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와 빨갱이
지난 5월 달에 들어서 부쩍 역사적 5월의 사건들 (5.16, 5.18 같은)에 추억을 더듬어 관심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쏟았다. 내가 만일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난다면.. 나를 낳아준 조국 역사의 일부분, 그것도 아주 의미가 큰 것을 모른다면 조금 억울할 것 같았다. 게다가 요사이 나의 주변에는 ‘조국의 빨갱이화’를 염려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앞에서는 나는 거의 ‘완전한 외계인’이 된다. 어떻게 그렇게 모르고, 관심 없이 살았을까?
그 잃어버린 198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가 ‘이념 논쟁’과 마주 어울려서 정체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게 된 것이다. Internet의 덕분으로 Fake news까지 등장하고, Youtube란 것은 자칫하면 우리들 거의 몇 시간 만에 brainwash를 시켜 버린다.
오늘 나의 생각은 ‘천주교와 빨갱이’란 거북한 화제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 읽은 1990년 5월호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의 ‘4.3 항쟁, 인간해방의 토대’란 ‘특별기고’를 읽은 후, 나는 나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간단히 말해서, 1990년의 천주교 잡지의 글이 이 정도라면, 지금은 과연 어느 정도일 것인가?
이 특별기고의 저자 ‘김명식 시인’이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Googling하려는 유혹을 참았다. 더 자세히 알아보면 나는 이 저자에 대한 ‘증오의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실은 ‘생활성서’는 분명히 (천주교)교회인가를 받은 출판물인데, 어떻게 이렇게 편파적, 아니 ‘빨갱이’의 mouthpiece역할을 했던 것일까?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광주사태에 대한 생활성서의 기사들’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함을 느꼈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었다. 만약 광주’항쟁’이 이 ‘시인’의 4.3 ‘항쟁’과 같은 맥락이라면 나는 색안경이 아니고 ‘증오의 눈’으로 그들을 볼 것이다.
이 글을 전재하는 것,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지만 이런 것 감수하기로 결심을 했기에 강행을 하였다. 문제는 ‘천주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어떻게 허용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사필귀정 事必歸正’의 맥락에서 ‘혁신정당 남로당과 함께 민족해방의 대열에 합류’ 한 4.3 항쟁이라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 ‘시인’이란 분, 과연 어떤 인간인가? 어떻게 천주교를 말살했고, 하려던 빨갱이들이 이렇게 천주교의 이름을 팔아가며, 합류할 수 있었는지.. 역사를 배워라, 역사를.. 이 ‘事必歸正’의 인간들아… 당신은 당신이 숭배해온 주사파, 김씨 세습왕조의 최후 발악적 말로와, 그 밑에서 인류역사 유래 없는 카프카도 웃지도 못할 어이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동족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전재 全載: 생활성서 1990년 5월호에서
제주 4.3 항쟁 42주년 특별기고 (2)
4.3 항쟁, 인간해방의 토대
김명식 시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연구원 원장1
이승만 정권을 앞세우려고
2차대전 이후 미국은 국제관계에 있어서 패권 팽창주의의 야심을 노골화 해 나갔다. 그들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대소련정책에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으며 소련과의 협상을 계속하면서도 모스크바 3국(미, 영, 소) 외상 협의 사항조차 지키지 않았다. 3상 협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 사령관은 2주 이내에 회담을 개최하고,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미, 영, 소, 중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을 고려하여 신탁통치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1945. 12. 17)
그리스, 터키, 중국 등지에서의 사회주의 확대경향과 소련의 세력확대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다음의 여러 이론과 주장을 통하여 국제적 입지를 구축하려 했고 한반도 문제도 같은 방식을 사용하였다.
- 케난의 주전론; 소련과의 협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미국은 이제 소련과의 상호적대적이고 상호불신하는 관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1946년 초)
- 처칠의 철의 장막론; 소련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어권 국민이 단결하자 (1946.3)
- 이승만의 분단고착 발언; 우리는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1946.6)
- 트루만 톡트린: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주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스, 터키에 4억 달러 원조요청(1947.3)
- 마샬 플랜; 자유주의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경제원조(1947.6)
미국은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안을 유엔 총회에 전격적으로 통과 시켰다(1947.11.14). 결국 UNTCOK 제1차 회의 (서울 1948.1.12)->소련측 반대->유엔 소총회 결론(1948.2.26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선거 실시)->UNTCOK 결의(한국의 일부지역에서 선거실시를 감시하며 동 선거는 늦어도 1948년 5월 10일 이전에 시시되어야 한다)라는 형식적 과정을 밟고 대리점령통치기구 구축음모를 착실히 굳혀나갔다.
미국은 당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지지하는 한민당과 북한 피난민 대표로 이루어진 조선민족당을 내세워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자기들의 전략이 실현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한반도 전역을 전초기지화하기 위해서 전략상 제주도에 반공기지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주도를 완벽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삼무도(三無島)는 처형도로 바뀌어
명분상으로는 선거전략을, 작전상으로는 초토화작전을, 토벌대에는 용병인 반공우익집단, 친일경찰, 친미경비대 등을 이용하려는 미국의 음모는 1948년 벽두부터 시작되었다. 5.10 선거운동은 리, 동 단위의 18~55세 청장년으로 구성된 향보단을 이용하였고 그 필요경비는 해당 지방민의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빨갱이를 잡는다는 구실로 계엄령 선포, 통행제 실시, 해상교통차단, 무차별 총살, 마을 가옥 소각, 주민 소개, 주민 격리작전(해안으로부터 4 km 내에 있는 중산간부락과 산간부락을 격리, 후에 9 km로 바뀜) 등으로 이루어진 초토화 작전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초토화작전 앞에서 제주도민은 혼연일체가 되어 미국의 지배전략에 전면 거부, 항거의 기치를 들고 단선단정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는 유엔 조선위원단 입국거부로 시작하여 2.7 구국투쟁, 자위무장투쟁, 전선합류투쟁으로 이어졌다.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고양되어가는 제주도민의 항전 기세에 대하여 미군은 제주지방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1천 7백여 명의 경찰토벌대를 증원했다 (1948.4.5) 그리고 1948년 5월 6일 점령군 전세력을 망라한 긴급대책회의 – 군정장관 딘 (Dean)도 참가 – 를 열고 구체적인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모의했다. 제주도 인민의거자 김달삼과 제9연대장 김익력 간의 협상을 유도하는 선무공작, 첩보활동, 합동토벌작전, 제11연대 창설, 수도청 형사대파견(1948.5.18) 등을 이유로 5.10 선거를 전후해서 기존병력의 50 퍼센트 이상이 증원되었다. 그들은 확보된 지상, 해상, 공군 화력으로 집단 대량학살, 집단 방화, 주민 추방, 전략촌 건성 (3광 3진 작전)을 자행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1948년 4월부터 1949년 4월 사이에 제주도의 4백여 부락 중에서 295부락의 1만여 호를 불태웠고 무려 5~8만의 무고한 제주도 양민을 살해했다. 산 좋고 인심 좋은 제주도는, 이국인의 총탄에 쓰러진 시체더미로 인해 거지 없고, 도둑 없고, 대문 없는 삼무도(三無島)에서 ‘처형도’로 바뀌어 버렸다. 미국은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기 위해서 제주도를 초토화했던 방식 그대로 이승만 정권을 앞세우고 초토화작전을 확대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한 목숨 떳떳하게 살고자 한라산으로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한 미국은 사실상 전후 조정문제를 금한 유엔 헌장 제 107호 및 내정간섭을 금한 동 헌장 2조 7항을 위배한 것이었다. 결국 대리점령통치기구를 세우려는 미국의 음모 앞에서 제주도민들은 하나 둘 한라산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제주도민의 유일한 꿈이었던 민족의 통일과 자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의한 민족의 분열과 38선 이남에서의 대리점령통치기구(이승만 정권) 설치음모를 분쇄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주도민의 저항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워온 정신 그대로였다.
민족해방지도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미국의 체포명령에 쫓기는 민주인사들은 지하로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고, 용병이 되라는 미국의 책략에 결코 부응할 수 없었던 제주도민들은 한 목숨 떳떳하게 살기 위하여 한라산으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압적인 미국의 선거전략에 맞서서 제주도민들은 단선, 단정저지투쟁에 몸과 마음을 다 쏟아 넣게 되었다. 그들은 실력저지만이 민족통일과 자주정부수립이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경찰의 탄압에 무력항쟁으로, 그 외 지서공격, 용병경찰처단 등으로 맞섰다. 동시에 제주도민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유엔 조선위원단은 물러가라” “망국 단선 단정결사 반대” “미소양군은 즉시 철수하라” “토벌대를 즉시 해체하라” “반미구국통일전선에 총 집결하라”. 민중의 생존권과 자유활동을 쟁취하기 위하여…
1948년 2월부터 3월까지 한라산으로 들어간 제주도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민족통일과 자주정부수립을 위해서 자위적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이 자위적 무장조직은 초기에는 한라산으로 들어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대정지역, 중문지역, 애월-한림지역, 제주, 조천지역, 남원지역, 성산-표선지역으로 뭉쳐 이루어졌다. 이렇게 구성된 자위무장대의 활동사항을 보면 그 성격이 뚜렷해진다.
“조선인민이라면 조국과 인민을 압박하는 외적을 몰아내는 폭넓은 투쟁에 서야 함이 명백하지 않은가?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미국과 그 앞잡이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들과 함께 조국과 인민이 이끄는 길로 결연히 떨쳐 일어서 행진합시다”(1948.4.3 인민무장대).
5.10 선거전략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자행된 ‘미국식 빨갱이 토벌전(W. L. 로버트)’에 맞서 경비대(문상길 중위와 함께 백 여명, 1948.4.27), 혁신정당 (남로당 1948.6.3), 사회단체 (단선단정 반대투쟁 총파업 위원회, 1948.5.5.) 및 학생, 지식인, 종교인들은 제주도민 무장대와 함께 민족해방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선거전략의 실패는 잔악한 초토화작전으로
결국 이렇게 합류한 제주도 민주세력에 의해 미국의 선거전략, 즉 대리점령 통치기구 설치음모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제주도 감과 을 두 선거구에는 투표에 참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5.10 선거 반대투쟁은 미국의 극동전략을 분쇄한 민족해방투쟁의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되었다.
선거전략에 실패한 미국은 앞잡이들을 내세워 제주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한라산 일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다음 항공기로 소이탄을 퍼부으면 제주도 빨갱이들을 몰살할 수 있다”. 이것은 11연대장 박진경의 말이었다(1948.6.17). 미국은 제주도를 시발로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고 6.25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 지배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 항쟁은 계속되리라
미국의 초토화작전에 묵묵히 맞서 싸우다 죽어간 5~8만의 목숨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당시 제주도민들은 무엇을 바랐고 어떻게 활동했는가? 최근 모슬포 송악산에 미 공군기지 건설계획에 대해 제주도민 전체는 왜 반대하고 일어섰는가? 4.3항쟁은 이상과 같은 소박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4.3 항쟁의 주체는 분명 제주도민 전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민족의 하나됨과 통일된 정부수립을 갈구했고 민족의 통일과 통일된 자주정부수립을 방해하는 미점령정책에 반대하여 싸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4.3 항쟁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고 궐기한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수만의 제주도민이 바로 이 싸움에서 전사한 것이다. 물론 이 싸움에는 제주도민의 생존권 투쟁도 포함된다.
4.3 항쟁은 역사적으로 볼 때 침략세력, 즉 여몽연합군 -> 조일 연합군 -> 한미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운 민중해방투쟁사와 그 궤(軌)를 같이 한다. 그러기에 4.3 항쟁은 각 시대, 각 지역에서 해방을 위해 싸워왔던 민중해방투쟁의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도식적인 민족주의, 인종주의, 종파주의, 이념주의를 훨씬 넘어선 인간해방이라는 지상과제를 안고 4.3 항쟁은 민족적 힘과 민중적 힘의 합류에 의하여 결행되었던 것이다.
이 합류된 힘은 바로 작은 규모였지만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오늘도 이 작은 힘들이 모여 역사를 정 방향으로 인도하고 사회를 민주화로 이끌며 인간다운 세상, 평화스런 사회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4.3 항쟁은 모름지기 인간해방의 토대이다. 누구든지, 어느 것이든지 역사의 올바른 흐름을 거스르는 한 이 4.3 항쟁은 계속될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무엇 때문에 미제 살인귀들의 총마개가 되려는가? 오늘 네놈들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밝아오는 조국의 아침햇살을 쇠사슬로 묶어 둘 수는 없다”(문상길 중위의 최후진술).
- 아주 제3세계만 골고루 섞어 놓으셨군요… 소련은 빼고, 미제를 혐오하는 이유를 짐작하겠습니다. ↩