌다 한번『네기시』단장의 집을 찾을 적이 있었다. 이즈음 만주에도 창시개명의 바람이 밀어닥쳐 용하는 『네기시 유기찌』로 행세했다. 한인들이 음지에 돋아난 버섯처럼 어귀다툼을 벌이며 모여 사는 판자촌, 용하는 그 나이에 이미 집안 일에는 초연했다. 연습을 마치고 용하가 친구 현명을 데리고 굴속 같은 집으로 들어섰다. 언짢은 표정으로 부친이 돌아보면서
『집에는 무엇 하러 들어오느냐』
『……』
아무 내색을 않은 채 외면하는 용하. 그들 부자 사이는 이런 식이었다.
『다 자란 큰애에게 왜 이런 말을 하시우.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할라고』
용하를 언제나 감싸는 어머니가 거든다.
『어쨌건 저놈은 내 자식이 아니야. 저 좋을 대로 새처럼 날아다니든지……』
용하의 부친은 그를 내어놓은 자식으로 이미 간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용하가 들어오면 그의 손 밑 남동생 용학은 좋아 라고 형에게 다가와 주일성당에서 형이 합창단을 지휘하던 모습을 흉내 내며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다. 그럴라치면 부친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놈 그 밥 빌어먹을 미친 지랄 그만 두지 못하겠냐』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그러슈』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 편을 든다. 그럴 즈음엔 용하는 다시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어느 친구의 하숙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그의 아버지는 체구가 작달 만하고 깡마르기는 했어도 막일로 단련된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에게도 굴하려 들지 않는 강기(剛氣)의 소유자였다. 그에 비해 어머니는 여자 키로서는 천칠 했으며 성격은 씩씩하고 이해심이 깊었다. 용하의 경우 외모나 성격이 거의 외탁을 한 편이었다. 여하튼 당시 용하가 지휘자겸 단장이던 조선합창단은 단원만 십 오명 정도 모였지 연습장소도 반주할 악기도 없었다.
그들은 틈나는 대로 용하가 성가대지휘자로 일하던 십간방천주 교회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곳도 언제나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이때 그들에게는 같은 연배의 조천석이라는 시작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조는 동시를 주로 썼고 용하는 그의 시에 곡을 붙여 동요를 짓곤 했다. 조는 그때 봉천주재 영국영사관에 잡역을 하면서 뒤뜰에 있는 헛간창고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조선합창단은 조의 자취장소인 이 헛간을 자주 연습장소로 이용했다. 합창연습에 쓸 피아노나 올간이 있을 턱이 없어 오현명이 중학 다닐 때 집에서 취미 삼아 켜던 아코디언을 가져다 합창단 반주악기로 썼다.
1940년 가을 마침내 조선합창단의 첫 공연이 다가왔다. 합창곡목은 칸타타『조선의 사계』조선합창단의 공연을 위해 용하가 동요 말고는 처음 작곡한 교성곡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19세. 연주는 『가네꼬』가 지휘하는 봉천방송국 전속 관현악단이 맡기로 되었다. 합창단원들은 조선인들로서는 봉천에서 처음으로 합창공연을 갖는다는 열기에 들떠 포스터를 손수 시내 요소에 붙이고 다녔다. 그러나 공연은 일보직전에서 좌절되는 듯했다. 일본관헌 측에서 합창공연을 그만두라는 명령이었다. 이유인즉 한인들의 민족감정을 촉발시켜 오족협화의 성스런 분위기를 깰 우려가 있다는 것 그들은 시내에 붙여 놓았던 포스터를 다시 때어내야 했다. 그러나『가네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애쓴 보람이 있어 포스터를 다시 붙이고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용하는 이미 일본관헌 눈에 별로『곱지 못한 젊은 한인』으로 비치고 있었다.
봉천공회당에서의 합창공연은 성황이었다. 봉천방송국은 이 합창공연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당시만 해도 이런 공연에 입장료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고 더구나 공연장소는 공회당이었다. 단지 열정을 가지고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자기들의 성장을 남에게 보이며 조선인들도 합창단을 만들어 자기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공연에서 박수를 아무리 푸짐하게 받았다고 해도 이들 풋내기들의 주머니 속에는 먼지밖에 나올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렇지만 자축파티가 없을 수는 없었다. 자금은 공연 연습 때 관현악단 노릇을 톡톡히 해온 오현명의 아코디언을 전당포에 맡겨 마련했다. 이 아코디언을 조선합창단이 삼 년 동안 활동하던 시기에 걸핏하면 전당포신세를 지기 일쑤였다. 전당포에서 꾼 돈을 단장인 용하는 어찌 어찌 구해서 다시 갚고 합창연습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코디언을 되찾아 쓰곤 했다.
용하는 이 당시 술에 관한 한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20 대 초반에 항용 있는 풋술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괴뢰 만주국을 쥐고 흔들던 일제동군부는 만주의 경제체제를 어느 정도 사회주의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명분이야 어떤 것이건 그런 경제통제방식이 원료나 인력의 수탈에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당들에게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세상이었다. 즉 오후 오시 이후에라야 술을 먹을 수 있었으며 그것도 감질나는 분량의 배급제였으니까 말이다. 한 사람에 대한 하루 배급정량은 일장에 맥주 이잔 마실 수 있는 표 이장이었다. 즉 하루에 맥주 사 잔이 배급정량이다.
이때 용하는 맥주 사 잔으로는 주량을 채울 수 없을 정도의 만만찮은 주당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저녁, 표를 사서 줄을 서가지고 술을 받아 마시려고 맥주 집에 서 있었다. 으레 술을 못 마시는 오현명을 데리고 갔다. 현명의 표 2장 몫까지 마시면 맥주가 8 잔이다. 옆에서 그의 술잔을 세어본 어느 날 현명은 그것이 18 잔까지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표를 몽땅 바꿔 마신 것이다. 요즘 생맥주 500cc 가량 되는 나무잔이었다. 그렇게 마시고서 『어 시원하다. 이제 살 것 같구먼』하는 용하의 주량에 이미 다른 합창단원들도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압도당한 것도 사실이다.
20세가 못돼 이미 시작된 그의 음주 벽은 섣부른 풋내기 음악가의 왁자한 기고만장 이었다기 보다는 그 자신, 음악, 그리고 민족, 나라에 대한 설움을 애꿏게 풀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런 성벽은 노갑이지하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자학적인 그렇지만 겉으로 말을 않고 속으로 삭이는 못난 수더분한 우리 동포의 속성이기도 했다. 용하의 주량을 채워주느라고 맥주집에 거의 함께 동행을 해주던 현명에게 겸연쩍고 미안했던지 용하는 어느 날
『자네 왜 제 몫으로 나오는 그 좋은 술을 안 먹고 모두 나에게 빼앗기나.
오늘은 내가 뺏지 않고 않을 테니 안마셔 보려나』
하고 술을 권했다.
『글세, 이때까지 술이라곤 입에 대어본 적이 없어 겁이 나는 걸』
『아마 자네가 이때까지 맛보지 못한 다른 세계가 있을 걸세』
용하가 이렇게 부추기는 바람에 현명은 그날 자기 몫으로 배급 받은 맥주 사잔을 모두
비웠다. 이층 맥주집 계단을 내려오는 현명을 용하가 부축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 세상이 흔들거리는구먼. 술맛이란게 이런 건가』
『어떤가,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지』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현명은 자기 몫의 배급맥주를 모두 비우게 됐다. 현명이 용하를 통해 본격적으로 술을 배운 것이다.
봉천의 조선합창단은 활동 삼여 년 기간 동안 합창공연 발표회 두 차례와 방송국 출연도 여러 차례 가졌다. 용하는 어린 나이에 사람을 모아 무엇인가 일을 꾸미는 남다른 리더십을 그 나름대로 얻고 있었다. 그의 봉천음악활동은 1943년에 끝난다. 일이세에 실향한인의 아들로 봉천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이제는 스무 살이 넘는 늠름한 청년음악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좀더 넓은 세계에 뛰어 들어 자기의 가능성을 더 깊이 파보고 싶었다.
당시 만주의 심장은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수군 신경(장춘의 만주국 시대의 이름)이었다. 그의 마음은 신경으로 달렸다. 우선 수소문을 했다. 당시 만주의 한인거류민단체로 계림회가 있었다. 계림의 신경분회장 이던 이홍조씨가 의주군 비현면 채마동, 즉 용하의 제 2의 고향출신이었다. 용하가 채마동에서 알았던 양마리아 여사가 바로 이홍조옹의 외손녀였다. 용하는 신경계림분회의 사무원으로 일단 직장을 얻었다.
봉천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 삼 년이여 동안 고생을 하며 함께 합창을 해오던 조선합창단원들은 그들의 단장 겸 지휘자를 떠나 보내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근암(용하)단장석별 기념촬영』도 했다. 그러나 송별연이 없을 수 없었다. 오현명의 아코디언은 다시 마지막으로 전당포 신세를 졌다 용하도 신경으로 간지 얼마후 봉천으로 돈을 우송해 현명은 아코디언을 전당포에서 되찾았다.
맨주먹 청년
1943년 만주국 수도 신경. 소위 남방전투에서는 기승을 부리던 일제가 차츰 수세에 몰리는 등 일진일퇴의 숨가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 이곳 만주국의 수도 신경은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평온한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북지방 쪽의 요란한 항일전선이나 국공내전의 입김이 관동군의 아성 신경에는 감히; 스며들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종전이 임박할 시기까지 만주대륙의 무연한 벌판 한가운데 자리한 이 도시는 『가식에 찬 평온』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용하가 봉천을 떠날 때 신경계림분회 사무원으로 취직이 된 것으로 알았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나라 없이 남의 땅에 와서 기식하고 있는 백성의 거류민 단체가 사무실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였다. 회관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다. 이홍주 선생댁이 분회사무실 겸 회의집회 장소였다. 이홍주선생은 신경의 한인사회의 지도자였다. 이선생은 계림분회의 한인들을 이끄는 한편 당시 일제 괴뢰 만주국의 국민회의격인 오족협화회의 대의원도 겸하고 있었다. 당시 말해 이미 연로한 지도자로서 소극적인 항일자세를 지키면서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거두어준 인물이었다. 용하는 어쩔 수 없이 이선생댁의 식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李선생댁에는 앞서 말한 량마리아여사가 있었다.
『아 마리아누님 아닙니까. 구 년 만이구만요』
『아니, 용하가 아니요. 이젠 몰라보겠군요. 그 동안 봉천활동이 대단했다면서……』
『대단할 건 없습니다만 앞으로 이곳에서 좀더 힘을 써볼까 합니다.』
고향에서 귀여워하던 용하가 어릴 때의 그 재능대로 헌칠한 청년음악가로 성장해 있는 것에 양여사는 보통학교 교원으로 지내면서 같은 교원이자 친구인 김임순여사와 함께 성가대를 맡아 이끌고 있었다.
『인편으로 전해 들었는데 용하씨가 작곡도 하고 합창단 지휘까지 했다면서』
『예, 모두들 열의껏 해보았지만 여건이 맘 같지 못해서 그리 큰 성공은 못 거둔 편이죠』
『언제 작곡공부는 하고 지휘하는 것을 익혔수』
『그저 혼자 이리 저리 뛰면서 노력했을 뿐, 좀 두서가 없는 편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 보픈데 앞으로 어찌 될는지……』
『요즘 내가 김임순이란 친구하고 성당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는데 우리가 보통학교 훈도 노릇하랴 또 음악실력도 달려 힘겨운데 용하씨가 맡아보지 않겠소』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옥명합창단이다. 옥명이란 이름은 이홍주선생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용하는 우선 합창단장으로 있으면서 성당의 올간을 이용해서 작곡연습을 하고 그 습작품들을 합창단원들에게 연습시켜보곤 했다. 또한 이때 용하는 이홍주선생댁에 올간은 물론 축음기 등이 있어 서구의 고전음악에 본격적으로 접할 기회를 가졌다. 이선생댁에는 가톨릭가정답게 고전음악, 음악서적들이 많았다. 당시 만주에는 러시아인들을 비롯한 구미인들이 적잖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한 구미예술의 파급이 대전말기 폐쇄적이던 일본본토보다도 더 활발했다.
용하는 계림회의 한인지도자들을 접하는 동안 이들로부터 촉망을 모은 젊은이였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역경을 뚫고 자기의 재질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그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촉망이었다. 그는 신경에서 당시 이곳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 음악가들을 여러 사람 만나게 된다. 이들의 해후는 신경의 한인음악활동에 활력소를 불어 넣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이 나라 음악계에 커다란 초석으로 변할 계기를 품고 있었다. 용하는 봉천시절과는 달리 신경에는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한인이 여러 명 있다는 것을 알고 우선 이들을 한데 묶어볼 마음을 궅히고 일차 순방을 다녔다.
일차적인 그의 관심사는 예술활동이 활발한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 한인들로만 이루어진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을 갖도록 하는 일이었다. 봉천에서처럼 그의 혼자 힘만으로 하기에는 신경이란 곳은 너무나 넓고 수준도 봉천과는 달랐다. 한인합창단을 만드는 일에 앞서 정규적인 음악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인 동지들을 규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가 처음 찾아간 사람은 빙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틈틈이 작곡을 하고 있던 김대현씨(현중앙대예대음악과교수)였다. 난생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나이도 일곱 살이나 김대현씨보다 아래였다. 그러나 찾아온 취지를 설명하는 폼이나 사람됨으로 봐서 녹녹하지 않은 위인으로 보였다고 김씨는 용하와의 첫 대면을 회상한다.
다짜고짜 교무실로 찾아 들어온 용하에게 김대현은 의외의 눈길을 보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일제의 밀정들이 득시글대던 시절, 생면부지의 청년이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 왔으니 경계의 주눅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예. 한인』동포로 작곡을 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을 허물 마십시오』퍽 어른스럽고 굳굳한 인상이었다.
용하는 자기가 김대현을 찾게 된 이유, 봉천에서의 활약 등을 설명했다. 그는 한인음악가들이 모일 것을 역설하면서 열정적으로 말했다.
『이 넓은 신경바닥에 조선인합창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윤형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신경교향악단에 김동진씨가 계시니 한번 찾아가 상의해 보십시오. 근간에 한번 모여보십시다.』
이 두사람의 만남은 그 후 용하가 세상을 등지기까지 이십여 년 동안 계속되며 수많은 일화를 뿌렸다. 결국 일곱 살이나 손아래인 용하와 끊을 수 없는 친구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후 친구관계에서 항상 나타난 일이지만 용하는 그의 동년배와는 거의 사귀지 않고 오~십 년 연상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신경교향악단에 한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용하는 당장 찾아간다. 당시 만주에서는 가장 수준이 높은 악단이던 신경교향악단에는 김동진 김성태 등 한인 여러 사람이 일인, 러시아인과 어깨를 겨루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동경 등지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이들 교향악단원들은 그를 동키호테같은 젊은이로밖에 처음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끈질기게 찾아와 한인음악가들이 모일 것과 한인합창단의 결성을 역설하자 그의 진심은 점차 이해되고 그의 열정은 어느 정도 받아 들여지고 있었다.
한인음악가들의 규합을 휘해 애쓰는 한편 용하는 성당의 옥명합창단을 지휘해서 신경방송국의 조선어방송시간을 통해 몇 차례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이런 활동은 계림분회 등의 한인사회에 조그만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음악활동을 가능케 하는 촉매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한인음악가들의 선입견을 씻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이다. 용하는 봉천에 온지 넉 달째 되는 사삼년 여름 계림분회 사무원자리를 그만두고 만주국의 예총격인 예문회관의 사무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때 예문회장은 동경의 주간음악신문사 사장을 지낸 음악 평론가『무라마쓰』(村松도미)였다.
봉천시절부터 드러난 일이지만 용하에게는 음악적인 재질 말고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흩어져서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개체들을 한데 묶어 조직화하는 재주였다. 그의 이런 재능은 음악활동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는 행각에도 다양하게 동원되곤 했다. 어찌됐건 서로 유기적인 관계없이 그저 자기가 속한 부서에서 생계나 꾸려가던 신경의 한인만의 음악가들은 난데없이 뛰어든 한 젊은이의 저돌적인 활약으로 순수한 한인만의 음악활동을 벌일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재만조선인 연합합창단. 합창단원들은 대부분 신구교의 성가대원들이었다.
창단공연 작품은 제 일부 윤용하, 제 이부 김대현, 제 삼부 김동진작곡의 대합창곡이었다. 신경교향악단이 연주를 하고 신경방송국에서는 실황을 중계했다. 사삼년 가을에 있었던 이 합창공연은 한인음악가들에게는 감격스런 일이었다. 한인작품을 한인만으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노래 부르고, 콧대 높은 일인들이 주축을 다룬 신경교향악단이 협연을 했으니 말이다. 이들 한인음악가들은 이후에도 협화회관을 통해 몇 차례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관현악곡의 작곡은 김동진-김성태가, 합창곡 작곡은 윤용하-김대현이 맡아 일하였다.
그는 이런 활동 이외에도 그 자신이 혼자 백조합창단을 만들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용하는 백조창단공연에 멀리 봉천에 있는 친구 오현명을 불렀다. 현명으로 하여금 그가 작곡한 독창곡 『독백』을 부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한 용하의 마음속에는 음악에 관한 한 신경보다 변경인 봉천에 틀어박혀 있는 현명을 큰 곳으로 끌어내 새 물을 마셔 보게 하는 한편 현명의 훌륭한 목소리를 신경음악계에 소개하려는 뜻도 들어 있었다. 전보를 받고 신경으로 달려온 현명은 잊지 않고 불러준 친구가 고마웠다.
윤용하(요셉)와 가톨릭 음악
1959년 봄에 찍은 사진, 사제 (아마도 대주교님, 2차 공의회 전 복장] 왼쪽에 신사복을 입은 분이 윤용하님.. 이곳은 어데일까? 아마도 재직할 당시의 학교가 아닐까..
우리에게 가곡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는 윤용하(요셉)는 가난한 옹기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아래에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가톨릭 음악을 위해 사용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가톨릭에는 종교 가요와 주일 학교용 노래가 너무 없어서 탈이요“라는 말을 자주 할 만큼 가톨릭 음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던 가톨릭 음악가였다.
그가 떠난 지 40년 조금 못 미치는 현재, 비록 몇 편 되지 않지만 그가 잡지나 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을 통해 그의 생애와 함께 그가 한국 가톨릭 음악을 위해 고민했던 점들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윤용하는 1922년 3월 16일 윤상근 (가롤로)과 이 마리아의 9남매 중 첫째 아들로, 천주교가 비교적 활발하던 황해도 은율군 일도면 농림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윤용하의 조부 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윤용하의 부모도 적극적인 교회 활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가정 환경에서 출생한 윤용하는 태어나서 5일만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은율(殷栗)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윤용하는 세살 때 평북 의주군 비현면으로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이사를 갔고, 그는 그 지방 성당(비현 본당)에서 처음 오르간을 구경했다고 한다.
윤용하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대축일에는 독창으로 성가를 불렀고 연극에도 출연하여 본당 신부와 주일 학교 선생들의 귀여움을 받았다.보통학교 5학년 때 그는 옹기장이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의 봉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다. 만주의 가톨릭 교회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음악에 더욱 심취한 그는 당시 심양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 가네코 로부터 틈틈이 작곡과 화성학을 배웠다. 그 후로는 음악적 경험을 바탕으로 거의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며 합창곡과 동요곡을 작곡하였다.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일까? 정면은 분명히 노기남 대주교님일 듯 한데 앉아 계시는 서양 신부님은? 입맞춤을 하는 이는 분명히 윤용하님일 것이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윤용하의 신덕과 음악적 재질을 일찌감치 알아본 어느 프랑스인 신부가 그를 음악 신부로 키우기 위하여 프랑스에 유학을 보내려고 하였다. 윤용하 자신도 신부가 되어 교회 음악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부모의 고집에 꺾여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이 사진은 ‘아마도’ 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는 모습이 아닐까..
음악에 대해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19세때에 이미 ‘만주 작곡가 협회’ 회원과 봉천 조선이 합창단 단장으로 , 그리고 신경 가톨릭 성가대 지휘자로서 아름답고 경건한 멜로디로미사곡을 편곡 지휘하였으니 모두들 윤용하를 ‘신동’이라고 칭송하였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이미 처녀 작곡한 칸타타(교성곡)<조선의 사계>를 봉천 기념 회관에서 직접 지휘하여 봉천 조선 합창단의 합창과 봉천 방송 관현악단과의 협연으로 공연하였다.
1년후 윤용하는 신경으로 옮겨가 ‘백조 합창단’을 직접 조직하여 자작곡 합창 발표회를 두세 차례 갖기도 하였다. 그는 일제 말기에 징병으로 끌려가던 도중 탈출하여 간도에 피신한 후, 간도 사범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광복 후 만주 용정으로 이사를 간 그는 용정 사범 학교에서 음악 강사 자리를 얻어 일하게 되었고, 또 이곳에서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그는 함흥으로 발길을 돌려 함흥 영생 여자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공산 정권의 예술 어용화 정책에 염증을 느끼고 1946년 아내와 함께 밤에 보따리를 싸 가지고 월남하게 된다.
가톨릭 음악인으로서의 고민과 노력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삶을 회고할 떄 빠지지않는 것이 그의 ‘신앙’과 ‘작곡’과 ‘술’이다. 그가 살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가 막걸리를 들지 않은 날은 이상한 날로꼽힐 만큼 현실의 불만이나 불우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기염을 토하곤 하였다. 그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걸로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줍어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는데, 사순절 기간인 40일동안만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사실로 그의 신앙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평소 어린이를 사랑했던 그는 자신이 어린이들을위해 할수 있는 일은 어린이들이 부를 아름답고 건전한 동요를 많이 만드는 일이었다. 특히 가톨릭 신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주일 학교 아동들이즐겨 부를 수 있는 동요를 많이 만들어서 보급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 주일 학교에서 성인용 성가책을 사용함으로써 어린이들이 부르기 어렵고, 성장기에 있는어린이들의 건강상으로도 좋지 못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이를 위한 성가책을 다시 편찬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편찬 요령에 대해서는 그가 당시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주일학교성가 소고>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 어린이 성가 편찬위원회를 조직하되 여기에는 성직자, 시안, 작곡가, 가톨릭 음악 지도자들로 구성해야 된다. 만일 한두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된다손치더라도 이러한 모임을 거쳐야만 내용이 충실한 성가책이 엮여져 나오게 될 것이다.
2) 내용에 있어서는 현재의 성인 성가책을 중심으로 하되 가사를 어린이들이 해독하기 쉽게수정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며, 때에 따라서는 성가를 시인과 작곡가에게 위촉해서 새로운곡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성가책이 나온 후에 성가 지도자와 주일 학교 선생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어린이 성가책의출판에 대한 취지와 곡에 대한 해설, 또는 시에 대한 해설도 하여서 가르치는 선생님들로 하여금 가사의 뜻과 곡의 내용을 알리도록 하는것도 뜻이 있다고 생각된다.
4) 편찬된 곡 중에서 추려서 레코드에 취입하도록 해야한다. 우리 신자들의 가정들에서도 축음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신자들 가정에서 어떠한 레코드판을 가지고있는지 추측하기 곤란하나, 사회물이 많을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레코드를 제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도 사실이다. 이런 기회에 어린이 성가레코드판을 제작하여서 신자들의 가정은 물론이려니와 일반 사회에도 내놓아서 어린이 성가를 통한 전교에도 힘씀이 필요하다고 본다.
5) 우리 가톨릭 어린이들의 정서를 함양하기 위해서 일 년에 한두번씩 정기적으로 음악회를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회를 줌으로써 어린이들을 점점 성당과 더 가까워질 것이며 또한 주성모님을 더욱 공경하게 되는 기회가 될 것 이다. 이러한 음악회에는 꼭 성가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명한 곡목을 택해서 음악적인 시야를 넓혀 주도록 해야 될 것이며, 이러한 기회에 음악에 국한할 것 없이 무용, 연극 등오 같이 할수 있도록 하면 더욱 좋으리라고 본다.
6) 이러한 음악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단체나 개인을 선출하여 가지고 그들을 장려하기 위한 표창도 해야 될 것이고, 떄에 따라서는 방학이나 공휴일을 이용하여 지방 순회 연극회 등을 가져서 지방 어닐이들의 문화 향상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여서 어려서부터 지방 어린이와 도회지 어린이들과의 사이에 따뜻한 친밀감을 가지게 한다.
앞의 글에서 볼수 있듯이 그가 얼마나 어린이들을 사랑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성가를 만드는 데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에 그는 아동 문학가인 이석현(세바스티아노)과 친분을 맺고 그의 동요 20여 작품을 노래로 만들었으며,그 작품중에서는 <가톨릭소년의 노래>,<성당 종> 등 주일 학교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도 있다.
<가톨릭 소녀의 노래>
떠오른 아침 해는 예수님 마음
그 햇빛 그 사랑을 담뿍 받아서
하늘처럼 푸르고 높이 자라는
천주님의 착한 아기 가톨릭 소년
늘 함께 돌보시는 성모님 은혜
호수천신 손목 잡고 참다이 살자
<성당 종>
성당 종 칩니다. 뗑뗑뗑
성당 종 칩니다. 뗑뗑뗑
어서 모여라 마을 아이들
신부님의 검은 수염 손을 펴들고
윤용하는 주일 학교 동요를 작곡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주일 학교용 동요집 출판을 위해 이석현과 만날 때마다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윤용하는 천안 복자여자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고, 몇몇 신부들의 회갑 축하곡도 작곡하였으나 끝내 동요집 출판은 나오지 못하였다. 한편 그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다수의 가톨릭 청소년들이 성가보다 유행가를 자주 부르는 모습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이는 그가 1964년 1월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가톨릭 청소년과 음악>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모두 윤용하님의 전쟁중 가톨릭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전방이건 후방이건 야외미사의 모습들.. 절박한 미사였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앞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해 가톨릭 음악 부문에 있어서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전체적인 한국 가톨릭 음악계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그가 강조했던 점은 한국 가톨릭음악계를 이끌어 갈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가톨릭음악계가 처한 문제점 들을 본당의 지도자들과 가톨릭음악가들이 함께 뭉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바람직한 가톨릭 음악의 방향 제시와 음악가들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이처럼 한평생 가톨릭 음악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삶을 살았던 그의 소원은 앞에서 잠깐 언급되었다. ‘가톨릭 주일 학교용 동요집’과 자신의 작곡집 출판, 그리고 자신이 만들었던 ‘대한 어린이 합창단’의 재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소원했던 그의 작곡집은 그의 사후 7년 후인 1972년 4월 19일에야 출판되었다.
맺음말
그는 평생을 자기 소유의 집을 지닌 일이 없이 단칸 셋방살이를 전전할 만큼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난했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적 혼을 가톨릭 음악에 헌신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부모의 반대로 자신의 어렸을 적 꿈인 음악 신부로의 꿈이 깨어졌지만, 그 못지않은 가톨릭 음악활동과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던 것이다.그가 작곡한 <보리밭>의 가사 중에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 온다’ 라는 구절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휘파람 불면서 흥얼거리는 이 노랫소리가 하늘에 있는 그의 귓가에까지 들릴 것이고, 그는 그 소리를 안주 삼아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을까…
음악평론가 이상만씨 회고
윤용하 는 주일 학교 동요를 작곡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주일 학교용 동요집 출판을 위해 이석현과 만날 때마다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윤용하 는 천안 복자여자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고, 몇몇 신부들의 회갑 축하곡도 작곡하였으나 끝내 동요집 출판은 나오지 못하였다. 한편 그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다수의 가톨릭 청소년들이 성가보다 유행가를 자주 부르는 모습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이는 그가 1964년 1월 <가톨릭 청년>에 기고했던 <가톨릭 청소년과 음악>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의 입에서 우리 나라와 일본의 유행가나 또는 동서양에서 유행되고 있는 샹송, 재즈 등의 노래가 불려지고 있다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에 내가 한 바를 써보기로 하겠다.
샹송을 유행시킨 불란서 ‘파리’에서도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고전 음악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은 명심해야 되며 또 가톨릭 청소년들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지도하고 계시는 분들은 더욱 이런 점에 대해서 정신을 가다듬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이 가사나 곡이 저속한 것을 부르고서 고해 신부님 앞에 어떻게 무릎을 꿇겠는가 말이다….(중략)…. 우리 가톨릭 청소년들이 다른 일반 청소년과 다름없이 유행가라면 덮어놓고 모조리 부른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중략)… 물론 교회의 사정에 따라서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오락 시설도 없으려니와 성가를 부르고 싶어도 성가 연습실 지도자의 결원 등으로 여의치 못한 교회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가톨릭의 청소년이라면 주일날 성가 책 한 권쯤은 들고 미사에 참례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반해서 도리어 어린이와 노인들이 가지고 와서 성가대들을 부르는 것을 쫓아서 부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현실은 기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톨릭 청소년은 깨끗하고 곱고 아름답고 거룩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정신을 가다듬고 하루의 생활을 남보다 더 훌륭한 생활을 보내도록 해야만 의의가 있는 것이다…(중략)… 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십이단의 봉헌경신공 경문 중에 ‘내 소리를 드림은 네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위함이요’라고 聖句를 명심하여 주기를 바라며 이만 그치는 바이다.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용하였다.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작품 연주회
윤용하 40주기 작품 연주회 포스터: 이 사진의 님은 언제의 모습일까.. 태극기의 모습으로 6.25 전쟁 중이 아니었을까?
2005년 윤용하선생을 기리고 그가 남긴 아름다운 음악 세계를 되새기기 위해 그와 음악을 함께 했던 동료 음악인들이 모여 「늘 금밖에 섰던 남자 – 윤용하, ‘보리밭’의 추억」이라는 타이틀로 지난 20주기에 이어 두번째로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작품연주회」를 엽니다.이 나라의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정서를 보리밭의 추억과 함께 아름다운 옛 추억을 일깨워 드리는 자리가 되고자 합니다.
■ 일시: 2005년 10월 26일(수요일) 오후8시
■ 장소 : 호암아트홀
2005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에 대한 <보관문화훈장> 추서
훈장을 받는 여성은 윤용하님의 (남매 중) 따님일 듯..
짧은 인생을 오로지 음악에만 몸던져 가난과 몰이해,
전쟁의 참담함 속에서도 순수한 열망과 불타는 의지로
우리의 아름다운 정서와 곧은 민족혼을 끊임없이 노래했던
작곡가 윤용하. 역류해 가면서 한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늘 금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티없이 맑은 선율과 그의 고고함을 우리 가슴에 묻고
우리 곁을 떠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기여한 공적을 기리는 2005년 문화훈장
음악부문에 윤용하 선생이 선정되었습니다.
시상은 오는 10월 15일(토) 오후 3시 전주시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 거행되는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실시되었다
고 윤용하 선생 40주기 추모미사
어려운 경제 사정과 무더운 여름 날씨 속에서도 기념사업회에 보내주신 관심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오며, 임원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올해로 40주기를 맞는 故 윤용하 선생의 기일인 7월 23일(토) 경기도 금곡에 위치한 선생의 묘소에서 아래와 같이 추모 미사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미사는 본 사업회 이사로 계신 백남용 신부님께서 주관하시게 되어 더욱 뜻 깊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시어 자리를 함께 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일시 : 2005년 7월 23일(토) 오전 9시
■ 장소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천주교회 공원묘지
■ 미사 집전 : 백남용 신부
언론 보도
중앙일보 [칼럼] 2005.10.24 (월)
오현명 윤용하기념사업회 회장·성악가·전 한양대 음대 학장
아, 윤용하! 순백의 예술혼이여
올해는 윤용하 형의 40주기가 되는 해다. 벌써 40주기가 되었나 싶게 세월은 화살처럼 흘렀다. 용하 형을 그리워하고 그의 음악과 인생역정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40주기를 그대로 지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급히 필자를 회장으로 하는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정부에 문화훈장 추서를 건의하는 한편 추모음악회도 준비했다. 고맙게도 정부에서는 보관문화훈장의 추서를 결정해 주었고, 추모음악회도 ‘늘 금 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 보리밭의 추억’이라는 주제를 걸고 내일(26일) 저녁 호암아트홀에서 열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특히 용하 형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으레 보리밭을 떠올린다. 그의 대표적인 가곡 ‘보리밭’이 우리 국민 누구나 사랑하는 국민가곡이 된 지 오래됐다. 이 가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란 수도 부산에서 박화목 선생의 노랫말에 곡을 붙여 태어났다.
전란으로 인해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우리네 마음을 푸근하게 적셔주어야겠다는 두 사람의 뜻이 투합하여 만들어졌다. 용하 형의 작품 영역은 넓고 다양하다. 가곡뿐만 아니라 오페라 오페레타 그리고 무엇보다 특히 동요가 두드러진다. 그는 광복 전 20세 전후에 이미 오페라 ‘조선의 사계’를 작곡했고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의 고전이 된 ‘나뭇잎배’ ‘노래는 즐겁다’ 등 수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또한 지금도 우리들이 부르고 있는 ‘광복절 노래’를 비롯하여 ‘민족의 노래’ 등 많은 국민가요를 작곡했다.
용하 형은 광복과 전란 기간 중에 지치고 메마른 우리 국민의 정서를 위로하고 순화시키기 위해 음악활동을 펼쳤다. 그는 특히 어린이들이 전란 속에서도 즐겁고 밝게 자라려면 아름답고 씩씩한 노래들을 많이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전 이후 그는 서울 중앙방송 어린이 시간의 전속 작곡가 노릇을 했다.
용하 그의 삶 자체가 음악이고 예술이었다. 그는 어떤 가식이나 타협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천형(天刑)처럼 둘러메고 살다가 그 가난을 깔고 누워 세상을 등졌다.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술로써 저항하고 술로써 풀어보려 했다. 그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늘 금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우리는 용하의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불꽃 같은 순수예술혼을 그리워한다.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던 집이나 악기를 가져보지 못했으면서도 창작열에 들떠 살면서 타협을 모르고 곧은 길을 걸어간 그의 고집에 경의를 보낸다. 허기진 배를 술로 채우며 일으켰던 수많은 소동과 실수에 따듯한 연민의 미소를 보낸다.
우리는 용하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의 생전은 물론이고 그가 세상을 등진 지난 40년 동안 빚 갚을 생각을 못했다. 이제 정부가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추모음악회도 열리게 되었다. 이 보잘것없고 때늦은 보은이 용하 형의 영혼에 위안이 되기를 빌어본다. 용하 형의 40주기 행사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린다.
[한국일보 ]2005-10-24]
‘보리밭’ 윤용하 추모 음악회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1922~1965) 40주기를 맞아 그의 노래들로 구성한 추모 음악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유랑한 그는 가곡 외에 동요 ‘나뭇잎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남겼다.
이번 행사는 그의 음악 동지였던 바리톤 오현명을 중심으로 출발한 윤용하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것으로,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바리톤 오현명, 난파 소년소녀합창단이 출연한다. (02)541-6234
[중앙일보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lully@joongang.co.kr] 2005-10-22
윤용하 40주기 가곡의 밤… 국민가곡 ‘보리밭’ 작곡가 추모
황인호의 시 ‘고독’에 곡을 붙인 고(故) 윤용하(1922~65)의 가곡이다. 이 노래는 작곡자의 고달픈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는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할 정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다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국민 가곡 ‘보리밭’의 작곡자인 윤용하 선생의 40주기 기념 연주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윤용하의 작품만으로 꾸미는 음악회는 85년 20주기 추모 음악회를 연 이후 두 번째다. 올해 40주기를 기해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최근 기념사업회(회장 오현명, 부회장 이부영)가 공식 발족했다.
1922년 황해도 은율 태생인 고인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곡, 동요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숱하게 남겼다. 동요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정인보 선생이 가사를 쓴 ‘광복절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종군 작곡가로’사병의 노래’ 등 군가를 작곡했다. 이 밖에도 미완성 오페라 ‘견우 직녀’, 오페레타 ‘해바라기 노래’, 교향곡 ‘개선’, 교성곡 ‘조선의 사계’등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은 역시 서정적 선율로 가득한 가곡과 동요다. ‘보리밭’은 고인이 부산 피란시절 박화목 시인에게 국민의 마음을 달래 줄 서정 가곡 한 편을 만들자고 제안해 가사를 받아 쓴 작품이다.
이번 음악회에는 1940년 고인과 함께 ‘조선합창단’을 창단했던 바리톤 오현명씨를 비롯,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피아니스트 정진우, 서울신포니에타 등이 출연한다. 02-541-6234.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2005.10.21
백발의 음악가들 무대에 서다
19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한 스튜디오. 피아니스트 정진우(77)씨의 반주에 맞춰 바리톤 오현명(80)씨가 윤용하의 가곡 ‘독백’을 나지막이 부르기 시작했다. 정씨의 박자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려고 하면, 오씨는 연방 “스타카토는 두 번이야”라며 잔소리를 했다.
곁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테너 안형일(78)씨가 “늙어서 그런지 요즘엔 도통 가사가 외워지질 않아”라고 푸념했다. 이번엔 정씨가 “아무 거나 딴 가사로 부르면 되잖아. 예전에 오 선생이 그랬다며…”라고 핀잔을 주자, 오씨는 “내가 뭘…”이라 뾰로통한 표정이다. 하지만 금세 이들은 입맞춰 ‘보리밭’과 ‘민족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윤용하. 40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인 ‘보리밭’의 작곡가를 옛 친구들이 연주회로 기린다.
[문화일보 김순환 기자] 2005. 10. 20
‘보리밭’ 작곡 윤용하 40주기 음악회
(::26일 서울 호암아트홀서::)
가곡 ‘보리밭’을 작곡한 고 윤용하 선생의 40주기를 기리는 음악회가 열린다.
윤용하기념사업회가 오는 26일 오후 8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여는 ‘늘 금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보리밭’의 추억’음악회는 지난 85년 20주기 연주회에 이은 20년만의 행사이다.
이번 음악회에는 바리톤 오현명,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파아니스트 정진우 씨, 난파 소년소녀합창단, 체임버 서울신 포니에타(지휘 김영준) 등이 출연, ‘보리밭’‘뱃노래’‘동백꽃 ’‘노래는 즐겁다’‘나뭇잎 배’‘추억’ 등 그의 대표작들을 들려준다.
특히 1940년 윤용하와 함께 ‘조선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오현명 한양대 명예교수도 무대에 올라 ‘독백’ 등 2곡을 부를 예정이다.
고 윤용하 선생은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나 지난 65년 43 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는 시대와의 불화와 가난 등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으나 가곡과 동요 등에서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6·25 전쟁 때에는 종군 작곡가로 참여해 군가 ‘사병의 노래’등을 작곡했으며, 이후 가곡 ‘보리밭’ ‘동백꽃’등과 동 요 ‘나뭇잎 배’‘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작곡했다. 또 ‘민족의 노래’ ‘광복절의 노래’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옥 같은 노래들을 남겼다.
고 윤용하 선생은 최근 우리나라 문화 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 문화훈장 음악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편 이번 음악회는 동아일보 기자시절 미발표 원고를 발굴했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상철 디자인이가스퀘어 대표, 이형대 캠브리지㈜ 대표 등이 적극 주선해 성사됐다.
[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2005. 10. 19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기념 연주회
‘보리밭’을 작곡한 고(故) 윤용하(1922-1965) 선생의 40주기 기념 연주회가 26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 에서 열린다.
윤용하 선생은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나 65년 43세라는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시대적 불운과 가난 등으로 인해 짧고도 고달픈 삶을 살다 갔지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곡, 동요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숱하게 남겼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종군작곡가로서 군가와 ‘사병의 노래’ 등을 작곡했으며, 이후 가곡 ‘보리밭’ ‘동백꽃’ ‘한가위 달’ 등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친숙한 동요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을 작곡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 문화훈장 음악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연주회는 윤용하 기념사업회(회장 오현명, 부회장 이부영)와 호암아트홀이 지난 20주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여는 그의 작품 연주회다.
바리톤 오현명, 테너 안형일, 소프라노 김영애, 피아니스트 정진우, 난파 소년소녀합창단, 서울 신포니에타(지휘 김영준) 등이 출연해 ‘뱃노래’ ‘동백꽃’ ‘노래는 즐겁다’ ‘나뭇잎 배’ ‘추억’ ‘보리밭’ 등 그의 대표작들을 연주한다.
[동아일보 전승훈 기자] 2005. 10. 19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 40주기 추모 음악회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선생의 서거 40주년을 기리는 음악회가 26일 오후 8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1922년 황해도 은율 에서 태어난 선생은 1965년 43세에 짧은 생을 마친 작곡가. 가곡 ‘보리밭’ ‘동백꽃’ 등을 비롯해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등 200여 곡의 동요, ‘민족의 노래’ ‘광복절의 노래’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옥같은 노래들을 남겼다.
이번 음악회는 1985년 20주기 기념음악회를 연 이후 두 번째. 올해 40주년을 기념해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최근에는 윤용하 기념사업회가 공식 발족했다.
이번 공연에는 안형일, 김영애, 정진우 씨 등 성악가들이 그의 대표 가곡과 동요를 부른다. 특히 1940년 선생과 함께 ‘조선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바리톤 오현명(81·한양대 명예교수)씨도 무대에서 ‘독백’ 등 2곡을 부를 예정이다.
윤용하의 작품세계
가곡
1) 보리밭 (박화목 작사)
2) 산골의 노래 (박목월 작사)
3) 독백 (김기영 작사)
4) 동백꽃 (이정호 작사)
5) 고독 (황인호 작사)
6) 자장가 (황해룡 작사)
7) 도라지꽃 (박화목 작사)
8) 뱃노래 (이석현 작사)
9) 한가윗 달 (김도성 작사)
10) 도래춤 (임안서 작사)
11) 달밤 (윤곤강 작사)
12) 어느 군인의 독백 (이영순 작사)
국민가요
1) 민족의 노래 (장유점 작사)
2) 무궁화
3) 광복절의 노래 (정인보 작사)
4) 국토아리랑 (이은상 w가사)
5) 우리들의 노래 (이기태 작사)
6) 근로인의 노래 (최숙자 작사)
7) 희망의 노래 (조지훈 작사)
8) 전원의 노래 (이석현 작사)
9) 백일(百一) 용사의 노래 (하한주 작사)
동요
1) 나뭇잎배 (박홍근 작사)
2) 카톨릭 소년의 노래 (이석현 작사)
3) 가을산 (강소천 작사)
4) 가울 수풍 (박화목 작사)
5) 강물과 떼 배 (권태응 작사)
6) 고개길 (이원수 작사)
7) 고개길 버스 (이석현 작사)
8) 고마운 순경 (박화목 작사)
9) 골목길 달 모롱이 (정완영 작사)
10) 구름 (이석현 작사)
11) 굴뚝 (이석현 작사)
12) 귀뚜라미 (이석현 작사)
13) 9.28 노래 (이석현 작사)
14) 널뛰기 (유석준 작사)
15) 노래는 즐겁다 (박목월 작사)
16) 눈 (김영일 작사)
17) 눈온 날 아침 (박화목 작사)
18) 눈이옵니다 (박경종 작사)
19) 다람쥐 (윤석중 작사)
20) 동물원 곰 (이석현 작사)
21) 동화 할아버지 (이석현 작사)
22) 등대 (박경종 작사)
23) 딱따구리와 다람쥐 (박경종 작사)
24) 때때춤 (이석현 작사)
25) 또랑물 (권태응 작사)
26) 매미와 개미 (박경종 작사)
27) 무지개 (박경종 작사)
28) 무지개 다리 (이석현 작사)
29) 버들 강아지 (이석현 작사)
30) 별 (목일신 작사)
31) 봄이 오네 (김영일 작사)
32) 별님동무 고기동무 (권태응 작사)
33) 산길 (이순희 작사)
34) 산샘물 (권태응 작사)
35) 새나라 새싹 (이석현 작사)
36) 설맞이 (이석현 작사)
37) 성당종 (이석현 작사)
38) 소년 (이석현 작사)
39) 설맞이 (이석현 작사)
40) 싸락눈 (이순희 작사)
41) 아기는 해바라기 (이석현 작사)
42) 아기의 꿈 (홍은순 작사)
43) 아지랑이 (서정봉 작사)
44) 우리 엄마 (이석현 작사)
45) 어린 고기들 (권태응 작사)
46) 어린이날 행진곡 (윤석중 작사)
47) 어린이 명절 (김영일 작사)
48) 어머니 (이석현 작사)
49) 오리 (권태응 작사)
50) 오막살이 집 (김영일 작사)
51) 우리 나라 좋은 나라 (박화목 작사)
52) 우리집 봄님 (이석현 작사)
53) 인형의 자장가 (강소천 작사)
54) 크리스마스 (이석현 작사)
55) 큰 별이 뜨면 (이석현 작사)
56) 편지 (김영일 작사)
57) 풍년노래 (박경종 작사)
58) 피리 (유석준 작사)
59) 함박눈 (이보라 작사)
60) 호박꽃 초롱 (강소천 작사)
61) 할머니 산소 (이석현 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